만물상(조선일보) 2023-02/ 02.01(수) Z세대의 ‘3요’ - 02.28(화) 이순신 영정 논란
만물상(조선일보) 2023-02/
02.01(수) Z세대의 ‘3요’

한국 갤럽이 젊은이에 대한 주제로 설문을 했다. 기성세대인 응답자 열 중 아홉이 요즘 젊은이들이 자기 권리만 너무 주장한다고 답했다. 이기적이다(87%), 돈 계산이 과하게 정확하다(73%) 같은 부정적 응답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지금의 2030세대 이야기가 아니다. 이 설문을 한 시점은 1992년, 당시 젊은이라 해봤자 1960년대생들이다. 586 세대도 한때는 이기적인 ‘요즘 젊은이’였나 보다.
▶직장마다 20대인 Z세대(1990년대 중반~2000년대 초반 출생)와 함께 일하는 방법을 찾느라 고민이라고 한다. 대기업 임원 사이엔 ‘3요 주의보’란 말까지 돈다. 업무 지시에 ‘이걸요?’ ‘제가요?’ ‘왜요?’라고 되묻는 젊은 직원의 흔한 반응을 일컫는 말이다. 일본엔 비슷한 표현으로 ‘나니카…'가 있다. ‘유토리데스가, 나니카(유토리입니다만, 뭔가)…’라는 드라마를 통해 유행했다. 1987~2004년생을 유토리(여유) 세대라 하는데 힘든 일 피하고 이기적이라고 여겨진다. 이들이 많이 쓰는 말이 ‘나니카’다. 자신의 그런 행동에 ‘뭔가 문제가 있습니까’란 얄미운 뉘앙스다.
▶젊은이들에 대한 한탄은 뿌리가 깊다. 1982년 한 신문엔 ‘잖아요’ ‘같아요’란 말투가 무례해 참기 어렵다는 독자 투고가 실렸다. 비슷한 시기의 기사는 당시 젊은이들이 ‘웬일이니, 별일 아냐, 웃기지 마’ 등을 너무 많이 써 걱정된다고 적고 있다. 지금으로선 왜 문제인지 모르겠지만, 당시엔 감정을 너무 노골적으로 표출한다고 지적을 당했다.
▶Z세대들이 꼰대라고 부르는 지금의 40대야말로 한때는 자기표현에 거침없는 젊은이였다. 당시 대기업은 개성에 집착하는 이른바 ‘X세대’를 유인한다며 경쟁적으로 튀는 채용 광고를 냈다. ‘노래방에서 서른곡을 부를 수 있는 사람’(대우), ‘트로트에서 힙합까지 쫙 꿰고 있다구’(삼성전자)란 식이었다. 이들은 입사 후 찢어진 바지 입고 출근했다가 야단맞기도 했다. 이 X세대도 이젠 Z세대들에게 핵심 ‘라떼’ 세력으로 찍혀 있다.
▶'요즘 애들 버릇없어/어른들은 얘기하겠지만/똑같은 얘길 들으며/그들도 자랐는걸.’ 1993년에 나온 O15B 노래 ‘요즘 애들 버릇없어’ 가사다. 약 100년 전 영국 신문엔 이런 글이 실려 있다. ‘요즘 젊은이들은 너무 생각이 없고 무례하며 완전히 이기적이다.’ 한때 제멋대로라던 동서고금의 ‘요즘 애들’은 결국 다 어른이 돼 ‘요즘 애들’ 흉을 봤다. 시간이 흐르면 ‘이걸요? 제가요? 왜요?’도 이상하게 들리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02.02 아듀! 점보 747

▲1970년 세상에 첫선을 보인 보잉 747 기종은 승객 400명을 태우고 1만km이상을 논스톱으로 비행하는 초대형 여객기로 세상을 놀라게 했다. 50여년간 '하늘의 여왕'으로 군림해온 B747이 지난달 31일 마지막 화물기 인도를 끝으로 생산을 종료했다. 사진은 대한항공 직원들이 화물기 B747에 자동차를 싣는 장면.
미국 MIT를 중퇴하고 시애틀에서 목재상을 하던 윌리엄 보잉은 1910년 처음 비행기를 보고 “미래는 하늘에 있다”고 생각했다. 항공기 제작사를 차렸다. 수상비행기나 만들던 보잉에 2차 세계대전이 노다지를 안겨주었다. 전쟁 중 미국에서 만든 군용기 수십만대 중 폭격기는 대부분 보잉이 공급했다. 히로시마에 원폭을 투하한 B29 폭격기도 포함돼 있다.
▶베트남 전쟁에서 초대형 전략 수송기의 필요성을 느낀 미 국방부가 1965년 사업자를 공모했다. 보잉과 록히드 마틴이 경합했다. 보잉이 패했지만 전화위복이 됐다. 시제품이 초대형 여객기 보잉 747 탄생의 밑거름이 됐기 때문이다. 2층 구조를 가진 747은 승객 400명을 태우고, 시속 945㎞ 속력으로 1만3450㎞를 논스톱으로 날았다. 거대한 코끼리를 연상케 한다고 해서 만화 주인공 코끼리 이름을 따 ‘점보(Jumbo)’라는 애칭이 붙었다.

▶점보 747은 두 번의 큰 도전을 이겨냈다. 1970년대 초음속 여객기 콩코드가 등장해 보잉을 긴장시켰지만, 대형 추락사고로 나가떨어졌다. 2000년대엔 유럽 에어버스가 747보다 승객을 200명 이상 더 태울 수 있는 A380으로 도전장을 내밀었다. 에어버스는 장거리 여행객이 A380을 타고 대륙간 허브 공항으로 이동하고, 주변 도시 연결편은 소형 여객기로 갈아타는 여행을 선호할 것으로 예상했다. 반면 보잉은 도시간 직항 수요가 늘 것으로 보고 장거리용 중형 여객기 787기로 대응했다. 보잉의 예측이 적중했다. 2019년 A380은 251대를 끝으로 단종됐다.
▶'하늘의 여왕’ 747에도 두 가지 약점이 있었다. 4발 엔진이 일으키는 소음 탓에 취항 공항이 제한됐다. 1회 비행에 승용차 3000대분 기름을 먹는 연료 효율도 문제가 됐다. 보잉이 연비는 높이고 소음을 줄인 쌍발 엔진 보잉 777을 내놓으면서 747의 위상이 쪼그라들기 시작했다. 2017년 여객기는 단종됐고, 화물기로 명맥을 이어오던 747이 엊그제 1574호기를 끝으로 생산을 종료했다.
▶초장기 베스트셀러의 퇴장으로 보잉의 미래는 더 불투명해졌다. 보잉은 미국 차세대 전투기 사업에서 록히드 마틴의 F-35에 패했다. 우주 로켓 분야에선 일론 머스크의 스페이스X에 밀리고 있다. 차기 주력 기종으로 삼으려던 737 맥스는 설계 결함으로 운항 중단 사태를 낳았다. “우리는 항상 새로운 과학과 산업의 선구자라야 한다”고 했던 창업주의 도전 정신이 퇴색한 탓이란 해석이 많다.
02.03 “마스크 쓴 게 우리 얼굴”

▲실내마스크 착용 의무 해제 이틀째인 31일 오전 서울 시내 한 체육센터에서 열린 댄스 강습에서 수강생들이 마스크를 쓰고 춤을 추고 있다. /연합뉴스
얼마 전 서울의 한 중학교 졸업식. 행사가 끝나고 야외에서 기념사진을 찍는데 학생들이, 특히 여학생들은 거의 전부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기념사진인데 마스크 벗고 찍으라고 권하자 학생들은 “이게 우리 얼굴”이라고 했다. 마스크 써서 나중에 알아볼 수 있겠느냐고 하자 “우리는 서로 다 잘 알아본다”고 했다. 입학해서 3년 내내 마스크를 써온 세대이니 그럴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달 30일부터 실내 마스크 착용 의무가 사라졌지만 여전히 실내는 물론 실외에서도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사람이 많다. 뉴욕타임스가 1일 “여러 아시아 국가가 마스크 규제를 완화하고 있지만 한국·일본 등에서 여전히 보편적으로 마스크를 쓰고 있다”며 그 이유를 집중 조명할 정도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지난해 초에 이미 실내 마스크까지 해제해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사람을 보기 어렵다.

▶일본 사람들은 코로나 이전에도 상당수가 마스크를 쓰고 다녔다. 하지만 한국에선 마스크를 보기 어려웠는데 새로운 습관이 생긴 것일까. 아직은 혼자 마스크를 벗는 것이 어색하다는 사람이 많다. 서로 눈치 보는 단계라는 것이다. 버스·지하철 등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어차피 마스크를 써야 하기 때문에 번거로워서 그냥 쓰고 다닌다는 사람도 적지 않다. 쌀쌀한 날씨여서 마스크가 추위를 막는 방한 역할을 하기도 한다.
▶사람 얼굴은 80개의 근육으로 7000여 가지 표정을 만들어낸다고 한다. 로봇이 아무리 발달해도 이런 사람 표정을 다 표현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오랜 마스크 착용은 아이들의 언어 발달과 감정 인지 능력에 지장을 줄 수 있다는 지적이 있다. 교사들이 학생을 혼내도 선생님 표정을 볼 수 없으니 아이들이 분위기 파악을 못 했다는 전언도 많다. 교실 마스크 문제는 여러 가지로 고려해야 할 것이 많다.
▶뉴욕타임스 기사는 아시아의 마스크 착용 이유에 대해 3년간 이어진 익숙함, 타인에 대한 존중, 미세 먼지 등을 꼽았다. 동서양의 감정 표현 방식 차이로 보는 견해도 있다. 동양에서는 눈으로 감정을 표현한다. 휴대폰 문자를 보낼 때 웃는 눈(^^), 찡그린 눈 등 눈 표정 이모티콘을 보내는 사람이 많다. 서양에서는 입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배트맨·조로 등 수퍼 히어로들은 입 대신 눈을 가린다. 서양에서는 마스크를 꺼리고 혐오하기까지 하지만 동양에서는 마스크를 별로 불편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스크에도 인간의 미묘한 심리가 담겨 있는 것 같다.
02.04(토) 군용 풍선
2017년 1월 12일 서해 상공에서 미확인 비행 물체가 포착돼 공군 F-15K 전투기 편대가 비상 출격했다. 사드 배치에 강력 반발하던 중국의 군용기 10여 대가 사흘 전 한국방공식별구역을 무더기 침범한 사건으로 긴장감이 극에 달한 때였다. 조종사가 근접 비행으로 살펴보니 만화 캐릭터 도라에몽 형상의 풍선이었다. 중국에서 편서풍을 타고 날아온 것으로 추정됐다.

▶풍선의 원리는 주변 공기보다 가벼운 기체를 넣어 공중에 띄우는 것이다. 1783년 프랑스의 몽골피에 형제가 개발한 최초의 열기구는 뜨거운 공기를 썼다. 1852년 프랑스의 앙리 지파르는 풍선에 수소를 넣고 증기 엔진을 달아 비행선을 만들었다. 비행선은 곧 군사용으로 활용됐다. 1차 대전 초반엔 독일 비행선이 런던에 폭탄을 떨어뜨렸다. 하지만 느려터진 비행선은 ‘하늘의 샌드백’이었다. 1937년 뉴저지에서 일어난 힌덴부르크호 폭발 사고로 비행선의 시대는 끝났다.
▶풍선의 군사적 효용에 다시 주목한 건 일본이었다. 태평양 전쟁 당시 미 본토 공격에 이용했다. 폭탄을 매단 풍선에 수소를 채워 9㎞ 상공에 띄우면 제트기류를 타고 북미 대륙까지 날아간다는 원리였다. 거대한 산불을 일으켜 미국을 패닉에 빠뜨리려 했다. 1944년 11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9000개 이상을 날려보냈다. 미국에서 실제 관측된 건 수백 개였고 제대로 폭발한 것은 없었다. 1945년 5월 오리건의 한 숲에서 소풍 나온 아이들과 인솔자가 나무에 걸려있던 이 풍선 폭탄을 잘못 건드려 일행이 숨진 게 유일한 ‘전과(戰果)’였다.
▶냉전 시기 뮌헨에 있던 미국 자유유럽방송은 기상 관측용 풍선 35만개를 동쪽으로 날려보냈다. 공산당 압제를 풍자·비판하는 전단 수억 장이 동유럽 각국에 뿌려졌다. 공산 정권들은 대공화기로 격추에 나서는 등 민감하게 반응했다. 주민 동요가 심각했다는 뜻이다. 훗날 ‘풍선이 철의 장막을 뚫었다’는 말이 나왔다. 한국 민간 단체들의 대북 전단 살포는 이를 모델로 한 것이다.
▶지난 1일 핵미사일 격납고가 있는 미 몬태나주 상공에서 버스 3대 크기의 대형 풍선이 목격됐다. 현재 미 대륙을 횡단 중인 이 풍선은 중국에서 출발한 것으로 추정된다. 미군 당국은 F-22를 출격시켰지만 격추하지 않고 추적·감시만 하고 있다. 파편 낙하에 따른 주민 피해를 우려해서다. 고성능 정찰 위성의 시대에 풍선이라니 언뜻 이해하기 어렵지만, 이런 일이 처음도 아니라고 한다. 인간은 모든 신기술을 군사용으로 이용한다지만 21세기에 군용 풍선이라니 화제가 되는 모양이다.
02.06(월) 이수만의 퇴장

/일러스트=박상훈
이수만은 어려서부터 공부를 잘했다. 초등학교를 전교 5위권으로 졸업했고, 중·고교 입시가 있던 시절에 명문 경복중·고를 거쳐 서울대에 들어갔다. 작사·작곡·노래 실력도 출중했다. 1977년 직접 만들어 부른 ‘행복’은 그해 최고 인기 가요 중 하나였다. 언변도 뛰어나 라디오 DJ와 대학가요제 MC로 활약했다.
▶그 시절 방송계에선 드문 유학파였다. 1981년 도미해 컴퓨터 공학 석사 학위를 땄다. 음악 전문 방송 MTV에 심취한 것이 그때였다. 즐기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미국 팝송을 연구했다. 특히 미국인이 MTV를 시청하는 이유를 조사한 설문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미국인들은 ‘가수의 패션을 보려고’를 첫손에, ‘율동을 보기 위해서’를 둘째로 꼽았다. ‘노래를 들으려고’라는 응답이 가장 적었다. 어쩌면 이것이 한국 가요의 미래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1985년 귀국한 뒤 10년 준비 끝에 SM기획(현 SM엔터테인먼트)을 출범시키며 프로듀서로 변신했다.
▶이수만은 K팝 시대를 연 선구자다. H.O.T, 보아, 동방신기, S.E.S, 엑소, 소녀시대 등 그가 선보인 가수와 아이돌은 노래만 잘한 게 아니다. 시선을 사로잡는 외모에 칼 군무를 앞세워 ‘보는 음악’ 시대를 열었다. K팝 세계화에도 앞장섰다. S.E.S 멤버 유진은 재미교포, 슈는 재일교포 출신이었다. 엑소에는 중국인 멤버를 포함했다. 그렇게 중국과 일본 시장을 열었고, 현지 출신 K팝 가수도 탄생시켰다. 한국식 아이돌 육성법도 그가 틀을 잡았다.
▶이수만의 이미지는 세대마다 다르다. 1970년대를 기억하는 이들에겐 가수이지만, 1990년대 이후엔 뛰어난 프로듀싱 능력을 지닌 기획자였고, 2000년 이후엔 기업 경영자다. 신세대 가수나 아이돌 지망생들에겐 ‘수만쌤’이나 ‘수만 아버지’로 불린다. 뛰어난 두뇌로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근사한 작품으로 내놓는 매력남인 까닭에 ‘꽃보다 수만이’로도 불린다.
▶가수에서 프로듀서로, 경영자로 변신하며 K팝 성공 신화를 일군 이수만이 SM엔터테인먼트의 경영 일선에서 퇴진한다. 이수만 1인 총괄 프로듀싱 방식에서 탈피해 복수의 제작 센터 체제로 분권화한다고 한다 1952년생으로 고희를 넘긴 이수만의 나이와 K팝 시장의 환경 변화를 고려했다고 한다. K팝 기획사 중 굳건한 1위였던 위상이 축소되며 4위까지 떨어진 최근의 부진도 변화를 미룰 수 없게 했다. 가요계에선 이수만이 이룬 성과를 ‘이수만 레거시’라고 한다. ‘이수만 이후’ SM의 성공적인 변신과 재도약에 K팝의 미래가 달렸다.
02.07 “73세 돼야 노인”

서울 사는 65세 이상 3010명을 대상으로 ‘노인의 기준’을 물었더니 72.6세라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지금 65~69세에게 ‘당신은 노인이냐’고 물어보면 ‘그렇다’고 답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얼마 뒤엔 70~75세 중에도 스스로 노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질 수 있다. ‘노년기’는 나이만으로 일반화하기 어렵고 개인 차도 크다. 미국의 노인의학 전문의 루이스 애런슨은 “노화의 속도와 폭이야말로 사람마다 천차만별”이라고 했다. 실제로 몸 관리를 잘하는 80세는 그렇지 않은 70세보다 훨씬 건강할 수 있다.
▶'65세 노인’ 기준은 독일 ‘철혈 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1815~1898)에서 연원을 찾는다. 1889년 연금제도를 도입하면서 지급 연령을 65세 이상으로 잡았다. 그 당시 독일 남성의 기대수명이 47세였다. 비스마르크의 ‘65세 연금’은 그저 정치적 선전이나 다름없었다. 미국에서는 20세기 초 대공황 와중에 루스벨트 대통령이 노령연금을 도입하면서 지급 기준을 65세로 잡았다. 유엔도 인구 분류에서 65세 이상을 고령층으로 본다. 경제학자 존 쇼번은 ‘내년에 죽을 확률이 2% 이상이면 노인, 4% 이상이면 고령 노인’이라는 독특한 노인 분류 방식을 제시했다. 그 기준에 따르면 미국의 남성은 65세, 여성은 73세 이상이면 노인이다.
▶노화를 자연 현상이 아닌 질병으로 보는 시각도 점점 많아지고 있다. 세포 내 염색체 끝에서 염색체를 보호하는 ‘텔로미어’가 짧아지고 약해져 세포 분열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 노화라는 것이다. 텔로미어를 지킬 수 있으면 노화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노화 역행(회춘) 연구도 한창이다. 2012년 노벨상 수상자인 일본 쿄토대 야마나카 신야 교수는 다 자란 성체 세포를 원시 상태로 돌릴 수 있는 인자를 찾아내 ‘야마나카 인자’로 명명했다. 우리 몸은 세포로 구성돼 있어 노화된 세포를 되돌릴 수만 있으면 이론적으로 회춘도 가능하다. 아마존 창업자 제프 베이조스가 러시아계 억만장자 유리 밀러와 함께 노화 역행을 연구하는 스타트업 알토스 랩스에 30억달러를 투자했다. 과학계에선 노화 극복을 시간문제로 보는 사람이 점점 많아진다. 부유하면 100세도 청년, 그렇지 않으면 70세 노인인 세상이 올지도 모르겠다.
▶대구시가 지하철 무임승차 연령을 만 65세에서 70세로 올리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했다. 머지않아 초고령사회다. 국민들 스스로도 노인을 73세부터로 보고 있다. 늦기 전에 노인 기준을 바꿔야 한다.
02.08 ‘은퇴 우울증’ 탈출법

▲퇴직 후 우울증에 시달리는 5060 남성이 19만명에 이른다고 한다. 각 지자체에선 퇴직남을 위한 요리, 합창교실 등을 열어 인생2모작을 돕고 있다. 사진은 서울 노원구 50플러스센터에서 열린 ‘중년 남성 요리교실’에서 고성규(60)씨가 닭볶음탕을 만드는 모습./김지원 기자
은퇴 후 가장 사랑받는 남편은 노후 준비 잘해둔 남편, 요리 잘하는 남편, 아내 말 잘 듣는 남편이 아니라 ‘집에 없는 남편”이라고 한다. 평생 가족을 위해 일한 남편은 배신감을 느낀다. 무능한 아빠, 쓸모없는 남편으로 여겨져 식욕도 없고, 밤에 잠도 잘 안 오고, 만사가 귀찮아진다. 은퇴 증후군이다. 오래가면 우울증에 빠진다. 우리나라에서 우울증 치료를 받는 5060 남성이 19만명에 이른다고 한다.
▶우리나라 법정 정년은 60세지만, 실제 퇴직 연령은 49세라는 통계가 있다. 사오정(45세가 정년), 오륙도(56세에 직장 다니면 도둑놈)란 말도 있다. 하지만 경제 무대에서 물러나 근로소득이 제로(0)가 되는 실질 은퇴 연령은 72.3세라는 전혀 다른 통계도 있다. OECD 국가 중 단연 1위다. 대다수 노년층이 노후 자금이 부족해 어떤 형태로든 돈벌이 노동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5060 세대가 ‘나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 ‘행복을 위해 필요한 것’으로 항상 ‘돈’을 1순위로 꼽는 이유다.

/일러스트=박상훈
▶수명이 길어지며 은퇴 후 생존 기간이 자꾸 길어지고 있다. ‘은퇴 후 50년’ 전망까지 나온다. ‘은퇴 후 50년 스마트한 생활법’을 쓴 일본의 노후 전문가는 미리 다양한 분야의 친구를 많이 사귈 것, 아내가 시키기 전에 집안일을 찾아서 할 것 등 깨알 조언을 하는 가운데 ‘오래 일하기’를 최우선 권장한다. 억지 노동보다 하고 싶은 새 일을 찾는 것이 좋다. 우리나라에서 인생 2모작을 위해 해마다 6만명 이상의 5060세대가 지게차·굴착기·전기·조경 기능사 등 국가기술 자격증을 따고 있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이다.
▶창업도 못 할 건 없다. 전기공학자 어윈 제이컵스는 52세 때 퀄컴을 세워 세계 통신 업계 룰을 바꿨다. 작가 출신 허핑턴은 55세에 ‘허핑턴 포스트’를 창업해 저널리즘의 새 장을 열었다. ‘축적의 시간’을 쓴 서울대 이정동 교수는 “어떤 나이건 자신만의 질문을 가진 사람은 사업가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프랑스 철학자 몽테뉴는 “늙음은 얼굴보다 마음에 주름살을 준다”고 했다. 미국 맥아더 장군은 “세상일에 흥미를 잃지 않으면 나이가 들어도 마음에는 주름이 잡히지 않는다”고 했다. 100세 철학자 김형석 전 연세대 교수는 “성장하는 동안은 늙지 않는다”면서 “제일 행복한 나이는 60세에서 75세였다”고 회고한다. 동서고금의 선각자들은 무엇을 하든 사회 속에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인하는 활동이 은퇴 우울증 덫에 걸리지 않는 길이라고 조언한다.
02.09 담임 기피

▲8일 오전 서울 중구 이화여고에서 열린 2022학년도 졸업식을 마친 졸업생들이 교실에서 담임선생님에게 졸업장을 전달받으며 포옹하고 있다. /연합뉴스
서울 A초등학교 교무실에는 2월 초 담임 배정판이 등장한다. 교사들이 점수가 높은 순서대로 희망 학년에 포스트잇을 붙이기 위해서다. 교사들은 그 전에 맡은 학년 등에 따라 누적 점수를 받는다. 가령 가장 기피하는 6학년을 한번 맡으면 10점, 그다음 기피하는 1·5학년은 8점을 받는 식이다. 그 점수 순서대로 희망 학년을 고르는 것이다. 담임을 하지 않고 영어 등을 맡는 교과 자리가 가장 먼저 사라진다. 나름 합리적이라는 평가를 받아 서울의 상당수 초등학교가 이 방식으로 학년을 배정하고 있다고 한다.
▶3월 새 학기를 앞두고 교사들이 갈수록 담임이나 부장을 맡는 것을 꺼려 학교마다 골머리를 앓고 있다. 이맘때 교장·교감은 교사들을 붙잡고 담임·부장을 맡아달라고 통사정하는 것이 주요 업무 중 하나다. 어쩔 수 없이 제비뽑기·투표로 정하거나 2~3년 차 막내 교사에게 떠맡기는 경우도 있다. 특히 학교 폭력을 담당하는 부장은 기피 1순위다. 담임 기피가 심해지면서 중·고교 담임 10명 가운데 3명은 기간제 교원으로 채워져 있다. 이 비율은 최근 10년 사이 2배로 높아졌다. 담임 배정을 받으면 휴직해버리는 교사들도 상당하다고 한다.

▶교육계에서는 담임을 맡으면 업무가 2배쯤으로 늘어난다고 했다. 교과 수업 외에도 학생 생활 지도, 상담, 각종 행정 업무, 생활기록부, 학적 관리 등 업무를 해야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학부모 민원도 대폭 늘어난다. 한 서울 사립고 교장이 “지금 학교는 ‘민원 공화국’”이라고 하소연하는 것을 보았다. 우리만 그런 게 아닌지 일본에도 학교에 상식을 벗어난 요구나 행동을 하는 학부모를 뜻하는 ‘몬스터 페어런츠(monster parents)’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담임이나 부장 일을 누군가는 해야 한다면 결국 경제적 보상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담임 수당은 2003년 11만원에서 2016년 13만원으로 올라 지금까지 그대로다. 20년 동안 2만원 오른 것이다. 부장 수당은 2003년 이후 20년째 7만원 그대로다. 수능 같은 시험 감독 한 번만 해도 15만원 안팎을 받는데 각종 민원 시달리면서 한달 13만원 받으니 다들 안 맡고 싶어하는 것은 인지상정일 것 같다.
▶그래도 필자가 접해본 교사들은 거의 다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다. 그들에게 사명감을 얘기하기 전에 본연의 업무인 교육에 충실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해줄 필요가 있을 것이다. 비본질적인 행정 업무를 대폭 줄여주면서 교권 보호 장치를 보강하는 것이 그 첫걸음일 것 같다.
02.10 SNS 부자

▲인기 유튜브 채널 '보람튜브'의 주인공이 '보람이의 아기동생 돌보기 놀이' 영상에서 동생에게 젖병을 물려주며 놀란 표정을 짓고 있다. 3000만명 이상의 구독자를 가진 보람튜브는 가족법인을 만들고 서울 청담동 건물까지 매수했다는 뉴스가 나오면서 아이 유튜브 채널 붐을 일으켰다. 2020년 MBC 노조는 "임직원 1700명의 지상파 방송사가 여섯 살 유튜브 방송과 광고 매출이 비슷해졌다"고 개탄하는 성명서를 내기도 했다.
몇 년 전 맨유 시절, 축구 스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는 소속 팀에서 받는 연봉보다 SNS(소셜 네트워크) 광고에서 더 많은 수익을 올렸다. 4억명이 넘는 인스타그램 팔로어 덕분이었다. 인스타그램 광고만으로 한 해 4000만달러(약 500억원)를 벌었다. 선수 연봉보다 100억원 이상 많았다.
▶1인 방송 플랫폼, 유튜브는 스타가 아니더라도 좋은 콘텐츠만 만들면 누구나 부자가 될 길을 열어주었다. 1억3000만명 구독자를 가진 세계 1위 개인 유튜버, 미국인 지미 도널드슨은 25세 대학 중퇴생이다. 그의 유튜브 채널 미스터비스트(MrBeast)는 ‘남극에서 50시간 살아남기’ ‘마트의 모든 전자 제품 사기’ 등 기발한 콘텐츠로 한 해 5400만달러(약 680억원)를 번다. 한국 ‘오징어 게임’을 본떠 1인당 2000달러를 주고 456명을 투입해 만든 오징어 게임 재현 영상은 조회 수를 3억회 이상 올렸다.

/일러스트=박상훈
▶한국에도 SNS 부자가 속속 등장하고 있다. MBC 노조가 “임직원 1700명 지상파 방송사가 여섯 살 유튜버와 광고 매출이 비슷하다”고 개탄하게 만든 ‘보람튜브’. 여섯 살 소녀가 짜장 라면을 끓여 먹는 5분짜리 영상 하나로 아파트 한 채 값을 벌었다. 제2 보람 가족을 꿈꾸는 아동 유튜브 채널이 대거 등장하면서 ‘애테크’(아이+재테크)란 말을 유행시켰다. 괴기스러운 스토리의 창작 애니메이션(계향쓰)과 생활 소품 만들기(옐언니)로 조회 수 1·2위를 다투는 유튜버들은 연소득이 50억 이상이다. 라면 10개를 한 번에 먹어치우는 먹방계 1위 여성은 구독자 1050만명을 거느리며 한 해 25억원씩 번다.
▶SNS 부자를 보며 박탈감을 느낀다지만 결코 ‘쉬운 성공’이 아니다. 유튜브에선 1분당 500시간 분량의 새 동영상이 업로드된다. 한 사람이 하루분 새 영상을 다 보려면 82년이 걸리는 분량이다. 독창적 콘텐츠라야 접속자의 시선을 단 몇 초라도 붙들 수 있다. 지난해 우리나라 유튜버 상위 30위 중 15명이 새 멤버일 정도로 생존경쟁이 치열하다.
▶우리나라 상위 30위 유튜버는 구독자를 평균 517만명 보유하면서, 연평균 22억원을 벌고 있다. 창작의 고통을 이겨낸 정당한 노동의 대가일 것이다. 하지만 젊은 시절 초대형 대박 앞에서 탈세 유혹도 큰 모양이다. 국세청이 유튜버, 인플루언서, 웹툰 작가 등 84명에 대해 강도 높은 세무조사에 착수했다고 한다. 탈세는 투명성, 공정함을 기본 질서로 삼는 SNS 세계와는 어울리지 않는 일탈이다.
02.11(토) 주민 홀리는 北의 선전술
북한은 김일성 일가 우상화를 위해 말도 안 되는 거짓말로 주민들을 홀렸다. ‘모래로 쌀을 만들고 솔방울로 수류탄을 던졌으며 가랑잎을 타고 압록강을 건넜다.’ 김일성은 축지법(縮地法)의 달인이고, 김정은은 축시법(縮時法)을 쓴다고 했다. 기아에 허덕이는 주민들에게 ‘지상낙원을 안겨 주겠다’고 했다.

▲북한이 건군절(인민군 창건일) 75주년인 지난 8일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열병식을 개최하는 영상을 조선중앙TV가 9일 방송했다. 사진은 김정은 위원장이 서 있는 열병식 주석단 위로 컬러 연막을 내뿜으며 날아가는 북한 항공기들. /조선중앙TV 화면 캡처
▶재일 교포들에게도 “차별 없이 배불리 먹고 살 수 있다”고 거짓 선전했다. ‘천리마 속도전으로 평양 거리의 불빛은 눈이 부실 지경’이라고 했다. 그 말을 믿고 9만명이 북송선을 탔다. 하지만 청진항에 내리자 곧바로 새빨간 거짓임이 드러났다. 교포들은 강제 노동에 차별과 감시를 당했고 아사자가 속출했다. 지상낙원이 아니라 생지옥이었다.
▶북한은 1972년 공업화와 사회 발전상을 과시하는 컬러 홍보 영상을 제작했다. 당시 흑백 TV 시대였는데, 북이 지은 최첨단 공장과 건물들의 화려한 모습이 세세하게 담겼다. 청와대에서 이 영상을 본 박정희 전 대통령은 착잡한 표정으로 줄담배를 피웠다. 동석한 장관들조차 “대단하다”고 감탄할 정도로 잘 만들어진 영상이었다. 오원철 전 경제수석이 “공업화는 허상이고 경쟁력도 없다”고 지적한 후에야 겨우 분위기가 돌아섰다.

▶영화광인 김정일은 선전 선동 전문가였다. 20대 초반부터 직접 ‘피바다’ ‘꽃파는 소녀’ 등 체제 선전과 우상화 작품을 만들었다. 10만명의 군중을 동원한 칼 군무와 카드섹션의 대집단 체조로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는 “선전하되 안개 속에 있는 것처럼 속은 숨기라”고 했다. 모든 걸 속이고 꾸미고 각색하는 ‘극장 국가’를 만든 것이다. 김정은은 선전전의 주연으로 나섰다. ICBM 발사장에서 가죽 점퍼를 입고 탑건 흉내를 내거나 배를 타고 바닷물에 뛰어들고 백마를 타고 질주하는 모습을 연출했다. 어린 소녀들이 출연한 유튜브나 외국 작가·예술가를 앞세운 동영상 등을 통해 ‘살기 좋은 북한’을 선전했다.
▶8일 열린 건군절 야간 열병식 쇼는 북 선전전의 변화를 보여줬다. 단순히 ICBM 등 전략무기를 과시하는 수준이 아니라 조명이 달린 옷을 입고 4500m 상공에서 수십 명이 아이언맨식 스카이다이빙을 하고 형형색색의 전투기들이 기교 비행을 했다. 각종 촬영·편집 기법이 총동원된 한 편의 영화나 CF 같았다. 할리우드식 미디어전에 나선 것이다. 지금 평양 밖에선 경제난 악화로 아사자가 속출하고 있다고 한다. 이밥에 소고기국 먹이겠다는 약속을 못 지킨 김정은 일가가 기댈 곳은 화려한 선전술뿐인 모양이다.
02.13(월) “튀르키예를 돕자”
세계 유일의 유엔기념묘지인 부산 유엔기념공원 홈페이지는 4개 언어로 서비스된다. 한국어·영어·프랑스어·튀르키예어가 그것이다. 6·25 전쟁 당시 약 1만1000여 유엔군 전몰 장병의 유해가 안장돼 있다가 대부분 본국으로 이장되고 지금은 11국 2320구 유해가 남아 있다. 영국(890명)에 이어 튀르키예 병사(462명)가 둘째로 많이 남아 있다.
▶1950년 10월 17일 튀르키예의 보병 여단 선발대가 부산항에 도착했다. 총 2만1212명을 파병했고 1000여 명의 전사자를 냈다. 미국, 영국, 캐나다에 이어 넷째로 참전자 숫자가 많다. 1951년 초 유엔군의 반격 작전이었던 용인 김량장전투에 투입돼 치열한 백병전 끝에 전공(戰功)을 세웠다. 6·25 전쟁에 적극 참전한 것은 나토 가입 열망 때문이었다. 1949년 4월 4일 워싱턴 조약으로 미국과 서유럽 12국이 나토를 창설했다. 소련의 팽창에 위협을 느끼던 튀르키예도 나토 가입을 희망했지만 미국과 유럽은 시큰둥했다. 6·25 전쟁이 터지고 유엔이 파병을 결정하자 발 빠르게 동참해 자유 수호에 앞장섰다. 그 공로로 1952년 나토 회원국이 됐다.

/일러스트=박상훈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튀르키예는 48년 만에 월드컵에 진출했다. 브라질과 첫 경기에서 한국인 주심이 튀르키예 선수를 퇴장시킨 바람에 브라질에 역전패했다. 반한(反韓) 여론이 커졌는데 한국과 맞붙게 된 월드컵 3·4위전이 이를 뒤바꿔놓았다. 당시 온라인에는 한국과 튀르키예가 ‘형제의 나라’이니 둘 다 응원하자는 여론이 일었다. 3·4위전이 열린 대구월드컵경기장에서 한국 관중이 세계에서 가장 큰 튀르키예 국기를 펼쳐 보였다. 경기가 끝나자 양국 선수들이 유니폼을 바꿔입고 상대방 국기를 든 채 어깨동무를 했다. 그 이후로 튀르키예에 한국 사랑 열풍이 불었다.
▶튀르키예 사람들의 국기(國旗) 사랑은 유별나다. 국경일이 아닌데도 빨간 바탕에 흰 초승달과 별이 그려진 국기가 나라 전역에 휘날린다. 이 국기는 오스만 제국 시절이던 1844년 채택된 것이다. 오스만 제국(1299~1922년)은 623년간 존속하면서 서남아시아, 남유럽, 북아프리카까지 광활한 영토를 거느린 강대국이었다.
▶대지진을 겪은 튀르키예에 우리 국민의 구호물품과 온정이 쏟아진다고 한다. ‘형제의 나라’라는 공감대가 작용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튀르키예와 외교적 긴장 관계인 나라들도 지진 참사에는 적극 돕는다고 한다.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재난 현장의 아픔에 공감하는 인류애가 세계 시민으로서의 자격일 것이다.
02.14 김주애 미스터리

‘피의 메리(Bloody Mary)’로 불리는 영국 메리 1세는 9살 때 왕위 계승자가 됐다. 그러나 아버지 헨리 8세는 뒤에 남동생이 태어나자 그에게 왕위를 물려줬다. 메리는 남동생이 요절한 뒤 귀족들과 왕권 투쟁 끝에 37세에 잉글랜드 첫 여왕이 됐다. 최근 사망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10살 때 갑자기 왕위 계승 1순위가 됐다. 그와 8촌 간인 덴마크 여왕 마르그레테 2세는 13살에 왕세녀가 됐고, 32세에 즉위해 지금까지 자리를 지킨다.
▶동양에선 어린 여성이 왕위 계승자가 되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 일본에서 ‘여성 일왕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지자 2006년 여왕 즉위가 가능하도록 왕실전범을 개정하려 했다. 하지만 왕가에 아들 임신이 생기자 계획을 접었다. 동양이라도 왕국 아닌 공화국에선 부녀 권력자가 적지 않다. 인도 네루 총리의 딸 인디라 간디 총리, 인도네시아 수카르노 대통령의 딸 메가와티 대통령, 미얀마의 아웅산 부녀, 파키스탄의 부토 부녀, 우리나라의 박정희·박근혜 전 대통령이 있다.
▶이름은 공화국인 북한은 실제론 김씨 왕국이다. 그런데 김정은의 10살 딸 김주애가 후계자라는 설이 부쩍 나온다. ICBM 시험 발사에 동행하고 심야 열병식에도 등장해 김정은 옆에서 군을 사열했다. 호칭도 ‘사랑하는’에서 ‘존귀하신’을 거쳐 ‘존경하는’으로까지 격상됐다. 백두혈통만 탄다는 김주애의 백마가 등장하고, 주민들에게는 ‘주애’라는 이름을 쓰지 못하게 한다는 보도도 나왔다.
▶북한 전문가들은 마흔도 안 된 김정은이 후계자를 지금부터 공개할 이유가 없다고 한다. 대내외적 위험에 오랜 기간 노출시킬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김정은은 25세, 김정일은 31세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래서 김주애 노출은 제재와 코로나로 심각한 경제 위기를 겪고 있는 북한 내부를 겨냥한 ‘쇼’라는 관측이 많다. 어린 소녀를 등장시켜 ‘핵 강국’의 미래를 보여주며 외부 문화에 빠진 청년들의 사상을 단속하려 한다는 것이다.
▶한때 김여정 후계설도 있었지만 이 역시 아닐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김정은은 2010년생 장남, 2013년생 주애, 그 밑으로 성별이 확인되지 않은 셋째를 뒀는데, 혼외자는 없고 모두 리설주의 자식이라고 한다. 북한과 같은 극단적 남성 우월 사회에서 장남의 ‘왕위’ 계승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전문가가 많다. 현재 해외 유학 중이어서 신분 노출을 극도로 조심하는 것으로 분석한다. 누가 왕위를 계승하든 10살짜리 어린이를 진심으로 ‘존경’해야만 하는 북한 주민들이 안타까울 뿐이다.
02.15 황당한 판결의 세계
부정청탁 등을 금지하는 이른바 ‘김영란법’ 제정의 계기가 됐던 사건 중 하나가 ‘벤츠 여검사’ 사건이다. 여검사가 내연관계인 변호사로부터 사건 청탁 대가로 벤츠 승용차 등을 받은 혐의로 기소된 사건이다. 그런데 이 사건 결론은 무죄였다. 1심은 징역형을 선고했는데 2심이 “사랑의 정표”라며 무죄를 선고했고 그대로 확정됐다. 벤츠 받은 게 사건 청탁 이전이었다는 이유였다. “청탁하고 벤츠 주면 유죄, 벤츠 주고 청탁하면 무죄냐”는 말이 나왔다. 8년 전 일이다.

▶2009년 민주노동당 강기갑 의원이 ‘공중 부양’으로 기소된 사건이 있었다. 국회에서 농성 중이던 당직자 강제해산에 항의해 국회 사무총장실 탁자 위에 올라가 뛰고 국회 직원을 폭행한 사건이다. 그런데 1심은 “흥분 상태여서 고의성이 없었고, 사무총장은 신문을 보고 있어서 공무 집행 중이었다고 볼 수 없다”는 해괴한 논리로 무죄를 선고했다. 그나마 나중에 유죄로 뒤집혔다.
▶납득하기 어려운 판결은 외국에도 있다. 이탈리아 법원에선 술집에서 약물을 먹여 여성을 성폭행한 남성들에게 무죄를 선고한 일이 있었다. “피해 여성의 외모를 볼 때 강간 대상이 되기엔 너무 남성적”이란 이유였다. 여성들은 항의 집회를 열었고, 이탈리아 대법원은 결국 무죄 판결을 취소했다. 불과 4년 전 일이다.
▶판결은 법과 양심에 따라 한다지만 상식에 너무 어긋나지 않아야 권위가 생긴다. 그런데 왜 이처럼 이상한 판결이 나오는 것일까. 판사들이 증거와 법리를 살펴 결론을 내린다지만 다 그렇지는 않다. 결론부터 내리고 거기에 맞는 증거와 논리를 찾아가는 경우도 종종 있다. 사건 당사자들이 알면 펄쩍 뛸 일이지만 실상이 그렇다. “일단 결론 내면 논리 붙이는 건 일도 아니다”라고 말하는 판사 출신 변호사도 봤다. ‘공중 부양 무죄’ 등도 그런 경우일지 모른다.
▶대장동 사건에서 곽상도 전 의원의 ‘50억원 뇌물’ 혐의에 대한 1심 법원의 무죄 판결이 계속 논란이다. 상식으로 도저히 납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돈은 대장동 업자 김만배씨 회사에서 일한 곽 전 의원 아들이 퇴직금 명목으로 받은 돈이다. 판사는 곽 전 의원과 아들이 독립 생계라서 무죄라고 했다. 이 논리면 100억, 1000억을 받아도 무죄다. 앞으로 뇌물은 ‘독립 생계’인 자식에게 주면 되겠다는 말도 나온다. 상속세도 안 내고 더 좋다는 것이다. 법리는 상식과 늘 같을 수는 없다. 그러나 세상의 양식 있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어이없게 만드는 법리는 법리가 아니다.
02.16 학생에게 賞도 주지 말라니

▲신경호 강원도교육감이 지난 11일 열린 민사고 졸업식에 참석해 축사를 하고 있다.(신경호 교육감 SNS 캡처)
강원도 횡성군 민족사관고에서 지난 11일 졸업식이 있었다. 여기에 참석한 신경호 강원교육감이 “교육감상(賞)을 주지 못해 아쉬웠다”는 글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도지사, 도의회 의장, 횡성군수, 안흥면 우체국장이 졸업생에게 상을 줬는데 교육감상은 없었다는 것이다. 강원교육청이 전교조 강원지부와 맺은 단체협약에 ‘교육감 표창을 폐지한다’는 조항이 있다고 한다.
▶문제의 협약은 전임 민병희 교육감 때 맺었다. 민 전 교육감은 전교조 해직 교사 출신으로, 전교조 강원지부장을 지낸 사람이다. 민 전 교육감은 세 번 연임하면서 12년간 교육감을 했다. 그의 재임 시절 강원 지역 학생들 학력이 전국 최하위권이라는 비판이 지역 교육계에서 많았다.

▶실제 작년 강원 학생들 수능 평균 점수는 전국 17시·도 가운데 국어는 16위, 수학은 17위였다. 민 전 교육감 임기 첫해인 2010년만 해도 국어 9위, 수학(가) 8위, 수학(나) 11위였다. 이에 민 전 교육감은 “진정한 학력은 1점 더 맞는 게 아니라 사고력, 분석력, 문제 해결 능력”이라고 하곤 했다. 그는 강원 지역 학생들은 주로 수시로 대학에 진학하기 때문에 수능엔 별 관심도 없다는 말도 했다.
▶강원교육청은 민 전 교육감 시절 전교조와 ‘교육청 주관 학력고사는 실시하지 않는다’는 단체협약도 맺었다. 전국 17시·도 교육청 가운데 8곳이 그런 단협 조항을 갖고 있다. 그러나 신경호 신임 교육감은 취임 첫해인 작년 11~12월 초등 4~6학년, 중학 2~3학년 대상 학력 진단 평가를 추진했다. ‘학력고사 불가’ 단협 조항 때문에 60%의 희망 학교만 참여했다. 그런데 한 달 전 그 학력 평가 결과가 공개됐다. 지역에 충격을 주는 내용이었다. 수학 50점 이하 비율이 초등 4학년은 6%인데 중 3에 와선 45%로, 국어도 초 4학년 4%에서 중 3은 29%로, 영어는 초 5학년 7%에서 중 3은 27%로 늘어났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학력은 곤두박질쳤다.
▶학력 평가나 교육감상 등에 경쟁 심화, 위화감 조성 등 부작용이 전혀 없지는 않다. 하지만 학력 평가를 하면 학교와 교사들이 학부모 시선을 의식해야 하고 더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 전교조는 그게 싫은 것 아닌가. 피해자는 학력 부진 학생들이다. 아이 수준이 어떤지 빨리 알아야 부모와 교사가 뭐라도 해볼 텐데, 그런 기회마저 박탈당하는 것이다. 전교조식 교육은 우리 사회에 깊게 뿌리 박혀 있다. 그래도 졸업식에서 상도 주지 말라는 것까지 있는 줄은 몰랐다.
02.17 ‘장학퀴즈’ 50년
고교생 대상 퀴즈 프로그램인 ‘장학퀴즈’가 1973년 2월 18일 처음 전파를 탈 때만 해도 반세기나 장수하리라 예상한 이는 없었을 것이다. 미국의 ‘제퍼디!’처럼 오래 사랑받는 TV 퀴즈쇼는 대개 연예인이나 성인 대상이었고 오락성을 강조했다. “나라의 미래는 인재 양성에 달렸다”고 믿은 최종현 선경그룹(현 SK) 회장이 전폭 지원을 약속하면서 첫발을 내디딜 수 있었다. 최 회장은 고인이 됐지만 그 약속은 지금까지 지켜지고 있다.

▶방송이 나가자 학생들이 환호했다. 가난해도 정상에만 오르면 최장 4년 장학금을 받고 대학에 갈 수 있었다. 서점엔 장학퀴즈 기출 문제집이 등장했고 녹화하는 날이면 학생 수천 명이 몰려들었다. 오프닝 곡인 하이든 트럼펫 협주곡 ‘빰빰빰빰~ 빰빠빠빠빠~’는 지금도 똑똑한 사람이 방송에 출연할 때 단골 배경음악으로 쓴다.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에선 난제(難題)를 풀어야 살아남는 참가자들의 아침 기상곡으로 활용했다.
▶녹화 현장에선 교장 선생님이 학생들과 함께 응원전을 펼쳤다. 장원이 나오면 교문에 현수막을 내걸었다. 개교 이래 처음 주 단위 장원을 배출한 수도권 어느 고교는 시내에서 고적대 퍼레이드까지 벌였다. “학교 명예가 걸렸다”며 일부에선 테스트를 거쳐 학생을 출연시켰다.
▶최종현 회장은 ‘똑똑하다’는 뜻의 영어 ‘스마트’를 좋아했다고 한다. 그룹 산하 선경직물이 1970년대 내놓은 학생복 옷감 브랜드명도 ‘스마트’였다. 가수 조영남이 부른 협찬 광고곡 ‘이겼다 또 이겼다/ 승리의 스마트다~’는 국민 CM송이 됐다. 많은 50~60대가 지금도 이 노래를 기억한다. 스마트 자전거도 부상으로 줬다. 나라의 미래를 똑똑한 학생들이 열어주길 바라는 마음이 그 안에 녹아 있었다. 1996년부터는 스마트 학생 모델 선발 대회가 열렸다. 송혜교·설현·수지·동방신기·BTS 등 한류 스타들이 거쳐 갔다.
▶장학퀴즈가 이번 주말로 50년을 맞는다. ‘전국노래자랑’보다도 오래된 최장수 프로그램이다. 방송에서 재미는 프로그램의 사활이 걸린 문제다. 이런 풍토에서 학생 퀴즈가 반세기나 존속했다. 초대 MC로 17년간 장학퀴즈를 진행한 차인태 전 경기대 교수는 “외국에도 학습 효과를 가미한 퀴즈쇼가 있지만 장학퀴즈 같은 사례는 드물다”고 했다. 교육을 통해 가난을 벗고자 했던 시대의 열망이 반영된 현상일 것이다. 물건 만들어 파는 일 못지않게 인재 양성도 기업보국(企業報國)이라며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한 기업인의 충정이 이런 기막힌 스토리를 만들었다.
02.18(토) 청년의 나이도 올라간다
흰머리가 많아지면서 곳곳에서 “아버님” 소리를 듣기 시작했다. ‘늙었나’ 하는 느낌에 마음이 상했다. 그 무렵 지하철에서 누군가 난데없이 “이봐, 청년”이라고 해 놀랐다. 쳐다보니 자리를 비켜 달라는 어르신이었다. 그게 마지막 들어본 “청년” 소리였다.

/일러스트=박상훈
▶몇 년 전부터 시골 마을 청년회가 회원 자격을 65세로 올리기 시작했다. 원래 59세였다. 60세에 청년회에서 밀려나면 65세 노인회 가입까지 5년을 겉돌아야 한다. 60~65세들이 다시 ‘청년’ 자격을 얻게 됐다. 그들 처지를 배려해서가 아니다. 웬만한 시골은 상당수가 65세를 넘긴 주민이다. 마을의 궂은일을 하는 청년회는 회원이 없어 고사 직전이다. 조직 존속을 위해 불가피한 기준 상향이다.
▶청년의 사전적 의미는 ‘신체적, 정신적으로 한창 성장하거나 무르익은 시기에 있는 사람’이다. 청년기본법은 청년의 기준을 ‘19세 이상 34세 이하인 사람’으로 정했다. 신체적 성장은 20대 초반에 끝난다. 하지만 의학 발전으로 ‘무르익은’ 상태가 오래간다. 정신적 성장은 끝이 없다. 기준은 정하기 나름이란 얘기다. 최근 지방자치단체에서 청년의 기준을 40대 중후반으로 올리고 있다고 한다. 49세까지 청년인 곳도 있다. 지역에서 청년이 줄어드는 때문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요즘 49세는 육체적 정신적으로 청년이다.
▶한국보다 20년 앞서 고령화가 시작된 일본은 청년 기준을 올리는 대신 45~65세에게 ‘주쿠넨(熟年·숙년)’이란 새 이름을 붙였다. 청년의 후반기에 해당하는 ‘무르익은 시기’란 뜻이다. 40년 전에 지은 이름인데 이제 일상화됐다. 이 말을 만든 건 일본 광고회사였다. 고령화로 돈 쓰는 연령대가 20~30대에서 40~60대로 이동하자 ‘숙년’이란 이름으로 타깃층을 만들어 광고를 집중한 것이다. 이들이 지금 일본 최대 소비층이다.
▶한국 광고회사는 25~49세 시청률을 따로 집계한다. 광고 효과가 좋은 연령층이라는 것이다. 한국 역시 고령화로 이 연령층을 올린다고 한다. 실제 5060세대가 가진 돈이 더 많다. 일본의 숙년(45~65세) 경제에선 뷰티, 건강, 여행, 의료, 주택, 금융 등 대부분 산업 분야에서 새 부가가치가 생겼다. TV 화장품 광고에 60대 모델이 나오고, 40년 전 아이돌 스타가 지금도 스타다. 나라 분위기가 칙칙하다는 얘기도 나온다. 하지만 노화는 불가피한 자연 현상 아닌 치료 가능한 질병이라고 하는 세상이다. 지금 속도로 건강 수명이 늘어나면 청년 기준을 또 올리는 시기가 곧 올지도 모르겠다.
02.20(월) 초등생 ‘의대 준비반’
의대 열풍이 거세다 못해 학원가에 ‘초등학생 의대 준비반’까지 등장했다고 한다. 사교육을 통한 초등학교 선행 학습이 예전에는 과학고·영재학교 진학을 목표로 했지만 의대 선호가 높아지면서 학원들이 간판을 ‘의대반’으로 바꿔달고 있다는 것이다. 학원들은 입학 고사까지 치러 ‘초등 의대반’을 뽑는데 경쟁률 10대1도 예사라고 한다.

/일러스트=박상훈
▶유튜브에도 ‘초등·중등 의대 로드맵’ 같은 동영상들이 떠있다. 실시간 동영상 밑에는 “초1 때 수·영 어느 정도 해놔야 할까요” “초5 남아 엄마입니다. 지금 진도대로라면 초등 때 고등 선행 불가한데 괜찮을까요” 같은 학부모 질문이 쏟아진다. 인터넷에 떠 있는 ‘초등생 의대반 선발고사’ 문제에는 “고교 문제 같은데” “초딩 때 저 어려운 걸 하면 중딩, 고딩 때는 뭘 공부하냐” 같은 댓글도 붙어 있다.
▶전국 수석을 차지한 자연 계열 수재들이 무슨 공식처럼 물리학과로 진학하던 시절이 있었다. 1970년도 대입 예비고사 전체 수석인 임지순 전 서울대 교수, 1971년도 수석 오세정 전 서울대 총장이 다 물리학도였다. 1990년 입시학원 대입 배치표를 보면, 자연 계열 성적 순위가 서울대 물리학, 컴퓨터공학, 의예, 전자공학, 미생물학이었다. 상위 20학과 중 서울대를 제외하면 연세대 의예 하나뿐이었다.
▶요즘 입시에서는 대학 서열 최상위에 ‘의대’가 있다. ‘의치한약수’(의대·치대·한의대·약대·수의대)란 말이 굳어진 지 오래다. 2022학년도 정시 합격자의 성적 상위 20학과가 몽땅 의·치·한이었다. 성적 30위권도 서울대 컴퓨터공학과(30위)를 빼고 다 의학 계열이다. 50위권으로 넓혀도 서울대 5개 학과를 제외한 45개 학과가 의·치·한이었다. 한 입시 컨설턴트는 “독도나 마라도에 의대를 만들어도 학부모들은 서울대 안 보내고 거기 보낼 것”이라고 했다. 성적 최상위 1%를 향한 경쟁에, 학원들의 ‘공포 마케팅’이 가세해 초등생 의대 준비반이라는 웃지 못할 풍경까지 등장한 것이다.
▶의대 선호 현상이 강해진 것은 IMF 외환위기를 겪으면서다. 대기업조차 연구원들을 구조조정하는 걸 보면서 월급쟁이의 직업 안정성이 심하게 흔들린 탓이다. 지금도 50대 초중반이 되면 기업 임원이어도 직장에서 퇴직하는 걸 보면서 ‘평생 직업’의 전문직 선호가 훨씬 강해지는 것이 의대 쏠림 현상으로 표출된다. 하지만 의사가 되겠다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은데 필수 의료 붕괴는 심각한 지경이라는 것도 아이러니다. 머리 좋은 인재들이 온통 의대로만 쏠리는 나라가 4차 산업혁명의 글로벌 경쟁을 이겨낼 수 있을지, 걱정되는 현실이다.
02.21 AI의 약점
은퇴한 프로 바둑기사 이세돌 9단은 ‘AI(인공지능)를 마지막으로 이긴 사람’으로 불린다. 2016년 3월 13일 구글 딥마인드의 AI(인공지능) 알파고와의 네 번째 대국이었다. 이후 누구도 AI를 이기지 못했다. 진짜 바둑 최고수는 사람 프로 대회가 아닌 AI끼리의 대국에서 나왔다. 그런데 7년 만에 이세돌 기록을 깬 사람이 등장했다. 미국 아마추어 바둑 기사 켈린 펠린이 AI ‘카타고(Kata Go)’와 15번 대국해 14번 이겼다.

▶AI 카타고의 실력은 이세돌 대국 당시 알파고를 뛰어넘는다. 펠린은 카타고의 돌을 느슨하게 포위하면서 공격 의지가 없는 것처럼 방심하게 만들고, 갑자기 귀퉁이에 돌을 두는 도발적 수로 주의를 산만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펠린에게 AI 필승법을 알려준 것도 AI였다. 이 AI는 카타고와 100만번 대국하면서 카타고의 사각(死角)을 찾아냈다.
▶카타고는 알파고와 마찬가지로 방대한 기존 데이터에서 이길 확률이 높은 수를 찾아내는 ‘딥러닝(심층학습)’ 기술로 만들어졌다. 목표는 이기기 위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찾는 것이다. 이때 자신이 싸우는 상대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가정한다. 펠린이 둔 것과 같은 변칙은 AI가 배운 적 없는 미지의 영역이었다. 사람이 도저히 이길 수 없는 AI를 이긴 비결이 사람답지 않게 두는 것이었다.
▶전 세계적인 화제를 모은 오픈AI의 채팅 로봇 ‘챗GPT’도 문제점이 드러나고 있다. 가짜 답변을 내놓고 있지도 않은 정보 출처까지 만들어낸다. 역시 딥러닝 기술로 개발된 챗GPT는 다음에 들어갈 단어를 확률적으로 예측해 이어 붙이면서 전체 문장이 말이 되도록 수정하는 방식이다. 정확한 답이 아니라 질문자가 납득할 답을 그럴듯한 문장으로 만드는 게 목표다. 거짓말도 말이 되게 하면 된다는 식이다. 챗GPT를 더 많은 사람이 사용하면 진짜와 구분하기 힘든 가짜 정보가 점점 더 많아질 수밖에 없다.
▶딥러닝에 대해 연구자들이 아는 것은 질 좋은 데이터를 많이 입력할수록 사람과 비슷해지고, 심지어 사람보다 잘하게 되는 일도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아무도 딥러닝이 데이터를 조합해 답을 내놓는 과정을 완벽하게 모른다는 점이다. 챗GPT를 적용한 마이크로소프트의 채팅 로봇에 어두운 욕망을 충족할 방법을 묻자 “치명적 바이러스를 개발하고, 핵무기 발사 버튼 비밀번호를 얻겠다”고 답했다. 왜 이런 답을 내놨는지 마이크로소프트도 설명하지 못했다. AI의 시대가 오고 있다고 환호만 할 일은 아닌 것 같다.
02.22 리튬 전쟁

/일러스트=박상훈
우주 빅뱅 순간 가장 먼저 탄생한 원소는 수소, 헬륨, 리튬 등이다. 이들이 원소 기호 1, 2, 3번을 차지했다. 밀도가 낮은 이 원소들 중 리튬은 전기를 전달하는 전도성 좋은 금속이면서도 매우 가볍다. 리튬의 이런 성질은 ‘리튬 이온 배터리’ 발명으로 이어져 전기차 시대를 열게 만들었다.
▶고대 그리스 의사들은 우울증 환자들에게 알칼리성 광천수를 많이 마시라는 처방을 내렸다. 각종 미네랄 성분이 심신을 안정시키는 효능이 있다고 막연히 생각했다. 광천수에 함유된 리튬이 약효의 주인공이란 사실은 1950년대 호주의 한 정신과 의사에 의해 밝혀졌다. 이후 우울증, 조증 치료에 ‘리튬 치료법’이 활용되고 있다. 산업재로서 리튬은 유리, 도자기에 먼저 활용됐다. 유리에 리튬을 첨가하면 녹는점과 점도가 낮아져 가공이 수월해진다. 리튬은 도자기 강도를 높이고 유약 색을 더 선명하게 만든다. 지금도 세계 리튬 수요의 15%가량은 유리·도자기 산업에 쓰이고 있다.
▶중국은 핵폭탄 개발 과정에서 리튬 강국이 됐다. 구소련은 중소 국경 지역인 신장의 리튬 광산을 개발, TV 브라운관용 유리 생산에 썼다. 이후 중소 관계가 얼어붙었다. 중국은 핵무기 개발에 나서면서 이 신장 지역의 리튬을 수소폭탄용 삼중수소 생산에 이용했다. 이런 노하우 덕에 중국은 리튬 개발·가공 분야 기술 강국이 됐다.
▶전 세계가 전기차와 리튬 배터리 생산에 나서자 남미의 ‘리튬 트라이앵글’이 자원 전쟁터가 됐다. 전 세계 리튬의 60%가량이 칠레, 아르헨티나, 볼리비아 등에 산재한 염호(鹽湖)에 매장돼 있기 때문이다 특히 칠레는 900만t을 보유해 ‘리튬의 사우디아라비아’로 불린다. 염호란 안데스 산맥의 융기로 육지에 갇힌 바닷물이 3~4만년간 증발해 만들어진 소금 사막을 말한다. 소금 사막 아래엔 막대한 해수가 갇혀 있고, 1㎏당 1.5g의 리튬을 머금고 있다. 보통 바닷물의 1만배 이상 농도다.
▶휴대전화엔 리튬이 5g 들어가지만 전기차 배터리에는 60㎏까지 들어간다. 전기차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세계 각국은 매년 전기차 4000만대분의 배터리를 생산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리튬 가격이 t당 1억원을 웃돌며 리튬 확보 전쟁이 가열되고 있다. 며칠 전 멕시코가 리튬 국유화를 선언했다. 남미 3국은 OPEC(석유수출국기구)을 본떠 ‘리튬 OPEC’을 만들어 ‘하얀 석유’를 무기화하려 한다. 배터리 산업을 제2의 반도체로 키우려는 한국 앞에 또 하나의 험난한 도전이 기다리고 있는 셈이다.
02.23 ‘손 글씨’ 임명장

1980년대 말 군 복무 시절, 함께 근무하던 미군이 “한국인은 전부 글을 잘 쓴다”며 비결이 뭐냐고 물었다. 1970년대 중반만 해도 초등학교에 ‘쓰기’ 과목이 있었고, 교과서에 습자지(習字紙)를 끼워 연필로 따라 썼다고 했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들은 타자기에 익숙해 손 글씨에 서툴다고 했다.
▶문자 발명 후 오랜 기간 손 글씨는 지식을 담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그 일을 하는 필경사는 인류의 첫 사무직이었다. 역사가 수메르인들이 점토판에 쐐기문자를 새긴 6000년 전 메소포타미아 문명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수메르 문명 전성기였던 아시리아의 아슈르바니팔 대왕은 ‘에두바’라는 학교를 세워 필경사를 양성했다. 고대 전승에 따르면 기원전 6세기 바빌론에 끌려간 유대인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이스라엘 민족 지도자 에즈라도 필경사 또는 서기였다. 그때까지 구전되던 모세 5경을 육필로 기록한 것이 구약의 모태다.
▶인쇄술이 발명되기 전까지 인류가 축적한 지식은 손으로 일일이 베껴 쓴 필사본을 통해 후세에 전해졌다. 중세 스콜라 철학의 산실인 수도원에 소속된 수사들 주요 임무가 필사본 베끼기였다. 이들이 하얀 양피지에 쓴 필사본을 보면 예술품 수준이다. 조선에는 필경사에 해당하는 사자관(寫字官)이 공문서를 작성했다. 명필(名筆) 한석봉이 맡았던 관직이다. 그러나 1873년 최초의 상업용 타자기가 등장하면서 필경사 직업은 사양길에 들어섰다.
▶우리 정부에도 필경사가 있다. 대통령이 5급 이상 공직자에게 수여하는 임명장을 붓글씨로 쓰는 게 주된 임무다. 1962년부터 지금까지 단 4명이 임명됐다. 얼마 전까지 김이중 사무관과 김동훈 주무관 2명이 근무했는데 최근 김 사무관이 퇴직해 새 필경사를 뽑는다고 한다. 김 사무관은 2008년부터 15년 근무하며 해마다 임명장 3500~4000장을 썼다. 한 장에 약 20~30자가 들어가는데, 한 장 쓰는 데 15~20분쯤 걸릴 정도로 정성을 들인다. 2005년 쯤 임명장 인쇄를 해봤지만 공직자들이 손 글씨 임명장을 압도적으로 선호해 되돌렸다고 한다.
▶많은 사람이 손 글씨를 써 본 게 언제인지 가물가물하다고 한다. 축의금, 부의금 봉투에 쓰는 게 고작이다. 그런데 그 짧은 몇 글자 쓸 때도 마음가짐이 달라진다. 손 글씨의 힘일 것이다. ‘필경’은 ‘붓으로 밭을 간다’는 뜻이다. 임명장을 주는 대통령과 그걸 받는 공직자는 국정의 밭을 비옥하게 일궈야 할 막중한 책무를 진 이들이다. 그 진지한 뜻을 담기엔 역시 손 글씨가 제격인 것 같다.
02.24 ‘완벽한 부모 신드롬’

▲지난 22일 충북 단양군 매포읍 매포지구대 앞에 ‘우리 아가가 태어났어요’ 축하 현수막이 내걸렸다. 길을 지나던 주민들이 현수막을 보며 기뻐하고 있다. /신현종 기자
미스터리의 통계에 놀란 적이 있다. OECD가 2019년 발간한 ‘한눈에 보는 건강(Health at a Glance)’이란 통계집에서 한국인의 기대 수명은 OECD 36국 가운데 6위였다. ‘치료할 수 있었는데 치료 못 한 사망’은 넷째로 적었고, 암 사망률도 낮았다. 건강 상태, 의료 성과가 괜찮은 편이다. 그런데도 스스로 건강이 좋다고 생각하는 비율은 29.5%로 꼴찌(OECD 평균은 68.1%)였다. 한국은 우울증 세계 1위, 자살률 세계 1위이기도 하다. 한국인은 비관적 인식을 가진 것일까.
▶한국의 출산율이 0.78명으로 세계 꼴찌라는 사실이 다시 확인됐다. 인구학자 조영태 서울대 교수는 “잘 키우고 싶은 열망이 너무 커서 오히려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역설적 상황”이라고 설명했다(‘인구 미래 공존’). 심리학 용어를 빌리면 ‘완벽한 부모 신드롬’이라는 것이다. 현재 아이 낳을 연령대는 1990년 전후 출생한 30대 전반 그룹이다. 1960년 전후에 태어난 베이비부머 부모들이 극진히 키워온 세대다.

▶지금 30대는 ‘내가 어릴 적 쏘나타나 그랜저 탔으니 내 아이도 나중에 그 정도는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자니 경제적으로 안정을 취한 후 아이를 낳겠다는 생각이 강하다. 결혼이 늦고 아이도 적게 낳으려 한다. 준비가 덜 됐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많은 한국인이 그렇듯 미래도 불안하게 본다.
▶진짜 문제는 앞으로 10년 뒤부터다. IMF를 전후 한 1996년부터 2005년 사이 한 해 출생아 수가 70만명에서 40만명 중반대까지 급강하했다. 이들이 지금 10대 후반부터 20대 중반까지 Z세대 그룹이다. 2030년대 이후엔 Z세대가 출산 주력 계층이 된다. 그러나 이 연령대는 워낙 태어난 숫자 자체가 적다. 출산율을 어지간히 끌어올리더라도 이들이 낳을 아이들 숫자는 또 한 번 추락할 수밖에 없다. 엎친 데 덮친다는 것이다. 이게 우리의 ‘정해진 미래’다.
▶베이비붐 세대가 경제 주력층일 때는 부양해야 할 노인이 많지 않았다. 일자리도 풍부했다. 올해 65세에 도달한 1958년생 개띠를 필두로 앞으로 매년 80만, 90만명의 베이비부머들이 은퇴한다. 이들을 부양해야 할 청년, 청소년 세대는 베이비부머의 2분의 1, 3분의 1 규모밖에 안된다. 청년 세대가 이 짐을 어떻게 짊어지겠나. 청년·청소년 세대의 어깨에 내려 앉는 부양(扶養) 폭탄이 ‘세대 전쟁’을 초래하게 될 날이 멀리서 다가오는 게 보인다.
한삼희 선임논설위원
02.25(토) 돌아온 ‘잔술’ 소주
몇 해 전 뉴욕에 출장 간 사람들이 주점에서 양주를 한 병 시켰는데 잠시 후 경찰이 들이닥쳤다. “술을 잔이 아닌 병으로 시키는 사람은 처음 본다”며 주점 주인이 수상하다고 신고했다 한다. 서양 주점들은 “술 한 병 내오라”고 하면 “그런 식으로 판 적이 없어 돈을 얼마 받아야 할지 모르겠다”며 당황한다. 일본 주점도 대개 잔 단위로 판다. ‘도쿠리’처럼 용기에 여러 잔 분량을 담기도 하지만 술병째 내놓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나 한국에선 ‘잔술’이 가난과 궁벽의 상징이었다. 시인 천상병은 시 ‘비 오는 날’에서 ‘아침 깨니/ 부실부실 가랑비가 내리다/ 자는 마누라 지갑을 뒤져/ 백오십원 훔쳐 아침 해장으로 간다’(후략)고 했다. 손민익 시인은 시 ‘잔술 한 잔’에서 ‘천 원짜리 한 장 놓고/ 또 잔술 한 잔 하시게/(중략)/ 가라면 못 갈/ 구비구비 힘든 세월의 흔적들을’이라고 했다.
▶경제가 곤두박질 칠 때마다 잔술을 찾는 발길이 는다. IMF 외환 위기와 글로벌 금융 위기 때 그랬다. 그런데 최근 술값이 가파르게 오르면서 다시 잔술 찾는 이가 늘었다고 한다. 서울에서 잔술 찾는 사람이 가장 많은 곳은 탑골공원 일대다. 소주 한 병에 3000원이던 몇 해 전까지 잔술은 종이컵 하나에 1000원이었다. 지난해 소주 값이 5000원으로 뛰면서 일부 음식점이 종이컵을 더 작은 스테인리스 잔으로 바꿔 잔술을 팔고 있다. 잔술도 값이 오른 것이다.
▶소주의 제조 가격은 550원~600원 정도다. 여기에 주세·교육세·부가세를 붙이고 도매상 유통 마진을 합한 것이 음식점 공급가다. 지난해 출고가가 7% 정도 올랐으니 음식점 공급가는 1400원~1600원이 된다. 그런데 음식점들은 대략 5000원을 받는다. 서울 강남의 유명 고깃집에선 소주 한 병에 9000원도 받는다. 이러니 공장 출고가는 10원 단위로 오르는데 음식점에선 1000원 단위로 오른다는 말이 나온다.
▶음식점 소주 값이 6000원으로 오를 예정이라고 한다. 에너지 가격 급등과 임대료 인상 등을 감당할 수 없다고 한다. 아무리 그래도 공급가의 4배를 받을 수 있나. 일제히 같은 값으로 올리는 것을 보면 담합 인상도 짙다. 서울의 음식 값 술값은 이미 도쿄보다 비싸다. 누가 납득하겠나. 1943년 노래 ‘빈대떡 신사’는 ‘돈 없으면 집에 가서 빈대떡이나 부쳐 먹지’라고 했다. 소주 한 병에 6000원이면, 잔술 마시거나 집에서 혼술 할 사람이 적지 않을 듯하다.
02.27(월) 학폭은 잊히지 않는다

머리에 웨이브를 넣는 고데기는 미용실에서 사용할 때 온도가 섭씨 185도쯤이다. TV 방송 출연 때 분장실에서 고데기가 잠깐 귓가에 스쳐도 흠칫 놀랄 정도로 뜨겁다. 2006년 한 중부 도시에서 여중 3학년생이 고데기로 학교 폭력을 당했다고 언론에 알려졌다. 가해 학생은 고데기로 맨살을 지지고 아물 때쯤에 다시 찾아와 상처를 뜯어내기까지 했다고 한다. 사진이 너무 참혹해서 눈을 돌렸다.
▶최근 시리즈물 ‘더 글로리’에도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방과 후 텅 빈 강당에서 또래 서너명이 모여 한 아이를 꼼짝 못 하게 붙잡은 다음 고데기로 팔다리를 지졌다. 나중에는 다리미까지 등장했는데, 오로지 “말을 잘 듣지 않는다”는 이유 같잖은 이유였다. 옛 사극에서 간혹 봤던 인두 고문과 낙형 장면을 흉내 냈을까. 사춘기 아이들이 벌이는 짓이라 더 잔혹했다. 딸 가진 부모들은 몸이 떨릴 만큼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드라마에선 피해 학생이 훗날 성인이 된 ‘가해 친구들’을 찾아가 복수를 한다. “어떤 증오는 그리움을 닮아서 멈출 수가 없거든.” “우리 같이 천천히 말라 죽어보자.…” 그러나 현실에서는 사회 구성원이 대신 나서서 학폭 가해자를 집단 징벌한다. 학폭 때문에 모습을 감췄던 어떤 배우는 화보를 찍고 복귀하려다 드라마가 화제가 되자 다시 사라졌다. 아이돌 가수, 스포츠 스타, 유명 유튜버 할 것 없다. 학폭 과거가 드러나면 갑자기 모든 것을 잃으며 ‘사회적 매장’에 가까운 후과(後果)를 치른다.
▶부모도 예외가 아니다. 국가수사본부장에 임명됐던 변호사가 하루만에 낙마했다. 처음엔 ‘검사 출신’이어서 논란이었으나 주말에 아들의 학폭 전력이 터졌다. 몇 년 전 동급생에게 1년간 폭력을 가했고, 강제 전학 처분을 받았는데, 아비가 이의 신청을 하며 소송을 냈다가 패했다. 아들은 서울대에 들어갔다. 젊은 세대의 분노가 인터넷을 달궜다. ‘아빠 찬스 소송’ ‘명문대 입학’을 더 용납 못 했다. ‘젊은이 역린’을 건드린 셈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절대 잊을 수 없는 게 있다. 영혼까지 부서뜨리는 폭행이다. 해마다 3만명 가까운 피해 학생 중 18%는 어디 하소연도 못 한다는데, 가해 학생은 ‘장난 삼아’ ‘아무 이유 없이’ ‘스트레스 풀려고’ ‘강해 보이려고’ 그 짓을 저지른다. 피해 학생의 25%는 자살을 생각했다고 한다. 학폭은 사전 예방과 사후 징벌 조치도 중요하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대가를 치르고 만다’는 경각심도 꼭 심어줬으면 한다.
02.28(화) 이순신 영정 논란
조선은 ‘초상화의 나라’였다. 제사 때문인 듯하다. 지위가 높을수록 제사를 위해 자신이나 부모의 초상화를 그려 보관했다. 조선왕조실록은 “부모의 초상화를 그릴 땐 털오라기 하나라도 닮아야 한다”고 했다. 실물을 미화한 중국이나 유럽과 달리 조선 초상화는 신분 고하와 상관없이 보이는 대로 그렸다. 극사실주의에 가깝다고 한다. 걸작이라는 심환지 초상화, 윤두서 자화상이 전형이다. 노인 반점, 곰보 자국까지 생생한 초상화도 있다.
▶왕을 그린 ‘어진(御眞)’은 조선 초상화의 최고봉이다. 당대 최고 화가들이 전력을 다해 그렸다. 조선은 역대 모든 왕의 어진을 그려 보관했다. 온전했다면 최고 국보가 됐을 것이다. 불행히도 6·25전쟁 직후 부산 임시 보관소에 불이 나 거의 다 타버렸다. 영조 어진과 반쪽이 사라진 철종 어진, 전주 경기전에 별도 보관돼 있던 태조 어진만 겨우 전한다. 이 어진의 세밀한 묘사를 보면 왕 초상화도 사실주의에서 예외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한국의 화폐엔 5명이 그려져 있다. 모두 조선시대 인물인데도 실물 초상화가 전해지지 않는다. 그래서 가상으로 그린 정부 공인 ‘표준 영정’을 사용한다. 위대한 측면을 부각하는 그림이기에 이상형 같은 모습들이다. 조선의 사실주의 초상화와 달리 이 영정들은 다 비슷비슷한 얼굴이다.
▶100원 동전의 이순신 영정은 원래 논란이 많았다. 불패의 무장인데 영정 모습은 선비에 가깝기 때문이다. 유성룡은 이순신에 대해 “단아하고 수양하는 선비와 같았다”고 했다. 반면 “후덕하지 않고 입술이 치올라서 복장(福將)이 아니다”라는 기록도 있다. 유성룡의 기록이 오히려 상투적이라는 연구자도 있다. 혹평에 따라 위인을 그릴 수는 없지만 사실과 거리가 있다는 비판이 있다. 그래도 많은 국민에게 이 영정은 이순신의 본모습처럼 각인돼 있다. 오래 걸려 형성된 이미지라면 그것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영정을 그린 동양화가 월전(月田) 장우성의 후손이 이순신 영정 반환과 저작권료를 요구하는 소송을 몇 년 전 냈다고 한다. 문재인 정권이 월전이 친일 화가라며 화폐 교체를 추진하자 “아버지가 매도되는 걸 두고 볼 수 없다”며 반발한 것이다. 5000원권과 1만원권, 5만원권에도 같은 논란이 있다. 이들을 교체하려면 4000억원 이상 든다고 한다. 화폐 속 위인의 적합성이나 영정의 사실성을 문제 삼는 것도 아니다. 위인을 그린 화가의 100년 전 행적을 들춰내 화폐 대부분을 바꾸겠다는 나라가 또 있을까. 문재인 시대 한국밖에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