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여담(문화일보) 2023-01/ 01-02(월) 김민선 ‘자신감 있게’ - 01-31(화) 北 ‘중전’과 ‘실세 공주’ 암투
오후여담(문화일보) 2023-01/
01-02(월) 김민선 ‘자신감 있게’

김종호 논설고문
한자(漢字) 문화권에 전해오는 12지(支) 중의 ‘묘(卯)’가 나타내는 동물은 토끼다. 예로부터 토끼는 온순하고 영리하다고 여겨져 왔다. 새끼를 한꺼번에 여러 마리 낳아, 번창·풍요 등을 상징하기도 한다. 연적(硯滴)·벼루·화로 등을 토끼 형상으로도 만든 이유다. 1939년, 1951년, 1963년, 1987년, 1999년, 2011년 등이 토끼의 해다. 그해 태어난 사람은 토끼띠다. 10간(干) 중의 ‘계(癸)’는 흑색이다. 흑은 지혜의 색이다. 계묘년인 2023년은 ‘검은 토끼의 해’다. 대표적인 토끼띠 스포츠 선수 중의 한 사람은 여자 스피드스케이팅의 김민선(24)이다.
‘빙속(氷速)’으로도 불리는 스피드스케이팅은 1000분의 1초까지 다툰다. ‘눈 깜짝할 사이’보다 더 짧은 순간의 차이로 승부가 갈린다. 김민선은 지난해 12월 17일 캐나다 캘거리에서 열린 2022∼2023 국제빙상경기연맹(ISU) 스피드스케이팅 월드컵 4차 대회 여자 500m에서 36초96으로 우승했다. 지난해 11월 12일 노르웨이 스타방에르에서 있었던 1차 대회부터 월드컵 연속 4회 우승이다. 그의 1차 대회 금메달은 2015∼2016 월드컵 4차 대회의 이상화 이후 한국 선수로는 7년 만이었다. 1차 대회 여자 1000m에서도 그는 한국 선수 최초의 은메달을 땄다. 여자 500m에서 월드컵 10회 연속 우승하고, 2010년 캐나다 밴쿠버동계올림픽과 2014년 러시아 소치동계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빙속 여제(女帝)’ 이상화도 월드컵 1000m에선 동메달 2개에 그쳤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스피드스케이팅을 시작한 김민선은 서문여고 재학 중에 세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의 2017년 500m 종목 주니어세계기록 37초70은 이상화가 보유하던 기록 37초81보다 0.11초나 빨랐다. 그는 은퇴한 이상화를 잇는 ‘신(新) 빙속 여제’로 불린다. “상상한 대로 경기를 펼치는 것이 목표”라는 그의 좌우명은 ‘자신감 있게’다. 오는 2월 폴란드 토마슈프마조비에츠키에서 열릴 2022∼2023 월드컵 5차·6차 대회는 물론, 2026년 동계올림픽 등에서도 자신감 넘치는 활약으로 금메달을 따기를 기대한다. 이상화가 2013년 11월 16일 미국 솔트레이크시티 월드컵 2차 대회에서 세운 여자 500m 세계기록 36초36도 조만간 넘어서고.
01-03 김정은의 2023 탁상공론

이도운 논설위원
북한이 새해 벽두부터 주변국에 대한 핵(核) 위협에 몰두하고 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지난 연말 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 보고에서 한국을 “의심할 바 없는 명백한 적”으로 규정하면서 “핵탄두 생산량을 기하급수적으로 늘리겠다”고 선언했다. 또, 지난달 31일과 지난 1일 연이틀 초대형 방사포를 발사한 뒤 “남조선 전역을 사정권에 두고 전술핵 탑재까지 가능하다”고 했다. 앞서 북한은 지난해 10월 4일 일본 열도 상공을 넘어가는 중거리미사일을 발사했다.
북한 정책 결정자들은 미국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들이기 위해 한국과 일본을 ‘핵 인질’로 잡는 전략을 세운 것 같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과 달리 조 바이든 정부는 북한과 협상할 뜻이 없어 보인다. 북한과의 협상에 열려 있다고 말하지만, 버락 오바마 대통령 시절의 ‘전략적 인내’, 실제로는 ‘방치’를 계속한다. 어차피 미국의 상대는 중국인데, 북한이 계속 말썽을 부리는 것이 중국을 압박하는 카드 가운데 하나로 나쁠 게 없다고 보는 것이다.
또, 북한이 아무리 우겨도 미 본토를 공격할 수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의 대기권 재진입 및 위성 통신 체계 등을 완성하지 못했다고 판단한다.
이를 알아챈 북한은 “그렇다면 한국, 일본이 핵 공격을 받으면 어떡할 거냐”고 미국에 패를 던진 것이다. 동맹국을 보호하려면 바이든 정부가 경제 제재 등 협상에 나서라는 뜻. 그러나 북한의 카드는 탁상공론에 지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무엇보다 한국과 일본은 북한에 인질로 잡힐 까닭이 없다.
경제·안보 모두 세계적 강국인 두 나라가 최악의 경제파탄국·인권탄압국의 인질이 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북은 전쟁을 수행할 경제적 능력이 거의 없다. 한·미·일 3국은 핵전력 공동 운용을 비롯한 다양한 대응책도 준비 중이다. 물론 북한이 실제로 한·일을 향해 미사일을 발사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미사일이 두 나라에 닿기 전에 북의 도발 원점은 초토화된다.
한국 국방부는 1일 “북한이 만일 핵 사용을 기도한다면 김정은 정권은 종말에 처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올해 북한의 전략적 선택은 무모한 도발이 아니라 윤석열 정부의 ‘담대한 구상’에 못 이기는 척 호응하는 것이 돼야 한다.
01-04 이재명의 교토삼굴

이현종 논설위원
제(齊)나라 재상인 맹상군에겐 식객이 3000여 명이나 됐다. 맹상군은 설(薛)이라는 지역에 1만 호의 식읍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에게 돈놀이하던 맹상군은 식객으로 있는 풍환(馮驩)이라는 사람에게 이 지역으로 가서 빚을 받아 올 것을 부탁했다. 풍환은 “빚을 받고 나면 무엇을 사올까요”라고 물었다. 이에 맹상군은 “무엇이든 좋소. 여기에 부족한 것을 부탁하오”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설로 내려간 풍환은 빚을 진 사람들을 모두 불러 모았다. 빚 문서를 들고나온 사람들이 잔뜩 주눅이 들어 서로의 눈치만 살피고 있는 모습을 본 풍환은 그들이 보는 앞에서 빚 문서를 불태워 버렸다. 풍환은 “맹상군께서 백성의 어려운 생활을 아시고 빚을 모두 없애 주겠다고 하셨습니다”라고 했다. 돌아온 풍환은 맹상군에게 “차용증서를 불살라 당신을 위해 돈 주고 사기 힘든 은혜와 의리를 사 가지고 왔습니다”라고 했다. 풍환이 되레 빚을 탕감해 주고 오자 맹상군은 화가 났지만 어쩔 수 없었다.
1년 후 맹상군은 새로 즉위한 민왕의 미움을 사 재상에서 물러나고 가세도 기울었다. 풍환의 권유로 설에 내려간 맹상군은 빚을 탕감받은 주민들의 큰 환대를 받았고, 이후 다시 재상에 올라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이때 풍환은 맹상군에게 “교활한 토끼는 구멍을 3개나 뚫지요(狡兎三窟)”라고 했다고 한다. 사기의 ‘맹상군열전’에 나오는 얘기로, 불안한 미래를 위해 미리 준비해야 한다는 말이다.
새해 첫날 서울 여의도 더불어민주당사에서 열린 신년인사회에서 당 상임고문인 문희상 전 국회의장은 이재명 대표가 옆에 있는 자리에서 “토끼는 민첩하고 영민한 동물이다. 굴을 3개 판다고 해서 교토삼굴이라는 말도 있다”고 운을 띄웠다. 그러면서 “우리도 영민한 토끼를 닮아서 플랜2, 플랜3 이렇게 대안을 많이 마련하는 해가 되길 바란다”고 했다.
이 대표의 사법 리스크에 대비해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얘기로 들릴 수 있다. 이미 이원욱 의원은 이 대표의 탈당을 거론한 바 있고, 친노·친문계에서는 대안 마련에 착수했다는 얘기도 들린다. 이 대표는 일부 측근 의원들과 사석에서 “기소될 것 같다”고 얘기했다고 한다. ‘방탄’ 이외에 토끼 굴이 없는 이 대표에게 계묘년은 힘든 한 해가 될 것 같다.
01-05 2023 ‘복합경쟁’ 시대

박민 논설위원
국내외 연구소와 석학들의 2023년 전망은 예상대로 부정적이다. 고 아산(峨山) 정주영 명예회장을 기념해 설립된 아산정책연구원은 2023년 주제어로 ‘복합경쟁(Complex Competition)’을 꼽았다. 2022년 국제 정세는 주요국 군사적 충돌 가능성의 증대, 주요국 간 전략경쟁 영역의 확장과 심화, ‘민주주의 대 권위주의’ 세력 대립 강화와 연대세력 확보 노력 등으로 요약되는데 2023년에는 이런 복합경쟁의 특성이 더 뚜렷해진다는 것. 이에 따라 △분쟁의 중심지로 떠오를 인도·태평양 △흔들릴 국제 비확산체제 △재래·핵 군비와 군사기술 경쟁 가속화 △중근동에 대한 중국·러시아의 틈새 공략 △선택의 딜레마가 가중된 한국 등 중견국 △늘어나는 경제 리스크와 격화되는 기술 경쟁 △새로운 격전지로 떠오를 인권 등 7가지 특징을 보일 것으로 전망했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을 예측한 영국 시사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The World Ahead’를 통해 2023년에는 예측 불가능성이 ‘뉴 노멀(새로운 표준)’이 된다고 밝혔다. 미·중 강대국 경쟁의 변화, 팬데믹 후유증, 전쟁으로 인한 불안, 경제적 격변과 침체, 극단적인 기후와 날씨 등으로 불안정성이 더욱 심화한다는 것이다. 영국의 콜린스 영어 사전이 2022년의 단어로 ‘퍼머크라이시스(permacrisis·영구적 위기)’란 합성어를 꼽은 것과 같은 맥락이다.
논문 ‘역사의 종말’로 유명한 프랜시스 후쿠야마 스탠퍼드대 교수는 문화일보가 진행한 같은 대학 신기욱 교수와의 대담에서 “2022년은 민주주의에서 권위주의로 향하던 국제정치의 흐름이 바닥을 친 해”라며 “우크라이나 전쟁은 권위주의 지도자가 저지른 최대 전략적 실수”라고 진단했다. 그는 미·중 충돌과 관련, “모든 관련 국가가 중국 침공 저지 계획을 세워야 한다”며 “한국은 동참해야 하며 중국을 밀어내는 동맹의 일부가 되는 방법을 고려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소프트 파워’ 개념 창시자인 조지프 나이 하버드대 교수는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올해 70주년을 맞는 한미동맹을 ‘운명공동체’로 규정하면서 “확장억제력과 관련, 핵 공유나 전술핵 재배치가 미국의 재래식 전력만큼 신뢰할 수 있는지 자문해봐야 한다”며 “재래식 전력이 훨씬 중요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01-06(금) 멕시코 언론의 비극

이미숙 논설위원
캐나다에서 미국으로 이어지는 북아메리카 대륙 남단에 위치한 멕시코는 전쟁 등으로 캘리포니아와 텍사스 등을 빼앗긴 탓에 미국과 국경을 접한 게 부담이었던 때도 있었지만, 요즘엔 미국 인접국 혜택을 톡톡히 누리는 나라다.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후 경제 규모가 나날이 커져 2022년 국제통화기금(IMF) 기준 명목 국내총생산(GDP)은 1조4000억 달러로 세계 15위다. 13위 한국(1조7000억 달러)보다 두 단계 낮지만, 과거 식민 모국이었던 스페인(1조3800억 달러)보다 한 단계 위로 국력도 역전됐다.
멕시코는 1994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했고,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 만들어진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회원국이다. 일찌감치 OECD에 가입한 덕분에 전문직 분야에 여성의 진출이 눈부시다. 2020년 세계경제포럼의 젠더 격차 지수에서 멕시코는 25위다. 108위인 한국에 비해 성평등 선진국이라 할 만하다. 지난 2일 멕시코 사상 처음으로 여성 대법원장이 탄생한 것도 이런 기류 덕분이다. 그러나 멕시코는 기자들이 생명을 걸고 취재를 해야 한다는 점에서 ‘언론 후진국’이다. 국제기자연맹(IFJ)에 따르면, 지난해 취재 중 사망한 언론인은 67명이다. 1위는 우크라이나로 12명, 2위는 멕시코로 11명이 사망했다. 우크라이나는 전쟁 중이라서 그렇다 해도 멕시코에서 매월 한 명꼴로 언론인이 살해됐다는 사실은 충격적이다.
AP 중앙아메리카 지국장 출신 캐서린 코코란은 ‘늑대의 입속에서:살해, 은폐, 그리고 침묵의 진짜 대가(In the mouth of the wolf: a murder, cover-up and the true cost of silencing)’에서 ‘멕시코는 기자들에게 가장 위험한 나라 중의 하나’라고 했다. 마약 거래 갱단에 무력한 정치권 탓에 살인·납치가 일상화했기 때문이다. 갱단 비리를 파헤치다 희생된 멕시코 기자 레지나 마르티네스의 삶을 추적한 저자는 ‘멕시코에선 목숨을 지키기 위해 갱단 주문에 따라 기사를 쓰는 경우가 많다’면서 ‘기자들이 진실 보도에 두려움을 느끼는 사회는 지적으로, 도덕적으로 붕괴된다’고 경고했다. ‘언론이 갱단에 협박받는 멕시코는 트럼프류의 포퓰리스트들이 언론을 매도하는 미국 등 민주주의 국가들의 암울한 미래상일 수 있다’는 저자의 결론은 섬뜩하다.
01-09(월) ‘사의재’ 욕보이기

이현종 논설위원
전남 강진에 유배된 다산 정약용(1762∼1836)은 두 아들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조선은 중국에 비해 문명이 뒤떨어져 한양에서 몇십 리만 멀어져도 원시사회”라며 “어떻게든 한양 근처에 살면서 문화의 안목을 잃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또, “만약 한양 한복판으로 깊이 들어갈 수 없다면 잠시 근교에 살면서 과일과 채소를 심어 생활을 유지하다가 재산을 불린 후에 들어가도 늦지 않다”고 구체적인 방법까지 제시했다. 그러나 정약용은 귀향에서 풀려 올라온 뒤에 현재 남양주시에서 살았지만 끝내 ‘in 한양(in 서울)’에 실패했다.
문재인 정부에서 부동산정책을 설계했던 핵심 인사들이 모여 문 전 대통령의 정책을 연구하는 포럼을 만든다고 한다. 윤석열 정부가 전 정부에서 추진한 정책을 뒤집자 이를 발전시키고 계승하겠다는 취지로 모임을 만든다고 한다. 장·차관은 물론 청와대 행정 요원까지 참여할 수 있도록 했는데 정책 연구보다는 최근 감사원에서 진행하고 있는 부동산·소득 통계 조작 의혹에 공동 대처하고 내년 4월 총선 출마 등도 고려하고 있는 듯하다.
이 모임은 명칭을 ‘사의재(四宜齋)’라고 하기로 했다. 사의재는 조선 시대 정조를 모시다 유배된 다산이 전남 강진에 4년 동안 머물던 주막집에 붙인 이름이다. 사의재는 네 가지를 마땅히 해야 한다는 방이며 용모, 말씨, 성품, 행동을 가리킨다. 친문들은 문 전 대통령을 개혁 군주인 정조에 비유하곤 하는데 자신들은 신하인 다산에 이입하고 싶은 모양이다.
그런데 포럼에 참여하는 김상조 전 청와대 정책실장은 낡은 가방을 항상 가지고 다니며 청렴한 척했지만, 2020년 세입자 보호 명분으로 만들어진 임대차 3법 시행 직전 세입자로부터 전셋값을 14% 올려 받은 사실이 밝혀져 경질됐다. 김수현 전 청와대 정책실장은 보유한 과천 주공6단지 아파트가 분양가상한제에서 빠지면서 특혜 논란이 일었다. 부동산 가격 폭등과 전세난으로 시민들의 꿈을 뺏고 자신들은 이득을 챙긴 인물들이 다산을 닮겠다고 포럼 이름을 사의재라고 했다는 것은 모순이다. 주 52시간제, 탈원전정책, 법인세 최고세율 인상 등으로 국민이 고통받았다. 모임을 만들기에 앞서 반성하는 것이 순서가 아닐까.
01-10 시금치와 통계 조작

이철호 논설고문
시금치가 ‘철분의 왕’이라는 이야기는 과학 역사상 가장 터무니없는 오류로 꼽힌다. 시작은 사소한 실수였다. 1870년 독일의 화학자 에리히 폰 볼프가 논문을 쓰다 깜빡하고 소수점을 빼먹었다. 시금치 100g의 철분 함유량이 3.5㎎에서 35㎎으로 둔갑했다. 20년 뒤 스위스 생리학자 구스타프 폰 분게가 기름을 부었다. 생시금치가 아니라 말린 시금치로 분석 실험을 한 것이다. 시금치 수분은 90%가 넘는다. 다시 한번 철분 함유량이 10배 뻥튀기됐다.
통계는 마법을 부리기 일쑤다. 한 학교가 20명의 학생을 성적 50∼60점은 A반, 90∼100점은 B반으로 절반씩 나눴다고 치자. 교장이 B반의 90점 학생을 슬쩍 A반으로 옮기면 통계 착시 현상이 나타난다. “우리 학교는 A반도, B반도 평균 성적이 크게 올랐다”고 우길 수 있다. ‘윌 로저스 현상’이라는 교묘한 통계 조작법이다.
문재인 정부의 통계 조작이 말썽이다. 소득주도성장과 부동산 가격 등 핵심 수치들을 고의적으로 마사지했다는 것이다. 감사원은 “좋은 통계로 보답하겠다”던 강신욱 전 통계청장, 4차례의 아파트값 급등 시점마다 이례적으로 낮은 수치를 입력한 부동산원을 표적으로 삼고 있다.
한번 각인된 ‘시금치=완전식품’ 기억은 좀체 수정되지 않았다. 만화영화 뽀빠이가 시금치 신공을 뽐냈고, 아이에게 채소를 먹이려는 부모들은 순종적 맹신에 사로잡혔다. 철분 함량만 따지면 브로콜리가 더 많다. 그런데도 시금치는 뉴욕타임스 선정 ‘10대 슈퍼 푸드’에 올랐다. 해피엔딩이다. 칼슘, 비타민A 등을 골고루 함유한 덕분이다.
“통계로 거짓말하기는 쉬워도, 통계 없이 진실을 말하기는 어렵다.” 스웨덴 수학자인 안드레예스 둔켈스의 명언이다. 문재인 정부의 통계 조작 희생양들이 사방에 널려 있다. “정부 믿었다가 벼락거지” “고금리로 영끌거지”라는 비명이 가득하다.
상황이 심각하게 돌아가자 친문 고민정 의원이 물타기에 나섰다. 감사원을 공수처에 고발하면서 “정치보복과 충성심을 비뚤어지게 발현하는 막가파 기관”이라 뒤집어씌웠다. 그러나 2년 전 기억은 잊은 모양이다. 문 대통령은 최재해 감사원장을 임명하면서 “균형감 있는 식견과 탁월한 업무 역량”이라 치켜세웠다.
01-11 제3자뇌물죄 흑역사

김세동 논설위원
10일 더불어민주당 지도부와 의원, 지지자들을 대거 대동하고 검찰에 나가 조사받은 이재명 대표의 성남FC 관련 혐의의 죄목은 ‘제3자 뇌물죄’이다. 성남시장이던 2014년 성남FC 구단주로서 부족한 운영자금 마련을 위해 성남시에 부지 용도 변경, 건축 인허가 등 ‘민원’이 있는 관내 기업을 찾아 6개 기업에 후원금 약 182억 원을 내게 하고 큰 특혜를 줬다는 혐의다.
형법 제130조(제삼자뇌물제공)는 ‘공무원 또는 중재인이 그 직무에 관하여 부정한 청탁을 받고 제3자에게 뇌물을 공여하게 하거나 공여를 요구 또는 약속한 때에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년 이하의 자격정지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뇌물 가액이 1억 원을 넘으면 특정범죄가중처벌법이 적용돼 ‘무기 또는 10년 이상의 징역’으로 가중 처벌되고, 뇌물액의 2∼5배의 벌금을 병과(倂科) 받게 된다. 유죄가 되면 이 대표는 이미 기소돼 재판이 진행 중인 2건의 선거법 위반 사건이나 대장동·백현동 사건 향방과 관계없이 정치생명이 끝남은 물론 재산상의 피해도 막심해진다.
이 대표는 “한 푼도 개인적으로 받은 게 없다”고 변호하지만,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건 등 과거 판례에 비춰보면 무죄가 되기 쉽지 않아 보인다. 박 전 대통령은 롯데그룹 면세점 사업 선정을 대가로 K스포츠재단에 70억 원을 지원하도록 했다가 제3자뇌물수수 혐의가 유죄로 인정됐다. 본인이 한 푼도 받지 않았다는 게 제3자뇌물죄 불성립의 조건이 아니라는 말이다. 대법원은 2006년 이남기 전 공정거래위원장이 SK텔레콤의 기업결합 심사에 대한 선처를 부탁받고 모 사찰에 10억 원의 시주를 하도록 한 사건에서 3자뇌물수수 유죄를 확정한 바 있다.
문제는 대가성 여부인데, 두산건설은 후원 방안 검토를 밝히며 성남시에 부지 변경을 요청하는 공문을 제출했고, 실제 50억 원의 후원금을 냈으며, 병원 부지가 상업용지로 변경되고 용적률도 250%에서 670%로 대폭 상향됐기 때문에 딱 떨어지는 제3자뇌물죄라는 판단이 많다. 이 대표가 지난해 8월 자신의 SNS에 ‘용도 변경 조건으로 광고비를 받았다고 가정해도 성남시민의 이익이 되니 이론적으로 뇌물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 게 외려 대가성을 자인한 자충수가 될 수도 있다.
01-12 문신 ‘우주를 향하여’

김종호 논설고문
서울 송파구 올림픽조각공원에는 은색 스테인리스 반구(半球)들이 두 줄로 나란히 하늘로 높이 치솟은 형상의 조각이 있다. 한국 조각가 1세대인 문신(1922∼1995) 작품 ‘올림픽 1988’이다. “나는 노예처럼 작업하고, 서민과 같이 생활하고, 신처럼 창조한다”는 말도 남긴 그는 세계적인 조각 거장(巨匠)이다. 일본 규슈 지방의 탄광 노동자이던 한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다섯 살 때 아버지 고향인 경남 마산으로 귀국했었으나, 2년 뒤에 부모가 다시 일본으로 가는 바람에 할머니의 보살핌을 받으며 컸다. 극장 간판을 그려주고 돈을 벌던 그는 밀항선을 타고 일본에 가서 온갖 허드렛일을 다하며 일본미술학교 서양화과를 다녔다. 조국이 해방되면서 귀국한 그가 1948년 서울에서 가진 첫 개인전을 두고, 평론가 김용준은 ‘조선의 대(大)작가 탄생을 예감한다’고도 표현했다.
1961년 프랑스 파리로 회화 유학을 간 그는 사기를 당해 50달러밖에 없는 상황에서, 고성(古城) 보수·복원 공사장 석공으로 3년간 일했다. 그 과정에 자신의 꿈틀거리는 조각가 기질을 발견하고 진로를 조각으로 바꿨다. 1964년 귀국했다가 다시 파리로 갔던 그가 1980년 영구 귀국하기까지 발표한 작품들에 대해, 현지 평론가 자크 도파뉴는 이렇게 극찬했다. “좌우 대칭의 유선형에 리듬이 흐른다. ‘이것은 레오나르도 다빈치다, 오귀스트 로댕이다, 백남준이다’ 하듯이 ‘이것은 문신이다’ 하게 된다. 독창성이 두드러지면서 상상력도 불러일으킨다. 개미허리 같기도 하고, 여인의 가슴 같기도 하고, 나비를 떠올릴 수도 있다. 그는 특정 형태를 만든 게 아니지만, 보는 사람에게 구체적 이름을 찾아내게 한다.” 그가 1992년 영국의 헨리 무어, 미국의 알렉산더 콜더 등과 함께 세계 3대 조각가로 선정돼 파리 초대전을 가지기에 이른 배경이다.
그의 조각·회화·도자 등 230여 점을 선보인 문신 탄생 100주년 기념전 ‘우주를 향하여’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지난해 9월 1일 개막해, 오는 29일 끝난다. “인간은 현실에 살며, 보이지 않는 미래에 대한 꿈을 그리고 있다”던 그가 생명의 근원과 미지의 세계인 우주를 탐구한 이유도 알게 해준다. 예술적 감동 속에 철학적 사유도 하게 하고.
01-13(금) 평양 상공의 한·미 드론

이도운 논설위원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전쟁의 승패는 하늘에서 결정됐다. 당시 기관총을 매달고 전장 위를 날던 복엽기는 이제 F-35·F-22 등 최첨단 전자 장비를 탑재한 5세대 스텔스 전투기로 발전했다. 한편에서는 조종사가 탑승하지 않는 무인기, 드론의 개발도 진행됐다. 미국은 1960년 베트남전에서 정찰 무인기를 띄우기 시작한 뒤 글로벌 호크(RQ-4) 같은 첨단 기종 개발에 이르렀다. 1999년 실전 배치를 시작한 글로벌 호크는 20㎞ 상공에서 38∼42시간 체공하면서 고성능 레이더와 적외선 탐지 장비 등을 통해 3000㎞ 떨어진 30㎝ 크기 목표물을 탐지할 수 있다.
한국 정부는 북 핵·미사일 정찰을 위해 글로벌 호크 구매를 원했지만, 미국은 한동안 팔지 않았다. 이명박 정부에서 독자 개발이 여의치 않자, 주한미군에 드론 배치를 요청했다. 거듭된 요청으로 2011년 글로벌 호크 구매가 결정됐고, 8년 뒤인 2019년 3대가 한국에 도착했다.
미국의 공격용 드론 활용은 1999년 코소보 전쟁에서 시작됐다. 의회 승인을 얻어 이라크·아프간 전쟁에서도 미사일을 탑재한 프레데터가 작전에 투입됐다. 2001년 9·11 이후에는 대테러 작전에서 본격 활용됐다. 오사마 빈 라덴 사살 작전이 대표적이다. 2020년에는 드론 리퍼(MQ-9)가 심야에 이라크 바그다드 인근을 차량으로 이동하던 이란 혁명수비대 가셈 솔레이마니 사령관을 정밀 타격했다. 현지가 아닌 펜타곤 작전통제실 모니터에서 워게임 하듯이 작전이 수행됐다. 바로 그 리퍼가 군산 기지에 배치돼 언제든지 평양으로 출격할 태세를 갖추고 있다. 물론 드론은 미국 전유물이 아니다. 중국은 리퍼에 대응하는 차이훙을 실전 배치 및 수출하고 있고, 유럽연합도 뉴런·바라쿠다 등을 컨소시엄 형태로 개발 중이다. 그러나 아직 미국 기술력에는 못 미친다.
지난달 26일 우리 영공을 침범한 북한 무인기가 여야 갈등을 일으키는 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군사적 측면에서는 전화위복이 됐다. 윤석열 정부가 북한의 구식 무인기에 대응하는 레이더 탐지 및 요격 시스템을 정비하는 한편, 최첨단 드론 개발을 본격화했기 때문이다. 한·미 연합군의 최첨단 드론이 평양 상공을 헤집고 다니게 될까봐 북한의 권력자들은 마음 편하게 잠들기 어려울 것이다.
01-16(월) 장수국가의 개혁

문희수 논설위원
조선 시대 왕들의 수명은 평균 46.1세(만 나이 기준)라고 한다. 태조 이성계부터 마지막 순종까지 27명의 수명을 분석한 결과다. 의식주 모두 취약했던 평민들의 수명이 평균 35세였고, 특히 유년기 사망자를 제외하면 양반의 경우 수명이 약 55세였던 것에 비하면 단명에 가깝다. 왕들이 질병과 스트레스에 시달린 탓이라고 한다. 그래도 고려 시대 왕 34명의 수명이 평균 41.4세였던 것보다는 수명이 늘었다.
서양도 사정이 비슷하다. 독일제국 시절 ‘철혈재상’으로 불렸던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최초의 공적연금인 노동자연금을 도입했던 게 조선 시대 후기인 1889년인데, 당시 독일인의 평균 수명은 불과 40대 초반이었다고 한다. 이 연금의 지급 개시 연령이 65세 이후로 돼 있었으니, ‘빛 좋은 개살구’였을 뿐이다.
지금 한국은 세계적인 장수국가다. 통계청의 생명표에 따르면 한국의 기대 수명(평균 수명)은 2020년 기준 여성 86.5세, 남성 80.5세로 평균 83.5세다. 2019년(83.3세)보다 늘었다. 대표적인 장수국가인 일본·스위스·아이슬란드 등과 비슷하다. 1970년 62.3세에서 50년 만에 21년이나 늘었으니 엄청난 도약이다. 2010년(80.2세) 이후 장수국가 대열에 올랐다는 평가다. 영국 옥스퍼드대는 코로나 탓에 지난해 27개국의 평균 수명이 단축됐다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미국은 남성·여성 모두 1.5년 이상 줄었다. 수명 증가는 풍요로워진 생활, 의학 등 과학기술 발전의 결과임을 거듭 확인하게 된다.
전 세계가 저출산·고령화를 고민하지만, 장수 자체는 재앙이 아닌 축복이다. ‘장수가 리스크’라는 말은 그만큼 개개인의 대비와 사회 시스템이 미비한 때문이다. 건강하고 풍족한 노년을 준비하는 것이 과제다. 고령층 인구가 감소한다고 해서 당면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노인국가가 문제인 것은 신생아 출산이 줄어 인구 분포가 점점 역(逆)피라미드형이 돼 가고, 미래 주역인 청년들이 활력을 잃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청년들에게 충분한 일자리가 있어야 하는 것이 최우선이다. 국민연금·건강보험 등이 지속 가능하도록 시스템을 개혁하고 청년 일자리와 함께 일할 능력이 있는 고령층도 일할 수 있게 하는 노동개혁이 시급한 이유다. 모두 건강하고 활기찬 삶이 돼야 한다.
01-17 중국의 ‘굴레와 고삐’ 책략

이철호 논설고문
‘열하일기’의 하이라이트는 조선 사신단이 청나라 건륭제를 알현하는 대목이다. 칠순의 건륭제는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그대들의 나라는 부처를 공경하는가? 사찰은 몇 곳이나 되는가?” 정사 박명원은 “우리는 본래 불교를 숭상하지 않고 사찰은 서울과 지방에 더러 있다”고 했다. 건륭제는 “곧장 (티베트 불교의 수장인) 판첸라마를 만나 인사를 올리라”고 했다.
사신단은 고민에 빠졌다. 귀국하면 경을 칠 노릇이었다. 연암 박지원은 ‘천자를 공경하는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 예법을 어찌 티베트 승려에게 하란 말이냐며 사신단이 그냥 털썩 앉아버렸다’고 썼다. 하지만 청의 공식 문건과 판첸라마 일대기에는 전혀 다르다. ‘조선 사신단이 배례를 올렸고 판첸라마는 불상을 하사했다’고 기록돼 있다. 실제 이 불상 때문에 성균관 유생들은 ‘사악하고 더러운 물건’이라며 학업을 중단하고 집단행동에 나섰다.
건륭제의 질문에는 주변국 외교전술인 ‘기미(羈미)책략’이 깔려 있다. ‘굴레 기 고삐 미’ 음훈 그대로 굴레를 채우고 고삐를 잡아당겨 교묘하게 지배하는 술수다. 만주족이 믿던 티베트 불교를 높이면서 성리학 조선에 굴욕을 강요한 것이다.
지난주 중국이 한국의 코로나 방역을 때렸다. 웨이보에는 ‘중국인에게 노란 카드를 강제 착용시켜 범죄자 취급을 했다’는 게시물이 누적 조회수 5억 회를 넘었고, 격리 호텔에 침대도 없고 식사도 허접하다는 가짜뉴스가 넘쳐났다. 한국·일본엔 단기 비자를 끊고 거꾸로 미국에는 항공편을 늘리라고 러브콜을 보낸다. 당(唐)·청(淸)시대 기미책략의 판박이다. 돌아보면, 당 태종은 자신이 형·동생을 죽이고 아버지를 감옥에 가두고는 연개소문의 쿠데타를 핑계 삼아 고구려를 침공했다. 같은 시기 토번 제국으로 급성장한 티베트에는 딸 문성 공주를 시집 보내 화평을 애걸했다. 기미책략의 두 얼굴이다.
한국은 대통령이 혼밥 박대를 당해도 ‘중국은 높은 봉우리’라 쩔쩔매던 과거의 정부가 아니다. 지난해부터 중국은 “칩4 동맹에 한국이라도 ‘노(No)’라고 말해 달라”며 소매를 붙잡고 있다.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겐 강한 기미책략의 이중성에 당당하게 맞서야 한다. 243년 전 열하일기의 비극을 반복해선 안 된다.
01-18 최악 ‘스페어’ 김여정

이미숙 논설위원
스페어(spare)는 유사시 대체할 수 있도록 준비해놓는 물품을 뜻하는데, 유럽 왕실이나 귀족 가문에서는 전통적으로 차남을 지칭하는 용어로 쓰였다. 장남은 권력을 물려받는 후계자인 반면, 차남은 장남 유고 시에 대체할 예비자란 의미에서 그렇게 불렸다. 미국 타임에 따르면, 영국 국왕이 된 찰스 3세는 왕세자 시절 다이애나 비가 장남 윌리엄에 이어 해리를 낳자 “스페어가 생겼다”고 만족해했다. 엘리자베스 여왕도 생전에 해리 왕자를 스페어라고 불렀다고 한다.
해리(38) 왕자의 자서전 ‘스페어(Spare)’는 발간 1주일 만에 영국에서 40만 부, 미국 캐나다에서도 150여만 부가 팔리며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해리 왕자는 영국 텔레그래프와의 인터뷰에서 “형인 윌리엄 왕세자의 세 자녀 중 한 명은 나처럼 스페어가 될 것이기에 마음이 아프다”고 말했다. 미 ABC방송 인터뷰에서는 형을 경쟁자로 묘사하면서 “사랑하지만, 최대의 적이기도 하다”고 털어놨다. 해리 왕자는 특히,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날 경우를 대비해 태어난 존재”라면서 자신을 그림자 같은 사람으로 묘사했다. 주인공을 위해 존재하는 부차적인 인물이라는 인식 때문에 괴로웠다는 것이다.
북한의 김여정(35)도 김정은(39) 국무위원장의 스페어로 통한다. 마키노 요시히로(牧野愛博) 아사히신문 기자는 최근 번역된 ‘김정은과 김여정’(한기홍 옮김·글통 간행)에서 “김여정은 북한의 톱 스페어”라며 “북한에서 김여정의 노출이 늘고 있어 일부에서는 김여정이 후계자로 지명되는 것 아니냐는 얘기까지 나온다”고 했다. 책에는 김정일이 뇌졸중 후 2009년 김정은을 후계자로 지명할 때 “여정이가 남자라면 뒤를 이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는 일화도 소개됐다.
영국의 스페어 해리가 영국 군주제를 바꾸겠다는 생각으로 왕실의 이면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폭로자라면, 북한의 스페어 김여정은 김정은을 옹위하며 대남 악담을 퍼붓는 대변인이라는 게 차이라면 차이다. 나아가 해리 왕자는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모린 다우드 표현처럼 “복수심에 가득 찬 엄마의 망령에 사로잡힌 밀레니엄 햄릿”처럼 행동하며 가십거리를 뿌릴 뿐이지만, 김여정이 김정은의 실제 후계자로 등극한다면 최악의 세습 독재 연장이라는 점에서 악몽이자 불행이다.
01-19 문재인의 책방

이현종 논설위원
1980년대 대학가엔 이른바 ‘빨간 책’으로 알려진 사회과학 서적만 취급하는 서점이 많았다. 이윤보다는 운동권 이념을 전파하고 운동권 학생들의 아지트가 돼 경찰의 주된 압수 수색 대상이었다. 현재 여야 정치인 중 이런 서점을 운영한 사람이 많다. 이해찬 전 총리는 1978년 서울 신림동 서울대 앞에 ‘광장서적’을 운영했다. 이곳은 사회과학 서점운동의 발상지나 다름없다. 서점에서 책 파는 것은 물론 운동권 출신들이 모여 투쟁 기획도 하곤 했다. 김문수 경제사회노동위원장도 서울대 인근에서 ‘대학서점’을 운영했다. 이곳의 특징은 노동운동전문 서점이었다. 서점 수익으로 해고노동자의 생계를 후원했다. 김부겸 전 총리도 서울대 부근에 ‘백두서점’을 운영했다.
연세대 앞에선 김영환 충북지사와 우원식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공동 운영한 ‘알서림’이 유명했다. 인근에 강금실 전 법무부 장관의 전남편인 김태경 씨가 운영하던 ‘오늘의 책’도 잘 알려져 있다. 사회과학 서점의 마지막인 성균관대 앞 ‘풀무질’이 지난 2019년 문을 닫으면서 이젠 대학가에 사회과학 서점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이들 서점에서 가장 인기 있었던 책자는 ‘해방전후사의 인식’ ‘전환시대의 논리’ ‘우상과 이성’ 등 이른바 의식화 필독서들이다. 이런 서점들이 운동권의 재생산 및 연락 장소로 큰 역할을 한 것이다.
문재인 전 대통령이 사저가 있는 양산 평산마을에 책방을 연다고 한다. 사저에서 120m 떨어진 곳에 대지면적 695㎡의 1층 건물을 8억5000만 원에 사들여 책방과 카페 등을 만들 계획이다. 문 전 대통령은 언론 인터뷰에서 “공부 모임을 열거나 토론하는 책방을 구상 중”이라고 했다. 작은 마을에 책 수요가 많지 않을 텐데 책방을 내기로 한 것은 친문 지지자들이 모임을 할 수 있는 ‘아지트’를 만들겠다는 발상이다. 노무현 재단은 서울과 김해 봉하마을에 기념관이 있지만, 문 전 대통령은 이런 것이 없다 보니 스스로 만들기로 한 것이다. 이재명 대표 측에서는 이 책방이 친문의 구심점이 되지 않을까 예의주시하고 있다. 1980년대 대학가 이념 서적 책방처럼 친문 계파의 유지 및 확장에 이용될 가능성이 크다. “잊혀진 삶을 살겠다”던 문 전 대통령이 1년도 안 돼 정치적 행보를 하는 것이 볼썽사납다.
01-20(금) 인기 급상승 한국어

박민 논설위원
지구상에는 약 6900개 이상의 현대 언어가 있다. 이 중 230개는 유럽에서, 2000개 이상의 언어는 아시아에서 사용된다. 인구 930만 명의 파푸아뉴기니에는 무려 800여 개의 언어가 사용된다. 한국어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 재외동포 거주지에서 사용되는 공용어다. 각종 언어 관련 통계를 다루는 에스놀로그(Ethnologue)가 2020년 2월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한국어를 제1 언어로 사용하는 인구는 7730만 명으로 전 세계 언어 중 14위다. 1위는 중국어고 스페인어, 영어, 힌디어가 뒤를 잇는다. 제2 언어를 포함하면 통계는 달라진다. 1위는 영어로 50개 국가 12억6800만 명이 사용한다. 2위는 표준 중국어로 싱가포르, 대만, 말레이시아 등에서 11억2000만 명이 사용한다. 3위가 힌디어(6억3700만 명)고 스페인어(5억3800만 명), 프랑스어(2억7700만 명), 아랍어(2억7400만 명) 등이 뒤를 잇는다. 한국어는 7940만 명으로 22위다.
최근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경영대학원(와튼스쿨)과 글로벌 마케팅 기업 BAV그룹이 공동 조사해 발표한 ‘2022년 세계 최고의 국가’에 따르면 한국은 10개 분야 중 ‘국력’ 분야에서 85개국 중 6위를 기록했다. 이는 전년 대비 2계단 상승한 순위다. 1∼5위는 미국, 중국, 러시아, 독일, 영국으로 순위 변동이 없었던 반면, 일본이 2단계 하락해 한국과 자리를 바꿨다. 커진 국력에 한류가 더해져 한국어 인기도 급상승 중이다. 미국 CNN 방송의 17일 보도에 따르면 글로벌 언어 학습 애플리케이션인 듀오링고 조사 결과, 한국어는 지난해 이 앱에서 7번째로 많이 학습된 언어였다. 영어가 5억 명가량으로 가장 많았고 스페인어, 프랑스어, 독일어, 일본어, 이탈리아어 순이었다. 한국어는 특히, 서아시아와 동남아시아에서 인기를 끌었는데 필리핀과 브루나이 등 4개국에서는 가장 많이 학습된 외국어로 꼽혔다.
한국어는 2007년 유엔 산하 세계지식재산기구(WIPO)에 의해 세계 10개 공식 언어로 지정됐고 2020년 인도와 러시아가 한국어를 제2외국어 과목으로 채택했다. 2006∼2016년 미국 대학에서 선택된 언어 학습자 통계를 보면 이탈리아어, 러시아어, 프랑스어, 독일어, 스페인어 등은 27.4∼13.3% 감소한 반면, 한국어는 무려 95% 증가했다.
01-25(수) 범죄자 ‘입’과 플리바게닝

김세동 논설위원
태국에서 체포된 김성태 쌍방울그룹 전 대표가 애초 예상과 달리 자진 귀국했을 때 검찰과 ‘거래’했을 가능성을 점치는 시각이 많았다. 특히 야권 지지자들은 그가 저지른 배임·횡령, 주가조작 등의 범죄를 봐주는 대신,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관련된 변호사비 20억 원 대납 의혹이나 대북 사업비 대리 송금 의혹 사건 등에서 구체적인 진술이나 물증 제시 등을 약속하는 뒷거래가 이뤄졌을 가능성을 우려했다.
그러나 그는 변호사비 대납이 사실이 아니라고 하는 데 그치지 않고, 아예 이재명을 만난 적도, 통화한 적도 없다고 원천 부인했다. 대장동 사건의 핵심 피고인인 김만배 씨도 자해로 한동안 병원에 입원했다가 다시 법원에 나오면서 “재판에 최대한 협조하겠다”고 해 태도 변화에 대한 기대를 낳았으나 역시 의미 있는 진술은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피고인이 유죄를 인정하거나 다른 사람에 대해 증언을 하는 대가로 검찰이 구형량을 낮추거나 가벼운 죄목으로만 기소하기로 거래하는 것을 플리바게닝(plea bargaining)이라고 한다. 유죄협상제 또는 사전형량조정제도라고도 하는데, 미국에서는 형사사건의 95%가 이 방식을 통해 해결되는 등 적극 활용되고 있다. 수사에서 재판 최종심까지 소요되는 천문학적인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일본, 영국, 프랑스, 스페인, 독일 등에서도 채택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플리바게닝에 대한 법적 근거가 없다. 선처를 바라고 피의자가 자진해서 수사에 협조하는 경우는 있지만, 사전에 검찰과 ‘딜’을 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명박 정부 때인 2011년 사법협조자 형벌감면제 도입 시도가 있었으나 반대 여론이 많아 유보됐다. 범죄자와 형량을 흥정한다는 게 정의 관념에 어긋난다는 명분론이 압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증거를 찾기가 쉽지 않은 조직, 마약, 뇌물 범죄에서 내부자 제보나 진술이 최종 책임자의 혐의 입증에 결정적일 때 ‘작은 악’과 거래하는 게 오히려 합리적일 수 있다. 범죄자 자신에게 아무런 실질적 이익이 없는데, 보복 위험성을 감수하고 조직의 수장이나 조폭 두목의 범죄를 증언할 이유가 없다. 범죄자의 선의(善意)를 기대하는 허망한 제도를 고집하는 건 거악(巨惡) 처벌을 불가능하게 해 결과적으로 큰 범죄자를 돕는 격이다.
01-26 이만익 화백

김종호 논설고문
“윤동주 시인의 ‘서시(序詩)’ 중에서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하는 슬픈 노래를 듣고, 나를 되새기는 마음으로 그림 세계에 매달려 힘찬 석양의 노래를 부르며 작업했다.” 가장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그림으로 세계화한 이만익(1938∼2012) 화백이 2011년 ‘석양의 노래’ 전시회를 열면서 한 말이다. 그는 시인 소월(素月) 김정식의 ‘산새도 오리나무 위에서 운다/ 산새는 왜 우노’ 하는 시 ‘산(山)’, 육사(陸史) 이원록의 시 ‘광야’의 초인(超人)을 상상한 그림 ‘초인’, 미국의 어니스트 헤밍웨이 소설 ‘킬리만자로의 눈’ 속의 ‘표범’ 등도 그렸다. 러시아 출신의 대문호인 레프 톨스토이의 동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나오는 인물 이반, 주세페 베르디의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 여주인공 비올레타 등을 그린 작품도 남겼다.
그는 전통을 받아들이면서 철저히 자기화(自己化)했다. 고구려 건국신화 속의 ‘주몽 설화’를 담아낸 작품, 단군신화를 바탕으로 삼은 ‘웅녀현신도’, 전래 이야기 ‘흥부전’을 나타낸 ‘가족도’ 등도 그 결과다. 백제 ‘정읍사’, 신라 ‘처용가’, 고려 ‘청산별곡’ 등을 형상화한 작품도 그 연장선이다. “한국적인 것의 상투성을 극복하고, 촌스럽지 않게 보편적으로 제시하고 싶다”며 독특한 예술 세계를 구축했다. 1961년 졸업한 서울대 미술대 재학 기간을 이렇게도 말했다. “그 시절 내 눈에 아름답게 보인 것은 찌들고 찌그러진 우리의 모습처럼 남아 있는 청계천 변의 누덕누덕한 판자촌이다. 그림 소재를 얻기 위해, 구정물이 흐르고 빨래가 찢어진 기(旗)처럼 널려 있는 삶의 상처, 서울역 광장에서 살기 위해 허둥지둥 나와 있는 밤의 군상들, 그 속을 헤맸다.”
그의 타계 10주기(周忌)를 맞아, 그를 재조명하는 전시회 ‘별을 그리는 마음’이 서울 송파구 위례성대로 소마미술관에서 지난해 9월 2일 시작됐다. ‘청계천’ 등 그의 대표작 100여 점을 보여주는 자리로, 오는 3월 5일까지 이어진다. “서양보다 가깝고 훈훈한 것, 때로는 나를 아프게 하고 분노하게 하지만, 결코 외면할 수 없는 한(恨)과 기원이 담긴 우리의 얼굴을 그리고 싶었다”던 그의 말에도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자리다.
01-27(금) 이란의 적국과 동맹국

이도운 논설위원
중동의 아랍 국가들과 이란은 역사적 라이벌이다. 인종과 언어, 종파도 다르다. 이란인은 히틀러가 우성 인자로 내세웠던 아리안 계통이다. 배우 엘리자베스 테일러, 테니스 스타 앤드리 애거시가 전형적 이란 계통이다. 아랍 출신 배우 오마 샤리프, 축구 스타 무함마드 살라흐와 비교하면 확연한 차이가 보인다. 아랍인은 아랍어를, 이란인은 페르시아어를 쓴다. 아랍인은 오스만 제국의 영광을, 이란인은 페르시아 제국의 부활을 꿈꾼다. 같은 이슬람교 국가지만, 아랍 국 대부분은 수니파이고 이란은 시아파다. 종파 간의 갈등은 다른 종교 간 갈등처럼 심각하다.
아랍의 사우디아라비아·UAE·쿠웨이트·카타르·오만·바레인 등은 걸프협력회의(GCC)를 결성해 이란에 맞서 왔다. GCC 가운데서도 UAE는 이란과 특별히 사이가 안 좋다. 1968년 영국이 걸프만에서 주둔군을 철수한 직후부터 두 나라는 호르무즈 해협 아부무사·툰브·시르리 3개 섬의 영유권 분쟁을 벌이고 있다. 전략적 요충지 호르무즈 해협에서의 군사적 헤게모니는 물론 바닷속 유전을 놓고도 다툰다. 인구가 많고 군사력이 강한 이란은 줄곧 UAE를 압박해 왔다. 지난해 1월에는 이란을 뒷배로 삼은 예멘의 후티 반군이 수도 아부다비에 드론 공격을 하기도 했다.
이란의 군사·경제적 실권을 가진 혁명수비대는 2020년 적과 동지를 분류했다. 혁명수비대 인터넷 사이트에 따르면 팔레스타인·레바논 헤즈볼라 등 교전단체와 러시아·중국·북한·쿠바 등 독재국을 동맹으로 규정했다. 반면 GCC 국가들과 미국·유럽연합·이스라엘·캐나다 등 서방국을 적으로 분류했는데, 한국도 포함돼 있다. 이란은 1980년대부터 북한에서 무기를 수입해간 것으로 알려졌다. 샤하브 미사일은 노동 미사일을, 코람사 미사일은 무수단 미사일을 기초로 만든 것이다. 2017년 5월 이란은 가디르급 소형 잠수함에서 순항미사일을 시험 발사했는데, 미 국방부는 “북한이 배후”라고 발표했다. 가디르급 소형 잠수함은 북한 연어급을 토대로 만든 것이고, 연어급은 천안함을 폭침시켰던 북 잠수정 기종이다. 특히, 최근에는 이란의 대함 탄도미사일·고체연료 기술이 북한으로 역수출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란은 이제 UAE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안보까지 위협하고 있다.
01-30(월) 여행수지 만성적자 유감

문희수 논설위원
이번 설 연휴에 해외로 나간 여행객이 급증했다. 인천공항을 통해 출국한 여행객만 하루 평균 61만여 명으로, 지난해 설 연휴 때보다 13배 가까이 늘었다고 한다. 코로나 방역 규제가 풀리자 ‘보복 여행’이 갈수록 두드러진다. 한국관광공사에 따르면 지난해 11월까지 한국인 출국자는 516만여 명으로 전년 동기보다 4배나 늘었다. 해외여행객은 코로나 이전 수준의 80%를 회복했는데, 올해는 원상회복도 가능할 것이라고 여행업체는 기대에 부풀어 있다.
그렇지만 비용이 부담된다. 고물가로 항공요금과 숙박비 등 현지 경비가 크게 늘었다. 보복 여행이 늘수록 여행수지 적자가 더 커질 것이란 우려가 크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11월까지 여행수지 적자는 70억8000만 달러로, 연간으로는 80억 달러에 이를 전망이다. 코로나 직전인 2019년(118억7000만 달러) 이후 최대다.
세계적으로 K-팝·K-푸드·K-콘텐츠 등이 뜨고 한국어도 많이 공부한다. 한국은 외국인이 가고 싶은 인기 지역이다. 그런데도 정작 여행수지는 적자다. 지난 1989년 해외여행 자유화 이후 흑자가 한 번도 없다. 문제는 우리 내부에 있다고 봐야 한다.
실제 보완이 시급한 게 한둘이 아니다. 서울에서 제주도까지 영어 등 외국어로 상세하게 소개·해설하는 안내시설이 너무 부족하고 부실하다. 석굴암 같은 곳은 하루 입장객 수를 제한하면, 여유 있는 관람과 함께 자발적인 현지 체류도 가능하다. 여행 상품도 더 다양화·고급화해야 한다. 외국인이 전통시장 등 원하는 곳을 직접 갈 수 있게 자유시간을 늘려 소비를 유도하고, 고궁·사찰·명승지는 순례는 물론 숙박 등 체험 프로그램도 필요하다. 주로 서울에서 묵더라도 전국을 코스별로둘러볼 수 있게 1∼2일짜리부터 시작하는 실속형 여행 상품도 제공해야 한다. 특히, 뻔한 기념품은 업그레이드가 절실하다.
코로나에 막혀 있던 해외여행 욕구가 분출하는 것은 세계 공통이다. 세계관광기구는 올해 관광업이 코로나 이전 수준을 거의 회복할 것으로 전망한다. 특히, 중국의 방역 규제 완화로 중국 관광객이 다시 몰려올 수도 있다. 한국이 여행수지 흑자를 못 낼 이유가 없다. 정부, 각 지방자치단체와 주민, 여행·관광업계가 힘을 합치면 기회를 살릴 수 있다.
01-31(화) 北 ‘중전’과 ‘실세 공주’ 암투

박민 논설위원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동생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과 부인 리설주 간의 권력 암투설이 본격 제기된 것은 2018년부터다. 세습 왕조 국가에서 장남(2010년)과 장녀(2013년)에 이어 둘째 아들(2017년)까지 낳은 리설주가 대외활동에 본격적으로 나선 시점이다. 같은 해 3월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 등 대북특사단 환영 만찬에 참석한 데 이어 김정은 첫 해외 일정인 중국 방문에 동행했다. 4·27 1차 남북정상회담 때 만찬에 참석했고 지난해 11월 18일 ICBM을 시험 발사하는 현장에 장녀 김주애와 동행했다. 2018년부터 북한 관영 매체들은 ‘존경하는 리설주 여사’라는 호칭을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여사’는 김일성 생모 강반석, 김정일 생모 김정숙 정도만 쓸 수 있는 표현이다.
김여정은 2008년 8월 김정일이 뇌졸중으로 쓰러지자 “정치를 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을 정도로 권력욕을 가진 인물이다. 그러나 남존여비 의식이 강한 김정일 사후에야 영향력을 확대하기 시작했다. 김정은을 밀착 보좌하며 정책 노선과 통치 방향을 잡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고 대남·대미 문제와 관련해 김정은의 대변인 역할을 하고 있다. 김여정이 김정은의 총애를 받는 이유와 관련, 일본 아사히신문 기자 마키노 요시히로는 저서 ‘김정은과 김여정’에서 두 사람이 고독한 남매고, 김정은에게 여전히 신뢰할 수 있는 부하가 없고, 김정은의 건강 상태가 불안해 유사시 대처할 인물이 필요하다는 점 등을 꼽았다.
지난 27일 영국 더 타임스는 김주애의 공개 행보와 관련해 ‘후계자 발표라기보다 김정은 인생에 중요한 두 여성 리설주와 김여정 간의 경쟁을 해소하려는 복잡하고 미묘한 제스처’라고 풀이했다. 2인자 공주 김여정과 세자 책봉을 앞둔 중전 리설주 간 암투는 필연적이다. 결정적 변수는 김정은의 건강이다. 김정은은 26세에 후계자가 됐다. 김정은의 장남은 13년 후 26세가 된다. 김정은이 그때까지 건강을 유지하면 권력의 중심축은 리설주와 김정은 장남으로 이동하고 김여정은 제거 대상이 될 수 있다. 반면, 10년 내에 김정은에게 유고 상황이 발생하면 김여정이 후계자로 등극하거나 4대 세습의 가교 역할을 할 수 있다. 다만 김여정의 성향상 일단 후계자 반열에 오르면 리설주와 김정은 자녀들을 숙청할 수 있다.
문화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