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희의 흥미진진 경제사] 01/ [1] 이사벨 여왕, 1492년 유럽 대륙에서 이슬람을 몰아내다 - [10] 청어 뼈 위에 건설된 암스테르담
[홍익희의 흥미진진 경제사] 전 세종대 교수 조선일보

2022.11.20
[1] 이사벨 여왕, 1492년 유럽 대륙에서 이슬람을 몰아내다
1492년, 이 기점으로 중세와 근대 나뉘어
스페인 왕국, 이베리아반도의 통일인 ‘레콩키스타’를 성취
이슬람 세력 유럽 대륙에서 몰아내
동시에 신대륙 발견의 위업을 이루어
‘1492년’, 이해를 기점으로 중세와 근대가 나뉜다. 세계사적 분기점이 될 정도로 중요한 해였다. 과연 이해에 무슨 일이 있어 세계사의 분기점이 된 것일까?

▲그라나다 성의 열쇠를 이사벨 여왕과 페르난도 왕에게 넘기는 장면. /위키피디아
이해에 세계사적 사건 3가지가 동시에 발생했다.
스페인 왕국은 이베리아반도의 통일인 ‘레콩키스타(Reconquista)’를 성취해 이슬람 세력을 유럽 대륙에서 몰아냈다. 그와 동시에 신대륙 발견의 위업을 이루었다. 경제사에 있어 1492년은 더욱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이해에 스페인 왕국은 기독교 국가임을 천명하며 유대인 추방령을 발표했다. 이로써 유대인이 사라진 스페인 왕국은 퇴조의 길을 걷게 되고 쫓겨난 유대인들이 몰려간 네덜란드는 중상주의의 꽃을 피우고 세계 무역 네트워크를 구축해 세계 경제를 주도하게 된다. 세계 경제를 쥐락펴락하는 미국의 탄생과 유대 금융자본주의의 출현이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과 유대인 추방령으로 시작됐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세계 질서를 탄생시킨 씨앗이 1492년에 심어졌다.
◇이사벨, 중세 역사를 주도한 이슬람을 몰아내어 유럽의 자존심을 회복하다

▲이사벨 여왕, 벨라스케스 작. /프라도 박물관, 마드리드
‘레콩키스타’는 재정복이란 뜻이다. 전성기에 비해 많이 약해진 이슬람 세력은 결국 최후 거점인 그라나다까지 내주고 1492년 완전히 이베리아 반도에서 퇴각했다. 레콩키스타의 완성은 스페인 왕국의 군사적 승리에 머물지 않고 서구가 세계사의 주역으로 등장하는 신호탄이었다.
역사라는 것이 본래 승자를 위한, 승자에 의한 기록이기도 하지만 중세의 역사는 왜곡이 심한 편이다. 중세 역사의 주인공은 단연 이슬람이었다. 중세 780년간 유럽의 기독교 왕국들은 좌우에 포진한 이슬람 세력에 억눌려 꼼짝 못 하고 갇혀 살았다. 지중해 역시 이슬람의 바다로, 아래로 내려갈 수도 없었다. 유럽 기독교 왕국들은 군사력, 경제력은 물론 과학기술과 문화 면에서도 이슬람에 크게 뒤처져 있었다.
당시 이슬람은 아직 유럽이 갖지 못한 것들을 가지고 있어 모든 면에서 유럽보다 우월했다. 화약과 대포가 있어 군사적으로 훨씬 강했을 뿐 아니라 나침판이 있어 해상 운용 능력도 발달해 해상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또한 종이를 사용했을 뿐 아니라 인쇄술이 발달해 책과 도서관이 있었다. ‘화약, 나침판, 종이, 인쇄술’ 등 동양의 발명품을 지리적으로 가까이 있던 이슬람이 잘 활용한 결과였다. 이러한 판국에 1492년 스페인 왕국이 유럽 대륙에서 이슬람을 몰아낸 레콩키스타는 유럽 기독교 세력들에 있어 자존심을 회복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1492년에 레콩키스타와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말고도 한 가지 사건이 더 있었다. 바로 ‘유대인 추방령’이다. 이 추방령으로 개종을 거부한 유대인 수십만 명이 스페인에서 강제로 쫓겨났다. 유대인 추방령은 두고두고 경제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후 발생한 벨기에 부뤼헤(부뤼주)와 안트워프의 발흥,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항구 재건과 플류트선의 개발, 네덜란드의 중상주의 만개, 항해조례와 영란전쟁, 명예혁명, 영국의 산업혁명과 전파, 신대륙의 부흥 등이 ‘스페인에서 쫓겨난 유대인’이라는 키워드 없이는 시원하게 설명되지 않는다.
◇이사벨 공주와 페르난도 왕자의 세기적 정략결혼
이러한 세계적 사건들은 카스티야 왕국의 이사벨 공주와 아라곤 왕국의 페르난도 왕자의 정략 결혼으로 시작되었다. 이 결혼으로 두 왕국은 연합체제를 구축해 스페인을 통일할 수 있었다.

▲당시 카스티야 왕국. /위키피디아
카스티야 왕국의 엔리케 왕은 자기의 이복여동생 이사벨 공주를 포르투갈 왕가와 결혼시켜 차기 왕위계승 후계자인 이사벨을 포르투갈로 보내 버리려 했다. 이를 눈치챈 이사벨은 선수를 쳐서 1469년 비밀리에 자신의 결혼을 주도해 바야돌리드에서 비밀 결혼식을 올렸다.
이를 계기로 두 왕국은 1479년에 통일을 하게 되고 힘을 모아 이슬람 왕국과 20여 년에 걸친 국토회복 전쟁을 치러 이슬람 교도를 1492년 1월 이베리아반도에서 몰아냈다. 이른바 레콩키스타이다. 그리고 정복한 그라나다 성에서 같은 해 3월에 유대인 추방령을 발표했으며, 여왕이 후원한 콜럼버스가 같은 해 10월에 신대륙을 발견했다.

▲이사벨이 결혼 전 은둔했던 세고비아 성. /네이버 블로그
그들의 험난했던 결혼 과정을 보자. 1451년 카스티야의 공주로 태어난 이사벨은 명석하고 당찬 여성이었다. 1464년 왕과 귀족들이 대립하고 있었다. 귀족들은 무능한 엔리케 왕 대신 왕의 이복 동생 알폰소를 왕으로 추대했다. 그 결과는 3년간의 내란이었다. 1467년 알폰소가 14살의 어린 나이로 죽자 내란은 막을 내렸다. 독살당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알폰소의 지지 세력은 이번에는 알폰소의 누나 이사벨을 국왕에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있어 이사벨은 왕위 계승 문제를 놓고 이복 오빠이자 국왕인 엔리케의 눈치를 살피며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반 엔리케파는 다음 계승자로 이사벨을 밀었고 힘에 밀린 엔리케 왕은 그녀를 일단 후임 왕위 계승자로 지명했다. 그러나 왕에게는 후아나라는 딸이 있어 왕은 반격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불안을 느낀 이사벨은 세고비아로 올라가 은둔 생활을 하면서 자기를 보호해 줄 강력한 결혼 상대자를 물색했다.

▲15세기 중반 아라곤 왕국의 영토. /나무위키
카스티야의 왕위 계승자인 이사벨의 혼인 문제는 국내외적으로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포르투갈, 아라곤 왕국, 프랑스가 제각기 결혼 상대 후보를 내놓았다. 엔리케는 이사벨을 포르투갈의 아폰수 5세와 혼인시키려 했다. 그러나 이사벨은 선교사를 보내 알아본 다음, 동맹 상대로서는 포르투갈보다는 지중해 영해권을 장악하고 이탈리아 남부와 시칠리아 등을 지배하고 있는 아라곤 왕국이 제격이라 판단하고 자신의 결혼 상대자로서 아라곤의 왕자 페르난도를 마음에 두었다.
18세의 이사벨은 고심 끝에 혼자서 아라곤 왕국의 왕위 계승자인 17세의 페르난도 왕자를 배우자로 정했다. 그러나 그것은 더 큰 반대를 불러일으켰다. 백년 전쟁에서 승리한 신흥강국 프랑스는 주위에 강력한 통일 스페인이 들어서는 것을 원치 않았다. 더구나 당시 세력가들이었던 카스티야의 영주들조차 강력한 왕권주의자인 페르난도를 필사적으로 반대했다.
또 다른 문제도 있었다. 둘은 근친 간이었다. 당시 유럽 왕족들은 왕족들 간의 결혼으로 그리 멀지 않은 친척들이 많았다. 그러나 가톨릭은 원칙적으로는 근친 간 결혼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래서 둘이 결혼하려면 교황의 특면장이 필요했다. 이사벨은 자기의 지지자인 톨레도 대주교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리고 이사벨은 몰래 결혼식장인 바야돌리드로 향했다.
급보를 접한 엔리케 왕은 이들의 결혼을 막으려고 군대를 출동시켰다. 위기의 순간에 톨레도 주교의 군대가 그녀를 구출했다. 그녀는 무사히 지지자들의 도시인 바야돌리드로 입성했다. 그녀의 손에는 교황의 특면장이 들려있었다. 후일 이 특면장은 톨레도 대주교가 위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페르난도 왕자는 결혼식 며칠 전에야 상인으로 변장한 몇몇 측근들과 함께 아라곤 왕국의 수도 사라고사를 출발했다. 그는 주로 밤을 이용해 오는 동안 죽을 고비를 넘기며 바야돌리드에 도착했다. 1469년 10월 19일 그렇게 두 사람은 결혼했다.

▲이사벨의 결혼식 장면이 그려져 있는 세고비아 성의 벽화. /위키피디아
하지만 시련은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엔리케 왕은 자신의 허락 없이 페르난도와 결혼한 이사벨의 결혼을 인정할 수 없다며 왕위계승권 박탈을 선언했다. 이사벨과 페르난도 두 사람의 왕권 강화 정책에 불안을 느낀 카스티야 귀족들의 세력도 갈수록 커졌다. 이 와중인 1474년 엔리케 왕이 돌연 사망했다. 때를 놓치지 않고 23세의 이사벨은 즉각 카스티야의 왕은 자신이라고 선언했다. 다른 쪽에서는 엔리케의 딸 후아나가 왕위 즉위식을 거행하고 있었다. 후아나의 남편이자 포르투갈 왕 알폰소 5세는 군대를 이끌고 카스티야 국경을 넘었다. 5년간의 내전 끝에 이사벨과 페르난도는 포르투갈 연합군을 격파했다. 같은 해 남편 페르난도가 아라곤의 왕위를 계승하자 카스티야-아라곤 연합왕국 곧 스페인 왕국이 탄생했다.
◇당시 유대인이 가장 많이 살았던 나라, 스페인 왕국
로마제국 이후 유럽에서 최초로 출현한 제국이 스페인 왕국이다. 이러한 영광 뒤에는 막강한 경제력의 유대인들의 도움이 있었다. 14~15세기에 유대인들이 가장 많이 살았던 나라가 스페인이다. 당시 스페인 인구가 700만이었으며 이 가운데 7%인 약 50만 명 정도가 유대인이었다고 한다. 특히 톨레도와 같은 주요 도시의 경우에는 인구의 1/3이 유대인이었다고 한다. 유대인 공동체가 있는 도시가 44개에 이르렀는데 이는 스페인 방방곡곡에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스페인 왕실은 막대한 전쟁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당시 부유층이었던 유대인들의 재정적 도움이 절실했다. 또 혼란기 국가를 이끌어 가기 위해 능력 있는 유대인이 한 사람이라도 더 필요했다. 이들을 상업, 무역업, 수공업은 물론 의술, 통역 등에 활용했다. 또 세무, 재정, 관리 부문에도 중용하여 중요한 일들을 맡아보게 했다. 부(富) 이외에도 그만큼 그들의 재능과 정직성이 뛰어났다는 증표다. (다음 편에 계속)
[2] 1492년 유대인 추방령의 비극
추방령, 돈과 금, 은 등 귀중품은 못 가져 나가게 해
10여 년 사이에 유대인 26만 명이 빠져나가다
스페인 왕국의 이사벨 여왕과 페르난도 왕은 1492년 1월 2일 마지막 이슬람을 그라나다에서 몰아내고 석 달도 되지 않은 3월 31일에 유대인 추방령을 발표했다. 칙령에서 명시한 유대인들의 죄는 “신성한 가톨릭 교리와 신앙 깊은 교도들을 무너뜨리려 시도”했다는 것이다.
그 무렵 스페인 왕국 인구 700만 명의 6.5%가 유대인이었다고 한다. 유대인 숫자가 유럽에서 가장 많았다. 특히 유대인들은 장원제도가 발달한 중세에 농촌에 살지 않고 상업이 발달한 도시에 모여 살았기 때문에 도시인구의 1/3을 차지했다. 유독 스페인에 유대인이 많이 살았던 이유는 8세기 이베리아반도를 정복했던 이슬람들이 500년 이상 유대인에게 관용을 베풀어 유대인들이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그 기간에 유대인들은 황금기를 구가하며 ‘유대 문화의 최고 전성기’를 이베리아반도에서 보냈다. 이 시기에 이슬람, 유대교, 기독교가 공존하며 문화적으로도 융성한 시대였다. 그 무렵 수도 코르도바는 문화와 상업이 발달한 유럽에서 가장 크고 강성한 도시였다.

▲1492년 스페인 법원 대심문관이 이사벨 여왕과 페르난도 왕에게 유대인 추방령에 서명을 요청하고 있는 모습, 에밀리오 살라 작, 1889년. /위키피디아
그러다 11세기 초 북아프리카에서 발흥한 교조주의 이슬람이 이베리아반도를 정복하여 유대인들에게 개종을 강요하며 학살하기 시작하자 유대인들이 피난 길에 올라 북부 스페인 왕국으로 몰려들었다. 이들이 14~15세기 스페인 왕국의 경제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492년 당시 스페인의 재정 고문 아이삭 아브라반넬도 유대인이었다. 스페인을 무역 경제부국으로 만든 장본인이다. 그는 유대인 추방령을 돈으로 막으려 하다가 실각한다.
유대인 추방은 전쟁 후유증으로 불거진 사회적 불안이 크게 작용했다. 왕실은 불안한 민심을 수습하고 기독교 국가의 위엄을 세우려는 의도로 기독교로의 종교 단일화를 제시한 것이다. 그 이면에는 경제적 이유도 도사리고 있었다. 전쟁으로 이완된 민심을 추스르고 바닥난 국고를 채우는 데는 유대인 추방과 재산 몰수가 일거양득의 묘수였다. 뿐만 아니라 콜럼버스 신항로 탐사에 들어갈 왕실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목적도 한몫했다.
◇추방령, 돈과 금, 은 등 귀중품은 못 가져 나가게 해
가톨릭으로 개종하지 않으면 4개월 이내에 스페인을 떠나라고 선포한 추방령에 의하면, 유대인들은 재산을 처분해서 가지고 나가는 것은 허용하되 화폐와 금, 은 등 귀중품은 가져 나갈 수 없다고 발표했다. 발각되면 처형이었다. 한마디로 억지였다. 재산은 놔두고 몸만 빠져나가라는 소리였다. 칙령이 발표되자 개종을 거부한 유대인은 팔 수 있는 모든 것을 몇 달 이내에 헐값으로 팔아 치웠다. 집을 주고 당나귀를 얻었고 포도원이 몇 필의 포목과 교환되었다.

▲유대인 추방령. /위키피디아
이렇게 재산을 급하게 처분할 수밖에 없었지만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신변의 위험을 안고 사는 유대인들은 모든 재산을 평상시에도 나누어 놓는 습관이 있었다. 1/3은 현찰로, 1/3은 보석이나 골동품 같은 값나가는 재화로, 1/3은 부동산으로 부를 분산시켜 관리했다. 안정적인 재산관리방식인 포트폴리오(Portfolio)는 여기서 유래했다. 그 와중에도 대부업을 했던 유대인들은 담보대출 시 저당 잡은 보석류를 챙겼다. 당시 유대인에게는 토지나 부동산 소유는 법으로 금지당했기 때문에 대부분 저당물이 보석류였다. 당시 보석류는 오늘날과 같이 높은 경제적 가치는 없었지만 이는 후에 유대인들이 이주해 간 안트워프와 암스테르담이 다이아몬드 등 보석시장으로 자리 잡게 된 이유다.
떠나기에 앞서 12살 이상 되는 아이들은 모두 결혼시켜 가족을 이루게 했다. 유대인들은 성인이 되어야 하느님으로부터 진정한 의미의 유대인이라 여김을 받기 때문이다. 이들은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수레나 나귀에 짐을 싣고 태어난 나라를 떠났다. 단 4개월만인 8월 초에 이르자 추방은 완결되었다.
◇10여 년 사이에 유대인 26만 명이 빠져나가다
이리하여 유대인 17만 명이 한꺼번에 추방당했다. 1480년 이래 종교재판을 피해 빠져나간 사람까지 합치면 약 26만 명 이상의 유대인이 10여 년 사이에 스페인을 떠났다. 그 무렵 인구 3만이 넘는 도시가 흔치 않은 유럽에서, 26만 명은 대단한 숫자였다. 당시 스페인에 얼마나 많은 유대인들이 빠져나갔는지는 학자에 따라 13만~80만 명까지 다양하다.
1492년 8월 2일 세비야 근처 항구에서는 마지막으로 추방되는 유대인 무리가 배 위로 탑승하는 동안, 또 다른 세 척의 선박이 그 옆에서 출항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 유명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선단이었다. 바로 그 가련한 유대인들의 후손을 위하여 그가 발견하게 될 신대륙이 피난처를 제공하게 되리라고는 콜럼버스 자신을 비롯해 그 어느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다. 사실 콜럼버스의 계획은 몇몇 유력한 ‘마라노’(가톨릭으로 개종한 유대인)들의 도움을 받아 실행될 수 있었다. 그의 배들은 유대인들에게서 압류한 돈을 가지고 건조되었고, 그의 선원 중에는 종교재판의 마수에서 자유를 얻고자 하는 적잖은 마라노들이 끼여 있었다.
스페인 북부에 살던 1만 2천 명가량의 유대인들은 프랑스에 가까운 나바라 왕국으로 향했다. 그곳 통치자들은 오랫동안 종교재판 제도의 도입을 거절해 왔었다. 그러나 페르난도 왕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나바라 왕국도 결국 종교재판 제도를 받아들여야 했다. 이곳으로 잠시 피신했던 유대인들은 결국 대부분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길을 택했고, 일부는 북아프리카와 이탈리아로 향했다.
◇결국 포르투갈도 유대인 추방해
스페인 영토에서 추방당한 17만 명의 유대인들 가운데 10만 명은 값을 지불하고 인근 포르투갈로 입국했다. 하지만 그것도 5년간의 체류에 불과했다. 1495년 마누엘 1세 왕이 포르투갈의 권좌에 올랐는데, 그는 페르난도와 이사벨 부부의 왕국을 상속받고 싶은 욕망에서 그들의 딸과 결혼하고자 했다. 이들 부부는 마누엘의 포르투갈 왕국 내에 비기독교인들이 존재하는 한 딸을 줄 수 없다며 결혼을 수락하지 않았다. 1496년 12월 포르투갈 내 유대인들과 무어인들에 대한 추방령이 선포되었다.
그들에게는 1년의 여유 기간이 주어졌다. 그전에 25세 이하의 젊은이들은 모두 강제로 세례를 받고 기독교로 개종되었다. 마누엘은 경제적 타격을 우려하여 유대인들이 떠나는 길을 방해했다. 마감 날이 지나자 마누엘은 미처 떠나지 못한 유대인들을 노예라고 선언하고는, 가능한 방법을 모두 동원하여 그들을 개종시켰다. 이들 중 다수 역시 비밀리 유대교 의식을 준수하는 마라노가 되었다. 이처럼 유대인들은 1497년에 포르투갈에서도 추방되고 말았다.
◇유대인, 플랑드르의 안트워프와 부뤼헤 등으로 향해
유대인들이 가장 많이 몰려간 곳은 종교의 자유가 있으며 비교적 안전한 북해 연안의 저지대 곧 플랑드르의 부뤼헤와 안트워프로 향했다. 그곳에는 1290년 영국에서 추방당한 유대인들이 이미 오래전부터 터를 잡고 상업과 교역 그리고 모직물 산업을 발달시킨 곳이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그들을 반겨 맞아 주었던 오스만제국으로 향했고 또 나머지는 북아프리카와 베네치아 등으로 이주했다. 이주 중에 약 2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16~18세기 유럽의 인재 이동 경로
일부는 프랑스로도 이주하여 화려하고 세련된 몽테뉴를 존재케 했다. 그의 어머니가 스페인계 유대인의 직계 후손이다. 모로코에는 북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유대인 정착촌이 있다. 그들 대부분은 스페인을 떠나온 유대인의 후손들이다. 그들은 “멜라(mellahs)”라고 하는 특별 구역에 격리되어 살았으며 유대인으로 인식케 하는 복장을 입어야만 했다. 한때 모로코에 25만여 명의 유대인들이 살았다.
◇스페인 애저요리의 유래
그 뒤에도 스페인 왕실은 유대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한 마라노 무리가 여전히 몰래 유대교 관습을 지킨다고 보았다. 종교재판소를 통해 이들을 색출하는 데 혈안이 되었다. 지금도 유대인이 가장 많이 살았던 톨레도와 세고비야에는 새끼돼지를 구운 애저요리가 유명하다. 톨레도에는 축제 때 돼지고기를 먹는 행사가 있다. 이는 당시 마라노들이 공개석상에서 유대인들이 금기시 했던 돼지고기를 먹어 보임으로써 그들의 개종을 만천하에 알리는 풍습에서 유래되었다. 애저요리(Cochinillo)는 생후 2주 된 아기 돼지를 통째로 구어서 먹는 스페인의 특선 요리로 접시로도 잘라질 만큼 육질이 부드럽고 맛이 일품이다.

▲세고비아 식당에서 애저를 접시로 자르는 모습. /위키피디아
그 뒤에도 종교재판을 피해 약 5만여 명의 유대인들이 추가로 스페인을 떠났다. 결국 많은 유대인들이 안트워프, 암스테르담 등지로 이주하면서 이베리아반도의 경제력이 중부 유럽으로 이동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같은 스페인에서의 유대인 사회의 몰락은 유대사 가운데 가장 중대한 사건 중 하나였다. 페니키아 시대에 이미 스페인 카디스 등에 유대인들이 진출한 기록이 있다. 적어도 솔로몬 시대부터 스페인에는 유대인들이 살았으며 그곳에서 주목할 만한 문화적 황금기를 이룩하며 유대인 사회를 발전시켜 왔다.
◇유대인 추방으로 금융업과 유통업의 몰락
추방된 유대인들은 당시 스페인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던 고급 인력들이었다. 당시 유대인들은 카스티야에서 재정과 금융을 장악하고 각 지방의 행정기관과 왕실의 요직에도 진출해 있었다. 스페인에서 유대인 추방 결과 그들이 많이 살았던 주요 상업도시의 집세와 가게세는 절반으로 폭락했다. 바르셀로나는 은행들이 대거 파산했다. 이로써 인구의 6.5%가 유대인이었던 아라곤 왕국은 금융업과 상업이 몰락하다시피 타격이 컸다. 전성기에 300개의 작업장을 자랑했던 바르셀로나의 면직물 산업은 15세기 중엽에 10개 정도의 작업장만을 운영하는 초라한 수준으로 전락했다.
게다가 유대인 추방은 한마디로 고급두뇌와 핵심 인재의 유출이었다. 당시 의사는 대부분 유대인이었으며 세금을 징수하는 사람도 세금을 가장 많이 내는 주 납세자도 유대인이었다. 그나마 남아있었던 마라노들도 유대인 티를 안내기 위해 전통적인 유대인 직업들을 버리고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많았다. 동시에 그들의 재능도 함께 땅에 묻어버렸다.
그 뒤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동인도 제도에서 후추와 향신료를 싣고 와도 유통망이 붕괴되어 소비자가 있는 북유럽으로 유통시킬 방도가 없었다. 동인도 제도로 싣고 갈 교역품도 구할 수 없었다. 이베리아반도의 생산과 유통 기반이 무너져 내린 것이다. 유대인 추방은 스페인 경제에 치명적이었다. 유대인들이 떠난 뒤 내수 부진과 더불어 국제교역 감소는 스페인 경제를 피폐케 했다. 이는 국고 수입 감소로 직결되어 스페인 왕국은 중남미에서 대량의 금과 은을 지속적으로 가져왔음에도 수 차례 파산을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다음 편에 계속)
[3] 후춧가루 쫓다 세계사 바꾼 콜럼버스
유럽인들이 비싼 후추에 열광한 이유

▲아메리카 대륙을 최초로 밟은 콜럼버스, 1862, 디오스코로 데 라 푸에블라 톨린 . /위키피디아
◇금가루보다 비쌌던 고대의 후춧가루
후추 등 향신료는 경제사적으로 보았을 때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의 중요성을 갖고 있다. 콜럼버스의 아메리카대륙 발견, 바스쿠 다가마의 인도 항로 개발, 마젤란의 세계 일주 등이 모두 인도의 후추를 구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무렵 동양의 향신료가 부의 원천이었다.
◇후추, 기원전 4세기 알렉산더 대왕 때 서구에 알려져

▲후추. /위키피디아
인도에서는 기원전 3000년경부터 후추와 정향 등 많은 향신료가 사용되었다. 기원전 330년경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이 이집트, 시리아, 터키, 페르시아, 인더스강 유역까지 정복하여 동양의 향신료가 유럽에 전해지게 되었다. 알렉산더 대왕은 원정 때 친구인 식물학자를 대동하여 점령지의 많은 향신료를 수집하게 했다.
하지만 유럽인들이 후추와 계피 등 향신료를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로마가 이집트를 정복한 뒤부터다. 인도에서 무역풍을 타고 인도양을 건너 홍해를 북상하여 이집트에 도달하는 항로가 개발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후추는 실크로드와 바닷길로 상업 중심지인 호르무즈나 아덴에 옮겨진 뒤 그곳에서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와 베네치아로 운송되었다. 당시 후추는 굉장히 비쌌다. 실제로 후추가 로마에 도착했을 때 같은 무게의 금과 가격이 같았다. 1세기 박물학자 플리니우스는 “후추같이 영양도 없는 것 때문에 매년 5,000만 세스루티우스의 돈을 유출하고 있다”고 개탄할 정도로 후추는 비쌌다.
◇후추 수입에 성공하면 100배 이상의 수익을 올리다
후추는 열대성 식물이라 유럽에서는 재배가 어려워 동서무역 하는 대상들로부터 비싼 값에 사들일 수밖에 없었다. 인도에서 실크로드를 따라 전해진 후추는 그리스, 로마 시대부터 보석처럼 귀하게 여겨져 순은 항아리에 넣어 소중하게 다루었다. 중세 게르만 사회에서는 세금 납부나 관료 급료, 땅 매매나 임대, 결혼 지참금 등에 후추가 쓰였다. 당시 인도에서 후추를 싣고 배가 무사히 돌아오면 100배 이상의 수익을 올렸다. 선원들은 고향에서 영웅이 되고 항해자금을 댄 상인들은 떼돈을 벌었다.
◇유럽인들이 비싼 후추에 열광한 이유
유럽 사람들은 왜 비싼 향신료를 그토록 선호했는지를 보자. 냉장고가 없던 시대라 소금에 절인 고기와 생선 그리고 빵이 주식이었다. 염장식품에 신물이 난 귀족과 세도가들은 후춧가루를 뿌린 신선한 스테이크를 좋아했다. 또 짜고 맛없는 음식에 정향이나 육두구 같은 향신료를 넣으면 맛이 좋아졌다. 그래서 동방의 향신료는 큰 인기를 끌었다. 그들은 비린내를 제거하고 육류를 저장하는데도 향신료를 사용했다. 하지만 향신료 가치는 단지 음식의 맛을 더하는 데 머물지 않고 성욕을 돋우는 강장제와 의약품으로 믿어져 수요를 더욱 부추겼다. 특히 전염병을 예방하는 살균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귀족들과 부유층들이 앞다투어 샀다.
◇베네치아 유대 상인들이 주도한 중세 후추 교역
중세 들어 이슬람 세력이 팽창하면서 유럽과 동양을 잇는 실크로드와 바닷길을 단절시킨 뒤부터 향신료는 아랍 상인의 손을 거치지 않으면 구할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가격이 오르고 거기에다 술탄이 과도한 관세를 부과하여 더욱 비싸졌다. 게다가 십자군 전쟁 이후 교황은 기독교도들의 이슬람 접촉을 금지했다. 이 통에 베네치아의 유대인 상인들이 이슬람 지역에서 후추를 사들여 막대한 이윤을 붙여 유럽에 팔았다. 그러다 보니 후추의 최종 소비자가격은 금가루보다 비쌌다. 귀하다 보니 은 대신 화폐로 통용된 때도 있었다. 이쯤 되자 후춧가루는 베네치아 공국을 제외하고 유럽 각국에서 고대 소금같이 왕실 전매품이 되었다.
베네치아 유대 상인들은 주로 이슬람 지역 유대 상인들과 독점 거래를 했다. 12세기 바그다드에는 4만 명의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다. 대부분 무역업에 종사했다. 베네치아 유대 상인들은 그들에게 모직물을 팔고 그 돈에 은을 보태어 향신료를 샀다. 일부는 호르무즈나 아덴 항구에 도착한 배에서 직접 향신료를 사서 바그다드를 지나 흑해 남부 해안을 경유해 콘스탄티노플에 이르는 경로를 이용했다. 이후 향신료는 콘스탄티노플에서 뱃길로 베네치아로 운반되었다. 나중에는 이슬람 내 향신료 유통의 주도권이 이집트의 카라미 상인들에게 넘어가 베네치아 유대 상인들도 향신료 수송을 전담하는 갤리 상선단을 매년 정기적으로 이집트와 시리아로 파견함으로써 지중해 향신료 교역에서 독점적 지위를 이어갔다.
◇유대인의 환어음, 귀금속 부족을 보충하다
베네치아가 동양에서 향신료, 비단, 면직물 등을 많이 수입해오는 한편 모직물을 제외하곤 동양에 팔 마땅한 물품이 없었다. 13세기 중엽 이후 이탈리아 도시들이 금화 주조를 재개했음에도 유럽의 금과 은만으로는 늘어나는 교역량을 결제하기 어려웠다. 그러한 상황에서 베네치아 유대 상인들은 실물화폐 없이도 거래를 청산할 수 있는 기술을 발전시켰다. 바로 환어음이었다. 이는 베네치아와 이슬람 양 지역의 유대 상인 간의 신용거래였기에 가능했다. 유대인 디아스포라 사이에는 탈무드라는 국제법이 규율하고 있어 신뢰와 신용이 생명이었다. 이후 환어음은 실물화폐의 부족분을 메우는 역할을 했으며, 이를 통해 상품거래를 더욱 원활하게 만들었다.
환어음은 발행인이 수취인에게 일정 금액을 빌리고, 합의한 기한에 발행지가 아닌 다른 장소에서 자신의 대리인으로 하여금 환어음 소지자에게 빌린 돈을 지불하겠다는 일종의 지불 명령서이다. 두 지역 간의 거래에 실물화폐 대신 환어음이라는 종이 서류로 거래관계를 청산할 수 있었다. 환어음은 여러모로 편리했다. 금화나 은화를 직접 운송하는데 드는 비용이나 위험이 없었다. 하지만 환어음을 발행하려면 여러 시장에 사업 조직과 거래처가 있어야 했다. 이런 연유로 당시 유럽에서 가장 넓은 상업망을 가지고 있었던 베네치아 유대 상인들이 환어음 거래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
15세기 초 베네치아 무역의 근간인 후추 교역액이 30만 두카토에 달했다. 금 3.56g을 함유한 두카토 금화가 당시 국제 기축통화였다. 이슬람 세계와의 무역에서 베네치아 상인들은 두카토로 지불했고 이슬람 상인들을 인도양에서 향신료를 구입할 때 베네치아 두카토로 결제했다. 그런 연유로 오늘날에도 인도와 동남아시아 향신료 생산지들에서 베네치아 두카토가 발굴되곤 한다. 15세기 말 중세가 끝날 때까지 400년 동안 모든 향신료 무역은 베네치아에서 이루어져 전 유럽의 무역업자들이 향신료를 사기 위해 베네치아로 몰려들었다. 베네치아 유대 상인들의 독점으로 다른 나라 상인들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그러자 다른 나라들은 인도로 가는 새로운 길 특히 바닷길 개척 가능성을 진지하게 검토하기 시작했다.
◇역사를 바꾼 대항해 시작되다

14세기 초 무역을 중시해 실크로드를 보호해 주던 원(元)나라의 힘이 떨어진 틈을 타 튀르크족이 오스만제국을 건국해 동서무역에 끼어들어 무역로를 차단하자 향신료 가격이 폭등했다. 1453년 이들이 동로마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 함락해 더 이상 후추를 구입할 수 없게 된 기독교 상인들에게는 인도로 가는 새로운 항로 개척이 절실했다.
향신료 무역을 이슬람을 통하지 않고 직접 시도한 것이 15세기 말 포르투갈과 스 페인의 대항해 시도였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이 그 촉발제였다. 이 책에 향신료 산지에 대해 자세히 적혀 있었다. “중국 동쪽에 황금의 나라가 있으며, 그곳 사람들은 후추를 물 쓰듯 한다”는 대목에서 유럽인들의 눈은 휘둥그레졌다. 황금과 후추가 흔하다니 탐험가들의 몸이 달아오를 수밖에 없었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향신료 획득 경쟁은 결국 항로를 동쪽으로 향한 포르투갈이 서쪽으로 향한 스페인을 이기고 무역권을 독점하게 된다. 대신 항로를 잘못 잡은 스페인은 신대륙을 발견했다.
◇지구가 둥글다고 믿은 콜럼버스
지금도 유대인이란 가설이 끊이질 않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1492년 10월 유대인 선원들과 함께 신대륙을 발견했다. 콜럼버스는 제노바 근처 사보나에서 모직물 무역상 도메니코 콜론과 스페인계 유대인으로 추정되는 어머니 수산나 폰타나로사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법적으로는 제노바 사람이었으나 이탈리아어를 쓰지 않고 스페인어를 썼다. 그의 아버지도 스페인계 유대인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 무렵 모직물 무역상은 대대로 유대인의 직업이었다. 그리고 콜럼버스는 영어식 이름이고 그의 실제 이름은 콜론(Colon)이다. 당시 ‘콜론’은 이탈리아에 살고 있었던 유대인들이 흔히 사용했던 이름으로 그 스스로도 다윗 왕과 관련 있다고 자랑하곤 했다. 최근 유대 연구가들에 따르면 콜럼버스는 1391년~1492년 사이에 스페인에서 추방된 유대인이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중세인은 지구가 평평해서 먼 바다로 나가면 절벽 아래로 떨어진다고 생각했다. /위키피디아
콜럼버스는 어릴 때부터 항해에 관심을 가져 10대부터 아버지를 도와 직물·포도주 매매를 위해 지중해와 아이슬란드까지 항해했다. 1474년 에게해 키오스섬에 유향을 사러 가는 항해에도 참가했고, 20대에는 마데이라섬으로 설탕 사러 간 적도 있었다. 이렇게 콜럼버스는 이미 아이슬란드, 마데이라, 영국, 아프리카 가나를 오가는 해상무역상이었다. 그는 제노바의 상선대 선장이 된 뒤 마르코 폴로와 프톨레마이오스 등의 책을 탐독하면서 지구가 둥글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그는 마르코 폴로의 글을 읽으면서 흥미로운 대목이 나오면 그 옆에 메모할 정도로 탐독했다.
마르코 폴로는 몽골 대칸이 지배하는 영역이 대인도, 중인도, 소인도 등 ‘세 개의 인도’로 되어 있다고 기록했다. 그래서 콜럼버스는 이사벨 여왕의 친서를 받아 1492년 대칸이 지배하는 ‘인도’를 향해 출항한 것이다. 지금도 대부분의 사람은 콜럼버스가 찾아가려던 ‘인도’가 우리가 아는 ‘인도’와는 완전히 다른 나라라는 사실을 잘 모르고 있다. 아무튼 그가 휴대한 친서의 수신인은 ‘인도’를 지배하는 몽골의 ‘위대한 칸’이었다. 그는 자기가 도착한 곳이 대칸이 통치하는 대륙에서 아주 가까운 섬이며, 근처에는 은이 풍부한 나라로 묘사된 ‘지팡구’ 곧 일본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어려서부터 선원 생활로 잔뼈가 굵은 콜럼버스는 서쪽 바다 저 멀리로 돌아가면 인도와 지팡구에 도달 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지팡구(Zipangu)란 ‘황금이 나는 땅’이라는 뜻인데, JAPAN이라는 명칭이 바로 여기서 유래했다.
◇유대인이 만든 유럽 최초의 근대적 지도

▲1375년 아브라함 크레스쿠 지도 자료사진. /서현우
당시 유대인 수학자나 과학자는 남들보다 1세기 먼저 지도와 나침반을 만들어 먼바다 항해에 필요한 준비를 했다. 마르코 폴로의 글이 유럽인의 지리 지식과 세계관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지를 잘 보여 주는 것이 1375년 스페인의 마요르카섬에서 제작된 카탈란 지도(Catalan Atlas)이다. 이는 유럽 최초의 ‘근대적’ 지도로 유명하다. 이 지도에는 ‘동방견문록’에 의해 처음 알려진 지명들이 세밀하게 기록되어 있다. 모두 8장으로 이루어진 이 지도는 동방 세계에 4장을 할애했다. 동방 세계에 대한 유럽인의 지리 지식이 얼마나 풍부해졌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지도와 나침반의 스승’으로 불린 유대인 아브라함 크레스쿠가 바로 이 지도를 만들었다. 이후 이 지도는 항해에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그의 아들 자코모 드 마조르카 또한 ‘지도의 유대인’이라고 불리며 사그레섬 해상 관측소 소장으로 일했다.
◇콜럼버스, 풍운의 꿈을 안고 리스본으로 가다
콜럼버스는 1479년 결혼했는데, 그 무렵 피렌체의 의사이자 지리학자이며 수학자인 파올로 토스카넬리는 대서양을 서쪽으로 항해하면 향신료의 나라에 도착할 수 있다는 항해계획서를 포르투갈 교회지도자 마린스를 통해 포르투갈 왕 알폰소 5세에게 전달했으나 그리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알게 된 콜럼버스는 1481년 포르투갈 왕에게 자신이 직접 도전해보고 싶다는 의지를 피력했다. 그리고 콜럼버스는 대항해의 꿈을 품고 제노바를 떠나 포르투갈에서 지도 제작소를 운영하며 자신의 꿈을 펼칠 기회를 찾기 위해 당시 ‘지구의 끝’이라고 불리는 리스본으로 갔다. 실제 유럽 사람들은 리스본 위에 위치한 ‘Cabo da Roca’라는 곳을 지구의 끝이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그곳에 가면 지구 끝에 다녀갔다는 증명서를 유려한 고어체로 발급해 관광객들한테 팔고 있다.
콜럼버스가 리스본에 도착했을 때 이미 돈 많은 유대인들이 대서양이 바라보이는 전망 좋은 곳에 빼곡히 지도 제작소들을 차려 놓고 있었다. 콜럼버스도 그 한편에 ‘콜럼버스 지도 제작소’ 간판을 내걸었다. 당시 모험가들은 인도항로 개척을 위해 희망봉을 돌아가는 방법을 시도했는데 번번이 장애물에 부딪혀 성공하지 못했다. 하지만 콜럼버스의 생각은 달랐다. 대서양을 서쪽으로 가로질러 계속 항해하면 지구는 둥글기 때문에 언젠가는 인도에 닿으리라 판단했다. 이후 그는 포르투갈의 후앙 2세와 스페인의 공동 왕들에게 지원을 요청했으나 그의 계획이 비현실적이라는 이유로 번번이 거부되었다.
◇콜럼버스, 이사벨 여왕에게 도움을 청하다

▲콜럼버스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이사벨 여왕과 페르난도 왕. /위키피디아
장장 17년간을 돈줄을 찿아 헤매던 콜럼버스가 우여곡절 끝에 여왕과 잘 아는 팔로스항의 수도원장 마르티나 신부의 주선으로, 1486년 1월 이사벨 여왕을 처음 알현해 탐험계획을 설명하고 도움을 청했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 소개된 ‘대칸의 나라(원나라)’ 를 찾아가겠다는 이 계획은 특별 심사위원회에 올려졌으나 쉽게 결론이 나지 않았다. 그 무렵 스페인은 이슬람과 전쟁이 막 끝난 시기여서 국고가 텅 비어 있었다. 이사벨 여왕은 콜럼버스를 당시 사령부 겸 임시 궁전이던 코르도바 성으로 불렀다.
◇음양으로 도움 준 유대인들
당시 궁전에는 3인의 마리노 곧 개종 유대인들이 있었다. 궁정 유대인 가브리엘 산체스, 시종 J. 가브레로, 왕실 조세관리관 루이스 데 산탄겔이 그들이었다. 그들은 이사벨 여왕에게 왕실 재정 사정이 궁핍함을 설명하고 만일 콜럼버스가 성공하기만 한다면 거대한 부를 거둘 수 있다고 권했다. 당시 유럽에는 왕실 내에 ‘궁정 유대인(Court Jew)’이란 특이한 직종이 만들어지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유대인들이 워낙에 재정 관리와 금융 섭외에 유능했기 때문이다. 궁정 유대인은 오늘날의 재무장관 격이었다.

▲산타마리아 호. /위키피디아
여왕은 콜럼버스의 요구가 많아 처음에는 부정적이었으나 왕실 조세관리관 루이스 데 산탄겔이 자신이 탐험 비용을 부담해도 좋다는 발언에 자극받은 여왕이 결국 그를 전폭 지원하기로 했다. 콜럼버스는 여왕과 산타페 협약을 체결했다. 그는 이 협약에서 세습권을 가진 제독이 되었고, 그가 개척할 식민지의 총독이 되었으며, 개척한 땅에서 얻는 수입의 10분의 1을 소유할 자격을 얻었다. 여왕의 명을 받은 조세관리관이 항해 비용에 충분한 1만7천 대랏트를 콜럼버스에게 마련해 주었다. 이사벨 여왕은 자금 제공 외에도 팔로스 시(市)로 하여금 선박 2척을 내주게 하고, 대항해를 기피하는 승무원 모집에도 과거의 죄를 면죄해 준다는 조건으로 선원들을 모을 수 있도록 해 주었다. 또한 팔로스항에 사는 핀손이라는 유능한 선장이 자기 소유 선박 산타마리아호와 함께 참가했다. 드디어 1492년 8월 3일 산타마라아호을 중심으로 3척의 배에 120명의 선원을 태우고 스페인 팔로스항을 떠나 인도로 출발했다.
당시 콜럼버스의 항해를 적극 지지했던 여왕의 재정담당관도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이었으며 궁정의 후원자들은 주로 이러한 개종 유대인들이었다. 그리고 그와 같이 일했던 선원은 물론 통역관, 지도제작자, 항해기구 제작자 등 대부분이 유대인이었다. 이렇듯 콜럼버스의 대항해에는 음양으로 유대인 과학자들과 선원들의 도움이 컸다.
◇남반구 항해를 가능케 해 대항해 시대를 연 유대인의 ‘천측력(天測曆)’
그 무렵 항해가들은 아프리카 서해안을 따라 탐험했는데 북반구에서는 북극성의 고도를 측정하면 대략의 위도(latitude)를 구할 수 있었다. 경도(longitude)는 연안을 따라 항해했기 때문에 큰 문제가 아니었다. 위도는 적도를 기준으로 북쪽 또는 남쪽으로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를, 경도는 본초자오선을 기준으로 동쪽 또는 서쪽으로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를 나타내는 위치이다. 그러나 남반구로 내려가면 북극성을 볼 수 없어 위도를 구할 수 없었다. 이를 해결한 사람이 바로 랍비이며 천문학자이자 콜럼버스의 멘토인 아브라함 자쿠토였다. 그는 콜럼버스에게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각인시킨 인물이다. 자쿠토는 유대교 신비주의 경전 ‘조하르’를 읽고 지구가 둥글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의 믿음을 과학적으로 증명했다. 곧 해의 고도를 측정하는 방법을 고안해 위도와 태양의 적위(Declination)를 계산해 놓은 <천측력>을 히브리어로 간행했다. 이로써 북극성 없이도 위도를 구할 수 있게 되어 남반구 항해가 가능해졌다. 이로써 대항해 시대가 열리게 된다.
콜럼버스가 항해를 떠나던 해 3월에 이사벨 여왕은 유대인 추방칙령을 내렸다. 당시 이렇게 추방당한 사람 중에 유대인 천문학자 자쿠토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포르투갈로 건너가 포르투갈 왕실 천문학자가 되었다. 자쿠토는 포르투갈 왕 마누엘 1세를 설득해 바스쿠 다가마가 인도항로를 개척하는 데 일조했다. 콜럼버스는 자쿠토가 작성한 항해 지도를 썼고, 유대인 요세프 베치뇨가 개발한 항해기구를 사용했으며, 통역관이었던 루이스 데 토레스도 랍비 출신으로 4개 국어에 능통했다. 이런 일련의 사실을 본 프랑스 학자 샤르르 드 라 론시에르는 ‘이들 중세 유대인 과학자, 지도제작자, 천문학자들이 ‘아프리카를 도는 항해에서 신대륙 발견에 이르기까지 위대한 발견의 토대가 되었다’고 평했다.
콜럼버스의 마지막 난관은 선원 모집이었다. 저 넓은 바다 끝에 가면 벼랑 아래로 떨어져 죽는다는 공포감 때문에 배를 타겠다는 사람이 없었다. 우여곡절을 거치며 콜럼버스의 끈질긴 노력으로 선원들이 채워졌다. 선원의 4분의 1은 승선을 조건으로 사면받은 죄수들이었다. 콜럼버스의 첫 항해에 탑승한 선원 중 우수한 뱃사람, 독도사, 통역, 외과의사 등 중요 스탭진은 유대인들이었다. 콜럼버스가 이런 유대인들을 만났다는 것은 큰 행운이었다. 어쨌든 콜럼버스와 선원들이 한 팀이 되어 거친 대서양을 횡단하여 1492년 10월 아메리카 신대륙 발견의 위업을 이룰 수 있었다.
[4] 대항해 시대의 개막
신대륙과 인도 항로 발견 등 대항해 시대를 연 항해 혁명
항해 혁명을 성공시킨 진원지 포르투갈
신대륙과 인도 항로 발견 등 대항해 시대를 연 항해 혁명은 인류사에 큰 획을 긋는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이로써 해상 무역과 문물 교류가 활성화되어 서양이 비로소 동양을 추월해 세계사의 주역으로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항해 혁명을 성공시킨 진원지 포르투갈에 대해 알아보자.
유럽의 서쪽 끝에 놓인 포르투갈은 대서양을 접하고 있는 해양 국가이다. 포르투갈 사람들은 이슬람이 이베리아반도를 지배하고 있을 때 그들로부터 많은 해양 기술을 습득했다. 이슬람은 갤리선을 범선으로 대체해 돛만으로도 바람을 거슬러 항해할 수 있었다.
그 무렵 이슬람은 경제력, 군사력, 과학 기술, 문화 등 모든 면에서 서양을 압도하고 있었다. 이베리아반도가 이슬람의 지배를 받는 동안에 아라비아에서 농사법, 모직물 제조, 항해, 천문, 지리, 지도 제작, 조선 기술, 행정·사법·군대 제도 등이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도입되거나 개선, 개량되었다.
역대 포르투갈 왕들은 해상 강국을 꿈꾸며 국민에게 해운을 장려하여 많은 인센티브를 주었다. 특히 페르난두 왕(재위 1367∼1383)은 100톤 이상의 큰 배를 건조할 경우, 왕실 소유 삼림의 나무를 자유롭게 사용토록 했다. 그리고 배를 건조하기 위해 수입하는 원자재는 관세를 면제했다. 외국에서 건조된 100톤 이상의 배를 수입할 때도 세금을 물리지 않았다. 배를 만드는 사람이나 사는 사람들은 해운업에 진력할 수 있도록 병역도 면제해 주었다. 또한 선박이 난파되거나 적에게 강탈되었을 때 선주에게 보상을 해주는 해상보험 제도도 실시하는 등 해운 발전에 노력했다.
◇포르투갈의 세우타 점령, 서구 최초의 해외 식민지
▲유럽 대륙에서 보이는 북아프리카의 세우타. /위키피디아
포르투갈은 제일 먼저 해상 팽창의 뇌관 구실을 했다. 1415년 엔히크(Henrique) 왕자는 아버지 주앙 1세가 이끄는 아프리카 세우타 정복 전쟁에 참전했다. 엔히크는 포르투갈에서 쫓겨 간 무어인들이 다시 포르투갈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섬멸하는 게 목표였다. 1415년 8월 15일 지브롤터 해협의 세우타 앞바다에 238척의 포르투갈 군함이 나타났다. 4만5000여 포르투갈 군인은 무어인들을 백병전으로 격파하고 세우타를 함락시켰다. 이는 탐험 시대를 여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슬람권의 중요한 교역 도시인 ‘세우타’ 점령은 유럽이 처음으로 자기 대륙 바깥에 건설한 최초의 ‘해외 식민지’였다.
세우타는 지브롤터 해협을 사이에 두고 스페인 남단의 지브롤터와 마주하고 있다. 세우타는 카르타고인들이 건설한 항구로 지중해 출입구를 지키는 전략적인 요충지인 관계로 로마· 반달· 비잔틴의 지배를 번갈아 받았고, 771년부터는 아랍령, 1415년부터는 포르투갈령, 1580년부터는 스페인령으로 바뀌었다. 지금도 스페인 관할 지역이다.
포르투갈의 세우타 침략은 무어인의 침략 방지와 해상 무역 확대를 위한 전략적 요충지를 선점한 의미도 있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금을 약탈하기 위한 것이었다. 지브롤터 해협의 세우타가 10세기부터 순도 높은 금화를 주조한 금의 산지라는 점이 포르투갈의 정복 의욕을 부추겼다. 당시는 금 소유량이 곧 국부의 지표였다. 점령 직후부터 포르투갈은 세우타 금화를 그대로 본떠 포르투갈 금화를 찍어냈다. 아프리카의 금이 포르투갈에 쏟아지고 있다는 소식은 유럽 각국을 바다에 주목하게 만들었다. 특히 포르투갈이 금화를 찍어 유통시키자 그때까지 금화가 없었던 스페인이 크게 자극받았다. 이후 세우타 점령은 세계사의 흐름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대항해로 지리상의 발견과 식민지 경쟁이 봇물처럼 터졌다.
◇세우타에서 항해 왕자 엔히크의 꿈이 영글다
그런데 정작 엔히크가 세우타에서 본 것은 무어인들의 엄청난 향신료였다. 그곳에는 인도와 중국, 아프리카에서 온 물건을 파는 상점이 수천 개나 있었다. 후추, 정향(丁香) 등 다양한 종류의 향신료가 창고에 무더기로 쌓여 있었다. 엔히크는 이슬람 상인을 거치지 않고 향신료를 직접 수입할 수 있는 항로를 개척한다면 포르투갈을 부강한 나라로 만들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의 생각은 이미 동양으로 향하고 있었다. 향신료 길에 오스만제국이 버티고 있어 바다로 가는 수밖에 없었다. 본국으로 돌아온 엔히크는 선대를 편성해 아프리카 서해안에 있는 마데이라 제도와 포르투 산투 제도를 포르투갈령으로 만들었다. 1419년 그는 포르투갈 남단 알가르베 주의 총독이 되었다.
◇엔히크, 세계 최초의 항해학교 설립
▲리스본 항구의 범선 모양 탑 옆면에는 엔히크 왕자를 선두로 마젤란과 바스쿠 다가마를 비롯한 신항로와 신대륙 발견에 참여했던 인물들의 조각상이 한 줄로 서있다. /위피키디아
엔히크는 아프리카 서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돌아 인도로 가는 항로 개척이 목표였다. 이를 위해 그는 사그레스 항구에 항해학교를 세웠다. 그리고 그리스 조선 기술자, 유대인 천문학자와 지도 제작자들을 초청했다. 그는 세계 최초로 항해학교를 설립해 우수한 항해 기술자들을 길러내는 한편 조선소를 만들어 선박을 개량하는 등 조직적으로 치밀하게 대항해를 준비했다. 그의 위대한 점은 그간의 경험에 의존하기보다는 과학적인 시스템에 의해 대항해를 준비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기독교 지리학자들이 그린 조잡한 지도를 버리고 대신 훈련된 항해사들이 실제 답사해서 그린 해도를 하나하나 맞추어 정확한 지도를 제작했다. 정확한 지도야말로 항해의 시작이자 끝이었다. 이 분야에서도 세계 곳곳에 커뮤니티를 갖고 있는 유대인들이 탁월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유대인들은 수학, 정밀 도구의 제조, 지도와 항해도 제작 등에 뛰어난 기술자들이었다. 그는 당시 최고의 지도 제작자로 평가받는 유대인 자푸다 크레스케스를 스페인의 마요르카섬에서 사그레스로 모셔왔다.
▲삼각돛의 카라벨(caravel)선. /위키피디아
엔히크 왕자는 그가 훈련시킨 선원들에게 정확한 항해 일지와 해도를 작성하고 해안에서 본 모든 것을 반드시 기록하도록 했다. 사그레스에는 포르투갈인은 물론 유대인, 무어인, 이탈리아인, 스칸디나비아인, 여행자, 학자들이 모여들었다. 지도 제작은 정밀 과학의 수준으로 올라섰다. 또한 아직 널리 사용되지는 않았던 항해용 나침반이 사용되게 되었고, 유대인 랍비이자 천문학자 아브라함 자쿠토가 개발한 위도를 측정할 수 있는 장거리 항해 기구 아스트롤라베가 제작되었다. 이 기구 덕에 비로소 북극성을 볼 수 없는 남반구에서도 원양 항해가 가능해졌다.
◇삼각돛의 카라벨(caravel)선 개발
▲삼각돛의 카라벨(caravel)선. /위키피디아
세우타 점령은 엔히크 왕자를 스타로 만들었다. 최전선에서 공격을 주도했던 21세의 엔히크 왕자는 유럽 각국으로부터 자신들의 군대도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을 정도였다. 각국 왕실로부터 청혼도 많이 들어왔다. 그러나 엔히크의 선택은 오로지 바다였다. 각국의 청을 마다하고 조선소와 해양연구소를 설립하고 먼 거리 항해에 적합한 삼각돛의 카라벨 선을 개발했다. 카라벨 선은 삼각형의 돛을 사용해 역풍에 강할 뿐 아니라 배 밑바닥이 평탄하고 너비가 좁아 속력이 빨랐다. 삼각돛은 항해사에 한 획을 긋는 획기적 변화였다.
◇항해의 역사를 바꾼 삼각돛
삼각돛이 발명되기 전까지 바다에서 이동은 제한적이었다. 사람이 노를 젓는 갤리선 아니면 뒤편 바람을 이용해 앞으로 나가는 범선 정도였다. 바람이 앞에서 불어오면 나아갈 수 없었다. 그래서 범선은 밤에 기온이 떨어지면 육지에서 바다로 부는 바람(육풍)을 이용해 바다로 나갔다가, 낮에 반대로 부는 바람을 이용해 집으로 돌아오는 정도였다.
십자군 전쟁 이후 오스만제국에 의해 실크로드 길목이 막혀버리자, 유럽 각국은 바다를 통해 동양으로 가려고 했다. 그러나 유럽에서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양을 거쳐 수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동양까지 노를 젓는 갤리선이나 사각 돛의 범선으로 가기는 불가능했다.
삼각돛은 이슬람 선단이 지중해 해상권을 장악하면서 전해졌다. 아마 그들도 7~8세기 아랍 상인들이 동아프리카에서 인도까지 항해하는 데 사용한 다우선의 삼각돛을 보고 이를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삼각돛을 이용하면 뒤에서 부는 바람은 물론, 앞에서 불어오는 역풍에도 앞으로 나갈 수 있다. 그 이전까지의 돛은 대부분 옆으로 펼친 직사각형 모양이었다. 삼각돛은 배의 앞쪽에 달린 삼각 모양의 돛을 좌우로 회전시키면 지그재그 형태로 앞으로 나갈 수 있다. 삼각돛이 역풍에도 앞으로 나가는 원리는 돛의 바깥쪽 바람이 돛 안쪽 바람보다 빠르게 흐르면서 바깥쪽 압력이 낮아져 배를 앞으로 잡아당기는 힘이 생긴다. 이는 비행기를 뜨게 하는 양력인 ‘베르누이 원리’와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삼각돛의 발명으로 노 없이 바람만으로도 먼 거리를 운항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편서풍이 부는 북위 30도에서 60도 사이에서 해상 무역을 하기 위해서는 역풍에도 앞으로 나가는 배가 필요했다. 서유럽에서는 포르투갈의 엔히크 왕자가 삼각돛을 이용해 포르투갈에서 해안선을 따라 아프리카까지 장거리 항해에 성공했다. 이로써 드디어 대항해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바다를 이용해 운반할 수 있는 상품의 양은 실크로드를 이용하는 낙타나 말이 운반하는 상품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다양하고 규모가 커졌다.
◇최초로 적도 이남의 바다를 탐험하다
▲아프리카 보자도르곶 남단. /위키피디아
엔히크는 해양학교 출신 항해자들을 본격적으로 아프리카 보자도르곶 남단의 바다를 탐험하는 항해에 내보내기 시작했다. 이런 노력으로 포르투갈은 세우타를 기반으로 1431년에 아조레스 군도를 손에 넣었다. 그리고 1418년 정복한 마데이라와 이 섬들을 곡물, 사탕수수 경작과 인디고 염료용 대청 재배 산지로 만들었다. 특히 사탕수수와 대청은 포르투갈의 주요 수출품이 되었다.
당시는 아프리카 서안 보자도르곶을 대서양의 끝으로 보았다. 당시 뱃사람들은 그 아래 ‘암흑의 녹색 바다’에 대한 두려움으로 남쪽으로 항해하는 것을 꺼려했다. 열대 바다는 뜨겁기 때문에 바닷물이 펄펄 끓는 해역을 항해하게 되면 모두 검둥이가 된다고 생각해 항해하기를 두려워했다. 그래서 죽음의 바다로 알려진 그곳을 탐험해 보겠다는 항해자들에게는 어떤 방향으로 바람이 불어도 돛만으로 원양 항해가 가능한 크고 성능 좋은 배를 지원했다. 1434년 탐험가 질 에아네스가 도전해 카나리아 제도를 발견하고 식민지로 삼았다. 이듬해 마침내 그곳으로부터 240㎞ 정도 떨어진 보자도르곶에 도달했는데, 펄펄 끓는 바닷물이 없는 고요하고 푸른 바다였다. 공포가 사라지자 이제는 더 남방으로 항해할 수 있다는 자신이 생겼다.
◇대항해를 가능케 한 쾌속범선 캐랙선(Carrack)의 등장
▲쾌속범선 캐랙선(Carrack). /위키피디아
15세기 들어 선박의 모습이 급격히 달라졌다. 1400년대의 배는 주로 돛대와 돛이 1개씩이었다. 그러나 먼 거리 탐험에 필요한 선박으로 개량되면서 돛의 수가 3개로 늘어났다. 3개의 삼각돛만을 쓰는 가볍고 기동성이 뛰어난 카라벨선이 제작된 후 개량을 거듭해 사각 돛도 함께 쓰는 쾌속 범선이 등장했다. 삼각 돛대 하나, 사각 돛대 두개, 다시 삼각 돛대 하나, 이런 식으로 구성된 이 배는 뛰어난 기동성을 지녔다. 캐랙선은 역풍에 유리한 삼각돛과 순풍에 유리한 사각 돛의 장점을 혼용했다. 그래서 강한 계절풍을 타고 큰 바다를 항해하는 데 적합했다. 1430년 포르투갈에서 처음 만들어진 이 배는 먼 거리 항해에 안성맞춤이었다. 엔히크 왕자가 이 배를 아프리카 서해안 탐험에 사용했다. 콜럼버스의 산타마리아호도 캐랙선이었다.
◇포르투갈의 대항해
▲바스쿠 다가마의 인도항로. /위키피디아
캐랙선의 등장으로 비로소 먼 거리 항해가 가능해졌다. 15세기 말부터 16세기 초 불과 30년 사이에 콜럼버스는 신대륙을 발견하고(1492), 포르투갈의 바스쿠 다가마는 인도 항로를 개척하며(1498∼1499), 마젤란은 세계 일주를 했다(1519∼1522). 이로써 대항해 시대가 활짝 열렸다. 캐랙선 크기는 점차 커져 15세기 400톤 정도였던 것이 16세기에는 1000톤 이상이 되었다.
스페인에서와 같이 중세 포르투갈에서도 유대인들이 상업과 대부업, 의사, 관리 등 경제활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특히 1492년 스페인에서 추방당한 대략 9만명의 유대인들이 이주해 오면서 포르투갈은 스페인에 이어 유대 경제와 문화를 이어가는 곳으로 부상했다. 하지만 이곳도 영원한 안식처는 아니었다. 4년 뒤 포르투갈도 유대인 추방령을 내렸다. 야망이 큰 마누엘 왕이 반유대 정책을 고수하는 스페인 왕국과의 정략결혼을 위해 유대인 추방을 결행한 것이다. 1496년 12월 칙령에 의하면, 이듬해 10월까지 개종을 거부한 모든 유대인이 떠나야 했다. 그래도 스페인보다는 시간을 많이 준 편이다.
부유한 유대인들은 재산을 갑작스럽게 처분할 수 없어 임시방편으로 영세를 받아 개종을 택했다. 이처럼 이곳에서도 많은 유대인이 가톨릭으로 개종하여 적은 수의 유대인만 추방되었다. 포르투갈은 스페인과는 달리 유대인들에게 그렇게 모질게 굴지는 않았다. 스페인 왕국이 그랬듯 포르투갈도 유대인들이 거주했던 시기가 대항해와 경제적 번영기를 함께하는 전성기였다.
◇새로운 운송 수단의 발달이 권력 이동을 야기하다
경제사에서 새로운 운송 수단의 출현은 곧 권력의 이동을 의미했다. 말이 끄는 마차 덕분에 중앙아시아 부족들이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의 권력을 쥘 수 있었다. 기동성이 좋은 유목 민족이 농경 민족을 제압한 것이다. 이러한 사례는 그 뒤에도 계속된다. 마차가 내달릴 수 있는 도로를 잘 닦은 로마제국이 대규모 기동력을 바탕으로 유럽을 제패했다. 이후 치고 빠지는 기마술이 뛰어난 몽골군이 동서양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했다.
육지 운송 수단 다음으로 발달한 것이 해상 운송 수단이다. 선박 제조술과 항해술이 월등히 앞섰던 중국이 정화 선단의 대항해에서 보여주듯이 당시 조공 무역을 통해 주변 국가들을 복속시켰다. 그 뒤 중국이 외부 오랑캐와의 관계를 단절시키겠다고 일방적으로 자국민의 출항을 금지시킨 ‘해금령’이 세계사의 흐름을 한순간에 바꾸어 놓았다. 선박은 모두 해체되거나 불살라졌다. 이러한 해금령 이후, 오히려 중국에서 발명되었던 나침반을 실제로 항해에 실용화시키고 선박에 키를 단 것이 서구였다. 이로써 중국이 물러난 자리에 서구가 바다의 주도권을 쥐게 된다.
이 가운데에서도 중국의 나침반을 일찍 받아들여 사용한 이슬람이 지중해 해상권을 장악했다. 이후 노잡이들을 이용한 대형 갤리선의 출현은 해적으로부터의 방어는 물론 획기적으로 유통 물량을 늘려, 베네치아가 지중해 상권을 쥐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그리고 그 뒤 대형 함대들로 구성된 무적 함대의 출현은 스페인을 제국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같은 시기에 포르투갈이 만든 쾌속 범선은 콜럼버스의 대항해 시대를 열어 신대륙을 발견케 했다. 16세기에 지도 제작 기술이 발달하여 지도와 해도가 크게 개선되었다. 이후 보급 선박의 대량 제작 기술과 해상운임 경쟁력이 가장 앞섰던 네덜란드가 해상 교역을 주도하게 된다.
그 뒤 산업혁명의 원동력인 증기기관의 발명으로 인한 증기선의 출현은 그간 바람에만 의지하던 해상 운송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는 또 육지에서 증기 기관차로 이어져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을 만들어냈다. 이후 운송 수단의 화려한 꽃이 핀 것은 미국이었다. 대륙 횡단 철도의 완성과 자동차의 대량 생산 및 항공 산업의 발달은 미국을 세계 경제의 중심에 올려놓았다. 이러한 운송 수단의 발달 경로와 함께하는 경제 권력의 이동은 공교롭게도 유대인의 이동 경로와 궤적을 같이하고 있다.
[5] 서양보다 빨랐던 동양과 이슬람의 대항해 시대
이슬람, 서양과 화폐 통합 이루고 중국과 교류하다
초인플레이션이 제국을 무너트리다
◇대항해 시대에 앞서 이미 8세기에 구축된 해상 실크로드
▲장보고 시대 해상실크로드. /위키피디아
일반적으로 ‘대항해 시대’라면 15∼16세기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시대를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이는 3차 대항해이다. 세계 해양 무역사를 보면 이미 8세기에 동양과 이슬람의 상선단이 해상 실크로드를 완성했다. 이것이 1차 대항해다. 이들은 양쯔강 하구 곧 상하이 입구의 주산군도, 영파(명저우), 양저우 등에서 만나 교역을 했다.
그 무렵 이슬람 상인들은 삼각형의 세로 돛을 단 ‘다우선’으로 페르시아만에서 아프리카 동해안, 인도, 동남아시아, 중국까지 항로를 개척했다. 다우선은 작지만 조종하기가 매우 편리한 배로 아프리카와 인도, 아시아 등 대양을 연결했다. 이때 이슬람 상인들의 항로는 중국 광저우 지나 양쯔강 하구의 양저우에까지 이르러 그곳에 이들의 거류지가 형성되면서 백제, 신라와 이슬람의 교류도 이뤄졌다.
◇백제, 신라와 이슬람의 교류
▲불어로 된 이 지도는 고대 한민족 세력권 곧 한반도와 발해만 내역과 주산군도를 비롯한 양쯔강 좌우, 그리고 규슈 등이 같은 색으로 표시되어 있다. /위키피디아
당시 주산군도와 영파에는 백제와 신라 유민들이 많이 건너와 살고 있었고 비단과 도자기, 철광석 교역 등 본국과의 교류가 빈번했다. 그들은 연안 항로 이외에도 계절풍과 해류를 이용했다. 주산군도와 규슈 그리고 전남 영암 사이에는 구로시오(흑조) 해류가 북쪽으로 흘러 이를 이용해 뗏목을 이어 만든 연선과 선박 운행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이런 연유로 주산군도에는 심청의 사당이 있고 우리 민족의 백김치와 젓갈이 있다고 한다.
동서양의 뱃길은 고대에도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대 로마에는 비단이 유행하여 1세기 중엽에 이미 로마에 비단 전문시장이 들어섰다. 로마인들은 비단이 두 나라로부터 왔다고 했다. ‘세리카’와 ‘시나이’였다. 로마인들은 육지를 통해 들여온 비단은 ‘세리카’라 불리는 중국에서 온 것이고, 바다를 통해 들여온 비단은 ‘시나이’라는 나라에서 왔다고 구분했다. 그러나 역사학자들은 세리카나 시나이가 모두 중국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시나이가 ‘신라’를 뜻하거나 주산군도에 있었던 ‘신라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당시 신라와 로마가 어떤 형태로든 교류가 있었다. 유독 신라 고분에서만 고대 로만 글라스가 발굴되고 있다.
◇다우선의 활약
▲다우선. /위키피디아
페르시아만과 인도양에서 주로 쓰였던 다우선의 기원은 명확하지 않다. 다만 고대 수메르 문명과 인더스 문명의 교류가 활발했던 점을 보면, 이 시기에 페르시아만과 인도양을 오갔던 다우선을 추정할 수 있다. 실제 ‘네이버 백과사전’에 보면, 정수일 박사가 “고대 인도양에서 항해하던 선박으로, 삼각돛을 단 목조선 일반에 대한 범칭. 일찍이 5000년 전부터 다우선은 인도양에서 부는 계절풍을 타고 메소포타미아의 우르와 인도의 모헨조다로 사이를 항해하면서 교역에 사용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렇듯 고대로부터 사용했던 다우선은 목재와 목재 이음을 쇠못이 아닌 노끈으로 꿰매어 묶었다. 노끈으로 묶은 배라 튼튼하지 못한 단점도 있지만 암초가 많은 바다에서는 장점도 있었다. 중세 여행가 이븐 바투타(1304-1368)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야자섬유인 칸바르(qanbar)는 배를 꿰매는 데 쓰는 노끈을 말한다. 인도나 예멘의 배들은 이 노끈으로 꿰맨다. 왜냐하면 두 지방의 바다 밑에는 암초가 많아 쇠못을 박은 배의 경우 못이 암초에 부딪히면 깨지고 만다. 그러나 노끈으로 꿰매면 노끈이 젖어 있어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
◇이슬람, 서양과 화폐 통합 이루고 중국과 교류하다
6세기에 발흥한 이슬람은 신정일치의 종교와 형제애로 다져진 ‘움마 공동체’를 만들어 빠른 시간에 사라센 제국을 건설했다. 이슬람은 7세기 말에 서양과 화폐 통합을 이루었다. 곧 동로마 제국의 금화와 사산왕조의 은화를 통합했다. 금화 1닢은 은화 22닢과 교환되었다. 이로써 서양과 이슬람의 화폐 교환이 한결 수월해져 무역이 활성화되었다.
▲계획도시 바그다드. /위키피디아
750년 압바스 왕조가 이슬람 세계를 장악하자 수도를 시리아의 다마스쿠스에서 동양과 좀 더 가까운 메소포타미아에 계획 도시 바그다드를 만들어 옮겼다. 이후 바그다드는 이슬람 세계의 중심지로 인구가 150만명에 달하는 세계 최대 도시가 되었다. 당시 바그다드와 견줄 수 있는 도시는 당나라 수도 장안과 동로마 제국 수도 콘스탄티노플 정도였다.
이후 이슬람은 인도와 남중국해로 해상 무역 반경을 넓혀나갔다. 삼각돛의 ‘다우’선으로 비단, 도자기 등 각종 교역 품목을 실어 날랐다. 당시 해상 실크로드 무역은 부의 원천이었다. 외국 무역상들이 중국 광저우로 몰려들었다. 광저우와 그 인근에만 20만명의 이슬람 상인과 유대 상인, 페르시아 상인들이 거주하는 자치 구역이 있을 정도였다.
875~884년에 발생한 ‘황소의 난’ 때 광저우를 점령한 반란군들은 이들 중 12만명을 학살했다. 특히 유대 상인 4만명이 살해되어 광둥 지역 유대인 정착촌은 거의 전멸하다시피 했다. 이슬람 상인들은 이 같은 ‘차이나 리스크’에 충격받아 믈라카 해협의 작은 섬으로 거점을 옮겼다. 이후 중국과 이슬람 상인은 인도 남부 항구 퀼론(쿠이론)을 경계로 동서 해역에서 각각 해상 무역을 담당했다.
◇은 부족 사태로 어음이 출현하다
이슬람 상인과 중국 상인의 해상 교류로 인도양 주변 해안 도시들의 상업이 활발해지자 유라시아 경제는 급속도로 발전했다. 게다가 중국은 비단과 도자기 수출 대금을 은으로만 받았다. 그러자 은 공급량이 경제 팽창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10세기에 이슬람 세계는 극심한 은 부족 현상을 겪게 되었다. 중국은 은이 조세의 기본이라 은이 금에 비해 고평가되었는데, 서양의 금과 은 교환 비율이 1대12인데, 이슬람은 1대9, 중국은 1대6 정도였다. 당연히 서양과 이슬람의 은이 고평가된 중국으로 흘러 들어갔다.
이러한 은 부족을 극복하기 위해 이슬람 지역에서 외상 거래와 어음이 탄생했다. 당시 이슬람 사회의 유대인 공동체와 이슬람 움마 공동체는 그들의 경전인 탈무드와 코란이 국제법 역할을 해 먼 거리에 위치한 공동체 간에도 서로 신뢰하며 거래할 수 있었다. 특히 유대인 공동체는 디아스포라 간의 오랜 정보 공유 전통으로 지역별 환시세에 정통했다. 그들은 시장에서 서로 다른 화폐를 바꾸어 주는 환전상 업무를 하면서 들고 다니기 무겁고 위험한 금속 화폐 대신 다른 지역의 유대인 공동체에서도 통용되는 어음과 수표를 960년께부터 발행함으로써 부족한 은화를 보충했다.
그 뒤 연이어 일어난 시아파의 봉기로 바그다드 주변이 혼란에 빠졌다. 그러자 경제와 무역의 중심이 이슬람에서 지중해로 옮겨 갔다. 중세 베네치아에서는 유대 상인과 이탈리아 상인들이 해상 무역을 발전시켰고, 어음도 이들을 따라 여러 도시로 퍼져나갔다.
◇중국, 어음이 지폐로 발전하다
중국에서도 이슬람과 비슷한 시기에 어음이 출현했다. 베이징과 항저우를 잇는 대운하 개발로 당나라 말기부터 강남 지역이 활발히 개발되었다. 경제 규모가 비약적으로 커지면서 거래할 때 쓸 철전과 동전이 심각하게 부족해지자 북송 시대 쓰촨에서 민간 금융업자가 철전과 동전 대신 종이로 만든 어음인 ‘교자(交子)’를 유통시켰다. 10세기 후반 발행된 ‘교자’는 철전이나 동전을 맡기고 받은 예탁 증서였다.
교자의 편리성이 입증되자 나중에는 나라가 직접 발행을 관장했다. 교자는 여진족의 금나라를 거치면서 ‘교초(交鈔)’라는 지폐로 발전했다. 원래 여진족은 동전을 기본 통화로 썼는데, 북송을 멸망시키고 화북지방을 점령한 후 구리가 부족해지자 1142년에 비단을 기반으로 지폐를 발행했다. 금나라는 동시에 은화와 동전도 발행해 금속 화폐와 지폐가 함께 통용되었다.
이후 금나라가 아래로는 남송과 싸우고 위로는 몽골과 대치하는 과정에서 전쟁 비용이 증가하자 지폐가 남발되었다. 금나라 말기인 1214년 무렵엔 초인플레이션이 발생해 1000관짜리 지폐도 발행되었다. 금나라는 화폐 개혁을 단행해 새로운 지폐인 보천(寶泉)을 발행했으나 이미 실추한 신뢰의 상실로 시장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과도한 지폐 남발로 인한 통화 붕괴는 금나라 멸망 원인의 하나로 작용했다.
◇순식간에 대제국을 건설한 몽골
▲13세기 몽골인들이 세운 대제국. /위키피디아
13세기 몽골인들이 대제국을 건설했다. 칭기즈칸이 25년간 정복한 땅은 로마제국이 400년간 정복한 땅보다 넓었고, 알렉산더 대왕과 나폴레옹, 히틀러 등 세 정복자가 차지한 땅을 합친 것보다도 넓었다. 당시 15만명의 군사로 그 넓은 땅을 정복한 것은 한마디로 기적이었다. 칭기즈칸의 사망으로 몽골군이 회군하지 않았다면 서유럽도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몽골군은 신출귀몰한 기동력 덕분에 순식간에 적들을 제압하고 정복할 수 있었다. 보통 몽골 기병 한 명이 서너 마리의 말을 끌고 다니며 바꿔 타 하루 이동 거리가 200㎞에 달할 때도 있었다.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빠른 속도였다. 적들은 전광석화와 같은 몽골군의 기습에 혼비백산했다.
고대로부터 대규모 부대가 움직일 때는 그 뒤를 따라가는 보급 부대가 있어야 했지만, 몽골군은 보급 부대를 끌고 다닐 필요가 없어 행군 속도가 빠르고 기동력 있는 작전이 가능했다. 어떻게 그게 가능했을까? 몽골군은 장병 스스로 자기 먹을 걸 안장 밑에 갖고 다니며 식사를 해결했다. 바로 말젖 분말과 육포 가루였다. 마르코 폴로에 의하면 몽골군은 4~5㎏ 정도의 말젖 분말을 휴대하고 다니다가 아침 무렵에 500g 정도를 가죽 자루에 넣고 물을 부은 다음, 저녁 때 불려 먹었다고 한다. 그러나 전투 중에는 육포 가루를 물에 타 먹었다. 특히 전쟁 중에 불을 피워 조리를 할 필요도 없어 부대가 적에게 쉽게 노출되지도 않았다.
그리고 몽골은 전 유라시아를 통일했기 때문에 기존의 실크로드 이외에 초원길이 더 뚫렸다. 그들은 네 개의 중요한 동서 교통로, 곧 ‘천산북로, 천산남로, 서역남로, 초원길’로 아시아와 유럽을 이었다. 그리고 통행로 요소요소 마다 마구간과 숙소를 겸한 역참을 세웠다. 이는 동서 무역을 위한 무역 진흥책이었다.
◇은본위 지폐로 화폐 통일을 이루다
원나라 초기만 해도 은과 비단이 주요 화폐였다. 교초 지폐는 제대로 유통되지 않았다. 금나라에서 관료로 일했던 야율초재는 칭기즈칸의 눈에 들어 원나라에서도 재무 담당 관료로 일했다. 그는 금나라에서 사용하던 지폐를 활용할 것을 건의해 2대 황제 오고타이 때 교초를 발행했다. 원나라 때 시행한 역참제로 안전하게 열린 실크로드는 동서 무역의 비약적인 활성화를 가져왔다. ‘금 항아리를 든 여성이 제국의 끝부터 끝까지 걸어가도 아무런 일이 없을 것이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원나라는 각 지역의 도시와 항구 그리고 나루터와 관문을 통과할 때마다 내는 통행세나 관세를 없애고 모든 물품의 세금은 마지막 판매지에서 한 번만 지불토록 했다. 그 결과 상업과 무역이 활성화되었다. 육로뿐 아니라 해상 교역도 활발했다. 천주 항구에만 1만5000척의 선박이 해상 수송에 종사했다.
▲교초. /위키피디아
본격적인 지폐 시대가 열린 것은 5대 황제 세조 쿠빌라이가 중상주의 정책을 취하면서부터였다. 그는 교역 활성화와 안전을 보장하는 지폐의 사용을 빠르게 확대하기 위해 은과 비단에 기반한 냥(兩) 단위 교초(지원통행보초)를 발행했다. 이는 은 1냥을 교초 10관으로 정해 유통시킨 태환 지폐였다. 원나라 교초는 동판으로 인쇄해 황제의 옥새를 날인해 발행되었다. ‘위조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문구도 새겨 넣었다. 덕분에 대량의 주조비용이 절약되면서 상거래가 활발해졌다. 쿠빌라이 초기엔 금나라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지폐와 은의 철저한 교환 비율을 지켰다. 은을 확보한 만큼만 지폐를 발행했다. 원나라는 지폐 인쇄를 위해 수도 연경(燕京·베이징)에 조폐창을 두었다.
이로써 은본위 제도의 이슬람권과 몽골이 공통된 통화 기반을 갖게 되었다. 이뿐만 아니라 중앙아시아 등 유라시아 지역이 모두 은을 기반으로 삼는 화폐 경제 체제 안에 통합되었다. 이로써 교초는 고려부터 시리아까지 몽골의 영향권에 있는 모든 지역에서 통용됐다.
원나라는 아예 지폐만 유통시키기 위해 모든 금은과 동전을 몰수하고 이를 지폐로 바꿔주었다. 지폐 받는 것을 거부하면 사형이었다. 이전 송나라 때 지폐를 사용하긴 했어도 이처럼 광범위한 지역에서 지폐(교초)만 통용된 것은 원나라 때가 처음이다. 당시 이곳을 방문한 마르코 폴로는 원나라의 지폐 제도에 깊은 인상을 받아 ‘동방견문록’에서 지폐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그래도 유럽인들은 아무 가치도 없는 종이가 돈 구실을 한다는 걸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초인플레이션이 제국을 무너트리다
원나라는 남송과의 전쟁과 대규모 토목공사 등 거액의 재정 지출이 필요하면 무거운 세금 징수로도 모자라 지폐를 마구 발행했다. 1274~1281년 원은 남송을 병합하고 고려의 2차 일본 침공으로 고려에 엄청난 원나라 지폐가 유입된다. 과도한 팽창 정책으로 인해 원나라가 빚더미에 앉게 되고 은을 준비금으로 예치하지 않은 지폐가 남발되자 사람들은 은을 지폐와 교환하지 않았다. 이제 교초는 은으로 교환할 수 없는 명목상의 화폐, 곧 명목 화폐로 전락했다. 게다가 위조지폐도 등장했다. 그로 인해 초인플레이션이 발생해 화폐 체계가 붕괴되면서 통화 시장이 마비되었다.
시장경제가 무너지자 원시적 물물교환 시대로 되돌아갔다. 그리스와 로마 제국이 밟던 전철을 몽골 제국도 피해가지 못했다. 이후 농민 봉기와 주원장의 발흥으로 1368년 몽골군은 몽골 고원으로 쫓겨나 원의 지폐는 휴지가 된다. 이렇듯 초인플레이션은 거대한 제국도 쉽게 무너뜨렸다.
◇중국의 대항해가 콜럼버스보다 앞서
▲중국의 정크선. /위키피디아
10세기 후반 중국 상인들이 여러 개의 사다리꼴 세로돛을 단 원양 범선인 ‘정크’선과 나침반 등 새로운 항해술을 이용해 남중국해와 인도양으로 진출했다. 이로써 2차 대항해 시대가 열렸다. 2차 대항해는 대개 10∼11세기를 기점으로 13∼14세기에 정점을 이룬다. 그리고 정화의 대항해가 대미를 장식한다.
정화 대항해에 동원된 배는 함대의 중심으로 보선(寶船·보물을 가지러 가는 배)이라 불린 대형 함선만 60여 척이었다. 보선의 크기는, 비록 과장설이 있긴 하나, 가장 큰 배의 경우 길이 151.8m, 폭 61.6m에 무게 약 3,000톤이었다고 한다. 당시로서 이 같은 함대의 규모와 배의 크기가 얼마나 놀라운 것이었는가는 1492년 콜럼버스의 1차 항해 때 참가한 인원이 120명, 함선은 3척에 불과했고 기함 산타마리아호도 230톤밖에 되지 않았던 사실과 비교하면 쉽게 알 수 있다.
▲콜럼버스의 배와 비교된 정화선단의 배 크기. /위키피디아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한 포르투갈의 콜럼버스가 길이 20m 안팎의 함선 세 척으로 인도를 찾아 나선 것은 1492년으로 정화보다 거의 1세기가 늦다. 정화의 대원정은 함대나 병력 규모, 실제 항해 거리 면에서 당시 유럽인들로서는 엄두도 내지 못하는 초대형 프로젝트였다. 그만큼 항해를 받쳐 줄 만한 나침반 등 항해술과 화약, 대포 등 과학 기술이 발달해 있었기 때문이다. 제 1차 세계대전까지 정화의 남해 원정대에 필적할 만한 함대는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주장도 있다.
정화의 원정에서 보듯이 그 당시 중국 등 동양권이 인구, 생산력, 무역 규모 등 경제적으로는 물론 군사력, 학문, 과학, 문화 등 모든 면에서 서구 문명을 압도하고 있었다. 정화의 대원정으로 동남아 곳곳에 화교 공동체가 만들어졌다. 지금도 인도양 각국에서는 정화의 초상을 모신 도교풍의 사원을 볼 수 있다. 중국인 ‘디아스포라’의 시작인 셈이다.
◇명나라의 쇄국정책, 항해선을 모조리 파괴하다
1371년 명나라 홍무제에 이어 1433년 선덕제는 다시 해금 정책을 취했다. 국경을 봉쇄하고 외국으로의 모든 여행과 교역을 금했다. 당시 일본 무로마치 막부는 왜구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하여 왜구가 극성을 부렸다. 더구나 명나라도 수도를 베이징으로 옮기고 난 후 해상 장악력이 현저히 떨어진 상태였다. 한편 해상 장악력이 떨어지자 시박사(해외 무역을 관리하고 관세를 매기던 기구)를 중심으로 한 관세 수입이 유명무실해졌다. 중앙 정부로서는 실익이 없어진 것이다.
선덕제의 해금령은 왜구를 봉쇄할 목적 이외에도 지방 토호 세력이 남쪽 해상 세력과 손잡고 일으킬지 모르는 쿠데타를 사전에 방지한 것이다. 또 양쯔강 이남의 해상 세력이 왜구 등 외국 세력과 결탁하여 정권에 도전할지 몰라 이들 관계를 사전에 단절케 하기 위한 조치였다.
명나라는 항해할 수 있는 배는 모조리 파괴했다. 섬 주민들을 모두 육지로 불러들여 무인도를 만들었다. 이러한 파괴 행위가 명나라 관리의 감독 아래 중국 전역에서 일제히 자행되었다. 항해 탐사 기록마저 모두 없애버렸다. 한마디로 닫힌 사회의 광기 어린 행동이었다.
이러한 어처구니없는 움직임은 사상적으로는 유교 관료주의와 중화사상에서 비롯되었다. 중화사상은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고 다른 나라들은 모두 오랑캐라는 사상이다. 해금령은 중화사상에 매몰된 오랑캐 혐오증 곧 외국인 혐오증이 주원인이었다. 이들 사상이 반상업주의와 함께 외부 오랑캐와의 접촉을 금지한 것이다. 외부 오랑캐들과의 교역이 서민들의 농본주의 숭상 정신과 미풍양속을 해칠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유교 관료주의의 발흥은 글 읽는 선비를 숭상하고 농본주의를 기본으로 하는 전형적인 사농공상 사회를 지향하여 상업과 교역을 천시했다. 유교 문명은 상업이 인간의 심성을 해친다고 여겨 이를 낮춰 보았다.
게다가 서양보다 앞서 지폐를 사용한 몽골 시대의 은본위 통화시스템과 시장경제는 지금도 자본주의의 뿌리를 이루는 중요한 제도이다. 하지만 명나라는 이것을 포기하고 물물교환의 자연경제로 되돌아갔다. 농업이 천하지대본이라 하여 서민들의 상업과 교역 활동을 억압하여 시장경제를 쇠퇴시켰다. 정화의 대항해 때 3000톤급의 배까지 건조했던 대형 선박의 건조를 모두 금지하고 기존 선박마저도 모조리 파괴했다. 해양에 관한 지식, 기술, 전통은 물론 의욕과 미래까지 꺾어버렸다. 이때부터 중국은 고립과 쇠퇴를 자초했다. 오랜 자본주의의 역사를 갖고 있었던 중국이 한 군주의 오판으로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져 가는 순간이었다.
◇500년간 지속된 조선의 해금령, 조선과 일본의 운명을 바꾸어 놓다
불행하게도 명나라의 쇄국 정책을 조선 역시 같은 이유로 펼쳤다. 고려 말부터 왜구들의 침입이 잦아지자 해적의 은신처를 없애기 위해 아예 섬에는 사람들이 살지 못하게 하는 공도(空島) 정책을 실시했다. 여기에 더해 민간인의 항해를 금하는 해금 정책을 폈다. 아예 바다에 나가는 것을 금한 것이다. 걸리면 곤장 100대였다. 잘못하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운 형벌이었다. 이로 인해 조선 500년 역사 내내 바다는 없었다. 조선의 해금 정책은 조선을 바깥 세계로부터 단절시켜 중국에 더욱 예속되는 결과를 초래했고, 주인 없는 조선의 바다에는 왜구가 주인이었다.
당시 세계에서 도자기를 만들 수 있는 나라는 조선과 중국뿐이었다. 도자기, 금속활자, 측우기, 신기전 등 수준급 과학기술을 보유한 조선이 500년간의 해금 정책으로 눈과 귀를 막아 유럽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의 흐름에서 소외되었다. 반면 이 시기에 일본은 개방 정책을 폈다. 일본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와 교류하며 임진왜란 때 잡혀간 조선 도공들이 만든 ‘도자기’와 조선의 은제련 기술로 제련한 ‘은’을 팔아 경제 대국의 기틀을 이때 마련했다. 그 돈으로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 빠르게 성장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쇄국 정책과 개방 정책의 차이가 후에 조선과 일본의 운명을 극명하게 갈라놓은 결과를 가져온다.
◇해금령, 동서양의 역학적 관계를 바꾸어 놓다
중국과 조선의 쇄국 정책 이후 동양의 성장은 한동안 멈췄다. 역사의 흐름을 외면하고 쇠락의 길로 접어든 것이다. 명(明)나라는 이름과는 달리 실은 ‘어둠의 나라’였다. 바깥 세계와 담을 쌓고 안으로 빗장을 걸면서, 몽골 제국이 부흥시켰던 동서 교류의 흐름이 끊어지고 동양은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결국 중농억상 정책은 세계 경제의 중심이 중국에서 유럽으로 넘어가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이 시기에 유럽 국가들은 무역을 통해 비약적으로 발전한 반면 명나라는 쇄국과 해금을 고집해 국제 무역에서 스스로 탈퇴했다. 오랜 기간 세계 일류 국가였던 중국은 17세기에 들어 서방 국가들에 뒤처지기 시작했다. 이로써 명나라의 정책 오류가 동서양의 역학적 관계를 뒤바꾸어 놓았다.
[6] 동전의 양면, 중상주의와 유대인
플랑드르, 지리적 잇점으로 생산과 유통의 중심지가 되다
유대인, 플랑드르 지방으로 모여들다
◇유대인의 시대가 열리다

▲16~18세기 유럽은 중상주의(重商主義) 시대였다. /위키피디아
16~18세기 유럽은 중상주의(重商主義) 시대였다. 중상주의란 말 그대로 상업을 중시하는 정책이다. 이로써 상업의 귀재인 유대인의 시대가 열렸다. 중상주의 사상은 한 나라가 부강하려면 무역을 통하여 당시의 화폐인 금, 은을 자국 내에 축적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중상주의(Mercantilism)는 중금주의(bullionism)라고 할 만큼 화폐를 중시했다. 이를 늘리는 데 최고의 정책 목표를 두어 수출을 장려하고 수입을 억제했다. 한편 값싼 원료의 확보와 수출 확대를 위해 식민지를 개척하는 것도 정부의 중요한 몫이었다. 한 마디로 중상주의는 국부를 증대하기 위한 정부의 전 방위적인 강력한 계획과 간섭이었다.
모든 특권은 경제를 주도하는 계층에게 주어졌다. 따라서 상인들이 유통을 장악해 이윤을 독점했다. 이들이 자본을 축적한 후 공장까지 만들어 생산과 유통을 함께 지배했다. 이렇게 상인주의 시대가 도래하여 자본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 시대에는 개인의 이익과 사회의 이익이 상충될 경우, 공익을 위해서는 개인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엘리트 주의에 입각해서 일부 유능한 사람들에게 공익을 맡겨야 한다고 믿었다. 이 과정에서 가장 득을 많이 본 계층이 유대인들이다. 그들이 가장 중요한 유통과 무역 활동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동족 간 단결력이 강하기 때문에 유럽과 중동 전역에 산재해 있는 디아스포라(유대인 공동체)를 연결해 상거래망을 형성했다.
중상주의는 기본적으로 국가를 강력하게 만들려는 시스템인 반면 자본주의는 능력 있는 개인을 부유하게 만드는 시스템이다. 근대 초기 유럽 여러 나라에서는 큰 갈등 없이 두 시스템이 공존했다. 하지만 절대 왕정을 거부하고 공화정을 추구한 네덜란드는 좀 특이했다. 네덜란드 사회가 1000년 동안 지속된 봉건주의와 완전히 결별하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가 철저히 다시 태어나는 변화를 맞았다. 따라서 국가보다는 개인의 자유와 행복권이 우선했다. 이렇게 네덜란드는 중상주의를 추구하면서도 개인의 자유무역을 우선적으로 존중했다. 중상주의보다 자본주의 원칙에 더 충실했다. 한 마디로 유대인에게 유리했다.
경제사에서 중상주의 시대를 15세기 중반부터 18세기 중반까지 300년간으로 보고 있다. 곧 스페인 제국에서부터 시작하여 네덜란드의 국제무역 중흥기를 거쳐 영국의 산업혁명 직전까지이다. 자본주의가 본격적으로 태동했던 시기이다. 정복 시대처럼 약탈한 재물로 국부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상인 자본의 힘으로 국부를 늘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국가 주도의 중상주의에 격렬히 반발하여 일어난 것이 1776년 미국의 독립혁명이고, 또 같은 해에 나온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이다. 이로 미루어 중상주의는 바로 그 직전까지다.
◇플랑드르, 지리적 잇점으로 생산과 유통의 중심지가 되다

▲플랑드르, 현재 벨기에 북부 지역. /위키피디아
유럽의 자본주의는 두 지역에서 피어났다. 하나는 중세 시대 크게 부흥했던 북부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이고, 또 다른 하나는 지금의 벨기에 북부 플랑드르(Flandre) 지역이다. 플랑드르(영어로 ‘플랜더스’)라는 이름은 8세기에 처음 나타났는데, ‘저지대’ 또는 ‘물이 범람하는 땅’이라는 뜻이다. 지금도 이 지역이 북부 이탈리아와 더불어 유럽 대륙 내에서 지역단위 경제 규모가 가장 크고 1인당 소득수준이 가장 높은 곳이다. 공교롭게도 이 두 지역의 성장을 유대인들이 주도했다.

▲중세 교역로 라인강 변에 유대인들이 몰려 살았다. /위키피디아
바이킹의 침입이 누그러진 후, 플랑드르 지역에는 떠나갔던 인구가 다시 찾아들었다. 12~13세기 플랑드르 지방은 북유럽의 모직물 산업 중심지이자 교통의 요충지였다. 그 무렵 플랑드르는 북쪽의 발트해 연안 국가들과 남쪽의 지중해 국가들을 연결해 주고 또한 영국과 대륙을 맺어주고 있었다. 이렇게 교통의 십자로에 위치하여 바닷길은 물론 라인강과 그 지류들을 교역로로 이용하고 있었다. 이러한 지리적 이점으로 플랑드르가 생산과 유통의 중심지가 되었다. 특히 브뤼헤(브뤼주)와 앤트워프(안트베르펜) 항구를 중심으로 상권이 발달했다.
◇비잔틴 제국의 모직물과 견직물 생산기술이 이탈리아 유대인들에 의해 플랑드르로 전해지다
그 무렵 플랑드르 지방의 모직물 산업은 유대인들이 주도했다. 원래 모직물의 기원은 기원전 3000년경 고대 수메르 유목민들의 면양 사육에서부터 유래되었는데 뒤에 중앙 아시아를 거쳐 비잔틴 제국의 중심 산업이 되었다. 비잔틴 제국은 6세기 중엽 중국에서 훔쳐 온 누에고치로 양잠 산업과 비단 직조 기술도 갖고 있었다. 제국은 이 직조 기술이 외부에 유출되지 않도록 철저히 보호했다.

▲테살로니카. /위피키디아
이후 비잔틴 제국의 테살로니카와 테벤의 유대인들이 직물 산업을 주도하며 직조 기술을 비밀에 부쳐왔다. 1147년 2차 십자군 원정 때 시칠리아 왕국도 비잔틴 원정에 참가했다. 바이킹의 후예인 노르만족 출신 루제루 2세가 다스리는 시칠리아는 지중해에서 가장 강력한 해군을 갖고 있었다. 루제루 2세는 직접 원정에 나서지는 않았지만 해군을 파견해 데살로니카와 테벤을 침공하여 유대인 직조공들을 포로로 잡아와 수도 팔레르모에 궁정 작업장을 세웠다. 이들을 통해 견직물과 모직물 산업이 시칠리아 왕국에 뿌리내렸다.

▲12세기 시칠리아 왕국 영토. /위피키디아
이 기술들이 유대인들에 의해 북부 이탈리아 도시국가 유대인들에게 퍼져나갔다. 그 뒤 밀라노 유대인들은 지력이 좋은 포강 근처에서 누에를 치고 양을 길러, 때가 되면 누에고치와 양털을 시칠리아와 나폴리 유대인들에게 내려보냈다. 그러면 남부에서 이를 가공하여 비단과 모직물을 짰다. 밀라노 유대인들은 이를 다시 수거해 아랍과 프랑스 남부에서 독점 수입한 천연염료로 ‘자색’(紫色, 보라색) 염색을 했다. 이 자색 염색이 유대인의 비기(秘技)였다.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색깔이었다. 그 무렵 이탈리아산 자색 비단과 모직물은 모든 유럽인에게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당시 자색 옷은 아무나 입을 수 있는 옷이 아니었다. 왕족과 성직자에게만 허용되었던 색깔이다. 그래서 자색을 ‘추기경의 색깔’이라 불렀다. 그 무렵 직조 기술과 염색 기술은 극비 사항이었다. 그럼에도 유대인 공동체 간의 끈끈한 인연은 이를 뛰어넘었다. 결국 북부 이탈리아 유대인들이 플랑드르 유대인들에게 모직 기술을 전파하여 모직물 산업은 플랑드르의 중심 산업이 되었다.
◇브뤼헤(Brugge, 브루게) 시대
1492년 스페인과 1497년 포르투갈에서 추방당한 유대인들이 가장 많이 몰려간 곳이 종교의 자유와 동족들이 있는 브뤼헤였다. 브뤼헤는 13~15세기 북유럽의 대표항구였다. 지중해에 베네치아가 있다면 북해에 브뤼헤가 있었다. 브뤼헤는 지중해와 북유럽, 영국과 대륙, 스칸디나비아반도와 대륙 간 뱃길의 길목에 있는 교역의 요충지였다. 브뤼헤의 성장사를 살펴보자.
◇유대인, 플랑드르 지방으로 모여들다

▲플랑드르 지방. /위키피디아
1096년 1차 십자군 전쟁이 일어나자 영국 내 반유대 정서가 고조되면서 유대인 박해와 살해가 잇달았다. 그러자 많은 유대인들이 바다 건너 플랑드르로 탈출했다. 이러한 이주는 거의 100년간 지속되었다. 플랑드르 지방은 11세기 이래 영국령으로 유대인들은 영국의 양모를 가져다 이를 상파뉴 정기시에 내다 팔았다. 그 뒤 플랑드르에 모직물 산업을 일으켜 상업 도시들이 생겨나 발전했다.
이후 3차 십자군 전쟁 때인 1290년 11월에 에드워드 1세에 의해 영국에서 유대인들이 일시에 추방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대부업에 종사하던 1만 6000 명 모두를 한꺼번에 내쫓은 것이다. 이것이 역사상 최초의 유대인 추방이다. 이는 반유대 정서의 민심을 달래기 위한 것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영국인들이 그간 유대인에게 진 빚을 무효화시키고 영주들이 그들의 재산마저 몰수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추방당한 유대인들이 도버 해협 건너 도착한 곳이 바로 영국에서 가장 가까운 플랑드르 지방의 브뤼헤 항구였다. 그 무렵까지만 해도 대륙의 플랑드르와 보르도 지방은 영국 국왕의 영지였다.
브뤼헤에 정착한 유대인들은 기존 유대인들과 손잡고 당시 최고 상품인 모직물 고급화에 주력했다. 질 좋은 이탈리아 모직물과 경쟁하기 위해서였다. 먼저 자기들이 살았던 영국에서 품질 좋은 고급 양털을 선별해 들여와 이를 유통시켜 모직물 질을 한 단계 높였다. 모직물은 주로 프랑스 샹파뉴 정기시(定期市)에 내다 팔고 일부는 영국에 수출했다. 샹파뉴 정기시는 이때 번영의 절정에 달했다. 또한 유대인들은 브뤼헤를 대부업 중심 도시로 만들었다.
1291년 제노바가 지브롤터 해협을 발견하여 이후 지중해 무역이 대서양 연안 및 북해까지 확대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 무렵 베네치아는 해군력을 키워 당시 이슬람이 장악하고 있던 지중해 해상권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제노바하고는 100년 소금 전쟁을 치루었다. 그리고 지중해를 넘어 북해로 진출하여 플랑드르의 브뤼헤와 직항로를 개설했다. 이로써 이탈리아 상인들이 알프스를 넘는 험준한 육로보다는 해로를 선호하게 되어 프랑스 상파뉴 정기시를 통한 거래 보다는 바닷길로 브뤼헤를 찾아오는 횟수가 늘어났다. 이것이 브뤼헤의 상권이 상파뉴 정기시를 앞서게 된 이유였다.

▲중세 초 브뤼헤의 지도. /위키피디아
브뤼헤에 유대인들이 자리 잡자, 이때부터 그들이 주도해 영국과 양털 교역이, 지중해 국가들과는 모직물 직교역이 활성화되면서 도시는 눈부시게 발전했다. 1296년 양모 시장이 브뤼헤에 개설되었다. 그리고 도시가 급격히 팽창하면서 1297년 새로운 성벽이 건설되어 도시 규모가 3배로 확장되어 새로운 저택과 창고들이 빠르게 건설되었다. 성 밖을 삥 둘러 판 오래된 해자는 상품 수송 운하로 사용되었다. 해상무역이 발달하자 1300년에는 브뤼헤가 한자(Hansa)동맹의 일원이 되었다. 여기서 Hansa는 ‘집단’을 뜻하는 중세 독일어이다. 하지만 그 뒤 이 말은 상인조합을 의미하는 낱말로 변했다.

▲14세기 브뤼헤에서 작성된 환전 영수증. /위키피디아
그 뒤 1306년에 프랑스에서 추방당한 유대인들이 브뤼헤에 합세했다. 이들의 합류로 브뤼헤는 그들이 취급하던 프랑스산 포도주, 아마포와 양모 등 프랑스 상품의 중심 수출입 항구가 되어 경제가 더욱 활성화되었다. 이로써 브뤼헤는 통과(通過)무역이 번창했고, 유럽 최대의 모직물 산업지역이 되었다.
◇브뤼헤, 북유럽 최대의 중계 무역 도시로 성장

▲운하가 많아 서유럽의 베네치아라 불리는 브뤼헤. /위키피디아
교역이 늘어나자 금융업이 발달했다. 무역과 금융은 실과 바늘의 관계였다. 중세 이래로 무역이 발달하면 이를 지원하는 금융이 발전했다. 무역과 금융업이 발달하자 브뤼헤에 큰 건물들이 들어서고 상설 시장이 열렸다. 나중에는 브뤼헤 직물 시장에 제노바 상인뿐 아니라 베네치아, 스페인,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등 먼 거리 상인들도 왔다.

▲갤리선. /위키피디아
당시 제노바와 베네치아로부터 들어오는 갤리선들은 대개 이탈리아로부터 사치품, 이탈리아산 비단, 벨벳 그리고 레반트로부터 동양 비단과 향신료를 싣고 왔다. 갤리선은 고대부터 지중해에서 주로 군함으로 쓰였는데, 돛도 사용하기는 하지만 바람보다는 수많은 노수꾼들이 북소리에 맞춰 노를 지어 운항하는 배다. 중세 이후 상선으로 쓰이는 갤리선이 지중해와 대서양을 거쳐 그 먼 길을 주로 사람의 힘으로 항해하여 온 것이다. 이렇게 먼 길을 배로 오는 이유는 그래도 육상보다 안전하고 통과세도 덜 물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많은 화물을 운송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지중해에서 북해까지 먼 길을 정기 운항하게 되면서 갤리선은 3개의 대형 삼각돛이 장착되어 노수꾼의 힘보다는 바람의 힘을 더 많이 이용하는 대형 ‘갤리 상선’으로 진화하게 된다. 플랑드르 노선에 투입된 베네치아 갤리 상선은 길이 50m에 폭이 9m로 약 250톤가량의 화물을 실을 수 있었다.
북유럽 최대 무역 도시로 성장한 브뤼헤는 14세기 전반에는 200여 도시의 연합체인 한자 동맹의 지도적 역할을 했다. 그 무렵 한자 동맹 상인단은 북유럽의 소금, 목재, 곡물, 모피, 꿀, 청어 등을 브뤼헤를 통해 서유럽 전역에 판매하면서 14세기에는 프랑스 상파뉴와 이탈리아반도를 능가하는 번영을 보였다. 그러자 플랑드르에 더 많은 유대인들이 모여들었다. 동 플랑드르주 주도인 헨트의 인구수는 14세기에 8만 명으로 유럽에서 가장 큰 도시 중 하나였다. 그리고 브뤼헤도 4만 명 정도로 비교적 큰 편이었는데 이는 당시 런던의 인구와 비슷했다.
◇부르고뉴 공국, 1384년 플랑드르의 주인이 되다
그 무렵 플랑드르의 주인이 바뀌었다. 14세기 후반 부르고뉴 공국의 필립 공이 이른바 베네룩스 3국이라 불리는 현재의 네덜란드·벨기에·룩셈부르크 전역을 지배하게 된다. 원래 부르고뉴 공국은 프랑스의 중심부에 있던 나라인데 좋은 지도자 덕분에 국력이 급팽창하여 지금의 독일-프랑스 접경지대 알사스 로렌을 점령했다. 그 뒤 플랑드르 백작 집안과의 결혼으로 저지대의 지배자가 된다.
포도주로 유명한 프랑스 부르고뉴 지방에 뿌리를 둔 부르고뉴 공국은 저지대 도시국가들을 잘 다스려, 저지대 사람들의 근면성과 오랜 상업 전통이 좋은 지도자와 어울려 15세기의 번영을 가져왔다. 15세기 전반부에는 독일 지역, 그리고 후반부에는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에서 추방당한 유대인들이 몰려와 브뤼헤 경제가 더욱 부흥했다.
◇합스부르크가, 뜻하지 않게 독일 왕이 되다
그 뒤 15세기 후반에 플랑드르의 지배자가 또 바뀌었다. 이번에도 결혼 동맹으로 합스부르크가가 플랑드르의 새 주인이 된 것이다. 경제사에서 보면 왕가의 흥망성쇠는 경제적인 부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합스부르크가도 예외가 아니었다. 여기에 운도 따랐다. 남부 독일과 북부 스위스에 걸친 지역의 소영주로 일개 백작에 불과했던 합스부르크가는 뜻하지 않은 어부지리를 얻었다. 실력 있는 국왕의 출현을 꺼린 독일 제후들이 이 집안의 ‘루돌프 폰 합스부르크’를 1273년 독일 왕으로 선출한 것이다. 합스부르크라는 성(性)은 그의 스위스 영지에 있는 합스부르크 성(城)에서 유래했다. 당시 독일 왕국은 여러 공국의 연합체였다.
◇합스부르크 가문 소금으로 부흥하다

▲소금 보물창고, 잘츠캄머굿. /위키피디아
이렇게 선출된 루돌프 왕은 고율의 소금세가 왕에게 큰 힘이 된다는 걸 알았다. 당시 이를 상징하는 도시가 있었다. 잘츠부르크 외곽도시 잘츠캄머굿(Salzkammergut)은 독일어로 ‘황제의 소금 보물창고’란 뜻이다. 그야말로 당시 소금이 왕에게는 보물이었다. 그림처럼 펼쳐진 알프스 산들과 70여 개의 평화로운 호수 주변에 소금 동굴이나 광산이 많았다. 실제로 이곳이 오스트리아 소금 광산의 주(主) 광맥이다. 이런 곳은 빙하시대 이전에 지반이 해수면보다 낮게 가라앉아 바닷물에 잠겼다가, 그 후 시간이 흘러 지반이 다시 올라오면서 땅속과 동굴, 골짜기 등에 남아 있던 바닷물이 모두 증발하여 소금만 남게 되었다. 이후 인류는 그곳에서 돌소금 곧 암염을 채굴했다. 그리고 주변 지하 샘물에서는 소금물이 솟아났다. 무려 7000여 년 전의 일이었다.
루돌프 1세는 소금 세금 덕에 재정이 튼튼해지자 실제 실력자가 되었다. 그를 대적하는 보헤미아 군대를 1278년 격파하여 오스트리아에서 내쫓아 오스트리아·슈타이어마르크와 케른텐을 점령했다. 합스부르크가가 오스트리아를 본령(本領)으로 삼게 된 것은 이때부터였다.

▲소금 광산으로 유명한 잘츠부르크. /위키피디아
그의 아들 알브레히트도 독일 왕으로 선출되었다. 왕은 소금 채굴 이권을 찾아 잘츠부르크 대주교와 전쟁을 벌였으나 패했다. 잘츠부르크(Salzburg)라는 이름 자체가 소금 성(Salz=소금, Burg=성)이라는 뜻이다. 잘츠부르크는 금, 은, 구리의 산지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라이헨할 소금 광산으로 유명하며, 소금을 파내 그 부를 이용해 도시를 만들었다. 지금도 라이헨할은 유럽의 소금 공급지이다.
1308년 알브레히트 왕이 암살된 뒤 15세기까지 합스부르크가는 독일 왕위에서 멀어졌다. 그러다 프리드리히 5세(재위 1440~1493)때 지금의 오스트리아 전체를 통합했다. 이후 합스부르크가는 오스트리아 알프스산맥의 소금 광산에서 파낸 돌소금에 고율의 세금을 부과하여 큰 부자가 되었다. 잘츠부르크 인근 할슈타트의 경우, ‘hal’은 켈트어로 소금이라는 뜻으로 소금 도시라는 의미이다. 거부가 된 오스트리아의 프리드리히 5세는 1440년 독일 왕에 선출되었다. 이후 오스트리아 영주이자 독일 국왕인 프리드리히 5세는 유럽에서 가장 큰 인수부르크의 은광산과 은 주조공장 그리고 소금 광산 덕분에 더 큰 부를 이루었다.
◇합스부르크가 플랑드르를 지배하다

▲신성로마제국 프리드리히 황제. /위키피디아
재력은 곧 국력이었다. 1452년에는 프리드리히 5세가 독일 왕 겸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선출되었다. 독일 왕 프리드리히 ‘5세’가 신성로마제국 프리드리히 ‘3세’가 된 것이다. 당시까지만 해도 여러 공국의 연합체 성격인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자리는 선출직이었다. 계몽주의 철학자 볼테르는 신성로마제국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신성로마제국은 신성하지도 않고, 사실 로마와 상관도 없고, 게다가 제국도 아니다.” 같은 해 프리드리히 3세는 로마에서 포르투갈의 항해왕 엔리케 왕자의 질녀인 엘레오노라와 결혼했다. 이 결혼은 후일 합스부르크 가문의 결혼정책의 초석이 된다.

▲막시밀리안과 마리. /위키피디아
그 뒤 프리드리히는 50년 이상 황제의 자리를 지키면서 합스부르크가의 왕위 ‘세습’을 이루어냈다. 막대한 부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후 합스부르크가가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지위를 지속 계승하는 합스부르크 시대가 계속되었다. 그는 1477년 아들 막시밀리안을 브루고뉴 공국의 상속녀 마리(마리아) 공주와 결혼시켜 브루고뉴 공국과 저지대를 확보했다. 이때부터 플랑드르는 합스부르크가의 지배를 받게 된다. 이후 이들의 자녀들과 손주들의 결혼 동맹으로 합스부르크가는 스페인 왕국과 신대륙, 보헤미아와 헝가리 등을 손에 넣게 되어 유럽 최대 가문이 된다.
◇이베리아 반도의 유대인들이 몰려오다
15세기 말에 세계에서 유대인이 가장 많이 살았던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유대인 약 30만 명이 추방당했다. 엄청난 숫자였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쫓겨난 유대인들은 유럽과 북아프리카의 여러 항구 도시에 정착했다. 그들은 그들의 상업적 재질을 발휘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든 정착했다. 브뤼헤(벨기에), 앤트워프(벨기에), 암스테르담(네덜란드), 런던, 트리에스테(이탈리아), 함부르크(독일) 같은 상업과 교역이 발달한 항구도시에 그들의 정착지가 형성되었다. 그들은 유대인 디아스포라를 통해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이를 통해 유대인들은 상업과 무역업에 종사했다. 이들을 ‘항구의 유대인’(Port Jew)이라 불렀다.
이베리아반도에서 추방당한 유대인 숫자가 워낙 많다 보니 이들 도시에 몰려드는 유대인들이 많았다. 너무 급격히 유대인 숫자가 불어나면 도시민들 사이에 반유대 감정이 쌓여 결국 쫓겨나는 일이 다반사였다. 이때부터 유럽 각국에서 유대인 숫자가 불어나면 유대인 박해와 추방이 관례화되는 경향이 생겼다. 이즈음 베네치아에서도 유대인 숫자가 불어나자 이들을 특별 구역에 한정해 살게 하는 ‘게토’가 1516년에 생겨났다.
그리고 상당 수의 유대인들이 북부 아프리카와 당시 유대인을 환대하던 오스만 제국으로 몰려갔다. 이후 테살로니카는 세파르디 유대인의 중심지가 되었다. 오스만 제국으로 간 유대인들은 경제를 부흥시켰을 뿐만 아니라 투르크(터키)족에게 대포, 화승총, 탄약, 탄환을 비롯한 군수 제조 기술과 인쇄술도 보급해 주었다. 이후 대포와 화기를 갖춘 오스만 제국 보병은 발칸 반도의 전쟁에서 대포의 위력을 여실히 보여 주었다. 그리고 또 일부 유대인 수천 명이 멀리 인도까지 가 정착한 후 본토인과 피를 섞어 인도인처럼 변했다. 유명한 지휘자 주빈 메타가 바로 인도계 유대인이다.
◇‘중계무역’에 주력했던 브뤼헤의 유대인들, 앤트워프로 자리를 옮기다

▲플랑드르의 항구도시 브뤼헤와 앤트워프(안트베르펜). /위키피디아
그 무렵 이베리아반도에서 추방당한 유대인들이 가장 많이 모여든 곳이 종교의 자유와 동족의 연고가 있는 플랑드르의 항구도시 브뤼헤와 앤트워프(안트베르펜)였다. 15세기 말 유대인들이 대거 합세한 이후 브뤼헤는 명실공히 전 유럽 최고의 무역 및 금융 중심지로 떠올랐다. 유대인들이 떠나간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항구가 유통 능력이 없어져 제 기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브뤼헤는 이베리아반도에서 추방당해 쫓겨 온 유대인들 덕분에 ‘중계 무역’이 발달했다. 중계 무역은 통과 무역과 달리 무역의 주체가 유대인이었다.
이곳에 온 이베리아 유대인들은 처음에는 그들이 살았던 이베리아 반도의 특산품들을 특히 많이 취급했다. 스페인산 양모와 피혁 그리고 천일염이 주류를 이루었다. 여기에 더해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방의 철과 남부 산 과일, 올리브, 쌀, 포도주들이었다. 진귀한 품목으로는 스페인령 카나리아 제도와 남부 안달루시아에서 재배되는 커피가 있었다. 당시 스페인과 포르투갈 남부지역에는 이슬람들이 재배했던 유럽 유일의 커피 농장이 있었다. 이런 식으로 취급 품목과 무역량이 급격히 늘어났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중계 무역을 위해 들여온 상품을 다양한 방법으로 부가 가치를 높였다. 또한 교역망도 승계되어 확대되었다. 유대인들은 이베리아 반도 상품의 중계무역 이외에도 발트해 연안국으로 수출하는 상품으로는 플랑드르산 아마, 모직물과 프랑스 포도주, 독일 맥주가 있었다. 특히 15세기 말에는 수요를 감당치 못하는 브뤼헤의 직물은 황금 직물이 된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운명이 닥쳐온다. 북해로부터 15Km 떨어진 브뤼헤는 바닷물이 들어오던 츠빈 만의 레이 강 수로가 퇴적물로 막히면서 바다로 열렸던 길이 단절되었다. 퇴적물로 인해 더 이상 배들이 접안할 수 없게 되자 결국 도시는 항구의 기능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브뤼헤를 중심으로 주로 해상교역에 종사했던 유대인들에게는 재앙이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항상 그렇듯이 이러한 불운 앞에 무릎 꿇지 않았다. 유대인들은 인근의 또 다른 항구도시인 앤트워프로 발길을 옮겨 다시 시작했다.
2023.01.02
[7] 유대인의 앤트워프 시대
세계 최초로 자본주의 형성을 주도한 상품, 설탕
유대인, 설탕 산업 프로세스 일체를 장악하다
◇유대인, 앤트워프를 다이아몬드 유통의 중심지로 키우다

▲브뤼헤가 항구의 기능을 잃자 유대인들은 브뤼헤에서 약 100km 정도 떨어진 앤트워프(안트베르펜)로 옮겨갔다. /구글 지도
브뤼헤가 항구의 기능을 잃자 유대인들은 브뤼헤에서 약 100㎞ 정도 떨어진 앤트워프(안트베르펜)로 옮겨갔다. 앤트워프 역시 바닷물과 민물이 만나는 북해 하구변 스헬데 강가에 있었다. 당시로서는 최상의 항구였다.
1492년 스페인에서 추방당한 유대인들이 브뤼헤와 앤트워프 두 곳으로 나누어 정착할 때, 앤트워프에 도착한 유대인들이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이 보석 장사였다. 스페인에서 추방될 때 숨겨 가지고 온 것들이었다. 당시 스페인에서 유대인들이 돈과 금, 은 등을 갖고 나가다 발각되면 사형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보석류는 상관하지 않았다. 그 무렵 보석이 많지도 않았거니와 또 보석의 가치가 그리 알려지지도 않았다. 유대인들은 돈과 귀금속을 보석류와 바꾸어 모두 다 한 움큼씩 가져 와 유통량이 상당했다. 이를 바탕으로 바르셀로나에서 보석 장사를 했던 유대인들을 중심으로 보석 시장이 쉽게 형성되고 활성화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앤트워프는 국제 보석 거래의 중심지가 되었다.

▲브릴리언트 커팅’ 다이아몬드. /위키피디아
유대인들의 보석 거래 가운데서도 다이아몬드의 이윤이 가장 많이 남았다. 그러자 유대 보석 상인들은 인도에 있는 유대인 커뮤니티와 협력하여 직접 다이아몬드 원석을 들여와 이를 가공해 팔았다. 기원전 3세기부터 2000년간 인도는 세계에서 유일한 다이아몬드 생산국이었다. 그 뒤 17세기 말 베네치아의 유대인 페르지가 다이아몬드 특유의 ‘브릴리언트 커팅’ 연마 방법을 개발한 뒤로 다이아몬드가 명실상부하게 최고의 보석이 되었다. 그러다 18세기에 브라질에서 다이아몬드 광산이 발견됨으로써 다이아몬드의 주산지는 브라질로 넘어갔다. 그러나 정작 본격적인 다이아몬드 시대를 열게 된 것은 1866년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강 근처에서 유레카라는 21캐럿짜리 다이아몬드 원석이 발견되면서부터다. 이어서 남아공에서 대규모 광상(鑛床)이 발견되어 다이아몬드가 급속히 대중화되었다.
앤트워프 유대인들은 점차 보석 물량이 커지자 이번에는 가공한 물건들을 외국에 있는 유대인 커뮤니티와 손잡고 수출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다이아몬드 산업은 유대인들이 ‘수입-가공-수출-유통’ 프로세스 일체를 장악하여 유대인 커뮤니티 간의 완전한 독점 산업이 되었다. 독점이다 보니 부르는 게 값이었다. 유대인들은 이 시장을 확고히 지배했다. 훗날 앤트워프는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여 네덜란드에 귀속되었다가 지금의 벨기에에 속하게 된다. 지금까지도 벨기에는 유대인들의 다이아몬드 중계 무역으로 유명하다.
◇포르투갈의 배, 유대인 찾아 앤트워프로 들어오다
바다와 단절되면서 몰락해 버린 브뤼헤의 패권은 그 뒤 온전히 앤트워프로 넘어간다. 브뤼헤의 유대인들이 앤트워프로 모두 옮겨갔기 때문이다. 브뤼헤가 플랑드르 지역 직물 산업의 중심 항구였다면, 앤트워프는 브라반트 공국의 직물 산업 중심 항구였다. 1500년께 이르러 앤트워프가 완벽히 브뤼헤를 대체한 후 국제 무역 시장으로 급속히 발전한다. 이렇게 앤트워프를 짧은 시간에 발전시킨 것은 포르투갈이 인도에서 가져온 향신료, 후추 등 동방 물품이었다. 1497년 유대인들을 추방한 포르투갈은 동방에서 향신료를 실어 와도 이제 이를 유통시킬 능력이 없었다. 결국 1501년에 리스본에서 동방의 계피와 후추 등 향신료를 실은 포르투갈의 배가 유대인을 찾아 앤트워프로 들어온다. 그 뒤 포르투갈에 앤트워프는 동방의 향신료를 유럽 대륙에 유통시킬 수 있는 유일한 거점이 된다. 이는 유대인을 추방한 스페인도 마찬가지였다.
그 뒤 앤트워프 유대인들이 다루었던 주요 교역품은 이베리아 반도와 브뤼헤 시절 다루었던 교역 품목에 인도산 향신료와 금,은,보석과 다이아몬드가 추가되어 주축을 이루었다. 당시로서는 최고의 고부가가치 품목들이었다. 그 무렵 다이아몬드는 주로 인도에서 생산되었다. 16세기 전반에 앤트워프는 발틱 무역의 중심지로서, 그리고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중계무역항으로서 번영을 누렸다. 이로써 유대인들은 당시 유럽과 동인도는 물론 신대륙의 상품을 거의 다 다루었다. 역사상 최초로 세계 상품의 대부분이 한곳에서 거래되었다는 의미에서 ‘세계시장’이 출현했다. 그러자 앤트워프의 정기시들이 일 년 내내 열리는 상설 시장으로 변모했다.
◇세계 최초로 자본주의 형성을 주도한 상품, 설탕
앤트워프에서 유대인들이 취급하는 상품은 더욱 다양해졌다. 북유럽의 타르(역청)와 호밀, 스페인의 양모·소금·포도주·올리브유 등 당시의 대표 수출 상품들이 북유럽과 스페인에서 직수출되지 못하고 모두 이 도시에서 거래되었다. 여기에 커피와 차, 코코아, 담배, 설탕이 더해졌다. 이 품목들이 이후 몇 세기를 풍미하는 최고 히트상품이 된다.

▲설탕. /위키피디아
특히 포르투갈이 신대륙에서 가져온 설탕은 유대인이 떠난 리스본에서는 유통시킬 수가 없었다. 이후 리스본을 경유하여 들어온 브라질산 설탕이 유대인에 의해 1508년부터 앤트워프에서 거래되었다. 그 뒤 신대륙의 설탕은 모두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설탕이 금값이어서 일반인들은 설탕을 구경하기 힘들었다. 이러한 폭리를 통해 거대한 자본 축적을 이루어 세계 최초로 자본주의 형성을 주도한 상품이 설탕이었다.
◇이슬람이 전파시킨 사탕수수와 설탕 제조 비법

▲사탕수수
기원전 4세기에 이미 인도에서는 설탕을 제조하고 있었다. 서구에 설탕이 처음 알려진 것은 알렉산더 대왕의 인도 침공 때였다. 기원전 325년 인더스강 동부 지역을 답사한 대왕의 부하 장군은 “인도에서 자라는 갈대는 벌의 도움 없이도 ‘꿀 같은 것’을 만들어 낸다. 인도인들은 그 즙으로 단 음료수를 만든다”고 기록했다. 장군은 사탕수수를 가리켜 ‘꿀벌 없이 꿀을 만드는 갈대’라고 했다. 유럽인의 눈에는 신기하기만 했다.
이후 6세기 페르시아에서 사탕수수를 재배하기 시작했다. 그 뒤 페르시아를 멸망시킨 이슬람은 전리품으로 사탕수수와 설탕 제조 비법을 챙겨 가는 곳마다 이를 전파했다. 8세기에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한 이슬람이 비교적 기후 조건이 비슷한 스페인 남부 연안과 마리다 섬을 필두로 카나리아 제도에서 사탕수수를 재배했다. 드디어 유럽 대륙에서도 사탕수수 생산이 가능해진 것이다. 11~13세기까지 벌어진 십자군 전쟁은 설탕 전파의 획기적인 계기가 되었다. 시칠리아 등 따듯한 기후의 지중해 지역에서 사탕수수를 재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양이 적고 귀해 값이 비쌌다.
◇유대인, 설탕 산업 프로세스 일체를 장악하다
그 무렵 설탕은 왕이나 귀족들만 애용하는 고급 향신료이자 의약품이었다. 설탕은 권위의 상징이 되었다. 심지어 몇몇 유럽 왕실은 중요한 행사 때 그들의 위용을 과시하기 위해 화려한 설탕 조각을 만들어 전시했다. 물론 값은 엄청났다. 영국에선 설탕 4파운드(1.8㎏)가 송아지 한 마리 값이었다. 그나마 예전에 비해 싸진 것이다. 1372년 레반트에서 베네치아를 경유해 들어온 설탕 1㎏의 가격은 수소 2마리 값이었고 14세기 말에는 수소 10마리 값까지 폭등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 베네치아 유대 상인들은 원당 무역뿐 아니라 정제 기술까지 습득했다.
15세기 포르투갈의 대항해 이후 아프리카에서도 사탕수수가 경작되기 시작했고, 스페인의 신대륙 점령과 함께 재배 지역이 중남미로 확산되었다. 그럼에도 15세기 내내 설탕 1㎏ 가격은 보통 소 한두 마리 가격을 유지했다. 이러한 고이윤을 오래도록 보장할 수 있는 길은 독과점 체제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유대인들은 설탕의 독과점 유통 체제를 완성한다. 곧 설탕의 유통 경로 일체를 장악한 것이다. 유대인들이 직접 브라질과 서인도제도에서 사탕수수 농장을 대규모로 운영했다. 이로써 사탕수수 재배에서부터 운반-정제-판매의 핵심 프로세스를 일괄 장악하는 독과점 체제를 완성했다.
◇유대인, 사탕수수 농장에 흑인 노예를 투입하다

▲유대인, 사탕수수 농장에 흑인 노예를 투입하다. /위키피디아
사탕수수는 특히 사람 손이 많이 가는 식물이다. 사탕수수는 심고 나서 12개월간 많은 물을 꾸준히 대야 한다. 심고 나서 베기까지 30여 차례에 걸쳐 물을 대야 한다. 따라서 물을 다루는 고도의 기술과 조직적인 노동력이 필요했다. 게다가 사탕수수는 땅을 황폐하게 만드는 성질이 있어 재배 지역을 자주 옮겨주어야 한다. 이렇게 옮겨 심고 물 주고 길러 4m가 넘는 사탕수수를 솎아 내는 것도 힘든 작업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제때 수확해 단시간에 즙을 짜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건조해져 즙을 충분히 짜낼 수 없었다. 또 즙을 짜내면 바로 끓여야 했다. 이를 위해 많은 땔감을 마련하고 붙어 앉아 오랜 시간 불 관리를 해야 했다. 그러려면 직접 사람의 손으로 따가운 햇볕 아래에서 등골이 빠지도록 일해야 한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흑인 노예들이 사탕수수 농장에 투입된다.
그 뒤 유대인들은 사탕 수수와 흑인 노예를 토대로 유럽-아프리카-신대륙을 잇는 삼각무역을 주도했다. 그리고 앤트워프에 설탕 정제 산업도 발달시켰다. 설탕 정제 산업은 유대인들이 이미 베네치아에서 해봤던 일이라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이러한 유대인들의 커뮤니티(디아스포라) 간의 결집력을 이용해 ‘생산-교역-가공-유통’의 일괄 독점 체제의 완성은 이후 다른 산업에서도 유대인의 주특기가 된다.
◇신용을 기반으로 무역과 금융을 연계시킨 유대인들
유대인들의 또 다른 특기는 중계무역이었다. 대부분 스페인, 포르투갈, 인도 등을 연결하는 삼각무역이 주류를 이루었다. 중계무역은 통과무역과 달리 유대인이 무역의 주체가 되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역을 주도할 수 있는 자본력 또는 금융 운용 실력이 관건이었다. 유대인들은 후자를 택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그들의 무역을 금융과 연계시켰다. 처음에는 담보금융이 주를 이루었다. 그러나 머지않아 신용대출을 상품에 연결시켰다. 유대인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역사적으로 약속어음을 담보로 한 신용대출은 중세 초기에 계약을 목숨처럼 중히 여기는 유대인들 사이에서 시작되었다. 그 뒤 유대인들은 믿을 만한 이방인들에게도 신용대출을 확대해 나갔다. 이것이 상인들 사이에서는 외상 장사로 발전했다. 신용대출과 외상 장사로 상업 활동에 필요한 유동성이 크게 늘어나는 효과를 보았다. 이것이 상업뿐 아니라 해상교역을 폭발적으로 늘리는 기폭제가 된다.
유대 상인들은 앤트워프 상설시장에서도 처음에는 신용대출을 상품에 연계시켰으나 나중에는 3개월에 2~3%, 곧 연간 8~12% 이자율의 ‘환어음’을 개발하여 정기시 상인들 사이에서 유통시켰다. 이렇게 상업과 무역을 지원하는 금융을 앤트워프의 유대인들이 성장시켰다. 원래 환어음의 역사도 중세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무렵 사람들은 당시의 화폐인 금이나 은을 집에 보관하기에는 너무 소중하다 못해 위험한 물건이었기 때문에 튼튼한 금고를 가지고 있는 금 세공인에게 맡겼다. 그리고 보관증서를 받아 화폐 대용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 증서가 환어음의 시초이자 종이 화폐의 기원이다. 그 뒤 이것이 진일보하여 유대인들은 금은 이외에 상품에 연계시키는 환어음도 개발했다. 이것이 발전하여 1630년경에는 부유한 상사들이 상품과도 연계되지 않은 순수한 금융상의 환어음만 다루었다.
환어음은 당시 유통되던 약속어음보다 훨씬 발전된 금융기법이었다. 약속어음은 발행인 자신이 지급할 것을 약속한 것이다. 이에 반해, 환어음은 제3자가 지급 의무를 진다. 주로 물건을 외상으로 준 수출업자가 채무자인 수입업자를 지급인으로 지정해 발행한다. 이는 누가 됐든 어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약정된 시기에 어음에 표시된 금액을 무조건 지급할 것을 위탁한 증권이다. 한마디로 요사이 수표와 같은 기능을 했다. 당시 교역 활동을 하기 위해 금, 은 주화를 많이 가지고 먼 길을 여행하는 것은 너무 위험한 일이었다. 게다가 무척 무거웠다. 이러한 위험과 고충을 한 방에 해결한 것이 환어음이다. 이후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유대인 커뮤니티 사이에서 이러한 환어음이 여행 중간의 위험 부담을 줄이면서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부를 쌓는 일에 관해 유대인이 기여한 최대 공헌은 신용대출이라는 제도 자체를 만든 일이었다. 뒤이은 공헌이 유가증권을 발명한 다음 이를 보급시킨 일이다. 유대인은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지역뿐 아니라 박해 가능성이 있는 지역에서도 유가증권의 사용을 추진했다. 그들이 이렇게 세계를 하나의 시장으로 간주하는 선진적인 시각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민족이 뿔뿔이 흩어진 이산(離散)의 결과였다. 일찍이 세계 곳곳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 디아스포라 간의 교류로 글로벌한 시야가 몸에 배어 있었기 때문이다.
◇유럽 최대 항구로 급성장한 앤트워프
앤트워프의 인구는 유대인이 몰려오기 전까지는 2만 명이었다. 그러나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추방당한 유대인들이 몰려온 1500년 무렵에 두 배가 넘는 5만 명으로 급성장했다. 그 무렵 도시 인구의 반이 유대인이었다. 그 뒤 1516년 베네치아에 게토가 생겼다. 당시 베네치아에서 자유롭게 해상무역과 조선업 그리고 금융업에 종사하던 유대인들이 게토에 갇히게 되자 이를 피해 앤트워프와 암스테르담으로 몰려왔다. 이베리아반도에서 올라온 유대인들과 베네치아에서 옮겨온 유대인들이 합쳐지면서 여러 면에서 시너지 효과가 일어났다. 해상무역의 범위가 넓어졌으며, 금융기법이 발달하고, 특히 조선업이 강해졌다. 유대인들이 몰려온 앤트워프는 얼마 지나지 않아 해양 공국 베네치아의 뒤를 이어 유럽의 중요한 유통 기지가 되었다. 이 시기에 앤트워프는 중계무역을 바탕으로 금융업이 급속히 커져갔다. 유대인을 추방한 영국은 무역과 금융 모두를 앤트워프에 전적으로 의존했다.

▲카를 5세. /위키피디아
이 시기에 몇 가지 역사적 사건들이 발생했다. 합스부르크가의 저지대 헨트(겐트) 출신 카를 5세(카를로스 5세)가 선대의 결혼동맹 덕분에 1516년 스페인 왕까지 겸하게 되었다. 1517년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시작해 가톨릭에서 신교가 갈라져 나왔다. 이후 스페인의 왕이자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된 카를 5세가 투르크의 침입이 있자, 제후들의 원조를 얻으려고 1526년 ‘신교 포교 금지’를 해제해 루터파의 포교를 허락했다.
그러자 앤트워프에서 종교재판이 폐지되었다. 당시 종교재판이란 주로 개종 유대인이 실제 기독교로 개종한 것인지를 조사하여 허위로 밝혀질 경우 화형에 처하고 재산을 몰수하는 반 종교혁명 조치였다. 스페인의 악명 높은 종교재판을 피해 고향을 등진 유대인으로서는 앤트워프가 축복의 땅이 되었다. 종교 핍박에서 벗어난 유대인들은 무역과 금융으로 앤트워프를 비약적으로 발전시켰다.
이후 앤트워프 경제가 무섭게 급성장했다. 1560년 무렵에는 인구가 10만 명이 되어 당시 스페인의 최대 항구 세비야를 능가했다. 조그마한 앤트워프가 무역 면에서 신대륙을 거머쥔 스페인 제국을 추월한 것이다. 앤트워프는 당시 유럽에서 나폴리, 베네치아, 밀라노, 파리 다음의 큰 도시로 성장해 유럽 5대 도시의 하나이자 유럽 최대 무역항이 되었다. 이후 유럽 경제의 중심지는 단연 활기찬 앤트워프였다. 세계 교역의 절반 가까이가 이 도시를 통해 거래되었다. 완연히 국제적인 상업 도시의 면모를 보였다.
◇유대인, ‘앤트워프 약탈 사건’으로 암스테르담으로 자리를 옮기다

▲앤트워프 약탈사건. /위키피디아
하지만 앤트워프의 번성은 오래가지 못했다. 스페인 제국의 재정 상태가 좋지 않아 저지대에 주둔하던 용병 부대의 급료를 주지 못했다. 이에 용병들이 밀린 급료에 불만을 품고 1576년 11월 앤트워프를 대대적으로 약탈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른바 ‘앤트워프 약탈 사건’이다. 약 7000명의 시민들이 살해되었다. 이때 많은 유대인들이 암스테르담으로 옮겨갔다.
우리가 여기서 주의 깊게 보아야 할 것이 있다. 경제사적인 측면에서 소도시에 지나지 않았던 앤트워프가 1500년 무렵을 전후해 어떻게 이렇게 빨리 성장할 수 있었는지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유대인을 빼놓고는 설명할 길이 없다는 점이다. 이후 16세기 중후반부터 쇠퇴의 길을 걸으며 스페인 지배에 들어간 앤트워프의 짧은 번영기와 유대인 거주 시기가 정확히 맞아떨어진다. 참으로 무서운 민족이다. 지금도 이 시기를 바탕으로 발전한 벨기에는 비록 나라는 작지만 강소국으로 유명하다. 오늘날 벨기에에는 유럽연합(EU)의 집행부가 있어 유럽의 수도 역할을 하고 있다.
[8] 유대인의 암스테르담 시대
스페인 왕국이 ‘네덜란드’를 지배하다
암스테르담, 세계 경제의 중심이 되다
1576년 앤트워프에서 반란을 일으킨 용병들에 의해 시민 7000여 명이 살해당하자 유대인들은 앤트워프를 탈출해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했다. 당시 암스테르담 지역엔 유대인들과 종교개혁 여파로 박해를 피해 온 개신교도들이 한창 몰려들고 있었다. 또 1568년에 시작된 스페인 왕국에 대한 네덜란드의 독립전쟁이 진행 중이었다. 그 무렵 상황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스페인 왕국이 ‘네덜란드’를 지배하다

▲브루고뉴 공국. /위키피디아
당시 유럽 왕들은 나라를 마치 사유물처럼 취급했다. 15세기 초 프랑스 중동부와 네덜란드 영지를 보유한 부르고뉴 공국과 플랑드르 백국이 정략 결혼으로 합쳐졌다. 그 뒤 합스부르크가의 신성로마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가 1477년 부르고뉴 공작의 외동딸과 정략 결혼함으로써 부르고뉴와 플랑드르는 합스부르크 영토가 되었다. 그러자 프랑스 루이 11세가 영유권 분쟁을 시작하며 막시밀리안을 공격했다. 하지만 막시밀리안은 1481년 프랑스군을 격퇴해 플랑드르와 네덜란드를 지켜냈다. 그러다 보니 신성로마제국이 지배하는 플랑드르를 포함한 저지대는 가톨릭이 극성을 부리는 스페인 왕국과는 달리, 비교적 유대인들에게 안전한 곳이었다. 때문에 이베리아반도에서 박해가 있을 때 유대인들은 이곳으로 피신했다. 개종한 유대인을 일컫는 ‘마라노’들 역시 종교재판을 피해 이곳으로 옮겨 왔다.
이렇게 결혼을 통한 영토 확장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전통’이 된다. 막시밀리안 황제는 아들 필립 왕자와 딸 마르가레타 공주를 결혼 동맹의 수단으로 활용해 1496년 스페인 왕국과 겹사돈 관계를 맺는다. 그는 스페인 왕국의 후아나 공주를 며느리로 맞이하고 그의 딸을 스페인 왕국의 후안 왕자에게 시집보냈다. 이 결혼으로 훗날 막시밀리안은 스페인뿐 아니라 나폴리와 시칠리, 사르디니아 그리고 신대륙의 식민지를 획득하게 된다. 이후 스페인 왕국의 후안 왕자가 일찍 죽는 바람에 막시밀리안의 아들 필립 왕자에게 시집온 며느리 후아나가 스페인 왕국의 상속녀가 되었다. 이로써 합스부르크 가문이 스페인 왕국까지 지배하게 된다.
◇해가 지지 않는 합스부르크가의 영토

▲스페인 왕 카를로스 1세이자 신성로마제국 카를 5세. /위키피디아
그 뒤 필립은 스페인 왕국의 왕이 될 아들 ‘카를’이 1500년에 태어나자 그가 다스리던 플랑드르 지역을 포함한 저지대를 아들에게 선물로 주었다. 그래서 저지대가 스페인 왕국의 땅이 된 것이다. 저지대를 선물로 받은 이 아들이 훗날 유럽의 패자가 된 스페인 왕국의 카를로스 1세 왕이다. 아버지를 일찍 여윈 그는 1516년 스페인 왕국을 다스리시던 외할아버지 페르난도 2세가 돌아가시자 16세의 어린 나이에 스페인 왕에 올라 신대륙 식민지까지 다스리게 된다. 플랑드르 헨트(켄트)에서 태어나 자란 카를로스는 스페인 왕국의 지배 아래 있는 저지대를 비교적 너그럽게 다스렸다. 카를로스는 1519년 친할아버지 막시밀리안 1세가 돌아가시자 신성로마제국의 왕관과 전 합스부르크가의 영지를 상속받아 스페인 왕국의 카를로스 1세이자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5세로서 스페인에서 오스트리아에 이르는 대제국의 수장이 되었다.

▲1547년 합스부르크가의 영토. /위키피디아
이처럼 유럽의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대영토를 확보한 이외에도 신대륙과 동남아의 필리핀 등 광대한 식민지까지 더하여 합스부르크가의 영토는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 되었다. 이후 합스부르크가의 위세는 수 세기간 지속됐다.
◇루터의 종교개혁과 유대인
1517년에 시작된 16세기의 종교개혁은 유대인들의 운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프로테스탄트의 출현은 유대인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종교개혁으로 유대인들에 대한 노골적인 박해는 끝났다. 유대인들이 증오했던 수도사와 수도원들도 신교에서는 없어졌다. 유대인들은 종교개혁을 환영했다. 초기에 신교도와 유대인들은 비교적 잘 지냈다.

▲마틴 루터. /위키피디아
마틴 루터도 처음에는 유대인을 옹호했다. 그가 가톨릭을 공격했던 내용 중의 하나가 가톨릭이 유대인들을 너무 무자비하게 취급했다는 것이었다. 가톨릭의 사제와 수사들이 유대인들을 공격하고 박해한 일을 루터는 강렬한 어조로 비난했다.
루터는 “유대인들은 지상에서 가장 좋은 혈통이다. 성령은 그들을 통하여 성경의 모든 책을 세상에 주시기를 원했다. 그들은 자녀요, 우리는 손님이요 나그네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유대인들을 개종시키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그리스도의 사랑이요, 초대 교회 교부들이 권했던 친절과 관심이 그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일부 유대인들은 루터의 말에 큰 기대를 걸고 그를 환영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멀찌감치 떨어져서 관망했다. 그 뒤 루터는 교황의 박해를 피해 피신 중에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했다. 독일 지역의 말들이 서로 달라 지난한 작업이었지만 그 통에 근대 독일어의 근간이 정리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인쇄술 덕에 각지로 전파될 수 있었으며 루터의 의견에 호응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루터는 교황의 권위를 정면으로 부정하면서 유대인에게 도움을 구했다. 1523년에 쓴 <예수 그리스도는 나면서부터 유대인>이라는 소책자에서, 루터는 도대체 유대인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전혀 없다고 말하면서, 유대인들의 자발적인 집단 개종을 바랬다. 그러나 루터가 번역한 성서보다는 탈무드 쪽이 훌륭한 성서 해석을 해놓았다면서 유대인들이 개종을 거부했다.
이때부터 루터는 돌변했다. 유대인들을 거세게 비난하기 시작했다. 이어 간행된 <유대인과 그 허위에 대해>라는 소책자는 홀로코스트를 향한 거대한 첫 발짝이라 할 만큼 유대인에 대해 과격한 독설을 퍼부었다.
먼저, ‘유대인의 시나고그에 불을 지르고, 타고 남은 것들은 몽땅 뻘 속에 파묻은 다음, 그 초석이나 불탄 재가 사람 눈에 뜨이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루터는 부추긴다. ‘유대교의 기도서를 파기하고, 랍비가 설교하는 것을 금해야 한다. 그리고 유대인의 집을 때려 부수고, 그곳에 사는 사람을 한 지붕 밑이나 마구간에 몰아넣은 다음, 그들에게 이 땅의 지배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해야 한다’, ‘유대인이 길거리나 저자 거리에 들어갈 수 없도록 해야 한다.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이 유해하고 독기 있는 구더기들을 강제 노동으로 내몰아서 이마에 땀을 흘리고 자신들이 먹을 빵을 벌게 해야 마땅하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영원히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루터는 말로 공격하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그의 영향력이 커지자 반유대적인 소책자를 쓰기 이전부터, 그는 1537년 작센에서 유대인을 추방했고, 1540년에는 독일 거리 곳곳에서 내쫓았다.
◇장 칼뱅, 상인 곧 유대인을 지지하다

▲장 칼뱅. /위키피디아
이에 견주어 훗날 영국 청교도 혁명의 사상적 지주가 된 프랑스인 장 칼뱅은 상인들을 지지했다. 당시 유럽에서 상업에 종사하는 자들은 낮은 사회적 지위에 처해 있었다. 이러한 상인들에게 칼뱅은 자신의 직업에 충실한 것이 신에게 봉사하는 길이라고 설교했다. 그 무렵 ‘상인(merchant)’은 유대인과 같은 뜻으로 쓰일 때가 많았다. 특히 해상무역에 직간접적으로 종사하는 유대인을 ‘merchant’라 불렀다. 중세 말 유대인들은 대부분 모직물 분야의 머천트 어드벤처스(Merchant Adventurers) 회사의 일원으로 활동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칼뱅의 주장은 당시로서는 파격이었다. 그리하여 상업이 융성했던 네덜란드에 칼뱅파가 퍼지게 된다. 그는 인간이 스스로의 구원을 확신하면서 세속적인 직업 활동과 합리적이고 금욕적인 일상생활을 함께 영위해야 함을 강조했다. 칼뱅은 근대적 직업관과 생활윤리를 제시해 근대사회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칼뱅은 이렇게 유대인에 대해서 호의적이었다. 칼뱅은 이자를 받고 대부하는 일에 대해 찬성했다. 칼뱅은 5% 이자율 한도 내에서는 빌려주어도 좋다고 했다. 그리고 루터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종교개혁 후 등장한 일부 신교도들도 고리대금업에 대해 관대한 입장을 폈다. 네덜란드 신교도와 영국 청교도들이 이자 상한선을 정해놓고 대부업을 허용한 것이다. 이것이 이 두 나라가 근대에 접어들어 금융 산업을 기반으로 상업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킨 이유이기도 하다. 칼뱅은 그의 저서를 통해 유대인의 주장을 객관적으로 전하는 바람에, 루터파로부터 ‘유대화’ 되었다는 질책을 받을 정도였다.
◇합스부르크, 둘로 갈라지다
그 무렵 저지대 사람들은 루터의 종교개혁 영향으로 신교를 믿는 사람들이 많았다. 부르고뉴 공국, 곧 지금의 네덜란드는 합스부르크 왕가가 혼인으로 스페인 왕가도 계승하자 1516년부터 스페인 왕 겸 독일 황제인 카를(카를로스) 5세의 통치를 받고 있었다.
그 무렵 카를 5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스페인 왕, 독일 왕, 이탈리아 왕, 오스트리아 대공, 네덜란드 영주 등 20여 가지 직함을 가졌다. 그는 유럽에선 70군데 이상의 영지를 소유한 군주였고, 신대륙에선 브라질을 제외한 중남미 전체, 그리고 동남아에선 실론(스리랑카)과 필리핀의 지배자였다. 필리핀은 당시 왕자였던 ‘필립의 땅’이란 뜻이다. 그는 넓은 지역을 통치하기 위해 한곳에 머물지 않고 스페인에서 독일로, 이탈리아로 동분서주하며 전쟁을 벌였다. 카를은 이슬람의 종주국 오스만 투르크와 전쟁을 벌였고, 교황과 싸웠으며, 독일 내 신교도 제후들과 대치했다.
유럽 전역을 휘저으며 넓은 영토를 통치하다 지쳐버린 카를 5세는 이 큰 영토를 혼자 다스리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했다. 그는 1555년 스스로 물러나면서 스페인 왕국과 스페인계 합스부르크령 곧 네덜란드를 포함한 저지대와 해외 식민지는 아들인 펠리페 2세에게 물려주고 나머지 독일계 합스부르크령과 신성로마제국의 왕관은 동생인 페르디난트 1세에게 물려줌으로써 합스부르크가가 둘로 갈라서게 된다.
◇네덜란드, 1568년 독립전쟁을 시작하다

▲펠리페 2세. /위키피디아
이로써 카를 5세의 뒤를 이은 펠리페 2세가 1556년에 스페인 왕이 된다. 스페인의 전성기이자 쇠락기의 시작을 열게 되는 펠리페 2세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그는 자신을 세계 가톨릭의 수호자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플랑드르 지방 저지대 신교도들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종교재판소를 세우고 가혹하게 탄압하기 시작했다.
신교도 가운데서도 칼뱅주의자들이 가장 행동적이고 저돌적이었다. 이들은 상공업에 열심히 종사하는 한편 종교 문제에 대해서는 매우 공격적이었다. 저지대의 상인들은 펠리페 왕의 중과세 정책과 상업 규제에도 반발했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종교탄압과 강력한 중앙집권 정책과 과다한 세금 징수는 북부 네덜란드로 하여금 독립을 염원하게 만든다. 여기에 불을 붙인 게 당시 북유럽을 휩쓸던 ‘성상 파괴 운동’이었다. 신교도들 특히 칼뱅주의자들은 가톨릭 성당에 설치되어 있는 마리아상 등 많은 조각들을 우상 숭배로 여겨 이를 공격해 파괴하기에 이른다. 그들은 이윽고 1566년 8월에 반란을 일으켜 저지대 전역의 400개 이상의 가톨릭 성당들을 부수고 불태웠다.
당시 펠리페 2세가 급파한 스페인 총독 알바 공은 대량 학살로 불온사상을 뿌리 뽑을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이었다. 이듬해 그는 급속하게 확산되던 반란을 진압하고 신교도 1만 8천 명을 처형했다. 그리고 무역에 중과세를 부과했다. 이러한 중과세로 인해 네덜란드 경제는 치명적인 타격을 받게 된다. 그러자 1568년 반란의 불길이 더욱 거세져 전국적인 반란이 일어났다. 펠리페 2세는 즉각 알바 공을 지휘관으로 삼아 1만 명의 진압군을 파견했다. 이에 네덜란드 17개 주 가운데 자유도시가 많았던 북부 저지대의 7개 주는 일제히 궐기하여 독립전쟁에 돌입했다. 스페인 진압군은 전쟁에서 포로를 인정하지 않고 무자비하게 살육했다. 이것이 80년간 계속된 네덜란드 독립전쟁의 시작이었다.
◇앤트워프 유대인들 암스테르담으로 옮겨오다

▲1538년의 암스테르담. /위키피디아
암스테르담이라는 이름은 원래 ‘암스텔강의 둑’이란 뜻이다. 13세기에 어민들이 암스텔강에 둑을 설치하고 정착한 데서 유래하였다. 그 뒤 14세기에는 한자동맹에 가입하여 함부르크의 맥주 수출항으로 번창했다. 16세기 중엽부터 유대인들이 가장 많이 모여든 곳은 앤트워프나 브뤼헤보다 스페인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이었다. 이는 종교적 관용을 베푼 네덜란드의 유대인 수용 정책 덕분이었다. 네덜란드는 유대인들이 그리스도교들하고 결혼하거나 국교를 비판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유대인들을 받아들였다. 이는 오히려 유대인들이 원하는 바였다.
게다가 앤트워프가 1585년에 스페인에 다시 정복되자 절반 가까운 시민들은 북부 네덜란드로 탈주했다. 그나마 그때까지 남아 있었던 유대인들도 이때 대부분 암스테르담으로 옮겨왔다. 그리고 앤트워프 시민 일부는 다른 나라로 떠나갔는데 그 가운데 만여 명이 런던으로 이주했다. 이 가운데 상당수가 유대인이었다. 당시 영국은 유대인의 공식 입국을 허용하지 않았을 때였지만 해상무역의 진흥을 위해 유대인의 입국을 눈감아 주었다. 아니 영국이 불러들였다고 보는 게 옳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당시 영국이 무역에 있어서는 ‘양모’라는 단일 품목 수출과 ‘앤트워프’라는 단일 수출 시장에 목매고 있을 때였다. 또 영국 왕실의 긴급 자금 조달과 관련하여 영국 내 유대 금융인이 없었기 때문에 국내에서 자금 조달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앤트워프에 대리인을 파견하여 필요한 자금을 융통해 쓰던 실정이었다. 당시 그 대리인이 무역상이자 외교관이었던 ‘토머스 그래셤’이었다. ‘악화는 양화를 구축한다’는 그래셤의 법칙을 발표한 그 사람이다. 이때 앤트워프에서 건너간 유대인들이 그 뒤 영국의 해상무역을 이끌었다. 그리고 그들이 1600년 영국 동인도회사와 1605년 레반트회사를 설립하여 동방무역을 주도했다.

▲네덜란드. /위키피디아
이러한 유대인의 이주는 당시 플랑드르 경제에 막대한 손실을 입혔다. 반면 암스테르담 경제는 급속히 발전했다. 그러자 유럽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던 유대인들이 암스테르담으로 대거 모여들었다. 더불어 암스테르담이 부흥하자 유럽 각국의 부유한 상인과 예술가들이 이곳으로 밀려들었다.
◇네덜란드, ‘종교의 자유’ 선언
1579년 네덜란드는 건국 헌장에 ‘종교의 자유’를 선언했다. 이것이 강력한 흡입력을 발산하여 네덜란드는 유럽 전역에서 종교 난민들을 흡수했다. 유대인들이 각지에서 네덜란드로 몰려들었다. 영국에서 국교인 성공회에 대항한 칼뱅주의자들도 심한 박해 때문에 네덜란드로 피신해 왔다. 이때부터 네덜란드에서 종교의 자유는 불가침의 영역으로 존중되었다.
세상의 대부분 종교는 무소유와 청빈을 강조한다. 그런데 유독 부의 축적이 신의 축복으로 여기는 종교가 두 개 있다. 바로 유대교와 칼뱅주의에 뿌리를 둔 청교도이다. 당시 네덜란드 경제의 주축이 스페인에서 추방당한 유대인들과 영국에서 박해를 피해 건너온 칼뱅주의자들이었다.
“칼뱅주의자들은 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곧 신으로부터 선택받은 증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막스 베버는 이같이 이들 청교도로부터 자본주의가 유래했다고 설명했다. 반면 베르너 좀바르트는 “자본주의는 유대인을 따라 들어왔다.”고 이를 반박했다.
여하튼 유대교와 칼뱅주의 정신과 자본이 네덜란드를 세계의 무역, 금융, 산업 중심지로 만들었다. 스페인에서 목숨을 지키기 위해 부득이하게 가톨릭으로 개종했던 마라노들도 암스테르담의 자유로운 종교 환경 덕분에 다시 자신들의 본래 모습을 되찾았다. 이름을 다시 히브리어로 바꾸고 남자는 할례를 행하면서 유대교로 되돌아갔다.
◇암스테르담, 세계 경제의 중심이 되다
1576년 ‘앤트워프의 학살’ 사건으로 유대인들이 암스테르담으로 대거 몰려온 지 15년 만인 1580년대 말에 이르러 암스테르담 규모는 이전보다 3배나 커졌다. 당시 암스테르담은 앤트워프 항구가 가지고 있던 시장을 빠르게 잠식해 가면서 유럽 최대 항구로 급성장했다.
유대인들은 16세기 말에 이르러 암스테르담 상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경제사에서 근대 들어 두 번의 ‘유대 대상인의 시기’가 있었다. 1590년부터 1609년 사이의 20년을 첫 번째 ‘유대 대상인의 시기’라 부른다. 그만큼 경제사에서 중요한 변화가 이 시기에 이루어졌다는 의미이다. 곧 ‘중상주의’가 이 시기에 본격적으로 닻을 올린 것이다. 조나단 이스라엘 런던대 교수는 이 시기에 네덜란드가 세계 무역을 주도하면서 다른 경쟁자들을 제치고 세계 경제의 중심이 되었다고 한다. 어떻게 이렇게 빠른 기간 내에 유대인들이 암스테르담 상권을 장악하고 더 나아가 암스테르담을 세계 경제의 중심으로 만들었는지에 대해 다음 회에서 자세히 알아보자.
[9] 유대인의 암스테르담 시대
척박한 저지대에서 소금 상권 장악해 한자동맹을 물리치다

▲저지대는 스헬데강, 라인강, 뫼즈강의 낮은 삼각주 지대 주변에 위치한 17개 자치주로 이루어진 느슨한 연합체. /위키피디아
저지대는 스헬데강, 라인강, 뫼즈강의 낮은 삼각주 지대 주변에 위치한 17개 자치주로 이루어진 느슨한 연합체로, 합스부르크가의 결혼동맹으로 1516년부터 스페인령이 되었다. 오늘날의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지역 일대이다.
15세기 말 이베리아반도에서 추방당해 저지대에 정착했던 유대인들에게 이 지역은 종교의 자유를 제외하고는 그리 풍요로운 곳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열악한 환경이었다. 저지대는 국토의 4분의 1이 해수면보다 낮아 댐을 쌓아 간척한 땅이었다. 그러다 보니 소금기가 많아 농업과 목축업이 부적합했다.
오죽하면 함께 모여 식사해도 자신이 먹은 거를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더치페이’가 발달했겠는가. 16세기 들어 수산업과 염료 산업이 발전하기는 했으나 모직물 산업과 금융 산업이 발달한 플랑드르 지방을 제외하고는 전반적으로 지하자원이나 특별한 생산물이 없는 척박한 곳이었다.
1576년 ‘앤트워프 약탈 사건’으로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한 유대인들이 이러한 척박한 환경 속에서 상업과 교역을 키워나가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유대인 역사를 살펴보면 유대민족은 형극의 역사를 반드시 영광의 역사로 바꾸는 능력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비즈니스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러한 네덜란드의 생태적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유대인들의 노력은 내다 팔 국내 자원이 빈약한 까닭에 더더욱 중계무역에 주목했다.
◇다이아몬드 산업, 암스테르담과 앤트워프가 겨루다
앤트워프 유대인들이 암스테르담으로 옮겨가자 이번에는 암스테르담이 다이아몬드 유통 중심지로 발돋움했다. 그러나 앤트워프도 이내 재정비하여 오늘날에는 벨기에의 다이아몬드 수출액이 네덜란드를 앞서고 있다.
이렇듯 오늘날까지도 다이아몬드 산업은 유대인들의 독과점 사업이다. 워낙 이익이 많이 남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의 주특기인 ‘일괄 독점 체제의 완성’은 이 산업에서도 꽃을 피웠다. 그들은 생산지와 가공지 그리고 판매지의 모든 유통구조를 일괄 장악한 독점 시스템을 이용해 수급을 조절하여 고가의 판매정책을 고수하고 있다.
이는 세계 최대의 다이아몬드 유통업체인 드비어스의 창시자 세실 로즈의 작품이다. 그는 공급과 수요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만이 다이아몬드 가격을 고가로 묶어 둘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생산과 공급을 조절하기 시작했다.
그 첫 단계로 그는 1888년 드비어스사를 설립하여 판매를 독점했다. 그리고 광산을 사들이기 시작함으로써 공급을 장악하여 단일 채널의 다이아몬드 시장을 구축했다. 이후 20세기 후반에 러시아와 캐나다 등에서 경쟁 생산업체들이 등장했으나 그들 역시 대부분 유대인들로 담합 체제는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이는 다이아몬드가 만약에 자유로운 경쟁 체제로 시장에 공급되기 시작하면 하루아침에 돌 값이 될 수 있음을 뜻한다.
◇바이킹의 소금 찾아 삼만리

▲바이킹의 대항해. /위키피디아
중세 유럽에서 소금 상권을 장악한 민족이 해상 교역을 주도했다. 8~11세기의 스칸디나비아 지역 바이킹들은 약탈 못지않게 교역에도 힘써 수로를 통한 교역망 개척은 주로 그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들은 수심이 얕은 강에서도 탈 수 있는 가늘고 긴 롱십(longship)을 타고 강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강물이 끊기면 배를 끌거나 둘러메고 다른 수로를 찾아 이동하면서 교역망을 개척했다. 당시는 약탈과 거래가 혼재했던 시기였다.
덴마크 지역 바이킹이 9세기 저지대와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로 내려온 것은 해안가에서 소금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들의 주요 교역품이자 주식인 절임 대구를 염장할 소금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발트해는 평균 수심이 55m에 불과한 대륙붕으로 겨울철 결빙 시기에는 해수 증발이 없고 주변 강들에서 흘러나오는 민물로 인해 염도가 낮아 소금 생산이 불가능했다.
노르망디에 내려온 바이킹들이 파리를 자주 습격하자 프랑스 왕은 바이킹의 수장 롤로와 911년 화해 조약을 맺고 그에게 공작의 지위를 주어 아예 노르망디를 내주었다. 이후 바이킹들이 시칠리아 등 지중해로 침공한다. 이 역시 소금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그 뒤 롤로의 후손 윌리엄 1세는 1066년 영국을 정복하여 영국 왕가의 시조가 된다. 이로써 정복왕 윌리엄은 영국 왕이자 노르망디 공작의 지위를 겸하게 되어 노르망디 지역은 영국 왕의 영토가 되었다. 이때 윌리엄 왕은 영국의 경제를 활성화하고, 다른 바이킹족들이 영국을 침범하지 못하도록 대규모 요새 겸 성들의 건축 자금 마련하기 위해 프랑스의 유대인들을 영국으로 불러들였다.
◇한자동맹의 번영

▲한자동맹. /위키피디아
암흑의 중세에 바이킹의 뒤를 이어 경제적 번영을 누리는 곳이 있었다. 그곳은 13세기부터 17세기까지 북유럽 한자동맹의 도시 국가들이었다. 한자동맹(Hanseatic League)이란 독일 북부 연안과 발트해 연안 도시들 90여 개가 힘을 합쳐 결성한 상업 동맹이자 자체적인 해군을 보유한 무역 공동체를 일컫는 말이다. 이들 상인집단은 14세기 덴마크와의 10년 전쟁에서 승리하여 세력권을 공고히 했다.
한자동맹도 소금 교역을 통해서 번창하기 시작했다. 북해 연안에는 대구를 비롯한 생선이 많이 잡혔다. ‘물 반, 고기 반’이라는 말이 생소하지 않을 정도로 거의 무진장으로 잡혔다. 그러나 생선은 쉽게 상했다. 햇빛에 말려서 건어물로 만들면 장기 보관이 가능했으나, 북유럽은 대체로 흐린 날씨가 연중 이어졌다. 그래서 염장을 하거나 훈제해야 했다.
훈제에는 값비싼 목재가 너무 많이 소요되었고 공급마저 충분치 못했다. 남은 방법은 염장밖에 없었다. 염장은 물론이고 훈제하기 위해서도 소금이 필요했다. 그러나 어장에서 가까운 곳에서는 소금이 많이 나지 않았다. 그러다 멀리 발틱해 연안 지역에서 암염 광산이 개발된 이후부터 북해 어장의 생선들이 유럽의 중요 식량자원의 역할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따라 한자 동맹의 도시들은 소금과 생선의 교역을 통해서 경제적 번영의 토대를 닦았고, 소금과 생선의 교역은 다른 특산품의 교역까지 활발하게 했다.
◇유대인. 소금으로 승부보다

▲빌렘 벤켈소어. /위키피디아
스칸디나비아 근처 발트해에서 잡히던 청어가 14세기부터는 해류의 변화로 네덜란드 연안 북해로까지 밀려드는 이변이 일어났다. 그러다 1425년경부터는 어장의 중심이 아예 발트해로부터 북해로 이동했다. 네덜란드인들은 너도나도 청어잡이에 나섰다. 그 결과 당시 매년 여름이면 약 1만t의 청어가 잡혔다.
그 무렵 네덜란드는 총인구가 100만 명 정도였는데 고기잡이와 관련된 인구만 30만 명이었다. 거의 전 세대가 청어잡이와 연관되어 있었다. 한마디로 청어잡이는 전 국민의 밥줄이었다. 14세기 중엽 네덜란드의 한 어민 ‘빌렘 벤켈소어’는 선상에서 작은 칼로 한칼에 청어의 배를 갈라 이리를 제외한 내장을 꺼내고 머리를 없앤 다음 바닷물을 85% 증발시킨 함수(鹹水)에 절여 통에 보관하는 염장법을 고안해 냈다. 바다에서 잡은 청어를 잡는 즉시 함수에 절이고 육지에 돌아와서 소금에 절이는 거였다. 이렇게 하면 1년 넘게 보관할 수 있었다.

▲네덜란드의 청어 어업을 그린 그림. /위키피디아
그러다 이런 작업을 위해서는 폭넓은 갑판의 배가 필요했다. 그들은 1416년 ‘뷔스(buss)’라는 갑판이 넓은 청어잡이 전문 선박을 개발했다. 적재량은 100t에 달했고, 염장 숙련공은 물론이고 통 만드는 기술자도 동승했다.
네덜란드는 이 두 가지 기술혁신을 통해 주변 경쟁국들을 압도했다. 조업 중에 보급선이 와 소금을 갖다주고 잡은 생선을 가지고 가, 항구로 회항할 필요 없이 계속 조업하면서 염장 작업도 직접 배 위에서 할 수 있게 됐다. 이로써 네덜란드 어선은 청어 이동 경로를 따라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연안까지 종횡무진으로 조업했다. 어장 쟁탈로 네덜란드와 스코틀랜드는 세 번이나 전쟁을 치렀다.
냉장고가 없는 당시에 소금에 절인 청어는 전 유럽에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이렇게 청어를 저장하고 수출하는 데에는 소금이 필수품이었다. 절임 청어 원가의 대부분은 청어가 아니라 소금이 차지했다. 당시 식량이 부족하고 냉장고가 없던 시절이라 보관 기간을 획기적으로 연장시켜준 절임 청어는 전 유럽에서 인기가 높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1년에 140일이 넘는 기독교 육류 금식 기간에도 생선은 먹을 수 있어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유럽 각지에서 몰려온 상인 수백 명이 매일 아침 소금에 절인 청어를 유럽 전역으로 가져가 돈을 벌었다. 당시 필요한 소금의 일부는 브뤼헤나 앤트워프를 통해 수입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독일이나 폴란드 암염 광산에서 한자동맹 무역망을 통해 공급받아 왔다.
스페인 왕국에서 추방당해 저지대에 온 유대인들이 가장 먼저 주목한 것은 청어를 절이는 데 필요한 대량의 ‘소금’이었다. 그 무렵 소금은 비쌌다. 유대인들은 바로 이 점에 착안했다. 그들은 먼저 한자동맹으로부터 공급받는 소금 대신 이베리아반도의 천일염을 수입했다.
천일염이 암염보다 값이 쌀 뿐 아니라 질은 말할 나위 없이 훨씬 더 좋았다. 이로써 유대인들은 청어 절임 소금을 암염에서 천일염으로 서서히 대체해 나갔다. 이는 네덜란드를 소금 중개무역 중심지로 만들어 준 중요한 시초였다. 유대인들은 소금 공급을 토대로 자연스레 절임청어 유통의 독과점 체제를 이룰 수 있었다.
◇유대인, 최초의 천일염 ‘정제 소금’으로 고객을 사로잡다

▲정제 소금. /위키피디아
그리고 이들은 여기서 한 발자국 더 나갔다. 천일염을 다시 한번 ‘정제’할 생각을 한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천일염은 암염보다 순도도 높고 깨끗했다. 그런데도 이를 다시 정제하여 더욱 고운 소금으로 재탄생시킨 것이다. 당시 소비자는 소금의 순도, 모양, 때깔 등 소금의 질에 민감했는데 특히 양질의 음식에 쓰일 소금에는 더 그랬다.
유대인들이 이러한 고객의 요구에 맞춘 것이다. 이 요구에 부응해 역사상 처음으로 거친 소금을 소비자가 원하는 질대로 만드는 소금 정제산업이 유대인에 의해 최초로 발달했다. 유대인들은 대서양 연안 천일염으로 결정이 더 작고 염도가 높은 소금을 만들기 위해 이를 다시 끓여 불순물을 제거하고 증발시켜 순도 높고 고운 결정을 만들었다. 유대인은 이렇게 고객을 만족시켜 돈 버는 법을 알고 있었다.
16세기 중엽에는 총 400개의 대서양 연안 소금정제소에서 4만t의 소금을 생산했다. 이는 당시 저지대 소금 필요량의 절반에 해당하는 양이었다. 그럼에도 이 정제 소금이 멀리 오스트리아나 독일에서 육로로 가져오는 암염보다 쌌다. 한마디로 이베리아반도의 정제 천일염은 대단한 가격 경쟁력과 품질 경쟁력 모두를 갖고 있었다. 이로써 북해 지역이 발트해를 제치고 소금 중계무역의 중심지로 부상했다.
◇유대인, 한자동맹을 역사 속에 파묻다
경쟁에서 밀린 한자동맹 도시들의 북해 주도권은 여기서 끝나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만큼 소금이 교역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았다. 채굴하기도 어렵고 운반도 힘든 독일어권 지역의 암염 대신 유대인들은 양질의 천일염을 정제하여 대량으로 들여와 한자동맹과의 무역전쟁에서 이긴 것이다. 소금이 경제권역 간의 주도권을 바꾼 것이다.
당시 한자동맹이 망한 이유는 또 있었다. 그들은 유대 상인들이 발행하는 환어음을 거부하고 매매 대금으로 현지 화폐만을 고집했다. 그러니 당시 북부 이탈리아와 플랑드르 상권을 쥐고 있었던 유대 상인과는 상업이 연계될 수 없었다. 그러던 차에 소금의 독점적 공급이 깨지고 판매가 줄면서 금융이 꽉 막힌 그들에게 유동성이 줄어들자 급격히 쇠퇴한 것이다.
유대인들은 청어를 절이고 남는 천일염과 정제 소금은 인근국들에 싼값에 되팔아 소금 유통을 완전히 장악했다. 이로써 유대인은 소금의 품질은 높이고 가격은 암염에 비해 낮추어 생산지-유통-소비지 일체를 지배하는 독과점 체제를 이루었다. 유대인들은 유통시킬 국내 자원이 부족하자 이렇게 경쟁력 있는 원자재나 상품의 부가가치를 높여 재수출하는 중계무역을 키워나갔다. 네덜란드의 척박한 환경이 오히려 전화위복이었던 셈이다.
◇환어음 거래 활성화로 상업 활동이 활발해져
고대로부터 상인들이 몸에 귀중품이나 금은 주화를 갖고 다니는 것은 매우 위험했다. 그래서 귀한 상품이나 주화를 운반해야 하는 상인들은 항상 대규모 상단을 구성해 함께 다니면서 용병들을 고용해 그들을 호위케 했다.
유대인들은 이러한 위험 부담을 줄이기 위해 그들 디아스포라 간 교역에 있어 주화 대신 어음을 사용했다. 어음은 거래 당사자 간에 일정한 시기에 일정한 장소에서 일정한 금액을 주겠다고 약속한 증서다. 처음에는 어음 발행자가 채권자에게 직접 지급하는 약속어음이었다.
그런데 앤트워프 유대인들이 어음의 뒷면에 채권의 양도를 기재하는 ‘이서’(裏書)를 함으로써 처음으로 상인들 사이에 서로 이전되고 할인시장에서 유통되기도 했다. 이것이 환어음으로 수표 역할을 했다. 강력하고 거대했던 한자 상인들이 환어음을 받지 않아 망하는 것을 본 유럽 상인들은 유대인들의 환어음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환어음이 유통되자 신용거래가 자리 잡고 시중 유동성이 늘어나는 효과를 보여 상업 활동이 활발해졌다.
◇네덜란드의 부, 청어로부터 시작되다
유대인들은 청어 처리에도 일대 혁신을 이루었다. 바로 ‘분업화’를 도입한 것이다. 고기 잡는 사람, 내장 발라내는 사람, 소금에 절여 통에 넣는 사람 등으로 나누어 작업을 진행했다. 숙련공들은 1시간에 약 2천 마리의 청어 내장을 발라냈다. 이로써 절임 청어의 생산량이 획기적으로 증가했다. 그러자 청어의 포획부터 시작하여 처리와 가공 그리고 수출은 기업화되기 시작했다. 청어 절임이 본격적인 산업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후 유대인들은 네덜란드에서 오늘날의 수협 격인 ‘어업위원회’를 만들었다. 동 위원회는 의회로부터 법적인 권리를 부여받아 체계적인 청어 산업을 관리 감독했다. 어업위원회는 품질 관리를 위해 저장용 통의 재질과 소금의 종류, 그물코의 크기를 정했다. 그리고 가공 상품의 중량, 포장 규격 등 엄격한 품질기준을 만들어 네덜란드산 청어가 뛰어난 품질을 지속적으로 지킬 수 있도록 관리했다. 그리고 어획 시기를 한정해 청어 산업의 장기적인 포석과 더불어 공급을 조절하여 청어 산업의 고부가가치화를 이끌었다. 이를 바탕으로 유럽 시장에서 다른 나라에 견주어 우수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러한 일관 공정 체계의 완성과 유통의 장악, 그리고 공급 조절 곧 ‘독과점 전략’은 원래 유대인들의 장기였다.

▲절임청어. /위키피디아
유대인들은 염장 대구가 영국과 프랑스 해군과 상선의 필수품이 되었듯이 네덜란드 해군과 상선 모두에 소금에 절인 청어를 공급했다. 이로써 안정적인 공급처를 확보했다. 그리고 규모의 경제를 살려 절임 청어를 품질이 균일한 경쟁력 있는 상품으로 만들어 전 유럽에 판매했다.
지금도 네덜란드 사람들은 절임청어, ‘더치 헤링(dutch herring)’을 즐겨 먹는다. 주로 꼬리를 잡고 통째로 먹기도 하고, 양파를 곁들여서 샌드위치로 먹기도 한다. 청어의 비릿한 향과 양파가 조화를 이루면서 은근히 입맛을 당기는 묘한 매력의 국민 음식으로 사랑받고 있다.
2023.01.22
[10] 청어 뼈 위에 건설된 암스테르담
유대인, 3차례에 걸쳐 암스테르담으로 몰려오다
◇네덜란드 염장 청어가 인기인 이유

▲생청어를 먹는 모습. /위키피디아
청어는 지방질이 많아 빨리 상했다. 그래서 상하기 전에 염장 처리하려면 만선이 안되더라도 빨리 항구로 돌아와야 했다. 네덜란드 어부들은 14세기 중엽부터 청어를 배 위에서 작은 칼로 내장과 가시를 처리하여 바닷물을 85% 증발시킨 함수(鹹水)에 염장하는 ‘선상 염장’ 기술을 개발함으로써 이제는 항구에 자주 돌아갈 필요가 없어졌다. 이는 주변 경쟁국들을 따돌리고 청어 어획고를 획기적으로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게다가 함수로 염장한 청어는 소금에 절인 청어에 비해 짜지 않아 생선 식감이 훨씬 좋았다. 함수로 염장한 청어가 네덜란드 사람들이 즐겨 먹는 ‘생청어’(Dutch Herring)이다. 여기에 식초를 부어 절이면 ‘식초 절임 청어’, 연기에 말리면 ‘훈제 청어’, 소금으로 2차 염장하면 1년 이상 유통할 수 있는 ‘염장 청어’가 된다. 이로써 경쟁국에 비해 맛이 좋은 네덜란드 염장 청어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 청어 산업은 국가 산업이 되었다.
◇청어잡이 배의 진화

▲청어잡이 전용선 ‘헤링버스’와 보급선. /위키피디아
이제 네덜란드 어부들은 북해 앞 바다뿐 아니라 청어 떼를 쫓아 스코틀랜드와 아이슬란드 지역까지 진출할 수 있었다. 그런데 기존의 작은 고기잡이배로서는 원양 항해가 무리였다. 그래서 15세기 중반부터 청어잡이 전용 선박 ‘헤링버스’(Herring Buss)가 개발되었다.
네덜란드 저지대 원주민들은 8~11세기에 이주한 바이킹 후손들이 많았다. 바이킹 배는 길쭉하고 물에 얕게 잠기는 것이 특징이었다. 그들은 청어잡이 배를 기동성 좋은 바이킹 롱쉽(long-ship)을 토대로 선상 작업에 편리한 형태로 개량했다. 우선 선상에서 청어 내장과 가시를 처리한 후 통에 담는 작업을 원활하게 할 수 있도록 갑판 넓이를 라운드쉽(round-ship) 모양으로 키웠다.
그리고 어업 방식도 진화했다. 청어잡이 배가 항구로 회항하는 대신 보급선들이 식량과 함수, 소금을 싣고 와서 청어를 가져가는 시스템으로 바뀌었다. 이로써 청어 잡는 어부들이 바다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청어잡이 배 또한 더 많은 청어와 소금, 그리고 더 많은 선원들을 태워야 했기에 헤링버스 크기는 지속적으로 커져 16세기 말에는 140~200톤 규모에 달했다. 이렇게 커진 배는 청어잡이 시즌(5~9월)이 끝나면 청어 관련 무역선으로도 사용할 수 있었다. 그들은 배 만드는 기술을 비밀에 부쳐 설계도의 외부 유출을 엄격히 금했다.
◇유대인, 3차례에 걸쳐 암스테르담으로 몰려오다
유대인들이 암스테르담에 몰려든 시기는 크게 3차례이다. 1차 이주는 스페인 왕국에서 추방된 1492년과 포르투갈에서마저 추방된 1497년, 2차 이주는 앤트워프 학살 사건에서 탈출한 1567년, 3차 이주는 앤트워프가 스페인에 정복당한 1585년이었다.
유대인들이 1차 이주하여 활발히 활동하던 1514년의 암스테르담 인구는 1만여 명에 불과한 작은 항구도시였다. 그 뒤 2차례에 걸쳐 유대인들의 이주가 더 이루어져 암스테르담 인구가 급격히 불어났음에도 1590년 암스테르담 인구는 4만 명 남짓이었다. 이후 유대인들은 암스테르담의 항구 기능을 정비하고, 대대적으로 간척사업을 벌이고, 운하를 파서 세계적인 항구로 발전시켰다. 이에 힘입어 인구도 급격히 불어나 1620년에 10만, 1670년에 20만 명의 대도시로 급성장하게 된다. 그 무렵 암스테르담 인구의 11%가 유대인이었다.
◇청어 산업 호황이 조선업 발전을 이끌다
1차 이주 때 이베리아반도에서 추방당해 몰려온 유대인들이 암스테르담에 정착하면서 스페인 천일염을 수입해 소금 상권을 장악함으로써 한자 상인들을 몰아내고 자연스레 청어 산업과 조선업을 주도하게 되었다.
유대인의 ‘표준화와 분업화’로 청어잡이가 호황을 누리다 보니 고기잡이 배가 많이 필요했다. 이는 조선업 발전으로 이어졌다. 또 조선업이 발전하다 보니 화물선 제작 능력이 좋아졌다. 네덜란드 산업은 이처럼 수산업에서 시작하여 배를 건조하는 조선업과 해운업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발트해 무역이 네덜란드 무역의 어머니

▲발트해. /위키피디아
조선업이 발달하니 목재업이 호황을 누렸다. 100톤이 넘는 청어잡이 배를 대량 건조하기 위해서는 대량의 목재가 필요했다. 선박용 목재는 땔감용 나무보다 재질이 우수해야 했다. 대형 선박 한 척 건조하는데 약 2,000그루의 참나무가 필요했다. 6만 평 숲에서 100년 동안 키워야 확보할 수 있는 양이었다. 그런데 저지대는 소금기가 남아 있어 큰 나무가 없었다.
유대인들은 처음에 라인강을 이용해 강 주변의 독일 내륙 숲에서 자른 통나무들로 뗏목을 만들어 암스테르담까지 가져왔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턱없이 모자랐다. 유대 무역상들은 삼림이 풍부한 스칸디나비아로 눈을 돌렸다. 그들은 배 밑바닥이 평편한 배로 스웨덴과 덴마크 사이의 수심이 낮고 물살이 빠른 ‘외레순 해협’을 지나는 경로를 개척해 발트해 무역을 주도하게 된다. 이후 핀란드와 스웨덴에서 통나무를 대량 수입해 목재 제재소와 조선소를 확장했다. 1497년부터 1503년 사이에 발트해를 드나들면서 통관세를 지불한 선박의 70%가 네덜란드 배였으며 그중 78%가 유대인이 많이 사는 홀란트 주의 배들이었다.

▲초기 발트해 무역. /위키피디아
어업과 무역의 성장은 더욱 조선업 발전을 촉진했다. 유대 무역상들은 목재 수입을 위해 빈 배로 발트해까지 갈 수는 없어 배에 뭐라도 실어야 했다. 그들은 소금과 절임 청어 그리고 플랑드르 모직물, 프랑스 포도주, 독일 아마와 맥주 등을 발트해 지역에 수출하고 목재와 곡물 그리고 조선업에 필요한 자재들을 수입했다. 이 중 일부를 자체 소비하고 나머지를 서유럽과 지중해 도시에 내다 팔고, 돌아오는 길에 정제되지 않은 소금과 기타 제조업 제품들을 수입하는 중계무역을 발전시켰다. 당시 네덜란드에서는 청어 절임에 필요한 질 좋은 소금을 추출하는 정제업이 크게 발전했다.
발트해 무역의 백미는 곡물 중계무역이었다. 16세기에 유럽 인구가 크게 늘어나 식량이 모자랐다. 1500년경 8,100만 명이었던 인구가 1600년경에 1억 400만 명으로 28%나 늘어났다. 식량 생산성이 낮았던 근세에 인구가 크게 느니 도시 규모가 커지면서 지중해 도시들이 기근에 허덕였다. 네덜란드 무역상들이 당시 유럽 최대의 곡창 폴란드에서 수입한 식량은 중계무역을 통해 지중해 지역에 비싸게 수출했다. 특히 1550~1650년까지 폴란드 곡물은 서유럽인과 지중해 사람들에게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한 식량이었다. 결국 네덜란드의 발트해 무역이 지중해까지 삼켜버린 셈이다. 네덜란드 무역선은 지중해 곳곳에 진출했다.
◇앤트워프 반란과 네덜란드 독립전쟁
16세기 중반까지 네덜란드의 약진은 놀라웠다. 하지만 이는 스페인 제국의 향신료 중계무역을 독점한 앤트워프의 성장에는 견줄 바가 아니었다. 그 무렵 앤트워프가 유럽 무역의 중심이었으며 암스테르담은 앤트워프의 외항 역할에 불과했다. 단적인 예로, 1543~1545년 암스테르담은 저지대 수출의 4%에 불과했고 앤트워프는 80%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랬던 것이 1567년 앤트워프 용병 반란으로 시민 7천 명이 학살당하면서 유대 무역상들이 대거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해오면서 두 도시의 상황은 역전을 맞이하게 된다. 앤트워프의 무역 네트워크가 고스란히 암스테르담으로 옮겨진 결과였다. 앤트워프 학살 사건을 계기로 1568년 스페인 지배를 거부하는 네덜란드 독립전쟁 곧 ‘80년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후 유대인들은 독립전쟁 자금을 지원하기 위해 유럽 곳곳의 유대인 디아스포라 자본을 끌어들여 전쟁 채권시장을 발전시켰다.
◇유대인, 동방 상품의 유통과 설탕 산업으로 부를 일구다
네덜란드는 청어 산업 호황과 더불어 한자 상인을 물리치고 이렇게 북유럽과 발트해의 무역 주도권을 획득했을 뿐 아니라 유대인들 덕분에 베네치아로부터 포르투갈 그리로 앤트워프로 이어졌던 동방 상품의 유럽 유통권을 인계받았다. 이후 본격적인 네덜란드 시대가 전개된다.

▲16세기 앤트워프 설탕 정제소. /위키피디아
그 무렵 소금도 비쌌지만 그 보다 더 비싼 것이 설탕이었다. 유대인이 떠난 앤트워프의 설탕 정제산업도 1585년 이후 자연스럽게 암스테르담으로 넘어왔다. 암스테르담이 앤트워프를 대신하여 브라질, 카나리아 제도 등지에서 온 원당의 집산지가 되었다. 당시로선 설탕 산업이 가장 돈 많이 버는 첨단산업이었다. 이로써 암스테르담이 당대 최대의 상업 도시가 된다. 나중에는 중상층까지 값비싼 설탕을 애호하자 암스테르담 시정부는 1602년 ‘사치품 사용 제한령’을 내려 설탕의 국내 소비를 막았다.
◇해상무역 증대와 비례해 커지는 상선들
네덜란드의 해상무역이 증대하자 상선의 크기도 커졌다. 그 과정을 보자. 13세기 삼각돛을 활용해 맞바람을 이겨내는 ‘자이빙’이라는 기술이 개발되자 종래 인간 근육의 힘으로 노를 저어 움직이던 갤리선은 그 역사를 마감하고 범선에 자리를 내주었다. 1450년경 역풍에 유리한 삼각돛과 순풍에 유리한 사각범의 장점을 혼용해 강한 계절풍을 타고 큰 바다를 항해하는데 적합한 캐랙선이 등장했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배가 바로 캐랙선이다. 그 뒤 해상무역이 증대하자 상선의 크기도 커졌다. 캐랙선의 크기는 점차 늘어나 15세기 400톤 정도였던 것이 16세기에는 1,000톤 이상이 되었다.

▲갤리온선. /위키피디아
이후 해적의 출몰이 잦아지자 16세기에 등장한 군선이 갤리온선이다. 캐랙선과 갤리온선은 외형상 크게 다르지 않으나 갤리온선은 처음부터 군용으로 쓰기 위해 만들어진 배로서 적을 제압하기 위해 크게 만들었다. 16세기 말엽의 갤리온선은 크기가 더 커졌다. 보통 1,000톤에서 2,000톤 규모로 거대한 몸집에 비해 길이를 늘리고 폭을 줄여, 물의 저항을 최소화했다. 옆으로 대포를 일렬로 장착하고도 속도가 빨랐다. 또한 적재 용량을 늘리기 위해 선체의 폭이 수면 부근에서 넓어지는 둥근 형태를 취하는 동시에 높이는 줄여 안정성을 향상시켰다. 빠르고 강한 갤리온선의 등장은 해상무역을 확산시켰고 많은 식민지에 유대인 커뮤니티인 디아스포라들을 탄생시켰다.
원래 유대인들은 중세 해양국가 제노바와 베네치아 때부터 선박 제조와 항해에 대한 남다른 기술을 갖고 있었다. 이 기술이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전해져 대항해 시대를 여는 원천기술이 된다. 이후 사각돛과 삼각돛으로 빠르게 움직이는 갤리온선의 덕을 톡톡히 본 곳은 네덜란드였다. 그 무렵 네덜란드는 유대인들 덕분에 해상무역뿐 아니라 조선업 경쟁력도 세계 최강이었다.
◇네덜란드 국가경쟁력, 대형 수송선의 대량 건조기술

▲대형 수송선. /위키피디아
해상무역이 급증하면서 조선업은 대형화하기 시작했다. 16세기 중반부터 조선업은 유대인들의 주도로 ‘경량화’와 ‘표준화’에 승부를 걸었다. 그래야 배가 가벼워 빨리 달릴 수 있고 만들기 쉽기 때문이다. 이를 토대로 배의 크기를 키워 화물 적재량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진화했다. 경쟁국인 영국 배들이 중무장한 채 사람을 많이 태울 목적으로 튼튼하게 건조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면, 네덜란드 선박들은 최소의 선원으로 최대의 경제효과를 얻는 데 초점이 맞추어졌다.
게다가 조선 기술자들에 의해 조선소용 밧줄, 목재 제재용 톱과 조선소용 기중기와 같은 첨단 장비와 기계가 발명되어 근대식 조선소가 탄생했다. 이로써 네덜란드에서는 가볍고 표준화된 ‘보급품 수송함’의 대량 건조기술이 1570년에 개발되었다.

▲복합 도르래. /위키피디아
가장 큰 특징은 처음으로 중간 돛대(topmast)가 사용되어 수직으로 두 개의 돛을 연속 끌어내려 펼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또 돛대에 장착된 ‘복합도르래’로 인해 이전에 만들어진 배에 비해 5분의 1 정도의 인원만으로 돛 관리가 가능해졌다. 한마디로 선박의 속도는 크게 향상되었으며 관리 인원은 최소화되었다. 이는 경제사에 한 획을 그을 만한 대단한 기술이었다.
게다가 선박 기자재 ‘표준화’로 선박 건조 비용이 영국의 60%에 지나지 않았다. 이는 곧 화물 유통 경쟁력의 차이로 이어졌다. 화물 운송 운임을 경쟁국 대비 절반 이하로 낮출 수 있었다. 이로써 네덜란드 조선업은 당대의 최고 산업이 된다. 또한 네덜란드가 진출한 해외 항구에서도 네덜란드식 선박 기자재 표준화가 정착되어 네덜란드 선박의 수리는 해외에서도 손쉽게 처리되었다.
훗날 선박 기자재 표준화로 선박 건조를 빠르게 하기로 유명한 ‘자르담’ 조선소에서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가 러시아의 부국강병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신분을 숨기고 100여 명의 사절단에 끼어서 목수로 일한 적이 있을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