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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재윤의 슬픈 중국6/ 〈51〉 제3기 시진핑, 마오쩌둥 이어 - 〈60〉중국, 아직도 마르크스를 떠받드는 이유는?

상림은내고향 2022. 12. 31. 15:49

송재윤의 슬픈 중국6/ 조선일보 2022

대륙의 자유인들

10.15

〈51〉 제3기 시진핑, 마오쩌둥 이어 인격신에 오를 것인가

▲<2019년 베이징 전역에 내걸린 시진핑의 사진과 구호. 사진/Saša Petricic/CBC>

 

정치의 가장 큰 병폐는 권력의 사유화와 인격 지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정치의 가장 큰 병폐는 권력 사유화(privatization of power)에 있다. 권력 사유화란 법체제와 정치 제도를 허물고 공권력을 자의적으로 사용하는 권력자의 전횡과 농단을 의미한다. 권력 사유화가 극단화되면 인격적 지배(personalist rule)가 나타난다.

 

나치 독일의 히틀러, 구소련의 스탈린, 중국의 마오쩌둥,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북한의 김일성, 김정은 등이 대표적이다. 그들은 단순한 독재자에 머물지 않고 인격신이 되어 날마다 전 인민의 눈동자에 강림했다. 전체주의 정권의 인격신은 과연 어떻게 다수 인민을 그토록 철저하게 길들이고 지배할 수 있을까? 노예근성은 어두운 인간 본성의 발현인가? 아니라면, 폭력이 인간 본성을 뒤틀어서 정신적 불구로 만든 탓일까?

 

▲<히틀러, 스탈린, 마오쩌둥, 20세기 전체주의 정권의 인격신이었다. 사진/AFP Archive/AFP files/Collection Roger-Viollet>

 

1990년대 구소련이 해체되고 동구의 자유화가 진행되면서 전체주의에 대한 민주주의의 승리가 역사의 필연적 과정처럼 확실해 보였다. 1990년대 초 구소련의 노동자들이 마르크스와 레닌의 동상을 깨부수고 흙발로 그의 두부(頭部)를 짓밟는 사진들이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제도적 진화 과정으로서의 역사는 이미 종언을 고했다는 섣부른 예측이 세계 정치학계에서 선풍을 일으키기도 했다.

 

한데 어쩐 일인가. 2010년대 중반 이후부터 우리는 다시금 전 세계 권위주의 정권에서 강력한 독재자에 의한 인격적 지배가 나타나는 음울한 현실을 목도하고 있다. 러시아의 푸틴과 중국의 시진핑이 앞에서 인격 지배의 쌍두마차를 몰고 달린다. 그 뒤를 터키, 방글라데시, 폴란드, 헝가리, 에콰도르의 권력자들이 따라가고 있다. 미국 정치학자들의 분석에 따르면, 1988년 모든 독재 정권의 23%만이 인격적 지배를 보였는데, 2016년엔 40%의 독재 정권이 강력한 일인 지배로 전락했다(“The New Dictators,” Foreign Affairs Sept. 26th, 2016).

 

▲<구소련 붕괴 후 레닌의 석상을 해체하는 사람들. 사진/ Toppling Lenin | © Ur Cameras / Flickr>

 

집권 이후 권력의 공고화를 위해 정치의 제도화를 후퇴시킨 중국의 시진핑 정권은 종신 집권의 길을 열고 권력 사유화에 이미 성공한 형국이다. 아직 인격신의 반열에 오르진 않았지만, 오늘날 중국에서 시진핑의 권력은 후진타오, 장쩌민이 누렸던 권력보다 훨씬 강력해 보인다. 그는 진정 제2의 마오쩌둥이 되려 하는가?

 

제20차 중공 당 대회, 세계의 이목이 쏠리는 이유는?

며칠 전 학부 시절 광활한 만주 벌판의 한 도시에서 만나 30년 가까이 오랜 친분을 쌓아온 한 중국인 친구와 문자를 주고받았다. 30대 초반 중공에 입당한 그 친구는 현재 손꼽는 명문 대학 공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친구는 지난 2년 10여 개월 중국의 국경이 닫혀 서로 만날 수 없었지만, 아마도 내년쯤이면 예전처럼 자유롭게 오갈 수 있으리란 희망을 전했다. 캐나다는 실질적으로 규제를 전면 풀고 90% 이상 생활이 정상화됐다고 하자 그는 “중국도 점차 느슨해질 텐데, 지금은 20대를 앞둔 시점이라서”라는 묘한 말을 했다.

 

여기서 “20대”란 바로 내일부터 (2022년 10월 16일) 베이징 톈안먼 광장의 인민대회당에서 개최되는 중국공산당 제20차 전국 대표대회(줄여서 중공 당 대회)를 의미한다. “제로 코비드” 정책이 연임을 위한 시진핑 총서기의 정치 방역이라는 뜻인 듯했다. 내가 “알겠어, 하하(明白, 哈哈)”하고 문자를 치자 그는 “넌 중국을 좀 아는구나(你是懂中國的)”하고 날 치켜세워줬다. 중국 안팎의 이목이 온통 제2차 중공 당 대회에 쏠려 있음을 보여주는 작은 에피소드다.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스탈린, 마오쩌둥을 기리는 과거 1960년대 포스터 위에 시진핑 총서기의 사진을 얹은 합성 작품. 사진/twitter.com>

 

중공 당 대회는 중앙위원회가 소집해서 5년마다 치러지는 중국공산당 최고 의결 회의이다. 제1차 당 대회는 1921년 7월 23일부터 8월 3일까지 비밀리에 개최되었다. 개회식은 상하이 프랑스 조계(租界)에서 거행됐지만, 7월 30일 회의를 염탐하는 수상한 사내를 발견하곤 급히 장소를 옮겨서 8월 3일 저장(浙江)성의 자싱(嘉興) 호숫가 선상(船上)에서 회의를 종료했다. 당시 전국의 당원 수는 고작 50명이었다. 그중 13명만 대표 자격으로 대회에 참석했다. 그 13명 대표 중 7인은 1949년 이전에 절명했고, 천궁보(陳公博, 1892-1946)와 장궈타오(張國燾, 1897-1979) 등은 이후 공산당을 버리고 국민당에 입당했다. 실로 미약한 출발이었으나 소련에서 파견한 코민테른 요원 두 명이 배석했고, 후난성 창사의 대표로 28세의 마오쩌둥이 그 역사의 현장에 있었다.

 

그 후 1928년까지 6차례의 당 대회가 열렸지만, 제7차 당 대회는 1945년 4월에야 개최될 수 있었다. 국민당의 토벌 작전이 거세지면서 내전 상태에 돌입한 까닭이었다. 그 후 1956년, 1969년, 1973년 중공 중앙위는 필요에 따라 비정기적으로 대회를 소집했다. 마오쩌둥이 별세한 이듬해 1977년 제11차 당 대회가 개최되었다. 그 후로 45년에 걸쳐 지금까지도 5년 주기로 당 대회가 열리고 있다.

 

▲<제1차 중국공산당 전국대표대회 참석자 사진. 오른쪽 맨 위가 마오쩌둥. 사진/중국 인터넷>

 

1977년 이래 중공 당 대회는 중공 중앙위원회 총서기를 추대하고 옹립하는 중대한 절차이다. 101년 전 불과 50명으로 출범한 중국공산당은 현재 9천7백만 명(전체 인구의 6.9%)의 당원을 자랑한다. 명실공히 세계 최대규모의 정치조직이라 할 수 있다. 바로 그 중국공산당의 우두머리가 중앙위원회 총서기다. 총서기는 통상적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가주석이 되며,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인민해방군”의 최고 통수권을 갖는다. 게다가 총서기는 전국인민대표대회, 국무원, 정치상협회의, 최고인민법원, 최고인민검찰원 등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의 위에 군림하면서 국가의 중대사를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실로 막강한 권력을 장악한다.

 

세계 최대 인구와 세계 제2위 경제 규모의 거대한 대륙 국가 중국의 최고 권력자가 결정되는 대회이기에 전 세계의 이목이 현재 제20차 당 대회에 쏠릴 수밖에 없다. 문제는 그러한 중국을 바라보는 외부의 시선이 의심과 우려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이다. 미국, 캐나다, 한국, 일본, 독일, 프랑스 등 세계 중심 국가들의 일반 여론이 이미 반중을 넘어 억중(抑中), 승중(勝中)으로 나아가고 있음은 널리 알려진 바다. 다음 주부터 열리는 제20차 당 대회는 과연 중국 안팎에서 과연 어떤 반향을 불러일으킬까?

 

▲<1977년 제11차 당 대회. 왼쪽부터 화궈펑(華國鋒), 예젠잉(葉劍英), 덩샤오핑(鄧小平), 리센녠(李先念), 왕둥싱(汪東興. 사진/공공부문>

 

중국 내부의 단속을 위한 국제적 도발

2018년 3월 11일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공식적으로 중화인민공화국 헌법 제3장 79조에 명기돼 있던 국가주석과 부주석의 임기 제한 규정을 삭제했다. 중앙위원회가 발의한 이 개정안 표결 결과는 99.8%의 찬성률을 보였다. 2,603명 중 2,598명이 찬성하고, 2명이 반대하고, 3명은 기권했다. 이로써 시진핑 총서기는 연임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 종신 지배의 길을 텄다.

 

이후 전 세계 인터넷 매체들엔 시진핑 총서기를 시 황제라 조롱하는 패러디가 홍수를 이뤘다. 우크라이나를 침략한 러시아와 대만을 위협하는 중국은 현재 인류의 건전한 상식과 보편가치에 도전하는 깡패 국가(rogue state)로 전락하고 있다. 21세기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러시아와 중국이 독재자 일인 지배를 연출하는 상황은 블랙코미디에 가깝다.

 

▲<“시진핑 황제,” 2018년 이후 시진핑의 권력욕을 풍자하는 패러디가 인터넷에서 홍수를 이뤘다. 사진/ 작자 미상>

 

마오쩌둥을 닮으려는 시진핑의 퇴행적 행태를 질타하는 전 세계 지식인의 목소리가 점점 더 커지고 있다. 능력 본위의 중국식 집단 지도체제가 미국식 선거 민주주의를 넘어서는 새로운 대안이라 극구 칭송하던 중국 밖의 친중 지식인들도 이제는 입을 닫고 있다. 중국이 거대한 싱가포르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던 섣부른 예측은 웃음거리가 되고 있다. 일당독재의 중국 정치가 어느새 최고 영도자 1인의 인격적 지배로 전락하고 있기 때문이다.

 

2019년 “강 대 강”으로 치닫던 미·중 무역 갈등은 중국발 팬데믹과 맞물리면서 지금까지 예측 불허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외부의 비판엔 아랑곳없이 중공 중앙은 덩샤오핑이 약속한 “일국양제(一國兩制)”의 원칙을 저버리고 홍콩의 자유를 짓밟는 극단적 법안을 통과시켰다. 시진핑 정권은 “제로 코비드” 정책에 따라 전국 인민의 사생활을 통제하고 상하이, 충칭 등 인구가 거의 3천 만에 달하는 대도시를 수개월 간 봉쇄하는 극단적 조치를 이어가고 있다.

 

대만을 향한 중국의 노골적인 군사 위협이 고조되자 지난 8월 중순 인도-태평양 지역 군사작전에 독일의 전투기 13대가 참여했다. 독일서 이륙한 전투기 13대는 호주, 싱가포르에서 군사작전을 수행한 후 보란 듯이 일본, 한국을 거쳐서 돌아가는 놀라운 장면을 연출했다. 중국의 위협에 맞서 2차 대전 이후 형성된 미국 주도의 국제 질서를 지키려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의 방어망이 새로이 견고하게 직조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2022년 8월 인도-태평양 군사 작전에 참여하는 독일의 전투기. 비행기 중앙에는 독일 국기가, 날개 양쪽에는 호주, 싱가포르, 한국, 일본의 국기가 그려져 있다. 사진/ courtesy of the German air force/Kyodo>

 

이 모든 국내외적 비상 상황을 뚫고서 시진핑 정권 제3기가 출범한다면, 정권 연장을 위해 대내외적 강경책을 구사했다는 비판을 면할 수 없다. 정치적 탄압을 정당화하기 위해 구미 국가들과의 긴장을 정치적으로 이용한다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구소련의 억압에 맞서 싸운 공로로 1975년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핵물리학자 안드레이 사카로프(Andrei Sakharov, 1921-1989)는 “자국민의 권리를 무시하는 정권은 이웃 나라의 권리도 존경하지 않는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독재국가의 대내적 정치 탄압이 국제적 도발로 이어질 수 있다는 통찰이었다. 푸틴은 러시아 내부의 정치적 억압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냉전 시대의 이분법으로 서방 세계를 악으로 몰고 가고 있다. 푸틴은 자국 내 권력 강화하기 위해 우크라이나 전쟁을 일으켰을 수 있다. 같은 맥락에서 시진핑 정권의 국내적 인권유린과 정치범죄가 국제사회에 직접적 위협이 될 수 있음을 세계는 잘 알고 있다. 과연 시진핑 정권 제3기는 어떤 파장을 불러일으킬까?

 

“시진핑 사상,” 과연 중국공산당 장전에 올라갈까?

일부 비판적인 인사들은 제20차 당 대회에서 이변이 일어나 시진핑이 실각할 수도 있다는 희망 섞인 예측을 하기도 하지만, 현재로선 중국 안팎 대다수 언론은 시진핑의 연임이 성공하리라 전망하고 있다. 다수의 전망대로 시진핑 정권 제3기가 열린다면 과연 그는 어떤 논리로, 어떤 대우를 받으며, 어떤 분위기에서 정권을 연장할까? 과연 “시진핑 사상”이 <<중국공산당 장전(章典)>> 총강에 “마르크스-레닌주의,” “마오쩌둥 사상,” “덩샤오핑 이론”과 함께 나란히 등재될 수 있을까?

 

▲<시진핑의 사진, 일화 및 “명언”이 담긴 중국의 초등학교 교과서. 2021년 8월 31일 촬영. 사진/ AFP>

 

현재 <<중공 장전>> 둘째 문단은 “중국공산당은 마르크스-레닌주의, 마오쩌둥 사상, 덩샤오핑 이론, ‘세 가지 대표’ 중요한 사상, 과학발전관, 시진핑 시대 중국 특색사회주의 사상을 행동 지침으로 삼는다”로 되어 있다. 여기서 ‘세 가지 대표’ 중요한 사상이란 장쩌민이 천명한 기본원칙을, 과학발전관은 후진타오가 역설한 발전 전략을 의미하는데, 두 사람의 실명은 삽입되지 않았다.

 

“시진핑 시대 중국 특색사회주의 사상”은 시진핑의 이름자와 함께 사상이란 단어가 붙는다. 다만 이는 시진핑 개인의 사상이라기보다는 2012년에서 2022년까지 시진핑 집권기의 국정 의제에 가깝다. 만약 다음 주 제20차 당 대회에서 논의될 중공 장전 수정안에서 “시진핑 사상”이란 명시적 표현이 총강에 삽입된다면, 이는 시진핑의 권력이 절정에 달했음을 방증하는 증거가 된다. 런던 대학(SOAS)의 스티브 창(Steve Tsang) 교수는 “시진핑 사상”이 <<중공 장전>> 총강에 등재되는 순간, 그가 진정한 독재자로 등극하게 된다고 전망한다.

 

<중국 당국은 티베트에서 시진핑 총서기의 초상화를 걸면 돈을 주고, 달라이 라마의 초상화를 걸면 강력하게 처벌한다. https://www.tibetanjournal.com/in-tibet-you-get-money-to-display-xi-jinping-portraits-but-punished-for-dalai-lamas/>;

 

문제는 시진핑 사상이 과연 무엇이냐는 점이다. 모름지기 한 정치지도자의 사상이란 그의 모든 언행, 정책, 저술, 세계관과 가치관의 집약이라 할 수 있을 듯하다. 그러한 맥락에서 지금껏 드러난 시진핑 사상의 구체적 내용을 열거하자면, “위대한 중화민족의 부흥”을 추구하는 중국 특유의 민족주의, 과거 중화 제국의 영광을 되살리려는 복고적 제국주의, 국내의 비판 여론을 탄압하고 공민의 기본권을 억압하는 일당독재의 권위주의, 동아시아 맹주를 넘어 새로운 세계질서를 구축하려는 패권주의, 2차 대전 이후 미국 주도로 형성된 자유민주주의적 세계질서에 맞서는 반자유적 인민독재, 인류의 보편가치와 인권을 부정하는 반인류적 전제주의,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무시하는 집단주의 등을 꼽을 수 있을 듯하다.

 

세계 최대의 국가의 이념으로 삼기엔 그다지 참신하지도, 독창적이지도 않아 보인다. 고작 민족주의, 복고주의, 제국주의, 권위주의, 패권주의, 인민독재, 전제주의, 집단주의에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쩌둥 사상을 버무려 놓았는데, 그조차 물과 기름처럼 잘 섞이지도 않는다. 과연 시진핑 사상은 마오쩌둥 사상에 이어 14억 5천만 전 중국 인민의 의식을 옭아매는 21세기 신중국의 통치 이데올로기가 될 수 있을까? “그렇다!”고 말하기엔 “철학의 빈곤”이 심해 보인다. <계속>

 

〈52〉 “나라의 도적을 파면하라” 중국 ‘브릿지 맨’의 절규

▲<2022년 10월 13일, 중국 베이징에 등장한 시진핑 반대 현수막. 시위자는 인화 물질에 불을 지펴 연기를 피우면서 군중의 시선을 끌고 있고, 행인들은 핸드폰을 들고 그 장면을 촬영하고 있다. 사진/twitter.com>

 

 과거를 어떻게 기억하고 해석하는가: 개인의 기억과 역사의 기록

2020년 영국 레스터(Leicestor) 대학의 신경과학자들은 오랜 연구 끝에 인간 지능에서 가장 중요한 기능이 바로 “기억(memory)”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인간은 다른 동물과는 달리 대뇌 측두엽의 해마(hippocampus)에 기억을 저장한다. 이 이론에 따르면, 과거의 사건이나 행위를 의미 있게 인식하고 기억하는 해마의 기억 저장 기능이 바로 인간 지능의 주춧돌이다.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가장 중요한 지적 능력은 바로 기억이라는 메시지다. 기억력을 상실하거나 어떤 이유에서건 과거를 기억하지 않는 상태가 되면 인간의 뇌 기능은 제대로 작동할 수 없다. 다행히 대다수 인간은 매 순간 자발적으로 기억을 뇌리에 저장하고, 저장된 기억을 활용해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창출한다. 문제는 그러한 인간의 기억이 부정확하며, 가변적이고, 때론 자기-기만적이라는 데 있다.

 

과거사를 둘러싼 논란이 끊이지 않음은 인간의 기억이 주관적이고, 선택적이며, 전략적이기 때문이다. 과거사가 정치의 쟁점이 되고, 역사학이 이념전쟁의 무기가 되는 이유도 다르지 않다. 과거사를 어떻게 기억하고 해석하는가에 따라 개개인의 가치관과 행동 양식은 바뀔 수밖에 없는데, 사람들은 저마다 기억하는 바가 같을 수가 없기에 한 공동체가 과거사를 기억하고, 기록하고, 대서사로 재구성하는 과정은 격렬한 논쟁, 심한 경우 이념전쟁까지 수반한다.

 

한 사회 구성원 개개인의 기억이 다양하고 다면적이며, 상이하고 상충적일 수 있음을 인정한다면, 국가는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고 물러설 수가 있다.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 사회에선, 다양한 집단과 개개인이 자유주의 원칙에 따라 사상의 시장에서 격렬한 기억의 경쟁을 펼친다. 그렇게 기억의 경쟁을 통해서만 공동체의 일반적 기억이 공유될 수 있고, 공동의 역사의식이 생겨날 수 있다.

 

중국처럼 공산당이 일방적으로 특정의 역사관을 14억 인구 모두에게 강요하는 나라에서 개개인은 뇌리의 기억을 삭제하거나 은폐하거나 조작하는 수밖에 없다. 물론 모두가 막강한 일당(一黨)의 권위에 복종하지는 않는다. 어느 사회나 다수의 침묵을 뚫고 마음속 생각을 표출하고야 마는 강직하고 무모한 아웃라이어(outlier)가 있게 마련이다.

 

▲<2022년 10월 13일, 베이징 쓰퉁차오. 현수막이 걸린 고가도로 위 시위 현장. 불이 붙은 인화 물질이 연기를 내쁨고 있다. 사진/twitter.com>

 

2022년 10월 13일 오후 2시 베이징에 나타난 ‘브릿지 맨’의 현수막

2022년 10월 13일 오후 2시 베이징 하이뎬(海淀)구 쓰퉁차오(四通橋) 다리 난간에 중국공산당 총서기 시진핑의 파면을 촉구하는 현수막이 내걸렸다. 중국공산당 제20차 전국대표대회의 개막이 불과 사흘 앞으로 다가온 시점이었다.

“휴교하고 파업하라! 나라의 도적 시진핑을 파면하라! (罷課, 罷工, 罷免 國賊 習近平)”

그 현수막 왼쪽 옆에 세 구절씩 2단으로 다음 같은 구호가 적혀 있었다.

 

“코비드 검사 말고 밥을(不要核酸, 要吃飯),

봉쇄 대신 자유를(不要封控, 要自由),

거짓 대신 존엄을(不要謊言, 要尊嚴),

문혁 말고 개혁을(不要文革, 要改革),

수령 대신 선거를(不要領袖, 要選票),

노예 말고 공민의 삶을(不做奴才, 做公民)”

 

현수막을 내건 40대 중반의 사내는 군중의 시선을 끌기 위해서 현수막을 내건 후에 바로 그 다리 위에서 상자에 넣어간 인화 물질에 불을 질러 하늘로 시커먼 연기를 피웠다. 당연히 불과 얼마 후 청년은 현장을 급습한 공안에 잡혀서 어디론가 끌려 갔다. 중국 밖에서야 당연히 표현의 자유라는 공민의 기본권을 행사했다 할 수 있지만, 중국 안에선 이 행동은 사회주의를 사보타주하고, 국가주석을 모독한 중대한 범죄로 취급된다.

 

시위자는 체포되고 현장의 현수막은 철거됐지만, 사건은 거기서 종료되지 않았다. 우선 이 작은 에피소드는 그 현장을 목격한 사람들의 뇌리에 생생한 기억으로 저장되었다. 그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그날의 1인 시위는 시민들 사이에서 꽤 큰 얘깃거리가 됐을 듯하다. 실제로 차 속에서 현장을 촬영한 한 사람은 “또 분신하는 거야?”하고 말하기도 했다. 입을 통해 전해지는 소문의 힘도 무시할 수 없지만, 요즘은 SNS의 시대이다. 디지털 혁명에 힘입어 현장에서 촬영된 다수 동영상은 실시간 인터넷을 타고 중국 각지로, 세계 각국으로 흩어져 갔다. 통신 매체가 부족했던 30년 전만 해도 이 사건은 큰 사회적 반향 없이 묻혔을 수 있다. 중국공산당의 막강한 권력에 비하면 다리 난간에 걸린 현수막은 미약하기 그지없어 거의 무의미한 단말마 비명에 지나지 않았을 수 있다.

 

지금은 그러나 과거와는 달리 베이징의 나비가 뉴욕의 비구름을 부르듯 외딴곳 1인 시위가 실시간 전 세계 여러 도시에서 동시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킬 수 있는 세상이다. 그날 펑리파(彭立發, 1974- )의 “베이징 쓰퉁차오 항의”는 중국 안팎의 세계 곳곳에서 작잖은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우선 중국 곳곳에서 사람들은 속속 화장실 문과 벽에 펑리파의 구호를 옮겨 적고 있다. 화장실에 적힌 펑리파의 구호는 사진에 찍혀 SNS에 올라간다.

 

▲<런던 세이트 마틴스(St. Martins) 예술 대학에 걸린 현수막. 펑리파의 현수막을 그대로 모방해서 만들었다. 역시 트위터로 퍼지고 있는 이미지다. 사진/twitter.com>

 

중국 정부는 신속하게 그 이미지를 모두 삭제하지만, 중국의 네티즌들이 VPN을 사용해 신속하게 해외 사이트로 퍼다 나른 이미지들은 여러 언론 매체를 타고 중국 밖의 사람들에게 전달된다. 뉴욕, 토론토, 샌프란시스코, 런던, 토쿄, 서울, 시드니, 베를린, 홍콩, 타이베이, 전 세계 각국 주요 도시의 여러 대학가에 펑리파의 그 구호가 그대로 나붙고 있다.

 

그날 중국 공안에 끌려간 후 행방을 알 수 없는 펑리파는 순식간에 중국 민주화의 영웅으로 거듭나고 있다. 그에겐 “브릿지 맨(Bridge Man)”이라는 별명이 붙여졌다. 다리 위에서 한 사람이 내건 두 장의 현수막과 그가 피운 검은 연기 한 줄기가 그토록 큰 반향을 일으키리라고 누가 생각했겠는가? 정부 비판을 용납하지 않는 거대한 감옥 같은 중국이란 대륙에서 한 용감한 중년 사내의 행동이 뜻밖의 파장을 일으킬 줄 누가 알았겠는가?

 

▲<베를린 훔볼트 대학에 붙은 시진핑 반대 포스터. 사진 아래 펑리파의 구호 그대로 적혀 있고, 양옆에는 “아직 미완의 혁명, 동지여, 더 노력해야!”라는 구호가 있다. 트위터를 통해서 전송되는 이미지. 사진/twitter.com>

 

이제 중국 민주화 운동은 더는 중국인을 위한, 중국인에 의한, 중국인만의 투쟁일 수 없다. 본래 호모 사피엔스로서 전 인류는 공동의 조상에서 나온 형제자매들이다. 세계인의 감시와 비판은 중국공산당을 압박하는 최고의 효력을 발휘한다. 중공 정부는 중국 내부 문제에 대한 외국 정부의 항의를 내정간섭이라 비판하지만, 세계 시민의 항의와 비판에 대해선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중국 밖의 인간이 중국 안의 인간을 위해 인류애를 발휘하는데, 인간의 기본권을 짓밟는 중공 정부가 대체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브릿지 맨이란 별명을 얻은 펑리파. 그의 트위터 계정이 폐쇄되기 전 펑리파의 사진을 구해서 10월 15일 샤오량이란 네티즌이 제작한 이미지. 사진/twitter.com>

 

‘브릿지 맨’의 선배 1989년 6월 5일 베이징의 ‘탱크 맨’

2022년 “브릿지 맨”의 선배는 바로 1989년 “탱크 맨”이다. 1989년 6월 5일, 중공 중앙이 급파한 20만 병력이 톈안먼 대학살을 자행한 다음 날 정오를 막 지날 무렵이었다. 군대가 시위대를 물리치고 도시를 완벽하게 탈환한 상황이었다. 수십 대의 탱크들이 1열로 죽 늘어져서 도심을 향해 진격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갑자기 도로 한복판으로 달려가서 맨몸으로 선두에선 탱크를 막고 선 한 청년이 있었다. 흰색 셔츠와 검은 바지를 입고 양손엔 쇼핑백을 들고 있는 안경잡이 청년이었다. 아마도 인근 식료품점에서 점심을 사가는 듯한 행색이었다. 탱크 앞에 선 그는 쇼핑백을 쥔 오른손으로 크게 원을 그리며 뭔가 항의의 구호를 외쳐댔다.

 

▲<1989년 6월 5일, 베이징으로 진격하는 탱크부대를 홀몸으로 막고 서 있는 “탱크 맨”의 모습. 사진/공공부문>

 

청년을 발견한 탱크는 우측으로 방향을 틀어 돌아가려 했지만, 청년은 재빨리 달려서 다시 그 탱크를 막고 섰다. 청년이 두 걸음 앞까지 다가섰기에 육중한 탱크는 제대로 방향을 틀 수 없어 좌우로 왔다 갔다 우물쭈물할 뿐이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거리의 군중은 환호성을 질렀고, 청년은 탱크 위로 올라가서 포신을 잡다가 해치를 열고 탱크 안의 군인에게 뭔가 말하려는 듯했다. 그때 주변 어디선가 심한 총성이 터졌다. 위협을 느낀 청년은 반사적으로 탱크 밑으로 내려와서 좌측 옆에 비켜섰고, 그 틈을 노려 탱크는 다시 우측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청년은 다시 그 앞으로 달려갔다. 결국 탱크의 해치가 열렸다. 고개를 들어낸 군인은 청년을 향해 뭔가 소리쳤지만, 청년은 물러서지 않았다. 잠시 후 저항하던 청년은 푸르스름한 옷을 입은 두 사람에 끌려서 군중 속으로 사라졌다. 1인의 장벽에 막혔던 탱크부대는 그때야 비로소 가던 길을 재촉했다.

 

길어야 2, 3분밖에 되지 않는 짧은 저항이었지만, 인근 호텔 발코니에서 그 장면을 발견하고 촬영한 외신 기자가 있었다. 그 동영상은 이후 중국 밖으로 전송되었고, 당시 찍힌 사진들은 톈안먼 민주화 운동의 아이컨 “탱크 맨”을 만들어냈다. 그날이 “탱크 맨”이 과연 누구였는지, 그 이후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는 지금껏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일설에 의하면 “탱크 맨”은 당시 19세의 왕웨이린(王維林)이라는 학생이었다.

 

중공 정부는 이 사실을 부인하지만, 만약 “탱크 맨”이 당시 19세의 왕웨이린이 사실이라면, “브릿지 맨”과는 불과 4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 “브릿지 맨” 펑리파가 “탱크 맨”에 영향을 받았는지는 아직 확인할 수 없다. “브릿지 맨”의 트위터 계정은 이미 삭제된 상태다. 다만 막강한 중공 정부에 대항해 공개적으로 항의하며 투쟁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33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19세 “탱크 맨”과 47세 “브릿지 맨”은 동시대의 투사들임을 알 수 있다.

 

“신시대 10년의 대변혁” 발표문에 끼워넣은 시진핑, 향후 10년 집권 의지

물론 중국 관영 매체만 보고 있으면 “브릿지 맨”의 고독한 투쟁은 용광로에 던져진 작은 못 하나의 반향도 못 일으키는 듯하다. 지금도 베이징의 인민대회당에서는 중국공산당 제20차 당 대회가 한창 진행 중이다. 지난 10월 16일 개막식은 1시간 44분 12초간에 걸친 시진핑 총서기의 모두(冒頭) 발표로 시작됐다. 200자 원고지 70매를 훌쩍 넘는 분량이다. 한국어로 번역하면 족히 100매를 훌쩍 넘는 장광설을 꿰는 메시지는 한 문장, “중국공산당은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위해 전군(全軍), 전국(全國), 각족(各族) 인민을 이끌고 신시대 중국 특색 사회주의의 길로 부단히 매진한다”로 축약된다.

 

공동의 지향 목표는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이다. 목적의 실현 주체는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다. 목적의 실현 방법은 “중국 특색 사회주의”이고, 동원되는 객체는 전국의 모든 군대와 56개 각족(各族) 인민이다.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가 인민과 군대를 동원해서 중국식 사회주의 일당독재의 방법으로 중화민족의 웅비를 위해 전진하겠다는 결의다.

 

▲<10월 16일 개막식 발표를 위해 인민대회장에 도착한 시진핑. 사진/AFP>

 

시진핑 정부 10년간 귀에 못 박히도록 들어온 구호지만, 다른 점이 하나 있다. 발표문 제1장의 제목이 “지난 5년의 업적과 신시대 10년의 대변혁”으로 되어 있다. 5년 전인 2017년 제19대 당 대회 발표문에는 제1장의 제목이 “과거 5년의 업적과 역사적 변혁”이라 되어 있다. 같은 당 대회인데, 이번에만 유독 “신시대 10년의 대변혁”이란 말을 끼워 넣었다. 최소한 10년간 몸소 통치하겠다는 최고 영도자의 결연한 의지의 표명이다.

 

2013년 제18차 당 대회의 주제는 “인민 민주주의의 부단한 확대”였다. 2017년 제19차의 주제는 “소강사회 전면 건설의 최종 승리 달성”이었다. 2022년 제20차 당 대회의 구호는 쉽고 명료하게 잡히지 않는다. 대회의 주제를 시진핑 총서기는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중국 특색 사회주의의 위대한 기치 아래 신시대 중국 특색 사회주의 사상을 전면적으로 관철하여, 위대한 창당의 정신을 널리 선양하고, 자신(自信)하고, 자강(自强)하며, 정의를 지키고 새로움을 창조하여, 힘차고 세차게 분발하여, 굳세고 용감하게 전진하여, 사회주의 현대화 국가의 전면적 건설을 위해,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추진하기 위해 단결 분투한다.”

 

▲<마오쩌둥에서 시진핑까지 어어지는 중국공산당 지도부를 풍자한 반체제 풍자 작가 파두차오(Badiucao의 작품. 이미지/badiucao.com>

 

5년 전과 10년 전의 당 대회에 비해 이번 대회의 주제는 왜 이리도 장황한가? 제1장의 제목에서 이미 “신시대 10년의 위대한 변혁”이란 집권 10개년 계획을 화두로 내세운 만큼 비할 바 없이 큰 무엇인가 내세워야 한다는 이념적 압박은 아니었겠나? 딴은 3년 전 만장일치로 헌법의 임기 규정을 부랴부랴 바꿔서 결국 집권을 연장하려 하니 충분히 머쓱했을 수 있다.

 

본래 과거 중국사의 제왕들은 황위에 추대될 때 주변 대신들의 간청을 못 이겨, 천명을 거역할 수 없어, 어여쁜 백성 방치할 수 없어 두려워 떨며 황송한 마음으로 못 이기는 듯 부득이 권좌에 오르는 장면을 의식적으로 연출했다. 제3기 집권을 노리는 시진핑의 제20차 당 대회 모두 발표엔 그러한 경외와 겸허의 수사는 찾아볼 수 없다.

 

과연 시진핑 정권 제3기는 어떤 풍랑을 헤쳐가게 될까? “브릿지 맨”의 구호처럼 다수 중국 인민이 경제적 이익과 개인적 자유와 인간의 존엄을 위해 “나라의 도적”을 파면하는 휴교와 파업의 투쟁을 벌일 수 있을까? “브릿지 맨”은 몽상가인가? 그의 몽상은 결국 덧없는 망상으로 끝나야 하나? 제20차 당 대회가 진행되는 지금도 중국 어딘가에서 누군가 몰래 화장실 벽에 “브릿지 맨”의 구호를 적고 있다. “나라의 도적 시진핑을 파면하라!”<계속>

 

▲<중국 곳곳의 화장실 문과 벽에 적힌 펑리파의 구호들. 그 밖에도 과학=출로, “봉성(도시 봉쇄)=절로(絶路)”라는 낙서도 보인다. 사진/twitter.com>

 

〈53〉 ‘외로운 군주와 여섯 난쟁이’의 미래는? “2035년 중국 민주화 가능성”

▲<2022년 10월 22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시진핑 총서기와 새로 구성된 정치국 상무위원 6인. 사진/Xinhua>

 

14억5000만 인구가 1인의 뜻대로 움직이는 新스탈린주의 늪에 빠지다

지난 10월 22일 중국공산당의 시진핑 총서기는 제20차 전국 대표 대회를 거쳐 제3기 연임에 성공했다. 당원 수 9700만의 중국공산당은 45년 전 마오쩌둥 시대의 일인 지배 체제를 재구축하는 역사적 퇴행을 연출했다. 14억 5000만이 중국공산당 일당의 독재 치하에 놓여 있는데, 그 일당이 일인(一人)의 뜻대로 움직이는 신(新)스탈린주의의 늪에 빠졌다.

 

중공 정치국 상임위원은 이제 모두 시진핑과 그의 충직한 여섯 명 부하들로 구성되었다. 대만 <<자유시보(自由時報)>>의 대기자 후원후이(胡文輝)는 일인 독재의 수족으로 전락한 중공 정치국 상무위원 6인에게 “여섯 난쟁이”란 별명을 붙였다. 정치국 상위는 이제 고군(孤君, 고독한 군주)과 여섯 난쟁이의 촌극이 되었다.

 

폐회식에선 시진핑의 좌측에 앉아 있던 79세의 전임자 후진타오(胡錦濤, 1942)가 완강히 버티다 강압에 못 이겨 회의장 밖으로 쫓겨나는 어색한 장면이 연출됐다. 일각에선 연로한 후진타오의 건강 상태를 우려한 시진핑의 배려라는 무리한 해석을 내놓지만, 한 나라의 수장이 즉흥적으로 국사(國事)의 프로토콜에 어긋나는 장면을 만들어낼 순 없다. 그날의 모든 장면이 국제 매체의 카메라에 찍혀 국외로 전송되고 있음을 시진핑이 모를 리 없었다.

 

▲<여러 차례 저항하다가 결국 강압에 못 이겨 회의장 밖으로 나가는 전 중공 총서기 후진타오의 모습. 앞에는 국무원 전 총리 리커창(왼쪽)과 시진핑 총서기(오른쪽)가 착석해 있다. 사진/ https://www.ndtv.com>;

 

결국 당내 권력투쟁을 종식하고 절대권력이 완성됐음을 과시하려는 한 전제군주의 얄팍하고 투박한, 무례하고 저열한, 교만하고 표독한 권술(權術)일 뿐이다. 중국 안팎의 비판적 지식인들은 시진핑을 북한 김일성에 비유하고, 시진핑의 중국을 한반도 서쪽의 “시(西=習)조선”이라 조롱하고 있다.

 

정치권력 독점은 인류 공동의 지혜에 역행하는 구시대의 낡은 유습

정치권력의 독점과 절대화는 세계 정치사 인류 공동의 지혜에 역행하는 구시대의 낡은 유습이다. 권력 분립과 견제와 균형을 강조하는 근대 구미의 입헌주의 전통뿐만 아니라 2500년 전통의 유가(儒家) 통치 철학에도 어긋난다. 집권 이후 시진핑은 틈만 나며 “서방식 자유주의의 유혹을 물리치기 위해 유교 전통의 부활”을 외쳤지만, 그는 실상 유교의 기본가치와 통치이념에 대해선 무지한 듯하다.

 

전국시대를 종식한 진왕정(秦王政)은 삼황오제(三皇五帝)의 권력을 일신에 집중시켜 시황제(始皇帝)의 지위에 올랐다. 천하통일의 위업을 달성했음에도 시황제는 이후 중국 역사에서 제국의 설계자 이사(李斯)와 함께 만고의 악인으로 전락했다. 전한(前漢) 시기 무제(武帝)가 유교를 정통 이념으로 채택한 이래 제국의 유생들이 대대로 진시황의 모순과 오류를 비판하는 정교한 과진(過秦)의 담론을 펼쳤기 때문이다. 유생들이 왜 진시황을 그토록 비판했겠는가? 정치권력의 집중이 군주의 독단을 초래해 정부의 실패를 자초함을 경험적으로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진시황을 역사의 악인으로 폄하(貶下)함으로써 독재자의 출현을 막으려는 고대 유생의 간지(奸智)였다.

 

▲<2015년 중국 시안(西安)에 세워진 진시황의 석상. 사진/wikimedia.org>

 

유가 최고의 경전 <<상서(尙書)>>는 군주와 대신 사이의 권력 분할을 성왕(聖王) 통치의 조건으로 제시한다. 전한(前漢)의 기린아 가의(賈誼, 기원전 200-168)는 어리석은 자가 군주가 되는 이른바 혼군(昏君)의 집권을 제도적으로 제약하기 위해서 현명한 재상을 관료제의 수장으로 삼는 승상제(丞相制)의 필요성을 논한 바 있다.

 

1400여 년 전 북주(北周, 557-581)의 문제(文帝) 우문태(宇文泰)는 “천하는 지극히 광활해서 한 사람 홀로 다스릴 수 없다(天下至廣,非一人所能獨治)”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중국 송대(960-1279) 지식인들은 권력의 전횡과 독단(獨斷)의 폐해를 막기 위해선 반드시 ‘언로(言路)를 개방하고’ 천하 사대부(士大夫) 지식인의 국정 참여를 확대하는 숙의의 과정이 필수적이라 주장했다.

 

공공 담론을 통해서 수렴된 지식계의 공유 가치와 공동 의제(議題)를 송대 사대부들은 공의(公議)라 했다. 13세기 남송의 진덕수(陳德秀, 1178-1235)는 “공의(公議)는 곧 천도(天道)”라고까지 정의한 바 있다. 이 밖에도 권력의 공유와 협치를 강조한 문장은 수도 없이 많다. 권력 독점과 전제 통치의 비판은 전통 시대 유생들의 입에 붙은 레퍼토리였다. 20세기 중반까지 진시황이 역사의 악인으로 비판과 질타의 대상이 됐던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2007년 중국 후난(湖南)성 창사(長沙)에 세워진 청년 마오쩌둥의 대규모 석상. 사진/https://www.atlasobscura.com/places/mao-mt-rushmore>;

 

진시황이 역사의 영웅으로 화려하게 부활한 시기는 다름 아닌 마오쩌둥 치하의 중국이었다. 특히 문화대혁명(1966-1976) 시기 마오쩌둥 일인의 권력이 절대화를 넘어 신격화되던 전체주의의 미망 속에서 중공 이데올로그들은 진시황의 미라를 지하에서 꺼내서 제세(濟世) 영웅의 신전에 안치시켰다. 이유야 단 하나 마오쩌둥의 절대권력을 정당화하고 미화하려는 의도였다.

 

결국 중국 헌법에 명시된 “마오쩌둥 사상”이란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외피에 스탈린식 전체주의와 진시황식 통일이념을 끼워 넣은 낡은 전제주의 이념에 불과했다. 중국 헌법에 명시된 “시진핑 신시대 중국 특색 사회주의 사상”은 대체 무엇인가? 스탈린에서 마오쩌둥으로 이어지는 공산 전체주의 일인 지배의 이데올로기인가?

 

쉬장룬 칭화대 교수 “이제 그만! 이 썩은 신격화 운동, 부패한 수령 숭배는”

시진핑 일인 지배의 강화를 보는 중국 지식인들은 지금 어떤 심정일까? 그들은 오랜 정치적 훈습과 세뇌 교육 때문에 마오쩌둥 방식의 일인 지배를 승인할까? 칭화(淸華)대학 법학원의 쉬장룬(許章潤, 1962- ) 교수는 중국공산당의 사상 탄압에 맞서 비판과 고언을 멈추지 않는 진정한 대륙의 자유인이다. 베이징 대학의 장첸판(張千帆, 1964- ) 교수와 함께 2010년대 중국의 헌정 논쟁을 주도했던 그는 중국 헌법학계의 대표적인 자유파 지식인으로 꼽힌다.

 

시진핑 총서기의 제3기 연임 확정을 전후해서 해외 체류하는 중국 지식인들 사이에서 쉬장룬 교수가 2년 전인 2020년 5월 발표한 글이 다시 퍼져 나갔다. “세계 문명의 큰 바다 위 중국이란 외딴 배(世界文明大洋上的中國孤舟)”라는 제목의 시론에서 쉬장룬 교수는 무리하게 제로-코로나 정책을 펼치는 시진핑 총서기를 강력하게 비판했다. 유장한 운율을 밟는 그의 문장은 중국공산당과 일인 지배를 저격하는 자유의 총탄이다.

 

“이젠 그만! 이 썩은 신격화 운동, 부패한 수령 숭배는,

이젠 그만! 이 무도한 칭송의 가무, 썩어빠진 몰염치는,

이젠 그만! 하늘을 뒤덮는 거짓, 끝도 없는 고난은,

이젠 그만! 흡혈의 홍조(紅朝) 정치, 탐욕의 당국(黨國) 체제는,

이젠 그만! 7년의 황당한 착란, 거슬러 뒤로 가는 걸음은,

이젠 그만! 70년의 시체 산과 피바다, 전대미문의 홍색 폭정은.”

 

“7년의 황당한 착란”은 2020년 당시 꼬박 7년째를 맞는 시진핑 정권의 실정과 반동을 가리킨다. “거슬러 뒤로 가는(倒行逆施) 걸음”이란 역사의 정도를 거슬러 거꾸로 치닫는 광포한 일인 독재의 착오를 의미한다. “70년의 시체 산과 피바다”는 1949년 이래 중국공산당이 저지른 정치범죄와 인권유린의 희생자들을 비유한다.

 

▲<시진핑 정권의 폭주를 비판하는 중국의 대표적인 헌법학자 쉬장룬(許章潤, 1962- ) 교수. 사진/twitter.com>

 

오늘날 중국 땅에서 중국공산당 70년의 폭정과 시진핑 정권의 실정에 대해, 특히 제로-코로나 정책에 대해 이보다 더 강력한 직격탄을 가하는 지식인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결국 쉬장룬 교수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구속됐다가 1주일 만에 석방된 후 교수직을 박탈당하고 가택 연금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쉬장룬 교수의 헌정 이론에 대해선 앞으로 차차 알아보기로 한다.)

 

막강한 권력의 중국공산당은 과연 왜 일개 대학교수의 입에 재갈을 물려야만 할까? 지식인의 비판도 허용할 수 없는 시진핑 정권의 전체주의적 통치는 역으로 중국공산당의 이념적 허약성을 보여준다. 인류 역사에서 공산주의 이론은 이미 구소련의 해체와 더불어 산산이 조각나 버렸다. 중국공산당이 이미 파산선고를 맞은 구시대 낡은 이념에 집착하는 이유는 오직 하나 권력의 독점과 일인 지배를 강화하기 위함이다. 과연 언제까지 중국에서 신스탈린주의 일인 지배가 지속될 수 있을까? 향후 10년 시진핑 정권의 미래는 과연 어떻게 될까?

 

독재자의 권력 집착은 위기의식의 반영...시진핑 ‘’안전”이란 단어 89차례 강조

표면상 시진핑 정권은 막강한 권력을 장악하고 앞으로도 굽힘 없이 일인 지배의 전제정을 강화해갈 듯하지만, 독재자의 권력 집착은 위기의식의 반영일 수 있다. “중공 20차 당 대회 정치 보고”에서 시진핑 안전이라는 단어를 89차례나 강조했다. 그는 “정치 안전”의 구호 아래 강력한 권력 독점 의지를 표명하고, “국토 안전”의 구호 아래 군사력 증강과 대만 병합의 가능성을 시사하고, “사회 안전”의 명분으로 제로-코로나 정책에 더욱 박차를 가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시진핑은 왜 그토록 “안전”에 집착하는가? 중국 밖의 전문가들은 이미 수년 전부터 시진핑 정권 자체가 중국의 위기를 자초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런 시각에서 보면 시진핑은 지난 10년간 무리한 정책을 펼쳐 스스로 경제적 위기, 사회적 위기, 외교적 위기를 자초해왔기에 도리어 목소리 높여 안전을 외치고 있다. 역사가 증명하듯, 독재 정권은 국민의 안전을 명분 삼아 대민 지배의 고삐를 당긴다.

 

개혁개방 43년, 세계 제2위의 경제 규모를 자랑하는 중국은 현재 1인당 국내총생산 1만2500달러의 중진국이다. 1989년 톈안먼 대학살 이후 지금까지 중공 정부의 통치는 정치 제도의 개혁 없이도 급속한 경제성장에 성공한 이례적인 사례로 역사에 기록될 듯하다. 중국의 경제 규모는 1990년 총생산량 3600억 달러에서 2019년 14조3000억 달러로 무려 40배의 급성장을 보였다. 영어권 학자들의 표현을 빌자면, 중공 정부는 이른바 “얼어붙은 후기 전체주의(frozen post-totalitarianism)”의 덫에 걸려 실질적인 정치적 제도개혁을 멈춘 상태다.

 

다만 경제성장이라는 수행적 합법성(performative legitimacy)을 정권의 통치 기반으로 삼고 있다. 문제는 이제부터이다. 민주화 없는 중국식 성장 모델은 과연 언제까지 유지될 수 있을까? 시진핑 일인 지배로 재출발하는 중국의 미래는 향후 10년간 어떤 과정을 거쳐 가게 될까?

 

1950년대 미국의 정치·사회학자 립셋(Seymour M. Lipset)은 민주주의의 사회·경제적 조건을 논하면서 경제발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한 국가가 경제적으로 발전할수록 민주주의로 진화할 가능성이 커진다는 가설이었다. 경제발전은 도시 인구의 팽창, 교육 수준의 향상, 대중 매체의 발달, 교통·통신 시설의 확충, 거주이전의 확대 등을 불러와서 결국 민주화에의 사회적 요구가 거세질 수밖에 없고, 그 결과 민주주의가 제도적으로 정착된다고 그는 주장했다. 립셋의 가설은 대한민국과 중화민국(대만)의 사례를 통해 가장 극적으로 그 타당성이 입증되었다. 권위주의 정권 치하에서 경제발전에 성공한 한국과 대만은 1980년대 이래 민주화에 성공해서 최소 3차례 이상 정권교체를 이뤘다.

 

▲<1989년 5월 톈안먼의 시위 군중. 맨 위 오른쪽엔 경찰복을 입은 시민도 있다. 사진/David Chen>

 

시진핑 정권 출범 이후 일인 지배의 강화를 관찰하면서 미국의 정치학자 민신 페이(Minxin Pei) 교수는 조심스럽게 2035년 중국이 정치적 급변을 거쳐 민주주의 체제로 진화할 가능성을 예측한다. 그 첫째 이유는 일인 지배에 따르는 정치적 위험이다. 일인 지배는 필연적으로 관료적 수동성, 책임 회피, 정책 착오의 위험성을 높이며, 극한 정치를 차단할 안전핀을 결하고 있다. 실례로 그간 시진핑의 전권으로 추진돼온 “일대일로(一帶一路)” 정책, 남중국해 군사기지 구축, 신장 지역 위구르족 탄압, 홍콩 반민주 법안 입법 등은 향후 중공 정부에 큰 부담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그 둘째 이유는 바로 권력 승계 과정의 위험이다. 스탈린이나 마오쩌둥의 사례가 증명하듯, 강력한 카리스마의 전제군주가 사라지면 격렬한 권력투쟁이 발생할 위험이 고조된다. 시진핑의 일인 지배가 강화될수록 그만큼 권력 공백에 수반되는 정치적 위험이 커진다는 얘기다.

 

▲<미국에서 활약하는 재미 중국인 정치학자 민신 페이(Minxin Pei, 裴敏欣, 1957- ) 교수. 사진/wikipedia.com>

 

셋째 이유는 인구 고령화 및 서방과의 무역 마찰에 따른 경제 성장률의 저하다. 유엔 통계에 따르면, 2030년 중국 인구의 17% 정도가 65세 이상이 된다. 국제적으로 신냉전 분위기가 고조되면서 전체주의 일인 지배의 중국과 구미 자유주의 진영 사이의 경제적 공생 관계가 약해진다면, 중국 경제는 심대한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향후 10년간 중국의 중산층이 더욱 확대된다는 점이다. 중국 경제가 최소 3%의 성장을 이어간다면 2035년쯤 한해 1인당 GDP가 구매력 기준으로 2만5000달러를 웃돌게 된다. 또한 10년 후엔 대학 졸업 인구가 전체의 20%를 넘어서게 된다.

 

중공 중앙은 지금 정치 개혁을 완강하게 거부하며 신스탈린주의의 일인 지배로 퇴행하고 있지만, 우리는 앞으로 10년 중국에 닥칠 정치적 급변 가능성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역경(易經)>> <계사전(繫辭傳)>의 경구처럼, 매사 극단으로 가면 변하게 마련이고, 변화는 막힌 것을 뚫고, 막힌 것이 뚫리면 오래도록 새로운 질서가 유지된다(窮則變,變則通,通則久).

 

“고군(孤君)과 여섯 난쟁이”의 촌극으로 전락한 “중국 특색의 전체주의”는 겉으로야 막강한 폭주 기관차 같지만, 쉬장룬 교수의 지적대로 “세계 문명의 큰 바다 위에서” 풍랑에 휩싸인 “외딴 배”일 수도 있다. <계속>

 

▲<“시진핑 인격숭배를 조심하라!“ 삽화/Stellina Chen, https://international.thenewslens.com/article/81388>;

 

 〈54〉 시진핑 독재 비판하다 파면...자유파 법학자 쉬장룬 전 칭화대 교수

▲<시진핑 정권의 독재를 통렬하게 비판한 후 강제로 파면당한 전 칭화대학 법학원의 저명한 법학자 쉬장룬(許章潤, 1962- ) 교수. 2020년 이후 미국 하버드 대학 페어뱅크 중국학 센터에 방문학자로 있다. 사진/rfa.org>

 

“수십 년 쌓은 재산을 지킬 수 있을까?” 적중한 쉬장룬 교수의 정세 예측

“수십 년간 쌓은 재산을, 많든 적든, 과연 지킬 수 있을까? 지금까지의 생활 방식을 유지할 수 있을까? 법이 정하는 재산 관계는 입법을 통해 선포한 바 그대로 보장받을 수 있을까? 실권을 가진 인물에 밉보이면 기업이 파산하고 집안이 파산하고 사람이 망하는 일은 없는가? 최근 몇 년간 시간이 갈수록 더욱 불확실해져서 아래든, 위든 모두가 공황(恐慌) 상태다. 제일 먼저 타격을 입는 부류는 개혁개방의 큰 물결에서 돈을 모아 성공한 인사들이다. 부자들의 대규모 이민 현상은 이에 대한 대응책이다.”

 

2018년 7월 말 칭화(淸華)대학 법학원의 저명한 법학자 쉬장룬(許章潤, 1962-) 교수는 “우리 앞의 우려와 기대”라는 시론을 발표했다. 인민대표대회는 헌법에 명기된 국가주석의 임기 제한을 삭제하고 시진핑 종신 집권의 길을 연 지 넉 달 된 시점이었다. 위의 인용문은 이 시론의 앞머리에 나온다. 쉬 교수는 “헌정 민주”의 핵심에 경제적 자유가 있음을 강조한다.

 

중국 헌법 총강 제12조는 “사회주의의 공공 재산은 신성하고 침범할 수 없다”이고, 제13조는 “공민의 합법적인 사유재산은 침범받지 않는다”이다. 사회주의의 공공 재산이 공민의 사유재산보다 우위에 있음을 보여주는 헌법적 근거다. 공산당 일당독재의 사회주의 중국에서 한 지식인이 공개적으로 사유재산권 보장을 강조하기란 쉽지 않다.

 

쉬 교수는 정치적 탄압의 위험을 무릅쓰고 재산권을 위협하는 시진핑 정권에 정면으로 맞섰다. 1950-60년대 중국의 경험에 비춰보면, 사유재산권을 상실한 인간은 모든 기본권을 다 빼앗겼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2018년 7월 쉬 교수는 분명 이후 전개될 중국 정치의 강경화를 내다보고 있었다. 시진핑 정권은 방역 독재로 공민의 기본권을 침해하고 있으며, 부자들은 서둘러 중국을 뜨기 위해 이민 준비를 하고 있다.

 

중국공산당의 통치력 칭송하는 ‘중국 전문가’들

“중국 전문가” 중엔 중국공산당의 통치력을 극구 칭송하는 사람들이 많다. 개혁개방 이후 경제발전 추진 과정에서 중공 중앙은 단 한 번의 실수도 범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학자도 있다. 시진핑 정권 출범 이전 중국 밖의 “중국 전문가” 사이에선 중공 중앙의 영도자들이 면밀한 토론과 철저한 검증을 거쳐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합리적 집단지도체제라는 주장이 널리 퍼져 있었다.

 

흔히 그 근거로 1978년 불과 156달러 정도였던 중국의 1인당 GDP가 2022년 1만1800달러로 급증했다는 사실을 든다. 주먹구구로 100배 성장이라 말하지만, 실제로는 44년에 걸친 75.6배의 성장이다. 같은 기간 전 세계 1인당 평균 GDP는 2022달러(1978)에서 1만2263달러(2022)로 6배 증가했는데, 중국은 그보다 12.6배 증가했다.

 

▲<덩샤오핑 개혁개방 40주년 기념 포스터 앞 광장에서 운동을 하는 선전(深圳)의 시민들. 사진/scmp.com>

 

중국의 개혁개방은 8억 인구를 빈곤의 나락에서 건지고, 그 결과 전 세계 빈곤층의 75%를 줄인, 세계사에 드문 탈빈(脫貧)의 혁명이었다. 그러나 그 이유만으로 중공 중앙의 지도력을 특별히 칭송할 필요는 없다. 중국경제가 44년에 걸쳐서 75.6배 급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1978년 무렵 중국경제가 파산지경이었기 때문이다. 출발점이 지극히 낮았기 때문에 천문학적 성장이 가능했다.

 

가령 한국을 돌아보면, 6.25전쟁을 치르고 휴전협정을 맺은 1953년 1인당 GDP는 67달러였는데 1997년엔 1만2398달러로 44년 동안 185배 급증했다. 4.19혁명이 일어났던 1960년엔 158달러였고, 2004년엔 1만6496달러로 104배나 증가했다. 반면 1977년엔 1056달러였고, 2021년엔 3만4758달러로 32.9배 증가했다. 역시 대단한 성장률이지만, 출발점이 이미 상당히 높아졌기에 그전보다 성장 속도가 더뎌질 수밖에 없었다.

 

1978년 중국 1인당 GDP는 한국의 1/9 정도였는데, 2020년대 한국의 1/3 이상으로 성장했다고 보면, 그 과정이 보다 쉽게 이해된다. 그 40여 년의 세월 동안 한국은 개발도상국의 지위를 벗어나 선진국으로 도약했다. 같은 시기 중국은 저개발 후진국의 굴레를 벗고 중진국의 “샤오캉(小康) 사회”로 진입할 수 있었다.

 

▲<“당 중앙의 주위에서 긴밀히 단결하여 4대 현대화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 분투하자!” 1980년 쓰촨 청두(成都)의 풍경. 사진/ https://everydaylifeinmaoistchina.org/>;

 

중진국 함정에 빠져드는 중국...반시장 정책이 지속 성장 가로막아

물론 중국은 14억 5천만 인구의 대륙 국가이기에 미국에 이어 세계 제2위의 경제 규모를 자랑하지만, 문제는 바로 지금부터다.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 설립 이래 한국은 개도국에서 선진국 지위를 인정받은 최초의 나라다. 그만큼 선진국 진입의 길은 좁고 험하다. 과연 중국이 앞으로도 초고속 경제성장을 지속해서 개도국의 한계를 벗어나 한국처럼 선진국의 반열에 진입할 수 있을까?

 

최근 월스트리트저널은 시진핑 정권이 권위주의 통치를 강화하고 시장경제를 위협하기 때문에 중국은 곧 중간-소득의 함정에 빠져들고 있다고 경고했다. 시진핑 총서기의 반시장 정책이 중국경제의 지속 성장을 가로막는다는 지적이다. 중국은 사회주의 특유의 “명령 및 통제”를 통해서 경제를 망쳤고,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도입한 후에야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룬 나라다. 무엇보다 미국 주도 세계 경제와의 공조 체제를 이룬 결과였다. 미·중 무역 전쟁 이후 경제적 공생 관계에 금이 가자 중국은 다시금 중국식 현대화를 외치며 이념 공세와 정치 탄압의 고삐를 바싹 당기고 있다.

 

지난 제20차 당 대회에서 시진핑 총서기는 미국 모델과는 전혀 다른 “중국 특색의 현대화”를 통해 향후 30년에 걸쳐 “사회주의 현대화 강국”으로 발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한편으론 교육과 과학의 혁신을 통해 나라를 일으킨다는 이른바 “교과흥국(敎科興國)”의 비전을 제시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민간 기업과 경제적 부유층에 대한 강력한 통제를 예고하고 있다.

 

시진핑 정권은 이미 민간 기업에 공익사업을 맡기고 기부금을 내라 압박하기 시작했다. 법정 세금을 완납한 기업에 별도의 세금 폭탄을 부가하고 있는 셈이다. “공동부유(共同富裕)”란 결국 기업에서 강제로 거금을 갹출해서 빈부격차를 줄이겠다는 사회주의적 재분배의 발상이다.

 

가중되는 경제적, 정치적, 외교적 위기 탓인가? 시진핑 정권의 경제정책은 점점 더 경화(硬化)되고 있다. 압박에 못 이긴 부자들이 속속 중국을 떠나는 조짐을 보이자 당국은 출국을 막기 위해 여권 갱신을 거부하고, 심지어는 비자 발급에 필요한 출생이나 결혼 문서 발급까지 지연하기도 한다. 과연 중국은 어디로 가고 있나?

 

▲<2022년 이후 계속되는 시진핑 정권의 폭압적인 방역 독재와 경제적 압박에 위협을 느낀 중국의 부유층이 해외 이민을 고려하고 있다는 보도가 잇따르고 있다. 사진/indiatimes.com>

 

쉬장룬 교수의 시진핑 정권 비판 “여덟 가지 우려가 현실화”

다시 2018년 시론 “우리 앞의 우려와 기대”를 살펴 보자. 이 글에서 쉬장룬 교수는 “4항 기본노선”, “여덟 가지 우려”와 “여덟 가지 기대”를 명료하게 전달한다. “4항 기본노선”은 1) 기본 치안 유지, 3) 사유재산권과 재부(財富) 추구권 보장, 2) 시민 생활의 자유 용인, 4) 정치 임기제의 실행이다.

 

“여덟 가지 우려”는 1) 개인의 재산권 박탈, 2) 경제 건설 대신 권위주의 정치의 부활, 3) 계급투쟁 고양, 4) 쇄국정책의 강화, 5) 민생 파탄의 대외 원조 강화, 6) 지식인 탄압, 7) 군비경쟁 강화 및 전쟁 발발 가능성, 8) 개혁개방의 폐기와 전체주의적 사회 통제의 강화이다.

 

“여덟 가지 기대”는 1) 일대일로 사업 같은 비실용적 해외투자 폐기, 2) 외교적 사치 축소, 3) 당 간부의 비밀 특권 폐지, 4) 특권 계급 특별 대우 폐지, 5) 정부 관원 재산 공개, 6) 시진핑 인격숭배 폐지, 7) 국가주석 임기제 부활, 8) 1989년 64 민주화 운동 진상규명 및 재평가 등 전반적 국가 개혁의 청사진이다.

 

요컨대 쉬 교수는 시진핑 정권의 복고적 권위주의를 통렬하게 비판했다. 개인의 사유재산권과 표현의 자유 등 중국 공민의 기본 인권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2021년 7월 24일, 쉬 교수는 그보다 3년 앞서 자신이 지적했던 여덟 가지 우려가 모두 현실이 됐으며, 여덟 가지 기대는 요원한 꿈으로 남아 있다고 썼다.

 

이 글이 인터넷을 타고 널리 퍼져나가자 2019년 3월 칭화대학은 쉬 교수의 직무를 전면 중단시키고 조사에 착수했다. 쉬 교수는 더는 강의도 할 수 없고, 연구도 할 수 없게 됐다. 2019년 4월 쉬 교수에게 출국 금지령이 떨어졌다. 쉬 교수는 굽히지 않고 2020년 2월 중공 정부의 방역 독재를 비판하는 문어체의 격문 “분노의 인민은 다시 두려울 게 없다”를 발표했다.

 

▲<2020년 7월 8일 폼페어 미 국무장관은 중공 정부를 향해 쉬장룬 교수의 석방을 촉구했다. 사진/AP/Twitter>

 

곧 그의 위챗 계정이 삭제되고, 그는 가택연금 상태에 놓였다. 2020년 7월 4일 쉬 교수는 자택에서 세 명의 공안 요원들에게 붙잡혀 끌려갔다. 중국 공안은 쉬 교수에 매춘 혐의를 걸었지만, 비판적 지식인들의 입에 재갈을 물리려는 판에 박힌 수법이다. 이 사건이 해외 유수 언론에 보도되면서 국제적 압박이 들어가자 중공 정부는 쉬 교수를 풀어줄 수밖에 없었지만, 쉬 교수는 8월 20년간 강의해온 칭화대학에서 해고되면서 34년의 교수 생활을 마감해야 했다.

 

2020년 8월 13일 쉬 교수는 미국 하버드 대학 페어뱅크 중국학 센터에서 방문학자 초청장을 받았다. 칭화대학에서 해고 통지가 보낸 후 며칠 안 지난 시점이었다. 쉬 교수는 지금도 하버드 대학에서 연구와 집필에 몰두하고 있다.

 

상소와 항의, 중국 지성사의 오랜 전통 이어져

전근대 중국의 사대부 지식인들은 정부를 비판하고 더 좋은 제도와 법제를 제안하는 오랜 상소(上疏)와 항의(抗議)의 전통이 이어갔다. 사대부 지식인들은 상소문 집필을 통해서 정부의 부패와 오류를 규탄하고, 문제점을 파헤치고, 제도적 개선책을 제시할 수 있었다. 멀리 선진 시대까지 소급되는 상소와 항의의 전통을 살펴보면, 전근대 사대부들은 오늘날 중국의 지식인들보다 더 큰 사상적 자유와 표현의 권리를 누렸다.

 

물론 사상·표현의 자유를 법적으로 보호받지 못했으나 오랜 전통과 관행이 실질적으로 전통 시대의 지식인들에게 정치적 표현의 자유를 보장했다. 그들은 일상적으로 상소문을 써서 황제에게 진상했고, 강직한 유자(儒子)의 훌륭한 상소문들은 지성계에서 널리 읽혔다. 중화 제국이 2천 년 존속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그 오랜 전통은 바로 오늘날 중국공산당 일당독재의 현실을 살아가는 중국의 지식인들에게도 전해지고 있다. 1950-60년대 마오쩌둥의 전체주의적 통치를 비판한 철학자 량수밍(梁漱溟, 1893-1988)이 대표적이다. 신유가 철학과 유식(唯識) 불교까지 섭렵한 량수밍은 청년기 농촌 재건 운동에 헌신했던 실천가였다. 건국 초기 그는 마오쩌둥에게 정부의 문제점에 관해 직언했고 마오쩌둥도 처음엔 그를 쟁우(諍友)라 칭했다. 이후 그의 비판이 심해지자 마오쩌둥은 직접 그를 비판해서 파면했다. 2018년 1월 18일, 쉬장룬 교수는 한 인터뷰에서 량수밍에 다음과 같은 찬사를 보냈다.

 

“량수밍 선생은 창생(蒼生, 민중)을 일으키기 위해 전국을 누볐다. 그와 같은 진정한 유자(儒子)는 유가 학설을 실천에 옮긴다. 몸소 역행함으로써. 그들은 일종의 종교적인 구세(救世)의 열정을 보인다. 오늘날도 신유가(新儒家)의 학자들이 나와서 어디 가나 나도 유자라 말하고 있지만, 말하고 나면 곧바로 가라오케에 노래하러 간다. 량수밍 선생은 가정, 국가, 천하를 관통하는 이 유가 사상을 통해서 구체적인 현실 문제를 고민하고 생각했다. 그러한 거대한 비전, 안목이 없이 시끄럽게 떠들어봐야 무슨 소용인가? 이는 보통 사람들이 쉽게 간과하는 문제다.”

 

▲<1950년대 마오쩌둥에게 직언을 고하고 함께 격론을 벌였던 중국의 철학자 량수밍(梁漱溟, 1893-1988). 사진/공공부문>

 

2020년 5월 쉬 교수는 뉴욕의 보덴 출판사(Boden Books)를 통해서 2018년의 기록을 담은 <<무술육장(戊戌六章)>>을 발표했다. 2021년 8월 쉬 교수는 같은 출판사에서 코비드 19 방역의 광풍이 전 세계를 휩쓸던 2020 경자년에 집필한 열 편의 서간문을 모아서 <<경자십차(庚子十箚)>>를 출판했다. 이제 쉬 교수의 유려한 고문체 문장 속에 담긴 통렬한 시대 비판에 귀 기울여보자. <계속

 

〈55〉 중국을 비판하면 서구 우월주의인가

▲<2021년 5월 10일 옌안의 동방홍 극장 앞에서 마오쩌둥과 시진핑의 초상화를 판매하고 있는 상인. 사진/AFP Photo>

 

“중국 현대사를 구미 지식인 관점에서 부정적으로 그리지 않았나?”

그동안 “슬픈 중국” 시리즈를 연재하면서 한국의 지인들에게서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앞으로 중국에 갈 수 있냐?”였다. 중국이 자유와 인권을 제약하는 전체주의 국가임을 잘 알기에 글쓴이의 신변 안전을 우려해서 던지는 질문이다. 이와 달리 지금껏 “슬픈 중국” 시리즈가 “중국 현대사를 구미 지식인의 관점에서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그리지는 않았나?” 항의하는 지식인도 이따금 있다.

 

10여 년 전 서울 소재의 한 대학에서 중국 개혁개방을 둘러싼 정치철학 논쟁에 관해서 논문을 발표할 때였다. 그 현장에 있던 중국 전문가 한 명이 “마오쩌둥이 없었으면 중국이 개혁개방을 어떻게 할 수 있었겠냐?”며 따졌다. 개혁개방의 초석을 마오쩌둥이 이미 놓았다는 주장인데, 그 근거가 무엇인지 알 길이 없었다. 그러한 발상이 역사의 상식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1981년 6월 27일 “역사결의”에서 중국공산당은 문화대혁명이 중국 현대사 최악의 동란이었으며 그 책임은 마오쩌둥에게 있다고 선언했다. 리차드 바움(Richard Baum) 같은 중국 정치학자가 지적하듯,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을 매장한(Burying Mao)” 후에야 개혁개방을 추진할 수 있었다.

 

▲<1992년 프린스턴 대학 출판부에서 펴낸 리처드 바움 교수의 저서 <<마오쩌둥 매장하기(Burying Mao)>>표지>>

 

자력갱생의 고립정책으로 서방 자본주의를 향해 쇄국의 빗장을 굳게 걸었던 마오쩌둥을 개혁개방의 선구라 주장했던 그 중국 전문가의 주장이 타당할 수 있는가? 마오쩌둥이 군사적으로 중국을 통일하고 사회주의로 인민의 정신을 무장시켰기에 그의 사후 중국공산당이 강력한 대민지배력을 발휘해서 “중국 특색 사회주의” 혹은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유지할 수 있었다는 발상일까?

 

마오쩌둥을 숭배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렇게 생각할 수는 없다. 한국의 좌파 지식인들은 구미 학계의 중국 비판에 반감을 드러낸다. 그들은 묻는다. “구미 학자들의 중국 때리기(China-bashing) 밑바탕엔 뿌리 깊은 유럽중심주의와 서구우월주의가 깔려 있지는 않나?”

 

중국을 벗어나야 중국이 제대로 보인다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는 소동파(蘇東坡, 1037-1101)의 시구를 생각한다.

“여산 진면목을 알지 못함은 不識廬山眞面目

단지 몸이 산속에 있는 까닭이라네 只緣身在此山中.”

 

<청(淸, 1644-1912)나라 왕휘(王翚, 1632-1717) <<여산백운도(廬山白雲圖)>> 이미지/공공부분>

진정 여산의 아름다움을 감상하고 평가하기 위해선 숭산(崇山), 태산(泰山), 화산(華山), 황산(黃山) 등 천하의 명산뿐만 아니라 산이 아닌 벌판, 사막, 호수, 바다까지 두루두루 섭렵(涉獵)해야 한다. 어디 산뿐이랴, 인간사(人間事) 모든 일이 그러하다. 젊음의 기쁨은 늙어서야 깨닫는다. 사랑의 의미는 실연(失戀) 후에 통감(痛感)한다. 돈을 벌고 난 후에야 가난에 진절머리치고, 속박당해 봐야 자유의 소중함을 안다. 운동선수가 경기의 흐름을 놓치면 엉뚱한 플레이를 하고, 정치인이 정세(政勢)를 오판하면 팽(烹)당하고 축출된다.

 

한 나라에 살아간다고 그 나라의 참모습을 절로 알 수는 없다. 일본 사람이 일본의 현실에 무지하고, 한국 사람이 한국의 진상에 눈을 감고, 미국 사람이 미국의 문제를 간과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한 나라의 실상을 직시하려면 그 나라 울타리를 벗어나야 한다. 중국처럼 반대 여론을 억압하고, 이의제기를 불허하고, 정부 비판을 처벌하는 일당독재 권위주의 국가에선 더더욱 그러하다.

 

인식은 경험에서 출발하지만, 그 한계를 넘어야 진실에 다가설 수 있다. 어떤 대상이든 그 실체를 규명하기 위해선 수동적 체험자에 머물지 말고 섬세한 관찰자, 예리한 분석자, 냉철한 비판자가 되어야만 한다. 유럽의 격언처럼, 어리석은 자는 개인적 체험을 맹신하고, 현명한 사람은 역사를 본다.

 

오늘날 중국 밖 5천 만에 달하는 중국계 인구가 전 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다. 중국을 벗어난 중국계 인사 중에는 중국의 현실을 직시하며 시진핑 정권의 역행을 비판하는 일군의 지식집단이 맹활약하고 있다. 여산을 벗어나 여산의 진면목을 보게 되듯, 그들은 중국을 벗어나 세계를 보았기에 중국의 진면목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가장 최근 과거 중국공산당의 근거지 옌안을 찾아가서 “옌안 정신”을 강조한 시진핑을 향해 중국 밖의 중국계 지식인들은 날카로운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

 

시진핑, 중앙정치국 상위 6인 데리고 혁명성지 옌안과 안양을 방문

제20차 당 대회를 마친 후 시진핑 총서기는 지난 10월 26일에서 28일까지 중앙정치국 상위 6인을 이끌고 중국공산당의 혁명 성지 산시(陝西)성 옌안(延安)시와 문혁 시기 자력갱생의 신화가 서려 있는 허난(河南)성 안양(安陽)시를 방문했다

 

그는 옌안의 한 과수원에 가서는 사회주의 현대국가의 전면적 건설을 위해선 여전히 농촌의 책무가 중대하다고 강조했고, 중학교에선 학생들에게 ‘홍색 유전자’를 계승하라고 채근했다. 지난 10월 27일 옌안의 혁명 기념관에서 시진핑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옌안 지구에서 7년간 생활하면서 노동했다. 나의 부친 세대도 이곳에서 나왔다·······. 이번 중앙정치국 상위 동지들과 함께 왔는데, 새롭게 결성된 중앙 영도 집단이 옌안 시기 당이 세운 우량한 혁명 전통과 작풍을 계승·발양(發揚)하고, 옌안 정신을 널리 선양하기 위함이다.”

 

 ▲< 2022년 10월 27일, 옌안혁명기념관을 찾은 시진핑 총서기와 중공중앙정치국 상위 6명. 사진/新华社记者 燕雁>

허난성 안양에서는 홍기거(紅旗渠) 운하 기념관을 찾아가서 “우공이산(愚公移山)”의 정신을 강조했다. 1969년 완성된 홍기거(紅旗渠)는 비탈을 끼고 절벽 사이 구멍으로 휘돌며 70.9km나 이어지는 산상(山上)의 대수로다. 1969년 향촌의 인민들이 불굴의 의지로 9년에 걸쳐서 완공했다. 이후 홍기거는 전국적으로 크게 홍보되면서 무산계급 혁명정신의 상징물이 되었다. 10월 28일, 시진핑은 허난성 안양의 홍기거를 시찰할 때 다음 발언을 했다.

 

“홍기거는 기념비다. 거기엔 린현(林縣)의 인민들이 숙명에 굴하지 않고,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자연과 투쟁했던 영웅적 기개가 적혀 있다. 홍기거 정신으로 인민을 교육하자! 특히 널리 많은 청소년을 가르치자. 사회주의는 견뎌내고 해내고 목숨을 걸고 바꾸는 것이다. 과거에만 그러하지 않고, 신시대도 역시 그러하다. 지난 세대가 목숨 걸고 일하지 않았다면, 그들이 선혈을 흘리고, 심지는 생명을 바치지 않았다면, 오늘날의 행복한 생활은 없다. 우리는 영원히 그들을 기억해야 한다.”

 

시진핑 총서기는 왜 20차 당 대회를 마치고 나흘 만에 정치국 상위 6명을 이끌고 옌안의 중국공산당 혁명 성지와 안양의 홍기거를 시찰했는가? 그가 직접 말하듯 “옌안 정신과 홍기거 정신은 절대로 마멸될 수 없는, 영원히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고 흔드는 중화민족의 역사적 기억”이기 때문일까? “젊은 세대가 고통을 삼키고 힘듦을 인내하는 자력갱생과 각고분투(刻苦奮鬪)의 정신을 계승하고 선양할 수 있도록” 인도하기 위함일까?

 

 ▲2016년 시진핑 인격 숭배를 경계하는 영어권 언론들. 사진/인터넷 캡처>

재미 중국 지식인들의 시진핑 비판

RFA(Radio Free Asia)는 미국 워싱턴 DC에서 영어 외 10개 아시아 언어로 중국, 북한, 라오스, 캄보디아, 베트남 등 아시아 공산권 관련 콘텐츠를 제작하는 비영리 민간 방송국이다. 이 방송에선 최근 옌안 정신과 홍기거 정신을 선전하는 시진핑을 비판하는 중국 출신 비판 지식인들의 인터뷰를 내보냈다.

 

후핑(胡平, 1947- )은 1980년 12월 베이징 대학 인민대표 선거에서 “표현의 자유”를 구호로 내걸고 당선됐던 인물이다. 후핑은 1980년대 후반 미국 유학을 떠나 현재 미국에 체류하면서 중국 민주화 운동에 헌신하고 있다. 이번에 그는 홍기거 정신을 외치는 시진핑을 비판하면서 다음과 말했다.

 

“마오쩌둥은 인민을 향해 목숨을 걸고 힘겹게 일하며 우직하게 버티라고 요구했지만, 중국이 농업수리 정신을 발전시키려면 마오쩌둥 사상을 학습하는 대신 과학, 기술, 기계화 생산 방법을 연구해야 한다. 시진핑이 홍기거를 중시하다니 참으로 황당무계할 뿐이다.”

 

대만에 체류하는 반중공 지식인 궁위젠(龔與劍)은 “마오쩌둥은 하늘과 투쟁하고, 땅과 투쟁하고, 사람과 투쟁하면, 그 기쁨이 무궁하다 했다”며 시진핑이 극빈의 상황에서 강제 노역에 시달렸던 1960년대 인민의 고역을 미화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정신”을 강조하는 중국공산당의 기묘한 심리상태를 다음과 같이 비꼬았다.

 

“중공의 사전에는 ‘정신’이란 글자가 매우 많다. 지명을 딴 다칭(大慶)정신, 다자이(大寨)정신, 인명을 딴 뢰이펑(雷鋒, 1942-1962, 모범 군인) 정신, 자오위루(焦裕祿, 1922-1964, 모범 간부) 정신 등이 있다. 중공은 민중에게 학습하라, 정신을 배우라며 쉴 새 없이 다그친다. 꼭 중국 전체가 거대한 정신병원처럼 보인다.”

 

궁위젠은 1989년 후난(湖南)성 이양(益陽)에서 민주화 운동에 참여한 후 2년의 노동 개조형을 살았던 인물이다. 2012년 이래 대만으로 건너가서 중국공산당의 인권 탄압과 정치범죄를 비판하면서 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이른바 “중국 이의자(異議者)”다.

 

 ▲<현재 대만에서 중국공산당을 비판하고 있는 중국의 민주화 투사 궁위젠(龔與劍)의 모습. 사진/rfa.org>

지난 11월 4일 RFA에는 한 중국계 재미 역사학자가 출연해서 “옌안 정신”과 “홍기거 정신”을 외쳐대는 시진핑 총서기를 직설 화법으로 통렬하게 비판했다. 바로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로스앤젤레스 캠퍼스의 쑹융이(宋永毅, 1949- ) 교수다. 그는 30년 넘게 1950-70년대 중국공산당의 정치범죄와 인권유린의 실상을 고발해 온 저명한 역사·문헌학자이다.

 

“시진핑은 퇴행적으로 마오쩌둥 시대의 계획경제로 돌아가려 한다. [마오쩌둥의 방법대로] 공사합작 경영과 인민공사로 회귀하면, 경제발전은 빠르게 무너진다. 개혁개방 40년인데, 시진핑이 대규모의 퇴행을 거듭하면, 과학기술의 수준, 공업발전, 국민경제가 수년 내에 크게 벌어지고 만다.”

 

“시진핑이 칭송하는 옌안 정신이 과연 무엇인가? 옌안 정풍(整風)은 마오쩌둥이 당내에서 개인숭배를 절대화하고 권력을 독점하고 전횡하는 행동을 의미한다. 그 시절 옌안에서 마오쩌둥은 대규모 숙청을 감행하고 청년 지식분자들을 세뇌했다. 시진핑이 옌안 정신을 외치는 진의는 무엇인가? 시진핑이 당내에서 숙청을 계속하겠다는 뜻이다. 시진핑은 역사관에서 완전히 마오쩌둥 시대의 역사를 그대로 복제하려 한다. 단순히 모방하는 데 그치지 않고 복제하려 한다. 그 정신상태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

 

 ▲2022년 11월 4일 RFA대담에서 시진핑 정권을 비판하는 쑹융이(宋永毅, 1949- ) 교수. “시진핑이 젊은이에게 고난을 곱씹으라 요구한다고? 비정상적인 ‘고난 숭배’다!” 사진/rfa.org 캡처

“마오쩌둥 시대 봉폐(封閉)되고 낙후된 경제 발전관이다. 홍기거는 대규모 정치 운동, 군중 운동이었으며, 낙후된 생산방식으로 건설되었다. 과학적 고려나 통일된 계획도 없었다. 관개한 토지의 면적도 본래 60만 무(畝)이었는데, 3분의 1로 줄어들었다. 인근지역의 수자원을 침탈하는 근린궁핍화(以隣爲壑)정책이었다. 인근지역은 불만이 많았다. 마오쩌둥의 계획경제는 순식간에 후퇴하고 붕괴했다. 중국 재원(財源)은 순식간에 고갈되고 만다. 문혁 후 중국 경제는 세계 수준에 20, 30년 낙후되었다. 그 기간에 5천억 위안을 소모했다.”

 

“시진핑이 젊은이들에게 고통을 악물라고 요구하는데, 이는 비정상적인 고통 숭배다. 도덕의 제고를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인성에 위반된다. 홍기거 건설할 때 사망자가 300명이 사상자가 3천 명이나 발생했다. 이는 칭송할 일이 아니다. 불필요한 고통을 강요해서 인민 스스로 사서 고생하게 해선 안 된다.”

 

쑹융이 교수와 함께 대담한 반중공 정치평론가 장펑(江峰)은 제로 코로나 정책으로 전 인민이 언제든 봉쇄되는 상황이 오면 시진핑은 필시 “우공이산”의 고사를 들먹일 것이라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시진핑이 외치는 ‘우공이산’에서 우공은 단지 미련스럽게 충성스럽다는 것이며, 이는 시진핑이 요구하는 바다. 만일 고난의 시기가 다시 오면, 그는 산을 옮기는 현실적 실천이 아니라 우직하게 충성만 바치는 우공을 요구할 것이다.”

 

중국을 벗어나 중국의 진면목을 보고 중국의 실상을 고발하는 중국계 지식인들의 맹활약을 보면서 피부색, 국적, 종교, 젠더를 너머 인간의 정서적 보편성을 절감한다. 인민의 자유와 인권을 억압하는 중국공산당을 비판하는데, 거기에 무슨 “유럽중심주의”나 “서구우월주의”가 개입될 수 있나? 과거 한국의 권위주의 개발독재에는 증오심을 드러내면서 중국공산당은 감싸고 도는 사람들의 이중잣대야말로 자가당착이며, 시대착오적 사대주의가 아닐까. <계속>

 

〈56〉 “14억 인구에서 뽑았는데 중국 축구 실력은 왜 저조한가?”

▲2012년 아일랜드 방문 당시 더블린의 크로크(Croke) 공원에서 축구공을 차고 있는 시진핑 총서기의 모습. 시진핑 총서기의 축구 사랑은 널리 알려진 바다. 중국인들은 축구 경기에 열광하지만, 중국의 국가대표 축구단의 실력은 FIFA 랭킹 79위에 머물러 있다./PA Images via Getty Images

 

최고 권력자의 오만과 독선이 파멸적 결과를 초래한 사례

21세기 현재 세계 여러 국가의 중장기적 군사·외교 전략은 어떤 과정을 통해 결정되는가? 국가의 지도자들은 과연 국익 극대화를 위해 최선의 노력으로 가장 현명한 결정을 내리는 합리적 행위자(rational actor)라 할 수 있는가? 아니라면, 그들 역시 보통 사람들처럼 감정, 편견, 무지, 아집에 휘둘리는 불합리한 존재들인가? 국제 외교사를 돌아보면, 주요 국가의 지도자들에게선 그 두 가지 모습이 중첩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대숙청으로 800여만 명을 구속하고 80여만 명을 죽음으로 내몬 스탈린의 편집증, 평화협상에 집착하다 나치에 조롱당한 대영제국의 수상 챔벌린(Neville Chamberlain, 1869-1940)의 순진함, 소련 침공 후 스탈린그라드의 점령을 위해 26만 이상의 병력을 소진했던 히틀러의 허영심, 한국전쟁에 300만 인원을 투입해 90여만의 사상자를 냈던 마오쩌둥의 도박 근성, 주체의 광기 속에서 개혁개방을 거부한 채 핵 개발에 몰두해 온 북한 김씨 왕조의 피해망상증 등등. 권력자의 파괴적 도그마를 보여주는 역사의 실례는 무수하다. 먼 데 볼 필요 없이 김씨 왕조의 선의만 믿고 “우리민족끼리”를 외치며 핵무장을 추구하는 북한 정권에 천문학적 뒷돈을 제공해온 대한민국 지난 정권의 군사·외교적 패착을 보라.

 

▲<1942년 나치 독일군의 침공으로 폐허가 된 소련 스탈린그라드의 풍경. 사진/공공부분>

 

진정 최고 권력자의 오만과 독선, 무지와 편견은 파멸적 결과를 초래할 수 있기에 권력의 독점과 전횡을 막는 법적·제도적 장치가 요구된다. 정부 조직 내부의 상호감시와 상호견제뿐만 아니라 언론 및 시민사회의 적나라한 고발과 냉철한 비판이 절실하다. 권력 비판의 핵심은 권력자의 아집과 편견, 오만과 독선, 허영과 광기, 가치관과 사유 습관, 지배욕과 열등의식까지 낱낱이 발가벗기는 인격 검증과 정신 감정에 있다.

 

개인의 능력엔 한계 있어...권력 집중은 정치 위기를 고조시킨다

1960년 경제학자 하이에크(Friedrich Hyek, 1899-1992)가 <<자유헌정론(The Constitution of Liberty)>>에서 이미 논했듯, 특정 개인이 제아무리 영리하고 해박하다 해도 인간의 두뇌가 파악하고 처리할 수 있는 정보와 지식은 극히 제한되어 있다. 인류가 쌓아 올린 지식은 도서관에 수천 만권의 책으로 정리되어 있다지만, 실제로 지식이란 책에 적힌 문자가 아니라 인간의 뇌리에 어떤 형태로든 저장되어 생체 에너지를 통해서 처리되는 극히 제한된 정보에 불과하다.

 

아무리 빅데이터를 집적하고 인공지능을 사용한다 해도 중대사의 결정이 최종적으로 권력자의 판단력에 맡겨져 있기에 현실정치엔 언제나 판단 착오의 위험이 존재한다. 권력자 역시 어리석은 욕망에 미혹되고, 그릇된 정보에 오도되고, 약물 한 방울에 정신적 착란을 일으킬 수 있는 연약하고 불완전한 인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대부분 현대 국가는 최고 권력자 일인에 최종 결정의 책임을 오롯이 떠넘기는 대신 전문 관료집단과 국가 조직을 최대한 활용하여 국익을 극대화하는 정책 결정의 합리성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 바로 그 점에서 최근 일당독재의 미망도 모자라 일인 지배의 불합리로 나아가는 중국공산당의 앞길은 결코 밝아 보이지 않는다.

 

어떤 이는 시진핑의 천재성까지 운운하며 중국공산당 집단 지도 체제가 선거 민주주의보다 우월하다는 황당한 주장을 펼치지만, 무리한 제로 코비드 정책의 역리(逆理)에서 드러나듯 오늘날 중국을 둘러싼 현실적 위기는 세계사의 상식은 물론 중국공산당의 관행까지 어겨가며 구태여 일인 지배로 나아가는 시진핑 정권의 오만과 독선에서 비롯됐다.

 

▲<1974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자유주의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Friedrich Hyek, 1899-1992). 사진/공공부문>

 

‘권력의 역설’... 독재자 일인 지배의 위험성

지난달 중국공산당 제20차 전국 대표 대회에서 시진핑 총서기는 군·정·관의 권력을 오롯하게 거머쥐고 일인 지배의 권력 기반을 공고히 하는 장면을 연출했다. 관행을 거슬러 68세 이전의 리커창(李克强, 1955- )과 왕양(汪洋, 1955- ) 등을 강제로 퇴출하고, 마지막 순간 후진타오(胡錦濤, 1942- ) 계의 젊은 기린아 후춘화(胡春華, 1963- )까지 내쳐서 정치국 상무위원회를 온전히 초록 동색 자기 인맥으로 채웠다. 스스로 황위에 올라 종신 지배의 가겠다는 강력한 집권 의지를 중국 안팎에 천명한 셈이다. 이로써 과연 시진핑 총서기의 권력 기반은 완벽하게 정비되었는가?

 

<<장자(莊子)>><천하(天下)>편에서 혜시(惠施)가 논하듯, “하늘은 땅만큼 낮고(天與地卑), 산과 늪은 모두 평평하고(山與澤卑), 정오의 태양은 기우는 태양이다(日方中方睨).” 47년 전 세상을 떠난 마오쩌둥까지 되살려내서 일인 지배를 미화하려 하지만, 인류사의 상식에 비춰볼 때 권력자의 도행역시(倒行逆施)란 비판을 면할 길이 없다.

 

▲2022년 10월 말 제20차 당 대회에서 제3기 집권을 확정한 후 옌안의 혁명성지를 순례하는 시진핑과 정치국 상무위원 총7인의 모습./신화 /AP연합뉴스

 

미국의 저명한 중국 관찰자(China watcher) 민신 페이(Minxin Pei, 1957- ) 교수는 최근 <<포린어페어스(Foreign Affairs)>>에 실린 “시진핑과 권력의 역설”이란 제목의 기고문에서 시진핑 정권이 앞으로 직면할 수밖에 없는 현실적 위기를 짚었다.

 

첫째, 일인 지배로 나아가는 중국공산당은 이제 권력의 속성상 권력의 승계를 둘러싼 권력투쟁을 피할 수 없다. 1969년 문화혁명의 절정에서 마오쩌둥은 중앙위 정치국을 모조리 무비판의 충성스러운 자기 사람들로만 채웠지만, 그 결과는 린뱌오 집단과 사인방 사이의 파멸적인 권력투쟁으로 펼쳐졌다. 천하의 마오쩌둥도 권력 승계를 둘러싼 분열과 반목을 막을 수 없었는데, 시진핑 정권이 역사의 예외가 될 수 있을까?

 

심리학자들이 지적하는 “권력의 역설”이란 권력의 크기와 권력자가 느끼는 안도감의 반비례를 의미한다. 더 큰 권력을 가질수록 독재자는 더 큰 불안감에 시달리게 된다. 특히 일인 지배의 전제 정권에선 독재자가 권력 장악을 위해 경쟁자를 제거할 수밖에 없는데, 그럴수록 원한 관계의 정적들이 더 늘어날 수밖에 없다. 절대 권력자 마오쩌둥의 심적 불안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그가 류샤오치(劉少奇, 1898-1969)를 숙청한 동기, 후계자로 직접 지목했던 린뱌오(林彪, 1907-1971)를 제거한 까닭, 중앙 정계로 복귀시킨 덩샤오핑(鄧小平, 1904-1997)을 다시 축출하고, 만년 총리로 충성을 바쳤던 저우언라이(周恩來, 1898-1976)까지 4인방을 사주해서 비판했던 이유가 소명되지 않는다.

 

▲<중국 출신으로 미국에서 맹활약하고 있는 중국 정치학자 민신 페이(Minxin Pei) 교수의 모습. 사진/Claremont McKenna College>

 

2022년 시진핑은 1969년 마오쩌둥을 답습해서 충성을 바친 자기 사람들만을 엄선해서 권력의 핵심층을 새로 꾸렸지만, 마오쩌둥 정권과 마찬가지로 이미 그 내부에 권력투쟁의 씨앗이 뿌려져 있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일인 지배의 외로운 독재자로 홀로 선 시진핑 총서기는 권력 유지의 과정에서 격심한 불안감과 의심증에 휩싸일 가능성이 크다. 앞으로 중국공산당 정부의 지도부에서 격렬한 권력투쟁과 파벌전쟁이 벌어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의미다.

 

둘째, 표면상 시진핑의 일인 지배가 개시되었지만, 현실정치에서 그의 권력이 막강한 힘을 발휘할지는 의문이다. 겉으로 강력해 보이는 독재자라도 그 권력은 실제로는 최고위 엘리트층 내부의 중추 세력에 한정될 수밖에 없다. 중국의 현실에선 통상 300명 미만으로 구성되는 중공 중앙위원회가 시진핑의 지배력이 미치는 현실적인 권력 범위이다. 그 한계를 넘어 더 큰 권력을 행사하려면 마오쩌둥처럼 개인적인 카리스마를 발휘하거나 덩샤오핑처럼 유능한 부하에게 권력을 위임해야 하는데, 과연 시진핑이 마오쩌둥이나 덩샤오핑처럼 권력을 행사할 수 있을까? 시진핑의 정치적 카리스마는 대중적 숭상(崇尙)을 한 몸에 받았던 마오쩌둥에 비하면 미약한 수준이다. 실제적인 통치의 능력에서 보아도 시진핑은 혁명지도자들과 권력을 공유하고 유능한 후계자를 발탁해서 경제성장의 박차를 이어간 덩샤오핑의 전설을 따를 길이 없다. 마오쩌둥도, 덩샤오핑도 될 수 없다면, 최고 영도자로서 시진핑의 일인 지배는 과연 어떤 형태의 통치가 될까?

 

권력의 공고화는 결국 광대한 대중의 지지를 통해서만 이뤄질 수 있고, 대중의 지지는 이념 조작과 정치 집회가 아니라 과학·기술의 자립을 통한 지속적 경제성장을 통해서만 확충될 수 있다. 과연 시진핑 정권의 통치는 정치적 안정과 경제성장을 지속할 만큼 합리적이고, 체계적인가? 출구를 찾을 수 없는 제로 코비드 정책, 부자를 외국으로 내모는 공동부유의 구호, 국제적 고립을 자초하는 외교적 강경책, 과격하고 억압적인 대민 통제는 시진핑 정권 앞에 지뢰밭이 펼쳐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결국 “시진핑” 일개인의 독특한 성격이 앞으로 중국공산당 정부의 성패를 가르는 최대 변수가 되고 있다.

 

중국공산당의 미래를 보려면 ‘중국 모델’ 신화를 타파해야

지금껏 중국 안팎에서 이른바 “중국 모델”을 칭송해온 자들은 중국공산당 집단 지도 체제의 효율성과 합리성을 주장해왔다. 흔히 그들은 중국의 통치 엘리트가 최고의 명문 대학을 나온 수재들로서 장시간 정부의 각 분야에서 단계적으로 국정 실무를 익히고 행적 실적에 대한 엄격한 고과와 냉정한 평가를 거쳐 발탁된 가장 유능한 행정가라고 주장한다. 우수한 영재들로 구성된 중국공산당 정치국의 집단 지도 체제는 국익의 최대화를 위한 최고의 전문성과 판단력을 발휘한다는 주장이다.

 

미국 보스턴 대학의 중국 정치 전문가 퓨스미드(Joseph Fewsmith) 교수는 중국공산당의 통치가 이미 제도화되었다는 일반론을 부정한다(Joseph Fewsmith, Rethinking Chinese Politics,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21). 그의 분석에 따르면, 시진핑 집권 초기부터 대규모로 전개된 반부패 운동은 정적을 제거하고 반대 세력을 억압하는 “권력 공고화(consolidation of power)” 과정이었다. 오늘날의 중국이 집단 지도에 의한 합리적인 시스템 통치가 아니라 민주집중제의 이름 아래 군사주의적 위계질서에 따라 독재적으로 운영되는 레닌주의 국가라는 분석이다.

 

▲<보스턴 대학의 중국 정치학자 퓨스미스(Joseph Fewsmith) 교수. 사진/bu.edu>

 

스탈린, 마오쩌둥의 사례가 증명하듯 레닌주의 국가에서는 강력한 1인의 인격적 지배가 나타난다. 사회주의 혁명이 전위조직으로서 공산당의 지도력을 강조하는 레닌주의는 권력 집중, 이데올로기 강화, 강력한 대민 지배를 특징으로 한다. 그러한 관점에서 시진핑 정권이 일인 지배로 나아가는 과정은 레닌주의 정치체제의 자연스러운 귀결이라 할 수 있다.

 

흔히 장쩌민에서 후진타오를 거쳐 시진핑으로 이어지는 지난 30년의 권력 승계 과정이 중국 정치의 제도화를 보여준다고 생각하지만, 퓨스미드 교수는 외관상 그러할 뿐, 실제로 오늘날 중국 정치는 군권을 장악한 강력한 독재자의 인격적 지배(personalist rule)일 뿐이며, 그 점에서 레닌주의 통치 모델이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덩샤오핑과 장쩌민은 실권에서 물러난 후에도 중앙군사위원회의 주석직은 놓지 않고 있었다. 시진핑의 정치권력 또한 강력한 군권 장악에 기초하고 있다. 장쩌민에서 후진타오로 가는 20년의 경험 역시 엄격한 의미에서 집단 지도 체제가 아니라 강력한 1인의 인격적 지배였다는 주장이다.

 

▲<2022년 2월 1일 카타르 월드컵 아시아조 최종 예선에서 베트남에 1대 3으로 참패한 중국 선수들의 모습. 사진/스포츠 조선>

 

7년 전 사석에서 한 중국 전문가는 내게 시진핑을 위시한 중국 영도자들은 모두 하나 같이 두뇌가 탁월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는 중공 최고 지도자 대부분이 최고의 명문대 출신들로 직관력, 정보력, 판단력, 결단력 등 모든 면에서 거의 완벽한 행정의 달인들이라 주장했다. 선뜻 동의하지 않는 내 얼굴을 빤히 보면서 그가 따지듯이 물었다.

 

“14억 인구 중에서 극심한 경쟁을 뚫고 정상에 선 최고의 영재들이니 그들이 함께 모여 만든 집단 지도 체제의 수준이 얼마나 높겠소?”

 

그때 그 순간은 그저 멋쩍게 웃어넘겼지만, 지금이라도 그에게 되묻고 싶은 질문이 있다.

 

“14억 인구에서 발탁된 중국의 국가대표 축구팀은 왜 그렇게 성적이 저조합니까? 왜 피파(FIFA) 랭킹 세계 79위에 머물러 있습니까?”

 

누구든 시진핑 정권의 앞날을 점치려면, 한국 좌파 지식계의 엉터리 중국 신화부터 분쇄해야 한다. <계속>

 

〈57〉 중국 시민들은 왜 ‘백지’를 들었을까… ‘백지 혁명’의 미래는?

백지 들기를 불온하다며 금지할 수 있을까?
백지 들기가 사회주의 파괴 활동이라며 처벌할 수 있을까?

▲<2022년 11월 27일, 베이징의 시위대가 정부의 검열을 비판하고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는 상징물로 백지를 손에 들고 시위하고 있다. 사진/Thomas Peter/Reuters>

 

성난 중국의 학생과 시민들 “공산당 물러나라!” “시진핑 물러나라!”

마침내 중국 인민이 일어났다. 지난 11월 29일 미국 CNN 보도에 따르면, 11월 25일부터 나흘 사이 중국 17개 주요 도시에서 최소 23건의 시위가 발생했다. 베이징, 톈진, 타이위안(太原), 시안(西安), 청두, 충칭, 우한, 난징, 상하이, 항저우, 광저우 등 대도시뿐만 아니라 신장(新彊) 서쪽 끝 인구 40여 만의 오아시스 도시 호탄, 77만의 도시 쿠얼러, 450만의 성도 우르무치에서도 성난 인민들이 시위를 벌였다. 1989년 이래 중국 전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이처럼 큰 시위가 발생한 적은 없었다. 무엇보다 자발적으로 모인 시민들이 외치는 구호가 충격적이다.

 

“공산당은 물러나라(共産黨, 下臺)! 시진핑은 물러나라(習近平, 下臺)!”

공산당 일당독재의 나라 중국에선 머릿속 상상조차 쉽지 않은 구호다. 중국은 어느 공공장소든 무수한 감시 카메라가 실시간 오가는 인민의 일거수일투족을 모조리 촬영·녹화하는 나라다. 그런 중국에서 대도시 광장에 시민들이 모여서 목청껏 “공산당은 물러나라, 시진핑은 물러나라” 외쳤다면, 그 자체가 가히 혁명적 사건이다. 1989년 톈안먼 시위대도 최고 영도자 덩샤오핑을 비판하고 국무원 총리 리펑(李鵬, 1928-2019)의 퇴진을 외쳤지만, 중국공산당의 퇴진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거의 없었다.

 

▲<2022년 11월 29일경, 서울 홍대 부근에서 중국인 유학생들이 시위를 벌이고 있다. 사진 왼쪽 글귀는 “시진핑 물러나라, 중공 물러나라”이고, 사진 오른쪽 끝엔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가 적혀 있다. 사진/ https://twitter.com/GFWfrog>;

 

중국은 공산당 비판이 법적으로 허용되지 않는 나라다. 중국 <<헌법>> “총강” 제1조는 명확하게 “중국공산당 영도가 중국 특색 사회주의의 가장 근본적 특징”이라 못 박고 있다. 그러한 중국공산당을 향해서 중국 인민이 “물러나라” 소리쳤다. 당·정·관·군의 모든 권력을 장악한 최고 영도자 시진핑을 향해 퇴진을 외치는 인민의 용기는 실로 대단하지만, “공산당은 물러나라!”는 구호가 너무나 충격적이라 “시진핑은 물러나라!”는 약하게 느껴질 정도다.

 

미국에서 활약하는 중국 민주화의 아이콘, <<베이징의 봄>> 영예 주필, 후핑(胡平, 1947- )은 말한다.

 

“공산당은 물러나라는 구호는 경천동지의 메시지다. 그 의의는 매우 중대하다. 상하이 군중이 소리쳐 외친 이 구호는 떨어지는 한 장 이파리 가을을 알리듯이 중국 백성의 심중에 민주와 자유를 쟁취하려는 포부가 있음을 증명한다.”

 

공산당 물러나라 구호는 경천동지의 메시지...제2 텐안먼 민주화 운동의 시작인가

1989년 이래 중국의 대중 시위는 대부분 지방정부의 부패와 무능을 비판하고 고발하는 “지방화된 운동(localized movement)”이었다. 이번에는 성난 인민이 중앙정부의 최고 권력자뿐만 아니라 중국공산당을 향해 직접적인 비판을 쏟아내고 있다. 시위 참여자를 보면, 위구르족과 한족이 함께 움직이고, 노동자, 중산층, 대학생이 한데 뭉치고 있다. 민족을 넘어, 계급을 넘어 다양한 집단이 뭉치는 광범위한 인민의 연대로 보인다.

시민들이 지목한 공공의 적은 “공산당”과 “시진핑”이다. 탄압하는 경찰을 향해 시위대는 당당하게 외친다.

 

“인민에 복무하라(爲人民服務)!” 그들의 혀끝엔 이미 “부자유 무녕사(不自由, 毋寧死)!”의 6자(字) 비결(秘決)이 들러붙었다. 1989년 톈안먼의 학생과 시민들이 외쳤던 바로 그 구호다. “자유가 아니면 차라리 죽겠다” 또는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의미다. 보다 구체적으로 그들은 “언론자유(言論自由, 표현의 자유)”와 “신문자유(新聞自由, 언론·출판의 자유)!”를 요구하고 있다. 자유가 시대정신임을 보여준다.

 

▲<2022년 11월 27일 칭화(淸華)대 학생들이 들고 있는 백지에는 프리드만(Friedman) 공식이 인쇄되어 있다. “Friedman”의 “de”를 비슷한 발음의 중국어 단어 的(더)로 바꾸면, “Free的 Man,” 곧 자유로운 인간이란 의미가 된다. 중국 대학생들의 창의적인 저항이 “백지 혁명”의 역사적 의의를 증폭시키는 장면이다. 사진/https://twitter.com/nathanlawkc>;

 

지난 3년간 제로-코비드 방역의 결과 중공 정부의 대민 지배력은 최고조로 강화되었다. 바이러스와의 전쟁은 중공 정부에 전 인민의 언행과 생각까지 감시하고 처벌할 수 있는 막강한 권력을 부여했다. 현재 중국은 수천만 인민을 수개월씩 집안에 감금하고 날마다 불러내서 PCR 검사를 하는 전체주의 국가다. 인터넷의 댓글까지 샅샅이 감시하고, 인민의 생체 정보 및 언행 기록까지 빅 데이터로 집적해서 개개인에게 사회적 신용등급을 부여한다.

 

중국이 바로 그러한 나라이기에 더더욱 최근 전국 17개 도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23개 시위가 발생했다는 사실은 중대한 의미가 갖는다. 철옹성 같은 중공 정부의 방화벽에 균열이 생겨났나? 아니라면, 어떻게 수백 명 인민이 광장에 모여서 “시진핑은 물러나라” 외칠 수 있단 말인가? 돌아보면, 균열의 조짐은 이미 오래전부터 보였다. 공산당 퇴진의 구호를 외치기까지는 중국 인민은 지난 3년 실로 파란만장의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모름지기 대중운동은 살아 숨 쉬는 생물(生物)과도 같다. 밟으면 꿈틀대고 아프면 피하게 마련이지만, 분노가 극에 달하면 무리 지어 싸운다.

 

제로-코비드 3년, 자유와 민주를 배운 중국 인민

팬데믹의 진원지 우한에 봉쇄령이 떨어져 시민들이 모두 집안에 갇혀버렸던 2020년 2월 초 칭화대학 법학원의 쉬장룬(許章潤, 1962- ) 교수는 “분노한 인민은 더는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격문을 발표했다. 이 글에서 쉬 교수는 중국공산당의 불합리하고 강압적인 방역 정책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중국은 점차 세계의 외로운 섬이 되어버렸고, 지난 30년 개혁개방으로 힘겹게 일군 개방성은 하루아침에 훼손되었으며, 중국의 치리(治理)는 순식간에 전근대로 돌아갔다. 길을 막고 문을 닫아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야만적인 인도의 재만이 중세기를 닮았다······. 그렇다! 국민의 분노는 이미 화산처럼 폭발했다. 분노하는 인민은 이제 더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쉬장룬 교수의 무서운 예언은 이후 3년에 걸쳐 점차 현실이 되고 있다. 분노한 인민은 두려움이 없기에 광장에 모여서 “공산당은 물러가라, 시진핑은 물러가라” 외칠 수가 있다.

 

<중국 화장실 낙서,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사진/https://twitter.com/lfh46123376>;

 

방역 정국이 시작된 이래 중국 전역에서 크고 작은 항의가 이어졌다. 급기야 지난 3월 말부터 시작된 상하이 봉쇄가 두 달 넘게 이어지면서 성난 시민들의 항의는 비등점으로 치솟았다. 중국의 SNS에 방역의 광기를 고발하는 동영상들이 급속하게 퍼져나갔다. 그때마다 중공 정부는 신속하게 그 영상들을 삭제했지만, 시민들의 자발적인 소통을 완벽하게 차단할 길은 없다. 격분한 시민들은 굴하지 않고 고층 건물 창밖으로 괴성을 지르고, 인터넷에 항의문을 올리고, 동영상을 퍼뜨리며 부조리한 현실을 고발했다.

 

5월 베이징 대학과 톈진의 난카이 대학에서 시위가 일어났다. 학생 기숙사 주변에 철판으로 만든 방역 벽이 세워지자 캠퍼스 안에 갇혀버린 학생들 수백 명은 캠퍼스 광장에 모여앉아서 일방적인 정부의 시책을 비판하며 시위를 벌였다. 학교 당국은 기숙사로 돌아가라며 학생들을 설득했지만, 일부 학생들은 반쯤 지어진 철벽을 밀어서 무너뜨리려 했다.

 

5월부터 7월까지 허난성에선 예금을 동결한 지방 은행에 항의하는 인민들의 시위가 이어졌다. 사전 정보를 입수한 정부는 참가자들의 여행권을 제한하기도 했지만, 시위를 막을 수는 없었다.

 

10월 13일 오후 2시 베이징 하이뎬(海淀)구 쓰퉁차오(四通橋) 다리 난간에 “나라의 도적 독재자 시진핑을 파면하라!”는 구호가 내걸렸다. 그날 다리 위에서 일인시위를 벌인 펑리파(彭立發, 1974- )는 현장에서 체포되어 지금도 구금된 상태지만, 현장의 동영상은 중국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사람들은 감시 카메라가 없는 화장실에서 펑리파의 구호를 거침없이 옮겨적는 “화장실 혁명”을 연출했다. 지난주 베이징과 상하이에 결집한 시위대는 펑리파가 내걸었던 바로 그 구호를 외쳤다. “코비드 검사 말고 밥을 달라! 수령 대신 선거를 원한다! 노예가 아니라 공민의 되고 싶다!” 베이징에서 발생한 단 한 사람의 시위가 전국 인민에 적잖은 영향을 끼쳤음을 보여준다.

 

지난 10월 28일 티베트의 라싸에서도 3개월간 지속된 봉쇄 조치에 맞서 수백 명이 모여서 정부를 규탄하는 집단 시위가 발생했다. 2008년 이래 처음으로 발생한 티베트의 시위였다. 당시 수백 명 시위대 속엔 티베트 원주민과 한족 이주노동자들이 섞여 있었다.

 

10월 29일, 매일 수십만 대의 I-Phone을 생산하는 정저우의 팍스콘(Foxconn) 공장 노동자들이 대규모로 짐을 싸서 철조망 방호벽을 넘어 공장에서 탈출해서 집으로 걸어가는 동영상이 위챗에 유포되어 전 세계에 충격파를 주었다. 정부의 일방적인 제로-코비드 방역에 대한 집체적 저항의 움직임이 일어나는 듯했다.

 

11월 24일 오후 충칭에선 한 젊은 남자가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외치면서 거리의 시민들을 향해 그릇된 방역 정책을 비판하는 시위를 벌였다. 그는 “세상엔 오직 하나의 질병이 있고, 바로 그 병명은 부자유와 빈곤”이라 주장해서 시민들의 호응을 얻었다. 경찰이 그를 붙잡아 목조르기를 하면서 제압하려 했지만, 시민들이 몰려가 완력으로 경찰의 손아귀에서 그를 구출했다. 그 장면이 고스란히 동영상으로 찍혀 중국 전역으로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용감하게 정부를 비판한 그에겐 “초인 형님(超人哥)”이라는 칭호가 붙었다.

 

 ▲<충칭에서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며 시위하는 일명 ‘초인 형님’의 모습. 그는 경찰에 목을 잡혔지만, 시민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탈출했다. 사진/ 인터넷 캡쳐>

 

같은 날 저녁 8시경 우루무치에서 10명이 사망하고 9명이 중상을 입는 참혹한 화재가 발생했다. 인명을 앗아가는 안전사고는 중국에서 심심찮게 발생한다. 2015년 톈진의 화학물질 창고에서 대폭발이 발생해서 165명이 사망했다. 2019년 3월에는 옌청의 화학공장에서 폭발 사고가 발생해서 78명이 사망하고 반경 7킬로미터 이내 주거지가 파괴되는 사고도 있었다. 우루무치 화재가 일어나기 불과 이틀 전인 11월 22일 허난(河南)성 안양(安陽)의 한 공장에선 전기용접의 잘못으로 화재가 발생해서 38명이 목숨을 잃는 사고도 발생했다.

 

중국 인민들에겐 그 모든 안전사고보다 11월 24일 우르무치의 화재가 더 큰 충격을 주었다. 모두가 불시에 봉쇄당할 위험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 당국의 검열 직전 전국으로 퍼져나간 동영상을 보면, 아파트 봉쇄 구조물 때문에 소방차는 건물 가까이 접근할 수 없었고, 호스에서 발사된 물은 치솟는 불길에 닿지 못함이 확인된다. 불길에 휩싸인 채 목숨을 잃은 10명 사망자 중엔 위구르족 여인과 네 명의 아들딸이 포함돼 있었다. 시민의 분노는 집체적 행동을 낳고, 행동은 결국 운동으로 발전한다. 바로 다음 날부터 격분한 시민들이 중국 전역에서 집결하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중국의 대학생들은 손에 백지를 한 장씩 들고 시위를 벌였다. 한 글자도 적히지 않는 종이 한 장이 대하소설 한 질보다 더 많은 말을 한다.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정부를 궁지로 몰아넣는 기발한 아이디어다. 베이징, 상하이, 난징, 광저우 등의 중국의 시민들이 백지를 들고 침묵시위를 벌인다면, 중공 중앙은 어떻게 대응할까? 백지 들기를 불온하다며 금지할 수 있을까? 백지 들기가 사회주의 파괴 활동이라며 처벌할 수 있을까?

 

 ▲<11월 27일 저장(浙江) 우전(烏鎭)의 관광지에서 한 시민이 백지 혁명을 선전하는 퍼포먼스를 연출하고 있다. 사진/https://twitter.com/wurenhua>;

2004년 우크라이나의 “오렌지 혁명,” 2011년 튀니지의 “재스민 혁명,” 2014년 홍콩의 “우산 혁명,” 2020년 홍콩, 대만, 태국을 잇는 “밀크티 동맹” 등에서 보듯, 시민운동이 성공하려면 그 운동의 정신을 압축하는 혁명의 상징물이 필요하다. 중국 인민은 백지를 들었다.

 

누구였을까, 맨 처음 백지를 손에 들고 거리로 나간 그 인물은? 우연히 한 사람의 머리에 번뜻 떠오른 생각이었을까? 어느 누군가, 아니 어떤 조직이 고심해서 만들어낸 혁명의 내러티브(narrative)일까?

 

백지 혁명의 저작권은 2020년 6월 홍콩의 시위대에 있다. 당시 베이징의 인민대표대회에 만장일치로 홍콩 국가보안법을 통과된 후, 홍콩의 시위대는 흰 종이를 들고 베이징의 탄압에 저항했다. 홍콩에서 시작된 시위 문화를 베이징, 상하이의 학생들이 받아서 대륙 전역으로 확산한 셈이다. 땅 밑으로 흐르는 강물처럼 1911년 공화 혁명에서 1989년 톈안먼 민운(民運)을 거쳐 2022년까지 오늘날 중국에서도 자유와 민주의 물결이 이어지고 있는가?

 

▲<2022년 11월 28일경 후난성 장사에서 백색혁명에 동참하는 시민들의 퍼포먼스. 사진/ https://twitter.com/GFWfrog>;

 

2022년 11월 25일, 공산당 일당독재 치하 중국에서 백지 혁명의 물꼬가 터졌다. 젊고 발랄한 중국 청년들은 시위 현장에서 실시간 핸드폰으로 찍은 동영상을 재빨리 VPN으로 중공 정부의 감시망을 따돌리고 해외 SNS로 퍼 나르고 있다. 런던, 뉴욕, LA, 시드니, 토론토, 서울 등 세계 각국의 대도시에서 백지 혁명에 동참하는 세계시민의 시위가 점점 더 거세지고 있다. 비관주의자는 중공 정부의 강경 진압으로 시위는 곧 멈춘다고 전망하지만, 2022년 백지 혁명은 이제 막 시작됐다.

 

백지 혁명의 행동 강령은 “백지를 손에 들고”이다. 구호는 “공산당은 물러나라, 시진핑은 물러나라!”이다. 1989년 이래 중국 인민을 이끄는 도도한 시대정신은 “부자유(不自由) 무녕사(毋寧死)”이다. “자유롭지 못하면 차라리 죽겠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계속>

 

 ▲<1989년 톈안먼 민주화 운동. 칭화 건축학원의 석사과정 학생들이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구호를 들고 시위하고 있다. 사진/ https://www.wilsonquarterly.com/quarterly/_/tiananmen-square-at-25>;

 

〈58〉“봉쇄 푼 중국, 3개월 내 3억명 코로나 감염”... 최대의 정치적 위기 

▲<2022년 11월 26일 10명의 목숨을 앗아간 우루무치 화재 사건 직후 영국 런던의 중국대사관 앞에 운집해서 제로-코비드 정책의 폐기를 요구하며 시위하는 중국계 학생들. “자유가 아니라면 죽음을 달라,” “시진핑 물러나라” 등의 구호가 보인다. 사진/ Alexander Mak/NurPhoto/Reuters>

 

“일어나라, 노예가 되기 싫은 인민이여” 중국 국가 부른 ‘백지 시위’

 “노예가 아니라 공민(公民)이 되고 싶다! 자유가 아니라면 죽음을 달라! 공산당은 물러나라! 시진핑은 물러나라!”

 

지난 11월 말 중국 전국 최소 17개 도시에서 백지를 손에 들고 광장에 몰려나온 시위대가 외친 파격의 구호이다. 그들은 모여서 목청껏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가를 제창했다. 그 가사 첫 소절이 전체주의적 압제를 거부하는 중국 인민의 혁명 의식을 새롭게 일깨운다.

 

“일어나라! 노예가 되기 싫은 인민이여!”

다윗보다 약한 젊은 학생들이 골리앗 군단보다 강한 중국공산당 정부에 항거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놀랍게도 그들은 공산당 해산과 시진핑 하야를 부르짖었다. 오늘날 중국에서 그보다 더 강력한 정치 구호는 있을 수 없다. 1989년 톈안먼 민주화 운동의 학생대표 왕단(王丹, 1969- )은 최근 개인 유튜브 방송에서 “1989년 당시 우리는 공산당 해산, 시진핑 하야 같은 구호를 외칠 수 없었다”며 시위대의 용기를 칭찬했다.

 

▲<2022년 11월 27일, 백지를 손에 들고 거리에 나온 베이징 시민들. 사진/Thomas Peter/Reuters>

 

현재 중공 중앙은 시위 주동자들을 색출해서 검거하고 있다. 정치범과 사상범을 처벌하는 중국의 형법은 그 종류가 다양하다. “국가 정권 전복 선동죄,” “반혁명 선전선동죄,” “정부 전복 음모죄,” “통적죄(通敵罪, 적과 내통한 죄),” “반국죄(叛國罪, 국가에 반역한 죄)” 등등. 다만 중국 법원은 웬만해선 그러한 반체제, 반국가의 죄목을 남발하진 않는다. 시위 주동자를 처벌할 때 중국 법원은 사회질서 파괴나 폭행 혐의를 걸어 처벌하기 일쑤다. 흔히 심흔자사죄(尋釁滋事罪), 곧 “싸움을 걸고 난리를 부린 죄”가 적용된다. “사회 관리 질서 방해죄”도 시위자에게 자주 적용되는 죄명이다. 중국 법원의 억지 판결 때문에 불의에 항거해 떨쳐 일어나 정부를 비판하며 투쟁한 민주인사는 폭행범의 낙인을 받고 옥살이해야만 한다.

 

이번에 “공산당 해산”과 “시진핑 하야”를 부르짖은 시위 군중을 처벌할 때 중국 법원은 과연 어떤 법을 들고나올까? 2019년 산시(陝西)성 법원은 트위터와 페이스북에 국가주석을 모독하고 중국공산당을 비판하는 글을 올린 중국의 네티즌 룽커하이(龍克海)에게 “엄중하게 사회질서를 파괴했다”며 “심흔자사죄”를 걸어 1년 6개월 형을 선고했다.

 

인터넷 공간에서 국가영도자를 비판했는데 판사는 대체 무슨 근거로 사회질서를 파괴했다고 판단했는가? 글로써 정부를 비판한 행위가 “싸움을 걸고 난리를 부린 죄”가 될 수 있나? 독재 정권 치하에선 법원의 판결이 그렇게 상식에 반하고 논리에 어긋난다.

 

백지 혁명, 최초의 승리...놀란 중국공산당, 결국 봉쇄를 풀다

놀랍게도 시위의 결과는 중국 공민의 한판승이었다. 당황한 중공 중앙은 주춤 뒤로 물러섰다. 12월 7일 중국 당국은 급작스럽게 역동적 청령(淸零, 제로-코비드) 정책의 중단을 선언했다.

 

어떤 이는 이번 시위의 규모가 그다지 크지 않았다며 중국 당국이 때가 돼서 방역 규제를 완화했을 뿐 시위의 영향은 미미했다고 주장하는데, 바닷속의 빙산을 모르는 어리석음이다. 전체주의 중국에서 그 정도 시위가 발생했다는 사실은 기층 인민의 분노가 이미 극에 달해 있음을 보여준다.

 

중국 관영 매체는 이번 조치가 시위와 무관한 의학적 결정이라고 보도하고 있지만, 시위에 놀란 중공 중앙이 뒷걸음질쳤음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듯하다. 불과 몇 주 전까지도 관영 매체는 제로-코비드 정책이 바이러스로부터 인명을 보호하는 가장 과학적이고, 효과적이며, 경제적인 방법이라고 선전·선동의 나팔을 불어댔기 때문이다.

 

▲<중국의 관영 매체는 방역에서 참패한 미국이 중국의 효과적인 제로-코비드 정책을 폄훼한다고 비판해왔다. 자막 설명: 왼쪽 위 “바이러스와의 공존,” 오른쪽 위 “역동적 제로-코비드,” 중간 “중국의 방법이 더욱 위험하다.” 그림/https://www.chinadaily.com.cn/>;

 

가령 지난 10월 11일 중공 기관지 <<인민일보>>에 게재된 “역동적 제로-코비드 정책은 지속될 수 있으며, 반드시 견지해야만 한다”란 제목의 칼럼을 보자.

 

“방역을 잘해야만 경제가 안정될 수 있고, 인민의 생활이 평안해질 수 있으며, 평온한 경제 발전, 건전한 사회 발전이 가능해진다. 냉철하게 살펴보자. 우리나라는 14억 인구의 대국인데, 지역 발전이 불균등하고, 의료자원의 총량이 부족하다. 방역을 완화하면 감염자가 폭증할 수밖에 없다. 일단 방역이 대규모로 뚫리면, 역병이 만연해서 경제·사회 발전에 엄중한 충격이 가해질 수 있다. 그 최종 대가는 더욱 높아지고 손실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역동적 제로-코비드 정책을 견지해야만 방역과 경제·사회 발전 사이의 균형이 유지될 수 있고, 가장 적은 대가로 가장 큰 방역 효과를 실현할 수 있으며, 최대한으로 사회경제 발전에 대한 방역의 영향을 최소화할 수 있다.”

 

아울러 이 칼럼은 오미크론 변종의 “면역 도피” 능력이 확연히 증강되어서 60세 이상 인구가 2억6700만에 달하는 중국은 반드시 역동적 제로-코비드 정책을 견지해야만 하다고 주장했다. 오미크론 변이의 치사율이 낮아져서 계절성 독감보다도 위험하지 않다는 세계보건기구의 입장과 대립된다.

 

지난 3년간 중국의 관영 매체는 날마다 “외방수입 내방반탄(外防輸入、内防反彈), 밖으로 (바이러스) 유입을 막고, 안으로 반등을 막자”고 부르짖었다. 전 인민을 무균 상태의 인큐베이터에 감금하려는 의도였나. 과학적으로 절대 설명될 수 없는 몰상식하고 불합리한 전체주의적 만용이었다. 의학적으로 도저히 성립될 수 없는 정책이기에 제로-코비드는 정치 방역이란 해석이 더욱 설득력 있다. 결국 중공 중앙은 인민의 저항에 부딪혀 희대의 엉터리 방역 정책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총서기의 옹고집이 꺾였기 때문이다.

 

시진핑의 이중적 메시지...시위 인정과 강력 진압 암시

지난 11월 말 중국 전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이른바 “백지 혁명” 시위가 터진 후, 시진핑 총서기는 엇갈리는 두 가지 메시지를 세상에 내보냈다. 12월 1일 EU 위원회 회장 샤를 미셸(Charles Michel)을 만났을 때 그는 “지난 3년간 코비드-19로 절망한 학생들과 10대의 항의”가 있었음을 이례적으로 인정했다. 중국의 관영 매체가 시위 관련 보도를 한 줄도 내보내지 않고 있는 현실에 비춰보면 시진핑 총서기가 시위의 발생을 인정했음은 지극히 이례적이다.

 

아울러 그는 오미크론 변이의 치사율이 낮아졌다면서 3년간 철통처럼 유지해 온 제로-코비드 정책이 막바지에 달했음을 암시했다. 청년층 항의에 짐짓 놀라 오미크론 변이를 언급하며 급하게 출구전략을 모색하는 장면이었다.

 

한편 그는 12월 6일 인민대회당에서 거행된 장쩌민 전 총서기 추도대회에서는 200자 원고지 33매 분량의 추도문을 낭독했는데, 1989년 “동란(動亂)”을 직접 언급했다.

 

“1989년 봄, 여름 사이 우리나라에 엄중한 정치 풍파가 발생했을 때, 장쩌민 동지는 동란에 반대하는 당 중앙의 선명한 기치를 옹호하고 집행했으며, 사회주의 국가 정권을 보위하고 인민의 근본 이익을 지키는 올바른 정책을 수호하며 견결하게 다수의 당원, 간부, 군중에 의지하여 강력하게 상하이 안정을 유지했다.”

 

▲<전 세계 각국에서 반시진핑 시위가 확산되고 있다. 사진/twitter.com/stopxijinping>

 

지금껏 중공 정부는 1989년 톈안먼에 대해선 함구해 왔다. 시진핑은 이례적으로 1989년 톈안먼 민주화 운동을 화두로 올리고선, “사회주의 국가 정권”에 도전하고 “인민의 근본 이익”에 저해가 되는 “정치 풍파”와 “동란”으로 규정했다. 작금의 상황에서 이 대목은 시위를 더는 좌시하지 않겠다는 강력한 진압 의지의 표명으로 읽힐 수 있다. 성난 민심에 놀라 엉터리 방역 정책을 포기하면서 그는 인민이 못 넘을 철조망을 치는 듯하다. 큰 위기에 봉착해 큰 거 하나를 양보하고 배수진을 친 형국인데 실은 더 큰 위기가 눈앞에 스멀거리고 있다.

 

백지 혁명 이후, 위기 직면한 중국공산당

지난 11월 말 중국 전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백지 혁명”이 발생했을 때 중국 밖의 중국 관찰자들 사이에선 비관과 낙관이 팽팽히 맞섰다. 비관론자들은 중공 정부의 감시체계와 탄압 수단을 강조하며 “백지 혁명”이 곧 사라질 수밖에 없다고 내다봤다. 낙관론자들은 1989년 톈안먼 민주화 운동 이후 33년 만에 일어난 대규모 시위가 시진핑 정권을 궁지로 몰아넣을 가능성도 있다고 주장했다.

 

아직은 누구도 뭐라 단정할 수 없는 상황이다. 톈안먼 대학살 이후 33년간 진상 조사조차 이뤄지지 않고 있는 중국의 현실을 보면 절망적이지만, “공산당 해산”과 “시진핑 하야”를 부르짖는 시위 군중의 담대함은 새로운 희망을 준다. 때로는 역사의 중대사가 깊은 밤 무서리처럼 몰래 찾아와 불쑥 급변의 물꼬를 트기도 한다.

 

11월 말 중국 17개 도시에서 최소 23회 이상의 대규모 시위가 벌어진 후, 중공 정부는 주동자를 색출해서 구속하고 집회 장소를 봉쇄하며 시위의 확산을 막고 있다. 일단 시위의 불길은 잦아들었지만, 그 불씨가 완전히 꺼졌다고 볼 수는 없다. 12월 들어서도 중국 곳곳에선 시위가 간헐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일례로 12월 5일 난징 공업대학 학생들은 광장에 운집해서 학교 당국의 캠퍼스 봉쇄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어떤 이는 강력한 정치 탄압으로 시위가 완전히 진압됐다고 생각하지만, 이번 시위가 일단 멈춘 이유는 놀란 중공 정부가 덜컥 내민 방역 완화라는 큰 양보(concession) 덕분이었다. 본래 독재 정권은 아래로부터 성난 군중의 저항에 부딪힐 때면 신속한 국면 전환을 위해 기대 이상의 유화책을 펼치게 마련이다. 12월 7일 급작스러운 방역 완화는 “백지 혁명”과 무관하다 할 수 없다. 작용이 있으면 반작용이 있듯, 전체주의 정권도 성난 인민의 함성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시위 군중은 “공산당 해산”과 “시진핑 하야”를 부르짖었고, 중공 정부는 부랴부랴 180도 정책 전환으로 인민의 노기를 달래야만 했다.

 

문제는 방역 기준이 완화된 바로 지금부터다. 지난 12월 6일 칭화(淸華)대학에서 열린 공청회에서 중국 질병 예방·통제 센터의 전 부주임으로 이번 방역을 직접 담당해온 전문가 펑즈젠(馮子健)은 수학적 모델로 분석한 결과 “앞으로 정책을 어떻게 조정하든 중국 전 인구의 80, 90%가 결국 1차 감염을 피할 수 없다”고 전망했다. 오미크론 변이의 치사율이 낮아졌다지만, 백신의 효능이 떨어지고 의료 시설이 열악한 중국에서 과연 앞으로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쉽게 예상할 수 없다. 지난 11월 말 영국의 건강 정보 분석 회사 에어피니티(Airfinity)는 중국이 제로-코비드를 파기하면 향후 3개월간에 걸쳐서 1억 6천 7백만에서 2억 7천 9백만 명이 감염되고, 예상 사망자 수가 130만 명에서 210만 명에 달할 수 있다고 예측했다.

 

▲<영국의 보건 정보 분석 회사 에어피니티는 최근 중국이 제로-코비드 정책을 풀면 향후 3개월에 걸쳐서 사망자가 최대 210만 명에 달할 수 있다고 예측했다. https://www.airfinity.com/articles/china-risks-between-1-3-and-2-1-million-deaths-if-it-ends-its-zero-covid>;

 

펑즈젠의 예측대로 중국 인구의 80, 90%가 감염된다면, 중국공산당은 과연 어떻게 대처할까? 에어피니티의 예측대로 앞으로 3개월간 많게는 3억 가까이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200만 이상이 목숨을 잃게 된다면, 중국 인민은 과연 어떻게 반응할까? 일단 방역을 완화하면 바이러스의 전파가 가속화되므로 전국을 봉쇄하지 않는 한 제로-코비드 정책은 효과가 있을 수 없다. 제로-코비드 정책이 폐기된 중국은 이제야 전 세계가 이미 다 겪은 그 힘든 과정을 다시 거쳐 가야 한다.

 

앞으로 3개월 감염자가 급속도로 늘어나고 사망자가 속출할 때 3년간 집안에 갇혀 살며 감시당해 온 중국 인민은 과연 무능한 정부를 용서할 수 있을까. 이미 “공산당 해산, 시진핑 하야”가 이 시대 중국 공민의 구호가 된 상황이다. 시진핑 정권 제3기가 막 시작되었는데, 중국공산당은 창당 이래 최대의 정치적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계속>

 

 ▲<2022년 11월 27일 상하이 시위. 사진/Thomas Peter/Reuters>

 

<59회> “마오가 죽었을 때 이제 우리 세대도 구제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2014년 쉬요우 (徐友漁, 1947- )교수. 사진/ google image>

 

진정한 철학자는 역사의 경험을 깊이 살펴서 현실의 인간을 실존적으로 탐구한다. 사이비 철학자는 역사를 외면하고 현실에 등 돌린 채로 경전 문구만 읊조리고 사자(死者)의 어록만 답습한다. 모든 철학적 사유는 구체적 경험에 대한 반성에서 시작하지만, 정치의 시녀가 된 강단의 철학자들은 경험적 탐구는 없이 관념의 유희에 빠져든다. 철학적 교조주의는 그렇게 역사와 경험을 무시한 채로 과거의 텍스트만 끼고 사는 지식인의 직무 유기와 지적 태만에서 생겨난다.

 

비판 정신을 상실한 공산정권의 관제 철학자들

1950~60년대 중국의 철학자들은 공산당의 지시에 따라 사회주의 혁명 이데올로기의 제작에 동원되었다. 그들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적 유물론이 절대 진리라는 대전제 위에서 교조적 혁명 이론을 만들었다. 중국공산당의 요구에 따라 관제 이데올로기를 제작했기에 그들은 철학의 정신을 버리고 권력에 기생하는 선전부대의 요원으로 연명했다.

 

특정 이론을 절대 진리라 믿는 순간 인간의 비판적 사유는 마비되어 종교적 독단에 빠져든다. 과학 철학자 포퍼(Karl Popper, 1902-1994)는 과학과 비(非)과학의 차이를 논하면서 “반증 가능성 원칙(falsification principle)”을 제시했다. “모든 백조는 하얗다”는 명제의 오류는 검은 백조가 출현하는 순간 경험적으로 반증된다. 반면 “신은 전지전능하며 편재(遍在)한다”는 믿음은 경험적으로 반증될 수 없는 종교적 교리일 뿐이다.

 

20세기 공산국가의 관제 철학자들은 중세 신학의 대전제 대신에 “마르크시즘의 유물변증법이 절대 진리”라는 대전제를 맹목적으로 받아들였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입만 열면 과학적 사회주의를 외치지만, 마르크스의 이론을 신성시했기에 그들은 비과학의 수렁에 빠져들었다. 공산권 전체주의 국가는 고분고분한 철학자들을 시켜서 교조적 혁명 이론을 만들게 한 후 그들이 제작한 폐쇄적인 이념으로 전 인민을 세뇌하는 선전·선동을 이어갔다.

 

지난 70여 년 중국공산당은 사상의 획일화를 위해 이데올로기 공작을 펼쳐왔지만, 그 어떤 정권도 인간의 비판 정신을 말살할 수는 없다. 시베리아 집단수용소에서 8년간 강제 노역에 시달렸던 솔제니친(1918-2008)은 스탈린 정권의 만행을 고발하여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심오하고도 영롱한 그의 문장이 웅변한다. 반성적 존재로서의 호모사피엔스는 극한의 상황에서도 지성과 판단력을 잃지 않을 수 있음을.

 

▲<1953년 카자흐스탄 수용소 포로 시절의 솔제니친의 모습. 사진/Aleksandr Solzhenitsyn Center>

철학자 쉬요우위 “마오쩌둥이 죽었다는 소식 접하고 너무나 기뻤다”

중국 문화대혁명을 직접 겪었던 홍위병 세대에도 당시 계급혁명의 광기 속에서 스스로 범했던 갖은 오류와 모순을 돌아보며 이후 평생에 걸쳐 참회와 각성의 기록을 남긴 깨어 있는 지성들이 적잖다. 현재 뉴욕 뉴스쿨(New School)에서 장기 방문학자로 재직 중인 쉬요우위(徐友漁, 1947- ) 교수가 대표적인 한 명이다. 쉬 교수는 마오쩌둥의 사망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1976년 9월 마오쩌둥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곧바로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너무나 기뻤다. 이제 우리 세대도 구제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오쩌둥 통치 아래서 우리는 실제로 온전히 10년을 허비해야만 했다. 1976년 그때 마오쩌둥이 죽지 않았다면, 이 모든 변화는 없었으리라. 바로 그 점이 중국 정치의 슬픔이다. 단 한 명의 존재가 억만 명이 정상적으로 살 수 있느냐, 비참하게 살아야 하느냐를 결정했다는 점이다. 그 분기선이 단 한 명의 생사로 결정이 됐다는 점이다.”

 

마오쩌둥 사후에야 그는 서른 넘은 나이로 대학에 입학했다. 이후 40여 년의 세월 그는 비판적 철학자의 일로를 걸었다. 그의 철학은 중국 현대사의 부조리와 중국 사회의 불합리를 타파하는 강력한 이념적 무기이다. 그는 그 무기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청년기 그가 직접 경험했던 문화혁명의 광기를 역사적으로 파헤쳤다. 날카로운 그의 붓끝에서 ‘마오쩌둥’이라는 허구의 인격신은 벌거벗은 임금님이 되어버린다.

 

▲<마오쩌둥 사망 후 사진을 잡고 울부짖는 청년들. 사진/공공부문>

 

대학살 전 학생들 “인민해방군이 설마 인민을 죽이겠어요?”

프랑크푸르트학파 등 서구의 정치철학과 사회이론의 전문가인 쉬 교수는 중국의 대표적인 자유주의 철학자이며 비판적 사상가이다. 1989년 톈안먼 민주화 운동 당시 쉬 교수는 광장에서 학생들과 함께 있었다. 탱크 부대가 도심을 뚫고 들어와 대학살을 벌이기 직전까지 쉬 교수는 학생들에게 숙소로 돌아가라고 설득했다. 천진난만한 학생들은 “인민해방군이 인민을 설마 죽이겠어요?” 하며 완강히 버티었고, 바로 다음 날 탱크 부대가 대학살을 자행했다.

 

쉬 교수는 이후에도 자유와 민주를 향한 염원을 버리지 않았다. 2008년 12월 중국 국내외 반체제 지식인과 민주 활동가들은 유엔 보편인권선언 60주년을 맞아 중국공산당 일당 독재에 맞서 근본적인 헌정 개혁을 요구하는 “08헌장”을 발표했는데, 쉬 교수는 최초 서명자 303인 중 한 명으로 참여했다. 2014년 1989년 6.4 운동 관련 세미나를 주최한 후 잠시 구속되었던 쉬 교수는 이듬해 뉴욕 뉴스쿨에 초빙되어 도미했다. 그해 쉬 교수에게 스웨덴의 올로프 팔메(Olof Palme) 인권상이 수여되었다. 오늘날까지 쉬 교수는 뉴욕에 머물면서 중국의 자유화를 위한 투쟁을 활발히 전개하고 있다.

 

▲<문화혁명 시기 홍위병 집단의 내전에 관해 강의하는 쉬요우위 교수. 오른쪽은 홍위병 운동을 탐구한 그의 역사서. 사진/공공부분>

 

쉬 교수는 관념의 아성에 머물기를 거부한 진정한 철학자다. 수준 높은 철학 논문을 꾸준히 발표하면서도 그는 문화대혁명(1966-1976)에 관한 기념비적 저작을 출판했다. 1999년 출판된 책의 제목은 <<형형색색의 조반(造反): 홍위병 정신 밑바탕의 형성과 변천>>이다. 이 책을 펼치면 문화혁명 10년 극단의 역사를 직접 연출했던 수억 인간 군상의 천태만상이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책의 서문에 나오는 문장이다.

 

“문혁은 10억 가까운 사람들이 휘말려 들었던 군중 운동이었다. 광대한 군중의 참여야말로 문혁 연구의 가장 중요한 점이다. 당시 그들은 왜 그토록 기괴하게 거동하고 열광적인 심리를 보여야만 했는가? 이는 초특급 마술사의 최면술에 걸려든 결과인가? 아니면 사회, 역사, 문화 등 여러 방면의 원인이 있는가? 그들을 광기 상태에 빠뜨려서 ‘너 죽고 나 살자’며 싸우게 했던 그 마력은 과연 이데올로기였던가, 아니면 개인이 당면한 이익이었던가?”

 

제1장 서두에는 다음 문장이 나온다.

“교회를 깨부수고 서적을 불태우고 스승들을 구타했던 노(老) 홍위병이나 긴 창이나 기관총을 손에 직접 들고 살상을 저질러 눈이 불게 충혈됐던 조반파(造反派) 홍위병이나 문혁 시기 홍위병은 모두가 파괴적 행동으로 세상을 경악하게 했다.

 

······. 과연 무엇이 그들의 일탈을 부추기고 야만적이고 황당한 행동거지를 그토록 자연스럽게 여기도록 만들었는가? 민족의 심리적 특징인가? 전통문화의 영향인가? 아니라면 청춘기 특유의 격동과 일탈 심리였나? 초인적 영수의 최면술과 같은 혹세의 마력이었나?

 

쉬 교수의 궁극적 관심은 홍위병의 파괴적 행동과 광적인 심리 상태를 규명하는 데 있다. 쉬 교수가 홍위병의 심리를 파헤치는 이유는 궁극적으로 인간의 본성을 경험적으로 탐구하기 위함이다. 실험실에서 청개구리를 해부하는 방식으로는 인간의 본성을 알아낼 수가 없다. 맹자(孟子)처럼 측은지심(惻隱之心)을 강조한들 성선(性善)의 대전제를 증명할 길은 없다.

 

인간의 본성을 제대로 논하려면 우선 현실의 인간을 깊이 살펴보아야만 한다. 구체적인 역사의 상황에 던져진 실존적 개체의 행동과 생각을 관찰하고 분석해야만 인간 본성을 직시할 수 있다. 그 점에서 쉬 교수의 홍위병 연구는 교조적인 마르크스주의 인간관을 해체하는 인간의 본성에 관한 경험적 탐구라 할 수 있다.

 

문혁의 광기...출신 성분이 나빴던 젊은 쉬요우위의 번민

최근 쉬요우위 교수는 유튜브 “왕단(王丹) 학당”의 ‘구술 역사 공정’에서 문화혁명이 발생했던 청년기 그가 겪어야 했던 고뇌와 번민에 관해 회고했다.

 

1947년 3월 17일 쓰촨성 청두(成都)에서 태어난 그는 서른 살 되던 1979년에야 쓰촨 사범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고교 3년이었던 1966년 문화혁명의 돌풍이 일어났기에 10년간 그의 학업은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대학 입시 자체가 중단되었고, 도시의 청년들은 멀리 산간벽지에 하방(下放)되어 자기 계발의 기회를 박탈당한 채 중세의 농노와 같은 고된 삶을 살아야만 했다.

 

초등학교 시절까지 그는 스스로 행복한 나라에서 열심히 잘 산다고 굳게 믿었다. 남달리 총명하고 성실했기에 그는 학업에 전념해서 교사들의 총애를 얻었고, 덕분에 학급 반장이 될 수 있었다.

 

행복한 유년의 기억은 그러나 1963년 급작스레 막을 내린다. 대약진운동의 실패 이후 잠시 행정의 일선에서 물러나 있던 마오쩌둥은 바로 그해 국가주석 류샤오치(劉少奇, 1898-1969)를 앞세워 이른바 사회주의 교육 운동(1963-1966)을 벌였다. 530여만 명의 지식인들을 탄압하고 그중 거의 8만 명 가까이 목숨을 잃었던 이 가혹한 정치운동은 일시에 중국 사회에 “계급투쟁”의 광풍을 몰고 왔다. 문혁의 전초전이었다.

 

전 중국 사회에서 이른바 “계급 노선”이 강조되면서 중·고교도 그 여파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때부터 학생들 개개인의 성적은 학습 능력과 생활 태도가 아니라 집안 배경과 출신성분으로 결정되는 부조리한 상황이 이어졌다. 출신성분이 좋지 못한 학생은 절대로 우수한 성적을 받을 수 없었다. 특히 정치 과목이 그러했다. 밤을 새우고 공부해서 모범 답안을 적어내도 그는 절대로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없었다. 그의 출신성분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문혁 발발 이후 상황은 더욱 심각해졌다.

 

1966년 8월부터 중국 전역에선 집안 배경에 따라 개개인의 혁명성이 결정된다는 이른바 “혈통론(血統論)”이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공산당 고관대작의 자제들은 “붉은 귀족”이 되어 과거 조부모나 부모가 지주나 반혁명 분자로 분류됐던 계급 천민의 자제들을 멸시하고 조롱했다. 인종차별만큼 가혹한 출신성분 차별이었다.

 

“부모가 영웅이면 아이는 호걸이고 (老子英雄, 兒好漢),

부모가 반동이면, 아이는 먹통이다 (老子反動, 兒混蛋).”

▲<문혁 초기 혈통론을 강조하는 포스터. “부모가 영웅이면 아이는 호걸.” 이미지/공공부문>

 

사회주의 신분제를 고착화하는 황당무계한 구호 아래서 출신성분이 나쁜 학생들은 배제되고 소외되었다. 마오쩌둥 배지를 달 수도 없었다. 음지로 밀려난 그는 날마다 마오쩌둥의 어록을 읽으며 반혁명적 사유를 버리려 노력했지만, 집안 배경 때문에 2등 공민이 돼야 하는 불합리를 그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한편 그는 그렇게 차별받고 배제되었기에 1966년 홍팔월(紅八月)의 폭력에 참여하지 않는 행운을 누렸다고 회고한다. 당시 홍위병들은 계급 천민의 마을로 쳐들어가서 민가를 초토화하는 대량 학살을 저질렀다. 그해 8, 9월 베이징에서만 1772명이 홍위병의 손에 학살당하고, 3만3695개 민가가 파괴되고, 8만5천명 넘게 추방되었다.

 

“만약 내가 출신성분이 나쁘지 않아서 초기부터 홍위병이 되었더라면, 다른 홍위병들과 달리 나는 나쁜 짓을 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당시 나 자신의 도덕 관념상 그럴 수는 없었을 듯하다. 대세에 휘말려서 나쁜 짓을 했을 수가 있었으리라. 낄 수가 없어서 나쁜 일을 하지 않았으니 큰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1967년 이후 문혁이 절정에 치달으면서 출신성분이 나쁜 학생들도 홍위병 조직을 결성해서 적극적으로 혁명 투쟁에 나서기 시작했다. 출신성분이 나쁜 학생들은 사회적 편견에 맞서 자신들의 이념적 선명성을 증명하기 위해서 더욱 강렬한 투쟁을 전개했다. 홍위병 운동에 참여하면서 쉬요우는 밤낮으로 계급투쟁을 고취하는 선동문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계속>

 

▲<문혁 시절 홍위병들이 마오쩌둥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의미로 추었던 충자무(忠字舞). 조반무(造反舞)라고도 불렸다. 사진/공공부문>

 

2022.12.31

〈60중국, 아직도 마르크스를 떠받드는 이유는?

▲<2018년 마르크스 탄생 200주년을 맞아서 중국 국립 박물관에는 마르크스 특별 전시관이 마련되었다. 사진/https://www.globaltimes.cn/content/1210302.shtml>;

 
 

헌법에 마르크스-레닌, 마오쩌둥, 덩샤오핑, 장쩌민, 후진타오, 시진핑 이념 열거

잘못된 철학이 국가 이념이 되면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빈곤의 악순환이 계속된다. 개혁개방 이전까지 중국 현대사는 독단적이고 폐쇄적인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쩌둥 사상이 빚어낸 공산 전체주의의 잔혹사였다. 중국 현대사의 모순과 부조리를 직시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인간관을 비판적으로 고찰해야 한다. 청년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1)의 유물론적 독단이야말로 전 중국을 혁명의 광기로 몰아넣은 이념적 바이러스였기 때문이다.

 

중국 헌법 전문에는 마르크스-레닌주의, 마오쩌둥 사상, 덩샤오핑 실용주의, 장쩌민 “세 가지 대표 중요사상”, 후진타오의 “과학발전관”에 이어 시진핑 “신시대 중국 특색 사회주의 사상”이 열거되어 있다. 14억 인민을 향해 7명의 사상을 절대 이념을 받아들이라는 이념적 강압이다. 누군가 이 전제를 비판하거나 공개적으로 부정하면 중공 정부는 “사회주의 파괴 활동”의 죄목을 걸어서 처벌할 수가 있다.

 

만약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 이승만 “독립 정신” 박정희 “새마을정신”, 전두환 “정의 사회 구현,” 노태우 “보통 사람의 시대,” 김영삼 “문민정부론,” 김대중 “국민 정부론,” 노무현 “참여 사상,” 이명박 “실용주의,” 박근혜 “애국애족론,” 문재인 “적폐 청산”에 윤석열 “법과 원칙”까지 다 명기한다면, 한국의 국민은 과연 어떻게 반응할까? 아마도 전국에 들불처럼 시위가 일어나 즉각적인 헌법 개정으로 돌입할 듯하다.

 

자유민주주의에 익숙한 한국인들은 특정 개인의 사상이 국가의 이념이 될 수 없음을 명확히 알고 있다. 그 어떤 사람도 다른 사람을 이념적으로 지배할 수 없다는 민주적 평등의식과 개개인의 사상과 가치는 스스로 결정한다는 독립적 자유 의지를 갖기 때문이다.

 

반면 중국 인민은 개개인 모두가 사회주의 혁명의 완수를 위해서 자기희생을 감내해야 한다는 집체주의와 위대한 수령의 교시를 따라야 한다는 영웅주의를 받아들인다. 그렇기에 헌법 전문에 7인의 사상을 적혀 있어도 큰 반발이 없는 듯하다.

 

대학마다 마르크스주의 학원...“영혼을 주조하고 인민을 훈육하라!”

지난 10년 시진핑 정권은 이른바 “시진핑 사상”을 만들기 위해서 각 대학에 설치된 마르크스주의 학원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며 이념교육을 강조해 왔다. 그 밑바탕에는 전근대적인 목민(牧民)의 의도가 깔려 있다. 목동이 양 떼를 돌보듯이 정부가 인민의 생각을 감시하고 교도(矯導)해야 한다는 전근대적 온정주의(paternalism)다. 마오쩌둥 이래 중국공산당 정부는 늘 그렇게 중국 인민의 인격, 성격, 가치관 형성에 적극적으로 관여해왔다.

 

단적인 예로 시진핑 총서기는 2016년 즈음 강군(强軍) 건설을 강조하면서 “주혼육인(鑄魂育人)”이라는 신조어를 들고나왔다. 말 그대로 영혼을 주조(鑄造)하고 인민(혹은 인간)을 훈육한다”는 의미다. 2019년 이래 중국의 관영 매체나 정부 기관은 “시진핑 신시대 중국 특색 사회주의 사상을 활용해서 (혹은 견지하여) 영혼을 주조하고 인민을 훈육한다”는 문구를 상투적으로 써 왔다.

 

마르크스주의 유물론을 철학의 제1 명제로 삼는 중국공산당이 거푸집에 쇳물을 부어 철근을 뽑아내듯 인간의 영혼을 주조하겠다고 공공연히 외치고 있다. 유물론자들의 집결소인 공산당이 영혼의 주조라는 표현을 쓰고 있음은 아무리 문학적 수사라 해도 모순되게 느껴진다.

 

▲<2021년 12월 28일 “중국 교육보”에는 “홍색 자원을 견지하여 주혼육인(鑄魂育人, 영혼을 주조하고 인민을 훈육하자)”는 제목의 시론이 게재되었다. 중국 전역의 관영 매체에는 “주혼육인”을 강조하는 기사가 자주 게재된다. 이미지/중국 광시성 장족 자치구 교육청 홈페이지>

 

마르크스는 영혼이란 기껏 물질적 현상이거나 종교적 환상이라 하지 않았나. 1843년 스물다섯 살의 마르크스는 “종교는 억압받는 존재의 한숨이며, 비정한 세상의 심장이며, 영혼 없는 조건의 영혼이며, 인민의 아편”이라고 썼다. 비판 정신이 수갑을 가린 가상의 꽃장식을 걷어냈으니 이제 그 수갑을 벗어야 한다고 청년 마르크스는 호기롭게 말했다.

 

마르크스 유물론의 가장 큰 맹점은 물질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과연 왜 목숨을 걸고 이타적인 혁명 투쟁에 나서야 하는지 전혀 설명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인간의 도덕적 의무감이나 사명감은, 칸트의 표현을 빌자면 “경험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어도 이념으로서 요청할 수밖에 없는,” 초월적 존재나 형이상학적 가치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19세기 말 제정 러시아 말기의 혼란 속에서 도스토옙스키(1821-1881)는 카라마조프가 이반의 입을 빌어 “신이 없으면 모든 게 허용된다”는 한 마디로 당시 서유럽에 널리 퍼져나가던 유물론적 인간관의 모순과 위험성을 지적했다. 그의 우려는 20세기 수천만의 인명을 앗아간 좌·우파 전체주의 정권의 정치범죄와 인권 유린으로 실현되었다.

 

인간은 물질적 존재라면서 왜 혁명적 자기 희생을 요구하나

영혼이 없는 물질적 존재로서의 인간에게 과연 어떻게 혁명적 사명감과 숭고한 도덕심을 불어넣을 수 있나? 어떻게 물질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폭탄을 끌어안고 적진으로 뛰어 들어가 “인민 만세!”를 외치며 기꺼이 자폭하는 혁명 전사로 거듭나게 할 수 있는가?

 

인간이 기껏 육체적 존재이고 정신세계란 물질적 현상에 불과하다면, 알라의 영광을 위해, 내세의 심판이 무서워서, 인과응보의 카르마를 벗어나고자, 태양처럼 밝은 마음의 양지(良知)가 발동해서 영웅적으로 사리사욕을 극복하고 이타적 자기희생을 감내했던 사람들은 기껏 종교적 환상에 속거나 유심론적 오류에 빠져서 일신을 망친 우중(愚衆)으로 전락하고 만다.

 

불멸의 영혼도 없고, 초월적 존재도 없고, 현생 이상의 그 어떤 세계도 없고, 천당도 없고, 니르바나(nirvana)도 불가능하다면, 인간이 대체 왜, 무엇을 위해서 도덕적이고 이타적인 삶을 살아야 하는가?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전제는 인간을 더 세속적이고, 더 이기적이고, 더 탐욕적으로, 더 폭력적으로 만들 수 있을지언정 고매한 이타적 영혼으로 고양할 수는 없다. 마르크시즘의 최대 모순이자 맹점은 바로 인간을 물질적 존재라 단정하고선, 그러한 인간에게 물질적 본성에 반하는 혁명적 자기희생을 요구한다는 데 있다.

 

바로 그러한 마르크스주의 유물론의 부조리와 모순 때문에 현실의 공산정권은 두 가지 방법으로 “영혼을 주조하고 인민을 훈육”할 수밖에 없다. 첫째는 영혼 속까지 파고드는 강력한 세뇌 교육이고, 둘째는 반대자를 색출해서 처벌하는 공포의 정치운동이다. 마오쩌둥에서 시진핑까지 이어지는 70여 년에 걸친 중국의 현대사가 그 점을 웅변한다.

 

▲<개혁개방 이후 중국에서 마르크스주의는 퇴조했지만, 시진핑 정권 들어 중공 중앙은 다시금 마르크스를 공개적으로 지지해 왔다. 사진/ https://www.arabnews.com/node/1295991/business-economy>;

 

진리 독점한 국가가 인민에게 올바른 생각을 주입한다? 그게 전체주의

인류 역사에 출현한 모든 공산주의 정권은 예외 없이 국가가 절대 진리를 독점한 후 인민의 의식에 “올바른” 생각, “올바른” 가치, “올바른” 목적의식을 주입하고 세뇌하는 전체주의 체제였다. 물론 그러한 “올바름”을 올바르다고 믿는 사람은 그 정권의 시녀들과 용병들밖엔 없다. 1950-60년대 중국에 넘쳐나던 “올바른” 구호들은 인민을 혁명의 병정으로 조련해서 죽음의 전장으로 내몰아간 전체주의 정권의 선전·선동일 뿐이었다.

 

유물론적 인간관으로 초월자를 살해하고, 영혼을 부정하고, 모든 종교와 전통을 죄악시한 공산주의자들은 무력으로 인민을 윽박질러서 혁명의 벼랑 끝으로 몰아갈 수밖에 없다. 공산주의는 인간의 원초적 욕망도, 이윤 동기도, 사유재산도, 입신출세(立身出世)의 열망도, 수신(修身)과 제가(齊家)의 의무감도, 치국(治國)과 평천하(平天下)의 이상도 모조리 부정하고 죄악시했기 때문이다. 그 모든 기본권을 박탈당한 개인은 대체 무엇을 위해 이토록 험한 세상에서 자발적으로 근면하고 성실하게 일하며 살 수 있단 말인가?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성실하게 살 수 있는 이유는 인간이 물질적 존재라서가 아니라 범우주적 질서에 경탄하며 유한한 존재로서 두려움과 겸손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중용(中庸)의 경구처럼, 하늘이 지극히 성실하기에 인간은 그 하늘을 본받아 성실하게 살려 한다. 미욱한 존재로서 돌연히 세상에 던져진 우리는 여기가 어디인지, 어떤 곳인지, 왜 태어나서 살고 있는지, 어디로 가는지 도무지 알 수 없어도, 날마다 이른 새벽 동녘에 솟아오르는 해처럼 우리도 맡은 일을 해야만 한다는 실존적 자각을 얻는다. 초월적 절대자가 있는지는 확신할 순 없어도, 여러 종교의 가르침이 다 믿을 순 없어도, 이 세계는 너무나 크고도 두렵고, 우주의 법칙은 너무나 신비롭고도 엄격하고, 역사의 경험과 전통의 지혜는 심오하고도 광대하기에 우리는 인류의 역사가 통째로 무의미하다고 여길 순 없다. 그렇기에 대다수 인간은 겸허한 마음으로 금도(襟度)를 지키며 근면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려 노력한다.

 

유물론적 인간관은 수십만 년 인류가 이 땅에 살며 터득하고 깨달은 정신적 자각, 종교적 직관, 실존적 지혜를 송두리째 부정한 청년 마르크스의 “치명적 자만(fatal conceit)”에서 나왔다. 대학가에선 흔히 마르크스를 인간 해방의 혁명 이론을 제창한 위대한 천재라고 미화하지만, 역사 현실을 경험적으로 탐구해 보면 유물론적 인간관의 논리적 모순과 정신병적 파괴욕을 알 수 있다. 공산주의가 인류 역사상 가장 억압적이고, 폐쇄적이고, 파괴적인 죽음의 이데올로기였음은 20세기 역사가 증명한다. 결국 20세기 공산정권의 인민은 국가의 농노로 전락한 채 경제적 보상도 없이 밤낮으로 강제 노역에 시달려야만 했다. 마르크스에서 레닌, 스탈린에서 마오쩌둥까지 유물론적 인간관이 빚은 디스토피아의 현실이었다.

 

▲<“위대하고, 영광스럽고, 옳고 정확한 중국공산당 만세!” 사진작가 슈마커(Byron E. Schumaker, 1935- )가 1972년 미국 대통령 닉슨 방중 때 촬영. 사진/wikipedia>

 

1990년대 중국에 뿌려진 자유주의의 씨앗...백지혁명이 이어갈까

어리석은 공산당의 유물론자들은 스스로 세상의 정답을 찾았다고 확신하지만, 그들은 실상 가장 중요한 인간의 실존적 물음에 대해서 아무런 해답을 제시할 수가 없다. 무지의 자각조차 없기에 그들은 얄팍한 유물론의 국정 교과서로 “영혼을 주조하고 인민을 훈육”하려 한다.

 

자유주의 국가에선 정부의 최우선 역할은 인간의 기본권과 개인의 자유 보장에 있다. 자유주의 이념에 따르면, 정상 국가는 개개인에게 표현의 자유, 사상·양심의 자유, 종교의 자유, 집회·결사의 자유를 보장한 후 물러나야만 한다. 국가는 개인의 사생활을 침해할 수 없으며, 사유재산을 침탈할 수 없다. 국가가 물러나면, 개개인은 열린 공론장과 사상의 시장에서 다양한 생각과 이론을 펼치며 경쟁하고 길항(拮抗)한다.

 

자유주의 국가는 개개인을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는 성숙한 시민으로 대우한다. 반면 전체주의 국가의 권력자들은 인민을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없는 미성년으로 취급한다. 미성년자를 보호하듯 불온한 사상, 불순한 생각, 그릇된 이념으로부터 인민을 보호해야 한다는 발상이다. 다수 인민이 그렇게 당이 원하는 인간형으로 주조되어야만 중국공산당은 권력을 영속할 수 있다. 만약 중국 인민의 다수가 자유주의 사상을 받아들인다면, 중국공산당은 지탱될 수 없다.

 

그렇기에 시진핑 정부는 중앙선전부의 역할을 더욱 확장하고 초·중·고 및 대학에서 사회주의 이념교육을 더욱 강화해 왔다. 문제는 중국공산당의 이념교육은 세상에서 가장 무미건조하고 지리멸렬한 판에 박힌 선전·선동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모두가 손에 핸드폰을 들고 세상의 온갖 재미난 얘기들을 빛의 속도로 주고받는 세상인데, 진부한 이념을 낡은 방식으로 설파해 봐야 잘 먹히지 않는다. “영혼을 주조하고 인민을 훈육”하려는 시진핑 정권의 시도는 실현 가능성이 없다.

 

시진핑 정권은 이념교육을 강화해서 2010년대 중국에는 “소분홍(小粉紅)”이라는 과격한 애국주의 청년집단이 탄생했다. 정부 편에 서서 과격한 언사로 반대자를 공격하는 “소분홍”의 행태를 보면서 시진핑 정권의 이념교육이 강력한 효과를 발휘한다는 분석이 많았다. 물론 지금도 “소분홍”이 사라지진 않았지만, 최근 중국의 청년 문화에 지각 변동이 생겨났다.

 

▲<2022년 11월 27일, 상하이의 “백지 혁명,” 1990년대부터 중국에 일어났던 자유주의 운동의 연장일 수 있다. 사진/Kyodo>

 

지난 11월 말 중국 전역 각지에서 20, 30대 청년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항의의 표시로 백지를 들고서 “공산당 해산”과 “시진핑 하야”를 외치며 시위했다. 이들은 공민의 기본권과 표현의 자유를 부르짖었다. 표현의 수위와 방식, 시위의 의도와 연출이 모두 일관되게 자유주의적 운동임을 보여준다.

 

그 뿌리를 찾아보면 1990년대 중국의 자유주의 논쟁으로 소급된다. 비록 지금은 정치적 탄압에 밀려 주변으로 밀려난 듯하지만, 이미 1990년대 중국 지식계와 사상계에선 하이에크(Friedrich Hayek, 1899-1992), 포퍼(Karl Popper, 1902-1994), 벌린(Isaiah Berlin, 1909-1997)을 위시한 구미의 자유주의 고전 다수가 번역·소개되었고, 공산당 일당 독재의 근본 문제를 비판하면서 공민의 기본권과 개인의 자유를 강조하는 일군의 자유주의자들이 활약했다. 오늘의 중국 상황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이제 그들의 논의에 귀 기울여 보자. 지난 주 소개했던 쉬요우위(徐友漁, 1947- ) 교수의 안내를 따라서······.<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