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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설수설(동아일보) 2022-12/ 12-01(목) 자택 앞 시위 민폐 - 12-31(토) 얼굴 없는 기부천사, 누군지 알아내려 애쓰지 말자

상림은내고향 2022. 12. 29. 19:39

횡설수설(동아일보) 2022-12/

12-01(목) 자택 앞 시위 민폐

 

올 6월 한 정보기술(IT) 기업 회장의 서울 단독주택 앞에 시위대 10여 명이 모였다. 이들은 ‘소액주주 병들어 죽는다’는 플래카드를 펼친 채 “사측이 주가 상승을 저지하고 있다”는 구호를 외쳤다. 비슷한 시기 한화 등 다른 기업의 일부 소액주주도 주가 하락에 항의하기 위해 최고경영자(CEO)의 자택 앞을 찾아갔다. 기업 본사가 아닌 기업인들의 자택 앞에서 시위를 하는 것이 공식처럼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자택 앞에서 텐트를 치고 노숙하거나 삼겹살을 구워 먹는 민폐 유발형 집회도 많아졌다.

▷자택 앞 시위의 유형도 예전엔 1인 시위 위주였는데, 요즘엔 단체 시위로 바뀌었다. 은마아파트 재건축추진위 주민들이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의 자택 앞에서 12일부터 벌이고 있는 시위도 한 예다. 이들은 현대건설이 시공을 맡은 공사로 인한 붕괴 위험을 거론하며 아파트 하부를 지나도록 설계된 광역급행철도(GTX) 노선의 변경을 요구하고 있다. 그런데 GTX 노선을 바꿀 결정권은 현대건설이 아니라 국토교통부에 있다. 정 회장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주민들이 안전 문제를 우려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국토부는 안전에 관한 한 아무 문제가 없다고 설명한다. 터널을 뚫는 공법도 주민들이 걱정하는 ‘발파공법’이 아니라는 것이다. 안전성에 대해 “산 밑에 빨대 두 개를 꽂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비유하는 전문가도 있다. 무리한 시위는 재건축추진위에 소속된 주민들에게도 자충수가 된 형국이다. 국토부가 재건축추진위 공금을 GTX 반대 시위에 사용한 것이 위법이라며 조사를 시작한 것이 단적인 예다.


▷자택 앞 시위의 대상은 기업인뿐만 아니다. 정치인이나 지방자치단체장이 사는 지역이 단골 시위 장소가 된 지 오래다. 단독주택이든 아파트든 가리지 않고 극단적 표현이나 원색적 욕설을 쏟아내 이웃 주민들이 단체로 정신적, 신체적 고통을 호소하는 일이 잦다. 자택 앞 집회가 금지된 곳은 대통령이나 국회의장 등 현직 헌법기관장이나 외교 사절의 공관뿐이다. 한때 아파트 단지 출입구를 집회 금지 장소에 추가하려는 움직임도 있었지만 결국에는 무산됐다.

▷현행 집시법에는 ‘사생활의 평온(平穩)을 뚜렷하게 해칠 우려가 있는 경우’ 경찰이 집회를 금지 또는 제한할 수 있도록 돼 있다. 그러나 자택 앞 시위는 법률의 문제를 떠나, 기본적인 상식과 시민의식의 문제라는 지적이 많다. 앞서 주가 하락 시위만 하더라도 충분히 항의는 할 수 있지만 꼭 프라이버시를 침해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더구나 시위 대상이 되는 기업인들의 이웃이라는 이유만으로 소음과 혐오 표현에 고통받아야 하는 사람들은 무슨 죄인가.
정원수 논설위원 needjung@donga.com

 

12-02 장쩌민과 백지 시위

 

지난달 30일 별세한 장쩌민 전 중국 국가주석이 해외 언론에 첫 주목을 받을 당시의 인상은 그리 좋지 않았다. 그는 1989년 톈안먼(天安門) 사태로 실각한 자오쯔양 공산당 총서기의 뒤를 이어 덩샤오핑이 그 자리에 앉힌 사람이다. 자오쯔양은 후야오방 전 총서기와 함께 정치에도 개혁이 필요하다는 쪽이었으나 덩샤오핑과 장쩌민은 정치와 경제를 분리하고 경제에서의 개혁만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한편이었다.

 

▷장쩌민은 덩샤오핑이 은퇴한 직후인 1993년 중국 국가주석에 올랐다. 그는 10년을 집권한 뒤 덩샤오핑이 정한 후진타오에게 물려주고 떠났다. 후진타오도 10년을 집권한 뒤 장쩌민이 정한 시진핑에게 물려주고 떠났다. 시진핑은 10년을 집권하고도 물러나지 않는다. 차기 지도자도 정해지지 않았다. 마오쩌둥과 덩샤오핑처럼 죽을 때까지 권력을 쥐겠다는 것이다. 현대 중국이라는 오페라가 1막 마오쩌둥, 2막 덩샤오핑, 3막 시진핑으로 구성된다면 장쩌민과 후진타오의 집권기는 2막과 3막 사이의 긴 간주 정도로 격하될 모양새다.

▷장쩌민에게는 총리로 주룽지가 있었고 후진타오에게는 원자바오, 시진핑에게는 리커창이 있었다. 경제전문가로서 으뜸은 주 총리다. 장쩌민-주룽지 2인조의 최대 업적은 덩샤오핑의 노선을 이어받아 2001년 중국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을 성사시킨 것이다. 톈안먼 학살의 음습한 구름을 뚫고 중국의 공장 불빛이 세계를 향해 반짝거리기 시작한 것은 장쩌민 집권기라고 할 수 있다.

 

▷장쩌민은 마오쩌둥이나 덩샤오핑과 달리 서방 언론에 과감한 노출을 택한 첫 중국 지도자이지만 덩샤오핑이 1979년 처음 미국을 방문했을 때 카우보이모자를 쓰고 찍은 사진만큼도 인상적인 사진을 남기지는 못했다. 그러나 후진타오나 시진핑에 비하면 훨씬 친근해 보이는 모습으로 언론에 등장했다. 1996년 필리핀 방문 중 피델 라모스 대통령과 함께 엘비스 프레슬리의 ‘러브 미 텐더’를 부르는 모습 등이 그런 예다. 그러나 그 뒤에는 티베트와 파룬궁에 대해 잔혹한 탄압도 불사하는 차가운 면이 숨겨져 있다.

▷중국에서 시진핑식 코로나 봉쇄에 반대하는 백지(白紙) 시위가 상하이에서 시작돼 전국으로 퍼지고 있다. 이 시위에 장쩌민이 소환되고 있다. 장쩌민은 톈안먼 사태 당시 상하이 당서기로 있으면서 베이징과 같은 유혈사태 없이 상하이의 시위를 해산시켰다.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을 영어로 외면서까지 시위대를 설득했다고 한다. 톈안먼 시위가 후야오방의 죽음을 추모하면서 커졌듯이 백지 시위도 시진핑보다는 장쩌민 시대가 나았다는 추모의 분위기 속에서 확산되고 있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12-03(토) 마크롱의 IRA 작심발언

 

미국 백악관에서 1일 진행된 국빈 만찬 테이블을 장식한 꽃은 ‘피아노 장미’였다. 국빈으로 초청된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아마추어 피아니스트라는 점에 착안해 선택한 품종이었다. 버터에 구운 랍스터와 캐비아, 마멀레이드를 올린 소고기 스테이크, 수제 치즈 등 메뉴는 셰프들이 6개월 전부터 준비한 것들이다. 프랑스를 상징하거나 양국 인연을 강조하는 청·백·홍의 소품들이 만찬장 곳곳에 등장했다.

 

▷미국의 인플레이션감축법(IRA)에 대해 “너무 공격적”이라며 불만을 쏟아낸 마크롱 대통령의 발언은 백악관의 극진한 대접이 무색할 만큼 직설적이었다. 대면 회담에서 담판을 짓겠다는 의도가 명백한 작심발언이었다. 결국 바이든 대통령이 IRA의 결함을 인정하며 수정을 시사하는 발언을 내놨으니 마크롱 대통령으로서는 외교적 성과를 거둔 셈이다. 지난해 미국의 오커스(AUKUS) 결성 과정에서 77조 원에 달하는 자국의 디젤 잠수함 수출 프로젝트가 허공에 날아간 것에 격분했던 그로서는 쌓인 앙금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IRA는 한국에 전기차 보조금 문제로 알려져 있지만, 법 전체로 보면 기후변화 대응과 관련된 부분이 상당수를 차지한다. 태양광 패널과 풍력 터빈, 그린수소 생산시설 등 신재생 에너지 분야에 총 3690억 달러의 보조금을 지급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일찌감치 탄소중립 목표를 설정하고 녹색에너지 기업들을 육성해온 유럽에는 치명타가 될 수 있는 법이다. 아우디와 폴크스바겐 등을 다 합쳐도 미국 시장 점유율이 5%에 못 미치는 전기차를 넘어서는 문제인 것이다.

 

▷마크롱 대통령이 나선 것은 유럽연합(EU)을 대신해 총대를 멘 것으로 보는 게 맞을 것이다. 가뜩이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에너지난, 인플레이션 등으로 유럽 전체가 경제 문제에 민감해진 시점이다. IRA로 인해 프랑스에만 100억 유로의 투자 손실이 발생하고 1만 개의 일자리가 없어질 것이라는 추산이 나오고 있으니 유럽 전체로는 말할 것도 없다. EU 내에서는 대미 경제보복을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동맹끼리 ‘무역 전쟁’이 날 판이다.

▷프랑스보다도 먼저 IRA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던 나라가 한국이다. 외교부와 산업통상자원부, 대통령실 고위 당국자들이 잇따라 워싱턴을 방문해 줄기차게 수정을 요구했다. 윤석열 대통령도 바이든 대통령과 이 이슈를 논의했다지만 가시적인 성과를 내지는 못했다. 결과적으로 마크롱 대통령이 앞장서는 모양새가 됐지만, 강력한 대미 압박으로 힘을 보태는 유럽의 우군을 얻었다는 점에서는 고무적이다. 바이든 대통령의 IRA 수정 발언이 립서비스로 끝나지 않게 주요국이 단단히 힘을 모아야 할 때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12-05(월) 한국 부자 지형도

 

“부자들은 자산을 취득한다. 그렇지만 가난한 이들과 중산층은 부채를 얻으면서 그것을 자산이라고 여기지.” 베스트셀러였던 책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의 저자 로버트 기요사키는 저서에서 자산과 부채의 차이점을 제대로 이해해야 제대로 투자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집을 사기 위해 얻은 대출금은 수익을 창출하지 못하는 ‘나쁜 빚’이며 그렇게 구한 집은 자산이 아닌 부채라는 게 그의 관점이었다.

 

▷10여 년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었던 그의 주장은 최근 빚 폭탄에 직면한 한국의 영끌족들에게 다시 소환되고 있다. 수억 원씩 대출을 받은 뒤 치솟는 금리에 허리가 휘는 이들이 새삼스럽게 부채의 무거움을 곱씹고 있는 때다. 돈 굴리는 법을 안다는 부자들의 부채 대응 움직임을 일찍 알았더라면 이들에게 도움이 됐을까. KB금융그룹이 발간한 ‘2022 한국 부자 보고서’에 따르면 코로나19 팬데믹 기간에 부자들은 금융부채 비중을 크게 낮췄다. 전례 없는 봉쇄, 방역 조치로 경제가 타격받는 상황에서 빚 관리에 우선순위를 뒀다는 의미다.

▷한국 부자의 61.8%는 ‘부채는 자산이 아니다’라고 생각한다는 조사 결과도 나왔다. ‘부채는 자산이다’는 회계학의 기본 공식과는 거꾸로 가는 인식이지만, 그만큼 부채의 레버리지 효과보다는 위험성이 커진 시점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들이 향후 자산 운용의 가장 큰 위험 요인으로 꼽은 것도 금리 인상(47%)이다. 최소 내년 말까지 지속될 것으로 보이는 고금리 기조로 볼 때 빚부터 줄이는 게 부(富)를 유지하는 길이라는 게 부자들의 현재 판단인 셈이다.

 

▷비트코인 같은 디지털자산에 투자했다는 부자들이 많지 않은 것 또한 눈에 띄는 특징이다. 앞으로도 투자하지 않겠다는 응답이 60% 가까이 된다. 디지털자산 가치의 변동률이 너무 높고(36.1%), 내재가치가 없기 때문(29.6%)이라는 게 이들이 댄 이유다. 가상화폐 등으로 대박을 터뜨린 성공 스토리의 홍수에 휩쓸리지 않고 실물 위주의 보수적 투자에 집중한 부자들의 성향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한국 부자들이 ‘부자’로 인정하는 총자산의 기준은 100억 원. 금융자산 10억 원 이상 보유자를 부자로 분류한 보고서의 기준보다도 훨씬 높다. 한국 부자의 수는 해마다 늘어나고 있으며, 3040 신흥 부자 중 상당수는 부모로부터 종잣돈을 물려받은 금수저들이라고 한다. 집 1채를 마련하기도 빠듯한 영끌족으로서는 남의 나라 이야기 같은 내용도 보고서에는 적지 않다. 그래도 핵심은 ‘어떻게 부자가 될 것인가’일 터. 경기 불확실성이 커지는 시기, 부채 관리에 집중하며 다음 투자 기회를 노리는 부자들의 촉을 읽어내는 게 먼저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12-06 B-21 폭격기

 

비행기가 전쟁에 처음 이용된 용도는 전투기가 아니라 폭격기로서다. 간단히 말해서 폭탄을 싣고 가서 폭탄을 떨어뜨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자체가 가공(可恐)할 만한 것이어서 제2차 세계대전까지만 해도 폭격기에는 적수가 없다고 여겼다. 일본 도쿄 대공습, 독일 드레스덴 폭격이 모두 폭격기에 의한 것이다. 원폭을 투하한 미국의 B-29 폭격기가 일본의 항복을 끌어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B-29는 한국전쟁까지 널리 활용됐다. B-29가 한국전쟁 중 옛 소련의 전투기 미그-15에 공격을 당하자 1952년 미국이 B-29의 느린 속도를 개선해 개발한 것이 B-52다. ‘하늘을 나는 요새’라는 별명을 지닌 B-52는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미국 폭격기의 중추를 이루고 있으며 저공으로 더 빨리, 더 오래 비행하는 ‘죽음의 백조’ B-1B가 이를 보완하고 있다. 소련은 B-29에 맞서 ‘곰’이라는 별명을 지닌 Tu-95를 개발했는데 이 역시 오늘날까지도 러시아의 전략자산으로 꼽힌다.

▷폭격기의 개발이 한동안 주춤해진 것은 레이더와 요격 미사일의 발전 때문이다. 스텔스 기술이 개발돼 그 장애를 뛰어넘게 해줬다. 스텔스 기술은 공격기에 처음 적용됐다. 2003년 이라크전에서 이라크의 방공망을 초토화시킨 F-117 나이트호크가 미국의 초기 스텔스기다. 스텔스 기술은 다음에 F-22 랩터와 그 보급 버전인 F-35 시리즈 등 전투기에 적용됐다. 그리고 다시 폭격기에 적용됐으니 그 첫 세대가 B-2 스피릿(Spirit)이고 이를 대체할 차세대가 2일 공개된 B-21 레이더(Raider)다.

 

▷러시아와 중국은 미국에 맞서 각각 T-50 PAK FA, J-20이라는 스텔스 전투기를 개발했지만 그 성능은 여전히 의문스럽다. 이런 두 나라가 미국에 근접하지도 못한 분야가 있으니 바로 스텔스 폭격기다. B-21은 조종사 없이도 스스로 항로를 변경해 폭격이 가능하다고 한다. 러시아와 중국이 5세대 군용기인 스텔스기도 따라잡지 못하는 사이 미국은 벌써 6세대 군용기인 디지털 스텔스기로 나가고 있다.

▷미국은 내년에 B-21 초도비행을 한 뒤 2026년부터 100대를 실전 배치할 계획이다. 일찍 모습을 공개한 이유는 북한을 비롯해 러시아와 중국이 겁 좀 먹으라는 것이다. B-21이 F-22의 호위를 받아 하늘을 난다면 레이더상에서 B-21은 골프공 크기 정도로, F-22 전투기는 작은 구슬 크기 정도로 인식된다. 새들이 몇 마리 날아가나 보다 착각하는 사이 한 국가, 한 도시를 초토화시킬 폭탄이 뿌려지게 된다. ‘폭격기 무적(無敵)론’이 다시 나올 만하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12-07 올해의 단어 ‘고블린 모드’

 

고블린(Goblin)은 판타지 소설이나 영화, 애니메이션에 자주 등장하는 캐릭터다. 주로 덩치가 작고 사악하거나 탐욕스러운 요괴로 그려진다. 영화 스파이더맨에선 강력한 괴물로 등장했지만…. 도깨비로 번역되기도 하는데 느낌은 다르다. 도깨비는 훨씬 종류가 다양하고, 또 친근하다. 수호자 의미도 있다. 고블린은 ‘추함’을 연상시킨다. 고블린과 생활 방식을 뜻하는 모드(Mode)의 합성어 ‘고블린 모드’가 영국 옥스퍼드 영어사전의 올해의 단어로 선정됐다.

 

▷고블린 모드란 말 자체는 국내엔 생소하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이미 고블린 모드의 삶을 살고 있는지 모른다. 만약 내가, 혹은 자녀가 일주일 내내 같은 잠옷을 입고 거의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감자칩을 먹으며 휴대전화로 넷플릭스만 보고 있다면, 침대에 떨어진 과자 부스러기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면, 입던 잠옷 차림에 양말만 신고 집 앞 편의점에 콜라를 사러 간다면….

▷옥스퍼드 영어사전은 고블린 모드에 대해 “사회적 규범이나 기대를 거부하는 방식으로 변명의 여지없이 방종하거나 게으르거나 탐욕스러운 행동 유형”을 의미한다고 정의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집이 지저분하든, 정크푸드 박스 더미가 곳곳에 쌓여 있든 “뭐 어때서?”라는 마음가짐이다. 고블린은 남들 눈에 신경 쓸 이유가 없으니까. 타락의 안락함, 그 자체인 것이다.

 

▷고블린 모드는 올해 처음으로 실시된 대중 투표에서 93%, 31만여 표를 얻어 ‘메타버스’와 ‘#IStandWith(∼을 지지한다는 뜻. 우크라이나 전쟁 계기로 급증)’를 제치고 1위로 선정됐다. 2022년, 팬데믹 3년 차에 접어들며 ‘지친’ 개인들의 심리적 상태를 정확히 포착했다는 평가다. 팬데믹 초기 유기농 아침 식사를 하고 근사한 몸매를 만드는 등의 모습을 너도나도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그러나 점점 달성할 수 없는 미적 기준, 지속 불가능한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반항 심리가 일고 있다는 것이다.

▷‘단순 방종’이 아닌 사회적 규범과 기대를 거부하는 ‘의도된 방종’이라는 점도 주목된다. 각국에서 벌어지는 정치적 격변에 대한 환멸,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보듯 혹시 있을지 모를 제3차 세계대전 위기감까지 겹쳐 극단적 자아 중심주의로 이어지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고블린 모드는 그런 점에서 세계사적 전환기를 맞아 눈여겨봐야 할 중요한 시대적 현상이다. 한국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자기개발 행위는 영속성을 갖기 힘들다. 실제 모습과 SNS를 통해 과시하는 삶이 다르다면 이중생활이나 마찬가지다. 다만 고블린 모드의 삶이 장난스러움을 넘어 사회적 무력감으로 이어져선 곤란하다는 생각이 든다.

정용관 논설위원 yongari@donga.com

 

12-08 공무원 점심시간 휴무 논란

 

‘12시 정각 우르르 점심 먹으러 떠나는 사람들 속에서 나는 꿋꿋이 자리를 지킨다. 민원대 공무원이기 때문이다.’ 1990년대생 공무원이 콘텐츠 플랫폼 ‘브런치’에 연재한 ‘공무원 표류기’를 보면 점심시간에 민원대를 지키는 고충이 잘 그려져 있다. 빈자리를 메우려 빠릿빠릿하게 움직여야 하고, 일부러 시간을 냈는데 긴 줄에 발을 동동 구르는 민원인의 항의도 거칠다. 차라리 도시락을 싸오는 게 편하다. 직장인의 하루 중 점심시간만큼 귀한 시간은 없다. 민원대 공무원의 고달픔이 공감되는 까닭이다.

 

▷내년 4월부터 대구시 8개 구군이 시범적으로 공무원 점심시간 휴무제를 도입한다. 그런데 전국공무원노동조합이 당장 내년 1월부터 전면 시행하라고 압박하면서 갈등을 빚고 있다. 공무원의 점심시간은 낮 12시부터 오후 1시이고 근무시간에 포함되진 않는다. 지금도 점심을 거르는 공무원은 없다. 시군구청과 읍면동 행정복지센터 공무원은 민원 응대를 위해 교대로 점심을 먹을 뿐이다. 전공노는 “공무원도 밥 먹을 권리가 있다”며 점심시간에 아예 민원실을 닫자고 한다.

▷공무원 점심시간 휴무제는 2017년 경남 고성군에서 처음 시행됐다. 현재 전국 시군구 50여 곳으로 확대됐다. 이 지자체 공무원들은 되레 업무효율이 높아졌다고 주장한다. 점심시간이면 근무 인원이 줄어 민원처리 속도가 느리고, 담당자가 없는 업무 처리에 애를 먹는 현상이 사라진 덕분이다. 무인민원발급기나 전자민원서비스가 보급돼 실제 민원인들의 불편함이 크지 않다고 한다.

 

▷하지만 여론은 싸늘하다. “점심시간만 쉬지 말고 쭈욱 쉬세요.” 무인발급기가 점심시간에만 작동하는 것도 아닌데 결국 잉여인력 아니냐는 반응이다. 이참에 공무원을 줄이라는 여론이 들끓는다. 특히 직장인은 점심시간이 아니면 민원서류를 발급하기 어렵다. 무인발급기나 인터넷에 익숙지 않은 어르신들도 헛걸음을 해야 한다. 게다가 전공노는 무인발급이 되지 않는 여권·세무 부서까지 점심시간에 업무를 중단하자고 한다. ‘워라밸’이 중요해진 사회적 문화를 감안하더라도 점심시간 교대근무조차 어렵다는 데는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공무원들은 마음 편히 점심 한 끼 먹자는데 냉정한 여론이 야속할 터다. 그러나 공무원에겐 개인의 안락함을 희생하는 공복(公僕)으로서의 직업윤리가 요구된다. 점심시간에 민원실을 직접 찾는 사람들일수록 사회적 약자일 가능성이 높다. 회사에 매여 있거나 하루 벌어 하루 살기에 기껏해야 점심을 거르고 짬을 낼 수밖에 없는 사람들, 직접 상담을 받아야 하는 복지 수요자들, 무인발급기 앞에서 문맹이 되는 고령자들이다. 이들의 점심시간도 귀하긴 마찬가지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12-09 美中 틱톡 2차전

 

유튜브에서 쇼츠(shorts)라고 하는 짧은 동영상이 유행이다. 인스타그램의 짧은 동영상은 릴스(reels)라고 불린다. 그러나 약 15초 길이의 짧은 동영상은 틱톡이 원조다. 어른들은 젊은이들이 영상만 보려 하고 글을 읽으려 하지 않는다고 한숨을 쉬고 있지만 정작 젊은이들은 동영상도 긴 것은 참지 못하고 짧은 것을 선호한다.

 

▷틱톡은 인스타그램이 사진 중심일 때 유튜브처럼 동영상을 중심에 뒀다. 똑같이 동영상을 중심으로 해도 틱톡에서는 기존 유튜브에서 볼 수 없는, 챌린지라고 불리는 따라하기 현상이 종종 일어난다. 동영상이 짧고 누구나 쉽게 만들 수 있는 기능을 앱 속에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틱톡을 세계 최초의 헥토콘(기업가치 1000억 달러 이상) 스타트업으로 만들었다.

▷다만 틱톡의 인기를 짧은 동영상이라는 형식에만 돌릴 수 없다. 틱톡에는 자극적인 콘텐츠가 많다. 어쩌면 형식이 내용을 규정한다고도 볼 수 있다. 짧기 때문에 자극적이지 않으면 관심을 끌 수가 없다. 최근에도 틱톡에서 약 700만 명의 팔로어를 가진 사람이 그랜드캐니언 협곡 아래로 골프 샷을 하면서 골프채까지 날려 보내는 영상을 올렸다가 당국의 조사를 받고 처벌됐다는 뉴스 보도가 있었다.

 

▷미국 인디애나주 법무부는 7일 틱톡을 운영하는 중국 바이트댄스를 상대로 틱톡의 콘텐츠들이 어린이와 청소년의 중독을 야기한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감기약으로 치킨 튀기기, 유리조각 먹기, 아기 던지기 같은 영상이 어린이와 청소년에게 좋은 영향을 줄 리가 없다. 펜실베이니아주의 한 10세 소녀는 지난해 12월 틱톡의 기절 동영상을 따라 챌린지하다 의식을 잃은 채 발견됐고 끝내 숨졌다.

▷미국의 더 큰 우려는 중국 정부가 미국 틱톡 사용자의 정보를 빼갈 수 있다는 데 있다. 조 바이든 정부의 크리스토퍼 레이 연방수사국(FBI) 국장은 지난달 미 하원 국토안보위원회에 “중국 정부가 수백만 틱톡 사용자의 개인 정보를 수집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재작년 도널드 트럼프 정부의 틱톡 다운로드 금지 행정명령은 법원에 의해 일단 제동이 걸렸다. 그러자 주정부가 독자적으로 나서고 아예 연방의회에서 법으로 규제할 움직임도 보이고 있다. 틱톡을 둘러싸고 2차전이 벌어지는 모양새다.

▷미중 갈등의 불똥이 화웨이에 이어 틱톡으로 본격적으로 튀고 있다. 위챗도 영향을 받을 것이다. 시진핑 디스카운트라고 할 만하다. 중국이 정치적으로 더 민주적이 돼도 부족할 판에 오히려 마오쩌둥의 1인 독재 시대로 회귀하고 있으니 그런 정부에 예속된 기업은 끊임없이 불신을 받을 수밖에 없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12-10(토) 獨 극우 쿠데타 음모

 

지난해 1월 미국 국회의사당에 난입한 도널드 트럼프 지지자 가운데에는 극우 단체 큐어논(QAnon) 신봉자들이 많았다. 이들은 “의원들을 체포해서 처형하자”고 목소리를 높이며 시위를 주도했다. 독일에서도 6일 의회를 점령하고 총리를 살해하겠다는 음모를 꾸민 극우 세력 일당이 체포되는 일이 벌어졌다. 큐어논의 영향을 받은 이들은 미 의사당 난입 사건을 모델로 삼아 쿠데타를 계획했다고 한다.

 

▷9월 독일 수사당국에 ‘극우 세력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익명의 제보가 접수됐다. 검찰과 경찰은 ‘그림자(Shadow)’라는 작전명 아래 은밀하게 용의자들의 통화 내역과 온라인 채팅을 추적했다. 그 결과 이들이 ‘X데이’를 정해 의회와 발전소 등을 무력으로 빼앗고, 혼란을 부추겨 정부를 전복하려는 계획을 세운 사실이 드러났다. 독일 정부는 6일 경찰 3000여 명을 투입해 130여 곳을 동시에 급습한 끝에 25명을 체포했다.

▷쿠데타 시도의 주축 세력은 ‘제국 시민’이라는 극우 집단이다. 1871년 독일 통일 이후 1918년 제1차 세계대전 패전 이전까지 존재했던 ‘제2제국’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다른 극우 세력인 네오나치와 구분된다. 1980년대부터 존재하던 ‘제국 시민’이 과격해진 것은 미국에서 건너온 큐어논의 음모론이 접목되면서부터다. 현재의 정부는 독일 정보기관이나 서방 정부 등 딥스테이트(숨은 권력집단)가 쥐고 흔드는 꼭두각시에 불과하므로 속히 타도해야 한다는 논리를 편다.

 

▷이들이 무력 사용을 철저하게 준비한 정황도 속속 드러나고 있다. 전직 공수부대 지휘관, 특수부대 대령 출신 등 체포된 사람들 가운데 적어도 15명이 군과 직간접으로 관련된 인물들이다. 경찰이 수색한 장소들 가운데 약 50곳에서 무기가 발견됐다. 총과 탄약, 테이저건, 석궁, 칼 등 종류도 다양했다. 올라프 숄츠 총리를 비롯한 정치인과 언론인 18명의 명단도 발견됐다. 쿠데타가 실행됐다면 표적이 됐을 가능성이 높은 인물들이다. 독일 정부로서는 가슴을 쓸어내렸을 것이다.

▷이번에 쿠데타를 막아냈다고 해서 안심할 일은 아니다. 경제위기를 틈타 앞으로 극우 집단이 세력을 확장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1923년 봉기했다가 실패한 히틀러가 10년 뒤 집권한 것도 인종 우월주의 등을 앞세워 대공황으로 흉흉해진 민심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근래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에서 극우 세력이 약진하는 이유도 비슷한 측면이 있다. 하지만 극단주의 세력은 결국 민생을 해결하지 못하고 오히려 국민에게 더 큰 부담만 남기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삶이 팍팍하더라도 그들의 달콤한 말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12-12(월) 과이불개

 

공자의 가르침을 모은 ‘논어’에는 잘못을 인정하고 바로잡는 노력을 강조한 구절이 곳곳에 나온다. 군자는 ‘잘못이 있으면 주저하지 말고 바로 고치고(過則勿憚改)’, 제자 안회는 ‘같은 잘못을 두 번 저지르지 않는다(不貳過)’라고 칭찬받았으며, ‘잘못을 저지르고도 고치지 않는다면 이것이 바로 잘못(過而不改 是謂過矣)’이라고 했다. 교수신문이 올해의 사자성어로 선정한 ‘과이불개’는 논어의 ‘위령공편’에 등장한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로 과오가 없을 순 없지만 이를 스스로 감당하지도, 고치지도 않는 것은 변명의 여지없는 잘못이라는 뜻이다. 선정에 참여한 교수들은 학계의 연구 윤리 문제와 함께 반성 없는 여야 정치권의 행태를 꼬집었다. “많은 사람이 잘못됐다고 하는데도 인정하지 않는다. 인정하지 않으니 사과할 이유도, 고칠 필요도 없는 것”이고 “잘못을 인정하는 순간 패배자가 될 것 같아 우기고 보는 풍조가 만연하다”는 지적이다.

▷‘과이불개’를 추천한 박현모 여주대 교수(세종리더십연구소장)는 “조선왕조실록에는 잘못을 고쳐 좋은 쪽으로 옮겨간 사례가 여럿 있다”며 세종의 예를 들었다. 중국에 사신으로 간 권희달이 부적절한 언행으로 물의를 빚자 “사람을 잘못 알고 보낸 것이 심히 후회된다”고, 역병이 돌았을 땐 미리 예방하지 않은 것을 “크게 후회한다”고 했다. 군자감(군량미와 군수품 담당 관청) 붕괴사고 때는 철저한 진상 조사와 책임 규명으로 이후 세종 재위 기간 내내 비슷한 참사는 반복되지 않았다고 한다.

 

▷올해의 사자성어 2∼5위에 비친 한국 사회도 암울하다. 2위는 ‘덮으려고 하면 더욱 드러난다’는 뜻의 욕개미창(欲蓋彌彰). 과이불개하고 덮으려고만 하니 계란을 쌓아 놓은 듯 위태롭고(累卵之危·누란지위·3위), 과오를 그럴듯하게 꾸며대고 잘못된 행위에 순응하며(文過遂非·문과수비·4위)’, 눈먼 자들이 코끼리 만지듯 좁은 소견으로 사물을 그릇 판단한다(群盲撫象·군맹무상·5위). 제 역할을 못하는 지식인에 대한 자성도 담아 선정한 사자성어들이다.

▷지난 정부가 출범했던 2017년 올해의 사자성어 ‘파사현정(破邪顯正·사악한 것을 부수고 생각을 바르게 한다)’엔 촛불 시위로 들어선 새 정부에 대한 기대감이 묻어난다. 하지만 해가 갈수록 부정적인 사자성어가 꼽히더니 2020년엔 ‘내로남불’ 세태를 꼬집은 ‘아시타비(我是他非·나는 옳고 남은 그르다)’, 2021년엔 ‘묘서동처(猫鼠同處·도둑 잡을 사람이 도둑과 한 패가 됐다)’가 선정됐다. ‘과이불개’로 시작한 새 정부는 ‘과즉물탄개(過則勿憚改)’하여 해가 갈수록 희망적인 사자성어를 떠올리게 되길 바란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12-13 1139채 ‘빌라왕’의 죽음

 

10월 서울 종로구의 한 호텔에 장기 투숙 중이던 40대 김모 씨가 숨진 채 발견됐다. 김 씨는 무려 1139채의 빌라와 오피스텔을 보유한 ‘빌라왕’이었다. 그는 전세를 끼고 집을 사는 ‘갭투자’ 방식으로 엄청난 규모의 빌라를 사들였다. 하지만 세입자 수백 명에게 전세금을 돌려주지 못해 경찰의 수사를 받던 중이었다. 김 씨가 갑자기 사망하면서 세입자들은 보증금을 받아내기가 더 막막해졌다.

 

▷전세를 얻을 때 기본적인 안전조치는 확정일자를 받는 것이다. 하지만 등기부등본을 살펴봐도 집주인의 세금 체납 여부 등까지는 확인할 수 없다. 이런 경우를 대비해 전세금 반환 보증보험에 가입했다면 세입자로서는 그 나름대로 철저하게 대책을 세운 셈이다. 김 씨는 62억 원의 세금을 체납한 상태였지만, 보증보험에 가입한 세입자 200여 명은 보증금을 받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을 것이다. 그런데 김 씨의 사망으로 상황이 복잡해졌다.

▷주택도시보증공사는 보험 가입자에게 먼저 보증금을 준 뒤 집주인에게 소송을 걸어 돈을 받아낸다. 그런데 집주인이 사망하고 상속받을 사람이 정해지지 않았다면 소송 대상이 없으므로 보증금도 지급하지 않는다. 보험에 든 세입자라도 상속 문제가 정리될 때까지 기약 없이 기다려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더욱이 보증보험 미가입자들은 살던 집이 경매를 통해 낙찰돼야 보증금을 받을 수 있어 사정이 더 딱하다.

 

▷문제는 김 씨처럼 여러 채의 빌라를 가진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는 점이다. 빌라 3400여 채를 구입해 전세 사기를 벌이다 9월 구속된 권모 씨 일당은 ‘빌라의 신(神)’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수도권에 100채 이상의 빌라를 가진 사람이 30명이 넘는다는 분석도 있다. 대부분 갭투자로 빌라를 매입했고, 정상적인 임대업자가 아닌 것으로 의심되는 사례가 적잖다. 언제 어디서 또 다른 전세 사기 폭탄이 터질지 모르는 상황이다. 특히 신축 빌라는 시세를 파악하기 어려워서 부동산 거래 경험이 적은 젊은층이 적정가보다 비싸게 전세를 얻는 경우가 많다.

▷집값이 하락하면서 빌라의 매매가 대비 전세가 비율은 전국 평균 82.2%에 달한다. 집을 팔아도 보증금을 제대로 받기 어려운 ‘깡통 전세’가 수두룩하다는 얘기다. 이런 상황에서 전세 사기까지 판을 치면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보증금을 잃고 피눈물을 흘리는 서민들이 늘어나게 된다. 엄중한 처벌도 필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예방이다. 전세 계약을 맺기 전 집주인의 세금 체납 여부 등을 확인할 수 있도록 하는 주택임대차보호법 개정안부터 서둘러 처리해야 한다. 빌라 전세 시장이 사기꾼들의 놀이터가 되도록 방치해서는 안 되겠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12-14 뜨는 K웹툰, 지는 日망가 

 

‘일본 망가(漫畵·manga)들은 한국 웹툰에 가려져 빛이 바래고 있다.’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한국과 일본의 만화 산업을 비교한 최신호의 기사 내용이다. 이 문장 그대로 제목이 된 기사는 만화의 원조이자 아시아의 만화 강국이었던 일본의 아성을 한국 웹툰이 무너뜨리고 있다고 전한다. 드래곤볼과 슬램덩크, 시티헌터, 베르사유의 장미…. 인기작들을 쏟아내며 ‘망가’를 해외에서 통용되는 고유명사로 만들었던 일본으로서는 자존심을 후벼 파는 보도다.

 

▷한국 웹툰의 시장 규모가 37억 달러를 돌파하며 급성장하는 반면 일본의 망가는 19억 달러 규모로 감소 추세다. 일본 디지털 만화 플랫폼의 양대 축은 한국 회사인 네이버 라인망가와 카카오의 피코마로, 두 회사의 시장점유율은 80%에 육박한다. 이들이 제공하는 100만 점 이상의 작품 중 상당수가 일본어로 번역된 웹툰이다. 만화와 애니메이션 같은 콘텐츠를 중심으로 일본 문화를 해외에 확산시키려던 ‘쿨 저팬’ 전략도 초라해진 지 오래다.

▷모바일 중심으로 급속히 전환하는 글로벌 만화 시장에서도 일본 작가들은 흑백의 단행본 출판을 고집해 왔다. 주인공의 땀방울까지 세밀하게 그려내는 일본 특유의 장인정신은 신세대 독자층이 즐기는 속도감을 따라잡지 못했다. 시선을 사선으로 움직이게 하는 만화책의 화면 분할 방식은 스마트폰의 스크롤로 쭉쭉 내릴 수 있는 웹툰의 세로 읽기보다 답답하다. 탄탄한 국내 마니아층이 유지되다 보니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작가도 많았다. 과거의 강점들이 망가 산업의 혁신을 저해하는 요소로 작용한 것은 아이러니다.

 

▷그러는 사이 한국의 웹툰은 드라마와 영화로도 제작되는, 한류의 새로운 킬러 콘텐츠로 자리 잡았다. 글로벌 판권 경쟁은 물론이고 각종 굿즈 생산에 방송에서나 볼 수 있었던 작품 속 간접광고(PPL)까지 비즈니스의 확장성도 어마어마하다. 인문학자들 사이에서는 웹툰을 새로운 학문으로 평가하자는 주장이 나오고, 프랑스 명문 경영대학원인 인시아드 산하 연구소에서 연구 사례로 등장할 정도로 위상도 높아졌다.

▷웹툰의 성공은 모바일에 최적화된 제작 기법, 누구나 작품을 올릴 수 있는 개방형 게재 시스템, 독자 반응을 실시간으로 반영할 수 있는 상호작용 등의 강점이 종합적으로 밀어올린 결과다. 상상력 가득한 한국 작가들의 경쟁력이 첨단 정보기술(IT) 플랫폼 위에서 한껏 진가를 발휘하고 있다. 일본 작가들도 뒤늦게 웹툰 스타일의 디지털 만화 제작에 뛰어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고령화된 옛 독자층에 매달린 채 만화책을 한 장 한 장 스캔해서 올리는 방식으로는 이미 날개를 달아버린 한국의 웹툰을 이길 수 없음을 알았을 것이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12-15 급증하는 고독사

 
 

요즘 같은 ‘백세시대’에 50, 60대면 신체적으로도 건강하고, 사회적으로도 왕성하게 활동할 나이다. 그런데 고독사의 절반이 50, 60대 남성에게서 발생한다. 평생 일만 하다 가족과 유대감을 쌓지 못한 데다 식사 빨래 같은 집안일에 미숙한 50, 60대 남성은 실직하거나 이혼하면 급격히 무너진다. 나약하다는 낙인이 두려워 고독감을 토로하지도 못한다. 질병과 가난을 안은 남성은 ‘삼식이’(세끼 모두 집에서 먹는 남편) 대접조차도 받지 못하고 가족과 영영 멀어지는 경우가 많다.

▷고독하지 않은 죽음은 없다지만 법적으로 정의되는 고독사는 존재의 본질로서 외로움과는 다르다. 가족 친척 등과 단절된 채 홀로 사는 사람이 자살 병사 등으로 혼자 임종을 맞고, 일정한 시간이 흐른 뒤에 시신이 발견되는 죽음을 말한다. 정부가 처음으로 고독사 통계를 발표했다. 지난해 3378명으로 집계됐는데 5년 전보다 40% 늘어난 수치다. 지난해 사망자(31만여 명)의 1%를 넘어선다. 남성이 여성보다 5.3배나 많다.

▷고독사의 대부분은 가족과 연락이 끊기거나 아예 주민등록이 말소된 무연고자들의 죽음이다. 이런 고독사는 계속 늘어날 것이다. 수명은 길어졌지만 가족 해체 및 1인 가구의 증가, 이웃 공동체 붕괴, 플랫폼 노동과 같은 ‘나 홀로’ 일자리 증가 등으로 사회적으로 연결되지 않은 개인이 많아지고 있어서다.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며 극단적인 고립 상태가 이어지는 것도 문제다.

 

▷2018년 영국은 고독부(Ministry for Loneliness)를 신설했다. 전체 인구 중 약 900만 명이 고독을 느끼는데 600만 명은 고독을 감춘다는 보고서가 발표되면서 고독은 개인이 아닌 국가가 해결해야 할 문제라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만성화된 고독은 건강을 해치고 생산성을 저하시키므로 의료·경제 등에 부담을 주는 사회문제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노인들의 고독사가 심각한 일본도 내각관방 내 고독·고립담당 장관을 임명했다. 지난해 두 나라 고독장관은 양자회담을 열고 “고독은 누구에게나 일어난다”며 정책적 개입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단 하나의 연결된 관계도 없이, 아무도 슬퍼하지 않는 죽음을 맞이한 이들. 그 고독한 죽음의 현장을 1000번 이상 청소한 유품정리사 김새별 전애원 씨는 저서 ‘떠난 후에 남겨진 것들’에서 “고독사가 의미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삶이다. 고독사는 그가 얼마나 고독하게 죽었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고독하게 살았는가를 말해준다”고 했다. 우리 사회가 살아생전 이들을 버린 건 아닌가 하는 물음이면서, 서로 따뜻한 온기를 나누며 살아가야 한다는 제안이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12-16 주한미군 우주군

 

“우주는 엄청난 힘의 경쟁이 벌어지고 있는 경기장이다.” 로이드 오스틴 미국 국방장관은 지난해 인사 청문회에서 중국, 러시아의 우주 선점 시도를 경고했다. 국가안보 차원에서 우주의 비중이 커지고 있다며 “장관이 되면 향후 전략적 검토에서 우주 공간도 세밀히 들여다보겠다”고 밝혔다. 폐지 논란이 불거지던 우주군을 유지하겠다는 뜻을 공식화하는 순간이었다.

 

▷우주군을 독립된 군 조직으로 운영하는 나라는 미국이 유일하다. 2019년 창설 당시 예산 부담, 공군과의 업무 중복 등 문제로 펜타곤의 반대가 만만치 않았다. 로고가 SF 시리즈 ‘스타트렉’ 것과 비슷하다는 논란이 벌어졌고, 제복 디자인과 군가 등은 “우주와 동떨어졌다”는 비판에 시달렸다. 코미디 드라마 ‘우주군(The Space Force)’에는 “스타워즈 광선검으로 햄버거를 데워 먹느냐”는 식으로 비아냥대는 대사가 곳곳에 등장한다. 미션의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희화화되는 경우가 적잖았다.

▷우여곡절 끝에 창설된 우주군은 조 바이든 행정부가 존속 의사를 천명한 이후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6번째 군을 만들겠다”고 공언했던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치적 쌓기용 아니냐는 의구심은 쑥 들어갔다. 러시아, 중국의 우주굴기를 군사적 위협으로 인식해 견제해야 한다는 전문가들의 목소리는 더 커졌다. 500기가 넘는 위성을 지구 궤도에 올린 중국은 이른바 ‘스파이 위성’을 추가로 쏘아 감시, 정찰 활동을 벌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난달 유인 우주선인 ‘선저우 15호’를 발사한 데 이어 이르면 이달 말 우주정거장 ‘톈궁 3호’의 건설을 완료할 계획이다.

 

▷미 우주군이 당장 중국, 러시아 군대와 레이저빔을 쏘아대는 우주전쟁에 나서는 것은 아니다. 8400명의 우주군 인력은 현재 위성통신과 GPS 운용, 이를 통한 미사일 감지 역량 강화 등에 집중하고 있다. 북한의 핵개발, 미 본토를 겨냥한 ICBM 발사는 우주군이 대응해야 할 주요한 안보 위협의 최우선 순위에 올라 있다. 미국이 주한미군사령부 예하에 우주군 부대를 창설한 것은 이를 보여주는 단적인 방증이다. 북한은 올해만 30여 차례 탄도미사일을 발사하며 전례 없는 빈도의 무력시위를 이어가는 중이다.

▷주한 미 우주군의 부대 마크에는 88개 별자리 중 하나인 용자리가 그려져 있다. 북극성 주위를 돌면서 변함없는 위치를 지키는 용자리가 우주군 ‘가디언스’의 준비태세를 뜻한다고 한다. 그 아래 가로 경계선은 남북을 갈라놓는 비무장지대(DMZ)를 의미한다는 게 우주군의 설명이다. 북한의 도발에 맞서기 위해 육해공군은 물론이고 우주군까지 전방위로 힘을 합치겠다는 미군 의지의 상징이다. 평양이 똑똑히 알아들어야 할 메시지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12-17(토) 하버드대 첫 흑인 총장

 

“부모님은 제게 기술자나 의사, 법률가 중 하나가 되라고 하셨죠. 이민자의 자녀라면 누구나 듣던 얘기였을 거예요.” 15일 연단에 선 클로딘 게이 미국 하버드대 신임 총장 내정자(52)는 자신이 대학에 들어갈 무렵의 일을 회상했다. 아이티 출신 흑인으로서 미국 사회에서 온갖 풍파를 겪은 부모가 딸에게 인종차별이 덜한 직업을 추천했다는 얘기다. 하지만 그는 부모의 기대와 달리 학자의 길을 택했다. 그리고 하버드대 386년 역사상 첫 흑인 총장으로 지명됐다.

 

▷게이는 1992년 스탠퍼드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하버드대 대학원에 첫발을 내디뎠다. “당시의 나는 총장이 되는 길을 걸을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다”고 게이는 회고했다. 실제 하버드대가 1636년 개교한 이후 2006년까지 배출된 27명의 총장은 전원 남성일 정도로 여성에게는 ‘넘사벽’이었다. 2007년 드루 길핀 파우스트 교수가 첫 여성 총장으로 선출되면서 비로소 유리천장이 깨졌다. 또 학부를 하버드대에서 졸업하지 않은 총장은 지금까지 단 2명일 정도로 순혈주의 전통도 강했다.

▷인종의 벽은 더 높았다. 노예제 금지 전 하버드대에서는 노예 70명이 잔일을 도맡아했다. 하버드대가 기틀을 잡을 수 있도록 기부금을 낸 이들은 노예 노동을 통해 막대한 수익을 올린 사업가들이었다. 하버드대는 자체 조사를 거쳐 올해 4월 이런 과거사를 반성한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냈다. 노예제의 유산을 바로잡기 위해 1억 달러의 기금도 조성하기로 했다. 게이가 총장으로 선출된 데에는 이런 분위기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미국 학계에서 흑인이 진입하기 어려운 곳은 하버드대만이 아니다. 전체 대학 교수 가운데 흑인은 7%에 불과하고, 흑인이 총장을 맡은 곳은 10% 수준이다. 특히 북동부 지역 8개 명문대를 가리키는 아이비리그에서 흑인 총장이 배출된 것은 2001년 루스 시먼스 브라운대 총장이 유일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차별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방증이다. 이런 장애물들을 모두 이겨낸 게이 내정자를 향해 하버드 내에서 “다양성과 우수함의 승리”라는 평가가 나오는 것은 지나치지 않다.

▷내년 7월 총장으로 취임하는 게이 앞에는 난제가 놓여 있다. 미 대법원은 하버드대 등에서 학생 선발 시 소수인종을 우대하는 정책이 위헌인지 여부를 내년 상반기에 결정할 것으로 보인다. 게이 내정자는 인터뷰에서 “위헌 결정이 나더라도 다양성이라는 가치를 지켜나갈 것”이라고 했지만 구체적 방안은 마땅치 않다. 미국이 자랑하는 명문대에서 인종 문제가 여전히 이슈가 된다는 것 자체가 안타까운 일이다. 그 아픔을 누구보다 잘 아는 게이 내정자가 해법을 찾을 적임자일 것이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12-19(월) 입문마약

 

미국에는 ‘420’이라는 은어가 있다. 오후 4시 20분을 일컫는 말이다. 1970년대 초반 캘리포니아주의 서로 다른 학교에 다니던 학생들이 방과 후 학교 담벼락에 모여 대마초를 피운 시간대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여기에서 확장돼 매년 4월 20일을 대마초의 날로 기념하고, 심지어 그날 대마초를 싸게 파는 판매점도 있다. 지금은 미국의 50개 주 가운데 캘리포니아주를 포함해 3분의 2 이상이 기호용 또는 의료용 대마초를 합법화했다.

 

▷대마초는 가격이 가장 싼 마약류여서 아무래도 접하기가 쉽다. 중독성이 담배보다 약하다는 연구도 있다. 하지만 대마초에 한번 손을 대면 중독성이 더 강한 코카인이나 헤로인, 케타민 등의 마약을 찾게 된다. 어둡고 위험한 마약의 길로 유혹한다는 뜻에서 ‘입문 마약(gateway drug)’으로 불린다. 미국 유학생이 학교에서 액상이나 가루, 젤리 형태의 대마를 접하고, 이를 한국에 들여오면서 4, 5년 전부터 국내에서도 번졌다.

▷검찰이 수사 중인 액상 대마 사건이 대표적이다. 서울 강남에서 피트니스클럽을 운영하는 A 씨는 해외에서 액상 대마를 가져와 전자담배 용기에 담아 팔았다. 이를 매입한 남양유업 창업주의 손자 홍모 씨 등 유력 인사의 자제 9명이 이미 기소됐다. 홍 씨에게 대마를 샀던 직장인 등 3명이 추가로 자수했는데, 전직 경찰청장의 아들도 있다. 검찰은 이들이 대부분 유학 시절 처음 대마를 접한 뒤 귀국 후에도 끊지 못한 것으로 보고 있다.

 

▷미국 대부분의 주에 이어 4년 전 캐나다에서도 대마가 합법화되면서 북미 지역에서 국내로 밀수되는 대마가 늘고 있다. 관세청이 지난해 적발한 대마 밀수량이 총 98kg이었는데, 이는 5년 전과 비교해 500배가량 폭증한 것이다. 대마 밀수량의 80% 가까이가 북미 지역이다. 설상가상으로 올해 태국에서도 대마가 합법화되면서 동남아시아 밀수 경로까지 추가됐다. 국내 마약의 양이 증가하면 구매 단가가 낮아질 수밖에 없다. 이원석 검찰총장의 말대로 “집 안에서 피자 한 판 가격에 마약을 구매하는 것이 현실”이 된 것이다.

▷마약 가격의 하락으로 그동안 마약에 손을 대지 않던 젊은층이 마약에 노출되는 부작용이 생기고 있다. 올해 마약 사범은 역대 최대치가 될 가능성이 높다. 가장 큰 특징은 초범이 많고, 10·20대 마약 사범이 크게 늘었다는 점이다. 여기엔 대마의 영향이 작지 않다. 마약 공급상 입장에선 마약 소비 연령대가 낮아지면 마약을 더 오래, 더 많이 팔 수 있다. 정부는 넉 달 전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입문 마약의 접근을 막는 것보다 더 중요한 전쟁이 있을까.
정원수 논설위원 needjung@donga.com

 

12-20 시진핑의 승풍파랑

 

“핵심은 신뢰를 높이는 것이다.” 중국 런민일보는 15, 16일 열린 중앙경제공작회의 결과를 이런 제목으로 18일자 1면에서 전했다. 매년 12월 열리는 경제공작회의는 최고위 정책결정자들과 지방정부 고위 관료, 국영기업 대표 등 수백 명이 이듬해 경제정책 방향을 결정하는 회의. 올해 회의에선 지도부의 친(親)기업 발언들이 두드러졌다. 특히 시진핑 국가주석은 “나는 일관되게 민간기업을 지원하고 민간경제가 더 발전된 지방에서 일해 왔다”며 “민간기업과 기업인은 우리와 같은 편이다”라고 강조했다.

 

▷중국은 이번에도 ‘안정 속에 성장을 추진한다(穩中求進)’는 기존 방침을 내세웠다. 하지만 그간 빅테크(대형 정보기술 기업)와 부동산 기업에 대한 규제의 명분이었던 ‘반(反)독점·부당경쟁’도, 시 주석이 강조하는 핵심 가치인 ‘모두가 잘사는 사회(공동부유·共同富裕)’도 언급하지 않았다. 분배보다는 성장을 중시하는 기조로 전환하면서 그간의 전방위적 ‘빅테크 때리기’도 끝내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외신도 민간기업과 외국기업, 그중에서도 인터넷 플랫폼 기업에 관심을 표시한 것에 주목했다.

▷그제 이롄훙 저장성 당서기가 항저우에 있는 알리바바 본사를 찾은 것은 그런 정책 변화의 신호탄일 것이다. 2년 전 마윈 창립자가 “중국 은행은 전당포식 운영을 하고 있다”고 당국을 비판한 것을 계기로 알리바바가 반독점 조사를 받은 이래 고위급 관리의 첫 방문이다. 이 서기는 “알리바바가 최전선에서 경제성장을 이끌고 일자리를 창출하며 글로벌 경쟁에서 두각을 보여 달라”고 격려했다고 한다.

 

▷시 주석이 새삼 친기업 기조를 내건 것은 10월 당대회에서 종신 체제를 굳힌 만큼 이제 여유를 갖고 실용적 정책으로 성과를 내겠다는 의도가 깔려 있겠지만, 그만큼 향후 경제전망이 어렵다는 방증일 수 있다. 6%대에 이르던 경제성장률은 올해 3% 초반대로 반 토막이 났다. 미중 전략경쟁 격화 속에 식량·에너지 안보와 반도체 등 핵심 공급망 확보는 당장 발등의 불이다. 더욱이 ‘제로 코로나’에 대한 반발로 ‘시진핑 퇴진’ 구호까지 나왔다.

▷시 주석은 “중국경제의 큰 배는 승풍파랑(乘風破浪)하며 앞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했다. ‘승풍파랑’은 원대한 뜻을 이루기 위해 바람을 타고 파도를 헤치며 극복해 나간다는 뜻. 우선 경제성장에 집중하면서 사회적 안정도 이뤄 중국몽을 실현하겠다는 의지다. 하지만 한번 잃은 신뢰를 회복하는 일부터 쉽지 않을 것이다. 언제 다시 고삐를 죌지 모른다는 시장의 불안과 불신은 당장 중국이 헤쳐 가야 할, 그 어느 때보다 거칠고 험한 풍랑일 것이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12-21 공직감찰반 부활 논란

 

“사정 컨트롤타워나 옛날 특감반 이런 거 있죠? 그런 거 안 하고. 사정은 사정기관이 알아서 하는 거고….” 5월 27일 윤석열 대통령이 출근길 문답에서 한 말이다. 특감반은 청와대에 있던 공직감찰반의 옛 이름인 특별감찰반의 줄임말이다. “대통령비서실의 사정, 정보조사 기능을 철저히 배제하겠다”며 민정수석실을 폐지하고 공직감찰반을 없앤 초심을 잃지 않겠다는 취지였다. 하지만 윤 대통령이 취임한 지 불과 7개월 만에 공직감찰반 부활 논란이 일고 있다.

 

▷공직감찰반은 공직자들에게 ‘저승사자’로 불렸던 곳이다. 경찰, 검찰, 국세청 등에서 파견된 멤버들이 대통령 친인척과 고위공직자의 비리 정보를 수집하고 혐의가 짙으면 수사기관으로 넘겼다. 그 뿌리는 박정희 정부에서 미국 연방수사국(FBI)을 표방하며 1972년 설치한 치안본부 특별수사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노태우 정부에서는 경찰청 조사과로 소속이 바뀌었고 ‘사직동팀’으로 불렸다. 노무현 정부 들어서 2003년 청와대 내에 정식으로 특별감찰반이 설치돼 15년간 이어지다 이름이 변경됐다.

▷은밀하게 이뤄지던 감찰반의 실태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은 2018년 말이었다. 당시 특감반원이었던 김태우 검찰 수사관은 ‘민영기업인 공항철도 임직원에 대한 비위 조사를 지시받았다’고 폭로했다. 민간인 사찰이 이뤄졌다는 것이다. 그가 작성한 첩보 보고서 목록 중에는 전직 총리 아들의 사업 현황, 민간은행장 동향 등과 관련된 내용도 있었다. 또 당시 조국 민정수석이 유재수 전 부산시 경제부시장에 대한 감찰을 무마한 혐의로 나중에 기소되는 등 감찰을 둘러싼 복마전도 벌어졌다.

 

▷정부는 공직감찰반의 기능을 대통령실 대신 국무총리실에 두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총리실 산하에는 공직기강을 담당하는 공직복무관리관실이 있는데, 이 조직을 보강한다는 것이다. 정부는 “공직감찰반 부활은 아니다”라고 밝혔지만 두 조직은 공직자의 비리를 감찰하는 곳이라는 점에서 성격이 비슷하다. 공직복무관리관실의 전신인 공직윤리지원관실이 민간인 사찰로 물의를 빚은 전력이 있다는 점도 공직감찰반과 닮았다. 감찰은 총리실에서 하더라도 그 내용은 결국 대통령실과 공유될 수밖에 없다.

▷본래 공직자에 대한 감찰은 독립기관인 감사원이 할 일이다. 대통령 친인척 관리가 문제라면 6년 넘게 공석인 특별감찰관을 임명하면 된다. 여기에 대통령 친인척 및 고위공직자 비리 수사를 전담하는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도 있다. 공직비리 척결에 반대할 사람은 없겠지만 지금 있는 기관들을 활용하는 것이 먼저다. 기껏 없앤 옥상옥(屋上屋)을 소속을 바꿔 다시 만드는 것이 능사는 아닐 것이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12-22 ‘검사는 공소장으로만 말한다’

 

뇌물수수 혐의 등으로 9일 재판에 넘겨진 정진상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실 정무조정실장의 공소장은 33쪽 분량이다. 이 가운데 10쪽가량이 사건 관계인들의 지위나 유착, 대장동 개발의 배경 설명에 할애됐다. 공소사실이 아닌 내용도 여러 번 언급됐다. 정 전 실장이 김용 전 민주연구원 부원장과 함께 2013년 9, 10월경 대장동 민간 사업자에게 받은 유흥주점 접대를 금액과 참석자, 지불 방식까지 구체적으로 적은 것이 대표적이다.

 

▷검사가 피고인을 기소하면서 법원에 제출하는 공소장엔 공소사실과 관련이 없는 내용을 기재해선 안 된다. 유죄로 예단할 수 있는 표현도 사용할 수 없다. 유죄 심증 형성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증거물이나 서류를 첨부하는 것도 금지된다. 범죄 사실을 간략하게 적은 공소장 하나만 제출하는 것이 원칙이어서 ‘공소장 일본주의(一本主義)’라고 부른다. 무죄 추정의 원칙에 따라 법관이 증거 조사를 하기 전에는 예단을 최대한 배제하기 위해 도입한 제도다.

▷이 원칙을 위반하면 판사가 무죄를 선고할 수 있지만 과거엔 사문화된 규정이었다. 그런데 대법원은 2009년 “범죄의 실체 파악에 장애가 된다면 공소기각을 해야 한다”는 판례를 처음 남겼다. 이후 공소장에 대한 공방이 자주 벌어지고 있는데, 정 전 실장의 공소장도 법정 다툼이 예상된다. 검찰은 대장동 개발의 사건 구조가 워낙 복잡해 공소장을 길게 쓰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설명한다. 변호인 측은 공소사실과 무관한 내용이라고 맞서고 있다.

 

▷아이로니컬하게도 법관들이 피고인석에 서는 불행한 사건 이후 공소장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다른 일반 재판으로도 확산됐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 등 사법농단 사건으로 기소된 전현직 법관들은 “공소장을 읽다보면 유죄로 귀결된다”며 첫 재판부터 공소장을 문제 삼았다. 공판중심주의가 더 강조되고, 국민참여재판이 늘어나면서 공소장은 앞으로 더 중요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다만 공소장의 흠결로 무죄가 선고된 사건은 손에 꼽을 정도로 여전히 드물다.

▷공정한 재판을 위한 공소장 작성의 원칙은 사실 수사의 공정성 보장으로 연장될 필요가 있다. 수사 도중 피의사실이 유출되면 결국 기소로 이어지고, 유죄 심증이 굳어지면서 재판에도 영향을 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흔히 “검사는 공소장으로만 말한다”고 한다. 이는 피의사실을 섣불리 누설하지 말고, 증거 원칙에 따라 수사를 한 뒤에 수사 결과를 간명한 공소장으로 보여줘야 한다는 뜻이다. 정치적 논란이 큰 사건일수록 검찰은 이런 원칙을 어기지 말고, 더 철저하게 지켜야 할 것이다.
정원수 논설위원 needjung@donga.com 

 

12-23 공매도 세력에 20조 원 안겨 준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 일론 머스크는 2020년 테슬라의 한정판 굿즈로 숏팬츠(Shorts)를 내놨다. 빨간색 새틴 원단에 금색으로 테슬라 전기차량의 모델명을 모은 ‘S3XY’를 박아 넣은 제품이었다. 머스크는 이 소식을 트위터로 알리면서 “어려운 시기를 겪는 공매도(Short) 투자자들에게 몇 개 보내주겠다”고 했다. 테슬라의 주가 하락에 베팅했던 이들을 조롱하려는 의도를 숨기지 않았다.

 

▷머스크는 공매도 투자자들을 향해 “테슬라가 죽기를 바라는 얼간이들”, “가치 파괴자”라고 맹공해 왔다. 테슬라에 대해 수억 달러의 공매도 포지션을 취한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자나 ‘공매도의 전설’ 마이클 버리를 상대로 노골적인 비난을 쏟아내기도 했다. 테슬라 시가총액이 1조 달러를 넘어서며 ‘천슬라’의 기록을 쓴 2020년은 머스크에게 ‘복수의 해’였다. 당시 공매도 투자자들은 38조 원의 손해를 봤다. 올해는 정반대 상황이 펼쳐졌다. 주가가 1년간 60% 넘게 가파르게 추락하면서 공매도 투자자들이 20조 원 가까운 이익을 낸 것이다.

▷적으로 여겨온 공매도 세력의 배를 불려준 건 아이러니하게도 머스크 자신이다. 트위터 인수 과정에서 보여준 그의 불안한 리더십과 충동적, 일방적인 경영 행보에 광고주와 이용자들은 추풍낙엽처럼 떨어져 나가는 중이다. 자신에게 비판적인 주요 언론사 기자들의 계정을 일방적으로 정지시킨 것은 SNS 사유화 논란을 불렀다. 인수자금 확보를 위해 40억 달러어치의 테슬라 주식을 팔아치운 것도 투자자들의 실망감을 키웠다. 머스크는 ‘트위터의 늪’에 빠진 채 밉상 CEO가 되어가는 처지다.

 

▷증권가 애널리스트들은 “테슬라의 가치 산정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고 토로한다. 테슬라 성장의 핵심 동력이었던 ‘괴짜 천재’ 머스크의 자유분방함이 점점 리스크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팟캐스트에 나와 마리화나를 피우고, 테슬라의 비상장 전환 계획을 전격 발표하는 등의 소동으로 수차례 입길에 올랐던 그다. “머스크의 트위터 한 줄에 휘둘리는 상황에 지쳤다”고 하소연하는 투자자가 적지 않다. 유독 격하게 진행돼온 테슬라와 공매도 세력과의 전쟁은 ‘CEO 리스크’에 베팅한 이가 그만큼 많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공매도 세력들은 “머스크 광대극의 끝을 보고 싶다”고 말한다. 머스크의 실체를 드러내 주가 거품을 걷어내는 일이라며 공매도를 옹호한다. 이에 맞선 주주들은 머스크의 트윗에 “당신이 자동차와 주행에 대해 이야기하던 옛날이 그립다”며 핵심 역량에 집중해달라고 호소하고 있다. 치열해지는 전기차 경쟁, 글로벌 경기침체 우려, 중국을 비롯한 주요 시장에서의 실적 부진 등 테슬라가 부딪힌 난관은 결국 머스크가 뚫어내야 하는 숙제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12-24(토) ‘실내 마스크’ 3년 만에 의무에서 자율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29개국 가운데 실내 마스크 착용이 의무인 나라는 한국뿐이다. 미국 영국 프랑스 등 10개국은 실내외 마스크를 모두 벗었다. 이들 나라에선 마스크 착용 의무가 ‘내 몸은 내 것’이라는 자유를 침해한다고 본다. 마스크 착용을 강제하기 어려운 문화다. 마스크를 쓰고 나가면 되레 바이러스를 전파할 가능성이 있는, 아픈 사람으로 여긴다. 나머지 18개국은 집단 감염 우려가 큰 곳에 국한해서 쓴다.

 

▷정부가 코로나19 확진자 및 사망자 감소와 의료대응 역량 등을 따져보고 유행의 정점이 지났다고 판단하면 실내 마스크 착용 의무를 권고로 전환할 예정이다. 이르면 다음 달 설 연휴 이후로 예상된다. 2020년 1월 20일 국내 첫 코로나19 환자가 발생한 지 꼭 3년 만이다. 마스크 수급 대란이 진정되던 그해 10월부터는 전국적으로 실내외 마스크 착용이 의무가 됐다.

▷실외 마스크 착용 의무는 석 달 전 해제됐다. 하지만 길거리에서 마스크를 벗은 사람을 보기 어렵다. 반면 옹기종기 모여 식당에서 밥을 먹거나 카페에서 커피를 마실 때는 마스크를 쓰지 않는다. 먹을 때만 벗도록 했지만 거의 지켜지지 않는다. 사실상 마스크 규제가 유명무실해졌단 얘기다. 마스크 착용의 비용이 효과를 상쇄한다는 연구도 축적되고 있다. 특히 영유아의 경우, 언어와 사회성 발달이 지연되고 면역력을 기를 기회를 빼앗긴다.

 

▷한국 일본 대만 등은 마스크 착용으로 코로나19 초기 대응에 선방했다. 마스크를 쓰라는 집단적 압력이 강한 한국, ‘가오판쓰(顔パンツ·얼굴팬티)’라 부르며 마스크를 벗기 싫어하는 일본 등 아시아 국가들에선 마스크 수용도가 높았다. 덕분에 바이러스가 델타로, 오미크론으로 변이를 거듭하며 치명률이 낮아질 때까지 시간을 벌었다. 그사이 백신도 개발돼 접종이 시작됐다. 마스크 의무화가 늦었던 미국 유럽 등은 팬데믹 초기 치명률이 높았다. 2020년, 2021년 미국의 사망 원인 3위는 코로나19였다. 앓을 만큼 앓고 집단면역이 형성된 셈인데 안타까운 희생이 많았다.

▷마스크를 벗은 나라들은 확진자와 사망자가 치솟는 경험을 했다. 백신 접종률과 항바이러스제 처방률부터 끌어올려야 한다. ‘위드 코로나’를 선언한 중국의 환자 폭증도 부담스러운 변수다. 마스크를 벗으면 사회·경제적 약자, 건강 취약계층부터 피해를 본다는 우려도 있다. 다행히도 최근 설문조사를 보면 실내 마스크 착용이 해제되더라도 10명 중 2명만 마스크를 즉각 벗겠다고 응답했다. 코로나19를 지혜롭게 헤쳐온 국민을 믿고 자율에 맡길 때도 됐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12-26(월) 중국 하루 확진자 3700만 명 vs 3049명

 

중국 국가위생건강위원회는 14일 “다른 검사로 코로나 양성 반응이 나왔지만 증상이 없는 사람들은 PCR 검사가 의무가 아니어서 무증상 감염자의 정확한 통계를 낼 수 없다”며 “오늘부터 무증상 감염자 통계를 내지 않는다”고 밝혔다. 뉴욕타임스가 중국 당국의 통계를 바탕으로 집계한 결과에 따르면 지난주 중국은 하루 평균 2650명의 신규 확진자가 발생했다. 이는 지지난주의 하루 평균보다 88%가 감소한 수치다.

 

▷중국 정부가 무증상자까지도 PCR 검사를 의무화했던 제로 코로나 정책의 완화를 발표한 것은 7일이다. 존스홉킨스대학 집계에 따르면 중국은 국민의 92.6%가 최소한 1회 이상의 백신 접종을 받았다. 그러나 그 백신은 중국산 백신으로 세계보건기구(WHO)가 권장하는 mRNA 방식의 화이자나 모더나 백신이 아니어서 감염예방률이 크게 떨어진다. 이 상태에서의 방역 완화는 장기적으로는 몰라도 단기적으로 확진자의 급속한 증가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블룸버그 등의 보도에 따르면 외부로 유출된 중국 국가위생건강위원회의 회의록 자료에 20일 하루 코로나 확진자가 3700만 명으로 추정된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12월에만 중국 인구의 18%에 이르는 2억4800만 명이 확진됐으며 베이징과 쓰촨성의 경우는 절반 이상이 감염된 것으로 추정된다는 내용도 들어 있다. 그러나 중국 보건당국의 공식 집계에 20일 확진자는 고작 3049명이었다.

 

▷3700만 명 대 3049명은 차이가 너무 커서 둘 다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중국 정부의 교묘한 집계 때문에 감염 실태를 숫자로 확인하기는 계속 어려울 듯하다. 다만 방역 완화 이후 베이징 등 대도시의 화장장이 24시간 돌아가고 그 앞에 늘어선 영구차의 긴 줄이 줄지 않는다는 목격담에서 코로나로 인한 사망자가 늘었으며 확진자는 그보다 훨씬 더 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중국 내 약국에서 감기약이 동났다는 보도에 이어 중국인들이 일본 등 이웃나라까지 가서 감기약을 구매하고 있다는 보도에서 사태의 심각성을 짐작할 수 있다.

▷존스홉킨스대학 집계에 따르면 인구 10만 명당 코로나 사망자 비율은 중국이 1.18명으로 압도적으로 적다. 주요 20개국 중에서 중국에 이어 두 번째로 적은 일본이 43.24명이다. 한국은 61.92명으로 5번째로 적다. 코로나가 다 끝나지 않아 이 수치는 아직 잠정적이다. 게다가 중국 같은 나라가 보고한 통계는 신뢰하기 어려워 예년보다 늘어난 초과사망자의 숫자를 구해 수정해야 한다. 중국이 그때도 1등일지는 이제 장담하기 어려워졌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12-27 北 사이버 도둑 ‘김수키’가 남긴 발자국

 

외교안보 전문가들은 올 4월부터 10월 사이 여러 차례 수상한 이메일을 받았다. 그중엔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출입기자 명의로 한미 정상회담 관련 뉴스링크에 댓글을 부탁하는 내용이 있었다. 태영호 의원실 비서 명의로 수신자가 참석하지도 않은 통일 정책 세미나에 대한 사례비를 준다고도 했다. 무심코 링크나 첨부파일을 열면 악성코드가 삽입돼 메일을 실시간으로 감시당하거나, 컴퓨터 내부 자료까지 도난당한다. 최소 892명에게 메일이 발송됐고, 49명이 피해를 입었다.

 

▷경찰청은 이 같은 이메일 사칭이 북한 정찰총국 산하 해킹 조직인 일명 ‘김수키(Kimsuky)’의 소행이라고 25일 밝혔다. 김수키가 저지른 8년 전 원전 도면 유출 해킹 사건과 인터넷 주소(IP)가 거의 동일하고, 악성코드의 핵심 기술이 똑같다는 것이다. 경유 서버로 접속한 컴퓨터에선 백신의 북한말 ‘왁찐’을 인터넷에서 검색한 기록도 있었다. 전문가들은 “도둑이 남긴 발자국이 상습범의 것과 일치한 것”이라고 본다.

▷북한의 사이버 공격 능력은 러시아와 함께 세계 1, 2위를 다툰다. 김수키라는 이름을 처음 붙인 곳이 러시아의 한 백신 업체다. 사이버 공격에 사용된 메일 계정이 영문으로 ‘Kimsukyang’(김숙향)이라는 것을 파악하고, 해킹 조직의 이름을 러시아식으로 ‘Kimsuky’로 부른 보고서를 2013년 냈다. 그때부터 국내외 전문가들은 이메일에 악성코드를 숨겨 개인 정보를 빼돌리는 북한 해킹 조직을 김수키로 불렀다.

 

▷정찰총국은 정보 탈취가 주된 임무인 김수키 외에도 서로 다른 역할을 수행하는 해킹 조직 3, 4개를 더 운영 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라자루스(Lazarus)’가 대표적이다. 방글라데시 중앙은행에서 10억 달러를 해킹으로 인출해 카지노를 통해 돈세탁을 하려다가 미국 연방수사국(FBI)에 적발됐다. 북한 체제를 조롱한 영화를 제작한 미국 소니 픽처스도 해킹했다. 기업을 전문적으로 노리거나 암호화폐 거래소를 주로 공격하는 해킹 조직도 있다.

▷북한은 1990년 ‘조선컴퓨터센터(KCC)’를 설립한 뒤 영재 교육 시스템으로 해커들을 양성해왔다. 특히 김정은이 사이버 전쟁을 핵, 미사일과 함께 3대 전쟁 수단으로 선언한 이후 인력이 2배로 늘었다고 한다. 덩치만 커진 게 아니라 수법도 진화하고 있다. 최근 김수키는 중소기업에 랜섬웨어를 유포해 시스템을 마비시킨 뒤 비트코인을 받고 풀어줬다. ‘총칼 대신 키보드’라는 구호 아래 정보와 기술, 돈을 닥치는 대로 훔쳐가는 이들을 막지 못하면 우리에겐 진짜 총칼 못지않은 위기가 닥칠 수 있다.
정원수 논설위원 needjung@donga.com

 

12-28 별난 몸짓·말투도 돈 받고 파는 시대 오나

 

지난해 초 가수 아이유와 쏙 빼닮은 외모로 틱톡에서 인기를 끌던 중국의 뷰티 인플루언서가 화제가 됐다. 아이유 특유의 깜찍한 옷차림, 표정을 따라할 뿐 아니라 눈매, 얼굴형까지 흡사해 중국의 아이유, ‘차이유’로 불리던 인물이다. 하지만 중국 누리꾼이 폭로한 차이유의 실제 외모는 아이유와 전혀 닮지 않았다. 영상 합성 기술 딥페이크로 만든 가짜 얼굴이었던 것이다. 이런 사건들을 통해 ‘퍼블리시티(Publicity)권’에 대한 관심이 국내에서 확산됐다.

 

▷법무부가 내년 상반기 중 ‘인격표지(標識) 영리권’을 넣어 민법을 고치기로 했다. 미국 36개 주와 독일, 일본, 프랑스 등이 인정하는 퍼블리시티권을 한국에 도입한다는 것이다. ‘사람은 자신의 성명, 초상, 음성, 그 밖의 인격표지를 영리적으로 이용할 권리를 갖는다’는 조항이 신설된다. 권리를 위임하거나 물려주는 것도 가능해진다. 상속 후 권리 존속 기간은 30년이다. 자녀가 부모의 퍼블리시티 권리를 충분히 이용할 수 있는 시간이다.

▷법이 도입되면 ‘차이유 사건’ 같은 일이 생겼을 때 손해배상 청구 등으로 대처할 수 있게 된다. 지금까지 퍼블리시티권을 명문화한 법이 없어 한국 법원은 유명인 초상권이 상업적으로 무단 사용된 경우 부정경쟁방지법 등에 따라 판단해 왔다. 아이돌 가수가 기획사에 초상권 활용 권한을 위임할 수 있는지 불분명했는데 이런 권리관계도 명확해진다. 신념에 어긋나는 등 중대 사유가 발생하면 위임을 철회할 수도 있다.

 

▷퍼블리시티권과 많이 혼동되는 권리가 저작권이다. 저작권은 노래, 영화, 문학작품 등 창작물을 보호할 뿐 창작자 개인의 특성까지 보호하진 않는다. 퍼블리시티권에는 초상권, 음성권, 성명권뿐 아니라 특색 있는 개인의 몸짓, 말투까지 포함될 가능성도 있다. 유명 배우의 말투, 인기 개그맨의 유행어를 성우 등 다른 사람이 성대모사 해 상업광고에 사용하는 게 그런 경우다. 원래의 배우, 개그맨에게 보상할 의무가 발생할 수 있다. 유명해진 범죄자가 자기 얼굴, 이름 등을 영리 목적으로 이용하려 할 때 이를 용인할 것이냐 하는 논란도 예상된다.

▷이 법이 주목받는 건 일반인도 유튜브, 인스타그램 등 소셜미디어에 올린 짧은 동영상 하나로 ‘벼락스타’가 될 기회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언론의 자유,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본인 의사에 반해 이름, 사진 등이 사용될 경우 손해배상도 청구할 수 있게 된다. 외모, 이름, 목소리를 자신만의 브랜드로 잘 키우면 돈도 벌고, 심지어 자녀나 배우자에게 유산으로 물려줄 수 있는 시대가 오고 있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12-29 “정치를 해본 적이 없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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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의 발언이 또다시 논란을 불렀다. 27일 이태원 국정조사에서 참사 당일 첫 보고를 받고 85분 뒤에야 현장에 도착했다는 야당 의원의 질의에 이 장관은 “그 시간은 이미 골든타임을 지난 시간이었다”고 답했다. “그 시간 동안 참사 현장에서 많은 국민들이 죽어가고 있었다”는 야당 의원의 주장을 반박하다 튀어나온 말이다. 결국 “제가 골든타임을 판단할 자격이 없는데 성급하게 말한 것 같다”며 사과했다.

 

▷이 장관은 구설에 올랐다가 사과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참사 다음 날 “경찰이나 소방 인력을 미리 배치해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고 했다. 국민 안전을 책임지는 주무 부처 장관으로서 부적절한 발언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이 장관은 이틀 만에 “국민 여러분께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며 고개를 숙였다. 야당 등의 사퇴 요구가 비등할 때 “누군들 폼 나게 사표 던지고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겠느냐”고 해 또다시 논란에 휩싸였다.

▷이 장관은 15년간 판사로 지냈다. 스스로 “저는 정치를 해본 사람이 아니다. 법률적으로 말한다고 했는데…”라고 주변에 말한다고 한다. 관가에선 과거 국민권익위원회 부위원장을 할 땐 직원들의 얘기를 잘 경청했는데, 장관이 되고 태도가 좀 변한 것 같다는 얘기도 들린다. 경찰국 신설 때 경찰서장들의 반발을 “하나회 쿠데타와 다름없다”고 했다가 사과한 것이 단적인 예다. 대통령의 고교 및 대학 후배라는 사실에서 근원적 원인을 찾는 시각도 있다.

 

▷경찰 승진 후보자를 집무실에서 면담했던 이 장관은 경찰 인사에도 거침이 없다. 대학 동문을 경찰에 밀고한 의혹을 받고 있는 김순호 초대 경찰국장을 경찰대학장으로 발령 낸 것이 대표적이다. 정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승진까지 시킨 건 경찰국 신설에 대한 기 싸움에서 밀리지 않겠다는 뜻으로도 볼 수 있다. 현 정부 들어 고속 승진한 조지호 치안정감과 김희중 치안감을 각각 ‘경찰 2인자’인 경찰청 차장과 후임 경찰국장에 임명한 것도 마찬가지다. 조 차장은 대통령직 인수위에서도 근무했다.

▷판사나 장관이나 똑같은 공직자다. 공직 수행에 있어 필요한 자질이나 자세도 크게 다르지 않다. 사적 인연이 있는 대통령에 의해 발탁됐지만 대한민국 장관이다. 장관에 취임한 지 벌써 7개월이 넘었다. “정치를 해본 적이 없어서…”라는 말만 할 때는 지났다. 그는 “사의를 표명하거나 대통령실과 의논한 바가 없다”고 했다. 이쯤에서 자신의 위치를 냉정하게 되돌아봤으면 한다.
정원수 논설위원 needjung@donga.com

 

12-30  90m 절벽서 떨어진 커플 살린 한국車

 

심하게 찌그러진 채 뒤집어진 차량에서 사람이 생존하긴 어려워 보였다. 험준한 바위 협곡 밑으로 90m 넘게 굴러 떨어진 차였다. 15초간의 낙하 충격으로 타이어까지 튕겨 나갔다. 그런데 차량 안에 타고 있던 미국인 커플은 뼈 하나 부러진 곳이 없었다. 이들은 소셜미디어에 사진과 함께 기적과 같은 생존 사실을 알렸다. “현대 엘란트라(국내 모델명 아반떼) N은 훌륭한 차”라면서.

 

▷이달 중순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일어났던 차량 사고의 생존자 커플은 뒤늦게 진행한 워싱턴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백만분의 1 확률로 살아남았다”고 했다. 요즘 한국 자동차의 안전성을 따져보면 사실 그 확률을 확 올려서 말해도 무리가 없다. 지난해 2월 골프선수 타이거 우즈가 제네시스 GV80를 타고 가다 벌어진 충돌 사고에서 살아남았고, 올해는 유명 아이스하키 선수 야로미르 야그르가 기아 EV6를 몰다 트램에 부딪혔지만 경미한 부상에 그쳤다. 그는 당시 “기아가 나를 구했다”고 했다.

▷교통사고 시 생존을 결정짓는 핵심 요소는 내부 안전공간 확보와 충격 완화다. 충격을 받아도 비틀리지 않고 버티는 힘이 좋은 초고장력 강판의 사용 비중이 높을수록 안전성이 커진다. 반대로 충격 흡수가 필요한 부분에서는 아코디언처럼 잘 구부러지게 만드는 기술도 필요하다. 용접 기술과 접착제, 내부 보강재 성능도 영향을 미친다. 최대 10개에 이르는 에어백 중에는 탑승자들끼리 머리가 부딪혀 깨지지 않도록 중간 히터에서 터지는 것도 있다.

 

▷글로벌 자동차업체들의 안전성 강화 경쟁은 치열하다. 현대차의 경우 국내에서만 연간 700여 회의 충돌 테스트를 진행한다. 영하 40도의 혹한에서부터 데스밸리 사막의 혹서까지 다양한 환경을 설정해 실험용 차량을 떨어뜨리고 굴리고 처박는다. 사람 모양의 실험용 더미도 나이와 성별 등 특성에 따라 160개가 넘는다. 더미의 몸 곳곳에 부착된 센서도 150개에 이른다. 메르세데스벤츠는 별도의 시뮬레이션 테스트까지 1만5000회를 거치고, 볼보는 교통사고 데이터를 분석, 누적해 연구에 반영하고 있다.

▷눈부신 기술 발달 덕에 “이제 웬만한 자동차 사고로는 사람이 죽지 않는 시대가 왔다”는 말도 나온다. 미국 고속도로안전보험협회(IIHS)에서 안전성 최고 등급인 ‘TSP+’를 받는 국산차도 계속 늘어나고 있다. 그래도 국내에서는 여전히 한 해 교통사고 사망자가 3000명에 육박한다. 하드웨어 안전장치에만 기대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음주운전 근절, 안전벨트 착용, 상대방을 배려하는 신중한 운전 같은 기본이 지켜져야 한다. 자동차 안전성의 핵심 키도 결국 사람이 쥐고 있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12-31(토) 얼굴 없는 기부천사, 누군지 알아내려 애쓰지 말자

 

해마다 이맘때면 전북 전주시 노송동주민센터엔 ‘발신자 표시 제한’으로 전화를 걸어오는 사람이 있다. 올해는 “다솔어린이집 유치원 차 뒷바퀴에 상자를 두었다”고 했다. 직원들이 달려가 찾은 상자 안에는 지폐 뭉치와 동전까지 현금 7600만5580원, 그리고 편지가 들어 있었다. “등록금이 없어 꿈을 접어야 하는 학생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이 익명의 독지가는 2000년 “어려운 이웃을 위해 써 달라”며 58만4000원을 놓고 간 이후 23년간 9억 원 가까이 기부했다. 전주에선 그를 ‘얼굴 없는 천사’로 부른다. 경남 창원에는 ‘얼굴 없는 산타’가 있다. 2017년부터 성탄절이나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익명으로 성금을 보내온다. 올해는 우크라이나 전쟁과 이태원 참사 피해자들,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 약 6000만 원을 기탁했다. 지금까지 기부 총액은 5억4500여만 원.

▷쌀이나 라면으로 온정을 전하는 이도 있다. 16년째 직접 농사지은 햅쌀을 기부하는 경남 거창군 ‘마리면 천사’, 명절마다 쌀 과일 떡 같은 제수용품을 두고 가는 광주 광산구 ‘하남동 천사’가 그들이다. 서울 양천구 ‘신월3동 천사’는 새벽에 몰래 트럭을 몰고 와 주민센터에 쌀 500kg, 라면 50박스, 귤 50박스를 내려놓는 모습이 폐쇄회로(CC)TV에 잡혔다. “이곳에서 할머니와 지독한 가난에 빠져 살았습니다. 지금은 작게나마 도울 수 있어서 가슴 따뜻합니다.”

 

▷고마운 독지가의 얼굴을 기어이 알아낼 때도 있다. 매년 쌀을 보내오는 울산 중구 복산2동 천사는 주민센터가 쌀을 가져온 배달업체에 수소문해 신원이 밝혀졌다. 서울 신월동 천사는 2011년 명동 자선냄비에 1억1000만 원짜리 수표를, 이듬해엔 같은 냄비에 1억570만 원짜리 수표를 넣었다. 자선냄비본부는 수표와 함께 건넨 편지의 필적을 감정해 두 사람이 동일인임을 확인했고 결국 그의 정체가 공개됐다. “폐지 줍는 어르신들 보면 지독히 가난했던 어머니가 떠올랐다. 못다 한 효도 대신 기부를….”

▷충남 천안시 청룡동 천사는 “내가 누군지 알려고 하면 다시 들고 가겠다”며 지난 28일 현금 9900만 원이 든 가방을 내밀었다. 기부천사들이 한사코 선행을 숨기는 이유는 ‘받는 이들에게 부담될까 봐’ ‘누군지 모르면 감동이 오래 유지되므로’ ‘기부 사실이 인간관계에 영향을 주는 게 싫어서’라고 한다. 기부할 때 활성화되는 뇌의 부위는 내 통장에 입금할 때 활성화되는 뇌의 부위와 같다. 그러니 감사한 마음에 얼굴 없는 천사의 정체를 알아내려 애쓰지 말자. 인간은 받는 기쁨보다 주는 행복이 더 크다는 걸 아는 존재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