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라이브러리속의 모던 경성 2022-03] 09.03 100년전 조선은 왜 베토벤 100주기를 - 12.31(토) 한복차림 조선인은 ‘일본탕’ 출입금지
[뉴스 라이브러리속의 모던 경성 2022-03] 조선일보 김기철 학술전문기자
09.03 100년전 조선은 왜 베토벤 100주기를 떠들썩하게 기념했을까
슈베르트·파가니니 100주기, 차이콥스키·비제 탄생 100년도 기념

▲1927년 조선의 신문사들은 앞다퉈 베토벤 100주기를 대대적으로 기념했다. 베토벤 음악을 들을 기회도, 연주자도 드물던 시절이었다.
베토벤 탄생 250주년을 맞은 2020년, 세계 음악계는 ‘악성’ 탄생을 기념하는 행사를 잔뜩 준비했다. 국내 공연장과 연주단체마다 잇따라 계획을 발표했다. 클래식 음악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연주회를 홍보하는데 훌륭한 계기로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코로나 바이러스의 습격으로 행사가 줄줄이 취소됐다. 공연계는 쑥대밭이 됐다. 무관중 스트리밍 공연으로 겨우 명맥만 이어갔다.
‘베토벤 250주년’이란 절호의 기회를 눈뜨고 놓칠 수밖에 없었지만 눈치빠른 이들은 알아차렸을 것이다. 한 번 더 기회가 남아있다는 사실을. 2027년은 베토벤 200주기이기 때문이다.
100년 전 조선에서 베토벤 100주기를 대대적으로 기념했다는 사실을 아시는가. 조선, 동아일보는 물론 매일신보, 경성일보까지 베토벤 사후(死後) 백주년을 알리는 기사와 특집이 넘쳐났다. 오케스트라는커녕 개인 연주자도 드물었던 때였다. 베토벤 음악을 들어본 이들도 드물었던 시절, 베토벤 백주기는 왜 기념했을까.

▲베토벤을 음악계의 셰익스피어로 빗댄 조선일보 1927년3월26일자 '베토벤 약전'1회.
◇'위대한 예술가이기 전에 偉人'
‘1927년 3월26일 바람이 불고 우뢰가 울고 우박이 오던 날 아침에 오래 병으로 고생하던 베토벤의 영혼은 하늘로 올라간 뒤로 오늘 꼭 100년째임으로 구미 각국은 물론이오, 문화가 발달된 어느 나라에서든지 악성의 백년제를 거행하게 되었습니다.’(‘베토벤 100년제’,조선일보 1927년3월26일)
조선일보는 이날 자부터 ‘베토벤 약전’을 나흘 연속 연재했다. ‘시가(詩歌)에 있어서 셰익스피어의 위대함을 잊을 수 없는 것같이 음악에 있어서 또한 베-토벤의 위대함을 잊을 수가 없다.’
베토벤을 문학의 셰익스피어에 견줄만한 위인으로 치켜올린 뒤, ‘그는 세계 음악사상에 나타난 모든 악성들 가운데에서 최고위를 점령하고 있다. 그는 재래의 음악으로 하여금 신(新)경로를 찾게하였으며 근대 악계(樂界)의 발달은 그의 영향을 좇아 기인함이라 할만큼 그의 음악사상에 처한 그 천재적 공적은 위대하다’ (이상 ‘베토벤 약전’, 1927년3월26일)고 소개했다.
필자는 그의 음악뿐 아니라 시련에 맞서 ‘진리를 탐구하고’ ‘현실을 관찰하는’ 능력이 탁월하다고 썼다. ‘위대한 예술가인 그보다도 먼저 위인(偉人)이며 비애의 인(人)이었다’는 것이다.

▲2017년 오스트리아 브레겐츠 페스티벌에서 공연된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 세계에서 가장 많이 공연되는 오페라중 하나이다. 1938년 비제 탄생 100년을 맞아 동아일보는 3회에 걸쳐 '비제와 카르멘, 그의 탄생 100년제를 앞두고' 기사를 실었다.
◇ ‘베토벤 이야기는 많이 듣지만 작품을 들을 기회는 적다’
동아일보도 베토벤 100년제를 적극적으로 보도했다. ‘베토벤 백년제, 세계가 협력해 대규모로 준비’(1927년2월13일) 기사가 출발이었다.’세계적 악성 베토벤씨의 사후 백년제를 세계에서 제각기 사계(斯界)유지들의 발기로 행할 터이라는 바, 각각 그 규모가 매우 크며...’ 기사는 독일 베를린,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기념 연주를 준비하고, 오스트리아는 ‘대통령 협찬’아래 위원회가 조직돼 준비 중이라고 전했다.
이 신문은 ‘베토벤의 일생과 작품에 나타나는 그의 성격’(3월27일, 3월29일~4월1일)를 5회에 걸쳐 연재했다. 평양 숭실전문학교와 미국 신시내티 음악학교를 졸업한 피아니스트 박경호가 썼다. 베토벤의 생애와 일화를 소개한 이 글은 이렇게 마무리한다. ‘우리는 베토벤의 이야기는 많이 듣지만 그의 작품은 들을 기회가 적다. 우리는 이런 불평(不平)한 처지를 면하기를 바라는 동시에 베토벤을 그의 음악으로 충분히 우리에게 알려줄 (음)악가가 어서 많이 나기를 빌면서…'
베토벤은 물론 다른 작품도 실제 공연으로 들을 수 있는 기회가 매우 드물던 시절이었다.
◇'베토벤 이래 최대 경앙을 받는 슈베르트’
슈베르트, 파가니니 서거 100년, 차이콥스키, 비제 탄생 100년을 기념하는 특집 기사도 나갔다. 스트라디바리 서거 200년까지 기념할 정도였다. 매일신보는 ‘악성 ‘슈벨트’의 백년제’(1928년12월13일)라는 기사에서 슈베르트를 ‘베토벤 이래 최대 경앙(敬仰)을 받는 음악가’ 로 소개했다.
파가니니 서거 100년 기사는 이렇게 썼다. ‘그의 연주는 화려하고 우아하기로 평판이 높으며 이태리 음악에다가 로맨티시즘을 고취한 선구자’(‘파가니니 백년제’, 조선일보 1940년1월18일)라는 평가와 함께 백년제 기념 바이올린 콩쿠르 개최 뉴스를 소개했다.

▲차이콥스키 탄생 100년을 맞은 1940년, 동아일보는 '차이코프스키 소묘, 그의 생애와 음악' 연재기사를 6회에 걸쳐 내보냈다./위키피디아
◇‘카르멘’을 중심으로 비제 탄생 100년 기념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기획도 종종 실렸다. 동아일보는 ‘삐제-와 카르멘, 그의 탄생 100년제를 앞두고’(1938년 10월23일~27일)를 상,중, 하(총3편)로 연속 내보냈다.음악평론가 김수향(金水鄕)이 필자였다. 홍난파가 작곡한 동요 ‘은행나무 아래서’ ‘참새’의 노랫말을 쓴 작사가이기도 했다. 김수향은 오페라 ‘카르멘’을 중심으로 비제를 조명했다. ‘실로 ‘카르멘’은 베르디의 ‘리골레토’와 더불어 고금무수(古今無數)한 오페라 작품 가운데 가장 유명한 가극이오, 가장 일반화한 ‘포풀랄오페라’라고 본다.’
동아일보는 1940년 5월 차이콥스키 탄생 100주년을 맞아 연재 기사를 실었다. 소련과 유럽이 나치 독일이 일으킨 전쟁에 휩쓸려 차이콥스키 탄생 100년을 축하할 여유조차 없던 시기였다. ‘차이코프스키 소묘, 그의 생애와 음악’(1940년5월18일~26일,총 6회). 필자는 또 김수향이었다.
김수향은 ‘슬라브민족의 근본적인 템프라멘트를 가진 내셔널한 작곡가인 동시에 인터내셔널한 작곡가로 다분히 근대 독일, 불란서, 이태리 음악의 특이한 체질을 접종하여 그의 음악은 근(近)구 러시아음악가운데 가장 인터내셔널하고 따라서 유니버셜한 음악이 되었다고 생각한다’고 썼다.
◇ ‘서양 음악, 문명인의 필수 교양’
100년 전 신문, 잡지는 ‘백년제’(百年祭)를 계기 삼아 서구의 유명 작가, 예술가, 지식인을 대대적으로 기념했다(‘모던 경성’, ‘吾人은 자유의 神을 눈물로 조문한다,나폴레옹 100주기 열풍’, 2022년2월12일). 100년 단위로 기념하는 서구의 관습과 이를 본받은 일본 언론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나름대로의 이유도 있었다. 부국강병에 뒤져 식민지로 전락한 민족의 재건을 위해선 근대화에 앞선 서구를 하루빨리 뒤따라야 했다. 근대 문명의 개척자와 주인공을 널리 소개함으로써 민중을 계몽시키고 문명 사회를 향한 의식 개선에 앞장섰다. 베토벤과 슈베르트, 차이콥스키와 비제 같은 음악가들이 만들어낸 서양 음악도 근대 문명의 일부로 간주됐고, 문명인의 필수 교양으로 받아들여졌다. 모던 보이, 모던 걸이 강박적이다시피 서양 클래식 음악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이런 이유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참고 자료
김미지, 우리 안의 유럽, 기원과 시작, 생각의 힘, 2019
09.10 美 세계일주관광단 태운 인력거 640대, 경성을 질주하다
호텔 없어 기차 침대칸서 자고, 창덕궁, 총독부 청사 구경…가는 곳마다 人力車 장사진

▲1926년3월 경성역에 도착한 세계일주관광단을 위해 출동한 인력거들이 장사진을 이뤘다. 자동차가 충분치 않아 관광단은 인력거 640대를 타고 창덕궁을 구경했다. 조선일보 1926년3월10일자
1926년 3월9일 아침 경성역 앞에 인력거 640대가 몰려들었다. 미국을 비롯한 38개국 출신 세계일주관광단 637명을 맞기 위해서였다. 이 대규모 관광단은 하루전인 8일 오후 2만톤 기선 ‘라코니야’호(號)를 타고 인천항에 들어왔다. 경성까진 임시열차로 이동했다. 당시 그만한 인원을 태울 자동차가 경성엔 없었다. 인력거에 한사람씩 태우는 게 유일한 방안이었다.( ‘인력거로 장사진’, 조선일보 1926년3월9일)
◇호텔 모자라 기차 침대칸에서 숙박
관광단은 두차례 나눠 입경(入京)했다. 8일 저녁 8시5분 1차 97명이 들어왔는데, 숙소가 충분치 않았다. 1914년 문 연 조선호텔에 50명이 묵고, 나머지는 경성역 구내에 정차한 열차 침대칸에 재웠다. 해외 관광객을 받을 인프라가 없던 시절이었다. 다음날인 9일 오전 10시45분 본진 540명이 열차로 경성역에 도착했다. 이들은 두팀으로 나눠 창덕궁 비원과 갓 들어선 총독부 청사 등 시내 관광에 나섰다. 한나절 관광을 마친 이들은 오후4시5분 열차로 인천에 돌아갔다.( ‘입경한 미국관광단’, 조선일보 1926년3월10일 석간2면, ‘미관광단 퇴경’, 조선일보 3월10일 조간2면)

▲위키피디아 1922년 진수한 영국 선적 2만톤 기선 라코니아. 배 길이만 183.3미터다. 최초로 세계 일주 크루즈를 한 배로도 알려졌다. 1926년 3월8일 인천항에 들어온 라코니아 승객 640명이 경성 관광을 즐겼다.
◇세계일주관광이란 과연 무엇?
서양 관광객들이 탄 인력거 640대가 거리를 달리는 모습은 장관이었을 것이다. 신문에도 줄지어 늘어선 인력거 사진이 실렸다. 관광 인프라 부족도 도마에 올랐다. ‘여관 불비(不備)는 빈약의 소치(所恥)’(‘팔면봉’, 조선일보 1926년3월10일 석간1면)라는 비판이 나왔다. 하지만 2만톤 초대형 기선에 640명 넘는 여행객이 선상 무도회를 열고, 목사까지 동반해 결혼식까지 올린다는 얘기는 도무지 납득할 수없었던 모양이다. ‘팔면봉’ 마지막 문장은 이랬다. ‘세계일주관광단! 관광이 과연 무엇?’ 어마어마한 돈을 내고 초대형 기선으로 세계일주 관광을 한다는 사실 자체가 식민지 상황에선 초현실적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위키피디아 1920년대 라코니아 호 선실 내부를 담은 사진. 가든 라운지, 식당, 라운지, 흡연실이다.
◇”그대들은 우리를 이해해 주기를 바란다”
대규모 세계일주관광단은 신문 사설에도 등장한다. ‘우리는 열국의 손님들이 많이 와서 우리 조선을 시찰하고 돌아가서 각기 생각하는 대로 우리 조선 사람의 생활과 모든 제도를 비판하여 주기를 바란다.’ 사설은 이런 당부도 했다. ‘그대(미국인)들의 선조가 1776년에 있어서 영국에 대하여 취하던 그 정신과 그 태도로써 우리에게 대하고 또 우리를 이해하여 주기를 바란다.’(‘미국관광단’, 1926년3월11일) 식민지 조선의 처지에 공감과 연민을 보여달라고 에둘러 표현한 셈이다.
◇최초의 세계일주 크루즈 항해 한 라코니아
세계일주 관광단이 타고 온 라코니아(Laconia)호는 영국 리버풀에 선적(船籍)을 둔 대형 기선이었다. 1922년 5월25일 영군 사우샘프턴에서 보스턴으로 첫 항해를 했다. 이후 늦봄부터 초겨울까지 대서양을 정기 운항했다. 1등석 350명, 2등석 350명, 3등석 1500명 등 승객 2200명을 수용할 수있었다고 한다.
첫 항해한 1922년11월21일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사(社)가 임대해 세계일주 항해에 나섰다. 승객 347명을 태우고 130일간 항구 22곳을 방문하는 일정이었다. 최초의 세계일주 크루즈여행이었다. 라코니아는 첫 항해 20년 만에 비운의 최후를 맞는다. 2차 대전 당시 군함으로 쓰이다 1942년 9월12일 밤 독일 잠수함 어뢰 공격으로 침몰했다. 군함에 탄 이탈리아군(軍) 포로 1809명 중 415명만 구조됐다고 한다.

▲관광객 중엔 꼴불견도 있었다. 석영 안석주는 만문만화에서 인력거에 탄 젊은 여성이 담뱃대를 꼬나물고 부채질하며 거리를 달리는 모습을 담았다. 조선일보 1930년4월20일
◇대규모 관광단 온다는 보도 줄이어
20세기 전반은 대형 기선, 철도의 등장으로 모험가의 전유물이던 세계일주가 가능해진 시대였다. 일본 요코하마를 거쳐 부산, 인천에도 세계일주관광단이 들어왔다. 세계 대전이 마무리된 1920년, 조선까지 찾아오는 세계일주관광단이 종종 있었던 모양이다. ‘요즘 신문 지상에나 무슨 통신을 보든지 유람객이니 관광단이니 하여 가지고 내조(來朝)한다는 보도가 없을 적이 없다.’(‘餘墨’, 조선일보 1920년5월12일)
‘외국인들은 대대적으로 세계주유관광단을 조직한다는데 언제든지 이러한 일에는 남에게 밑지지 않는 미국인이 남먼저 내(來)19일에 도착하리라는 ‘레이몬드웟트컴’사(社)의 일행 19명을 위시하야 내년 1월에는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사(社) 주최로 조직된 450명의 관광단이 일본에 도착하야 그 중 100명은 조선을 거쳐서 중국으로 향한다 하며 또 이어서 동월에 ‘유나이티드 아메리칸라인’사(社)의 주최인 동항단(東航團) 450명이 ‘조류트’호를 타고 일본 횡빈에 도착하야 그 중 40명이 조선을 시찰하리라 하며….’( ‘전천후 타격 받던 조선호텔의 금후’, 조선일보 1925년11월11일) 1차대전으로 손님이 준 조선호텔 영업이 다시 활기를 띨 것이라고 예측했다. 세계일주 관광단이 조선에 온다는 뉴스는 1920년대~1930년대 끊임없이 이어졌다.

▲조선일보 1929년4월14일자 2면에 실린 사진. 인력거를 탄 미국관광단이다. 이런 사진이 종종 신문에 실렸다.
◇자동차 100대로 경복궁, 덕수궁 구경
1930년대에 들어서면 인력거 대신 자동차로 이동할 만큼 형편이 좀 나아졌다. 1935년 4월 미국 세계일주관광단 방한을 소개한 기사는 이렇다. ' ‘딸라’의 나라 미국의 호화선 ‘레조류트’호 세계일주관광단은 중국 방면의 관광을 마치고 11일밤에 인천에 입항하야 하루저녁을 배안에서 새운 후 12일 아침에 인천에 상륙한 일행 300명은 전부 일등차로 편성된 임시열차로 오전 9시55분에 경성역에 도착하야 두 대로 나누어 자동차 100여대를 몰아 덕수궁, 경복궁, 총독부박물관 등을 구경한 후 오후0시15분에 조선호텔에 점심을 먹으며 조선 기생들의 춤추는 것을 구경하고 오후4시 임시열차로 인천으로 돌아갔다.’( ‘관광단 호화판 6시간에 7000원’, 조선일보 1935년4월13일)
1937년 여름 경성을 찾은 미국 관광단은 급행열차 노조미호로 경성에 와서 만주로 이동한다고 소개했다.
◇'담뱃대 꼬나물고 부채질하는 젊은 여성’
서구 관광객중엔 현지 문화를 고려하지 않는 꼴불견도 꽤 있었던 모양이다. 인력거를 탄 젊은 여성 관광객이 담뱃대를 물고 부채질하면서 거리를 누비기도 했다. 상중에나 쓰는 백립(白笠)까지 머리에 얹어 혀를 차게 만들었다. ‘촌평의 달인’ 석영 안석주(1901~1950)가 쏘아붙였다.
‘미국의 세계 관광단이란 언제나 도처에서 그 본색을 드러내어 어느 곳에서든지 그들의 특이한 연출은 대 갈채를 받아왔지만 이번에 서울을 다녀간 양키레뷰단은 특히 그 대(大)탈선적 여흥을 보여주었다.’ 안석주는 한마디 보탰다. ‘본받기 잘 하는 이땅의 아가씨들에게 보이기에 꺼려할 만한 꼴이다.’(양키 레뷰단의 가장행렬, 조선일보 1930년4월20일)
◇이정섭과 이순탁의 세계일주기, 신문 연재
1920년대는 조선의 지식인들이 중국과 러시아, 일본은 물론 유럽과 미국으로 유학, 취업, 사업 또는 순전히 여행을 위해 세계로 나갔다. 1920년 조선, 동아일보 창간으로 우리말 민간 신문이 등장하고 개벽, 삼천리, 조광 등 잡지의 전성시대가 열리던 시절이었다. 조선인의 세계 여행기는 신문, 잡지에 홍수처럼 쏟아졌다. 조선일보 네컷 연재만화 ‘멍텅구리’는 1926년 2월부터 6개월간 ‘세계일주’편을 실어 조선인의 세계 인식을 확장시켰다. 한국인 최초로 프랑스 대학을 졸업한 이정섭은 1927년 중외일보 특파원으로 천도교 지도자 최린과 함께 세계 일주를 하면서 신문에 연재 기사를 실었다.
◇1920~30년대는 ‘여행의 시대’
연희전문 교수 이순탁은 1933년4월24일 경성을 출발 이듬해 1월20일 귀국할 때까지 9개월간 17개국을 다니며 현장에서 여행기를 써서 전신으로 보냈다. 도쿄, 요코하마, 상하이, 홍콩, 싱가포르, 카이로를 거쳐 이탈리아, 스위스,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독일, 영국, 아일랜드에 이어 미국을 거쳐 태평양을 건너 귀국하는 일정이었다. 조선일보에 60여차례 연재된 이순탁의 세계일주기는 서유럽을 휩쓴 대공황과 자본주의 위기, 파시즘의 특세를 경제학자 안목으로 관찰한 심층보고서였다. 1920년대~1930년대는 여행의 시대였다.
09.17 땔감 때문에…경찰 발포로 농민 17명 사망
1930년 7월 함남 단천 주민 2000명 군청, 경찰서 습격...삼림조합의 가혹한 벌목 단속 항의

▲단천 사건을 보도한 조선일보 1930년 7월26일자. 특파원을 현지에 파견, 단천 사건의 참상을 화보로도 실었다.
‘군중 습격과 경관 發銃’ ‘즉사 4명, 중경상26명’ ‘군청과 경찰서에 2000명 쇄도’
1930년 7월22일 조선일보 사회면에 심상찮은 기사가 났다. 톱 기사만큼 굵직한 제목이었다. 함경남도 단천에서 군중 2000명이 경찰서와 군청을 습격, 4명이 경찰 발포로 즉사했다는 내용이었다. 2000명 넘는 시위대가 경찰서, 군청을 습격했다는 것도 놀라운데, 실탄 사격으로 4명이나 죽었다는 사실은 충격적이었다.
‘21일(실은 20일) 오후4시경에 함남 단천군 하다면의 면민 약 2000여명이 수일전부터 삼림조합(森林組合)을 중심으로 한 분규사건 때문에 단천읍내에 있는 군청에 쇄도하야 군수를 면회하고 삼림조합의 해산과 이 사건으로 전일 검거된 오십사명의 면민을 석방하여 달라고 요구하였으나 거절을 당하였으므로 군중들은 격앙하야 곤봉과 돌로 군청의 창문과 유리창을 파괴하였다.’(‘군중 습격과 경관 發銃’, 조선일보 1930년7월22일)
경찰 총격에 따른 사망자는 17명까지 늘어났다. 3·1운동을 떠올리게 하는 대규모 시위였다. 총독부의 신경이 함남 북쪽의 산간지대에 쏠렸다. 조선일보는 특파원을 현지에 파견했다. ‘단천 民擾사건 진상’(7월25일)이란 제목 아래 ‘검거는 의연계속’ ‘가족은 통곡, 경계는 엄중’ ‘절명(絕命)된 13명 성명’ 등 시시각각 속보를 내보냈다.
◇박경리 소설 ‘토지’에도 등장
‘단천 삼림조합 반대 사건’으로 알려진 이 사건은 지금은 기억하는 이가 드물다. 하지만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에도 이 사건이 등장할 만큼, 주목을 받은 대사건이었다. 등장인물(관수, 해도사, 소지감)간의 대화에서 ‘단천 사건’의 원인을 묻자 이렇게 답한다. ‘반일 감정이 팽배해있던 차에 불을 붙인 것은 흔히 있었던 일 때문인데, 불법 벌채를 했다 하여 군청에서 조사하러 나간 놈이 남정네도 없는 집에서 아낙을 모욕했던 모양이라….’(’토지’ 14권 166~167쪽, 나남출판, 2002년)
◇주민 괴롭히는 삼림조합 반대
군중들이 군청에 몰려간 가장 큰 이유는 삼림조합 반대였다. 삼림조합은 1920년대 중반 임야조사사업을 마친 뒤, 각 군(郡)에 조직한 관제조합이었다. 임야 소유자와 연고자를 강제로 가입시키고, 벌목을 제한하면서 땔 나무 채취 시기와 채취량을 결정해 시행하는 역할이었다. 조합원들에 조합비를 거두고, 산불방지활동이나 송충이 구제, 벌채 제한 등 부역도 부담시켰다. 사실상 군청 직원이 겸임하는 사실상의 행정 기구로 이름만 조합이었다.
단천군에도 1929년 하반기에 조합이 설립돼 조합비를 부과하기 시작했다. 이듬해 7월 하다면 연대리에서 삼립조합 직원이 조합비를 안낸 주민 집을 찾아갔다가 땔 나무를 발견하고, 폭언을 했다. 이에 주민들이 면사무소에 몰려가 항의하면서 삼림조합과 면직원, 순사를 구타했다. 그러자 경찰이 주민 수십명을 체포했고, 이에 분노한 주민들이 20일 군청에 몰려가 대규모 시위를 벌인 것이다.
◇삼림조합의 가혹한 벌목 단속
총독부는 벌목을 제한하는 ‘금벌(禁閥)주의’를 고수했다. 국유림은 물론 사유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수령 20년 미만의 침엽수와 10척 미만의 활엽수는 베지 못하게 하고, 6척 미만의 나무는 가지도 꺾지 못하게 했다. 취사·난방을 땔 나무에 거의 100% 의존하던 주민들에겐 청천벽력같은 소식이었다. 조합비도 부담스러웠지만, 돈을 낸다고 해도 땔감을 마음대로 채취할 수 없었다. ‘금벌주의’를 일선에서 시행한 삼림조합 직원과의 마찰은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다. 단천 주민들도 ‘이와 같은 가혹한 삼림간수 취체에는 견딜 수없다. 그리하여 삼림조합이라는 것을 해산케 하자!’(‘취지 모르는 촌민에게 취체 過酷이 禍因’, 조선일보 7월26일)면서 들고 일어난 것이다.
◇광화문, 동대문 등 경성 거리에도 격문 나붙어
‘단천 사건’의 여파는 컸다. 사건 며칠 후 경성 거리에도 단천 사건 진상을 알리는 격문이 붙기 시작했다. 29일 새벽 광화문 사거리 체신국 앞과 순사교습소 담장에 대자보가 나붙었다.(’단천사건에 관한 격문을 또 시내에 첨부’, 조선일보 7월30일) 관할 종로서 고등계는 긴장했다. 시내 한복판, 더욱이 순사교습소 담장에 버젓이 ‘조선만세’란 제목아래 단천 사건을 알리는 격문이 붙었으니, 그럴만했다. 그런데, 며칠 뒤인 8월3일 오후5시 동대문성벽에도 등사판으로 인쇄한 대자보 여러장이 나붙였다.
◇신간회, 김병로, 김진국 진상조사차 파견
좌·우합작 민족운동단체인 신간회 경성지회는 즉각 ‘단천 사건’ 현장 조사에 나섰다. 가인 김병로와 김진국이 대표로 단천에 파견돼 나흘간 현장 조사를 마쳤다. 8월1일 밤 8시 종로2가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조사보고회를 가진다는 예고 기사( ‘단천 사건의 조사보고회’, 조선일보 8월1일)까지 나갔다. ‘단천 민요사건의 진상은 여시(如是)하다’란 제목으로 김진국이 연설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관할 종로서 고등계는 ‘연설 내용이 불온할 것’이라며 연설회를 금지시켰다.
◇'단천 사건’으로 함흥 형무소 만원
‘단천 사건’여파로 인근 함흥 형무소는 수감자로 가득찼다. ‘함흥 형무소는 정원 초과 300명! 수감자의 고초는 상상코도 남는다’(조선일보 9월17일)는 기사가 날 정도였다. 원래 수용 인원 550명을 초과해 852명이 수용됐다는 것이다. ‘이삼백명의 초과인원이 생긴 이유는 근자에 돌발한 단천습격사건으로 근 이백명의 인원이 증가되었다’면서 ‘850여명중에 사상범이 350명’이라고 했다.
삼림조합의 가혹한 벌목금지 조치에 전국 곳곳에서 격렬한 항의와 시위가 빗발쳤다. 총독부는 삼림조합을 통한 벌목 통제를 포기하지 않았다. 말로는 산림녹화를 내세웠지만 연료 문제에 대한 해결책 없이 나무 베는 것만 금지하는 건 효과를 거두기 어려웠다. 단속에 걸린 지역 주민들과 땔감 가격 상승으로 서민들만 고통받을 뿐이었다. 산림녹화의 꿈은 해방을 기다려야 했다.
◇참고자료
최병택, 한국 근대 임업사, 푸른 역사, 2022
성주현, 일제하 단천 지역의 민족운동, ‘순국’ 통권 137호, 2002.6
09.24 ‘콩나물 장사’하다 숨진 조선의 첫 스웨덴 경제학사
1931년 스톡홀름대 졸업한 최영숙, 5개국어 능통했으나 취업 실패

▲최영숙은 1931년 2월 스톡홀름대를 졸업했다. 조선의 첫 스웨덴 경제학사였다.
‘인도는 중국과 애급과 마찬가지로 상고(上古)문명국이다. 그러나 그 찬란한 역사와 문명은 오늘날에는 다 어디가고 지금은 일개 섬나라인 영국의 지배밑에 있다. 산천에 흐르는 젖과 꿀은 어이해 인도의 딸과 아들의 살과 뼈를 기르는 데 아무런 인연이 없어졌는가.’ (‘인도유람’1, 조선일보 1932년2월3일)
1932년초 신문에 인도유람기가 실렸다. 여행기 형식이지만, 인도 독립운동가 마하트마 간디와 사로지니 나이두(시인·1879~1949)를 소개하는 기획이었다. 필자는 스웨덴 유학을 마치고 귀국길에 오른 최영숙이었다. 이집트를 거쳐 인도에서 4개월 가량 머물면서 현지 사정을 관찰한 그는 이렇게 썼다.
‘스와데쉬(인도말로 물산장려회) 상점은 거리마다 흥왕하고 있다. 인도인들은 극소수의 사람들을 제하고는 모두 물건 값을 더 주거나 외국 물품을 사용하면 자기에게는 경제적 리(利)가 될지라도 결코 외국 상점에 가서 사쓰지 않고 꼭 스와데쉬 상점에 가서 자기들의 쓸 것을 사쓰기로 위주한다.’(‘인도유람’ 1) 인도를 빗대 조선의 물산장려운동을 지지하고 민족 의식을 자극하는 내용이었다.

▲1932년2월3일 조선일보에 실린 최영숙의 '인도유람'1. 첫회부터 인도의 스와데쉬운동을 소개하면서 물산장려운동과 민족의식을 자극했다.

▲위키피디아 1931년 런던을 방문한 마하트마 간디. 최영숙은 같은 해 간디를 만나기 위해 인도를 방문할 만큼, 그를 흠모했다.
◇쇠약한 간디 연설에 ‘부모 유언 듣듯 감격의 눈물’
최영숙은 ‘내가 인도를 찾아간 일이나 인도에서 오래 머물게 된 이유는 ‘깐듸’ ‘나이두’ 두분을 만나고 싶은 까닭이었다’고 썼다. 마침내 1931년 7월 초 봄베이에 도착한 간디를 만났다. 이집트에서 인도로 향하는 배 안에서 만난 나이두의 생질 ‘로氏’의 소개 덕분이었다.
‘반나체인 그의 끝없이 수척한 팔과 다리! 코끝에 반쯤 걸린 안경, 쾌활한 웃음을 웃을 때마다 드러나는 몇 개 안남은 웃니! 크고 둥근 머리 꼭대기에 서너 오라기 뒤로 늘어진 긴 머리끝. 이같이 그의 외모는 보잘 것없지만 그의 인격! 그의 정신! 그의 행동은 세계 인류에게 막대한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이다.’(‘인도유람’3, 조선일보 1932년2월5일)
두 번째 만남은 8월29일 아침이었다. 수십만 남녀가 모인 넓은 운동장에서 마이크 앞에 선 간디가 연설을 시작했다. ‘놀라지 말라!그렇게도 수척하고 쇠약하여 보이는 간디씨의 음성은 산곡을 울릴 듯 말귀마다 힘있게 울려 나왔다. 청중은 마치 부모의 유언이나 듣는 듯이 고요하고 정숙하게 서서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았다.’

▲죄영숙의 별세를 알리는 조선일보 1932년4월25일자 기사.
◇귀국 다섯 달 만에 쓰러져
간디의 육성과 인도 실상을 르포한 최영숙의 이름은 두 달 뒤 신문에 다시 등장한다. 이번엔 부고(訃告)였다. ‘여자의 몸으로 외국의 최고 학부를 마치고 경제학사의 학위를 얻어가진 후 작년 11월에 금의환향하였던 시내 홍파동(2의 10) 최영숙 여사는…지난 23일 오전 11시에 이 세상을 영별하고 말았다.’(‘구십춘광을 등지고 애석! 여인의 요절’,조선일보 1932년4월25일)
한국 최초의 스웨덴 유학생인 최영숙은 1931년 2월 스톡홀름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덴마크, 러시아, 독일, 프랑스, 스위스, 이탈리아,그리스, 터키, 이집트, 인도를 여행했다. 1931년 11월 귀국한 최영숙을 신문들은 대서 특필했다. ‘조선 초유의 여류 경제학사 최영숙양’ ‘서전에서 돌아온 최영숙양은 다섯 나라 말을 통하는 재원’(조선일보 1931년12월22일). 이런 인재가 제대로 뜻을 펼치지도 못하고 귀국 다섯달만에 세상을 떴다. 애석한 죽음이었다.
◇배추, 미역, 미나리, 콩나물 장사까지
최영숙은 ‘첫 여성 경제학사’란 타이틀이 무색하게 ‘취업난’에 시달렸다. ‘불쌍한 조선 사회를 위하여 한 조각 붉은 마음을 가지고 발버둥이 치는 여성이니 그가 고국에 돌아오는 날은 반드시 한줄기 희망의 불이 비칠 것’(‘엘렌 케이 찾아가 서전 있는 최영숙양’, 조선일보 1928년4월10일)이라고 했지만 그가 일할 만한 곳은 없었다. 신문 기자, 교사 자리를 얻으려 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포목상을 하면서 여유있던 집안 살림이 기울어지면서 노부모 생계까지 책임져야했다.
최영숙은 귀국 직후 ‘처음 조선을 다시 찾을 때에 현하의 급무인 경제운동과 노동운동에 몸을 던져 산 과학인 경제사회학을 더욱 살려보려고 하였으며 공장 직공이 되어 그들과 같이 실제 운동을 하려 하였으나 집 사정이라든지 여러 가지 형편에 많은 변동이 있어 당장에 취직이 문제’ (조선일보 1931년12월22일)라고 호소했다.
최영숙은 서대문 밖 교남동에서 채소가게를 열었다. 운영난을 겪던 ‘여자소비조합’을 인수해 벌인 일이었다. 8년 유학 끝에 스웨덴 경제학사 학위를 받은 최영숙이 ‘배추 포기, 감자, 마른 미역 줄기, 미나리단, 콩나물단을 만지는 것’(’삼천리’제4권제5호, 1932년5월)이 일과가 됐다. 유학파 신여성이 이런 구멍가게를 꾸리는 게 쉬울 리 없었다.
◇인도계 혼혈아 출산으로 가십거리
최영숙은 홑몸이 아니었다. 인도 체류 때 얻은 사랑의 열매였다. ‘어린애를 가진 몸에 영양부족, 소화불량, 그는 각기병까지 걸려서 두 다리는 차차 부어올라오기 시작했다.’(’동광’제34호, 1932년6월) 병원에 실려간 최영숙은 1932년 4월11일 동대문부인병원에서 산모 상태가 위험하다는 진단을 받고 태아를 꺼내는 수술을 받았다. 그후로도 호전되지 않아 4월13일 세상을 떴다.
최영숙이 인도인의 피가 흐르는 혼혈아를 출산했다는 뉴스는 세간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미혼으로 알던 조선의 첫 여성 경제학사가 혼혈아를 낳고 죽었으니, 가십거리가 될 만했다. ‘스톡홀름대에서 만난 인도 유학생’(삼천리) ‘인도 여행중에 만난 한국계 혼혈’(동광) 등 잡지들은 아버지의 정체를 둘러싸고 갑론을박을 벌였다. 최영숙의 죽음은 무성한 가십에 휩싸였다.

▲여성운동가 엘렌 케이를 찾아 스웨덴에 유학한 최영숙의 사연을 소개한 조선일보 1928년4월10일 '엘렌케이 찾아가 서전 있는 최영숙양'
◇엘렌 케이 흠모해 스웨덴 유학
최영숙의 이력은 독특했다. 이화여고보를 졸업한 1923년 중국으로 유학간 것부터 그랬다.최영숙은 ‘나는 남달리 일본 유학을 싫어하였으며 까닭도 없이 중국 유학을 즐겨함에 따라서’(’삼천리’제4권제1호, 1932년1월)라고 공개선언할 만큼, 항일(抗日) 의식이 강했다. 남경 명덕(明德)여학교를 거쳐 회문(滙文)여자중학을 마친 1926년 스웨덴으로 향했다. 당대의 저명한 스웨덴 여성운동가 엘렌 케이(1849~1926)에게 감화를 받았기 때문이다. 엘렌 케이는 당시 신문, 잡지에 자주 소개된 유명 인사였다. 최영숙은 중국 유학 시절 엘렌 케이의 사상에 호응해 편지를 주고 받을 만큼 그를 흠모했다. 하지만 그가 1926년9월 스웨덴에 도착하기 직전 엘렌 케이는 세상을 떴다. 최영숙의 생각도 많이 달라졌다.
◇구스타프 황태자의 고고학 연구 보조
최영숙은 고학생이었다. ‘낮에는 노동을 하고 밤에는 어학을 공부하였다’고 일기에 썼는데,여기서 노동은 ‘자수’(刺繡)를 가리켰다. 베개 하나의 수를 놓으면 5, 6원의 수입이 생겼다. 이 돈으로 먹고 자고 저금까지 했다. 스톡홀름 대학을 다닐 때는 스웨덴 황태자 도서관에서 그의 역사고전 연구를 도왔다. 1926년10월 조선을 방문해 ‘서봉총(瑞鳳塚)’ 발굴 현장을 찾은 구스타프 아돌프(1882~1973) 황태자, 바로 그 사람이었다. ‘서봉총’의 첫 글자 ‘서’는 스웨덴의 한자명인 ‘서전’(瑞典)에서 따왔다. 최영숙은 이 구스타프 황태자가 조선에서 가져간 역사고전 서적의 목록을 만들고 내용을 번역하는 일을 맡아서 했다. 구스타프 황태자는 1950년 즉위해 23년간 재위했다.
◇스키 타고 雪原 누빈 조선 여인
최영숙의 스웨덴 초반 생활은 고달팠던 모양이다. ‘서전의 풍경은 내가 어릴 때에 지리를 배우면서 상상하던 풍경은 아니었으며 또한 언어 풍속 등이 전혀 다르고 아는 사람조차 없으니 어찌 외롭고 쓸쓸하지 않았으리까? 그래서 나는 한달 동안은 밤이나 낮이나 울기만 했답니다.’ 최영숙은 월간 ‘삼천리’(제4권제1호, 1932년1월)에 학창시절을 이렇게 회고했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조선이라는 땅의 존재도 모르는’ 동료틈에서 부대끼느라 스트레스를 받았다. 하지만 차츰 적응해나간 최영숙은 ‘다른 동무들과 똑같이 여름이면 수영으로, 겨울이면 스키로, 이렇게 세월이 어떻게 가는 줄도 모를 만하게 자미스러운 생활을 계속하던 일이 지금 와서는 끝없이 그리워집니다’라고 썼다.
스키를 타고 스웨덴 설원을 누비던 최영숙은 그토록 고대하던 고국 땅에서 스물 여섯 아까운 나이에 떠났다. 해외에서 닦은 실력을 펼쳐보지도 못했다. 식민지 조선에서 여성 경제학도로 살아갈 길은 매우 협소했을 것이다. 동경 유학 출신 모던 걸, 모던 보이들이 하릴 없이 방황하던 시절이었다. 혹 마흔 넘어 해방 이후까지 살아남았다면 5개 국어에 능통한 최영숙에게 기회가 생겼을 지 모르겠다. 일찍 스러진, 안타까운 청춘이었다.
◇참고자료
최영숙, 네 사랑 받기를 허락치 않는다, 가갸날, 2018
이승원, 세계로 떠난 조선의 지식인들, 휴머니스트, 2009
성현경, 경성 에리뜨의 만국 유람기, 현실문화, 2015
전봉관, ‘조선 최초 스웨덴 경제학사 최영숙 애사’, ‘신동아’ 2006년5월호
‘경제학사 최영숙 여사와 인도청년과의 연애관계의 진상’, ‘동광’ 제34호, 1932년6월
‘인도 청년과 가약 맺은 채 세상 떠난 최양의 비련’, ‘삼천리’제4권제5호, 1932년5월
최영숙, ‘간디와 나이두 회견기, 인도에 4개월 체류하면서’, ‘삼천리’제4권 제1호, 1932년1월
최영숙, ‘서전대학생 생활’, 삼천리 제4권제1호, 1932년 1월
10.01 ‘한국문학전집’ 은 어떻게 탄생했을까
1930년대 전집 출판 봇물…문단 30년의 결실 ‘현대조선문학전집’

▲조선일보 1938년9월1일자에 실린 '현대조선문학전집' 광고. 제7권 희곡집 출간을 알렸다. 1,2집은 3판, 나머지는 재판을 찎었다고 소개했다.
1930년대는 문학전집(선집)이 쏟아진 시대였다. 잡지 ‘삼천리’의 ‘조선명작선집’(1936), 박문서관의 ‘현대걸작장편소설전집’(1937)에 이어 1938년 출간된 ‘현대조선문학전집’(총7권)은 한국 근대문학의 ‘정전’(正典)을 만드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전집으로 손꼽힌다. 근대 문단 30년이 배출한 주요 작가와 대표작을 추려 한국 문학의 성과를 한자리에 모은 결정체이기 때문이다. 전집에 수록된 이광수, 나도향, 김동인, 박태원, 이효석, 이태준, 한용운, 정지용, 백석, 모윤숙, 김기림처럼 훗날 한국문학사에 굵직한 자취를 남긴 문인들을 당대에 평가해 자리매김을 한 것이다.
이 전집은 단편소설과 시가(詩歌), 희곡, 평론, 수필기행 등 문학 전 분야를 망라했다. ‘근래 출판계에서 처음 보는 가장 대담한 장거’(백철, 조선일보 1938년3월11일) ‘조선 문단이 창시된 이래 이 전집 만큼 획기적인 대업은 따로 없었을 것’(김문집, 조선일보 1938년8월7일)이라는 찬사가 쏟아졌다. ‘전집’에 수록된 작가와 작품들이 해방 이후 교과서에 실리는 등 한국 문학의 대표작으로 인정받았다는 사실에서 명성을 확인할 수 있다.
◇단편소설, 시가, 수필기행, 희곡, 평론 등 5개 분야
‘현대조선문학전집’을 낸 곳은 조선일보 출판부였다. 1938년2월 신문 한 개면을 털어 광고가 나갔다. ‘신문학30년의 총결산-전집 간행의 의기충천’이라는 굵직한 제목 아래 ‘현대조선문학전집’ 출간을 예고했다.총 7권 출간 계획을 밝히면서 3월초 제1회 배본을 앞두고 예약 신청을 받는다는 안내가 실렸다. 1920년대 일본 신조사 세계문학전집이 쓴 방식처럼, 신문에 대대적으로 광고를 내고 예약을 받아 대량 판매했다. 전집은 단편집 3권, 시가집, 수필기행집, 희곡집, 평론집 각 1권씩으로 그해 3월부터 9월까지 차례로 출간됐다.

▲조선일보 1938년2월3일자에 실린 '현대조선문학전집' 출간 광고. 이 전집은 해방 후 중고교 교과서에도 수록 작품들이 실리면서 한국 문학의 정전 역할을 했다.
◇단편소설 35명, 시가집 33명...
전집에 수록된 작가는 단편소설 35명, 시가집 33명, 평론집 12명, 희곡집 6명, 수필기행집 16명이다. 작품 수로 보면 단편소설 37편, 시가집 174편, 평론집 18편, 희곡집 7편, 수필기행집 18편이다. 수록 작가는 아래와 같다.
1권 단편집(상): 이광수 나도향 박화성 이태준 김유정 박태원 장덕조 엄흥섭 이기영 이효석 이석훈
2권 시가집: 주요한 이광수 양주동 김동환 이은상 한용운 정지용 김억 박팔양 임화 이병기 김정식(소월) 박종화 김오남 백석 모윤숙 김광섭 김기림 노천명 김상용 박용철 신석정 김일 김동명 김영랑 주수원 조벽암 임학수 김형원 이상화 변영로 오상순 이장희
3권 단편집(중): 김동인 장혁주 전영택 한설야 함대훈 이상 안회남 방인근 백신애 한인택 이선희
4권 수필기행집: 이광수 안재홍 이은상 김동인 김진섭 정인섭 이태준 양주동 나도향 박화성 노자영 심훈 이원조 이선희 박태원 김자혜
5권 평론집: 박영희 양주동 최재서 이원조 김문집 유진오 정인섭 김남천 김환태 이헌구 백철 김기진
6권 단편집(하): 염상섭 주요섭 이무영 이익상 강경애 현진건 최학성 최정희 유진오 채만식 최명익 전무길 김말봉
7권 희곡집: 유치진 채만식 송영 홍로작 김정진 이무영
◇'전집’ 수록기준은?
‘전집’ 선정 기준은 뭘까. ‘전집’편찬에 누가 참여했고, 어떤 기준으로 선정했는지는 명확한 자료가 없다. 전집에 서북 출신 작가가 많이 포함돼있고, 당시 조선일보엔 방응모 사장을 비롯, 서북 출신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서북 출신이 편집진에 많이 참여했을 것이라는 추정이 나온다.(유용태, ‘근대 한국 문학정전의 문학제도적 접근’ 298쪽)
하지만 이보다 더 주목할 것은 전집이 나오던 1938년 조선일보 출판부엔 이은상 주간과 함대훈 주임을 비롯, 노자영, 노천명, 윤석중 같은 문인들이 대거 포진했던 사실이다. 편집국에도 이헌구, 이원조 같은 문인 기자들이 활약했다. 문학전집 출간에 적격인 탄탄한 인맥을 갖춘 셈이다.
◇재판 이상 찍을 만큼 호조
‘전집’은 권당 350쪽 분량에 가격은 1원20전이었다. 분량이 지나치게 긴 작품은 자연스레 걸러졌다. 민간 신문에서 내는 문학전집인 만큼, 작품성과 대표성은 물론 상업성까지 고려, 독자들이 선호하는 작가와 작품을 골랐을 것이다. 실제로 이 전집은 상당한 판매량을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제7권 희곡집 출간을 알리는 광고(1938년9월1일자)에 따르면, 1권 단편(상), 2권 시가집은 3판을 찍었고, 나머지도 재판을 찍었다. 당대 독자들이 전집 수록 작품의 문학적 성취에 동의했다는 뜻이다.
◇일제 검열로 수난겪은 문학전집
‘현대조선문학전집’은 첫째 권부터 일제 검열에 걸려 수난을 겪었다. 조선일보 1938년2월3일자는 전집 1권 내용으로 이광수의 ‘방황’, 김동인의 ‘동업자’, 이기영의 ‘묘양자’(苗養者)를 예고했다. 하지만 이 작품들은 1권에 수록되지 못했다. ‘조선출판경찰월보’ 제114호(1938년3월)에 따르면, 이 작품들은 현대 조선의 사회제도를 저주하고 조선인의 비애를 강조한다는 이유로 출판 금지 처분을 받았다.(유용태, ‘근대 한국 문학정전의 문학제도적 접근’ 309쪽) 결국 김동인은 1권에서 빠졌고, 이기영은 ‘묘양자’대신 ‘원치서’를 실었다. ‘시가집’도 일본의 조선 통치를 저주하고 민족의식을 고양한다는 이유로 검열당했고, ‘평론집’도 마찬가지였다.
◇여성 작가, 과감하게 발탁
주목할 만한 사실은 ‘전집’ 첫권부터 여성 작가들을 과감하게 발탁했다는 점이다. 이광수, 나도향, 이효석, 이기영과 함께 박화성(1903~1988)의 ‘한귀’(旱鬼), 장덕조(1914~2003)의 ‘창백한 안개’를 포함시켰다. 백신애, 이선희(이상 단편집 중) 강경애, 최정희, 김말봉(이상 단편집 하) 등 단편소설 분야는 물론, 2권 시가집에도 모윤숙, 노천명을 포함시켰다. 이전 문학전집에선 없던 일이었다. 여성 작가들을 작심하고 한국 문학 주역으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문학평론가 강진호 성신여대 교수는 ‘현대조선문학전집’이 ‘시, 소설, 수필, 희곡, 평론에 이르는 문학의 전 장르를 포괄했을 뿐 아니라 대상 작가도 이광수, 김동인, 김소월에서 김유정, 이상에 이르는 당대의 중견과 소장을 두루 포함하고 있다’면서 ‘이런 사실은 이 전집이 정전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강진호, ‘한국의 문학전집 현황과 문제점’ 153쪽, ‘문화예술’ 통권280호)고 했다.
◇물레방아, 봄봄, 메밀꽃 필 무렵 등 교과서 수록
‘현대조선문학전집’ 수록 작가와 작품은 해방 이후 중고교 교과서에도 수록됐다. 나도향의 ‘물레방아’, 이태준의 ‘복덕방’, 김유정의 ‘봄봄’, 이효석의 ‘메밀꽃 필무렵’, 이상의 ‘날개’, 김동인의 ‘광염소나타’ 등이 대표적이다. 김소월, 한용운, 정지용, 백석 등도 교과서에 늘 오르내리는 시인들이다. 세월의 도전에 밀려 예전만큼 주목을 받지 못하는 작품도 있다. 하지만 80여 년 전 한국 문학의 정전(正典)을 만든 편집진의 안목은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요즘 독자들의 선택을 받고 있다.
◇참고자료
유용태, ‘근대 한국 문학정전의 문학제도적 접근-’현대조선문학전집’을 중심으로’, ‘어문논집’ 제47집 2011,7
박숙자, ‘조선문학선집’과 문학정전들, ‘어문연구’ 제39권 제4호, 2011년 겨울
강진호, ‘한국의 문학전집 현황과 문제점’, ‘문화예술’ 통권280호, 2002.11
10.08 길에 가득한 마스크黨, ‘여성 코와 입 가려 자미 적어‘
1930년대 마스크 유행…전염병 예방과 防寒용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 이연주 1930년대 거리엔 '마스크黨'이 넘쳐났다.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마스크를 필수품처럼 쓰는 이들이 많았다. 검은 색 마스크가 일반적이었다고 한다.
‘요새 길에 나가보면 여자나 남자를 말할 것없이 ‘마스크’들을 하고 다니는 것을 많이 보게 되는데….’
팬데믹 시대를 사는 요즘 일상을 묘사한 것같다. 하지만 80여 년 전 경성 풍경이다. 1935년 12월27일 조선중앙일보에 실린 이 기사 제목은 ‘보기 거북한 ‘마스크’ 黨들’. 남녀 불문, 마스크를 쓴 사람들이 많았다는 얘기다.
비슷한 시기, 시인 겸 문학평론가 김기림 수필에도 마스크가 등장한다. ‘초겨울이 되어 부엌에서 김장 준비에 착수하는 눈치가 보이면 벗은 벌써 약국에 가서 마스크를 사온다…겨울 동안에 내가 조금이라도 감기나 걸려 드러누으면 그는 바로 나를 찾아온다. 방 안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그는 ‘마스크’를 벗는다. 그러고는 그는 감기에 걸리지 않고 겨울을 지낼 수 있는 자신의 행운을 가장 자랑스럽게 선전한다. 딴은 ‘마스크’나 써보았을걸하고 나는 잠깐 후회한다.’(‘어느 오후의 스케-트 철학’1, 조선일보 1935년2월19일)

▲시인 겸 문학평론가 김기림(왼쪽)은 ‘반(反)마스크 당(黨)’이었다. 시골 조카에게 편지를 보낼 땐 ‘너는 마스크를 쓰지 말아라’하고 꼭 덧붙일 정도였다.
◇'反마스크黨' 김기림
김기림은 ‘반(反)마스크 당(黨)’이었다. 시골 조카에게 편지를 보낼 땐 ‘너는 마스크를 쓰지 말아라’하고 꼭 덧붙일 정도였다. ‘신장이 오척(尺)삼사촌(寸)을 넘는 체격 당당한 장부의 입과 코에 검은 ‘마스크’가 걸려 있는 꼴이란 나는 비록 천하의 약장사들의 항의를 받는 한이 있을지라도 그렇게 보기 좋은 풍경이라고 거짓말을 할 수는 없다.’ 남성다움을 해친다는 것이다.
여성미 훼손론(論)도 뒤따른다. ‘여자의 얼굴의 미(美)란 그 오십퍼센트 이상이 상긋한 코와 꼭 다문 입 맨드리(맵시, 모양새)에 깃들여있는 것인데 대체 그들은 무슨 생각으로 그들의 얼굴의 이 중요한 부분을 불결한 마스크로서 가려버리는겔까.’
환자를 위한 의료용 마스크 착용은 예외로 쳤다. 또 ‘남을 꼬집는 데만 익숙해버린 문예평론가 ‘까십’자’ ‘언제든 명예훼손죄에 걸릴 수있도록 남의 험구나 실언만 하고 돌아댕기는 종족’에게도 마스크 착용을 당부한다. 글쟁이다운 유머다.

▲마스크는 흰색으로 쓰고, 자주 천을 갈아줘서 청결을 유지해야 한다고 쓴 조선일보 1931년1월27일자 기사 '마스크는 흰 것이 제일'.
◇1920년 스페인 독감 직후 등장
‘마스크黨’은 이 땅에 언제부터 생겼을까. 과학사 연구자인 현재환 부산대 교수에 따르면, 1920년 쯤 전염병 방역 도구로 마스크가 등장했다. (현재환, 홍성욱 엮음, 마스크 파노라마, 문학과지성사, 2022) 1918년~1919년 스페인 독감이 유행할 당시 조선엔 마스크가 널리 쓰이지 않았다고 한다. 4차 유행이 진행된 1919년 12월이 되서야 마스크 착용을 권장하는 조치가 시행됐다. 1919년12월27일 경기도 지사가 공포한 ‘유행성감모예방심득(心得)’이 대표적이다.
일본은 물론 타이완 총독부도 1918년 11월 환자 가정의 마스크 착용을 담은 유행성 독감 예방 규칙을 배포했다. 조선은 왜 마스크 착용이 1년 넘게 늦었을까. 스페인 독감은 1918년 9월부터 조선에서도 환자들이 발생하기 시작해 그해 겨울 정점에 달했다. 몇 달 새 사망자만 14만명이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총독부가 왜 마스크 착용을 서두르지 않았는지 정확한 사유는 알 수없다. 다만, 1919년 전국적으로 번진 3.1운동 여파로 총독부가 모든 행정력을 정치적 혼란 수습에 동원했기 때문에 경찰 중심의 위생 관리를 효과적으로 작동시킬 여력이 없었을 것으로 추정한다.(현재환, 식민지 조선에서의 마스크’ 203쪽)
◇홍역, 성홍열 등 전염병 돌 때마다 마스크 강조
마스크 착용은 1920년대 들어 신문을 통해 권장됐다. 유행성 독감은 물론, 홍역, 성홍열, 기면성 수막염 등 전염병이 돌 때마다 마스크 착용을 당부하는 기사가 났다. ‘조선 뉴스라이브러리’를 통해 1920년대 지면에서 ‘마스크’를 검색하면, 44건의 기사가 뜬다. 독가스 방지용 마스크도 간간히 있지만 전염병 감염 예방을 위한 마스크 기사가 대부분이다.
1921년 봄 진도군에 유행성감기가 창궐했다. ‘영양불량으로 인하여 어떤 사람은 폐렴까지 병발되야 노약(자)은 사망한 자가 적지 않았’는데, ‘모르희네(모르핀)주사를 실시하야 위독에 빠지게 한 일도 많이 있었’을 만큼 위험했다. ‘예방주사를 실시하거나 그렇지 아니하거든 ‘마쓰구’를 사람마다 실시하라운々하였다더라’고 했다.(’진도군의 感冒 창궐’, 조선일보 1921년4월13일)
◇'반드시 마스크를 입에 걸고 다닐 것’
1925년 초 경북에 홍역이 돌아 몇 달만에 환자가 1만명 발생하고, 이중 2000명이 사망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경찰에서 알면 잡아간다고 하여 병자가 있으면서도 절대 비밀에 붙여가지고 남과 조금도 꺼림없이 교통을 함으로 병은 점점 만연되고….’(‘홍역환자 만여명’, 조선일보 1925년4월20일) 식민 당국에 알려져 단속 대상이 될까봐 쉬쉬하는 분위기 속에 전염병은 들끓었다. 기사 뒷부분, 의사(김현경)의 말을 빌려 ‘반드시 마스크를 입에 걸고 다닐 것’을 당부하고 있다.
1925년 말 성홍열이 유행하자 전문가(한성의원장 김기영)의 예방법 및 주의할 점을 실은 기사가 나갔다. ‘될 수 있는 대로 밖에 데리고 나가 찬 공기를 쏘이지 아니하는 것이 좋고 부득이한 경우에 밖에 나가게 되면 잊어버리지 말고 꼭 ‘마스크’를 사용하여야 할 것이다. ‘마스크’라 하는 것은 겨울에 일본 사람들이 흔히 하고 다니는 것을 우리가 익히 보는 터인즉 별로히 설명할 필요는 없지마는 ‘까제’나 소독한 헝겁을 넙적하게 척척 접어 코에 대이고 좌우로 끈을 만들어 귀에 거는 것이니 찬공기가 직접 호흡기 속에 접촉됨을 막는 것이다.’(‘근래 유행하는 성홍열’, 조선일보 1925년12월25일) 당시까지 마스크 착용이 일본인만큼 일반화되지 않았음을 알 수있다.
◇1930년대의 마스크 유행
1931년 유행성 독감이 창궐했다. 1918년~1919년의 스페인 독감 유행 때와 견줄 정도로 심각했다. ‘유행성 감기라는 것은 세계적으로 그 통계를 보면 반드시 주기적으로 유행하는 것인가 합니다. 동양에서는 대정7,8년에 크게 유행하여 다수 인류의 생명을 빼앗은 일이 있었는데, 그후 10년만인 금년에 이 감기가 또 몰려다닙니다. 조선안에는 그 감기에 걸린 자가 하도 많음으로 수를 알 수없으나 이번의 유행 감기는 그다지 악성은 아닌가 합니다.’(‘십년만에 또 다시 유행성독감 창궐’, 조선일보 1931년2월6일) 총독부 위생과장이 ‘남의 말’처럼 전하는 유행성 독감발생 현황이다. 위생과장은 독감 예방 조치로 ‘마스크 착용’을 내세웠다.
◇이헌구와 백석의 마스크론
마스크는 흰색보다 검은색 마스크가 더 유행했던 모양이다. ‘일기가 춥다든가 기후의 변화가 있게 되면 입에 다가 검은 ‘마스크’를 대고 다 사는 사람이 많은 것입니다. 그리하야 겨울만 되면 ‘마스크’를 거리에만 하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신경이 과민한 사람은 방안까지 하고 있게 되어 마치 ‘마스크’시대나 된 것 같은 느낌이 있는 것입니다.’(‘입마개는 노인이나 할 것’, 조선일보 1932년1월31일)
문학평론가 이헌구는 도서관 열람실 풍경을 주제로 글을 썼다. 서울 중구 소공동 롯데백화점 본점 1층 주차장 자리에 있던 총독부 도서관을 묘사했을 것이다. ‘내 바로 옆에는 ‘마스크’로써 비상시적 무장을 하고 나형(裸形)의 체구가 두셋씩 끼어있는 의학서류를 펼쳐놓고 앉아 골똘히 다른 한 책과 대조해가면서 빨간 연필을 놀릴 새 없이 줄줄이 가로 따라가고 있다.’(‘도서관 풍경’上, 조선일보 1937년3월14일)
시인 백석의 수필 ‘입춘’에도 마스크가 등장한다. 고향 마을의 겨울을 추억하며 쓴 글이다. 여기엔 외투, 장갑과 함께 마스크가 겨울을 상징하는 물건으로 나온다. ‘그런 소년(少年)도 이제는 어느듯가고 외투(外套)와 장갑과 마스크를 벗기가 가까워서 서글픈 마음이 없듯이 겨울이 가서 슬퍼하는 슬품도 가버렸다. 입춘(立春)이 오기전에 벌써 내 썰매도 노루도 멧새도 다 가버린 것이다.’( ‘입춘’, 조선일보 1939년2월14일)
◇비위생적 마스크는 반대
마스크 반대론도 만만찮았다. 특히 마스크가 비위생적이라는 이유를 든 전문가들이 꽤 있었다. 앞의 조선중앙일보가 ‘마스크 黨’을 비판한 이유는 ‘위생’과 ‘미용’이었다. 전염병 감염을 막기 위한 위해 마스크를 쓰는데, 비위생적이라는 얘기는 무슨 뜻일까. ‘내뿜는 공기를 그 ‘마스크’안에서 다시 들여마시게 되니까 공기가 아주 더럽습니다’ ‘입김이 자꾸 눈 있는데로 올라가서 속눈썹에 김이 어리게 됩니다. 그 결과로 속눈썹이 자꾸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어디까지 믿어야할지 모르겠지만, 다음 주장은 근거가 있는 것같다. ‘속의 ‘까제’를 잘 안 갈고 보면 그 비위생적이란 말 할 수없습니다’.(이상 ‘보기 거북한 ‘마스크’ 黨들’, 조선중앙일보 1935년 12월27일) 마스크 안에 부드러운 천을 대어 쓰고 교체하는 식으로 마스크를 재활용했기 때문에 속의 ‘까제’를 자주 갈아주지 않으면 불결해진다는 얘기다.
‘불결한 마스크는 도리어 해독’(조선일보 1939년2월22일), ‘마스크는 하되 까제를 자주 갈 일’(조선일보 1937년12월9일)처럼 마스크 위생을 강조하는 기사는 잊을 만하면 실렸다.
◇'마스크, 여성의 미를 가리다’
마스크에 대한 비판론 중 하나는 여성의 미를 가린다는 것이다. ‘여자에게 있어서는 그 어여쁜 코를 또 가장 표정의 변화가 많고 미묘한 입을 가리고 다닌다는 것은 여간 자미적은 일이 아닙니다.’(’보기 거북한 ‘마스크’ 黨들’, 조선중앙일보 1935년 12월27일)
‘근자에 보면 무슨 시체인지 인물도 얌전해보이는 여학생간에 마스크라고 하야 코까지 가리우는 입마개를 하고 다니는 것이 많다. ▲감기때문에 그런 것을 한다고도 하지만 감기에 마스크가 얼마나 유효한지도 의문이지만,반드시 그러치도 않은 모양이니 ▲정정당당하고 명명백백 하여야 할 처녀들이 무엇때문에 코입을 가리우고 다닐까.▲무엇이 부끄러울까, 무엇을 숨길 일이 있어 그럴까’(‘색연필’, 조선일보 1939년2월14일)
마스크 반대론이 엉뚱한 곳으로 튄 셈이다.
마스크를 3년 여 입에 붙이고 살았지만 여전히 거추장스러운 건 매한가지다. 안경에 입김까지 서리면 시야가 흐려져 위험하기까지 하다. 100년 전 홀연히 나타난 ‘입마개’를 하고 살았을 마스크 당(黨)의 기분은 어땠을까. 마스크의 기억을 다시 떠올리게 된 게 코로나 19 덕분이라니, 고약할 뿐이다.
10.15 강경애 박화성 백신애...‘조선문학전집’보다 먼저 나온 ‘여성문학선집’
1937년 출간, 1년만에 4쇄…“천년 후에도 이 얼굴들 보이기를”(이은상)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 정다운
100% 여성 작가로만 이뤄진 ‘세계문학전집’이 나오고 있다. 은행나무 출판사가 연초부터 매달 한 권씩 출간하는 월간 ‘에세’(ESSE)와 휴머니스트 출판사가 2월초 론칭한 ‘휴머니스트 세계문학’시즌 1이다. ‘여성’을 내세운 문학전집은 페미니즘 시대를 반영하는 출판계의 새 흐름이다. 그런데 85년 전에 이미 여성작가로만 이뤄진 문학선집, 그것도 한국문학선집이 나온 사실을 기억하는 이는 드물다.
1937년 출간된 ‘현대조선여류문학선집’(現代朝鮮女流文學選集, 이하 ‘선집’)이 바로 그것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책이 한국문학전집 원조로 꼽히는 ‘현대조선문학전집’보다 1년 앞서 출간됐다는 것이다.
1938년 나온 ‘현대조선문학전집’(이하 ‘전집’)은 단편소설(상,중,하), 시가, 평론, 희곡, 기행수필 등 모두 7권으로 본격적인 ‘한국문학전집’의 시작으로 평가받는다.(’모던 경성-한국문학전집은 어떻게 탄생했을까’,2020년 10월1일) ‘선집’과 ‘전집’은 모두 조선일보 출판부에서 나왔다. 노산 이은상 주간,문학평론가 함대훈 주임을 비롯 쟁쟁한 문인 기자들이 재직하던 시절이었다.
◇베스트셀러로 떠오른 ‘여류문학선집’
‘선집’은 상당히 인기를 누렸다. 1937년 4월 초판이 나온 이래, 5월에 재판, 6월에 3판을 찍었고, 이듬해 8월에 4판을 발행할 정도였다. 근대 문학이 막 출범한 시기, 여성작가로만 이뤄진 문학 선집이 인기를 누린 비결은 뭘까.
선집 수록 작가는 모두 15명(강경애 김말봉 김오남 김자혜 노천명 이선희 모윤숙 박화성 백국희 백신애 장덕조 장영숙 장정심 주수원 최정희)이다. 소설을 비롯, 시, 시조, 수필을 수록했는데, 해당 작가편엔 작가 사진과 약력이 실려있다. 이 중 소설가는 강경애(어둠) 김말봉(편지) 이선희(계산서) 박화성(춘소·春宵) 백신애(꺼래이) 장덕조(자장가) 최정희(흉가) 등 7명이다.
문학평론가 이원조는 ‘박화성씨의 후중(厚重)한 필치(筆致)라든지 모윤숙씨의 화려(華麗)한 상화(想華), 이선희씨의 재기환발(才氣煥發)한 필치에다가 불패분방(不覇奔放)한 상념(想念)은 각각 독특한 특색을 가지고 있으며 ‘흉가’(凶家)에 나타난 최정희씨의 심각미는 또한 그 핍박한 생활에서 우러난 산 기록이란 점에서 일주(一籌)를 더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현대조선여류문학선집 독후감’, 조선일보 1937년5월12일 ) 라고 썼다.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의 ‘조선여류작가집’(1936)
‘선집’은 1936년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 조선판이 연재한 ‘조선여류작가집’(이하 ‘작가집’)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일본어로 발행된 이 신문 조선판 주독자층은 조선에 사는 일본인이었다. 하지만 한국인도 구독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신문은 1936년 4월21일부터 6월10일까지 백신애, 최정희, 장덕조, 노천명, 박화성, 김말봉, 강경애의 최신 소설을 연재했다. 물론 일본어로 번역된 작품이었다. 필자 사진과 약력을 매회 앞부분이나 뒷부분에 실었다.
이선희 대신 노천명이 들어간 것말고는 ‘선집’수록작가와 동일하다. 노천명도 시로 ‘선집’에 수록됐으니, ‘오사카마이니치’의 ‘작가집’ 필자 전원이 ‘선집’에 들어온 셈이다.매일신보 연재소설 삽화를 맡았던 화가 이승만이 매회 ‘작가집’ 소설 내용을 충실히 재현한 삽화를 그렸다. ‘작가집’ 연재작은 ‘선집’과 한 편도 중복되지 않는다. ‘선집’ 편집자가 의식적으로 피했을 가능성이 높다.

▲현대조선여류문학선집' 출간을 알리는 광고.조선일보 1937년4월26일자에 실렸다.
◇'현대조선문학전집’의 원류
‘선집’ 수록 소설가 7명은 이듬해 나온 ‘현대조선문학전집’ 단편소설집에도 전원 참여했다. 그런데 ‘선집’과 ‘전집’에 수록된 작품은 완전히 다르다.현대조선문학전집에 수록된 작품은 박화성의 ‘한귀’(旱鬼) 장덕조의 ‘창백한 안개’, 백신애 ‘적빈’(赤貧) 이선희 ‘매소부’ 강경애 ‘마약’ 최정희 ‘산제’(山祭) 김말봉 ‘고행’이다. 작가의 다양한 작품 세계를 알리고, 독자들이 중복 구입하는 것을 막기 위한 배려로 보인다.
‘전집’ 시가편에는 김오남 모윤숙 노천명 주수원, 수필기행집엔 김자혜의 작품이 실려있다. ‘여류선집’ 작가 15명 중 12명이 ‘전집’에도 그대로 이름을 올린 것이다.
◇1939년 ‘여류단편걸작집’까지 연결
1939년 출간된 ‘여류단편걸작집’(이하 ‘걸작집’)은 선집 소설작가 7명중 김말봉, 이선희가 빠지고 노천명이 들어갔다. ‘걸작집’도 ‘선집’이나 ‘전집’에 수록된 작품 대신 다른 작품을 실었다. 강경애의 ‘지하촌’ 장덕조의 ‘한야월’(閒夜月) 이선희의 ‘연지’ 최정희의 ‘곡상’(穀象) 노천명 ‘사월이’ 백신애 ‘채색교’ ‘호도’(糊塗)다. 박화성 ‘춘소’를 제외하면 모두 ‘선집’, ‘전집’에 실리지 않은 작품이다.
‘걸작집’ 수록 기준은 당대 작가의 대표작이었다. ‘현 문단에 활약하고 있어 그들의 권위를 자타가 공인하는 여류문학가 제씨(諸氏)가 자기들의 작품중에서 가장 자신이 있다고 사유하는 바의 걸작을 수집하야 이 일편(篇)을 편(編)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수재된 작품이야말로 여류문단의 정화요 규수문예의 주옥이다. 실로 고왕금래의 역사상 이와 같은 광채 육리(陸離)한 꽃이 피기는 이번이 처음일 것이다.’ 조선일보 당시 주필 이훈구가 쓴 서문의 한 대목이다.
요즘 시각에서 보면, 1918년 소설 ‘경희’를 발표한 나혜석이 ‘선(전)집’ 에 포함되지 않은 것은 의아하다. 하지만 나헤석이 1934년 ‘이혼공개장’을 발표한 이후, 사회에서 경원시된 사실을 떠올리면 ‘선(전)집’에 들어가지 않은 이유를 헤아릴 만하다.

▲여류단편걸작집 출간을 알리는 신문광고. 조선일보 1939년1월21일자에 실렸다.
◇해방 이후 한국 문학의 正典으로 떠올라
‘여기서 이 시대 여성의 부르짖음을 듣고저 한다. 여기서 이 시대 여성의 얼굴을 보고저 한다.’
노산 이은상은 ‘현대조선여류문학선집’서문에 이렇게 썼다. ‘바러건댄 백세후에 오히려 이 소리 들릴지어다. 다시 빌건댄 천재(千載·1000년)후에 또한 이 얼굴 보일지어다.’
‘선집’ 수록 작가들은 2000년대 출판사 창비가 낸 ‘20세기 한국소설’전집에도 대부분 수록될 만큼, 한국 문학사에 굵직한 자취를 남겼다. 그들의 대표작은 한국 문학의 정전(正典)으로 자리잡았다. ‘선집’ 편집자들의 감식안이 상당히 뛰어났다는 얘기다. 덕분에 노산의 소원은 100년이 되기 전 현실로 이뤄졌다.
◇참고자료
유용태, ‘’현대조선여류문학선집’의 근대 미의식과 정전적 의의 연구’, ‘인문사회21′ 11-5(통권42호), 2020
‘근대 한국 문학정전의 문학제도적 접근-’현대조선문학전집’을 중심으로’, ‘어문논집’ 제47집 2011,7
박숙자, ‘조선문학선집’과 문학정전들, ‘어문연구’ 제39권 제4호, 2011년 겨울
서승희, ‘제국의 저널리즘과 일본어 번역/창작의 역학: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 조선판 수록 ‘조선여류작가집’(1936)의 의미’, ‘동아시아문화연구’ 제67집, 2016.11
조선일보 출판부, ‘현대조선여류문학선집’, 1937
‘현대조선문학전집’, 1938
‘여류단편걸작집’, 1939
10.22 딸까지 팔아먹는 ‘刺身鬼’, ‘모루히네 조선’의 비극
1920년대 모르핀 중독자 급증, 총독부 느슨한 규제에 일부 의사까지 모르핀 밀매로 폭리

▲아편, 모르핀 원료인 양귀비 열매를 품에 안고 가는 조선 소녀들. 양귀비 재배자의 자식들로 보인다. / '조선의 전매'(1941)중
‘학명은 ‘모루히네 환자’, 별명은 ‘자신귀’, 직함은 ‘하이카라 거-지’, 속칭 ‘아편쟁이’는….’
조선일보 1933년6월30일자는 ‘자신귀’(刺身鬼)를 소개했다. 자기 몸을 찌르는 귀신, ‘모르핀’ 중독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1920년대~1930년대 신문을 들춰보면 ‘자신귀’란 단어가 수시로 등장한다. 그만큼 사람들에게 익숙한 용어였다.
100년 전 이 땅에는 모르핀 중독자가 넘쳐났다. 모르핀 주사에 인이 박힌 이들은 주사약을 구하기 위해 딸도, 아내도 팔아넘겼다. 1933년 2월 ‘자신귀’ 부녀의 상봉기사는 그 중 하나다.

▲양귀비 꽃을 재배하는 조선의 여성/'조선의 전매'(1941)중
◇'자신귀 부녀’의 상봉
평북 용천에 살던 스물아홉살 김시병은 3년 전 식구들을 이끌고 만주에 이주했다가 생활고로 가족이 뿔뿔이 흩어졌다. 열두살짜리 딸 연울은 대련, 심양 등지로 방랑하다가 ‘모루히네’ 중독자가 됐다. 유랑하던 연울은 1933년 1월 중국 안동현(縣)에서 극적으로 아버지와 만났다. 기쁨은 잠시뿐이었다. 역시 ‘모루히네’ 중독자였던 김시병이 주사값 70원 때문에 딸을 차련관의 음식점에 팔아넘겼다. 주사 없이 하루도 살 수 없는 딸은 음식점 고용살이를 견딜 수없어 도망쳤다. 음식점 주인이 주재소에 신고하면서 ‘자신귀 부녀’ 얘기가 세상에 알려졌다.(’12세 소녀로 ‘모히’중독될때까지: 일가 이산코 유랑3년에 자신귀된 부녀가 상봉’(조선일보 1933년2월8일자)

▲모르핀 중독자 부녀의 기막힌 사연을 보도한 조선일보 1933년2월8일자
◇걸레쪽 입은 산송장들이 ‘눈깔사탕’연회
1927년 봄이었다. 경성 한복판 서소문의 ‘자신귀굴’(刺身鬼窟)을 르포한 기사가 신문에 실렸다. 당시 아편 중독자는 10만을 헤아렸다고 한다. 기자는 당국자의 말을 빌려 이렇게 썼다.’아편쟁이가 전국에 10만이나 된다 하는 것은 개산에 불과하며 기실에 이르러서는 20만이 될는지 30만이 될는지 알 수없다고 하는 것은 어떤 당국자의 말이다.’
그중에서 아편쟁이가 가장 많은 곳은 경성이었다. 경기도평의회 평의원 조사를 빌려, 경성 시내 아편쟁이만 4만 이상이라고 했다. 경성에서도 가장 큰 아편굴이 서소문에 있었다. ‘지붕은 이즈러지고 서까래는 나팔을 부는 움막살이 초가집이 40여호가 즐비하게 늘어서고 걸레쪽 입은 산 송장의 무리들이 이곳저곳에 몰려앉아 ‘눈깔사탕’ 연회가 벌어졌다.’ 이곳에 몇 명이 사는지 통계는 없지만, 동네 사람 말을 빌려 40여호, 300여명이라고 전했다.(이상 ‘자신귀굴 방문기2-호수로 사십여호, 인수로 삼백’, 조선일보 1927년3월12일)

▲앳된 얼굴의 소녀가 양귀비 재배를 돕고 있다. /'조선의 전매'(1941) 중
◇대학 출신 인텔리, 명창 기생도 아편굴 신세
‘이 아편굴에도 위생 당국 조사에 따르면, 대학 출신과 중학 출신인 상당한 지식계급이 10여명에 달한다 하며 명기와 명창이란 이름을 듣던 기생과 광대도 수십명에 달한다는데, 때로 궂은 비가 내린다든지 달 밝은 밤에는 자기들의 심회를 토해내는 구슬픈 노래소리가 부근 동리 사람들까지 비감을 느끼게 된다고 한다.’( ‘자신귀굴 방문기 4′, 조선일보 1927년3월14일)
인텔리, 명문대가 자제, 기생, 광대들이 모르핀에 빠져들어 부랑자 신세가 됐다. ‘귀족 자제’로 알려진 한 중독자는 ‘죽어도 우리 집 이야기는 말할 수 없습니다’고 했다. 그는 아내까지 아편을 맞게 해 내외가 집에서 쫓겨났다고 했다. ‘나는 이곳에 있고, 아내는 전라도 모처에 있습니다. 들으시면 기막히시지요. 더 묻지 마시오.’ (‘자신귀굴 방문기’5, 조선일보 1927년3월16일)
◇모르핀으로 독감치료?
아편과 모르핀은 일제시대 조선의 최대 골칫거리였다. 특히 아편을 정제한 모르핀은 아편연(阿片煙)에 비해 값이 싸고 사용하기가 간편한데다 당국의 규제까지 느슨했다. ‘모루히네’중독자가 급증한 이유였다. 모르핀 중독은 병원을 통해서도 버젓이 유행했다.
유행성독감이나 복통 같은 질병을 치료한다면서 모르핀 주사를 놓아주는 일이 빈번했다. 1921년 3월 진도에선 유행성 독감이 유행했다. ‘영양불량으로 인하야 어떤 사람은 폐병까지 병발되어 노약자는 사망한 자가 적지않은데, 그 관내 조선 의생의 말을 듣고 ‘모루희네’ 주사를 실시하여 도리어 위독에 빠지게 한 일도 많이 있었는지라.’(‘진도군의 감모창궐’, 조선일보 1921년4월13일)
◇고물상주인이 모르핀 주사 처방
모르핀을 만병통치약으로 믿고 남용하다 죽는 사고도 빈발했다. 의료인도 아닌 고물상 업자가 병을 고쳐준다며 모르핀 주사를 놓았다가 용량과다로 목숨을 잃기도 했다. ‘고물상하는 김성오(45)와 주소 부정 김규성(40) 등 2명은 26일 오후1시 길야정 일정목 76번지 천단상회의 고용인으로 있는 갈경태(19)가 각기로 고생하는 것을 보고 모루히네 주사를 하면 나을 터이니 돈 50전을 내라고 하야 50전을 받고 모루히네 주사를 하여주었던 바 분량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갈경태는 그 자리에서 혼도함으로 즉시 부근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시켜 치료하던 중 동 4시에 죽었음으로 전기 두명은 모두 과실치사죄로 본정서에서 인치 취조중이라더라’(’’손방’의 모히주사로 생사람이 급사’, 조선일보 1928년11월28일) 이런 기사는 일제시대 신문에 넘쳤다.
◇의사들까지 모르핀 밀매로 폭리
모르핀 밀매로 돈벌이에 나선 일부 몰지각한 의사도 있었다. ‘천안에는 모루히네 중독자가 날로 늘어감에 유지자측에선 그 박멸책을 강구하고 경찰당국에서도 주의를 엄밀히 하던 바, 수일전에 어떤 사람의 밀고로 그 원인이 발각되어 경찰서에서 시내 대성의원에 있는 최종순의 가택수색을 위시하야 그 병원 의사 박충모와 중독자들을 소환 취조한 결과 전기 의사 박충모가 모루히네를 다량으로 밀매한 것이 판명되어 벌금 200여원에 처했다는데, 시내 사회 각방면에서는 사람의 생명을 구한다는 신성한 의업계에 도리어 사욕을 위하야 이같이 사회에 해독을 주는 의사는 엄중히 징계하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분개햐야 장차 성토 배척할 기세가 날로 높아간다더라’(‘의사가 모히밀매하고 벌금 2백원 물어’,조선일보 1926년12월5일)
◇모르핀 밀매 벌금, 고작 200원
‘전라남도 지방에 모루히네 중독자가 날로 많아지는 원인은 자기 동족이 멸망함에 따라서 자기 몸까지도 결국 멸망되고 말 것을 깨닫지 못하고 다만 목전의 이익을 취하기에 눈이 붉어 간악한 수단을 가지고 모루히네를 밀매하기로 전업을 삼는 의사와 의생이 각 고을에 많이 생기는 것과 지방 경찰 당국자의 이에 대한 취체가 다만 표면에 지나지 못하는 까닭임은 누구나 다 아는 바이오’(‘모히밀매의생’, 동아일보 1922년 7월26일)
처벌은 느슨했다. 모르핀을 밀매한 의사에게 내린 처벌은 벌금 200원뿐이었다.
◇모르핀 중독 심각했던 1920년대
동아시아 아편문제를 연구한 박강 부산외대 교수는 1920년대~1930년대 조선의 모르핀 중독자 급증은 총독부의 안이한 대응에서 비롯됐다고 지적한다.
1914년 공포한 조선경무총감부 훈령에 따르면, 아편은 무겁게 처벌했지만, 모르핀 처벌은 가벼웠다. 아편연의 수입과 제조, 판매, 혹은 판매를 목적으로 소지한 자는 6개월 이상~7년 이하 징역에 처하고, 아편연을 피운 자는 3년 이하의 징역에 처했다. 하지만 모르핀을 투여한 자는 3개월 이하 금고 또는 500원 이하의 벌금에 규정했을 뿐, 모르핀 주사자에 대해서는 처벌 규정이 없었다. 모르핀 밀매로 돈을 벌어도 처벌할 규정이 마땅찮았고, 모르핀중독으로 패가망신해도 개인적 일탈로 방관할 뿐이었다.
1919년 조선에서 모르핀을 독점 생산하던 다이쇼 제약 주식회사가 1차 대전이 끝나면서 수출이 어려워지자 이들이 생산한 모르핀이 조선 땅에 대거 풀렸다. 일본 내지에서 과잉 생산된 모르핀까지 조선으로 밀수입됐다. 모루히네 중독자가 늘어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총독부는 마약문제를 방관하다가 문제가 심각해지자 1930년 마약전매제를 시행했고, 1935년 ‘조선마약취제령’을 공포, 단속을 엄격하게 하면서 마약 중독 문제가 서서히 완화됐다.
◇'마약김밥’ ‘마약떡볶이’는 그만!
검찰총장이 집에서 마약을 소셜미디어로 피자 한 판값에 직접 구매하는 세상이 됐다고 한탄할 만큼, 최근 마약이 급속히 번지고 있다. 어린이 놀이터나 캠핑장에서 마약을 거래하거나 투약한 채 돌아다니다 붙잡히는 일이 심심찮게 보도된다. 올들어 7월까지 적발된 마약사범만 1만 명이 넘는다. ‘마약 김밥’, ‘마약 떡볶이’처럼 무심코 쓰는 말도 다시 생각해볼 일이다. 마약에 대한 경계심을 누그러뜨리고 호기심만 자극할 뿐이다. 무엇보다 ‘자신귀’가 출몰하던 100년전 세상으로 돌아갈까 무섭다.
◇참고자료
박강, 아편과 조선, 선인, 2022
조선총독부 전매국, 조선의 전매, 1941
10.29 1920년대 등장한 신종 음료, 카페에서도 인기 메뉴
‘첫 사랑의 맛’ 칼피스, 모던 걸의 입맛 사로잡다

▲박태원은 커피와 홍차, 코코아를 즐겼다. 하지만 1920년대 등장한 신종 음료 칼피스는 '외설적인 색채'가 싫다면서 꺼렸다. 대표작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도 경성역 티룸에서 칼피스를 권하자 극구 사양하는 장면이 나온다.
1920년대 경성 밤거리에는 ‘감주’를 팔러다니는 장사꾼이 있었던 모양이다. 대중월간지 ‘별건곤’(1928년2월호)기사 ‘감주와 막걸리’는 이렇게 시작한다.
‘구루마에 끌고 다니는 ‘왜국수’ 장사가 생긴 것은 오래된 옛 이야기요, 약식 장사가 두부 장사처럼 외치고 다니는 것도 벌써 헌 이야기가 되었지만 이번 세밑에는 ‘따끈따끈하구료’ ‘맛보고 사 잡수시오’하고 밤 깊은 골목을 요란히 외치고 다니는 감주 장사도 생겼다.’
이 ‘감주’의 매력(?)을 선전하는 데 신종 음료 ‘칼피스’가 등장한다. ‘사랑에 낯붉히고 안젓는 나어린 애인들에게 ‘칼피스’ 이상의 고마운 맛이 있을 것’이라는 표현이다. 청춘 남녀들이 ‘연애의 맛’을 느끼며 마시는 음료로 ‘칼피스’를 선전한 것이다.

▲미감, 청량, 건강을 강조한 칼피스 신문 광고. 조선일보 1930년 7월13일자
◇박태원, ‘외설적 색깔, 싫다’
1934년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한 박태원 대표작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도 칼피스가 등장한다. 거리를 걷다 동창생을 만난 구보씨는 경성역 티룸에 들렀다. ‘의자에 가서 가장 자신 있게 앉아, 그는 주문 받으러 온 소녀에게, 나는 ‘가루삐스’, 그리고 구보를 향하여, 자네두 그걸로 하지. 그러나 구보는 거의 황급하게 고개를 흔들고, 나는 홍차나 커피로 하지.’
동창생이 권한 ‘가루삐스’, 즉 칼피스를 구보는 완강하게 거부한다. 색깔이 외설적이고, 입맛에 맞지않다는 이유에서였다. ‘음료 칼피스를, 구보는,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은 ‘외설’한 색채를 갖는다.또, 그 맛은 결코 그의 미각에 맞지 않았다.’
박태원은 ‘기호품일람표’(동아일보 1930년3월25일)란 글에서 이렇게 썼다. ‘첫사랑의 맛을 잘 알고 있는 나, ‘칼피스’를 먹을 생각이 나지 않소.’ 같은 글에서 양식에는 홍차, 차와 케익을 맛보고 싶을 때는 ‘코코아’와 ‘슈크림’을 먹는다고 썼다. 커피는 맛이 검증된 단골 카페 이외의 장소에선 마시지 않는다고도 했다. 입맛 까다로운 ‘모던 보이’다운 취향이었다.

▲현명한 어머니는 칼피스를 간식으로 준다고 선전하는 칼피스 광고. 조선일보 1937년6월30일자
◇여름철 대표적 청량음료
칼피스는 사이다, 시트론, 평야수(平野水) 같은 탄산음료와 함께 1920년대 들어 이 땅에 소개됐다. 무더운 여름철에 많이 찾는 음료였다. 1930년 신문에 수박, 참외, 복숭아 같은 과일과 맥주를 소개하면서 ‘칼피스’를 포함시킬 만큼 신종 유행 음료로 떴다. 우유로 만든 음료인 만큼, 변질될 우려도 있었다. ‘우유를 원료로 한 산성 음료수 하면 ‘칼피스’ ‘렉키스’같은 것이 흔히 유행되는 것인데, 이런 것들이 어떤 때에 위험성이 있는가 하면 오래된 것들중에 흐린 것이 있는 것입니다. 음료수의 여러가지 성분이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흐리게 되는 나쁜 것들이 있습니다.’(‘우유로 만드는 음료 여러가지’, 조선일보 1930년 8월6일)

▲박태원은 친구 이상이 운영하던 다방 '제비'에 관한 추억을 썼다. 마담도 없고, 전화기도 떼가고 유성기도 팔아버린 제비 다방엔 손님이 없어 한적하다고 했다. 삽화도 직접 그렸다. 칼피스는 서비스하지 않고, 커피와 홍차만 판다고 썼다. 조선일보 1939년 2월22일자
◇제비 다방엔 없다
칼피스는 경성 거리에 하나둘씩 생기기 시작한 ‘카페’ 메뉴판에 커피, 홍차와 나란히 이름을 올릴 만큼 유행했다. 박태원은 친구 이상이 운영했던 찻집 ‘제비’이야기를 조선일보에 쓴 적 있다. 이상이 죽은 후인 1939년이었다. ‘제비’의 메뉴는 언젠가부터 커피와 홍차, 딱 두 종류였던 모양이다.
' “무얼드릴깝쇼?” “저-나는 포-트랩, 자넨, 칼피스?” “지금 안되는 뎁쇼.무어 다른 걸루…” “안돼…그럼 소-다 스이.” “그것도 안되는 뎁쇼”, “그것두 없다?... 그럼 뭐는 되니?” 수영이는 눈썹 하나 까딱않고 천연스리 대답한다. “홍차나 고-히나.”'(‘제비’上, 조선일보 1939년2월22일)
제비 다방엔 없었지만, 카페나 다방에서 흔히 파는 메뉴였다.
칼피스는 카페나 바에서 남성이 술을 마실 때 동석한 여성들이 선택하는 음료이기도 했던 모양이다. 채만식의 신문연재소설 ‘염마’에도 남자는 위스키, 여자는 칼피스를 고르는 대목이 나온다. ‘허철은 위스키—를 섞은 홋트레몬을, 향조는 칼피스를 각기 한잔씩 앞에 놓고 앉았다. “참 당산은 친구도 업수?” 무얼 생각했는지 향초가 마시던 칼피스잔을 내려놓으며 묻는다.’( ‘염마’, 조선일보 1934년 9월14일) 술 자리에 합석했지만, 술에 약한 사람들이 주로 마셨다는 것이다.
◇'첫 사랑의 맛’으로 선전
칼피스는 우유에 유산균을 넣어 발효시켜 만든 음료였다. 일본인 무역상 미시마 카이운(三島 海雲)이 1919년 7월 시원한 산미와 단 맛을 추가한 발효음료로 만들어 판매했다. 일본에서는 칼피스 광고에 ‘첫 사랑의 맛’이란 선전문구를 붙였다. 시원하고 달달한 맛을 ‘첫 사랑’에 연결시킨 것이다. 이 광고가 먹혔던지, 칼피스는 일본은 물론 조선과 중국, 만주에서도 인기 음료로 떠올랐다.
칼피스 광고는 당시 신문에 자주 실렸다. 칼피스가 온도에 따라 맛이 다르다면서 가장 맛있는 온도는 섭씨 14도라고 선전했다. 깊은 우물에서 길어낸 물의 온도와 같다고 했다. 시원하면서도 달콤한 맛에 반한 사람들이 이 음료수를 찾기 시작했다. 칼피스는 건강 음료로 소개되기도 했다. 칼피스 광고는 ‘자강음료’(滋强飮料)란 문구를 내세웠다. 우유에 유산균까지 들었으니, 건강에 좋은 음료라고 생각할 만했다.
칼피스는 광복 이후에도 많이 팔렸다. 요즘도 ‘쿨피스’란 이름으로 나온다. 어쩌다 가게에서 눈에 띄면 ‘요즘도 이걸 먹나’ 싶은데, 새콤달콤한 추억의 맛이 떠오를 때도 있다. 예전 같은 인기는 덜하지만, 떡볶이 같은 음식을 먹을 때 매운 맛을 가라앉히는 데는 더할 수없이 좋다.
◇참고자료
城西人, ‘감주와 막걸리’, ‘별건곤’ 11, 1928.2
박현수, 식민지의 식탁, 이숲, 2022
이경훈, ‘박태원의 카페, 구보의 커피’,’현대문학의 연구’74, 한국문학연구학회,2021
김동식, ‘1920년~30년대 대중잡지에 나타나는 음식표상-별건곤과 삼천리를 중심으로’ 684~685, 한국학연구 제44집, 2017
11.05 일본인 거주 남촌에 수도관 집중, 8000명 사는 이태원엔 우물만 5개
‘사막같은’ 이태원, “물 한모금이 황금처럼 귀해”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 이연주 일제는 일본인이 주로 사는 남촌에 수도관을 거미줄처럼 깔아 수돗물을 공급한 반면, 조선인이 대부분인 북촌과 1936년 경성에 편입된 이태원, 공덕 등지에는 수도관을 제대로 설치하지 않았다. 이때문에 조선인 대부분은 식수를 우물물에 의존하는 민족차별을 겪었다.
‘우리 동리 이태원정(町)은 턱앞에는 칠백리의 긴 물줄 한강이 보기 좋게 놓여있고, 등 뒤 수철리(水鐵里·금호동 일대) 산 등에는 경성부의 대(大)수원지가 있어 10년 대한(大旱)이 들더라도 이곳 사람들은 물 걱정은 없으리라고 추측하겠지만, 그러나 이태원의 물난리란 요만조만한 것이 아니다. 8000여명이나 사는 곳에 우물이 단지 다섯 개밖에 아니되니 물 한모금이란 이곳에서는 큰 황금같이 귀하다.’(‘사막 같은 이태원정에 어느 때나 수도를 시설?’, 조선일보 1938년 9월21일자)
1938년 이태원 주민이 신문에 투고했다. 조선시대 한성부(漢城府)에 속했던 이태원은 1914년 고양군에 편입됐다가 1936년 4월 다시 경성부로 들어왔다. 경성부 소속이 됐지만 기반시설은 빈약했다. 특히 식수문제가 심각했다. 8000명 사는 동네에 우물이 5개 밖에 안된다니 그럴 만했다.
이 주민은 ‘새벽부터 밤 깊도록 물싸움이 지독하다’면서 ‘이건 사막이래도 이런 지독한 사막지대는 별로 없을 것’이라고까지 했다. ‘여기도 경성부 이태원정이라 하니 수도 좀 맛 볼 수없을까요? 수도는 어떤 사람만 먹는 것인가요?’라고 하소연했다.

▲일본인은 대부분 수돗물을 사용하는데, 조선인은 2할 밖에 안된다고 지적한 조선일보 1926년12월28일자 기사
◇'수돗물은 근대의 상징’
식수난(亂)은 경성부에 새로 편입된 이태원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경성부의 조선인 주민 대부분이 식수난으로 골머리를 앓았다. 1910년대까지 조선인 대다수는 우물과 강물을 식수원으로 썼다. 1920~1930년대는 도시에서 전통적 우물 대신 상수도가 급속도로 전파된 시기였다. 우물은 전염병 온상이자 불결을 상징하는 낡은 시대의 유물로 간주됐다. 수돗물은 찬란한 근대 문명의 상징이었다. 우물물을 길으러 갈 필요없이 수도꼭지만 틀면 콸콸 깨끗한 물이 흘러나오니 반할 수밖에 없었다.
김영미 국민대 한국역사학과 교수에 따르면, 상수도 보급은 1920년 대규모 콜레라 유행이 중요한 계기가 됐다. 그 해 경성부민 전염병 사망자 중 조선인은 983명이나 됐다. 일본인도 266명이 죽었다. 동네마다 자위(自衛) 방역단이 생겨났고 위생과 방역이 제1의 우선순위로 떠올랐다.

▲경성의 수도료가 동양 제일로 비싸다고 보도한 조선일보 1927년2월18일자 기사. 일본보다도 30~40% 더 비싸다고 했다.
◇조선인은 29%만 수돗물 사용
문제는 행정을 책임진 경성부가 일본인 지역(남촌) 위주로 상수도 배관을 설치했다는 점이다. ‘일본인촌(村)인 남부는 경성부에서 가설한 수도선이 지주망(蜘蛛網·거미줄)같이 얽혀 있으나, 조선인촌인 북부 경성은 전항에 말한바와 같이 몇 개의 간선뿐임으로 대개는 우물물을 먹게 되어 여름이면 전염병을 예방할 도리가 없는데….’(‘경성수도는 남부 전용물, 조선인은 불과 2할’, 조선일보 1926년12월28일)
기사에 따르면, 1926년 11월 수돗물을 먹는 경성의 일본인은 7만5166명으로 전체 일본인의 85%인데 반해, 조선인은 6만3456명으로 전체 조선인의 29%밖에 안된다고 비판하고 있다.
5년이 지난 1931년에도 상황은 비슷했다. 수도를 쓰는 가구는 조선인은 1만6366호(전체 5만1000호), 일본인 2만1820호(전체 2만2000호)로, 일본인은 거의 전원이 수돗물을 쓰는 반면, 조선인은 약 32%만 수돗물을 이용했다.(‘府內 수도 사용 조선인 4할, 일본인은 거의 全數’, 조선일보 1931년 3월13일) 신문들은 이런 기사를 지속적으로 내보내면서 일제의 민족차별을 비판했다.
◇경성부의 수도계량제, 가난한 조선인들 우물물로 내몰아
조선인이 위생적인 수돗물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제한한 요인은 또 있다. 1924년9월1일 경성부는 사용량에 따라 수도 요금을 부과하는 미터제를 실시했다. 그러자 수돗물을 얻어먹던 조선인 빈민들은 다시 우물물로 내몰릴 수밖에 없었다. (‘경성수도 卽賣制로 위협된 시민위생’, 조선일보 1924년10월3일)
‘남의 행랑에 있는 사람으로 종전에 주인집의 열쇠를 빌려서 물을 다소간 얻어먹고 살던 사람들은 대타격을 만나서 ‘한 지게에 오리씩’하는 물이나마 사먹을 수가 없는 형편임으로 잡용에 사용하려고 파놓은 우물(井水)로 기어들게 되었는데, 경성에 있는 ‘우물’은 어떠한 것임을 불구하고 모두 불결할뿐만 아니라 수질에 매우 해독이 많은 까닭으로 그 물을 먹는 사람들중에는 병에 걸리어 신고하는 사람도 있다하여 그의 자세한 수효는 알 수없으나 어떻든 우물물을 먹는 사람이 많이 있게 된 것은 사실…’(‘위험한 井水사용’, 조선일보 1924년10월3일)

▲경성부가 1924년9월부터 사용량에 따라 요금을 징수하는 수도계량제를 실시하면서 김장철을 맞은 주민들이 용수난을 겪고 있다고 보도한 조선일보 1924년10월21일자 기사
◇'매일 살풍경한 수도의 소동이 끊일 새없다’
경성부의 수도계량제에 대한 비판은 거셌다. 행정당국이 어떻게 주민을 상대로 돈벌이를 할 수 있느냐며 추궁했다. ‘경제학상의 소위 자유화(自由貨)에 속하는 물은 경성에 있어서 가장 부자유한 고가의 상품이 되고 말았다’고 시작한 한 신문 사설은 ‘수도 계량제 실시 후 매일 살풍경한 수도의 소동이 끊일 새 없다’고 지적했다. 영세민이 비위생적인 우물물을 먹을 수밖에 없도록 내몰았다면서 곧 닥치는 김장철에 얼마나 큰 부민의 고통이 있을지 ‘당국자는 아는가, 모르는가’라고 호통쳤다. (’경성수도 공황’, 조선일보 1924년10월23일)
수도계량제 탓에 우물물을 먹는 조선인이 늘어나자 경성부 당국자도 걱정할 정도였다. ‘♦경성부에서 수도를 인계하여 간 뒤로 계량제를 실시하더니 그 뒤로는 물을 얻어먹기가 어찌 어려운지 우물물을 먹는 이가 늘었다 한다. ♦그런데 음료수에 적당하지 못한 물을 먹는 곳이 있어 위생상에 큰 염려일 뿐 아니라 전염병 환자가 늘어가는 원인이 거기에 있는 것같다고 경성부 위생과장은 말하였다 한다.’(잔소리, 조선일보 1924년9월5일)
◇'동양 최고의 물값’
미터제로 바꾼 경성의 수도 요금은 동양 최고라는 말이 나올 만큼 비쌌다. 대구, 원산보다 10% 더 비싼 것은 물론 일본의 각 도시보다 30~40%나 비쌌다고 한다.(‘경성의 수도 요금은 동양 제일의 고가’, 조선일보 1927년2월18일) 그나마 급수제한과 단수가 연중행사처럼 발생했다. 이 때문에 요금인하운동 얘기도 심심찮게 나왔다. 하지만 당국자들은 수원지(水源池) 유지비가 비싸기 때문에 요금을 내릴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공짜나 다름없는 우물물 대신 비싼 수돗물을 사먹게 된 데는 총독부의 무능한 행정 탓도 컸다. 도시 팽창에 따른 하수도 시설 정비에 재원을 투자하지 않아 우물이 오염됐기 때문이다. 인구는 급증하는데 분변이나 생활하수를 제대로 처리하지 않고 개천이나 강물에 흘려보내면서 오염이 심각해졌다.
◇'지렁이,물벌레가 나오다니...’
게다가 경성의 수돗물은 벌레나 불순물이 나오기 일쑤였다. ‘경성부의 수도는 여름마다 지렁이가 나오느니, 또 무슨 이름모를 물벌레며 모래 같은 것이 나온다고 하야 말썽을 일으키고 있는데, 더구나 그것이 전염병도시라는 별명을 듣고 있느니만치 수도에 대해서는 일반 시민의 신경이 날카로워서 적지않은 불안과 의심을 가지고 있다’(‘경성 수도망에 이상’,조선일보 1936년3월7일)고 보도할 정도였다. 100여년 전 ‘근대의 총아’ 수돗물이 일으킨 파란이었다.
◇참고자료
김영미, 일제 시기 도시의 상수도 문제와 공공성, 식민지 공공성-실체와 은유의 거리, 책과 함께, 2010
김백영, 지배와 공간: 식민지도시 경성과 제국 일본, 문학과 지성사, 2009
11.12 낙랑파라 단골 이상은 ‘더치 페이’의 선구자?
1932년 6월 이순석 개업, 박태원 구본웅 이태준 등 모더니스트들의 ‘핫플’

▲낙랑파라는 1932년 7월7일 경성부청(현 서울도서관) 맞은편 장곡천정105번지에 개업했다. 이상 박태원 구본웅 김소운 등이 자주 드나들던 예술가들의 아지트였다./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 정다운
‘거의 매일같이 ‘낙랑’에서 만나는 얼굴에는 이상, 구본웅 외에 구본웅의 척분(戚分)되는 변동욱이 있고, 때로는 박태원이 한몫 끼었다. 거기다 낙랑 ‘주인’인 이순석-이 멤버는 모두 나보다는 앞서 서로 친한 사이들이었다.’
시인 김소운(1907~1981)이 친구 이상을 그리며 쓴 회상이다. 둘의 첫 만남도 끽다점(喫茶店) 낙랑파라에서였다. 화가 구본웅의 소개였다. 김소운은 이상을 ‘우정에 있어서도 현실적, 도회적이었다’고 기억한다.
◇'더치 페이’의 선구자(?) 이상
‘한 테이블에서 같이 차를 마실 때, 그중 하나가 찻값을 치른다는 것은 우리 사회에 겨우 하나 남은 염치요,관습이다. 그러나 삼십 사, 오년 전 그 시절에 이상은 이미 그런 폐습을 탈피한 선각자(?)였다.희희낙락 담소하다가도 일어설 때는 제가 마신 찻값으로 10전 경화(硬貨) 하나를 테이블 위에 내놓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상이 ‘더치 페이’ 선구자였다는 얘기다.
1932년 7월7일 경성부청(현 서울도서관) 건너편 장곡천정(현 소공동) 105번지에 문을 연 ‘낙랑파라’는 요즘 말로 모더니스트들의 ‘핫플’이었다. 이상, 박태원 등 구인회와 구본웅, 길진섭, 김용준 등 목일회(木日會)멤버들이 단골로 모였다. 예술을 운동의 도구로 여기는 프로문학, 프로예술과 거리를 둔 모더니스트들의 아지트였다. 지금 플라자호텔이 들어서있는 소공로 입구다.

▲시인 이상이 그린 '낙랑파라' 삽화. 박태원이 쓴 신문연재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 들어있다. 낙랑파라 내부를 묘사했다. 등나무 의자와 커피, 음료수 잔 뒤로 두 손으로 턱을 받치고 무료하게 앉아있는 마담의 모습이 보인다. 조선중앙일보 1934년8월14일자
◇남국의 파초, 축음기, 커피로 도회적, 이국적 분위기
‘대한문 앞으로 고색창연 옛 궁궐을 끼고 조선호텔 있는 곳으로 오다가 장곡천정(町) 초입에 양제(洋製) 2층의 소서한 집 한 채 있다. 입구에는 남양(南洋)에서 이식하여 온듯이 녹취 흐르는 파초가 놓였고,실내에 들어서면 대패밥과 백사(白沙)로 섞은 토질 마루 위에다가 슈베르트, 데도릿지(독일여배우 마들레네 디트리히) 등의 예술가 사진을 걸었고, 좋은 데생도 알맞게 걸어놓아있어 어쩐지 실내 실외가 혼연조화되고 그리고 실내에 떠도는 기분이 손님에게 안온한 심정을 준다. 이것이 ‘낙랑팔라’다.’(박옥화, ‘인테리 청년 성공직업’, 삼천리 1933년10월)
필자는 낙랑파라를 ‘서울 안에 있는 화가, 음악가, 문인들이 가장 많이 모이고 그리고 명곡연주회도 매주 두어번 열리고 문호 괴테의 밤같은 회합도 가끔 열리는 곳’이라고 소개했다. 이곳은 문인, 화가들이 커피잔을 놓고 축음기를 통해 울려퍼지는 음악을 들으며 취향과 감수성을 공유하는 감각의 공동체였다. 낙랑파라의 ‘파라’는 응접실, 거실을 뜻하는 단어 ‘parlour’의 일본식 표기에서 왔다. 일본에선 양과자와 음료수를 주로 파는 경음식점을 가리키는 단어로 사용됐다고 한다.
낙랑파라는 2층짜리 한양절충식 건물이었다. 1층은 다방, 2층은 화실로 꾸몄다. 목조로 뼈대를 만든 후 벽돌로 벽을 쌓고 지붕에는 기와를 얹고, 양식 유리창을 설치했다. 밖에서 보면 양식 건물로 보였을 것이다. 실내엔 등나무 의자와 테이블을 놓고, 야자수를 들여놓아 이국적 분위기를 냈다. 당시 일본과 유럽의 고급 호텔이나 카페에서 사용한 인테리어 아이템이었다.

▲경성부청(현 서울도서관)앞 낙랑파라 단골 멤버들. 왼쪽부터 이상 박태원 김소운이다. 낙랑파라는 모더니스트 예술가들의 아지트였다.
◇커피, 홍차 1잔에 10전, 토스트도 팔아
낙랑파라의 분위기는 단골 박태원 덕분에 소상하게 알 수 있다. 1934년 8월1일부터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한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엔 낙랑파라가 자주 등장한다. ‘다방의 오후 2시, 일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그곳 등의자에 앉아 차를 마시고 담배를 태우고, 이야기를 하고, 또 레코드를 들었다. 그들은 거의 다 젊은이들이었고, 그리고 그 젊은이들은 그 젊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자기네들은 인생이 피로한 것같이 느꼈다.’
백수나 다름없는 인텔리 청년들이 커피를 마시며 소일하는 곳이었다. 박태원 친구였던 이상이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삽화를 그린 덕분에 낙랑파라의 내부를 더 알 수있다.
낙랑파라 메뉴는 커피와 홍차, 소다수, 아이스크림, 칼피스 등이었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 토스트를 먹는 손님이 나오는 것으로 미루어 간단한 음식도 팔았던 모양이다. 낙랑파라의 커피, 홍차 가격은 10전이었고, 아이스크림, 코코아, 칼피스는 15전 정도였다.
◇투르게네프 50년제, 길진섭 소품전시회 열려
낙랑파라에선 ‘삼천리’ 소개처럼 미술전시회, 출판기념회, 음악회 같은 이벤트가 수시로 열렸다. 1933년 8월 22일 저녁 8시, 러시아 소설가 투르게네프 50주기 기념제가 이곳서 열렸다(‘투르게네프 50년祭 기념’, 조선일보 1933년8월22일) 함대훈 이헌구 이하윤 등이 발기인으로 나선 문단 행사였다. 주요한 임화 김상용 김억 이선근 이태준 정지용 등 당대의 문인들이 모여 투르게네프를 추억했다.
1936년3월15일 서양화가 길진섭 소품전이 열린 곳도 낙랑파라였다. 낙랑파라 주인인 이순석이 친구의 곤궁한 생활을 도와주기 위해 마련한 작은 전시였다. ‘서양화가 길진섭씨는 그동안 재차 도동(渡東)하여 빈한한 서생의 생활을 무릅쓰고 일심전력 화도에 정진한 결과, 중앙미전 및 백일회 등 상당히 권위있는 미전에 입선되는 동시 백만회 회원으로 추천,친우 이순석씨 외 몇 분은 씨의 생활이 너무나 군간함을 민망히 생각하고 씨의 소품전을 열어 다소의 도움을 이루어 주고자 방금 그 준비에 분망중이인데…'(‘길진섭씨 개인소품전’, 조선일보 1936년3월15일)
길진섭(1907~1975)은 길선주 목사의 막내아들로 1932년 도쿄미술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한 화가였다. 정지용 첫 시집 ‘정지용시집’(1935)과 ‘백록담’(1941), 이육사의 유고집 ‘육사시집’(1946)을 디자인하고, 요절한 이상의 데스 마스크(안면상)를 떠 준 마당발이었다.
◇도쿄미술학교 도안과 출신 이순석이 주인
‘낙랑파라’ 주인 이순석(1905~1986)은 광복 후인 1946년 서울대 미대 교수로 부임해 1970년 정년퇴임까지 후학을 양성한 디자인, 석조 공예분야 1세대다. 1931년 동경미술학교 도안과를 졸업한 이순석은 그해 동아일보사 강당에서 국내 첫 공예도안전을 개최했다. 화신백화점 대표 박흥식에게 스카우트 돼 광고부 주임으로 일하다 1년여 만에 관두고 낙랑파라를 차렸다. 당시 덕수궁 박물관에 수시로 다니면서 공예공부를 했는데, 근처에 화실을 낼 겸, 카페를 낸 것이다.
‘삼천리’에 따르면, 이순석은 시설비 1100원, 유동자본 500원 등 2000원 정도 들였는데, 매달 매상은 300원에 비용이 200원쯤 들고, 순수입은 불명(不明)이라고 썼다. 이순석은 ‘프랑스 파리에 유행했다는 살롱과 비슷해서 문인, 화가 등 예술가나 예술가 지망생들이 주로 모여 고전음악을 감상하면서 예술을 논하고 작품 구상을 하는 등 일종의 예술가들의 집회소 구실을 했다’(‘노교수와 캠퍼스와 학생’141, 경향신문 1974년 3월11일자)고 회고했다. 경영이 시원찮았던지 이순석은 1935년 경 배우 김연실에게 넘긴다. 김연실은 가게 이름을 ‘낙랑’으로 바꿨지만, 그 후에도 종종 ‘낙랑파라’로 불리기도 했다.
◇복혜숙의 ‘비너스’, 유치진의 ‘플라타느’
카페는 1920년대~1930년대 도회적 분위기를 즐기는 곳이자, 모던의 상징인 ‘핫플’로 떠올랐다. 예술가들이 직접 운영하는 끽다점, 카페도 하나둘씩 늘어났다. 영화감독 이경손이 차린 ‘다방 카카듀’(1927년 개업), 영화배우 복혜숙의 ‘비너스’(1928년 개업), 영화배우 겸 미술감독 김인규의 ‘멕시코’(1929년), 이상의 ‘제비’(1933)는 종로의 명물이었고, 극작가 유치진의 ‘플라타느’가 낙랑파라와 함께 소공동을 지켰다. 카페의 르네상스시대였다.
◇참고자료
오윤정, ‘1930년대 경성 모더니스트들과 다방 낙랑파라’, 한국근현대미술사학 제33집, 2017 상반기
박현수, 식민지의 식탁, 이숲, 2022
서울대미대 응용미술학과 동문회,하라 이순석, 1993
박옥화, ‘인테리 성공직업’1, 삼천리 1933년 10월, 99
‘깍다점평판기’, 삼천리 제6권 제5호 1934.5
김소운, ‘李箱 異常’, ‘하늘 끝에 살아도’, 동화출판공사, 1968
11.19 경성제대 교복 입은 가짜 대학생, 절도 사기에 여성 능욕
1924년 설립된 경성제대, 고학력 선망의 그림자

▲1924년 설립된 경성제대 본부와 법문학부 건물이다. /서울역사박물관
‘본적을 경기도 파주군 주내면에 둔 고희도는 경성제국대학 학생의 정복정모(正服正帽))를 가짜로 만들어서 쓰고 대학생으로 가장한 후 경성,개성의 두어 곳에서 이십여 회의 절도 사기를 범행하였고, 또 대학생을 빙자하야 양가처녀를 유인 능욕한 것이 오륙인이라고한다. 이러한 대학생의 정복과 정모를 입고 썼음으로 세상에서는 다소 그를 학생의 신분으로 신용하였기 때문에 그 범죄가 용이하게 된 것이요, 더구나 어린 양 같은 처녀들이 그가 대학생이라는 것을 존경하여 그에게 친하다가 유인되어 능욕까지 당하였다 한다’(‘대학생이란 무엇’, 조선일보 1929년 10월25일)
◇연애하려고 가짜 대학생 행세
일제시대 신문에는 ‘가짜 대학생’기사가 자주 등장한다. 일본 유학생 또는 경성제대생이라고 속인 사기꾼이 줄을 이었다. 절도나 성폭행 같은 중대 범죄를 저지르기도 했지만, 연애를 하려고 가짜 대학생 행세를 했던 이들까지 있었다. 고학력 선망이 부른 일탈이었다.
아현동에 사는 스무살 김경길이란 젊은이는 집 앞에서 자주 마주친 여자전문학교생의 미모에 반했다. 관심을 끌어보려고 예과생 정복, 정모에 망토까지 사서 입고, 돌아다녔던 모양이다. 그러다 하필 진짜 예과생에게 걸렸다. 미심쩍은 진짜 경성제대생은 신고했고, 김경길은 서대문 경찰서에 끌려갔다.(‘이번엔 연애에 성공코저 가짜 대학생 노릇’, 조선일보 1938년 4월8일) 제대(帝大)생이라면 우러러보던 시절이었다. 경성제대(당시 城大로 줄여 불렀다)는 1945년 광복 때까지 조선에 단 하나밖인 정규대학이었다.

▲여학생과 연애하기 위해 가짜 대학생 행세를 한 청년이 경찰에 붙잡혔다는 조선일보 1938년 4월8일자 기사.
◇朝鮮帝大가 원래 명칭
조선에 최고학부인 대학을 세우자는 운동은 3.1운동 직후인 1920년 조선교육회 설립발기회가 발족하면서 시작됐다. 1922년 1월 이상재 이승훈 윤치호 김성수 송진우 등이 조선민립대학기성준비회를 정식으로 결성했다. 전국에 지부를 잇따라 설치하고 대학설립을 위한 모금에 나섰다.
조선의 교육열에 놀란 일제는 민립대학 설립을 탄압하고 경성제대 설립으로 맞불을 놓았다.1924년 5월 예과, 1926년 5월 본과가 출범하면서 경성제대가 탄생했다. 첫 입학생 원서교부 때만해도 이름이 조선(朝鮮)제국대학이었다. 이렇게 부르면 조선이 식민지가 아니라 하나의 제국으로 인정해주는 꼴이 된다고 해서 서둘러 경성제국대학으로 명칭을 바꿨다고 한다. 합격자 발표 때는 ‘경성제대’로 이름이 바뀌어 있었다.
◇전문학교 졸업생이 최고 지식인
당시엔 2년제인 예과(豫科)를 졸업해야 대학 본과에 들어갈 자격이 생겼다. 문과, 이과 각 80명씩 160명을 뽑기로 했는데(실제론 170명 합격), 조선인 합격자는 45명 밖에 안됐다. 식자들은 조선인 학생이 일본인의 3분의1밖에 안된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당국의 교육정책이 조선인을 도외시하고 일본인만을 본위로 하는 괴상한 현상을 볼 때에 당국의 교육정책을 비난하지 않을 수 없는 동시에 돌이켜 교육의 보장이 없는 우리 민중의 장래를 위하여 통탄을 말지 아니한다.’ 조선일보 사설(‘조선대학 시험전말을 듣고’,1924년4월3일)은 입학시험의 민족차별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일본 역사 문제가 출제되고, 일본식 한자 훈독과 영어 발음 문제가 조선인에게 불리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경성제일고보, 15명으로 최다 합격
입시 경쟁이 치열할 수밖에 없었다. 고등보통학교(고보)는 물론 보통학교 입학경쟁도 극심하던 시절이었다. 수재들만 모인다는 경성제일고보(훗날의 경기고)가 15명의 합격자를 내, 조선인 전체 합격자의 3분의1을 차지했다. 평양고보(6명) 대구고보(5명)순이었다. 사립 명문에서도 10명의 합격자를 냈다. 휘문 3명과 중앙, 보성, 배재에서 2명씩, 그리고 양정고보에서 1명의 합격자를 냈다.
◇일선융화의 결실? 웃기는 소리
1924년 5월 성대(城大) 예과 시무식엔 당시 총독부 2인자인 아리요시(有吉忠一) 정무총감이 참석했다. 성대 설립은 ‘일선융화’의 결실을 거두기 위한 것이라고 강변했다. 조선인도 일본인처럼 인재를 배출하게 하기 위한 시책이라고 자랑까지 했다. 곱게 넘길 수 없었다. ‘하필 일본인을 표준할 것 무엇있나. 유길 총감의 안계(眼界)도 몹시 협착(狹窄)하군’(‘民聲’, 조선일보 1924년5월17일) 신문은 대놓고 정무총감을 비아냥댔다.
◇둥근 교모의 예과생, 본과생은 사각모
성대 예과생은 흰 테를 두 줄 두른 둥근 모자에 느티나무 잎사귀가 세갈래로 갈라진 모표를 붙였다. 일본 고등학교 교모를 본땄다. 본과생은 사각모를 썼다. 검은 색 교모와 교복, 그리고 망토를 걸친 제대생은 최고 엘리트로 대접받았다. 지방 대도시는 물론 경성에서도 경성제대생을 볼 일이 많지 않아 교복을 번듯이 입고 나타나면, 깜빡 속을 수밖에 없었다. 경성제대 입학생과 졸업생 명단이 매년 신문에 실렸고, 졸업 후 진로가 주요 잡지의 기획으로 나올 정도였다. 1945년 광복을 맞을 때까지 경성제대를 졸업한 조선인 학생은 810여 명에 불과할 만큼 희귀했다.

▲경성제대 2회 졸업생인 이효석은 졸업 후 일자리가 없어 총독부 검열계에 취직했다가 곤욕을 치렀다. 극소수 엘리트가 들어간 경성제대 출신도 마땅한 일자리를 찾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조선일보 DB
◇총독부 검열계 취직했다가 지탄받은 이효석
경성제대 졸업생은 관리, 의사, 교수 등 전문직으로 진출했다. 법과 출신은 고등문관시험을 거쳐 총독부 고위관료로 진출한 이들도 많았다. 하지만 문학, 사학, 철학 등 인문학 출신은 진로가 마땅찮았다. ‘메밀꽃 필 무렵’으로 이름난 이효석이 대표적이다. 이효석은 1925년 법과 진학이 보장된 문과 A조로 경성제대 예과에 들어갔다. 예과에 입학하던 해 매일신보 신춘문예에서 선외가작에 뽑혔다. 이효석은 문학의 꿈을 키웠고, 본과에 올라가면서 문학으로 바꿨다.
대학을 졸업한 이효석은 결혼까지 했으나 취직을 못해 어려움을 겪었다. 대학 스승의 주선으로 총독부 경무국 검열계에 취직했다. 동료들의 글을 검열하는 자리에 들어간 것이다. 문단의 기대주 이효석이 검열관이 되자 비판이 쏟아졌다. 낙담한 이효석은 사직하고 처가가 있는 함경북도 경성으로 내려가 경성농업학교 영어 교사로 일했다. 일순간의 잘못된 판단이 평생 큰 상처로 남았다. 입시철에 문득 떠오른 100년 전 경성제대 후일담이다.
◇참고 자료
이충우, 최종고 지음, 다시보는 경성제국대학, 푸른사상, 2013
최병택, 예지숙 지음, 경성리포트, 시공사, 2009
11.26 90년 전 비행기타고 도쿄 출장다닌 금광업자 우영희
1929년 도쿄~대련 정기 항로 개설…초특급편은 도쿄~경성 6시간 주파

▲1929년 9월 도쿄와 경성을 잇는 항공 여객노선이 개설됐다. 오사카, 후쿠오카, 울산을 거치는 노선이었다. 1938년 초특급편을 이용할 경우, 경성에서 6시간 후면 도쿄에 도착할 수있었다. 사진은 1935년 무렵의 하네다 비행장/‘世界畵報’1937년 2월호
1938년1월22일 아침 금광업자 우영희는 도쿄를 향해 출발했다. 그가 향한 곳은 여의도비행장이었다. 동료 K와 함께 ‘더글라스’ 18인승 프로펠러 비행기에 탑승했다. 비행기는 오전 11시5분 정각에 이륙했다. ‘상계(上界)는 청명하얏고 백운(白雲)상 높이 난 은색 ‘뽀듸’(바디)는 눈이 부실만치 빛나며 서북상으로 흘러드는 일광(日光)은 보온설비를 한 기내의 온도에 지지아니할 만치 따뜻하얐다.’ 우영희 앞으로 ‘백색 면포를 펼쳐놓은 듯한 강’ ‘송이밭을 보는 듯한 농촌의 초가지붕’이 지나가더니 눈 덮인 추풍령이 들어왔다. 비행기는 이어 대구와 울산비행장 상공을 거쳐 현해탄을 건넜다.

▲우영희가 이용했을 것으로 보이는 더글라스 DC 2 프로펠러 여객기. 승무원 3명, 승객 14명을 태울 수있는 소형비행기였다.
◇기내식으로 샌드위치 서비스
바다를 건너는 도중에 기내식으로 샌드위치가 나왔다. ‘하늘위의 점심식사’를 마친 그의 눈앞에 큐슈 지방의 산들이 멀리 보이기 시작했다. 하필 그 때, 난기류를 맞닥뜨린 비행기가 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먹은 음식은 물론 누런 위액까지 모두 게워낸 그는 기진맥진했다.
후쿠오카 간노스(雁巢) 비행장에 내린 우영희 일행은 세관 검사와 도항 검사를 마치고 도쿄행 비행기로 갈아탔다. 오른쪽은 태평양, 왼쪽엔 도시와 산들이 스쳐갔다. 비행기는 3시간만에 도쿄 하네다 공항에 도착했다. 오사카나 나고야 비행장에 중간 기착하는 편도 있으나 ‘초특급’은 하네다공항까지 논스톱으로 날아갔다. 도착시간은 오후 5시였다. 경성 출발 6시간만에 도쿄에 도착한 것이다.우영희가 광업전문잡지 ‘광산시대’ 1938년5월호에 기고한 ‘동경기행-內地 광업계의 동향’에 나오는 내용이다.

▲1930년 9월 여의도 비행장의 평양 기생. 이들은 경성 조선극장에서 열린 조선각도명창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평양에서 비행기편으로 경성에 왔다. 경성 기생들이 이들을 환영하기위해 비행장에 몰려나왔다고 한다. 조선일보 1930년 9월 22일자
◇2박 3일 거리를 6시간만에 주파
20세기 전반 현해탄 건너 도쿄로 가려면, 아무리 빨라도 2박3일은 걸렸다. 경부선 열차로 부산에 내려가 관부연락선을 타고 배위에서 하룻밤을 보낸 뒤 시모노세키에 내렸다. 도쿄까지는 열차로 열몇시간 더 달려야했다. 그런데, 그 시절에도 경성과 도쿄를 6시간만에 연결하는 항공 여객기 서비스가 있었다. 엄청난 티켓값을 지불해야했고 프로펠러 소형기라서 추락 위험도 무릅써야했지만, 비행기를 선택하는 승객이 있었다.
경성과 도쿄를 잇는 항공노선은 1929년 4월1일 민관(民官) 합동의 일본항공수송주식회사가 정기 우편, 화물 수송 업무를 시작하면서 비롯됐다. 그해 7월 도쿄~오사카~후쿠오카, 9월 후쿠오카~울산~경성~다롄을 연결하는 항공여객 서비스가 출범했다.
◇백리길 인천 왕복 후 경성 상공 선회
일본항공수송주식회사 비행기가 1929년 8월 도쿄~다롄 여객노선 시험비행을 위해 여의도 비행장에 착륙했다. 네덜란드 비행기 제조사인 포커(Fokker)여객기였다. 이 비행기는 새 노선 홍보를 위해 기자 초청 시승회를 가졌다. 29일 오후3시 여의도비행장에서 이륙한 비행기는 인천 월미도까지 날아갔다가 경성 상공을 한바퀴 돌고 착륙했다. 동승 기자는 ‘백리 길 인천을 왕복하고 사십리 이상의 경성 주위를 선회하고 돌아온 동안이 겨우 32분! 스피드의 위력을 새삼스러이 놀라지 아니할 수없었다’(‘30분에 경인왕복’, 조선일보 1929년8월31일)고 썼다.
여의도 비행장은 1916년 일본에 의해 군용비행장으로 개설됐다. 국내 첫 비행장이었다. 1929년 동경~대련 노선이 개설되면서 울산, 대구, 청진, 광주,신의주, 함흥 비행장이 잇따라 개설됐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을 제패한 손기정이 도쿄에서 비행기편으로 귀국, 여의도비행장에 도착했다. 조선일보 1936년 10월18일자
◇여의도 비행장에 내린 ‘마라톤 우승자’손기정
여객기를 타고 여의도에 내린 최고 스타는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을 제패한 손기정이다. 그는 1936년10월17일 오후 2시27분 여의도 비행장으로 개선했다. 비행장은 도착 2시간전부터 수천명의 군중이 몰려나와 인산인해를 이뤘다. ‘우렁찬 도작예보의 ‘싸일렌’소리와 함께 멀리 동북 간방으로 푸른 구름을 헤치고 한 마리의 솔개미처럼 안계(眼界)에 나타난 기체(機體)! 이것을 발견한 순간 모였던 관중의 입에서는 ‘저거다! 비행기가 보인다!’하는 환호가 폭죽소리처럼 터져 나왔다.’(‘불후의 榮冠은 찬연! 세계 마라손왕 개선’,조선일보 1936년 10월18일)
손기정이 귀국한 항공 코스도 예의 도쿄~경성 구간을 그대로 밟았다. 손기정은 16일 오전9시 도쿄 발 오사카 행 비행기에 올라 오사카에 잠시 내렸다가 후쿠오카에서 하룻밤을 잤다. 17일 오전10시50분 발 비행기로 울산 비행장에 잠시 내렸다가 경성에 도착했다. 30시간 정도 걸린 셈이다.
◇입시 응시하러 후쿠오카서 비행기 원정
1930년대 치열한 입시 경쟁 풍속도에 비행기가 등장한다. ‘상급학교의 입학시험 관문 돌파의 희망도 현재와 같은 비상한 경쟁률로는 한 곳만 수험하는 것은 위험하야 벌써부터 두곳, 세곳 수험하는 것은 일종의 수험계의 풍속인데, 이러한 풍속의 절호의 중개자로 비행기가 등장하였다. 어디까지든지 1931년식이다.’(‘高商 시험을 치르러 비행기 타고 날아와’, 조선일보 1931년3월24일)
도쿄 제일중학 졸업생 하나가 1931년 2월21일 도쿄에서 비행기를 타고 후쿠오카에 와서 고등학교 입시를 본 뒤 다음날 간노스 비행장에서 경성행 여객기에 올라 여의도 비행장에 착륙했다. 다음날 경성고등상업학교(京城高商) 입시에 응하기 위해서였다. 경성고상은 광복후의 서울대상대 전신인 명문이었다.
◇'유행의 첨단’ 평양 기생도 여의도 비행장에
1930년 평양 기생들이 경성 조선극장에서 열리는 조선 각도(各道)명창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비행기를 타고 여의도 비행장에 내렸다. ‘유행의 첨단 평양 名妓들이 비행기로 입경’이라는 기사였다. ‘조선 각도(各道)명창대회에 참가하는 평양 기성(箕城) 권번의 선수와 응원기생 10명은 20일 평양으로부터 비행기를 타고 경성에 날아왔다. 비행기도 못타본 시내 각 기생들 권번에서는 이를 환영하노라고 여의도비행장에서 일시 때아닌 꽃밭을 이뤘는데, 선착된 4명은 한경심 장학선 강산월 정옥엽으로 붉은 입술에서 기염이 비행기를 오르듯 만장이나 되었다 한다.’(조선일보 1930년9월22일자) 기자는 당시 유행하던 ‘자동차 드라이브’처럼 비행기 유람이 유행할지도 모르겠다고 비꼬았다. 기차로 대여섯시간 거리인 평양~경성간에도 비행기를 타는 승객이 있었던 모양이다.
◇폭풍설로 불시착해 목숨 잃을 뻔
당시 티켓값은 얼마였을까. 1929년 7월 여객기 첫 운항 당시 도쿄~오사카 구간은 3시간 비행에 30엔(원), 오사카~후쿠오카편은 35엔이었다. 경성까지 편도 티켓만 100원을 훌쩍 넘겼을 것이다. 당시 신종 직업인 전화교환수 월급이 25원~50원, 백화점 점원이 20원~30원, 신문기자 월급이 50~60원하던 시절이었다. 비행기 여행은 보통 샐러리맨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금광업자 우영희는 요즘 돈으로 치면 수십억, 수백억이 오가는 비즈니스를 하느라 비행기를 종종 이용했던 듯하다. 앞 기고문에서 ‘지금까지 나의 항공은 수십회에 달하였으나’라고 쓴 것만 봐도 그렇다. 우영희는 세달전 ‘광산시대’1938년 2월호에 기고한 ‘90만원에 팔린 오북(吾北)광산내용공개’에서도 광산 매매를 위해 도쿄에 비행기를 타고 왕복했다고 회고했다. 1936년 2월 도쿄~평양 구간을 탑승했는데, 큐슈 근방에서 폭풍설을 만나 불시착했다. ‘그때의 위험, 간단히 말하자면 산 것이 천행(天幸)’라고 쓸 만큼 위험천만한 여행이었다.
◇참고자료
국사편찬위원회 편, 여행과 관광으로 본 근대, 두산동아, 2008
우영희, ‘동경기행-內地 광업계의 동향’, ‘광산시대’ 1938년5월
‘90만원에 팔린 오북(吾北)광산내용공개’,’광산시대’ 1938년2월호
12.03 제국대학 첫 여성 유학생 신의경의 대담한 도전
1927년 센다이 도호쿠대 법문학부 입학...이화여전 교수, 광복후 첫 여성 의원

▲조선인 여성 최초로 일 제국대학을 졸업한 신의경. 도호쿠대 재학중인 1929년 입학동기인 박동길과 약혼 기념으로 촬영했다. /신의경 가족 제공
상급학교(대학) 진학은 한 세기 전에도 뜨거운 관심사였다. 월간지 ‘동광’이 ‘학교선택체험담’(1931년 2월호)을 주제로 각계 인사 20명에게 ‘그 학교를 선택한 이유’ ‘선택에 대한 만족 또는 후회 여부와 이유’를 설문조사를 했다. 시인 주요한이 1926년 5월 창간한 ‘동광’은 흥사단 계열 단체 수양동우회의 기관지 성격을 띤 시사잡지다. 유길준 둘째 아들인 유억겸 연희전문교수, 양주동 평양 숭실전문교수, 이극로 조선어사전편찬위원 등 기라성 같은 지식인들이 설문에 응했다.
◇여성도 고등교육 받아야
서른셋 신의경은 동경여자의전을 나온 의사 이덕요와 함께 여성으로는 단둘만 이름을 올린 인물이다. 신의경은 조선 최초로 제국대학을 졸업한 조선인 여자 유학생이자 광복 후 첫 여성 의원(남조선과도입법의원)을 지낸 선구자였다. 1927년 센다이의 도호쿠(東北)제대에 들어가 서양사를 공부한 그는 1930년 졸업과 함께 이화여전 교수로 부임했다.
도호쿠대를 선택한 이유를 이렇게 답했다. ‘누구보다도 더욱 참상에서 살아나가는 조선 여성은 그 자체의 장래를 위하야 배우지 아니하면 안될 이 현상에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국가와 사회의 근본인 가정을 맡을 여성으로서는 될 수있는 대로 보다 높은 교육이 필요하외다.’ ‘나는 여성의 고등교육을 어디까지 필요로 하는 동기에서 센다이로 갔습니다.’
신의경은 ‘여성에게도 고등교육이 필요하다’ ‘일본의 교육은 ‘어떻게 살까’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가까운 교육이요, 서양의 교육은 ‘어떻게 하면 잘 살까’의 문제를 해결케하는 교육인 듯 합니다…나로서는 급선무로 어떻게 살까의 문제를 선결문제로 보는데서 센다이를 가게 되었습니다’라고 답했다.

▲1928년 도호쿠대 조선인 유학생들이 단체로 기념촬영을 했다. 앞줄 왼쪽 세번째가 신의경, 네번째가 박동길이다. /신의경 가족 제공

▲신의경은 1927년 3월 도호쿠대학 법문학부에 입학해 서양사를 공부했다. 신입생 350명 중 유일한 여학생이었다고 한다. 사진은 1913년 촬영한 도호쿠대학 교문./위키피디아
◇'금녀의 벽’깬 도호쿠대
도호쿠대는 도쿄대, 교토대에 이어 1907년 일본에서 세 번째로 개교한 제국대학이다. 1945년까지 여학생을 받지않은 도쿄대·교토대와 달리 설립 초창기인 1913년 여학생 3명을 받아들여 금녀(禁女)의 문을 깼다. 신의경이 도호쿠대를 선택한 이유도 이런 학교 내력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1927년 3월20일 경부선 열차에 오른 그는 시모노세키를 거쳐 센다이에 도착했다. 2박3일 걸렸다. 23일은 전공과목, 24일은 영어와 구두시험을 치르고 합격했다. 그가 입학하던 해, 신입생 350명 중 여학생은 단 1명이었다고 한다. 조선인 유학생은 그를 포함, 8명이었다.
신의경은 집안에서 유학비를 대주는 ‘금수저’출신이 아니었다. 부모 모두 일찌감치 작고했고, 유학을 떠난 1927년이면 세는 나이로 서른 살이었다. 선교사 도움으로 근근이 학비를 낼 뿐, 생활비는 아르바이트로 벌어야 했다.
‘학비는 꼭 오늘 와야만 할 터인데 오지 않는다. 아침 일찍부터 기다리다 못해 나오는 것은 눈물뿐이다.’ ‘오늘 마루젠(丸善)으로 책을 찾으러 갈 날인데 돈이 20전뿐이다. 10전이 부족하다.’
돈 걱정으로 가득한 그 시절 메모다. 그는 ‘미국의 종교개혁’을 주제로 논문을 쓰고 1930년 3월 문학사 학위를 받았다. 그의 졸업은 신문에 날 만큼 세인의 관심을 끄는 뉴스였다.
‘시내 관수동에 거주하는 신의경 양은 금춘에 동북제대 법문학부 문과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야 문학사의 학위를 얻었는데 조선 최초의 여(女)문학사로서 서양역사를 전공하였으며 그의 모교인 이화여전의 교편을 잡으리라더라’(‘조선 최초의 女문학사’, 조선일보 1930년3월25일)

▲조선인 첫 제국대학 유학생 신의경은 1919년 3.1운동 직후 상해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결성된 대한민국 애국부인회 사건으로 2년간 옥고를 치른 독립운동가였다.

▲대한민국 애국부인회 사건 공판을 보도한 조선일보 1929년 12월18일자 기자. 신의경은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았으나, 미결기간까지 포함, 2년 가까이 징역을 살았다.
◇캠퍼스 커플로 만난 박동길
‘아, 이곳이 어찌 이리 적적한가.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일테지만 내게는 아무 인적이 없는 광야이다.’ 신의경은 유학 초기 고독으로 힘들어했다. 하지만 달콤한 로맨스가 기다렸다. 입학 이듬해인 1928년 12월 유학생 망년회에서 입학 동기 박동길을 만난 것이다. 한살 위인 박동길은 스무살 때인 1917년 오사카 동양방적회사에서 일당 30전을 받는 견습공으로 출발, 오사카 고등공업학교를 거쳐 오사카 광영제약회사 기사로 일하다 서른 살에 도호쿠대에 진학한 만학도였다.
서른 넘어 만난 두 사람은 졸업 후 결혼하기로 약속하고 연인 사이가 됐다. 둘은 귀국 후인 1931년 6월 연지동 하마련 선교사 집에서 결혼식을 올렸다.서른 넷 관립 경성고등공업학교 교수와 서른 셋 이화여전 교수의 결혼은 당시로선 이례적인 만혼(晩婚) 엘리트 지식인의 결합이었다.
◇개신교 집안, 독립운동으로 옥고
신의경(1898~1988)은 개신교 가정에서 자란 신여성이었다. 어머니 신마리아는 정동여학교 교감, 연동교회 초대 여전도회장을 지냈고, 큰 이모는 한국 최초의 여의사인 박에스더, 작은 이모는 세브란스병원 부속 간호학교 1회 졸업생인 김배세였다. 신의경은 1918년 어머니가 교사로 있는 정신여학교를 졸업하면서 모교 교사로 남았다.
20대의 신의경은 열혈 투사였다. 3.1운동 당시 교사로 있으면서 경성애국부인회를 만들어 회장으로 활동한 것을 시작으로 그해 9월 정신여학교 선배인 김마리아와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후원금을 지원하는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결성했으나 일제에 검거돼 2년 가까이 옥고를 치렀다.(‘비밀결사 애국부인회 김마리아사건 공판’, 조선일보 1920년12월18일)
‘빈대, 벼룩이 많지만, 빈대약 주는 고로 관계치 않사옵고, 또 잠도 잘 자나이다.’ ‘안경다리가 부러져서 실로 매서 쓰고 있다. 여기있는 동안은 견딜는지 모르겠다.’ 이 시절 어머니와 동생에게 쓴 편지다.
대구 감옥에 갇혀있던 1921년 6월 정신적 지주였던 어머니 신마리아가 별세했다. 신의경은 3개월 뒤 출옥한 후에야 별세 소식을 듣고 혼절했다고 한다. 감옥에서 나온 그에게 월남 이상재는 ‘작은 감옥에서 큰 감옥으로 나왔구나’라고 위로했다고 한다. 신의경은 1924년 아펜셀러가 교장으로 있던 이화여전에 진학해 영문학과 사학을 배운 뒤 도호쿠대에 유학했다.
◇언론이 주목한 차세대 지도자
조선의 첫 제국대학 여성 졸업자인 신의경에게 거는 기대는 컸다. 그는 신문, 잡지에 단골로 등장하는 유명인사였다.
파인 김동환이 낸 월간 ‘삼천리’(1932년 2월)는 경성의 5대 학교 졸업자들의 근황을 소개하면서 이화여전 출신 중 신의경의 인물평을 자세히 실었다. ‘氏는 서울 태생이다. 키가 후리후리하고 얼굴 길쑥하게 생긴 氏는 몹시 활발해서 동무들 사이에 있어서 ‘말괄량이’라는 말까지 들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몹시 좋아보이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호의를 사게 된다.’
다음달 ‘삼천리’(1932년3월)에 차세대지도자 기획 기사를 쓰면서 신의경을 박인덕, 김필례, 김신실, 유각경, 홍애시덕과 함께 기독교계 여성 지도자로 손꼽았다.
◇광복 후 첫 여성 의원
신의경의 이화여전 교수 생활은 2년 만에 끝났다. 신의경은 이후 학계보다 교육계, 종교계에 주력했다. 1935年부터 피어선성경학원 교사 및 부원장으로 일했고, 연동교회 여전도회장, 경기노회 여전도회장으로 일했다. 광복을 맞을 때까지 두 남매를 키우면서 교회활동에만 매달린 그는 1946년12월 미군정청 산하 남조선과도입법의원(총90명)에 여성의원으로 참여, 1948년 5월까지 활동했다. 김규식과 정치 활동을 함께 하면서 그가 총재를 맡은 대한적십자사 창립위원과 집행위원, 그가 주석으로 있던 민족자주연맹의 부녀국장을 맡았다. 정부 수립 이후엔 피어선 성경학교, 정신학원(정신여중고), 정의학원(서울여대) 등의 교육활동과 교회 활동에 전념하다 1988년 타계했다. 정부는 대한민국 애국부인회 활동으로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김대진 한예종 총장이 외손자
신의경의 딸 박문희(91)는 서울대 정치학과를 나와 한국 걸스카우트 연맹 총재를 지냈다. 사위 김상찬은 상업은행장을 지낸 금융계 원로로 지난 9월 타계했다. 박문희·김상찬 부부는 2남을 뒀다. 큰아들 김웅진(69) 교수는 미국 신시내티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고 한국외대 정외과에서 가르쳤고, 둘째 아들 김대진(60)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은 손열음 김선욱 등 K클래식 스타를 길러낸 피아니스트이다.
◇참고자료
하늘과 땅 사이에서-순원 신의경 권사 전기,2001
정종현, 제국대학의 조센징, 휴머니스트, 2019
‘학교선택체험기’, 동광 제18호, 1931년2월
‘5대학부出의 인재 언,파렛드’, 삼천리 제4권제2호, 1932년2월
‘차대의 지도자 총관’, 삼천리 제4권제3호, 1932년3월
12.10 경성제대 축구팀, 英軍·큐슈제대를 꺾다
조선인 학생으로만 구성…방종현이 실질적 주장, 박치우 주전

▲1930년10월22일 경성운동장에서 열린 영국 해군 브리지워터 팀과의 대결에서 경성제대 축구부는 2대1로 이겼다. 조선인 학생들로 구성된 축구팀이었다. 경기 후 기념촬영에 나선 선수들./'다시 보는 경성제국대학'중
1930년10월 22일 오후 4시 경성운동장(옛 동대문운동장)에서 한·영 축구대결이 펼쳐졌다. 인천항에 입항한 영국 군함 ‘브리지워터’팀과의 친선경기였다. 우리 축구팀은 경성제대(이하 城大·성대) 축구부였다. 전원 조선인 재학생들로 이뤄진 아마추어 축구팀이었다. 중국에 배속된 ‘브리지워터’ 축구팀은 그해 20여차례 친선 경기에서 대부분 승리한 강팀이었다. 중국의 강호 난징대를 4:1로 누르기도 했다.
영국팀은 화려한 기량으로 경기를 주도했다. ‘영군(英軍)의 ‘롱킥’과 ‘숏킥’과 ‘헤-딍’은 자유자재(自由自在)로, 성대군(城大軍) 압박을 당하면서도 전반전에는 일대일의균형(均衡)의 세(勢)로 진행(進行)하다가…'(‘城大 對 英艦 축구 城大 得勝’, 조선일보 1930년10월25일자)
경성제대 학우회보에 실린 지상(誌上) 중계에 따르면, 선제골은 경성제대가 넣었다. 시작 4분 만에 하프라인 왼쪽에서 드리블로 밀고 들어가 레프트 포워드 정경모에 패스, 득점한 것이다. 영군(英軍)은 전반 21분 코너킥을 이용한 헤딩으로 한 골을 만회했다.
후반전은 일진일퇴 공방전이었다. 종료 1분 전인 후반 34분에야 승부가 났다. 레프트 윙 노윤모의 강한 슛을 영군 골키퍼가 쓰러지면서 잘 잡았지만, 골라인 안쪽으로 밀려나 결승점을 허용했다. 경성제대의 2:1 승리였다.

▲경성제대 예과 4,5회로 구성된 축구팀. 왼쪽 아래에서 두 번째가 주전으로 뛴 박치우다. /'다시 보는 경성제국대학'
◇민족의식 자극한다며 文友會 해산
축구는 1920년대 조선의 최고 인기 스포츠였다. 보성전문과 연희전문이 강팀이었다. 경성제대 축구부는 1928년부터 활발하게 움직였다. 학교 내 서클활동부 16개중 조선인을 중심으로 모인 유일한 서클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인 학생들은 원래 ‘문우회’(文友會)를 중심으로 모였다. 문학서클같지만 예과에 다니는 조선인 학생 전체를 망라한 조선인 학생회였다. 문우회는 ‘본회는 조선 문예의 연구와 장려를 목적으로 하고 매학기 1회씩 조선문예잡지를 발간한다’는 회칙을 정했다. 이에 따라 우리말 잡지 문우(文友)를 발간했다. 유진오, 이효석, 고유섭, 조용만이 ‘문우’에 글을 발표했다. 하지만 1928년 11월 5회까지 발간하고 해산했다. 학교당국이 6.10 만세운동 이후 조선 학생의 민족의식을 자극할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주시하다 문우회를 해산한 것이다.

▲영국 해군 브리지워터 팀과의 친선경기를 보도한 조선일보 1930년 10월25일자 기사
◇큐슈제대와의 한일戰
문우회 후신 격인 예과 축구부는 조선 학생들의 구심체가 됐다. 1928년 6월 일본 대학 축구 강호인 메이지대 축구팀이 경성운동장에서 성대(城大) 축구팀과 맞붙었는데, 성대가 2:0으로 의외의 승리를 거뒀다. 성대 축구팀은 1929년 가을 만주 순회 원정을 떠났다. 뤼순공대와 다롄 일반팀은 가볍게 눌렀으나 펑톈(현 선양)에서 맞붙은 만주의대에 졌다.
성대 축구부는 매년 큐슈제대와 정기전을 열었다. 자연스럽게 한일전이 됐다. 1929년 경성에서 1차전을 가졌고, 다음해 2차전은 후쿠오카에서 열리는 식이었다. 1차전은 성대의 승리였고, 2차전 원정에서도 3경기를 겨뤄 2승1패로 이겼다. ‘큐슈제대와 대항식 축구전을 거행키 위하야 원정한 경성제대 축구부 선수 일행은 그간 삼회시합을 거행하야 제 1회전에는 1대0으로 성대가 득승하고 제2회전은 역시 1대0으로 큐슈대가 득승한 결과 25일 결승에는 1대0으로 성대가 쾌승하야 연2년 우승권을 장악하고 27일오전7시 경성역착 열차로 귀경할 터이라 한다.’(‘九洲에 원정한 城大우승’, 1930년9월27일)
큐슈제대와의 정기전은 1938년 제10회 대회 때까지는 개최됐다는 사실이 신문 보도를 통해 확인된다. 1934년 6회대회까지 경성제대의 무패행진이 이어진 사실로 미뤄, 경성제대팀이 압도적 우위를 차지한 것같다.
1930년 첫 번째 큐슈 원정 선수단 명단에서 눈길을 끄는 인물이 있다. 박치우(1909~?)다. 박치우는 이듬해 경성에서 열린 큐슈제대와의 경기에도 출전했는데 학부에 진학해서도 축구팀에서 계속 뛰었던 모양이다. 서양철학을 전공한 박남철은 1933년 졸업 후 숭실전문 교수를 거쳐 1938년 조선일보 사회부와 학예부 기자로도 일했던 인텔리였다. 광복 후 월북한 박치우는 빨치산 정치교육을 맡은 강동정치학원 교수로 있다가 빨치산 부대 정치위원으로 내려와 오대산 부근에서 사살당했다고 한다.
◇국어학자 방종현이 실질적 축구부 회장
1930년 큐슈 원정 경기 때 매니저로 참가한 이흥배(1908~1994·국방차관, 경기지사 역임)는 경성제대 학우회보에 원정기를 생생하게 썼다. 그는 “조선 학생들이 따로 축구부를 하자고 논의한 것이 아닌데도 자연히 몰렸고 은연중 결속되었다”고 회고했다. 이흥배는 축구부의 실질적 주장 역할을 방종현(국어학자·1905~1952)이 했다고도 썼다. ‘방종현은 실질적인 축구부 회장 격이었다. 무슨 일이나 열성인 그였지만 축구를 직접 하지 않아도 축구부 일이라면 으레 앞장을 섰다’는 것이다. 방종현은 박치우와 같은 해인 1928년 경성제대 예과 5회로 입학한 동기생이다. 박치우와 같은 1938년 조선일보에 입사해 향토문화조사위원회 상임위원을 지냈다. 일제시대 거의 유일하게 방언을 수집, 연구해 1940년 ‘속담대사전’을 펴냈다. 광복후 서울대 문리대 학장을 지냈다.
◇일본인 학생과의 갈등
조선인 예과생들의 구심점 역할을 했던 축구부를 둘러싸고 한일 학생 간의 갈등도 있었다. 일본인이 4분의3가까이 차지한 경성제대 예과 학생회에서 조선 학생으로 이뤄진 축구부의 여름 원정 예산을 삭감해버렸기 때문이다.
‘경성제대 예과학생회 내 조선인 생도와 일본인 생도간에 여러 가지 문제로 항상 알력이 있어 오던 바 금번 동학생회 주최인 각 운동부 하기원정에 대하여 전부 조선인 학생으로 부원이 되어 있는 축구부에는 원정시키지 않고자 일인(日人) 생도가 반대하여 오던 중 학생회 총무와 직원회에서 여러가지 사정을 고려한 결과 동(同)축구부의 원정 참가를 가능케 할 일인일표제(1人1票制)를 제안하였으나 일인 학생은 적극적으로 반대하야 작일(昨日) 생도총회에서 일인일표안의 취소를 강박하였음으로 동학생위원회에서(위원 대부분은 일인생도)는 강경하게 주장을 못하게 되자 참석하였던 조선인 생도 백명은 다수를 믿고 횡포를 자행하는 일인 학생과 일인만으로 조직된 위원회의 무성의함을 분개하야 규탄적 격론을 한 후 일제히 퇴장하였는데 일년에 15원씩 다 같이 운동회비를 내면서 일인학생들만으로 부원이된 유도 검도부에만 대부(?)를 지출하며 축구원정단 참가에 대하야 노골적으로 방해함은 부당천만한 일임으로 퇴장한 조선인 학생 일동은 결속하야 학생회와 일인 생도에게 항쟁하리라 한다.’( ‘城大 학생회에서 朝日학생 알력’, 조선일보 1930년 6월22일)
카타르 월드컵 16강에 진출한 한국 축구의 저력 어딘가엔 일본인의 차별과 맞서 싸우던 90년 전 청년들의 기개가 맞닿아있을 지도 모르겠다.
12.17 콩나물시루 같은 만원 전차…‘교통지옥’경성의 맨 얼굴
1929년 진명여고보생 120명 탄 전차 전복사고로 충격

▲남대문 앞을 지나는 전차. 1930년대 중반 나온 사진엽서에 수록됐다. 5전으로 시내 대부분을 다닐 수있는 전차는 근대 교통수단으로 각광받았지만, 콩나물 시루처럼 승객을 가득 태워 비난을 받았다. 전차 사고도 빈발했다. /서울역사박물관
1929년4월22일 아침 진명여고보생들은 개교 기념식을 마치고 전세낸 전차 3대에 나눠탔다. 학교설립자인 순헌귀비(엄비)릉에 참배 겸 꽃놀이를 가기 위해서였다. 효자동에서 출발한 전차는 적선동 서십자각에서 커브를 돌다가 전복됐다. 3대 중 중간에서 달리던 제165호 전차 운전사 석갑동의 과속이 문제였다. 3,4년생 120여명이 탄 전차는 아수라장이 됐다. 학생 88명이 경성의전 부속병원에 입원했다.
‘파쇄된 유리창은 우수수하게 차안에 떨어졌으며 전차의 두부는 그렇게 든든한 강철 기둥이 두 가닥으로 깨어져 버린 가운데 여기저기에 아직도 마르지 아니한 선혈이 보는 사람을 놀라게 하며 여학생들의 점심밥을 싼 책보는 함부로 흩어졌으며 뒤축 높은 여학생 구두가 거꾸로 세로 굴러다니고 천정에 매어달렸던 전등과 벽에 붙은 거울까지 일일히 몹씨도 파쇄되었고…’(’선혈 임리(淋漓)한 현장’, 조선일보 1929년4월23일) 사고 현장은 참혹했다. 이례적인 대형 참사였다.
신문은 호외까지 발행하며, 연일 사고 원인과 대책, 부상자 현황을 속보로 보도했다. 경험이 부족한 운전사의 과속과 함께 75명 정원인 전차에 120명을 태우고 달린 전차 회사 경성전기에 대한 비판이 쏟아졌다.
사고 후유증은 컸다. 부상자가 너무 많아 수업을 제대로 진행하기 어렵다며 학교 측이 여름 방학을 한 달 당겨 휴교를 신청할 정도였다. 사고 석 달 후인 8월1일 중상을 입고 치료 중이던 4년생 최계숙이 정신적·육체적 충격으로 사망했다. 8월 초 2학기가 시작됐지만, 3,4년생 183명 중 68명이 병상에서 신음하느라 결석할 정도였다.(‘진명교 부상학생 1명은 필경 사망’, 조선일보 1929년8월22일)

▲종로 2가 기독교청년회관 앞을 지나는 자동차와 전차./서울역사박물관
◇경성주민의 발, 전차
100년 전 경성 거리에는 전차와 자동차가 근대적 교통수단으로 화려하게 등장했다. 1911년 당시 2대뿐이던 자동차는 20년 뒤인 1931년 4331대로 늘어났다. 하지만 승용차, 승합차는 물론 화물차까지 합해도 4331대에 불과한 자동차는 대중적 운반수단은 아니었다. 경성 주민의 발은 전차였다. 전차는 1909년 37대에서 1945년 257대로 약 7배, 하루 평균 승차인원은 7000명에서 55만명으로 68배 이상 늘어났다. 전차 1대당 평균 2000여명 꼴로 수송한 셈이었다. 콩나물 시루처럼 승객들을 가득 태운 전차가 만원 버스, 지옥철의 원조였다. 당시 신문엔 ‘교통 지옥’, ‘사바세계의 아수라’같은 제목의 기사가 자주 등장했다. 출퇴근, 등하교 시간마다 교통 전쟁을 치러야 하니 사고가 빈발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1929년 4월 22일 진명여고보생 120여명을 태운 전차가 적선동에서 전복됐다. 이 사고로 88명이 입원하는 등 당시 이례적인 교통참사였다. 이 사건을 보도한 조선일보 1929년4월23일자
◇'살상기계’전차
전주 출신 스무살 청년 탁명록이 고향에 갔다 경성에 올라와 광희문 방향 전차를 탔다. 전차가 황금정(현 을지로) 2정목 9번지를 통과할 무렵, 급하게 내리려고 고함을 쳤다. 하지만 운전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속도를 냈다. 전차에서 떨어진 탁명록은 바퀴에 깔려 오른쪽 다리가 부러지면서 정신을 잃었다. 경찰은 승객 안전을 돌보지 않고, 무리하게 운행한 운전사와 차장을 입건했다. 이 교통사고를 다룬 기사에 붙인 제목이 ‘살상기화한 경성전차’(조선일보 1923년3월9일)다.
요즘처럼 교통사고 통계가 체계적으로 정리된 자료는 없지만, 신문에는 교통 사고 기사가 끊임없이 등장했다. 야외 활동이 많아지는 봄철 교통사고를 정리한 기사에 따르면, 경기도(경성 포함)의 1927년 자동차 사고 229건에 사망자 9명, 부상자 59명, 전차 사고는 219건에 사망자 4명, 부상자 174명, 자전차 사고는 107건에 사망자 32명, 부상자145명이었다. ‘소리내는 ‘사자(獅子)’, 전차와 자동차’(조선일보 1928년2월2일)기사였다.
◇횡단보도, 신호등, 차선 등 교통안전 시설 없어
근대 교통사 전문가인 정재정 서울시립대 명예교수는 경성부내 교통사고가 빈발했던 근본 원인으로 도로 부족과 신호등과 횡단보도, 가로등같은 교통 안전시설이 열악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도로가 비좁고 대부분 비포장인데다 한국인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의 도로는 일본인 거주 지역보다 더 도로사정이 열악했다는 것이다.
전차 사고의 대부분은 접촉사고나 뛰어내리다 넘어져서 생겼다고 한다. 사고예방 안내 기사엔 이런 대목이 있다. ‘우선 아무리 급한 일이 있고 뛰어내리고 뛰어오를 만한 자신이 있더라도 한 걸음 더 걷거나 한 차 뒤지는 것을 거리껴서 뛰어내리고 뛰어오르는 것을 일절 하지말 일’ ' 전차 궤도 가로 걸어 갈 때에 항상 궤도로부터 3,4 척 멀리 나서서 다닐 일’. 여기엔 횡단보도를 어떻게 건너라, 신호등이 빨간색일 때는 정지하라는 식의 내용이 없다. ‘전차사고 빈발에 대한 의견’(조선일보 1921년9월10일~9월12일)이라는 시리즈(총3회) 신호등이나 횡단보도 같은 시설이 거의 없었다는 뜻이다. 이 시리즈 두 번째 기사는 전차 운전사 부족과 차량 노후화를 교통 사고의 주범으로 지목하고 있다. ‘첫째 운전하는 사람 수효가 적은 것이니 운전하는 차량 수효가 많아서 기다리는 시간이 적을 것같으면 승객들이 그다지 급히 서둘러서 타려고 할 것이 아니며 그에 따라서 시간의 경제가 과연 얼마나 될 것인가.’ ‘요사이 운행하는 전차를 볼 것같으면 10여년씩 운전을 하여 이제는 그만 아주 폐물이 되어서 기계는 어떻게 지탱하겠으나 차체로부터 운전대는 거의 무너지게 되어 승객의 수효는 불과 30여명 밖에 못탈 것을 그것도 운전하는 전차량수의 하나를 계산하니 더욱이 차량의 부족함을 감(感)할 것이다.’(조선일보 1921년 9월11일)
◇'전차 운행 대수 늘리고, ‘심야 버스’ 도입하라’
1939년 인구 90만에 육박하던 경성부는 만원 전차, 버스 문제를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었다. 경성부회 의원들은 ‘전차, 버스문제 대책위원회’를 구성, 전차·버스 운영주체인 경성전기에 대해 12개 요구사항을 전달했다. 전차 대수를 늘릴 것, 전차 부족은 버스로 보충할 것, 급행버스에 환승을 인정하고 요금을 5전 균일로 할 것, 급행버스를 러시아워때만 아니라 종일 운행할 것 등이었다. ‘오전 1시에 버스를 1회 운행할 것’처럼 심야 버스 운행을 주문하는 내용도 담겼다.(’경전(京電)에 보내는 부민의 총의’, 조선일보 1939년12월23일)
경성부의 전차, 버스 운영을 독점하던 경성전기는 경성부를 앞세운 부회(府會)의 요구를 일부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급행 버스 운행을 확대하는 한편, 1940년4월부터는 시내 일부 정류장에 서지 않고 통과하는 급행 전차도 운행했다. 경성부회는 교통난 해소를 위해 더 강력한 교통 통제 기관을 만들어 영리 위주 운수회사를 감독할 것을 총독부에 의견서로 제출했다.
지난달 나온 한 카드회사 조사에 따르면, 수도권 거주 20~50대는 전철과 버스 등 대중교통 이용에 하루 평균 64분 쓴다고 한다. 사람들의 삶의 질을 좌우하는 건 거창한 이념이 아니라 택시와 광역버스, 지하철·전철 같은 대중 교통의 질(質)이다. 100년 전 만원 전차, 만원 버스에 시달리던 경성부민들의 분투도 보다 나은 삶을 위한 노력이었을 것이다.
◇참고자료
정재정, 일제하 경성부의 교통사고와 일제 당국의 대책, 典農史論 7, 서울시립대 국사학과,2001
12.24 100년前 성탄 “감옥에서 신음하는 형제 생각에 눈물”
3.1운동 투옥신자 많아…일제는 주일학교 가두행진까지 감시

▲3.1운동으로 투옥된 신자들이 많던 1920년 성탄절은 눈물 흘리며 기도하는 이들이 많았다고 한다. 일제 당국은 주일학교 학생들의 가두행진까지 감시할 만큼, 신경을 곤두세우고 교계 동향을 주시했다.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 정다운
1938년 12월25일 새벽, 무악재 너머 빈민촌의 야경단원 둘이 쌀 2자루와 장작 열 다발을 자전거에 싣고 가던 수상한 남자를 발견했다. 도둑으로 의심한 야경단원들은 관할 고양경찰서에 신고했다. 경찰서에 끌려간 이 청년은 뜻밖의 사연을 털어놨다.
그는 경성 시내 공평동 123번지에서 식품 가게를 운영하는 스물여섯 청년 박재양이었다. 어릴 적 가난하게 자랐는데 성탄절 때마다 누군가 백미 닷되와 나무 한단씩을 집에 몰래 두고 가 감격했다고 말했다. 전날 밤 시내 정동교회에서 성탄전야예배를 드린 그는 빈민들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나눠주려고 밤늦게 그 동네로 가던 길이라고 했다. 산타클로스처럼 몰래 선물을 갖다주려고 이른 새벽, 자전거에 쌀과 장작을 실어날랐다는 얘기였다.(’봉욕(逢辱)한 싼타클로쓰’,조선일보 1938년12월28일)
◇식당에도 성탄 트리, 성탄 찬양대가 새벽거리 돌아
성탄절은 1920년대 조선에서 대중적 명절로 떠올랐던 것 같다. 교회나 미션 스쿨에서 크리스마스 트리를 장식하고 축하 예배와 공연을 가진 것은 오래됐을 것이다.
일반 식당과 카페에서도 트리를 장식하고 성탄절 분위기를 냈던 모양이다. 1920년 신문에 조선호텔 대식당에 설치한 크리스마스 트리의 장식등에 화재가 났다는 기사(‘조선호텔 小火’, 조선일보 1920년12월28일)가 난 걸 보면, 성탄 트리도 유행했던 것 같다.
성탄절 새벽, 동네를 돌아다니며 성탄 찬송을 부르는 교인들도 있었다. ‘▲25일 새벽 빛나는 태양이 아직 세상을 밝히기 전에 ▲경성의 조선인 시가에는 잠자는 시민들을 꿈속에서 부르는듯이 류량한(맑고 또렷한) 창가소리가 들리었다 ▲잠속에서 깨인 사람들 이불속에서 귀를 기울이기를 한참하다가 “올커니…크리스마쓰 찬양대로군’'(‘핀셋트’, 조선일보 1930년 12월26일)
‘성탄과 조선’(조선일보 1926년12월25일)이란 제목의 사설은 ‘12월25일인 성탄일은 차차로 민중화하여서 아직 그의 신도들에게 국한된 일일지라도 거의 민중적 명절화하려는 경향을 보인다’고 지적했다. 그 이유로는 ‘조선의 기독교가 또한 허름하지 아니한 사회적 성가를 가지고 있는 까닭이다’고 썼다.

▲1938년 성탄절 새벽 도둑 의심을 받고 체포된 사람을 심문했더니, 실은 빈민에게 쌀과 장작을 몰래 나눠주려던 '산타클로스'였다는 미담을 전한 조선일보 1938년 12월28일자 기사.
◇'감옥에서 신음하는 형제 생각에 눈물’
조선의 기독교가 ‘허름하지 않은 사회적 성가’를 가지고 있다고 쓴 건 기독교가 3.1운동에서 펼친 주도적 역할과 관련 있다. 조선, 동아일보가 창간된 1920년 이후 첫 성탄절 분위기를 전하는 기사엔 이런 분위기가 담겨있다. ‘금년 성탄절은 어느 회당에서든지 아무리 즐겁고 기쁘게 맞으려한다 할지라도 감옥에서 신음하는 형제를 생각하는 때에는 감개지회를 금치 못하며 몇방울의 눈물도 아니 떨어뜨리지 못할 것인데, 성탄절을 가장 위의(威義) 있고 거룩하게 맞으려고 준비에 분주한 각 교당의 신도들은 장차 어떠한 의식을 베풀어 인상됨이 많고 느낌이 많은 1920년의 크리스마스를 맞으려는가.’(‘설창한화’(雪窓閑話), 조선일보 1920년12월14일)
◇전 인구 1.6~1.7%뿐인 기독교 신자가 3.1운동 투옥자의 20%
3.1운동에 참가했다가 투옥된 기독교인들이 많았던 사실을 성탄절 기사를 빌려 대놓고 언급하고 있다. 민족대표 33인 중 남강 이승훈을 비롯한 기독교 지도자들은 16명으로 절반 가까이 차지했다. 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가 쓴 ‘한국기독교회 100년사’에 따르면, 3.1운동 초기인 1919년 3,4월의 체포자 1만9000여 명 중 기독교인은 3373명(17%)를 차지했다. 6월30일 현재 투옥자 9456명 중에서 기독교인은 2033명으로 전체 21%를 차지했다. 당시 기독교 신자수는 전 인구의 1.6~1.7%인 30만에 불과했다. 그런데 수감자가 20%쯤 될 만큼 많았다는 사실은 기독교 신자들이 그만큼 3.1운동에서 주요한 역할을 했다는 얘기이다.
◇성탄 행렬이 반일시위로 번질까 경계
일제 당국은 기독교계의 성탄절 행사를 예의주시했다. 축하 행사가 반일(反日)시위로 번질까봐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지난 26일은 경성 시내 각 일요학교에서 크리스마스의 탄강(誕降) 축하로 거행하는 바, 오후1시부터 6시까지 연하야 부내 청진동 광남교회를 출발하여 각 교회를 방문하고 축의를 표하며 각 병원 입원 환자를 위하여 위문하였는데, 일대는 일요학교 생도 300명의 보호자를 합하여 악대와 깃발 행력을 하였음으로 당국에서는 만일을 염려하여 엄중히 경계하였다더라.’(‘크리스마스의 연합기행렬, 당국에서 엄중 경계’, 조선일보 1920년12월27일)
어린 학생들의 축하행렬까지 감시할 만큼, 일제의 신경이 곤두서있었다.

▲이화학당 학생들이 성탄절을 맞아 생활비를 아낀 돈으로 이재민들에게 나눠줄 옷과 모자 등을 선물했다는 조선일보 1924년 12월23일자 기사와 사진.

▲이화학생들이 생활비와 학비를 아껴 이재민들에게 보낼 옷과 생활물품을 선물했다는 기사와 함께 실린 사진.
◇생활비 아껴 이재민 돕기 나서
크리스마스는 대개 빈민 구제를 위한 자선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미션 스쿨 학생들이 용돈을 모아 이웃을 돕는 선물을 마련했다는 기사가 줄을 이었다. 구세군은 자선냄비 거리 모금을 통해 서대문 구세군 본영에서 매일 빈민 50명에게 쌀을 나눠주고, 오후엔 장작이 없어서 밥도 지어먹을 수 없는 사람에게 국밥을 나눠주기도 했다.(‘주린 자에게 국밥을 나눠준다’, 조선일보 1928년12월22일)
이화학당 학생들은 생활비와 식비를 절약해 모은 돈과 직접 지은 옷과 모자 등을 이재민들을 위해 써달라며 기부했다. ‘이화학당에서는 이 불쌍한 동포에게 조금이라도 기쁨을 주고자 객창에 고생하는 여학생의 따뜻한 마음으로 자기네 평소의 생활비에서 몇푼씩 알뜰히 절약하야 그 금품을 본사(本社)를 거쳐 이재동포에게 보내게 되었다. 이화고등보통학교 기숙생은 두 학기전부터 쓰는 돈을 절약하야 백원돈을 보내게 되었고 이외 고등과,중등과,대학과 학생 일동은 그 근소한 학비에서 추위에 떠는 이재민에게 아래와 같이 의복을 만들어 역시 본사를 거쳐 이재민에게 보내고 또 돈 6원85전을 따로 거두어 보내게 되었다.’(‘이화 학생의 미거’,조선일보 1924년12월23일)
◇성탄절 내력과 의미 다룬 보도 줄이어
크리스마스 전후로 성탄절의 유래와 의미를 소개하는 사설과 기사를 연달아 실었다. ‘크리스마스! 이는 참 반가운 소식이다. 구세주의 탄생한 날이다’로 시작한 사설 ‘크리스마스’(조선일보 1925년 12월25일)는 ‘예수교는 욱일승천의 세(勢)로써 전 구주를 정복하고 널리 온 세계에 충만하게 되었다’고 썼다. 서구를 지배한 정신 문명의 바탕이 기독교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예수는 혁명적이었고 따라서 비타협적이었다. 그러나 그의 목적하는 바는 평화에 있었다’면서 평화를 앞세웠다.
이듬해 성탄절 사설에서도 기독교의 인도주의를 높이 평가하면서 도덕적 반성에 따른 개신 운동을 주문했다. ‘기독신교가 조선에 수입된 지 45년을 산(算)하고 그의 구교(舊敎·천주교)의 유입은 벌써 수세기의 연원을 가졌다. 기독교의 선각자 교역자 및 그 유심한 사녀(士女)들의 노력이 또한 크기를 기(期)하야 말시 안는다.’ (‘성탄과 조선’,조선일보 1926년 12월25일)
1000만 신자를 헤아리는 요즘 이상으로 30만 신자를 향한 당시 사회의 기대가 적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참고자료
이만열, 한국기독교회 100년사, 성경읽기사, 1985
12.31(토) 한복차림 조선인은 ‘일본탕’ 출입금지
일본인이 운영한 온양온천, 조선인 차별대우로 원성 높아

▲일본여행협회 조선지부가 1941년3월 발행한 잡지 '문화조선'(옛 관광조선)제3권제2호에 실린 온양온천 광고.
‘온양온천은 수백년이래 조선 반도강산에 일 명승지(名勝地)이라. 금일에 이르러 주식회사라는 명칭으로 일본인이 차(此)를 관리하는 중인데 기입욕장소(其入浴塲所)는 좌,우편 양쪽에 설치하였으며 전(全)조선각지로부터 춘추양절(春秋兩節)은 조선인 남녀노유를 물론하고 입욕차(入浴次)로 내왕(來往)하는 객(客)은 수만(數萬)으로 계산(計算)한다. 그런데 일본탕, 조선탕이라는 명칭(名稱)을 사용하는 중이며 소위 일본탕은 비록 조선인이라도 양복을 입었으면 입욕(入浴)케하는 중(中)인데, 양복은 걸레가 다 되었어도 상관없고 조선 의복으로는 상당한 신사복으로 금의(錦衣)를 입었을지라도 입욕을 불허하니, 소위 조선탕에도 일본의(日本衣)를 착(着)한 인(人)의 입욕(入浴)을 불허(不許)함이 상당(相當)치 아니한가. 여차한 차별을 철폐하는 것이 편의(便宜)하겠다고 사람들이 희망한다더라’(‘목욕도 부자유’, 조선일보 1923년5월30일)
◇걸레 같은 양복이라도 입어야 들여보내
충남 아산 발(發) 기사가 신문에 실렸다. 명승지로 소문난 온양 온천에서 ‘일본탕’ ‘조선탕’을 구분해 조선인을 차별대우한다는 내용이었다. 허름한 양복이나 일본옷이라도 걸치면 조선인도 ‘일본탕’에 출입할 수있지만, 최고급이라도 한복 차림으론 일본탕엔 들어갈 수없게했다는 지적이었다. 요금은 같은데, 일본탕에 비해 조선탕의 시설과 서비스가 떨어진다는 점도 지적했다. ‘같은 요금을 내어도 일본탕은 물이 좀 더 덥고, 정결하게 꾸미었음으로 조선사람으로도 중류 이상이라고 할 만한 사람들은 그곳을 희망하는 터이나 조선옷만 입었으면 물론 표를 팔지 아니하고 아무리 추할지라도 일본 옷이나 또는 양복을 입었으면 조선 사람이라도 입욕시키는 기괴한 차별적 수단을 씀으로 내왕하는 손(님)들의 불평이 높아오던 중인데….’(‘온천시민대회’, 조선일보 1924년12월18일)
◇시민대회까지 열어 당국에 진정서 제출
온양온천은 조선시대 태조와 세종, 세조가 다녀간 ‘왕실온천’으로 유명했다. 경성에서 경부선(1905년 개통)을 타고 천안까지 가서 사설철도인 경남철도주식회사 열차로 갈아타면 온양까지 직행했다. 1934년 기준, 평일 왕복은 2원78전, 주말은 1원98전으로 30%정도 할인해줬다. 주말 여행을 유도하기 위해서였다.
초창기 온양온천은 조선인의 성토대상이었다. 1910년대 일본인이 온천 소유권을 사들여 주식회사를 세우면서 사달이 났다.일본인 업주는 온천수를 뽑아올려 온천탕을 운영하고 호텔과 상점을 개발해 일본식 온천장을 운영했다. 하지만 복식에 따라 출입을 제한하는 ‘기발한’ 발상으로 조선인의 분개를 샀다. 차별대우에 분개한 주민 수백명은 시민대회까지 열어 당국에 진정서를 제출했지만 좀처럼 개선되지 않았다.
◇호서기자단까지 공동 항의
1927년에도 온천 관리자들이 차별로 일관한다는 기사가 실렸다. 이번엔 호서(湖西)기자단이 공동으로 항의했다.’일본인들이 별별 야비한 계책으로 돈을 뺏아가며 조선동포를 차별하는 중, 제일 분한 일은 욕탕을 좌우로 분치하고 위로는 일인(日人)탕, 좌로는 조선탕으로 만들어 요금은 일반으로 받고 조선탕에는 위생도 무엇도 불구하고 아무나 들여보내고 소위 일본탕에는 걸레조각이라도 양복과 일본옷을 입었으면 입욕을 허가하고 아무리 신사라도 조선옷만 입었으면 절대로 입욕을 불허하는 기괴망측한 일이 있어 일반의 비난이 많은 바 분개한 일반 주민들은 온양온천욕탕을 경남철도가 매수할 희망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온양온천 관리자 종시 차별로 일관’,조선일보 1927년4월5일)
이런 차별이 언제까지 계속됐는지는 알 수없다. 하지만 두고두고 시빗거리가 됐다.

▲구보 박태원이 1938년 겨울 황해도 배천온천을 찾았다. 해서지방 기행의 첫 일정이었다. 경성에서 가장 가까운 온천이었다. 조선일보 1938년2월15일자
◇구보 박태원의 배천온천 기행
‘토성서 차를 바꾸어 타고 배천온천서 내린 것이 오후 1시반. 떠나기 전 이형에게서 배운대로 곧 천일각에 들렀다.’
1938년 어느 겨울 아침, 구보(仇甫) 박태원이 황해도 여행을 떠났다. 첫번째로 향한 곳이 배천온천이었다. 경성에서 가까워 주말 1박2일 여행으로 손꼽히는 곳이었다. 경의선을 타고 토성(土城)에서 내려 배천행 지선으로 갈아타면 두시간 정도 걸렸다고 한다.
구보는 천일각에 들러 온천욕부터 했다. 욕탕을 나와 ‘돈부리’로 점심을 먹었다. ‘해서기유’(海西記遊·조선일보 1938년2월15일~22일·총6회)를 배천온천으로 시작했다는 건 그만큼 온천 여행이 인기가 있었다는 뜻이다.
배천온천은 경성에서 가까운 만큼 교통비도 비교적 쌌다. 1935년 기준, 열차 3등칸 왕복에 1원83전인데다 반도여관 및 조선여관은 1박에 1원~1원50전 정도였다. 물론 구보가 들른 천일각 숙박은 최저3원, 배천온천(호텔)은 4원50전부터였으니, 고급 시설도 있었다.
◇겨울 여행의 꽃, 온천여행의 탄생
온천은 20세기 전반 새로운 관광 명소로 떠오른 인기 여행지였다. 동래온천이나 온양온천처럼 유서깊은 곳도 있었지만 온천욕은 조선인에게 익숙치 않았다. 교통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온천 여행을 다녀오기도 쉽지 않았다.
경부선과 경의선, 경원선이 부설되면서 철로를 따라 전국에서 온천이 개발되고 인기 여행지로 급부상했다. 온천 개발에 나선 건 물론 일본인들이었다. 조선총독부 지질조사소에 따르면, 1925년 전국의 주요 온천으로 동래 해운대 유성 온양 신천 용강 온정리 주을온천이 꼽혔다. 교통이 편리하고 관광객 숙소를 갖춘 온천이었다.

▲극작가 함대훈이 쓴 동래온천 탐방기. 웅초 김규택이 삽화를 그렸다. 조선일보 1934년10월11일자
◇이광수의 온천예찬
춘원 이광수는 당시 ‘모던 문물’인 온천욕 예찬자였다. 일본 유학생 출신이니만큼 온천 문화에 친숙했을 것이다. 동래온천에 들른 춘원은 이렇게 썼다. ‘맑고 따뜻하고 부드러운 물에 신체를 잠그고 앉았는 맛은 참 비길 데가 없다. 얼른얼른하는 화강석 위에 앉아 말끔하니 전신을 씻고 나서 백설 같고 양모(羊毛) 같은 수건으로 몸을 씻고, 백사(白沙) 청송(靑松)으로 솔솔 불어오는 청풍(淸風)을 쐬면, 육신의 진구(塵垢·먼지와 때)뿐 아니라 정신의 진구까지 씻어지는 것같다.’(이광수, ‘반도강산’, 영창서관, 1939) 온천욕이 얼마나 상쾌했던지 몸의 때뿐 아니라 정신의 때까지 씻기는 것같다고 썼다. 1917년 7월31일의 편지다.
◇온양온천 ‘유한계급의 유원지’
극작가 남우훈은 1924년 처음으로 온천장을 구경했다. 부산에 들렀다가 동래온천에서 하룻밤 묵으며 온천욕을 했다는 것이다. 그는 온천장을 소설에 등장하는 로맨스의 현장으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산책할 만한 곳도 변변찮은데다 뜨거운 물밖에 없는 온천장을 둘러보고,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다’고 했다. 4년 뒤 온양온천에서 일주일을 보낸 뒤엔 생각이 달라졌다. 온천 욕장 근처는 일본인들의 주택, 여관, 상점이 줄지어 들어섰다. ‘우리네의 거리에서 볼 수 없는 활기를 그곳에서 보게 된다. 조선의 도시가 모두 그리한 것과 같이 조그마한 온천장까지도 그들의 독무대가 되고 있다.’
숙소 맞은편 방에 ‘양복쟁이’ 두 사람이 젊은 여성과 함께 들어와 밤새도록 청요리를 시켜먹으며 술마시고 화투치는 장면을 목격했다. 향락과 퇴폐의 냄새를 맡았다. 남우훈은 이렇게 썼다. ‘조선에 있어 온천장이 오락장화하게 된 것은 멀지 않은 과거에서부터이다. 약 10년 전만 하여도 온천이라면 환자가 갈 곳으로 밖에 생각지 아니하여서 병자의 요양지이던 것이 현금에는 요양보다 오락이 앞서게 되었다. 그리하여 겨울이면 유한계급의 유원지가 되는 것이다.’(‘온양온천삽화’ 별건곤 제24호, 1929년12월)
◇'후끈한 탕속에 들어앉아 바깥 햇빛을 내다보면…'
‘별건곤’ 같은 호에 동래온천 방문기를 쓴 시조시인 김남주는 온천 마니아였던 모양이다. ‘후끈후끈하는 온천의 탕 속에 들어앉아 남쪽 유리창으로 들어오는 가냘픈 겨울의 햇빛을 내다보는 것도 겨울을 보내는 맛으로는 주사청루(酒肆靑樓·술집과 기생집)에 수백금을 허는 것보다는 상승일 것같습니다.’
김남주는 동래온천장이 예전과 달리 퇴폐, 향락의 장소로 변질됐다면서도 온천장을 찾는 즐거움이 있다고 말한다. ‘이곳도 옛날은 약수로 병을 고치고자 순례의 나그네를 하는 보살네들이 부근의 산사를 찾고 치성을 하던 곳이라 그때는 정토이었고 동경의 뜻도 달랐섰거니와 지금은 음탕한 곳으로 여지없이 변하고 말았습니다. 기생, 자동차, 창녀, 여관, 요리집 등이 발달이 되었다면 상당 이상으로 그렸다고 하겠습니다만은 눈을 들어서 좌우의 벌판을 바라보고 뒤로 산을 쳐다보면 산이 아름답고 물이 깨끗하여서 속화되고 추회될 것을 가리우고도 남을 것이 있겠습니다.’ (‘동래온천 情話’, 별건곤 제24호, 1929년 12월)
◇새해 첫날은 온천에서
철도국은 단체 운임을 할인해주면서 온천 여행을 장려했다. 겨울이면 관광객이 온천으로 몰려들었다. 소설가 김남천의 신문 연재소설 ‘사랑의 수족관’(조선일보 1939년12월28일)엔 새해초 온천 여행을 다녀오는 걸 관례화한 중년 부부가 나온다.
‘이신국씨와 그의 부인 은주는 몇해째 계속해 오는 습관대로 정월 초하룻날을 온천에서 보내었다. 아침일찌기 원동(苑洞·일제시대 원서동 명칭) 저택에서 침실을 나온 이신국씨는 ‘푸록코-트’에 위의를 갖추고 봉축식에 정식으로 참례한 뒤 곧 여장을 꾸려가지고 부인과 함께 미리부터 예약해두었던 배천 온천으로 자리를 옮기었던 것이다.’ 기업체 사장 이신국 부부가 향한 곳은 경성에서 가까운 배천온천이었다. 부부는 3박4일간 호텔에 묵으며 온천욕을 즐기면서 ‘몸과 마음을 정양했다’
겨울 여행의 꽃, 근대 온천 여행은 100여년전 이렇게 시작됐다.
◇참고자료
조선총독부 지질조사소, ‘조선지질조사요보’ 제3권, 1925
남우훈, ‘온양온천삽화’, 별건곤 제24호, 1929년12월
김남주, ‘동래온천 情話’, 별건곤 제24호, 1929년 12월
‘온천장안내’, 삼천리 제7권제1호, 1935년1월
이광수, ‘반도기행’, 춘원이광수걸작선집 제1권, 영창서관, 1939
국사편찬위원회 편, 여행과 관광으로 본 근대, 두산동아, 2008◎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