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餘談7/ 2022-3/ 09.03 고수와 하수 - 12.29 내 집으로의 귀환

상림은내고향 2022. 12. 29. 10:51

餘談7/ 2022/

09.03  고수와 하수

하수는 어렵고 복잡하다

고수는 쉽고 단순하다

 

모든 역사를 통해 단순함은 복잡함을 이겨왔다. 애플과 이케아, 무지(MUJI)가 그랬고, 오래된 유행가 가사가 그랬다.

 

초대박 신제품은 늘 조작이 쉽고 단순한 제품이라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단순함(simplicity)이란 경지는 말처럼 그리 단순한 일이 아니다. 이에 비해 소위 먹물 계층은 말이나 글이 대개 어렵고 복잡하다. 가장 중요한 재미는 아예 기대 난망이다.

 

아인슈타인은 “간단하게 설명할 수 없다면 충분히 아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결국 진짜 고수의 세 가지 특징은 가장 쉽게 말하고, 복잡한 걸 단순하게 처리하며, 엄청 재미있는 사람이다.

조선일보  이동규 경희대 경영대학원 교수

 
 

09.21  진화하는 그라피티 아트

이주현 미술사학자·명지대 문화예술대학원장

 

그라피티는 1960년대 말 미국 흑인 인권운동 흐름 속에서 백인 중심의 고급미술에 대항해 시작된 스트리트 아트다. 초창기 작가들은 경찰의 눈을 피해 익명으로 지하철이나 건물 외벽에 포스터나 스티커·벽화 등에 강렬한 메시지를 담아 제작했다. 1980~90년대 힙합문화 유행과 맞물려 대중화에 성공한 그라피티는 스타 작가를 배출했고 길거리를 벗어나 갤러리와 미술관 진입에 성공한다. 오늘날은 스티커와 포스터 문양을 의류나 장난감으로 상품화하면서 서브 컬처에서 벗어나 미학적 스펙트럼을 넓혀가고 있다.

 

1970년 출생한 스트리트 아티스트이자 사회운동가이며 성공한 사업가이자 디자이너이기도 한 셰퍼드 페어리(Shepard Fairey)의 작업은 미국 그라피티 아트의 현주소를 잘 보여준다. ‘행동하라! 눈을 뜨고 마음을 열어라(Eyes Open, Minds Open)’ 전시(롯데뮤지엄)에 진열된 140여장의 포스터와 벽화, 작가가 디자인한 스케이트보드와 펑크 록 뮤지션의 앨범 재킷은 주류문화와 끊임없이 충돌하며 살아온 백인 예술가의 삶의 궤적이자 지난 30년간 미국 그라피티 아트의 역사이기도 하다.

길거리에서 꽃핀 강렬한 예술
미국작가 페어리의 ‘행동하라!’
주류와 비주류 경계 무너뜨려

▲셰퍼드 페어리의 ‘희망’. 종이 위에 스텐실, 실크스크린, 콜라주, 2008. [사진 2022 COURTESY OF SHEPARD FAIREY OBEY GIANT ART INC.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의사 집안에서 태어난 페어리는 1988년 명문 로드아일랜드 디자인스쿨에 입학하지만 정작 그의 관심은 학교 밖의 거리였다. 당시 서민들의 사랑을 받던 거인 프로 레슬러 앙드레 루시모프의 얼굴을 프린트한 작은 스티커를 거리에 붙이자, 스티커는 스케이트보더 커뮤니티를 통해 급속히 확산됐고, 페어리는 거리 예술이 갖는 소통의 힘을 경험하게 된다.

 

그는 1990년 프로비던스시 시장 후보의 대형 포스터를 루시모프의 얼굴로 도배해 경찰 조사를 받는가 하면, 루시모프 이미지에 영화 ‘화성인 지구 침공’ 속 대사에서 따온 ‘복종하라(Obey)’는 텍스트를 결합해 ‘오베이 자이언트 (Obey Giant)’ 도상을 도처에 붙여 권력에 순종하도록 길들여진 현대인의 의식 세계를 조롱했다.

페어리는 조지 부시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던 2004년에는 ‘반전, 반 부시’ 포스터를 제작했고, 이후에도 인권운동가 안젤라 데이비스와 제시 잭슨 목사, 밥 말리 등 자신에게 영감을 준 인물을 붉은 바탕에 검은 윤곽이 강조된 사회주의 프로퍼갠더 포스터 양식으로 제작하며 거리 작업을 이어갔다.

 

그의 이름을 결정적으로 세상에 알린 것은 2008년 대통령 선거용으로 제작한 버락 오바마의 초상화 ‘희망’이었다. ‘희망’은 시사주간 타임의 표지화로 선정됐을 뿐 아니라 국립초상화박물관이 이를 사들임으로써 그를 제도권과 연결시켜 주었다. 이듬해 사설 갤러리가 아닌 공공미술관에서의 개인전이 보스톤에서 열렸으며, 불법이 아닌 공공미술로서 페어리가 그린 넬슨 만델라 벽화가 요하네스버그의 9층 건물을 장식하게 된다.

 

거인 이미지를 로고로 사용해 2001년 그가 설립한 의류회사 ‘오베이’가 세계적 의류 브랜드로 성장하고, 전시장에 걸린 그의 그림이 명성을 얻자 상업성에 대한 논란이 일기 시작했다. 그러나 페어리는 2007년부터 ‘오베이’ 의류의 일부 품목을 비영리단체를 위해 디자인하고 수익금 전액을 수단 다르푸르 내전 희생자, 알래스카 야생동물 구조단을 비롯해 수많은 환경과 인권단체에 기부함으로써 자본의 논리에 잠식당하지 않고자 노력한다.

 

또한 트럼프 정부의 인종주의 정책을 비판해 제작한 모슬렘 여성들의 초상화 시리즈에서는 초기의 강렬한 색채와 두꺼운 윤곽선 대신, 건물 외벽 인양 벽지와 신문지가 겹겹이 콜라주 된 바탕 위에 면밀하고 회화적인 선묘로 인물들의 윤곽을 그려냄으로써 서민의 삶이 묻어나는 거리미술 특유의 미학을 잃지 않으면서 작품의 완성도를 높여 가고 있다. 2015년에는 디트로이트의 건물 14채를 그라피티로 훼손한 혐의로 체포되는 등 미술관과 거리, 고급문화와 하위문화의 경계를 허물려는 작가의 시도는 여전히 계속된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예술의 장이란 힘의 장이자 이를 변용하거나 유지할 수 있는 투쟁의 장임을 주장했다. 확장된 개념으로서의 그라피티는 주류와 비주류, 주변과 중심 사이 어딘가에 위치하면서, 때로는 협조하고 때로는 충돌하며 그 간격을 좁혀가고 있다. 상업화와 자본의 논리를 따르지 않고, 예술의 실천적 행위를 통해 인간의 의식을 전환시키고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믿음을 져버리지 않는 한 그라피티의 저항정신은 현재진행형이며, 그 진화의 끝은 아직 열려 있다.

중앙일보  이주현 미술사학자·명지대 문화예술대학원장

 

09.22  일요일 아침에 받은 마지막 환자

일요일 아침이었다. 나는 벌써 스물세 시간 근무 중인 응급실에 있었다. 간밤에 분주하다가 아침에 한산해진 참이었다. 사람들이 휴일의 깊은 잠에서 깨어나면 응급실도 다시 활기를 찾을 것이었다. 한 시간 남은 퇴근 준비를 하는데 정적을 깨뜨리는 한 통의 전화가 왔다.

“싱크홀 사고입니다. 50대 노동자, 심정지 상태입니다.”

아무래도 퇴근이 미뤄질 것 같았다. 중환 구역을 비우고 환자를 수용하기로 했다. 싱크홀이라면 당연히 추락 사고다. 외상으로 인한 심정지 환자에겐 필요한 처치가 많다. 중환 구역 간호사가 외상 환자 처치를 준비하고 있었다. 누적된 피로감이 몰려왔다. 가끔 도로 밑의 검고 깊은 구덩이를 내려다본 적이 있었다. 바닥이 깨지며 그 공간으로 추락했을 것이라 짐작했다.

 

환자는 곧 도착했다. 그는 거대한 펄밭에서 건져낸 것 같았다. 추락 지점이 진흙이었던 모양이었다. 도로 공사 복장에 진흙이 그대로 씌워져 있어 심폐소생술 하는 구급 대원도 흙투성이였다. 즉시 병원 침대로 옮겼다. 습기를 머금은 진흙이 후드득 떨어졌다. 벌써부터 팔 하나와 다리 하나가 어색하게 꺾였다. 심정지가 발생했다면 저 정도 골절은 당연했다.

 

일단 맥이 없었다. 마음이 급했다. 거구의 환자였고 진흙에 추락했다면 살릴 수도 있었다. 삽관을 위해 왼손에 블레이드를 들었다. 입안이 흙과 모래로 가득 차 엉망이었다. 오른손으로 환자의 입안에서 진흙을 퍼냈다. 위에서 나온 토사물도 섞여 있는 것 같았다. 간신히 블레이드로 시야를 확보했다. 입안의 까끌거림이 블레이드를 통해 왼손에 그대로 전달되었다. 기도를 찾아 관을 넣고 공기를 불어넣자 검고 탁한 물이 관을 통해 그의 폐에서 역류했다. 즉시 터져 나올 정도로 많은 양이었다.

“대원님. 환자 물에서 건졌습니까? 추락이라고 들었는데요.”

“도로가 깨지면서 상수도가 같이 터졌습니다. 현장이 물구덩이여서 정리하는 데 한 시간이 넘게 걸렸습니다.”

 

탄식이 절로 나왔다. 원인은 하나가 아니었다. 나는 흉부를 압박하면서 그의 육체를 진찰했다. 한쪽 팔과 다리에 골절이 있었고 골반이 덜그럭거렸다. 복부도 지나치게 팽창되어 보였다. 추락으로 인한 손상이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결정적 사인은 아니었다. 그는 추락한 뒤 그 안에서 분명히 살아있었으니까.

 

죽음까지의 경위가 머릿속에서 끔찍하게 맞춰졌다. 그는 불시에 땅 아래로 추락했다. 빛이 한 줄기 들어오는 어둡고 캄캄한 공간이었다. 파열된 상수도관에서 나오는 물은 맹렬하게 터져 나갔다. 하지만 그는 골반과 다리가 깨져 일어설 수 없다.

 

그의 몸 어딘가로 물줄기가 쏟아졌다. 그는 지금 이렇게 조용하게 사지를 뻗어 누워 있지만, 당시에는 살고자 노력했을 것이다. 어둠을 이기고 나가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부러진 팔다리로는 길을 찾을 수 없다. 결국 그는 저 검은 물을 마시는 수밖에 없었다. 폐에서 나오는 흙탕물이 그 사실을 입증했다. 그리고 한 시간 동안 도움의 손길은 오지 못했다. 그는 그곳에서 혼자였다. 흉부 압박으로 그의 사지가 제멋대로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같은 인간으로서 두려움을 느꼈다. 추락의 손상으로도 인간은 사망하지만 진흙물로 숨을 막아도 인간은 사망한다. 한 사람에게 둘 다 일어날 필요는 없다. 그 어두운 물이 얼굴을 타넘는 순간 인간에게는 어떤 고독이, 어떤 절망이 닥치는 것일까.

 

소생술은 무의미해 보였다. 그는 사람들이 일요일 아침 단잠을 자는 동안 힘들게 일하던 노동자였다. 이제 사람들은 고통의 기척조차 느끼지 못하고 잠에서 깨어날 것이다. 그것은 타인의 것일 뿐이니까. 나는 소생술을 중단했다. 바깥에는 그의 아내와 딸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 사망 통보가 오늘 내 마지막 일이었다.

조선일보 남궁인 이대 목동병원 응급의학과 교수·작가

 

09.23  죽은 여왕이 가르쳐준 것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의 장례식이 엄수된 19일(현지 시각) 여왕의 관이 해군 장병들이 이끄는 포차에 실려 런던 버킹엄궁 인근 거리를 지나고 있다. 영국 국교(國敎) 성공회 최고위 성직자인 저스틴 웰비 캔터베리 대주교는“여왕은 1953년 대관식에서 국가와 국민을 위한 삶을 살겠다고 맹세했고, 그 약속을 지켰다”고 말했다. 영국 언론 매체들은 전 세계 약 40억명이 이날 여왕의 장례식을 지켜본 것으로 추정했다. /로이터 연합뉴스

 

생전에 다시는 못 볼 대단한 규모의 장례식을 TV로 지켜보며, 여왕은 죽어서도 열 일을 한다고 생각했다. 전대미문의 애도 행렬을 통해 영국을 하나로 통합하고, 전 세계 200여 나라 지도자들을 런던으로 불러모았다. 40억 명이 시청한 장례 미사에서 캔터베리 대주교는 여왕을 ‘살아서는 봉사, 죽어서는 희망(Service in life, Hope in death)’의 상징으로 칭송했다. 누구보다 많은 이의 사랑과 작별 인사를 받고 영면한 엘리자베스 2세는 비록 먼 나라 여왕이지만 과거 영국과 오늘날의 세계를 어떤 세계사 교과서보다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영국인이 그렇게 줄서기 달인인 줄 이전에는 몰랐다. 7.5㎞까지 늘어선 줄은 시간당 0.5마일 속도로 천천히 움직이고, 줄 선 사람에게 목을 축일 수 있는 급수대와 화장실의 위치를 알려주는 것은 물론, 가져올 것과 가져오면 안 되는 물건의 목록도 사전에 공지되었다고 한다. 런던으로 모여든 사람은 줄잡아 75만명 정도. 직장인은 휴가를 내고, 학생들은 결석계를 내고 그 줄에 합류했다. 그들은 영국인의 특기인 ‘잡담(small talk)’을 하며 시간을 무료하지 않게 보낼 줄도 안다. 기온이 떨어져도 불평하거나 동요하지 않는다. 조지 오웰은 일찍이 이런 영국인의 성향을 ‘줄서기 참을성(queue-tolerant)’이라고 불렀다.

 

9월의 런던이 그렇게 쾌청하고, 단풍이 들락 말락 한 공원과 가로수가 얼마나 아름다운 도시인지도 알게 되었다. 호두까기 인형에서 본듯한 장난감 병정 같은 말쑥한 병사들이 유니언 잭으로 장식된 거리를 배경으로 장중한 음악과 플롯이 완벽하게 어우러진 장엄한 장례 행렬을 완성했다. 이를 본 CNN의 아만포어 기자는 “전 국민이 배우로 출연한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 같다”고 표현했다. 여왕의 장례식은 1960년대 초에 이미 모든 계획이 수립되었고, 매년 두세 차례씩 실제 점검을 했다고 한다. 로마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듯, 여왕의 장례식도 수십년의 준비 기간을 거쳤다.

 

 

유럽의 여러 왕조가 쇠락을 거듭할 때 영국의 왕실은 건재했던 비결도 짐작할 수 있었다. 영국의 입헌군주는 자신의 존재 기반이 ‘국민의 사랑’임을 알고 일찍부터 그들과 소통하며 근대화와 민주주의에 적응하려 했다. 그 과정에서 미디어를 매우 적절하고 탁월하게 이용했다. 1969년에 왕실의 일상을 담은 다큐멘터리를 방영해 국민에게 친숙하게 다가갔고, 국가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메시지로 국민에게 용기를 주었다. 이번 장례식 역시 왕실 최초로 생중계를 결정해 전 세계의 이목을 모으고 왕실의 위엄을 과시했다.

 

몇십년도 안 되는 현대사를 두고도 국민적 합의가 어려운 우리에 비해 이번 장례식이 보여준 국가의 영속성과 안정감은 경이에 가깝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즉위하고, 결혼하고, 장례식을 치른 웨스트민스터 사원은 영국 역사를 700년 동안 지켜본 곳이다. 57년 전 처칠 수상 서거 후 처음 열리는 이번 국장은 국가의 정점이 무엇이며 수호해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 웅변한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두 손주며느리는 여왕이 물려준 귀고리를 착용했고, 증손녀 샬럿 공주도 증조할머니에게 받은 다이아몬드 브로치를 가슴에 달고 장례식에 참석했다. 장례식장에서 성가대는 그동안 왕실의 대관식과 결혼식 때 부른 노래의 악보를 다시 꺼내 목청껏 부른다.

 

아무리 여왕이라도 이렇게 전 세계가 애도하는 것은 여왕이 뭔가 잘했기 때문이다. 역사 평론가들은 그 이유를 여왕이 정치보다 높은 곳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평가한다. 정치적으로 어느 한편에 서지 않고, 영국의 정신적 지주로 봉사하는 데 중심을 두었기에 전 세계 나라들이 거부감 없이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이다. 국가의 적통은 과거에서 나온다는 믿음으로 입헌군주의 힘과 위엄을 정치가 아닌 국격에 쏟은 결과다. 역사가 켜켜이 쌓인 장례식을 지켜보고 있자니 마치 죽은 자와 산 자가 피아노의 검은 건반과 흰 건반처럼 서로 어우러져 연주하는 웅장한 교향악을 듣는 느낌이었다.

 

죽은 자와 산 자를 극명하게 대비시킨 명연설로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을 빼놓을 수 없다. 남북전쟁 당시 전몰 용사가 묻힌 게티즈버그 묘지에서 링컨은 전사자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았음을, 살아있는 사람들은 자유의 씨앗을 소중하게 키워나갈 것을, 그리고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국민의 정부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다. 국가의 영속성이란 이렇게 죽은 자의 희생 위에 산 자의 헌신이 보태져야 가능한 것이다.

 

이쯤 되면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왜 하나같이 과거에 집착하는지 알 수 있다. 그들은 나라를 세우거나 부수는데 죽은 자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없던 사실도 만들어내고, 있던 사실도 부정한다. 역사 교과서를 맘대로 기술하고, 가해자와 피해자를 손바닥 뒤집듯 바꾼다. 과거가 불리하면 왜곡하고, 과거가 이득이 된다면 부모도 바꿔치기할 사람들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기억의 효용가치를 아는 그들이니 문화전선에서 빼어난 역량을 발휘하는 것은 당연하다.

 

현실론자들은 이미 흘러간 과거가 뭐 그리 중요하냐고 물을지 모른다. 오히려 미래가 더 중요하지 않으냐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죽은 위인을 산 자들이 부활시키지 않는 한 국가의 영속성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비루한 산 자들만 우글거리고, 그들끼리 싸우고 헐뜯는 모습에 신물이 난 참에, 먼 땅에서 거행된 오랜 왕실의 장례식은 이런 역사의 지혜를 한 가닥 전해주는 것 같다.

조선일보  박성희 이화여대 커뮤니케이션미디어학부 교수·한국미래학회 회장

 

똑바로 읽어도, 거꾸로 읽어도 같은 말이 있다. 기러기, 토마토, 스위스, 인도인, 별똥별, 역삼역이 그러하다. 이를 영어로 팰린드롬(palindrome)이라고 한다. 단어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가련하다, 사장집 아들 딸들아, 집장사 다하련가”처럼 문장으로도 가능하다. 웃긴다.

 

팰린드롬보다 조금 더 발전한 언어유희가 어크로스틱(acrostic)이다. 가로로 읽는 글의 각 행 첫머리를 세로로 읽으면 숨은 뜻이 드러나는 글이다. 우리나라의 삼행시가 그렇다. 미국 작가 에드거 앨런 포가 아내에게 보낸 시의 각 행 첫 글자를 세로로 읽을 때 엘리자베스 즉, 아내 이름이 나온다. 그 암호가 풀리는 순간 웃게 된다.

 

영국 작가 루이스 캐럴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이어 ‘거울 속으로’라는 동화를 썼다. 그 책 마지막에 시를 한 편 남겼다. 각 행 첫 글자를 세로로 읽으면 ‘앨리스 리델’이라는 이름이 나온다. 캐럴이 짝사랑한 이웃 집 여자애다. 겨우 열한 살짜리 미성년에게 연정을 품는 소아성애자로 밝혀지는 것이 두려웠던 캐럴은 금지된 사랑을 어크로스틱에 숨겼다. 사람들이 눈치 채자 캐럴은 시치미를 뗐다. 독자들은 억측을 멈추고 그냥 웃었다.

 

팰린드롬이나 어크로스틱이 서양식 언어유희라면, 삼행시나 파자(破字·글자 분해)는 우리나라 언어유희다. 김삿갓이 그 분야의 대가였다. 그런데 유희가 유희로 끝나지 않았다.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는 파자는 정국을 소용돌이에 빠뜨렸다. 조(趙)광조가 왕이 되려 한다는 의심 속에서 개혁파가 숙청당했다. 기묘사화다. 웃을 수 없었다.

 

1519년 이 무렵 중종이 ‘주초위왕’에 대해 보고받았다. 그때 ‘위왕’을 “왕을 위해서 목숨도 바친다(爲王代死)”로 넉넉하게 받아들였다면, 역사는 달라졌다. 지레 짐작하여 글의 의도를 억측하고 굴레를 씌우면 위험하다. ‘바이든’이냐 ‘날리면’이냐를 두고 벌어지는 지금 세태도 마찬가지다. 억측은 멈추고, 넉넉함과 웃음은 늘려야 한다.

조선일보  차현진 한국은행 자문역

 

10.11  조선시대 유튜버를 아십니까

/ 일러스트=허예진

 

이제는 사라져버린 옛날의 직업 중에 전기수(傳奇叟)라는 게 있다. 조선 후기에 인기가 많았다는데, 책도 없고 텔레비전도 없던 시기에 이 동네 저 동네를 돌아다니며 직업적으로 소설을 읽어주는 사람들을 전기수라고 불렀다고 한다. 단옷날 그네 타다가 이도령 눈 맞은 춘향전, 흥부와 놀부처럼 책을 읽기도 하고, 아니면 이야기를 지어내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에게 한꺼번에 이야기를 들려줘야 했으니 감칠맛 나는 목소리에 발음도 분명해야 했다. 무엇보다 이야기의 완급을 쥐락펴락하는 솜씨가 꼭 필요했을 것이다.

 

즐거운 장면에선 신이 나서 청중들의 웃음이 터지게 하고, 원통한 장면이 나오면 화가 나 두 주먹을 불끈 쥐게 하고, 그렇게 사람들을 울고 웃기는 것이 전기수였다. 마이크 하나 없이 목소리만으로 그리 했다는 것이 기술 문명에 찌든 현대인의 시선으로 보기에 신기할 뿐이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책이 값싸게 출간되고, 영화가 나오면서 전기수는 차츰 사라졌다. 그다음으로 등장한 이야기꾼은 무성영화의 변사였다. 소리가 녹음되지 않은 흑백 영상을 틀고 때맞춰 스토리를 설명하고 배우들 목소리를 대신 내주는 변사는 옷을 갈아입은 전기수였다. 그리고 시간이 다시 흘러 무성영화는 유성이 되고, 흑백은 총천연색 컬러가 되었으며 동네 반장님 댁에만 있던 텔레비전도 이제는 집집마다 있다. 채널은 또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그 다음으로 유튜브가 나타났다.

 

요즘은 유튜버가 가장 선망받는 직업 중 하나라던가. 가상공간에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 채널을 만들고, 방송을 하는데 이것도 결국 전기수가 아닌가. 저마다 이야기를 하고, 사람들은 그중 좋아하는 이야기를 골라 들으며 기뻐하고 화내거나 한다. 유튜브에 너무 많은 이야기가 떠돌고 있어 팩트 체크를 해야 한다는 말도 들리지만, 말하는 사람이 신이 나고, 듣는 사람이 즐거우면 그걸로 또 족한 것 아닐까. 언젠가 책이고 유튜브고 다 없어지고 또 다른 무엇으로 바뀔지 모르지만, 그래도 이야기를 들려주고 듣는 즐거움은 영원하리라.

조선일보 이한 작가·'우리는 투기의 민족입니다’ 저자

 

10.18  외국에서 고생하는 한국어

한 언어학자가 집필한 책에서 한국의 ‘곽’씨 성을 영어로 표기하는 방법이 60여 개가 된다는 내용을 보았다. 곰곰 생각해보니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내 이야기이기도 했다. 굳이 ‘곽’씨가 아니더라도 내 성씨는 영어로 표기되는 순간 아주 이상하게 된다. 유학을 앞두고 여권 발급을 위해 영문명을 써야 할 때, 나는 주저 없이 아버지가 쓰시던 영문표기 ‘choi’를 그대로 따라 썼다. 그런데 이것은 아무리 봐도 ‘초이’지 ‘최’는 아닌 것 같다.

 

더구나 문제는 내가 유학을 간 곳이 영어권이 아닌 독일이라는 것이다. 독일 사람들은 대뜸 내 성을 보고 ‘코이’로 읽어버렸다. 영어와 다른 발음체계를 가진 독일에서 내 성은 졸지에 ‘코이’가 된다. 이름이라고 자유로울 수 없으니, 여기에 이름까지 보태면 나도 낯선 내 이름이 당황스럽기만 하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영어식 표기가 만든 엉뚱함
이름도 영어의 노예가 돼서야

내가 처음 페이스북의 ‘저커버그’를 알파벳으로 보았을 때 단박에 ‘추커베르크’로 읽으면서, 독일어의 의미를 알고 있는 이상 추커(설탕)베르크(산), 즉 ‘당산(糖山)’이라는 나름의 작명까지 곁들였다. 그러고 보니 독일어와 영어의 읽기 방식 차이 때문에 바그너는 와그너가 되고, 함부르거(함부르크 사람)는 햄버거가 된다.

 

우리나라에는 모차르트·모짜르트·모짤트도 있고, 바흐와 바하도 있다. 동일인인가? 오스트리아의 유명한 필하모니는 ‘비엔나 필하모니’가 아니라, ‘빈 필하모니’다. ‘빈~’은 독일어 국가인 오스트리아 수도의 독일어 발음이다.

 

내 가족 이야기로 돌아오면 문제가 더 심각해진다. 남편과 아들의 성이 영문으로는 다른 방식으로 표기되는 일이 벌어졌다. 남편은 여권에 쓰일 성을 영문 ‘Ju’로 표기했는데, 훗날 한국에서 군대에 가게 된 아들은 다른 알파벳 조합으로 성을 표기하다 보니, 가족관계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다.

 

남편 성의 영문표기를 독일식으로 발음 하면 ‘유(Ju)’씨가 되는데, 아들은 이를 피하려 흔한 영문표기로 동물원과 발음이 같은 ‘주(Joo)’를 택했지만, 이를 다시 독일식으로 발음하면 ‘요’씨가 되는 요상한 일들이 생긴다. 현재 아들은 다시 ‘Ju’로 영문표기를 한다. 이렇게 되면 군대는 다른 사람이 다녀온 것이 되나? 같은 ‘박’씨라도 ‘박(Pak)세리’와 ‘박(Park)찬호’의 영문 표기가 다른 것은 익히 알려진 바이다.

 

우리나라 고유 명칭의 표기법도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제주가 ‘Chechu’에서 ‘Cheju’로, 그리고 지금은 ‘Jeju’로 쓴다. 되도록 우리말 소리체계로 표현하려는 국어학자들의 고심이 깊어질 수밖에.

 

비단 우리뿐만이 아니라 세계 각국에서 고유 명칭을 더 이상 영어 표기법에 의존하지 않고 자국의 발음에 맞도록 표기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최근 들어 뉴스를 장식한 터키가 바로 그 한 예인데, 터키는 칠면조의 영어 발음과 같기에 보다 자국의 명칭에 가까운 ‘튀르키에’로 바꾸어 국가명을 표기하고 있다. 조금만 찾아보면 세계 곳곳에서 이런 추세를 반영하는 많은 사례를 볼 수 있다.

 

제주도만 문제이겠는가. 우리 학교 명칭의 영문 표기는 ‘Sungkyunkwan’인데, 학교 인근 꽃집이 ‘Seounggyungwan 꽃집’인 것을 보고 놀랐다. 그래서 둘러보니 도로명 표지판 하단의 영문표기는 이렇게 혹은 저렇게 두 가지 모두가 쓰이고 있어, 같은 ‘성균관로’가 서로 다른 모양새로 표기되어 있다. 그래도 뭐가 문제이겠는가. 한국어 발음만 같다면야. 정말 그런가? 어느새 우리나라 ‘김’씨는 ‘(킴)Kim’도 ‘(김)Gim’도 있고, ‘이’씨는 ‘(리)Lee’도 ‘(이)Yi’도 있다.

 

우리는 “영어가 한국에 와서 고생한다”라는 말을 곧잘 하는데, 우리말도 외국에서 고생하기는 마찬가지다. 내 성을 ‘코이’로 발음하는 독일 친구들에게 ‘tschoe’로 표기해 주면, 정확하게 ‘최’로 발음한다. 무엇이 기준이 되어야 할까. 별생각 없이 관례대로 영어 표기법으로 만들어 놓은 이름은 거의 개명 수준이 되어 가족관계뿐만 아니라 내 정체성마저도 혼란스럽게 한다.

 

누군가 이렇게 따져 묻겠지. 그래서 어쩌란 말이냐? 지금은 다양한 국적과 언어권의 저자들이 학술논문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때문에 생소해 보이는 많은 이름을 대하면서 어떻게 발음해야 할지 몰라 난감해지기도 한다.

 

어떤 답을 내야 할지 유보한 채, 우리 고유의 이름들이 영어식 표기에 휘둘려 세상 다시 없는 요상한 이름이 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라 생각해본다. 이름마저 영어의 노예가 되어 엉뚱한 소리로 불리지 않아야겠기에.

중앙일보  최명원 성균관대 독어독문학과 교수

 

10.27  신부가 꽃다발 던지는 이유… 결혼식에 얽힌 이야기

 

가을 주말 길거리가 단풍(fall foliage) 행락객과 결혼식 가는 하객들로 붐빈다. 요즘 결혼식은 과거와 달리(unlike in the past) 단풍 색깔만큼이나 다양해졌다. 신랑·신부 부모인 혼주가 주례(officiator at a wedding)를 맡는가 하면, 혼주 부부가 축가로 색소폰 합동 연주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여전히 지켜지는 유서 깊은 혼례 풍습들(time-honored wedding traditions)이 있다.

 

신부 드레스는 아직 흰색이 단연코 많다. 영국 빅토리아 여왕이 1840년 앨버트공(公)과 결혼식 때 광택 고운 흰색 드레스를 입었는데, 이후 많은 신부들이 왕족처럼 보이려는(look like royalty) 마음에 색깔까지 모방하면서(mimic it including the hue) 일반화했다. 순수성과 처녀성을 상징하는(symbolize purity and virginity) 색이기도 했다.

 

결혼반지를 끼는(wear wedding ring) 것은 이집트에서 유래했다(originate in ancient Egypt). 둥그런 원형은 영원을 나타내고(represent eternity), 가운데 구멍은 미지(未知)로의 관문(gateway into the unknown)을 뜻했다. 신랑도 반지를 끼는 건 제1차 세계대전 무렵까지 그다지 흔하지 않았다. 다이아몬드 반지는 1477년 오스트리아의 맥시밀리언 대공이 프랑스의 버건디 왕국 공주에게 청혼하면서(ask for her hand in marriage) 등장했고, 1940년대부터 대중적이 된 건 De Beers라는 다이아몬드 회사의 마케팅 결과였다.

 

네 번째 손가락에 끼는 것 역시 이집트에서 비롯됐다. 사랑의 정맥(vein of love)이 약지(藥指)를 통해(run through the ring finger) 심장으로 이어진다고 믿었다. 왼손에 끼운 것은 대부분 오른손잡이여서(be right-handed) 반지가 마모되는 것을 방지하기(protect it from wear and tear) 위함이었다.

 

신부가 꽃다발을 던지는(toss the bouquet) 건 1700년대 첫 기록이 남아있다. 미혼 친구들이 신부 옷 조각을 얻으면 행운이 온다는 믿음에 결혼식 후 달려들곤 했는데, 드레스 뜯기는 걸 피하려고(in order to avoid having her dress torn off) 부케를 던져주게 됐다고 한다. 신부 들러리(bridesmaid)는 여성을 소유물로 여겼던 고대 시대에 신부가 납치되는 걸 방지하기 위해 다른 여성들에게 비슷한 옷을 입혀 유인 수단으로 삼은 데서 생겨났다. 신랑 들러리는 groomsman이라고 하는데, 경호 역할을 한다고 해서 ‘최고 칼잡이(best sword fighter)’를 줄여 ‘best man’이라고도 부른다.

 

웨딩 케이크는 로마에서 유래했다. 다산(多産)을 기원하며(pray for the fecundity) 신부 머리에 뿌린 축하 음식 밀 비스킷이 기원이 됐다. 1680년대에는 굴(oyster), 양의 고환과 췌장(lamb testicle and sweetbread), 수탉의 볏(rooster comb), 잣(pine kernel) 등을 넣었다는 기록도 있다.

 

중세 영국에선 신랑·신부가 서로 주는 물건을 받아들이는(accept an object) 동작을 보임으로써 결혼 동의를 나타냈는데(show their consent), 보통 반지였던 이 물건을 ‘wed’라고 했다. 그래서 결혼식을 wedding이라고 부르게 됐다고 한다.

조선일보  윤희영 에디터

 

11.01 엄마의 허리

8년 전 사기를 당했다. 모아 둔 돈을 몽땅 날리고 8000만원의 빚이 생겼다. 살기 위해 주야 교대 공장을 다니면서 주말에 막노동까지 뛰었다. 그래 봐야 손에 쥘 수 있는 돈은 300만원 안팎. 처음으로 빚을 상환하고 월세까지 냈을 때 수중에 남은 돈은 5만원이었다. 그나마 장마 탓에 막노동 못 간 달은 돈을 빌리러 다녀야 했다.

갚을 날짜조차 기약할 수 없었으니 사실상 구걸하러 다닌 셈이다. 한 달 내내 하루도 안 쉬고 일하니 자연히 사람들과 멀어졌다. 일주일 내내 통화 목록엔 엄마 이름뿐. 내 곁에 남은 건 학교 친구도 아니요, 직장 동료도 아닌, 오로지 가족뿐이었다.

 

어느 날부터였던가. 엄마의 허리가 점차 굽어가는 걸 느꼈다. 퇴근길에 계단도 혼자 못 올라서 중턱서 앉아 가쁜 숨만 몰아쉬는 엄마를 보았다. 병원에 가보니 척추협착증이라고 하더라. 수술하면 금방 좋아질 걸 알지만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꼿꼿하게 서서 걷지 못하는 모습을 보며 속으로 가슴앓이만 했다. 제때 병원 못 가니 엄마의 몸 상태는 점차 나빠지기만 했다. 어깨도 잘 들지 못하고, 팔엔 커다란 혹이 생겼다. 왼쪽 어금니를 뽑은 탓에 오른쪽으로만 음식을 씹었다. 종종 밤에 아파서 앓는 소리를 할 때도 있었다. 한 번은 그 신음을 듣는 게 너무 괴로워서 제발 조용히 좀 하라고, 어차피 빚 갚느라 병원비도 없으니 못 고쳐준다고 신경질 냈다. 가난에 의지가 꺾이면 곧바로 불효자가 된다는 걸 그때 알았다.

 

빚을 진다는 건 남들 다 달리고 있던 평지에서 떨어져 절벽 아래에서 시작한다는 뜻. 죽도록 기어올라 간신히 끝에 도달하면 남들은 이미 아득히 먼 앞을 달리고 있다. 한 해 한 해 통장에 찍힌 마이너스가 줄어들 때마다 친구들은 대기업 들어가거나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 채무 상환 과정에서 가장 두려운 건 이자나 독촉이 아니었다. 남들 잘 되는 소식 들을 때마다 가슴속에 솟구치는 불안이었다. 빚 다 갚으면 나이는 30대 중반일 텐데, 남은 거라곤 상해버린 몸뚱이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10년짜리 공장 경력뿐. 미래를 생각하면 늘 우울해져서 퇴근 후 술만 마셨다. 그때마다 엄마는 말없이 못난 아들 먹일 술안주를 만들어 상에 올려놓곤 했다.

 

이대로 계속 살 순 없었다. 하지만 당장 상황을 바꿀 순 없으니 삶의 방식을 바꾸기로 했다. 무일푼으로 미래의 내게 남겨 줄 수 있는 유산은 두 가지. 어디 가서 무시당하지 않을 지식과, 고된 육체노동을 견뎌낼 튼튼한 몸이었다. 평일 시간을 쪼개 달리기하고, 주말엔 방구석에 있고픈 몸을 이끌고 도서관으로 갔다. 공장에서 과장님 다리가 철판에 짓뭉개지는 모습을 본 후론 꾸준히 일기도 썼다. 이력서에 한 줄도 못 남길 그 습관들이 쌓이고 쌓이자 책까지 쓰게 됐다. 여러 운이 겹쳐 첫 작품임에도 꽤 팔렸다. 언제나 생활비만 간신히 남아있던 통장에 처음으로 여윳돈이 생겼다. 첫 인세로 할 일은 너무나 명확했다. 남은 빚을 일시 상환했다. 마침내 신용회복위원회와의 인연이 끝나는 순간 삶의 한 고비를 넘었음에 안도했다. 얼마 안 가 또 인세가 들어왔다.

 

얼마 후 집에 들렀다. 허리가 꼬부라진 엄마와 마주한 순간 인세의 사용처를 정했다. 그날 바로 엄마를 종합병원으로 데려갔다. 이참에 몸 아픈 곳 싹 수술하시라고 했다. 한사코 됐다고 하는 엄마를 보험 들어놔서 병원비 얼마 안 나온다며 안심시킨 채 MRI 기계 안으로 밀어 넣었다. 한 달 후 청구서가 떨어졌다. 비급여 항목이 많아 내야 할 돈만 400만원이 넘었다. 덕분에 통장이 도로 텅텅 비었지만 별 실감은 나지 않았다. 그냥 원래부터 없었던 돈처럼 느껴졌다. 그러다 10월 초에 다시 마산 고향집을 들렀다. 놀랍게도 엄마가 버스 정거장으로 마중 나와 있었다. “집에서 기다리지 그랬어”라고 말하니 “아들 빨리 보고 싶어 그랬지”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엄마는 허리 쫙 편 채 힘든 기색 하나 없이 산복도로 언덕길을 올랐다. 발걸음은 가벼웠고 웃음소리는 경쾌했다. 저 뒷모습을 보기 위해 지금껏 꾹꾹 버티며 살아왔구나, 몇 분쯤 걷자 괜스레 눈물이 났다. 아랫눈썹에 찔끔 맺힌 이슬은 좀처럼 멎지 않고 비가 되어 쏟아졌다. 엄마도 대뜸 길에 멈춰서서 울어 재끼는 아들의 마음을 안 걸까. 놀라는 대신 조용히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청춘을 몽땅 불사른 8년의 투쟁 끝에 비로소 우리 가족은 평범을 되찾았다.

조선일보  천현우 얼룩소(Alookso) 에디터

 

11.03 아무것도 하지 마라

생과 사의 주사위가 매일 굴러간다, 집으로 가는 길 안 보인다
차 조심해라 그렇게 일렀건만, 사람에게 깔릴 줄 누가 알았을까
하지 마라, 네 책임은 없다는 듯 두리번거리며 희생양 찾지 마라

아무것도 하지 마라. 산다는 게 죽을죄다. 생과 사의 주사위가 매일 아침 굴러간다. 산다는 게 그런 건지. 집으로 가는 길은 원래 보이지 않는 건지.

 

아무것도 하지 마라. 그 버스를 타지 마라. 기어봉에 전진 후진도 모자라 하강이 있다. 한강 다리 끊어져 그 버스 곧 추락한다. 상판에 곤두박질쳐 두 동강 난다. 튕겨 나온 너의 몸이 한강 물에 실려 간다. 푸른 꿈이 실린 너의 교복 누가 그리 정성스레 다려주었니. 검은 강물에 젖은 너의 교복 누가 탁탁 털어 말려주겠니. 그 버스는 타지 마라. 성수대교 무너진다. 차라리 열차를 타고 가라.

 

▲그림=이철원

 

그 열차는 타지 마라. 시너와 라이터를 들고 있는 심장 없는 승객이 있다. 그래도 타려거든 하고픈 말, 미처 건네지 못했던 말 남김없이 하고 타라. 네 안부 기다리는 너의 부모님에게, 그림일기 그리자는 너의 아이들에게, 저녁 밥상 마주 앉을 너의 남편과 아내에게 꼭 한번 사랑했노라고, 다음 생에 우리 또 만나자고 꼭 한번 전해주어라. 대구 지하철 불난다. 벌겋게 달아오른 바퀴가 선로 위에 멈춰 섰다. 미처 못다 한 말들이 터널 안의 재가 되어 흩날린다. 그 열차는 타지 마라. 차라리 물 위로 떠다니는 배를 타라.

 

그 배도 타지 마라. 과적에 고박 불량, 평형수도 못 채운 그 배는 곧 가라앉는다. 나오라는 말 한마디 없던 그 배에는 선장도 없고 바다에는 해군도 해경도 없는데 맹골수도 차가운 물 들이치면 네 여린 몸 어떡하려고. 친구 손 꼭 부여잡고 제주 해변 거닌다는 게 죽을죄는 아닐진대 곧 가라앉을 그 배를 왜 꼭 타려고. 신발장에 흰 운동화 한 켤레 자리 빈다. 둘러앉은 밥상 위에 수저 한 벌 모자란다. 아버지 차 룸미러에 너의 얼굴 안 보인다. 타지 마라. 그 배도 곧 가라앉는다. 이제 아무것도 하지 마라.

 

아무것도 하지 마라. 쇼핑조차 하지 마라. 냉각탑이 지붕 뚫고 백화점이 무너진다. 아빠 셔츠, 엄마 내복 사서 효도 한번 해보겠다는 게 죽을죄는 아닐진대 첫 월급 탄 우리 아들 머리 위로 콘크리트 떨어진다. 다 키워낸 팔다리를 잘라낸다. 석고보드 떨어진다. 부모 얼굴 비춰주던 각막 위를 뒤덮는다.

 

아무것도 하지 마라. 숨마저도 쉬지 마라. 살균제를 쓴다는 게 죽을죄는 아닐진대 멀쩡했던 가습기에 그렁그렁 폐 녹는다. 우리 아기 잠자는 방 모빌 소리 아련한데 딸랑딸랑 잠 깰 시간 울지 않고 고요하다.

 

아무것도 하지 마라. 술도 먹지 말고 춤도 추지 말고 퇴근하자마자 집에 가라. 누워서 죽는 것도 사람이고 앉아서 죽는 것도 사람인데 서서 죽는 것이 사람다운 죽음인가. 이태원에 가지 마라. 이태원역 1번 출구 그 골목에 가지 마라. 코로나에 치인 청춘, 논다는 게 죽을죄는 아닐진대 시퍼렇게 질린 분장, 하얀 시트 코스튬이 찬 바닥에 누워 있다. 내려오는 사람, 올라가는 사람, 인도가 차도보다 더 무서울 줄 누가 알았을까. 차 조심해라 그렇게도 일렀건만 다 키운 내 새끼들 사람에게 깔려 죽을 줄 누가 알았을까. 그 새벽에 붉은 낙엽이 그렇게도 흩날리더니. 그 새벽에 그렇게도 별이 맑더니.

 

이제 아무것도 묻지 마라. 더 나은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해 꼭 이런 아픔들을 겪어야 하는지, 기필코 누군가가 죽어야 했는지, 이러한 물음에 우리 스스로 답할 수 있을 때까지. 그리고 짓눌려 죽어가던 이들, 울며 심폐 소생술을 하던 이들, 그 옆에서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던 이들, 이 처참한 광경들을 웃으며 지켜보던 이들, 이 모든 것이 인간 삶의 원형인가라는 물음에 우리 스스로 답할 수 있을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마라. 동굴 속을 기어 나와 몸을 세운 미어캣처럼, 네 책임은 없다는 듯 두리번거리며 희생양을 찾지 마라. 때로 진실은 가장 빛나지만 주우면 범법자가 되고 마는 땅에 떨어진 다이아몬드 같은 것. 진실은 우리 모두가 그들을 죽게 만들었다는 것.

 

아무것도 하지 마라. 삶은 곧 생동하는 죽음이다. 아무것도 하지 마라. 화장터의 화장(化粧)이다.

아무것도 믿지 마라. 어딜 가나 죽음인 것이다.

조선일보 조은산·'시무 7조' 청원 필자

 

11.03 아니함만 못한 말, 하지 말아야 할 말

아니함만 못한 말이 있다. 차라리 하지 않는 편이 나은(be better left unsaid) 말이 있다. “그 나이에 대단해 보이세요(look great for your age)”도 그중 하나다. 선의로 하는(mean well) 말이지만, 그 나이엔 대개 보기 흉하다는 것처럼 들려 모욕적이고 업신여기는 듯한 인상을 준다(come across as insulting and condescending).

 

/일러스트=최정진

 

“피곤해 보인다(look tired)”는 말도 그렇다. 공감을 나타내려는(try to be sympathetic) 의도와 달리 “왜 그렇게 꼴이 엉망이냐(look like crap)”는 소리로 들린다. “살이 빠졌네요(lose weight)”라는 ‘칭찬(compliment)’도 마찬가지다. “예전엔 뚱뚱했다”고 과거를 소환하는 지적질이나 다름없다.

 

“늘 이렇게 해왔다”라는 말은 무사안일과 비타협적 태도를 자인하는(own up to their easy-going attitude and uncompromising stand) 언사다. 익숙하다는 이유만으로 어느 방법이나 과정을 고수하겠다는(stick to them) 건 고집스럽고 편협하다는(be stubborn and close-minded) 자백이다.

 

“그건 내 잘못이 아니다”라고 하는 건 잘잘못을 떠나 맡은 일에 소극적이고 미숙하다는 소리로 들린다(end up sounding half-hearted and immature). “그건 내 일이 아니다”도 같은 느낌을 풍긴다(give off the same vibe). 직장에서 그런 말을 하면 팀 동료나 구성원임을 부인하고 ‘왕따’를 자처하는(think of themselves as an outcast) 것과 같다. 뒷걸음치며 책임을 회피하려는(back away and avoid blame) 사람이나 할 말이다.

 

“그러게 내가 뭐랬어”는 듣는 사람을 돌아버리게 한다(drive them crazy). 우월함을 거듭 강조하려는 말인데, 어린아이가 동생 놀리는(taunt their younger sibling) 듯한 기억을 불러일으켜(call to mind) 유치하고 옹졸하게 들린다(sound childish and petty). “전에도 내가 말했던 것처럼”이라고 하는 것도 거의 마찬가지로 기분 나쁜(be only slightly less obnoxious) 말이다. 상대방이 자신의 말을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hang on to their every word) 듣지 않은 것에 기분이 상했다고(be offended) 불쾌감을 내비치며 나무라는(find fault with the other side) 듯하다.

 

“못 하겠다” “해보기는 하겠다”라는 건 특히 직장에선 해선 안 될 소리다. 스스로 “그 일을 할 노하우나 의욕, 또는 둘 다 없다(lack either know-how, motivation, or both)”라는 말과 다름없다. 마땅히 해야 할 일에 “못 하겠다” “노력해보겠다”고 하는 건 말이 안 된다.

 

“어리석은 질문(dumb question)입니다만”이나 “외람되지만(with all due respect)”도 아니함만 못하다. 질문을 하든 의견을 개진하든 자신을 폄하할(undermine oneself) 하등의 이유가 없다. “어리석은” “외람”이라고 하는 순간, 듣는 사람들은 존중할 만한 내용이 아니라는(be less than respectful) 느낌을 갖게 돼 곧바로 무시 모드로 들어간다(tune you out).

조선일보 윤희영 에디터

 

11.05 앉은 자리가 꽃자리

3주간 기차로 이동하는 여행을 떠난 적이 있다. 자주 역방향으로 달려가는 좌석에 앉게 되었다. 무엇보다 힘들었던 건 햇빛이 비치는 창가 자리를 배정받을 때였는데 여름 햇빛은 참 고역이었다. 그렇게 음악을 들으며 풍경을 감상하려던 계획은 틀어졌고, 이번 여행은 운 없이 늘 햇빛 쪽 창가에만 앉는다고 생각했다. 커튼을 치자 이내 기분도 어두워졌다. 그러다 며칠 후, 기차가 늘 직선으로만 달리는 게 아니란 걸 깨달았다. 기차는 직선과 곡선 때로는 어두운 터널을 통과했다. 햇빛이 내리꽂던 창가는 어느새 그늘이 되었고, 반대편 창가는 햇빛이 번졌다. 문득 우리 삶도 달리는 기차의 여정과 비슷하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힘든 시간도 세월이 흐르면 어느새 사라진다. 우리를 둘러싼 조건이 늘 변하는 것처럼 삶은 직선보다는 울퉁불퉁한 곡선에 더 가깝다. 여름엔 햇빛이 고역이지만 겨울에는 오히려 고마운 존재다. 내가 앉은 자리에 그늘이 생기자 “음지가 양지 되고 양지가 음지 된다”라는 옛말이 떠올랐다.

 

“옆집 잔디가 더 푸르다”라는 미국 속담이 있다. 공원의 잔디밭도 그렇다. 내가 있는 이곳보다 저 먼 곳이 늘 더 푸르게 보인다. 하지만 가까이 가보면 촘촘히 푸르러 보이는 그곳도 이곳과 다르지 않다는 걸 깨닫는다. 유튜브나 인스타그램을 보면 남들은 다 행복하고 나만 불행한 것처럼 보이지만 알고 보면 그들의 삶도 나와 다르지 않다. SNS는 ‘실제의 내’가 아닌 ‘되고 싶은 나’를 연출해 보여주는 무대일 때도 많기 때문이다. 삶은 간단치 않다. 사람은 때론 일기장에도 거짓말을 적는다.

 

문제는 자신만 불행하다고 믿는 마음이다. 자신이 앉은 자리를 굳이 타인의 것과 비교하지 말자. 구상의 시 ‘꽃자리’에 이런 구절이 있다. “우리는 저마다 스스로의/ 굴레에서 벗어났을 때/ 그제사 세상이 바로 보이고/ 삶의 보람과 기쁨을 맛본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조선일보 백영옥 소설가

 

11.08 ‘진달래꽃’ 100년을 보내며

지금부터 꼭 100년 전인 1922년, 스무 살의 청년 김소월(金素月)은 한 편의 시를 씁니다.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우리다.// 영변의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진달래꽃’)

소월의 명시 나온 지 꼭 100년
다음달 낭송과 노래 공연 무대
명시의 고향엔 북한 핵시설이…

그는 이 시가 100년 동안 한국인에게 널리 애송되며, 한국을 대표하는 시가 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 작품은 1922년 『개벽』 6월호에 ‘개여울’ ‘고적한 날’ ‘제비’ ‘장별리(將別離)’ ‘강촌’ 등과 함께 발표됐습니다. 그러다가 1925년 매문사(賣文社)에서 스승 김억(金億)의 출판비 지원으로 간행한 시집 『진달래꽃』의 표제작으로 실려 있습니다. 김소월은 이 시집 한 권으로 불멸의 시인이 되었습니다. 열세 살 때 평안북도 정주군 갈산면에 남강(南岡) 이승훈(李昇薰)이 세운 오산학교(五山學校)에 입학해 안서(岸曙) 김억으로부터 본격적인 문학 수업을 받고, 열여덟 살 때 『창조』에 ‘낭인의 봄’ 등을 발표해 문단에 데뷔한 소월은 아일랜드 시인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1865∼1939)의 이 시를 혹시 몰랐을까요?

 

‘금빛과 은빛으로 무늬를 놓은/ 하늘의 수놓은 옷감이라든가/ 밤과 낮의 어스름한 저녁 때의/ 푸른 옷감 검은 옷감이 내게 있다면/ 그대의 발밑에 깔아 드리오리다만/ 내 가난하여 가진 것 오직 꿈뿐이라/ 그대 발밑에 내 꿈을 깔았으니/ 사뿐히 밟으소서, 내 꿈 밟고 가시는 이여.’(‘하늘의 옷감’)

 

예이츠의 ‘꿈을 밟고 간다’와 소월의 ‘꽃을 밟고 간다’가 비록 닮긴 하였으나 소월의 정서는 한국인의 오랜 한(恨)의 정서에 맞닿아 있다고 할 것입니다.

 

‘가시리 가시리잇고/ 버리고 가시리잇고/ 날러는 어찌 살라하고/ 버리고 가시리잇고/ 잡사와 두어리 마나는/ 선하면 아니올세라/ 설온 님 보내오나니/ 가시는 듯 도셔 오소서’(‘가시리’)

 

‘진달래꽃’에서 내가 싫어 떠나는 님의 발길에 꽃을 깔아드리고 죽어도 눈물을 흘리지 않겠다는 이별의 정서는, 잡아두고 싶지만 심하면 아니 올듯하여 보내드리니 가시는 듯 다시 와달라는 고려가요 ‘가시리’의 정서에 이어져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한국어의 전통 운율인 7·5조의 리듬을 밟고 있습니다. 그래서 100년 동안 한국인들이 애송해 온 시가 되었겠지요. 소월이 예이츠의 시를 알았느냐 몰랐느냐에 상관없이 ‘진달래꽃’은 한국인의 정서를 가장 잘 담아낸 시라고 하겠습니다. 한국인 귀화 필기시험에 ‘진달래꽃’의 지은이가 누구냐는 문제가 나왔었다고 합니다. 즉 김소월을 모르면 한국인이 아니라는 뜻이지요.

 

민족시인이자 현대 한국 서정시의 원류인 소월은 아내 홍단실과의 사이에 4남 2녀를 얻고 1934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에 뇌일혈로 서른두 살 짧은 생을 마감했습니다. 이후 장녀 구생과 3남 정호를 제외하고는 모두 북한에 남았습니다. 김구생은 한국전쟁 도중 요절했고, 김정호는 인민군으로 남한에 왔다가 포로가 된 뒤 대한민국 국군에 재입대하였습니다.

 

어느 날 미당 서정주 시인이 국회 정문에 나타났습니다. 미당은 국회 경비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한솔에게 서정주가 왔다고 전하게.” 당시 국회의장은 한솔 이효상 시인이었습니다. 경비의 보고를 받은 한솔은 “잘 모셔라”고 지시합니다. 한솔을 만난 미당은 소월 선생의 아들이 남한에 있는데 생계가 어렵다며 취직을 시켜 달라고 당부합니다. 소월의 아들을 면담한 한솔은 당장 취업이 가능한 자리로 채용했다고 합니다.

 

저는 김정호 선생을 뵌 적이 있습니다. 남북 분단 후 북한 공산당의 탄압을 피해 서울로 옮긴 소월의 모교 오산중학교에서 2005년에 열린, 시집 『진달래꽃』 간행 80주년 행사 때였습니다. 사회자가 “지금 이 자리에 김소월 시인의 아드님이 계십니다”라고 해서 참석자들이 깜짝 놀랐었지요. 단상에 오른 김정호 선생은 아버지에 대한 회고담과 함께 김소월 문학관을 건립하는 것이 꿈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 소원을 이루지 못한 채 이듬해인 2006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오는 12월 2일 재능시낭송대회 전국 결선에서 시 낭송과 노래로 구성된 ‘진달래꽃 100년을 보내며’가 공연됩니다. 이 공연에는 소월의 증손녀인 성악가 김상은씨도 참여해 증조부의 시를 노래합니다. 한국인의 영원한 애송시 ‘진달래꽃’의 무대인 영변에는 북한의 핵시설이 들어서 있습니다. 명시의 고향에 평화를 위협하는 핵시설이 들어선 시대의 아이러니를 우리는 보고 있는 것입니다.

중앙일보 유자효 한국시인협회장

 

11.19 가을이 되면

가을이 되면 가을이 제일 좋다고 말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봄이 오면 봄이 가장 좋다고, 여름이 오면 여름을 최고로 좋아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줏대 없다고 볼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겨울이면 눈이 내려서, 여름이면 좋아하는 복숭아를 실컷 먹을 수 있어서 기쁜 사람이고 싶다.

 

김연수의 소설집 ‘이토록 평범한 미래’에서 그가 메리 올리버의 시를 얘기하며 “세상은 경이로워!”라고 말하는 것과 “세상을 품에 안을 때 경이로워!”라는 말이 다르다고 말하는 문장을 발견했다. “’세상을 품에 안을 때 경이롭다’는 말은 경이로움이 내게 달린 문제”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결국 “내가 세상을 안을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인 셈이다.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웠던 몇 년을 보낸 후, 내가 간신히 쓸 수 있었던 건 ‘과거는 변한다’라는 딱 한 문장이었다. 우리는 과거란 이미 지나갔고, 결코 변할 수 없는 고정된 것이라 믿는다. 그러니 이번 생은 망했고, 트라우마 때문에 다시 일어날 수 없을 거라고 절망한다. 하지만 이제 나는 과거가 변할 수 있다는 걸 안다. 되돌아가 고치고 싶은 그 과거는 밝은 쪽으로 미래를 상상하며, 현재를 성실히 살아갈 때 바뀐다. 산 정상에 오르면 나무 가시에 찔리고, 물웅덩이에 빠지고, 기어오르느라 흘린 피와 땀은 다른 의미가 된다.

 

잭 길버트의 시 ‘변론 취지서’에는 “우리는 과감히 기쁨을 추구해야 한다. 쾌락 없이는 살 수 있지만, 기쁨 없이는 안 된다/ 이 세상이라는 무자비한 불구덩이에서 고집스럽게 기쁨을 받아들여야 한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 적확한 시인의 말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건 ‘기쁨’이 아니라 ‘고집스러운 기쁨’이다. 눈이 녹으면 더러워서, 비가 내리면 단풍이 하수구를 막아서, 봄의 꽃가루 알레르기 때문에 이 모든 계절을 싫어한다고 말하는 삶은 어떤 풍경일까. 한 번뿐인 삶을 충만하게 살고 싶다면 우리는 고집스레 기쁨을 찾아내야 한다. 그러니 시인의 말처럼 가을을 가장 좋아한다고 말하자. 그냥 가을이 되자.

조선일보 백영옥의 말과 글

 

11.24 사무사(思無邪)

사무사(思無邪), 흔히 “생각에 그릇됨이 없다” 정도로 번역된다. 그러나 문맥을 감안하면 이 번역은 수정되어야 한다. 이 말은 ‘논어’ 위정(爲政)편에 나오는데 위정편은 주제가 다움[德]이다. 다움은 말과 행동에서 드러난다.

 

이런 문맥에서 사무사(思無邪)란 “말과 행동에 그릇됨이 없으려면 생각에서부터 그릇됨이 없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런 의미의 사무사(思無邪)를 좀 더 상세하게 풀어낸 것이 자한(子罕)편에 나오는 사무(四毋)이다. 이는 공자 자신이 하지 않았던 네 가지를 말한다.

 

“스승님께서는 네 가지를 끊어버리셨다. 억측을 하지 않으셨고 반드시, 결코, 절대 등을 말하지 않으셨으며 자기만 옳다고 고집하지 않으셨고 사사로운 자기를 내세우지 않으셨다.”

 

이렇게 하는 것이 바로 사무사(思無邪)이다.

 

그중 첫 번째가 억측을 하지 않는 것이다. 공자는 어떤 말을 하면 반드시 근거를 제시했다. 요즘 야당의 김의겸 의원이나 장경태 의원이 보여주고 있는 아니면 말고식 폭로가 바로 전형적인 억측이다.

 

공자는 직접 보거나 들은 것이 아닐 때는 반드시 ‘아마도[其]’라는 말을 사용했다. 유감스럽게도 기필(期必)이라는 부정적 행태 또한 김 의원과 장 의원이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기필(期必)이란 자기 말에 절대성을 부여하는 태도를 뜻한다.

 

도대체 이들은 왜 이러는 걸까? 왜 이렇게도 자기만 옳다고 고집을 부리는 것일까? ‘아마도[其]’ 공적 담론보다는 사사로운 자기 이익, 즉 다음 총선 공천에 눈이 멀어 이런 행태를 보이는 것이 아닐까?

 

이런 사람들에게는 사실 이런 비판 또한 아깝다. 자기만 옳다고 고집하고 사사로운 자기를 내세우기에 급급한 사람이 경청(傾聽)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다만 사무사(思無邪)와는 정반대되는 인간 유형을 생생하게 보여주어 교육 목적상 기록해둘 뿐이다.

조선일보 이한우 경제사회연구원 사회문화센터장

 

11.28 "암말기父 매주 찾아봬라" 의사 처방에...아들 "바빠서 그건 좀"

시골에 사는 팔순 노인이 폐암4기 진단을 받았는데 항암치료를 거부했다. 보다 못한 서울 큰아들이 아버지를 억지로 서울대병원으로 모시고 왔다. 환자는 항암치료를 거부했고 아들은 강력히 항암치료를 원했다. 환자와 아들은 진료 내내 실랑이를 벌였다. 이 둘 사이에서 내가 환자 손을 들어주자 아들은 강력히 항의했다.

 

“선생님, 항암치료를 하지 말자고요? 안됩니다. 우리 아버지 항암치료 꼭 해주세요. 이대로 돌아가시게 내버려 둘 수는 없어요.”

 

“남은 기대여명이 6개월 정도 돼요. 항암치료를 하면 4~5개월 더 연장할 수 있지만 무척 힘들어서 견디기 힘들어요. 무엇보다 환자분 본인이 원하지 않으시고요.”

 

“그래도 항암치료를 해주시면 안 될까요? 우리 아버지, 오래오래 사셔야 합니다.”

 

아들과 나의 실랑이가 길어지자 환자 본인이 한마디 했다. “내 나이가 이제 팔십둘이예요. 이 정도면 살 만큼 산 거에요. 때 되면 가야 하는데 이제 때가 된 거예요. 나는 이 정도면 만족해요. 내 친구도 항암치료 받다가 고생만 하다 그냥 가버렸어요. 항암치료 안 할래요.”

 

이쯤 되면 환자 뜻을 따르는 게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아들을 설득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아들에게 다른 질문을 했다. “평소 아버지를 얼마나 자주 찾아뵙나요?” 의외의 질문에 아들은 멋쩍어하며 잠시 쭈뼛거리다가 대답했다. “명절에 찾아뵙고 그 외엔 1년에 두세 번 정도 더 찾아뵙습니다.” 따져보니 많아야 1년에 너댓 번 찾아뵙는 셈이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항암치료 처방이 아닌 다른 처방을 냈다.

 

내가 내린 건 매주 주말 고향에 내려가 아버지를 만나라는 처방이었다. 항암치료를 해서 삶을 1년 더 연장한다고 하면 1년에 5번 볼 아버지를 2년에 10번 보는 거다. 그런데 매주 주말 아버지를 뵈면 항암치료를 하지 않고도 스무 번 넘게 볼 수 있었다. 항암치료 없이도 함께 하는 시간을 획기적으로 늘릴 수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이 어디 있겠는가. 오래 사시며 시간을 늘리기를 원한 아들에게도, 항암치료를 원하지 않은 아버지에게도 모두 윈윈이 되는 처방이라 생각하며 나 혼자 뿌듯했다.

 

하지만 아들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뜻 밖이었다. “그건 좀 어렵겠는데요. 제가 회사 일이 바빠서…. 매주 고향에 내려가는 것은 어렵습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버지가 오래 사셔야 효도도 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항변했던 바로 그 아들이었다. 그런데 바빠서 매주 고향에 내려가긴 어렵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뭐라 대답해야 할지 난감했다.

 

▲이탈리아 작가 폼페오 바토니의 '탕아의 귀환'(1773)의 한 부분.

 

자식들은 바쁘다. 어찌 된 노릇인지 죄다 바쁘다. 자식치고 안 바쁜 자식을 보지 못했다. 바빠도 보통 바쁜 게 아니다. 회사도 다녀야 하고 야근도 해야 하고 돈도 벌어야 하고 아이도 키워야 하고…, 자식들은 너무나 바쁘다. 맞다. 요즘처럼 먹고 살기 힘든 세상에서는 그렇게라도 바쁘게 살아야 근근이 먹고 살 수 있다. 자식들도 사실 살기 힘들다.

 

그런데 문제는 시간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부모의 시간과 자식의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 그것도 많이 다르게 흘러간다. 나의 시간으로는 부모님은 아직 돌아가실 때가 안되었는데, 부모의 시간으로는 이미 때가 되었다.

 

나이든 부모는 이미 기다림을 많이 써서 그렇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하루 24시간 같지만 누구에게나 다르게 흘러간다. 자식에게는 고향 내려가는 길이 3시간 같아도 노부모에게는 3일로 느껴진다. 주말에 자식들이 내려온다고 하면 3일 전부터 좋아하는 음식을 준비하지 않던가. 나에게는 고작 3시간이 지났지만 부모님은 3일만큼 늙어버렸다. 그래서 부모의 시간과 자식의 시간은 세월의 흐름만큼이나 벌어진다. 60대 같았던 부모님은 이미 80대가 넘었다.

 

그 와중에 바쁨은 시간 부족의 문제가 아니라 우선순위의 문제가 된다. 부모에게 자식은 우선순위가 아니었던 적이 없건만 자식에게 부모는 살아온 세월의 흔적만큼 우선순위에서 멀어진다. 물론 정말 어쩔 수 없는 바쁨이 있다. 다른 피치 못한 중요한 일이 많을 수 있다. 그래서 노부모에게 양해를 구하고 죄송하다고 하면 대부분의 부모는 이해해준다. 오히려 바쁜데 뭐하러 오냐고 대답한다. 사실 바쁜데 명절 때 오지 말라는 이야기는 정말 오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니었는데 말이다.

 

잘해드린 건 없는데 자꾸 늙어만 가는 모습을 보면 자식들도 괴롭다. 자식들은 효도도 하고 싶고 바쁜 일을 포기하기도 싫고 모든 것을 다 움켜쥐고 싶다. 효도는 머릿속으로만 맴돌고, 현실은 처리해야 하는 바쁜 일로 골치 아프다. 자식들도 괴로울 것이다. 그래서일까. 어떤 때 내 귀에는 바쁘다는 이야기가 "자식들이 바쁘니 당신은 더 늙지도 말고 아프지도 마시고 지금처럼만 계시라"는 야박한 이야기로 들린다. 이 글을 읽는 지금 이 순간만이라도 이런 야박한 생각은 접고, 부모님의 시간에 맞춰보면 어떨까.

중앙일보 김범석 서울대 암병원 종양내과 전문의

 

11.27 신문을 찾는 아이

▲일러스트=김영석

 

생후 30개월 아들에게 집에서 처음 맡은 ‘일’이 생겼다. 문 밖 신문을 안으로 들여놓는 일. 어린이집 가려고 집을 나서면 신문이 있는데 그걸 안쪽으로 옮기는 역사적 임무다. 처음엔 내가 하는 모습을 보고 따라 한 것뿐인데 “민우야, 네가 해봐”라고 한 이후로는 자기 몫인 줄 안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두툼한 신문을 집어 드는 모습이 귀여워 죽겠다. “아이고 잘한다!” 칭찬해주면 배시시 웃는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 녀석이 보름 전 사고를 당했다. 밤새 글 쓰고, 새벽에 편의점에 나가 오후까지 일하고 돌아와 깜빡 잠이 든 때였다.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 민우가….” 아내 목소리에는 비명과 흐느낌이 절반 섞여 있었다. 옷도 걸치지 않고 뛰어나갔더니 사람들이 웅성웅성 모여있었고 아들은 축 처져 엄마에게 안겨있었다. 아파트 단지 안에서 트럭에 치인 것이다. 곧장 경찰이 달려왔다. 아이는 구급차에 실려 응급실에 갔다.

 

그 뒤로 내가 무슨 정신으로 그 일들을 치렀는지 모르겠다. 병원에 가는 내내 아이는 안겨 잠만 잤고, 도착해 일어서보라 했더니 울며 쓰러졌다. 바지를 벗겨보고야 까무러치는 줄 알았다. 허벅지 쪽으로 뭔가 밟고 지나간 흔적이 시뻘건 것이다. 엑스레이와 뇌 CT를 찍고, 결과가 나오길 기다리는 사이 나는 수천 번도 더 나 자신을 책망했다. 어린이집에서 아이를 데려오는 임무는 언제나 내 몫이었다. 한 달에 한 번이나 아내가 데려오는데 하필 그때 그런 일이 벌어지다니. 오후 4시 알람에 벌떡 일어나지 못한 나 자신이 원망스러웠고, 절반쯤 깨어났으면서도 ‘아내가 데려오겠지’ 하면서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간 나 자신을 때려주고 싶었다.

 

인과관계를 따지며 모든 걸 원망하고 후회하기 시작했다. 왜 밤새 글을 쓴 것일까. 왜 하필 그때 그 직원은 코로나19에 걸려 내가 새벽 근무를 대신한 것일까. 새벽 근무만 아니었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1년 전 이 아파트로 이사 올 때, 단지 안을 돌아다니는 택배 트럭을 보고 위험하다는 생각은 했다. 그때 누가 “그래도 여기가 제일 낫다” 주장했더라? 아내에게 전화가 왔다. 모든 것이 자기 책임이라며 다른 아이에게 잠깐 눈길을 준 사이 트럭이 덮쳤다고 흐느꼈다. “아냐. 당신 잘못 아냐. 누구 잘못도 아니니까, 일단 아이가 무사하도록 하늘에 기도만 하자.” 다행히 의사가 ‘기적’이라 표현할 정도로 아이는 골절이 없었고 심한 찰과상만 입었다. “트럭에 깔렸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네요. 하늘이 도운 겁니다.”

 

하루 지나, 경찰관 입회 아래 아파트 CCTV를 확인했다. 경찰관이 눈을 질끈 감을 정도로 사고 장면은 끔찍했다. 택배 트럭은 곡선 보행로에서 전혀 속도를 줄이지 않고 달렸고, 아이를 치고 나서 또 전진했다. 살아있다는 사실이 정말 기적 같은 일이었다. 하늘에 감사하는 한편으로, 이젠 택배 기사가 더욱 원망스러웠다. 아무리 보험사에 일임했다지만 그는 송구하다는 문자 메시지 하나 없었다. 사고 당일 구급차를 기다리던 동안에도 어딘가로 전화해 자기 심장이 벌렁거리고 손이 떨린다는 이야기만 되풀이했다. 세 아이 엄마라더니, 과연 맞나?

 

사람에겐 저마다 사연이 있을 것이고, 그것을 최대한 이해하려 노력하자 말해 왔건만, 그 일이 막상 내 일이 되었을 때는 ‘노력’조차 되지 않더라. ‘~했더라면’이라는 가정법이 자꾸 머리를 맴돌고, ‘~만 아니었으면’ 하는 통회(痛悔)가 가슴을 꽉 조여온다. 내 뺨을 때리고 싶고, 달려가 뺨을 때려주고 싶은 사람이 생긴다. 꾹꾹 눌러 울음을 참으며 ‘이럴 땐 어떡해야 하지?’만 생각하기로 했다. 내가 이성을 잃으면 모두가 흔들린다.

 

경과를 말하자면 나흘쯤 지나 아이는 절룩거리며 걷기 시작했다. 의사가 “아이들의 회복력은 역시 경이롭습니다” 말할 정도로 천진난만한 예전 모습으로 돌아왔다. 열흘 지나니 밖에 나갈 수 있을 정도가 되었는데, 그렇게 자동차를 좋아해 벤치에 앉아 한없이 자동차만 구경하던 녀석이 이젠 거리를 달리는 자동차를 보며 표정이 굳는다. 생후 30개월짜리 눈망울에 비친 슬픔을 읽으며 억장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주저앉아 울고만 싶었다. 왜 우리에게 이런 일이 닥친 것일까. 다음 날 천천히 산책했다. 이번엔 사고가 일어난 놀이터 근처로 가려 하지 않는다. 아이도 분명히 기억하고 있구나. 말이 늦어 아직 의사소통조차 제대로 되지 않는 녀석이 속으로 앓고 있을 고통을 생각하니 다시 울고만 싶다.

 

사고가 난 지 보름이 지났다. 병원에 가려 현관문을 열고 나섰더니 아이가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신문, 신문을 찾는 것이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며 아내랑 나는 말없이 그냥 흐느꼈다. 살아있게 해주심에 감사했다. 산 자는 살아갈 것이고, 우리는 이 아파트를 떠날 것이다. 비슷한 처지를 겪는, 겪은, 많은 이의 심정이 이제야 조금, 아주 조금 이해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새벽에 읽은 신문이라도 이젠 문 앞에 놓아야겠다.

조선일보 봉달호 '힘들 땐 참치 마요' 저자

 

12.15 망치질에도 철학이 있다

▲‘해머링 맨(Hammering Man)’은 일하는 사람의 상징이다. /박돈규 기자

 

그는 오늘도 허공에 망치질을 한다. ‘해머링 맨(Hammering Man)’은 서울 광화문 근처에 있는 22m 높이의 움직이는 조각품이다. 요즘엔 산타클로스 모자와 양말을 착용하고 있어 멀리서도 눈길을 붙잡는다. 해머링 맨이 망치를 머리 위로 올렸다가 내리기까지 걸리는 시간을 재보니 55초다. 이 동작을 하루 10시간씩 반복한다. 설치된 지 올해로 20년. 그 세월은 약 500만번의 망치질과 같다.

 

해머링 맨은 구두 수선공부터 과학자, 광부, 회사원, 예술가까지 ‘일하는 사람’의 상징이다. 우리는 어떤 장소에서 각자의 망치를 들고 일한다. 몸을 움직이거나 머리를 쓰고 적당한 대가를 받는다. 그런데 이상하다. 해머링 맨이 어느 날에는 활기차 보이고 어느 날엔 지쳐 보인다. 아마도 일터에서 느낀 감정, 일을 바라보는 마음 상태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일 앞에서 때로는 숙연해지고 때론 서럽다.

 

오래 일하는 사람들은 그래서 연구 대상이다. 이순재, 신구, 박정자, 손숙 등 ‘대학로 방탄노년단’은 데뷔한 지 60년이 넘었다. 더 이상 경제적 목적으로 일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은 관객이 안심하고 선택하게 하는 이름이고,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는 저울 같은 캐릭터 분석이 강점이다. ‘노병(老兵)은 죽지 않는다’를 흥행으로 증명하고 있다.

 

현역 최고령 배우 이순재는 살아 있는 해머링 맨이다. 1956년부터 연기라는 망치질을 멈추지 않았다. 이번에는 연극 ‘갈매기’ 연출에 도전하면서 배우로도 출연한다. 진력나지 않을까? 왜 아직도 연기를 하는지 물어본 적이 있다. “솔직히 말하면 이것밖에 할 게 없으니까 하는 거예요. 그리고 아직도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 있으니까 합니다.” 단순하고 명쾌한 그 대답이 가슴을 쿵 쳤다.

 

배우는 몸 전체가 망치다. 연기란 자기 몸뚱이를 가지고 자기 능력껏 표현하는 일이다. 모든 것을 다 드러내고 평가받는 직종. 눈치 보지 말고 두 발 다 담가야 한다. 그러나 히트작을 내고 인기를 얻을 땐 조심해야 한다. 그 이미지는 감옥이라 갇히면 끝장이다. 이순재는 성공한 캐릭터인 ‘대발이 아버지’를 5~6년 더 우려먹을 수 있었지만 끝나자마자 버렸다. 백지(白紙)에서 다시 시작했다.

 

망치질에 마일리지가 있다면 백세 철학자 김형석 교수는 VVIP다. 1920년생인데 여전히 강연을 하고 책을 쓴다. 김 교수는 “여든 살이 될 때 좀 쉬어 봤는데 노는 게 더 힘들더라”며 이렇게 말했다. “내게는 일이 인생이에요. 남들은 늙어서도 그렇게 바쁜데 행복하냐고 묻습니다. 그들이 생각 못 하는 행복이 뭔고 하니, 내 일 덕분에 무엇인가 받아들인 타인이 행복해하는 걸 보게 됩니다. 그게 내 행복이에요.”

 

오래 일하면서 행복한 비결이었다. 좋아하는 일을 하며 생활이 되고 남에게 도움이 된다면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사람은 크게 세 부류라고 이순재는 말했다. 꼭 있어야 할 사람, 있으나 마나 한 사람, 있어서는 안 되는 사람. 한국 사회에 꼭 있어야 할 사람이 되겠다는 생각이 지금의 그를 만들었다. 할 수 있는 게 연기뿐인데 아직도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 있기에 오늘도 연습실로 간다.

 

일하기 위해 사는 게 아니라 살기 위해 일하는 것이다. 내 쓸모만이 아니고 타인에게 도움이 되기 때문에 일한다고 관점을 바꾸면 출근길이 즐거울 수 있다. 구순이 코앞인 현역 배우와 백세 철학자가 말하는 ‘망치질의 철학’은 개인주의가 팽배하고 환승(갈아타기)이 각광받는 시대라서 더 웅숭깊다. 필요한 자리에서 묵묵히 일하며 이 사회를 지탱하는 해머링 맨들을 향한 응원가로 들렸다.

조선일보 박돈규 기자

 

12.24 “맛있게 드세요”라는 아름다운 주문

한국에서 산 지 1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어색한 것이 많다. 그중 하나가 음식점에서 식사를 마치고 계산할 때 직원한테 “맛있게 드셨어요?”라는 질문을 받는 것이다. 실제로 맛있었다면 아무 문제 없다. 그냥 “네”라고 대답하면 되니까. 곤란한 것은 아쉽게도 입맛에 안 맞았을 경우다. “아니요”라고, 나는 도저히 못 한단 말이다!

 

그 가게의 발전을 기원한다면 “아니요” 하는 것이 더 친절할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나의 미각에 절대적인 자신감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고, 눈앞 직원을 실망시키는 것은 나에게도 기쁜 일이 아니다. 그래서 ‘본심이 아닌데…’라는 마음속 응어리를 안은 채 “아, 네…”라고 묘하게 대답하게 되는데, 그런데 조금이라도 망설이면 상대방이 ‘혹시 맛이 없었나?’ 하고 의심할 것 같아서 요새는 계산할 때 “맛있게~” 소리가 들리는 순간 생각을 잠시 멈추고 기계처럼 “네!”라고 대답한다. 반응이 너무 빨라서 오히려 직원들이 수상하게 여길지도 모르겠다.

그러므로 우리 커피점에서는 손님이 계산할 때(우리는 후불제입니다) “맛있게 드셨어요?”라고는 절대로 묻지 않는다. 나는 맛있게 만들려고 노력하지만 사람 취향은 제각각이다. 손님이 애매한 얼굴로 “아, 네…” 하거나, 질문이 끝나지 않았는데도 무표정한 얼굴로 “네!”라고 외치거나 그런 서로가 슬픈 장면을 마주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한편 손님 중에는 묻지 않았는데도 “정말 맛있게 먹었습니다~”라고 그냥 인사말 같지 않은 말을 해주는 사람들이 있다. 말 그대로 맛있게 드셨다면 음식점으로서는 더 기쁠 수 없다. 그런데 여기서도 곤란한 일이 생긴다. “맛있게 먹었습니다” 하면서 케이크와 음료를 많이, 때로는 절반 이상 남기고 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도대체 본심은 무엇일까? 덧붙여서 일본에도 누군가에게 선물을 줄 때 “하찮은 것입니다만(받아주세요)” 하며 속마음과 다른 말을 하는 풍습이 있는데 (정말 하찮은 것이라면 주지 말아야 한다) 일본인인 나도 이것은 참 이상하다고 느낀다.

 

또 생각해보니 음식점에 가서 듣는 “맛있게 드세요”라는 말도 좀 불가사의하다. 요리가 나온 그 시점에는 이미 먹을 것은 완성된 상태고, 내가 맛있게 먹느냐 맛없게 먹느냐는 결국 요리사가 맛있는 음식을 만들었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다. (오히려 “맛있게 만들었습니다!”라고 당당하게 말해준다면 시원하겠다.) 아니면 콩국수에 손님이 직접 소금을 적당량 뿌리는 것처럼 각자 노력해서 최대한 맛있게 먹으라는 뜻일까? (솔직히 콩국수는 처음부터 미리 요리사가 생각하는 적당량 소금이 들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내가 외국인이기 때문일까?)

 

그러나 이제 내가 음식점을 하는 처지가 되고, 흉내 내서 “맛있게 드세요” 하게 되면서 비로소 그 말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손님에게 커피를 내면서 말하는 “맛있게 드세요”는 내가 열심히 내린 커피에 살짝 곁들이는 기도나 소원 같은 것이다. 손님에게 꼭 맛있게 먹으라고 강요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그 말을 들은 사람도 맛있게 먹어야 한다고 긴장하면서 먹을 필요는 전혀 없고, 각자의 방법으로 마음 편하게 먹으면 된다.

 

커피와 요리가 더 맛있어지는 자그마한 주문(呪文) “맛있게 드세요”는 입에 올리는 것도 귀에 들리는 것도 즐겁다. 그 아름다운 말에는 크리스마스 캐럴 같은 기분 좋고 따뜻한 멜로디가 붙어 있는 것 같다.

조선일보 시미즈 히로유키 아메노히커피점 운영

 

12.29 내 집으로의 귀환

그 겨울, 살기 위해 국밥을 끓이던 아버지… 밤늦게야 오시던 어머니
이제 아내의 밥이 더 맛있어 진 건 아내도 어머니가 되었기 때문일까

결혼이 곧 최고의 행복은 아니겠지만, 그 나름의 가치와 삶의 영위라는 기쁨은 분명 존재하기 마련이다. 늦은 퇴근을 마치고 현관 앞에 섰을 때, 내 부재의 틈새로 흘러나오는 그리운 이들의 목소리를 듣게 되는 것. 그리고 문을 열었을 때, 그 조그만 머리를 대롱거리며 쏟아져 나오는 어린 것들을 품에 안는 것. 그러한 일상 속 작은 행복이 나의 귀환을 인도하고 있던 것이다. 그리하여 안정감에 젖어 든 나는 희망을 안고, 겨우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 가 잠을 청할 수 있던 것이다.

 

그러나 가끔, 아주 가끔은―반복되는 일상 속의 이 모든 것이 버겁게만 느껴지는 출근길 아침이거나, 그렇게 나고 살다 죽는 게 곧 인생이냐는 실존적 허무에 휩싸이게 된 어느 무력한 날의 오후라든가, 썰물이 휩쓸고 간 바다처럼 황량해진 급여 계좌를 바라보며 헛웃음을 짓고 마는 매월 25일의 빈곤한 저녁이라든가 그런 날에는 꼭 한번―왠지 모를 고독과 삶에 대한 중압감에 빠져들게 되어 나는 다시 내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고 마는 것이다. 이제는 사진 속에만 존재하게 된 그 낡고 좁은 벽돌집, 생계 수단이었던 조촐한 식당, 그리고 그 안의 삶에서 각자 기쁨과 슬픔을 간직하게 된 네 식구의 아련했던 겨울을 말이다.

 

 

나는 그려 넣고 있었다. 모든 게 불편하기만 했던 그러나 모든 게 가능하기도 했던 가난의 백지 위에, 햇살로 가득했던 작은 마당과 그 위로 빛나고 있던 모든 것을. 살기 위해 온종일 국밥을 끓여야 했던 아버지의 땀 구슬, 거인의 한숨처럼 쏟아지는 입김과 흩어지던 당신의 꿈. 크게 다투시는 날에, 어머니의 눈 밑으로 돋아나던 맑은 고드름과 작고 어린 나의 소망까지도.

 

그리고 그날 밤에는 소리 없이 내린 눈이 마침내 온 세상을 하얗게 뒤덮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밤늦도록 오지 않는 어머니를 찾아 마당을 가로질러 달려 나갔던 것이다. 가게 일을 모두 마치고 겨우 집에 올 수 있었던 어머니는 그 길에서 만난 나를 꼬옥 안아 주었던 것이다. 아들, 하고 어머니가 말했을 때, 심장으로 전해지는 또 다른 심장의 기쁨과 슬픔의 말들을 나는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우연이었을까. 다시 오른 퇴근길에서, 이러한 생각에 젖어 멍하니 앞차의 미등만 바라보던 내게 아내의 전화가 걸려온 것은. 깜빡 잊었다는 투의 그녀가 ‘어머님이 무말랭이 담그셨나 봐. 아이들 주시려고 장조림도 하셨다는데, 오는 길에 들러서 받아 와요’라고 말했던 것은. 그리하여 나는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원래 내가 있던 곳으로.

 

다시 눈이 내리고 있다. 세상 모든 풍경을 지워낼 것처럼 쏟아지는 눈은 시간마저 거꾸로 되돌리는 듯하다. 나는 다시 어머니에게 달려가려 한다. 그 길 위에는 국솥을 젓고 있는 아버지도 있을 것이다. 내 나이의 아버지가 나를 보며 이렇게 말하겠지. ‘먹고산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이더냐. 가라. 넌 아직 멀었으니.’ 나는 아버지에게 술을 줄이라는 당부만을 남겨놓겠다. 이제 저 모퉁이를 돌면 헐거워진 경첩의 삐걱대는 문이 나올 것이다. 저 문 너머에서 어머니가 환히 웃으며 서 있을 것이다. 문이 열린다. 세월의 눈이 내려앉은 어머니의 머리칼이 새하얗다.

 

아들…. 이제 온 거여…? 밥 줘…? 그려….

 

그러나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겨울의 기억이 선명해지는 만큼, 내가 있어야 할 곳에서 나를 기다리는 이들의 모습 또한 선명해졌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잖니. 어머니가 식사를 마친 아들의 등을 애써 밀쳐낸다. 작은 반찬통이 손에 들렸다. 무말랭이는 아내가, 장조림은 아이들이 좋아할 것이다. 이제야 들리는 듯하다. 그 겨울의 어머니는 그래도 우리 살자고 말하고 있었다. 이제야 알 것 같다. 아버지는 국솥과 싸우는 게 아니라 세상과 싸우고 있었음을. 그래, 내 생의 전초기지는 삶의 후방이 아닌 전방에 있다.

 

그렇게 나는 다시 귀환하였다. 첫째 녀석은 어머니의 장조림이 맛있다고 난리다. 둘째 딸아이는 ‘맛이가 엄따’며 퉤퉤 뱉고 있다. 무말랭이를 씹던 아내의 눈이 커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나는 아내에게―어머니 집에 다녀왔다고, 어머니가 차려준 밥을 먹고 왔다고, 그러나 이제는 당신이 해준 밥이 더 입맛에 맞게 되었는데, 그것은 당신 또한 누군가의 어머니가 되었기 때문이겠지, 라는 마음속의 어리숙한 말들을―내 가슴과 어깨 위로 뛰어오르는 아이들을 안고 달래려는 바람에 차마 꺼내놓지도 못했던 것이다.

 

다시 눈이 올까? 나는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창가에 비친 내 머리에도 어느덧 새치가 듬성듬성하다.

조선일보 조은산·'시무 7조' 청원 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