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이탈주민(탈북민) 이야기18/ 2022. 10.01 약도 하나 들고… 사랑 찾아 사선 넘었다 - 12.12 文정부 때 눈치 보던 탈북민들... 500명 하나원 친정집 나들이
북한 이탈주민(탈북민) 이야기18/ 2022
◆10.01 약도 하나 들고… 사랑 찾아 사선 넘었다
우즈베키스탄 北식당 여직원 5명 연쇄 탈북
지난 5월 탈북 물꼬 튼 여직원은 현지 한국교민 사귀며 귀순 결심
애인이 한국대사관 약도 그려줘… 남은 여직원 4명도 줄지어 귀순
北보위부 조사나오자, 여직원들 “극형 받을라” 연쇄탈북

▲한국대사관 가는 길은… - 우즈베키스탄 수도 타슈겐트의 북한 식당 ‘내고향’ 종업원 A씨가 현지 한국 교민 B씨로부터 전달받은 약도(왼쪽 작은 사진)를 바탕으로 만든 일러스트. 약도에 표시된 ‘옛날내고향’은 2021년 식당을 옮기기 전 식당 위치를 의미한다.
중앙아시아 우즈베키스탄 수도 타슈켄트의 북한 식당 여종업원 5명 전원이 지난 5월부터 4개월간 3차례에 걸쳐 식당을 탈출해 한국으로 들어온 것으로 30일 알려졌다. 이들은 모두 20대 초반 MZ 세대(1980~2000년대 출생)인 것으로 파악됐다. 이번 연쇄 탈북의 물꼬를 튼 여종업원 A씨는 현지 한국인과 이성 교제를 하다 탈북 결심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가 먼저 탈북하자 나머지 4명도 뒤따라 귀순길에 올랐다고 한다. 해외 북한 식당 직원들의 집단 탈북은 2016년 4월 중국 닝보의 ‘류경식당’ 탈출 이후 6년여 만이다. 지난 5년간 코로나 확산과 문재인 정부의 북한 심기 살피기, 탈북 어민 강제 북송 사건 등으로 탈북민이 급감하는 가운데 집단 탈북 사건이 다시 발생한 것이다.
우즈베키스탄 현지 소식통과 정보 당국 등에 따르면, 타슈켄트 시내에 있는 북한 식당 ‘내고향’ 종업원 5명은 올해 5월 1명, 6월 1명, 8월 3명 등 3차례에 걸쳐 모두 탈북했다. 이들은 현지 한국 대사관에 찾아가 귀순 의사를 밝혔던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 식당 ‘내고향’은 지난 2019년 9월쯤 문을 열었다. 현지인뿐 아니라 한국 교민과 여행객도 자주 찾아가는 곳이었다고 한다. 국내 유명 유튜버들도 이 식당을 찾아 소개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들 종업원 모두가 탈북해 한국에 온 것이다. 현재 이 식당은 폐업 상태인 것으로 알려졌다.

▲우즈베크 北식당서 일하던 여직원 -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의 북한 식당 ‘내고향’ 한 여종업원이 과거 식당에서 일하던 모습. /현지 소식통 제공
이번 탈북 행렬은 종업원 A씨가 지난 5월 처음으로 귀순하며 연쇄적으로 일어났다고 한다. 20대 초반인 A씨는 현지 한국 교민 B씨와 상당 기간 이성 교제를 했으며, 이 과정에서 탈북을 결심한 것으로 알려졌다. B씨는 늦깎이 대학생으로 타슈켄트에 오래 거주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현지 소식통은 이날 본지 통화에서 “두 사람이 연애편지를 주고받는 등 진지하게 교제해온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A씨가 탈북을 결심하자 B씨가 A씨가 일하는 식당에서 한국 대사관으로 가는 약도를 그린 편지를 전해주는 등 적극적으로 도움을 줬다”고 말했다. 이들의 탈북 소식은 손님이 많던 북한 식당 ‘내고향’이 돌연 폐업하면서 현지 교민 사회에 퍼진 것으로 알려졌다.
본지가 입수한 편지를 보면, 한국 교민 B씨는 A씨에게 “오빠는 우리 OO가 자유로운 곳에서 예쁘게 최고의 여자로 생활했으면 좋겠다” “떳떳한 대한민국의 한 여자로 만들어서 남의 시선·눈총 받지 않고 너와 손잡고 걸으며 맛있는 음식도 먹으며 거리를 활보하고 싶다” “사랑한다”고 썼다. 그는 또 “고향에 가서 평생 어려움과 감시·통제 속에서 사는 것보단 한국 생활은 기본만 살아도 자유와 인권, 사람의 권리, 모든 것이 보장되는 사회야. 네가 조금만 노력한다면 얼마든지 자유롭게 살 수 있단다”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B씨는 한국 정착이 쉽진 않을 것이라는 점을 언급했다. 그는 “처음부터 한국 생활이 파라다이스처럼 쉽진 않겠지만, 조금 힘든 시기만 지나면 적응되고 정말 잘 왔다는 생각이 들 것”이라고 했다. 또 “소량의 돈을 보낼 테니 자주 신는 신발 칼창 아래 양쪽에 분산해서 넣어 놓아라” “대사관에 도착하면 텔레그램 깔아서 나에게 연락해라” 같은 설명도 했다. 그는 컴퓨터로 작성해 출력한 A4 용지 2장 분량의 편지에 이 같은 내용을 담고 편지 하단 공백에는 볼펜으로 대사관 약도를 직접 그렸다. 편지 글에는 띄어쓰기와 맞춤법에 맞지 않는 부분이 여럿 있었다.

▲탈북 여직원들이 일했던 식당 '내고향' -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의 북한 식당 '내고향'의 모습. 이 식당의 20대 초반 여종업원 5명은 지난 5월부터 3차례에 걸쳐 탈출해 한국으로 들어온 것으로 30일 알려졌다. 해외 북한 식당 직원들의 집단 탈북은 2016년 4월 중국 '류경 식당' 사건 이후 6년여 만이다. /유튜브 우즈베키스탄 TV
이후 A씨는 지난 5월 몰래 식당을 빠져나와 한국 대사관을 찾아가 귀순 의사를 밝혔다고 한다. 그 한 달 뒤인 6월 다른 종업원 1명도 같은 방법으로 탈북한 데 이어 지난 8월에는 나머지 직원 3명이 같이 귀순길에 올랐다. 현지 교민에 따르면, A씨에 이어 다른 종업원 1명이 ‘실종’됐을 때 북한 보위부가 급파돼 조사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남은 여종업원 3명은 강제 귀국 조치를 당한 뒤 극형에 처해질 수 있다는 두려움을 느껴 탈북을 결심했다고 한다. 정보 당국에 따르면, 이들 5명 모두 무사히 입국해 합동 조사를 받고 안전하게 체류 중이라고 한다.
이번 집단 탈북 사건은 지난 5년간 탈북자 수가 급감하는 가운데 발생해 주목된다. 통일부에 따르면, 입국 탈북민 수는 2012년 1502명을 시작으로 2013년부터 2019년까지 1000∼1500명 선을 유지했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 들어 ‘김정은 대변인’이란 얘기가 돌고 코로나 사태로 북중 국경이 봉쇄되면서 탈북자 수는 급감했다. 특히 2019년 북한 어민 2명이 탈북해 한국으로 왔지만 강제 북송된 사건이 북한 내부에 알려지면서 귀순 발길은 더 줄었다. 2020년 229명이었던 입국 탈북자 수는 지난해 63명으로 떨어졌다.

대북 소식통은 “코로나 위기가 끝나면 북한 MZ 세대의 탈북 행렬이 늘어날 수 있다”고 했다. 통일부 자료에 따르면, 2012년 김정은 집권 이후 10년간 탈북한 1만701명 중 20대가 3194명(30%)으로 가장 큰 비율을 차지했다. 30대도 24%에 달했다. 이른바 MZ 세대가 전체 탈북자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것이다. 지난 2019년 강제 북송된 탈북 어민 2명도 90년대생 MZ 세대였다. 정보 당국 관계자는 “북한 MZ 세대는 김씨 정권에 맹목적인 충성심을 보이는 기성세대와 달리 충성에 대한 보상을 바라는 심리가 강하다”면서 “북한이 MZ 세대 챙기기를 위해 정책 변화를 주고 있지만, 식량 부족 등 경제 악화로 MZ 민심 잡기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했다.
조선일보 노석조 기자
◆10.04 '김정일 유서' 입수한 탈북 박사…왜 文정부서 간첩몰이 당했나
남북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남·남 갈등'도 심각한 한반도에서 북한 관련 정보를 캐거나 대북 공작 일선에 투입되는 일은 생명을 내놓아야 할 정도로 위험하다. 북한의 온갖 협박에도 꿋꿋하게 버텼으나 문재인 정부 시절 간첩으로 내몰려 엄청난 고초를 겪은 두 사람이 있다. 탈북 지식인 이윤걸(54) 북한전략정보서비스센터 대표와 베테랑 대북공작관 출신 정규필(58) 예비역 육군 대령(호림안보협의회 회장)이다. 이들은 이구동성으로 "문 정권 시절 국가정보원과 검찰의 황당한 '간첩 몰이'의 진상을 규명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최근 두 사람을 만나 그간의 사정을 들어봤다.
김일성 장수 연구하다 2005년 탈북
이 대표는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난 데다 조부모 형제가 일찍이 월남해 북한에 남은 가족은 최하층민으로 살았다. 기적적으로 북한의 3대 명문 중 하나인 평양이과대학을 졸업하고 김일성 주석을 위한 '만수무강연구소' 소속인 청암산연구소(호위사령부 관할)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다 2005년 "잘못된 북한 체제를 바꾸겠다"며 탈북했다.
▲이윤걸 북한전략정보서비스센터 대표가 2012년 초 입수한 '김정일 유언'을 담은 책을 든 모습. 장세정 기자
충남대에서 생명공학 박사 학위를 받은 이 대표는 통일부·국가정보원·국군정보사령부(정보사) 등 주요 대북 기관들과 협력하며 알토란같은 북한 내부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 보고서를 제공해왔다. 그가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은 계기는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2011년 12월) 불과 넉 달 후인 2012년 4월 '김정일 유서'를 입수해 공개한 때였다. 그해 11월 『김정일의 유서와 김정은의 미래』를 출간하면서 2013년 12월에 터진 장성택(김정은의 고모부) 실각을 예견해 대북 정보 입수 능력을 입증했다. 특히 이 대표가 북한 내부 정보를 근거로 "핵·미사일·생화학무기는 '김씨 가문의 보물'이어서 정권이 망하기 전에는 내놓을 리가 없다"고 역설하자 우파는 환호했지만, 좌파는 '탈북자=배신자' 프레임을 걸어 공격했다.
아니나 다를까. 2018년 6·13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이 압승한 바로 다음 날 오전 8시 검찰수사관들이 압수수색영장을 들고 집과 사무실에 들이닥쳤다. 6월 21일 이 대표는 유엔 대북 제재를 어기고 북한과 중국이 단둥 항구에서 원유를 밀거래하는 북한 청류1호 사진을 입수해 폭로했고, 공교롭게도 7월 16일 군사기밀보호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
국군정보사령부 전·현직 간부의 군사기밀 빼돌리기를 수사하던 국정원과 검찰이 이 대표를 엮으면서 졸지에 대북 정보를 일본에 넘긴 파렴치범으로 몰렸다. 이 대표는 "대한민국을 위해 일했는데 분노가 치밀었다. 목숨을 던져 항거할 생각도 했다"며 당시 심경을 회고했다. 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아 2019년 1월 31일 1심에서 징역 2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김정은 위원장이 2012년 2월 22일 인민보안부 산하 '경기용 총탄 공장'을 현지지도하던 중 턱을 치켜 세운 고모부 장성택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고 있다. 장성택은 이듬해 12월 총살당했다. 사진 이윤걸 독점 입수
풀려난 이 대표는 치밀한 반박 자료를 찾아내 그해 7월 26일 서울고법 형사1부(정준영 부장판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2심 재판부는 "일본에 넘겼다는 자료는 이 대표가 평소에 취급했던 북한 정보에 불과하다"고 판단했다. 검찰이 상고했지만, 그해 10월 31일 대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됐다.
이 대표에게 왜 이런 황당한 일이 생겼을까. "북한 내부 기밀을 계속 빼 오니 북측이 손봐주라고 지목한 것 같다. 문 정권이 2018년 남북 대화와 북미 대화를 추진하던 무렵 내가 '김정일 유서'와 김정일이 직접 쓴 '회고록' 등 북한 정보를 근거로 김정은에겐 비핵화 의지가 없어서 핵 문제는 절대 해결 안 된다고 계속 주장했다. 주사파 운동권 출신들이 주도한 문 정권에 단단히 밉보였다."
그는 "누가 무리한 구속을 주도했는지 짐작하고 있다. 자유와 통일을 위해 올바른 일을 해온 나를 괴롭힌 사람들이 범법자이고 죄인이다. 대낮에 대한민국 헌법을 유린한 자들이 벌 받아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 대표는 "김정은이 최근 핵 선제 사용 조건을 법제화했다. 문 정권은 북한의 핵·미사일 강화에 시간을 벌어줬다"고 비판했다. 이어 "북한 정권이 무너지고 통일되면 주사파는 자신들의 결탁과 내통 사실이 드러나는 것을 제일 두려워한다"면서 "문 정권의 잘못을 반드시 바로잡아야 한다"고 촉구했다.
▲26년간 대북공작관으로 맹활약한 정규필 예비역 대령이 평양 시내 전경 그림 앞에 서 있다. 장세정 기자
북·중 국경 흑색요원, 굶으며 1주일 버텨
'최고의 대북 첩보 장교'로 손꼽혔던 정규필 전 대령은 경북 포항이 고향이다. 육사 42기로 임관한 뒤 2019년 대령으로 전역할 때까지 37년간 현역으로 복무했다. 정보 병과 출신으로 1991년 대위 시절 인간정보(HUMINT)를 담당하는 북파공작부대(HID) 팀장을 맡은 인연으로 2017년까지 26년간 국방부와 합참 산하 정보본부, 국군정보사령부 소속 대북공작관으로 국내외 험지에서 맹활약했다.
처자식을 떠나 혈혈단신으로 북·중·러 국경지대에서 '흑색 공작'을 진행하면서 풍찬노숙을 마다치 않았고, 중국에서만 14년간 주중대사관 무관 등으로도 활동했다. 특히 2010년 북한의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 도발 이후 대북 핫라인 구축을 위해 중국에 급파됐다.
탄핵으로 2017년 5월 문재인 정부가 출범하자 중국에서 귀국한 그는 정년을 1년 6개월 가량 앞둔 2019년 3월 말 전역했다. "고교 졸업 이후 처음으로 자연인이 됐으니 자유를 맘껏 누리겠다"는 기대에 부풀었다. 하지만 5월 14일 국정원 요원 21명이 28평 아파트에 몰려와 22시간 동안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들 정도로 압수수색을 강행하는 바람에 하루아침에 군사기밀보호법 위반(유출) 혐의를 받는 간첩으로 몰렸다. 현역 시절 안중근 의사의 '위국헌신 군인본분'을 신념으로 받들며 국가를 위해 일한다는 사명감과 명예심으로 살아왔던 그의 인생이 180도 뒤집히는 순간이었다.
▲2009년 8월 21일 당시 임태희 한나라당 정책위의장이 김대중 전 대통령 조문을 위해 서울을 방문한 김양건 북한 통전부장을 만나 스위스그랜드 호텔에서 양주로 건배하는 모습. 정규필 전 대령은 남북 당국의 막후에서 비공개 역할을 수행했다. 사진 대북정보요원 측 제공
그는 국정원 요원들에게 "국가와 민족 앞에 스스로 켕기는 것이 있으면 광화문 네거리에서 할복하겠다"고 말할 정도로 당당했다. "혹시라도 오해가 있을 것 같아 컴퓨터 비밀번호까지 친절하게 알려줬는데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갔고 시간이 가면서 감정의 기복이 심했다. 아무도 몰라주는데 생사를 넘나들며 돈키호테처럼 살았다는 억울함, 믿었던 국가가 아무 잘못도 없는 나에게 이럴 수 있느냐는 분노, 북·중 국경지대에서 흑색요원으로 활동하면서 단돈 10위안(약 2000원)으로 굶주리며 1주일을 버텼던 시절이 생각나며 서글픔이 밀려오자 심장이 멎을 것 같았다. 결국 119에 실려 갔다."
국정원과 서울중앙지검에서 수차례 소환 조사를 받았지만 2020년 2월 18일 기밀누설죄 무혐의 통보를 받았다. 국정원이 제기한 기밀이라는 것은 정 전 대령이 현역 시절 기무부대에 자진해 보고한 내용이었다. 그런데 무혐의를 통보하면서 검찰은 "군사기밀보호법상 비인가자가 기밀을 탐지·수집·점유하고 있다"며 압수수색영장에 없던 별건으로 기소했다. 청천벽력이었다. 그는 "전역하기 전에 컴퓨터에 소장된 자료를 모두 삭제했는데 국정원이 포렌식으로 복구해 검찰에 무리하게 '기소 청탁'을 했다"며 반발했다.
▲서울 남산에 있는 '안중근의사기념관'을 찾아간 정규필 예비역 대령. 그는 소위 임관 때부터 지금까지 안중근 의사의 '위국헌신 군인본분'을 신념으로 삼아 생사를 넘나들며 대북공작 활동을 성실히 수행해왔다고 자부했다. 무공 훈장을 여러개 받아도 될 정도로 국가를 위해 수많은 공을 세웠지만 '첩보 장교'의 비밀 업무 특성상 공식 기록에 남길 수 없어 그의 가슴엔 유일하게 '보국훈장 삼일장'만 달려 있다. 장세정 기자
법정에서 "2013년에 생성한 문건은 1년 후에 이미 기밀 해제된 데다 내가 작성한 문건을 내가 수집·탐지했다는 별건 기소는 군사기밀보호법 성격상 논리에 맞지 않는다"고 반박했지만, 지난 7월 서울중앙지법은 징역 6월 집행유예 1년을 선고했다. 곧바로 항소한 그는 "37년간 군인으로 일하면서 앞에서 날아오는 적의 총알은 피할 수 있었지만, 뒤에서 내리찍는 아군의 도끼날은 피할 수 없었다"며 참담한 심정을 토로했다.
'문 정부 간첩 조작 시나리오' 밝혀야
그는 얼마 전 대통령실에 "국정원의 간첩조작사건에 대해 조사해 달라"며 청원서를 제출했다. 청원서에서 "37년간 국가를 위해 헌신한 군인을 간첩으로 모는 바람에 내가 근무한 대북공작부대·정보사·국방정보본부는 물론 주중대사관 무관부 등 대북 정보를 다루는 휴민트 관련 조직까지 별건 조사를 구실로 초토화했다"며 "문 정권 시절 국정원이 무슨 짓을 했는지 밝히고 군 정보기관과 조직의 명예를 회복시켜야 한다"고 호소했다.
군부 독재정권 시절에는 간첩 조작 사건이 많았지만 '사람이 먼저'라는 구호를 내걸었던 문 정부 시절에 벌어진 간첩사건은 매우 낯설다. 이 대표와 정 전 대령은 "문 정권 시절 국정원의 간첩 몰이는 북한에 불리한 활동을 해온 탈북자와 대북첩보 조직을 파괴하기 위해 주사파 세력이 꾸민 모종의 시나리오대로 움직였다"고 의혹을 제기한다.
정 전 대령은 "문 정권 들어 좌파들이 2017년 과거사위원회를 만들어 국정원을 장악하고, 2018년엔 기무사를 해체하고, 2019년엔 정보사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대북 정보 시스템이 무너지니 2019년 11월 탈북 청년 어민 2명의 비밀 강제 북송 사건이나 2020년 9월 해수부 공무원 이대준씨 서해 피살 사건의 진상이 당시에 덮일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했다.
'정규필 대령 간첩 조작 의혹'은 지난 9월 20일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도 거론됐다. 한덕수 총리는 "필요할 경우 감사를 진행할 수 있다"며 "결국은 진실이 밝혀질 것"이라고 답변했다. 문 정부가 해명하고 윤석열 정부가 밝혀야 할 의혹이 추가된 셈이다.
장세정 논설위원 zhang@joongang.co.kr
월간조선 10월 호
◆귀순한 전 북한요원 차성근
“지금의 국정원은 구시대 유물, 한국형 모사드 절실하다”
⊙ 1996년 귀순한 대남 공작원 차성근 박사
⊙ 김정일정치군사대학 졸업 후 잠비아에서 노동당 공작원 활동 중 귀순
⊙ “한국에서 장애인 특집 방송 보고 남한에 마음의 문 열어”
⊙ “제2연평해전을 우발적 충돌로 조작, 남한 사회에 깊이 실망했다”
⊙ “북핵 대응은 최악의 실패한 정책, 귀순 후 오극렬 부장의 북핵 언급 진술했지만 입 다물고 있으라 했다”
⊙ “휴민트로 북한 사회에 구멍 뚫어 자유의 물 넣어야”
車成根
1967년생. 김일성정치군사대학 졸업 / 대외정보조사부(현 35호실) 배치되어 러시아, 잠비아에서 태권도 사범으로 위장. 대남 공작요원 활동 / 1996년 귀순. 국방부에서 근무 후 퇴직 / 경기대 북한학 박사
▲1996년 1월 16일 김포공항으로 입국한 차성근 전 노동당 작전부 공작원. 현재 모습은 사진으로 담지 않았다. 사진=국가기록원
“김포공항에서 차로 이동하는데 도로가 꽉 막히더군요. 국가정보원 직원이 옆에서 알려줬어요. ‘이게 다 한국에서 만든 차들입니다.’ 속으로 생각했어요. ‘그래? 저 차가 1년이나 굴러가려나?’”
1996년 1월 16일 김포공항 입국장에서 환한 얼굴로 자유 대한민국에 손을 흔들던 스물아홉 살 청년 차성근. 어느덧 55세의 중년이 되어 앉아 있다. 8월 26일 서울에 있는 그의 자택에서 만났다.
김정일정치군사대학 졸업
▲96년 1월에 망명한 북한 잠비아 주재 외교관 현성일씨와 부인 최수봉씨, 공작원 차성근씨가 기자회견이 끝난 뒤 회견장을 나서는 모습. 사진=조선DB
그는 잠비아에서 노동당 작전부 공작원으로 근무하다 현성일, 최수봉 부부와 함께 귀순했다. 현성일씨는 귀순 당시 주(駐)잠비아 북한대사관의 3등 서기관이었다. 평양 출신 엘리트들이 한꺼번에 세 명이나 귀순해 당시 큰 화제가 됐다.
그는 외교부 영접국장을 지낸 차순권 전 주(駐)가봉 북한대사의 장남이다. 김정일정치군사대학을 졸업했다. 김정일정치군사대학은 북한 대남사업요원과 전투원을 전문적으로 양성하는 곳이다. 1962년 금성정치군사대학으로 설립됐고, 당중앙위 직속 정치학교로 개칭했다. 1992년 1월 김정일의 50회 생일을 맞아 ‘김정일정치군사대학’으로 이름을 바꿨다. 북한에서 유일하게 김정일의 이름을 붙인 학교다. 당 간부 자녀, 대남사업 관련자 자녀, 국가안전보위부 및 보안성 간부 자녀 등 소위 ‘성분’이 좋고 똑똑한 이들이 입학생으로 선발된다.
대학 졸업 후에도 계속 대남 공작 요원 훈련을 받았다. 1992년 노동당 대외정보조사부(현 35호실) 소속으로 러시아에 파견됐다. 태권도 사범으로 위장해 남한 기업인과 선교사를 포섭하는 공작을 했다. 1994년엔 다시 잠비아로 보내졌다. 가족은 북한에 남겨둔 채였다. 역시 태권도 사범으로 위장해 대남 공작 업무를 했다.
주잠비아 북한대사관에 신임 대사가 부임한 후 갈등이 생겼다. 현철해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의 조카인 현성일씨 부부와 함께 한국으로 귀순했다. 대남 공작 요원으로 남한에 대한 교육, 즉 이남화 교육을 받았지만 막상 남한에 와보니 배운 것과 달랐다.
“북한도 승리-58이라고 1958년부터 자동차를 생산했어요. 그런데도 발전이 없었어요. 그러니 한국에서 만든 차도 같을 줄 알았던 겁니다. 와서 살아보니 아니더군요. 20년 넘게 갈 정도로 잘 만드는데 사람들이 오래 안 탑디다.”
― 대남 공작원 교육받으면서 그런 건 안 배웠나요.
“남한이 10대 경제 강국이라고 아무리 배워도 내가 그걸 누려보지 못했기 때문에 실감하지 못해요. 피서도 가보고, 자가용도 사보고 여러 가지 해봐야 남한 사람들 생활 수준이 대단하구나 깨닫는 겁니다.”
― 머리로는 알아도 실감을 못 하는군요.
“먹기 싫은 음식이면 버리고, 배달 어플을 켜면 결정장애가 올 정도로 갖가지 음식이 기다리고 있는 걸 목격해야 자본주의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게 됩니다.”
― 이남화 교육은 어떻게 하나요.
“한국의 정치 시스템이나 생활 습관은 가르쳐주는데 감정적인 건 못 가르쳐주잖아요. 드라마를 보여줍니다. 저때는 〈회전목마〉니 〈아들과 딸〉 〈서울의 달〉이라는 드라마였죠. 〈청춘 행진곡〉이라는 드라마를 보는데 고생만 하던 여주인공이 죽는 걸 보니 가슴이 먹먹하더군요.”
선택지 없는 사회
― 가슴이 먹먹해지는 걸 기대해서 교육자료로 쓴 건 아니지 않나요.
“북한에선 대남 공작원들한테 남한은 세 명 중 한 명이 중앙정보부 정보원이고, 매판 자본가이고, 미국 모방해서 잘사는 거지 절대 스스로 자력갱생하는 게 아니라고 가르쳐요. 드라마는 감동스럽지만, 감상문을 좋게 쓰면 어떻게 될지 뻔히 알잖아요. 남한은 못된 사회라고 쓰죠.”
― 남한 드라마를 많이 보고 감동을 받아도 행동은 안 바뀌는군요.
“한국인들은 흡수력이 빠르고 실천력이 빠르잖아요. 북한 사람은 안 그래요. 열 번 스무 번 봐도 내 걸로 만들기가 힘들어요. 똑똑한 사람일수록 더합니다.”
― 왜 그렇죠.
“북한에선 어릴 때부터 쭉 유일적인, 하나의 똑같은 교육만 합니다. 아무리 머리가 좋아도 상관없어요. 딱 이대로만 해야 된다 이런 교육을 받으니 다르게 행동하면 다른 사람이 되는 줄 알아요.”
― 선택지 외에 다른 행동을 해본 적이 없군요.
“탈북자들이 생리적으로 적응 못 하는 이유가 그겁니다. 남한 사람들은 어릴 때부터 친구 문제, 집안, 돈 문제, 무슨 보험, 직장 이런 걸 다각적으로 생각해서 결정하잖아요. 그런데 북한에선 하라는 대로만 하고, 정부에서 정해준 몇 가지 중에 고르는 게 답니다.”
감동 강요하는 북한
― 그렇겠네요.
“평양 사람들이 한국 드라마를 접하면 이런 생각을 합니다. 첫째, 적발되면 어떡하지, 둘째 재밌네. 그렇지만 표현해도 안 되고 쫓아가서도 안 되지. 남한이 발전한 건 알아. 그래도 의도적으로 안 따라가려 해요. 셋째, 그래도 사회 계율을 지켜야지. 사회 계율에서 벗어나면 지방으로 내려보내지거든. 지방에 가면 말짱 황이라는 걸 아니까요.”
― 평양 시민에겐 지방으로 보내지는 게 일종의 공포군요.
“매일 교시 말씀과 당 정책을 학습합니다. 거기에 한 달에 한두 번씩 계속 큼직한 행사가 열려요. 대낮에 10만 명, 100만 명이 모여서 ‘와’ 하는데 사람이 심리적으로 거기에 쫓아가게 되어 있어요. 2002년 월드컵 거리응원보다 더한 행사를 상시적으로 한다고 보면 됩니다.”
― 누구라도 자연스럽게 세뇌당하겠군요.
“유튜브에 올라오는 북한 영화를 최근에 다시 쭉 봤어요. 이제 다시 보니 자부심을 길러주는 내용이더라고. 특히 노동당에 대해 자부심을 길러줍니다. 나도 눈물이 날 정도더라고. 근데 그게 영화 〈탑건:매버릭〉 같은 자연스러운 감동이 아니야.”
― 그럼 어떤 감동인가요.
“북한은 모든 영화의 내용이 비슷해요. 어떤 상관이 수령의 충신이야. 이 사람은 아프고, 형편이 어려워도 내 일을 먼저 도와줘요. 누가 아프면 병원 가서 헌혈해주고요. 북한에도 의인들이 있어요. 그 사람들의 좋은 점만 뽑아서 그런 식으로 영화를 만들어요.”
― 그러고 보니 《로동신문》에도 무슨 미담(美談)이 거의 매일 등장합니다. 내용 구조는 매번 거의 비슷하지만요.
“그렇죠. 그러니 북한 영화를 보면 감동을 안 받을 수 없어요. 수령과 당에 대한 충성을 도덕화, 의리화, 양심화해놨어요. 충성을 안 하면 인간쓰레기보다 더한 놈이라고 교육하는 겁니다. 그러니 교육을 잘 따라간 똑똑한 사람일수록 벗어나기 쉽지 않아요.”
‘냉면이 넘어가나?”
▲리선권. 사진=공동취재단
― 어릴 때부터 계속 같은 교육을 받으면 그렇겠네요.
“북한은 인물 잘나고, 공부 잘하고, 집안 좋은 애들은 어릴 때부터 간부를 시킵니다. 못생기고 체구도 작고 운동도 잘 못하고, 집안도 별로고, 공부도 못하는 애는 말썽꾼이라고 불러요. ‘야 너는 숙제도 제대로 안 하고 답도 못 하는 애가 낟알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니?’”
2018년 리선권 조평통 위원장은 옥류관 행사에서 냉면을 먹고 있는 대기업 총수들에게 정색하며 이렇게 말했다. ‘냉면이 목구멍으로 넘어갑니까?’
“남한 사람들은 너무 어이가 없겠지만, 북한에선 보통 하는 얘기예요. 어릴 때부터 아이들에게 욕을 하는 데는, 노리는 효과가 있어요. 첫째, 똑똑한 애들이 반대 세력화를 할 수 없어요. 둘째, ‘이렇게 공부 잘하고 똑똑한 사람을 데리고 가는 당, 군, 정부는 너희를 이끌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이렇게 각인이 됩니다.”
― 철저히 적자생존이군요.
“그런데 북한은 남한과 다른 게 인성교육을 많이 합니다. 잘난 애가 잘난 척하면 선생이 혼내요. 겸손하고 남을 도울 수 있는 성품을 가지게끔 교육해요. 50세가 지나서 생각을 해보니까 잘난 놈 주위엔 항상 사람이 있거든요. 남한에선 그러면 국회의원 되고, 장관 되는 게 당연하잖아요. 북한에선 그게 아니에요.”
― 그럼 뭡니까.
“내가 잘났잖아요? 첫째, 내가 잘났으면 얼마나 잘났겠습니까 다 당의 은덕이죠. 둘째, 공부 못하는 애 숙제 도와주고 놀아주고, 잘난 척 안 해야 해요. 원래 국가 사회주의 도덕이 그거예요. ‘하나는 전체를 위해, 전체는 하나를 위해’ 그게 그거예요. 그래서 북한에 협동을 소재로 한 영화가 그렇게 많아요. 영화 〈심장에 남는 사람〉 〈보증〉 둘 다 그런 내용이에요.”
― 인성교육을 철저히 시킨다는 게 흥미롭네요.
“그렇게 교육하면 모반을 할 수 없어요. 1968년 김창봉(1919~1968년) 사건이 유명하지요. 김창봉이 너무 똑똑했어요. 소련에 유학도 다녀왔고 말도 잘했어요. 김창봉이 김일성 최고사령관보다 자기가 전략·전술에서 우수하다 이렇게 나온 거예요. 군벌관료주의로 지목받고 숙청당했어요. 자만한 거죠.”
― 능력은 뛰어났지만 인성 때문에 숙청당했다는 얘기군요.
“오진우와 현철해는 절대 나서지 않았어요. 그래서 오래간 겁니다. 북한에서 관료주의, 세도주의 하다 걸리면 미국에서 인종주의 걸리는 것과 거의 같아요. 그래서 능력 있고 겸손한 사람이 남한보다 북한에 더 많은 거예요.”
장애인 방송 보고 마음 열어
― 남한에서 목격한 좋은 점은 없나요.
“여기 와서 마음을 탁 연 계기가 있어요. 들어와서 국정원 논현동 안가 2층에 있었을 때예요. TV를 트니까 장애인을 위한 음악회를 하는 겁니다. 관객석에도 장애인이 많은데, 무대에도 장애인들이 올라가 있어요. 이런 음악회를 1시간 넘게 하는 겁니다. 깜짝 놀랐어요. 북한엔 장애인이라는 말도 없거든요. 병신이라고 하지.”
― 요새는 장애인이라는 말을 쓰는 것 같던데요.
“김정은 집권하고 보이는 것 때문에 쓰는데, 북한 내부는 아니에요. 제가 평양 살 때 어느 집에 놀러 갔는데 안방에(팔을 옆으로 크게 벌리며) 이만한 애가 앉아 있는 겁니다. 이만하게 부어서 눈도 조그마한 여자아이였어요. 다운증후군이라는 말도 모를 때니 깜짝 놀랐어요. 어린 마음에 ‘안됐구나’ 이런 생각이 들어야 되는데 ‘뭐지 이게?’ 하고 나온 거예요.”
― 그 아이는 어떻게 됐나요.
“그 가족이 지방으로 내려갔어요. 아이를 지방으로 보내라고 6개월 정도 기한을 줬어요. 그 아버지가 외교관이었는데도 딸만 내려보내지 않고 가족이 전부 지방으로 같이 간 겁니다. ‘혁명의 수도에는 불량배도 없고 병신도 없어야 한다’는 원칙 때문이지요.”
― 사회 차원에서 도태시켜버리는군요.
“제가 중학교 4학년 때 차출이 돼서, 5학년 1학기 마치고 김정일정치군사대학(이하 김정일대학)에 들어갔어요. 1967년생이면 보통 86학번이거든요. 저는 83년에 들어간 겁니다. 김정일대학 졸업해보니 공부 잘했던 외교관 가정 친구들은 종합대학 2학년에 다니고 있어요. 공부 못한 애들은 공장에 집단 배치돼 있고요.”
― 진로 지도가 단순하고 확실하군요.
“대학 다니는 애들, 공장 다니는 애들을 만났는데 저한테 존대를 하는 겁니다. ‘너 어떻게 지냈어?’ ‘잘 지냈습니다’ 이게 당연시되는 거예요. 북한에서 김정일대학에 갔다는 건 여기로 치면 하버드대학 가는 거 이상이거든요.”
조작된 제2연평해전
▲2003년 6월 24일 오전 평택 해군 제2함대 사령부 충무동산에 세워진 6·29 서해교전 전적비 제막식에서 전사자 유가족들이 전사자들의 흉상 부조를 어루만지며 오열하고 있다. 사진=조선DB
그는 귀순 이듬해인 1997년에 국방부에 들어갔다. 2017년 퇴임할 때까지 20년간 북한의 정치·경제·사회와 대남 정책을 분석했다. 한국 생활에 한참 적응하며 일에 매진했던 2002년 6월 29일, 잊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다. 제2연평해전.
제2연평해전은 2002년 6월 29일 북한 경비정들이 서해의 북방한계선(NLL)을 넘어와 우리 해군의 고속정을 선제공격하며 시작됐다. 북한 해군 서해함대 8전대 7편대 소속 경비정 등산곶 684호정이 85mm 전차포로 선제 포격해왔다. 이 전투로 우리 해군 6명이 전사, 18명이 부상당했고 참수리급 고속정 357호가 침몰했다. 북한 해군은 약 3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1척의 함정이 반파되었다. 이날은 2002 FIFA 월드컵 대한민국 대 터키의 3위 결정전이 열린 날이다. 그의 설명이 이어졌다.
“여기가 이런 곳이구나… 너무 실망했어요. 그때 저는 국방부 전략정보과에 있었어요. 북한 함정이 3개월 동안 두 척씩 나와서 연습을 하는 겁니다. 한미연합사에서는 이상하다고, 도발 준비 하는 거 아니냐고 했어요.”
― 그때가 2000년 김대중-김정일 정상회담 이후 한반도에 평화가 왔다고 떠들 때였죠.
“월드컵 시기이기도 하고 남북 간에 개성공단, 금강산 관광 등 교류가 있을 때예요. 김대중 청와대에 들어가 ‘북한이 도발할 겁니다’라고 얘기하면 자리보전하기 힘든 시기가 아니었을까. 저는 장군이 아니었으니까 모르지만요. 문건을 쓸 때도 문구 자체를 순화한 용어로 쓰게 했어요.”
보복이 체질화된 북한
― 그런 와중에 연평해전이 일어난 거군요.
“우리 과는 담당들이 각기 나뉘어 있었어요. 북한의 정치 담당, 경제 담당, 대남 정책 담당 하는 식으로요. 투스타, 스리스타 장군들이 우리를 오라고 했어요. 궁금한 건 하나예요. 공격이 의도적이냐, 우발적이냐.”
― 뭐라 답했나요.
“무조건 의도적이다. 첫째, 북한 지휘체계 자체가 서해함대 사령관이 결정하고 전대장이 결정하고 하는 게 불가능하다. 전방의 총알 한 방까지 일사불란하게 통제된다. 함선을 가라앉힐 정도로 한두 시간 교전을 한다? 말도 안 되는 얘기다.”
― 계획적이었단 거군요.
“둘째, 북한은 보복이 체질화되어 있다. 김정일이 제1연평해전에서 진 걸 보복해야 된다고 했다는 첩보가 수십 건 있었어요. 해군사령관에게 무조건 참패를 만회해야 한다고 말했어요. 세 번째, 월드컵 마지막 날이었다. 북한은 항상 성동격서(聲東擊西)다. 북한은 대한민국이 월드컵으로 위상이 높아지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게다가 북한은 서해를 분쟁지역화하려고 한다. 월드컵 시기, 국제적 이목이 모여 있으니까 얼마나 좋은 기회냐.”
― 장군들이 납득하던가요.
“반문하더군요. ‘김대중 대통령이 2년 전에 가서 정상회담을 했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나겠나.’ 북한은 그 정상회담을 ‘남한 대통령이 노구(老軀)를 끌고 와서 김정일 장군에게 이제까지 잘못했다며 많은 조공을 바쳤다’고 평가했어요. 실제 북한 강연자료에 쓰여 있어요. 그 얘기를 하면서 이게 북한의 생각이라고 알려줬어요.”
― 받아들이던가요.
“북한이 지금 경제난 아니냐는 겁니다. 사회주의 나라가 다 거꾸러지고 뒷배가 없는데 자칫 전쟁 날 수도 있는 도발을 어떻게 하냐.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이런 배은망덕한 짓을 설마 하겠냐고 하더군요.”
― 핵무기를 만드는데 함포를 못 쏘나요. 당황스럽네요.
“마지막으로 저에게 다시 묻더군요. ‘그러면 북한이 어떻게 도발하나?’ 답했어요. ‘전대 전체가 도발하는 게 아니다. 북한은 해군사령관, 서해함대사령관, 전대장이 연결된다. 전대는 함선 두 척의 함장하고만 딱 연결된다. 작전 문건도 수기로 내린다. 무전도 안 한다. 그러니 아예 감지가 안 된다. 대남 침투 자체를 그렇게 한다.’”
― 그랬더니요?
“수기로 쓰인 작전 문건을 가지고 오라는 겁니다. 제가 그랬어요. ‘그건 국정원이 가져와야지요’ 그러니, 주장하지 말라는 겁니다. 물어봐놓고 주장하지 말라는 건 뭡니까.”
사실 군은 이때 이미 증거를 갖고 있었다. 제2연평해전을 일으킨 북한 경비정 684호가 교전 이틀 전에 상급부대인 8전대에 보고한 ‘SI(특수정보·Special Intelligence)’ 15자였다. 대북(對北) 감시부대가 수집해 국방부 장관, 국방정보본부, 합참작전본부, 해군작전사령부 등 관련 부대에 통보한 내용이다. ‘발포 명령만 내리면 바로 발포하겠다.’ 《월간조선》이 뒤늦게 밝혀내 2012년 7월호에 단독 보도했다. 군은 이때까지도 이 사실을 숨겼다. 북한의 계획적 도발이었던 제2연평해전은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 서울 용산에서 우발적 교전으로 변모했다.
정의나 정직 실종
“우리 의견은 반영 안 하고 ‘우발적’으로 일어난 일로 만들었어요. 다음 날 TV에 자막이 지나가더군요. ‘서해에서 북한 함정 우발적 충돌 우리 함선 하나 피격됨.’ 지금 와서는, 그때 뒤집어놨어야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2015년에 〈연평해전〉이라는 영화가 나왔어요. 극장에서 보는데 눈물이 줄줄 나와요. 해군 수병들이 총탄에 맞아 죽어가는데, 위에선 우발적이냐 의도적이냐 우왕좌왕하다 결국엔 조작한 겁니다.”
― 비극입니다.
“미안하고 창피했어요. 우발적 사고라고, 사상자들 대우도 제대로 못 받았어요. 유가족 중의 한 가족은 한국에서 못 살겠다고 미국으로 떠났잖아요. 그걸 보면서 생각했어요. 여기는 정의나 정직이 안 통하는구나.”
― 북한은 다르다는 겁니까.
“북한은 이런 건 있어요. 제가 공작원 할 때 지도원이 허튼소리하고 제 말을 반영하지 않고 일을 진행해요. 나중에 그 일 때문에 저에게 추궁이 내려와요. 그러면 저는 말합니다. ‘제가 한 게 아닙니다.’ 근거로 회의록이나 지도원에게 제출한 보고서를 제출합니다. 그러면 확인 후 지도원을 바로 날려버려요.”
― 신상필벌(信賞必罰)을 확실히 한다는 얘기군요.
“제가 남한에 와서 제2연평해전 다음으로 실망한 게 바로 인사(人事) 관리입니다. 2년에 한 번씩 과장이 바뀌어요. 야전에 있던 대령들이 주로 내려와요. 대위나 소령, 중령 때라도 정보본부에서 근무해본 것도 아니고 대령이 와서 1년 만에 정책보고서를 어떻게 씁니까. 그런데 이분들이 저에 대한 인사 평가를 해요.”
― 북한은 인사 방식이 다른가요.
“북한은 인사 파트가 따로 있는데 인사 업무만 담당하고 개입을 못 해요. 조직 안에서 세포비서가 매주 각 사람에 대해 정리를 합니다. 상호 비판을 하니까 이 사람이 이번 주는 업무를 등한시했는지, 동료를 무시했는지 정리가 돼요. 그 사람의 평정서(생활기록부)로 축적됩니다.”
― 그럼 누군가를 알고 싶으면 그 평정서를 열어보면 되겠네요.
“조직에서 평정서를 정리해서 주면 인사 파트는 그걸 연도별로 정리해요. 그걸 열어보면 인성부터 업무 능력까지 다 알 수 있어요. 북한에서 제일 좋은 평가는 ‘눈치 안 보고 누가 뭐라 해도 자기 길 꿋꿋이 가는 사람’입니다. ‘이번 주에 평가가 안 좋았는데 한 달 지나서 보니 사실은 다른 사람을 도와주려고 헌신한 거구나’, 그러면 이게 기록이 돼요.”
― 독재 국가 하부 조직 나름의 합리성이군요.
“그러니 인사를 할 때 당위원회에서 후보를 정해서 문건을 가져오라고 합니다. 열몇 명이 같이 문건을 살펴봐요. 그러면 누가 적임자인지 딱 나와요. 보위부나 보안부도 검토를 하고요. 후보를 올리면 상급 당에서 결정해요. 남한처럼 차례대로 기수별로 앉히는 식이 아니에요. 철저히 능력을 보니까 3년 아래도 임명됩니다.”
― 실수했다고 지방으로 내쫓기기도 하잖아요.
“북한은 실수를 하면, 반성하고 더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을 요구합니다. 혁명화 내려갔다가 돌아와서 더 승진하는 이유가 그겁니다. 근데 거기서 주저앉으면 완전히 주저앉게 돼요.”
장군에게 쓴소리 해 눈총
― 2년 만에 바뀌는 과장이 인사 평점을 혼자 다 매기는 방식이 이해 안 되긴 했겠네요.
“자기 기분대로 인사 평가를 하고, 좀 양반이라는 사람은 양식을 나눠줘요. 본인 인사 평가를 스스로 연필로 써서 주면 자기가 그 위에 다시 쓰겠다고요.”
― 사이가 안 좋으면 그게 영향을 미칠 수 있겠네요.
“군단장 마치고 본부장으로 온 장군이 있었어요. 북한 시스템에 대해 보고를 몇 번 했는데 계속 같은 결론을 내는 겁니다. ‘차 서기관, 내가 한 얘기가 맞나?’ 솔직하게 얘길 했어요. ‘이 말씀은 맞는데 좀 그렇지 않은 내용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대령들이 저를 힐끗힐끗 봐요.”
― 눈치를 주는 건가요.
“나중에 그랬다더군요. ‘살다 살다 군인도 아닌 애가 본부장한테 잘못을 지적하는 건 처음 봤다, 특이한 사람이다.’”
― 북한이 헌신적이고 굽히지 않는 사람을 중용한다 해도, 김씨 3대에 대한 비판은 어쨌든 못 하잖아요. 아무리 합리적으로 인사를 해도 기본 토대가 비정상 국가 아닙니까.
“그렇죠. 북한에서 올바르다는 건 수령과 당의 방침대로 하는 거예요. 무엇이 옳은가 판단할 때 교시 말씀, 그리고 현 정세와 주변 상황을 보고 판단하라는 거예요. 당의 방침을 신념화, 양심화, 도덕화를 해버렸다고요. 그게 수령제일주의예요. 그게 사회 밑바탕에 깔려 있는 겁니다.”
그는 공작원 훈련 시절 겪은 사건을 털어놨다.
화교를 혼낸 신의주 사건
“김정일대학 출신들은 다른 공작원들과 좀 다른 대우를 받았어요. 그들은 영웅 칭호 받아야 받는 대우를 받았어요. 스무 살 되자마자 20일 만에 노동당에 화선 입당을 했어요. 다른 사람은 1년 동안 후보 기간을 보내야 해요.”
― 그만큼 훈련이 힘들겠군요.
“훈련을 하면서 우리끼리 담력 훈련을 한 번 하자고 했어요. 신의주에 화교들이 와서 북한 여성들을 노리개 삼아 농락하고, 도박을 하면서 미풍양속을 해친다는 겁니다. 우리가 징벌을 하자.”
― 홍길동처럼요?
“네. 다섯 명이 내려갔어요. 조장은 김정일대학 12기예요. 우리는 21기고. 그 사람은 남한에도 몇 번 왔다 갔다 해서 영웅 칭호를 받았어요. 대남 공작 부문에 있는 애들은 생사를 걸고 하는 일이기 때문에 똑똑하고 헌신적이지 않으면 안 돼요. 생판 낯선 사회에서 적응해야 하니까 적응 잘하고 현명해야 해요. 조장이 그런 사람이었어요.”
― 도박장에 갔나요.
“한 명이 정찰을 돌아서 도박장을 알아냈죠. 제가 보위부 과장, 다른 친구가 지도원을 연기하기로 했어요. 나머지 사람은 망봐주고요. 근데 작전하기로 한 날 전날에 조사부에서 전화가 온 거예요. ‘하지 마라. 잘못되면 이게 조·중(朝·中) 사이에 외교 문제가 될 수 있다.’ 다들 모여 앉았어요.”
― 회의를 했겠네요.
“지도원이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기에 제가 그랬어요. ‘감쪽같이 하자. 우리만 입 다물면 되지 않나.’ 스물두세 살 때였으니까요. 다른 사람들도 합시다, 합시다 그래요. 지도원도 그러면 하겠다고 했어요. 도박 판돈을 압수하면 다 같이 혁명자금으로 쓰자고 했어요.”
― 결국 감행했군요.
“우리가 북한 사람 치고 키가 컸어요. 화교들이 벌벌 떨더라고요. 둘이 들어가서 엎드리라고 하고 가짜로 사진도 찍었어요. ‘오늘은 우리가 조직적으로 문제는 안 삼는다. 다신 이런 판 벌이면 용서 안 한다’ 하고는 판돈을 싹 걷어서 나왔어요. 그런데 문제는 다른 데서 터졌어요.”
― 어디서 터졌나요.
“조장이 돈을 더 받아내려고 한 거예요. 우리한테 얘기 안 하고 넷 중의 한 친구를 데리고 돈 털린 화교를 다시 만났어요. ‘우리가 눈 감아주기엔 금액이 너무 적다. 더 가지고 와라.’ 그런데 그 화교가 평북도 보위부와 연결이 돼 있던 거예요. 그래서 보위부에 얘길 한 겁니다.”
朝中 분쟁으로 확대 위기
― 난리가 났겠네요.
“돈 받으러 나갔다 두 명이 다 검거됐어요. 나머지 사람은 그 상황을 몰랐고요. 조사하는데 소속이 대외조사부라고 하니 보위부에서 깜짝 놀라는 거예요. 그때 김정일이 국가안전보위부장을 겸하고 있었어요. 보위부에서 보고서를 올리면 김정일에게 직보가 되는 겁니다.”
― 난리가 났네요.
“노동당 조직지도부로 보고서가 올라갔어요. 서기실 부부장이 이 문서를 보니까 대단히 엄중한 거예요. ‘조사부 공작원들이 신의주에서 화교들 등쳐서 조·중 문제가 발생, 외교적 문제로 비화하게 됐다.’”
― 엄청난 내용이군요.
“그때 우리 부부장이 허명욱이었어요. 최은희·신상옥을 납치한 사람이에요. 납치하고 김정일이 너무나 기분이 좋아서 자기가 차던 롤렉스 금시계 풀어서 주고, 자기가 타던 차도 가져가라고 했어요. ‘허 부부장은 이제 과장 겸 부부장이다’, 서기실에서는 김정일이 허 부부장을 신임한다는 걸 알고 있었죠. 그래서 얘기해준 겁니다.”
― 그래서 어떻게 됐나요.
“‘우리가 알아서 잘 처리할 테니 문서는 올리지 마라’ 그래서 안 올라갔어요. 저희는 즉시 소환이 됐고 비판 토론이 열렸어요. 지도원이 이러는 거예요. ‘저는 조직의 지시를 받고 하지 말자고 했는데 차 선생을 포함한 공작원들이 해야 된다고 우겨서 자의적으로 저지른 거다.’”
― 죄를 덮어 씌웠네요.
“제 차례가 됐어요. 제 비판은 하나도 안 하고 대뜸 말했어요.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 지도원 동지가 처음엔 그렇게 얘기해서 제가 하자고 했습니다. 근데 그걸 당신이 승인하지 않았습니까. 현장 나와서 망까지 봐주지 않았습니까.’ 부부장이 갑자기 소리를 질러요. ‘종파 새끼들이구만! 어디 당을 공격해.’”
― 그래서 벌을 받았나요.
“초대소에서 2개월 동안 아무것도 못 하고 비판서만 썼어요. 젖 먹을 때부터 학생 때 잘못한 것까지 계속 썼어요. 그런데 그 와중에 제가 일을 또 저지른 겁니다. 몰래 초대소를 빠져나가 아버지를 만나러 갔어요.”
북한 시스템에 모순 느껴
― 구해달라고요?
“조장이 제대당한 걸 알고 아버지에게 합영회사 취직 자리를 부탁하려고요. 아버지가 그때 외무성 대표단 영접지도국장을 했거든요. 그거 하면서 북한의 합영회사라는 합영회사는 다 알고 있었어요. 영접지도국장 사인이 없으면 외국 대표단이 북조선에 못 들어왔거든.”
― 뇌물 유혹도 많았겠네요.
“아버지는 집에 사치품은 일절 들이질 않았어요. 대신 술, 고기, 흰쌀은 늘 채워져 있었어요. 담배도 합영회사에서 꽉꽉 채워놔요. 저건 뇌물 아니냐고 했더니 아니래요. ‘내가 혼자 먹냐, 다 같이 먹고 나눠주잖아. 이건 뇌물 아니다.’ 부친한테 조장 일자리를 부탁해서 결국 좋은 자리에 취직됐어요.”
― 취직시켜줬네요.
“결국 신의주 사건을 두고 동료들이랑 같이 반성하며 잘못했다고 빌었어요. 그 와중에 몰래 나갔다 온 게 걸린 거예요. ‘조장을 취직시켜주는 게 네 개별적으로는 맞는 얘기지만 당 조직의 원칙이나 규율을 위반한 사람을 위해주는 건 반항하는 거다.’ 이 사건을 겪으며 북한 시스템에 모순이 있다는 걸 느꼈어요.”
그가 어릴 때 북한에서 겪은 일을 들려준 이유는 한 가지였다. 북한 사회를 똑바로 이해시키고 싶은 것.
“보수, 진보 다 문제인데, 특히 민주당 정권의 대북 정책은 참 문제가 많았습니다. 첫째, 북한을 바라보는 관점이 아예 틀렸고, 정책에 대한 이해력이 없었어요. 북한은 수령 중심으로 단결하는 사회예요. 사회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가정이에요. 수령이 아버지이고 노동당은 어머니예요.”
― 수령제일주의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군요.
“둘째, 북한은 남한과 미국을 쳐서 없애야 될 대상으로 간주하고 있어요. 노동당 규약 바뀌었다고 언론에서 떠들썩했는데 내용은 하나도 변한 거 없어요. 셋째, 개인의 인권을 인정 안 하고 전체주의 인권만 인정하는 사회예요. 그런 전제하에서 움직여야죠.”
‘백두산의 새 전설’
▲2018년 9월 20일 백두산 장군봉에 오른 문재인 대통령 부부와 김정은 내외. 북한은 백두산을 김일성의 항일빨치산 활동의 주무대이면서 김정일이 태어난 곳으로 선전하고 있다. 사진=조선DB
― 이해 없이 무작정 정상 회담만 해봤자라는 거군요.
“문재인 대통령이 김정은과 회담을 하며 백두산까지 간 것을 두고 북한은 이렇게 생각해요. ‘배짱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5년짜리 대통령, 역시 우리 수령이 위대하구나.’ 최악은 이렇게 생각한단 겁니다. ‘우리가 똘똘 뭉쳐서 지금까지처럼 가야 한다.’”
― 그래서 다가서고 퍼줘도 ‘삶은 소대가리’ 소리를 듣는 거군요.
“문재인 대통령이 백두산에 갔을 때 리설주가 이런 말을 해요. ‘전설 많은 백두산에 새 전설이 생겼다.’ 이게 무슨 뜻인가 하면요, 남한 대통령은 순수하게 백두산을 찾았다 해도, 북한 측은 혁명 전통이 시작된 백두산에 와서 백두산 전통을 인정했다고 할 겁니다. 요새 대북 휴민트(Humint·인간정보)를 안 하니까 강연자료를 안 가져오는데 안 봐도 뻔해요. 남조선 괴뢰가 백두산 전통을 인정했다고 할 겁니다.”
― 남한에서 와서 김정은 장군님한테 엎드렸으니까 또 다른 전설이 생긴 거란 뜻이죠?
“그렇죠. 민간 교류는 좋아요. 교류를 반대하는 건 아닙니다. 다만 출연 가수나 곡목을 고를 때도 좀 생각을 해야 해요. 2018년에 한국 가수들이 평양에서 공연했을 때 윤도현밴드가 ‘1178’이란 노래를 불렀어요.”
‘1178’은 한반도 최북단에서 최남단까지의 거리(1178km)를 뜻한다. 가사는 이렇다. ‘처음에 우리는 하나였어 너와 내가 잡은 손 그 누군가 갈라놓았어.’ 윤도현은 평양에서 이 노래를 부르기 전 남북한 관계를 생각하며 가사를 지었다고 설명했다. 차성근 박사의 설명이 이어졌다.
“이건 딱 북한이 좋아하는 운동권적 사고의 가사입니다. 특히 남한에서는 예술하는 사람은 정치에 함부로 끼어들면 안 됩니다. 상황이 복잡해요. 차라리 평양에선 ‘가을 우체국 앞에서’ ‘너를 보내고’ 같은 사랑 노래를 부르는 편이 나아요.”
윤도현씨가 그런 계산까지 했을진 의문이지만, 북한 입장에선 윤도현밴드의 노래를 들으며 남한의 예술인이 와서 위대한 지도자 김정은에게 아부를 떤다고 생각할 수 있겠다.
휴민트 강화해야
차 박사는 북한을 자유민주주의체제로 변하게 하려면, 무엇보다 스스로 변하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만나서 논의한다고 대북 정책 잘하는 게 아니에요. 그건 그대로 하되 북한 사회에 자꾸 구멍을 파서 자유의 물을 넣으라고요. 북한을 스스로 변하게 하려면 거기에 자유 의지 가진 사람들이 점점이 확산되고 세력이 형성되어야 합니다. 그때 사회주의 국가들 무너졌듯이 무너질 거예요.”
― 구멍을 어떻게 팝니까.
“휴민트하라고요. 해외에 나와 있는 사람 포섭하고 들여보내고, 그걸 장기간 하다 보면 어느새 북한말로 ‘은을 내는’ 시기가 안 오겠어요? 효과가 나온다고요. 그건 안 하고 대통령이 선물, 약속 잔뜩 싸들고 가서 화해협력 같은 소리 했잖아요. 근데 남북연락사무소를 폭파했어요. 얼마나 핫바지로 봤으면요.”
― 국정원이 휴민트를 제대로 하고 있는지 의문이네요.
“박정희 대통령 때 만들어진 게 중앙정보부잖아요. 국내, 국외 정보를 한 사람이 틀어쥐고 조종할 수 있어요. 이게 지금까지 바뀌지 않은 겁니다. 정치가들이 한심해요. 북한이 독재 사회라지만 북한도 정보조직은 국내, 국외 다 갈라져 있어요. 국내는 국가안전보위부가, 해외는 정찰총국이 담당합니다.”
세계 주요 국가들은 국내 정보 수집과 해외 정보 수집 기관을 분리해놨다. 영국도 국내 안보는 MI5가, 해외는 MI6로 담당기관을 나눴다. 미국의 경우 해외는 CIA, 국내는 FBI다. 러시아는 국내는 FSB, 해외는 SVR이다. 이스라엘도 국내는 신베트가, 해외는 모사드가 맡고 있다.
― 한국은 1960년대에 만들어진 정보 조직을 지금도 고수하고 있군요.
“국정원 안에 국내 파트, 해외 파트, 북한 파트가 같이 있기 때문에 국정원장이 조종을 할 수 있어요. 갈라져 있으면 각기 성과를 내야 하니까 조종이 안 되죠. 그 사이의 조정은 미국의 국가정보국(DNI)처럼 청와대 정도에서 컨트롤타워 하나 만들면 되는 겁니다. 거기는 정보 수집이 아니라 컨트롤만 하는 거예요. 정보 독점과 전횡을 막을 수 있어요.”
실패한 북핵 정책
― 그렇게 안 하니 정보 수집에서 뒤처지고 문제가 생기겠네요.
“저는 핵 문제를 가장 큰 실패로 봐요. 2002년도 2차 북핵위기가 올 때부터 제가 본격적으로 개입을 했어요. 근데 저는 오극렬 부장한테 분명 들었거든요. 전병호가 김정일한테 ‘장군님 이렇게 핵무기 조립했습니다’고 하니 김정일이 너무 좋아했다면서 나한테 직접 말한 적이 있어요. 그 얘기를 남한 와서 했더니 국정원에서 입 다물고 있으라는 거예요.”
― 그랬군요.
“그런데 국방부에 들어와서 보니까 계속 북핵을 조악한 수준, 써먹을 수 없는 수준이라고 평가절하하는 거예요. 그러다 지금까지 온 겁니다. 이제 와서는 대응체계로 가야 되지 않냐고 해요.”
― 문제가 많네요.
“왜 영변이나 핵 시설이나 핵과학자들 주변에 간첩들을 못 들이냐고요. 북핵을 전반적으로 알 수 있는 고급 정보가 없어요. 북핵 전담 TF를 따로 만들어서, 이 조직은 정권이 바뀌어도 관계없이 대북 공작을 하게 해야 해요. 모사드는 중동의 핵을 막으려고 물리적인 공작을 얼마나 합니까. 과학자도 죽이고 시설 파괴도 하잖아요.”
― 윤석열 정권에 제언을 한다면요.
“북한에 대한 진단을 똑바로 해야 합니다. 지금은 북한을 변화시키는 게 우리의 목표입니다. 북한은 가만 놔두면 변화는커녕 의리화, 도덕화, 신념화되고 똘똘 뭉칩니다. 민주당 정권들처럼 퍼주면 더 심해질 거고요.”
―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말이 같잖아요. 미국이 위성으로 5cm 단위로 북한을 들여다본다지만, 우리처럼 휴민트를 할 순 없습니다. 정보를 갖고 있으면 미국을 설득하고 미국보다 우위에 설 수 있어요. 명심해야 할 건 김정은 집권 후 북한은 더 단단해졌다는 겁니다.”⊙
글 : 하주희 월간조선 기자 everhope@chosun.com
◆김정은과 싸우는 탈북 北送동포 리소라
“일본 적십자사는 북송동포들의 운명을 망친 단체”
⊙ 어머니는 고등학교 때 ‘사회주의 혁명하겠다’며 혼자 北送船 타
⊙ 열탄·오징어 장사로 시작, 연탄 제조·밀무역·쌀장사로 성공
⊙ 일본에 도착한 후 청소부 등으로 일하다가 대학 진학해 법학 공부
⊙ 日법원, 북송동포들의 손해배상 소송 기각하면서도 북한·조총련의 거짓선전에 대한 위법성 인정

▲사진=장원재
김정은을 상대로 전면전(全面戰)을 벌이는 인권운동가가 있다. 어머니는 북송동포(北送同胞), 본인은 탈북자(脫北者)다. 아이 둘을 데리고 사선(死線)을 넘었다. 남편은 북한에 있다. 생사(生死)는 모른다. 오빠 등 직계 가족도 아직 북한에 있다. 역시 생사는 모른다. 인권운동을 계속하면 가족의 안전은 위협받을 것이다. 그래도 멈출 수 없다. 정의(正義)를 외면하고 불의(不義)에 굴복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리소라. 1970년 함경남도 금야(金野) 출생. 금야군은 동으로 동해를 접한다. 서쪽은 악명 높은 수용소가 위치한 요덕군(耀德郡), 남쪽은 고원군(高原郡)과 강원도 천내군(川內郡)이며 북쪽은 정평군(定平郡)이다. 고원에서 남행하면 원산(元山)에 이르고, 정평군에서 조금 더 가면 함흥(咸興)이다. 예부터 ‘검은 금’이라고 불리던 석탄이 많이 나고, 기름진 너른 평야가 있어 금야군(金野郡)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름만 남아 있지 살기에는 척박한 땅입니다. 특산물로 홍시와 고구마가 유명하고 그다음에는 특별히 유명한 게 없어요.”
5남매 중 넷째. 언니 둘과 오빠 하나, 그리고 남동생이 있다. 집안에서는 제일 어리바리하다고 했다. 나중에 탈북해서 어머니를 찾아가니 “어떻게 형제 중에 네가 왔느냐?”고 놀랄 정도였다. 리소라는 어머니를 지금도 ‘엄마’라고 부르지 않는다.
“여섯 살까지는 엄마라고 불렀지만, 후에는 엄마라고 부른 기억이 없습니다. 제가 세 살 때 아버지가 간염으로 병원에 들어가서 10년 정도 지냈어요. 육종(sarcoma)으로 번져서, 어머니가 낮에는 직장 다니시고 밤에는 간병했죠. 그래서 어머니 얼굴을 본 적이 드물었습니다. 북한에는 ‘70일 전투’ 하는 식으로 초과 근무가 많거든요. 새벽 세 시에 퇴근해서 밥 한술 들고 아버지한테 가는 겁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약품을 자체 조달해야 했어요. 다른 병원 제조실에 가서 맡겨놓은 포도당을 찾고, 겨울에는 외투 안에다가 얼지 않게 싸매고…. 간염 병원이 굉장히 멀어요. 집에서 눈길을 헤치면서 병원에 갔다가 새벽에 귀가해서 밥을 해놓고, 또 직장에 가는 거예요. 그런 생활이 이어지니까 어머니 얼굴을 볼 새가 없었고, 그다음엔 학교에서 제가 어머니 때문에 차별을 받았으니까….”
새끼발가락 발톱이 없는 이유

▲1959년 12월 14일 일본 니가타항을 떠나는 북송선. 리소라 씨의 어머니도 1960년 북송선을 탔다. 사진=마이니치신문
차별? 북송동포 자녀였기 때문이다. 주변 사람들은 그 사실을 다 알았는데 리소라 본인만 몰랐다. 유치원 시절, 밤늦게 아이를 찾으러 온 한 어머니가 리소라를 밀쳤다. 넘어진 리소라를 넘어 자기 아이를 안으면서 “왜 저따위하고 노는가”라고 아이에게 말했다. 갑자기 밀치니까 많이 놀랐다. ‘내가 특별히 잘못한 일이 없는데 왜 그러나?’
이상하다고 여겼는데 그런 일들이 계속 이어졌다. 간염 환자의 자식이고 본인도 간염을 앓았기에 ‘전염병자라 그러는가’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친구들이 “우리 어머니가 너하고 놀지 말래”라고 했다. “음악반에서도 내일부터 나오지 말라”고 했다. 상급학교에 진학하니 소년단 지도원이 욕설과 더불어 “네가 딱히 공부해서 무슨 소용이 있냐?”며 주먹을 들었다. ‘성분이 불량하니 괜히 다른 사람 앞길 막지 말라’는 소리였다.
“북한 신분사회에서 가장 토대가 나쁜 적대계층(敵對階層)은 다 감옥에 보냈고, 그다음이 동요계층(動搖階層)인데, 북송동포는 동요계층 가운데서도 가장 아래였어요. 자본주의 물을 먹어본 사람이라며 드러내 놓고 멸시했습니다.”
북송동포 중 일본 친척들이 경제적으로 도와주는 사람은 차별받지 않았다. 하지만 리소라의 집은 가난했다.
“저희 어머니는 부모님 승낙 없이 고등학교 때 혼자서 북송선을 탔거든요. 조선 반도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완성하시겠다고. 그러니까 자존심 때문에라도 송금(送金)해달라, 도와달라고 손을 안 내미셨죠. 저는 새끼발가락 발톱이 없습니다. 늘 작은 신발밖에 못 신어서 새끼발톱이 나오지 못한 거예요. 우리 아이들은 지금 제 발톱이 귀엽다고 하는데, 제 어린 시절은 이럴 정도로 가난했습니다.”
유아 류머티즘 관절염 앓아
열 살 때 비로소 엄마가 일본에서 온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엄마는 집에서 일본 얘기나 일본말을 하지 않았다. 어쩌다 어머니 동무들이 모이면, 커튼을 친 후 새카만 모포를 이중삼중으로 덧씌우고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눴다. 자기들끼리 조용조용 부르던 노래를 기억한다. 알고 보니 일본에서 배운 곡들이었다.
“본인들은 ‘따뜻하고 자애로운 어버이의 품’을 그리며 북한에 왔는데, 현실은 자기랑 가족들이 다 천대받고, 개선 방법도 없고…. 그 속이 얼마나 복잡했을까요? 이분들은 모일 때마다 눈물을 흘렸어요. ‘모임에 못 나온 누구누구가 붙잡혀 갔다’는 얘기도 은밀하게 했습니다.”
어려서 받은 차별이 어머니 탓이었다는 걸 알자 원망하는 마음이 생겼다. “일본에서 어떻게 왔느냐?”고 물으니 어머니는 입을 딱 닫고 대답하지 않았다. 스트레스가 쌓이니 몸에 탈이 왔다. 유아 류머티즘 관절염이었다. 계속 열이 나면 이불을 뒤집어쓰고 말없이 며칠을 앓았다. 16세 무렵엔 증상이 심해져 7개월 동안 걷지도 못할 정도였다. 사춘기를 보내며 어머니하고는 점점 소통을 안 했고 ‘아버지 딸’로 살았던 이유다.
대학 진학도 사연이 많다. 북한은 9월 학기제. 김정일 생일(2월 16일) 행사가 끝나면 시험을 보고, 구역별로 개인 등수를 매긴다. 14등까지는 김일성대·김책공대 등 중앙대학 진학, 그 뒤로는 석차에 따라 일반 대학, 지방대학, 전문학교 등으로 배정하는 식이다. 물론 석차대로 이뤄지는 법은 없다. 당 간부, 돈주 등 힘 있고 돈 있는 사람들이 ‘사업’을 해서 등위를 조작하기 때문이다.
“제가 중앙대학에 갈 수 있는 등수에 들어간 거예요. 그런데 갈 수 없다는 걸 알았죠. 제가 중3 때 청진에 물리 전문학교가 생겼습니다. 원자력발전소 요원 양성 학교였죠. 졸업하면 거의 다 소련 유학을 갔습니다. 거기 교원들이 와서 학교 성적을 보고 예비 입학생을 뽑아 시험을 치거든요. 청진에 가서 두 번 시험을 쳤는데 제 가족 상황을 안 다음부터는 찾지 않더라고요.”
동요계층 귀국자를 공부하라고 외국으로 보내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깨달음
대학 진학을 준비하던 무렵, 하느님 같은 존재였던 아버지가 오토바이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17세 나던 해 5월 5일이었다. 1차 대학, 2차 대학 합격통지서도 오지 않았다. 성적으로 보자면 당연히 와야 하는데 오지 않았다. 갑자기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 전까지는 제 눈앞의 개별적인 사람들을 미워했었죠. 사로청(사회주의로동청년동맹·현재는 김일성김정일주의청년동맹) 지도원도 밉고 교사도 밉고…. 그러다가 ‘어쩌면 북한이라는 곳의 정책이 이럴 수 있겠다, 이건 내 개인의 문제가 아니구나’라는 깨달음이 왔습니다. 돌아가는 상황을 다 이해하니까, 한 사람 한 사람을 증오하던 마음이 다 없어졌어요. 눈앞에 보이는 사람을 증오하고 미워하며 산다는 건 굉장한 스트레스입니다. 특히 어린 마음엔 더하죠. 한국에서는 누가 미우면 전학이나 이사를 가면 되는데, 북한은 그게 안 되잖아요. 그래서 스트레스가 극심했는데, 한순간에 제 내면(內面)의 어딘가가 뻥 뚫리면서 ‘이 사람들에겐 죄가 없구나, 이 나라의 어딘가가 잘못됐지 이 사람들 잘못은 아니구나’라고 마음을 정리했습니다.”
대학을 안 가고 집단 배치받아 노동자로 나가겠다고 생각했는데, 담임 선생님이 입학통지서를 가지고 왔다. “대학에 가서 네가 찾지 못한 답을 찾아보라”는 말씀에 마음이 흔들렸다. 결과는 불합격. 신체검사에서 떨어졌다. 당시 몸무게가 37kg으로, 합격 체중 38kg에 못 미쳤기 때문이다. 필기시험에는 붙었지만, ‘튼튼한 몸으로 나라에 이바지할’ 능력이 모자란다고 했다. 간염으로 1500m 오래 달리기도 완주하지 못했고 수류탄 던지기도 못 했으니 할 말이 없었다.
그래도 다른 대학에 자리가 났다. 기술대학이라 여학생들이 지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일 힘든 데가 어디냐”고 물었더니 전기기계공학과라고 했다. 전기도, 기계공학도 다 공부해야 한다고 했다. 21명 중 여학생은 리소라 혼자였다.
“교단에서 거짓말하기는 싫었다”
9월에 대학에 입학하니 11월에 평양으로 가라고 했다. 공부가 아니라 건설 사업장 동원이었다. 평창구역 광복거리 쑥섬 제방 건설에 모든 학생이 참여했다. 1980년대는 문수거리, 통일거리 등 각종 건설 사업에 김정일이 북한 전역의 대학생들을 대거 동원하던 시절이다. 북한은 대학생들을 혁명을 위한 미래의 간부로 양성한다. 그래서 건설 현장에서 단련시키는 것이다. 건설 동원이 전부가 아니다. ‘교도대(敎導隊)’라는 준(準)군사조직의 훈련에도 참가해야 한다. 교도대는 겨울기(期)가 있고 여름기(期)가 있다. 훈련기간은 6개월이다. 모든 대학생의 의무다.
“2학년 때도 평양 건설 현장에 나갔다가 집에 와서 3일 지내고 바로 평양교도대로 나갔습니다. 제 보직은 85mm 고사포 3번수였어요. 적 비행기가 날아오면 그걸 보고 조준수한테 알려주는 역할입니다. 훈련을 겨울에 했는데, 지내기가 보통 일이 아니었어요. 목욕탕이 없으니까 이랑 벌레가 나왔어요. 한 달 후부터는 쌀도 안 줬습니다. 아침에 강냉이 20알 주면서 이게 한 끼 식량이고 반찬은 알아서 자체적으로 해결하래요. 실전(實戰) 훈련이라는 겁니다.”
대학 성적은 좋았다. ‘도면(圖面) 그리기의 여왕’이라고 불렸다. 1992년 졸업 후, 교원이 되고 싶었지만 현장으로 갔다.
“대학에서 연구원으로 남으라고 했지만, 교단에서 거짓말하기는 싫었습니다. 북한에서는 전문직 수업, 그러니까 전자기 이론을 가르칠 때도 ‘위대한 수령 김일성 원수님께서 지도하시기를’이라고 시작해야 하거든요.”
자살은 ‘공화국 낙원을 배신’하는 중대범죄

▲북송선을 탄 재일동포들이 일본 니가타항의 길에 평양을 상징하는 버드나무를 심어 버드나무길을 조성했다는 일본 신문 기사(왼쪽). 이때 심은 236그루 가운데 83그루가 살아남았다. 일본으로 돌아온 북송동포들은 북송동포들이 무사 귀환할 때까지 그들을 잊지 말자며 ‘버드나무길 재건’을 추진하고 있다(오른쪽). 사진=리소라
대학 수업과정을 마치면 3대 혁명소조에 나가 3년 동안 현장을 체험해야 한다. 그래야 졸업을 할 수 있다. 1994년 7월 김일성이 죽었다는 소식도 3대 혁명소조 파견 중 접했다. 아침에 운동회를 하고 점심밥을 먹으려는데 특별방송이 나왔다. 상복(喪服) 대용으로 두꺼운 겨울옷을 한여름에 꺼내 입고 추모장을 만들고 경비를 서다 여러 사람이 까무러쳤다. 3대 혁명소조 파견을 마치면 직장 배치다.
중앙당에서 온 사람이 문건을 살펴봤다. 삼촌 이내 친척 중에 노동당원이 없으니 이 대학에 들어올 성분이 아니라고 했다. 그것이 전기기계 공장이 아니라 조그만 부품 공장 설계원으로 배치받은 까닭이다. 설계실장이 갑자기 ‘내일부터 출근하지 말라’고 했다. 한번 배치받으면 여간해서는 직장을 옮길 수 없는 곳이 북한이다.
‘해고’라는 건 이례적인 조치였다. 공장이 군수품(軍需品) 공장으로 전환, 김정일의 현지 지도를 받은 것이 배경이었다. 핵심 설계부서에 위험인물이 근무하면 안 된다는 이유였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살 충동이 일었다. 북한에선 자살을 ‘공화국 낙원을 배신’한 중대범죄로 다스린다. 본인이 아니라 자살자의 가족 전체가 처벌받는다.
“내가 ‘너희 같은 인간들 손에는 죽지 않을 것’이라고 결심했거든요. 대학 때도 두어 번 목숨을 잃을 뻔한 위기를 다 넘겼어요. 그런데 그때는 정말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거리에 조금씩 시체가 나오기 시작하는 등, 고난의 행군 도중이라 제가 자살한다고 해도 가족들이 당하지는 않겠다고 생각했죠.”
富者 시아버지
어떻게 하면 자연스럽게 죽을까, 자동차 사고나 기차 사고를 당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지금의 시아버지가 갑자기 ‘며느리 삼겠다’며 집으로 찾아왔다. 귀중품인 ‘초콜릿 한 판’을 들고서였다. 시댁은 소문난 부잣집으로, 롱밴 자동차와 선전대 차 두 대를 보유한 북송동포였다. 그는 “내가 왜 우리 아버지나 형제가 일본에서 피땀 흘려 번 돈으로 간부들에게 뇌물을 고이며 비굴하게 살아야 하나. 가난하게 살더라도, 차라리 너처럼 당당하게 사는 것이 부럽다”고 했다. ‘천대받지 않고 부유하게 사는 사람한테도 내가 알지 못하는 삶의 고통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제안에 응했다. 시아버지는 부자인 친구들이 “왜 그런 며느리를 얻느냐”며 핀잔을 주자 “내 며느리 욕하지 말라”며 싸움도 마다하지 않을 만큼 리소라를 아꼈다.
결혼 몇 년 후, 시댁의 가세가 급격하게 기울었다. 시아버지가 심장마비로 돌아가시고 일본에 계시는 시할아버지도 암으로 사망했다. 하루아침에 송금이 끊긴 것이다. 살림 규모를 줄이지 못하는 가족들은 빚을 내서 살았다. 가구를 내다 파는 등 뒷수습을 하다가 다시 병이 찾아왔다. 그래서 분가(分家)를 하고 장사를 시작했다.
“나진 선봉에서 담배를 가져다 팔았는데 안전원들이 자꾸 물건을 압수하고…. 다른 사람은 뒤로 다 물건을 찾아오는데, 저는 아무리 뇌물을 써도 귀국자(북송동포)라고 물건을 안 돌려주는 겁니다. 그러다가 2003년 겨울에 우리 아들이 영양실조로 죽게 됐어요. 물을 한 모금 먹이니까 5분 안에 항문으로 다 나오더군요. 설사도 하고요. 내장이 완전히 기능을 멈춘 거죠.”
‘내가 도대체 무슨 죄를 지어서 이 땅이 나를 이렇게까지 핍박하는가.’ 자신이 당하는 건 견딜 수 있었지만, 자식이 죽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그날 저녁 독하게 결심했다. ‘내 앞을 가로막는 자는 누구든 죽이리라.’
장사로 성공하다
사람이 죽어 나가도 다 거두지 못해 들개가 시신을 뜯어 먹던 시절이다. 동창들에게 연락하니 요직에 있는 사람이 많았다. ‘유일한 여학생’이라 자기가 누구라는 긴 설명은 필요 없었다.
탄광 수출 당비서에게는 열탄(熱炭), 수산사업소 고위직으로부터는 낙지(오징어)를 받아다 팔았다. 처음엔 도매상에게 넘겼고, 장사가 손에 익은 뒤엔 이문을 더 남기기 위해 연탄을 직접 찍어 팔기도 했다. 나중에는 밀무역까지 하며 규모를 키웠다. 막판엔 평양 수매양정국까지 선이 닿았다. 개선문 앞에 청사가 있는 힘센 기관이다. ‘기회만 차려주면 하겠다’ 대답하고 유엔이 지원한 쌀을 취급했다. 현품이 아니고 ‘증서’를 팔았다. 증서 보유자가 쌀 창고 앞에 가서 현품으로 교환해가는 거래였다. 석탄은 가끔 다 팔리지 않았지만, 쌀은 늘 완판이었다. 언제 다음 지원이 나올지 모르니, 물건이 나오는 족족 무조건 다 팔렸다.
“그때 북한에서는 1만 엔이면 네 식구 1년 쌀값이었어요. 그런데 저는 한 달에 300달러를 생활비로 썼습니다. 세대주(남편)한테 아사히 맥주, 기린 맥주 사드리고 출근할 때 아침마다 고양이 담배 넣어주고 일본 원단으로 옷도 해 입혔죠. 그러다 보니까 우리 가족 네 명이 평생 살려면 얼마가 필요할까, 계산이 나오더군요. 목표가 생기니까 막 달렸습니다. 평양에 직접 가서 전표를 받아오고, 밥가마(밥솥) 뇌물로 돌리면서 간부 사모님들 공략하고…. 거래량을 확 늘렸습니다. 탈북 직전에는 저랑 일하는 분들이 전국 쌀 가격을 낮췄다 올렸다 할 정도였어요.”
중앙당 중앙행정국, 정무원에 손을 써서 남편 직장도 바꿨다. 평양 모 기관에 간부로 갔다. 아이들에게는 예술을 시켰다. 평양 만경대에서 TV 출연도 시켰다. 지방과 평양에서 큰 집도 샀다. 그동안 괴롭혔던 자들에게 복수하는 기분이었다. ‘이렇게 잘살아서 너희를 내 발밑에 앉힐 것이다’라는 심정이었다.
“또 하나, 북한이 어디로 가는지를 꼭 보고 싶었어요. 어디까지 거짓말을 하고, 사람을 얼마나 더 죽이며 유지할 수 있는지, 그 끝을 보고 싶었습니다.”
마약에 중독된 사회

▲2021년 12월 14일 북송 사업 개시 62주년을 맞아 니가타항에서는 조총련을 규탄하고 희생된 북송동포들의 넋을 달래는 행사가 열렸다. 사진=리소라
탈북 결심은 우연한 기회에 했다. 옆집 아들이 마약에 중독됐다. 부모를 피투성이가 되도록 폭행하는 일이 이어졌다. 어른들이 약을 쓰는 건 알고 있었지만, 아이들까지 빙두(氷豆)를 한다는 건 충격이었다.
“고등중학교 5학년생이니까 16세? 또래 친구 중에 한 집 부모가 그런 약을 쓰면 같이 다니는 아이들이 다 중독이 된다고 하더군요. 호기심에도 하고, 여자아이들도 다이어트한다고 피부 새하얘진다고 마약을 쓰고, 시험 기간에 빙두를 하면 잠도 안 오고 공부가 잘된다고 먹고….”
생각보다 마약이 아주 가까이 와 있었다. 평양은 마약이 범람하는 도시였다. 특권층만 다닌다는 만경대 학생궁전도 예외가 아니었다. 돈 있고 권력 있는 집 아이들은 거의 100% 마약에 절어 있었다. 아이들이 마약을 공급해 교사 중에도 중독자가 많았다. 리소라의 자녀들이 중독자가 되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마약 청정 구역을 찾아 이사하려고 했는데, 그런 곳은 없었다. 사리원도, 해주도, 개성도, 북쪽 청진, 김책도, 주변 시골 마을에도 마약이 넘쳐흘렀다. 사람들은 마약을 에너지 드링크처럼, 가정상비약처럼, 마치 한국에서 커피를 마시듯 널리 사용하고 있었다. 마약을 피하는 길은 탈북밖에는 없었다.
“남편한테 이야기했죠. ‘이 나라에 우리가 살 곳이 없다. 아이들 때문에 내가 사는데, 우리 아이들이 마약 중독되는 건 못 보겠다. 마약 하나만 보더라도 북한에는 미래가 없다. 가야 되겠다.’”
남편은 못 간다, 가지 말자고 했다. 석 달 뒤면 간부로 발령 날 것이라는 기대도 있었다. 다른 사람은 중국을 오가며 밀무역을 했지만, 리소라는 그 전까지는 중국 쪽으로 넘어간 적이 없었다. 토대가 나빠 시범 케이스로 걸릴 수도 있고, 처벌도 심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2007년 2월에 강을 건넜습니다. 2월 16일 김정일 생일 전후가 특별경비 주간이거든요. 기다렸다가 월말에 중국으로 갔어요.”
뒤늦게 들은 어머니 탈북 소식
중국 측 사업파트너가 아지트를 마련해줬다. 시내에 나가서 도서관에 들러 한국 신문, 잡지를 다 거둬 왔다. 기사를 읽는데 많이 낯설었다. ‘일본으로 가야 하나?’는 생각을 했다. 어머니 때문이다. 어머니는 2004년에 탈북했고, 리소라는 어머니의 일본행 소식을 2006년에야 처음 들었다.
“어머니가 말도 없이 2004년에 없어졌는데, 저는 몰랐죠. 제 생활도 바빴으니까. 그래서 오빠네 집에 같이 있겠지 했는데, 남편 간부 사업 당시 알았어요, 어머니가 탈북했다고. 그래서 처음엔 ‘어머니는 내 인생에 도움이 안 되는 사람’이라고 마구 성을 냈는데, 오빠가 저를 말리더라고요. 자기가 가라고 했다고. ‘그러다가 오빠가 단련대 잡혀가면 어떻게 하려고 하느냐, 우리가 받을 피해는 생각 안 해봤냐?’고 하니까 ‘야, 어머니가 17세에 부모 형제하고 갈라져서 죽을 때까지 서로 못 본다는 게 말이 되느냐? 그래서 방법만 있으면 가라고 했다’고 하더군요. 집에 와서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이해가 갔습니다.”
처음엔 스위스로 가려고 했다. 함남도·평북도·자강도 사이 방목지에서 염소를 키우는 프로젝트가 있었다. 인민에게 우유를 먹이려는 당의 배려라고 했다. 물론 실패했다. 방목지를 조성하다 사람도 많이 죽었다. 리소라도 죽을 뻔했다. 직장에서 노동 파견을 나갔던 길이었다. 산이 험한 곳이라 도로 사정이 열악해 차가 전복(顚覆) 됐다. 같은 차에 타고 있던 절친한 동무 둘이 사망했고, 리소라는 겨우 목숨을 건졌다. 사고는 수시로 일어났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인민들이 이렇게 희생하는데, 관리인들은 염소를 빼돌려 고기로 팔기도 했다. 스위스가 선진국이라는 걸 알았지만, 왜 북한과 이런 식으로 참담한 일을 추진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일을 알리고 막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탈북 후 행선지를 스위스로 정하고 아이들을 데리러 다시 북한으로 들어갔죠.”
남편을 설득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12월에 탈북을 결행한 이유다. 12월은 사실 탈북 적기가 아니다. 국경연선에서 동계 훈련에 들어가 경비가 심해지기 때문이다.
“10월에 남편이 ‘가자’고 해서 일단 저 혼자 국경연선으로 갔습니다. 아이들이 그쪽에서 태어났다는 가짜 출생증을 만들었어요. 그게 없으면 북중 접경지대로 이동이 불가능하니까요.”
돈을 써서 사람을 시켜 아이들을 데리고 왔다. 아이들한테는 “중국에 있는 외할머니를 만나러 간다”라고 거짓말을 했다. 아이들 학교에는 “식구들 전부 평양으로 이사 간다”고 했다. 갑자기 없어지더라도 의심을 사지 않으려는 준비였다. 그다음에 남편이 와야 하는데, 기업소 행사가 겹쳐 출발을 못 했다.
남편과의 이별
2007년엔 동계 훈련 시작 지시가 일찍 떨어졌다. 더 기다릴 수가 없었다. 일단 아이들과 먼저 강을 건너고, 남편은 나중에 오기로 했다. 날짜를 정확하게 기억한다. 2007년 12월 13일. 아이들은 12세, 9세였다. 중국 사업 파트너들이 고무보트를 가지고 나와 줄을 당겨 탈북을 도와줬다.
“다음 날 아침 혜산(惠山) 쪽을 보는데 눈물이 펑펑 쏟아졌어요. 내가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살 수 없을 만큼 저 땅이 나를 핍박했구나. 원망스러웠죠.”
대학 졸업할 때까지만 해도 뭔가 제도가 이상하다는 건 느꼈지만, 원망은 없었다. ‘위에서도 노력하는데, 잘 안 되는 것이겠지. 나도 이 나라의 한 성원으로 사회를 위해서 열심히 살면서 기여하리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리 살아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강물에 신분증을 던졌다. ‘북에서 받은 이름을 버리고 새 삶을 살겠다’는 결의였다. 남편을 기다리면서 일본영사관에 전화를 했다. 스위스대사관은 번호를 몰랐고, 한국과 일본의 영사관 번호는 중국 사람이 알려줬다. 일본에 연고자가 있느냐고 묻기에 그렇다고 했다. 모처로 오라기에 “제가 남편을 기다려야 되니까 남편이 오면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라고 답했다.
며칠을 기다리는데 사고가 났다. 아지트가 발각된 것이다. 리소라에게 현금이 많을 것이라고 짐작한 사람들이 벌인 소동이 문제였다. 돈을 받고 강을 건너게 해준 북한 군인 사이에 싸움이 나서 서로 총질할 정도였다. 20일쯤 다른 곳에서 숨어 지내는데, 남편이 붙잡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아이들을 맡겨두고 북으로 다시 가려고 했는데 국경연선의 브로커가 절대로 나오면 안 된다고 말렸다. 그랬다가는 남편도, 아이들도, 리소라도 다 죽는다는 얘기였다. 그때 이후로 오늘까지 남편을 본 일이 없다. 아이들이냐 남편이냐 사이에서 아이들을 택해 남편을 사지(死地)로 몰아넣었다는 죄책감이 지금도 남아 있다. 납덩어리처럼 무거운 무언가가 없어지지 않는다.
탈출극
“중국으로 북한 보위부가 들어왔어요, 저희를 잡으려고. 저한테 연락해준 분은 어디 대사관에 가든 다른 데 가든 빨리 중국을 뜨라고 했습니다.”
심야에 쳐들어온 체포조를 피해 옆집을 거쳐 잠옷 바람으로 도망쳤다. 택시를 잡아 타고 “사람이 많은 데로 갑시다”라고 했다. 백화점에 들어가 사람들 사이에 섞였는데 보위부 사람들이 포위망을 좁혀왔다. 여행용 트렁크를 파는 매장에 몸이 건장한 중국 남자 여럿이 보였다. 그 사람들한테 100위안짜리 중국 돈 한 장씩을 주고 ‘경호’를 부탁했다. 15명의 중국 남자가 리소라의 가족을 에워쌌다. 더 많은 숫자의 보위부원이 성난 얼굴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탈북할 때 극한 상황에 대비해서 극약을 챙겨 갔었어요. 아이들 먼저 먹이고 나도 먹자라고 결심하고 약을 꺼냈는데, 아이들도 지금 상황이 급박한 걸 아는지 눈을 크게 뜨고 저를 보더군요.”
막 약을 먹이려는데 휴대폰으로 전화가 왔다. 어머니였다. “베이징에 있는 일본대사관으로 가면 받아줄 거다”는 전갈이었다. 리소라는 중국에 숨어 있는 동안 위급 상황에 따른 대책을 세워놨다. ‘돈의 힘’으로 만든 비상연락망이었다. 택시기사가 백화점 밖에 차를 대놓고 기다리겠다고 했다. 그런데 백화점 정문까지 어떻게 가나. 보위부 사람들이 얼굴이 다 보일 정도로 포위망을 좁혀왔다. 중국 ‘경호원’들의 활약으로 몸싸움 끝에 택시에 탑승. 택시 뒤로 차 두 대가 따라왔다. 택시기사가 ‘이대로 가면 잡힌다’며 자기 집 근처 복잡한 골목 안으로 차를 몰았다. 동료 기사들에게 연락해 미행자의 위치를 파악하고, 차를 바꿔 타며 겨우 위험지역에서 벗어났다. 리소라와 아이들은 우여곡절(迂餘曲折) 끝에 미리 대기시켜둔 장거리 이동차에 탑승, 베이징까지 갈 수 있었다.
‘괴물의 나라’로

▲2021년 12월 14일 니가타항에서 열린 북송동포 위령행사에서 발언하는 리소라 씨. 사진=리소라
“베이징의 일본대사관에 들어서자마자 온몸의 힘이 다 풀렸어요. 탈출 과정도 긴박했고, 남편이랑 아이들 때문에 거의 잠을 못 잤으니까요. 열흘 남짓 밥도 안 먹고 계속 자기만 했습니다.”
일본대사관에서 의사를 불러줬다. 그곳에서 10월 말까지 지냈다. 일본 정부는 탈북자들에게 엄격했다. 북송선을 탔다는 증거가 있거나 일본에 확실한 연고가 있는 사람만 입국을 허락했다. 리소라 가족은 운이 좋았다. 2008년 쓰촨 대지진 때 일본에서 지원을 많이 했다. 덕분에 문제를 풀기가 수월했다. 아이들이 영양실조라는 사정까지 겹쳐 인도주의적으로도 지원을 받았다. 조기(早期) 일본행이 가능했던 배경이다.
“일본대사관에서 아이들이 발작을 일으켰습니다. 일본에 간다니까 난리가 났죠. 아이들한테는 일본은 ‘괴물의 나라’였으니까요. 무서웠던 겁니다. 북한에서 받았던 반일(反日) 교육의 결과인데, 이걸 12세짜리한테 어떻게 설명합니까. 마지막에 너무 말을 안 들어서 제가 딸을 때렸어요. 대사관 분들이 아동 학대라면서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아들은 어리니까 제 말을 잘 듣는데, 딸은 사정도 모르면서 ‘일본에 가지 않을 테니 도로 북한으로 보내달라’고 했습니다.”
이 문제는 외할머니가 보내준 디즈니 DVD가 해결했다. ‘만화 속의 일본어 더빙’을 따라 하며 아이들의 일본어 실력이 일취월장(日就月將)했다. 대사관 직원들의 친절도 아이들의 마음을 여는 데 일조했다. 24시간 전기가 들어오고 물이 나오고, 문명 생활도 아이들이 좋아한 부분이다. 일본 교과서를 달라고 해서 45분 수업, 10분 휴식 시간표를 만들어 아이들과 일본어를 공부하고, 은혜를 갚는다는 심정으로 대사관 안을 청소했다.
청소부 등으로 일하다가 대학 진학
도쿄에 도착하니 공항에 어머니가 나와 있었다. 어머니의 이웃들은 탈북민의 공중도덕 수준을 견디지 못했다. 그래서 첫 숙소는 노숙자 쉼터, 가정폭력 피난처였다. 보증금이 없으니 집을 빌릴 수도 없었고, 돈이 있다 해도 탈북자들의 경우 부동산들이 중개를 꺼려 했다. 법을 아는 이에게 도움을 구하니 ‘생활보호신청을 하라’고 했다. 이에 10평 남짓한 집이 배정돼 세 식구의 보금자리가 됐다. 첫 직업은 호텔 방 청소였다.
“제가 일본으로 간 목적은 ‘북송사업이라는 게 도대체 뭐기에 나를 이렇게 괴롭혔나?’ 그걸 알아보자는 것이었어요. 북한에서는 신문이고 뉴스고 다 거짓말만 하잖아요. 그러니까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일본어도 공부하고, 돈도 벌고 일본 사회에 대해 빨리 알고 싶었습니다.”
8개월을 열심히 일했는데 근무 중에 정신을 잃었다. 북한에서 당한 교통사고 후유증이었다. 직장을 옮기고, 더 늦으면 곤란할 것 같아 야간 중고등학교를 거쳐 호세이대학(法政大學)에서 법률을 전공했다. 일본에선 북한 학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학비는 자체 부담이었다. 사이버대학 야간학부에 등록하면 학비를 3분의 1로 깎아줬다. 등록금은 일 년에 60만 엔 정도. 중간에 돈이 없어 휴학하고 마트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비를 버느라 졸업하기까지는 6년이 걸렸다. 그 와중에 아이들도 모두 대학에 보냈다. 지금은 국숫집을 운영하며 ‘모두 모이자’라는 북한 인권단체에서 활동하고 있다. 법을 전공한 건 원대한 목표가 있어서였다.
“일본에 오니까 법치국가(法治國家)라는 말이 자꾸 들렸습니다. 법을 기준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이 사회 질서를 유지한다고 해요. 북한에서는 법률 문건 자체가 기밀문서죠. 일반 사람이 접하면 안 됩니다. 그러다 보니 일반 사람은 법 지식이라는 것이 없어요. 그래서 법을 공부했습니다. 북송사업의 부당성을 알리려면, 법적으로 문제 제기를 하는 것이 꼭 필요하겠다고 판단한 것도 이유입니다.”
日 법원, ‘거짓 선전은 위법’
대학에 다니는 도중, 국회도서관에 가서 재일동포 북송에 대한 자료를 모았다. 북송사업 인권 문제 해결을 위한 시민단체에서도 일했는데, 국제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려면 영어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딸을 미국으로 유학 보낸 이유다.
최근 활동은 북송사업의 죗값을 묻는 소송. 일본으로 돌아온 북송동포 5명을 원고(原告)로, 일본 정부와 김정은을 피고(被告)로 했다. 한 사람당 1억 엔의 보상을 요구했다.
― 금년 3월 23일 판결이 났죠? 국내 언론에서는 기각(棄却)되었다고 보도되었습니다.
“대체로 그렇게 아시는데 판결문을 보면 의미 있는 대목이 적지 않습니다. 저희가 바라던 중요한 부분을 판결문에서 거의 다 인정했어요. 핵심은 북송사업이 북한과 조총련 등 단체에 의해 거짓 선전으로 진행된 일이라는 거죠. 피해보상에 관한 부분은 시효(時效)가 지나 인정할 수 없다고 했지만, 북송사업 자체가 잘못된 일이라는 것을 법적으로 확인한 겁니다.”
그동안 한일 양국 국민 가운데는 ‘북송동포들이 자발적으로 배에 오른 것 아니냐, 북한 도착 후의 인권 유린은 심각했지만, 선택 자체는 자발적’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번 판결문은 ‘거짓 선전이 있었고 그 부분은 확실히 법률 위반’이라고 확정했다는 의미가 있다.
1945년 8월 15일 당시, 230만~240만 정도의 재일동포가 일본에 거주하고 있었다. 귀국선을 타고 상당수가 고향으로 돌아왔고, 1959년 12월 북송사업을 시작할 무렵엔 60만 정도만 남아 있었다. 일본 정부는 재일동포들의 범죄율이 높고, 사회보장으로 살아가는 비율도 많은 부담스러운 존재로 여겼다. 일본 정부가 볼 때, 재일동포들은 일본 사회의 잠재적인 위험군(危險群)이었다. 생활보호 대상자 비율도 일본인의 약 8배였고 사회주의 성향도 강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중 6분의 1 정도를 일본 밖으로 내보내려는 계획을 세웠다. 북한은 전후 복구를 위한 노동력이 필요했다. 일본과 북한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지점이다. 정식 국교가 없으니 일본 적십자와 북한 적십자가 연대해 일을 진행했다. 이것이 이른바 북송사업(北送事業)의 전말(顚末)이다.
일본 법원은 이번 판결문을 통해 ‘북송사업 과정에서 고의(故意)로, 거짓 선전한 증거가 있으며 이것은 죄’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 판결문에 따르면, 북송동포들은 자기가 좋아서 자발적으로 간 사람들이 아니라 일본과 북한 당국에 의해 속아서 북으로 건너간 것이 된다.
일본 적십자사의 무신경

▲리소라 씨는 북송동포 관련 NGO 모두모이자 등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도쿄에 있는 조총련 본부 앞에서 조총련 규탄 행사를 하는 모두모이자 회원들. 사진=리소라
― 앞으로 어떤 일을 할 계획입니까.
“고등법원 항소(抗訴)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3월 23일에 판결이 나고 4월 3일에 변호인단과 원고들이 기자회견을 했죠. 지금 당장은 북한 인권 시민운동에 큰 성과가 없지만, 한 걸음이라도 계속 전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저희 재판을 통해 세계 어딘가에서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인권 침해 사례를 환기하는 것도 의미가 있고요. 시간이 흘러도 잘못된 일을 한 가해자는 언젠가는 반드시 처벌을 받고, 피해자는 보상을 받는다는 원칙을 세우고 싶습니다.”
일본 적십자사 역사관에 북송선 사진이 아직까지 걸려 있는 일도 가슴 아프다. 일본 적십자사는 9만3000여 명을 북송하고 수십만의 이산가족을 만든 주체다. 이산가족을 만든 일 자체가 적십자 정신 위반이다. 그런데 기념관에 커다란 북송선 사진이라니! 이것은 아직도 일본 적십자사가 재일동포 북송이 ‘기념할 만한 잘한 일’이라고 평가한다는 증거가 아닐 수 없다. 아니면 아예 무신경한 것이든가.
“일본 적십자사는 북송동포들의 운명을 망친 단체입니다. 그 사람들이 북한에 가서 그렇게 고생하고, 인권침해 사례를 지속적으로 호소하는데도 북송선 사진을 방치하고 있다니요? 언어도단(言語道斷)입니다. 제 부모님은 북송사업으로 청춘과 인생을 다 빼앗겼습니다. 젊음과 인생이 되돌아오는 건 물론 아니지만, 그래도 그분들의 빼앗긴 삶을 조금이라도 보상받을 수 있게 하고 싶습니다. 앞으로 이 일의 전후좌우(前後左右)를 역사의 기록으로 남기고, 죄가 있는 사람은 처벌하는 일을 할 것입니다.”
“남편에게 아이들 모습 보여주고 싶어”
북송동포 9만3340명의 이름을 모두 새긴 비석 건립도 추진 중이다. 명단은 어딘가에 분명히 있다. 일본 출입국관리소가 명단을 가지고 있고, 일본 적십자사도 북송 신청서를 보관하고 있을 것이다. 일본 적십자사는 ‘개인정보보호법’ 때문에 명단을 줄 수 없다고 했다. 지금 살아 있는 고령자들을 구출하고, 이산가족을 만나게 하려면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 절박한 문제다. 그래서 일본 적십자사에 다시 요청했다. 당신들이 확보한 명단을 가지고 북한 적십자사에 이 사람들의 생사를 확인해달라고. 일본 적십자사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서 리소라 씨는 재일동포 북송연구회라는 단체를 새로 만들어 이 일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려고 하고 있다.
“그분들이 어디에서 고문당했고 어떻게 죽었는지, 그걸 다 밝혀내서 자료로 남겨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리소라 씨에게는 지금까지도 가슴 아픈 일이 있다. 생사를 모르는 남편과 북한에 남아 있는 형제의 일이다.
“남편은 아이들이 자라는 모습을 보지 못했습니다. 저희 딸이 내년이면 대학을 졸업하는데, 장차 결혼식장에 제가 혼자 앉아 있을 걸 상상하면 가슴이 먹먹합니다. 꼭 살아서 남편에게 아이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며 하루하루를 버팁니다. 정의(正義) 실현을 갈망하는 모든 분에게 부탁드립니다. 부디 북송동포들을 잊지 말아 주십시오.”⊙
글 : 장원재 배나TV 대표
◆10.31 "통일, 북한 주민의 인권 되찾아주는 것"
한국, 4년만에 유엔서 북 인권 제기
외부의 관심과 압력이 인권의 동력
정권·정세와 무관한 가치로 다뤄야
"수용소 얘기를 안 믿는 분들이 많아 놀랐어요. 정치범 수용소, 북한 사회의 공포, 현실입니다. 단, 아이들을 노역에 동원한다는 얘긴 과장됐어요. 남이든 북이든 애들은 귀하게 여기잖아요." 함경북도 청진에서 철학 교수로 일하다 아들을 데리고 탈북한 여성에게서 들은 얘기다. 남편은 사회 저항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수용소로 끌려갔고, 힘깨나 쓰는 친정을 둔 그는 이혼하면서 수용소행을 면했다고 했다.
영생의 권력을 추구하는 독재 정권은 강압 통치와 인권 탄압을 하게 마련이다. 그래야 정권이 유지된다. 북한은 지난해 말, 한국 영상물을 유포하고 시청한 사람에게 각각 사형과 최대 15년형에 처하는 '반동사상 문화 배격법'을 만들고, 방역을 이유로 국경을 오가는 주민에 대한 총살령을 내렸다.
정부는 국제무대에서 이뤄지는 북한 인권 문제 논의에 적극 관여한다. 문재인 정부가 '남북 관계 영향'을 이유로 보였던 퇴행의 정상화 조치다. 이신화 북한 인권 국제 협력 대사(5년간 공석이었다)는 지난주 유엔에서 북한군이 서해에서 공무원 이대준씨를 살해한 사건을 개탄하고, 2015~17년처럼 유엔 안보리에서 북한 인권을 논의할 것을 촉구했다. 앞서 황준국 유엔 대사도 여성들이 탈북 과정에서 겪는 인신매매와 강제 송환, 고문 등 인권 유린을 강하게 제기했다. 무엇보다 유럽연합(EU)이 준비 중인 유엔 북한인권결의안 공동제안국에 이름을 올린다. 4년 만이다.
윤석열 정부의 국정 기조인 '가치 외교'의 실행이란 측면이 크다. 하지만 애초 북한 인권 문제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라는 원칙 아래 정권의 성격이나 정세와 무관하게 일관성 있게 제기했어야 할 이슈다. '진보 정권'은 유독 북한 인권에 눈을 감았다. 하긴 주민의 삶 대신 핵미사일 개발에 국가 자산을 쏟고 고모부와 형을 살해한 김정은을 "예의 바른 지도자" "계몽 군주"라 칭송한 이들 아닌가. 황준국 대사는 유엔에서 "강제송환 금지 원칙이 탈북자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돼야 함을 이웃국들에도 상기시키고 싶다"고 했다. 중국을 겨냥한 말일 텐데, 탈북 어민이 '흉악범'임을 내세워 눈을 가려 북송하고 북한군이 살해한 이대준씨에게 '월북' 프레임을 씌우고 피살 사실을 알고도 "계속 수색"을 지시한 게 한국 정부였다는 사실이 민망하다. 한국의 유엔 인권이사국 연임 실패를 두고 논란이 분분했는데, 토마스 킨타나 전 유엔 북한 인권특별보고관은 "북한 인권에 대한 문재인 정부의 입장이 이사회에서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고 했다.
군부독재를 겪으며 민주화를 스스로 이뤄낸, 어느 선진국에 뒤지지 않는 인권 감수성을 지닌 대한민국 국민은 외부의 관심과 압력이 그 사회의 민주주의와 인권 증진에 큰 동력임을 경험으로 안다. 전두환 신군부 때의 사례. 5·18 민주항쟁 후 신군부가 김대중에게 사형을 선고하자 미국은 강한 항의 성명을 수차례 발표하고 안보협력 철회까지 경고하며 김대중 석방·구명에 나섰다. "카터 행정부 말기 한·미 관계 최고 사안이었다. 레이건의 안보 보좌관 리처드 앨런은 '김대중을 처형하면 거북한 한·미 관계를 청산할 절호의 기회를 놓칠 것'이라고 했다. 이후 김대중을 살려주는 조건으로 전두환의 백악관 방문을 약속하는 안을 냈다."(돈 오버도퍼,『두 개의 한국(The Two Koreas)』). 1985년 10월 리처드 워커 주한 대사는 김근태에 대한 고문 증거를 입수한 뒤 한국 정부에 "용납할 수 없는 행위로, 이 사건이 한국을 계속 괴롭힐 것"이라며 경제 제재까지 거론했다.
탈북 외교관 태영호 의원은 2001년 5월 요란 페르손 스웨덴 총리가 EU 의장으로 방북했을 때 통역이었다. "페르손은 김정일에게 '핵문제가 해결돼도 인권 문제가 남는 한 북한의 국제사회 편입은 어렵다고 했다. 지원이 어렵다는 뜻. 이후 김정일은 '인권대화로 시간을 끌고 유럽을 속여 넘기라'는 외교 지침을 내렸다. 외국인에게 보여줄 법원·감옥을 만경대구역에 건설했고 전문가들을 유럽 인권 강습에 보냈다."(태영호, 『3층 서기실의 암호』) 변화의 틈이었다. 북한-EU간 인권대화 중단 이후 2003년부터 이어진 게 유엔 대북인권결의안이다. 태 의원은 통일을 '북한 주민에게 인간의 고유한 권리를 되찾아주는 것'이라 정의한다.
2014년 12월 유엔 안보리에서 오준 대사는 북한 인권 문제의 특별한 의미를 명연설로 남겼다. "대한민국 국민에게 북한 사람들은 그저 아무나(just anybodies)가 아닙니다. 수백만이 아직도 북한에 가족을 두고 있습니다. 북한에서 찍은 영상들을 볼 때마다 몸서리쳐집니다. 훗날 오늘을 되돌아볼 때 이들을 위해 올바른 일을 했다고 말할 수 있길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
중앙일보 김수정 논설위원
월간조선 11월 호
◆중국 정부의 탈북민 관리 정책 변화하나?
中, 탈북 여성들에게 임시거주증 발급
⊙ 버스나 택시는 탈 수 있어도 기차, 비행기는 못 타… 공안에 잡힌 후 임시거주증 제시하고 풀려나기도
⊙ “2020년 5월 이후 강제 북송 중지, 지린성 투먼 구류소엔 탈북민 100명 이상 갇혀 있어”
⊙ 탈북 여성들에게 임시거주증 발급하는 중국 정부, 결혼 적령기 한족 남성들 소요 우려?
⊙ “북한에 코로나19 환자 50만 명 이상 있다고… 지난해부터 북한 내 가족과 연락 끊겼다”

▲2022년 2월 11일 서울중앙우체국 앞에서 중국정부 탈북민 강제 북송 반대 기자회견이 열렸다. 사진=조선DB
“중국 사람들은 북한 여성들 성격이 안 좋다고 해요. 왜 그렇게 됐는데요. 신분이 없다고 학대를 받으니 그냥 당하면서 살 수는 없잖아요. 악을 쓰며 싸우느라 성격이 더 사나워졌어요.”
탈북 여성 A씨의 말이 이어졌다. 50세인 그는 2012년에 탈북해 10년째 중국에서 숨어 살고 있다.
“제 나라에서 사는 게 아니니 끽소리 한 번 못 내고 중국 공안이 트집 잡으면 잡는 대로 갖은 일을 당하면서 산다는 게 제일 억울해요. 신분증이 없으니 어디 갈 수도 없고 한국도 못 가니 학대받으면서 사는 탈북 여성이 많아요. 소원은 아프지 않고 사는 거예요.”
중국 내 탈북 여성 20만 명으로 추정

▲통일맘연합회는 2022년 7월 23일 태영호 의원실과 함께 탈북여성인권 증진 세미나를 열었다. 왼쪽부터 태영호 의원, 윤미라 통일맘 사무국장, 김정아 통일맘 대표, 김성민 자유북한방송 대표, 김희정 박사, 진미정 서울대 아동가정학과 교수. 사진=통일맘연합회
벌써 10년 넘게 그곳을 떠도는 이들이 있다. 중국을 떠도는 북한 주민들이다. 주로 여성들이다. 복합적인 이유가 있겠지만, 인신매매 시장에서 탈북 여성에 대한 수요가 압도적으로 높은 것도 이유 중 하나일 터다.
탈북 여성 중 다수가 중국에서 매매혼(賣買婚)을 당한다. 주로 중국 벽지(僻地)에 사는 한족(漢族) 남성들에게 팔려간다. 공안에 들키지 않고 숨어 살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이들의 숫자가 도대체 몇 명이나 되는지 한국 정부는 물론 중국 정부도 모른다. 20만 명이라고 추산하는 이들도 있다.
코로나19는 이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통일맘연합회는 지난 5월부터 6월에 걸쳐 중국 내 탈북 여성들을 심층 인터뷰했다. 이들을 통해 확인한 사실들을 중국 공안 관계자들의 증언과 비교, 분석했다. 공안은 한국으로 치면 경찰을 말한다.
통일맘연합회(이하 통일맘)는 탈북 여성과 그들의 자녀들을 돕는 모임이다. 특히 중국을 비롯한 타국에서 아이를 낳은 탈북 여성들을 지원한다. 현재 중국을 떠도는 이들이 겪고 있는 일들을 국제사회에 알리고 있다. 2018년부터는 실태 조사에 학문적 분석을 곁들인 보고서를 내고 있다. 코로나19 이전인 2019년엔 영국 의회와 미국 백악관을 찾아 탈북 여성 문제를 증언했다. 김정아(48) 통일맘 회장도 과거 매매혼을 통해 중국 남성과 가정을 이뤘다가 한국 입국에 성공한 경우다.
이번 조사를 위해 중국 내의 각기 다른 6개 지역에 거주 중인 탈북 여성 7명을 선정했다. 연령대는 40대와 50대에 걸쳐 있다. 탈북한 시점은 다양하다. 2012년에 탈북한 여성도 있고 2019년에 중국으로 넘어온 이도 있다. 7명 중 2명은 강제 북송된 후 재탈북했다.
이들의 증언을 통해 알게 된 건 크게 두 가지다.
첫째, 코로나19 기간 동안 탈북자들의 강제 북송이 중지됐다는 사실이다. 두 번째는 중국 정부의 탈북자 관리 정책 변화다.
탈북자 강제 북송은 2020년 5월 이후로 이뤄지지 않고 있는 걸로 파악됐다. 2020년 초부터 코로나19가 유행했다. 북한과 중국 사이의 국경도 전면 폐쇄됐다. 국경을 넘나들며 이뤄지던 밀수도 잠정 중단됐다. 북한 내부 증언에 따르면 북·중 국경 지역에서 북송되어 기초조사를 받는 탈북민을 2020년부터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양강도 혜산시의 경우 2020년 1월 초가 마지막이었다. 그 전에 북송되어 들어온 탈북자들에 대한 조사도 2020년 5월에 마무리됐다고 한다. 중국 전체로 봐도 2020년 5월에 이뤄진 강제 북송이 근래 마지막 북송이었다.
이는 북한 측의 요청 때문이었다. 2020년 5월경 북한 측은 중국에 탈북민들을 보내지 말라고 통보했다고 한다. 코로나19 바이러스 감염을 우려해서다. 이 때문에 중국 지린(吉林)성 투먼(圖門)에 있는 구류소엔 현재 탈북민이 100명 이상 구류되어 있다고 한다. 북한에서 받아들이지 않으니 계속 감옥 생활 중이다. 투먼은 대표적인 북한-중국 국경도시다.
“北에 코로나19 환자 50만 명 이상” 추정
북한은 이전부터 유행병에 굉장히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도 그럴 것이 북한 주민들의 영양 상태와 체력, 취약한 보건 대응 역량을 고려할 때, 감염병의 파급 효과가 어떨지 예측이 안 되기 때문이다. 2003년 사스 유행 때는 평양-베이징 항공 노선 운행을 중지했다. 2014년 에볼라 바이러스 유행 때도 외국인 입국을 금지했다.
이번에도 2020년 1월 22일부터 외국인 관광객의 입국을 금지하고, 국경을 봉쇄했다. 그러면서도 올해 5월까지는 대외적으로, 북한 내 코로나19 확진자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다 지난 5월 12일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8기 8차 정치국 회의에서 처음으로 코로나19 확진자가 발생했다고 발표했다. 이날부터 코로나19 확진자 일일 통계도 발표하기 시작했다.
중국 내 탈북 여성들은 북한 내 코로나19 상황이 심각하다고 증언했다. 작년보다 올해 더 상황이 심각해진 걸로 추정된다. 2012년 탈북한 D씨의 얘기다.
“북한 내 코로나19 환자가 50만 명이 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3년 전까지는 고향에 돈을 보냈는데 이후 연락이 끊겼어요.”
2019년 탈북한 여성 B씨의 얘기도 북한 내 가족과 작년부터 연락이 안 된다고 증언했다.
“작년에는 가족과 연락을 했는데 올해는 안 돼요. 작년까지는 북한에 돈을 들여보냈어요.”
북한은 코로나19 확산 상황도 정치적으로 이용 중이다. 지난 7월 1일 북한 매체들은 북한에서 코로나19가 시작된 원인으로 남한의 전단 풍선을 지목했다. 이런 뜬소문은 북한 주민과 중국 내 탈북자들 사이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듯했다. 탈북 여성 C씨 또한 “한국이 풍선에 코로나균을 담아 북한에 들여보냈다는 소문이 돈다”고 말했다.
‘임시거주증’ 발급하는 中

▲2019년 5월 21일 통일맘연합회 김정아 대표(왼쪽)가 탈북작가 지현아씨(가운데)와 함께 영국 옥스퍼드 유니온 토론클럽에서 탈북 여성들의 인권 피해를 증언하는 모습. 통일맘연합회는 탈북 여성과 그 자녀들이 겪는 일을 국내외에 알리고 있다. 사진=통일맘연합회
강제 북송 중지와 함께 눈에 띄는 변화가 있다. 바로 중국 정부의 탈북자 관리 정책 변화다. 2020년부터 탈북 여성들에게 ‘임시거주증’을 발급하고 있다. 임시거주증엔 탈북 여성의 사진과 남편과 자녀들의 이름, 거주지, 남편과 본인의 전화번호가 적혀 있다. 등록번호도 부여되어 있지만, 공식적인 주민신분증은 아니다. 중국 전역에서 시행 중인 조치인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탈북 여성이 많이 거주하는 지방을 중심으로 시행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신분증’은 중국 내 탈북 여성들의 ‘꿈’이자 ‘소망’이다. 탈북 여성 A의 증언이다.
“3년 전에는 돈만 좀 내면 신분증을 만들 수 있었다고 해요. 지금은 돈이 있어도 안 돼요. 공안에 아는 사람이 있어도 안 된대요.”
어떤 탈북 여성들은 돈을 내고 죽은 이의 신분증을 빌린다. 2002년에 탈북한 50세 여성 D의 증언이다.
“신분증을 빌려서 가지고 있어도 병원 같은 곳은 가기 힘들어요. 말투나 많은 부분에서 중국인이 아니라는 게 드러나기 때문이에요.”
탈북 여성들은 중국 정부의 임시거주증 발급에 상당히 주목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중국 정부의 진의를 의심하고 있다. 인터뷰에 응한 이 중 거주 등록을 한 이들은 대부분 공안의 채근 때문에 등록을 했다. D씨의 얘기다.
“저는 돈이 없어서 등록을 안 하고 다녔어요. 어떤 지역은 돈을 받고, 어떤 지역은 돈을 안 받고 해준다고 들었어요. 얼마 전에 공안에서 전화가 와서 빨리 등록하라면서 등록 안 하고 잡히면 감옥에 보낸다고 했어요. 그래서 중국돈 ○○○○위안을 내고 등록했어요.”
등록증 만드는 데 5000~7000위안 들어
탈북 여성들의 거주지가 특정될 것을 우려해 등록비와 지명은 밝히지 않겠다. 이들이 등록비로 낸 돈은 대략 중국 돈 5000위안에서 7000위안 사이다. 7000위안이라면 한국 돈으로 대략 140만원이다. E씨 역시 돈을 내고 거주증을 만들었다.
“등록할 때 돈을 냈어요. 제가 사는 곳은 못사는 공안이 많아서인지 탈북민들에게 돈을 많이 받았다고 해요. 공안들이 집집마다 다니면서 무조건 등록하라고 강압해 할 수 없이 모두 등록했어요.”
탈북 여성들은 신분증이 아닌 임시거주증이기에 여전히 불안하다. A씨의 이야기다.
“이번에 등록을 하면서 공안에 물었어요. ‘신분증도 안 만들어주면서 왜 계속 오라 가라 하는가’ 그랬더니 김정은이 동의하지 않기에 어쩔 수 없다고, 김정은 허락이 있어야 시진핑이 허락한다며 신분증은 생각도 하지 말라고 했어요. 등록증이 있으면 버스나 택시를 탈 수 있는데, 기차나 비행기는 못 타요.”
“중국인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들이 있으니 북으로 안 보내지 않을까 기대를 걸기도 해요.”
가장 큰 두려움은 혹시 임시거주증이 강제 북송에 활용되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여성들의 이야기다.
“강제 북송이 다시 시작되면 거주지가 파악되어 있으니 1순위로 끌려갈 수 있잖아요.”
“코로나19 상황이 풀리면 어느 날 갑자기 한 번에 북한으로 잡아갈까 봐 걱정돼요. 그것 때문에 등록을 안 하는 사람이 아직 많아요. 지린성에선 아파트를 봉쇄하고 집집마다 두들기는데, 숨죽이고 기척을 안 내기도 했어요. 검사도 안 받고 백신 접종도 한 번도 안 했어요.”
“남한이나 북한에 연락하지 마라”

▲통일맘연합회는 2018년부터 ‘내 아이 안고 싶어요’ 프로젝트를 통해 인권보고서를 발행해왔다. 올해 외국에 배포할 인권보고서
공안은 이들에게 공통적인 얘기를 했다.
‘어디 가지 않고 집에서 가정생활에 충실하면 잡아가지 않겠다’ ‘북한이나 한국에 연락하지 마라’ 등의 얘기다.
“등록하면서 제가 불안해하니 공안들이 이젠 안 잡는다고 안심하라고 했어요. 등록증이 있으면 중국 관내를 마음대로 다닐 수 있다고 하기에 ‘진짜 다녀도 되냐’고 물었어요. 그랬더니 ‘어딜 가려고 하냐, 한국에 가려고 그러냐’고 묻기에 ‘아이 데리고 여행 다니고 싶다’고 했어요.”
실제 타지에서 공안에 잡혔다가 이 증명서로 신분을 증명해 풀려난 탈북자도 있다고 한다.
B씨의 증언이다.
“허베이성에 있는 탈북민들이 선양에 놀러 갔다가 잡혔대요. 그때 임시거주증을 보여줬더니 등록번호를 공안이 조회해보더래요. 신원 확인이 돼서 풀려났어요.”
‘거주증을 만든 탈북 여성이 경미한 범죄를 저질렀는데 벌금만 물고 풀려났다’는 증언도 있다.
거주증을 받은 사람들은 한 달에 2번가량 공안에 가서 거소 확인을 받아야 한다. 이때 휴대전화도 검사한다.
“한국에 아는 사람이 있는지 물어보기도 하고 휴대폰 검사도 해요. 북한 사람들과 연락하지 말고, 한국에 가지도 말라고 해요. 중국에 있는 탈북자들과 위챗(중국판 카카오톡)으로 소통하는데, 위챗을 검사하기 때문에 지웠다 다시 깔면서 연락이 끊기기도 해요.”
北 여성 북송에 항의하는 한족들
중국 공안이 임시거주증을 발급하는 이유는 뭘까. 중국 공안 관계자는 이렇게 설명했다.
“중국 벽촌에 100명 정도의 탈북 여성이 중국인 남성과 결혼해 사는 한족 마을이 있다. 그 마을 중국인들이 공안에 항의했다고 한다. ‘공안이 탈북 여성들을 잡아가면 큰 문제가 된다. 중국인의 대(代)를 끊고 싶은가.’ 그래서 이 지역에서 가장 먼저 임시거주증을 발급해주기 시작했다. 그 지역에서 안정적으로 살 수 있는 증빙서류라고 보면 된다.”
공안들은 일단 한족 남성과 결혼해 가정을 꾸린 탈북 여성을 중심으로 임시거주증을 발급하고 있다. 이들은 탈북 여성들에게 공통적으로 ‘한국에 가지 말 것, 북한에도 연락하지 말 것’을 당부한다. 북한 정권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 이들이 조용히 한족 사회에 동화되길 기대하는 조치다. 탈북 여성 E씨의 증언이다.
“열심히 가정생활만 잘 하는 탈북민들은 안 잡아간다고 공안이 계속 말했어요.”
사실 중국 정부가 탈북자들에게 임시거주증을 발급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07년에도 잠시 일부 지역에서 임시거주증 발급을 했다. 이때는 이유가 분명했다. 이듬해인 2008년에 열린 베이징올림픽 때문이었다.
올림픽을 앞두고 국제인권단체들이 ‘탈북자를 강제 북송하면 올림픽을 보이콧하겠다’며 항의하자 중국 정부는 일부 탈북자에게 임시거주증을 발급해줬다.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른 후 탈북민들의 신분 보장 문제는 다시 없던 일이 됐다.
2020년부터 시행 중인 임시거주증 발급은 2007년과는 또 다른 것으로 보인다. 어차피 코로나19로 인해 국경을 봉쇄한 상황이라 탈북 여성들을 북으로 보낼 수도 없으니 공안이 주도해 일단 관리 차원에서 신상정보를 확보하는 걸로 추정된다.
지역 정부로서는 한족 남성의 반발도 무시할 순 없을 터다. 중국의 결혼 적령기 인구 사이의 성비 불균형 문제는 매우 심각하다. 1980년부터 실시한 산아제한 정책과 남아선호 사상이 만난 결과다. 2020년 기준 결혼 적령기 중국 남성은 여성보다 약 3500만 명 많다.
더 심각한 건 성비 불균형이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중국의 1990년대생의 성비는 110(남성) 대 100, 2000년대생은 118대 100이다. 농촌 지역은 더 심각하다. 2021년 중국 통계연감을 보면 농촌의 15~19세 남녀 성비는 126.24이다. 김정아 대표는 “이제는 탈북 여성들이 내몽골 지역에까지 팔려간 사례도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물론 탈북민에 대한 중국의 국가 정책에 따라 사정은 언제든 달라질 수 있다.
중국인 남편과 탈북 여성의 관계는 각각의 경우마다 다르다. 중국인 가족에게 학대를 당하는 여성도 있고, 사이가 좋은 경우도 있다. 한 답변자의 한족 남편은 ‘아내가 북송되면 본인도 그 자리에서 죽겠다’고 말했다. 탈북 여성이 북송되면 죽을 수 있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코로나19 이후 일거리 없어져
북한 사회는 워낙 제재와 위기에 익숙하다. 위기의 일상화라고 할까. 그래도 코로나19의 영향을 피해 갈 수는 없다. 일반 노동자들은 코로나19 이후 더 살기 힘들어졌다.
“코로나19가 퍼지면서 북한은 더 살기 힘들어졌어요. 가발이나 모자를 만들어 중국으로 보내는 것 같은 일거리가 많았는데 지금은 그런 일거리가 없어요. 북한에서 돈이 없는 사람은 장사를 못 하고 그런 소일거리로 먹고살거든요. 여자들이 장사를 해서 식량을 보충하고요.”
북한에서 일반 노동자들은 월급만으로 먹고살 수 없게 된 지 오래다. 관련 증언이다.
“북한에서 막노동자 월급이 2000원이에요. 그나마 그 돈을 다 받는 것도 아니에요. 인민반과 직장에 세금을 내고 나면 남는 돈으로는 살 수가 없어요. 세(稅) 부담이 너무 커요.”
북한 돈 2000원이면 한국 돈으로 대략 1만2000원이다. 코로나19로 국경이 폐쇄되면서 북한 돈의 가치가 비정상적으로 급등했다. 이건 일시적인 현상으로 봐야 한다. 그 전에는 대략 1달러에 8000원(북한 돈)이었다.⊙
글 : 하주희 월간조선 기자 everhope@chosun.com
◆11.21 지자체가 탈북민 지원에 나서야
최근 탈북민과 관련한 안타까운 사건이 잇따르고 있다. 서울에서 탈북 여성이 백골로 발견된 지 며칠 만에 지방 거주 20대 청년이 원룸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3년 전 탈북 모자 아사 사건 이후 정부는 탈북민 위기 가구 관리 전담조직을 운영하고 있다. 그런데도 불행한 사건이 끊이지 않는다. 이번에도 정부는 지원 시스템 전반을 재검토하겠다고 밝히고 있으나 미봉책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
북한인권정보센터(NKDB)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탈북민의 직업 안정성은 일반 국민과 비교할 때 상당히 낮고 평균 소득은 3분의 2 수준이다. 이 결과는 체계적인 조사가 시작된 20여 년 전과 큰 차이가 없다. 탈북민 건강도 위험 수준이다. 질병 때문에 직장과 일상생활에 어려움을 겪고, 북한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차별을 경험하고 좌절하곤 한다.
고독사·가난 등 탈북민 불행 속출
25개 하나센터로는 지원에 한계
3500개 읍면동이 함께 책임져야

▲kim.jeeyoon@joongang.co.kr
‘먼저 온 통일’로 불리는 탈북민의 삶은 일반인과 다른 부분이 있다. 탈북민 가구의 66.2%는 재북 가족과 친척에게 송금한 적이 있다. 대북 송금은 탈북민 사회의 공공연한 비밀이다. 대북 송금은 대부분 북측 가족의 요청에 의한 것이다. 일반인의 70% 소득 수준임에도 생계 곤란과 치료를 이유로 송금 요청을 받으면 거절하기 어렵다. 자신의 탈북으로 고초를 겪었을 부모·형제들에 대한 죄의식 때문에 사채를 빌려서라도 송금하게 된다.
북한 억양 때문에 취업이 좌절되어 생계가 위협받고, 통장 잔고가 없는 기간이 길어지면, 미국·유럽 등으로 재이주를 꿈꾸거나 삶과 희망을 버리는 극단적 선택을 할 수도 있게 될 것이다. 탈북민의 극단 선택과 고독사, 아사 사건까지 계속되고 있지만, 이는 먹을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희망을 잃어 발생하는 것이다.
한국에서 냉장고에 먹을 것이 없거나 한 줌의 쌀이 없어 죽음을 맞는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다. 안타깝게 생을 마감한 탈북민들은 쌀이 없어서라기보다는 한국에서 살아갈 희망을 잃었기에 생존을 포기한 것이다. 부모·형제를 두고 목숨까지 걸고 넘어온 한국에서조차 비참한 삶을 살아야 하는 데 자존심이 상하고 그런 모습을 감추고 싶은 것이다. 꿈과 희망을 잃은 육신이 사계절이 지난 후 백골로 발견되었다면 인간다운 삶의 필수 요건인 사회적 연결망까지 단절된 것이다.
정부의 지원 노력에도 탈북민은 정착에 어려움을 겪고, 전문가들은 지원 정책의 전면적 개편을 요구하고 있다. 문제는 서비스 전달 체계이다. 탈북민 지원정책은 일반 복지·행정 전달 체계와 분리된 별도의 전달 체계를 갖고 있다. 통일부가 전국 25개 하나센터를 통해 3만3000여 탈북민에게 교육과 필요 서비스를 제공한다.
탈북민 사회 적응을 위한 각종 복지·행정서비스는 전국 3500여 읍면동 주민자치센터가 아닌 전국 25개뿐인 하나센터가 전담한다. 하나센터는 경기도·서울 외에는 광역자치단체별로 한 곳이다. 광역시도 거주 전체 탈북민을 단 한 곳의 하나센터가 맡고 있다. 거주지에 사회복지관과 읍면동사무소, 시군구청이 있지만 탈북민은 ‘특별한 국민’으로 간주되어 하나센터에서 별도 서비스를 받는 구조이다.
탈북민도 대한민국 국민이고 지역 주민이며 시장 군수와 기초의원의 유권자이다. 지역 행정 복지 기관이 책임을 갖고 지원하는 체계로 전환되어야 한다. 분리 정책은 특별한 보호가 아닌 차별과 고립을 가져올 수도 있다.
전국 읍면동사무소와 시군구청이 지역 주민인 탈북민을 지원하는 책임을 져야 한다. 행정안전부가 주무를 맡고 보건복지부 등이 협업하면 탈북민에 대한 복지·행정서비스는 개선될 수 있다. 지방 하부 조직이 없는 통일부가 주무 부처를 맡는 상황에서는 탈북민 거주 임대아파트 단지에 있는 500여 사회복지관은 전문인력과 서비스 제공 능력을 갖추고 있음에도 탈북민에게 다가갈 수 없게 된다.
탈북민에게 필요한 것은 거주지에서 충족되어야 하고 지역 행정 복지기관과 이웃 주민이 포용적 자세를 가질 때 사각지대는 해소될 수 있다. 탈북민의 이웃은 탈북민 스스로와 지역 주민, 지역 행정기관 모두가 되어야 한다. 탈북민의 적극적인 노력과 합리적 지원정책, 지역사회의 포용력이 어우러져야 한다. 이것이 진정한 생활밀착형 지원 방식이다.
중앙일보 윤여상 북한인권정보센터 소장
◆12.12 文정부 때 눈치 보던 탈북민들... 500명 하나원 친정집 나들이
세계자유북한인총연맹 창립식에 탈북민 대거 참석

▲지난 10일 ~11일 경기도 안성 소재 하나원에서 탈북민 500명이 참석한 친정집 나들이’ 행사가 열렸다./통일부 제공
“10년 만에 하나원 친정집을 찾아 친구, 언니, 동생들을 만나 회포를 나누니 잔칫집에 다녀온 기분입니다.” “일산 킨텍스에 수천명의 탈북민이 모여 자유통일 결의를 다졌습니다”
문재인 정부의 탈북민 배제와 ‘코로나19′로 한자리에 모이기 힘들었던 탈북민들이 최근 하나원 친정집 나들이를 가고, 세계자유북한인총연맹 창립식에 참석하는 등 간만에 수백·수천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지난 10일 ~11일 경기도 안성 소재 하나원에 500명의 탈북민이 모였다. 통일부 하나원이 탈북여성 수료자(제1기~제298기) 및 가족을 대상으로 개최한 ‘2022 탈북민 친정집 나들이’행사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세계자유탈북인총연맹 창립식이 8일 일산 킨텍스에서 탈북민들이 대거 참석한 가운데 진행되고 있다./세계자유탈북인총연맹 제공
통일부 산하 탈북민 정착 교육 기관인 하나원은 탈북민들에게 ‘남한의 첫 보금자리’이자 제2의 고향으로 통한다. 역대 정부는 1999년 7월 개원 이래 상당수 탈북민이 이곳을 거쳐 간 이곳을 ‘탈북민 포용 정책’의 상징으로 홍보해왔다. 이 때문에 주요 계기 때마다 통일부 장차관 등 고위 인사들이 방문해 탈북민들을 위로·격려해왔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 집권 이후 탈북민들 속에서는 “북한 눈치 보느라 탈북민을 천덕꾸러기 취급하고 하나원은 찬밥 대접을 받는다”는 지적이 나왔다. 대표적인 사례가 2019년 7월 하나원 개원 20주년 행사 때 통일부 장·차관이나 남북하나재단 이사장 등 고위 인사들이 불참하고, 언론 공개를 막은 것이다.
하나원은 2020년 ‘코로나 19′ 팬데믹으로 인한 북한의 국경 봉쇄 등으로 탈북민 수가 급감하면서 다시한번 존폐의 기로에 섰다. 이번 행사는 탈북민들의 사기를 진작하고 하나원 운영을 활성화 하자는 취지에서 기획됐다.
통일부에 따르면 행사에 참석했던 탈북민 김모씨는 “다시 오고 싶은 고향집을 방문할 수 있어 너무 좋았고, 수료 후 연락이 닿지 않던 동료를 만나 기쁨이 두 배라며, 행복한 추억을 나누는 친정집 나들이를 통해 새롭게 각오를 다지는 계기가 될 것 같다”고 말했다.
탈북민 구출단체 관계자 A씨는 본지 통화에서 “저희 단체가 구출해 한국으로 데려온 탈북민 수십명을 처음 만나 인사를 나눴다”며 “고향집 같은 하나원에서 다양한 프로그램을 체험하면서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고 했다.
탈북민 단체관계자 B씨는 통화에서 “문재인 정권 때 하나원 20주년 행사에 장·차관은 물론 남북하나재단 이사장도 불참하는 등 탈북민을 소외시켰다”며 “코로나로 썰렁하던 하나원이 간만에 들썩이고 잔칫집 분위여서 좋았다”고 했다.
이번 행사를 준비한 서정배 하나원장은 “고향이자 친정집인 하나원을 방문한 탈북민들을 환영하며, 우리 사회에 안정적으로 정착해 나가고 계시는 모습이 너무 자랑스럽다며, 앞으로도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탈북민이 대한민국 국민으로 당당히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을 지속해 나갈 계획이라”고 했다.
탈북민들은 북한 음식을 시식하면서 고향의 맛을 느끼고, 포토존에서 가족, 친구들과 함께 소중한 추억을 만들었다. 또 직업교육관에 마련된 직업체험을 통해 다양한 정보를 얻고, 평소 관심 있던 영농과 창업 관련 상담을 받기도 했다. 이밖에도 남북한 주민이 함께 준비한 ‘난타 공연’과 전문 공연자들의 무대로 축제분위기를 즐겼다고 한다.
이런 가운데 지난 8일에는 북한 정찰총국 대좌 출신의 김국성 총재가 일산 킨텍스에서 탈북민들과 함께 세계자유탈북민총연맹 창립식을 개최했다.
김국성 총재는 본지 통화에서 “전국에서 탈북민 5000 여명이 한자리에 모여 창립식을 열었다”며 “세계탈북민총연맹은 세계 최악의 3대세습독재체제를 허물고 자유통일을 이루기 위해 헌신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들은 강령에서 “북한내 자유의 온기를 불어놓고 자유와 인권의 가치를 알릴 것”이라며 “북한을 탈출해 떠도는 탈북민들의 안전한 입국과 정착을 도울 것”이라고 밝혔다.
조선일보 김명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