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雜事(한국사) 2022-3/ 04.29 “누가 고종을 개혁군주라 하나, 그는 매국노였다” - 11.04 이봉창의 ‘두 얼굴’... 과연 어느 쪽이 진짜인가
역사속의 雜事(한국사) 2022-3/
◆04.29 “누가 고종을 개혁군주라 하나, 그는 매국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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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박종인 기자
월간조선 05월 호
◆戰史家가 보는 ‘김창룡 口述 회고록’의 의미
해방 후 대한민국 초기 對共수사실록이자 反共建軍史
⊙ 남로당위원장 김삼룡, 부위원장 이주하, 조직부장 이중업, 군사부 책임자 이재복 등 일망타진… 6·25 발발 후 ‘남로당원 20만 명’ 봉기 차단
⊙ 여순사건 이후 7차례에 걸쳐 肅軍… 軍內 좌익 세력 일소
⊙ 빨치산 사령관 남도부의 참모이자 김정일의 처남인 성일기 체포
⊙ 북한 교육상 백남운의 지시로 북으로 가져가려던 《조선왕조실록》 발견, 압수
⊙ 김일성과 홍명희 딸의 부적절한 관계, 김정일 생모 김정숙의 의문의 죽음
[편집자 주]
《월간조선》은 지난 1월호부터 ‘특무부대장 김창룡 구술(口述) 회고록’을 입수, 연재해왔습니다. 당초 5~6회 정도 분량을 발췌해서 소개할 예정이었으나, 최근 전사가(戰史家)인 남정옥 박사가 ‘구술 회고록’ 전량을 정리해 4월 중으로 《육군특무대장 김창룡 장군 비망록 : 숙명의 하이라루》(청미디어, 426쪽)라는 제목으로 발간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에 《월간조선》은 ‘특무부대장 김창룡 구술 회고록’의 연재를 중단하고, 대신 남정옥 박사에게 이 책에 대한 해설 원고를 부탁하여, 게재하기로 했습니다. 그간 ‘특무부대장 김창룡 구술 회고록’을 애독해주신 독자들께 감사드립니다.

김창룡(金昌龍·1916~1946년) 장군은 6·25전쟁을 전후(前後)하여 숙군(肅軍)과 남로당 세력을 일망타진하여 대한민국을 위기에서 구한 대한민국의 수호자이자 반공(反共)의 상징이다. 뼛속까지 반공으로 다져진 사람이 바로 육군특무부대장(陸軍特務部隊長) 김창룡이다. 1947년 군대에 입대한 이후 일생을 반공을 위해 살았고, 그 도정 위에서 대한민국 현대사에 거룩한 발자취를 남기고 위대한 삶을 마감한 참 군인이다.
그런 김창룡 장군의 구술원고(口述原稿)가 66년 만에 공개되어 2022년 4월, 단행권의 책 《육군특무대장 김창룡 장군 비망록 : 숙명의 하이라루》로 발간되기에 이르렀다. 책의 부제(副題)인 ‘숙명의 하이라루’에서 하이라루(하이라얼·海拉爾)는 김창룡이 공산주의와 첫 싸움을 시작한 곳으로,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중국 동북부 지역의 국경도시이다.
금번 책으로 발간되는 김창룡의 구술원고는 자신의 반공적 삶의 발자취를 기록한 회고록 성격의 비망록이자, 대한민국 건국 전후와 6·25전쟁 기간에 일어난 주요 대공(對共) 사건들을 기록해놓은 ‘대공수사기록’이자 ‘대한민국 반공역사’이기도 하다.
口述원고의 작성 경위

▲김창룡 장군의 구술 회고록 원고.
김창룡 장군이 생전에 남긴 구술원고(이하 원고)는 200자 원고지 1600매에 달하는 적지 않은 분량이다. 원고는 김창룡 장군이 특무대장으로 재직 시인 1954년과 1955년 사이에 서울대학교 국문학과 출신의 특무대원에게 구술하여 작성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원고는 김창룡 장군이 1956년 1월 30일, 군내(軍內) 불의(不義)의 세력이 쏜 흉탄에 순직한 후 부인 도상원(都相媛) 여사에게 전달되었다가 그의 사후(死後) 66년 만인 금년(2022년)에 드디어 책으로 발간되게 되었다.
원고에서 김창룡의 활동 무대는 중국 만주 지역과 북한, 그리고 남한 지역이다. 이 세 지역은 모두 공산주의와 관련이 깊은 곳이다. 중국 동북부의 만주 지역은 김창룡이 1940년대 전반기 5년간 활동했던 곳이다. 만주는 1917년 볼셰비키 공산혁명으로 세워진 소련과 국경을 맞대고 있던 곳으로, 공산혁명을 중국에 수출하는 길목에 위치해 있다. 김창룡은 만주에서도 소만(蘇滿) 국경도시인 하이라루에서 일본 관동군 특무부대 소속으로 중국 공산당원을 감시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하이라루에서 김창룡은 소련 공산주의의 폭력성과 잔혹성을 목격하고 공산주의와의 투쟁에 앞장설 것을 다짐한다. 김창룡의 일생에서 공산주의와의 기나긴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북한은 김창룡의 고향이 있는 곳이다. 그의 고향은 함경남도 영흥이다. 영흥은 역사적으로 조선 태조 이성계를 배출한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다.
해방 후 5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김창룡은 이미 소련군의 비호를 받고 있는 북한 공산주의자와 소련군 비밀경찰(게페우·GPU)에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필사의 탈출을 하게 된다. 해방 후부터 월남할 때까지 북한에서의 9개월의 시간은 김창룡의 일생에서 가장 길고도 힘든 고통의 시간이었다. 소련 비밀경찰과 북한 공산주의자들로부터의 끊임없는 체포와 도주, 그리고 남한으로의 탈출의 역경은 그로 하여금 공산 세력을 이 땅 위에서 반드시 몰아내겠다는 각오를 다지게 하는 데 충분했다.
그는 1946년 5월 고향 땅에서 벗어나 평양과 개성 송악산을 거쳐 자유의 땅, 남한으로 들어오게 된다. 하지만 연고가 전혀 없는 남한에서 김창룡은 한동안 노숙자 생활을 했다. 그럼에도 자유가 보장된 남한에 온 것이 너무나 행복했다. 옥에 티라면 공산 세력의 발호였다.
陸士 3기로 입교

▲해방 무렵의 김창룡 장군과 부인 도상원 여사.
고향 땅과 같이 해방공간 남한 지역에서도 공산 세력들이 활개를 치고 다녔다. 남로당(남조선노동당의 줄임말)을 비롯하여 좌익 단체들이 미(美) 군정하에서 폭력과 폭동을 일삼으며 불법을 자행하고 있었다. 미군정하의 자유로운 남한 사회가 공산주의자들과 좌익들이 벌인 폭력적인 행동으로 혼란에 빠져들기 일쑤였다.
그때 김창룡은 결심했다. 공산주의와 싸워 이겨야겠다고. 그 길은 군대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렇게 결심하고 있을 때 서울역에서 우연히 옛 친구 박기병 중위(육군소장 예편)를 만나 그의 권유로 전북 이리에 있는 조선경비대(국군의 전신) 제3연대 사병으로 입대했다. 그러나 공산 세력은 군대에까지 침투해 있었다. 사병으로서 군대 내 공산 세력을 없앤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1947년 1월, 장교가 되기 위해 육군사관학교 3기로 들어갔다.
김창룡은 이때부터 군대 내에서 공산당과 투쟁을 벌이게 된다. 그의 눈에는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이 또렷이 보였다. 소위로 임관한 김창룡은 공산당을 상대하는 정보부서에 배치되었다. 이어 방첩(防諜)과 대공(對共) 업무를 전담하는 육군본부 정보국의 방첩대(이후 특무부대)에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며 이 분야 제1인자로 우뚝 서게 되고, 그 결과 초고속 승진을 하게 된다. 임관 2년 만에 중령으로 진급하고 군대 내 공산 세력을 소탕하는 숙군 작업을 책임지는 방첩대장에 임명된다. 그때 군대에 침투한 공산 세력이 사회에까지 퍼져 있는 것을 알게 된 정부에서는 김창룡을 군검경합동수사본부장으로 전격 발탁해 사회 전반에 걸쳐 암약하고 있는 공산 세력까지 일망타진하게 한다.
6·25전쟁 때 방첩대는 육군특무부대로 확대되고, 김창룡 장군은 1951년 5월 부대장에 취임하여 1956년 1월 30일 순직(殉職)할 때까지 그 직을 유지하게 된다.
해방 후 건국 초기의 對共수사기록
김창룡 장군의 원고는 일제강점기 공산주의와 처음 싸웠던 하이라루에 대한 회상(回想)으로부터 시작된다. 공산주의와의 싸움은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자신의 강한 신념과 이에 반한 공산주의에 대한 강한 불신에서 비롯됐다. 그때부터 그는 공산 세력의 발본색원(拔本塞源)에 진력(盡力)한다. 그 과정에서 그는 결코 강압적이거나 반인권적인 방법 대신에 보다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수사방법을 택하였다. 그 결과 대한민국을 공산주의 침략에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반공국가로 다져나갔고, 국군을 공산주의와 싸워 이길 수 있는 믿음직스러운 반공군대로 태어나게 했다. 이처럼 원고에는 김창룡 장군의 반공에 기초를 둔 대공사건 수사 기록들이 구술되어 있다.
김창룡 장군의 원고는 크게 3개 부분으로 나눠진다. 첫 번째 부분은 원고의 총론 부분에 해당되는 것으로 1940년대 첫 군대 생활을 한 만주의 국경도시 하이라루 시절부터 해방 이후 귀향과 남한으로의 탈출 과정, 건국 전야 및 6·25전쟁 이전 복잡다기한 공산 세력에 대한 숙군 활동, 6·25전쟁 시 활약상이 시간대별로 전개되어 있다. 두 번째와 세 번째 부분은 원고의 각론에 해당하는 것으로 전쟁 중 공산 세력이 자행한 각종 사건에 대한 수사 과정을 생생하게 기술해놓고 있다. 대한민국 건국 전후와 6·25전쟁 당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대공 사건들을 망라하고 있다. 원고에는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았거나 수사 과정이 소략했던 사건들도 수록되어 있다. 이를 중심으로 주요 사건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성일기 체포
성일기는 북한 김정일의 처남이자 김정남의 외삼촌이다. 성일기의 막내 누이동생이 바로 김정일의 처 성혜림(成蕙琳)이고, 그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김정남이다. 성일기는 북한 게릴라 양성소인 강동정치학원을 나와 함경북도 회령에 있는 제3군관학교에서 훈련을 받고 남파되어 남한 지역 유격대사령관 남도부(南道富)의 작전참모로 활동하다가 1953년 12월 하순 김창룡이 지휘하는 특무대에 의해 체포되었다.
성일기는 남한에서 유격대 활동을 할 때 차진철(車鎭喆)이라는 가명으로 활동하였다. 성일기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골수 공산주의자들이었다. 아버지는 남로당 재정책(財政責)이었고, 어머니는 남파공작원 양성 기관인 강동정치학원을 졸업하고 《로동신문》 논설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그의 부모는 6·25전쟁 이전 성일기를 남겨두고 월북(越北)하였다. 그러다가 성일기가 6년제 보성중학에 다니고 있을 때 평양에 있는 부모로부터 모스크바로 유학을 보내줄 테니 북한으로 오라는 연락을 받고 단신으로 월북했다. 그의 인생 진로가 바뀌는 순간이었다.
북한에서 게릴라 훈련을 받고 6·25전쟁 직전 남파된 성일기는 남도부가 지휘하는 유격대에서 크게 능력을 인정받고 남도부의 작전참모로 발탁됐다. 남도부는 북한군 중장에 최고훈장을 받은 자로 김일성의 신임이 두터운 자였다. 그러나 성일기가 속한 남도부의 유격대는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되자 북한으로부터 산악 지역에서의 무장투쟁을 버리고 도시와 농어촌으로 내려와 지하조직을 구축하라는 지령을 받고 이를 위해 활동하던 중 체포되었다.
성일기의 집안은 경남 창녕의 만석꾼 집안이었다. 성일기가 유격대로 활동할 때 창녕에는 그의 백부가 살고 있었다. 성일기는 남도부와 함께 그의 백부 집에 은신하던 중 체포됐는데 당시 남도부는 대구에 가 있어서 체포를 면했다. 하지만 대구로 간 남도부도 1954년 1월 김창룡의 특무대에 의해 체포되는 신세가 되었다.
북한으로 간 성일기의 집안은 몰락의 길을 걸었다. 성일기의 바로 밑 여동생 혜랑은 김일성대학을 나와 결혼하여 아들 이한영을 낳았다. 그러나 혜랑은 북한에서 살지 못하고 해외로 망명하게 되었고, 그의 아들 이한영도 남한으로 귀순했다가 김정일에 의해 살해되었다. 막내 여동생 성혜림은 평양예술대학을 나와 일급 공훈배우가 되어 월북 작가 이기영의 아들과 결혼했다. 그러나 김정일의 눈에 들어 남편과 이혼한 후, 김정일과 정식으로 결혼하지 않은 채 아들 김정남을 낳았다. 성혜림은 말년에 모스크바에서 요양 생활을 하다가 외롭게 죽었고, 그의 아들 김정남은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공항에서 독극물에 의해 살해되었다. 김창룡의 배려로 살아남은 성일기는 북한으로 가지 못하고 남한에서 홀로 쓸쓸한 말년을 보냈다.
《조선왕조실록》 北送 저지

▲백남운
북한은 6·25전쟁 와중에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하여 국보급 고문서 3000여 권을 북한으로 반출하려고 하였다. 이는 북한 교육상 백남운(白南雲)의 지령에 따른 것이었다. 백남운은 전북 고창 출신으로 연희전문학교와 서울대학교 교수를 지내다가 월북한 경제사학자(經濟史學者)이다. 월북 후 북한에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과 교육상을 지냈다.
경제사학자로 사료(史料)에 밝은 백남운은 국보 제151호인 《조선왕조실록》 850권을 비롯하여 중국 역대 사서, 우리나라 역대 역사서 등 3000여 권의 목록을 적어 보낸 후 이를 수집하여 평양으로 옮길 것을 지시하였다. 남한에서 암약하고 있던 북한 공작원으로부터 백남운의 밀명을 받은 심상구(沈相九)는 국립도서관을 비롯하여 서울 시내 각 대학, 그리고 개인이 소장하고 있는 귀중한 서적들을 압수 등 강제적인 방법을 통해 수집하였다. 수집된 서적들은 운반하기 좋게 궤짝에 넣어 서울에 있는 백남운의 동생인 백남교의 집에 보관했다.
그렇지만 이들 국보급 문화재들은 평양으로 가져갈 수송차량을 기다리던 중 김창룡이 지휘하는 합동수사본부에 의해 압수되었고, 고문서 수집을 주도했던 심상구는 체포되어 법의 심판을 받게 되었다.
국회의장 신익희(申翼熙)는 1950년 12월 10일, 국보급 문화재의 평양 반출을 막은 김창룡 대령에게 “괴뢰 도배가 암취 은닉한 국보적 서적 수천 점을 발견 압수하여 영구 보존케 함으로써 국가문화재 보전에 공적이 다대한 공로”로 표창장을 수여하고 격려하였다. 김창룡이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하여 3000여 권의 국보급 기록유산의 북한으로의 유출을 막아냄으로써 소중한 기록유산은 보존되게 되었다.
남로당 지도부 일망타진
김창룡은 6·25전쟁 이전 남한 내 최대 공산 조직이던 남로당(南勞黨·남조선노동당) 세력을 일망타진하여 남침 모의 과정에서 김일성(金日成)과 박헌영이 장담했던 남한에서의 ‘인민봉기(人民蜂起)’를 사전에 봉쇄하였다. 6·25전쟁 이전 북한 수상 김일성과 부수상 겸 외무상 박헌영은 소련의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두 차례에 걸쳐 스탈린에게 남침 승인을 요청하였다.
그렇지만 스탈린은 김일성의 남침 요청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1949년 3월 모스크바를 처음 방문한 김일성과의 회담에서 스탈린은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고 말하며 남침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1950년 4월 두 번째 모스크바 방문 시에도 스탈린은 선뜻 남침을 승인하지 않았다. 이때 김일성이 부수상 겸 외상 박헌영으로부터 누차 들었던 남한에는 남로당 20만 당원이 있기 때문에 북한이 38도선만 넘으면 남한에 있는 남로당원이 일제히 봉기하여 쉽게 남한 정권을 전복시킬 것이라고 말하자, 그때야 스탈린은 중국 마오쩌둥의 동의를 얻는다면 남침해도 좋다는 조건부 승인을 하게 된다.
하지만 북한이 남침을 했을 때 남한에서는 남로당에 의한 대규모 인민봉기는 물론이고 단 한 건의 폭동도 없었다. 이에 김일성은 박헌영을 숙청할 때 “미국놈의 고정간첩 박헌영은 남조선에 지하당원이 20만 명이나 되고 서울에만 6만 명이 있다고 떠벌렸는데 20만 명은 고사하고 우리가 낙동강 계선에 진출할 때까지 단 한 건의 폭동도 없었다. 만일 부산에서 노동자들이 단 몇천 명이라도 일어났더라면 우리는 반드시 부산까지 해방시켰을 것이고 미국놈들은 상륙하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스스로 인민봉기에 커다란 기대를 걸고 있었다는 것을 밝혔다.
북한이 남침했을 때 남한에서 남로당의 인민봉기가 일어나지 않았던 것은 모두 김창룡의 덕이었다. 김창룡의 방첩대(일명 CIC, 육군특무부대의 전신)는 6·25 이전 남한 내 남로당 거물 간부들을 모조리 체포하여 그 조직을 와해시켜놓은 상태였다. 남로당위원장 김삼룡, 부위원장 이주하, 김삼룡의 비서 김형육, 남로당 조직부장 이중업, 남로당 군사부 책임자 이재복, 남로당 군사부 세포 김영식 등을 체포하여 그들의 조직망을 밝혀내 일망타진했다. 이렇게 해서 남로당이 전쟁 이전 완전히 와해되어 북한의 남침 후 김일성과 박헌영이 바라던 조직적인 활동을 하지 못하게 됐고 박헌영은 결국 이것이 빌미가 되어 김일성으로부터 숙청되는 결과를 맞게 된다.
이처럼 김창룡의 방첩대는 6·25전쟁 이전 남로당 간부들을 완전히 소탕하여 그 조직을 와해시킴으로써 자칫 서울 함락과 함께 대한민국 정부가 남로당에 의해 전복될 수 있었던 상황을 미연에 방지함으로써 대한민국을 위기에서 구했던 것이다. 이번에 책으로 발간되는 김창룡의 원고에는 이들 남로당 주요 직위자들에 대한 체포까지의 수사 과정이 한 편의 드라마처럼 적나라하게 구술되어 있다.
軍內 좌익 세력 척결

▲군 수뇌부와 함께 이승만 대통령의 훈시를 듣고 있는 김창룡 장군.
김창룡이 군대에 들어간 무렵(1947년)은 공산당원 또한 조직적으로 군대에 침투한 시기였다. 미군정하에서 군대 입대는 손쉽게 이루어졌다. 그것은 미군정이 이념적 편향을 가리지 않는 이른바 ‘불편부당(不偏不黨)’의 원칙하에 사상적 검증 없이 누구나 쉽게 군대에 들어올 수 있도록 문호를 개방했기 때문이다. 이에 남로당은 장차 대한민국 국군이 될 군대를 장악하기 위해 남로당원들을 대거 입대시켰고, 이미 입대한 군 장병들에 대해서는 공산주의 전향을 적극적으로 회유하고 있었다.
김창룡이 최초에 사병으로 입대한 전북 이리의 제3연대는 물론이고 이후 장교가 되기 위해 들어간 육군사관학교도 공산당 세상이었다. 그때부터 김창룡은 군내 침투한 공산 세력을 뿌리 뽑는 데 노력하였으나 개인의 힘으로는 역부족이었다. 그러던 차 군대 내 침투한 남로당원들을 제거할 기회가 찾아왔다.
그것은 바로 대한민국이 건국된 지 불과 2개월 만인 1948년 10월 19일에 일어난 여순 10·19사건이었다. 여순사건은 전남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국군 제14연대에 침투한 남로당 세력들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발생한 사건이다.
이에 따라 대한민국은 정부 차원의 대규모 숙군을 단행하게 된다. 이는 군내에 침투한 남로당은 물론이고 사회에서 암약하고 있는 공산 세력까지 완전히 제거하는 범정부 차원의 ‘빨갱이 소탕작전’이었다. 이를 위해 정부에서는 공산당 박멸을 위한 법적 근거로 국가보안법을 제정하고, 국가보안법 아래 김창룡이 이끈 방첩대(이후 군검경합동수사본부)가 숙군을 단행하게 된다. 숙군은 여순 10·19사건 이후인 1948년 10월부터 1954년 10월 31일까지 7차례에 걸쳐 실시된다.
내부에서 붕괴한 장제스軍의 前轍 피해
숙군은 전쟁 직전인 1950년 6월 6·25전쟁 이전까지 실시된 4차례의 숙군이 핵심이다. 이때 김창룡은 육군본부 정보국 특별조사과(방첩대의 전신) 수사관, 방첩과장, 방첩대장, 군검경합동수사본부장의 직책을 거치며 숙군을 지휘한다. 그 과정에서 김창룡의 방첩대는 1327명에 달하는 군인과 민간인을 검거하여 군 및 남한 사회에서 암약하고 있던 남로당 세력을 발본색원하게 된다.
김창룡의 원고는 전쟁 이전 시기의 숙군에 대해 주로 기술하고 있다. 이때 김창룡의 방첩대에 의해 체포된 거물급 군 인사로는 연대장을 역임한 최남근 중령과 김종석 중령, 육군사관학교 생도대장 오일균 소령, 육군사관학교 교수부장 조병건 소령 등이 있다. 당시에는 여단이나 사단급 편제가 없고 연대가 최고 단위의 부대였다. 또 그 당시 군에는 장군 계급이 없었기 때문에 연대장이 최고 지휘관이었고, 영관급 장교는 최고위 계급에 해당되었다.
전쟁 이전 군내에 침투한 남로당 세력의 제거는 6·25전쟁 초기 국군이 위기에 몰리고 있는 상황에서도 개별 또는 집단으로 적에게 투항하는 것을 방지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그것은 숙군을 통해 국군이 반공군대로 거듭났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숙군에 실패한 중국의 장제스(蔣介石) 군은 달랐다. 중국 장제스의 국부군이 마오쩌둥(毛澤東)의 공산군에게 패배한 원인은 장제스 군대에 침투한 공산당원들이 결정적인 전투에서 집단으로 공산군에게 투항했기 때문이다. 그 여파로 장제스 정부는 결국 중국 대륙을 빼앗기고 대만으로 쫓겨나게 되었다.
이후 김창룡의 방첩대 및 육군특무부대는 전쟁 후인 1954년 10월까지 군내에 침투해 있던 남로당 세력 350명을 체포하여 법의 심판을 받게 하였다. 이처럼 군내에 침투한 남로당의 공산 세력의 뿌리는 깊고도 질겼다. 그러나 결국 이런 남로당 세력도 김창룡이 지휘하는 방첩대와 특무부대의 끈질긴 집념과 집요한 수사에 의해 일망타진되고 국군은 반공정신으로 충일한 반공군대로 거듭 태어나게 된다.
김일성과 홍명희 딸의 부적절한 관계

▲김일성과 그의 아내 김정숙, 아들 김정일.
홍명희(洪命喜)는 임꺽정(林巨正)의 작가로 유명하다. 그는 해방 이후 남한에서 활동하다가 가족들을 모두 데리고 월북하였다. 홍명희는 슬하에 아들 둘과 딸 둘을 두었다. 딸들은 쌍둥이로 모두 숙명여고를 거쳐 이화여전(이화여자대학교 전신)을 나왔다.
김창룡의 원고에는 해방 이후부터 김일성의 전속(專屬) 간호원을 지낸 조옥희(趙玉姬)가 6·25전쟁 이후 전선에 투입되었다가 김창룡의 특무부대에 의해 체포되어 진술한 내용이 있다. 그 내용 중 홍명희의 딸과 김일성의 관계가 구술되어 있어 흥미를 끈다. 조옥희는 홍명희 딸 중 한 명과 김일성은 깊은 관계를 유지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북한 정권 수립 후 부수상이 된 홍명희는 미모의 딸을 데리고 김일성이 있는 수상관저를 자주 방문하였다. 그 당시 홍명희 딸은 처녀인지 아닌지는 분명치 않았으나 관저 내의 고용인들은 그녀를 ‘미스 홍’으로 김일성은 ‘홍 동무’로 호칭했다고 한다. 홍명희의 딸은 빨간 튤립처럼 요염하게 생겼으며 김일성 앞에서는 갖은 아양을 떨었고, 김일성의 부인인 김정숙이 관저에 없을 때에는 혼자 찾아와 김일성과 단둘이 방 안에서 교성(嬌聲)을 지르며 추태를 부리기도 했다. 그러다 두 사람의 관계가 김정숙에게 들키게 되자 그 후 홍명희 딸의 수상관저 출입이 금지되었다.
김일성 아내 김정숙의 死因은?
그런데 그로부터 얼마 후 김일성의 주변에서 예기치 않은 두 가지의 사건이 일어났다. 하나는 1949년 봄에 김일성의 일곱 살 난 어린 아들이 수상관저의 연못에서 놀다가 익사(溺死)한 사건이었고, 다른 하나는 김일성의 부인 김정숙이 임신 5~6개월밖에 되지 않은 상황에서 출산 도중 갑자기 사망한 사건이다.
그 과정에서 김일성은 아들의 익사사고와 김정숙의 사망 원인을 밝히기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하지 않았는데 이 두 사건에 홍명희 딸의 보이지 않은 음모가 있었을 것이라는 것을 조옥희의 증언은 시사하고 있다. 특히 김정숙의 갑작스런 사망 사건에 대해 조옥희는 죽기 전날 김정숙은 권총사격을 하고 자기와 같이 쾌활하게 정원에 앉아서 잡담까지 나누었는데 잠자다가 갑자기 죽었다는 것이다. 거기다가 북한의 공식 발표내용이 출산 중 사망이라는 것이 석연치 않았다. 간호원인 조옥희가 볼 때 당시 김정숙은 임신 5~6개월로 낙태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출산사망이 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더군다나 김정숙의 장례식 날 김일성은 상여 앞에 섰고 그 뒤에 각료들과 각계 대표들이 뒤따랐는데, 부인의 장례임에도 김일성의 얼굴에는 슬픈 기색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장례식이 끝나고 몇 달 지나지 않아 홍명희의 딸이 수상관저로 들어왔고, 그때부터 홍명희 딸에 대한 주변 사람의 호칭이 ‘수상 부인’ 또는 ‘장군 부인’으로 불렸다는 것이다. 이 외에도 조옥희는 해방 이후 김일성에 관한 비화들을 진술하고 있다.
아편 밀매 적발

▲아들과 망중한을 즐기는 김창룡 장군.
김창룡 장군이 1956년 1월 30일 군내 불의의 세력에 의해 암살을 당했을 때 그날 이승만 대통령은 김창룡 장군에 대해 담화문을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김창룡 중장은 국가가 제일 위란한 시기에 제일 중요한 책임을 맡아서 군인으로서 공산당의 지하공작을 적발 취체(取締)하며 국가의 안전보장을 위하여 힘썼으며 동시에 공산당들이 인접 나라를 통하여 백방으로 침투하는 것과 혹은 아편(阿片)과 금전을 밀수하여 분란을 일으키려는 것을 모두 방어해 왔다…”
대통령의 담화문에서 보듯 김창룡의 직무 범위는 국가안전보장에 관한 일뿐만 아니라 아편 밀매나 밀수 같은 일까지 광범위하였다. 남로당은 전쟁 이전부터 아편 밀매를 통해 활동자금을 마련하였다. 남로당 조직부장 이중업은 주문진과 포항을 중심으로 북한으로부터 매월 10kg 이상의 아편을 밀수입해다가 동족을 마비시키고 있었다. 이중업은 아편 판매책을 통해 국내는 물론이고 홍콩과 상해(上海) 등 해외에까지 밀수출하여 그 판매 대금으로 정치자금을 조달하고 있었다. 그런 이중업의 체포는 곧 남로당의 자금을 옥죄는 것이었고, 이는 결국 남로당의 붕괴를 촉진하는 것이었다.
북한은 6·25전쟁 중에도 아편을 만들어 국내로 반입시켜 간첩들의 공작비를 충당시키고, 나아가 유엔군 군인들에게 판매하여 염전(厭戰)사상을 유발시키려는 목적으로 대규모로 유통시켰다.
북한은 배편으로 강화도를 통해 아편을 들여보내 서울과 부산 등으로 유통시켰다. 아편 판매책들은 북한에서 훈련을 받은 밀파된 공작원들로 적발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에 김창룡의 특무부대는 은밀히 유통되는 조그마한 단서를 통해 광범위한 탐문 수색과 정보수집, 그리고 의심되는 장소 및 인물에 대한 끈질긴 잠복근무를 통해 퍼즐을 맞추어 나가듯 수사를 진행하였다. 그 결과 북한 간첩 양성소인 금강정치학원에서 훈련을 받은 박동수를 강화도에서 체포하여 그 전모를 밝히게 되었다.
反共建軍史
원고는 대한민국 반공의 상징인 육군특무부대장 김창룡 장군이 생전에 기록해둔 회고록 성격의 대공수사(對共搜査) 비망록이다. 또한 건국과 6·25전쟁을 전후하여 대한민국 정부와 국군이 공산주의와 싸웠던 것을 기록했다는 점에서 대한민국 반공투쟁사(反共鬪爭史)이자 국군의 반공건군사(反共建軍史)이며 특무부대의 대공수사기록으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대공수사기록은 내용의 특수성과 비밀성으로 인해 그 직책을 수행했던 인물이 회고록 또는 비망록으로 내놓기가 쉽지 않다. 그러한 탓인지 건군 70여 년이 지났지만 육군특무부대 출신의 기록은 흔치 않다. 특정 사건과 인물에 대해 단편적으로 언론에 인터뷰 형식으로 알려진 것은 있으나 경험담을 모두 담은 회고록 같은 것은 흔치 않다. 숙군 당시 육본 정보국장으로 수사를 책임졌던 백선엽 장군도 자신의 회고록 중 제한해서 그 일부분만 소개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번에 책으로 발간되는 김창룡 장군의 원고는 자신이 관여했던 중요한 대공수사 사건에 대해 비교적 상세하게 빠짐없이 기록해놓았다는 점에서 그 사료적 가치가 크다고 하겠다. 원고에서 김창룡 장군은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 또는 말미에 자신의 견해를 밝힘으로써 당시 그 사건을 바라보는 수사책임자로서 인식이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사료로서 그 의미 또한 적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 책은 해방공간과 건국 전야, 건국, 그리고 6·25전쟁 전후의 대한민국이 북한의 각종 도발과 위협 앞에서 굴하지 않고 그것을 어떻게 극복해나갔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잔학성과 폭력성에 기반을 둔 비인간적인 군상을 역사적 사실로 제시해줌으로써 대한민국의 사상적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일깨워주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원고는 대한민국 건국 전후의 현대사를 이해하는 길잡이 역할로서 부족함이 없을 것으로 사료된다.
대한민국의 수호자

▲국립대전현충원에 있는 김창룡 장군의 묘.
김창룡 장군의 원고는 그가 군대에 입문한 후 평생을 공산당 때려잡는 방첩 및 대공전선에서 싸웠던 대한민국 수호자이자 반공의 상징이며 대공전선의 제1인자임을 입증하고 있다. 그는 전쟁 이전 남로당 세력을 일망타진함으로써 6·25전쟁의 위기에서 대한민국을 수호하였고, 숙군을 통해 중국의 국공내전에서 장제스 군대처럼 공산당이 침투했던 국군을 싸워 이길 수 있는 강력한 반공군대로 탈바꿈시켰으며, 전쟁을 전후하여 사회 전반에 걸쳐 공산 프락치를 부식시켜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체제 기반을 흔들려는 북한의 남침 야욕을 잡초를 뽑아내듯 소탕함으로써 대한민국을 사상적으로 건강하게 만들었다.
김창룡 장군이 특무대에서 활동한 시기는 공산주의의 침략과 위협으로부터 가장 어렵고 힘들었던 건국 전야로부터 대한민국 건국, 그리고 6·25전쟁이 맞물린 민족격랑의 시대였다. 이런 위난한 시기에 그는 반공의 최선봉에서 특무부대를 지휘하여 대한민국을 굳건한 반공국가로 다져놓았다. 그는 오로지 이 땅에서 전제적인 공산주의를 없애고 자유로운 대한민국을 건설하기 위해 밤낮없이 노력하였다. 대한민국은 그런 안보적 토대 위에서 경제적 발전을 통해 오늘날의 자유와 번영을 누리고 있다. 그 이면에는 반공전선에서 사선(死線)을 넘으며 숱하게 싸웠던 김창룡 장군과 그 특무부대원들의 피와 땀이 자양분 역할을 했다는 것은 숨길 수 없는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김창룡 장군의 원고가 그동안 정치적 이해와 이념적 편향에 따라 오염되고 얼룩진 대한민국 현대사를 이해하고 올바르게 정립되는 데 도움이 되기를 기대해본다.⊙
글 : 남정옥 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05.17 태극기를 만든 사람은 ‘친일파’가 아니었다

▲1882년 '해양 국가들의 깃발'에 실린 '이응준 태극기'.
벌써 18년 전의 일입니다. 2004년 1월, 조선일보 문화부 막내 기자였던 저는 한 고서상으로부터 제보를 받았습니다.
“미국 책 한 권을 입수했는데요, 태극기가 실려 있어요.”
미국 해군부(Navy Department)가 발간한 ‘해양 국가들의 깃발(Flags of Maritime Nations)’이란 책이었습니다. 여러 나라들의 국기가 컬러로 실려 있었고, 그중 조선(Corea)의 국기로서 태극기가 소개돼 있었습니다. 괘의 좌우가 바뀌긴 했지만 태극과 4괘로 이뤄졌다는 점에서 현재의 태극기와 크게 다를 게 없었습니다. 무심히 책을 훑어봐선 별 이상한 점을 느낄 수 없었죠.
그런데 책의 서문을 보고서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이게 도대체 무슨...”
거기 이렇게 적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3000부를 제작, 각 기관에 분배하기로 1882년 7월 19일 상원에서 결의했다.’
이 기록이 왜 놀라운 일이었느냐면, 지금까지 태극기를 만든 사람은 1882년 8~9월 특명전권대신 겸 수신사로 일본에 파견된 박영효(1861~1939)였다는 것이 정설이었기 때문입니다. 박영효의 ‘사화기략’에는 태극기를 만든 것이 1882년 9월 25일이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그런데 두 달 이상 이른 7월 19일에 이미 미국에선 ‘태극과 4괘로 이뤄진 조선 국기’를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박영효가 만들었다는 ‘태극기’보다 최소한 2~3개월 앞서 조선 국기인 태극기가 존재했다는 것이 됩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가. 이태진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현 명예교수, 훗날 국사편찬위원장)에게 물어봤습니다. 자료를 본 이 교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 이것은... 김원모 선생 말씀이 맞는다는 것이 되는데!”
무슨 얘길까요. 1882년 5월 22일, 제물포에서 중요한 행사가 거행됐습니다. 조선이 미국과 수교를 맺은 조미수호통상조약 조인식이었죠. 이때 미국 성조기와 나란히 조선의 국기가 걸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근대사의 자료라는 게 묘한 데가 있어서, 이보다 11년 전에 발생한 신미양요는 꽤 많은 자료 사진이 남아있습니다만 정작 조미수호통상조약 당시의 사진은 전혀 현존하는 것이 없습니다. 분명 누군가 사진을 촬영했겠지만 말입니다. 따라서 1882년 5월 22일 게양됐던 ‘조선 국기’가 무엇이었는지 알 수 없었죠. 그런데 김원모 단국대 명예교수는 바로 이 국기가 태극기의 원형이었다고 보고 있었던 겁니다.

▲김원모 단국대 명예교수
김원모 교수를 만나 자료를 보여줬더니 몹시 놀라워하며 당시의 상황을 설명했습니다. “조미수호통상조약 당시 미국 측 전권대사는 해군 제독 로버트 슈펠트(Shufeldt·1822~1895)였습니다. 그런데...”
김 교수가 발굴한 슈펠트의 ‘조선 개항 체결사’에는 이런 내용이 수록돼 있었습니다. 당시 청나라에서 특사로 파견한 마건충은 조선이 청의 속국이라고 주장하며 조선 측이 청나라의 황룡기와 비슷한 ‘청운홍룡기’를 게양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슈펠트는 이것이 조선을 독립국으로 인정하려는 자신의 정책에 위배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에 조선 대표인 신헌과 김홍집에게 “조선의 국기를 제정해서 사용하는 게 좋겠다”고 조언했습니다.
슈펠트의 의도를 알아차린 김홍집은 역관 이응준(1832~?)에게 ‘국기를 그리라’고 지시했고, 이응준은 미 군함 스와타라(Swatara)호 안에서 국기를 만들었습니다. 국기를 만든 것은 1882년 5월 14일과 22일 사이였고, 이 국기는 5월 22일 제물포에서 열린 수호통상조약 조인식에서 게양됐습니다. 그해 7월 ‘해양 국가들의 깃발’에 실은 태극기는 바로 이때 내걸린 조선 국기를 보고 그렸을 가능성이 커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박영효 태극기’보다 4개월 앞선 것이 됩니다. 괘의 좌우가 바뀐 것에 대해선 “반대편에서 보고 그렸을 가능성이 있다”는 해석이 나왔습니다.
회사로 돌아와 이걸 기사화할 것을 고민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퇴사한 L선배가 지나가다 웃으며 제게 물었습니다.
“유(兪)공, 다음주 기삿거리는 뭐가 있나?”
저는 저도 모르게 최대한 일상적인 말투로 대답했습니다.
“아 네... 최초의 태극기가 발견됐습니다.”
그걸 들은 L선배의 황당한 표정이 지금도 잊히지 않습니다.
박영효 이전 최초의 태극기가 발견됐다는 사실은 조선일보 2004년 1월 27일자 사회면과 문화면 기사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이응준 태극기'를 처음 보도한 조선일보 2004년 1월 27일자 사회면.
이후 학자들 사이에서 태극기의 기원과 관련한 연구가 진척됐습니다. 대체로 ‘태극기를 처음 만든 사람은 역관 이응준이었고, 박영효는 이응준의 태극기를 모본으로 태극기를 만들어 공인되도록 했다’는 것으로 의견이 모아졌습니다. 하지만 ‘해양 국가들의 깃발’에 실린 태극기가 과연 ‘이응준 태극기’가 맞는지에 대한 연결고리가 빠진 상태였습니다.
그 ‘빠진 단서’가 세상에 드러난 것은 2018년 8월이었습니다.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가 미국 워싱턴 국회도서관 소장‘슈펠트 문서 박스’에서 발견한 태극기. 역관 이응준이 제작해 1882년 5월 22일 제물포에서 열린 조·미 수호 통상조약 조인식에 성조기와 함께 걸렸던 조선 국기임이 확실시된다.
이태진 교수가 미국 워싱턴 국회도서관 소장 ‘슈펠트 문서 박스’ 속 ‘한국 조약 항목’에서 태극기 그림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해양 국가들의 깃발’에 실린 태극기 도안과 동일한 모양이었습니다. 책에서 태극기 위에 ‘COREA’, 아래에 ‘Ensign(깃발)’이라 적힌 것까지 똑같았는데, 여기선 손으로 쓴 글씨였습니다. 즉 ‘해양 국가들의 깃발’에 실린 태극기의 원본이었던 것입니다. 이 태극기 그림에 날짜가 적혀 있지는 않았지만, 바로 뒤에 있는 문서가 1882년 6월 11일 작성된 것이었습니다. 슈펠트는 1882년 5월 조미수호통상조약 이후 다시 조선을 방문한 일이 없었습니다.
이 소식을 처음 들은 저는 속으로 이런 외마디 말을 외쳤습니다. “만세!”
그리고 이 사실 역시 제가 특종 보도했습니다.

▲이태진 교수가 미국 워싱턴에서 '슈펠트 문서' 속에 담긴 '이응준 태극기'를 찾아낸 사실을 보도한 조선일보 2018년 8월 14일 A8면.
‘해양 국가들의 깃발’에 실린 태극기가 1882년 5월 22일 조미수호통상조약 당시 게양됐던 ‘이응준 태극기’란 사실이 확실해진 것입니다. 다시 말해, 태극기를 만든 사람은 박영효(1882.9)가 아니라 이응준(1882.5)이었던 것입니다.
그 동안 많은 백과사전의 서술이 바뀌었습니다. ‘태극기를 만든 사람’ 또는 ‘태극기의 창안자’가 종래의 박영효에서 이응준으로 고쳐졌습니다. 그러면 이응준은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기록이 많지 않은데, 1850년 증광시 역과에 2위로 합격한 뒤 역관이 된 뒤 중국어 통역 일선에서 활약했던 것으로 나옵니다. 1882년 조미조약 때는 영어를 아는 청나라 역관을 통해 미국과의 통역을 담당했습니다.
제가 찾아낸 조금 묘한 기록이 있습니다. ‘고종실록’에는 1889년 사신단의 일원으로 청나라에 간 이응준이 귀국 즉시 체포돼 의금부에 수감됐다고 적혀 있습니다. 그를 고발한 사람은 다름아닌 중국 북양군벌의 실력자이자 당시 조선을 쥐락펴락하던 원세개(위안스카이)였습니다. 그는 “이응준이 왕을 속이고 2만금을 가로챘다”고 했습니다. 전후 사정을 보면 이응준이 청나라 대신들에게 뇌물을 주라는 밀명을 받은 뒤 미처 실행하지 못한 상태에서 횡령죄를 뒤집어쓴 것으로 보입니다. 일각에선 ‘청나라 깃발을 국기로 쓰라는 권유를 무시당했던 청나라가 조선 국기를 창안한 이응준을 눈엣가시로 봤을 것’이라 보기도 합니다.

▲고종실록 26권 1889년 3월 30일, 역관 이응준이 의금부에 수감된 기록
이후 이응준이 어떻게 됐는지는 좀처럼 드러나지 않습니다. 임금의 가마를 부실하게 만들었다는 죄로 벌을 받고 하루아침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세종 때 장영실을 연상케 하는 부분입니다.
이후 ‘태극기를 만든 사람’으로 오래도록 알려진 사람은 중인 출신의 일개 역관인 이응준이 아니라, 철종 임금의 부마였던 ‘금릉위’ 박영효였습니다. 박영효는 갑신정변을 일으킨 개화파의 주역 중 한 사람이었지만 훗날 일제로부터 후작 작위를 받고 조선귀족회 회장을 맡는 등 친일 활동을 했습니다. 태극기의 진짜 창안자였던 이응준이 친일파가 아니었다는 사실은 지금으로선 무척 다행스런 일이라 하겠습니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 조미수호통상조약 140주년을 맞아 오는 7월 7일까지 ‘조미수교와 태극기’ 특별전을 열고 ‘가장 오래된 태극기’ 2점을 전시한다고 합니다. 이태진 교수가 ‘슈펠트 문서’에서 찾아낸 태극기와 1882년 7월 ‘해양 국가들의 깃발’에 실린 태극기입니다. 14년 전 그 태극기를 처음 보도했던 기자의 입장에서 감회가 깊어질 수밖에 없는 전시입니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조미수교와 태극기' 특별전
조선일보 유석재기자
◆06.03 초대 주미공사 박정양 워싱턴 활동 사진 최초 발견
워싱턴 고택 방문 현장
당시 참찬관으로 공사관 일행이었던 이완용과 부인 사진도
초대 주미조선전권공사인 박정양이 공사관원들과 함께 조지 워싱턴 고택을 방문한 사진이 확인됐다. 초대 주미공사관원들의 활동상은 기록 및 그림으로만 전해졌는데, 사진이 발견된 것은 처음이다. 주미대한제국공사관(관장 김상엽 국회소재문화재재단 미국사무소장)은 2일(현지 시각) 초대 주미공사관원들의 미국내 활동을 담은 사진 2장을 공개했다.
첫 번째 사진은 박정양(朴定陽)이 공사관원들과 함께 1888년 4월26일 버지니아 마운트 버넌에 위치한 미국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의 고택을 방문한 사진이다.

▲주미대한제공국사관이 2일(현지 시각) 초대 주미공사관원들의 미국내 활동을 담은 사진을 공개했다. 왼쪽부터 무관 이종하, 주미공사 박정양, 수행원 화가 강진희, 서기관 이하영. /주미대한제공국사관
무관 이종하(李鍾夏)와 수행원인 화가 강진희(姜璡熙)가 양 옆에 있고, 오른쪽에는 서기관 이하영(李夏榮)이 현지인 가족들 사이에 서 있다. 현지인들이 이들 관원들 뒤에 모여 있는 모습을 두고 공사관은 “현지인들의 많은 관심과 환영을 받았다”고 했다. 이들은 미국에 처음 부임했을 때 독특한 한복 차림새로 가는 곳마다 눈길을 끌었다.
이 사진은 미국인 이자벨 하인즈만이 한 경매 사이트에서 구입해 보관하다 2020년 마운트 버넌 워싱턴 도서관에 기증했다. 도서관측은 공사관측에 해당 사진에 나온 인물들과 방문일시 등을 문의했고, 공사관측은 국내 전문가들과 자료 등을 토대로 사진에 찍힌 인물들이 박정양 초대 공사 등 외교 공관원들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한다.
박정양이 조지 워싱턴 생가를 방문한 때는 박정양과 관원들이 그해 1월17일 백악관을 방문해 그로버 클리블랜드 대통령에게 국서(친서)를 전달한지 3개월이 지난 시점이다. 당시 참찬관이었던 이완용과 번역관이었던 이채연은 본국으로 일시 귀국길에 올라 함께 방문하지 못해 사진에는 없다. 공사관은 “사진은 박정양 등 공관원들이 워싱턴의 고택에 배를 타고 도착한 뒤 현지인들과 기념사진을 촬영한 것으로 추정된다”며 “이 사진은 우리나라 공시 외교관원이 미국의 기관을 방문한 가장 오래된 사진으로 여겨진다”고 했다.
또 한 장의 사진은 이듬해인 1989년 5월6일 이완용과 이채연이 본국에서 미국에 돌아온 후 부인들과 함께 마운트 버넌을 방문한 사진이다. 이 사진에는 날씨 탓인지 남성들이 양산을 들고 있는 것이 모습이 담겼다.

▲왼쪽부터 박정양의 귀국으로 공사대리를 맡고 있던 이하영, 이채연의 부인, 이채연, 알렌과 알렌의 딸, 이완용, 이완용의 부인. /주미대한제공국사관
대미외교사 전문가인 한철호 동국대 교수는 이번 사진 자료 발굴에 대해 “당시 고종의 지시에 따라 미국 현지의 사정, 제도, 문물 등의 실상을 파악하던 박정양 공사 일행의 현지 활동모습이 사진을 통해 처음 확인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했다. 공사관 복원공사 프로젝트 매니저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김종헌 배제대 교수는 “박정양이 그의 문집에서 조지 워싱턴을 여러 차례 언급하고 마운트 버넌 방문을 중요하게 서술한 것은 조선의 자주 독립을 위한 노력 때문이며, 귀국 후 독립협회를 적극 지원한 것 역시 같은 맥락에서 평가할 수 있다”고 했다.
1887년 조선이 미국에 전권공사를 파견하려 하자 청나라는 ‘속국의 공사 파견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반발했었다. 당시 조선 정부는 미국 활동을 청나라에게 보고하고 청 관리가 외교 활동에 동행한다는 청의 조건을 수용했지만, 박정양은 워싱턴DC에 도착하자마자 청에 보고 없이 당시 미 대통령 클리블랜드에게 신임장을 제정했다. 청은 박정양의 처벌을 요구하는 등 압박을 넣었고, 박정양은 미국에 도착한지 1년여만에 귀국했다. 김상엽 관장은 “이번 사진 공개를 계기로 관련 기관·연구자들과의 협력을 강화하고 공사관과 한미 외교사 관련 자료를 적극적으로 찾을 예정”이라며 “수집한 자료는 향후 전시회를 통해 공개할 계획”이라고 했다.
조선일보 워싱턴=이민석 특파원
◆06.10 왜군 7만 물리친 함양 백성, 그들은 왜 잊혀져갔나
경남 함양 황석산성

김정탁 노장사상가
경남 함양의 아나키스트들을 취재하다 이곳 황석산성에서 정유재란의 승패를 가늠할만한 결정적 전투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또 이 전투는 정유재란 때 한양이 왜군에 의해 점령당하지 않은 이유에 해당할 만큼 중요했다. 임진왜란 때는 충주 탄금대에서 신립이 이끄는 조선군이 왜군에 패해 선조가 한양을 비우고 의주로 피난을 가야 했다. 정유재란 때는 어째서 왜군이 한양을 점령하지 못했을까. 이와 관련해서 몇 가지를 추론해 볼 수 있다.
황석산성 전투에서 수천명 항전
임진왜란·정유재란 종식 이끌어
이순신, 명량해전 대비 시간 벌어
참패한 일본, 전투상황 왜곡·조작
나라 지키려 목숨을 던진 민초들
역사의 주인공으로 되살아나야
왜군은 왜 한양을 점령 못했나

▲하늘에서 내려다본 경남 함양군 황석산성 정경. 정유재란 당시 왜군에게 마지막까지 항거한 이들의 절개가 서린 곳이다. [사진 함양군청, 김정탁]
첫째, 정유년 때 왜군은 임진년 때와 비교해 전력이 약해서였을까. 정유년 때도 12만 명의 왜군이 동원돼 임진년 때와 비슷한 규모였다. 그리고 정유재란 때는 조선 백성을 노예로 팔 수 있는 권한을 병사에게 부여했기에 개전 초기 왜군의 사기는 높았다. 게다가 원균 휘하의 조선 수군이 칠천량에서 전멸해 왜군은 승승장구할 거로 보았다.
둘째, 임진왜란은 5년이었는데 정유재란은 2년으로 기간이 짧아서였을까. 짧은 전쟁 기간은 한양 점령과 큰 관련이 없다. 임진년 때 한양이 점령된 건 왜군이 부산에 상륙하고 20일 만의 일이다. 그러니 2년간 계속된 정유재란에서 왜군이 잘 싸웠다면 한양 점령은 얼마든 가능했다. 더욱이 임진왜란 때 조·명연합군이 평양성을 탈환하자 왜군은 남해안에 성을 쌓고 장기전에 대비했으므로 전쟁 기간이 5년이라도 실제 전투가 벌어진 건 1년이 채 안 된다.

▲그래픽=김은교 kim.eungyo@joongang.co.kr
셋째, 정유재란 때 조·명연합군이 충청도 직산에서 왜군을 물리쳐 왜군이 더 북상할 수 없어서였을까. 이것이 주로 언급되는 이유인데 직산 전투에 참여한 양쪽 군대의 규모가 생각만큼 크지 않다는 사실을 알면 이를 이유로 내세우기 힘들다. 왜군이 직산에서 전투를 벌인 건 한양으로 북상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조·명연합군을 경상도로 유인하기 위한 성격이 짙다. 그렇다면 직산 전투는 전주성에서 부상병 치료 등을 위해 시간을 벌기 위한 왜군의 양동작전으로 보인다.
넷째, 이순신이 명량해전을 승리로 이끌어서였을까. 이는 상당 부분 관련이 있다. 서해로 들어오는 왜군 보급로가 끊겨 이런 상태에서 한양을 침공하긴 어렵다. 그렇지만 황석산성 전투에서 왜군의 주력이 무너지지 않았다면 명량해전의 승전도 기대하기 힘들었다. 황석산성 전투로 왜군의 전라도 진입이 늦어져 이순신이 명량해전에 대비할 시간을 벌어서다. 이런 사실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아 황석산성 전투가 우리 역사에서 소홀히 다루어져 안타깝다.
왜군 사상자만 4만8000명

▲황석산성에서 순국한 이들의 위패를 모신 황암사 사당. 무명의 희생자인 백성을 중앙에 모셨다. [사진 함양군청, 김정탁]
정유재란 때 왜군은 두 방향으로 쳐들어왔다.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가 이끄는 7만5000명의 우군은 부산으로 들어와 창녕-합천-함양 방면으로 쳐들어왔고,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가 이끄는 4만5000명의 좌군은 사천·웅천-광양을 거쳐 섬진강을 따라 북상해서 쳐들어왔다. 이처럼 경상도를 위쪽과 아래쪽에서 각각 좌우로 횡단한 우군과 좌군은 전주성을 함께 공격한 뒤 우군은 한양을 향해 계속 진격하고, 좌군은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 전라도 곡창지대를 확보하려고 했다.
그런데 여기에 차질이 생겼다. 우군이 황석산성 전투에서 조선 백성군으로부터 큰 타격을 받아서다. 향토사학자 박선호가 쓴 『백성의 전쟁』에 따르면 이 전투에서 7만5000명의 왜군 중 4만8000명이 죽거나 다쳤다. 이 때문에 우군은 전주성에 예정보다 늦게 도착했는데 전주성은 좌군에 의해 이미 함락된 상태였다. 좌군과 우군의 전투 결과가 왜 이렇게 갈렸을까. 산성 싸움 여부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좌군은 남원에서 산성 싸움을 하지 않아 조·명연합군을 이긴 데 반해 우군은 함양에서 산성 싸움을 벌여 큰 피해를 보아서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조선은 기존의 기동방어 전략을 산성을 중심으로 한 거점방어 전략으로 바꾸었다. 산성 싸움을 벌여야 왜군의 조총 공격을 무력화할 수 있어 남원에선 왜군을 교룡산성에서 기다렸다. 그런데 명나라 부총병 양원(楊元)이 교룡산성을 버리고 남원성으로 들어갔다. 조·명연합군이 10배가 넘는 4만5000명의 왜군과 전투를 벌이려면 당연히 산성 싸움을 벌여야 하는데, 양원은 산성 싸움에 익숙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교룡산성을 포기했다. 이런 잘못된 판단으로 남원성을 사수했던 4000의 병사와 6000의 백성은 죽음을 맞이했다. 남원의 만인의총은 이래서 세워졌다.
전사자·부상자 코까지 잘라

▲황암사 경내의 의총. 의총 뒤편에 있는 컨테이너 가건물이 보기 흉하다. [사진 함양군청, 김정탁]
한편 우군은 창녕의 화왕산성을 그대로 지나쳤다. 곽재우의 의병을 겁낸 탓도 있지만, 산성 싸움을 피하고 싶어서였다. 그렇지만 합천의 벽견산성에선 조선군 방어가 허술해 싸움을 벌였다. 벽견산성을 사수하는 데 실패한 조선 백성군 1000여 명이 황석산성으로 옮겨가자 왜군은 여기를 다시 공격했는데, 여기선 주력을 상실할 정도로 큰 타격을 입었다. 이런 전투 결과가 부끄러워서인지 왜군은 황석산성 전투의 전모를 숨기고 조작까지 했다. 이것이 우리 역사에서 황석산성 전투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이유이다.
한 예로 황석산성을 공격한 우군 숫자를 7만5000에서 2만7000으로 크게 줄였다. 이는 좌군의 4만5000과 비교해서 너무 적은 수다. 한양 함락이란 막중한 임무를 지닌 우군은 후방을 담당한 좌군에 비해 당연히 병력이 많아야 한다. 또 우군 숫자를 이렇게 줄이면 좌우군을 합해봐야 7만2000밖에 되지 않는데, 그러면 정유년 때 동원된 12만 명 중 나머지 4만8000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물론 우군 일부만 황석산성 전투에 참여했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렇더라도 우군이 전주성에 예정보다 늦게 도착한 이유를 어떻게 설명할까. 황석산성 전투에서 피해를 본 것 말고는 다른 이유를 찾기 힘들다.
물론 닷새간 치른 전투에서 4만5000명의 왜군이 죽거나 다친 사실도 좀처럼 믿어지지 않는다. 이에 대해 박선호는 일본 측 사료를 토대로 왜군 내에 자체 분열이 생겨나 사상자가 이렇게 많이 늘어났다고 주장한다. 왜군의 자체 분열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가 허락한 노예 팔기 때문에 벌어졌다. 병사가 노예를 팔려면 조선군과 명군의 코 세 개를 베어야 하는데, 이를 쉽게 확보하기 위해 왜군 전사자와 부상자의 코까지 베는 가운데 자중지란이 생겨났다. 게다가 우군 대장 모리가 큰 부상을 당해 휘하 군대를 제대로 통솔할 수 없어 이런 참극이 방치됐다.
조선인 혼 담긴 황암사 불태워
정규군이 아니라 백성군과의 전투로 패한 데다 패배의 중요한 원인이 아군·적군을 가리지 않은 코베기여서 일본은 황석산성 전투의 기억을 지우고 싶었다. 그래서 1910년 한국을 병탄하자마자 황석산성 전투에서 죽은 수천 명의 조선인 영혼을 기리기 위해 세운 황암사를 불태웠다. 또 안의군을 없애고 거창군과 함양군 일부로 편입했다. 그런데 일본이 이렇게 한 데는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황석산성 전투가 결과적으로 임진과 정유전쟁 대단원의 막을 내린 이유 중 하나가 됐기 때문이다.
안의(安義)는 의로움(義)에 편안하다(安), 즉 의롭게 사는 게 편안하다는 말이다. 황석산성 전투를 지휘했던 민간인 군무장 유명개, 홍의장군 곽재우의 당숙인 안의현감 곽준, 지병으로 함양군수를 사임했음에도 함께 남아서 싸웠던 조종도는 가족들과 함께 기꺼이 ‘안의’의 길을 택했다. 또 황석산성 인근에 살았던 안음·함양·산음(산청)·거창의 수천 명의 백성도 이 길을 따랐다. 한양의 사족만 대접받는 조선사회에서 이들이 목숨까지 버려야 할 아무런 까닭이 없다.
맹자는 의(義)를 수오지심(羞惡之心), 즉 부끄러워할 줄 아는 마음으로 정의한다. 요샛말로 ‘쪽팔리지 않는’ 마음이다. 소설가 이병주는 “우리의 산하는 햇빛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달빛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쪽팔리게 살았으면서 역사에 이름을 남긴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이는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황석산성 전투를 치른 수천 명 백성은 쪽팔리지 않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초개처럼 버렸으니 역사에 이름을 남기지 못해도 신화의 주인공이라도 되어야 마땅하지 않는가.
중앙일보 김정탁 노장사상가
월간조선 06월 호
◆통일신라의 국경은 만주에 있었다
⊙ 진흥왕 때 황초령·마운령까지 진출했던 신라의 東北 영토가 통일 후에는 원산만 이남으로 후퇴한 것은 이해하기 어려워
⊙ 신라-발해 국경선은 랴오둥반도(遼東半島) 톈산(天山)산맥 - 지린성(吉林省) 지린합달령 - 헤이룽장성(黑龍江省)의 목단령(牧丹嶺)으로 이어지는 線
⊙ 日帝의 滿鮮史觀에 따라 ‘평양’을 지금의 평양으로 보는 데서 誤認 시작돼
⊙ 대동강으로 알려진 浿河는 랴오닝성 盖州에 있었다
⊙ 발해와의 국경이었던 신라의 井泉郡은 ‘용두레 우물’이 있는 지금의 룽징(龍井)
허우범
1961년생. 인하대 국어국문과 졸업, 同 대학원 융합고고학 박사 / 인하대 홍보팀장, 대외협력처 부처장 역임. 現 인하대 융합고고학과 초빙교수 / 저서 《여말선초 서북국경과 위화도》 《삼국지기행》 《술술삼국지》 《동서양 문명의 길, 실크로드》 등

▲중국 지린성 룽징시 용두레우물 앞에 있는 연혁비.
신라는 처음 경상도 지역에서 건국하여 점차 영토를 확장하였다. 6세기 중반 진흥왕 시기에는 한강 유역을 차지하였고, 함경남도의 함흥과 단천 지역까지 영토를 넓혔다. 진흥왕은 자신의 치적을 기념하기 위해 4곳(함남 함흥, 함남 단천, 북한산, 경남 창녕)에 순수비(巡狩碑)를 세웠다.
신라는 당(唐)과 연합하여 삼국을 통일하고 백제와 고구려의 영토를 분할하였다. 고구려의 도읍지인 평양을 기준으로 대륙 쪽의 땅은 당이 차지하고, 한반도 쪽의 땅은 신라가 차지하였는데, 이에는 백제의 땅이 모두 포함되었다. 우리의 역사교과서에 비정(比定)된 통일신라의 강역은 현재의 평양 아래쪽 대동강에서 동해안의 원산만까지 잇는 선(線)으로 되어 있다. 이미 진흥왕대에 개척한 황초령비와 마운령비가 있는 함경남도 지역이 제외된 것이다. 학계에서는 발해의 공격으로 신라가 원산만 이북 지역을 상실하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현재 교과서의 통일신라 강역.
신라는 전투의 승패에 따라 영토를 잃기도 하였지만 다시 회복하였다. 이러한 사실들은 사서(史書)에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진흥왕 시기에 확보했던 영토가 그 이후에 상실한 경위는 사료(史料)의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신라의 영토는 삼국통일 때까지 줄곧 확장되었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통일신라의 국경선을 대동강에서 원산만까지로 못 박고 있는 것은 어찌 된 영문인가.
滿鮮史觀
그 가장 큰 이유는 고구려의 평양이 현재의 평양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1905년 제국주의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자 을사늑약(乙巳勒約)을 강요,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보호국가로 삼았다. 당시 일본은 한반도를 발판으로 만주경영(滿洲經營)을 위한 계획에 착수하여 만주 지역과 한반도를 하나의 역사 단위로 파악하는 ‘만선사관(滿鮮史觀)’을 만들었다. 이 사관은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와 이나바 이와키치(稻葉岩吉)에 의해 체계화되었다. 주된 연구대상은 한국의 고대사, 한국 식민지화와 만주 진출을 추진하는 데 용이(容易)한 역사지리의 고증(考證)이었다.
일제(日帝)는 한국의 식민지화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다방면으로 노력하였다. 한국을 보호국가로 삼은 것은 미성숙한 조선인들을 성숙하게 완성시켜주기 위한 것이며, 일본과 조선은 한 조상이었다는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을 내세우며 조선의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였다.
또한 일제는 고조선의 평양을 현재 북한의 평양이라고 하고 이로부터 삼국을 통일한 신라와 고려의 역사지리를 모두 한반도 안에 욱여넣는 반도사관을 정립하였다.
그들은 이러한 식민사관을 완성하기 위하여 먼저 남만주철도주식회사(南滿洲鐵道株式會社)로 하여금 《만주역사지리》와 《조선역사지리》를 완성토록 하였다. 이 작업에 책임자로 참여한 시라토리는 ‘책임자의 변(辯)’에서 말하기를, “국가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하여 우리도 적극적인 협조를 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 두 책의 목적은 압록강(鴨綠江)과 두만강(豆滿江)이라는 자연지리를 경계로 그 동쪽과 남쪽은 한국사, 서쪽은 중국사, 북쪽은 여진족 등등의 역사 영역으로 기록하는 것이었다. 1913년에 완성된 이후 조선 역사 연구에 필수도서로 활용되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1938년에 조선사편수회에서 발간한 《조선사》의 국경사 부분을 설명하는 근간(根幹)이 되었다.
“고려 西京=고구려 평양=지금의 평양”
삼국(三國)의 국경 관련 연구에 참가한 일본 학자는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가 대표적이며, 이외에도 나이토 도라지로(內藤虎次郞), 하야시 다이스케(林泰輔), 마쓰이 히토시(松井等), 이마니시 류(今西龍), 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 야나이 와타리(箭內亙) 등이 있다. 이들의 신라 강역 연구는 고구려와 백제의 경계를 함께 살펴보는 것이었는데 이는 우리 역사의 공간을 한반도 안으로 비정하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그리하여 고구려의 평양과 고려의 서경을 사료 검토도 없이 다음과 같이 확정하였다.
〈고려의 서경(西京)이 고구려의 평양이고 지금의 평양이라는 것은 어떤 고증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야나이 와타리)
일제가 제일 중시한 역사지리는 고구려의 도읍지인 평양이다. 나당(羅唐)연합군이 고구려 영토를 분할할 때 그 기준이 평양이었고, 고려 시대에는 서경이 되었기 때문이다. 즉 고구려의 평양을 확정 지으면 통일신라와 고려의 영토도 자연스럽게 확정할 수 있었다. 따라서 고구려의 평양을 우선적으로 비정하였는데, 마침 평안도에 평양이라는 지명이 있으니 이곳이 곧 고구려의 평양이요, 고려의 서경이라고 확정 지어버린 것이다.
역사에서의 지명은 전쟁이나 반란, 또는 군현(郡縣)의 조정 등에 따라 변동될 수밖에 없다. 고구려는 모두 8번에 걸쳐 천도(遷都)를 하였다. 우리는 고구려의 천도를 모두 현재의 중국의 지린성(吉林省) 지안(集安)시와 평안도의 평양(平壤)을 오간 것으로 배웠다. 그런데 8번의 천도를 두 곳으로만 반복하였다는 사료 설명은 없다. 진정 평양은 오직 현재의 평양뿐이었단 말인가.
평양이 압록강 동쪽에 있다?

▲일제가 구축한 통일신라 강역.
고려의 서경은 반란이 자주 일어난 지역이었다. 금·원(金元)대에는 서경을 총괄하는 장수가 인근의 성들과 함께 적에게 귀부(歸附)하기도 하였다. 《원사(元史)》의 기록을 보면 이때 귀부한 고려의 땅을 원(元)은 동녕로(東寧路)에 편입시키고 그 지역의 연혁을 이렇게 기록해놓았다.
〈동녕로는 원래 고구려 평양성이었고 또 장안성이라고 했다. (중략) 진(晉) 의희(義熙) 이후 그의 왕 고련(高璉)이 처음으로 평양성에 거주했다. 당이 고구려를 정복하고 평양을 빼앗자 그 나라가 동쪽으로 옮겨갔다. 압록수(鴨綠水) 동남쪽으로 약 천리 떨어진 곳인데 옛날 평양이 아니다. 왕건(王建) 때에는 평양을 서경(西京)이라고 했다. 원나라 지원(至元) 6년(1269년)에 이연령(李延齡), 최탄(崔坦), 현원렬(玄元烈) 등이 부(府), 주(州), 현(縣), 진(鎭) 등 60개의 성을 이끌고 귀부했다. 지원 8년(1271년)에 서경이 동녕부(東寧府)로 개칭됐다.〉(《원사·지리지》, 동녕로)
고련은 고구려 장수왕의 이름이다.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은 지금의 중국 랴오닝성 랴오양(遼陽)이다. 이는 아래의 기록에서 알 수 있다.
〈평양성은 압록강 동쪽에 있는데 일명 왕검성이라고 하며 기자의 고국(故國)이다. 성 밖에는 기자묘가 있다. 한나라 때 낙랑군 치소였는데 진(晉) 의희(義熙) 이후 왕 고련이 이 성에 처음으로 기거했다.〉(《대명일통지》, 요동도지휘사사)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는 명(明)이 건국 후 국가가 안정되자 자국의 영토와 주변국의 현황을 정리한 사료다. 이 기록은 명의 영토인 랴오양 지역의 연혁을 설명하는 부분이다. 이 지역이 고조선의 왕검성이고, 기자의 땅이며, 낙랑군의 치소(治所)가 있었던 곳이자,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원사》의 기록에서는 평양이 한 곳이 아니었고, 현재의 압록강도 고구려 시대의 압록강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의 압록강에서 동남쪽으로 400km 이상 떨어진 곳에 평양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고려 西京은 현재의 평양이 아니다
현재의 평양과 고려의 서경이 다른 곳이었음은 우리의 사서에서도 명확하게 드러난다.
〈신우(辛禑·우왕)가 평양(平壤)에 머물면서 여러 도의 군사 징발을 독려하였고, 압록강에 부교(浮橋)를 만드는 일은 대호군(大護軍) 배구(裴矩)를 시켜서 감독하게 하였다. 배로 임견미와 염흥방 등의 가재(家財)를 서경(西京)으로 운반하여 군수물자를 준비하게 하였고, 또 온 나라의 승도(僧徒)를 징발하여 군사로 삼았다〉(《고려사·열전》, 최영)
고려 우왕은 명이 철령위(鐵嶺衛) 설치를 통보하자 옛 영토를 수복하기 위하여 요동(遼東)을 공격하기로 결심한다. 위의 기록은 이를 위하여 군수물자와 군사들을 징발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군사 징발을 독려하는 장소는 평양이고, 군수물자를 준비하여 두는 곳은 서경이다. 평양과 서경이 같은 곳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또한 군수물자를 배를 이용하여 서경으로 운반하였다는 것은 압록강 위쪽에 서경이 있다는 뜻이다. 5만여 명의 대군이 요동으로 출병하려면 많은 군수물자가 필요하다. 이러한 군수물자는 압록강 건너에 위치한 서경에서 보급하는 것이 전술의 기본이다. 우리는 《고려사》의 기록에서도 현재의 평양이 고려의 서경이 될 수 없음을 간단하게 확인할 수 있다.
“고구려가 도읍한 곳은 모르겠다”
조선은 건국(建國)과 수성(守城)이 어느 정도 안정을 이루자 세종대(世宗代)에 이르러 조선의 정통성을 세우기 위한 사업을 시작하였다. 그 사업은 조선의 영토 안에 조선 이전의 선대(先代) 역사의 표식물을 설치하는 것인데, 그 장소는 각각의 왕성에다 설치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고구려의 도읍지인 평양의 위치를 알지 못하였다.
〈정사를 보았다. 예조판서 신상(申商)이 계하기를, “삼국(三國)의 시조(始祖)의 묘(廟)를 세우는데 마땅히 그 도읍한 데에 세울 것이니, 신라는 경주(慶州)이겠고, 백제는 전주(全州)이겠으나, 고구려는 그 도읍한 곳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조선왕조실록》, 세종 9년 3월 13일)
이 기록에서도 고구려의 평양성이 당시 조선 영토에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려의 서경이 고구려의 평양성이었고, 고려 때는 임금들이 서경에 자주 다녔는데 그 서경이 지금의 평양이었다면 모를 리가 없기 때문이다.
일본 학자들은 식민사관을 구축하기 위하여 한국과 중국의 수많은 사료를 검토하였다. 이들이 위의 사료를 그냥 지나칠 리 만무하다. 그럼에도 ‘고려의 서경이 지금의 평양이라는 것은 아무런 고증도 필요하지 않다’라는 한 문장으로 우리의 역사지리를 이렇게 왜곡해놓았던 것이다.
고구려 장수왕대의 평양이 랴오양이라면 압록강도 당연히 다시 살펴봐야 한다. 최근의 연구에서 고구려 시대의 압록강은 현재의 랴오허(遼河)임이 밝혀졌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제껏 알고 있었던 통일신라의 강역을 바로잡아야 하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圖北과 眞北

통일신라의 국경을 살펴보는 데 중요한 역사지리는 니하(泥河)와 정천군(井泉郡)이다. 니하는 신라와 경계를 이루는 발해의 남쪽에 위치한 지명이고, 정천군은 발해와 경계를 이루는 신라의 북쪽에 위치한 지명이다. 먼저 니하에 대한 사서의 기록을 살펴보자.
〈(발해의) 남쪽은 신라와 니하를 경계로 견주고 동쪽은 바다로 막히고 서쪽은 거란이다.〉(《신당서·열전》, 발해)
우리는 일반적으로 지도에서 방위를 계산할 때 위쪽은 북쪽, 오른쪽은 동쪽으로 인식한다. 하지만 이것은 지도에서만 표현되는 도북(圖北) 방위다. 고대(古代) 사서의 방위 기록은 모두 북극성(北極星)을 기준으로 하는 진북(眞北) 방위를 사용하였다. 도북이 ‘더하기(+)’ 형태라면 진북은 ‘곱하기(×)’ 형태다. 즉 지도에서 고대의 방위 기록을 제대로 살펴보려면 서북쪽이 서쪽이 되고, 동북쪽이 북쪽이 되며, 동남쪽이 동쪽이 되는 것이다. 이제까지의 역사지리 연구는 사서에 기록된 방위를 도북으로 해석했기 때문에 방위가 맞지 않았던 것이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후대(後代)의 학자들은 당시 기록자가 방위를 잘못 알았기 때문에 사서의 기록 또한 잘못되었다면서 멋대로 고쳐서 주장하였던 것이다.
〈근래 다시 (김)사란의 표문을 보고 경이 패강(浿江)에 군사를 두고 지키고자 함을 알았다. 패강은 발해의 요충지이자 녹산(綠山)과 마주 보는 곳으로, 원대한 계획을 마련한다면 이야말로 좋은 대책이다. 또한 발해(渤海)는 오래전에 토벌에서 벗어나서 거듭 군사를 수고롭게 하였지만 아직 멸망시키지 못했다. 경이 항상 미워하니 매우 가상하다. 도적을 경계하고 변방을 안정시키는 데 무슨 못 할 일이 있겠는가? 다 처리하고 나면 사신을 보내 아뢰도록 하라.〉(《장구령집》2, 칙신라왕김흥광서(勅新羅王金興光書))
浿河는 랴오닝성 盖州에 있었다
당은 고구려를 멸망시키자 평양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하였다. 신라는 당이 발해를 견제하기 위하여 도움을 요청하자 이러한 기회를 이용하여 패강(浿江)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발해를 견제하였다. 그렇다면 패강은 고구려의 평양인 랴오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을 것이다. 또한 다음의 기록에서 패강은 니하와 같은 강임을 확인할 수 있다.
〈니하(泥河)는 일명 패수(浿水)이며 헌우락(軒芋樂)이라고도 한다. 물에 헌우초가 많다.〉(《대명일통지》, 요동도지휘사사, ‘니하’)
〈청하(淸河)는 개주위(盖州衛)의 분수령에서 발원하여 서남쪽으로 흘러 성의 남쪽을 지나는데 주남하(州南河)라고도 한다. 다시 서쪽으로 흘러 니하(泥河)와 합류하여 바다로 들어간다.〉(《대명일통지》, 요동도지휘사사, ‘청하’)
신라군이 주둔했던 패강은 곧 신라와 발해의 경계인 니하인 것이다. 그리고 이 니하는 현재의 중국 랴오닝성 가이저우(盖州)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가이저우시를 흐르는 강은 다칭허(大淸河)인데 강의 흐름이 사서의 기록과 일치한다. 다칭허가 서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기 전에 합류하는 강은 유니허(淤泥河)이다. 따라서 유니허가 곧 니하이며 패수가 되는 것이다. 유니허는 가이저우시 서쪽의 렌윈다오(連雲島)와 맞닿아 있는데 렌윈다오에는 예부터 군사들이 주둔하는 관소(關所)가 있었다. 유니허는 다스차오시(大石橋市)까지 이어지는데 이곳은 옛 해성현(海城縣) 지역으로 육로로도 평양(遼陽·랴오양)까지 진격하는 가장 빠른 길목에 위치한다. 이처럼 유니허는 육지와 바다를 통해 평양을 공략하는 가장 근접한 요충지인 것이다.
新羅山
통일신라의 서북쪽(眞北) 경계는 다음의 기록에서 추정할 수 있다.
〈함주(咸州)를 출발하여 북으로 가니 땅이 평탄하여 각지에 취락을 이루고 있다. 새로운 경작지가 두루 퍼져 있고 땅은 곡물을 심기에 적당하다. 동으로는 멀리 천산(天山)이 보인다. 금나라 사람들은 이를 채(彩)라고 하는데, 이는 신라산(新羅山)이다. 산 안이 깊고 멀어 다닐 수 있는 길이 없다. 그곳에서 인삼(人蔘)과 백부자(白附子)가 산출되며 깊숙한 곳은 고려와 경계를 접한다.〉(《선화을사봉사금국행정록(宣和乙巳奉使金國行程錄)》)
이 기록은 북송(北宋)의 허항종(許亢宗)이 함주(咸州)에서 북으로 금(金)나라 상경(上京)인 현재의 하얼빈시 아래에 위치한 아청(阿城)으로 가는 노정을 기록한 것이다. 함주는 현재의 중국 랴오닝성 카이위안(開原)이다. 허항종이 하얼빈으로 가는 중에 동쪽 멀리에 높은 산이 있는데 그 이름은 신라산(新羅山)이며 신라의 경계가 그곳이었음을 말하고 있다. 현재 카이위안에서 하얼빈으로 가는 길의 동쪽은 지린합달령(吉林哈達嶺)이 이어진다. 그렇다면 허항종이 말한 신라산은 바로 지린합달령의 어느 높은 봉우리를 지칭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금나라 때에는 이미 신라가 고려에 병합된 시기이지만 오랫동안 신라와의 경계였기에 시대가 바뀌었어도 함주 일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신라산으로 불렀던 것이다. 허항종은 관료였기에 민가에서 불리는 신라산에 대한 기록과 함께 그 지역이 지금은 고려의 경계임을 밝혀놓은 것이다. 이를 통해 지린합달령이 통일신라와 발해의 경계이자 고려의 국경임을 알 수 있다.
통일신라의 북쪽 경계를 고찰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역사지리는 신라의 정천군(井泉郡)과 발해의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이다.
우리 학계에서는 발해의 동경을 중국 지린성(吉林省) 훈춘(琿春)시의 반라청(半拉城)에 비정하고 있다. 또한 신라의 정천군은 함경남도 문천군 덕원면에 비정하고 있다.
신라의 정천군은 고구려 때는 천정군(泉井郡)이었고, 고려 초기에는 용주(湧州)라고 불렀다. 지명은 언제나 그 지역의 특성을 반영하여 부르기 마련이다. 이러한 점에서 본다면 정천군이라는 지명은 자연지형의 특징을 반영한 것이 틀림없다. 주거지 형성의 첫 번째 조건은 샘물, 즉 마실 수 있는 물이 나오는 곳이어야 한다. 신라의 정천군은 이미 고구려 시대부터 샘물로 유명한 곳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는 고려 초기까지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중국 지린성 룽징(龍井)시의 거룡우호공원(巨龍友好公園)에는 룽징시 지명의 유래가 되는 ‘용두레우물(龍井)’이 있다. 이 우물은 지금도 수량이 풍부하다. 이곳에 있는 석비(石碑)에는 ‘용정이라는 지명의 기원은 정천이다(龍井地名起源之井泉)’라고 명확하게 밝혀놓고 있다. 신라 정천군의 위치가 지린성 룽징시이면 그동안 학계의 문제가 되어왔던 마운령비와 황초령비의 해석도 자연스럽게 해결이 된다.
발해 東京은 어디?

▲일제의 동경성 발굴보고서.
룽징시가 신라의 정천군이라면 발해의 동경(東京)도 다시 살펴봐야만 한다. 《삼국사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가탐(賈躭)의 《고금군국지》에 이르기를, “발해국의 남해, 압록, 부여, 책성 4부(四府)는 모두 고구려의 옛 땅이다. 신라 정천군에서 책성부에 이르기까지 무릇 39역(驛)이다”라고 하였다.〉(《삼국사기》, 지리4, ‘백제’)
발해의 동경(東京)은 일명 책성부(柵城府)라고도 부른다. 신라의 정천군에서 발해 동경까지는 39역(驛)이라고 하였으니 현재의 길이로 변환하면 430km 정도다. 현재의 지린성 룽징시에서 헤이룽장성(黑龍江省) 닝안(寧安)시의 발해 왕성까지의 거리는 390km이다. 현재의 도로가 국도(國道)임을 감안하다면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한·중·일 학계 모두 닝안시의 발해왕성을 상경(上京)으로 보고 있지만 이곳은 옛날부터 동경성(東京城)으로 불려 왔다. 그런데 어떻게 동경성이 상경성이 되었는가. 이 또한 일제의 식민사관 구축 과정에서 바뀐 것이다.
〈요양(遼陽)은 천회 10년(1132년)에 남경으로 고쳐졌으며, 그 후 정원 원년(1153년)에 다시 동경이라고 이름이 붙여지기에 이르렀다고 한다면, 그사이인 21년 동안 별도로 동경이라고 부를 만한 지역을 설치하지 않았는지 어떤지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불행하게도 이 일에 관하여 확실한 어떤 증거도 얻을 수는 없지만, 단지 금나라 시대의 옛터임에 틀림없는 오늘날의 동경성(東京城)이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떤 관계가 있을 것이라고 상상할 수는 있는 것이다. (중략) 지금의 동경성은 천회 연간에는 번화한 도시였으며, 한때 금나라의 동경(東京)이었다는 것을 추측하기에 충분할 것이다. 동경성이라고 하는 명칭도 아마 금나라 시대부터 생겨난 것일 것이다. 《금사(金史)》에 이 지역에 관한 기사를 싣지 않은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만주역사지리》2, 제2편, 159쪽)
닝안시의 발해 왕성터
현재의 랴오양은 금 시대에는 남경이었다가 동경으로 바뀐 것인데, 랴오양이 남경이었을 때의 동경은 현재 발해의 상경으로 비정한 헤이룽장성 닝안시의 발해 왕성터라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의 이면에는 닝안시의 발해 왕성터를 옛날부터 동경성으로 불러온 것에 있다. 즉 이를 그대로 발해의 동경으로 인정할 수 없었기에 금 시대의 동경일 것으로 ‘상상하고’ ‘추측하여’ 주장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일본 학자들의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해주는 사료가 어디에도 보이지 않자 그들 역시도 ‘심히 유감스러운 일이다’라고 안타까워하고 있다.
일제는 사서(史書)에서 금 시대의 동경이라는 기록이 없자, 1939년에 닝안시의 동경성에 대한 대대적인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그리하여 이곳이 금 시대의 동경성이고 발해의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였다는 발굴보고서를 발간하였다. 그런데 발굴보고서의 발굴 현황을 살펴보면 금 시대의 유물과 유적은 흔적조차 없다. 이에 일본 학자들은 별도의 주석(註釋)으로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발해(渤海)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 터가 남아 있는 곳이 현재 동경성(東京城)이란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 것에 관해, 고(故) 마쓰이 히토시(松井等)는 금 시대에 동경이라고 이르렀던 적이 있었기 때문일 것으로 추정한 일이 있다. 그렇지만 금 시대에 이 지역이 동경이라고 불렸던 일에 대해서는 문헌(文獻)이 증명하는 것이 없고, 또 우리의 조사 결과 어떠한 금 시대의 유적, 유물을 접하지 못한 것을 보아도 이 주장을 급히 쫓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동경성_발해국 상경용천부지 발굴보고》, 서론, 1939)
발해의 상경이자 금 시대의 동경이라고 믿었던 닝안시의 발해왕성 터를 발굴한 결과, 금 시대의 유물과 유적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아서 조사에 참여한 학자들조차도 금 시대의 동경으로 보기 어렵다는 결론을 내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동경성이 금과는 상관없는 발해의 유적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곳의 지명이 예전부터 동경성으로 불려 왔던 점을 고려할 때 발해의 동경일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더욱이 앞서 살펴본 신라의 정천군인 지린성 룽징시에서 이곳까지의 거리가 사서에 기록된 거리와도 부합하기 때문이다.
역사적 사실이 이러함에도 일본 학자들은 아무런 기록도, 아무런 흔적도 나오지 않은 곳을 금 시대의 동경이라고 밀어붙였던 것이다. 그리고 발해의 유물이 나오자 상경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일본 학자들의 이러한 역사지리 연구는 신라의 북계(北界)인 정천군을 원산만의 문천에 비정하였기 때문에 발해의 영역을 상대적으로 함흥까지 내려야만 하였던 사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현재 발해의 상경으로 비정하고 있는 헤이룽장성 닝안시의 발해왕성 터는 발해의 동경으로 보아야만 한다.
국경선과 국경지대

▲통일신라 국경 예상도.
이제까지 통일신라 강역과 관련된 여러 사료를 검토한 결과를 지도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중세(中世) 시기까지의 국경 개념은 국가 간에 상호 보장하는 선(線)과 정치 상황에 따라 언제든지 변동 가능한 유동적인 지대(地帶)로 구분하여 살펴야 한다. 이때 상호 보장하는 국경선은 자연지형의 안쪽이며, 유동적인 국경지대는 지정학적 요충지를 관할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방법론에 의하여 신라의 국경선을 고찰하면 랴오둥반도(遼東半島) 톈산(天山)산맥에서 지린성(吉林省)의 지린합달령, 그리고 헤이룽장성(黑龍江省)의 목단령(牧丹嶺)으로 이어지는 선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신라의 국경지대는 랴오닝성 가이저우시의 다칭허에서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로 흘러가는 수분하까지를 국경지대로 볼 수 있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하고 백제의 강역과 고구려의 영토 일부를 자국의 영토에 편입시키고 9주 5소경을 설치하였다. 이러한 통일신라의 영토가 현재의 한반도를 넘어 앞 페이지 지도의 지역까지 이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다음의 사료에서도 알 수 있다.
〈9주(九州)가 관할하는 군(郡), 현(縣)은 무려 450개였다. 신라 지리의 넓고 먼 것이 이와 같이 극성하였다.〉(《삼국사기》, 지리1, ‘신라’)
實證 없는 實證史學
조선은 세종대에 이르러 통치 영역에 필요한 강역과 조세 및 부역 등에 필요한 군현을 정비하여 지리지를 발간하였다. 당시 조선 팔도의 주·부·군·현의 개수는 모두 334개였다.
역사교과서에 설명된 우리의 영토사는 통일신라 시대는 물론 고려와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줄곧 확장되어왔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한반도 전체로 영토를 확장한 조선 시대 군현의 수가 대동강과 원산만을 경계로 하는 통일신라의 군현의 수보다 적다면 이는 어떻게 이해하여야만 하는가. 특히 조선 시대의 인구가 통일신라 시대의 인구보다 적지 않았을 것임을 고려한다면 통일신라의 영토는 당연히 현재의 한반도를 넘어 앞 페이지의 지도가 가리키는 영토여야만 보다 합리적인 설명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일제는 우리의 역사지리를 한반도 안에 비정하면서 사서의 기록이 맞지 않으면 ‘괴이하다’ ‘고증이 필요 없다’ ‘상상할 수 있다’ 등의 주장으로 합리적인 논거와 실증적인 연구를 무시하였다.
그들은 이러한 방법으로 우리 영토사에서 중요한 지명인 압록강(鴨綠江), 평양(平壤), 서경(西京), 자비령(慈悲嶺), 철령(鐵嶺) 등을 사실과 다르게 왜곡하여 비정하였다. 일제가 이렇게 비정한 우리의 영토사는 오늘날 오히려 ‘실증(實證)사학’임을 표방하며 이를 더욱 견고하게 이어가고 있다. 수많은 사서의 기록을 무시하고 고고학적 자료들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어찌 합리적이고 실증적인 역사 연구라고 할 수 있는가.
신라는 경상도에서 출발하였지만 삼국을 통일하며 대국으로 성장하였고, 세계적으로도 흔치 않은 1000여 년의 역사를 간직한 문명국이었다. 이러한 통일신라의 영토가 진정 어디까지였는가를 밝히는 것은 우리 민족의 정통성을 되찾는 것이자, 후손에게도 우리의 올바른 역사를 알려주는 중차대한 일이다.⊙
◆06.24 “공산 치하에서 구출된 평남 도민 여러분” 6·25 때 유엔군 北통치 문서 나왔다

▲1950년 11~12월에 작성된 유엔군의 민사·행정자료 국한문 원본. 왼쪽부터 김성주(金聖柱) 평남 지사 대리의 ‘도민에게 고함’ ‘야간통행금지시간의 변경에 관한 공시(公示) 제1호’ ‘계몽대(啓蒙隊) 파견에 관한 건’./아트뱅크 제공
1950년 6·25 전쟁 당시 한국군과 유엔군이 점령했던 북한 평안남도 지역의 행정자료가 24일 새로 발견됐다. 유엔군이 한국전쟁 중 북한 지역을 어떻게 통치했는지 보여주는 자료로, 전문가들은 “역사적 사료로서 가치가 크다”고 했다. 이 같은 자료가 영문이 아닌 국한문으로 발견된 것은 이번이 처음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 자료들은 한국군과 유엔군이 1950년 9월 서울을 수복한 후 계속 북진해 평안남도를 점령 및 통치했던 1950년 10~12월 당시 유엔군 측이 작성한 공문서들이다. ‘시·군 행정 기구표’ ‘야간 통행 금지 시간의 변경’ ‘언론인에 관한 조치의 건’ 등 총 19종이다. 고서점 ‘아트뱅크’를 운영하는 윤형원(75) 대표가 최근 입수해 본지에 공개했고,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문서가 진본(眞本)임을 확인했다.
특히 당시 유엔군이 임시로 임명한 김성주 평안남도 도지사가 도민에게 한 연설 원고가 포함됐다. 김 지사는 당시 연설에서 “공산 치하에서 구출되어 새 희망과 환희에 싸여, 씩씩하게 전진하시는 여러분에게 새삼스럽게 경축의 말씀을 드린다”며 “오늘날 우리는 용맹한 우리 국방 군 장병들의 헌신적 노고와 유엔군의 용전으로 그립던 고토를 다시 찾고 이 마이크 앞에 역사적인 전파를 울리게 되었다”고 했다.
또 “사선을 넘으면서 동고동락하던 우리의 서북 청년들과 죽음을 털끝처럼 가벼이 여기며 용전 분투하던 우리의 친애하는 호림부대 동지들은 싸움에 이겼다는 승리감에 도취되지 말고 한층 더 굳은 마음의 준비를 갖추어 최선의 승리를 차지할 때까지 더욱 용진하시길 원한다”고 했다.
유엔군이 작성한 ‘언론인에 대한 조치의 건’엔 “도정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 언론인의 적극적 협력을 필요로 한다” “공보관은 (사전에) 각 기자의 질문을 접수해 회답안을 작성한다” “출입기자는 기자증을 발행한다” 등 방침이 기록돼 있다. ‘도 출입기자초청의 건’ 문서엔 “도정에 관한 여론 청취와 상호 화목을 도모하기 위해 도 출입기자를 초청한다”고 되어 있다. 일시는 1950년 12월 3일 오후 3시이고, 출입 인원엔 “대한통신 2인, 평남신문 2인, 평양일보 2인, 평양신문 2인, 평양방송국 2인”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또 야간 통행 제한에 관한 문서엔 오후 6시부터 다음날 오전 6시까지 일반 시민의 통행을 금지하고 “정당한 허가 없이 본 명령에 위반하여 통행하는 자는 체포하여 유엔군 당국에서 처단할 것”이라는 내용이 쓰여 있다.
나아가 ‘계몽대 파견에 관한 건’엔 “본 도의 당면한 과업 중에 하나인 계몽 사업과 도정 준비를 위한 지방실정 조사차 계몽대를 지방에 파견하고자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당시 북한 주민들을 상대로 계몽 작업을 계획했던 것이다.
이번 자료를 분석한 이상호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은 “그동안 유엔군의 북한 점령 정책에 관해 국내에 소개돼 있었던 자료는 회고록이나 영어로 작성된 문서들이 전부”라며 “국한문으로 작성된 이 자료는 유엔군의 북한 점령 정책이 도민들을 대상으로 어떻게 계획되었는지에 관한 일면을 우리의 언어로 엿볼 수 있게 해준다는 데 의의가 있다”고 설명했다.
김기섭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전쟁사연구부장은 “이번에 공개된 문서는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것”이라면서 “다만 중공군의 제 2차, 3차 공세로 유엔군이 38선 이남으로 철수하며 이러한 통치 계획이 실제로 실현되지는 못했다”라고 밝혔다.
조선일보 박강현 기자
◆06월 28일 대한민국 항공史 효시 ‘윌로스 한인비행가양성소’

▲윌로스 한인비행가양성소를 그린 펜화. ⓒ루시드로잉
1921년 4월 10일 미국 캘리포니아 새너제이 평야에서 한인 청년이 비행사 면허시험 중에 300피트 상공에서 추락했다. 추락한 조종사는 박희성이었다. 그는 석 달 후 다시 시험에 응시해 당당히 국제항공면허를 취득했고, 그해 7월 18일 대한민국임시정부 비행병 참위(소위)로 임관했다.
우리나라 항공사(史)의 효시는 ‘한인비행가양성소’라는 비행학교다. 이곳은 1920년 7월 5일 미국 캘리포니아 윌로스(Willows)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총장 노백린 장군과 재미독립운동가 김종림 선생이 함께 설립했다. 노백린 장군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공중전이 매우 유효한 전과를 거뒀다는 점을 간파하고 비행사를 양성해 일제에 대항한 독립전쟁에 대비하고자 했다. 양성소에는 당시 최신형 비행기인 ‘스탠더드 J-1’ 3대를 갖추고, 미국인 교관의 지도 아래 30여 명 한인 청년이 비행 조종술과 무선전신 등을 훈련받았다.
재미사업가 김종림 선생은 40에이커에 달하는 비행장 부지를 제공했고, 비행학교로 이탈리아계 이민자가 사용하던 퀸트학교 건물을 임차했다. 현재 윌로스에서 서쪽으로 6.4㎞ 떨어진 글렌카운티 162번 주 고속도로 7233번지에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 하지만 원래 이 건물은 현 위치에서 16.9㎞ 떨어진 곳에 있었다. 1924년에 지금의 위치로 옮겨져 현재 원소유자의 손녀 부부가 창고로 사용하고 있다.
세계 제5위의 공군력을 갖춘 대한민국 공군의 출발점은 미국 캘리포니아 윌로스 한인비행가양성소 건물이다. 이는 곧 우리 항공사의 효시이자,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비행학교며, 소중히 가꿔야 할 국외독립운동사적지다. 적극적인 관심과 돌봄의 손길이 필요한 때다.
문화일보 김도형 문화재전문위원
★한국 현대사 완벽 정리 | KBS 다큐 1~10부
▶1부 분단 https://youtu.be/jbGcrdC77Q0
▶2부 전쟁의 시그널 https://youtu.be/ah4gOcVoVwU
▶3부 폭풍 https://youtu.be/MmsB7vMcjzk
▶4부 북진 https://youtu.be/6tVImy9mj8o
▶5부 후퇴 https://youtu.be/lqBaqV8uncA
▶6부 또 다른 전쟁 https://youtu.be/VHF778oINtc
▶7부 전쟁의 그늘 https://youtu.be/CgoVJbL29PE
▶8부 정전 https://youtu.be/1aJSFlQhGKg
▶9부 끝나지 않은 전쟁 https://youtu.be/7xuvuEbLxps
▶10부 에필로그 https://youtu.be/2dLZbEha5bg
월간조선 08월 호
◆근대 중국의 조선 정책과 역사적 기억
임오군란 후 조선을 省으로 병합하자는 주장 제기
⊙ 조선과 淸, 전통적 朝貢 질서와 근대 국제법 질서 사이에서 표류
⊙ ‘한국은 역사적으로 중국의 속국’… 이때 속국의 의미는 朝貢 질서가 아니라, 19세기의 정치적·개념적 혼란 속에서 변질된 것
⊙ 고종, 朝美 수교 시 淸의 주장으로 미국 대통령에게 조선이 중국의 속방임을 확인하는 國書 보내
⊙ 중국, 《新淸史》 편찬하면서 조선을 〈屬國傳〉으로 분류한 《淸史稿》 답습
金鍾學
1977년생. 서울대 외교학과 졸업, 서울대 외교학 석·박사 /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역임. 現 국립외교원 조교수 겸 외교사연구센터 책임교수 / 수상 제43회 월봉저작상 / 저서 《개화당의 기원과 비밀외교》 《흥선대원군 평전》 《근대 일선관계의 연구》(역서)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었지만, 그 뒤에는 청국의 작업이 있었다.
1882년 8월 1일(이하 일자는 양력), 청(淸) 조정에 주일(駐日)공사 여서창(黎庶昌)으로부터 조선 한성에서 심상치 않은 변란이 발생했음을 알리는 긴급한 전보가 도착했다. 급전(急電)은 임오군란(壬午軍亂)의 발발을 알리고 있었다.
조선 정책의 사실상 책임자인 북양대신(北洋大臣) 겸 직예(直隸)총독 이홍장(李鴻章)은 모친상을 치르기 위해 합비(合肥)로 낙향해 있었으므로, 서리(署理)를 맡고 있던 장수성(張樹聲)은 조선의 공식 요청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즉각 광서제(光緖帝)에게 파병(派兵)을 상주(上奏)해서 재가를 받았다. 파병을 결정하기까지 걸린 시일은 단 6일이었다. 이에 따라 8월 10일에 위원(威遠)·초용(超勇)·양위(揚威) 등 3척의 군함이 인천에 입항하고, 그 열흘 뒤엔 약 2만 명의 선발 부대가 경기도 남양부 마산포(馬山浦)에 상륙했다. 이례적일 정도로 신속한 청의 군사적 조처에 일본의 외무당국은 경악했다.
이처럼 대규모의 군대가 한반도에 진입한 것은 병자호란(丙子胡亂) 이후 약 250년 만의 초유의 일이었다. 불과 10여 년 전에 청은 조선 원정을 앞둔 프랑스 및 미국 공사에게 “조선은 비록 중국에 조공(朝貢)을 바치지만 일체 국사(國事)를 자주적(自主的)으로 처리하므로 중국이 간여하지 않는다”라는 구실로 개입을 회피한 적도 있었다. 이 파병을 계기로 조선과 청의 관계는 본질적 변화를 맞이했다. 많은 연구자가 1882년을 근대 한중(韓中) 관계의 전환점으로 지목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淸 제국의 와해
당시 청 제국의 판도는 와해의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주요 조공국 중 하나인 시암(타일랜드)은 1850년대부터 조공을 바치지 않았다. 베트남을 비롯한 동남아시아에선 1860년대부터 프랑스 및 영국과 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신강(新疆) 지역에선 이슬람 지도자 야쿱 벡(Yacub Beg)의 반란이 일어났다. 러시아는 이를 빌미로 1871년 이리(伊犁) 지방을 점령했다. 그 반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리바디아 조약(Treaty of Livadia, 1879년)이 체결됐지만, 불리한 조건에 불만을 품은 청국이 조약 개정의 움직임을 보이자 레솝스키(Lesovskii) 제독이 이끄는 발틱 함대 23척이 블라디보스토크에 집결하는 등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다.
가장 큰 충격을 준 것은 일본의 류큐(瑠球) 병합이었다. 류큐는 1402년에 명(明)의 책봉(冊封)을 받았으나, 1609년 사쓰마번(薩摩藩)의 침략을 받은 뒤로는 중국과 사쓰마번 양쪽에 조공을 바치고 있었다. 서양 열강은 이 같은 상황에 독립왕국으로 인정해서 미국(1854년), 프랑스(1855년), 네덜란드(1858년)가 차례로 조약을 맺었다. 그러나 일본은 1871년 류큐에 속한 미야코지마(宮古島)의 공납선(貢納船) 선원 54명이 원주민에게 살해당한 사건을 빌미로 이듬해 류큐 국왕을 ‘류큐 번왕’에 책봉한 후, 1874년에 ‘일본령 류큐 주민의 학살’을 응징한다는 명분으로 출병을 단행했다. 그러고 마침내 1879년 류큐번을 폐지하고 오키나와현(沖縄県)을 설치한 것이다.
淸, 조선에 開國 권유

▲북양대신 이홍장.
이제 남은 것은 조선뿐이었다. 서울에서 베이징까지의 직선거리(944km)가 도쿄에서 나가사키에 이르는 거리(965km)보다 짧은 사실로도 알 수 있듯이, 한반도는 베이징과 동삼성(東三省)을 지키는 데 가장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왼팔[左臂]’ ‘울타리[屛蔽]’ ‘이를 덮는 입술[脣齒]’ 등의 관용어는 그 지정학적(地政學的) 가치를 잘 말해준다. 게다가 청국의 발상지인 만주와 연접해 있을 뿐 아니라, 상징적으로도 가장 모범적인 성리학(性理學) 국가로 꼽히는 조선의 자발적 복종은 이민족이 세운 청 제국의 위신을 지키는 데도 필수적이었다.
문제는 조선을 타국(他國)의 침략으로부터 지킬 방법이 마땅치 않다는 데 있었다. 두 차례에 걸친 아편전쟁(1839~1842년, 1856~1860년)과 태평천국의 난(1850~1864년) 등 내우외환(內憂外患)에 시달리며 청의 국력은 이미 피폐할 대로 피폐해져 있었다. 1861년부터 ‘자강(自强)’을 기치로 내세우며 이른바 양무운동(洋務運動)을 추진했지만, 아직은 뚜렷한 성과가 보이질 않았다.
이에 이홍장은 조선의 문호를 개방하는 방법을 취하기로 했다. 서구(西歐) 열강의 이해관계를 교착시키고 그 세력 간의 균형을 이루게 해서 러시아와 일본 등 위협적인 국가가 조선을 독점하는 사태를 막겠다는 판단이었다. 1879년 8월, 이홍장은 조선의 전(前) 영의정 이유원(李裕元)에게 서한을 보내 다음과 같은 말로 문호 개방을 권유했다.
〈현재의 계책으로는 독(毒)으로 독을 공격하고 적(敵)으로 적을 제어하는 책략을 써서, 이번 기회에 서양 각국과 조약을 체결하여 그들의 힘을 빌려 일본을 견제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일본은 그 사기술과 힘만 믿고서 경탄(鯨呑)과 잠식을 도모합니다. 류큐를 폐멸한 한 가지 일이 그 실마리를 드러낸 것이니 귀국은 참으로 이에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일본이 두려워하고 복종하는 것은 서양입니다. 조선의 힘으로 일본을 제압하기엔 혹 부족할까 우려되지만, 유럽과의 통상을 열어 일본을 제압한다면 넉넉히 남을 것입니다.〉
‘독으로 독을 공격하고, 적으로 적을 제어하는 책략’이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이는 ‘이이제이(以夷制夷)’라는 고지(故智)의 근대적 변용이라고 할 만한 것이었다. 물론 문호 개방만이 유일한 정책적 선택지는 아니었다.
조선 병합론 대두

▲주일청국공사 하여장.
예를 들어 1880년 초 주일청국공사 하여장(何如璋)은 조선에 사변(事變)이 생긴 틈을 타서 중국의 군현(郡縣)으로 삼아 그 정치를 개량하고 군비를 정비하는 것을 상책(上策), 판사대신(辦事大臣)을 주재시켜서 중대한 내정(內政)과 외교를 주재(主宰)해서 외국이 넘보는 것을 예방하는 것을 중책(中策), 조선이 외국과 통상하는 것을 허락하되 조약문에 “대청국의 명을 받들어”라는 말을 성명(聲明)하게 함으로써 유사시 간여할 여지를 마련하는 것을 하책(下策)이라고 했다. 유사한 맥락에서 임오군란 직후 장건(張騫)과 장패륜(張佩綸) 같은 소장 관료들은 조선 국왕을 폐위하고 마치 한사군(漢四郡)처럼 한 성(省)으로 병합하거나, 감국(監國)을 파견할 것을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홍장이 보기에 이러한 방법은 지나치게 극단적인 것으로, 조선과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 일본 및 서양 열강의 항의와 간섭을 초래할 뿐 아니라 청에 적지 않은 부담을 줄 가능성이 있었다. 그는 조선 문제로 인해 청이 의도치 않은 외교적, 군사적 분쟁에 휘말리는 사태는 반드시 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원(元)나라 때 여러 차례 감국(監國)을 파견했지만, 직권[事權]이 단일하지 않아서 혼란이 더욱 심해졌습니다. 만약 조선 국왕을 폐위하고 행성(行省)으로 삼는다면, 조처가 크게 기이하여 주목을 받을 것[奇堀]입니다. 더구나 지금은 각국이 이미 조선과 조약을 맺고 통상을 하고 있으며, 러시아와 일본이 옆에서 호시탐탐 노리고 있으니 반드시 틈을 타서 소란을 일으킬 것입니다.〉
開國의 가장 큰 원인은 재정난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당시 조선 측 대표 신헌.
이윽고 1882년 5월 22일에 인천 제물포에서 신헌(申櫶)과 로버트 슈펠트(R.W.Shufeldt) 간에 조미(朝美)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됐다. 조선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었다. 이미 6년 전에 강화도조약(조일수호조규)이 체결됐지만, 조선 정부는 이를 마치 임진왜란 후 체결된 기유약조(己酉約條·1609년)처럼 옛 우호를 회복하기 위한 것으로 간주했다. 이어서 6월 6일과 30일에 제1차 조영수호통상조약, 제1차 조독수호통상조약이 각각 체결됐다.
그런데 서양 국제법에 따르면, 오직 주권(主權)국가만이 다른 주권국가와 독자적으로 조약을 체결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서 조약의 체결은 상대국을 주권국으로 승인한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조선의 수교는 청의 입지를 취약하게 만들 우려가 있었다.
그 대비책으로, 이홍장은 조미조약의 협상을 천진(天津)에서 진행하는 한편, 자신의 심복인 마건충(馬建忠)을 제물포에서의 조인식에 입회하게 했다. 특히 그는 조미조약 제1조에 “조선은 중국의 속국(屬國)이다”라는 내용을 명문화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러나 이는 미국의 체면을 심각하게 실추시키는 것이었으므로 슈펠트의 강경한 반대로 무산(霧散)되고, 일단 조약을 체결한 후 조선 국왕이 미국 대통령에게 별도의 국서(國書)를 보내 이를 성명하기로 타협이 이뤄졌다.
지금까지 본 것처럼, 1882년에 이뤄진 조선의 문호 개방에는 청의 정책이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그것이 유일한, 심지어 가장 중요한 이유였다고 단정하는 것은 잘못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조선이 문호를 개방한 결정적 원인은 극심한 재정난에 있었다. 19세기 이후 조선 정부의 재정난은 악화일로로 치달아서, 임오군란 직후에는 국고(國庫)가 1개월을 버틸 여력도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가 되었다. 이에 조선 정부는 일찍부터 새로운 재원으로 무역에서 얻는 관세(關稅) 수입에 주목했다. 청국에서도 양무운동의 주된 재원은 관세 수입에서 나왔으며, 심지어 1858년 이후 합법화된 아편 무역의 관세가 그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위해서라도 문호 개방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던 것이다.
임오군란
하지만 그때까지 조선은 단 1척의 무역선도, 1명의 유학생도 해외에 보낸 적이 없는 폐쇄된 국가였다. 흥선대원군의 쇄국(鎖國) 정책이 유명하지만, 사실 쇄국은 건국 이래 기본적인 대외 정책이었다. 대원군은 무너진 국가 기강을 바로 세워 이를 철저하게 집행했을 따름이었다. 양반 위주의 강고한 신분질서와 체제교학(體制敎學)인 성리학을 수호하기 위해 수백 년간 중국과 일본을 제외한 외부 세계와의 교통은 물론 정보의 유입마저 철저히 통제해온 나라에서, 백성들의 심성에 적개심과 공포감만이 자리 잡은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강화도조약 체결 이후 금과 대두(大豆), 쌀 등이 일본으로 대량 반출되면서 한성의 곡가가 3배 이상 급등하는 등 민생(民生)이 크게 위협받고 있었다.
결국 집권 세력에 의한 문호 개방 정책은 즉각적인 사회적 반동을 초래했다. 조미조약이 체결된 지 불과 두 달 뒤에 터진 임오군란이 그것이었다. 천진에 영선사로 와 있던 김윤식(金允植)은 군란의 발발 소식을 듣고는 곧바로 ‘외교’에 반대하는 불령(不逞)한 무리의 소행일 것으로 단정했다. 실제로 임오군란은 사소한 계기에서 시작됐지만, 사건이 전개되면서 점차 배외운동(排外運動)의 성격을 띠어 일본공사관과 일본인들이 습격당하고, 외교를 주도한 관료들의 집이 파괴됐다. 심지어 분노한 난군(亂軍)과 난민(亂民)은 이를 배후에서 지휘한 것으로 알려진 민비(閔妃)를 잡기 위해 임금이 있는 창덕궁에까지 난입했다. 이는 임오군란의 본질이 김윤식의 추측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조선의 생존을 위해 문호 개방은 필연적 선택이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조선 사회는 그 충격을 감당할 만한 여력을 이미 상실한 상태였다. 이홍장을 비롯해 서양국가와의 수교통상을 제안한 청국의 당국자들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며, 그것이 초래할 후폭풍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이미 조선이 일본을 포함해 미국·영국·독일과 조약을 맺은 상황에서 배외운동을 방치하는 것은 이들 국가의 항의와 개입을 초래할 우려가 있었다. 청국이 황급히 군사적 개입을 단행한 데는 조선 문제로 인해 복잡한 외교적 분쟁에 휘말리는 사태를 예방하고, 또 기존의 정책 기조를 유지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屬邦照會文

▲1888년 1월 체스터 아서 미국 대통령에게 신임장을 봉정하는 조선 외교관들에 대해 보도한 당시 미국 신문.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는 자리에서 고종이 미국 대통령 체스터 아서(Chester A. Arthur)에게 보내는 국서가 교부됐다. 이홍장과 슈펠트의 합의에 따라 조선이 중국의 속방(屬邦)이라는 사실을 천명하는 문서였다. 이 때문에 이를 ‘속방조회문(屬邦照會文)’이라고 부른다. 그에 대한 아서 대통령의 회신은 이듬해 5월 20일 초대(初代) 주조선미국공사 푸트(Lucius H. Foote)가 부임하면서 고종에게 봉정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작년에 조약을 맺을 때 귀 군주의 서한을 받았습니다. 이에 그 답서를 써서 푸트로 하여금 대신 바치게 합니다. 대체로 조선이 중국과 왕래하는 것은 우리나라 상민의 일에는 지장이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 밖에는 대체로 간여하지 않을 것이며, 또한 조선이 중국의 속방이 되는 문제도 묻지 않을 것입니다. 귀국의 내치와 외교의 모든 일은 귀 군주께서 자주(自主)로 주관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으니, 실로 깊이 흠모하는 바입니다. 통상(通商) 한 가지 일에서도 자주지국(自主之國)입니다.〉
양절체제

▲‘양절체제’라는 말을 만들어낸 유길준.
속방이란 무엇일까? 근대 이전 동아시아에서 속방(또는 속국)은 대체로 조공국을 의미했다. 한반도의 왕조는 4세기 중엽부터 중원의 왕조와 조공 관계를 맺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공 관계의 구체적 양상과 정치적 의미는 시대에 따라 다소 상이하지만, 그 본질은 조공·책봉과 같은 정치적 의례(political ceremony)를 매개로 조공국은 상국(上國)의 권위와 기존 지역질서에 순응하며, 상국은 조공국의 내정에 대한 간섭을 자제하고 그 국가 자주권을 용인한다는 의지를 상호 확인하는 데 있었다. 즉 그것은 명분상으론 상국과 조공국 간의 위계(位階)가 존재하지만, 실제로 모든 국정은 독립적으로 운영되는 독특한 국제 관계를 뜻했다.
그런데 서양의 역사나 국제법에서는 이에 해당하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아서 대통령은 조선과 청국 간의 난해한 역사나 제도적 규범은 논외로 차치하고, 조선과 미국 간의 외교 관계는 오직 국제법과 조약에 따라 처리하겠다고 성명한 것이다. 일본(1876년)을 비롯해 영국(1882, 1883년), 독일(1882, 1883년), 이탈리아(1884년), 러시아(1884년), 프랑스(1886년) 등 전후로 조선과 조약을 맺은 다른 국가도 같은 입장을 취했다.
그 결과, 조선은 전통적인 조공 관계(조선-청)와 근대 조약 체계(조선-서양·일본)가 중첩된 모순된 국제정치적 환경에 처하게 되었다. 유길준(兪吉濬)은 《서유견문(西遊見聞)》(1895년)에서 이를 ‘양절체제(兩截體制)’라는 말로 개념화했는데, 이는 마치 앞뒤가 잘린 형상과도 같다는 의미였다.
물론 양절체제는 이홍장이 기대한 결과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 속에서 조공 관계는 양국 사이에서만 유효한 특수한 체계로 상대화됐기 때문이다. 이는 조선과 서구열강 간의 조약 체결을 중재함으로써 그에 대한 전통적 권위와 기득 권리를 인정받겠다는 애초 의도에서 본다면 처참한 실패에 가까웠다. 훗날 청국의 저명한 사상가이자 언론인인 양계초(梁啓超)가 《이홍장 평전》에서 청일전쟁에서 패배한 원인(原因)을 분석하면서 “이는 모두 이홍장이 ‘종속국은 외교를 할 수 없다’라는 국제법을 분명하게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들이다. 잠시의 수고를 덜고자 큰 도리를 내세워 사람들을 기만한 것은 정말로 외교상의 큰 잘못이었다. 이후 세계 각국은 조선을 중국의 종속국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라고 신랄하게 비난한 것은 이 때문이다.
속국=보호국 논리 등장

▲‘주찰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로 조선에 주재하던 시절의 청년 원세개.
이를 만회하기 위해 청 내부에선 속방(또는 속국)의 의미를 근대 국제법적으로 해석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1883년 5월, 내각학사(內閣學士) 주덕윤(周德潤)이 베트남 문제와 관련해서 올린 상소는 속국을 근대적 의미의 ‘피보호국(protected state)’으로 정의한 최초의 사례로 알려져 있다.
〈중국의 이른바 ‘속국’은 바로 외국에서 말하는 ‘보호국’입니다.… 그렇다면 중국이 베트남을 다투고자 한다면 반드시 먼저 ‘속국’의 이름을 다투어야 하고, ‘속국’의 이름을 존속시키고자 한다면 반드시 먼저 ‘보호’의 실제를 남겨둬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근대적 조약의 형식을 통해 조선과 중국 간의 특수 관계를 공식화하기 위해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 1882년 10월 4일)·중강통상장정(中江通商章程, 1883년 9월 23일)·길림무역장정(吉林貿易章程, 1884년 6월 19일) 등을 의정(議定)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의 경우, 그 전문에서 “이번에 약정한 수륙무역장정은 중국이 속방을 우대하는 뜻으로, 각 여국(與國)이 일체로 균점하는 것과 같은 부류에 있지 않다”라고 명시했다. 이와 함께 1885년에는 조선의 외교 및 통상업무를 관장한다는 뜻의 ‘주찰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駐札朝鮮總理交涉通商事宜)’라는 직함을 주어 원세개(袁世凱)를 파견했다.
열강, 淸의 조선 외교 관리 용인

▲청일전쟁 후 시모노세키조약으로 청국은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상실했다.
그렇지만 청일전쟁 전까지 양절체제의 구조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그것은 조약 체결로 이미 기정사실화(fait accompli)된 조선의 주권국 지위를 부정하기에는 청의 논리가 빈약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주로 한반도에 대한 열강(列强)의 지정학적 이해관계에 따른 결과였다. 마치 오늘날의 미중(美中) 전략 경쟁과 마찬가지로 19세기는 영국과 러시아 간의 헤게모니 다툼이 벌어지던 시대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영국과 러시아, 그리고 일본은 지역 정세의 안정성을 위해 청이 일정한 수준에서 조선의 외교를 ‘관리’하는 것을 선호했다. 이러한 경향은 1885년과 1886년 2차례에 걸쳐 조선 왕실이 독자적으로 러시아에 보호를 의뢰한 사실이 폭로되면서 더욱 강화됐다. 원세개가 조선의 내정과 외교에 대한 간섭을 자행할 수 있었던 데는 이러한 국제정치적 환경도 일정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한반도의 현상 유지를 전제로 했다. 즉 서구 열강은 조청 관계에 굳이 개입할 뜻은 없었지만, 청 또한 양절체제를 극복하기 위해 조선을 병합하거나 총독을 파견해서 통치하는 등 그 국제적 지위를 일방적으로 변경할 수 없었던 것이다. 원세개가 최소 2차례 이상 고종의 폐위(廢位)를 건의했음에도 불구하고, 이홍장이 끝까지 허락하지 않았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조선이 우리 대청(大淸)의 번속(藩屬)이 된 지 200여 년 동안에 해마다 조공을 행한 것은 중외(中外)가 모두 아는 바다.… 우리 조정은 번복(藩服)을 어루만져서, 그 국내 정사(政事)를 예부터 스스로 다스리게 했다.… 저 나라[일본]가 조약과 공법을 준수하지 않고 제멋대로 날뛰어서, 오로지 속임수만을 일삼아 흔단(釁端)이 저들에게서 열렸으니 공론이 명백하다. 이로써 특별히 천하에 포고해서 우리 조정에서 이 일을 처리한 방식이 실로 이미 인(仁)과 의(義)를 다한 것이었음을 분명히 알리노라.〉
청은 조선을 그 판도 내에 유지하기 위해 서양 열강과의 외교를 권유했지만, 오히려 이는 그 이탈을 촉진하는 역효과를 낳았다. 그러자 청은 조선에 대한 기득권을 주장하기 위해 속방의 의미를 피보호국으로 재해석하면서, 실질적인 보호를 제공하고 국제적인 책임을 지고자 했다. 하지만 이 때문에 청은 점점 더 조선 문제에서 헤어날 수 없게 되었고, 결국 청일전쟁에서 패하면서 반(半)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청은 끝내 양절체제를 극복할 수 있는 논리를 마련하지 못했다. 앞에서 인용한 광서제의 청일전쟁 선전(宣戰) 조칙(詔勅)에서 보듯이, 조선과의 관계를 정의하는 청의 언어는 개전(開戰) 직전까지도 전통적 조공질서와 근대 국제법 체계 사이에서 부유(浮游)하고 있었다.
《明史》에는 외국, 《淸史稿》에는 속국
19세기 한중 관계의 역사는 그 속에서 만들어진 몇 가지 개념을 통해 오늘날까지도 우리의 역사 인식에 일정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듯 보인다. 앞에서 몇 차례 언급한 바 있는 속국이라는 말이 이에 해당한다. 흔히 ‘한국은 역사적으로 중국의 속국’이었다고 하지만, 이때 속국의 의미는 조공질서의 역사적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19세기의 정치적·개념적 혼란 속에서 변질된 것임에 유의해야 한다.
덧붙여 말하자면, 1911년 신해혁명(辛亥革命)으로 수립된 북양정부는 ‘역대수사(易代修史)’의 전통에 따라 청조의 정사(正史)를 편수하기 위한 예비 작업으로 《청사고(淸史稿)》를 만들면서 조선과 관계된 사항을 〈속국전(屬國傳)〉으로 분류했다. 이는 조선을 〈외국전(外國傳)〉에 포함시킨 《명사(明史)》의 체제와도 다른 것으로, 속국을 근대적 의미의 피보호국으로 해석한 19세기적 인식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었다. 현재 중국 정부는 2003년부터 국가청사편찬공정(國家淸史編纂工程)이라는 이름으로 《신청사(新淸史)》를 편찬하고 있는데, 그 체제는 《청사고》를 답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宗主權
또 다른 사례로 ‘종주국(宗主國)’과 ‘종주권(宗主權)’을 들 수 있다. 속국이 전(前)근대시기에 통용된 단어였던 것과 달리, 이 말들은 1904년경에 일본에서 ‘suzerainty’의 번역어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될 뿐, 관견(管見)에 따르면 아직 그 유래조차 명확히 밝혀진 바가 없다. 본래 ‘종주(宗主)’란 조상의 제사를 모시는 일족의 적장자를 뜻하는 말이다. 따라서 ‘종주국’과 ‘종주권’이라는 표현은 국제 관계를 가족 관계의 비유(analogy)로 파악한 것으로, 여기에는 마치 부형(父兄)이 자제(子弟)를 챙기듯이 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지도하고, 책임지고, 때로는 따끔하게 훈육해야 한다는 의미가 내포돼 있다.
유럽 외교사에서 ‘suzerainty’라는 개념이 처음 조약에 등장한 것은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 간에 체결된 콘스탄티노플 조약(Treaty of Constantinople, 1800년)에서였다. 이는 오스만 제국의 영토를 해체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그 종교적·정신적 권위를 인정한다는 의미로 사용된 것으로, 종주권과는 달리 가족 관계의 함의는 포함돼 있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종주권이라는 말은 근대 동아시아의 고유한 역사적 산물에 가깝다. 이 개념에는 조공제도의 역사적 기억, 서양 국제법의 ‘suzerainty’, 그리고 가부장적(家父長的) 가족 윤리 등의 요소들이 함축돼 있다. 그리고 이는 작은 나라에 대한 큰 나라의 무제한적(無制限的)이고 초월적인 권위와 권력의 행사를 서술하고 정당화하는 개념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19세기 중국은 조선과의 관계를 국제법의 언어로 정의하는 데 끝내 실패했다. 하지만 그것은 역설적으로 종주권이라는 모호한 개념으로 전화(轉化)하여 동아시아의 역사적 기억을 왜곡하고 있는 듯 보인다.⊙
◆08.10 어떤 광복절
8월은 한일 관계를 생각하는 시간이다. 한쪽에선 영화 ‘한산’을 보면서 과거를 상기하고, 다른 한쪽에선 윤석열 대통령의 광복절 기념사가 미래 지향적이기를 기대한다.
일제강점기는 우리 민족에게 고통과 분노의 시간이었다. 친일파 후손들도 그때의 기억이 편치는 않다. 생물학자 우장춘이 그랬다. 그는 명성황후 시해범 우범선과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래서 1950년 귀국할 때 주변에서 그의 안녕을 염려하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나는 한국인”이라며 고집스럽게 배를 탔다. 그리고 아버지의 업보를 씻는 마음으로 부산에서 여생을 보냈다.
1953년 일본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이승만 대통령은 우장춘의 변심을 의심하며 출국을 금지했다. 6·25 전쟁 중 현역 해군 소령으로 근무할 정도로 애국심이 컸던 우장춘은 그 의심까지 감내하며 아홉 번의 광복절을 정직하고 담담하게 맞았다. 출생 자체가 한일 근대사의 비극이었던 우장춘의 충정은 과학으로 빛난다. 씨 없는 수박 말고도 제주도의 감귤과 유채꽃, 병충해에 강한 강원도 감자는 그가 아버지를 대신하여 사죄하는 마음으로 만든 것들이다.
친일파 후손 중에는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우범선과 함께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했던 구연수의 장남 구용서(일본명 구하라 이치로)가 그렇다. 구연수가 조선총독부 고위경찰인 덕에 그 아들 구용서는 도쿄상대에서 유학을 마친 뒤 조선은행에 단독으로 채용되었다. 그리고 조선인인데도 도쿄에서 근무하는 전무후무한 특혜를 누렸다. 거기서 친일파 송병준의 손녀(노다 미에코, 한국명 송지혜)와 결혼했다. 광복 직후 귀국해서는 그런 과거를 꽁꽁 감추고 있다가 한국은행 초대 총재가 되었다.
1959년 오늘 우장춘이 61세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이종사촌이었던 구용서는 그때 상공부장관이었다. 우장춘과 달리 자신의 모든 것을 감추고 속였던 구용서는 해마다 광복절이 괴로웠으리라.
조선일보 차현진 한국은행 자문역
◆08.15 2000명 이끌며 항일투쟁 "조선 짠다크"...73년만에 유공자 됐다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였던 여성 항일독립운동가 김명시(1907~1949) 장군이 사후 73년 만에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다.
국가보훈처는 지난 12일 제77주년 광복절 맞아 독립운동가 303명을 독립유공자로 포상하면서 김명시 장군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고 14일 밝혔다.

▲1933년 9월 조선공산당 재건 사건으로 재판받던 당시 신문에 실린 김명시 장군 모습. 사진 열린사회희망연대
“조선의 짠타크” 2000명 이끌며 항일무장투쟁
“부하 2000명을 가지고 항일전에 활동하여 무훈을 세운 연안독립동맹(조선독립동맹)의 여장군 김명시는 수일전에 개선 귀국”
1945년 12월 23일자 동아일보 1면에 실린 기사 내용이다. 이 기사에서 김 장군은 “조선의 짠타크(잔다르크)”로 표현됐다. 해방 후 다른 언론들도 “여장군”이라 칭하며 그의 항일투쟁기를 전했다.
옛 경남 마산(현 창원)에서 태어난 장군은 18살이던 1925년 가입한 고려공산청년회에서 유학생으로 선발, 소련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공부했다. 이 대학은 코민테른(공산당 국제조직) 산하 공산주의 혁명가 양성기관이었다.
김 장군은 유학 1년여 만인 1927년 중국 상해로 파견돼 중국공산당 상해한인지부에서 일하며 홍남표·조봉암 등과 함께 항일운동을 했다. 일제 만주침략이 임박했던 1930년에는 무장대와 함께 하얼빈 일본영사관을 공격했다.

▲김명시 장국의 개선 귀국 내용이 담긴 1945년 12월 23일자 동아일보 기사. 제목 중 ″조선의 짠타크(잔다르크) 현대의 부랑인 연안서 온 김명시 여장군 담″(빨간 동그라미)이라고 적혀 있다. 사진 국사편찬위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기사 원문 캡처
이후에는 상해로 돌아와 비밀기관지 ‘콤뮤니스트’ 제작 등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에 나섰다. 그러다 1932년 국내에 잠입, ‘콤뮤니스트’, ‘태평양노조’ 등 비밀기관지를 인쇄·배포하다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조봉암 등과 ‘조선공산당 재건 사건’ 주모자로 몰리면서 징역 6년을 선고받았다. 예심 기간 1년을 포함, 신의주 형무소(교도소)에서 7년의 옥고를 치렀다.
그는 1939년 만기 출소한 뒤 중국으로 국경을 넘어가 중국공산당 팔로군에 입대해 싸우다 무정 장군의 연락을 받고 조선의용군에 합류했다. 여기서 화북지대 여성부대 지휘관을 맡아 전투와 선전전을 벌이며 해방 전까지 항일무장투쟁을 했다. 이때 ‘여장군’ 칭호를 얻었다.
김명시 장군은 해방 후 국내에서 신탁통치 반대 활동을 했다. 그는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체포돼 1949년 10월 부평경찰서 유치장에서 생을 마감했다. 당시 정부는 김 장군이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고 밝혔다.

▲김명시 장군의 사망 내용을 담은 1949년 10월 11일자 경향신문 기사. 제목에 ″북로당 정치위원 김명시, 유치장서 자살″이라고 적혀 있다. 사진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기사 원문 캡처
독립유공자 서훈의 걸림돌 ‘북로당 정치위원 기록’
창원지역 시민단체 열린사회희망연대(희망연대)는 2019년 1월 장군에 대한 독립유공자 포상을 신청했지만, 정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국가보훈처는 같은 해 11월 “사망경위 등 광복 후 행적 불분명”하다고 했다.
희망연대는 사망 당시 내무부가 장군의 이력을 ‘북노당 정치위원’이라고 발표한 것이 걸림돌로 작용한 것으로 판단했다. 실제 보훈처는 희망연대가 2021년 재심의 요청한 건에 대해 “1949년 김명시 선생이 모종의 혐의로 부평경찰에서 유치되었고 북노당 정치위원으로 소개되었던 점과 관련해 선생의 마지막 활동이 확인되는 1947년 11월부터 사망 시까지의 행적에 대해 보다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고 회신했다.
시민단체 “김명시 북로당에 정치위원 아니다”
희망연대는 북로당 정치위원 이력의 사실 여부를 확인하는 작업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국토통일원(현 통일부)이 갖고 있던 북조선로동당 창립대회(1946년8월), 2차대회(1948년3월) 회의록을 확보해 북로당에는 ‘정치위원’란 직책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해당 자료에는 중앙위원, 검열위원 등 직책과 중앙위원회, 검사위원회 조직은 있지만, 정치위원이나 정치위원회는 기록돼 있지 않았다. 게다가 해당 자료 명단에 김두봉·김일성 등 이름은 있지만 김명시는 없단 사실도 확인했다.
창원=안대훈 기자 an.daehun@joongang.co.kr
◆우리의 마지막 황실과 한국전쟁 당시 사진
https://m.cafe.daum.net/gigocun/qiTU/404?svc=cafeapp 대한제국의 자료
https://m.cafe.daum.net/gigocun/qiTU/396?svc=cafeapp - 1050년 한국전쟁 당시 사진
월간조선 09월 호
◆언론 속의 역사 | 세계 일주 여행 최린과 이정섭
파리에서 만난 최린·나혜석 스캔들
⊙ 여류 화가 나혜석, 1927년 7월 만주와 시베리아 대륙을 횡단해 파리行… 조선 여성 최초의 세계 일주 기록
⊙ 천도교 지도자 최린과 佛유학생 출신의 《중외일보》 기자 이정섭, 1927년 8월 태평양과 美대륙 횡단해 파리行
⊙ 최린·이정섭, 미국에서 서재필·이승만 등과 만나
⊙ 최린·이정섭이 아일랜드 독립운동가 데 벌레라와 인터뷰한 것이 문제 되어 《중외일보》 筆禍 사건 발생
⊙ 최린과 동행하던 이정섭, 1927년 11월 돌연 혼자 귀국… 최린과 나혜석의 불륜 시작
⊙ “(이정섭은) 년전 장기 여행 중에도 엇던 애인의 관게로 해서 급속히 귀국하엿다는 풍문이 돌앗스니”

최린(崔麟·1878~1950년·납북), 나혜석(羅蕙錫·1896~1948년), 이정섭(李晶燮·1895~1950년·납북) 세 사람은 일제 강점기 사회적 관심을 끌면서 화제를 뿌리고 다녔던 인물들이다. 최린은 천도교(天道敎) 지도자로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이었으나 후에 친일(親日)로 변절하여 지탄(指彈)의 대상이 되었다. 나혜석은 시대를 앞서간 여성 화가였지만, 최린과의 스캔들이 알려진 뒤에는 불우한 말년을 보냈다. 이정섭은 파리에서 대학을 마친 《중외일보(中外日報)》의 인텔리 논설기자였다.
나혜석과 최린의 불륜(不倫) 관계는 이정섭과 함께 세 사람이 파리에서 만났을 무렵에 은밀하게 벌어졌다. 하지만 나혜석은 귀국 후에 남편의 요구로 이혼했다가 6년 뒤 1934년, 최린을 상대로 위자료(慰藉料) 청구 소송을 제기, 세간의 주목을 불러일으켰다. 낭만의 도시로 알려진 파리. 쉽게 갈 수 없었던 그곳까지 세 사람은 어떤 경로로 가게 되었을까. 최린, 나혜석, 이정섭이 파리에서 만나게 된 경위를 추적해보기로 한다. 최린과 이정섭의 파리행(行)은 언론 역사의 한 부분이라는 의미도 있다.
최린 - 민족대표에서 親日派로
최린은 언론 역사를 연구하는 입장에서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의 사장이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연구의 대상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론사 분야에서 특별한 연구가 거의 없는 실정이다. 그래서 최린이 어떤 인물인지 먼저 알아볼 필요가 있다. 그의 행적을 살펴볼 수 있는 기본적인 자료는 그의 ‘전기(傳記)’이다.
최린은 전기를 두 번 저술한 적이 있다. ‘자화상, 파란중첩 50년간’(《삼천리》 1929년 9월호)이 첫 번째이고, ‘자서전(약력)’(《한국사상》 제4집, 1962년)이 두 번째이다. 두 번째 전기는 《여암문집(如菴文集)》(여암최린선생문집편찬위원회, 1971년)에도 수록되어 있다. 3·1운동 재판 기록과 광복 이후 반민특위(反民特委) 공판 때의 진술 내용도 1차 자료의 가치를 지닌다고 평가할 수 있다.
최린은 함경남도 함흥 출생으로 1904년 11월 대한제국 황실에서 선발한 국비(國費) 유학생으로 도쿄부립제일중학교(東京府立第一中學校)로 유학을 떠났다. 최남선(崔南善)도 같은 유학생 50명 가운데 한 명이었다. 1906년 9월에는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학과에 입학하여 1909년 9월에 졸업했다. 귀국하여 1911년부터 보성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다가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투옥되면서 사퇴했다. 형무소에서 3년간 복역한 후에 천도교 중앙 종리원(宗理院) 등 장로(長老)로 천도교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佛유학생 출신의 논설기자 이정섭

▲이정섭이 파리 유학을 마치고 귀국함을 알리는 기사(《조선일보》 1926.7.18).
이정섭은 1920년대에 7년 동안 프랑스로 나가 파리 소르본대학 문학부에서 학사 학위를 받고 귀국하여 《중외일보》 논설기자가 되었다. 처음 그는 경제학을 공부하기 시작하여 경제학원론, 경제사상사 등을 파고들었다.
그러다 경제학은 사회학의 한 부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당시 프랑스는 타르드(Jean Gabriel Tarde·1843~1904년)와 뒤르켐(Emile Durkheim·1858~1917년) 같은 사회학의 세계적인 태두(泰斗)를 배출한 바로 직후였기에 사회학은 일종의 새로운 유행 학문이 되어 있었다.
이정섭은 프랑스 사회학의 영향을 받아 경제사회학과 윤리사회학을 수강하였다. 하지만 사회학은 경제학에 비해 아직 학문적으로 과학화하지 못한 상태였기에 사회학자들 사이에서 학문적 방법론에 관한 논의가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이정섭은 과학적 방법론이 무엇인가를 탐구하기 위해 논리학 연구에 착수하여 이 영역에서 당시 유명하다는 책 대부분을 독파했다. 학문은 깊이 파고들수록 새로운 분야가 전개되기 마련이다. 논리학을 연구하다 보니 심리학의 한 분야라는 사실을 깨닫고 심리학 과목까지 수강하였다.
연구가 깊어질수록 범위 또한 넓어지며 또 다른 분야가 나타났다. 그것은 철학이었다. 다시 철학개론과 철학사를 연구해보았는데, 순수철학은 너무 추상적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후 독일의 자연철학(Naturphilosophie·과학철학)까지 섭렵하며 소르본대학을 마쳤다. 이 시기에 이정섭은 마르크스의 《자본론》과 《공산당선언》도 열심히 읽었다. 철학부 사회학과가 《공산당선언》을 교과서로 사용했기 때문이기도 했다(이정섭, ‘학해편린(學海片鱗), 맑쓰에 대한 일 의문’, 《중외일보》 1927년 4월 28일). 제일 경탄한 저자로는 베르그송(Henri Bergson)을 꼽았다(이정섭, ‘우리가 외국에서 보고 가장 경탄한 것, 새 조선 사람의 본밧고 십흔 일들, 내가 佛國에서 본 二大驚嘆’, 《별건곤》 1927년 7월, p.95). 그는 학업을 마치자 귀국 길에 올라 지중해, 인도양을 건너 일본 고베를 경유하여 부산에서 기차를 타고 1926년 7월 17일 서울역에 도착했다. 만 40일이 걸린 긴 여행이었다.
일본·미국·독일에서 공부한 언론인은 더러 있지만, 프랑스에서 정식 학사 학위를 받은 사람은 이정섭이 처음이었다. 프랑스어·영어·일어를 구사하는 능력에 첨단의 사회학을 전공하여 학문적으로도 단연 주목을 받았다. 언론계 입문 후 논설 집필과 국제 문제 기자로 활동하며 지방 강연 등 폭넓은 행보를 전개하자 일본 경찰의 감시 대상이 되었다.
조선 여성 최초의 세계 일주
최린과 나혜석의 은밀한 스캔들이 벌어진 프랑스 파리는 예술과 낭만, 환상적인 이미지의 도시였다. 그곳은 아무나 갈 수 있는 도시가 아니었다. 더구나 여성의 신분으로 파리 여행은 꿈꾸는 것조차 어려운 시절이었다. 거기에 두 사람의 만남도 특이하고 극적이었다. 지구를 반대 방향으로 돌아 파리에서 만나는 운명의 일치였다. 최린과 이정섭은 1927년 8월 태평양을 건너 미(美) 대륙을 횡단하고 대서양을 넘어 유럽으로 가는 일정을 소화했다. 반대로 나혜석은 한 달 먼저인 1927년 7월 2일, 만주와 시베리아 대륙을 횡단하는 코스를 잡아 파리로 향했다. 나혜석의 세계 일주는 조선 여성 최초의 기록이었다. 영친왕(고종의 손자 이은)은 나혜석보다 한 해 먼저인 1926년 5월 23일, 요코하마에서 수행원들과 함께 유럽 여행을 떠나 11개월 동안 유럽 13개국을 방문했지만 세계 일주는 아니었다(김기철, ‘모던 경성, 영친왕의 유럽 호화여행, 그는 무엇을 보았을까’, 《조선일보》 2022년 7월 29일). 영친왕 이은은 군축회의가 진행 중인 제네바에서 인터라켄을 통과하는 도중에 나혜석-김우영 부부를 만나 만찬에 초대했다. 이은은 나혜석 부부를 두 차례 만났다(나혜석, 《조선 여성 첫 세계 일주기》, 가갸날, 2018년, pp.53~55).
이정섭의 입장에서 세계를 한 바퀴 돌면서 현지에서 집필한 원고를 《중외일보》로 보내어 그 여행기를 연재한다는 기획은 좀처럼 얻기 어려운 행운이었다. 국내 언론사상 첫 시도였다는 보람도 느꼈을 터이다. 세계 일주 현지에서 송고한 여행기 ‘조선에서 조선으로’는 독자들의 열렬한 호응을 받았다.
최린과 이정섭
《중외일보》는 이상협(李相協· 1893~1957년)이 창간한 신문으로 《조선일보》 《동아일보》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3대 민간지 중 하나였다.
이상협은 《동아일보》 창간의 주역이었고, 《조선일보》로 가서 ‘혁신 조선일보’를 이끌다가 《중외일보》를 창간한 언론계의 거목(巨木)이었다. 《중외일보》는 최남선이 창간한 《시대일보》의 후신(後身)으로, 《시대일보》는 참신한 편집으로 인기가 있었지만 자본 부족으로 폐간 위기에 놓였고, 이를 이상협이 인수하여 새로 총독부의 허가를 받아 제호(題號)를 《중외일보》로 바꾸어 1926년 11월 15일에 창간했다. 이정섭은 이때 입사했다.
이정섭은 세계 일주 여행기를 감당할 최적의 능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당시는 세계 일주 자체가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어려운 시기로, 그 기행문을 현지에서 보내고 이를 신문에 연재한다는 사실은 대단한 관심과 호기심을 끌었다.
최린과 이정섭은 보성학교 사제 관계이면서 함흥 동향 출신이었다. 정확히 밝히자면 이정섭은 본적이 함경북도 함주군(咸州郡)인데 함흥과 인접한 지역이어서 함흥 출신으로 알려졌다. 20세 때인 1915년 보성중학 제5회로 졸업했고, 자유당 시절 실력자였던 이기붕(李起鵬·전 국회의장)을 비롯하여 최승만(崔承萬·전 인하대 학장)이 같은 해 졸업한 동기생이다.
이정섭은 보성중학 시절부터 외국 유학을 꿈꾸어 낮에는 학교에 다니고 저녁에는 YMCA에서 영어공부를 해 졸업 후 24세쯤 되었을 때는 영어신문 《서울프레스》를 읽을 수 있는 실력이 되었다(이정섭, ‘나의 佛國 유학시대’, 《신천지》 1950년 2월, pp.168~172).
나이는 이정섭이 17세 아래였다. 그러나 이정섭은 《삼천리》 1931년 4월호에 쓴 글에서 최린을 ‘고우(故友)’로 불렀다(이정섭, ‘崔麟 코-쓰 비판, 최린씨의 방향’, 《삼천리》 1931년 4월, pp.54~55).
이정섭의 세계 일주 출발

▲이정섭의 세계 일주 기행 예고 기사(《중외일보》 1927.7.2).
《중외일보》는 이정섭이 출발하는 날인 7월 2일, 1면 중앙에 ‘본보 기자의 세계 일주’라는 제목의 사고(社告)를 실었다. “세계 일주의 사명을 맡은 기자는 금춘(今春) 중국혁명의 중심지대인 호한(滬漢, 상하이-한커우) 지방에 특파되어 투철한 관찰과 명쾌한 문장으로 독자 제위(諸位)의 갈채를 박(博, 크게 얻다)한 본보 논설기자 이정섭”이라고 소개했다. 이정섭을 국제문제 전문기자로 내세운 것이다. 이어서 “각 방면의 신흥세력과 약소민족에 대하야 시찰조사”할 것이라고 예고했다.
이정섭이 7월 2일 서울역을 출발하여 세계 일주의 여행길에 올랐을 때는 30여 명이 전송하러 나왔다. 《중외일보》는 7월 3일 자 사회면 중앙에 이정섭이 어제저녁 북미로 향했다는 기사를 실었다.
민족운동의 구심점인 천도교의 지도자라는 상징성을 지닌 최린의 세계 일주는 개인적인 유람이 아니었다. 조선 민족의 진로를 모색하고 국제적인 안목에서 독립운동을 이끌 것이라는 기대감도 있어서 일반의 관심은 컸다.
최린은 한 해 전 1926년 9월 9일 도쿄로 가서(최린, ‘자서전’, 《여암문집(如菴文集)》 하, 여암최린선생문집편찬위원회, 1971년, p.208) 도쿄제국대학 병원에서 위장병 치료를 받다가 완쾌되자 이정섭보다 21일 앞서 6월 11일 요코하마에서 출항하는 대양환(大洋丸)편으로 미국으로 떠났다. 1년 예정으로 유럽 여러 나라와 중국을 둘러본다는 계획이었다. “우리가 조선을 알려면 조선 안에서 보는 것보다 조선 바깥에서 조선을 보아야 할 것이요. 그리고 우리의 사정을 세계 여러 나라에 널리 알리겠다”는 것이 표면에 내세운 이유였지만, 내심 독립운동의 방향을 ‘자치운동’으로 전환하는 문제를 연구하려는 목적이라는 추측이 떠돌았다(이정섭, 위의 ‘崔麟 코-쓰 비판, 崔麟씨의 방향’).
세계 일주를 떠나던 무렵 최린은 아직 친일로 변절하지는 않았다. 최린은 시카고 교민들의 환영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의 이번 여행에 대하여 세상에서는 이러고저러고 말이 많으나 나의 목적은 조선 안에 있어서 조선 전체를 볼 수 없기 때문에 조선을 떠나 해외를 보고 조선 전체를 보려 합니다. 이것이 조선 전체를 관찰하는 유일한 방법이외다.”(이정섭, ‘조선에서 조선으로’, 49, 1927년 12월 5일) 미국 본토 도착 전 하룻밤 머문 하와이에서는 이승만(李承晩)을 만나 내외정세에 관한 의견을 나누었다.
이정섭의 기행문 ‘조선에서 조선으로’ 첫 회가 《중외일보》 1면에 실린 날은 서울에서 출발하고 한 달이 좀 넘은 1927년 8월 20일. 앞서 떠난 최린을 미국에서 만나기로 하고 뒤를 쫓아가면서 보낸 원고였다. 여행기 첫 회에서 4회까지는 아직 최린을 만나기 전 이정섭이 서울에서 도쿄로 가는 여정을 적었다.
일본 경찰은 이정섭을 감시하면서 따라다녔다. 부산에서 일본으로 향하는 배 안에서는 물론, 고베-오사카-도쿄까지 릴레이식으로 감시 형사와 동행하는 처지가 되었다. 이정섭은 “아! 창피 막심이외다! 하몽(何夢, 《중외일보》 발행인 이상협의 호) 형, 우리는 어찌하여 이따위 미행과 감시를, 혐의를 받게 되었습니까”라고 탄식했다. 도쿄에서 미국으로 가는 배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형사의 감시와 미행이 따라다녔다.
‘쟁쟁한 당대 논객’ 이정섭

▲‘세계 일주 기행, 조선에서 조선으로’ 제1회(《중외일보》 1927.8.20).
이정섭은 요코하마에서 출항하는 배를 타고 미국으로 가서 최린과 합류하기로 하였다. 《중외일보》 지면이 온전히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기행문도 중간에 빠진 회가 더러 있다. 1927년 8월 20일에 시작된 제1회부터 이듬해 2월 27일에 중단될 때까지 연재된 91회 가운데 17회분이 누락되어 74회가 남아 있다.
기행문은 가벼운 필치의 에세이 문체를 구사하다가 사회 비평 시각의 논평으로 이어지는 서술로 바뀌기도 하면서 연재를 이끌어나갔다. 첫 회에서 자신이 쓰는 기행문의 성격을 이렇게 말한다.
〈나의 기행문에는 스스로 ‘나’에 대한 기사가 많게 됩니다. ‘나’라는 가운데는 개인적 나, 조선인적 나도 있고 신문기자적인 나, 철학적 사회학적 나도 있습니다. 세상이 나를 보는 것과 내가 세상을 보는 것을 솔직하게 표현할 뿐이외다. 이 점을 망각하면 나를 오해하시기 쉽습니다.〉
이정섭을 처음 만나는 사람은 “교만하다, 아는 체한다”는 인상이었다(강우, ‘쟁쟁한 당대 논객의 풍모, 대담한 평론가 이정섭씨’, 《삼천리》 1932년 8월). 학문적으로도 누구 못지않게 다양한 지식을 축적했다는 자신감이 있었고, 장기간 프랑스에 머무르면서 유럽의 정치·문화를 경험했다는 자부심이 그런 인상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모자를 비뚜름하게 쓰고 다니는 모습도 대단히 건방져 보였을 것이다. 미국 희극배우 버스터 키튼(Buster Keaton)의 모자 쓴 모습이 연상되는 파격적인 외관이었다(‘조선에서 조선으로’ 첫 회, 1927년 8월 20일).
최초의 여류 화가 나혜석의 파리행
나혜석은 도쿄미술전문학교를 졸업하던 1921년경에 교토제국대학 출신 김우영(金雨英)과 결혼했다. 김우영은 만주 안동현(安東縣) 부영사(副領事)를 지내고 1934년 나혜석이 최린을 상대로 소송할 당시에는 변호사를 하고 있었다. 나혜석은 총독부 미술전람회에서 특선 6회, 도쿄미술전람회 1회, 파리의 일불(日佛)미술전람회에서도 입선되어 여류 미술가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나혜석은 최린-이정섭보다 한 달 먼저인 1927년 6월 19일 시댁이 있는 부산에서 출발하여 세계 일주 여행길에 올랐다. 6월 22일 서울역을 떠나 만주 펑톈(奉天)을 거쳐 시베리아를 횡단하는 일정이었다. 최린 일행이 일본에서 태평양을 건너 미국 서부에서 동부를 거쳐 대서양 너머 영국과 유럽을 일주하고 러시아, 중국을 통해 오는 일정과는 반대로 시베리아 대륙을 거쳐 유럽으로 갔다가 미국을 통해 오는 일정이었다(나혜석의 세계 일주 여행기는 다음 책에 수록되어 있다. 나혜석, 《조선여성 첫 세계 일주기》, 가갸날, 2018년).
《조선일보》는 나혜석이 영국,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벨기에,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스페인, 덴마크, 노르웨이, 터키, 페르시아, 체코, 태국, 그리스, 미국을 1년 반 예정으로 여행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여류 화가 나혜석 여사의 세계 만유(漫遊). 불란서를 중심으로 동서양 각국의 그림을 시찰코저 내 22일 경성역 출발’이라는 《조선일보》 1927년 6월 21일 자 기사인데, 나혜석이 ‘아우’로 부르는 여기자 최은희가 썼을 것이다. 최은희는 나혜석이 서울역에서 떠나는 기차로 세계 여행의 길에 오르자 함께 타고 평양까지 갔다가 돌아올 정도로 친밀한 사이였다(나혜석, 《조선여성 첫 세계 일주기》, p.12).
나혜석이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타고 가는 도중 바이칼 호수를 지나면서 7월 9일 자로 최은희에게 보낸 편지 ‘나혜석씨 여중(旅中) 소식, 아오 추계(秋溪)에게’는 《조선일보》 7월 28일 자에 실렸는데 안동현과 하얼빈에서도 최은희(호 추계)에게 편지를 보냈다는 말이 나온다. 기사가 실린 때 나혜석은 이미 모스크바를 거쳐 폴란드로 갔다가 7월 19일 파리에 도착한 뒤였다.
안창호 아들이 車로 관광 안내
한 달 뒤에 요코하마에서 세계 일주 여행을 떠난 최린은 태평양을 건너는 데 20일이 걸려서(최린, ‘구미여행’, 《혜성》 1931년 4월)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날은 1927년 6월 27일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이정섭을 기다렸다. 49세였던 최린은 머리가 반백으로 거의 60대로 보인다고 《신한민보》는 보도했다. 기미독립운동 민족대표 33인으로 투옥되었던 최린의 반백 흰머리는 관록을 더해주는 모습이었다. 이정섭은 7월 21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최린과 합류했다.
11월 1일 자에 실린 기행문 제17회는 이정섭이 탄 배가 샌프란시스코에 닿은 7월 21일의 기록이다. 이날부터 이정섭은 먼저 와 있던 최린과 동행하면서 여행기를 송고했다. 처음에 밝힌 대로 개인이 보고 들은 경험의 에세이 형식 기행문과 함께 기자로서 취재한 기사 성격으로 연재를 이끌어나갔다.
샌프란시스코 교포신문인 《신한민보》는 이정섭이 일어·영어·불어에 능통하고 독일어도 할 수 있는 인물이라고 소개했다. 샌프란시스코에 머무는 동안은 오클랜드에 사는 동포들이 환영회를 열어주었고(19회, 11월 3일), 안창호의 아들 필립(Philip Ahn, 必立)이 자동차로 관광 안내를 해주었다. 국민회(Korea National Association)를 방문하여 《신한민보》 편집자 백일규(白一圭)도 만났다(21회, 11월 5일).
최린과 이정섭은 샌프란시스코에서 7월 27일에 기차를 타고 남쪽으로 12시간 거리인 ‘지상낙원’ 로스앤젤레스에 도착했다(23회, 11월 7일). LA 거주 동포는 500여 명이었는데, 일본인은 1만여 명이나 되었다.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는 동포들도 있었지만 대개는 노동자들이었다.
28일 아침에는 흥사단(興士團) 단원들과 만났다. 이날 저녁과 30일에는 동포들의 환영 만찬에 참석했다. 하지만 이들은 안창호(민족 심리통일과 산업장려)와 이승만(선전과 외교) 두 지도자를 지지하는 사람들로 심각하게 양분되어 있었다(25~27회, 11월 9~11일).
서재필과의 만남
대륙횡단 열차를 타고 중간 기착지 솔트레이크시티, 나이아가라 폭포 등을 둘러보고 동부로 가서 뉴욕과 워싱턴을 방문했다. 뉴욕에서는 《뉴욕타임스》 편집국과 논설실, 공무국을 둘러보았다(51회, 12월 8일). 뉴욕의 보성학교 교우회 8명은 8월 23일 최린 환영회를 열어주었는데, 그 가운데는 허정(許政·전 과도내각 수반), 이기붕, 김도연(金度演·초대 재무부 장관), 유태하(柳泰廈·전 주일공사)가 있었다.
뉴저지에 있는 프린스턴대학을 둘러본 다음에는 윤치영의 안내로 필라델피아 교외의 자택에서 서재필을 만났다(최린, ‘서재필씨와 회견’, 〈자서전〉, pp.223~224). 이정섭은 서재필의 인상을 이렇게 묘사했다(55회, 12월 12일).
“서재필 박사는 키는 커-다마하고 골격은 건장하며 행동은 매우 활발하야 능히 30 청년을 능가할 만합니다. 둥그스레하고 조금 검붉은 얼굴은 광대한 이마와 배합되어 선뜻 나타나는 무어가 보이며 두 쪽에 돌출한 관골은 고집성을 상징하는 것 같고 힘 있게 꼿꼿이 내려온 코에는 모험성이 보이며 조금 돌출한 듯한 넓은 입은 힘 있게 다물려 백절불굴의 결심과 분투욕을 표현합니다.”
이정섭은 워싱턴에서 기행문 61회(12월 18일)까지 보낸 뒤 뉴욕을 거쳐 8월 3일 유럽으로 떠나는 배를 탔다. 기행문은 한 달 동안 중단되었다가 해가 바뀐 1928년 1월 21일 자 제63회부터 다시 게재되었다. 미국에서 대서양을 건너는 장면은 ‘대서양상에서’라는 부제(副題)로 시작된다. 제67회는 런던에서 마르크스의 묘를 참배하는 장면부터 3회에 걸쳐서 감회를 적을 정도로 마르크스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제67~69회, 1928년 1월 26~28일).
이정섭, 파리에서 돌연 최린보다 먼저 귀국
이정섭은 여행을 떠나기 전인 4월 28일 자 《중외일보》 1면 칼럼 ‘학해편린’란에 ‘맑쓰에 대한 일 의문’이라는 글을 실은 적이 있었다. 수년 전만 해도 마르크스 신도가 아니면 시대의 낙오자라는 불미(不美)한 칭호를 얻게 되었다고 전제하면서 마르크스의 역사철학을 이해하려면 헤겔의 변증법 이론을 먼저 알아야 한다고 소개하고 공산화(共産化)된 사회 이후에는 어떤 정치제도가 들어설지 의문이라는 비판적 의문을 제기하였다.
이정섭은 당시 우리나라에서 마르크스주의와 공산주의 철학을 가장 깊이 연구했던 언론인이었다. 독일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받고 이정섭보다 2년 뒤 1928년 6월에 귀국한 김현준(金賢準)이 1930년 9월에 《근대 사회학》(광한서림)을 출간했다는 광고가 《중외일보》에 실려 있는데, 목차에 마르크스, 엥겔스 등 여러 사회학 사상가의 이름이 두루 올라 있지만, 필자는 그 책을 보지는 못했다.
이정섭과 최린의 동행 여행은 영국·아일랜드를 돌아 파리에서 끝이 났다. 이정섭은 1927년 11월(이정섭의 회고 글에는 1928년 11월로 되어 있으나 착각이거나 오타일 것이다)에 파리에서 혼자 귀국길에 올랐다.
최린과 나혜석의 불륜이 처음 있었던 날은 11월 20일이었다(《조선중앙일보》 1934년 9월 20일, 나혜석의 위자료 청구 기사). 이정섭의 경로는 독일, 폴란드, 러시아(모스크바)를 거쳐 일주일 동안 기차를 타고 만주, 그리고 서울로 오는 코스였다(이정섭, ‘莫斯科의 露西亞美人’(‘모스크바의 러시아 여인’-편집자 주), 《삼천리》 1931년 4월, p.68). 서울 도착은 이해 말이었고 서울 도착 무렵인 1927년 12월 18일에는 기행문 61회가 게재되었다.
이정섭이 어째서 파리에서 최린보다 먼저 서울로 돌아왔는지 정확한 이유를 알 수는 없다. 그런데 약 5년 후 《삼천리》(1932년 8월호)에 실린 ‘쟁쟁한 당대 논객의 풍모, 대담한 평론가 이정섭씨’(강우)라는 글에서 먼저 귀국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는 실마리 한 가닥을 찾을 수 있다. 강우는 이렇게 썼다.
〈(이정섭은) 나이가 37~38세에 불과한 미남자다. 미남자인 그가 파리대학을 졸업하고 금의환국하자 조선 각 방면 여성들이 경쟁적으로 연애를 구하야 얼마 동안은 사랑의 무덤 속에 뭇칠번 하엿다 하며 년전 장기 여행 중에도 엇던 애인의 관게로 해서 급속히 귀국하엿다는 풍문이 돌앗스니 그 사실이 과연인지 안인지는 몰라도 그는 확실히 염복만흔 평론가인 동시에 삼미(三美)의 소유자[미남자에 미재(美才)와 미녀를 가진 이]라 하겟다.〉
이정섭의 귀국의 이유는 “어떤 애인의 관계로 해서”라는 것인데, 서울에 있는 어떤 애인인지, 혹은 나혜석을 사이에 두고 최린과 갈등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대영제국의 붕괴인가’
▲총독부가 이정섭의 세계 일주 여행기를 삭제 처분한 이유를 기록한 비밀 문서(조선총독부 경무국, 《朝鮮に於ける出版物槪要》, 1929년 발행, p. 83).
서울로 돌아온 이정섭은 해가 바뀐 1928년 1월 1일 자 문화면에 ‘독재적 민족운동을 제창함’이라는 글을 실었는데 완전히 삭제된 상태로 제목만 남아 있다. 경찰의 압수기록도 없으니 내용은 전혀 알 수 없다.
이정섭은 독자들에게 귀국 사실을 공개하지 않은 채 1월 21일(63회)부터 연재를 계속했다. 제63회(1월 21일)와 64회(1월 24일)의 뉴욕에서 30여 명 동포의 환송을 받으며 떠난 머제스틱(Majestic)호는 아직 대서양에 떠 있는 상태였다. 67회(1월 26일)가 되어서야 영국에 도착하여 런던 마르크스의 묘지를 찾는 이야기가 계속되었다.
그런데 런던 기행문 제80회(2월 15일) 소제목 ‘영국민의 장래’(2)는 6단 박스 기사로 마지막 단은 삭제되어 깎인 상태로 흔적만 남아 있다. 다행히 검열 이전 온전한 지면이 보존되어 있어 삭제된 부분을 알 수 있다. 이날 1면 머리 사설 ‘신간회 창립 1주년 기념에 대하야’도 검열로 완전히 삭제되었는데, 이정섭의 기행문 가운데 삭제된 부분은 다음과 같다.
〈대영제국의 붕괴인가
이와 같이 대영제국의 각 자주적 단체가 행정상 입법상 외교상으로 거의 독립국가의 권한과 체재(體裁)를 가지게 되었으니 이것을 영제국의 붕괴로 볼까, 혹은 식민지의 이익과 편의를 도모하는 독립 권한의 부여이므로 이로써 영제국의 결속은 더 견고하여진 것으로 볼까 함에 대하여는 학자의 이론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만 이론이요 사실에 있어서는 자주단체의 권한이 확장되면 확장될수록 독립에 가까우며 각 자주적 단체가 독립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영제국의 결속은 해이(解弛)될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자주적 단체가 과거의 성적으로 장래에도 그 독립적 보조로 진행한다면 불원간 독립에 정절(正切)되어 결국 영제국의 붕괴를 볼 것이요 그리하야 일몰부지(日沒不知)의 대제국은 일몰을 알게 될 소도(小島) 왕국으로 변하지 않을까 합니다.〉
영국의 식민지 자치제 허용 정책을 소개한 이정섭의 글은 조선을 발판으로 식민지를 넓혀 대제국을 구축하려 했던 일본으로서는 경계하지 않을 수 없는 기사였다. 조선에서도 자치제 요구가 이어질지 모른다는 우려가 있었을 것이다. 해가 지지 않는(日沒不知) 대영제국이 결국은 해가 지는 광경을 보는 작은 섬나라(小島) 왕국으로 변할 것이라는 이정섭의 예언은 오늘날 영국의 모습으로 잘 나타나 있다.
아일랜드 독립운동가 벌레라와의 인터뷰
▲검열에 걸린 아일랜드 독립운동가 에이먼 데 벌레라 인터뷰 기사(《중외일보》 1928.2.21).
검열을 담당하는 총독부 경무국 도서과(圖書課)는 영국과 아일랜드 기행문에 특별히 신경을 썼다. 2월 16일 자(81회) ‘영경(英京)을 떠나면서’는 전문(全文)을 삭제했고, ‘아일랜드 수도 더블린에서’라는 부제를 단 21일 자(86회)도 전면 삭제 처분했다. 총독부는 아일랜드(에이레)의 독립운동을 다룬 기사들을 특히 문제 삼았다.
최린과 이정섭은 9월 20일 8시30분에 런던에서 출발하여 오후 2시 홀리헤드(Hollyhead)항에 도착하여 아일랜드의 더블린으로 건너갔다(최린, 〈자서전〉, p.237).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에서 정치가이자 독립운동가 에이먼 데 벌레라(Eamon de Valera·1882~ 1975년)와 만난 날은 9월 22일이었다(〈자서전〉, p.240). 그를 만난 장면은 해를 넘겨 1928년 2월 21일 자(제86회)에 실렸다.
데 벌레라는 영국에 대항하여 아일랜드의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20세기 아일랜드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독립운동가였다. 아일랜드 임시정부 수반(1932~1948년), 아일랜드 자유국 대통령과 아일랜드 공화국 대통령을 역임했고 아일랜드 제헌의회 의장이었다. 1926년에는 피아나 페일(Fianna Fail·아일랜드공화당)을 창당했다.
‘자치에 만족 말고 최후 목적을 달하라’
▲삭제 처분에 대한 불만을 직설적으로 토로한 이정섭의 글(1928.2.26).
이정섭은 최린과 함께 데 벌레라를 만나 “최린은 조선의 데 벌레라”라고 소개하였다. 데 벌레라와의 인터뷰는 아주 짧은 시간이었다. 최린이 “당신의 과거 민족운동을 벌인 경험 가운데 조선 민족의 장래를 위해 참고될 만한 것이 있으면 말해달라”고 청하자, 벌레라의 답변은 이랬다.
“일 민족이 해방되어가는 과정상에는 필연적으로 자치당과 독립당의 2당으로 분열되는 법이외다. 결코 자치주의로 다러나지 말고 최후의 목적을 달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기행문 중간 제목은 ‘자치에 만족 말고 최후 목적을 달하라’였다. 총독부는 이 기행문의 전문 삭제를 명했기 때문에 《중외일보》는 조판했던 기사를 모두 깎아내고 발행하였다. 이튿날인 2월 22일 자에 게재된 기행문(제87회) 중간 제목 ‘애란 공화국 선언, 자치로부터 독립에로’라는 부분도 검열에서 삭제 처분이었다. 이어서 2월 25일 자(제88회)도 흔적이 남지 않을 정도로 완전 삭제였다. 이정섭은 26일 자 제89회 서두에 이런 글을 적어 검열에 대한 불만을 직설적으로 토로했다.
〈영국 기행문 중 대영제국 장래에 대한 과학적 견해와 애란(아일랜드-편집자 주) 사정 서술은 혹은 삭제 혹은 압수의 비운에 처하야 오다가 지금 와서는 애란 기행문은 일절 본 지상에 발표 말라는 당국자의 최후 제재를 바덧습니다. 붓을 집어던지고 십흔 생각이 잇스나 그래서는 기행문의 자살행위가 됨니다. 다시 집필하려 합니다. 혹 독자가 필자의 답답한 가슴을 촌탁(忖度)하신다면!〉
경찰의 《중외일보》 조사 후 연재 중단
▲전문 삭제된 《중외일보》 1928년 2월 25일 자 세계 일주 기행.
89회(2월 26일)는 영국을 떠나 이정섭이 정들었던 파리 도착이다. 그러나 총독부가 이정섭의 공개적인 저항을 묵과할 리 없었다. 제90회가 실린 2월 27일 오전 10시30분, 경성지방법원 검사국 차석검사 나가노(中野俊助)와 마쓰마에(松前謙助) 검사의 지휘 아래 종로경찰서 형사들이 자동차 두 대에 나누어 타고 《중외일보》로 들이닥쳤다. 경성지방법원 검사국 소속 검사 다섯 명 가운데 두 명이 출동한 것은 사건을 매우 중대하게 취급하고 있음을 의미했다. 수사진은 《중외일보》 편집국과 주간 이상협(편집 겸 발행인), 논설반 기자 이정섭의 가택도 수색하여 원고 등을 압수했다. 이들은 이상협, 이정섭과 편집국장 민태원(閔泰瑗·1894~1934년)을 연행하여 오후 5시까지 조사한 후에 다시 소환하겠다면서 일단 돌려보냈다.
검찰 수사는 아일랜드 독립운동 관련 부분이었다. 아일랜드의 독립 문제를 다루면서 은연중에 조선도 독립해야 한다고 비유했기 때문이었다(조선총독부 경무국, 《朝鮮に於ける出版物槪要》, 1929년, p. 83). 경찰의 강도 높은 수사를 받으면서 세계 일주 기행문은 3월 1일 자 제91회를 마지막으로 중단되었다. 이정섭과 이상협은 불구속 수사를 받다가 3월 4일에 기소되었다. 《중외일보》는 3월 1일 자 1면에 다음과 같은 사고를 게재하고 연재를 중단하였다.
〈근고 본지에 련재 중이든 리정섭씨 집필의 세계 일주 기행은 당국의 기휘(忌諱)에 저촉되야 더 계속키 곤난한 사정에 봉착하얏슴으로 91회로써 중지하게 되엇기 자에 근고함. 중외일보사〉
‘妻權 침해에 의한 위자료’ 1만2000원
▲나혜석이 최린을 상대로 ‘처권(妻權) 침해에 의한 위자료’ 1만2000원을 청구한 소송에 대한 기사(《동아일보》 1934.9.20).
이정섭이 떠난 뒤에도 최린은 약 한 달간 파리에 머물면서 천도교 발행 잡지 《별건곤》(1927년 12월호)에 근황을 알리는 짧은 글을 게재하였다. 파리를 떠난 날은 12월 8일, 오후 1시에 출발하여 벨기에 수도 브뤼셀에 도착한 시각은 5시15분이었다. 이튿날은 국가독립반제국주의국제연맹(세계약소민족회의)에 옵서버 자격으로 참가해 연설했다. 통역은 이정섭과 같은 때에 파리 유학생이었던 김법린(金法麟·1899~1964년. 초대 원자력원장, 동국대 총장 역임)이었다.
최린은 이어 스위스, 스페인, 이태리, 오스트리아, 독일,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폴란드, 러시아와 중국을 거쳐 1928년 4월 1일 서울로 돌아왔다(‘다수인사 환영리 최린씨 재작 귀국’, 《동아일보》 1928년 4월 3일, ‘조선을 떠나서는 조선인은 무행복, 세계는 양대 세력의 대치, 세계 만유한 최린씨 담’, 《조선일보》 1928년 4월 3일). 배와 기차를 이용한 대장정이었다. 이처럼 여러 나라를 고루 둘러본 사람은 그때까지 조선에는 없었을 것이다. 이정섭과 《중외일보》 주간 이상협이 필화(筆禍)로 재판받고 있는 바로 그때였다.
나혜석이 최린을 상대로 ‘처권(妻權) 침해에 의한 위자료’ 1만2000원 청구소송을 제기한 날은 1934년 9월 19일이었다. 최린이 파리와 독일 쾰른에서 나혜석과 벌였던 애정행각이 6년이 지난 뒤에 아름다운 로맨스가 아닌 불륜으로 만천하에 공개된 것이다. 4년 전인 1930년 11월 20일에는 남편 김우영으로부터 법적 이혼을 당한 상태였다.
나혜석의 소송은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 나혜석에게는 사회적 냉대와 지탄이 돌아왔다. 이 사건은 《동아일보》와 《조선중앙일보》가 크게 보도하였으나 총독부가 압수했다(‘여류 화가 나혜석(羅蕙錫)씨, 최린씨 상대 제소, 처권(妻權) 침해에 의한 위자료 1만2000원 청구’, 《동아일보》 1934년 9월 20일, ‘도교 신파 대도정(大道正) 최린씨 걸어 제소, 원고는 여류 화가 나혜석 여사, 정조유린, 위자료 청구’, 《조선중앙일보》 1934년 9월 20일, 《언문신문차압기사집록》, 조선총독부 경무국 도서과, 1937년 5월, pp.18~21). 두 신문이 최린과 나혜석의 불륜을 대서특필한 것은 그의 변절을 응징한다는 의미도 있었다.
중추원 참의 최린
나혜석은 소송과는 별도로 《삼천리》에 ‘이혼 고백장, 청구(靑邱)씨에게’라는 글을 2회 게재(1934년 8~9월호), 결혼 생활과 이혼에 이르게 된 경과를 상세히 서술했다. 소송에 앞서 나혜석은 남편이 자기를 다시 받아주도록 설득했고 중간에 소설가 이광수에게도 중재를 요청해보았으나 허사였다. 이혼 사실의 공개는 신여성이라도 결코 쉽지 않은 결단이었다. 충격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글의 중간 제목 ‘C와 관계’의 부분에 파리에서 최린과 처음 만났으며 독일 쾰른에서도 만났던 사실을 밝히고 있다. 최린을 상대로 제기한 소송은 소(訴) 취하 조건으로 수천원을 받았다는 설이 있다(《정월 나혜석전집》, 국학자료원, 2001년, p.748). 소송 관련 기사는 총독부가 삭제 처분을 내렸기 때문에 일제 강점기 언론사의 한 부분으로 남았다.
최린은 소송당하기 직전인 1934년 4월 중추원 참의로 들어가면서 공개적인 친일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8월 30일 시중회(時中會)라는 단체를 조직하고 창립식을 거행하였다(‘최린씨를 중심한 신단체 時中會, 현재는 정치적 색채가 업스나 금후 동향이 주목처’, 《조선일보》 1934년 9월 2일).
1938년 4월 15일 《경성일보》에서 《매일신보》가 분리하여 독립된 주식회사를 설립하면서 사장에 취임하여 3년간 재임했다(1938년 4월 15일~1941년 5월 31일). 부사장은 《중외일보》에 최린-이정섭의 세계 일주 기행을 연재했던 이상협이었다.
《중외일보》 筆禍
《중외일보》 필화는 조선인 발행 신문이 인도와 아일랜드의 독립운동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상황에서 총독부가 식민지 치하 약소국의 독립운동을 조선의 독립운동과 결부하는 기사를 싣지 못하도록 하였던 검열 기준에 저촉되어 일어난 사례였다. 이상협은 신문지법 위반, 이정섭은 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어 4월 4일에 열린 재판에서 이상협은 금고 4개월(발행인 책임 2개월, 편집인 책임 2개월), 이정섭은 징역 6개월의 판결이 났다. 6월 6일에 열린 2심도 동일한 판결이었다. 그러나 최종심인 고등법원은 이해 11월 1일 원심을 파기하고 이상협 벌금 200원, 이정섭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이정섭, 〈‘정치가 변절’과 ‘회견기’, 최근 10년간 필화, 舌禍史〉, 《삼천리》 1931년 4월, p.18).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는 이를 “관대한 언도”라고 보도했다.
그러나 총독부의 탄압은 끝나지 않았다. 같은 해 12월 6일에 《중외일보》에 정간(停刊)을 명했다. 문제 된 사설은 ‘직업화와 추화(醜化)’로 중국의 배일(排日)운동이 주제였다. 배일운동이 직업화되면 그 순수함을 잃고 사회적 손실도 크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도 중국의 배일이 “애국심의 발로”이며 “경의를 표할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사실 총독부는 이 사설 한 편만이 아니라 이정섭의 아일랜드 기행문을 비롯하여 전반적인 편집 태도에 불만이 누적되어 있다가 이 사설을 문제 삼아 정간을 명한 것이었다. 총독부는 《중외일보》가 《시대일보》를 인수하여 1926년 11월 15일에 창간한 이후 1928년 12월까지 2년 남짓한 짧은 기간에 행정처분 63회, 사법처분 1회의 처벌을 받았다고 말했다. 특히 문예란이나 사회시사 보도를 통해서 학생은 학교 내에서 투쟁을 쌓아 나가라고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그 논조는 총독의 시정을 비난·공격하고 세계 약소민족의 독립운동을 빙자하여 조선이 독립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풍자하고, 매사를 편견과 중상을 바탕으로 집필을 감행함으로써 멋모르는 민중으로 하여금 총독정치를 오해하게 하였다”고 정간 이유를 설명했다.
총독부는 《중외일보》에 발행 정지를 명하는 동시에 편집 겸 발행인 이상협과 편집국장 민태원을 신문지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취조하여 1929년 1월 12일에 기소했다. 경성지방법원은 1월 31일 발행인 이상협에게 벌금 200원, 사설 집필자이자 편집국장인 민태원에게는 징역 3개월에 집행유예 3년 판결을 내렸다. 이상협은 판결에 승복했으나, 민태원은 공소(控訴·항소)했는데, 3월 27일 경성복심(覆審)법원은 민태원에게 원심대로 징역 3개월에 집행유예 3년 판결을 내렸다. 총독부는 조선의 독립운동을 연상시키는 보도를 극력 경계, 기사의 삭제, 정간과 같은 행정처분과 언론인을 구속 기소하는 등의 사법처분까지 병행하며 탄압했다.
《중외일보》는 정간된 지 42일 만인 1929년 1월 18일 정간이 해제되었으나 2월 10일에 이르러서야 속간(續刊)했다. 1929년 9월 1일에는 이상협이 물러나고 안희제가 사장에 취임했는데 경영권을 둘러싼 분쟁과 재정난을 이겨내지 못하고 1930년 10월 자진 휴간하고 말았다. 그 후신으로 1931년 11월 27일 창간한 신문이 《중앙일보》(후일 《조선중앙일보》)였다.
이정섭·최린·나혜석의 그 후
이정섭은 1932년 6월 《조선일보》에 논설반 겸 정경부장으로 입사했으나 오래 근무하지는 않았고, 1938년 5월 1일 경성방송국에 입사하여 강연·강좌 부문을 담당하다가 제2방송부 보도과장(1941년 11월)이 되었다. 1943년 6월 조선어 방송 제2방송부가 폐지된 뒤 기획과장으로 재직 중에 해방을 맞았다.
미군이 서울에 진주한 직후 9월 15일 경성방송국 한국인 직원들은 임원진을 선출했는데 이정섭은 회장에 선출되어 1948년 10월까지 재임했다. 1946년 8월에는 조선무선초급중학교를 고급중학으로 승격시키기 위한 후원회장을 맡았다. 이 학교는 현 광운대학교의 전신이다. 1947년 8월에 결성된 ‘국제정세연구회’의 사무를 방송협회에 두기로 한 것을 보면 이 조직을 이정섭이 실질적으로 운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6·25전쟁 후 이정섭은 7월 17일 돈암동 256의 12 자택에서 납북되었다. 그 이후의 소식은 알 길이 없다. 나이는 55세였다.
최린은 1941년 6월 《매일신보》 사장에서 물러나 다시 중추원 참의가 되었다. 광복 후에는 반민특위에 기소되었다가 6·25 후 종로구 명륜동 3가 67-17 자택에서 납북되었다.
나혜석은 1948년 사망했으며 정확한 날짜와 장소는 알려지지 않았다. 1970년대 이후부터 그의 글과 그림이 소개되었고, 기념사업회가 결성되었다. 2000년에는 수원시 인계동에 ‘나혜석거리’가 조성되었다.⊙
글 :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
월간조선 09월 호
◆한국 정치의 여걸 朴順天을 아시나요?
도로로 잘린 生家터는 밭뙈기로 변해
⊙ 최초의 정당 여성 黨首, 최초 5선 여성 국회의원… 친근한 ‘박 할머니’로 알려져
⊙ 고향인 부산 기장군은 抗日의 고장… 20여 명의 독립운동가 배출
⊙ 2010년 기장군에서 박순천기념관 건립 추진하다 중단… 親日 논란 불거져
⊙ “제자 김금진을 감언이설로 근로정신대에 보냈다”는 의혹… 《친일인명사전》에 등재 안 돼
⊙ “조국의 비운을 통탄하며 그(김금진)를 보내는 모두가 서로 손을 잡고 울었다.”(《중앙70년》 중에서)

▲1971년 4월 26일 제7대 대통령 선거 당시 신민당 대구 유세에서 연설에 앞서 박순천 여사가 김대중 후보의 연설메모를 뒤에서 보고 있다.
박순천(朴順天·1898~1983년)은 부산 기장이 낳은 여걸, 한국 정치사에 뚜렷한 발자국을 남긴 인물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정당 당수(黨首)로 1966년 민중당 대표최고위원을 지냈다. 1950년 5월 2대 국회 때 서울 종로갑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된 뒤 4~7대 의원을 지낸 5선(選) 의원.
아직 이 여성 최다선 기록을 깬 이는 없다. 박근혜·이미경·추미애·김영선이 5선이지만 6선은 없다. 굳이 따지자면 최초 5선 여성 국회의원이다.

《조선일보》는 1983년 1월 11일 자 10면에 ‘격동기(激動期)에 남긴 큰 발자취’라는 제하의 기사로 박순천의 영면을 애도했다.
〈9일 밤 타계한 박순천 여사는 생존 시에 원이름보다 ‘박 할머니’란 이명(異名)으로 더 널리 통했고 본인 역시 이렇게 불리는 것을 반겨했었다.
최초의 본격적인 여성 정치인이자 최초의 여성 당수 등 여사를 가리키는 ‘기록적’ 의미의 수식어는 갖가지였지만 소박한 인품과 구수한 체취는 이런 별스런 칭호를 스스로 사양했었기 때문이었다.(하략)〉
박순천은 ‘여성’이나 ‘정치인’이란 한정된 구분을 훨씬 뛰어넘는 여걸이었다. 평소 존경하던 이승만(李承晩·1875~1965년) 대통령이 발췌개헌(1952년 7월 부산의 피란국회에서 통과된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첫 헌법 개정)을 하자 결별, 장면(張勉·1899~1966년) 등과 함께 민주당을 창당했다.
자유당 시절, 반독재투쟁에 앞장섰으며 여성 본연의 부드러움과 포용력으로 민주당의 신·구파 투쟁에 완충역을 했고 당수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무술(武術) 경관에게 맞아 타계할 때까지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다.
2010년 박순천기념관 추진되다 중단

▲박 할머니’ 박순천은 빼어난 대중연설로 수많은 청중을 사로잡았다. 사진은 1969년 10월 16일 서울 효창구장이다.
내년이면 박순천이 우리 곁을 떠난 지 40주기가 된다. 안타깝게도 그의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다. 지난 2010년 무렵 고향인 부산 기장군에서 생가 복원 및 기념관 건립이 추진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친일(親日) 논란이 빚어지면서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그사이 생가는 허물어지고, 생가터의 절반은 마을도로가 잘라먹었다. 기자가 찾아간 생가 주변은 그저 흔한 밭뙈기에 불과했다. 호박이 넝쿨을 틀고 고추가 익어가며 주민이 한가로이 농약을 치고 있었다.
윙윙거리는 벌과 날파리가 한국 근현대사의 호걸이 나고 자란 ‘창세기’ 공간을 어리둥절하게 만들고 있었다. 기억할 만한 조그마한 표석 하나 없었다. 우물터만 그대로였다. 안타깝게도 고향에서 먼저 박순천은 무명인(無名人)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하늘이 보우하사, 아직도 박순천을 그리워하는 이들이 있었다. 기자는 부산 기장의 대변항을 찾아갔다. 지난 6월의 일이다.
향토사학자 공태도(孔泰道·90) 선생은 부산 기장이 고향이다. 바다를 끼고 있는 기장은 조선 시대부터 기장미역, 기장갈치, 기장멸치로 명성을 떨쳤다. 정철(鄭澈·1536~1593년)의 가사(歌辭)와 더불어 조선시가의 쌍벽을 이루는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1587~1671년)가 기장에서 귀양살이를 하면서 모두 29편의 글을 남겼다. 정확히 1618년 11월 서른두 살 나이에 기장으로 유배돼 6년을 보냈다.
공 선생은 부산 《국제신문》과 《부산일보》의 부산 동래군, 양산군 주재기자로 35년 동안 일했다. 특종 중 하나가 1991년 쓴 ‘윤선도의 문헌발굴’ 기사다. 당시만 해도 고산이 기장으로 유배된 사실이 알려지지 않았다. 고산에 대한 문헌과 사료를 찾아 백방으로 뛰어 시와 제문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기자와 만난 공 선생은 박순천 얘기에 앞서 기장이 낳은 독립운동가를 일일이 설명하기 시작했다.
“1900년대 자그마한 이 읍소재지 기장은 한글학자이며 독립운동가인 김두봉(金枓奉·1889~?) 선생을 비롯해 제헌국회 때 초대 부의장인 김약수(金若水·1892~?), 그리고 독립운동가 김종엽(金鍾燁·1897~1969년)·김도엽(金度燁·1899~1937년)·구수암(具壽巖·1901~1920년) 등과 동래고 ‘장산 횃불 사건’의 주동자인 박영출(朴英出·1907~1938년), 부산 항일학생의거(일명 ‘노다이’ 사건)의 이도윤(李道胤·1923~?) 등 20여 애국지사를 배출한 위대한 고장입니다.
그분들은 자기 목숨을 초개(草芥)와 같이 던졌어요. 기장이 인물의 고장입니다.”
― 애국지사가 많은 배경이 있나요.
“비록 ‘삼정승 육판서’ 같은 이는 없어도 나라가 어려움에 처하면 인물이 나타났어요. 지리적 여건과 바다와 싸운 강인한 정신 때문이 아닐까요? 신라 때 침입한 왜적이 1396년 배 120척을 앞세워 기장읍성과 동래읍성을 점유한 일이 있었어요. 또 임란(壬亂)을 일으켜 조상들의 코와 귀를 베어간 역사도 있지요.
시적(詩的)으로 표현하자면, 단절의 세월 속에서 불의와 맞서 피로 거름하신 선열들의 노호(怒號·성내어 소리 지름)가 산야(山野)를 적시며 대하(大河)처럼 도도히 기장을 흐르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 1910년 당시 기장의 유림들과 유지들이 항일운동의 디딤돌을 놓았다고 하더군요.
“그분들이 기장 보명학교와 여성 교육기관인 명정의숙을 설립했지요.”
1905년 전후로 설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보명학교는 기장 지역 청년들을 대상으로 민족계몽운동 교육의 산실 역할을 했다고 한다. 보명학교 출신으로 독립운동가 김두봉·김약수·김종엽 등이 있다.
여학교인 명정의숙은 1910년 기장에 세워진 민족학당이다. 기장 지역 유지들의 기부금으로 설립되어 1918년 애국지사 박세현(朴世鉉·1897~1917년) 교장의 옥사 후 해체되고 말았다.
기장이 낳은 독립운동가들
이 대목에서 공 선생의 말이다.
“명정의숙 학생 40여 명이 1919년 기장 만세 사건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고 합니다. 또 기장 3·1운동 주동의 한 사람인 구수암 의사(義士)가 옥사한 후 장례를 기장면민장으로 이끌어낸 이들이 명정의숙 출신들이에요. 장례식 때 여학생들이 조사(弔詞)를 읽고 만장기(挽章旗)를 앞세워 일경(日警)에 항의한 일도 있다고 하지요.”
공 선생은 “박순천을 이해하려면 이런 기장의 독립운동사를 이해해야 한다”며 ‘명정의숙가’ 이야기를 보탰다.
“김 기자! ‘명정의숙가’란 게 기장에 있어요. 구구절절 나라를 찾아야 된다는 가사로 엮어져 있어요. 또 학생들이 불렀던 ‘애국의 노래(꿈을 깨세)’는 오매불망 국권회복 성취를 위해 나아가자는 내용입니다.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서 볼 수 없는 사료가치가 높은 노래지요. ‘애국의 노래’는 1936년 안익태(安益泰·1906~1965년)가 지은 ‘애국가’보다 20년이나 앞선 1916년에 이미 기장 사람이 지어 불렀지요.
이런 일들로 볼 때 기장의 항일운동 의식이 얼마나 높게 불탔는지 알 수 있어요.”
꿈을 깨세 꿈을 깨세 얼른 꿈 깨서
어하 우리 학도(學徒)들아 얼른 꿈 깨서
들었나 못 들었나 저 새 소리
처처(處處)에서 지직이고(지저귀고) 햇빛이 비치네
들려오네 들려온다 문명의 종소리
구주(歐洲)에서 미주(美洲)에서 일본에서도
학도들아 학도들아 청년학도들아
우리들도 꿈을 깨서 얼른 배아서(배워서)
오매불망 국권회복 성취하고서
세계열강 대열 속에 전진해보세
-박우돌 작사 〈애국의 노래(꿈을 깨세)〉 전문
소를 타고 日警을 놀리다
공태도 선생은 ‘기장 독립운동 약사(略史)’ 강의를 마치고 박순천 가계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에 따르면 박순천은 1898년 음력 9월 10일 한학자인 박재형(朴在衡)과 김춘열(金春烈)의 슬하에서 태어났다. 주소는 부산 기장군 대변리 88번지. 본관은 밀양이고 본명은 명련(命連). 부모는 딸의 명줄이 길게 이어지기를 바라는 뜻에서 이름을 이렇게 지었다고 한다.
정확히는 외동딸이다. 아들을 낳지 못해 양자를 들였는데 이름이 박창무(朴昌茂·1885~1938년)다. 공 선생의 말이다.
“박순천은 어릴 때 남장을 하고 ‘대변서당’에 다녔고 사내아이들과 곧잘 어울려 낚시질을 할 만큼 활달했다고 합니다. 한 번은 소를 타고 일본 주재소 앞을 다니면서 일경들을 놀려주었다고 해요. 명정의숙에 다니던 후배를 찾아가 ‘왜놈과 싸우려면 기장여성청년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조언한 일도 있다고 합니다.”
공 선생은 “아버지 박재형이 기장 읍내에 나갔다가 상투를 잘리고 돌아왔을 때 어머니 김춘열이 장롱 속 태극기를 꺼내 담장 밑에 묻으면서 통곡하는 모습을 보고서 딸 박순천은 나라 잃은 설움을 가슴 깊이 간직하게 되었다”고 전했다.
동래여고의 전신인 부산진 일신여학교에 입학하여 보통과와 고등과를 마쳤다. 학창 시절 학교 벽에 걸린 일본 천황의 초상화를 긁어서 우는 모양을 만들어 소동을 일으켰고, 일본어 시간에 여선생을 울게 만드는 등 민족정신이 충만한 소녀였다고 한다.
이후 마산 최초의 여학교였던 호주 선교재단의 의신(義信)여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성경 채플과 생리학 겸 동물학을 가르친 일도 있다.
“전라도 순천에 시집갔다가 소박맞고 잠시 우리 집에 와 있다”

▲부산 기장군 대변리 88번지 박순천의 생가 모습이다. 지금은 허물어지고 없다(사진 왼쪽). 박순천은 고향인 부산 기장에서 3·1운동을 하다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 사진=독립기념관 제공
(사)기장향토문화연구회가 펴낸 《기장의 독립운동사》(2013년)에는 1919년 3·1운동 당시의 박순천 행적이 잘 묘사돼 있다. 소개하면 이렇다.
〈1919년 3월 5일 박순천은 마산장에 나온 사람들에게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나눠주고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며 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 만세운동으로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한 달 옥살이를 한 후 보석으로 풀려났다.
이후 경찰의 가택 수색으로 태극기를 비롯한 독립선언서와 항거계획, 일기장 등이 발견되어 도피 생활을 계속하게 되었다.(하략)〉(339쪽)
겨우 20대 초반의 박순천이 마산장터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한 일을 떠올려보면 여걸이 아닐 수 없다.
― 본명은 ‘명련’이라던데 ‘순천’은 어떻게 해서 지어졌나요.
“그러니까 일경을 피해 경남 함안에 은신 중일 때 ‘만세꾼이 도망 왔다’는 소문이 나돌았다고 해요. 당시 제자의 오빠인 박용구라는 분의 집에 숨어 있었는데 그 집 부인이 이웃 사람들에게 ‘친정 조카인데 전라도 순천에 시집갔다가 소박맞고 잠시 우리 집에 와 있다’고 꾸며댔대요. 이때부터 ‘순천댁’으로 불렸다더군요.”
이후 박순천은 기생으로 변장해 일본으로 건너가 1920년 도쿄 요시오카(吉岡) 여자의학전문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기장 집에서 하숙비와 학비를 ‘박명련’이란 이름으로 송금한 것이 드러나 형무소에 수감되고 말았다.
당시 2·8독립선언을 주도했던 동경유학생 조직인 ‘학우회’에서 면회를 왔고, 모임 총무였던 게이오대 변희용(卞熙鎔·1894~1966년·훗날 성균관대 총장 역임)을 만났다. 이후 마산형무소로 이감되어 1년 4개월간 복역한 후 1921년 출옥해 고향 기장으로 돌아왔다.
“계약같이 반지니 무엇이니 정말 싫다”

▲《동아일보》 1936년 1월 1일 자에 실린 박순천의 사진.
이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1926년 2월 황신덕(黃信德·1898~1984년), 이현경(李賢卿·1902~?) 등과 함께 한국인 최초로 일본여자대학 사회사업부를 졸업했다.
박순천은 앞서 1924년 12월 24일 서울 무교동 요릿집 태화관에서 변희용과 결혼했다고 한다. 대학 3학년 무렵이다.
최정순(전 서울시의원)이 쓴 국민대 박사 학위 논문 〈박순천 정치리더십 연구〉에 따르면 박순천은 도쿄 유학 중에 맏아들 광호(卞光晧)를 낳고 학업을 마친 뒤 29세인 1926년, 남편 변희용과 함께 귀국하였다고 한다. 시댁이 있는 경북 고령에서 박순천은 “하도 시집살이가 고되어서 한 번은 친정에 편지를 써 보내 어머니가 편찮다는 전보를 보내달라고 부탁”하여 “겨우 친정인 기장으로 빠져나가 한동안 숨을 돌린” 일이 있을 정도로 매운 시집살이를 한 것으로 전해진다.
박순천은 ‘도쿄 유학생 티를 없애려고 시계니 구두니 모두 없애버리고 고무신으로 갈아 신고 탁아소와 야학을 열었다’고 한다. 공 선생의 말이다.
“피폐한 고령 농촌 경제의 구제를 목적으로 고령 부인소비조합을 발기(1931년 10월)하고 회장으로 활동한 일도 있고, 고령군 일대 두 곳에 야학을 개설(33년 6월)하고 자수 강습회(34년 12월)를 열기도 했죠.”
《동아일보》 1935년 1월 3일 자 11면에 박순천의 기고문 ‘신가정을 만드는 용비에 충당할 것’이 실렸는데, “결혼 피로연은 아무 의미 없는 폐풍이므로, 신가정 건설 비용이 필요한 신혼부부의 생활 보장을 위하여 당연히 폐지하자”는 주장을 폈다.
《동아일보》 1936년 1월 1일 자 33면, 1월 4일 자 11면에 실린 ‘당혼(當婚)한 딸을 위한 어머니 좌담회’에 그의 이름이 다시 등장한다. “(결혼식은) 친구한테 통지하고 간단하게 축배나 서로 올리면 그만” “계약같이 반지[指環]니 무엇이니 저는 정말 싫다”며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결혼개혁을 외쳤다.
당시 좌담회에서 “왜 남자들은 여자에게만 대하야 순결을 부르짖습니까. 바로 여자 자신이 순결을 부르짖는다면 그건 별문제이지만”이라고도 했다.
親日 논란의 실체는…

▲1992년 6월 5일 자 《뉴스메이커》에 실린 기사 〈故 박순천·황신덕 말못할 사연〉.
박순천은 일제 경찰의 탄압 회피와 장남의 취학을 위해서 서울행을 택한다. 뚜렷한 수입원이 없던 그는 조선공예사와 금강전구공장에서 여공으로 일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40년 10월 황신덕이 여학교인 경성가정여숙(京城家政女塾)을 설립하자 비공식 ‘부교장’으로 참여하게 된다. 그 이유에 대해 훗날 박순천은 《한국일보》에 연재된 ‘나의 이력서’(1974년 12월 4일 자)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전력 때문에 교사 인가가 나지 않아 부교장 격으로 서무를 맡게 되었다.〉
박순천은 태평양전쟁 당시 일제의 전쟁 지원을 독려했다는 의혹이 있다. 1940년 친일단체인 황도학회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1941년 12월 조선임전보국단 주최의 강연에 ‘국방가정(國防家庭)’, 1942년 1월 ‘전황뉴스를 듣고’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다만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의 강연이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또한 친일 논란에 더하여, 경성가정여숙 학생이었다가 여자 근로정신대에 자원했던 김금진(金今珍)의 증언을 근거로 ‘교장이던 황신덕과 함께 제자를 근로정신대로 보낸 스승’으로도 알려졌다.
제자 김금진은 박순천이 세상을 떠난 뒤인 1992년 6월 5일 자 《뉴스메이커》(《주간경향》 전신)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제가 18세 때 ㅈ여고 2학년 때였어요. 43년 3월경이었는데 황신덕 교장선생이 전교생을 모아놓은 조회에서 ‘우리 학교가 문 닫을 위기에 처해 있다. 여러분 중 한 학생이라도 정신대에 자원하면 학교가 살 수 있을 것이다’라고 간곡히 자원을 호소했어요. 몇 날 며칠을 조회시간마다 간곡히 호소하였는데 정작 지원 학생은 나오지 않았어요. 박순천 부교장 선생도 비슷한 내용의 말을 했어요.”〉(20쪽)
기사 전체(18~20쪽)에서 박순천이 근로정신대에 제자를 보내는 데 관여했다는 의혹은 이 인터뷰에 적힌 ‘박순천 부교장 선생도 비슷한 내용의 말을 했어요’라는 대목뿐이다.
‘박순천 부교장 선생도 비슷한 내용의 말을 했어요’

▲《중앙70년》에 실린 경성가정여숙 시절 황신덕 교장(뒷줄 왼쪽)과 박순천 부교장(뒷줄 오른쪽).
이에 대해 공 선생은 자신의 생각을 털어놨다.
“김금진이 자원한 정신대는 통상적으로 알려진 일본군 위안부와는 다른 근로여자정신대로 알고 있어요. 학교 폐교를 막기 위해 자원한 것이니 박순천에게 전적으로 책임을 묻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때마침 3선(3~5대) 부산시의원을 지낸 김유환(金有煥·72)씨가 기자를 만나러 찾아왔다. 김 전 의원은 (사)기장향토문화연구회 회장을 역임하며 박순천을 속속들이 연구했다고 한다. 친일 논란으로 좌절됐지만 10여 년 전 박순천기념관 건립추진위원장을 맡은 적도 있다. 그의 말이다.
“박순천 할머니는 장남이 학병으로 끌려가는 것을 보면서도 창씨개명을 끝까지 안 하신 분입니다. 학교(경성가정여숙)에 불이 나자 실화(失火) 혐의를 조사하던 일경(日警)이 교장 이하 교직원 모두가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것을 보고 ‘창씨개명도 안 하고 무슨 학교를 하느냐. 배를 갈라 자결하라’고 소리를 질렀지만, 끝까지 창씨개명하지 않았죠.
황신덕 교장이 조회 시간에 ‘지금 한둘이라도 (근로정신대에 지원을) 안 하면 학교가 폐교된다’는 사실을 학생들에게 알렸대요. 어떻게 보면 자원을 권유하는 발언을 했지….
이때 박 할머니도 ‘비슷한 내용의 말을 했다’는 겁니다. 《뉴스메이커》에 실린 김 할머니의 인터뷰는 박순천 사후 9년이 지난 뒤에 나온 겁니다. 이걸 가지고 친일파로 몰아서….”
김 전 의원은 속상하다며 말을 이어갔다.
“그게 다입니다. 또 (김금진은) 종군위안부로 간 게 아니고 총알 만드는 군수공장에 갔어요. 사람들은 마치 종군위안부에 가도록 종용했다고 오해하고 있어요. 사실이 아닙니다.
박 할머니의… 역사는 우리 기장의 역사만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역사입니다. 평생 애국하신 분이고 양성평등을 가장 먼저 주장하신 분이죠. 2대 국회의원 시절, 간통 쌍벌죄를 주장, 이를 법제화(형법 1953년 9월 11일 제정)시키셨어요.”
양성평등 구현을 실현한 최초의 여성의원
여성노동자에게 생리일 유급휴가와 산전·산후 60일간 유급휴가를 허용하는 내용의 모성보호 입법을 발의한 이도 박순천이다.(근로기준법 1953년 5월 10일 제정)
― 역사적인 법을 제정했군요.
“사람들은 잊어도 역사는 기록하고 있죠. 남성 우월주의가 팽배하던 시절, 동료 의원이 여자에게만 간통제를 적용하는 법안을 발의하자 강력히 반대해 헌법 제11조에 규정된 남녀평등권에 의한 쌍벌죄로 간통죄를 입법 발의했죠. 양성평등 구현을 실현한 최초의 여성 국회의원으로 역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한편, 박순천은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교육·학술과 친일단체 부문에 선정된 일이 있다. 그러나 최종 편찬된 《친일인명사전》에는 그의 이름이 없다. 김 전 의원의 말이다.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 조사보고서〉의 친일반민족행위가 결정된 1006명에도 박순천의 이름은 없었습니다.
제가 국회의원실을 통해 ‘국가기록원이 보유 중인 박 할머니의 친일반민족행위자 포함 명단과 반민족행위 내역 일체의 정보 공개’를 요구한 적이 있어요. 어느 쪽에도 박 할머니 이름이 없음을 확인할 수 있었죠.”
― 《친일인명사전》에 등재가 안 됐군요.
“친일 인사가 아니란 것이죠.”
곁에 있던 공태도 선생이 말을 받았다.
“한 번은 국가보훈처에서 박순천의 친지들에게 서훈 신청을 하라고 통보를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친일 논란을 의식해서인지 ‘필요 없다’고 거절했다고 해요. 그분들도 큰 상처를 받았나 봅니다.”
《뉴스메이커》 기사와 《중앙70년》의 기록 검증
기자는 1992년 6월 5일 자 《뉴스메이커》 기사 원문을 국립중앙도서관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김금진 할머니는 18세 때인 경성가정여숙 2학년 때 근로여자정신대에 참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내 한 몸 희생해 학교를 구하자”는 결심이 솟아 교장실로 찾아갔다고 한다. 황신덕 교장이 “후회를 안 하겠느냐”고 다짐을 받은 대목도 기사에 나온다.
제자 김금진이 간 곳은 일본 도야마현(富山縣)의 총알 만드는 군수공장이었다. 김금진은 “지금 생각해도 거기서 다시 종군위안부로 끌려가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다. 2년여 동안 한 차례도 생리를 못 했을 정도로 몸이 형편없이 망가졌다. (귀국해) 그 길로 1년 반을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고 고백했다.
1940년 10월에 개교한 경성가정여숙은 광복 직전인 1945년 1월 중앙여자상과학교(4년제)로, 광복 직후인 그해 12월 중앙고등여학교로 교명이 바뀐다. 지금의 중앙여고(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로)다. 중앙여고가 개교 30주년을 맞아 1970년에 발행한 《중앙70년》이 국립중앙도서관에 보관 중이었다.
놀랍게도 《중앙70년》에 김금진이 근로여자정신대에 자원한 이야기가 비중 있게 실려 있었다. 중앙여고가 중요한 장(章)으로 ‘그 사건’을 다룰 만큼 당시에도 큰 화제였음을 알 수 있다. 다음은 《중앙70년》에 실린 글의 일부다.
〈이때 학교장실에 김금진이란 학생이 교장실 문을 노크하며 찾아왔다.
“학교 문을 닫게 하는 일을 앉아서 볼 수도 없거니와 마침 저는 고향이 함경도라 쉽게 고향에 돌아갈 수도 없는 일이요, 부모 형제도 함께 없고 혼자이니 제가 정신대에 자원을 하겠습니다” 하며 자진하였다.
조국의 비운을 통탄하며 그를 보내는 모두가 서로 손을 잡고 울었다.
김금진의 희생적인 정신에 의해서 학교는 폐교를 면하게 된 것이다.
그는 일본의 어느 군수공장으로 파견되었다가 해방과 더불어 귀국했다. 직원과 학생들은 얼싸안고 울며 웃고, 웃으며 울면서 그를 환영했다. 돌아온 금진은 왼몸에 옴쟁이처럼 두드러기가 뒤덮였고 늑막염으로 열기가 내리지 아니하여 입원 치료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해방이 되어 귀국하게 된 기쁨으로 병은 속히 치료되어 다음 해 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체육과를 졸업하여 수도여중(首都女中)에 근무하다가 결혼하여 유자 생남하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
“학생들은 왜 그리도 정이 두터웠던지…”(박순천)

▲경성가정여숙이 1944년 3월 서울 견지동 교사로 이전할 당시 교직원들이다. 앞줄 왼쪽 끝이 박순천 부교장. 왼쪽에서 세 번째가 황신덕 교장.
김금진은 1945년 3월 15일 제3회 졸업생 59명 중 맨 마지막에 이름을 올렸다.
그는 《뉴스메이커》 인터뷰에서 “해방되고 귀국해 학교를 찾아가니 황 교장과 선생님들이 ‘살아서 돌아왔다’며 깜짝들 놀랐다”고 밝힌 바 있다. 《중앙70년》에도 “해방과 더불어 귀국했다”고 적혀 있다. 추정컨대 입학연도를 따져 김금진을 3회 졸업생에 포함시킨 것으로 보인다.
박순천이 ‘폐교 위협’으로 학생들을 협박했거나, 감언이설로 자원케 했다는 주장이 사실인지 여부는 하늘만이 아실지 모른다. 그러나 ‘역사적 진실’로 단정하기엔 무리가 있어 보인다.
흥미롭게도 《중앙70년》에 ‘박순천 부교장’의 회고담이 같이 실려 있다.
〈선생은 학생들을 보고 좋아서 울고, 그저 매일 울음으로 세월을 보냈습니다. 또 운동장이 좁아서 학생들이 공을 치다가는 공이 전찻길에 튀어나가 공이 터지면 또 학생들은 울며 불며 애석해했습니다.
그래서 황 교장과 다른 학교에 가면 운동장이 부러워서 발길을 떼지 못했습니다. 학생들은 왜 그리도 정이 두터웠던지 방학 때가 되면 3일 전부터 울고 헤어지고, 개학만 되면 반가워서 붙들고는 울고 했습니다. -전 부교장 박순천-〉
중앙여고가 개교 80주년을 맞아 펴낸 《중앙80년사》(2020년)에는 1951년 졸업생 이옥재 할머니의 박순천에 대한 회고담이 실려 있다. 이 할머니는 “(학교에서) 군복 작업을 할 때는 감시하는 일본 여자가 있었다. 박순천 선생님께서 그 여자를 피해 귓속말로 민비 시해 사건을 알려주었다. 애국심을 잃어버리면 안 된다고 수양회 때마다 강조하셨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정신대 권유가 들어왔다. 그러다 우리 학교에 들어와 애국애족 교육을 받았으니 마음속에 깊이 박힐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누구보다 학교를 사랑하고 제자를 아꼈던 박순천이 학생을 ‘감언이설로 정신대에 보냈’을까. 《중앙70년》에는 ‘조국의 비운을 통탄하며 그(김금진)를 보내는 모두가 서로 손을 잡고 울었다’는 표현이 나온다. 어느 쪽이 더 진실에 가까울까?
물론 김금진이 스승인 황신덕·박순천에게 평생 섭섭한 마음을 가졌을 수밖에 없다는 점도 존중받아야 한다. 김금진은 1983년 박순천이 세상을 떠날 당시 같은 동네(화곡동)에 살았는데도 찾지 않았다고 한다.
기자는 박순천이 타계할 당시 살던 ‘서울 화곡5동 111-61번지’를 찾아가 보았다. 화곡5동은 현재 우장산동으로 동명(洞名)이 바뀌었다. 주변이 모두 다가구 빌라로 변해 옛집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또 누구도 박순천을 기억하는 이가 없었다.
박순천기념관과 박태준기념관 역대 기장군의회 회의록을 살펴보니, 박순천 생가 복원과 기념관 건립을 두고 의원들 간 찬반 논란이 있었다. 일부 반대 의원은 박순천의 ‘친일 행적’을 거론했다. 2010년 12월 7일 기장군의회 예결특위. K의원은 박순천을 “사랑하는 제자를 정신대에 보내서 한 여성의 인권을 완전히 유린한 인물”로 묘사하며 기념관 건립에 반대했다. 결국 예결위원 6명이 표결에 부쳐 박순천기념관 건립 여부를 물었다. 그 결과 4명이 찬성, 추진이 이뤄졌다. 그러나 기장군 측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아 이후 동력을 잃어버렸다. 친일 논란이 계속 불거졌기 때문이리라. 반면, 박순천기념관과 비슷한 시기에 추진됐던 ‘철의 사나이’ 박태준(朴泰俊·1927~2011년) 포스코 명예회장의 기념관은 82억원을 들여 지난 2015년부터 공사를 시작해 작년 12월 공식 개관했다. |
박순천 생가를 찾아가다

▲김유환 전 市의원이 박순천의 생가터(기장군 대변리 88번지)를 설명하고 있다. 생가터가 밭뙈기로 변해 있다.
김유환 전 의원, 공태도 선생과 더불어 기자는 박순천의 생가를 함께 찾아가 보기로 했다.
안타깝게도 ‘기장군 대변리 88번지’에 생가는 없었다. 도시계획에 따라 도로가 생기면서 생가를 헐어버린 것이다.
김 전 의원과 공 선생이 사진으로 남은 생가 모습을 보여주었다. 일자(一)형 평범한 한옥이었다.
일자형 한옥은 바람이 잘 통할 수 있도록 설계된 구조다. 방과 마루, 부엌이 일자형으로 이뤄졌는데 마루는 방과 방 사이 통풍을 위해 마련됐으리라. 집은 대변항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였다. 어린 시절 늘 바다와 함께 지냈음에 틀림이 없다. 망망대해 바다를 보며 어떤 꿈을 꿨을까. 때로 거친 파도를 보며 한반도의 슬픈 운명을 비관하지 않았을까.
생가가 없는 생가터를 둘러보았다. 그저 흔한 밭뙈기였다. 줄지어 고추 모종이 서 있고 호박넝쿨이랑 옥수숫대, 감나무가 보였다. 고추가 넘어지지 않게 함부로 박은 철제 막대기가 야속하게 느껴졌다.
우물이 보였다. 붉은색 덮개가 있었다. 지금도 두레박이 드리워져 있을까. 우물터 곁에 시멘트 담장이 있었다. 생가의 담장이었을까? 그나마 허물어지고 일부만 남아 있었다.
소녀 박순천, 아니 박명련은 그 담벼락에 앉아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봤을까. 그리고 그 담 뒤로 빽빽이 대나무가 들어서 있었다. 대숲 사이에서 부는 바람은 그에게 어떤 바람이었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데 김 전 의원이 “내가 박순천기념관 건립을 밀어붙이려고 했는데…”라며 답답한 마음을 털어놨다.
“2010년도쯤이었을까. 기념관 건립을 추진했는데 생가 인근 땅이 도로에 들어가 버리니까 무슨 기념관을 짓겠어요.”
― 안타깝네요. (생가터 옆 도로가) 국도인가요, 지방도인가요.
“아뇨, 그저 마을 안길입니다. 이런 길은 군수가 도시계획 결정을 해서 변경시킬 수 있었어요. (군수가) 박 할머니 생가를 역사적 자리라고 판단해서 보존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죠.
이후 군수가 바뀌면서 할머니 생가 주변 땅 일부를 매입은 했습니다.”
박순천과 기장 남산봉수대

▲월남 파병 군인을 만난 박순천 여사.
― 다행이네요. 어느 정도 땅인가요.
“약 170평 정도입니다. 그걸로는 턱없이 부족하고, 보상행정 차원에서 인센티브를 줘서라도 (주변 땅을) 적극 매입해야 했는데 그렇게 못 했어요. 게다가….”
― 게다가….
“박 할머니의 친일 문제가 이후 불거지면서 개 몽댕이(몽둥이) 휘두르듯 사람들이 찾아오고, 거품 물고 할머니를 막 몰아붙이는데, 제가 그것과 싸우면 오히려 할머니를 더 매도하고, 낙인을 찍는 결과를 초래하겠다 싶어서 기념관 건립을 보류할 수밖에 없었어요.”
― 기념관 건립의 꿈을 지금도 갖고 있나요.
“물론이지요. 우리 대(代)에서 지켜내지 못하면 영원히 기대하기 어렵지 않겠어요? 기장의 정체성, 그러니까 일제에 항거하던 그 정신을 못 지키는 셈이 되니까요.
(생가터 주변 뒷산을 손으로 가리키며) 저 뒤에 뭐가 있는 줄 아세요? 봉수대가 있습니다.”
― 봉수대 이름이 뭔가요.
“기장 남산봉수대입니다. 기장읍 죽성리에 있는 이 봉수대는 해안선을 따라 북상해 경북 안동을 거쳐 서울까지 이어집니다.
지금으로부터 1000년 전인 고려 성종 4년(985년)에 설치해 고종 31년(1894년) 갑오개혁 때 폐지된 역사적 공간이죠. 밤에는 불을 피웠고 낮에는 짐승의 똥 등으로 연기를 피워 왜적의 침입이나 그때그때의 위급한 상황을 임금께 보고했다고 합니다.
저 봉수대처럼 향토를 지키는 정신이 바로 기장의 정신이고, 박 할머니의 정신이 아니겠어요?”
박순천의 조카 박성조 교수의 회고

▲박순천의 조카 베를린자유대 박성조 종신교수.
기자는 박순천의 직계 후손을 찾으려 했으나 흔적을 찾을 길이 없었다. 다행히 그의 조카 베를린자유대 박성조(朴聖祚·86) 교수와 연락이 닿았다. 현재 그는 독일에 거주하고 있다. 수십 차례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집안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박순천의 아버지 박재형은 한학자였음에도 호주 선교사 매킨지(J.N.Mackenzie)를 통해 기독교로 개종하셨어요. 향리에 월전교회(지금의 죽성교회)를 설립하셨고 뒷날 대변교회 신축 등에 많은 헌금을 내셨어요. 또 대한예수교 장로회 사기(史記)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동래군(현재 기장군으로 분리되었다-편집자 주) 월전(月田)교회가 성립하다. 선시(先時)에 최상림, 박재형이 종신(從信)하고 인가귀도(引家歸道)하야 기장읍교회에 내왕 예배하더니 지시(至是)하야 예배당을 신축하고 교회를 성립하니라.’
이 기록에 언급된 최상림(崔尙林·?~1945년) 목사는 경남교회의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전개해 1945년 6월 옥중에서 타계한 독립지사입니다.”
박성조 교수와 공태도 선생에 따르면, 박재형은 구한말 참봉 벼슬을 하였고 당시 드문 천석꾼이었다. 소 한 마리와 당나귀 4마리를 사육하는 등 부유층에 속했다. 한학에 능통했으며 영어를 독학으로 배워 성경을 한글로 번역했다고 한다.
사재를 털어 비록 명칭은 ‘서당(대변서당)’이었으나 근대적인 의미의 학교를 세웠고 박순천도 일제가 문을 연 ‘국민학교’를 외면하고 그 ‘서당’에 다녔다. 역사, 지리, 수학, 주판, 음악, 체육, 예술 등 다양한 과목을 가르쳤으며 문맹자를 위한 성인 야간학교도 운영했다고 전한다.
계속된 박 교수의 말이다.
“박재형은 항일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음에도 항상 기장 지방에 있었던 항일운동 모임을 뒤에서 음으로 양으로 지원했다고 알고 있어요.
또한 박재형의 아내 김춘열 역시 여걸이었다고 해요. 학교를 나오지는 않았으나 성경을 빨리 읽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사랑스럽지만 엄격하고 강인한 여성이었다고 해요. 처음에는 불교를 믿었으나 기독교로 개종했고 열렬한 반일사상을 지녔다고 하지요.
제 아버지(박창무)에 따르면 박순천은 어릴 때부터 아주 총명했다고 합니다. 박재형이 세운 학교에서 공부하다 14~15세 때 집을 떠나 부산에서 학교를 다녔다고 해요. 기장 3·1운동에 가담해 수배 중인 박순천이 일본으로 밀항할 때 오빠인 박창무가 자금을 마련해 전달한 것으로 알고 있어요.”
“‘기회주의적인 유연성’에 철저히 반대입장"

▲1974년 8월 19일 육영수 여사 국민장 영결식에서 여성계를 대표해 박순천이 조사를 읽고 있다. 사진=조선일보DB
― 조심스런 질문입니다만, 박순천의 친일 논란을 어떻게 보시나요.
“조카가 고모를 객관적으로 평가하긴 어렵지만, 과거엔 광복 이전의 행적을 두고 ‘박순천은 유관순’이라고 평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훗날 일본 제국주의에 동조했고, 제자를 정신대로 보냈다고 하여 친일파로 혹평했지만 아무런 증거가 없습니다. 그렇게 주장하는 어느 대학교수와 통화한 일이 있습니다. 아무 증거도 없고, 전해 들은 이야기라고 주장하였어요.”
― 정치인으로서의 박순천은 어떻게 평가하나요.
“제가 대학(서울대 정치학과)에 다닐 때를 떠올리면 ‘두 젊은 정치인’(YS와 DJ)이 매주 박순천을 방문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당시엔 지역 간 적대감정이 전혀 없었어요. 박순천은 호남이나 영남에서 아무런 편견 없이 환영받던 정치인이었어요.”
또 박성조 교수는 “박순천을 부정부패를 모르는 보수 지도자”라고 평했다.
“박순천은 뇌물이나 부정행위를 절대 용납하지 않았어요. 제가 동백림 사건으로 중앙정보부에 의해 한국으로 납치됐을 때의 일입니다. 제 담당 검사가 ‘박순천에게 말해 좋은 곳으로 영전시켜달라’고 부탁해달라기에 전했더니 고모가 크게 노하시며 저를 꾸중한 적도 있었어요.
늘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는데 세비와 남편 월급으로 정치하기가 빠듯했나 봅니다. 슬하에 3남 4녀를 키우는 것도 힘이 들었을 거예요. 금전적 유혹이 있었으나 늘 거부했다고 해요. 다만 친정 조카인 동양실업사장(朴聖弼·작고)이 지원하다 경찰과 검찰에 여러 번 불려가 혹독한 고문을 받은 적이 있었어요. 박성필이 바로 제 친형입니다. 결국 박성필은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고 말았어요.”
“지금까지 한국에 그런 여성 지도자는 없습니다”

▲박순천이 살던 서울 화곡5동 111-61번지에는 현재 다가구 빌라가 들어섰다. 흔적을 찾을 길이 없다.
― 이념적인 측면에서 정치 지도자 박순천을 어떻게 평가합니까.
“박순천은 이념이나 특별한 신념을 따르는 맹종자는 아니었어요. 그러나 애국주의와 민주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결의와 합의는 철두철미하게 지키는 성격이었죠. 일제 때 항일운동을 하다 수감된 전력이 애국주의를 입증하고 있어요. 광복 이후 신탁통치 논란이 일자 치열하게 반대운동을 전개했지요.
6·25 당시 인민군이 쳐들어왔을 때 국회는 ‘서울시민을 버리고 피란가지 않겠다’고 결의했음에도 다수의 국회의원이 피란을 떠났으나 박순천은 떠나지 않고 서울에서 숨어 지냈어요. 이승만·박정희 정권 때도 ‘기회주의적인 유연성’에는 철저히 반대하는 입장이었죠.”
박 교수는 덧붙여 이렇게 말했다.
“박순천은 기회주의적으로 정치 활동을 하지 않았고 시종일관 정의감과 확고한 신념으로 남성 정치세계에 큰 기여를 하였지요. 야당의 당수로 그의 리더십은 남성을 압도했습니다.
타고난 웅변술에 수많은 관중이 환호한 일도 있어요. 그가 한강에서 연설을 하면 100만 명이 운집했다고 하지요. 지금까지 한국에 그런 여성 지도자는 없습니다.”⊙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09.16 한반도 남북 분단 결정지은 건 1948년 9월 스탈린의 지령이었다?
아무도 주목 못했던 런던외상회의와 한반도의 운명

▲소련의 독재자 이오시프 스탈린. /조선일보 DB
1980년대 이후 많은 좌파 인사들은 대체로 1945년 8월 15일 대한민국의 수립을 ‘한반도 분단을 고착화한 결정적인 사건’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분단을 처음 결정적으로 언급한 것이 1946년 6월 3일 이승만의 ‘정읍 발언’이라고 봅니다. 이승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기 휴회된 공위(미소공동위원회)가 재개될 기세도 보이지 않으며 통일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케 되지 않으니, 남한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 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해야 할 것입니다.”
과연 이것이 분단을 낳은 발언이고, 분단의 원흉은 이승만과 대한민국이었을까?
솔직히 말해서 정말 그런 줄 알았습니다. 1990년대 소련이 붕괴되고 막대한 분량의 비밀문서가 공개되기 전까지는 말이죠.
최근 출간된 한 저작에선 그 동안 우리가 듣도보도 못했던 1945년 종전 직후의 한 국제회의에 대한 언급이 나왔습니다. 그것은 ‘런던외상(外相·외무장관)회의’ 입니다. 허동현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의 ‘역사관과 역사학자’(북코리아) 입니다.
이 책은 역사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첫 장을 펼쳐드는 순간 푹 빠져들게 되는 ‘한국사 최고 논쟁의 끝판왕’ 같은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황사영 백서(반역자인가 민권운동가인가), 동학농민봉기(민중민주주의 운동인가 민란인가), 대한제국(국민국가인가 전제국가인가)처럼 사람마다 다르게 해석되고 논쟁이 끝없이 이어지는 사안들을 자세히 해설하고 자신의 의견까지 제시한 책이니까요. 하지만 아이고 참, 이런 제목과 표지라면 도대체 누가 사서 읽을까 좀 답답하기도 합니다.

이 책에선 이런 말도 했습니다.
인간은 한 시대의 지배적 정신에서 자유롭기 어렵다. …민족과 민중 같은 거대담론이 횡행할 때 개인은 없다. 이데올로기가 모든 것을 지배하던 시대에 자신들이 상상하는 세상에 정당성을 주기 위해 만들어진 개인 동원을 위한 거대담론의 수사(修辭)인 민족과 민중은 일란성 쌍둥이다.
1990년대 초에 이런 말을 좀 들었어야 했는데, 원.
아무튼 이 책의 4장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에 보이는 현대사 서술의 문제점은 무엇인가?’에서는 1980년대 좌파 수정주의(revisionism)의 영향을 받은 학자들이 소련을 ‘세계 민족 해방을 선도하는 나라’, 미국을 ‘제국주의 야욕을 지니고 세계로 팽창하며 약소 민족을 압박하는 나라’로 보고 교과서 집필을 맡아 온 것이 큰 문제라고 지적했습니다. 이런 큰 그림 속에선 대한민국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나라가 되며 ‘자유민주주의’와 ‘남침’은 교과서에서 삭제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그러면 ‘분단 고착화의 책임은 남한을 반공 보루로 만들기 위해 분단을 주도한 미국에 있다’는 수정주의자들의 주장은 사실일까요? 1945년 8월의 상황을 들여다보죠. 두 번째 원자폭탄이 나가사키에 떨어지기 하루 전인 8월 8일, 소련은 대일 선전포고와 함께 두만강을 건너 한반도로 진격했습니다. 소련군이 어렵지 않게 한반도 전역을 장악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바로 그 시각, 미군의 위치는 너무나 멀었습니다. 여전히 한반도에서 남쪽으로 1000㎞ 떨어진 오키나와에 있었던 것입니다. 미국은 8월 14일 소련에 일본군 무장해제를 위한 38선 분할 점령을 제의했습니다. 두 달 전에 소련 점령 하 폴란드에서 공산정권이 수립된 것을 보고 ‘일단 소련이 점령한 지역에서는 그들을 제거하기 어렵다’는 판단하에 내린 궁여지책이었습니다. 소련이 거절하면 그만이었기 때문이죠.

▲소야 해협
그런데 스탈린은 이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왜일까요? 홋카이도 북부에 대한 통치권을 얻어, 소련 극동함대가 태평양으로 나아갈 수 있는 사할린과 홋카이도 사이 소야 해협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이런 속셈이었던 겁니다.
“남한을 내주고 일본을 분할해 북일본을 갖는다!”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고, 9월 12일부터 10월 2일까지(참 오래도 모였네…) 영국 런던에서 미국·영국·소련의 외무장관들이 참석한 런던외상회의가 열렸습니다. 그 동안 한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 회의를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왜? 한국 문제가 언급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회담의 결렬은 미국과 소련의 관계를 급격히 악화시켰고, 한국의 미래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그것은 다름아닌 ‘남북 분단의 확정’이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전승국 중 한 나라였던 소련은 런던외상회의에서 두 가지를 요구했습니다. ①패전국 일본의 통치에 대한 참여. ②아프리카 대륙 북단에 있는 트리폴리타니아(Triolitania)를 우리에게 할양할 것. 트리폴리타니아는 지금의 리비아 북서부를 차지하는 넓은 땅입니다. 동시에 태평양과 지중해로 진출하겠다는 야심을 공공연히 드러낸 것이죠. 미국과 영국은 이 요구를 묵살했습니다.

▲아프리카 북단, 현 리비아 영토인 트리폴리타니아. /위키피디아
이러자 스탈린의 입장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아직 회의가 열리던 중인 1945년 9월 20일, 스탈린은 북한을 점령하고 있던 소련군에게 이런 결정적인 지령을 내렸습니다.
“38선 이북에 정권을 수립하라!”
이 지령이야말로 한반도의 남북 분단을 확정한 것이었습니다.
정읍발언? 대한민국 단독 정부? 분단이 이런 데서 시작되고 고착화됐다는 것은 다 웃기는 얘깁니다. 이 지령에 따라 다섯 달 뒤인 1946년 2월에 평양에서 출범한 ‘북조선 임시 인민위원회’는 김일성 독재를 고착화하고 조만식 등 민족주의 인사들을 구금했으며, 남한이 정치세력의 분립과 좌우 갈등을 겪는 동안 무상몰수 무상분배(사실은 처분권 없이 경작권만 줌)의 토지개혁, 산업시설 국유화, 지방정권기관 조직 등 단독공산정권 작업을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북한 점령기 서울에서 발행된 ‘해방일보’ 1950년 8월 15일 자 1면. 스탈린(오른쪽)과 김일성 사진을 크게 싣고 소련 군대를 해방군으로 묘사했다.
그런데 말입니다.
스탈린은 왜 그런 지령을 내렸던 걸까요?
런던외상회의에서 태평양과 지중해 진출이 좌절된 것에 대한 단순한 분풀이가 아니었습니다. 당시 미국도 소련도 동아시아에서 가장 큰 관심을 지니고 있던 지역은 한반도가 아니었습니다. 만주와 중국이었습니다. 소련은 일본 통치 참여와 트리폴리타니아 점령이 좌절된 이상, 미국과 협력하지 않고 전략적 요충지인 만주를 장악하려 했습니다.
북한에 ‘정부 수립’ 지령을 내린 지 18일 뒤인 10월 8일, 스탈린은 30만 명의 중국 공산군에게 만주를 점령하라는 지령을 내렸습니다. 1946년 3월 소련군은 일본군에게서 노획한 무기와 점령지를 중국 공산군에게 넘겨줬고, 5월 중국 공산군이 국민당군에게 패주하자 이런 조치를 취합니다.
“중국 공산군을 북한으로 후퇴시켜!”

▲①1930년대 초 난징의 쑨원 묘소를 참배한 장쉐량(앞줄 왼쪽)과 장제스(오른쪽). 만주 지역 군벌이었던 장쉐량은 장제스에게 투항한 뒤 시안사변 직전까지 협력 관계를 유지했다. ②일본 패망 다음 달인 1945년 9월 충칭에서 만난 마오쩌둥(왼쪽)과 장제스가 승리를 기념하는 축배를 들고 있다. 이후 국공합작은 깨지고 내전이 시작됐다. ③국공내전 초기에는 장제스의 국민당군이 우세했다. 1947년 공산당 본거지인 옌안이 국민당군에 함락되자 마오쩌둥이 말을 타고 피신하고 있다. ④마오쩌둥이 1949년 10월 1일 톈안먼에 올라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을 선포하고 있다.
1946년부터 1948년까지, 중국 국민당군이 들어갈 수 없었던 후방기지로 북한을 제공하기 위해, 이들에게 협조적인 북한 ‘정권’이 반드시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럼 당시 미국의 입장은 어땠을까요? 미국의 전략가들은 당시 한반도를 중국 대륙에 부속된 지역으로만 봤기 때문에, 한반도만을 대상으로 한 전략을 세우지 않았습니다. 1947년 4월 중국의 국공내전에서 공산당의 승리가 확실해지기 전까지는 국공내전의 추이을 봐 가며 현상을 유지하려 한 관망(wait-and-see) 정책이 주된 기조였습니다.
1947년 9월 미국은 소련의 한반도 동시 철병 제의를 받아들여 미군 철수와 한국 문제의 유엔 이관을 결정했습니다. 허동현 교수는 “미국이 체면을 손상하지 않으면서 한국 문제에서 발을 빼겠다는 것이었다”고 말했습니다. 그 결과 6·25가 일어났고, 당초 한국에 별 관심이 없던 미국을 애써 다시 한반도 문제에 끌어들인 것은 1953년의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성사시킨 이승만 정부였습니다.
[後記]
가만히 생각해 보면, 연해주에 살던 한인 동포 17만명을 6000㎞ 떨어진 머나먼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켰던 사람, 그 와중에 2500명의 한인을 학살했던 사람, 한반도를 남북으로 분단시켰던 사람, 김일성에게 지령을 내려 6.25를 일으켰던 사람, 전쟁에 지친 김일성이 ‘인민들이 다 죽게 생겼으니 제발 휴전을 허락해 달라’고 애원했는데도 묵살했던 사람은 모두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이오시프 스탈린이었습니다. 젊은 세대가 마르크시즘에 솔깃해하던 1980년대에 한때 그조차 숭배 대상이 돼 그의 글을 담은 ‘스탈린 선집’이 대학가에서 읽혔다는 것을 생각하면 절로 한숨이 나옵니다. 저는 아직 모스크바에 가 보지 않았지만, 언젠가 크렘린 벽에 있다는 그의 무덤을 찾아가 보고 싶습니다. 당신이 그렇게도 괴롭히고 짓밟고 말살하려 했던 우리 민족은 아직도 죽지 않고 여전히 살아 있다는 걸 말해주고 싶어서입니다.
조선일보 유석재 기자
월간조선 10월 호
◆金鎭炫 회고록을 읽고
한 경계인의 ‘대한민국 현대사 紀行’
⊙ “국가 지도층 머릿속에 국가가 없다”
⊙ 金泳三, “에이… 이승만 독재자레이, 독재자”
⊙ 비서실장에게 “돈을 마련해오라!”고 채근한 金大中
⊙ 북한, 만찬장 옆에 ‘술 강권 공작팀’ 꾸려놓고 방북 언론사 사장단의 만취, 추태 유도
⊙ 북한 다녀온 후 “체제와 이념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0.01%라도 북한 측과 타협할 수 없다” 지침 내려
⊙ “대한민국을 의심, 폄하, 부정하면서는 한민족 한반도의 자유·민주·통일·정의·평화를 세울 수 없다”
⊙ 지도층은 회고록 써놓고 죽어야

김진현(金鎭炫) 선생의 회고록 《대한민국 성찰의 기록》(나남출판 펴냄, 653페이지)은 올해 86세의 저자(著者)가 체험한 ‘한국 현대사 기행문’처럼 읽힌다. 언론인, 장관, 대학 총장, 시민운동가 등 다양한 입장에서 대한민국을 경험한 분이 기억이 아니라 계획적으로 모은 기록을 근거로 쓴 책이라 인용할 사례가 많다. 김 선생은, 평소의 기록 습관에다가 자료 정리를 뒷받침해줄 사무실과 비서가 있었다는 점이 다행이라고 했다.
▲김진현 전 장관의 회고록 《대한민국 성찰의 기록》
저자는 자신을 ‘다생(多生) 세대’라고 정의했다. ‘가장 전쟁 경험이 많은 세대, 가장 많은 문자와 언어로 생활한 세대, 가장 이사 많이 다닌 세대(‘고향’ ‘향수’를 아는 마지막 세대), 가장 다양한 국가체제를 겪은 세대, 가장 많은 혁명(사상, 정치, 경제, 생활, 기술)을 겪은 세대로서 대한민국 역사의 증인임을 자각하며 이 기록을 쓴다’고 했다.
〈나는 일제시대와 6·25 무렵까지 시골 할머니 집에 가면 숙모들이 베틀에 앉아 목화솜으로 옷감 짜는 소리를 듣고, 짚신을 신고, 저녁이 되면 여우에게 물려간다고 집 밖에 못 나가고, 6·25 전까지는 정말 호랑이 눈빛이었는지 밤에 곰내미산 줄기 앞산 등성이에 두 불빛이 어슬렁이면 호랑이 나왔다고 어른들이 경계하던 체험을 기억하는 세대이다. 벼 심고 벼 베고, 송진을 따 호롱불 켠 체험의 세대이다. 한말(韓末) 이전부터 이어온 전통, ‘산촌의 자연’을 체험한 마지막 세대이다.〉
저자는 자신을 ‘이종(異種)사회, 이종집단, 이종기관 간의 경계를 가장 다양하게 넘나든 유일한 언론인이다’고 자평(自評)했다. 재미있는 회고록을 쓸 수 있는 최적(最適)의 경험자란 뜻이다.
전 《조선일보》 주불(駐佛)특파원 신용석(愼鏞碩)씨가 유럽에 머물고 있던 나에게 이 회고록을 읽고 감동했다는 연락을 해와 이 책의 출판을 알게 되었다. 최근에만 이 책을 계기로 저자와 두 번 만났는데 그의 첫마디가 “이승만, 박정희를 제외하면 국가 의식을 가진 지도자를 갖지 못한 나라다”는 개탄이었다. 윤석열(尹錫悅) 대통령도 지난 광복절 기념사에서 한국의 국시(國是)인 자유민주주의 이야기는 많이 하면서 그날이 건국 74주년임을 확인하지 않고 넘어갔다(역대 대통령 중 문재인에 이어 두 번째).
金泳三, “李承晩 독재자레이, 독재자”
▲1987년 9월 25일 《동아일보》 논설주간실을 찾은 YS. 후일 《이승만과 김구》를 저술한 손세일 전 국회의원이 뒤에 보인다. 사진=김진현
저자는 책에서 “나는 이 나라 대통령, 총리, 국무위원들, 국사학자들이 대한민국 정통성, 정체성, 정당성을 지켜야 한다는 의지가 너무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했다. 국가 지도층의 머릿속에 ‘나라(country)’와 ‘국민(nation)’은 있는데 ‘국가(state)’가 없다니 충격적이다. 저자는 〈현, 전 총리 분들의 언행이 그러했다〉면서 우파 지도자들부터 비판한다.
〈특히 일부 우파란 분들의 이승만 영웅화가 지나쳤다. 우남에 대한 극좌파의 날조, 과잉 폄하는 고쳐야겠으나 그 과정에서 ‘4·19혁명’을 지나치게 격하, 결국 안병만 교육부 장관이 교육부가 제작한 “기적의 역사” 영상물을 회수하고 사과하는 자해행위마저 생겼다. 우남에 대한 왜곡 정리를 넘어 마치 백범이 1948년 북행시(北行時) 6·25를 미리 알고 국민을 속인 것처럼 주장하는 등 백범 폄하가 극심해졌다. 그러자 광복회와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사업회(김자동 회장)는 “대한민국 건국은 1919년이다” 제하 89주년 학술회의를 열어 대항했다. 그럴수록 우파의 반격도 강해져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짓자는 캠페인성 보도도 계속 나왔다.〉
KBS가 2008년 7월 16일 아침, 건국 60주년 기념사업 집행위원장이던 저자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다. 앵커가 “… 정부 부처 장관·민간들이 참여한 위원회는 1948년 8월 정부 수립을 건국으로 보고…” 하며 말을 건다. 저자가 “국민과 영토와 주권을 확실하게 갖고 또 주권이 국제적으로 승인된 나라는 대한민국이 실제적인 건국이고, 지금은…” 하는데, 기자가 말을 끊고 “그러나 역사학계가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섰습니다”며 박성수·이만열 교수와의 인터뷰로 이어갔다. KBS조차도 시시비비의 언론이 아니라 ‘60주년 건국’ 반대 진영 대변기관인 듯했다고 썼다.
그는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우남-백범의 통합에서 찾아야 한다”고 했다. 《이승만과 김구: 한국 민족주의의 두 유형》이란 대작을 쓴 손세일(孫世一) 선생의 생각과 비슷하다.
저자는 1993년 김영삼(金泳三) 대통령과 국수를 먹으면서 이런 건의를 한다.
〈시간이 갈수록 백범기념사업회가 정부 비판 인사로 기울고, 백범 행적을 반(反)대한민국 좌파 쪽으로 기울게 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 그러기 위하여 백범의 아드님인 김신 장군을 반공연맹(자유총연맹) 이사장으로 모시고, 우남의 양자인 이인수 명지대 교수를 새마을운동 이사장으로 기용하라고 간곡히 진언했다. YS의 즉각 반응이 놀라웠다. “에이… 이승만 독재자레이, 독재자.” 백범엔 언급도 없었다.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오늘 이 땅 이념 갈등의 뿌리엔 단순히 극좌 대 극우, 친북 대 반공이라는 도식을 넘어 이른바 주류 내의 철저하지 못한 자기정체성 상실에도 큰 원류가 있다.〉
나라와 민족과 국가의 차이를 모르는 이가 국가원수 자리에 앉으니 “그 어떤 이념이나 동맹보다 민족이 더 중요하다”고 외치며 한국 현대사의 가장 중요한 두 건물, 중앙청과 청와대 본관을 민족정기 회복 차원에서 철저히 부숴버린 것이다.
金大中과 돈
▲김진현 전 장관이 해방 전 초등학교 입학 후 아버지와 찍은 사진. 아버지와 둘이서 찍은 유일한 사진이자, 초등학교 시절 남긴 유일한 사진이다. 사진=김진현
김진현 선생은 회고록을 쓸 때 기자정신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공인(公人)일 경우 친했던 사이라도 어두운 면을 드러낸다. 김대중(金大中)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부정적이다.
1980년 짧은 민주화의 봄에 뜻밖에 그의 자형(姊兄)이 김대중 비서실장이 된다. 비서실장을 통해서 그는 밖에서 아는 DJ와 너무나 판이한 DJ를 알게 되었다고 썼다. 돈이었다. 한번은 자형이 조용히 만나자 해서 집으로 갔다. “어찌 돈을 마련할 수 없겠느냐?”는 하소연이었다고 한다. “돈을 마련해오라!”는 독촉을 두 번이나 받았다는 것이다. 전에 서울시에 있던 누구는 얼마를 마련해오고 여의도 어느 목사는 몇억씩 몇 번 기부했다며 어찌해야 할지 자문하는 것이었다. 저자는 비서실장을 그만둘망정 돈에 관여하지 말라고 했다.
저자는 김대중을 만났을 때 특이한 점을 발견했다고 한다. 논설위원들과 식사를 끝내고 헤어질 때 아무리 먼저 나가시라 해도 모두가 서서 기다려야 했다고 한다. 초청자는 비서가 미리 저녁값을 결제해서 문 앞에서 바로 헤어지게 되는 법인데 DJ만은 다 보고 있는 앞에서 지갑을 꺼내 현금(그때는 카드가 없었다)을 두 손으로 세어 계산하더라고 했다. 그는 자형한테 들은 돈 이야기와 겹쳐 기억에 남는다고 썼다.
논쟁적 한국인 鄭周永
▲김진현 전 장관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김구 선생의 ‘益世濟民’ 휘호. 김 전 장관의 거실에 걸려 있다. 사진=김진현
김진현 선생은 경제부 기자로 출발, 《동아일보》 논설실장, 한국경제연구원 대표이사, 과학기술처 장관, 《한국경제신문》 회장, 《문화일보》 회장, 건국 60주년 기념사업 집행위원장,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건립위원장 등을 거치면서 특히 재벌 내부 사정에 밝은 분으로 알려져 있다. 회고록에도 재벌 회장들 이야기가 더러 나오는데 그는 현대그룹 창업주 정주영(鄭周永)을 가장 논쟁적 인물로 꼽았다.
“현대그룹은 삼성, LG·GS, SK, 한화그룹과 더불어 한국에만 존재하는 독특한 기업그룹-선진국에도 일본에도 없고 인도, 타일랜드, 필리핀 등에서만 일부 아직 존재하는, 그러면서도 이들과도 다른 독특한 가족기업 복합그룹”이라고 정의한다. ‘그룹’이라기보다 영어의 스피어(Sphere, 天球, 또는 세계)라고 했다. 경제·금융산업을 넘어 사회 모든 부문, 정치·외교·교육·예술·법조·의료·복지·스포츠·언론에 큰 영향을 미치는 독립왕국의 한 전형이란 것이다.
정주영에 대한 호불호와는 상관없이 ‘이 점만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한국 20세기 근대화 혁명의 큰 줄기의 하나이고 산업화 담당 초(超) 거물, 한국 산업혁명의 상징 기업인이라는 점, 특히 ‘맨주먹 소박한 한인(韓人)’의 세계적 성공 신화, 단군 이래 ‘원형(原型) 한인’의 ‘세계적 기업 성공신화’의 창조자라는 점에서 같은 세대의 성공 기업인들과 도전의 질(質)에서 확연히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삼성, LG·GS, 효성, 쌍용 등 영남 부자(富者) 상인 출신들의 성공신화와도, 동양화학(이희림), 대한선박해운(이정림) 등 개성 출신 재벌들과도 차별성이 분명하다. 가장 ‘원초적인 한인’으로서 ‘최초의 세계 기업인’이 된 점, 이게 정주영의 역사적 위상이란 것이다.
그는 기업인이면서도 정권에 호락호락하지 않았고 때로는 정권에 도전을 서슴지 않았으며 정치에 뛰어들었다. 저자는, 그를 ‘가장 철저한 한인, 보편인, 세계인, 전면인(Totalman) 정주영’이라고 요약했다. “한국적 기준으로는 가장 동물적인 보편성, 그러나 그 시대 인물 대부분이 그러하듯 ‘권력-국가’ 의식은 강하나 본질적 의미의 사회공동체, 보편적 사회 시민의식은 부족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극명하게 보여준 인격”이라고 보았다.
나는 1992년 가을 대통령 후보로 나선 77세의 정주영을 인터뷰했는데 그렇게 신나 보일 수가 없었다. 기업인으로 맨날 정치인, 특히 대통령 눈치를 보다가 선거운동 기간에 욕도 마음대로 할 수 있으니 기분이 좋다는 이야기였다. 대선 직후 김영삼 당선자를 만나보니 낙선한 김대중 후보보다 보수표를 잠식, 자신이 낙선할 뻔했다고 정주영을 벼르고 있었다. 정 회장은 김영삼 5년 동안 비자금 관련 수사로 검찰에 불려 다니고, 현대그룹은 정권 눈 밖에 나 고생했다. 건강도 악화되었다. 경제 권력이 정치 권력을 못 당한다는 원리를 재확인했다.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니 기를 펴게 된 정주영은 소떼를 몰고 방북, 김대중-김정일 평양회담의 길을 닦았지만, 아들 정몽헌은 그 회담과 관련된 대북(對北)송금 사건 수사를 받다가 자살했다.
金正日의 자존망대 안하무인
▲2000년 8월 12일 방북 언론사 사장단의 일원으로 북한을 방문, 김정일과 만났다. 오른쪽 끝이 김진현 전 장관. 사진=김진현
2000년 6월 김대중-김정일 평양회담 직후인 8월 12일에 있었던 언론사 대표들의 방북(訪北) 비화는 충격적이다. 저자는 《문화일보》 회장으로 평양에 갔는데 기괴한 장면을 목격했다고 썼다. 김정일의 정식 초청으로 북한을 방문하였으니 공식 오찬에서 환영사 같은 게 있을 줄 알았다고 한다. 김용순 노동당 비서 겸 통일선전부장이 환영사를 했고 이어서 최학래 《한겨레》 사장이 방북언론사장단을 대표하여 답사를 읽었다. 그런데 김정일은 시종일관, 환영사를 하는 김용순이나 답사하는 최 사장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듣지도 않았다. 옆자리에 있는 박권상 KBS 사장 또는 다른 사람과 계속 떠들었다는 것이다. 최 사장이 열심히 답사를 읽다가 힐끔힐끔 김정일을 보더니 끝냈다.
〈헤드테이블에 앉은 최태복 최고인민회의 의장 등도 최 사장의 말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김정일의 입술에만 눈과 귀가 쏠렸다. 내 옆자리에 있는 강능수에게 말을 걸어도 나한텐 눈도 안 주고 건성으로 “네, 네” 할 뿐, 그도 입술만 보고 있었다. 최 사장은 “역사적인 기록이라 생각해서 새벽까지 답사 원고를 다듬었는데…” 하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안하무인 자존망대의 극치였다.〉
방북 언론사 대표단은 8월 12일 낮 12시부터 3시30분까지 평양시 중구 목란관에서 김정일과 식사를 하고 대화를 나눴다. 박지원 문화관광부 장관과 방북 언론사 대표단 56명 전원이 참석했다. 접견실에서 김정일과 약 20분간 잡담을 했다는데 대화록을 검색하여 읽어보니 저자가 말한 자존망대의 극치를 확인할 수 있었다.
김정일, “北 언론, 정확성에서 우리가 훨씬 정확”
“남쪽 신문은 쭉 보다가 8년 전부터 눈이 나빠져 지금은 잘 안 봅니다. 섭섭한 게 많지만 이젠 나무라지도 않겠습니다. 6·15선언 이후 많이 달라졌습니다. 과거에는 본의 아니게 그랬을 것입니다. 보도 경쟁에서 북쪽 언론이 질 수 있으나 정확성에 관해서는 남쪽 언론 못지않습니다. 우리가 훨씬 정확합니다.”
“우리는 평화적 이용을 위해서 로켓을 개발 중에 있는데 미국은 자꾸 자기들과 전쟁한다고 우리를 의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과학기술 발전을 위해 로켓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로켓 한 발에 2억, 3억 달러가 들어가는데 미국이 우리 위성을 대신 쏴주면, 푸틴 대통령에게 우리가 개발을 안 하겠다고 얘기했습니다.
위성 발사는 과학 목적으로 하는데 1년에 두세 번 하면 한 9억 달러 들어갑니다. 로켓을 개발해서 대륙 간 탄도탄을 만들어 두세 발로 미국을 공격하면 우리가 미국을 이깁니까? 그런데도 미국은 이것으로 트집을 잡고 있습니다.”
“우리 군대가 전쟁 때 낙동강까지 갔었는데 집집마다 동아리에 막걸리가 있어서 두세 사발씩 먹고 비리비리하는 바람에 전쟁에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정주영 영감이 막걸리를 30가지나 보내와서 조금씩 먹어봤는데 그 가운데 아주 맛 좋은 게 있어서 ‘이게 제일 맛있더라’고 알려주니까 정 회장이 포천 막걸리라고 대답하면서 어떻게 알아냈느냐며 깜짝 놀랍디다.”
“박정희 평가는 후세가 해야지. 동참자가 말해서는 안 됩니다. 그때 그 환경에서는 유신이고 뭐고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소위 민주화도 무정부적 민주화는 곤란합니다.”
“북남 합쳐봤자 인구가 1억도 안 되는데 그럴수록 명예를 중히 해야지요. 대국에 비굴하거나 아첨하면 절대 안 됩니다. 남쪽의 경제 기술과 북쪽의 정신을 합작하면 강대국이 됩니다.”
“내 힘의 원천으로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가 모두가 일심단결하는 일이고 두 번째가 군력입니다. 외국과 잘 되어도 군력이 있어야 하고 친해도 군력을 가져가야 합니다.”
술 먹이기 공작
김진현 당시 《문화일보》 회장은 이 책에서 당시 평양에서 있었던 일을 취재기자처럼 알려준다. 서울로 돌아가기 전날 저녁 선전선동부장 정하철의 만찬이 있었는데, 여기서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김 회장 테이블의 접대역은 《철도신문》 사장이란 젊은이 혼자였다. 김 회장은 술이 약하다. 《철도신문》 사장이 첫술을 따를 때 ‘어느 자리든 한잔밖에 못하니 양해해달라’고 했다. “네, 알겠습니다” 하곤 건배를 마치자 바로 술잔을 채웠다. 두 잔째를 마시고 나니 또 따랐다. “이거 안 되는데”라고 해도 ‘마지막 밤인데 좀 취하시면 어떠냐’며 강권했다. 그러기를 네 번, “그래, 그러면 이게 마지막이오. 더는 권하지 마시오” 하고 술잔을 비웠다. 그러자 다섯 잔째 또 따랐다. 김 회장은 버럭 소리를 지르면서, “이런 놈이 어디 있어. 내가 미리부터 한잔만 한다고 알렸고, 성의로 석 잔 더 받고 더 권하지 않기로 했잖아. 고얀 놈!” 하니 그제야 움찔하고 멎었다. 모(某) 방송사 사장은 술을 빨리 안 갖고 온다고 북한 종업원을 때려서 코피가 낭자하게 흘렀다. 다른 방송사 사장도 만취해 계단에서 뒹구는 등 해서는 안 될 추태가 벌어졌다. 술자리는 밤 11시40분에야 끝났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노래는 한 열 번 부르고, 몇 분은 북한 노래도 부르고 마이크를 여러 번 잡았다고 했다.
김 회장은 귀경(歸京) 후 KBS 박권상 사장으로부터 ‘강권’과 ‘추태’가 계획된 공작이었음을 직접 들었다고 한다. 박 사장은 방북단 최연장자인데다 이미 6월 평양회담 때도 참가했었다. 그날 저녁, 몸이 불편하여 불참하려다 마지막 만찬이라 참석했다. 만찬이 길어지자 중간에 숙소로 돌아가겠다고 하니 북측이 당황했다고 한다. 그들은 급하게 만찬장 옆 빈방 책상 위에 박 사장을 눕혔고 만찬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그 옆방이 바로 술 강권 선동공작팀의 방이었다. 조용히 누워 있으니 옆방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주의 깊게 들으니 공작지휘부에서 각 테이블에 술 강권 지시를 내리는 소리였다. 이런 식이었다.
“A 테이블 김 사장 걔 몇 잔 먹었어? 10잔? 안 돼 인마! 20잔은 먹여야지. 10잔이 뭐야!”
〈많은 남쪽 방북자들의 말 못 할 이야기들이 많이 있었을 것이다. 명색이 김정일 초청에다가 그가 최고로 믿는다는 박지원을 포함한 56명의 ‘귀한 손님’에게도 이러니, 얼마나 많은 추태와 약점들이 잡혔을까? 그리고 북은 이를 얼마나 이용했을까?〉
‘어떻게 인간을 이렇게 만들어놨나’
수년 전 퇴직한 국정원의 대북(對北)공작관은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북한에 갔다 온 뒤 갑자기 태도가 바뀌는 이들은 조심해야 합니다. 북한에 혼자 가는 것은 위험합니다. 저들의 공작에 속수무책입니다. 미인계(美人計)를 쓰는 이유 중 하나는 약점을 잡으면 매수할 필요가 없어 돈이 안 든다는 점 때문이지요. 김정일이나 김정은이 방북 인사를 특정, 포섭하라고 명령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해내게 되어 있습니다.”
소련의 KGB와 동독 정보기관이 서방 정치인 등을 상대로 미인계를 쓴다든지 동성연애 등 약점을 잡아 간첩 요원으로 포섭한 예는 이미 많이 드러나 있다. 북한의 공작 행태는 소련을 원형으로 삼으니 비슷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김진현 당시 《문화일보》 회장은 “마지막으로 순안공항을 떠나올 때 동원된 군중을 보면서 인간적으로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어 눈물이 났다”고 적었다. 땡볕에서 2시간40분 동안 서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특히 여섯 살 꽃다발 소녀가 ‘조국통일’을 외치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면서 어떻게 인간을 이렇게 만들어놨나, 북녘 내 동포가 너무 불쌍했다고 했다. 그는 회사로 돌아와 “이번 방북에서 뼈저리게 느낀 점은 체제와 이념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0.01%라도 북한 측과 타협할 수 없다는 점”이며 “우리 신문은 두려움과 편견을 버리고 진실만을 보도해야 한다”는 북한 보도 지침(2000년 8월 22일)을 내렸다고 했다.
김진현 회장의 북한 보도 지침은 그보다 2년 먼저 북한을 방문하고 돌아온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이 내린 보도 지침과는 판이하다. 홍 회장은 1998년 9월 23일 고려대학교 언론대학원 최고위 과정 강연에서 북한에 대한 시각 변화는, 1994년 이른바 조문(弔問) 파동 직후 김대중씨를 만난 것이 계기였다고 했다.
홍석현 《중앙일보》의 논조 변화
“당시 야당 지도자였던 현재의 대통령을 일산의 모처에서 만나 조문 파동에 관해 서너 시간에 걸쳐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서로 의견이 같은 부분도 있고, 다른 점도 있었지만, 이 만남은 제가 이후 남북문제를 보는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는 계기였던 것만은 분명했습니다. 그 며칠 뒤 저는 북한을 어떻게 봐야 하고 언론은 이에 대해 어떠한 역할을 해야 하는가를 두고 사내 토론에 부쳤습니다. 《중앙일보》는 중도우익을 표방하고 있습니다만 남북문제에 관한 한 《한겨레》 쪽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변화를 하기로 한 셈입니다. 이 같은 논조 변화의 과정을 거친 뒤에는, 북한과의 직접적인 접촉을 시도하기로 했습니다.”
“우연히 일본 쪽 경로를 통해 유력 인사와 연결되면서 실마리가 풀렸고, 1997년 7월 마침내 《중앙일보》 북한문화유산 답사팀이 언론사상 최초로 북한 땅을 밟고 이어 올해 9월까지 네 차례의 방북 조사를 성공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북한에 대한 보도 방법도 이제는 보다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해야 할 때입니다. 북한 사람들도 이제는 기사를 잘못 쓰면 바로 사장실에 항의 전화를 해대는 우리의 독자처럼 여겨야 한다는 뜻입니다. 권영빈 위원이 이번 4차 방북을 마치고 돌아와서는, 북한의 인공위성 발사와 관련 ‘광명성이 가야 할 길’이라는 제하의 칼럼으로 군사적 강대국화를 떠나 경제 입국을 통한 부국화를 촉구했습니다. 북한 측에서는 북경을 통해 우리 측에 ‘아니 알 만한 사람이 어떻게 광명성이 어쩌고 저쩌고 하느냐(북한에서 광명성은 사실 김정일 총비서의 별칭에 해당됨), 이제 당분간 《중앙일보》와는 공동사업을 보류하고, 앞으로의 계획도 재검토하겠다’며 반발하기도 했습니다.”
참고로 2016년 7월 1일 자 《중앙일보》에는 당시 국제문제 대기자 김영희 이름으로 “사드를 포기하자”는 논평이 실렸다.
〈정답은 사드 배치 포기다. 한·미 관계는 약간의 후퇴를 용납할 만큼의 여유가 있다. 한·중 관계에는 그런 마진이 없다. 전쟁 방지가 지상명령인데 사드가 있다고 북한의 도발 의지는 꺾이지 않는다. 차라리 사드를 포기하고 중국의 힘을 빌려 북한의 전쟁 도발을 사전에 방지하는 것이 최선의 정책이다.〉
《중앙일보》가 외교·안보 정책에서 이처럼 왼쪽으로 돌아선 배경이 홍석현 회장의 김대중 면담과 방북이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신문과 JTBC가 박근혜 타도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도 아울러 검토할 만하다.
개념어를 많이 만든 분
일류(一流)국가는 명사를 만들고 이류(二流)국가는 동사를 만든다고 한다. 민주주의, 자본주의, 3권분립, 인권 등 명사를 만든 나라는 1류이고 그들이 만든 민주주의를 따라 하는 나라는 2류를 면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김진현 선생은, 명사, 즉 개념어를 많이 만들었다. 회고록에 ‘내가 만든 개념과 용어’가 두 페이지에 걸쳐서 소개되어 있을 정도이다. TK, 문어발 재벌, 선진화(善進化), 해양화, 준(準)조세 등이다. 1980년대 초 김 선생이 쓴 논문에서 “38도선 분단으로 한국은 섬이 되었다. 무역으로 먹고사는 해양화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게 된 것은 축복이었다”는 글을 읽고 세상을 보는 눈이 맑아지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다. “좋은 글은 세상을 넓게 밝게 보게 하는 통유리와 같다”는 조지 오웰의 말처럼 되려면 개념어가 잘 정리, 활용되어야 하는데 한글전용으론 이게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김 선생이 염원하는 선진화는 한국어의 반신불수(半身不隨)로 불가능한 목표가 된 게 아닐까? 이 책에서도 ‘김진현’이란 발음부호만 있고 ‘金鎭炫’이란 뜻을 담은 본명은 맨 끝 이력난에 숨어 있었다.
라이샤워, “아시아에선 한국만 민주주의 가능”
▲한국 민주화에 관심이 많았던 라이샤워 교수는 1973년 11월 16일 서울 동교동에 있는 김대중씨 사저를 찾아 김대중씨와 만났다. 사진=조선DB
김진현 선생은 1970년대 하버드대학 부설 니만 재단 초청으로 연수를 간 적이 있다. 나는 1990년대 니만 펠로였다. 그는 “한국 대학 4년보다 그곳에서 1년이 더 많이 배웠다”고 말한 적이 있다. 김 선생은 하버드에서 만난 에드윈 라이샤워 교수의 말 한마디에 한국 정치를 보는 눈이 달라졌다고 썼다.
1972년 유신(維新)이 선포됐다. 김 선생이 오전 강의가 끝나고 니만 사무실 라운지에서 《뉴욕타임스》를 펼치니 1면 톱에 탱크가 국회 정문을 막아선 사진과 함께 유신계엄 선포 기사가 실려 있었다. ‘눈물이 났다. 이제 신문사도 문 닫겠구나. 나라는? 나는 어찌해야 하나?’ 니만 동료들도 있는데 눈물을 보이기 미안하여 정문을 열고 뜰로 내려가는데 다릿심이 빠져 계단에서 주저앉아 버렸다고 한다.
열흘쯤 뒤 하버드대학 라이샤워 교수가 주동, 학자 전직 외교관 등 10여 명이 박정희(朴正熙) 독재를 맹렬히 비판하고 압력용으로 주한미군(駐韓美軍) 철수를 요구하는 성명서가 나왔다. 저자는 라이샤워 교수 면회를 신청, 옌칭도서관에 있는 그의 사무실에서 만났다. 유신반대 성명에 감사를 표하고, 그러나 유신의 명분이 북한으로부터의 위협인데 미군 철수 주장은 닉슨 독트린처럼 박정희 독재의 명분을 강화할 수 있다고 말했다. 설명 중에 1904~1905년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친일(親日) 정책을 언급하는 순간 라이샤워는 책상을 탕 치면서 말했다.
“미스터 김, 내가 한국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는가. 옌칭도서관에 한국관을 만든 것도, 한국학 강의와 한국학 교수를 독립시킨 것도 나일세. 나는 아시아 국가 중 민주주의를 할 수 있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고 확신하고 있네. 한국인들의 개성적·직설적 성격으로 해서 한국만이 민주주의가 가능한 나라이네. 중국, 베트남? 일본? 내가 일본 전문가이고 주일대사 했고 마누라도 일본 사람이지만 일본은 민주주의 어려워….”
〈두 가지로 큰 충격이었다. 일본에 대하여 경제 기술은 물론 정치 민주주의도 우리보다 훨씬 앞선 선진국으로 생각했던 나, 당시 평균적인 한국 사람 모두 그리 알고 있는 일본에 대한 미국 최고 일본 전문가의 말씀은 놀랍지만, 소화가 어려웠다. 한국만이 아시아에서 민주주의가 가능한 특출한 나라인데 오직 박정희가 이를 막고 있다는 판단은, 국내에서건 해외에서건 처음 듣는 말이었다.〉
김 선생은, 그 이후로 일본은 어떤 나라인가, 아시아에서 한국의 특징, 세계적 보편성과 아시아적 일반성과 한국의 특수성·예외성 같은 명제에 매달렸다고 한다. 그 결과물의 하나가 2005년에 출판된, 《일본 친구들에게 정말로 하고 싶은 이야기》이고 아직도 매달리고 있다.
라이샤워 교수는 통일신라를 높게 평가한 적이 있는데 이게 대한민국에 대한 낙관적 전망으로 연결된 것인지 모르겠다. 일본 천태종을 연 승려 엔닌(圓仁)의 여행기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를 영문(英文)으로 번역 출판하고 해설책 《엔닌(圓仁)의 당대(唐代) 중국 여행》이란 책을 냈던 그는 신라에 감탄했다.
〈당시의 한국(신라)은 지리적으로도, 언어적으로도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문화적으로도 이미 오늘과 같은 나라였다. 같은 민족, 언어, 국경을 가지고 한국보다 더 오래 지속되고 있는 나라는 중국뿐이다. 한국에 필적할 만한 소수의 국가군(群) 속에 일본이 들어 있다.〉
신라 통일을 가능케 했던 것은 나당(羅唐) 동맹이었다. 신라인의 해외 활동은 세계 제국 당(唐)의 제1 동맹국이었다는 데서 가능했을 것이다. 1945년 이후 한국인의 활동무대가 신라인을 닮아 세계로 넓어질 수 있었던 데는 한미(韓美) 동맹 덕이 컸다. 통일신라와 대한민국은 상무(尙武)정신, 자주정신, 해양화 등 공통점이 많다.
‘대한민국에 대한 반역’이 진행 중
김진현 선생은 건국 70주년인 2018년 문재인 정부를 ‘대한민국에 대한 반역’ 정권이라 규정하고, ‘김정은과 주사파(主思派) 합작의 위험’을 경고하였다. 8월 6일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대한민국의 시작과 완성, 그리고 과제’(한국정치외교사학회 및 선진통일건국연합 공동 주최) 축사를 통해서였다.
그는 “자유, 민주, 평등, 다원, 개방이라는 인류 진보의 가치와 그 실현에서 아시아 최고인 대한민국이 우리 안에서 극성스러운 자기 부정과 자멸로 가는 처참한 몰골 앞에 자괴감 그리고 문득문득 허무감마저 든다”고 했다.
“통사적(通史的), 동시대사적(同時代史的) 비교에서 그 어느 나라 민족주의 근대화 운동보다 우월한 대한민국의 실적을 의심, 폄하, 부정, 저주하는, 대한민국에 대한 반역이 바로 건국 70주년을 맞는 2018년에 더욱 기승을 부리는 현실 앞에 1945년 ‘해방’, 1948년 ‘건국’의 감격이 아니라 2018년 ‘자멸’의 피눈물을 본다.”
그는 대한민국에 대한 역사적 반동(反動)의 범인으로 문재인 정권을 특정하였다.
“잠깐이나마 한반도 남쪽 5000만 대한민국이 12억 중국보다 경제력(GDP)에서 컸던 기록(1980년대 말 1990년대 초)이 있는 그런 대한민국의 중심성 완성의 길을 김정은이, 트럼프가, 시진핑이, 푸틴이, 아베가 막는 것은 당연하다 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 안에서 ‘민주’ 정부의 권력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 역사의 반동은 어디서 왔나.”
그는 ‘김정은과 주사파 합작에 의한 파국의 위험’을 넘기 위해서 대한민국 주류(主流)는 끊임없이 ‘대한민국 민족주의’의 원형과 지향점을 확인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대한민국의 민족주의는 헌법이 명시한 대로 ‘통일’ 지향이며 주변 4강을 극복하지 않고는 통일이 어렵기 때문에 ‘자강(自强)’ 지향이어야 한다. 그는 “2018년 오늘에 분명한 진실은 대한민국을 의심, 폄하, 부정하고는 한민족 한반도의 자유·민주·통일·정의·평화를 세울 수 없다는 것”이라면서 한국의 정체성, 정통성, 법통성의 강화를 통하여 ‘한반도 중심성 창조의 길’을 가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것이 회고록의 요약이기도 하다.
노인이 죽는다는 건 도서관이 불탄 것과 같다!
그는 머리말에서 대한민국 과거 지도층의 게으름, 특히 기록의 소홀을 가차 없이 비판한다. 회고록을 통하여 국민과 역사 앞에서 진실을 고백해야 할 의무를 진 특권층 인사들이 그 의무를 포기하였다는 것이다. 신현확(申鉉碻) 전 국무총리에게 회고록 집필을 강권하다시피 하였지만 실패했던 점을 지적하면서 이렇게 덧붙이기도 했다.
〈당신들의 행복에 비해 너무 불운, 불행한 삶을 지낸 이 나라 독립, 건국 희생자들에 대한 감사의 표시를 하고 갔어야 했다. 나 죽기 전 나 같은 쓴소리 기록들도 많이 쌓여 이 나라 독립과 건국에 희생된 선열들의 고통이 헛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노인이 죽는 일은 도서관 하나가 불탄 것과 같다고 한다. 세계에서 가장 드라마틱하고 해피엔딩의 이야깃거리를 가진 한국의 기성세대는 이제 교과서 왜곡 타령 그만하고 연륜(年輪)에 새긴 저마다의 회고록, 피가 흐르는 진짜 교과서들을 다 토해 놓고 사라져야 한국의 정통성·정체성·정당성 문제를 최종적으로 해결하고 헌법 제1, 3, 4, 10조가 명령하는바 북한노동당을 몰아내고 자유통일 하여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두 번째의 일류국가를 완성할 수 있는 자료들을 갖게 될 것이다.
“남과 북이 민족사적 정통성과 삶의 양식(樣式)을 놓고 타협이 절대로 불가능한 총체적 투쟁을 벌이고 있는” 한반도에선 이념전쟁에서 이기는 것만으론 부족하다. 역사전쟁에서 이겨야 진짜 승리하는 것이고 이는 기본적으로 자료싸움이다. 60대 이상 국민들을 대상으로 한 회고록 쓰기 운동을 제창한다.⊙
글 : 조갑제 조갑제닷컴·조갑제TV 대표
◆10.15 100년 전 ‘항공 아이돌’… 공중용사 안창남을 기억하십니까
한반도 비행한 최초 한국인
고국 비행 100주년 특별전

▲안창남이 비행기와 함께 찍은 사진. 역사사진회에서 발행한 월간 사진집 제121호(1923)에 게재됐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소장. /국립항공박물관
“경성의 한울(하늘)! 경성의 한울! 내가 어떻게 몹시 그리워했는지 모르는 경성의 한울! 이 한울에 내 몸을 날리울 때 내 몸은 그저 심한 감격에 떨릴 뿐이었습니다.”(개벽 제31호, ‘공중에서 본 경성과 인천’)
1922년 12월 10일, 한 대의 비행기가 경성 하늘을 날아올랐다. 여의도에 구름처럼 모여든 5만여 인파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환호했고, 하늘에선 비행기에서 뿌린 오색 전단이 흩날렸다. 이날 경성 하늘을 비행한 사람은 21세 청년 안창남(1901~1930). 한반도 하늘을 최초로 비행한 한국인 비행사였다.
안창남을 태운 비행기 ‘금강호’는 여의도 비행장을 이륙해 마포, 공덕, 독립문, 평동, 경복궁, 안국동, 창덕궁, 창경궁, 종묘, 동대문, 광희문, 을지로, 남대문, 광화문, 종로, 서대문 상공을 한 바퀴 돌고 여의도 비행장에 착륙했다. 안창남은 ‘개벽’ 제31호(1923년 1월 1일)에 기고한 ‘공중에서 본 경성과 인천’이라는 글에서 이날의 감격을 상세히 써 내려갔다. “비행장에서 1100미터 이상을 높직이 뜨니까 제일 먼저 눈에 뜨이는 것은 남대문이었습니다. 남대문이 눈에 보일 때 나는 오래간만에 돌아오는 아들을 대문 열어놓고 기다리는 어머니를 바라보는 것 같이 ‘오오 경성아!’ 하고 소리치고 싶을 정도로 반가웠습니다.”
올해는 안창남이 고국 방문 비행을 한 지 100년 되는 해. 국립항공박물관에서 이를 기념한 특별전 ‘공중용사 안창남’이 열리고 있다. 안창남의 이날 비행은 조선 사람들에게 ‘우리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던진 사건이었다. 구전으로 내려오던 다양한 민요에 “떴다 보아라 안창남의 비행기, 내려다보아라 엄복동의 자전거”라고 개사한 노랫말이 유행하기 시작한다. 엄복동(1892~1951)은 자전거 가게 점원으로 일하면서 전(全)조선 자전거대회에 출전해 월등한 기량으로 일본 선수들을 물리쳐 명성을 떨친 인물이다.
1928년 콜롬비아레코드사가 발매한 유성기 음반이 전시장에 나왔다. 가야금 병창 이일선의 민요 ‘이팔청춘가’의 한 소절 “치어다보느냐 안창남 비행긔/굽어살피니 엄복동이로다”라는 노랫말만 봐도 안창남이 당대에 누린 인기를 실감할 수 있다. 비누, 가솔린 등 신문에 실린 상품 광고에도 안창남의 이름이 등장한다. “비행기에 안창남씨, 고급화장에 돈표비누” “안창남씨 비행기에는 우리 회사의 소코니 모터 가솔린을 사용하였다”···.
우리나라에 비행기가 등장한 건 1913년. 서울 용산에서 일본인 군인이 공개 비행 행사를 펼친 것을 시작으로 1917년 미국의 민간 비행사인 아트 스미스가 수만 인파가 보는 앞에서 곡예비행을 펼쳤다. 이를 구경하던 무리 중에 휘문고등보통학교 학생 안창남이 있었다. 공중을 올려다보며 비행사가 되기로 결심한 그는 학교를 중퇴하고 1919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비행기제작소와 오구리 비행학교에서 비행기 조종술을 배웠다. 1921년 도쿄-모리오카 간 우편비행대회에서 3등 비행사 면허를 취득했고, 1년 뒤 2등 비행사 면허를, 그 다음 해엔 1등 비행사 면허까지 취득한다.

▲1922년 한국인 최초로 한반도 하늘을 날았던 안창남이 몰았던 비행기 '금강호'가 국립항공박물관 1층 상설전시장에 복원, 전시된 모습. /국립항공박물관
조선인 비행사가 일본에서 열린 비행대회에서 수상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안창남은 일약 ‘아이돌’로 떠올랐다. 안창남을 고국으로 초청하자는 목소리가 커졌고 ‘안창남 고국 방문 후원회’가 조직된다. 이후 그를 정식 초청해 서울 하늘을 비행하는 행사가 열린 것. 안창남의 고국 방문 비행은 그의 서른해 짧은 생에서 분수령이 된다. 고국 방문 비행 이전에 인기 비행사의 삶을 살았다면, 이후엔 중국으로 망명해 항공을 통한 독립운동에 투신한다. 산시성에서 비행학교 교관으로 활약하며 항일독립단체인 대한독립공명단을 조직하고 항일 비행학교 설립을 추진하는 등 조국의 독립을 위해 애썼다. 그러나 1930년 4월 2일 산시성에서 비행 훈련을 하던 중 추락해 만 스물아홉에 세상을 떠났다.
안창남의 불꽃 같은 생애를 조명한 전시라 반갑지만, 설명 위주의 평면적인 구성은 아쉽다. 박물관 1층 상설전시장에는 안창남이 몰았던 비행기 ‘금강호’가 실물 크기로 복원·전시돼 있다. 특별전은 12월 11일까지.
조선일보 허윤희 기자
◆10.21 이토 히로부미를 쏜 사람은 안중근 아닌 ‘제3의 저격자’라고?
당신이 몰랐을 수도 있는 안중근 의거 5대 포인트 대해부
오는 26일은 안중근(安重根·1879~1910) 의거 113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저는 10월 26일에 총에 맞아 유명을 달리한 두 사람,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과 박정희의 유사성을 비교하는 글을 쓴 얼마 전 쓴 적이 있었습니다. .(https://www.chosun.com/culture-life/relion-
academia/2022/05/24/EKTI6EQPX5BLTKBS2B3IDDDZDI) 그러나 한 가지 확연히 다른 점이 있죠. 총을 쏜 두 사람은 너무나 달랐다는 것입니다. 1909년에 총을 쏜 사람은 1979년에 총을 쏜 사람처럼 사사로운 권력욕이 없었을뿐더러, 총을 쏜 다음에 남산으로 갈지 용산으로 갈지 망설이는 일 따위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대한민국 문화계가 ‘안중근 열풍’에 휩싸였다는 기사가 최근 났습니다.(https://www.chosun.com/culture-life/culture_general/2022/10/11/CDAIJT6XCVDCRLGCAD7MHIP32E/) 김훈의 소설 ‘하얼빈’에 이어 윤제균 감독의 영화 ‘영웅’, 그 원작인 뮤지컬 ‘영웅’이 각각 스크린과 무대 위에 오른다는 얘기죠. 왜 안중근인가?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외쳤던 두 개의 이슈, 약육강식에 승복할 수 없다는 것과 동양 평화는 여전히 유효한 외침이다.”(김훈) “안중근 의사는 역사 속에 박제된 영웅이 아니라 코로나 사태, 경제 불황처럼 어려운 시기에 불려나와 긍지와 위로, 자극을 준다.”(윤성은 영화평론가)
자, 그런데 말이죠.
그렇게 여러 차례 많은 문화 장르로 소비되고 또 생산되고 있는데도, 과연 우리는 안중근을 얼마나 잘 알고 있는 걸까요? 의외로 사람들이 잘 모르는 ‘안중근의 잘 알려지지 않은 다섯 가지 포인트’를 짚어 보겠습니다.

▲안중근 의사의 의거 96주년 기념식이 2005년 10월 26일 오전 서울 남산공원에 있는 서울시교육원 강당에서 열려 참석자들이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조선일보 DB
①처음엔 일본을 믿었다?
이것은 누가 한 말일까요.
“1905년 러일전쟁에 즈음하여 일본 천황의 선전조칙에 의하면 일본은 동양평화를 유지하고 또 한국의 독립을 기하기 위해 러시아와 싸웠으므로 한국인은 다 감격하여 일본인과 같이 출전하여 활동한 사람도 있다. 또 한국인은 일본의 승리를 마치 자국이 승리한 듯이 기뻐하고 이에 의하여 동양의 평화는 유지되고 한국은 독립될 것이라고 기뻐하고 있었다.”
이 충격적인 말은 얼핏 보면 어느 친일파가 한 말인가,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놀랍게도 1910년 2월 7일 안중근 의사가 법정에서 진술한 내용입니다. 이게 무슨 말인지 궁금하다면 안 의사의 이어지는 다음 진술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토가 통감으로 한국에 와서 5개조의 조약(을사늑약)을 체결하였다. 그것은 전의 선언과 반하여 한국의 불이익이 되었으므로 국민은 일반으로 불복을 칭하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1907년 또 7개조의 조약(정미7조약)이 체결되었다. 이것은 통감이었던 이토가 병력으로 압박을 가하여 체결시키기에 이르렀으므로 국민은 일반으로 크게 분개하여 일본과 싸우더라도 세계에 발표할 것을 기했다.”

▲조선 통감으로 부임한 이토 히로부미(왼쪽)와 영친왕.
만약 1905년 러일전쟁 종전 이전의 상황에서 일본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려 했던 사람들에게 ‘친일파’라는 용어를 붙인다면 안중근 의사와 이준 열사 같은 인물도 모두 ‘친일파’가 됩니다. 역사적 상황이 아주 다르기 때문에 이 용어는 시기적으로 무척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무때나 써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러일전쟁이 끝나기 전의 상황에서 상당히 많은 한국인은 ‘일본이 러시아를 물리치고 아시아의 평화를 지켜줄 것’이라고 기대했으며, 이들 모두가 친일반민족행위자는 결코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러일전쟁은 국제적으로도 상당히 큰 영향을 미쳐서, 멀리 튀르키예에서는 이때부터 같은 아시아인이면서도 서양인을 이긴 일본을 ‘형제’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훗날 6·25 전쟁에 참전한 인연으로 (나중에 잘살게 된) 한국을 ‘형제’라고 부른 것과는 비슷해 보여도 조금 다른 맥락이었던 것이죠.
안중근을 비롯한 많은 한국인들이 일본 제국주의의 실체를 분명히 깨닫게 된 계기는 1905년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한 을사늑약이었습니다. 안중근은 “일본은 뱀과 고양이같이 한국을 배신했다”며 일본에 저항하기로 결심하고, 연해주로 건너가 의병 조직인 대한의군의 참모중장이 됩니다. 훗날 “나는 대한의군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이토를 총살했다”고 밝혔던 그 신분입니다.

▲뮤지컬 '영웅'에서 안중근 의사와 대한의군 동지들이 국권 회복을 다짐하는 장면.
②안중근 아닌 ‘숨은 저격수’가 쐈다?
‘사실은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인물은 안중근 의사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는 이야기가 수십 년 전부터 계속 돌았습니다. 음지에 도사린 스토리는 쉬쉬하며 은밀하게 이야기할수록 더욱 진실에 가까워지는 듯한 분위기를 풍기게 마련입니다. 이 이야기는 현재 일본어 위키피디아의 ‘안중근’ 항목에도 버젓이 설명돼 있습니다.
이 ‘제3자 저격설’이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인지, 대표적 안중근 연구자 중 한 사람이었던 최서면(1928~2020) 전 국제한국연구원장을 찾아가 물어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 진원지는 1942년에 일본에서 나온 ‘무로다 요시아야 옹의 이야기(室田義文翁譚)’라는 책 한 권이었습니다.

▲일본 귀족원 의원 무로다 요시아야.
무로다는 안중근 의거 당시 하얼빈역에서 이토를 수행한 귀족원 의원이었습니다. 무로다는 1938년에 죽었고 이 책은 4년 뒤 무로다 생전의 이야기를 모아 출간했습니다. 우선 여기서 공신력이 확 떨어집니다. 본인이 직접 쓴 것도 아니라는 얘기죠. 저자를 알 수도 없고 집필 목적도 불확실한, 한마디로 괴서(怪書)인 셈입니다.
그럼 이 책에선 무로다의 말을 빙자해서 과연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었을까요? “이토 공이 맞은 탄환은 안중근의 브라우닝 권총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프랑스제 기마총(騎馬銃)에서 발사된 것이다.” 기마총이란 권총보다는 길고 소총보다는 짧은 카빈총입니다.

이토가 피격당하던 그 상황에서 하얼빈역 1층 찻집에서 나온 안중근 의사가 권총으로 쏜 것이 아니라, 2층에 숨어 있던 정체를 알 수 없는 ‘진범’(이 음모론이 꼬리에 꼬리를 문 나머지 ‘러시아 비밀조직원이 그 실체’ ‘일본 제국주의를 견제하려는 전세계 유대인의 소행’이라는 허풍 섞인 이야기로도 발전이 됐다고 합니다)이 카빈총으로 비스듬히 내려 쐈다는 얘깁니다. 거짓말이란 디테일한 군더더기가 더 붙을수록 진짜 같아 보이는 법. ‘무로다 옹의 이야기’란 책에서는 이런 설명까지 하고 있습니다. “그 식당은 격자 구조로 돼 있어 아래로 쏘기에는 절호의 장소였다.”
그렇게 위에서 아래로 총탄이 비스듬히 내려가도록 쏜 결과, 이토의 몸에 박힌 총탄 세 발이 모두 그런 방향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뒷받침하듯 책은 매우 그럴듯해 보이는 ‘이토 피격 진술도’를 수록했습니다.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수행했던 귀족원 의원 무로다 요시아야가 그린 '이토 피격 진술도'.
이 그림으로 본다면 안중근 의사가 수평으로 쏜 총에서 발사된 탄환일 수는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최서면 원장은 “그림 자체가 근거 없는 날조”라고 잘라 말했습니다. “무로다는 이토의 몸 속에 있는 총탄을 볼 수 없었습니다!” 총격을 받고 열차 안으로 옮겨진 이토가 30분 만에 사망하자 러시아 측이 부검을 건의했으나 일본 측은 “감히 이토 공의 몸에 칼을 댈 수 없다”며 반대했습니다. 열차는 이토의 시신을 싣고 황급히 하얼빈을 떠났습니다. 무로다는 이토가 쓰러진 뒤 부축해서 열차로 옮긴 순간 수행했을 뿐, 이토가 죽는 순간도 보지 못했습니다.
열차가 일본 조차지인 관동주(關東州) 다롄(大連)에 도착한 뒤 수행 의사, 다롄병원장, 관동군 군의관이 긴급 회의를 열어 부검 여부를 논의했으나, 몸 속의 탄환을 꺼내는 수술을 하지 않기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결국 이토 몸 속의 탄환은 누구도 보지 못했던 것.
그러나 이토를 쏜 총에서 나온 탄환은 딱 한 발이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이토 옆에 있다가 다리를 부상당한 사람이 만철(滿鐵) 이사였던 다나카 세이지로(田中淸次郞)였는데, 그가 죽은 뒤 유족은 이 총탄을 도쿄 헌정기념관에 기증했습니다. 이것은 분명 카빈총이 아닌 권총 탄환이었습니다. 한 일본 르포 작가가 무로다 책을 본 뒤 총알 감식을 의뢰해 그 결과를 책으로 냈는데 “아무리 입을 놀려도 권총알이 카빈총알로 둔갑할 수는 없다”고 실토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일본 헌정기념관에 전시된 탄환. 하얼빈 의거 당시 안중근 의사가 쏜 탄환이다.
그런데, 이토의 몸을 부검하지는 못했지만 탄환이 박힌 시신을 직접 본 사람이 단 한 명 있었습니다. 이토의 수행 의사, 즉 주치의인 고야마 젠(小山善). 최서면 원장이 2013년 일본 외무성에서 발굴한 자료는 바로 고야마가 작성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무슨 자료였을까요? ‘이토 공작 만주시찰 일건(伊藤公爵滿洲視察一件) 별책 제1권 메이지(明治) 사십이(四十二)’. 지금까지 저 정체불명의 ‘이토 피격 진술도’가 신경이 쓰였던 사람이라면(사실 그게 저였습니다) 무릎을 탁 칠 만한 자료가 들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토의 사망진단서였습니다

▲이토 히로부미의 수행 의사 고야마 젠이 작성한 이토의 사망진단서에 수록된 그림. 총탄이 수평으로 관통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 대단히 중요한 그림 한 장이 수록됐습니다. 제1탄은 오른쪽 팔뚝 위를 관통해 오른쪽 갈빗대 부분을 거쳐 심장 아래, 제2탄은 오른쪽 팔꿈치→흉막→왼쪽 늑골 아래, 제3탄은 윗배 중앙 우측→좌측 복근에 박혔다는 것을 명시했습니다.
그렇다면 세 발 모두 ‘수평으로 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2층에서 아래로 쏜 총탄에 비스듬히 맞았다’는 것은, 이토의 사망 현장에 없었고, 총알과 이토의 시신의 총탄 흔적 모두 보지 못했으며, 담당 의사도 아니었던 무로다가 했다는 말을, 무로다가 죽은 지 4년 뒤에 나온, 저자도 누군지 모르는 책에 나온 얘기일 뿐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 황망한 이야기가 이후 만만찮은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제3자 저격설’이 사실인 것처럼 쓴 소설이 전후(戰後) 일본에서 3종이나 나왔고, 2010년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기 무렵 또 이런 내용을 담은 책이 출간됐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왜 그런 음모론이 돌았던 것일까. 최서면 원장은 말했습니다. “한국인처럼 유약하고 활기 없는 민족이 어떻게 감히 이토 공을 쏠 수 있겠느냐는 민족적인 멸시에서 나온 것으로 봐야 합니다. 한국인이 그런 거사를 했다는 것을 믿고 싶지 않았던 것이죠.”

▲뮤지컬‘영웅’2막에서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는 장면.
③안중근은 도대체 몇 발의 탄환을 쐈나?
뮤지컬 ‘영웅’은 어둠 속에서 일곱 발의 총성이 들리고 화면에 일곱 개 별이 박히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북두칠성에서 딴 안중근 의사의 ‘응칠’을 하얼빈에서 쏜 탄환 ‘일곱 발’과 매치시킨 흥미로운 연출입니다.
그런데, 일곱 발이라고요? 여러분, 안 의사가 하얼빈역에서 모두 몇 발의 탄환을 쐈다고 알고 계십니까? 저는 분명 어렸을 적 위인전에서 ‘여섯 발’이라고 기록한 것을 진실로 알고 있었는데, 자료마다 그 숫자가 모두 달랐습니다. 그래서 어느 역사학자에게 전화로 물어본 적이 있었는데 대답이 이랬습니다.
“그게 뭐가 중요하다는 거예요!”
그의 말이 맞을 수도 있겠지만, 신문사 입사 뒤로 20년 넘게 육하원칙과 팩트의 중요성을 신조처럼 여기고 살아온 저로서는 어쩐지 그의 모습이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이라기보다는 해석만 중요시하는 평론가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안중근이 쏜 탄환은 모두 일곱 발이었습니다. 권총은 벨기에제(製) 브라우닝 M1900였죠. 이 총은 탄창에 일곱 발이 들어가기 때문에 보통 ‘7연발’로 알려져 있는데, 사실은 약실에 한 발을 더 끼울 수 있기 때문에 ‘8연발’이었습니다.

▲브라우닝 M1900 권총의 내부 구조. 탄창에 탄환 7발을 넣을 수 있지만 약실에 한 발을 더 끼울 수 있기 때문에 8연발이 된다.
안 의사는 이 총을 품고 하얼빈역으로 가기 전에 여덟 발을 모두 채웠습니다. ‘천주교 신자여서 일부러 십자(+)를 새겼다’는 통설이 있었습니다만, 재판에서 안 의사의 동지 우덕순은 “연해주와 시베리아에서 흔히 파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미 시장에 나올 때 그렇게 돼 있었다는 것입니다. 총탄이 명중했을 때 회전하면서 파고들어 살상력을 높이는 효과를 노려 제작자나 유통 관련자가 그렇게 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안 의사가 일부러 십자를 판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얼빈에 도착한 이토가 기차에서 내린 것은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이었습니다. 플랫폼에서 러시아 의장대를 사열한 이토가 열차 쪽으로 되돌아올 때, 찻집을 뛰쳐나온 안중근은 러시아 의장대 뒤로 바싹 붙어 서 있다가 이토와의 거리가 10보 정도 됐을 때 권총을 뽑아들고 의장대 병사들 사이로 이토를 향해 모두 네 발을 쐈습니다.

탄환 4개 중에서 3개가 이토에게 명중했습니다. 빗나간 한 발은 일본 주(駐)하얼빈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川上俊彦)의 오른팔을 맞혔습니다. 권총에 남은 탄환은 이제 4개. 안중근은 그걸 마저 다 쏘려 했습니다.
그 이유를 그는 옥중에서 집필한 자서전 ‘안응칠 역사’에서 이렇게 술회했습니다. “수염이 흰 조그만 노인을 이토라고 판단해 단총을 뽑아들고 4발을 쏜 뒤, 잘못 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의젓해 보이는 다른 자에게 3발을 더 쐈다.”
다시 쏜 3발은 어떻게 됐을까요. 하나는 이토의 수행비서 모리 야스지로(森泰二郞)의 왼쪽 허리를 관통해 배에 박혔습니다. 또 하나는 이미 위에서 언급한 만철 이사 다나카 세이지로의 왼쪽 다리를 맞혔습니다. 유일하게 남아 있는 탄환이죠. 그리고 아마도 마지막 탄환이었을 남은 하나는, 옷감 털이 십자 홈에 낀 채 플랫폼 위에 떨어져 있는 것이 발견됐습니다. 일본 검찰관은 이 탄환이 만철 총재 나카무라 제코(中村是公)의 외투와 바지를 뚫은 뒤 ‘다른 사람’의 바지를 또 한번 관통해 떨어진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바지 하나만 총알에 관통당한, 대단히 운이 좋았던 마지막 사람은 과연 누구였을까요. 바로 귀족원 의원 무로다 요시아야. 그의 이름을 달고 나온 책이 음모론의 근원이 됐던 그 인물입니다. 참 희한한 일이죠.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던 중국 헤이룽장성 하얼빈역 플랫폼. 의거 현장임을 알리는 알림판은 전혀 없고 아무런 설명 없이 바닥에 타일 표시만 돼있다. 왼쪽 하단의 삼각형(▷)타일로 표시된 곳이 안중근 의사가 총을쏜 지점이고, 역무원이 서있는 곳 바로 앞 마름모(◇) 타일로 표시해 놓은 지점이 이토 히로부미의 피격 장소다. 두 지점의 거리는 약 6m다. /조선일보 DB
그렇다면 총 속에 있던 마지막 제8탄은 어떻게 됐을까요? 총신이 화약 연기로 검게 그을린 가운데 총구 안에 장전된 채로 남아 있었습니다. 쏘지 못한 것이죠. 법정에서 ‘혹시 자결하려고 남겨 놓은 게 아니냐’는 질문을 받자 안 의사는 이렇게 진술했습니다.
“내 목적은 한국의 독립과 동양평화의 유지에 있었고, 아직 목적을 달성했다고 할 수 없기 때문에, 이토를 죽여도 자살할 생각 따위는 없었다.”
그렇다면 주변의 러시아 병사들에게 제압당했기 때문에 마지막 탄환을 쏘지 못한 것이고, 쏜 탄환 중 제7발이 누구도 맞히지 못하고 바닥에 떨어진 것도 6발을 쏜 뒤 이미 제압당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결론적으로 총 8발 중 6발을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쏴 명중시켰고, 한 발은 총신 속에, 한 발은 차디찬 역사(驛舍) 바닥에 남겼던 것입니다.

▲이토 히로부미 저격 후 체포 당시의 안중근 의사.
④거사를 마친 안중근은 어떤 행동을 취했나?
거사를 끝내고 러시아 병사들에게 제압당한 안중근은 어떤 행동을 취했을까요. 분명 어린 시절 위인전을 읽었을 많은 사람들의 기억은 제각각 다릅니다만 대체로 이렇게들 기억합니다.
“태극기를 휘두르며 ‘대한독립 만세’라고 외쳤다.”(말이 되지 않지만 ‘대한민국 만세’라 쓴 책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과 다릅니다. 안중근은 하얼빈역에 들어설 때 태극기를 지니고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최대한 일본인처럼 보여야 했기 때문에 검문에서 적발되기 쉬운 태극기 같은 소지품을 가지고 갔을 리가 없습니다. 이미 물리적으로 제압돼 마지막 탄환을 쏘지 못한 상황에서 손으로 무엇을 들고 흔들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뭔가 큰 소리로 외친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그것은 “코레아 우라!”였다고 합니다. 러시아어로 ‘한국(대한제국) 만세’란 뜻이죠. 만약 한국어로 외쳤다면 알아들을 사람이 없었을 테니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국제 공용어인 에스페란토로 ‘코레아 후라’라고 한 것이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뜻은 같습니다.

▲서울 여의도 국회 헌정기념관 앞에서 열린 안중근 의사 동상 제막식에서 역사어린이합창단이 태극기를 흔들며 공연을 선보이고 있다.
⑤이토는 죽으면서 ‘바카야로’ 욕설을 했나?
사실 저도 얼마 전까지 이 얘기가 진짜인 줄 알았습니다. 상당히 많은 국내 전기류에서조차 사실인 듯 실은 이야기니까요. 이토가 죽기 직전 “나를 쏜 자가 누구냐?”고 묻자 수행원이 “조선인입니다”라고 대답했고, 이 말을 들은 이토는 “바카야로(바보 같은 놈)”라 내뱉고 숨을 거뒀다는 얘기죠.
심지어 이 얘기는 최근 출간된 김훈 소설 ‘하얼빈’에서도 사실인 것처럼 묘사됐습니다!
이 말의 속뜻은 ‘나는 조선을 근대화시키려고 한 것인데 나를 죽이다니 멍청한 일이군’ 또는 ‘내가 살아있어야 조선이 아주 멸망하지는 않을 것인데 이제 너희들은 꼼짝없이 망했다’라는 의미로 해석되기도 했습니다. 이토의 사망으로부터 불과 10개월 뒤 대한제국은 멸망했으니까요.
하지만 이토가 살아있었다고 해서 대한제국은 더 숨이 붙어 있을 수 있었던 것일까요? 학자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허동현 경희대 한국현대사연구원장은 “을사늑약에서 경술국치까지 5년(1905~1910)이란 시간이 지체된 것은 만주 이권을 둘러싼 일본·러시아·미국의 각축전 때문이었을 뿐”이라고 했습니다.
1909년의 상황에서 이미 대한제국은 내정 관할권과 군대를 상실한 상태였고, 이미 서울에 설치된 통감부는 총독부와 다를 바 없는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이토의 하얼빈 방문은 러시아가 미국과 손잡고 일본을 압박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안중근 의거가 일어났던 1909년 10월에 대한제국은 사실상 멸망한 나라였던 것입니다.

▲1904년 2월 3일 미국 '펀치'지 삽화. 러일전쟁 직전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서 중립선언을 한 대한제국 처지를 묘사한 삽화다.
그런데 이토가 그런 말을 한 것 자체는 사실이었을까요? 아니, 그 말의 출전은 과연 어디였을까요?
바로 앞에서 나온 그 괴서, ‘무로다 옹의 이야기’였습니다. 하지만 이미 설명했듯이 무로다는 이토 사망 당시 현장에 있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이토가 했다는 그 얘기를 전해 들었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것도 불가능했습니다. 이토를 저격한 사람이 한인이라는 사실은 이토의 시신을 실은 열차가 출발한 다음에야 밝혀졌기 때문에 이토는 죽는 순간까지 그 사실을 알 수 없었습니다.
최서면 원장은 1984년 이토 히로부미의 손자로부터 “할아버지는 총격 직후 사망했기 때문에 유언은 한 마디도 없었다”는 확인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바카야로’는 이토가 안중근에게 한 말이 아니라, 1942년에 그런 말을 지어낸 이름 모를 일본인에게 지금 제가 해주고 싶은 말입니다.

▲일본 시인 이시가와 다쿠보쿠.
그러나 그렇게 한심한 일본인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시가와 다쿠보쿠(石川啄木·1886~1912)라는 시인이 있었습니다. 비록 ‘테러리스트’라는 호칭이 우리의 마음에 들지 않긴 합니다만, 그의 시 ‘코코아 한 잔’은 안중근 의사를 존경하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합니다.
나는 안다.
테러리스트의 슬픈 마음을―
말과 행동으로 나누기 어려운
단 하나의 그 마음을
빼앗긴 말 대신에
행동으로 말하려는 심정을
자신의 몸과 마음을 적에게 내던지는 심정을―
그것은 성실하고 열심인 사람이 늘 갖는 슬픔인 것을.

▲지난해 3월 26일 서울 남산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 순국 112주기를 맞아 견학 온 학생들이 참배를 하고 있다. /뉴스1
안중근 의사가 감옥에서 쓴 ‘동양평화론’은 지금 읽어봐도 놀라울 뿐입니다. 이 책은 제국주의 서양 열강의 침략을 막기 위해 한·중·일 3국이 협력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일본이 뤼순(旅順)을 중국에 돌려 주고 3국이 공동으로 관리하는 군사 항구를 만들어 평화회의를 조직하자는 것입니다. 3국 청년으로 구성된 군대를 만들고 이들에게 2국 이상의 언어를 배우게 하며, 공동 중앙은행을 설립해 공동 화폐를 만들자고 했습니다. 유럽연합(EU)을 연상케 하는 평화 체제 구상이, 과연 어려서 한학 교육을 받은 30대 초반의 청년에게서 나올 수 있었는지 경이롭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오는 26일은 안중근 의거 113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조선일보 유석재의 돌발史전
◆10.28 박정희는 정말 일본에 독도를 ‘팔아넘겼나’?
1965년 한일회담 ‘독도 배제’의 전말

지난 25일은 제122주년 ‘독도의 날’이었습니다. 대한제국이 1900년 10월 25일 칙령 41호를 통해 독도가 울릉도의 부속 섬이라는 사실을 천명한 일을 기념한 날이죠.
그런데, 아직까지도 일본이 독도 영유권 주장을 멈추지 않고, 독도가 한·일 사이의 분쟁지역처럼 된 이유는 광복 이후 독도 문제를 제대로 처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없지 않습니다.
1965년 한일회담에 대해서도 비난하는 목소리가 있습니다. 한마디로 “박정희가 독도를 일본에 팔아먹었다”는 것이죠. 이건 꽤 오래 전부터 얘기가 나왔던 것인데, 심지어 유신 시절엔 마을 잔치에서 이런 말을 했다가 실제로 잡혀간 사람도 있었습니다(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22/0003377986?sid=102).
도대체 이런 말이 나오게 된 유래는 무엇이었을까요. 대략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1)김종필과 박정희의 ‘독도 폭파론’.
(2)한일회담에서 독도가 끝내 언급되지 않은 것.
(3)한·일 간의 막후에서 이뤄졌다는 ‘독도 밀약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이 세 가지는 모두, ‘박정희 전 대통령이 대한민국의 독도 영유권을 저해했다’는 것과는 거리가 먼 일이었습니다. 지금부터 하나하나 따져보도록 하죠.

▲1965년 12월 17일 한일회담 비준서에 서명하는 박정희 대통령.
①JP와 박정희는 독도를 폭파하려고 했나?
‘영토의 실효적 지배’를 놓고 볼 때, 2차 세계대전 전후(戰後) 독도의 영유권을 놓고 벌인 한국과 일본의 경쟁은 사실상 1955년에 종결됐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1952년 1월 18일 국무원 고시 제14호로 ‘인접 해양에 대한 주권에 관한 선언’을 발표하고 해안에서부터 평균 60마일(약 97킬로미터)에 이르는 해역에 ‘평화선’을 그었습니다. 독도는 평화선 안에 포함됐습니다. 이것은 선언에 그치는 조치가 아니라, 1957년까지 평화선을 침범한 일본 어선 152척과 어민·선원 2025명을 나포했습니다.
이것이 6·25 전쟁의 혼란 중에 일어난 대한민국 정부의 적극적인 조치였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얼핏 생각하면 ‘전쟁을 틈타 일본이 독도 영유권을 빼앗아갔다’는 게 자연스럽다고 여길 수도 있겠지만(실제로 그렇게 착각하는 외국인도 있습니다)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전쟁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이 자국 영토인 독도에 대한 실질적 지배권을 확보했다’가 실제 역사였던 것입니다.
이후 1953년부터 1954년까지 일본 측이 독도에 무단 상륙해 자기 영토라는 표지판을 세운 적이 몇 번 있었지만, 1955년 1월부터는 경북 울릉경찰서 산하의 무장 경찰 ‘독도경비대’가 독도에 주둔해 그 이후 지금껏 한국 경력(警力)이 독도를 지키게 됐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1955년부터 현재까지, 독도가 대한민국의 법적인 동시에 실질적인 영토였다는 사실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1954년 8월 28일 독도에서 촬영한 독도의용수비대의 모습. 1953년 4월 창설돼 독도 경비에 나섰으며, 이들 중 9명이 경찰에 특채돼 1955년 1월부터 독도에 상주하면서 경비를 담당했다.
자, 그런데 말이죠.
1961년 5·16 이후 일본과 한일회담을 교섭하는 과정에서 ‘JP의 독도 폭파론’이 불거지게 됩니다. 이것이 처음 알려진 것은 1962년 11월 13일 일본 하네다 공항 기자간담회에서 김종필(1926~2018) 중앙정보부장이 한 말 때문이었습니다. JP는 오히라 마사요시(1910~1980) 일본 외상과 회담을 마치고 귀국길에 오른 참이었습니다.
“농담으로는 독도에서 금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갈매기 똥도 (필요) 없으니 폭파해버리자고 말한 일이 있다.”
물론 JP가 그렇게 후대 내내 민감하게 여겨질(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지탄의 대상이 될) 사안을 공항에서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툭 던진 것은 결코 현명한 일이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훗날 JP는 그 발언을 ‘폭파해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일본 땅이 되지는 않게 하겠다’는 뜻이었다고 설명한 적도 있지만, 당시 상황에 대한 가장 구체적인 기록은 방송작가 김석야가 쓴 ‘실록 박정희와 김종필’(1997)입니다. 당시 JP의 발언은 이런 것이었다고 합니다.

▲1964년 3월 28일, 한일회담의 막후 지원 활동을 벌이다 귀국한 김종필 공화당 의장이 김포공항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독도 문제가 한·일 두 나라 사이에 장애가 된다면 해결 방안이 있긴 있습니다. 제가 한국에 돌아가서 독도를 한국 공군의 연습장으로 삼도록 하겠습니다. 공군기를 동원하여 며칠간만 폭격하면 독도는 영원히 지도상에서 없어지고 말 겁니다. 그리고 우리는 후세에 대한 변명을 위해서 ‘독도는 일본 측에서 한일회담의 미끼로 사용하기 때문에 지구상에서 완전히 없애버렸다’고 기록에 남기겠습니다. 그러면 우리 두 사람의 이름도 한·일 두 나라에 영원히 남게 되겠군요.”
어떤 자료를 봐도 이 발언은 정말 독도를 폭파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일본이 이 문제를 다시 꺼내지 않도록 하기 위한 외교적 수사였다고 해석해야 할 발언이었습니다. 그것을 알게 해 주는 또 하나의 근거는 1962년 11월 12일의 김-오히라 2차 회담에서 JP가 돌연 독도의 ‘제3국 조정안’을 내세웠다는 것입니다. 사실 겉으로만 보면 이것이야말로 정말 위험천만한 얘기일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의 의사와는 무관한 독단적 행동이었다는 증거가 남아 있습니다. 당시 한국 외무부는 이렇게 보고했기 때문입니다. “김 부장의 의도는 국제사법재판소 제소를 위한 일(日)측의 강력한 요구에 대하여 몸을 피하고 사실상 독도 문제를 미해결 상태로 유지하기 위한 작전상의 대안으로 시사한 것이라고 생각됨.”

△1962년 11월 12일 김종필 당시 중앙정보부장(왼쪽)이 일본의 오히라 마사요시 외무대신과 회담을 갖고 있다.
이후의 상황은 ‘제3국’, 사실상 미국에 조정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독도 문제에 대해 당시 미국은 줄곧 일본 편이었고 솔직히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학술적 검토를 바탕으로 한 입장이 아니라 ‘전략상 그곳이 일본 영토였으면 좋겠다’는 것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JP의 발언 이후 일본은 당황했고, 다양한 대안이 출현하면서 ‘국제사법재판소 제소’라는 당초의 일관된 전략이 흔들렸던 것입니다.
한국 측 회담 당사자들이 처음부터 면밀하게 계획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손자병법’ 시계(始計)편에 나오는 ‘난이취지(亂而取之)’ 전략을 연상케 합니다.
“적을 혼란시켜서 취한다.”
결과적으론 그렇게 됐습니다. 누구도 독도를 폭파하지 않은 채.
그런데 1965년 한일회담이 이뤄지기 직전, 이번엔 박정희 대통령이 ‘독도를 폭파하고 싶다’는 발언을 합니다. 이건 또 무엇이었을까요? 미 국립문서보관소에 있다가 2004년 밝혀진 국무부의 비망 대화록에서 나온 것입니다. 1965년 5월 27일 딘 러스크 미국 국무장관이 박정희 대통령을 만났을 때, 박 대통령은 “(일본과) 수교 협장에서 비록 작은 것이지만 화나게 하는 문제 가운데 하나가 독도 문제”라면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독도를 폭파시켜 없애버리고 싶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1963년 11월 고(故)케네디 대통령 추도식 참가차 노스웨스트 항 공기를 타고 미국을 찾은 박정희 대통령(당시 국가재건회의 의 장)이 러스크 국무장관과 악수하고 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다시 설명하겠지만, 이것은 JP와 마찬가지로 정말 독도를 폭파하겠다는 발언이 아니었습니다. 그건 러스크와 박정희의 다음 대화에서 드러납니다. 러스크가 박정희 입장에서 스스럼없이 자기 흉금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닌 이상, 박정희의 말은 본심이 아니라 철저히 외교적 목적을 지닌, ‘독도가 한일협상의 의제가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발언이었습니다.
더구나 러스크는 한국의 독도사(史)에 있어서 대표적인 빌런 중 한 사람입니다. 그는 바로 1951년 차관보 시절 ‘독도는 역사적으로 한국의 일부가 아니었다’는 일본 주장을 그대로 복사한 소위 ‘러스크 서한’을 쓴 인물이었습니다. 이런 자가 독도 문제를 한국에 유리하게 구상할 리 없었고, 실제로 러스크는 박정희의 그 발언 다음에 진짜 의도를 드러냅니다. ‘당신이 골치아파하는 독도에 대해 내가 해결책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였죠.
“한국과 일본이 공동으로 관리하는 등대를 세우고 그 섬이 누구에게 속하느냐는 문제를 결정하지 말고 그대로 남겨둬서 자연히 문제가 사라지게 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요즘 일부 국내 논자에게서도 유사한 발언을 볼 수 있는 ‘독도 한일 공동소유론’이었습니다.
박정희의 대답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한·일 공동 등대 설치 방안은 실행되지 않을 것입니다(A joint light house with Korea and Japan just would not work).”
미국의 ‘독도 공동 소유’ 제안을 명백히 거부했던 것입니다.
박정희의 ‘폭파 발언’이 가져온 효과는, 은근슬쩍 ‘공동 소유 카드’를 들이밀었던 미국이 다시는 독도에 개입하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이후 미국은 더 이상 독도에 관한 중재를 하지 못했습니다. 더 이상 시간적 여유가 없었습니다. 러스크가 박정희와 만난 것은 1965년 5월 27일, 한일협정 기본 조약의 가조인은 한 달도 지나지 않은 6월 22일에 이뤄졌습니다. ‘독도’가 과연 어떻게 됐는지는 뒤에서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여기서 좀더 언급할 것이 있습니다. 당시의 전후 상황과 박정희의 ‘공동 소유 거부’ 발언, 이후 실제로 전개된 한일회담의 독도 관련 사항들을 모두 빼놓은 채 ‘폭파하고 싶다’는 말만 단장취의(斷章取義)해서 “박정희가 독도를 폭파하고 싶다는 말을 했다!”며 정치적 공격을 했던 사람이 실제로 있었습니다. 2012년 8월 2일 경북 안동 독립운동기념관에서 야당의 대선 예비후보가 여당 후보를 비판하기 위해 박정희 대통령이 러스크에게 한 말 중에서 ‘폭파’ 부분만 빼서 언급했던 것이죠.
바로 이 인물입니다.

▲2012년 8월 2일 민주통합당 문재인 예비후보가 경북 안동 임하면 안동독립운동기념관을 찾아 분향 후 기념관을 둘러보고 있다. 그는 이 자리에서 "독도 폭파 발언을 했다"며 박정희 전 대통령을 비판했다.
②박정희는 협상에서 ‘독도’를 일부러 뺐나? 도대체 왜?
그렇다면 JP가 협상 과정에서 잠시 무시했다는 ‘박정희의 의도’는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요?
그것은 1962년 11월 8일, 박정희가 JP에게 내린 훈령의 제3항에 드러납니다. “일본 측에서 독도 문제를 다시 제기하는 경우에는, 같은 문제가 한일회담의 현안 문제가 아님을 지적하는 동시에, 일본 측이 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한국민에게 일본의 대한(對韓) 침략의 결과를 상기시킴으로써 회담의 분위기를 경화(硬化)시킬 우려가 있음을 지적할 것.”
독도 문제는 협상의 카드가 될 수 없음을 단호하고 분명하게 밝힌 것이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1961년 이케다 총리와 회담을 했던 박정희가 평화선 문제가 카드가 될 수 있음을 내비쳤다가 국내에서 큰 저항에 부딪쳤던 데서 온 학습효과일 수도 있지만, 이후 한일협상에서 한국은 독도를 실질적인 카드로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폭파’ 같은 것을 실제로 계획하거나 실행한 일도 없습니다.
일본은 한일회담에서 독도 문제의 국제사법재판소 제소를 합의하는 것이 불가능하는 판단을 하게 됐습니다. 그 대신 택한 것이 ‘분쟁 해결에 관한 교환 공문’이었습니다. 한일협정 기본 조약이 가조인된 1965년 6월 22일 당일에 나온 이 공문의 내용은 이랬습니다.

▲1965년 6월 22일 일본 도쿄의 총리 관저에서 열린 한일협정 조인식 장면. 한국측은 공식적인 측면을 강조해 외무성 건물에서 하기를 희망했으나 일본측은 정치적인 상징성을 고려해 총리 관저에서의 서명을 고집했다. /조선일보DB
“달리 규정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 양국 간의 분쟁은 우선 외교상의 경로를 통하여 해결하기로 하며, 이에 의하여 해결할 수 없을 경우에는 양국 정부가 합의하는 조정 절차 또는 중재 절차에 의하여 그 해결을 도모하기로 한다.”
이 문장에서 ‘독도’라는 지명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습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훈령을 받은 이동원 외무장관이 끝까지 일본 측을 압박한 결과였습니다. 이 장관은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서명을 연기해도 좋다”는 입장이었고, 언론 발표 시점 직전에서야 사토 에이사쿠 총리의 정치적 결단으로 ‘독도’를 뺐습니다.
이것은 무슨 의미였을까요?
6월 22일 당일 주일 한국대사는 본국으로 이런 긴급 전보를 보냈습니다.
“이상과 같이 양해 사항을 한 것은 일본이 종래에 주장한 독도라는 문구 삭제를 통해 독도 문제 해결을 위한 것으로, 당초 일본이 요구하였던 절치상 합의에 대한 시간적 구속, 법적 구속, (상대국 제소) 결정에 대한 (아측의) 복종 의무 등을 완전히 해소시킨 것임.
따라서 아국(我國)의 합의가 없는 한 중재 수속은 물론 조정 수속도 밟지 못하게 되는 것이며, 독도 문제의 해결은 실질적으로 아측의 합의 없이는 영원히 미해결의 문제로 남게 되는 것임.”

▲독도 경찰 경비대원들이 대형 태극기 앞에서 K-2소총을 들고 국토 수호 의지를 다지고 있다.
이제 아무리 일본이 독도 도발을 하더라도 ‘독도가 대한민국의 영토’라는 사실은 흔들리지 않게 된 것이고, 일본이 이 현상을 타개할 모든 방법이 (무력 침략 말고는) 봉쇄돼 버렸던 것입니다. 당시 아사히신문은 이런 논평을 했습니다. “한국이 ‘다케시마는 한국 영토’라는 태도를 견지하는 한 실제로 분쟁을 해결할 수 있는 전망은 극히 작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호사카 유지 세종대 교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1962년 6월 22일 일본 정부는 사실상 독도 영유를 포기했다.”
그런데, 이것도 문제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때 일본과 협상해서 ‘독도는 한국 영토’라는 것을 분명히 인정 받고 다시는 도발을 못하도록 해야 하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자...... 여기서 잠깐만요, 잠깐만 생각해 보시죠.
1965년 한일회담 당시 우리가 독도를 협상 테이블에 의제로 올려놓아야 할 필요가 과연 있었을까요? 역사적으로 분명한 우리 영토이고, 1955년 이래 우리 경찰이 주둔하고 있는 실질적인 대한민국 영토인 독도를 왜 협상 테이블에 올려놔야 하는 것일까요?
사실 ‘대한민국은 독도를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다’는 것도 따지고 보면 좀 우스운 얘깁니다. 다음 문장을 보시죠. “대한민국은 제주도를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다.” 뭔가 좀 이상하다고 느낀다면 다음 문장을 또 보죠. “대한민국은 여의도를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다.”
독도, 제주도, 여의도 모두 대한민국의 주권이 미치는 영토라는 데는 단 0.01%도 차이가 없습니다. 일본이 자기 영토라고 억지 주장을 한다고 해서 왜 한국이 독도를 회담의 의제로 올려야 하는 것일까요? 왜 ‘이 섬은 우리 영토가 아니라 일본과의 분쟁 지역이다’라고 시인해야 하는 걸까요?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이동원 외무장관(왼쪽)과 시이나 일본외상 등 양국 대표가 1965년 6월 22일 한일기본조약에 서명하고 있다. 조선일보 DB
당시 일본은 극우 세력이 아니라 사회당 등 혁신 세력이 ‘한·미·일 삼각 군사동맹으로 대(對) 공산권 봉쇄 정책을 하려는 게 아니냐’며 한·일 국교 정상화를 반대하고 있었고, 독도 문제의 해결을 요구한 것도 이들이었습니다. ‘다케시마는 일본 땅’이라는 목소리를 크게 내던 주체가 일본 우익이 아니라 좌익이었다는 건 지금 보면 이채롭습니다. 당시만 해도 독도에 대해 큰 관심이 없었던 일본 정부가 독도 문제를 물고 늘어졌던 것은 좌파의 눈치를 보기 위한 ‘국내용’ 정책의 성격이 컸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독도를 포함한 양국 분쟁 문제는 따로 처리하자’며 여지를 두는 듯하다가 아예 협상 테이블에서 독도를 내려 놓는 고도의 외교적 기술을 한국이 구사했던 것입니다. ‘독도를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도록 해 줄 테니 청구권 자금을 올리라’는 식의 질 낮은 협상도 하지 않았습니다. 1965년 당시 박정희는 불과 48세, 김종필과 이동원은 39세였습니다.
홍일송 전 미국 버지니아주 한인회장을 2019년 인터뷰한 적이 있습니다. 미 하원의 일본군 위안부 결의안과 버지니아주의 동해 병기 법안 채택을 성사시킨 인물이죠. 그는 “동해 문제와 독도 문제에 대한 대응 방법은 같을 수가 없다”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기 100불짜리 지폐가 한 장 있다고 합시다. 그 100불이 내게 있지 않고 남의 손에 있다면 나는 그 돈을 얻기 위해서 큰 노력을 기울여야겠죠. 그런데 100불이 이미 내 손에 있다면 어떨까요? 나는 그 100불을 잃지 않도록 최대한 조용히 지켜야 할 겁니다. 동해 표기가 ‘남의 손에 있는 100불’이라면 독도는 ‘내 손에 있는 100불’입니다. 독도를 여기저기에 떠들면서 지킬 필요는 없죠. 이미 우리가 지배하고 있는 영토니까요.”

▲홍일송 전 미국 버지니아주 한인회장. /박상훈 기자
③'독도 밀약’은 허깨비다
2007년 나온 한 보도에 따르면 1965년 1월 1일 한국의 정일권 국무총리와 일본의 고노 이치로 건설대신 사이에 막후 협상이 이뤄졌고, 핵심 내용은 ‘독도 문제는 해결하지 않는 것을 해결한 것으로 간주한다’는 내용이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소위 ‘독도 밀약’이라는 것이죠.
하지만 증언만 있을 뿐 이 문서의 존재는 전혀 확인되지 않았고 앞으로도 별로 그럴 전망이 없습니다. 정일권과 고노를 연결하는 역할을 맡았다는 김종필의 형 김종락은 1980년 신군부가 권력을 잡은 뒤 전두환이 두려워서 밀약을 쓴 종이를 불태워버렸다고 합니다. 일본에서도 이 문서는 확인되지 않았을뿐더러, 일본 정부는 이 밀약에 대해 공식적으로 부인하고 있습니다.

▲김영삼 정부 때인 1997년 4월 독도 접안시설의 확장 공사 모습. /조선일보 DB
학계에선 이렇게 말합니다. “비밀문서의 법적 구속력은 없고, 한일회담에서 독도 문제는 한국의 의지대로 실효적 지배에 의한 영토 주권의 방해를 받지 않았다.” 밀약의 3조는 ‘현재 한국이 점거한 현상을 유지하되 경비원을 증강하거나 새로운 시설을 건축하거나 증축하는 일은 하지 않는다’였는데, 김영삼 정부 시절 독도에 접안 시설을 설치한 일은 이것을 정면으로 ‘위반’한 게 아닙니까? 일본이 당시 항의하긴 했지만 ‘한국 너희 왜 밀약대로 하지 않느냐, 약속 위반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만약 밀약 같은 것이 실제로 존재했었다고 해도 이후의 한·일 관계사에서 효력을 미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밀약의 1조라고 알려진 부분, ‘독도는 앞으로 한·일 양국 모두 자국의 영토라고 주장하는 것을 인정하고, 동시에 이에 반론하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는 것을 곰곰이 뜯어 보면, 현재의 상태에서 일본이 한국의 독도 영유권을 사실상 승인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일본이 위조된 독도 밀약의 쪽지라도 내보이지 않고 ‘그런 거 없다’고 하는 이유를 충분히 짐작할만한 대목입니다.

▲독도 전경.
역사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이승만을, 박정희를, 김종필을 비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독도 문제에 관해서만큼은 이렇게 말해야 할 것입니다. “그들은 결국 독도를 지켜냈다”고 말입니다.
조선일보 유석재 기자
◆11.04 이봉창의 ‘두 얼굴’... 과연 어느 쪽이 진짜인가
보물 지정예고 자료에 등장한 뜻밖의 사진

문화재청에서 지난 1일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 예고한 문화재 중 20세기의 유물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속에 적힌 내용과 역사적 의미가 아니라면 그다지 문화재적 가치가 없었을 종이 한 장. 그것은 1931년 12월 13일 작성된 ‘이봉창 의사(義士) 선서문’이었습니다.
‘’나는 赤誠(적성)으로써 祖國(조국)의 獨立(독립)과 自由(자유)를 回復(회복)하기 爲(위)하야 韓人愛國團(한인애국단)의 一員(일원)이 되야 敵國(적국)의 首魁(수괴)를 屠戮(도륙)하기로 盟誓(맹서)하나이다. 大韓民國(대한민국) 十三年(십삼년) 十二月(십이월) 十三日(십삼일) 韓人愛國團(한인애국단) 앞 宣誓人(선서인) 李奉昌(이봉창)’

▲이봉창 의사가 1932년 1월 일왕을 향해 폭탄을 투척하기 직전인 1931년 12월 작성한 선서문. /문화재청
여기서 ‘적성’이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참된 정성’이란 뜻이고, ‘대한민국 십삼년’이란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을 대한민국 원년으로 삼는 연호이니 1931년이 됩니다. ‘적국의 수괴’란 누구였을까요. 바로 일왕 히로히토(裕仁)였습니다. 일제 침략의 맨 꼭짓점에 있는 일왕을 저격하겠다는 결의였습니다. ‘한인애국단’이란 당시 임시정부의 김구가 창설한 독립운동 단체였습니다.
이날 선서문 서명을 마친 이봉창(1900~1932) 의사는 양손에 수류탄을 들고 선서문을 가슴에 단 채 기념사진을 촬영했습니다. 촬영 장소는 한인애국단의 임원이자 안중근 의사의 막냇동생인 안공근의 집이었습니다. 이 장소의 의미는 큽니다. 이렇게 이봉창은 의거(義擧)로써 안중근 의사를 계승한다는 뜻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때만 해도 김구와 안공근의 관계는 무척 좋았습니다. 저는 안공근의 실종에 김구 세력이 관련됐다는 설과 그를 뒷받침하는 증언을 소개하는 기사를 쓴 적이 있습니다.(https://www.chosun.com/entertainments/music/2022/08/26/76EDBNQ3EFESTLS4YQPC5RDX4M/)
그런데, 이 ‘보물 지정 예고’ 보도자료에서 문화재청이 당시 촬영한 사진이라며 첨부한 사진이 있었습니다.
어라?

▲문화재청이 2022년 10월 31일 배포한 보도자료 중 '이봉창 선서문'과 관련된 사진자료.
분명 의아해하실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내가 기억하는 이봉창 의사 사진은 저 사진이 아니었는데!” “그건 거사를 앞두고 활짝 웃고 있는 표정이었는데!” “저렇게 뭔가 우울하고 불안한 표정이 아니었는데!” “뭔가 이상한데...!”
그렇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여러분이 기억하고 계실 사진은…
바로 이 사진이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십시오.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 사진에서 이봉창 의사의 얼굴은 몸에 비해 좀 커서 신체 비례가 다소 부자연스럽습니다. 이것은 포토샵이 없던 옛날 사진에서 종종 나타나는 현상이긴 합니다만, 태극기의 경계선과 손, 옷소매 부분은 누군가 펜으로 그린 흔적이 선연하게 보입니다. 선서문은 당시 카메라의 화질로 촬영됐다기엔 너무나 선명한데다 맨 위 사진에 나온 선서문 원문과 비교하면 좀 다릅니다. 누군가 사진 위에 선서문의 내용을 쓴 것으로 보입니다.
이제 두 사진을 비교해 보겠습니다.

▲왼쪽 사진을 사진A, 오른쪽 사진을 사진B라고 할 때, 사진B가 실제 현장에서 촬영된 원래 사진이라는 것이 보다 분명히 드러납니다. 앞에서 비친 조명을 받아 왼손과 오른쪽 뺨을 밝히고 있고, 선서문의 글씨는 거의 보이지 않으며, 태극기의 가장자리도 선명하지 않고, 무엇보다 광원 반대쪽인 벽과 태극기에 인물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뜻밖인 것은, 수류탄을 들고 있는 그의 표정이 대단히 어둡고 근심 어린 듯한 모습이라는 데 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뤘던 것이 배경식 역사문제연구소 부소장이 2008년에 썼던 이봉창 의사의 전기 ‘기노시타 쇼조, 천황에게 폭탄을 던지다’(너머북스) 였습니다. 제목의 기노시타 쇼조(木下昌藏)란 이봉창 의사가 일본 회사에 취직하기 위해 지었던 일본식 이름이었습니다. 역사문제연구소는 계간 ‘역사비평’을 발간하는 학술단체고, 배경식 부소장은 성균관대 사학과 출신의 연구자입니다.
그는 사진A에 대해 이렇게 분석했습니다. “다른 사진에서 활짝 웃는 얼굴을 오려 붙인 합성 사진이다. 수류탄을 든 두 손과 배경의 태극기는 그린 것이 분명하고, 선서문도 원본의 필체와는 다르며, 자세히 보면 얼굴의 목선도 보이지 않는다.”
얼굴만 오려 붙였다는 그 ‘다른 사진’으로 추정되는 사진은 바로 이것입니다.

한인애국단의 의열활동 기록을 담은 ‘도왜실기(屠倭實記)’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이봉창 의거와 윤봉길 의거가 있던 해인 1932년 상하이에서 처음 출간됐습니다. 그런데 이 초간본 ‘도왜실기’에 실렸던 이봉창의 사진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바로 사진B였습니다. 어둡고 우수에 찬 표정을 띤.
그럼 우리에게 익숙한 사진A는?
이것은 1945년 이전까지 발간된 어느 출판물에서도 나타나지 않는 사진이었다는 것입니다. 1964년 3월에 국내에서 처음 출간된 ‘도왜실기’의 한글판에서야 처음 출현한 사진이라는 것입니다. 그럼 ‘도왜실기’의 초판본에 있던 사진B는? 한글판에선 빠졌습니다. 무슨 얘길까요. 수류탄을 들고 ‘삶을 초월한 듯’ 밝은 미소를 짓고 있는 이봉창의 사진은 광복 이후 ‘도왜실기’를 낸 사람들이 새롭게 창안해 낸 이미지라는 것입니다.
일왕을 향해 폭탄을 던진 독립운동의 영웅 이봉창이 거사 직전 이토록 어둡고 불안 어린 표정을 지었다는 사실을 숨기고, 활짝 웃는 얼굴로 일종의 조작을 했다는 것이 되죠.
그 ‘어두운 표정’은, 죽음을 앞둔 서른한 살 식민지 청년의 차마 숨길 수 없는 한 조각 불안감이 드러난 것이었습니다.
이봉창 의사는 중국에 가기 전까지만 해도 보통 조선 청년이었습니다. 독립운동가 집안에서 자란 사람도 아니었고, 농민운동이나 계몽운동 활동을 벌이던 인물도 아니었습니다. 일본에서 노동자로 생활하며 더 나은 삶을 꿈꿨던 평범한 식민지 청년이었고, 이제 막 수입돼 유행하던 자본주의 소비 문화를 향유한 ‘모던보이’였습니다. 그러던 사람이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차별받는 냉혹한 현실에 눈을 떴고, 김구를 만나 독립운동가가 되는 극적인 반전을 이뤄낸 인물이었다는 것입니다.

▲안석주가 1928년 그린 '모던보이의 산보'. 서양식 모자와 나팔바지 차림 모던 보이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 왼쪽 남자는 바이올린을 들었다.
아직 일제가 조선인에게 창씨개명을 요구하지도 않았던 시기에 일본식 이름을 지녔던 것이 이봉창 의사가 비판을 받을 부분이라는 얘기가 나올 수도 있겠죠. 하지만 이봉창은 어느 시대 어떤 환경에서 태어난 사람이라도 마땅히 할 수 있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것은 ‘주어진 환경에서 열심히 살자’는 것이었습니다. 이봉창은 “일본인의 습관을 빨리 배워 그들과 같은 대우를 받아야겠다”고 결심하고 성공한 인생을 꿈꾸며 불철주야 노력했습니다.
12세 때부터 일본인 상점의 점원으로 일했던 이봉창은 17세였던 1918년 용산역에 취직해 4년 동안 역무원과 운전 수습생 등으로 근무했습니다. ‘용산역에 취직했다’는 것은 요즘 같으면 IT 대기업에 들어갔다는 것에 비견할 수 있습니다. 철도는 당시의 최첨단 교통수단이었고 용산은 한반도 철도의 중심지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는 ‘유리천장’을 느끼게 됩니다. 조선인 직원은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일본인에 비해 승진과 봉급에서 철저히 차별을 겪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용산역에서 하위 기술직급인 기수(技手)직의 경우 일본인의 평균 월급이 126원이었던 데 비해 조선인은 68원으로 겨우 54% 정도에 그쳤습니다. 같은 직급이 그랬다는 겁니다!

▲1946년 용산 철도기지에서 국내 기술자들이 처음 만든 기차 '조선해방자호'. /코레일
이봉창은 ‘차라리 일본으로 가서 일하는 게 오히려 차별이 덜하다’는 말을 듣고 당시엔 ‘내지(內地)’라 불리던 일본으로 갔습니다. 철공소 등 여러 직장에서 성실하게 일했고, 독신으로 살기에는 여유를 누릴 수 있을 정도로 돈을 벌었던 것 같습니다. 여가 시간에는 술 마시고 카페에 가거나 영화를 보고 골프를 치는가 하면, 음악 듣고 마작을 하거나 유곽을 찾는 일도 즐겼다고 합니다. 이런 그를 보고 ‘근대의 최신 소비문화를 누렸던 모던보이’였다고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1928년 11월 일왕 히로히토의 즉위식이 인생 행로를 바꿉니다. 일을 하루 쉬면서까지 즉위식을 보러 갔으나 경찰이 그를 수색하며 한글 편지를 발견하곤 일주일 동안 유치장에 구금했던 것입니다. 지난 일을 곰곰이 돌이켜본 이봉창은 이렇게 결심했다고 합니다.

▲일왕 히로히토.
“조선인 주제에 일본 임금 같은 것을 볼 필요는 없다는 것 아니냐? 이제 우리 이천만 동포의 자주권을 위해 일해야겠다.” 그 누구의 계몽이나 감화를 받지 않고 스스로 겪은 현실 위에서 민족 의식에 눈을 뜨게 됐던 것입니다.
1931년 중국으로 건너간 이봉창은 안공근을 만나 그의 소개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인사들과 알게 됐습니다. 이봉창의 일본어가 너무나 유창했고 상하이에서 만난 일본인들과도 친밀한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심지어 의거를 위해 일본으로 가는 배를 탔을 때 부두로 배웅 나온 일본 경찰도 있었다고 합니다) 많은 임정 인사들은 그를 밀정이 아닌가 의심했습니다. 유일하게 그를 믿었던 사람이 바로 김구였다고 합니다. 그 김구조차도 100% 믿지는 못해 자신의 이름을 당시 쓰던 가명인 ‘백정선’으로 알려줄 정도였습니다.
이 무렵 임정 인사들과 함께 했던 술자리에서 그는 엄청난 말을 해서 좌중을 놀라게 했습니다. “왜황을 도살하기는 극히 용이한데 왜 실행하지 않습니까? 내가 도쿄에 있을 때 어느 날 천황이 행차해서 내 앞을 지나는 것을 보고 ‘이때 내가 총이나 작탄을 가지고 있었다면 어찌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인애국단장 김구(왼쪽)와 윤봉길 의사.
이것은 취중진담이었습니다. 그는 며칠 뒤 김구(이봉창 자신은 여전히 백정선으로 알고 있던)를 만나 의거의 뜻을 밝혔습니다. 이봉창은 김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지난 31년 동안 육신의 쾌락은 대강 맛보았습니다. 이제는 영원한 쾌락을 꿈꾸며 우리 독립 사업에 헌신할 목적으로 상하이로 왔습니다.”
결코 김구가 억지로 시킨 일이 아니었습니다. 윤봉길은 한인애국단에 입단하며 선서문을 쓴 4일 뒤 상하이를 떠나 일본으로 갔습니다. 1932년 1월 8일, 마침내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간담을 서늘케 한 사쿠라다몬(櫻田門) 의거가 일어났습니다. 이봉창은 도쿄 교외에서 열병식을 마치고 돌아가던 히로히토 일왕 일행의 두 번째 마차를 향해 수류탄을 던졌습니다. 폭탄은 명중했지만 일왕은 첫 번째 마차에 타고 있었습니다. 마치 그 옛날 장량의 진시황 암살이 실패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당시 일왕도 여러 대의 가짜 마차를 보안용으로 가동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봉창 의사의 사쿠라다몬 의거 직후의 모습.
저는 이봉창 의거 중 바로 이 대목에서 가장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당황한 일본 경찰이 이봉창이 아니라 이봉창 근처에 있던 일본인이 폭탄 투척자인 줄 알고 구타했습니다. 몸을 피할 기회일 수도 있었지만 이봉창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그 사람이 아니라 내가 던졌다! 숨지 않을 테니 점잖게 다뤄라.”

▲의거 직후 체포 연행된 이봉창 의사.
1932년 9월 30일 일본 재판부는 이봉창에게 ‘대역죄’로 사형을 선고했고, 10월 10일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교수형이 집행됐습니다. 이봉창의 나이 만32세였습니다.
그럼 그것은 그대로 실패한 의거였을 뿐일까.
그렇지 않았습니다. 사쿠라다몬 의거는 커다란 국제적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비록 일왕에 의해 반려되긴 했지만 일본의 이누카이 쓰요시(犬養毅) 내각이 총사퇴를 선언할 정도로 일본은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중국의 민국일보는 이봉창 의거를 보도하면서 ‘불행히도 명중하지 않았다’고 써서 일본이 상하이 사변을 일으킨 원인 중 하나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의열투쟁은 곧바로 같은 해 4월 29일 상하이 훙커우 공원의 윤봉길 의거로 이어졌습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같은 요즘 TV 프로그램에서 가끔 이치에 닿지 않은 말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 독립운동가들은 진짜로 독립이 이뤄질거라고 생각해서 독립운동을 한 게 아니라 그걸 기록으로 남기려 했을 뿐”이라는 식입니다. 정말 웃기는 소립니다. 이봉창·윤봉길 의거를 비롯한 끈질긴 독립 투쟁이 없었더라면 1943년 연합국이 카이로 선언에서 ‘일본이 강제 점거한 모든 영토를 탈환한다’고 했을 때 한국은 여기서 제외돼 전후에도 일본 영토로 남아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독립운동을 했기 때문에 독립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봉창 의거에 대해, 무척 기억에 남는 추도사가 있습니다. 과기처 장관과 문화일보 사장을 지낸 김진현 전 이봉창의사기념사업회장의 2002년 이봉창 의거·순국 70주년 기념식 추도사입니다.
“이봉창 의사의 의거는 당시 아시아 민족운동 중에서도
유일하게 일왕을 직접 저격한 쾌거였다.
해외 항일독립운동을 재집결하고
상해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더욱 굳건히 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 폭탄은 근대 항일 독립운동의 가장 큰 폭음이었으며
일본 군국주의의 원천인 ‘천황’ 신화를 깨는
문명의 큰 종소리, 인간의 고함이었다.”
이제 이봉창의 ‘두 얼굴’에 대해 제 생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는 비록 ‘적국 수괴 도륙’이라는 목적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후대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거사를 수행한 위대한 독립운동가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초인(超人)은 아니었습니다. 결코 모든 순간 확신에서 1%도 벗어나지 않은 인물이 아니었다는 얘깁니다. 오히려 지금 우리가 발을 땅에 딛고 사는 곳에서 스쳐가고 마주치는 그 숱한 사람들처럼, 열심히 살고 돈을 벌어 성공하고 싶어했고, 새로운 문화를 맛보며 지극히 개인적인 여가 생활도 즐기며 살고 싶어했던 서른 갓 넘은 청년이었습니다.
의거 전 태극기 앞에서 폭탄을 들고 촬영했던 사진의 원본인 사진B에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젊은이의 주저함과 망설임과 두려움의 편린이 스쳐지나가는 바로 그 순간이 기록돼 있습니다. 이제 그걸 굳이 걷어내고 다른 사진과 합성할 필요조차 없는 세상이 됐다고 보는 것이 온당합니다. 이봉창은 스스로의 각성을 거쳐 최후의 순간에 그 평범함을 불멸의 의지로 승화한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조선일보 유석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