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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 이야기5/ 2022/ 01.08‘흑인 첫 오스카 남우주연상’ 시드니 포이티어, 95세로 사망 - 10.15 ‘해리포터’ 해그리드 연기한 배우 로비 콜트레인 별세

상림은내고향 2022. 12. 22. 16:38

할리우드 이야기5/ 2022/

01.08‘흑인 첫 오스카 남우주연상’ 시드니 포이티어, 95세로 사망

1964년 제 36회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시드니 포이티어(왼쪽)

 

전설적 헐리우드 배우이자 최초의 흑인 오스카 남우주연상 수상자인 배우 시드니 포이티어 경(Sir)이 95세를 일기로 사망했다고 7일(현지 시각) CNN방송·가디언 등 외신이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이날 바하마 정부 관계자는 “시드니 포이티어가 전날(6일) 밤 사망했다”고 밝혔다. 포이티어는 1964년 흑인 배우로는 처음으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2002년에는 아카데미 특별 공로상을 받았다.

 

1927년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에서 태어난 포이티어는 당시 영국령이던 바하마 제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가난한 형편 탓에 15세에 나이를 속여 조기 입대했고, 제대 후 연극 극단에서 연기 실력을 쌓았다. 1950년 ‘노 웨이 아웃’에 출연하며 할리우드에 진출했다.

 

포이티어는 주로 미국 사회의 흑인 차별을 정면으로 다룬 영화에 출연했다. 첫 주연작인 ‘흑과 백’(1958)은 흑인 탈옥자를 통해 인종차별 문제를 다룬 작품이다. ‘언제나 마음은 태양’(1967)에선 백인 학생들을 인내심으로 포용하는 선생님으로 출연했다. ‘밤의 열기 속으로’(1967)에서는 인종차별을 딛고 살인사건을 쫓는 흑인 형사로 열연했다.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안겨준 ‘들백합’(1963)에서는 동독을 탈출한 수녀들을 돕는 마음씨 좋은 퇴역 군인 역을 맡았다.

 

하지만 “백인들이 좋아할 만한 ‘모범적이고 전형적인’ 흑인 연기를 보였다” “스크린 바깥의 정치적 인권운동에는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에 포이티어는 2000년 오프라 윈프리쇼에 출연해 “(흑인 배우로서) 엄청난 책임감을 느꼈다”며 “다른 사람들이 내 뒤에 오기 위해서는 내가 해야 할 일들이 있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포이티어는 직접 감독으로 나서 8편의 영화를 연출했고, TV 드라마 등에도 꾸준히 출연했다. 바하마 국적도 가진 포이티어는 1997년 주일 바하마 대사로 부임하기도 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2009년 그에게 ‘대통령 자유메달’을 수여했다.

조선일보 김지원 기자

 

03.19  ‘세계 최고 미남 배우’ 알랭 들롱 안락사 결정

▲2019년 5월 19일 72회 칸 영화제에 참석한 알랭 들롱./로이터

 

‘세계 최고의 미남’으로 불렸던 프랑스 배우 알랭 들롱(86)이 안락사를 결정했다.

 

알랭 들롱의 아들 앙토니 들롱은 프랑스 라디오 RTL과의 인터뷰에서 “최근 아버지가 나에게 안락사를 부탁했다”고 말했다고 아메리칸포스트 등이 19일(현지시각) 보도했다. 앙토니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그의 마지막을 함께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2019년 72회 칸 영화제에서 선보인 젊은 날의 알랭 들롱의 모습을 담은 2019 칸 영화제 스페셜 포스터./트위터

 

프랑스 매체 르포앵에 따르면 알랭 들롱은 지난해 췌장암으로 사망한 전 부인 나탈리 들롱을 돌보던 아들의 모습에 관심이 많았다. 앙토니는 어머니가 파리에서 자신을 비롯한 가족, 친구들에 둘러싸인 채 숨을 거뒀다고 전했다. 앙토니는 “자유로운 존재였던 어머니는 자신이 살아온 방식대로 죽기를 원했다”며 “그래서 안락사를 선택했다”고 했다. 그러나 나탈리는 안락사로 생을 마감하지는 않았다. 프랑스에서는 아직 안락사가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알랭 들롱은 법적으로 안락사를 허용하는 스위스에 살고 있다. 그는 1999년 스위스 국적을 취득해 현재 프랑스와 스위스의 이중국적자다. 알랭 들롱은 지난해 인터뷰에서 “안락사에 찬성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는 “안락사는 가장 논리적이고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며 “특정 나이, 특정 시점부터 우리는 병원이나 생명유지 장치를 거치지 않고 조용히 떠날 권리가 있다”고 말했다. 알랭 들롱은 이미 스위스 변호사들과 전 재산을 정리했다고 한다.

 

▲젊은 시절의 알랭 들롱. /조선DB

 

알랭 들롱은 영화 ‘태양은 가득히’(1960), ‘한밤의 살인자’(1967), ‘미스터 클라인’(1976) 등에 출연하면서 뜨거운 인기를 누렸다. 90여 편의 영화에 출연했고, 80여 편에서 주연을 맡은 대스타였다. 1995년 베를린 국제영화제에서 명예 황금곰상을 받았고 1991년 레지옹도뇌르 훈장을 받았으며 2019년 칸 영화제에서 명예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여배우들과 끊이지 않는 스캔들로도 유명했던 그는 여러 차례 동거와 헤어짐을 반복했다. 1962년 알랭 들롱에게는 당시 오랜 연인이 있었지만 나탈리와의 관계를 발전시켰고, 1964년 비밀리에 결혼해 아들 앙토니를 출산했다. 결혼 생활을 4년 6개월가량 유지하다 1969년 이혼했다. 알랭 들롱이 정식으로 결혼한 건 나탈리가 유일했다.

 

알랭 들롱은 2019년 뇌졸중으로 수술을 받은 뒤 스위스에서 노년을 보내고 있다. 그는 수술 직전 “나이 든다는 건 끔찍하다”며 “우리는 나이라고 불리는 것에 대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조선일보  이가영 기자

 

03.19  유명 스타들의 옛날 사진

▲ 마릴린 먼로

 

▲렌시 레이건 미스터 티

 

▲마이클 잭슨, 프레디 머큐리

 

▲아놀드 슈워제네거

 

▲제임스 딘

 

03.29  OTT가 오스카 휩쓸다…애플 ‘코다’ 작품상 등 3관왕

남우조연상을 받은 청각장애 배우 트로이 코처와 상을 시상한 배우 윤여정. [AFP=연합뉴스]

 

장애인 가족의 감동 드라마가 아카데미 역사를 새로 썼다. 애플TV+의 ‘코다’가 OTT 영화로는 처음 아카데미 작품상을 품었다. 2017년 아마존 스튜디오의 ‘맨체스터 바이 더 씨’가 OTT 작품상 첫 후보에 오른 이후 5년 만이다.

 

28일(한국시간) 미국 LA 돌비극장에서 열린 제94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코다’는 작품상·각색상·남우조연상 등 후보에 올랐던 3개 부문에서 모두 수상했다. ‘코다’는 농인 부모를 세상과 연결해온 비장애인 딸이 가수의 꿈을 펼치는 가족영화다. 프랑스 영화 ‘미라클 벨리에’를 토대로 션 헤이더 감독이 각색을 겸했다. 장애인 배우까지 무명의 신인들이 반전을 일으켰다.

 

제인 캠피온은 첫 감독상을 받았다. [EPA=연합뉴스]

 

넷플릭스는 ‘파워 오브 도그’ ‘돈 룩 업’ 등 2편으로 2019년 이후 4년 연속 작품상 후보에 올랐지만 수상에는 실패했다. 할리우드 스타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주연한 ‘파워 오브 도그’는 올해 최다인 12개 부문 후보에 올랐지만, 감독상(제인 캠피온)만 차지했다. 여성 감독의 수상은 역대 세 번째다.

 

‘코다’ 제작자 필립 로셀렛은 작품상 수상 무대에서 “이 영화로 역사를 새로 쓰게 해주셔서 감사하다”며 감격했다. 수어까지 배워 영화를 만든 헤이더 감독은 “이 영화가 아티스트로서 삶의 전환점이 됐다”고 했다. ‘코다’에서 아버지를 연기한 트로이 코처는 남우조연상을 받았는데, 청각장애 남자배우로는 첫 수상이다. 남녀를 합쳐선 1987년 여우주연상의 말리 매틀린에 이어 두 번째다.

 

지난해 ‘미나리’로 여우조연상을 받은 윤여정이 이날 남우조연상 시상자로 무대에 올라, 수상자 코처를 수어로 호명했다. 윤여정은 코처가 수어로 수상 소감을 전할 수 있도록 트로피를 대신 들고 무대 곁을 지켰다. ‘코다’의 모든 수상에 수어 통역이 함께했다. 객석의 스타들도 일제히 양손을 들어 흔드는 수어 박수로 축하했다.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라틴계 아리아나 데보스. [AP=연합뉴스]

 

작품상 무대엔 올해 76세인 ‘카바레’(1972)의 배우 라이자 미넬리가 휠체어를 타고 시상자로 올랐다. 장애뿐 아니라 다인종·성소수자·다문화를 품은 시상식이었다. 여우조연상은 뮤지컬 영화 ‘웨스트사이드 스토리’의 라틴계 배우 아리아나 데보스가 커밍아웃한 성소수자 여성 최초로 수상했다. 최근 남성으로 성전환한 배우 엘리엇 페이지도 15년 전 여성으로서 주연을 맡았던 아카데미 각본상 수상작 ‘주노’의 동료 배우들과 각본상 시상자로 나섰다.

 

최다 수상은 드니 빌뇌브 감독의 SF 대작 ‘듄’이 차지했다. ‘듄’은 음악감독 한스짐머의 음악상을 비롯해 촬영·편집·미술·음향·시각효과 등 6관왕에 올랐다.

 

제94회 아카데미상수상자·수상작.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주로 주제가상 후보작으로 채운 축하공연도 다양하고 화려했다. 개막 공연은 톱스타 비욘세가 ‘킹 리차드’ 주제가로 장식했다. 영화의 실제 주인공인 테니스 스타 비너스·세리나 윌리엄스 자매가 직접 소개자로 나섰다. 방탄소년단(BTS)도 막간 녹화 영상으로 한국말 축하 인사를 보냈다. 아카데미는 시상식 시청률 저하 대책으로 편집·분장·단편 등 비인기 부문 시상을 생중계 전 미리 진행했고, 대신 공연은 한층 풍성하게 마련했다. 주제가상은 ‘007 노 타임 투 다이’의 동명 주제가를 부른 뮤지션 빌리 아이리시가 받았다.

 

한때 백인 일색이라 비판받던 연기상 부문도 올해는 다양한 인종에 돌아갔다. 여우주연상은 ‘타미 페이의 눈’의 제시카 채스테인이, 남우주연상은 ‘킹 리차드’의 윌 스미스가 받았다. 스미스는 배우 데뷔 후 32년 만에 첫 오스카 트로피를 안았다. 권투선수 무하마드 알리로 분한 영화 ‘알리’(2001), 절절한 부성애를 연기한 ‘행복을 찾아서’(2006)에 이어 세 번째 도전 만에 수상했다.

 

시상식 중 배우 윌 스미스가 크리스 록을 폭행하는 사건도 있었다. [AP=연합뉴스]

 

스미스는 수상 소감에서 “리차드 윌리엄스(윌리엄스 자매의 아버지)는 맹렬하게 가족을 보호하는 인물이다. 저도 제 인생에서 사람들을 보호하는 것이 소명이라 생각한다”며 “저희 아버지도 리차드처럼 정말 유별났다. 우리는 사랑 때문에 미친 짓을 많이 한다”고 말한 뒤 눈물을 흘렸다.

 

스미스는 앞서 장편 다큐멘터리상 시상자로 나선 코미디 배우 크리스 록이 자신의 아내 제이다 핀켓 스미스의 삭발을 두고 “‘지 아이 제인2’에 출연하면 되겠다”고 농담하자 무대에 올라 록의 뺨을 때렸다. 제이다는 탈모증을 앓고 있다. 록은 2016년 아카데미 시상식 때도 제이다가 유색인종 후보가 적다는 이유로 불참한 데 대해 “제이다가 오스카를 보이콧한 것은 제가 리아나(가수)의 팬티를 보이콧하는 것과 같다”고 빈정댔다.

나원정·남수현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04.01  실어증에 은퇴한 ‘다이하드’

브루스 윌리스, 연기 중단 선언
“인지 능력 떨어져 연기 어렵다” 가족이 은퇴 성명 발표

/AFP 연합뉴스

 

영화 ‘다이하드’ ‘식스 센스’ 등으로 기억되는 할리우드 배우 브루스 윌리스(67)가 실어증 진단을 받고 은퇴를 선언했다.

 

윌리스 가족이 소셜미디어로 “최근 건강 문제를 겪은 브루스 윌리스가 실어증과 인지 능력 감퇴로 연기를 할 수 없는 상태”라며 은퇴 성명을 발표했다고 31일 미국 뉴욕타임스 등이 보도했다. 이 성명에는 윌리스 아내 에마 헤밍 윌리스, 전처인 데미 무어, 윌리스의 다섯 자녀가 서명했다.

 

윌리스 가족은 “여러분에게 브루스 윌리스가 얼마나 큰 의미인지 알기 때문에 소식을 전한다”며 “그는 신중한 검토 끝에 자신의 삶에서 매우 중요한 연기 활동을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우리에게는 힘든 시기지만 가족으로서 이 일을 함께 헤쳐나갈 것”이라고 했다. 실어증은 일반적으로 뇌졸중이나 머리 부상 때문에 생기지만, 느리게 자라는 뇌종양이나 퇴행성 질환으로 발생할 수도 있다고 AP통신은 전했다.

 

윌리스는 아널드 슈워제네거, 실베스터 스탤론과 함께 20세기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근육질 액션 배우다. 1970년대 브로드웨이 무대에서 배우로 데뷔한 그는 존 맥티어넌 감독의 ‘다이하드’(1987)로 단숨에 세계적 스타로 부상했다. 윌리스는 이 시리즈에서 악당들을 물리치기 위해 ‘죽도록 고생하는(die hard)’ 뉴욕 경찰 존 매클레인을 연기하며 인간미가 물씬 나는 영웅 캐릭터를 만들어냈다.

 

그는 액션 스타에 그치지 않고 ‘펄프 픽션’ ‘식스 센스’ ‘문라이즈 킹덤’ 등에서 연기력으로도 호평을 받았다. TV에서도 활약해 골든글로브 TV 부문 연기상 후보와 에미상 후보에 올라 각각 트로피 1개씩을 차지했다. 최근에는 소규모 제작사의 액션 영화에 주로 출연했다. 브루스 윌리스가 비록 은퇴 선언을 했지만 후반 작업 중인 미개봉 영화들이 남아 있어 그가 출연하는 작품을 당분간 볼 수 있을 전망이다.

조선일보  박돈규 기자

 

07.08  ‘대부’의 소니 콜레오네 떠났다… 배우 제임스 칸 별세

▲배우 제임스 칸. /AFP 연합뉴스

 

영화 ‘대부’ ‘미저리’ 등에서 명연기를 펼쳤던 미국 배우 제임스 칸(82)이 세상을 떠났다.

 

유족은 7일(현지 시각) 트위터 글을 통해 “칸이 전날 저녁 별세했다”며 “여러분의 사랑과 진심 어린 애도에 감사하다”고 전했다. 다만 구체적인 사인과 칸이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곳 등은 공개하지 않았고 “어려운 시기에 가족들의 사생활을 계속 존중해 주시길 부탁드린다”고 덧붙였다.

 

1940년생인 칸은 1972년 포드 코폴라 감독의 명작 ‘대부’에서 비토 콜레오네의 장남인 ‘산티노 소니 콜레오네’ 역할을 맡은 것으로 유명하다. 당시 함께 출연한 말론 브란도, 알 파치노에 못지않은 연기를 펼쳐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영화 '대부' 속 제임스 칸(맨 왼쪽)의 모습. /AP 연합뉴스

 

특히 칸이 극중 인물의 이중성을 표현한 장면들이나, 고속도로 톨게이트에서 경쟁 마피아 조직원들이 쏜 총에 맞아 사망하는 장면은 아직까지 회자되는 명장면으로 꼽힌다. 때문에 영화 팬들에게 칸은 ‘영원한 소니 콜레오레’로 불린다.

 

칸의 또 다른 대표작은 스티븐 킹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1990년 개봉한 ‘미저리’다. 소설가 ‘폴 쉘던’ 역을 연기한 그는 자신의 글을 동경하는 광기 어린 팬의 학대에 시달리는 연기를 실감 나게 해냈다. 이밖에 ‘겜블러’(1974) ‘도둑’(1981) ‘엘프’(2003) ‘홀리 랜드’(2019) 등에도 출연했다.

조선일보  문지연 기자

 

08.09  팝스타 올리비아 뉴턴 존 별세… 30년간 암 투병

▲8일(현지 시각) 아침 별세한 올리비아 뉴턴 존이 2007년 4월 대만에서 아시아 콘서트 투어를 홍보하기 위한 기자 회견을 열고 있는 모습./로이터 연합뉴스

 

영국 출신의 가수 겸 영화배우 올리비아 뉴턴 존(74)이 별세했다. 그의 남편 존 이스털링은 8일(현지 시각) 페이스북을 통해 “오늘 아침 올리비아 뉴턴 존이 가족 및 친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남부 캘리포니아에 있는 목장에서 평화롭게 세상을 떠났다”고 밝혔다. 뉴턴 존은 1992년 첫 유방암 진단을 받은 뒤 수십 년간 투병 생활을 해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스털링은 “그녀를 추모하기 위해 암 치료 및 연구에 전념하는 ‘올리비아 뉴턴 존 재단’에 기금을 기부해주길 부탁한다”고 말했다.

 

뉴턴 존은 1971년 밥 딜런의 곡 ‘이프 낫 포 유(If Not For You)’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이후 ‘렛 미 비 데어(Let Me Be There)’ ‘아이 어니스틀리 러브 유(I Honestly Love You)’ ‘플리즈 미스터 플리즈(Please Mr. Please)’ 등 곡들이 크게 히트했다. 미국 음악계 최고 권위 상인 ‘그래미상’을 네 차례 수상하기도 했다.

 

1978년엔 뮤지컬 영화 ‘그리스(Grease)’에 출연, 세계적인 스타로 발돋움했다. 그리스는 1950년대 미국 고등학생들의 사랑과 꿈 등을 그려낸 작품이다. 영화 삽입곡이자 극중 뉴턴 존이 상대역 존 트라볼타(68)와 함께 불렀던 ‘Summer Nights’ ‘You’re The One That I Want’ 등 곡들이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졌다. 두 배우는 1983년 영화 ‘환상의 듀엣(Two Of A Kind)’에도 함께 출연했다. 트라볼타는 뉴턴 존의 사망 소식에 “친애하는 올리비아, 당신은 우리 모두의 삶을 훨씬 행복하게 만들어줬다”며 “언젠가 당신을 다시 만나 함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고 전했다.

조선일보  김동현 기자

  
 

◆1950년대 최고의 미녀 배우는 누구일까?

마릴린 먼로 (1926–1962)

할리우드의 가장 상징적인 인물 중 한 명인 마릴린 먼로는 1950년대 초에 '나이아가라' (1953년)로 급부상했고, '뜨거운 것이 좋아' (1959년)로 골든 글로브 상을 수상해 정점을 찍었다.

 

그레이스 켈리 (1929–1982)

그레이스 켈리는 아카데미 상을 받은 '더 컨트리 걸' (1954)을 포함하여 1950년대에 11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그녀는 1956년 4월 레이니어 3세와 결혼함으로써 모나코의 공주가 되었다.

 

브리짓 바르도

프랑스 여배우 브리짓 바르도는 '그리고 신은 여자를 창조했다' (1956)에서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았고, 빠르게 영화의 "섹시 아이콘"으로 불렸다.

 

리타 모레노

푸에르토리코 태생의 미국 배우, 댄서, 그리고 가수 리타 모레노는 1961년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로 오스카상을 수상해 유명해졌다. 하지만 그녀는 '사랑은 비를 타고' (1952)과 '왕과 나' (1956)와 같은 영화에서도 성공을 거두었다. 모레노는 아카데미상, 에미상, 토니상 등 3관왕을 달성한 몇 안 되는 연예인 중 한 명이다.

 

오드리 헵번 (1929–1993)

오드리 헵번은 그레고리 펙과 함께 출연한 로맨틱 코미디 '로마의 휴일' (1953)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헵번은 한 번의 영화로 오스카상, 골든 글로브상, 그리고 BAFTA상을 수상한 최초의 여배우였다.

 

도로시 댄드릿지 (1922–1965)

도로시 댄드리지는 1954년 '카르멘 존스'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른 최초의 흑인 여배우가 됨으로써 1950년대에 할리우드 역사를 다시 만들었다.

 

소피아 로렌

이탈리아에서 찬사를 받은 여배우들 중 한 명인 소피아 로렌의 가장 기억에 남는 역할은 비토리오 데 시카의 앤솔로지 영화 '나폴리 황금기' (1954)에서 소피아 역을 맡은 것이었다

 

킴 노박

킴 노박은 1950년대에 프랭크 시나트라와 함께 '팔 조이'(1957)로 할리우드의 최고 흥행작을 남겼고, 제임스 스튜어트와 함께 알프레드 히치콕의 스릴러 영화 '버티고'(1958)에 출연해 유명해졌다.

 

엘리자베스 테일러 (1932–2011)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1950년대를 '신부의 아버지'로 시작했다. 10년 동안 그녀는 또한 '자이언트', '레인트리 카운티', '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와 같은 상징적인 작품들에 출연했는데, 후자의 두 작품으로 테일러는 오스카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나탈리 우드 (1938–1981)

나탈리 우드는 '이유 없는 반항' (1955)으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후보에 올랐을 때 겨우 10대였다. 그녀는 '수색자' (1956)에서 기억에 남는 연기를 보여주었지만, 1981년 캘리포니아의 산타 카탈리나섬 해안에서 익사한 채 발견되었다.

 

셜리 맥레인

셜리 맥레인은 알프레드 히치콕의 블랙 코미디 영화 '해리와의 트러블' (1955)로 영화 데뷔를 했다.

 

잉그리드 버그만 (1915–1982)

스웨덴 여배우 잉그리드 버그만은 할리우드에서 자리를 잡았고 최고의 흥행 성적을 거두었으며, '아나스타시아'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로렌 바콜 (1924–2014)

1940년대에 로렌 바콜은 그녀의 남편 험프리 보가트와 함께 기억에 남는 영화들을 만들었다. 50년대에는 '백만장자와 결혼하는 법' (1953년)과 '디자이너 우먼스' (1957년)와 같은 히트작을 남겼다.

 

리타 헤이워드 (1918-1987)

리타 헤이워드는 1950년대 중반까지 영화에 출연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1957년의 '팔 조이'에서 프랭크 시나트라와 킴 노박보다 더 많은 돈을 벌었다. 이듬해 그녀는 '애수의 여로'에 출연하며 큰 호평을 받았다.

 

제인 러셀 (1921–2011)

제인 러셀은 '신사는 금발을 좋아한다' (1953)에서 마릴린 먼로의 상대역으로 출연하며 1943년의 '무법자' 이후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녀는 클라크 게이블과 함께 출연한 '거인'를 포함하여, 1950년대에 몇 편의 영화에 더 출연했다.

 

데비 레이놀즈 (1932–2016)

여배우이자 가수인 데비 레이놀즈는 날카로운 감각으로 그 시대에 가장 성공한 연예인 중 한 명이었다. 그녀가 맡은 가장 유명한 역할은 '사랑은 비를 타고' (1952)의 캐시 셀던 역으로 그녀의 첫 주연이었다. 1957년 그녀는 노래 'Tammy'로 빌보드 음악 차트에서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에바 가드너 (1922–1990)

에바 가드너는 당시 할리우드에서 톱스타 중 한 명이었고, 1950년대에는 '쇼 보트' (1951), '모감보' (1953), '바와니 정션' (1956)으로 오스카상 후보에 올랐다.

 
 

제인 맨스필드 (1933–1967)

1950년대의 제인 맨스필드는 여러 편의 영화에서 성공을 거두었지만, 사생활로 잘 알려지기도 했다. 그녀는 1967년 6월 자동차 사고로 사망하여 모두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도리스 데이 (1922–2019)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어디에서나 볼 수 있었던 도리스 데이는 '칼라미티 제인' (1953)과 알프레드 히치콕의 '나는 비밀을 알고 있다' (1956)에서 주연을 맡았다. 그녀는 1959년의 '필로우 토크'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지나 롤로브리지다

1927년에 태어난 이탈리아 여배우 지나 롤로브리지다는 할리우드 영화의 황금기 시대부터 지금까지 살아 있는 몇 안 되는 배우 중 한 명이다. 그녀는 영화 '빵과 사랑과 꿈' (1953년)으로 영국 아카데미상 최우수 외국 여배우상 후보에 올랐다.

 

조안 콜린스

영국 여배우 조안 콜린스는 1950년대 초 영국 영화에서 조연으로 많이 등장했으며, 이후 미국 감독 하워드 호크스의 작품 '파라오의 땅'에서 넬리퍼 공주로 캐스팅되었다. 몇 년 후, 콜린스는 TV 시리즈 '다이너스티' (1981–89)에서 알렉시스 콜비 역을 연기하며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데보라 카 (1921–2007)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난 데보라 커는 1950년대에 뮤지컬 영화 '왕과 나'에서 안나 레오노웬스 역으로 골든 글로브 상을 수상했다.

 

에바 마리 세인트

그녀는 데뷔 작품 '워터프론트'(1954)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받았고, 1959년에 개봉한 알프레드 히치콕의 '노스웨스트'에서 뛰어난 연기를 선보였다.

 

수잔 헤이워드 (1917–1975)

패션 모델이었던 수잔 헤이워드는 1940년대 후반과 1950년대에 여배우로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1952년 그녀는 '내 마음속의 노래와' (1952)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1959년 그녀는 '나는 살고 싶다' (1958)에서의 연기로 오스카상을 수상했다.

 
 

제니퍼 존스 (1919–2009)

제니퍼 존스는 1940년대에 명성을 얻었지만, 1950년대 큰 성공을 거두었다. '모정' (1955)으로 그녀는 다섯 번째 아카데미상 후보에 올랐고, 말년에 존스는 정신 건강과 교육에 대한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다.

 

데브라 파제트

데브라 파제트는 1950년대에 '십계명' (1956)과 엘비스 프레슬리의 영화 데뷔작 '러브 미 텐더' (1956)에 출연했다.

 

진 시몬스 (1929–2010)

1950년 할리우드에 도착하기 전에 영국에서 큰 성공을 거둔 여배우 진 시몬스는 틴셀타운에서 '로브' (1953), '아가씨와 건달들' (1955) 그리고 '큰 나라' (1958)와 같은 영화로 명성을 얻었다.

 

실비아 심스

영국 여배우 실비아 심스는 런던의 슬럼가를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으로 유명한 '드레싱 가운을 입은 여자' (1957), '아이스 콜드 인 알렉스' (1958), '노 트리스 인 더 스트릿' (1959)를 포함해 50년대에 가장 잘 알려진 영국 작품들 중 일부에 출연하면서 1950년대 후반 큰 성공을 이루었다.

 
 

클레어 블룸

영국 여배우 클레어 블룸은 1947년에 런던 무대에 데뷔했고 찰리 채플린이 그녀를 발견해 그녀에게 '리마이트' (1952)에서 주연을 제안했다. 이것으로 그녀는 50년대에 대표 남자 배우들과 다양한 연기를 펼쳤다.

 

10.15  ‘해리포터’ 해그리드 연기한 배우 로비 콜트레인 별세

▲영화 '해리 포터' 시리즈에서 마법 학교 호그와트의 숲지기 해그리드 역을 연기한 배우 로비 콜트레인이 72세 나이로 별세했다./트위터

 

 

영화 ‘해리 포터’ 시리즈에서 마법 학교 호그와트의 숲지기 해그리드 역을 연기한 배우 로비 콜트레인이 72세 나이로 별세했다.

 

14일(현지시각) AP 통신과 BBC 등에 따르면 콜트레인의 에이전트 벨린다 라이트 측은 콜트레인이 이날 영국 스코틀랜드의 한 병원에서 사망했다고 밝혔다.

 

벨린다 라이트는 성명에서 “고인은 해리 포터의 해그리드 역으로 가장 잘 기억될 것”이라며 “그는 전 세계 아이와 어른 모두에게 기쁨을 가져다준 역할을 했고 20년 넘게 매주 팬레터를 받았다”고 추모했다.

 

▲배우 로비 콜트레인(왼쪽)과 '해리포터' 작가 조앤 케이 롤링./트위터

 

해리 포터 제작진과 출연 배우는 물론 영화계 안팎에서 콜트레인에 대한 추모 물결이 이어지고 있다.

 

해리포터 작가 조앤 케이 롤링은 트위터를 통해 콜트레인과 함께 찍은 사진을 올리고 “다시는 콜트레인 같은 사람을 알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이어 “그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재능이 있고 완전한 사람이었다”며 “그와 함께 일하고 웃을 수 있어서 정말 행운이었다”고 했다.

 

해리포터 역의 배우 다니엘 래드클리프는 성명을 내 애도를 표했다. 그는 “콜트레인은 내가 만난 사람 중 가장 재밌는 사람이었다. 어린 시절 우리를 계속 웃게 해줬다”며 “그를 만나 함께 일할 수 있어서 정말 행운이었고 그가 세상을 떠나 매우 슬프다. 그는 대단한 배우이자 사랑스러운 사람이었다”고 했다.

 

니콜라 스터전 스코틀랜드 자치정부 수반도 트위터를 통해 “매우 슬픈 소식”이라며 “스코틀랜드 엔터테인먼트의 전설인 로비 콜트레인, 당신을 매우 그리워할 것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고 했다.

 

한편 고인은 2001∼2011년 개봉한 8편의 ‘해리 포터’ 시리즈에서 호그와트 숲을 지키는 혼혈 거인 해그리드를 연기했다. 영화 속 해그리드는 주인공 해리 포터와 그 친구들을 도와주는 정이 넘치는 조언자 역할로, 팬들의 큰 사랑을 받았다.

조선일보  김자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