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2/ ⑥ 천지인(天地人)과 하늘 - ⑫ 땅 이야기 - 디아스포라와 어머니, 황토방
⑥ 천지인(天地人)과 하늘
한국은 하늘과 땅, 인간의 힘이 어우러지는 三太極의 나라
⊙ “한국인은 사물 속에 숨겨져 있는 본성이 있다고 생각했고 그 본성은 하늘이 주는 것이라 여겨”
⊙ “하늘과 땅, 사람의 힘과 노력 모두가 어울렸을 때만 곡식 한 톨을 먹을 수 있어”
⊙ “ 우리가 배운 것은 국가주의, 민족주의밖에 없어. 그걸로 이 글로벌한 세상에 어떻게 살겠어?”
⊙ “凡人의 가족주의에서 荊人의 국가주의, 공자의 인간주의, 노자의 무위자연 중 우리는 어디까지 와 있을까”
[편집자 註]
이어령 선생이 타계한 지 2개월이 되어간다. 선생은 생전(生前) 시리즈 ‘한국인 이야기’의 문패에다 ‘끝나지 않은’이란 수식어를 직접 붙였다.
생전 선생은 당신이 남긴 굵직한 저작물과 수많은 강연에서 언급한 ‘한국인 이야기’를 비록 당신이 떠나도 계속 이어가기를 희망하였고 관련 원고와 저서의 일부를 《월간조선》에 전하였다.
또 선생이 남긴 바탕 위에 편집자의 생각을 보태도 된다고 허락하였다. 그렇게 말씀하셨지만 감히 편집자의 생각을 덧붙일 수는 없었고, 아주 조심스럽게 선생이 남긴 큰 발자국을 따라 연재를 이어가고자 한다. 선생에게 누(累)가 되지 않기를 소망할 뿐이다. 첫걸음을 배우는 아이의 흥분과 떨림으로 연재를 재개한다.

▲지난 3월 서울 종로구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외벽 전광판에 소개된 고 이어령 초대 문화부 장관의 글귀. ‘여러분과 함께 별을 보면 즐거웠어요. 하늘의 별의 위치가 불가사의하게 질서정연하듯, 여러분의 마음의 별인 도덕률도 몸 안에서 그렇다는 걸 잊지 마세요.’ 사진=조선일보DB
한국인 이야기의 바탕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단순하면서도 명료한 물음이 담겨 있습니다. 인간은 신성하지도 영원히 살 수도 없습니다. 나약한 존재에 불과합니다. 스스로의 결단과 선택만이 우리 운명을 결정지을 수 있습니다.
한국인을 둘러싼 세상을 똑바로 봐야 합니다. 그래서 천지인(天地人), 그중에서도 우리를 둘러싼 하늘 이야기부터 시작해볼까 합니다. 땅과 사람 이야기도 차례차례 들려드리겠습니다.
옛날의 한국인들은 오늘의 우리보다 훨씬 더 사물로부터 많은 것을 보고 배웠습니다. 사물 속에 숨겨져 있는 본성이 있다고 생각했고 그 본성은 하늘이 주는 것이라 여겼습니다. 인간은 그 무수한 사물의 본성을 통해 물질이 아니라 정신의 행복을 찾으려고 했습니다. 본성이란 쉽게 말해 적자(赤子)의 마음, 즉 아이의 마음입니다. 그 아이의 마음을 잃지 않고 사는 사람을 맹자는 ‘대인(大人)’이라 불렀는데, 대인은 몸뚱이가 크다는 의미가 아니라 정신적 행복을 느끼고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눈을 들어 밤하늘을 보면 수많은 별이 있습니다. 한국인은 ‘별’ 하면 바로 윤동주(尹東柱·1917~1945년) 시인을 떠올리게 되지요. 지상에서 마주한 얼굴이 하늘로 올라가 하늘의 얼굴, 하늘의 눈동자가 되면 윤동주의 시에 가장 가까운 이야기가 됩니다. ‘서시’를 한번 외워볼까요?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의 ‘서시’ 전문
나의 이야기를 모두 듣고 여러분이 천지인을 가지고 보면 이 시가 새롭게 느껴질 것입니다.
지금 손을 들어 허공에 선을 하나 그어보세요. 그것이 천(天)입니다. 그 아래에 다시 선을 하나 그으면 지(地)가 됩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다시 선을 하나 그으면 인(人)이 됩니다. 한자로는 석 삼(三) 자와 같은 형태지요.
# 천지인이 뭔가요?

▲지난 2020년 8월 18일 밤, 강원도 강릉시 왕산면 안반데기 위로 은하수가 펼쳐졌다. 사진=조선일보DB
농사를 짓는다고 가정해봅시다. 하늘에서 비가 오지 않으면 농사를 지을 수가 없어요. 비는 하늘에서 땅으로 오는 것이지요. 그런데 아무리 비가 충분히 와도 씨앗이 땅에 떨어지지 않으면 식물은 자라지 않아요. 하늘의 힘과 땅의 힘 속에서 식물이 자랍니다. 그런데 이 안에 사람의 힘이 없으면 곡식이 아니라 잡초가 자랍니다.
하늘과 땅, 사람의 힘과 노력 모두가 어울렸을 때만 우리가 곡식 한 톨을 먹을 수 있어요. 아무리 인간이 노력해도 도울 땅이 없으면 곡식이 나지 않고, 인간이 노력하고 땅이 준비되어 있어도 비가 내리지 않으면 자라지 않아요. 그러니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는 말은 단순히 농업이 중요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인간의 힘만으로는 안 된다’ ‘땅의 힘만으로도 안 된다’ ‘하늘의 힘만으로도 안 된다’, 즉 모든 것, 다시 말해 농업은 물론이고 산업, 금융업 등 무엇을 하든 하늘과 땅, 사람이 합쳐졌을 때만 인간이 살아갈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나는 88서울올림픽과 같은 큰 행사를 기획할 때마다 이 천지인 삼재(三才)사상을 기본으로 했어요.
하늘과 땅, 사람의 조화
하늘과 땅, 사람이 합쳐져야 한다는 것을 삼재사상이라 합니다. 앞에서 우리 허공에 하늘과 땅, 그 사이의 사람을 그려 한자 석 삼(三) 자를 만들었지요? 요즘 은행에 가면 억(億)을 넘어 몇조(兆) 이런 단위의 금액이 흔하고, 반대로 내 통장을 보면서 ‘아휴, 요것밖에 없어’라고 한숨이 나오곤 하지만 사실 세상은 석 삼(三) 자만 있으면 됩니다. 삼(三) 자만 있으면 세상을 얻을 수 있어요.
이것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규경(李圭景·1788~1856년)이 한 말입니다. 그는 “농업을 하기 위해서는 천지인 세 가지의 힘이 있어야 한다”고 했지요. 사실 농경문화란 하늘과 땅 그리고 인간의 협력에 의해서만 그 결과가 나타나는 법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홍수가 나거나 가뭄이 생기면 게으른 자와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얻을 수가 없지요.
마찬가지로 땅이 척박하면 아무리 부지런히 일을 해도 기름진 땅에서 낮잠을 자는 게으른 농부를 이기기 어렵지요. 천지인 삼재가 합쳐져 이루어지는 농사꾼의 경쟁에는 이렇게 3분의 2가 천과 지의 변수가 작용해요. 그러니 요즘 어느 정도 과학적 영농이 가능하다고 해도 여전히 하늘과 땅의 변수에 얽매일 수밖에 없는 게 우리 인간이죠.
천지가 이럴진대 사람 역시 믿을 게 못 됩니다. 예컨대 선비들이 문장을 겨루고 이념을 논하는 것도 마찬가지죠. 글이나 예술은 사람의 주관이나 지식의 차이에 따라 각기 달라지잖아요. 내가 보기에 형편없는 글을 평론가들이 극찬하기도 합니다. 어떤 이가 잘 쓴 문장을 어떤 이는 신통찮다고 여기기도 하죠.
천지인 속 나의 위치는?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윤동주의 ‘서시’ 중에서. 일러스트=조선일보DB
판단이라는 글자 자체에도 나타나 있듯이 판(判)이란 칼로 반을 자른다는 뜻입니다. 칼은 붓보다 언제나 분명하죠. 붓으로 싸우는 선비들의 승부는 칼로 싸우는 무사(武士)들보다 우열을 가리기가 어려워요. 그래서 천지인 속에서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줄 알아야 합니다.
내가 국제 학술대회 같은 곳에서 이런저런 학술적인 발표를 할 때 서양 학문을 아무리 가르쳐봐야 그 사람들이 놀라겠어요? 그런데 삼재사상, 천지인의 조화를 이야기하면 놀라요. 서양은 천지인이 합치는 것이 아니라 싸우는 역사거든요.
하늘이 땅하고 싸우고, 땅이 사람과 서로 치고받고 싸워요. 심지어 희랍 신화의 우라노스 이야기를 보세요. 아버지가 자식을 잡아먹잖아요.
우리에게는 천지인이 합쳐져야 한다는 게 너무 당연한 이야기라 우습게 들려도, 서양 사람들에게는 “와,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가 있지?” 해요. 그들은 지금의 역사가 끊임없이 하늘과 땅이 서로 싸우고, 인간과 자연이 서로 싸워서 이루어낸 결과라고 믿거든요. 지금도 코로나19와 싸우고 있고, 코로나19를 통해 드러난 자연과 치열하게 싸우고 있다고 여기고 있어요.
문제는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자연을 정복할 수 없다는 데 있어요. 정복할 수 있다는 착각이 불행을 가져오고 있지요.
동양과 서양 세계관의 차이
동양의 사고는 서양과 달랐어요. 자연과 인간이 조화를 이루는 것을 올바른 삶이라고 여겼어요. 임금 왕(王) 자를 보세요. 천지인의 석 삼(三) 자를 수직으로 이으니까 왕(王)이 되었어요. 이것이 동양의 리더, 왕의 본래 의미예요. 아무나 왕이 되는 것이 아니라 천(天), 하늘의 힘과 지(地), 땅의 힘 거기에 인(人), 인간의 힘까지 아우를 수 있는 사람만이 왕이 되고 리더가 될 수 있다는 뜻이지요.
그런데 오늘날은 어때요? 땅만 지배해도 되는 줄 알고 땅과 그 땅에 사는 사람들만 지배하고 있거나 또는 인간만 지배해서 표를 많이 얻으면 리더가 되잖아요. 하늘이 돕지 않아도 대부분의 정치인은 인심, 즉 투표자의 마음만 잡으면 대권을 쥘 수 있어요.
임금 왕(王) 자에서 하늘을 의미하는 걸 걷어내면 흙 토(土)만 남아요. 그러니까 흙, 땅과 사람만을 지배해서 리더가 된 자는 진정한 왕이 아니라는 이야기죠. 이제 하늘의 의미까지 알게 되면 여러분은 각자가 왕이 될 수 있습니다.
# 세상이, 세계가 뭔가요?

▲그래픽 디자이너 최지웅씨가 모은 호돌이 인형, 성화봉 모형, 화보집 같은 88서울올림픽 수집품들. 이어령 선생은 삼태극 사상을 기반에 두고 88서울올림픽의 엠블럼을 만들었다. 사진=조선일보DB
세상의 힘이라는 건 사실 무척 간단합니다. 하늘의 힘, 땅의 힘, 인간의 힘이 어우러지는 삼재사상, 그게 삼태극(三太極) 사상이에요. 하늘과 땅만 있는 것은 태극(太極)이에요. 하늘의 양과 땅의 음이 합쳐진 것이지요. 삼태극은 천지인, 하늘과 땅에 사람이 들어간 거예요. 보세요. 태극기의 태극과 삼태극은 다르지요? 우리는 이 삼태극 사상을 기반에 두고 88서울올림픽의 엠블럼도 만들었어요.
여러분이 서양 학문을 무시하고 배우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서양 학문에 우리 천지인 사상을 결합해 이야기할 수 있을 때, 21세기에 우리가 동과 서를 합쳐서, 서양에서도 리더가 될 수 있고 한국에서도 리더가 될 수 있는 글로벌 리더가 되는 것입니다.
글로벌이라는 걸 우리나라 말로 하면, 세계? 지구촌? 아니요. 천하(天下)입니다. 천하통일 할 때의 그 천하. 옛날에 중국은 중국이 세계의 전부인 줄 알았어요. 그래서 중국을 통일해놓고 천하통일 했다고 그랬어요. 요즘 보면 미국과 중국이 참 비슷한데, 미국 프로야구에 월드 시리즈(the World Series)가 있는데 이게 또 세계인이 모인 경기가 아니에요. 미국 동부 해안가의 사람들과 서부 해안가의 사람들이 경기하는 걸 놓고 월드 시리즈라고 하는 거죠.

▲종묘 정전 남문 문설주 아래에 새겨져 있는 삼태극 문양. 눈여겨보면 궁궐과 왕릉 곳곳에서 이런 화려한 태극 문양을 찾아볼 수 있다. 사진=조선일보DB
중국 유교 경전 중에 《대학(大學)》이 있어요. 거기에 보면 중국이 천하통일 한다는 말이 나오는데, 수신(修身)–몸을 닦고, 제가(齊家)–집안을 가지런히 하고, 치국(治國)–나라를 다스린다니까, 자 여기서 나라까지 왔지요? 그다음이 평천하(平天下), 천하를 평정하는 거죠. 중국 전역을 통일하면 그게 평천하, 중국인들은 중국 대륙이 지구 전체인 줄 알았던 거예요. 미국 사람들도 마찬가지죠. 신천지를 만들어서 그게 월드(세계)인 줄 알았어요. 그러니까 ‘뉴 월드’, 신세계 교향곡이 있잖아요.
한국 사람들만은 오래 외침을 당했기에 한국이 천하가 아니라는 걸 알았어요. 그러니까 진짜 천하의 존재를 한국인만이 안 거예요. 중국 사람들은 천하를 몰라요. 중국 대륙을 다 제패하고 나서 이게 천하인 줄 알았는데 글로벌리즘이 생기니 중국도 아주 작은 한 나라에 불과한 겁니다. 특히 인공위성을 띄워놓고 하늘에서 보면 말이죠.
# 눈을 감고 생각해봐요.
그러니 제가 여러분을 데리고 하늘로 가려고 하는 게 대단한 이야기이지요. 중국이 대국(大國)이라고, 미국에서 월드 시리즈 한다고 주눅 들지 마세요.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나라 간의 경계선도 없고 높고 낮은 것도 없어요. 아무리 큰 빌딩도, 아무리 큰 나라도 위에서 보면 ‘반짝반짝 작은 별’의 하나에 불과합니다. 집의 울타리, 마을의 경계와 행정구역, 나라의 국경도 보이지 않습니다.
하늘에서 천천히 내려다보세요. 그러면 지구가 보일 겁니다. 더 내려오면 동양과 서양을 구별 짓는 반구(半球)가 보일 거예요. 또 내려오면 아시아가 보이고 거기서 더 내려오면 중국, 한국, 일본이 보입니다. 우리가 매일 보는 기상도를 떠올려보세요. 거기서 더 내려오면 자기가 살고 있는 도시, 나는 서울이 보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발 딛고 선 곳이 보일 테지요?
더 내려오면 무슨 구(區), 무슨 동(洞). 자기가 사는 동네가 보여요. 그리고 거기서 더 내려오면 내가 사는 집, 우리 식구, 그중 누군가의 얼굴이 보여요. 거기서 더 가면 그 누군가의 눈동자가 있어요. 저 우주로부터 계속 내려가서 마지막으로 도착하는 곳은 우리의 눈동자입니다. 거꾸로 눈동자로부터 번져 가면 저 하늘 은하수까지 가요.
참 기분 좋은 상상 아닙니까? 실제로 여러분이 우주로 가려면 로켓을 타야 하는 데 못 가죠. 그런데 상상력으로는 얼마든지 갈 수 있어요. 지금 여러분은 저와 함께 은하수에 떠 있는 겁니다. 하늘의 은하수에서 지구를 내려다본다… 이것이 시고, 문학이고, 상상력이에요.
시인들이 매일 가난해도 불행하지 않은 것은 없어도 상상력 속에서 별 게 다 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에요. 날개 달고 하늘을 나는 것도 가능하죠. 우리가 시를 배우는 것은 바로 이 상상력을 배우는 것입니다.
# 荊人遺弓에 담긴 깊은 뜻을 보세요

▲기원전 239년 중국 진나라의 재상인 여불위가 주도하여 편집한 백과사전인 《여씨춘추(呂氏春秋)》.
‘형인(荊人)이 활을 잃고도 활을 찾으려 하지 않았다. 형나라 사람이 잃은 것을 형나라 사람이 주울 것이니 찾아서 뭣하겠는가. 공자가 그 말을 듣고 형(荊)을 빼는 것이 옳다고 하자 노자가 그 말을 듣고 사람 인(人) 자도 빼는 것이 옳다라고 했다.’
(荊人有遺弓者而不肯索曰荊人遺之荊人得之又何索焉孔子聞之曰去其荊而可矣老聃聞之曰去其人而可矣故老聃則至公矣天地大矣生而弗子成而弗有萬物皆被其澤得其利而莫知其所由始)
-荊人遺弓, 《呂氏春秋》 중에서
이 이야기는 《여씨춘추(呂氏春秋)》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형나라 사람 하나가, 참 인격자인데 이 사람이 사냥을 갔다가 활을 잃어버린 거예요. 그런데 잃어버린 활을 찾지 않고 산에서 그냥 내려오니 사람들이 이렇게 말해요.
“아니, 여보시오. 그 비싼 활을 잃어버렸는데, 왜 그걸 찾아보지도 않고 그냥 내려옵니까.”
그러자 이 사람이 하는 말이 이랬어요.
“형나라 사람이 잃어버린 활을 형나라 사람이 주울 텐데, 그거 내가 안 찾아도 그만입니다.”
보통 사람이 아니죠. 자기가 형나라 사람 전체만큼 커졌어요. 이런 사람은 왕을 시키면 좋아요. 이 사람이 바로 나라를 다 가진 사람입니다. 자신이 그 나라가 된 거예요. 우리는 아주 조그만 습득물을 주워도 신고하는데 이 사람은 “아니야, 그거 너 가져. 잃어버렸고 한국 사람이 주웠는데 내가 잃은 게 뭐가 있어, 내가 한국 사람 되면 되지”라고 말하는 경지잖아요.
그 이야기를 들은 공자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이고, 그 사람 소인(小人)이다. 이왕이면 형(荊) 자를 떼고 말하지 그랬냐.”
형인에서 형 자를 떼면 인(人)만 남지요. 사람이 잃은 거, 사람이 얻을 텐데 굳이 내가 찾을 게 뭐가 있냐의 경지로 커집니다. 국가의 경계가 없어지고 사람만 남아요.
“대~ 한민국!”에서 ‘한국’을 뺀다면?

▲축구 경기에서 “대~ 한민국!”을 외치고 있다. 지난 2012년 7월 런던올림픽 축구 남자 B조 조별 예선 대한민국 대 멕시코 경기에서 한국 교민들이 응원을 하고 있다. 사진=조선일보DB
우리가 축구 경기만 하더라도 막 “대~ 한민국!”을 외쳐요. 나라 이름을 외치고 나라를 기반으로 한 응원을 하죠. 사실 축구 경기에서 선수가 한 골 넣어봐야 내가 행복해지는 것도 돈이 생기는 것도 아닌데 기뻐 날뛰다가 한 골 먹었다고 그냥 땅을 치고 분해하잖아요. 그런데 공자님은 말합니다. 이렇게.
“아이고, ‘한국’을 빼봐라. 사람이 넣고 사람이 잃은 거 박수 칠 일도 분할 일도 없다.”
더 큰 것을 가진 군자는 그런 거 가지고 다투지 않는다는 거죠. 보통의 사람에게는 어려운 일이지만.
이런 게 휴머니즘입니다. 영화에 보면 많이 나오는 이야기예요. 어떤 간호사가 있습니다. 자기 어머니는 유대인이라 나치에 의해 죽었어요. 그런데 나치 장교 하나가 피를 흘리며 병원에 와요. 이걸 살려야 합니까 죽여야 합니까?
살리려면 ‘나라’라는 개념을 빼야 합니다. 만약 이 간호사가 나치 장교를 살렸다면 이미 이 여자는 땅에 있지 않고 하늘에 올라가 있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라, 자기 식구, 내 자식이 보여요. 내 자식에서 다시 나의 나라가 보입니다. 그다음에 다시 잘 올라가 봐야 글로벌인데, 다들 글로벌에서 더 큰 곳으로 나가는 것에 실패합니다. 그동안 모든 사람이 글로벌, 세계화, 국제화하면서 TV에서 유행처럼 지구촌을 이야기했지만 도대체 뭐가 글로벌이고 지구는 하나라는 말입니까? 도처에서 국가 간 분쟁이 일어나고 인종 저항을 하고 있는데.
우리나라만 해도 벌써 다문화 가정이 얼마나 많아요. 이주 노동자는 몇만이고요. 한국 땅에서 한민족만 가지고는 못 삽니다. 그런데 아무 준비가 안 되어 있어요. 지구촌이라고 말했지만 가짜라는 거죠. 이렇게 보면 여러분의 가치관이 막 흔들리는 겁니다.
글로벌, 세계화, 국제화를 하려면…
보통 나치 장교가 피를 흘리고 죽어가고 있다고 칩시다. 내가 사람을 살려야 하는 의사인데 내 앞에서 사람이 죽어가고 있어요. 그런데 그 내가 독일, 프랑스, 영국인이라는 의식이 있으면 그 사람을 살리는 게 아니라 거꾸로 죽여요. 내 나라의 원수라고 해서 죽이지 않겠어요? 사람이니까.
그러나 공자님의 도덕은 국가주의가 아니라 인간주의입니다. 휴머니즘이에요.
그러니 보세요. 자신과 형인을 동일시한 국가주의라고 하는 것만도 대단한 것 같았는데, 그게 아니지요. 일본이 우리를 삼키고 일본인이 한국에 와서 나쁜 짓을 한 것은 국가와 자신을 동일시한 것입니다. 사람 대 사람이라면, 어떻게 사람이 사람한테 그런 짓을 하겠어요. 국가주의이기 때문에, 내가 국가라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한국인을 일본인이, 식민지니까 죽여도 된다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지 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죽여요.
지금까지 우리가 배운 것은 국가주의, 민족주의밖에 없어요. 그걸로 이 글로벌한 세상에서 어떻게 살겠어요. 그러니까 여러분의 가치관이 막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대한민국을 외치면서 “국가와 민족을 사랑하라!”고 배웠는데 그걸 공자님이 “떼라, 국가를 없애봐”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거예요. 이건 정말 차원이 다른 이야기죠.
그런데 노자는 그 공자님을 두고도 소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에고 인(人) 자도 지워버리지….”
그러면 뭐가 됩니까? 짐승, 자연, 바람. 천하의 글로벌이 되는 거죠.
지금 우리는 지구에 인간만이 산다고 생각하며 살기 때문에 기후 온난화가 일어나고, 환경 파괴시키는 석유를 캐내며 살고 있는데 거기서 인(人)을 빼면 대자연만이 남아요. 그게 노자의 사상입니다.
# 우리는 어디까지 왔나요?
우리나라 사상을 보면 제일 밑에 가족주의가 있어요. 자기 선조를 조상신으로 믿고 제사를 지내면서 우리 선조와 족보를 들먹이며 으스대죠.
그다음에 나라를 믿는 국가주의가 있어요. 그다음이 인간주의. 거기서 더 나아가면 지렁이 울음소리를 듣고 하찮은 돌멩이도 끌어안는 높은 차원에서 사람도 안 보이고, 동네도, 나라도 안 보이는 별 하나가 보입니다. 그 별과 별이 만나는 그 높이까지 올라갈 수 있을까요? 사람인데.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이 내 새끼를 끌어안는 것이 인간인데, 가족을 희생시켜가며 나라에 내 자식을 바칠 수 있을까요? 드물긴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여태까지 자기 자식을 나라에 바치고서 “나는 인간으로서 가족을 벗어날 수 있는 가치를 가졌다, 국가를 위해 희생했다”라는 자부심을 가지는 겁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공자님이 나타나서 “나라는 좀 빼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또 나라를 빼고 인간으로서 적십자나 ‘국경 없는 의사회’ 같은 조직에 소속되어 내 국가와는 전혀 상관없는 아프리카 오지 같은 곳에 가서 인간을 위해 봉사를 합니다.
이번엔 노자가 와서 “야, 그 사람도 빼라”고 해요. 그게 쉬운 일이 아니죠.
그래서 이제 물어보는 겁니다. 우리는 어디까지 왔을까요? 범인(凡人)의 가족주의에서 형인(荊人)의 국가주의, 공자의 인간주의, 노자의 무위자연 중에서 우리는 어디까지 와 있습니까?
아직까지는 자기 집 문밖 앞까지도 못 나온 것 같아요. 내가 생각하는 것과 여러분이 생각하는 정도가 다를 수 있겠지요? 그래도 아직 갈 길이 멀지요?
# 天人相關 사상은 위험해요
여기서 잠깐! 한국인의 강한 천인상관(天人相關) 사상을 한번 살펴볼까 합니다. 천지인이 조화를 이루는 삶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천지에 종속되는 삶을 선택하는 경우를 말합니다.
천인상관 사상은 하늘이 인간을 속속들이 다 들여다보고 잘못이나 나쁜 짓을 하면 가뭄이나 폭풍이나 홍수로 징벌도 한다는 생각을 내포하고 있어요. 반대로 잘못을 속죄하고 빌면 용서도 하는, 하늘이 인간의 양심(良心)과 직결된 존재라고 여기는 식이죠.
조선 전기의 문신 추강 남효온(南孝溫·1454~1492년)의 수필집 《추강냉화(秋江冷話)》에 이런 이야기가 적혀 있습니다.
경기도 이천에서 한 강도가 처형을 당했는데 처형 직전 이 강도는 “나는 어릴 때 절도질을 한 일은 있으나 강도질은 한 일이 없다. 내 말의 허실은 하늘이 반드시 알고 있을 것”이라고 하였지요. 그런데 처형당하자마자 먹구름이 몰려들어 폭우가 쏟아졌고, 이천골 거의가 침수되고 대홍수를 몰고 왔어요.
물론 우연의 일치일 테지만 우리 옛 선비들의 강한 천인상관 사상은 결코 이를 우연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수령은 사직서를 써 역마 편으로 올려보내고 자신은 거센 탁류에 몸을 던져 자결했다고 해요.
우리 옛 선비들은 이처럼 하늘과 나의 양심 사이에 직결된 어떤 매체(媒體)가 있다고 여겼던 겁니다. 이것은 막스 베버가 거론한 기독교 문화권의 초자아(超自我·Super Ego)와 흡사한 가치관이랄 수 있습니다. 곧 이기적(利己的)이고 속물적인 나를 초월한, 즉 하늘이 지켜보는 양심적 자아가 우리 옛 선비들에게는 체질화돼 있었던 셈이지요.
그러나 천인상관 사상은 대단히 위험한 발상일 수 있어요. 착한 일을 하면 하늘이 복을 내리지만 나쁜 일을 하면 벌을 받는 인과응보의 법칙은 늘 성공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이 세상에 인간을 불행하게 만드는 요소들이 너무 많아 착하게 살려고 해도 그렇게 되지 않고 착해서 반드시 보상을 받는 것도 아니란 걸 알 수 있지요.
기게스의 반지 이야기

▲플라톤과 ‘기게스의 반지(The Ring of Gyges)’. 이미지 출처=www.thevintagenews.com.
플라톤의 《국가(Republic)》에 유명한 ‘기게스의 반지(The Ring of Gyges)’ 우화가 실려 있습니다. 바르게 살고, 착하게 사는 것이 행복의 필요조건이라는 견해를 물리치는 반론(反論)으로 자주 등장하는 이야기입니다.
한때 기게스는 목동이었습니다. 기게스가 양을 치고 있던 어느 날 갑자기 커다란 지진이 일어났어요. 지진이 일어난 자리에 땅이 갈라져 동굴이 생겼는데 기게스는 동굴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 안에서 금반지를 낀 거인의 시체를 발견합니다. 기게스는 거인의 손가락에서 반지를 빼들고 밖으로 나왔어요. 어느 날 우연히 반지의 흠집 난 곳을 안으로 돌리면 투명인간이 되고 밖으로 돌리면 자신의 모습이 다시 나타난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이제 ‘보이지 않는 힘’을 가진 기게스는 나쁜 마음을 먹게 됩니다. 가축의 상태를 왕에게 보고하는 전령으로서 궁전에 들어간 기게스는 마법의 반지를 이용해 왕비와 간통하고, 왕을 암살합니다. 심지어 왕위를 찬탈하고 왕으로 등극하죠.
기게스는 마법의 반지를 이용해 왕비를 유혹했고 왕을 죽였으니 부도덕하기 이를 데 없어요. 그렇지만 그는 왕위에 오르는 행복을 누립니다. 사람이 나쁜 짓을 하면 벌 받고 불행해야 하는데 기게스의 우화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죠.
# 어떤 운명에도 의연한 사람이 되세요

▲기원후 5세기의 희랍과 로마 철학의 최후를 장식한 사상가 보이티우스.
사실 악한 사람이 행복해지는 사례는 현실 속에서 혹은 가공의 소설 속에서 흔하고도 흔합니다. 착하고 겸손하며 도덕률을 철저히 지키는 삶이 행복의 필요조건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당장 오늘자 신문을 펼쳐보면 알 수 있어요. 세상에는 내가 미워하는 사람이 잘살고 높은 자리에 앉아 있으니까요. 나만 왜 이리 사는지, 하늘이 원망스럽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생각해보세요. 인간이 서로 부도덕함만을 추구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법과 제도가 필요 없고 연민이나 동정, 양심도 필요 없어요. 모든 것이 힘에 의해 좌우되고 인간의 운명은 그날그날의 운수에 결정될 수밖에 없어요. 그리고 그 힘도 오래 지속될 수 없어요.
되짚어 생각하면, 바르게 산다는 것이 재물을 충족시키고 권력이나 사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필요한 것일까요? 높은 자리나 힘센 권력 속에 어떤 자연적 선(善)이나 본성 같은 하늘의 의지가 내포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기원후 5세기 로마제국의 정치가이자 희랍과 로마 철학의 최후를 장식한 사상가 보이티우스(Anicius Manlius Severinus Boetius·477~524년)가 사형 선고를 받고 유배지에서 처형될 날을 기다리며 저술한 책이 《철학의 위안(De Consolatione Philosophiae)》(정의채 몬시뇰 譯)입니다. 이 책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우리는 상습적으로 행인을 살해하던 부시리디스(Busiridis)가 나그네인 헤르쿨레스(Hercules)에게 살해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레굴루스(Regulus)는 포로로 잡은 많은 카르타고 사람들을 쇠사슬로 붙들어 매었지만 얼마 안 가 그 자신이 전쟁에 패하여 자신의 손을 그들의 쇠사슬에 내맡겨야 했다. 그러니 사람이 자기가 행한 것을, 남이 자기에게 응보 하지 못하도록 방지할 수 없다면 그런 권력이 대관절 무엇이 장하단 말인가.
… 수많은 악한이 고관대작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 현실인즉 그 고관직 자체가 본질적으로 선일 수 없음은 확연하다. 그리고 여러 다른 행복도 이와 마찬가지니 대체로 행복이란 아주 악덕한 사람들에게 더 풍성하게 베풀어지는 법이다.〉(p74~75)
세속적 행복에 씐 가짜 이름
보이티우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부러워하는 재물과 권력, 높은 지위는 하느님이 창조한 사물의 본성과는 거리가 멀고, 사람들이 그 사물의 본성과는 얼토당토않은 가짜 이름을 붙여 부르곤 하기 때문에 혼란이 생겼다”는 겁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세속적 행복(권력, 재물 등)은 다 진정한 행복이라고 불릴 수 없어요. 그러므로 행복이란 그 자체 안에 바랄 만한 아무것도 지니고 있지 않을 뿐 아니라 아무런 선도 없음을 알 수 있어요.
흔히 한국인은 철학과 사상이 부족하다고 합니다. 천인상관 사상이 강하면 강할수록 인간은, 인간의 철학은 숨 쉴 수 없어요. 철학은 현실의 공포나 희망에서 자유로워진 인간을 다루는 분야입니다. 철학적 인간은 어떠한 천재지변이나 폭군의 횡포에도 놀라거나 쉽게 동요하지 않습니다. 주변의 변화에 휘둘리며 그때그때 희망이나 공포를 갖는 사람은 평생 자유롭지 못하고 스스로 압제 속에 살아가게 됩니다. 보이티우스의 시 한 편을 소개합니다.
어떠한 운명에도 의연한 사람은
거만한 운명을 발 밑에 깔고
행운과 불운을 올바르게 쳐다보며
그 얼굴 태연하게 보존할 수 있네.
태풍 휘몰아치는 바다의 광포도
큰 입으로 화염을 뿜어서
흑연(黑煙)에 뒤덮인 활화(活火)의 베수비오산도
드높이 솟은 저 탑 때려치는
천둥 번개와 벼락도
그 마음 혼란시킬 수는 없네.
가련한 사람들아! 어찌하여 너희는
하잘것없는 횡포스럽기만 한 폭군들을
무서워해 떤단 말이냐.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아무것도 두려워 않는다면
너, 폭군의 진노를 무력게 하리로다.
그렇지만 무서워해 떨거나
합당치도 못한 것만을 탐하는 자는
방패를 버리고 제자리를 떠남과 같으니
자기를 묶을 쇠사슬을
마련하는 것이니라.
-보이티우스의 《철학의 위안》 중 ‘제1서’에서
# 안중근 의사가 진짜 영웅인 까닭은 무얼까요?

▲지난 2019년 3월 26일 서울 중구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 열린 ‘안중근 의사 순국 109주기 추모식’에 일본인 참석자들이 헌화하고 있다. 사진=조선일보DB
사람의 선택은 늘 위태롭습니다. 시각과 관점에 따라 정반대의 해석을 낳기도 합니다. 정말이지 사람의 신념이란 것은 믿을 것이 못 됩니다. 인간이 지닌 각자의 신념이, 신념의 칼끝이 언제 자신을 향할지 모릅니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1841~ 1909년)를 일본에서는 일본의 근대화를 이끈 애국자라고 합니다. 그를 하얼빈에서 총을 쏘아 죽인 안중근(安重根·1879~1910년) 의사는 우리의 영웅이지요. 이렇게 나라 대 나라로 보면 우리의 원수는 저들의 애국 영웅이 되고 반대로 우리의 영웅은 저들에게는 테러 범죄자가 됩니다. 나라 대 나라의 대립구도로만 본다면 이 문제는 영원한 돌림노래, 쳇바퀴 돌리기입니다.
어떻게 해야 이토를 죽인 안중근 의사가 위대해질까요? 국가주의를 넘어 그보다 더 높은 곳에서 말을 해야 합니다. 일본 사람이 하는 것보다 더 높은 차원의 인도주의에서 한 것이었다고 해야지요. 그렇게 되면 안중근 의사는 우리의 영웅이 아니라 세계 인류에 대한 폭력을 막은 사람, 비인간적인 짓을 저지르는 일본인과 맞서 싸운 사람이 되는 겁니다.
일본이라는 국가와 싸운 사람이 아니라, 그 비인간적인 세력과 싸워서 이긴 사람이에요. 그러면 안중근 의사는 한국의 영웅이 아니라 인류의 영웅이 될 수 있어요.
신념이란 이름의 욕망
그런데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봅시다. 그린피스 같은 범지구적 환경운동을 해서 자연파괴를 막는다면 그 사람은 누구의 영웅이 될까요? 그 자연에서 살아가는 다람쥐, 토끼, 그리고 자연 그 자체겠지요. 정말 위대한 영웅인 것이죠. 그보다 더 큰 영웅이 있을 수 있을까요?
그러나 자연이라는 게 아름다운 자연만 있으면 누군들 못 하겠어요. 자연에는 코로나19, 오미크론, 메르스, 페스트와 같은 고약한 바이러스도 있어요. 그것도 생명체죠. 그러니 그게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도 함부로 ‘나는 누구야’라는 신념을 가지면 안 돼요. 이렇게 어려운 문제를 매일매일 같이 싸워서 자기만의 결론을 얻지 못한다면 지식인이라고 할 수 없어요.⊙
06월 호
⑦ 천지인(天地人)과 윤동주의 ‘서시’
“높은 곳에 ‘별’, 가장 아래에 ‘잎새’, 그사이에 ‘내’가 있다”
⊙ 라파엘로 그림에 플라톤의 손끝이 하늘을 가리키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손바닥이 땅을 가리키고 있는 까닭은…
⊙ 김소월 ‘진달래꽃’ 속 두 사람은 서로를 역겨워도 않고, 가지도 않았으며, 열렬히 사랑하고 있는 중
⊙ 윤동주 ‘서시’는 부끄럽지 않게 살았고, 살고 있고, 살 것이라는 맹세
⊙ 인간은 비록 불완전하고 땅에서 죄를 짓고 살지만 하늘을 볼 수 있기에 부끄러움을 알아

▲화가 김병종이 즉흥적인 느낌으로 그린 이어령 초상.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축소지향의 일본인》 등을 쓰던 젊은 날의 이미지로 그렸다. 사진=조선일보DB
내가 서양 사람들 앞에서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 사상을 이야기하면 서양인들이 다들 와 놀랍다고 이야기하는 까닭이 있어요.
서양의 최고 철학자는 플라톤입니다. 영국의 철학자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1861~1947년)는 “오늘날 서양 철학은 플라톤의 주석본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을 했어요. 여기에 하나 더 붙이자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있지요.
이탈리아 르네상스 전성기의 화가 중에 라파엘로(Raffaello Sanzio·1483~ 1520년)가 있습니다. 이탈리아 로마는 기본적으로 기독교 내지 그리스도교 국가이지만 르네상스 시기에 그리스·로마 문화가 들어와요. 중세 때는 그리스도교와 이방의 종교 문화는 대립하고 싸웠지만 르네상스에 들어서 기독교가 그리스·로마의 문화까지도 다 품어버립니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바티칸 교황청의 프레스코화입니다.
대표적인 그림은 라파엘로가 1510~1512년 사이에 그린 〈아테네 학당(Scuola di Atene)〉이라는 작품입니다. 그리스는 희랍의 신(神)을 믿는 다신교니까 로마 가톨릭의 입장에서 보면 이교도지요. 그런데 왜 바티칸에 이 그림을 그리게 했을까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까지도 예수님 밑에 오면 다 제자가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 〈아테네 학당〉을 보면 알겠지만, 가로세로의 비율이 똑같아요. 이처럼 비율이 똑같은 게 기독교의 십자가입니다. 그러니까 희랍의 철학자들을 데리고 기독교를 만든 거죠.
서양 철학의 기본 -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이탈리아 르네상스 전성기 화가 중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 오른쪽은 그림 속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사진=조선일보DB
이 그림의 중앙을 보세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세워놓았지요? 그리고 나머지 희랍 철학자들을 다 집어넣었어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여기 벌거벗고 드러누워 있는 사람이 디오게네스라는 건 한눈에 알아볼 수 있죠. 통나무집에서 산 디오게네스 말고 또 누가 이렇게 바닥에 드러누워 있겠어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크게 확대해 보면, 플라톤의 손끝이 하늘을 가리키고 있어요. 아리스토텔레스는 손바닥을 아래로 해서 땅을 가리키고 있죠.
이러니 서양 사람들이 내가 ‘천지인 삼재’를 이야기하면 놀라지 않을 수 있겠어요?
플라톤은 “모든 인간의 본질은 하늘에 있다”라고 말하고 있어요. 그러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선생님, 하늘이 아니라 땅이지요, 땅”이라고 말합니다.
이게 이원론(二元論)입니다. 서양은 죽었다 깨어나도 이 이원론에서 벗어나지 못해요.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1770~1831년)이 정(正·테제·Thesis), 반(反·안티테제·Antithesis), 합(合·신테제·Synthesis)이라고 해도, 프로이트(Sigmund Freud·1856~1939년)가 무의식을 파헤치고 별의별 것을 다 했지만 결과적으로 서양에서 ‘하늘’과 ‘땅’은 멀어요. 하늘은 이데아, 관념의 세계이고 땅은 육체의 세계입니다. 하늘은 무한·영원의 세계이고 땅은 순간·공간의 세계입니다. 무한·유한, 선·악, 두 세계로 나뉩니다.
서양에서는 하늘나라에서 잘못한 사람들이 모두 땅으로 떨어져요. 떨어지는 것은 무게를 지니고 있어요. 중력에 의해 떨어지는 것은 다 나쁜 것이 되고, 죄는 항상 무거운 것이에요. 무거운 죄를 지은 죄인들의 발목에 큰 족쇄를 채우죠.
반대로 중력을 이기고 날아가는 것들은 선(善)한 것들, 좋은 것들이죠. 그래서 단테의 《신곡》에 보면 죄의 무게만큼 높은 산을 올라가는 형벌을 내립니다. 올라간 만큼 죄가 가벼워져요.
# 잘못된 지식의 위험성 - ‘진달래꽃’의 새로운 해석
▲1988년 12월 촬영한 이어령 선생과 ‘호돌이 어린이’ 윤태웅 군. 한국을 세계에 알린 88서울올림픽의 이미지 메이커 이어령 선생이 개회식 〈정적〉에서 굴렁쇠를 굴린 ‘호돌이 어린이’ 윤태웅 군을 안아 올려 원의 의미를 말해주는 모습이다. 사진=조선일보DB
우리나라 사람들이 다 아는 국민시 두 편이 있어요. 그중 하나가 김소월(金素月·1902~1934년)의 ‘진달래꽃’입니다. 교과서에 실린 이 시를 대개 학창 시절 외웠거나 지금도 외우고 있을 겁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시는 윤동주(尹東柱·1917~1945년)의 ‘서시’입니다.
두 시 모두 각종 시험에 단골 출제되는 시지요. 심지어 외울 수도 있어요. 그러나 그렇게 외우는 사람 중 거의 단 한 사람도 ‘진달래꽃’과 ‘서시’를 제대로 모른다고 말한다면 믿으시겠어요?
자, ‘진달래꽃’을 우리는 이별의 시로 배웠어요. 과연 진짜 그럴까요? 이 시는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이라고 시작해요. ‘가실 때’니까 아직 내가 사랑하는 님은 안 갔어요. 이런데 어떻게 이별의 시가 됩니까?
‘만약 당신이 가신다면 이러이러하겠다’는 이야기니까 현재 이 두 사람은 서로를 역겨워도 않고, 가지도 않았으며, 열렬히 사랑하고 있는 중이에요. 가령 내가 ‘만약에 백만원이 생긴다면…’이라고 썼는데 시제를 잘못 봐서 ‘아, 이(李)아무개 백만원 생겼대’라고 오해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게 영어로 하면 if 가정법이잖아요. 그런데 학교에서 다들 그렇게 가르쳐요. 사랑가가 아닌 이별가로 말이죠.
‘진달래꽃’은 이별가가 아닌 사랑가
▲2016년 6월 서울 종로구 화봉문고에서 전시된 《진달래꽃》 초판본의 모습. 시인 김소월이 생전에 낸 유일한 시집인 《진달래꽃》 초판본은 2015년 경매에서 1억 3500만원에 낙찰되었다.
“사랑한다면 당신하고 어디 가서 서로 진달래꽃 꺾어서 뿌리지 않고 화전이라도 부쳐 먹으면서 오순도순 했어야지. 이건 분명히 이별하는 이야기야”라고 단정하는 식이에요.
그러나 동사의 시제를 잘 보세요.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에서 보듯 ‘드렸다’가 아니라 ‘드리오리다’잖아요. 그런데 다들 ‘드렸다’로 읽어요. 그러니까 이별의 시가 된 거죠. ‘뿌리오리다’지, 뿌리지 않았어요. 이 시의 동사는 전부가 미래 추정형입니다. 마지막 구절도 보세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지금은 눈물을 흘리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이 시가 정말로 이별가가 되려면 이렇게 되어야죠.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 말없이 보내 드렸었지.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지르밟고 가셨지. 죽어도 눈물 안 흘리려고 했는데 눈물 펑펑 흘렸습니다.’
이게 원래의 시와 닮기나 했어요?
이 시의 화자가 말하고자 하는 건 이 말이에요.
“내가 당신을 지금 열렬히 사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당신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나를 버려도 꽃을 뿌려줄 겁니다. 나는 눈물도 안 흘릴 겁니다, 이렇게 사랑하는데….”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 시는 이별을 가장하여 사랑을 노래한 시예요. 이별을 상상하면서 이별을 통해 오늘의 반대되는 상황으로 오늘의 내가 누리고 있는 사랑의 기쁨을 노래한 시예요. 이별의 슬픔을 통해 사랑의 기쁨을 노래한 것이죠. 이것을 전문적인 용어로는 패러독스 아이러니(Paradox Irony) 수법이라고 합니다.
# 선입견으로 읽는 윤동주의 ‘서시’
우리가 학교 다닐 때 책에 줄 긋고 칠하면서 배운 시가 윤동주의 ‘서시’입니다.
윤동주…저항시인…서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하며 줄줄줄 외웠죠. 이게 상표(商標)입니다. 영화사의 로고예요. 알맹이가 아닌 껍데기죠. 외우면 윤동주의 시를 알게 됩니까?
윤동주 저항시? 윤동주가 저항하는 거 봤어요? 다 선생님에게 들은 얘기지요. 이 시를 읽기도 전에 선생님이 알려줘요.
“윤동주는 저항시인이다. 이 시는 일제에 저항한 시다”라고 말한 뒤 시 읽기를 시작하지요.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아! 죽는 날까지 일제에 저항하겠다는 다짐이구나’ 하고 해석해가면서 읽는 거죠. 그렇게 하고 읽으면 이 시의 여러 군데가 걸려요.
윤동주 선생이 저항시인이 아니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그러나 저항시인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이 시를 보면 이 시의 진짜 값어치를 모르게 돼요. 다 일제에 저항하는 시로만 읽으니까, 이 시의 장치나 비유도 딱 그렇게 한정 짓게 되니까요.
만약 여러분이 이 시를 쓴 시인이 누구인지 모르고 선생에게 가르침도 받지 않고 그냥 날것인 채로 읽었을 때도 저항시라고 느껴질까요? 한번 해보세요.
‘서시’를 날것 그대로 다시 읽기
저항시라는 말도 모르고 윤동주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길을 걷는데 그냥 ‘서시’가 땅바닥에 떨어져 있기에 주워 읽었다 칩시다. 그런 마음으로 솔직하게 그냥 읽어보세요.
이 시만 읽어서 ‘아, 이분이 후쿠오카 감옥에서 생체실험 희생자로 돌아가시고, 그 집안도 다 기독교인인 데다 독립운동을 하신 분들이지’ 하고 느껴질까요?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 윤동주의 ‘서시’ 전문
아무런 선입견 없이 이 시만 읽었을 때, 조선 독립을 위해서 싸우겠다는 마음이 느껴져요? 이 시를 저항시로 읽으려면 해석을 이렇게 해야 합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부끄럽지 않게 나는 친일파가 되지 않겠다. 일본놈 앞잡이를 절대 안 하겠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잎새라는 게 민초들이지. 바로 한국인이야. 이 시를 쓰고 있는 윤동주가 살고 있는 북간도로 쫓겨온 가난한 사람들이지. 이 사람들을 보니 일본 식민치하에서 사는 사람들이 너무너무 안되어 보여서 윤동주가 괴로워하고 있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조국 해방의 별, 우리의 별 그걸 위하여 나는 끝까지 일본 사람들에 의해 죽어가는 사람들을 사랑해야지. 우리 동포를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일제에 저항하고 조선[한국]을 독립시켜서 이 가난하고 학대받고 어렵고 고난에 찬 민족을 구해야 되겠다. 그 길이 나에게 주어진 길이니 나는 오늘도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끝!
자, 여러분은 저항시인 윤동주 시인의 저항시 한 편을 감상했어요.
# 새롭게 읽는 윤동주의 ‘서시’ - 삭제된 서술부의 시제
그런데 저항시인이라는 프레임을 제거하고, 시대상황도 배제하고 이 시를 읽으면 ‘모든 죽어가는 것들’에 예외가 있습니까? 일본 사람, 한국 사람의 구별이 있어요? 공자님이 말씀하신 대로 ‘나라’를 빼고, 이 시에서는 ‘노자’까지 나갔어요.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이니까 ‘사람’까지 뺐잖아요.
‘바람에’+‘도’가 붙으니, ‘바람’은 물론이고 ‘사람’은 말할 것도 없죠.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그러니 그게 일본인이든 중국인이든 한국인이든, 내 이웃을, 죽음의 운명을 타고난 인간을 윤동주는 사랑했어요. 태어나면서 사형선고를 받는 것이 사람이죠. 언제가 되었든 필연적으로 죽는 것이 인간이에요. 그런데 사람들은 죽을 줄 알면서도 버티고 싸우지요. 윤동주는 그 안에서 버티는 것이 아니라 하늘까지 올라갔어요.
하늘에 올라가면 별이 있습니다. 땅을 노래하는 마음이 아니라 별을 노래하는 거니까 벌써 그 안에 역사를 내재하고 있다는 말이지요. 역사를 포함하고 점점 위로 올라가면 땅이 보이고 지구가 보이고, 거기서 쭈욱 올라가서 별을 노래하는 겁니다. 하늘을 우러러보는 거죠.
그러니까 하늘까지 못 올라간 사람, 별을 모르는 사람은 풀잎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할 리가 없어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이라는 말은 현재 자신은 부끄러울 것이 전혀 없다, 나는 결백하다, 나는 그런 뜻을 가지고 있다며 스스로에게 맹세하는 말이에요. 그렇게 살고 싶다고 소원하는 거죠.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시인 김소월
이렇게 맹세하고, 다짐하고, 소원한다는 건 돌이켜 말하면 죽는 날까지 부끄럼 없이 살고 싶은데 그게 자신이 없다는 말이기도 해요. 자신이 없으니 또 한 번 맹세하고 다짐하는 거죠.
앞에서 김소월의 ‘진달래꽃’을 이야기하면서 시제를 잘못 읽으면 시의 본래 뜻을 모르고 착각하게 된다고 했지요? 그런데 ‘서시’의 이 부분은 한국어의 특성상 서술어를 생략하면서 시제가 동시에 생략되어 있어요. 보세요.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 없기를’ 하고 서술어 대신 말줄임표(…)를 썼어요. 이건 읽는 사람이 서술부의 시제를 무엇으로 넣어 읽느냐에 따라 이 문장을 과거로도 현재로도 미래로도 읽을 수 있다는 거지요. 한 번 해볼까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맹세했다’라고 읽으면 과거에 맹세한 것이지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맹세한다’라고 읽으면 지금 현재에 내가 맹세하고 있는 것이에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맹세할 것이다’라고 읽으면 미래에 그리 맹세할 것이라는 다짐이 됩니다. 과거, 현재, 미래에도,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이 없다는 이야기예요. 부끄럽지 않게 살았고, 살고 있고, 살 것이라는 말이지요.
# ‘부끄러움’도 문화의 산물. 3가지 부끄러움
▲한 다큐멘터리에 소개된 〈‘미니스커트 1호’ 윤복희 이야기〉 캡처.
1967년 가수 윤복희씨가 우리나라 최초로 미니스커트를 입고 나타났을 때 신문과 방송에서는 망신스럽다고 야단이 났어요. 결국 윤복희씨는 미니스커트 때문에 울고 갔잖아요. 요즘은 그가 입었던 미니스커트는 오히려 얌전해 보일 정도인데 옛날엔 그 정도의 길이도 창피해했어요.
그러니까 부끄러움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문화입니다. 어느 문화에서는 부끄럽지 않은 것이 어느 문화에서는 부끄러운 것이 되지요. 또 남에 대해서는 부끄러운 것이 자기에 대해서는 조금도 부끄럽지 않은 경우도 있어요. 자기가 혼자 있을 때는 아무렇게나 해도 부끄럽지 않잖아요. 주말 오전에 늦잠 자고 일어나 한껏 흐트러진 모습도 혼자 있을 때는 부끄럽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지요. 그 모습을 누가 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 그때부터는 부끄러워지지만. 또 남들은 모르는 나 혼자만의 부끄러움이 있어요. 자기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 이건 하늘에 대한 부끄러움이죠. 남들은 다 몰라도 하늘과 나만은 아는 그런 일들이 있으니까요. 이 부끄러움이 땅으로 내려오면 다시 남에 대한 부끄러움, 흔히 말하는 ‘쪽팔리는’ 부끄러움으로 바뀌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세 가지 부끄러움을 배웠어요.
하늘이 나를 봤을 때의 부끄러움, 땅의 사람(법, 제도 등)이 나를 보았을 때의 부끄러움, 그리고 꽃과 같은 자연이 나를 보았을 때의 부끄러움이 있어요. 남이 보는 앞에서는 부끄러워서 옷을 못 벗는데, 집에서 키우는 반려동물 앞에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옷을 벗어요. 개에게, 탁자에 놓인 꽃한테 “저리 가, 고개 돌려”라는 말을 하지는 않잖아요.
부끄러움조차 ‘천지인’과 연관해 설명할 수 있는 거예요. 이러니 ‘천지인’이 기가 막힌 거죠.
‘나와 하늘’이 직접 연결된 ‘부끄러움’
▲백범 김구 선생이 남긴 유묵 ‘신기독(慎其獨)’. 사진=문화재청
좀 더 ‘부끄러움’에 대해 이야기해볼게요.
그리스도교를 믿는 사람은 부끄러움을 ‘선악과(善惡果)’와 연관 지어 생각할 수 있어요.
하느님이 남자와 여자를 창조했을 때 창세기 2장 25절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람과 그 아내는 둘 다 알몸이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하느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먹은 뒤 어떻게 됐을까요? 창세기 3장 7절입니다.
‘자기들이 알몸인 것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두렁이를 만들어 입었다.’
‘무화과나무 잎을 엮었다’는 것은 알몸을 부끄러워했다는 말과 같아요. 이처럼 부끄러움은 인간의 원죄(原罪)에서 나왔다는 시각입니다. 이 부끄러움은 하늘(신) 앞에 감히 고개를 들 수 없는 인간의 타고난 죄인 것이죠. 부끄러움의 세 층위(層位) 중 첫 번째 ‘하늘이 나를 봤을 때의 부끄러움’입니다.
신기독(愼其獨), 혹은 신독(愼獨)이란 말이 있습니다. 《대학(大學)》과 《중용(中庸)》에 나오는 말인데, ‘홀로 있을 때 삼가라’는 뜻입니다. 백범(白凡) 김구(金九·1876~1949년) 선생이 남긴 여러 유묵 가운데 ‘신기독’이란 글씨가 등록문화재(제442-2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김구가 집무실 벽에 ‘신기독’을 걸어놓았다고 합니다.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년) 선생 역시 ‘신독’이란 말을 따랐다고 합니다. 어느 더운 여름날, 퇴계가 의관을 정제하고 서책을 읽자 가족들이 편하게 옷을 갈아입으라고 권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퇴계는 “혼자 있어도 천 명 사이에 있는 것처럼 행동해야 한다”며 ‘신독’이라는 글귀를 남겼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퇴계와 김구의 경구, 愼獨
《송사·채원정전(宋史·蔡元定傳)》에서는 ‘신독’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밤길 홀로 걸을 때에도 그림자에 부끄러움이 없어야 하고, 홀로 잠잘 때에도 이불에 부끄러움이 없어야 한다(獨行不愧影 獨寢不愧衾).’ 남이 보든 안 보든 스스로 삼간다는 이 신독·신기독은, ‘나와 하늘’이 서로 연결돼 있음을 뜻합니다.
‘나(개인)와 사회’, 다시 말해 ‘사회 법률·제도’가 나와 연결된 것이 아니라 ‘나와 하늘’이 직접 연결돼 있습니다. ‘나와 하늘’이 주고받는 것이지 중간에 ‘사회와 법률’이 개입할 순 없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손가락질을 받아도, 법을 어겨 혹독한 처벌을 받아도 ‘나와 하늘’ 앞에 떳떳한 겁니다.
1984년 5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방한해 시성식(諡聖式)을 직접 주재하며 김대건(金大建·1822~1846년) 신부를 비롯해 가톨릭 복자 103위를 성인(聖人)으로 품위를 올렸습니다. 또 지난 2014년 2월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에게 시복(諡福) 결정을 내렸습니다.
한국의 신앙 선조들은 선교사나 사제, 수도자의 가르침을 통해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나와 하늘’이 바로 연결된 경우가 아닐까요?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죽음까지 불사해가며 믿음을 지키게 했을까요?
조선 왕조가 자행한 전 근대적 사상 통제와 신분제적 사회 질서에 대한 저항이었을지 몰라도 보다 높은 차원의 선택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망해가는 조선을 위해 목숨을 내놓았을 근거가 부족합니다. 어쩌면 그들의 죽음은 인간의 양심과 인격에 대한 깨달음의 표현이 아니었을까요? ‘순교자의 죽음은 역사 발전 과정에서 출현한 사상과 양심의 자유에 대한 갈망의 결과’(한국천주교주교회의·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라는 평가도 있습니다. 이때 양심은 ‘나와 하늘’이 바로 만나는 지점입니다.
양심과 ‘부끄러움’
▲시인 윤동주
독자 여러분이 종교를 믿지 않는다면, 부끄러움은 개인의 양심(良心) 문제일 수도 있어요. 두 번째 ‘땅의 사람(법, 제도 등)이 나를 보았을 때의 부끄러움’ 말입니다.
네이버 국어사전에서 ‘양심’을 찾아보면 이렇게 정의되어 있어요.
‘도덕적인 가치를 판단하여 옳고 그름, 선과 악을 깨달아 바르게 행하려는 의식.’
《철학사전》(중원문화 刊)에서 ‘양심’을 다시 찾아보았습니다.
‘인간이 사회에서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도덕적인 책임을 생각하는 감정상의 느낌을 말한다.’
어떤 선택을 하고 결정에 책임을 지는 과정에서 ‘양심에 어긋나면’ 혹은 ‘도덕적인 책임감을 느끼면’ 부끄러움을 느끼게 됩니다. 어떤 이는 아무리 인적이 드문 거리라도 함부로 무단횡단하지 않습니다. 지나는 차도 없고 횡단보도가 멀어도 그는 도로교통법을 철저히 지킵니다.
그런데 이 양심이 형성된 과정을 추적하면 조금 복잡해집니다. 저 유명한 에리히 프롬(Erich Pinchas Fromm·1900~1980년)의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떠올려보세요. 어떤 이는 자신의 양심에 따른 결정에 불안감과 공포를 느낍니다. 스스로 선택한 삶의 원칙(양심)을 따르지 못하고 외부의 ‘신화’와 ‘우상’을 섬깁니다.(신화와 우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독립적인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심리 상태를 ‘자유로부터의 도피’라고 하지요.)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는 양심의 실체는, 내면의 성찰과 비판을 거쳐 스스로 삶의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에서 생긴 것이어야 합니다. 남이 만든 도덕률 혹은 윤리적 외부 준거(準據)나 틀에 맞추고, 맞춰가는 행위를 ‘양심에 따른다’고 착각합니다. 사회적인 법과 제도, 도덕률이 절대적인 양심이 될 순 없습니다.
양심과 ‘자유로부터의 도피’
아무리 사회 제도가 허용한다고 해도, 내 양심에 비춰 아니라고 느끼면 그것은 아닌 것입니다. 미국 사상가 헨리 소로(Henry D. Thoreau·1817~1862년)가 말하는 시민 불복종 운동(Civil Disobedience Movement) 같은 것이죠.
일제강점기 독립투사들이 조선총독부의 혹독한 법과 제도를 알면서도 목숨을 걸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양심 때문이었어요. 그래서 모진 고문을 겪고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세월이 흘러 그토록 믿어왔던 도덕률이 악법으로 바뀔 경우 양심은 큰 혼란에 빠져버리고 맙니다. 그렇기에 양심은 세상에서 평가하는, 옳고 그른 것을 초월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야 바람이 불어도, 권력이 바뀌어도 자신을 지켜나갈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사람마다 양심, 풀이하자면 자긍심, 수치심, 그리고 죄책감 같은 정서들은 천차만별입니다. 부모의 양육태도가 ‘부끄러움’과 ‘뻔뻔함’을 결정한다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브로디와 셰퍼의 연구(1982)에 따르면 위협적이고 처벌적인 부모들이 도덕적으로 성숙한 자녀들을 양육하게 되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이와 정반대로 가혹한 형태의 훈육에 의존하는 부모들은 종종 부적절한 행동을 하고 죄책감, 양심의 가책, 수치심, 혹은 자기비판을 거의 나타내지 않는 자녀들을 갖게 되는 경향이 있다고 해요. 아이들을 부모가 의도하는 방향으로 얼마든지 변화시킬 수 있다는 ‘교육만능론’은 전혀 신뢰할 것이 못 됩니다.
어쨌든, 각 개인이 태어나고 자라난 환경, 양육태도가 다르듯 저마다 부끄러움을 느끼는 정서상의 반응, 즉 양심도 다릅니다.
복수와 관련한 두 이야기
▲독일 연출가 오스터마이어의 〈햄릿〉에서 선왕의 장례식 장면이다. 무대를 가득 덮은 흙을 활용해 인물들의 심리와 공간을 표현한다. 사진=LG아트센터
영화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2015)는 사냥꾼 휴 글래스(리어나도 디캐프리오 扮)의 복수극입니다. 휴 글래스는 거대한 야생 곰에게 일격을 당해 큰 부상을 입게 되는데 비정한 동료 피츠 제럴드(톰 하디)는 인디언의 추격과 돈에 눈이 멀어 휴의 아들을 죽이고 그 또한 땅속에 묻고 떠납니다. 휴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처절한 복수를 완성하는데 이 경우 어떤 사람은 ‘복수하라’고 양심에 명령을 내리지만, 어떤 이는 ‘어떤 일이 있어도 살인만은 하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셰익스피어의 《햄릿》도 양심의 문제를 다루고 있어요. 덴마크의 왕이 갑자기 서거하자, 동생 ‘클로디어스’가 왕위에 오릅니다. 심지어 선왕(先王)의 아내와 재혼까지 합니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괴로운 시간을 보내던 ‘햄릿’ 왕자. 그는 어느 날 아버지의 망령(亡靈)에게서 자신이 동생 클로디어스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햄릿은 숙부 클로디어스를 죽이지 못해 양심상 괴로워합니다. 그러나 극(劇)과 똑같은 상황에 직면한 다른 사람은 숙부를 죽여서 살인에 대한 죄책감으로 괴로워할지 모릅니다. 참 복잡하고 어렵습니다.
프로이트의 정신 분석학에서 ‘부끄러움’은, 본능적인 욕구들의 즉각적인 만족을 추구하는 원초아(Id), 이러한 욕구들에 대해 현실적인 계획들을 세워 대응하는 합리적인 자아(Ego)보다는 도덕적인 초자아(Superego)와 가깝습니다.
초자아는 양심과 비슷합니다. 초자아가 생겨나면 아동은 자신의 행위에 자긍심을 느끼고, 반면 도덕적으로 위반한 행동에 대해서는 죄책감 혹은 수치심을 느끼도록 만드는 ‘내부의 감시자(internal sensor)’를 갖게 됩니다.
그러나 프로이트의 초자아 이론은 현대 심리학에서 많은 공격을 받습니다. 초자아가 아동들이 이성의 부모에 대한 근친상간의 욕망 같은 정서적인 갈등을 경험하는 남근기(3~6세)에 주로 발달한다는 주장도 요즘 거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어요.
# ‘서시’를 읽는 세 가지 방법 - 종교시·저항시·휴머니즘시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정음사, 1955).
다시 윤동주의 ‘서시’로 돌아가 세 가지 층위의 부끄러움에 관해 분석해보겠습니다. 앞서 ‘하늘이 나를 봤을 때’ ‘땅의 사람이 나를 보았을 때’ ‘자연이 나를 보았을 때’의 부끄러움을 말했어요.
‘서시’를 일제에 대한 저항시라고 했을 때는 이 시를 정치적 레벨에서 읽은 것입니다. 국가 간의 정치 속에서 이 시를 읽을 수 있어요.
국가의 개념을 털어내고 인간 레벨의 문제로만 읽었을 때는 휴머니즘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다음으로는 종교적, 초월적 하늘의 레벨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해서 ‘서시’는 저항시(정치), 인간주의시(휴머니즘), 종교시 이렇게 3개 층위로 읽을 수 있지만 전체적인 뜻은 천지인입니다. 일제에 저항하는 민족애(民族愛), 인간애(人間愛), 우주애(宇宙愛) 말이죠. 이처럼 하늘, 땅, 사람으로 나눠놓으면 놀랍게도 이 시가 금세 보입니다.
하늘에는 별이 있어요. 땅에는 잎새가 있지요. 먼저 하늘의 별은 바람이 불어도 끄떡없어요. 그러나 땅의 풀잎과 같은 잎새는 바람이 불면 흔들려요. 잎은 떨어지면 쉽게 죽습니다. 그러니 잎새는 모든 죽어가는 것의 상징이지요. 별은 죽음을 초월한 것이에요. 죽지 않습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에 나오는 말이에요. “오, 폭풍이 불어도 끄떡없는 별아.” 태풍 속에서 배를 타고 노 젓는 사람들은 별을 보고 항해를 합니다. 그 별이 우리나라로 오면 북극성, 북두칠성이 됩니다. 그래서 모든 생명이 북두칠성에서 온 것이에요. 저 삼라에서 온 것입니다.
별 하나 나 하나, 별 둘 나 둘…
▲2017년 11월 2일 서울 마포구 한국조폐공사 제품 홍보관에서 모델이 시인 윤동주 탄생 100주년 기념 메달을 들어 보이고 있다. 사진=조선일보DB
그러니 우리가 누워서 ‘별 하나 나 하나, 별 둘 나 둘’ 하는 것은, ‘죽는 나와 영원히 죽지 않는 저 하늘나라에서 온 내가 있다’는 말입니다. 나는 땅에서는 죽어야 하는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에 슬프지만 별과 나를 동일시(Identify)해서 별의 생명이 되었을 때는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는 것이지요. 사실은 슬픈 얘기예요.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바라는 마음의 기저에는 ‘나-하늘’이 직접 연결돼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과 연결된 지상의 인간들은 사랑을 해도 뭘 해도 다 죽지만 별은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고 했을 때, 내 마음속 심리적인 부끄러움이나 괴로움을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극복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은 시인의 마음이죠. 정치인이나 종교인의 마음이 아니라 시인이니까 윤동주는 하늘의 별을 노래하지 스스로 하늘의 별이 되지는 않았어요. 그러니까 다시 천지인으로 돌아옵니다.
제일 높은 곳에 ‘별’이 있고, 가장 아래에 ‘잎새’가 있고 그사이에 ‘내(사람)’가 있습니다. 위를 보고, 아래를 보고, 다시 시인으로 돌아오는 것이지요.
# 인간의 아름다운 눈, ‘나와 하늘’이 연결되다
사형수들은 형장에서 죽기 전에 예외 없이 하늘 한 번 쳐다보고, 땅 한 번 쳐다보고 죽는다고 합니다. 마지막까지도 하늘과 땅을 보고 죽어요. 그러니까 하늘과 땅 사이에 인간의 눈이 그렇게 아름다운 것입니다. 사형수의 눈이라도 아름다워요. 하늘을 보고 땅을 보니까 말이죠. 짐승들은 땅밖에 보지 못합니다. 짐승들은 부끄러움을 몰라요.
하지만 인간은 비록 불완전하고 땅에서 죄를 짓고 살지만 하늘을 볼 수 있기에 부끄러움을 압니다. 죄를 짓고 경찰서에 끌려온 사람들, 부끄러움을 알기 때문에 하나같이 모자를 눌러쓰거나 옷을 뒤집어쓰고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립니다. 그 모습을 보면 마음이 놓입니다. 죄를 짓고 끌려왔지만 너도 인간이구나, 하는 안도감이지요.
함께 죄를 지은 무리가 저희끼리는 막 부끄럽게 다녀도 끄떡없었어요. 그런데 잡혀온 순간 하늘을 보는 겁니다. 하늘을 보니 스스로 부끄러운 거예요. 사형수들이 죽기 전에 하늘을 한 번 쳐다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땅의 마음만이 아니라 하늘의 마음이 있고 인간의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 말을 하죠.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가 있냐. 너도 사람이냐?”고 할 때는 ‘그 말을 듣는 너라는 상대가 짐승보다 못하다’는 비난입니다. 그런데 “나도 사람이야” 할 때는 실수할 수 있고 완벽할 수 없는, 신이 아닌 인간이라는 뜻이에요. 신처럼 완벽할 수는 없지만 짐승은 아니지요. 지금 ‘사람’은 신과 짐승의 사이에 있습니다.
윤동주 눈이 아름다운 이유는…
▲동북아역사재단이 주최한 ‘한일 대학생 공동역사체험’ 행사에 참가한 한일 대학생들이 일본 교토 도시샤대학교 내에 위치한 윤동주 시비에 헌화하고 있다. 사진=조선일보DB
인간은 천(天)과 지(地)의 사이에 있기 때문에 하늘을 볼 때는 신을 향하고 땅을 볼 때는 짐승을 향합니다. 그래서 그사이에 있는 인간의 눈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윤동주의 눈이 그래서 아름다워요.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기를 맹세하는 사람이니까 사랑해야지, 영원히 미래를 향해서 사랑해야지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이 시가 이렇게 아름다운 겁니다.
제일 마지막 줄을 볼까요?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이 시에서 바람이 두 번 나옵니다. 처음에는 ‘잎새에 이는 바람’인데, 그 바람이 지금은 ‘하늘의 별에 스치고’ 있어요. 모든 것을 시들게 하고 죽게 하는 바람은 시간이죠. 그 시간이 별에 스치면 영원까지 갑니다. 그러니 윤동주가 ‘나는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라고 말할 때의 그 길은 풀잎에서부터 별까지 가는 것이지요. 바람을 따라서, 잎새에 이는 땅의 바람에, 저 허공에 부는 바람까지 뻗쳐서 별까지 가는 그 과정의 길입니다. 부끄러움이 없는 길이지요. (계속)⊙
07월 호
⑧ 천지인(天地人)과 별[星]의 노래
우리는 고난을 통해 별로 간다(ad astra per aspera)
⊙ 윤동주의 두 가지 마음, ‘별을 노래하는 마음’과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는 마음’
⊙ 시인의 마음은 하늘과 땅 사이에서 흔들리고 설레는 마음… 윤동주는 역사 속 ‘영웅’이 아니라 ‘햄릿’과 같아
⊙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고, 아래로는 사람을 대함에 있어 부끄럽지 않을 때(仰不愧於天 俯不作於人)
⊙ 추운 겨울날, 언 손을 비비며 연을 날려본 기억이 있는 이가 윤동주의 마음을 아는 사람
⊙ Veni, vidi, vici(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의 ‘V’, 윤동주의 ‘밤, 별, 바람’의 ‘ㅂ’

▲하늘로 연과 종이비행기를 날리는 아이들의 마음은 같다. 사진=조선DB
하늘과 땅 사이에 길이 있습니다. 무슨 그런 길이 다 있냐고요?
당연히 있지요. 눈에 안 보일 뿐 마음의 눈으로 보면 누구나 길을 그릴 수 있지요. 과학적으로도 설명할 수 있어요. 하늘에서 떨어지는 별똥별은 포물선을 그리며 낙하한다고 해요. 밤하늘에 별똥별이 휙 나타났다가 떨어지는 찰나에 진심을 다해 소원을 빌었던 기억이 누구나 한 번쯤은 있을 겁니다. 그러고 보면 혜성도 태양을 중심으로 포물선의 궤도로 움직이고 있어요.
하늘과 땅 사이에 다양한 형태의 길을 꿈꿀 수 있겠지만 하늘의 길은 어쩌면 포물선 형태가 될 것입니다. 그것이 땅에서 하늘로 향하든, 하늘에서 땅으로 향하든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 연과 포물선
▲‘불’ 같았던 젊은 시절의 이어령 선생.
땅에서 얼레를 들고 있는 아이와 하늘에 떠 있는 연 사이에 있는 실이 그려내는 선이 포물선입니다. 이 포물선을 이야기하기 전에, 아이들은 그 추운 날 왜 그렇게 덜덜 떨면서도 밖에 나가 연을 날렸을까요? 지금 어른들이 로켓과 비행기 같은 것을 만들어서 하늘로 가고 싶어 하는 그 마음과 하늘로 연과 종이비행기를 날리는 아이들의 마음은 같습니다. 이 연은 비행기의 모델이에요.
연을 날려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연이라는 게 떨어지기 쉬워요. 전선줄에 걸리고 나뭇가지에 걸려 추락할 때의 좌절감은 참 크죠. 내 연이 높이 높이 날았으면 좋겠는데 반드시 떨어져요.
연을 바람에 실어 날려 보낼 때, 연은 하늘로 날아오르려고 하지만 동시에 끝없이 떨어지려고도 하지요. 하늘로 날아가고 싶은 마음과 땅으로 끌어당기는 중력, 그 두 개의 마음이 윤동주(1917~1945년) 시인에게도 있잖아요. ‘별을 노래하는 마음’과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는 마음’처럼요.
‘모든 죽어가는 것’은 현실에서의 괴로움이고, ‘별을 노래하는 것’은 이상과 꿈입니다. 그러니 끝없이 가벼워져서 별까지 올라가는 마음과 땅의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하는 데서 오는 괴로움, 미움, 현실에서의 어려움이 하늘로 날아가는 연과 얼레를 잡고 있는 아이 사이의 긴장감 있는 포물선으로 자리 잡는 것입니다.
포물선과 逆說, 그 아름다움
아이가 연을 날린다고 했을 때, 하늘을 나는 연과 얼레를 잡고 있는 아이 사이에는 반드시 올라가려는 것과 내려오려는 것 사이의 포물선이 그려집니다. 이것이 포물선의 아름다움이에요. 우리나라의 기본은 이러한 포물선으로 이루어집니다. 말하자면 역설(逆說)이지요. 하늘로 올라가려 하는 가벼움과 끝없이 지구가 끌어당기는 중력이 팽팽하게 긴장을 이루는 가운데 포물선은 직선이 아닌 곡선이에요. 그러니 이 포물선은 아름답지요.
운명으로 주어진 길을 걸어가는데 그 운명의 끝에는 죽음이 있습니다. 이 길은 나에게 주어진 것이니까 자기가 선택할 수는 없어요. 그렇지만 그냥 끌려가는 것만도 아닙니다. 주어진 길을 걸어가는 속에서 끝없이 별을 노래하고 하늘을 우러러볼 줄 알기 때문에, 짐승처럼 그냥 죽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가 그 추위 속에서도 연을 날리는 것은 중력과 그 중력을 거슬러 올라가려는 것의 대립이지요. 이것이 시몬 베유(1909~1943년)가 말하는 ‘중력과 은총’입니다.
중력이라고 하는 것은 뉴턴(1643~ 1727년)의 사과처럼 밑으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땅에 있는 식물들은 그 중력을 거스르고 하늘로 올라가요. 힘없는 넝쿨이라도 하늘을 향해 끝없이 손을 뻗어요. 죽음은 정해진 운명이지만 죽는 그 순간까지 지향점은 영원의 하늘이지요.
윤동주 시인이 그랬습니다. 잎새에 이는 바람과 같이 죽음, 중력에 지배되는 땅을 향한 마음과 별을 우러르는 하늘을 향한 마음, 그 중간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포물선과 같은 곡선이 생깁니다.
# 맹자의 〈진심편〉과 서시
그런데 윤동주가 시인이 아니라 군자(君子)라면 어떻게 될까요.
군자는 이미 초월한 사람입니다. 땅에 사는 보통의 사람이 아니에요. 맹자(BC 372~289년)는 〈진심편(盡心篇)〉에서 군자에게 세 가지 즐거움이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 부모님과 형제가 모두 무사하면 첫 번째 즐거움(父母具存 兄弟無故 一樂也)이고, 둘째 위로는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고 아래로는 사람을 대함에 있어 부끄럽지 않을 때가 두 번째 즐거움(仰不愧於天 俯不怍於人 二樂也)이며, 셋째는 천하의 영재를 얻어 교육을 함이 세 번째 즐거움(得天下英才 而敎育之 三樂也)이라 하였습니다. 윤동주의 시는 이 두 번째 즐거움에서 나옵니다.
‘앙불괴(仰不愧)’—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고, ‘부부작어인(俯不怍於人)’—땅을 내려다봐서 사람을 향해서도 당당하게 부끄러움이 없는 상태가 군자의 즐거움이지요.
괴(愧)도 부끄러움을 뜻하는 한자어고 작(怍)도 부끄러움을 뜻하는 자입니다. 요즘은 여간해서는 잘 쓰지 않는 글자지요.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낄 때는 ‘자괴(自愧)’라고 합니다. ‘자작(自怍)’이라고 하면 남 앞에 부끄러운 것입니다. 자괴는 하늘 앞에 부끄러운 것이고 자작은 남 앞에 부끄러운 것이니까 요즘 말로 바꾸면 “쪽팔리는 것”이지요. 그러니 군자삼락의 두 번째 구절을 거칠게 해석하면 ‘사람을 봐서 쪽팔리는 일이 없고, 하늘을 봐서 부끄러움이 없으면 문제가 없다’는 뜻이 됩니다. 그런데 이 문구의 시제는 과거, 현재, 미래 중 어디에 해당할까요?
현재에도 과거에도 부끄러움이 없는…
▲하늘의 별. 윤동주 시인은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것을 사랑하라’고 했다. 사진=조선DB
미래에 그럴 것이라고 하면 그것은 군자가 아닙니다.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에도 그렇다 해야 그것이 군자이지요. 그러니 전부 과거형이어야 합니다.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현재에도 과거에도 ‘없었고’ 사람을 봐서도 부끄러움이 ‘없다’, 이것이 군자입니다.
윤동주의 ‘서시’를 전부 과거형으로 고치면 윤동주는 시인이 아니라 군자가 됩니다.
‘하늘을 우러러서 나는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습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것을 사랑했습니다. 주어진 길을 내가 오늘 갑니다.’ 이건 시가 아니라 자랑이죠. 남에게 하는 말입니다. 이 자랑을 들은 사람은 “와~ 저 사람은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했네. 예수님이네” 하지 않겠어요? 이렇게 과거형으로 바꾸어버린 시에는 망설임과 노력하려는 마음과 현실에서의 부딪침이 전혀 나타나지 않아요. 그런 것들이 시인의 마음인데요, 남에게 말하는 것은 시가 아니라 자랑이에요. 과거형으로 바꾼 ‘서시’에서 윤동주는 시인이 아니라 군자가 되었습니다.
다시 윤동주가 쓴 ‘서시’의 본래 문장으로 돌아가 봅시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원문을 보면 아무것도 이루어진 것이 없어요. 이루어진 것은 보통 과거형, 완료된 문장으로 서술되는데 이 시에서 과거형으로 쓴 것은 ‘괴로워했다’ 단 하나예요. 그러니까 괴로워한 것만은 사실이고 현실이지요. 나머지 서술부의 시제를 보면 ‘사랑해야지’ ‘걸어가야겠다’ 하는 미래의 다짐, 미래의 원망(遠望)과 의지만이 나타납니다. 일종의 자기 자신에 대한 맹세지요.
그리고 현재시제 역시 단 하나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가 있습니다. 그러니 이 시에 나타난 동사에는 ‘보다, 노래하다, 부끄럽다, 괴롭다, 사랑하다, 걷다’가 있는데 여기에는 반드시 시제가 붙어 있습니다.
시제를 보면 과거, 현재, 미래로 나누어 볼 수 있지요.
첫 구절은 시제를 붙일 서술어를 생략해버리는 것으로 시제를 넘어섰어요. 과거, 현재, 미래를 통튼 자신의 결심이니까 과거에 했든, 현재에 하든, 미래에 할 것이든 상관이 없어요. 어쨌든 된 것이고 될 것이니까요.
# 상승직선, 수평선, 포물선
▲윤동주 시인.
현재형과 미래형으로 쓴 윤동주의 시들이 모두 이루어졌을 때, 그것을 ‘길’로 그려보는 상황을 가정해봅시다. 가장 낮은 잎새에서 바람은 별까지 올라갔습니다. 이 위로 올라가는 길을 똑바로 직선으로 그으면 그것은 군자의 경지예요.
위로 올라가지 않고 아래에서 쭉 뻗어나가면 그것은 현실 정치인, 현실인의 경지지요.
그런데 인간은 신과 짐승의 중간에 있고 하늘과 땅을 모두 볼 수 있는 인간의 눈은 아름다운 것, 그것이 바로 시인의 마음이지요. 하늘과 땅 사이에서 흔들리고 설레지요. 군자는 이런 설렘이 없어요. 모든 것을 완전히 졸업하고 초월한 존재입니다. 또 악인이면 괴로워하지 않고 사랑하지도 않아요. 현실에 그저 적응하고 살면 되지요.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것이 시인의 마음입니다. 저항시의 측면에서 보더라도 윤동주는 독립운동하는 사람의 결단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앞에서 끝없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인간적인 것에서 우주적인 것으로 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윤동주는 역사 속 ‘영웅’이 아니라 ‘햄릿’과 같아요. 시 속에서 끝없이 흔들리면서 죽음 앞에서 영원으로 가고, 현실 앞에서 이상으로 가고, 괴로움 앞에서 노래하고 사랑을 하는 존재이지요.
땅에 얽매여 있으면서도 그것으로부터 초월하고자 하고 가장 낮은, 모든 죽어가는 것의 현실에서 영원히 불멸하는 별을 향해서 가는 마음을 노래하고 그 길을 걷는 것을 실천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시인의 마음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어린 아이가 그 추운 날 날린 연에 묶여 있는 실처럼 포물선이 그려져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드리운 무거움과 가벼움 사이에서 날아가려는 연과 중력으로 떨어지려는 연 사이에 팽팽한 연실의 그 중력! 그 추운 겨울날에 언 손을 비비며 연을 날려본 기억이 있는 사람은 윤동주의 시를 알고, 윤동주의 마음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 연에는 날개가 없어요. 그리고 그 연과 사람 사이에는 묶인 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운명의 실이고, 그것이 길입니다.
#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하는 마음은 별을 노래하는 마음에서 나왔다
시를 볼 때 어떤 것이든 여러 가지 의미 층위가 존재합니다. 예를 들어 명사 하면 ‘하늘, 별, 땅’ 그다음이 풀잎이에요. 이 풀잎을 정치적으로는 민초(民草)라고 합니다. 글래스 루츠(Grass Roots). 민주주의(Democracy)와 비유할 때는 민초라는 뜻을 가지지요. 월트 휘트먼(1819~1892년)의 시 ‘풀잎’처럼 우리가 땅에서 하는 것이에요. 또 김수영(1921~1968년)의 유명한 시 ‘풀’에서 바람이 불면 풀들은 다 눕습니다. 울다가 눕고, 바람보다 더 빨리 눕고, 바람보다 더 빨리 울었다가, 바람보다 먼저 일어납니다.
▲김수영 시인은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고 ‘풀’을 노래했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김수영의 ‘풀’ 일부
이렇게 하찮은 것, 바람이 불면 운명에 거스르지 못하고 복종하는 것! 이런 존재에서 시작해 전혀 다른 차원의 하늘까지 가는 하늘의 별이니까 하늘, 땅, 사람을 그리면 공간이 생겨납니다. 이번엔 시간을 볼까요? ‘잎새에 일던 바람’은 춘하추동, 밤낮과 같은 시간의 변화 속에서 점점 하늘로 올라갑니다. 계속 가다 보면 변하지 않는, 바람이 꽉 차 있는 곳으로 가게 됩니다.
사실 바람이라고 하는 것은 끝없이 변하는 시간을 뜻하니까 시간의 축이 돼요. 시간은 곧 탄생과 죽음을 의미합니다.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처럼 말이죠.
그러니까 이 시 전체에서 ‘별’과 가장 가까운 동사를 찾아낸다면 ‘사랑해야지’입니다.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는 것은 별을 노래하는 마음에서 나왔습니다. 현실이 아니라 모든 것이 멸망하는 밤이 되어도 빛이 사라지지 않고, 바람이 불어도 끄떡하지 않는, 그 별을 노래하는 마음이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는 힘이 됩니다.
# 서양과 동양의 서로 다른 별 모양
▲라틴어 ‘ad astra per aspera’는 ‘고난을 통해 별로 간다’는 뜻이다.
미국 국기에는 별[星]이 많습니다. 미국 주(州)의 수만큼 왼쪽 상단 네모난 칸에 별을 그려 넣었는데, 지금은 별이 50개입니다. 이 성조기의 별의 모양을 보세요. 익숙하지요. 우리에게 지금 별을 그려보라 하면 다들 이런 모양으로 그립니다. 미국 국기에 그려진 별의 모양과 동일한 모양입니다. 그런데 백 년 전만 해도, 한국 사람에게 별을 그리라고 하면 단추처럼 동그란 모양으로 그렸습니다.
여러분이 별을 그릴 때 단추처럼 동그란 모양이 아니라 다섯 모서리가 있는 별을 그리는 것은 유럽 서양문명이 자기의 ‘밈(Meme)’, 문화적 유전자가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처음 한국 사람, 중국 사람이 미국에 가서 우리에게 익숙한 저 별이 그려져 있는 미국의 국기를 보고는, “아, 웬 놈의 깃발에 저렇게 꽃이 많냐” 해서 화기(花旗)라고 했어요. 꽃이 있는 깃발이라는 뜻이지요. 우리도 처음에는 미국을 ‘화기국’이라고 했어요. 이런 것들을 볼 때 서양 사람들이 생각하는 별은 한국 사람이 생각하는 별과 다릅니다.
오각형의 별 모양은 사람을 나타냅니다. 머리, 양손, 양발. 그래서 별을 거꾸로 놓으면 큰일 나는 거예요.
육각형 별, 우리가 흔히 다윗의 별(Star of David)이라고 하는 삼각형 두 개를 엇갈려 겹쳐놓은 별은 유대교의 상징이지요. 두 개의 삼각형 중 하나는 올라가는 것 불, 하나는 내려가는 것 물을 나타내요. 이런 것을 상징코드라고 하는데, 이런 상징코드를 알고 보면 별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별에게 가는 길
별이란 무엇입니까. 바람이란, 길이란 무엇입니까. 길은 선(線)이고 시간이잖아요. 공간이면서도 시간입니다. 그래서 길 위에 서 있으면 이상한 사람이 되는 거예요. 특히 밤에 그런 짓 하면 큰일 나요. 밤에 길거리에 서 있으면 이건 법률적으로 안 되는 겁니다.
그와 관련된 법률이 있는 네덜란드 같은 나라에서는 개를 산책시킬 때도 사람이 한곳에 가만히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주변을 맴돌아야 해요. 주변을 맴도는 것은 괜찮지만 가만히 서 있으면 강도나 도둑, 아니면 이상한 여자로 오해를 받습니다. 길은 걸어가도록 만들어져 있기에 길에 멈춰 서면 멋쩍고 이상한 것이지요.
‘길을 걸어가야겠다’는 말은 프로세스(Process)를 의미합니다. 과정이지요. 죽는 날까지의 과정을 길로 나타냈어요. 길의 끝에는 죽음이 있습니다. 직선으로, 평지를 향하여 쭉 뻗은 길을 그냥 가면 길 끝에서 죽음과 만나게 됩니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 죽어가는 것’처럼 말이지요.
하지만 시인이니까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가면 이 길은 하늘로 올라갑니다. 그러나 성인군자는 아니니까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듯’ 땅에게 끌어당겨지지요. 하늘로 올라가는 연과 중력의 사이에서 그려지는 연실과 같은 아름다운 포물선이 그려지지요.
# 시와 현실의 이야기 - 시인으로 살아가기 힘든 현실
별을 노래했던 윤동주는 별에 닿았을까요? 시인은 영원히 별에 닿지 못합니다. 영원히 세속을 초월한 군자가 못 되는 존재예요. 그렇다고 세속적 인간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시인에게는 상상력의 날개가 있어요.
시인들이 현실에서는 성인군자로 존경받기보다는 뭔가 우리와는 다른 이상한 사람, 변태적인 사람, 생활력이 없는 사람으로 느껴지지요. 보들레르(1821~1867년)의 말처럼 귀양 온 신선이거나, 귀양 온 천사가 아니면 앨버트로스가 시인입니다. 앨버트로스(Albatross·한자문화권에서는 신천옹[信天翁]으로 불렸다-편집자)는 단숨에 바다를 건널 수 있다는 새인데 이 새가 사람들에게 붙잡혀 배의 갑판에 앉으면 우스꽝스러운 새가 됩니다. 단번에 바다를 건널 수 있는 거대한 날개가 오히려 걷는 데 방해가 되어 뒤뚱거리게 만드니까요. 그래서 선원들은 그 새의 큰 부리에다 담뱃재를 터는 학대도 했다고 해요.
그것이 오늘날의 시요, 시인의 상상력입니다. 하늘 위 시의 세계를 날아다닐 때는 어마어마한 힘을 발휘하는 기가 막힌 날개가 땅 위의 현실세계에서는 보행을 방해하지요. 시인들이 참 살아가기 힘든 세상입니다. 내가 여기서 말하는 시인(詩人)은 실제로 시집을 출간하고 등록되어 있는 시를 쓰는 사람들이 아니라 이 책을 읽는 여러분을 뜻하는 것입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을 가지고, 풀잎의 괴로움을 가지고, 죽는 날까지 부끄러움이 없이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 그래서 서로 눈과 눈을 마주치면서 별을 보고 하늘을 보는 여러분이 시인입니다.
시(Poem)와 시인(Poet)의 어원인 고대 그리스어 명사 Poietes는 ‘만들다(Make)’는 뜻입니다. 만든다는 것은 없던 것을 새로 있게 하는 것이지요. 물건을 만드는 사람은 기술자고 마음이나 꿈을 만드는 사람은 시인이에요.
언어와 상상력을 가지고 시를 만들었는데 그 시가 현실이 되면 어떻게 될까요?
# ad astra per aspera 고난을 통해 별들로
▲“아이 라이크 아이크(I Like Ike)”는 미국 34대 대통령 아이젠하워의 선거 구호였다.
라틴어 ‘ad astra per aspera’는 ‘아드, 아스트라, 페르, 아스페라’로 읽습니다. 나는 프랑스어는 했지만 라틴어는 배우지 않았기 때문에 이 문장의 정확한 발음은 몰라도 의미는 알죠.
‘고난을 통해서 별로 간다.’
세네카(B.C. ?~65년·고대 로마 제국 시대의 정치인, 사상가, 문학자. 로마 제국의 황제인 네로의 스승으로도 유명하다-편집자)의 구절인데, 뜻이 중요한 것만이 아니라, ‘A.A.A’의 두음을 보세요. ‘아드, 아스트라, 아스페라.’ 이것이 바로 시입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B.C.100~B.C.44년)가 로마 시민과 원로원에 보낸 승전보에 쓴 유명한 문구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도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진 라틴어 경구 “Veni, vidi, vici”였습니다. 우리에게는 영어로 번역된 문구가 다시 한국어로 번역되어 왔기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 문구도 보세요. ‘비니, 비디, 비치’, ‘V.V.V’의 두음이에요. 이런 것이 시입니다. 영어로 번역해서는 시가 안 돼요.
미국의 34대 대통령 아이젠하워(1890~1969년·재직 1953~1961년)가 대통령 선거 당시 내건 구호는 “I Like Ike”였어요. Ike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아이젠하워의 별명이었습니다. ‘아이, 아이, 크크.’ 두음·흉음·말음의 운율이 정확히 일치하죠. 이 말은 그대로 시가 됩니다. ‘나는 아이젠하워를 좋아합니다(I Like Eisenhower)’라고 하면 ‘I Like Ike’와 같은 뜻이지만 시가 아니지요.
그러니까 시는 의미 이상의 것입니다. 의미에 날개를 단 것이에요.
‘아드, 아스트라, 아스페라’ ‘비니, 비디, 비치’
▲전남 나주초등학교 입학식에서 전교생이 운동장에 모여 ‘꿈은 이루어진다’는 뜻으로 별 모양을 만들었다. 사진=조선DB
다시 고난을 통해서 별들로, 즉 ‘ad astra per aspera’를 봅시다. 우연히도 ‘별’이라는 아스트라(astra)와 ‘고통’이라는 아스페라(aspera)가 발음이 비슷해요. 우연이겠지만 기적 같지 않아요? 밤이라는 고난이 있을 때 별은 빛납니다. 낮에는 별을 보지 못해요. 깜깜한 밤, 폭풍이 부는 때에 별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이렇게 별과 고난은 연결이 되는 것인데 언어까지도 유사한 거예요.
그런 말들은 많아요. 어머니의 자궁은 움(womb)인데 무덤은 툼(tomb)입니다. ‘W’와 ‘T’ 글자 하나 차이지요. 무덤은 우리가 죽어서 가는 곳이고 자궁은 우리가 태어나는 곳인데 어쩌면 태어나는 곳과 죽어서 가는 무덤이 하나는 ‘움’이고 하나는 ‘툼’일 수가 있습니까. 이렇게 극과 극인데 차이는 고작 ‘W’와 ‘T’의 차이로 나타내는 그것이 시입니다. 언어에 대한 아름다움, 언어의 운율을 알기 시작할 때 시를 아는 것이지, 단순한 의미만을 알아서는 시인이 될 수 없습니다.
한국 프로야구 레전드 이만수 전 SK와이번스 감독이 좋아하는 문장이 ‘Scars Into Stars’입니다. 번역하면 ‘상처는 별이 된다’입니다. 생략된 영어 문장을 살리면 ‘Turn your scars into stars(당신의 상처를 별로 바꾼다)’입니다. ‘상처’와 ‘별’의 단어가 한 자(c, t)만 다르고 같습니다.
‘h’가 반복되는, ‘상처’를 뜻하는 hurt와 ‘별’과 비슷한 뜻의 halo(성상의 머리나 몸 주위에 둥글게 그려지는 광륜 혹은 후광이라는 뜻-편집자)를 써서 ‘Turning hurts into halos(상처를 빛으로 바꾼다)’라는 문장도 자주 사람들에게 회자됩니다.
# ‘서시’의 별, 바람, 밤 - 반복되는 ‘ㅂ’

▲하늘에서 내려다본 서울의 모습이다. 올림픽대교 등 한강다리들이 줄지어 서 있다. 사진=조선DB
윤동주는 ‘서시’에서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고 했어요. ‘도’라는 것은 반복의 의미지요. 어젯밤에도 내일밤에도 무한히 계속될 거예요. 잎새에서 별까지 바람이 이는 그 길을 향해서 나는 걸어갑니다.
그런데, ‘밤, 별, 바람’ 이상하지 않아요? ‘ㅂ’이 공통적으로 겹쳐요. 세 개의 ‘B, ㅂ’ 두운입니다.
시를 가르칠 때 저항시인이다 하는 정치적인 의미만 가르칠 것이 아니라 더 높은 차원으로 한국말의 두운이 여기에 있다는 것을 찾을 수 있게 가르쳐줘야 합니다. 이런 ‘ㅂ’ 두운을 가진 시가 또 있어요. 정지용의 ‘향수’라는 시에 보면 ‘빈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다시 이야기를 처음으로 되돌려 생각해봐요. 하늘과 땅 사이에 다양한 길 말입니다. 지금부터 한국이 할 일은 날개를 달고 하늘을 나는 일, 하늘에서 한국을 내려다보는 별이 되는 일입니다. 그걸 꿈꾸어봐요. 그것은 어쩌면 우리 역사 속에서 ‘천지인’의 천(天)을 가지는 일과 같을지 모릅니다. 하늘로 올라가는 그 길이 아름다운 포물선임을 가르쳐준 이가 윤동주입니다.
우리는 윤동주를 역사 속에서 그 시대 많은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시를 쓴 저항시인으로 알고 있지만, 만약 윤동주가 역사적 차원에서 저항시로만 ‘서시’를 썼다면 독립한 후에도 우리의 가슴을 울리지는 않았겠지요. 윤동주의 시는 우리 생각의 틀을 한 번 더 깨주고 더 큰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시야를 만들어주었던 것입니다.⊙
09월 호
⑨ 땅 이야기 -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선생님 이름이 이어영입니까, 이어녕입니까, 이어령입니까?”
⊙ 집안에선 “의영아, 의영아!”로 불러… 해방되고는 ‘이어녕’
⊙ 《흙 속에 저 바람 속에》(1962년)가 처음 나왔을 때 ‘이어영’
⊙ 이화여대에 가면 ‘이어녕’ 선생, 교육부에선 ‘이어령’
⊙ 최초의 신소설 《血의 淚》, 최초의 신체시 ‘海에게서 少年에게’의 비극, 한자 세대의 비극
⊙ 한국인에게 묻고, 세계인에게 묻는 말 “너, 어디까지 왔니?”

▲故 이어령 이화여대 석좌교수가 2001년 9월 7일 정년퇴임을 앞두고 고별강연을 하고 있다. 사진=조선일보DB
건강이 썩 좋지 않아 외부 강연을 하지 못하는 날이 많아 서울 평창동 서재에서 강연을 하고 인터뷰를 한 적이 있습니다. 나를 배려하여 집으로 와준 것이었지요.
그러나 본래 서재는 외부에 공개하지 않는 곳입니다.
생각해보세요. 한 왕궁의 주인인 임금님이라 할지라도 그 왕궁의 주방에는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임금이 주방에 들어가면 몇 사람이 죽어나가게 돼요. 일하는 사람들이 아무리 깨끗하게 유지하려 노력해도 임금님이 보면 “야! 니들이 이걸 나한테 먹였구나, 어! 저기 바퀴벌레도 있구나” 하거든요. 그러니까 주방은 그 성의 주인인 임금은 물론 외부인에게도 절대로 보여주면 안 됩니다. 그 성에서 열리는 파티가 아무리 화려하고 성대해도 그 파티가 열리는 동안 주방에 한번 들어가 보세요. 음식을 막 엎지르고, 쓰레기가 지천으로 널려 있지 않겠어요?
글 쓰는 사람에게는 그런 주방이 바로 서재인 셈입니다. 읽다가 엎어둔 책들, 글 쓰면서 마신 차 찌꺼기가 엉겨 붙은 찻잔, 구겨진 원고지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피곤할 때 잠시 눈을 붙였던 자리의 흔적들. 게다가 남들은 ‘야, 이 양반 참, 뭐 이런 걸 갖다 놨어. 초등학교 애들 방도 아니고’라고 생각할 만한 나에게만 소중하고 영감을 주는 물건들도 여기저기 있어요.
남한테 보이려고 꾸민 공간이 아니니까 그냥 별의별 게 다 정돈되지 않은 채로 있어요. 그래서 여간해서는 외부에 공개하지 않는 장소이지요. 그럼에도 서재까지 여러분에게 열어놓은 것은 나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 60년 넘게 글쓰기를 멈추지 않은 이야기

▲이어령 선생의 서울 평창동 서재에 자리한 《플라톤 전집》. 선생은 생전에 “《플라톤 전집》을 읽고 많은 영감을 받았다”고 고백했다.
나는 일제 시대에 초등학교를 다녔고, 초등학교 6학년 때 해방을 맞았습니다. 일제 시대를 제법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지요. 또 23~24세, 대학 4학년 때부터 글을 쓰기 시작해 평생을 글을 썼어요. 이렇게 오랫동안 글을 써온 사람이 없을지 몰라요, 주변에. 실력이 나보다 나은 사람이 있지만 이렇게 재수 좋은 사람이 많지가 않거든요. 이렇게 꾸준히 오랫동안 글을 써온 사람을 어디서 구해 오겠어요. 전 세계에 없어요. 서양에서는 괴테 하나가 23세에 글을 쓰기 시작해서 83세까지도 현역으로 글을 썼죠.
그러니까 내가 잘나거나 지식이 특별히 많아 강연하고 글 쓴 게 아니라, 단지 해방 이후 70여 년간 다양한 시대상을 직접 경험하면서 그 경험을 글로 꾸준히 옮긴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거지요.
제가 어렸을 때 누님과 나물 캐러 다닌 게 ‘채집 시대’를 경험한 것 아니겠어요? 오래전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면서 산업 사회에서 ‘정보화와 디지로그’에 관한 글을 쓰고, 후기 정보 사회인 요즘에는 ‘빅데이터’에 관한 글을 썼지요.
그러니까 인간의 한 생애 속에서 누님 쫓아 나물 캐던 채집 시대를 거친 소년이 후기 정보 사회의 빅데이터 강연을 하는 사람은 전 지구상에 나 하나뿐인 거예요.
# 채집 시대 때 사랑받는 이는 누구?

▲“쑥과 같은 나물은 하느님이 거저 주신 것입니다. 나물 캐기는 채집이에요.” 전남 구례 오일장의 봄나물이다. 사진=조선DB
우리가 어렸을 때는 정말로 나물 캐러 다녔어요. 쑥과 같은 나물은 하느님이 거저 주신 것이지 인간이 재배한 것이 아니죠. 그러니까 나물 캐기는 채집이에요.
사실 한국 사람들이 내 곁에 있는데, 그게 뭔지를 몰라서 못 찾아 먹는 것일 뿐, 우리는 나물 문화를 가지고 있어요. 콩나물 같은 것은 인간이 재배하기도 하지만 나물의 기본은 산채(山菜), 즉 인간이 가꾼 것이 아니라 산에서 그저 자라는 거예요. 한국 사람들이 이걸 아직도 몰라요.
서양 사람들이 김 먹는 것을 본 적이 있나요? 서양 사람들은 김을 먹지 않아요. 요즘은 김도 양식 재배를 하지만 본래 김은 인간이 씨를 뿌려 재배하는 것이 아니라 바다, 자연에서 그저 발생한 것을 우리가 뜯어 먹는 것이었거든요. 동양인만 김을 먹어요. 채집 문화, 나물 문화가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거죠. 샐러드로 대표되는 서양의 야채 요리는 모두 재배된 식물로 만들어져요. 허브와 같은 향신료조차 그들은 정원의 한쪽에서 따로 재배하죠. 그러나 한국을 보세요. 쑥도 비닐하우스에서 재배해서 판다는 세상이지만 그래도 봄날의 시골 장터에 나가 보면 밭둑이나 산에서 직접 채취해온 나물을 파는 할머니들이 시장에 좌판을 펴고 앉아 있고, 우리는 그 나물을 사다가 집에서 반찬을 만들어 먹어요. 서양의 샐러드와는 전혀 다르죠. 우리의 생활 속에 채집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는 거예요.
그런데 채집 시대에, 부지런한 사람과 게으른 사람 중 어느 쪽이 칭찬을 받았을 것 같아요? 지금의 상식으로는 부지런한 사람이 칭찬을 받았을 것 같지만 아니에요. 농경 시대에 부지런한 사람이 자기 논과 밭을 열심히 경작해서 많은 수확을 얻는 것은 칭찬받을 일이었지만 채집 시대를 생각해보세요. 농경은 작물을 기르는 일이 주가 되지만, 채집 시대에 인간은 작물을 수확만 할 뿐 기르는 행위는 전혀 하지 않았어요. 기르는 것은 오직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죠. 그러니까 뒷동산에 주어진 사슴은 몇 마리밖에 없어요. 인간의 노력과 관계없이 이미 주어진 것이죠. 그런데 부지런한 사람이 있어 남들이 놀 때 그 사슴을 전부 잡아먹었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다른 사람은 굶을 수밖에요.
채집 시대의 勝者 꼬부랑 할머니
부지런한 것은 우리가 직접 생산에 참여할 때나 그러라는 이야기예요. 고사리든 뭐든, 하느님이 주신 것은 똑같으니 그것을 다 함께 나누어 따 먹어야 하는데 부지런한 사람이 있어서 새벽까지 막 따서 자기가 먹고 남은 것을 저축하면, 저축하는 사람이 나쁜 사람이죠. 그러니까 옛날 채집 시절에는 게으르고 저축하지 않는 사람이 그 공동체에게 굉장히 사랑받는 사람이었다는 이야기예요. “너 착한 애야”라는 칭찬도 받고요. 그래서 요즘은 노름해서 지면 그 사람에게 돈을 빼앗지만, 옛날에는 일을 아예 못 하도록 도구를 빼앗았어요. 그 사람이 일을 못 해야 그만큼의 배분이 나에게 돌아오니까요. 우리 생각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뒤집는 이것은 마셜 살린스(Mashall Sahlins·1930~2021년)의 《석기시대 경제학》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옛날 사람이 혼자 벌어서 몇 사람이나 먹여 살렸을 것 같아요? 대개 두 사람, 세 사람 정도고 나머지 사람들은 자기가 먹을 것을 직접 다 채집해 왔어요.
그러면 제가 질문 하나 할까요? 채집 시대 때 가장 경쟁력 있는 자가 누구였을까요?
아프리카의 수렵 채집민 하드자족 예를 든다면 가장 많은 식량을 구한 이는 놀랍게도 노파들이었다고 하죠. 그것도 뼈와 가죽만 남은 노파들…. 미국의 저명한 인류학자이자 영장류학자인 세라 블래퍼 허디(Sarah Blaffer Hrdy·1946~)의 《어머니,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 따르면, 어디서 음식을 구해서 먹이는 할머니와 이모할머니가 있으면 아이들은 풍족한 영양을 공급받아 잘 자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 할머니가 바로 내가 비유로 늘상 이야기하던 ‘꼬부랑 할머니’입니다. 이 이야기는 뒤에 다시 할게요.
할머니의 무조건적 사랑 내지 희생, 무엇보다 손주에 대한 아낌없는 사랑은 비단 우리나라만의 이야기는 아닐 겁니다.
채집 시대 때 남성과 여성의 역할을 따져보면 남성은 식량을 구하러 장거리 여행을 떠나거나 사냥 혹은 싸움으로 다치거나 죽는 경우가 종종 발생했어요. 여성 입장에선 먹고사는 문제를 남성에게 전적으로 의존할 수 없는 이유였죠.
그러니 때로 스스로 살아갈 궁리를 해야 했고 예고 없이 찾아온 기근이나 추위, 풍수해 같은 자연재해는 물론 보릿고개 같은 불가피한 식량난까지 대비해야 했어요. 이럴 때 가족 내지 집단 내에 모계 친척 여성, 즉 어머니, 외할머니, 이모할머니의 존재는 아이들의 성장과 생존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음을 예상할 수 있어요.
한편, 채집민들은 사냥감을 집단 전체와 나눠 가졌다고 해요. 그러나 남성의 채집(사냥)만으론 집단이 필요로 하는 칼로리의 절반도 채울 수 없었다고 하지요. 그럼 나머지는 어떻게 메웠을까요? 여성, 무엇보다 할머니의 비중이 커질 수밖에요. 또 일부 남성은 일부일처(一夫一妻)에 만족하지 않았을 겁니다. 뒤집어 말하면 여성 역시 부성(父性)의 지원이 불확실한 남성과도 짝을 맺었던 거지요. 결국 여성 스스로 남성의 빈 자리를 어떤 식으로든 메워야 했는데 ‘대행 부모’ 내지 ‘돌봄 공유’의 형태에 가장 적합한 존재가 할머니이고 장수하는 할머니는 ‘인류의 에이스 카드’였지요.
세라 허디의 이런 시각은 내가 이야기하는 ‘꼬부랑 할머니’와 일맥상통합니다. 남자들이 채집이나 사냥을 해오면 누가 요리해요? 여자는 애 낳고 키우면서 자연히 집에 있게 되잖아요. 불을 다루는, 부지깽이를 든 여자가 바로 인류 최초의 요리사, 즉 꼬부랑 할머니죠.
헤겔은 ‘최초의 전사(戰士)’, 즉 남성이 역사를 만들었다고 하지만 내가 볼 때 아닙니다. 최초의 역사를 만든 이는 전사 혹은 싸움꾼이 아니고 부지깽이를 든 여성, 꼬부랑 할머니입니다.
다른 영장류와는 구별되는 이런 인간의 ‘협동 육아’가 진화사에 큰 변곡점을 만들었고, 세라 허디의 표현을 빌리자면 타인의 마음을 읽는 행위, 공감하고 협력하는 태도, 나눔과 같은 ‘상호 이해(Mutual Understanding)’를 하게 되었지요.
이런 관계 속에서 점점 현실의 어려움이나 닥쳐올 고난을 ‘준비’하고 ‘대비’할 수 있었어요. 그러면서 인류는 자기 자신을 바라보게 되고 ‘지금 우리는 어디에 있고, 어디로 가고 있으며, 나는 그리고 우리는 누구일까’를 질문할 수 있게 되었지요.
# ‘어디까지 왔어?’라는 말의 뜻
자, 우리가 그 수렵채집의 시대로부터 지금 어디까지 왔나를 생각해보세요.
전화가 와도 옛날 같으면 “누구십니까” 했을 것을 요즘은 전화에 발신인이 누구인지 다 뜨니 그런 것을 묻지 않죠. 그 대신 기다리는 남자친구 또는 여자친구가 약속시각이 지났는데도 사람은 오지 않고 전화만 올 때, 첫마디가 이래요.
“너, 어디야 거기?”
그다음으로 하는 말은 “어디까지 왔어?”죠. 요즘은 모바일 시대라 다들 스마트폰을 들고 다니잖아요.
초등학생쯤 되는 아이가 길바닥에서 막 울먹울먹하면서 휴대전화를 걸 때 옆에서 가만히 들어보면 아마 이렇게 말을 할 거예요.
“엄마 어디야? 어디까지 왔어?”
다른 애들은 하교 시간에 다들 엄마가 와서 데리고 가는데 내 보호자만이 오지 않을 때 하는 말이죠. 또 있어요. 어머니들이 늦도록 들어오지 않는 딸에게 전화를 걸어서 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너 지금이 몇 시야? 어디까지 왔어?”
어머니는 딸이 오는 시각에 맞추어 골목길로 마중을 나가줘야 하니까요. 아버지들이 아들에게 심부름을 시킬 때도 그래요. 요즘 아들들이 아버지 말을 그렇게 잘 듣지 않잖아요. 그러니까 전화를 걸어서 “야, 너 어디까지 왔어?” 한 뒤에 바로, “뭐? 떠나지도 않았어?”라고 말을 합니다. 아들은 아예 떠나지도 않은 것이죠.
이런 건 또 할아버지들이 하는 것도 있어요. 명절이나 제삿날인데 서울에 있는 자식만 안 왔어요. 세상 풍파를 다 겪어본 할아버지는 딱 점잖게 어린애처럼 보채는 일도 없이 신경질도 안 내고 느긋하게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씀하시죠.
“누구야, 다들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어디야? 어디까지 왔어?”
할아버지들의 맥없는 그 말은 참 가슴 아픈 이야기이기도 해요. 다른 자식들은 다 왔는데 서울 애만 안 오는 거예요. 지금 제사도 다 지내고 명절이면 차례도 다 지냈는데 그 애만 늦는 거죠.
서울 사람들은 대부분 늦어요. 우리가 약속시각보다 늦게 왔을 때 제일 많이 하는 거짓말이 “길이 막혔다”는 말이에요. 도로가 막히지 않아도 “거의 다 왔는데 길이 막혀요”라고 말하잖아요.
그러니까 전화할 때 거짓말을 제일 많이 해요. 거북한 전화가 왔을 때는 잘 들리면서도 이렇게 말하잖아요.
“전화 상태가 나빠서 잘 안 들려. 내가 나중에 걸게.”
#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한국과 세계는 어디에 있는지
내가 지금 이야기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한국 사람들이 어디까지 왔고 어디에 있는지, 이것을 내가 때로는 유치원, 초등학교 아이 입장에서, 때로는 딸을 기다리는 어머니 입장에서, 또 아버지와 할아버지 입장에서 한국인에게 묻는 거예요.
“어디까지 왔니? 거기 어디야?”
또 아시아인에게 같은 질문을 해요.
사실, 이제는 시대가 바뀌었어요. 과거엔 우리가 유럽을 위시한 서양 사람을 죽어라 쫓아갔지만, 이제는 거꾸로 서양 사람이 동양을 보고 있어요. 그런데 이 아시아 사람들은 지금 갈등만 하고 있어요. 그래서 ‘아시아 사람은 어디까지 왔냐?’를 묻는 거죠. 유럽은 EU(유럽연합)를 만들고, 미국은 NAFTA(북미자유무역협정)가 있는데 아시아인은 뭘 하고 있어요? 어디까지 왔어요?
앞으로 세계 경제에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의 역할과 비중이 더 커지리라 기대해봅니다. 그러고 보니 오는 11월 18~19일 태국 방콕에서 APEC 정상회의가 열리고, 이보다 앞선 15~16일엔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G20 정상회의가 개최된다고 하네요.
마지막으로 하나 더 물을 것이 있어요. 코로나19 이전의 메르스 사태 때 뭘 느꼈어요? 우리와 아무 관계도 없을 줄 알았던 그 중동의 낙타, 내가 한 번 보지도 못했던 그 낙타 때문에 우리가 온통 난리를 겪었잖아요.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지금도 그 난리를 치고 있어요. 원인은 박쥐의 코로나 바이러스와 기원이 알려지지 않은 코로나 바이러스 사이의 재조합에서 유래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어요. 세상에 박쥐가 다 뭐예요?
그러니까 이 세상에 무관한 사람은 없어요. 글로벌이니 로컬이니 이런 이념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이에요. 우리 밥상을 보세요. 우리 시골에서 키운 게 별로 없어요. 표고버섯과 밤은 일본산, 손질한 고등어는 네덜란드산, 소고기는 호주산, 돼지고기는 멕시코산, 닭고기는 캐나다산, 전지분유는 뉴질랜드산을 자주 먹으니 우리 밥상만 하더라도 이미 글로벌한 것이죠.
그러니 마지막에는 세계인들에게 물어야 해요. 우리만 행복해도 안 돼요. 아프리카에서 병이 나고, 또 지구 어딘가에서 지진이 나는 속에 우리 혼자 행복할 수는 없어요. 그러니까 또 전 세계 사람에게 묻습니다. “너, 어디까지 왔니?”라고.
한국인에게 묻고, 아시아인에게 묻고, 세계 사람에게 묻는데 그중 제일 급한 것은 한국인에게 묻는 것이고, 그보다 더 급한 것은 나에게 묻는 것입니다.
내가 늘 이야기하는 것이지만, “어디서 불났다”고 할 때 놀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자기 동네에서 불났다”고 그러면 다들 문을 열어보고, “이웃집에서 불이 났다”고 하면 바로 집으로 달려가거나 도망을 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나’의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민족, 애국 이런 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지금 어디 왔느냐를 알면 한국이 어디에 왔는지를 알고 아시아가, 세계가 어디에 있는지를 압니다. 그것이 여러분이 지금 나의 책을 읽는 목적이고, 또 내가 여러분에게 말을 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어디까지 왔나’를 생각하는 목적입니다.
이야기의 전체 주제를 알아야 해요. 초상집에 갈 때 누구 초상인지는 알고 가야지, 실컷 울고 나서 “그런데 누가 돌아가셨대? 이럴 수는 없잖아요. 그러니까 우리 이야기의 시작이 어딘지를 알아야 합니다.
# 환경·시대에 따라 ‘이어영’ ‘이어녕’ ‘이어령’으로 불린 이야기

▲이어령 선생이 1962년 펴낸 《흙 속에 저 바람 속에》(현암사). 오른쪽은 문학사상사가 발행한 같은 책이다. 이 책은 단행본으로 국내에서만 수백만 부 이상이 판매되었고 미국, 일본, 중국 등지에 번역 출판되었다.
《흙 속에 저 바람 속에》가 1962년에 처음 나왔어요. 그때는 저자의 사진을 책에 넣어주는 경우가 있었거든요. 그 책의 저자 보관본 사진 속지에 내가 내 이름을 써넣었는데 ‘이어영’이라고 썼어요. 그런데 시간이 흘러 언젠가부터 ‘이어령’이라고 사인을 했어요. 세월이 흐르면서 얼굴색이 변한 것처럼 이름도 바뀐 겁니다.
어렸을 때 집에서 나는 ‘의영’이라고 불렸어요. 서울 경기도에서는 ‘어’자의 발음을 ‘의’라고 했거든요. ‘암행어사’라고 하지 않고 ‘암행의사’라고 하는 식이죠. 그러니까 원래 ‘령(寧)’자는 단어의 제일 앞에 나오면 ‘영’으로 발음하고 중간에 나오면 ‘령’으로 읽어야 하는데, ‘어(御)’자를 ‘의’라고 발음해버리니까 히아투스(Hiatus·모음충돌) 현상이 일어나지 않아서 ‘령’자가 처음에 나온 것과 마찬가지가 되어 ‘영’으로 발음하게 된 거죠. 그래서 집안에서는 다들 “의영아, 의영아!” 그렇게 불렀어요.
학교에 들어가서는 다들 표준말을 쓰니까 지금이라면 의당 내 이름을 찾을 수 있었겠지만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던 때는 일제 시대라 창씨개명 때문에 아무도 내 진짜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어요. 6학년 때 해방이 되면서 비로소 이름을 찾았는데 그때는 ‘어녕’이라고 했어요. 그러다 또 중학교에 갔더니 그때는 한글맞춤법도 없었을 땐데, 국어 선생님이 “‘어녕’이가 뭐냐, ‘어영’이다, 너는” 하셨어요. 그래서 내 이름의 영문 표기는 ‘O Young’이에요. 인터넷에서 나를 영어로 검색할 때도 그렇고, 내 책 영문 번역본의 저자 이름도 모두 ‘by Lee O Young’로 되어 있어요.
오래전 영국문화원(British Council)에서 우리 외교 문화인사를 초청하는 행사가 있었어요. 내가 거의 최초의 한국문화론인 《흙 속에 저 바람 속에》의 저자이고 대학교수니까 나를 초청했었죠. 대학 졸업 직후에 교수를 했으니 교수치고는 무척 젊었던 나를 보고 영국 문정관이 자기도 모르게 “Oh, Young!”, 그러니까 ‘너 참 젊다!’며 감탄을 해요. 그러더니 자기가 나를 초청하려면 내 이름의 로머나이즈(romanize)를 써야 한다며 묻기에, “너 지금 나에게 ‘Oh, Young’ 그랬잖아, 그렇게 쓰면 돼. ‘Young’이라고”라고 대답한 일이 있어요. 그러니까 내 영문명은 ‘오영, 어영’이죠.
그 뒤 내 글이 국정교과서에 실리게 되어 편수관들이 모였어요. 그때는 남의 이름이라도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국가에서 지정한 표기법으로 통일하게 되어 있었어요. 당시 국가 지정 표기법으로는 지명은 속음으로 읽게 되어 있었어요. 그러니까 충남 보령(保寧)이라고 하지 ‘보영’ 또는 ‘보녕’이라고 읽거나 표기하지 않잖아요. ‘보령, 회령, 비령’ 하는 식으로 지리책에서 ‘寧’자가 들어간 지명은 모두 ‘령’으로 표기하니까 사람 이름에도 ‘寧’자가 있으면 ‘령’으로 표기하는 것이 원칙이 되는 거죠. 그래서 교과서에는 내 이름이 ‘이어령’으로 표기되었어요.
“아무렇게나 불러도 됩니다”

▲현암사가 펴낸 《흙 속에 저 바람 속에》에 실린 이어령의 사진과 사인. 사인이 ‘이어영’으로 적혀 있다.
당시 내가 교수로 있던 이화여대에 가면 ‘이어녕’ 선생이고, 월급봉투나 기타 문서에도 ‘이어녕’인데 교육부에 가면 ‘이어령’이 되어 교과서에는 전부 ‘이어령’으로 실렸어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술 먹다 말고 한밤중에 나에게 전화를 걸어 이렇게 묻는 겁니다.
“선생님! 지금 싸움이 붙었는데, 선생님 이름이 이어영입니까, 이어녕입니까, 이어령입니까?”
그때마다 나는 “아무렇게나 불러도 됩니다”라고 대답했어요. 사람들은 “아니, 내기가 걸렸는데 아무렇게나 하면 돼요?”라고 불평했지만, 나로서는 그렇게 대답해서 서로 다 이긴 걸로 해주는 수밖에 없었어요. 내가 어느 쪽의 손을 들어주면 누군가는 잃을 수가 있는데 그건 내 책임이잖아요. 한때는 책에 저자 사인을 ‘이어영’이라고 했는데, 왜 그때 ‘이어영’이라고 사인해놓고는 지금은 ‘이어령’이라고 하느냐고 따지면 나는 할 말이 없거든요.
교육부가 나에게 붙여준 이름 ‘이어령’, 집안에서 불러준 ‘이의영’, 중학교 때 ‘이어영’, 그리고 대학에서는 ‘이어녕’! 이렇게 내가 내 이름을 어려서부터 쓰고, 20대부터 글을 쓰고 책을 내기 시작해서 거의 60~70년을 이 성(姓)과 이름을 가지고 책을 내고 저자 사인을 해주었는데도 내가 내 이름을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는 거예요.
게다가 남들은 나한테 유명한 사람이라고 하니, 세상에 널리 알려진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자기의 이름을 모르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어디까지 왔니’처럼 광복 후 70여 년이라는 긴 세월 속에 일제 시대 강제로 창씨개명한 것을 제외하고라도 ‘李御寧’이라는 이름이 이처럼 다양하게 변한 거예요. 남들이 그렇게 불러준 것만이 아니라 나 스스로도 그렇게 다양하게 변환하며 써왔어요. 1962년의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초판 저자 보관본에는 이렇게도 선명하게 나의 글씨로 써놓은 나의 이름 ‘이어영’이 있으니까요.
# ‘흙 속에 저 바람 속에’에 담긴 뜻은…
내 이름에도 이러한 비화가 있지만, 나의 첫 번째 책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역시 이름에 얽힌 이야기가 있어요. 사람들은 이 책의 제목을 두고 시적(詩的)이라는 말을 많이 해요. 사실 이 책이 첫 출간될 당시에는 한자어로 된 제목이 일반적이었거든요.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를 당시 일반적으로 쓰이던 한자어 제목으로 바꾸면 ‘풍토(風土)’가 돼요. 정신풍토, 지리풍토 이런 말로도 많이 쓰이고, 영어로 하면 Climate. 기후, 풍토. 희랍어로는 ‘기울다’는 뜻이죠. ‘경사져 있다’는 말이에요. 흔하게 쓰고 듣던 말이지만 ‘풍토’라는 말을 하면 가슴에 찡하게 오는 것이 없어요. 왜냐하면 한자를 말했기 때문이지요. 풍토의 풍(風)은 바람 풍자예요. 토(土)는 흙이라는 뜻이죠. 저는 이 풍토라는 말을 세 살 때 어머니에게 배운 말로 바꾸면서 바람이 뒤에 오고 흙이 먼저 오도록 순서만 뒤집었어요. 그리고 흙, 바람이라는 말에 ‘속에’라는 말을 붙였어요. 또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는 건데 ‘저’라는 말을 슬쩍 끼워 넣어 ‘저 바람 속에’라고 손가락질하듯이 하니까 바람이 보여요.
그러니까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라는 건 ‘풍토’라는 말인데, 한자로 風土라고 할 때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추상어였다가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라는 세 살 때 배운 순수한 우리말로 바꾸는 순간 ‘아! 풍토라는 말이 바람과 흙이구나’ 하고 깨닫게 되는 거죠. 흙과 바람. 우리 몸, 육체는 흙이에요. 마음, 또는 정신(Spirit)이라는 것은 바람이에요. 흙은 변하지 않지만 바람은 수시로 변해요. 그러니 우리에게는 변하는 ‘나(마음)’와 변하지 않는 ‘나(몸)’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거죠. 나만이 아니라 한국에도 그런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이 있기에 《흙 속에 저 바람 속에》인 거예요. 《풍토》가 아니라. 사실 이 제목 덕분에 그 당시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어요.
# 한국 근대에 담긴 비극적 현실

▲1906년에 간행된 우리나라 최초의 신소설인 이인직의 《혈(血)의 누(淚)》. 사진은 2016년 한 출판사가 펴낸 《혈의 누》.
한국 근대문학이 막 부화하던 시절 책 제목을 어떻게 붙였는지 볼까요?
우리나라 최초의 신소설로 알려진 이인직(李人稙·1862~1916년)의 《혈(血)의 누(淚)》를 들어보셨지요? ‘피의 눈물’이라고 하면 간단할 것을 신소설이라고 내세우면서도 제목은 굳이 한자를 써서 ‘혈의 누’라고 붙였어요. 소설가들이 모두 한자에 절어 ‘피의 눈물’이라는 말을 못 하는 거예요. 소설가는 제 나라말, 그것도 세 살 때 배운 말로 소설을 써야 하는데, 엄청난 한자문화 때문에 한자 세대는 한자가 우리나라 말보다도 더 익숙했어요. 그러니까 《혈의 누》 같은 제목을 쓰게 되는 거죠. 한글 세대인 요즘 사람들은 《혈의 누》라는 제목을 보면 ‘남원 광한루’ 같은 것을 떠올리게 될지도 모르지요.
“내 눈에서 피눈물이 나” 그러지 “내 눈에서 혈의 누가 난다”라고 하면 무슨 실감이 나나요? 아버지가 막 화를 내면서 “너 그 짓하면서 내 눈에서 피눈물 나는 걸 봐야 되겠냐!” 이런 말을 들으면 마음이 찡한데, “내 ‘혈의 누’ 나는 걸 봐야 되겠냐!” 하면 아무 감동이 없잖아요.
그러니까 《풍토》, 그러면 독자들이 감동하지 않는데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하면 감동하는 거예요. 게다가 그냥 바람도 아니고 ‘저 바람’이라 하고 거기다 ‘속’이라는 글자가 두 개 나오니 운율이 붙는 거예요. 또 이게 완결된 문장이 아니에요.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그러니까 종이 울리다 만 것처럼 여운이 있잖아요. 흙 속에 뭐가 있는지, 바람 속에 뭐가 있는지 아무 이야기도 안 했는데 사람들은 제목 하나만으로 상상하는 거예요,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있는 무언가에 대해.

▲대한민국 제1호 잡지 《소년》 창간호. 독자 6명으로 시작한 14전짜리 《소년》은 1908년 11월 최남선이 발행했다. 최초의 신체시 ‘海에게서 소년에게’는 《소년》 창간호의 권두시로 발표되었다.
특히 이상한 것은 ‘신체시(新體詩)의 효시’라고 하는 최남선(崔南善·1890~1957년) 선생이에요. 우리나라 최초의 현대시를 최남선 선생이 썼는데 그 작품의 제목이 ‘海에게서 少年에게’예요. 바다 해(海)자를 썼어요.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국제펜클럽대회를 한국에서 열었을 때 내가 우리나라 최초의 현대시 ‘海에게서 少年에게’를 소개한 일이 있어요.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작가들이 왔지요. 스크린 전면에 이 시의 영문 제목이 떴는데 눈이 아득해지더라고요. ‘From the sun, To the boys’라고요. 화들짝 놀랄 수밖에요. 번역자가 한글로 ‘해에게서 소년에게’라고 적어놓은 걸 보고 바다 해(海)를 하늘에 떠 있는 해(日)로 생각을 하고 영문으로 옮긴 거죠. 이것이 우리나라 신체시의 비극이에요. 신체시라고 했으니 ‘바다에서 소년에게’라고 하는 것이 마땅한데 왜 ‘海에게서 소년에게’라고 했을까요? 당시에는 바다를 해(海)라고 하고, 사람을 인(人)이라고 하는 게 더 알기 쉬웠던 거죠. 한자 세대니까.
병원 중에 이비인후과라는 게 있잖아요. 이비인후과의 ‘이(耳)’는 귀를 뜻하는 한자예요. 그러나 우리말의 ‘이’는 치아를 의미하죠. 그래서 누가 “너 이가 이상하다”라고 말하면 되묻게 되는 거죠. 두 손으로 각각 귀와 치아를 가리키며 “귀요? 치아요?”라고.
그러니까 신소설, 신체시를 쓰던 이인직·최남선 선생이 굉장히 위대한 분이지만 이 책을 읽는 여러분은 한자 세대가 아닌 한글 세대라서 그분들의 위대성을 실감하기 어려운 것이죠.
# 나는 무슨 세대에 속할까

▲국립국어원은 이어령 문화부 장관 시절인 1991년 1월 23일 개청했다. 이어령 장관, 안병희 초대 국어연구원장 등이 서울 종로구 운니동 덕성여대 별관에 마련한 새 청사에서 현판식을 갖고 있다. 사진=조선일보DB
한글 세대, 즉 우리말 세대는 광복 이후 고작 70여 년밖에 되지 않아요. 한글을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여러분은 그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겠지만, 한국 사람이 세 살 때 배운 어머니 말로 통하는 세상이 왔으니 우리는 옛날 사람보다 행복한 시대에 사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나라 말 쓴다고, 이비인후과의 이(耳)라고 하지 않고 귀라고 한다고 행복해하는 사람이 있어요? 행복이 먼 데 있는 게 아니에요. 비교해보면 이인직·최남선 선생이 얼마나 답답했을까요. ‘바다’를 ‘바다’라고 부르지 못하고 ‘해(海)’라고 쓰면 ‘해(日)’로 받아들일 수도 있는데도 그렇게 썼다고 하니, 또 그걸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시인 신체시라고 부르니, 우리 근대라는 것이 오죽했겠어요.
한글 세대 이전에 한자 세대가 있었어요. 나는 서당 가서 천자문을 배웠으니 한자 세대에 약간은 걸쳐 있는 사람이에요. 일제 시대에 태어나 자랐고 그때 초등학교에 다녔으니 일어 세대는 말할 것도 없죠. 이름까지도 일본식 이름으로 창씨개명했었으니까요. 그러면서도 나는 ‘혈의 누’와 같은 형식의 제목인 ‘풍토’라고 하지 않고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라고 했어요. 풍토라는 한자어를 순수한 어머니의 말로 한 거죠. 이 책이 외국에서도 《Climate》가 아니라 《In This Earth, In That Wind》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어요. 풍토라는 말이 한자에서 온 것이 아니라 우리의 흙과 바람이라는 의식이죠. 이것을 영어로 번역했을 때 내 사상은 중국에서 온 것이 아니라 한국의 사상이 배어 있는 것이 세계로 알려졌어요.
이렇게 되니 결국 나는 무슨 세대에 속할까를 생각해보게 됩니다. 천자문을 읽었고 그다음에 일본어를 썼어요. 학교에 가서 한글을 체계적으로 배우기 이전에 일본어를 철저히 배워야 했죠. 그곳은 한국어를 쓰면 벌을 서던 세계였어요. 6학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한국어를 자유롭게 읽고 쓰게 된 사람이 지금은 언어를 다루는 문필가가 되었어요. 한글 세대가 된 거죠.
한때는 사람들이 내가 우리말로 감동을 준다고 해서 ‘언어의 마술사’라고 불렀는데 내가 붙인 말이 아니에요. 실은 별명이 몇 개 있는데 ‘창조의 아이콘’ ‘창조적 지성’, 그리고 뭐… ‘한국대표 지성’.
내가 제일 바라는 말은…
솔직히 하나도 안 맞는 이야기지만 남들이 붙여준 겁니다. 그러니 별명이지요. 난 그런 별명이 싫어요. 대신 “부르려면 크리에이터(Creator)로 불러다오” 하지요. 창조인, 생각하는 사람(Thinking Man)이라고 부르는 게 내가 제일 바라는 것입니다.
광복 이후 다른 나라들이 200년 걸려도 하지 못한 산업문명의 모든 것을 우리는, 한국은 불과 몇십 년 안에 다 치러야 했습니다. 범람하는 산업화의 물결, 급변하는 문명의 충돌 그 사이사이, 고비고비마다 굵직한 모토를 던져왔지요. 20대에는 ‘우상의 파괴와 저항의 문학’, 30대에는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로 대표되는 한국문화론, 40대에는 일본문화론인 ‘축소 지향의 일본인’, 50대에는 88서울올림픽 슬로건 ‘벽을 넘어서’, 60대에는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 70대에는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접목을 말하는 ‘디지로그’, 80대에는 ‘생명이 자본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눈물 한 방울’이라는 키워드를 던졌습니다.
생각해보세요. 세계의 어떤 문필가와 교수가 만년 동안 살아야 체험할 수 있는 인류 문명의 전 과정을 80여 년 한평생 동안 모두 체험하고 또 참여할 수 있겠습니까.⊙
《흙 속에 저 바람 속에》의 서문 그것은 지도에도 없는 시골길이었다. 국도에서 조금만 들어가면 한국의 어느 시골길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길이었다. 황토 흙과 자갈과 그리고 이따금 하얀 질경이 꽃들이 피어 있었다. 붉은 산모롱이를 끼고 굽어 돌아가는 그 길목은 인적도 없이 그렇게 슬픈 곡선을 그리며 뻗어 있었다. 시골 사람들은 보통 그러한 길을 ‘마차길’이라고 부른다. 그때 나는 그 길을 지프차로 달리고 있었다. 두 뼘 남짓한 운전대의 유리창 너머로 내다본 나의 조국은, 그리고 그 고향은 한결같이 평범하고 좁고 쓸쓸하고 가난한 것이었다. 많은 해를 망각의 여백 속에서 그냥 묻어두었던 풍경들이다. 이지러진 초가집의 지붕, 돌담과 깨어진 비석, 미루나무가 서 있는 냇가, 서낭당, 버려진 무덤들 그리고 잔디, 아카시아, 말풀, 보리밭… 정적하고 단조한 풍경이다. 거기에는 백로의 날갯짓과도 같고, 웅덩이의 잔물결과도 같고, 시든 나뭇잎이 떨어지는 것 같고, 그늘진 골짜기와도 같은 그런 고요함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폐허의 고요에 가까운 것이다. 향수만으로는 깊이 이해할 수도 또 설명될 수도 없는 정적함이다. 아름답기보다는 어떤 고통이, 나태한 슬픔이, 졸린 정체(停滯)가 크나큰 상처처럼 열려져 있다. 그 상처와 공도를 들여다보지 않고서는 거기 그렇게 펼쳐져 있는 여린 색채의 풍경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위확장(胃擴張)에 걸린 아이들의 불룩한 그 배를 보지 않고서는, 광대뼈가 나온 시골 여인네들의 땀내를 맡아보지 않고서는, 그리고 그들이 부르는 노래와 무심히 지껄이는 말솜씨를 듣지 않고서는 그것을 알지 못할 것이다. 지프차가 사태진 언덕길을 꺾어 내리막길로 접어들었을 때, 나는 모든 것을 보았던 것이다. 사건이라고도 부를 수 없는 사소한 일, 또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지만 그것은 가장 강렬한 인상을 가지고 가슴속으로 파고들었다. 앞에서 걸어가고 있던 사람들은 늙은 부부였다. 클랙슨 소리에 놀란 그들은 곧 몸을 피하려고는 했지만 너무나도 놀라 경황이 없었던 것 같다. 그들은 갑자기 서로 손을 부둥켜 쥐고 뒤뚱거리며 곧장 앞으로만 뛰어 달아나는 것이다. 고무신이 벗겨지자 그것을 다시 집으려고 뒷걸음친다. 하마터면 그때 차는 그들을 칠 뻔했던 것이다. 이것이 그때 일어났던 이야기의 전부다. 불과 수십 초 동안의 광경이었고 차는 다시 아무 일도 없이 그들을 뒤에 두고 달리고 있었다. 운전사는 그들의 거동에 처음엔 웃었고 다음에는 화를 냈다. 그러나 그것도 순간이었다. 이제는 아무 표정도 없이 차를 몰고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나는 모든 것을 역력히 기억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잔영이 좀처럼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누렇게 들뜬 검버섯의 그 얼굴, 공포와 당혹스런 표정, 마치 가축처럼 둔한 몸짓으로 뒤뚱거리며 쫓겨 갔던 그 뒷모습, 그리고… 그리고 그 위급한 경황 속에서도 서로 놓지 않으려고 꼭 부여잡은 앙상한 두 손… 북어 대가리가 꿰져 나온 남루한 봇짐을 틀어잡은 또 하나의 손… 벗겨진 고무신짝을 집으려던 그 또 하나의 손… 떨리던 손…. 나는 한국인을 보았다. 천 년을 그렇게 살아온 나의 할아버지, 할머니의 뒷모습을 본 것이다. 쫓기는 자의 뒷모습을. 그렇다. 그들은 분명 여유 있게 차를 비키는 아스팔트 위의 이방인 같은 사람들이 아니었다. 운전사가 어이없이 웃었던 것처럼 그들의 도망치는 모습은 꼭 길가에서 놀던 닭이나 오리 떼들이 차가 달려왔을 때 날개를 퍼덕거리며 앞으로 달려가는 그 모습과 다를 게 없었다. 악운과 가난과 횡포와 그 많은 불의의 재난들이 소리 없이 엄습해왔을 때에 그들은 언제나 가축과 같은 몸짓으로 쫓겨 가야만 했던 것일까! 그러한 표정으로, 그러한 손길로 몸을 피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가! 우리의 피부빛과 똑같은 그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우리의 비밀, 우리의 마음이 있다. |
10월 호
⑩ 땅 이야기 - 부지깽이, 두레박, 이끼
‘부뚜막 위 부지깽이가 되자’
⊙ 남을 불태워주는 추임새를 넣는 사람이 되어라
⊙ ‘우물가 옆 두레박이 되자’… 자기 두레박 없어도 함께 두레박 쓸 수 있는
⊙ ‘바위 위 이끼가 되자’… 딱딱한 바위를 초록으로 덮어 생명이 싹트게
⊙ 잃어버린 것을 찾는 일이 인간의 영원성을 찾는 일과 같아

▲초대 문화부 장관 시절의 이어령. 1990년 12월 19일, 17년 만에 부활된 청룡영화제에 참석해 이어령 장관이 수상자들에게 축사를 하고 있다. (왼쪽부터 박상민, 최진실, 이 장관, 원미경, 안성기, 최민수, 황신혜) 사진=조선DB
한국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절대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지 않아요. 닭살 돋고 낯간지러워 절대 하지 못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진짜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그런 말을 안 쓰는 거예요.
서양 사람은 내(I)가 너(you)를 사랑(love)한다고 말하는데, 그 말을 하는 순간 사실은 벌써 사랑하는 것이 아니에요. 사랑하면 너와 내가 하나, 한 몸이 되는 건데 나와 너를 따지는 순간 사랑하는 것이 아니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우리는 그냥 “사랑해” 이러지 “내가 너를 사랑해” 이렇게 말하지 않아요.
사랑 고백할 때 남편은 아내에게 “사랑해”라고 해요. ‘나, 너’를 빼고 그냥 “사랑해”. 사실 그것도 상당히 발전한 거예요. 원래 한국 사람들은 진짜 사랑해서 구혼할 때 “사랑해”라는 말 대신 “니캉 내캉 함께 살자”라고 말했어요. 참 좋은 말이죠. 너와 내가 함께 살자! 살자는 건 생명을 말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평생 동안 글을 쓴다는 건 말을 찾는 거였어요. 만드는 것이 아니라 찾는 것!
그러고 보면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이 팔도마다 다 틀려요. 그러니 찾는 과정이 어렵지요. 어렵지만 즐겁기도 하고요.
경상도 사투리로 ‘너를 사랑해’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디져도 그런 말 몬 한다.”
전라도 사투리로 ‘너를 사랑해’는 “거시기 혀!”, ‘널 죽도록 사랑해’는 “오메 거시기 혀!”. 또 다른 버전으로 “니가 오살나게 좋아브러”.
충청도 사투리로 ‘너를 사랑해’는 “임자밖에 서” 혹은 “꼭 말루 허야 하남”이죠. 충청도 사람이 기분이 좋을 때 “뭐여…”라고 말하고, 기분 나쁠 때는 “뭐여!”, 짜증 날 때도 “뭐여!!”라고 하지요. 이처럼 같은 의미라도 쓰이는 방식, 표현하고 이해하는 방식이 사람마다 지역마다 사회마다 다 다릅니다. 그러니 일일이 ‘찾아가는’ 것이지요.
# 문화부 장관 시절, ‘갓길’ 이야기

▲1990년 10월 12일 자 《조선일보》에 어느 독자가 〈노견 어원이 뭐냐. 갓길이면 어떨까〉라는 글을 투고했다.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갓길 표시’ 또는 ‘갓길 없음’ 표시가 나오는 걸 보게 될 거예요. 그것이 내가 만든 말이에요. ‘갓길’. 그래서 내 별명이 ‘갓길 장관’이 되었어요. 문화부 장관 하면서 뭘 했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별로 한 일이 없는 것 같은데 고속도로 타고 가다 보면 ‘아, 내가 그래도 이름 하나는 바꿨구나’ 싶어요.
갓길은 무엇보다 어색하지 않다는 장점이 있었어요. 한자어를 순우리말로 순화한다면서 공처가를 ‘아내 무섬쟁이’니, 이화여대를 ‘배꽃 계집 큰 배움터’ 막 이런 어색한 말로 바꾸니까 사람들이 저항감을 느껴 결국 바꾸지 못하는 거거든요.
그런데 갓길은 입에 착 붙어요. 내가 그 이름을 짓기 전에는 노견(路肩), 혹은 길어깨라고 했어요. 노견이라고 하니까 무슨 길거리 개(路犬)을 말하는 거냐고 사람들이 막 욕하니까 그다음으로 제안된 이름이 길어깨였어요. 노(路)가 길이고 견(肩)이 어깨니까 길어깨. 노견과 함께 길어깨라는 이상한 이름이 불리기도 했어요. 그래서 내가 국무회의에서 “그 길을 ‘노견’이나 ‘길어깨’라고 하면 절대 안 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어요.
당시 행정용어 표기 문제는 내무부 소관이었는데 내무부에서 갓길 통행 과태료 법을 통과시키려고 할 때였어요. 사실 갓길은 길이 아니라, 고속도로가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 설치한 거거든요. 그러니까 차가 그 길을 달리면 안 되는 것은 물론이고, 길도 아닌 거죠. 그러니까 다른 장관들이 “그건 당신 소관도 아닌데, 문화부 장관이 왜 나서냐, 그리고 길도 아닌데 갓길이라는 이름을 붙이면 사람들이 그걸 오히려 더 길로 착각하고 달릴 것 아니냐”며 반대했어요. 그때 내가 이렇게 말했죠.
갓길의 기적, 《행정용어순화편람》(1992)

▲1992년 12월 《행정용어순화편람》이라는 책이 이문석 총무처 장관 명의로 나왔다. 1991년 말에 〈행정용어바르게쓰기에관한 규정〉이 제정되면서 총무처와 법제처, 문화부 등이 중심이 되어 대대적인 행정용어 순화 작업을 벌였다고 한다.
“‘길갓집’을 생각해봐라. 길갓집은 길의 가에 붙어 있는 집이지, 길 위에 있는 집이 아니다. 그러니까 갓길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해서 그게 길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국무회의는 장관회의가 아니라 나라 살림에 관한 회의다. 그 길의 이름은 대한민국 온 사방에 다 붙을 건데, 그 글자는 문화에 관한 것 아니냐.”
이렇게 막 밀어붙여서 결국 내무부에서도 ‘갓길’로 이름 붙이게 된 거예요. 갓길. 가에 있는 길, 갓길. 어린아이도 이해하기 쉬운 말이잖아요.
게다가 누가 만든 말이 아니라 옛날부터 써온 말 같지 않아요? 일제 시대 때 발행된 《조선일보》나 《동아일보》를 찾아봐도 갓길이란 표현은 나오지 않습니다. 일상생활에서 쓰였지만 순우리말이어서 쓰이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사실 노견은 일본식 표현입니다. 과거엔 고속도로 표지판에 〈노견주행 엄금〉이라는 표현이 많았습니다. 미국 등 서양에서 ‘Road Shoulder’라는 표현을 쓰는데 일본 사람들이 그걸 보고 한자로 옮겨 만든 용어죠. 1960년대 정부 행정용어로 노견이란 한자어 대신 같은 의미의 길어깨라고 쓰기도 했어요. 1982년 《이희승 국어대사전》에도 길어깨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공식적으론 길어깨로 쓰면서 표기는 노견이라 적고, 뒤죽박죽 써온 것이지요.
그러나 갓길은 세 살 때 어머니에게 배워서 써온 말처럼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정착되었어요. 노견이 갓길로 바뀐 후 많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이전부터 일제식 행정용어를 우리말로 바꾸자는 움직임이 있어왔는데 갓길이 마중물이 된 셈이지요.
1992년 12월 《행정용어순화편람》이라는 책이 이문석 총무처 장관 명의로 나왔습니다. 앞서 1991년 말에 〈행정용어바르게쓰기에관한 규정〉이 제정되면서 총무처와 법제처, 문화부 등이 중심이 되어 대대적인 행정용어 순화 작업을 벌였죠.
어문 관련 단체 등 71개 기관에서 순화 대상 용어를 수집하였어요. 이렇게 모은 8673개 용어를 국어심의회 등 전문기관의 심의를 거쳐 1차로 최종 확정해 《행정용어순화편람》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당시 편람에 들어간 사례는 이렇습니다. 그땐 왜 이리 어려운 말을 썼을까 싶어요.
고오바이 → 오르막·물매·비탈길
가께소바 → 메밀국수
가꾸목(角木) → 각목·각재
가도(假道) → 임시도로·임시통로
가리방 → 줄판
도선장(渡船場) → 나룻터
브로슈어(brochure) → 안내서
쇄정(鎖錠)하다 → 잠그다
시건(施鍵)장치 → 잠금장치
오시핀 → 납작못
영세민 → 저소득층
잠업(蠶業) → 누에치기
재식(裁植)하다 → 심다
절석(切石) → 마름돌
품신(稟申)하다 → 건의하다
핫 라인 → 직통전화
마을 입구 정자목, 쌈지공원, Vest Pocket Park
내가 만든 말은 그것만이 아니에요.
주택가 곳곳에 조그마한 공원을 만들어 ‘쌈지공원’이라는 이름을 붙였어요. 그걸 문화부 장관 재임 시절 3개를 만들었는데 지금은 전국에 쌈지공원이 수천 개 있어요. 과거 농촌 등 집단 거주지의 중심지나 마을 입구의 정자목을 중심으로 형성된 자생적인 소공원 형태의 ‘농촌 공동쉼터’를 도시에 정책적으로 적용시킨 것이죠.
‘쌈지’라는 건 작은 주머니를 말하는 우리말이에요. 작은 공원을 그냥 흔하고 평범하게 ‘작은공원’이라고 하지 않고 쌈지공원이라는 예쁜 이름을 붙여준 거죠.
서구에서도 비슷한 개념의 공원이 많아요. 뉴욕 허드슨 강이 내려다보이는 허드슨 하이트(Hudson Height)라는 곳이 있어요. 맨해튼 끝자락에 위치한 언덕이죠. 이 지역에 3개의 도로가 만나는 교차로가 있는데 차가 빨리 지나가 보행자들이 늘 사고 위험에 노출됐었죠. 거기에 소규모 공원을 만들었는데 그걸 포켓공원이라 부릅니다. 이 포켓공원이 생기면서 자동차들은 알아서 속도를 줄이게 됐죠. 또 포켓공원과 연계해 횡단보도도 훨씬 넓어져 보행자들의 안전도 보장받게 됐어요.
도시 소공원(Vest Pocket Park)은 조끼주머니(Vest Pocket)가 의미하는 것처럼 작지만 요긴하고 편리함을 추구하는 공간인데 우리로 치면 바로 쌈지공원을 말합니다. 쌈지공원은 ‘the Vest-Pocket Park’의 순수한 한국적 표현으로 도심지의 자투리땅을 활용해 저소득층 고밀주거지역 거주자들을 위한 문화·복지적 차원에서 조성되었습니다.(이은기의 〈도심지 쌈지공원의 이용 후 평가 및 개선방안〉 참조)
또 서울시에 ‘자락공원’이 있어요. 서울에는 크고 이름난 산이 많잖아요. 그 산과 평지의 접경지역에 공원을 만들고 자락공원이라고 이름 붙였어요. 치맛자락을 생각해보세요. 치맛자락은 땅에 끌리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남산이 치마를 입었다고 상상을 해보세요.
또 ‘자락’은 치맛자락의 자락이기도 하지만 끝자락의 자락이기도 해요. 산의 끝자락, 주거지의 끝자락. 그 양쪽의 끝자락이 겹친 곳에 자락공원을 만드는 거죠. 산과 사람들의 주거지가 이어지지 않으면 산은 섬처럼 고립돼요. 도시인의 생활반경에 산을 끌어들이는 거죠.
이어령, 쌈지공원에서 울다 다음은 2016년 8월 26일 자 《주간조선》에 보도된 쌈지마당 이야기다. 1991년 6월 첫 번째 쌈지마당인 ‘중계쌈지마당’이 완공됐다. 연탄 실어 나르는 리어카 한 대도 다닐 수 없는 작고 꼬불꼬불한 골목길 마을에 들어선 쌈지마당은 의외의 곳에 ‘짠’ 하고 나타나는 ‘마법의 예술공원’ 같았다. 중계쌈지마당 준공식 행사 당일, 이어령은 울었다. “고건 시장한테 준공식에 나와달라고 했더니 이분이 농을 해. ‘선배님, 서울시장을 너무 우습게 보시네요. 10억 건설 현장에도 테이프 끊으러 안 가는데 8000만원짜리 공사에 나가겠습니까. 껄껄껄. 가야지요. 100억짜리는 안 나가도 거기엔 나가겠습니다.’ 이런 말을 하더니 기쁘게 행사장에 왔지. 행사가 끝나도 갈 생각을 안 해. ‘장관님 먼저 가세요. 저는 민원이 많아서 빠져나가기 힘들 겁니다’ 하며 손사래를 치더라고. 거기가 무허가 건물이 많잖아. 시민들이 서울시장한테 하고 싶은 건의가 좀 많겄어. 시민들 틈에 뺑 둘러싸여 나더러 손사래를 치는데, 고건씨가 키가 크잖아. 혼자 삐죽이 서 있는 걸 보니 울컥하더라고. 그런 마음으로 공원 입구를 나오는데 아이들이 만든 플래카드가 보여. ‘이.어.령.문.하.부.장.과.님.감.사.합.니.다.’ 노트를 한 장씩 찢어서 크레파스로 삐뚤빼뚤하게 써서 매달아 놓은 거야. 서툰 글씨로 철자법도 다 틀리고. 그 근처에 수녀님들이 돌봐주시는 보육원 시설이 있는데, 그 아이들이 만든 거였지. 아이들 마음이 어떻겠어요? 그걸 본 순간 눈물이 확 나더라고.” |
안상수체로 바뀌면서 일어난 변화

▲기하학적인 안상수체는 받침이 세로획의 정중앙에 오면서 정사각형 틀을 벗어난 글꼴이다. 사진=조선DB
내가 장관이 되었을 때는 군사정권이 막 민간으로 넘어올 때니까 중앙정부는 아직도 권위주의에 가득 차 있었어요. 서류나 문서는 모두 교과서의 글씨체처럼 딱딱한 명조체로 쓰고 그럴 때 나는 문화부의 모든 글씨체를 안상수체로 바꾸어버렸어요.
글자야말로 가장 원초적인 디자인 아닌가요? 이후 서체 디자인이 뭔지 사람들이 그제야 깨닫게 됩니다. 기존의 틀에 익숙한 사람들은 거부감이 있었겠지만 컴퓨터가 보급되고 워드 프로세서 소프트웨어가 널리 쓰이면서 날개를 달았죠. 통치계급, 즉 정치인이나 관료들이 쓰는 서체의 권위가 무너졌어요.
서체의 변화가 문장의 변화, 사고의 변화, 사회의 변화를 동시에 이루지 않았을까요? 또 다양한 서체가 등장하면서 높다란 정부의 문턱도 낮아지지 않았을까요?

▲아이들이 바람개비를 돌리고 있다. 사진은 2008년 8월 31일 서울 여의도 63바람개비축제를 알리는 바람개비 자전거 홍보단 모습이다.
나는 권위주의를 깨고 좀 부드럽게 하고 싶어서 문화부 앞에 바람개비를 붙여놓기도 했지요. 우리가 바람개비 가지고 놀 때, 바람이 불기를 기다리기만 하며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들고 뛰면 바람이 없어도 바람개비가 돌아가잖아요. 바람이 없다고 탓하지 말고 스스로 뛰면 바람개비는 돌아간다는 뜻으로. 그러자 어떤 장관이 나에게 오더니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도 중앙청이 권위가 있어야지. 문화부가 바(bar) 같아요. 뭐 거기다가 바람개비를 달아놓고 그럽니까?”
지금은 뭐 아무렇지도 않은데, 그 말을 들을 당시에는 참 기분이 나빴어요. 중앙청의 청(廳)은 관청을 뜻하는 말이고, 거기에 출근하는 사람들을 등청(登廳)한다고 했어요. 보통 사람들은 출근을 하는데 중앙청으로 오는 사람들은 등청을 하는 거예요. 이렇게 어마어마한 말을 쓰는 곳에 막 바람개비를 붙여서 돌리니까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았죠. 그래서 관리들이 그렇게 불평을 하는데 나는 이런 농담을 했어요.
“성공했네! 사람들이 bar로 알았으면 성공했네. 그러면 사람들이 막 들어올 거야. 우리한테는 그 문턱이 높았지만, 이젠 그냥 별 사람 다 들어올 거 아니야. 밤에도 들어올 거 아니야.”
# 문화부 슬로건1 부뚜막 위 부지깽이

▲1991년 6월 29일 《조선일보》 19면에 실린 〈휴식공간 중계 쌈지마당 준공〉 기사. 이어령 장관과 백상승 서울 부시장, 주민 등 150명이 참석해 준공식을 가졌다. 기사에는 중계 쌈지마당에 이어 금호 쌈지마당(성동구 금호2가), 창신 쌈지마당(종로구 창신동)도 다음 달 준공한다고 적혀 있다.
그때는 관청에서 내거는 슬로건이 보통 ‘협조와 평화와 뭐…’ 이런 식이었어요. 관념적이고 한자 투의 말이었죠. 사실 슬로건은 지금도 그렇긴 하죠. ‘진보와 평화’ 하는 식으로. 내가 문화부 장관이었을 때 문화부의 슬로건이 뭐였는지 알아요?
첫 번째, 부뚜막 위 부지깽이가 돼라.
부뚜막 위 부지깽이. ‘부’자 두음이 반복되니까 음운율이 생기죠.
부엌에 가면 놋그릇, 은그릇 같은 귀중품도 있고 식칼, 도마 같은 필수품도 있고 그중 제일 천한 것이 부지깽이예요. 부지깽이는 밤낮 불에 타요. 끄트머리를 불태워가며 아궁이의 불을 지피고 나면 다시 끄고, 다시 또 타고. 여러분이 특수한 사람은 못 되어도 부지깽이 같은 사람은 될 수 있어요. 남을 위해서 몸을 태우고 불은 못 되더라도 불을 붙여주는 것이 부지깽이잖아요.
그러니까 부엌에서 가장 천한 것이지만 또 가장 요긴한 것이 부지깽이예요. 불을 붙여주는 부지깽이가 없으면 안 돼요. 그리고 이 부지깽이는 누구나 될 수 있어요. 아무 나뭇가지나 하나 꺾으면 다 부지깽이로 쓸 수 있어요.
여러분이 기가 막힌 발명이나 연구로 노벨상을 타는 사람이 못 될지는 몰라도, 다들 부지깽이는 될 수 있어요. 사람들은 부지깽이를 우습게 알지만, 부지깽이가 있기 때문에 장작불을 지필 수 있고 밥을 지을 수 있어요. 부엌에 식칼부터 은그릇까지 온갖 것이 다 있지만 제일 하찮아 보이는 부지깽이, 심지어 무엇이나 될 수 있고 가장 긴요하게 쓰이는 것이 부지깽이예요.
그러니까 긴요하게 쓰이는 사람이 되라는 거죠. 자기가 불타는 것이 아니라 남을 불태워주는 추임새를 넣는 사람이 돼라, 공무원이 뭐냐, 너희 스스로 불이 되려 하지 마라, 너희가 밥이 되려 하지 마라, 밥 짓고 요리할 때 밑에서 자기를 그슬려가며 부지깽이처럼 봉사해라.
전 국민을 향해 “불이야!”라고 소리 지르는 사람
인류 역사에 있어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 불의 발견이라고 하지만 불을 이용하게 된 것도 부지깽이 덕분입니다. 사냥한 음식을 익혀 먹을 때 불을 어떻게 다뤘을까요? 손으로 했겠냐고요. 부지깽이로 했겠지요.
불쏘시개 작대기야말로 가장 소중한, 꼭 필요한 물건이죠. 부지깽이로 이글거리는 불을 만지며 생각에 빠졌을 겁니다. 따스함을 느꼈을 겁니다. 불 앞에 모여 음식을 익혀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밤하늘에 수놓은 별들을 올려다보았겠지요.
그 별을 보며 처음으로 신화(神話)라는 꿈을, 가공의 이야기를 만들었을 테지요. 종교가 생겨났을지도 모릅니다. 오늘날, 우리가 시인이나 소설가로 부르는 사람 역시 과거로 거슬러 거슬러 올라가면 별을 올려다본 최초의 사람이 나오고, 그리고 불쏘시개, 부지깽이를 든 사람이 나오지 않겠어요?
태초에 부지깽이를 든 사람들은 하늘에 흩어져 있는 별들을 그냥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북두칠성처럼 별과 별 사이를 이어서 하나의 별자리를 만들어냈어요. 그리고 그 모습 속에 견우직녀 설화 같은 아름다운 이야기를 적어 넣었던 겁니다.
그러니 ‘부뚜막 위 부지깽이가 돼라’라는 말이 얼마나 소중한 말이냐고요. 그런 농담 있잖아요. ‘홍도야 울지 마라’를 한마디로 줄이면 ‘뚝!’이 된다는. 그것과 마찬가지예요. 그런 다양한 분야의 봉사를 표현하는 게 ‘부뚜막 위 부지깽이가 돼라’예요. 봉사자 중에서도 문화 봉사자니까 그냥 봉사를 하는 게 아니라 문화계에 불을 붙이는 봉사자가 되어, 시인에게 불을 붙이고, 연극계에 불을 붙이는 거죠. 그래서 문화부가 잘 되면 환하게 불이 탈 거 아니겠어요? 나는 문화부 장관이 전 국민을 향해 “불이야!”라고 소리 지르는 사람이라고 했어요. 문화부라 하면 사람들이 거들떠보지도 않으니 ‘불이야’라고 하면 돌아볼 거 아니겠어요. 불이 났으니까.
# 문화부 슬로건2 우물가 옆 두레박

▲경북 경주 인왕동 유적 우물 바닥에서 출토된 두레박. 사진=신라문화유산연구원 제공
두 번째 슬로건은 우물가 옆 두레박이에요.
두레박을 모르는 사람은 없죠? 두레박은 우물가에 하나를 공용으로 놔주기만 하면 그다음에 오는 사람이 손쉽게 물을 떠먹을 수 있어요.
아무리 목이 말라도 두레박이 있어야 해요. 두레박 없이는 우물물을 길을 수 없어요. 인류의 역사와 함께 전승돼온 것이 두레박일지 몰라요. 두레박이 없었다면 우물을 파지도 못했을 것이고 강가나 개울 곁에서만 살았을 겁니다. 두레박이 있었기에 깊은 산속에서도 살 수 있었고 공동으로 우물을 쓰며 집단을 이루고 마을공동체를 이룰 수 있었을 거예요.
한국인에게 돗자리가 ‘하늘을 나는 융단’이라면, 두레박은 ‘하늘이 내린 그릇’ 아니겠어요? 우물이 ‘집안의 작은 바다’라면 두레박은 ‘바다와 땅을 잇는 엘리베이터’인 셈이지요.
그런데 만약 그 두레박을 자기 것 들고 가서 쓰고는 내 것이라고 싹 챙겨 와 버리면 모든 사람이 다 우물터에 갈 때마다 자기 것을 가지고 다녀야 해요. 이렇게 못난 짓 하는 사람은 되지 말자는 거죠.
내 가진 것을 나눠주고 어쩌고 하는 이런 위선적인 말 대신, 모두가 쓰는 우물터에 내가 물 떠먹은 두레박을 안 가져가고 놔두는 그런 작은 선행보다 더 크고 많은 것을 바라지는 않아요. 그거면 모든 동네 사람이 자기 두레박이 없어도 하나의 공동 두레박으로 편하게 쓸 수 있잖아요.
그 두레박과 같은 것이 문화시설이에요. 극장 하나 지어 놓으면 거기 와서 누구나 연극을 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그 문화시설, 소위 문화 인프라를 우리가 만들자는 거죠. 부지깽이가 되어 문화에 불을 붙이고, 그 불 붙은 문화가 활활 타오를 수 있는 터전을 만드는 것, 그것이 문화부가 할 일이에요. 문화를 융성시키고 불 붙이는 일!
그런데 아무래도 후퇴한 것 같아요. ‘문화융성위원회’(박근혜 정부 시기인 2013년 7월 공식 출범한 문화 융성을 담당하는 대통령 직속 정책 자문기구.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사라졌다)와 같은 어려운 말을 쓰잖아요. 내가 이미 몇십 년 전에 ‘부지깽이가 되자’라고 했는데 그게 융성(隆盛)이에요. 불 붙이라는 이야기잖아요? 그걸 그냥 ‘문화에 불 붙이자’ 하면 진짜 불이 붙을 텐데, ‘융성’이라고 하니까 이게 어디 남의 나라 이야기 같아요. 그래도 한편으로는 이름 잘 붙인 거예요. 그래야 뭐가 있는 것 같잖아요. 뭐 부지깽이, 두레박 이러면 또 너무 가벼운 것 같아서 사람들이 미심쩍어해요. 사람들은 묵직해야 쫓아오지 가벼우면 안 쫓아와요. 이해하긴 참 쉬운데도.
# 문화부 슬로건3 바위 위 이끼가 되자
세 번째, 바위 위 이끼가 되자.
우리가 바위를 깰 수 있어요? 우리 속담에 ‘계란으로 바위 치기’가 있죠. 문화는 도저히 정치·경제를 못 깨요. 계란으로 바위를 깨지 못하듯. 비유를 하나 해볼까요? 지금 맹장염에 걸린 사람이 있어요. 당장 수술 안 하면 큰일 나죠. 그런데 또 이 사람이 노래를 부르고 싶어 해요. 그런데 노래를 못 부르게 한다고 해서 어디가 터져서 죽어요?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문화는 밤낮 우선순위가 뒤로 밀리는 거예요.
그리고 부모님들이 뭐라고 해요? 늘 “그거 다음에 하자”라고 말씀하시죠. 먹고사는 것, 그러니까 정치·경제·사회가 우선이지 문화는 밤낮 뒷전인데, 그 뒷전인 문화부의 장관이 뭘 할 게 있었겠어요.
우스운 이야기인데, 지금처럼 한강유역 정비가 잘 되기 전의 이야기예요. 여름만 되면 한강 부근에서 홍수가 나서 마포 일대에서 이재민이 발생하는 거예요. 내가 장관이 되고 얼마 되지 않아서 또 한강 다리가 물에 잠길 정도로 큰 홍수가 나서 이재민이 발생했죠. 그러자 대통령 주재하에 장관들이 모인 국무회의를 열었어요. 내무부는 치안을 담당하고 보사부는 의약품을 지원하는 식으로 각 부처마다 그런 재난 상황에 해야 될 역할이 있는 거예요. 심지어 국방부는 국군장병들을 동원해 긴급 재난 구호 봉사를 하고요. 그런데 문화부는 뭘 하라고 시키는지 들으려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안 나오는 거예요. 그 국무회의 끝까지 계속.
홍수 같은 재난 상황이 나서 이재민이 나왔을 때 문화부가 뭘 하겠어요. 잘 해봐야 합창단 데리고 가서 힘내라고 공연하는 건데 잘못하면 뺨 맞아요. 남은 지금 다 죽게 생겼는데, 너희는 지금 신난다고 노래하고 춤추냐? 안 그러겠어요?
“이끼만 있다면 사막에서도 살 수 있어. 그게 문화”

▲이끼계곡 모습이다. 강원 평창군 가리왕산의 장전계곡. 사진=조선DB
그러니까 문화라고 하는 건 정치·경제·사회 같은 바위와 싸워서 이길 수는 없어요. 그러나 그 딱딱한 바위를 덮는 이끼는 될 수 있죠. 이 메마른 정치·경제·사회를 깰 수는 없지만 아름다운 노래, 시로 감동시켜 생명의 이끼로 덮어버리는 거죠. 그 딱딱한 바위에 초록색 이끼가 돋아나는 거 보세요. 기가 막히잖아요?
이런 게 기적이죠. 흙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그 딱딱한 바위를 초록색 부드러운 이끼로 다 덮어서 생명이 거기서 싹트게 하니 기적이지요.
이끼는 원래 ‘물기가 많은 곳에 나는 푸른 때’를 가리키는 말이에요. 이끼는 3억5000만 년 전 최초로 육상 생활에 적응한 식물군이죠. 종류도 다양해서 우리나라에서만 700여 종이나 된다고 해요. 집 주변의 돌담이나 그늘지고 축축한 마당, 습기가 많은 숲 속 등에는 다양한 종류의 이끼가 살고 있습니다. 비록 습한 곳에서 자라지만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어요.
흙이 무너지거나 공사 등으로 맨땅이 드러나 식물이 전혀 없는 곳에 맨 먼저 나타나 정착하면서 다른 생물이 살 수 있는 터전을 만들어주죠. 과거 유럽에서는 침대의 속재료와 건축 재료로 사용했고, 인디언과 에스키모인들은 아기 기저귀를 만드는 데 이용하는 등 세상에 이롭게 사용됐어요. 지금도 이롭게 쓰입니다.
1995년에 서울에서 이끼가 사라지자 산림청에서 환경오염 실태조사를 벌인 적이 있어요. 산성비 때문이지요. 이끼는 대기 및 토양 오염물질에 민감하게 반응한다고 합니다.
서울주택도시공사(SH)는 도시 내 미세먼지 저감 솔루션인 ‘SH 스마트 이끼타워’를 개발해 특허 출원했다고 합니다. 이끼와 바람을 이용해 주변 약 50m 내의 미세먼지 흡착률을 높여 공기정화 효율을 증진시키도록 고안됐다지요.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이처럼 이끼만큼 이로운 게 없어요. 저 거대하고, 숨도 쉬지 못하는 바위를 덮을 만한 이끼만 있다면 우리가 어떤 사막에 가서도 살 수가 있어요. 그게 문화예요. 그래서 바위 위 이끼가 되자, 이게 내가 장관 재직 시절 내건 문화부의 세 번째 슬로건이었어요.
# 우리말을 낡고 옛날 것 취급해선 안 되는 이유
내가 그렇게 세 가지를 문화부 슬로건으로 내걸었더니 신문에서 문화부를 공격하기를, ‘요즘 이 아무개가 문화부 장관이 되더니 중앙청과 문화부 내에 고어(古語)가 난무한다’라는 거예요. 옛날 말이지만 이게 우리말인데, 사람들은 고어, 그러니까 고려 시대 때 말인 줄 알아요.
그 당시로 치면 21세기가 이제 곧인데 이 사람이 어디서 와서 지금 부지깽이니 두레박이냐는 거죠. 그 사람들은 부지깽이가 뭔지 몰랐나 봐요. 그러니까 고어라고, 나더러 옛날 고리타분한 조선 시대 놀음을 한다고 공격했겠지요.
그러나 우리 것은 맨날 낡고 옛날 거예요? 우리 것이 미래가 되면 안 됩니까?
밥 먹을 때 쓰는 젓가락, 옷 입을 때 매는 옷고름 자락, 그리고 누워서 바라보는 대청마루의 서까래, 손가락의 투구인 골무, 악기가 된 평화로운 곤봉인 다듬이, 머리의 언어인 갓, 누워 있는 악기인 거문고, 현재 세계인의 고랑을 파는 호미, 한국인 손으로 빚어진 진주이자 다이아몬드인 나전칠기… 한국인이 사용해온 물건들 하나하나에는 한국인의 마음이 그려낸 별자리가 있어요. 그건 낮엔 안 보일지 몰라도 밤이 되면 밝게 빛납니다. 낮에는 태양 때문에 안 보일 뿐 없어서 안 보이는 게 아닙니다. 한국인의 마음이란 게 그렇습니다.
부지깽이와 두레박은 버리거나 잊힌 것들이 아니라 한국인의 마음을 그려낸 별자리입니다. 하늘의 별들은 다 똑같지만 별자리와 그 전설의 이야기들은 민족과 나라에 따라 다 달라지는 법입니다. 그러니 함부로 천시하거나 잊어선 안 되는 것이지요.

▲이어령 선생. 등단 50주년 당시의 모습이다. 2006년 10월 24일 사진을 찍었다. 사진=조선DB
요즘 사람들이 쓰는 말을 보면, 이것저것 붙여놓고 다시 말을 줄여놔서 뭘 이야기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사람들이 술을 마실 때 건배사로 “나가자!” 그러기에, 나는 어디로 나가자는 말인 줄 알았더니 ‘나라와 가정을 사랑하자!’라는 말을 줄인 거라더군요.
지금 한글 세대들이 쓰는 한글에는 새로운 조어가 얼마나 많이 생겼는지 몰라요. 이게 《혈(血)의 누(淚)》(‘피눈물이 난다’는 의미)라던 사람들이 한글 전용을 시작한 지 70년 만에 일어난 변화예요.
지금은 아무것도 아닌데 내가 문화부 장관 하던 시절만 하더라도 ‘부뚜막 위 부지깽이가 되자’ ‘우물가 옆 두레박이 되자’ ‘바위 위 이끼가 되자’ 이것들을 고려 때 이야기인 줄 알고 고어를 쓰는 사람이라고 했단 말이에요.
그러니 내가 묻는 거예요. 지금 우리가 어디까지 왔니? 문자로 봤을 때 한자 세대로 시작해 일어 세대를 거쳐 한글 세대로 왔는데, 이 한글을 제대로 찾지도 못하고 다시 영어 세대로, 또 한자 세대로 가고 있어요.
외국어를 쓰지 말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을 찾는 일이 바로 외국어를 배우는 것이고 한자를 배우는 것이죠.
서정주의 시집 《화사집》 속에는 서구적인 사상이 있지만 그 속에 동양적인 전통이 담겨 있고, 김동리의 소설 《무녀도》 속에는 거꾸로 동양적인 특성이 있지만 그 속에 또한 서구적인 사상까지 내포되어 있죠. 그래서 이들은 다 같이 전통적이며 인류적 보편성을 획득한 한국 문학이라 말합니다.
우리가 어느 특정한 시대나 고정된 지역적 편견의 색안경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볼 때 그 시대 문화의 생명은 극히 짧은 것이 되고 맙니다. 한 시대(시간), 한 지역(공간)이 되는 배경을 이해해야만 안목이 생기고 비전이 생깁니다. 문학에서 고전적 작품이라는 것은 무수한 공간을 꿰뚫고 확충하면서 오늘날까지 그 가치를 존속시켜온 작품을 뜻합니다. 호메로스나 셰익스피어의 위대성은 타임리스(timeless)에 있습니다. 《햄릿》이 덴마크인이라서, 왕자라서, 고대인이라서 유명한 게 아니라 인물 속에 인간 총체의 한 비극성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덴마크 왕실의 인간들만 흥미를 갖는 인물로만 그려졌을 거예요.
당대에만 유행하는 사조, 뿌리가 없는 전통은 오래갈 수 없습니다. 곧 잊히고 맙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을 찾는 일은 인간의 영원성을 찾는 일과 같아요. 가치에 공감하는 많은 이의 지적(知的) 연맹을 실현시킬 수 있으니까요.
《흙 속에 저 바람 속에》(1962)에서 요즘 사람들은 거꾸로 풍토(風土)라는 한자를 쉽게 배워요. 우리말을 찾는 것이 곧 한자를 배우는 일이 된 거죠.
#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한국인의 뒷모습
《흙 속에 저 바람 속에》의 서문(《월간조선》 2022년 9월호 참조)에 나오는 노부부 이야기는 저의 실화입니다.
당시 군대에서는 더 이상 군용으로 쓸 수 없는 차를 민간에 불하해줬어요. 그럼 언론사들이 그 차를 불하받아 차체의 카키색을 다른 색으로 칠하는 정도의 개조만을 거쳐 썼거든요. 책에서 내가 타고 있던 차도 그런 차였어요. 그 차를 타고 고향을 갔다가 오는 길에 본 장면인 거죠. 그 장면을 한 번 상상해보세요.
그런데 고개라는 게 뭘까요? 우리 민요 아리랑을 보세요. 그게 고개 노래잖아요. 각지의 아리랑마다 가사는 다 달라도 후렴은 똑같거든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고개를 넘게 해주시오, 고개를 넘어가세요, 넘지 마세요.’ 이러잖아요. 판소리에서 나온 우리 고전소설 《춘향전》에 춘향이 ‘(이도령이) 달만큼 별만큼, 나비만큼 불티만큼 망종고개 넘어 아주 깜박 넘어가니’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한국인에게 있어 고개라는 건 이별의 마지막 경계선이에요.
어려서 외갓집에 놀러 갔다 돌아오는 길에는 항상 외할머니가 쫓아 나오세요. 분명히 안방에서 하직 인사 하고 나왔는데도 마루 끝까지 따라 나와 “잘 가라” 하세요. 그래서 마당 아래에서 인사를 꾸벅 하는 거예요. “할머니 추워요, 얼른 방에 들어가세요.” 그렇게 이미 두 번이나 인사를 주고받았는데도 할머니는 또 대문간까지 나오시죠.
그럼 “이만 가볼게요, 얼른 들어가세요” 하고 인사를 하고 대문을 나서는데도 여전히 따라 나오세요. 돌담을 따라 돌아가는 골목길까지. 그럼 “아유, 얼른 들어가세요”라고 만류해보지만 할머니는 그러세요. “응응, 들어갈게, 들어갈게” 하시면서 막상 들어가지는 않으시고.
한국 사람들이 이별하는 게 이렇게 힘이 들어요. “들어가셔요” 그러면 또 쫓아 나오시고. 이 애틋한 동행은 보통 마을 입구까지지만 눈으로 하는 배웅은 계속 이어져요. 당신의 딸, 손자가 마을 고갯길을 넘어 사라질 때까지 하염없이 그 자리에 서서, 딸이나 손자가 돌아보면 손을 흔들어주기도 하면서 서 있는 거죠. 참 눈물겹죠. 그 마지막 고개를 넘어가면 자기 딸이나 손자를 영원히 못 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도 한국의 어느 고개를 가든지 거기에는 이별하는 사람들이 마지막 봤던 얼굴이 있는 거죠.
자동차에 놀란 村老의 뒷모습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서문은 바로 그런 고개에서 있었던 일이에요. 지프를 타고 속력을 내며 고갯길을 돌아 내려오는데, 마침 그 앞에 나이가 든 시골 할아버지·할머니가 있는 거예요. 농부 특유의 옷차림에 장을 보고 오는지 할아버지는 작은 짐을 들고 느긋하게 길을 걷고 있다가 자동차 경적 소리에 뒤를 돌아본 거지요.
마차 정도나 다니지 지프가 다니지도 않는 시골이에요. 시골에 있어도 비행기는 하늘을 날아다니니까 봤어도 자동차는 여간해서는 볼 일이 없어요. 그런데 갑자기 등 뒤에서 차가 나타나니까 평생 차를 피해보지 못한 이분들이 깜짝 놀라서 뛰어요. 그냥 뛰었으면 내가 그렇게 가슴이 아팠을까.
그 경황없는 가운데 두 노인이 손을 부여잡고, 또 그 보따리에 뭐 그리 귀중한 게 들었겠어요? 시골 장터에서 구입한 거라고 해봐야 양잿물, 북어대가리 그런 것일 텐데 그걸 다른 손에 또 꽉 부여 쥐고 놓질 않아요.
닭, 오리, 칠면조 이런 가금(家禽)으로 키우는 새들은 개나 여우 같은 육식 동물이 덤벼들 때 날 수가 없으니까 뛰어서 피해요. 그것도 길옆으로 숨어버리면 될 텐데 그냥 무작정 앞만 보고 푸덕푸덕 달려가는 거죠. 바로 이 두 노인분이 그랬어요. 뒤에서 빵빵하고 경적을 울렸으니 길옆으로 피하면 간단한 걸, 기를 쓰고 앞으로만 계속 뛰는 거예요. 놓치지 않으려고 손을 꼭 붙잡고 서로 다칠까 봐 걱정하면서.
도시 사람들은 뒤에서 경적을 울려도 쓰윽 보고는 느긋하게 길옆으로 슬쩍 피해주는데 자동차에 놀라 뛰어가는 촌로의 뒷모습에서 내가 뭘 봤겠어요.
그 장면을 보던 때 나는 25세나 26세쯤 되었어요. 확실하진 않지만 어쨌든 서른이 되기 전에 쓴 글이거든요. 그때 그분들은 내게 역사 속에서 끝없이 쫓겨 다니던 우리 아버지, 우리 어머니, 할아버지를 생각하게 했어요.
‘우리 조상들이 저런 모습으로 도망갔구나, 가축의 모습으로 쫓겨 다녔구나’ ‘천년을 그렇게 살아온 내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뒷모습을 만난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쫓겨 가던 뒷모습, 우리 역사 속에서 허둥지둥 가축처럼 쫓겨간 한민족. 그러니까 그 이야기를 하자고 생각했어요. 그것이 그때 내가 쓴 책 《흙 속에 저 바람 속에》였던 거죠.
# 후에 찾아간 성황당 길 - 모든 것이 변하다
▲이어령 선생이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서문에 나오는 ‘무척 깊은 산골의 높은 고개’인 청다니 고개를 다시 찾았다. 차가 다니기 좋게 다 깎아 완만한 언덕이 되어 있었다.
그때가 《경향신문》 논설위원을 할 때고, 그 차도 신문사의 차라는 말은 앞에서 했고요. 그리고 한참 뒤에, 그 쫓기던 노부부가 있던 길에 다시 한 번 가봤어요. 그 불하받은 미제 군용 지프가 아니라 제대로 된 우리 국산차 에쿠스를 타고 갔죠. 에쿠스는 희랍어로 말이라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네 바퀴 달린 말을 타고 그곳에 다시 간 거예요.
내가 어렸을 때는 그곳이 무척 깊은 산골의 높은 고개였어요. 물론 어린아이의 왜곡된 기억일 수 있지만. 그때는 청다니 고개라는 이름이었는데, 밤에 고개를 넘으면 호랑이가 모래를 끼얹는다는 전설이 있었지요. 동네의 어떤 사람이 장 보고 오다가 호랑이 때문에 놀라 허리를 다쳤다는 말도 있고. 그런데 지금 가보니 거기는 호랑이가 나올 만한 깊은 산골도, 높은 고개도 아니었어요. 내가 지프를 타고 갔을 때만 해도 조그마한 길이었는데 지금은 차가 다니기 좋게 다 깎아 완만한 언덕에 버스가 다니는 4차선 도로예요. 심지어 그 길의 아래에 광케이블이 깔려 있으니 조심하라는 팻말도 달려 있었어요. 다만 성황당 나무는 그대로더군요. 어지간히는 늙은 그 나무가 그 자리에 옛날처럼 서 있었어요.
20대 후반의 나는 거기서 할아버지·할머니의 뒷모습을 보고 가축처럼 쫓겨 간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러니 우리 조상들은 참 못났다, 왜 쫓겨 다니느냐고 가슴을 치고 화를 냈는데 후에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어렸을 때는 한국 사람의 진짜 뒷모습을 몰랐어요. 아, 그게 아니다 내가 잘못 알았다는 사실을 내가 이대 교수가 된 뒤니까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를 쓴 후예요. (계속)⊙
11월 호
⑪ 땅 이야기- 한국인의 뒷모습, 붉은 산, 애국가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기뻐서 죽사오매…
⊙ 일본 지식인 기무라 에이분과의 만남… ‘한국인은 위대한 사람’
⊙ “기차는 떠나간다 보슬비를 헤치며…”(情恨의 밤車 中)
⊙ “그때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나는 거의 잊어버렸어. 성경에도 있어요. 용서하라고”(제암리 학살 사건 생존 할머니)
⊙ 6·25 때 줄지어 질서 정연하게 피란하는 모습에 세계가 감탄
⊙ 김동인의 소설 〈붉은 산〉… ‘나’와 ‘삵’을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의 입에서도 그 노래 ‘애국가’
⊙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심훈의 ‘그날이 오면’ 中)

▲이어령 전 장관. 2016년의 환한 모습이다.
# 한국인의 진짜 뒷모습은…
어렸을 때는 한국 사람의 진짜 뒷모습을 몰랐어요. ‘아! 그게 아니다, 내가 잘못 알았구나’라고 생각한 것은 내가 이화여대 교수가 된 뒤니까 《흙 속에 저 바람 속에》(1962년)를 쓴 후예요.
1960년대 남진의 ‘가슴 아프게’라는 노래가 나오고, 이미자 노래가 일본에서 인기를 얻으면서 일본에 한류 붐이 막 일려고 할 때였어요. 그때 지금은 세상을 떠났지만, 일본에 기무라 에이분(木村榮文·1935~2011년)이라는 아주 양심적인 지식인이 있었어요. 상도 많이 타고 다큐멘터리도 아주 잘 찍는 사람이었지요.

▲기무라 에이분이 촬영해 일본 RTV에서 방영한 ‘봉선화 필 때’ 프로그램의 한 장면이다.
그분이 1970년대 초반에 일본 RTV에서 〈봉선화 필 때〉라는 특집 프로그램을 만들었어요. 이 기무라 에이분은 일본이 한국을 강점하고 있을 때 알던 한국인 친구들이 더러 있었어요. 그래서 그 한국인 친구들이 그 시절, 얼마나 가슴 아프게 지냈는가를 현장 취재하러 오면서 나를 만난 거예요. 그때 취재 대상이 가수 이미자, 나, 그리고 1919년 4월의 비극적인 수원 제암리 사건 때 살아남은 생존자 할머니였어요.
내 책 《흙 속에 저 바람 속에》가 전 세계에서 번역될 때였는데 이웃 일본에서는 《恨の文化論(한의 문화론)》으로 소개되었지요. 당시로선 우리나라를 최초로 다룬 ‘한국문화론’이었어요. 그 무렵, 우리는 일본이 그렇게 다들 잘났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인데, 그는 한국에 와서 뜻밖에도 ‘한국인이 위대한 사람’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나를 찾아온 겁니다.
나 역시 ‘한국인의 뒷모습’(《월간조선》 9월호, 10월호 〈끝나지 않은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 ⑨ ⑩편 참조)을 떠올리며 다시 말해, 지프의 경적 소리에 놀란 노부부가 서로 손을 꼭 쥐고 뒤뚱거리며 곧장 앞으로만 뛰어 달아나는 모습만 생각한 거예요. 그 모습이 떠올라 한국인은 그냥 그렇게 쫓겨 다니는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참 불쌍한 한국인, 지지리도 못났다고 생각했죠.
우리 민족이 중국을 지배하지 않은 이유

▲일본의 양심적인 지식인 기무라 에이분.
고백하자면, 남들은 다른 나라 쳐들어가서 온갖 것을 다 빼앗아 오는데, 물론 그게 좋은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정복하는 사람이 되지 왜 맨날 정복당하고 빼앗기는가, 하고 답답해했었어요.
중국을 보세요. 원(元)나라를 세운 몽고족, 금(金)나라를 세운 여진족, 청(淸)나라를 세운 만주족 모두 중국 한족(漢族)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와 같은 변방 오랑캐거든요. 그 사람들 중에 중국 전역을 한 번쯤 지배해보지 않은 민족이 없어요. 오직 우리 한(韓)민족만이 중국을 지배해보지 못했죠.
그런데 요즘 보세요. 중국을 지배했던 변방 민족 중 자민족의 국가를 가지고 있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어요. 다른 민족은 중국 본토에 세웠던 나라가 망하는 것과 동시에 사라졌거든요. 우리가 중국을 지배하지 않았던 것도 다 생각이 있었던 거죠.
기무라 에이분의 다큐멘터리는 한국의 여학교 학생들이 ‘울 밑에 선 봉선화’를 노래하는 것으로 시작해요. 왜 이 노래였을까요? 1920년 만든 홍난파 작곡, 김형준 작사의 이 노래에는 한국 가곡의 효시, 조선 독립을 애타게 기다리던 백성들의 목소리가 담겨 있습니다.
다큐에는 또 나의 인터뷰와 함께 기차역 장면이 삽입되었죠. 그 인터뷰를 하면서 노래도 불렀어요. ‘정한(情恨)의 밤차(車)’라는 곡인데, 1935년에 발표된 노래예요. 나는 노래를 못하는 사람인데, 이 노래는 잘 불러요. 노래의 가사는 이렇습니다.
〈1. 기차는 떠나간다 보슬비를 헤치며
정든 땅 뒤에 두고 떠나는 님이여.
2. 간다고 아주 가며 아주 간들 잊으랴.
밤마다 꿈길 속에 울면서 살아요.
3. 님이여 술을 들어 아픈 맘을 달래자.
공수래공수거가 인생이 아니냐.〉
어릴 때의 기차는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기차와 달랐어요. 나는 시골에서 자랐는데, 기차를 타고 우리 고향에 도착했던 사람들은 모두 늑대와 같았어요. 우리 형을 빼앗아가고 우리 어머니나 누이를 능욕한 짐승 같은 사람들이었죠. 기차를 타고 도착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일본 사람들이었어요. 그러니 기차에 대한 감정이 좋을 수가 없지요. 또 기차를 타고 가는 조선인들은 죄다 고향을 등지거나 고향을 떠나는, 아니 고향을 잃은 사람들이었어요.
소작 짓던 땅을 빼앗기고, 도저히 조선 땅에서는 먹고살 길이 없어서 저 용정이니 만주, 간도 땅으로 떠나는 사람들…. 그리고 동남아로 징용, 학도병으로 끌려간 사람들….
그래서 한국인의 노래 속에는 기차 타고 떠나는 사람들의 한(恨)이 있어요. 일본에서는 원(怨)이나 한(恨)을 구별해서 쓰지 않지만, 일본 사람들은 원수를 갚는 원이고, 우리는 한을 푸는 한을 써요. 다르죠.
# ‘기차는 떠나간다’ 노래에 얽힌 기억
《흙 속에 저 바람 속에》에 담긴 ‘노부부’는 지프에 치일 뻔한 거잖아요. 그러나 그 이전에는 무시무시한 기차가 있었던 거지요. 근대의 상징이 기차라고 해도 한국인에게 기차는 반갑고 고마운 존재가 아닙니다. 거듭 말하지만 우리 누이, 우리 형, 우리 아버지가 정신대, 강제징병, 징용으로 끌려갈 때 쓰인, 무시무시한 굉음을 내는 검은색 쇳덩어리였어요. 그래서 제가 ‘정한의 밤차’라는 노래만 유독 잘 부르게 되었어요. 다른 노래는 하나도 못 해요.
옛날에 동네 사람들이 우리 집에 모이는 일이 많았어요. 그렇게 바깥에서 손님이 온다든지, 귀한 손님이 오면 어머니나 아버지가 아이들을 불렀어요.
“얘, 아무개 오라고 그래라.”
그러면 제가 가는 거예요. 사랑방에 모인 손님들 앞에. 형은 숫기가 없고, 나는 아직 어려서 뭘 모를 때니까 어른들이 뭘 시키면 부끄럼 타지 않고 그냥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 형님은 연출을 맡고 연기는 내가 한 거죠. 형이 “여기서는 좀 구슬프게 불러라” “여기서는 더 애절하게 해줘야지” “그냥 하면 안 된다”, 이렇게 지도하는 걸 받고 어른들 앞에 나가서 노래를 불렀어요.
지금 생각하니까 그분들은 내 노래를 듣고 싶었던 게 아니에요. 그때 그 사랑방에 모였던 사람들은 다들 맘이 안 좋고 슬프니까 김동인(金東仁·1900~1951년)의 소설 〈붉은 산〉에서 ‘삵’이 죽어가면서 애국가를 불러달라고 한 것처럼 어린애가 부르는 ‘정한의 밤차’(박영호 작사 이기영 작곡)를 듣고 싶었던 거죠.
그 어린애가 부르는 “기차는 떠나간다 보슬비를 헤치고” 하는, 우리의 그 슬프고 한 많은 노래를 듣고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거예요. 어린 내가 그 노래를 하면 듣던 사람 중에는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고, 한숨 쉬는 사람도 있고, 아까까지는 침통해하던 사람이 또 막 박수치면서 “야! 너 잘 부른다” 하니까 우쭐했어요.
게다가 용돈도 줍니다. 돈 몇 푼씩을 쥐여줘요. 어렸을 때는 그 재미에 어른들 앞에서 그 노래를 제법 자주 불렀지요.
# 기찻길의 주먹감자
그 노랫말을 보면 부슬비를 헤치고 기차가 떠나가는데, 기차가 떠날 때는 왜 밤낮 비가 오는 걸까요? 정한의 기차, 아니 ‘정한의 밤차’에서만 그런 게 아니에요. 1980년대에 가수 김수희가 불러서 지금까지도 전 국민 애창곡인 ‘남행열차’도 ‘비 내리는 호남선~’이라고 시작하지요. 왜 우리나라는 기차가 떠날 때마다 비가 올까요? 비가 와야만 기차가 달릴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어렸을 때는 그 노래가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어른들이 좋아하니까 그냥 불렀고, 사실 초등학생이 되어서도 그 뜻이 뭔지는 몰랐어요. 그런데 뭔지도 모르면서 우리가 하교할 때마다 무슨 의식처럼 하던 일이 또 있어요.
하교하는 길에는 철길이 있었어요. 우리 동네에 사는 아이들은 전부 그 철길을 따라 등하교를 했어요. 다른 길에서는 안 그러는데, 그 철길을 걸을 때는 다들 장난도 안 치고 말도 안 하고 심각하게 걸어요. 기차를 기다리느라. 기차는 거의 정시에 오니까, 아이들이 시계는 없지만 느낌으로 그즈음이 되면 다들 기찻길 옆에 일렬로 늘어섰어요. 기차 지나가는 걸 보려고요. 그러면 저쪽에서부터 기차가 칙칙폭폭 소리를 내며 달려오는 거죠.
보통 아이들의 놀이에는 리더가 있어요. 그땐 남자아이들이 주로 전쟁놀이를 할 때니까요. 그런데 기차를 기다릴 때는 리더도 없어요. 그냥 다들 서서 심각한 표정으로 기차만 보고 있다가 기차가 자기 앞으로 오면 욕을 해요. 주먹감자를 먹이는 거죠. 그건 일종의 의식이었어요. 기차에다 대고 하는 의식…. 아이들끼리 서로 어쩌는지 쳐다보지도 않아요, 기차를 보느라.
내 누이를 뺏어간 기차, 면소(面所)까지 와서 누구를 잡아간 기차. 아이들이 그 기차에 대고 주먹감자를 먹이면서 “야! 이 새끼들아” 하고 욕을 하는 거예요.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이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상스럽게 그런 욕을 했다고요. 그 기차가 얼마나 많은 분노를 내려다 놓고 얼마나 많은 슬픔을 싣고 갔으면 그랬을까요. 어린 아이들이 가본 적 없는, 말로만 들은 저 만주 벌판으로 쪽박 찬 우리 아버지·어머니, 아저씨·아주머니를 실어 나르던 기차를 향해 오죽했으면 그랬겠어요? 기차의 의미도 알지 못하면서 철길에 서서 매일같이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그러는 거예요.
그런데 지금은 어때요. 요즘 아이들은 기차가 지나가든 말든 관심도 없죠? 아주 어린 아이들은 좋아서 박수치고. 이게 우리 역사의 변화입니다. 참 웃음과 눈물이 뒤범벅되던 시절의 사연인데 지금 아이들은 아무것도 몰라요.
# 기차와 恨의 정서

▲일본이 1906년 설립한 남만주 철도 주식회사의 특급열차 아시아호. 증기 기관차로는 이례적으로 유선형이었던 아시아호는 최고 시속 134㎞로 만주를 누볐다. 사진=동북아역사재단
그런데 요즘 기차, KTX나 SRT, ITX-새마을호는 너무 쏜살같이 달려요. 완행열차도 있어야 합니다. 비 내리는 기찻길을 느리게 달리는 완행열차…. 요즘은 그 기차의 정서가 다 사라지고 빠른 이동 수단으로만 남았어요. 유행가 가락처럼 ‘비 내리는 호남선 완행열차에~’ 하는 슬픔, 한과 함께 살았던 사람들이 이제는 그 한을 잊고 있어요. 한국인은 원수를 갚는 것이 아니라 한을 푸는 민족입니다.
예를 들어 너무 가난해서 대학에 못 갔어요. 가난의 이유는 누구누구 때문에 우리 땅을 빼앗기고, 그래서 가난해진 거라고 칩시다. 커서 복수를 위해 그 사람을 죽이거나 막 겁박을 해요. 그럼 원수를 갚는 거죠. 그런데 그렇게 한다고 해서 내가 대학에 가집니까? 아니잖아요. 나를 대학에 못 가게 만들었다고 그 사람을 나쁘게 대하는 건 그저 단순한 화풀이밖에 안 됩니다. 한 맺힌 근본은 내 안에 덩그러니남아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 사람이 그러거나 말거나 내가 열심히 해서 대학에 가요. 그러면 원수는 못 갚았지만 한은 풀잖아요.
우리 민족의 한, 분단의 한, 역사의 한을 푼다는 것은 어느 사람을 죽이고, 중국과 싸워 이기고 일본과 싸워 이기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복수를 했다고 한들 우리의 한은 그대로 남아요.
기무라 에이분이 나를 만나고, 그다음으로 초기 한류(韓流) 붐을 일으킨 이미자를 만나고,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이 제암리 사건 때 살아남은 할머니였어요.

▲독립기념관이 공개한 영문 화보집 《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한국독립운동)》. 이 사진은 제암리 학살 때 가족을 잃은 여성들의 모습이다. 사진=독립기념관 제공
그때의 사건에 대해 묻자, 할머니는 이렇게 대답해요.
“그때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나는 거의 잊어버렸어. 이제 생각도 안 나. 한밤중에 가끔 생각이 나긴 해요. 그러나 다 지난 일 아닙니까. 성경에도 있어요. 용서하라고.”
그리고 다큐멘터리의 마지막 장면은 그 할머니의 뒷모습이에요. 뒷짐 지고, 시골의 호젓한 오솔길을 걸어가는 뒷모습은 당당했어요. 입 밖으로 내어 말하지 않아도 그 뒷모습이 이렇게 말하는 거죠.
‘모든 것을 잃고 아들도 죽었지만 일곱 손자를 거느리고 사는 지금, 나는 괜찮아. 원수를 사랑하라고 성경에도 그랬어. 가끔 생각은 나지만 용서할 거야.’
그 뒷모습이 어떻게 가축처럼 도망가는 모습이겠어요? 그 뒷모습에서 쫓겨 가던 슬픔이 아니라 그 쫓김 속에서도 인간으로서 어떤 침략자보다 강한 한국인의 생명력을 본 겁니다.
# 임진왜란 때의 조선인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에 수록된 〈김씨열체〉라는 그림이다. 박신간의 부인인 김씨가 임란 당시 노모를 업고 뛰어가고 있다.
광해군 5년(1613년)에 편찬된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에 수록된 〈김씨열체(金氏裂體)〉라는 그림을 본 적이 있나요? 곡산군 사람이자 박신간(朴信幹)의 부인인 김씨는 스무 살 때 임진왜란을 만나 그 어머니를 업고 피란을 가다 왜적을 만나 목숨을 잃었습니다.
왜구에게 쫓겨 도망가면서도 노부모를 업고 뛰었다고 해요. 지금 왜구가 쳐들어오고 내 목숨이 다급한 상황인데도, 걷지도 못하고 살날이 얼마 남지도 않은 부모를 버리지 않은 거예요. 그걸 보고 일본인들이 ‘우리는 전쟁이 났을 때 노부모를 업고 뛸 사람이 있을까’ 하고 감탄한 거죠. 그래서 임진왜란 때 쳐들어왔던 장수들 중에 “야만인이 문화의 국가를 쳤구나, 나는 모든 걸 버리겠다” 하고 부하를 데리고 귀순해서 한국의 장군으로서 일본과 맞선 사람도 있어요.
수원 제암리 사건 때 스물여덟 명이 죽었어요. 그 교회에 없던 사람들도 찾아가서 죽여 30명이 죽어요.
그때 할머니가 정말 기가 막힌 말을 해요.
“사람은 죽여도 집은 태우지 마라.”
놀라운 이야기지 않아요? 그런데 그 일본군은 사람도 죽이고 민가도 다 태웠어요. 그럼에도 그 할머니는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죠.
“나한테 묻지 마, 나는 다 잊어버렸어.”

▲1969년 3월 1일 경기도 화성군 제암리의 교회에서 3·1절 기념식이 거행되고 있다. 사진=조선일보DB
제암리는 기독교 교세가 아주 강한 곳이니까 이 할머니도 기독교인이었을 거예요. 그러니까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그분의 속마음까지 보태어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예수도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어. 그러니 나는 너희를 용서할 거야. 슬프지도 않아. 나한테는 손자가 있어. 씨가 있어. 너희가 씨를 말려? 어림도 없는 소리 하지 마. 내 아들은 죽었지만 나는 손자들 보는 재미로 살아. 가끔 생각나지만 나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아.”
그러곤 의연하게 뒷짐 지고 싹 사라지던, 기무라 에이분의 다큐 속 당당한 뒷모습이 오래 기억에 남아요. 그 할머니, 한국의 여성들은 가축처럼 쫓겨 가지 않았어요. 인간의 모습 가운데서도 가장 아름답고 강한 사람으로 쫓겨 갔기에 그 씨, 그 손자들이 이젠 더는 쫓기지 않고 살 수 있게 된 것이죠.
# 질서 정연하게 피란 가는 사람들

▲6·25 당시 줄 지어 북상하는 유엔군과 남하하는 피란민의 모습이다. 사진=이어령 제공
미 국무성에 보관되어 있는 한 장의 사진이 있어요.
세상 어느 나라, 어느 전쟁에서 피란민이 이렇게 질서 정연하게 가는 거 본 적 있어요? 옆의 군대는 전장을 찾아 북상하는 유엔 군대고, 그 옆은 길을 막지 않으려고 리더도 없는 피란민이, 무거운 짐을 머리에 이고 손에 들고 일렬로 질서 정연하게 남쪽으로 내려가고 있는 거예요. 이건 쫓기는 모습이 아니에요.
세상에 이런 모습이 어디 있어요? 다른 곳은 서로 도망가느라 길을 막아서 군대가 전장에 투입되지 못해요. 다들 탱크가 가는 길 앞을 막아서 아수라장이 되는 거죠.
6·25 때 이 기적 같은 사진 한 장에 전 세계 사람들이 놀랍니다. ‘한국인이 대단한 민족이구나!’ 감탄했죠. 저 피란민 무리에 무슨 리더가 있었겠어요. 남편 잃고 자식 잃은 여자들이 대부분인데, 모두 경황이 없을 텐데, 젖먹이 아이를 등에 업고, 짐 보퉁이는 머리에 이고, 정처도 없어요. 그저 살려고 남쪽으로 갈 뿐, 기다리는 사람도 반기는 사람도 없는 길을 떠나는 사람들이 질서 정연하고 의연한 거예요.
당시를 떠올려봐요. 한강 다리는 이미 폭파되어 건널 수 없잖아요. 나룻배 하나를 얻어 타고 겨우 한강을 건너 걷기 시작한 겁니다. 서로가 이 살육의 전쟁을 겪으며 어떻게 살아갈지 막막했겠지만 그렇게 걸어갔던 겁니다. 긴긴 여름 해를 따라 저녁에는 모닥불 옆에 누워 자기도 하며 걸어갔던 거예요.
이 사진 한 장이 한국은 야만의 국가, 쫓겨 다니는 야만의 국가가 아니라고 알려준 거죠. 서구 사람들, 아프리카인을 동물 취급하지 사람 취급을 했어요? 노예로 만들어 동물처럼 부리고. 그러나 여긴 아니라는 거죠.
‘아프리카 사람들과 똑같이 가난해도 여긴 아니다! 봐라, 짐승이 언제 산불 날 때 이렇게 일렬로 가는 걸 봤냐?’
이게 바로 한국인의 뒷모습인 겁니다.
한국 근대문학 개척자 김동인의 아들 김광명(金光明·한양대 의대 명예교수)씨의 육성을 들은 적이 있어요.
김광명이 신경외과 의사라는 직업을 택한 이유는 말년의 아버지가 앓던 중풍과 관련이 있다고 하지요. 6·25가 터지자 가족이 아버지 김동인을 업고 피란을 갔어요. 왕십리에서 응봉동 고개를 넘어 한강까지 가서 밤을 꼬박 새워 줄을 섰습니다. 이튿날 아침 나룻배를 타려고요. 놀랍지 않아요? 인민군이 탱크를 앞세워 밀려드는데 나룻배를 타려고 밤새 줄을 섰다고 하니까요. 다행히 나룻배에 가족 모두가 올랐는데 아버지 김동인은 몸을 가눌 수가 없었대요. 할 수 없이 가족 모두가 집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이듬해 다시 1·4후퇴 때 피란을 갔어요. 김광명의 증언은 이랬어요.
“신당동, 약수동을 거쳐 한남동 쪽을 향하다 보니 피란민 수가 상당히 많았어요. 길 양쪽으로 국군이 새끼줄을 쳐놓아 새끼줄을 넘어 흑석동(김동인의 딸이 출가한 집)으로 갈 수도 없었고 밀려드는 인파 탓에 뒤돌아 서울로 되돌아갈 수 있는 상황도 안 됐어요. 그렇게 새끼줄 안쪽에서 걸어 첫날 도착한 곳이 경기도 수원이었습니다.”
새끼줄이 있어 하루 만에 경기도 수원까지 피란 갈 수 있었던 겁니다.
# 김동인의 〈붉은 산〉, 흙, 황토의 의미
▲김동인의 소설 〈붉은 산〉
한국인의 이런 의연한 모습은 사진으로뿐만 아니라 문학작품으로도 형상화되어 있어요.
소설 〈붉은 산〉은 1932년 김동인이 발표한 단편인데, 일제 강점하니까 차마 일본이 지배하고 있는 한반도를 배경으로는 말을 못 하고 만주로 무대를 옮겨서 쓴 소설이에요. 대개 만주인들은 뿔뿔이 흩어져 사는데, 만주로 이주한 한국인들은 한국인들끼리 모인 마을을 만들어서 살았어요.
그 조선인 마을에 의사인 ‘나[余]’가 들어가게 됩니다. 이 소설에서 ‘나’는 화자(話者)이면서 관찰자예요. 진짜 주인공은 이 마을에서 나가 만나게 되는 ‘삵’이라는 별명의 정익호입니다. 멀쩡한 이름을 두고, ‘삵’, 그러니까 거친 육식동물의 이름으로 불리게 된 주인공의 성격은 별명 그대로입니다. 생긴 것도 표독스러운 데다가 투전에 싸움으로도 모자라 부녀자 희롱까지 더해지니 이 조선인 마을에서는 골머리가 아픈 거죠. 그렇다고 한 동포를 차마 내치지도 못하고요. 이 ‘삵’에 대한 이야기가 쭉 이어집니다.
만주의 한국인 마을에 모여 살던 사람들은 모두 한국에서 살지 못하고 쫓겨 온 사람들이죠. 조선의 내 땅을 빼앗기고 소작권도 잃어 먹고살 길이 막막하니까 만주까지 들어가 남의 땅 부쳐 먹고 사는 거예요. 얼마나 비참한 삶이겠습니까. 지주는 밤낮 왜 소출이 이거밖에 안 되냐, 너 어디에 감춰놓은 거 아니냐 윽박지르며 때리고 소작인은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그 소출을 지키는 그런 관계였어요. 그 불쌍한 사람들끼리 모여 사는 곳에서 남 해코지나 하고 사는 ‘삵’은 또 모두에게 얼마나 미움의 대상이겠어요. 불쌍한 한국인끼리 왜 저리 괴롭히나 하겠지요.
풍토병 연구를 위해 그곳까지 간 의사인 ‘나’는 사람들에게 들어 이런 것을 알게 되는 거죠. 그러던 어느 날 누가 ‘나’를 불러서 급히 가보니, 송노인이라는 한국인 소작농이 소출이 적다는 이유로 만주인 지주에게 맞아 다 죽게 되어 나귀에 실려 온 거예요.
실제로 나귀에서 내리는 순간 절명하고 말죠. 그런데도 누구 하나 그 억울한 죽음에 대해 지주에게 항의를 할 수가 없는 거예요. 힘이 없으니까. 저쪽은 지주들이고, 주변에 사람도 많은 데다 제 나라 제 땅이고 이쪽은 땅도 없고, 자기 몸 하나 지켜줄 나라도 없는 쫓겨 온 소작농이잖아요.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화자인 ‘나’, 의사도 너무너무 화가 나고 분하고 서러워도 어디에 가서 호소할 데도 보호해줄 데도 없으니 참을 수밖에요. 그런데 그 말썽꾼인 ‘삵’이, 아무도 나서지 않는데 말 한 마디 없이 어디로 사라져 버려요. 혼자서 만주인 지주네 집에 쳐들어간 거예요. ‘삵’이 아무리 깡패고, 한국인 마을에서는 싸움꾼이라고 한들, 싸움이 됐겠어요? 중과부적(衆寡不敵)이죠. 결국 마지막엔 죽도록 맞아서 한국인 마을로 돌아오는데 집까지 가지도 못하고 마을 입구에서 그냥 쓰러져 버려요.
그래서 사람들은 또 ‘나’를 불러요. 소설 〈붉은 산〉의 마지막 장면은 이 삵의 임종 장면입니다.
〈“선생님 노래를 불러주세요. 마지막 소원… 노래를 해주세요.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여는 머리를 끄덕이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여의 입에서는 창가가 흘러나왔다. 여는 고즈넉이 불렀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고즈넉이 부르는 여의 창가 소리에 뒤에 둘러섰던 다른 사람의 입에서도 숭엄한 코러스가 울리어 나왔다.
무궁화 삼천리
화려 강산…
광막한 겨울의 만주벌 한편 구석에서는 밥버러지 익호의 죽음을 조상하는 숭엄한 노래가 차차 크게 엄숙하게 울리었다. 그 가운데 익호의 몸은 점점 식어갔다.〉
‘삵’이 그렇게 사람들에게 푸대접을 받고 눈엣가시처럼 여겨졌지만, 사실은 의협심이 강했던 사람인 거예요. 늘 망나니처럼 자기 동포들을 괴롭혔지만, 또 막상 자기 동포가 외부의 사람에게 핍박을 당했을 땐 죽은 사람 복수를 하기 위해 나서는 그런 사람인 거죠.
그 ‘삵’이 임종하며 보는 것이 붉은 산과 흰 옷의 환상이에요. 그리고 마지막 소원은 노래를 불러달라는 거였죠. ‘애국가’를. 안익태(安益泰·1906~1965년) 선생이 ‘한국환상곡’을 작곡한 것이 1936년 독일 베를린에서였으니까, 이 소설 발표 당시에 사람들이 불렀던 애국가는 스코틀랜드의 민요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의 곡조에 맞춘 창가였을 거예요.
죽어가는 ‘삵’을 앞에 두고, 또는 삵의 머리를 끌어안고, ‘나’는 노래를 하는 거죠. “동해물과 백두산이…” 그러자 ‘나’와 ‘삵’을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의 입에서도 그 노래가 나와요. 참으로 장엄한 코러스 아니었겠습니까?
디아스포라, 望鄕歌…
요즘 한국에서 행사할 때 ‘애국가’를 잘 안 불러요. 대개 애국가 제창을 생략하는 경우가 많죠. 그런데 가끔 올림픽 같은 국제경기에서 1등 해서 시상식 때 태극기가 게양되면서 “동해물과 백두산이…”, 이 곡조가 나오면 눈물이 핑 돌아요. 왠지 마음이 찡해지죠. 다른 나라 사람들은 그 메달을 따기까지 자기의 고생을 생각하며 우는 경우가 많겠지만 우리는 그냥 태극기를 보는 것만으로도, “동해물과 백두산이…” 하는 노래를 듣는 것만으로도 그렇게 서럽고 가슴이 북받치는 거예요.
그런데 이 ‘삵’이, 그 장엄한 코러스를 들으면서 죽어갈 때, 마지막으로 본 것이 무엇이었어요? 붉은 산이죠. 푸른 산도 아니에요. 붉은 황토 흙 산. 그리고 흰 옷 입은 사람들. 그러니까 만주 땅까지 쫓겨 와가지고 겉으로는 그 개망나니 짓을 했지만 가슴속에는 늘 떠나온 고향이 있었던 거죠.
고향을 떠나온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가 이 “동해물과 백두산이…”예요. 고향에서 쫓겨나 만주까지 온 농민도, 나라의 독립을 위해 떠나온 독립군도, 심지어 일제에 의해 전 세계로 노예처럼 팔려간 사람들도 이 노래를 불렀어요.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 노래는 ‘애국가’라기보다 나라를 잃은 사람들의 ‘디아스포라(diaspora)’, 고향을 잃은 사람들의 망향가(望鄕歌)인 거죠. 땅을 그리워하며 불렀던 노래예요.
사람들이 황토방에 가는 이유는…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할 때의 그 흙인데 그것도 그냥 흙이 아니고 황토 흙이에요, 황토 흙! 이 황토 흙이라는 게 참 묘해요.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불모의 땅이 황토 흙인데 ‘황톳길’ 그러면 마음이 찡해지거든요. 황토라는 말만으로도 말이죠. 뒤에서 말하겠지만, 그래서 지금 사람들이 황토방을 가는 거예요. DNA가 남아 있어서 그래요. 황토방이 바로 그 붉은 산이에요.
‘삵’이 죽어가는 순간에 그리워하며 환상으로 본 것은 화려한 도시, 풍요한 감나무·대추나무, 기름진 황금들판이 아니라 그 메마르고 황폐한 붉은 산이었어요. 이중섭(李仲燮·1916~1956년)이 그린 듯한 그런 붉은 산. 거기에 흰 옷 입은 고향 이웃들이 보입니다. 만주벌판 그 황량한 땅에서 환상으로 보는 고향의 붉은 산과 흰 옷 입은 사람들….
‘삵’의 마지막 소원에 따라 사람들은 노래를 불러요. 힘없어서 몸을 사리기만 했던 사람들이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고 말이죠. 그야말로 장엄한 코러스입니다. 모두의 마음을 움직이고, 두려움을 잊게 만든 노래잖아요.
지금 우리는 이 노래가 아무렇지도 않고, 큰 감동도 없지만 어디에서 어느 때에 부르는 것인가에 따라 똑같은 노래인데 그렇게 다르죠. 이게 결국 디아스포라, 약소민족으로 고향을 상실하고 쫓겨 온 사람끼리 남에게 받은 핍박과 설움을 서로 위로할 수밖에 없을 때, 그 순간에 마지막으로 부르는 노래가 ‘애국가’예요. 이런 것을 생각하면 감히 ‘애국가’를 생략하자는 말이 안 나와요. 생각해보세요.
한때 ‘애국가’는 잘못 부르면 잡혀가는 노래였어요. 누구도 감히 드러내 놓고 가르쳐준다거나 하지 못해서 겨우, 겨우 아버지가 아들에게 집 안에서만 몰래 가르쳐주고, 그 아들이 또 친구에게 몰래 가르쳐주고 하면서 번져갔을 거예요. 가사를 종이에 인쇄하거나 써서 보여준다거나 하는 건 상상도 못 하는 상황에서 뜬소문처럼 번져갔을 노래인데, 1930년대의 〈붉은 산〉에 정확하게 오늘날 우리가 부르는 가사가 나옵니다. 기가 막히지 않아요?
# ‘애국가’ 이야기- 고통스러운 영원
▲2022년 6월 14일 오후 서울 마포구 상암월드컵경기장에서 한국과 이집트의 평가전을 앞두고 애국가가 흘러 나오면서 태극기가 펼쳐지고 있다. 사진=조선일보DB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우리가 무심코 부르지만 가사를 한번 보세요.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이라니요? 동해물이 다 말라 없어지고 백두산이 다 닳아 없어지는 건 과학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니까 이건 영원(永遠)을 말하는 거죠.
그런데 그 영원이 행복한 영원이 아니라 고통스러운 영원이에요. 뭔가가 생성하고 커지고 하는 것이 아니라 마르고 마멸되는 부정적인 영원이죠. 본디 영원이라는 것은 꿈과 희망을 말할 때 쓰는 말이지만 실제로 행복할 때는 꿈과 희망을 말하지 않아요.
한국 불교에서는 ‘옥으로 새긴 연꽃 봉오리가 진짜 꽃이 되어 피어나듯이’라는 비유를 많이 씁니다. 돌이 어떻게 꽃이 되겠어요?
한국 사람은 참 현실적인 사람들이에요. 어느 나라든 관용구를 보면 사는 게 먼저고 죽는 것이 뒤에 오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거꾸로입니다. 죽는 게 앞서고 사는 게 뒤에 오죠. ‘죽기 아니면 살기’라고 하지 ‘살기 아니면 죽기’라고 하지 않잖아요. 무슨 일을 할 때도 ‘죽기 살기로 열심히 하라’고 하지 ‘살기 죽기로 열심히 하라’고 해요? ‘죽으나 사나’라고 하지 ‘사나 죽으나’ 안 그러잖아요. 그런데 셰익스피어는 《햄릿》에서 이렇게 썼잖아요.
“To be or not to be.”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만약 연극할 때 대사를 이렇게 읊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한국말을 모르는 사람이에요. 한국어로 번역할 때는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고 해야 맞죠.
한국 사람들의 이런 관용구를 가만 히 보세요. 앞에 좋은 게 오고 뒤에 나쁜 게 오면 결론은 뭐가 되겠어요? 나쁜 거죠. 그런데 앞에 나쁜 게 오고 뒤에 좋은 게 오면 죽음에서 삶으로 오는 게 되잖아요. 삶이 오고 죽음이 오는 것보다는 죽음 뒤에 삶이 오는 것이 좋지요.
그래서 서양 사람들의 ‘trial and error’, 즉 시행착오(試行錯誤)라고 하는데, 심리학자들이 이걸 ‘착오시행’으로 바꾸자고 해요. 시행(試行)하고 착오(錯誤)했다면 그것은 네거티브예요. 착오로 끝났을 뿐 아무것도 얻지 못했으니까요.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도 사실 아무 생각 없이 보면 지지리도 못난 말이잖아요. 영원에 빗댈 말이 얼마나 많아요. 그것들을 다 버려두고 동해물이 마르고 백두산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 영원하려면 그 영원이 얼마나 힘들고 고되겠어요. 그런데 그게 현실이에요.
영원이라는 건 없어요. 또 동해물이 마르고 백두산이 닳아 없어지는 건 몇억 겁[億千萬劫]이 지나도 불가능해요. 냇물이 마르고 뒷동산이 없어지는 건 가능해요. 그러나 동해물과 백두산은 안 되죠. 불가능한 영원을 현실적인 불가능으로 만들어버린 거예요.
# 그날이 오면, 인경을 들이받아
그래서 나는 심훈(沈熏·1901~ 1936년) 선생의 ‘그날이 오면’을 보면 참 가슴이 아파요. 해방의 그날이 얼마나 기쁜 날입니까. 떡도 해 먹고 막 춤도 추고 그래야 하는데 글쎄 머리로 인경(人定)을 들이받아 피가 흐르고 몸의 가죽을 벗겨서 북을 만들어 치고 싶다니요. 인경은 조선 시대에 통행금지를 알리거나 해제하기 위하여 치던 종을 뜻합니다. 세상에 왜 그 기쁜 날에 머리를 들이받고 자기 가죽을 벗긴답니까?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며는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치기 전에 와 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하늘에 날으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올리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그걸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몰라요. 그 기쁜 날은 기쁨으로써 더 많은 것을 원하지도 않게 되는 그런 날인 거예요. 그 지독한 고통 속에서 설마 그날이 오랴. 그날이 오면 나 죽어도 좋다는 말인 거죠. 한국 사람이 죽음을 함부로 생각해서 죽음을 쓰는 것이 아니라 “죽어도 좋아, 이 세상에는 죽음보다도 강한 게 있어”라는 말을 하는 겁니다.
“내가 살을 찢어서 북을 만들어도 신나는 게 있어, 그게 그날이야.”
이렇게 이야기를 해야지요. “세상에 그날이 왔으면 살아야지 왜 굳이 사람 가죽을 벗겨가지고 북을 만들어 친다니. 아이고 끔찍해라. 이런 메조키스트가 어딨냐”고 말하는 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거예요.
여자들이 가장 사랑할 때 역설적으로 “죽고 싶어”라고 말해요. “오빠, 나 죽고 싶어” 그러는 건 그 오빨 그만큼 크게 사랑한다는 얘기예요. 내 마음을 강조하기 위한 최상의 말이 죽음이에요. 우리가 또 뭔가를 절대로 반대할 때 흔히 쓰는 관용구로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라는 말도 쓰이잖아요. 눈에 흙이 들어간다는 게 바로 죽음을 뜻합니다.
# 흙의 중요성
▲3년 전 대형 산불이 발생했던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성천리 일대 야산. 1960~70년대 산림 녹화 이전 우리나라 산은 대개 붉은 산이자 민둥산이었다.
제가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으세요? 흙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붉은 산. 그 흙을 빼앗긴 거예요. 내 땅을 빼앗긴 거죠. 그 흙을, 고향의 흙을 잃으면 ‘삵’처럼 환상에서밖에 보지 못해요. 그것도 초록이 무성한 풍요한 산이 아니고 붉은 황톳길처럼 붉은 산. 그것을 토포필리아(Topophilia), 혹은 장소애(場所愛)라고 합니다.
우리나라 땅의 8할이 산이에요. 과거엔 헐벗은 붉은 산, 민둥산이 대부분이었죠. 그런데도 우리는 ‘금수강산 삼천리’라고 했어요. 그걸 ‘진짜 금수강산(錦繡江山) 보지도 못했나 보다’고 어처구니없어 할 게 아니에요. 메마를수록, 붉은 산일수록 애정이 가는 겁니다. 부모 자식 간에도 부모의 살림이 넉넉하고 건강하면 자식들이 부모 걱정을 안 해요. 사랑도 없죠, 나 살기 바쁜데.
그런데 그 부모가 가난하게 살면 그 어린애가 효도를 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조국도 그래요. 우리 조국이 나한테 뭘 해줄 만큼 넉넉하고 잘살면 나는 내가 더 잘살 수 있는 곳으로 이민 가서 조국 잊고 편안하게 잘살 수 있어요. 남편도 잘나야 이혼하는 거죠. 지지리 못난 남편은 버리지도 못해요. 사람이 그래요.
내게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는 조국이 너무 딱하니 버리지를 못해요. 그러니까 붉은 산, 이게 더 가슴이 아파요. 남들이 보면 이렇게 비웃을지 모르겠어요.
‘아이고, 그것도 산이라고…. 그 황토산, 나무 하나 없고 사슴은커녕 토끼 한 마리 없는 그런 산이 뭐가 좋다고….’
“붉은 산, 이게 더 가슴 아파요”
하지만 나에게는 가슴 에이게 절절히 그리운 곳이 되죠. 흰 옷도 보세요. 그게 뭐 금의환향(錦衣還鄕)의 비단옷도 아닌 헤질 대로 헤진 무명옷을 입은 그 가난하고 핍박받는 사람들이 보고 싶어집니다.
그러니 이 흙이 뭘까요? 이 흙에 대한 사랑이 뭔가 생각해보면 그게 토포필리아, 장소애입니다.
내가 어렸을 때 밖에서 놀다 집에 돌아오면 항상 어머니가 옷에 묻은 흙을 털어주셨어요. ‘아이고 이 녀석 흙 묻혀왔어?’ 그러고 그 옷을 빨아주셨죠. 내 옷에 흙이 묻었다는 이야기는 내가 흙과 놀고 왔다는 이야기예요. 친구와 함께 놀았든 혼자 놀았든 어린 저는 흙과 놀았어요. 그런데 요즘 아이들, 콘크리트와 아스팔트 길을 걸으며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엄지족이 된 아이들은 흙과 너무 멀어요. 흙하고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요. 예전에 도시 아이들이 흙을 너무 모르니까 쌀이 벼에서 자라는 게 아니라 쌀나무에서 난다고 아는 아이도 있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요.
우리가 해방 이후 70여 년을 살아오면서 제일 많이 잃어버린 게 뭘까요? 그 지겨운 농촌 떠나 서울 와서 다들 출세하고 우리 참 행복해졌죠. 그 과정에서 우리는 흙을 잃어버렸어요. 저 황토 흙의 우리 산, 그 흙이 우리가 먹을 풀, 우리 나물들, 곡식들, 우리의 생명을 이어가게 해줄 것들을 키워냈어요. 식물, 동물, 벌레, 인간 모두 흙이 없으면 죽어요.
그런데 그 흙을 언제 밟아봤나 싶어요. 어딜 가나 다 아스팔트가 깔려 있고….
대체 언제부터 우리가 이렇게 된 걸까요? (계속)⊙
12월 호
⑫ 땅 이야기- 디아스포라와 어머니, 황토방
“앉을방아에서 찧어 먹던 호밀, 보리 다 어디로 갔습니까?”
⊙ 日 ‘기미가요’에 드러난 침략의 노래… 돌멩이·모래가 바위·이끼 꿈꿔
⊙ 韓 ‘정석가’ ‘서경별곡’… 부정·죽음 앞세운 희망·생명 꿈꿔
⊙ “우리처럼 당하고 찢기고 힘든 고개를 넘어가면서 선진국 된 나라, 없어요”
⊙ “고향서 내쫓긴 우리가 남의 가슴 못 안 박고 살아 이렇게 사는 겁니다”
⊙ “끝없는 생명 만드는 게 흙, 죽은 생명이 흙을 통해 再生”
李御寧(1933~2022)
서울대 국문학과·同 대학원 졸업, 문학박사 / 경기고 교사, 이화여대 교수, 《조선일보》 《한국일보》 《중앙일보》 《경향신문》 《서울신문》 논설위원, 동아시아 문화도시 조직위원회 명예위원장, 유네스코 세계문화예술교육대회 조직위원장, 초대 문화부 장관 역임

▲한국예술종합학교 석관동 캠퍼스에서 열린 ‘이어령 예술극장’ 현판 제막식에 참석한 김대진 총장(왼쪽부터), 이어령 전 장관의 부인 강인숙 영인문학관장, 아들 이승무 한예종 영상원 교수. 사진=조선DB
# ‘기미가요’, 비과학적인 상상에 의한 침략의 노래
남의 나라, 특히 우리와 가까운 일본의 국가(國歌)와 우리 국가를 한 번 비교해 봅시다.
일본에서도 ‘기미가요’(일본어: 君が代 きみがよ·군주의 치세)를 막 부르지 못합니다.
“19세기에 ‘기미가요’를 불러가면서 아시아를 침략했으니 부르지 말자, 일장기를 걸지 말자!”
우리를 비롯한 아시아에서 그렇게 요구하는 게 아니라 일본 내부에서 나오는 목소리예요. 사실 ‘기미가요’라는 건 일본의 고전 단가 모음집인 《만엽집》에 나오는 그냥 사랑 노래인데 그걸 천황을 받드는 노래로 만든 거예요. ‘기미(君/きみ)’라는 건 그냥 사랑하는 그대를 얘기하는 건데 거기에 천황을 빗댄 거죠.
君が代は 님의 치세는
千代に八千代に 1000대에 8000대에
細石の 작은 조약돌이
巖となりて 큰 바위가 되어
苔の生すまで 이끼가 낄 때까지
사랑의 노래가 침략의 노래로
님이 다스리는 이 치세가, 또는 님이 살고 있는 이 시대가 한 대(代)만 돼서는 안 된다, 1000대 아니 8000대까지 가라(千代に 八千代に)는 영원히 이어지라는 말이죠. 우리가 이야기하는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과 같아요.
1000년, 8000년이 길고 지겹다고요? 그런데 그다음 가사는 더 기가 막힙니다. ‘흙도 아니고 돌멩이가 바위가 될 때까지’ ‘다시 그 바위에 이끼가 끼도록 영원하옵소서’라고 노래합니다.
이게 과학적으로 맞는 얘기예요? 돌이 바위가 될 수 있나요? 모래가 어떻게 바위가 되며, 설사 된다 한 들 모래가 바위가 된 것만도 끔찍한데 그 바위에 이끼가 끼는 것까지 상상을 합니까. 비과학적이죠. 우리하고는 달라요. 우리는 산이 닳아 모래가 되어 없어지는데, 일본은 돌멩이를 바위로 만들어서 그때까지 영원하자고 하니까 똑같은 영원이지만 우리처럼 부정적인 것을 전제로 한 영원이 아니라 긍정적인 것을 영원으로 했어요. 바로 침략(侵略)의 노래인 것이죠. 작디작은 모래가 바위가 된다고 생각했으니 한국을 먹고 중국을 쳐들어가고, 작은 일본이 점점 크게 확장되는 거예요.
얼마 전만 해도 우리가 일본과 얼마나 가깝게 지냈어요. 그런데 자꾸 헌법을 뜯어고치겠다,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에 참배를 간다고 하니까, 우리가 이렇게 말하며 일본을 경계하는 겁니다.
“아이고, 얘들 또 돌멩이, 모래가 바위 되려고 하는구나. 그렇게 되면 우리가 억울하게 되겠구나.”
지금 우리 살기도 바쁜데 왜 반일(反日)의 기치를 들겠어요? 2011년 쓰나미 왔을 때도 우리가 일본을 도와줬잖아요. “힘내라” 하면서 아이들이 저금통 깨서 성금 모아 보내고 했잖아요. 글쎄 이런 좋은 이웃으로, 그냥 모래로 살지 그걸 바위로 만들겠다고 야단들이에요, 지금.
# 부정 앞세운 희망·생명 노래한 한국인

▲《악장가사》 등에 실린 고려가요 ‘정석가(鄭石歌)’.
우리 ‘애국가’ 가사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이라는 부정적 영원의 이미지가 어느 날 갑자기 그냥 생긴 것이 아니라 고려 때부터 똑같은 발상의 노래가 있어요.
조선 초기에 구전(口傳)되던 고려가요들을 모아 한글로 기록한 책 《악장가사(樂章歌詞)》 《악학궤범(樂學軌範)》 《시용향악보(時用鄕樂譜)》 등에 실린 고려가요 ‘정석가(鄭石歌)’ 가사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삭삭기 셰몰애 별헤
구은 밤 닷 되를 심고이다.
그 바미 우미 도다 삭나거시아
유덕(有德)신 님을 여ㅣ와지이다.’
(사각사각 가는 모래 벼랑에/ 구운 밤 닷 되를 심습니다// 그 밤이 움이 돋아 싹이 돋아나야만/ 유덕하신 임을 이별하고 싶습니다.)
아주 가느다란 모래가 있는 벼랑에, 그냥 밤도 아니고 구운 밤 다섯 되를 심어 놓고, 그 밤이 움이 돋아 싹이 나면 님과 이별하겠다는 말이니까, 절대 헤어지지 않겠단 이야기지요. 흙이 아닌 모래, 그것도 벼랑에 있는 모래니까 습기가 하나도 없어요. 제대로 된 씨를 심어도 싹이 트지 못할 그곳에 구운 밤을 갖다 심는다는 건 부정적인 가정(假定)이죠. 같은 영원을 가정하는 말이라도 같은 노래에 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므쇠로 한쇼를 디여다가
슈산(鐵樹山)에 노호이다.
그쇠 초(鐵草)를 머거아
유덕(有德)신 님을 여ㅣ와지이다.’
(무쇠로 큰 소를 만들어다가/ 쇠로 된 나무가 있는 산에 놓습니다// 그 소가 쇠로 된 풀을 먹어야/ 유덕하신 임을 이별하고 싶습니다.)
철로 된 나무가 있는 산에 무쇠로 만든 큰 소를 놓아서, 그 소가 철로 된 풀을 먹을 때까지 영원하자는 겁니다. 옛날부터 그랬어요. 이 ‘정석가’와 ‘서경별곡’에 공통으로 들어가 있는 후렴구가 ‘구스리 바회예 디신 긴힌 그츠리잇가’인데, 풀이하자면 이렇습니다.
‘구슬이 바위에 떨어져서 깨어질 수는 있어도, 그 구슬을 엮어 놓은 끈이야 끊어질 리가 있겠습니까.’
이게 우리나라의 부정을 앞세운, 죽음을 앞세운 희망과 생명이에요. 그러니까 한국 사람들은 끝없이 살아가는 이 세상 속에서 그다지 욕심을 부리지 않았어요. 현실은 항상 죽음을 전제로 한 행복이고 죽음에서 벗어나는 것뿐 그렇게 욕심이 큰 민족이 아니었던 거죠.
# 남에게 폐 안 끼치고 이만큼 사는 나라는 우리가 유일
그래서 지금도 난 늘 이야기를 해요. 한국 사람이 자랑할 것이 별로 없다고요. 세계적으로 지금 우리보다 잘사는 나라들이 얼마나 많아요. 국민소득으로 따져도 잘 해봐야 우리는 세계 10위에서 13위를 왔다 갔다 하니까 우리보다 잘사는 나라들이 10개 나라도 넘는 거예요. 그 나라들보다 우리가 못살고, 노벨평화상 하나를 빼고는 학술 분야에서 노벨상을 탄 사람도 없잖아요. 그러나 우리는 남의 민족 눈에서 피눈물 나게 하고 그 가슴에 못질한 적도 없어요. 남을 침해하지 않은 민족 가운데 우리만큼 사는 민족이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라! 정말이에요.
프랑스 개선문(凱旋門), 그거 아프리카에서 콩고니 뭐니 다 식민지로 만들고서는 자랑스럽다고 만든 문이잖아요. 일본은 제국주의 시절에 이웃 국가들을 모두 침탈하고 심지어 대만까지 먹었어요. 그 이웃들이 흘린 눈물이 얼마겠어요. 그러니까 지금 G7, G10 국가에 들어 있는 나라들은 전부 남의 가슴에 못질하고, 거기서 빼앗은 재산으로 지금 선진국 소리를 듣지, 우리처럼 당하고 찢기고 힘든 고개를 넘어가면서 어렵게, 어렵게 살면서 선진국이 된 나라는 없어요.
우리 지금 어때요? 한국에 스마트폰 안 든 사람이 있어요? 심지어 초등학교 아이들도 그걸 들고 다니니까 으레 그런가 보다 하지만 이게 보통 일이 아니에요. 외국에서는 아직도 와이파이를 아이들이 쓰는 경우가 없어요. 이웃 일본만 해도 광케이블이 아니라 ISDN이 일반적이에요. 우리는 집집마다 광케이블이 안 들어가는 곳이 없는데….
지금이 좋은 세상 맞아요?
내가 지금 우리나라를 칭찬하고 자랑하자고 꺼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앞으로 가기 위해 뒤를 돌아볼 때 정말 광복 후 70여 년 동안 여기까지 우리가 제대로 왔느냐를 묻는 거지요. “우리가 하는 자랑이 진짜 자랑일까?” 이걸 묻는 겁니다.
우리가 지금 이만큼 살게 되었어요. 나이 많은 분들은 흔히 그러시죠. “아이고 좋은 세상 됐다, 우리 옛날 연탄불 피울 때는 말이지 가스 때문에 사람도 죽고 그랬어.” 그러곤 자식들 향해 “얘야, 좋은 세상 왔다”고요. 그러는데 정말 좋은 세상이 왔어요? 지금이 좋은 세상 맞아요?
지난 70여 년 동안 우리가 어떻게 지냈느냐 하는 건 자랑스러운 것이죠. 하지만 앞으로 70년을 다시 또 나아가려면 이대로는 안 돼요.
고향서 내쫓긴 사람들이 그래도 남의 눈에 피눈물 안 나게, 남의 가슴에 못 안 박고 올바르게 살았기에 지금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우리만큼, 아니 우리보다 더 잘사는 다른 사람들, 다른 민족들은 다 전과자들이에요. 어디 가서 이야기하면 바로 “너희 몇 년에, 몇 세기 때 우리에게 와서 착취했던 나쁜 사람들이야”라고 지탄받지만 우리는 그런 게 없잖아요.
1960년대 월남전 당시 파병 가서 좀 나쁜 짓을 하긴 했어요. 하지만 그것도 따지고 보면 우리가 한 게 아니죠. 우린 그때 워낙 못사니까, 돈을 받고 파병을 간 거예요. 사실은 눈물겨운 거지, 우리가 남을 침략한 게 아닙니다. 그래도 어쨌든 남의 나라에 쳐들어가서 남이 눈물 흘릴 일을 만든 건 월남전 정도고 그걸 제외하면 우리는 남에게 못할 짓 하지 않았어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런 역사가 없습니다. 이런 민족이 드물어요.
남의 나라 침공해서 지배했던 사람들은 지금 다들 민족이 해체되고 없어졌어요. 중국의 55개 소수 민족 중 자기 조국을 가지고 있는, 자기 민족만의 독립된 국가를 가지고 있는 민족은 몽골족과 조선족밖에 없어요. 이건 대단한 거죠.
# 전 세계에 흩어져 사는 것도 좋은 것

▲세계 곳곳에 흩어져 사는 한민족은 193개국 732만5143명(2021년 기준)에 이른다. 지금은 한국이 살 만해서 이민이 줄고 있다.
디아스포라(diaspora)는 희랍어입니다. ‘디아(dia)’는 방향을 뜻하는 겁니다. 사방(四方)을 말하죠. 그리고 ‘스포라(spora)’는 씨앗, 즉 씨앗을 뿌리는 것을 말해요. 우리가 씨를 뿌릴 때 한군데에 모아 뿌리는 것이 아니라 사방에 넓게 뿌리지요.
우리 민족도 그래요. 사방으로 도망갔지요. 지금 저 러시아부터 시작해 미국, 유럽 온갖 곳에 한국 사람 안 간 곳이 없어요. 아프리카 오지에 가도 뻥튀기와 번데기를 파는 한국 사람이 있다잖아요. 독일에 광부, 간호사로 가서 정착한 한국 사람도 있고, 열을 가하지 않아도 달걀이 그냥 익어버린다는 그 열사(熱沙)의 땅 중동 지역에도 한국인들이 진출해 있죠. 우스개로, 냉탕 온탕에 다 있는 거예요. 저 시베리아의 냉탕부터 중동의 온탕까지 그곳들을 왔다 갔다 하면서 우리가 이만큼 살게 되었어요. 한국인의 디아스포라지요. 전 세계에 한국인의 씨앗을 뿌린 겁니다.
지금 한국 인구가 5000만이 넘는데, 세계 곳곳에 흩어져 사는 한민족은 193개국 732만5143명(2021년 기준)이에요. 이 통계를 보면 동북아시아부터 아프리카까지 모든 곳에 다 가 있죠. 지금은 한국도 살 만하게 되었으니까 이민을 별로 안 나가지만요. 내가 가끔 농담 겸 하는 이야기로, 정치를 못해도 그것이 한국 사람에게 득이 될 때가 있다고 해요. 정치를 잘 해서 살기 좋으면 이민 갔겠어요?
어렸을 때 민들레 홀씨가 하얗게 피어나면, 그 하얀 솜털 봉오리를 꺾어 들고 입김을 세게 불어 하늘로 날려 보낸 기억이 있을 겁니다. 누구라도 그 하얀 솜털 봉오리를 보면 불어 날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돼요. 어린아이의 장난이라고 해도 그건 생태계에 도움을 준 거예요. 하나의 식물이 가까이에 뭉쳐 있으면 해로워요. 어떤 이유로 그 지역의 생태계가 위협받으면 전체가 몰살되는 위험이 있잖아요. 그 식물에 위험한 돌림병이 돌면 그 돌림병이 퍼져 한 종(種)이 사라질 수 있어요. 그래서 멀리 퍼져나가기 위해 민들레는 하얀 깃털을 달았고, 단풍나무 씨앗이나 소나무 씨앗은 프로펠러를 닮은 외날개를 달고 있어요. 모체로부터 가능한 한 멀리 떨어질 수 있도록 말이죠.
韓民族 디아스포라는… 한민족 분산의 역사는 크게 네 시기로 구분된다. 첫 번째 시기는 1860년대부터 1910년까지로 이 시기에는 구한말의 농민, 노동자들이 기근, 빈곤, 압정을 피해 국경을 넘어 중국, 러시아, 하와이로 이주했다. 두 번째 시기는 1910년부터 1945년까지다. 생존 자체가 위협받는 궁핍에 내몰린 우리 민족은 1920년대에 접어들어 자신이 경작하던 땅을 빼앗기자 어쩔 수 없이 이농민이 되어 만주를 비롯한 해외로 이주했다. 1910~1918년에 걸쳐 진행된 식민지 정부의 토지조사사업으로 조선 농민의 소작화가 이루어지고 일본인 지주와 동양척식회사 등이 조선 농민을 체계적으로 착취하자 궁핍해진 농민들은 만주로 이주했던 것이다. 게다가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본은 ‘왕도락토(王道樂土)’ ‘오족협화(協和)’ ‘일본의 생명선’이라는 선전 문구 아래 식민지 건설의 환상을 키워나갔다. 그리고 중국 동북 지역을 대륙 침략의 병참기지와 식량기지로 활용하고자 했던 일본은 1년에 1만 호씩 만주로 이주시킨다는 계획 아래 조선인들을 집단으로 이주시켜 집단농장을 형성하게 하여 식량 증산을 꾀했다. 일본은 만선척식주식회사를 설립해 한인이민 사업을 담당하게 하고 1939년부터 해마다 조선에서 1만 호를 이주시키기로 계획했다. 그리하여 만선척식주식회사에 의해 이주한 한인 농가는 1939년 말 당시 1만3977호, 인구수는 6만5065명이었다. 이후 중일전쟁(1937)과 태평양전쟁(1941)으로 이주 추이는 줄었으나, 약 26만 명의 한인이 이 시기 조선총독부와 관동군이 협력해 강행한 국책이민 형태로 만주에 이주했던 것으로 추산된다. 요컨대 오늘날 대부분의 조선족 인구가 일제 식민지 통치기간에 이주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세 번째 시기는 1945년부터 1962년까지로 이 시기에는 한국전쟁을 전후해서 발생한 전쟁고아, 미군과 결혼한 여성, 혼혈아, 학생 등이 입양, 가족 개혁, 유학 등의 목적으로 미국 또는 캐나다로 이주했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시기는 1962년부터 현재까지로 이때부터는 정착을 목적으로 한 이민이 이루어졌다. (장유정의 〈20세기 전반기 한국 대중가요와 디아스포라〉, 윤인진의 《코리안 디아스포라》 중에서 인용) |
워털루 전쟁과 로스차일드 가문 이야기

▲유대인은 나라 없이 떠돌았던 오랜 디아스포라를 겪으며 가난한 동족의 생존을 보살피기 위해 유대 회당에 모금함을 두고 모으는 구호 기금 ‘쿠파’와 이방인을 돕기 위한 ‘탐후이’ 등 다양한 자선의 방식을 만들어냈다. 오늘날에도 미국 인구의 2%인 유대인은 매년 발표되는 50대 기부자 명단의 평균 30% 이상을 차지한다. 프란스 프랑켄 더 영거의 그림 〈7가지 자비로운 행동〉(1605), 베를린 독일역사박물관 소장. 그림=조선DB
전 세계로 가장 많이 흩어져 있으면서도 불행하지 않고, 노벨상을 가장 많이 탄 민족이 유대민족입니다. 디아스포라가 이 유대인에게서 나온 말이에요.
진위(眞僞)가 의심스럽긴 하지만, 널리 알려진 이야기로 워털루 전쟁과 로스차일드 가문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당시 유럽에도 국채(國債)와 주식을 거래하는 시장이 있었는데, 전쟁의 승패에 따라 각 나라의 국채 가격은 오르락내리락했겠죠.
전쟁의 승패에 대한 정보를 남들보다 하루만 빨리 알아도 엄청난 돈을 벌어들일 수 있었어요. 그것을 가장 많이 알고 있던 이가 각국 정부나 군대가 아닌 딱 로스차일드 가문(Rothschild Family)의 네이선 로스차일드(Nathan Mayer Rothschild·1777~1836)였다고 해요. 당시엔 전화나 전보가 지금처럼 활성화되어 있지 않으니 전서구(傳書鳩)를 띄워서 정보를 주고받았는데, 로스차일드 가문은 널리 퍼져 있어서 가문끼리 오가는 비둘기가 있었던 거죠. 패밀리 네트워크예요.
워털루 전투의 승패가 결정되던 날은 폭우가 내렸는데 그 비를 뚫고 로스차일드 가문의 전서구가 도착했고, 영국의 승리를 알게 된 로스차일드는 그 자리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던 영국의 국채를 팔기 시작합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동요하는 거예요.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가문 사람들끼리의 패밀리 네트워크 덕분에 가장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는 로스차일드가 영국 국채를 팔기 시작했다? 게다가 로스차일드가 누구예요. 금융업계의 왕과 같은 사람이잖아요. 사람들이 다들 “아이고, 영국이 졌구나!” 생각하면서 가지고 있던 영국 국채를 죄다 내다 팔았어요.
그러자 로스차일드는 사람들이 투매(投賣)해서 가격이 떨어질 대로 떨어진 국채를 남몰래 싹 사들여 엄청난 이익을 취했어요. 이때 로스차일드가 번 돈이 현재 가치로 6억 파운드가 넘는 돈이었다고 합니다. 이 로스차일드가 유대인이에요.
흩어져 이 녀석들아. 하나씩 흩어져

▲디아스포라의 모습이다. 월남전 당시 베트남 ‘보트 피플’. 사진=조선DB
다섯의 아들을 둔 어떤 사람이 하나, 둘, 셋, 넷, 다섯 개의 화살을 끈으로 묶어놓고 아들들을 불러 모았어요. 그런 후 화살을 각자에게 하나씩 나누어 주며 “화살을 부러뜨려 봐”라고 하니 아들들은 손쉽게 화살을 부러뜨렸겠죠? “두 개 부러뜨려 봐” “세 개 부러뜨려 봐” 하니 아들들은 벌써 알고 있었어요. 그런 옛날이야기가 있으니까요.
그래서 속으로 ‘아이고 아버지, 그거 다 아는 얘기예요’라고 생각하며 세 개, 네 개까지 하는데, 다섯 개까지는 못 부러뜨리는 거예요. 그래서 아들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알았어요, 아버지! 오 형제 단합하고 뭉쳐서 잘 살겠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대뜸 “야 이 바보들아, 바보들아!” 합니다. 아버지가 말하고 싶은 건 그게 아니었던 거죠.
“너희 힘이니까 못 꺾지. 더 힘센 사람이 오면 다섯 개도 쉽게 꺾어. 뭉치면 죽는 거야. 흩어져! 이 녀석들아. 하나씩 흩어져! 하나는 독일에 가고 하나는 프랑스에 가면 독일과 프랑스가 싸워 어느 한쪽이 그 나라의 패망과 함께 사라져도 하나는 살아남잖아. 두 개 다 부러뜨릴 수는 없어. 전 세계로 흩어져. 그래서 그중의 어느 하나만이라도 살아남으면 우리가 다 사는 거야.”
여태까지 우리는 뭉쳐야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했지만, 흩어지면 살고 뭉치면 죽는 게 맞는 말이에요. 디아스포라가 얼핏 보기에 불행해 보이더라도 유대인들이 세계 각국에 퍼졌기 때문에 노벨상도 각 나라의 여러 환경 속에서 탈 수 있게 됐던 거예요. 이스라엘 본국에 사는 유대인 중에서는 노벨상을 탄 사람이 별로 없어요. 남의 나라로 디아스포라 되어서 그 결과로 《안네의 일기》 같은 슬픈 글을 쓰게 되기도 했지만, 하느님이 전 세계로 파종을 하신 겁니다.
디아스포라, 한국의 얼과 마음을 전 세계에 뿌려

▲독일 파독광부와 간호사야말로 한민족 디아스포라의 대표적인 사례다.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1964년 12월 10일 서독을 방문해 파독광부와 간호사를 만나기 위해 본에서 1시간 거리의 함보른 광산에 입장하고 있다. 사진=국가기록원
한국 사람이 지금까지 고통스럽게 살면서, 그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프리카 오지에 간 게 한국인을 파종한 거예요.
“너희는 견딜 수 있어. 아프리카는 물론 그 어떤 곳에 가서도 견딜 수 있어. 그러니 한국의 얼과 마음을 전 세계에 뿌려!”
이렇게 하느님의 목소리를 빌려 말하지만 디아스포라는 가슴 아픈 거예요. 그러나 나쁜 면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거죠.
더구나 요즘과 같은 글로벌한 세계에서 메르스, 코로나19 같은 무서운 병이 한국에 들어와 한반도에 살고 있는 한국인이 모두 죽는다고 해도 전 세계에 퍼져 있는 우리 동포들이 많이 있잖아요. 그곳은 바이러스의 영향을 받지 않을 테니 살아남아요. 자식을 낳아서 한집에 오글오글 모여 사는 사람들은 ‘모’ 아니면 ‘도’예요. 그러나 흩어져 있으면 절대로 안 죽습니다. 이게 국제고 글로벌 사회예요. 그러니까 내 민족, 내 나라를 사랑하는 애족, 애국심을 가진 채로 전 세계로 흩어져 사는 것이 사실은 좋은 거예요. 우리나라에도 좋은 거고.
IMF 때 해외에 있는 동포들이 우리나라로 금을 보내줬던 것도, 해외에 나갔기 때문에 금융위기에 타격을 입지 않은 사람들이 국내의 동포를 도와준 거잖아요.
롯데그룹을 보세요. 일본에서 시작된 회사가 한국으로 들어와서 아주 큰 기업이 되었지요. 일본에서 롯데를 처음 시작한 창업주도 한국에서 살지 못할 이유가 있어 일본으로 간 거지 처음부터 웅대한 포부와 모험심을 품고 일본으로 건너갔겠어요? 지금 해외에서 살고 있는 우리 이민 1세대들은 다들 한국에서 탄압받고 땅을 빼앗기고 어떤 이유에서든 내 나라 내 땅에서 살지 못하고 쫓겨간 분들이지요.
하지만 어때요? 그렇게 해외로 간 분들, 다들 그 나라에서 행복하게 잘 살고 계세요. 그러니까 내가 이야기한 장소애(愛), 즉 ‘토포필리아(topophilia·장소를 뜻하는 topos와 사랑을 의미하는 philia의 합성어)’대로 여러분이 이 한국 땅, ‘붉은 산’을 벗어나면 죽는 줄 알면 이 이야기는 의미가 없습니다. 이 글을 읽을 필요가 없어요.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온 우리가 그 붉은 산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지금은 황토방으로 갑니다. 흙은 변하지 않지만 바람은 움직여요. 이 땅은 그대로인데 한국 사람들, 특히 여성들은 많이 바뀌었어요.
# 《80초 메시지 생각 나누기》- 어머니의 발

▲이어령 선생이 쓴 《이어령 80초 생각 나누기》
내가 《이어령 80초 생각 나누기》(2014)라는 책에 이런 글을 썼습니다.
얼굴은 좀 험악하게 생겼지만 공부는 잘하는 사람이 있었어요. 취직시험을 보면 지필시험이나 서류 심사에는 늘 통과를 하는데 면접만 보면 떨어지는 거예요. 떨어지고 떨어지고, 마지막이다 생각했던 회사에서 또 떨어졌어요. 그러자 이 사람이 그 회사의 사장을 붙잡고, 이렇게 말합니다.
“사장님, 회장님. 제게 홀로 늙으신 어머님이 계십니다. 제가 시험에 또 떨어지면 저희 어머니가 죽습니다. 제발 좀 제 사정을 봐서 따로 면접을 봐주세요.”
애원을 하자 그 사장이 그 구직자의 얼굴을 가만히 보더니 말합니다.
“혼자 사는 노모가 계셔?”
“네, 예전에 청상과부가 되셔서 저 하나를 보고 여태 키우셨는데, 제가 이제 어머니를 봉양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래? 그러면 오늘 가서 어머니의 발을 씻겨드리고 오게. 그러면 내일 자네에게 다시 면접 기회를 주겠네.”
이 젊은 구직자가 그 말을 듣고 집에 돌아가니 어머님이 이렇게 말해요.
“너, 취직은 됐냐.”
“아니요, 그런데 희망이 하나 생겼어요.”
“뭔데?”
“어머니 발을 씻겨 오면, 내일 재면접을 보게 해 주겠대요. 사장님하고 단둘이서 따로 또 한 번 면접을 보게 해 주겠대요.”
이게 어머니의 사랑이었구나
그러자 어머니는 반색하며 말합니다.
“얘, 그거 어렵지 않다. 대야 갖다 놓고 얼른 씻겨라. 취직만 된다면 씻겨라.”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요즘 아이들 말로 변태라고 해도 할 말이 없지요. 무슨 발을 씻기라고 합니까? 그래도 그 모자는 절박하니까 사장이 시킨 대로 해요. 한데 어머니가 씻겨달라고 양말 벗고 내놓은 발을 보는데 아들은 기가 막히는 거예요. 그 발이 사람 발이 아니에요. 청상과부가 되어 어린 아들을 키우느라고 어머니가 그 발로 평생 얼마나 걸어 다녔겠어요. 땅을 얼마나 디디고 다녔겠습니까. 그러다 보니 새끼발톱은 무지러져 까맣게 죽었고, 발등은 거북이 등처럼 갈라져 있었어요. 아들도 어머니가 고생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그 발을 자기 손으로 잡아보니 눈물이 그냥 쏟아져요.
‘이게 사람의 발이냐. 어머니가 나를 위해서 몇천 리를 걸으셨냐. 이게 어머니의 사랑이구나.’
어머니의 발을 씻겨준 아들은 그다음 날 그 회사로 다시 찾아갑니다. 구직자를 기다리고 있던 사장이 물어요.
“어머니의 발을 씻겨드렸나?”
그러자 아들이 대답을 합니다.
“네. 사장님께서 제게 어머니를 찾아주셨습니다. 저는 말로만 어머니를 사랑했지, 어머니의 발을 씻겨드리면서 비로소 어머니가 나에게 어떤 어머니인가를 알았습니다. 정말 좋은 것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저 취직 안 해도 됩니다. 감사 인사를 드리러 왔으니 이만 가겠습니다.”
사장이 등을 돌린 그 구직자를 붙잡습니다.
“여보게 이리 와, 자네 지금 면접 합격했네. 내일부터 와서 일하게.”
이 이야기를 《80초 메시지 생각 나누기》에 썼더니 어떤 사람이 와서 저한테 그래요.
“이 선생, 역시 당신 옛날 사람이오. 요즘 그런 발을 가진 어머니 없어. 그러니 그런 걸로는 면접 통과 못 하고 취직 못 해.”
# 흙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찾아가는 곳-황토방

▲서울의 어느 황토 찜질방 모습이다.
도시를 보세요. 황폐한 붉은 산이지만 그래도 우리가 흙과 함께 지내면서 흙에서 기운을 받아 살아왔는데, 지금 도시를 보면 그 흙 위로 모두 아스팔트가 깔려 있어요.
아스팔트 아니면 돌이거나 돌 아니면 시멘트! 도심의 사무실만이 아니라 개인이 사는 집에도 여기저기 놓인 화분의 흙을 제외하면 흙이 없어요. 요즘은 다들 아파트에 사니까. 그러니 우리 자신들은 모르고 가는 것이기는 해도, 사람들이 흙을 찾아 황토방으로 가는 거예요.
황토방에서 입는 옷은 황토색 옷이에요. 그 황토방에서 일괄 대여해주죠. 왜 하필 황토색 옷을 대여해줄까? 붉은 황토 산을 떠올리게 하는 색이니까 황토색 옷을 찜질복으로 대여해주죠. 거기에 가면 흙을 볼 수 있어요. 속까지 시커먼 흙구덩이….
황토방에 가면 또 하나 재미있는 것이 남녀노소 사이에 구별이 사라진다는 점이에요. 흙은 모든 것을 공평하게 끌어안죠. 그래서 흙 앞에 가면 다들 편안해집니다. 우리나라가 ‘남녀 칠세 부동석’이라고 해서 그렇게 남녀를 구분하고 내외하는데도 시골에 가서 멍석만 펴 놓으면 그 자리의 주인이고 지나가던 나그네고 뭐고 그냥 전부 와서 앉고 드러누워 낮잠 자고 하늘 보고 그랬거든요. 옆에 누가 있든 말든.
흙바닥에 멍석 깔아놓으면…

▲2022년 9월 서울 석관동 한국예술종합학교 캠퍼스에는 지난 2월 타계한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의 이름을 딴 ‘이어령 예술극장’이 들어섰다.
전설처럼 전해져 오는 얘기가 있어요. 6·25사변이 났을 때, 피란민 중 한 사람이 어느 집 마당에 멍석을 깔고 누워 잠을 청하는데 웬 청년 하나가 옆에 와서 자더래요. 그런가 보다 하고 밤새 잘 자고 일어나 아침에 보니 같이 잠을 잔 청년이 북에서 내려온 인민군이었답니다. 무서운 적군(敵軍)이었던 거죠. 피란민들은 그 인민군을 피해 도망가던 중이었잖아요. 적으로 대치해 서로 죽고 죽이던 사이도 시골 흙바닥에 멍석을 깔아놓으면 옆에 와서 자고 가요. 그것에 관해 누구도 말하지 않아요. 이게 우리의 흙이에요.
《흙 속에 저 바람 속에》의 그 흙! 바람은 그 흙을 어떻게 했어요?
끝없는 생명을 만드는 게 흙이에요. 흙에서 생명이 자라기도 하지만 죽은 생명이 흙을 통해 또 다른 생명으로 재생되기도 하죠. 자연계 순환의 고리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흙입니다. 흙에서 자란 식물을 먹고 생활하던 동물이 죽으면 흙으로 돌아가서 다시 다른 생명을 위한 거름이 됩니다.
흙이 없으면 그 재생의 고리도 끊어져요. 그 중요한 흙을 오늘날 우리는 아스팔트로 시멘트로 덮어버립니다. 아스팔트와 시멘트 아래의 흙은 생산을 하지 못하니 죽은 흙과 마찬가지입니다. 고속도로가 생기면 그 고속도로의 길이와 너비만큼 흙이 생산할 수 있는 풀, 나무, 잡초, 곡식… 이런 생명이 줄어드는 겁니다.
흙이 죽어가고 있다

▲강원도 정선군 남면 역밭 주민이 디딜방아로 곡식을 찧고 있다. 사진=조선DB
지금 그 흙이 죽어가고 있어요. 도시란 흙을 죽이는 문명입니다. 농촌을 죽여서 도시가 만들어지면 그 농촌에서 살던 사람들이 도시로 서울로 이농(離農)해 출세하고, 그 출세를 부러워하는 이 문화가 우리의 번영을 가져온 도시 문화예요. 스스로 흙을 파서 우리가 먹을 양식을 거두어들이는 것이 아니라 공산품을 만들어 수출해 돈을 벌어 외국의 밀가루를 사 와서 연명하고 있지요, 지금 우리가…. 대량 생산에 적합하게 유전자 변형을 한 그 밀가루를요.
우리가 옛날에 앉을방아에 찧어 먹던 호밀, 보리 다 어디로 갔습니까?
그러니까 무역을 해서 이만큼 잘살게 되었다는 말은 그만큼 흙과 멀어졌다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흙과 떨어졌어요. 분리되어버렸습니다. 우리는 그 ‘흙’의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그 흙의 의미를 알자는 말이 옛날 브나로드 운동처럼 농촌으로 돌아가서 거기서 곡식 지어 빻아 먹자는 말이 아닙니다. 같은 도시 생활을 해도 흙이 뭔지를 알면 생명이 뭔지를 알게 됩니다. 여태껏 무심하게, 별생각 없이 그냥 가고 싶어지니까 갔던 황토방. 지금부터라도 그 황토방에 가면 왜 마음이 편안해지고, 우리가 굳게 지키던 규범마저 한 꺼풀 느슨해져 남녀구별도 없어지나를 생각해보세요.
# 한국의 방 문화

▲이어령 선생이 기자에게 전해준 ‘미국에까지 퍼진 한국의 찜질방’ 사진이다.
한국엔 외국엔 없는 묘한 문화가 하나 있어요. 사적인 공간은 ‘집’이에요. 공적인 것은 퍼블릭(public) 공공(公共)의 공간이죠. 그런데 그 중간에 ‘방’이라는 게 있어요. 빨래를 보세요. 사적 공간인 집에서 혼자 빠는 빨래가 있고, 동네의 세탁소라는 공적 공간에 맡기는 빨래가 있어요. 그런데 빨래방은 여럿이 가서 각자의 빨래를 해요.
컴퓨터도 그래요. 집에서 혼자 컴퓨터를 써서 글도 쓰고 웹 서핑도 하고 게임도 해요. 회사에 나가서 컴퓨터로 공적 업무를 봐요. 그런데 PC방이 또 있어요. 노래를 부르려면 집에서 혼자 부르거나 극장의 무대에서 부르는데 한국 사람들은 집도 아니고 극장도 아닌 노래방에서 노래를 제일 많이 불러요. 이런 거 보면 한국 사람들 참 묘한 사람들이에요.
이 방 문화가 하나 더 만들어낸 게 ‘황토방’이에요. 자연도 아니고 도시도 아닌 중간 지점이죠. 도시 한가운데에 만들어진 인공의 자연이 황토방. 사람들이 거기 모여들어서 쉬는 거예요. 이 ‘황토방’은 현재 우리나라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중국 사람들이 보면 “야, 희한하다”, 일본 사람들이 와서도 “와, 희한하다”, 이렇게 감탄하고 좋아하니까 이게 외국까지 진출했어요. 황토방은 아니지만 찜질방이.
이 사진은 미국에 있는 한국식 찜질방인데, 아마 한국 교민이 만들었겠죠? 여기에 미국 사람도 와서 한국 사람들이 찜질방 즐기듯 즐기는 거예요. 사람들이 행복해 보여요. 이런 방에서는 반드시 먹는 게 있어요. 그러니까 처음 보는 낯선 사람들이 다들 똑같은 헐렁하고 성별 차이 없는 옷을 느슨하게 입고 한방에 앉아 같은 음식을 먹는 거예요. 그것도 자발적으로. 이렇게 글로 써놓고 보면 참 희한한 일이지 않아요? 옷이야 주니까, 꼭 그 옷을 입어야 하지만 그렇다 쳐도 말이에요. 사람들이 찜질방 가면 꼭 하는 게 하나 더 있어요. 수건의 양 끝을 돌돌 말아가지고 ‘양머리’라 이름 붙인 수건 모자를 꼭 써요. 이건 규칙도 아니고 누가 시키는 것도 아니거든요. 그런데 다들 그러고 앉아서 삶은 계란을 까먹고 식혜 마시면서 놀아요. 참 묘한 문화죠. 방 문화라는 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