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71] 32만㎞ 누비며 호주·하와이 발견… 태평양 정복한 ‘캡틴 쿡’ - [80] 19세기 근대 축구의 탄생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조선일보 2022
2022.08.02
[71] 32만㎞ 누비며 호주·하와이 발견… 태평양 정복한 ‘캡틴 쿡’

▲제임스 쿡은 1768~1779년 3차례에 걸친 항해를 통해 남극과 북극, 호주 남쪽 태즈메이니아, 아르헨티나 남쪽 티에라 델 푸에고, 아메리카 북서부 해안, 시베리아 북동단 해안을 두루 탐사했다. 그의 항해는 유럽의 세계 패권 장악을 위한 기틀을 마련했다. 영국의 최하층 계급 출신인 쿡은 전문성과 리더십을 인정받아 해군을 이끄는 선장에 올랐다. 그림은 쿡의 선단(船團)이 폴리네시아의 한 섬에 정박한 장면을 묘사한 작품이다. /게티이미지코리아
근대 이후 유럽인들이 세계의 대양(大洋)을 탐험했다. 대서양과 인도양을 자세히 파악한 이후 18세기에 탐험해야 할 미지의 공간으로 남은 곳이 태평양이었다. 당시 태평양은 ‘논둠 코그니타(Nondum cognita·아직 알지 못하는 미지의 장소)’라 불렸다. 태평양 해역을 그린 해도(海圖)는 일부 지역 해안선을 점선으로 대충 그려놓은 상태에 불과했다. 이 광대한 바다와 섬들, 사람들과 동식물을 파악하는 데 결정적 공헌을 한 인물이 제임스 쿡 선장(Captain James Cook·1728~1779)이다.
수로 파악·지도 제작에 뛰어난 능력
쿡은 1728년 10월 27일 요크셔의 날품팔이 집안에서 태어났다. 최하층 계급 출신이었으나 그나마 학교를 조금 다녀서 읽기와 쓰기, 산수를 배웠다. 13세에 학업을 중단하고 잡화상 일을 하다가 14세에 도망가서 석탄운반선의 견습 선원이 되었다. 7년 동안 일하며 항해, 지도 제작, 천문 공부를 했는데, 그의 성실성에 감탄한 고용인이 그를 다른 석탄운반선의 1등 항해사로 천거했다. 27세가 되어 선장직에 오를 수 있었는데, 놀랍게도 그는 하급 수병으로 해군에 입대하는 파격적인 결정을 했다. 해군에서 더 큰 승진 기회를 찾을 수 있으리라 판단한 것이다. 실제로 그는 7년전쟁(1756~1763) 당시 캐나다 식민지에서 영국군과 프랑스군이 충돌한 퀘벡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다. 영국군이 승리한 핵심 원인은 많은 병력을 안전하게 이송한 데 있다. 모래톱과 암초가 많아 운항이 매우 힘든 세인트로렌스강을 통해 병사들을 이송해야 하는데, 프랑스 해군이 단 한 척의 배도 보내지 못한 데 비해 영국 해군이 60척을 올려 보냈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쿡이 아주 정확한 수로(水路)를 지시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해안선이나 수로를 파악하고 정확하게 지도에 옮기는 일에 아주 유능했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캐나다 해안 지도를 그렸고, 1766년에는 일식을 관찰하고 보고서를 왕립협회에 제출했다. 이처럼 착실하게 실력을 쌓아가는 사람에게 기회가 오는 법이다.
당시 유럽 각국은 다른 나라에 앞서 낯선 해역을 파악하여 자국 소유로 삼으려 하는 동시에, 세계에 대한 과학 지식을 늘리고자 했다. 과학과 정치군사 측면은 내적으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 태평양 항해는 그와 같은 각국 간 경쟁의 주요 무대였다. 18세기 중엽 주요 국가 간 항해와 과학 능력을 다투는 계기가 생겼다. 1769년 6월 3일에 금성이 태양면을 통과하게 되는데, 지구 각지에서 이 현상을 관찰하면 지구~태양 간 거리 측정이 가능하고 태양에 대한 여러 과학 정보를 얻을 수 있으리라 판단한 것이다. 영국 왕립협회는 국왕 조지 3세에게 남태평양에 과학 탐구용 선박을 보내자고 제안하여 승낙을 받았다.
왕립협회는 영국 동인도회사의 공식 수로학자(hydrographer)이며 문필가인 알렉산더 달림플(Alexander Dalrymple)을 지휘관으로 추천했다. 그렇지만 해군본부는 해군이 아닌 사람에게 선박 지휘를 맡기는 데에 난색을 표했고, 대신 제임스 쿡을 천거했다. 사실 쿡은 해군 바깥에서는 무명에 가까운 인물인 데다가 미천한 집안 출신이어서 반대도 많았으나, 워낙 출중한 실력을 발휘해온 터라 결국 그가 낙점을 받았다.

▲1775년 제임스 쿡 초상화. 이로부터 4년 후 쿡은 하와이에서 원주민과의 갈등 끝에 살해당했다. /위키피디아
쿡이 고른 배는 368t급 석탄운반선 인데버호였다. 원래 험한 바다에서 많은 석탄을 운반하도록 만든 배라 공간이 넓어서 많은 승객과 과학 기구들을 실을 수 있고, 빠르지는 않지만 안정감 있는 배여서 원양 항해에 유리한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 배에 장교와 선원 83명, 그리고 왕립협회 회원 11명이 탔다. 그 가운데 25세의 거부 과학자 조셉 뱅크스(Joseph Banks)가 1만파운드라는 거금을 기부했고, 탁월한 과학 실력을 인정받아 이 사업의 학문적 리더로 인정받았다. 하층 출신 쿡 선장과 귀족 자제 뱅크스는 성향이 다르면서도 서로 상대방을 탁월한 인재로 존중하며 깊은 우정을 느끼면서 협력해 나갔다.
원래 사업 목적인 천문학 관찰 자체는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당시 망원경과 천문학 지식이 불충분했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부수적인 목표가 더 큰 의미가 있었다. 그것은 태평양 해역을 샅샅이 조사하고, 특히 ‘미지(未知)의 남방대륙(Terra Australis Incognita)’의 존재 여부를 확인하는 일이다. 쿡이 출항할 때 받은 명령서에는 금성 관찰이 끝나면 밀봉 봉투 안에 있는 두 번째 임무를 수행하라는 내용이 있었다. 바로 그 극비 지시 사항이 그동안 알려진 경계 너머 남쪽으로 항해해 가라는 것이었다.
하와이 원주민과 갈등 끝에 목숨 잃어
‘미지의 남방대륙’은 로마시대의 지도 제작자 폼포니우스 멜라(Pomponius Mela)가 처음 생각해 낸 용어다. 고대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리 개념에 따르면, 북반구에 거대 대륙들이 몰려 있으므로 지구가 균형을 이루려면 남반구에도 그에 상응하는 대륙이 존재해야 한다(현대 과학적 사고로는 틀린 개념이다). 유럽인들은 제2의 신대륙 발견 가능성을 점치고 있었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를 발견했듯 누군가가 거대 대륙을 발견하고 그곳을 지배하게 되면 이야말로 ‘초대박’이 아닐 수 없다! 유럽인들로서는 남쪽으로 갈수록 날씨가 더워진다고 생각할 만하므로 남방 대륙은 아주 더운 곳이라고 예측했다. 아마도 온화한 기후에 자원이 풍부할 테고, 따라서 그곳에는 문명화된 사람들이 산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물론 실제 탐사 결과는 그런 주장과 한참 거리가 멀었다. 쿡은 남위 40도 해역을 항해했으나 그와 같은 거대 대륙을 발견하지는 못했다. 다만 오스트레일리아 동쪽 해안을 따라 북상하면서 이때 발견한 곳을 뉴사우스웨일스(New South Wales)라고 명명하여 후일 오스트레일리아가 영국 영토가 되는 시발점이 되었다.

▲미지의 남방 대륙’이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 제임스 쿡의 주요 임무였다. 사진은 제임스 쿡이 첫 항해를 떠난 지 250주년을 맞은 2018년에 영국에서 열린 기념 축제의 한 장면이다. /게티이미지코리아
쿡 선장은 이후 두 번 더 태평양 탐사 항해를 했다. 제2차 항해(1772∼1775)는 해군성의 명령에 따라 본격적으로 미지의 남방 대륙을 찾아 남위 71°10′까지 내려갔다. 2만㎞를 넘는 극도로 위험한 항해를 한 끝에 이 해역에 남방대륙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최종적으로 확인하였다. 3차 항해(1776~1779)는 대서양에서 태평양으로 가는 관통로를 발견하기 위해 북태평양을 탐험하는 것이었다. 쿡은 샌드위치제도(하와이)를 발견하였고, 여기에서 북아메리카 연안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 알래스카 남부를 지나 6월 말 베링 해협으로 들어갔다. 북빙양(北氷洋)에 도달하였으나, 8월 중순 두꺼운 빙판에 막혀 더 이상 항해를 할 수 없어 하와이로 되돌아갔다. 이곳에서 현지 주민들과 갈등 끝에 쿡 선장은 목숨을 잃었다. 남은 선원들은 다시 베링 해협 탐험을 위해 북위 70°33′까지 올라갔다가 1780년 10월 영국으로 귀환하였다.
세 번에 걸친 기념비적 항해에서 쿡 선장은 남극과 북극, 태즈메이니아, 티에라 델 푸에고, 아메리카 북서부 해안, 시베리아 북동단 해안을 모두 탐사했다. 그가 수행한 항해 거리는 32만㎞에 달하는데 이는 지구에서 달까지의 거리에 해당한다. 그의 항해는 지리 지식 증대에 크게 기여했고, 유럽의 세계 패권 장악을 위한 기틀을 마련했다. 이런 놀라운 성과를 거두는 데 결정적 요인은 쿡 선장의 리더십이다. 꼼꼼하고 능숙한 일처리는 물론이고, 선원들을 때로는 엄격하게 때로는 부드럽게 잘 지휘하였다. 지도력이 없으면 흔히 말하듯 배가 산으로 올라가는 기이한 꼴을 보게 된다. 지도자의 리더십이 중요한 것이 어디 배 한 척 지휘하는 일뿐이랴.
[선원들 ‘괴혈병’ 막은 쿡 선장]
비타민C 보충 위해 양배추 절임 먹여
대항해시대에 선장의 중요한 임무는 무엇보다 선원들의 건강과 생명을 지키는 일이었다. 쿡 선장은 선원들의 사망을 막기 위해 최대한 노력을 기울였다. 위생 문제에 신경을 써서 침구, 옷가지를 정기적으로 세탁하도록 하고, 식초로 바닥을 닦고, 유황불로 실내 공기를 소독하도록 했다. 선원들에게 목욕을 강제하여 심지어 북극권의 차가운 날씨에서도 반드시 규칙적으로 목욕하도록 지시했다.
당시 선원들의 사망 원인 1위는 괴혈병이었다. 이 병 때문에 원양 항해를 마치기까지 선원 중 절반 이상, 심지어 75%가 죽는 일도 벌어졌다. 사람들은 비타민C 부족이 근본 원인이라는 과학적 설명은 못 해도 경험에 의해 감귤류 같은 특정 식품이 괴혈병 예방과 치료에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쿡 선장은 괴혈병 예방 효과가 탁월하다고 알려진 양배추 절임(사워크라우트)을 3000㎏ 넘게 싣고 선원들에게 먹이려 했다. 그렇지만 선원들은 익숙지 않은 음식은 입에 대려 하지 않는 경향이 강하여, 양배추를 죽어도 안 먹으려 했다.
쿡 선장은 절묘한 방안을 생각해 냈다. 장교들에게만 양배추를 지급한다고 선언한 것이다. 그러자 전날까지 양배추는 죽어도 안 먹겠다고 우기던 선원들이 돌연 왜 자기들에게는 지급하지 않느냐고 아우성을 쳤다. 이후 쿡 선장의 항해에서는 적어도 괴혈병으로 죽는 사람은 없었다. 지도력을 발휘하는 데에는 힘으로 밀어붙이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72] 최후의 日제국군 오노다, 왜 1974년에 항복했나
軍國의 추억… 日, 29년간 밀림서 게릴라전 벌인 전범을 영웅대접

▲민간인 30명 학살한 패잔병에 환호하는 일본 - 1944년에 일본 정보 장교로 필리핀 루방섬에 주둔한 오노다 히로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사실을 모른 채 숨어 지내다 1974년에 투항했다. 일본으로 돌아온 오노다는 극우파 사이에선 진정한 사무라이로 불렸지만, 필리핀 주민을 살해한 옛 제국주의 군대의 패잔병이라는 평가도 뒤따른다. 사진은 오노다(가운데 탑승 계단 맨 앞 인물)가 1974년 3월 12일 도쿄 공항에 도착해 지면에 첫발을 내딛는 장면이다. /게티이미지코리아
1945년 8월 15일, 일왕은 더 이상 전쟁을 계속하면 일본 국민이 전멸하고 인류 문명 전체가 붕괴할 위험이 있다며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9월 2일, 미국 전함 미주리호 함상에서 항복 문서에 서명함으로써 공식적으로 제2차 세계대전은 종식되었다. 그렇지만 태평양에 산재한 여러 섬 밀림에는 일본군 패잔병 상당수가 종전 소식을 모르거나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은 채 숨어서 저항을 계속했다. 그중 대다수는 결국 투항하거나 현지 군과 교전 중 사살되었으나, 끝까지 버티며 저항한 사람이 없지 않다. 필리핀 북부 루방섬에 숨어 있던 오노다 히로오(小野田寛郎·1922~2014)가 대표적이다.
오노다 소위는 1944년에 정보 장교로 루방섬에 주둔하게 되었다. 1945년 2월 연합군이 이 섬을 점령하면서 일본군 대부분은 포로로 잡히거나 전사하였지만, 오노다 소위와 세 병사는 정글 깊숙이 숨어 들어갔다. 수년 동안 이들은 게릴라전을 벌이며 버텼다. 그러던 중 1949년에 병사 한 명이 숲에서 나가 필리핀군에 투항했다. 남은 사람들은 이 ‘배신 행위’에 분개하며 더욱 저항 의지를 굳혔다. 오노다 소위가 생존해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일본 정부는 5차에 걸쳐 현지에 수색대를 파견했다. 먼저 투항한 동료가 이제 전쟁이 끝났으니 밀림에서 나오라는 편지를 써서 뿌렸지만, 이들은 적군의 계략이라며 믿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오노다와 그의 동료들은 주변 농촌을 습격하여 주민 30명을 살해하고 100여 명에게 부상을 입혔으며 식량과 물자를 약탈하면서 연명했다. 1954년 필리핀 수색대와 교전이 벌어져 한 명이 사살되었고, 1972년 경찰의 총격으로 또 한 명이 사망했다.
이제 오노다 홀로 남았다. 그는 직속상관이었던 다니구치 요시미 소좌가 내린, 부대가 전멸하는 한이 있더라도 투항하지 말라는 명령만 기억하고 있었다. 정작 다니구치씨는 그런 명령을 내린 것을 후회하여 루방섬 27곳에 일왕의 항복 명령문을 게시하고 부하들의 투항을 권고했지만, 깊은 숲속에 숨은 오노다는 그 사실을 알 수 없었다. 지나친 자기 확신에 갇히면 헤어날 수 없는 모양이다. 오노다는 주민에게서 훔친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통해 도쿄올림픽이 개최되어 미국 선수들과 일본 선수들이 함께 스포츠 경기를 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전쟁 중에도 스포츠 경기만은 평화롭게 이루어지는 모양이로군’ 하고 생각했다고 한다.
오노다를 찾아낸 사람은 노리오 스즈키라는 젊은 일본인 모험가였다. 그가 세운 버킷리스트는 ‘오노다 소위, 판다곰, 히말라야의 설인(雪人)’을 만나는 것이었다. 운 좋게 첫 번째 미션에 바로 성공했다. 1974년 스즈키는 루방섬을 찾아가 산속 깊이 들어갔다. 이상한 기척을 느낀 오노다가 총을 들고 다가왔다. 스즈키는 자신을 일본인 여행자라고 소개하며 안심시킨 후 ‘혹시 오노나 소위 아닙니까?’ 하고 물었다. 오노다는 실로 오랜만에 다시 모국어를 들었다. 함께 담배도 피우고 식사도 한 다음 스즈키는 이제 전쟁이 끝났으니 자기와 함께 일본으로 가지 않겠냐고 물었다. 이번에도 오노다는 직속상관 다니구치의 명령이 있어야만 떠날 수 있다고 답했다. 스즈키는 일본에 가서 상관을 찾아보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일본에 돌아가면 자칫 아무도 자기 말을 믿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 스즈키는 오노다에게 함께 사진을 찍자고 제안했고, 두 사람은 사진 30여 장을 찍었다.

스즈키의 증언에 따라 일본 당국은 현지에 구출반을 보내 수색 작업을 벌인 끝에 드디어 오노다를 만났다. 당시 그는 2차 세계대전 때 사용하던 99식(九九式) 소총 한 자루와 총탄 500발, 일본도, 수류탄, 군복과 옷 몇 점, 취사도구, 전등 같은 물품을 지니고 있었다. 또 만일 포로로 잡히면 자결하라고 어머니가 준 단도까지 잘 보관하고 있었다. 오노다는 친형 도시오를 보고 뜨겁게 포옹했다. 그동안 규슈에서 서적상(書籍商)을 하고 있던 그의 상관 다니구치가 ‘전투 행위와 작전을 즉각 중지하고 가까운 곳의 상관 명령을 받을 것이며, 그러지 못할 경우 미군이나 필리핀군의 지시를 받으라’는 투항 명령서를 낭독했다. 이 명령에 따라 오노다는 일본 대사의 입회 아래 필리핀 공군 사령관 호세 랑쿠도 소장에게 정식으로 투항했다. 88세인 그의 어머니도 아들의 생존 소식을 듣고 기뻐했다. 오노다 소위가 구출된 이날은 마침 그의 52세 생일이었다.
오노다가 숨어 살던 지역 인근의 농민들과 어민들은 이 ‘패잔병 놈’이 그동안 수십 명을 살해하고 곡식을 불사르거나 약탈해 간 악마 같은 놈이라며 처벌을 요구했지만 일은 다르게 진행되었다.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필리핀 대통령은 오노다의 범죄를 사면해줬다. 22세에 조국을 떠났던 청년은 50세가 넘어 일본에 돌아왔고, 일본 국민에게 영웅으로 대접받았다. 패전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일본 국민들은 오노다에게서 ‘살아있는 일본 정신을 보았다’고 열광했고, 극우파는 오노다야말로 일본의 전통 가치를 그대로 간직한 진정한 사무라이라고 칭찬했다. 실제로 오노다는 일본 제국 군인의 가치관을 버리지 않았다. 일본 정부가 준 보상금, 심지어 30년 군무의 대가를 계산하여 준 월급도 수령하기를 거부하고 전액을 야스쿠니 신사에 기부했다. 1974년 오노다는 자기의 삶을 소개하는 책을 써서 출판했다. 정글 한가운데에서 수행했던 명령, 생존, 숲에서 보낸 삶 등을 소상히 소개했지만, 그가 저지른 민간인 살상 행위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언급하지 않았다.

▲미주리호서 연합군에 항복하는 日 육군대장 - 1945년 9월 2일 미국 전함 미주리호 선상에서 일본 육군을 대표해 우메즈 요시지로 대장이 항복 문서에 서명하고 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30년 만에 돌아온 일본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곳이 되어 있었다. 근대화된 일본 사회는 옛 제국 군대 소위의 가치관을 지닌 사람에게는 살아가기 벅찬 곳이었다. 게다가 연일 그에게 향하는 사람들의 지나친 관심도 견디기 힘들었다. 결국 그는 브라질로 이민 가서 목장을 경영하였다. 이곳에서 그의 친척들을 만났고, 또 후일 아내가 될 사람도 만났다.
그러던 중 고국에서 들려오는 소식에 질겁했다. 어떤 젊은이가 부모를 칼로 찔러 죽였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타락한 일본 사회를 구제하기 위해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1984년 그는 일본으로 돌아가서 일종의 서바이벌 캠프인 오노다 자연학교(小野田自然塾)를 만들었다. 일본 젊은이들이 자연 속에서 살며 인내, 용기, 명예 같은 가치를 회복하도록 돕는다는 취지다. 그렇지만 그가 견지하는 옛날식 가치관이 과연 현대 일본 젊은이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이후 오노다의 행적을 보면 그의 사고는 암만해도 제국주의의 잔재(殘滓)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오노다는 결혼 후 아내와 함께 우익 활동가의 삶을 살았다. 그는 일본 군부의 위안부 운영 책임을 부인하고, 일본군이 저지른 남경대학살이 중국 측의 조작이라는 주장을 펴곤 했다. 그는 2014년 1월 16일, 도쿄의 한 병원에서 91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한편 루방섬에서 오노다를 찾아낸 노리오 스즈키는 판다곰을 직접 보겠다는 두 번째 미션까지는 성공했지만 마지막으로 설인을 만나고자 히말라야에 갔다가 산사태를 만나 사망했다.
오노다는 어떤 존재인가? 일본 우파 인사들에게는 마지막 순간까지 일본도를 간직하고 상관 명령을 충실하게 따르며 적에게 저항한 ‘마지막 사무라이’나 ‘참군인’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 물론 필리핀 현지 주민들로서는 잔혹한 산적으로 변신한 옛 제국주의 군대의 패잔병이며 반드시 처벌해야 마땅한 전범에 불과했을 터이다. 시간이 많이 흐른 현재, 그는 역사의 흐름에 떠밀려 열대 밀림으로 추방된 후 그곳에서 헛된 이데올로기를 부여안고 젊은 시절을 탕진한 가련한 운명의 희생자로 보일 뿐이다.
[태평양섬 곳곳에 日패잔병]
정글서 끝까지 저항하다 기미가요 부르는 소리에 나타나 항복하기도
일본 제국군의 잔존 군인이 또 한 명 있다. 일본군 이름은 나카무라 데루오지만 원래 타이완 동부 산악 지역 아미스족(河美族) 원주민으로서 본명은 스니오였다.
일제는 동남아시아 열대우림의 전선에서 잘 싸우리라 여겨지는 대만 산악 부족 사람들로 고사의용대(高砂義勇隊)를 만들었는데, 그는 이 부대의 병사로 동원되어 인도네시아 모로타이섬에 배치되었다. 연합군이 이 섬을 점령한 후 그는 섬 깊숙이 숨어 들어가 작은 오두막 캠프를 짓고 홀로 버텼다. 행방을 알지 못한 일본군은 그를 사망 처리했다.
오노다 소위가 생환한 해인 1974년, 우연히 그의 생존 사실이 알려져 수색대가 파견되었으나 그를 찾아내기 어려웠다. 여러 사람이 기미가요(일본 국가)를 합창하자 그가 나타났다. 일본이 패망하고 이미 전쟁이 끝났다고 말하자 그는 ‘일본이 질 리가 없다’고 화를 냈다.
대만 정부는 그에게 리광후이()라는 이름을 부여했다. 대만 내 소수민족 출신의 일본 제국군이었던 그는 어느 나라에서도 진심 어린 환영을 받지 못한 듯하다.
31년 만에 고향에 돌아가 보니 아내는 이미 재혼했고, 헤어질 때 한 살이었던 아들은 청년이 되어 있었다. 모든 것이 낯선 현대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던 그는 몇 년 후 60세에 폐암으로 사망했다.
[73] 문화 꽃피웠던 르네상스 시대, 알렉산데르 6세의 ‘막장 정치’
교황의 사생아가 무려 3명… 그 중 딸을 세차례나 정략결혼시켰다

▲르네상스를 뒤흔든 보르자 가문 - 영국 화가 존 콜리어(1850~1934)의 그림 ‘체사레 보르자와 한 잔의 포도주’. 교황 알렉산데르 6세(오른쪽에서 둘째)가 추기경 시절에 첩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체사레(왼쪽)와 루크레치아(왼쪽에서 둘째)가 모여있는 모습이다. 알렉산데르 6세는 딸의 혼사를 자신의 세력을 키우기 위한 도구로 활용했고, 아들 체사레는 친형을 암살하고, 여동생의 애인과 배우자 역시 제거한 비정한 권력가였다. 루크레치아는 아버지와 오빠의 권력욕에 일생을 휘둘리며 수난을 겪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르네상스 시기 이탈리아는 찬란한 문화 발전을 이루었으나 정치적으로는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특히 15세기 말 로마는 ‘신성함도 법도 없고 오직 금과 폭력이 넘쳐나는 비너스의 제국’이라는 말이 돌았다. 흔히 타락한 교황의 대명사로 통하는 알렉산데르 6세와 그의 아들 체자레 그리고 딸 루크레차는 이 시대 혼돈의 극단을 증언하는 사례다.
알렉산데르 6세는 원래 에스파냐의 발렌시아 출신으로서 본명은 로드리고 보르자(Rodrigo de Borgia)다. 일찍이 교계와 속계 양면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다가 삼촌이 교황이 되자(갈리스토 3세) 로마에서 승승장구했다. 그렇지만 그는 신심이 깊은 인간은 결코 아니어서, 추기경 직책을 수행할 때 카타네이(Vannozza Cattanei)라는 여인을 애첩으로 두었다. 두 사람은 조반니와 체자레라는 두 아들을 낳았고, 이어서 1480년 세 번째 아이인 딸 루크레차를 얻었다. 딸마저 권력 추구의 도구로 삼은 로드리고는 고작 열한 살이었던 루크레차를 두 에스파냐 귀족과 차례로 약혼시켰다. 상대방이 양다리를 걸친 상태라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던 두 악혼자는 크게 분개했다.
고작 11살에 두 귀족과 동시에 약혼
다음 해인 1492년, 보르자 추기경이 교황 알렉산데르 6세가 되면서 상황이 급변한다. 교황은 이탈리아 북부의 강국 밀라노와 정치적 동맹을 강화하기 위해 루크레차의 이전 약혼을 모두 파기하고 밀라노 공작의 조카 조반니 스포르차와 결혼시켰다. 14년 연상인 남편과 한 정략결혼이 행복할 리 없다. 1493년, ‘교황님 댁 혼사’라는 이상한 성격의 결혼식을 성대하게 치르기는 했으나 신혼부부는 전혀 애정이 없어보였다. 첫날밤도 아무 일 없이 지나간 것으로 보인다.
다음 해 나폴리 왕국의 왕위 계승 문제로 교황과 밀라노 공작 사이에서 갈등이 벌어지면서 문제가 불거졌다. 밀라노 공작은 프랑스 국왕과 결탁하여 나폴리로 공격해 들어가려 했고 교황이 이를 저지하려 했다. 루크레차의 남편 조반니는 자기 삼촌(밀라노 공작)과 장인(교황)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중립을 지키려 했다. 결국 프랑스군이 로마로 공격해 들어와서 산탄젤로성에 피신해 있던 교황이 항복하고, 프랑스 군이 나폴리까지 쳐들어갔다가 되돌아가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동안 사위 조반니가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은 데다가 루크레차에게 계속 냉랭한 태도를 보이자 교황은 두 사람의 결혼을 무효화하기로 결정했다. 이혼이라는 게 불가능했던 시대이므로(결혼을 종교적 성사<聖事>가 아니라 계약 행위로 규정하고, 따라서 계약을 해소하는 이혼도 법적으로 가능하게 된 것은 프랑스혁명의 결과다), 결혼이 원천 무효라고 선언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두 사람이 성적 결합이 없었으며 그 원인은 조반니가 성적 무능력자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공개적으로 성적 무능력자 낙인이 찍힌 조반니는 악성 루머를 퍼뜨려서 보복했다. 교황이 자기 딸과 근친상간 관계이기 때문에 자신에게서 루크레차를 빼앗아갔다고 주장하며 돌아다닌 것이다.

▲알렉산데르 6세, 루크레치아, 체사레.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결혼했다가 다시 결혼 무효 처분을 당해 충격을 받은 루크레차는 수녀원에 들어가서 아예 나오려 하지 않았다. 교황은 딸을 설득하기 위해 자신의 시종 페드로 칼데스(Pedro Caldes) 일명 페로토(Perotto)를 보냈다. 22세의 젊은 남성 시종이 18세 이혼녀와 자주 만나 인생 상담을 하다 보니 뜻하지 않게 뜨거운 관계가 되었고, 루크레차는 임신했다. 아마도 페로토가 그녀의 첫사랑이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가족 내 살인이라는 끔찍한 일까지 벌어졌다. 작은오빠 체자레가 큰오빠 조반니를 암살하여 시체를 테베레강에 던져버린 것이다. 이처럼 포악한 성격의 체자레가 여동생의 임신 사실을 눈치 채고 말았으니 이제 그녀의 애인 페로토의 목숨도 위태해졌다. 페로토가 목숨을 구하기 위해 교황에게 달려갔으나 체자레는 단도를 쥐고 바티칸궁을 가로질러 그를 추격하여 교황이 보는 앞에서 그를 찔렀다. 그가 죽었는지 살아남았는지는 불분명하여 설이 엇갈리지만, 어쨌거나 루크레차가 두 번 다시 페로토를 볼 수 없게 된 건 분명하다.
이런 막가는 상황에서 교황과 체자레는 다시 루크레차를 나폴리 왕의 서자인 아라곤의 알폰소와 결혼시켰다. 다행히 두 사람은 서로 사랑했고 행복한 삶을 이어갔다. 그러나 이번에도 오빠 체자레가 문제를 일으켰다. 그는 프랑스 국왕 루이 12세와 결탁하여 밀라노를 지배하고 더 나아가서 나폴리 왕국까지 차지하려는 욕심을 품게 되었다. 그러자니 처남의 출신 국가인 아라곤과 관계가 악화되었다(나폴리 왕국과 아라곤은 가까운 관계였다). 체자레가 어떤 짓이라도 서슴지 않고 벌인다는 사실을 잘 아는 알폰소는 두려움을 느낀 나머지 로마에서 도주했다. 교황은 딸의 안전을 위해 루크레차를 소도시 스폴레토로 보냈고, 도망갔던 남편도 이곳으로 찾아와 두 사람이 다시 함께 살았다. 부부는 이곳에서 안정된 삶을 살 수 있을까? 자신의 정치적 계획에 방해가 되는 인물은 누가 되었든 가차 없이 처치해 버리는 체자레가 있는 한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 1500년 7월 15일, 자객 5명이 길거리에서 알폰소를 공격했다. 루크레차는 중상을 입은 남편을 간호하면서, 혹시 오빠가 또 공격해오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방 앞에 호위병 16명을 배치했다. 그러나 체자레 앞에서는 이런 정도는 무용지물이다. 마치 마피아 영화에서 그러하듯, 사흘 뒤 알폰소는 어느 틈엔가 누군가에게 목 졸려 죽은 상태로 발견되었다.
겨우 20세에 루크레차는 큰오빠, 애인, 남편이 모두 작은오빠 체자레에게 살해당하는 꼴을 당했다. 그러자 세간에는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체자레가 여동생과 근친상간 관계여서 주변 남자들을 질투한 나머지 모두 죽였다는 것이다. 소설과 영화, 오페라는 그런 식의 흑색 전설을 따르는 경향이 있으나, 그보다는 체자레의 정치적 욕망이 주요 동인이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
이런 상황에서 교황 가문은 루크레차의 세 번째 결혼을 주선했다. 상대는 장래 페라라 공작이 되는 에스테의 알폰소였다. 루크레차로서는 어떻게든 로마의 친정집 식구들에게서 멀리 떨어지고 싶은 심정이었으리라. 흑색 전설에 따르면 당시 떠들썩한 연회에 매춘부 50명이 초대되어 손님들 모두 질펀하게 놀았다고 한다. 1502년 1월, 마침내 루크레차는 이탈리아 북부 지방의 도시 페라라로 떠났다. 아버지와 오빠 그리고 로마의 악덕에서 벗어난 그녀는 마침내 행복한 삶을 되찾았다. 두 사람 사랑의 결실로 아이도 여럿 낳았다.
왕위 계승과 교황가문 얽히고설켜
1503년 교황 알렉산데르가 사망했고, 체자레 역시 1507년 전투에서 사망했다. 루크레차는 아마도 슬픔과 동시에 안도감을 느끼지 않았을까. 이후 그녀는 여인으로, 어머니로 그리고 예술 후원자로 평온한 삶을 살다가 1519년 39세에 11번째 아이를 낳다가 사망했다. 후대의 문학 작품과 영화, 드라마는 루크레차를 타락한 모략가, 살인을 행하는 요부, 근친상간녀 등 악마적 캐릭터로 각색하는 경향이 강하지만 실상은 오히려 잔혹한 운명의 희생자에 가깝다.
르네상스 시대의 찬란한 예술 작품들을 보노라면 이런 문화를 탄생시킨 당대 사회가 매우 덕성스러운 곳이 아니었을까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정치와 문화가 같은 수준으로 발전하지는 않는 듯하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서 잔인하지만 유능한 체사레의 리더십 찬양]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체자레 보르자를 매우 훌륭한 통치 행위를 수행한 인물로 제시한 바 있다.
“로마냐 지방을 점령한 공작(체자레)은 그 지역이 예전부터 무질서가 판치는 곳임을 알게 되었다. 이곳을 평정하기 위해 라미로 도르코(Ramiro d’Orco, 혹은 Ramiro de Lorca)라는 잔인하지만 유능한 인물을 파견하면서 전권을 위임했다. 그는 단기간에 질서와 평화를 회복했으며 사람들은 그를 두려워했다. 시민들의 반감이 높아졌다는 것을 눈치 챈 공작은 분위기를 무마하고자 했다. 이제껏 행해진 잔인한 조치는 자기 잘못이 아니라 대리인인 라미로의 난폭한 성격 때문이라는 점을 보여주고자 했다. 어느 날 아침 공작은 두 토막이 난 라미로의 시체와 형구들, 피 묻은 칼을 광장에 전시했다. 참혹한 광경을 본 시민들은 한편으로 만족감을 느끼면서도 경악을 금치 못했다.”
[74] 미켈란젤로의 3대 피에타, 피렌체서 사상 첫 합동 전시
거장의 세 피에타, 전쟁과 코로나에 지친 사람들을 위로하다

▲바티칸 피에타, 반디니 피에타, 론다니니 피에타 - 미켈란젤로의 세 피에타 작품에는 그의 인생 여정과 예술관이 고스란히 투영돼있다. 스물네 살에 완성한 바티칸 피에타는 예수의 몸과 성모의 옷 주름까지 완벽하게 사실적으로 묘사돼 있다. 일흔다섯에 만든 반디니 피에타에서는 노쇠하게 표현된 육체에서 비애감이 묻어난다. 죽기 사흘 전까지 작업한 론다니니 피에타는 형상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추상화돼 고통과 슬픔의 분위기가 물씬 난다. /비지트바티칸시티닷컴·위키피디아
올해 피렌체의 오페라델두오모(Opera del Duomo) 박물관에서는 역사상 처음으로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세 작품을 한 공간에 전시했다. 피에타(Pièta)란 십자가에서 내린 그리스도의 시신을 두고 성모가 애도하는 주제의 작품을 말한다. 24세에 완성한 바티칸 피에타, 75세에 이르러 자신의 묘소에 설치할 것을 염두에 두고 만든 반디니(Bandini) 피에타, 그리고 미켈란젤로 최후의 작품 론다니니(Rondanini) 피에타를 함께 볼 수 있는 정말로 흔치 않은 기회다(다만 바티칸 피에타와 론다니니 피에타는 원본은 아니고 정교하게 복제한 캐스트 작품이다). 세 작품을 보면 거장 미켈란젤로의 예술적, 영적 성숙 과정을 짐작하게 된다.
미켈란젤로(Michelangelo di Lodovico Buonarroti Simoni)는 1475년 3월 6일 피렌체 인근의 카프레제(Caprese)에서 출생했다. 6세에 어머니가 사망하여 4년 동안 유모에게 맡겨져서 자랐다. 마침 이 유모의 남편이 석공이라서 이때부터 어린 미켈란젤로는 돌 만지는 데 관심을 두었다고 한다.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여읜 애달픈 심정과 차가운 돌에서 새로운 생명을 창조해 내는 평생의 업이 운명처럼 엮인 것이다.
유럽 100개 도시 평화행사 위해 기획
부친은 미켈란젤로에게 자신처럼 공직에 나아가기를 희망했으나 그의 강렬한 예술적 열정을 꺾을 수는 없었다. 미켈란젤로는 13세에 기를란다이오와 동업하는 공방에 도제로 들어가서 각종 기예를 익혔다. 곧 당대 최고 권력자인 로렌초 데 메디치의 눈에 들어 그의 후원을 받으며 일취월장으로 성장하게 된다. 그러나 1492년 후원자 로렌초가 사망한 후 피렌체와 이탈리아의 역사는 격동기로 들어가고, 젊은 예술가 또한 굴곡진 삶을 살았다. 때로 박해를 피해 이웃 도시로 피신하거나 혹은 권력자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숨어 살아야 했다. 최근 피렌체의 산 로렌초 대성당 지하 공간에 은거하는 동안 미켈란젤로가 벽에 그린 스케치 자료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이런 가운데서도 그는 최상의 작품들을 생산해냈다. 특히 그의 명성을 확고하게 만들어준 작품이 바티칸 피에타다. 로마 주재 프랑스 대사인 장 빌레르(Jean Bilhères de Lagraulas) 추기경이 프랑스 국왕 샤를 8세의 묘소를 장식할 작품을 주문한 것이다. 완성한 작품은 그야말로 경탄을 불러일으킨다. 그리스도 몸의 근육과 핏줄, 물결치는 듯한 성모 옷의 주름까지 어떻게 이토록 완벽하고도 아름답게 묘사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사실 너무 아름답게 묘사해 오히려 문제가 되었다. ‘십자가에서 내린 그리스도를 무릎에 올려놓은 성모’라는 조각상은 거의 볼 수 없는 구도로서, 이전 시기 독일에서 목재로 만든 작품이 소수 있을 뿐이다. 그 작품들은 모두 극단의 슬픔에 잠긴 성모를 나타낸다. 그런데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는 완벽한 피라미드 구도이고, 그리스도는 고대 그리스 신상(神像)에서 볼 수 있는 멋진 육체를 가지고 있으며, 성모는 앳되 보이는 얼굴에 고요한 표정을 짓고 있다. 미켈란젤로는 성모자(聖母子)의 아름다움은 육체적인 게 아니고 순결과 성스러움에서 오는 영적인 아름다움이라고 해명했지만, 역시나 젊은 예술가이기 때문에 그렇게 만들었으리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가 다시 피에타 작품을 만든 것은 50년이 흐른 뒤다. 그의 나이 75세에 죽음이 멀지 않다는 것을 느끼고, 이제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예술을 수행한 것이다. 당시 그의 젊은 제자 체키노 브라치(Cecchino Bracci)가 일찍 세상을 뜨고, 이어서 미켈란젤로의 뮤즈였던 여류 시인 비토리아 콜론나(Vittoria Colonna)도 사망하여 충격을 받았을 터이다. 그는 자신의 묘소를 장식할 작품으로 반디니 피에타를 제작했다. 미완 상태로 남아 있던 이 작품은 후일 조수 칼가니(Tiberio Calgani)가 완성했고, 오랫동안 몬테카발로(Montecavallo)의 반디니 빌라에 있던 것을 메디치 3세가 구입하여 피렌체로 가지고 왔다.
네 인물로 구성된 이 작품은 대리석 조각 하나로 만들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복잡하고 거대한 규모다. 작품 분위기는 이전 피에타와는 완전히 달라서 깊은 비애감을 자아낸다. 그리스도는 더 이상 완벽한 육체가 아니라 축 처져 있으며, 성모의 몸짓과 표정은 크나큰 고통을 드러내고, 마리아 막달레나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차마 믿지 못하겠다는 듯 다른 곳을 보고 있다. 이 세 인물을 마치 품에 안듯이 위에서 굽어보는 니코데모는 미켈란젤로 자신의 얼굴을 하고 있다. 바리새파 지도층 인사였던 니코데모는 밤에 예수를 찾아와서 ‘누구든지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듣는 인물로 성경에 나온다.
미켈란젤로는 누군가가 이 작품을 보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 그런데 어느 날 저녁 궁금증을 참지 못한 바사리(동시대의 화가이자 예술가들의 전기를 쓴 작가)가 문 너머로 들여다보는 것을 알아챘다. 미켈란젤로는 램프를 땅에 떨어뜨리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 역시 이 램프처럼 곧 쓰러지고 내 빛도 사라질 거요.”
마지막 작품 론다니니 피에타는 미켈란젤로의 오랜 예술적 여정의 도달점이라 할 만하다. 그는 1552년경 작업을 시작하여 죽기 사흘 전까지 이 작품을 다듬고 있었다고 한다. 환영(幻影)같이 가늘고 긴 모습의 그리스도와 성모는 거의 땅에서 떨어져 나와 공중에 떠있는 듯하다. 이들의 헐벗은 신체는 이목구비가 거의 없고, 형상을 잃은 듯 추상화되어 있으며, 고통과 슬픔의 분위기가 물씬 난다. 그리스도의 발이 꺾여 불안정하기 짝이 없는 상태로 가까스로 서 있는 모습을 보노라면 참으로 묘한 느낌이 든다. 성모가 죽은 그리스도의 몸을 지탱하고 있는 걸까(논리상으로는 그래야 할 것이다), 아니면 그리스도가 성모를 업고 있는 걸까? 그리스도가 자신의 어깨에 얹혀 있는 성모의 손을 느끼며 대화를 나누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이미 삶과 죽음의 경계는 허물어진 걸까? 해석은 다양할 수밖에 없다. 현대 조각가 헨리 무어는 이 피에타야말로 가장 감동적인 작품이며, 미켈란젤로 89년의 삶이 온전히 녹아 있다고 말했다.
미켈란젤로 키운 유모의 남편이 석공
노년의 피에타 작품들은 스물네 살 청년 시기에서 한참 멀어졌다. 완벽하게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고 누군가의 오해에 발끈하여 성모의 옷깃에 자기 이름을 새겨 넣던 미켈란젤로가 아니다. 후기의 작품들은 의도적으로 미완(non finito) 상태로 두어서, 돌에서 형상을 완전히 꺼내지 않고 일부가 아직 돌 속에 묻혀 있는 상태다. 이는 플라톤 철학 혹은 당대 신플라톤주의 철학과 관련이 있다. 플라톤은 이 세상의 그 어느 예술품도 이데아의 세계에 있는 본질적 대응물(counterpart)과 완전히 같을 수 없다고 말했다. 결과적으로는 죽은 돌에서 생명이 움트고 있는 듯한 강렬한 느낌을 받게 된다.
유럽 도시 100곳의 시장과 주교들이 모여 평화를 기원하는 대회를 기념하는 이 전시회는 단테의 ‘신곡’ 중 천국 편 29장의 구절 ‘사람들은 하느님의 말씀이 세상에 뿌리내리기까지 얼마나 많은 피를 흘리는지 생각하지 않는다’를 모토로 제시했다. 미켈란젤로 자신이 피에타를 제작하며 이 말을 했다고 하지만, 동시에 질병과 전쟁의 피해를 본 세상의 어머니들과 아이들에 대한 위로의 말이라고도 한다. 피에타는 고통의 어둠 속에서 빛에 대해 명상하는 작품이다.
[’바티칸 피에타’ 둘러싼 논란]
미켈란젤로 작품이라고 사람들이 믿지 않자 성모 옷깃에 이름 새겨
바티칸 피에타는 작품 완성 직후부터 논란을 일으켰다. 이처럼 아름다운 작품을 애송이 조각가가 만들었을 리가 없으며, 다른 작가의 작품이라는 소문이 돌자 미켈란젤로는 분개하여 성모의 옷깃 부분에 자기 이름을 새겨 넣었다. 미켈란젤로가 서명을 남긴 유일한 사례인데, 그는 곧 이런 일을 한 데 대해 깊이 후회했다고 한다.
그리스도가 33세에 죽었으니 성모 또한 최소한 40대 이상의 나이여야 하는데 왜 그렇게 젊고 아름다운 소녀 얼굴을 하고 있는가? 또 아들이 비참하게 죽었는데 성모는 왜 그렇게 평온한 표정인가? 사실 이 작품에서 나타내고자 한 것은 육체적 아름다움이 아닐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성모의 육체적 아름다움이 아니라 영적 아름다움을 나타냈다고 해명했다. 그리스도는 사흘 후에 부활할 터이므로 영원히 죽은 게 아니라 일시적으로 잠자는 상태이고, 이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성모 또한 잠든 어린아이를 내려다보는 어머니 같은 표정이다.
1972년 한 광인이 이 작품을 망치로 쳐서 코가 깨지고 팔이 부러지는 참사를 겪은 후 이제는 방탄 유리로 보호하고 있어서 바티칸에서 이 작품을 차분히 감상하기는 어렵다. 이번 기회에 피렌체에서 아주 가깝게 보았을 때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죽은 그리스도의 손이 ‘엄마 치맛자락’을 살짝 잡고 있는 부분이었다.
[75] 교황이 헨리8세에 ‘신앙 수호자’ 칭호… 왕은 21세기에도 신성한가
1000년 이어온 유럽의 왕실

▲엘리자베스 여왕의 대관식 - 1953년 6월 영국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열린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대관식. 이날 의례를 주관한 성공회 수장 캔터베리 대주교는 “영국은 하느님의 왕국에 더 가까워졌다”고 선언했다. 엘리자베스 2세는 70년간 영국 국민들을 단결시키는 통합의 상징으로 재위했고, 서거한 여왕의 후계자 찰스 3세가 내년 70년 만에 새 대관식을 치르게 된다. /게티이미지코리아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나 찰스 3세는 왜 국왕인가? 이들이 왕위를 차지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오늘날 사람들 대부분은 아마 동의하기도 이해하기도 어려울 테지만, 답은 이들이 신성하기 때문이다. 영국을 비롯한 유럽의 왕국들은 1000년 넘는 장구한 세월에 걸쳐 군주의 영적이고 종교적인 성격을 유지해 왔다. 특히 대관식은 군주의 신성성을 확보해 주는 중요한 행사다. 1953년에 거행한 엘리자베스 2세의 대관식 당시 의례를 주관한 영국 성공회 수장인 캔터베리 대주교 제프리 피셔는 국왕의 세속 권력이 축소된 대신 영적 권력이 훨씬 더 강화되었으며, 그로 인해 영국은 하느님의 왕국에 더 가까워졌다고 선언했다.
6세기에 기독교적 즉위식 첫 등장
일반인 관점에서는 대주교가 국왕에게 ‘성 에드워드왕의 왕관’을 씌워주는 장면이 대관식의 클라이맥스로 보일 수 있다. 왕권을 상징하는 홀(笏·scepter)을 왼손에 쥐고, 보석 444개로 꾸민 무게 2.23㎏의 순금 왕관을 머리에 얹는 장면은 분명 멋지고 인상적이다. 그렇지만 사실 국왕을 국왕답게 만들어주는 장면, 다시 말해 왕을 신성한 존재로 만들어주는 장면은 기름 부음 의식(도유식·塗油式·anointment)이다. 대주교가 신성한 기름을 발라주는 의례를 하면 신왕은 잉글랜드의 교회를 지키고 보존하겠다고 선서한다. 이 의식의 모델은 구약성서에 나오는 이스라엘 국왕의 즉위식이다. 참석자들은 ‘열왕기상’의 1장에 나오는 “제사장 사독과 선지자 나단은 솔로몬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니, 모든 사람들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신이시여 왕을 구하소서, 왕이시여 만수를 누리소서, 왕이시여 영생을 누리소서” 하는 내용을 노래한다. 근대에 들어서는 이 장면에서 1727년 헨델이 조지 2세의 대관식을 위해 작곡한 ‘제사장 사독’을 연주한다. 도유식은 국왕의 권력과 권위가 하느님에게서 유래한다고 선포하는 의미다. 이를 통해 국왕은 그리스도(이 말 자체가 ‘기름을 발라 축성된 임금, 대제관’이란 뜻이다)의 대리인과 같은 거룩한 존재가 되어 정의롭게 나라를 다스리며, 또 국가와 교회의 통합성을 강화한다.
국왕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 신령한 존재라는 의식은 멀리 켈트족 전통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켈트족 왕은 용과 괴물이 상징하는 혼돈의 힘과 싸워 이기고 세계의 질서를 회복하는 존재다. 켈트 신화에서 왕은 세상의 중심인 신성한 나무에 자리 잡고 우주의 조화를 유지하는 역할을 하며, 치유와 예언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런 성격을 띠는 유럽의 군주를 ‘기적을 행하는 왕(thaumaturgic king)’이라 부른다.
기독교화가 진척되면서 이런 내용은 새로운 종교에 맞추어 변형되었다. 왕은 이제 신과 동격의 존재는 아니며 그보다는 신과 소통하는 일종의 사제와 같은 성격을 띤다. 이런 의미에서 국왕은 백성이 선출한 게 아니라 하느님에게 선택받은 존재임을 더욱 강조하게 되었다. 대관식에서 왕관을 쓰는 요소보다 신의 축복을 더 강조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기독교적 즉위식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6세기에 등장한다. 574년 콜럼바(Columba) 성인이 댈리어더 왕국(Dál Riata 혹은 Dalriada, 스코틀랜드 서부 지역에 위치해 있던 나라)의 아이단 막 가브란(Áedán mac Gabráin)의 머리에 손을 얹고 축복을 내린 것이 유럽 최초의 기독교적 즉위식 사례다. 이때 기독교 군주의 즉위는 어떤 의미였을까? 이 시대는 폭력이 넘쳐나는 무정부 시대이며, 영적·문화적으로 암흑기였다. 마치 깡패들이 날뛰듯 부족장이나 전사 귀족들이 멋대로 폭압적 행태를 일삼던 상태에서 벗어나 새로운 군주가 강력한 힘으로 통치하여 질서와 안정을 기하는 것이 훨씬 개선된 제도였다. 콜럼바 성인은 법을 통한 통치, 무엇보다 기독교적인 정의·겸손·자애의 원칙 아래 통치하는 국왕에게 기꺼이 교회의 지지를 보냈다. 반대급부로 세속 권력은 교회에 후원과 보호를 제공한다. 그리하여 교회와 국가가 서로 돕는 관계가 정립된 것이다.
중세 내내 국왕은 가톨릭교회에서 권위와 정당성의 근거를 제공받았다. 이 점은 영국에서 종교개혁이 일어나 영국 국교회가 성립된 이후에도 변함이 없고, 오히려 더 강화되어 영국 국왕은 ‘신앙의 수호자’라 불렸다. 사실 이 표현은 역설적인 면이 있다. 원래 이 타이틀은 16세기에 교황이 헨리 8세에게 부여한 것이다. 가톨릭 신앙을 철저히 지키고자 하는 의지가 참으로 가상하다고 하여 이런 명예로운 타이틀을 받았는데, 이후 헨리 8세는 자신의 이혼과 재혼 문제에 시비를 거는 교황청의 처사에 반발하여 가톨릭과 결별하고, 영국 국왕이 기독교 신앙의 최고 수장(首長)이 되는 국교회를 설립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는 ‘개신교 신앙의 보호자’가 되었다. 영국의 국왕이 신앙의 수호자라는 주장은 영국 주화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여왕의 초상과 함께 ‘DG REG FD’라는 약어가 보이는데, 이는 Deo Gratia Regina Fidei Defensor, 다시 말해 ‘신의 은총을 입은 여왕, 신앙의 수호자’라는 뜻이다.
국왕이 종교적 성격을 띠는 신성한 지배자라는 관념은 근대에 들어서도 계속 강화되었다. 제임스 1세(잉글랜드 왕으로 재위 1603-1625)는 왕권신수설, 즉 국왕의 권위는 하느님에게서 받은 신성한 힘이기 때문에 의회의 조언이나 승인 없이 자유롭게 법률이나 칙령을 제정할 수 있다는 주장을 설파했다. 이런 논리는 정치적으로 물의를 일으켰지만, 사실 국민은 적어도 국왕이 신성하다는 점에 대해서만큼은 의심하지 않았다. 내전 과정에서 참수당한 국왕 찰스 1세는 그리스도와 직접 비교되기도 하여, 군중이 죽은 왕의 목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손수건에 적시기 위해 몰려들었다. 말하자면 기독교 신앙을 위해 죽은 순교자로 대접받은 것이다.
헨리 8세, 이혼 문제로 가톨릭과 결별
교회가 왕실에 신비한 분위기나 존경의 태도를 강화해주는 것은 현대에도 마찬가지다. 대관식, 결혼식, 장례식 등을 지극히 화려하고 정교하게 만들어서 과시하는 것도 그런 맥락이다. 연구자들은 19세기 후반부터 왕실 의식이 변모했다고 말한다. 이전에는 의식이 차분하고 사적이며 일반 대중에게 널리 광고하지는 않았으나 갈수록 더 화려하고 공적이고 사람들 이목을 끄는 방식으로 변했다. 1953년 엘리자베스 2세의 대관식이 최초로 텔레비전으로 중계된 것도 중요한 변화의 계기다.
엘리자베스 2세가 서거하고 영국 즉위위원회가 찰스 3세의 왕위 승계를 공식적으로 승인했다. 내년 봄이면 새로운 영국 군주의 대관식을 보게 될 것이다. 여전히 영국 국민 다수가 군주제 유지에 찬성한다고는 하지만 왕실에 대한 애정이 예전만 못하다는 점 또한 분명하다. 왜 여전히 국왕이 존재해야 하는가 설명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세속화한 현대사회에서 국왕이 신의 지상 대리인이며 신성한 인물이라는 주장을 문자 그대로 믿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동안 왕실 인사들의 적나라한 면모를 너무 많이 접한 나머지 왕실의 신비로움은 다 증발해 버리고 말았다. 왕세자빈과 불화 끝에 이혼하고 그러는 동안 유부녀와 연인 관계를 유지한 사실 등은 평범한 사람이라면 전적으로 보호받아 마땅한 사생활에 속하겠지만, 영국을 비롯하여 영연방 15국의 원수로서 하느님의 뜻을 이 땅에 펼쳐야 할 ‘신성한 존재’로서는 결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다. 21세기에도 과연 군주는 신성한 존재로 남을 것인가? 앞으로도 계속 군주제를 유지하려면 새로운 현대적 정당성을 확보할 일이 남았다.
[중세 유럽의 왕은 그리스도와 동급?]
왕의 손길 닿으면 병이 낫는다고 믿어
국왕의 신성성을 잘 나타내는 요소는 국왕의 손길(Royal Touch)로 병을 치유한다는 믿음과 관행이다. 중세 잉글랜드와 프랑스에는 이 관행이 널리 퍼져 있었다. 국왕의 손길이 닿으면 병이 낫는다는 믿음은 곧 국왕이 그리스도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다. 특히 국왕의 손길이 가장 큰 치유력을 보인다고 믿었던 병이 연주창이다. 이 병의 실체는 경부림프선결핵(tuberculous adenitis)이다. 결핵균이 침투하여 림프선이 커지고 농양이 생기며, 여기서 생긴 고름이 피부로 터져 나오는 증세를 보인다. 연주창 환자를 만져서 병을 낫게 했다는 기록을 처음 남긴 왕은 헨리 2세(재위 1154-1189)지만, 이전 기록들로 보건대 이미 정복왕 윌리엄(재위 1066-1087)이 시행한 것으로 보인다.

▲환자 어루만져 치료하는 헨리 2세 - 헨리 2세가 연주창에 걸린 백성을 어루만져 치료하는 장면을 담은 그림.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돼 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국왕의 신성한 치유력이라는 믿음은 중세 내내 이어졌고, 종교개혁 이후에도 사그라들지 않았다. 17세기에 찰스 2세는 1660년부터 4년 동안 2만3000명의 환자를 만졌고, 다음 국왕 제임스 2세는 1685년 3월부터 12월 사이에 4422명을 만졌다. 영국에서 이 의식을 마지막으로 행했던 왕은 앤 여왕으로서 1714년의 기록이 있다. 프랑스의 루이 14세 또한 이 행사에 성심껏 참여해서 1680년 부활절 기간에만 1600명에게 은혜를 베풀었다. 물론 왕이 만져주었다고 병이 다 나은 것은 아니다. 볼테르가 지적하듯, 그토록 왕의 손길이 많이 닿았던 루이 14세의 첩이 연주창으로 죽었다는 사실이 그 점을 말해 준다.
현대인들은 물론 이런 의식을 문자 그대로 믿고 따르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여전히 비슷한 사고방식을 보이기도 한다. 예컨대 즉위 25주년 축전(silver jubilee)을 맞았던 1977년에 군중들이 엘리자베스 2세에 다가가 손을 뻗어 마치 치유를 구하는 듯한 장면이 연출되었다. 국왕의 신성한 힘에 대한 무의식적인 기억이라 할만하다.
[76] 숙종과 루이14세
천연두 휩쓴 17세기… 동서양 왕들은 걸어다니는 ‘종합병동’이었다

양(洋)의 동서를 막론하고 국왕의 몸은 그 자체로 늘 국정의 핵심 문제였다. 조정은 국왕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 지대한 노력을 기울였고, 이 과정에서 매우 많은 기록을 남겼다. 지난 시대 국왕들이 겪은 크고 작은 질병과 치료 상황에 대해 소상히 알 수 있는 이유다. 거의 같은 시기에 재위했던 조선의 숙종(1661-1720, 재위 1674-1720)과 프랑스의 루이 14세(1638-1715, 재위 1643-1715)를 건강 문제라는 관점에서 비교해 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 같다(28회 ‘루이 14세의 건강’에서 다룬 내용 일부를 간략히 다시 소개하기로 한다).
베르사유 궁정에서는 다캥(Antoine d’Aquin)과 파공(Guy-Crescent Fagon)이라는 두 명의 궁정 수석의가 수십 년 동안 국왕을 매일 진찰하고 결과를 기록하여 ‘건강일지(Le Journal de santé)’를 남겼다. 두 사람은 국왕이 아침 8시에 기상했을 때 제일 먼저 찾아와서 몸 상태를 살피고, 병세가 발견된 때에는 적절한 치료를 했으며, 이런 사실들을 상세하게 기록했다. 이 기록을 보면 루이 14세는 평생 수많은 병을 달고 산 ‘인간 종합병동’이라 할 만하다. 그런 몸으로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장수에 속하는 77년을 산 것이 신기할 정도다.
루이 14세, 좌측 상부 치아들 전부 뽑아
루이는 1647년 아홉 살에 천연두(두창)에 걸렸다. 이로 인해 얼굴에 생긴 얽은 흔적은 평생 콤플렉스로 남았다. 치아도 부실하여 1685년 치근을 잘라내는 처치를 했는데, 깨끗하게 마무리되지 않아 농양이 생기고 골염이 심해졌다. 할 수 없이 좌측 상부 치아들을 전부 발치해야 했다. 마취제가 없던 시절이니 극심한 고통을 겪은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런데 이때 발치를 담당한 사람이 너무 세게 잡아당겨서 입천장 절반이 뜯겨 나가고 종양이 생겼다. 천공(穿孔) 부분을 처리하는 방법은 벌겋게 가열한 쇠막대로 지지는 수밖에 없어서, 14차례나 입안을 지졌으나 구멍이 완전히 막히지 않았다. 그 결과 비강(鼻腔)을 통해 입과 코가 연결되었다. ‘국왕이 음료수를 마시거나 목을 헹굴 때 물이 입에서 코로 올라가 분수처럼 쏟아져 나온다’거나 ‘코에서 빨간 포도주가 흘러나왔다’고 전한다. 치아가 부실하니 소화불량이 생겼고, 이는 다시 고질적인 장염으로 발전했으며, 그 때문에 관장도 자주 해야 했다.
항문에 치루가 생겨 제거 수술도 해야 했다. 당시 의료 수준이 신통치 않으니, 아무리 왕이라 하더라도 끔찍한 칼질을 피할 수 없다. 의사는 메스로 두 번, 가위로 8번 생살을 잘라냈다. 다음 날 그런 상태로 어전회의를 주관했을 때 국왕의 이마에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혔다. 나이 들면서는 통풍과 당뇨병 증세도 심각했다. 모두 고통과 피로를 가져오는 병이다. 여기에다가 막중한 통치 부담을 안고 있으니 정신적 스트레스도 매우 컸을 터이다. “국왕께서는 나쁜 꿈에 시달리는지, 자는 도중 말하고 소리 지르고, 때로 벌떡 일어나기도 한다”는 기록을 보면 정신 건강에도 문제가 있었던 것 같다.

▲동의보감에 실린 인체해부도.
같은 시대 조선의 궁중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다.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에는 임금의 신체 상태, 약물 처방이나 투약 이후의 중상 변화 등에 대한 세밀한 기록들이 넘쳐난다. 이런 자료들에 대한 연구를 보면 숙종 또한 루이 14세와 유사하게 많은 병에 시달렸고, 그것이 왕실과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이상곤, ‘왕의 한의학’).
숙종은 평생 간 질환으로 고생했다. 15세(숙종 2년)에 처음 간염 증상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감기 증상으로 오인하여 형방패독산(荊防敗毒散)을 썼는데, 며칠 후 얼굴과 눈에 갑자기 누런색이 나타나자 의관들이 황달 증세로 진단하여 처방을 바꾸었다. 황달을 치료하는 시령탕(柴苓湯)을 쓰자 며칠 안에 누런빛이 모두 사라지고 수라와 침수(寢睡)가 원래 상태로 돌아와 완치되었다. 그렇지만 여기에서 문제가 끝난 게 아니다. 숙종은 이후에도 긴 질환 증상들을 평생 달고 살았다. 작은 일에도 흥분 잘하고 ‘애간장’을 태우며 걸핏하면 노여움이 폭발했다. 한의학에서는 이런 증상 또한 간 질환에서 비롯된 현상으로 본다고 한다. “임금의 노여움이 폭발하여 번뇌가 심해져 입에는 꾸짖는 말이 끊이지 않고, 밤이면 잠들지 못했다”는 기록이나, “마음이 답답하여 숨쉬기가 곤란하고 밤새도록 번뇌가 심하여 수습할 수가 없다”는 국왕 자신의 고백이 그런 점을 말해 준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국왕은 분노조절장애 상태라 할 만하다. 신하들은 벌벌 떨며 숨을 죽일 정도로 공포에 떨었고, 임금도 스스로 인정하기를 “성질이 너그럽고 느슨하지 못하여 일이 있으면 내던져 두지를 못하고 출납하는 문서를 꼭 두세 번씩 훑어보고… 그러자니 오후에야 비로소 밥을 먹게 되고 밤중에도 잠을 자지 못했다”고 한다(숙종 29년).
숙종, 소변·대변 장애로도 고생
숙종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또 다른 병으로는 두창을 들 수 있다. 숙종 9년, 임금이 이 병에 걸리자 내의원에서 치료를 맡았는데, 별 효험이 없자 두창 전문의인 유상(柳瑺, ‘증보산림경제’를 쓴 유중림의 아버지)을 궁궐에 불렀다. 처음 탕약을 써서 병세가 완화되는 듯했으나 얼굴에 생긴 곪은 종기 때문에 증상이 다시 심해지자 처방을 바꾸어 사성회천탕(四聖回天湯)이라는 약을 썼다. 곧 열이 내리고 얼굴에서 딱지가 떨어졌다. 유상은 공로를 인정받아 동지중추부사로 두 계급 승진의 영예를 안았다. 숙종의 첫 부인인 인경왕후 김씨도 두창으로 세상을 떠났고, 왕세자와 연령군(延齡君, 숙종의 여섯째 아들)도 이 병으로 고생했다.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明聖王后) 또한 아들의 두창을 치료하려다가 병을 얻어 죽는 비운을 맞았다. 두창은 조선 후기에 많은 사람을 끔찍이 괴롭혔다. 오늘날 우리는 일본 용어인 천연두(天然痘)라는 말을 흔히 쓰지만, 과거에는 마마, 손님, 포창(疱瘡), 두창(痘瘡)이라 부른 외에 백세창(百世瘡)이라고도 했는데, 이는 죽기 전에 꼭 한 번은 치르는 병이라는 의미다.

▲숙종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기해기사계첩’ - 조선 숙종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행사 장면을 상세히 그려낸 화첩 ‘기해기사계첩’. /국립중앙박물관 e뮤지엄
숙종은 눈병으로도 고생했다. 한의학에서는 이 또한 간 질환과 관련이 있다고 풀이한다. 간의 질환에서 비롯한 화증이 ‘불의 통로’인 눈의 신경을 위축시킨다는 것이다. 숙종 43년에는 글을 보기 어려워 장지(壯紙)에 큰 글씨로 간략하게 쓰도록 시켜서 읽었다. 심지어 숙종 44년에는 혼례식을 올린 후 인사 온 왕세자 부부조차 알아보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러 크게 탄식했다.
나이 50대 중반에 이르자 온갖 병세가 더욱 악화했다. 특히 오줌이 방울방울 떨어지며 대변이 잘 나오지 않는 병세가 나타났다. 자손들과 어의들이 병 치료를 위해 수많은 약재를 구하여 바쳤다. 그렇지만 숙종 45년 10월에 아들 연령군이 사망한 후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졌고, 급기야 이듬해에 복수가 차오르는 간경화 말기 증세가 나타났다. “성상의 환부는 복부가 갈수록 더욱 팽창하여 배꼽이 불룩하게 튀어나오고, 하루에 드는 미음이나 죽의 등속이 몇 홉도 안 되었으며, 호흡이 고르지 못하고 정신이 때때로 혼수상태에 빠졌다.” 이후 한 달 만에 숙종은 세상을 떠났다.
늙고 병에 걸려 고생하다 죽는 데에는 왕이나 일반 서민이나 큰 차이가 없다. 어쩌면 구중궁궐에 갇혀 지내느라 운동 부족 상태가 되는 데다가 워낙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을 테니 국왕의 여건이 더 안 좋을 수도 있다. 국왕 한 사람에게 국사(國事)의 많은 일들이 집중될 수밖에 없으니, 무엇보다 국왕이 건강을 유지하는 것이 중차대한 일일 수밖에 없다.
[루이 14세 가문의 비극]
세자·손자·증손자 잇따라 병으로 요절… 증손자 1명 살아남아
루이 14세가 말년에 이르렀을 때 후손들의 계속된 죽음 때문에 베르사유 궁 전체가 암울한 분위기에 휩싸이곤 했다. 1711년, 루이 14세의 세자가 두창에 걸린 지 4일 만에 죽었다. 다음 해인 1712년에는 증손자인 부르고뉴 공과 부인이 일주일 간격으로 죽었다. 독살설도 제기되었으나, 증세로 보건대 당시 프랑스에 널리 퍼졌던 홍역에 감염된 것으로 보인다. 2년 뒤인 1714년, 왕의 손자인 베리 공작이 사냥 도중 사고를 당한 후 열흘 만에 사망했다. 당시 의사들은 환자의 피를 뽑아 체액의 균형을 맞추는 사혈법에 주로 의존했는데, 병에 걸려 허약해진 어린아이들에게 소독 상태가 의심스러운 바늘로 찌르는 것이 오히려 부작용을 일으켰을 가능성도 있다. 루이 14세 자신이 1715년에 죽었을 때 살아남은 자손은 증손자인 앙주 공작뿐이었다. 그가 다섯 살의 나이에 루이 15세로 즉위했다.
조선의 궁중에서도 두창이 큰 피해를 낳았다. 숙종 자신이 두창에 걸렸을 뿐 아니라 여러 사람이 이 병으로 사망했다. 숙종 6년에 첫 부인 인경왕후가 두창에 걸리자 숙종과 왕대비 명성왕후가 창경궁으로 옮기고 인경왕후는 경덕궁에 남았으나 이레 만에 사망했다. 명성왕후의 죽음 또한 이 사태와 관련이 있다. 숙종이 병에 걸리자 무당을 불러 점을 쳤는데 명성왕후에게 든 삼재(三災) 때문이라는 점괘를 받았다. 삿갓을 쓰고 소복 차림으로 물벼락을 맞으라는 무당의 말을 믿고 엄동설한에 실제 그렇게 했다가 병을 얻어 12월 5일에 사망했다.
[77] 괴물들과 싸우는 헤라클레스… 그리스 식민지 정복 과정이었다
헤라클레스의 12과업… 신화와 역사 사이

▲헤라클레스의 12과업 - 헤라클레스의 열두 과업을 새긴 조각상. 튀르키예의 유누슬라르 마을에서 발견된 이 조각상에는 네메아의 사자를 처치하는 첫 과업부터 하데스의 출입문을 지키는 머리 셋 달린 개 케르베로스를 잡아오는 마지막 과업까지의 모습이 형상화돼 있다. 그리스와 지중해 세계 각지의 괴물들을 처치하는 헤라클레스의 여정은 이웃 지역을 무력으로 침공해 식민지를 건설하는 과정을 나타낸다. /위키피디아
사자 가죽을 걸쳐 입고 커다란 몽둥이를 들고 있는 거구의 사내. 헤라클레스는 사실 밤에 길거리에서 만나면 간담이 서늘해질 인상이다. 막무가내의 힘과 육체성의 화신인 헤라클레스는 신화상에서 가장 인기 있고 사랑받는 주인공이다. 온 세상의 악당과 괴물들을 무지막지한 힘으로 부수고 나가는 정의의 사도이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 편에서 볼 때 정의의 사도지만, 맞는 편에서 보면 천하의 악당일 수밖에 없다. 과연 그가 쳐부순 적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왜 헤라클레스에게 처절하게 맞아야 했을까? 이유가 따로 있는 건 아니고, 단지 고대 그리스인들이 팽창해 나가는 지역의 주민들이기 때문이다. 헤라클레스는 고대 그리스 식민 팽창의 선두에 선 주인공이다. 상징적으로 이 신은 이방인의 세계에 힘으로 뚫고 들어가서 적을 한 방에 무너뜨리고 땅을 빼앗은 다음 그리스 문화를 전파하고 개량하는 역할을 맡아서 했다. 그가 한평생 쉴 틈 없이 세계를 돌아다니며 싸움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광기에 사로잡혀 자기 가족까지 몰살
인간은 도저히 할 수 없는 위업을 마음껏 이룰 수 있는 이유는 그가 신의 씨앗이기 때문이다. 헤라클레스는 최고 신 제우스와 인간 알크메네 사이에서 태어났다. 알크메네의 미모에 반한 제우스는 그녀의 남편 암피트리온이 전쟁터에 나간 사이에 그의 모습으로 변신하여 침실에 들었고, 결국 알크메네는 신의 자손을 잉태하게 되었다. 제우스는 기쁨에 겨워 ‘페르세우스의 후손이 미케네의 통치자가 되리라’고 정했다. 알크메네가 페르세우스의 후손이기 때문에 그런 축복을 내린 것이다. 그런데 뒤늦게 이 사실을 눈치챈 헤라(제우스의 아내인 여신)가 모든 일을 틀어놓았다. 또 다른 페르세우스의 후손 스테넬로스의 아내도 임신 중이었는데, 헤라는 알크메네의 출산은 늦추고 스테넬로스의 아들을 일곱 달 만에 빨리 나오게 하여, 결국 먼저 세상에 나온 에우리스테우스가 미케네의 왕이 되었다. 그가 바로 헤라클레스의 평생 라이벌이다.
청년 헤라클레스는 테바이의 공주 메가라를 아내로 맞아 세 아들을 얻었다. 이 첫 번째 결혼은 엄청난 비극으로 파국을 맞는다. 헤라클레스가 아내와 세 아이를 모두 죽이는 최악의 가정 폭력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어느 날 리코스라는 자가 테바이로 쳐들어와서 온 가족을 죽이려는 찰나에 헤라클레스가 돌아와 리코스를 죽였다. 그런데 이 순간 헤라클레스는 광기에 빠졌고, 자기 가족들까지 몰살했다. 헤라클레스는 광기 속에서 자신의 앞에 있는 게 리코스가 아니라 자신의 영원한 라이벌 에우리스테우스이고, 아이들과 아이 엄마는 에우리스테우스의 처자식이라고 상상했다. 그래서 활로 이 모든 사람들을 처단해 버린 것이다.

▲헤라클레스가 사자와 싸우는 모습을 화폭에 담은 페테르 파울 루벤스의 그림. 열두 과업 중 첫 번째다. /앱슬리 하우스 웰링턴 컬렉션. 아칸소대
헤라클레스에 닥친 이 광기의 실체는 무엇일까? 그가 힘으로 무찔러 죽인 리코스(Lykos)는 늑대라는 뜻이다. 늑대를 죽이는 파괴적인 힘 자체도 동물적인 힘이다. 리코스를 없애는 순간 그것의 여성형 대응물인 리사(lyssa)가 덮친 것인데, 이는 곧 인간이 동물의 세계로 타락해서 폭력을 휘두르는 상태를 가리킨다. ‘극대노’ 상태에 빠지면 인간성을 상실하고 늑대로 변한다. 다시 말해 리사는 도시와 문명을 파괴하고 인간관계를 파탄 내는 무질서한 힘이다. 영웅에게는 자기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이 야만의 힘을 정화하여 그리스적 정신으로 승화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 일을 맡아서 해준 것은 지혜의 여신 아테나와 영웅 테세우스다. 제정신을 찾은 헤라클레스가 자신이 저지른 짓을 깨닫고 비탄에 잠겨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하자, 테세우스가 델포이의 신탁을 받아보라고 권한다. 신탁 내용은 미케네로 가서 에우리스테우스의 노예가 되어 그가 시키는 일들을 하라는 것이다. 에우리스테우스는 다름 아닌 헤라클레스에게 돌아갈 왕위를 빼앗은 자가 아닌가. 그는 이 기회를 이용해 늘 부담스럽고 위협감을 주던 헤라클레스에게 열 가지 고난의 과업을 부과하여 괴롭혔다. 게다가 그중 두 가지는 치사한 핑계를 대서 무효 선언한 후 두 가지를 더 부과한다. 이것이 유명한 헤라클레스의 12과업이다.
그리스와 지중해 세계 각지의 괴물들을 처치하는 이 흥미진진한 모험은 실상 폭력적으로 이웃 지역에 쳐들어가서 식민지를 건설하는 과정을 나타낸다. 이 영웅담들이 벌어지는 공간을 추적해 보자.
네메아(Nemea, 펠로폰네소스 반도 북동쪽)의 사자와 레르네(Lerne, 펠로폰네소스 반도 중남부, 아르고스만 근처)의 머리가 아홉 개의 용 히드라를 죽이는 첫 번째와 두 번째 과업은 모두 펠로폰네소스 지역 내부의 골칫거리를 해결한 일들이다. 그 다음 세 번째부터 여섯 번째까지 일들은 펠로폰네소스반도 북부와 중앙부를 무대로 한 일들로서, 제법 먼 곳에서 일어났다. 에리만토스(Erymanthos, 그리스 서부 지역)의 거대한 멧돼지 죽이기, 아르테미스 여신이 보호하는 케리네이아(Keryneia, 그리스 서부 아카이아 지역)의 암사슴을 산 채로 잡아오기, 스팀팔로스 호수의 괴조(怪鳥)들을 퇴치하기, 올림피아에 위치한 아우게이아스 왕의 축사를 청소하기 같은 일들이 그것이다.
그리스인의 해상 활동과 일치
그다음 일곱 번째부터 열 번째까지 과업은 그리스 세계를 떠나 훨씬 먼 곳을 무대로 한다. 크레타의 황소를 잡아오기, 트라케의 왕 디오메데스의 사나운 식인 말들을 사로잡아 오기, 아마조네스(흑해 남쪽 지방)의 여왕 히폴리테의 허리띠를 가져오기, 에리테이아(Erytheia, 지중해 서쪽 끝에 위치한 공상의 섬)의 괴물 게리온의 소를 산 채로 잡기 등이 그것들이다. 마지막 남은 두 번의 과업은 아주 먼 상상의 나라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열한 번째 과업은 헤스페리데스(Hesperides, ‘저녁의 딸들’로 불리는 서쪽 나라 님프)의 정원에서 황금 사과를 훔쳐 오는 일인데, 이를 하기 위해서는 우선 리비아에서 길목을 지키는 거인 안타이오스와 싸워야 한다. 열두 번째 과업은 저승 세계인 하데스 왕국의 출입문을 지키는 머리 셋 달린 개 케르베로스를 잡아 오는 것이다. 이 마지막 과업까지 다 완수한 후 헤라클레스는 다시 자유의 몸이 된다.

열두 과업의 수행은 그리스 본토의 핵심 지역으로부터 점차 지중해 주변의 먼 지역으로 퍼져 간다. 이는 그리스인들의 해상 활동이 지중해 각 지역으로 확산하고 식민화가 진행되는 현상을 나타낸다. 이방인의 세계를 탐험하고 그 안으로 뚫고 들어가는 헤라클레스는 속성상 중간 존재다. 자신이 스스로 야만적 광기를 정화했듯, 우선 상대방 세계에 힘으로 뚫고 들어가서 그리스의 고상한 가치를 전파하며 그리스 세계로 만들어간다는 상징이다. 폭력적 인물이면서 중재자, 힘으로 문제를 강제 해결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식이다.
그런 점에서 그의 이름부터 의미심장하다. 헤라클레스(Heracles)는 hera(영웅)와 cles(신)가 합쳐진 것이니, 인간 영웅이면서 신이 된 인물, 인간의 몸에서 태어났으나 결국 불멸의 신의 지위로 격상하여 올라간 존재다. 그의 죽음이 이런 점을 명료하게 말해준다. 그의 두 번째 아내 데이아네이라는 계략에 빠져서 히드라의 독 성분이 묻어 있는 옷을 남편 헤라클레스에게 입혔다. 독이 헤라클레스의 몸을 파고들자 온몸이 불이 붙는 듯했다. 최후가 다가온 것을 직감한 헤라클레스는 불타는 고통 속에서도 자신의 시신을 화장할 장작 더미를 쌓고 그 위로 올라가 아들에게 불을 붙이라고 지시했다. 왜 헤라클레스는 매장이 아니라 반드시 화장을 해야 했을까? 그의 혼이 하늘로 올라가야 하기 때문이다. 불 속에서 인간적인 부분들은 타서 없어지고 신성 부분만 남은 헤라클레스는 올림포스로 승천했다.
[여전사의 나라로]
헤라클레스 기운받은 아마조네스 여전사들 힘이 더욱 강력해져
신화는 고정된 게 아니라 여러 판본이 있다. 아마조네스를 찾아가는 모험담 또한 여러 종류의 이야기가 전한다. 그 중에선 선정성이 두드러진 판본도 있다. 이번 임무를 수행하려고 길을 떠날 때 우연히 아테네의 영웅 테세우스가 헤라클레스를 만나 동행하게 되었다. 두 영웅이 여인들의 나라에 도착했을 때 여왕 히폴리테는 테세우스의 용모에 반했다. 여왕은 자신의 욕망을 위해 흥미로운 제안을 한다. 헤라클레스는 아마조네스의 여성 50명을 만족시켜 주어야 하며 그 기간 동안 자신이 테세우스와 동거하기로 하고, 그런 후에 자신의 허리띠를 주겠다는 것이다. 헤라클레스가 이 임무를 완수하려면 적어도 두어 달은 족히 걸릴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헤라클레스의 스태미나를 모르고 한 말이었다. 하룻밤이 지나고 테세우스와 히폴리테가 정답게 아침 식사를 하려는데 헤라클레스가 나타났다. 50명을 상대하는 일을 다했으니 빨리 허리띠를 내놓으라는 것이다. 그 후 헤라클레스의 기운을 타고난 자손을 얻은 아마조네스의 여전사들은 더욱 힘이 강력해졌다.
[78] [上] 아메리카의 작물, 세계의 입맛을 바꾸다
500년전 아즈텍 사람들의 식탁은 유럽보다 풍성했다

▲멕시코 대표화가' 디에고 리베라가 그린 아즈텍 제국 - 멕시코 출신의 세계적인 화가 디에고 리베라(1886~1957)가 아즈텍 제국의 전성기 수도 테노치티틀란 사람들의 생활상을 그린 그림. 사람들로 북적이는 시장에서 현지인들이 재배한 토마토와 옥수수 등의 작물을 사고파는 모습이 묘사돼있다. 아즈텍인들이 일상적으로 먹던 이들 작물은 유럽으로 건너와 서양 음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식재료가 됐으며, 나중에는 전 세계인의 식생활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이 벽화는 멕시코 대통령궁에 있다. /위키피디아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이후 세계사의 큰 흐름들이 변했다. 그 가운데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세계인들의 입맛을 바꾸어놓았다는 점이다. 아메리카 주민들은 놀라울 정도로 다양한 작물을 재배하고 있었는데, 이것이 세계 각지에 전해져 새로운 음식들이 만들어졌다. 옥수수, 감자, 고구마, 호박, 토마토, 가지, 고추, 담배, 아보카도, 바닐라, 코코아(초콜릿) 등의 작물이 모두 아메리카산이다. 이런 식재료들이 없다면 이탈리아의 피자, 벨기에의 감자튀김, 영국의 피시앤드칩스, 그리고 한국의 김치는 오늘날 분명 다른 맛이든지 아예 존재하지 않았을 터이다.
1519년, 코르테스가 지휘하는 에스파냐 정복자들이 오늘날 멕시코에 해당하는 아스텍 제국으로 진격해 들어갔을 때 이들을 놀라게 한 것은 궁성과 신전만이 아니었다. 제국의 수도 테노치티틀란은 유럽 어느 도시보다도 더 크고 번성했다. 후일 정복 연대기를 쓴 베르날 디아스(Bernal Diaz del Castïllo)는 틀라텔롤코(Tlatelolco) 시장을 보고 “중국이나 오리엔트 세계와 겨눌 수 있는 세계 최대 시장 중 하나”라고 말했다. 그들은 처음 접하는 다양한 작물들, 파인애플, 망고, 파파야 같은 과일들, 역시 처음 보는 칠면조 같은 동물들 앞에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아메리카 대륙은 기후대가 다양한 데다가 높은 산맥의 경사면을 따라 올라가며 고도가 달라질 때마다 식생대가 달라져 식물 종이 매우 다양하다. 자연히 이곳 주민들은 선사시대부터 지극히 다양한 식용 작물과 약용 작물들을 재배할 수 있었다.
이런 식물들을 재료로 한 다양한 조리 전통도 발전했다. 아스텍인들은 이전 시대에 살았던 테오티우아칸이나 톨텍 주민들의 전통을 수용한 데다가 광대한 주변 지역 주민들의 문화 또한 받아들였다. 그 결과 16세기에 멕시코 지역 주민들은 유럽인보다 훨씬 풍부하고 균형 잡힌 식단을 향유하고 있었다. 옥수수, 토마토, 호박, 고추 등의 기본 재료에다가 새, 멧돼지, 오리, 거위, 개구리, 올챙이, 여기에 더해 각종 구근 식물, 식용 꽃, 해초류, 식용 곤충 등 실로 다양한 식재료를 보유했고, 색깔을 맞춘 소스들을 사용하는 아주 세련된 조리를 했다. 조만간 이런 다양한 작물들과 조리법이 유럽과 전 세계로 확산했다.

▲16세기 중남미를 탐험했던 프랑스 성직자 앙드레 테베가 그린 것으로 알려진 몬테수마 황제의 모습. /위키피디아
한두 가지 사례를 보자. 토마토는 멕시코 고원과 안데스 산지가 원산지이다. 나우아틀(Nahuatl)어의 ‘토마틀(tomatl)’ 혹은 ‘히토마트(jitomate)’가 토마토라는 말로 변했을 것이다. 아메리카 주민들은 고추를 함께 사용하여 토마토 소스를 만들어 음식에 맛을 냈다. 토마토는 콜럼버스와 동시대에 이미 에스파냐에 들어왔다. 처음에는 주로 관상용으로 재배했지만, 이후 나폴리와 제노바를 통해 이탈리아로 들어갔고 결국 이 나라 요리의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았다. 이탈리아인들은 이 작물을 ‘포마도로(poma d’oro, 황금의 사과)’라고 불렀다가 이 말이 변하여 오늘날 토마토를 가리키는 단어인 포모도로(pomodoro)가 되었다.
옥수수는 오래 전부타 아메리카 대륙 전체에서 재배해 왔다. 기원전 1000년 경 주민들이 옥수수 가루로 오늘날 토르티야와 비슷한 음식을 만들어 먹었다는 사실도 확인되었다. 옥수수가 아메리카 문명 내에서 매우 중요한 작물이라는 것은 마야의 ‘포폴 부(Popol Vuh)’ 같은 신화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신은 첫 번째 인간을 진흙으로 만들었는데 홍수 때 파괴되었고, 두 번째 인간은 나무로 만들었는데 강한 비바람에 해체되었으나, 흰 옥수수 죽으로 만든 세 번째 인간은 지금까지 잘 생존해 있다는 설명이다. 아메리카 주민들의 기본 음식이었던 옥수수는 유럽에 들어온 후 곧바로 주식의 자리를 차지하지는 못하고 동물 사료로 사용되었다가 바스크 지역부터 사람이 먹는 음식 재료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새로운 먹거리를 곧바로 수용하지는 않으려 한다. 당연한 일이지만 처음 경험하는 기이한 맛의 식재료를 접하면 이런 것들이 몸에 나쁜 영향을 끼치지는 않을지 의심하게 된다. 중세와 근대 초 유럽 의학은 체액들 간 균형으로 인체의 건강을 설명했는데, 신대륙에서 들어온 음식물은 균형을 깰 위험이 있다고 판단했다. 기독교도가 아닌 야만인들의 음식을 어떻게 믿을 수 있단 말인가. 사람들은 원래 자신에게 익숙한 방식을 고수하려는 경향이 있어서 이와 다른 것은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예컨대 예로부터 빵을 만들어 먹은 유럽인들에게 빵을 만들 수 없는 감자는 주식(主食)이 되기 힘들었다. 성경에서도 예수가 제자들에게 빵을 잘라주었지 구운 감자를 나누어준 적은 없지 않은가.
따라서 낯선 작물들을 수용하는 과정은 우선 기존의 익숙한 음식과 대비하는 방식으로 시작한다. 감자와 고구마는 밤 맛이 나는 커다란 순무로, 파인애플은 소나무에서 열리는 사과로, 고추는 매운맛이 한층 더 강한 후추로 이해하는 식이다. 아보카도나 카카오 같은 것은 도저히 비슷한 작물을 찾기 힘들었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고대와 중세의 문헌들에서 유사한 사례들을 찾으려 했다. 이때 어떤 작물에 대해 안 좋은 속설이 붙으면 오랫동안 확산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 예컨대 가지는 유대 음식 재료와 통하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마침 시고 강한 냄새를 띠고 있어서 독성을 띤 것으로 오해했다. 땅속에서 음흉하게 자라는 것으로 보이는 감자는 초기에 만드라고라(mandragdra, 마술적인 힘을 가진 것으로 알려진 식물)와 유사하다는 인상을 주었다. 게다가 나병을 옮긴다는 루머까지 돌았다. 일반인들이 어쩔 수 없이 감자를 받아들이고 더 나아가서 아일랜드 같은 일부 지역에서 인구 대다수를 먹여 살리는 작물이 된 데에는 심각한 기근이 한몫을 했다. 굶어죽을 바에야 그 동안 천시하던 음식이라도 먹을 수밖에 없었고, 일단 먹기 시작한 다음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주식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반면 처음에 좋은 인상을 부여받은 경우에는 확산에 훨씬 유리하다. 예컨대 고추는 중세 이래 사람들이 애타게 찾던 후추와 같은 계열의 향신료로 취급되었다.
어떤 작물이 한 사회의 농업 체제 안에 들어가고 많은 사람이 먹는 음식이 되어 안정적인 위치를 차지하기까지는 상당히 긴 시간을 요하곤 한다. 그러기까지 대개 식물원에서 자라며 옥석이 가려진다. 많은 식물학자와 화초 애호가가 호기심의 대상으로 아메리카 작물들을 키우곤 했다. 16세기 중엽에 감자는 스페인과 이탈리아, 벨기에, 독일의 식물원에서 관상용으로 길렀다. 토마토 역시 ‘황금의 사과’ 혹은 ‘사랑의 사과’로 불렸고, 프랑스에서 고추는 ‘정원의 산호(corail de jardin)’라는 멋진 별명을 얻었다. 이런 식으로 신작물이 과연 현지 풍토에 맞는지 점검을 거친 끝에 식물원에서 주변 지역으로 퍼져나간다. 고추나 토마토는 텃밭에서, 옥수수나 감자는 밭으로 가서 본격 재배되었다. 그렇지만 어떤 식물은 식물원에서 빠져나가는 데 2~3세기의 긴 시간이 걸리기도 하고 어떤 식물은 아예 못 나가는 경우도 있다.
아메리카의 많은 작물은 이와 같은 과정을 거친 후 각국의 주요 음식으로 자리 잡았다. 감자가 전해지지 않았다면 독일 사람들은 대체 무엇을 먹고 살았을까? 토마토가 전해지지 않았다면 이탈리아 사람들은 입이 심심해서 어떻게 살았을까? 유럽뿐 아니다. 아메리카 작물들은 곧 아시아와 아프리카로도 전해져 그야말로 세계의 음식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멕시코 원산의 고추가 전해지지 않았다면 오늘날 우리나라와 인도, 헝가리의 음식은 어떻게 되었을까? 고추가 세계인의 음식을 한층 맵게 만든 과정에 대해서는 다음에 살펴보기로 하자.
몬테수마의 테이블
1519년 11월 8일 아스텍 제국의 수도 테노치티틀란에 입성한 연대기 작가 베르날 디아스는 몬테수마 황제의 연회에 참석한 후 기록을 남겼다.

▲스페인 마드리드에 있는 문화·전시 공간 ‘멕시코의 집(Casa de Mexico)’에 아즈텍 몬테수마 황제 집권기의 화려한 연회 음식이 재현돼 있다. 황제의 식탁에는 각종 동식물뿐 아니라 인육까지 올라왔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황제의 음식을 위해 요리사들은 30종류 이상의 음식을 만들었다. 음식은 작은 진흙 화로 위에 올려 놓아서 식지 않도록 했다. 몬테수마를 위해서만 300접시가 넘는 음식을 준비했고, 손님들을 위해서는 1000접시가 넘는 음식을 만들었다. 식탁에는 하얀색 식탁보와 작은 수건들을 올려놓았고, 여인 4명이 그릇에 물을 가져와 황제가 손을 씻도록 했다. 식사 중에는 황금색을 칠한 일종의 문짝을 세워서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도록 하였다.... 식사 후에는 모두 2000그릇이 넘는 카카오 음료를 마셨고, 끝없이 많은 과일이 나왔다.”
다른 증인인 아귈라르 수사(Fray Francisco de Aguilar)는 이 연회에 사용된 식재료가 무엇인지 기록한다. 칠면조, 꿩, 자고새, 메추라기, 비둘기, 오리, 사슴, 멧돼지, 토끼, 애벌레, 선인장(샐러드를 만들었다), 달팽이, 메뚜기, 해조류, 게다가 인육(人肉)까지 있었다. 어느 신에게 희생을 드리느냐에 따라 노예, 젊은이, 여성 혹은 아이의 살을 골라서 요리했다고 한다.
[79] [아메리카 작물] [下] 고추의 전파
콜럼버스가 유럽에 소개한 고추… 튀르키예가 전세계 전파하다

▲콜럼버스 신대륙 상륙 -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탐험대 일행이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뒤 원주민 타이노인들과 만나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 화가 겸 저술가 테오도르 디 브라이가 그린 1594년 판화가 원작이다. 콜럼버스는 아메리카 대륙을 탐험하면서 일지에 현지인들이 재배하는 작물에 대한 기록을 남겼는데, 이것이 고추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다. 고추는 아시아와 유럽 등으로 전파되며 전 세계인의 입맛과 음식을 바꿔 놓은 작물이 됐다. /미국 국립 의학 도서관
1493년 1월 15일, 아메리카 대륙의 에스파뇰라 섬을 탐험하던 콜럼버스는 일지에 이런 기록을 남겼다. “이곳에서는 아히(aji)라는 값진 식물을 많이 재배한다. 사람들은 이 식물이 건강에 좋다고 생각해서 식사 때마다 반드시 챙겨 먹는다. 매년 선박 50척 정도 가득 이 식물을 실어 나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고추에 관한 최초의 기록이다.
고추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기원전 7000년부터 자연산을 거두어 먹었고, 그로부터 몇 세기 뒤부터 경작해 오던 작물이다. 원산지가 볼리비아 산지인지 혹은 멕시코인지 100% 정확하지는 않으나, 아메리카 대륙 각지로 퍼져 일상적으로 애용하는 음식 재료가 되었다. 15세기 말부터 유럽인들이 이 작물을 세계 각지로 전파했다. 이전 시대에 전 세계적으로 널리 보급된 향신료는 후추나 정향처럼 대개 아시아 산물이었는데, 이제 고추와 바닐라, 올스파이스 같은 아메리카산 향신료들이 더해져 세계인의 입맛을 바꾸어놓았다. 현재 세계 인구의 4분의 1이 매운 고추를 즐겨 먹는다.
세계 인구 4분의 1이 고추 즐겨 먹어
에스파냐 출신 선원과 상인들이 고추를 본국으로 가지고 간 후 이탈리아 일부 지역과 프랑스 남부 지역으로 전해졌다. 그렇지만 이런 지역 사람들이 고추를 즐겨 먹지는 않았다. 당시 유럽에서는 매운맛보다는 버터를 많이 사용하는 부드럽고 순한 맛의 음식들이 확산 중이었다. 프랑스 요리가 그런 흐름의 정점을 차지한다. 서유럽에서 고추는 음식 재료로는 제한적으로 사용되었을 뿐이고, 식물원에서 관상용으로 인기를 끌었다. 그런데 레온하르트 푹스(Leonhard Fuchs)라는 식물학자는 ‘식물사’(1549)에서 얼마 전부터 독일 각지에서 고추를 기르고 있다고 기술하면서, 놀랍게도 이 작물의 원산지를 인도의 콜카타라고 잘못 소개한다. 왜 그럴까? 에스파냐에서 동유럽 방향으로, 더 나아가서 세계 각지로 고추를 전파했으리라고 잘못 생각하기 쉽지만, 실상은 전혀 엉뚱한 곳으로부터 전해졌을 수 있다. 작물의 전파는 통상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한 경로를 거치게 마련이다. 사실 전 세계 각지로 고추를 전달한 사람들은 에스파냐인이 아니라 포르투갈인들이었다.

▲에스파냐의 고추가 들어간 소시지 - 에스파냐식 전통 소시지인 초리조. 돼지고기를 다진 뒤 고추와 소금, 마늘 등의 양념을 넣고 말려서 만들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포르투갈 상인과 선원이 고추를 처음 접했을 가능성이 큰 곳으로는 브라질 동쪽 해안 혹은 파나마 지역을 든다. 이들은 아프리카와 대서양상의 섬들에 세운 자신들의 교역 거점들에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 옥수수 같은 아메리카 신작물을 전파했고, 이때 고추가 따라 들어갔을 것으로 보인다. 이어서 아시아의 교역 지점들로도 전달되었는데, 특히 인도의 고아(Goa)가 세계적 확산의 중요한 중간 거점이 되었다. 이곳으로부터 서쪽으로는 튀르키예로, 동쪽으로는 믈라카해협을 넘어 동남아시아와 동아시아로 고추가 확산했다.
특기할 곳이 튀르키예의 아나톨리아 지역이다. 옥수수, 콩류, 호박, 고추 등 아메리카의 작물들이 광범위하게 전파되는 소위 ‘콜럼버스 교환 현상’에서 에스파냐 지역보다도 아나톨리아 지역이 오히려 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를 ‘아나톨리아 미스터리(Anatolian mystery)’ 현상이라고 부른다. 아마도 아시아 내 해상·육상 교역로들을 통해 물품이 오가는 과정에서 인도에서 튀르키예로 작물들이 전달되었든지, 혹은 오스만제국 병사들이 인도를 공격하던 중 고추 같은 작물들을 얻어서 들여왔을 수도 있다. 아메리카 작물들은 아나톨리아 지역을 제2의 고향 삼아 번성했다. 이후 오스만제국 군이 오스트리아의 빈을 향해 공격하는 과정에서 다시 튀르키예로부터 발칸 지역과 헝가리로 고추가 확산했다. 고추는 특히 헝가리에서 사랑받는 작물이 되었다. 이곳에서는 파프리카 종 고추가 개발되었고, 이것을 활용한 굴라시 수프와 같은 국민 음식이 탄생했다.

▲튀르키예 고추 - 튀르키예 샨르우르파의 한 전통시장에서 고추로 만든 향신료 가루를 높이 쌓아놓고 팔고 있다. 튀르키예는 과거 아메리카 원산 작물의 주요 집산지 역할을 했다. /게티이미지 코리아
다른 한편 인도로부터 동쪽으로도 고추가 확산해 갔다. 중국, 구자라트, 아랍 상인들이 교역 활동 과정에서 믈라카와 인도네시아로 확산시켰고, 다시 중국과 조선, 일본 방향으로 퍼져갔다. 그 구체적 경로가 모두 명쾌하게 밝혀진 건 아니다. 연구자들이 하나같이 강조하는 점은 신작물들의 전파 과정이 여러 시기에 여러 차례에 걸쳐 복잡다기한 경로를 거쳤으리라는 점이다.
한반도에 고추가 유입된 과정도 마찬가지다. 이 문제에 대해서도 다양한 설들이 제시되어 있다. 우리나라 옛 문헌들은 대개 일본을 거쳐 한반도에 들어왔다고 기술한다. 예컨대 ‘지봉유설(芝峯類說·1613)’은 “남만초는 센 독이 있는데 왜국(倭國)에서 처음 들어왔다. 그래서 민간에서는 왜개자라 부른다. 때로 이것을 심은 술집에서 그 맹렬한 맛을 이용해 간혹 소주에 타서 팔고 있는데 이를 마신 자는 대부분 죽었다”고 한다. 사실 남만초(南蠻椒·동남아시아 지역에서 유입된 매운 양념 풀)와 왜개자(倭芥子·일본에서 들어온 겨자)라는 두 명칭을 거론한다는 것은 어디에서 들어온 건지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다는 의미다. 반면 일본에서는 오히려 조선에서 들어왔다고 기록한다. ‘대화본초(大和本草·1709)’에서는 “옛날 일본에는 번초(蕃椒)가 없었는데, 조선을 칠 때 그 나라에서 종자를 가져왔다고 한다. 그래서 그 이름을 고려호초(高麗胡椒)라 부른다”고 하고 있다. 조선은 일본에서 들어왔다고 하고, 일본은 조선에서 들어왔다고 기록한 것이다. 아마도 두 나라 모두 고추가 이미 전해진 상태에서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이후 광범위하게 보급되는 과정에서 양국 사람들 모두 전쟁 중 상대편 국가에서 들어온 것으로 믿게 된 듯하다.

▲중남미의 고추 요리 - 중남미의 전통 요리 ‘아히 데 가이나(Aji de gallina)’. 올리브와 달걀, 닭고기, 밥과 고추 등이 재료다. 고추는 원산지 아메리카에서도 중요한 식자재였다. /플리커 Discover Corps
‘성호사설(星湖僿說)’에 의하면 광해조부터 고추가 크게 보급되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처음부터 고추가 큰 환영을 받은 것은 아니다. 매운맛을 내는 달래, 마늘, 파, 생강, 천초 등이 이미 있었기 때문이다. 고추가 매운맛을 내는 재료로 굳건히 자리를 잡은 것은 대체로 18세기부터의 일로 보인다. 이 시기에 고추를 사용하는 음식 관련 기록들이 많이 보일 뿐 아니라, 비로소 고추라는 이름이 정착되었다.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번초(蕃椒)를 향명(鄕名)으로 고초(苦草)라 한다”는 언급이 이를 말해 준다. 이전까지 ‘고초’는 산초나 후추를 가리키는 용어였는데, 일반인들이 이제 오늘날의 고추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하기에 이른 것이다.
조선엔 광해군 무렵부터 널리 퍼져
김치의 발전 과정을 보아도 오랫동안 고추가 거의 쓰이지 않았다. 기록상으로는 18세기 중엽에 가서야 김치에 고추가 들어간다. 그러므로 사실 과거 김치는 ‘매운맛’보다는 ‘순한 맛’이었다. 우리 음식 전반에 고추가 압도적으로 많이 쓰이게 된 것은 일제감정기였다. 이 시대 신문기사에 “이렇게 자극성이 많은 고추를 두세 살 먹은 어린아이 적부터 사용하야 이것이 없이는 먹을 수 없이 중독이 되며 습관이 되어버립니다” 하고 한탄하는 글이 나올 지경이다. 갈수록 맛이 강해지는 현상은 현재에도 진행 중인 것으로 보인다. 낙지 요리 식당 주인의 인터뷰를 보면 십여 년 전보다도 현재 훨씬 매운 음식을 내야 손님들이 만족한다고 한다.
아메리카 원산의 고추가 보급되어 많은 나라의 음식이 매워진 현상은 우리가 예민하게 주목하지는 않았으나 사실 근대 세계에서 일어난 실로 중요한 현상이다. 물론 세계적으로 매운맛이 확산하는 가운데에도 각 나라마다 색다른 매운 음식을 창안해 냈다. 우리는 불같이 매운 인도 음식과도 다르고 비교적 순한 정도로 매운 헝가리 음식과도 다른 우리 나름의 독특한 매운 음식을 만들어냈다.
[김치의 변화]
처음엔 심심한 백김치… 18세기부터 고추 사용
김치의 재료와 만드는 방식은 시대에 따라 다르게 변화해 왔다.
조선시대 전기의 자료인 ‘수운잡방(需雲雜方·1481~1552)’에는 김치 재료로 무와 가지가 가장 보편적이고 동아도 비교적 널리 쓰였으나 배추는 잘 보이지 않는다. 양념은 단순해서 향신료로 천초와 할미꽃(白頭翁), 생강, 마늘 등이 보이지만, 아직 고추가 쓰이지 않았다. 조선 중기 자료인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1766)’에 이르면 김치 재료로 이전에는 없던 미나리와 갓이 쓰이고, 무엇보다 배추가 등장하지만 아직까지도 많이 쓰인 것은 아니다. 양념으로는 파, 마늘, 생강, 청각, 거목, 천초 외에 드디어 고추가 보인다. 조선 후기 자료인 ‘규합총서(閨閤叢書·1809)’를 보면 김치 재료로 무가 주로 쓰이고 오이, 가지, 동아 역시 많이 쓰이지만 무엇보다 배추가 증가하는 게 눈에 띈다. 대부분의 김치에 고추가 쓰인다는 점도 중요하다.
이러한 발전 과정을 보면 조선시대 중기를 지나면서 재료가 다양화·고급화되는 중이고 무엇보다 배추와 고추가 더 많이 쓰인다는 점을 확인하게 된다. 배추는 이전 시대에도 없지는 않았으나 19세기 말쯤 되어서야 오늘날과 같은 좋은 배추를 재배하게 되었다(예컨대 서울의 방아다리 배추가 이름을 날린 좋은 품종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가장 많이 먹는 배추 통김치는 ‘단군 이래’ 먹던 게 아니라 아메리카 원산의 고추가 들어오고 중국산 배추 종이 개량된 이후인 19세기 말 이후 진정 보편화된 역사적 산물이다.
[80] 19세기 근대 축구의 탄생
전진패스 안되고, 핸들링 허용… 초기엔 英동네마다 룰 달랐다

▲부상 선수 속출했던 19세기 사립학교의 축구 - 영국 런던 북서부에 자리 잡은 유서 깊은 명문 사립학교 해로스쿨 학생들이 운동장에서 축구 경기를 하는 모습을 화폭에 담은 화가 토머스 헨리(1852~1937)의 그림. 19세기 중반부터 영국의 사립학교들은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믿음으로 격렬한 스포츠의 대명사인 축구를 교육 수단으로 적극 권장했다. 당시 운동장에서는 학생들이 과격하게 경기하다 중상을 입는 일도 속출했다. 이런 운동 스타일은 졸업생들에게는 소중한 전통으로 인식됐다. /위키피디아
오늘날 세계인이 열광하는 축구는 언제 시작됐을까?
축구의 기원이라고 볼 만한 다양한 공놀이는 고대 이래 세계 각지에 존재했으나 현재 월드컵 경기에서 보는 현대식 축구는 19세기 영국에서 완성되었다. 1863년 10월 26일, 런던의 프리메이슨즈 태번(Freemasons’ Tavern)이라는 선술집에 12명의 축구 클럽 대표들이 모여 ‘잉글랜드·웨일스 축구협회(Football Association, 약칭 FA)’를 결성하고 통합 축구 규칙을 작성한 것을 결정적 계기로 친다. 이렇게 합의된 규칙에 따라 운영하는 경기를 ‘협회 축구(Association Football)’라고 불렀는데, 이때 Association이라는 단어의 중간 부분을 따와 사커(soccer)라는 말이 만들어졌다.
이상이 통상 거론하는 현대 축구의 기원에 관한 정설이다. 그런데 당시 작성된 협회 규칙을 보면 이상한 점들이 한둘이 아니다. 손으로 공을 잡는 핸들링이 허용되었고, 골대에 크로스바가 없으며, 터치다운 규칙도 있고, 무엇보다 전진 패스가 아예 허용되지 않았다. 이러면 축구가 아니라 차라리 럭비 경기와 유사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다시 말해 협회 창설은 현대 축구를 완전히 정립시켰다기보다는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하나의 계기였을 뿐이다.
귀족들은 공 돌리는걸 비겁하게 생각
축구의 발전에 대해 과거에 자주 거론한 해석은 엘리트층이 주도하는 일종의 ‘문명화 과정(civilizing process)’이라는 견해다. 중세 이래 이어져 온 민속 축구는 규칙도 거의 없는 상태로 많은 사람이 골목길이나 벌판에서 거칠게 부딪치는 난장판의 놀이였다는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에서 상스러운 하인을 욕할 때 ‘축구나 하는 천한 놈’이라고 비난하는 식이다. 그런데 산업혁명 시기에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이런 식의 거친 놀이는 사라져가고, 대신 이튼, 해로, 윈체스터 같은 명문 사립학교(Public Schools라고 부르지만 실제 사립)에서 규칙을 지키며 정정당당하게 승부를 겨루는 경기로 발전했다. 각각의 학교는 자신들만의 고유한 경기 규칙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사립학교 졸업생들이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만나 함께 축구를 하고자 했을 때 출신 학교와 상관없이 모두 따를 수 있는 공동의 규칙이 필요했다. 그 결과가 1863년 가을 축구협회 결성과 협회 규칙의 제정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엘리트층에 의해 깨끗하게 정돈된 형태의 축구가 정립된 다음 노동계급에 전해졌고, 이후 대중 스포츠로 발전했다는 것이 이런 해석이 말하는 바이다.

▲기원전 3세기 그리스의 축구공 - 에게해에 있는 그리스령 사모트라케섬에서 발굴된 기원전 3세기 축구공의 축소판 모형. 현재 축구공과 매우 비슷하다. /FIFA 박물관
그러나 최근 연구는 사뭇 다른 설명을 제공한다. 노동계급은 엘리트층이 만들어낸 결과물을 단순히 받아들인 게 아니라 훨씬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는 주장이다.
우선 중세 이래의 민속 축구에 대한 견해부터 수정할 필요가 있다. 과거에 시골 벌판이나 골목길에서 많은 사람이 무질서하게 이리저리 뛰는 ‘동네축구’를 했으리라는 것은 지레짐작에 불과하며, 실제로는 훨씬 정제된 경기를 하고 있었다. 예컨대 ‘정육점 팀’과 ‘장갑 제조업 팀’ 간의 경기를 언급한 19세기 기록에 따르면 팀당 7명의 선수들이 명확하게 규정된 운동장에서 경기를 했다. 심지어 18세기에 한 팀 6명씩 뛰는 여성 축구 경기 기록도 있다. 수십 명이 무질서하게 날뛰며 격투를 벌였으리라는 것은 오해의 산물이다.
오히려 19세기 명문 사립학교의 축구야말로 그런 격렬한 몸싸움의 대명사였다. 원래 사립학교 교장들은 축구가 ‘백정들에게나 어울리지 신사들에게는 안 맞는 놀이’라고 생각했으나, 1840년대 무렵부터 건강한 정신은 건강한 몸에서 길러진다는 ‘근육질 기독교’ 정신이 강조됨에 따라 축구를 권장하기 시작했다. 청년들이 방탕한 성욕, 특히 동성애 같은 ‘비정상적’ 욕망에 휩쓸리지 않도록 만드는 데에는 과격한 운동이 최고라고 보았다.
그 결과 학교 운동장에서는 학생들이 축구를 하다가 땅에 처박히고 여러 명에게 깔리고 심하면 다리가 부러지는 사태가 벌어졌다. 학생 시절 이런 과격한 운동을 한 경험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졸업생들은 대개 자신의 학교 전통을 고수하려 했으며, 여러 학교 규칙들을 취합하여 적당히 만들어낸 잡종 규칙에 저항했다. 따라서 1863년에 제정된 협회 규칙은 거의 채택되지 않아서 사문화될 처지에 몰렸다.
▲한나라 축국 - 중국 한나라 시기에 유래된 것으로 알려진 축국(蹴鞠) 경기 모습을 그린 풍속화. 돼지나 소의 방광에 공기를 넣어 공으로 삼았다. /위키피디아
그러는 동안 옛날식 축구는 계속 진행되고 있었다. 명문 학교와는 관련 없는 이런 사람들이 오히려 축구 규칙을 당대 사정에 맞게 조정해 갔다. 이들은 자기에게 익숙한 규칙만 고집할 것이 아니라 적절한 타협을 통해 공동의 규칙을 만드는 데 우호적이었다. 그래야만 게임이 가능하지 않겠는가. 특히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셰필드 축구 클럽이다(현재까지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축구 클럽이다). 1857년 이 클럽이 주도하여 규칙을 수정했는데, 이때 크로스바를 만들고, 코너킥과 프리킥을 도입했으며, 특히 오프사이드 위반 규칙을 완화했다. 당시 사립학교 축구에서는 상대방 진영 깊숙이 들어가 있는 동료에게 전진 패스를 하는 일은 아예 없었고, 오직 힘으로 상대방을 밀치면서 앞으로 전진하는 무력 대결을 펼쳤다. 이와 달리 셰필드 클럽의 규칙은 우리 편 공격수 앞에 상대방 선수가 한 명이라도 있으면 패스를 받는 것을 허용했다. 이런 방식의 경기가 훨씬 큰 인기를 누려서, 한 해에만 200번 가깝게 벌어졌다. 토요일에 오전 근무만 하는 반공일(半空日, half-holiday) 제도가 정착해 갔고, 그 결과 토요일 오후에 셰필드 클럽 규칙을 따르는 축구 경기가 급증했다. 시대의 대세를 무시할 수 없었던 축구협회는 새로운 오프사이드 규칙을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새로운 규칙에 잘 적응한 팀이 유리한 것은 당연하다. 특히 스코틀랜드 축구 클럽들이 앞서나갔다. 글래스고의 퀸스파크 클럽은 무모한 드리블 위주의 경기 운영 대신 ‘연합경기(combination play)’, 오늘날 용어로 이야기하면 패싱 게임(passing game)에서 뛰어난 실력을 과시했다. 축구를 일종의 유사 전투로 받아들이던 명문 학교 출신들이 보기에 이런 식으로 공을 살살 돌리는 방식은 ‘남자답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실제 경기 결과가 중요한 법, 패스를 정교하게 하는 스코틀랜드 팀이 남자답게 우격다짐만 하는 잉글랜드 팀보다 늘 좋은 결과를 얻었다. 결국 잉글랜드에서도 스코틀랜드 스타일이 확산했다. 1885년에 프로 축구팀 제도가 시작되었을 때, 블랙번 로버스, 애스턴 빌라 같은 팀들은 패싱 게임에 능한 스코틀랜드 출신 선수들을 영입했다.
▲피렌체 칼초 - 이탈리아 피렌체 지방의 민속경기 ‘칼초’ 장면을 묘사한 프랑스 삽화가 외젠 담블랑(1865~1945)의 그림. /게티이미지코리아
1883년 FA컵대회서 노동자팀이 우승
1883년 FA컵 대회 결승전이 이런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노동자 팀인 블랙번 올림픽이 이튼 학교 팀을 꺾고 우승했다. 누가 봐도 키가 10㎝가량 더 큰 엘리트 팀이 월등하게 나은 체격을 앞세워 노동자 팀을 쉽게 이길 줄 알았으나, 막상 경기를 해 보니 상대방이 요리조리 패스하는 공을 쫓아다니다 완전히 나가떨어졌고, 결국 2대1로 지고 말았다. 이제 거칠게 힘으로 밀어붙이는 차징 게임(charging game)은 정교한 패싱 게임 앞에서 상대가 되지 않았다. 셰필드, 맨체스터, 리버풀 같은 산업 도시의 노동계급 팀들이 축구의 면모를 영영 바꾸어 놓은 것이다. 자신들의 방식으로 축구에서 이길 가능성이 사라진 명문 학교 학생들은 럭비로 눈을 돌렸다.
매사에 엘리트층이 주도하여 노동계급을 세련되게 문명화시킨다고 생각하기 십상이지만, 축구 경기에서만큼은 반대로 노동계급이 엘리트층을 문명화시켰다.
[고대 동서양 모두 축구 즐겨]
중국 한나라의 축국, 로마는 하르파스툼, 멕시코에선 울라마
여러 사람이 대형을 갖춰 둥근 공을 차고 달리는 놀이 혹은 제의 행위는 세계 각지에서 찾을 수 있다. 기록상 가장 오래된 것은 중국 고대 한나라의 축국(蹴鞠)이다. 황제가 군사 훈련 목적으로 돼지나 소의 방광에 공기를 넣어 만든 공을 상대방 골에 집어넣는 경기를 시켰다고 한다. 같은 시기 로마제국에서는 하르파스툼(Harpastum)이라는 경기가 있었는데, 아마도 축구보다는 럭비와 유사한 형태였다. 이 전통이 살아남아 피렌체 지방에서 아직도 거행하는 전통 경기 칼초(calcio)가 되었다. 이 경기에서는 공을 잘 차는 것만큼이나 주먹질과 레슬링 기술이 중요한 요소였다.
아마도 가장 오래된 사례로는 멕시코 지역을 중심으로 아메리카의 광대한 지역에서 거행되었던 울라마(ulama)를 들 수 있다. 고무공을 발로 차거나 엉덩이로 튕겨서 상대방 골문에 넣는 이 경기는 기원전 3500년경부터 종교의식의 일환으로 행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