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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이야기 2022/ 이순자 여사의 증언록 - 이순자 여사가 말하는 ‘나와 全斗煥 대통령’〈상〉〈하〉

상림은내고향 2022. 12. 6. 19:31

●전두환 이야기 2022

■전두환 비망록 - 이순자 여사의 증언록

https://youtu.be/TkwyKcab1DM -  단독 인터뷰 - 1부   이순자 여사의 육성 증언 제5공화국

https://youtu.be/BwhjNf2Gj5s  -     단독 인터뷰 - 2부 / 박정희와 전두환 

https://youtu.be/vGShGuBvNhw단독 인터뷰 - 3부 / 전두환과 최규하

 

전두환 대통령의 업적을 살펴보자.

1. 박대통령 시해사건 깔끔하게 수사

2. 국보위 설치로 국난극복

3. 삼청교육대 설치로 사회악 일소

4. 연좌제 폐지

5. 구속적부심사 부활

6. 야간통행 금지 폐지

7. 칼라 TV 시대개막

8. 프로야구 개막

9. 프로축구 개막

10. 교복 자율화 시행

11. 해외여행 자율화 시행

12. 86아시안게임 유치

13. 88올림픽 유치로 국가위상 제고

14. 북괴가 제공한 수해물자 수령

15. 평화의 댐 건설

16. 최초 평화적 정권교체 실행

17. 물가안정

18. 교육혁신과 문화창달

19. 과학기술 진흥

20. 국방, 외교역량 강화

21. 영종도 신공항 건설(인천공항)

22. IT산업 육성발전

23. 임기 단임제 시행

24. 청탁배격 운동

25. 9~12% 경제 성장율 지속

26. 동구권 외교수립

27. 전국민 의료보험 확대실시

28. 사교육 금지

29. 중소기업 육성

30. 부동산 안정

-유튜브에서

 

월간조선 11월 호

■이순자 여사가 말하는 ‘나와 全斗煥 대통령’ 〈상〉 

군인 全斗煥

 

 “사단장 시절 중대장 이름 줄줄 외우고, 부하들과 육개장 파티하며 행복해한 그분”

⊙ “방금 들었던 일을 기억 못 하는 일이 자주 생기자 ‘여보, 내가 당신이 누군지 알아볼 때까지만 당신이 수고해요’”
⊙ “혈액암 말기 선고받고 연명치료 거부… 죽음 초연하게 받아들였다”
⊙ “33년 전 백담사로 떠나던 날 홀연히 떠나… 그분은 나의 영원한 동지”
⊙ “全 前 대통령, 5·18특별법으로 28일간 단식하면서 해마 손상당해 2013년 무렵부터 알츠하이머 앓기 시작”
⊙ 초급 장교 경제적 어려움 알아 이화여대 의대 진학… 얼마 전 재입학 통지 와
⊙ 12·12 한 달 후 한국외대 편입시험 치러… 연대광장에서 남편 화형식 목격

▲사진=주민욱 씨영상미디어 기자 

 

2022년 9월 29일 청명한 가을날 오후,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의 고(故) 전두환(全斗煥) 전(前) 대통령의 자택 앞 골목은 적막했다. 12·12와 5·18 관련해 검찰로부터 소환 통보를 받은 전두환 전 대통령이 1995년 12월 2일 소위 ‘골목성명’을 발표한 그 역사의 현장…. 지난해 11월 23일 전 전 대통령이 향년 90세로 작고한 뒤 5·18 관련 단체의 확성기 시위도 사라졌고, 문재인 정부 들어서면서 경비초소마저 철수시켜 썰렁한 풍광이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부인 이순자(李順子·83) 여사가 전 전 대통령 사망 1년 만에 인터뷰에 응했다. 접견실 맞은편에 걸린 《반야심경(般若心經)》 216자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 2007년 이순자 여사가 수술의 성공 여부를 장담할 수 없는 큰 수술을 받게 되자 치유를 기원하는 심정으로 쓴 것이라고 했다. 기자가 “‘이순자 할멈’이라 쓴 것이 흥미롭다”고 하자, “그이와 아들 셋 목소리가 똑같아 남자들 중 한 사람이 ‘여보’라고 부르면 여자 네 사람이 자기 여보인 줄 알고 뛴다”며 “그이가 ‘당신은 할멈이라고 할 때만 뛰라’며 그렇게 부르기 시작했다”고 했다.

 

▲연희동 자택 접견실에서 인터뷰하는 이순자 여사. 왼편에 전두환 대통령의 영정사진과 유골함, 무궁화대훈장이 보인다. 이 여사 뒤편에 보이는 대형 병풍은 전두환 대통령의 취임사를 서예로 쓴 것이다. 사진=주민욱 

 

인터뷰가 진행된 접견실은 5공화국의 ‘흔적’으로 가득했다. 이순자 여사의 뒤편 벽면 전체엔 전두환 전 대통령의 취임사를 담은 대형 액자가 압류딱지 흔적을 남긴 채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반대쪽 벽에는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 부부,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일본 총리,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찍은 사진이 걸려 있었다. 1988년 2월 24일 전 대통령이 청와대를 떠날 때, 청와대 직원들이 남긴 ‘전두환 대통령의 치적(治績)’ 액자가 기자에게 5공화국 재조명의 시대적 요구를 소리 없이 아우성치는 것 같았다.


접견실은 전두환 전 대통령의 영정 사진과 신위(神位), 그리고 유골함, 그의 회고록이 자리한 빈소(殯所)로 용도가 바뀌어 있었다. 감청색 투피스 정장 차림에 알이 굵은 진주 목걸이를 하고 나온 이 여사는 추징금 압류 후폭풍에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1997년 대법원에서 추징금 확정판결을 받으면서 25년이 넘도록 압류와 공매에 불복해 이의신청과 소송을 하면서 정신까지 피폐해졌다”면서도 4시간이 넘는 인터뷰 동안 다리를 가지런히 모은 채 전두환 대통령이 생전 앉았던 그 의자에서 그간의 쌓인 응어리를 털어놓았다.


“화장하면 사리로 나올 텐데…”

— 최근 암 수술을 받으셨다고 들었다. 현재 몸 상태는 어떠신가.
“유방암 판정을 받고 수술받게 된 날은 남편의 49재를 마친 바로 다음 날인 1월 11일이었다. 왼쪽 가슴을 완전 절제하는 수술을 받고 방사선 치료까지 받았다. 어려움을 많이 겪었지만 다시 건강한 일상생활로 돌아왔다. 각하 사면·복권되고 난 다음, 안면 신경섬유종 수술도 받았는데, 하얀 이빨처럼 생긴 섬유종을 떼어낸 걸 보시더니 ‘화장(火葬)하면 사리로 나올 텐데 아깝다’고 해서 웃었다. 평소에 농담도 그렇게 잘하셨다.”

— 응접실 입구에 걸려 있는 《반야심경》을 전 대통령이 한 자 한 자 정성 들여 쓰신 것을 보면 여사님의 건강에 무척 신경을 쓰신 것 같다.
“평생 고락을 같이해온 마누라를 잃을 수도 있겠다 싶어 정신없이 반야심경을 세필로 썼다고 하더라. 2007년 3월의 일이다. 하마터면 그때 그이를 홀로 남겨두고 이 세상을 하직할 뻔했다. 침실 바로 옆 화장실까지 가는 일도 힘들게 느껴졌으니까. 두 다리가 아파 병원을 찾았는데, 대동맥이 막혀 코어텍스 성분으로 된 인공혈관으로 갈아 끼워야 한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릴 들었다. 3월 29일 1차 시술을 받고, 이튿날 2시간30분에 걸친 대수술을 받은 후 무균실에서 열흘을 보낸 후 겨우 퇴원했다.”

— 지난해 11월 23일 서거한 전 대통령을 유골함에 담아 현재 10개월째 자택에 모시고 있다.
“돌아가시기 5년 전 발간한 회고록에서 ‘만약 통일의 날을 맞이하기 전에 내 생이 끝난다면 북녘땅이 바라보이는 전방의 어느 고지에 백골로라도 남아 조국이 통일되는 그날을 맞고 싶다’는 유언을 남겼다. 하지만 전방 고지는 군(軍) 관할 지역이고 코로나19로 인해 민간인 출입이 통제되고 있어 장지(葬地)는 시간을 갖고 찾기로 했다. 1년 안에 장지에 모실 수 있게 될 것이라 막연히 생각했는데, 고인에게 낯익은 장소를 찾아내는 일이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무리 애를 쓴다 해도 1주기 안에 찾기는 어려울 것 같아 애태우고 있다. 잠정적으로 집에 모시면서 유지(遺旨)를 잘 받드는 길을 모색해보기로 했다.”


큰며느리에게 ‘우리 집에 시집와 고생했다’

— 전 대통령이 회고록에서 5·18 헬기사격을 증언한 조비오 신부를 비판한 혐의(사자명예훼손)로 재판을 받았다. 항소심 첫 공판이 열리던 2021년 8월 9일, 사람들은 연희동 대문을 열고 나오는 전 대통령의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5·18특별법으로 28일간 단식하면서 해마 손상을 당해 2013년 무렵부터 알츠하이머를 앓으셨다. 그래도 평소 활기차고 강한 모습이셨는데, 재판받으러 갈 때 몸무게가 12kg이나 빠지고 병색이 짙은 모습으로 나타나자 대역(代役) 아니냐고 의심하는 사람이 있었을 정도다. 1심 재판 때에도 급성 탈장(脫腸)에 걸려 당장 수술받지 않으면 큰일 날 수 있다는 담당 의사의 경고를 받았지만, 재판에 출석하고 다음 날 입원해 급히 수술을 받았다. 항소심 재판 때도 흉통과 가슴 답답함을 호소하면서도 끝까지 재판정에 앉아 버틴 연후에 병원에 입원했는데, 의사가 혈액암(일명 다발성 골수종)이라고 하더라.”

 

— 치료가 불가능했나.
“혈액암 말기였다. 생명 연장을 위한 항암치료나 연명치료를 거부하고 남은 생을 그냥 가족과 함께 보내고 싶다 하셨다. 항암제는 투여하지 않았고, 보험 적용이 되는 경구용약(먹는 약)만 드셨다. 죽음을 초연하게 받아들이고 나선 맨날 콧노래 부르시고 즐거워하셨다. 큰아들(전재국) 집에 가셔도 밖에 경호관 기다린다며 빨리 나오시던 분이 돌아가시기 전날엔 커피까지 드시고 큰며느리에게 ‘우리 집에 시집와 고생했다’고 하시더라.”


“편안한 모습으로 내 품에 안겨 세상 떠나”

— 전두환 대통령의 마지막 모습을 들려달라.
“방금 들었던 일을 기억 못 하는 일이 자주 생기자 ‘여보, 내가 당신이 누군지 알아볼 때까지만 당신이 수고해요’라며 멋쩍어하는 그분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모든 것 다 잊어버려도 나만 잊지 마세요. 눈이 잘 안 보이면 안경을 쓰면 되고, 귀가 잘 안 들리면 보청기를 끼면 되듯, 기억이 잘 안 나시면 제가 대신 기억해드리면 되잖아요.’ 그러곤 이 세상 모든 것을 관장하시는 하느님께 기도드렸다. ‘하루라도 남편보다 더 오래 살아 그분의 눈이 되고 귀가 될 수 있게 해달라’고. 결국 나의 간절한 기도가 통했던 것 같다. 그분은 혈액암이라는 끔찍한 선고를 받았지만, 식사와 목욕도 혼자 하셨고, 오래 고통받는 일 없이 편안한 모습으로 내 품에 안겨 세상을 떠나셨다. 청와대 들어갔다가 나와 격동의 삶을 살다 보니 국내 여행 한 번 제대로 못 했다며, 그동안 고생한 마누라와 우리나라 구석구석 다녀보고 싶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 돌아가시기 전에 식사는 좀 하셨나.
“입맛이 없어 음식에 손도 못 대셨다. 그때도 준비한 사람의 노고를 생각해 ‘준비하느라 고생했을 텐데 먹지 못해 미안하구만’이라면서 우유나 뉴케어(환자용 영양식) 몇 모금이라도 마셔보려 애쓰셨다. 먼저 가신 시어머님을 닮아 고맙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시던 분, 정말 좋은 곳으로 가신 것만 같은 얼굴로 침대 위에 누워계시는데… 돌아가셨다는 사실도, 다시는 못 올 곳으로 영영 가셨다는 사실도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징검다리를 손잡고 건너는 부부

▲2017년 출간한 이순자 여사의 자서전 《당신은 외롭지 않다》(자작나무숲)의 표지 사진. 이순자 여사는 촬영자는 알 수 없지만 전 대통령과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사진이라고 했다. 사진=이순자 여사

 

— 언론들이 전 대통령의 사망 소식을 전하면서 전두환, 33년 전 백담사로 떠나던 그날 돌아가셨다고 했다.
“우리 가족에겐 잊으래야 잊을 수 없는 날인 11월 23일, 그분은 이 세상과 작별하셨다. 누가 무슨 소리를 해도 묵묵히 참아내고 한마디 대꾸조차 하지 않고 살아내신 분. 하필이면 생각하기에도 서러운 그날 훌쩍 우리 곁을 떠나면서 남편은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렇게 살아내는 것이 평화적 정부 이양(移讓)을 성취시킨 사람의 의무였다’고 말이다. 다행히 나는 퇴임 후 그분과 함께 굴곡진 삶을 살아오면서 그분이 보여준 불굴의 의지와 의연함에 깊이 매료됐다. 그리고 특출할 만큼 뛰어난 그분의 기억력이 정치재판으로 인한 광풍(狂風)에 시달리면서 예전만 못해진 것을 지켜보면서 가슴 아파했었다.”

— 2017년 출간한 자서전, 《당신은 외롭지 않다》 표지에 등장하는 징검다리를 손잡고 건너는 두 분 모습은 부부란 무엇인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진 같다. 자서전 제목을 이렇게 정한 까닭은.
“그 사진을 처음 찾아냈을 때의 기쁨을 아직도 가슴속에 간직하고 있다. 언제 누가 찍은 사진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 사진이야말로 우리 내외가 함께해온 세월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위태롭게 놓인 징검다리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조심스럽게 건너왔듯, 앞으로 우리에게 닥쳐올 고난도 함께 손잡고 헤쳐나가고 싶다는 소망을 표현하고 싶었다.”

— 1988년 11월 23일 백담사에 들어가시면서 기록하기 시작한 여사님의 자서전은 마치 일기장을 읽는 듯 생생한 묘사가 일품이다. 전두환 대통령 회고록은 5공화국의 《삼국사기》에 가깝고, 여사님의 자서전은 《삼국유사》에 가까운 것 같다.
“내 자서전의 초판 1쇄본 발행일이 2017년 3월 27일이고, 그분의 회고록 초판 1쇄본 발행은 4월 3일이니까 거의 동시에 출판되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때 나는 사람들이 어떤 책을 더 선호하나 궁금증이 일어 경호관들에게 각하 회고록과 내 자서전을 선물한 후 물어보았다. 그분들은 각하 책 1, 2권이 더 재미있었다고 했다. 작가 입장에선 약간 섭섭했는데, 오 기자님이 내 자서전이 더 재미있다고 말씀해주시니까 기분이 좋다(웃음).”


남편에 대한 존경심과 측은지심

— 전두환 대통령은 자서전을 보고 뭐라고 하셨나.
“‘당신, 기억력 참 좋구먼~’이라고 하셨다. 사람들이 제대로 알아야 할 역사적 사실들이라 백담사 시절부터 1995년까지 그분의 구술을 받아 녹취를 풀어 기록했으니까 그런 말을 들을 만하다. 백담사 2년 생활을 《조선일보》에 게재하고 자신을 얻어 자서전을 쓴 거다. 나의 인생을 통해 격동기의 한국 근현대사의 일부분이나마 간접적으로 경험해볼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하는 바람으로 처음엔 대학노트에 쓰다가 컴퓨터까지 배워가며 최선을 다했던 것 같다.”

— 어떤 계기로 자서전을 쓰시게 됐나.
“대한민국이 건국되기 전, 일제강점기인 1939년 3월 24일 만주에서 태어나 8세 되던 해 귀국해 84세 될 때까지 이 나라에서 살아온 여인네다. 그것도 42세 되던 해 남편이 뜻하지 않게 대통령이라는 어마어마한 자리를 맡는 바람에 대통령 부인의 역할을 맡게 돼 남들이 겪어볼 수 없는 경험을 했다. 또 남편이 한 번도 해보지 못한 평화적 정부 이양을 하는 바람에 권력에서 멀어진 사람이 어떠한 수모를 겪어야 하는지도 몸소 체험했다. 내가 보고 느낀 일들을 일기장에 기록하듯, 일상생활을 영상으로 남기듯, 될 수 있는 한 세밀하게 적어보려 노력했다.”

— 자서전 발문에 ‘나의 애인이었고 신랑이었고 남편인 그분. 자식들의 아버지이고 손자 손녀들의 할아버지인 그분. 대한민국 제11대, 제12대 대통령으로 나라를 위해 헌신한 그분에게 이 책을 바치고 싶다’고 적으셨다. 영부인에게 남편인 전 대통령은 사랑하는 사람 이상의 존재로 느껴진다.
“장문의 글을 써본 적이 없던 내가 2만 장이 넘는 원고를 쓰게 되고, 자서전을 손수 집필하게 되면서 참으로 많은 기록을 접하게 됐다. 그 과정에서 나는 남편에 대한 존경심과 측은지심(惻隱之心)을 많이 느끼게 됐던 것 같다. 퇴임 후 끊임없이 가해지는 박해를 함께 헤쳐나가면서 동지애(同志愛)도 느끼게 됐던 것 같다. 책 한 권 달랑 드리면서 그이에게 여러 말을 한 걸 보면, 내가 가진 것이 책밖에 없어 여러 가지 이름으로 아름답게 포장해 선물해 드리고 싶었는가 보다.”

 

전두환 생도와의 첫 만남

▲1958년 경기여고 졸업장을 들고 동기들과 함께한 이순자 여사. 사진=이순자 여사

 

 — 전 대통령을 처음 만난 날을 기억하시는지.
“첫 외출을 나왔지만 딱히 갈 곳도, 점심 사 먹을 돈도 없었던 육군사관학교 2학년 생도들이 물어물어 찾아온 곳이 참모장 댁이었다. 바깥에서 ‘참모장님 계십니까’라는 소리에 쪼르르 나가서 문을 열어드린 진해여중 2학년생 소녀와 사관생도와의 인연의 시작이었다. 첫 만남에서부터 유난히 자세가 단정하고 화통한 것이 돋보였던 그이에게 당시 육사 참모장이셨던 아버지(이규동 전 육군본부 경리감)는 무척 끌리셨던 것 같다. 뒷마당에서 직접 재배한 채소들 외엔 별 반찬이 없었는데도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우는 젊은이들에게 ‘자네들 형편에 어디 마땅히 갈 데가 있겠나. 주말엔 언제든 부담 갖지 말고 점심 먹으러 오게나’라는 말씀을 잊지 않으셨고, ‘정말 그래도 되겠습니까’라며 전 생도는 몹시 기뻐했다. 그날 이후 주말이면 친구들과 함께 찾아오는 우리 집안의 반가운 손님이 되어주었다. 일요일날 오지 않으면 왜 안 오나 궁금증이 더해갔다.”

— 자서전을 보면, 두 분 사이의 사랑이 ‘솜에 물 배듯’ 쌓여갔다며 시적(詩的)으로 표현하셨다. 전 대통령의 어떤 점이 끌리셨나.
“휴전이 되자 육사가 피란지 진해에서 태릉으로 옮겨가고, 나 역시 서울 경기여중에 복교하면서 그분과의 낭만은 계속되지 못했다. 3년 전 치른 여중 입시 국가고시에서 고득점을 얻었던 내가 아버지의 잦은 전근으로 광주, 논산, 진해 등 많은 학교를 전전하는 사이에 엄청난 실력 격차가 생겨 이른 시간 내에 만회하지 않으면 고교 입학도 장담할 수 없는 형편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공부에 목숨 걸다시피 하고 있던 내가 언제부터 그이를 연인으로 느끼기 시작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분명한 건 그이가 서울로 옮겨온 후에도 주말이면 어김없이 우리 집 초인종을 눌렀다는 사실이고, 우리 형제에게는 여전히 아저씨 같은, 또 내겐 친척 오빠 같은 존재였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역시 유별한 것이 남녀 사이였는지, 오랫동안 가족 같은 정을 나누면서 헤어지기 싫은 사이로 변해갔던 것 같다.”


‘나는 너를 남몰래 사랑해왔다’

▲진해 변두리에 위치한 이순자 여사의 경화동 집을 찾아왔을 당시의 전두환 생도. 사진=이순자 여사

 

— 프러포즈는 누가 먼저 했나.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1년쯤 지난 어느 날, 전방에서 외출 나온 그이가 나를 집 밖으로 불러냈다. 그러곤 ‘나는 너를 남몰래 사랑해왔다’면서 ‘내가 졸업할 때까지 기다려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그것을 프러포즈라 해도 될까(웃음).”

— 혹시 이분이 나중에 큰 인물이 될 거란 생각은 해보셨는지.
“전두환 생도는 유머 감각이 뛰어나고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깊은 편이라 늘 곁에는 친구가 많은 편이었다. 또한 구수한 입담으로 어렸을 적 고향에서 참외 서리하던 얘기, 황강가 모래밭에서 씨름하던 얘기를 들려줄 땐 정말 재미있었다. 자신이 어렸을 적, 물을 너무 많이 길어 키가 크지 못했다며 대구 변두리 달동네 생활을 얘기해줄 때는 가슴이 뭉클하기도 했다. 편찮으신 어머니가 고생하시는 것이 안쓰러워 식구들이 사용할 물은 자신이 책임지고 아랫동네까지 내려가 길어다 드렸고, 젖은 나무 때는 어머니가 늘 눈물을 흘리신다며 뒷산에 가서 솔잎을 긁어다 놓고 숙제를 하거나 친구들과 공놀이했다는 소리를 들었다. 부모님께서도 전 생도가 엉덩이가 가볍고 싹싹해 보통 인물 됨됨이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셨던 것 같다.”

  

 ▲1958년 봄, 이화여대 의과대학에 입학한 후 학교 교정에서 동기생들과 함께한 이순자 여사(오른쪽 두 번째). 사진=이순자 여사 

 

— 왜 의대를 지망하셨는지.
“임관 후 힘든 군인의 길을 가기 시작한 그이를 떠올리자 젊은 장교의 생활고(生活苦)를 해결할 수 있는 전공을 선택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경제적 부담을 주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선택한 게 의과대학이었다. 막상 입학해 의학실습을 해보니 적성에도 잘 맞는 것 같았다. 중도에 학업을 포기하지 않고 의사가 된 친구들은 대부분 미국에서 살고 있더라. 내가 그이와 헤어졌다면 나도 그중 한 명이 돼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이의 아내’라는 자리
 

 ▲1955년 9월 30일 전두환 생도의 육사졸업식에 참석한 이순자 여사의 어머니 이봉년 여사와 고모, 그리고 이순자 여사. 사진=이순자 여사

 

— 전두환 중위와의 결혼을 위해 의대 2학년에 재학 중 자퇴했는데, 의사의 길을 걷지 못한 아쉬움은 없나.
“물론 학업을 포기하고 자퇴하게 된 이유가 ‘결혼한 사람은 학교에 다닐 수 없다’고 못 박아 놓은 이화여대의 잘못된 학칙 때문이었으므로 원망하는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김활란(金活蘭) 총장님이 미혼이셔서 그랬나? (웃음) 결혼한 게 무슨 죄라고…. 하지만 나는 여전히 생각하고 있다. 의사는 나 아닌 사람들도 얼마든지 해낼 수 있는 직업이지만, ‘그이의 아내’라는 자리는 나만이 해낼 수 있는 자리라고. 얼마 전 이화여대에서 학칙(學則)이 바뀌었다면서 재입학을 허가한다는 통지가 왔더라. 근데 80세 넘어 의과대학 가서 뭐 하나.”

— 전두환 생도가 임관 직후, 두 분 사이에 이별의 위기가 있었다고 들었다.
“육사를 졸업하기 전에는 자신들의 앞날에 밝은 미래가 펼쳐질 것이라고 한껏 기대에 부풀어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초급 장교가 임관 후 하늘과 땅 사이만큼이나 괴리가 큰 현실과 마주하게 되면서 절망감에 사로잡혀 나를 포기하기로 결심해버린 것이었다. 진정으로 상대방을 사랑한다면, 자신을 친자식처럼 대해준 여자친구 부모의 은혜를 생각한다면, 자신을 사랑한 죄밖에 없는 어린 사람을 고생길로 끌어들여선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는 거다.”


全-李는 초등학교 선후배

▲1959년 1월 24일 대구 경북고 앞 제일예식장에서 결혼식을 올린 전두환·이순자 커플. 주례는 최영희 당시 2군사령관(국방부 장관 역임)이 섰다. 사진=이순자 여사

 

— 전두환 대위가 일방적으로 이별을 통보했나.
“아무도 찾을 수 없는 전방부대로 사라졌다. 당시 그이의 결심이 얼마나 단호했던지 전방으로 수소문해 찾아가 설득도 해보고 울면서 읍소도 해보았지만 모두 실패로 끝났다. 그를 포기할 수 없었던 난 결국 부모님께 SOS를 쳤고, 결혼식을 올려 더 이상 방황하지 않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간신히 마음을 돌려놓고 결혼식을 올리기 직전, 주말에 사랑하는 연인의 파경(破鏡)을 처절하게 그린 영화 〈지붕〉을 잘못 보는 바람에 또 한 차례 위기를 맞기도 했다. 하필이면 그런 영화를 골라 보다니…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나온다. 우여곡절 끝에 1958년 1월 24일 대구 제일예식장에서 식을 올렸고, 학교를 자퇴한 21세짜리 신부가 탄생했다.”

— 영부인께서 대단한 용기를 내신 것 같다.
“사랑 하나만 믿고 한 남자에게 내 소중한 인생을 몽땅 걸었던 것이다. 물론 결혼 후 다른 학교로 전학해 공부를 계속한다는 전제하에 결정한 일이긴 하지만, 어렵게 공부해 들어간 학교를 자퇴한다는 건 당시 내겐 목숨을 내놓는 것이나 마찬가지의 어려운 결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분과의 결혼을 택한 건, 상대방의 행복을 위해 자신의 불행을 기꺼이 택한, 그런 귀한 분을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결혼 후 그분이 내게 ‘당신의 살신성인적 용단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나도 없고 우리도 없다’며 행복한 결혼 생활의 공을 모두 내게 돌리곤 했지만, 나는 늘 그분과 나를 동여매 주고 있던 인연의 공도 컸다고 생각한다.”

이순자 여사는 “경기여중에 입학한 후 처음으로 맞춰 입은 교복을 자랑하고 싶어 모교 희도초등학교를 찾아갔을 때 멋진 제복의 육사 생도를 우연히 보았는데, 그가 1년 후 우리 집을 찾아온 전두환 생도였고, 초등학교 선배였다니 참 대단한 인연이라고 생각했다”며 “진해여중에 전학하자마자 화동(花童)으로 뽑혀 이승만(李承晩) 대통령께서 임석하신 육사 입교식에 참석하게 됐는데, 전두환 생도를 비롯해 200명의 4년제 육사 생도들이 배출되는 역사적인 장면도 직접 목격했다”고 했다.


장인 위해 전 재산 내놓은 사위 

 ▲이순자 여사의 친정아버지 이규동 장군과 모친 이봉년 여사. 육군 경리감을 지낸 이규동 장군(예비역 준장)은 박정희 대통령과 육사2기 동기다. 사진=이순자 여사

  

— 1959년 결혼하셨는데, 그 당시 육군 장교 월급으로 살림살이가 가능했나.
“결혼 적령기의 대위 봉급이 겨우 쌀 한 말을 살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다 보니 이상을 실현하기는커녕, 당장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었다. 한 번은 어느 장교가 만삭이 된 부인과 자식들이 굶주리는 걸 보다 못해 부대 취사장에서 막 끓고 있던 밥과 콩나물국을 퍼서 철조망 사이로 식구들에게 건네주는 걸 본 적도 있다고 한다.”

— 지금도 내 집 마련하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인데, 지금 연희동 집은 어떻게 마련한 것인가.
“우리 부부는 대구에서 결혼한 후 시댁에서 4개월 정도 시부모님을 모시고 살았고, 또 서울로 이사 온 후 친정에서 10년 가까이 살면서 다른 초급 장교들에 비해 고생은 덜한 편이다. 하지만 아이 셋이 태어나도록 친정에 얹혀사는 것이 부모님께 죄송스러워 하루라도 빨리 독립하려고 미용학원도 다니고 편물을 배워 부업도 하고, 안 해본 일이 없다. 버는 족족 친정 부모님에게 맡겨 관리했는데, 친정아버지가 10년 후 분가할 때 보광동과 효창동에 그분과 내 명의로 각각 집 한 채를 마련해주셨다. 대지 50평에 건평 17평 정도의 작은 집이었지만, 후에 우리 가족의 ‘드림 하우스’라 할 수 있는 연희동 집 마련에 기틀이 됐다.”

— 전두환 대통령과 장인의 사이는 어땠나.
“친정아버지(이규동)는 경북 성주에서 성장해 그곳에서 어머니(이봉년)를 만나 슬하에 1남 6녀를 두셨다. 난 차녀였으나 맏딸 역할을 했다. 봉천군관학교를 4기로 졸업하시고 만주에서 육군경리관으로 일하시다 해방 후 육사 2기로 졸업했다. 1959년 육군본부 경리감을 끝으로 이듬해 성주에서 민의원으로 출마하기 위해 육군 준장으로 전역하셨다. 하지만 정치에 문외한인 아버지는 차점으로 낙선하셨고, 우리 가족은 참혹한 선거 후유증에 시달렸다.

남편이 포트베닝에서 귀국한 날, 침통한 심정으로 자초지종을 말했더니, 그이는 한순간도 지체하지 않고 안방으로 건너갔다. 우리 부부가 정성을 다해 모은 저금통장 한 개와 자신이 유학하는 동안 식비마저 아껴가며 모은 미화 500달러, 전 재산을 장인 앞에 내놓았다. 부모님이 베풀어주신 은혜를 생각하면 정말 아까울 것이 없었다. 가회동 집에 살 때, 욕실을 공동으로 부모님과 사용했는데, 아버지는 사위의 출근 준비에 불편함을 주지 않으려고 새벽 일찍 일어나 냉수마찰을 하시고 욕실을 손수 청소까지 해놓으셨다. 8년이나 계속되는 생활에서 사위와 단 한 번도 마주치는 일이 없었다.”


특수전 전문가
 

 ▲1960년 7월 미국 조지아주 포트베닝의 미 육군 보병학교 레인저 과정 시절의 전두환 대위. 최세창, 강기오, 차지철 대위가 동기생이다. 사진=이순자 여사

 

— 전두환 대통령은 현역 시절, “군인은 국가가 요구하면 언제라도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신분이다. 남편과 언제까지나 함께 살 수 있고, 또 출근한 남편이 퇴근해 다시 집에 돌아올 거라는 안이한 생각을 버려야 한다”고 말씀하셨다고 했는데, 이런 말을 들었을 때 기분이 어땠나.
“남편은 군인 중에서도 특수전 전문가였다. 최근 채널A에서 방영된 〈강철부대〉라는 예능 프로처럼, 특수전 전문가들은 언제나 위험을 무릅쓰고 임무를 수행해내야 했던 만큼, 각오도 남달랐던 것 같다. 그러니 군인의 딸로 태어나 군인의 아내가 된 나한테까지 그런 다짐을 그토록 자주 들려준 게 아닐까 생각한다. 한국에서 공수 교육과정을 마친 남편은 결혼 5개월 후 미국 캘리포니아 포트 브랙(Fort Bragg)으로 가 심리전 전술을 익힌 데 이어, 이듬해에는 조지아주 포트 베닝(Fort Benning)에서 레인저 과정(유격전문가)과 패스파인더 과정(군사유격특수전)을 익히면서 명실상부한 특수전 전문가가 되었다.”

 

 ▲1971년 11월, 제1공수특전단장으로 진급한 전두환 장군은 사랑과 솔선수범을 슬로건으로, 낙하훈련 때는 1호기를 타고 가 가장 먼저 점프를 했다. 사진=이순자 여사

  

— 전두환 대통령은 현역 시절 공수훈련을 받기 전에 반드시 책상 위에 신분증과 지갑을 가지런히 두고 갔다고 자서전에 쓰셨다.
“청소하면서 책상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그이의 소지품을 대할 때면 남편의 훈련에 임하는 비장한 각오가 느껴졌다. 아이들을 데리고 낙하 현장이 보이는 한강 다리로 달려가 안전하게 착지하는 남편의 모습을 확인하고 집으로 돌아온 적도 있다. 대한민국 특수부대 요원의 체력은 이북 특수부대 요원의 체력보다 강해야 한다는 것이 그이의 지론이었다. 그래서 그랬던지 제1공수특전단장이 된 후 천리행군이라는 것을 시행했는데, 천리행군만 할 수 있으면 어떤 미션을 부여받아도 완수해낼 수 있다고 했다. 그런 신념 때문에 장군이 된 뒤에도 낙하 훈련을 계속했고, 옮겨가는 부대마다 구보도 실시했는데, 항상 부대원들과 함께 뛰었다. 낙오하지 않기 위해 따로 연습하기도 했다. 그이는 내게도 군사훈련 내용을 자세히 요도(要圖)를 그려가며 설명해주었는데, 그럴 때면 ‘이분이 나도 부하로 생각하는 것 아닌가’ 헷갈릴 정도였다.”


“박종규씨가 박정희 의장에게 데리고 갔다더라”
 

 ▲강원도 사창리 소재의 21사단 66연대 1중대 소대장 시절의 전두환 대통령. 사진=이순자 여사

  

— 5·16혁명이 발발했을 때, 육사 생도들의 지지행진을 이끌었는데, 애초부터 정치적 성향이 강한 분이 아니었나.
“남편은 장인의 육사 동기생인 박정희(朴正熙)란 인물에 대해 이미 장인을 통해 들었을 것이다. 그날 육군본부를 찾아갔을 때, 미국 특수전학교 출신으로 경호실장을 역임한 박종규(朴鍾圭)씨를 만나 아이디어를 이야기했고, 박종규씨가 박정희 의장에게 데리고 갔다더라. 육사 축구부 주장 출신에다 후배들이 많이 따랐다. 군사혁명위원회가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편되면서 그이를 최고회의 의장의 민원비서관으로 임명했다. 그이는 사관학교에 들어가던 때 일생 군인으로 살다 군인으로 죽겠다고 다짐했고, 그때까지도 초심(初心)을 잃지 않고 있었기에 박 의장의 정치 입문 권유는 사실상 ‘지시’였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인으로 나서지 않았다. 국가이익을 최우선으로 하고 자기 인생 목표에 대한 설계가 뚜렷해 유혹에 쉽게 흔들리는 사람이 아니었기에 고등군사반(OAC) 교육을 이수하기 위해 광주(光州)로 내려가 가족과 문간방 생활을 다시 시작한 것이다.”


“박 대통령, 막내아들 출산 소식에 격려금 보내줘”

 ▲박쥐25호 작전을 위해 헬기로 출동하는 장병을 지켜보는 전두환 백마부대 29연대장. 박쥐부대로 통칭된 9사단 29연대는 칸호아성 닌호아에 주둔하면서 적진을 기습하는 임무를 띤 부대였다. 사진=이순자 여사

  

— 전두환 대령은 백마부대(9사단) 29연대장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했다. 당시 육사 출신 연대장 중에는 유일했다.
“그이가 연대장으로 발령받고 인사드리러 가자, 박 대통령께서 본인의 사진에다 친필 사인을 해주셨다. 그러곤 이세호(李世鎬) 주월 한국군 사령관을 통해 편지도 보내주셨는데, 그분이 답장을 올리면서 내가 막내아들(재만)을 출산했다는 소식을 전해 올리자 내게도 격려금과 함께 편지를 보내주셨다. 아랫사람을 참으로 정성스럽게 대하신다는 느낌을 받았다.”

  

 ▲1967년 8월 17일 1·21사태를 진압한 수도경비사령부 30대대를 격려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 내외. 전두환 중령은 그해 국군의날 보국훈장 삼일장을 수여받았고 11월 대령으로 진급했다. 사진=이순자 여사

  

— 참, 신기하게도 전 대통령이 가는 곳마다 역사적 사건들이 따라다녔다.
“1961년 5·16 때는 육사 생도들의 혁명지지 선언을 이끌어냈고, 1968년 1·21사태 때는 제30경비대대장으로 무장공비들이 청와대 습격을 위해 자하문 근처에 나타났을 때 이들의 격퇴에 앞장섰다. 또 1사단장 시절에는 제3땅굴을 발견함으로써 북한이 군사분계선을 넘어 수도인 서울에서 겨우 44km 떨어진 지점에 남침용 땅굴을 파놓았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알리게 됐다.”


육개장 파티

▲1958년 8월 30일, 결혼 직전 주말 외출을 나온 전두환 중위와 데이트를 즐기는 이순자 여사. 이 여사는 교통비, 책값, 커피값을 절약해 광교 인근의 ‘런던’이란 양복점에서 결혼양복을 맞춰주었고, 전두환 중위는 푼푼히 모은 돈으로 손목시계를 준비했다. 사진=이순자 여사

 

— 전두환 대통령이 부하들을 장악하는 비결은 어떤 것이 있었을까.
“남편의 일에 대한 접근방식은 확실히 남다른 데가 있었다. 남편은 타고난 건강 체질인 데다 부지런하고 철저했다. 그래서 남편과 함께 일하는 사람들은 힘들었을 것이다. 그분 곁을 떠난 후에는 일 잘 배웠다는 소리를 듣고 윗분들로부터도 칭찬을 많이 받게 되지만, 항상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뛰어야 했다. 내게 많은 것을 요구하면서도 늘 관심과 애정을 표시해줌으로써 불만을 토로할 기회를 원천적으로 차단했는데, 그분은 부대원들에게도 늘 사랑과 관심을 보여주며 서로 동지애를 느끼도록 했다.”

— 부하들에게 어떤 식으로 관심을 보여주셨나.
“남편은 부대에 부임하면 ‘100일 작전’이라며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1사단장 시절, 중대장들 이름까지 모조리 다 외웠다. 천둥번개 치고 폭설이 내리는 날이면 감시초소에서 근무하는 중대장들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일일이 이름을 불러주며 격려했다. 절대로 1중대장, 2중대장 하지 않았다. 칠흑 같은 밤 강풍이 몰아치면 내게 연락해 ‘따뜻한 커피를 가져오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또 내가 사단에 들어가는 날이면 사단장 관사는 늘 육개장 파티장으로 변했고, 그분은 부하들과 무척 행복해했다. 풍성한 식탁은 아니어도 땀 뻘뻘 흘리며 맛있게 잡수시던 대대장님들, 참모님들 모습이 지금도 기억난다. 그만큼 철저했기에 갑작스레 맡겨진 대통령직을 감당할 수 있었을 것이다.”

— 내조하시느라 많이 힘드셨겠다.
“당시 우리 내외는 시어머님을 모시고 있었는데, 많이 편찮으셨다. 또 돌봐줘야 할 아이들도 넷이나 되는 데다, 큰아들은 대학입시를 코앞에 둔 시점이라 집에서도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엄청 바빴는데 남편 부하들까지 챙기려니 힘들긴 했다.”


10·26 후 불면증 시달려
 

— 1979년 3월 1사단장(육군 소장)을 하다 보안사령관으로 전격 발탁됐다. 당시 파격 인사에 대해 주변에서 무슨 이야기는 없었나.
“보통 사단장 임기는 2년이다. 임기를 1년 남겨놓은 시점에서 소장 신분으로 중장 보직인 국군보안사령관으로 발탁되자 모두 파격 인사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로부터 7개월 후 박정희 대통령이 심복에 의해 시해당하시고, 또 10개월 후 남편이 대통령이 되리라고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무리 박 대통령이라 해도 자신이 1979년 3월에 임명한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자신의 사후 뒤처리를 맡을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 1979년 10월 26일 저녁,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서빙고 분실의 무전 연락을 받고 들어간 이후 일주일이 넘도록 댁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때 불안하지 않았나.
“새벽 4시쯤 손삼수(孫衫秀) 부관이 전화로 ‘라디오를 틀어보시라’고 해서 박 대통령의 ‘유고(有故)’를 알았다. 근혜, 근영, 지만군은 엄마에 이어 아버지까지 이런 일을 당하니 어쩌나 하는 생각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온 나라를 단번에 충격 속으로 몰아넣은 박 대통령 시해 사건이 비상계엄령을 불러오고, 계엄령이 선포됨과 동시에 계엄공고 제5호에 의해 ‘합동수사본부’가 설치되고, 보안사령관이 그 책임자로 임명됐다는 사실은 내게도 중압감을 안겨주었다. 남편은 여전히 집에 들어오지 못했는데, 나는 남편이 맡게 된 책무의 막중함에 질려 염려와 불안으로 극심한 불면증에 시달려야 했다.”


“시동생 집으로 옮겨”
 

 ▲전두환 준장이 1973년 제1공수 여단장 시절 부인 이순자씨와 함께 행사를 참관하고 있다. 전두환과 차지철은 공수부대에서 생사고락을 함께한 전우였다. 사진=국가기록원

 

—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수사 책임자로 김재규(金載圭) 중앙정보부장과 정승화(鄭昇和) 계엄사령관 겸 육군참모총장을 체포했다. 당대의 최고 군부 실력자들을 체포하는 것은 본인 목숨까지도 걸어야 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물론이다. 당시 남편은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는 데 목숨을 걸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시해 현장에 있었던 김계원(金桂元) 대통령 비서실장, 차지철(車智澈) 대통령 경호실장,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등이 모두 나는 새도 떨어뜨릴 수 있는 권력자들로 소장 계급의 보안사령관이 수사하기엔 버거웠다. 게다가 18년간 나라를 통치하던 대통령이 시해된 마당에 대통령을 죽인 사람이 심복인 중앙정보부장이라는 사실이 세간에 알려지면서 배후 세력에 대한 흉흉한 소식이 난무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설상가상 시해범 김재규가 계엄령 선포와 동시에 계엄사령관으로 임명돼 이미 막강한 권력을 갖게 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시해 장소에서 불과 50m 거리에 대기시켜놓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됐으니 얼마나 고민이 컸겠나. 무시하자니 직무유기가 될 것이고, 소신껏 수사하자니 너무 위험하고…. 그런 상황에서 남편처럼 좌고우면(左顧右眄)하는 일 없이 수사 책임자로서의 소임을 완수해낼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다.”

— 10·26 사건 발생 열흘 만에 귀가한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가족들 모두 당분간 동생인 전경환(全敬煥)씨의 팔판동 집에 가서 지내라”고 했다는데, 김재규의 시해 사건과 관련해 전두환 장군 본인은 물론이고 가족들의 신변 위협까지 느꼈던 것 아닌가.
“11월 8일에 김재규가 사전 계획과 모의가 있었다고 자백하면서 수사가 훨씬 더 복잡하고 심각한 상황으로 바뀌었다면서 우리 거주지를 옮겨야 한다는 건의도 무시할 수 없게 됐다고 했다. 김재규 중정부장의 손을 빌려 박 대통령을 제거한 배후 세력이 있다면, 이 사건 수사책임자인 자신 하나쯤 제거하는 것은 아주 간단한 일일 것이라고 남편은 말했다. 시동생(전경환-편집자 주) 집이 총리공관 옆에 있어서 다행이었다. 휴교령이 내려져 당시 다니던 연세어학당에 안 가도 돼 이사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외대 영어과 편입시험 도전

— 박 대통령 시해 사건에 연루된 정승화 총장 연행은 수사를 위한 합법적 연행이었고, 이 과정에서 군사반란을 일으킨 것은 전두환 측이 아니라 정승화와 김재규를 따르는 세력이었다는 주장 아닌가.
“그렇다. 대통령 한 사람의 편향된 역사관이 이런 끔찍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돌이켜보면 일명 ‘역사 바로 세우기 재판’은 집권야욕을 가진 남편이 12·12로 군사반란을 일으키고, 집권 구상인 ‘시국수습방안’을 만들어 정국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5·17계엄확대조치를 취하도록 한 후, 의도적으로 광주사태를 부추겨 결국 정권 찬탈에 성공했다는 조작된 시나리오를 법(法)의 이름을 빌려 ‘사실화’시킨 ‘역사 왜곡의 끝판왕’ 같은 것이었다. 남편은 생전에 ‘맨날 나보고 쿠데타를 했다고 하는데, 차라리 그때 쿠데타를 했었어야 했다’며 ‘만약 쿠데타를 했더라면 12·12 이후 광주사태가 났을 때 책임자가 누구인지, 뭐가 죄인지 딱 부러지게 했을 거다’라고 하시는 소리를 들었다.”

 

— 영부인께서는 대통령 시해 사건이 일어났던 그해에 한국외국어대 영어과 편입시험도 보셨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런 엄청난 격변의 시기에 평화롭게 공부를 하신 거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게 인간의 존재 아닌가. 10년 가까이 모시고 살았던 시어머님이 돌아가시고 아이들도 어느 정도 커 생활에 여유가 생기게 되자 결혼으로 인해 중단된 공부에 대한 열정이 다시 살아났던 것 같다. 남편이 보안사령관직을 맡아 서울에서 근무하게 되자마자 나는 곧바로 연세어학당에 등록해 공부하려 했으니까. 연세어학당에 9월이 되어서야 간신히 등록에 성공해 공부를 시작하게 됐는데, 이번에는 한 달 만에 남편이 10·26사태의 수사책임자가 되면서 두 번째 공부의 꿈도 중단돼버렸다. 느닷없는 10·26 사건으로 학교에 휴교령이 내려지자 ‘나는 왜 이렇게 공부 운이 없나’ 싶어 거의 울기 직전의 심정이었다. 실의에 빠진 나를 구원해준 건 남편이었다. 아예 외국어대 영어학과에 편입시험을 쳐 원 없이 공부에 몰두해보라고 하더라.”


전두환, “내년엔 부디 대학편입의 願을 푸시오”
 

 ▲남편인 전두환 제1공수특전단장의 지도로 사격을 하고 있는 이순자 여사. 전 장군은 이 여사에게 지휘관의 아내라면 소총 사격술 정도는 익혀야 한다고 했다. 사진=이순자 여사 

 

— 12·12사태 때, 신군부와 구군부가 충돌하는 와중에 여사께서 외대 편입을 준비했다는 것은 전두환 장군이 당시 쿠데타를 계획하고 있었다면 할 수 없는 일 아닌가.
“그렇다. 한국외국어대학 편입시험 날짜가 1980년 1월 15일이었는데, 12·12사태 당시 나는 한 달 후 치러질 편입시험 준비로 여념이 없었다.”

— 당시 여사님 연세가 42세였는데, 늦깎이 학생으로 한국외국어대학 영어 전공으로 편입시험을 보았다가 불합격했다. 당시 심정은 어떠했나.
“반드시 대학에서 다시 공부를 시작하겠다는 집념이 컸던 만큼, 낙방 후의 좌절감은 생각보다 깊었던 것 같다. 열심히 도와주고 응원해준 가족들에게도 괜히 미안하고 겸연쩍은 심정이 돼 결국 몸살을 앓으며 누워버렸다. 아이들은 그런 내 모습이 우스웠던지 ‘엄마가 대학시험에 떨어져 병이 나셨네’라며 빙글거렸다. 그날 나는 아이들 앞이라는 것도 잊고 그만 눈시울을 붉히고 말았다. 당황한 아이들이 각자 방으로 몰려가고 난 후, 남편이 가만히 내 어깨를 두드리며 이렇게 말했던 기억이 난다. ‘여보, 너무 실망하지 말아요. 이번에는 아무래도 너무 무리였지 않소? 시간도 너무 촉박했고…. 당분간 푹 쉬고 다시 시작하시오. 나도 힘껏 도와줄 테니 내년엔 부디 대학 편입의 원(願)을 푸시오.’ 그이의 따뜻한 위로로 지쳐 있던 심신을 다시 일으켜 세운 나는 마음이 급해져 다시 책가방을 들고 연세대어학당으로 달려갔다. 3월 중순의 일이었다.”


전두환 화형식 현장 목격

— 편입시험에 실패하신 후에도 연세어학당을 계속 다니셨는데, 당시 계속된 비상계엄령 상황에서 학내도 시끄러웠을 텐데….
“10·26으로 선포된 비상계엄령은 지속되고 있었지만 대학의 휴교령은 해제됐다. 4월이 되자 대학가의 모습은 급격히 변하기 시작했다. 평화스럽게 진행되던 시위 농성이 격렬한 투쟁으로 변하면서, 학생들의 구호도 비상계엄 해제와 이원집정부제 반대 등 정치적 쟁점으로 진화했다.

하굣길에 연세대 루스채플(대학교회)을 지나 학생회관 앞을 막 통과할 때였다. 학생회관 건물에 길게 바닥까지 ‘유신 괴수 전두환’이라는 선혈 같은 붉은 페인트로 쓴 거대한 플래카드가 내걸려 있었다.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그날 나는 중앙도서관 앞 광장에서 죽어도 잊을 수 없는, 끔찍한 의식을 목격했다. 짚으로 만든 남편의 허수아비가 내가 보고 있는 앞에서 아들 또래의 젊은 시위대들에 의해 활활 불태워지고 있었다. 나는 손에 들고 있던 책가방을 떨어뜨린 것도 느끼지 못한 채 장승처럼 서서 그 장면을 지켜보았다.”

— 그날 상황을 남편 전두환 보안사령관께 말씀드렸나.
“그날 밤 남편은 늦은 시각에 귀가했다. 그이와 마주 앉은 후에도 내 머릿속은 온통 낮에 본 장면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이도 이미 대학가의 시위와 그 시위에 등장하고 있는 자신의 이름에 대해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왜 하필 이럴 때 중정부장을 맡으셨는지, 전 도무지 모르겠어요’라고 남편의 어두운 얼굴빛을 보면서 나는 말을 쏟아내고야 말았다. 워낙 믿고 따르는 남편이라 바깥일에 관해선 의문을 제기해본 적이 없었지만, 그날 낮에 보고 들은 것들은 도저히 침묵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 그날 남편의 대답은 차분하고 명료했다. ‘내 가능한 한 빨리 정보부가 제자리를 찾도록 한 후 내 본연의 자리로 돌아가도록 할 테니 너무 걱정 마시오.’”


드라마의 역사왜곡
 

 ▲1978년 7월 제3땅굴을 발견한 현장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에게 상황을 보고하는 전두환 제1사단장. 왼쪽이 이세호 육군참모총장이다. 사진=이순자 여사

  

— MBC 드라마 〈5공화국〉을 보면, 신군부가 최규하 대통령을 권총으로 위협해 권력을 찬탈한 것으로 나온다.
“드라마가 방영될 당시 5공화국 인사들이 ‘사실이 터무니없이 왜곡되었다’며 항의하자,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 다큐멘터리가 아니다’라고 했다더라. 설마 오 기자님도 그 내용을 그대로 믿는 건 아닐 거라고 본다. MBC는 〈5공화국〉이라는 드라마를 2005년 4월 23일부터 9월 11일까지 장장 41회에 걸쳐 방영했는데, 허화평(許和平), 장세동(張世東), 정호용(鄭鎬溶) 등 5공화국 인사 12명이 드라마 방영으로 관련 당사자들의 명예가 크게 훼손됨은 물론 역사까지 크게 왜곡되었다고 엄중히 경고함과 동시에 반론 보도를 요구했다고 한다. 나도 그 드라마를 본 적이 있는데, 킬러가 지붕에서 각하 차를 저격하려고 하고, 권총으로 최 대통령을 위협하고…. 확인되지 않은 유언비어들을 실제 상황인 양 그럴듯하게 묘사하는 바람에 내가 보기에도 사실인 것처럼 느껴지더라. 아무튼 드라마 〈5공화국〉이 전두환 대통령의 5공화국을 조명하는 데 커다란 해악을 끼쳤다.”(다음 호 ‘대통령 전두환’으로 계속)⊙

글 : 오동룡 조선뉴스프레스 취재기획위원·군사전문기자 gomsi@chosun.com

 

12월 호 

이순자 여사가 말하는 ‘나와 全斗煥 대통령’ 〈하〉

 청와대, 백담사, 그리고 그 후…

“백담사 첫날 밤, 대입 앞둔 막내 생각하며 잠 못 이뤄”

 

⊙ “장영자 사건 때 남편에게 ‘대통령 끝나실 때까지만이라도 헤어져 있자’고 말해”
⊙ “어려 보일 것 같아 한복 입었지만 컬러TV 화면에 실제보다 화려하게 비쳐”
⊙ 전두환, 백담사로 가는 차 안에서 하염없이 눈물 흘리자 “임자 볼 면목이 없구먼”
⊙ “제2부속실, 2급 비서관 한 명, 5급 행정관 한 명으로 운영”
⊙ “백담사 시절 맛있는 음식 챙겨 들고 전국 각지에서 찾아주신 국민들, 스스럼없이 대해주던 동네 아주머님들 고마워”
⊙ “검찰, 손주들이 키우던 진돗개, 결혼 패물까지 압수”
⊙ “‘전 재산 29만원’은 검찰이 추징해 간 휴면계좌의 이자를 언론이 왜곡한 것”
⊙ 전두환, “政敵들에 의해 악용당하는 걸 두려워해 기록 남기지 않는다면, 후대 사람들이 무엇을 보고 배우겠는가”

 

▲사진=주민욱 씨영상미디어 기자

 

1980년 8월 27일, 전두환(全斗煥) 국가보위입법회의 상임위원장 겸 중앙정보부장(서리)은 통일주체국민회의 선거를 통해 대한민국 제11대 대통령에 선출됐다. 8월 16일 최규하(崔圭夏) 대통령이 사임을 발표하고 서교동 사저로 떠난 지 열흘 만이었다. 당시 전 대통령의 나이는 쉰 살, 이순자(李順子·83) 여사는 마흔두 살이었다. 지난 25년 동안 군문(軍門)에서 땀과 열정을 바쳤던 남편 전두환을 따라 이순자 여사는 세종로 1번지 청와대 생활을 시작했다.

— 전업주부로 살아오시다가 처음으로 공식석상에 등장하셨는데, 어려움이 많으셨겠다.
“보통 가정의 전업주부가 그렇듯 한 번도 공식석상에서 연설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아니면 내성적인 성격 탓인지, 카메라 앞이나 대중 앞에 서면 나도 모르게 극도로 긴장해 몸이 굳어버리곤 했다. 영부인은 수습기간도 롤 모델도 없는 역할이었다.”

— 그렇다고 영부인의 역할을 사양할 수도 없는 것 아닌가.
“모든 것이 조심스럽기만 했다. 더군다나 임기 내내 제2부속실을 2급 비서관 한 명, 5급 행정관 한 명, 이렇게 두 명만을 두고 운영했기 때문에 행사가 확정되면 부랴부랴 준비하느라 분주했다. 대통령 비서실로부터 연설문 초안과 행사내용 자료들을 전달받으면 여기저기 쉬어갈 곳, 높낮이가 필요한 곳을 표시해가며 열심히 연습하곤 했다. 하지만 막상 행사장에서 연설문을 읽을 때면, 이상하게 연습을 많이 했는데도 어느새 등에는 진땀이 흘러내리곤 했다. 조언자 없이 시행착오를 통해 스스로 배워가는 길을 택했으니 지금 돌이켜보면 아쉬움이 남는다.”


마흔두 살에 첫 해외여행

▲1981년 8월 대통령 전용열차로 취임 후 첫 휴가를 저도로 갔다. 전 대통령이 곧 미국으로 떠날 외동딸 효선씨와 물 속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사진=이순자 여사

 

— 1981년 1월, 전 대통령 취임 5개월 만에 미국을 국빈 방문하셨다.
“5공화국 정부의 개방화 정책으로 해외여행이 자유화되기 이전만 해도 공직자 부인의 해외여행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40년 전 국민소득이 겨우 1800달러(1981년 GNI)였던 걸 감안하면 이상한 일도 아니다. 우리 가족은 해외여행은 고사하고 국내여행도 남편이 장군 진급을 하고 나서야 처음으로 할 수 있었다. 나라 형편이 조금 나아져 여름휴가가 허락됐던 거다. 이듬해 여름엔 제주도에 다녀왔는데, 별천지 같았다.”

— 한미정상회담 준비는 어떻게 했나.
“장관들과 수행원들이 12년 만에 성사된 한국 대통령의 미국 방문에 온갖 정성을 쏟아부었다. 실수 없이 준비해 성과를 극대화하려고 온통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나도 내내 가슴이 방망이질하는 나날이었다. 쉬는 시간에도 ‘접견 인사 자료’부터 ‘만찬 자료’까지 모든 자료를 마치 수험생처럼 머리를 싸매고 공부했다.”

— 회담 분위기는 어땠나.
“1980년 2월 2일 오전, 레이건 대통령과 상견례를 겸한 단독회담을 가졌다. 레이건 대통령은 먼저 땅굴 문제에 관해 질문을 던졌고, 그분은 군사 전문가답게 한반도에서 주한미군의 역할을 중점적으로 설명해나갔다고 하더라. 이때 레이건 대통령은 모종의 결심을 굳히고 있었던지 예의 그 환한 웃음을 얼굴 가득 띠고 ‘주한미군 철수는 없을 것이니 안심하라’고 그분에게 말했다. 오찬장으로 향하는 그분은 고무돼 있어선지 표정이 상기돼 있었고, 발걸음이 몹시 가벼웠다.”


나카소네와의 우정 

 ▲오찬장으로 이순자 여사를 에스코트해주고 있는 레이건 대통령. 뒤편에 전두환 대통령과 낸시 여사가 보인다. 사진=이순자 여사 

 

— 당시 사진을 보면 오찬장에서 레이건 대통령이 팔짱을 끼고 이동했다.
“레이건 대통령이 경쾌한 목소리로 ‘제가 오찬장으로 모시겠습니다, 영부인님’이라고 하시며 ‘나도 취임(1월 20일)한 지 보름밖에 안 돼 화장실을 겨우 찾는다’고 조크하셨다. 검은 정장에 푸른빛 넥타이를 맨 노신사, 레이건 대통령이 왼팔을 내밀며 정중히 건네는 말에 나는 그만 당황하고 말았다. 의전(儀典)과 관련해 많은 자료를 꼼꼼하게 읽었는데, 예상치 못한 돌발상황이었다.”

— 낯선 남자의 팔짱을 낀다는 것이 생소하지는 않았나.
“앨범을 보면, 거절하는 것이 더 결례인 것 같아 자연스럽게 하려고 애쓰던 내 모습에 웃음이 나온다. 레이건 대통령이 오찬 도중에 ‘영부인께서도 북한이 파놓은 땅굴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라고 물어보셨는데, 미국 방문의 가장 중요한 핵심 현안이 주한미군 철수 백지화였기에 그가 한국의 안보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사실에 무척이나 반가웠다. 지금 접견실에 걸려 있는 사진처럼,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눈부신 햇살 아래 레이건 대통령 내외와 백악관 발코니에 나란히 섰다. 두 정상은 마치 백년지기(百年知己)처럼 서로를 부둥켜안은 모습으로 양국의 새로운 우호관계를 과시했다.”

  

 ▲도쿄도 히노데마치에 있는 나카소네 총리의 별장 ‘히노데 산장’. 나카소네 총리는 전 대통령의 출소를 기다려 이곳에 초대해 레이건 대통령, 고르바초프 서기장의 나무 옆에 식수하도록 했다. 사진=이순자 여사 

 

— 레이건 대통령, 나카소네 총리, 전 대통령은 당시 각각 70세, 63세, 50세로 나이 차이가 컸는데, 인간적으로 가까워진 것 같다.
“세 분은 나이를 초월해 교류를 이어갔다. 퇴임 이후에도 변함없었다. 나카소네 총리는 치매 때문에 사회생활을 일찍 접은 레이건 대통령에 대해 안타깝게 생각하셨다. 우리 부부가 백담사에 있을 때는 따뜻한 내복과 고급 원단인 비쿠나로 지은 옷, 레코드를 보내주셨고, 남편이 옥고(獄苦)를 치르고 나올 때는 도쿄 ‘히노데(日の出) 산장’에 초대해주셨다. 그곳에서 우리는 레이건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식수한 나무 옆에 나란히 기념식수를 했다. 얼마 전 그분의 아드님인 나카소네 히로부미(中曾根弘文) 참의원 의원이 결혼을 앞둔 아들 나카소네 야스타카(中曾根康隆) 중의원 의원과 함께 연희동에 들렀다.”


“나 같은 사람은 대통령이 되지 말았어야 했어”

— 취임한 지 1년 만인 1981년 8월에 사촌동생이 구속되는 등 이때부터 친인척 관련한 사고가 터지기 시작했다.
“그분은 주변의 작은 실수 하나라도 용인하지 않겠다는 의지로 국정에 임했다. 그분은 어렸을 적 서당에 함께 다녔던 사촌동생을 구속시켰다. 사기꾼들의 감언이설(甘言利說)에 속아 한국노년복지자조회 임원이라는 감투를 얻어 쓴 채 실컷 이용당한 것으로 드러났지만, 법 앞에선 누구도 예외일 수 없다며 법대로 처리할 것을 지시했다. 그분은 ‘나 같은 사람은 대통령이 되지 말았어야 했어’라며 자책했다. 자신이 대통령만 되지 않았다면 감방은커녕 일생 파출소 유치장 구경 한 번 하지 않고 살 수 있었던 사촌동생을 구속시킨 사람이 됐다면서. 그이는 일과 후 혼자 있을 때면 아들을 감옥에 보내고 괴로워하실 숙부를 생각하며 몹시 참담해했다.”

 

— 1982년 5월 건국 이래 최대 사기 사건으로 불리는 장영자(張玲子)와 이철희(李哲熙) 부부의 어음 사기 사건이 터졌다. 이들이 기업으로부터 편취한 어음 액면가만 7111억원에 달했다. 이 사건이 터지면서 ‘정의로운 사회 구현’을 표방하는 전두환 정부에 직격탄을 날렸다.
“지금 생각해도 속상하다. 그 얘기는 친정 여동생을 통해 처음 들었다. 내 측근을 사칭하는 한 여자가 서울 한복판 특급호텔 한 층을 통째로 쓰면서 큰 규모의 사업을 벌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 여자가 나의 작은아버님 재혼 부인의 여동생이고, 첫 결혼에 실패하고 3공화국의 중앙정보부 차장을 지낸 이철희라는 사람과 ‘사파리 클럽’이라는 곳에서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다는 거다.”


“목숨이라도 끊고 싶은 심정이었다”

— 전 대통령께 말씀을 드렸나.
“사실을 알렸고, 청와대는 즉각 사태 파악에 들어갔다. 얼마 후 궁금해하는 내게 조사 결과를 설명해주던 그분은 한동안 말없이 먼 곳을 바라보기만 했다. ‘여보, 오늘 보고한 사람이 아주 묘한 소리를 한마디 합디다. 시중에 퍼진 소문이라는데, 장영자라는 사람 뒤에 당신의 작은아버지 이규광(李圭光)씨가 있고, 또 그 뒤에는 청와대와 민정당이 있는데, 우리가 그 장씨를 통해 비밀리에 정치자금을 마련하고 있다는 거요.’ 그분의 이 말에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 같았다.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그 일로 마음이 무거워진 여사께서 전 대통령께 헤어지자고도 하셨다면서요.
“사기 행각을 벌인 그 여자가 작은아버지의 처제라고 하니 무력감(無力感)이 몰려왔다. 남편에게 대통령 끝나실 때까지만이라도 헤어져 있자고 했다. 정말 그분을 위해서라면 이혼, 아니 목숨이라도 끊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분은 직원들에게 ‘청와대와는 단연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니 소신을 갖고 원칙대로 철저히 조사하라’고 강력하게 지시했다. 5월 들어 드디어 장영자·이철희 부부가 구속됐고, 구속자 중에는 작은아버지도 포함돼 있었다. 장영자는 자신의 탐욕으로 열심히 살아가고 있던 많은 성실한 사람을 파산시켰고, 그들 가슴에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을 화상을 남겼다.”

 

“남편, 軍 시절부터 부부 동반 좋아해”

— 5공화국 시절 TV 뉴스 등에 여사께서 자주 등장했다.
“그분은 군 시절부터 남자들만의 모임보다 부부 동반, 가족 모임을 더 좋아했다. 그리 하는 게 여성에 대한 올바른 대접이라는 게 그분의 나름 생활철학이기도 했다. ‘주부들이 협조해주지 않으면 내가 무슨 수로 이 난국을 헤쳐나갈 수 있겠소. 사람을 많이 만나 내가 직접 협조를 구하려고 해도 장소의 물리적 제약 때문에 어렵소. 그러니 힘들더라도 따로 사람들을 만나 협조를 부탁해보시오’라고 하니 돕지 않을 수 없었다.”

— 전 대통령의 이런 생각이 여성의 입장에선 부담스러웠을 것 같다.
“그분과 함께 지방 출장이든 어디든 가게 됐을 때 여러 가지로 걱정이 많이 되더라. ‘혹 실수라도 저질러 대통령의 위신을 실추시키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과 강박감이 몰려와 병이 날 지경이었다. 양장 차림을 하면 살이 빠져 왜소해진 내가 더 어려 보일 것 같아 한복을 주로 입었다. 한데 때마침 컬러텔레비전 시대가 열려 모든 것이 화려하고 자극적으로 변해버렸다. 텔레비전 속의 내 존재는 대통령의 조용한 내조자가 아닌, 사치스럽고 화려한 대중스타로 내비쳤다. 이웅희(李雄熙) 공보수석을 만나 참석 행사 횟수를 줄이고, 부득이 참석하더라도 가급적 뉴스 화면에 등장하지 않도록 신경 써 달라고 부탁드렸다.”

— 여사님께서 모 여배우를 질투해 미국으로 보냈다는 이야기도 있다.
“살다 보면 좌절과 실패는 피할 수 없는 삶의 한 과정인 것 같다. 퍼스트레이디라는 대통령 부인이 국민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지는 못할망정 오해와 비웃음, 악성 추문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었다. 배우 장모씨가 결혼하지 않은 이유가 각하가 그녀를 좋아해서 내가 그녀의 자궁을 적출했기 때문이란 루머도 퍼졌다. 내가 속으로 ‘내가 정말 능력자네…’ 이런 생각도 했다(웃음).”


“그분의 폭포수 같은 눈물 처음 봐”
 

 ▲버마 우산유 대통령의 안내로 육군병원을 찾아 부상자를 위로하는 전두환 대통령과 이순자 여사. 사진=이순자 여사

 

— 우리 국민들은 미얀마(당시 버마) 하면 1983년 10월 9일 발생한 북한의 아웅산묘소 폭탄 테러를 떠올린다. 폭파 순간 영부인께서는 어디에 계셨나.
“랑군한글학교 학생과 학부모 초청 담소 시간을 갖고 있는데, 10분 정도 지났을까… 급하게 흘려 쓴 글씨로 ‘각하께서 행사를 중단하고 돌아오시니 영부인께서도 행사를 마무리해주십시오’라는 메시지가 적힌 쪽지를 받았다. 각하께서 공식 행사를 중단했다는 전갈은 심상치 않은 일이 생겼음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황급히 학부모들에게 짧은 인사를 남기고 경호관의 뒤를 따랐다. 경호관은 영빈관 별채로 가고 있었다. 별채의 구석방에 도착하니 그곳에 그이가 앉아 있었는데, 얼굴이 백지장 같았다.”

— 그 긴박한 상황에 전 대통령은 어떻게 상황을 지휘했나.
“그때 장세동(張世東) 경호실장이 그분에게 ‘수행원들이 잇달아 도착한 뒤 태극기를 단 이계철(李啓哲) 대사의 승용차가 도착하자 테러범들은 대통령이 도착한 것으로 오판하고 만행을 저질렀다’고 보고했다. 핏기 하나 없는 창백한 얼굴로 묵묵히 보고를 듣고 있던 그분의 눈에서는 폭포수 같은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말할 수 없이 애통하고 참담한 가운데에도 그분은 정신을 가다듬고 현장을 지휘하기 시작했다. 그분은 김병훈 의전수석, 황선필 공보수석, 장세동 경호실장 등 살아남은 세 사람의 공식수행원을 불러 ‘국화계획을 중단하고 서울로 돌아간다. 서울에서 비행기를 한 시간이라도 빨리 오게 하여 순국자의 유해와 부상자를 긴급 후송하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사건 발생 7분 만에 내린 조치였다. 그 황망하고 긴박한 순간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살아남은 세 분 수행원에게 비상약으로 준비해온 청심환을 건네는 일뿐이었다.”

— 귀국 후 전두환 대통령은 어떠했나.
“한동안 그분은 아끼고 의지하던 인재들을 잃은 슬픔으로 밤에도 일어나 혼자 눈시울을 적시는 일이 많았다. 어느 날은 새벽에 홀로 비서실을 찾아가 그들이 앉았던 자리에 멍하니 앉아 있기도 했다.”
 

 

5공화국의 쟁쟁한 경제팀

1988년 2월 24일자로 퇴임한 전두환 대통령에게 청와대 직원들이 전달한 치적 액자엔 ▲최초의 단임 및 평화적 정부 이양 실현 ▲정상외교로 세계 속의 한국 부각 ▲소득배증과 10대 무역대국으로의 부상 ▲한 자릿수 물가와 흑자경제의 실현 ▲올림픽 유치와 아주대회의 성공 ▲자주방위산업체제의 확립 ▲국민연금과 전 국민 의료보험 실시 ▲과학기술의 획기적 진흥 ▲문화시설의 확충과 독립기념관 건립 등이 적혀 있다. 전 대통령의 재임 중 출장거리는 국내 927회(12만7140km), 국외 7회(72일, 16개국, 16만5734km)였다.

— 국민들은 전 대통령의 업적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경제라고 생각한다.
“보안사령관 시절 ‘경제학 선생님’으로 만난 경제기획원 출신 김재익(金在益) 수석에 이어 사공일, 박영철(朴英哲), 김기환(金基桓) KDI 원장을 비롯한 쟁쟁한 경제팀이 살림을 꾸린 덕분이다. 그분은 경제관료를 쓸 때도 이론과 실무를 겸비하도록 경력 관리를 해주셨다. 그분이 달성한 경제 분야 성과라면 단연 ‘한 자릿수 물가, 두 자릿수 경제성장률, 외채상환, 자립경제의 기반 구축’이 아닐까 싶다. 그분의 재임 기간 우리나라는 물가는 안정되고 경기는 호황을 누렸고, 국민들은 그동안 고통 분담에 동참한 대가를 나눠가질 수 있었다.”


6·29의 이면
 

 ▲1988년 2월 25일 오전 10시, 노태우 신임 대통령과 전두환 전 대통령이 취임식을 마치고 손을 흔들고 있다. 사진=이순자 여사 

 

— 윤석열(尹錫悅) 대통령이 후보 시절, 전두환 대통령은 정치와 경제 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냈다고 말했다가 논란을 빚었다.
“1987년 6월, 당시 연일 계속되는 격렬한 대규모 집회를 통해 국민 대다수가 직선제를 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남편은 내각제 개헌을 선호했던 자신의 고집을 꺾고, ‘직선제 개헌의 완전 수용’과 ‘가능한 민주화 조치의 단행’이라는 결단을 내렸던 것이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의 감동이 생생하다.”

— 6·29선언도 사실은 전두환 대통령의 작품이라는 말도 있다.
“맞는 말이다. 그분이 먼저 해야만 했던 일은 노 후보를 설득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당시 민정당 총재 자격으로 내각제를 홍보하고 있던 노 후보는 대통령 집무실에서 그분을 만날 때까지도 직선제에 대한 생각이 없었는지 그분의 돌연한 제안에 거부반응을 보였다 한다. 이틀의 시간을 두고 직선제 수용의 불가피성과 직선제를 받아들인 후의 선거에서도 노태우 후보가 충분히 승산이 있다는 점을 조목조목 설명해나갔다고 한다. 마침내 6월 19일 그분은 노 대표의 결심을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고 한다.”


‘성격이 팔자를 만든다’

— 결과적으로 모든 공(功)이 노태우 대표에게 돌아갔는데….
“그분은 노 대표에게 직선제를 비롯해 야당과 국민이 요구하는 모든 민주화 조치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과감한 구상을 책임지고 만들어 오라고 요구했다. 그 결과로 얻어지는 ‘과실’은 노 대표에게 양보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고 한다. 어차피 그분 자신이 직접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심판을 받을 수는 없는 상황이니까, 자신의 분신(分身)과도 같은 노 후보가 국민과 야당, 언론으로부터 환영받을 수 있는 공약을 발표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스물아홉(1959년) 때 사랑하는 사람의 장래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던졌던 그분답게 이번에는 사랑하는 조국과 민정당의 미래를 위해 자신의 것으로 해도 될 영광과 찬사를 모두 친구 노태우에게 주고 있는 남편을 보면서 생각했다. ‘성격이 팔자를 만든다’는 말은 맞는 것 같다고.”

— 2019년 언론 인터뷰에서 여사님께서 전 대통령을 ‘민주화의 아버지’라고 말했다가 논란이 됐다.
“어려움에 처해 있던 경제를 살려보겠다고 인기 없는 정책을 소신 있게 채택해 끝내는 국민소득을 두 배로 올려놓은 남편, 이 나라 민주 발전을 위해 자신의 소신을 기꺼이 꺾은 남편이 퇴임 후 30년 동안 박해만 받는 것을 지켜보면서 너무 홀대한다 싶어 평소 소신을 말했던 것뿐이다. 윤석열 후보가 전두환 대통령은 정치와 경제 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냈다고 이야기하셨다가 공격을 받는 것을 보면서, 내가 ‘남편이 민주주의의 아버지로 평가받아야 한다고 말했다’가 곤욕을 치른 기억이 났다. 치매를 앓고 있는 남편을 닮아 헛소리를 하고 있다면서 몰아붙이니, 내가 어떤 근거로 남편이 민주화의 아버지라는 신념을 갖게 되었는지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 자서전을 보면, 국회 증언을 끝낸 1990년 1월 3일 무렵 박근(朴槿) 전 유엔대사가 전 대통령을 찾아와 대화한 내용이 나오는데, 김영삼씨의 말이 충격적이다.
“박근 대사가 교회에서 김영삼씨를 만났는데, 6·29 같은 조치를 노태우 대표가 아닌, 자신과 손잡고 했더라면 보호를 받았을 텐데, 노 대표에게 주어 이렇게 당하는 것이라는 말을 하더라는 것이다. 그 말을 들은 남편은 박근 대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김영삼씨의 말이 맞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했더라면 백담사에서 겪은 고초나 지난 31일(1989년 12월 31일) 증언대에 서서 당한 수모 같은 것은 면할 수 있었겠지요. 그러나 지금도 변함이 없지만 당시 내 소신은 나 자신의 보신을 위해서 내가 만든 당이나 함께 일한 동지들을 배신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어요. 국가 미래만을 위해 소신을 갖고 한 선택이니 후회는 없습니다.’”


김옥숙과의 우정

— 전 대통령은 노 대통령을 후계자로 선택하신 것을 후회하신 적은 없었을까.
“노태우씨를 훌륭한 후임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기울인 그분의 노력은 노태우씨가 맡았던 화려한 경력에 고스란히 나타난다. 제2정무 장관, 체육부 장관, 내무부 장관, 서울올림픽 조직위원회 위원장, 대한체육회 회장, 제12대 국회의원, 민주정의당 대표위원, 민정당 대통령 후보…. 60세도 안 된 나이에 이렇듯 화려한 경력을 쌓을 수 있다니! 과하다 싶을 정도로 많은 직(職)을 경험하게 하는 것을 보면서 대통령의 의중을 짐작한 사람 몇몇이 ‘후배나 부하에게는 권력을 물려줄 수 있어도 친구나 동지에게 물려주는 것은 위험하다’는 충고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남편은 40년 지기(知己)였기에 누구보다 자신이 인간 노태우를 잘 알고 있다고 자신했다. 자신이 야심 차게 키운 노태우야말로 자신의 뒤를 이어 자신이 못다 이룬 핵심 정책들을 더욱 성장·발전시켜 ‘선진 조국 달성’이라는 자신의 국정목표를 완수할 수 있는 인물이라고 확신했던 것 같다.”

— 노태우 대통령의 영부인 김옥숙(金玉淑) 여사와 가까이 지내시는지.
“노태우 대통령의 부인과는 10년간 영어 공부를 함께 했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다. 남편들 때문에 알게 된 사이지만, 남편 내조하는 스타일이나 아이들 교육하는 방식,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계발에 열심인 점이 서로 통했다. 개인적인 생각이긴 하지만, 남편이 심중에 두었던 후계자에게 자리를 넘기고 평화적 정권 교체를 이룩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나와 김옥숙 여사의 우정도 한몫했다고 생각한다. 각자의 배우자를 먼저 저세상으로 보내고 홀로 지내는 요즈음 서로 힘이 되며 살고 싶어 연락했지만, ‘누구를 만날 형편이 못 된다’는 얘기만 들었다. 가슴이 아프다.”


새세대육영회와 새세대심장재단
 

 ▲심장병 어린이 1만 명 새 생명 탄생 기념식에 참석한 이순자 여사. 이순자 여사는 재임 중 ‘새세대육영회’와 ‘새세대심장재단’ 두 단체를 탄생시키고 성장시켰다. 사진=이순자 여사 

 

— 7년간 재임하시고, 청와대를 떠나실 때 전 대통령은 58세, 여사님께서는 50세셨는데, 아쉬움 같은 건 없으셨나.
“임기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난 누구보다 기뻐했다. 어떤 알 수 없는 변수가 남편을 권좌에서 내려오지 못하게 할까 봐 임기 내내 전전긍긍하며 살았기 때문이다.”

— 7년 6개월의 청와대 생활, 영부인 역할을 하시면서 어떤 때가 가장 보람이 있으셨나.
“요즈음 청와대 시절을 떠올릴 때마다 미소 짓게 만드는 일은 두 가지가 있다. ‘새세대육영회’를 통해 당시 후진적 상태에 머물러 있던 유아교육 환경을 크게 개선시킬 수 있었던 일, 그리고 수술만 받으면 새 생명을 얻을 수 있는 6만여 명의 시한부 심장병 어린이들을 도울 수 있는 새세대심장재단을 설립했던 일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재단의 도움을 받아 하루 4명의 시한부 환자가 건강과 새 생명을 꿈꾸며 수술실로 들어가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람을 느낀다. 유아교육을 선진국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데 일조하겠다는 순수한 목적으로 창립한 새세대육영회는 국회가 마련한 ‘5공 청문회’의 무서운 추궁까지 견뎌내고 살아남았다. 그 단체는 정부의 압력 때문에 단체 이름도 ‘새세대육영회’에서 ‘아이 코리아’로 바뀌긴 했어도 2022년도까지 나와 육영회 회원들이 추진하던 사업을 계승 발전시키고 있다. 참으로 뿌듯하다.”


“올림픽 개회식은 꼭 직접 보고 싶어 해”

 ▲서울올림픽이 끝난 후 연희동 자택으로 찾아온 안토니오 사마란치 IOC 위원장은 전 대통령에게 서울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를 축하했다. 사진=이순자 여사

 

 — 88서울올림픽을 유치하고, 준비했던 전두환 대통령인데, 정작 개막식에는 참석하지 못했다.
“2017년 펴낸 자신의 회고록을 통해 밝힌 당시 그분의 솔직한 심정은 다시 봐도 눈물이 나고 속이 상한다. ‘5공 청산’ 정국을 종결시키기 위해서는 그분의 국회 출석 증언이 불가피하다는 야당 측의 끈질긴 요구로 정국이 시끄러웠다. 그런 가운데 88서울올림픽 개최의 날은 점점 다가왔다. 그분은 그 개회식만큼은 꼭 직접 보고 싶어 했다. 그분의 이런 희망은 누가 봐도 무리 없는 바람이었다. 그런데 6공 청와대에서는 그분의 올림픽 개회식 참석을 바라지 않는다는 얘기를 언론에 흘리고 있었다. 그분은 박세직(朴世直) 조직위원장의 초청장을 거부했고, 노 대통령의 형식적인 유감 전화를 받았다. 9월 17일 역사적인 서울올림픽이 개막했고, 그분은 집에서 TV를 통해 개회식 광경을 지켜봤다. 단상 로열 박스에는 노태우 대통령은 물론 서울올림픽을 히틀러의 베를린올림픽에 빗대며 빈정거렸던 김영삼씨도 있었다.”

— 정치적 상황에 의해 백담사로 떠나실 때의 심정이 어땠을까.
“그분은 올림픽을 계기로 국정이 어두운 ‘5공 청산’의 질곡에서 벗어나 올림픽 성공의 부가가치를 최대한 활용하며 발전적인 미래로 전진해나가기를 바랐었다. 그러나 그 염원은 무참히 깨져버렸다. 잠시 주춤했다 다시 불어오는 회오리바람처럼 모든 언론이 다시 그분의 재임 중의 일들을 왜곡해 보도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성공적인 올림픽에 대한 그분의 역할과 5공화국의 최소한의 땀과 공적마저도 외면했다. 왜곡된 과거에 대한 분노만으로 그분과 지난 정부를 몰아세우며 성토해댔다. 그러나 그분은 아무리 억울하고 원통한 소리를 들어도 여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 전두환 대통령은 그때 어떤 생각이었을까.
“그분은 여소야대(與小野大)의 정국을 맞아 노 대통령이 정치적으로 어려운 입장에 처해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새 정부로서 새로운 출발, 더 높은 도약을 위해 과거사를 짚고 넘어가는 과정이 불가피한 모양이라고 이해하며 성원하고 있었다. 다만 ‘5공 청산’에 몰두하느라 올림픽의 성공이 가져다줄 국운 번창의 힘찬 동력, 그 천재일우(千載一遇)의 황금 같은 타이밍을 놓칠까 봐 염려하며 안타까워했을 뿐이었다.”

— 그런데 노태우 대통령의 태도가 애매했다.
“여론의 비판이 극심할 즈음에 언론보도 속에서 그이의 ‘외국 추방’ ‘은둔’ ‘낙향’이라는 단어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 낯선 말들 속에 잠복해 있는 그 어떤 음습한 것이 느껴졌다. 그것은 곧 현실이 되어 연희동 집 문을 두드렸다. 정부 측에서 한 사람이 그분을 찾아온 것이다. 그러고는 그분에게 보도 내용과 똑같은 요구를 해오는 것이 아닌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경악할 내용의 요구였다. 평소 그분은 후진국의 지도자들이 권력을 이용해 치부하고 재임 기간 동안 그 재산을 해외로 빼돌려두었다가 권좌에서 물러난 후에는 외국으로 도망가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는 사례들을 극도로 증오했다. 그런데 마치 자신도 그런 매국적인 지도자인 양 해외로 내몰려고 하는 새 정부의 발상 앞에서 그이가 택할 수 있는 길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죽어도 이 땅에서 죽는다는 것이 그분의 신념이었다.”

— 혹시 노태우 정부에선 환갑 나이에 불과한 전두환 대통령이 퇴임 후 국가원로로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것을 우려하지 않았을까.
“그랬을 것도 같다. 단임을 결심할 때 모든 것을 버리겠다는 결심도 했어야 했는데, 국가원로로서의 활동은 유지하려다 노 대통령과 3김씨 모두에게 호되게 당하게 된 것 같다.”


백담사에서의 첫날 밤
 

 ▲1988년 11월 23일 오전 10시20분. 전두환 전 대통령은 응접실에서 참담한 심정으로 ‘국민 여러분에게 드리는 말씀’을 발표했다. 행장도 꾸리지 못한 황망한 출가에 이순자 여사가 얼굴을 감싸고 흐느끼고 있다. 사진=이순자 여사 

 

— 백담사로 가는 건 어느 분이 결정하셨나.
“그분은 노태우 대통령의 경호실장인 이현우씨로부터 자신의 해외 망명을 청와대에서 원하는 것 같다는 보고를 받은 날, 노태우 대통령의 진심을 알게 됐다. 친구 전두환을 보호하고 싶지만 정치적 상황 때문에 불가피하게 어려운 결심들을 하고 있다고 철석같이 믿었던 친구 노태우가 어떤 이유에서건 친구 전두환이 서울을 떠나 사라져 주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그날 밤 허탈한 모습으로 밤새워 생각에 잠겼던 남편은 내게 서울을 떠나자고 말했다. 그리고 기왕에 가는 것, 사람들이 찾아오기 힘든 첩첩산중으로 가자고 했다. 다음 날 아침, 백담사로 떠나기에 앞서 그분은 국민들 앞에 서서 진심을 다해 사죄한 후, 내 땅, 내 조국에 남아 받는 벌이라면 어떤 벌도 달게 받겠다는 대국민 담화문을 낭독한 후 은둔의 길에 올랐다. 백담사로 가는 차 안에서 그분은 침묵을 지키고 계셨는데 나는 쏟아지는 눈물을 억제하지 못했다. 몇 번이고 곁에 계신 분을 생각해야지 하고 다짐했지만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지 못했다. 지금도 마음의 고통으로 말하면 나보다 몇백 곱절은 더했을 그분 앞에서 하염없이 울기만 했던 그때 내 모습을 생각하면 한없이 부끄러워진다. 말없이 지켜보기만 하던 그분이 ‘임자 볼 면목이 없구먼’이라고 말하며 눈물 콧물로 뒤범벅이 된 내 얼굴을 닦아준 후에야 서러운 울음을 그쳤으니 말이다.”

 

 ▲자나 깨나 전 대통령 부부의 마음을 짓누르는 것은 서울에 두고 온 고3 아들 걱정이었다. 사진=이순자 여사

 

 ▲부부는 수험생처럼 불경을 시도 때도 없이 읽으며 고통의 본질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진=이순자 여사

 

 — 백담사에 처음 갔을 때 가장 걱정되던 건 무엇이었나.
“백담사 입구에서부터 다시 수십 리의 외길을 가야 했는데 길이 얼마나 험하던지 차에서 내려 밀고 가야 하는 구간도 있었다. 외길이 끝나는 계곡 사이에, 통나무로 얽어 만든 외나무다리가 보였고, 스님들과 앞질러 달려온 기자들이 기다리고 있는 그 외나무다리 뒤로 낡고 초라한 작은 절 하나가 보였다. 이것이 백담사와 우리 내외의 첫 만남이었다. 일찍 자리에 누웠지만 물소리, 바람소리, 풍경소리에 좀처럼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경황이 없어 말 한마디 변변히 나누지 못하고 떠나온 막내아들 재만을 생각하자 목이 메어 왔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청와대에 들어가 한창 엄마의 손길이 필요한 아이에게 엄마 노릇 한 번 제대로 못해 주었다. 청와대를 떠나 집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그동안 못다 한 정성을 쏟아주리라 결심했지만, 대학 입시를 앞둔 아이를 혼자 남겨두고 낯선 곳으로 떠나오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 외가댁도, 아니 온 친척들이 모두 소용돌이에 휩싸이고 있어 아이를 맡길 만한 곳도 없었다. 황망히 서울을 떠나오면서 누나가 있는 사돈댁에 가 있도록 일러두었지만, 그 애가 받았을 엄청난 충격이 생각나 거의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그 밤을 시작으로 우리 내외는 그곳에서 769일(2년 1개월 8일)을 보내야 했다.


“음식 챙겨 들고 찾아주신 국민들”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방, 나오는 건 한숨뿐이었지만 손주들이 찾아오면 시름을 잊었다. 주말마다 찾아오는 손주들을 자전거에 태워주며 마냥 즐거워하는 전두환 대통령. 사진=이순자 여사

 

 — 그 어려운 시간을 보내실 때 힘이 되어준 사람은?
“끝까지 곁을 지켜준 측근들이다. 그리고 백담사에서 고생하고 있는 전직 대통령의 처지가 안타까워 맛있는 음식 챙겨 들고 전국 각지에서 찾아주신 국민들이다. 그리고 부모들 따라 매주 주말이면 찾아와 온갖 재롱을 피워주던 손주들과 나를 어려워하지 않고 스스럼없이 대해주던 동네 아주머님들이었다. 비 때문에 백담사까지 올라오지 못한 방문객들이 그분을 보지 못하면 돌아가지 않겠다고 우기는 바람에 주차장까지 내려가고, 잘 보이지 않는다고 하기에 그분은 버스 위까지 올라가 손을 흔들었다.”

 

▲동네 아줌마들이랑 김장거리 다듬기도 하고, 여름이면 손녀를 데리고 텃밭에 나가 감자를 캤다. 사진=이순자 여사

  

— 1995년 비자금 사건으로 노태우 대통령이 구속되자, 김영삼 대통령이 ‘5·18특별법’을 만들어 전두환 대통령을 구속시켰다. 전 대통령은 소위 ‘골목길 성명’을 발표했다.
“‘저는 오늘 이 나라가 과연 지금 어디로 가고 있고, 또 어디로 가고자 하는지에 대한 믿음을 상실한 채 심히 비통한 마음으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로 시작되는 성명문 낭독은 8분 만에 끝났다. 하지만 김영삼 대통령의 역사관을 따져 묻고 ‘군사 반란 세력’과 야합한 김 대통령의 행적을 추궁하는 내용의 성명은 당시의 상황에서 국민들에게는 ‘사이다 발언’으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청와대가 예상치 못했던 그분의 대국민성명으로 몹시 심기 상해한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그 소문을 뒷받침하듯 그분에 대한 전격적인 ‘체포작전’이 자행됐다. 성명이 있은 바로 다음 날인 1995년 12월 3일, 만물이 어둠에 싸여 있던 일요일 새벽 6시34분경, 그분은 여장을 풀었던 합천 장조카 집에서 급파된 검찰 수사관에 의해 강제 구인당했다. 그분을 태운 호송 차량은 4시간을 쉬지 않고 달린 후 안양교도소에 도착했고, 구속 직후 물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한 상태에서 11시간에 걸친 신문을 받았다.”

— 당시에 안양교도소에 수감되면서 28일간 단식을 하셨다.
“맞다. 장기간의 단식으로 지방과 근육이 많이 빠지게 됐는데, 사면 복권된 후 적절한 치료를 받은 덕분에 병의 진행을 늦출 수 있게 됐지만, 해마가 약간 뿌옇게 나올 정도의 뇌손상을 입었다. 그럼에도 남편은 2015년 11월 25일 서울대병원에 마련된 김 전 대통령의 빈소를 찾아 말없이 조문하고 돌아왔다. 정치자금을 뇌물죄로 몰아 추징금 환수라는 명분으로 전 가족의 재산을 초헌법적 수단으로 몰수해간 김영삼씨의 이해할 수 없는 자기모순과 악의를 그분은 ‘가는 마당에’란 말로 감싸 안았던 것이다.”


“영감 그때 잘못하셔서 고생이 많다”
 

 ▲전 대통령의 큰며느리와 장손 우석군이 주말을 맞아 백담사를 찾았다.

 

 — 전 대통령은 1995년 내란혐의 등으로 기소됐고, 1997년 4월 대법원에서 무기징역과 추징금 2205억원을 선고받았다.
“대부분의 사람은 퇴임 후 10년간 집요하게 그분을 강타한 수난들이 1997년 12월, 사면 복권됨으로써 막을 내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추징금 환수라는 올가미가 그분에게 씌어 있었고, 정치권력은 대를 이어가며 필요에 따라 그 올가미를 당김으로써 그분의 숨통을 조였다.”
 

 

 ▲백담사 시절 전두환 전 대통령은 가끔 찾아오는 손녀를 업어주면서 시름을 달랬다. 사진=이순자 여사

 

 — ‘5·18특별법’에 따른 ‘비자금’ 사건의 법원 판결을 말하는 건가.
“맞다. 대통령 재임 중 거둔 정치자금은 모두 ‘뇌물’이고 뇌물로 받은 돈은 그것이 이미 정치자금으로 사용된 것인지 여부를 따질 것도 없이, 모두 개인이 물어내야 한다는 것이 그 판결의 내용이었다. 추징금은 정치자금법 이전에 당 총재가 기업들의 기부를 받아 정치자금으로 쓰는 공적자금이었다. 그분은 그 돈을 효자동 상업은행에 예치시켜놓고 공공개념으로 운영했다. 남편은 정치자금 중 많은 부분을 재임 중 고지식하게 정치적 목적으로 모두 사용했기 때문에 추징이 어려울 수밖에 없었던 거다. 게다가 단식 와중에 검찰의 수사를 받던 그분은 의식이 혼미한 상태에서 검사가 내미는 은행계좌에 찍힌 돈을 모조리 받은 것으로 인정했고, 그분이 기업 대신 십자가를 지는 바람에 천문학적인 2205억원이라는 추징을 당하게 된 것이다.”

— 그걸 소명해야 하지 않을까.
“그분이 그때 ‘내란수괴(內亂首魁)면 무조건 사형인데, 그깟 돈을 가지고 기업인들과 재판정에서 주었다, 안 받았다 치사하게 그럴 필요가 없다’고 하셨다. 그걸 따져 검찰이 증명하도록 했어야 했고, 그 액수가 확정되었다면 우리가 지금처럼 고생을 안 하는데… 하여튼, 살아계실 때는 말을 못 했지만, 영감 그때 잘못하셔서 고생이 많다(웃음).”


‘전 재산 29만원’의 진실
 

 ▲전두환 대통령과 이순자 여사가 장세동 전 경호실장 등 측근들과 산행을 했다. 전 전 대통령이 5·18 관련 재판을 받을 때 함께한 인물들이다. 사진=이순자 여사

 

 — 2003년 추징금과 관련, “예금자산이 29만원뿐”이라고 해 두고두고 논란이 됐다.
“2003년 검찰은 남편에게 ‘재산명시 명령신청’을 법원에 제출한 후 법원에 출두해서 선서하라고 통보해왔다. 그분은 변호인에게 자신에게 남아 있는 재산을 빠짐없이 기록해 차질이 없도록 하라고 했다. 변호인들은 남편 명의로 돼 있는 연희동 별채는 물론 유체부동산, 서화류, 사용하던 골프채까지 망라해 소유물을 남김없이 ‘재산명시서’에 기록했다. 그런데 마지막 완성본을 읽어본 남편이 자신이 직접 법원까지 나가 선서해야 하는 사안이니, 누락된 부분이 있어서는 안 된다면서 혹시 검찰에서 가져간 통장에 얼마간의 이자가 발생해 있을지 모르니 알아보라고 했다. 변호인들이 알아본 결과, 검찰이 추징해간 휴면계좌에서 총 29만원의 이자가 발생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소액이지만 정확을 기하는 의미에서 기재하게 됐던 것이다. 그런데 일부 언론이 그 사실을 마치 남편이 ‘전 재산이 29만원밖에 없다’고 주장한 것처럼 왜곡해서 보도하더라. 기가 막힌 왜곡 보도다. 그 이후 그 ‘29만원’은 ‘29만원밖에 없다면서 골프를 치느냐’는 식으로 그분을 조롱하는 말이 됐다.”

— 2003년 10월, 법원의 명령에 따라 제출한 재산목록에 기재된 자산은 경매에 부쳐졌다. 당시 심정이 어떠했나.
“아침부터 저녁 늦은 시각까지 진행된 경매는, 역시 경매에 부쳐진 연희동 집에서 진행됐다. 피아노, 응접세트 3점, 카펫 3점, 식탁세트, 찬장, 에어컨, 냉장고 3개, 텔레비전 3대, DVD베스트, 골프세트 2점, 컴퓨터, 프린터, 책상, 회전의자 등 우리 가족의 손때가 묻은 가재도구들이 경매되었다. 기가 막힌 것은 그다음 장면이다. 우리 가족이 키우던 진돗개 ‘설이’와 ‘송이’도 검찰에 압류돼 경매에 부쳐졌는데, 영문을 모른 채 웅크리고 있던 설이와 송이를 끔찍하게 사랑했던 어린 손주들은 눈물을 글썽이며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하다하다 키우던 개마저 경매에 부치는 것이 이 나라 법이고 권력이구나 하는 생각에 눈앞이 아찔했다. 천만다행으로 설이와 송이는 아이들의 눈물겨운 모습을 측은하게 여긴 이웃 주민 한 분이 경매에 참여해 사주신 덕분에 아이들 곁에 머물 수 있었다.”


“둘째 아들 이혼한 전처의 집까지 압수수색”
 

 ▲이순자 여사의 연희동 서재. 이곳에서 2만여 쪽에 달하는 자서전 초고를 정리해 2017년 자서전을 펴냈다. 사진=이순자 여사

 

 2013년 10월에 추징금 환수시효가 끝나게 돼 있었다. 그런데 2013년 6월 27일, 국회가 전두환 대통령의 가족, 친인척, 지인은 물론 사돈의 팔촌의 재산까지 압수수색을 벌일 수 있는 소위 ‘전두환법(공무원범죄에 관한 몰수 특례법)’을 제정해 통과시켰다.

“대한민국 국회는 건국 이래 모두 네 번 소급입법인 특별법을 제정했다. 그 네 번의 소급입법 중 두 번이 전두환 대통령을 처벌하기 위한 목적에서 만들어졌다. 첫째는 1995년 김영삼 정부 시절 제정한 ‘5·18특별법’이고, 2013년 박근혜(朴槿惠) 정부 시절 제정된 위헌 소지의 ‘전두환법’이다. 이 법이 제정되기가 무섭게 검찰은 연희동 집에 대한 가택수색은 물론, 막내아들 장인의 회사와 사저, 심지어 둘째 아들의 이혼한 전처의 집까지 압수수색을 했고, 이 과정에서 돈이 될 만한 것이라면 약혼·결혼 패물들까지 압수해 갔다. 물론 그분의 사돈의 팔촌들의 재산이 1980년도 이후에 그분의 정치자금에서 유래된 재산이라는 것을 검찰이 입증해야 하는 난제가 있었지만, 우선 검찰은 닥치는 대로 그분과 그분 주변을 압박했던 것이다.”

— 2013년 장남 전재국씨가 추징금 완납을 약속한 적이 있다. 전 대통령 서거 이후 추징금에 대한 의무는 면책되는 것인가.
“2013년 장남 전재국이 헌납하겠다고 약속했던 재산은 이미 추징이 완료되었다고 알고 있다. 다만 경매에 부쳐진 재산의 가격이 당시 검찰이 발표했던 액수만큼 높게 나오지 않아 완납되지 못한 것이다. 미납된 추징금은 자손들에게 상속되지 않는다고 알고 있다.”

— 노태우 대통령의 아들 노재헌(盧載憲)씨는 2019년 8월에 5·18 광주 민주화 운동 탄압을 사과했는데, 왜 전두환 대통령 측은 사과하지 않느냐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분이 돌아가셨을 때, 장례식장을 가득 메운 조문객들 앞에서 나는 가족을 대표해 ‘남편으로 인해 고통을 받고 상처를 입으신 분들께 남편을 대신해 깊은 위로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는 말씀을 드렸다. 5·18로 인해 희생되신 분들을 생각하면서 한 말이다. 생각해보니 남편이 공직에서 물러난 후 저희는 참으로 많은 일을 겪었다. 그럴 때마다 남편은 내게 모든 것이 자신의 불찰이고 ‘부덕의 소치’라고 말씀하셨다. 나 또한 남편을 잃고 보니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괴로워하시는 분들의 마음을 알게 돼 위로해드리고 싶어 큰 마음 먹고 사죄의 말씀을 올렸던 것이다.”


“병들고 늙어 자기 한 몸 챙기기도 힘든 나이에…”

 ▲1990년 12월 30일, 전두환 대통령 내외가 2년여 동안 신세를 진 백담사 대웅전에서 송별기도를 드리고 있다. 사진=이순자 여사

 

 — 회고록에 따른 조비오 신부 사자(死者)명예훼손 혐의로 고발을 당해 그동안 광주(光州)에서 재판을 받으셨다.
“광주지방법원이 남편에 대한 구인장을 집행하기로 한 2021년 3월 11일 아침의 일이다. 혹시 일어날지도 모를 돌발행동에 대비해 여벌의 옷을 준비하고 아침 식사를 준비하면서 나는 몹시도 마음이 언짢았다. 물어보고 따지고 벌주려면 몸이 좀 건강하고 기억력도 온전할 때 했으면 좋았으련만, 병들고 늙어 자기 한 몸 챙기기도 힘든 나이에 장장 10시간이나 걸리는 곳으로 불러내 구인까지 하려 하다니…. 구인장(拘引狀)이 발부돼 광주지방법원으로 가고 있던 남편은 몸에서 호랑이 기운이 느껴지는, 범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전직 대통령의 모습이 아니었다. 병들고 노쇠해져 아내인 내가 옆에서 보살펴드리지 않으면 광주까지 가는 일도, 재판정에 참석하고 집으로 무사히 돌아가는 일도 어려운 노인일 뿐이었다.”

— 전두환 대통령이 생전에 5·18 문제와 관련해 남기신 말씀은 없나.
“남편은 대통령에 취임한 후 광주사태의 진상을 파악하고 후유증을 치료하는 데 좀 더 노력하지 못했던 점을 대단히 유감스럽게 생각하셨다. 정치권의 요구로 2년여에 걸친 백담사 생활을 했을 당시, 몸도 마음도 몹시 고단한 가운데에도 광주사태라는 민족적 비극으로 희생된 분들의 영가(靈駕)가 극락왕생할 수 있도록 100일 기도를 연달아 강행한 것도 그런 까닭이다. 그런 깊은 회한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1995년도 5·18특별법 제정으로 구속돼 안양교도소에서 영어(囹圄)의 몸이 되었을 때, 단식 후유증으로 몸이 몹시 불편한 가운데에도 옥중에서 매일 한 시간씩 고성(高聲)으로 염불하며 영가들의 왕생극락을 기원했다. 그리고 그이는 알츠하이머라는 병 때문에 방금 한 일을 기억하지 못하셨지만, 정신이 온전했을 때는 ‘과거는 물에 흘려보내고 국민이 다시 화합해 새 출발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전두환, “있는 그대로 평가를 받을 것”

— 전직 대통령들의 경우를 보면서, 공직자는 역사 앞에서 무한책임을 져야 하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나카소네 총리는 그의 저서 《정치가는 역사의 법정에 선 피고》(중앙공론)에서 그같이 말했다.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7년 반 동안 국정을 책임졌던 그분 역시 역사 앞에서 무한(無限)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공적인 일뿐 아니라 사적인 일까지 담당 비서관을 배석시켜 기록을 하는 남편을 보며 염려하는 사람이 많았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남편은 소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정적(政敵)들에 의해 악용당하는 걸 두려워해 기록을 남기지 않는다면, 후대 사람들이 무엇을 보고 배우겠는가. 난 누가 뭐라고 해도 있는 그대로의 기록을 남길 것이고, 있는 그대로 평가를 받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