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중앙일보) 2022-11/ 11.01(화) 이태원동 - 11.30(수) 한전
분수대 2022-11/ 중앙일보
11.01(화) 이태원동
이태원동은 예로부터 사람이 많이 다니던 곳이었다. 동 이름 자체가 조선시대 역원에서 유래했다. 먼 길을 가야 하는 파발과 관리에게 말을 빌려주는 곳은 역(驛), 잠자리와 밥을 제공하던 곳은 원(院)이라고 했다. 현 이태원동과 멀지 않은 서울 용산동 용산고 부지 인근에 이태원이란 이름의 원이 있었다.
조치원이나 인덕원·장호원처럼 교통의 요지마다 ‘원’으로 끝나는 지명이 남아있는데 모두 역원이 있던 자리였다. 이태원도 그랬다. 고려시대부터 수도와 중부·영남지역을 연결하는 첫 길목으로 교통 요충지 역할을 했다.
영남과 수도를 오가는 많은 사람과 물자가 모이던 지역이었다. (서울역사박물관 발간 『이태원 공간과 삶』)
그런 이태원에서 참사가 났다. 평소 휴일에도 수만 인파에 골목마다 길이 밀리던 곳이다. 게다가 코로나19 이후 마스크 없이 보내는 첫 핼러윈 데이 주말이었다. 10만 명 넘는 인파가 몰릴 것이란 예측이 있었다. 그러나 행사 주최자가 특정되지 않았던 탓에 제대로 된 통제는 이뤄지지 않았다. 인파가 넘치는 가운데 사고는 갑작스럽게 발생했다. 혼란은 참사로 이어졌다. 사고 직후 수많은 소방관·경찰관·의료진·시민 등의 분투가 있었지만 희생을 다 막을 순 없었다.
‘왜 거기에 갔냐, 왜 그랬냐’는 한탄 섞인 목소리가 한켠에서 나온다. 하지만 그곳에 있던 젊음은 죄가 없다. 외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경기장에서, 종교행사에서, 공연장에서. 그 누구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누구에게도 일어나선 안 되는 일이었다.
참담한 무력감과 바닥없는 우울이 한국 사회 전체를 덮쳤다. 2014년 4월 세월호 참사 이후 다시는 없었으면 했던 국가적 재난을 또 목도하게 됐다. 8년 전 경험했던 비탄과 고통이 다시 밀려들었고 일상은 쓸려나갔다.
이태원 참사는 현재 진행형이다. 많은 부상자가 지금도 생사를 오가고 있다. 현장에 있었던 생존자와 목격자, 그리고 유가족 등이 겪을 트라우마는 이제 시작이다. 이들에 대한 지원을 포함하는 사고 수습이 필요한 이유다. 참사 원인과 과정에 대한 철저하고 엄중한 조사도 뒤따라야 한다. 많은 생명이 무참하게 사그라지는 일이 다시는 없도록 말이다.
조현숙 경제정책팀 차장
11.02 레고
레고는 20세기 가장 성공한 완구 브랜드다. 전 세계 어디를 가나 장난감 매장의 중심은 레고다. 할아버지, 아버지, 손자까지 대를 이어 즐겼다. 세대를 초월하는 강력한 지식재산권(IP)은 지금도 게임으로, 영화로 다양하게 변주된다. 요즘 아이들의 뮤즈인 마인크래프트나 로블록스도 레고가 없었다면 탄생하기 어려웠을 터다.
레고 마니아의 꿈과 환상이 담긴 레고랜드의 국내 상륙은 기대가 컸다. 디즈니랜드 같은 글로벌 테마파크 유치가 여러 차례 무산된 이후라 더욱 그랬다. 하지만 100년 무상 임대 조건, 선사시대 유물 발굴 등의 이유로 반발이 거셌는데 주민과 이해관계자를 제대로 설득하지 못했다. 공사비를 둘러싼 잡음도 끊이지 않았다. 올해 5월 문을 열기까지 개장 시기만 7차례 연기됐다.
다시 논란의 중심에 선 건 강원도가 지급 보증한 자산유동화기업어음(ABCP) 2050억 원어치가 부도 처리되면서다. 뒤늦게 채무를 갚겠다고 했으나 이미 회사채·기업어음, 부동산 프로젝트 파이낸싱(PF) 시장으로 불안이 전이된 후였다. 금융 당국까지 나섰지만, 혼란은 여전하다. 잃은 신뢰를 되찾는 일이니 수습이 길어질 수밖에 없다.
장사도 딱히 잘 안되는 모양이다. 개장 초기 반짝했던 인기가 빠르게 식고 있는데 실제로 방문객은 연간 200만명이란 목표에 한참 못 미친다. 그도 그럴 게 5만원대의 비싼 입장료, 악착같이 받는 주차요금, 서울 5성급 호텔보다 비싼 숙박비를 납득할 만한 이용객이 얼마나 되겠나.
관리 능력도 의문이다. 개장 이후 놀이기구가 멈춘 것만 5차례다. 최근엔 연간이용권을 팔고 휴장 일정조차 알리지 않아 또 한 번 입길에 올랐다. 각종 커뮤니티엔 ‘먹을 게 마땅치 않다’, ‘볼거리만 있고, 쉴 곳이 없다’는 불만이 쌓여간다. 모두 재방문율을 떨어뜨리는 요인이다. 두 번, 세 번 찾는 고객이 없으면 그 어떤 테마파크도 살아남지 못한다.
‘레고(LEGO)’는 ‘잘 놀다’라는 뜻의 덴마크어 ‘LEG GODT’의 줄임말이다. 레고랜드 역시 ‘생애 첫 테마파크를 경험할 아이들에게 즐겁고, 행복한 경험을 선사하겠다’고 홍보한다. 아이는 마냥 즐거울 수 있겠으나, 아이 혼자 춘천까지 갈 일은 없다. 부모가 ‘잘 놀고 간다’는 생각을 못 하는 놀이터라면 레고랜드의 미래도 뻔하다.
장원석 S팀 기자
11.03 복기
프로 바둑 기사들은 대국을 끝낸 직후, 전체 대국 내용을 순서대로 되짚는 복기(復棋)를 한다. 복기에 임하는 패자는 자신이 둔 악수(惡手)를 되짚으며 실수와 오판의 순간들을 직면한다. ‘바둑의 전설’ 조훈현 9단은 “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다. 자신의 치부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며 패전 후 복기의 고통을 토로한 바 있다.
하지만 바둑의 세계에서 복기를 회피하면 실력을 키울 수 없다. 복기를 게을리하는 하수들은 자신의 패착을 매번 반복해, 패배의 굴레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한다.
‘돌부처’ 이창호 9단은 『부득탐승』에서 “복기는 패자에게 상처를 헤집는 것과 같은 고통을 주지만, 유일하게 패자가 승자보다 더 많은 것을 거둘 수 있는 시간”이라 설명했다. 또 “패한 대국을 다시 놓아보며 실패의 원인을 찾는 복기의 노력만큼은 누구보다 많이 했다”고 자부했다.
복기가 주는 교훈은 자신의 실수와 실패 경험이 전진과 성장의 밑거름이 된다는 데 있다. 내 안에 숨은 오판과 악수의 패턴을 찾아내 제거하고, 묘수와 승착의 전략을 새로 심는 게 복기의 수순이다.
지난달 29일, 대한민국 서울 한복판에서 핼러윈데이를 즐기러 나온 청춘 156명이 압사하는 날벼락 같은 참사가 터졌다. 대통령은 즉각 국가 애도 기간을 선포했고, 문화 행사들은 줄줄이 취소되는 등 전 국민이 추모에 동참하고 있다. 112 신고에 대한 경찰의 부실한 대응, “경찰·소방인력 배치 부족이 참사 원인 아니다”는 행정안전부 장관의 발언 등은 이번 참사가 “관리 실패로 인한 인재”였음을 확인하게 한다.
추모와 함께 지금 할 일은 차분한 복기다. 이 같은 관리 실패가 왜 발생했는지 꼼꼼하게 되짚으며, 당시의 오판과 악수의 원인을 빠짐없이 분석해야 한다. “통제해 달라”는 112 신고를 가벼이 넘긴 원인 중 혹시라도 “노는 것까지 지켜줘야 하느냐”는 식의 부정적 인식이 깔려있진 않았는지, “왜 그런 델 갔냐”는 조롱 댓글은 왜 등장하는지까지도 빈틈없이 살폈으면 한다.
치밀한 복기 뒤에 책임자 문책도, 새로운 안전관리대책 마련도 진행될 수 있다. 제2, 제3의 참사를 막을 묘수는 이번 이태원 참사에 숨어있는 우리 사회의 분열과 부실, 치부를 제대로 헤집는 데 달렸다.
박형수 국제팀 기자
11.04(금) 국가애도기간
2001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미국 9·11 테러 사흘 뒤인 9월 14일을 ‘애도의 날’로 정했다. 한국인을 포함한 희생자 2977명을 추모하기 위해서다. 전국 관공서·학교가 조기를 게양하고 오전 10시 사이렌을 울려 1분간 묵념했다. 이전에도 KAL기 폭파(1987), 삼풍백화점(1994)·성수대교(1995) 붕괴 등 수백명의 사상자를 낸 대형 사고가 있었지만 정부가 애도를 위한 날짜·기간을 지정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2010년 4월 천안함 피격 때 이명박 정부가 해군장 장례 기간(5일간)을 ‘국가애도기간’으로, 영결식 당일을 ‘국가애도의 날’로 명명했다. 기존 ‘국가장’ 때 장려해 온 전 국민적 추모 분위기를 불의의 군사 사건에 적용키로 결정한 것이다. 전·현직 대통령 등이 사망하면 현행법(국가장법 4조)상 최대 5일을 장례 기간으로 정해 추모한다. 다만 2014년 세월호 참사 때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 “공직사회 기강 확립”을 지시했을 뿐, 별도의 애도기간을 선포하지는 않았다.
이처럼 과거 사례가 제각각이다 보니 이번 이태원 핼러윈 참사 애도기간(10월 30일~11월 5일) 동안 적잖은 사람들이 ‘일상에서 뭘 해야 하고, 뭘 하면 안되는지’를 궁금해하는 풍경이 펼쳐졌다.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에 “국가애도기간에 회식을 해도 되나”, “공연(예능)은 예정대로 하나”, “수학여행이 취소되는 건 아닌가” 등의 글이 올라온다. 국가애도기간 중 일반 시민의 활동 범위를 명문화해 규정한 법적 근거나 시행령은 없다. 천안함 때 정부가 부처·지자체·공공기관 등에 ▶검소한 복장 ▶근조(謹弔) 리본 패용 ▶행사 자제(불가피한 경우 간소화) ▶조기 게양을 지시했고, 현 정부도 비슷한 공문을 내려보냈다.
한켠에서는 이번 애도기간 설정을 두고 ‘7일이나 하는 게 맞나’, ‘군인 순직과는 성격이 다르다’ 등의 논쟁이 벌어지는 모습도 보인다. 130명이 희생된 지난 2015년 파리 테러 때 부인을 잃은 저널리스트 앙투안 레리가 테러범들에게 쓴 편지 구절을 소개한다. “우리는 최대한 행복해지고 자유로워짐으로써 당신(테러범)에게 상처를 줄 것이다. 당신이 바라는 증오 따위는 없다.”
공방과 증오가 아닌, 공감과 배려만이 비극을 진정으로 극복하는 열쇠다.
심새롬 정치팀 기자
11.07(월) 조용한 해고
“4년 차인 후배가 1박2일로 워크숍을 가자네.” 얼마 전 1년 만에 회식했다는 지인의 말이다. “뭘 하자고 했다고?!” 나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졌다.
“입사하고 (대면) 회의도, 회식도 못 해봤다며 정기적으로 해도 좋겠단다. 중견 팀원들 얼굴은 흙빛으로 변하고. 못 들은 체할 수도 없고…. 고민이다.”
4년 차…. 코로나19와 함께 입사해 회의와 회식의 엄혹함을 모를 연차다. 아직 모든 게 궁금할 테다.
2010년대만 해도 매주 월요일 회의를 했다. 한 주간 쓸 기사와 취재 계획을 쭉 써서 팀원들 수만큼 출력해 가지런히 회의실 책상 위에 두면 한 시간에 걸쳐 팀장에게 순서대로 혼이 났다.
선배는 후배 앞에서 팀장에게 혼나는 모습을 보이는 게 싫었을 테고, 후배는 선배들에게 돌아가며 혼나는 것이 힘들었다. 회의 후엔 늘 새벽까지 함께 어울렸다. 회의 때 혼나서 기분도 더러운데 마주 앉아 술 마시고, 노래하고, 또다시 술을 마셨다.
“여성들은 먼저 들어가”라는 소리에 오기가 발동해 끝까지 앉아있다 보면 어느덧 해가 뜨기도 했다. ‘월요병’ 수준이 아니라 ‘월요 악몽’이었다. 코로나19 이후 가장 좋은 점이 PC나 전화로만 소통하는 ‘대면 부재’였다. 그런데 대면 부재가 자칫 ‘소통 부재’로 이어지는 모양새다.
받은 월급만큼만, 주어진 최소한의 일만 하겠다는 ‘조용한 퇴사(Quiet Quitting)’에 이어 ‘조용한 해고(Quiet firing)’까지 등장했다. 직원이 제 발로 퇴사할 때까지 별다른 지적이나 지시 없이 연봉 동결, 승진 누락, 성장기회 박탈, 업무 피드백 제외 같은 조처를 하며 고의로 방치한다. 근로자가 일을 돈벌이 수단으로만 여기듯 기업도 근로자를 돈벌이 수단으로만 대한다.
회식 때 가장 듣기 싫은 건배사가 “우리가 남이냐!”였다. 그때마다 “어, 우리 남 맞아”라고 중얼거렸다. 그런데 남은 남인데 가족보다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는 남이다. 꼭 일에서 의미를 찾을 필요는 없지만, 꼭 돈벌이 수단이라고 선을 그을 필요도 없다. 돈도 벌고, 보람도 찾는다면 삶이 더 즐거울 수 있다.
조용히 방치할 수 있지만 ‘꼰대’ 소리 각오하고 새내기 후배가 어엿한 몫을 할 수 있도록 때론 잔소리할 필요도 있다. 소통을 거부하는 조용함에는 삶을 바꾸는 힘 같은 건 없지 않나.
최현주 금융팀 기자
11.08 군중 난류
사우디아라비아 메카에는 매년 이슬람 성지 순례 기간 수백만 명이 몰려든다. 자마라트 다리에서 ‘악마의 돌기둥’에 돌을 던지는 의식은 성지순례의 하이라이트다. 그 자마라트 다리에 사람이 몰려 300여 명이 숨지는 참사가 2006년 일어났다. 군중 역학 전문가인 디르크 헬빙 교수 등은 당시 사고 현장 영상을 분석해 ‘군중 난류(crowd turbulence)’ 현상을 발견한다.
난류(亂流)란 무질서하고 비정상적인 유체의 움직임이다. 수도꼭지를 조금만 열면 물줄기가 수직으로 똑바로 떨어지지만, 유량을 늘리면 물방울이 불규칙적으로 튀듯이 쏟아진다. 마찬가지로 밀집도가 높아지면 사람들은 마치 물처럼 한 덩어리의 유체인양 불규칙하게 요동치게 된다. 이를 ‘군중 지진(crowd quake)’이라고도 하는데, 지진처럼 통제가 불가능하고 위협적이다.
가로세로 1m당 7명을 넘어서면 군중 난류가 형성되고, 그 속에 낀 사람들은 마치 파도에 휩쓸리듯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출렁이게 된다. 이런 밀도에선 숨 쉴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각자 안간힘을 쓰는데, 그 힘이 서로 맞닿은 사람들 간에 전달되며 물리적으로 증폭된다. 군중 난류가 생기면 몇 사람만 균형을 잃고 쓰러져도 대형 참사로 이어질 수 있다. 넘어진 곳에 생긴 공백 때문에 지탱할 곳이 없어진 사람이 그 위로 엎어지면서 도미노처럼 쓰러지기 때문이다.
일단 군중 난류가 생긴 뒤에는 돌이키기 어렵다. 사람과 사람 간 안전거리를 유지하고, 일방통행으로 군중의 흐름을 원활하게 만드는 식으로 예방해야 한다는 게 군중 역학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처방이다.
이태원 참사 현장에서 토끼 머리띠를 한 남성이 사람들을 밀쳤다는 등 누군가가 의도를 가지고 참사를 유도했다는 음모론이 돈다. 무리 속에 낀 몇 명이 일부러 압사를 유도했다는 건 다분히 비과학적인 사고방식이다. 숨쉬기도 어려울 만큼 밀집된 군중 속에서 사람 하나하나는 물줄기 속의 물방울일 따름이다.
사우디는 2006년 자마라트 다리 참사 이후 증·개축 등을 통해 참가 인원을 분산했다. 하지만 2015년 자마라트 다리로 향하는 길목에서 수백 명이 숨졌다. 몇 년간 사고 없이 넘어갔더라도, 당국이 긴장을 놓으면 언제든 참사가 빚어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이경희 이노베이션랩장
11.09 음모론
음모론은 매혹적일 때가 많다. 사건의 원인·배경이 분명하지 않을 때, 배후에 ‘권력 또는 비밀단체’가 있다고 손짓해주기 때문이다. 음모론을 처음 접하면 겉으로는 ‘말도 안 된다’며 손사래를 치지만, 속으로는 ‘혹시 또 모른다’고 생각하는 게 인지상정이다. 9·11 테러에 미국 정부가 개입했다거나,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 장면이 세트장에서 연출됐다는 주장을 듣는다면 처음에는 누구나 귀가 솔깃해진다.
인종차별주의자들이 특정 지역의 인종을 몰살시키기 위해 고의로 에이즈를 만들었다는 설도 있다. 이런 음모론은 보통 개연성에 근거해 가정과 비약이 덧대 만들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건이 우연히 일어나는 게 아니라 배후와 목적이 있을 거라고 믿는 인간 심리를 이용하는 것이다.
사건의 배후로 정적을 지목할 때 음모론은 진영논리에 복무한다. 세월호 참사 때 일부 진보단체를 중심으로 퍼졌던 ‘인신공양설’, 천안함 피격 당시 퍼진 ‘좌초설’ ‘잠수함 충돌설’ 등이 대표적이다. 이는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는 탈진실(Post-truth) 시대와 맞물려 결국 정치를 종교화하는 데 일조했다. 진실에 대한 합의가 이뤄지기 어렵게 된 것이다. 음모론이 “세상의 일을 자세히 알려고 할 때 그걸 방해하고자 하는 사람이 들이대는 지적인 욕설”(노엄 촘스키 MIT 명예교수)이라고 비판받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음모론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진실이 굳건해질 때도 있다. 천안함은 음모론자들의 주장을 반박하는 과정에서 법원 등으로부터 어뢰에 의한 폭침이라는 점을 여러 차례 공인받았다. 국정원 여론조작 사건 같은 경우 처음에는 ‘정치공작 음모론’ 정도로 받아들이는 사람도 적지 않았지만, 2009~2012년 조직적인 여론조작이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난 케이스다. 시간과 노력이 들어도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이 헛되지는 않다는 방증이다.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7일 ‘이태원 참사는 마약과의 전쟁 때문’이라는 주장을 한 야당 의원을 향해 “직업적인 음모론자. 정치 장사를 한다”고 비판한 뒤 후폭풍이 거세다. 여당에서조차 “품격에 맞지 않는 행동”이라는 말이 나왔다. 한 장관이 음모론을 좀 더 진지하게 대하길 바란다. 그게 음모론인지 진실인지 판단하는 건 한 장관이 아니라 국민이기 때문이다.
한영익 정치에디터
11.10 안와골절
안와(眼窩·orbit). ‘눈구멍’이라는 뜻의 해부학 용어다. 머리를 감싼 뼈 중에서 안구 주변의 커다랗게 패인 구멍을 의미한다. 전두골·누골·사골·구개골·상악골·접형골·협골 7종류의 뼈로 구성돼 있다. 안구뿐만 아니라 주변 근육·시신경·눈물기관·동맥·정맥 등이 공유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안와를 감싸는 뼈가 손상된 상태를 ‘안와골절’이라 부른다. 외부 물체에 의해 강하게 타격을 받았을 때 안와벽 중 상대적으로 두께가 얇은 하벽과 내벽이 부러지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심할 경우 안구 함몰, 안면 감각 저하, 출혈, 시력 저하 등이 발생한다.
비교적 생소한 해부학 용어가 널리 알려진 건 축구대표팀 에이스 손흥민(30·토트넘)의 부상 때문이다. 지난 2일 손흥민은 마르세유(프랑스)와의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경기에 출전했다가 다쳐 전반 24분 만에 교체됐다. 공중볼을 다투는 과정에서 상대 선수의 어깨에 안면을 부딪치며 그라운드에 나뒹굴었다. 이후 정밀검진을 통해 안와골절 판정을 받았다. 총 4곳의 골절이 발생했다.
지난 4일 수술을 받은 손흥민의 회복 상황은 일단 희망적이다. 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쳤고, 카타르월드컵 출전에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단, 부상 전 경기력을 온전히 되찾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안과 전문의에 따르면 안와골절 부상자가 무리해서라도 활동을 시작할 수 있는 최단 시점은 수술 후 3주부터다. 공교롭게도 손흥민의 수술과 카타르월드컵 본선 한국 첫 경기(24일 우루과이전)의 간격이 정확히 3주다. 마스크 등 보호장구를 착용하더라도 손흥민이 그라운드에 오를 수 있는 시점은 그 이후가 될 전망이다.
손흥민의 복귀를 기다리는 심정은 엇갈린다. 사실상 ‘손흥민의 팀’으로 준비한 월드컵인 만큼, 최대한 많은 시간을 뛰어주길 바라는 마음을 숨길 수 없다. 축구 인생의 최전성기에 접어든 ‘한국 축구 보물’이 월드컵 무대를 휘젓는 모습을 보고픈 마음도 간절하다.
한편으론 무리해서 출전을 강행하다 부상이 악화할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사라지지 않는다. 손흥민은 지난 수년간 소속팀과 대표팀을 오가며 혹사에 가까운 일정을 소화해왔다. 어떤 방식으로든 ‘쉼표’가 필요한 건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이런 두 마음이 어디 필자뿐일까.
송지훈 스포츠디렉터 차장
11.11(금) 직무유기
서울경찰청은 총경급 과장이 돌아가면서 주말과 공휴일 당일 오전 9시부터 다음날 오전 9시까지 상황관리관 당직을 선다. ‘서울특별시경찰청과 경찰서의 당직근무규칙’에 따르면 서울청 상황관리관은 ‘112지령 등 상황관리와 당직업무 등 모든 상황을 총괄’한다. 24시간 근무 특성상 전반(오전 9시~오후 1시, 오후 6시~다음날 오전 1시) 근무 후 자가대기가 가능하다.
이태원 참사가 발생한 지난달 29일 서울청 당직 상황관리관은 류미진 총경이었다. 류 총경의 보직은 서울청 인사교육과장이다. 사고 발생 시각은 오후 10시 15분. 류 총경은 5층 상황실이 아닌 10층 자신의 사무실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는 1시간 24분이 지난 뒤 내려와 당직팀장으로부터 사고를 보고받았다.
류 총경은 지난 2일 대기발령됐고 경찰청 특별수사본부에 직무유기 혐의로 입건됐다. 서울청 과장들에 따르면 주말 당직은 본인 사무실에서 보는 게 관행처럼 굳어졌다고 한다. 오히려 상황실에 내려와 “오늘 어떤 신고가 들어왔어요?”라고 물어보면 직원들은 의아하게 여긴다고 한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112 신고는 긴급사고 발생 시 초동 대응부터 현장 지원까지 겸하면서 상부에 보고 업무까지 해야 하는 전문성이 필요한 분야다. 같은 총경급이더라도 경찰은 기획·정보·수사·생안·경비·교통·외사 등 각자의 주력 기능이 폭넓다.
형법 제122조에 명시된 공무원 직무유기 혐의는 ‘1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 또는 3년 이하의 자격정지’ 형량을 규정하고 있다. 직무유기로 156명 사망의 책임을 묻기에는 그 형량이 결코 무겁다고 볼 수 없다. 문제는 법원이 근무지 이탈이나 업무 태만으로는 유죄 판결을 내리지 않는다는 거다.
2014년 세월호 참사 때 부실 관제로 재판에 넘겨진 진도 연안해상교통관제센터(VTS) 직원 13명. 대법원은 2015년 11월 이들의 직무유기에 대해선 무죄를 선고하고, 교신일지를 조작한 행위만 유죄로 인정한 원심을 확정했다.
류 총경은 29일 몇 시부터 몇 시까지 자기 방에 머무르면서 의식적으로 상황관리관 업무를 방임했는지 규명하는 게 관건이다. 직무유기를 형사적 책임으로만 물어야 하나. 당직 시스템을 제대로 정비하지 않는 것도 직무유기다.
위문희 사회2팀 기자
11.14(월) 환승연애
제목에 영감을 주었을 듯한 ‘환승이별’은 별로 좋은 뜻이 아니었다. A가 B랑 사귀면서 C와의 관계를 열어둔 결말로 방치하다 이별이 임박하면 상대를 C로 교체한다. 양다리 오해의 소지가 있지만 연애 공백이 전혀 없다는 장점이 있다. ‘디졸브(Dissolve) 이별’도 비슷하게 쓰인다. 영화 속 장면 전환 같은 이별과 만남이다.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티빙에서 첫 방송부터 화제성을 독식한 ‘환승연애2’의 성공으로 이 용어는 긍정적 힘을 얻은 듯하다. 환승이 아름다울 수도 있단다. 이에 더해 안 그래도 쏟아지던 연애 예능(짝짓기 예능) 실험도 당분간 이어지게 됐다.
국내에선 ‘사랑의 스튜디오’(MBC·1994~2001)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유구한 역사의 이 장르에서 새로운 게 나올 것이 있을까 싶을 때, 허를 찌르는 설정이 등장한다. 서로 잘 알아가라며 남녀를 쇠사슬로 묶어둔다거나(쿠팡플레이 ‘체인리액션’), 함께 밤 시간을 보내고 시작하는(웨이브 ‘잠만 자는 사이’) 자극적 설정으로 구조화한 데이팅 프로그램이 방송되고 있다. 선정성 논란이 있지만, 성별 구분 없이 다 벗은 몸을 보고 상대를 고르라는 해외 프로그램(영국 채널4 ‘네이키드 어트랙션’)에 비하면 아직은 얌전한 편이다. 한국 데이팅 프로그램에선 여전히 여성 출연자가 남성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고 패널 모두 패닉에 빠진다.
연애 예능이 많이 만들어지는 이유는 선명하다. 제작비가 상대적으로 적게 들고 화제성이 높다. 콘텐트 사업자가 꼭 붙잡아야 할 20·30세대가 집착하는 장르다. 인성과 사생활을 까발려야 하는 이 상황에 기꺼이 나서는 출연자의 목표도 분명하다. 이들도 열심히 일하러 나온다. 최근의 연애 예능 출연자의 절대다수가 이름을 알릴 필요가 있는 직종 종사자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출연료가 상당한 목돈인 것에 더해, 현재 사회에서 가장 큰 자산인 영향력을 단숨에 얻을 수 있다.
그렇다고 이들이 사랑을 찾는 마음이 가짜라고 할 수는 없다. 월급 받으러 출근하지만, 하다 보면 일을 잘 해내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진심과 비즈니스가 섞이는 것이야말로 짝짓기 예능의 영원한 DNA, 그 복잡한 감정을 발라내며 보는 것이 이 장르 시청자가 얻을 수 있는 진짜 재미다.
전영선 K엔터팀 팀장
11.15 CPI
지난주 ‘CPI’ 세 글자가 얼어붙었던 전 세계 금융시장을 녹였다. 바로 미국 소비자물가지수(Consumer price index)다. 10일 미 노동통계국은 10월 소비자물가가 지난해보다 7.7% 올랐다고 발표했다. 전달보다 단 0.5%포인트 내렸고 상승률은 7%를 여전히 웃도는데 시장은 환호했다. 예상했던 7.9%보다 낮다는 이유에서였다. 물가를 잡겠다며 살벌하게 금리를 올리고 있는 미국 연방준비제도(Fed)가 긴축 고삐를 늦출 것이란 기대에 주가는 오르고 환율은 안정을 찾았다.
금융시장을 울고 웃게 하는 CPI는 전쟁 속에서 탄생했다.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때 미국 조선업은 유례없는 호황을 누렸다. 군함과 화물선을 만드느라 자금이 밀려 들어오는데 물자는 턱없이 부족했다. 생필품 가격이 치솟자 ‘이 돈 받곤 못 산다’는 노동자의 불만이 컸다. 적정 임금을 책정하기 위해 노동통계국은 92개 산업 도시에서 한 가족이 먹고사는 데 필요한 돈이 얼마인지 품목별로 조사하기 시작했다. 2년 준비 후 1919년 첫 CPI가 공표됐다. 통계청이 아닌 노동통계국이 지금도 CPI 발표를 맡고 있는 건 이런 역사 때문이다.
물가가 오르면 금리도 오른다. ‘해는 동쪽에서 뜬다’처럼 당연한 명제 같지만 사실 발명에 가깝다. CPI 자체가 원래 통화정책 지표가 아닌 임금 책정 기준이었다. 물가 안정 수단으로 금리를 활용한 역사도 30~40년밖에 안 된다.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인물이 바로 ‘인플레 파이터’ 폴 볼커 전 미 Fed 의장이다. 베트남 전쟁과 오일쇼크가 불러온 1970~80년대 초고물가 위기를 연 20% 이르는 금리 처방으로 해결한 인물이다.
주춤한 물가에 시장이 환호하고 있지만 안심하기엔 이르다. 7% 물가 상승률은 Fed 목표(2%)와 여전히 거리가 멀다. 중앙은행이 치열하게 물가와의 전쟁을 벌이는 이유는 단 하나다. 방치된 고물가의 끝은 언제나 극심한 경기 침체였기 때문이다. Fed도 경험으로 안다. 금리 인상 폭이 줄고 인하 시기가 빨라진다는 건 순전히 시장의 기대다. 현 Fed 의장인 제롬 파월은 “숫자를 말하거나 날짜를 말해라. 둘 중 하나만 해야지 둘 다 해선 안 된다”는 볼커의 격언을 충실히 지키는 중이다. 위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조현숙 경제정책팀 차장
11.16 주식과 현금
남의 나라 물가에 이렇게 관심이 많았던 적이 또 있었을까. 지난 10일 미국 노동부가 발표한 10월 소비자물가지수(CPI)는 1년 전보다 7.7% 상승했다. 6월(9.1%) 이후 4개월 연속 상승 폭이 축소돼 1월(7.5%)과 비슷한 수준까지 내려왔다. ‘물가가 잡힐 것 같다’는 기대감이 생긴 셈이다.
주식시장에선 낙관론이 힘을 받기 시작했다. 실제로 뉴욕 증시는 급발진했다. 나스닥은 10일 하루에만 7.35% 뛰었다. 다음날 국내 증시 역시 폭등했다. 가깝게는 코스피 2500선 탈환, 길게는 연말까지의 랠리를 전망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여러 증권사가 연말 코스피 전망치를 상향 조정했다. 근거는 있다. 폭등한 물가가 급격한 금리 인상을 불러왔으니, 물가가 정점을 찍고 내려온다는 건 분명 의미 있는 신호다. 금리 인상으로 인한 달러 강세도 한풀 꺾였다. 역시 증시 상승세에 힘을 보탤 수 있는 요인이다.
정말 ‘꽃길’이 열릴까. 긍정적인 CPI 신호에 네 번 연속 기준금리를 0.75%포인트씩 인상한 미국이 일단 12월엔 0.5%포인트만 인상할 전망이다. 감속도 물론 반가운 일이나, 멈추는 건 아니다. 물가상승률이 8%대를 유지하니까 7%대만 돼도 괜찮은 것 같지만, 목표(2%)까진 한참 멀었다. ‘인상 중단’이나 ‘금리 인하’ 같은 시나리오를 떠올릴 시점은 아니란 얘기다.
지난해까지 10년간 성장주 중심인 나스닥은 7배가량 상승했다. 유례없는 초저금리의 작품이다. 올해는 정확히 반대다. 글로벌 증시 조정은 시작도, 끝도 금리 인상이었다. 미국 기준금리는 이미 4%에 도달했고, 당분간 더 오를 게 확실하다. 추세적 반등을 논하려면 인상 종료 시점뿐만 아니라 금리가 얼마나 오랜 기간 높은 수준을 유지할 것인지에 대한 판단이 필요하다. 지금으로선 알 길이 없다. 경기라도 좋으면 모를까 침체의 폭을 가늠하기 어렵다. 많은 전문가가 낙관론보다 신중론에 무게를 두는 이유다.
시중은행에 예금만 해도 5%의 이자를 주는 시대가 다시 왔다. 이보다 많은 수익을 보장하지 않는 한 돈은 딴 곳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투자가 위축될 수밖에 없다. 주식이든 부동산이든 치솟는 금리 앞에선 무력하다. 주식시장이 뜨거울 때야 머뭇거리면 안 되지만, 조정 땐 조바심을 내면 안 된다. 아직은 현금을 귀하게 여길 때다.
장원석 S팀 기자
11.17 수능 필적확인
‘넓은 하늘로의 비상을 꿈꾸며.’ 이해인 수녀의 시 ‘작은 노래 2’의 한 구절이다. 지난해(2022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에 필적확인 문구로 등장해 화제가 됐다. 수능이 끝난 뒤 전문이 궁금해 시집을 사봤다는 수험생의 후기가 적지 않았다.
전년도 수능의 필적확인 문장은 ‘많고 많은 사람 중에 그대 한 사람’이었다. 나태주 시인의 ‘들길을 걸으며’의 한 대목이다. 긴장된 마음으로 시험지를 펼쳤던 수험생들은 이 문장을 옮겨 적다 울컥했다고 얘기했다.
필적확인은 2005학년도 수능 때 대리시험 등 대규모 부정행위가 발각돼 다음 해 도입됐다. 겹받침 등 필적확인에 필요한 기술적 요소가 포함된 12~19자 문장 중에 수능 출제위원이 선정한다. 수험생들은 과목이 바뀔 때마다 이 문구를 OMR 카드에 자필로 기입해야 한다.
‘부정행위 방지’ 차원에서 도입된 제도지만, 해가 갈수록 수험생을 위로·응원하고픈 출제위원들의 마음이 진하게 묻어난다. 제도가 처음 도입된 2006학년도엔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빛’(정지용, ‘향수’)이 실렸는데 최근엔 ‘그대만큼 사랑스러운 사람을 본 일이 없다’(2019, 김남조의 ‘편지’), ‘너무 맑고 초롱한 그중 하나 별이여’(2020, 박두진의 ‘별밭에 누워’) 등으로 분위기가 바뀌었다.
수능시험은 스무 살 안팎의 수험생이 처음 맞이한 첨예한 경쟁의 순간일 수 있다. 시험장 공기가 차갑고 살벌해도, 따뜻한 문장엔 사람을 일으키는 힘이 있다. 출제위원들 역시 문장의 힘을 믿기에, 온기가 담긴 한 줄 문장을 정선한다.
한 줄의 위로가 필요한 사람은 비단 수험생뿐일까. 최근 우리는 이태원 압사 참사를 목격했고, 코로나19와 인플레이션의 고통은 여전하다. 위로가 마땅한 이때 ‘웃기고 있네’ ‘개 파양’ ‘빈곤 포르노’ 등 증오와 혐오의 막말이 연일 쏟아진다. 종교지도자까지 ‘대통령 전용기 추락’이란 섬뜩한 저주의 주문을 쏟아내 충격을 안겼다.
장자는 “남에게 한 말은 자신을 향해 쏜 화살”이라 했다. 몰인정하고 독한 말끝의 결과가 걱정스러운 이유다. 오늘 수능이다. 수험생뿐 아니라 어른들도, 올해 필적확인 문장을 적어보면 어떨까. 막말 대신 응원과 위로로 힘을 얻는 날이 됐으면 한다.
박형수 국제팀 기자
11.18(금) 어깨 격려
최근 유독 눈길을 끄는 대통령의 제스처가 있다. 어깨를 두드려 상대를 북돋는 행동이다. 지난 11일 동남아 순방 출국길에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에게 한 ‘어깨 격려’가 선명한 정치적 메시지로 읽혔다. 이태원 참사로 야당이 경질을 요구하고, 여론조사에서도 사퇴 응답이 큰 이 장관에게 인사권자인 윤 대통령이 손을 뻗어 어깨를 다독였다. 정치권에서 “최측근에 대한 명백한 신임의 표현”이란 해석이 나온 게 당연했다. 아니나 다를까. 닷새 뒤 입국 때도 윤 대통령은 “고생 많았다”라며 이 장관을 위로했다.
논쟁적 측근에 대한 어깨 격려 장면은 처음이 아니다. 윤 대통령은 지난달 25일에도 내년도 예산안 시정연설 후 국회 본회의장을 순회하다 장제원 국민의힘 의원의 어깨를 두드리며 귓속말을 나눴다. 대부분의 여당 의원과 의례적 악수를 한 것과 분명 다른 태도였다. 장 의원은 다음날 기자들에게 “내가 지역에만 있으니 불쌍해 보였나 보다”라고 농담했다. 한동안 권력 중심부에서 멀어진 듯했던 그의 표정이 한층 밝았다.
어깨 격려는 상대에게 친밀감을 표시하는 대통령 특유의 버릇으로 보인다. 검찰 재직 때 자주 후배들의 어깨를 두드렸다. 대선 후보 경선이 한창이던 지난해 10월 15일에는 당내 ‘일대일 맞수토론’ 직후 경쟁 상대였던 홍준표 전 의원(현 대구시장)의 어깨를 격 없이 툭툭 쳐 곤혹 아닌 곤혹을 느낀 일도 있었다. 보수 성향 온라인 커뮤니티에 ‘그만해라 아 진짜’라는 자막을 입힌 영상이 퍼졌고, 홍 전 의원이 “새카만 후배가 (할 만한) 적절한 행동은 아니다. 내가 태연하게 웃고 말았다”고 인터뷰해 이른바 ‘태도 논란’이 이어졌다.
커뮤니케이션 분야 권위자인 앨런 피즈는 의사소통의 83%가 몸짓·표정 등 비언어적 요소로 이뤄진다고 분석했다. 언론을 통해 전 국민이 바라보는 공개석상에서는 손짓 하나, 한숨 한 번까지 메시지로 여기는 게 정치권 불문율이기도 하다. 의도된 연출이든 아니든, 이제 앞으로 또 누가 어느 상황에서 대통령의 어깨 격려를 받을지가 궁금해진다. 이 장관 어깨를 두드린 날 윤 대통령은 비행기를 타며 “어깨가 무겁다”고 했다. 그가 다독인 어깨들에도 한층 무거운 책임감을 바라는 게 지나친 기대는 아닐 것이다.
심새롬 정치팀 기자
11.21(월) 관치 금융
1차 세계대전이 끝난 1919년 체결된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승전국인 미국·영국·프랑스 등 연합군은 1921년 패전국인 독일에 전쟁배상금 1320억 마르크(금)를 갚으라고 통보한다. 당시 독일 정부의 연평균 세입액이 60억~70억 마르크였으니 세금을 한 푼도 쓰지 않고 20년을 꼬박 갚아야 하는 금액이었다.
독일의 재정 상태는 뻔했다. 독일은 즉각 디폴트(채무 불이행)를 선언했지만, 어쨌든 매년 배상금은 갚아야 했다. 결국 밤낮으로 돈을 찍어냈다. 독일 통화 공급량은 1921년 이후 2년 만에 7500배 늘었다. ‘1달러=4조 마르크’ 수준까지 물가가 심각하게 뛰었다. 주부들은 나무 대신 돈뭉치를 땔감으로 썼고 아이들은 돈다발을 쌓으며 놀았다. 국가 혈맥인 금융의 붕괴는 곧 국가의 존폐로 이어졌다.
이 위기를 극복한 인물이 얄마르 호러스 그릴리 샤흐트(Hjalmar Horace Greeley Schacht)다. 당시 통화 집행위원이었던 샤흐트는 가치를 잃은 마르크(파피어) 발행을 중단하고 독일 곳곳에 있는 농장·공장 같은 부동산을 담보로 발행하는 저당증권 형태의 새 마르크(렌텐)를 발행했다. 화폐교환 비율은 ‘1=1조’였다. 새 마르크를 받기 위해 수요가 몰렸고 공급은 턱없이 부족했다. 정부·기업·은행 등이 발행 한도를 늘이라고 압박했지만, 그는 굴하지 않고 발행량을 철저히 통제했다. 새 마르크의 품귀 현상은 화폐 가치 회복의 밑거름이 됐고 독일 경제는 회생했다. ‘관치 금융’(정부가 금융시장 인사·자금배분 등에 직접 개입)의 기적이었다.
한국도 관치 금융을 등에 업고 ‘한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빠른 경제성장 신화를 만들었다. 1945년 45달러에 불과했던 국민소득은 60년 만에 2만 달러를 넘었다. 대신 부작용이 만만치 않았다. 대출 등 금융 활동이 법이나 시장 원리에 의해 투명하게 이뤄지지 않으면서 각종 비리·청탁·금융 경쟁력 약화 등의 문제가 생겼다.
새 정부 들어 관치 금융 논란이 거세다. 지난 6월 이복현 금융감독원장 취임 이후 금리 산정에서 금융지주 CEO 인선까지 금융당국이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모양새라서다. 경제위기 상황에서 관치 금융의 기적을 향한 행보일 수 있지만, 정부 입맛대로 좌지우지하던 이전 정권의 ‘관치 망령’이 떠오르는 것이 기우이길 바랄 뿐이다.
최현주 금융팀 기자
11.22 빈 살만
무함마드 빈 살만 알사우드(37)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가 짧은 방한 기간 강력한 인상과 선물을 남기고 갔다. 빈 살만 왕세자는 시가총액이 약 2조 달러에 달하는 사우디 국영 석유회사 아람코의 대주주다. 애플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기업이다. 그를 접견한 한국 재계 총수들의 자산 총액을 합쳐도 그에 미치지 못한다는 걸 보여주는 사진이 인터넷에 퍼졌다. 이번 방한 기념으로 한국 기업과 총 300억 달러 규모의 사업 계약 및 업무협약(MOU)을 체결한 것으로 알려졌다.
빈 살만은 ‘살만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이름을 풀이하면 ‘알사우드 가문, 살만의 아들 무함마드’다. 아버지 살만 국왕은 2015년 형 나예프 국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다. 2017년엔 왕세자였던 조카 무함마드 빈 나예프를 폐위시키고 아들을 왕세자로 격상시킨다. 지난 9월엔 국왕이 총리를 겸직하는 관례를 뒤엎고 왕세자를 총리에 임명한다. 살만 부자는 형제 상속으로 왕위가 이어지던 사우디 왕실의 전통을 깨고 부자상속 시대를 열었다.
빈 살만은 개혁가다. 여성의 운전, 공연과 스포츠 관람을 가능케 하는 등 인권 신장에 앞장섰다. 원유생산국인 사우디는 세계 탄소배출량의 4%를 차지함에도 그린 에너지 전환에는 미온적이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빈 살만은 사막 한가운데에 친환경 스마트도시를 짓는다는 ‘네옴(NEOM)’ 시티 프로젝트로 승부수를 던졌다.
그는 피의 숙청으로 권력을 다진 인물이기도 하다. 부패 청산 명목으로 권력에 위협이 되는 이들을 체포하고, 석방 조건으로 재산의 70%를 헌납하도록 했다. 사촌 동생 만수르 빈 무크린은 의문의 헬기 사고로 사망했다. 미국 국가정보국(DNI)은 워싱턴포스트 기자 자말 카슈끄지 암살 배후로 빈 살만을 지목하기도 했다. 카슈끄지는 사우디 왕정 독재를 비판하던 언론인으로, 2018년 잔인하게 살해됐다.
이에 분개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당시 빈 살만을 ‘국제적 왕따’로 만들겠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고유가로 고군분투하던 지난 7월, 빈 살만을 만나 주먹 악수를 나눴다. 미 행정부는 최근 카슈끄지 암살 관련 소송에서 빈 살만에게 국가 원수에게 부여되는 면책 특권을 적용했다. 국제 관계에서 명분은 실리를 위한 포장일 뿐임을 시사하는 장면이다.

▲17일 오후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오른쪽부터)빈 살만 왕세자와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정의선 현대자동차 회장, 김동관 한화솔루션 부회장 등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사진 SPA 캡처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2022년 7월15일(현지시간) 사우디아라비아 제다에 도착해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와 주먹 인사를 하고 있다. [AP/SPA=연합뉴스]
이경희 이노베이션랩장
11.23 리스크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지 말라’는 격언은 미국 경제학자 제임스 토빈 전 예일대 교수가 1981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뒤 언급한 투자원칙이다. 기자회견장에서 “당신의 포트폴리오 이론을 쉽게 설명해달라”는 질문에 “만일 바구니를 떨어뜨리면 모든 것이 끝장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요즘은 투자는 물론 일상생활에서도 상식으로 취급하는 경구다.
그가 이론적으로 기여한 ‘포트폴리오’는 리스크는 최소화하면서 수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노력의 산물이다. 고위험·저위험 상품에 분산 투자하는 게 핵심이다. 투자 상품의 분산 비율은 상황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한 가지 상품에 전 재산을 올인하는 걸 금기시한다.
이런 상식을 거슬렀다가는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최근 금리가 수직상승한 탓에 무리한 대출을 받아 부동산이나 주식을 구매한 이들이 곤란에 처한 게 대표적이다. “영끌해 경기도 20평대 집 마련한 걸 후회한다. 어두운 터널에 갇힌 기분” “대출을 총동원해 주식·코인에 투자했는데 4000만원을 손해 봤다”며 고통을 호소하는 사례가 줄을 잇는다. 리스크 분산에 소홀했던 수업료를 온몸으로 지불하고 있는 셈이다.
반면에 요즘 정치권은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는 데 집중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이재명 대표의 사법 리스크가 현실화하자, 친이재명계 의원들이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촛불집회에 나서는 등 강경 대응 위주의 전략을 공고히 하고 있다. “빠져나갈 구멍조차 틀어막고 있다”(중진의원)는 우려는 뒷전이 돼버렸다. 향후 수사·재판 결과에 따라 자칫 잘못하면 당 전체가 치명상을 입을 수 있다는 우려가 적지 않다.
위험 분산에 취약한 건 ‘친윤’ 일색으로 흐르는 국민의힘 역시 마찬가지다. 국정이 삐걱대도 ‘윤석열 정부 뒷받침론’만 언급되는 탓에, 최근 선거에서 여당을 지지했던 2030세대는 상당수가 지지층에서 떨어져 나갔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세대 지역 인재 계급 등 다방면에서 고립된 정당이 돼 2년 전 총선에서 참패한 과거는 잊은 듯 하다.
한국갤럽 여론조사에 따르면 양당 지지율은 5주째 32~35% 선으로 오차범위 이내 접전을 벌이고 있다. 고정 지지층 덕에 위기 때마다 국민에게 진 빚을 탕감받아왔던 양당의 생존사가 이제는 바뀔 때도 된 것 같다.
한영익 정치에디터
11.24 자이언트 킬링
‘1만 시간의 법칙’으로 널리 알려진 『아웃라이어』의 저자 말콤 글래드웰은 또 다른 저서 『다윗과 골리앗』에서 약자가 강자를 이기는 방법을 세 가지로 정리해 알려준다. ①약자의 강점과 강자의 약점을 맞부딪치게 하고 ②생각을 가두는 프레임(편견)을 깨고 ③상대의 강점을 약점으로 바꿀 방법을 찾으라고 조언한다.
성서 속 어린 목동 다윗과 거인 장수 골리앗의 싸움에서 유래한 스포츠 용어로 ‘자이언트 킬링(giant-killing)’이 있다. 하위리그 팀 또는 상대적 약팀이 상위리그 팀 또는 강팀을 이기는 이변을 뜻한다.
다른 예를 찾을 것 없이 2002 한·일월드컵의 대한민국이 자이언트 킬링의 대표적 사례다. 한국은 조별리그에서 포르투갈을 무너뜨린 것을 시작으로 이탈리아(16강), 스페인(8강) 등 당시 우승 후보를 줄줄이 주저앉혔다. 역대 월드컵의 이변 또는 명승부를 논할 때 2002년 한국의 4강 신화는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레퍼토리다. 4년 전 러시아월드컵에서 한국이 독일을 2-0으로 완파한 경험 또한 빼놓을 수 없다.
필자가 현장 취재 중인 카타르월드컵 무대에선 사우디아라비아가 ‘거인 킬러’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다. 지난 22일 사우디가 대회 최고 스타 리오넬 메시(35)가 이끄는 아르헨티나를 2-1로 꺾었다. 32개 본선 출전국 중 최약체로 손꼽힌 팀이 첫판부터 우승 후보를 쓰러뜨리는 모습에 전 세계가 경악했다. 운 좋게도 이 경기를 현장에서 지켜봤는데, 관중석을 가득 메운 8만8012명의 축구 팬이 내지르는 함성에 취재석 테이블이 흔들릴 정도로 열기가 뜨거웠다.
카타르월드컵 첫 자이언트 킬링이 등장한 지 이틀 만인 오늘 한국축구대표팀이 본선 H조 첫 경기를 치른다. 상대는 아르헨티나 못지않은 남미의 강호 우루과이다. 외신과 주요 베팅업체의 생각은 대부분 우루과이 승리 쪽으로 기울어 있다. 손흥민(30·토트넘)이 부상에서 빠르게 회복하고 있지만, 대체 불가 에이스가 다친 사실 하나로 한국축구대표팀에 대한 외부의 기대감이 떨어진 게 사실이다.
하지만 글래드웰의 조언처럼 미리부터 생각을 가둘 필요가 없다. 서로를 믿고, 미리 준비한 대로 상대의 약점을 파고드는 데 집중하면 길이 열린다. 아시아의 이웃 사우디가 해낸 걸 우리라고 못 할까.
송지훈 스포츠디렉터 차장
11.25(금) 스위스 치즈 모델
스위스는 산지가 국토의 70%를 차지한다. 산간 지방의 특성을 살려 오래전부터 낙농업이 발달했다. 소의 원유를 원료로 하는 수많은 종류의 치즈가 자연스럽게 생겨났다. 주한 스위스 대사관 홈페이지에 따르면 스위스에는 450가지 이상의 치즈가 있다. 2019년에 약 19만 5000톤의 치즈가 생산됐다. 스위스는 매년 1인당 20㎏이 넘는 치즈를 소비하는 치즈의 나라다.
에멘탈(Emmental) 치즈는 전 세계적으로 스위스를 대표하는 치즈다. 숙성 과정에서 생긴 ‘치즈 아이(cheese eye)’라는 구멍이 숭숭 나 있는 게 특징이다. 만화영화 ‘톰과 제리’에서 제리가 좋아하는 그 치즈다. 치즈 아이가 풍미를 생성시킨다는 평가도 있다. 에멘탈 치즈는 고산지대에서 생활하는 소 젖으로 만든다. 에멘탈은 베른 주의 에멘(Emmen)지역과 ‘계곡’을 뜻하는 탈(Tal)이 합쳐져 만들어진 말이다. 참고로 스위스 내에서 가장 인기 있는 치즈는 그뤼에르(Gruyere)라고 한다.
영국 맨체스터대의 심리학자 제임스 리즌은 1990년 발간한 『휴먼 에러』에서 ‘스위스 치즈 모델’을 제시했다. 사실은 스위스 ‘에멘탈’ 치즈 모델이다. 이 모델은 에멘탈 치즈의 구멍을 안전사고를 유발할 수 있는 잠재적 결함에 빗댄다. 에멘탈 치즈를 여러 장 겹치면 각 치즈에 뚫려 있는 구멍을 일직선으로 관통하는 틈이 생길 수 있다. 이것이 ‘사고 궤적(trajectory)’을 형성해 대형 사고가 발생한다는 이론이다. 사고의 원인을 인적 과실뿐만 아니라 조직적인 요인까지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난달 29일 발생한 이태원 참사는 경찰, 소방, 지자체에 도사리고 있던 구멍들이 한꺼번에 맞춰지면서 피해가 커졌다고 봐야 한다. 참사 당일 4시간 전부터 압사 위험성을 알렸던 11건의 112 신고가 있었다. 핼러윈의 피크는 자정으로 치닫는데도 소방은 오후 10시까지만 안전근무 계획을 세웠다. 경찰·이태원역·상인회 간담회에 구청은 쓰레기 배출을 담당하는 자원순환과 직원 2명을 내보냈다.
구멍이 없는 조직은 없다. 하지만 각자 구멍의 수를 줄이거나 구멍의 크기를 메우려는 노력은 해야 하지 않겠는가. 내 주변부터다. 더는 사람의 실수가 시스템의 방어벽을 뚫고 대형 참사로 이어지는 일은 없어야 한다.
위문희 사회2팀 기자
11.28(월) 회귀와 환생
현재의 정신과 지식을 유지한 상태에서 시간을 이동해 인생 다시 살기. 요즘 콘텐트 업계의 화두, 회귀물(回歸 物)의 골자다. 주인공은 어느 날 눈 떠 보니 다른 시간이나 차원으로 이동해 있고 이내 적응해 맹활약하게 된다.
방송 시작과 동시에 화제몰이 중인 JTBC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도 2017년 연재를 시작해 대성공을 거둔 회귀 웹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어른 남성의 전유물이었던 기업 소설에 새로운 자양분을 제공했다는 평가를 받는 작품이다. 완결된 지 4년이 넘었지만, 아직 이만한 기업 소설이 없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풍성한 디테일을 자랑한다. 뉴스를 관심 있게 본 사람이라면 바로 어떤 사건을 뼈대로 하는지 눈치챌 수 있을 정도로 구성이 탄탄하다.
2010년대 중반 이후 회귀 장치는 대중소설 트렌드를 압도해왔다. 물론 무협지 시절에도 회귀나 환생을 소재로 한 작품은 존재했다. 하지만 당시엔 소수 취향으로 분류됐다. 현재의 회귀물은 양대 웹소설 플랫폼(카카오페이지·네이버 시리즈) 순위를 지배한다. 지난해 연재를 시작해 3억5000만번 열람된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이나 드라마화를 계기로 다시 상위권으로 뛴 ‘재벌집…’은 이중 극히 일부다. 로맨스(‘악녀는 마리오네트’)나 의학소설(‘외과의사 엘리제’)을 회귀와 섞는 등 기상천외한 설정이 쏟아져 나온다.
회귀의 인기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 이 현상과 가장 잘 통하는 것은 ‘이번 생은 망했다’(이생망) 정신일 것이다. 열심히 살아온 회귀 소설의 주인공에겐 희망도 미래도 없다. 하지만 인생을 리셋하면 승산이 생긴다. 공무원 시험 낙방생은 아이돌 오디션 프로그램 시청 기억을 살려 데뷔에 성공하고, 묻지마 살인 피해자인 여성은 황녀로 태어나 권력을 잡는다. 아무리 노력해도 제자리인 현생의 낙담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하는 장치가 바로 회귀다.
드라마 ‘재벌집…’ 방송 중 시청자 댓글 창이 가장 폭주한 순간은 진도준(송중기)이 (신도시 지정 전) ‘분당 땅’을 달라고 하는 장면이었다. 이때 너도나도 당시 샀어야 할 종목을 외치기도 했다. ‘한강의 기적’이 끝난 자리, 회귀가 저성장 시대의 해법을 찾지 못한 세대의 숨구멍 역할을 하고 있는 역설을 보여준다.
전영선 K엔터팀 팀장
11.29 도어스테핑
기획재정부에서 있었던 일이다. 새로 발령받은 직원 하나가 빨리 보고를 하러 들어오라는 A국장 호출에 급하게 국장실로 들어갔다. 그의 모습을 아래위로 훑어본 국장은 “슬리퍼를 신고 보고를 하러 들어오다니 말이 되냐”며 호통을 치기 시작했다. 사무실에서 신고 있던 슬리퍼를 미처 구두로 갈아신고 오지 않은 게 문제였다.
그리고 국장의 일갈이 이어졌다. “다시는 내 방에 보고하러 들어오지 마.” 엄포가 아니었다. 그 직원은 대면 보고에서 배제됐고 요직이었던 해당국에서 밀려나야 했다. 이후 장관으로 승승장구한 A국장의 ‘지엄함’을 알려준다며 당시 현장에 있었던 기재부 모 과장이 전한 일화다.
공직 사회 분위기가 여전히 엄중하긴 하지만 그래도 10여 년 전 옛날얘기다. 여름이면 샌들을 신고 반바지도 입는다는 한 ‘에이스’ 과장을 두고 상관들이 두손 두발 다 들었다는 얘기가 들릴 정도니 말이다. 공식 보고나 국회 일정이 있으면 정장에 구두를 갖춰 입는 게 당연하지만, 슬리퍼 갈아신는 걸 깜박했다고 해서 멀쩡히 일 잘하는 직원을 날려버릴 간 큰 국장은 이제 없을 거다.
대통령실이 도어스테핑 중단을 공식 선언한 지 9일째다. 때아닌 슬리퍼 논란도 여전하다. 지난 18일 윤석열 대통령의 도어스테핑 후 대통령실 비서관과 설전을 벌인 기자가 슬리퍼를 신었다는 걸 두고 진영 간 논쟁이 뜨겁다. 하지만 슬리퍼를 탓해봤자 논점 이탈이다. 비속어 보도와 전용기 탑승 불허 논란의 연장 선상인 건 모두가 안다.
도어스테핑은 말 그대로 문(door) 앞에서 걸어 나가며(stepping) 하는 돌발 인터뷰다. 집이나 사무실 앞에서 한참 대기하다가 문밖으로 취재원이 나오면 붙잡고 물어보는 걸 말한다. 언론계 은어 ‘뻗치기’와 오히려 통하는 용어다. 각본이 없으니 당연히 불편한 대화가 오갈 수밖에 없다.
반듯한 정장과 구두 차림에 팔짱을 끼지 않고 정제된 어투로 질문하는 기자를 원한다면 물론 어렵지 않다. 대부분의 기자가 이미 따르고 있는 관행이다. 그러나 약식이든 공식이든 일방적 얘기를 듣거나 덕담이나 나누자고 하는 기자회견이란 없다. 불편한 질문과 논쟁을 감수해야 하는 자리다. 도어스테핑을 재개하든 안 하든 변함없는 언론의 공식이다.
조현숙 경제부 차장
11.30(수) 한전
3000억원도, 3조원도 아니고 무려 30조원. 올해 한국전력의 예상 영업손실 규모다. 경기도의 한 해 예산과 맞먹는다. 적자의 이유는 간단하다. 생산된 전기를 비싸게 사와서, 싸게 팔기 때문이다. 원룟값을 요금에 반영한다는 ‘연료비 연동제’는 무용지물이었다. 한전은 전기요금 인상을 늘 ‘요청’했으나, 정부는 늘 ‘거절’했다.
버티기 힘든 수준의 적자지만 전력 공급을 독점하는 이 공기업은 누가 도와도 돕는다. 일단 정부는 전력도매가격(SMP) 상한제를 시행하기로 했다. 발전사에서 좀 싸게 사오겠다는 뜻이다. 한전채 발행 한도를 자본금과 적립금을 더한 금액의 2배에서 5배로 높이는 한전법 개정안도 통과됐다. 은행 역시 손을 내밀었다. 연말까지 2조~3조원을 빌려줄 계획이다. 돈줄 막힌 한전에 숨통을 틔워주려는 의도다.
모두 좋은 방법이 아니다. 급한 건 알겠으나 SMP 상한제는 한전의 적자를 발전사의 적자와 맞바꾸는 것뿐이다. 한시적이지만 재산권 침해 소지도 있다. 한전채는 이미 시장을 교란하고 있다. 한전채 같은 우량채가 발행량을 늘리면 시중 자금이 그쪽으로 몰릴 수밖에 없다. 가뜩이나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을 중심으로 자금 경색 우려가 큰 상황이다. 돈이 진짜 필요한 곳으로 흘러가지 못할 수 있다. 시중은행이 등 떠밀리듯 등판한 것 역시 정상적으로 보이진 않는다.
일단 전기요금 현실화가 시급하다. 정부도 내년엔 인상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손실 규모를 고려하면 큰 폭으로 올려야 한다. 하지만 물가는 여전히 높은 수준이고, 선거는 다가온다. 어설프게 올릴 가능성이 크다. 그러면 전기요금 인상 또한 미봉책일 뿐이다.
유가가 하락하고, 적자 폭이 줄고, 또 어쩌다 한전이 흑자를 내면 지금의 걱정은 사그라질지 모른다. 다만 확실한 건 이런 상황이 반복될 거란 점이다. 한전은 이익을 남기면 국민 고혈을 짠다는 비판을 받고, 손해를 보면 무능한 공기업 취급을 받는다. 최근 10년 동안에도 이런 사이클을 여러 번 돌았다. 일반 투자자 비중이 40%에 달하는 상장사이면서, 강력한 정부 통제를 받는 공기업이란 이중 신분 때문이다.
이 애매함을 그냥 두고선 어떤 대책도 잠깐이다. 전기요금은 앞으로도 정권에 따라 춤을 출 것이다. 정부가 확실하게 떠안든, 시장에 맡기든 이제는 결단할 때가 됐다.◎
장원석 증권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