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여담(문화일보) 2022-11/ 11월 01일(화) 펠로시 자택 피습 사건 - 11월 30일(수) ‘유검무죄, 무검유죄’ 유감
오후여담 2022-11/ 문화일보
11월 01일(화) 펠로시 자택 피습 사건
이미숙 논설위원
‘초대받지 않은 손님’(Guess who’s coming to dinner)은 딸의 흑인 남자친구에게 경악하는 백인 부부의 심리를 코믹하게 그린 작품으로, 60년대 미국 영화의 고전으로 꼽힌다. 바하마 출신 미 배우 시드니 포이티어가 남자친구로 출연해 강렬한 인상을 줬다. 부모 역을 맡은 스펜서 트레이시와 캐서린 헵번은 딸의 친구인 이지적인 청년에게 끌리면서도 흑인이라는 이유로 거부감을 보인다. 인종차별이 격렬하던 시대상을 잘 드러낸 영화지만, 요즘 미국 기준에서 보면 낯설다. 흑백결혼은 이미 보편화했기 때문이다.
인종장벽보다 심한 것은 정파 갈등이다. 독일 출신 미 정치학자 야스차 뭉크는 얼마 전 공영라디오 NPR 인터뷰에서 “미국인들은 자녀가 다른 인종과 결혼하는 것은 문제 삼지 않지만, 당파가 다른 것은 못 참아 한다”고 말했다. 민주당을 지지하는 부모들은 자녀들이 공화당 지지자와 결혼할까 봐 겁내고 공화당 성향 인사들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뉴욕 출신 작가 시그리드 누네즈의 장편소설 ‘어떻게 지내요’(What are you going through)에는 주인공의 친구가 “남은 생을 공화당이 지배하는 주에서 보내고 싶지는 않다”고 말하는 대목이 나온다. 친구는 암 투병 중인 것으로 그려지는데, 진영 논리가 막다른 상황에서도 삶을 지배하는 절대 기준임을 보여준다.
공화당·민주당 지지자 간 반목은 도널드 트럼프 시대의 유산이다. ‘프라우드 보이’ 등 극단적인 트럼프 지지자들은 자신들을 애국자라고 주장하면서 “사회주의자를 쫓아내야 한다”며 민주당 의원들에 대한 폭력 행위를 정당화하고 있다. 1·6 미 의사당 폭력난입 사태가 대표적이다. 미 경찰 자료에 따르면 트럼프 행정부 출범 후 미 상·하원 의원 및 가족에 대한 위협이 크게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신고된 건수는 9600여 건이다.
11·8 중간선거를 앞두고 낸시 펠로시 미 하원의장의 남편 폴 펠로시가 자택에 침입한 극우 성향 폭력배의 둔기에 맞아 두개골 골절 등 부상을 당했다. 당시 펠로시 의장은 워싱턴에 머물고 있어 위기를 모면했지만, 이 사건은 미국 민주주의가 어떻게 망가지고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미국만큼이나 여야의 극단적인 팬덤 정치가 횡행하는 우리나라에서도 유사 테러가 일어나지 않을까 우려된다.
11월 02일 레고 정신과 정치 공방
박민 논설위원
블록 장난감 레고(LEGO)는 덴마크어로 ‘재미있게 놀다’는 뜻의 ‘leg godt’를 줄인 말이다. 라틴어 lego는 ‘나는 모은다(합친다)’는 뜻인데 회사 관계자들은 이 단어를 나중에 알았다고 한다. 현재의 레고 블록은 1949년 처음 나왔는데 블록끼리 결합력이 약해 인기를 끌지 못했다. 블록 아래에 파이프를 만들어 결합력을 높이는 방식을 개발해 특허를 출원했고, 1958년부터 조립형 블록을 본격적으로 출시했다. 레고 그룹의 2020년 매출은 7조9800억 원, 순이익 1조8000억 원이다. 2014년 타임지는 레고를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장난감으로 선정했다.
창업자 올레 키르크 크리스티얀센의 3남 고트프레드는 2대 회장에 취임하면서 좋은 제품을 만들기 위해 10대 원칙을 정했다. 무한한 가능성을 가질 것, 성별·나이·세대를 초월할 것, 상상력·창조력·발전성을 지향할 것, 놀수록 가치가 높아질 것, 안전성이 높고 품질이 좋을 것 등이다. 실제로 레고는 무독성 플라스틱을 사용하는 등 아이들 건강을 최우선으로 한다. 포장 상자에 사용되는 종이나 잉크는 먹어도 무해할 정도다. 제작 과정에서 배출되는 합성수지 폐기물은 99% 재활용한다. 다양한 소재를 다루지만 폭력, 정치, 종교, 섹스, 욕설, 음주와 흡연 관련 소재는 다루지 않거나 묘사를 최소화한다. 전쟁과 관련된 무기, 종교 관련 시설 등은 만들지 않는다.
국내에 레고가 정식으로 수입된 것은 1985년 7월이고 1996년 경기 이천에 연간 750만 개의 박스를 생산할 수 있는 공장이 준공됐다. 그러나 토종 후발주자인 옥스포드와의 경쟁으로 매출이 하락하면서 2005년 생산 라인이 중국으로 옮겨갔다. 각 나라 특징을 살린 건축물 등을 레고로 만들어 전시하는 레고랜드는 디즈니랜드, 유니버설 스튜디오와 함께 세계 3대 테마파크로 불린다. 원래 글로벌 엔터테인먼트 그룹 멀린이 운영했으나 지난 2019년 레고 그룹이 사모펀드와 함께 8조8000억 원에 인수했다. 현재 전 세계에 10개가 운영 중인데 지난 5월 5일 춘천시 중도동에 개장한 레고랜드는 세계에서 2번째로 큰 규모다. 그러나 강원도의 보증채무 상환 문제와 전·현직 도지사의 책임 공방으로 논란이 뜨겁다. 레고의 아름다운 제작 원칙을 어린이와 시민들이 즐길 수 있도록 조속한 정상화를 기대한다.
11월 03일 대만과 제주도
이신우 논설고문
싱하이밍(邢海明) 주한 중국대사가 최근 영토 문제와 관련해 주목할 만한 발언을 했다. 대만을 겨냥해 한국의 제주도와 같은 것 아니냐고 따진 것이다. 싱 대사는 지난달 26일 관훈클럽 초청 토론회에서 대만 무력 통일 시도와 관련해 “제주도가 (한국으로부터) 독립하겠다고 하면 인정해주겠느냐”고 되물었다. 한마디로 같은 민족의 땅이니, 한국인도 그런 맥락에서 대만 문제를 인식해야 한다는 논리다. 다른 말 할 것 없이 대만은 한족(漢族)의 땅이라는 이야기다. 일견 근거도 있고, 설득력도 있어 보인다. 하지만 주장의 배경을 이루는 ‘민족’이나 ‘혈통’은 잘못 사용할 경우 자기가 판 함정에 스스로 빠지는 단어가 될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중국은 과연 같은 민족, 같은 혈통의 나라인가라는 반박이 튀어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한족의 땅을 주장의 근거로 내세우기 어려운 것은 지금의 중국 영토가 중국인 스스로 건국했던 명(明)나라 때와 크게 다르다는 점이다. 신장위구르를 비롯, 티베트, 내몽골은 원래 명나라 바깥에 있던 땅들이다. 그것을 이민족인 청(淸)나라가 정복하고 흡수한 것이다. 현대 중국은 얼떨결에 이들 땅을 이어받았을 뿐이다. 대만이 같은 민족의 땅이니 흡수 통일과 무력 통일이 정당하다면 지금의 중국 영토를 구성하고 있는 신장위구르를 비롯, 내몽골, 티베트 땅의 독립운동도 가능하다는 역설이 제기될 수 있다. 몽골에서 내몽골 반환 요구가 나오지 말라는 법이 없다.
더 중요한 것은 만주 땅이다. 이곳은 한족과 별개로, 청의 여진족이 살던 곳이다. 여진족, 즉 만주족은 원래 한반도 계열이었다. 한때 말갈이라고 불리기도 했고, 고조선·부여·읍루·고구려·발해 등 만주 땅에서 발흥했던 한민족의 여러 갈래 중 하나다. 혈통으로 따지자면 한족보다 오히려 한(韓)민족 쪽에 더 가깝다. 싱 대사의 논리를 확대 적용하면 한반도와 만주의 재결합까지도 가능해진다. 중국의 민족통일 노선이 진리라면 중국은 통일 한반도를 지지, 지원해야 마땅하다. 그렇게 해본 적 있나. 현실은 정반대다. 중국은 북한을 통해 남한을 통제하는 한편, 한·미·일의 동북아 전략을 무너뜨리기 위한 견제 장치로 활용하고 있다. 중국은 지금 한민족의 분열, 한반도 분단 구도를 즐기고 있지 않은가.
11월 04일(금) 1원 한 장
김세동 논설위원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최근 자신의 최측근 김용 민주연구원 부원장이 대선 자금 명목으로 유동규 전 성남도시개발공사 기획본부장·남욱 변호사 등 대장동 일당에게서 8억4700만 원을 수수했다는 보도가 나오자 “불법 자금은 1원도 받은 일 없다”고 말했다. 이 대표가 진실을 말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고 믿는 사람도 많지만, 1원이 동전이 아닌 지폐를 말하는 것이라면 이 대표의 말이 사실일 공산이 크다.
현재 한국은행이 발행하는 지폐는 1000원·5000원·1만 원·5만 원 등 4종류가 전부다. 의외로 1000원권은 5000원(1972년 7월 1일 발행), 1만 원(1973년 6월 12일 〃) 지폐보다 2년도 넘게 늦은 1975년 8월 14일에 나왔다. 1원권 지폐는 1962년 6월 13일 발행됐다가 1970년 5월 20일 발행 중지됐다. 10원권도 1962년에 발행돼 1973년까지 사용됐다. 1원과 10원 동전이 1966년 발행되면서 지폐가 점차 없어지게 된 것이다. 1원 동전은 은행 간의 차액결제를 위한 용도로밖에 쓰이지 않아 소량만 발행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의 정무수석을 지낸 강기정 광주시장도 금융감독원의 라임자산운용 검사 무마 청탁을 위해 자신에게 5000만 원을 건넸다고 증언한 김봉현 전 스타모빌리티 회장을 2020년 위증죄로 고소하면서 기자들에게 “1원 한 장 받은 적 없다”고 했다. 정치인들의 ‘1원 한 장’ 어법은 결백을 주장하는 최고조 강조법이라고 하는 것일 테지만, 10만 원도 아니고 정치·불법자금 1원은 무의미한 액수라서 외려 발언의 진실성을 떨어뜨린다.
김의겸 민주당 대변인이 지난달 24일 법무부 국정감사에서 한동훈 장관에게 “7월 19∼20일 윤석열 대통령, 김앤장 변호사 30여 명과 서울 강남 청담동 고급 술집에서 새벽 3시까지 술자리를 하지 않았느냐”고 면책특권에 기댄 허무맹랑한 질문성 폭로를 해 여권을 발칵 뒤집어놨다. 더 웃기는 건, 한 장관이 “사실이면 장관직을 걸겠다. 김 의원은 뭘 걸겠냐”고 다그치자 민주당 측에서 “사실이 아니면 차분히 답변하면 되는데, 과도하게 화를 내니 ‘정말 무슨 일이 있는 것 아니냐’는 느낌이 든다”고 적반하장격으로 나온 것. 야당 논리대로 하면 1원도, 사탕 한 개도 받지 않았다는 이 대표의 주장에도 똑같이 의심이 간다.
11월 07일(월) 요절 가수 차중락
김종호 논설고문
‘찬 바람이 싸늘하게 얼굴을 스치면/ 따스하던 너의 두 뺨이 몹시도 그리웁구나/ 푸르던 잎 단풍으로 곱게 곱게 물들어/ 그 잎새에 사랑의 꿈 고이 간직하렸더니/ 아∼ 그 옛날이 너무도 그리워라/ 낙엽이 지면 꿈도 따라가는 줄 왜 몰랐던가’. 요절 가수 차중락(1942∼1968)이 1966년 발표한 노래로, 가을에 찾아 듣는 사람이 많은 ‘낙엽따라 가버린 사랑’ 시작 부분이다. ‘로큰롤의 제왕’이던 미국 가수 엘비스 프레슬리의 1962년 노래 ‘Anything That’s Part of You’가 원곡으로, 정민섭이 편곡했다. 가사는 당시 실연(失戀)을 겪은 강찬호 시(詩)였다. 김기덕 감독은 매력적인 저음의 바이브레이션 창법 또한 가을 분위기 물씬하던 차중락의 짧은 일생을 그린 영화 ‘낙엽따라 가버린 사랑’도 1970년 개봉했다.
한양대 연극영화과 재학 중에 미스터코리아 선발 전국 대회 2위에 오를 만큼 체격도 좋던 차중락은 1964년 대중가수로 데뷔했다. ‘한국의 비틀스’로 불리던 그룹인 키보이스(Key Boys)의 보컬리스트로 나섰다. 그 록 밴드 일원이던 사촌 형 차도균이 권유했다. 1966년 솔로 가수 독립 후에 그가 남긴 노래 20여 곡 중에는 명곡이 적지 않다. 1967년 동양방송(TBC) 라디오 연속극 ‘사랑의 종말’ 주제가도 그중 하나다. 이경재 작사, 이봉조 작곡의 ‘외로워 외로워서 못 살겠어요/ 하늘과 땅 사이에 나 혼자/ 사랑을 잊지 못해 애타는 마음/ 대답 없는 메아리 허공에 지네’ 하는 노래다. 그는 ‘마음은 울면서’ ‘그대는 가고’ ‘철없는 아내’ 등을 특히 좋아한다고도 했다.
차중락은 서울 청량리의 동일극장 무대에서 공연하던 중에 고열로 쓰러진 지 며칠 지나지 않아, 뇌막염으로 세상을 떠났다. 공교롭게도 ‘낙엽따라 가버린 사랑’을 발표한 지 2주년이 되는 날인 11월 10일이었다. 그의 노래가 생각나는 계절이 깊어가고 있다. 서울 중랑구 망우묘지공원에 있는 그의 무덤 앞에 1969년 세운 추모비의 조병화 시 ‘낙엽의 뜻’도 새삼 떠올리게 된다. ‘세월은 흘러서 사라짐에 소리 없고/ 나무닢 때따라 떨어짐에 소리 없고/ 생각은 사람의 깊은 흔적 소리 없고/ 인간사 바뀌며 사라짐에 소리 없다/ 아, 이 세상 사는 자, 죽는 자, 그 풀밭/ 사람 가고 잎 지고 갈림에 소리 없다’ 하는 시다.
11월 08일 G선상의 ‘이태원’
이도운 논설위원
지난 4일 오후 7시 30분,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공연이 시작됐다. 세계 최정상 교향악단인 빈필은 한-오스트리아 수교 130주년을 기념해 방한했다. 연주회 시작 직전 다니엘 프로샤워 제1 바이올린 수석이 무대 앞으로 나와 마이크를 잡았다. “이태원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해 ‘G선상의 아리아’를 먼저 연주하겠습니다. 박수는 치지 말아 주세요.”
바이올린과 비올라, 첼로, 더블베이스 등 현악기만으로 연주가 시작됐다. 원래 선율이 아름다운 곡이지만, 연주가 시작되는 순간 청중은 저절로 눈을 감고 손을 모았다. 2020년 역사가이자 음악가인 존 엘리엇 가디너가 발간한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전기 한국판 제목은 ‘천상의 음악’이다. 빈필의 G선상의 아리아는 마치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와 희생자들의 억울하고 슬픈 영혼을 보듬어 하늘로 데려가는 느낌을 줬다. 연주가 끝나고, 거짓말처럼 2500명이나 되는 만원 청중 가운데 단 한 사람도 박수를 치지 않았다. 그 상태로 모든 연주자와 청중은 1분간 묵념을 이어갔다. 예술이 인간에게 선사할 수 있는 최고의 위로였다.
이태원 참사를 추모하는 방식이 음악처럼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다. 국내에서는 재난과 참사를 어떻게든 정략적으로 악용하려는 세력이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추모 대회를 가장한 반정부 시위가 열리고, 내각 총사퇴가 거론되고, 앞으로 2년간 정치 이슈로 삼겠다는 속셈도 드러낸다.
2시간에 걸친 빈필의 공연이 끝나고 이번에는 지휘자 프란츠 벨저 뫼스트가 마이크를 잡았다. “음악은 우리에게 위로도 되지만, 삶의 희망이 되기도 한다”면서 ‘비엔나왈츠’를 한 곡 더 연주하겠다고 했다. G선상의 아리아가 이태원 희생자를 위한 위로였다면, 비엔나왈츠는 살아남은 이들을 위한 희망의 노래였다.
희생자를 애도하는 한편, 벨저 뫼스트의 제안처럼 미래를 위한 희망의 노래도 불러야 한다. 분열적·갈등적 정치 선동에 굴하지 않고, 모든 국민이 함께 손잡고 ‘대한민국’을 외칠 수 있는 계기가 필요하다. 오는 20일 개막하는 카타르월드컵이 좋은 계기가 될 수 있다. 대한축구협회와 서울시는 이태원 참사 여파로 거리 응원을 취소했다고 한다. 충분히 이해하지만, 한 번 더 생각해 보길 바란다.
11월 09일 대만 안보 지키는 반도체
문희수 논설위원
대만 특유의 반도체 특화 전략이 새삼 주목받고 있다. 반도체를 앞세워 경제는 물론 안보까지 지키는 이른바 ‘실리콘 방패’ 전략이다. 미국과 중국 간 갈등이 고조될수록 반도체 대국인 대만의 가치가 더욱 돋보인다. 대만 정부는 영향력을 더 키우려고 자국 내에 반도체 공장을 더 짓고 있다. 북부∼서부∼남부 일대 반도체 벨트에만 20개 공장을 건설 중이다.
반도체 기업에 대한 예우도 남다르다. 세계 1위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업체인 TSMC가 대표적이다. 오는 18∼19일 태국에서 열리는 아태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 이 회사 모리스 창(91) 창립자가 차이잉원(蔡英文) 총통을 대신해 참석할 예정이라고 한다. 그것도 벌써 5년째다. 중국에서 총통의 참석을 반대하는 이유도 있지만, 민간 기업인이 국제 정상회의에 대참하는 것은 웬만한 나라에선 꿈도 못 꿀 일이다. 이 회사의 위상은 최근 미국·일본·독일에 반도체 공장을 짓기로 한 것을 놓고 대만 정치권에서 안보 불안 논란까지 빚어진 데서도 확인된다. 그만큼 세계적으로 영향력이 크다는 얘기다.
지난해 세계 파운드리 시장에서 TSMC 점유율은 무려 53%였다. UMC 등 다른 대만 업체까지 합치면 64%나 돼 한국(18%), 중국(7%)을 압도한다. 건설 중인 공장들이 완공되면 파워가 더 커질 게 분명하다. 중국이 정치·외교적으로 대만을 압박해도, 반도체에 관한 한, 의존을 피할 수 없다. 중국의 지난해 반도체 수입 가운데 TSMC 등 대만 비중이 30%를 넘는다.
대만에서 “우리를 지켜주는 것은 미국의 무기가 아니라 반도체 공장”이라는 목소리가 높은 게 단지 허세로만 보이지는 않는다. 이마누엘 칸트가 명저 ‘영구평화론’에서 상호 긴밀하게 얽혀 있는 국가 간에는 서로 피해를 입기 때문에 전쟁이 벌어지지 않는다고 설파했던 것을 상기시킨다. 더구나 지금은 전 세계가 연결돼 있다. 중국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여파를 잘 보고 있을 것이다. 대만에서 반도체는 경제를 넘어 안보도 지킨다. 경제와 안보가 한 몸인 것이 시대 흐름이다. 초격차 경쟁력을 갖춘 기업이 있는 게 미사일보다 안보를 더 튼튼히 만들 수 있다. 한국도 삼성·현대차·SK·LG 같은 글로벌 기업 하나하나가 얼마나 귀중한지 되새겨야 한다.
11월 10일 문재인의 입양 · 파양관
박민 논설위원
입양에는 ‘가슴으로 낳은 자식’ ‘편견을 극복한 피보다 진한 사랑’ 같은 찬사가 따른다. 역설적으로 그만큼 어렵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런데 지난해 1월 문재인 당시 대통령은 신년기자회견에서 독특한 입양관을 제시했다. 생후 18개월 된 입양아가 양부모 폭행에 사망한 ‘정인이 사건’ 재발 방지 대책을 묻는 질문에 “입양 부모의 경우에도 마음이 변할 수 있기 때문에 일정 기간 안에 입양을 다시 취소한다든지, 여전히 입양하고자 하는 마음은 강하지만 입양 아동과 맞지 않는 경우 아이를 바꾼다든지 등 입양 아동을 보호할 수 있는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말했다.
당시 야당이던 국민의힘 대변인 김은혜는 “정인이 사건 방지책은 결국 ‘교환 또는 반품’인 것인지 궁금하다”며 “인권변호사였다는 대통령 말씀 그 어디에도 공감과 인권, 인간의 존엄은 없었다”고 비판했다. 청와대는 “대통령의 의도나 머릿속에 ‘아동 반품’이란 의식 자체가 없다”고 반박했고, 친문들도 전체 맥락을 강조했지만 엎질러진 물이었다. 법조계는 위탁양육제는 입양 아동 입장에서 모니터링을 하는 제도이고, 법원 역시 입양 아동의 복리 차원에서 입양 취소를 심리한다고 지적했다. 입양 관련 단체들은 정인이 사건의 본질이 아동 학대이지 입양 문제가 아니라며 문 대통령의 입양관 자체를 문제 삼았다.
그로부터 21개월여 만에 풍산개 곰이와 송강의 ‘파양 문제’ 논란이 분분하다. 윤석열 대통령 퇴진 집회를 주도해온 ‘촛불승리전환행동’ 상임공동대표 우희종 교수조차 일갈한다. “솔로몬은 생명체에 대한 존중과 정서에 근거해 판결했다. 21세기가 그 시절보다 못하다.” 풍산개로 인한 문 전 대통령의 대북정책 및 치적 홍보 효과는 돈으로 환산하기 힘들다. 곰이와 송강의 양육비는 어느 정도일까. 문 전 대통령은 퇴임 전 전직 대통령 예우를 강화해 예우보조금을 연 2억6000만 원에서 3억9400만 원으로 인상했다. 전액 비과세로 받는 연금만도 월 1390만 원이다.
반려견은 ‘한 가족처럼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는 개’다. 입양아를 키우는 김미애 국민의힘 비대위원이 지난해 신년기자회견 직후 페이스북에 올린 글이다. “입양 아동은 시장에서 파는 인형도 아니고, 개나 고양이도 아니다. 개나 고양이도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11월 11일(금) 지속 불능 ‘한전공대’
이미숙 논설위원
반기문 제8대 유엔 사무총장은 17개 색깔이 햇살 모양으로 뻗어 나가는 동그란 배지를 양복 재킷에 늘 달고 다닌다. 무지개 같은 배지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이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반 전 총장은 “유엔이 밀레니엄 개발 목표 종료 후 설정한 17개 지속가능 개발 목표(SDGs·Sustainable Development Goals)”라고 설명한다. 17개 과제는 빈곤과 질병, 교육 등 보편적 문제에 기후변화, 에너지, 환경오염 등 지구환경 문제, 그리고 기술, 주거, 고용 등 경제사회문제로 유엔은 회원국들이 2016년부터 2030년까지 지속가능 개발을 통해 달성해야 할 공동목표로 정했다. 반 전 총장은 2007년부터 10년간 유엔 수장으로 일하면서 이 문제에 집중했고, 퇴임 후에도 반기문 재단을 중심으로 ‘SDGs’ 달성에 주력하고 있다.
지난 9월 미국 서부의 명문 스탠퍼드대에서 지속가능 도어 스쿨(Doerr School of Sustainability)이 문을 열었다. 문·이과 구분을 초월해 지구 문제 해결에 집중하는 새로운 단과대다. 실리콘밸리의 벤처투자가 존 도어(71)가 기후변화와 지속가능 개발 연구에 써달라고 11억 달러(약 1조4000억 원)를 내놓고, 제리 양 등 동문 기업인들이 동참해 모금된 16억9000만 달러를 바탕으로 설립됐다. 여기엔 사회과학부와 지구물리학부, 에너지공학부, 토목환경공학부 등 7개의 학부·대학원 과정이 개설돼 ‘SDGs 특화대’라 할 만하다. 도어 스쿨 설계를 주도한 스콧 펜도르프 교수는 최근 스탠퍼드대 아태연구소(소장 신기욱)와 반기문 재단이 서울에서 주최한 ‘환태평양 지속가능 대화’ 국제회의에 참석, “사회과학과 공학에 기반해 지구 생태계를 연구해야 기후변화 대응과 지속가능 개발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21세기 지구 문제 해결을 모색하는 벤처투자가와 학자들의 협업으로 탄생한 혁신적인 도어 스쿨을 보며 문재인 전 대통령이 임기 말 막무가내로 밀어붙인 한전공대(한국에너지공과대학)가 떠올랐다. 모기업인 한국전력은 문 정부의 탈원전 정책으로 인해 만성 적자기업으로 전락하면서도 민주당 압박에 수천억 원의 설립비를 댔다. 그런데 뚜껑을 열어보니 달랑 에너지학부 1개뿐이다. 비전도 없이 정치논리로 만들어져 세금과 기업 재정만 축내는 ‘좀비 대학’은 지속 불가능하다.
11월 14일(월) 속 보이는 서명운동
이현종 논설위원
서명운동은 온건하면서도 힘 있는 의사 관철 수단이다. 1838년부터 1840년까지 영국에서 일어난 차티스트 운동은 서명운동이 본격화하는 시발점이다. 차티스트라는 명칭은 노동자들이 제기한 인민헌장(People’s Charter)에서 유래한 것으로, 당시 일정 이상의 재산을 가진 남성에게만 있던 투표권을 ‘모든 성인 남자에게 주자’는 주장을 펼쳤다.
1838년 5월 런던 노동자협회 지도자였던 윌리엄 러벳은 인민헌장을 발표하고, 이 헌장이 의회에서 통과될 수 있도록 런던과 버밍엄 등 영국 각지의 대도시에서 집회를 갖는 한편으로 120만 명의 서명이 담긴 청원을 영국 하원에 제출했다. 의회가 청원을 거부하자 1842년에는 3배 가까운 325만 명의 서명이 담긴 청원을 재차 제출했고, 1848년엔 570만 명이 서명했다. 이런 노력이 쌓여 1867년과 1884년의 선거법 개정을 통해 영국에서 보통선거로의 큰 진전이 이뤄졌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대규모의 서명운동은 1985년 2·12 총선에서 신한민주당이 제1야당으로 부상하고 이후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이 주도한 민주화추진협의회 중심으로 벌어진 ‘민주제 개헌 1000만 명 서명운동’이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1986년 1월 국정연설에서 88서울올림픽을 핑계로 1989년까지 개헌 논의를 유보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직선제 개헌을 요구해온 야권은 개헌을 위한 범국민서명운동을 전개하기로 했다. 당시 DJ는 100만 명 정도 서명을 받자고 했으나, YS는 1000만 명으로 늘리자고 했다. DJ가 “어떻게 1000만 명 서명을 받느냐”고 하니, YS는 “그걸 누가 세어 보냐. 그냥 하면 되지”라고 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11일부터 이태원 참사 국정조사를 위한 범국민서명운동을 제안하고, 실제 서명운동에 들어갔다. 그런 장외투쟁은 민의의 전당인 국회를 움직일 방법이 없을 때 하는 비상수단이다. 민주당이 169석을 가지고 있는 만큼 재적 과반 참석에 과반 찬성인 국정조사 발동 권한은 충분하다. 그런데도 굳이 서명운동을 하겠다는 것은 자신에 대한 사법 리스크가 급속히 가시화하자 이를 돌파하기 위한 전술로 비친다. 너무 속이 뻔히 보여서 일반 국민의 호응이 얼마나 있을지는 미지수다.
11월 15일 이상야릇한 한전공대
이신우 논설고문
한전공대(한국에너지공과대학교) 총장의 기본급이 3억 원 수준인 것으로 최근 확인됐다. 연봉 외에도 성과급이 별도로 지급된다. 내부 평가에서 S등급을 받는 경우엔 기본급의 100%(3억 원)를 추가한다. 총장이 이 정도이니 일반 교수들의 연봉 수준도 줄줄이 고액으로 책정된다. 정교수 15명의 연봉도 평균 2억 원이다. 교육부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4년제 정교수 평균 연봉이 1억2000만 원이었다. 한전공대에 구성된 48명의 교수진 연봉만 100억6000만 원인데 여기에 성과급까지 합하면 그 액수는 훨씬 더 뛴다.
문제는 한전공대 운영자금 조달이다. 한전공대는 2025년까지 설립과 운영에 8200억 원 정도를 투입하는데 그 가운데 가장 큰 몫은 한전이 담당한다. 이름도 한전공대 아니었던가! 더 심각한 문제는 한전이 지금 천문학적인 적자 늪에 허덕인다는 점이다. 올해에만 적자 규모가 40조 원에 이를 것이라고 한다. 운영자금이 없어 회사채 찍어내기로 연명하는 상황이나 요즘엔 회사채도 제대로 팔리지 않는 신세다. 그럼 한전 보조금을 폐지하고 인근 지방대와 통폐합한 후 대학이 자립할 수 있도록 조치하면 될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이 제기될 것이다. 하지만 이는 불가능하다. 한전공대는 ‘한국에너지공과대학교특별법’을 통해 특혜를 보장받는다.
이 법에 따르면 한전공대는 특수법인 대학으로 국공립·사립학교 어디에도 소속돼 있지 않다. 학교는 교육부 소관 아닌가 하는 말이 나올까 봐, 소관 부처를 산업통상자원부로 옮겨 놨다. 법 규정을 살펴본들 내용이 모호하기 짝이 없어 학생 선발, 학위 과정, 교수 임면 등에 책임 있는 당사자를 특정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동시에 국유재산과 공유재산 등을 대학에 무상 양여, 사용 허가 및 대부받을 수 있는 길까지 터놨다. 법 규정상 한전공대가 손을 벌리면 누구라도 돈을 내야 하나 참견은 사양한다. 학교 내에 불미한 일이 있어도 이를 정보 공개하면 큰일 난다. 법 제27조는 ‘임직원이나 임직원이었던 사람은 직무상 알게 된 비밀을 누설하거나 도용하여서는 아니 된다’고 못 박고 있다. 만일 이를 어길 경우 ‘3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 또는 30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제30조). 한전공대, 과연 정체가 뭘까?
11월 16일 교복이 시위 드레스코드
김세동 논설위원
토요일인 지난 12일 오후 3시 장대비가 내리는 가운데 서울 광화문역 2번 출구 앞에서 ‘제1차 윤석열퇴진중고등학생촛불집회’가 열렸다. 대부분 교복 위에 우비를 입은 중·고교생 60여 명 등 150여 명의 학생과 시민이 모여 ‘일제고사 부활야욕 중고생 선제타격. 중고생의 힘으로 윤석열 퇴진’ ‘중고생촛불집회탄압 국민의힘 사과하라’ 등의 손팻말을 들고 구호를 외쳤다. ‘야욕’ ‘선제타격’ 등 친북 운동권 집회에서 익숙하게 봐온 용어를 어린 학생들이 들고 있어 생경한 풍경이었다.
25세나 되지만 촛불중고생시민연대 상임대표를 맡고 있는 최준호 전 통합진보당 청소년 비대위원장은 “대통령을 쫓아내고 나라를 뒤바꿨던 4·19혁명, 2016년 촛불혁명을 누가 일으켰느냐”고 말했다. 중고생촛불집회는 이날을 시작으로 매주 토요일 같은 장소에서, 같은 시간에 연다고 한다. 자체 집회를 마친 중고생들은 용산 대통령 집무실 주변으로 이동해 촛불승리전환행동의 ‘이태원 참사 책임자 처벌촉구 집회’에 합류했다. 핼러윈 사고 희생자들의 추모식을 진행하겠다고 연 이 집회에서도 주된 구호는 “윤석열 퇴진”이었다.
이태원 참사가 발생하기 전에 중고생촛불집회 주최 측이 11월 5일 1차 집회 개최예고 포스터를 홈페이지에 올리면서 준비물로 ‘교복(드레스코드)’ ‘깔고 앉을 공책’이라고 적은 걸 보고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취임 6개월도 안 됐고, 엄청난 비리가 드러난 것도 아닌데 윤 대통령의 퇴진을 촉구하는 중고생들만의 특이한 집회를 열면서 교복을 입고 나오라고 한 속셈이 너무도 저열하고 노골적이라고 느껴졌다. 어린 청소년들조차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한다는 주장을 시각적으로 과장하기 위한 것으로, 속이 뻔히 보이는 치졸한 선전술이다.
이 조직의 강령엔 학생인권을 보장한다며 화장(化粧)·두발·복장 자유를 적시하고, 중고생의 숙박시설 사용과 자취생활 등에 관한 자유를 요구하기도 한다. 강령에 복장 자유를 내걸면서 시위 드레스코드로 교복을 지정한 건, 자기모순이자 자가당착이다. 이러다 자칫 ‘윤석열퇴진아줌마촛불집회’라는 조직이 만들어져 ‘준비물-영유아 태운 유모차’라고 적은 포스터를 볼지도 모르겠다.
11월 17일 김건희의 공공외교
이도운 논설위원
현대 외교에서 새롭게 떠오르는 개념이 공공외교(Public Diplomacy)다. 20세기 말까지의 전통적 외교는 외교관 대 외교관, 정부 대 정부, 국가원수 대 국가원수 사이에서 주로 이뤄졌다. 그러나 자유민주 사회에서 국민의 역할이 갈수록 커지면서 외교 상대국의 정부는 물론 국민과 직접 소통하는 것이 중요해졌다. 각국 국민과 역사·문화·가치·정책에 대한 공감대를 확산하면서 자연스럽게 국가 간 신뢰를 확보한다는 것으로 기업의 마케팅과도 통하는 개념이다. 미국의 전직 외교관이자 터프츠대 플레처스쿨 학장이었던 에드먼드 걸리언의 ‘대국민 외교론’, 하버드대 조지프 나이 교수의 ‘소프트 파워’ 등이 공공외교의 이론적 토대가 됐다.
미국은 아예 국무부에 공공외교 담당 차관을 신설했고, 일본은 외무성 외무보도관실이 공공외교를 총괄하며, 중국은 전 세계에 공자학원을 확산하고 있다. 얼마 전 타계한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1999년 4월 방한 중 전통문화가 살아 숨 쉬는 경북 안동을 찾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우리나라도 각 주재국에 한글학교를 설치하는 등 정부의 노력도 있었지만, 실질적인 공공외교는 삼성·현대·LG·SK 같은 글로벌 기업과 싸이·BTS·블랙핑크·박세리·김연아·손흥민 등 대중문화·스포츠 스타들이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윤석열 대통령의 아세안·G20 정상회의 기간에 김건희 여사가 새로운 ‘영부인 공공외교’를 시도했다. 김 여사는 배우자 프로그램인 앙코르와트 방문 대신 심장병·뇌 질환을 앓고 있는 캄보디아 어린이의 집을 찾은 것. 이러한 사실이 보도되면서 이 어린이를 한국에 데려와 치료하는 모든 비용을 내겠다는 독지가들이 줄을 잇고 있다. 현지의 반응도 좋다. ‘프놈펜포스트’는 14일 ‘한국의 영부인이 병든 아이에게 희망을 가져왔다’고, ‘크메르타임스’는 15일 ‘한국에서 곧 보자-한국의 영부인, 캄보디아 꼬마에게 심장 수술 약속’이라는 보도를 냈다. 한편으로, 한국인 의사의 선행까지 널리 알려졌다.
그런데 외신들은 국내의 비판 목소리도 보도했는데, 장경태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빈곤 포르노’ 발언이 부각됐다. 어느 쪽이 국익을 위한 활동이고, 어느 쪽이 국익을 자해하는 행위인지, 오래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11월 18일(금) ‘보리밭 화가’ 이숙자
김종호 논설고문
한국적 서정(抒情)과 힘찬 생명력을 화폭에 담아온 지향(芝鄕) 이숙자(80) 화백이 1989년 작품 ‘이브의 보리밭’을 선보였을 당시 한국 화단에선 도발로 받아들였다. 음모(陰毛)까지 적나라하게 드러낸 알몸의 여인이 보리밭에 누워, 눈을 똑바로 뜨고 앞을 바라보는 모습의 그림이었다. 화단 일각에선 “튀는 그림으로 돋보이려고 한다”고 수군거렸고, 어느 화가는 “저렇게 그리면 창피하지 않나” 하고 개탄도 했다. 이 화백 은사인 천경자 화백마저 “이런 건 좀 안 그렸으면”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뒤에도 ‘이브의 보리밭’ 연작을 계속 내놓은 이 화백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여성은 자연의 원천이자, 생명의 근원이다. 나는 누드를 꽃이나 나비처럼 아름다운 자연의 일부로 생각한다. 무의식이겠지만, ‘벌거벗은 이브’는 내가 살아오면서 갈등했던 여성의 굴레와 인습에 대한 저항 의식을 형상화한 자화상이 아닐까도 싶다. 보리밭을 고뇌의 이브와 함께 그릴 수 있다는 기쁨에 열병을 앓듯 그려낸 그림으로, ‘보리밭의 에로티시즘’이라는 새로운 내 작품 세계가 열렸다.”
이제 ‘이브의 보리밭’은 그의 예술을 상징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1967년 홍익대 동양화과를 졸업한 뒤로 한국 채색화의 정통성을 이으며 발전시켜온 그가 1991년에 펴낸 에세이 저서의 제목으로도 삼았다. 그의 첫 보리밭 작품은 1977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출품한 ‘청맥(靑麥)’이다. 그해에 경기도 포천을 찾아간 길에 눈앞에 펼쳐진 보리밭을 처음 봤을 때 “너무 아름다워서 울고 싶었다”고 한다. 아찔할 정도로 정서적 충격을 받았고, 그런 느낌을 그림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그날이 6월 10일이었다는 것까지 지금도 여전히 기억한다. 우직하면서 눈이 선량한 소, 한글, 민족정기가 느껴지는 백두산 등 작품 소재를 다양화하면서도, 보리밭을 끊임없이 변주하며 그려온 배경도 달리 없다.
젊은 시절에 ‘세계적인 작가가 되겠다’는 다짐의 의미로 한자(漢字) ‘세(世)’를 써서 집 안에 붙여 놓기도 했던 그는 결국 그 꿈을 실현한 셈이다. ‘보리밭’ 연작을 비롯한 그의 대표적인 작품 40여 점으로 구성한 개인전이 서울 종로구 인사동 선화랑에서 지난 10월 19일 개막했다. 오는 19일 끝난다. 머잖아 또 열렸으면 좋겠다는 사람이 많다.
11월 21일(월) 달 유인기지 경쟁
문희수 논설위원
미국이 50년 만에 달 탐사 계획(아르테미스)을 재개해 관심이다. 지난 1972년 아폴로 17호 이후 처음으로 우주인을 달에 착륙시키는 것을 넘어, 달에 인류가 살 기지까지 건설하는 원대한 계획이다. 또 달 궤도에 우주정거장을 건설해 화성 유인 탐사에 나선다는 대장정의 출발이다.
미 항공우주국(나사)이 지난 16일 사람이 탈 수 있는 캡슐형 우주선 오리온을 실은 대형 로켓(SLS)을 발사한 것은 아르테미스 계획의 1단계인 무인 비행이다. 오리온은 달을 두 바퀴 돌며 방사능 피폭 등을 실험하고 지구로 돌아오는 것이 목표다. 2단계는 2024년 우주비행사 4명을 태우고 달 궤도 왕복 여행을 하는 유인 비행이다. 최종 3단계는 2025년에 사상 처음으로 여성 및 비(非)백인계 우주인 4명을 달로 보내 이 중 2인을 달에 착륙시켜 탐사를 마친 후 귀환시키는 것이다. 3단계가 성공하면 달 궤도에 우주정거장, 달 남극엔 유인기지를 건설해 향후 화성 유인 탐사 및 더 먼 심(深)우주 탐사를 위한 교두보를 구축하게 된다.
물론 달 탐사는 경제적 실익과도 밀접하다. 달에는 핵융합 에너지원만 지구촌이 1만 년 동안 쓸 수 있는 양이 매장돼 있다고 한다. 희토류와 희귀광물도 많아 달 자원 경쟁이 치열하다. 당장 미국과 중국 간 달 기지 경쟁이 한층 뜨거워질 전망이다. 중국은 우주 강국이다. 2013년 우주선 달 착륙 이래 2019년엔 달 뒷면에도 첫 착륙을 했고, 2020년엔 월석 시료를 채취해 귀환했다. 2024년 달 남극 탐사, 2027년 달 남극 기지 건설을 위한 구조 시험에 나설 예정이다. 미국이 중국을 경계하는 이유다.
다행히도 한국은 지난해 5월 아르테미스 계획에 영국·캐나다·호주·일본 등에 이어 10번째로 참여하는 국가가 됐다. 지난 8월 발사에 성공해 100일 넘게 순항 중인 다누리호는 나사의 음영 카메라를 실었다. 올 12월 말쯤 달 궤도에 안착하면 장차 아르테미스 3호의 달 착륙지 및 유인기지 최적 후보지를 찾는 데 도움을 줄 예정이다. 그렇지만 앞선 나라들에 비하면 한참 뒤진다. 이번 오리온은 직선으로 날아 6일 정도면 달에 닿는 데 비해 다누리호는 4개월 반이나 걸린다. 막대한 연료 무게를 감당할 기술이 부족한 탓이다. 한국은 2031년에나 달 착륙선을 독자 발사할 예정이다. 더욱 분발해야 한다.
11월 22일 ‘민들레’의 민들레 모욕
박민 논설위원
민들레는 포공영(蒲公英)으로도 불린다. 마당에 핀 민들레를 의미하는 옛말로 밤하늘의 별처럼 아름다워 ‘땅의 별’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관련 전설도 있다. 옛날에 평생 단 한 번의 명령밖에 내릴 수 없는 운명을 가진 왕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운명을 결정한 별들을 원망하다 복수를 결심한다. 그는 밤하늘의 별을 향해 “모두 하늘에서 떨어져 땅에서 꽃으로 피어나라”고 명령했다. 순간 밤하늘의 별들이 떨어져 노란 꽃으로 피어났다. 그래도 분이 가시지 않는 왕은 양 떼를 몰고 가 꽃들을 사정없이 짓밟게 했다. 그러나 모질게 생명을 이어간 꽃이 민들레다.
다년생 초인 민들레는 실제로 강인한 생명력을 갖고 있다. 뿌리를 동강 내더라도 각각의 뿌리에서 싹이 튼다. 땅 위에 바싹 붙어 자라는 잎과 달리 땅 속의 뿌리는 곧고 깊게 박혀 있고 거의 인삼만큼 자라는 경우도 있다. 살짝 바람만 불어도 사방으로 흩날리는 민들레 갓털은 아스팔트의 작은 균열이나 아파트 난간의 한 줌 먼지에서도 꽃을 피운다. 그래서 민초(民草)의 상징으로 꼽히기도 한다. 가수 조용필이 민들레를 ‘일편단심’이라고 노래한 것은 번식의 특성 때문이다. 토종 민들레는 서양 민들레의 꽃가루 총각이 찾아와도 절대 받아들이지 않고 토종 민들레의 꽃가루 총각만을 기다린다. 토종 민들레는 양성화(兩性花)이지만 다른 꽃의 수분을 받아야 씨앗을 맺는다. 짝을 만나지 못하면 수절을 한다. 반면 서양 민들레는 다른 종을 받아들이기도 하고 여의치 않으면 양성화의 장점을 활용해 자가 수분을 해버린다.
최근 정치권에서 민들레가 논란이 되고 있다. 친야 성향 온라인 매체 ‘민들레’가 지난 14일 유족의 동의도 받지 않은 채 희생자 155명의 이름을 공개하자 유족은 물론 국가 인권 관련 기관, 시민단체 등이 일제히 비판하고 나선 것. 민들레는 유족이 희망하면 이름을 삭제하겠다고 한 발 물러섰지만 삭제를 요청하는 유족에게 홈페이지 가입이나 신청자 신분증 사진을 요구해 또다시 빈축을 샀다. 자기만 옳다는 선민의식과 편향적 인식에 매몰돼 민초에 고통을 안겨주는 매체가 ‘민들레’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것 자체가 별처럼 아름답고 일편단심인 민들레에 대한 모욕이다. 더구나 민들레의 꽃말은 ‘감사하는 마음’ ‘내 사랑 그대에게 드려요’다.'
11월 23일 ‘보호 졸업’ 청년과 적십자
이미숙 논설위원
보육원 등에서 생활하다 만 18세 때 퇴소하는 이들을 자립준비 청년이라 부른다. 시설 생활을 ‘졸업’하는 보호종료 아동은 매년 2500명 수준이다. 보건복지부 조사에 따르면 자립준비 청년 5명 중 1명은 숙박시설 등 주거지로서 적절치 않은 곳에서 생활하며 대학진학자들은 20%가 채 안 된다. 진학했다 해도 절반 이상은 생활고와 부적응 등의 이유로 그만두는 것으로 나타났다. 시설에서 나올 때 500만 원의 자립정착금을 받는데 그 지원금을 전문적으로 노리는 일명 ‘빨대족’ 조직까지 있어 사회에 나오자마자 위기에 처하는 이도 많다고 한다.
대한적십자사(회장 신희영)가 자립준비 청년 지원을 위한 ‘레드 크로스 갈라’를 지난 11일 서울 용산구 그랜드 하얏트 호텔에서 개최했다. 장예순 한적 부회장은 “사회에 나오자마자 절벽과 마주한 청년들을 위해 멘토링과 교육 지원 등을 하겠다”고 밝혔다. 자립준비 청년 지원 활동가 박강빈 씨는 “시설에서 나온 첫 밤이 가장 힘들었다”면서 “기댈 수 있는 곳이 없는 후배들을 돕기 위해 이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보육원에서의 성장 과정을 기록한 책 ‘나는 행복한 고아입니다’의 저자인 이성남 장학사는 “나를 키워준 8분의 어머니와 후원자들 덕분에 이 자리까지 왔다”면서 “시설을 나온 청년들이 홀로서기 아닌 함께 서기를 하도록 도와달라”고 말했다.
레드 크로스 갈라는 김성주 회장 재임 때인 2015년부터 시작됐다. 취약 계층, 국내체류 난민, 재난 피해자 지원을 주제로 매년 10억여 원을 모금했는데 자립준비 청년 지원을 콕 찍어 캠페인을 시작한 것은 의미가 깊다. 그간 이들에 대한 지원은 민간 재단인 아름다운재단과 글로벌 아동지원 기구인 굿네이버스가 주로 관심을 가져왔다. 아름다운재단은 2001년부터 ‘열여덟 어른’ 캠페인을 시작해 20년째 자립준비 청년 장학금 및 자립역량 강화 지원 사업을 진행 중이다. 굿네이버스도 시설 아동 및 보호종료 아동 지원 모금 사업을 통해 지원활동을 해왔다. 한적이 자립 준비 청년 프로젝트를 시작한 것은 이 문제가 이제 국가적 어젠다가 됐다는 뜻이다. 저출산 문제를 해결한다며 천문학적 예산을 쏟아부으면서, 우리 곁에 있는 시설 및 시설 출신 아이들을 방치하는 것은 위선을 넘어 반인륜이다.
11월 24일 김만배와 ‘죄수의 딜레마’
이현종 논설위원
“지은 죄만큼만 처벌받겠다”. 구속기한이 만료돼 석방된 유동규 전 성남도시개발공사 기획본부장과 남욱 변호사가 왜 진술을 바꿨냐는 질문에 공통된 답변을 했다. 유 씨가 구속되기 전 정진상 더불어민주당 당 대표 정무조정실장과 김용 민주연구원 부원장이 “개인 비리로 해라. 우리는 모른다” “쓰레기라도 먹고 병원에 가라” “침낭을 들고 태백산맥으로 가서 열흘 동안 숨어 지내라”고 했다고 한다. 이젠 협박을 한 두 사람은 구속돼 있고 유·남 씨는 나와 있다. 대장동 주범으로 구속됐던 김만배(화천대유 대주주) 씨마저 24일 0시 구속기한 만료로 출소해 묘하게 처지가 뒤바뀌는 셈이다.
정권이 바뀌자 사건의 본질과 주범들도 바뀌는 상황이다. 문재인 정권 검찰 수사팀은 천화동인 1호의 소유주가 유 씨라고 했으나, 지금은 이재명 대표 측으로 바뀌고 있는 셈이다. 남 변호사는 “겁이 났다”며 심경 변화에 대해 법정 증언을 했지만, 결국 이들이 ‘죄수의 딜레마’에 빠졌기 때문이다. 용의자들이 각자 범행을 부인하면 증거가 없어 모두 풀려날 수 있는데 상대방이 죄를 인정하고 자신만 부인하면 혼자 더 강한 처벌을 받을까 두려워 결국 죄를 자백한다는 게임이론 모델이다.
이 대표가 “측근이 아니다”고 했던 유 씨가 가장 먼저 딜레마에 빠졌다. 자신은 돈도 챙기지 못했는데, 모든 잘못을 지고 가야 하는 상황을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여기에 10여 년을 함께했던 이 대표가 국정감사장에서 “정진상·김웅 정도 돼야 측근”이라고 선을 긋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의 빚을 떨쳐 버릴 수 있었다고 한다. 정진상과 김용을 겨냥, “천천히 말려 죽일 것”이라고 한 것을 보면 유 씨의 배신감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이 간다. 남 변호사는 “천화동인 1호 지분은 이재명 시장 측으로 알았다”면서 성남시장 선거-경기지사 선거-대선 경선 때 전달한 돈도 구체적으로 폭로했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처럼 누구 하나 내가 책임지겠다는 ‘의리’가 없다 보니 순식간에 죄수의 딜레마에 빠져 버린 것이다. 이제 석방된 김만배 씨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주목된다. 구속됐다 한 번 풀려나면 다시는 들어가고 싶지 않다고 한다. “남이 내 징역 대신 살아주지 않는다”는 남 씨의 말이 크게 들릴 듯하다.
11월 25일(금) 반도체 강국이 군사 강국
이신우 논설고문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침공 후 얼마 가지 않아 각종 무기가 바닥을 드러내자 재생산 과정에 뜻하지 않은 곤욕을 치러야 했다. 국제사회의 제재로 현대 무기 생산에 필수적인 반도체를 제때 공급받지 못한 것이다. 그러자 러시아는 소비자용 전자제품까지 뒤지기 시작했다. 냉장고·TV·게임기 등을 닥치는 대로 분해해 군수용 부품으로 쓸 만한 반도체를 찾아 헤매야 했다. 서방 언론은 이를 두고 “러시아 방위 산업 역량이 잠식당하기 시작한 것이 분명하다”며 “(첨단) 대신 재래식 무기를 더 많이 쓰는 추세”라고 조롱했다.
그러잖아도 우크라이나군은 휴대용 대공 미사일 ‘재블린’이나, 사거리가 수백 ㎞에 달하는 다연장로켓시스템 ‘하이마스’ 등을 동원하면서 러시아군을 압도하는 작전 능력을 과시하고 있다. 모두 군수용 반도체 의존도가 높은 무기들이다. 이를 보면 알 수 있듯 현대전은 첨단 무기를 신속하고, 또 대량으로 동원할 수 있는 능력 여부에 승패가 달려 있음을 알 수 있다. 당연히 어느 쪽이 첨단 반도체 산업에서 앞서가는지가 결정적 요인이 될 수밖에 없다. 한국은 이런 측면에서 미래 군사력 강화에 엄청난 잠재력을 갖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은 이미 재블린·하이마스와 동일한 성능의 ‘현궁’ ‘천무’ 등의 생산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전투기 두뇌인 에이사(AESA) 레이더의 핵심 부품인 질화갈륨 반도체도 이미 자체 개발, 실전 배치 중이다. 모두가 K-반도체의 실력 덕분이다.
앞으로는 전쟁에서 무인 시스템 비중이 점차 커질 것이라는데 이 역시 인공지능(AI) 반도체가 주인공임을 의미한다. 이광형 카이스트(KAIST) 총장 겸 리셋 코리아 4차산업혁명 분과장은 최근 “소총·전차·자주포·함정·전투기 등도 디지털 기술에 의해 현저하게 성능을 향상할 수 있다”면서 “10년 후에는 AI 반도체를 잘 만드는 나라가 세계를 호령하게 될 것”(중앙일보 10월 24일)이라고 단언했다. 한국은 이미 이를 실천에 옮기고 있다.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주관으로 한국기계연구원, 나노종합기술원 등이 참여하는 국방과학기술연구회인 DMC융합연구단이 국방 무기체계용 반도체 부품과 플랫폼을 개발하기 위해 2020년 출범했다. 에이사 레이더 역시 이곳에서 나온 반도체로 가능했다.
11월 28일(월) 2022 ‘최악 정치인’ 후보들
이도운 논설위원
올해 한국 영화계는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이 지배한 듯하다. 25일 열린 청룡영화제에서 ‘헤어질 결심’은 작품·감독·여우주연·남우주연·각본·음악 등 주요 6개 부문을 휩쓸었다. 박 감독에게 칸 영화제 감독상을 안겨준 화제성에 끌려 필자도 몇 년 만에 영화관을 찾았다. 걸작 또는 명작은 관람 당시의 재미보다는 관람 후의 여운이 큰 작품이다.
중년 남녀의 러브 스토리를 묘사하는 데 굳이 연쇄 살인이라는 설정이 필요했나? 탕웨이가 연기한 송서래는 폭력적 남성들의 희생양인가, 아니면 천성이 악녀인가? 박 감독은 ‘연애의 목적’에서 보여줬던 지질한 남자의 연기가 기억에 남아 박해일을 처음으로 캐스팅한 것인가? 혹시 박 감독 스스로 누군가 새로 사랑하는 사람이 생겨 이 영화를 만든 것은 아닌가?
생각할 것이 많은 영화이기 때문에 n차 관람이 이어졌고, 각본집은 출간 즉시 베스트셀러가 됐으며, 전남 순천 송광사의 종고루 앞에는 맑은 날에도 우산 쓴 커플이 줄을 이었고, 2030·4050 영화 팬들은 각종 커뮤니티에서 영화 속 특정 장면의 의미를 놓고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25일 시상식에서 가수 정훈희 씨가 영화 마지막 장면의 배경 음악이었던 ‘안개’를 노래하자 탕웨이는 왈칵 눈물을 쏟았다. 여우주연상 소감에서 밝힌 것처럼 “몇 년, 혹은 몇십 년을 기다렸던 캐릭터를 만나고”, 혼신을 다해 그 캐릭터를 연기했던 배우가 보여줄 수 있는 감정의 표현이었다.
어쩔 수 없이 직업 정신이 발동했다. 그렇다면, 올해 최고의 정치인은 누구인가. 3·9 대선에서 당선된 윤석열 대통령이 주요 후보일 것이다. 그러나 윤 대통령 취임 당시 52%의 지지율은 30% 안팎으로 떨어졌기 때문에 선뜻 선택하기 쉽지 않다.
반대로 최악의 정치인은 후보가 많다. 주한 유럽연합(EU) 대사의 발언을 날조하고 청담동 술자리 괴담을 유포한 야당 대변인, 괴담 영상을 최고위원회의에서 틀고 대통령 부인의 캄보디아 공공외교를 ‘조명’ ‘외신’ 등 가짜뉴스를 섞어 비난했던 의원, 대통령 흔들기를 정치적 입지로 삼는 여당 정치인들이 경합할 만한 후보다. 최고의 정치인은 찾을 수 없고, 최악의 정치인만 수두룩한 세상. 그것이 2022년 대한민국 정치의 현주소였다.
11월 29일 ‘침목의 조각가’ 정현
김종호 논설고문
“쓸모를 다한 철길의 침목(枕木)을 작품의 오브제로 사용하는 건, 초등학교 때 철길로 다닌 경험의 영향이 컸다. 화물열차로 탱크나 장갑차 등을 실어나르는 걸 봤다. 그 무거운 걸 지탱한 게 침목이다. 밑면에는 자갈 등에 눌려 생긴 수많은 흠집이 있다. 오랜 세월의 무게를 견딘 인고(忍苦)의 흔적이다. 그런 침목은 내가 살아온 것보다 훨씬 더 험난한 세월을 견뎌, 아름답고 힘 있어 보인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험난한 현대사를 거쳤으니까, 그것이 오버랩 되기도 한다.” 미술계에서 ‘침목의 조각가’ ‘물질에 응축된 시간과 힘을 표현하며, 인간을 성찰해온 예술가’ 등으로 일컫는 정현(66)의 말이다.
홍익대 조소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파리국립고등미술학교로 유학 갔던 그는 현지에서 자신만의 조형언어에 걸맞을 도구를 찾아 나섰다고 한다. 쇳덩어리를 두드려 보기도 하고, 큰 각목을 도끼로 내리찍어 인체를 변형한 작품도 만들어 보며, 방법을 탐색하는 과정에 떠올린 것이 침목에 대한 어린 시절의 기억이었다. 침목뿐 아니라, 철의 부산물을 깨부수려고 허공에서 낙하하기를 수백∼수천 번 반복해 16t 무게가 절반까지 줄어드는 파쇄공, 아스팔트로 쓰이다 버려진 아스콘, 건물을 지탱하다 폐기된 철근 등으로도 작품 재료를 다양화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사랑하는 이유를 존중해줘야 한다. 쟁취하려고 하고, 내 마음대로 한다면, 그게 사랑일까. 대상 자체를 중요시하면서, 내가 사랑하는 이유를 존중하는 조형언어를 찾으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조각이 지닌 ‘자유와 사랑’도 발견하고 알게 됐다고 한다.
세계적인 조각가로 발돋움한 그는 “고집·광기로 통칭 되는 일반적 작가상(像)과 내 캐릭터는 분명히 다르다”고 한다. “오브제에 숨은 힘을 찾는 것은 내 인생의 힘을 찾는 것”이라며, 이렇게 덧붙인다. “‘재료의 시간’이나, ‘내 속의 시간’이나 모두 오래 걸리고, 더디고, 그러면서 서서히 작품화한다.” 그의 개인전 ‘시간의 초상’이 서울 성북구립미술관에서 지난 10월 5일 개막해, 오는 12월 4일 끝난다. ‘침목’ 연작 등 다양한 조각·설치 84점과 드로잉을 포함한 100여 점을 선보인 자리다. 그의 작품을 두고 ‘눈을 즐겁게 하기보다 가슴으로 겪게 한다’고 평가하는 이유도 알게 해준다.
11월 30일(수) ‘유검무죄, 무검유죄’ 유감
김세동 논설위원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정진상 당 대표실 정무조정실장이 대장동 비리 의혹과 관련해 검찰에 구속된 지난 19일 페이스북에 ‘저의 정치적 동지 한 명이 또 구속됐습니다. 유검무죄, 무검유죄입니다’는 글을 올렸다. 정진상은, 이 대표가 “벗이자 분신 같은 사람”이라고 부른 김용 전 민주연구원 부원장보다 ‘윗길’로 분류되는 최측근이다. 이 때문에 다급해진 이 대표가 ‘검찰 수사=이재명 죽이기’라는 악의적인 정치 프레임 씌우기를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자신이 성남시장 때 민간업자들이 1조 원 가까운 이익을 얻은 대장동 사업을 허가해 줬으면서도 ‘대장동은 국민의힘 게이트’ ‘몸통은 윤석열’이라고 아무런 맥락도 닿지 않는 주장을 마구 내질렀던 것처럼 말이 되든 안 되든 지지자들만을 향한 메시지 던지기로, 그만큼 곤궁한 처지를 반영한 것일 터다.
유검무죄(有檢無罪) 발언은, 서울올림픽 폐막 6일 후에 발생했던 지강헌 탈주 사건으로 유명해진 ‘유전무죄, 무전유죄(有錢無罪 無錢有罪)’에서 착상한 것으로 보인다. 7차례에 걸쳐 556만 원을 훔친 잡범임에도 전과가 많다는 이유로 징역 7년에 보호감호 10년 처분을 받은 지강헌이 교도소 이송차량에서 1988년 10월 8일 탈주해 가정집에서 인질극을 벌이다 한 발언으로, 당시 동정하는 여론이 상당했고 ‘홀리데이’라는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문제는 0.73%포인트 간발의 차이로 대통령이 안 됐고, 여전히 다음 대통령 가능성이 큰 거대 야당 대표라는 사람이 사법 시스템을 부정하고 폄훼하는 흉기 같은 말을 아무런 근거도 없이 흉내 냈다는 점이다.
유검무죄는, 문재인 정권 때 검찰 수사를 틀어막아 기소를 피할 수 있었다는 자백으로도 해석돼 자책골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유검무죄’ 운운에 이어 올린 ‘조작의 칼날을 아무리 휘둘러도 진실은 침몰하지 않음을 믿습니다’는 글도 문제다. 정진상의 구속영장을 발부한 건 판사이고, 법원이 최근 구속적부심도 기각할 정도로 범죄 사실을 상당히 인정한 상황인데도 한사코 “검찰 조작 수사”라고 고장 난 레코드판처럼 되풀이한다. 세월호를 연상시키는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는 표현도 악의적이다. 외려 문 정권 검찰이 수장시킨 대장동 사건의 진실이 인양되고 있다는 게 사실에 부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