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용한의 전쟁사] 〈221〉 우크라이나의 동족상잔 - 〈240〉정도전 진법과 축구의 진화
[임용한의 전쟁사] 역사학자 동아일보 2022
2022.07.19
〈221〉 우크라이나의 동족상잔

1941년 6월 22일, 히틀러는 독소 불가침 조약을 파기하고 소련을 기습 공격했다. 이것이 바르바로사 작전이다. 초기에 독일군의 기세는 무서웠다. 북부, 중부, 남부 3개 집단군으로 구성된 독일군은 각각 레닌그라드, 모스크바, 우크라이나를 향해 진격했다. 7월 16일 중부집단군의 선봉이던 전격전의 아버지 구데리안 휘하의 29보병사단이 스몰렌스크를 점령했다.
스몰렌스크는 폴란드에서 벨라루스를 지나 모스크바로 향하는 직선상에 있다. 7월 중순 동안 구데리안은 소련군의 역습을 격퇴하며 스몰렌스크를 확고하게 장악했다.
그는 바로 모스크바로 진격하고 싶었지만 히틀러가 남쪽으로 방향을 전환해 우크라이나로 향하라고 지시했다. 히틀러도 이유는 있었다. 우크라이나는 전략적으로 제일 중요한 지역이었다. 곡물은 말할 것도 없고, 지금 러시아가 장악한 도네츠 지역은 당시 소련 전체의 석탄 60%, 코크스 75%, 철 30%, 강철 20%를 생산했다. 그런데 우크라이나로 향한 남부집단군의 전과가 제일 부실했다.
구데리안은 남쪽으로 수직 낙하해서 키이우와 드니프로강으로 향했다. 독일군은 키이우에서 소련군을 완벽하게 포위해 100만 명을 섬멸했다. 이때부터 우크라이나의 악몽이 시작된다. 수백 년간 우크라이나를 탐냈던 독일은 이 풍요한 땅은 게르만인들의 보금자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굳이 우크라이나인을 보호하거나 회유하려 들지 않았다. 사건이 터지면 필요 이상으로 가혹하게 굴었다. 게다가 나치의 박멸 대상은 공산주의자와 유대인이었는데, 이곳은 공산권 국가인 동시에 유대인들이 제일 많이 거주하는 지역이었다.
종전까지 우크라이나에서 독일과 소련이 일진일퇴 공방전을 펼친다. 소련군도 유대인에게 가혹했고, 우크라이나인은 동족이 아니었다. 소련군이 진군하면 민족주의자를 살해했고, 물러가면 공산주의자가 보복을 당했다. 국가, 이념, 민족, 우리가 6·25전쟁에서 겪었던 것과 같은 비극이 1940년대 우크라이나에서 펼쳐졌다. 그리고 약 80년 후에 비극이 재연되고 있다. 로마사에 새겨진 격언이 있다. “가련한 자여, 그대의 이름은 약자이니라.”
〈222〉 전쟁에도 룰이 있다

1970년대 이야기다. 공학을 전공한 교수가 미국 유학에서 돌아왔다. 소지품을 검사하던 세관원이 짐 속에 가득한 책을 보면서 물었다. “선생님께선 왜 이렇게 혁명을 좋아하십니까?” 이념, 정치적 신념에 예민하던 시대였다. 여러 권의 책 표제에 적혀 있는 혁명(Revolution)이란 단어가 눈에 걸렸던 모양이다. 그 책들은 ‘교통혁명’, ‘생활혁명’ 뭐 그런 등등의 책이었는데 말이다. 영어권 국가에서 사용하는 혁명이란 단어의 다양한 용도를 이해하지 못한 소치였다.
전쟁도 일상에서 오용되고 남용되는 단어 중 하나이다. 경쟁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은 과도한 경쟁, 치열한 경쟁 상태를 묘사할 때 전쟁이란 단어를 붙인다. 입시전쟁, 아파트 청약전쟁, 각종 예약전쟁, 요즘은 ‘매일매일이 전쟁이다’라는 말도 자주 듣는다.
‘전쟁’이란 단어에는 치열함, 살벌함, 극한 경쟁상태라는 의미 외에 또 하나의 중요한 의미가 있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무자비함이다. 경쟁하고 싸움을 벌여도 룰이 적용되는 자리가 있고, 룰을 포기하는 상태가 있다. 후자가 전쟁상태이다. 거짓말, 속임수가 찬양받고, 배신, 매수, 약속 파기가 당연하고, 오폭과 오발탄에 민간인들이 희생당하고, 현지 조달, 공포감 조성, 항전 의지 포기라는 전략적 이유로 도시를 파괴하고, 민간인과 어린아이를 학살해도 눈을 질끈 감게 만드는 것이 ‘전쟁’이란 단어의 마법적인 의미이다.
제네바 협약, 전범, SNS를 통한 세계인의 눈과 규탄, 전쟁에도 국제적인 룰을 부여하고, 그것을 지켜보려는 노력은 의외로 얼마 되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만 해도 18, 19세기에 비하면 인도주의가 차원이 다르게 성장한 듯하지만, 전쟁 한쪽에서는 폭격, 원폭, 가스실에서 유례없는 대량살상이 벌어졌다.
SNS가 맹위를 발하는 21세기에는 전쟁의 룰이 작동을 할까? 다들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러나 이건 허상이다. 전쟁 전에 정의롭던 사람도 전쟁이 벌어지면 돌변한다. 정의? 그것은 내 안에 있는 야수와의 싸움이다.
〈223〉 착한 리더는 나쁜 리더인가

남북전쟁 전사를 읽어 보면 전투의 승패를 결정하는 원인으로 유독 지휘관의 리더십, 전술 역량의 비중이 높게 느껴진다. 스톤월 잭슨(남부 연합군 장군)의 경우를 제외하면 인상 깊은 전술적 움직임이 없는데도 그렇다. 남·북군이 같은 환경, 문화에서 자라고, 같은 사관학교 출신 밑에서 같은 장비로 싸워서 비교할 것이 지휘관의 개인적 역량뿐이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남북전쟁에서 리더십의 중요성과 내용에 대해 아주 독특한 견해를 보여준 사람이 북아프리카 전쟁에서 독일군 에르빈 로멜 장군을 격파한 공으로 전쟁 영웅이 되었던 영국군 버나드 몽고메리 원수이다. 몽고메리의 견해는 이렇다. 남군 총사령관 로버트 리 장군은 신사이자 인격자였다. 그는 부하들에게 큰소리를 친 적도 없고, 삿대질을 하며 권위적인 명령을 내리지도 않았다. 부하들의 실수는 웬만하면 눈감아 주었다. 이런 평가만 보아도 덕장 중의 덕장이다.
이런 리더십의 배경엔 남군 지휘부의 끈끈한 인맥이 있다. 리 장군이 속한 버지니아 군벌은 미군 최대의 지역파벌이었다. 전쟁 영웅을 무수히 배출해 냈으니 정실인사로 무능한 지휘관들을 등용해서 전쟁을 망쳤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만연한 인정주의, 격려와 의리가 때로 사소한 명령 불복종이나 과도한 자율을 낳는데, 게티즈버그 전투와 같은 결정적인 순간에 이런 것들이 치명적이고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이 되었다.
반면 북군의 경우 링컨은 군에 대한 정보나 인맥이 하나도 없었다. 북군 지휘부의 인맥은 남군과는 질이 달라서 무능한 관료형 장군들이 수뇌부를 차지했다. 덕분에 전쟁 중반까지 북군 사령부는 전쟁사에 길이 회자되는 멍청한 일화들을 생산한다.
링컨의 대응은 그럴 때마다 가차 없이 교체하는 것이었다. 과격한 시행착오 끝에 전쟁의 운명을 바꿀 지휘관을 발굴하게 되고 그것이 승리의 요인이 된다. 전쟁이 위험한 만큼 인재 등용에도 모험과 용기가 필요하다. 몽고메리는 이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224〉 중국의 잘못된 존재증명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을 때부터 중국이 대만을 침공할지 모른다는 걱정들이 생겼다. 그 와중에 낸시 펠로시 미국 하원의장이 대만을 방문하면서 중국이 격렬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중국이 과연 전쟁을 벌일까. 빗나간 미사일이 대만에 추락하거나 우연히 조우한 양국 전투기가 교전을 벌이거나 하지 않는 이상 침공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생각된다. 물론 돌발 상황까지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대만은 어려운 상대다. 대만 군대가 형편없어졌다는 말이 많지만, 만만한 상대는 아니다. 무기 수준도 높다. 무엇보다 대만은 침공하기에 아주 곤란한 땅이다. 동부 산악지대는 험준하기로 손꼽힌다. 최고봉은 거의 해발 4000m다. 이런 험한 지형 탓에 정복하기도 쉽지 않았다. 사람들은 대만이라고 하면 당연히 중국의 일부였다고 여기지만, 청나라에 쫓긴 명나라 유민이 들어가 정씨 왕조를 세우기 전까지 대만은 원주민의 땅이었다. 청나라가 침공해 정씨 왕조를 몰아냈지만 이때도 대만을 완전히 지배하지는 못했다.
중국군은 규모는 크고, 온 세상의 ‘짝퉁’ 무기로 무장했지만, 실력은 미지수다. 군기는 엉망이고, 군인의 사명감은 부족하고, 무엇보다 실전 경험이 없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군은 경험 없는 군대가 대규모 전쟁을 벌일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잘 보여주었다. 독소전쟁과 6·25전쟁에서 러-중은 경험 없는 군대도 놀라운 전투 실력을 보여줄 수 있음을 증명했지만 그때는 인력을 무한정 투입하던 시기였다. 이제 그런 전쟁은 승리하든 패배하든 권력의 종말을 의미한다. 지금 중국이 미국을 향해 협박성 발언을 하고, 대만해협 봉쇄 훈련을 하는 것은 사실 세계를 향한 시위다. 초강대국 미국이 물러나며 생긴 공백에 자신을 밀어 넣겠다는 신호다.
문제는 이런 존재증명 방식이 잘못됐다는 것이다. 서양 제국주의만 욕하고 그것만 없으면 세상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것처럼 떠들면서 19세기 제국주의 사고에 머물러 있다는 건 모른다. 앞으로 50년은 자본주의 제국주의자가 아니라 사회주의자들의 시대착오적인 제국주의에 고통받을 것이다.
〈225〉 객관적이라는 형식주의

임진왜란 초기 절망적이던 전황을 바꾼 건 조선 수군의 승전이었다. 이순신은 1, 2차 출정에서 연이어 승리하고, 선조에게 건의사항을 올렸다. 포상 방식에 관한 것이었다.
조선의 법에 군공을 세운 사람을 포상하는 기준은 적의 머리였다. 적을 죽인 증거를 가져오면 그를 기반으로 포상했다. 이것은 고대 중국에서부터 사용되던 법이다. 보병들이 스크럼을 짜고 싸우던 전쟁에서 이런 포상법은 의미가 있었을 거다. 그러나 전쟁은 훨씬 진화했다. 특히 해전은 적군 개개인을 살해하는 것이 아닌, 적함을 격파하고 배에서 적군을 몰아내는 전술적 움직임이 중요했다. 이순신은 이것을 지적한다. 정말 용감하고 훌륭한 장수는 적선, 그것도 중요한 적의 기함을 공격해 파괴하는 장수다. 그런데 난파한 배의 적군은 바다에 떨어진다. 전투 중에 그들을 쳐다볼 틈도 없다. 그런데 이런 장병은 증거가 없다고 포상할 수가 없다. 반대로 싸움터 뒤에 처져서 물 위에 떠다니는 시신이나 줍는 병사들은 포상을 받는다.
이순신은 머릿수로 포상하는 법 대신에 전투에서의 활약을 지휘관이 살펴서 추천하는 사람을 포상하자고 건의한다. 선조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증거가 없다, 객관적이지 않다는 것이었다. 진짜 속셈은 이순신이 포상권을 이용해서 군을 사병화할 수 있다는 의심 때문이었다. 이런 의심도 치졸하지만, 객관적이지 않다는 주장에 대해 살펴보자. 현대인들도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선조의 주장에 동조한다. “평가는 객관적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주관적 평가는 증거가 없잖아요.” 이순신의 요지는 적의 머리는 제대로 된 전공의 증거가 되지 못한다는 거다. 그래도 사람들은 주저한다. “물증이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인문학 교육이 필요한 건 사물의 본질을 보는 능력을 키우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우리 교육은 본질 대신 단어와 고정된 가치에 매몰되게 하는 데 더 실력을 발휘한다. 지금 우리 사회가 어처구니없는 갈등과 편 가르기로 분열되는 것도 잘못된 교육 탓이 아닐까?
〈226〉 선조의 뒤끝

임금 사후에 생전의 공덕을 기리어 붙인 이름인 묘호(廟號)에는 조와 종이 있다. 조는 공을 세운 임금에게 증정하는데, 공은 왕조를 개창한다거나 국난을 극복한 공을 말한다. 선조라는 묘호는 임진왜란을 극복하는 큰 공을 세웠다는 의미에서 ‘조’자를 붙인 것이다.
그러나 선조에 대한 현대인의 평가는 박하다 못해 거의 최악 수준이다. 임진왜란이 나기 전에 선조의 치적에 대한 평가는 좋았다. 당대의 민심이 그랬다. 임진왜란 중에도 선조의 판단력은 훌륭한 편이었다. 이렇게 말하면 서울을 버리고 도망간 건 뭐냐고 분노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고려 현종, 명종, 공민왕, 조선의 인조 등 수도에서 피란한 왕이 한둘이 아니다. 몇 가지 실수를 인정한다고 해도 제대로 된 행적도 많았다. 이순신을 파격적으로 등용한 사람도 선조다.
하지만 이순신 해임부터 일이 꼬인다. 이순신 해임으로 칠천량에서 조선 수군이 거의 전멸하고, 호남이 쑥대밭이 되었다. 임진왜란 전사에서 최대의 비극이 다 이때 벌어진다. 그 와중에 이순신이 명량해전으로 최악의 상황을 막았다. 이제 선조는 어떻게 해야 했을까? 실수를 되돌릴 수 없다. 그렇다면 자신의 실수를 솔직히 인정하고 이순신에게 몇 배의 보답을 하는 것이 자신의 명예를 만회할 수 있는 길이었다.
선조는 반대로 한다. 명나라 장군들이 놀라서 이순신을 칭찬했다. 명군 총사령관 양호는 선조에게 와서 이순신에게 어떤 포상을 했느냐? 포상이 부족하면 자신이 직접 포상하고 싶다고까지 말했다. 이순신이 전사하자 명나라 병부상서 형개는 너무 애통해서 제사를 지내주었다고 말하고 선조에게 특별 제사를 지내라고 권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선조는 여전히 떨떠름했다. 이순신의 공을 인정하면 자신의 실수를 더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한 듯하다. 이것이 선조의 명성에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주었다.
우리 정치인들은 잘못을 인정하는 데 정말 박하다. 선조처럼 한 번 잘못을 인정하면 더 밀린다고 생각한다. 정치와 줄다리기를 구분하지 못한다.
〈227〉 누가 더 야만적일까

미국 지성사학자 크레인 브린턴은 현대인들은 눈 하나 깜짝 하지 않고 원자폭탄을 투하하면서 고대인들을 야만인으로 간주한다고 지적했다. 이 말을 할 때는 냉전기였고, 현대인들도 핵폭탄 사용은 반대한다고 반박한다면 2차 대전, 베트남전 때 시행된 그리고 지금도 우크라이나에서 자행되고 있는 무차별 포격을 예로 들 수 있다.
브린턴의 지적이 현대인의 착각에 대한 일침이었다면 고대인에 대한 편견에도 일침을 놓아야 한다. 원시 부족들의 삶은 순박하고 평화로웠다는 착각은 누구에 의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모르겠다. 대항해시대 이후로 유럽 국가들은 세계의 낙후 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게 문명의 혜택을 선사하고, 야만 상태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문명국가들의 책임이라고 말했다.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과거에 이런 문명국의 책임론이 제국주의 지배의 도구로 악용되기도 했다. 우리 역사에서도 그런 불쾌한 기억들이 있다. 이런 악용 사례, 또 영화 ‘미션’에도 등장했던 저들에게 영혼이 있느냐는 식의 인종학적 편견에 대한 반발로서 “문명의 때와 자본주의에 절지 않은 원시세계의 순박함”이 등장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러나 자본의 만행을 비판했던 카를 마르크스도 원시문명 예찬은 반대했다. 원시사회는 순수하고 낭만적인 사회가 아니라 힘과 폭력이 지배하는 야만사회였을 뿐이라고 말이다.
정복자의 군대가 평화롭게 살아가던 세계를 파괴하는 장면도 문명인들의 상상이다. 문명의 무기로 무장한 정복자들이 들이닥치기 전에 원시의 땅에서도 그들 간에 잔혹한 폭력과 파괴가 자행되고 있었다. 단지 폭력의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을 뿐이다.
누가 더 야만적일까? 그런 질문 자체가 불필요한 것 아닐까? 인간은 언제나 두 얼굴의 존재이다. 자신의 이해관계가 무관할 때는 상식적인 천사가 되고 이해관계가 걸리면 무슨 명분이든 끌어다 쓴다. 문명은 기아와 질병의 땅에 식량과 의약품을 보낼 수 있는 능력과 무자비한 드론과 미사일을 퍼부을 수 있는 능력을 똑같이 선사했다.
〈228〉게임체인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미국의 고속기동포병로켓시스템이 게임체인저 역할을 하고 있다. 미국이 제공한 장거리 곡사포, 레이더파 추적 미사일, 피닉스 고스트 같은 최신형 드론 등도 기대만큼 혹은 그 이상의 활약을 보여주고 있다. 반면 러시아 무기들은 스펙상의 성능을 보여주지 못해 조롱의 대상이 되고 있다.
덩달아 러시아 무기의 평판도 형편없이 추락하고 있다. 그런데 실은 이런 사태가 처음이 아니다. 1948년에 시작된 중동전쟁 때 미국과 소련은 경쟁적으로 자국 무기를 실어 보냈다. 이때도 소련이 제공한 무기 중에는 4차 중동전에서 이스라엘 전차부대를 몰살시켰던 새거 대전차 미사일이나 무적 이스라엘 공군을 초토화시킨 SA-6 같은 게임체인저급 신무기가 활약하기도 했지만, 전반적으로 소련제 무기의 평판은 전쟁 전보다 낮아졌다. 이집트 대통령 나세르는 흐루쇼프에게 소련 무기의 지원을 강력히 요청했다. 흐루쇼프는 망설였다. 실전에서 소련제 무기의 허상이 드러나면 국제 무기시장에서 주문도 줄고 가격은 떨어질 것이라는 이유였다.
러시아 무기의 굴욕, 미제 무기의 선전은 어디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을까? 사거리, 발사 속도, 파괴력 같은 제원상의 수치로는 검증하기 힘든 성능이 실전용 성능이다. 병사도 똑같은 훈련을 받고 똑같은 장비를 착용해도 실전에서 전투 경험이 있는 병사와 없는 병사의 역량은 5배, 10배 이상 차이가 난다. 무기도 마찬가지다.
또 하나가 품질의 균형이다. 초고강도의 포신을 가진 야포가 타이어가 불량이거나 바퀴축의 나사가 쉽게 부러져서 무용지물이 될 수도 있다. 군수산업은 비리의 온상이 되기 쉽다. 전쟁에 나가 보지 않고 사격장과 창고에서 수명을 마치는 무기 또한 엄청나다. 사소하지만 치명적인 불량이 쉬쉬하며 넘어갈 수 있는 구조다.
전쟁을 많이 치른 나라가 전쟁을 잘한다. 평화를 사수하는 나라가 전쟁이 벌어지면 평화를 사수하기 어렵게 된다. 이것이 전쟁과 평화의 역설이다.
〈229〉 추석과 임진왜란

추석은 한민족의 오래된 명절이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왕실에서도 추석에는 차례에 해당하는 제사를 지내곤 했다. 다만 왕실에는 아무래도 국가 제사, 다른 중요한 제사가 많아서인지 상대적으로 조촐한 느낌이다. 추석에 추석 느낌 나는 기사가 없는 해가 대부분이다. 그때는 전 국민의 대이동도 없었고, 공휴일도 아니었다.
“문소전에 가서 망제를 지냈다.” 이 정도가 전부이고, 바로 평소처럼 공무를 집행한다. 선왕에 대한 제사가 국가 공식 행사 느낌이라면 차례는 왕실 가족의 사적인 행사 같은 분위기를 준다.
그래도 명절은 명절인데, 임진왜란 7년 동안 추석의 모습은 어땠을까? 임진왜란 발발 첫해인 1592년 추석에 선조는 의주에 있었다. 전공자 포상, 범죄자 처형, 군사의 의복 문제, 중국군 군량 문제…. 추석은 언급도 없다. 다음 해 추석은 더 정신이 없다. 수복한 한양으로 돌아오는 도중이었기 때문이다. 추석날에는 황해도 봉산에서 묵었다. 그래도 명절 같은 일이 있기는 했다. 왜군에게서 풀려난 왕자들과 해후해서 가족 상봉을 했다.
그 뒤로도 임진왜란 기간 동안 내내 추석의 일과는 똑같다. 가벼운 차례 같은 행사는 있었지만, 실록에서 기록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전쟁이 끝난 후의 기록에도 추석 행사가 기록된 경우는 희귀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선조 말년이 되면 추석에 왕세자가 문안했다고 하고, 그날은 아무 일과가 없다. 그런 걸 보면 임진왜란기의 추석이 좀 다르기는 했던 모양이다.
백성들의 추석은 어땠을까? 난중일기에도 추석의 감상은 없다. 이순신 장군도 공무, 전염병 걱정, 가족 걱정으로 바쁘다. 전란 중에는 양반들도 굶어 죽고, 비참한 생활을 한 사람도 많았다. 그들에게 추석은 언감생심이었다.
팬데믹 이후 3년 만에 귀성객이 넘친다고 한다. 3년 만에 상봉한 가족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팬데믹이 아니라 3년간의 전쟁이었다면 올해 추석은 어땠을까? 우리가 평화로운 명절과 해후를 즐길 수 있는 것은 나라를 지켜온 사람들, 지금도 지키고 있는 사람들 덕분이다.
〈230〉 우크라이나 전쟁 이제 끝날까?

러시아군이 하르키우주에서 패퇴했다. 성동격서 전술에 당했다고 하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우크라이나군은 일취월장한 반면, 러시아군은 병력 부족과 피로, 전술 효율성의 부족으로 북부에서 남부 헤르손 지역에 이르는 긴 전선을 감당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러시아군의 병력 부족의 배경에는 더 큰 이유가 있다. 같은 병력이라도 더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전술이고, 군의 전체적인 전력이다. 처음부터 지적된 이야기지만 러시아군은 제병협동 능력이 떨어진다. 한참 기세 좋게 화력전을 할 때도 포신만 달아올랐지 보병과 전차의 전진은 지지부진했다.
하르키우에서 물러날 때 2차 세계대전 때의 독일군은 비슷한 상황에서 지연전과 기동방어를 펼쳤다. 러시아군은 그런 기민한 능력이 없고, 2선 방어 지점조차 제대로 설정해 놓지 않은 듯하다. 우크라이나군이 병력과 장비도 늘고, 하이마스로 무장하고 장거리 타격 능력을 갖추면서 러시아군의 후방지원 능력과 이동, 반격지점 설정 능력은 더 큰 지장을 받게 된 것 같다.
그럼 이제 이 전쟁이 끝날까? 아니다. 러시아는 최소 한 번 이상 반격을 시도할 것이다. 시나리오는 셋이다. 셋 중 하나가 아니라 전부 또는 2개가 차례로 혹은 동시 진행될 수도 있다. 벨라루스의 직간접 지원을 얻어 북부에서 침공한다. 러시아 영토 안에서 군을 보강해 돈바스 전선에서 하르키우 방면으로 대공세를 편다. 당분간 루한스크 전선 방어에 주력하면서 대대적인 전력 보강을 준비한다.
1안은 가능성도 낮고, 시도한다면 주공이 아닌 양동작전일 수 있다. 2안은 가능성이 높고, 러시아군의 능력을 다시 가늠하게 되겠지만, 군의 능력이 단기간에 향상될 가능성은 낮아서 큰 효과를 보지 못할 것이다. 3안은 당장 얻는 것도 없지만, 양국과 전 세계를 더 고통스럽게 할 것이다. 지금 이 상황에서 전쟁을 끝내려면 우크라이나군의 한 번 더 결정적인 승리가 필요하다. 우크라이나군은 아직 그 정도로 강하지는 않지만 전술적인 승리는 가능하다. 그런 전술을 보게 될까?
〈231〉푸틴의 마지막 치킨 게임

푸틴이 마지막 대반격을 시도할 것이라는 예상은 했지만, 핵 위협과 30만 동원령이라는 상당히 센 카드를 내놓았다. 러시아는 현 점령지에서 러시아 편입 투표를 강행하고 있다. 러시아는 본토가 침략당하면 핵 사용도 불사하겠다고 선언해 왔다. 투표를 거쳐 이곳이 러시아 영토라고 선언하는 순간, 핵 사용의 명분을 얻게 된다.
전쟁 시작부터 러시아는 전쟁 수행에 필요한 병력을 오판했다. 그럼에도 동원령은 자제해왔다. 동원령은 푸틴의 지지율을 급락시킬 수 있다. 통계상으로 잡히지 않아도, 전쟁에서 소기의 성과를 거두더라도 희생자가 증가할수록 러시아 국민의 불만과 독재자에 대한 불안감은 커져 갈 것이다.
30만 동원령을 내려도 러시아가 실제 전장에 투입할 병력은 얼마나 될까? 병력 수를 늘릴수록 이미 한계에 달한 장비와 화력, 군수 지원은 열악해지고, 스탈린식 전쟁을 닮아가게 된다. 그러므로 동원령은 푸틴에겐 나락으로 떨어지는 입구이며, 푸틴이 동원령까지 내리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동원령이 떨어졌다. 어쩌면 푸틴이 원하는 것은 ‘나는 어떤 비합리적 행동도 할 수 있다’는 메시지인지도 모른다. 전쟁이란 그 자체가 비합리적 선택이며, 모든 해결책 중에서 최악의 수단이다. 역설적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전쟁을 수행하는 방법, 과정, 전략·전술은 최대한 합리적이고, 정교한 판단과 방법으로 수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피와 생명을 집어삼키는 전쟁은 결국은 분노와 불안에 잠식당하게 되고, 전쟁의 수행 방식조차 이성의 끈을 놓게 된다. ‘나는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 이것이 독재자의 최후의 전술이다. 혹시 계산된 협박이라면 아직 준비가 덜 된 우크라이나군의 성급한 공격을 유도하려는 희망일 수도 있다. 우크라이나군을 한 번 크게 소모시키고, 더 이상 시간을 끌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는 협박으로 전쟁 포기를 얻어내려는 전략일 수도 있다. 근데 이것이 성공할 수 있을까?
〈232〉 국군의 날

10월 1일은 국군의 날이다. 이날을 국군의 날로 정한 이유는 6·25전쟁 중 육군 제3사단이 38선을 넘어 북진을 시작한 날이기 때문이다. 전쟁 후 남북한의 대립과 1950년대의 사회 분위기가 반영된 결정이었다. 그러다 보니 국군의 날을 새로 지정하자는 주장도 있다. 지금은 몰라도 언제고 통일이 되면 날짜가 바뀔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어떤 날이 좋을까? 논의가 시작되면 많은 의견이 쏟아지겠지만 모두를 만족시키는 날을 정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국군의 날 제정 이전처럼 육해공군이 창립 기념일을 각자 기념하고, 현충일과 10월 8일 재향군인의 날을 기존의 국군의 날 행사를 포함한 더 의미 있는 기념일로 만드는 것은 어떨까?
우리 사회에 지금 필요한 것은 군의 존재 이유와 군인에 대한 존중심을 회복하는 것이다. 과거의 존중심이 억지로 요구한 것이었다고 해서, 과거 군 생활이 힘들고 부당한 경험이 많았다고 해서 그것이 국방과 군의 본연적 가치를 폄하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카이사르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리비우스는 로마사를 남겼다. 로마가 강대해지자 젊은이들이 군을 싫어하고 편안함을 찾는 분위기가 확산되는 것을 보고 그것을 경계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충격이었다. 로마가 부강해진 건 얼마 되지 않았다. 로마가 지중해의 강자, 부자로 거듭나기 시작한 계기는 포에니 전쟁이었는데, 최종 승리를 거둔 지 150년 정도 지났을 때 해이해지는 기류가 조성된 것이다. 우리는 반세기 만에 사회의 분위기가 싹 바뀌었다.
기성세대는 자신들이 고난과 고민, 고통 속에서 얻은 교훈이 유전처럼 다음 세대에 전달될 것이라고 착각한다. 신세대의 착각은 자신들의 불만, 욕구는 기성세대와는 차별화된 참신하고 건전한 욕구라는 확신이다. 아니다. 그 절반은 감정적인 반발이고, 자칫하면 한순간에 위기를 초래한다. 리비우스의 노력이 성공했는지, 로마는 그 뒤로 몇백 년을 더 버텼다. 서로마가 망한 뒤에는 동로마가 1000년을 이었다. 우리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233〉러시아, 제3의 전략

우크라이나군의 기세는 대단하고 러시아군은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고 있다. 올겨울쯤이면 우크라이나가 빼앗긴 영토를 거의 탈환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러시아군의 몰락은 군의 구조적인 한계, 러시아의 아직도 전근대적이고 권위적인 문화가 근원적인 원인이다. 제2차 세계대전 때라면 물량, 인력 등 여러 가지 수단으로 이런 약점을 커버할 수 있었다. 그러나 디지털 시대로 전환한 지금 미군과 비교할 때, 경직된 문화와 조직이 얼마나 큰 약점이 되는지 이번 전쟁으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이 못지않게 중요한 요인은 푸틴의 무리한 요구와 지나친 간섭이다. 아직 크렘린 내부의 이야기가 새어 나오지 않아 확증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전쟁 중반부터 그런 징후가 스멀스멀 보였다. 우왕좌왕하는 전략, 전투 병력의 교대 같은 기본적인 원칙도 지키지 않는 군대 운용. 러시아 군인들이 이 정도로 어리석을 수는 없다. 이런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요인은 정치권, 아니 푸틴의 과도한 간섭뿐이다. 독소전쟁 때 스탈린과 히틀러가 교대로 저질렀던 실수를 푸틴이 반복하고 있다.
30만 명을 동원했다지만 이들이 총알받이가 아닌 반격의 힘이 되기 위해서는 1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다. 1년 후라고 해도 보장은 어렵다. 그럼 우크라이나의 승리는 시간문제일까? 러시아가 핵을 사용하지 않는 이상 전황을 되돌리기는 어려워 보인다. 핵을 사용해도 효과는 미지수다. 핵이 최고의 위력을 발휘하는 때는 테이블과 마이크 앞에 놓였을 때다. 만에 하나 파멸적이고 저주스러운 결과를 초래한다고 해도 파멸이 승리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러시아에 사실 한 가지 전략이 남아있다. 지독한 장기전. 국경에 병력을 배치하고 우크라이나의 도시를 폭격하면서 초장기전, 지구전으로 간다. 강국이 약국을 상대하는 가장 징그러운 전략이다. 30만 동원령과 핵 협박은 이 전략을 위한 밑밥일 수 있다. 아무래도 이 전쟁의 유일한 해결책은 푸틴 정권의 몰락뿐인 것 같다.
〈234〉 선제공격

20세기에는 너무 많은 전쟁이 있었다. 충격적이고 혁신적인 전술과 어이없는 전투도 많았다. 그중에서도 쇼킹했던 전쟁이 1967년에 벌어진 6일 전쟁일 것이다. 이집트와 시리아가 주력이 되고 요르단, 레바논, 이라크까지 힘을 합쳐 이스라엘을 공격했던 이 전쟁은 6일 만에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났다. 아랍이 믿던 최강 세력인 이집트는 개전 3일 만에 굴복했다.
이집트의 허망한 패배는 개전과 함께 이집트의 모든 공군기지를 공습해 공군 전력을 초토화시킨 이스라엘 공군의 선제타격이 결정적이었다. 시나이 반도는 하늘에서 공격하면 피할 곳도 숨을 곳도 없는 곳이다. 제공권을 완전히 장악한 이스라엘 전투기들은 시나이 사막에 무력하게 노출된 이집트군의 전차, 차량, 병사들을 무자비하게 공격했다. 이스라엘 공군의 승리는 상상을 초월하는 이스라엘 공군과 조종사들의 노력과 전술의 결실이었지만, 세상의 모든 극적인 승리가 그렇듯이 이집트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국제 여론을 의식한 이집트는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선제공격했다는 명분을 얻고 싶어 했다. 이집트는 선제공격을 허용하더라도 공군의 피해는 20% 내외일 것이란 엉터리 계산을 했고, 전쟁을 각오한 상황에서도 이집트 공군의 선제공격을 불허했다. 어이없게도 1973년 욤키푸르 전쟁 때는 이스라엘이 똑같은 이유로 이집트의 선제공격을 허용했다가 나라를 잃을 뻔했다.
국제 여론을 무시할 수 없는 현대 전쟁에서 선제공격은 곧잘 전쟁 책임론의 근거가 된다. 상대가 공격할 의지가 없을 때 혹은 평화적 해결을 위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을 때 선제공격을 했다면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전쟁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누가 먼저 발포했는가는 우문이 될 수도 있다.
침략 전쟁이라고 공격만 하고 국토 방어 전쟁이라고 수비만 하는 것도 아니다. 군대는 공격과 방어에 모두 숙달해야 하며, 그래야 방어 전쟁도 수행할 수 있다. 전쟁은 막아야 하지만, 전쟁을 방지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상대가 이길 수 있는 가능성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다.
〈235〉손무가 푸틴에게 주는 충고

푸틴이 장기전으로 가려고 맘을 단단히 먹은 모양이다. 이 전쟁은 처음부터 3가지가 없었다. 승산, 효과적인 전략, 출구가 없었다. 그러니 푸틴으로서는 시간을 끌며 기적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전쟁이 장기전 체제로 돌입했다고 해서 장기간 지속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 전쟁의 운명은 세 개의 기둥에 달렸다. 러시아의 군수 산업, 군대, 그리고 민심이다. 이 셋 중 하나가 부러지거나 연쇄반응이 나면 경제가 막히고, 푸틴의 권력도 위험해진다.
30만 명을 징집한다지만 러시아의 군수체제가 이 군대를 먹이고 입히고 무기와 탄약을 안정적으로 보급할 수 있을까? 훈련도 안 되고, 장교의 지도력은 형편없고, 싸울 의지도 약한 보충병들은 당장은 방어선에 밀어 넣을 수 있지만, 대규모 패전이나 포로가 발생할 가능성도 높아진다. 전쟁이 초반에는 러시아 국민의 애국심을 고취시켰지만 전쟁과 경제, 가족의 상태가 나날이 하강하면 결국 반발이 커질 수밖에 없다.
장기전으로 가는 것은 해결책이 아니라 자신의 발밑에 계속 화약을 쌓는 격이다. 손자병법 2권 작전 편에서 장기전의 위험을 이렇게 말한다.
“전쟁이 오래 지속되면 군대는 둔해지고 사기가 꺾인다. 성을 공격하면 아군의 전투력이 소진된다. 오랫동안 군대를 운용하면 국가의 재정이 부족해진다. 군대가 약해지고, 사기가 꺾이고 군대가 소진되면 재정이 파탄 난다. 내부 혹은 인접국에서 제후들이 이 틈을 타 일어나니 이런 상황이 되면 지혜로운 자라고 하더라도 후방의 상황을 감당할 수 없다.”
지금 푸틴과 러시아의 상황을 거짓말처럼 맞히고 있다. 지금이라도 푸틴이 손무의 충고를 경청한다면 전쟁을 중단하는 기적이 발생할까? 푸틴이 설마 이런 위험도 모르고 전쟁을 시작했을까? 독재자는 언제나 스스로 파멸한다. 다만 그 과정에서 나라와 국민, 이웃이 피해를 입는다. 그래서 더욱이 이 전쟁의 끝은 러시아 국민에게 달렸다.
〈236〉강대국이 약한 나라에 패하는 이유

카이사르는 갈리아 원정 때 게르만 기병을 용병으로 고용했다. 그의 사후에 로마군단은 게르만족과 혈투를 벌이며 다뉴브강까지 진출했다. 당시 로마인이 보기에 게르만족은 말 그대로 야만족이었다. 그때 로마의 장병 중에서 로마가 400년 후에 게르만족에게 멸망당하리라는 사실을 예감했던 사람이 있을까?
역사에는 서로 다른 민족과 국가가 처음 접촉하는 순간이 있다. 때때로 그 순간은 충격과 공포, 혹은 오만과 멸시로 채워지기도 한다. 어떤 사제들은 저런 야만족에게 영혼이 있겠냐는 학구적인(?) 의문을 던지기도 했다.
인류 역사상 수많은 제국들, 도저히 정복당하지 않을 것 같던 거대한 제국들이 이런 야만족 혹은 약소국에 의해 멸망했다. 역사가들도 그 원인에 대해 궁금해했다. 상식적인 답을 내기 힘들었던 사람들은 내부의 부패를 지목했다. ‘거대한 제국은 안으로부터 스스로 무너지는 것이다.’ 로마 제국의 멸망을 다룬 고전 영화에서도 마지막 장면을 이런 웅장한 멘트로 장식한다.
역사가들이 내부 붕괴에 예민했던 데는 선진 제국이 내부 기록을 충분히 남겼던 탓도 있다. 고도하고 발전한 사회일수록 내부도 복잡하고 사고도 많다. 잠들지 않는 도시와 시골의 차이처럼 말이다. 역사가도 제국에 많았고, 그들은 당연히 야만족의 내부 사정보다는 자신의 세상에 관심이 많았다.
사실은 약소국에 멸망당한 강대국보다 강대국에 흡수되거나 멸망당한 약소 부족이 훨씬 더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국에 대역전극이 벌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역사가들이 자주 놓치는 사실은 승리하는 군대는 상대적으로 더 첨단이며, 더 전투적이고, 새로운 시스템에 더 잘 적응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반면 부유하고 나태해진 제국은 부조화의 병에 걸린다. 첨단 무기를 믿고 훈련과 전투 의지를 소홀히 하고, 돈에 의지해서 용병을 고용한다. 그러고는 인구, 경제력, 무장, 법제, 행정 같은 조화되지 않은 추상적 지표에 안주한다. 마침내 불타버린 궁전의 기둥을 보며 이렇게 한탄한다. “이 위대한 도시가 어떻게….”
〈237〉수소폭탄의 위협

1956년 11월 5일 오전 8시, 영국군과 프랑스군 공수 대대가 수에즈 운하 입구에 위치한 항구도시 포트사이드 주변 거점에 낙하했다. 영국군은 운하 서쪽에 있는 가밀공항을 점령했고, 프랑스군은 남쪽의 운하 진입로에 있는 교량을 점령했다. 다음 날인 6일 영국 해병 기동부대가 포트사이드에 상륙해 도시를 점령했다.
영국과 프랑스군의 목적은 이집트의 나세르 대통령이 국유화를 선언한 수에즈 운하를 탈환하는 것이었다. 먼저 운하를 무력으로 점거한 뒤 영국과 프랑스군은 수에즈를 보호하는 유엔군으로 탈바꿈할 예정이었다. 나세르는 당황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으로 그로기 상태가 되어 있는 영국과 프랑스가 이집트까지 원정군을 보낼 여력이 없을 것이라고 예측했었다. 영국과 프랑스가 예상을 깨긴 했지만, 연합군은 소수였다. 10만이라고 알려진 이집트군이 전력을 기울여 공격한다면 연합군이 버텨내기는 힘들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수에즈로 몰려들고 있었다. 이스라엘군은 전격적으로 전쟁을 시작해 시나이반도를 손쉽게 장악하고 수에즈 동안에 도달했다. 이스라엘 때문에 이집트군은 시나이에서 큰 손실을 입었고, 남은 병력을 포트사이드에 있는 연합군에 집중할 수도 없었다. 수에즈 국유화가 실패한다면 나세르의 인기는 추락하고 실각할 수도 있었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소련이 총리 니콜라이 불가닌의 명의로 메시지를 발송했다. “근대적 대량파괴무기를 보유한 더 강력한 나라로부터 공격을 받을 경우 영국과 프랑스의 입장은 무엇인가?”
이 메시지에서 언급한 대량파괴무기는 핵폭탄이었다. 이 직전에 소련은 수소폭탄 실험에 성공했다. 일본에 떨어트린 원자폭탄의 파괴력은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영-프는 겉으로는 아닌 척했지만, 미국마저 수에즈 철수를 요구하자 협박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역사적으로 핵 협박이 성공한 최초의 사례이다.
러시아, 이란, 북한까지 직간접으로 핵을 들먹이고 있다. 이번에는 그 협박이 먹힐까? 이번에도 미국의 태도가 결과를 좌우할까?
〈238〉1차대전 종전 기념일

11월 11일은 제1차 세계대전 종전 기념일이다. 우리가 아는 한 최대의 희생자를 낸 전쟁은 1차대전이다. 중폭격기도 핵폭탄도 없었지만, 전사자만 1000만 명이 넘는 대참사였다. 모든 전쟁이 참극이고, 억울한 죽음과 비극적인 사건을 안고 있지 않은 전쟁은 없다. 그러나 1차대전 중에 벌어진 참상은 필설로 형용할 수 없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참전자들의 수기나 증언도 보통은 감정이 격해진 상태로 전달되기 마련인데, 1차대전의 기록들은 전쟁터의 상황이 너무 끔찍해서 언어로는 참상을 제대로 묘사하지 못하거나 감정을 억누르는 경향을 보인다.
중대가 전선에 배치되자마자 1주일 내내 포격이 작렬하고, 진흙땅에 판 참호가 견디지 못해 매몰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이런 경우, 몇 명이 그 참호에 묻혔는지도 모른 채 매장 처리해 버리기도 했다.
병사들은 물과 진흙이 범벅이 된 참호에서 먹고 자며 생활했다. 잠이 들면 쥐들이 다가와 코를 킁킁거리며 산 자와 죽은 자, 죽어가는 자의 냄새를 맡았다. 아직 살아 있어도 죽음이 가까웠다 싶으면 망설이지 않고 공격했다. 그런 환경에서 인간이 버틸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할 정도이다.
지휘관의 두뇌는 갑자기 발달한 병기의 파괴력을 따라가지 못했다. 병사들의 눈에 이 전쟁의 전술은 살인병기 앞으로 병사들을 밀어 넣고 피와 살로 땅을 덮어 가는 것뿐인 것처럼 보였다. 사실은 지휘관들도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내고, 온갖 시도를 했다.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된 성과를 내지 못하거나 예상치 못한 엇박자와 불행한 결과를 초래하곤 했다.
1차대전 중에 벌어진 최대의 비극은 종전 처리이다. 승전국이고 패전국이고 전쟁 중에 벌어진 참상의 충격을 극복하지 못했다. 생존자들은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기보다는 분노에 휩싸였고, 그 분노를 지배계급, 이웃 나라, 패전국에 돌렸다. 나라마다 정치적 혼란, 혁명이 발생했다. 패전국은 분노하고 파시즘이 성립하고, 다시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이것이 11월 11일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
〈239〉루한스크와 세바스토폴

우크라이나 전쟁이 언제 끝날 것 같으냐는 질문을 곧잘 받는다. 끝날 시점은 알 수 없지만 러시아 측에 종전을 강요하는 결정적인 포인트가 2군데 있다. 동부전선의 루한스크이다. 이지움을 탈환한 뒤에 슬라뱐스크를 지나 세베로도네츠크를 거쳐 루한스크와 도네츠크로 쭉 파고들었으면 좋았겠지만, 압도적인 전력이 아닌 이상은 쉽지 않다. 역사적으로 러시아군과 싸울 때는 승세를 잡았다고 힘으로 밀어붙여서는 안 되고, 끝까지 전술적 움직임으로 흔들어야 한다.
고로 직진보다는 우회와 압박이다. 현재 스바토베 쪽에 전선이 형성되어 있는데, 스타로빌스크 쪽으로 진출하면 루한스크, 세베로도네츠크가 압박을 받게 되고, 남쪽의 도네츠크 지역도 부담이 커진다.
남쪽은 당연히 크림반도이다. 헤르손에서 철수했지만 러시아의 드네프르강 방어선은 위태위태하다. 크림반도에는 방어지형이 없다. 우크라이나군이 강을 넘으면 크림 남단까지는 일사천리이다. 그러나 남부에 가공할 요새가 기다리고 있다. 세바스토폴이다. 크림반도와 흑해를 장악하기 위한 요충지로 이곳은 이미 두 번의 전설적인 전투를 치렀다. 1853년 러시아, 오스만 제국과 영국, 프랑스 연합군 간에 벌어진 크림 전쟁이다. 영-프 연합군은 세바스토폴을 포위하고 공격했다. 끝내 함락은 시키지만 승자 패자를 가릴 것 없이 엄청난 희생을 낸 악몽의 전투로 기록된다. 영-프 연합군 사상자가 13만, 러시아 측이 10만 명이었다. 전쟁 전체 사상자의 절반이 세바스토폴에서 나왔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독일의 명장 만슈타인이 러시아군이 지키는 세바스토폴을 포위했다. 독일군은 쉽게 이기리라 생각했지만 포위전은 무려 10개월을 끌었다. 12만의 러시아군은 죽거나 포로가 되었다. 독일군도 12만의 사상자를 냈다. 현재의 세바스토폴은 러시아 흑해 함대의 주둔지로 더 요새화되어 있다. 이 악몽의 전투가 또 벌어질까? 세바스토폴을 함락하지 않아도 상황이 여기까지 진행된다면 러시아는 전쟁을 계속할 동력을 잃을 것이다. 어느 도시 앞에서 전쟁이 끝날까?
〈240〉정도전 진법과 축구의 진화

1962년 칠레 월드컵에서 브라질이 우승했다. 19세 소년 펠레의 데뷔전이기도 했다. 1960년대 브라질 선수들의 화려한 발기술은 유럽 선수들을 가지고 놀았고, 다른 세상에서 온 축구 같았다. 기원전 2세기 유목 기병들은 한나라 기병을 가지고 놀았다. 기마술과 활솜씨 모두 상대가 되지 않았다. 1960년대 이탈리아 축구에서 빗장 수비라는 ‘카테나치오’가 탄생했다. 수비를 굳히고, 좌우 양측 윙을 이용해 기습 공격을 한다. 수비수도 공격에 가담하면서 윙백이란 포지션으로 발전했다.
정도전이 만든 조선의 진법은 전방에 방패 부대를, 후방에 궁병을 배치한다. 일단 수비로 적을 끌어들이면서 최대한 타격하고 지치게 한다. 그 다음 최후방에 배치했던 기병을 좌우 양익에서 발진시켜 적을 공격하는 전술이다. 카테나치오와 개념이 비슷하다.
축구가 무사들의 호전적인 기질을 해소해 주기 위해 만든 게임이란 설이 있다. 경기가 거칠고 도심을 쑥대밭으로 만들기도 해서 1349년 영국 에드워드 3세가 축구를 금지하는 포고령을 내린 적도 있다.
2세기 후반 조조는 자신의 기병을 이끌고 요동을 쳐서 흉노와 선비 기병에 압승을 거두었다. 조조의 주력이 유목 기병에서 스카우트한 부대였지만 과거 흉노 기병에게 유린당하던 시절에 비하면 완전한 역전승이었다.
요즘은 유럽 선수들도 화려한 개인기를 자랑한다. 혈통은 아프리카계인 선수들도 많지만 피부색으로 국적을 구분하던 시대는 지났다. 반면 브라질 선수 중에는 유럽 스타일이 몸에 밴 선수도 많다.
이번 월드컵에서는 아시아 팀들이 전에 없던 승리를 구가하고 있다. 분명 이전과는 다른 변화이다. 세상은 변하고 사람들은 서로 배우며 성장한다. 월드컵의 역사를 보면 4년마다 이런 변화가 드러난다. 물론 국력, 경제력은 이렇게 쉽게 역전과 이변을 허용하지 않는 듯하다. 그러나 축구의 변화는 변화가 진행형임을 말해준다. 이젠 우리도 아시아, 아프리카, 제3세계에 대한 수동적, 피해자적인 시각에서 벗어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