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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스토리18/ 절대군주의 이면사/ 01.06 보석 1541개 박힌 왕관 썼던 이란 황후의 몰락 - 03.18 트레이너와 결혼한 스웨덴 공주

상림은내고향 2022. 11. 22. 16:24

글로벌 스토리18/ 

■절대군주의 이면사

입헌군주제 국가들의 이면 이야기  중앙일보 [알쓸로얄]  2018.

◆01.06 보석 1541개 박힌 왕관 썼던 이란 황후의 몰락

 중앙일보 국제부 기자들이 2018년을 맞아 새로운 시리즈 [알쓸로얄]을 선보입니다. 2017년의 [알쓸신세- 보면  있는 기한  뉴스] 자매품 격인 [알쓸로얄] 현대 지구촌에 존재하는 절대군주 혹은 입헌군주제 국가들의 이면을 들여다봅니다.   
  

2016 통계로 이런 군주제 국가는 43개국이나 되는데요, 가운데 영연방 국가에 속한 나라가 16개국입니다. 지역도 다양해서 벨기에·모나코 유럽뿐 아니라 사우디아라비아·바레인 중동에도 왕정이 존재하고 일본·부탄·태국 아시아와 레소토·스와질란드 아프리카에도 있지요.   
  
세계 어느 곳에 있건 부와 명성을 타고나는 왕족들은 숙명적으로 대중의 관심 속에 권력·애정 다툼에 휘말리게 됩니다.  


그런알고 보면 쓸모있는 신기한 로얄 이야기 [알쓸로얄]에서 들려드리겠습니다. 1편은 1979 이슬람혁명으로 쫓겨난 이란 팔라비(팔레비) 왕조 이야기입니다. 수천년을 호령한 페르시아 제국에서 이어졌던 팔라비 왕조는 혁명으로 이란 땅에서 쫓겨나긴 했지만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답니다
.   

 

▲1967 이란 팔라비(팔레비) 왕조의 파라 디바 황후를 위해 제작된 대관식용 왕관. 1541개의 보석으로 장식된 왕관은 세계적인 보석 브랜드 반클리프 아펠의 역작이었다. [사진 반클리프 아펠]

 

미국에서 권총 자살한 팔라비 왕자  

최근 중동의 맹주 이란이 연일 반정부 시위로 시끄러웠습니다. 민생고를 호소하던 시위대는 이슬람 신정 체제에 대한 비판을 넘어왕정 시대로 돌아가자 구호까지 외쳤지요. 이란 왕정이 폐지된 것이 1979 아야톨라 호메이니가 주도한 이슬람혁명 때였으니 실제 그렇게 오래된 얘기도 아닙니다. 그런데 이때 쫓겨난 팔라비(Farah Pahlavi, 또는 팔레비) 왕조가 미국에 망명 있는 것을 아시나요? 지금은 미국을 불구대천 원수 대하듯 하는 이란은 팔라비 왕조 때만 해도 미국과절친관계였답니다.

 

▲1976년의 알리 레자 왕자. 1979 이슬람 혁명으로 축출된 이란 팔라비(팔레비) 왕조의 왕자 가운데 동생으로 2011 미국 보스턴에서 권총으로 자살했다. [사진 위키피디아]

 

 지난 2011 1월 미국 보스턴에서 들려온 뉴스가 세계 언론의 한 토막을 차지했습니다. 1979년 이슬람 혁명으로 축출된 이란 왕조의 두 왕자 가운데 동생인 알리레자 팔라비(당시 45)가 권총으로 자살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알리레자의 형이자 무함마드 레자 팔라비 국왕의 장남인 레자 팔라비는 “다른 수백만 이란 젊은이들처럼 알리레자도 사랑하는 모국에서 일어난 (정치적) 불행에 매우 혼란스러워했다”면서 동생의 죽음을 애도했습니다.   
   
아버지와 여동생의 죽음도 알리레자의 자살에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1941 즉위했던 팔라비 국왕은 왕좌에서 쫓겨난 다음 해인 1980 이집트에서 췌장암으로 사망했습니다. 2001년에는 당시 31세였던 막내딸 레일라가 영국 런던의 호텔에서 약물과용으로 숨졌습니다. 왕궁에서 쫓겨날 당시 9살이었던 레일라는 오랫동안 거식증과 우울증을 앓았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팔라비 왕가 사람들의 잇따른 죽음은 자신들이 처한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는 분노와 회한이 크게 작용했을 겁니다. 79년 혁명 전까지 이들의 위세는 실로 대단했습니다. 막대한 원유 생산량을 기반으로 갖은 사치와 축재를 일삼았으니까요. 대표적인 게 1967년에 열린 호화 대관식입니다.

 

▲레자 팔라비 이란 왕세자. 1979년 이슬람 혁명으로 축출된 팔라비(팔레비) 왕조의 생존해 있는 계승자다. 1960년 무함마드 레자 팔라비 국왕의 장남으로 태어났고 현재는 미국에 거주하고 있다. [사진 위키피디아]

 

왕관에 장식된 다이아몬드만 1469  

1966 왕실은 세계적인 보석 브랜드 반클리프 아펠을 왕실 장식품을 만드는 공식 브랜드로 선정했습니다. 당대 최고의 보석세공 브랜드 50곳이 경합한 결과입니다. 국왕은 1959 결혼한 번째 부인 파라 디바를 위해 특별한 선물을 하고 싶어했습니다. 파라 디바 왕비에겐 근대 이란 왕조 처음으로황후(Shahbanu)’라는 칭호를 부여하고 이를 대외적으로 공표하는 화려한 대관식을 열었습니다.   
  
 이란 전통에 따라서 왕관은 이란 중앙은행 국고에 보관된 보석으로만 장식해야 했습니다. 진귀한 보석들을 국외로 반출할 없었던 까닭에 당대 최고의 세공사로 불렸던 피에르 아펠이 프랑스 파리에서 이란 수도 테헤란으로 향했습니다. 아펠은 이란 중앙은행 지하 금고에서 며칠 숙고한 끝에 왕관에 세팅할 스톤을 선정했습니다.   

 

▲1967 이란 팔라비(팔레비) 왕조의 파라 디바 황후를 위해 제작된 대관식용 왕관. 1541개의 보석으로 장식된 왕관은 세계적인 보석 브랜드 반클리프 아펠의 역작이었다. [사진 반클리프 아펠]

 

▲1967 이란 팔라비(팔레비) 왕조의 파라 디바 황후를 위한 대관식때 쓰인 보석 세트를 소개하는 홍보 페이지. 1541개의 보석으로 장식된 왕관을 비롯해 목걸이 세트 모두가 세계적인 보석 브랜드 반클리프 아펠의 역작이었다. [사진 반클리프 아펠]

 

▲1967 이란 팔라비(팔레비) 왕조의 파라 디바 황후를 위해 제작된 티아라. 세계적인 보석 브랜드 반클리프 아펠의 역작이다. [사진 반클리프 아펠]

 

철통 같은 경비 속에 6개월 만에 완성된 왕관은 실로 호화로움 자체였습니다. 왕관은 다이아몬드 1469, 에메랄드 36, 루비 34, 스피넬 2, 진주 105개와 다양한 스톤 등 총 1541개의 보석으로 장식됐습니다. 특히 왕관의 중앙엔 무려 150캐럿의 에메랄드가 박혔습니다.   
  
 파라 팔라비 황후 외에 팔라비 국왕의 여동생과 딸들을 위한 주얼리 세트도 제작됐습니다. 지금도 반클리프 아펠은 공식 홈페이지에서 이때 대관식을 브랜드 역사 최고의 기념비적 장면으로 홍보하고 있습니다. 

 

▲1967 파라 디바 왕비를 '샤바누 (Shahbanu)'  황후로 추대한 대관식. 파라 디바는 이란 팔라비(팔레비) 왕조의 2 국왕 무함마드 레자 팔라비 국왕의 세번째 부인이다. [사진 위키피디아]

 

"차도르 벗어라" 이란 서구화 주도한 왕실  

팔라비 왕조는 1925 육군 장교 출신 레자 팔라비가 카자르 왕조를 무너뜨리고 통치자로 등극하면서 시작됐습니다. 레자 팔라비 재임 기간 이란엔 횡단철도가 건설되고 주요 도시들을 연결하는 지선이 만들어지는 근대국가의 인프라가 확충됐습니다. 도로·학교·병원이 건설됐고 34 대학교가 창설되기도 했습니다. 35년엔 궁정 여성들에게 차도르를 벗으라는 명령이 내려지는 개방화·서구화 정책이 추진됐습니다
   

▲파라 디바 황후. 이란 팔라비(팔레비) 왕조의 2 국왕 무함마드 레자 팔라비 국왕의 세번째 부인으로 1967 대관식에서 '샤바누 (Shahbanu)' 황후 칭호를 부여받았다. [사진 위키피디아]

 

이란은 2차 세계대전에 휘말리면서 외세의 개입을 받는 상황이 됐습니다. 팔라비 1세는 연합국의 압력을 받아 1941년 퇴위했고 장남인 무함마드 레자 팔라비가 2대 국왕으로 등극했습니다. 팔라비 2세 재임 기간 이란의 세속주의, 근대화 정책은 계속됐습니다. 특히 1963년부터 백색혁명을 통해 토지개혁·여성참정권 부여 등도 실시됐습니다.   
  
 얼마 전 아프가니스탄의 옛 모습을 담은 한장의 사진이 미국 언론을 중심으로 화제가 됐습니다. 지금은 아프간이 원리주의 이슬람을 신봉하는 탈레반 세력 아래에서 신음하고 있지만 수십 년 전 탈레반이 권력을 휘두르기 전에는 여성들이 미니스커트를 입고 활보하는 근대국가였음을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원리주의 탈레반 세력이 장악하기 근대화된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의 자유로운 복장을 여성들.

 

 이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란의 옛날 사진을 보면 지금의 엄격한 복장 규제가 상상이 되지 않습니다.   

 

▲이슬람혁명이 있기 1960~70년대 이란 여대생들 모습. 당시만 해도 히잡을 쓰지 않고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성들을 길거리에서 흔히 있었다.

 

왕실 사치가 원리주의 무슬림 '혁명' 불러  

▲1979 이슬람 혁명 파라 디바 황후의 사진 포스터를 찢고 있는 이란 군중들. [사진 위키피디아]

  
 팔라비 왕조의 몰락을 역사는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왕권 안정을 위한 국방비 증액과 함께 인플레이션이 심해지면서 생필품 부족 등에 대한 국민의 불만도 쌓여갔다. 여기에 이슬람 전통을 중시하는 원리주의 무슬림·민족주의 세력이 힘을 얻으면서 79 이슬람 혁명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란에서 쫓겨난 팔라비 왕족은 뿔뿔이 흩어졌다가 미국을 중심으로 정착합니다. 호화로운 왕관을 뽐냈던 팔라비 황후 역시 미국에 현재 건재하고 있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이들은 해외로 흩어진 이란인들과 긴밀한 협력 관계 속에 사실상의 신정국가인 이란에불손한전파를 송출하고 있답니다.  


 이란 대중문화를 은밀히 파고드는 이란 왕실과 국외 이란인들 미디어의선전선동 대해선 다음 편에 들려드리겠습니다. 보너스로 '아시아의 비너스' 불렸던 팔라비 국왕의 다른 왕비들 얘기도 기대하세요.

 

▲이란 팔라비(팔레비) 왕조의 휘장. [사진 위키피디아]                           

강혜란 기자 theother@joongang.co.kr 

◇01.09 아시아의 비너스로 불린 이란 왕비와 망명 왕족

지난 [알쓸로얄] 1보석 1541 박힌 왕관 썼던 이란 황후의 몰락에선 1979 이슬람공화국 혁명 이전에 팔라비(팔레비) 왕조가 어느 정도 위용이었나 전해드렸습니다. 이번엔 미국에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팔라비 일가와 그들이 고국 이란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알아보려 합니다. [알쓸신세- 보면  있는 기한 계뉴스] 왕실·왕족 시리즈 [알쓸로얄] 2 시작합니다

 

해외 도피한 왕비 재산 1 달러

▲1986 이란의 왕세자 레자 팔라비(팔레비) 자스민의 결혼식. 왼쪽은 어머니 파라 디바 이란 황후. [사진 핀터 레스트]

 

1979 이란에선 이슬람 종교지도자 아야톨라 알리 호메이니가 이끄는 원리주의 무슬림 세력이 팔라비(팔레비) 왕조를 쫓아내고 공화국을 수립했습니다.  
  
당시 무함마드 레자 팔라비 국왕의 장남 레자 팔라비는 미국에서 공군 조종사 과정 중이었습니다. 이듬해 부왕이 이집트에서 사망하자 21 왕세자 레자 팔라비는 허울뿐인 왕실의 대통을 계승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스스로를 국왕으로 칭하지는 못했습니다. 1906 제정된 이란 구헌법에 따르면 왕위 계승자는 이란 의회에서 선서를 해야 인정받기 때문입니다
  
레자 팔라비의 모친은 국왕의 번째 아내 파라 디바 팔라비입니다. 1967 보석 1541개가 박힌 왕관을 쓰고 이란 황후 칭호를 받았던 호화 대관식의 주인공이죠. 비록 이란에서 쫓겨나긴 했지만 해외에 재산을 상당히 빼돌리고 있었나 봅니다. 2016 포브스 보도에 따르면 미국에 거주 중인 파라 팔라비의 재산은 1 달러( 1000억원) 추정됐습니다

 

▲1950 2 16 이란 테헤란의 상원 의회에서 국왕(Shah) 취임 선서를 읽는 무함마드 레자 팔라비(팔레비). [사진 위키피디아]

 

팔라비 왕비 '아시아의 비너스' 불려 

잠시 팔라비 국왕의 부인들을 살펴보겠습니다. 팔라비는 왕세자 시절이던 1939 이집트의 공주 파우지아와 결혼을 했습니다. 팔라비가 20, 파우지아가 18세였는데(일각에선 16세로 주장) 파우지아 공주는 2 클레오파트라라고 불릴 정도로 미인이었습니다. 왕가의 정략 결혼이라 해도 팔라비 왕세자로선 거부할 이유가 없었겠지요. 결혼식은 카이로에서 한번, 테헤란에서 한번 열렸습니다.   

 

▲이집트 공주이자 무함마드 레자 팔라비(팔레비) 이란 국왕의 첫번째 부인이었던 파우지아. '클레오파트라의 환생' '아시아의 비너스' 불릴 정도의 미인이었다. [사진 위키피디아]

 

▲이란 팔라비(팔레비) 왕조의 두번째 국왕 무함마드 레자 팔라비의 첫번째 왕비였던 파우지아 푸아드(Fawzia Fuad). '아시아의 비너스'라고 불릴 정도의 미모의 소유자로 1942 9 21 발간된 미국 '라이프' 표지를 장식하기도 했다. [사진 위키피디아]

                    

2 후인 1941 팔라비는 연합국의 압력을 받아 양위한 부왕의 뒤를 이어 이란의 (Shah, 국왕) 됐습니다. 이듬해인 1942 미국 잡지 『라이프』 파우지아 왕비를 9 21일자 커버에 실으면서아시아의 비너스라고 표현했습니다. 계란형 얼굴과 꿰뚫는 듯한 푸른 눈이 조각품 같다는 찬사도 곁들였습니다.   
  
하지만 결혼은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샤나즈가 태어난 파우지아는 1945 테헤란의 왕궁을 떠나 이집트에서 이혼소송을 제기했습니다. 1948 11 이혼이 성립되면서 파우지아는 다시 이집트 공주로 돌아갔고 이혼 이듬해에 이집트 대령과 재혼했습니다.   

 

▲무함마드 레자 팔라비(팔레비) 국왕(오른쪽) 그의 첫번째 왕비이자 이집트 공주 출신인 파우지아. [사진 위키피디아]    

 

둘째 왕비 이혼 위자료로 파리 대저택 

팔라비는 1951 번째 아내를 맞습니다. '소라야' 라는 이름의 왕비는 유럽에서 교육 받은 자유분방한 여성이었습니다. 소라야는 16세인 1948 팔라비를 처음 만났고 팔라비는 그에게 22.37캐럿에 이르는 다이아몬드 반지를 선물하며 청혼했습니다. 사람의 결혼식 역시 화려했습니다. 소라야 왕비는 크리스찬 디오르가 디자인한 깃털과 진주로 장식된 드레스를 입었습니다.   

          

▲1951 무함마드 레자 팔라비(팔레비) 국왕과 두번째 부인 소라야의 결혼식. 소라야 왕비는 크리스천 디오르가 디자인한 깃털과 진주로 장식된 웨딩드레스를 입었다. [사진 위키피디아]

 

▲무함마드 레자 팔라비 이란 국왕(오른쪽) 그의 두번째 왕비 소라야. [사진 위키피디아]

 

팔라비 국왕이 가장 사랑한 여인으로 꼽히는 소라야는 불행히도 아이를 갖지 못했습니다. 왕위를 계승할 아들이 급했던 왕은 결국 1958 번째 이혼을 선언합니다. 왕에게 아들을 낳아줄 둘째 왕비를 들이는 방안도 검토됐지만 소라야는 깨끗이 물러나는 쪽을 택했습니다. 이혼 위자료로 당시 가격으로 300 달러에 이르는 파리의 최고급 펜트하우스와 롤스로이스 벤츠 자가용, 각종 보석과 매달 7000달러의 연금이 주어졌습니다. 소라야는 파리에서 살면서 몇몇 영화에 출연하는 배우로서 인생 후반부를 보냈습니다. 

 

혁명 전후로 수십만명 미국에 망명 

번째 부인이 파라 디바는 자손이 귀했던 팔라비 국왕에게 왕자 , 공주 둘을 안겨줬습니다. 1967 황후 칭호까지 받게 것도 이러한다산 공로가 작용했을 겁니다. 하지만 지난 편에서 말씀드렸듯 혁명으로 쫓겨난 막내딸 레일라는 약물과다복용으로, 차남 알리 레자는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한때 최고의 부와 명예를 누렸던 이란 왕가의 비극적 몰락이지요

 

▲1967 파라 디바 팔라비(팔레비) 왕비를 황후(Shabanu) 추대하는 대관식에서 무함마드 레자 팔라비 국왕이 왕비에게 왕관을 씌워주고 있다. 보석 1541개가 박힌 왕관은 세계적인 브랜드 반클리프 아펠이 왕궁의 요청에 따라 특별 제작했다. [사진 위키피디아]


그러나 파라 디바와 장남 레자 팔라비는 현재까지도 미국에서 윤택한 망명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란 혁명 전후로 해외로 도피했던 이민자들, 이른바디아스포라 이들의 든든한 지지자들이기도 합니다. 일각에선 이란 디아스포라가 LA에만 60만명 정도 된다고 추정합니다

 

11분간 '깜짝 방영'… CIA 기획

1986 9 이란 TV 갑자기 해적 전파가 끼어들었습니다. 11 전파를 영상에선 미국에 살고 있는 레자 팔라비 왕세자가 모습을 드러내나는 돌아갈 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란 정부와 국민들을 놀라게 이벤트는 중앙정보국(CIA) 기획했던 것으로 훗날 밝혀졌습니다. 80년대 CIA 이란 왕실의 망명 생활을 금전적으로 후원했다는 폭로도 나왔습니다.   

 

▲레자 팔라비 이란 왕세자. 1979 이슬람 혁명으로 축출된 팔라비(팔레비) 왕조의 생존해 있는 계승자다. 1960 무함마드 레자 팔라비 국왕의 장남으로 태어났고 현재는 미국에 거주하고 있다. [사진 위키피디아]

 

왕세자는 이같은 주장을근거 없는 이라고 부인했습니다. 마땅한 직업 없이 미국에서 살아갈 있는 것에 대해선애국적인 지지자들 덕분이라고 했습니다. 팔라비 왕세자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취임 후에 언론 인터뷰에서이란에 혁명이 일어나야 한다” “이란에 돌아가고 싶다 열망을 다시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란에선 미국에 있는 파라 디바 왕비나 레자 팔라비 왕세자의 근황을 TV 종종 있다고 합니다. 중앙정부가 통제하는 국영방송은 아니고 해외에서 송출되는 위성채널을 통해서죠.  
  
 이란 내에서 방송되는 해외발 위성채널은 파르스(PARS) TV(미국), BBC 페르시안(영국), 파르시(PARSI) 1 수십여개나 됩니다. 이런 채널은 위성 수신기만 달면 가정에서 있는데 2000 초만 해도 단속이 심했지만 이젠 걷잡을 없는 지경이라 당국도 사실상 묵인해주고 있다는군요(구기연 『이란 도시 젊은이들, 그들만의 세상 만들기』 참조). 
  

위성 채널 맞서 '대장금' 한류 방송 

해외 거주 이란인들에 의해 주로 운영되는 이들 채널은 상당수가 왕가에 호의적이라 새해만 되면 왕비와 왕세자의 인사를 방영해준답니다. 왕정 시대 인기를 끌었던 왕년의 스타 아니라 LA에서 활동하는 1.5세대, 2세대 교포 가수의 쇼도 방영하고요. 시절을 기억하는 장년 세대에겐 향수를, 종교적 규제의 안에 갇힌 젊은 세대에겐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내용들이죠.

 

▲조선 중종 시기를 배경으로 MBC 역사 드라마 '대장금'. 이란에서 한류를 일으켰다.

 

이영애 주연의 드라마대장금 이란에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알고 계시지요. 2006 이란 국영 IRIB방송을 통해 방영됐을 비공식적인 시청률이 80% 넘었다고 알려집니다. 그런데 이란에서 한류가 가능할 있었던 것은 어찌 보면 이런 위성 미디어 덕분이라고 있습니다.   
  
위성 채널을 통해 할리우드나 미국 드라마가 퍼져 나가자 이란 국영방송은 이를 견제하는 차원에서 한국 드라마를 틀었습니다. 결과대장금 시작으로주몽’ ‘고맙습니다’ ‘해신’ ‘하얀 거탑’ ‘동이등이 잇따라 히트했지요. 이란 당국의 보수적인 입맛에 맞게 주로 사극이나 가족 드라마를 수입한 것도 눈여겨 대목입니다
  
최근 이란에서 반정부·반기득권 시위가 들불처럼 일었을 정부가 가장 먼저 일이 메시저 텔레그램 서비스 차단을 시도한 것입니다. 텔레그램을 통해 시위 정보를 공유하고 비판 여론이 결집하는 것을 막으려 거죠. 일주일 넘게 이어졌던 시위는 21명이 사망하고 1000여명이 구금되는 것으로 일단락되고 있지만, 이게 끝이라고 단정하긴 이릅니다.  
  
 인터넷·위성채널 등으로 세계와 접속하는 젊은이들, 이른바 3세대(나슬레 세봄) 이란에서 변화의 주역으로 나서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해 12 30(현지시간) 이란 수도 테헤란대학교에서 경찰이 반정부 시위에 참가한 학생들의 출입을 막기 위해 교문을 봉쇄하자 학생들이 항의하며 이를 스마트폰으로 찍고 있다. [AP=연합뉴스]

강혜란 기자 theother@joongang.co.kr 

 

◆01.13 지역갈등 끝판왕 벨기에독일서 수입한 왕실이 해결사?

벨기에는 고유한 가치가 없는, 역사의 사고로 생긴 나라다

국가에 대한 모독이 될 법한 이 발언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벨기에의 이브 메테름 전 총리입니다.  
총리 취임 , 북부 플랑드르계 정당인 기독민주당 당수로 재임하던 2006년의 발언입니다

 
당시 그는네델란드어를 배울 지적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이라며 남부 왈롱 지역민을 노골적으로 무시하기도 했죠

 

▲2013 7 21일 필리프 벨기에 국왕이 즉위했다. 브뤼셀에 엤는 왕궁 발코니에서 국민에게 인사하는 벨기에 로열패밀리. 오른쪽은 이날 아들에게 양위한 알베르 2세 부부, 가운데는 필리프 국왕과 마틸디 왕비. 앞줄의 어린이들은 국왕 부부의 네 자녀다. [로이터=연합뉴스]

 

▲지난해 7 21일 미사에 참석하기 위해 브뤼셀 생 미셸 성당으로 향하는 필리프 국왕 가족. 7 21일은 초대 국왕인 레오폴드 1세의 즉위를 기념하는 벨기에의 국경일이다. 왼쪽부터 엘레오노레 공주, 가브리엘 왕자, 마틸다 왕비, 필리프 국왕, 엘리자베스 공주, 에마뉘엘 왕자. [ EPA=연합뉴스]

 

벨기에를 통합하는 맥주·축구·국왕” 

유력 정치인이 자신의 나라를 깎아내리고, 타지역민을 대놓고 비하할 만큼 벨기에의 국가 정체성과 소속감은 흐릿합니다내가 속한 지역이 훨씬 중요한 거죠 


지역색이 뚜렷하고, 그로 인한 지역 갈등도 첨예합니다. 벨기에라는 나라가 아주 느슨하게 결합된 공동체라는 뜻이고요.  
  

▲벨기에 국기.

 

벨기에 인구( 1130만 명) 59%를 차지하는 플랑드르와 40%를 차지하는 왈롱은 사용하는 언어부터 다릅니다. 각각 네델란드어와 프랑스어를 사용하죠. 당연히 문화도 다릅니다.   


경제력 차이도 큽니다. 사는 플랑드르는가난한 왈롱이 우리의 세금을 쓴다 불만이고, 아예 분리독립을 도모하고 있습니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2016년엔 민족주의 정당 새플랑드르연대(N-VA) 소속인 플랑드르 자치정부의 한 장관이 “10년 뒤엔 벨기에라는 나라가 없어지길 바라며, 아마 그렇게 될 것이다”라고 당당하게 밝혔을 정도니, 우리의 영호남 갈등은 명함도 못 내밀 수준입니다 
  
이처럼 언제 찢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나라를 하나로 묶어주는 있습니다메테름 총리도 언급했던, 맥주와 국가대표 축구팀 그리고 국왕입니다.  


그렇다면, 대체 왕실은 어느 지역 출신이기에 벨기에를 하나로 묶어줄 있는 걸까요.  

 

신생 독립국 벨기에, 국왕을 찾아라

▲벨기에 왕실의 문장. [위키피디아]

 

벨기에는 1830년 네델란드에서 독립했습니다. 국가를 세우면서 입헌군주제를 선택했죠그리고는 왕이 될만한 인물을 물색합니다 


나폴레옹의 양아들인 외젠 보아네르, 프랑스의 마지막 루이 필립의 아들인 느무르 공작이 후보로 거론됐지만 성사되지 못합니다.  
  
당시는 나폴레옹의 패배 () 프랑스 전쟁을 이끌었던 오스트리아·프로이센·러시아·영국 열강이 주도한 체제가 수립됐을 때입니다. 프랑스의 팽창주의가 종식되고 마침내 힘의 균형을 되찾았는데, 프랑스 출신이 벨기에를 접수하는 용납되지 않는 일이었던 겁니다.  
  
그래서 등장한 후보가 독일의 공국 작센-코부르크-고타 가문의 레오폴드였습니다. 앞서 독립한 그리스로부터도 왕의 자리를 제안받았지만불안정한 나라는 싫다 고사했던 인물입니다.  


그는 벨기에의 제안은 받아들였고 1831 7 21 레오폴드 1세로 즉위합니다. 이날은 벨기에의 국경일이 됐죠.  

 

▲벨기에의 초대 국왕 레오폴드 1. 독일 작센코부르크고타 가문 출신인 그는 신생독립국 벨기에의 제안을 받고 왕에 즉위했다. [위키피디아]

  
사실 레오폴드 1세는 작은 신생국가라는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벨기에 국왕 자리를 내켜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뒤이어 즉위한 레오폴드 2세가 콩코를 삼킨 것도작은 나라컴플렉스를 해소하기 위한 방편이었다는 설이 있고요
  
어쨌든 레오폴드 1세는 뛰어난 외교술로 벨기에의 독립을 지켰고, 아들인 레오폴드 2세에게 왕위를 무사히 넘겨 입헌군주제를 공고히 합니다.  

 

독일에서 수입한 왕가姓도벨기에 바꿔 

▲벨기에의 4번째 왕인 레오폴드 3세와 스웨덴 아스트리드 공주의 결혼사진. [위키피디아]

 

일종의 ‘독일 이민자’ 출신인 벨기에 로열패밀리는 수십년 간 ‘작센-코브르크-고타(Saxe-Coburg-Gotha)’라는 성()을 사용하면서 뿌리를 지킵니다.   
  
그러나 1 세계대전 이후 독일의 이미지가 나빠지면서, 1920 성을 ‘van Belgie’, ‘de Belgique’, ‘von Belgien’ 바꾸는데요각각 네델란드어·프랑스어·독일어로벨기에의(of Belgium)’ 뜻하는 말입니다. 벨기에의 공식 언어가 셋이라 성도 각각의 언어로 따로 것이죠.  
  
의도하지 않았지만, 독일계 가문을 왕가로 섭외한 것은 플랑드르와 왈롱 양쪽 모두에 공평한 선택으로 보입니다. 때문에 그나마왕이 벨기에를 통합해 준다 이야기할 수도 있을 테고요.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플랑드르에선 왈롱보다 왕실에 대한 호감도가 현저히 낮을 아니라, 왕실 따위 필요 없다는 여론도 높습니다분리독립에 방해가 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2013 현재의 필리프 국왕이 즉위할 때도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아웃사이더라며 탐탁지 않게 여겼습니다.  
물론 국왕은 이중언어 교육을 받았고, 네델란드어와 프랑스어를 모두 사용합니다. 다만 프랑스어를 편하게 사용할 뿐인데, 플랑드르 사람들은 그게 싫은 거죠.  

 

▲벨기에 브뤼셀에 엤는 왕궁. [위키피디아]

 

국왕의 불륜 폭로, 배후엔 분리독립파?

이처럼 플랑드르 사람들이 왕실을 싫어하다 보니 1999년 알베르 2세의 불륜 스캔들이 벨기에를 휩쓸었을 때, 그 배후에 플랑드르 정치인이 있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습니다 
  
발단은 당시 18세인 학생이 출간한 알베르 2세의 부인, 파올라 왕비의 자서전입니다. 물론 왕실이 공인한 자서전은 아닙니다.  


책엔 알베르 2세가 1966년부터 18년간 시빌이라는 여성과 부적절한 관계를 지속했고, 사이에서 딸이 태어났다는 내용이 실렸죠. 존경받던 왕실에 핵폭탄이 떨어졌습니다.  


마침 책이 출간된 시기도 문제였습니다. 노총각이었던 당시 필리프 왕세자가 약혼을 앞둔 시점이었죠
  
책의 내용은 사실무근이 아니었는지 왕실은 인정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부인하지도 않았습니다.  
더구나 그해 크리스마스 대국민 담화에서 알베르 2세는 자신의 과거를 인정하는 듯한 발언도 하죠.  

 
30 우리 부부도 위기를 겪었고, 오랜 시간 어려움을 극복한 깊은 이해와 사랑을 되찾았다” 
벨기에 언론은 담화를 알베르 2세의 우회적인 불륜 인정으로 봤습니다.  
  

▲알베르 2세의 혼외 딸이라고 주장하는 델피네 뵐(왼쪽). 딸과 함께 자신의 책에 사인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이와는 별개로 의문도 제기됐죠‘왕실의 경사를 앞두고 10대 학생이 국왕의 불륜이 담긴 책을 썼다?  “책의 진짜 저자는 독립에 방해되는 왕실을 뒤흔들려는 플랑드르의 극우 인사”라는 주장이 나올만 했던 겁니다

 

친자확인 소송 직후 퇴위한 알베르 2

시간이 흘러 잠잠해졌던 알베르 2세의 ‘과거사’는 2013 6월 막장 드라마 급으로 재등장합니다 
  
책에 등장했던 혼외자, 델피네 뵐이 알베르 2세와의 친자관계를 증명하겠다며 DNA 검사와 왕실가족의 증언을 법원에 요청한 겁니다


뵐은재산을 노리는 아니다. 딸로 인정받고 싶다 입장이었고, 벨기에 왕실은사생활이라 노코멘트라고 선을 그었습니다.   

 

▲알베르 2세와 파올라 왕비. [EPA=연합뉴스]

 

그리고 7월 알베르 2세는 아들에게 왕위를 넘긴다고 발표합니다“고령과 건강을 이유로 물러난다”는 게 공식적인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스캔들로 추락한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기 위한 정치적 결정이라고 보는 이들도 적지 않았죠.  
  
당시 뵐이 제기한 소송은 끝을 보지 못했습니다. 국왕 신분이었던 알베르 2세의 면책 특권 때문에 DNA 검사를 없었기 때문입니다.   
  
국왕이 바뀌고 알베르 2세가 더는 면책특권을 누릴 없게 되자 뵐은 소송을 다시 제기했는데요, 2017 벨기에 법원은 DNA 검사 없이알베르 2세는 뵐의 법적 아버지가 아니다라고 판결합니다. “생물학적 유대만이 부녀 관계를 충족시키는 것이 아니며 가족 구성원 사이의 통합 같은 것도 고려해야 한다 겁니다.  
뵐은 승복하지 않고 항소하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지난해 7 31일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페젠대일 전투 100주년 행사가 열린 벨기에 조네베커에 모인 영국과 벨기에의 로열 패밀리. 왼쪽부터 영국의 케이트 미들턴 왕세손비, 필리프 벨기에 국왕, 찰스 영국 왕세자, 마틸다 벨기에 여왕, 윌리엄 영국 왕자,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 [EPA=연합뉴스]


다음 편에선 벨기에 왕실에서 아마도 가장 유명한, 레오폴드 2(1835~1909) 이야기를 살펴보겠습니다.  
콩고를 사유지로 만들어 자신의 놀이터이자, 상아와 다이아몬드가 가득한 보물상자로 여겼던 그는 벨기에의 ‘흑역사입니다광대한 식민지를 가졌던 영국·프랑스조차 혀를 내두를만큼의 극악무도한 식민 지배로 악명을 떨쳤던 인물입니다

홍주희 기자 honghong@joongang.co.kr   

 

◆02.17 1000만 명 죽음으로 몰고 간 ‘콩고의 도살자’

이번엔 벨기에의 역대 왕 중 가장 유명한 레오폴드 2(1835~1909)의 이야기를 살펴보겠습니다

   
홀로코스트를 저지른 아돌프 히틀러, 캄보디아킬링필드대학살의 주범 포트, '아프리카의 히틀러' 우간다의 이디 아민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역사상 가장 잔혹한 통치자로 손꼽히는 인물입니다.  


악명을 떨친 덕에 그는 19세기에야 독립한 소국 벨기에 왕실에서 유일하게 역사에 길이길이 남을 왕이 됐죠.  

 

히틀러 맞먹는 벨기에의 흑역사

▲벨기에 레오폴드2세는 콩고를 지배하면서 지옥으로 만들었다. 당시 세계적으로 수요가 폭증한 고무 생산을 늘리기 위해, 콩고 원주민에게 할당량을 지정하고 이를 맞추지 못하면 손목을 잘랐다. 1900년 무렵 콩고에서 촬영된 이 사진은 그의 잔혹한 지배를 한 눈에 보여준다. [중앙포토]

 

레오폴드 2세의 잔혹과 야만을 한눈에 보여주는 것이 바로 위 사진입니다. 1900년 무렵 콩고에서 촬영된 사진 속엔 손이 잘린 흑인 소년과 그 소년의 팔을 들고 있는 백인 남성이 서 있습니다.   

그가 콩고를 지배하는 동안 잘려나간 원주민의 손이 수백만에 달할 . 유럽 근대 제국주의자 최악이라는 레오폴드 2세는 대체 콩코에서 무슨 일을 저지른 걸까요
  
레오폴드 2세는 아버지인 초대 국왕 레오폴드 1세의 뒤를 이어 1865 왕위에 오릅니다. 서구 열강들이 식민지 확장에 열을 올리던 시기입니다.   


영국·프랑스·스페인 등을 보면서 레오폴드 2세는 식민지만이 국가를 부강하게 만들어줄 거라 생각했습니다. 즉위 직후 동생인 필리프 왕자에게 보낸 편지에도 그는 “국가는 강하고 번영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식민지를 가져야 한다 썼습니다.  
  
하지만 후발주자가 식민지 삼을만한 나라는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벨기에 의회가 식민지 개척에 시큰둥했습니다. 1831 중립국 지위로 독립을 선언한 벨기에의 군사력이 바다 건너 식민 영토를 보호할 있을 만큼 강하지 않기 때문에, 식민지 경영을 무모한 도박이라 여겼던 겁니다.  

 

▲근대 유럽 제국주의자 중 최악으로 손꼽히는 벨기에의 레오폴드2.

 

필리핀 구매 실패 콩코에 돌려 

레오폴드 2세는 단독으로 식민지 확보에 나섭니다스페인의 이사벨 2세에게 필리핀 양도를 타진했죠. 필리핀을 사기 위해 영국은행에 대출도 신청합니다. 그러나 대출은 거부됐고, 이사벨 2세마저 폐위되면서 계획은 무산됩니다 
  
플랜A 좌절된 레오폴드 2세의 눈에 들어온 것이 콩고입니다.  


그는 콩고 접수를 위해국제 아프리카 협회라는 단체를 설립했습니다. 과학 연구와 인도주의를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콩고 식민화가 본래 목적이었죠. 자신을 아프리카에 서구의 기독 문명을 전파하는 박애주의자로 포장하고 국제 학술회의를 개최해 이를 선전합니다.    
  
주도면밀하게 의도를 위장한 덕분에 그는 쉽게 콩고를 손에 넣었습니다마침 강대국 영국과 프랑스의 충돌을 막아줄 완충지가 필요했던 국제사회의 이해관계도 그를 도왔습니다.    


콩고 지배권을 인정받은 레오폴드 2세는 1885 공식적으로 콩고자유국가(Congo Free State) 세우고 본격적인 식민지 개척을 시작합니다

 

▲레오폴드 2세의 사유지였던 자유콩고국가의 지도.

 

레오폴드 2세의 콩고는 보통의 제국주의 식민지와는 달랐습니다 


벨기에 정부는 통치에 관여하지 않았고, 그는 개인 자격으로 콩고의 땅과 원주민을 소유했습니다벨기에 면적의 75배에 이르는 거대한 영토가 역사상 유례없는 사유지가 겁니다.  

 

역사상 유례 없는 개인 소유 식민지

그는 벨기에 정부로부터 돈을 빌려가며 콩고 개발에 나섰습니다. 수탈을 통해 얻은 이익은 당연히 레오폴드 2세의 개인 재산이 됐습니다‘콩고 개발업자’나 다름없던 레오폴드 2세는 실제 자신을 ‘소유주(proprietor)’라 불렀다고 합니다 
  
수탈 대상은 상아였습니다. 그러나 상아로 얻을 있는 수익은 기대에 미쳤습니다.  


때마침 고무 타이어를 사용한 자전거가 발명됐고, 자동차 산업이 폭발적으로 성장합니다. 고무 수요가 폭증하면서 국토 절반을 고무나무가 덮고 있던 콩고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됩니다.  
  
그는 원주민을 모조리 고무 생산에 투입합니다. 밀림에서 맨몸으로 고무를 채취하는 일은 그야말로 사람을 갈아 넣는 노동입니다. 레오폴드 2세는 주저하는 원주민을 밀림으로 밀어 넣기 위해 악랄한 수법을 동원합니다.  


원주민의 아내나 딸을 감금해놓고 고무를 가져오면 풀어주겠다고 협박하는가 하면, 강제노동을 거부하는 마을은 몰살시킵니다.   

 

수탈과 학살지옥으로 변한 콩고

▲손목이 잘려나간 콩고인들의 모습은 레오폴드2세의 잔혹성을 상징하는 이미지가 됐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손목을 잘라낸 잔혹한 행위는 특히 악명 높았는데, 손이 절단된 뭉툭한 팔목을 가진 원주민들의 모습이 레오폴드 2세의 폭정을 상징하는 대표 이미지가 됐을 정도입니다. 
  
그는 고무 할당량을 맞추지 못하면 목숨으로 갚도록 했고, 이들을 처형하는 용병에게는 총알을 낭비하지 않았다는 시신에서 잘라낸 손으로 증명하도록 했습니다. 총알이 빗맞는 실수를 했을 , 용병들은 살아있는 사람들의 손목을 자르기 시작했습니다. 잘라낸 손이 용병들의 성과로 평가되면서, 바구니 가득 잘린 손을 담아 다녔다는 목격담이 나오기도 했죠.  


인정사정없는 착취와 수탈, 극악무도한 살육으로 콩고는 지옥이 됐습니다.  
  
이렇게 콩고를 착취해서 레오폴드 2세는 막대한 수익을 올립니다


1998 역사저술가인 아담 호크실드가 펴낸 『레오폴드 왕의 유령(King Leopold's Ghost) 소개한 뉴욕타임스(NYT) 기사는 레오폴드 2세가 거둔 수익이 2 2000 프랑, 현재 가치로 11 달러( 1 1000억원) 추정된다고 전했습니다

 

콩고 착취해 현재 가치 1조원 수익 

▲벨기에 브뤼셀에 있는 레오폴드 2세의 동상. [위키피디아]

 

호크실드의 책에 따르면 레오폴드 2세는 수익 일부를 아끼던 정부(情婦) 캐롤라인에게 저택과 값비싼 드레스를 사주는 데 사용했습니다. 


제국을 꿈꾼 군주답게 과시적인 건축사업에 몰두했습니다어찌나 건물을 지어댔는지건축왕이란 별명을 얻었을 정도입니다
  
그래서인지 히틀러에 맞먹는 학살자로 역사에 기록됐는데도 벨기에에선 그에 대한 평가가 나쁘지 않습니다. ‘건축왕덕분에 벨기에는 19세기 아르누보의 중심지가 됐을 아니라, 대대손손 자랑할만한 아름다운 유산을 갖게 됐기 때문입니다. 

 

▲벨기에 브뤼셀에 있는 생캉트네르 공원의 개선문. 레오폴드 2세는 콩고에서 거둔 이익을 건축 사업에 쏟아부었다. [위키피디아]

 

▲벨기에 라켄에 있는 국립 왕실 온실. 레오폴드 2세의 명으로 건설됐다. [벨기에 플랑드르 관광청 홈페이지]

 

어쨌든 극악무도한 행위는 곧 선교사 등을 통해 콩고 밖으로도 알려지게 됐습니다. 레오폴드 2세를 향한 국제사회의 거센 비판이 일었습니다. 훨씬 거대한 식민지를 착취·수탈한 영국 등 제국주의 열강조차 레오폴드 2세의 잔혹성에 혀를 내두르며 비난에 가세했습니다. 마크 트웨인과 코넌 도일 등 유명 인사들도 나섰고요. 
  
사태를 방관하던 벨기에 정부는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콩고를 식민지로 병합하기로 결정합니다. 1908 마침내 콩고자유국가는 사라집니다

 

23 지배 1000 인구 감소 추정 

레오폴드 2세가 콩고를 지배한 기간은 20년 남짓입니다. 그 기간 콩고에서 약 1000만 명이 숨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당시 공식 통계가 없어 이는 역산한 수치입니다 


각종 기록을 종합하면 1885~1908 콩고 인구의 절반이 사라진 것으로 추정되는데,1924 최초로 실시된 인구조사 결과 콩고 인구가 1000 명으로 집계됐다는 겁니다

▲레오폴드 2세를 뱀으로 묘사한 1906년 삽화.

 

▲1998년 출간된 『레오폴드 왕의 유령』표지.

 

호크실드는『레오폴드 왕의 유령』에서 ‘1000만 대학살’의 원인은 복합적이라고 분석했습니다. 살해당한 자들뿐 아니라, 질병과 기아로 사망한 원주민도 이 숫자 안에 포함된다는 거죠또 가혹한 착취로 인해 이 기간에 출산율이 급감한 것 역시 콩고 인구를 급감시킨 원인으로 꼽힙니다 
  
레오폴드 2세는 끝까지 콩고에서 벌어진 학살을 몰랐다고 잡아뗐다고 합니다.  


콩고에서 저지른 일을 묻어버리려 애쓰기도 했죠. 벨기에 정부가 콩고를 병합한 , 레오폴드 2세의 궁전 소각로는 8 동안 연기가 피어올랐습니다. 콩고와 관련된 모든 자료를 불태워 없애버린 겁니다. 이때 그가 이런 말을 했다고 전해집니다.  


나의 콩고를 그들(벨기에 정부)에게 넘기지만, 그들에게 내가 무슨 일을 했는지 권리는 없다” 
  
콩고를 넘긴 이듬해인 1908 레오폴드 2세는 사망합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50 년이 흐른 1960년에야 콩고는 벨기에에서 독립합니다.  
  
벨기에 정부는 2002 콩고에 사과했습니다. ()소련 성향을 보였던 독립 영웅이자 초대 총리 파트리스 루뭄바 피살을 묵인한 대한 사죄였습니다. 외에도 몇몇 정치인들이 벨기에의 식민 통치에 대한 유감을 표명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1908 콩고를 합병하기 , 레오폴드 2세가 저지른 대학살에 대한 입장은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정부가 개입하지 않은, 사유지에서 개인이 저지른 학살은 벨기에와 무관하다. 책임지거나 사과할 필요 없다 여론도 적지 않고요


벨기에가거대한 망각(The Great Forgetting)’ 빠져 있다는 비판을 받는 까닭입니다.

 

◆02.20 "결혼에 대해  생각할래" 공주 혼인 연기로 불붙는 日왕실 승계 논란

“그의 태양처럼 밝은 미소에 반했어요.   
공주는 나를 달처럼 조용히 지켜주시는 분입니다.”   

달달한  사랑 고백이 지난  가을 일본인들을 흐뭇하게 했습니다. 아키히토(明仁ㆍ85) 일왕의 맏손녀인 마코(眞子ㆍ27) 공주가 도쿄 국제기독교대 1학년  만난 대학 동기 고무로 게이(小室圭ㆍ27) 결혼을 하겠다고 발표한 자리에서 나온 이야기입니다. 2005 일왕의  사야코(淸子) 공주의 결혼 이후 오랜만의 왕실 결혼인데다, 대학 시절 만나 사랑을 키워  소박한 러브 스토리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아키히토 일왕의 큰손녀 마코 공주(오른쪽)가 대학 동기 회사원 고무로 게이와 결혼을 발표하고 있다. [AP=연합뉴스]

  
그런데, 올해 2  마코 공주는 돌연 결혼식 연기를 발표합니다. 올해 11월로 예정됐던 결혼식을 2 후인 2020년으로 미루기로  겁니다

 
가을까지 결혼 준비를 하기에는 시간적 여유가 부족하다고 판단했습니다. 결혼에 대해   깊고 구체적으로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천재지변 등의 뚜렷한 이유도 없이 공주의 결혼이 갑자기 연기되면서, 일본에선 이런저런 소문이 무성합니다. 이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아키히토 일왕이 2016 건강 문제 등을 이유로 생전에 퇴위하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퇴위식이 2019 4월로 예정된 상황이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나옵니다. 왕실의  행사들을 마치고 차분한 분위기에서 식을 올리는  낫다고 판단했다는 겁니다.  

 

약혼자 어머니의 ...가정 문제가 원인?

하지만 일본 언론들은 약혼자 고무로 가정의 경제적 상황이 결혼을 연기하는   원인이 되었을 거라 보고 있습니다. 고무로는 대학을 졸업한  미국 유학을 다녀와 지금은 일본의  법률 회사에서 사무직으로 일하고 있는 회사원입니다. 안정적으로 직장을 다니고 있지만 집안은 유복한 편이 아니라고 합니다.  
  
주간여성’ ‘주간문춘  일본 주간지들은 지난해 마코 공주의 결혼 발표가 나온 후부터 고무로 모친인 고무로 가요(佳代) 금전 문제 집중적으로 파헤치고 있습니다. 2002 남편과 사별한 고무로의 모친이 2010년부터 교제했던 남성에게 수년에 걸쳐 400만엔( 4000만원) 빌렸다는 것이죠. 이를 아들의 학비나 유학 비용으로 사용했습니다.   

▲2019년 퇴위를 발표한 아키히토 일왕 부부. [AP=연합뉴스]

  
상대 남성은 헤어진  돈을 갚으라 요구했지만, 고무로의 어머니는 빌려준  아니라 증여로 생각했다 변제를 거부했습니다. 이와 함께 고무로의 아버지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 고무로의 어머니가 신흥 종교 신도라는 내용  내밀한 가정사가 연이어 보도되면서 공주가 이렇게 복잡한 집안과 혼인하는  대한 국민들의 불안이 높아졌습니다. 게다가 고무로의 모친이 금전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왕실에 경제적 지원을 요청했다는 보도까지 나왔죠. 일본 왕실을 전문으로 취재하는 저널리스트 치카시게 유키야(近重幸哉)씨는 일본 아메바TV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고무로 씨는 누구에게나 좋은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같지만, 그의 가족들에게 불거진 문제가 이런 이미지를 해치고 있습니다. 일본인들의 관심과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마코 공주는 이런 문제들을 원만히 해결하고 국민들을 안심시킨  결혼하는 것이 좋지 않겠냐고 판단한  합니다.” 논란이 가시지 않을 경우, 결혼을 취소하는  아니냐는 추측도 조심스럽게 나오고 있습니다

부계 승계만 인정하는 황실전범(皇室典範)’. 여성은 일반인과 결혼하면 왕족 지위 박탈  

국민들이 마코 공주의 결혼 이후 생활에 대해 걱정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일왕가의 규칙·제도 등을 정한 법률인 황실전범(皇室典範)’ 따라 일본 왕실 여성은 일반인 남성과 결혼하면 왕족의 지위를 잃게 됩니다.(남성은 결혼 후에도 왕족 신분이 유지되고, 배우자 역시 왕족이 되죠.) 성을 남편의 성으로 바꿔야 하고, 왕족에게 주어지는 혜택도 받을  없습니다. 고무로의 연봉은 200만엔( 2000만원) 정도로 알려져 있는데, 도쿄대 종합연구박물관에서 특임연구원으로 일하는 공주의 수입을 더한다 하더라도 윤택한 생활은 힘들 것이라는 우려가 나옵니다.  

▲일본 궁내청이 2016년 11월 28일 공개한 일본 왕실 단체사진. 아랫줄 가운데 아키히토 일왕 부부 왼쪽으로 아키히토의 장남인 나루히토 왕세자 부부, 오른쪽으로 차남인 후미히토 왕자 부부가 앉아있다. 윗줄 맨 왼쪽부터 후미히토의 장녀인 마코 공주, 그 옆으로 나루히토의 외동딸인 아이코 공주, 그 옆으로 후미히토의 막내 아들인 히사히토 왕자 및 차녀인 가코 공주가 있다. [뉴시스]

  
물론 과거 왕족으로서의 품위 유지 위한 돈을 받게 됩니다. 아사히 신문에 따르면 황실경제법에 따라 결혼하는 공주들에게는 왕족 1인에게 배정된 연간 예산의 10배를 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일시불로 축하금이 지급됩니다. 마코 공주의 경우 그동안 기준 금액이 연간 1525만엔( 1 5000만원)이었으므로, 최대 1 5250만엔( 15억원) 돈을 받게  것으로 보입니다.   
  

▲히사히토 왕자가 태어나기 전의 일본 왕실 가족사진.

  
마코 공주의 결혼 문제를 바라보는 일본인들의 불안감은 일본 사회의 해묵은 논쟁에 다시 불을 지피고 있습니다. 바로 여계(女系) 일왕 인정하는 문제입니다. 법을 고쳐 왕실의 여성들이 결혼을 해도 왕족의 신분을 유지하며 궁가(宮家·미야케) 이룰  있도록 하고, 이들의 후손에게도 왕위를 물려주자는 것이죠. 앞에서 말했듯 황실전범 아버지로부터 혈통을 이어받은 남성인 남계남자(男系男子)’ 왕위에 오를  있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일본 왕실을 설명할  종종 등장하는 만세일계(萬世一系)’라는 말은 일본 왕실이 이렇게 부계 혈통으로만 현재의 125대까지 이어져 왔음을 자랑스러워하는 표현입니다.     

 

40 넘게 딸만 태어난 왕실... 끊길 위험  앞에 

  문제는 남계남자의 원칙을 적용할 경우 현재 일본 왕실에 왕위를 물려받을  있는 남성이 너무 적다는 것입니다. 현재 일본 왕족은  19명인데,   14명이 여성입니다. 왕족 남성 5  아키히토 일왕과 그의 유일한 남동생 마사히토(正仁) 친왕은 80대의 고령입니다. 게다가 마사히토 친왕에겐 자녀가 없습니다. 아키히토 일왕의 숙부인 다카히토(崇仁) 친왕(2016 별세) 자녀들도 딸만 낳거나 결혼을 하지 않아,  집안에도 왕위 계승 후보가  남성이 없습니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아키히토 일왕의  아들인 나루히토(德仁ㆍ58) 왕세자와 후미히토(文仁ㆍ53) 왕자가 현재 왕위 계승 순위 1, 2위입니다.    아들 나루히토 왕세자에겐  아이코(愛子ㆍ17) 공주가 있고, 후미히토 왕자는 이번에 결혼을 연기한 마코 공주와 가코(佳子ㆍ24) 공주, 그리고 2006 태어난 히사히토(悠仁) 왕자를 두고 있습니다.  
  
가코 공주에 이어 집안의 미혼 여성들이 모두 결혼을  왕적이 사라지면, 왕실에 50 이하 왕족은 히사히토 왕자 혼자만 남게  가능성이 큽니다. , 현재 12살인 히사히토 왕자에게서 이후 아들이 태어나지 않을 경우,  그대로 왕실의 대가 끊기는’ 상황에 처한 것입니다. 

 

2 세계대전 종전  왕실 대폭 축소

 이렇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려면 과거로 돌아가야 합니다. 2 세계대전이 끝나기 전까지 일본에는 여러 분파의 왕족들이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의 아들의 아들의 아들 이어지는 부계 왕위 승계에  문제가 없었죠. 하지만 일본이 전쟁에서 패하고 1946 왕이 인간선언 하면서 1947 1 왕실의 축소를 골자로 하는 황실전범 제정됩니다.  법으로 다이쇼(大正) 일왕 직계 자손을 제외한 11 분파 51명의 왕족이 신분을 잃고 민간인이 되었습니다. 이와 함께 일부일처제의 도입으로 왕실의 후궁 제도가 폐지되면서 출산 역시 급격하게 줄어들죠.   
  

▲나루히토 왕세자의 55세 생일 기념해 방송에 출연한 일본 왕세자 가족. [방송캡처]

  
히사히토 왕자가 태어나기 전인 2000년대 초반, 당시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 총리는 직면한 왕실 승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성 일왕을 인정하고 여계 자손에게도 왕위를 승계하는 방향의 황실전범 개정을 진지하게 검토했습니다. 여성 일왕, 여계 일왕이 인정되면 나루히토 왕세자의  아이코 공주가 왕위를 물려받을  있고,  자녀가 계속해서 왕위를 이어갈  있게 됩니다. 그러나 보수층의 반대 시위가 이어지는  찬반이 팽팽하게 맞선 가운데 2006 9 히사히토 왕자의 탄생으로 논의는 흐지부지되고 맙니다.  

시대에 뒤쳐진  바꿔야”..아베 총리는 반대

  그런데 최근 아키히토 일왕의 조기 퇴위 발표와 마코 공주의 결혼 소식이 나오면서 이번 기회에 시대에 맞지 않는 법안을 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습니다. 집권 자민당의 니카이 도시히로(二階俊博) 간사장도  방송에서 여성 존중 시대에 일왕가의 남계남자 계승 원칙은 시대에 뒤쳐진 이라고 말한  있습니다. 그러나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를 중심으로  보수 진영은 만세일계의 전통을 깨서는 안된다 굳건하게 반대하고 있는 입장입니다.   
  

▲일본 궁내청이 공개한 일본 후미히토 왕자의 가족사진.

  
국민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요미우리 신문이 2016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황실전범 개정해 여성 일왕을 인정하는 것에 찬성한다고 밝힌 응답자가 72% 달했습니다.  여성 왕족이 결혼 후에도 궁가 이뤄 왕족의 신분을 유지할  있도록 해야 한다는 데도 64% 찬성했죠.  
  
2016년에는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가 일왕의 왕위 계승권을 남자, 남계 왕족에게만 주는 것은 여성 차별이라는 내용의 성명서를 만들었다가 일본 정부의 강력한 반발로 채택이 무산된 적도 있었습니다. 당시 일본 정부는 “(황실전범은) 차별을 목적으로 하지 않으며 위원회가 우리 왕실 규정에 대해서 거론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입장을 밝혔죠.   
  
시대는 변한  오래인데, 일본 왕실은 아직   과거에 머물고 있는 형국입니다. 국민 대다수의 평등 의식에도, 글로벌 스탠더드에도 맞지 않는 일본 왕실의 계승 문제, 과연 이번에는 달라질  있을까요. 아키히토 일왕 퇴위를 계기로 왕실 관련 법안을 대폭  봐야 한다는 의견을 무시하고 국회에서 제정한 특별법 형식으로  사안을 처리하려는 아베 정부의 움직임을 보면, 변화는 쉽지 않을  같습니다.     
이영희 기자 misquick@joongang.co.kr   


◇일본에는 여성 왕이 있었다!

잠깐.  기사를 읽고 의문이 드셨을  모르겠습니다. 일본 역사에는 여성 일왕이 실재했다. 그런데 여자가 왕이   없다니 무슨 소리인가.  

사실입니다. 일본에는 여성이 왕이  적이 있었습니다. 35대와 37대에 연이어  번을 재위한 고교쿠 일왕(皇極天皇, 594~661·그림) 포함해  8명의 여성 일왕이 존재했습니다

하지만 역사가들은 이들이 어린 아들을 대신해 왕위에 오르는  임시 재위의 성격이 강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 역시 부계로 탄생한,  아버지 쪽이 왕족인 여성들이었죠.  이들은 다른 왕족 남성과 결혼했기 때문에 뒤를 이은 왕들 역시 남계 계승 이어가게 됩니다. 
  
 여성 일왕과 여계 일왕 제도는 구분되어 논의되어야  문제입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왕족이 극소수에, 왕족끼리의 결혼이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에서  문제를 분리하는 것은  의미가 없어 보입니다. 


◆03.12 네팔왕조 몰락 부른 '궁중 대학살'  뒤엔 왕자의 이룰  없는 사랑

힌두교 신자들은 창조신 브라마, 보호신 비슈누, 파괴신 시바를 가장 위대한 신으로 꼽습니다. 힌두교 왕국이었던 네팔에서 국왕은 비슈누의 환생으로 존경을 받았고요. 그러나 2001 비슈누의 화신은 왕궁에서 죽음을 맞습니다. 이후 왕조도 몰락의 길을 걷죠.  


이번 [알쓸로얄] 2008 막을 내린 네팔의 왕조 이야기입니다.  
  
2007 10 네팔은 500루피권 지폐를 새로 발행했습니다. 구권의 앞면에 그려진 갸넨드라 국왕의 초상화가 신권에서 에베레스트 산의 이미지로 교체됐죠. 이듬해엔 모든 권종의 지폐가 새로 나왔습니다.  
  
네덜란드 중앙은행이 발표한 논문 지폐 정체성 디자인 따르면 발행국의 정체성은 지폐 디자인의 주요 요소입니다. 네팔이 지폐에서 국왕을 지우고 에베레스트를 넣은  역시 국가 정체성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이었죠


바로 왕정 폐지와 공화정 수립입니다.  
  
2008 5 네팔 의회는 왕정 폐지와 공화정 도입을 내용으로 하는 결의안을 채택했습니다. 의회는 갸넨드라 국왕에게 수도 카트만두의 왕궁을 떠나라는 요구도 했습니다. 나라얀히티 왕궁은 국유화되어 박물관이 됐고, 국왕은 평민으로 격하됐습니다.   


1768 소왕국들을 제압해 네팔을 통일한 (Shah) 왕조 239 만에 막을 내린 겁니다.  

 

왕조의 종말을 불러온 피의 만찬

▲비운의 네팔 왕가 가족사진. 앞줄 왼쪽은 비롄드라 국왕, 오른쪽은 아이스와랴 왕비. 뒷줄은 왼쪽부터 쉬루티 공주, 디펜드라 왕세자, 니라잔 왕자. [중앙포토]

 

네팔 왕실은 비교적 국민의 신망을 얻었습니다 
비렌드라 국왕이 네팔 민주화의 물꼬를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1972 27세에 네팔의 열번  국왕이  그는 한동안 전제 군주로 군림했지만, 1990 민주화 시위가 발발하자 스스로 권력을 포기하고 입헌군주제를 도입했습니다힌두교의 삼위일체신  둘째인 비슈누의 화신으로 국민의 추앙도 받았죠.   
  
왕실은 그러나 2001 벌어진 ‘피의 만찬으로 몰락의 길을 걷습니다.  
그해 6 나라얀히티 왕궁의 만찬장. 매달 국왕이 주재하는 왕실 일가의 저녁 모임이 열렸습니다. 비렌드라 국왕과 아이스와랴 왕비, 디펜드라 왕세자, 니라잔 왕자, 쉬루티 공주, 그리고 비렌드라 국왕의 누이 등이 참석했죠
  
 자리에서 무차별 총격이 벌어집니다. 유혈극의 장본인은 디펜드라 왕세자. 당시 현지 언론에 따르면 만취한 왕세자가 왕비의 꾸중을 듣고는 격분해 가족을 향해 자동소총을 난사했다고 합니다. 왕세자는 자살을 기도했죠.  


국왕 부처  8명은 현장에서 즉사했고, 뇌사 상태에 빠졌던 왕세자는 사흘  병원에서 사망했습니다. 왕실 일가족이 몰살하는 대참극이 벌어진 겁니다

 

▲네팔 왕실 살인극의 장본인인 디펜드라 왕세자와 그의 연인 데브야니. [중앙포토]

 

전대미문의 살인극은 왕세자의 결혼 문제에서 비롯됐습니다사건을 조사한 왕립 조사위원회가 훗날 발표한 결론도 “왕세자가 결혼에 반대하는 국왕 내외와 갈등을 빚다 일으킨 사건”이었죠
  
왕세자는 네팔 유력 정치인의 딸인 데브야니 라나와 사랑에 빠져 비밀 결혼식까지 올렸습니다. 하지만 끝내 부모의 허락을 얻지 못했다고 합니다.  


혼사를 둘러싼 갈등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국왕이 왕세자 대신 차남인 니라잔 왕자에게 양위하겠다는 뜻을 밝혔을 정도였습니다

 

결혼 반대 부닥치자 가족 몰살

▲네팔 국기.

 

결혼 반대의 원인은 분분합니다 


당시 현지 언론엔 독실한 힌두교 신자였던 아이스와랴 왕비가 “왕세자가 35 전에 결혼하면 국왕이 비명횡사한다 점성술사의 말을 믿고 결혼을 강력히 반대했다고 보도됐습니다. 사건 당시 왕세자는 30세였죠.  
  
신붓감의 가문이 문제였다는 설도 있습니다

 
라나 가문은 네팔 총리를 세습해  명문가입니다. 아버지는 외무·재무장관을 지냈습니다. 그러나 왕실 가문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죠 아이스와랴 왕비가 신붓감 어머니의 낮은 신분을 문제 삼았다고 합니다. 데브야니의 어머니는 인도 중부 마드야 프라데시의 왕족 출신이었습니다.  
  
아이스와랴 왕비가 마음에 두고 있던 며느리감이 따로 있었다고도 합니다


왕세자가 결혼은 왕비가 정해준 신붓감과 하는 대신 데브야니를 정부(情婦) 삼는 절충안 마련해 부모를 설득했지만, 데브야니가 거부했고 참극으로 이어졌다는 보도도 나왔죠
  
권력 다툼이 참극의 원인이라는 분석도 있었습니다

입헌군주국이  뒤에도 네팔은 의회를 중심으로  민주화 세력과 왕권 강화를 도모하는 왕실 세력의 알력으로 몸살을 앓았습니다. 이런 갈등이 왕실 내부에서 격화돼 살인극으로 이어졌을 것이란 추정입니다.  


영국 이튼칼리지와 미국 하버드대에서 유학한 디펜드라 왕세자가 민주 세력에 우호적인데 반해, 왕실의 실력자였던 왕비는 보수의 대변자였다는 점이 이런 분석을 뒷받침합니다.  

 

▲왕정에서 공화국으로 바뀐 뒤 국왕 초상을 에베레스트 이미지로 교체한 네팔. [중앙포토

 

 

참극에 뒤이은 폭정왕실, 자멸의 길로 

▲네팔의 마지막 왕, 갸넨드라 전 국왕. [중앙포토]

 

참극 이후 왕권은 비렌드라 국왕의 동생인 갸넨드라가 물려받았습니다. 마침 해외출장 중이라 죽음을 모면한 탓에 그가 사건을 사주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그다지 신뢰받지는 못하는 음모론입니다. 
  
갑자기 즉위한 그는 폭정을 시작했습니다. 선출직 총리를 해임하는가 하면 헌법을 바꿔 전제정치를 부활시켰습니다. 비상계엄을 선포해 전권을 장악하고, 축재와 공포정치를 일삼았습니다.   


갸넨드라 국왕은  비렌드라가 마오이스트 반군과의 협상으로 간신히 얻은 평화마저 깨뜨렸습니다


1996 왕정 폐지를 내세우며 내전을 시작한 마오이스트 반군은 국토의 상당 부분을 장악하고, 인구 대부분을 차지하는 농민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죠

 
갸넨드라 국왕은 협상 대신 제압을 선택해 내전을 격화시켰습니다.  
  
국민만 고통받는 상황이 이어지자 야당 연합과 마오이스트 반군이 손을 잡았습니다. 이들이 주도하는 민주화 시위가 시작됐고, 정부의 강경 진압은 민주화를 향한 열망에 불을 지폈습니다. 미국  국제사회도 네팔 정부를 압박했습니다갸넨드라가 스스로 자멸의 길로 들어선 겁니다.   

 

쫓겨난 前국왕, 왕정복고에 아직도 미련

▲2001년 네팔 왕족 피살 사건이 벌어진 카트만두의 나라얀히티 궁전, 현재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위키피디아]

 

갸넨드라는 두 손을 들고 맙니다. 국회를 복원하고 권력 이양을 발표했습니다.   


마오이스트 반군은 정부와 내전 종식을 위한 회담을 시작했습니다. 왕정 폐지도 밀어붙였습니다. 정부와 의회는 왕조의 239 역사를 계승해 입헌군주국으로서 민주주의를 강화하자고 했지만, 반군은 “다시 게릴라가 되어 앞으로 40년간  싸울 수도 있다 배수진을 쳤습니다.  


결국 네팔은 연방민주공화국으로 재출범하고 2008 4 제헌의회 선거를 치렀습니다.  
  
 모든 사건의 주요 인물들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요

갸넨드라 국왕은 상당히 안온한 여생을 보내고 있습니다. 폐위되고 재산이 몰수되긴 했지만, 네팔에서 잘살고 있으니까요. 보통 쫓겨난 왕들이 죽음을 맞거나 해외를 떠도는 신세가 되는  비하면 해피엔딩입니다
  
물론 본인은 불만이 가득합니다. 호시탐탐 왕정복고를 노리며 2012 방송 인터뷰에선 왕으로 복귀하겠다 선언하기도 했죠.  


그렇다고 구체적 행동을 하는  아닙니다. “국민투표를 통해 왕정 복귀에 대한 여론을 물을  있는  아니냐 물음에 그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폐지할  국민에게 묻지 않았으니, 내가 돌아가는 것에 대해서도 물을 필요가 없다 

 

비극 원인이  비련의 여인  인생

▲네팔 왕조의 몰락을 초래한 2001년 왕실 살인극의 원인이 된 데브야니 라나의 결혼식. 그는 2007년 인도 유력 정치인의 손자와 결혼했다. [중앙포토]

 

왕실 몰락의 원인을 제공한 데브야니는 어떨까요.

사건이 발생한 다음  신변안전을 위해 인도로 도피한 그는 7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야 네팔에 돌아왔습니다. 2008 4 제헌의회 총선에 출마한 아버지의 선거운동을 돕기 위해서였습니다.  
  
 사이 그는 영국의 런던정치경제대학(LSE)에서 학위를 취득하고 유엔개발계획(UNDP)에서 일을 시작했습니다. 인도의 사업가이자 유력 정치인의 손자인 남성과 결혼도 했습니다당시 인도 총리와 정관계 고위인사  하객 5000명이 참석한 성대한 결혼식이었습니다.  
  
2008 4월엔 영국의 더타임스와 사건 이후 처음 인터뷰도 했습니다. “멋지고 이해심 깊은 남편과 결혼했다” “유엔에서 일하며 배운 것들로 네팔을 돕고 싶다  그는 과거의 비극을 완전히 떨쳐낸  행복과 희망으로 가득  있었습니다. “운명은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라 믿는다 강한 의지도 보였습니다.  
  
그는   사건이 아니었다면 역사가 바뀌었을지 모른다 “정치인이 아니라 국민에 의해서 (네팔에선)  많은 것이 이뤄져야 한다 발언도 했습니다. 그러나 정치에 직접 뛰어들 생각은 없다 선을 그었죠.
  
 인터뷰로부터  10지난해 2 인도 매체인 인디아 익스프레스엔 데브야니가 네팔 정치권에 뛰어들 것이란 보도도 나왔습니다.  


매체는 “(데브야니가) 네팔 정계에서의 역할을 고려하고 있다”며 “아버지가 소속된 ‘라스트리야 프라자탄트라당(RPP-N)’의 후보로 선거에 출마할 수 있다“고 전했습니다 

 

◆03.18  트레이너와 결혼한 스웨덴 공주, ‘육아 휴직’도 부부가 반반

▲2010 6 19(현지시간) 세기의 결혼식에 앞서 스웨덴 스톡홀름시내에서 마차를   지나가며 손을 흔드는 왕세녀 빅토리아와 남편 다니엘. [사진 위키피디아]

 

평창패럴림픽 참석차 내한한 빅토리아 왕세녀의 '평범한 결혼'

지난 14일 강원도 평창 패럴림픽 크로스컨트리 스키 남자 시각장애 경기에서 스웨덴 세바스티안 모딘 선수가 은메달을 따자 자기 일처럼 기뻐하는 한 여인이 카메라에 포착됐습니다. 현 국왕 칼 구스타프 16세의 맏딸 빅토리아(41) 왕세녀입니다. 빅토리아 왕세녀는 국제패럴림픽위원회(IPC) 집행위원으로서 내한해 선수단을 격려하고 응원했습니다.   
  
스웨덴은 부계 중심의 왕위 계승을 이어왔지만 1979 성별중립적 왕위 계승이 확립되면서 맏딸 빅토리아가   터울 남동생  필립 왕자를 제치고 1980 왕세녀로 책봉됐습니다. 이변이 없는  빅토리아는 1720 이래 처음으로 스웨덴의 여왕이  것입니다. [알쓸로얄- 보면  있는 로얄 이야기] 오늘은 국민과 친근한 입헌군주국 스웨덴의 왕실을 들여다보겠습니다
  

▲평창 동계 패럴림픽 참석차 내한한 스웨덴 빅토리아 왕세녀가 지난 14일 크로스컨트리스키 남자 1.5㎞ 스프린트 클래식 시각장애 경기에서 은메달을 딴 세바스티안 모딘 선수와 함께 환호하고 있다. [사진 스웨덴왕실]

 

대한민국에 ‘영미 열풍’을 불러일으킨 여자 컬링 대표팀 ‘팀 킴’이 세계 최강 스웨덴과 금메달을 놓고 맞붙은 결승전. 지난 225 TV 중계화면은 관중석에 패딩점퍼를 입은 한 노인을 연신 비추었습니다. 여느 스웨덴 응원단과 나란히 경기를 지켜본 이 노인은 스웨덴 국왕 칼 구스타프 16세였습니다. 그는 이후 다른 경기에서도 점퍼에 니트 모자 차림으로 고함을 치며 응원했고 선수들과 친근하게 기념사진을 찍곤 했습니다. 소탈하고 탈권위적인 스웨덴 왕실의 현재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는 장면이지요. 
  
스웨덴은 970  왕국이 수립된 이래 천년 동안 왕실이 이어졌고 19세기  헌법에 의해 입헌군주제를 단계적으로 도입했습니다. 1973 즉위한  구스타프 16세는 스웨덴 베르나도테 왕가의 일곱 번째 왕입니다. 이듬해인 74 새로운 정부조직법이 제정되면서 국왕의 정치불간섭이 명문화됐고 실질적 권리를 모두 의회로 넘긴 국왕은 이후 철저히 상징적인 존재로서 역할만 하고 있습니다

 

▲지난달 25일 강릉 컬링센터에서 열린 여자 컬링 결승전에서 칼 구스타프 16세 스웨덴 국왕(뒷줄 가운데)이 자국 선수들을 응원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취임 당시 구스타프 16세는 27세로 미혼이었습니다. 그는 왕세자 시절인 1972년 독일 뮌헨올림픽에 갔다가 3살 연상의 ‘평민’ 여성과 사랑에 빠졌습니다. 당시 통역·수행을 맡았던 실비아 조머라트입니다. 실비아는 독일인 아버지와 브라질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항공사 스튜어디스를 거쳐 뮌헨의 아르헨티나 영사관에서 근무하던 중이었습니다. 둘이 사귈 때만 해도 스웨덴 왕실엔 평민과 결혼하면 왕위 계승권을 박탈하는 규범이 존재했습니다.   
  
하지만 74 국왕의 실질적 권위를 모두 앗아간 새로운 헌법이 제정되면서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왕족이나 귀족이 아니어도 왕비가 되는  아무런 문제가 없게  겁니다. 구스타프 16세는 76 실비아와 웨딩마치를 울렸습니다.   
  

▲1976년 스웨덴 국왕 칼 구스타프 16세와 실비아 조머라트와의 결혼식 모습. [중앙포토]

 

공교롭게도 구스타프 16세의 12녀 모두가 평민과 결혼했습니다. 그 중 차기 국왕 자리를 찜한 빅토리아 공주는 2010년 헬스 트레이너 출신 다니엘 베스틀링과 결혼해 세계적 화제가 됐습니다. 칼 필립 왕자도 2015년 글래머 모델 출신인 소피아 헬키브스트와 결혼했고 차녀 마들렌 공주도 2013년 영국 태생의 미국인 금융인 크리스토퍼 오닐과 백년가약을 맺었습니다. 영국 윌리엄 왕세손이 케이트 미들턴과, 해리 왕자가 배우 출신 메건 마클과 결혼하면서 영국 왕족과 평민과의 러브스토리가 주목받았지만 왕실의 혼인 격식 파괴는 스웨덴 등 스칸디나비아 왕실이 훨씬 앞선다고 하겠습니다.   
  
빅토리아 왕세녀와 결혼  다니엘은 체육관을 경영하는 사업가로 소개됐지만 이는  년에 걸친 신분 세탁 결과였습니다. 외신에 따르면 빅토리아와 다니엘은 2002 스웨덴의 작은 마을 오켈보의  체육관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사람의 교제가 알려졌을  사람들은 평범한 중산층 가정 출신에다 야구모자를 즐겨쓰고 다니고 구수한 시골 사투리를 쓰는 다니엘을 두고 조롱했습니다. 국왕도 그가 차기 여왕이  딸의 배필로 맞지 않다고 봤습니다.

 

▲스웨덴 빅토리아 왕세녀와 2010년 세기의 결혼을 올린 다니엘. 왼쪽은 왕세녀와 만나기 전 야구모자를 쓰고 다니던 평범한 헬스트레이너 시절 모습. [중앙포토]

 

하지만 빅토리아가 고집을 꺾지 않자 국왕은 결국 교제를 허락합니다. 대신 그를 왕실 가족으로 만들기 위한 훈련에 착수했습니다. 머리를 짧게 깎고 전문 스타일리스트를 붙여 옷맵시를 다듬어줬습니다. 다니엘은 영어·프랑스어·독일어를 익히고 역사·정치학을 공부하는 등 교육을 받아 귀공자로 거듭났습니다. 2010년 각국 왕족을 포함해 수천명의 하객이 참석하고 수만명의 관중이 지켜본 두 사람의 결혼식은 ‘찰스-다이애나’ 이후 최대 규모의 ‘세기의 결혼’으로 회자됐습니다. 눈물 어린 성혼 서약과 함께 다니엘은 바스테르고틀랜드 공작이라는 작호를 받았습니다.   
  

▲스웨덴 왕세녀 빅토리아는 1990년대 중반 한동안 섭식장애를 겪은 것으로 알려진다. 그는 이후 인터뷰와 책을 통해 "당시엔 번민이 많았다. 내 생김새가 마음에 들지 않았고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내 인생을 통제하는 것 같았다"고 고백했다. [사진 인스타그램]

 

빅토리아는 어쩌다가 헬스 트레이너와 사랑에 빠진 걸까요. 이면엔 공주의 건강 문제가 있습니다. 빅토리아는 1996년 왕실 행사 때 예전과 달리 깡마른 모습으로 카메라에 포착돼 건강에 이상이 있는 게 아니냐는 우려를 불렀습니다. 이후 그가 섭식장애를 겪는다는 사실이 공공연히 알려졌고 공주는 주변의 시선을 부담스러워한 나머지 스웨덴 국내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미국 예일대로 진학했습니다. 미국에서 본격적인 치료와 운동을 한 뒤 귀국 후에도 꾸준히 건강 관리를 했고 이 과정에서 다니엘을 만난 것으로 보입니다.   
  
빅토리아는 이후 공식 인터뷰 등을 통해 매우 힘들었던 시기다. 당시엔 번민이 많았다.  생김새가 마음에 들지 않았고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인생을 통제하는  같았다 고백했습니다. 유럽 왕실 일원이 건강 이상을 공개적으로 인정한 매우 이례적인 사례로 꼽힙니다
 

공주를 평범하게 키우고 싶어하는 왕세녀 부부가 스웨덴의 평범한 부부와 같은 육아방식을 선택했다.”

2012 빅토리아 왕세녀의 육아 휴직 소식을 전한 스웨덴 언론의 보도 내용입니다. 빅토리아는 결혼 2 만에 첫딸 에스텔을 낳았습니다. 그러면서 왕세녀로서의 공식적인 대외업무를 중단하는 6개월 간의 출산·육아 휴가를 받았습니다. 6개월이 끝나자 이번엔 남편 다니엘 공작이 육아휴직을 받았습니다. 에스텔 공주는 공립 보육시설에 보내져서 스웨덴의 보통 아이처럼 어울렸습니다. 둘째 오스카 왕자가 태어났을 때도 마찬가지로 부부는 출산·육아 휴가를 번갈아 썼습니다. 

 

▲스웨덴 빅토리아 왕세녀와 남편 다니엘 바스테르고틀랜드 공작. 첫딸 에스텔 공주와 아들 오스카 왕자. [스웨덴 왕실]

 

▲헬스트레이너 출신인 다니엘 공작 뿐 아니라 빅토리아 왕세녀 자신도 스포츠를 즐기는 활달한 성격이다. 티레스타 국립공원에서 온 가족이 트레킹을 즐기는 모습. [사진 스웨덴왕실] 

 

이들의 출산·육아 휴직은 ‘평범한 스웨덴 직장인’의 권리입니다. 스웨덴은 자녀당 총 480일의 유급 육아휴직을 인정하는데, 이 중 90일은 아빠가 사용하지 않을 경우 소멸한다고 합니다. 390일간 임금의 80%가 육아휴직 급여로 지급됩니다. 이를 통해 스웨덴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최상위 출산율(2016년 합계출산율 1.85)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스웨덴은 2014년 기준 만 65세 이상의 노인인구가 184만명으로 전체인구(970만명) 중 약 20%에 이르는 초고령화 국가입니다. 초고령화·저출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내총생산(GDP) 2.9%를 양육지원예산으로 할당하고 있습니다.  

  
이런 복지제도를 향유하기 위해 스웨덴 국민들은 엄청난 세금을 부담합니다. 스웨덴의 개인 소득세율은 최저 30%, 최고 45%입니다. 연간 43 크로나( 5600만원) 이상을 벌면 최고 세율을 적용하고 아무리 적게 벌어도 30% 세금으로 냅니다. 하지만 국민들은 그만큼 되돌려 받는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높은 세율에 저항하지 않습니다.  

라르스 다니엘손  유럽연합(EU) 스웨덴 대사는 이런 선순환과 관련해 내가  세금이 제대로 쓰일 것이라는 믿음, 보육의 질이 좋을 것이라는 신뢰가 있어야 아이를 낳고 맡긴다 설명했습니다(2018 311 중앙선데이 인터뷰). 빅토리아 왕세녀 역시 이런 국민적 신뢰를 앞서서 실천하는 왕족의  사람입니다. ‘세금 낭비 논란이 없진 않지만 그럼에도 스웨덴 왕실이 국민의 높은 지지를 누리는 이유 역시 이런 믿음과 모범적인  평등 행보 때문일 겁니다.   

 

▲스웨덴 국왕 칼 구스타프 16세의 차녀 마들렌 공주의 2013년 결혼식. 신랑은 영국 출신의 미국 금융인 크리스토퍼 오닐이다. [AFP=연합뉴스] ◎

강혜란 기자 theother@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