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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스토리14/ 바이킹 국가 연구 - 유럽行 엑소더스 - 난민들의 눈물

상림은내고향 2022. 11. 19. 18:07

글로벌 스토리14/ 

■바이킹 국가 연구

조갑제 조선일보  2016.03.22

◆영웅들의 세계  '超一流의 産室' 

2010 11월 유엔개발기구(UNDP)가 발표한 2010년 세계 ‘삶의 질()’ 국가별 순위에서 한국은 스위스, 프랑스, 덴마크 같은 서방 선진국들을 제치고 169개국 중 12위로 수직상승하였다.   

▲가장 대표적인 롱십인 오제베르크 롱십


 
‘삶의 질’(Human Development Index) 평가는 교육수준, 평균수명, 국민소득(구매력 기준)을 합산하여 생활수준을 채점하는 방식이다. 법치(法治)나 안보(安保) 같은 요소는 직접 반영되지 않는다. 아시아 국가로선 한국이 11위인 일본 다음이었다. 노르웨이가 올해도 1등이었다. 한국은 오스트리아, 스페인, 이탈리아, 벨기에, 싱가포르, 영국보다도 앞섰다. 작년보다 14등이나 올랐다. 이는 금융위기로 유럽 나라들이 곤란을 당하고 있는 데 비하여 한국이 빠르게 회복했고, 국민소득을 구매력 기준으로 계산한 덕분인 듯하다. 구매력 기준 한국인의 1인당 소득은 29618달러로 평가되었다
  
 
한국이 높게 평가받은 가장 큰 이유는 교육열 때문이다. 국내에선 교육망국론(亡國論)이 드세지만 외국에선 한국의 교육열을 부러워한다. 구매력 기준으로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28위인데, 삶의 질 랭킹은 12위였다. 이는 한국이 소득수준에 비하여 교육과 의료가 좋다는 뜻이다. 북한은 통계부족으로 조사대상에 들지 못하였다
  
 
삶의 질 순위에서 늘 상위(上位)에 오르는 나라는 바이킹을 조상으로 하는 스칸디나비아(핀란드는 바이킹 나라가 아니지만 지리적으로 인접, 같은 문화권에 포함) 5개 국가이다. 이번에도 1위에 노르웨이, 9위에 스웨덴, 16위에 핀란드, 17위에 아이슬란드, 19위에 덴마크가 올랐다. 20위 안에 5개국이 다 들어감으로써 초일류(超一流)국가임을 다시 한번 실증(實證)한 것이다
  
  2011
8월 뉴스위크가 선정한 ‘이 나라에 태어나면 성공 가능성이 높은 나라 랭킹’에서도 북구(北歐) 4() 10위 안에 들었다. 1위 핀란드, 3위 스웨덴, 6위 노르웨이, 10위 덴마크.
  
 
세계에서 1인당 자산(資産)보유액이 가장 많은 나라는 노르웨이이다. 행복도가 가장 높은 나라는 덴마크. 고급문서 해독률이 가장 높은 나라는 스웨덴, 2위는 덴마크, 3위는 노르웨이, 6위는 핀란드. 국가경쟁력 순위는 덴마크가 5, 스웨덴이 6, 핀란드가 9, 노르웨이가 11. 공무원의 청렴도는 덴마크가 세계 2, 스웨덴이 4, 핀란드가 6, 노르웨이 11. 남녀평등 지수는 1위가 아이슬란드, 2위 핀란드, 3위 노르웨이, 4위 스웨덴, 7위 덴마크. 민주주의 성숙도는 1위가 스웨덴, 2위 노르웨이, 3위 아이슬란드, 5위 덴마크, 6위 핀란드이다. 정치, 경제, 교육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北歐의 바이킹 국가들이 늘 10위권(位圈)에 든다.
 

  
 
미국의 노르웨이 이민자들  

  스칸디나비아, 특히 노르웨이 이민자들은 미국에서도 사는 곳마다 좋은 환경을 만든다. 미국의 노르웨이 이민자(移民者)들은 약 460만명으로 본국(本國) 인구와 같다. 본국 인구보다 많은 미국 이민자를 낸 나라는 아일랜드뿐이다. 노르웨이 이민자들이 많이 사는 주()는 미네소타(16%), 노스다코타(30%), 사우스다코타(16%), 몬태나(12%), 위스콘신(9%)이다. 미국에서 만나는 백인 50명 중 한 명은 노르웨이 사람이다. 이들은 주로 중북부(中北部) 지방에 많이 산다
  
 
스칸디나비아 4개국 출신 이민자는 약 1200만명이다. 미네소타주는 스칸디나비아 출신들이 32%, 독일계가 38%이다. 미네소타는 주민들의 건강상태가 52개주 중 1등이라고 한다. 범죄발생률은 52개주 중 14번째로 낮은 편이다. 미국에서 ‘미네소타주 출신’이라면 모범생으로 통한다
  
 
노르웨이 사람들이 많이 사는 노스다코타는 범죄발생률이 52개주 중 세 번째로 낮다. 사우스다코타도 9, 위스콘신이 8, 몬태나주는 7위이다. 스칸디나비아 사람들은 미국에 와서도 본국처럼 호수가 많고 추운 州에 모여 산다. 미네소타주는 별명이 ‘1만 개의 호수를 가진 땅’이다. 노르웨이 이민자들은 모여 사는 경향이 강하고 문화적 전통을 이어가며 본국과 연계를 유지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스칸디나비아 3국은 6·25 남침 전쟁 때 우리에게 의료지원을 해준 나라이고 국립의료원을 지어주었다. 그뿐이 아니다. 1953년부터 2008년 사이 이루어진 한국 어린이의 해외입양 중 미국으로 입양된 수는 총 108222명으로 전체의 3분의 2를 구성하고, 그 다음이 프랑스 11165, 스웨덴 9297, 덴마크 8702, 노르웨이 6295명 순으로 나타나고 있다.

 

 다른 국적자를 포함하면 미국 다음으로 해외입양을 많이 받는 나라는 스웨덴이다. 세계 130개국에서 45000명을 입양했는데, 인구 비율로 보면 세계 최대 입양국이다. 미국 내에서도 스칸디나비아계() 미국인들이 해외입양을 많이 받는데, 미네소타주에는 15000~2만여 명의 한국 아동이 입양되었다. 이 수치는 미네소타주에 거주하는 한국인의 절반 수준에 달한다고 한다.   


 
스칸디나비아 3국의 인구는 합쳐서 2000만명 정도인데, 받아들인 한국 입양아들은 24300여 명이다. 노르웨이는 약 400명의 탈북자(脫北者)들을 수용, 정착시켰다. 한국인으로선 머리가 숙여질 따름이다.  

  
 
바이킹의 殉葬 풍속

덴마크 란겔란드의 무덤에서 발굴된 10세기 바이킹의 유골. 왼쪽은 주인, 오른쪽은 발목이 묶인 채 참수되어 묻힌 노예의 유골이다

 

야만과 문명(文明)의 한 척도는 높은 사람이 죽으면 노예나 종을 죽여 같이 묻는 순장(殉葬)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따르면 신라 지증왕은 서기 502년에 순장을 금()하는 명령을 내렸다. 바이킹은 유럽에서 가장 늦게까지 순장을 했다. 기독교를 가장 늦게 받아들인 것과 관련이 있다.  


 
이들의 순장 풍습에 대한 기록을 남긴 이는 이븐 파들란이라는 아랍인이다. 그는 992년 볼가강변(江邊)에서 목격한 러시아 부족장의 장례식을 생생하게 기록했다. 당시의 러시아는 스웨덴 바이킹이 슬라브족()을 정복하여 그 기초를 놓은 나라이다. 러시아란 국명(國名)도 ‘루스’라는 스웨덴 말에서 나왔다
  
 
한 바이킹 부족장(部族長)이 죽자 가족이 남녀 노예들(아마도 슬라브족이었을 것이다)을 모아놓고 “누가 따라 죽을래?”라고 묻는다. 한 여자 노예가 순장을 자원(自願)한다. 그때부터 다른 노예들은 이 여자를 감시한다. 생각이 바뀌어도 봐주지 않는다. 장례식까지 여인은 매일 술을 마시면서 노래를 부른다. 좋은 일을 기다리는 듯하다.   

 

  장례식 날, 사람들은 배를 강변에 끌어올려 놓는다. ‘죽음의 천사’란 별명을 가진 비대한 여자가 장례식을 주재한다. 땅에 묻어두었던 부족장의 시신(屍身)을 다시 꺼내와 옷을 입힌다. 배에 천막을 치고 그 안으로 시신을 가져가 안치(安置)한다. 마치 산 사람을 대하듯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시신 옆에 쌓아둔다.   

 

  사람들은 개와 닭을 잡아 고기를 배로 던진다. 따라 죽게 되어 있는 여인은 여기저기 쳐진 천막을 돌아다니면서 부족장의 부하들과 성교(性交)를 한다. 그들은 “주인에게 이야기하라. 주인에 대한 사랑의 표시로서 이렇게 한다고”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여인을 배로 데리고 간다. 여인은 목걸이를 벗어 ‘죽음의 천사’에게 준다. 많은 사람이 나무로 만든 방패를 들고 와서 여인을 에워싼다. 여인에게 술을 먹인다. 여인은 노래를 부른다. 통역자는 아랍인 이븐 파들란에게 “사람들에게 작별을 고하는 노래를 부르고 있다”고 말한다.   

 

  사람들이 방패를 두드리기 시작하였다. 여인의 비명을 구경꾼들이 듣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여섯 명의 남자가 배에 올라탄다. 여인을 부족장 시신 옆에 눕힌다. 남자들이, 여인의 두 팔과 다리를 붙든다. ‘죽음의 천사’가 여인의 목을 끈으로 맨다. 두 남자가 끈을 당겨 질식시키는 순간 ‘죽음의 천사’는 굵은 칼로 여인의 갈비뼈 사이를 여러 번 찌른다. 부족장과 가장 가까운 친척이 와서 배에 불을 지른다. 사람들이 차례로 불쏘시개를 배에 던진다. 배가 불길에 휩싸인다
  
 
이런 식의 순장이 사라진 것은 11세기 초 바이킹들 사이에 기독교가 확산되면서이다. 노예제도도 사라졌다. 기독교에 의한 문명화(文明化)가 시작된 것이다기독교를 가장 늦게 받아들인 바이킹족이지만 16세기 초 루터의 종교개혁이 일어나자 맨 먼저 신교(新敎)로 개종하였다.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사람들은 1530년대부터 루터교로 개종(改宗), 유럽 신교세력의 보루(堡壘)가 된다. 17세기 전반의 30년 종교전쟁 때 독일의 신교도를 구원한 것은 (프랑스의 후원을 받은) 스웨덴군()이었다
  

고크스타드에서 발굴된 롱십.  

 

  롱십(Long Ship) 

  서기 8~11세기는 이른바 바이킹 시대. 스칸디나비아에 살고 있던 바이킹이 인구증가, 농지부족 사태에 직면, 약탈에 나선다. 날렵하게 생긴 긴 배를 몰고 유럽을 공격, 정복, 정착해 간다. 프랑스의 노르망디, 이탈리아 남부와 시실리, 시리아 해안 지대, 러시아의 모태(母胎)가 되는 키예프, 그리고 영국, 아일랜드, 아이슬란드, 그린란드를 점령하였다. 오늘날의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아이슬란드는 바이킹족이 건설한 나라이다. 영국과 아일랜드도 바이킹의 영향이 많이 남아 있다. 11세기 후 영국 왕가(王家)는 바이킹족 출신인 정복왕 윌리엄 1세의 후손들이다.  


 
바이킹이 유럽으로 쳐들어갈 때나 그린란드와 북미(北美)대륙을 탐험할 때 사용한 배는 흔히 ‘롱십’(Long Ship)이라 불린다. 가늘고 긴 선체(船體)이다.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의 여러 박물관에서는 발굴된 배를 진열해 놓고 있다
  
 
가장 유명한 배는 노르웨이 오슬로에 있다. 오슬로 대학 부설 ‘바이킹 배 박물관’에 세 척의 롱십이 있다. 이 가운데서도 오제베르크 고분(古墳)에서 발굴된 배가 가장 유명하다. 바이킹 배를 설명할 때 보여주는 사진은 거의 이 배를 찍은 것이다. 길이 22m, 너비와 높이가 각 5m인데 원형(原型)대로 거의 보존되어 있다. 이 배가 발견된 고분에선 20() 60대의 여인 두개골도 나왔다.   

 

  2010 5월에 이 박물관에 갔을 때 세어보니, 배의 양쪽엔 15개씩 모두 30개의 노 젓는 구멍이 나 있었다. 30명이 노를 저었다는 이야기이다. 최고시속은 18km로 추정된다. 배는 참나무와 소나무가 재료이며, 목재(木材)에 고래기름을 발랐다. 서기 800년 전후(前後)에 만들어진 배라고 한다. 여자 유골이 있었다고 하여 ‘여왕의 배’로 불린다.   

 

  바이킹 배는 앞뒤가 없다. 약탈을 한 뒤 서둘러 돌아와 배를 돌리지 않고 빨리 도망갈 수 있게 한 것이다.   

 

  두 여인 중 한 명은 다른 한 명을 위하여 순장된 것으로 보이는데 어느 쪽인지는 알 수가 없다고 한다. 20대 여인의 염색체를 조사한 결과 이란인()을 조상으로 둔 것으로 추정되었다. 금속 이쑤시개를 쓴 것으로 나타났는데 이로 보아 상류층이었을 것이다. 60대 여인은 암()으로 죽었는데 호르몬 분비 장애를 겪어 남자처럼 보였을 것이라고 한다. 이들이 매장된 연도는 서기 834년으로 추정되었다. 열네 마리의 말과 소 및 개들의 뼈도 발굴되었다

 

  고크스타드에서 발굴된 배도 전시되어 있는데, 길이가 23.24m, 너비가 5.2m이다. 32명의 노 젓는 사람 등 40명이 정원이지만 70명까지 탈 수 있었다. 추정 최고속도는 시속 20km. 이 배의 복제판을 만들어 노르웨이의 베르겐에서 미국까지 항해한 적도 있다.    


 
덴마크 王家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왕가  

  1945년생인 필자 세대(世代)는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 덴마크에 대하여 좋은 이야기를 들으면서 컸다. 지금도 달가스, 그룬트비 같은 덴마크의 교육자와 농업운동가 이름을 기억하는 이들이 많다. 덴마크가 19세기 후반에 프러시아에 패전(敗戰)한 후 어떻게 국민정신을 바로 세워 나라를 재건(再建)하였는가, 잘사는 농촌을 어떻게 만들었는가? 교사들이 열정적으로 우리에게 가르쳤다. 서울농대 유달영(柳達永) 교수 같은 분들이 덴마크 이야기를 책으로 써 소개하기도 하였다. 5·16 군사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朴正熙) 정부도 농촌개발에 덴마크의 사례를 배우려 하였다.   

 

  그래서 덴마크는 농업국가, 평화로운 나라, 그러나 약한 나라로 알려졌지만, 유럽에서는 덴마크라고 하면 ‘무서운 바이킹의 나라’란 인상이 강하다. 8세기 말에서 11세기 말까지의 약 300년간 유럽 기독교 문명권을 강타한 해양(海洋)민족 바이킹족의 중심은 덴마크에 살던 바이킹이었다. 노르웨이 바이킹은 탐험과 개척, 덴마크 바이킹은 전쟁, 스웨덴 바이킹은 장사를 주()특기로 하였다
  
 
노르웨이 바이킹은 아일랜드, 영국을 침공하더니 아이슬란드, 그린란드를 개척하고 지금의 캐나다 동해안에까지 건너갔다. 아메리카 대륙을 처음 발견한 이는 콜럼버스가 아니라 바이킹이란 주장은 이제 정설(定說)이다. 바이킹은 그러나 아메리카 대륙에서 정착하지 않고 철수하였다

  

  덴마크 바이킹은 대부대를 조직, 정복에 나섰다. 유럽의 현존 王家 중 가장 오래된 이는 덴마크 이다. 965년 덴마크의 해롤드 왕()은 부하 바이킹들과 함께 원시(原始)신앙을 버리고 기독교로 개종했다. 그는 통일왕국을 건설해 노르웨이, 스웨덴 일부까지 통치하게 되었다. 자연히 동원력이 강해졌다

 

  이후 그들은 잉글랜드 정복에 주력(注力)하였다. 그 전 9세기 초부터 덴마크 바이킹들은 북해(北海)를 건너와 잉글랜드를 공격하기 시작, 동부지방을 점령하였다. 잉글랜드 사람들도 이에 대응, 뭉치기 시작하였다. 알프레드 대왕이 나타나 덴마크 바이킹들을 무찌르고 협상이 성립되었다. 잉글랜드의 동부지방 통치권을 바이킹에게 주는 대신에 바이킹들은 잉글랜드 왕에게 충성을 바치고 기독교로 개종하기로 하였다. 비슷한 시기 프랑스의 노르망디 지역을 점령한 바이킹과 프랑스 왕 사이에 맺어진 약속과 같은 조건이었다. 덴마크 바이킹에게 주어진 공국(公國)은 데인로(Danelaw)라고 불렸다
  
 
알프레드가 죽은 뒤 잉글랜드와 덴마크는 다시 전쟁에 들어갔다. 10세기 전반 잉글랜드는 바이킹들을 내몰고 실지(失地)를 수복하는 듯하였으나 덴마크 본국에서 대규모 원정군을 보냈다. 덴마크의 스벤 왕(해롤드 왕의 아들)은 북구의 강자(强者)였다. 그는 1014년에 잉글랜드를 완전히 정복하였다. 그의 아들 카누트는 ‘대왕’으로 불린다. 1017~1035년 사이 카누트 대왕은 지금의 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 일부, 그리고 영국(잉글랜드)으로 구성된 대제국(大帝國)을 다스린 사람이었다
  


 
영국王家도 바이킹系

영국을 정복한 노르망디공 윌리엄(왼쪽). 윌리엄 공이 해롤드 왕을 무찌른 헤이스팅스전투를 묘사한 태피스트리(걸개그림).


  카누트 대왕과 그의 아들이 죽자 잉글랜드를 다스리던 덴마크 바이킹은 잉글랜드의 왕위(王位)를 알프레드 왕의 후손 에드워드에게 물려주었다. 에드워드가 후계자 없이 죽자 노르웨이의 해롤드 할드라다 왕은 자신이 잉글랜드의 왕을 겸하고 싶어서 1066년 원정군을 보냈다. 도버 해협 건너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 공국(公國)의 윌리엄 공(그 또한 바이킹의 후손)도 왕이 되고 싶어 수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잉글랜드에 상륙하였다.  


 
영국 귀족을 대표한 색슨족 출신 해롤드는 먼저 노르웨이 원정군을 스탬포드 다리에서 맞아 전멸시키고 노르웨이 왕까지 죽였다. 잉글랜드군의 다음 상대는 노르망디에서 건너온 군대였다. 헤이스팅스에서 벌어진 결전에서는 노르망디의 윌리엄 공이 이겼다. 잉글랜드군은 강행군으로 너무 지쳐 있었다
  
 
윌리엄 공(영국왕으론 윌리엄 1)의 영국 점령은 영국의 進路뿐 아니라 세계사의 흐름을 바꾼 대사건이다. 노르망디 사람들이 영국의 새로운 귀족층이 되었다. 이들은 선주민(先住民)인 앵글로-색슨 귀족과 융합하여 오늘날 영국의 왕가 및 귀족들의 선조(先祖)가 된다. 현 엘리자베스 2세는 윌리엄 정복왕 1세의 32대 후손이다. 노르망디 사람들이 쓰던 프랑스어가 영어 형성에 큰 영향을 끼치고 유럽 대륙의 로마-라틴계 문명이 영국에 많이 들어온다. 바이킹족이 영국과 유럽을 이어준 것이다.  


 
이때부터 영국은 北歐를 벗어나 유럽 대륙을 활동무대로 삼게 된다. 노르만의 영국침공은 영국에 대한 마지막 침공이었다. 대륙으로부터 수많은 침공을 당해오던 영국은 그 이후는 침략하는 나라로 바뀐다. 윌리엄 1세와 후손들은 고향인 노르망디의 영유권(領有權)을 주장하고, 나중엔 프랑스의 왕좌(王座)까지 탐하게 된다. 14~15세기 프랑스-영국 사이 백년 전쟁의 서막이 열리는 것이다.   

 

  덴마크는 잉글랜드를 잃고도 수백 년간 스칸디나비아 반도 전체를 통치하였다. 16세기까지 약 800년간 북구의 최강국은 덴마크였다. 코펜하겐의 덴마크 국립박물관에 가보면 제국이 아니면 모을 수 없는 미술품들이 많다. 스웨덴도 140년간 덴마크 지배를 받았다. 16세기 스웨덴은 덴마크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 17세기엔 유럽의 새 강국으로 떠오른다.   


 
장사꾼 스웨덴인  

  노르웨이 사람들은 스웨덴 사람에 대하여 “돈은 셀 줄 아는데 친구는 셀 줄 모른다”고 비꼰다. 필자는 2010 5월 스웨덴 수도 스톡홀름에 가서 쉐라톤 호텔에 묵은 적이 있다. 1층 화장실에 들렀더니 번호판이 붙어 있었다. 프런트에 가서 물으니 비밀번호를 알려주는 것이었다. 투숙객에게만 화장실 사용을 허용하는 호텔은 처음 보았다. 공중화장실도 유료(有料)이다.  


 
스웨덴 바이킹족은 장사꾼 기질을 살려 러시아, 흑해(黑海), 비잔틴 제국 등 동남쪽으로 나아갔다. 이들은 볼가강을 타고 내려가 흑해에 이르고, 지금의 이스탄불(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두었던 비잔틴 제국과 교역(交易)하는가 하면 일부는 바그다드까지 진출, 아랍 사람들과 장사를 했다. 한때 비잔틴 제국의 황제는 바이킹족으로 구성된 경호부대를 두었다. 스웨덴 사람들이 이때 발전시킨 도시가 키예프이다. 키예프(우크라이나 수도)를 중심으로 성장해 간 나라가 러시아. 러시아의 초기 지배층은 바이킹이었다. 러시아를 제국으로 발전시키는 데 토대를 놓은 이반 뇌제(雷帝)도 바이킹 왕족 루릭 가문의 모스크바 분계(分系)이다.

   

  유럽을 여행하다가 보면 도처에서 바이킹의 역사를 만나게 된다. 스칸디나비아는 바이킹의 고향이었으니 그렇다 치고, 프랑스의 노르망디, 영국, 아일랜드, 시실리, 나폴리, 몰타에까지 바이킹의 발자취를 보게 된다. 현재의 영국왕가가 바이킹계이고, 런던탑이 그 왕가의 창시자 윌리엄 왕이 세운 것이다. 이탈리아 남부 나폴리와 시실리의 유수한 건축물들이 바이킹의 후예인 노르만 정복시절의 작품이다. 아일랜드의 더블린과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 또한 스웨덴계 바이킹이 키운 도시임을 알고 놀란다. 노르망디 해안 섬 위에 지은 몽셍미셀 성당은 노르망디공 리샤르 1세가 베네딕트 수도회 소속 수도원으로 지은 것이 증축된 건물이다  


 
최초의 근대국가 시실리 왕국

노르망디공 리샤르 1세가 노르망디 해안 섬 위에 지은 몽셍미셀 성당.  

 

  1066년 프랑스 노르망디를 다스리던 윌리엄 공이 영국으로 쳐들어가 이를 정복, 영국의 모태를 만들던 무렵에 노르망디 출신의 또 다른 바이킹이 시실리와 이탈리아 남부를 점령, 150년간 다스리면서 이 왕국을 유럽에서 가장 발전한 나라(일부 역사학자들은 최초의 근대적인 국가라고 부른다)로 만든 사실(史實)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노르망디에 살던 노르만인들은 전사(戰士)들이었으므로 유럽과 비잔틴 제국에서 용병(傭兵)으로 인기가 있었다. 그들끼리 정보망이 발달하였다. 좋은 일자리가 있으면 고향인 노르망디에 연락하여 동료들을 불러왔다. 바이킹들은 영웅적인 기질로 인해 용병에 만족할 사람들이 아니었다. 용병을 하다가 영주나 지도자가 되는 노르만인들이 생겼다.


  
그들 중 오트빌 가문 출신의 로저가 1071년 이슬람 세력이 장악하고 있던 시실리를 정복하였다. 이 세력은 그 전후(前後) 이탈리아 반도의 약 3분의 1이나 되는 남부 이탈리아 여러 도시를 차례로 정복, 시실리와 함께 묶어 한 왕국으로 다스렸다. 이 왕국은 지중해의 몰타와 지금의 트리폴리, 튀니지 해안 등 아프리카 북안(北岸)의 몇 개 도시도 정복하였다. 노르만 세력의 꿈은 시실리를 근거지로 하여 이탈리아를 통일, 지중해 제국을 만드는 것이었다고 한다. 이 시실리 왕국은 王朝가 바뀌고 한때 나폴리 왕국이 떨어져 나가는 곡절을 겪지만 1861년의 이탈리아 통일 때까지 유지된다

 

  노르만이 다스리던 시실리 왕국은 다양한 문화, 종교, 언어가 뒤섞여 활기가 넘쳤다. 시실리는 문명의 교차로에 자리 잡아 옛날부터 여러 문화가 혼재(混在)된 곳인데, 노르만 정복자들은 이런 지정학적(地政學的)인 조건에 잘 적응하였다. 이슬람, 기독교, 그리스정교(正敎), 유대교가 공존하였다. 이탈리아인, 유대인, 아랍인, 그리스인, 게르만인, 노르만인들도 섞여 살았다.   


 
노르만들은 백성들에게 자유를 많이 주었다. 종교적, 인종적 차별을 하지 않았다. 노르만들은 중앙집권적인 관료제도를 만들어 법치를 세우고 피지배층의 관습을 존중하면서 다양한 문화와 민족을 포용하였다. 왕은 봉건영주들의 권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직속 관료제도를 강화하였다. 안정과 관용 속에서 풍성한 나라가 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시실리 왕국이 유럽에서 등장한 최초의 근대 국가라는 주장을 하는 이들도 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議會는 바이킹 公會

▲훌륭한 전사(戰士) 집단인 바이킹은 지중해와 아메리카 대륙까지 진출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의회(議會)는 바이킹이 만든 것이다. 노르웨이 바이킹들은 아이슬란드를 점령한 다음 서기 930년에 알싱이란 의회를 열었다. 36명의 추장과 12개의 소공회(小公會)를 대표하는 사람들이 모여 법을 만들고 재판을 하기 위하여 15일간의 회기(會期)를 가진 것이다. 사회를 본 사람은 법령(法令)을 기억하는 의무를 맡은 사람이었다. 한 독일사람은 이런 모임을 열어 문제를 해결하는 아이슬란드 사람들을 보고 “그들은 왕이 없으나 법이 있다”고 말하였다.  


 
기독교가 들어와 중앙집권적인 왕이 등장하기 전 바이킹 사회에서 왕은 입법권(立法權)이나 사법권(司法權)이 없었다. 그런 권한은 공회에 있었다. 공회는 자유민들의 회의체인데, 마을, 지역 단위로 있었다. 이런 공회는 연간 한두 번 열렸다. 공개적으로, 민주적인 토론이 이뤄졌다. 재판도 이 공회가 맡았다. 기소된 사람은 자유롭게 자신을 변호할 수 있었다.   

 

  바이킹 사회는 노예와 부족장이 있긴 했으나 자유민이 주축이었다. 바이킹 자유민은 당대의 유럽 사람들보다 훨씬 큰 자유를 누렸다. 바이킹 사회의 평등성에 기반을 둔 민주성, 민주성에 근거한 역동성(力動性)은 지금도 북구에서 이어져 온다. 오늘날 스칸디나비아 나라들이 보여주는 평등, 자유, 복지의 모델은 바이킹 사회의 전통에 뿌리박고 있는 듯하다
  
 
스칸디나비아 3국이라고 하면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만 들어간다. 핀란드는 빠진다. 노르딕국가들(Nordic Countries)이라고 하면 3국 외에 핀란드, 아이슬란드, 그린란드, 파로에 섬이 들어간다. 이들 나라를 북구라고도 부른다. 북구 나라들은 국기(國旗)에 옆으로 누운 십자가를 공통적으로 쓴다
    


 
노르딕 모델  

  인구는 스웨덴이 937만명으로 가장 많다. 덴마크 550, 핀란드 534, 노르웨이 483만명이다. 아이슬란드는 약 32만 명, 그린란드는 56000, 파로에는 49000명이다. 면적은 그린란드가 216만㎢로서 호주를 제외하면 세계에서 가장 큰 섬이다. 그린란드와 파로에는 덴마크 자치령(自治領)이다. 북구 4개국의 인구는 모두 2500만명 정도이다.  


 
종교는 신교가 84%이다. 거의 모두가 루터교이다. 가톨릭은 1.25%로서 이슬람(2.58%)보다 적다. 북구는 그러나 기독교인들 가운데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는 비율이 세계에서 가장 높다.   

 

  EU(유럽연합)에 가입한 북구 나라는 덴마크, 핀란드, 스웨덴이다. 유로를 쓰는 나라는 핀란드뿐이다. NATO에 가입한 나라는 덴마크, 아이슬란드, 노르웨이이다.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는 왕국, 핀란드와 아이슬란드는 공화국이다. 노르웨이가 독립국이 된 것은 1905, 스웨덴은 1523, 아이슬란드는 1944, 덴마크는 10세기경부터, 핀란드는 1917년이다
  
 
북구모델(Nordic Model)이란 말이 있다. 이 나라들이 개발하여 정착시킨 독특한 사회, 복지, 교육 제도를 말한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혼합형태이다. 개인의 기본권 존중, 평등, 여성의 취업 장려, 경제활동 인구의 최다화(最多化), 빈부(貧富)격차의 최소화, 강력한 사회보장과 의료보험, 폭넓은 의무교육 제도, 낮은 범죄율, 높은 생활수준, 많은 세금, 높은 고급 문서 해독률, 민주주의의 성숙, 법치주의의 확립, 높은 노조 가입률(80% 이상), 사회민주당의 장기집권을 공통점으로 한다. 이들 나라는 공공(公共)부문의 지출이 많지만 생산성은 높다.   

 

  실업수당이 덴마크는 받던 임금의 90%, 스웨덴은 80%이다. 독일은 60%. 국민총생산 중의 세금은 스웨덴이 51%, 핀란드가 43%. 독일은 34%. 교육투자율도 높은데, 덴마크는 국내총생산의 7%, 스웨덴은 6.5%를 투자한다. 영국은 5.5%. 
  
 
스웨덴 사람들의 80%는 매년 한 번 이상 직업훈련을 받는다. 유럽 평균의 두 배이다. 스웨덴과 핀란드는 국내총생산의 4%를 매년 연구개발 투자에 쓴다. 영국은 2% 이하. 덴마크는 풍력(風力)발전으로 전력(電力) 25%를 댄다. 경제와 복지 분야의 규제는 입법으로 하지 않고 이해(利害) 당사자 간의 합의로 한다. 유럽에서 기업 하기 좋은 나라 랭킹에선 1위가 덴마크, 4위가 아이슬란드, 5위가 노르웨이, 6위가 핀란드, 7위가 스웨덴이다. 노조(勞組)의 힘이 세어도 기업 자유도가 높다


 
덴마크는 해고가 자유로운 나라이다. ()복지 정책처럼 들리겠지만 해고가 자유로운 덕택으로 재()취업률도 높다. 유럽에서 가장 실업률이 낮다. 여기서 나온 단어가 유연(柔軟)안정성(Flexicurity)이다.

 

Flexibility(유연성) Security(안정성)의 합성어로서 고용의 유연성을 통하여 직업의 안정성을 도모한다는 뜻이다. 덴마크의 실업률은 2%대로서 10%에 육박하는 서구(西歐) 나라들에 비교된다. 덴마크는 거의 매년 국민행복도가 세계 1등으로 조사된다(2016년 조사에서도). 고용의 신축성과 공무원 사회의 투명성(세계에서 가장 덜 부패한 나라)이 만든 결과라고 한다.     


 
바이킹이 세운 나라가 초일류가 된 이유  

  바이킹이 세운 나라가 초일류(超一流) 국가가 된 이유를 나름 정리해 본다
  
  1.
민족적 자질이 우수하다. 체력이 좋고 IQ가 높다. 탐험가, 모험가, 지배민족의 체질을 타고났다. 공동체의 권력구조가 비교적 평등하였다. 상무(尙武)정신과 상술(商術), 그리고 행정력이 뛰어났다. 바이킹 시절에도 정복한 곳을 다 一流로 만들었다
  
  2.
기독교 문명을 맨 나중에 받아들였으나 종교개혁 때 개신교로 개종, 산업화와 민주화에 유리한 정신적 풍토를 조성하는 데 성공하였다
  
  3.
바이킹의 해양정신을 잃지 않았다. 무역, 탐험, 이민, 해운(海運)에 주력하고 진취적인 삶의 자세를 유지함으로써 과학과 기술을 발전시켰다. 평등정신에 기초한 사회 복지 제도를 만들었다
  
  4.
국가별 인구 규모가 500~900만 수준으로 관리하기가 좋다
  
  5.
지정학적인 전략(戰略)가치가 약하여 유럽 강대국으로부터 본토를 공격받는 일이 적었다.

 

◆야만의 땅,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를 가다!

구스타프 아돌프 대왕이 건조한 전함 바사호. 

 

덴마크의 햄릿성    

   덴마크와 스웨덴 사이 해협은 가장 좁은 곳이 4km이다. 이 해협이 발틱海의 목구멍이다. 이곳을 장악하면 북구(北歐)와 독일 및 러시아가 이용하는 발틱海를 통제하게 된다. 15세기부터 해양강국 덴마크가 이곳에 크론보그 요새를 짓고 출입하는 선박으로부터 통과세를 받았다

 

   요새가 있는 마을 이름은 헬싱괴르인데 세익스피어가 쓴 '햄릿'의 무대이다. 관광객들은 크론보그성을 '햄릿城'이라고 통칭한다. 이 성은 바다로 돌출한 곳에 있어 더욱 장대하다.

 

세익스피어가 활동하던 16세기 이 城은 유럽에서 유명하였다. 덴마크 왕들은 이 성에서 여름을 보내기도 하였다. 헬싱괴르가 덴마크의 수도라고 착각할 정도였다. 세익스피어 사망 200주년을 기념하는 연극이 城의 정원에서 공연되었다. 그 뒤에도 '햄릿'이 여러 차례 공연되었다. 최근엔 로렌스 올리비에, 존 길거드, 크리스토퍼 프러머 같은 배우들이 등장하였다. 크론보그성은 2000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유럽을 대표하는 르네상스 시절의 城이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론 덴마크가 발트해의 해상권을 장악하였던 황금기를 상징한다

 

  1423년 덴마크 에릭왕은 독일 북부의 한자 동맹 소속 상인들을 소집, 스웨덴-덴마크 해협을 통과하는 선박은 일단 헬싱괴르에 닻을 내리고 통과세를 내야 한다고 통보하였다. 당시 한자동맹 도시국가들은 北歐의 무역을 독점하다시피 하여 이 해협을 많이 이용하였다. 덴마크는 노르웨이와 스웨덴(핀란드 포함)를 속국으로 다스리고 있던 강국(强國)이었다. 1427년까지 크론보그 요새를 완성한 에릭은 여기에 포대(砲臺)를 설치하였다. 세금을 내기 위하여 정박하는 배와 선원들이 돈을 쓸 수 있도록 항구 마을도 개발하였다. 수많은 통과 선박이 19세기까지 거의 400년간 낸 세금은 덴마크를 먹여 살린 큰 재원(財源)이었다. 서기 1500년 이전엔 연간 1000척 정도가 이 해협을 통과하였다. 그 이후엔 5000척을 넘었다. 네덜란드 선박들이 많았다. 이 해협을 사이에 두고 덴마크와 스웨덴은 16~17세기에 여섯 차례 전쟁을 벌였다


 
정치적 학살은 주로 반대세력에 겁을 주기 위하여 이뤄지지만 오히려 반발을 불러 낭패를 당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엔 거대한 왕궁(王宮)이 평온한 바다를 내려다 본다. 유럽에서 사용되고 있는 왕궁 중에서 가장 크다고 한다. 단조롭고 육중하게 보이는 왕궁의 방이 600개가 넘는다. 이 왕궁 정문 앞은 ‘스톡홀름의 피바다’(Stockholm Bloodbath)라고 불리는 사건이 난 곳인데 기념물이 있다. 이곳이야말로 스웨덴이란 나라의 탄생지이다. 국가가 피바다 한가운데서 태어난 경우이다
  
 
스웨덴과 노르웨이는 14세기 말부터 덴마크를 중심으로 연방국가를 만들어 살아왔다. 덴마크 왕가(王家)가 지배자였다. 16세기 초 스웨덴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귀족들이 중심이었다. 덴마크 왕 크리스티안 2세는 두 차례 진압군을 보냈으나 스웨덴 반군(反軍)에 밀렸다. 세 번째 진압군은 프랑스, 독일, 스코틀랜드 용병(傭兵)들을 포함한 대군(大軍)이었다. 스텐 스투레가 지휘하는 스웨덴 반군은 연패(連敗)하였다. 스투레도 부상당한 뒤 죽었다.   

 
스웨덴의 귀족회의는 덴마크 왕이 반란 책임자들에 대한 사면(赦免)을 약속하면 다시 충성을 맹세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러나 반군은 스투레 부인의 지휘하에 그 뒤에도 스톡홀름에서 항전(抗戰)을 계속하였다. 덴마크의 해군이 나타나 바다와 육지에서 공격해 들어오자 스웨덴 반군은 사면 약속을 받고 항복하였다. 1520 9 7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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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 스웨덴의 대표자들은 크리스티안 2세에게 충성을 다짐하였다. 덴마크 왕이 스웨덴 왕위(王位)를 세습하는 데도 동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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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 크리스티안 왕은 트롤레 대주교가 집전(執典)한 스웨덴 왕위 즉위식을 올렸다. 즉위 축하 행사도 사흘간 벌어졌다. 7일 크리스티안 왕은 스웨덴의 지도자들을 궁정의 저녁 회의에 초청하였다. 다음 날 저녁, 덴마크 군인들이 난입(亂入), 스웨덴 지도자들을 끌고나가 감금하였다. 9일 트롤레 대주교가 주재하는 위원회가 지도자들에게 사형(死刑)을 선고하기 시작하였다. 스웨덴 지도자들은 수년 전 덴마크 王家 편인 트롤레 대주교를 쫓아내려는 모의를 한 적이 있었는데, 대주교는 그 음모자 명단을 가지고 보복에 나선 것이다
  
 
사형선고를 받은 이들 가운데는 반군을 지원한 귀족들이 적지 않았다. 이들은 바깥으로 끌려나가 참수(斬首)되거나 교수형(絞首刑)에 처해졌다. 이틀간 82명의 스웨덴 지도자들이 처형당했다. 크리스티안 왕은 반군 지도자 스투레와 그의 어린 아들 무덤까지 파헤치고 시신을 꺼내 불태우게 했다. 이때 처형된 에릭 요한슨의 아들 구스타프 바사는 학살 소식을 듣고는 스웨덴의 북쪽 달라르나 지방으로 피신, 백성들을 상대로 학살의 부당성을 호소하고, 반란군을 조직, 독립전쟁을 일으켜 덴마크 군대를 쳐부순다.

 

115년 사이 여섯 번 싸운 덴마크-스웨덴   

  구스타프 바사는 3년간의 독립전쟁 끝에 덴마크 군대를 무찌르고 1523 6 24일 스톡홀름에 입성(入城)했다. 그 보름 전인 6 6일 그는 의회에서 왕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달아난 트롤레 대주교 자리에 다른 사람을 임명, 교황의 허락을 간청하였으나 교황은 트롤레를 재()임명하라고 요구하였다. 이로써 비롯된 분쟁 끝에 바사 왕은 가톨릭을 버리고 루터교를 국교(國敎)로 택한다. 1525년엔 신약(新約)성경을 번역, 출판하였다.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 그리고 영국의 헨리 8세는 거의 동시에 가톨릭을 버렸다
  
 
덴마크는 1523년에 스웨덴의 독립을 허용한 뒤에도 실지(失地)를 회복, 스웨덴을 종속시키기 위하여 1563~1679년의 115년 사이에 여섯 번이나 전쟁을 하였다. 1657년 덴마크가 스웨덴을 공격하자 스웨덴은 반격에 나서 얼어붙은 해협을 건너와 코펜하겐을 2년간 포위하기도 하였다. 덴마크는 결국 북구(北歐)의 패자(覇者) 자리를 스웨덴에 넘겨주고 만다

 

스웨덴 수도(首都) 스톡홀름에 아주 인기 있는 박물관이 있다. ‘바사 박물관’(VASAMUSEET)이다. 1628 8 10일의 처녀항해 때 침몰한 전함(戰艦) ‘바사’를 1961년에 건져내어 복원, 전시하는 박물관이다. 매년 100만명 이상이 구경하러 온다. 낙후되었던 스웨덴을 유럽의 강국(强國)으로 만든 구스타프 2세 아돌프 대왕의 명령에 의하여 만들어진 이 전함은 상부가 너무 무거워 풍랑이 불자 뒤집히면서 침몰하였다.

 

 전함은 길이가 69m, 높이가 49m였다. 배수량(排水量) 1200t 64개의 대포를 실었고, 탑승 선원은 400명이 넘었다. 이 가운데 약 50명이 구조되었다. 침몰한 곳이 해안에 가깝고 얕은 바다 밑이어서 건져올릴 수 있었다. 14000개의 조각을 맞추어 복원한 전함이므로 원래의 재질(材質)에 원래의 모습이다. 전복 사고 후 구스타프 대왕은 관련자를 문책하도록 지시, 조사가 시작되었지만 아무도 처벌받지 않았다. 관련자들의 과실이 발견되지 않았고, 설계자들은 ‘왕의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고 책임을 전가(轉嫁)하였다. 사고원인은 ‘신()의 뜻’으로 귀착되었다

 

  구스타프 아돌프, 신교도를 지켜내다

‘현대전의 아버지’로 불리는 스웨덴의 구스타프 아돌프 대왕.

 

  구스타프 아돌프 대왕은 전쟁의 천재(天才)였다. 나폴레옹과 클라우제비츠가 숭배한 장군-왕이었다. 구스타프는 기병, 보병, 포병, 보급부대를 유기적으로 통합하여 기동전을 펼쳤다. 기병과 보병도 대포를 쏠 수 있도록 훈련을 받았다. 병과(兵科)가 달라도 서로 도왔다. 전사학자(戰史學者)들은, 그를 ‘현대전의 아버지’라고 부른다. 구스타프 대왕은 열일곱 살에 왕이 되었다. 왕자 시절부터 영명(英明)한 인물이었다. 외국 사신을 접견할 때 그 사신의 나라 말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라틴어로 말하고 쓸 줄 알았다. 당시 스웨덴은 덴마크, 러시아, 폴란드와 동시에 전쟁을 벌이고 있었는데, 모두 승리하였다
  
  1618
년 독일을 무대로 한 30년 전쟁 때 그는 신교도(新敎徒) 편에서 참전하였다. 그가 이끄는 스웨덴 군대는 구교(舊敎) 편인 합스부르크 왕조(신성로마제국)와 폴란드 연합군을 격파해 갔다. 한때 뮌헨이 있는 바이에른 지방까지 진출하였다. 스웨덴 군은 당시 유럽 최강이었다. 잘 훈련된 스웨덴 보병의 사격은 명중률이 높았고 발사 시간이 빨랐다. 구스타프 대왕은 1632 11 6일 독일에서 전투 중 전사(戰死)하였다. 왕이 죽어도 스웨덴군()은 승리하였다. 스웨덴 왕 가운데 ‘대왕’ 칭호는 그가 지금까지 유일하다. 죽었을 때 나이 38, 재위(在位) 21년이었다. 스웨덴은 독립한 지 100년 만에 유럽에서 러시아, 스페인 다음으로 면적이 큰 강국이 되었다. 발트해는 스웨덴의 호수가 되었다. 전함 바사호 앞에 서면 스웨덴 전성기의 영웅적인 기상을 느낄 수 있다

 

스웨덴 군대가 신교도 편을 들지 않았으면 30년 종교전쟁은 구교도의 승리로 끝났을 것이다. 거의 패배한 신교도 세력을 구한 것이 스웨덴이었다. 한때 스웨덴 군대는 독일의 반을 점령하였다. 30년 종교전쟁에서 그들은 독일에서 1500개의 도시, 18000개의 마을, 2000개의 성()을 파괴하였다. 30년 전쟁 이후 유럽에선 종교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 30년 전쟁은 유럽에서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바이킹의 군사적 전통이 다른 모습으로 꽃을 피운 곳이 스웨덴이다 

 

王을 수입한 노르웨이와 스웨덴

프랑스군() 원수(元帥) 출신으로 스웨덴 왕위에 오른 칼 요한 14.

 

  노르웨이는 1380년부터 1814년까지 덴마크와 연합국을 이뤘다. 덴마크는 나폴레옹 전쟁 때 프랑스 편에 섰다가 패전국(敗戰國)이 되는 바람에 1814년 노르웨이를 스웨덴에 넘겨주었다. 스웨덴이 노르웨이를 통치하였으나 큰 압박은 없었고 자치(自治)를 허용하였다
  
 
노르웨이는 1905년 평화적으로 스웨덴과 분리, 독립한다. 이때 국민투표에서 노르웨이 사람들은 공화국이 아니라 왕국을 선택하였다. 노르웨이는 오래전에 왕가의 맥이 단절된 상태였다. 그들은 왕을 수입하기로 하였다. 덴마크의 왕자 칼을 모셔 와서 왕으로 추대하였다. 그는 바이킹 시절의 노르웨이 왕 이름인 하콘 7세라 칭하고 아들 올라프를 왕세자(王世子)로 임명하였다. 지금 왕은 올라프의 아들인 하랄드 5세이다
  
  1810
년 나폴레옹이 유럽을 석권하고 있을 때 스웨덴 왕은 칼 13세였다. 왕세자가 죽어 후손이 끊어지자 귀족회의는 프랑스의 장 밥티스트 베르나도트 장군을 왕세자로 추대하였다
  
 
베르나도트 장군은 나폴레옹이 신임하는 부하였다. 원수(元帥) 계급을 가졌던 그는 함부르크 일대를 통치하는 총독으로 근무 중 스웨덴의 왕세자로 영입되어 군의 참모총장도 겸했다. 스웨덴이 연합군 편에서 나폴레옹을 공격할 때는 이를 지휘하였다. 1818년 칼 13세가 죽자 베르나도트 장군이 스웨덴의 왕이 되어 칼 요한 14세로 불리게 되었다. 그 후손들이 지금까지 왕조(王朝)를 이어가고 있다
 

 

죽었다가 깨어나도 노르웨이를 이길 수 없는 中國

북해유전 덕분에 노르웨이는 세계 5위의 석유수출국이 됐다.  

 

  중국 정부는 최근 반()체제인사 류샤오보(劉曉波)에게 2010년도 노벨평화상을 주기로 결정한 노르웨이에 압박을 시도하였으나 먹히지 않았다. 노벨의 유언에 따라 평화상 결정에 관한 전권(全權)은 노르웨이 노벨위원회가 갖고 있는데, 노르웨이 의회에서 선출된 5명의 위원은 후보자 선정에서 독립적인 권한을 행사한다
  
 
지구 상에서 중국의 압박이 가장 먹히지 않는 나라가 노르웨이이다. 노르웨이는 싸움꾼 덴마크와 장사꾼 스웨덴 사이에 끼여 기()를 제대로 펴보지 못한 순박한 동생격()이었다. 하늘이 이런 노르웨이에 축복을 내린 것은 20세기 후반이다. 1969년 북해(北海)의 노르웨이 수역(水域) 안에서 거대한 유전(油田)이 발견된 것이다. 척박한 고향을 떠나 해적질을 하면서 세계를 떠돌아다녀야 했던 나라, 본토(本土) 인구만 한 이민자가 미국으로 건너간 나라가 축복 받은 땅으로 변한 것이다
  
 
노르웨이는 석유수출 세계 5, 가스수출 세계 3위이다. 국내총생산의 약 20%가 석유수입이다. 노르웨이는 석유수입금을 잘 관리한다. 석유수입을 국부기금(國富基金)화하였는데, 2009 11월 현재 4550억 달러이다. 아부다비 기금에 이어 세계 2위이다. 앞으로 10년 안에 1조 달러에 달하고 결국은 세계 최대의 기금이 될 것이다
  
 
노르웨이 사람은 머리 좋고 체력 좋은 사람이 부지런하고 마음도 좋은 경우이다. 석유수입이 이 정도이면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1, 2차 산업은 기피하게 되는데 노르웨이는 그렇지 않다. 노르웨이는 중국에 이어 세계 제2위의 해산물(海産物) 수출국이고, 세계 6위의 상선대(商船隊)를 갖고 있다. 잘사는 민족이 가장 먼저 버리는 게 수산, 해운(海運)인데 노르웨이는 바다를 떠나지 않는다. 1000년 전의 바이킹 시절부터 변하지 않는 게 있다면 이들의 해양정신이다
  
 
노르웨이는 깊은 계곡이 많아 전체 전력(電力)의 약 98%를 수력(水力)발전으로 충당한다. 그러니 석유를 많이 수출할 수 있는 것이다. 상장(上場)된 회사 주식의 약 30%를 국가가 보유한다. 석유, 통신, 은행, 알루미늄 산업은 국영(國營)이다
  
 
의료비는 전액 무료이다. 출산(出産)휴가는 부모가 다 받는 데 1년이다. 이 정도이면 놀고먹자는 사람들이 많아 실업률이 높을 것 같지만 1~3%이다. 노르웨이는 1인당 GDP가 약 10만 달러로서 룩셈부르크에 이어 세계 2위이지만 1인당 자산(資産) 보유액은 세계 1위이다. 쉽게 말하면 세계 최고의 부자들이란 뜻이다. 작년 초엔 인구가 두 배인 스웨덴보다 GDP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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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당 GDP뿐 아니라 삶의 질, 평화지수, 자유지수, 국가운영 성적 등 거의 모든 국제통계에서 노르웨이는 최상위권이다. 작년 미국의 <폴린 폴리시>()가 매긴 ‘성공-실패국가 랭킹’에서 노르웨이는 성공국가 1등이었다
  
 
이런 노르웨이가 아직 국민개병제(皆兵制)를 유지한다. 상비군은 23000, 동원가능 예비군까지 합치면 83000명이다. 복무기간은 6~12개월이다. NATO(북대서양조약기구) 창설국이기도 하다
  
 
노르웨이는 물가가 비싸다. 미국보다 약 30% 높다. 임금은 직종(職種)이나 남녀 간 차이가 매우 작다. 청소부, 간호사, 정부 고위관리, 대학교수의 월급이 거의 같다. 2008년 세계를 휩쓴 금융위기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은 유일한 나라가 노르웨이이다. 인류역사가 만들어낸 최고의 선진국이 노르웨이인 셈이다
  
 
이런 나라에 중국이 무슨 압력을 넣을 것인가? 세계에서 가장 인권(人權)을 존중하는 나라에 대하여 세계에서 가장 인권을 무시하는 나라가 무슨 압력을 넣는단 말인가? 노르웨이를 괴롭힐수록 국제사회에선 중국이 못난 나라로 비칠 것이다. 중국으로선 지는 게임이다.
 

 

노르웨이의 송네 피오르

▲송네 피오르.

 

  필자는 2006년 여름 미국 알래스카에서 ‘트레이시의 팔’(Tracys Arm)이란 이름을 가진 피오르(바다에서 내륙으로 깊숙이 들어온 강처럼 생긴 지형. 양쪽으로 절벽이 형성된 것이 특징이다)를 구경하면서 감탄을 연발하다가 곁에 있는 동료 관광객에게 “노르웨이의 피오르와 비교하면 어떤가?”라고 물었다. 그는 “노르웨이가 한 수 위다”고 했다. 이보다 더한 장관(壯觀)이라면 반드시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해 5월 노르웨이를 여행하면서 유람선을 타고 송네 피오르를 구경하였다. 알래스카 피오르보다 더 크고 아름다웠다. 송네 피오르는 북해에서 내륙(內陸)으로 205km나 들어간 강처럼 생긴 긴 만()이다. 그린란드의 스코레스비 순드 피오르 다음으로 길다
  
 
필자는 송네 피오르가 내륙으로 가장 깊숙이 들어온 지점인 프램이란 작은 항구에서 유람선을 탔다. 수심이 깊어 8t 이상 나가는 크루즈 선박도 접안(接岸)할 수 있는 마을이다. 송네 피오르의 가장 깊은 곳은 1308m이고 평균 폭은 4.5km, 가장 좁은 곳은 300m이다. 피오르 양쪽으로 솟은 산은 절벽을 이루는데 수면(水面)에서 1000m 이상 되는 직벽(直壁)도 많다. 이 직벽에 수많은 폭포가 걸려서 흘러내린다. 세계에서 낙차가 가장 큰 10() 폭포 가운데 다섯 개는 노르웨이에 있다. 송네 피오르의 물색깔은 지구 상에서 볼 수 있는 가장 짙은 녹색이다
  
 
사람 눈이 간사하다고 할까? 이 지구 상의 최고 자연경치 중 하나인데도 오래 보고 있으니 익숙해지면서 감동이 잦아들었다. 구도가 너무나 완벽하기에 싫증이 난 것인가. 미국의 그랜드 캐년을 처음 보는 이들은 “와!”하고 부르짖고는 말문을 닫는다고 한다. 달리 표현할 말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완벽하고 장엄한 경치는 그 자체로서도 완결성을 갖기에 별도의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
  
 
프램에서 산악열차를 타면 20km를 달려 864m 산꼭대기에 오른다. 다른 보조시설이 없는 철도로서는 가장 경사가 급한 구간이다
  
 
노르웨이를 여행할 때 대자연(大自然) 속으로 달리는 버스 안에서 안내자가 ‘시크릿 가든’(SECRET GARDEN)이 작곡한 노래들을 틀어주었다. 노르웨이인(롤프 러브랜드/작곡가 겸 피아니스트. 남자)과 아일랜드인(피오눌라 세리/바이올리니스트. 여자) 두 사람으로 구성된 이 ‘시크릿 가든’은 수많은 노래를 작곡하였다. 특히 ‘저녁기도’(NOCTURNE)란 음악이 자연과 딱 들어맞았다. 눈 덮인 산(), 명경 같은 강물, , 드문드문 보이는 집들을 버스 차창(車窓) 밖으로 음악과 함께 흘려보내면서 달리고 또 달렸다
  
 
‘시크릿 가든’이 작곡한 음악과 노래는 유튜브(youtube.com)에 수십 곡이 올라 있다. 한국의 텔레비전 드라마 배경음악으로 자주 나와 친숙하다. 요사이 결혼식의 축가(祝歌)로 가장 많이 불리는 노래 두 곡은 ‘시크릿 가든’이 작곡하였다. ‘유 레이즈 미 업’(You raise me up)과 ‘봄을 위한 세레나데’(Serenade to Spring)이다. ‘봄을 위한 세레나데’는 한국에선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로 번안(飜案)되었다. ‘봄 노래’가 ‘가을 노래’가 된 것이다. ‘시크릿 가든’의 노래를 들으면 노르웨이의 자연이 생각난다. 노르웨이인이 작곡자임으로 노르웨이적 감수성(자연과 인정 등)이 들어 있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섬이 24000개 몰려 있는 스톡홀름 群島  

  북구를 여행하면 배를 많이 타게 된다. 지난해 5월 필자는 보름간 스칸디나비아 4개국을 돌았는데 코펜하겐에서 오슬로, 스톡홀름에서 헬싱키까지는 여객선을 탔다. 유람선 비슷한 구조를 가진 여객선이라 즐길 것이 많았다. 이런 배를 타면 역시 바다 구경이다. 바다가 보이는 선실은 60유로 정도 더 줘야 한다. 여객선은 오후 늦게 출발, 다음 날 아침에 목적지에 닿는다
  
 
스톡홀름에서 오후 5시에 출발한 5t 여객선은 스톡홀름 군도(群島)를 지난다. 남북 방향으로 약 24000개의 섬이 몰려 있는 곳이다. 정원 같은 섬, 등대만 있는 돌섬, 초등학교 운동장만 한 섬, 높이가 5m도 안되는 평평한 섬들 사이로 거선(巨船)이 지나는데, 수십m 거리를 두고 아슬아슬하게 빠져나가기도 한다. 섬의 종합전시장 같은 스톡홀름 군도 중 사람이 사는 데는 1000곳 정도라고 한다. 이곳에 약 5만 개의 별장이 있다. 약간 과장이겠지만, 스톡홀름 사람들은 자가용 자동차만큼 요트를 많이 갖고 있다고 한다.   

  
  
헬싱키의 名物 수오멘리나 요새

▲헬싱키의 명물 수오멘리나 요새의 포대.

 

  스웨덴은 호수도 많다. 2에이크, 8100평방미터 이상의 호수가 97500개이다. 핀란드는 500평방미터 이상을 호수라고 계산하는데 187888개이다. 여객선의 바에서 석양(夕陽)이 드는 자리를 잡고 스쳐 지나가는 바다와 섬과 갈매기의 비상(飛翔)을 구경하면서 머리를 텅 비우고 한 잔 하는 재미도 쏠쏠하였다
  
 
핀란드 수도 헬싱키에서 머문 세 번째 날 아침 호텔 프런트 근무자에게 “오늘 어디를 구경 가면 좋을지 추천해 줄 곳이 없느냐?”고 물었다. 여직원이 반문하였다
  
 
“수오멘리나 요새를 가 보셨어요?
  
 
안 가봤다고 하자 그는 “자신 있게 권합니다”라고 했다. 더구나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보증수표이다
  
 
헬싱키 항구에서 배를 타니 15분 만에 요새에 닿았다. 짧은 항해이지만 헬싱키를 바다에서 바라보는 재미가 있다. 스칸디나비아 4개국의 수도는 모두 항구이다. 헬싱키, 스톡홀름, 오슬로, 코펜하겐. 이들 도시는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야 제대로 보인다. 바다에서 바라본 헬싱키 시가지의 풍경 속에서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루터교회와 러시아정교(正敎)교회 건물이 마주 보면서 양립(兩立)하고 있는 모습. 루터교회는 스웨덴의 영향, 정교교회는 러시아의 영향을 상징한다
  
 
수오멘리나 요새는 1748년 핀란드가 스웨덴 속국(屬國)일 때 러시아를 막기 위하여 지은 것이다. 북쪽의 지브롤터란 별명을 얻었다. 두 섬에 걸쳐 있는 요새를 한 바퀴 도는 데는 하루가 걸린다. 벙커, 포대, 잠수함, 박물관, 병영, 교회 등 볼 것도 많고 쉴 곳도 많다
  
 
러시아의 알렉산더 1세는 1808년 나폴레옹과 우호조약을 맺은 뒤 스웨덴을 공격, 이듬해 핀란드를 빼앗아간다. 이 스웨덴 요새는 그때 러시아 군대로부터 수개월간 포위된 채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항복하였다
  
 
그 뒤 러시아는 터키를 상대로 한 크리미아 전쟁 때 프랑스와 영국을 적()으로 돌린다. 1854 8 9일 영불(英佛) 연합함대는 이 요새를 향하여 21000발의 함포 사격을 퍼부었다. 요새의 대포는 제대로 대항하지 못하고 얻어맞기만 하였다. 영불군은 상륙작전을 하지 않고 물러났다
  
  1906
7 30일엔 요새 수비군이 러시아와 핀란드 공산주의자들의 선동을 받아 군사반란을 일으켰다가 즉시 진압되었다. 78명의 반란군이 피살되고 처형되었다. 핀란드가 1917 12월에 독립을 선언한 직후 벌어진 내전(內戰)이 끝나자 이 요새는 포로로 잡힌 공산주의자들을 수용하는 감옥 역할도 했다. 1만명에 육박하는 포로가 수용되었다. 그 가운데 10%는 수용 중 질병 등으로 사망하였다. 2차 대전 중엔 단 한 차례 러시아 공군의 폭격을 받았을 뿐이다
  
 
요새 안에는 러시아군이 만든 정교 교회 건물이 남아 있다. 핀란드가 독립한 후엔 루터교회로 개조되었다. 언덕 위의 이 교회는 등대로도 쓰인다. 교회가 등대로 쓰이는 세계에서 유일한 경우라고 한다. 헬싱키를 방문하는 관광객들에게 꼭 권하고 싶은 곳이다. 스웨덴, 러시아, 핀란드의 역사를 느낄 수 있고, 평화로운 바다를 향해 있는 녹슨 대포 위에 올라가 사진을 찍고, 전망 좋은 음식점에서 식사를 즐길 수 있다.     


  
핀란드 독립을 도운 레닌  

  한국인들이 우리 국민성을 이야기할 때 자주 쓰는 단어가 ‘한()’과 ‘신바람’이듯이 핀란드 사람들은 ‘시수’라는 말을 자주 쓴다. 핀란드어()인데, ‘배짱’ 또는 ‘견디기’란 의미가 들어 있다. 이는 핀란드의 역사를 반영한다
  
 
핀란드는 극한(極限)의 자연환경과, 이웃한 두 강대국 스웨덴-러시아 사이에서 핍박과 설움을 견디며 민족적 정체성을 지켜내고 드디어 세계 최고 국가를 만들어 냈다. 고생을 많이 한 핀란드 사람들은 과묵하다. 친한 사람들끼리 사우나에 들어가 한마디도 하지 않는 경우가 예사이다. 휴대전화의 메시지 기능은 말을 하기 싫어하는 핀란드 사람들이 발명한 것이란 농담까지 있다
  
 
수천 년간 한번도 독립하지 못하고 스웨덴과 러시아의 속국으로만 있었던 핀란드 사람들이 독립국가를 만드는 데 가장 많은 도움을 준 이는 러시아 혁명의 주역(主役) 레닌이었다. 그는 제정(帝政)러시아 시절 혁명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시베리아에서 유형(流刑)생활을 할 때 감방동료인 한 핀란드인의 도움을 받았다. 레닌은 핀란드로 탈출, 숨어 지내기도 하였고, 1917년 볼셰비키 혁명 때는 페테르그라드(나중에 레닌그라드로 개칭)와 핀란드를 오가면서 모의를 하였다. 러시아 공산혁명 이전부터 핀란드가 독립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다녔다
  
  1917
11월 러시아 혁명이 성공한 직후 핀란드 의회가 독립을 선언하자 레닌은 러시아 신생 국가를 승인하게 하였다. 러시아는 독립 핀란드가 사회주의 국가가 되기를 원하여 핀란드 내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을 지원하였다. 1918년 핀란드에선 친()러시아 공산세력과 친독일 민족세력 사이에서 내전이 일어났다. 108일간 계속된 전투에서 약 3만명이 죽었다. 만네르헤임 장군이 지휘하는 민족파의 백군(白軍)이 승리, 입헌(立憲)군주제를 선택하였으나 독일이 1차 대전에서 항복하자 공화국으로 바꾸었다.    


  
핀란드 國父 만네르헤임 장군

핀란드의 국부(國父) 칼 구스타프 만네르헤임 장군.

 

  핀란드의 건국(建國)과 세 차례 전쟁을 지도한 인물은 칼 구스타프 만네르헤임 장군이다. 그는 터키의 국부(國父) 아타 투르크(케말 파샤)를 닮은 드라마틱한 생애를 산 위인(偉人)이다. 그의 부계(父系)는 독일, 모계(母系)는 스웨덴인이었다. 러시아가 핀란드를 지배하고 있을 때 러시아군의 장군으로 복무하였다. 러일전쟁에도 참전, 봉천회전(奉天會戰)에서 훈장을 받기도 하였으며 1차 대전 때는 러시아 기병부대를 지휘하였다. 1917 2월 혁명이 났을 때는 기병군단장(중장)이었다.
  
 
핀란드가 독립을 선언하였을 때 노동자 세력은 사회주의를, 자본가와 농민과 상공인들은 자본주의를 원하였다. 양쪽이 내전을 벌이자 만네르헤임은 백군을 지휘, 적군(赤軍)을 물리쳤다. 그는 독일이 항복한 이후 왕정이 폐지되고 공화국이 출범하는 과도기에 섭정(攝政)을 맡아 영국과 미국으로부터 국가승인을 얻는 데 기여하였다. 이 시기 일부에선 그를 왕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이후 그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1919
년부터 1939년 소련군의 침공이 있을 때까지 20년간 만네르헤임은 공직(公職)을 맡지 않았으나 국방력 건설에 자문을 해주고 핀란드가 내전의 후유증을 치유하고 국론(國論)을 통합하는 일에 참여하였다. 그는 탐험과 여행을 좋아했다
  
  1939
11월 스탈린의 명령으로 소련군이 핀란드를 침공하였다. 조국은 그를 다시 불렀다. 자신으로선 네 번째 참전이었다. 핀란드군 총사령관이 된 그는 소련의 60만 대군을 상대로 잘 싸웠다
  
 
핀란드의 스키 부대는 게릴라 전법으로 대항하였고, 소련군 전차(戰車)에 ‘몰로토프 칵테일’이란 별명이 붙은 화염병(火焰甁)으로 저항하였다. 1940 3월 소련과 핀란드는 모스크바 협정을 맺고 휴전하였다. 핀란드는 국토의 상당부분을 빼앗겼으나 국체(國體)를 보존하는 데는 성공하였다. 소련이 휴전 이후에도 추가적 요구를 하자 핀란드는 독일의 지원을 받기 시작하였다
  
  1941
6 22일 나치 독일군이 소련으로 쳐들어가면서 독소(獨蘇)전쟁이 일어났다. 개전(開戰) 전에 핀란드는 자국(自國) 내에 독일군이 들어와 대소(對蘇) 공격을 준비하는 것을 허용하였다. 소련이 초전(初戰)에서 밀리자 핀란드는 실지를 회복하려고 독일 편에 서서 소련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1939년의 전쟁을 ‘겨울전쟁’, 1941년 전쟁을 ‘연장전’이라고 부른다.
  
 
만네르헤임은 이번에도 핀란드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히틀러는 만네르헤임을 존경하여 핀란드 주둔 8만 독일군의 지휘권을 맡아줄 것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만네르헤임은 독일 편에서 싸웠지만 선을 그었다. 소련에 빼앗긴 영토를 되찾는 데만 참전 목적을 두었다. 독일군이 레닌그라드 포위전을 벌일 때도 핀란드군이 합세하지 못하게 하였다
 

 

 히틀러와 스탈린의 존경을 받다

1939년 소련과의 전쟁 당시 핀란드군은 지형지물을 이용한 게릴라전으로 소련군을 괴롭혔다.

 

  1942 6 4일은 만네르헤임의 75세 생일이었다. 히틀러는 생일을 축하한다는 명분으로 비밀리에 핀란드를 방문하였다. 만네르헤임은 히틀러를 그의 사령부나 헬싱키에서 맞이하면 공식적인 성격의 회담으로 비칠까 신경을 써 지방 도시에서 만났다. 핀란드 측은 오해를 피하기 위하여 두 사람의 대화를 비밀녹음하였다. 히틀러는 만네르헤임에게 대소전(對蘇戰)에 더 적극적으로 참전할 것을 권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1944
년이 되면서 소련이 독일군을 밀어붙이고, 연합군이 노르망디에 상륙, 핀란드가 ‘지는 쪽’에 줄을 선 것이 확실해졌다. 만네르헤임과 핀란드 국가 지도부는 어떻게 하면 독일과 잡은 손을 떼고 소련과 휴전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되었다. 그들은 만네르헤임만이 이 난국(難局)을 헤쳐갈 수 있는 인물이라고 판단하였다
  
 
핀란드 지도부는 지혜롭게 대처하였다. 소련군이 핀란드를 공격하자 핀란드는 우선 독일과 동맹조약을 맺고 독일군의 도움으로 국토를 지키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후 동맹조약에 서명하였던 대통령이 사임했다. 그를 이어받아 만네르헤임 장군이 국회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전임(前任) 대통령이 서명한 조약을 무효화시키고 소련과 휴전회담을 시작, 한 달 뒤 휴전이 성립되었다. 핀란드는 일부 국토를 소련에 넘기고, 전쟁 배상을 하기로 하였으나 국체(자유민주주의-시장경제)의 보존을 약속받았다. 소련 편에 서게 된 만네르헤임은 총부리를 돌려 한때의 동맹국이던 독일군을 핀란드에서 쫓아내는 전투를 벌이게 된다
  
 
소련 등 연합국의 승리로 2차 대전이 끝난 이후에도 만네르헤임은 대통령직을 계속 수행하였다. 연합국 중 아무도 만네르헤임을 전범(戰犯)으로 재판하자는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스탈린은 1947년 모스크바를 방문한 핀란드 대표단을 맞아 “소련군이 핀란드를 점령하지 않은 것은 만네르헤임 덕분임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만네르헤임은 히틀러와 스탈린으로부터 동시에 존경을 받은 거의 유일한 인물이다. 1946 3 4일 대통령직을 사임한 그는 1951년에 사망하였다. 84세였다
  
 
핀란드는 소련에 대한 전쟁배상을 기계류와 조선(造船) 등 물품을 통하여 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기계공업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고 한다.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된 셈이다. 핀란드는 냉전시기에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유지하면서도 소련에 대하여는 유화적인 정책을 펴지 않을 수 없었다. 핀란드 정부는 정치적인 인사(人事)에 대하여는 사전에 소련정부와 상의하기도 하였다. 그러면서도 국익(國益)을 지켜낼 수 있었던 것은 소련 또한 두 차례 전쟁을 통하여 핀란드인들의 투지와 자립(自立)정신을 절감하였기 때문이다
  
  1989~1991
년 소련 해체기에 핀란드는 재빨리 발틱 3(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의 독립을 승인하는 등 탈()소련 정책을 선택하였다. 만네르헤임 기념관은 헬싱키 시내에 있다.   

  
  
교육 1위 핀란드, 2위 한국 

  2010년 여름 <뉴스위크>지가 실시한 ‘최고 국가(Best Countries) 랭킹’에서 1등은 핀란드였다. 한국은 프랑스, 아일랜드, 싱가포르, 벨기에, 스페인보다 앞선 15위에 올랐다. 이 조사는 ‘어느 나라에 태어나는 게 성공을 보장하는가’라는 설문(設問)으로 이뤄졌다. 현재와 과거보다는 미래의 잠재적 가능성을 더 중시한 조사이다. 그렇더라도 한국의 등수(等數)가 매우 높다. 그 이유는 한국의 교육이 높게 평가되었기 때문이다
  
 
핀란드는 국가가 교육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모든 국민이 경쟁력 있는 교육을 받도록 엄격하게 관리한다. 〈뉴스위크〉는 사람과 국가의 성패(成敗)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교육이라면서 특히 취학(就學) 전 조기(早期)교육이 가장 성공적인 투자라고 강조하였다. 1960년대에 불우한 환경의 어린이들을 상대로 조기교육을 받은 이들과 받지 못한 이들을 비교하는 조사를 시작하였다. 35년 뒤 결과는 너무나 명백하였다. 조기교육을 받은 이들이 돈을 많이 벌고, 좋은 직장을 갖고, 범죄와 이혼율도 낮았다
  
 
조기교육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학교에 머무는 시간을 늘리는 것이다. 학생들은 18세까지 깨어 있는 시간의 반을 학교 바깥에서 보낸다고 한다. 학교에 머무는 시간을 늘리는 게 좋다. 등교(登校)를 빨리 하고, 하교(下校)는 늦게 하고, 토요일에도 공부하는 게 좋다는 것이다. 과외수업이 나쁠 게 없다는 이야기이다
  
 
교사들의 질을 높이는 투자도 효과적이다. 좋은 교사와 나쁜 교사를 놓고 학생들의 배움 양()을 조사한 결과 3배의 차이가 났다고 한다. 부모의 수준도 자녀들의 학업과 출세를 좌우하는 큰 요인이다. 전문직 종사자를 부모로 둔 경우엔 3세 때 이미 다른 아이보다 어휘력(語彙力)과 지능지수에서 1년을 앞서간다
  
 
‘최고 국가 조사’ 항목 중 교육부문에서 한국은 1위 핀란드에 이어 2위로 평가되었다. 〈뉴스위크〉의 평가가 다소 과장된 면이 있고, 한국 사정에 어두운 구석도 있겠지만(애국심 교육과 국어 교육의 실패를 간과), 바깥에서 바라보는 한국 교육의 전체적인 모습은 안에서 생각하는 것과는 너무 다르다. 그러니 교육망국론(亡國論)이란 말은 쓰지 않아야겠다
  
 
헬싱키의 핀란드의 국립박물관에 가니 자신들의 정체성에 대한 이런 글이 있었다
  
 <
우리는 인종적으론 20%가 아시아 계통, 80%가 유럽계통이다. 문화적으론 유럽이다.>
  
 
핀란드인들은 바이킹족과 이웃하여 살다가 바이킹 문명(文明)의 일원이 되었다. 좋은 친구를 둔 덕분에 초일류(超一流)국가 클럽에 들어간 셈이다. 한국도 이승만(李承晩) 대통령 덕분에 한미(韓美)동맹을 통하여 세계에서 가장 선진되고 강력하고 너그러운 나라와 친구가 되었다. 이 행운에 한국인의 교육열이 더해졌다. ‘삶의 질’ 랭킹 12위는 그렇게 하여 가능해진 것이다. ‘일류(一流) DNA’는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교육이다.
 

조갑제(趙甲濟) 조갑제닷컴대표

 

■유럽行 액소더스

◆1. 돈 없으면 밀항 못해… 엄마는 애 둘 데리고 공원서 오늘도 버틴다

지난 18일 해 질 녘 터키 서북부 이스탄불 중심의 무라트파샤 공원에서 30대 중반의 시리아 여성 니아마가 행인을 상대로 구걸하고 있었다. 그는 허름한 나일론 재질의 검은색 아바야(위아래가 한 벌로 이어진 이슬람 여성 의복)와 얼룩덜룩한 붉은 히잡(이슬람 여성용 두건) 차림이었다. 네댓 살 되어 보이는 아이 둘이 그의 곁에 있었다.

무라트파샤 공원은 그리스와 불가리아와 접한 터키의 국경 도시 에디르네행() 버스가 있는 오토가르(버스 터미널)로 가는 길목에 있어 난민이 몰렸다. 이 때문에 이들에게 돈을 받고 밀입국을 알선하는 브로커도 은밀히 활동하는 곳이 이 공원이다. 이날도 육로를 통해 유럽에 가려고 터키 남부 도시 이즈미르와 가지안테프 등지에서 올라온 난민들이 공원에 가득했다. 기자도 이날 가지안테프에서부터 난민들과 동행하며 피란 루트를 따라 현장을 찾았다.

공원 잔디밭 귀퉁이에 앉아 있던 니아마는 기자가 다가가자 아이들을 끌어안으며 움츠렸다. 하지만 "난민 시설에 들어가는 것이 더 안전할 텐데 왜 거리에 나앉아 있느냐"고 묻자 그는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난민 시설에 들어가고 싶어도 자리가 없어 못 갑니다. 공중 화장실이 있고 잔디밭이 있는 이 공원이 그래도 나은 편입니다." 그는 "브로커를 통해서 에게해를 건너 그리스 섬으로 가거나 이스탄불 서쪽의 국경 지대를 통해 밀입국할 생각은 안 했느냐"는 질문에 "그러려면 돈이 필요한데, 애 둘의 비용까지 감당할 능력이 안 된다"고 말했다. 터키 내 시리아 난민은 약 200만명이지만 제대로 된 시설에 수용된 이들은 전체의 10% 수준에 불과하다. 대부분 제대로 끼니조차 때우지 못하고 터키 내에서 전전하며 궁핍하게 살고 있는 것이다.

 

▲요람 대신 골판지 상자 - 그리스 북부 이도메니 마을에서 시리아인으로 추정되는 한 난민이 골판지 상자에 아기를 담아 이동하고 있다. 시리아 난민들은 100여명이 살고 있는 이 마을을 거쳐 마케도니아로 넘어간 뒤 세르비아와 헝가리를 통과해 서유럽 국가로 들어가고 있다. /AP 뉴시스

 

또 다른 시리아 난민인 예순한 살의 알리 이스학은 "지중해 밀항을 하려면 브로커에게 1000~2000달러는 줘야 하는데, 오랜 피란 생활로 돈도 잃고 건강도 잃어 지금은 어찌할 길이 없다"고 했다. 그는 "헝가리 등 동유럽에서 이미 들어가 독일로 가겠다고 하는 난민들의 얼굴을 TV에서 한번 보라"면서 "이들 대부분은 젊은 편이고 영어도 할 줄 아는 대학 졸업자들"이라고 말했다. "버스표를 살 형편이 없거나 국경 지대로 걸을 기력이 없는 빈곤층과 노약자는 난민 행렬에서도 맨 뒤로 처지며 '하층 난민' 신세가 된다"는 것이다.

그때 이스탄불에서 서쪽으로 230㎞ 떨어진 국경 도시 에디르네의 도로에서 난민 2000여 명이 경찰과 충돌했다는 현지 통신사의 속보가 기자의 휴대전화 화면 창에 떴다. 난민들이 기습적으로 도로에 모여 그리스 입국을 요구하며 국경을 향해 행진 시위를 한 것이다.

 

 

현장을 잡기 위해 급히 에디르네로 이동했다. 하지만 시위 장소에 도착했을 때는 난민들이 경찰에 강제 연행돼 인근 임시 시설에 수용된 뒤였다. 청년 300여 명은 진압 선을 뚫으려다가 경찰에 제지되는 과정에서 다쳐 병원에 후송됐다. 하지만 그 소란을 틈타 일부 난민이 국경 철조망을 넘어 재빨리 그리스로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짧은 순간 또 난민들 사이에 운명이 갈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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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오전 찾아간 그리스 국경 검문소는 전날 발생한 소요 문제로 긴장감이 고조돼 있었다. 곳곳에 진압용 장갑차, 무장한 경찰과 군인이 배치돼 있었다. 기자가 사진을 찍으려고 하자 무장 경찰이 갑자기 튀어나와 한쪽으로 끌고 가더니 "찍지 마라"며 반() 협박조로 말했다. 그리스행 입국 심사 사무실에 가니 심사관은 난민이 아닌 관광 목적으로 그리스에 입국하려는 외국인들에게도 신경질을 내며 고함을 쳤다. 기자가 "그리스에 무비자로 입국 가능한 한국인"이라고 했지만, 그는 "체류하는 동안 구체적으로 어디를 가고 어느 숙소에서 묵을지를 입증하는 문서를 내야 한다"며 입국을 막았다. "스마트폰으로 예약한 숙소 정보를 보여주겠다"고 했지만, 그는 "이미 늦었다"면서 "터키로 돌아가라"고 했다.

이렇게 터키에서 그리스나 불가리아를 잇는 육로가 강력히 통제되면서 난민들은 다시 목숨을 걸고 쿠르디 가족이 그랬던 것처럼 위험한 바닷길을 택하고 있다. 이날 밤에도 중동 난민들이 탄 배가 그리스로 밀항하다 터키 선박과 충돌해 뒤집히면서 난민 13명이 익사했다. 이 중 6명이 어린이였다.

조선일보 노석조 특파원

 

◆2. 시리아의 피아노맨

이슬람극단주의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의 위협 속에서도 음악으로 동포들을 위로했던 시리아의 피아노 연주자 아이함 아흐마드(27)가 지난 16일 터키에서 밀항해 가까스로 그리스 섬 해안에서 구조된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아흐마드는 20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지금 자유가 있는 유럽에 있다. 파도가 심해 위험했지만 다행히 금세 가라앉았고 레스보스섬 근처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해안 근처에서는 배에서 뛰어내려 헤엄을 치다가 그리스 해안경비대에 구조됐다.

▲시리아의 피아노맨’ 아이함 아흐마드가 수도 다마스쿠스 외곽 야르무크 난민촌 폐허에서 피아노를 치고 있다. /BBC

아흐마드는 작년 내전 격전지인 수도 다마스쿠스 외곽 야르무크 난민촌 폐허에 허름한 피아노를 갖다 놓고 연주하는 동영상을 인터넷에 올려 세계를 감동시켰다. 그는 70㎏였던 몸무게가 45㎏으로 줄어드는 등 건강이 악화되면서도 시리아를 떠나지 않고 내전 희생자를 추모하고 평화를 기원하는 연주를 멈추지 않았다. '시리아의 피아노 맨'이라는 애칭도 붙었다.

하지만 지난 4 IS '연주는 이슬람 율법에 어긋난다'며 살해 위협을 하며 피아노를 불태워 버리고, 고양이까지 잡아먹어야 할 정도로 식량 사정이 악화되자 그는 결국 조국을 등지기로 했다. 아흐마드는 6개월에 걸쳐 수백㎞를 걸어 터키 국경을 통과한 뒤 서부 이즈미르로 이동했고, 결국 그리스 땅을 밟았다. 아흐마드는 "그리스에서 독일로 갈 것"이라면서 "내전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갈 때까지 독일에 머물며 못다 한 피아노 연주를 계속하고 싶다"고 말했다.

조선일보 노석조 특파원

 

◆2015-10-28  난민은 존엄하다

 

터키 해변에서 숨진 채 발견된 세 살베기 시리아 난민 소년 알란 쿠르디의 죽음을 추모하고 난민의 실상을 알리기 위해 인도 아티스트 수다르산 팻낵이 만든 모래조각. 팔레스타인인 거주 가자지구 해변이다. 


유럽대륙의 호수 같은 바다, 지중해. 워낙 넓다 보니 해역별로 고유 명칭이 있다. 동편의 그리스와 터키 사이는 에게 해다. 그 바다엔 아름다운 섬도 많아 ‘지중해의 진주’라 불린다. 청동기시대 고대문명의 발상지인 크레타, 미노스 등의 섬과 좋은 기후, 멋진 풍광 덕분이다. 그래서 크루즈 여행의 보고가 됐다. 모항은 그리스의 아테네. 유람선은 그리스의 섬을 경유해 아시아 지역인 터키의 유적도시 에페수스까지 오간다. 버킷리스트에서 빠지지 않는 그리스 산토리니도 에게 해 키클라데스 제도의 섬이다.

누구든 가고 싶어 하는 에게 해가 요즘은 비극의 무대로 변했다. 엑소더스 중인 시리아 난민들이 생사의 기로에 선 곳으로 말이다. 지금 이 순간도 그렇지 않을까 싶다. 맨몸의 난민들이 가랑잎처럼 흔들리는 보트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을 테니. 알란 쿠르디의 가족도 그랬다. 쿠르디는 지난달 2일 터키의 한 해변에서 숨진 채 발견된 세 살배기 시리아 소년이다. 아빠는 아내와 두 살 터울의 형제를 데리고 에게 해를 건너 그리스로 가다가 보트가 전복돼 사랑하는 가족을 모두 잃었다. 

내가 쿠르디의 사진을 본 건 취재차 이스라엘에 머물 때였다. 그건 내게도 충격이었다. 그 직후 보도를 접하니 유럽은 난민 수용 여부를 놓고 흔들리고 있었다. 미온적이던 난민수용정책에 대한 반성과 변화, 그로 인한 혼란 때문이다. 심정적으로는 수용해야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니 이해 못할 바도 아니다. 아랍계 난민 수용으로 떠안게 될 경제·사회적 비용과 문화·종교적 갈등에 대한 우려도 만만찮으니.

그렇지만 쿠르디 사건으로 세상은 정신을 차렸다. 난민구제가 선택이 아님을 깨달은 것이다. 쿠르디 사고 전 지중해에서 숨진 난민이 올해만 2643명이라는 국제이주기구(IOM)의 통계도 큰 힘을 보탰다. 다른 유럽국가와 달리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처음부터 진솔했다. 흔들림 없이 초지일관했다. 그는 8 26일 모든 난민을 수용하겠다고 선언하고 올해 80만 명을 받아들이겠다고 밝혔다. 80만 명’은 지난해 유럽연합 28개국이 들인 난민 수를 넘는 수치다.  

메르켈 총리의 이 선언은 독일 국내의 난민 거부 움직임 속에 나온 것이어서 더욱 돋보였다. 당시 드레스덴 근처 하이데나우 시에선 극우주의자들이 난민 250명이 탄 버스를 가로막고 경찰에게 폭력까지 휘둘렀다. 총리는 그 현장을 찾았고 자신에게 ‘배신자’라고 야유하는 시위대를 향해 일갈했다. ‘난민도 존엄의 대상이며 독일은 그래야만 한다’고.
 

지금 내전으로 고통받는 시리아인은 2200만 명. 이 중 25만 명은 숨졌고 760만 명은 집을 잃은 채 나라 안을 떠돌고 있다. 400만 명은 터키 이라크 레바논 요르단 이집트에 이미 이주했고, 또 다른 400만 명은 국경을 넘어 정착할 곳을 찾거나 찾을 것으로 추정된다.

전쟁은 난민을 낳는다. 그건 독일도 다르지 않았다. 나치독일에서도 모든 국민이 히틀러를 추종한 건 아니다. 수많은 독일인이 배편으로 독일을 등졌다. 그중엔 일제강점기의 우리나라를 찾은 이도 있다. 김일성 별장이라 불리는 ‘화진포의 성’(예배당)을 지은 건축가 H. 베버다. 
 

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 서독도 그랬다. 구소련 위성국가로 전락한 동독 내에서 섬처럼 고립됐던 베를린의 서쪽 시민들도 한때는 난민이었다. 당시 베를린 시는 연합군(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에 점령돼 소련군 관할의 동베를린, 서방연합군 관할의 서베를린으로 양분됐다. 그런 베를린을 소련이 1년간(1948 6월∼1949 5) 무력으로 봉쇄했다. 육로와 수로 통행을 막은 것이었다. 이때 서방이 베를린을 포기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통일된 지금의 독일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연합군은 베를린을 버리지 않았다. 일촉즉발의 무력 충돌도 피하지 않고 비행기로 생필품을 공수했다. 항공기 추락 등 피해도 적지 않았지만 서베를린 시민을 외면하지 않았던 것이다. 

동독 출신인 메르켈 총리는 그 당시를 기억했을 것이다. 사람에 대한 존엄을 목숨 걸고 보호한 당시 서방의 의연함을. 유럽연합에 지금 필요한 건 이런 역지사지(易地思之).

조성하 전문기자 summer@donga.com 

 

◆2015.10.29 장벽 쌓는 유럽…갈 곳은 '죽음의 바다'?

▲진격의 거인’ 극장판 ‘홍련의 화살’ 캡처. 거대한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의 모습. [사진=’진격의 거인’ 영화 캡처]


일본에서 인기를 얻은 애니메이션 ‘진격의 거인(進擊の巨人)’을 보면 인류는 거대 장벽 안에서 살아간다. 수십m나 되는 식인 거인을 피해서 만든 거대 장벽이다. 50m나 되는 장벽은 3중으로 만들어져 있고 내벽으로 갈 수록 높은 권력자들이 거주한다. 영화 ‘진격의 거인’은 외부의 공포를 이용한 교묘한 권력의 지배와 불평등을 보여준다. 미국 공화당의 대선 후보 도널드 트럼프가 멕시코 국경에 장벽을 쌓겠다고 했을 때 ‘진격의 거인’과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트럼프는 멕시코 이민자를 ‘성범죄자’로 지칭하며 미국인들에게 위협이 된다고 경고했다. 이민자들은 식인 거인이고 장벽이 필요하다는 논리와 비슷한 이야기다.

최근 유럽에서도 장벽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있다. 지중해를 통해서 들어오는 난민을 막기 위해서다. 미클 라이트너 오스트리아 내무장관은 28(현지시간) “열흘 후부터 국경지역에 물리적 장벽 건설을 시작한다”고 밝혔다. ‘솅겐조약’을 의식해 “국경을 닫는다는 뜻은 아니고, 입국을 질서 있고 체계적으로 하려는 것”이라며 “장벽에는 문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 군 측은 슬로베니아 국경에 철책 혹은 컨테이너를 설치할 방침이라고 못을 박았다.

 

▲유럽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장벽들.


오스트리아만이 아니다. 난민을 막기 위해 유럽에 설치되었거나 설치 중인 장벽은 10여개나 된다. 장벽은 점차 남진하고 있으며 해안선에 가까워지고 있다. 중부 유럽이 내부의 장벽을 치고 있고 발칸반도와 동유럽 국가들이 외부 장벽을 만드는 양상이다. 거리가 멀긴 하지만 영국과 프랑스도 장벽을 만들고 있는데 어쩌면 이곳이 가장 안쪽의 장벽일지도 모른다. ‘진격의 거인’처럼 3중 장벽이 힘이 센 나라를 중심으로 동심원을 그리며 장벽이 만들어지는 양상이다. -클로드 융커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은 28일 “유럽에 장벽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며 장벽 불가 방침을 재확인했지만 솅겐조약은 허물어질지도 모른다.

 

▲SNS에서 공유되는 EU 국가들의 장벽 설치 풍자 만화. [트위터 캡처]
 

헝가리는 이미 지난달 18일 세르비아와의 국경에 레이저 철조망을 두른 높이 4m의 철조망 장벽을 1차로 완성했다. 이달 15일에는 크로아티아 국경지역까지 총 177㎞의 장벽을 완성했고 루마니아 쪽 국경에도 장벽을 만들 계획이다. 헝가리와 오스트리아의 움직임에 맞춰 슬로베니아도 크로아티아 쪽 국경에 장벽설치를 고려하고 있다고 밝혔다. 난민 정책 마련을 주도하는 독일도 예외는 아니다. 독일 일간 빌트는 집권 기민당이 오스트리아 쪽 동부 국경에 콘크리트로 된 장벽을 만드는 법안 설치를 찬성했다고 보도했다. () 이민 정서 확대로 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지지율이 역대 최저까지 떨어진 가운데 나온 조치다.

이런 중부 유럽의 장벽 건설은 도미노처럼 번지고 있다. 중부ㆍ서부 유럽으로 진입하지 못한 난민들을 그대로 떠안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의 확산이다. 영국 인디펜던트는 “발칸 국가들이 난민의 완충지가 되는 걸 두려워하며 난민을 향한 문을 잠그려 한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불가리아와 그리스도 터키 쪽 국경에 장벽을 쌓았다. 불가리아는 이미 터키 인근 레소보 지방에 길이 32㎞의 철조망 담벼락을 설치했고 총 160㎞까지 장벽을 확대할 방침이다. 그리스도 터키 국경에 11㎞의 장벽을 만들었다. 터키 쪽에서 넘어오는 난민의 1차 저지 장벽이 만들어 진 셈이다. 동구권 세르비아와 루마니아도 “독일이나 주변국이 난민을 막으면 우리도 국경을 닫을 수 밖에 없다”고 성명을 냈다. 유럽으로 유입되는 난민의 80%가 택하는 ‘터키-발칸반도’루트가 장벽에 막힐 수도 있다는 의미다.

 

▲난민들의 이동 경로. [국제이주기구 홈페이지]
 

지중해 서부 쪽도 마찬가지다. 영국과 프랑스는 유로터널을 통한 난민진입을 막기 위해 700만 파운드( 126억원)를 투입해 2㎞ 가량의 장벽을 만들고 있다. 스페인은 북아프리카에서 넘어오는 난민을 막기 위해 2005년 세우타와 멜리야 지역 만든 장벽을 6m까지 높였다. 지난해에 모로코도 칼날을 설치한 5m 높이의 장벽을 세웠다. 이 지역은 올해 3845명의 난민이 넘어온 루트다.

물리적 장벽뿐 아니라 심리적 장벽도 점차 높아지고 있다. 반 이민 정서가 확산되며 우파 정권이 유럽 선거에서 연승을 올리고 있다. 지난 25일 실시된 폴란드 총선에서 난민 수용을 거부하는 법과정의당(PiS)이 과반 의석을 차지해 정권을 잡았다. 오스트리아에선 극우 자유당이 지난 11일 수도 빈 시장선거서 역대 최고 득표를 올렸고, 18일 스위스 총선에서도 민족주의 스위스국민당이 승리를 거뒀다. 포르투갈에서도 3일 집권 사회민주당 우파연정이 재집권에 성공했다. 유럽의 시민들은 인류애 차원에서 난민들에게 동정을 보여왔지만 점차 이들을 ‘식인 거인’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독일의 반 이민 시위나 북유럽에서 부는 반 이민 정서가 대표적이다.

더 큰 문제는 난민 주요 유입 경로인 터키와 스페인에도 선거가 예정되어 있다는 점이다. 다음달 1일 터키와 12월로 예정된 스페인 총선에서도 반 이민 정책을 내세운 우파 정권이 집권할 경우 물리적 장벽뿐 아니라 난민을 막는 다양한 정책이 추진될 가능성이 높다. 유럽연합(EU) EU차원에서 난민 문제 해결을 위해 계속 머리를 맞대고 있지만 뾰족한 방법이 없다. 결국 쏟아지는 난민에 불안감은 마음속에서 자라 장벽을 만들고, 그 장벽은 우파의 정치적 지지를 받아 물리적 장벽으로 현실화하는 것이다.

 

▲지중해지역의 난민 유입과 사망자. [국제이주기구 홈페이지]
 

지도를 보면 난민들이 유럽으로 들어오는 경로는 크게 3곳으로 나뉜다. 이중 동부 터키 루트와 서부 북아프리카~이베리아 반도 루트가 막히면 남은 건 중부 지중해를 통해 이탈리아와 그리스로 넘어가는 루트 밖에 남지 않는다. 이른바 ‘죽음의 지중해’루트다. 국제이주기구(IOM)는 올해 70 4227명이 지중해를 넘었고 이중 3257명이 바다를 건너다 사망했다고 27일 발표했다. 이중 중부 지중해에서 사망한 난민은 88% 2860명이다. 우리들 마음 속에 거인이 커지고, 장벽이 높아질 수록 난민들은 죽음의 바다로 노을 저을 수 밖에 없다는 말이다.

정원엽 기자 wannabe@joongang.co.kr  

 

◆난민들의 눈물 - 이미지

2015년

▲유럽행 난민들 15.8.30

 

▲지중해의 눈물 - 15.9.2 터키 물라주 보드룸의 해안 테서 시리아 출신 에이란 쿠르디 3세가 에게해에서 익사

 

▲크로아티아 국경

 

▲시리아 난민수용소 15.1월

 

▲터키 국경선의 터키 경찰과 난민 아기

 

▲난민 어린이 - 15.12.3 아프가니스탄 가즈니 지역

 

 

 

 

 

 

 

 

2016년

▲난민 보트 16.1.3 그리스 레스보스 섬

 

 

 

 

 

▲아프리카 난민들 - 16.5.16 지중해 해상

 

▲난민의 눈물 - 16.7.28 북아프리카 리비아 북쪽 23km 떨어진 지중해 해상에서 구조된 난민 남매의 눈물

 

 

 

 

 

 

 

▲난민들의 몸부림 - 16.8.29  리비아 해안에서 난민 6500명이 구조, 소말리아 에스트리아 출신들의 난민

 

 

▲난민들의 구명조끼 - 16.9.19 런던 국회 광장 시리아 난민들이 그리스 레스보스섬에 버린 조끼들이 펼쳐져 있다

 

 

 

 

▲난민들의 생사 - 16.10.4 지중해 리비아 인근에서 난민선이 구조를 기다리고 있다

 

 

 

 

 

 

 

 

 

 

◆2016-03-17 국경 막히자 강 건너는 난민들

 

 

 

 

 

 

 

 

 

 

▲4일 그리스-마케도니아 국경 부근에 머물던 난민들이 마케도니아로 가기 위해 캠프에서 빠져나와 이도메니 부근에서 강을 건너고 있다. 이들은 서로 손을 꼭 잡고 길게 늘어서 아이들의 도강을 도왔다. ◎

이도메니=AP 뉴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