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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스토리13/ 유라시아 이야기/ 1 金씨 성은 황금을 뜻하는 '알타이'에서 출현한 것일까? - (19)-(1)(2)(3) 노트르담 사원이 100년만에 지어졌는데/ 유라시아 문명 기행 2000㎞

상림은내고향 2022. 11. 18. 18:04

글로벌 스토리13

■잊혀진 유라시아 이야기

2015-04-17 조선일보  오은경 동덕여자대학교 교수

1 金씨 성은 황금을 뜻하는 '알타이'에서 출현한 것일까?

한국인은 알타이라는 이름을 역사가 생기기 이전 아득하고 머나먼 선조의 고향으로 기억한다. 인간의 회귀 본능을 생각해 본다면, 한민족의 시원으로 추정되는 알타이에 대한 궁금증과 호기심이 수없이 많은 사람을 그곳으로 이끌 법도 한데, 알타이는 아직 우리의 손길이 닿지 않은 신화와 전설 속 미지의 땅으로만 남겨져 왔다.

알타이를 방문하기로 결심했던 것은 지난해 여름이었다. 그런데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하는지 막막하기만 했다. 이렇게 저렇게 수소문한 끝에 인천공항에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를 경유 시베리아 벌판의 노보시비르스크까지 비행기를 타고 간 후 승용차로 갈아타서 산을 넘고 넘어 이틀에 걸쳐서야 간신히 알타이 공화국의 수도 고르노-알타이스크에 도착할 수 있었다.

국경이 없던 고대에는 알타이에서 한반도까지 말을 타고 나흘 정도면 갈 수 있었다고 알타이학 연구소 니콜라이 예게예프 소장이 말했다. 그런데 수 천 년이라는 시간이 흐르고 국경과 이념의 경계가 생기면서 공간적으로뿐만 아니라 심리적으로 너무도 머나먼 곳이 되고 말았다.

 

▲몽골 알타이지역(텝쉬)의 암각화. 서울시립대박물관 제공

 

핀란드 언어학자 람스테드가 한국어를 알타이어군으로 분류한 이후에도 지난 100년간 한국어의 근원은 명쾌하게 규명되지 않은 채 애매한 상황이었다. 알타이어 전문가들에 의하면, 한국어와 알타이어가 갈라진 시기는 대략 8000여 년 전이라고 한다. 8000여 년이란 아득한 기억만큼 한국어와 알타이어가 긴밀히 교류했던 흔적도 그만큼 희미하게 지워졌다.

거기에는 한자의 역할이 컸다. 한자를 받아들이고 난 후 순수 한국어의 표기는 한자어로 대체되었다. 음가대로 한자를 차용해서 썼던 일본어와는 달리 고대중국어의 음가까지 그대로 변용하였던 한국어는 ‘토속 한국어의 상실’이라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한 환경에서 한-알타이 두 나라 언어의 공통분모를 찾아보려는 지난 1세기 동안의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이번 알타이 여행을 통해 현지 알타이어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알타이어의 흔적이 아직도 우리말에 상당히 남아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으름장을 놓다’에서 ‘으름’은 알타이어로  ‘나쁜 징조’라는 뜻이다. 

한반도와 일본에서 ""으로 여겨졌던 ‘곰(←ᄀᆞᆷ)’이 제사장이란 뜻의 알타이어  ‘감’에서 나왔다는 것은 매우 신빙성이 있다. 이외에도 ‘물’ ‘꾀’ ‘주름’ 의성어 ‘구불구불’ 동사 ‘자르다’ ‘부수다’ 접미사 (장사)-, 복수어미 ‘들’ 등은 모두 알타이어와 공유하는 한국어의 토속 어휘들이다.

게다가 ‘알타이’는 ‘금()’을 뜻하는 말이다. 한민족에게서 가장 많은 성()인 ‘김()’씨는 그 뿌리가 단순한 철이라기보다 황금을 의미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는 점에서 황금의 나라 ‘알타이’와 연결 지을 수 있는 개연성이 있다. 알타이 족을 통칭하는 튀르크인들은 예로부터 철을 잘 다루었다.

이때 철은 금속 중에서 가장 값지고 순수한 금속인 금을 의미하였다. 그 때문에 유라시아 대륙을 제패했던 고대 튀르크인들에게 금을 다루는 대장장이는 그들 부족 사회에서 성인이자 현인으로 추앙받았으며 부족장과 더불어 가장 존경받는 위치에 있었다. 아마도 이러한 고대사회의 시대적 배경과 분위기 안에서 ‘금’이라는 뜻의 ‘김()’씨 성이 출현한 것은 아닌가 생각된다.

 

▲알타이 지역 주민들의 스키를 타는 모습. 조선일보DB

 

고대 신라가 중국의 영향권 안에 들어가기까지 왕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던 ‘마립간’이나 ‘거서간’ 등의 어휘에 나타난 ‘간’이라는 말도 알타이어와 일치한다. ‘마립’은 그들 사이에서 흔한 이름이고, 특히 ‘간(kaan)’은 알타이어를 비롯한 모든 튀르크어에서 ‘칸’ 혹은 ‘깐’으로 발음되는 ‘왕’을 칭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6세기 초기까지 신라 왕들이 썼던 금관이나 왕릉 등이 유라시아 튀르크족의 유물, 유적과 흡사하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아쉽게도 북방으로 진출하고자 하는 한민족의 의지는 역사적으로 중화 한자문화에 의해, 근대에 와서는 소련의 철의 장막과 남북 분단의 현실로 인해 날개를 접었던 적이 있었다. 그 결과 이미 알타이를 회상하는 기억세포도 잊힌 지 오래다.

하지만 이제는 신화시대에나 있었을 것 같은 망각의 기억을 되찾아야 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우선 마음의 길부터 열어야 하겠다
.

 

오은경

동덕여자대학교 교수

E-mail : euphra33@hanmail.net

 

한국외국어대학교를 졸업하고 터키 국립 하제테페 대학교에서 터키문학과 비교문학으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우즈베키스탄 알리셰르나보이 국립학술원에서 우즈벡 구비문학과 민속학, 비교문학으로 외국인 최초로 인문학 국가 박사학위(Doctor of Science)를 받았다. 터키 국립 앙카라 대학교 외국인 전임교수와 한국학 중앙 연구원 초빙연구원(Post-doc), 우즈베키스탄 니자미 사범대학교 한국학 교수를 역임했다. 현재 동덕여자대학교 재직 중이다.

주요 연구 분야는 터키문학·이슬람여성·비교문학·중앙아시아 투르크 민족의 구비문학·정신분석학이다. 터키·유라시아 투르크 전문가로서 한민족의 근원과 투르크와의 친연성을 연구 중이다.


저서로 '터키 문학 속의 한국 전쟁', '20세기 페미니즘 비평: 터키와 한국 소설속의 여성', '베일 속의 여성 등이 있다.

 

2 아버지를 활로 쏴 고슴도치 만든 흉노족 샤누이 모데

리더라면 사적 가족적 '()'을 저버려야

중국식 사관의 영향으로 우리는 북방민족들을 오랑캐 또는 야만족으로 간주하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이들 북방민족은 우리와 고대문화를 공유했던 형제국가들이었고 세계적 제국을 이루었던 민족들이었다. 그중의 하나가 흉노였다. 흉노는 한민족과 마찬가지로 탁월한 기마민족으로써 활을 잘 쏘기로 유명했으며 중국을 굴복시키고 조공을 받았던 강력한 대제국이었다.

흉노의 샤뉴이 모데(선우묵돌)는 거대한 중국을 굴복시키는 촉매가 되었던 휘파람 소리를 내는 화살 “명적(鳴鏑)”을 만든 것으로 유명하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중국인을 사시나무처럼 떨게 하였던 그의 강력한 지도력이었다. 대의를 위해 그는 자신의 피붙이까지도 과감하게 도려낼 줄 아는 위인이었다.

모데는 계모와 아버지의 음모로 적대국인 이웃 유엣지(월지)로 인질로 잡혀갔지만 오히려 준마를 탈취하여 고향으로 돌아온다. 아버지는 적국에서 살아 돌아온 아들을 기특히 여겨 그를 죽이지 않고 만여 가구가 사는 투멘 지역(연해주와 두만강 이북 지역)을 하사한다. 모데는 거사를 준비하기 위해 주민들을 기마대로 만들어 말 타고 활 쏘는 법을 가르친다. 마침내 어느 날 그는 자기가 명적을 쏘면 그 방향으로 화살을 쏘라고 병사들에게 명령한다. 명령에 따르지 않는 자는 모두 처형한다고 엄명을 내렸다.

 

▲고대 흉노족이 사용한 명적./시베리아 크라스노야르스크 지역학 박물관 제공

 

그는 병사들의 군기가 어느 정도인지 시험해보기 위해 자신이 애지중지하던 아르가마크(준마)를 향해 명적을 쏜다. 너무도 아름답고 빼어난 지도자의 준마에게 감히 화살을 쏘지 못하고 망설였던 군사들은 그 자리에서 목이 날아간다. 얼마 후 모데의 화살은 절세미인으로 명성이 자자한 자신의 아내를 겨누고 만다. 모데의 측근 호위대는 아름답기 그지없는 지도자의 아내에게 도저히 화살을 날리지 못한다. 그들은 어김없이 처형당하고 만다.

그러고서 모데는 사냥 중이던 아버지 투만의 애마를 향해 명적을 쏜다. 그러자 모두 일사분란하게 활시위를 당긴다. 병사들이 일제히 자신의 명령에 따르는 것을 확인한 모데는 드디어 아버지를 향해 활을 쏘고, 결국 아버지 투만의 몸은 화살에 박혀 고슴도치가 되어버린다. 이어 계모와 이복형제를 처치한 모데는 흉노의 지도자인 샤뉴이(선우)가 된다. (기원전209).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흉노족 간의 내분으로 그들의 세력이 약화하였을 것이라고 판단한 둔후(東胡)는 끊임없이 흉노에게 조공을 요구하다가 심지어는 황무지까지 떼어달라고 한다. 이때 흉노의 대신들은 가축도 치지 못할 황무지를 위험을 무릅쓰며 지켜야 할 이유가 없다고 제언한다.

 

▲샤뉴이 모데./시베리아 크라스노야르스크 지역학 박물관 제공

 

모데는 “토지는 국가의 기본이거늘 어찌 국토를 포기할 수 있겠느냐!”라고 대로하며 황무지를 포기하자고 제언한 대신들의 목을 친다. 이어 정예 기마부대를 동원하여 무자비하게 둔후를 토벌한다. 흉노는 마침내 만주의 거대한 초원지역을 점령하고, 기세를 몰아 한()나라를 굴복시켜 조공까지 받아내는 대업을 이루면서 막강한 유라시아 제국을 건설한다.

흉노가 유라시아의 맹주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대의를 위해서라면 사적 “의리”와 자신의 이익을 과감히 포기하고 자신에게 냉혹할 줄 알았던 모데의 리더십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모데의 리더십은 국가와 기업, 나아가 인류의 미래를 짊어지고 나가야 하는 글로벌 지도자라면 깊이 새겨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여러 지도자들이 흔히 범해온 가장 큰 패착은 측근을 비롯한 주변 인물에 얽매인 사적이거나 가족적인 “연()”에서 비롯되지 않았던가. 그러한 연에서 벗어나 열린 세계를 지향하고 세계로 뻗어나가야 하는 한민족의 시대적 당위성을 고려할 때 우리는 진취적이고 역동적인 기마민족의 후예라는 것을 상기해 봄 직하다.  

 

3 뜨거운 태양 아래 낙타 젖통가죽을 삭발한 포로 머리에 씌우면…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고문

신화와 전설 속에는 인간이 잊어서는 안 되는 압축된 상징이 담겨 있다. 중앙아시아에는 포로들의 기억을 말살시켰던 무시무시한 주안주안 족의 고문에 대한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왜 굳이 기억을 말살시키려 했던 걸까?

그들은 포로를 잡으면 완전히 삭발시키고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낙타의 젖통 가죽을 포로의 머리에 뒤집어씌우고, 목에는 칼, 손발에는 족쇄를 채워 뜨거운 사막에다 머리를 처박게 한 후 음식도 주지 않고 며칠이고 그대로 팽개쳐 두었다.

그러면 이글이글 타오르는 태양 아래 낙타의 젖통가죽이 말라 비틀어져 가며 삭발한 포로의 머리를 쇠고랑처럼 짓눌러 댄다. 둘째 날부터는 새로 솟아나기 시작한 빳빳한 머리카락이 낙타의 가죽을 뚫지 못하고 오히려 포로의 머릿속을 뚫고 들어가 버린다. 이때 고통이란 가히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계속되는 고통 속에 대부분의 포로는 죽어버리고 만다. 그중에서 간혹 생존자가 생긴다면 그를 풀어주고 음식과 물을 주어 건강을 되찾게 해준다.

그러나 극심한 고문을 겪은 생존자는 이미 과거의 기억을 완전히 상실한 후이다. 그들은 이렇게 해서 노예가 된 포로를 만쿠르트라고 불렀다. 만쿠르트는 통상적인 열 명의 노예보다 더 값진 대우를 받았다. 만쿠르트는 자기의 출신하며, 자기의 이름과 어린 시절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어머니와 아버지도 기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쿠르트에게 자의식 따위는 없었다. 밥을 주는 주인에게만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최상의 노예일 뿐이었다.

노예를 소유한 주인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노예 반란이란 점을 고려해 본다면, 만쿠르트 만큼은 그럴 염려가 없었다. 만쿠르트는 개처럼 밥을 주는 주인만 알아볼 뿐이었다. 또한 만쿠르트는 모진 고통을 견디고 살아났을 정도로 생명력이 강하고 힘이 셌기 때문에 아무리 더럽고 힘든 일이라도 불평 없이 해치우는 훌륭한 노예였다.

하지만 그는 이미 죽은 영혼과 다름없었기 때문에 주안주안 족에게 붙잡혀 가서 만쿠르트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가족들조차 그를 구해보겠다는 결심을 포기해버렸다. 그럼에도 붙잡혀간 아들을 찾아 나선 나이만 족의 어머니가 있었다.

 

▲활을 겨누고 있는 만쿠르트./조선일보DB

 

이 어머니에게는 잘생기고 늠름한 아들 졸라만이 있었다. 졸라만은 불행하게도 주안주안 족과 전투를 하다가 포로로 잡혀갔다. 어머니는 아들을 찾겠다는 일념으로 하얀 낙타 한 마리에 몸을 의지한 채 위험을 무릅쓰고 주안주안 족의 목초지로 잠입했다. 그녀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아들을 찾겠다는 열망에 가득 차 있었다.

그녀는 수소문 끝에 아들을 찾아냈고 몰래 그에게 접근했다. 그러나 가축 지기가 되어 있는 아들은 겉모습만 과거와 똑같을 뿐 이미 만쿠르트가 된 지 오래였다. 그녀는 무표정한 아들의 어깨를 부여잡고 슬픔에 복받쳐 흐느껴 울어봤지만, 아들은 어머니의 손을 뿌리치고 낙타 무리를 돌보는 데 여념이 없었다. 어머니가 아들의 기억을 되살려보려고 아무리 애를 써보았으나 소용이 없었다.

주안주안 족의 삼엄한 경비를 피해 달아나기도 했던 어머니는 도저히 자기 핏줄인 아들을 노예로 내버려둘 수가 없었다. 낯익은 환경으로 데려가면 언젠가 제정신이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한 가닥의 희망을 기대하며 어머니는 주안주안 족의 삼엄한 경비를 뚫고 아들이 있는 곳으로 다시 몰래 들어갔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자장가를 불러주기도 하며 모성애를 느끼게 해주려고 노력해보았다.

주름진 얼굴에 머리가 하얗게 센 어머니의 얼굴은 비통함에 젖어 “졸라만! 내 아들 졸라만!”하고 외쳐댔다. 그러나 그때 만쿠르트가 된 아들은 낙타 그늘에 숨어서 한쪽 무릎을 꿇고 그녀를 향해 팽팽하게 활시위를 당기고 있었다. 누군가 낯선 자가 접근하면 무조건 활을 쏘아 버리라는 주안주안 족 주인의 지시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하얀 낙타 아크마야를 탄 어머니는 아들과 눈이 마주쳤다. 순간 “쏘지 마!”라고 외쳐봤지만 화살은 허공을 가르며 이미 그녀의 옆구리에 박힌 후였다. 어머니는 낙타의 목을 붙잡은 채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그때 그녀의 하얀 목도리가 떨어져 새로 변해 날기 시작하였다. 새가 외쳤다. “얘야, 기억해봐, 넌 누구의 아들이니? 네 이름이 뭐니? 너의 아버지는 도넨바이다! 도넨바이!”그날부터 그곳에서는 밤마다 도넨바이란 새가 날아다니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어머니가 묻힌 곳은 “어머니의 안식”이라는 뜻의 “아나 베이트 묘지”라고 불렸다.

중앙아시아의 튀르크 인들은 자신의 뿌리와 근본을 망각하지 않기 위해서 7대 조상까지는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만 부끄럼 없는 삶을 살 수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 튀르크 인의 심성 속에는 한국인처럼 조상숭배 사상이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다. 자존심이 강하고, 자신이 누구인지 근본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튀르크 인들에게 기억을 빼앗긴 채 만쿠르트로 살아가는 상황이야말로 인간으로서 참을 수 없는 가장 끔찍한 비극이었을 지도 모른다. 자신이 누구인지 잊어버렸던 것의 결말은 결국 친모살해와 같은 반인륜적인 비극을 초래하지 않았던가.

기억을 말살한 후 만쿠르트로 만들었던 주안주안 족의 고문은 중앙아시아 튀르크 인들에게 전해 내려오는 전설이다. 하지만 그러한 반인륜적 행위가 과연 주안주안 족에게만 국한 되었을까? 인류 역사 속에서 사람들을 세뇌하고 기억을 뺏어버리려는 시도는 국가에서부터 개인에 이르기까지 무수히 시도되었다.

일본은 끊임없이 기억을 왜곡하고 말살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최근
아베 총리의 미 의회 연설에 우리 모두 촉수를 곤두세우고 있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우리는 역사를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4  남자들이 말타기, 활쏘기, 씨름할 때 여자들이 유독 씨름판에 관심을 둔 까닭은?

씨름은 한민족 고유의 놀이일 뿐만 아니라 중앙아시아 튀르크 제 민족은 물론이고, 몽골을 비롯한 유라시아 대륙 전역에 퍼져 있는 민속경기이다. 씨름은 인류사에서 그 어떤 형태의 스포츠보다 오래된 것으로 알려졌다. 연구결과에 따르면 중앙아시아에서 씨름이 시작된 것은 최소한 3500년 전부터였다고 한다.

특히 씨름은 남성들의 힘겨루기 형식으로 축제나 의식, 또는 결혼식이 벌어질 때 춤과 음악 못지않게 사람들 흥을 돋아주었던 고대인들의 중요한 엔터테인먼트였다고 할 수 있다.

2500
년 전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이자 역사가였던 헤로도토스는 고대 튀르크족의 관습에 관해 언급하면서 이미 그때 튀르크족의 씨름 전통에 대해 기록한 바 있다. 서기 10세기 중앙아시아의 저명한 의술가이자 사상가인 아비쎄나(980-1037)는 심신을 단련하는데 씨름만큼 좋은 방법은 없다고 전하기도 했다. 이처럼 오랜 세월동안 씨름으로 몸과 마음을 연마해 온 튀르크 남성들이 ‘하면 된다, 해야 한다, 물러서지 않는다!’ 라는 강인한 정신을 갖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천 년 전에 등장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중앙아시아 튀르크족의 전설적인 영웅 서사시 주인공 알퍼미쉬는 씨름을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겨루기 시합’이라고 지칭하고 있다. 또한 칭기즈칸 군대에서는 최고의 씨름꾼들을 전쟁을 지휘하는 장수로 발탁했을 뿐만 아니라 병사들에게 의무적으로 씨름을 가르쳤다. 그래서 튀르크인들은 씨름을 ‘검은 호랑이’라고 불렀다.

칭기즈칸에 버금가는 튀르크의 위대한 정복자 티무르(1336~1406)는 병사들의 체력단련을 위해 매일 ‘검은 호랑이’를 연습시켰다. 당시 오스만 왕조를 제압하고 영국, 프랑스와 외교관계를 맺었던 티무르 군대는 무패를 자랑하는 최강 군대였고, 그 시대 세계 영토의 절반을 정복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주변국에 파견하는 외교사절단에 반드시 최고의 씨름꾼들을 포함했다.

사신들을 위한 접대나 피로연이 끝나면 씨름꾼들의 시범경기를 보여주며, 간접적으로 티무르 군대의 힘과 국력을 과시했다. 그 결과 사신들이 협상을 타결하고, 외교적 문제를 해결하는데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튀르크족 민족 정보 포털 사이트 제공

 

그래서 명성이 높고 힘센 씨름꾼들은 민중 속에서 전설이 되어왔다. 튀르크족인 타타르 인들이 사는 크리미아 반도에는 전설적인 씨름 영웅들이 묻힌 묘지들이 보존되어 있다. 그곳은 지금도 많은 참배객이 찾는 성지가 되어 있을 정도이다. 키르기스스탄에서는 물 맑고 푸른 산골 잔디에서 씨름하며 남성들이 호연지기를 보여주고 있으며, 씨름을 국기(國技)로 삼는 우즈베키스탄에서는 씨름꾼만 200만명에 이를 정도로 인기가 높다.

그렇다면 씨름은 과연 남성들과 관련된 운동이었을까? 당연히 씨름은 남성들만의 스포츠로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적어도 씨름의 기원은 여성들과 관계가 있다. 동물의 세계에서 암컷을 놓고 수컷들이 씨름들을 하는 모습을 보면 얼핏 힌트를 얻을 수도 있지 않은가.

고대 튀르크 유목민들의 결혼풍습에는 모계사회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남성들이 신랑감으로 선정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들이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종목들은 말 타기, 활쏘기, 씨름이었다. 그것은 고대사회에서 이러한 종목들이 후보자들의 자질과 육체적, 정신적 능력, 그리고 인간적 성숙도를 가늠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잣대였기 때문이다.

그중에서 신부 측이 가장 눈여겨보았던 것은 신랑의 육체적 역량을 평가할 수 있는 씨름이었다. 특히 씨름이 진행되는 동안 각 후보자가 보여주는 인내심, 용맹, 대담함, 자비심 같은 인간적 됨됨이라든가 우월한 체력은 양질의 후손을 보장할 수 있는 척도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종족을 통솔할 수 있는 리더십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보다 더욱더 강력한 모계사회의 흔적은 신부와 신랑이 직접 씨름을 하였다는 기록에서 볼 수 있다. 신부가 신랑 후보와 씨름을 해 본 후 혼사 여부를 결정하였다는 것이다. 고대 로마 작가 엘리아누스(C. Aelianus: AD 175~235)는 중앙아시아 유목종족의 결혼풍습에 대해 언급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결혼을 희망하는 청년은 자기가 선망하는 신부 후보와 씨름을 해야 한다. 만약 씨름에서 신부가 승자가 되면 패자인 청년은 그녀의 포로가 되어 평생 종살이를 해야 한다. 씨름에서 신부를 이겨야 그 여성을 차지할 수 있다.

이러한 내용은 튀르크족의 영웅 서사시 ‘알퍼미쉬’의 고대 판본에서도 언급되고 있다. 남녀 간에 씨름을 한다니 엉뚱해 보이기도 하지만 이것은 물론 상상력에 맡길 문제이다. 밤새도록 둘이 얼싸안고 씨름했는데 신랑후보자가 미래의 신부를 제대로 만족하게 해주지 못했다면 패자로 취급받는 것은 너무도 당연했을 것이다. 사내구실을 제대로 못 했으니까 말이다. 더더구나 모계사회가 아니었던가.

시간과 역사는 아버지중심 사회로 흘러갔고, 남성들은 다행히 굴욕적인 결과를 초래할지도 모르는 남녀 간의 씨름이라는 통과의례는 피하게 되었다. 그러나 자기가 원하는 신부를 차지하기 위한 남성들의 고군분투는 다른 형태의 씨름으로 계속 되고 있다.

 

(5) 남성들은 왜 자신의 누이나 어머니를 살해할까?

얼마 전 세상을 떠난 터키의 국민작가 야샤르 케말(1923~2015)은 평생 여성, 노동자, 소수민족 등을 주제로 사회적 약자 편에서 글을 썼다. 케말의 소설 중에는 혈연 간의 살인을 다룬 ‘독사를 죽였어야 했는데’가 있다. 반체제 혐의로 그가 수감되었을 때 알게 된 하산이라는 일곱 살 소년의 실화를 소설화한 작품이다.

소년의 어머니 에스메는 처녀 시절 소문난 미인이었다. 그녀는 마을 청년 압바스와 사랑하는 사이였다. 그러나 난데없이 그녀를 짝사랑해오던 할릴이라는 청년이 나타나, 그녀를 강제로 납치해 마약을 먹여 기절시킨 후 하루 밤을 보낸다. 에스메는 하룻밤을 잔 남자와 결혼해야 한다는 풍습에 따라 억지 결혼을 하게 된다. 에스메를 빼앗긴 압바스는 결국 할릴을 살해함으로써 사랑의 복수를 하지만, 그 역시 할릴의 가족에게 붙잡혀 살해당한다. 할릴을 잃은 시댁 식구들은 며느리 때문에 가문의 명예가 더럽혀졌다고 생각한다.

에스메는 분위기가 살벌한 시댁을 떠나려고 하지만 아들을 놔주지 않는 시댁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고 마을에 머문다. 에스메가 사랑하는 어린 아들 하산은 친가 쪽 식구들에 의해 어머니는 부정한 여인이라고 끊임없이 세뇌당한다. 아들은 이처럼 숨 막히는 집안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삼촌이 엄마를 죽이라고 선물한 총으로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엄마에게 총부리를 겨눠 살해한다. 명예살인을 한 것이다.

 

▲12살에 60살 노인에 팔려 결혼 후 5년 매질 끝에 도망친 17살 소녀에게 돌아온 것은 오빠의 명예살인./CNN 홈페이지 캡처

 

전 세계적으로 1년에 약 5000여 명 정도가 이러한 폐습에 희생당하고 있다. 서남아시아를 중심으로 가장 피해가 극심한 나라는 파키스탄이다. 이러한 악습이 이슬람 전통 때문이라고 믿고 있지만 종교적 교리에서라기보다 구성원의 결속을 중요시하는 부족주의 특성과 유목 전통 때문에 생겨났다.

명예살인의 희생자는 주로 가족 구성원 내의 여성들이다. 여성들이 성적으로 부정한 행위를 해서 가문의 명예를 더럽혔다고 믿는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 다른 남자와 혼전 성관계를 했다고 짐작이 가는 신부, 아버지가 원하는 배우자가 아닌 다른 남자와 연애를 한 딸, 이혼을 당하고 돌아온 딸, 바람난 아내 등이 그 대상이다. 심지어 대학 캠퍼스 커플 사이에서도 여자 친구가 고무신을 거꾸로 신었다는 이유로 살인해도 명예살인의 범주에 들어간다.

근대화 과정에서 혈연 및 친족 중심 체계가 붕괴하면서 명예살인의 횟수가 현저히 줄어들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 근절되지는 않고 있다. 이것은 강한 부족주의 전통과 미약한 처벌에 기인한다. 가문의 명예가 걸려 있는 상황이 참작되면 가해자는 6개월이나 1년 이내의 실형을 받는 것이 고작이다. 터키의 경우는 최근 유럽연합 가입을 위한 인권 가이드라인에 맞추기 위해 강력한 법 개정을 한 상태이지만 다른 서남아시아 국가는 아직 문제의식도 공유하고 있지 못한 경우가 태반이다.

 

▲'명예살인'을 규탄하는 파키스탄 여성./조선일보DB

 

그렇다면 오빠가 친누이 동생을, 아들이 어머니를 죽여서까지 얻게 되는 가문의 명예란 무엇일까? 도대체 왜 이런 폐습이 지속하는 것일까? 여자들은 남자들이 만들어 놓은 가부장적 질서체제 속으로 들어와 있어야 한다는 것이 서남아시아 남성들의 대체적인 통념이다. 여성이 그 체제를 조금이라도 거부하거나 도전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기라도 하면 가부장질서의 존엄에 상처를 입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치부한다.

그래서 여자의 일탈은 그 여자를 책임지는 남자가족 구성원들의 얼굴에 먹칠하는 것이며, ‘불결한 상처’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명예살인이라는 방식으로 외과수술을 하는 수밖에 없다고 그들은 고집스럽게 믿고 있다. 명예살인은 가부장적 남성 질서의 불완전성을 일시적으로 은폐해 주는 베일에 불과하다. 남성 질서의 불완전성을 마치 정당한 법도처럼 이 같은 관습으로 해결하려는 짓은 여성들을 통제하기 위한 남성들의 비열하고 비겁한 장치이다.

하지만 용어만 다를 뿐 명예살인이 남의 나라의 일만은 아니다. 중국과 한국에도 명예살인에 준하는 관습이 근대 이전까지 존재했다. 조선시대에서도 남편이 죽고 나면 아내에게 수절을 종용하고 열녀문을 세워주는 방식으로 명예살인이 자행되어오지 않았던가. 단지 일탈에 대한 육체적 징벌의 정도가 덜 잔인했을 뿐이지 그러한 여성은 사회적으로 매장되어 이미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였다.

케말이 들춰냈던 명예살인이라는 극단적 가부장적 질서의 치부는 아직도 이 세상에서 완전히 근절되지 않았다. 오히려 어느 틈에 IS처럼 다른 명분을 덧씌운 변종 바이러스로 다시 태어나 더욱 노골적이고 극렬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국제 사회를 비롯한 우리 모두가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오늘도 누군가는 억울한 희생양이 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6):사슴이야기① 깨끗하고 매끈한 사슴의 젖은 마치 아이를 낳은 여인의 유방 같았다

신화 속의 사슴 이야기

사슴은 자의든 타의든 인간과 가깝게 지내온 동물이다. 사슴은 인간과 아주 멀리 떨어져 살고 싶어 했겠지만 인간이 그렇게 허용하질 않아서였다. 유라시아 대륙에서 자주 발견되는 만년 이상 된 바위그림에서조차 그렇게 느껴진다. 넓적한 바위에는 사람들이 마치 진리를 추구하듯 사슴들의 뒤를 열심히 쫓아다니는 모습이 온통 묘사되어 있다.

왜 그랬을까? 물론 사슴고기 때문이었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신라의 금관처럼 신비롭게 생긴 뿔 때문이었다. 동물의 머리에서 나무가 자라나다니! 영물 사슴에 얽힌 유라시아 신화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유라시아 대륙을 남북으로 4000km나 가로지르는 예니세이 강이 있다. 이 강의 이름은 키르기스어로 “에네 사이(어머니 강)”에서 나온 것이다. 마치 동남아시아 인들에게 “메콩”(어머니 강)과 같은 곳이다.

머나먼 옛날, 이 예니세이 강변에는 여러 부족이 살고 있었다. 이들은 끊임없는 반목과 불화 속에 살았다. 키르기스족은 그러한 부족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이들은 서로서로 공격과 기습을 하며 곡식과 가축을 약탈하는 생활을 했다. 그러면서 죽일 수만 있다면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모두 몰살시키고 마는 시대였다.

키르기스 족장 물체는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부족 영웅이었지만 그에게도 죽음의 시간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예니세이 강가에서 그를 마지막으로 이 세상에서 떠나보내는 날 아녀자들은 머리를 풀어헤치고 남자들은 무릎을 꿇고 통곡과 읍을 했다. 예니세이 강변 부족들에게는 아무리 적대관계라 하더라도 애도 기간만큼은 이웃을 습격하지 않는 원칙이 있었다. 하지만 이날 그 원칙을 깨고 적의 무리가 상중인 키르기스족을 기습공격 하여 전원 몰살시켰다.

 

▲인간과 가깝게 지내온 사슴.

 

그러나 그때 어른 몰래 숲 속에서 놀고 있던 두 명의 어린 키르기스 소년과 소녀는 천우신조로 적의 습격을 피할 수 있었다. 적의 한(khan)은 이들이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듣자 노발대발했다. 절름발이 노파에게 아이들을 시퍼런 예니세이 강에 빠트려 죽이고, 키르기스족의 이름이 이 세상에서 영원히 지워지게 하라고 명령했다.

명령에 따라 노파가 아이들을 벼랑 아래로 떠밀어 버리려 하는 찰나였다. 그때 엄마 사슴 한 마리가 원망에 찬 왕방울 눈으로 애처롭게 노파를 바라보고 있었다. 산모의 모유처럼 뽀얀 색을 띤 사슴이었다. 그 사슴의 뿔은 그 자체가 아름다움이었으며 늦가을 단풍나무가지처럼 운치 있게 뻗어 있었다. 사슴의 젖은 깨끗하고 매끈했다. 마치 아이를 낳은 여인의 유방 같았다. 이 사슴은 인간의 손에 의해 어린 쌍둥이를 잃어버린 엄마 사슴이었다.

사슴은 노파에게 아이들을 놓아 달라고 사정했다. 노파는 이 아이들이 인간의 자식들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며 사슴의 소원을 들어주었다. 사슴은 아이들을 데리고 울창한 수풀을 지나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초원을 통과하고 나서, 모랫바람이 부는 사막을 넘어 폭풍우가 몰아치는 강을 건너갔다. 온갖 위험과 역경을 무릎 쓰고 만년설로 쌓인 산으로 다가갔던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이 당도한 곳은 만년설 봉우리들 한가운데 위치한 뜨거운 바다 이식쿨 호수였다. 엄마 사슴은 아이들에게 말했다. “이곳에서 자손 대대로 번성하여라!

 

▲만년설이 보이는 초원 언덕에서 살고 있는 사슴 무리.

 

소년과 소녀는 장성하여 아이를 낳았다. 엄마 사슴도 이 고장을 떠나지 않고 함께 살았다. 사람들은 엄마 사슴을 성녀처럼 존경했다. 이식쿨 호숫가 숲 속에는 하늘의 별마저 시샘할 만큼 아름답고 하얀 사슴들이 인간과 조화롭게 살며 마음껏 활개를 치고 돌아다녔다. 인간은 사슴에게 손끝 하나 건드리지 않았다. 그 누구도 사슴에게 불손하지 않았으며, 사슴을 보면 말에서 내려 길을 양보할 정도였다.


이러한 전통은 수만 마리의 양과 말을 소유하고 있던 어느 갑부가 죽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갑부가 죽자 그의 아들들은 거창한 장례식을 치렀다. 호숫가에 천백개의 유목천막을 치고 세상에서 유명하다는 사람들은 모두 불렀다. 아들들은 셀 수도 없이 많은 가축을 잡아 푸짐하게 대접을 해주며 으쓱거렸다. 가수들은 고인과 그 아들들을 칭송하는 노래를 불렀다. 갑부의 아들들은 그들의 명성이 온 천지에 퍼지고, 그들의 영예가 이 세상 끝까지 도달하길 바랐다.

아들들은 묘안을 짜 냈다. 아버지의 무덤 위에 신성한 사슴의 뿔을 장식하여, 뿔 달린 엄마 사슴이 자신들의 조상이라는 것을 자랑하려 했던 것이다. 그들은 사냥꾼을 보내 사슴을 죽이게 하고 사슴의 뿔을 도려냈다. 이어 그 뿔로 무덤을 장식하게 했다. 아들들은 항의하는 부족의 원로들을 채찍으로 때리며 개처럼 쫓아냈다.

이때부터 사슴들의 수난시대가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너도나도 숲속으로 들어가 하얀 사슴들을 사냥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사람들은 조상의 묘를 사슴뿔로 장식하는 것이 고인에 대한 그들의 본분으로 간주했다. 급기야는 사슴의 뿔을 사고팔고 창고에 쌓아 두기도 했다. 사슴에게는 절망의 시대가 찾아온 것이다. 궁지에 몰린 사슴들은 사람이 오르지 못하는 가파른 벼랑 위로 도망쳐 보았지만 그곳에도 역시 사냥개나 사냥꾼이 기다리고 있었다.

사슴들이 사라지고, 산들이 텅 비어 가기 시작했다. 태어나서 사슴을 구경 한 번 못한 사람들이 생겨날 정도였다. 인간들에게 진노한 엄마 사슴은 어린 사슴들을 데리고 이식쿨 호수와 영원히 작별을 고했다. 이것이 유라시아에서 사슴이 인간을 등지고 떠난 이야기이다.

 

(7):사슴이야기② 사슴을 추적해 7일째… 맨손으로 잡은 한국 사냥꾼들

러시아 작가이자 사냥꾼이었던 얀코프스키(1911~2010)는 볼셰비키 혁명을 피해 아버지를 따라 1920년대에 함경도에 정착했다. 그는 백두산을 비롯하여 한반도에서 조선인이 사슴사냥 하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 얀코프스키는 붉은 갈색에 하얀 점들이 옆구리에 박힌 꽃사슴이 얼마나 우아하고 기품이 있는 지, 그 자태에 탄복했다.

유라시아에 ‘하얀 사슴’이 있었다면 조선에는 바로 ‘꽃사슴’이 있었던 것이다. 그때는 꽃사슴 대신 “터럭 사슴”이란 말을 썼다. 조선인들의 사슴 잡는 솜씨는 그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을 정도로 놀라웠다. 사냥에 관한 어느 연구서를 보아도 맨손으로 사슴을 잡았다는 기록은 없었다. 사냥이야기로 유명한 쿠퍼(F. Cooper)의 소설을 뒤져도 그러한 예를 찾아볼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얀코프스키가 호랑이와 곰 야생 사슴등을 잡은 기념으로 촬영한 사진. /조선일보DB

 

조선인들은 유럽인들이 도저히 생각조차 못하는 방법을 고안해 냈다. “가반도”라 불렸던 조선의 사슴잡이들은 자연과 가까우면서 관찰력이 뛰어났다. 봄이 되어 새싹이 돋아날 무렵 새싹 맛을 본 사슴은 나뭇가지나 마른풀 같은 지겨운 겨울 먹잇감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는 것을 그들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이때는 사슴이 극도로 쇠약해지면서 평소 가지고 있던 힘과 끈기를 잃어버리는 시기였다.

눈이 녹는 사월이 되면 땅이 젖어 있기는 했어도 나뭇잎들이 두툼이 쌓여 있기 때문에 사슴의 흔적을 찾기는 거의 불가능했다. 그러나 숙련된 사슴잡이들은 가벼운 막대기로 낙엽과 마른풀을 뒤적이며 새벽부터 밤까지 아무도 볼 수 없는 사슴발자국을 찾아내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들이 사슴의 발자국을 찾아내는 날에는 사슴이 어디로 가든 그 발자국을 놓치는 법이 없었다. 돌무더기 속이든, 늪이든, 냇가이든 간에 사슴이 지나간 흔적은 어김없이 찾아냈다.

진짜 사슴잡이는 자기가 쫓는 사슴의 발굽까지 다른 사슴들의 것과 구별해낼 줄 알았다. 사슴에게는 숲 속의 악마 같은 존재였다. 쫓기는 사슴은 다른 사슴들의 무리 속으로 들어가 섞이기도 했다. 그래도 사슴잡이는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자기가 쫓던 사슴의 발자국을 식별해냈다. 한 치의 실수도 없이 추격은 계속되었다. 사슴이 배고파 쓰러질 때만 노린 것이다. 자신이 끊임없이 쫓기고 있다는 것을 느낀 사슴은 극도로 예민해져서 완전히 식욕을 잃어버린다. 물만 자주 마실 뿐이었다.

 

▲터럭 사슴'으로도 불린 꽃사슴.

 

4월의 밤은 점점 짧아져만 가서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허기에 기력을 잃기 시작한다. 처음 이틀 동안 사슴을 보지 못하던 사슴잡이는 셋째 날부터 사슴을 보기 시작한다. 그러나 사슴은 재빨리 시야에서 사라진다. 넷째 날부터 사슴이 눈에 들어오는 횟수가 점점 늘어나기 시작하고, 사슴은 자주 누워 있다가 사람이 다가오면 펄쩍 뛰어 달아나곤 한다.

이때다 싶은 사냥꾼은 점점 가까이 다가가며 추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는다. 그러다 사슴이 완전히 기진맥진한 순간 올가미를 던지는 것이다. 수컷에게는 뿔에다, 암컷은 목에다 올가미를 씌운다. 그러나 즉시 올가미를 끌어당겨 현장에서 포획하는 것이 아니다. 그 상태로 하룻밤을 내버려 둔다. 올가미를 쓴 사슴이 심하게 저항을 하면 심장발작으로 죽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사슴이 죽어버리면 6일 동안 추격해 온 것이 수포로 돌아갈 수 있다. 7일째 일어설 수 없을 정도로 허기에 쓰러져 있는 사슴을 맨손으로 생포하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었다.

노련한 사슴잡이는 사슴의 발자국만 봐도 뿔의 길이를 알아낼 수 있었다. 뿔이 길고 무거울수록 앞발굽을 디디는 모양새가 전혀 달라지기 시작한다고 했다. 이러한 방법은 바위가 많고 험준한 조선의 금강산 지역에서 생겨났다.

특히 금강산은 비싸고 귀한 꽃사슴을 전통적인 방법으로 포획하는 사슴사냥 지의 요람이었다. 조선인들은 꽃사슴을 산 채로 잡는 법을 알고 있었지만, 사슴들을 길들여 번식시키지는 않았다. 하지만 새끼를 밴 암컷만큼은 정성스럽게 먹여 키웠다. 다만 어미 뱃속에서 사슴 새끼가 완전히 자라날 때까지만이었다. 그러나 새끼가 세상에 나오기 직전에 어미는 죽였다. 티베트 민간의학에서 매우 귀중한 약제로 간주하는 사슴의 태아 “녹태(鹿胎)”를 얻기 위해서였다.

뱃속에서 꺼낸 녹태는 살이 문드러질 때까지 곰탕을 만들어 천문학적인 가격으로 팔았다. 어미 사슴은 그냥 고기로 먹고 벨벳처럼 부드러운 가죽은 옷이나 장갑을 만들었다. 수사슴의 경우는 첫 녹용이 생길 때까지만 키우고 죽여 버렸다. 그렇게 해서 이미 1920년대에 강원도 금강산 일대에서 한국의 꽃사슴들은 거의 멸종되었다. 그러자 대부분의 사슴잡이들은 백두산 쪽으로 이동해갔다. 그래서 백두산 지역에서는 노련한 사슴 사냥꾼을 북한식 사투리로 강원도를 일컫는 “가반도”라고 불렀다. 이것이 한국의 꽃사슴에 대한 숨겨진 이야기이다.

 

(8):사슴이야기③ 만병통치 불로장생 바라던 황제를 위한 특권적 치유방법?

지난 수천 년 동안 지구 상에서 “사슴의 나라”로 불릴 만한 곳이 있다. 바로 유라시아 대륙 심장부에 있는 황금의 나라 알타이이다. 여기서는 청동기 시대 이후부터 지금까지도 계속 사슴도()가 발견되고 있다. 고고학자가 아니더라도 산길을 지나다 보면 높은 절벽에 새겨진 고대의 사슴 그림들을 쉽게 발견해 낼 수 있을 정도이다. 이러한 바위그림들에서 사슴들은 신성함의 상징이자 사냥의 대상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 옛날에도 인간은 양면적인 존재였나 보다.

과거 그림에서 보듯 현재도 알타이는 사슴 개체 수를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는 곳이다. 아마 4500m 높이 만년설이 쌓인 벨루하 산을 중심으로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는 가파른 산들, 가을이면 불타는 단풍으로 인간의 눈을 현혹하는 황금의 호숫가, 그 어딜 봐도 끊임없이 펼쳐지는 울창한 자작나무, 전나무, 소나무 숲들이 선량한 눈을 가진 우아한 이 동물을 지켜오지 않았을까.

 

▲고대 사슴 벽화.

 

알타이에는 바야흐로 5월과 6월이 되면 전국적인 사슴 축제가 열린다. 이 축제를 즐기기 위해 수천 명이 이 고장을 방문한다. 사실은 녹용 때문에 오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녹용 피로 목욕하기 위해서이다. 모든 동물 세계를 통틀어 젊은 사슴의 뿔보다 더 경이로운 것이 있을까.

그래서인지 먼 옛날부터 녹용 피로 목욕을 하는 것은 강력한 치유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왔다. 중국에서는 꽃사슴 뿔에서 추출한 귀한 액체를 2000년 동안 만병통치약으로 사용해왔으며, 윈난 성에서는 녹용엑기스가 금보다 더 비쌌고, 녹용 피로 목욕을 하는 것은 오로지 황제와 그의 가족만을 위한 특권적 치유방법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어느 평민이 사슴피로 목욕을 한 죄로 처형을 당한 적이 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이다.

녹용은 사슴뿔이 한참 자라날 때 잘라낸 연한 뿔이다. 이때의 뿔은 벨벳처럼 부드러운 솜털이 난 가죽으로 덮여 있으며, 피가 밴 연골 해면체 조직으로 이루어져 있다. 봄이면 녹용에는 미세세포, 생물 활성물질, 생물자극력과 치유력을 관장하는 호르몬이 응축되어 있다고 한다. 사슴에게는 그 어떤 포유류에도 없는 강력한 재생조직이 있어서 사슴뿔은 하루에 2cm씩 자라난다. 놀랍게도 수사슴의 머리에서 자라나는 뿔 속에는 태아 줄기세포가 있다고 한다. 그것은 포유류 중에서 사슴에게만 있는 현상이다.

 

▲알타이 농장에서 선보인 사슴의 뿔.

 

그뿐만 아니라 포유류 중에서 유일하게 사슴은 매년 25kg나 되는 뿔을 털갈이하듯 갈아 치운다. 늦가을이 되면 사슴의 뿔은 경화되어 떨어져 나간다. 그리고 다음해 봄이 되면 떨어져 나간 자리에서 새로이 젊은 뿔이 자라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러한 뿔의 재생주기는 매년 반복된다. 예전에는 뿔을 얻기 위해 사슴을 죽였다면 요즘에는 감쪽같이 뿔만 잘라낸다.

“불로장생약”을 추출하기 위해 뿔을 자르는 시기는 신진대사가 가장 활발하고 번식하기 좋은 5~6월로 한정되어 있다. 이래서 이 기간이 인간뿐만 아니라 사슴에게도 축제가 되는 모양이다. 뿔을 자를 때는 사슴에게 통증이나 염증을 유발하지 않게 하기 위해 다수의 숙련가들이 매달려 눈을 가리고 피를 멈추게 하는 가루를 뿌려주며 “인도주의적으로” 뿔을 잘라낸다. 그들의 솜씨는 이미 예술적 경지에 도달해 있다.

낡은 조직은 죽어버리고 새로운 조직이 해마다 탄생하는 것은 뿔만이 아니다. 사슴의 피부, 결합조직, 연골, , 혈관, 신경 조직들도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재생된다. 이러한 갱생을 위해 사슴은 극도로 압축된 물질과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비축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다 보니 어른 사슴이 보통 1m60cm의 키에 250~400kg 나가는 탄탄한 몸매를 유지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젊은 사슴의 뿔을 자르면 한 마리당 1.5L의 피가 나온다. 그 피를 모아 뜨겁게 덥히고 나서 욕조 가득히 채워 녹용 피 목욕마사지를 한다. 황제 힐링 목욕인 셈이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목욕은 하루 걸러 매번 20분씩 10번 해야 효험이 있으며, 이 목욕은 면역력 증진, 스트레스 저항력 강화, 노화방지, 원활한 혈액순환, 성기능 향상, 관절통 및 만성피로 해소에 효과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한 번에 20분 이상 받으면 고혈압의 위험이 있기 때문에 현지 의사들과 상담 후에 녹용 피 욕조에 들어가야 한다. 이미 1990년 전에 현대식 사슴과학연구소를 개설한 알타이에서는 사람들의 건강개선과 회춘을 위해 사람들에게 ‘사슴을 바치는’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고 있다.

 

▲사슴의 피로 목욕을 하는 모습.

 

자연 청정지역에서 자라난 알타이 사슴의 뿔은 전 세계에서 가격이 가장 높다. 한국, 중국, 미국, 뉴질랜드에서도 녹용이 생산되지만, 알타이산은 평균 1.5~2배나 비싸게 팔린다고 하며, 알타이 녹용 중의 90%는 한국과 중국으로 수출된다. 어른 사슴은 매우 다혈질적이고 공격적이다. 수컷들은 틈만 나면 자기네끼리 싸운다.

수사슴들은 서너 마리의 암컷으로 이루어진 “하렘”을 가지고 있지만, 암컷이 다른 수컷을 찾아간다 해도 굳이 말리지 않을 정도로 민주적이다. 새끼가 달린 암컷은 새끼가 위험에 처하면 맹수에게도 달려들 정도로 모성애가 강하고 대담하다. 그러나 아무리 담대한 사슴이라 하더라도 사슴은 인간을 가장 무서워한다. 야생 사슴들은 인간의 냄새를 맡는 순간 바람처럼 사라진다.

사슴이 싫다고 하는데도 인간은 왜 그토록 끈질기게 사슴을 쫓아다닐까. 해마다 재탄생하는 사슴의 영원한 청춘을 구현하고자 하는 인간의 오래된 꿈 때문이 아닐까….

 

(9)-①  '김태희가 밭을 간다'는 우즈베크의 여성이 유난히 예쁜 이유?

한국의 “유라시아 이니셔티브”, 중국의 “일대일로(一帶一路)”시대를 맞이하여 유라시아 투르크(Turk)국가들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다. 그러나 왠지 유라시아 대륙은 미지의 땅이자 미개척지인 것처럼 들리고 있다. 적어도 한국인들에게만큼은 그렇게 심리적 거리가 멀게 여겨지는 것 같다.

미국의 시인 에드거 앨런 포의 처녀작으로 《테머레인과 기타 시(Tamerlane and Other poems)(1827)가 있다. ‘테머레인’은 투르크 족의 정복자 “절름발이 티무르”를 영어식으로 옮긴 말이다. 투르크족은 몽골족과 더불어 지난 3000년 동안 48번이나 세계적 제국을 건설한 것으로 알려졌다. ‘제국의 건설’은 세계화의 고전적 방식이다. 물론 48번의 제국을 세운 정복자 중 동서양을 통틀어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은 칭기즈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서방세계에서는 “절름발이 티무르” 테머레인의 이야기가 오래전부터 연극무대에 올려지거나 문학 작품화되어 있을 정도로 대중성을 띠고 있다. 그들에게 정복자 “절름발이 티무르”는 다양한 스토리텔링의 소재를 제공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영국의 극작가 니콜라스 로우는 희곡《테머레인》(1702)을 썼고, 헨델은 그 희곡을 바탕으로 오페라 《타메르라노(Tamerlano)》를 작곡했다. 결과적으로 티무르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잘 알려진 “세계화된” 인물이다.

 

▲티무르 동상. /조선일보 DB

 

20세기 서방세계에서 칭기즈칸이 조명받았던 것은 냉전시절 구소련에 대한 심리전의 일환이었다고 볼 수 있다. 칭기즈칸이 280년간 러시아를 정복했던 “악몽”을 상기시키고자 하는 정치적 의도가 깔렸었던 것이다. 반면 몽골을 비롯한 구소련권에서는 소련이 해체되기 전까지 칭기즈칸은 그저 부랑배 정도로만 알려졌을 뿐이었다. 상상하기 어렵겠지만, 칭기즈칸이 몽골에서 복권된 것은 불과 25년 전의 일이다.

방대한 티무르 제국을 건설했던 정복자 “절름발이 티무르”는 지금의 우즈베키스탄에서 태어났다. 그의 출생에 대해서는 가축도둑 출신이라는 설, 투르크족이라는 설, 몽골족이라는 설 등 다양하지만 정확한 내용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어찌 되었든 그는 거시적 안목, 야망, 통찰력 그리고 용맹함을 무기로 곧 부족의 족장이 된다.

그러자 티무르는 소수의 군대로 차가타이 한국을 전복시키고 세계를 정복할 꿈을 꾼다. 그는 정복자의 정통성을 과시하기 위해 칭기즈칸의 혈통이 흐르는 죽은 적장의 아내 비비한음을 자신의 본부인으로 맞이한다. 티무르는 비비한음을 끔찍이 사랑했기 때문에 잔혹한 정복자와 사랑이라는 낭만적 테마가 자주 문학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티무르는 지금의 사마르칸트를 거점으로 당시 러시아를 통치하고 있던 황금한국을 멸망시키고, 페르시아와 메소포타미아를 점령했고, 러시아, 조지아, 인도, 시리아, 터키까지 침공한다. 우리의 고려여인들이 몽골로 끌려갔듯이, 수천 명의 여인이 티무르의 포로로 잡혀오기도 했다.

패전의 가장 큰 희생자는 역시 여성이다. 우즈베키스탄 여성들이 유난히 아름다울 수밖에 없는 이유에 부분적으로는 정복의 역사도 한몫을 담당하였다. 정복지에서 데려온 가장 아름다운 여성들은 우즈베크 여성들에게 당연히 우월한 유전자를 물려주었을 것이다.

<②편에 계속>

 

<①편에서 계속>
잔인하고 끔찍하지 않으면 정복자가 될 수 없을까. 바그다드에서 티무르는 9만 명의 주민들을 참수해 해골로 탑을 세우기도 하고, 시바와 터키에서 항복하는 자들에게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게 해줄 것이라고 약속하고 나서 투항한 3천명의 포로들을 산 채로 매장시키기도 했다.

오스만 투르크의 술탄 바자제트를 포로로 잡아 동물 우리에 가두기도 하고 그의 아내들은 발가벗겨서 모든 이들에게 음식과 술시중을 들게 하는 등 인간으로서는 차마 할 수 없는 모욕을 주기도 했다.

한쪽 다리를 쓰지 못하는 티무르는 자비심이 없었다. 단지 말을 타고 전투를 하는 데에만 몰입했다. 미국 역사학자 저스틴 모로치(Justin Morozzi)의 저서 《테머레인: 이슬람의 칼, 세계의 정복자》 (2004)에 따르면 티무르는 수백만 명을 살육했다. 그것도 아주 잔인한 방법으로만 집행했다. 그는 이슬람교도였다.

기독교도들과 힌두교도들을 정벌할 때는 올바른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서라고 합리화했으며, 같은 이슬람교도교도를 공격하고 학살할 때는 그들이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변명했다. 중앙아시아 전체와 터키, 인도까지 점령을 마친 그는 중국의 명나라를 정벌하러 가는 도중 지금의 카자흐스탄 땅에서 심한 감기에 걸려 어쩔 수 없이 회군을 하게 되는데 69세의 나이에 사망하기에 이른다.

잔인하고 포악한 정복자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티무르는 예술과 학문을 사랑하였다. 대표적인 예가 실크로드의 중심지이며 세계적 관광 명소로 자리 잡은 도시 사마르칸트이다. 사마르칸트는 세계적으로 가장 아름다운 문화도시로 만들고자 했던 티무르의 작품이다. 사마르칸트는 티무르가 얼마나 세계화의 달인이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국제화된 도시였다. 사마르칸트 도시에 스페인에나 있는 도시 ‘마드리드’라는 지명이 있을 정도였다.

정복자와 세계화의 달인이었던 그는 원정 지역마다 아내를 두었다. 아내만 총 18명이었다. 그중 수도인 사마르칸트에 거주하는 본부인 비비한음은 남편의 신임을 가장 많이 받고 있었다. 티무르와 부안 비비한음의 사랑이야기는 아름다운 비비한음 모스크와 얽혀 한층 안타까움을 더한다.

현명하고 아름답기로 유명한 비비한음은 남편의 환심을 사기 위해 남편이 인도 정벌을 마치고 오기 전까지 사마르칸트에 대리석과 푸른 옥으로 가장 아름다운 사원을 짓기로 결심하고 당시 최고의 건축가를 초청한다. 하지만 젊은 건축가는 60세가 넘은 비비한음에 반해서 티무르가 인도 원정에서 돌아오기 전까지 마무리하려면 자신에게 키스를 허용해주어야 한다고 제안한다.

현명한 비비한음은 하렘에 있는 다른 여성들과 사랑을 나누도록 해주겠다고 역제안하며 회유한다. 여성들은 계란에 색칠을 입힌 것처럼 색을 벗겨 내면 모두 똑같은 존재라고 달랜다. 그러나 건축가는 무색무취의 술이 들어간 잔과 물이 들어 있는 잔을 비유하며 겉으론 똑같지만 자기는 술이 들어 있는 잔처럼 사랑이 끓어오르고 있다며 막무가내로 버틴다. 남편에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을 보여주고 싶은 욕망에서 비비한음은 그녀의 뺨에 키스를 단 한 번 허용한다.

그러자 젊은 건축가는 그녀에게 너무나 뜨겁게 키스를 한 나머지 그녀의 뺨에 붉은 반점을 남기고 말았다. 며칠 후 원정에서 돌아온 티무르는 비비한음의 뺨을 보고 진노를 하여 그 건축가를 붙잡으러 사람을 보냈지만 건축가는 막다른 옥상으로 도망갔다가 거기서 날개를 달고 도망갔다고 전해진다. 비비한음이 티무르에게 헌정한 건축물은 그녀만큼이나 아름다운 자태로 복원되어 지금도 사마르칸트를 장식하고 있다.

 

▲구미에미르 유적.

 

티무르가 잔혹한 정복자임에도 서방에서 그를 호의적으로 받아들였던 것은 십자군 전쟁의 참전 멤버인 영국, 프랑스, 스페인에서 오스만 투르크가 서쪽으로 침공해 들어올 수 있는 동력을 차단해주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티무르가 사망하고 나서야 오토만 터키는 이 지구상에서 그리스라는 나라를 완전히 없애버릴 수 있었다(1460-1830).

이때 티무르는 유럽의 여러 나라와 교류를 했다. 스페인은 두 명의 대사를 티무르 제국으로 파견하기도 했다. 그중 헨리 3세가 파견한 루이 곤살레스 클라비호는 1403년 티무르에게 오스만 투르크를 동쪽에서 협공해줄 것을 약속받는다.

그리고 루이 곤살레스 클라비호는 티무르에 관한 글을 일기 식으로 기술하여 서방세계에 투르크 정복자에 대해 상세한 정보를 제공했다. 결과적으로 티무르는 서방세계로서는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했기에 그의 잔혹함은 위대한 정복자의 이름 뒤로 사라져 버렸다. 역시 수십만 명의 희생자를 내고도 승리한 나폴레옹을 우리는 영웅이라고 부르지 않는가.

1941
년 구소련의 고고학자 게라시모프는 검은 옥 덮개와 육중한 철관에 눕혀져 있는 티무르의 시신을 분석했다. 1미터 72센티의 시신에서 절름발이의 흔적을 확인했고 69세의 나이였지만 50대 초의 강골의 소유자라는 사실을 입증해냈다.

600
년 전에 그 나름대로 세계화를 달성했던 유라시아 투르크의 정복자 티무르가 보다 장수했다면 명나라의 운명과 그리스의 운명이 완전히 뒤바뀌고, 세계사가 새로 쓰였을 것이다. 세계화는 영토 확장과 제국주의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90년대 이후 세계화의 의미 또한 그 의미가 완전히 변화되었다. 세계화의 출발과 시작은 정복자의 정복 전쟁에서 비롯되었고 피의 전쟁을 불사한 것이었다. 오늘날 경제적 의미의 시장 확장과 문화 다양성에로의 개방은 무엇을 전제로 하는가. 우리에게는 아직 ‘정복자‘라는 명칭도, 유라시아도 낯설게 들릴 뿐이다.

 

10 한국전쟁서 싸웠던 '아나톨리아의 사자들' 누구?

분단국가의 상황, 그리고 강대국 틈바구니에서 그 어떤 나라보다 안보의식이 높아야 할 한국이지만 안보를 강조하는 것은 군인이나 공무원 등 극히 일부 계층에 국한된 용어처럼 들린다. 심지어 이 사회의 보수파를 지칭하는 아이콘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정파를 초월하여 안보만큼은 전 세계 어느 곳에서도 성역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역사적으로 유라시아나 유럽의 제국에서도 왕 또는 귀족이 되는 것은 국가안보를 위해서 얼마나 현실적인 기여했는지 그 공적이 고려되는 경우가 많았다. 한마디로 국가를 위해 영토를 얼마나 확장했는지 아니면 국가를 위해 어떻게 몸을 바쳤는지가 중요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상대적으로 우리보다 영웅이 많았다.

우리에게도 영웅이 없는 것은 아니다. 정치적 상황 때문에 영웅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을 뿐이다. 비근한 예가 2010 11월 북한의 연평도 포격사건이다. 북한의 기습적 포격으로 평화로운 연평도가 시커먼 불바다가 되는 장면을 모든 국민이 생중계되는 TV로 목격했다. 이러한 기습으로 허를 찔린 우리 군대가 허둥댔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의 해병용사들은 북한군이 쏘아대는 포탄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불구덩이 속에서 철모에 불이 붙었는데도 자주포로 꿋꿋하게 대응했다. 왜 그런지 두려움을 모르는 우리 젊은이들의 영웅적 대응에 대해 언론에서는 커다랗게 조명하지 않았다. 그들이야말로 조국을 위해 자신의 몸을 불살랐던 우리의 영웅들이 아닌가.

우리에게는 까마득히 잊혀가고 있는 또 다른 영웅들이 있다. 맥아더 장군은 이들을 “아나톨리아의 사자들”이라고 지칭했다. 이들은 한국전쟁에서 유엔군의 일원으로 싸웠던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온 터키 병사들이었다. 8000 km나 떨어진 머나먼 나라에 살고 있던 이들이 왜 돌연 낯선 땅에서 벌어진 전쟁에 참전했는지, 그것은 우리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들이 대한민국의 편에 서서 커다란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목숨 바쳐 용맹스럽게 싸워주었다는 것이다.

 

▲승선하는 터키병사들.

 

터키는 유엔군 중에서 미국, 영국, 캐나다에 이어 네 번째로 많은 병사를 파병했다. 하지만 희생자 비율은 가장 높았다. 미국 전쟁평론가들의 말에 따르면 터키 병사들은 방어보다 공격을 선호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이들이 방어에 나설 때는 공격할 때보다 희생자 수가 더 많았다. 한국전이 가장 치열할 때 5453명의 터키 전투여단이 부산에 상륙했다. 터키 전투여단장은 한국전에 참전하기 위해 본인 스스로 두 개의 별을 강등시키면서까지 자원한 타흐신 야즈즈 준장이었다.

그는 이미 예순 살이 다된 노병이었지만 조국의 안보와 직결된 전쟁이라 판단했기에 최전선에 나서고자 했던 것이다. 그의 병사들은 대부분 러시아 국경과 접한 터키 시골 마을 출신들이었다. 이들은 무슨 영문인지는 몰랐지만 조국이 필요로 하는 전쟁이기에 마다하지 않았다. 심지어 형제 나라 한국을 공산군에게서 구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차서 자신들의 참전을 지하드(聖戰)로 승화시켰다.

당시 세계는 동서로 양분된 시기였다. 터키는 미국과 소련 양자택일의 갈림길에 서 있었다. 독자적인 노선에 서 있다가는 아무런 보장도 없이 국가가 날아갈 수 있는 상황이었다. 사실 터키와 러시아는 역사적으로 수백 년 동안 앙숙지간이었다. 지금의 러시아 남부와 크리미아 반도, 불가리아를 포함한 남슬라브 지역을 놓고 러시아와 터키는 19세기 중반까지 다투어왔던 오랜 전쟁의 역사가 있었다.

그러나 현대 군사과학기술의 발달로 터키의 군사력이 약화하기 시작한데다가 부동항이 없는 러시아가 흑해 이남 지역으로 남진해오고 있었기 때문에 터키는 이를 봉쇄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리고 있었다. 아마 터키가 뚫렸다면 러시아가 지중해 지역은 말할 것도 없고, 아프리카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했을지 모른다.

터키에 반면교사가 되었던 비극적 사건이 있었다. 바로 구소련이 2차 세계대전을 치르기 직전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발트 3국에 보였던 “호의”였다. 이 발트 3국은 히틀러와 스탈린 사이에서 양자택일을 해야 했다. 유럽 국가를 사냥하기 시작한 히틀러와 동맹관계를 맺는다는 것이 자칫 위험한 함정에 빠질 수 있다고 발트 3국이 주저하고 있을 때 스탈린이 이들 3국에 미소를 보이며 그들을 보호해주겠다고 러브콜을 보낸 것이다.

이들은 스탈린의 러브콜을 선뜻 호의로 받아들였다. 그러자 스탈린은 이들을 보호해주기 위한 명목으로 3000명의 군대를 파견했다. 소련군의 진주와 더불어 반 소비에트 정치인들과 사회 유력인사들은 처형당하거나 시베리아로 유형 보내졌다. 결국 발트 3국은 소비에트 연방에 병합되는 불운을 겪는다.

1950
년 구소련은 지중해로 통하는 터키의 해협을 사이좋게 공유하자고 제안한다. 말이 공유지 터키의 영해로 소련군이 들어오게 해달라는 뜻이었다. 터키는 소련의 침입을 저지하고 자신의 안보를 보장받기 위해서 나토 가입이 절박한 상황이 되었다. 이때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나토가 주축이 된 유엔군의 부름을 받은 터키에게는 절호의 기회였다.

터키군은 1950년 한국에 상륙한 지 한 달 만에 평안도 개천군 군우리 전투에 투입된다. 중공군에게 전면적으로 포위를 당한 유엔군을 측면 지원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영어도 한국어도 잘 통하지 않았던 터키군은 초기에 정보부족으로 상당한 희생을 치렀다. 그래도 이들에게는 두려움을 모르는 맹렬함이라는 무기가 있었다. 결국 협곡에 갇힌 그들은 밤낮으로 3일 동안 끈질기게 혈전을 벌인 결과 중공군의 허리를 뚫을 수 있었다.

덕분에 대규모 민간인 학살을 방지할 수 있었고, 8군과 미 육군 9군단이 평양으로 안전하게 퇴각할 수 있는 시간을 벌게 해줬다. 군우리 전투를 가리켜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의문의 여지없이 유럽문명을 지킬 수 있는 가장 강력하고 믿을만한 보호자는 터키군대이다”라고 평가했으며, 시카고 트리뷴지는 “터키 인들이야말로 우리에게 최고의 동맹이 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쓰기도 했다. 반면 구소련의 타스 통신은 미군들을 가리키며, “당신들을 구원한 것은 터키인들이었다!”라고 비아냥거렸다.

터키군은 이후 베가스 엘코, 용인 김량장, 철원 김화 등지에서 방어가 아닌 공격작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한국전쟁 중 터키 병사 741명이 전사하고 163명이 행방불명되었으며, 2068명이 부상당했고, 244명이 포로가 되었다. 그중 전사자 462명의 무덤이 부산 유엔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누군가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할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 그들의 삶은 기억되어야 할 충분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분단의 아픔을 한민족과 공유하면서 대한민국을 지켜낸 터키 참전군을 추모하며 6·25 발발 65주년을 맞아 그들의 넋을 기린다. 지구에서 전쟁이 사라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11) 고구려의 진정한 후손 지금도 있을까?

한민족이 지난 1.5세기 동안 지독한 성장통을 앓아왔던 이유 중의 하나는 우리 선조가 먼 옛날 한반도에 정착한 이래 거칠게 변화하는 외부세계에 등을 돌린 채 이 땅에서만 조용히 살기만을 고집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지겨운 가난을 이겨내기 위해 고요한 아침의 나라 한반도를 박차고 나갔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바로 “고려인들”이다. 그들은 한때 50만 명에 육박하기도 했으나 지금은 우즈베키스탄에 대략 20만명, 카자흐스탄에 10만명, 러시아에 10만명 정도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이들 고려인이 겪었던 강제이주야말로 한민족의 시련이 얼마나 가혹했는지 가늠케 해준다.

1937
9월 초 소련의 극동 연해주에 살던 17만여 명의 고려인들은 수천 킬로 떨어진 중앙아시아 땅으로 강제이주를 당한다. 강제이주의 명분은 고려인들이 1937년 중국을 침공했던 일본의 잠재적 첩자이자 공모자라는 판단에서였다. 그 당시 한국은 지도 상 일본 땅이었으니 스탈린의 소비에트 정권은 한국인과 일본인을 동일시했던 것이다.

그래서 한국 땅에서 이주해온 고려인들은 공식적으로 ‘인민의 적’이란 누명을 써야 했다. 소련 당국은 아무런 준비도 안 된 고려인들을 집합시켜 강제로 화물열차에 태웠다. 이들은 짧게는 35, 길게는 3개월 동안 화물칸에 실려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의 초원과 황무지로 버려졌다.

불결한 화물칸에서 질병과 기아로 죽은 사람도 부지기 수였다. 카자흐스탄에 거주하는 고려인 작가 알렉산드르 강은 자신의 작품에서 매우 사실적으로 그때의 모습을 재현하고 있다. 한밤중에 열차에서 내린 고려인들은 화물트럭으로 옮겨 타 집도 없고 인적도 없는 초원 한가운데로 버려졌다. 현지인 화물트럭운전사들은 보드카에 취한 상태에서 운전했다고 한다.

보드카에 취하지 않고서는 차마 고려인들을 초원 한가운데 떨어뜨려 놓는 일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란다. 이들은 밤이면 영하의 추위에서 떨다가 땅속에 구덩이를 파거나 움막집, 또는 갈대로 엮은 집에서 살아야 했다.

 

▲고려인 모국방문단과 함께 한국을 찾은 독립운동가 홍범도 장군의 외손녀 김알라(75). /조선일보 DB


다행히 현지 중앙아시아사람들은 타지 사람이라고 고려인들에게 텃세를 부리거나 해코지를 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들 역시 숨죽이며 살아야 했던 소비에트 시민이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구소련 시대에는 민족적 갈등이란 이론상 있을 수 없었다. 고려인들은 극단적으로 열악한 여건에서도 인민의 적이란 오명에서 명예를 회복하려고 소련군으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려 했다. 그러나 고려인들에게는 소련군입대가 허용되지 않았다.

고려인들은 무기 대신 삽이나 농기구를 사용하는 노동군대에서만 근무할 수 있었다. 그래서 당시 고려인들에게 가장 큰 서러움은 ‘많은 한국인이 생각하는 것과 같은 나라 잃은 서러움이 아니라’ 소련시민임에도 소련군에 입대할 수 없다는 서러움이었다. 거기다가 고려인들은 예외 없이 거주지에서 30킬로 이상 벗어날 수 없는 이동의 제약을 받았다. 하지만 암울한 면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고려인들은 알몸으로 강제로 이주당한 것에 대한 공식적 보상을 받았다. 이주 후 3~4년 후쯤 건축비와 토지를 배당받았던 것이다. 그리고 2년 동안 집단농장에서 수확한 농산물에 대해 국가징수분을 면제받았다. 또한 소련 당국은 이들에게 극동에 있던 한국어학교를 중앙아시아에 그대로 설립하게 허락해주었다. 민족적 정체성을 유지하게 할 수 있는 활동도 허락해주었다. 예를 들어 카자흐스탄에 있는 ‘조선극장’은 한국을 포함하여 한국어로 연기하는 전 세계 극장 중에서 가장 오래된 극장으로 손꼽히고 있을 정도이다.

타민족과 비교해 고려인에게 군 입대를 제외한 나머지 차별은 없었다. 오히려 고려인들은 유난히 학구열과 노동생산성이 높았기 때문에 현지 민족들의 존경과 인정을 받았다. 구소련 시대에 대학교육을 이수한 고려인의 민족 비율이 유대인에 이어 2위를 차지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한국어 학교 중 일부는 1960년 초까지 운영되다가 고려인들의 요청으로 1947년부터 러시아 학교로 편입되기도 했다. 학부모 된 입장에서 자식들이 현지 아이들처럼 한국어가 아닌 러시아어를 배워 빨리 주류사회로 편입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고려인들 스스로 결정한 결과였다.

 

▲강제이주 된 고려인들의 재정착 촌 전경. /조선일보 DB


[
스탈린의 강제이주에 대한 면죄부를 주는 것은 아니지만 1세대 당사자들은 엄청난 고통을 감수했지만 2세대와 3세대로 오면서 그 고통은 잊혀 졌다고 볼 수 있다. 오히려 감상에 젖은 한국인들이 현지 고려인에게 그때의 고통을 회상해보라고 재촉하지만 현재는 잘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돌아가신 어른들의 회고를 통해 기억한다 해도 그 고통을 실감하지 못한다. 물론 어떤 고려인 화가는 한국인들의 연민을 사기 위해 강제이주를 테마로 한 작품을 그려내서 남한 사회에서 유명해지기도 했다.

스탈린이 사망한 후 고려인들은 실질적으로 명예회복을 했다. 1960년대 이후부터는 중앙아시아 정부에 고려인 2, 3세 장관들이 자주 이름을 올리고, 사회 각계에서 고려인들이 영웅칭호를 받을 정도로 공식적 활동이 두드러졌다. 소련해체 후 1991년에는 법적으로 모든 고려인이 복권 되었다. 중앙아시아 국가에서 러시아로 귀화하는 경우에는 가산점 혜택까지 받고 있다.

중요한 것은 “위대한 수령 동지”란 말까지 그대로 모방해서 쓸 정도로 김일성이 존경해 마지않았던 스탈린이 고려인들만 유난히 미워했던 것은 아니다. 스탈린은 같은 무렵에 민족 고유의 자치주에 살고 있던 90만 명의 독일계 소련시민을 고려인보다 훨씬 무자비한 방법으로 중앙아시아와 시베리아로 이주시켰다. 그리고 수백 년 동안 크림반도에 둥지를 틀고 살아왔던 22만 명의 타타르인들을 중앙아시아와 시베리아로 강제로 분산시켰고, 서부에 사는 유대인들을 동부 시베리아로 대거 이주시켰다. 이어서 러시아인을 포함해 쿠르드족, 터키족, 칼미크, 발트 연안 민족 등 다수의 민족을 소비에트 전역으로 분산시켰다.

이처럼 한민족의 후예인 고려인들에게 강제이주와 같은 혹독한 시련의 시기가 있었다. 이들은 그 시련을 이겨내기 위해 현지에서 뿌리를 내리려는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한결 강하게 성장했다. 고려인은 말 그대로 19세기 말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빈손으로 조선국경을 넘어 온갖 역경을 이기고 낯선 땅에 뿌리를 내린 늠름한 고구려의 후손이다. 이제 피해의식에 입각한 역사의식에서 벗어나 고려인의 긍정적 측면을 재조명할 때가 되었다. 그래야만 고려인들이 당당한 유라시아의 주역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지 않을까.

 

(12)  이슬람 여성 얼굴가리는 행위 남성에게 관능적 충동을 야기시킨다?

베일이 권력이다?

‘이슬람’하면 우리는 당연히 베일을 쓴 여성들을 떠올린다. 그리고 베일의 정체에 관해 온갖 논쟁을 벌인다. 논쟁은 베일을 문화적 차이로 보아야 한다는 시각과 인권 유린이라는 시각으로 나누어진다. 그러나 이런 시각들은 어디까지나 외부의 시각이다. 조선시대 우리의 여인들이 너울이나 장옷을 걸치고 외출했던 것에 대해 외부세계 사람들이 이러쿵저러쿵하는 것 같은 경우이다. 물론 이슬람 사회 내부에서도 여성들의 베일착용에 대해 끊임없는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 그럼에도 왜 이슬람 여성들은 베일을 쓰는 걸까.

이란이나 과거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에서는 여성이 베일을 쓰지 않으면 국가로부터 가혹한 체벌이나 처형을 받았다. 그것은 분명히 여성의 자유 의지나 선택권을 침해하는 반인권적 행위이다. 그러나 베일 착용이 강요되지 않는 나라에서조차 여성들이 자발적으로 베일을 쓰고 다니는 것을 어떻게 봐야 할까. 최근 우리나라 여성 사이에서도 햇빛에 얼굴을 노출하지 않으려고 베일보다 더한 ‘복면’을 쓰는 피부보호 행위쯤으로 봐야 할까.

 

▲프랑스 여권을 손에 들고 부르카(무슬림 여성의 얼굴을 가리는 베일)를 착용한 여인. /조선일보 DB

 

터키나 이집트와 같은 나라에서 여성의 베일 착용은 전적으로 여성 자신의 선택에 달렸지만 우리가 보기에 거추장스러울 것 같은 베일을 자발적으로 착용하는 여성도 적지 않다. 이 때문에 베일 착용을 굳이 강요받은 행위라고만 볼 수 없다. 이슬람 여성의 베일 착용은 자신이 속한 사회의 고유한 전통과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어가고자 하는 여성들의 자발적인 표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측면에서 베일 착용은 진정한 여성이 되었음을 표시하는 통과의례이기도 한 동시에 나는 이제 성숙한 여성이 되었으니 남자들은 나를 여자로서 바라보길 희망한다는 내면의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메시지가 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베일은 뭇 남성들의 시선으로부터 자신의 얼굴을 가리는 매우 엄한 징표처럼 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역설적이게도 이젠 혼기에 접어든 여성이 되었음을 만방에 알리고 다니는 상징이기도 하다. 이슬람 율법에 따르면 여성은 아홉 살이 되면 베일을 써야 한다. 베일을 씀과 동시에 이슬람 고유의 여성관에 따라 남성과 거리 두기가 시작된다.

그것을 권위적 율법이 아닌 문학적 시각에서 해석하자면 여자를 프레임 속에 가두는 행위로 볼 수 있지만 이젠 가까이해도 된다는 허가의 표시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베일은 어떤 이에게는 경직된 이슬람 율법을 연상시키겠지만, 상상력과 건강을 동반한 남성에겐 관능적 충동을 야기 시킬 수 있는 페티쉬이기도 하다. 때문에 무슬림 여성들은 전통적으로 베일로 몸을 가리면 가릴수록 무슬림 남성의 존중을 받아왔다.

그 안에는 성()과 성()이라는 두 개의 성이 감춰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조선시대의 여성들이 조신하면 할수록 훌륭한 신붓감이 될 수 있고 존경받는 여성으로 간주하였던 것과 같다. 그렇게 함으로써 여성들은 보이지 않는 사회문화적 권력을 획득해왔다.

 

▲강아지를 안고 베일을 착용한 여성. /조선일보 DB

 

이 점에서 여성의 베일은 여성이 사회 고유의 문화를 받아들임으로써 어엿한 구성원이 되고자 하는 통과의례의 표식이자 여성으로서의 사회문화적 권력을 획득하기 위한 도구 역할을 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이슬람 여성들이 베일을 쓰는 행위는, 한국여성들이 다이어트와 성형을 통해 날씬하고 규격화된 외모를 유지하여 자신의 몸을 ‘상품과 자본’으로 활용해 사회문화적 권력을 획득하려는 행위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슬람 여성의 베일착용을 고정적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독실한 무슬림 여성이라면 당연히 종교적 의무로서 베일을 착용하지만, 무슬림이면서도 베일을 거부하는 진보적인 여성도 적지 않다. 동시에 종교적 의무에는 관심이 없지만, 단순히 “시집을 잘 가기 위해서” 베일을 쓴다고 고백하는 여성도 상당수 있다.  

비핵화 선언으로 더욱 자유화 바람이 불 것으로 기대되는 이란이나 온건한 이슬람 국가들에서 이제 베일은 여성에게 중요한 패션 아이템이 되었다. 다양한 색상이나 옷감의 베일이 만들어지기도 하고, 베일에 명품 바람이 불기도 한다. 베일을 통해 남성과 사회로부터 인정받고 이로 인해 더욱 편하고 존중받는 삶을 살 수 있다면, 이슬람 여성들은 굳이 베일을 거부하지 않을 것이다.

*참고로 베일의 명칭, 디자인, 색상 등은 이슬람 국가마다 상이하다. ‘히잡’은 베일을 통칭하는 말로 주로 쓰인다. 전반적으로 북아프리카와 사우디, 예멘 등에서는 ‘아바야’를, 이란에서는 ‘차도르’, 아프가니스탄에서는 ‘부르카’, 터키에서는 ‘바쉬외르튀쉬’라 부르는 스카프형 베일을 쓴다. 이집트 등 일부 중동 국가에서는 ‘니캅’이라고 불리는 얼굴 가리개를 착용하기도 한다.

 

(13) 타지키스탄의 수도에서 400㎞ 떨어진 관광지까지 화장실이 몇 개?

이미 여러 해전에 소고기를 비롯한 육류수입의 제한이 풀리고 가격도 상당히 떨어진 것으로 알고 있는데, 한국 소비시장에서의 체감가격은 별로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우리나라 식당의 고기인심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매우 야박하다. 7000원짜리 찌개나 탕 한 그릇 시키면 아직도 양념과 국물뿐이고 고기는 서너 점이 전부다. 반대로 끝없이 펼쳐진 초원에 가축 떼들이 즐비한 유라시아 국가들에서는 고기 인심만큼은 얼마나 후한 지 만두에도 느끼할 정도로 고기만 잔뜩 들어 있다. 고기 인심에 비해 신선한 야채라든가 산뜻한 양념 인심은 야박하다. 나라마다 지형과 기후가 다르고 삶의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풍요로운 것과 부족한 것의 차이가 큰 법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서로 부족한 것을 채워 주는 교역이 자연스럽게 생겨났던 것이다.

동양과 서양을 잇는 실크로드 역시 두 세계 간의 부족함과 풍족함을 채워 주는 자연발생적 교역로 역할을 톡톡히 했다. 중국은 고대 실크로드를 현대적으로 복구하기 위해 “일대일로(一帶一路)” 건설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우리가 수출활로를 튼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했듯이 중국은 일대일로를 통해 유럽으로 가는 고속도로를 건설하겠다는 요량이다. 그러면 일대일로 선상에 있는 유라시아 투르크 국가들도 자연스레 중국의 영향권 안에 들어올 수 있다는 속셈도 깔린 것이다. 이점에서 중국과 러시아는 유라시아 대륙을 두고 소리 없는 각축을 벌이고 있다. 하지만 천여 년 이상 실크로드를 왕래하던 대상들을 “빨가벗겨” 왔던 유라시아 투르크인들이 강대국들이 생각하는 만큼 그리 호락호락하게 무역통로를 내줄 것 같지는 않다.

 

▲투르크인들에게 '공짜는 없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조선닷컴

 

여행 자유화로 한국인들도 유라시아 국가들을 찾는 횟수가 잦아졌다. 그러나 유럽에 가까운 터키를 빼놓고 유라시아 투르크 국가들을 개별적으로 여행하기는 아직도 편하지 않다. 여행객들에게 아직까지 관료주의적 통제가 심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외국인들을 대하는 그들의 태도가 그리 투명하지 않아 겪게 되는 고충이 많다. 우즈베키스탄에서 타쉬켄트-사마르칸트 행 기차를 탔을 때의 일이다. 차장이 와서 승객들에게 “차를 마시겠는지, 커피를 마시겠는지” 선택 여부를 물었다. 질문이 주는 뉘앙스 때문에 당연히 공짜라고 생각했다면, 그것은 우즈베크인들을 아직 충분히 겪어보지 않았다는 뜻이다.

외국인들을 “봉”으로 아는 이 지역에서 공짜란 없다. 택시를 타기 위해서 항상 흥정해야만 되는 것도 그렇다. 행선지를 알려줘도 운전수는 외국인 손님에게 먼저 얼마 줄 것인 지부터 물어보고 시작한다. 손님이 얼마나 정보를 잘 알고 있는지 떠본 뒤 손님이 부르는 가격보다 몇 배를 더 부르는 방식이 그들의 상술이다. 비단 택시요금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관공서에서 서류 한통 처리할 때도 투명하게 대답하는 공무원은 드물다. 처리결과 여부를 알려준다 해도 중간에 꼭 바뀌기 때문에 소용이 없다. 데드라인이 닥쳐서 민원인이나 수요자가 급히 사정을 하면 그때부터 진전여부가 결정된다. 그들과의 협상에서 급하게 굴다가는 절대적으로 불리하게 되어 있다.

이들이 은밀하게 감춰두고 있는 것 중에는 화장실도 빠지지 않는다. 그래서 낭패를 보는 외국여행객이 적지 않다. 전반적으로 유라시아 인들에게 화장실 인심은 무척 야박하다. 야박한 이유는 화장실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이다. 장거리 여행을 하면서 중간 휴게소에서 물건을 사고 화장실을 물으면 마치 무슨 보물단지라도 된 듯이 육중한 자물쇠를 채워놓았던 화장실을 열어준다. 그나마 화장실이 있다는 것만으로 감사해야 한다. 극단적인 경우지만 타지키스탄의 수도 두샨베에서 유명한 관광지가 있는 쿨럅 성까지 왕복 400㎞ 거리에 화장실이 하나도 없을 정도이다. 유목민들의 후예다 보니 드넓은 초원이 모두 화장실이라 생각하면 차라리 속이 편하다.

<②편에 계속>

 

<①편에서 계속> 

유라시아 국가에서는 대도시를 떠나 지방으로 여행할 때 중간 휴게실에서 차 한 잔과 만두를 먹고 화장실을 찾으면 벌판 후미진 곳에서 구멍 여러 개가 파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 곳에서 용변을 해결하는데 남자들은 사정이 나은 편이지만, 특히 한국 여성들은 몹시 괴롭고 당황할 수밖에 없다. 러시아의 변방에 위치한 투르크 족 자치 공화국인 야쿠트나 알타이 지방을 가보면 ‘3인용’ 혹은 ‘4인용’ 재래식 오두막 변소가 있어서 낭패를 보는 경우도 있다. 변소 한 칸에 서너 개의 구멍을 뚫어 놓아 동시에 서너 명이 사이좋게 용변을 볼 수 있게끔 되어 있다. 일을 보고 나온 사람은 줄을 서있는 사람들에게 “자리가 있어요”라고 친절하게 알려준다. 극장 빈자리를 채워 들어가듯 사람들은 화장실 빈자리를 찾아 일을 본다. 그 광경에 당황하고 도저히 적응을 못해 뒷사람한테 “절대 자리 남았다고 들어오지 말아 달라”고 신신당부를 하고 양해를 구한 후 4인용 화장실에 혼자 들어가면 그곳 아주머니들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는 듯이 뭐 그리 유난을 떠느냐며 궁시렁거리기 일쑤다.

타슈켄트 대학 캠퍼스조차도 화장실을 찾기는 좀처럼 쉽지 않다. 건물 한 동 어디엔 가에 교직원만 이용할 수 있는 조그만 화장실이 팻말도 없이 자물쇠로 잠겨 있고, 학생용은 캠퍼스 한 귀퉁이에 있는 화장실을 찾아가 긴 줄을 기다려야만 해결할 수 있다. 일례로 어느 날 모 대학교 문과대학교에서 세미나가 있었는데, 쉬는 시간에 화장실을 묻자 사람들은 화장실이 없다고 했다. 어떻게 화장실이 없을 수 있냐고 내심 당황하고 놀라서 묻자, 너무 멀어서 갈 수가 없다고 했다. 최소한 한 층마다 화장실을 기대하는 것은 지나친 사치였다. 건물 한 동에 최소한 하나정도는 있어야 할 화장실이 거의 15분 걸어야 갈 수 있는 곳에 있었다. 만 여 명 정도 되는 전교생 모두가 사용하는 화장실을 캠퍼스 한 구석에 조그맣게 마련해 놓은 것이다.

 

▲유료화장실. /조선닷컴

 

한국어문학과에서 강의를 할 때의 일이다. 수업시간이 되면 꼭 한 두 명씩 손을 들고 화장실을 다녀오겠다고 하는 학생들이 있었다. 생리적인 일이니 당연히 허락을 안 할 수 없는 일인데, 매 시간마다 그런 학생이 생기니 신경이 쓰여서 왜 쉬는 시간에 다녀오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너무 멀고 줄이 길어서 쉬는 시간 동안에 다녀오면 수업에 들어올 수가 없다고 했다. 한국어문학과만은 세련된 ‘수세식’ 화장실이 학과 강의실 층에 있었기 때문에 무슨 말이냐고 물었더니 그것은 교수들만 이용할 수 있는 화장실이라고 했다. 그제야 화장실에 인색한 중앙아시아의 현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학교가 아닌 관공서라고 사정이 더 나은 것은 아니다. 그나마 수세식 화장실이 있는 것은 다행인데 변기뚜껑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것은 러시아를 비롯한 구소련 권 국가들이 거의 동일하다. 사회주의 시절 대중의 편의는 항상 뒷전에 있었기 때문에 각자가 알아서 해결하라는 식이다. 화장실 문제는 국민 건강과도 직결될 수 있으니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한번은 타슈켄트 소재 종합대학교에서 9시부터 5시까지 연달아 강의에 참석해야 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화장실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중간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적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지역을 여행하려면 건조한 기후임에도 물도 마음껏 마실 수가 없다.

투르크 족 국가들 중에서 화장실 문제를 가장 성공적으로 해결한 나라는 터키이다. 터키는 과거에는 유럽인들에게 화장실 때문에 많은 조롱과 비아냥거림을 받기도 했다. 유럽인들은 터키여행을 다녀와서는 화장실을 빗대며 “야만적이고 후진적인 나라”라며 비웃었다. 과거 오스만제국과 이슬람 포비아는 ‘알라투르카’라고 불리는 재래식 화장실로 빈정거림을 샀다. 그러나 터키의 이런 열악한 화장실 상황은 역으로 수많은 벼락부자를 만들어냈다.

1980
년대를 전후로 재래식 화장실은 거의 일제히 현대식 화장실로 개조되며 도처에 유료공중화장실이 생겨났다. 소위 “화장실 재벌”들로 불리는 화장실 주인들은 곳곳에 ‘알라프랑가’라는 청결한 유럽식 화장실을 만들어 재미를 보았다. 이들은 공중화장실 입구에서 입장료를 받고 휴지를 주고 일을 보고 나오면 화장수를 친절히 뿌려준다. 대신 화장실은 언제나 청결하게 관리하고 있다. 화장실 하나로만 잣대를 삼았을 때 유라시아 대륙에서 선진국 수준을 자랑하는 곳은 역시 터키이다. 여러 나라를 여행하면서 느낀 사실이지만 선진국과 비선진국의 차이는 전적으로 화장실의 수준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 같다.

 

(14)-①  사기와 상술 능한 실크로드 상인들에 걸리면 다 털려

유라시아 대륙 진출을 꿈꾸는 신() 실크로드 경제벨트는 21세기 많은 나라의 꿈이다. 새로운 비단길 확보를 향한 중국과 러시아의 치열한 각축 속에서 한국도 서유럽까지 이어지는 유라시아 대륙횡단 철로를 한반도까지 연결하려는 가슴 벅찬 구상을 하고 있다. 중국은 고대부터 여러 차례 비단길을 무력으로 장악해보고자 했으나 성공한 적은 없었다. 비단을 비롯해 멋진 말, 온갖 귀금속, 진귀한 동서양의 물건들이 오가는 비단길의 소유권을 투르크 민족들이 수천 년 동안 꽉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길이란 단순히 사람과 물건만 오가는 곳이 아니라 서로 다른 문화가 만나 대화하고 영향을 주고받는 교류의 장이기도 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동서양 문명의 교통로였던 실크로드는 동서양의 특산품뿐만 아니라 종교와 사상과 예술 같은 정신문화도 활발하게 교환되던 문물시장이었다. 고대 중앙아시아에서 실크로드의 상권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던 사람들은 소그드 상인(Sogdiana merchants)이었다.

 

▲비잔틴을 정복한 오스만 제국의 술탄 초상. /주간조선

 

이들은 천부적인 상인으로서 물류교역뿐만 아니라 문명교류의 주역이기도 했다. 산스크리트어로 쓴 불경이 소그드 어를 통해 중국어로 번역되었고, 소그드 인들을 통해 조로아스터교, 마니교, 기독교가 중국으로 전파되었다. 그러나 서기 8-9세기가 되면서 이들의 역할과 패권의 상당 부분이 중앙아시아의 새로운 주인으로 등장한 투르크인들에게 넘어간다. 투르크인들은 단순히 교역활동에만 종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문명교류라는 시대적 사명과 흐름에 유연하게 대처했던 "글로벌"화 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인종의 벽을 허물고 인도ㆍ아리안 족과 자연스럽게 융화하여 하이브리드 인종을 만들어 이미 오래전에 진정한 의미의 다문화사회를 일구어 냈다. 다양한 인종의 혼혈로 획득한 이들의 유전자는 아름다운 외모라는 선물까지 후대에 남겨주었다.

그러나 더욱 흥미로운 것은 조상 대대로 비단 길을 오가던 대상들을 상대로 장사를 해왔던 이들 투르크인들에게는 골수까지 상인의 유전자가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투르크인들을 제대로 소화하려면 이들에게 숨겨진 그 같은 유전자를 꼭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만 온전한 의미에서 이들과 소통하고 "상처받지 않고" 교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즈베크인들에게는 "손님이 오면 돈이 온다"라는 속담이 있다. 손님이 오면 환대를 하지만 그 이면에는 손님은 돈이라는 뜻이 숨겨져 있다. 그것은 오랜 세월동안 척박한 실크로드 사막에서 '투르크인들이 어떻게 부를 축적하며 삶을 유지해왔을까'에 대한 대답이다.

실크로드를 오가는 대상들이 오랜 시간 목숨을 건 여행 끝에 잠시 쉬어 갈 수 있는 공간은 오아시스에 자리 잡은 “카라반사라이”였다. 이곳이야말로 필요한 음식과 장비를 보충하고 사람도 낙타도 당나귀도 제대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달콤한 주막이자 리조트였다. 투르크인들은 심신이 피로한 대상들에게 온갖 서비스를 제공하는 대신 최선을 다해 그들을 벗겨 먹었다.

요즘에도 주막집 주인 격인 투르크인 아파트 주인은 조금이라도 어수룩해 보이는 외국인 세입자가 들어오면 집에 문제가 생겼다는 둥 온갖 트집을 잡아 세입자의 주머니를 톡톡 털어간다. 그래서인지 중앙 아시아인들은 외국인이나 이방인을 언제나 반갑게 맞이한다.

<②편에 계속>

 

<①편에서 계속>
조상 대대 중개무역과 상업을 생업으로 살았던 투르크인의 문화는 터키를 가보아도 잘 알 수 있다. 최근에는 대형마트와 백화점이 주요 유통구조를 장악해버리기도 했지만 재래시장이나 일반 상점에서는 아직 흥정문화가 일반적이다. 흥정은 단순히 물건을 사고파는 행위가 아니다.

물건을 매개로 서로 친분을 쌓는 기회이기도 하다. 조금 비싼 물건이라서 흥정이 오래될 것 같으면 주인이나 점원은 흔쾌히 차를 대접한다. 진한 터키 커피를 카페에 주문까지 해서 배달시켜주기도 한다. 차를 마시면서 오랫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물건을 서로 흥정하는 것이다. 다만 그 과정에서 투르크인들의 유별난 자존심만큼은 건드리지 말아야 한다.

물건을 흥정할 때 이 원칙을 깨면 다된 비즈니스도 망치고 만다. 처음에 이야기를 나눌 때 터키 말을 알거나, 그 지방 소식이나 물건값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되면 주인은 바가지를 씌우지 않는다. 그러나 그 지역 물정이나 시세를 모르는 이방인이라고 생각되면 된통 바가지를 뒤집어씌운다. 이윤을 남기는 것이 장사꾼의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들은 절대로 양심의 가책 따위는 느끼지 않는다. 사기와 상술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것 자체가 이들에게는 상인의 도리이다.

물건을 최대한 싸게 사고 싶으면, 현지의 실정을 잘 아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 물건부터 최대한 칭찬해줘야 한다. 주인의 자존심을 한껏 치켜세워주고 나서 자신의 부족한 주머니 사정을 설명하면서 측은지심을 자아내면 인정 많은 터키인은 자기가 손해 보지 않는 범위에서 최대한 싼 가격에 물건을 넘겨준다. 그러면 나중에 그 가게를 찾아가도 오랜 친구라도 맞이하듯 반갑게 맞아준다.

 

▲투르크어 사전에 삽입된 세계지도. /주간조선

 

투르크인들이 조상 대대 물려받은 상인의 유전자는 이들을 협상의 달인으로 길러냈다. 모든 정치, 경제 협상 테이블에서 이를 무시하고 적당히 준비했다가는 낭패를 면하기 어렵다. 몇 년 전 터키 정부가 일본에서 유리한 조건을 얻어내기 위해 원자로 건설 입찰에 한국을 들러리로 끌어들여 결국 그들이 바라던 목적을 달성한 협상력은 투르크인들의 전통적 상술이라 할만하다. 투르크인 사회에서 가장 빨리 성공하기 위해서는 그들만의 "이너 서클"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그리 호락호락하지가 아니다.

그들이 이방인을 자기 사람으로 받아주는 것은 그야말로 사막 여행처럼 지난한 여정이다. 한마디로 나를 버려야 한다. 이런 경우를 빗대어 간도 쓸개도 다 내줘야 한다는 말이 생겼는지 모른다. 자기 것을 모두 내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 검증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들은 낯선 이방인을 최대한 벗겨 먹을 수 있을 때까지 벗겨 먹는다. 그 과정에서 공정함이나 합리성을 강요한다는 것은 당장 관계를 끝내자는 말이나 다름없다. 무리하게 이들에게 사과나 잘못을 시인하게 하는 행위는 금물이다. 자존심이 강한 유목민 근성과 여기에다 절대 책임지기 싫어하는 관료주의 기질까지 가세해 이들에게 사과를 받아내기란 하늘의 별 따기와 같다. 가진 것을 다 털려도 등을 돌리지 않고 그들과 함께 남아 울고 웃을 때 그들은 비로소 자기 사람으로 받아준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교류가 시작되는 것이다. 공정한 거래도 이때부터 가능해진다. 공짜란 절대로 없다. 그러나 털릴 것이 두려워 이들과의 교류를 피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구더기가 무서워 장 못 담그랴. 게다가 그들은 수천 년 동안 동서양 교역의 촉매제 역할을 해오지 않았던가.

세계를 상대로 자유무역을 해야 하는 우리로서는 투르크인들과 진심 어린 우정을 나눠야 한다. 중국과 일본에게는 자본에서 밀린다. 러시아는 중앙아시아 투르크인들에게 있어 백 년을 함께 살아온 식구이다. 우리가 기댈 것은 무엇인가. 유라시아 실크로드의 주역이었던 투르크인들에게 길을 내달라고 조르기 이전에 진정한 의미의 친밀한 관계 설정부터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이제 그들이 누구인지 올바로 알고 손을 내밀며 포용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15)  결혼하고도 바람기 버리지 못하는 터키 남자들… 여자만 보면 들이대

구릿빛 피부에 이글거리는 이국적 눈빛, 바람에 날리는 금발의 곱슬머리. 청춘 여성이라면 누구나 한번 이탈리아 여행을 꿈꾸며 가져보는 이탈리아 남성에 대한 환상이다.

최근에는 지중해 연안의 터키가 한국인에게 가까운 여행지로 부상하면서 터키로의 투어를 계획하는 여성들이 많아졌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터키를 다녀온 일부 미혼 여성들은 한결같이 "터키에서" 사랑에 빠졌다며 황홀한 여행담을 늘어놓는다. 나름대로 멋진 이국적 로맨스를 추억으로 담아 귀국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지중해의 정열적 태양과 로마, 비잔틴, 이슬람을 아우르는 고대 유적지들을 배경으로 할리우드 영화에 나올듯한 조각 같은 남성들이 온갖 찬사를 늘어놓으며 구애를 한다면 거기에 넘어가지 않을 여성도 많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터키 남성들처럼 허풍과 과장을 섞어 적극적으로 애정 공세를 벌인다면 말이다. "세상에서 가장 예쁜" 혹은 "태어나서 처음 보는 미인"이라는 수식어는 터키 남성들이 한국 여성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는 상투어이다. 한번 연애라도 해보려 하면 주변의 시선과 평판을 신경 써야 하고, 마음에 드는 남성이 있어도 소위 승산 있는 게임이라는 확신이 있을 때만 ‘밀당’이라는 것을 시도하는 한국 여성들에게 터키 남성들의 달콤한 접근은 영화와 같은 짜릿함으로 다가오게 마련이다. 그래서 일부 한국 여성들은 진심으로 사랑에 빠져서 마침내 결혼까지 결심하기도 한다.

그러나 한국여성들에게 접근하는 상당수의 터키 남성들이 열정적일 수는 있지만,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그리 로맨틱하고 순수할 것이라고만 믿었다가는 큰 오산이다. 실크로드 장사꾼의 유전자는 신붓감을 고를 때도 어김없이 촉을 세운다. 터키 남성들에게 한국이나 일본 여성은 최고의 신붓감이다. 전 세계적으로 한국과 일본 여성들은 “부자”인데다가 “남편에게 충실하고 헌신적”이기까지 하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국내 한 예능프로그램에 출연해 인기를 누렸던 터키인 E. /조선닷컴


이에 비해 터키 부부들의 상호관계는 우리와는 조금 다른 면이 있다. 그들은 부부끼리 서로를 철저히 감시하며 산다. 아내는 남편이 어디 있는지 끊임없이 감시한다. 남편은 매시간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아내한테 보고한다. 기혼남성들이 까다로운 상사의 호출 전화라도 받듯 매우 쩔쩔매며 전화기에 대고 지금 어디라고 대답하며 전화를 끊는 모습은 흔히 볼 수 있는 터키의 일상이다. 그런 터키 아내들과 비교하면 한국 여성들은 남편을 하늘처럼 모신다고 상상한다.

게다가 최근에는 한류로 인해서 한국인에 대한 선망과 관심이 더욱 높아졌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한국 여성을 선호하는 것은 한국인들이 돈이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한국인 신부를 얻는다는 것은 그들에게 "대박"인 셈이다. 그들의 철저한 계산대로라면 한국인 신부는 꽤 남는 장사이다.

터키를 여행하면서 사랑에 빠졌다는 젊은 여성들의 스토리를 들어보면 만나게 된 배경이나 연애 과정이 거의 흡사한 경우가 많다. 예전에도 어떤 여학생이 터키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면서 찾아온 적이 있었다. 들어보니 늘 들어오던 고전적 패턴의 스토리였다. 여행지에서 접근해온 그 남자는 여행 가이드였다. 가이드이다 보니 한국인들을 만날 기회가 잦았다. 한 달 만에 그들은 결혼을 결심했다. 남자에게 초혼이냐고 물었더니 재혼이라고 했다. 전처는 일본 여성이었다고 했다. 뭔가 사랑을 위장한 프로의 냄새가 났다.

이런 경우 결혼을 해도 석연치 않은 불화에 시달리는 경우가 흔하다. 남성은 신부가 돈을 많이 가져오거나 결혼과 동시에 신분 상승을 하리라고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본인의 욕망이 채워지지 않으면 공연히 사소한 것부터 트집 잡기 시작한다. 터키 음식 요리가 서투르다고 화를 내는 둥, 말이 안 통한다고 핀잔을 주는 둥 하면서 말이다.

낯선 관계에서 친분을 쌓아나갈 때도 터키 남성의 접근은 스토커처럼 매우 끈적거린다. 이들은 여성들에게 매우 적극적으로 호감을 표현한다. 다가와 말을 걸고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고 친구로 가깝게 지내자고 제안한다. 여자를 바라보는 그들의 눈빛은 그윽하다. 그들은 그러한 눈빛을 지어낼 줄 안다. 이들의 바람기는 결혼하고도 멈추지 않는다. 얼마 전 어느 예능 프로그램으로 인기 정상을 달렸던 한 터키 남성이 유부남인데도 불구하고 미혼인척 여러 여성과 스캔들을 내서 방송에서 중도에 하차한 일이 있었다.

터키 남성들의 이런 스토리는 드문 일이 아니다. 한국에 살면서 한국 여성에게 구애했던 터키 남성들이 유부남으로 밝혀진 경우가 종종 있다. 터키의 경우 법적으로 엄연히 일부일처제가 자리 잡았음에도 터키 남성의 바람기는 멈추지 않고 있다. 한국에서 간통죄가 폐지되고 난 지금 지구에서 유일하게 터키에만 간통죄가 남아 있다. 남성들의 바람을 방지하고 처벌하기 위한 간통금지제도가 있다는 것 자체가 터키 남성들이 얼마나 바람을 많이 피우는지 반증해주는 것이 아닌가
.

16-①② 낙제 거듭하다 퇴학당한 학생이 졸지에 대통령 되더니…

세계에서 가장 폐쇄적인 나라를 꼽으라면 북한과 쿠바를 들 수 있다. “인간이 아닌 이데올로기를 섬겨온” 나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기에 또 한 나라 투르크메니스탄을 추가시킬 수 있다. 차이가 있다면 앞의 나라들은 “깡패국가(rogue state)”로 분류되어 온 것에 비해 투르크메니스탄은 적어도 이웃국가에 아무런 위협을 가하지 않는 “착한 나라”라는 사실이다.

유라시아 대륙 중앙아시아에 자리 잡은 투르크메니스탄은 위로는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동쪽으로는 아프가니스탄, 남쪽과 서쪽으로는 이란과 카스피 해와 접하는 나라이다. 언어는 알타이어족 투르크 어군에 속하며 터키어와 아제르바이잔어와 가장 가깝다. 이들 세 민족 모두 오우즈 투르크 족의 후예이다.

투르크멘 족은 원래 유목민이지만 10-11세기 가즈나 왕조 시대에는 카스피해에서 이란, 아프가니스탄, 중앙아시아 영토를 석권하고 인도까지 원정하여 이슬람과 페르시아 문화를 인도로 전파하는데 커다란 공헌을 했으며, 18세기 유라시아권에서는 셰익스피어와 버금가는 시인 마흐툼쿨리를 배출하기도 했다. 투르크메니스탄은 19세기 말 러시아에 합병되었다가 소련의 붕괴와 더불어 1991년 독립을 한 신생국가이다. 투르크메니스탄의 초대 대통령(1991~2006)으로는 당시 투르크메니스탄 소비에트 공산당 제1 서기장이었던 사파르무라트 니야조프가 취임했다.

 

▲1998년 세워진 높이 75cm의 아치형 동상. 꼭대기에 있는 것이 높이 12m에 이르는 니야조프 전 대통령 황금상이다. /조선일보 DB


니야조프는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소비에트 고아원에서 자랐고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공업전문대를 졸업한 이후 모스크바에서 학업을 계속했으나 낙제를 거듭하다 퇴학당하고 만다. 하지만 그는 공산당원으로서 열렬히 활동하다 고르바초프에 의해 지역당서기장으로 발탁되었으며 예기치 않은 소련의 붕괴로 인해 “무임승차”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대통령이 되자마자 자신의 이름을 “모든 투르크멘 족의 수장”이란 뜻의 “투르크멘바쉬”로 개명했다. 그의 공식적 호칭 앞에는 항상 “각하”와 더불어 기다란 수식어가 붙었다. 그를 찾아온 또 다른 뜻밖의 행운이 있었다면 이 나라가 천연가스와 석탄 매장량이 매우 풍부한 자원 부국이라는 사실이었다. 세계 4대 천연가스 생산국인 투르크메니스탄은 중국과 카스피 해로 가스관을 연결해 상당한 국부를 축적하고 있다.

이러한 경제력을 기반으로 니야조프 대통령은 모든 국민에게 전기, 수도, 가스, 그리고 정제 소금을 2020년까지 무료로 공급한다는 특별 법령을 내렸다. 그러면서 니야조프는 공산주의의 흔적을 개인의 우상화로 대체하기 시작했다. 도시들과 별들, 그리고 달의 이름까지 “투르크멘바쉬”라는 자신의 이름을 따게 하였다. 마치 김일성을 “민족의 태양”으로 숭배하듯 그를 “세계 투르크멘 족의 아버지”로 숭배할 수 있게 하는 장치를 만들었다.

니야조프에게는 나름 기발한 면도 있었다. 그는 매월의 명칭과 일주일의 명칭을 자기 식대로 바꿔 모든 달력의 표기를 대체했다. 예를 들어, 월요일은 “첫째 날”, 화요일은 “젊은 날”, 수요일은 “기분 좋은 날”, 목요일은 “정의의 날”, 금요일은 “어머니 날”(니야조프는 자신의 어머니를 자주 기릴 정도로 어머니에겐 효자였다), 토요일은 “영혼의 날”, 일요일은 “휴식의 날”로 명칭을 바꿔버렸다.

그는 참외를 지나치게 좋아한 나머지 8월의 둘째 주 일요일을 “참외의 날”로 정해 우리나라의 추석명절처럼 만들었다. 무언가 투르크멘식의 주체사상이 떠오른다. 게다가 니야조프는 자신의 저서 “루흐나마(영혼의 책)”을 발간하여 모든 대중 도서관을 폐쇄해버린다. 어차피 독서를 많이 하지 않는 국민인데 쓸데없는 책들을 읽느니 자신의 저서 한 권만이라도 제대로 읽으면 된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리고 이 책을 기리기 위해 9월의 명칭도 “루흐나마”로 바꿔버린다.

모든 대학 입시생들, 운전면허 준비생들, 또 천국에 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이 책을 읽어야 했다. 투르크메니스탄에서 이 책과 견줄 수 있는 유일한 책은 코란이다.

<②편에 계속>

 

10대 소녀 수백 명 '하렘(북한식 기쁨조)' 만들어 쾌락 즐기다 심장마비 사망

<①편에서 계속>
니야조프는 법제도 개편의 목적으로 사형제를 영구 폐지하고 매년 만 명의 죄수를 사면해왔다. 그럼에도 유엔 인권위원회의 보고서를 보면 이곳에서 최악의 인권위반사례가 빈발한다고 한다. 개인우상화가 절정에 이르는 2000년에는 모든 PC방이 폐쇄당하고 국민의 0.7% 3 6천명만이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는 허가를 받는다. 2004년과 2005년에 걸쳐 수도를 제외한 전국의 의사, 간호사, 양호교사들은 모두 해직당하고, 지방의 모든 병원은 폐쇄명령을 받는다.

병이 나면 누구나 수도인 아슈하바트로 와서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모든 의사들은 히포크라테스 선서 대신 대통령인 니야조프에게 선서를 해야만 했다. 2006년에는 모든 연금수혜자의 3분의 1에 연금지급중단 명령이 내려졌다. 자식들을 놔두고 어른들이 국가에서 연금을 받으면 안 된다는 의미에서였다. 그러면서 투르크메니스탄 정부는 연금수혜자들이 그만큼 사망해서 중단된 것이라고 외국 언론에 변명했다.

니야조프는 2005년 국가주도의 모든 공연, 명절 및 결혼식을 포함한 문화행사 그리고 TV 방송에서 립싱크를 금지했다. 녹음된 음악은 음악예술 발전에 부정적 영향을 준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리고 모든 발레, 오페라, 서커스 공연을 금지했다. 이런 장르의 예술은 투르크메니스탄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판단에서였다.

또한 니야조프는 수도에서 모든 개를 퇴출시켰는데, 개에게서 “향기롭지 못한 냄새”가 난다는 것 때문이었다. 그런가 하면 수도 근처 사막 한가운데에 사는 사막 거주민들도 스케이트를 타라고 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아이스링크를 세우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결국 2008년 “아이스 궁전”이라는 이름으로 세계 최초로 사막 한가운데에 실내 스케이트장이 건설되었다.

 

▲베르디무함메도프 투르크메니스탄 대통령(왼쪽), 베르디무함메도프 황금상. /조선일보 DB


니야조프는 1997년 폐암수술을 받고 담배를 끊었다. 그 이후로 그는 전국의 공공장소에서 흡연을 금지했고 모든 공무원에게 금연령을 내렸다. 투르크메니스탄에서는 담배를 씹는 행위도 금지되었다. 그리고 모든 국민에게 금니를 해서는 안 되니 금니를 모두 뽑으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대신 자신이 어린 시절 경험했던 기억을 교훈 삼아 이를 튼튼히 하기 위해서는 뼈를 씹으라고 권장했다. 그러면 이도 빠질 확률이 낮아진다고 했다. “어렸을 적에 나는 강아지들이 뼈를 씹으면서 이가 튼튼해지는 것을 봤다. 이가 빠진 사람들이 뼈를 씹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이러한 명령은 니야조프 사후에 대통령이 된 당시 보건부 장관이었던 베르디무하메도프에 의해 시행되었다. 베르디무하메도프는 치과의사 출신이었다.

니야조프는 TV보도기자와 남녀앵커들 모두에게 화장을 금지시켰다. 방송 중 남자인지 여자인지 식별하기 어렵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는 10대 소녀들을 수백 명 차출하여 하렘(북한식 기쁨조)를 만들어 중세 왕조의 쾌락을 즐겼다. 그러다가 결국 그는 2006 12월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러나 수도의 중앙광장에 세워진 그의 황금상은 매일같이 태양의 방향을 따라 오늘도 돌아가고 있다.

기록상 니야조프가 북한의 김일성을 추종했다고 나와 있지는 않지만 그의 처신은 김일성의 족적과 매우 흡사했다. 유라시아 국가 지도자들의 대부분이 박정희 대통령을 롤 모델로 삼았던 점에 비추어 니야조프는 매우 예외적인 현상이었다.

니야조프의 대를 이은 것은 치과의사출신의 보건부 장관이었던 현 대통령 베르디무하메도프였다. 그는 전임자보다는 훨씬 인간적이고 의사로서의 사명의식을 갖춘 인물이다. 그는 전임자가 금지했던 인터넷 사용을 다시 확대시켰고, 학교에서 금지했던 체육, 외국어, 예술교육을 복귀시켰다. 그리고 해직시켰던 의료인들을 복직시키고, 연금이 끊겼던 노인들에게 다시 연금을 지급했으며, 그동안 폐쇄당했던 학술원도 복귀시켰다. 요일과 월의 명칭도 이전의 명칭으로 되돌렸으며, 개인우상화 작업도 약화시켰다. 하지만 절대 권력이란 역시 어쩔 수 없나 보다. 하얀 대리석 언덕에서 말을 타고 가는 베르디무하메도프의 찬란하고 거대한 황금상이 수도인 아슈하바트에 2015년 완공되었다.

 

17-(1)(2) 여대생이 강의 시간에 아이 데리고 와 수업하는 나라

옛부터 결혼은 인륜지대사라 한다. 어느 나라 사람이든 결혼은 삶에서 가장 중요한 통과의례이다. 그런데 남녀가 모두 자신이 원하는 배우자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연애결혼이 시작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남녀가 자유롭게 연애를 할 수 있다는 사고는 근대화와 더불어 생겨난 매우 근대적 개념이다. 따라서 낭만적 사랑과 연애결혼은 중세인의 세계관과 삶의 패러다임의 변화 결과 생겨난 근대성의 상징물이다. 우리나라도 근대화와 더불어 등장한 신여성들이 근대성 실현의 하나로 주장했던 것이 자유연애와 자유결혼이 아니던가. 그렇게 보면,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자유연애를 할 수 있도록 세상이 변한 것도 100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구소련에서 독립한 신생독립국 우즈베키스탄을 비롯한 중앙아시아 국가는 상황이 어떨까.


오랜 과거의 결혼 전통에서 유목민인 중앙아시아인들에게는 이른바 “납치 혼”이 존재했다. 마음에 드는 여성을 납치해서 신부로 삼는 제도이다. 이미 사라진 관행이라고 믿고 싶기는 하지만 여전히 유목 전통이 비교적 강하게 남아 있는 키르기스스탄에서는 아직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러시아 문화의 영향을 받아 오랫동안 서구 문화를 접해왔던 중앙아시아의 투르크족에게 자유연애만큼은 아직 보편화하지 않았다. 이들은 관습적으로 아직도 중매결혼을 선호한다. 중매를 시작하고 결혼식을 올리기까지의 과정이 대체로 한 달 남짓에 불과하다. 이렇게 서둘러 결혼을 진행하고, 연애결혼을 터부시하는 이유는 혹시라도 지역 공동체에서 불미스러운 소문에 휘말리게 될까 하는 전통사회 특유의 두려움 때문이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만일 젊은 여자가 연애를 하다가 들키거나 외간 남자와 손이라도 잡고 걸어 다니다가 들키면 당장 결혼해야 한다. 안 그러면 가문에 대한 평판이 매우 나빠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미혼의 여자가 외간 남자와 사귄다는 것을 부정한 행위로 간주하여 그것을 커다란 가문의 수치라고 여긴다. 이런 불미스런 사태를 사전에 방지하고자 부모들은 자기 딸이 연애를 시작하면 무조건 결혼을 시킨다. 심지어는 가문명예를 실추시킬 싹을 미리 자르기 위해 일찌감치 시집을 보내버리기도 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결혼 연령도 매우 이르다. 대부분 조혼이 이루어진다. 결혼연령은 16세부터 시작되기도 하는데 대체로는 18세부터가 결혼 적령기로 여겨진다. 그래서 대학 캠퍼스에서 임산부 여학생들을 종종 보게 된다. 출산을 앞두고 있어도 여학생들은 휴학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몇 달씩 학교를 나오지 않고 시험도 보지 않아도 아무 문제가 없다. 출산에 대해서 교수들이나 학교 행정 당국은 무척 관대하다. 교수들은 간단한 리포트 정도로 알아서 학점을 주는 것이 관행이다. 대학교를 졸업할 무렵이면 미혼인 여학생의 수는 손에 꼽을 정도이다.

이런 조혼 풍습 때문에 어린 신랑 신부는 생활력이 없거나 학생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들은 대부분 펭귄족으로 살아간다. 아이를 낳아도 부양은 전적으로 할머니, 할아버지의 몫이다. 돌잔치도 할머니, 할아버지가 해준다.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했다는 이른바 한국의 삼포 세대가 중앙아시아에 등장하지 않는 것은 엄밀하게는 자식의 육아와 생활비를 부모가 공동으로 분담하는 있기 때문이다.

학생 부부의 육아는 당연히 시어머니의 몫이다. 그런데 가끔 대학교 3~4학년 수업에 여학생들이 집에서 돌봐줄 사람이 없다면서 아이를 데리고 수업을 듣기도 한다. 서너 살 된 아동은 수업을 듣는 엄마 곁에 앉아서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그림책을 읽기도 한다. 그러다가 지겨워지면 목을 놓아 울기 시작한다. 어린 대학생 엄마가 당황해서 아이 입을 틀어막으면 강의를 진행하던 교수님은 너그럽게 “아이가 힘들어하니 그만 집에 가봐라”며 조퇴를 허용해주신다. 임신, 출산, 육아를 담당하는 여성에게는 매우 관대한 사회이다.

중앙아시아 투르크 민족에게 중매문화가 보편적이지만 그렇다고 전문 중매쟁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남자가 동네에서 마음에 드는 여자가 생기면 자기 어머니를 그 집에 중매쟁이로 보내 의사를 묻는 형태이다. 중매쟁이는 나이가 지긋하고 덕망이 있는 사람을 선호하지만, 대부분 친어머니나 누이, , 친지 등이 담당한다. 중매쟁이의 첫 번째 청혼이 거절당하더라도 남자는 시간을 두고 연속적으로 몇 차례 더 중매쟁이를 ‘파견(?)’한다. 생각할 시간을 주면 마음을 돌릴 것이라는 계산에서이다.

<②편에 계속>

<①편에서 계속>
결혼식은 최대한 성대하게 하는 것이 투르크인들의 습성이다. 자존심이 강한 투르크인들은 남에게 보여 지는 자신의 모습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그런 의미에서 허세와 보여주기를 좋아하는 투르크인들의 결혼식은 매우 성대하다. 자신의 위세와 권력을 과시하고 자랑하는 것이 결혼식의 또 다른 모습이기 때문이다. 투르크인들은 아이가 태어나면 아이의 미래 결혼식에 쓸 돈을 그때부터 모으기 시작한다.

평생 벌어서 모은 돈을 결혼식을 위해 모두 쏟아 붓는 것이다. 그래서 결혼식에는 그동안 알고 지냈던 모든 사람들을 초대한다. 최대한 많은 인원이 모여야 혼주의 체면이 산다고 믿는 것이다. 과거 냉수 마시고도 이를 쑤시는 우리의 허세나 최근 결혼식 하객 알바까지 등장시켜 그럴 듯한 결혼식을 올리려는 한국 사회의 모습을 부분적으로 연상시키기도 한다.

이렇듯 성대한 결혼식을 치룬 투르크인들은 아직도 보수적 전통이 강하기 때문에 결혼 후 문제가 생겨도 여성들이 이혼을 결심하기란 쉽지 않다. 남편이 폭력을 휘둘러도 주변의 눈이 두려워 참을 수 있을 만큼 참고 살려 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래도 심한 가정폭력, 알코올 중독 등의 이유로 이혼을 하게 되는 최악의 사태가 벌어지면 친정에서 이혼한 딸을 기꺼이 받아준다.

구소련 치하에서 만들어진 사회주의 법을 따르고 있어서 이혼절차나 과정이 그리 어렵지는 않고,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쉽게 이혼할 수 있다. 같은 이슬람 문화권이라 해도 아랍 사회처럼 딸이 이혼 당하고 돌아왔다고 해서 가문의 수치라며 명예살인을 하는 경우는 찾아볼 수 없다. 이혼하고 돌아온 딸의 자녀는 친정부모가 친자식처럼 돌봐주고, 딸이 경제력과 생활력이 없으면 당연히 부양을 해준다. 게다가 아이의 외삼촌이 기꺼이 아버지 노릇을 해준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한편, 공식적으로는 일부일처제이지만 이슬람 율법에 따른 이맘 집도 하에 비공식 결혼을 올리기도 한다. 이렇게 두 번째 부인을 얻으면 호적에는 올릴 수 없지만 관습적으로 이들은 부부로 인정된다. 호적에 오르지 않은 두 번째 부인과 결혼생활을 하는 데는 별다른 문제가 없다. 합법적인 부부는 아니지만 관습에 따라 사람들은 두 사람을 부부로 대우해준다. 다만, 여행을 가서 호텔에 숙박할 때는 문제가 될 수도 있다. 혼인증명서를 제출해야 한 방에 투숙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같은 중앙아시아 국가인 우즈베키스탄은 거의 130개 소수민족이 거주하는 다문화 사회이기 때문에 같은 나라에 살고 있다 해도 우즈베크나 키르기스 등의 투르크인들과 러시아 문화에 완전히 동화된 타민족의 삶의 방식은 완전히 다르다. 특히 한민족인 고려인만 해도 이들의 결혼과 이혼은 같은 나라에 사는 우즈베크인에 비해 훨씬 자유롭다.

러시아 문화와 삶의 방식을 따르는 고려인도 십 대 후반에서 이십 대 초가 되면 거의 결혼한다. 그러나 순결이나 평판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우즈베크인에 비하면 현저한 사고와 관습 차이를 보여 고려인은 결혼 전에 신랑 신부가 동거를 하는 경우도 흔하다. 게다가 평생 세 번 이상 결혼하는 고려인들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은 서로 미성숙한 상태에서 어린 나이에 결혼하는 관계로 순탄치 못한 결혼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다. 결혼 후 최대한 10년 정도 버티다 헤어지는 사례가 많다. 자녀를 한명 정도 두는 삼십대 중반의 이혼 남녀들은 아이가 대학을 들어가고 사십 정도가 되면 또 한 번 결혼 한다.

이미 인생을 어느 정도 체험하고 성숙한 상태에서 결합한 재혼은 성공적인 확률이 높다. 그런데 배우자가 사망하거나 부득이한 사유로 또 이혼을 해서 60세 정도 되면 다시 황혼 결혼을 맞이한다. 황혼 결혼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자신을 행운아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80세가 다 되어가는 러시아의 고려인 작가 아나톨리 김은 현재 네 번째 신혼을 즐기고 있다.

재혼한 고려인들의 자녀는 어머니에게 양육권이 자동으로 넘어가므로, 여자의 경우 전남편의 아이와는 함께 살지 않고 자신이 낳은 아이를 데리고 오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자녀가 어느 정도 성장하면 한집에 살기 보다는 가까운 거리에서 따로 살게 하고 보살펴 준다. 부득이한 사정이 있을 때만 함께 사는데, 함께 살더라도 자녀는 어머니의 새 남편이나 아버지의 새 아내를 아버지나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는다.

다른 사람에게 소개할 때도 “우리 엄마의 남편” 혹은 “우리 아버지의 부인”이라고 소개한다. 고려인들은 부모일지라도 자녀의 결혼 결정에 크게 관여하지 않는다. 유럽과 러시아의 영향 탓인지 그들은 자녀의 결혼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면 지나친 강요보다는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해결책을 모색하려 노력한다.

다양한 결혼제도가 공존하는 프랑스에서 미래학자 파비엔 구 보디망은 “결혼은 없어지지 않고 진화할 것이며, 앞으로는 제도권 밖의 다양한 형태의 결혼이 인정될 것이다” 말한 바 있다. 같은 시대, 한 나라에서 민족에 따라 다양하게 공존하는 결혼제도는 결혼이 어떻게 변화하고 진화하고 있는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모든 제도가 그러하듯이 결혼제도 역시 인간의 발명품이다. 인간을 위한 결혼 제도, 인간을 발목 잡지 않는 제도로 진화하여야 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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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2  한국의 김치 맛 다르듯  터키에는 커피맛 달라

“커피 한잔 하시겠어요?


이 말만큼 달콤하고 가슴 설레는 말이 있을까?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커플의 만남을 탄생시킨 주역을 꼽으라면 단연코 ‘커피’가 빠질 수 없을 것이다. 지구상의 수많은 커플이 커피 한 잔이 계기가 돼서 결혼까지 이르게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구나 한국은 6.25 전쟁 이후 전 세계적으로 커피를 가장 많이 소비하며, “맛있는 커피가 가장 많은” 커피 강국이 되었다. 불과 몇 십 년 전까지만 해도 서구 문화나 근대 문물의 상징이었던 커피가 이제는 한국인의 삶과 분리될 수 없는 기호 식품으로 굳건히 자리 잡았다.

우리는 커피가 서구나 유럽의 상징이라고만 알고 있지만, 커피 문화가 꽃을 피웠던 곳은 다름 아닌 오스만 제국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에티오피아가 원산지로 알려진 커피가 잠을 쫓는다는 것을 알게 된 이슬람 수도사들에 의해 아라비아 반도에 전해진 커피는 신성한 음료가 되었다.

커피가 전해지면서 하루에 다섯 번 기도를 올리는 수도사들이 커피를 마시면서 수행에 몰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커피를 “알라께서 내리신 음료”라 하며 오로지 남성들만 마실 수 있는 성스런 음료로 간주하기도 했다. 그러한 커피가 터키까지 전해진 것은 이슬람 국가의 종주국인 오스만 제국이 탄생하면서이다.

오스만 제국에서 카페가 문을 연 것은 1554년이다. 투르크 족이 이스탄불(비잔틴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지 100년 정도 지난 후였다. 이스탄불의 상업중심지 타흐타칼레(Tahtakale)에 ‘커피 하우스’라는 뜻의 “카흐베하네(kahvehane)”가 최초로 선을 보였다.

상인들이 모이면 대규모 연회가 필요했으므로 비용이 만만치 않게 소요되었지만, “카흐베하네”는 커피 한잔과 터키 식 딜라이트 “로쿰”으로 오랜 시간동안 부담 없이 필요한 만남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점에서 인기 만점이었고, 매우 실용적인 공간으로 각광받았다. “카흐베하네”는 대체로 상인들이 모이는 곳이었으나, 문학과 가족 문제까지 토론하는 장으로 발전해갔다. 그런데 한때는 사람들이 모여 반정부 토론을 하며 역모를 꾀할지 모른다는 우려에서 강제로 폐쇄당한 적도 있었다.


오스만 제국에서 카흐베하네는 빈부나 신분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이 이용하는 공간이었다. 그렇지만 모이는 사람들의 성격에 따라 다양한 카흐베하네로 구분되었다. 상인들, 지역주민, 장인들은 각각 자신들의 성격에 맞는 독자적인 카흐베하네에 출입했다. 명창들의 공연을 볼 수 있는 카흐베하네, 그리고 이야기꾼의 모노드라마인 메다(meddah)를 볼 수 있는 카흐베하네 등 다양한 카페들이 생겨났다. 이와 같은 역사를 지닌 터키 커피는 끓이면 방법부터 마시는 방법까지 터키인만의 고유한 색채와 맛을 담고 있다.

터키 커피는 곱게 갈아낸 커피 원두 가루를 끓이는 것이 특징이다. ‘제즈베’라고 불리는 국자 같은 주전자에 원두가루와 물을 한꺼번에 넣고 끓인다. 기호에 따라서 설탕을 넣고 끓이기도 한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이 거품이다. 정성껏 스푼으로 저으면서 커피물이 넘치지 않으면서도 거품이 소담스럽고 보글거리게 끓이는 것이 요령이다. 그러면서 최대한 구수한 맛을 살려야 한다.

한국인의 김치 맛이 집집마다 다르듯 터키인들의 커피 맛도 다채롭기 짝이 없다. 집에 찾아온 손님들에게 예전에는 가장 먼저 커피를 대접했다. 그러면 손님들은 그 집 커피 맛으로 그 집의 문화와 분위기를 평가하기도 했다. 또한 커피 한잔으로 결혼에 골인하는 되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신랑 측에서 신부 집에 청혼하러 갔을 때 신부가 시댁 어른들의 테스트를 통과해야 하는 첫 번째 관문이 바로 커피 맛이다. 신랑 측의 어른들은 예비 신부 후보가 끓여온 커피 맛으로 신붓감의 요리 솜씨를 가늠한다. 터키에서 그만큼 커피는 신랑 신부의 연을 맺어주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왔다.

<②편에 계속>

 

<①편에서 계속>
터키 커피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커피점()'이다. 터키인들은 커피를 마시고 남은 찌꺼기를 굳혀서 점을 본다. 터키인 속담에 "점을 믿지는 마라. 그러나 점도 안 보고 살지는 마라"라는 속담이 있다. 점을 보면서 정을 쌓고, 이야기로 친분을 쌓아가라는 터키인의 지혜가 담긴 말이다. 그만큼 터키인들은 서로에게 점을 쳐주면서 덕담을 나누고, 그동안 숨겨 놓았던 어려운 속내를 털어놓으며 친구가 되어 가는 과정을 즐긴다.

터키인은 처음 만나는 사이라도 커피를 마시고 커피로 점을 치면서 자연스럽게 사적인 이야기를 털어놓고 대화를 즐긴다. 그들은 커피 찌꺼기가 만들어낸 온갖 형상과 상징들을 나름대로 해석해 내면서, 상대방의 고민을 듣고, 덕담을 늘어놓거나 해결책을 제시하기도 한다.

바람둥이 남성들은 여성들에게 접근하기 위해 커피점을 봐주는 척하며 그럴듯하게 상대방 여성의 마음을 사로잡는 방법을 배우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터키인들은 "커피 한잔에 40년의 추억이 담긴다"고 말한다. 그들이 마시는 커피는 단순히 커피가 아니라 소통이자 이야기로서 추억과 역사를 만들어내는 그들만의 문화이기 때문이다.

 

▲커피를 마신 후, 찌꺼기로 그날의 운세를 보는 터키문화. /조선일보 DB

 

그러나 커피는 터키의 문화로만 한정되지 않았다. 유럽 문화의 상징인 에스프레소, 비엔나커피, 카푸치노 모두 터키 커피가 유럽 대륙에 전해지면서 파생한 문화상품이다. '카페(카흐베하네)'가 유럽에 전해진 것은 오스만제국을 통해서이다. '비엔나커피'는 오스만 군대가 빈까지 진출했다가 전쟁에서 패망하고 퇴각하면서 빠트려 놓고 간 커피 원두에서 탄생하게 되었다.

에스프레소 역시 이스탄불을 다녀간 이탈리아 사람들이 터키 커피를 신속하게 만들어 마시기 위해 기계를 만들어 보급하면서 생겨난 것이다. 그래서 에스프레소는 터키 커피처럼 지금도 작은 커피 잔에 진한 원액을 그대로 마신다.

터키 커피는 한때 유럽 사회에서 이슬람이나 이교도를 상징하는 검은 악마의 음료로 간주하였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러한 편견에서 벗어나 커피는 유럽인의 삶에서 없어서는 안 될 최고의 기호식품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러한 공로 덕분에 터키 커피는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될 수 있는 영예를 얻었다. 이처럼 세계인의 문화유산이 될 정도로 깊은맛과 문화적 역사가 서린 터키 커피 한잔을 권해보는 바이다.

 

(19)-(1)(2)(3) 노트르담 사원이 100년만에 지어졌는데 6년만에 완성한 소피아 사원 결국은…

10월말까지 해외로 떠난 한국인 관광객 수가 무려 1600만 명이다. 이젠 세계 명소에 한국인 발길이 닫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다. 덕분에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국인에게 생소했던 이스탄불의 성 소피아(Hagia Sophia) 사원은 국내 여행객들이 꼭 봐야 하는 세계적 명승지로 자리 잡아 가고 있다. 하지만 성 소피아 사원은 명승지 이상의 커다란 의미를 담고 있는 세계 역사의 중요한 아이콘이다.

Hagia Sophia’는 그리스어로 발음하면 ‘아이야 소피아’로 ‘성현(聖賢)’이란 뜻이고 터키어로는 ‘아야 소피야’로 발음된다. 성 소피아는 단초는 기독교를 최초로 공인한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 360년 콘스탄티노플(비잔티움→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에 세워졌다가 서기 537년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에 의해 현재 사원이 다시 세워진 것이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로마제국에 최초로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하고 제국의 수도를 비잔티움으로 옮기고, 비잔티움을 자신의 이름을 따서 콘스탄티노플로 개명했다.

 

▲비잔틴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위키피디아


그 후 비잔티움은 헬레니즘 문화 산실로 천 년 동안 정교 세계의 문화, 예술, 종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472~565)는 섭정 초기에 세금을 과도하게 부과한 탓에 시민에게 그다지 인기를 누리지 못했다. 보수파인 청색당과 진보파인 녹색당 시민은 전차경기장에 모여 승리의 여신(Nika)을 연호하며 황제를 타도하려 시도했다.

황제와 신하들은 시민의 기세에 눌려 대피할 준비까지 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황후 테오도라는 불같이 역정을 내며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해 폭도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할 것을 독려했다. 황제는 아내의 꾸지람에 자극을 받아 잔인하게 반란을 진압했다. 그 결과 반란에 가담한 3만 명의 시민이 학살됐다.

기독교 상징이었던 성 소피아 사원이 폭도에 의해 불에 타버린 것을 개탄하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그 자리에다 오늘날의 성 소피아 사원을 다시 짓도록 명령했다. 532년에 시작해서 매년 1만 명의 일꾼이 동원돼 537년에 경이로운 규모의 성 소피아 사원이 완공됐다.

당대 최고 시인이었던 파울루스 실렌티아리우스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와 기독교의 승리(Nika)”였다. 유스티아누스는 성 소피아 사원의 건축을 그리스의 물리학자인 안테미우스와 수학자인 이시도르에게 맡겼다. 이들은 6년이 안 되는 짧은 기간에 성당을 완공했다. 비슷한 규모의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이 600년 후에 1세기 넘는 기간 건축된 것을 고려한다면 거의 기적이었다.

성 소피아 사원의 원형 천정(cupola)은 금과 은을 비롯해 50가지 보석으로 장식하여 축복에 찬 하늘나라를 상징하도록 꾸며졌다. 그것은 보는 것만으로도 천국에 온 것으로 착각하게 할 정도로 장관이었다. 하지만 급히 짓는 바람에 20년 후 지상 50미터 높이의 원형 천정이 붕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런데 그 지붕은 이 사원을 지은 이시도르의 아들에게 떨어졌다. 마침 이시도르의 아들은 원형 천장을 새로이 지으려는 명을 받고 사원 안에 있었던 참이었다.

그는 아버지의 대를 이어 오늘날까지 아무런 사고 없이 1400년간 동안 지탱해올 수 있는 50미터 높이에 지름이 30미터나 되는 원형 천정을 완성했다. 원형 천정 아래로는 40개의 아치와 창이 나있다. 이 창들에서 나오는 햇빛은 원형 천정을 감싸며 사원 실내로 흘러들어와 황금모자이크 벽을 비춰주며 신비로운 기운을 발산시켜주게끔 설계되어 있다.

<②편에 계속>

러시아인을 충격에 빠트린 성 소피아 성당

<①편에서 계속>

사원 내부는 지상층과 상층부에 있는 발코니로 나뉘어 있다. 그것은 남녀, 계급에 의해 자리 배치가 되어 예배볼 수 있게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발코니 층에는 황제 내외가 예배를 볼 수 있는 자리가 따로 마련되어 있다. 세기가 거듭함에 따라 사원 장식은 더욱 화려해졌다.

황제의 초상화, 그리스도와 성인의 아이콘이 가미되었다. 한때 우상파괴 운동에 따라 그러한 이미지가 훼손당했던 적도 있었다. 원형 천정은 어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의 대형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었다. 이 사원에 발을 딛고 들어오는 사람은 그 누구든 인간이 아닌 신의 손에 의해 지어진 듯한 사원의 웅장함과 찬란함에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였다. 이러한 장관을 보면 신앙심이 저절로 생겨난다고 했다. 그것은 미래 러시아의 운명을 바꿔 놓았을 정도였다.

원래 다수의 우상을 숭배했던 고대 러시아에서는 대대로 이어지는 혈족 간 유혈 복수가 그치지 않고, 살아 있는 인간을 제물로 바치고, 남편이 죽으면 살아있는 아내를 불로 태워버리고 노예를 부리는 악습이 횡행했다. 이러한 폐단을 시정하고 다수 우상으로 인한 국가 분열을 해결하기 위해 당시 러시아 수장이었던 키예프의 블라디미르 대공은 하나의 공인된 신으로 국가를 통합하려 했다.

그는 동쪽의 이슬람교, 하자르족이 믿는 유대교, 로마의 가톨릭교, 비잔티움의 정교를 염두에 두고 어느 종교가 러시아인에게 가장 적합한지 알아보기 위해 해당 지역으로 사신들을 보냈다. 사신들 보고를 들은 블라디미르 대공은 할례를 해야 하고 술을 금지하는 이슬람교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쾌활하고 술을 즐기는 러시아인에게 어울리지 않는 종교라고 생각했다.

 

▲326년 기독교성당으로 건립됐지만 1453년 오스만투르크 점령이후에도 파괴되지 않고 지금까지 이슬람 사원으로 계속 사용되고 있는 성 소피아 성당. /조선일보 DB


그리고 조국에서 추방되어 후손이 여러 나라에서 수천 년간 떠돌이 생활하는 유대인의 종교 또한 국교로 받아들이기가 께름칙했다. 가톨릭교는 지나친 금욕과 계율을 요구했기에 받아들이기가 불편했다. 그러나 동로마제국의 기독교를 알아보러 콘스탄티노플에 갔다 왔던 사신들은 황홀감에 넘쳐 있었다.

성 소피아 사원의 장엄함과 휘황찬란함, 그곳의 사제들이 입고 있는 화려한 성의 모든 신하를 대동하고 사원에 나타난 황제 앞에서 벌어지는 호사한 의식, 수많은 사제를 거느린 대주교의 위엄, 숨을 멎게 할 것 같은 성가, 이 모든 것이 러시아인에게 커다란 충격이었다. 사신은 성 소피아 사원에 발을 디딘 순간 분위기에 취해서 자신이 천국에 와 있는지 지상에 와 있는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고 말했다.

블라디미르 대공은 주저하지 않고 동방의 그리스 정교를 받아들였다. 서기 988년 러시아의 종교로 기독교가 선포되었다. 선포 다음날부터 모든 국민은 강가로 나가 강제로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마을 주변에 세워진 모든 우상은 파괴되었다.

블라디미르는 러시아를 세례 시킨 국왕으로 러시아 정교회의 성인(聖人)이 되었다. 이후 러시아는 1917년 혁명 전까지 유럽에서 가장 신앙심이 강한 나라가 되었다. 성 소피아 사원이 그 실마리를 제공한 것이다.

성 소피아 사원이 운명의 소용돌이를 맞이한 것은 1453년이었다. 그해에 비잔티움 제국은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오스만 투르크제국의 투르크인들에게 완전히 함락되었다. 이후 그리스라는 나라는 400년 가까이 이 지상에서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투르크인들은 콘스탄티노플을 파괴하고 약탈했다.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은 이스탄불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소피아는 이교도들에게 겁탈을 당했다. 그러나 아주 아름다운 나머지 오토만의 술탄 메흐메드 2세는 소피아의 아름다움에 반해 소피아의 겁탈을 중지시켰다.

<③편에 계속>

 

소피아 사원은 기독교 상징인가 이슬람교 상징인가?

<②편에서 계속>

소피아를 아예 이슬람으로 개종시켜 영원히 자기 것으로 만들려 했다. 아홉 개 하늘을 형상화한 성 소피아 사원 원형지붕들은 이슬람교도의 탄성을 자아내게 하였다. 소피아의 새로운 주인이 된 이슬람교도들은 사원 주위에다 이슬람식 뾰족탑들을 설치했다. 내부에도 변화를 주었다.

이들은 모자이크 위에다 노란 페인트를 두껍게 칠을 해버렸다. 기독교의 상징들을 감추기 위해서였다. 글자 그대로 호도 행위가 벌어진 것이다. 단지 반원형 천정에 새겨진 아이를 안고 있는 성모의 모자이크만 남겨두었다. 그리고 기둥 모서리에다 이슬람 성인 이름을 딴 문자 문양들을 걸어놓았다. 그렇게 해서 이슬람 최고의 사원이 되어버린 성 소피아 사원은 이스탄불의 푸른 회교사원의 모범적 건축양식이 되었다.

오스만 투르크제국은 1차 세계대전에서 패전국이 되었고, 새로운 터키의 지도자 아타튀르크는 발전한 유럽을 지향하며 터키를 종교 국가가 아닌 세속국가로 선포했다. 그 상징이 성 소피아 사원이었다. 소피아를 이슬람에서 해방했다. 500년 가까이 이슬람 사원 중추 역할을 해왔던 성 소피아 사원을 박물관으로 전환한 것이다. 그것은 터키가 지역주의에서 벗어나 세계주의로 나가겠다는 신호였다.

성 소피아는 또 한 번 개종을 겪으며 어느 특정 종교에 얽매이지 않은 채 이제 이스탄불이 아닌 세계의 유적지로 자리 매김을 했다. 그 안에는 고대 정통 기독교와 중세 이슬람교, 고대 서양 문명의 결정체와 동방 이슬람의 고유문화, 동쪽 세계와 서쪽 세계, 고대와 중세와 현대가 어우러져 있다. 이와 같은 인류의 애환이 서려 있는 성 소피아 사원은 비로소 진정한 코스모폴리타니즘을 획득한 것이다.

 

▲터키 이스탄불의 성소피아 대성당의 전경. /조선일보 DB

 

하지만 최근 소피아에 이상 징후가 생겼다. 1915 150만 명의 기독교계 아르메니아인들이 오스만 튀르크 제국의 터키인들에 의해 대량 학살당한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고 난 다음부터이다. 물론 터키는 이 사실을 극구 부인하고 있다.

학살당한 자들은 어디까지나 1차 세계대전의 희생자들이지 터키인과는 무관하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가톨릭 세계의 영적 지도자인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난 4월의 미사에서 “20세기 최초의 대량학살이 터키인에 의해 자행되었다”며 “이 사실을 외면하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터키의 이슬람 지도자들은 교황의 그러한 발언은 성 소피아 사원을 다시 회교 사원으로 개종시키는 명분을 줄 뿐이라고 과격하게 반응했다. 이미 2013년 터키의 부총리가 성 소피아를 이슬람교도들에게 다시 돌려주어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한 바도 있다.

그들은 현재 성 소피아가 슬픈 얼굴을 하고 있고 다시 소피아에 미소를 돌려줄 의무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교황의 미사가 있던 날 성 소피아 사원에서는 85년 만에 최초로 앙카라에서 온 이맘 알리 텔에 의해 코란이 암송되었으며, ‘무함마드의 사랑’이라는 전시회가 시작되었다.

이 행사에 정부의 고위관리들이 참석했다. 성 소피아 사원을 다시 기독교 사원으로 복구시키자는 운동을 지난 수십 년 동안 펼쳐왔던 미국과 유럽의 운동가들에게 찬물을 끼얹는 사건이었다. 마치 새로운 십자군 전쟁이 암암리에 진행되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성 소피아(지혜)의 성스런 지혜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오은경의 잊혀진 유라시아 이야기

 

■[유라시아 문명 기행 2000㎞] 

윤명철  동국대 교수·유라시아 실크로드 연구소장  주간조선

 2018.10.01

2526그곳에, 우리와 닮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

유라시아 지역을 다니다 보면 때때로 깜짝깜짝 놀랄 때가 있다. 나와 얼굴이 비슷한 현지인들을 만나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지난 8 25일부터 9 4일까지 우즈베키스탄을 거쳐 타지키스탄, 파미르고원, 키르기스스탄을 지나는 2000㎞ 장도를 마치고 돌아왔다.
   
   2001년에도 바이칼호와 알혼섬에 들어갔었다. 그곳에서 부랴트족들을 만나는 순간 경이로움을 숨길 수가 없었다. 외모와 살색, 골격은 물론이고 심지어 풍모와 생활습속들마저 익숙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근대에 가까워질 무렵에 그 지역으로 이주한 몽골어계의 혼혈집단이니 우리의 한 갈래였고, 굳이 따지자면 우리가 원류이다. 일부 사람들은 우리가 몽골의 한 가지로 알고 있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선비족의 한 갈래가 몽골부족일 뿐이고, 선비어와 부여어는 서로 통했다. 오히려 우리가 종가이고 몽골은 분가인 셈이다.
   
   북만주 지역에는 끝이 안 보일 정도의 대삼림들이 있다. 또 북만주를 통과해 러시아 영역으로 들어가 무려 4000여㎞를 흘러가다 동해로 흘러가는 흑룡강(아무르강)이 있다. 그 언저리를 가보면 지금도 주로 에벤키족 계통의 사람들이 다양한 이름으로 남아 있는 걸 볼 수 있다. 옛날 말갈의 후손들이니 당연히 우리와 얼굴이나 신앙, 민속 등이 유사하다.   

 

한민족의 뿌리를 찾아   

   그런데 이런 일은 중앙아시아에 가서도 자주 겪는다. 카자흐스탄, 중국, 러시아가 걸쳐 있는 알타이 산록은 기원 전 3세기 무렵에는 흉노인들이 살았고, 6세기에는 투르크(돌궐)제국이 활동한 곳이라서 그들의 후손과 문화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난 정말 우즈베키스탄에 있는 부하라에서 놀랐다. 실크로드를 오고간 소그드 대상의 동상을 보았는데, 눈이 쑥 들어가고 코가 우뚝 섰고, 구레나룻이 무성해서 내 얼굴과 영락없이 닮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페르시아계, 그리스계, 투르크계 그리고 8세기에는 아랍계까지 섞인 사람들이었다. 그러니 그들과 닮은 나는 어쩌면 그리스인의 피도 약간은 흐르고 있을지 모른다. 당연하지만 이란이나 터키에 가서도 이러한 경험을 때때로 했었다.
   
   궁금증이 일어난다. 내 몸속에는 어떤 종족들의 피가 흐르고 있는 걸까. 단일민족이라지만 도대체 우리 한민족은 어떻게 해서 이루어졌고, 우리 문화는 유라시아 세계와 어떤 연관을 갖고 있을까. 최근에 들어서 한민족의 혈연이나 문화와 연관된 정체성에 관심들을 갖고 있다. 더구나 정부의 유라시아 정책과 맞물려 이 현상은 ‘한민족의 원류 찾기’라는 이름으로 여러 분야의 사람들로 하여금 유라시아 지역을 답사하게 한다.
   
   ‘한민족의 기원은 어디인가?’ 이러한 물음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와 주장들이 있다. 기본적으로는 ‘북방기원설’이 주를 이루고 있다. 우선 우리나라에 전래된 청동기문화 유입 경로와 연결돼 있고, 한국어와 알타이어계는 유사성이 많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남북 혼합설’이다. 즉 중국의 남부 지역과 인도 지역에서 해양을 이용하여 이주한 남방계와 북방에서 말 타고 내려온 유목민이 결합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리고 북한이 주장하지만 ‘본토기원설’이 있다.
   
   우리가 수천 년 동안 살면서 문화의 핵을 만들었던 ‘터’는 만주와 한반도, 그리고 바다이다.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끝이면서, 북쪽의 대륙과 남쪽의 해양이 만나는 교차로이다. 해가 떠오르는 곳이고, 사람이 살기에 가장 적합한 이상향이다. 그렇다면 유라시아 전 지역에서 이곳을 향해 이주해올 수밖에 없다.
   
   많은 한국 사람들이 바라는 게 있다. 우리 문화와 역사를 유라시아 전체와 연결하면서, 가능한 한 우리와 연관된 범위를 넓고 크게 확장시키려 한다. 대표적인 사람이 육당 최남선이다. 그는 ‘불함문화론’을 내세우면서 그 범위를 한반도, 일본열도, 오키나와에서 남유럽의 발칸반도까지 확장시키고, 인류 3대 문화권 중 하나이며, 그 중심이 조선이라고 주장하였다. 또 일부에서는 한민족의 원류를 유라시아의 어떤 한 지역이라고 주장한다. 예를 들면 ‘바이칼 기원설’ ‘흉노 이주설’ ‘파미르고원설’이 있고, 심지어는 ‘수메르문명’과 연관시키는 경우도 있다.
   
   왜 그럴까. 물론 그 지역과 연관된 생물학적 본능도 작용했다고 믿지만, 아무래도 짓눌려왔던 반도사관을 극복하고 역사 속에서라도 강대국이 되려는 심리가 작동하지 않았을까.   
  


   초원 길과 오아시스 길 

   그런데도 정작 우리는 유라시아에 대하여 아는 것이 별로 없다. 떠나온 지 너무 오랜 세월이 흘렀고, 또 반도에 갇혀 폐쇄적인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대륙 유라시아’는 동아시아의 비옥한 농경지대, 타클라마칸 같은 죽음의 사막과 오아시스, 동서 2500㎞에 달하고 해발이 평균 5000m급인 톈산산맥과 파미르고원 같은 최고의 산악지대들, 그리고 알타이 산록과 바이칼호, 몽골로 이어지는 대초원지대, 아랄해, 카스피해, 흑해 같은 내륙해와 발하슈(balkhash), 이식쿨호 같은 호수들, 그리고 무려 1300만㎢가 넘는 시베리아가 있다. 시베리아는 ‘잠자는 땅’ ‘버려진 땅’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몽골인의 나라인 ‘시비르 한국’에서 기원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한편 ‘해양 유라시아’는 동아지중해, 동남아시아, 인도양, 페르시아만 등을 연결하는 바닷길로 구성되었다. 그러므로 유라시아는 전체적으로는 농경의 정주성(stability) 문화와 유목, 삼림 및 해양의 이동성(mobility) 문화가 만난 ‘혼합 문화대’를 이루었다.
   
   나는 우선 이러한 자연환경을 고려하면서, 사람들이 살 만한 곳을 염두에 두면서 우리 터를 중심으로 선을 긋는다. 그럼 큰 길은 8개가 되고, 그 중간중간에는 작은 길과 샛길들이 만들어진다. 그렇다면 우리 민족과 문화는 이 ‘8+α’의 길과 연결되면서 교류하는 과정에서 생성되었다. 그 큰 길들 가운데 핵심은 바이칼호 지역, 알타이 산록과 연결된 ‘초원 길(Steppe Road)’과 중앙아시아와 이어진 ‘오아시스 길(Oasis Road)’이다. 실제로 그 큰 길의 주변 일대가 대륙 유라시아 세계의 핵심이다.
   
   우리와 유라시아 세계가 연관된 것이 무엇이 있을까. 쉽게 거론되는 것은 혈연과 언어이다. 유라시아의 동과 서에 걸쳐서 넓은 지역에 사는 주민들은 북방 몽골로이드에 속한 투르크계 종족이다. 남아 있는 석상이나 유골 등에서 확인할 수 있지만, 이들은 황인종과 백인종이 섞인 혼혈인들이다. 다만 동쪽에서는 황인종의 피가 더 섞였고, 서쪽에서는 백인종의 배율이 높을 뿐이다. 흉노·돌궐·위구르 등이 그렇고, 고구려도 일부는 그런 점이 있다. 얼굴 전문가인 조용진 교수는 고구려인들은 투르크의 피가 많이 섞였고, 내가 전형적인 고구려 인물이라고 검증하였다. 그래서 경기도 구리시에 세운 광개토태왕 동상은 나를 모델로 삼아 제작했다.
   
   유라시아 대륙에는 알타이 지역을 중심으로 동쪽으로는 캄차카반도에서 서쪽으로 발칸반도까지, 북으로는 시베리아의 북부에서 남으로는 중국 서남부까지 미치는 광대한 지역에서 알타이어가 사용되었다. 종족에 따라서 투르크어, 몽골어, 퉁구스어로 구분하는데 우리의 예맥어는 골고루 섞인 것이라고 보면 된다. 놀랍게도 중국의 한족은 알타이어와 전혀 관련이 없다.

 

정체성이 담긴 알타이어의 핵심 단어들  

   알타이어에서 우리와 연관된 몇 가지 핵심단어들을 살펴보면 매우 흥미롭고, 우리의 잃어버린 정체성을 찾는 데 도움이 된다. 우선 ‘한’이라는 단어이다. 우리 국호는 대한민국, 즉 ‘한()’의 나라라는 뜻이다. (khan·kan·han)을 한자로 바꾸면 桓·韓·汗·干·丸·漢 등으로 변한다. 그래서 돌궐제국의 계민가한, 몽골제국의 칭기즈칸처럼 임금을 뜻하는 말로 사용됐다. 한글의 ‘한’은 크다()라는 뜻이고, 한강의 ‘한’은 길다()란 뜻이다. 또 수도라는 의미로 사용된 예는 고구려의 환도, 백제의 한성, 발해의 홀한성(상경성) 등이 있다. 국명으로 사용된 경우도 많았다. 우리 ‘한국’을 비롯하여 킵차크 한국(러시아를 300년 지배), 시비르 한국, 부하라 한국, 히바 한국, 크림 한국, 카잔 한국, 아스트라 한국 등 무려 39개가 있었다.
   
   또 하나가 ‘밝’이다. 우리는 흔히 ‘백의민족’이라고 자랑스럽게 부르면서 흰 빛을 숭상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때 백은 흰색의 ‘white’가 아니고, 빛을 뜻하는 ‘bright, 즉 광명이다. 그러니까 백두산을 가리키는 ‘불함산’ ‘백두산’ ‘태백산’ 등은 다 빛과 연관이 깊고, 바이칼호의 불칸바위, 카자흐스탄의 발하슈, 바르글, 부르글호 등도 연관이 있다. 그리고 부여의 해모수 해부루, 고구려의 초기 왕들의 해씨는 해를 뜻하는 말이다. 신라 왕인 박혁거세의 ‘朴’도 빛, 즉 광명을 뜻한다.
   
   또 하나, 거의 망각해서 사어가 된 듯한 느낌마저 드는 단어가 ‘감’ ‘금’ ‘개마’ 같은 말이다. 알타이어에서는 ‘신()’이나 ‘무당’ 또는 ‘인간’의 의미를 갖는 중요한 단어들이다. 단군신화에 나오는 ‘熊’은 동물인 곰이지만, 동시에 신(대지의 신)을 뜻한다. 고구려인들은 백두산을 개마대산이라고 불렀고, 그 옆에는 개마고원이 있다. 신산, 신시라는 의미이다. 백제의 수도인 검마을(몽촌), 검나루(웅진), 신라의 수도인 금성은 이 감계의 언어이다. 그 밖에 유라시아 세계에는 아사달, 금미달, 양달, 음달처럼 땅을 뜻하는 ‘달(tar)’계 단어, 또는 검다는 의미의 가라, 하늘이라는 의미의 텡그리(Tengri) 등의 언어가 지금껏 남아 있다.
   
   대륙 유라시아에 사는 알타이어계 주민들은 신앙과 민속도 비슷한 점이 많았다. 샤머니즘(Shamanism)은 퉁구스어인 샤먼에서 나온 용어인 만큼 우리와 관련이 깊고, 또 조상을 공경하는 일이나 하늘을 숭배하는 신앙은 유라시아 어디나 동일했다. 초원에서 유목생활을 하는 흉노인은 자신들의 임금을 ‘텡그리 고도(천자)’라고 불렀는데, 고구려인도 천손, 천제, 일월의 자손이라고 칭했다. 당연히 태양 신앙이 강해서 동명(東明)신화, 주몽(朱夢)신화, 박혁거세(赫居世)신화 등을 비롯해서 해와 연관된 성이나 이름, 지명 등이 많다. 또 더불어 하늘의 전령자로서 새, 특히 까마귀를 숭상했다. 특히 고구려인들은 고분벽화에 삼족오를 집요하게 표현했고, 머리에는 새 깃을 꽂은 모자를 쓰고 다녔다.
   
   알타이들은 나무를 숭배하는 신앙 등이 있어서 바이칼호의 알혼섬 알타이산맥의 오지, 파미르고원이나 천산 기슭 등 어디서나 동네 어귀마다 있었던 당나무의 모습들을 확인할 수가 있다. 우리 민족의 기원과 사상, 문화를 알려주는 가장 중요한 자료는 단군신화이다. 그런데 바이칼호를 비롯해서 알타이 지역에 널리 전승되어온 게세르신화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신의 역할 등 단군신화와 유사한 내용과 동일한 구조를 갖고 있다. 우리에게는 금강산이 무대로 알려진 아름답고 신비로운 ‘나무꾼과 선녀’ 이야기나 누구에게나 익숙한 ‘백조의 이야기’ ‘콩쥐팥쥐 이야기’ 등이 있는데 이 역시 알타이문명권에서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설화이다. 그 밖에도 서낭당(오보에) 신앙이나 나무숭배 신앙 등이 거의 같다.
      


   고구려의 예술이 말해주는 것들

   중앙아시아 지역과 고구려가 직접 교류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증거들도 춤·음악·씨름 등의 예술에서 나타난다. 이를 통해 보면 5세기 무렵에는 소그드인들이 고구려와 교류했거나 거주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지금 만주의 집안에 있는 국내성 주변에는 약 12000여기의 고분이 있다. 그 가운데에서 약 20여기가 벽화를 갖고 있다. 무용총 벽화에는 말 타고 달리면서 활을 당기는 무사도와 함께 춤추는 무희와 악사들이 그려져 있다.
   
   지난 9월에 키르기스스탄의 이식쿨에서 열린 제3회 세계 유목민대회를 참관했었다. 놀라운 일이지만 거기서 비파나 피리 등 고구려의 악기들로 연주를 하고 있었다. 고구려는 30여가지의 악기를 갖고 연주했는데, 많은 종류는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들어온 것이다. 실크로드의 도시들인 투르판, 카슈카르, 부하라, 사마르칸트, 심지어는 이란이나 터키의 바자르에는 낯익은 고구려의 악기들이 팔리고 있는 걸 볼 수 있다.
   
   우리는 전통 춤 하면 조선시대의 정적이고 우아한 몸짓만 떠올린다. 조선은 불과 500년 된 신흥국가이다. 그 이전의 우리 역사는 수천 년이다. 고구려의 춤은 화려한 복장을 하고, 빠르게 돌고 도약하는 역동적인 춤사위다. 중앙아시아의 춤들을 받아들여 개량한 것이었다. 워낙 뛰어나서 수나라와 당나라에서는 매우 높게 평가되었는데, 이태백도 고려 춤을 찬양하는 시를 지었을 정도였다. 그래서인지 승무로 유명한 이애주 교수는 고구려 춤을 복원하려고 열심이었다. 각저총(씨름무덤)에는 샅바를 붙잡고 힘을 겨루는 코가 크고 수염이 텁수룩한 인물들이 그려져 있는데, 당연히 중앙아시아계 인물들이다.
   
   사람들은 우즈베키스탄 하면 빼어나게 아름다운 여인들을 떠올린다. 고구려인을 떠올리지는 않는다. 1965년 사마르칸트시의 외곽인 아프라시압 궁전터가 발견되었다. 알렉산더 대왕이 갔던 도로의 잔해도 발견되었는데, 사람들을 놀라게 만든 것은 7세기의 바르후만 왕이 외교 행사를 치르는 찬란하고 화려하면서도 우아한 벽화들이었다. 그 서쪽 벽 끝에 고구려 사신으로 추정되는 2명의 사내가 서 있었다. 머리에는 새 깃이 높게 달린 조우관을 쓰고, 허리에는 고리 달린 긴 칼을 차고, 바지 아래를 묶었으며, 두 손을 포갠 채로 옷 속에 넣고 의젓하고 당당하게 서 있었다.
   
   이미 소그드 상인들과 교류했지만, 7세기 중반에 당나라와 전쟁을 벌이면서 위기에 처하자 연개소문은 무려 4000㎞나 떨어진 이곳까지 사신단을 파견한 것이다.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 실제로 일어났던 것이다. 그림을 보면서 나는 여러 가지 상상을 해본다. 혹시나 그들 가운데 일부는 조국이 멸망한 소식을 접한 후에 그대로 눌러앉았을 가능성은 없었을까. 사실 그 후 90여년쯤 지나서 고구려 병사들이 고선지를 따라왔고, 그들 중 포로로 잡힌 이들은 잔류했을 것이 분명하다.
   
   이렇게 중앙아시아는 아주 먼 고대부터 우리 한민족과 혈연이나 언어, 그리고 다양한 종류의 문화를 공유하였다. 20세기 와서는 연해주에서 강제로 끌려온 조상들이 고려인이라는 이름으로 이 지역에 굵고도 깊은 뿌리를 내렸던 것이다.
   
   지구의 한가운데 있는 유라시아 세계, 그 한가운데인 중앙아시아와 북방의 초원 일대는 인류문명의 산파 역할을 담당하면서 1만㎞가량 되는 몇 개의 길을 통해서 동쪽과 서쪽의 사람들과 문화, 그리고 물건들을 주고받게 만들었다. 그리고 가장 동쪽에 있는 우리는 혈연은 물론이고 언어, 신앙, 문화 등을 그 지역과 공유하거나 주고받으면서 역사를 발전시켜왔다.
   
   나는 오늘도 ‘유라시아 세계’라는 꿈을 꾸고, 다시 떠날 날만을 고대한다. 그 이전에 내가 직접 답사한 유라시아 세계의 이야기를 펼쳐보려고 한다.

 

2527실크로드를 넘어 유라시아 로드, 그 길에서 문명이 꽃피다

예전에는 ‘역마살’이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말을 타다가 살()을 맞는다는 뜻이다. 발해가 멸망한 지 1000여년 넘게 길을 잃어버린 채 ‘골목’ 안에서 살아온 우리가 스스로에게 씌운 굴레였다. 이젠 세상이 달라졌다. 많은 사람들이 반토막 난 반도 땅을 떠나 대륙과 해양이 만나고 우리의 피와 언어, 신앙, 문화, 습관 등이 진하고 굵게 이어진 유라시아로 떠난다.
   
   그럼 유라시아는 어떤 곳일까. ‘유라시아(Eurasia)’라는 단어는 유럽과 아시아를 포함한 일종의 합성명사인데, 왠지 유럽 중심 사관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이 세계는 자연환경, 종족, 언어, 그리고 흥미진진한 역사상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대략 6개의 권역으로 나눌 수가 있다. 그 가운데에서 중앙아시아는 동서남북을 연결해주는 십자로(IC) 또는 허브(Hub) 역할을 했기 때문에 항상 중요했다.
   
   이제 60줄에 들어선 우리 세대들은 1980년대라는 답답하고 암울한 상황 속에서 송창식의 ‘고래사냥’과 양희은의 ‘아침이슬’을 불러젖히며 쌓여가는 응어리들을 삭여갔다. 그 시대 나에게는 일본인 ‘기타로’가 만든 ‘실크로드’의 유장한 선율과 다큐멘터리 속에 나타난 낙타 등에 올라탄 대상들과 적막하고 광활한 사막이 숨통을 틔워줬다. 그 장면과 선율은 꿈틀거릴 수 있는 에너지를 충전시켜주었다. 그렇게 해서 시작한 해외 답사는 일본열도, 만주를 거쳐 유라시아 전체로 확장되었다.
   
   그러는 과정에서 우리 민족의 원형을 좇기 시작했다. 우리 문화가 만들어지는 데는 몽골 초원, 바이칼호, 알타이산록, 파미르고원, 심지어는 중앙아시아를 넘어 흑해와 지중해의 물결이 넘실거리는 유라시아 전 지역이 연결되었다는 인식도 강해졌다. 그리고 ‘실크로드’뿐만 아니라 크고 작은 많은 길들이 있었다는 사실도 알아갔다. 그래서 ‘유라시아 로드(Eurasia road)’라는 더 크고 넓은 명칭을 사용하면서 내 나름의 논리를 만들어가고 있는 중이다.      


   실크로드의 길   

   그러면 유라시아 교통로들은 언제부터 개통되었을까. 이 길들은 어떻게, 누구에 의해서 이용됐을까. 그 길들은 가운데 있는 중앙아시아와 어떤 방식으로 이어졌을까.
   
   무려 5 만년 전이다. 인류의 직계조상인 ‘호모 사피엔스사피엔스’가 유라시아 세계를 횡단한 것은. 이들은 심지어 뗏목을 타고 먼바다를 항해하여 호주 대륙에 도착하였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탐험에 뛰어드는 영장류이다. 기원전 15세기 정도가 되면 청동기로 무장한 채 말 타는 집단들이 교류하거나 전투를 벌이면서 동서를 교차 횡단하였다. 서기 전 3세기를 전후해서는 ‘실크’, 즉 비단 무역망에 있는 오아시스들을 중심으로 도시국가들이 발생하였다. 이 무역 시스템과 길을 ‘실크로드’라고 불렀는데, 독일의 페르디난트 폰 리히트호펜이 1877년에 처음 사용한 용어이다. 하지만 이 말을 세계적으로 유행시킨 데는 야심찬 일본인들의 역할이 컸다. 지금은 중국이 ‘일대일로(One belt and One road)’라는 이름으로 신()실크로드 정책을 추진하고 러시아와 미국도 이 사업에 뛰어들었다. 이젠 우리도 눈으로, 마음으로 유라시아 세계를 끌어안고 우리 논리로 해석하면서 활용해야 하지 않을까.
   
   나는 지구를 인체와 마찬가지로 유기체 또는 생명체로 본다. 그렇다면 유라시아를 잇는 공간 역시 대동맥, 동맥, 정맥, 실핏줄처럼 종횡으로 이어지고 연결된 일종의 네트워크 시스템이다. 중앙아시아와 연결된 길만 해도 동서로 5개 이상이 있었고, 남북으로도 몇 개가 있었다.      


   길의 진짜 개척자들   

   첫째가 ‘사막의 길(Oasis-road)’이다. 전형적인 실크로드(Silk road)로서, 낙타를 모는 대상들이 비단 같은 비싼 물건 등을 싣고 중국의 시안을 출발해서 터키의 이스탄불 또는 유럽의 발칸반도까지 가는 전장 7000㎞의 교통로이다. 그 중간에 신장의 타클라마칸사막과 전장 2000여㎞가 넘는 톈산(Tengri-dar), 중앙아시아의 길고 넓은 페르가나계곡 등이 자리 잡고 있다. 오아시스 도시인 사마르칸트, 부하라와 이란의 이스파한, 테헤란 등의 유서 깊은 도시들도 있다. 그런데 어쩌면 작은 일일 수도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게 있다. 손오공이 까불대는 ‘서유기’라는 소설 때문인지, 모화(慕華)사상 때문인지, 실크로드는 중국인이 개척하고 중국 상인들이 활약한 길로 안다. 중국 정부도 마치 자기 땅처럼 일대일로 전략을 망설임 없이 밀어붙이고 있다. 다니다 보면 곳곳에서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모습들이 연출된다. 하지만 중국인과는 크게 관련이 없고, 그들의 역할도 미미하다. 더더욱 중앙아시아에서 서쪽까지의 길은 전혀 무관하다.
   
   그럼 누가 이 막막한 사막에 길을 낼 생각을 했고, 또 만들어 이용했을까.
   
   놀랍게도 처음으로 실크로드를 개척하고 유라시아 교통 시스템 속에 편재시킨 사람들은 페르시아계이다. 기원전 6세기 중반 무렵 페르시아제국은 이집트를 평정하였고, 이어 동쪽으로 진출하여 아프가니스탄 북부와 중앙아시아까지 영향을 끼쳤다. 그 덕분에 오늘날 신장 지역에서는 ‘월지(月支)’라고 알려진 나라가 비단 무역을 주도하였다. 그래서 페르시아 문화와 차라투스트라를 믿는 조로아스터교가 중국을 거쳐 우리에게까지 잔영을 드리운 것이다.
   
   그리고 서기 4세기 전반에는 마케도니아의 젊은 알렉산더 대왕이 그 유명한 다리우스 1세를 쫓아 서아시아를 건넜다. 알렉산더는 서부 실크로드를 무섭게 달려와 사마르칸트를 무자비하게 점령하였다. 이후 일부 그리스인이 파미르고원을 넘어 타지키스탄,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지역으로 들어가 살게 되었다.
   
   나는 학생들에게 가끔 질문을 던진다.
   
   “얘들아. 세계에서 가장 예쁜 여인들이 사는 곳이 어디라고 생각하니?
   
   우즈베키스탄에 가면 ‘김태희가 밭에서 일하고 있다’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어서다. 멋쩍어하는 학생들에게 나는 피식 웃으며 말한다. “타지키스탄.” 그 나라 여성들은 투르크계의 피에 페르시아계, 그리스계, 그리고 약간의 아랍계와 인도 피도 섞였기 때문이라고 장황하게 설명하면서.
   
   2013년에 국산 자동차를 타고 경주에서 출발해 중국을 거쳐 중앙아시아의 옛 도시국가들을 통과해서 이란, 터키까지 60일 동안 횡단을 했다. 물론 중간중간에 답사와 함께 연설, 학술회의 등 여러 나라를 위한 행사들을 벌였다. 그때 동서로 이어진 8000㎞의 길 위에서 다양한 여인들의 얼굴을 보았는데, 그 후 언젠가 사마르칸트의 길거리를 지나는 한 여인을 보면서 ‘실크로드의 모든 얼굴’이 다 어른거리는 사실(?)에 소스라치게 놀랐었다.
   
   기원전 3세기에 들어서면서 흉노제국은 기마군단을 이끌고 월지를 축출한 후 실크로드 무역망을 장악하였다. 이를 활용하여 강대국이 된 그들의 일부는 군대를 이끌고 동유럽 주변까지 진출하였다. 반면에 중국은 한나라 때 일시적으로 신장 지역에 진출하였을 뿐이다. 심지어는 당나라 때조차도 중앙아시아까지 들어갈 수가 없었다. 실제로 실크무역을 주도하면서, 중국 지역에 춤, 음악, 불교를 전달해준 역할을 한 사람들은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트, 타슈켄트, 부하라 등에 거주한 소그드 상인들이었다. 이들의 일부가 고구려에 들어왔고, 그들의 춤과 음악, 기예 등이 전달되었기 때문에 고구려 문화가 우수할 수 있었다. 고구려 문화가 국제성을 띤 것이다.   
   

   철의 길, 황금의 길   

   둘째 ‘초원의 길(Steppe-road)’이다. ‘말의 길(Horse road)’이며, ‘철의 길(Iron-road)’ ‘황금의 길(Gold road)’이기도 하다. 동쪽의 만주 일대에서 몽골 초원과 알타이 산록, 카스피해를 거쳐 흑해의 동북 연안을 통과한 후 동유럽의 판노니아 평원까지 이어지는 길이다. 인류의 역사는 적어도 15세기까지는 청동이나 철제품으로 무장한 채로 말을 타고 달리면서, 짧은 활을 쏘는 사람들이 주역이었다.
   
   알타이 산록에서 첫 출발한 기마민들은 헤로도토스가 쓴 ‘역사’에 스키타이인으로 기록된 이래 때때로 유럽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말 몸뚱이에 사나운 사람의 얼굴을 한 괴물인 켄타우로스가 바로 이들의 이미지였다. 뒤이어 북흉노가 흑해 지역을 넘었다. 만약 파죽지세로 유럽을 공략하던 흉노의 아틸라가 453년에 급사하지 않았더라면 백인종의 유럽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후에도 그들은 계속 서쪽으로 진출하여 티무르제국, 몽골제국, 오스만투르크제국을 건설하면서 동시에 유럽을 점령했다. 동쪽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기마 유목민들은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쌓기 이전부터 중국 지역을 넘나들었고, 한나라는 60년 동안이나 흉노제국에 온갖 수모를 당하면서 조공을 바쳤다.
   
   이 거대한 초원의 길(Steppe-road)의 동쪽 끝에 우리가 있다. 1995년에 부여의 터전인 북만주의 초원지대로 올라간 적이 있다. 당시 말 세 마리를 사서 탐험대원들과 함께 고구려의 수도였던 집안(集安)까지 타고 내려온 적이 있었다. 이때 기마민들의 통로와 사회 시스템도 확인하였지만, 무엇보다도 역마살이 유독 많이 낀 내 혈관 속의 역동적이고 야성적인 피의 정체를 확실하게 알았다. 그 힘으로 지금껏 유라시아를 다니는 중이다.
   
   세 번째가 ‘바다의 길(Marine-road)’이다. 중국의 광둥성부터 동남아시아, 인도양을 거쳐 페르시아만으로 이어진 길고도 긴 바닷길이다. 그 일부에는 고구려와 백제 승려들의 발자취가 남겨졌다. 8세기에 막 들어서면서 20대 중반의 신라 승려인 혜초가 배를 타고 간 항로도 그 일부이다. 15세기 초부터 그 유명한 명나라의 정화(鄭和)가 지휘하는 원정대들이 무려 7차례나 통과한 길이고, 그 후 80여년쯤 지나 포르투갈의 바스코 다가마가 희망봉을 돌아 이 항로의 서쪽을 항해했다. 결국은 이 사건이 유라시아 세계의 역사, 인류의 역사를 바꾸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른바 해양실크로드는 중국의 차()가 서쪽으로 팔려가는 ‘차의 길(Tea-road), 반대로 영국이 판 ‘아편의 길’이기도 하다. 또한 ‘도자기의 길(Ceramic-road)’이기도 하다. 조선에서 끌려간 도공들의 솜씨가 밴 일본 도자기들이 유럽으로 팔려갔고, 결과적으로 고흐나 모네 같은 인상파 화가들이 독특한 작품들을 창작하는 영감을 주기도 했다.
   
   이 길은 동쪽으로는 신라와 일본까지, 서쪽으로는 유럽의 궁정까지 팔려간 ‘향료의 길(Spice-road)’이기도 했다. 배를 이용한 물류 수송은 말이나 낙타에 비할 수가 없을 정도로 물량이 많았고, 경제성이 높았다. 지금도 대부분의 자원과 상품은 배를 이용한 물류망에 의존한다. 지금 이 길 위에서 중국의 일대일로 전략과 남중국해 영토 분쟁, 트럼프 행정부의 인도·태평양 전략이 충돌을 하고 있다. 우리는 겨우 신남방정책을 추진하려는 중이다.      


   이끼의 길, 얼음의 길   

   네 번째가 ‘숲의 길(Taiga-road)’이다. 이것은 ‘모피의 길’이며 ‘강의 길’과도 교차된다. 동만주와 연해주 일대에서 동시베리아의 침엽수림지대를 통과한 후에 자작나무와 백양나무들이 울창한 바이칼 일대의 삼림지대를 걸쳐 우랄산맥에 도달하는 길이다. 2015년 시베리아횡단철도(TSR)를 타고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해서 이르쿠츠크, 모스크바를 경유한 후 베를린까지 24일 동안 이 길을 답사했었다. 그 ‘철도의 길’이 과거 ‘타이거 로드’였기 때문이었다. 이 길의 주역들은 동아시아에서는 퉁구스계(에벤키로 알려졌다), 그 서쪽에서는 몽골계였다. 우랄산맥을 넘어 유럽의 서부지대까지 활동한 사람들은 우리와는 연관이 적다.
   
    3개의 큰 길들 말고도 동서를 횡단하는 길이 더 있다. ‘이끼의 길(Tundra-road)’이 북위 50도 이북에서 자라는 부드러운 이끼 지대를 이어주면서 극동 시베리아에서 스칸디나비아 일대까지 이어진다. 순록을 따라 다니는 고아시아계와 퉁구스계의 주민들이 주로 이용했다. 또 ‘얼음의 길(Ice road)’이 있다. 놀라운 일이지만 북위 70도 전후의 극지역인 스칸디나비아 일대, 캄차카반도 등에서 신석기시대의 유적들이 발견된다.
   
   유라시아에는 동서뿐만 아니라 남북의 길도 있었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놓치고 있다. 신석기시대부터 여러 곳에 중요한 남북의 길들이 있었는데 유라시아 전체를 연결하는 길은 중앙아시아 일대를 중심으로 한 몇 개의 큰 길들이다.
   
   첫째는 바이칼호와 예니세이강 상류 일대에서 알타이 산록과 톈산산맥을 경유한 후 파미르고원에서 다시 동서로 갈라지는 초원 산악로이다. 3000여년 전부터 오랫동안 유목민들이 말을 기르고 타면서 남진한 길이다. 흉노제국도 이 길을 통해서 중앙아시아 지역을 점령했고, 몽골 또한 마찬가지다.
   
   둘째는 아랄해, 카스피해에서 남쪽의 부하라, 판지켄트 일대를 거쳐 파미르고원에서 각각 분리되는 길이다. 최소한 5000년 이전부터 중앙아시아는 인도양 지역과 남부 시베리아, 그리고 서아시아 지역과 무역을 했고, 심지어는 인도양에서 서식하는 조개들도 사고팔았다. 바로 이 길을 통해서다.
   
   셋째, 우랄산맥에서 볼가강을 따라 내려와 캅카스산맥을 지나 흑해의 동안을 타고 내려와 아나톨리아반도를 잇는 길이 있다. 말을 탄 기마군단과 상인들도 활용했지만, 배를 이용하기도 한 길이다. 스키타이인부터 시작해서 흉노인, 투르크계, 몽골계가 꾸준히 활용하면서 지중해로 접근하던 길이다.
   
   그 밖에도 여러 길이 있었다. 동쪽에는 이미 2000년 전에 호탄(Khotan)과 중국의 북부지방을 이어준 ‘옥()의 길(Jade Road)’이 있었고, 서쪽에는 이미 4500여년 전부터 아프카니스탄에서 메소포타미아까지 연결된 ‘청금석(Lapis lazuli)의 길’도 있었다. 파미르의 동쪽 길은 알렉산더가 타지키스탄으로 들어갈 때, 월지가 인도로 들어갈 때, 현장과 혜초가 불경을 싸들고 귀국할 때, 조금 훗날 고구려 유민 출신인 고선지가 힌두쿠시를 넘을 때도 이용했다. 18세기 이후에는 러시아의 남진정책과 이에 맞서는 영국의 북진정책이 충돌하면서 파미르고원길을 활용했다.
   
   동서남북으로 촘촘하게 이어진 교통망 덕분에 유라시아는 서로 도와주는 상호 호혜 체계의 공동체를 만들면서 풍요롭게 살 수 있었다. 생태계의 다양성이 중요하다면 인간도 또한 생물학적으로, 문화적으로 다양성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 물론 이 길로 인하여 때로는 전쟁도 많이 벌여 인류를 슬프게 만들었다. 이제 21세기 유라시아 로드는 인류와 한민족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2528우리는 왜 유라시아를 잡아야 하나?

2018 10, 어느덧 우리 모두는 21세기에 본격적으로 두 발을 깊숙하게 들여놓았다. 그런데 역사학자의 관점으로는 호모사피엔스가 탄생한 이래로 지금보다 더 진폭이 큰 문명의 전환기는 없었다. 인간이 인간을 만드는 시대에 접근한 듯하고, 지구와 인류는 불안한 마음으로 혼란스럽고 갈등이 폭발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중이다.
   

   당연히 세계질서도 급격한 속도로 재편되는 중이다. 그 중심에 유라시아 세계와 동아시아, 그리고 우리가 있다. 16세기는 세계사의 한 기점이었다. 이전에는 기마군단을 보유한 대륙세력이 세계사를 주도했고, 이후에는 해양세력이 더 확장된 세계의 향방을 요리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변했다. 대륙과 해양을 동시에 활용하거나 장악해야 한다. 즉 해륙적 세계관으로 무장하고, 해륙교통망을 장악하면서, 해륙적인 국가시스템을 운영해야만 강대국이 될 수 있다. 이 평범한 진리를 제일 먼저 간파하고 실현시킨 나라는 해륙국가이면서 ‘양양(兩洋·태평양, 대서양)국가’인 미국이다. 해양제국인 영국은 스스로 물러섰고, 대륙제국인 러시아는 철저하게 실패했다. 그리고 지금은 신흥제국인 중국이 그 목표에 도전 중인데 성과는 ‘글쎄’다.

   

   일반적으로 간과하기 쉬운데, 유라시아 세계는 꼭 대륙 유라시아와 해양 유라시아로 구분하고 유기적으로 파악해야만 한다. 중앙아시아와 시베리아 일대는 길게는 400년 만에, 짧게는 100년 만에 가치가 새로 부각된 곳이다. 강대국들 간의 각축전이 벌어지는 핵심 지역으로 부상 중이다. 이 때문에 ‘중앙 유라시아’라는 단어가 사용돼왔다.

   

   켄트 콜더(Kent Calder)는 ‘신대륙주의(新大陸主義·The New Continentalism)’라는 그의 책에서 19세기 후반과는 또 다른 양상을 우려하고 있는데 바로 여기서 등장하는 것이 ‘해양 유라시아’ 개념이다. 해양 유라시아는 동아지중해 일대와 동남아시아 지중해(동남아시아 반도 및 섬들), 벵골만을 비롯한 인도양, 페르시아만과 홍해, 에게해의 일부 등을 포함한다. 콜더의 우려대로 현재 대륙보다 더 심각하고 강렬한 갈등이 발생하고 있는 중이다.
      


  
 신해양주의의 등장   

   넓고 넓은 바다 곳곳에서 영토갈등이 심각하다. 한·일 간에는 독도 문제가, 한·중 간에는 이어도(離於島) 문제가 있다. 또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에선 일·중 간의 영토분쟁이 심각하다. 일·러 간에는 내밀하게 남쿠릴열도 분쟁이 지속되고, 시사군도(Paracels Islands)·난사군도(Spratly lslands) 등이 있는 남중국해 분쟁은 대충돌의 뇌관이 될 수도 있다. 동아시아에서만 11개 장소에서 영토갈등이 벌어지는데, 그 가운데 8개가 해양 영토갈등이다. ‘이어도’ 문제는 그중 하나이다. 이른바 ‘신해양주의(新海洋主義·New Oceanism)’가 등장하는 중이다.
   

   미국도 이 흐름에 가세하고 있다. 미국은 2011 9월 힐러리 클린턴 당시 국무장관이 ‘신실크로드 전략(New Silkroad Initiative)’을 발표하였다. 이어 오바마 대통령이 ‘pivot to Asia, 즉 ‘아시아 회귀전략’을 선언하였다. 잠재적 적국인 러시아를 압박하고, 아시아에서 중국이 해양패권을 장악하려는 기도를 저지하면서 외곽을 포위하는 전략이다. 트럼프 정부는 한술 더 떠서 ‘자유롭게 열린 인도-태평양 전략(Indo-Pacific stratergy)’을 구사하는 중이다. 군사력까지 직접 동원하면서 중국을 압박하고 포위하는 형국이다.

   

   반면 중국은 2012 11월 후진타오가 선언한 ‘해양강국론’에 이어, 2013 9월과 10월에 각각 ‘신육상실크로드(一帶·one belt)’와 ‘21세기 해상실크로드(一路·one road)’ 구축을 제의하였다. 2015 3 28일에는 ‘실크로드 경제벨트 및 21세기 해상실크로드 공동건설계획’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러한 ‘일대일로 정책’은 마치 쿠빌라이칸 때 추진한 일종의 유라시아 해륙정책의 일환처럼 보인다.

   

   중국은 ‘중국몽’이라는 강국 건설을 목표로 정치·문화·군사력을 입체적으로 강화하면서 오만하게 질주하는 중이다. 하지만 현실은 힘에 벅찬 모습이다. 별로 승산이 없어 보이는 미·중 간 무역전쟁에서부터 휘청거리는 중이다. 어쨌든 이 충돌의 결과는 어떤 식으로든 우리에게 직격탄을 날릴 것이다. 중국은 내부의 말 못할 사정들과 미국의 압박과 포위를 돌파하려는 명분도 있지만, 아무래도 과거 중화제국주의의 습성을 못 버린 것 같다. 언젠가 중국의 남쪽에서 학술회의를 하는데, 한 중국 학자가 “오키나와는 과거 유구국(琉球國)이므로 중국 영토”라고 발표했다. 난 순간 뒤통수만 보이는 일본 학자의 표정이 궁금해졌다. 만약 내 앞에서 이어도가 중국 영토라고 주장했으면 어떻게 반응했을까를 떠올려봤다. 왜 중국은 지식인들까지 이렇게 변해가는지 안타까울 뿐이다.

   

   이렇게 복잡한 상황 속에서 유라시아 세계는 왜 중요해지고 있을까? 유라시아가 갖는 어떠한 가치가 신세계 질서에서 중요해지고 있는 걸까?

   

   우선 지경학적인 가치가 크다. 우선 자원의 문제인데, 중앙아시아에는 전 세계 천연가스의 5%, 전 세계 석유와 석탄 매장량의 3.5%가 있다. 특히 카스피해는 걸프만과 시베리아에 이은 제3대 석유 보고이다. 시베리아의 남부는 비옥한 토양지대이지만, 북부는 사우디아라비아를 능가하는 석유를 생산한다. 우리에게도 절대적으로 필요한 해외 석유자원의 보급지가 될 수 있다.

   

   또 하나는 교통로 문제이다. 중앙아시아와 시베리아는 동아시아와 서아시아 및 유럽을, 또 북아시아와 남아시아를 거쳐 인도양을 연결하는 교통의 십자로이다. 그래서 러시아는 19세기 중반부터 이 지역을 합병하면서 남진정책의 교두보로 삼았다. 지금은 중국이 서진하는 데 활용하는 중간거점이고 통과지이다. 우리에게는 시베리아나 몽골, 중앙아시아 모두 막힌 대륙로를 뚫어줄 새로운 물류망이기도 하다.
      


   해양 유라시아의 중요성   

   해양 유라시아도 중요성이 뒤지지 않는다. 어업자원이라는 전통적 가치도 있지만, 실제로 중요한 것은 역시 지하자원이다. 전통적으로 바닷길은 석유를 비롯한 물류의 통로로서 중시됐다. 그런데 1960년대 말 유엔 극동경제위원회에서 ‘동중국해상 천연자원 매장량에 대한 보고서’를 발표하면서 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의 파고가 일렁거렸다. 센카쿠열도의 해저에 1000억배럴에 달하는 석유가 매장되어 있을 가능성이 제기된 것이다. 이 해역과 연관된 곳이 이어도 해역이다. 남중국해도 상황은 마찬가지이다. 해저에는 풍부한 광물자원이 매장되었는데, 특히 천연가스 매장량이 350t으로 추정돼 ‘제2 페르시아만’으로 불린다. 실제 베트남은 매년 700t 이상의 생산량을 가진 석유 수출국이고 이 해역을 끼고 있는 말레이시아, 브루나이도 석유수출국이다.
   

   언젠가 동아시아의 해양 영토갈등과 역사 분쟁에 대해서 강의할 때였다. 난 학생들에게 이러한 이야기를 했다. “우리는 베트남을 후진국으로 여기고, 실제로 베트남 처녀들이 한국의 농촌으로 시집을 많이 온다. 만약 한국 경제가 추락하고, 너희들은 직장 구하기가 더 힘들어지는데, 베트남이 성공한다면 상황이 역전될 수도 있겠네?” 그만큼 석유 수출국인 베트남이 가능성의 나라라는 의미였다.

   

   해양 유라시아는 교통로의 가치만 따지면 오히려 대륙의 길보다 더 크다. 2017년도 중국의 수출입 무역총액은 우리 돈으로 4560조원이다. 그런데 중국은 해양운송업이 대외무역의 90% 이상을 담당해왔다. 세계 3대 석유 수입국이지만 원유와 원재료의 90% 이상을 해상운송을 통해서 수입한다. 그런데 중국은 태평양으로 진출하려면 대만해협을 비롯하여, 난사군도·시사군도를 지나 말라카해협, 바시해협 등을 통과해야만 한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통과로에 있는 대부분의 나라들이 정치제도와 이데올로기가 중국과는 다르다. 또 기본적으로 중국을 싫어하고 두려워한다. 여기에 미국의 힘도 작동한다. 이러한 한계를 돌파할 목적으로 중국은 해군력을 무서운 속도로 신장시키는 중이다. 또 ‘만만한’ 한국에 대해서 이어도의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는 중이다.

   

   일본도 수입 석유의 70~80%가 말라카해협을 통해 본토로 수송되고, 나머지 상품들도 거의 대부분 이 항로를 활용할 수밖에 없다. 심지어 미군의 서태평양 해군함대가 소모하는 연료의 85%가 이 해역을 통해서 보급받는다는 통계도 있다. 따라서 일본은 해양대국을 실현할 수밖에 없다. 1994년 이후에 발효된 해양영토의 기준을 적용할 경우 일본은 해양면적만 약 386만㎢로서 육지면적(37.7만㎢) 10배 이상이나 되는 큰 나라이다. 우리의 의존도는 더욱 심각하다. 수출입 물동량의 99.3% 이상이 이 해로를 통과하여 세계로 나간다.
      


   세계사 대전환기의 생존전략   

   요즘 발생하는 사건들과 국제정세를 살펴보면 정말 뭔가 큰 사건이 터질 것만 같은 세계사의 대전환기임이 실감난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한민족은 어떤 위상에 놓여 있으며, 어떤 생존전략을 짜야 할까? 간단하고 솔직하게 말하면 ‘우리 청소년들의 미래가 어떻게 될까’가 가장 큰 걱정거리가 아닐 수 없다.
   

   어차피 우리는 생존이라는 차원에서 유라시아 세계에 적극적으로 진출하고 협력관계를 만들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취할 태도는 명확하다. 이들과 손을 맞잡고, 서로 밀고 당겨가면서 상생관계를 만들어야만 한다. 만약 중국이 우리의 자주(自主)를 위협할 시기가 오면 대()중국 포위전선을 구축해야 하는데 그 배후세력으로 활용할 수 있는 지역이 바로 유라시아다. 과거 고구려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더구나 유라시아 사람들은 중국을 좋아하지 않을 뿐 아니라, 좋아할 수가 없다. 그러니까 중국보다는 우리와 손을 잡는 것이 경제적으로 유리하다는 사실도 잘 알고 느낀다. 다만 문제는 우리가 그들의 정치적·경제적 가치를 실감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왜 그런지 이해가 안 되지만 관계를 맺는 데도 덜 적극적이다.

   

   유라시아 세계를 떠올리면 우리는 정말이지 기막힌 장점들을 갖고 있다. 대륙 유라시아 세계와는 고대부터 언어, 혈연, 문화적으로 친연성이 여간 깊은 게 아니다. 일종의 ‘문화공동체’ 의식을 가질 논리적 근거와 증거들도 꽤 있다. 뿐만 아니라 ‘초원의 길’ ‘삼림의 길’ ‘사막의 길’을 통해서 고조선·고구려·신라·발해·고려는 직간접으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역사를 운영해왔다. 지금 우리는 그들과의 친연성을 모르거나 알아도 어렴풋이 알 뿐이지만 유라시아에는 이러한 사실들을 아는 사람들이 꽤 있다. 그 가운데 일부는 우리와 형제의식을 갖고 있으며, 틈만 나면 그걸 표현하려고 애를 쓴다.

   

   문화적 유전자가 유사해서인지, 아니면 ‘성공한 나라’ 한국을 동경해서인지 한류는 거의 폭풍 수준으로 유라시아 세계를 휩쓸고 있다. 2013년에 자동차로 실크로드를 횡단할 때 이란의 사막 한가운데에서 겪은 일이다. 현대차 ‘투싼’을 멈춘 후 이것저것 손보고 있는데, 수염을 덜 깎은 아저씨가 다가오더니 내 어깨를 툭툭 친다. 그러더니 씨익 웃는 얼굴로 엄지를 치켜세우며 “주몽” “주몽”이라고 말했다. TV에서 한국 드라마를 봤다는 의미였다.

   

   또 언젠가 카자흐스탄에서 ‘탈라스’ 지역을 지나 키르기스스탄으로 넘어갈 때, 검문소에서 차를 멈추고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때 동네 청년들 몇이 다가오더니 웃으면서 알아들을 수 없는 발음으로 말을 건넸다. 몇 번 반복해서 듣는 순간,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들이 한 말은 “하염없이”라는 주몽 드라마의 대사였다. 그 밖에도 유라시아 곳곳에서 한류의 위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도시는 물론 사막이건 초원이건 고원이건 간에 드라마 ‘대장금’의 포스터가 붙어 있거나, 바람에 펄럭거렸다


    유라시아를 공부해야 한다   

   중국의 일대일로 전략과 러시아의 신동방정책은 각각 신실크로드라는 명칭을 달고 있다. 거기서 보듯 역사의 재해석을 통해서 과거의 영향력 또는 영광을 재현하려 한다. 치밀한 전략을 수립하고 성공의 확률을 최대한 높이려는 전술이다. 이게 자긍심 있는 민족이고, 역사의 가치를 인정하고 미래를 지향하는 국가의 모습이다. 우리가 그토록 싫어하는 일본도 마찬가지이다. 일본은 과거에 중국을 ‘지나’라고 불렀다. 나도 멋모르고 그렇게 불렀다. ‘지나(支那)’는 중국을 가리키는 ‘China’를 한자식으로 변환한 것이다. 거기에는 가지, 즉 ‘Brench’라는 속뜻이 있었던 것을 나중에야 깨달았다. 동아시아의 중국을 꿈꾸던 제국 일본이 반식민지 상태였던 나라를 ‘중국(中國)’이라고 부르기는 싫었을 것이다.

우리의 전 정부는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를 주장했고 현 정부는 ‘신북방정책’ ‘신남방정책’을 추진하는 중이다. 그런데 미국이나 중국, 하다못해 일본만큼도 유라시아 세계의 역사와 시스템, 그리고 문화를 잘 알지도 못하고, 적극적으로 활용하지도 못하는 것 같다.
   
   만약에 정부의 누군가가, 아니 사업가나 학자들이 유라시아 세계에 갔을 때 고구려 고분벽화에 그려진 중앙아시아 인물을 보여주고, 경주 괘릉에 서 있는 페르시아 석인상과 아라비아인의 애틋한 사연을 담은 ‘처용가’를 이야기해주면 어떻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