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스토리12/ 세계의 분쟁史7/ 박현도의 이슬람 들여다 보기4/ 2019.02월 호(월간조선) 미국의 시리아 철수로 궁지 몰린 쿠르드족 - 06월 호 미국은 이란을 칠 것인가? - 이란·미국은 왜 철천지..
글로벌 스토리12/ 세계의 분쟁史6/ 박현도의 이슬람 들여다 보기4/ 2019.02월 호(월간조선)
2019. 02월 호
◆미국의 시리아 철수로 궁지 몰린 쿠르드족
⊙ 쿠르드족, 터키(약 1500만명) 시리아(약 200만명) 이라크(약 500만명) 이란(약 800만명) 등 4개국에 흩어져 살아
⊙ 터키, 시리아내전에서 활약한 쿠르드 민병대 YPG를 테러집단으로 간주… ISIS 관련 폭력조직과 손잡고 있다는 관측도 있어
⊙ 非무슬림 쿠르드족인 야지디인, 시리아정교 기독교인들도 미군 철수와 ISIS 복귀 후 학살 일어날까 우려
▲이라크의 쿠르드 자치정부(KRG)는 2017년 9월 분리독립 투표를 실시, 압도적 지지를 이끌어냈으나, 이라크 중앙정부와 주변국들의 반대로 무산됐다. 사진=AFP/연합뉴스
지난해 12월 19일 미국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의 트위터에 “아이시스(ISIS·우리 언론은 IS로 표기하고 있음)에 역사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니 이제 위대한 젊은이들을 집으로 돌아오게 할 때(After historic victories against ISIS, it’s time to bring our great young people home!)”라고 쓰며 시리아 주둔 미군철수를 공식적으로 선언하였다. ISIS가 시리아에 미군을 주둔시킨 유일한 이유였는데, 시리아에서 이들을 무찔렀으니 더 이상 있을 필요가 없다(We have defeated ISIS in Syria, my only reason for being there during the Trump Presidency)는 것이 철군의 변(辯)이다.
실익 없는 전쟁에 국력을 낭비하지 않겠다는 것이 대선(大選) 후보 때부터 누누이 공언했던 트럼프 대통령의 지론(持論)이었다. 그러나 시리아 철군(撤軍)은 너무나도 갑작스런 결정인 데다가 미군을 도와 ISIS 격퇴에 혁혁한 공을 세운 쿠르드군을 저버리고 가는 것이라 파장이 크다. 끝까지 적을 물고 늘어지기에 ‘미친개’, 결혼을 하지 않았기에 ‘수도승 전사(戰士)’라는 별명을 지닌 군인 중의 군인 출신 매티스 국방장관은 대통령의 결정에 반기(反旗)를 들었고, 결국 사표를 냈다.
미국 정계와 여론은 “성급하고도 무모한 결정”이라는 비판을 트럼프 대통령에게 쏟아부었다. 철군이 미국 동맹국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고 적에 이로우며, 궁극적으로 미국의 국제신뢰도에 치명상을 입혀 향후 미국이 국제사회에서 지도력을 발휘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우려하였다. “우리 국방부는 가장 어려운 시기에 최고의 활약을 보여줍니다. 국가를 향한 믿음을 강건히 하고 동맹과 함께 굳건히 적에 맞섭시다”라는 매티스 장관의 고별인사는 시리아 철군이 미군과 함께 싸우는 우군(友軍)과 동맹에게 영향을 주어서는 안 된다며 트럼프 대통령의 시리아 철군을 우회적으로 비판한 듯하다. 부정적인 여론에 주춤한 트럼프 대통령은 일단 한 발 물러서서 점진적 철군으로 방향을 틀었다. 지금 당장 미군을 빼면 위험하다는 의견을 받아들인 것이다. 즉각 철군에서 최소 한 달은 넘어 4개월 정도는 걸려야 미군이 시리아에서 귀환할 것 같다.
사실 미군 주둔이나 철군은 주판알을 튕겨 손익(損益)을 따져 손쉽게 결정해서 감행할 성격의 문제만은 아니다. 미국이 그저 그런 강국이라면 손익을 따져 철군하는 것을 주변에서 그다지 심각하게 보지 않을 수 있겠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때부터 자유세계를 이끌어 온 국가이기에 미국과 함께해 온 나라들이 철군에 당황하고 놀랄 수밖에 없다. ‘미국이 아니면 이제 누가 자유세계의 맏형으로 자유와 민주와 인권을 지킬 수 있겠느냐’는 두려움이 터져 나오는 형국이다. 시리아 전장(戰場)에서 목숨을 걸고 미군과 함께 싸운 쿠르드인들의 좌절감은 그 누구보다 더 깊다.
국제전으로 둔갑한 시리아내전
▲3000만명에 달하는 쿠르드족은 터키·이라크·이란·시리아 등에 흩어져 살고 있다.
2011년 3월 이른바 ‘아랍의 봄’ 훈풍이 튀니지·이집트·예멘·리비아를 거쳐 불어오면서 시리아에도 민주화 바람이 불었다. 민주화 요구는 시위를 넘어 내전(內戰)으로 번졌다. 표면상으로는 권위주의 독재정권과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의 투쟁인 것 같았다. 하지만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시리아 대통령 바샤르 알 아사드를 혼내 주려는 에르도안의 터키, 아사드가 취하고 있는 친(親)이란 정책에 종지부를 찍어 이란의 영향력을 제거하려는 미국과 친미(親美) 걸프왕정, 아사드를 사수하여 레바논의 헤즈볼라를 계속 지원하려는 이란, 지중해 연안 유일의 해군기지인 시리아의 타르투스를 지키려는 러시아가 뛰어든 국제전이 바로 시리아 내전이다. 단순히 독재정권과 민주화 세력의 싸움이었다면 쉽게 끝날 수 있겠지만, 시리아를 둘러싸고 여러 나라의 이해관계가 얽히고설키어 무려 7년 넘게 살육전이 지속되었다. 설상가상으로 혼란의 틈을 타 알카에다, ISIS 같은 무슬림 극단주의자들이 활개를 치면서 상황은 더욱 복잡해졌다.
오바마 행정부는 내전 초반부터 적극적인 개입을 주저한 반면, 러시아는 2015년부터 본격적으로 내전에 뛰어들었다. 그 때문에 사실상 시리아 내전의 최종 승자는 50만명에 달하는 자국민(自國民)을 죽인 바샤르 알 아사드와 그를 후원한 러시아와 이란이 됐다. 특히 러시아는 무슨 일을 해도 타국(他國) 정부의 내정(內政)에는 간섭하지 않고 국익(國益)에 부합하면 확실히 밀어 준다는 강력한 인상을 남겼다. 미국처럼 인권(人權)이나 민주주의를 가르치려 하지 않으니 권위주의 독재정권에 이보다 더 이상적(理想的)인 동반자이자 후원자가 세상 어디에 또 있겠는가!
트럼프 대통령이 철수시키려는 미군은 현재 시리아 북부 쿠르드 지역에 주둔하고 있다. 이곳은 터키와 국경을 맞댄 곳이다. 쿠르드는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함께 국가를 이루지 못한 중동(中東)의 대표적인 민족이다. 종교는 순니파 이슬람이 압도적인 다수(多數)다. 주변 아랍과 터키의 순니 무슬림들이 주로 하나피 법학파를 따르는 것과 달리 쿠르드 순니는 샤피이 법학파를 추종한다. 언어는 인도·유럽어족에 속하는 쿠르드어로 이란어와 가깝다. 이들은 국가를 이루지 못한 채 대다수가 무슬림 국가인 터키(약 1500만명), 시리아(약 200만명), 이라크(약 500만명), 이란(약 800만명) 등 4개국에 흩어져 살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쿠르드인 수는 약 3000만명에 달한다.
무산된 독립시도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한 이래 전 세계 무슬림들은 팔레스타인 문제에 분노하고 일치된 아랍 내지 무슬림의 힘으로 팔레스타인 국가 건설을 강조해 왔지만, 같은 무슬림인 쿠르드인들의 자치독립 요구에는 귀를 닫고 눈을 감은 채 모르쇠로 일관하였다.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 1988년 3월 16일 할랍자에서 독가스로 단 5분 만에 최소 3000명에 달하는 쿠르드인의 목숨을 앗아 갔을 때에도 모두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닫았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오스만제국이 무너지면서 서구(西歐) 열강은 1920년 세브르조약에서 쿠르드 독립을 약속하는 듯하였다. 그러나 1922년 오스만제정(帝政)을 폐지한 케말 아타튀르크의 터키정부는 이 조약의 부당함을 지적하고 힘찬 투쟁을 벌였다. 결국 터키는 1923년 7월 세브르조약을 폐기하고 서구열강과 로잔조약을 새로 맺었다. 그 결과 쿠르드인들은 지금처럼 4개국 속민(屬民)으로 각기 편입되었다.
1941년 이란 북부로 진출한 소련은 이곳을 소련령(領)으로 귀속시키고자 쿠르드 민족주의를 은밀히 후원했다. 이에 쿠르드인들은 1946년 1월 22일 이란 북부에 마하바드공화국을 세웠지만, 소련군이 물러나면서 그해 12월 15일 독립의 꿈을 접어야했다. 마하바드공화국은 근대 들어 아주 짧게나마 들어섰던 유일한 쿠르드 국가였다.
2003년 이라크 사담 후세인 정권이 무너지면서 오랫동안 박해를 받았던 이라크 쿠르드인들에게 서광이 비쳤다. 우리 국군 자이툰부대가 주둔했던 아르빌을 수도로 한 쿠르드지역정부가 들어섰다.
2011년 시리아 내전 발발 이래 쿠르드인들은 이라크와 시리아에서 ISIS와 치열하게 싸우면서 수많은 희생자를 냈다. 이들이 악전고투하면서 끝까지 싸운 이유도 바로 독립국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이라크에서 ISIS 세력 소멸을 공식적으로 발표하기 직전인 2017년 9월, 바르자니 대통령이 이끄는 이라크의 쿠르드지역정부는 국제사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독립투표를 강행하였다. 내부 정치적 계산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ISIS 격퇴에 공을 세우면 미국이 독립을 지원해 줄 것이라는 기대를 지니고 있었는데, 더 늦으면 그 공을 인정받지 못할 것 같아 서두른 측면이 있다. 투표는 92.7%라는 압도적인 찬성률을 기록하였다. 그러나 이라크정부도, 이웃 이란·터키도 쌍심지를 켜고 독립불가를 외치며 무력(武力)시위를 벌였다. 그 결과 쿠르드지역정부는 오히려 키르쿠크를 정부군에 빼앗겼고, 더 이상의 충돌을 피하고자 독립투표 결과를 동결하였다. 바르자니는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쿠르드 민병대 YPG
▲2016년 10월 ISIS가 점령 중인 모술 탈환 작전을 준비하는 쿠르드 자치정부 민병대(페슈메르가) 대원들. ISIS가 소탕되어 가는 지금 쿠르드족은 ‘토사구팽’ 신세가 되어 가고 있다. 사진=UPI/연합뉴스
이처럼 그나마 가장 안정적인 자치정부를 꾸리고 있던 이라크 쿠르드족이 시도한 독립투표에서 볼 수 있듯 쿠르드의 독립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쿠르드인들이 집중 거주하고 있는 4개국 중 어느 한 곳에서라도 쿠르드인들이 독립을 성취한다면 주변 국가들에 미치는 영향력이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크기 때문이다.
특히 가장 많은 쿠르드인들이 살고 있는 터키의 적대감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깊다. 세속주의를 표방한 아타튀르크 시대부터 쿠르드인들은 민족적 독특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산악지대 터키인’으로 분류되었다. 터키는 ‘국민통합과 영토보전’을 위협하는 어떠한 행동도 불법으로 명시한 1982년 헌법에 따라 쿠르드족의 인권을 억압하였다.
이에 1978년에 결성된 쿠르드노동당(PKK)은 1984년부터 터키정부를 상대로 본격적인 무장 독립투쟁에 들어갔다. 1999년 PKK 지도자 오잘란이 체포되면서 양측이 휴전(休戰)상태를 유지하다가 2004년 다시 항쟁이 시작되었다. 2013년부터 약 2년간 평화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2015년 다시 쿠르드와 터키정부군 간 전투가 재발하여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터키정부는 PKK를 불법 테러단체로 규정하고 있다.
터키는 미군을 도와 ISIS를 격퇴한 시리아 북부의 쿠르드 민병대 민중수호대(YPG)를 PKK와 연계된 무장단체로 간주한다. 결코 용납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미군 철수 계획이 발표된 직후 미군이 떠날 만비즈를 공격하기 위하여 터키군을 집결시킨 것도 이 때문이다. 2004년 발족한 YPG는 시리아 북부 지역 쿠르드인들이 2003년에 만든 민주통일당(PYD)의 민병대 조직이다. YPG는 2011년 시리아 내전 발발 직후부터 활동영역을 넓히기 시작하였고, 미국의 요청으로 2015년에는 쿠르드인뿐 아니라 아랍인을 포함한 시리아민주군(SDF)을 결성하여 ISIS의 수도 라까를 함락하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
YPG, 적이던 시리아군에게 도움 요청
▲2018년 1월 터키군은 시리아 내 쿠르드족 거주지역을 장악하고 있는 YPG 민병대를 공격했다. 사진=로이터/연합뉴스
터키가 의심하는 대로 YPG의 모체인 PYD가 PKK와 연계된 조직인지 아닌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PKK 창시자 오잘란의 사진이 YPG가 통제하는 지역 곳곳에 걸려 있는 것은 사실이다. 오잘란은 1999년 터키 당국에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았는데, 2002년 사형제가 폐지되면서 종신형으로 감형되어 현재 수감 중이나, 면회가 금지된 상태다. 터키가 오잘란과 PKK를 보는 입장은 미국이 오사마 빈라덴과 알카에다를 대하는 태도와 다를 바 없다. 따라서 터키 당국이 오잘란을 심정적으로 지지하는 PYD를 PKK와 다른 별도의 조직으로 보는 것을 기대하기는 불가능하다.
이제 미군이 철수하면 시리아 북부에서 미군과 긴밀히 협조하면서 ISIS 퇴치에 혁혁한 공을 세운 YPG의 앞날은 어두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 미군 철수 계획이 나오자마자 YPG는 자신들이 몰아낸 시리아정부군에 도움을 청하고 나섰다. 사실 이들은 시리아정부군과 싸워서 시리아 북부 쿠르드 지역에서 몰아냈다기보다는 시리아정부에 자신들의 지역에 접근하지 말라고 했다고 보는 것이 더 합당하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간에 터키군의 위협에 맞서 적으로 간주하였던 시리아정부군에 손을 내민 것을 보면 시리아 쿠르드인들의 절박한 위기감을 엿볼 수 있다.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은 미군이 떠난 자리를 메울 터키가 쿠르드인들을 ‘학살(slaughter)’하지 않도록 하겠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터키 외교부는 폼페이오 장관이 미군의 후원을 받는 YPG 민병대를 시리아 쿠르드인과 동일시하는 우(愚)를 범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나섰다.
터키는 반드시 YPG를 손보겠다는 의지를 내보인다. 사실 그동안 터키의 가장 큰 불만은 미국이 PKK를 테러조직으로 인정하고 있으면서도 이와 연계된 YPG를 시리아 전장에서 후원할 뿐 아니라 이들과 힘을 합쳐 함께 싸우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이제 미군이 철군하고 그 빈자리를 터키에 넘기겠다고 하니 터키로서는 YPG를 소탕할 절호의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다.
ISIS 복귀 두려워하는 야지디인
▲SNS에는 야지디족 소녀 노예 판매 광고가 버젓이 올라와 있다.
시리아 북부 쿠르드 지역에는 이라크에서 ISIS에 학살, 강간당하고 노예가 되어 팔려 갔던 비극의 주인공 야지디(Yazidi/Yezidi)인들이 살고 있다. 이들은 쿠르드족이지만 비(非)무슬림이다. 쿠르드 사람들끼리는 문제가 없지만, 시리아 쿠르드 지역을 터키가 밀고 들어오면 ISIS가 다시 살아나 이들을 괴롭히는 것은 시간문제다. 극단주의자들은 야지디를 사탄 숭배자들이라고 저주한다. 야지디 소녀와 여성들은 노예로 팔려 나갔다. 199명이 가입한 한 SNS 그룹 단톡방에는 야지디 여성 노예매매가 버젓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중 한 광고에는 11살 여자 아이의 사진과 함께 다음과 같이 문구가 적혀 있다. “여성노예, 11살, 처녀, 예쁨, 하녀, 가격은 9000달러부터, 머리카락이 짧음.”
네덜란드의 ‘자유야지디재단(Free Yezidi Foundation)’은 ISIS를 완전히 소탕하기 전에 미군이 철수하면 ISIS가 다시 돌아올 것이고, YPG가 주축이 된 시리아민주군을 터키가 공격하면 ISIS의 재부상은 더욱 쉬울 것이라면서, 트럼프 대통령의 조기철수 계획이 가져올 결과를 염려한다.
실제로 터키군이 2018년 초 YPG로부터 시리아 북부 쿠르드 지역인 아프린을 빼앗자 쿠르드 주민들이 ISIS로부터 참변을 당하였다. 재단은 미국정부가 철군을 최대한 늦추고 ISIS 거점을 계속 공습하며, 터키가 공군력을 쓸 수 없도록 시리아 북부 지역을 비행금지구역으로 지정해 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시리아정교 기독교인들도 터키 우려
미군 철수가 가져올 재앙을 쿠르드인들만 걱정하는 것은 아니다. 시리아 북부지역에 사는 시리아정교(正敎) 그리스도인들 또한 심각한 우려를 표하고 있다. 이들은 예수가 썼던 아람(Aram)어의 시리아 지역 방언인 시리아어(Syriac)를 교회전례 언어로 사용하면서 예수가 한 말 그대로 ‘주기도문’을 낭송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이들 소수 그리스도인들은 100여 년 전 오스만제국이 아르메니아 그리스도인들을 학살할 때 이를 피해 시리아 북부로 이주한 이들의 후손이다. 이들은 사선(死線)을 넘어 온 조상들이 이야기하였던 학살의 희생양이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휩싸여 있다. 학살의 주역은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이 바로 자신들의 조상을 괴롭혔던 터키라고 하면서 재현될지도 모를 비극적인 역사를 개탄하고 있다.
미국과 유럽의 시리아정교 그리스도인들은 한목소리로 1월 3일 “침략자 터키가 시리아정교 그리스도인들로부터 그리스도교와 신앙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빼앗아 가는 것을 막아 달라”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이들은 터키가 시리아 북부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을 몰살할 것이라는 두려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미국은 ISIS 잔당 소탕을 터키에 맡기고 나가려고 하지만, 터키는 쿠르드 지역인 아프린을 접수할 당시 주민들을 약탈하고 살해하는 것을 일삼는 무장 세력과 연대해 싸웠고, 이들 무장 세력에는 과거 ISIS에 가담하였던 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터키가 자기들이 공략할 지역에 ISIS를 선발대처럼 먼저 보내어 전열(戰列)을 흐트러뜨리는 전략을 쓰고 있다고 분석하기도 한다.
자유의 버팀목이 사라질 때
다행히 트럼프 대통령이 마음을 다소 바꾸어 즉각 철군이 점진적 철군으로 바뀌긴 하였지만, 언제 다시 상황이 돌변할는지 모른다. 스스로를 지킬 능력이 없는 쿠르드인들은 강대국의 입맛에 따라 휘둘릴 수밖에 없다.
자유세계의 큰 나무가 되어 주었던 미국이 자국의 이익을 앞세우면서 국제사회에서 민주주의와 인권이 설 땅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 독재정권이 주민들을 고문하고 학살해도 전혀 관심을 갖지 않고, 줄기차게 국익만 앞세우며 인권개념이 없는 동토(凍土)의 제국들이 힘을 쓰는 세상에서 사는 것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일인지를 트럼프 행정부의 미국 외교정책 변화 때문에 새삼 실감한다.
자유세계의 버팀목이 사라지는 무서운 현실 앞에서 과연 쿠르드인들이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이들이 마주한 비참한 현실이 우리나라가 처한 안보 위협과 중첩되어 등골이 더욱 오싹하다. 자유세계가 건재하길 바라고 또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03월 호
◆이슬람혁명 40주년을 맞는 이란
경제 파탄, 지도층 ‘내로남불’로 민심 이반
⊙ 30년간 집권해 온 최고지도자 하메네이 승계 놓고 권력 암투
⊙ 미국의 경제제재로 경제 어려운 가운데 권력층 2세 ‘아가자데’들의 사치와 오만 드러나면서 민심 이반
⊙ 테헤란 미국대사관 점거 당시 美帝 규탄했던 부통령 아들은 미국 유학 중… 대통령 조카는 미국 회사 근무
⊙ 볼턴 美 안보보좌관은 ‘2019년은 이란 전복의 해’ 외치지만, 오히려 역효과 날 수도
▲이란 이스파한 이맘광장의 어린이들. 혁명 40주년을 맞는 이란은 경제난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사진=박현도
1979년 1월 16일 시위대에 밀려 샤 파흘라비가 이란을 떠남으로써 왕정(王政)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2주일 후인 2월 1일 프랑스에 머물던 아야톨라 호메이니가 오랜 해외 망명생활을 마치고 귀국했다. 이날부터 호메이니가 임명한 바자르간 정부가 이란을 완전히 장악하여 샤 파흘라비가 국정을 맡긴 바흐티아르 정부를 무너뜨려 혁명에 성공한 2월 11일까지 10일간을 ‘10일간의 새벽(다헤예 파즈르)’이라고 부른다. 이란력(曆)으로는 11번째 달인 바흐만월 22일, 양력으로는 2월 11일에 무려 2500년이라는 긴 역사를 지닌 이란의 왕정이 쓰러지고 이란 역사상 최초의 공화정(共和政)이 들어섰다. 이란 국기에는 혁명기념일 22일을 기리기 위해 ‘알라는 가장 위대하시다(알라후 아크바르)’는 아랍어 문구가 위아래에 각각 11번씩 모두 22번이 쓰여 있다.
이란에 들어선 새로운 공화정은 이슬람 역사상 최초로 이슬람법학자들이 다스리는 이슬람민주정이다. 이슬람이라는 종교와 민주주의가 혼합된 정체(政體)로 우리에게 익숙한 세속(世俗)민주정과는 다르다. 이슬람 역사에서 이슬람법학자들이 정권에 봉사한 적은 있지만, 직접 정권을 잡은 것은 이란이 처음이다. 샤 파흘라비가 서구적 세속주의를 강력하게 추진하면서 전통 이슬람문화를 중시하던 민심을 세심하게 보살피지 못한 잘못을 지적이라도 하듯, 3월 30~31일 이틀간 열린 국민투표에서 유권자의 89%가 참가하여 98%가 이슬람이 중심이 되는 새로운 정체에 찬성하면서 이슬람민주정을 채택했다. 찬반을 묻는 투표용지는 ‘구(舊)정권을 이슬람공화정으로 바꾸는 헌법 승인’이라는 문구와 함께 찬성이 녹색, 반대는 적색으로 나뉘어 있었다.
대통령 위에 이슬람법학자
이란의 개혁파 성직자이면서 대통령을 8년간 지낸 하타미는 “민주주의는 여러 형태를 취할 수 있으며, 이란의 이슬람 민주주의는 다른 나라에 없는 영성(靈性)이 있다”고 말한다. 이슬람과 민주주의가 만난 이란의 정체는 혁명의 지도자 호메이니가 오랫동안 구상한 ‘법학자 통치론’에 뿌리를 두고 있다. 호메이니는 시아파에서 불의한 세상 종말에 재림(再臨)하여 정의를 세울 것이라고 믿는 12번째 이맘 마흐디가 올 때까지 무슬림들을 이슬람법에 정통한 법학자들이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맘을 대신하여 이슬람법학자가 다스리는 것이 호메이니의 이슬람법학자 통치론의 핵심이다.
그 결과 이란의 국가원수(元首)는 이슬람법학자인 최고지도자다. 대통령은 국민 직선(直選)으로 선출하지만, 말 그대로 행정부의 수반일 뿐이다. 대통령에게는 국군 통수권이 없다. 핵심적인 외교사안 결정권 역시 최고지도자에게 있다. 정보수장도 최고지도자의 동의 없이 대통령이 임명할 수 없다. 그래서 미국이 이란과 핵(核)협상을 할 때 미국 측에서 “루하니 대통령의 의견은 중요하지 않다”고 여러 차례 말을 흘렸고, 이에 루하니 대통령은 이란의 대미(對美)협상이 최고지도자의 승인을 받았음을 강조한 것이다.
종교와 정치가 동행하는 이란의 정치체제에 대해 비판론자들은 “종교인들이 정치를 하지 않아도 충분히 종교적인 나라도 있다”고 지적하면서 세속적 민주주의를 애써 외면하는 이란을 비판한다. 그러나 지난 40년간 이란인들은 현 이슬람공화정을 수호하면서 4년마다 대통령과 국회의원을 직접 선출하고, 최고지도자를 뽑고 해임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닌 전문가의회 의원을 8년마다 직접 선택했다.
하메네이 이후를 둘러싼 암투
▲지난 2013년 6월 총선 당시 투표하는 이란 최고지도자 하메네이. 뒤에 호메이니의 초상이 보인다. 사진=뉴시스/로이터
최초의 최고지도자직에는 혁명을 이끈 아야톨라 호메이니가 당연하게 올랐다. 1989년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현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하메네이가 지금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런데 노령에 전립선암 수술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 하메네이의 후계자를 두고 이란 정계에 정치적 긴장감이 흐른다.
지난 1월 라프산자니 전 대통령 사망 2주년을 애도하면서 루하니 대통령은 “부자(父子) 세습을 막기 위해 혁명을 했고, 라프산자니가 아니었다면 전문가의회가 호메이니 사후(死後) 최고지도자를 결정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이 발언은 최고지도자 측근의 심기를 거슬렀다는 후문이 돌았다. 부자 세습은 왕정을 무너뜨린 이란혁명을 말하는 것이지만, 하메네이가 자신의 아들 모즈타바를 최고지도자로 만들려고 한다는 소문이 수년 동안 유포된 것을 고려하면 단순히 파흘라비 왕정을 타파한 혁명을 가리킨 것이 아니라는 해석이 나온다.
더욱이 호메이니 사후 최고지도자직에 공백이 생겼을 때 주저하는 하메네이에게 임시 최고지도자직을 맡으라고 강권하여 수습한 사람이 당시 전문가의회 의장인 라프산자니였다는 점을 상기시킨 것 또한 예사롭지 않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이를 두고 루하니를 반대하는 측에서는 루하니가 차기 최고지도자를 노리고 있다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오고 있다. 사실 진위와 무관하게 이러한 추측과 해석을 보면 향후 최고지도자 자리를 둘러싸고 이란 정치체제에 변화가 일어날 가능성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이란 화폐 가치 3분의 1로 떨어져
혁명 40주년의 풍경은 그다지 아름답지는 않다. 이슬람 전통에서 40은 ‘완성’을 상징한다. 이는 이슬람 이전 중근동(中近東) 문화에서도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모세가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헤맨 기간이 40년, 예수가 사탄의 유혹을 뿌리치며 광야에서 기도한 날이 40일인 것도 그러한 이유다. 이슬람 예언자 무함마드가 40세에 예언자가 된 것, 무함마드와 부부의 연을 맺은 첫 번째 아내 카디쟈의 나이가 40세인 것도 완성의 상징을 반영한다. 중세 무슬림들이 “내 나이 40세 때”라는 말을 한 것도 생물학적 나이가 40이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만큼 인간적으로 성숙한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무슬림의 전통문화에서 탈상(脫喪)은 40일, 아이를 낳은 산모가 정상생활을 하는 것도 40일이다. 이처럼 40이라는 숫자가 지닌 뜻을 새겨보면 이슬람혁명 40주년은 그 어느 때보다도 풍요롭고 즐거워야 하지만 이란을 둘러싼 안팎의 우울한 기운이 축제 분위기를 끌어내리고 있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이유는 경제다. 트럼프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줄기차게 취해온 이란 적대정책 때문에 오바마 행정부가 이란과 맺은 포괄적공동행동계획(JCPOA)이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경제부흥 분위기에 한껏 고무되었던 이란 경제가 급전직하로 추락하면서 민심이 싸늘하다. 이란의 화폐 가치가 3분의 1로 하락하고 인플레이션이 급등하면서 민생경제가 처참하게 망가지고 있다.
지난해 말 국내에서 열리는 행사에 초청받아 온 이란의 지인(知人)은 “1만원짜리 물건을 사려다가도 이란 돈으로 환산하면 쉽게 손이 가지 않는다”고 필자에게 토로한 적이 있다. 이란 화폐 가치가 하락하면서 1만원짜리가 3만원이 되었으니 충분히 이해가 되고도 남는다. 이란으로 여행 가는 사람에게는 쓸 돈이 넘치지만, 이란인이 이란 밖에서 돈을 쓰기에는 어려운 현실이다.
이란의 철부지 금수저 ‘아가자데’
▲‘테헤란의 부잣집 아이들’ 인스타그램에 올라온 사진들. 경제난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민심에 불을 질렀다.
그런데 이러한 우울한 상황에도 유력인사들의 자녀들이 인터넷에 흥청망청 돈을 쓰는 사진이나 동영상을 올려 자랑질을 하면서 이란인들의 분노를 자아내는 일이 발생했다. 인스타그램에는 아예 ‘테헤란의 부잣집 아이들(Rich Kids of Tehran)’이라는 항목까지 등장하여 소위 잘나가는 아이들의 적나라한 ‘돈 자랑’을 여과 없이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미국의 경제제재로 나라가 어렵든 말든 나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라는 금수저를 문 젊은이들의 모습은, 정부의 단속을 피해 프락시 서버를 이용하여 인터넷에 접속하여 세상사를 접하는 이란 젊은이들에게 그대로 전달되어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박탈감을 선사했다.
이들 철부지 금수저를 이란어로는 ‘아가자데(Aghazadeh)’라고 한다. ‘아가’는 남자를 높여 부르는 칭호로 경(卿), 선생과 같은 뜻이다. ‘자데’는 아들이다. 이 말은 원래 1990년대부터 이란 사회에서 사회적으로 유력한 인사의 자녀를 비꼬는 말로 통용되었다. 그런데 최근 이란 경제가 극도로 어려워지면서 ‘아가자데’의 도를 넘은 언행이 그 어느 때보다 더 심한 상대적 박탈감을 안겨다 주고 있는 것이다.
외교관의 아들 사샤 소브하니는 그리스의 섬이나 샴페인이 가득한 요트 배경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리면서 50만명에 달하는 팔로워들에게 얼마나 오랫동안 자신을 질투할 것이냐는 글을 써서 논란을 초래했다가 글을 지워야만 했다. 또 퇴역한 혁명수비대 사령관 아들 라술 톨루이는 2세 된 딸아이를 위하여 애완 호랑이를 동원한 호화파티를 연 사실을 인스타그램에 올려 보는 이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이를 두고 보수적인 성직자 마흐디 사드로사다티는 “일반인들은 아이 기저귀를 사기 위해 애쓰고 있는데, 당신은 어느 나라에서 살고 있는가?”라고 비판했다.
사실 아가자데의 돈 자랑이나 호화로운 생활만이 문제는 아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비싼 차(車), 옷, 가방, 음주 호화파티보다 평범한 이란 젊은이들의 마음을 후벼 파는 것은 유력인사들의 언행불일치의 이중적인 삶이다.
작년 12월 루하니 대통령의 33세 된 사위 캄비즈 메흐디자데는 지질연구소장에 임명되었다가 여론의 질타를 받고 이틀 만에 자리에서 물러났다. 석유부 자문위원을 지냈기에 지질연구소장직을 맡을 능력이 전혀 없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이란인들은 이른바 대통령 장인이 뒤를 봐줬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판단하고 반대의 목소리를 높였다. 평소 젊은이들을 보듬는 말을 하던 대통령이 해서는 안 될 인사를 했으니 곱게 보일 리 만무하겠는가.
유명한 개혁파 정치인 모함마드 레자 아레프는 “좋은 유전자(Good Genes)를 물려받아서 성공했다”는 말을 한 아들 때문에 이란인들의 냉소(冷笑)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지난 11월 아레프가 트위터에 “미국의 경제제재에 맞서 이란인들이 열심히 일하며 합심단결해야 한다”고 하자 한 변호사가 이란인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좋은 유전자를 없애는 것”이라고 비꼬았다. 이란을 좀 더 개혁적인 국가로 만들겠다는 정치인으로 젊은 층으로부터 굳건한 지지를 받았고, 루하니가 대통령이 되는 데 크게 공헌했던 아레프 역시 자식 교육 잘못한 원죄(原罪)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아레프 아들의 발언 이후 ‘좋은 유전자’는 인터넷상에서 해시태그로 폭발적으로 사용되면서 이란 상류사회를 비판하는 용어가 되었다. 사위 때문에 곤욕을 치른 루하니도 ‘좋은 유전자’ 조롱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한 트위터 사용자는 루하니가 산적한 경제문제를 풀 수 있는 전문가들은 활용하지 않고 ‘좋은 유전자’를 써서 자신 주변 사람들만 만족시키려고 한다고 비꼬았다.
이란 지도층의 ‘내로남불’
▲거리에서 물건을 파는 소녀. 혁명기득권층의 자녀들은 이 소녀와 다른 삶을 살고 있다. 사진=박현도
1979년 1월 이란을 떠난 마지막 왕 샤 파흘라비는 여러 나라를 떠돌다 암 치료를 위해 그해 10월 미국으로 갔다. 이란인들은 이에 크게 분노했다. 과격한 학생들은 11월 4일 담장을 넘어 테헤란 주재 미 대사관을 점거하고 52명의 미국인을 인질로 잡았다. 무려 444일 동안 지속된 대사관 점거 때문에 당시 미국 대통령 카터는 재선(再選)에 실패했다.
대사관 점거 당시 영어를 아주 잘하는 여학생이 서구 방송과 인터뷰에서 미국의 제국주의를 강하게 비판했다. 당시 ‘최고지도자를 따르는 무슬림 학생들’ 조직 소속으로 스스로를 메리(Mary)라고만 밝혔던 그녀는 바로 현재 루하니 행정부에서 여성・가족문제 담당 부통령으로 있는 마수메 에브테카르다. 40년 전 거침없이 미국의 죄악을 영어로 세계에 알렸던 그녀의 아들 이사 하셰미는 2015년 현재 ‘사탄의 나라’ 미국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것으로 언론에 보도되었다. 그는 자신의 인스타그램 계정에 해변에서 찍은 사진, 미국 전몰용사들이 묻힌 샌프란시스코 국립묘지 동영상 등을 올렸다.
반미(反美)를 외치던 과거 운동권 인사가 자신의 자녀들은 미국으로 유학 보내는 일이 우리나라에서도 적지 않아 빈축을 산 바 있는데, 이란 역시 예외는 아니다. “미국에 죽음을(마르그 바르 아므리카)!”이라는 구호를 외치며 미국을 ‘거대한 사탄’이라고 비난하던 유력 인사들이 자식들 앞에서는 한없이 초라해지는 꼴이다.
지난해 10월 15일 미국의 《워싱턴타임스》는 국회의장 알리 라리자니의 딸이 오하이오에서 대학신입생이 되었고, 부통령 모함마드 바게르 노바흐트의 조카이자 국회의원 알리 노바흐트의 자녀인 에흐산과 닐루파르가 각각 조지워싱턴대학과 UCLA에서 가르치고 있으며, 루하니 대통령의 동생 호세인의 아들 알리 페레이둔은 맥그로-힐 교육회사에서 일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좋은 유전자’를 보살피고, 반미를 외치면서도 2세들의 미국행을 막지 않은 유력인사들의 이중적 언행이 날이 갈수록 외부의 압박으로 삶이 팍팍해지는 이란인들의 마음을 흔들지 않는다면 그것이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 ‘아가자데’의 풍요로운 삶이 인터넷으로 알려지면서 정의를 세우고자 40년 전 거리를 가득 메웠던 순수한 시민들의 혁명 열기가 한없이 초라해지는 형색이다. 어쩌면 미국의 경제제재가 없었다면 현실과 이상의 간극이 이처럼 크게 느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트럼프 행정부의 이란 제재가 미국이 원하는 이란 체제 변화를 불러올 수 있을까? 미국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 보좌관 볼턴은 “현 이란 체제가 40년이 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고 하면서 2019년을 ‘이란 전복(顚覆)의 해’로 지목한 바 있다. 물론 최근 볼턴은 트럼프 행정부의 대(對)이란 정책의 목표가 정권교체는 아니라고 한발 물러서긴 했다.
미국의 압박
하지만 오바마 행정부는 지난 2012년 오랫동안 테러조직으로 불법시했던 이란의 반정부단체 모자헤디네 할크(MEK)를 테러조직 명단에서 제외했다. 트럼프 행정부 내 인사들은 모자헤디네 할크의 부속 조직인 이란저항협의회(NCRI)와 활발하게 접촉하면서 공식적으로 지지하고 있다. 볼턴은 2017년 NCRI 총회에서 2019년 총회는 테헤란에서 하자고 말할 정도였다.
혁명 직후 초대 대통령을 지내다 탄핵된 후 서구로 망명을 떠난 바니사드르는 “트럼프의 압력이 이란인을 현 체제로부터 결코 해방시키지 못할 것이며, 오히려 현 이란 정권에 도움이 될 뿐”이라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이란은 세계사에서 유례가 없는 세 번의 혁명, 즉 1905년 입법혁명, 1951년 석유국유화(國有化), 1979년 혁명을 이룬 나라다.
바니사드르는 “역사적으로 이란에서 폭정(暴政)은 정치적으로는 왕정과 군대, 경제적으로는 대지주와 바자르 상인, 문화적으로는 성직자, 외부적으로는 서구 열강과 관계라는 4가지 구조를 지니고 있는데, 세 번의 혁명으로 이제 남은 것은 성직자뿐”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외부 요인인 트럼프가 압력을 가하면서 오히려 자생적인 시민들의 민주화 움직임에 해를 끼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이러한 입장은 트럼프의 JCPOA 탈퇴, 이란 제재 재개 때 서구의 이란 전문가들이 지적한 바 있다. 지난 40년간 투표를 통해 정부를 구성한 유일한 중동 국가로 민주주의 근육이 가장 잘 발달한 이란에 외부에서 불필요한 압력을 가하면 서구가 그토록 외치는 민주주의는 설 길이 없을 것이라는 우려가 팽배했다. 이러한 걱정은 테헤란 에빈교도소에 투옥된 여성 인권운동가 파르하드 메이사미가 보낸 편지에도 잘 드러난다.
“나는 차라리 잘못된 일을 저지르는 우리나라의 억압자들에게 갇힌 채 감옥에서 평생을 보내면서 그들의 잘못을 고치는 데 전념하겠다. 약속을 깨고 도덕적 원칙을 무시한 채 합리적이고 평화적인 JCPOA를 탈퇴한 자들의 수치스러운 도움을 받기 위해서는 단 1초도 허비하지 않을 것이다.”
완성의 숫자 40을 즐기기에는 이란인의 삶에 아직 여유가 없다.⊙
04월 호
◆인도 - 파키스탄이 공중전 벌인 카슈미르는 어떤 곳인가
무슬림이 多數임에도 힌두교도 군주가 인도 선택하면서 분단
⊙ 이슬람 테러조직 ‘자이셰 모하메드’, 인도군에 폭탄 테러 가해 40명 살해… 인도가 보복 공습, 파키스탄과 공중전 벌여
⊙ 모직 제품 ‘캐시미어’의 원산지… 14세기 이후 이슬람 지배
⊙ 주민의 75%가 무슬림이었지만 인도·파키스탄 독립 당시 힌두교도 지배자가 인도 귀속 선택… 65%는 인도, 35%는 파키스탄이 점령
▲지난 2월 18일 인도 카슈미르주 잠무에서 경계근무 중인 인도 군인들. 2월 14일 대규모 자살폭탄 공격으로 40여 명이 숨진 후 긴장이 계속되고 있다. 사진=뉴시스/AP
지난 2월 14일 파키스탄의 ‘자이셰 모하메드(Jaish-e Mohammed·무함마드의 군대)’라는 단체 소속 22세 청년 아딜 아마드 다르가 인도령(領) 슈미르(Kashmir)의 풀와마(Pulwama) 지역 레트포라에서 자살폭탄 테러를 감행했다. 잠무 스리나가 고속도로에서 경비군인을 태운 차량을 목표로 한 테러 공격으로, 인도 군인 40명이 목숨을 잃었다. 테러에는 60kg 정도의 강력한 폭발물이 사용되었고, 살상 반경이 150m에 달했으며, 폭발의 충격으로 시신이 무려 80m 떨어진 곳까지 날아갔다고 인도 경찰 당국은 밝혔다.
테러 공격에 발끈한 인도는 50년 만에 처음으로 공군기를 파키스탄 영공(領空)으로 보내 테러분자들의 근거지를 공습(空襲)했다. 파키스탄은 “인도가 테러를 자행한 자이셰 모하메드와 무관한 곳을 폭격했고, 파키스탄 공군이 인도 공군 미그-21 전투기 2대를 격추했으며, 조종사 한 명을 생포했다”고 발표했다. 인도는 “파키스탄 공군기 F-16 한 대를 격추했다”고 했다. 파키스탄은 이를 극구 부인했다.
미국과 중국이 전방위적(全方位的)으로 맞부딪치고 있는 현실 속에서 국제사회는 카슈미르 현안보다는 비공식 핵(核)보유국인 인도와 파키스탄 두 나라의 갈등이 핵전쟁으로 비화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촉각을 세우고 있다. 파키스탄이 부인하고는 있지만 인도의 구(舊)소련제 미그-21이 어떻게 파키스탄의 미국제 F-16을 격추할 수 있었는지를 궁금해하는 목소리가 있는가 하면, 미국이 저렇게 국방력이 허약한 인도와 손잡고 중국을 견제할 수 있을지에 대해 회의(懷疑)하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총선에 이용하려 파키스탄 공습했나
카슈미르를 두고 인도와 파키스탄의 신경전은 1947년 양국이 영국에서 독립하여 국가를 세운 때부터 지속되어 왔다. 여러 차례 전쟁을 겪기도 했지만 서로 인내력을 발휘하여 더 큰 참화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특히 인도령 카슈미르에서 테러나 분쟁이 발생하더라도 인도는 늘 파키스탄이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다고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고, 파키스탄은 오리발을 내미는 전형적인 양상을 반복했을 뿐, 이번처럼 인도가 직접 파키스탄을 공격한 적은 없었다.
물론 인도 군인 40명의 무고한 목숨을 앗아간 자살 테러는 인도령 카슈미르 역사상 최악으로 꼽힌다. 그 때문에 테러를 배후에서 조종한 자이셰 모하메드 근거지인 파키스탄령 카슈미르를 인도가 공습한 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하지만 그보다는 총선을 코앞에 둔 인도의 나렌드라 모디(Narendra Modi) 총리가 애국심을 자극해 유리한 정국(政局)을 조성하기 위해 파키스탄 공습을 결정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파키스탄은 확전(擴戰)을 막기 위해 생포한 인도 공군 조종사를 송환했다. 이 조종사는 이미 인도에서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모디 총리의 집권여당 인도인민당(Bharatiya Janata Party·BJP)은 힌두민족주의를 표방하고 있기에 파키스탄과의 대립은 곧 다가올 선거에서 모디 총리에게 호재로 작동할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다. 구식 비행기 두 대는 잃었지만 총선만 생각하자면 한마디로 남는 장사를 한 셈이다.
물론 유례없이 강력한 테러 공격을 당한 나라가 테러를 계획한 단체의 근거지를 공격하는 것은 정상적인 국가라면 마땅히 해야 할 일임에 틀림없다. 굳이 선거 때문에 했다고 공격의 이유를 댈 필요는 없다. 자국(自國)의 영토와 국민을 보호하는 것은 국가의 의무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이다. 오히려 왜 인도령 카슈미르에 거주하는 청년이 파키스탄령 카슈미르에 근거지를 둔 테러 집단의 사주를 받고 인도령 카슈미르에서 인도 군인들을 희생양으로 삼아 자살폭탄 테러를 감행했는지 묻는 것이 더 정상적일 것이다.
‘캐시미어’의 원산지
인도와 파키스탄이 서로 완전한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는 카슈미르는 양털로 만든 담요나 옷으로 널리 알려진 캐시미어(cashmere)의 어원으로 유명한 곳이다. 캐시미어 모직 제품은 우리나라에서도 고급 제품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런데 캐시미어 모직 제품의 따스함이나 부드러움과 달리 현대 카슈미르는 항쟁·억압·테러로 점철된 차갑고 날카로운 비극의 역사로 가득한 곳이다.
히말라야산맥 서쪽에 자리 잡은 카슈미르 지역은 해발 최저 300m에서 최고 7000m에 달하는 고원지대로 타원형 접시 모양의 지형이다. 총면적은 약 22만km2로 우리 한반도와 같은 크기다. 북동쪽으로는 중국의 신장웨이우얼 자치구, 동쪽으로는 티베트, 남쪽으로는 인도, 서쪽으로는 파키스탄, 북서쪽으로는 아프가니스탄과 각각 맞닿아 있다. 고대(古代) 인도 불교의 성왕(聖王)인 아소카(재위 기원전 약 265~238)는 카슈미르를 다스리면서 많은 불교 유적을 남겼다. 중국의 삼장법사(三藏法師) 현장(玄奘・602~662)은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에서 이곳을 오늘날 중국어 발음으로 ‘자스미뤄(迦濕彌羅)’라고 불렀다.
1320년 몽골의 침략으로 혼란을 겪으면서 정치적 공백이 발생하여, 무슬림이 정권을 잡을 때까지 역사적으로 보면 카슈미르는 불교나 힌두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다스렸다. 8세기에 신드(Sind) 지방 통치자들이 카슈미르 침공을 시도했으나 히말라야산맥 남쪽 지역에서 멈추었다.
14세기 이후 이슬람 침입
본격적으로 무슬림이 카슈미르를 장악한 것은 튀르크 출신 샤 미르가 1339년 권력을 잡고 술탄 샴숫딘으로 즉위하면서 샤 미르 술탄조가 들어서면서부터다.
시칸다르(재위 1389~1413) 술탄은 힌두교 사원을 파괴하고 힌두교도들을 박해하면서 이슬람교로 강제 개종시켰다. ‘위대한 왕’이라는 뜻인 ‘부드샤’로 불린 그의 아들 자이눌 아비딘(1420~1470)은 아버지와 달리 비(非)이슬람교인들에게 부과하던 세금을 폐지하고, 힌두교사원을 재건하고, 이슬람교로 강제로 개종당한 힌두교인들이 다시 힌두교로 돌아갈 수 있도록 했다. 부드샤의 후계자들 역시 종교적 관용정책을 폈다. 하지만 수피들과 여러 무슬림의 노력에 힘입어 15세기 말경 카슈미르 주민 대다수가 이슬람을 받아들였다.
샤 미르 술탄조에 이어 시아파 튀르크 차크족이 카슈미르를 1561년부터 1586년까지 잠시 장악하다가, 강력한 무굴(Mughul)제국이 새로운 지배자로 등장했다. 무굴제국은 상공업과 농업을 일으키고 지역을 안정시키며 발전의 기틀을 마련했다. 무굴제국의 일부가 되면서 카슈미르는 지역의 독특한 정체성(正體性)을 상실했다. 재능 있는 장인(匠人)·시인·학자들이 더 나은 삶을 찾아 제국의 수도로 떠나면서 카슈미르의 문화는 예전과 달리 풍요로움을 잃은 것이다.
아우랑제브(1618~1707) 사후(死後) 무굴제국의 카슈미르 지배력이 흔들리면서 지역 유력자들이 외부 아프간 세력을 끌어들여 1752년 무굴제국을 몰아냈다. 그러나 새로운 지배자는 세금을 과하게 거둬들이고 시아들을 박해하는 등 폭정으로 주민들을 괴롭혔다.
아프간에 이어 1819년 펀자브의 통치자이자 시크교도인 란지트 싱이 카슈미르를 장악했다. 1846년까지 지속된 시크교의 카슈미르 지배도 평화롭지는 못했다. 모스크를 폐쇄하고, 소 도축 금지령을 위반하면 사형으로 다스렸다. 무거운 세금을 심지어 창녀에게까지 매겼다. 그 결과 많은 사람이 가난에 시달렸고, 펀자브나 북부 인도로 대거 이주했다.
영국의 식민지배
1846년 제1차 영국-시크 전쟁에서 영국이 승리하면서 시크교도들의 카슈미르 지배가 막을 내렸다. 영국은 750만 루피에 카슈미르를 잠무의 통치자인 도그라족 지도자인 라자 굴랍 싱에게 넘겼다. 카슈미르 주민의 90%를 차지하던 무슬림의 삶은 시크교도의 통치 시절보다 더 나아진 듯했으나, 여전히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지는 못했다. 힌두교 종교세를 내야 했고, 소 도축 역시 금지되었다. 정부가 여러 모스크를 직접 통제하고 관리했다. 1885년 권좌에 오른 프라타프 싱은 무능했다. 러시아의 인도 침략을 우려한 영국은 카슈미르를 점령, 1921년까지 직접 다스렸다. 영국은 개혁정책을 다수 도입했지만, 무슬림 주민들에게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무슬림들은 셰이크 압둘라를 중심으로 결집하여 강제노역 철폐, 정부 공직 무슬림 고용 확대, 모스크 국가관리 완화 등을 요청했으나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무슬림들은 1932년 10월 저항운동을 시작했다. 급기야 1946년 5월에는 4년 전 간디가 시작한 인도 독립운동(Quit India Movement)을 본떠 카슈미르 독립운동(Quit Kashmir Movement)을 발족했다. 카슈미르 정부는 이를 무력진압하며 공포정치를 이어갔다.
1947년 6월 3일 영국 정부는 인도 독립안(案)을 발표했다. 당초 영국 정부는 550여 개에 달하는 인도 내 여러 소국(小國)이 각기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선택하라고 했다. 한 달 후인 7월 25일에 마운트배튼 경(卿)은 여러 지도자에게 주민들의 종교적 성향을 고려하여 주민들의 뜻에 맞게 인도나 파키스탄에 합류하라고 권고했다.
카슈미르 역시 선택의 기로에 직면했다. 1941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카슈미르 인구의 77%가 무슬림이었다. 따라서 종교적으로 대다수인 무슬림의 뜻을 존중한다면 선택지는 당연히 파키스탄이었다. 더욱이 지리적으로도 파키스탄과 더 가깝다. 그러나 힌두교도였던 카슈미르 최후의 통치자 하리 싱은 파키스탄에 합류하길 원하지 않았다. 다만, 파키스탄과 현재의 상황을 바꾸지 않는다는 협정을 맺어 상호 통상과 교류에 장애가 없도록 했다. 인도와는 이러한 협정을 맺지 않았다.
카슈미르의 분단
▲카슈미르의 마지막 군주인 하리 싱.
1947년 8월 영국령 인도가 14일에 파키스탄, 15일에 인도로 각각 독립했다. 카슈미르 정치상황은 불안하게 돌아갔다. 6월에 무슬림들은 카슈미르 서쪽에서 반(反)정부 시위를 벌였고, 9월에는 카슈미르 남부에서 반(反)무슬림 시위가 일어났다. 2만명의 전사(戰士)를 모아 파키스탄이 카슈미르를 복속하려 한다는 소문도 떠돌았다.
그러던 중 10월 파키스탄 북서 변경의 파슈툰 부족이 카슈미르를 침공했다. 이들은 오늘날 파키스탄령 카슈미르 수도인 무자파라바드를 점령했다. 이어 동쪽으로 170km 떨어진 수도 스리나가르 공격을 시도했다. 파키스탄은 파슈툰 부족을 지원하고자 했으나 영국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당시 인도군과 파키스탄군은 분리되지 않은 채 영국의 통제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파슈툰 부족의 침공에 화들짝 놀란 하리 싱은 인도에 도움을 요청했다. 이에 인도는 도움을 받으려면 먼저 카슈미르를 인도에 귀속시킨다는 협정에 서명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하리 싱은 인도의 뜻에 따라 10월 26일 인도령 가입문서에 서명했다. 이튿날 인도는 군대를 스리나가르에 투입하여 반격에 나섰다. 인도는 이 가입문서에 근거하여 카슈미르가 합법적인 인도령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파키스탄은 이 문서가 조작된 것이고, 하리 싱이 자유의지로 서명한 것도 아니며, 파키스탄과 먼저 맺은 협정이 유효하기 때문에 카슈미르가 인도령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더욱이 하리 싱이 카슈미르를 떠나 자신의 통치령을 제어할 수 없는 상태였고, 따라서 주민들을 대신하여 결정을 내릴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인도의 카슈미르 접수는 어불성설이라고 주장한다.
제1차 카슈미르 전쟁은 결국 국제사회의 중재로 1949년 1월 1일에 끝났다. 카슈미르의 65%는 인도가, 나머지 35%는 파키스탄이 차지했다. 우리의 휴전선처럼 통제선(Line of Control)이 그어졌다. 이어 양측은 1965년에 다시 카슈미르를 두고 2차 전쟁을 벌였지만 큰 변화는 없었다.
테러의 온상
▲지난 2월 15일 인도 뭄바이에서 파키스탄 총리 사진을 불태우며 反파키스탄 시위를 벌이는 인도 무슬림들. 인도의 무슬림 인구는 1억7000만명에 달한다. 사진=뉴시스/AP
2000년대 들어 카슈미르 분쟁은 이번 테러처럼 파키스탄령 카슈미르에 근거지를 둔 테러집단이 인도령 카슈미르 해방을 목적으로 하는 무력(武力) 공격을 취하는 양상을 띠고 있다. 인도 정부는 이들 테러집단을 파키스탄 정보 당국이 은밀히 후원하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다.
특히 이번 테러를 조직한 자이셰 모하메드는 인도뿐 아니라 파키스탄·미국·유엔도 테러집단으로 지정한 단체다. 소속원은 1000명 안팎으로 알려져 있다. 인도는 이 단체의 수괴인 마수드 아즈하르가 아무런 제재도 없이 자유롭게 파키스탄 내에서 활보하고 있다고 불만스러워한다.
이 단체는 알카에다·탈레반과 사상적으로 친근하게 연계되어 있고, 파키스탄에서는 데오반디에서 파생되어 정당으로도 활동하는 시파헤 사하바 파키스탄(예언자 동료의 군대)과 같은 조직이 되길 희망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자이셰 모하메드의 목표는 카슈미르를 파키스탄에 복속하고, 아프가니스탄에서 서구 세력을 축출하며, 파키스탄을 샤리아가 다스리는 이슬람 국가로 만드는 것이다. 이미 공개적으로 미국에 전쟁을 선포했고, 인도 대륙에서 힌두교인과 비(非)무슬림을 모두 몰아내는 것을 지상 목표로 삼고 있다. 2008년에는 아프가니스탄에서 국제연합군을 목표로 삼아 공격을 시도했다. 현재는 주로 인도령 카슈미르와 인도, 아프가니스탄, 남부 파키스탄에서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인도 정부는 파키스탄 정보부, 오사마 빈라덴, 탈레반이 자이셰 모하메드 조직을 지원했고, 수괴 아즈하르가 오사마 빈 라덴을 위시하여 알카에다 고위지도층과 접촉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카슈미르 사람들은 자신의 고유한 언어인 카슈미르어와 문학을 보존하고 있는 문화인들이다. 그러나 두 핵 강국 파키스탄과 인도의 틈에서 자유와 독립보다는 양자택일을 강요당하고 있다. 파키스탄령 카슈미르는 아자드 카슈미르, 즉 자유카슈미르라고 하지만 파키스탄 정부의 입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인도령 카슈미르 사람들은 인도의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하지만 인도 정부의 철권통치에 제대로 숨도 쉬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국제사회는 이들의 고난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채 자국이 인도와 파키스탄 중 어디에서 더 큰 이익을 얻을 수 있는지에만 집중하고 있다. 그 와중에 ‘알라의 자비’를 입으로만 외우는 테러 세력들이 폭탄을 던지고 있으니 카슈미르에서 캐시미어의 부드러움과 따뜻함을 언제나 찾을 수 있을까?⊙
05월 호
◆트럼프가 골란고원을 이스라엘 영토로 인정한 이유
‘NSC 그림자 위원’ 셸던 애덜슨의 힘
⊙ 美 유대인들이 지지하는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의 총선 승리, 내년 美 대선에서 유대인 지지 이끌어내기 위한 포석
⊙ ‘大이스라엘주의자’ 애덜슨, 지난 대선 때 트럼프에게 8200만 달러(933억원) 기부… 존 볼턴 기용도 그의 작품
⊙ 트럼프, 골란고원을 이스라엘 영토로 인정한 후 애덜슨에게 “당신이 원하는 것을 가져왔어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 3월 25일(현지시각)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와 만난 자리에서 골란고원에 대한 이스라엘의 주권을 인정하는 포고문에 서명했다. 트럼프의 뒤로 그의 사위인 쿠슈너 백악관선임고문의 모습이 보인다. 사진=AP/뉴시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극단적인 친(親)이스라엘 정책으로 또 한 번 국제사회를 깜짝 놀라게 했다. 지난 3월 25일 골란고원을 이스라엘 영토로 못 박는 외교문서에 서명한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2017년 12월에는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인정하고 미국 대사관을 텔아비브에서 예루살렘으로 이전하라는 행정명령을 내린 바 있다.
골란고원은 이스라엘이 1967년 6일 전쟁 중 5일째 되는 날 시리아로부터 빼앗은 땅이다. 이스라엘은 국제사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81년 골란고원을 자국(自國) 영토로 병합했다. 이미 유엔은 1971년 안보리 결의안 242호, 1973년 안보리 결의안 338호를 통해 골란고원에서 철수할 것을 이스라엘에 요구했다. 1987년 안보리 결의안 497호에서는 골란고원의 이스라엘령 편입은 국제법적으로 무효(無效)라고 선언했다. 이스라엘은 오히려 안보리 결의안 242호가 “역내(域內) 모든 국가의 주권, 영토보전, 정치적 독립, 그리고 각 국가가 위협이나 무력(武力)으로부터 자유로운 안전하고 공인된 국경 내에서 평화롭게 살 수 있는 권리를 존중하고 인정”한다는 점을 들어 골란고원 점령과 병합이 정당하다고 맞서왔다.
국제사회는 이번 미국의 조치에 경악을 금치 못하며 반대의 목소리를 높였다. 페데리카 모데리니 유럽연합(EU) 외교안보 고위대표는 “28개 EU 전(全) 회원국이 만장일치로 이스라엘이 점령한 골란고원에 이스라엘의 주권이 없다고 선언했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그동안 유럽연합의 대(對)이스라엘 공동전선을 분열시키기 위해 헝가리·폴란드·체코·루마니아·오스트리아·리투아니아 등을 상대로 외교적 노력을 기울여 왔으나, 허사로 돌아갔다.
영국도 “골란고원을 이스라엘의 영토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기존 입장에 변화가 없다”고 재천명했다. 영국은 “국제법과 유엔헌장이 무력으로 영토를 병합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국가책임법(Law of State Responsibility) 역시 무력을 써서 영토를 병합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아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팔레스타인을 포함하여 모두 22개 아랍 국가를 회원으로 두고 있는 아랍연맹도 미국의 결정에 반대한다는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지난 3월 31일 튀니지에서 열린 정상(頂上)회담에서 “아랍연맹은 국제법, 유엔과 안보리의 결정에 따라 골란고원이 시리아 영토임을 다시 확인한다”고 선언한 것이다. 튀니지 외무장관 케마이에스 지나위는 “아랍은 이스라엘을 인정하고, 이스라엘은 골란고원을 포함하여 1967년 전쟁에서 점령한 땅을 모두 반환하라”고 촉구했다.
골란고원과 크림반도
이처럼 국제사회는 지금까지 한목소리로 이스라엘이 점령하여 불법(不法) 병합한 골란고원이 결코 이스라엘의 영토가 될 수 없다는 입장을 굳건히 유지해왔다. 안보리 결의안 242호에는 땅과 평화를 맞바꾸는 개념이 들어 있는데, 이를 적극 활용하여 요르단·이집트와 분쟁을 끝냈듯 이스라엘과 시리아가 골란고원 문제를 평화적으로 매듭짓길 희망해왔지만, 별무소득이었다. 그런데 미국이 유엔의 바람과 달리 갑자기 골란고원을 이스라엘 영토로 인정하고 나섰으니 국제사회가 크게 놀라 반대의 목소리를 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에 그다지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은 결정을 왜 갑자기 내린 것일까? 물론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인정한 것에 비하면 골란고원 이슈는 상대적으로 비중이나 충격 강도가 약한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무력으로 점령한 골란고원을 이스라엘 영토로 인정한다면, 크림반도를 무력 병합한 러시아를 비판할 명분이 사라진다.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골란고원과 크림반도는 성격이 전혀 다른 사안”이라고 강조하고 나선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시리아의 공격을 방어하면서 골란고원을 점령한 반면, 러시아는 우크라이나가 위협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크림반도를 병합했다”는 것이다.
폼페이오 장관의 말은 1967년 6일 전쟁을 이스라엘이 시작한 것은 사실이지만, 1948년부터 1967년 전쟁 직전까지 시리아가 골란고원에서 이스라엘에 무력으로 위협을 가했다는 뜻이다. 6일 전쟁만 두고 보면 이스라엘이 시리아의 골란고원을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빼앗듯이 뺏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전쟁 발발 이전에 오랫동안 골란고원에서 시리아가 이스라엘을 괴롭혔기에 이스라엘이 국민 생존과 국가 안보를 위협하는 시리아의 골란고원을 점령한 것은 우크라이나로부터 위협을 전혀 느낄 수 없었던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령 크림반도를 병합한 것과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이다.
폼페이오 장관이 이처럼 이스라엘의 골란고원 점령을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과 비교하면서 정당화하고 나선 것 자체가 미국이 골란고원을 이스라엘령이라고 인정하는 것이 그만큼 쉬운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지난 8년간 끌어온 시리아 내전(內戰)에서 이란의 영향력이 증대함에 따라 골란고원을 철통같이 유지하는 것이 이스라엘 안보에 절대적으로 중요할 것이다. 이스라엘은 이란이 이끄는 무장세력이 골란고원을 계속 위협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결코 이 지역을 내줄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골란고원에 대한 속성 강의 듣고 결심
다시 원래의 질문으로 돌아가서 채근해보자. 왜 트럼프 대통령은 4월 9일 총선을 앞두고 미국을 방문한 네타냐후 총리에게 골란고원이 이스라엘 영토라고 인정하는 외교문서에 서명하는 선물을 주었을까?
트럼프 대통령은 4월 6일 카지노 거부(巨富)이자 자신을 적극적으로 후원하는 셸던 애덜슨이 이끄는 공화당유대인연합(Republican Jewish Coalition) 연례 총회에서 자신의 사위 재러드 쿠슈너, 주이스라엘 대사 데이비드 프리드먼과 같은 중동문제 자문들로부터 골란고원에 관한 속성 강의를 듣자마자 바로 골란고원을 이스라엘 영토로 인정하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이 함께한 자문들에게 “역사를 짧게 빨리 설명해주시오. 빨리 해주시오. 중국·북한 등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요. 빨리 알려주시오”라며 골란고원에 대한 강의를 요청했다고 청중에게 밝혔다. 강의를 듣고 나서 그가 “논의한 것을 내가 그대로 인정한다면 어떻겠소?”라고 말하자, 프리드먼 대사는 ‘멋지고 예쁜 아이처럼’ 자신에게 “정말로 그렇게 할 것이냐?”고 놀라서 물었다고 그는 말했다. 이에 트럼프 대통령은 “당장 그렇게 할 것”이라고 하면서 모두의 예상을 깨고 수십 년간 지속된 골란고원 정책을 뒤집는 문서에 서명하기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그는 당시 상황을 “빙(BING)!하니 이뤄졌다”라는 말로 설명하면서 “신속하게 멋지게 결정했다”고 자평했다.
다소 과장하는 투로 말하기 좋아하는 트럼프 대통령이 자신의 지지자들 앞에서 한층 고무된 상태에서 말한 것임을 감안하더라도, 그가 골란고원을 이스라엘 영토로 인정하는 외교문서에 서명한 것이 측근들을 놀라게 할 정도로 파격적이고 재빠른 결정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당신이 원하는 것을 가져왔어요”
▲트럼프의 對중동정책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유대계 巨富 셸던 애덜슨. 사진=셔터스톡
트럼프 대통령이 이런 뒷이야기를 공개한 곳이 차기 대선에서 든든한 돈줄이 되어줄 유대계 미국인 공화당원 모임이라는 데에서 쉽게 짐작할 수 있듯, 이번 결정을 이끈 주된 동기는 선거와 후원이다. 선거는 가깝게는 4월 9일 이스라엘 총선, 멀리는 자신이 곧 돌입할 대선이다. 선거에서 가장 중요한 후원금이 바로 미국 유대인들에게서 나오기에 이들이 원하는 것을 들어준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의 후원자들이 지지하는 이스라엘의 현 총리 네타냐후가 승리하는 것을 돕기 위해 네타냐후가 그토록 원하는 것, 즉 골란고원을 이스라엘 영토로 인정하는 것을 속 시원하게 들어준 것이다.
지난 대선에서 트럼프 후보를 위해 8200만 달러(약 933억원)를 기꺼이 낸, 든든한 물주(物主) 애덜슨은 미국이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인정하여 예루살렘으로 대사관을 옮기는 것을 강력히 희망했다. 그는 대사관 이전 비용을 자신이 책임지겠다고까지 했다. 이날 트럼프 대통령은 애덜슨 부부에게 공개적으로 “우리는 당신이 원하는 것을 가져왔어요”라고 하면서 자신의 예루살렘 정책이 이 부부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고 말했다.
이란 핵협상 파기, 미국 대사관 예루살렘 이전, 매파 존 볼턴의 국가안보보좌관 임명 등 트럼프 대통령의 굵직굵직한 중동(中東)정책 이면에는 애덜슨의 입김이 서려 있다. 올해 85세인 애덜슨은 《포브스》에 따르면 385억 달러(43조9000억원)의 재산을 가진 2019년 기준 세계 21번째 억만장자다. 싱가포르의 랜드마크인 마리나 베이 샌즈 호텔, 마카오 최초의 라스베이거스 스타일 카지노도 그의 것이다. 그는 북한에서도 사업을 하기 위해 남북한 간 긴장이 완화되기를 적극적으로 희망한다.
‘NSC의 그림자 위원’
애덜슨은 대(大)이스라엘, 즉 팔레스타인을 인정하지 않고 점령지를 영구 병합한 이스라엘을 꿈꾼다. 이를 위해 네타냐후 총리를 지지한다. 그는 2014년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영구 점령하거나 요르단강 서안(西岸) 지역을 병합하고 팔레스타인 주민들에게 이스라엘 총선 투표권을 주지 않는다면 이스라엘이 비민주적인 국가가 될 것”이라는 의견에 대해 “그래서 무엇이 문제냐”고 대꾸했을 정도다.
2012년 미국 대선에서는 자신의 이스라엘에 반하는 정책을 내세운 오바마를 ‘반(反)이스라엘’로 규정하고 오바마 낙선을 위해 무려 1억5000만 달러(1707억원)를 공화당에 후원했다. 이제 그는 자신의 꿈과 희망을 트럼프 대통령을 통해 하나하나씩 이루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이러한 그를 가리켜 국가안전보장회의(NSC)의 ‘그림자 위원’이라고 부를 정도로 애덜슨은 음지(陰地)에서 트럼프의 중동정책에 강력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애덜슨은 ‘대이스라엘 정책’을 강력히 추진할 수 있는 네타냐후를 위하여 《이스라엘 하욤(Israel Hayom)》이라는 신문사까지 만들어주었다. 네타냐후의 애칭 ‘비비’를 따서 ‘비비턴(Bibiton·비비 뉴스페이퍼)’이라고 불릴 정도로 《하욤》은 네타냐후를 위한 용비어천가를 노골적으로 부른다. 이 신문은 타블로이드판 무료신문으로 해마다 약 400만 달러(45억6000만원)의 적자(赤字)를 기록하고 있다. 애덜슨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네타냐후를 위해 기꺼이 돈을 투척한다. 네타냐후는 공개적으로 “《이스라엘 하욤》이 아니었다면 선거에서 이기기 어려웠다”고 말한 적이 있을 정도다. 애덜슨과 네타냐후의 관계는 네타냐후 부패 스캔들이 터지면서 소원해졌지만, 애덜슨은 자신의 목표인 대이스라엘 건설을 향해 쉼 없이 정진하고 있다.
‘애덜슨의 인형’이 된 트럼프
▲3월 26일(현지시각) 시리아 곳곳에서는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이스라엘의 골란고원 주권을 인정한 것에 항의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사진=AP/뉴시스
한편 네타냐후는 트럼프 대통령의 사돈 찰스 쿠슈너와 절친한 사이다. 찰스 쿠슈너도 애덜슨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을 적극 지지하고 후원하는 인물이다. 언제인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네타냐후가 뉴저지주 리빙스턴에 있는 찰스 쿠슈너의 집을 방문했을 때 그의 아들이자 트럼프 대통령의 사위인 재러드가 자신의 침실을 내주고 지하 방에서 잤을 정도로 네타냐후와 쿠슈너 집안은 친분이 깊다. 트럼프 대통령, 네타냐후 총리, 찰스 쿠슈너 셋이 회동한 적도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친이스라엘 행보의 뿌리에는 애덜슨, 쿠슈너, 네타냐후가 있는 것이다.
사실 지난 대선 때 애덜슨은 공화당 경선에서 루비오(Marco Rubio)를 지지했다. 이를 두고 트럼프는 자신의 트위터에 “애덜슨은 루비오에게 큰돈을 주어 완벽하게 자신의 인형(puppet)으로 만들려고 한다”며 조롱했다.
트럼프는 당시 이스라엘 문제에 대해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이스라엘이나 팔레스타인 양측 모두 평화에 관심이 있는지 의심스럽다”고 했을 뿐 아니라 “이스라엘의 책임이 더 크다”고까지 했다. 2015년 12월 공화당유대인연합 모임에 나와 연설을 할 때 청중의 반응은 미지근했다. 예루살렘이 이스라엘의 수도인지 아닌지 명확한 견해도 밝히지 않았고, 그 때문에 야유까지 들어야 했다. 루비오 편에 선 애덜슨을 두고 “당신 돈을 내가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당신은 나를 지지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정치인들을 조종하고 싶어 한다. 그거야 뭐 괜찮다. 난 당신의 지지가 필요하지만, 당신의 돈이 필요하지는 않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이처럼 냉랭했던 트럼프와 애덜슨의 관계가 급격히 가까워진 것은 트럼프가 2016년 3월 미국 이스라엘 공공문제위원회(AIPAC) 연례 총회에 나가 이스라엘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주이스라엘 미국 대사관을 ‘유대민족의 영원한 수도 예루살렘’으로 이전하겠다”고 하면서부터다. 이 연설문 작성에 트럼프의 사위 쿠슈너와 네타냐후의 측근으로 주미 이스라엘 대사인 론 더머가 크게 도움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결국 이 두 사람이 트럼프와 애덜슨을 연결하는 중요한 고리가 되었다. 그리고 “루비오가 아니라 트럼프가 애덜슨의 인형이 된 것이 아니냐”는 말이 나올 정도로 둘은 밀착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네타냐후, “골란고원은 1967년 이전부터 이스라엘 땅”
실로 극적인 반전(反轉)이다. 2012년 밋 롬니를 지원했을 때 공화당유대인연합은 롬니가 트럼프처럼 빈정거리거나 비신사적인 언행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했을 정도로 트럼프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이제 연합의 고위 관계자는 “미국 유대인 사회에서 트럼프 지지세가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이는 그동안 트럼프가 매파들의 친이스라엘 정책을 충실히 따라주었기 때문이다. 이번 골란고원 역시 예외가 아니다.
이미 지난 3월 11일 네타냐후 총리는 트럼프 대통령 측근인 린지 그레이엄 미상원의원, 주이스라엘 미국 대사 프리드먼과 함께 골란고원을 방문했다. 네타냐후 총리는 “이곳이 1967년 이전부터 이스라엘인들의 땅이었다”면서 골란고원이 이스라엘 영토임을 재확인했다. 이스라엘 언론에서는 네타냐후의 골란고원 방문이 총선 전에 미국으로부터 골란고원이 이스라엘 땅임을 인정받고자 하는 움직임의 일환이라고 추측하면서, “만일 미국이 네타냐후 총리의 바람을 들어준다면 총선을 앞둔 네타냐후 총리에게 커다란 선물이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리고 정확히 10일 후인 3월 21일 트럼프 대통령은 “52년이 흐른 지금 골란고원이 이스라엘 영토임을 미국이 인정해야 한다. 이는 이스라엘과 역내 안정에 전략적으로 안보적으로 상당히 중요하다”는 트위터 메시지를 남겼다. 이어 네타냐후 총리의 미국 방문에 맞추어 3월 27일 골란고원을 이스라엘령으로 인정한 외교문서에 서명했다. 이로써 미국은 1981년 골란고원을 합병한 이스라엘을 공식적으로 지지하고 승인한 세계 유일의 국가가 되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재선을 위해 애덜슨 같은 유대계 부호의 도움이 필요한데, 이들이 바로 친이스라엘, 더 나아가 (극)보수적인 매파정책을 지향한다. 트럼프 대통령이 그 이전 그 누구도 하지 못했던 극도의 친이스라엘 정책을 과감하게 펴면서 국제사회를 놀라게 하는 결정을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힘이 정의다
팔레스타인 문제와 달리 지난 52년간 시리아와 이스라엘 양측은 골란고원을 두고 대립은 하되 분쟁은 자제해왔다. 아니 어찌 보면 시리아가 무력의 열세를 인정이라도 하듯 1973년 제4차 아랍-이스라엘 전쟁 때를 제외하고는 골란고원 탈환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반정부 감정을 지닌 시리아 주민은 정부가 골란고원을 찾기 위해 진지한 노력은 하지 않고 독재정권을 유지하는 데 골몰해왔다고 비판한다.
시리아가 골란고원을 되찾으려고 노력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2000년대 들어 반환협상이 있었지만, 별 진전이 없었다. 이스라엘은 반환 조건으로 시리아에 이란과의 관계를 끊으라고 요구했다. 시리아는 “이란-시리아 관계가 골란고원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반박했다.
이스라엘 수자원(水資源)의 30%를 차지하는 골란고원을 이스라엘이 쉽게 시리아에 내줄 리 만무하다.
골란고원은 포도주로 유명한 이탈리아의 토스카나와 비슷하다고 해서 ‘이스라엘의 토스카나’라고 불린다. 양(量)은 적지만 질(質) 좋은 포도주를 생산하기에 딱 좋은 곳이다.
이제 이스라엘의 골란고원 점령의 후원자로 미국이 전면에 나섰다. 국제사회의 힘의 균형에 변화가 오지 않는 한, 미국에 대항할 만한 강력한 국가가 나타나지 않는 한, 애덜슨처럼 부와 사상적 지향점이 분명한 부호가 새로운 반대의 길을 가는 정치인을 후원하지 않는 한, 어쩌면 시리아가 골란고원을 탈환하는 것은 불가능할지 모른다. 국제사회에서는 여전히 힘이 곧 정의다.⊙
06월 호
◆미국은 이란을 칠 것인가?
볼턴·애덜슨은 이란 공격 희망, 트럼프는 망설여
⊙ 美, 2003년 이라크 침공 전 “사담 후세인이 대량살상무기를 트럭으로 옮기고 있다…” 했는데, 이번에는 “이란이 탄도미사일을 배로 이동시키고 있다”고
⊙ 미국의 볼턴(Bolton), 이스라엘 총리 베냐민(Benjamin) 네타냐후,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 무함마드 빈(Bin) 살만, 아부다비 왕세제 무함마드 빈(Bin) 자이드 알 나하얀이 對이란 압박 주역 ‘4B’
⊙ 볼턴, 北-이란 핵무기 커넥션 경고… 유대인 부호 애덜슨은 이란 사막에 핵무기 투하 주장
▲지난 5월 10일 이란 수도 테헤란에서는 금요기도회를 마치고 나온 시민들이 反美·反이스라엘 시위를 벌였다. 사진=뉴시스/AP
이란을 겨누는 미국의 창끝이 급격히 날카로워지고 있다. 지난 5월 5일 지중해에 머물던 ‘에이브러햄 링컨’ 항공모함이 예정보다 앞당겨 중동(中東)으로 향했다. 루이지애나 기지에 있던 B-52 폭격전단도 5월 9일 카타르 우다이드 공군기지에 도착했으며, 5월 10일에는 수송상륙함 알링턴호가 원래 계획보다 앞당겨 페르시아만(灣) 지역으로 접근하고 있다. 미국은 이미 바레인·요르단·쿠웨이트·카타르·아랍에미리트에서 운용 중인 패트리엇 미사일 시스템도 증강 배치하기로 결정했다. 말 그대로 긴장감이 숨 가쁘게 높아가고 있다.
지난해 5월 8일 트럼프 대통령은 유엔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5개국과 독일이 이란과 맺은 JCPOA(포괄적공동행동계획)라는 핵 협정을 일방적으로 깨고 나온 뒤 이란에 경제제재를 다시 부과했다. 그리고 급기야 지난 5월 3일에는 한국·일본·중국·터키·인도가 더 이상 이란산(産) 원유(原油)를 수입할 수 없도록 제재유예 조치를 연장하지 않았다. 이란의 원유 수출을 완전히 틀어막아 숨통을 조이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다.
미국의 압박, 이란의 반격
미국이 핵 협정을 박차고 나가도, 석유 수출 길을 막아도, 이란은 예상과 달리 민감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전략적 인내’ 정책을 취해온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일방적인 핵 협정 탈퇴 1년이 되는 지난 5월 8일 하산 로하니 이란 대통령은 대(對)국민 생방송 연설에서 “미국을 제외한 핵 협정 당사국 4개국에 향후 60일간 이란의 금융과 원유수출 제재를 푸는 데 협력하지 않으면 JCPOA 일부 조항을 지키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핵 협정에 따르면 이란은 우라늄 농축을 3.67%까지만 할 수 있고, 최대 300kg만 보유할 수 있다. 또 플루토늄 생산에 쓰이는 중수 생산도 130t까지만 가능하다. 제한량 이상의 우라늄과 중수(重水)는 러시아와 오만에 반출하여야 하고, 분기마다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이를 감시한다. 그런데 두 달 안에 제재를 풀지 않으면 우라늄을 제한 이상으로 고농축하고 아락(Arak) 소재 중수공장을 현대화하겠다고 공표한 것이다.
이란은 미국과 달리 협정을 한번에 급격히 탈퇴하지 않고 조금씩 조건을 걸어 경제제재에서 벗어나는 전략을 세운 듯하다. 미국과 서유럽국(영국・프랑스・독일)・러시아・중국 간의 상호 간극을 벌려 이란에 유리한 합의를 만들어내려는 전략이다.
이란의 반격에 맞춰 미국은 군사자산을 페르시아만으로 집결하는 전략을 취했다. 여기에는 이스라엘이 한몫 단단히 했다. 이란이 선박으로 탄도미사일을 옮겨 중동 내 미군을 공격하려 한다는 첩보를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가 미국에 알려주었다는 후문이다.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군사력 증강은 이란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조치”라고만 할 뿐 이유를 밝히지는 않았다. 다만 그는 “미국이나 동맹에 대한 공격은 무자비한 힘으로 막을 것”이라고 하면서 “이란 정권과 전쟁을 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대리세력, 이슬람혁명수비대, 또는 이란 정규군의 어떠한 공격도 막을 준비가 완전하게 되어 있다”고 강조했다.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군사력 배치에 대해 “이미 전부터 준비해온 것”이라고 하면서 ‘헤즈볼라’ 같은 제3자가 미군을 공격해도 이란 정권에 직접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했다.
2003년 이라크 침공 전과 데자뷔?
전반적인 형세는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 김정은과 정상(頂上)회담을 하기 직전까지 미북(美北) 간 긴장이 최고조로 고조되어 가던 때와 유사하다. 다만 이란은 북한과는 달리 상당히 놀라울 정도의 참을성을 발휘하면서 상황을 관리해왔다는 것이 눈에 띄게 다르다. 전략적 인내를 거두고 핵 활동 재개 신호를 보내긴 했지만, 조건을 내걸고 상황을 두고 보겠다는 신중함을 잃지 않고 있다. 물론 이란이 유약한 모습만을 보인 것은 결코 아니다. 미국이 혁명수비대를 테러집단 명단에 올리자 이에 맞서 미군을 테러집단으로 지정하며 맞불을 놓았고,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 가능성을 내비치기도 했다.
그러나 이란은 북한과 달리 지나친 맞대응은 삼가며 가능한 한 외교적으로 문제를 풀려는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평소 ‘미국을 대하는 최선의 방법은 강하게 맞대응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온 이란이 미국의 일방적인 공세에도 흥분하지 않고 신중함을 유지하는 것은 외교적 해법을 최선으로 보기 때문일 것이다. 자칫 의도하지 않은 실수 때문에 군사력이 움직일 경우 이란이 처참한 전장(戰場)이 될 가능성을 피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최근 미군의 움직임을 2003년 이라크전과 비교하는 시각도 없지 않다. 2003년 미국은 이라크 침공 전에 “사담 후세인이 대량살상무기를 트럭으로 옮기고 있다”고 했는데, 16년이 지나 이번에는 “이란이 탄도미사일을 배로 이동시키고 있다”고 하는 것이 그냥 흘려듣기에는 의미심장하다는 말이다. 더욱이 미국은 지난 수년 동안 “이란이 미사일을 배에 실어 예멘 반군에 공급해왔다”고 말해왔는데, 갑자기 이러한 일이 어떻게 미군에 새로운 위협이 되는지 의아하다는 것이다.
이란 압박 주역 ‘4B’
▲미국의 反이란정책을 조장하는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 사진=뉴시스/AP
자리프 이란 외무장관은 해군력 동원, 이란 위협 대응이라는 일련의 미군의 움직임을 ‘B팀’의 모사라고 본다. 볼턴(Bolton), 이스라엘 총리 베냐민(Benjamin) 네타냐후,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 무함마드 빈(Bin) 살만, 아랍에미리트(UAE)아부다비 왕세제 무함마드 빈(Bin) 자이드 알 나하얀이 바로 이름에 B가 들어간 네 명의 B팀이다. 자리프는 트럼프가 아니라 이들 B팀이 이란과 전쟁을 원한다고 생각한다. 또 미국과 친미(親美) 국가가 안전하지 않은 것은 이란 때문이 아니라 이란을 싫어하는 이들 넷을 역내 국민이 증오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란을 탓해봐야 이러한 사실을 뒤집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사실 B팀의 파괴력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특히 볼턴이 문제다. 그를 현재 미국의 대이란 정책을 좌지우지하는 자리에 밀어 넣은 것으로 알려진 셸던 애덜슨에 주목해야 한다(《월간조선》 5월호 ‘트럼프가 골란고원을 이스라엘 영토로 인정한 이유’ 참고). 자리프의 말마따나 트럼프는 전쟁을 원하지 않을지 몰라도 볼턴과 애덜슨은 대통령과 다르다. 이들은 이란은 핵개발을 할 것이고, 이를 막는 방법은 군사적 타격밖에는 없다고 굳건히 믿고 이를 트럼프 대통령에게 관철시키고자 노력하기 때문이다.
▲무함마드 빈 자이드 알 나하얀(왼쪽) 아부다비 왕세제와 사우디 왕세자 무함마드 빈 살만(오른쪽)은 미국의 중동정책에 영향을 미치는 ‘4B’의 일원으로 꼽힌다. 사진=UAE공보부
2015년 볼턴은 《뉴욕타임스》 기고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란이 핵 프로그램을 협상하지 않을 것임은 피할 수 없는 결론이다. 이란이 광범위하고 심도 있는 무기생산체제를 건설하지 못하도록 제재가 막을 수 없을 것이다. 북한이 설계하고 건설한 사담 후세인의 오시락(Osirak) 원자로나 시리아 원자로를 1981년과 2007년 이스라엘이 공격한 것처럼 군사적 행동을 취해야만 원하는 것을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이 불편하지만 진실이다. 시간이 너무 없지만, 타격은 여전히 성공할 수 있다.”
볼턴, 北-이란 핵 커넥션 우려
▲볼턴의 후원자이자 對이란 강경론자인 유대인 부호 애덜슨. 사진=셔터스톡
우리에게는 꽤나 거북하고 불편한 일이지만, 볼턴은 북한이 중동의 핵개발에 밀접하게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는다. 백악관으로 들어가기 직전인 2017년 7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이란 반정부 단체 연례모임 연설에서는 북한과 이란의 핵 거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란은) 북한과 핵무기 및 탄도미사일 개발 협력을 지속적으로 늘려가고 있다. 이란이 핵 협정을 준수하고 있다고 하지만 이는 별 상관이 없다. 북한은 핵무기를 소형화하여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에 장착하여 미국을 때릴 수 있는 위험한 지점에 이미 가까워지고 있다. 북한이 그러한 능력을 갖추면 다음 날 바로 테헤란은 돈으로 살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핵확산이고, 이것이 바로 트럼프 대통령의 대북한관이 테헤란을 보는 시각과 유사한 이유다.”
북한과 이란이 핵개발 쌍둥이임을 강조하고 “이란의 핵개발을 무력으로 막아야 한다”는 지론을 펴는 볼턴을 백악관에 꽂아 넣은 인물은 애덜슨이다. 미국 카지노 산업 재벌로 이스라엘 우파의 든든한 후원자인 그는 핵공격을 해서라도 이란의 핵 야심을 저지해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는 인물이다. 2013년 뉴욕 예시바대학에서 오바마의 대화 정책을 비난하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무엇을 협상한다는 말인가? 나는 이렇게 말할 거다.
‘내 말 들어 봐. 너희에게 사막이 있잖아. 내가 뭔가 보여줄게.’… 휴대전화기를 들고 네브래스카 어딘가에 전화를 해서 ‘하자’라고 말한다. 거기에 핵폭탄이 있어, 탄도미사일에 올려서 사막 한가운데에 떨어뜨려. 아무도 다치지 않아. 방울뱀이나 전갈 뭐 그런 것들이 있을 뿐이야. 그러고 나서 말하는 거지.
‘다음은 테헤란 한복판이야. 이게 바로 비즈니스지. 너희 사라지고 싶어? 그럼 뻣뻣하게 계속 핵개발 해봐. 평화롭게 살고 싶어? 그럼 다 뒤집어. 너희가 원하는 전기에너지용 핵발전소를 가질 수 있도록 보장해줄게.’”
이란의 핵개발을 막기 위해 먼저 위협용으로 아무도 다칠 가능성이 없는 이란의 사막에 핵무기를 사용한 후 다음에는 테헤란에 쏘겠다고 위협하여 이란의 핵개발을 저지하자는 말이다. ‘말도 안 된다’고 모두가 귀담아듣지도 않은 말을 한 애덜슨이 이제는 트럼프 대통령의 중동 정책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사실은 예사롭지 않다. 이스라엘을 보호하기 위해서 이란의 핵 야심을 무조건 막아야 한다는 것이 애덜슨의 믿음이다.
이란 핵 시설 타격을 원하는 볼턴과 핵무기를 사막과 수도에 떨어뜨려서라도 이란이 핵개발을 포기하도록 해야 한다는 믿음을 지닌 애덜슨은 환상의 짝꿍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란의 숨통을 조이려는 애덜슨의 활약은 볼턴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2017년 10월 13일 트럼프 대통령은 이란과의 핵 협상을 불인정하면서 이란이 핵개발과 중동 내 불안 조장을 중지시킬 해결책을 의회, 동맹국과 함께 찾지 못할 경우 대통령 자신이 “언제라도 협정을 취소하겠다”고 선언했다. 모두를 놀라게 한 이 발언은 연설문 원안에는 없던 것이었는데, 바로 전날 애덜슨의 라스베이거스 사무실을 방문하고 있던 볼턴에게서 나왔다는 후문이다.
“볼턴은 우리를 전쟁으로 끌고 들어갈 것”
▲북한·이란에 대해 강경론을 주장하는 볼턴 美 국가안보보좌관. 사진=뉴시스/AP
트럼프 대통령은 볼턴이 호전적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볼턴을 국가안보보좌관으로 임명하기 전, 트럼프는 맥매스터 당시 국가안보보좌관에게 “볼턴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는 전화를 걸었는데, 통화 말미에 트럼프는 맥매스터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볼턴은 당신처럼 매파야. 우리를 전쟁으로 끌고 들어갈 거야.”
이란이 행동을 바꾸도록 유도했던 것이 오바마 행정부의 대이란 정책이었다면, 볼턴이 세 명의 B와 함께 유도하고 있는 트럼프 행정부의 대이란 정책은 정권을 바꾸는 데에 방점이 찍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정권교체가 쉬운 일은 아니다. 외부의 압박이 강하면 강할수록 이란 내부의 강경론자들이 더 힘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나마 반정부 목소리를 높이던 사람들도 국가적 위기 앞에서는 주춤거리는 경향이 크다.
더욱이 볼턴・줄리아니와 같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영향을 끼치는 인물들이 미는 반정부 단체는 이란인 대다수가 혐오하는 ‘무자헤딘 헐크(MEK·Mojahedin-e Khalq)’다. 이슬람과 사회주의를 혼합한 종교와 같은 폭력단체로, 2012년까지 미국 정부가 테러단체로 지정했던 조직이다. 현재 이란국민저항위원회(NCRI)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는 이 단체의 2017년 연례 모임에서 볼턴은 “2019년 모임을 테헤란에서 갖자”고 하여 청중의 환호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볼턴이 약속한 이슬람혁명 40주년 전 이란 체제 붕괴는 이미 석 달이나 지났다.
무자헤딘 헐크는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사담 후세인의 편을 들어 수천명 이상의 이란인을 죽인 단체다. 이런 단체를 제아무리 현 이슬람체제 정부가 싫다 하더라도 이란 사람들이 대안(代案)으로 인정할 수 있을까? 더군다나 이들은 미국인을 죽이고 암살을 시도한 전력(前歷)을 가지고 있다. 누구보다도 폭력적인 이들이 테러단체 명단에서 빠진 것은 출처 불분명한 자금으로 미국 유력인들에게 지속적으로 로비를 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지배적이다. 이란국민저항위원회는 많은 돈을 주어 유력 인사들을 연사로 활용하고, 정치후원금도 듬뿍 기부하고 있다. 그래서 미국의 유명한 이란 전문가는 “이 단체와 연계된 사람은 청렴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한다”고 단언한다.
트럼프, 전쟁 원치 않아
볼턴의 호전적인 행보에 트럼프 대통령은 아직 발을 맞추고 있지 않다. 경제・군사적으로 이란에 강력한 위협을 가하지만 대화를 포기하지 않고 있다. 2017년 이란 측에 따르면 무려 8차례에 걸쳐 트럼프 대통령은 로하니 이란 대통령과 만남을 시도했다고 한다.
지난 5월 9일 트럼프 대통령은 이란이 자신에게 전화를 주길 바란다고 공개적으로 말했다. ‘주이란 스위스대사관에 자신의 번호를 남겨두었으니 언제라도 연락하라’는 말이다. 소식통에 따르면 스위스는 이란 측이 요구하기 전까지는 먼저 전화번호를 주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아락치 이란 외무차관은 “미국 측이 내 전화번호를 알고 있으니 먼저 전화를 해야 할 것”이라고 답했다. 대화 분위기가 쉽게 조성될 것 같지는 않지만, 적어도 자리프 외무장관이 지난 4월 밝힌 대로 이란과 전쟁을 원하는 사람은 트럼프 대통령이 아니라는 점만은 확실해 보인다. 백악관은 “트럼프 대통령이 대화를 제의한 것은 진심”이라고 부연했다.
매티스 국방장관이 물러난 이후 트럼프 행정부의 대이란 목소리는 볼턴이 주도하고 있다는 것이 중평이다. 매파인 볼턴은 트럼프 대통령을 전쟁의 불구덩이로 인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미국이 진정 이란과 전쟁을 하고자 한다면, 먼저 레바논의 헤즈볼라나 시리아의 이란 혁명수비대를 제어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지적한다. 이란을 타격할 시 후방에서 미군과 이스라엘을 공격할 것이 불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재선(再選)을 노리는 트럼프 대통령은 그가 그토록 싫어하는 ‘돈 많이 드는 전쟁’은 당연히 안 할 것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미국 내 휘발유 값이 ‘유가(油價) 천장’이라고 하는 1갤런(3.78리터)에 3달러를 넘으면 재선이 어렵다는 것이 중평이다. 이란과 전쟁을 하면 하루 평균 원유 물동량이 1800만인 호르무즈 해협은 전 세계 유가를 지옥으로 인도할 것이다. 하루 160만 배럴의 원유를 생산하는 리비아가 2011년 혼돈에 빠졌을 때 우리나라 휘발유가가 2000원을 넘었다. 그보다 10배가 넘는 원유 길이 막힌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굳이 상상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트럼프, “이란은 나에게 전화해야 한다”
그렇다면 트럼프 대통령은 무엇을 바라는가? 이란이 자신과 다시 제대로 된 협정을 맺길 원한다.
“그들은 나에게 전화를 해야 한다. 함께 앉아서 우리는 공정한 협상을 할 수 있다.… 이란을 다치게 하길 원하지 않는다.… 나는 그들이 강하고 위대하기 바라고, 훌륭한 경제를 갖길 원한다. 나에게 전화를 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그들과 대화에 나설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말이다. 이쯤 되면 “볼턴은 이란 최고지도자 하메네이가 트럼프 대통령에게 친서(親書)를 보내는 것을 가장 두려워할 것이다”는 농담이 실감 난다. 친서라도 받으면 트럼프 대통령이 즉각 대화에 나설 것이기 때문이다. “이란이 트럼프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볼턴이 차단한 것 아니냐?”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어쩌면 이란이 미국의 전략자산 전개를 위협용이라고 평가절하하는 이유도 B팀과 달리 트럼프 대통령은 전쟁 의욕이 없다고 평가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이 누구인가! 그가 어떤 결정을 할는지는 정말이지 오로지 신(神)만이 아실 것이다.⊙
박현도
1966년생. 서강대 종교학과 졸업, 캐나다 맥길대 이슬람학 석사 및 박사(수료), 이란 테헤란대 이슬람학 박사 / 현 명지대 중동문제연구소 인문한국 연구교수,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중동연구회전문위원, 종교평화국제사업단 영문계간지 《Religion & Peace》 편집장 / 저서 《법으로 보는 이슬람과 중동》 《IS를 말한다》 등 공저 다수◎
■2018.01.20 이란·미국은 왜 철천지원수 됐나
오늘도 스마트폰만 들면 먼 나라 소식들이 들려옵니다. 중동의 자살 테러, 아프리카의 독재자, 지중해를 떠도는 난민들의 이야기가 실시간으로 전해집니다. 뉴스를 볼 땐 착잡하다가도 다른 기사를 클릭하다 보면 어느새 무뎌지곤 하죠.
그런데, 같은 이야기를 영화로 보면 어떠신가요. 스크린 속 인물들에 몰입해 함께 웃고 울다 보면 그 상황이 그저 남의 일로만 느껴지진 않을 겁니다. 먹먹한 감정이 며칠이나 일상 속에서 일렁이기도 하죠.
제가 국제 뉴스를 ‘영화’ 이야기를 통해 소개하려는 이유입니다. 머나먼 곳에서 일어난 일이라 해도 우리와 무관한 일은 없으니까요.
그 첫 번째 편은 ‘이란과 미국’입니다. 때로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일이 펼쳐지기도 했던, 중동의 맹주와 세계 최강국의 수십 년에 걸친 애증의 역사는 어땠을까요.
▲알리 하메네이 이란 최고지도자 [AFP=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연합뉴스]
최근 이란과 미국 관련 뉴스를 질리도록 보셨을 겁니다.
요약하면, 이란에서 경제난 등의 문제로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는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옳다구나’하고 시위대를 지지, 이란 정부가 인권을 탄압한다며 마구 비판한 일입니다.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 이란 최고지도자도 지지 않고 트럼프가 ‘정신병 환자’라 비난했죠. 날 선 공격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쏟아지는 뉴스 속에서 혹시 이런 궁금증이 들진 않으셨나요.
‘이란과 미국은 도대체 왜 이렇게 사이가 나쁠까? 설마… 나만 몰라?’
두 나라는 왜 이리 철천지원수가 됐을까요? 믿을 수 없겠지만, 이란과 미국은 한때 혈맹이라 할 정도로 가까웠는데 말이죠.
그 애증의 역사를 알려면 시간을 되돌려 1979년으로 가야 합니다. 할리우드 톱스타 벤 애플렉이 감독과 주연을 겸한 영화 ‘아르고’(2012)를 먼저 보시죠.
◇ ‘스파이의 소굴’ 미국 대사관을 점거하라!
▲영화 '아르고'의 한 장면. 성난 시위대가 미국 대사관 앞으로 향했다.
1979년 11월 이란 테헤란의 미국 대사관.
건물 앞을 가득 메운 성난 시위대를 창문 너머 바라보는 미국인 직원들이 덜덜 떨고 있습니다. 이란 독재 정권 팔레비 왕조를 무너뜨리자는 ‘이슬람 혁명’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던 때였죠. 사람들은 독재자 무함마드 레자 샤(‘샤’는 페르시아어로 왕을 뜻함) 팔레비의 망명을 받아준 미국에 ‘샤를 내놓으라’며 시위를 벌이다 급기야 대사관을 점거했습니다.
그런데 이 난리 통을 틈타 직원 6명이 몰래 탈출해 캐나다 대사관으로 향합니다. 들키면 처형될 것이 뻔해 꼼짝없이 이곳에 숨어있어야 했죠. 미국 정부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 중앙정보국(CIA) 요원 토니(벤 애플렉)가 묘안을 냅니다.
“이 6명을 캐나다 영화 제작자로 속입시다. 할리우드 SF 영화를 찍기 위해 이란에 로케이션 헌팅을 간 거라고 하자구요!”
속이려면 제대로 해야겠죠.
토니는 영화 제작자의 도움을 받아 할리우드에 사무실을 차리고, 배우를 캐스팅하고, 미디어를 초청해 파티를 여는 등 온갖 ‘쇼’를 벌입니다.
▲영화 '아르고'의 한 장면. 가짜 영화 '아르고'를 열심히 준비하는 모습.
▲영화 '아르고'의 한 장면. CIA 요원 토니(벤 애플렉) 뒤로 호메이니의 초상화가 보인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테헤란을 찾은 토니의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은 살벌합니다. 총을 든 혁명수비대가 곳곳에서 감시하고 있고, 처형된 사람들의 시신이 크레인에 걸려있죠. 어쨌든 토니의 작전은 성공합니다. 말도 안 된다고요? 그러나 엄연히 실화입니다. (물론 미국인의 시각에서 그린 탓에 이란에선 크게 분개했죠.)
영화는 여기서 끝나지만, 나머지 인질 수십 명은 무려 444일이나 억류돼 있었습니다. 미국으로선 참으로 체면을 구긴 일이었고, 이란과 미국의 관계는 나빠질 대로 나빠졌죠.
◇ 소련과 석유 때문에 독재자 지원한 미국
▲영화 '아르고'의 한 장면
그런데 말입니다.
단지 미국이 샤의 망명을 받아줬다는 이유만으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사실 미국을 향한 이란인들의 분노는 수십 년간 쌓인 것이었습니다.
좀 더 시계를 돌려보지요.
제국주의가 전 세계를 삼킨 20세기 초, 페르시아 제국의 영광을 쓸쓸히 흘려보낸 이란은 러시아와 영국의 반식민지 상태에 있었습니다. 지정학적 요충지였을 뿐 아니라 석유가 펑펑 솟아나는 땅이었으니까요. 이란은 신생 강대국 미국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싶었지만, 러시아와 영국이 틈을 줄 리가 있나요.
그러다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집니다. 영국ㆍ소련ㆍ미국은 같은 편이 됐죠. 미국은 소련에 전쟁 물자를 공급해야했는데, 가장 안전한 보급로가 이란이었습니다. 레자 샤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그토록 동경하던 미국을 받아들입니다. 군대를 비롯한 모든 걸 ‘미국식’으로 바꾸기 시작했죠. 이란과 미국의 밀월 관계가 시작된 겁니다.
▲1950년 2월 16일 이란 테헤란의 상원 의회에서 국왕(Shah) 취임 선서를 읽는 무함마드 레자 팔라비(팔레비). [사진 위키피디아]
전쟁이 끝나자 이번엔 미국과 소련의 냉전이 시작됐습니다.
미국은 중동에 소련의 세력이 뻗는 걸 막기 위해 이란을 ‘절대 방어’해야 했습니다. 영원한 우방 이스라엘 또한 지켜야 했고, 석유야 말할 필요도 없었죠. 미국과 이란 관계는 더욱 끈끈해졌습니다.
그런데 1951년. 샤의 독재를 비판하던 무함마드 모사데크 총리가 ‘이란 석유를 이란인의 손에 주겠다’며 석유 국유화를 단행합니다. 원유를 헐값에 가져가던 영국 석유 기업들과 미국은 깜짝 놀랐죠.
결국, 미국과 영국은 막강한 자금으로 쿠데타를 부추겨 모사데크를 제거, 망명했던 레자 샤를 다시 불러와 친미 정권을 세웠습니다. 엄청난 군사ㆍ경제적 원조를 해주고 석유회사도 세웠죠.
샤는 반발하는 시민들을 비밀경찰 ‘사바크’를 동원해 폭력으로 짓밟았습니다. 그런데 사바크에 끔찍한 고문 기술을 알려준 건 누구였을까요?
“CIA는 ‘해외 내부안보프로그램(Overseas Internal Security Program)’이라는 프로젝트를 통해 25개국에서 군과 경찰 77만 1217명을 훈련시키는 한편 이란, 이라크 등 (기타 수많은 나라)의 비밀경찰 창설을 지원했다.”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中)
▲이란 '이슬람 혁명'을 이끈 지도자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 [사진=위키피디아]
마침내 종교 지도자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를 중심으로 혁명이 발발합니다.
미국의 지원, 석유 수출 등으로 경제성장률은 연 40%에 달했지만, 빈부 격차는 심했고 서민들의 삶은 나락으로 떨어졌기 때문이었죠.
“이란의 반(反)샤 운동은 20세기에서, 아니 인류사에서 최대 규모의 대중운동이었다”(『이란과 미국』 中)
혁명은 성공했지만, 혼란은 계속됐습니다. 자유주의자들과 보수적 종교 세력 등 여러 집단 간 싸움이 격렬해진 거죠. 당시 상황이 어땠느냐고요?
애니메이션 영화 ‘페르세폴리스’(2007)는 이 시절을 온몸으로 통과한 소녀 마르잔을 통해 당시 분위기를 보여줍니다. 이란 출신 감독 마르잔 사트라피의 자전적 이야기이기도 하죠.
▲영화 '페르세폴리스'의 한 장면. 미국이 괴물처럼 묘사돼 있다.
독재자를 쫓아냈다는 소식에 마냥 신나던 소녀는 자유를 위해 싸워온 삼촌이 처형당하자 혁명에 의문을 품기 시작합니다. 아디다스와 이소룡을 좋아하던 마르잔은, 차도르와 정숙을 강요하는 문화에 적응하지 못하죠. 억압적인 분위기 속에서 몰래 파티를 열고 암시장에서 서방 팝가수들의 음반을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 소녀의 눈을 통해 전해집니다.
▲영화 '페르세폴리스'의 한 장면.
그러다 진짜 큰일이 터집니다.
1980년 9월, 이웃 나라 이라크가 침공해온 거죠.
◇ 이란-이라크 전쟁, 미국은 또 이란을 버렸다
이라크 후세인 정권은 이란이 내분을 겪자 이때다 싶었습니다. 종교ㆍ영토 문제에 유전 지대를 두고 벌어진 전쟁이었죠. 이라크군의 위력은 가공할 만했습니다. 게다가 이란군 동향을 샅샅이 찍은 위성사진도 이라크의 손에 있었죠. 누가 줬을까요?
네, 미국이었습니다.
이란 사람들은 미국이 이라크를 조종한다고 여겼습니다. 그리고 종교 지도자 호메이니 아래 단결해 치열하게 싸웠죠.
그런데 미국은 이 전쟁 중에 이상한 짓을 벌입니다.
분명 이라크에 최첨단 무기를 지원하면서도 뒤로는 이란에도 몰래 무기를 판 겁니다. 당시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은 적국인 이란에 무기를 판 돈으로 니카라과에 있는 ‘콘트라 반군’을 지원했습니다. 바로 이란-콘트라 스캔들입니다. 니카라과에서 좌파 혁명이 성공하자 친미 우파 반군을 지원하기 위해 필요한 자금을 이란에서 뽑은 거죠.
▲영화 '페르세폴리스'의 한 장면. 이란과 이라크의 전쟁을 묘사하고 있다.
‘페르세폴리스’에서 마르잔의 아버지는 이렇게 말합니다.
“서방세력은 이라크와 이란 양쪽에 무기를 팔았단다. 우린 농간에 놀아난 셈이지.”
그러다 1988년 7월, 미군이 이란 민간 항공기를 폭격기로 ‘오인’해 격추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물론 이란 사람들은 ‘오인’임을 믿지 않았죠. 그러나 이 전쟁을 끝내기로 합니다. 울며 겨자 먹기로 유엔(UN) 결의안을 받아들입니다.
◇ 두 나라는 화해할 수 있을까
이후에도 여러 갈등이 있었지만, 두 나라의 관계가 좋아질 기회는 있었습니다.
미국-이라크의 걸프전(1991년) 때 이란은 중립을 지켰고, 2001년 미국이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정권과 전쟁을 벌일 때, 탈레반과 대립하는 북부동맹을 도왔죠. 이유야 어찌 됐든 미국에는 도움이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한번 틀어진 관계는 쉽게 회복되지 못했습니다.
2002년 이란 핵 관련 시설 위성사진이 공개된 이후에는 악화일로로 치달았습니다. 버락 오바마 정부 시기인 2015년 핵 협정을 맺으며 잠시 해빙기를 맞았지만, 트럼프 대통령 집권 이후 핵 협정 이행 여부를 놓고 다시 대립이 격화되는 중입니다.
▲이란 테헤란의 아자디 타워. 아자디(Azadi)는 페르시아어로 '자유'라는 뜻이다. [AFP=연합뉴스]
그러나, 이란은 미국이 결코 함부로 할 수 없는 나라입니다.
이 나라는 레바논의 헤즈볼라, 팔레스타인의 하마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시리아의 아사드 정권 등에 큰 영향력을 가진 역내 강국입니다.
무엇보다 이란 사람들은 ‘대(大) 페르시아 제국’의 후손이라는 자긍심이 엄청납니다. 혁명을 이뤄낸 자부심도 커서 ‘아랍의 봄’(2011년 아랍권 민주화 운동) 또한 이란 혁명 정신의 영향이라 보죠.
▲2013년 부산을 찾은 모흐센 마흐말바프. [사진제공=라희찬(STUDIO 706)]
2013년 가을, 저는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이란의 거장 영화감독 모흐센 마흐말바프를 인터뷰한 적이 있습니다.
그의 작품은 이란 문화에 대한 자긍심과 함께 현실에 대한 통렬한 비판으로 유명하죠. 10대 시절 레자샤 정권에 치열하게 맞섰다던 그는 말했습니다.
“경찰에 총을 맞아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고 심한 고문도 받았죠.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처절하게 싸웠습니다. 이후에는 영화와 예술에 빠졌어요. 그러나 그 무엇을 하든 제게 중요한 것은 항상 사람, 사람이었습니다.”
사실 그는 혁명 이후에도 억압적인 종교 보수 세력에 비판의 날을 세운 탓에 갖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이란 민중에 대한 사랑과 조국에 대한 자긍심을 늘 가슴에 품고 있었던 거죠.
최근 시위를 벌인 이란 사람들은 어쩌면 또 다른 마흐말바프, 마르잔일지 모릅니다. 단순히 ‘세계 최강대국의 적국’에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요.
‘페르세폴리스’에서 마르잔은 결국 이란을 떠납니다. 공항에 선 마르잔의 귓가엔 아버지의 말이 맴돕니다.
“네가 누군지, 또 어디서 왔는지 잊지 말거라.” ◎
임주리의 영화로운 세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