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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스토리11/ 세계의 분쟁史6/ 박현도의 이슬람 들여다 보기3/ 2018.01월 호(월간조선) 빈 살만의 새로운 사우디아라비아 - 12월 호 王政 비판하다 慘殺된 사우디 언론인 카슈끄지

상림은내고향 2022. 11. 13. 18:26

글로벌 스토리11/ 세계의 분쟁史6/ 박현도의 이슬람 들여다 보기3/

2018년  01월 호 월간조선 

◆[빈 살만의 새로운 사우디아라비아]

⊙ “디스코장을 여십시오”(이란 팔레비 국왕) vs. “폐하 국민의 90%는 무슬림”(파이살 사우디 국왕)
⊙ 살만 사우디 국왕, 1979년 호메이니 혁명이 시작되기 전 300년간 우리나라는 테러나 극단주의를 모르고 살아왔다”
⊙ 빈 살만 왕세자, “이란의 하메네이는 ‘중동의 히틀러’… 1979년 이란혁명 체제 무너뜨리기 전에는 중동평화가 없다
⊙ 미국-사우디-이스라엘, ()이란 전선 구축

▲살만 국왕과 아들 빈 살만 왕세자.
반대파를 숙청한 빈 살만 왕세자는 조만간 왕위를 계승할 것으로 보인다. 사진=뉴시스

 

무함마드 빈 살만(Muhammad bin Salman). ‘살만의 아들 무함마드’라는 이름이다. 현 사우디아라비아 국왕 살만(1935년생. 2015년 국왕 즉위)의 아들로 왕세자다. 우리가 성()을 쓰는 것과 달리 아랍인들은 전통적으로 개인 이름 뒤에 빈(이븐)을 붙여 ‘누구의 아들’이라는 이름을 쓴다. 이슬람의 예언자 무함마드는 아버지 이름이 ‘압둘라’라서 무함마드 빈 압둘라다. 빈을 계속 붙인 이름도 있는데, 이 경우 조부, 증조부, 고조부의 이름을 쉽게 알 수 있다
  
 
빈 살만은 젊은 왕세자다. 1985 8 31일생이니 만으로 32세다. 1932년 사우디아라비아의 국부(國父) 압둘아지즈(1875~1953) 초대(初代) 국왕 이후 왕국은 국부의 아들들이 줄곧 왕위를 수평상속 해왔다. 압둘아지즈가 자신의 아들들이 모두 왕위에 오르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2015년 살만 국왕은 이복(異腹)동생 무크린(1945년생)을 왕세제에서 해임하여 세대교체의 틀을 닦았다. 그러고는 조카 무함마드 빈 나이프(1959년생)를 왕세자로 삼았다가 다시 2017 6 21일 전격적으로 자신의 아들을 차기 왕세자로 끌어올렸다. 살만 국왕이 왕위를 곧 아들에게 물려줄 것이라는 추측이 끊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조만간 젊은 왕이 다스리는 사우디아라비아를 보게 될 전망이다.
  
 
신세대 왕세자라서 그런지 빈 살만의 언행이 파격적이고 심상찮다. 무엇보다도 그가 생각하는 이슬람이 그동안 사우디아라비아의 트레이드마크였던 강경 보수 와하비(Wahhabi) 이슬람과 다른 모습이다. 빈 살만은 “우리는 단지 과거 우리가 따랐던 세계와 모든 종교에 열린 온건한 이슬람으로 되돌아가고자 한다”고 말한다.
  
 
예언자 무함마드 시대에는 음악도 있었고, 여성이 지도자 역할도 했는데, 지금 그렇게 못한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젊은 왕세자의 생각이다. 그동안 금지하였던 여성 운전을 허용하기로 하고, 남녀부동석(男女不同席)의 전통을 깨고 남녀가 섞여 앉아 보는 콘서트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열린 것도 이러한 변화의 일환이다. 35년 만에 영화관이 다시 등장한다. 말 그대로 변혁이 시작되었다. 이와 함께 살만 왕세자가 지극히 보수적인 와하비 종교지도자 제거에 나선 것은 굳이 말할 필요조차 없다
. 


  
‘유일신론자’ 압둘 와합  

  와하비란 사우디아라비아 건국 종교이념을 제공한 무함마드 이븐 압둘 와합(1703~1792)의 사상을 따르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와하비는 스스로를 무와히둔(Muwahhidun), 즉 유일신론자(唯一神論者)라고 불렀다. 이들은 믿음과 불신(不信)을 엄격하게 구분하여, 종교적 성인(聖人)의 무덤에서 중재를 구하는 기도를 하거나, 성묘(聖墓)를 성스럽게 여기고 성인과 사물을 중히 여기는 마음이나 행위를 모두 불신앙으로 간주하였다. 당시 사람들에게 널리 퍼져 있던 대중적 믿음 형태를 타파해야 할 대상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메디나에 있는 예언자 무함마드의 묘도 파괴하려고 하였고, 시아파 이맘과 가족의 묘는 이미 없애 버렸다.
  
 
이븐 압둘 와합은 스스로가 밝혔듯 네 가지 점 때문에 유명하였다.
  
 
첫째, 유일신성(唯一神性)을 엄밀히 주장하였다.
  
 
둘째, 다신(多神) 숭배가 무엇인지 어떠한 행위가 다신 숭배인지 규정하고 설명하였다.
  
 
셋째, 유일신 신앙에서 벗어난 사람들을 불신자로 선언하였다.
  
 
넷째, 불신자와 맞서 싸우라는 신의 명령을 따랐다. 그러나 당시 학자들은 이븐 압둘 와합의 이슬람법학 해석 능력을 신뢰하지 않았다. 법학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고 평가하였다. 사실 그 누구보다도 그의 친형제인 술레이만이 그가 지닌 신앙관을 비판하고 나섰다.
  
 
“하나님 외에 신은 없고 무함마드가 그분의 종이고 사도라고 증언하며 예배, 희사, 라마단월 단식, 순례를 행하고, 하나님, 천사, 성서, 사도를 믿는 사람들을 불신자라고 선언하고 있다.… 그들을 불신자로 만들고 그들이 사는 곳을 전쟁터로 만든다. 우리는 묻는다. 이러한 이슬람법 해석을 어디에서 가져왔는가?
  
 
이븐 압둘 와합은 엄격한 유일신론을 자의적(恣意的)인 잣대로 적용하면서 주변의 무슬림을 불신자로 간주하였고, 그런 생각 때문에 메디나에서 추방당하기도 하였다. 그러했던 그가 자신의 이슬람 해석을 펼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것은 메카와 메디나가 위치한 히자즈 지방 다르이야의 부족장 무함마드 이븐 사우드(1710~1765)를 만나면서였다. 둘은 의기투합하여 이븐 압둘 와합의 종교사상이 바탕이 되는 새로운 정치공동체를 만들기로 하였다. 이븐 압둘 와합이 불신자로 규정한 무슬림들을 무찌르기 위하여 성전(聖戰)을 선언한 것이다. 이로써 이븐 사우드의 무력과 이븐 압둘 와합의 종교사상이 결합한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의 서막이 올랐다. 이처럼 18세기에 시작한 사우디아라비아는 역사적으로 여러 부침을 겪은 끝에 오늘날 아라비아 반도의 주축국으로 굳건히 자리 잡았다
. 

 
  
와하비, TV 방송도 반대

▲점진적 개혁을 추구했던 파이살 전 사우디 국왕.

 

그런데 문제는 건국의 종교이념이 된 와하비 사상이다. 이븐 압둘 와합 이래 순수한 이슬람 신앙을 강조하고 이에 합당한 신앙인의 개념이 지나치게 엄격하기에 새로운 문물이나 생각이 국가 발전을 이끌어 나가기 어려워졌다. 특히 과학문물을 바탕으로 발전하는 근대국가에서 문제는 심각할 수밖에 없었다.
  
 
텔레비전이 좋은 예다. 와하비 종교지도자들은 여러 해 동안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의 국영 텔레비전 방송국 설립을 반대하였다. 이슬람이 형상을 금한다고 해석하는 이들에게 인간의 형상을 보여주는 텔레비전이 곱게 보일 리 만무하였다.
  
  1965
년 코란 낭송을 시작으로 사우디아라비아에 처음으로 텔레비전 방송 송출이 시작되었다. 이에 격분한 와하비주의자들이 1966년 방송국을 공격하였다. 파이살 국왕(재위 1964~1975)의 조카이자 와하비주의자였던 칼리드 이븐 무사이드 왕자가 이때 시위에 참가하였다가 경찰의 총에 맞아 사망하였다. 그리고 칼리드 왕자의 형제인 파이살 이븐 무사이드가 10년 후 파이살 국왕을 암살하였다. 조카의 총에 맞아 비극적으로 세상을 떠난 파이살 국왕은 텔레비전 방송뿐 아니라 사우디아라비아 여성 교육의 기반을 놓은 왕이다. 그가 여성을 위한 교육 시설을 만들 때에도 와하비주의자들의 반대가 심하였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종교적 정체성을 좌지우지하는 와하비주의자들이 강력한 상태에서 국왕이 근대화를 추진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1960년대 사우디아라비아가 직면해야 했던 종교문화적 난관과 파이살 국왕의 고민은 다음 편지에서 쉽게 짐작할 수 있다
.  

 
  
미국의 ‘쌍둥이 기둥’

▲급진적 서구화를 추구하다가 이슬람혁명으로 축출된 팔라비 전 이란 국왕.

 

  “나의 형제여, 근대화를 하십시오. 국가를 개방하십시오. 남녀공학 학교를 세우십시오. 여자들이 미니스커트를 입게 하십시오. 디스코(Disco)장을 여십시오. 근대화를 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저는 당신께서 왕좌를 지키실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폐하, 충고에 감사합니다. 저는 폐하가 프랑스의 샤(Shah·왕)가 아니시라는 점을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엘리제(Elysee) 궁에 사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란에 계십니다. 폐하 국민의 90%가 무슬림입니다. 이 점을 잊지 마십시오.
  
  1960
년대 후반 이란의 국왕 팔레비와 사우디아라비아 국왕 파이살이 서로 주고받은 편지 중에 나오는 말이다. 팔레비 국왕이 사우디아라비아의 근대화를 권하자 파이살 국왕이 이란 국민 대다수가 무슬림이라는 점을 잊지 말라고 하면서 팔레비가 말한 근대화가 이슬람 문화와 잘 맞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텔레비전 방송국을 세우고 여성 교육의 기반을 닦는 등 근대화 작업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파이살 국왕은 이란과 달리 강력한 국내 와하비 무슬림 세력과 보수적인 이슬람 문화를 더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당시 이란은 왕정국가로 팔레비가 이른바 ‘백색혁명’이라는 이름의 근대화를 야심 차게 추진하고 있었다.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는 지금과는 달리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둘 다 미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던 친()서방 국가였다. 1970년대 냉전 시절 미국은 페르시아만을 사이에 둔 두 나라를 ‘쌍둥이 기둥(Twin Pillars)’이라고 부르며 소련의 위협으로부터 중동(中東)을 지키는 안보 동반자로 우대하였다. 이란은 이러한 시대상황을 사우디아라비아보다 더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중동에서 가장 근대화된 친미(親美)국가로 자리매김하였다.

    

  오해가 낳은 갈등 

  그러나 1979년 이란의 이슬람혁명은 이 모든 것을 단숨에 바꾸어 버렸다. 이란 왕정을 “이스라엘, 더 나아가 미국을 위한 군사기지”라고 비판한 호메이니의 지도 아래 이슬람혁명이 일어나 이슬람공화국이 들어선 것이다. 이제 사우디아라비아도 안심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미국과 이스라엘, 그리고 타락한 무슬림 정권을 비난하는 이란의 이슬람혁명 정신이 페르시아만 건너 사우디아라비아에까지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메카 대순례에서 이란 무슬림들의 시위와 구호를 보면서 사우디아라비아 당국은 종교행사가 정치 선동의 장()이 되었다고 분노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놀라움에 전전긍긍하였다. 사우디아라비아 동부 유전지대, 특히 세계 최대 유전지대에는 이란인들과 같은 시아파 자국민들이 집중 거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란 왕정을 무너뜨린 시아 형제들의 성공에 고무되어 이들도 사우디아라비아 왕정에 저항의 깃발을 들 수 있다는 생각에 전율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우려는 지금도 유효하다. 2016 1 2일 사우디아라비아가 자국(自國)의 시아파 지도자 니므르 안니므르를 전격 처형한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 간에 갈등이 심화된 데에는 오해도 한 원인이 됐다. 이란 순례자들이 메카 대순례에서 외치던 구호를 사우디인들이 잘못 알아들은 것이다. 이란인들은 “신은 가장 위대하시고(아크바르), 호메이니는 지도자(라흐바르)” “신은 한 분(와히드), 호메이니는 지도자(카히드)”라고 외쳤는데, 호메이니를 가리킨 말인 ‘라흐바르’ ‘카히드’를 ‘아크바르’ ‘와히드’로 오해하였다. 즉 “신은 가장 위대하시고, 호메이니는 가장 위대하시다” “신은 한 분, 호메이니는 한 분”으로 들은 것이다. 신성 모독의 다신론자들이라고 시아파를 오해하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
.   

 
  
사우디 국왕, “이란이 전 세계 테러 이끌어”

▲이슬람혁명 후 귀국하는 호메이니. 이란의 이슬람혁명은 사우디에 큰 충격이었다

 

  이란혁명 이후 사우디아라비아는 이란의 혁명 수출을 막기 위해 자신들이 진정한 무슬림이라는 점을 보여주어야만 하였다. 이란의 이슬람은 잘못된 것이고 사우디아라비아의 이슬람이 참된 이슬람임을 이웃 무슬림 형제들과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전과 달리 자체 관리를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와하비주의자들의 전성시대가 활짝 열렸다. 페르시아만을 사이에 두고 누가 진짜 무슬림인지 치열한 경쟁이 가열하게 진행되었다.
  
  2017
5월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하였을 때 살만 국왕은 1979년 이후 중동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호메이니 혁명 이후 현재까지 이란 정권은 전 세계 테러를 이끌어왔다. 1979년 호메이니 혁명이 시작되기 전 300년간 우리나라는 테러나 극단주의를 모르고 살아왔다. 이란은 선량한 이웃들을 모두 거부하였다.
  
 
사우디아라비아가 보기에 오늘날 중동과 세계를 혼미하게 만드는 무슬림 테러의 근본 원인은 1979년 이란혁명이다. 빈 살만 왕세자는 이렇게 진단한다.
  
 
“지난 30여 년간 일어난 일은 사우디아라비아의 모습이 아니다. 지난 30여 년간 이 지역에서 일어난 일은 중동의 모습이 아니다. 1979년 이란혁명 이후 여러 나라에서 이란의 모델을 베끼려고 하였는데, 사우디아라비아도 그중 하나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리고 문제가 전 세계로 퍼졌다. 이제 이를 없앨 때다.
  
 
그러니까 그동안 사우디아라비아는 이란이 선도한 경기에서 수동적으로 적응하면서 공세를 막기에 급급하여 자신의 경기를 하지 못했는데, 이제는 그렇게 하지 않고 이란이 만든 게임의 틀을 부수어 버리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이란은 극단주의 종교사상을 지닌 국가라서 사우디아라비아와 공통의 대화를 나눌 여지가 전혀 없다는 것이 빈 살만 왕세자의 평가다. 더군다나 그가 보기에
이란은 혁명 수출의 꿈을 버리지 않고 있는 나라다.    


  
‘시아초승달’

▲빈 살만 왕세자가 ‘중동의 히틀러’라고 부르는 이란 최고지도자 하메네이.

 

또 호메이니 혁명 이후 이란은 전 세계가 화를 내면 슬쩍 유연한 모습을 보여주어 비난의 화살을 피하는 강온 전략을 써왔고, 사람들은 이에 속아 왔다고 빈 살만은 분석한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이란의 술수에 속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한다. 더 나아가 빈 살만은 이란 정권이 사우디아라비아가 관장하고 있는 이슬람 성소(聖所)이자 예배 방향인 메카 정복을 꿈꾸고 있다고 하면서 그러한 전투가 사우디아라비아가 아니라 이란에서 일어나도록 힘쓸 것이라고 전의(戰意)를 다진다.
  
 
현재 중동에는 본격적인 반()이란 전선이 조성되고 있다. 2003년 사담 후세인 정권 붕괴 이후, 이라크에서는 시아파가 정권을 장악하여 같은 시아파에 속하는 이란에 유리한 역내 환경이 조성되었다. 2004년 압둘라2세 요르단 국왕이 걱정하면서 내뱉은 이란-이라크-시리아-레바논으로 이어지는 ‘시아초승달’이 그려진 것이다. 그리고 2011년 아랍의 봄 혼란기에 발생한 시리아 내전에서 친이란적인 바샤르 알 아사드 정권을 이란의 혁명수비대가 중심이 된 시아파 민병대가 지켜내면서 이란의 영향력이 아랍세계에서 더욱 강건해졌다. 사우디아라비아가 중심이 되어 아라비아 반도에서 이란 세력을 축출하려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러나 젊은 왕세자는 굴하지 않고 다시 공세를 시작하려고 한다. 이란의 최고지도자 하메네이를 ‘중동의 히틀러’라고 부르면서 이란의 신경을 건드리고 있다. 1979년 이란혁명 체제를 무너뜨리기 전에는 중동에 평화가 없다고 단단히 각오를 다지는 중이다.    


  
미국-사우디-이스라엘 공동전선

  이제 이러한 반이란 전선에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스라엘이 은밀히 손을 잡는 중이다. 공개적으로 발표만 하지 않았지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스라엘의 권력 핵심부가 상호 협조하고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이러한 사실을 비밀로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머리로 국가전략을 생각하는 지도층과 가슴으로 이스라엘을 대하는 왕정국민 여론 사이의 간극이 크기 때문이다. 친이스라엘, 친유대교 언행이 사회적 금기인 중동 무슬림 사회의 여론을 함부로 거스르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이스라엘은 이란만 빼고 역내 모든 국가와 우호관계를 넓히겠다고 선언하였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이미 “이란은 불량정권, 광신도 정권, 세계 최대 테러지원 국가”라면서 “죽음, 파괴, 혼란”밖에 모른다고 공개적으로 비판하였다. 이란핵 협상 폐기를 거론하며 이란을 전면적으로 압박하는 정책을 추진 중이다.
  
 
이러한 전개상황을 감안하면 2018년 사우디아라비아-이스라엘-미국의 반이란 전선이 더욱 강고해질 중동을 그다지 어렵지 않게 내다볼 수 있다. 이란은 러시아와 협력관계를 맺어 대응전선을 구축하려는 분위기다. 터키도 이러한 대립전선에서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빠르면 2017 12월 혹은 2018 1월이면 빈 살만 왕세자가 사우디아라비아의 국왕으로 즉위할지도 모른다. 과연 그동안 사우디아라비아와 중동을 옥죄어 온 1979년 이란혁명 체제를 무너뜨리려는 빈 살만의 꿈이 이루어질까? 아니면 이란의 경고처럼 빈 살만의 사우디아라비아가 운명을 걱정해야 할까? 중동의 새해는 실로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짙은 안갯속에서 시작한다.

 

 

02월 호

◆[아랍에미리트연방(UAE)은 어떤 나라인가?]

세습 ‘아미르’가 다스리는 7개 나라의 연방… ‘아미르’는 지도자·장군이라는 의미

⊙ 맏형 격인 아부다비와 둘째 격인 두바이는 경쟁과 공존 관계… 두바이를 아부다비보다 우선시하다가 낭패 보기도
⊙ 종교·영토분쟁 등으로 이란을 주적(主敵)으로 여겨…, 프랑스군 기지 유치
⊙ 중국은 ‘아랍연합추장국’이라고 불러…, 연방대통령은 아부다비 아미르가 맡아

▲두바이의 상징인 부르즈 칼리파.
두바이가 건설을 시작했으나 자금난에 처했을 때 아부다비의 아미르 칼리파의 도움을 받아 완공한 후, 그의 이름을 붙였다. 사진=삼성물산 제공

 

외국어를 우리말로 옮기는 것은 쉽지 않다. 아랍어는 더 심하다. 우리말에 없는 발음이 있기도 하지만 영어식으로 먼저 소개된 단어가 많아 원어(原語)대로 적으면 오히려 혼란을 불러일으키는 경우가 적지 않다. 십자군 전쟁의 영웅 살라훗딘은 살라딘, 전통 이슬람 정치체제의 최고지도자인 칼리파는 칼리프라는 영어식 표현으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다.
  
 
외래어 표기법에 따라 이슬람의 가장 큰 종파인 ‘순니(Sunni)’파의 아랍어 발음은 명확하게 ‘순니’임에도 불구하고 영어 발음에 따라 자음이 nn, mm처럼 겹칠 때는 하나만 쓴다는 원칙을 고수하여 ‘수니’가 표준어다. ‘섬머(Summer)’ 대신 ‘서머’가 옳은 표기인 것처럼 말이다.
  
 
서두부터 장황하게 아랍어 표기법을 설명하는 이유는 요즘 국내 언론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아랍에미리트’ 때문이다. ‘에미리트(Emirates)’라는 말은 아랍어 ‘이마라트(Imãrã)’를 영어식으로 표기한 것이다. ‘이마라트’는 ‘이마라(Imarah)’의 복수인데, ‘이마라’는 ‘아미르(Amîr)가 다스리는 땅’을 뜻한다.
  
 
무슬림세계에는 정치공동체 지도자를 부르는 명칭으로 칼리파(예언자 무함마드의 대리자), 말리크(), 술탄 등이 있다. ‘아미르’도 그중 하나로 ‘지도자’, ‘장군’을 뜻한다. ‘아미르’는 무함마드에게 붙은 명칭 중 하나이기도 하였는데, 이슬람의 예언자를 ‘신앙인의 지도자(아미르 알무으미닌)’라고 불렀다.
  
 
일반적으로 ‘아미르’는 무슬림 정치체제에서 군주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고, 아미르가 다스리는 나라를 ‘이마라’라고 한다. 토후국(土侯國)으로 번역하기도 하는데, 아미르가 다스리니 아미르국이라고 표기해도 무방하다. 칼리파가 다스리는 칼리파국(킬라파), 왕이 다스리는 왕국(마믈라카), 술탄이 다스리는 술탄국(술타나)처럼 말이다.
  
 
아랍에미리트는 이처럼 아미르가 통치하는 나라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나라다. 공식 국호를 가급적 정확하게 옮기면 ‘아랍이마라트연방(聯邦)’ 또는 ‘아랍아미르국연방’이고, 이를 영어 약자로 UAE(United Arab Emirates)라고 적는다. 일본은 아랍수장국연방(首長國連邦), 중국은 아랍연합추장국(聯合酋長國)이라고 부른다.

 

각각의 아미르국은 세습 왕정

▲칼리파 빈 자예드 알 나흐얀 UAE 대통령은 아부다비의 아미르이다.

 

오늘날 아랍에미리트연방은 아부다비(Abu Dhabi), 두바이(Dubai), 샤르자(Sharjah), 아즈만(Ajman), 움물꾸와인(Umm al-Quwain), 푸자이라(Fujairah), 라으술카이마(Ras al-Khaimah) 등 총 7개의 아미르국이 연합하여 만든 국가다. 원래 이들 아미르국은 19세기 초 이래 각기 영국과 협약을 맺어 보호를 받는 협약국(Trucial States)이 되었다가 독립했다.
  
 
라으술카이마를 제외한 여섯 아미르국이 1971 12 2일에 입헌연방국을 구성했다. 라으술카이마는 2달 후인 1972 2 10일에 7번째로 합류하여 아랍에미리트는 7개 아미르국이 뭉친 연방국가가 되었다. 총면적은 71024km²로 99720km²인 우리나라보다 조금 작다. 그중 83.7%를 아부다비 아미르국이 차지하고 있다. 총인구는 약 910만명이다. 이 중 아부다비에 약 290만명, 두바이에 약 270만명이 거주한다.
  
 
각각의 아미르국은 세습 왕정으로 독립성을 유지하면서 연방을 이루고 있다. 연방 설립 때부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아부다비와 두바이가 사실상 연방의 핵심 아미르국인데, 가장 면적이 넓고 자원이 풍부한 아부다비가 맏형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연방헌법에 따르면 아랍에미리트는 ‘종교, 언어, 역사, 공동운명으로 결합된 대아랍국가의 일원’이고, 연방 국민은 ‘아랍공동체의 일원’이다(6). 또 연방의 공식 종교는 이슬람이고, 이슬람법이 연방법의 주요 원천이며, 연방의 공식 언어는 아랍어다(7). 연방의 수도는 원래 아부다비 아미르국과 두바이 아미르국 국경지역에 건설하여 알카라마라고 부르기로 하였지만, 1996 7월에 아부다비 아미르국의 수도인 아부다비를 연방의 수도로 확정하였다.
  
 
연방은 1971년 성립 이래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있다. 5년 임기인 연방대통령은 현재 아부다비 아미르국의 셰이크 칼리파 국왕이 맡고 있다. 부통령은 두바이 아미르국의 무함마드 빈 라시드 국왕이다. 연방의 최고 권력기관은 7개 아미르국 통치자들이 참여하는 최고회의다. 이곳에서는 주요 안건을 5개 아미르국의 찬성을 얻어 결정하는데, 5표에 아부다비와 두바이의 찬성표가 포함되지 않을 경우 안건은 자동적으로 부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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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조개잡이로 시작

아랍에미리트는 1953년 아부다비 아미르국의 무르반밥(Murban Bab)에서 처음으로 유전(油田)이 발견되어 자원의 혜택을 받기 시작하기 전까지 진주조개잡이가 주산업이었다. 진주조개를 채취하기 위하여 사람들이 해변에 몰려들어 살면서 아랍에미리트의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전히 진주조개잡이는 아랍에미리트가 자랑하는 핵심 문화유산이기도 하다. 오늘날에는 진주양식업으로 전통 진주생산 산업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무르반밥 유전의 최초 원유 생산량은 불과 하루 3674배럴이었지만, 오늘날에는 25만 배럴이 나온다. 유전에서 112km 떨어진 제벨단나(Jebel Dhanna) 수출항까지 파이프라인을 연결하여 처음으로 원유를 수출한 1963 12 14일 이래 아랍에미리트의 원유생산 시설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현재 아랍에미리트의 총 석유매장량은 세계 7위에 해당한다. 2016년 하루 평균 석유생산량은 370만 배럴이었는데, 이 중 순수 원유는 290만 배럴이었다. 아랍에미리트는 2020년까지 순수 원유 생산량을 일일 350만 배럴로 늘리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산유국(産油國)이 겪는 공통적인 문제는 자원의존도가 지나치게 높다는 점이다. 아랍에미리트는 이 점을 그 어떤 산유국보다 먼저 간파하고 혁신적으로 의존도를 줄이고자 노력해 왔고, 상당부분 성공하였다. 정부 발표에 따르면 2014년 기준 국내총생산(GDP)에서 원유와 가스가 차지하는 비율은 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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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의 선두 주자 두바이

▲두바이가 관광산업 유치를 위해 조성한 팜 아일랜드.

 

산유국들은 차년도 예산안을 만들 때 당해 유가를 예측한 후 그에 맞추어 나라 살림살이 계획을 세운다. 예상보다 유가가 오르면 산타클로스 선물을 받은 것마냥 기쁘고 발걸음이 가볍지만, 유가가 예상치보다 떨어지면 발등에 불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불확실한 경제구조를 지니고 있다. 더욱이 자원에만 의존하여 손쉬운 돈벌이에만 전념하다 보니 비()석유가스 부문 산업이 취약하여 국가경제가 발전하기 어렵다.
  
 
자원부국의 경제가 지닌 이러한 구조적 모순을 깨닫고 아미르국 중 제일 먼저 혁신에 나선 곳이 바로 두바이다. 바다를 메워 그 위에 도시를 건설하고, 세계 어느 곳이나 10시간이면 닿을 수 있는 지리적 이점을 앞세워 아랍에미리트항공을 키우고, 오일달러를 유치하여 중동(中東)을 넘어 런던, 싱가포르, 홍콩의 자리를 넘보는 금융허브로 변신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지금 두바이는 현대 중동에서 발전의 모델이요, 혁신의 선두주자로 세계인의 뇌리에 각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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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과 공존

▲에티하드항공은 UAE의 맹주 아부다비가 두바이의 아랍에미리트항공에 맞서 설립했다.

 

그러나 아랍에미리트의 일등 아미르국은 두바이가 아니라 아부다비다. 아부다비는 두바이보다 15배 정도 더 큰 면적을 차지하고 있고, 아랍에미리트 내 확인된 석유 매장량의 약 94% 920억 배럴을 보유하고 있다. 두바이는 약 40억 배럴로 4%에 불과하다. 샤르자가 1.5%, 라으술카이마가 0.5%를 각각 차지하고 있다.
  
 
두바이에 뒤질세라 아부다비도 혁신과 발전을 거듭하여 아랍에미리트 전체 발전에 선순환(善循環)을 이루었다. 두바이의 아랍에미리트항공에 맞서 아부다비는 에티하드항공을, 크고 웅장한 두바이공항에 맞서 아부다비공항을 새롭게 단장하였다. 또 두바이에 필적할 만큼 현대적인 마천루를 도심에 세워 올리고, 각종 국제기업체와 교육기관을 유치하였다. 그 결과 아랍에미리트는 비석유가스 부문 산업이 활성화되었고, 현재 GDP에서 30% 정도를 차지하는 자원산업 의존도를 2021년에는 20%로 낮추고, 50년 내에 아예 0%로 만드는 계획을 야심차게 추진 중이다. 또 현재 약 80퍼센트에 달하는 재정수입의 석유수출 의존도를 낮추고 유가하락에 대응하기 위하여 올 1 1일부터 5퍼센트 세율의 부가가치세를 도입하였다.
  
 
자원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두바이는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남기 위해서는 몸부림을 쳐야 하는 숙명을 안고 있었기에 비자원 부문 발전에 몰입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반면 아부다비는 상대적으로 두바이보다 발전 계획에서 뒤처졌지만, 풍부한 자원을 바탕으로 혁신에 속도를 내면서 두바이를 쉽게 압도할 수 있다는 것이 세평이다.
  
 
사실 두 곳을 돌아보면 화려하고 번잡한 두바이가 서울 강남과 비슷하고, 아부다비는 조용한 성북동 부촌(富村) 같은 느낌을 받는다. 실제로 아부다비가 돈줄을 끊으면 두바이의 생존이 어려울 것이다. 이러한 아부다비와 두바이의 공존과 경쟁관계를 잘 모르고 우리 정부 관계자나 기업인이 아랍에미리트 입국 시 별 생각 없이 두바이에 먼저 들렀다 아부다비로 갔다가 아부다비측의 심사를 뒤틀리게 하는 바람에 곤욕을 치렀다는 말도 있다.     


  
이란이 주적(主敵) 

  1979년 이란의 이슬람혁명 이래 페르시아만을 사이에 두고 시아파 이란의 공화정과 순니파 아랍왕정국 간 갈등이 표면화되면서 아랍, 이슬람, 왕정이라는 공통분모를 띤 사우디아라비아, 바레인, 쿠웨이트, 카타르, 오만과 함께 아랍에미리트는 걸프아랍국협력회의(GCC)라는 친미 정치경제협의체를 만들어 이란에 대항해 왔다.
  
 
그러나 작년 6월 아랍에미리트가 사우디아라비아와 함께 카타르와 외교관계를 단절하면서 카타르가 이란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함에 따라 GCC가 내부적으로 붕괴되고 있는 중이다. 현재 아랍에미리트는 카타르와 외교를 단절하고 예멘 내전(內戰)에 참여하면서 사우디아라비아와 발을 맞추어 역내(域內) ()이란 전선을 구축하고 있다.
  
 
아랍에미리트는 이란을 자국의 안보에 가장 위협적인 나라로 간주하고 있다. 양국 간에는 영토분쟁이 미결과제로 남아 있다. 영국이 아랍에미리트 지역에서 철수하기 직전인 1971 11 30일부터 이란은 페르시아만 호르무즈 해협 인근 유전지대의 아부무사(Abu Musa), ()툰브(Tunb al-Kubra), ()툰브(Tunb al-Sughra) 3개의 섬을 실효지배하고 있다. 이란은 이들 지역을 호르모즈간(Hormozgan)주의 영역으로 간주하지만, 아랍에미리트는 이들 섬을 라으술카이마 아미르국의 영토라고 주장하면서 반환을 요구하고 있는 중이다.
  
 
천연자원이 풍부한 페르시아만을 여러 나라가 공유하다 보니 국익(國益)을 두고 종종 이웃과 첨예한 대립이 벌어지지 않을 수 없다. 현재 찰떡궁합을 과시하고 있지만, 사우디아라비아와도 수역(水域)문제로 갈등을 벌인 적이 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아랍에미리트에 가장 위협적인 주적(主敵)은 이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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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와 군사동맹

▲UAE에 만들어진 프랑스군 기지를 시찰하는 사르코지 전 프랑스 대통령.

 

아랍에미리트는 그래서 2009년 이란의 반대와 비난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와 군사협력을 맺어 아부다비에 영구 군사기지를 건설, 향후 50년간 사용권을 프랑스에 주었다. 프랑스 역사상 프랑스나 아프리카 외의 지역에 처음으로 만든 이 군사기지의 이름은 평화부대(Camp de la paix). 프랑스 육·해·공군이 사용하는데, 해군의 자예드(Zayed) 항구, 공군의 자프라(Dhafra) 기지와 400여 명의 병력을 수용하고 있는 병영이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군사력 측면에서 보면 현재 아랍에미리트는 객관적인 전력(戰力)에서 이란의 상대가 될 수 없을 정도로 약하다. 세계 각국의 군사력을 평가하여 순위를 매기는 세계군사력(GFP·Global Fire Power)에 따르면 2017년 기준으로 이란은 133개국 중 21, 아랍에미리트는 60위에 각각 올랐다.
  
 
이란보다 모든 면에서 열세인 아랍에미리트가 자국의 안보를 수호하는 최상의 방법은 강대국과의 군사동맹일 것이다. 프랑스군 기지 유치는 바로 그러한 전략의 일환이었다. 사르코지 전 프랑스 대통령은 평화부대를 두고 “아랍에미리트의 안보가 위협을 받을 때 프랑스가 함께할 것”이라고 하면서 “페르시아만이라는 중요한 지역의 안보를 확보하는 데 책임을 다할 것”이라고 선언, 이란의 심기를 건드렸다. 이란과 경협은 하더라도 안보는 아랍에미리트와 함께한다는 프랑스식 안()아랍에미리트-()이란 전략이다. 프랑스는 아랍에미리트와의 안보협력을 바탕으로 원전(原電) 수주까지 노렸지만, 한국에 막판에 역전패당하고 말았다.    


  
중동의 복잡방정식  

  요즘 우리나라와 아랍에미리트 간 말 못할 사연 때문에 정국(政局)이 시끄럽다. 경제로만 얽혔던 중동이었는데, 우리나라 국력이 커지면서 단순히 경제로만 관계를 맺기 어려운 시대가 왔는지도 모른다. 남북이 대치하고 동북아 정세가 급변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의 대외(對外)관계는 치밀하고 신중해야 한다.

 

중동 국가와의 경제·안보협력도 마찬가지다. 중동은 열강과 역내 국가들의 정치·군사·종교적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곳이다. 특정 국가와의 밀접한 협력이 역내 다른 국가의 심기를 건드릴 가능성도 십분 고려해야 한다. 이번 사태를 우리는 자신의 국력이 어느 정도인지, 국력에 걸맞은 우리의 외교 행보는 어때야 하는지를 차분하게 돌이켜보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03월 호

◆카타르를 둘러싼 중동의 냉전

⊙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등 GCC 국가들, 작년 6월 카타르와 단교

⊙ 카타르의 무슬림형제단 비호, 알자지라 방송의 걸프 왕정국가들 비판, ()이란 외교 등이 빌미

⊙ 카타르에 공군기지 둔 미국은 고민 중…, 터키·이란은 카타르 지지

▲친()이란 노선으로 중동 왕정국가들 사이에서 고립된 카타르의 수도 도하.

 

  “참을 만큼 참았다!

  2017 6 5 GCC(걸프협력회의) 회원국인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 바레인이 비()회원국인 이집트와 함께 최후통첩도 없이 전격적으로 카타르와 외교관계를 단절하면서 내뱉은 분노의 소리다. 사우디아라비아 등은 이와 함께 국경폐쇄, 영공(領空) 통과 차단 조치까지 취했다. 카타르에 대한 단교 조치나 외교관계 격하에 동참한 나라는 걸프 지역을 넘어 현재 10개국 이상이다. 단교를 주도한 국가는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다. 사우디아라비아 외무장관은 반() 카타르 감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우리는 참을 만큼 참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만일 카타르가 걸프의 일원이 되려면 그에 맞게 행동해야 한다. 해악을 끼치는 일을 그만두어야 한다. 우리는 오래 기다릴 준비가 되어 있다. 서두르지 않는다. 그러나 예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는 없다.
  
  GCC
회원국의 단일대오가 무너지고 있다. GCC 1979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이란의 이슬람혁명, 1980년 이란-이라크 전쟁 등 중동에 휘몰아친 급격한 정세 변화에 대응하고자 1981년 걸프 연안 국가들이 ‘아랍, 이슬람, 왕정’이라는 공통분모를 기반으로 뭉쳐 만든 기구다. GCC가 카타르 단교 사태를 기점으로 사실상 와해됐다.
  
 
사태 직후인 작년 12월 쿠웨이트에서 개최된 GCC 정상회담에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바레인 정상은 참석하지 않았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는 GCC와 별도로 양국 간 새로운 정치경제협력을 결성했다고 공표했다. 이들은 중재에 나선 쿠웨이트의 노력을 존중할 의도도, GCC 안정을 꾀할 마음도 없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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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르, 2014년에도 주변국들과 마찰 빚어

▲걸프협력회의(GCC) 6개국.

 

사실 카타르를 둘러싼 갈등은 지난 2014 3월에도 있었다. 카타르가 무슬림형제단을 계속 지원하고, 이집트 출신인 무슬림형제단의 사상적 지도자 유수프 알카라다위(Yusuf al-Qaradawi, 1926년생)의 망명을 허용한 데다가, 카타르의 알자지라 아랍어 방송이 “아랍에미리트가 이슬람 통치에 반대하는 나라”라고 비판한 것이 문제가 됐다.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바레인은 주()카타르 자국(自國) 대사를 모두 소환하는 강경조치를 취했다. 이들 국가는 카타르가 GCC 회원국의 내정에 간섭하면서 회원국의 안보를 저해하고 있다면서 강력히 항의했다. 카타르가 자세를 낮추고 성난 이웃 왕정국과 화해하면서 일단락되긴 했지만, 불화의 불씨는 완전히 꺼지지 않았다.
  
 
사실 2017년 카타르 단교 사태는 결국 2014년 위기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제는 바로 카타르의 외교노선이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의 외교 방향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특히 이들 국가가 가장 문제시하는 이란에 유화적인 태도를 취하고 하마스, 무슬림형제단 등 ‘테러집단’으로 규정한 단체들을 지원하고 포용하는 정책이 눈엣가시였다.
  
 
단교를 주도한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와 이에 맞서는 카타르가 보는 단교의 원인은 사뭇 다르다. 반카타르 진영의 주장에 따르면, 2015 12월 왕족을 포함하여 26명의 카타르 국민이 이라크 남부로 매사냥을 나갔다가 이란이 지원하는 헤즈볼라 시아민병대에 16개월째 인질로 잡혀 있었는데, 이들을 구하기 위해 카타르가 무려 10억 달러에 달하는 몸값을 지불했다고 한다. 이 중 7억 달러는 이란이 받아 시아민병대에 일부 나누어 준 후 상당액을 챙겼고, 3억 달러는 알카에다 전사를 비롯하여 이슬람극단주의 전사들 손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알카에다 연계 무장집단에 돈이 들어간 사실은 차치하고라도 이란과 척을 지고 있는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 입장에서는 카타르가 이란에 이로운 거래를 했다는 사실에 격노했다. 더욱이 카타르 국영방송사 보도에 따르면 카타르 국왕이 “이란에 적대적인 정책을 취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처사”라면서 이란, 하마스, 헤즈볼라, 이스라엘을 높이 평가하고,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자리에 오래 있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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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르와 UAE의 갈등

▲셰이크 모함메드 빈 자예드 알 나흐얀 아부다비 왕세제.

 

카타르 정부는 이러한 발언은 사실이 아니고 해커가 웹사이트에 침입하여 조작한 것이라고 극력 부인했다. 한편 단교 7개월째인 지난 1월 국내 방송에서 카타르 외무장관은 “아랍에미리트가 송환을 요구한 반정부 인사를 카타르 정부가 인도하지 않았기에 단교에 이르렀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르면 어느 아랍에미리트 반정부 인사 부부가 2013년 아랍에미리트를 떠나 카타르에 들어왔다가 남편은 영국으로 떠났고, 부인만 가족문제로 카타르에 머물렀다고 한다. 그런데 부인의 여권이 만기가 되어 연장을 시도했으나 아랍에미리트 측에서 여권 연장을 거부하고, 셰이크 모함메드 빈 자예드 알 나흐얀(Shaykh Mohammed bin Zayed Al Nahyan, 1961년생) 아부다비 왕세제가 셰이크 타밈 빈 하마드 알 사니(Shaykh Tamim bin Hamad Al Thani, 1980년생) 카타르 국왕에게 특사(特使)를 보내 문제의 여인을 아랍에미리트로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카타르는 범죄를 저지르지도 않은 사람을 송환하는 것은 국제법과 카타르 헌법에 위배된다는 이유를 들어 신병 인도 요구를 거부했다. 아랍에미리트 측에서 단교 두 달 전부터 반 카타르 공세를 취하기 시작하면서 송환이 이루어지면 그치겠다고 제안까지 했다는 것이다. 그래도 카타르가 꿈쩍하지 않자 아랍에미리트는 사우디아라비아에 저간의 사정을 설명하여 도움을 구했고, 이에 당시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였던 무함마드 빈 나이프가 문제의 여성의 신병을 인도하면 더 이상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카타르 측에 조언까지 했다고 한다.
  
 
도대체 이 여성이 누구인지 밝히지는 않았지만, 카타르 외무장관이 직접 방송에 나와 단교의 원인을 밝힌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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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개 조의 요구

▲셰이크 타밈 빈 하마드 알 사니 카타르 국왕.

 

이처럼 양측이 제시하는 단교의 이유는 사뭇 다르다. 하지만 반카타르 진영이 단교 철회의 조건으로 카타르에 내건 요구사항은 상당히 구체적이고, 독립국가의 주권을 침해한다는 인상을 강하게 풍긴다. 단교 단행 직후 쿠웨이트가 중재에 나섰다. 처음에는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가 카타르에 요구하는 내용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불분명했다. 이른바 요구조항이 구체적으로 언론에 보도된 때는 단교 17일째인 6 22일이다.
  
 
그런데 가르가시(Gargash) 아랍에미리트 외무장관은 요구조항이 공개된 데 대해 “카타르가 유치한 일을 했다”면서 “중재에 흠집을 내려는 시도이거나 냉랭한 정책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단교 철회를 위해 카타르가 10일 안에 해야 한다고 못 박은 13가지 요구사항을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이란과 외교관계 격하, 외교공관 폐쇄, 이란 혁명수비대 관계자 추방, 군사 및 정보협력 단절. 이란과 무역통상은 GCC 안보를 저해하지 않도록 미국과 국제제재를 따를 것
  
  2.
터키 군사기지를 폐쇄하고 터키와 군사협력 중단.
  
  3.
무슬림형제단, IS, 알카에다, 파티흐 알샴(Fatih al-Sham), 헤즈볼라 등 테러단체와 관계 절단.
  
  4.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이집트, 바레인, 미국 및 여러 국가가 테러리스트로 지정한 개인, 그룹, 또는 조직에 대한 모든 지원을 끊을 것.
  
  5.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이집트, 바레인 국적의 테러리스트, 도망자, 수배자를 본국으로 인도하고 재산을 동결하며, 이들의 주거, 동향, 재무상황 정보를 제공할 것.
  
  6.
알자지라 방송과 관련 방송을 폐쇄할 것.
  
  7.
주권국가의 내정에 간섭하지 말고,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이집트, 바레인 국적의 수배자에게 시민권을 부여하지 말며, 이들 국가의 법을 위배하여 부여한 시민권은 박탈할 것.
  
  8.
최근 카타르 정책 때문에 발생한 인명 손실과 여타 재정 손실을 보상할 것. 액수는 카타르와 협의하에 결정될 것임.
  
  9. 2014
년 사우디아라비아와 협의한 대로 카타르의 군사정책, 정치, 사회정책, 경제정책을 걸프 및 아랍국가의 정책과 일치시킬 것.
  
  10.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이집트, 바레인 내 정치적 반대파들과 접촉을 끊고, 반대파들을 접촉하고 지원한 과거 상세기록을 넘기고, 이들의 개인신상정보와 카타르의 지원사항을 제출할 것.
  
  11.
아랍21, 라스드(Rassd), 알아라비 알자디드(Al Araby Al Jadeed), 메카멜린(Mekameleen), 미들이스트아이(Middle East Eye) 등 카타르가 직간접적으로 후원한 모든 언론매체를 폐쇄할 것.
  
  12.
이 모든 요구조건 리스트가 제출된 지 10일 안에 충족하지 못하면 무효임.
  
  13.
요구사항에 동의한 첫해에는 매달, 두 번째 해에는 분기마다, 이후 10년 동안은 매해 감사받을 것에 동의할 것.
    


  
무슬림형제단에 대한 입장 차이

▲작년 6 6일 쿠웨이트의 알 사바 국왕(왼쪽)은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 살만 국왕과 카타르 국교단절 사태를 논의했다. 사진=뉴시스

 

카타르의 주권을 사실상 인정하지 않는 굴욕적인 조건으로 가득 찬 13개 항에 카타르가 동의할 리는 만무했다. 카타르 정부가 이를 거부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반카타르 4개국이 이집트 카이로에서 합의한 6가지 원칙을 다시 내세웠다
  
  
1. 여하한 형태의 극단주의와 테러에 맞서 싸우고 재정후원이나 도피처를 제공하지 않을 것.
  
  2.
증오와 폭력을 퍼뜨리고, 선동하고, 증폭하거나 정당화하는 모든 선전과 여하한 형태의 표현을 금할 것.
  
  3.
아랍국가들을 위하여 GCC 틀 안에서 2013년 리야드 합의, 2014년 추가 합의 및 실행체제를 온전히 준수할 것.
  
  4. 2017
5월 리야드에서 열린 아랍-이슬람-미국 정상회담 결과를 준수할 것.
  
  5.
내정에 간섭하지 않고 불법조직을 지원하지 않을 것.
  
  6.
모든 형태의 극단주의와 테러를 국제평화와 안보 위협으로 간주하고 맞서 싸워 국제공동체 소속 국가로서 책임을 다할 것.

  
  13
개 조항이 황제가 제후를 나무라는 논조라면, 6개 조항은 이보다 훨씬 부드럽고 누그러진 느낌을 준다. 그러나 그 내용은 카타르가 테러단체를 지원하고, 이웃 국가의 정정(政情)을 불안하게 만드는 원흉(元兇)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풍긴다. 반카타르 진영 국가들이 말하는 테러단체란 무슬림형제단이 주축이다. 카타르는 무슬림형제단을 대체로 합리적인 무슬림 단체로 보고 있다. 물론 자국 내에서 반정부 활동을 하지 못하도록 잘 관리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무슬림형제단을 보는 반카타르 진영 국가들의 입장은 강경하다. 일례로 ‘아랍의 봄’ 직후 선출된 무슬림형제단 출신 모르시 대통령을 시시가 이끄는 군대가 쿠데타로 제거한 이집트의 눈에 무슬림형제단을 감싸고 도는 카타르가 곱게 보일 리 만무하다.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바레인 역시 자신들의 왕정을 제대로 된 무슬림 권력으로 보지 않는 무슬림형제단을 용인할 수 없다.
  
 
게다가 2013년과 2014년 이른바 리야드 합의에서 테러를 지원하는 59명의 개인과 12개의 단체를 명시하고 카타르가 이들을 후원하거나 도움을 주지 않을 것이라고 서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지키지 않는다는 불만이 팽배한 상태였다. 2014년 대사 소환을 야기한 알카라다위도 바로 59명의 개인 명단에 올라 있다. 그래서 위 3항에서 2013년과 2014년에 한 합의를 지키라고 카타르에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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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자지라에 대한 불만

▲중동 왕정에 대한 비판적 보도에 앞장서 온 알자지라 방송.

 

그런데 카타르가 이웃 국가의 내정에 간섭하고 있다는 것은 무슨 말일까? 그것은 바로 알자지라 방송의 파괴력을 에둘러 표현한 것이다. 중동의 CNN, BBC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언론이 알자지라 방송인데, 중동 내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성역 없이 보도하다 보니 권위주의 왕정국의 심사가 무척 불편하다.
  
 
카타르 도하에 위치한 알자지라 방송은 카타르 왕정에 대해서는 침묵하면서도 이웃 걸프 왕정국가, 특히 왕실 관련 사건이나 사고는 매의 눈으로 매섭게 보도하니 ‘공적(公敵) 1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게다가 알카라다위 같은 무슬림 지도자들이 이들 왕실을 비판하는 목소리를 여과 없이 보도하니 알자지라는 이란과 함께 순니 걸프 왕정의 안전을 위협하는 2대 불순분자다
  
 
사실 11521km2의 면적을 지닌 카타르는 우리나라 경기도만 한 크기로, 인구도 2641169명에 불과한 소국이다. 이 중 카타르 시민권자는 약 40만명 정도로 추산된다. 그런데 이 작은 나라는 자원부국으로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 중 하나다. 2017 7월 세계은행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16 1인당 국민소득은 75660달러로 세계 11(우리나라 27600달러, 45), 구매력평가기준상 1인당 국민소득은 125000달러로 세계 2위다(우리나라 35790달러, 49).
  
 
카타르는 세계에서 가장 큰 가스전을 페르시아만에서 이란과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사우디아라비아와 달리 이란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소국이 살아남기 위해 스위스처럼 자리매김을 하겠다는 것이 카타르의 비전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서로 다른 생각을 지닌 다양한 단체나 인물들에게 카타르는 좋은 안식처였다. 그러다 보니 이웃 국가들의 심경을 건드렸다. 특히 걸프 지역 큰형 노릇을 해온 사우디아라비아 입장에서는 카타르가 ‘돈 좀 벌었다고 이제 말을 안 듣는’ 버르장머리 없는 동생으로 보일 것이다.
  
  1971
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카타르를 이끈 사니 가문은 원래 사우디아라비아 왕실과 같은 사우디아라비아 중부 나즈드 지역 출신으로 와하비 사상의 계승자를 자처해 왔다. 수도 도하에 2011년 새로 건설한 모스크를 이맘 무함마드 이븐 압드 알와합 모스크로 명명했을 정도다. 그런데 외교단절 사태가 발생하면서 사우디아라비아 내 와합 후손들은 카타르 정부에 모스크 이름을 바꾸라고 요구하고 있는 중이다. 이처럼 종교를 두고도 사우디아라비아와 불편한 관계다.    


  
중동의 냉전 

  공교롭게도 카타르 단교 사태는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사우디아라비아 방문 직후 불거졌다. 트럼프는 “중동 방문 중 나는 더 이상 극단주의 후원은 안 된다고 말했다. 지도자들은 카타르를 가리켰다. 보시오!”라는 트윗을 남겨 반카타르 진영과 미국 사이에 사전 조율이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샀다. 결국 미 국무부에서 논란을 잠재우기 위해 노력하면서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미국이 카타르 알우데이드(al-Udeid)에 중동 최대의 공군기지를 운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일각에서는 미국이 극단주의자들과 싸우는데 그들에게 피란처와 자금을 지원하는 카타르를 버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또 알우데이드 공군기지가 대체 불가능한 곳이 아니라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미국이 현재 이란에 최대의 압박을 가하면서 핵을 완전하게 포기하게 하려고 하는 상황에서 카타르를 버리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선택은 아니다. 오히려 카타르는 미국과 관계를 더 좋게 하기 위해 더 노력하고 있다.
  
 
단교 사태 후 카타르는 오히려 이란과 더 가까워졌다. 이웃 국가가 하늘 길을 막자 카타르 항공은 이란 영공을 통해 날고 있고, 사우디아라비아를 통해 들어오던 식료품이 중단되자 이란이 배로 실어다 주고 있다. 자리프 이란 외무장관은 “이웃은 영원하다. 지리는 바꿀 수 없다. 강요는 결코 해결책이 아니다”라고 반카타르 진영의 압력을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터키는 카타르에 군대까지 파견하여 왕궁을 수호했다. 카타르 정부가 공식적으로 부인하긴 했지만, 터키군이 카타르 왕실 전복 기도 쿠데타를 막았다는 설()도 있다. 터키 군사기지 폐쇄나 터키와 군사협력이 중단될 기미조차 없다. ()무슬림형제단 에르도안 터키 정부는 카타르의 든든한 후견자로 자리 잡았다.
  
 
이제 GCC는 사실상 사망 선고를 받았다. 이제 걸프 지역은 반카타르 진영과 카타르의 ‘신()냉전 시대’로 급속히 접어들고 있다. 아울러 이 지역과 경제교류가 활발한 우리의 고민도 깊어갈 수밖에 없다. 카타르에서 우리가 수입하는 가스는 연간 총수입량의 3분의 1에 달한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는 늘 우리의 입장을 지지해 주는 적극적인 우방국이다. 차가운 전쟁에서 우리의 국익을 극대화할 지혜와 인내가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점이다.
 

 

 

04월 호

◆알후다이비야(al-Hudaybiyyah) 평화협정

⊙ 무함마드, 메카에서 축출되어 메디나로 이주한 후 메카와 3차례 전쟁
⊙ 무함마드, 628년 알후다이비야에서 메카측과 정전(停戰)협정 맺어… 2년 후 메카 함락
⊙ 아라파트, 알후다이비야 협정에 비유하면서 오슬로 평화협정 수락
⊙ “예언자가 메카를 정복한 것처럼 결국 이란이 원하는 바를 이룰 것” (미·이란 제네바 핵협정 체결 후 이란 정치평론가 알후세이니)

▲무함마드는 알후다이비야에서 메카와 평화협정을 맺었지만, 2년 후 메카를 정복하는 데 성공했다.

 

과거는 단순히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을 이해하고 미래에 다가올 상황을 미리 재단하는 데 자주 거론되곤 한다. 최근 우리측 5명의 대북(對北) 특사(特使)가 북한 김정은을 만나 대화를 나누고 온 것을 두고 우려하는 목소리가 있는 것이 좋은 예다. 북한의 태도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도 있다. 다른 편에서는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의 발표를 독일에 기만당한 줄도 모르고 1938 9 30일 뮌헨 협정을 맺은 네빌 체임벌린 영국 총리가 ‘우리 시대의 평화(Peace in Our Time)’를 역설한 것에 빗대어 북한의 위장평화 공세에 우리가 속고 있다며 경계의 눈빛을 풀지 못하고 있다. 평화를 갈구한 체임벌린 총리의 바람과 달리 히틀러는 1년 후 폴란드를 침공했기 때문이다.
  
 
무슬림 세계에도 평화와 관련하여 늘 입에 오르내리는 중요한 사건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알후다이비야(al-Hudaybiyyah) 평화협정이다.    


  
헤지라 

  알후다이비야는 지명으로 오늘날 메카에서 약 15km 떨어진 곳이다. 이곳에서 628 3월에 예언자 무함마드가 자신의 반대자인 메카의 쿠라이시 부족과 10년 기한의 평화협정을 맺었는데, 이를 ‘알후다이비야 평화협정’이라고 부른다.
  
 
무슬림 전승(傳承)에 따르면 무함마드는 40세에 아랍어로 유일신(唯一神)을 뜻하고 우리나라 무슬림들이 하나님으로 번역하는 ‘알라’의 부르심을 받아 예언자가 되었다고 한다. 정확히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632년에 죽었을 때 그의 나이가 60세 또는 63세 또는 65세였다는 전승기록을 감안하면 570년경에 태어났을 것이고, 그로부터 40년이니 대략 610년 전후인 셈이다.
  
 
예언자로서 무함마드가 전한 가르침은 당시 고향 메카 사람들에게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특히 그가 속한 쿠라이시 부족의 지도층은 무함마드가 자신들의 권위에 도전한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메카에 있는 다신교(多神敎) 신전 카으바 성원은 아랍인들의 순례지로 존중받았는데, 무함마드의 유일신 신앙이 이러한 다신 신앙을 반대했기 때문이다. 메카인들은 무함마드가 자신들의 전통적인 종교생활을 파괴한다고 보았다.
  
 
결국 무함마드는 “예언자는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는 말대로 고향 메카에 안착하지 못했다. 절체절명의 위기를 넘기면서 메카에서 북쪽으로 약 400km 떨어진 야스립(Yathrib)으로 도망치듯 떠나 도착했다. 야스립은 이후 예언자가 머문 도시이기에 예언자의 도시, 즉 마디나 안나비로 불렸는데, 이를 줄여서 마디나(메디나)로 칭한다. 메카에서 메디나로 옮긴 것을 역사적으로 히즈라(Hijrah)라고 한다. 아랍어로 ‘이주(移住)’라는 뜻이다. 이슬람력()에서 히즈라가 이루어진 해를 기원으로 삼는데, 서력(西曆)으로 환산하면 622년이다.
  
 
메디나의 삶은 고달펐다. 무함마드를 따라 메디나로 이주한 무슬림들은 새로운 땅에서 먹고살 기반이 없었다. 다행히 이들을 돌봐 주는 메디나 주민 조력자들이 있긴 했지만, 경제적 곤궁을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의 도움은 되지 못했다. 메카인들과 벌인 첫 번째 전쟁의 원인이 된 메카 대상(隊商) 행렬 공격도 이러한 상황에서 나왔다. 메디나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던 무슬림들에게 자신들의 믿음을 인정하지 않고 박해한 메카인들은 단죄의 대상이었기에 이들의 상인 행렬은 공격 대상으로 안성맞춤이었다
. 

  
  
무함마드와 메카의 전쟁

▲627년 칸다끄 전투에서 무슬림군은 도랑을 파는 새로운 전술로 메카군을 물리쳤다.

 

이에 분노한 메카가 대규모 군대를 조직하여 공세를 취함에 따라 벌어진 것이 624년 바드르(Badr) 전투다. 군사력에서 절대적 약세였지만 무함마드의 무슬림군이 승리했다. 이로써 무함마드를 하나님이 보호하고 있다는 믿음이 추종자들 사이에서 강해졌다. 이 전투에서 무슬림군이 패배했더라면 오늘날 이슬람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후 메디나와 메카 간에는 624~625년 우후드(Uhud) 전투와 627년 칸다끄(Khandaq) 전투 등 2번의 싸움이 더 벌어졌다.
  
 
우후드 전투는 메디나군이 승리를 앞둔 상태에서 전리품에 눈이 멀어 무슬림들의 대오가 흐트러지면서 아찔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무함마드의 목숨도 위태로운 상황에 처하기도 했다. 메디나군은 많은 인명을 잃었다. 그러나 메디나군이 완전히 패배했다고 보기도 어려운 싸움이었다. 어찌 되었든 메카군이 메디나를 굴복시키지 못한 상태로 철수했기 때문이다.
  
 
칸다끄 전투는 아랍인들에게 생소한 방어책인 도랑을 도입한 싸움이었다. 페르시아 출신 무슬림인 살만은 무슬림군에게 페르시아식 방어법인 ‘도랑(칸다끄)’을 방어진지 주변에 파서 적의 접근을 막도록 했다. 오늘날 이란인들은 초기 이슬람 공동체 방어에 지대한 공헌을 한 살만을 대단히 자랑스럽게 여긴다. 메카가
이끌고 온 대군은 처음 보는 도랑에 속수무책으로 대응하지 못한 채 27일간 포위만 하다가 결국 물러나고 말았다.

 

▲대순례 때 메카의 카으바신전을 도는 무슬림들. 카으바신전 순례는 다신교 시절부터의 전통이다. 사진=뉴시스

 

고향에서 쫓겨난 무함마드는 이처럼 고향 사람들에 맞서 모두 3차례의 전투를 치르면서 꿋꿋하게 신앙공동체를 이끌었다. 그런데 칸다끄 전투가 끝난 지 1년이 채 못 된 628 3월 어느날 무함마드는 메카의 카으바 성원을 순례하는 꿈을 꾼다. 알와끼디(al-Waqidi, 747~823)는 그의 역작 《키타브 알마가지(Kitab al-Maghazi, 무함마드의 전투기)》에서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들은 말했다. 하나님의 사도는 꿈에서 ‘성원(카으바)’에 들어가고, 머리를 삭발하고, ‘성원’의 열쇠를 쥐며, 알아라파트(al-Arafat) 산에 섰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도는 교우들에게 ‘우므라(Umrah, 소순례)’를 행하라고 일렀고, 그들은 준비를 서둘렀다.
  
 
연중 정해진 기간에 행하는 대순례 핫즈(Hajj)와 달리 소순례인 우므라는 기간에 구애받지 않고 할 수 있다. 아라비아의 종교 관습인 순례는 그 대상지가 카으바 성원이다. 당시 카으바 성원은 다신교 신전이었다. 무함마드의 이슬람 운동이 아라비아를 통일하면서 다신교적인 순례가 유일신교 순례로 변환했다. 무슬림들의 전승에 따르면 원래 메카의 카으바 성원이 유일신 성원이었는데, 사람들이 진정한 유일신 신앙을 잃고 타락하여 다신론자들이 되면서 카으바가 다신 신전으로 추락했고, 이를 무함마드가 정화하여 원래의 유일신 전통으로 되돌려 놓았다고 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무함마드의 이슬람 운동이 다신교 관습이었던 대순례와 소순례를 이슬람화한 것이지만, 무슬림 신앙인들의 관점에서 보면 이는 원래 유일신 전통으로 회귀가 되는 셈이다.   

 
  
무함마드의 순례

  무함마드의 꿈에 따라 소순례가 시작되었다. 무함마드를 따라 1400여 명의 무슬림들이 메디나를 떠나 메카를 향해 순례의 길에 올랐다. 메카의 공격에 죽음을 당할 수 있다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순례이니만큼 비무장 상태였다. 메디나에서 대규모의 무슬림들이 소순례를 행한다는 소식이 메카에도 전해졌다. 서로 목숨을 앗겠다고 칼을 겨눈 지가 1년이 안 되었고 그동안 무려 3번의 큰 전투를 치르면서 서로 죽고 죽인 원수들이 자신들을 향해 온다는데 이를 반길 이가 어디 있을까!
  
 
메카인들은 놀라서 바로 200명으로 구성한 기병대를 보내 소순례단을 막고자 했다. 그러나 미리 정보를 입수한 무함마드는 메카군을 피해 험로(險路)를 택해 메카로 전진했고, 메카를 눈앞에 두고 알후다이비야에 정지했다. 낙타가 더 이상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기에 이를 하나님의 계시로 생각하여 선 것이다.
  
 
알후다이비야에서 무함마드 일행과 메카는 상호 의향을 확인하고자 분주히 움직였다. 무슬림들이 무함마드에게 보인 존경심은 대단했던 것 같다. 메카측 특사 우르와는 “이들의 존경심이 페르시아인·로마인·이디오피아인들이 각기 자신들의 왕에게 보여준 것과 비교가 되지 않게 높은 수준”이라고 평가하면서 메카 지도자들에게 “무함마드 일행이 순례만을 목적으로 삼고 왔으니 메카 순례를 허락하라”고 조언했다. 그의 조언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무함마드는 메카에 우스만(Uthman b. Affan)을 특사로 보냈다. 그런데 우스만의 행방이 묘연해졌다. 심지어는 메카인들이 우스만을 죽였다는 소문까지 들려 왔다. 이에 소순례에 나선 무슬림들은 적과 끝까지 싸우겠다는 굳은 결의를 나무 아래에서 무함마드에게 했다고 한다. 코란 48 18절은 이를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나무 아래에서 그대에게 서약을 한 신자들을 보고 기뻐하셨노라. 그들의 마음을 알고 평온을 내리시고 승리로 보답하셨노라.
  
 
이처럼 하나님이 기뻐했기에 나무 아래에서 한 결의를 ‘기쁨의 결의’라고 부른다. 한편 이 나무가 돔 형태였기에 하드바(Hadba)라고 했고, 여기에서 후다이비야라는 지명이 나왔다는 설이 있지만 추측에 불과하다. 이 나무 자리에 모스크가 세워졌다고 하는데 15세기 초반까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무함마드, 협상에서 유연성 발휘 

  메카는 문제가 불거지자 우스만을 석방한 후 수하일(Suhayl b. Amr)을 특사로 보내 무함마드와 협상을 시도했다. 오랜 의견 교환 끝에 협상문을 작성하려고 하자 우마르가 “다신교도와 어떻게 협상을 맺을 수 있느냐”며 반대하고 나섰다. 우마르는 무함마드 사후(死後) 2() 칼리파(무슬림의 최고종교지도자)가 되어 무슬림 세계를 10년간 다스린 사람이다. 이에 무함마드는 “하나님의 종이자 사도로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니 하나님이 자신을 패배자로 만들지는 않을 것”이라며 협상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이에 우마르는 훗날 자신이 이날 자신의 생각이 더 낫다고 여기며 무함마드에게 한 말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희사와 단식과 예배를 계속 행하고 노예를 해방한다고 고백했다.
  
 
메카 특사 수하일은 협상 문안에 상당히 민감한 모습을 보이며 무함마드측을 압박했지만 무함마드는 유연한 모습을 보였다. 협정문은 무함마드가 구술(口述)하고 알리가 받아 적었다. 무함마드가 “자비로우시고 자애로우신 하나님의 이름으로”라고 하자 수하일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면서 “하나님, 당신의 이름으로”라고 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무함마드는 그대로 따랐다. 또 “이것은 하나님의 사도 무함마드가 수하일과 합의한 것이다”라고 무함마드가 구술하자, 수하일은 “만일 내가 당신을 하나님의 사도라고 받아들였다면 당신과 싸우지 않았을 것이오. 당신과 당신 아버지의 이름을 쓰시오”라고 반대했다. 그러자 무함마드는 ‘하나님의 사도 무함마드’를 ‘압둘라의 아들 무함마드’로 고쳤다. 또 다른 전승에 따르면 이때 문안을 작성하던 수하일이 ‘하나님의 사도 무함마드’를 지우라고 했으나 무함마드의 말을 따르지 않고 버티자 무함마드가 직접 자신의 이름을 지웠다고 한다. 영국의 이슬람학자 와트(William Montgomerry Watt, 1909-2006)는 이처럼 무함마드가 직접 자신의 이름을 지운 것을 보면 무슬림들의 믿음과 달리 무함마드가 문맹은 아니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정전(停戰)협정 2년 후 메카 정복

  유연한 무함마드와 까탈스러운 수하일이 합의한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양측은 향후 10년 동안 적대적 행위를 중지한다.
  
  2.
원하는 사람이나 부족은 누구든지 양쪽 중 원하는 쪽에 가담하거나 원하는 쪽과 협정을 맺을 수 있다.
  
  3.
보호자의 허락 없이 메카 사람이 무함마드 진영에 가담할 경우 메카로 돌려보내야 하지만, 무함마드 쪽 사람이 메카에 가담할 경우에는 되돌려 보내지 않는다.
  
  4.
이번 해에는 순례를 할 수 없고 다음해에 3일간 소순례를 행한다.

  
 
무슬림이 되겠다고 온 사람을 메카로 되돌려 보낸다는 합의내용 때문에 무함마드측 사람들의 동요가 일었다. 이슬람을 포기하고 메카로 가는 사람은 돌려받지도 못하는데 말이다. 그러나 이를 넓게 보면 반드시 불리한 것만도 아니다. 신앙을 버리고 가는 사람을 억지로 돌려받는 것이 좋을 리 없다. 또 무슬림으로 개종한 사람을 받아들이지 못하더라도 이들이 메카에 남아 이슬람을 전파할 수 있으니 불리하다고만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궁극적으로 협정은 무함마드의 이슬람 운동에 긍정적인 효과를 낳았다. 무함마드의 지도력을 메카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했고, 싸움을 걸지 않는 한 무슬림들은 방해받지 않고 이슬람 선교 활동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장이 열렸다.
  
 
정전(停戰) 2년을 넘지 못했다. 메카의 동맹 바크르(Bakr) 부족이 정전협정을 깨고 무함마드측 동맹인 쿠자아(Khuza'a) 부족을 공격했다. 이에 무함마드가 동맹 부족을 돕기 위하여 출병(出兵)하고 메카를 포위했다. 수세에 몰린 메카는 저항을 포기하고 항복했다. 무함마드는 고향을 떠난 지 8년 만인 630년에 무혈(無血) 귀향에 성공했다. 알후다이비야 평화협정이 무슬림의 메카 정복으로 귀결된 것이다
.  

  
  
알후다이비야의 재현 가능한가?

▲2013 11월 미국과 체결한 제네바 협정을 이란인들은 알후다이비야 협정에 비유하기도 한다. 사진=뉴시스

 

무슬림들은 알후다이비야 평화협정을 성공신화로 여겨 어려운 현실을 뚫고 나가는 지표로 삼는다. 이러한 태도는 종종 협정을 맺은 이들의 심경을 무겁게 만들기도 한다.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를 이끌던 아라파트(Yasser Arafat, 1929~2004) 1993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평화를 규정한 오슬로 협정을 맺은 후 이렇게 말했다.
  
 
“이 협정을 나는 우리의 예언자 무함마드와 쿠라이시 부족이 맺은 협정과 다를 바 없다고 간주한다. 기억하다시피 우마르는 이 협정을 거부하면서 ‘경멸스러운 협약’이라고 했다. 그러나 무함마드는 이를 받아들였다. 우리도 이 오슬로 평화협정을 수용한다.
  
  2013
년 이란이 미국을 위시한 6개국과 맺은 이란 핵관련 제네바 협정(JPOA, 공동행동계획)을 두고 하타미(Mohammad Khatami, 1943~ ) 전 대통령의 자문을 맡은 바 있는 정치평론가 알후세이니(Mohammed Sadeq al-Husseini)는 이를 알후다이비야 평화협정에 비유하면서 “예언자가 메카를 정복한 것처럼 결국 이란이 원하는 바를 이룰 것”이라고 말했다.
  
 
아라파트나 알후세이니 두 사람 모두 궁극적으로 비록 오슬로 협정이나 제네바 협정은 지금은 자신들에게 불리하지만, 예언자가 알후다이비야 평화협정의 불리함을 극복하고 2년 후 승리했듯이 최후의 승자는 자신들이 될 것이라는 희망을 피력한 것이다. 협정을 맺은 상대방이 듣기에는 무척 불쾌한 표현임에는 틀림없다.
  
  1993
년 오슬로 협정은 현재 유명무실한 상태이다. 2013년 제네바 협정은 2015 JCPOA(포괄적 공동행동계획)으로 확장되어 발효되었지만, 현재 미국 트럼프 행정부에서 계속 파기하려고 으름장을 놓고 있는 중이다. 알후다이비야가 재현될지 알 수는 없지만, 아무래도 현재로서는 그 가능성은 희박하다. 7세기 무함마드의 무슬림공동체와 메카의 전력(戰力)의 차이는 그리 크지 않았다. 지금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미국-이란과는 상황이 전혀 다르다. 이런 사실을 먼저 깨닫는 것이 급선무다. 현실을 외면한 채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 역사 해석으로 애써 맺은 협정의 가치를 떨어뜨리고 진의를 의심받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2018.05월 호 

◆무슬림들의 영원한 이상(理想), 정통칼리파 시대

⊙ ‘최후의 예언자’ 무함마드 사망 이후 ‘사도의 대리자’ 칼리파 시대 열려… 초기 4명을 ‘라시둔(하나님이 올바르게 인도한 대리자들)’으로 존경
4명의 라시둔(아부 바크르, 아부 우마르, 우스만, 알리)는 협의회에서 선출… 혈연보다 신앙 중시
⊙ 마지막 정통칼리파 알리 피살 후 우마야 왕조 수립… 이후 현대까지 세습과 독재 악순환 계속돼

▲천사들과 네 명의 라시둔에 둘러싸여 있는 무함마드. 14세기 초의 그림이다.

 

이슬람교 신자, 즉 무슬림들은 창조주 하나님(알라)이 만든 최초의 인간 아담을 인류 최초의 예언자로 간주한다. 아담부터 시작한 예언자 계보는 유대·그리스도교 성서에 등장하는 유수한 인물들로 이어져, 그리스도교인들이 신성(神性)을 지닌 인간으로 여기는 예수 역시 예언자라고 한다. 물론 무슬림들은 예수의 신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예수는 인성(人性)만을 지닌 인간이라고 본다.
  
 
이처럼 아담에서 예수까지 이어진 예언자 전승의 마지막에 무함마드가 자리한다. 무슬림들은 하나님이 인류에게 내보낸 마지막 예언자가 바로 무함마드라고 믿는다. 무함마드 이후 더 이상 예언자는 나오지 않는다.
  
 
벽돌집에 비유하자면 예언자라는 집을 완성하는 마지막 벽돌이 무함마드다. 시간적으로는 가장 늦게 출현했지만, 그가 없으면 예언자 전통이 완성되지 않는 것이니, 무함마드는 예언전승을 집대성한 위대한 인물이다. 아랍어로 최후의 예언자 무함마드를 ‘카탐 알안비야’, 즉 ‘예언자의 봉인(封印)’이라고 부른다. 오늘날 이란의 혁명수비대에서 즐겨 쓰는 용어이기도 하다. 이슬람에서 이단으로 여기는 자는 바로 최후의 예언자 무함마드 이후에도 예언자 전통이 이어진다고 하는 사람들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632년 무함마드가 병으로 죽은 후 무슬림 공동체는 큰 충격에 빠졌다. 예언자는 어디까지나 인간이기에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유한한 존재다. 이를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인정하기 어려웠던 듯, 오랜 동료이자 2년 후 무슬림 공동체의 지도자가 된 우마르는 하나님의 사도(무함마드)가 죽지 않았고, 이슬람이 모든 다른 종교를 지배할 때까지 죽지 않을 것이라며 무함마드의 죽음을 부인했다. 이에 아부 바크르는 충격에 빠진 무슬림들에게 “무함마드를 숭배하는 자들이여, 무함마드는 죽었다. 하나님을 숭배하는 자들이여, 하나님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라고 외치며 신의 무한성(無限性)에 비추어 예언자의 유한성(有限性)을 강조하며 공동체의 동요를 수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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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도의 대리자’

무함마드의 죽음. 그가 죽은 후 무슬림 공동체는 협의에 의해 칼리파를 선출했다.

 

  그렇다면 최후의 예언자가 남기고 간 무슬림 공동체는 예언자 없이 어떻게 신앙을 수호하며 존속할 수 있었을까? 더 이상 예언자가 나오지도 않는 상황에서 예언자를 대리하는 지도자가 무슬림들을 이끌었다. 이러한 지도자를 ‘칼리파’라고 불렀는데, ‘하나님의 사도의 대리자’라는 뜻을 지닌 ‘칼리파 라술 알라’의 줄임말이다. 특별히 처음 4명의 칼리파를 후대의 칼리파와 구분하여 라시둔(하나님이 올바르게 인도한 대리자들)이라고 부르고 존경을 표한다. 우리말로는 라시둔을 정통(正統)칼리파라고 한다. 이슬람을 정치적 원리로 삼는 근본주의자들을 위시하여 많은 무슬림들은 예언자와 이 4명의 칼리파들이 다스린 시대를 가장 이상적인 시기로 여겨 오늘날에도 재현하고자 노력한다. 그렇다면 라시둔 시대는 후대와 어떻게 달랐던 것일까?
  
 
오늘날 무슬림 세계는 거의 예외 없이 절대왕정 내지 독재공화정의 정체를 유지하고 있다. 절대왕정은 말 그대로 왕의 권한을 헌법이 제한하지 못하니 왕의 말이 곧 법이다. 후계자 역시 왕의 뜻대로 이루어진다. 공화정에는 왕이 없지만, 사실상 공화정 수반이 왕처럼 군림하기에 현대 무슬림 세계에서 왕정과 공화정의 차이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공화정을 채택한 이집트나 시리아에서 보듯, 한번 권좌에 오른 대통령은 죽어서야 물러난다. 이집트의 무바라크가 아랍의 봄 시위에 물러난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후계자 선정도 왕정과 다를 바 없어 시리아의 경우 아버지 하페즈 알아사드에 이어 아들 바샤르 알아사드가 권좌를 이어 가고 있다. 공화정 부자세습이다. 북한처럼 말이다

 

 

이렇듯 권력을 세습하는 전통은 사실 정통칼리파 시대의 것이 아니다. 정통칼리파들은 모두 무함마드와 같은 꾸라이시 부족 출신이긴 했지만 형제나 부자(父子) 관계도, 같은 집안 출신도 아니었다. 사실 무함마드가 이룬 가장 위대한 업적은 혈연 중심의 아랍사회를 신앙 중심의 이슬람사회로 변환한 것이었다. 이를 반영이라도 하듯, 무함마드 사후(死後) 무슬림 공동체의 지도자는 비록 꾸라이시 부족에서 나오긴 했지만, 칼리파 4명 모두가 친족으로 엮이지는 않았다.

 

포로가 된 족장의 딸을 풀어주는 무함마드(오른쪽 불꽃 형상). 가운데가 그의 아내 아이샤다.

 

  먼저 아부 바크르는 무함마드가 예언자 소명을 받았을 때부터 함께한 오랜 동료로, 무함마드가 메카 사람들의 박해를 피해 메디나로 이주할 때에 유일하게 동행한 사람이었다. 무함마드보다 세 살 어린 것으로 알려진 아부 바크르는 메디나로 이주하기 전 상처한 무함마드가 여섯 살 된 자신의 어린 딸 아이샤를 아내로 맞는 것을 허락했다. 둘의 혼인은 623년 또는 624년에 정식으로 이루어졌는데, 그때 아이샤의 나이는 약 10세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아부 바크르는 이로써 무함마드의 동료이자 장인이 됐다.  

 

  ‘이슬람의 바울로’ 아부 우마르

아부 바크르는 무함마드의 장인으로 무함마드 사후 초대 칼리파가 됐다.

 

  무함마드 사후 아부 바크르가 첫 번째 칼리파가 된 것은 그의 뒤를 이어 두 번째 칼리파가 된 우마르의 힘이 컸다. 무함마드가 살아 있을 때 무함마드를 대신하여 예배를 이끌 정도로 그의 위상은 높았지만, 무함마드가 죽자 메카에서 이주한 무슬림들을 도왔던 메디나의 무슬림 조력자들은 자신들 중에서 지도자를 옹립하려고 했다. 이에 우마르가 설득하여 아부 바크르가 첫 번째 칼리파가 됐다. 공동체 지도층이 합의한 결과다. 아부 바크르는 부유함을 마음에 두지 않고 소박한 삶을 산 것으로 유명하다. 후대 사람들이 그를 존경한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다
  
 
아부 바크르가 2년간 칼리파로 공동체를 이끌다 죽음의 문턱에 이르러 우마르를 후계자로 옹립하라는 유언을 훗날 세 번째 칼리파가 된 우스만에게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아부 바크르의 뜻에 따라 두 번째 칼리파가 된 우마르는 원래 무함마드의 이슬람이 메카 사회에 분열을 조장한다고 싫어하며 이슬람 운동을 막았던 사람이다. 그의 여동생과 매제가 무슬림이 됐다는 것을 알고 불같이 화를 냈던 우마르는 여동생 집에서 흘러나오는 코란 낭송에 매료되어 무슬림이 됐고, 이후 이슬람 보호와 전파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리스도교의 사도 바울로처럼 박해하는 자에서 선교하는 자로 극적인 전환을 했기에 우마르를 ‘이슬람의 바울로’라고 부르기도 한다. 아부 바크르와 마찬가지로 우마르는 무함마드의 동료이자 장인이었다. 무함마드는 과부가 된 우마르의 딸 하프사를 네 번째 아내로 맞이했다.
  
 
우마르 또한 수수하고 검소한 삶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게다가 화도 벌컥 잘 냈다. 무슬림 장수들이 비단옷을 입고 있는 것을 보고 돌을 던졌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다. 전승에 따르면 637년 무슬림군이 점령한 예루살렘에 우마르는 낙타를 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신발을 손에 들고 맨발로 걸어서 들어가 보는 이들을 놀라게 만들었다고 한다. 예루살렘의 그리스도인들은 정복자라면 압도적인 기병의 호위를 받으며 웅장한 말발굽 소리를 내면서 입성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너무나도 소박한 우마르의 모습을 보고 감탄했다는 것이다.    


  우마르, 이슬람 분열의 단초 마련  

  무슬림들은 아부 바크르와 우마르가 지도자의 권위가 무력(武力)이 아니라 질박한 삶의 양식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이 두 사람은 무함마드 사후 무슬림 공동체를 더욱 단단하게 만든 주역들이었다. 사실 학자들은 무함마드 생전에도 이들이 공동체 운영에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을 것이라고 판단한다. 그래서 조금 과장된 용어로 무함마드, 아부 바크르, 우마르가 삼두(三頭)정치를 했다고 보는 시각도 없지는 않다. 그런데 아부 바크르보다 우마르의 역할이 더 컸던 것 같다. 아마도 무함마드가 “하나님께서 나 다음으로 예언자를 내신다면 그건 우마르일 것이다”라고 말했다는 무슬림 전승 기록은 이를 반영하는 듯하다. 그러나 순니와 달리 시아 무슬림들은 우마르가 알리와 예언자 집안 사람들을 제대로 우대하지 않았다고 하면서 우마르에 대한 적의(敵意)를 숨기지 않는다.
  
 
우마르는 모스크에서 바스라 총독의 그리스도교인 노예의 칼에 찔려 죽었다. 그는 죽기 전 침상에서 자신의 후계자를 뽑을 협의회를 구성할 것을 요청했다고 한다. 그가 차기 지도자로 특정인을 염두에 두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협의회는 우스만을 세 번째 칼리파로 낙점했다.
  
 
우스만은 이슬람을 반대한 우마야 가문 출신이지만, 이슬람 운동에 참가했고, 무함마드의 둘째 딸 루까야를 아내로 맞았으며, 루까야가 죽은 후에는 셋째 딸 움 쿨숨과 부부의 연을 맺어 무함마드의 겹사위가 됐다. 우리의 가족 관념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시아 전승은 우스만의 두 아내가 모두 예언자의 딸이 아니라고 부인한다.
  
 
부유한 상인 출신이었지만 소박했던 우스만의 칼리파 즉위와 함께 초기 무슬림 공동체에 분열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우스만을 향한 비판의 목소리가 상당히 많이 기록되어 있는데, 무엇보다도 자신이 속한 우마야 가문 사람들을 요직에 중용한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지나치게 독립적인 총독의 권한을 제한하려는 의도로 이해할 수는 있지만, 친족에 의존하는 인사는 환영받지 못했다. 무슬림 전승은 우스만 집권 12년을 선정(善政) 6, 실정(失政) 6년으로 나누어 본다. 전승에 따르면 7년째 되던 해 우스만이 에언자의 인장을 잃어버렸는데, 공교롭게도 그해 이라크에서 경제난과 반란의 기운이 퍼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집트의 경우 경제적 어려움이 더해지면서 우스만이 예언자의 전통에 따라 부()를 제대로 분배하지 않는다는 비난이 일었다. 우스만의 친족등용으로 권력에서 소외된 인사들이 반란의 불씨를 키우면서 결국 이집트 반란군이 메디나로 몰려왔다. 우스만은 이들을 잘 달래 되돌려 보냈다. 그런데 우스만이 이집트 총독에게 보낸 서신을 지닌 전령이 귀환하던 반란군에 잡혔다. 편지에는 반란군이 이집트에 도착하면 처리하라고 적혀 있었다. 이에 격노한 군인들이 다시 메디나로 발길을 되돌렸고, 서한이 위조됐다는 해명에도 불구하고 결국 우스만을 살해했다. 12년에 걸친 우스만의 칼리파직은 656년에 이렇게 허무하게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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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타의 전투’와 시핀전투

‘낙타의 전쟁’은 무함마드의 미망인 아이샤(왼쪽)와 제4대 칼리파 알리 간의 싸움이다.

 

  우스만 살해라는 혼돈의 시기에 알리가 네 번째 칼리파로 선출됐다. 우스만을 죽인 이들이 알리를 지지한 것은 우스만의 죽음을 알리가 사주했다는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물론 알리는 당시 메디나에 있던 무슬림들의 선택을 받았기에 우스만을 죽인 이들만의 지지에 힘입어 칼리파가 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우스만을 죽인 자들에게 복수의 칼을 갈고 있던 우스만 친족들에게 알리는 공적(公敵)이 됐다. 더욱이 알리는 예언자의 아내 아이샤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무함마드의 사촌동생인 알리는 그의 네 번째 딸 파띠마를 아내로 맞아 무함마드의 사위이기도 했다. 나이는 알리가 약 10살 정도 더 연상이지만 아이샤는 알리의 장모다.
  
 
알리와 아이샤의 관계가 왜 나빴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전승에 따르면 아이샤가 무슬림군과 함께하던 중 뒤처져 일행과 떨어졌고, 다음 날 젊은 병사가 아이샤를 찾아 나타난 사건으로 불륜을 저질렀다는 소문이 횡행하자 알리가 무함마드에게 이혼을 권했다고 한다. 물론 둘은 헤어지지 않았다. 아이샤가 부정한 짓을 하지 않았다는 코란 계시가 내려왔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불리한 말을 한 알리를 아이샤가 좋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알리는 칼리파가 되자마자 아이샤를 중심으로 한 반군의 도전에 직면했다. 656년 바스라에서 아이샤가 탄 낙타를 중심으로 전투가 벌어졌고, 알리의 군대가 승리했다. 알리는 패배한 아이샤를 정중하게 대했다. 이후 아이샤는 정치적으로 조용한 삶을 살았다. 아이샤가 탄 낙타 주변에서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다고 해서 역사는 이를 ‘낙타의 전투’라고 부른다.

 

4대 칼리파 알리의 군대와 제3대 칼리파 우스만의 지지자들은 657년 시핀에서 전투를 벌였다.

 

  하지만 우스만의 친족으로 우스만의 죽음을 복수하겠다는 의욕에 불타며 알리에게 책임을 묻고 있던 당시 시리아 총독 무아위야가 반란의 깃발을 다시 들었다. 657년 양측 군대는 시리아와 이라크의 국경지역인 유프라테스 강가 시핀(Siffin)에서 격돌했다.
  
 
무아위야는 영리했다. 그의 군대는 창끝에 코란을 꽂아 중재를 요청했다. 무슬림의 피를 흘리기를 꺼렸던 알리는 이를 받아들여 중재가 시작됐다. 그러나 알리의 추종자들 중 일부가 이에 반대하고 나섰다. 그들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판결을 내릴 수 있다. 믿는 자들이 싸울 때는 화해해야 하지만, 반란을 일으킨 경우에는 끝까지 싸우라”고 한 코란 49 9절을 근거로 들면서, 반란자 무아위야측의 중재 요구를 받아들인 것은 정의롭지 못한 것이라고 반대했다. 결국 이들은 알리의 진영에서 이탈했다. 이들을 ‘카와리즈’라고 하는데, ‘떠난 자들’이라는 뜻이다. 알리측은 카와리즈를 응징했다. 그에 대한 보복으로 카와리즈는 661년에 알리를 살해했다. 이로써 정통칼리파 시대는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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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시대를 그리는 무슬림들

4대 칼리파 알리가 암살되면서 정통칼리파 시대는 끝났다.

 

  우스만의 친족등용 실정에서 무너지기 시작한 정통칼리파 시대는 우스만 살해 후 알리가 칼리파가 되면서 낙타의 전투, 시핀전투를 거쳐 알리 살해라는 일련의 비극적인 내전의 혼란을 겪었다.
  
 
알리 사후 알리 진영은 그의 아들 하산이 잠시 이끌다가 무아위야와 평화협정을 통해 무아위야에게 무슬림 공동체 지도자 자리를 양도했다. 이로써 우마야 칼리파조가 개창됐다. 우마야 칼리파조는 정통칼리파조와 달리 세습으로 칼리파 자리가 이어졌다. 예언자 무함마드가 혈연 중심의 아랍 사회를 신앙 중심의 공동체로 바꾸었고, 정통 칼리파 시대는 이를 이어 갔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다시 혈연이 신앙을 눌렀다.
  
 
우마야 칼리파조 이래 무슬림 세계의 정치 현실은 세습과 독재의 연속이다. 그래서일까. 선출과 협의를 중시했던 정통칼리파 시대를 무슬림들은 이상적인 황금시대를 그리워한다. IS가 내거는 명분도 ‘칼리파 국가’의 재건이다. 극악한 전체주의 신정(神政) 체제를 지향하는 IS는 얘기할 가치도 없지만, 그래도 칼리파 제도는 그 정신만 제대로 살린다면 훌륭한 정체(政體)가 될는지도 모른다. 칼리파 시대에도 물론 질투와 다툼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래도 그때에는 지도자를 협의하에 뽑을 수 있었고, 그렇게 선출된 지도자는 부귀한 지위에 올랐어도 소박한 삶을 살았다. 세습과 독재의 악순환이 계속되고, 그 와중에 무고한 국민들이 죽어 나가는 지금보다는 그때가 나았다고 말하면 지나친 얘기일까?

 

 

06월 호

◆시리아 알아사드 정권의 기반 알라위派

▲2011 6월 라타키아. 바샤르 알아사드 지지 친정부 시위.

 

   “국민은 정권 전복을 원한다(앗샤으브 유리두 이스까딴 니담). 

  2011 1월 튀니지 벤 알리의 24년 독재정권이 민주화 시위로 무너지면서 시작된 이른바 ‘아랍의 봄’ 때 독재정(獨裁政)이 만연한 중동(中東) 지역 국민들이 애호하던 구호다. “개도 국경을 넘어야 짖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국민 감시가 철저한 시리아에서도 3 6일 남부 도시 다라에서 청소년들이 이 말을 담장에 썼다가 경찰에 체포됐다. 아이들이 붙잡혀 고문을 당하자 부모들이 거리로 나섰다. 같은 달 15일에는 수도 다마스쿠스와 시리아 최대 도시 알레포에서 반정부 시위가 발생했다. () 대통령 바샤르 알아사드의 아버지 하페즈 알아사드가 1970년 쿠데타로 정권을 잡아 이듬해 대통령을 갈아치우고 스스로 대권(大權)을 거머쥔 이래 무려 41년간 부자(父子)세습 독재에 지친 시리아 국민들이 ‘아랍의 봄’에 힘입어 거리로 나선 것이다.
  
 
시리아의 반()정부시위는 평화로운 정권교체를 이끌어내지 못했다. 바샤르 알아사드는 국민들을 말로 어르고 달래거나 총칼로 협박하며 자리를 굳건히 지키려 했다. 반정부 시위대 또한 강대강(强對强)으로 맞섰다. 그 결과는 모두가 다 알다시피 지난 7년간 시리아를 휩쓸고 있는 내전(內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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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아, 3차 대전의 震源 되나?

하페즈 알아사드 대통령 가족. 뒤편 왼쪽에서 두 번째가 현 대통령 바샤르 알아사드.

 

  단순하게 보면 시리아 내전은 민주적인 정치개혁 없이 정권을 유지하려는 바샤르 알아사드 정권과 이에 반대하는 반정부 세력의 다툼이다. 한 꺼풀 더 벗겨 들어가 보면 바샤르 알아사드 정권을 유지해서 이란-이라크-시리아-레바논으로 이어지는 이른바 ‘시아초승달(Shia Crescent)’ 지대를 수호하려는 이란과 이를 막으려는 반이란 국가의 대립이 자리 잡고 있다. 이란은 억압자에 반대한다는 이슬람혁명정신을 내세워 팔레스타인 선주민(先住民)을 내쫓고 국가를 세운 이스라엘의 시온주의 타파를 국시(國是)로 삼고 있다.
  
 
이란은 시리아를 확보해야만 반이스라엘 무력(武力) 투쟁 선봉에 선 레바논의 헤즈볼라 지원이 가능하기 때문에 친()이란 바샤르 알아사드 정권 수호에 전력(全力)을 기울이고 있다. 반면 아라비아반도에서 이란의 영향력을 제거하고자 애쓰는 사우디아라비아, 이스라엘은 어떻게 해서든지 이란과 시리아의 관계를 파탄 내고자 반군(反軍)을 지원하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반군에게 무기와 자금을 제공했다. 이스라엘은 내전이 시작된 이래 약 100여 차례에 걸쳐 조용히 시리아 공습을 감행했다.
  
 
시리아 내전은 국내적으로 보면 정부군과 반정부군의 다툼, 지역적으로 보면 친이란과 반이란의 대립이다. 더 나아가 시리아 내 지중해 연안 항구도시 타르투스(Tartus)에 건설한 해군기지를 수호하고 중동 내 영향력 확대를 꿈꾸는 러시아와 이를 막으려는 미국의 대립이기도 하다. 형세가 마치 1차 세계대전 직전의 발칸 반도와 같아서 시리아 내전이 자칫 잘못하면 3차 세계대전을 촉발할 수 있다는 우려스러운 전망이 나오고 있다.
  
 
바샤르 알아사드 정권의 기반은 전 국민의 약 11%에 달하는 200여만 명의 알라위(Alawi)파 사람들이다. 아버지 하페즈부터 아들 바샤르까지 알아사드 부자 정권이 1971년 이래 무려 47년 동안 존속되고 있는 것은 이들 알라위파의 단결에 힘입은 바 크다. 시리아가 독립하기 이전까지 이단(異端) 종파로 낙인찍혀 박해와 멸시를 받았던 알라위파 사람들이 시리아 정권을 유지해 왔다는 자체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들의 힘은 군권(軍權) 장악에서 나온다. 북한이 그러하듯 말이다. 이들이 시리아 정부군의 65%를 차지하고 고위 요직을 꿰차고 있기 때문에 장기 독재체제가 가능했다. 이들은 도대체 누구이기에 소수(少數)이면서도 알아사드 부자 정권을 어언 반세기 동안이나 지탱해 올 수 있었던 건가?    


  알라위 혹은 누사이리 

  알라위는 시아(Shia)파다. ‘시아’는 아랍어로 ‘파()’나 ‘당()’을 뜻한다. 시아는 원어로는 시아트 알리(Shiat Ali)라고 하고 이를 줄여 시아라고 하는데, 알리파, 알리당, 즉 알리를 따르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알라위’라는 말은 아랍어는 알리(Ali)라는 이름의 형용사 형태로 ‘알리의’라는 뜻을 지니고, 형용명사로 알리를 따르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알라위나 시아나 사실상 같은 말이다.
  
 
알리는 이슬람의 예언자 무함마드의 사촌동생이자 사위인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를 가리킨다. 시아파에서는 예언자 무함마드가 죽기 전 632년 마지막 메카 순례를 마친 후 가디르 쿰에서 일행과 헤어지기 전에 사람들에게 “나를 지도자로 여기는 이들이여, 보라, 여기 알리가 너희의 지도자다”라고 하면서 알리를 무슬림 공동체의 지도자로 임명했다고 믿는다. 시아들의 믿음과 달리 그는 무함마드 사후(死後) 24년이 지난 656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4번째 칼리파, 즉 예언자의 대리자가 됐고, 661년 정적(政敵)의 칼에 암살당한 비운의 지도자다.
  
 
알리는 예언자의 딸 파티마와 결혼, 하산과 후세인 두 아들을 두었다. 오늘날 시아파 다수를 차지하는 12이맘 시아파는 알리를 첫 번째 이맘, 하산을 두 번째 이맘, 후세인을 세 번째 이맘으로, 후세인의 직계 후손을 네 번째부터 열두 번째 이맘으로 여긴다.
  
 
이 글에서 지칭하는 알라위는 원래 역사적으로 보면 알라위라는 말보다는 ‘누사이리(Nusayri)’로 불렸다. ‘누사이리’는 ‘누사이르를 따르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누사이르는 무함마드 이븐 누사이르 알나미리를 가리킨다. 그는 9세기 바그다드에서 시아파 열번 째와 열한 번째 이맘 추종자였다고 한다. 시리아가 프랑스보호령이던 시대인 1924년에 당시 여러 지역 경찰 업무를 맡고 있던 경찰총수가 아랍어로 《알라위의 역사》라는 제목의 책을 쓰면서 처음으로 알라위라는 말을 사용한 이래 누사이리가 알라위로 통용되기 시작했다

   
  
시아와 알라위

1938년 안티오크. 알라위 남성.

 

  시아파는 형성 과정에서 주요 인물, 특히 알리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정통파와 과장(誇張)파로 나뉜다. 정통파와 달리 과장파는 알리의 신성(神性)을 주장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을 아랍어로 굴라트(Gulat)라고 불렀다. 말 그대로 ‘과장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누사이리’, 즉 ‘알라위’는 알리를 신으로 숭앙하기 때문에 과장론자들로 불렸다. 엄밀히 따지면 알리를 신으로 숭배하는 것은 아니다. 알라위는 대단히 영적(靈的)이고 비의적인 해석을 채용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러한 해석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들을 ‘인간 알리를 신으로 과장하여 섬기는 자’들로 간주하여 이단시했다.
  
 
알라위는 신론(神論)을 이해하는 방식이 다소 독특하다. 그리스 철학자 플로티노스(204/5~270)의 유출론(流出論)의 영향을 받았다. 유일신에서 나온 다양한 자연세계를 가장 잘 설명해 주기에 유출론은 유일신론자들이 크게 환영했다. 태양에서 여러 갈래의 햇빛이 나오지만 해와 햇빛이 동일하지 않듯, 유일신에서 세상이 유출되지만 세상이 신이 아니기에 이슬람과 같이 유일신론을 견지하는 종교를 설명하는데 이보다 더 적절한 사상도 없을 것이다.
  
 
알라위는 창조주 유일신이 본질(마으나 mana), 이름(이슴 ism), (바브 bab)이라는 세 가지 양식을 취한다고 본다. 이 셋을 신성의 세 형태라고 부를 수 있다. 이와 같은 신성의 세 가지 표현양식은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론(三位一體論)과 유사하다. 그래서 학자들은 알라위가 십자군 시대에 그리스도교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본다.
  
 
본질은 뜻, 의미라고도 하는데 창조되지 않고 영원하다. 유출의 근원이다. 이름은 본질/, 의미에서 처음으로 유출되는 것으로 신성한 빛에서 유출된다. 문은 본질/, 의미에서 두 번째로 유출된다. 이름은 신성을 숨긴다. 문은 신성으로 이르는 길이지만 신성 그 자체는 아니다. 알라위는 문을 통해 신성에 관한 지식을 얻는다.
  
 
태초에 알라위의 영혼은 신을 둘러싸고 찬양하는 빛이었으나 신에 불복하여 천상에서 지상으로 내던져져 물질적 육체를 지니고 윤회(輪回)에 휩싸이게 됐다. 죄인의 영혼이 들어간 동물은 섭취가 금지되고, 죄의 결과로 창조된 동물은 먹을 수 있다. 신의 본질을 믿으면 육체의 감옥에서 벗어나 별이 되어 다시 천상의 궁극자를 향하는 여정에 오를 수 있다. 여성은 사탄이 지은 죄악의 결과물인바, 천상여행을 할 수 없을뿐더러 종교의례 참여도 불가능하다.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지극히 남성 중심의 신앙이다. 여성을 배제하고 남성만이 참가하는 알라위 종교의례는 일정한 연령에 이른 자들만이 내부적으로만 은밀하게 행하기 때문에 외부인이 알 방법이 없다. 종교사상도 의례도 밀의적 요소가 강하다. 종교지도자나 학자들이 신앙해석을 제공하지 않기에 연구자들은 지금도 기존에 발표된 문서에만 의존할 뿐이다.
  
 
외부인들은 그리스도교에서 신이 예수로 육화(肉化)된 것으로 이해하는 것처럼 알라위가 신이 알리로 육화됐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알라위가 이슬람 내에서 이단으로 갖은 박해와 공격을 받은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시아와 알라위의 화해

2차 세계대전 당시 시리아 알라위 매사냥꾼.

 

  알리 이후 2번째 이맘부터 11번째 이맘은 각기 자신의 가르침을 전해줄 문을 지니고 있었다. 알라위의 창시자인 누사이르는 11번째 이맘의 문이다. 이란과 이라크에서 다수를 이루는 12이맘 시아파와 달리 알라위는 12번째 이맘의 대리자를 따로 인정하지 않고, 누사이르가 문으로 계속 역할을 한다고 믿는다. 이 점이 무엇보다도 12이맘파와 알라위를 갈라놓은 지점이다. 오늘날에는 양측이 서로를 인정하고 있다. 하페즈 알아사드 집권 당시인 1973년에 알라위 지도자들은 알라위가 12이맘파와 같은 믿음을 공유한다고 선언했다. 12이맘파 법학자 무사 알사드르는 알라위를 12이맘파로 인정하는 법해석을 내렸다.
  
 
현대 12이맘파가 알라위를 포용한 것과는 달리 무슬림 사회는 일반적으로 알라위를 배척했다. 아무리 영적이고 비의적인 해석이라고 하더라도 그 뜻을 깊게 새길 수 없는 대다수 사람에게 알라위의 종교사상은 오해받기 딱 좋았다. 한발리 법학자 이븐 타이미야(1263~1328)는 “알라위를 유대인, 그리스도교인보다 더 이단”이라고 하면서 이들이 무슬림 사회에 끼친 해악이 몽골군과 십자군보다 더 큰 이유를 다음과 같이 들었다.
  
 
“그들은 배우지 못한 무슬림 앞에서는 자신들이 시아파요, 예언자 집안사람들에게 충직한 척하지만, 사실 그들은 신과 예언자, 성스러운 경전, 의무나 금지사항, 보상과 징벌, 천국과 지옥, 또는 무함마드 이전에 오신 사도들이나 이슬람 이전의 종교 중 하나를 믿지 않는다. 그들은 무슬림들에게 알려진 신과 신의 사도들의 말씀을 자신들이 고안한 우의적인 방식으로 해석하여 비의학(秘義學)이라고 부른다.
  
 
말리키 법학자 이븐 바투타(1304~ 1369)는 알라위가 사는 지역을 지나면서 이들이 알리를 신으로 믿고, 예배도 세정례도 단식도 하지 않으며, 맘룩 술탄의 명령으로 지은 모스크를 동물 축사로 쓴다고 기록했다. 한때 술탄이 이들을 모두 죽여 버리려고 했다가 농사에 필요하다는 재상의 건의에 따라 제거 계획을 포기했다고도 한다  

  
  프랑스의 분할통치

현재 알라위 분포도.

 

  알라위는 오늘날 알라위산()을 중심으로 주변으로 퍼져 살았다. 시리아 지도에서 서쪽 지중해 연안이 이들의 집중 거주지다.
  
 
배우지 못하고 가난한 산악거주민으로 천대받던 알라위의 삶에 볕이 든 때는 프랑스 식민지 시대다. 아랍 민족주의와 이슬람주의를 두려워하던 프랑스는 소수(少數) 종파를 보호하면서 ‘나누어 다스려라’는 고전적 통치법을 활용했다. 1920년 알라위 자치 지역은 몇 차례 변화를 겪은 후 1937년 새로운 국가 시리아의 영토로 편입됐다. 알라위 국가로 독립하지 못하고 시리아의 일부가 된 것이다. 오늘날 알라위는 시리아 서북부와 레바논 북부( 20만명), 터키 남서부( 150만명)에 걸쳐 살고 있다.
  
 
편견 때문에 무슬림 사회에서 정상적인 출세가 불가능했던 알라위는 프랑스 식민지 시절 군인으로 활약했다. 하페즈 알아사드 시대부터 알라위파가 군부를 기반으로 지금까지 시리아를 장악하게 된 것도 이러한 전통 덕분이다. 박해받던 이들이 새로운 기회의 창이 열리자 적극적으로 편승하여 운명을 개척한 것이다.
  
 
시리아 내전 종결을 둘러싸고 국제사회가 골머리를 앓고 있는 오늘날 알라위가 또 어떻게 자신의 앞날을 개척할까? 하나 확실한 것은 이슬람을 정치와 사회적 삶의 원리로 삼는 무슬림형제단에게 조금이라도 시리아를 양보한다면 알라위의 미래는 어두울 수밖에 없다. 프랑스 식민지 보호령 이전 전통 무슬림 사회에서 알라위의 삶은 비참했으니까 말이다. 바샤르 알아사드를 지탱하는 힘은 바로 소수자로서 겪어야 했던 참혹한 과거의 기억이다.

 

 

7월 호

◆어느 少數派 무슬림학자의 《코란》 해석

이스라엘 땅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것 

⊙ 칼릴 모함메드, “예언자 무함마드의 사명이 예루살렘이나 이스라엘 수복에 있지 않다… 무함마드의 임무는 메카 정복으로 완성”
⊙ ‘이슬람을 정치적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악용하며 테러를 행하지 마라’
‌⊙ “모든 무슬림이 테러리스트가 아니지만, 거의 모든 테러리스트가 무슬림”(압드 알라만 알라시드)

▲5월 15일 요르단을 비롯한 많은 이슬람 국가에서는 이스라엘 주재 미국 대사관의 예루살렘 이전을 규탄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사진=뉴시스

 

   1995년 미국 의회가 제정한 ‘예루살렘대사관법’은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首都)로 인정하고, ()이스라엘 미국 대사관을 예루살렘으로 옮겨야 한다고 규정했다. 단 대사관을 이전하는 것이 미국의 안보를 위협할 경우 6개월마다 이전을 유예할 수 있다는 규정을 두었다.
  
 
이 법의 발의자는 당시 공화당의 밥 돌 상원의원이었다. 대선(大選)에서 유대계의 지원을 얻기 위해 낸 묘수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1996년 대선에 공화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현직 클린턴 대통령에게 패했다. 1976년 포드 대통령의 러닝메이트로 부통령 후보로 출마하여 패한 뒤 20년 만에 다시 대통령 후보로 나섰다가 고배(苦杯)를 마신 것이다. 미국 역사상 대통령 후보, 부통령 후보로 대선에 나섰다가 모두 패한 유일한 정치인으로 기록됐다.
  
 
대선에서 밥 돌처럼 유대인의 지지를 기대한 빌 클린턴, 조지 부시(아들 부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선거유세에서는 모두 이스라엘의 수도가 예루살렘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들은 유예조항을 활용하여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선언하지도, 대사관을 예루살렘으로 이전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트럼프 대통령은 전임자들의 이중적인 태도와는 달리 과감하게 유예조항을 무시하고 법안을 그대로 살리는 돌직구를 던졌다. 그리고 지난 5 14일 이스라엘 건국 70주년 기념일에 예루살렘으로 미국 대사관을 이전했다.
  
 
예루살렘 대사관법이 통과될 당시 라빈 이스라엘 총리는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와 평화협상을 진행 중이었기 때문에 악영향을 우려하여 이 법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그로부터 23년 후인 올해는 양상이 사뭇 다르다. 이스라엘은 축제 분위기다. 1948 5 14일 벤구리온 임시국가위원회 위원장이 유대인 지도자들을 영국 몰래 텔아비브박물관으로 불러 4시에 이스라엘 건국을 선포하자 가장 먼저 이를 승인한 나라가 미국이었다. 당시 미국 대통령은 트루먼. 70년 후인 올해 5 14일에는 트럼프 대통령이 예루살렘을 수도로 인정하고 대사관까지 이전했으니 두 ‘트’ 대통령이 이스라엘에는 은인 중의 은인이 아닐 수 없다.
  

 
  예루살렘을 둘러싼 갈등

주이스라엘 미국 대사관의 예루살렘 이전을 하루 앞둔 5 13일 예루살렘 시내에는 ‘미국 대사관의 이전을 환영한다’는 글귀가 내걸렸다. 사진=뉴시스

 

  1947년 유엔은 팔레스타인 분할안을 통과시키면서도 예루살렘이 지닌 역사적·종교적 중요성을 감안하여 아랍이나 이스라엘 어느 쪽에도 관할권을 주지 않고 ‘코르퓌스 세파라툼(Corpus Separatum), 즉 분리개체(分離個體)로 지정하여 국제사회에 관리를 맡겼다. 1967 6일 전쟁 때 이스라엘이 요르단으로부터 동()예루살렘을 빼앗아 동서 예루살렘을 모두 지배하기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유엔은 이스라엘의 예루살렘 정복을 인정하지 않았다. 더 나아가 1980년 이스라엘 의회가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규정한 ‘예루살렘법’을 통과시키자 유엔은 안보리 결의안 478호로 이를 비판했을 뿐만 아니라 회원국에 외교공관을 예루살렘에서 철수시키라고 요구했다. 미국만 기권한 채 찬성 14, 반대 0표로 가결된 결의안에 따라 올해 미국이 대사관을 이전하기 이전까지 단 한 개국도 예루살렘에 대사관을 설치하지 않았다. 이처럼 이스라엘과 미국을 제외한 국제사회는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받아들이지 않을 뿐 아니라 이스라엘의 동예루살렘 점령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예루살렘을 당연히 자신들의 땅으로 여기고 있다. 이스라엘처럼 팔레스타인 역시 예루살렘을 자신들이 세울 국가의 수도로 결정해 놓고 있다. 예루살렘에서 남동쪽으로 약 4km 떨어진 아부디스에 의회 건설 공사를 하다가 예루살렘에 의회를 세워야 한다는 의원들의 강력한 반대에 밀려 중단했다.
  
 
최근 사우디아라비아의 왕세자 무함마드 빈 살만은 예루살렘 대신 아부디스를 수도로 하여 팔레스타인 국가를 세우라고 마무드 압바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에게 강권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물론 팔레스타인의 반응은 차갑다. 특히 미국 대사관 예루살렘 이전에 맞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는 미국과의 공식대화 통로인 주미 특사를 소환했고, 더 나아가 미국 대사관 개관식에 참석한 유럽연합 4개국(루마니아·오스트리아·체코·헝가리) 주재 자국(自國) 대사를 불러들였다. 미국 대사관 개관식 날 강렬하게 항의에 나선 팔레스타인 주민 시위대에 이스라엘군이 발포하여 60여 명이 죽고 약 2800여 명이 부상당하는 유혈사태가 벌어졌다.
  
 
문제의 심각성은 예루살렘이 단순히 팔레스타인-이스라엘의 대립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이스라엘 지배하의 팔레스타인뿐 아니라 중동(中東) 전역의 아랍인들, 더 나아가 예루살렘을 이슬람의 성지로 믿는 전() 세계 무슬림들까지 반미(反美)·반이스라엘 대열로 끌어들이기 때문이다. 국제테러의 대명사 알카에다는 “미국 대사관의 예루살렘 이전은 무장투쟁으로만 막을 수 있다”는 지도자 아이만 알자와히리의 음성메시지를 내보내며 무슬림들의 봉기를 선동했다. 예루살렘뿐 아니라 텔아비브도 무슬림 땅인데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이를 이스라엘에 팔아넘겼다고 비난하면서 무기를 들고 싸워야 한다고 재촉한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이스라엘에서 살라는 것은 神의 명령”

이스라엘은 유대인의 땅이라고 주장하는 칼릴 모함메드 교수. 사진=유튜브 캡처

 

  그렇다면 정말 이스라엘은 무슬림의 땅일까? 무슬림이자 예배인도자(이맘)인 칼릴 모함메드 미국 샌디에이고주립대 종교학과 교수는 적어도 《코란》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무슬림 소유가 아니라고 단언한다. 《코란》을 있는 그대로 읽으면 오늘날 이스라엘 건국자들인 시온주의자들의 주장과 전혀 다를 바 없이 이스라엘의 땅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예언자 무함마드의 언행을 모아놓은 《하디스》는 이스라엘이 저주받은 유대인들로부터 빼앗은 무슬림의 땅이라고 한다. 칼릴 모함메드의 주장은 명료하다. 원래 아랍-이스라엘 대립은 종교와는 무관한 것이었는데, 반이스라엘 투쟁을 이슬람과 유대교의 싸움으로 비화시켰다는 것이다. 그런데 《코란》은 종교전쟁으로 격상시킨 사람들이 불리하게 이스라엘에 대한 소유권이 무슬림에게 없다고 말한다.
  
 
이스라엘 땅은 히브리어로 ‘에레츠 이스라엘(Eretz Israel)’이다. 근세에 유대인의 고향으로 돌아가자고 시작한 이른바 정치적 시온주의자들이 쓴 표현이 바로 ‘에레츠 이스라엘’이지만, 이 말은 이들 시온주의자들보다 훨씬 먼저 히브리성서(그리스도교의 구약성서)에 사용됐다. 그런데 이슬람의 경전 《코란》 역시 이 개념을 그대로 쓴다. 모세가 사람들에게 말한 것을 기억하라.
  
 
“나를 따르는 사람들이여! 주님께서 당신들에게 베푸신 호의를 기억하시오. 여러분으로부터 예언자와 왕을 세우시고 어느 민족에게도 주신 적 없는 것을 여러분에게 주셨소. 나를 따르는 사람들이여, 하나님(알라)께서 여러분을 위해 써 놓으신 성스러운 땅으로 들어가시오. 되돌아오지 마시오, 그러면 고통을 겪으리라.(《코란》 5 20-21)
  
 
위 구절 중 21절에서 모세는 하나님이 모세를 따르는 사람들을 위해 “써 놓으신” 성스러운 땅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여기에서 “써 놓다”라는 말의 원어(原語)는 아랍어 동사 ‘카타바(kataba)’다.
  
 
칼릴 모함메드는 이 동사에 주목한다. 《코란》에서는 이 동사의 행위자가 알라인 경우가 22번 나오는데 하나같이 거스를 수 없는, 요즘 북핵(北核)과 관련하여 자주 언론에 오르내리는 말인 ‘불가역적(不可逆的)’이라는 뜻을 지닌다. 이러한 대표적인 예로 2 183절은 라마단 단식이 무슬림들에게 “적혀졌다”이며 ‘카타바’ 동사의 수동형 ‘쿠티바(kutiba)’를 쓴다. 이 말은 곧 ‘단식이 의무’라는 말이다. 칼릴 모함메드는 역사적으로 코란 주석가들이 코란 5 21절의 카타바 동사를 알라의 명령으로 해석했다고 강조한다.
  
  8
세기 무카틸 이븐 술레이만(767년 사망)은 카타바를 ‘명령하다’로 풀이하고, “이 땅에서 퇴각하면 패배자가 될 것”이라고 해석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성스러운 땅에 있는 아브라함에게 그 땅이 바로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 상속될 곳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10
세기 역사가이자 《코란》 주석가로 유명한 앗타바리(922년 사망)는 카타바를 “거기에 살고 있는 폭압자들 대신 너희가 살 곳으로 보존된 서판(알라우 알마푸즈, al-Lawh al-Mahfuz)에 확실히 적어두신 것”으로 풀이한다. ‘보존된 서판’이란 ‘천상의 성서’를 뜻하는 말로 《코란》 85 21절은 바로 이 서판에 기록된 것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하나님이 유대인들에게 이스라엘 땅에 들어가 살라고 ‘천상의 성서’에 적어두었다는 말은 결국 절대 고칠 수 없는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말이다. 

 
  ‘성스러운 땅’은 어디인가?  

  12세기 시아 무슬림 아부 알리 앗타바르시(1153년 사망)는 앗타바리의 해석을 그대로 따른다. 14세기에 이븐 카시르(1373년 사망)는 카타바를 하나님이 약속한 것이라고 풀이했고, 19세기에 무함마드 앗샤우카니(1834년 사망)는 한층 더 나아가 하나님이 믿는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하나님의 지식 속에 이미 예정해 놓은 것으로 해석한다. 즉 모세 일행이 성스러운 땅으로 들어가 살도록 하나님이 본래부터 정해 놓았다는 말이다.
  
  20
세기 시아 무슬림 학자인 이란의 타바타바이(1981년 사망)는 《코란》 5 21절을 28 5절이 더 명확히 설명하고 있다고 풀이한다. 즉 “하나님이 약한 자들에게 그 땅을 상속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모세는 하나님을 의존하고 도움을 청하면 이러한 약속이 이루어질 것으로 믿었고, 《코란》 7 129절은 그 땅이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이 하나님의 종들에게 그 땅을 줄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처럼 《코란》 주석가들은 순니나 시아 구분 없이 하나님이 ‘성스러운 땅’을 모세와 모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주었다고 해석한다. 그렇다면 ‘성스러운 땅’은 도대체 어디를 말하는가? 오늘날 예루살렘은 아랍어로 ‘알쿠드스’라고 부른다. 성스러운 곳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코란》은 예루살렘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는다. 《코란》 5 21절에 나오는 ‘성스러운 땅’이라는 말의 원어 표현은 ‘알아르드 알무캇다사(al-Ard al-Muqaddasah)’다. 앗타바리는 이 지명이 (1) 시나이와 인근 지역 (2) 시리아 (3) 예리고 (4) 다마스쿠스, 팔레스타인, 요르단 일부를 가리킨다고 풀이한다.
  
 
칼릴 모함메드는 《코란》이 17 4절에서 유대인이 바빌론제국과 로마제국으로부터 유배를 당했다는 것을 2번의 유배로 암시하면서 17 104절에서는 모세를 따르는 이들이 심판의 날에도 이 땅, 즉 이스라엘에 살 것이라고 말한다고 강조한다. 이스라엘이 유대인들을 위한 땅이라는 시온주의의 개념을 《코란》이 정확히 뒷받침하고 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코란》 어디에도 예언자 무함마드의 사명이 예루살렘이나 이스라엘 수복에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코란》 5 3절에서 명확히 말하고 있는 것처럼 아랍인들의 예언자 무함마드의 임무는 메카 정복으로 완성됐다는 것이다.    

 

  초기 무슬림, 예루살렘 중시하지 않아  

  그렇다면 왜 무슬림들은 예루살렘을 반드시 투쟁해서 수복해야 할 무슬림의 땅이라고 생각하는가? 칼릴 모함메드는 무함마드가 죽은 지 1세기 후에 만들어진 예언자 언행록(言行錄)인 《하디스》가 원인을 제공한다고 지적한다. 《하디스》가 유통되기 전인 638년부터 이미 예루살렘은 무슬림들이 지배하고 있었다. 그는 초기 무슬림들이 예루살렘을 지배했을 때 예루살렘을 지금 생각하는 것처럼 중요하게 여겼더라면 왜 예루살렘이 아니라 텔아비브에서 남동쪽으로 15km 떨어진 곳에 있는 로드(Lod)를 수도로 삼았겠느냐고 반문한다.
  
 
칼릴 모함메드는 예루살렘을 다스리면서 무슬림들은 하나님이 인간과 맺은 계약이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을 통해 혈통적으로는 유대인, 영적(靈的)으로는 그리스도인들과 맞닿아 있다는 사실에 직면하고는 아브라함의 다른 아들인 이스마일을 통해 무슬림들이 진정한 계약의 상속자임을 내세웠다고 해석한다. 아브라함이 사랑하고 하나님에 제물로 바치려고 했던 아들은 이삭이 아니라 이스마일이었다는 주장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또 《코란》에서 지적한 바대로 유대인들이 하나님과 한 약속을 어겼다는 점을 무슬림들이 언급하지만, 이러한 계약과 예루살렘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칼릴 모함메드는 지적한다. 설령 계약을 어겼다고 하여도 그 권리가 무슬림에 상속되는 것은 아니라고 하면서 말이다.
  
 
사실 《하디스》의 신빙성은 9세기부터 무슬림 학자들이 꾸준히 제기했다. 대표적인 《하디스》 수집가 무함마드 알부카리(810~870) 60만 개의 《하디스》를 모았지만 결국 신뢰도 점검과정 중에 거의 다 쳐내고 약 6000여 개만 묶어 책으로 출판했을 정도다. 칼릴 모함메드는 이처럼 《하디스》가 조작된 경우가 많으니 《하디스》 없이 《코란》 구절에 집중해서 팔레스타인 문제를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칼릴 모함메드는 오늘날 팔레스타인 분쟁이 종교 간 다툼으로 변질됐다고 개탄한다. 1967 6일 전쟁에서 아랍군이 이스라엘에 대패한 직후인 1968년 아즈하르대학에 모인 무슬림 학자들이 《코란》에 근거하여 이스라엘의 호전적인 행동을 제어하는 지하드를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랍인뿐 아니라 이슬람을 믿는 모든 사람의 투쟁을 독려한 것이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문제가 불거진 1948년 이스라엘 독립 때부터 1972년 뮌헨 올림픽에서 ‘검은구월단’이 이스라엘 선수를 살해할 때까지도 반이스라엘 투쟁의 핵심동력은 이슬람이 아니라 아랍민족주의였다고 칼릴 모함메드는 지적한다. 타도대상도 유대인이 아니라 이스라엘 건국이념인 정치적 시온주의였지만, 헤즈볼라, 하마스, 알카에다가 투쟁의 선봉에 나서면서 ‘반이스라엘’이 ‘반유대인’으로 변질됐다고 비판한다.

    
  아랍-이스라엘 분쟁에서 종교적 색채 없애야  

  증오 발언을 일삼으며 테러를 조장하는 사람들을 신실한 무슬림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칼릴 모함메드는 유수프 알카라다위처럼 민간인 살해를 종교적으로 정당화하는 이슬람법 해석을 내어놓는 이들을 신랄히 비판한다. 그러면서 팔레스타인의 평화를 위한 조건으로 네 가지를 주장한다.
  
 
첫째, 아랍-이스라엘 분쟁에서 종교적 색채를 없애야 한다.
  
 
둘째, 무슬림이 《코란》과 《하디스》의 차이를 인식하고, 적어도 《코란》에 초점을 강하게 맞춰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해야 한다.
  
 
셋째, 테러와 유대인 증오를 완전히 배제해야 한다.
  
 
넷째, 팔레스타인이 테러를 중단하고 이집트, 요르단처럼 이스라엘과 평화조약을 맺어야 한다.

  
 
학자적 양심에 근거한 칼릴 모함메드의 의견은 소수(少數) 중의 소수다. ‘친()이스라엘 시온주의 무슬림’이라는 비아냥도 쏟아지고 협박 이메일도 메일함에 쇄도한다. 그러나 그가 지닌 문제의식은 명확하다. ‘이슬람을 정치적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악용하며 테러를 행하지 말라’는 것이다. 테러는 이슬람이 아니라 사람을 증오하는 소수의 인간이 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과 같은 무슬림이 대다수인 팔레스타인의 고통은 자신의 고통이기도 하다고 토로한 칼릴 모함메드는 팔레스타인이 테러를 포기하고 이스라엘과 평화를 이루길 염원한다.
  
 
평화의 종교 이슬람을 악용하는 이들이 사라지길 바라는 칼릴 모함메드의 절규는 비록 오늘날 무슬림세계에서는 듣기 힘든 극소수 의견이지만 경청할 필요가 있다. 그의 고민은 그가 인용한 저명한 아랍 언론인 압드 알라만 알라시드의 말에 그대로 담겨 있다
  
 
“모든 무슬림이 테러리스트가 아니라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지만, 거의 모든 테러리스트가 무슬림이란 것 또한 명백하고, 이는 정말 고통스러운 사실이다.… 빈 라덴은 무슬림이다. 버스, 차량, 학교, , 건물에 자살폭탄을 감행한 전 세계 다수는 무슬림이다. 가슴 아픈 기록이다!
  
 
칼릴 모함메드의 기원대로 무슬림 지도자들이 증오선동 설교와 법해석을 멈추는 날이 올까?

 

 

08월 호

◆‘제주 난민’ 사태 불러온 예멘은 어떤 나라인가

⊙ 북예멘은 1918년까지 오스만제국이, 남예멘은 1967년까지 영국이 지배
1990년 북예멘 주도로 통일… 1994년 남예멘이 분리독립 선언했으나 북예멘에 진압돼
2015년 이후 하디 정부-후티 반군 간 내전… 사우디아라비아, 이란 견제 위해 개입

▲6 18일 제주시 용담동 법무부 제주출입국 외국인청에서 열린 난민 신청자 대상 취업설명회에는 예멘인 400여 명이 몰렸다. 사진=뉴시스

 

  말레이시아에서 제주도로 들어온 예멘 난민들 때문에 지난 한 달간 여론이 들썩였다. 제주출입국 외국인청에 따르면 5월 초부터 6월 중순까지 예멘인 561명이 입국하여 이 중 549명이 난민 신청을 했다. 내전(內戰) 중인 예멘이 제주도 무사증(無査證) 입국명단에 속해 있는 데다 말레이시아-제주 간 직항 노선이 개설되면서 2016 7, 2017 42명이던 예멘 난민 수가 급격히 증가했다.
  
  1991
년 유엔 난민협약에 가입하고 2012년 난민법을 제정하여 2013년 시행할 때만 해도 우리 정부와 국회의 관심은 탈북자였다. 예멘 난민은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한 예멘 난민 수용 반대 목소리가 높아감에 따라 정부도 상당히 곤혹스러운 처지다. 국제사회와 한 약속을 깨고 난민법을 폐지할 수도 없는 실정이기 때문이다. 갑작스럽게 늘어난 예멘 난민 수에 국민이나 정부나 모두 놀라서 어쩔 줄 모르고 당황한 모습이 역력하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예멘 난민들은 1km나 떨어진 머나먼 우리나라로 와야만 했을까?
  
 
아라비아 반도 남서쪽 끝에 자리 잡은 예멘은 북쪽으로 사우디아라비아와 1458km, 동쪽으로 오만과 288km에 달하는 국경을 맞대고, 동쪽으로는 홍해 남쪽으로 아라비아해에 연한 나라다. 국민 평균 연령이 19.5세이고, 25세 이하 인구가 전 국민의 60%를 차지할 정도로 젊은 나라지만, 아랍국가 중 가장 가난한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경제 사정이 열악하다. 예멘은 굳이 내전이 아니더라도 이미 ‘실패국가’로 불리던 곳이다.  
  

  자이디 시아와 北예멘

예멘 지도. 남북으로 나뉘었던 예멘은 1990년 통일을 이루었다.

 

  근세기 예멘은 수도 사나를 중심으로 한 북쪽은 1918년까지 오스만제국이, 항구도시 아덴이 축이 되는 남쪽은 1967년까지 영국이 지배했다. 오스만제국이 떠난 북쪽은 자이디(Zaydi) 시아파가 다스렸다. 자이디 시아는 편의상 학계에서 5이맘파로 부르는 시아로, 오늘날 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산재(散在) 7이맘파 이스마일리 시아와 이란에서 국가를 이룬 12이맘파 시아와는 역사적으로 다른 분파다.
  
 
자이디 시아는 740년 이라크 쿠파에서 순니 우마이야 정권에 반기를 든 자이드 이븐 알리 이븐 알후세인(694/695년생, 740년 사망)을 이맘(Imam·지도자)으로 추종한 사람들을 가리킨다. 자이드는 예언자 무함마드의 사촌 동생이자 사위인 알리와 예언자의 딸 파티마의 증손자로, 3번째 이맘 후세인의 아들이자, 12이맘파의 5번째 이맘 무함마드 알바키르의 이복형제다. 쿠파의 반란은 실패했고, 자이드는 죽었다.
  
 
자이디 시아는 불법적인 순니 통치에 저항하는 것을 종교적 의무로 간주한다. 이란의 12이맘파 시아와 달리 이맘이 죽지 않고 어딘가에 살아 있다가 불의로 가득 찬 세상 종말에 다시 온다는 것을 믿지 않고, 이맘은 결코 잘못을 하지 않는다는 ‘이맘의 무류성(無謬性)’도 수용하지 않는다. 자이디 시아가 순니와 크게 다를 바 없고, 순니에 대한 태도가 온화하다고 하면서 이들을 온건한 시아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자이디 시아는 불법적인 순니 통치에 강력히 저항했기에 정치적으로 보면 다른 시아파보다 훨씬 더 전투적이다.
  
 
역사상 자이디 시아의 중심지는 카스피해 지역과 예멘, 이렇게 두 곳이었다. 자이디는 8~9세기에 카스피해 남쪽 타바리스탄(Tabaristan) 지역에 거점을 마련했지만, 16세기에 이르러 세력을 상실하고 12이맘파에 흡수되거나 사라졌다.
  
  890
년에 성립한 예멘의 자이디 공동체는 1539년 오스만제국에 편입된 후 독립과 복속의 과정을 반복하다가 제1차 세계대전 후 오스만제국이 붕괴하면서 독립 자이디 이맘조()를 구축했다.  
  

  분단과 통일, 내전

예멘의 독재자 살레는 통일을 이루었지만 결국 나라를 내란으로 몰고 갔다.

 

  1962 9월 이맘 아흐마드가 죽자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아흐마드의 후계자인 아들 무함마드를 일주일 만에 권좌에서 끌어내리고 예멘아랍공화국을 세웠다. 권력을 잃은 자이디는 예멘의 북서부 사다 지역에 집중적으로 거주하고 있다. 현재 예멘의 시아는 약 800만명에서 1000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는 전체 인구의 35~40% 수준이다. 이맘조가 무너지고 다수가 순니로 개종했지만 아직도 그 비율이 비교적 높은 편이다.
  
 
북예멘과 달리 남예멘은 영국의 지배를 받았다. 1839년 아덴항을 장악한 영국은 남예멘을 인도의 일부로 간주하여 통치했고, 1937년 아덴을 보호령으로 삼고 이를 거점으로 남예멘 지역을 장악했다. 영국이 손에 넣은 남예멘 지역은 전체 예멘의 3분의 2에 달했다. 한 세기를 넘긴 영국의 남예멘 통치는 1963년 본격적인 반영(反英)항쟁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결국 1967년 영국이 철수하면서 남예멘에 남예멘인민공화국이 세워졌다. 그러다가 급진적인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정권을 장악, 1970년 국호를 예멘인민민주공화국으로 바꾸고 친()소련 사회주의 노선을 채택, 소련 해군에게 항구를 열어주었다.
  

북예멘과의 통일을 이루었다가 나중에 분리독립운동을 이끈 알베이드.

 

  남과 북으로 나뉘고 국가의 노선도 달랐지만, 분단된 한반도와 달리 남북 예멘의 사이는 그다지 나쁘지는 않았다. 비록 1970년대에 국경에서 무력(武力)충돌이 발생하여 아랍연맹이 중재 역할을 하긴 했지만, 1980년대에는 비교적 양측 관계가 평온했다.
  
 
통일은 소련 공산주의 체제가 무너지면서 이루어졌다. 1990 5 22일 양측은 통일에 합의하고 예멘공화국 성립을 선포했다. 새로운 예멘공화국은 북예멘의 대통령이던 알리 압둘라 살레를 대통령으로, 남예멘의 알베이드 사회당 당수를 부통령으로 하여 출범했다. 북예멘의 수도였던 사나가 새 예멘공화국의 수도가 되었다. 남예멘의 수도였던 아덴은 경제 중심지 역할을 맡았다.
  
 
통일 예멘의 앞길은 험난했다. 경제난으로 내부 불만이 격렬해졌다. 결국 통일에 합의했던 남예멘의 알베이드가 주축이 되어 1994 5 21일 다시 아덴을 수도로 하는 남예멘 독립을 선포했다. 그러나 국제사회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살레 대통령은 7 7일 아덴을 점령하여 내전을 끝냈다. 서둘러 내분을 봉합했지만, 후티(Huthi) 반군, 남예멘의 소외감, 극단주의, 살레의 교묘한 독재정치가 통일 예멘의 발전과 국민통합을 계속 가로막았다. 예멘 난민 유입의 결정적 계기가 된 2015년 발발 예멘전쟁은 위의 4가지 요소가 빠짐없이 골고루 작동한 결과물이다.
  
  

  후티 반군의 등장

후티 반군의 모체가 된 ‘젊은 신앙인들’의 창설자 후세인 바드룻딘 알 후티.

 

  한편 자이디 시아 지역인 사다에서는 순니파 사우디아라비아의 와하비 사상의 침투를 막고 교육을 통해 자이디 시아의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1994년경부터 ‘젊은 신앙인(Muntada al-Shabab al-Mumin)’이라는 조직이 결성되었다.
  
 
이 모임은 후세인 바드룻딘 알후티가 이끌었다. 이들은 2003년 예멘 정부가 미국 부시 행정부의 이라크 침공을 용인하자 반정부 목소리를 높이면서 세력 확장을 꾀했다. 2004년 정부가 후세인을 체포하기 위해 군대를 투입했다. ‘젊은 신앙인’이 대항하고 나서자 무력충돌이 발생했다. 후세인은 전투 중 사망했다. 이 참극을 계기로 ‘젊은 신앙인’은 후티 반군(反軍)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후 후티 반군은 후세인의 동생 압둘말리크 알후티가 ‘안사룰라(Ansar Allah)’라는 이름으로 이끌고 있다. 이들의 목표는 “알라는 가장 위대하시다! 미국에 죽음을! 이스라엘에 죽음을! 유대인에게 저주를! 이슬람에 승리를!”이라는 구호에 잘 드러난다.
  
  2011
년 이른바 ‘아랍의 봄’ 민주화 시위가 일어나자 예멘에서도 살레의 독재정권 종식을 요구하는 국민 저항이 시작됐다. 살레는 2012년 면책(免責)을 보장받고 사임했다. 부통령 압둘라 만수르 하디를 중심으로 한 국민대화협의체가 구성되었지만, 후티 반군은 이에 참여하기를 거부했다.
  
 
후티 반군은 전 대통령 살레 지지자들과 함께 2014 9월 수도 사나를 장악하고 이듬해 1월에는 대통령궁까지 점령했다. 대통령궁이 반군 손에 떨어지기 3일 전에 대통령직을 사임한 하디는 연금(軟禁) 상태에 있다가 2월에 수도를 빠져나와 남부 아덴으로 피신했다. 하디의 요청을 받은 사우디아라비아는 2015 3 26일 ‘결정적 폭풍’이라는 작전명의 후티 반군 공습을 시작했다. 이후 현재까지 전쟁이 지속되고 있다.
  
 
후티 반군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통일 예멘에서 소외당하고 있다고 느낀 남부 예멘인들은 2007년부터 남부운동(Southern Movement)을 시작하면서 정부에 정당한 대우를 요구하고 나섰다. 정정(政情)이 혼란한 틈을 타서 알카에다는 남서부 지역에 조직을 결성하고 지속적으로 극단주의 정치 이슬람 선전을 이어갔다. 알카에다는 2000 10 12일 아덴항에서 급유 중이던 미국 군함 코울호를 공격하여 커다란 손상을 입혔다.
  
  

  국제전으로 번진 예멘내전

‘아랍의 봄’의 영향으로 2011 4월 이후 예멘에서는 살레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가 전국에서 벌어졌다. 사진=뉴시스

  1978년 북예멘 대통령으로 집권한 살레는 2011년 국민 저항에 맞부딪힐 때까지 비전 없이 정권 유지를 위해 순간순간 정치적 감각만을 발휘하며 권좌를 이어왔다. 한때 그는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미치지 않는 자이디 시아 지역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후티 반군의 기반이었던 ‘젊은 신앙인’을 지원하기도 했다. 2009년에는 후티 반군을 절멸하기 위해 초토화 작전을 폈지만, ‘아랍의 봄’ 이후 권좌에서 물러난 후에는 다시 후티 반군과 손을 잡고 하디 정부를 전복시킨다. 하지만 그는 후티 반군과 사이가 벌어지면서 2017년 후티 반군의 총에 목숨을 잃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예멘전쟁은 형식상으로는 하디가 이끄는 합법적 정부와 이를 무력으로 수도 사나에서 내쫓은 후티 반군 간 내전이다. 하지만 하디의 요청을 받고 사우디아라비아가 아랍에미리트바레인쿠웨이트카타르이집트요르단모로코세네갈수단과 연합군을 형성하여 후티 반군 공격을 시작한 국제전이기도 하다. 사우디아라비아가 주도하고 아랍에미리트가 가장 강력하게 후원하는 연합군에서 카타르는 두 나라와 외교 불화를 빚으면서 2017년 연합군에서 빠졌다. 미국영국프랑스 등 서방 국가의 지원을 등에 업은 연합군은 후티 반군을 이란이 지원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이란의 도움 없이 후티 반군이 현재까지 버틸 수가 없다고 본다. 연합군은 2015 9월에 오만 연안에서 중무기를 후티 반군에 전달하려던 이란 국적 어선을 적발했다. 2016 3월에는 미국 해군이 AK-47 소총 1500자루, 대장갑차 휴대용 발사기 200기 등을 적재한 이란 국적 어선을 나포, 이란이 후티 반군을 지원하고 있는 증거로 제시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후티 반군의 지도자였던 후세인이 이란의 종교도시 쿰에서 머무르며 공부했고, 레바논 헤즈볼라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으며, 후티 반군 내에 12이맘파 시아가 있을 뿐만 아니라 이란의 성직자가 안사룰라를 레바논의 헤즈볼라와 같은 조직으로 비유한 것을 들어 양자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물론 이란은 이 모든 의혹을 극력 부인하고 있다.  


  사우디, 이란 견제 위해 예멘내전 개입  

  사우디아라비아가 예멘전쟁에 깊숙이 개입하는 이유는 단순명료하다. 이란이 아랍세계에 더 이상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사우디아라비아는 1979년 이슬람혁명 이래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한다는 혁명이념을 내걸고 이란이 중동 무슬림 세계를 혼란과 극단주의의 늪으로 빠뜨렸다고 생각한다. 특히 2003년 사담 후세인이 이라크에서 제거된 이래 이란이 이라크·시리아·레바논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며 순니 아랍왕정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고 보고 있다. 이제는 친이란 후티 반군이 국경의 남쪽 예멘을 장악했으니 사우디아라비아로서는 실로 심각한 상황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테헤란-바그다드-다마스쿠스-베이루트로 이어지는 친이란 전선에 사나까지 포함되는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사우디아라비아는 후티 반군을 예멘에서 몰아낼 뿐 아니라 이들의 거점인 사다 지역에 자이디 시아 국가가 들어서 자국과 국경을 맞대게 될 가능성을 염려하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국가안보를 위해 어떻게 해서라도 이란으로부터 정치적·경제적·사상적 지지를 받는 후티 반군 제거를 이번 예멘전쟁의 목표로 삼고 있다. 무모하다는 비판을 받으면서도 현 왕세자 무함마드 빈 살만이 국방장관이었을 때 예멘전쟁을 시작한 것은 바로 이란의 영향력을 제거하여 1979년 이란혁명체제를 종식하겠다는 큰 그림의 일환이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이란의 영향력을 제거하기 위하여 시리아내전에 관여해 왔다. 시리아에서 사우디아라비아는 지난 7년간 노력했지만,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여전히 이란은 다마스쿠스에서 건재하고 있다. 이제 예멘에서 마저 후티 반군을 제어하여 하디 정부를 재건하지 못한다면 사우디아라비아는 심각한 위협에 처할 수밖에 없다. 전장을 테헤란으로 옮기려는 사우디아라비아의 노력이 치열한 곳이 바로 예멘전쟁이다
    

  국민의 80%가 난민 전락  

  내전을 넘어선 국제전의 피해자는 두말할 것도 없이 예멘 국민이다. 유엔난민기구의 공식집계에 따르면 4월 현재 2200만명이 심각한 어려움에 처해 있다. 내부 피란민만 200만명이 넘는 상황이다. 예멘 인구가 약 2700만명이니 국민의 80%가 국내에서 전쟁 난민으로 전락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말레이시아를 거쳐 제주로 들어온 예멘 난민은 대다수가 후티가 장악한 지역 출신이다
  
 
북쪽에서 후티 반군을 피해 남쪽으로 달아난다고 해도 안전하지도 않다. 중앙정부가 붕괴된 상태에서 각 부족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이합집산하며 싸우고 있다. 알카에다·IS와 같은 테러 조직들 또한 세력 확장을 위해 날뛰고 있다. 후티 반군이 발호하면서 예전에는 엷었던 종파(宗派) 정체성마저 극성을 부리고 있다.
  
 
이제 고대(古代) 로마로 이어지는 아라비아 향료 무역을 담당했던 ‘행복한 아라비아(Arabia Felix)’ 예멘은 사전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말이 되었다. 예멘은 실패한 국가의 실상을 모두 보여주는 나라가 되었다. 국가 비전을 제시하고 국민 통합을 이루기 위해 애쓰기보다 권좌에만 집착한 지도자를 둔 나라가 어떻게 멸망하는지 생생히 보여주는 ‘비참한 아라비아(Arabia Misera)’일 뿐이다.

 

 

09월 호

◆인터넷에 떠도는 ‘이슬람의 13교리’는 사실인가?

⊙ 〈《코란》에서 가르치는 이슬람의 13교리〉는 2014년경 영어권에서 유포된 〈급진(과격)이슬람과 이슬람국가의 13가지 교리〉가 원전
⊙ ‘여자 아이를 강간, 결혼, 이혼해도 된다’ ‘노예와 아내는 때려도 된다’ 등 13개 항목 모두 《코란》에 없거나 왜곡 해석한 주장들
⊙ 《코란》을 恣意的으로 해석하거나 거짓말을 유포해 反난민정서 조장하는 것은 문제

▲2014년경 영어권에서 유포된 〈급진(과격)이슬람과 이슬람국가의 13가지 교리〉는 《코란》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지난 6월 예멘 난민 신청자가 제주도로 대거 입국한 상황과 맞물려 인터넷상에는 〈《코란》에서 가르치는 이슬람의 13교리〉라는 글이 급속도로 퍼지며 공포감을 조성하였다. 이 문건은 이슬람교의 경전인 《코란》에 여성, 비이슬람교 신자를 흉폭하게 대하는 13가지 교리가 있는데, 국민 대다수가 무슬림(이슬람교 신자)인 예멘에서 온 난민들이 국내에 정착할 경우 《코란》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행하여 우리나라 여성들, 더 나아가 전 국민이 위험에 처할 것이라는 경고성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 문건은 2014년경 영어권에서 유포된 〈13 Doctrines of Radical Islam and ISIS〉의 우리말 번역본이다. 한동안 국내에서도 유통되다가 예멘 난민 신청자 입국 사태가 발생하면서 다시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영어 원문의 제목은 〈급진(과격)이슬람과 이슬람국가의 13가지 교리〉인데, 우리말 제목은 〈《코란》에서 가르치는 이슬람의 13교리〉로 둔갑하였다. 영어 원본이나 우리말 역본(譯本)이나 모두 《코란》 구절을 적시하면서 13가지 교리를 설명하지만, 이들 교리를 인용한 《코란》 구절과 자세히 비교하면 서로 내용이 들어맞지 않는다.
  
  ‘아랍어를 모르더라도 한글 번역본 코란을 놓고 인용 구절과 내용을 잠시 비교만 해보아도 금방 들통날 거짓말로 가득한 문건을 퍼 나르면서 난민 반대를 해야 할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든다. K-팝 한류로 국제적 인지도가 높아 가는 오늘날 우리 사회가 반()이슬람 정서에 기댄 거짓말에 흔들린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참으로 낯 뜨거운 일이 될 것이다.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문건의 내용을 하나하나 코란 구절과 대조해 설명하겠다.  
  

  다른 사람을 性노예로 만들어도 된다?  

  1. 사춘기 시작 안 한 여자 아이를 강간, 결혼, 그리고 이혼해도 된다(《코란》 65:4).
  
  인용 구문으로 제시한 《코란》 65 4절에는 이러한 내용이 없다. 아내와 이혼할 때에는 3개월을 기다리고, 임산부일 경우에는 출산 때까지 기다리라는 말뿐이다.  

 


  2. 다른 사람을 성()노예와 노동 노예로 만들어도 된다(《코란》 4:3, 4:24, 5:89, 33:50, 58:3, 70:30).
  
  적시한 《코란》 구절 6개 모두 성노예나 노동 노예를 만들어도 된다는 교리와 무관하다. 이들 구절은 무슬림 남성의 혼인과 관련한 가르침을 내리고 있을 뿐이다.  

 


  3. 노예와 아내는 때려도 된다(《코란》 4:34).
  
  일단 《코란》 4 43절에 노예를 때려도 된다는 말은 없다. 아내가 말을 듣지 않으면 먼저 충고하고, 잠자리를 하지 말라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 방법으로 “때리라”고 이른다. 그런데 여기서 ‘때린다’는 말은 아랍어로 ‘다라바’라는 동사인데, 이 말은 ‘때린다’뿐만 아니라 ‘멀리한다’ ‘이별한다’는 뜻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코란》이 ‘아내를 때리라’고 한 것이 아니라 ‘아내를 멀리하라’고 가르친다고 해석하는 무슬림들도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상당히 많은 이슬람 법학자들이 ‘때리라’는 말과 달리 아내 구타를 금지하였다.  

 


  4. 강간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4명의 이슬람교 남성이 필요하다(《코란》 24:4).
  
  《코란》 구절과 전혀 부합하지 않는 말이다. 《코란》 24 4절은 “정숙한 여성을 비방하면서 4명의 증인을 데려오지 못하는 자들은 채찍질 80대에 처하고 이후 이들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말라”고 이른다. 강간당한 것을 증명하기 위해 4명의 남성을 데려오라는 말이 아니라 무고한 여성을 4명이 증인 없이 비방하면 매를 때리라는 말이다. 주장하는 내용과 《코란》 구절이 서로 맞지 않는다.  

  
  천국에서 72명의 처녀를 상으로 준다?

서울 이태원 이슬람사원에서 예배를 보는 무슬림들. 사진=조선일보DB

 

 

  5. 유대인과 기독교인이 이슬람교로 안 바꾸면 그들을 죽이든지 세금을 내게 한다(《코란》 9:29).
  
 
해당 구절에는 유대인과 기독교인을 죽이라는 말은 없고 이들이 인두세(人頭稅)를 낼 때까지 싸우라고 한다. 《코란》 구절과 관계없는 말이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초기 이슬람 팽창의 주원인은 선교가 아니라 경제였다. 이슬람으로 개종(改宗)하면 인두세를 거둘 수 없기 때문에 개종을 못하도록 한 경우도 있었다.  

 


  6. 이슬람교가 아닌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든지 손과 발을 절단시켜라(《코란》 8:12, 47:4).
  
  믿지 않는 사람을 십자가형()에 처하거나 발을 절단하라는 말은 없고, 목과 손가락을 자르라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분명히 해 둘 것은 이러한 대상이 문건에서 말하는 대로 ‘이슬람교가 아닌 사람’이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믿지 않는 사람’은 바로 무함마드와 전투를 벌였던 메카의 다신교도(多神敎徒)들을 일컫는다. 622년 자신의 신앙을 인정하지 않고 박해를 가한 고향 메카 사람들을 피해 메디나로 이주한 무함마드가 630년 승리할 때까지 박해자들과 벌인 전투와 관련된 구절이다. 이러한 상황을 염두에 두어야 해석이 가능하다. 이러한 《코란》 구절을 현실에 바로 적용하는 현대 무슬림들이 있는가? 이들은 일반 무슬림들이 극단주의 내지 무슬림이 아니라고 분류하는 극단주의자나 테러분자들뿐이다.
  


  7. 이슬람교가 아닌 사람을 죽이면 천국에서 72명의 처녀를 상()으로 받는다(《코란》 9:111).
  
  해당 구절은 알라(이슬람교의 유일신을 가리키는 아랍어)를 위한 싸움에서 죽이거나 죽은 사람은 천국에 갈 것이라는 말과 함께 알라가 유대인의 토라, 그리스도인의 복음서, 무슬림의 《코란》에서 그러한 약속을 하였다고 이른다. 천국에서 72명의 처녀를 상으로 준다는 말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8. 이슬람교를 떠나는 사람은 죽여라(《코란》 2:217, 4:89).
  
  인용한 두 구절 중 2 217절에는 이슬람을 배교(背敎)한 사람을 죽이라는 말이 없다. 이슬람 신앙을 버리고 불신자(不信者)로 죽으면 이 세상에서 한 행동이 모두 헛되고, 저승에서 영원한 불 속에서 고통을 받으리라고 경고한다. 두 번째 구절인 4 89절을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그들은 너희들이 믿지 않아서 그들과 같이 불신자가 되길 바란다. 그들이 이주하여 알라의 길에 들어선다면 함께하라. 만일 그들이 등을 돌리면 발견하는 대로 죽여라. 동맹을 맺거나 도움을 얻지 말라.
  
  이 구절 역시 무함마드의 이슬람 신앙공동체가 자신들을 박해하던 메카 다신교도들과 싸울 때 나온 구절이다. 따라서 이러한 특정한 시간과 공간 상황을 무시하고 이를 보편교리로 이해하는 것은 무리다.    


  훔치고 거짓말하라?

  9. 이슬람교가 아닌 사람은 목을 베어 죽여라(《코란》 8:12, 47:4).
  
  이는 위 6번째 항목과 같은 내용이다. 7세기 이 구절이 관련된 역사적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해석이다.
  


  10. 알라신()을 위해 죽이고 순교(殉敎)하라(《코란》 9:5).
  
  해당 코란 구절은 이슬람 공동체를 반대하는 메카인과 싸우던 상황을 반영한다. 이슬람 신앙을 인정하지 않는 메카의 다신교도들을 전장(戰場)에서 죽이고 포로로 잡되 이들이 뉘우치고 예배와 희사(喜捨)를 하면 놓아주라고 이른다. 순교하라는 말은 없다.
  


  11. 이슬람교가 아닌 사람들을 위협하라(《코란》 8:12, 8:60).
  
  이 두 구절 모두 무함마드와 싸움을 벌이던 메카인들을 두고 이른 말이다.
  


  12. 이슬람교가 아닌 사람들의 것들을 훔쳐라(《코란》 8).
  
  《코란》 8장은 ‘전리품(戰利品)의 장’이라는 제목대로 전리품에 관한 가르침을 전한다. 전리품을 훔친 것으로 이해하여 코란이 이슬람교가 아닌 사람들의 것을 훔치는 것을 정당화한다고 보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해당 《코란》 구절이 말하는 전리품은 무함마드의 이슬람공동체가 메카의 다신교도들과 전투를 벌인 역사적 상황에서 나온 물품을 말한다. 8 1절은 전리품의 주인이 알라와 그의 사도인 무함마드라고 하고, 41절은 알라와 사도가 5분의 1을 갖고 나머지는 친척, 고아, 가난한 자, 여행자를 위한 몫임을 밝히고 있다.
  


  13. 이슬람을 강화하기 위하여 거짓말을 하라(《코란》 3:26, 3:54, 9:3, 16:106, 40:28).
  
  적시한 해당 구절 5개 모두 어디에도 이슬람을 위해 거짓말을 하라는 말은 없다. 오히려 40 28절은 거짓말하는 자를 알라가 인도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도대체 어디에서 거짓말을 하라고 권장한단 말인가?   

 
  역사적 상황의 산물들

2014 1월 시리아 라카 시내를 행진하는 IS대원들. IS 등 극단주의자들은 《코란》을 자의적으로 해석한다. 사진=뉴시스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코란》에서 가르치는 이슬람의 13교리’라는 문건은 제목과 달리 《코란》과 관계되는 구절이 희박하다. 적시한 구절에서 뽑아냈다고 하는 교리가 해당 구절에 나오지 않을 뿐 아니라 나온다 하더라도 《코란》 구절이 나온 7세기 이슬람 신앙 역사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문구만 추출하여 보편교리로 분장하였을 뿐이다.
  
  사실 《코란》은 상당히 해석하기 어려운 경전이다. 분명 특정한 상황에서 알라가 천사 가브리엘을 매개자로 선택하여 예언자 무함마드에게 계시를 내렸다고 무슬림들은 믿는다. 그러나 《코란》은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있어서 알라가 가르침을 내렸는지 설명 없이 말만 전하기 때문이다. 서양의 이슬람학자인 예수회 신부 피터스(F. E. Peters)는 이러한 특징을 지닌 《코란》을 두고 ‘문맥 없는 말씀(a text without context)’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이슬람사 초창기부터 무슬림들은 《코란》 계시의 역사적 배경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그 결과 《코란》 해석학이 발전하였다.
  
  정확한 문맥 속에서 가르침을 이해하는 것은 이슬람교의 《코란》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의 경전 이해에도 중요한 일이다. 그러한 노력 없이 그냥 경전의 한 구절만 따올 경우 인용 구절이 본래의 뜻과 전혀 다르게 쓰이면서 훼손될 가능성이 크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교의 《신약성경》에서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오서 10 34)”는 말만 툭 뽑아내어 예수가 테러를 조장하는 가르침을 주었다고 해설한다면 과연 그리스도인들이 수긍할까?
  
  “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할지니라. … 여자들이 만일 정숙함으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의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디모데오전서 2:11-15)”와 함께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그들에게는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라(고린토전서 14:34-35)”라는 신약성서 구절 두 개를 뽑아내어 그리스도교는 여성의 인격을 무시한다고 주장한다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수긍할까?  

  
  이슬람 관련 괴담, 왜 나오나

2018 6 30일 서울 광화문 동화면세점 앞에서 열린 ‘가짜 난민 반대 집회’. 난민에 반대하더라도 사실에 근거한 반대를 해야 한다. 사진=조선일보DB

 

  굳이 그리스도교 신자들 마음이 불편하게 문맥을 고려하지 않고 성경구절만 뽑아 예를 제시한 것은 반이슬람 정서에 기댄 코란 13교리 괴담(怪談)이 그만큼 심각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아니 어쩌면 앞에서 소개한 그리스도교 《성경》의 예보다 더 왜곡되었다. 역사적 문맥을 무시할 뿐 아니라 《코란》에 존재하지도 않는 말을 만들어서 《코란》에 있다고 보란 듯이 거짓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맥을 무시하고 문자 그대로 《코란》을 받아들여 자신들의 악행(惡行)을 정당화하는 이들은 알카에다와 자칭 ‘이슬람국가(IS)’ 등 테러분자, 극단주의자들이다. 자신들은 무슬림이라고 하지만 많은 무슬림들이 결코 무슬림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이다.
  
 
우리 사회에 유포되고 있는 코란 13교리 괴담이 차라리 영어 원본 제목인 ‘급진(과격)이슬람과 이슬람국가의 13가지 교리’를 그대로 땄다면 좋았을 것이다. 원본과 달리 마치 모든 무슬림들이 받아들이는 교리처럼 제목을 바꾼 것은 의도적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러한 문건이 예멘 난민 신청자 입국 시점과 맞물려 일어난 것도 그냥 우연이라고 간주할 수도 없다. 분명 민심을 교란하기 위한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는 그동안 반이슬람 정서를 조장해 온 특정 종교인들의 움직임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 무슬림 세계가 비무슬림 세계보다 보편적 인권, 자유, 민주주의라는 측면에서 아쉬운 점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개종과 선교의 자유까지 포함한 종교의 자유, 여성인권, 성소수자 권리 등에 대한 해석 차이 때문에 무슬림 다수 국가들이 비무슬림 국제사회와 보편적 인권개념을 공유하지 못하고 있다.
  
 
이에 대해 지나치게 서구중심적인 인권해석이라는 반발도 적지 않다. 또 근대 서구(西歐)의 식민 지배를 겪으면서 종교의 자유를 무슬림 국가 정체성(正體性)을 해체하려는 외부의 음모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전 세계가 공감하는 보편적인 인권관을 확립하기에는 분명 더 많은 논의와 토론과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이슬람은 다양하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무슬림들이 일사불란하게 통일된 인권개념이나 해석을 견지하고 있다고 보는 것은 위험하다. 무슬림 세계는 넓고 개인적 해석은 다양하다. 이슬람교는 로마 가톨릭처럼 중앙집권적이지 않다. 개신교처럼 자유로운 조직이다. ()보수부터 극진보까지 학자층이 넓게 퍼져 있다. 이들은 모두 《코란》을 다양하게 이해하고 해석한다. 단 하나의 불변(不變)한 이슬람 해석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심각한 잘못이다. 그리스도교가 다양하듯, 이슬람교도 다양하다. 하나의 틀로 보아서는 안 된다.
  
 
난민을 반대할 수 있다. 문제가 있다면 반대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반이슬람 정서에 기대어 거짓말을 근거로 반대하는 것은 크나큰 잘못이다. ‘알카에다’표 이슬람, 자칭 ‘이슬람국가’표 이슬람을 ‘보편 이슬람’으로 보는 것도 모자라 《코란》에 없는 말을 만들고 문맥을 무시하고 자의적(恣意的)으로 《코란》 구절을 해석한 것을 전 세계 무슬림이 믿는다고 거짓말하면서 예멘 난민 신청자들을 그런 이슬람을 믿는 폭도로 몰아붙이며 반대하는 것은 분명히 정의로운 한국인이 할 짓이 아니다.

 

 

10월 호

◆에르도안의 터키, 어디로 가나

2071년까지 터키를 이슬람국가로 되돌리는 것이 목표

⊙ 에르도안, 政敵인 이슬람 지도자 펫훌라흐 귈렌을 쿠데타 배후세력으로 지목, 15만명 해고, 5만명 체포
⊙ 에르도안, 미국의 경제보복으로 리라화 폭락하자 국민들에게 “달러나 金을 리라로 바꿔 달라”고 호소
⊙ ‘경건한 세대’ 육성 내걸고 이슬람교육 강화…, 진화론도 안 가르쳐

▲지난 8월 27일 만지케르트전투 947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한 에르도안 대통령. 만지케르트전투 1000주년이 되는 2071년까지 터키를 이슬람화하는 것이 에르도안의 목표다. 사진=터키 정의개발당 트위터

 

  터키 리라화가 연초보다 달러 대비 40% 평가절하되면서 터키 경제가 휘청거리고 있다. 연초 1리라는 우리 돈으로 약 270~280원대였다. 터키 당국이 간첩 혐의로 미국인 앤드루 브런슨 목사를 체포한 후 2년 넘게 억류하며 미국의 석방 요구를 거절하자, 트럼프 대통령이 경제 보복에 나서면서 165원까지 급락했다. 지금은 170원대 전후를 오르내리고 있다. 나토(NATO) 회원국으로 미국의 우방이자 유럽방어의 최전선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닌 터키가 총체적 경제위기를 맞으면서 미국과 터키의 불협화음이 경제를 넘어 확산되어 그칠 기세가 보이지 않는다.
 
  제왕적 대통령이 된 레제프 에르도안은 현재 대체자가 없는 터키의 절대 권력자다. 2016년 쿠데타 미수사건 이래 대대적인 정적(政敵) 제거 작업이 진행되어 사실상 현재 터키에서 에르도안을 비판하는 목소리는 모기 소리만큼도 들을 수 없는 상태다. 15만명이 해직됐고, 5만명이 쿠데타 가담 혐의로 체포됐다. 문제는 해직자나 체포된 사람 대다수가 사실상 쿠데타 가담자가 아니라는 점이다.

 

2016 7 15일 군부 쿠데타 당시 에르도안의 쿠데타 저지 호소에 거리로 나온 시민들은 몸으로 쿠데타군을 막았다. 사진=터키 국회 홍보물 캡처

 

  에르도안은 자신의 정적이자 이슬람 지도자 펫훌라흐 귈렌의 현대 이슬람운동과 관련된 사람은 모두 쿠데타 음모 가담자로 여겨 직장에서 쫓아내거나 투옥했다. 귈렌은 한때 에르도안과 손을 잡은 적이 있지만, 에르도안과 달리 근본적으로 정치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다. 그는 현대사회에서 빛을 잃은 이슬람의 정신을 되살리고자 종교 간 대화와 공존을 내세우며 이슬람과 이웃 종교의 화해와 화합을 교육을 통해 전파하려고 한 종교지도자다.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을 가장 목소리 높여 비판하면서 테러의 원인을 외부가 아닌 무슬림 세계의 문제로 심각하게 지적하고 고민해 온, 실로 보기 드문 인물이다. 귈렌의 사상을 구현하기 위해 그를 따르는 독지가들이 재산을 희사하여 터키와 세계 여러 곳에 많은 학교가 들어섰는데 쿠데타가 불발로 돌아간 후 에르도안은 국내 귈렌 관련 사립학교를 모두 폐교했다.
 
  에르도안 정부는 귈렌과 귈렌 추종자들을 ‘펫훌라흐 테러조직(FETö, Fethullahç ı Terör Örgütü)’이라고 명명(命名)하면서 보이는 대로 투옥하고 있다. 에르도안의 귈렌 집착은 보기에 지나칠 정도다. 에르도안은 자신을 내몰려고 한 쿠데타의 배후에 귈렌이 있다고 확신한다. 귈렌을 따르는 추종자들이 터키 곳곳에서 암약하면서 쿠데타를 기도했다고 믿는다. 해외에도 귈렌의 사상에 동조하는 터키 무슬림들이 있는데 터키 정부는 이들을 테러리스트로 규정한 명단을 각국 정부에 주면서 추방할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또 귈렌과 관련된 것으로 의심이 가는 인물은 여권 갱신을 해 주지 않고 반드시 터키 국내로 들어오게 만들어 입국 즉시 체포하는 꼼수도 발휘했다. 신생아 여권을 해외에서 발급하지 않고 부모가 반드시 터키에 입국하여 받도록 편법을 쓰면서까지 귈렌 추종자들을 색출하는 데 혈안이 됐다. 이에 따라 쿠데타 불발 이래 터키 정부의 탄압을 피해 거주하고 있는 나라로 망명, 귀화하는 터키인들의 수가 늘었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다.

 
  현재 펫훌라흐 귈렌은 미국 펜실베이니아주에 거주하고 있다. 에르도안은 어떻게 해서든지 귈렌을 터키로 불러들이려고 애쓰고 있다. 수차에 걸쳐 송환을 요구했으나 미국 정부는 요지부동이다. 


  브런슨 목사 사건

  그러던 중 브런슨 목사 사건이 터졌다. 브런슨 목사는 20년 이상 터키에서 거주하고 있는 미국인이다. 이즈미르에서 장로교 부활교회 목사로 일하고 있던 그는 2016 4월 체류연장 신청을 했다. 10 7일 경찰에 소환되자 브런슨 목사는 일상적인 비자 문제 협의인 줄 알고 출두했으나 즉시 체포됐다. 그는 변호사와 미국 영사 접견권마저 거부당한 채 구금됐다.
 
  법원의 공식기록에 따르면 브런슨 목사는 ‘무장 테러조직원’이다. 판사는 브런슨 목사가 2016 7월 불발 쿠데타의 배후인 귈렌운동과 관련된 인물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터키 국영 아나돌루통신에 따르면 2017 8 24일 검찰은 브런슨 목사가 테러조직을 후원하고 정치·군사 스파이 행위를 했다는 증거를 제출했고, 2018 3 5일 법원은 이를 받아들였다.
 
  브런슨은 반정부 테러단체인 쿠르드노동자당(PKK)과 쿠데타 주도 세력인 귈렌운동을 지원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는데, 오는 10월에 재개될 재판에서 유죄 선고를 받으면 최대 35년을 감옥에서 살아야만 한다.
 
  브런슨 목사는 이런 혐의를 강력히 부인하고 있다. 자신은 정치활동을 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시리아 난민을 도왔을 뿐인데 터키 당국은 자신이 쿠르드노동자당을 지원한다고 하고, 교회를 세우자 귈렌운동가들의 도움을 받았다며 자신을 몰아세웠다고 하면서 결백을 주장하고 있다.
 
  브런슨 목사는 지난 7 25 19개월간 수감생활을 마치고 석방됐지만 가택연금(軟禁) 상태다. 터키 당국은 가택연금과 출국금지를 해제해 달라는 브런슨 목사와 미국 정부의 요구를 모두 거부했다. 삼권분립(三權分立)을 지키는 국가에서 행정부가 사법부의 판단에 개입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었다. 그러나 적어도 2016년 쿠데타 불발 이후 터키에서 사법부는 독립적인 판단을 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때문에 터키 정부의 브런슨 목사 석방 거부는 설득력이 없다는 것이 중론(衆論)이다.
 
  이에 트럼프 대통령은 경제보복으로 맞섰다. 지난 8월 초 터키산 철강과 알루미늄에 2배의 관세를 매겼다. 그 결과 터키 리라화의 가치가 급락했다. 물론 브런슨 목사 사건이 아니더라도 이미 터키의 경제 추락은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었다.


  경제문제를 정치논리로 풀려는 에르도안

에르도안 대통령은 8 13일 대통령궁에서 열린 재외공관장 회의에서 터키의 경제위기는 외세 탓이라고 주장했다. 사진=AP/뉴시스

 

  문제는 에르도안 정부의 대응이다. 세속의 일은 세속의 논리로 풀어야 하는데, 에르도안은 이슬람을 자신의 정치적 입지에 이용하기 좋아하는 정략적 습성을 리라화 추락 대응에도 고스란히 보여주었다. 에르도안은 “여러분 베개 밑에 달러나 유로, 또는 금이 있다면 은행에 가서 리라로 바꿔 달라. 미국은 달러가, 우리에게는 국민과 알라가 있다”고 호소하면서 환율 위기를 이슬람에 기대어 돌파하고자 한다.
 
  애국심과 신앙심만으로 경제위기를 돌파할 수 있을는지는 회의적이다. 세계 17위 경제력을 지닌 나라의 지도자가 경제를 경제논리로 풀지 않고 신의 도움에 기댄다는 것은 아무리 보아도 비이성적(非理性的)이다.
 
  사실 에르도안의 이러한 행보는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그는 터키를 2071년까지 새롭게 바꾸려고 한다. 1071년 알프 아르슬란(Alp Arslan)이 이끄는 셀주크튀르크가 아나톨리아 반도 동부 끝자락에 위치한 만지케르트(오늘날 말라즈기르트)에서 동로마 비잔틴 제국군을 무찌르고 오늘날 터키 정복의 교두보를 마련한 지 1000년이 되는 해까지 터키를 세속주의가 아닌 이슬람이 지배하는 나라로 만들겠다는 것이 에르도안의 야심이다.
 
  이를 위해 그는 ‘딘다르 비르 네실(Dindar bir nesil),’ 즉 ‘경건한 세대’를 양성하는 야심찬 계획을 시행 중이다. 학교 정규교육 과정에서 청소년들에게 이슬람교육을 강화하여 애국심과 신앙심을 고양하고 있다. 이러한 계획이 지속된다면 향후 젊은 세대는 이전 세대와는 달리 보다 더 종교적인 정체성(正體性)을 갖게 될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동시에 이러한 교육은 터키의 발전에 장애가 될 가능성 또한 크다. 종교적 이유 때문에 진화론(進化論)을 가르치지 않는 과학교육이 진행되는 현실은 좋은 예다. 진화론이 옳고 그름을 떠나 유일신교의 창조론 때문에 진화론 교육이 어렵다면 유사한 사례가 다른 주제에 대해서도 적용될 것이다. 이는 결국 창의적인 과학교육의 부재로 이어져 궁극적으로 터키의 발전을 가로막을 것임에 틀림없다.   


  터키 역사상 3대 위인 

  터키어를 쓰는 사람들이 이슬람 세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슬람 세계에서 아랍어·페르시아어·터키어를 쓴 무슬림들은 이슬람 역사전통 발전에 이바지한 공로가 크다. 아랍어는 유일신 알라의 계시를 담은 경전 《코란》의 언어이자, 이슬람에서 최후의 예언자로 존경하는 무함마드의 모어(母語). 아랍어는 이슬람 세계에서 예나 지금이나 그리고 앞으로도 가장 중요한 언어다. 페르시아어를 쓰는 사람들은 아랍인들의 지배를 받으면서 자신들의 종교였던 조로아스터교 신앙을 버리고 이슬람교로 개종(改宗)한 사람들이지만, 새롭게 찾은 믿음을 문화로 승화시켰다. 이슬람문화를 꽃피운 언어가 페르시아어다. 터키어를 쓰는 사람들은 아랍어·페르시아어 사용자들보다 늦게 이슬람 세계에 들어왔다. 그러나 이들은 중앙아시아에서 거칠 것 없이 오늘날 우리가 중동(中東)이라고 부르는 지역으로 들어와 이슬람 세계를 크게 확장했다.
 
  이들을 얕본 비잔틴 제국은 1071년 만지케르트에서 터키어를 쓰는 셀주크튀르크 무슬림들에게 패했다. 동방 그리스도교의 아나톨리아반도 동쪽 끝이 무슬림 손에 넘어간 역사적인 사건이다. 그리고 이로부터 382년 후인 1453년에 유서 깊은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이 터키어를 쓰는 오스만튀르크 손에 함락됐다. 콘스탄티노플은 이스탄불로 이름을 바꾸었고, 그리스정교회 대신 이슬람이 제국의 종교가 됐다.
 
  되돌아보면 오늘날 터키를 만든 세 명의 위대한 인물은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의 승장(勝將) 알프 아르슬란, 1453년 콘스탄티노플 정복자 메흐메트 2, 그리고 열강(列强)의 손에 가루처럼 날아갈 뻔한 터키를 온전하게 보존한 지도자 케말 파샤다.
 
  케말 파샤는 오스만제국의 패망에서 교훈을 얻어 이슬람이 아닌 세속주의에 바탕을 둔 새로운 터키공화국을 건립했다. 1922 11 1일 오스만제국의 술탄(황제)직을 폐지하고, 1923 10 29일 터키공화국을 선포했다. 이듬해 3 3일에는 칼리파(이슬람의 최고종교지도자)제도를 폐지했다. 곧 이어 전통 무슬림 복장에 변화를 주고, 종교기관을 폐쇄했으며, 터키어를 아랍어문자 대신 라틴알파벳으로 표기했다. 전통적인 이름에도 변화를 주어 성()을 쓰게 하고 스스로 아타튀르크(Atatürk·튀르크인의 아버지)라는 성을 채택했디. 여성의 참정권(參政權)을 완전히 보장하고 헌법에 세속주의 원칙을 확립했다.   


  케말 파샤의 ‘모자 연설’

케말 퍄샤는 모자 등 복식 개혁을 포함해 서구화·세속화정책을 적극 추진했다.

 

  알프 아르슬란과 메흐메트 2세는 이슬람을 중요한 가치로 삼아 정치행위를 한 반면 케말 파샤는 과거의 유산을 버리고 이슬람을 개인의 신앙 영역으로 묶어 두었다. 이슬람을 공적인 행위에 결부시키는 것을 막고 터키를 세속주의 원칙에 입각한 국가로 유럽처럼 발전시키고자 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문명화된 삶이었다. 그는 훗날 ‘모자(帽子) 연설’로 알려진 대중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터키 민족은 문명인들입니다. 역사적으로나 본질적으로나 문명인들입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의 형제요 친구요 아버지로서 문명화됐다고 자처하는 우리 터키 민족 구성원들이 지적(知的)으로도 문명화됐다는 것을 증명하고 보여주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각기 가정 내 생활에서 얼마나 문명화됐는지 보여주어야 합니다.
 
 
문명화 정도를 삶에서 보여주어야 한다고 강조한 케말 파샤는 청중들에게 “터키인의 복장이 민족적이고 문명화됐으며 보편적인지” 물었다. 그러자 청중들은 “아니다”라고 답했다. 그러자 그는 다시 “한 민족이 적절한 복장을 갖춰 입지 않는 것을 생각할 수 있느냐”고 하면서 “소중한 보석에 진흙을 바를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진흙 안에 보석이 있으면 흙을 걷어내고 보석을 드러내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지금부터 옥스퍼드 신발이나 발목까지 오는 신발을 신을 것입니다. 바지·코트·셔츠· 타이·탈부착이 가능한 목깃·재킷을 입고 아주 자연스럽게 모자도 쓸 것입니다.
 
 
케말 파샤는 서양식 모자를 쓰면서 “이 모자를 쓰는 것이 옳지 않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만, 저는 그들에게 당신들이야말로 정신이 나가고 어리석은 사람들이라고 할 것입니다”라며 연설을 마쳤다.
 
 
이로써 1925 11 25일 터번을 대체했던 페즈(Fez)를 금지하고 서양식 모자 착용을 법제화했는데, 이유는 단순하다. 케말 파샤가 보기에 터키는 서구에 비해 비문명국이었기 때문이었다. 1926 10월 대중연설에서 그는 “문명화된 세계가 우리보다 훨씬 앞서 있다”고 하면서 “따라잡는 수밖에 없다”고 심정을 토로했다. 이슬람력() 대신 서양력, 금요일 휴일 대신 일요일을 채택했다. 코란 낭송과 예배 알림을 터키어로 할 것을 명령했다. 여성의 머리가리개 착용도 금지했다. 전통적인 터키의 생활양식이 문명화된 서구에 비해 뒤떨어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터키의 시계는 거꾸로 돌아간다 

  터키보다 문명화된 서구를 따라잡으려는 케말 파샤의 비전 아래 터키는 지난 한 세기 동안 세속주의의 길을 걸으며 문명의 대열에 들어서기 위해 노력했다.
 
 
에르도안은 이제 케말 파샤와는 다른 길로 터키를 이끌고 있다. 헌법을 고쳐 종래 상징적인 존재이던 대통령직에 제왕적 권력을 부여했다. 지난 7 9일 대통령에 취임한 에르도안은 취임식에서 “법치, 민주세속 공화국, 케말 파샤의 원칙과 개혁에 충직하겠다”고 선서했다. 그러나 2003~2014년까지 총리로, 2014년부터 대통령으로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그가 꿈꾸는 터키는 분명 케말 파샤의 터키와는 질적(質的)으로 다르다.
 
 
에르도안에게서 앞선 서구 문명을 보면서 추격 의지를 불태우며 유럽처럼 발전하려 노력한 케말 파샤의 분투와 자각은 볼 수 없다. 에르도안은 ‘완전한 종교’인 이슬람을 신봉하는 터키가 뒤처져 있다고 보지 않는다. 그도 과거 방식대로 살 수는 없고 현실에 맞춰 종교 해석을 유연하게 적용하여야 한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이슬람을 개혁한다는 뜻은 결코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한다. ‘완전한 종교’를 개혁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겉보기에는 시대의 흐름에 맞추어 신앙을 해석하는 것 같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일례로 에르도안의 여성관(女性觀)을 보면 갑갑하기 그지없다. ‘이슬람 가르침에 맞게 여성은 어머니가 되어야 하고, 어머니가 되기를 거부하고 집안에 있기를 꺼리는 여성은 제아무리 성공적인 직장생활을 한다고 하더라도 부족하고 불완전한 존재’라는 것이 에르도안의 생각이다. 에르도안은 “신(), 남자가 여자를 때리고 편하게 해 주었기 때문에 여자들은 신께 감사해야 한다”고 한 누렛딘 을드즈를 시대착오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고 비판하긴 했다. 그러나 전통의 굴레에서 여성을 해방시키려고 노력한 케말 파샤의 진지함과 품격을 에르도안에게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하기야 이제 학교 교육 과정에서 케말 파샤의 세속주의 원칙 수업이 점차 사라지고 있으니 두 사람을 굳이 비교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리라. 리라화 평가절하는 가속되고, 케말 파샤의 원대한 ‘문명화 지향 비전 시계’는 되돌려지고 있다. 진정 터키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세속적 자유원칙에 따른 건전한 정치비판 대신 보수적인 자의적(恣意的) 이슬람 해석만 자유롭게 유통되는 터키의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11월 호

◆아프리카 국가이자 中東국가인 수단 

⊙ 영국 식민지에서 독립한 후 군부 쿠데타, 내전 등 거쳐 이슬람 정권 수립
⊙ 한때 알카에다 후원해서 테러지원국 지정, 다르푸르 사태로 대통령이 국제형사재판소로부터 체포영장 발부받아
⊙ 아랍 경작지의 1/3에 해당하는 비옥한 농토 보유…, 근래 産油國 대열 합류

▲수단의 수도 하르툼. 시가지 옆으로 나일강이 흐른다. 사진=박현도

  “이집트는 나일강의 선물이다.


  고대(古代)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가 이집트를 두고 한 말로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는 유명한 문구다. 발원지로부터 총 길이가 무려 약 6800km에 달하는 나일강의 어원(語源)은 고대 그리스어 네일로스(Neilos). 이를 라틴어에서 닐루스(Nilus)라고 불렀고, 아랍인들은 닐(Nil)이라고 했다. 고대 셈어에서 강을 뜻하는 나할(nahal)에서 나온 말일 수도 있다.
 
  나일강이라고 하면 모두 이집트를 연상한다. 사실 나일강은 두 줄기가 수단에서 하나로 합쳐져 이집트로 흐른다. 한 줄기는 에티오피아 고원(高原)의 타나(Tana) 호수에서 발원한 청()나일이고, 또 다른 줄기는 우간다의 빅토리아 호수에서 시작한 백()나일이다. 청나일은 명칭과는 달리 강물이 검은 침전토를 운반하기에 물색이 검정색인데, 검정과 청색을 혼용해 쓰던 토착어 때문에 청나일로 불렸다는 설이 있다. 한편 백나일은 강물에 밝은 회색 침전토가 쓸려 가서 물색이 흰색처럼 보이기에 그런 이름을 갖게 됐다고 한다. 이 두 물줄기는 수단의 수도 하르툼에서 만나 북쪽 이집트로 흘러 지중해로 들어간다.
  


  아프리카이면서도 中東인 나라

 

이집트가 나일강으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지만, 사실 수단이야말로 청백 두 나일을 모두 포용하고 있으니 진정 나일의 선물이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니다. 진정한 나일강의 나라 수단은 아프리카 대륙에 있지만, 이슬람문화권이기에 여타 국가와는 다른 색채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아프리카라기보다는 흔히 우리가 아는 중동(中東)이라고 부르는 편이 더 낫다. 아랍어를 쓰고 이슬람이 지배적인 종교문화인 나라이니 말이다.
 
  오늘날 수단은 2017 10월 미국의 경제제재에서 해제되면서 새로운 도약을 꿈꾸고 있다. 아직 테러지원국 명단에서는 제외되지 않았지만, 1997년부터 부과된 미국의 경제제재가 풀리자 꽉 막혔던 돈줄이 터질 것이라는 기대와 함께 내심 테러지원국 해제도 바라고 있다.
 
  이에 우리 기업들도 수단 시장 개척에 조심스럽게 나섰다. 지난 10 2일부터 4일까지 우리 기업 14개사가 수단을 방문하여 산업통상자원부, 플랜트산업협회,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 무역협회, 무역보험공사 등 경제기관과 주()수단 우리 대사관의 도움을 받으며 현지 판로 개척에 전력을 기울였다. 수단 정부의 관심도 지대했다. 두 명의 현직 장관이 경제협력 행사에 직접 참가하여 수단 홍보와 투자유치에 정성을 쏟았다.
 
  아프리카이면서도 중동의 향기가 진한 수단은 홍해를 사이에 두고 두 지역을 연결하는 전략시장으로서 가치가 큰 곳이다. 월드컵 축구 예선에서 볼 수 있듯 수단은 분명 아프리카 대륙에 속하지만, 종교문화와 경제교역에서는 중동 아랍국가의 특징이 진한 곳으로, 지정학적(地政學的) 위상을 잘 활용하여 아프리카연합과 아랍연맹 둘 다 가입되어 있다.
 
  수단은 동쪽으로는 홍해와 에리트리아, 서쪽으로는 차드와 중앙아프리카, 남쪽으로는 남수단, 에티오피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남수단은 2011년 지금의 수단, 즉 북수단에서 분리 독립했다. 남북 수단은 사실 하나의 나라를 이루기에는 종교문화적으로 이질적이다. 그러나 이질적인 두 지역이 수단 독립과 함께 하나의 정체로 묶였다. 양자는 치열한 내전 끝에 결국 2011년 헤어졌다. 남수단은 남수단공화국, 북수단은 수단공화국이 공식 국호다.   


  마흐디 저항운동

무함마드 아흐마드는 자신을 마흐디로 선포하고 反英투쟁을 이끌었다.

 

  수단이라는 말은 아랍어로 ‘검다’는 뜻이다. 근대 이전의 아랍 지리학자들은 오늘날 모로코· 알제리·튀니지·리비아·이집트 남부 지역, 즉 사하라 사막 남쪽 지역을 ‘빌라드 앗수단(Bilad al-Sudan)’이라고 불렀다. ‘흑인들의 땅’이라는 말이다.
 
  오늘날 수단공화국은 오스만 제국의 이집트 총독 무함마드 알리(1769~1849) 1821년에 정복하면서 ‘이집트의 수단’이라고도 불렸다. 홍해에서 다르푸르, 누비아에서 아프리카의 대호수에 이르는 지역을 포괄했다.
 
  이집트의 지배를 받았지만, 1882년 이집트가 영국의 보호령(保護領)이 되면서 사실상 영국이 수단을 통치했다. 그러나 수단 사람들의 저항도 만만찮았다. 이슬람 지도자인 무함마드 아흐마드가 스스로를 이슬람교의 종말론적 인물인 ‘마흐디(Mahdi)’로 선포하면서 반()이집트-반영(反英) 무장투쟁을 시작했다. 마흐디는 불의(不義)한 세상을 정화하여 정의를 세우기 위하여 신()이 보낸 인물을 말한다.
 
  마흐디 저항군은 1885년 하르툼으로 진격했다. 당시 수단 총독은 중국에서 일어난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한 찰스 조지 고든이었다. 마흐디 저항군의 기세가 거세지자 영국 정부는 철수 명령을 내렸다. 피할 수 있는 시간이 충분했지만 고든은 본국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고, 피신하지도 않았다. 결국 고든의 머리는 마흐디 저항군의 손에 떨어졌다.
 
  수단은 영국 총독 공관 부속 성공회 성당을 박물관으로 만들어 수단 독립운동 역사 관련 물품을 전시해 놓고 있다. 박물관 전시물은 마흐디 저항운동으로 시작한다. 저항군이 고든의 머리를 들고 있는 사진, 중국 복식을 한 고든의 사진이 중국어 설명과 함께 걸려 있다.
  

 
 
독립 후 南北 갈등 

  마흐디 저항군의 수단 통치는 1899년으로 끝났다. 수단은 영국의 승인하에 이집트가 총독을 보내 다스리는 형식으로 식민 지배를 받았다. 이집트와 영국의 통치를 거쳐 수단이 독립한 것은 1956년에 이르러서였다. 1952년 이집트 나세르의 군사혁명은 수단 독립의 청신호가 됐다. 혁명정부는 수단이 독립해야만 영국의 영향력이 소멸될 것이라고 보았다. 더군다나 혁명 지도자였던 나기브의 어머니는 수단 출신이었다. 영국은 수단 독립을 막고자 노력했으나 실패했다.
 
  신생 독립국의 앞날은 평탄하지 않았다. 5차례나 군부(軍部) 쿠데타가 이어질 정도로 정치적 혼란이 극심했다. 초대(初代) 국회에서부터 북수단이 남수단을 압도했다. 사실 남수단은 독립 당시 미래에 대한 막연한 기대를 지니고 수단 독립 대열에 합류했다. 그러나 독립 후 수단의 정치는 북부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수단 정부가 아랍이슬람화 정책을 밀고 나가면서 비()무슬림 수단인들의 불만이 팽배할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1969년 쿠데타로 집권한 누메이리(1969~1985년 재임) 정권은 1983년 북부에서만 적용되던 이슬람법을 남부에도 강제 시행, 비무슬림들의 정서를 자극했다.
 
  이슬람이 정치적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할 때, 진정한 신앙의 힘이 발휘되기는 어렵다. 누메이리 정부는 18개월 동안 50명 이상의 절도범 손목을 잘랐고, 외화를 소지한 죄로 콥트정교인을 교수형에 처했으며, 맥주를 판 가난한 여인은 태형에 처했다.
  


 
비운의 개혁가 따하

바시르 수단 대통령.

 

  누메이리는 1985년 여성과 비무슬림의 완전한 권리를 옹호하면서 다()종교 세속사회에서 이슬람법을 시행해서는 안 된다고 반대하던 이슬람 개혁가 마흐무드 모함마드 따하를 배교죄(背敎罪)로 몰아 처형했다. 당시 수단 판사들은 따하가 죽어 마땅한 배교자라는 이집트의 최고 이슬람교육기관 알아즈하르와 무슬림세계연맹의 의견을 인용했다.
 
  따하가 죽은 1985년이나 지금이나 중동은 여전히 신의 법을 문자적으로 적용하는 극단주의자들이 활개치고 있다. 신을 입에 올리며 죽인 선량한 무슬림들을 시리아와 이라크에서 최근까지 IS(이슬람국가)가 얼마나 많이 죽였는지 상기해 보면 극단주의의 힘은 여전하다.
 
  따하는 잘못된 시간에 잘못된 장소에서 태어난 불우한 개혁가였다. 그는 영국 식민 지배 시절에 공화당을 만들어 정치활동을 하다가 수단 최초의 정치범이 된 인물이었다. 따하는 1985 1 18 76세의 나이에 1만명의 군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교수형을 당했다. 아랍인권기구는 이날을 ‘아랍인권의 날’로 선포했다.
 
  훗날 누메이리는 자신은 따하를 죽이길 원하지 않았으나 하산 투라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죽였다면서 따하 죽음 배후에 투라비가 있었다고 고백했다. 투라비는 1983년 이슬람법 시행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따하의 목숨을 앗아간 이슬람법 시행 때문에 수단정부와 남부의 수단민중해방군의 내전(內戰)의 불씨가 다시 타올랐다.
 
  이슬람에 기댄 정치는 따하의 죽음 이후에도 계속됐다. 누메이리는 쿠데타로 실각했지만, 1989년 쿠데타로 집권한 바시르 현 대통령은 1991년 수단 전역에 다시금 새로운 이슬람 형법을 도입했다. 그는 남수단에도 무슬림 법관을 임명했다.
 
  바시르의 집권과 이슬람주의적 국가 질서 건립의 배후에 투라비가 있다. 그는 1990년대에 과격 무슬림들을 끌어들인 대중아랍이슬람의회를 만들어 사무총장이 됐다. 투라비는 정부가 수단민중해방군에 맞선 내전을 지하드(聖戰)로 선포하는 데 기여했다. 그 결과 반란군에 맞설 국방방위대 의무 징집이 시행됐다. 이슬람법 시행과 이슬람적인 헌법 제정으로 수단에서 ‘신의 통치’가 완성된 데에 투라비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 

 
  알카에다의 후원자 투라비

수단의 이슬람화를 주도한 투라비. 사진=뉴시스

 

  1999년 대통령과 벌인 정치투쟁에서 패하면서 투라비의 영향력이 사그라들었다. 투라비를 투옥하고 가택연금(軟禁)하면서 바시르 정권은 이슬람에 전보다 유연한 태도를 견지했다.
 
  그러나 투라비가 수단을 급진과격 이슬람주의자들의 뒷마당으로 만들어 끼친 해악은 적지 않다. 수단의 반정부 지식인들은 투라비가 이슬람을 앞세워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현 수단의 정치체제 건설에 책임이 있다고 지적한다. 오사마 빈 라덴과 그의 동료이자 빈 라덴 사후 알카에다를 이끌고 있는 자와히리를 수단으로 불러들인 사람도 투라비다. 이들은 1996년 추방될 때까지 5년간 수단에서 거주했다.
 
  빈 라덴을 영웅, 미국을 ‘악()의 화신(化身)’으로 부른 투라비는 수단을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분자들의 피신처로 만들었다. 열렬한 지하드 지지자였던 투라비는 1998 AP통신과 한 인터뷰에서 그해 8 7일 케냐와 탄자니아의 미국 대사관 두 곳이 동시에 폭탄 공격을 받아 200명 이상이 죽은 사건을 두고 “이해할 만하다”고 말할 정도였다.
 
  미국은 1993년 급진 과격분자 지원을 중단하라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수단 정부가 계속 국제 테러조직에게 수단을 도피처로 제공하고 있다고 하면서 수단을 테러지원국으로 지정했다. 아울러 미국 정부는 수단이 이란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이란이 지원하는 단체에 만남의 장소, 환승처 및 도피처를 제공하고 있으며 광범위한 이슬람 극단주의자들과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1997년에는 행정명령 13067호를 발동하여 수단에 경제제재를 부과했다. 이듬해에는 알카에다의 화학무기 공장으로 의심이 가는 곳을 14발의 크루즈미사일로 폭격했다. 그러나 정보와 달리 의약품 제조공장으로 드러났다.
 
  2001 9·11 뉴욕테러가 발생하고 난 후에야 비로소 수단 정부는 미국에 협력하여 국내 알카에다 조직 색출에 나섰다.   


 
다르푸르 사태

다르푸르 사태 당시 난민촌. 48만명이 목숨을 잃고 280만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사진=조선BD

 

  2003년 서부 다르푸르에서 정부의 실정(失政)을 비판하며 반군(反軍)과 주민들이 반정부 시위에 나섰다. 바시르 정부는 잔자위드(Janjawid) 민병대를 내세워 마을을 불태우고 살인·강간·고문을 자행했다. 48만명이 목숨을 잃고, 280만여 명의 피난민이 발생했다. 1994년 르완다 학살에 버금가는 잔인한 폭력사태였다.
 
  이 처참한 현실을 유엔은 ‘세계 최악의 인도적 위기’로, 미국 정부는 ‘학살’로 규정했다. 국제형사재판소(ICC) 2009 3월 바시르 수단 대통령을 전쟁범죄와 반인도적 범죄 혐의로 기소하면서 체포영장을 발부했다. 2010 7월에도 체포영장을 발부했다. 그러나 바시르 대통령은 여전히 건재하다. 바시르 대통령이 수단 밖으로 나오면, 해당 국가는 그를 체포해서 국제형사재판소 재판정에 세워야 하나 남아프리카공화국·케냐 등 그가 순방한 국가들이 모두 체포명령을 이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향후 바시르 대통령이 체포되어 심판을 받을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독립 이래 끊임없이 내전과 정치 불안에 시달려 온 수단은 현재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아가고 있다. 유전(油田) 75%를 차지하고 있는 남수단이 독립하면서 충격이 컸지만, 협상을 통해 향후 손실액을 보상받는 것으로 대화가 마무리되어 가고 있다.
 
  작년 10월 미국의 경제제재가 해제됐지만 아직 그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 수단은 내심 미국이 테러지원국에서 완전히 해제해 줄 것을 기대하고 있다. 투라비의 이슬람주의 비전에 휘말려 종교를 정치적 도구로 쓰면서 국가발전의 길에 어긋나는 역주행(逆走行)을 한 수단의 과거가 무척이나 안타깝다. 따하의 생각을 좀 더 존중했더라면 독립 후 내전이나 정치적 불안을 조금 덜 겪지 않았을까?   


 
1999년부터 석유수출국 

  나일강의 선물이라고 하기에는 이집트에 비해 수단의 역사문화적 위상이 많이 뒤처진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단은 아랍세계 모든 경작지의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는 곡물 창고다. 아랍농업개발기구(Arab Organization for Agricultural Development)가 본부를 수단의 수도 하르툼에 둔 것도 수단의 농업이 지니고 있는 국제적 위상을 여실히 보여주는 좋은 예다. 현지에서 10년 동안 유학생활을 한 선배 교수의 말에 따르면 열무를 심었더니 한 해 6번이나 수확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렇듯 어마어마한 농업 잠재력을 갖춘 나라지만 현실은 그러하지 못하다. 석유 때문이다. 1959년 이탈리아가 수단의 홍해 연안에서 석유 탐사를 시작한 이래 수단은 유전개발에 힘을 쏟았다. 그 결과 1979년 미국 셰브론사가 최초의 유전을 남수단 무글라드 서쪽에서 발견했다. 3년 후인 1982년에는 헤글리그와 유니티라는 중요한 유전을 발굴했다. 이들 유전은 내륙에 위치했기에 채굴한 석유를 수출하기 위해서는 홍해 연안 항구까지 파이프라인을 건설해야 했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내전, 개발 중단, 사업자 변경 등 우여곡절 끝에 북동부 홍해 연안 항구 부르수단에 이르는 파이프라인이 완성되어 1999년 처음으로 수단은 석유수출국 대열에 합류했다.
 
  파이프라인 개통식에서 석유수출을 ‘신의 선물’이라고 한 바시르 대통령의 말처럼 석유는 수단의 희망이고 미래였다. 하지만 석유에 몰입하는 사이 천혜의 농업은 그만큼 관심에서 멀어졌다. 이제야 비로소 수단 정부는 그간 소홀히 여긴 농업 재건에 눈을 돌리고 있다. 현대화와 수출산업화로 농축산업을 발전시키려는 수단 정부의 비전에 우리나라가 도움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 아프리카와 중동을 잇는 가교 수단에 부국(富國)과 빈국(貧國)을 잇는 우리나라의 경험과 기술이 더해져 상생 협력의 미래가 열리길 기대한다.

 

 

12월 호

◆王政 비판하다 慘殺된 사우디 언론인 카슈끄지

⊙ 할아버지는 사우디 초대 국왕 압둘 아지즈의 주치의, 삼촌은 武器商 아드난 카쇼기, 사촌형은 다이애나의 애인 도디 알 파예드
⊙ 이슬람에 근거한 민주주의 주장하는 무슬림형제단 지지자… 미국이 왕실 대체할 지도자 감으로 보았다는 주장도 있어
⊙ “건설적인 의견과 (종종 현명한) 반대의견이 묵살된다면 나라가 어떻게 진보의 길을 걸을 수 있을까?
⊙ 사우디 왕실, 駐美대사 칼리드 왕자 귀국시켜… 왕세자 교체설 나와

▲터키 이스탄불 주재 사우디 영사관에서 살해된 언론인 카슈끄지. 2014년 12월 바레인의 《알아랍》 뉴스 채널 국장 시절의 모습이다. 사진=AP/뉴시스 

 

  자말 카슈끄지. 지난 10 2일 터키 이스탄불 주재 자국(自國) 영사관에 혼인에 필요한 서류를 받으러 갔다가 살해되어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든 사우디아라비아 반체제 언론인. 카쇼끄지, 카쇼기로도 표기되는 성을 가졌는데, 카슈끄지라는 이름은 ‘나무 숟가락을 만들거나 파는 사람’을 뜻하는 터키어다. 터키어로는 ‘나무 숟가락’을 뜻하는 ‘카슈크’와 ‘사람’을 뜻하는 ‘츠’가 붙어 ‘카슈크츠’라고 하는데, 아랍어로는 ‘카슈끄지’라고 표기한다.
 
  그의 할아버지는 원래 터키 중부 카이세리 출신인데 사우디아라비아 여성과 결혼했고, 사우디아라비아의 초대(初代) 국왕 압둘 아지즈의 주치의 역할을 하면서 사우디아라비아에 정착했다. 왕족은 아니지만,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은 카슈끄지 집안에는 꽤나 유명한 인물들이 많다. 카쇼기로 더 알려진 삼촌 아드난 카슈끄지는 1980년대에 무려 40억 달러의 재산을 보유한 억만장자 무기상(武器商)으로 명성을 떨쳤다. 유명 여성작가였던 고모 사미라는 파리의 리츠호텔과 런던의 해로드백화점을 소유한 이집트 출신 갑부 무함마드 알 파예드와 결혼했다. 그녀의 아들 도디 알 파예드, 즉 카슈끄지의 사촌형은 영국의 전() 왕세자비 다이애나의 연인으로 다이애나와 함께 미심쩍은 자동차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카슈끄지는 1958년 메디나에서 태어나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고등교육을 마친 후 미국 인디애나 주립대학교에서 경영학 학사 학위를 받은 후 귀국했다. 잠시 서점에서 일한 것 외에는 지난 30여 년 동안 줄곧 언론인으로 활동하면서 사우디아라비아 왕가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특히 정보당국과 함께 일하면서 9·11 테러 이전에 왕가와 오사마 빈 라덴의 우호적인 관계 복원을 위해 노력을 기울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양측에 오고간 이야기를 가장 많이 아는 인물로 꼽히는 카슈끄지는 왕족을 제외하고 일반인으로 민감한 비밀을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인물이다. 오사마 빈 라덴을 인터뷰하기도 했고, 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 소련에 대항하는 전사(戰士)들의 신앙심에 놀라움을 표하기도 했다. 물론 9·11 테러 이후에는 입장이 바뀌었다.
  


  무슬림형제단 추종자

  2003년 일간지 《알와딴》의 편집장이 됐지만, 이븐 타이미야(1263~1328)를 비판하는 글이 지면에 나가도록 했다는 이유로 불과 52일 만에 편집장에서 해임됐다. 이븐 타이미야는 이슬람 종교사에서 “코란이 창조되지 않은 말씀”이라고 주장하다가 옥고(獄苦)를 치른 아흐마드 이븐 한발(780~855)의 보수적인 신앙을 이어 받은 학자다. 그는 코란을 문자적으로 해석했고, 성인(聖人) 공경과 같은 대중적인 믿음을 강력히 비판했다. 이슬람으로 개종(改宗)했는데도 불구하고 몽골 지배층을 불신자(不信者)라고 비난했으며, 신학과 철학으로 신앙을 표현하는 것을 배격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건국 종교이념인 와하비(Wahhabi) 사상은 아흐마드 이븐 한발과 이븐 타이미야를 사상적 원조로 삼는다. 그런데 이븐 타이미야를 비판하는 글이 나가도록 했으니 사우디아라비아의 지도층이 발칵 뒤집어질 만한 일이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달리 서구(西歐)에서는 이때부터 카슈끄지를 진보적인 언론인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보수적인 종교이념에 도전하는 용감한 언론인’이라는 이미지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가 아무나 할 수 없는 용기를 낸 것은 사실 대단한 일이다.
 
  카슈끄지가 ‘사상(思想)의 자유’라는 기치를 내걸고 사우디아라비아의 철옹성(鐵甕城) 같은 국가이념인 와하비 사상에 반기를 든 것은 아니다. 그는 실은 무슬림형제단을 추종하는 인물이었다.
 
  1928년 이집트에서 시작한 무슬림형제단은 세속적(世俗的) 서구사상에 반대하고, 이슬람을 종교를 넘어 삶의 전반에 영향을 끼치는 총체적인 생활방식으로 보는 근대 이슬람주의 운동의 대표적인 사상이다. 와하비와 다른 점은 와하비가 사우디아라비아 왕정(王政)의 수호사상이라면, 무슬림형제단은 민주주의라는 제도를 이용하여 정권을 잡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는 점이다. 무슬림형제단은 이슬람의 가치가 철저히 스며든 국가를 꿈꾼다. 서구가 카슈끄지를 ‘진보적 언론인’으로 보는 것은, 면밀히 살피면 사실 실상과 다른 것이다. 무슬림형제단이 다양한 사유(思惟)가 공존(共存)하는 사회를 지향하는 운동은 아니기 때문이다.
  


 
바레인 방송국 맡은 지 11시간 만에 문 닫아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 왕세자(오른쪽)는 지난 10 23일 카슈끄지의 아들 살라를 왕궁으로 불러 위로했다. 이를 두고 잔인한 악수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살라와 그의 가족은 이틀 후 미국으로 떠났다. 사진=AP/뉴시스

 

  편집장에서 해임된 후 카슈끄지는 일종의 ‘자진 망명’을 떠나 약 4년간 영국에서 생활하다가 2007년에 귀국, 《알와딴》 편집장으로 복귀했다. 그는 사우디아라비아 사회의 엄격한 이슬람 해석을 계속 지적하는 글을 잡지에 싣다가 2010년 또다시 해임됐다. 사우디아라비아 사회에서 허용 가능한 논쟁의 경계선을 넘어가는 활동을 했기 때문이다.
 
  이후 카슈끄지는 24시간 아랍어로만 방송하는 바레인의 뉴스 채널 《알아랍》을 맡아 야심차게 새 출발을 했다. 하지만 바레인 왕정이 극도로 경계하는 시아파 지도자의 인터뷰를 송출하는 바람에 개국(開局) 11시간 만에 방송국은 문을 닫았다.
 
  그 후에도 카슈끄지는 여러 신문·방송에서 평론가로 활동했다. 무함마드 빈 살만 현 왕세자가 권력을 공고히 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그에 반대해 온 입장 때문에 신변의 위험을 감지했다. 결국 2017 9월 미국으로 다시 자진 망명을 떠난다. 《알자지라》와 인터뷰에서는 그는 체포되는 것이 두려워 미국으로 이주했다고 고백했다.
 
  미국에서 카슈끄지는 특출한 재능을 지닌 사람들에게 주는 최대 3년 유효한 O1비자를 받아 《워싱턴포스트》의 칼럼니스트로 활동했다. 그는 비자 만료 전에 영주권 신청을 계획하고 있었다. 왕세자의 입장에서 보면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 인물로 느껴도 하나 이상할 것 없을 정도로 카슈끄지는 왕세자의 여러 정책을 강하게 비판했다. 그의 칼럼은 영어와 아랍어로 게재됐으니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실이 느끼는 심리적 압박의 강도는 상당했을 것이다.
 
  빈 살만 왕세자는 1979년 이란혁명의 영향으로 경직된 자기 나라를 온건한 이슬람 국가로 이끌겠다는 신념 아래 여성운전, 영화상영을 허가하는 등 일련의 개혁적인 정책과 비전을 내세웠다. 때문에 왕세자는 변화를 갈구해 온 젊은 층의 너른 지지를 확보했다. 국제사회 역시 빈 살만이 이끄는 사우디아라비아가 과거와 달리 ‘정상국가’로 갈 것이라는 희망 어린 기대감을 피력했다.   


 
예멘전쟁 종식 주장

  그러나 카슈끄지는 빈 살만을 개혁가로 보지 않았다. 그는 빈 살만이 사우디아라비아를 온건한 이슬람 국가로 만들기 위해 종교적으로 위험한 극단주의자들을 멀리하는 개혁적인 정책을 펴는 게 아니라 오로지 권력을 장악하는 데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선량한 사람들을 억압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2017 10 31일자 《워싱턴 포스트》 칼럼에서 카슈끄지는 빈 살만을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극단주의자들을 척결하겠다는 무함마드 왕자의 생각은 옳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을 잘못 쫓고 있다. 지난 2달 동안 사우디아라비아의 지성인·성직자·언론인·사회관계망(SNS)의 유명 인사들이 다수 체포됐다. 이들 대다수는 아무리 나쁘게 본다고 하더라도 정부에 다소 비판적일 뿐이다. 반면 이슬람학자위원회 소속 다수 위원들은 극단적인 생각을 지니고 있다. 무함마드 왕세자가 존경하는 셰이크 살리흐 알파우잔은 텔레비전에서 시아파는 무슬림이 아니라고 했다. 역시 존경하는 셰이크 살리흐 알루하이단도 무슬림 통치자는 다른 사람의 의견을 반드시 들을 필요가 없다는 법적인 조언을 했다. 민주주의, 다원주의, 또는 여성운전에 반대하는 이들의 견해를 반대하거나 비판하지 못하도록 왕령(王令)으로 보호하고 있다. 이처럼 극단적인 생각을 용인하면서 어떻게 온건할 수 있을까? 건설적인 의견과 (종종 현명한) 반대의견이 묵살된다면 나라가 어떻게 진보의 길을 걸을 수 있을까?
 
  카슈끄지는 더 나아가 왕세자의 독단적인 국정운영, 언론장악 등 권위주의적 통치행태를 비판하고 예멘전쟁, 카타르와의 단교(斷交), 레바논 정책, 신도시 네옴(Neom) 건설 등 굵직굵직한 외교·경제 정책들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카슈끄지는 ‘개혁적인 계몽왕자’라는 세간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빈 살만의 감추어진 어두운 면을 부각하여 거칠 것 없는 권력자의 심기를 심하게 건드렸다. 살해되기 한 달 전인 9 11일 칼럼에서는 2015년 왕세자가 주변의 의견을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개시한 예멘전쟁을 끝내고 국가의 위엄을 되살려야 한다고 충고했다.
 
  〈잔인한 예멘전쟁이 장기화되면 될수록 상처가 더 공고해질 것이다. 예멘 사람들은 가난, 콜레라, 식수난과 싸우면서 국가를 재건하기에 여념이 없을 것이다. 왕세자는 폭력을 종식하고 이슬람의 발생지라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위엄을 되찾아야 한다.   


 
빈 살만, 顧問 자리 제의하며 회유 

  이처럼 카슈끄지는 언론의 자유가 보장된 미국에서 조국 사우디아라비아의 잘못된 정책을 비판하며 반정부(反政府) 언론인으로서 확실히 자리매김했다. 특히 올해 초에는 ‘아랍세계를 위한 민주주의(Democracy for the Arab World Now)’라는 정당을 결성하여 보다 본격적으로 반정부 활동에 나섰다. 그가 말하는 ‘민주주의 아랍세계’란 무슬림형제단이 민주적인 절차로 정권을 잡는 것을 뜻한다. ‘이슬람법이 통치하는 국가’는 아니더라도 ‘이슬람에 근거한 국가’를 세우겠다는 것이 그의 최종 목표였다.
 
  분명 왕세자는 상당한 위기감을 느꼈을 것이다. 위기감까지는 아니더라도 마치 파리나 모기가 얼굴 앞에서 계속 앵앵거리는 불편함은 컸을 것이다. 선거를 모르는 왕정국가에서 국가 기반을 흔드는 민주주의는 금기어(禁忌語)이니 말이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실질적인 헌법이라고 할 수 있는 통치기본법 6조는 국민들은 “국왕에게 충성하고, 편할 때나 어려울 때나 행복할 때나 고통스러울 때나 복종하고 순종한다”라고 명시하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민주주의가 온전하게 설 자리를 찾기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1985년생 33살의 혈기왕성한 왕세자는 비록 카슈끄지가 자신보다 27살이나 더 많은 1958년생이라지만 왕족도 아닌 자가 자기를 대놓고 비판하니 몹시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왕족이라도 눈 밖에 나면 가만두지 않았는데 말이다. 그래도 빈 살만은 카슈끄지의 마음을 돌리고자 귀국하면 고문(顧問) 자리를 주겠다고 그를 회유했다. 그러나 카슈끄지는 그러한 초빙에 응하는 것이 도덕적으로나 종교적으로 합당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거절했다.  


  사랑과 죽음

CCTV에 찍힌 자말 카슈끄지와 그의 약혼녀 하티제 젠기즈의 마지막 모습. 지난 10 2일 카슈끄지가 살해되기 몇 시간 전에 아파트로 들어가는 모습이다. 사진=AP/뉴시스

 

  사우디아라비아는 친미(親美) 왕정국가였지만, 2001 9·11 테러범 대다수가 사우디아라비아 국적자였다. 이에 격노한 미국 정부 일각에서는 사우디아라비아 왕정을 미국의 이익을 대변할 수 있는 체제로 바꾸어 미국이 직접 원유(原油)를 관리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그러면서 미국이 앞으로 사우디아라비아를 이끌 인물로 염두에 둔 사람 가운데 하나가 카슈끄지라는 말도 돌았다. 다소 황당하게 들리는 이야기다. 어찌 됐든 그 정도의 말이 돌 상황이라면 카슈끄지를 그냥 평범한 사람으로 간주하고 무시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사우디아라비아 왕실의 입장에서는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로 여길 수밖에 없었으리라.
 
  반대의 목소리를 내면서부터 카슈끄지의 삶은 고통스러웠다.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는 카슈끄지를 국내에 있는 가족과 생이별을 하도록 만들었다. 아내와도 외부 압력 때문에 사실상 강제 이혼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 시민권을 가진 그의 아이들은 모두 출국(出國) 금지 조치를 당했다.
 
  홀로 미국에서 살던 그는 올해 5월 이스탄불에서 열린 한 학회에서 24살 어린 터키 대학원생 하티제 젠기즈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둘의 나이 차가 크다던 젠기즈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스탄불과 워싱턴을 오가며 새로운 삶을 꾸미기로 약속했다. 카슈끄지는 결혼에 필요한 서류인 이혼증명서를 받기 위해 지난 9 28일 이스탄불에 있는 자국 영사관을 방문했다.
 
  젠기즈에 따르면 걱정했던 것과 달리 영사관 직원들은 카슈끄지를 상당히 친절하게 대했다고 한다. 서류 준비에 시간이 걸리니 10 2일에 다시 오라는 말을 듣고 카슈끄지는 영사관을 나왔다. 운명의 그날인 10 2, 카슈끄지는 젠기즈에게 자신의 휴대전화를 맡기고 죽음의 소굴로 들어갔다. 처음 방문했을 때 분위기가 좋았기에 카슈끄지는 다소 편한 마음이었다. 그래도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여 자신이 나오지 않으면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의 고문이자 터키 집권당인 정의개발당 의원이었던 아크타이에게 전화를 하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알려진 바와 같이 카슈끄지는 영사관에서 영원히 나오지 못했다.
 


  “그 개의 목을 가져오라” 

  모두 왕세자를 의심하지만, 사우디아라비아는 ‘아랫것들’이 과잉충성심에서 카슈끄지를 압박하다가 사고가 발생하여 죽었다는 공식적인 해명을 내놓고 있다. 정황상 불법적으로 사우디아라비아 영사관을 도·감청한 것으로 보이는 터키는 외교마찰 우려 때문에 정보를 공식적으로 내놓지는 못하고 있는 대신 언론을 통해 정보를 흘리고 있다. 터키 정부는 사우디아라비아가 정부 차원에서 반정부 발언을 일삼는 골칫덩이 카슈끄지를 제거했다고 확신하며 압박을 가하고 있다.
 
  터키 정부는 카슈끄지를 처치하기 위해 당일 터키인 근무자들에게는 미리 휴가가 주어졌고, 법의학 전문가를 포함한 15명의 암살단이 사건 당일 새벽에 사우디아라비아에서 터키로 들어왔다고 하면서 신상도 공개했다. 처참하게 토막 난 카슈끄지의 시체 사진까지 나돌았다. 우발적 사건이 아니라 계획적인 살해라는 말이다. 사건의 책임을 지고 자리에서 물러난 왕세자실의 고문이 “그 개의 목을 가져오라”고 한 말을 도청한 음성파일까지 언론에 폭로됐다.
 
  터키는 사우디아라비아가 체포한 살해 용의자들을 자국으로 넘기라고 요구하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응하지 않고 있다. 국제사회는 떠들썩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잠잠해지는 형국이다. 카슈끄지 살해를 지시한 것으로 강력하게 의심을 받고 있는 빈 살만은 의심은 가지만 뚜렷한 물증이 없는 상태다. 그는 시간을 끌면서 국제 여론이 카슈끄지를 잊길 바라는 전략을 쓰고 있는 듯하다. 《워싱턴포스트》지는 카슈끄지의 죽음을 끝까지 파헤치겠다고 했지만, 결정적 증거가 될 시신이 나오지 않고 있는 데다 체포된 용의자들이 살해 지시 윗선을 자백하리라 기대하기 어려운 상태이다. 사건의 진상은 영원히 미궁으로 빠질 가능성이 짙다.
  


 
왕세자 교체설 나오기 시작

▲칼리드 주미 사우디 대사. 사진=주미 사우디아라비아 대사관 홈페이지

 

사우디아라비아 및 미국과 사이가 불편했던 터키는 이번 사건을 양국(兩國)과 관계를 자신들이 원하는 쪽으로 움직이는 좋은 기회로 이용하고 있다. 꽃놀이패를 쥔 형국이다. 영국·독일·프랑스·캐나다 등 인권·자유·민주를 핵심 가치로 삼는 정부는 언론인 살해를 규탄하고 나섰지만, 사우디에 대한 무기 수출 때문에 비판 수위를 조절했다. “합당한 해명을 할 때까지 무기 판매를 중지하겠다”고 한 메르켈 독일 총리가 그나마 가장 강력하게 항의를 표한 셈이다. 미국은 어떻게 해서든지 큰 문제 없이 조용히 사건을 처리하려고 애쓰는 모습이다. 더 이상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곤란하다는 신호를 사우디아라비아 왕실에 전달했을 것이다.
 
  국제여론의 비판적인 기조에 위축된 사우디아라비아 왕실은 빈 살만 왕세자에게 더 이상 독단적인 행동은 안 된다는 경고를 날리기 위해서인지 주미대사로 재직 중이던 막내 동생 칼리드를 불러들였다. 왕세자가 내쳤던 왕실 인사들도 다시 조용히 불러들이고 있는 중이다. 대내외적으로 평판이 좋은 칼리드를 부()왕세자로 임명한 후 왕세자를 교체할지도 모른다는 설까지 나돈다.
 
  수세에 몰린 빈 살만 왕세자는 카슈끄지가 위험한 이슬람주의자였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자신이 꿈꾸는 온건한 이슬람의 사우디아라비아에 어울리지 않는 무슬림형제단 사상을 쫓는 인물이라는 주장이었다. 과거 이집트·시리아 등 주변 국가의 세속주의 정권을 견제할 때 사우디아라비아는 무슬림형제단을 지원했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 무슬림형제단이 민중의 지지를 바탕으로 급부상하면서 왕정 전복의 위험을 간파한 사우디 왕실은 무슬림형제단의 강력한 반대자로 스스로를 자리매김했다. 그러니 당연히 무슬림형제단에 경도된 카슈끄지는 위험한 인물일 수밖에 없다.
 
  이유야 어찌 됐든 현대 중동에서 이슬람은 이처럼 여전히 정치 담론의 핵심이지만,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한 지 오래다. 이슬람의 이름으로 서로를 마음 편히 대할 수 없는 적()으로 여겨야 하는 안타까운 현실은 언제나 마무리될까? 오로지 알라만이 알 것이다. 알라후 아을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