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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雜事(세계사) 2022-1/ 01.10 ‘독일의 아테네’ 바이마르 - 09.23 소설 ‘뿌리’ 쿤타 킨테의 고향, 노예·황금·상아의 대륙

상림은내고향 2022. 11. 8. 19:47

역사 속의 雜事(세계사) 2022-1

01.10 ‘독일의 아테네’ 바이마르… 자식 사랑한 모성애가 문화·예술 꽃피웠다

바이마르 대공妃 아나 아말리아, 18세에 혼자된 후 아들 교육 몰두
괴테·빌란트·실러 등 석학 초빙해 자식 가르치고 나라 체계 세워
궁정도서관 정비, 현재 100만권 소장한 ‘아나 아말리아 도서관’으로

독일의 바이마르는 인구가 6만 정도에 불과한 작은 도시이지만, 이곳은 독일뿐 아니라 유럽을 통틀어 손에 꼽는 예술의 도시다. 도시를 지나는 강의 이름을 따서 ‘일름강의 아테네’라고 부르는 이곳은 18세기 이후 유럽 인문 정신의 꽃을 가장 화려하게 피웠다.

 

그 중심은 독일 최대의 문호 괴테였다. 괴테는 바이마르 출신은 아니지만, 50년 이상을 이곳에 살며 인문과 문화와 경제 등 여러 분야에서 도시를 최고의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그리고 괴테뿐만 아니라 빌란트, 헤르더, 실러 등 독일 최고의 지성들이 이 작은 도시로 와서 살았다. 그들의 존재는 또 다른 예술가와 학자들을 불러들였으며, 이곳은 고대 아테네를 연상시키는 문화의 중심이 되었다. 그리하여 ‘바이마르 고전주의’라는 말까지 생겨났다.

 

바이마르란 이름을 들으면, 우리는 바이마르 헌법이나 바이마르 공화국을 연상한다. 독일제국이 제1차 대전에서 패한 뒤 공화국을 세우기 위해 헌법을 제정한 장소가 바이마르였기에 헌법과 국가에 이런 별명이 붙은 것이며, 현대건축의 선구자 그로피우스가 디자인과 건축의 교육을 위해 바우하우스를 처음 세운 곳도 바이마르다. 이곳이 독일의 문화와 정신을 계승하는 상징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시작인 괴테는 어떻게 여기 왔을까?

 

 ▲‘아나 아말리아 대공비 도서관’ 내부(위 사진). 아나 아말리아가 궁정 도서관을 개조해 만든 이 도서관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서관으로 꼽힌다. 개관 300주년을 맞은 1991년에 ‘아나 아말리아 대공비 도서관’으로 명명됐다. 아래 왼쪽 사진은 바이마르 국립극장 앞에 있는 괴테와 실러 동상. 아나 아말리아는 괴테·빌란트·실러 등 지식인을 궁으로 초빙해 아들을 교육하고 나라의 체계를 잡았다. 아래 오른쪽은 아나 아말리아 초상화. /ⓒKlassik Stiftung Weimar, Wikipedia

1756년 바이마르 대공국의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2세는 18세의 나이에 두 살 어린 브라운슈바이크 볼펜뷔텔 공국의 아나 아말리아(Anna Amalia von Braunschweig-Wolfenbüttel·1739~1807) 공주와 결혼하였다. 그런데 공작은 2년 만에 사망하고, 아말리아 대공비는 8개월짜리 장남과 배 속의 둘째를 가진 채로 18세에 혼자가 되었다. 그녀는 어린 아들을 대신하여 공국의 섭정이 되었다.

 

그러나 섭정이라고 해도 그녀 역시 10대 소녀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녀는 지혜로운 판단력과 굳은 의지로 대공국을 위해 최상의 방법을 찾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아들이 성인이 되었을 때, 공국을 제대로 통치하기 위한 튼튼한 기반을 마련해놓는 것이었다. 그녀는 독일의 선구적 지성인이었던 작가 크리스토프 마르틴 빌란트를 아들의 가정교사로 영입하였다. 이어서 의학과 신학을 전공하고 철학과 문학에까지 영향을 떨쳤던 석학 요한 고트프리트 헤르더를 영입하였다. 그리고 아나 아말리아는 드디어 괴테를 초빙하였다. 괴테는 작가로 알려졌지만, 그는 이미 자연과학을 비롯한 여러 학문과 경제까지 통달한 인물이었다. 괴테는 처음에 광산 운영 책임자로 부임하였으나, 이어 국방위원장을 맡아 군대를 정비하고, 건설국을 맡아 도로를 건설하고, 재정국과 화폐국까지 맡아 화폐를 개혁했다. 만년에 괴테는 미술학교⋅식물원⋅박물관의 책임자도 되어, 책상 위의 이론을 실제 정치와 행정에 적용해보는 기회를 가졌다. 또한 괴테에 의해서 그와 나란히 추앙받는 극작가 프리드리히 실러마저 바이마르로 왔다.

 

그렇게 아나 아말리아의 모든 열정은 국가의 체계를 잡고 아들에게 최고의 교육을 제공하는 것에 바쳐졌다. 그리고 19년이 지나서 즉 아들이 성인이 되자, 그녀는 아들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지체 없이 퇴위하였다. 그녀는 궁전을 물러나와 흔히 과부궁(寡婦宮)이라고 불렸던 작은 저택으로 옮겨 살았다. 아나 아말리아는 책을 좋아했던 친정아버지의 영향으로 다독가였으며 자신이 외국 서적을 번역하거나 작곡할 만큼 교양이 뛰어났다. 그녀는 독일 최고의 학자와 작가와 예술가들을 자신의 궁으로 초대하여, 그곳을 문화의 중심으로 만들었다. 매주 그곳에서 열리던 독서회⋅강연회⋅음악회에는 유럽 최고 수준의 지성인과 예술가들이 모여들었다. 그녀의 거실에서는 빌란트와 헤르더와 괴테와 실러 등 4대 지성이 함께 앉아 시를 낭독하고 정세를 토론하고 음악을 같이 듣는, 다시는 볼 수 없을 광경이 벌어졌다. 독일의 모든 문화예술인들은 바이마르를 방문하는 것을 소망이자 영광으로 여겼다. 아나 아말리아 모후와 아들 카를 아우구스트 대공 시절에 바이마르는 문화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아나 아말리아가 펼친 여러 활동 중에서 중요한 것이 도서관을 정비하고 확장한 것이었다. 역대 대공들이 소장했던 장서를 모아놓은 궁정도서관이 있었는데, 그녀는 그것을 바탕으로 초록궁을 로코코양식으로 개조하여 아름다운 도서관을 만들었다. 나중에 괴테가 30년 이상이나 도서관장을 맡으면서 장서는 8만권으로 늘어났다.

 

1991년에 도서관은 개관 300주년을 맞아 ‘아나 아말리아 대공비 도서관’으로 명명되었다. 이후로 현대적 시설의 신관을 세우고 무려 100만권을 보유한 거대한 수장고까지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2004년에 누전으로 인한 화재가 발생하여, 5만권의 귀한 고서들이 소실되는 막대한 피해를 당했다. 도서관은 다시 공사를 하여 2007년에 재개관하였다. 1000억원을 들여 당국은 불에 탄 책들과 똑같은 책을 전 세계를 찾아다니며 구입했고, 각국 독지가들로부터 증여받아 원래 장서와 거의 같은 목록을 완성하였다.

 

아들의 장래를 위한 어머니의 지극정성은 국가의 번영은 물론이고, 그곳을 독일 문화의 수도로 만들었다. 그녀가 평생에 걸쳐 했던 활동은 가진 자가 공동체를 위해서 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하고 가치 있는 일이었다. 바이마르라는 도시 이름이 세계인들의 머릿속에 어떤 식으로라도 남아 있다면, 현명하고 강인했던 덕성과 끊임없는 자기계발로 통찰력을 지녔던 한 여성의 지성을 빼놓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조선일보 박종호 풍월당 대표

 

01.11 절체절명의 순간, 나라를 이끈 지도자… 처칠 이전에 그가 있었다

“영국은 캐나다와 그냥 똑같네요.”

5년 전 쯤 런던에서 유럽특파원으로 근무할 당시 저와 나이 차이가 많은 큰누나의 딸 내외가 캐나다에서 방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조카 사위는 캐나다 토론토에서 성장한 교포인데, 며칠 동안 이곳저곳 다니더니 돌아갈 무렵 이 한 마디를 하더군요. 런던을 둘러봤더니 사회가 움직이는 시스템이 두 나라가 거의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당시 그 말이 꽤 신선하게 들렸습니다. 영국이 프랑스와의 제국 건설 경쟁에서 승리해 북미(미국과 캐나다)를 손아귀에 넣었지만, 미국이 독립전쟁을 통해 떨어져 나가면서 캐나다만 대영제국의 식민지로 남았습니다. 이후 캐나다는 1867년 자치령이 됐고, 1951년에는 정식 국명(國名)이 캐나다자치령에서 캐나다로 바뀝니다. 오랫동안 영국의 지배를 받았다고 해도, 자치를 획득한 것이 150년 전 일이고 본국이 대서양 건너편에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캐나다는 영국보다 미국과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조카 사위 말을 듣고 무릎을 칠 뻔했습니다. “아, 그렇구나. 영국이 건설했던 제국은 어떤 의미에서는 아직도 강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구나.” 물론, 대영제국 시절과는 다르겠지만 말이죠.

 

015년 6월 13일 영국 엘리자베스(가운데 흰 옷) 2세 여왕의 생일을 맞아 영국 왕실 가족들이 버킹엄궁 발코니에 모였다. 여왕과 남편 필립(여왕 오른쪽으로 둘째)공이 손을 흔들어 보이고 있다. /AFP 연합뉴스

 

 현재 영연방에는 세계 54국이 가입해 있습니다. 북미와 중남미, 아프리카, 아시아, 오세아니아 등 지구촌 모든 대륙에 회원국이 퍼져 있습니다. 이들은 대부분 대영제국이 식민지로 거느렸던 나라들입니다. 물론 회원국들이 지금도 영국의 통치나 지배, 지시를 받는 것은 아닙니다. 계산기 두드리고 머리 굴려가며 이해 관계를 따져본 결과, 영연방으로 있을 때 누릴 수 있는 혜택이 더 크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영연방 회원국이라고 다 같은 회원국은 아닐 것입니다. 그 중 유독 친밀하고, 국제적 이슈가 있을 때마다 하나로 뭉치는 나라는 영국과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입니다. 이들 4국은 미국과 함께 군사·정보 동맹체인 ‘파이브 아이스(Five Eyes)’를 구성하고 있지요. 최근에 중국 베이징 동계올림픽에 대해 ‘외교적 보이콧’을 선언한 나라들도 이들입니다. 이들 나라는 앵글로색슨이라는 인종적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작년에 미국과 영국, 호주가 ‘오커스’라고 하는 또 다른 군사동맹을 출범시킨 것도 “우리는 언제까지 진정한 원팀”이라는 의식이 작용한 결과라고 봅니다.

 

사실 캐나다에 먼저 진출한 건 프랑스였습니다. 프랑스는 1608년부터 세인트로렌스강(江) 중심으로 퀘벡·몬트리올 등에 식민지를 건설했습니다. 영국은 20년 정도 늦은 1628년 프랑스 식민지의 남동쪽, 대서양에 접한 노바스코샤 지역에 발을 들여놓았습니다. 이로부터 약 150년 후, 세계의 패권을 놓고 대결을 펼친 끝에 영국이 승리했고, 21세기에 제 조카 사위가 “영국과 캐나다는 정말 똑같은 것 같다”는 말을 하게 된 것이지요. 이제 세계 역사의 흐름을, 그리고 영국과 프랑스의 운명을 바꿔놓은 18세기로 돌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눈여겨 볼 것은 여러 전쟁이 있었고, 전쟁을 벌이는 양쪽 멤버들은 계속 바뀌는데, 영국과 프랑스는 항상 적(敵)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세계전쟁의 시대

18세기의 전쟁은 이전과는 커다란 차이점이 있습니다. 가장 두드러진 점은 동시에 지구촌 곳곳에서, 많은 나라들이 뒤엉켜 싸우는 세계 전쟁의 성격을 띄게 됐다는 점입니다. 17세기 말에서 19세기 초 유럽에는 대형 전쟁들이 잇따라 터졌습니다. 아우크스부르크동맹 전쟁(또는 9년 전쟁, 1688~1697)을 시작으로 에스파냐 왕위계승 전쟁(1701~1714),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1740~1748), 7년 전쟁(1756~1763), 나폴레옹 전쟁(1793~1815) 등입니다. 중세와 근대 초기 전쟁들은 주로 개별 국가간에 벌어지거나 소수 국가들이 참여하는데 그쳤고, 전장(戰場)도 일부 지역에 국한됐는데, 18세기를 거치면서 참전국도 크게 늘고, 전투도 유럽을 넘어 전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양상으로 바뀌었습니다. 개막전 같았던 것이 아우크스부르크 전쟁이었는데 이 전쟁을 통해 유럽 패권을 장악하려다 실패한 프랑스 루이 14세는 18세기가 문을 열자 곧바로 에스파냐 왕위계승 전쟁에 뛰어들었습니다.

 

에스파냐에서 합스부르크가(家) 출신인 카를로스 2세가 후사없이 사망하자 왕위는 그의 유언에 따라 루이 14세의 손자인 앙주 공 필리프에게 넘어갔습니다. 루이 14세의 입장에서 보면 손자가 에스파냐 왕이 되면 프랑스와 에스파냐가 하나로 합쳐지면서 자신의 부르봉 왕가가 유럽의 최강이자 독보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고, 유럽 패권 장악이라는 자신의 꿈이 실현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그만의 꿈이었지요. 다른 유럽 국가들이 이를 눈뜨고 지켜볼 일은 없었습니다.

 

이제 짝짓기가 활발해집니다. 프랑스와 에스퍄냐 쪽엔 나폴리와 시칠리아, 헝가리, 바이에른, 쾰른 등이 동참했습니다. 나폴리와 시칠리아는 에스파냐 지배를 받는 왕국이었고, 헝가리는 오스트리아(합스부르크가)에서 분리·독립을 원하고 있었습니다. 바이에른·쾰른 등은 합스부르크가 강해지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다른 편에선 잉글랜드(영국)가 오스트리아와 손을 잡았고, 여기에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와 네덜란드, 사보니아(사르데냐) 등이 합류했습니다. 에스파냐와 사이가 나쁜 포르투갈, 에스파냐에서 독립하려는 카탈루냐 등도 이 편에 섰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전세는 엎치락뒤치락했고, 전쟁은 위트레흐트 조약(1713)과 라슈타트·바덴 조약(1714)으로 종결됩니다. 결과는 영국과 오스트리아쪽 승리라고 해야 할 듯 합니다. 루이 14세의 손자 필리프는 펠리프 5세로 에스파냐 왕에 오르지만, 프랑스 왕위는 물려받지 못하게 됐습니다. 루이 14세의 꿈이 좌절된 것입니다. 독일 하노버 왕조의 후예인 앤 여왕은 영국 왕위를 공식 인정받게 됐습니다. 영국은 또 프랑스로부터 허드슨만과 아케디아 등 미국 식민지 일부를 할애받고, 에스파냐에서 지브롤터·미노르카섬을 얻었습니다. 프로이센도 땅을 일부 얻었고, 네덜란드는 상업적 특권을 승인받았습니다. 포르투갈은 브라질에 대한 식민지 특권을 인정받았습니다. 이 정도면 프랑스와 에스파냐는 땅을 칠 노릇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듯 합니다.

 

존 처칠, 1대 말버러공

 

 에스파냐 왕위계승 전쟁 때 영국에 특출난 전쟁 영웅이 한 명 등장했습니다. 말버러 공 존 처칠입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윈스턴 처칠 수상의 먼 조상입니다. 그는 영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장군 중 한 사람으로 인정받는데, 그럴만도 한 것이 에스파냐 왕위계승 전쟁에서 그는 단 한번도 패한 적이 없다고 합니다. 2차 대전의 영웅 몽고메리 장군은 그에 대해 “대단한 외교적 수완을 가진 군사적 천재였다. 나는 영국군이 유럽 최고의 군대 가운데 하나로 부상한 것은 다름 아닌 말버러 덕분이라고 늘 생각해왔다”고 말했습니다.

 

한편,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초반에 유럽의 전쟁을 주도했던 프랑스 루이 14세는 죽기 직전 증손자인 루이 15세에게 이런 유언을 남겼다고 합니다. “너는 이웃 나라와 싸우지 말고 평화를 유지하도록 힘써라. 이 점에서 짐이 밟은 길을 따르지 말라. 국민들의 괴로움을 덜어주는 정치를 하여라. 아쉽게도 짐은 행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이후에도 프랑스는 루이 14세의 유언처럼 되지는 않았습니다.

 

한동안 잠잠하더니 1740년 유럽에 다시 전운(戰雲)이 짙게 드리워졌습니다. 계기는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문제였습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카를 6세는 사망하면서 오스트리아 왕위를 장녀인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물려줬는데, 바이에른 등이 “여자는 왕위에 오를 수 없다”는 내용의 관습법 ‘살리카법’을 들어 반대했습니다. 참고로 마리아 테레지아는 모두 16명의 자녀를 낳았는데요. 그 중 한 명이 프랑스 루이 16세의 부인 마리 앙투아네트입니다.

 

이런 갈등의 상황에서 꾸준히 군사력을 키운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가 오스트리아의 알짜배기 땅 슐레지엔을 집어삼키면서 유럽이 전쟁의 불길에 휩싸이게 됐습니다. 이번에 팀 구성은 프로이센과 바이에른 쪽에 프랑스와 스페인, 제노바, 모데나, 스웨덴이 붙었습니다. 반대쪽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진영엔 영국과 하노버, 네덜란드, 러시아 등이 함께 했습니다.

 

1748년 엑스라샤펠(또는 아헨) 조약으로 전쟁이 끝났는데 프로이센은 슐레지엔을 얻어 최대 승자가 됐고, 마리아 테레지아도 합스부르크 가문 계승을 인정받아 오스트리아는 물론, 헝가리와 보헤미아, 크로아티아 등의 왕에 올랐습니다. 그녀의 남편 프란츠 1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에 즉위했습니다. 영국과 프랑스는 전쟁 때 얻은 땅을 서로 되돌려 주었습니다. 영국은 캐나다 루이스버그 요새를 프랑스에 돌려줬고, 프랑스는 인도 마드라스를 영국에 반환했습니다. 하지만 이 전쟁은 ‘끝나지 않은’ 전쟁이었습니다. 슐레지엔을 잃은 마리아 테레지아는 와신상담 복수의 칼을 갈았고,8년 후 잃었던 땅을 되찾기 위한 전쟁을 벌였습니다. 영국과 프랑스도 최후의 승자를 가릴 결정적 한판을 준비했습니다.

 

◇제국, 위용을 갖추다

7년 전쟁은 오스트리아 마리아 테레지아 입장에선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에 대한 ‘복수전’이었습니다. 하지만 얽힌 당사자들이 많았습니다. 기본적인 대립 구도는 프로이센 대 오스트리아, 프랑스 대 영국이었습니다. 전쟁은 크게 세 곳에서 전개됐습니다. 유럽 대륙과 북미, 인도 등입니다. 유럽의 거의 모든 나라가 참전하고, 해외 식민지에서도 전투가 벌어진 까닭에 영국의 처칠 수상이 ‘18세기의 세계대전’이라고 부른 이 전쟁은 결론적으로 영국·프로이센 편이 이겼습니다. 양측은 1763년 파리 조약을 맺었습니다. 특히 영국은 1759년 세계 곳곳에서 승전보를 울렸는데, 그 이후 전투는 ‘소탕 작전’ 수준이었습니다.

 

①유럽 대륙 (포메라니아 전쟁)

마리아 테레지아는 200여년간 합스부르크의 숙적이었던 프랑스를 우군으로 끌어들이고, 러시아와 동맹을 맺었습니다. 프로이센을 반드시 꺾겠다는 집념의 발로였습니다. 이에 프로이센은 프랑스의 라이벌인 영국과 동맹을 맺었지요. 전쟁은 프랑스 해군이 영국령 마요르카섬을 공격하면서 시작됐습니다. 프로이센은 작센을 순식간에 점령했지요.

‘합스부르크 왕가의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

 

 전쟁 중 프로이센은 한때 참패 수준까지 몰렸습니다.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에 연전연패했고, 나라는 망하기 직전이었습니다. 하지만 옐리자베타 여제가 죽고 표트르 3세가 뒤를 이은 러시아가 갑자기 전쟁을 중단하고 이탈하는 바람에 전황이 확 바뀌었습니다. 자살 생각까지 했던 프리드리히 2세는 기력을 회복하고 전세를 뒤집었습니다. 프랑스군도 영국·하노버 연합군에 대패하면서 의욕을 상실했습니다. 전후 조약에 따라 참전국들은 유럽을 전쟁 이전 상태로 되돌리기로 했지만, 프로이센의 슐레지엔 점령은 인정하기로 했습니다.

 

②북미 (프렌치-인디언 전쟁)

7년 전쟁 개시 1년 전 북미에선 프렌치-인디언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이 전쟁은 7년 전쟁과 맞물렸고 1763년 함께 끝났습니다. 프랑스·영국 대결은 필연적이었습니다. 프랑스 이민자들은 북미 인디언들을 상대로 모피 교역을 하면서 세력을 확장했고, 영국 이민자들은 정착촌을 확대하면서 영역을 넓혔지요. 두 세력은 오하이오강 유역에서 맞부딪쳤습니다.

 

초기에 프랑스가 우세했습니다. 세인트로렌스와 오하이오 강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 계속 승리를 거뒀습니다. 하지만 1758년 8월부터 전세가 바꾸었습니다. 영국은 그해 8월 노바스코샤의 루이스버그에서, 이듬해에는 크라운포인트(현재의 뉴욕주)와 타이콘데로가 요새에서 승리를 거뒀습니다.

 

승부를 가른 결정적 대결은 1759년 9월 프랑스군의 핵심 거점인 퀘벡 요새에서 벌어졌습니다. 당시 32세의 제임스 울프가 이끄는 영국군이 몽캄이 지휘하는 프랑스군을 격파했습니다. 이날 전투는 영국군이 ‘일제 사격’으로 프랑스군을 한방에 무너뜨린 유명한 전투입니다. 울프 명령에 따라 영국군 5000여명은 적이 코 앞에 접근할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적이 40야드(약 37미터) 안으로 들어오자 일제 사격을 실시했고, 프랑스군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졌습니다. 이것으로 전투는 끝났습니다. 전투다운 전투는 15분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사망자는 영국군 650명, 프랑스군 1500명 수준이었습니다. 짧고 강렬한 작은 교전이었지만 전투 결과 캐나다의 지배권은 영국으로 넘어갔고, 그런 점에서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전투 중 하나로 대우를 받고 있습니다. 이 전투에서 울프와 몽캄 모두 치명적 부상을 입고 전사하게 됩니다. 두 사람은 조국에서 영웅으로 칭송을 받습니다. 이듬해 영국은 몬트리올에서도 프랑스를 몰아냈습니다. 프랑스가 완전히 쫓겨난 북미는 이제 대영제국의 품에 들어가게 됩니다.

 

③인도

프랑스와 영국은 1600년대에 인도와 교역을 시작했습니다. 영국은 엘리자베스 1세 때인 1600년 동인도회사를 설립했고, 프랑스는 1664년에 세웠습니다. 두 나라의 동인도회사는 유럽에서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때도 인도의 지배권을 놓고 맞붙었습니다.

 

1756년 프랑스와 동맹을 맺은 벵골의 태수 시라지-웃-다울라가 병력 5만명을 이끌고 캘커타의 영국인들을 몰아냈습니다. 하지만 영국 동인도회사의 서기에서 군대 지휘관까지 오른 입지전적 인물 로버트 클라이브가 승부를 뒤집었습니다. 그는 1757년 캘커타를 되찾은 데 이어 그해 6월 최대 승부처였던 플라시 전투에서 시라지-웃-다울라 군대를 격파, 결정적 승리를 거뒀습니다. 1761년에는 퐁디셰리까지 점령함으로써 영국은 인도에서 프랑스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제 인도는 거의 200년 동안 대영제국의 거대한 시장이며, 군사·경제·문화의 보고가 될 것입니다.

 

④그외

영국군은 카리브해에 있는 프랑스와 에스파냐 식민지도 공격했습니다. 프랑스의 풍요로운 설탕섬들, 즉 과달루페와 마르티니크, 도미니카를 정복했습니다. 에스파냐령 쿠바를 손에 넣었고, 필리핀 마닐라를 공격해 에스파냐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뒀습니다. 포르투갈 근해와 프랑스 서부 연안에서 벌어진 해전에서도 모두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윌리엄 피트

7년 전쟁에 임하는 영국의 핵심 전략은 명확했습니다. “프로이센을 지원해 프랑스와 동맹국들을 유럽 대륙에 묶어 놓는다. 그사이 영국은 전 세계 식민지에서 승리를 쟁취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관건은 이런 전략을 뒷받침할 우세한 해군력을 확보할 수 있느냐였습니다. 해군이 강해야 상대방 병력 이동을 바다에서 차단해 적을 분산·약화시키고, 아군 전력을 집중해 완승을 이끌어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운이 좋았던 걸까요. 이런 절체절명의 시기에 영국에는 전략을 짜고 실행에 옮기며 나라를 이끌 지도자가 있었습니다. 바로 채텀 백작인 윌리엄 피트였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처칠이 그랬던 것처럼, 그는 영국을 이끌었고 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그리고 제국의 틀을 만들어냈습니다.

 

윌리엄 피트, 1대 채텀백

 

우선, 1755년 12월 하원에 출석한 그의 말을 들어보시지요. “우리는 전쟁을 선포하기 전에 가능한 한 충분히 그리고 제대로 인원이 배치된 해군을 양성해야 합니다.”

 

피트는 의회에서 5만5000명의 해군 육성 약속을 받아냈습니다. 영국 해군의 선박 보유량은 7년 전쟁 시작 초기 25만톤이었는데 종전 무렵 34만톤으로 늘었습니다. 프랑스는 최대 보유량이 14만7000톤에 불과했습니다. 영국 해군의 절반 수준이었던 것이죠. 최신예 전투함인 전열함은 프랑스가 70척, 영국은 105척을 보유했습니다.

 

피트를 향한 영국인들의 찬사는 대단합니다. 몽고메리 장군은 “그는 정치가이자 탁월한 전쟁 지도자로서 영국 역사상 암흑기에 집권했고, 처칠과 마찬가지로 뛰어난 웅변으로 영국인들을 이끌어 단결시켰다”고 평가했습니다.

 

피트는 ‘위대한 하원의원’으로 불렸습니다. 7년 전쟁 당시 그는 총리가 아니었습니다. 심지어 당시 국왕과도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직책은 지금으로 따지면 여당 원내 대표와 내무장관을 맡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의회와 내각, 영국을 이끄는 실질적 리더였습니다. 그는 전쟁 직전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내가 이 나라를 구할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그일을 ….”

 

피트의 막강한 영향력은 탁월한 연설 능력과 국민들의 직접적인 지지에서 나왔습니다. 역사학자 바질 윌리암스는 “영국 역사에서 처음으로, 왕의 지명이나 의회의 선택이 아닌, 국민들의 목소리에 의해 최고 권력에 오른 사람은 피트가 처음이었다”고 했습니다. 영국의 어떤 정치인도 피트만큼 단시간에 국민들의 신뢰와 존경을 한꺼번에 받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런던은 사상 처음 ‘명예 런던시 자유상’을 그에게 수여했습니다. 이런 상을 주는 도시들이 줄을 이었습니다. 체스터, 우스터, 노리치, 베드포드, 솔즈베리, 스털링, 야머스, 튜크스베리, 뉴캐슬….

 

그는 청렴으로도 국민의 마음을 얻었습니다. 이튼칼리지와 옥스퍼드에서 공부한 그는 만 27세 때 하원에 입성했고,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이 진행 중이던 1746년 재무성 육군 담당 회계 총괄 책임자를 역임했습니다. 당시 이 직책을 맡는 사람은 운용 자금의 이자를 챙기고, 외국으로 가는 보조금의 0.5%를 받았습니다. 아무도 비난하지 않는 관행이었습니다. 하지만 피트는 단 한 푼도 이런 이득을 취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당연히 동료 의원들과 내각, 국민들 사이에 칭찬이 자자했지요.

 

피트는 상황을 정확히 꿰뚫어봤고, 미래를 위한 전략에 탁월했습니다. 당시 영국엔 2차 세계대전 때 독일 히틀러와 협상하고 양보했던 챔벌레인 총리같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뉴캐슬 공작인 토머스 펠햄 홀스 총리였습니다. 그는 유럽 대륙에 있는 영국 동맹국들에 자금을 지원하는 조약을 추진했습니다. 그러면 그 동맹국들이 나서서 프랑스가 영국을 침략하겠다는 생각을 포기하도록 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일종의 주화론(主和論)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피트는 프랑스와 전쟁에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1756년 초 피트는 홀스 총리가 미노르카 섬에 대한 방비를 소홀히 하고 있고, 이는 곧 프랑스의 침공을 부를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실제로 그해 6월 미노르카는 프랑스군 기습을 받아 함락되었습니다. 이 일로 홀스 총리를 자리에서 물러났고, 피트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는 더욱 확고해졌습니다.

 

이제 정권을 좌우하게 된 피트는 1758년부터 자신의 전략을 본격 가동하기 시작했고, 초기에 곳곳에서 프랑스군에 밀리던 영국군은 전세를 뒤집기 시작했습니다.

 

피트는 1761년 관직에서 물러났습니다. 이미 7년 전쟁의 판세를 영국의 승리로 만들어 놓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는 전쟁이 끝난 후, 즉 1766년 총리에 올라 2년간 재직했습니다. 당시 영국 의회는 북미 식민지에 대해 과도한 세금을 부과하려했는데, 피트틑 이에 반대했고 결국 자리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조선일보 장일현 기자

 

01.14 유럽보다 100년 앞선 대항해, 왜 어느 날 중단됐나

명나라 정화 함대 미스터리

정화(鄭和)가 지휘하는 명나라 함대가 1405~1433년 기간 중 여러 차례 남중국해와 인도양을 휩쓸고 다녔다. 한 차례 항해에 보통 2만 명 이상이 동원되었다니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1402년 영락제(永樂帝, 재위 1402~1424) 군대의 남경 함락 때 건문제(建文帝, 재위 1398~1402)가 해외로 피신했고 그를 포획하기 위해 이 함대가 출동했다는 터무니없는 이야기가 오랫동안 떠돈 것은 이 거대한 사업의 목적을 이해하기 힘들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원양 함대 안에 채마밭도 만들어

기록에 남아있는 선박의 크기부터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다. 주력선인 보선(寶船)은 길이가 120m에 달하는 것으로 전해지는데, 그 크기의 목조 선박이 공학적으로 가능한 것인지 의문이 제기되었다. (1805년 트라팔가해전에서 넬슨 제독의 기함이던 빅토리호가 서양에서 건조된 가장 큰 목조 선박의 하나로 아직까지 보존되어 있는데 약 70m 길이다) 2005년 이래 남경 부근 조선소 유적의 발굴을 통해 보선의 크기가 사실로 확인되었다.

▲2005년 정화 함대원정 600주년을 기념해 중국서 제작한 선박 모형. [중앙포토]

 

유럽인의 대항해시대는 정화 함대보다 근 100년 후에 시작되었다. 유럽 연해에 묶여 있던 유럽인의 항해활동이 15세기 중엽부터 아프리카 서해안을 따라 조금씩 확장되다가 콜럼버스의 대서양 횡단(1492)과 바스쿠 다 가마의 인도양 진입(1498)에 이른 것이다.

 

콜럼버스와 다 가마의 함대를 정화 함대와 비교한다면 코끼리 앞의 강아지랄까? 그들의 기함보다 더 큰 배가 정화 함대에는 수십 척이었다. 몇 척의 보선은 말할 것도 없고, 군대를 싣는 병선(兵船), 장비와 식량을 싣는 양선(糧船), 말을 싣는 마선(馬船) 한 척 한 척이 모두 후세 유럽인의 원양 함선보다 훨씬 더 컸다. 식수를 싣는 수선(水船)도 따로 있었고 큰 배에는 채마밭까지 두었다니, 이는 괴혈병에 대비한 것이었을까?

 

사업 규모에 비해 그에 관한 관변 기록은 매우 적다. 이 사업에 관한 언급을 기피하는 분위기가 오랫동안 명나라 조정에 있었고 당시 자료도 나중에 없앤 것이 많았다고 연구자들은 본다. 그래서 이 사업의 목적과 성격에 관한 억측이 아직까지 어지럽게 떠돌고 있다.

 

바닷길로 돌아간 마르코 폴로

 ▲정화 함대가 중국에 들여온 기린을 묘사한 그림. [중앙포토]

 

영락제의 대함대 건조는 그에 앞선 원나라의 ‘세계제국’ 성격에 비추어 이해해야 할 것이다. 기원전 3세기에 세워진 ‘중화제국’은 외부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 내향적 제국이었다. 서북방 유목민의 군사적 위협에 대응하는 외에는 찾아오는 ‘오랑캐’를 보듬어줄 뿐이지, 그들을 찾아갈 생각은 별로 없었다.

 

몽골제국은 이와 달리 유라시아대륙 태반을 정복하고 ‘세계’를 바라보는 눈을 넓힌 외향적 제국이었다. 쿠빌라이(재위 1260~1294)가 원나라를 세울 때 몽골제국이 4한국으로 분열되었지만 그는 몽골 대칸(大汗)의 형식적인 자리라도 지켰다. 대칸의 권위를 끝까지 받들어준 일-칸국은 원나라와 특별한 관계를 오랫동안 유지했다.

 

▲명나라 영락제

 

페르시아 지역의 일-칸국과 원나라 사이에는 적대적인 차가타이 칸국이 자리 잡고 있어서 육상교통이 어렵게 되었고 해로를 많이 이용하게 되었다. 마르코 폴로도 일-칸국에 시집가는 원나라 공주를 모시는 배를 타고 일-칸국으로 갔다가 유럽으로 돌아갔다.

 

이 시기까지 인도양과 남중국해의 교역활동은 많이 자라나 있었지만 중국과 페르시아 사이의 직항로는 활발하지 못했다. 말라카해협을 경계로 두 해역의 계절풍 양상이 다르기 때문에 상선들은 어느 한 해역에서만 활동하고 두 해역을 모두 통과하는 화물은 경계 지역의 중계무역에 의존했다. 마르코 폴로가 일-칸국까지 가는 데도 2년의 시간이 걸렸고, 그 사이에 일-칸국의 아르군 칸이 죽었기 때문에 그와 결혼하려고 간 코코친 공주는 그 아들 가잔 칸과 결혼해야 했다.

 

▲콜럼버스

 

 세계제국의 꿈을 버리지 못한 쿠빌라이에게는 인도양-남중국해의 제해권이 큰 과제였다. 그러나 1292년 자바 원정에 실패하고 그가 죽은 후 이 과제는 원나라가 명나라에 몰려날 때까지 되살아나지 못했다. 100여 년 후 영락제가 만든 대함대의 파견 지역에 관한 정보는 쿠빌라이에게 물려받은 것이었다. 세계제국의 꿈도 쿠빌라이에게 물려받은 것인지 알 수 없다.

 

‘닫힌 제국’으로 돌아온 명나라

중화제국 초기에는 경제활동 중 농업의 비중이 컸고, 따라서 경제력 통제도 농지 중심으로 행해졌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에 따라 비중이 자라난 상업은 농업에 비해 통제가 힘들었다. 송-원 시대에 크게 늘어난 해외무역은 국가의 통제가 특히 힘든 영역이었다. 영락제의 함대는 해외무역을 조공체제의 틀에 최대한 수용하려는 시도였지만 장기간 계속하기에 너무 큰 비용이 필요하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바스쿠 다 가마

 

 오늘날의 기준으로는 이런 통제력 강화가 ‘국가주의’ 경향으로 비판받기 쉽다. 그러나 이런 국가주의가 역사 속에서는 엄연히 중화제국의 표준 이념이었다. 제국이 ‘천하’에 대해 책임을 가진다는 이 이념으로는 해외무역 역시 천하 안에서 이뤄지는 것이므로 국가가 방기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중국의 전통적 천하관은 하나의 ‘닫힌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다. 그 폐쇄성이 근대화 과정에서 많은 비판(중국 지식인들의 자기반성 포함)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환경학자 바츨라프 스밀이 주간 ‘노에마(Noema)’ 인터뷰(2021년 2월 27일자)에서 한 말을 보며 다시 생각해본다.

 

“일론 머스크(스페이스-엑스 우주개발 사업의 추동자)가 아무리 열을 올려봤자 화성 식민지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 이것이 우리가 가진 유일한 생태계이고 바로 지금 여기서 우리가 잘 관리해야 할 대상입니다. 우리의 생태계는 연약하면서도 다행히 저항력을 가진 것입니다. 생태계에 회복 능력이 있다는 이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회복 능력이 사라지는 어떤 한계가 있다는 것도 또한 사실입니다. 우리가 어느 정도 파괴해도 생태계는 원래 모습을 찾으려 들지만 한도가 있는 일입니다.”

 

근대세계의 번영은 ‘외부’ 자원의 착취를 발판으로 이뤄졌다. 그래서 ‘열린 세계관’을 받든 것이다. 지구화의 진행으로 지구상에 더 이상의 외부가 없게 되자 지구 밖의 외부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닐 암스트롱의 달 착륙(1969) 이후 더 이상 그 길이 열리지 않자 이제 우리의 ‘유일한 생태계’를 다시 바라보게 된 것이다. 막강한 함대를 갖고도 세계정복에 나서지 않은 명나라의 ‘닫힌 세계관’도 다시 평가할 때가 되었다.

 

앞만 보고 달린 근대화, 지금 되돌아보는 이유

중국과 일본은 1860년대에 양무(洋務)운동과 메이지유신으로 근대화의 길을 열었고 조선도 곧 개화(開化)운동으로 뒤를 따랐다. 그로부터 100년은 동아시아 여러 국가와 사회에 근대화의 시대였다. 한국에서는 1970년대까지 ‘조국 근대화’가 국가적 과제였다.

 

21세기에 깊숙이 들어온 이제 ‘근대화’의 의미를 돌아본다. 자원과 환경 등 인류 공동의 문제부터 질서와 삶의 질 등 우리 사회의 문제까지, 오늘의 우리를 불안하고 고통스럽게 만드는 문제는 근대화가 모자란 결과일까, 아니면 지나친 결과일까?

 

 근대화의 시대는 앞만 보며 달린 시대였다. 역사의 고찰도 19세기 후반애 정해진 ‘근대’의 기준에 묶여 있었다. 근대화도 이제 하나의 역사적 현상으로 냉철하게 되짚어볼 때가 되었고 그를 위해서는 시야를 넓힐 필요가 있다. 근대화의 과제가 어떤 상황에서 제기된 것인지도 따져보고, 그 과제를 나란히 맞은 동아시아 여러 사회가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도 비교해가며 살펴보려 한다.

 

정화 함대로 고찰을 시작한다. ‘서세동점’의 물결에 앞서 오히려 ‘동세서점’의 기세를 보인 일이었다. 유럽은 16세기에 대항해시대를 시작했지만 그 해상활동 능력은 15세기 초 명나라 함대의 위용을 18세기까지도 따라오지 못했다. 그런데 어느 날 명나라는 함대 운용을 스스로 중단했다. 명나라는 왜 그 거대한 함대를 만들고, 또 얼마 후 그 함대를 버린 것일까?

중앙일보 김기협 중국 역법과 동서교섭사를 연구해 온 역사학자

 

02-18  6500년 전 황금인간의 ‘플렉스’

세계 고고학계에 한 획을 그은 1970년대 바르나 발굴 현장. 사진 출처 스미스소니언 매거진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

 

《최근 ‘플렉스(Flex)’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 자신의 여력을 끌어모아 마련한 사치품을 다른 사람에게 한껏 과시하는 것을 뜻한다. 요즘 젊은이들 사이의 유행처럼 보이지만 사실 플렉스는 인류의 역사와 함께했다. 황금과 보석으로 화려하게 꾸민 무덤이 대표적인 예로 꼽힌다. 황금으로 온몸을 치장해 플렉스를 실현한 최초의 인류는 놀랍게도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 같은 문명과 멀리 떨어진 불가리아에서 발견됐다. 신석기시대에 문명의 변방에서 살다 간 이 황금인간은 도대체 누구였을까.》

 

포클레인 삽날 끝에 걸린 황금

불가리아라면 대부분 요구르트와 장수 음식, 그리고 TV 속 아름다운 자연 정도를 떠올릴 것 같다. 실제 러시아와 비슷한 슬라브계와 튀르크계가 연합해 만든 흑해 연안의 이 나라는 세계 4대 문명에 들지 않을뿐더러 스톤헨지 같은 유명한 유적도 없다.

 

휴양 도시인 바르나주의 주도 바르나는 불가리아에서도 특히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이 도시는 1949년에 소련 독재자 스탈린의 70회 생일을 맞아 ‘스탈린’으로 도시 이름이 바뀐 아픈 현대사도 품고 있다. 그리고 50년 전에는 세계 최초의 황금인간이 이곳에서 발견되면서 유명해졌다.

 1972년 바르나 호수 근처에서 작업을 하던 중장비 기사 라이초 씨는 포클레인 삽날 끝에 무언가가 걸린 것을 느끼곤 즉시 기계를 멈췄다. 포클레인에서 내려 흙 속을 살피던 그는 햇빛에 반짝이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황금이었다. 노련한 기사의 감각 덕분에 세계적인 보물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성기에도 황금 덮개 씌워

 포클레인 기사가 우연히 발견한 6500년 전 불가리아 바르나 공동묘지에선 무덤 300기와 황금 유물이 발굴됐다. 특히 43호 무덤에선 온몸을 황금으로 치장한 일명 ‘황금인간’이 발견되면서 바르나 문명이 재조명됐다. 그는 당시 부족 지도자로 추정된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그가 땅을 파던 곳은 약 7000년 전부터 수천 년간 고대인들이 무덤으로 사용하던 공동묘지였다. 지금까지 300여 기의 무덤이 발굴됐고 5.5kg에 달하는 황금 유물 2000여 점이 발견됐다. 유명한 이집트 투탕카멘왕의 무덤에서는 100kg에 달하는 황금이 나왔으니 이쯤이야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할는지 모른다. 하지만 놀라운 부분은 바로 연대다. 온몸을 황금 장신구 등으로 두른 바르나의 일명 ‘황금인간’은 투탕카멘보다 무려 3000년이나 앞선 약 6500년 전의 것으로 밝혀진 것이다.

 

이 믿기 어려운 사실을 두고 고고학자들은 수십 년간 온갖 과학적 방법을 동원해 검증을 거듭했다. 하지만 결과는 한결같았다. 우리나라 강동구 암사동에서 빗살무늬 토기를 사용하던 6500년 전 불가리아에서는 이미 황금문화를 꽃피운 것이다.

바르나의 무덤 가운데 43호 무덤의 주인공은 샤먼 또는 족장으로 추정된다. 온몸을 금으로 두른 그의 무덤에서만 모두 1000여 점의 황금이 나왔다. 흥미롭게도 그는 성기도 마치 콘돔 같은 황금 덮개로 덮여 있었다. 조상을 뜻하는 한자 조(祖)도 남성의 성기 모양에서 기원한 점을 고려하면 성기는 동서를 막론하고 대를 잇는 상징적인 힘을 뜻했던 것으로 보인다.

무덤 주인공이 생전 선택받은 삶을 살아왔음은 그 골격에서도 잘 드러난다. 당시 평균 연령은 28세 내외였고 평균 키는 남성 160cm, 여성 148cm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 황금인간은 키가 180cm가 넘고 나이도 50대에 가까웠다. 그리고 손에는 권력을 상징하는 황금으로 도금한 지휘봉을 들고 있었다. 이 황금인간 외에도 1kg에 가까운 황금을 넣은 무덤 3기가 더 발견됐다. 심지어 빈 무덤에 황금이 가득 찬 경우도 있었으니 황금은 당시 바르나의 지배계급들이 널리 사랑했던 아이템으로 보인다.

 

해상교역으로 쌓은 부

 그렇다면 또 다른 의문이 든다. 과연 석기시대 도구를 사용하던 바르나 사람들은 도대체 어디서 황금 만드는 기술을 배웠던 걸까. 그리고 그 엄청난 비용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바르나의 황금은 지금 시각으로 봐도 순도가 아주 높다. 이런 황금을 추출하기 위해서는 높은 온도를 내는 화덕이 필수적이다. 그리고 신석기시대부터 사람들은 빵을 굽고 토기를 굽는 화덕을 사용하고 있었다. 즉, 높은 온도를 내는 기술은 빙하기 이후 마을을 일구고 살던 신석기시대 마을 대부분이 갖고 있었다. 금속이나 유리를 만드는 기술도 높은 온도를 내는 화덕에서 출발한 것이다.

하지만 다른 신석기시대에서 황금이나 청동을 많이 만들지 못한 이유는 비용 때문이다. 광석을 채굴하고 높은 온도의 화덕에 필요한 연료 등에는 엄청난 비용이 든다. 그러니 고대 신석기시대인들이 황금이나 청동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고 한들 쉽게 만들어내긴 어려웠던 것이다.

 

 바르나 유적지에서 나온 황금 그릇, 장신구, 도끼 등. 사진 출처 Armburster·Dmitrinov

 

하지만 바르나인들은 바다를 통한 교역으로 부를 쌓았다. 바다 교역로를 장악한 덕분에 경제적으로 풍족해진 바르나 사람들은 많은 돈과 인력을 들여 고가의 황금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바르나 사람들은 석기를 사용하는 중에도 장신구는 황금으로 만들어 치장했다. 하지만 바르나인들의 이런 플렉스는 오래가지 못했다. 기후가 바뀌고 사람들이 흩어지면서 바르나인들의 영화도 순식간에 끝났다. 그들은 교역로가 끊어지면서 다시 이전의 시대로 돌아갔고, 그들의 존재는 기억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남는 것은 해골과 황금뿐 

 바르나 묘지에서 발굴된 인간 머리 점토 유물. 실제 크기와 비슷하게 제작됐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바르나뿐 아니라 세계 곳곳의 많은 귀족과 왕들은 무덤 속으로 자신의 부귀영화를 가져가려 했다. 사실 고대 여러 지역에서 무덤에 수많은 황금을 넣었다. 그들의 플렉스 종착역은 바로 무덤인 셈이었다. 귀한 황금을 쓸데없이 땅속에 넣느냐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시대별로 조금씩 달라도 과거 사람들은 30, 40대를 넘기지 못하고 사망했다. 지금같이 수십 년간 노년 생활을 할 필요가 없었던 그들은 우리가 연금을 넣듯 자신의 무덤에 황금을 쌓아놓고 죽은 뒤 저세상에서 플렉스하면서 살려고 했다.

아마존의 제프 베이조스나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 같은 슈퍼리치들이 불로장생을 꿈꾸며 천문학적 돈을 투자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영원히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고 싶은 인간의 욕망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

하지만 남는 것은 해골뿐이다. 영원한 것은 황금이지 인간이 아니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하여 황금을 쌓아 놓은들 결국 우리는 한 줌의 재가 될 것이다. 운이 좋아 봐야 바르나의 황금인간처럼 우리가 걸친 황금이 미래 박물관의 전시품이 될 뿐이다. 우리에게 약속된 행복은 내 손에 걸친 황금이 아니라는 것이야말로 6500년 전 최초의 황금인간이 우리에게 주는 가르침이 아닐까.
동아일보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

 

03.01  “같은 뿌리” “민족·종교·언어 달라”… 러·우크라 악연의 역사

800년전 갈라져나왔지만… 우크라 ‘300년 러 영향권’ 아픈 역사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지난 21일 대국민 연설에서 “우크라이나는 항상 러시아의 일부였다”고 했다. 1100년 전 ‘키예프루스’라는 뿌리가 같아서 자국의 일부였다는 것일까.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는 “소비에트 연방적 사관에서 나온 표현”이라고 했다. 우크라이나인들은 같은 키예프루스에서 나왔지만 러시아와는 구성 민족도 달랐고, 우크라이나는 독자적 종교도 가지고 있는 독립된 민족이라고 주장한다. 올레나 쉐겔 한국외대 교수(우크라이나어과)는 “푸틴의 주장은 한국이 중국 일부라고 하는 것처럼 터무니없다”며 “지금 우크라이나인들은 법치와 민주주의를 위해 러시아와 싸우고 있다”고 했다.

 

 우크라이나 독립 영웅 보흐단 흐멜니츠키가 폴란드군을 물리치고 1649년 키예프로 입성하는 모습을 표현한 그림. 흐멜니츠키는 17세기 우크라이나 민족의 독립국가를 수립하기 직전까지 갔다. 그러나 외교적 오판으로 러시아가‘우크라이나는 우리 땅’이라고 주장하는 빌미를 주고 말았다. /위키피디아

◇하나의 뿌리 ‘키예프루스’

우크라이나·러시아·벨라루스는 9세기경 지금 우크라이나 지역에 출현한 첫 국가 ‘키예프루스’를 모체로 삼는다. 지금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우크라이나어로는 키이우)가 수도라 우크라이나는 자신들이 종가(宗家)라고 여긴다. 쉐겔 교수는 “범슬라브민족 국가였지만 지금 우크라이나를 구성한 부족과 러시아를 구성한 부족이 달랐고, 당시부터 키릴 문자를 읽는 방식이 달랐다. 스페인어와 포르투갈어가 다른 것처럼 러시아어와 우크라이나어도 다르다”고 했다. 한·중·일이 한자 문화권이지만 고유의 민족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러시아와는 차별된다는 것이다.

 

키예프루스가 국교로 삼았던 정교회를 믿는 우크라이나인이 많지만, 고유 종교도 있다. 정교와 가톨릭을 접목한 ‘통합교회’(우니아트)다. 소련 지배 시절 탄압받던 통합교회인들이 여전히 우크라이나에 400만명가량 된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가 ‘일부’라고 주장하지만 민족·언어·종교에서 독자성이 있다는 것이다.

 

◇흐멜니츠키 봉기와 페레야슬라프 협정

키예프루스가 몽골 침략으로 멸망한 뒤 우크라이나 지역은 폴란드 지배를 받는다. 이 시기 군사 자치체인 ‘코사크’가 등장하면서 독립 우크라이나의 모체가 나타난다. 지금도 우크라이나에서 독립 영웅으로 꼽히는 보흐단 흐멜니츠키(1596~1657)는 그 주역이다.

 

 

17세기 중반 우크라이나 코사크 부대는 폴란드에 맞서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당시 코사크 지도자였던 흐멜니츠키는 한때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 턱밑까지 진군하며 승리한다. 광범위한 자치권을 보장받고 그는 개선장군이 돼 1649년 키예프로 귀환한다. 사실상 우크라이나 민족 국가를 수립한 것이다. 구자정 대전대 교수는 이 시기를 “러시아와 민족적 차별성을 주장하게 되는 우크라이나 정체성의 첫 출발”이라고 논문에서 평했다.

 

그러나 이는 짧았다. 약속과 달리 폴란드는 역공에 나섰다. 흐멜니츠키는 모스크바 공국(지금의 러시아)에 도움을 요청했다. 당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인이 맺은 ‘페레야슬라프 협정’(1654년)은 두고두고 문제가 된다.

원본이 분실됐기 때문이다. 소련과 러시아는 군사 원조의 대가로 ‘코사크와 우크라이나인은 차르(러시아어로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할 것’이라는 내용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 시기 우크라이나가 복속했다는 얘기다. 우크라이나 학계에서는 이를 부정한다. 단기적 군사 동맹이었을 뿐이라는 것이며, 원문도 남아있지 않은 협정 내용을 러시아가 ‘당시 통일됐다’며 날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러시아 주장이 힘을 얻은 결과 ‘유럽 최후의 대국, 우크라이나의 역사’(글항아리)를 쓴 구로카와 유지는 이 조약을 이렇게 평가했다. “사후적 맥락에서 이 조약이 우크라이나사의 전환점이 돼 러시아에 병합되는 과정의 첫걸음이 됐다.” 러시아는 이 협정 이후 차르의 칭호를 ‘전(全) 러시아의 차르’에서 ‘모든 대러시아(러시아) 및 소러시아(우크라이나)의 차르’로 바꾼다.

 

그러나 러시아는 협정 2년 만에 폴란드와 평화 협정을 맺고 우크라이나를 분점했다. 흐멜니츠키는 차르에게 협정 위반을 비난했지만 아무 효과도 없었다. 수도 키예프를 따라서 흐르는 드네프르강을 기준으로 좌안은 폴란드가, 우안은 러시아가 지배하게 됐다. 이후 독립선언을 이어갔지만 실질적인 독립은 1991년 소련 해체 이후 가능했다. 1930년대 스탈린의 집단농장 정책 실패가 유발한 대기근의 와중에 무수한 목숨이 사라졌다.

300만명으로 추산하지만 우크라이나인들은 최대 1000만명이 숨졌다고 본다. 소련의 수탈로 대기근이 벌어졌다고 생각한 서부 지역의 반(反)러시아 정서는 강화됐다.

 

쉐겔 교수는 “우리는 유럽식 국가를 세우고 싶기 때문”이라며 “러시아가 상징하는 부패·전체주의와 결별하고 싶다”고 했다. “목숨 걸고 싸우는 것은 이번에 무너지면 다시 일어설 기회가 없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민들이 끝까지 버티는 것이다.”

 

☞페레야슬라프 협정

우크라이나 민족 지도자 흐멜니츠키가 1654년 페레야슬라프에서 폴란드와 싸우기 위해 러시아(모스크바 공국)와 동맹을 맺은 조약. 원본은 전해지지 않는다. 우크라이나는 단기적 군사 동맹에 대한 내용이 담겼다고 주장한다. 러시아는 이 조약에 ‘우크라이나인은 차르에게 충성을 맹세한다’는 내용이 있다며 이를 빌미로 우크라이나사를 자국사에 편입시키고자 한다.

조선일보  양지호 기자

 

03.11  ‘더 빨리, 더 멀리’ 유럽의 세계정복 가속

기선(汽船)이 바꾼 세계사

19 세기 영국 엔지니어 브루넬의 최고 야심작으로 꼽히는 그레이트브리튼 호. 철제 선각에 스크루 추진을 갖췄다. 영국 브리스톨 항구에 복원돼 수상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사진 위키피디아]

 

 세계일주에 처음으로 성공한 사람이 누구인가. 누구나 마젤란(1480~1521)을 먼저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그 자신은 도중에 죽었고, 1519년 9월에 함께 떠난 약 270명 대원 중 19명이(31명이라는 설도 있다) 1522년 9월에 포르투갈로 돌아온 사실이 잘 알려져 있다.

 

그러면 3년 만에 돌아온 이 19명을 최초의 세계일주 여행자로 볼 것인가. 마젤란의 명예를 살리려는 주장이 있다. 그가 전에 몇 해 동안(1505~1512) 인도양 해역에서 활동하면서 말라카까지 간 일이 있으므로 그곳을 출발점으로 세계일주를 이룩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10년 전의 다른 볼일을 세계일주의 일부로 본다는 것이 좀 억지스럽기도 하고, 그가 죽은 필리핀에서 말라카까지 거리도 작지 않다.

증기기관 선박 19세기 초에 첫선
1838년엔 대서양 횡단 정기노선

‘범선의 시대’ 끝마친 서구의 약진
“시장 열어라” 동아시아 거센 압박

소설 『80일간의 세계일주』도 나와
16세기 마젤란 땐 3년 걸린 항해

 

첫 세계일주는 ‘말라카의 엔리케’?

 길이 211m의 그레이트이스턴호. 1890년 해체 전까지 몇 해 동안 백화점 광고판으로 쓰였다. [사진 위키피디아]

 

 또 하나 엉뚱해 보이는 주장이 있다. 마젤란이 1512년 말라카를 떠날 때 데리고 간 엔리케라는 이름의 노예는 항해 후 해방시켜 준다던 마젤란의 약속이 그가 죽은 후 지켜지지 않을 것이 확실해지자 달아났다. 말라카가 그 지역 교역 중심지이던 당시 상황으로 보아 필리핀에서 도망한 엔리케가 고향을 찾아갔을 가능성이 크다. 그의 1521년 이후 행적이 말라카에서 확인된다면 ‘말라카의 엔리케’가 최초의 세계일주 여행자로 인정받을 수도 있겠다.

 마젤란

 

 쥘 베른의 『80일간의 세계일주』가 나온 것은 마젤란 사후 350년이 지난 1872년이다. 대단한 모험가가 아니라도 돈만 넉넉히 쓰면 세계일주 여행이 가능하게 됐을 때다. 미국과 인도의 횡단철도가 완공되고(1870, 1869) 수에즈운하가 개통된(1869) 시점이다.

 

 소설 『80일간의 세계일주』 경로. 유럽과 인도, 북아메리카의 횡단 구간 외에는 모두 기선이 이용됐다. [사진 위키피디아]

 

 마젤란 함대의 3년에서 포그씨(『80일간의 세계일주』 주인공)의 80일까지 세계일주 기간이 14분의 1로 줄어든 것인데, 감축의 대부분은 마지막 50년 사이에 이뤄진 것이다. 베른이 태어난 1828년 무렵에 세계일주를 상상하는 소설이 나왔다면 『18개월간의 세계일주』란 제목이었을 것이다. 포그씨의 가장 중요한 교통수단은 기선이었는데, 기선의 대서양 횡단 정기노선은 1838년에 시작됐다.

 

증기기관은 18세기 초에 발명됐지만 선박 동력으로 활용되는 단계에 이른 것은 19세기 초의 일이다. 기선의 출현은 항해 활동에 혁명적 변화를 가져왔다. 종래의 범선은 바람이 정해주는 항로와 일정을 따라야 했다. 해역과 계절에 따른 풍향 변화는 대항해시대를 뒷받침한 지리정보의 가장 중요한 내용이었다. 예를 들어 1498년 인도양에 진입한 다가마는 10년 전 디아스가 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대륙 남단에 이른 것과 다른 항로를 취했다. 서아프리카(지금의 시에라리온)에서 서남쪽으로 대서양 깊숙이 들어갔다가 큰 호(弧)를 그리고 남아프리카로 돌아간 것이다. 디아스가 발견한 편서풍을 이용함으로써 항해 기간을 크게 줄일 수 있었고, 이후 대서양에서 인도양으로 넘어가는 표준 항로가 됐다.

 

마젤란의 기함 빅토리아 호 모습. 오르텔리우스의 1570년 지도에서. [사진 위키피디아]

 

다가마 함대는 서아프리카에서 남아프리카 사이에 90일간 난바다에 떠 있었다. 보통사람은 한 달 이상 비타민C 공급이 끊기면 괴혈병의 위협을 받기 시작한다. 신 과일이 괴혈병을 막아준다는 사실은 일찍부터 막연하게라도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나름대로 대비를 했지만, 항해가 예정보다 너무 늦춰지면 유령선이 돼버릴 위험이 있었다. 16~18세기 범선시대를 통해 약 200만 명의 선원이 괴혈병에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아무리 항로를 잘 골라도 장거리 항해 중에는 계절풍을 기다리기 위해 몇 달씩 머물러야 하는 곳들이 있었다. 돛의 방향을 조정해서 역풍을 뚫고 진행하는 기술이 있었지만 속도가 느리기 때문에 장거리 항해에는 쓸모가 없었다. 강력한 증기기관의 발전이 비로소 항해 활동을 바람의 지배로부터 해방시켜주었다.

 

환상적인 부의 원천 ‘인도’

 브루넬의 마지막 작품 로열 앨버트 브리지. 1859년 세워 졌다. [사진 위키피디아]

 

대항해시대의 선두주자는 항해왕 엔히크(1394~1460)가 이끈 포르투갈이었다. 포르투갈은 1434년부터 사하라사막 너머 아프리카 서해안을 남하하기 시작했다. 또 하나 해상강국인 스페인을 대표한 항해가 콜럼버스와 마젤란이 모두 포르투갈에서 오래 활동하다가 넘어온 사람이었다는 사실부터 두 나라의 선후 관계를 보여준다.

 항해왕 엔히크

 

15세기 유럽인은 ‘인도’를 환상적인 부(富)의 원천으로 생각했다. 유럽을 둘러싼 이슬람세계 저 너머 향료를 비롯한 값진 물자가 나오는 곳이었다. 그 물자를 가지러 가는 길이 무슬림들에게 막혀 있었고 무슬림의 중계무역도 베네치아 등 이탈리아 도시들이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포르투갈과 스페인 모험가들은 인도로 향하는 다른 항로를 찾아 나섰다.

 

포르투갈 함대들은 아프리카 남쪽 끝에서 대서양과 인도양이 이어져 있다는 이슬람 세계에서 얻은 정보를 토대로 끈질기게 남쪽을 향했다. 한편 후발주자 스페인이 아직 불확실하던 ‘지구가 둥글다’는 믿음에 희망을 걸고 서쪽으로 향한 것은 투기성이 강한 모험이었다. 양쪽 다 목표는 인도였다. 카리브해 섬들이 인도가 아니라는 사실이 확인되고도 ‘서인도’로 불린 것은 ‘서쪽에서 찾은 부의 원천’이라는 뜻이었다.

 

두 나라는 토르데시야스조약(1494)으로 유럽 밖의 세계를 나눠 갖기로 했다. 대서양상의 한 경도를 기준으로 동쪽은 포르투갈, 서쪽은 스페인이 갖기로 한 것이다. 아프리카와 아시아는 포르투갈, 아메리카는 스페인의 몫으로 한 것인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이 경도에 남아메리카 일부가 걸렸기 때문에 포르투갈은 브라질까지 갖게 됐다. 그리고 이 경도의 반대편 경도에 걸린다고 해서 스페인은 필리핀을 갖게 됐다.

 

아메리카에는 유럽세력에 대항할 문명이 없어서 바로 스페인의 식민지가 된 반면 포르투갈은 아시아에서 여러 문명세력이 뒤얽힌 가운데 끼어들어 복잡한 관계를 펼쳐가기 시작했다. 17세기 들어서는 네덜란드와 영국 등 다른 유럽세력들이 포르투갈을 따라 아시아에 진출했지만 18세기 중엽까지는 해상세력으로 존재했을 뿐이다. 18세기 후반에야 영국동인도회사가 인도에서 본격적 식민지 경영을 시작했다.

 

시대를 너무 앞서가도 문제

 이점바드 브루넬

 

1838년에 대서양 횡단 정기노선을 연 배 그레이트웨스턴호의 설계자는 이점바드 브루넬(1806~1859)이다. 2001년 BBC가 여론조사로 선정한 ‘위대한 영국인 100인’ 중 윈스턴 처칠에 이어 2위를 차지할 때까지 들어본 적이 없던 이름이었다. 알고 보니 이 엔지니어는 영국 산업혁명의 한 주역으로, ‘영국의 풍경을 가장 크게 바꾼 인물’로 꼽히는 사람이다.

 

브루넬이 설계한 많은 건물과 교량이 아직도 남아 있어서 시대를 앞서간 그의 풍모를 보여준다. 그런데 이 천재 엔지니어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대상은 기선이었다. 대서양을 건너려면 짐보다 석탄을 더 많이 실어야 했던 그 시절에 그는 배가 클수록 경제성이 좋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배의 진행에 대한 물의 저항은 배 길이의 제곱에 비례하는데 용량은 세제곱에 비례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레이트웨스턴호(1838, 길이 71.6m)와 그레이트브리튼호(1845, 98m) 모두 건조 당시 최대의 기선이었고, 특히 그레이트이스턴호(1859, 211m)는 최대 선박의 자리를 해체 때까지 지켰다.

 

시대를 앞서가는 것이 좋은 일일 때가 많지만, 너무 앞서가는 데는 문제가 있다. 1869년 개통된 수에즈운하를 너무 커서 통과할 수 없는 배가 그레이트이스턴호 하나였다. 수로와 항만도 그 크기 배에 맞춰져 있지 않은 곳이 많아서 충돌과 좌초 등 사고가 이어졌다. 1890년 해체에 이르기까지 기선 노릇 제대로 한 기간이 얼마 되지 않았다.

 

브루넬의 배들처럼 첨단을 달리지 않더라도 기선의 성능은 계속 향상됐다. 큰 기선들이 1820년대부터 범선보다 몇 배 빠른 속도로 대양을 누비기 시작했다. 1793년 영국 사절 매카트니의 통상 확대와 외교관계 수립 요구가 청나라에 거절당할 때는 달리 어쩔 길이 없었다. 그러나 40여 년 후 아편전쟁(1839~1842) 때는 해상을 석권하고 인도에서 병력을 실어올 기선들이 갖춰져 있었다. 동아시아 국가들에 개항 압력이 쏟아지기 시작한 조건이었다.

중앙일보  김기협 역사학자

 

■ 인류 역사상 최고 부자는

인류 역사상 최고의 부자는 누구일까. 미국 시사주간 타임이 역사학자, 경제학자 등의 의견과 물가상승률 및 시대별 경제체제 차이, 국부(國富)를 좌우할 수 있는 개인의 힘 등을 고려해 최고 부자 10명을 뽑았다.

 

1위에는 13~14세기 아프리카 말리 왕국의 전성기를 이끈 통치자 '만사 무사'가 꼽혔다. 당시 말리는 세계 금의 절반 이상을 생산했으며, '만사 무사'가 대부분을 직접 관리했다. 이슬람 신자였던 그는 1324년 부인 800, 노예 12000, 낙타 100마리를 이끌고 메카 성지 순례를 떠났다. 오가는 길에 가난한 사람들에게 황금 수십t을 뿌렸고, 그 바람에 그가 지나간 도시들의 금값이 10년간 폭락했다.

 

2015-09-05 현재

 

2위인 로마 제국의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부는 현재 가치로 46000억달러( 5461조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로마는 세계 생산의 25~30%, 아우구스투스 개인의 부는 국가 경제의 20%를 차지했다. 11세기 중국 송나라의 신종과 16세기 인도 무굴제국의 악바르 대제가 각각 3, 4위를 차지했다. 현대 인물 중에는 구 소련의 통치자 이오시프 스탈린(5), 미국의 강철왕 앤드루 카네기(6)와 석유왕 존 록펠러(7), 마이크로소프트(MS)의 창립자 빌 게이츠(9)가 꼽혔다. 스탈린의 경우 독재자였던 그가 세계 생산의 약 10%(현재 가치 약 75000억달러)를 차지하던 강대국 소련을 마음대로 좌우한 점이 고려됐다.

양모듬 국제부 기자

 

03.12  아인슈타인도 쇼팽도 잡스도… 난민이었다

 우리가 몰랐던 난민 출신들, 아무도 몰랐던 그들의 잠재력

 천재 물리학자 아인슈타인, '피아노의 시인' 쇼팽, 프랑스의 대문호 빅토르 위고, 전설적 종군사진가인 로버트 카파. 이들의 공통점은 난민(難民) 출신이라는 점이다. 중동과 아프리카 등 고향을 등진 난민들이 대거 목숨 걸고 살 길 찾아 유럽으로 몰려드는 상황에서 '난민 출신 위인들'이 주목받고 있다. 유엔난민기구는 '난민들의 잠재력'이라는 문구와 함께 난민 출신 세계적 저명인사 136명을 홈페이지에 소개했다.

독일이 자랑하던 당대 최고의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은 히틀러의 집권으로 난민 신세로 전락했다. '유대인의 자식'이라는 이유에서다. 히틀러는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던 아인슈타인의 업적을 무시하고, 연구를 금지했다. 핍박이 심해지자 아인슈타인은 프린스턴대 교수직을 얻어 미국으로 망명했다.

 

전 세계 전장(戰場)을 누볐던 종군 사진가 로버트 카파도 역시 나치 정권을 피해 고향을 등진 난민이었다. 헝가리에서 태어난 카파는 현지의 유대인 추방 정책이 본격화하자 열일곱 살에 독일 베를린으로 피란 갔고, 히틀러의 유대인 박해에 쫓겨 프랑스 파리로 갔다. 그곳에서 스페인 내란을 취재하게 되면서 종군기자로서의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작곡가 프레데리크 쇼팽 역시 타국에서 평생 조국 폴란드 독립을 바라던 난민이었다. 당시 폴란드는 러시아에 지배받고 있었고 쇼팽은 음악을 통해 조국의 위대함을 알린다는 사명을 갖고 오스트리아 빈으로 건너갔다. 하지만 폴란드의 청년들이 조국의 주권을 찾기 위해 러시아를 상대로 기도한 '바르샤바 혁명'이 실패하자, 정치적 위협을 받고 프랑스로 망명해 죽을 때까지 돌아오지 못했다.

프랑스 작가 빅토르 위고는 '노트르담 드 파리' 등으로 명성을 쌓은 이후인 1851년 나폴레옹 정권에 반대하다 국외로 추방됐다. 대로를 뛰어다니며 시위를 벌이는 등 사회활동에 적극적이었던 위고는 정부의 탄압을 피해 벨기에로 갔다. 하지만 정부에 비판적인 글을 발표하다가 벨기에서도 추방돼 영국의 섬 등을 전전하며 난민생활을 했다. 그가 망명 기간 중 써 낸 작품이 바로 '레미제라블'이다. 난민 생활의 산물인 셈이다.

우리에게 최근 가장 잘 알려진 난민 출신 유명인사는 애플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2011년 사망)이다. 그의 친부(親父)인 압둘파타 존 잔달리는 시리아 출신 미국 이민자다. 잔달리가 조국의 폭정(暴政)을 피해 난민이 되지 않았다면 '애플'도 존재하지 않았을 수 있다는 얘기다
.

 

03.16  마지막 ‘군사 천재’로 불린 사나이의 쓸쓸한 퇴장… “소설 같은 나의 생애여!”

1815년 3월 7일 이제르강과 드라크강이 합류하는 알프스 기슭의 프랑스 남동부 도시 그르노블에 돌연 긴장감이 감돌았습니다. 남쪽에서 한 무리의 무장 세력이 도시를 향해 거침없이 행군해 오고 있었고, 이를 막으려는 듯 프랑스 제5연대가 외곽에 전투대형을 갖췄습니다.

한 남자가 말에서 내리더니 제5연대 병사들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습니다. 모든 사람들 눈길이 이 남자에게 쏠렸습니다. 그는 이제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누구라도 지금 방아쇠를 당긴다면 그를 쓰러뜨릴 수 있는 거리입니다. 남자가 입을 열었습니다.

 

“내가 바로 여기에 있다. 너희의 황제를 죽여라. 너희가 원한다면.”

그 순간 울려퍼진 것은 총소리가 아닌 병사들의 환호성이었습니다. “황제 만세!” “황제 만세!” 병사들은 달려가 그의 옷을 만지고 그의 손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 100일 천하

나폴레옹,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패한 뒤 프랑스 황제에서 물러나 지중해 엘바섬에 유배됐던 그는 이렇게 유럽에 자신의 귀환을 알렸습니다. 열흘 전인 2월 26일 탈출에 성공, 이틀 뒤 프랑스 남부 해안에 상륙했고 파죽지세로 파리를 향해 북진했습니다. 3월 10일에 리옹에 도착했고, 20일에는 파리에 입성했습니다. 100일 천하의 시작이었습니다.

 

▲Napoleon's Return from Elba, by Charles de Steuben, 1818

 

돌아온 황제의 마차가 도착한다는 소문이 파리에 퍼지자 튈르리 궁 앞에는 사람들이 구름같이 몰렸습니다. 나폴레옹은 곧 다시 병력을 소집했습니다. 6월 초엔 병력 규모가 20만명에 달했습니다. 하지만 상황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문제는 지휘관과 참모들이었습니다. 그에겐 더 이상 능력있는 부하 지휘관들이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이 치명적 약점은 최후의 전투인 워털루 전투에서 결정적인 패인 중 하나로 작용하게 됩니다. 전투가 그의 뜻대로 되질 않았기 때문입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유럽도 발빠르게 움직였습니다. 영국과 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등은 3월 17일 각각 군인 15만명을 동원해 나폴레옹에 맞서기로 결의했습니다. 웰링턴은 벨기에에서 영국군과 네덜란드군, 벨기에군 등을 모아 군대를 정비했습니다. 프로이센도 움직였고, 오스트리아도 전투를 준비했습니다.

 

사실 나폴레옹은 처음엔 싸울 생각이 없었던 듯 합니다. 그는 유럽 각국에 평화와 공존을 호소하는 친서를 보냈습니다. 하지만 이미 나폴레옹을 겪을대로 겪은 유럽은 단박에 거절했습니다. 이제 양측의 대결은 ‘필연’으로 치달았습니다. 두 달여만에 군대를 재편한 나폴레옹은 곧 전투가 벌어질 것임을 공개적으로 알렸습니다. 6월 11일 그는 하원 의원들에게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오늘 밤 나는 선발대로 떠납니다. 적의 움직임을 보건대 내가 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조국을 지키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는 모든 병력을 데리고 가지는 않았습니다. 왕당파 등 국내 반란이나 소요에도 대비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 워털루… 나폴레옹의 잇따른 실수

언제나 그랬듯 이번에도 나폴레옹은 병력 규모에서 열세였습니다. 나폴레옹군은 보병 5만명, 기마병 1만5000명 등을 포함해 모두 7만2000여명이었습니다. 이에 비해 연합군은 약 12만명이었습니다. 영국과 네덜란드, 하노버 등에서 온 병력을 지휘하는 웰링턴 휘하에 6만8000명이 있었고, 프로이센의 블뤼허는 5만명을 이끌었습니다. 여기에 러시아 부대 25만명이 라인강 중류에 집결해 있었고, 라인 강 상류에는 2만5000명의 오스트리아군이 대기하고 있다는 정보도 들렸습니다.

 

나폴레옹의 전략은 간단하고 명확했습니다. 웰링턴 부대와 블뤼허 부대 사이로 치고 들어가 두 부대를 갈라놓은 후 각개격파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기려면 일사분란하고 빠르고 정확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이 된 이 전투에서 나폴레옹과 그의 부대가 보여준 모습은 이전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몇 번의 결정적 순간에 나폴레옹은 되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잇따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이런 걸 운명이라고 해야 하는 것일까요.

나중에 나폴레옹은 세인트헬레나에서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나는 운명이 나를 버렸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결정적인 성공에 대한 느낌을 가질 수 없었다. 과감히 시도하지 못한다는 것은 적절한 순간에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①첫번째 실수 : 브뤼셀 무도회 때 기습 기회 놓쳐

6월 15일 영국군 사령관 웰링턴은 부대를 주둔시킨 뒤 저녁 때 리슈몽 공작부인이 개최한 무도회에 참가해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철의 공작’ 웰링턴은 사교계 일을 아주 중요시하는 인물이었습니다. 당연히 그날 밤 그의 군대는 전투 준비가 돼 있지 않았습니다. 이때 나폴레옹은 이미 벨기에 국경을 넘은 상황이었습니다. 완벽한 기습 공격의 기회를 잡은 것이죠. 만약 나폴레옹이 웰링턴을 기습했다면 워털루 전투는 나폴레옹의 승리로 끝났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다음날 웰링턴 부대는 일부 프랑스군과 조우했지만 피해를 거의 입지 않은 채 대격전 준비에 들어갔습니다.

 

②두번째 실수 : 전초전 승리 후 프로이센군 추격 안해

16일 전초전 성격의 전투가 리니에서 벌어졌습니다. 나폴레옹은 이날 프로이센의 블뤼허 부대를 만났습니다. 블뤼허에겐 악몽같은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영국군과 합류하기 전에 나폴레옹 군대를 만났으니까요. 반면 프로이센군과 영국군을 따로 따로 상대하겠다는 나폴레옹으로선 쾌재를 부를만 했습니다. 결과는 역시 예측 그대로였습니다. 프로이센군은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군에게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프랑스의 완승. 심지어 프로이센의 사령관 블뤼허는 허벅지에 부상까지 당했다고 합니다.

 

문제는 다음 순간에 발생했습니다. 패주하는 프로이센군을 추격해 완전히 격멸했어야 했는데 나폴레옹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프로이센군이 전의를 상실해 전장(戰場)에서 물러날 것이라 생각한 것 같습니다. 많은 군사 전문가들은 이 부분을 나폴레옹의 가장 뼈아픈 실책 중 하나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까마득한 후배 몽고메리 장군은 “나폴레옹은 리니 전투 후 전군을 이끌고 프로이센군을 추격해 한동안 효과적인 전투력을 지니고 전장에 나타나지 못하도록 블뤼허 군대를 섬멸해버렸어야 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라면 불과 이틀 후에 블뤼허가 워털루로 돌아와 웰링턴과 합세, 나폴레옹을 참패로 몰아넣는 일은 없었을 것이니까요.

 

③세번째 실수 : 병력 분산

나폴레옹은 주력을 이끌고 본인이 직접 블뤼허를 추격하진 않았지만, 뒤늦게 그루쉬 원수에게 병력 3만명을 주며 블뤼허를 쫓으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엄청난 오판이었습니다. 총 병력이 열세인 상황에서 40% 가까운 전력을 떼어낸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본 게임인 워털루 전투 때 나폴레옹에게 이 병력이 있었다면 웰링턴은 절대로 나폴레옹의 공격을 막아낼 수 없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루쉬는 결국 이틀 동안 들판만 헤매다 나폴레옹이 전투에서 졌다는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④네번째 실수 : 망설임, 또 망설임

6월 18일. 밤새 많은 비가 내리는 바람에 땅이 온통 질퍽거렸습니다. 프랑스군의 공격이 늦춰졌습니다. 원래는 새벽에 작전을 개시한다고 했는데, 오전 9시로 연기됐습니다. 장병과 대포가 진창 속에 빠질 것을 우려해 해가 나고 땅이 좀 더 굳어질 때를 기다리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9시가 돼도 공격 명령은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오전 11시 30분이 돼서야 드디어 공격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당초 계획보다 5~6시간 이상 늦춰진 것이었습니다. 이 ‘잃어버린 시간’은 나폴레옹에겐 큰 아쉬움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공격을 연기함으로써 블뤼허가 도착할 시간을 벌어준 꼴이 됐기 때문입니다. 나폴레옹은 원래 한번 결정한 작전은 절대 변경하는 일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날은 왜 그랬을까요.

 

▲The Battle of Waterloo, 1815

 

전투는 치열한 공방을 거듭했습니다. 중간에 나폴레옹이 승기를 잡은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때도 나폴레옹은 핵심 부대 투입을 망설였습니다. 사실 웰링턴은 나폴레옹 만큼 풍부하고 과감한 전략과 전술을 구사하는 군인은 아니었습니다. 항상 확실한 방어망을 구축해 아군의 전력을 최대한 보전한 뒤 적 전투력이 떨어진 때를 노려 공격을 가하는 식이었습니다. 워털루 전투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나폴레옹은 공격을, 워털루는 수비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오후 3시쯤 몸이 좋지 않았던 나폴레옹은 잠깐 휴식을 취하기로 하고 네 원수에게 지휘를 맡겼습니다. 그런데 네 원수가 약간의 승기가 보이자 전체 기병대에게 돌격 명령을 내렸고, 이 기병대가 포병과 육군 지원없이 돌격하는 바람에 역공을 당해 궤멸하고 말았습니다. 이때를 기점으로 해서 프랑스군은 웰링턴군에 밀리기 시작했고, 마침 워털루에 도착한 프로이센군이 연합 공격에 나섬에 따라 전세는 완전히 기울게 됩니다. 밤10시쯤 웰링턴과 블뤼허가 만나 향후 추격전은 지친 영국군 대신 체력이 충분한 프로이센군이 맡기로 합의를 했습니다.

 

워털루 전투는 영국-프로이센 연합군이 정말 운좋게 승리했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만약 나폴레옹이 계속되는 여러 실수 중 단 하나만이라도 저지르지 않았다면 그날의 승패는 바뀌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인지 이 전투에 대해 연합군이 “간발의 차로 간신히” 이겼다는 말까지 나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구차하게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전투에서 이겼어야 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반면 승리한 웰링턴은 “나폴레옹은… 구식으로, 종대 대형으로 진격했고, 구식으로 패주했다”고 평가했습니다.

 

◇ 세인트헬레나

1815년 8월 7일 나폴레옹은 “내 운명을 완성하겠다”며 영국의 전열함 노섬벌랜드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10월 15일 아프리카 대륙에서 1870km 떨어진 대서양의 외딴 섬 세인트헬레나에 도착했습니다. 그의 섬 생활에 대해선 많은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1820년 7월 들어 나폴레옹의 병세가 완연하게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위암이었다는 말도 있고, 간염의 일종이었다는 말도 있습니다. 10월 4일에는 이웃에 점심을 먹으러 갔다가 거의 실신에 가까운 상태로 돌아왔고 며칠 후에는 뜨거운 욕조에서 나오다 의식을 잃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제 그는 편히 쉬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침대가 내게 아주 달콤한 공간이 되었소. 이 세상의 어떤 보물과도 바꾸지 않을 것이오. 얼마나 엄청난 변화인가. 내가 얼마나 쇠락했는지.”

 

1821년 4월 13일 그는 긴 유언장을 남겼습니다. 그는 옛 병사들까지 꼼꼼하게 챙겼습니다. 그들에게 자신이 저축한 2억 프랑을 남기겠다고 했습니다. 이 돈은 그들에게 전달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5월 4일 밤부터 맥박이 갑자기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다음날 새벽에는 혼수 상태에 빠졌고 오전 5시 그의 호흡이 완전히 멈췄습니다.

 

▲Napoleon on Saint Helena, watercolor by Franz Josef Sandmann, c. 1820

 

세인트헬레나에서 인생을 되돌아본 나폴레옹. 그는 워털루 전투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렸을까요. 그는 “패자의 명예도 타격받지 않았고, 승자의 명예도 드높아지지 않은 이상한 승리였다. 패자는 그 파괴를 뛰어넘어 기억될 것이고, 승자는 어쩌면 잊힐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물론 이런 나폴레옹의 예측이100% 맞아 떨어진 건 아닙니다. 웰링턴은 나폴레옹을 이긴 덕에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장군 중 한 명으로 기록되고 있으니까요. 게다가 그는 계속 정치에 몸담고 있다가 1828~1830년 영국 총리를 역임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것만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나폴레옹이 없었다면 웰링턴은 그저 대영제국 건설에 기여한 영국의 한 장군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반대로 나폴레옹은 웰링턴이 없었어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장군으로 평가받을 것입니다.

 

이는 나폴레옹 사후 세상이 보인 반응을 보면 분명해집니다. 지금까지 그에 대한 연구나 평전, 에세이는 무려 60만 종이 넘는다고 합니다. 후배 군인들은 거의 존경과 흠모 수준으로 그를 바라보는 것 같습니다. 영국의 2차 대전 영웅인 몽고메리 장군은 “그렇게 뛰어난 한 명의 군사적 천재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고, 이후 세상에는 그러한 천재가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지상에 군인이 존재하는 한 그는 가장 뛰어난 장군 가운데 한 명으로 기억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나폴레옹은 이런 걸 미리 예견했던 것일까요. 그는 세인트헬레나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죽으면 나에 대한 연민이 물결칠 것이다.” 그리곤 자신의 삶에 대해 한마디 던졌지요. “소설 같은 나의 생애여!”

조선일보  장일현 기자

 

03.23  러시아의 침략에 분개한 쇼팽, 조국을 향한 격정을 음악에 담다

바르샤바 함락에 끓어오르는 분노 담아 ‘혁명’ 부제 에튀드 작곡
파리서 숨지자 “마음은 폴란드인, 재능은 세계시민” 기사 실려
유언에 따라 심장은 고국 폴란드에… 수도 공항은 쇼팽으로 명명

 프리데리크 쇼팽(Frédéric François Chopin·1810∼1849)은 세상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피아니스트일 것이다. 학교 음악실이나 동네 피아노 교습소에 걸린 쇼팽의 얼굴은 예민하고 유약해 보인다. 어떤 아이들은 여자가 아니냐고 말하기도 한다. 그것은 쇼팽의 유명한 특징이다. 그는 우아한 행동과 기품 있는 태도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는 의상에 신경을 많이 썼고 파리의 오페라 극장에서 이탈리아 오페라 보기를 좋아했다. 대중 공연장보다는 귀부인들이 주도하는 살롱에서 연주했다. 그가 쓴 피아노곡은 듣는 이의 마음을 어머니처럼 어루만져 주듯이 부드럽고 섬세하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쇼팽의 한 면일 뿐이다. 그는 젊어서 조국을 떠난 후에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울분을 가슴에 삭이고 있었으며, 평생 친구와 가족을 그리워하며 고통받은 난민이었다. 그의 음악은 조국을 위해 싸울 수 없었던 자신에 대한 회한을 용암처럼 담은 뜨거운 것이었다.

 

폴란드 태생 작곡가 쇼팽은 예민하고 유약한 이미지로 알려져 있지만 그의 음악에는 조국을 위해 싸울 수 없었던 회한과 그리움 등이 담겨 있다. 사진은 라지비우 공작 앞에서 연주하는 쇼팽을 그린 19세기 후반 작품. 오른쪽 위 사진은 프랑스 파리의 쇼팽 무덤이고, 아래는 쇼팽의 슈투트가르트 일기와 초상화다. 쇼팽의 심장은 사후 폴란드로 옮겨져 바르샤바의 성(聖) 십자가 성당에 안치됐다. /위키피디아

 

쇼팽은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태어나, 20세에 고향을 떠나 프랑스에서 살다가 마흔을 넘기지 못하고 파리에서 죽었다. 어린 쇼팽은 일찍이 피아노에 커다란 재능을 보였다. 당시 바르샤바의 신문은 “천재란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에서만 태어나는 줄 알았는데, 우리 폴란드에서도 천재가 등장했다”고 쓸 정도였다. 바르샤바 음악원을 졸업한 쇼팽은 넓은 곳으로 나아갔다. 먼저 음악의 중심지 빈으로 가서 리사이틀을 열어 성공을 거두었다.

 

1830년 빈에 도착하자마자 쇼팽은 조국 폴란드에서 침략국 러시아에 대항하는 시민혁명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폴란드는 러시아와 프로이센 등 강대국 사이에서 끊임없이 외침을 겪었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고유의 예술과 문화를 지켜온 문화국이다. 빈까지 따라왔던 친구는 그 소식에 폴란드로 돌아갔다. 쇼팽은 폴란드의 또 다른 친구에게 편지를 썼다. “자네가 전쟁터에 나갔다는 소식을 들었네. 참호는 파보았는가? 부디 대령이 되어 돌아오게. 나는 최소한 북치기라도 될 수는 없는 것일까?” 쇼팽은 자신도 돌아가 전쟁에 참가하고 싶었지만, 부모와 주변의 만류로 돌아가지 못한다. 그는 그의 주변에서 조국을 위해 싸우지 않은 유일한 청년이 되었다.

 

빈을 떠난 쇼팽은 린츠, 잘츠부르크, 뮌헨을 거쳐 슈투트가르트에 도착했다. 호텔에 여장을 푼 쇼팽은 조국의 혁명이 실패로 끝났다는 소식을 받는다. 러시아 군대가 바르샤바를 장악하여 도시를 방화하고 시민들을 학살했다는 것이다. 참담한 심정의 쇼팽은 1831년 9월, 호텔 방에서 일기를 쓰는데, 사후에 출판되어 ‘슈투트가르트 일기’로 알려진 글이다.

 

“오 하느님, 어디 계십니까! 당신은 존재하시면서 복수해주지 않으십니까! 러시아인들의 만행이 아직도 충분하지 않으십니까? 아니면 하느님 당신이 러시아인입니까? 아버지는 노년에 빵조차 사지 못하고 계십니다. 어머니는 이미 죽은 딸의 무덤을 러시아군이 짓밟은 것을 지켜보고 계십니다. 누이들은 이미 겁탈당했을지 모릅니다. 러시아인들이 시민들을 목 졸라 죽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여기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맨손으로 한숨만 쉬면서 절망감을 피아노에 두드려대고 있습니다. 하느님, 땅을 흔들어 이 땅을 삼키소서. 우리를 도와주러 오지 않은 프랑스인들이 가장 잔인한 고초를 받게 하소서….” 그러고 쇼팽은 호텔 방에서 조국을 향해 끓어오르는 격정을 ‘혁명’이라는 부제를 단 에튀드(연습곡) c단조(작품 번호 10-12)로 작곡한다.

 

이어 파리로 간 쇼팽은 그곳에서 큰 성공을 거둔다. 그는 파리의 모든 피아니스트를 굴복시켜, 파리 전체가 그의 연주에 넋을 잃었다. 그는 파리의 최고 명사가 되고, 낭만주의 음악에서 매우 중요한 작곡가 중 한 명이라는 평판을 듣는다. 지금도 따라다니는 그의 연애 이야기는 모두 생략한다. 그런 흥밋거리 일화가 우리가 쇼팽을 제대로 바라보는 것을 방해해왔다. 그보다는 그의 음악 속에 언제나 존재했던 사랑하는 조국과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주목하자. 파리에서 그와 친분을 나누었던 리스트는 “보통 사람들이 신에게 기도하거나 고백하는 말을 그는 음악으로 쏟아냈다”고 말했다.

 

파리에서 병을 얻은 쇼팽은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39세에 숨을 거둔다. 평생 파리에서 작곡하고 파리에서 연주하다가 파리에서 죽었지만, 그의 부고를 실은 폴란드 신문 기사는 이렇게 시작했다. “태생은 바르샤바고, 마음은 폴란드인이며, 재능에 관해서는 세계시민인 쇼팽은….” 죽기 전 그의 마지막 말은 “어머니, 나의 불쌍한 어머니”였다. 파리에서 장례식이 끝나자, 유언에 따라 심장이 도려내졌다. 심장은 주인을 대신하여 조국으로 보내져 바르샤바의 성(聖) 십자가 성당에 안치되었다.

 

시대와 조국을 외면한다면 진정한 예술가가 아닐지도 모른다. 예술은 아름다운 레이스나 화려한 벨벳에 싸여 있는 것이 아니다. 위대한 예술은 폭탄과 화염 속에서 그 역할을 해왔다. 그런 쇼팽의 애국심을 알기에 폴란드 정부는 나라 관문을 ‘바르샤바 프레데리크 쇼팽 공항’으로 명명하였다.

 

당시와 무척이나 닮은 일이 폴란드의 이웃 나라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지고 있다. 쇼팽을 계승하는 20세기 세계 최고 피아니스트들인 스비야토슬라브 리히터, 블라디미르 호로비치, 에밀 길렐스 등을 지금도 간혹 러시아 사람으로 알지만, 그들은 모두 조국이 짓밟힌 우크라이나 출신이다.

조선일보  박종호 풍월당 대표

 

04.08  16세기 들어 국부 증강, 해양제국 건설 꿈꿔

일본은 어떻게 강대국이 됐나

김기협 역사학자

 

임진왜란 때 일본 측 요구는 명나라에 볼일이 있으니 길 좀 빌려달라는(가도·假道) 것이었다. 이 요구를 흔히 지어낸 핑계로 본다. 조그만 섬나라가 대륙을 정복하겠다는 주장 자체가 황당해 보이기 때문에 실제 욕심은 조선에 있었을 것으로 짐작하는 것이다.

 

그런데 다른 사람은 몰라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는 명나라 정벌의 뜻이 정말로 있었다. 명나라를 몰아낸 후 일본 천황이 북경에서 천하를 다스리게 하고 관백(關白)인 자신은 영파(닝보·寧波)에 자리 잡고 천축(天竺)을 도모하겠다는 구상이었다.

 

왜 영파였을까? 지금은 부성급(副省級) 주요 도시지만 당시에는 하나의 주급(州級) 지방도시였을 뿐인데.

영파가 16세기 초까지 일본 조공선의 기항지였고, 그 후에는 왜구 활동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일본인에게 영파는 외부를 향한 창문과 같은 곳이었다. 히데요시의 꿈은 대륙의 제국 탈취를 넘어 해양제국 건설에 있었던 것이다.

 

중국과 은 밀거래로 경제력 키워
인도~마카오~일본 3각무역 활기

포르투갈이 전해준 총기도 개량
중 천하제국 본딴 ‘소천하’ 목표

일본통일 이룬 막부 비폭력 추구
이웃 나라 섣부른 단정 경계해야

 

히데요시의 꿈은 ‘왜구(倭寇)제국’

 ▲오다 노부나가의 패권을 성립시킨 나가시노 전투(1575)의 병풍 그 림. 포르투갈이 전해준 뎃포(鐵砲)가 승부를 갈랐다. 왼쪽의 오다군이 방책을 따라 포수 대열을 배치하고 오른쪽 다케다군 기마대를 저지하고 있다. [사진 위키피디아]

 

 중국 서남방의 해양세계를 일본인이 천축으로 생각한 것은 1549년 일본 선교를 시작한 프란시스 사비에르(1506~1552)가 인도의 고아에서 왔기 때문이다. 사비에르의 통역 안지로가 기독교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불교의 본산 ‘천축’에서 왔음을 강조했다.

 

안지로는 또한 하느님을 비로자나불을 뜻하는 일본말 ‘다이니치’로 표현할 것을 권해서 사비에르도 받아들였다가 2년 후 폐지했다. 일본인이 익숙한 관념에 의탁하는 것이 최초의 접촉에는 편리한 점이 있지만 더 깊이 들어가면 기독교의 본질을 가리게 되기 때문이었다. 안지로는 최초의 일본인 기독교인이었지만 ‘천축’을 강조하고 ‘다이니치’를 표방한 것을 보면 머릿속은 불교로 가득 차 있었던 모양이다.

 

예수회 창립멤버의 한 사람 사비에르는 유럽인의 새 활동 영역인 동방세계 선교에 뜻을 두고 1542년부터 인도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1547년에 그를 찾아온 안지로에게 일본의 풍속과 상황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일본 선교를 결심했다. 일본인의 품성이 기독교에 적합하다는 판단이었다고 전해지지만, 교역과 교통의 상황도 고려했을 것이다.

 

안지로가 사비에르를 찾아간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살인죄로 도피행각에 나선 사쓰마의 하급무사 안지로가 중국 남해안으로 간 것은 왜구가 되기 위한 표준 코스로 보인다. 그런데 사비에르의 존재를 알게 되자 2년간 찾아다닌 끝에 그를 만나 그 안내자가 됐다. 안지로는 사비에르의 선교사업을 해적활동의 새로운 유형으로 생각한 것이 아닐까?

 

포르투갈 배 정기적으로 왕래

 ▲‘주신구라’는 에도 후기부터 오늘날까지 일본에서 가장 사랑받는 사화(史話)다. 가부키부터 텔레비전 시리즈까지 많은 작품으로 나왔다. 원수의 집에 침입하려는 사무라이들을 그린 판화. [사진 위키피디아]

 

일본에 포르투갈인이 처음 나타나 화승총을 전해준 것이 1543년이었다. 접촉이 시작되자마자 포르투갈 배의 일본 기항이 잦아진 사실은 안지로의 행적에서도 알아볼 수 있다. 1545년 그가 가고시마에서 탄 포르투갈 배는 원래 계획했던 것과 다른 배였고, 그 배 선장이 사비에르와 잘 아는 사람이어서 사비에르 이야기를 듣게 됐다고 한다.

 

포르투갈인의 일본 왕래가 잦아진 것은 교역의 중요한 열쇠를 그곳에서 찾았기 때문이다. 바로 은(銀)이다. 포르투갈인은 1510년대에 남중국해 해역에 들어와 중국 교역을 시도했지만 중국에 팔 물자를 찾기 어려웠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그 무렵 다량의 은이 산출되고 있었고 일본과 명나라 사이의 조공무역은 1523년부터 끊어져 있었다. 일본산 은의 중국 반입이 이른바 ‘후기 왜구’의 중심 사업이 됐고, 여기에 포르투갈인의 참여가 늘어나면서 일본에도 발길이 닿게 된 것이다.

 

사비에르가 일본에서 체류한 1549~1551년 기간 중 고아와 규슈 사이에 포르투갈 배가 정기적으로 왕래하기 시작했다. 1554년 포르투갈이 마카오 기지를 확보한 후에는 고아~마카오~나가사키 노선이 확정됐다. 이 배를 통해 일본의 은이 중국으로 들어가고 종이와 비단을 비롯한 중국 상품이 일본으로 나왔다. 배는 포르투갈 배지만 유럽 상품의 비중은 얼마 되지 않았고, 수익의 상당 부분이 선교사업에 쓰였다.

 

안지로가 ‘해외선교의 수호성인’ 사비에르를 왜구를 대신할 새로운 유형의 해적 수령쯤으로 생각했다 하더라도 전혀 틀린 생각은 아니었던 셈이다. 안지로는 사비에르가 일본을 떠난 얼마 후 진짜 해적으로 나섰다가 중국 해안에서 죽었다.

 

1543년 포르투갈인이 전해준 총기가 일본에서는 ‘뎃포(鐵砲)’란 이름으로 퍼져나갔다. 일본인은 바로 이것을 모방해 만들기 시작했고, 얼마 안 있어 같은 시기 유럽보다 우수한 제품을 만들어 쓰게 되면서 일본의 전쟁 양상을 바꿔놓았다. 1592년 조선에 출병한 16만 명 병력 중 약 4만 명이 뎃포로 무장했다고 한다.

 

총기를 짧은 시간에 독자적으로 발전시킨 것도 놀라운 일인데, 더 놀라운 사실은 몇십 년 후 일본에서 총기 사용이 실질적으로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도쿠가와 막부 성립(1603) 이후 대형 전쟁이 없어지면서 총기 사용이 사라져갔다.

 

마테오리치가 감탄한 평화

 ▲인도 고아에서 사비에르가 설교하는 모습. 청빈과 순명을 표상하는 성자 모습이지만 일본에서는 영주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의전에 무척 공을 들이기도 했다. [사진 위키피디아]

 

전쟁이 없다 해서 총기의 효용이 사라질 것 같지 않다. 1703년의 한 사건을 극화한 ‘주신구라(忠臣藏)’는 주군의 복수에 목숨을 건 47인 사무라이의 이야기다. 원수 한 사람 죽이는 데 목적을 둔다면 총기가 적합한 도구 아니었을까?

 

총기 사용이 “무사답지 못한 짓”이란 관념이 보인다. 이런 관념의 지배가 바로 ‘평화의 문화’를 말해주는 것이다. 16세기 말 중국에 온 마테오 리치는 이런 평화의 문화에 경탄했다. “병사든 군관이든, 문관이든 무관이든, 어느 누구도 시내에 무기를 가지고 다니지 못하게 되어 있다. (...) 사람들 사이의 싸움이나 폭력이라면 고작 머리카락을 잡아당기거나 손톱으로 할퀴는 정도를 넘어서는 일이 없기 때문에 사람이 죽거나 다친다는 일은 들어볼 수 없다. 오히려 싸움을 피하고 물러서는 사람이 점잖고 용기 있는 사람으로 칭송을 받는다.”

 

일본이 센고쿠(戰國) 시대를 지나 도쿠가와 막부체제에 이른 것은 중국이 전국시대를 지나 천하제국을 이룬 것과 방불한 일이다. 통일을 이룬 지배세력은 새로운 도전자의 출현을 막기 위해 국내의 폭력 수준을 낮추는 데 힘썼다. 중화제국이 ‘천하’의 평화를 지키는 데 애쓴 것처럼 도쿠가와 막부는 일본을 하나의 ‘소(小)천하’로 지킨 것이다.

 

일본의 폭력성에 대한 한국인의 인상은 두 차례 침략의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이웃 사람의 ‘인간성’이나 이웃 나라의 ‘국민성’에 대한 섣부른 단정은 이웃 간의 진정한 이해를 가로막기 쉽다. 폭력성이 나타난 역사적 상황을 파악함으로써 더 깊은 이해가 가능할 것이다.

 

[한반도와 일본의 국력 첫 역전, 임진왜란 불러]

 

임진왜란 때 사용된 조총(鳥銃). 뎃포가 등장하며 더 강한 갑옷이 제작됐고, 더 강력한 뎃포가 개발되는 ‘군비 에스컬레이션’이 16세기 후반 일본에서 일어났다.

 

한국인이라면 일본을 특별히 미워하거나 싫어하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일본을 조금 깔보는 경향이 있다. 오랫동안 대륙의 선진문명을 섬나라에 전수해 준 반도국 입장에서 16세기 말과 19세기 말의 침략은 보편적 국제 도의 이전에 건방지고 배은망덕한 짓으로 느껴진다.

 

그러나 반도와 섬의 지정학적 우열 관계는 불변의 원리가 아니다. 상황 변화에 따라 바뀔 수 있다. 금속문명 초기 단계에서 만주와 한반도 사이에도 역전이 있었다.

 

“금속기문명이 대륙으로부터 처음 전파되던 시절에는 대륙에 가까운 위치의 만주가 당연히 한반도보다 선진지역이었다. 고조선 수도의 남하, 부여에서 고구려의 파생, 고구려에서 백제의 파생이 모두 선진문명의 남진 현상을 보여주는 상황들이다. (...) 그런데 기원전 3세기 이후 중국 방면으로부터 철기를 바탕으로 한 집약적 농업문명이 본격적으로 전파되면서 문명의 북고남저(北高南低) 상황이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온난한 기후의 한반도가 그 단계 농업문명의 정착에 더 유리한 조건이었기 때문이다.” (김기협의 『밖에서 본 한국사』 34쪽)

 

만주와 일본에 대한 한반도의 경제적·문화적 우위는 1000년간 계속됐으나 13세기 후반 몽골 정복을 계기로 변화가 시작됐다. 미개한 상태에 머물러 있던 일본사회가 다양한 변화를 일으키고 15~16세기의 센고쿠(戰國)시대를 거쳐 도쿠가와 통일에 이르렀다. 16세기 중 일본의 경제력과 군사력은 역사상 처음으로 한반도 국가를 추월했고, 그 결과가 임진왜란에 나타났다.

중앙일보  김기협 역사학자

 

09.21  대륙이 한 번도 지배하지 못했던 섬

대만해협을 바라보는 중국 푸젠(福建)의 샤먼(厦門) 앞바다에는 유럽의 식민 도시 구랑위(鼓浪嶼)가 떠있다. 아편전쟁 직후 유럽 열강이 개항장으로 차지한 섬이다. 바로 앞에 대만 영토인 진먼다오(금문도·金門島)가 있어 대만을 겨냥한 포대와 비행장이 도사리고 있다. 청나라 말기 서구 열강을 방어하던 호리(胡里) 포대를 비롯해 여러 포대가 남아있는 중국 남부 해변 곳곳에는 현대적 포대들이 대만을 노린다.

 

대만해협과 인근 바다에 흩어져 있는 펑후(澎湖)열도를 읽어냄은 중국의 현재와 미래를 읽어내는 지름길이다. 샤먼에서 묵은 호텔에서 건너편을 바라보자니 구랑위 동북 곶에 정성공(鄭成功·1624~1662) 동상이 해협을 바라보며 밤마다 불을 밝히고 있다. 그 사이로 중국 함선이 지나간다.

 

▲명나라 장수 정성공이 호랑이를 사냥하는 모습을 그린 일본 화가 우타가와 구니요시(1797~1861)의 그림. 그는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에 명나라가 멸망한 뒤에도 옛 왕조를 받들며 대만과 주변 지역을 통치했고, 중국과 대만 모두 각자의 필요에 의해 그를 역사적 영웅으로 부각했다. 대만 타이난(오른쪽 위 사진)과 중국 푸젠성에 정성공의 조각상이 세워졌다. /게티이미지코리아·위키피디아

 

타이난(臺南) 안핑(安平)에도 민족 영웅 정성공 동상이 서있다. 안핑은 대만 남부에 세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의 식민 거점이다. 대만해협 양안에 정성공 동상이 존재함은 본토와 대만을 연결하는 최대 촉매가 정성공임을 알 수 있다.

 

명말 청초에 태어난 정성공은 반청존명(反淸尊明)의 기치를 내걸고 멸망한 명조 황가의 자손을 옹립하고 대만, 진먼, 샤먼 등지를 통치했다. 어머니는 일본인이었고, 그의 경호병에는 아프리카 흑인도 포함되었으며, 그가 신뢰한 특사는 이탈리아인이었다. 외세 네덜란드에 저항했으며, 한족을 존중하고 만주족을 멸시했다. 밀수꾼과 해적에서 출발하여 대만해협을 무대로 동아시아 해역의 패권을 겨뤘다.

 

영웅 만들기는 곳곳에서 펼쳐진다. 박물관, 동상, 무덤, 기념품 등으로. 대만해협을 무대로 한 시대를 풍미하던 역사 인물이 되살아나 대륙과 대만을 강력하게 연결하는 매개체로 정치적 부상을 거듭한다.

 

대만해협의 또 다른 촉매는 화교다. 샤먼 시내에는 화교박물관이 우뚝 서있다. 광저우 출신인 캉유웨이(康有爲)의 ‘고국은 너를 잊지 않는다’는 명구가 각인되어 있다. 중화적 질서 속에 한족의 연대를 강조하고, 그 인연법을 애국심과 결부시키는 것이다. 정성공은 중국사의 필요에 따라 소환되고 대량 소비되는 중이다. ‘중국의 아들’이자 ‘대만의 아버지’란 표현도 등장한다. 그런데 정성공이 역사적으로 부각되고, 양안에서 모두 절세의 애국자로 모셔진 것은 20세기 이후의 일이다. 앞서 정성공은 반청존명의 반역자이자 해적 따위로 취급된 역사가 존재했다.

 

정성공의 부각은 ‘한족 중심의 대만 만들기’ 일환이다. 그러나 대만은 원주민의 땅이었다. 원주민은 ‘부인된 민족’이다. 그들 역사는 대만에서도 귀퉁이에서 언급되거나 인류종족학적 입장에서 관심을 받을 뿐, 주류는 아니다.

 

당·송·원은 해양 강국이며, 명나라 영락제도 정화 원정대를 보내는 등 강한 해양력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아주 이상한 일은 본토 세력이 대만을 직접 경영한 사실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오나라 손권이 대만을 쳐서 원주민을 잡아들이는 등 공략한 적은 있지만, 직접 경영하지는 않았다. 명은 대만을 제외하고 펑후까지만 지배하고 있었다. 정화 함대도 대만은 들르지 않았다. 중국사의 묘한 빈틈이다. 그 땅의 주인인 원주민이 계속 살고 있었기 때문에 빈틈이란 표현도 사실은 지극히 중화주의적 입장이다.

 

가오슝(高雄)에서 쌍발 프로펠러 소형 비행기를 타고 펑후에 내렸다. 펑후의 야트막한 사두산에 있는 최초의 네덜란드 유적지 홍마오청(紅毛城)을 찾아갔다. 유럽인은 대만을 ‘일랴 포르모자(Ilha Formosa, 아름다운 섬)라고 불렀다. 정성공이 대만으로 밀고 내려오기 전, 대만을 점령한 최초의 나라는 흥미롭게도 1622년에 들어온 네덜란드다. 대만해협의 빈 공간에 한족보다도 유럽 세력이 먼저 발을 뻗은 것이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는 중국 본토와 일본, 유럽의 중개무역으로 돈을 벌고 있었다.

 

해협에서는 언제나 국제정치적 파란이 일어난다. 대만해협도 예외가 아니었다. 정성공은 네덜란드를 쫓아내고 최초로 ‘한족의 나라’를 대만에 세운다. 중국이 그를 절세의 애국자로 부각시키는 이유다. 장제스가 차지한 국민당 정부의 대만도 한족 중심의 절세의 애국자가 필요했다. 그러나 국민당 일당독재가 끝나면서 균열이 본격화했다. 그 균열에는 후대에 해협을 건너온 한족의 일파인 하카(客家)뿐만 아니라 원주민의 목소리도 섞여 있다.

 

명의 해금정책은 상인을 해적으로 내몰았다. 일반 백성과 상인은 새로운 기회를 찾아서 해협을 건너 대만으로 들어섰다. 남중국해 일원은 정부 통제를 벗어난 해적의 세상이었다. 히라도(平戸)에 연고를 둔 해적왕 왕직은 모험적 국제 무역상이었다. 일본의 후기 왜구는 무역 상인을 겸했다. 해적과 왜구와 상인은 일궤를 같이하며 대만해협에 출몰했다. 해금으로 버려진 빈자리는 빈민과 어부, 자유로운 상인이 채웠다.

 

대만에는 네덜란드 이전에 해협을 건너온 중국인도 있었다. 푸젠의 가난한 백성들이었다. 해금을 피해 많은 이들이 대만해협을 건너와서 이주촌을 형성했다. 하지만 대만의 정체성은 여전히 원주민과 이주민, 그리고 유럽인이 각축하는 ‘부인된 땅’이었다. 왕직이나 정성공이나 본토에서 대접받지 못하던 변방 오랑캐이자 반항아들이었다. 대만해협은 이처럼 중국과 일본, 네덜란드와 스페인 등의 계열과 사연을 달리하는 바다 오랑캐들이 차고 넘치던 바다였다.

조선일보 주강현해양문명사가·전 제주대 석좌교수

 

 

09.23  소설 ‘뿌리’ 쿤타 킨테의 고향, 노예·황금·상아의 대륙

또 하나의 신대륙 ‘사하라 이남’

북아메리카·남아메리카·오세아니아, 세 대륙은 ‘신대륙(New World)’으로 불린다. 아시아·유럽·아프리카 ‘구대륙(Old World)’과 대비된다. 아메리카가 15세기 말에, 오세아니아가 17세기에 ‘발견’되었다는 사실에는 이론의 여지가 있다. 사람이 살던 곳이고 더러는 고도의 문명을 꽃피우기도 하던 곳인데, 꼭 유럽인의 눈에 들어와야만 그 존재가 시작된 것처럼 볼 수 있는가.

 

그러나 역사의 큰 흐름에 비추어서는 이들을 신대륙으로 보는 데 의미가 없지 않다. 고유의 문명과 문화가 철저하게 파괴되거나 무시되고 구대륙에서 퍼져나온 역사의 흐름에 휘말려 들어가면서 피동적인 역할을 강요당했기 때문이다.

 

서아프리카-지중해, 예부터 교역
15세기 이후 유럽의 약탈 본격화

‘암흑대륙’은 피부보다 역사 문제
노예사냥 성행하며 문화도 끊겨

80년 뒤엔 세계 인구의 40% 거주
인류에 닥친 위기 함께 풀어가야

 

유럽 중심주의 퇴조하며 재조명

 ▲미국에 끌려온 흑인 노예들의 비참한 삶을 다룬 알렉스 헤일리의 소설 『뿌리』(1976)는 큰 사회적 충격을 일으켰다. 소설 속 주인공 쿤타 킨테가 미국에 도착한 메릴랜드주 애너폴리스에 세워진 알렉스 헤일리 기념물이다. [사진 위키피디아]

 

 16세기 이후 신대륙은 유럽인에게 막대한 자원을 제공함으로써 ‘서방의 흥기’를 뒷받침해 주었다. 자원 착취의 기지로 만들어진 식민지가 자라나 20세기에는 ‘서방 패권’을 연장시키며 그 주역을 맡기도 했다. ‘발견’ 이후 신대륙의 역사는 세계사의 전개에서 중요한 축이 되었다.

 

서방 패권을 당연시하던 유럽중심주의가 근년 퇴조하면서 신대륙의 역사적 역할이 새로운 조명을 받고 있다. 그런데 신대륙으로 눈길을 돌리기 전에 먼저 살펴보고 싶은 곳이 있다.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Sub-Saharan Africa)’는 15세기 유럽인의 진출을 계기로 세계사 전개에 피동적 역할을 강요당했다는 점에서 신대륙과 같은 입장에 놓였던 곳이다.

 

‘사하라 이남’이란 이름 자체가 외부의 인식이 빈약했던 사정을 보여준다. 이집트에서 모로코까지 지중해 연안 지역은 일찍부터 지중해문명권의 일부로 유럽인에게 잘 알려진 곳이었다. 그 남쪽은 알려진 것이 극히 적었기 때문에 ‘사하라 이남’으로 퉁쳐서 부른 것이다.

 

▲소설 『뿌리』는 드라마로도 제작돼 세계적 인기를 끌었다. [사진 위키피디아]

 

사하라사막 남쪽에도 기후와 생태가 확연히 서로 다르고, 따라서 역사와 문화도 서로 크게 다른 여러 지역이 있었다. 그중에 가장 먼저 살펴볼 곳이 서아프리카다. 15세기 중엽 이후 유럽인의 활동이 가장 많았고, 아메리카로의 노예 반출도 가장 많았던 곳이다.

 

유럽인 진출 이전에도 서아프리카의 중심적 역할을 보여주는 것이 ‘반투 팽창(Bantu Expansion)’ 가설이다. 서아프리카 지역에는 니제르-콩고어파(語派)의 여러 언어가 뒤얽혀 있는데, 그 동쪽 끝에서 출발한 반투어군(語群)이 기원전 10~5세기부터 동쪽과 남쪽으로 퍼져 나가 대륙의 중·남부를 뒤덮게 되었다는 것이다. 농업 발생, 철기 사용 등 기술 발전을 발판으로 서아프리카 문화가 확장되어 나갔다는 관점을 함축하는 가설이다.

 

노예 대거 반출이 빚은 ‘역사의 단절’

 ▲미국 화가 윌리엄 잭슨의 ‘노예선’. [사진 위키피디아]

 

서아프리카의 역사는 일찍부터 지중해권과의 교섭을 축으로 진행됐다. 장거리 교역이 사하라사막을 가로질렀고, 4세기부터 낙타의 도입으로 더욱 확대됐다. 지중해권 일환으로 선진문명이 보급된 북아프리카에 대해 서아프리카는 자원을 공급하는 배후지 역할을 했다.

 

서아프리카 몇 개 지역에 ‘상아해안’ ‘노예해안’ ‘황금해안’의 이름을 붙인 것은 그 전통적 수출품을 표시한 것이다. 상아건 노예건 황금이건 서아프리카의 자원 착취는 15세기에 유럽인이 시작한 것이 아니다. 육로를 거쳐 북아프리카로 나가던 것이 해로를 통해 유럽과 아메리카로 향하게 된 것이다. 유럽인이 직접 원주민을 노예로 ‘사냥’한 일은 거의 없었다. 지역에 존재하던 노예시장에서 구매했다. 이따금 유럽인의 노예 포획 시도에 현지 권력자들이 격렬하게 저항한 것은 자기네 밥그릇이었기 때문이다.

 

▲노예선의 표준 구조. 1781년에는 노예 442명을 꽉꽉 눌러 실은 영국 배가 항로 착오로 식수 부족이 닥쳤을 때 노예 142명을 바다에 던져버리는 일도 있었다. 노예무역 금지를 앞당긴 사건이었다. [사진 위키피디아]

 

16~18세기 아메리카로의 노예 반출이 1200만 명 전후로 추정되는 한편 10~17세기 중 이슬람 세계로의 노예 반출을 1100~1700만 명 범위 안에서 많은 학자가 추정한다. 서아프리카의 노예 수출(?)이 유럽인의 활동으로 종래보다 줄잡아 3~5배 늘어난 것으로 볼 수 있다.

 

어느 문명권에 대해서도 배후지는 노예를 비롯한 자원을 공급하는 역할을 맡는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배후지의 문명수준 상승으로 노예의 반출이 줄어든다. 15세기 이전 수백 년 동안 서아프리카의 문명수준 상승은 이슬람화의 틀에 따라 진행되고 있었다. 그런데 유럽인의 출현으로 노예 수요가 급증하면서 이슬람화 과정이 교란되고 심지어 이슬람을 받아들인 사회까지 노예사냥의 대상이 된 일이 많았다. ‘역사의 단절’이라 할 수 있는 현상이다.

 

알렉스 헤일리 『뿌리』의 표절 시비

 ▲알렉스 헤일리

 

사하라 이남 출신으로 가장 유명한 사람 하나가 쿤타 킨테다. 알렉스 헤일리(1921~1992)의 소설 『뿌리』(1976)는 쿤타 킨테가 1767년에 감비아 지역에서 노예사냥꾼들에게 포획된 후 그 7대손인 작가 자신에게 이어지는 한 집안의 역사를 그린 작품이다. 역사상 가장 많은 관심을 모은 소설의 하나가 되었다.

 

『뿌리』의 가치는 그 예술성보다 문제의식에 있다. 미국의 노예해방 후 100여 년이 지나도록 차별이 극복되지 못한 상황에서 노예들도 ‘뿌리를 가진 사회적 존재’였다는 사실을 보여준 이 작품이 큰 반향을 일으킨 것이다.

 

▲해럴드 쿨랜더

 

이 작품의 표절 문제가 흥미롭다. 인류학자이며 소설가 해럴드 쿨랜더(1908~1996)가 자기 소설 『아프리카인』(1967)을 표절했다며 소송을 냈다. 헤일리는 그런 소설이 있는지도 몰랐다고 우겼지만 쿨랜더의 주장을 지지하는 전문가 의견서가 나온 후 쿨랜더와 합의를 봤다. 65만 달러 보상금과 함께 “알렉스 헤일리는 해럴드 쿨랜더의 『아프리카인』의 여러 내용이 자기 작품 『뿌리』에 들어간 사실을 인정하고 유감을 표한다”는 성명을 발표하는 조건이었다. 그 후 스키드모어대학의 한 교수는 1970년에 헤일리가 학교로 찾아왔을 때 『아프리카인』 읽기를 권하고, 흥미를 보이기에 집에 가서 그 책을 가져와 주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사실성에도 문제가 제기되었다. 헤일리 자신 사실과 창작이 겹쳐진 ‘팩션(faction)’의 성격을 표방했고, 독자들도 『뿌리』를 소설보다 논픽션으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쿤타 킨테의 출발점에 대한 증인으로 헤일리가 내세운 감비아 그리오(griot·서아프리카에서 음악과 이야기를 통해 과거의 일을 전파하는 사람)가 진짜 그리오가 아니라고 그 지역 연구자들이 지적하고 나섰다. 헤일리가 조사하러 다니면서 조사 대상자들에게 자신의 추측을 이야기한 내용이 그 사람들의 진술을 유도해낸 ‘순환제보(circular reporting)’의 함정에 빠진 것으로 보는 것이다.

 

‘암흑대륙’의 미래도 암흑일까?

쿨랜더의 소설을 읽기는커녕 그런 책이 있는 줄 알지도 못했다는 헤일리의 주장은 그의 인격을 의심케 한다. 그러나 쿤타 킨테의 출발점에 관한 고증 문제는 18세기 중엽의 서아프리카 상황을 밝히기 어려운 사정에 비추어 이해할 만한 것이다. ‘팩션’이라 하더라도 ‘팩트’보다 ‘픽션’에 더 많이 의지하지 않을 수 없는 영역이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오랫동안 통용돼 온 아프리카의 별명이 ‘암흑대륙’이다. 주민의 피부색보다 과거를 밝히기 어렵다는 문제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15세기 이전의 문자 기록이 극히 적다는 점에서 구대륙보다 신대륙으로 보이는 지역이다. (물론 ‘사하라 이남’에 한정된 이야기다.)

 

아프리카 역사에 관한 책을 찾다 보니 아프리카에 관한 책보다 아프리카 출신 노예에 관한 책이 훨씬 더 많다. 일반 독자를 위한 출판물 중에는 아프리카 자체보다 노예에 대한 관심이 압도적인데, 전문적 역사 연구의 분량 자체도 노예 쪽으로 더 많이 쏠려 있는 것 같다.

 

지금까지 이뤄져 온 ‘세계화’의 진도에 비해 ‘세계사’의 인식이 크게 뒤져있다는 생각을 새삼 하게 된다. 3세기에 걸쳐 아메리카로 반출된 노예 1200만 명은 6000여만 명으로 추정되는 1700년경 아프리카 인구의 5분의 1 수준이다. 그런데 노예들은 지금까지 인식돼온 세계사의 전개에서 맡은 독특한 역할 때문에 집중적 관심을 받아온 것이다.

 

2018년도 아프리카 인구는 13억2100만 명, 세계 인구의 18.2%를 점하는 것으로 집계돼 있다. 2100년에는 39억2442만 명으로 세계 인구의 37.9%에 이를 전망이다. (위키피디아 ‘아프리카 인구통계’) 이 전망이 얼마나 정확할지는 모르나 인류의 미래에 아프리카의 역할이 어떤 의미로든 크게 늘어나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지금도 인류의 위기를 가리키는 지표가 아프리카에서 많이 나타나고 있다. 그 대처를 위해 여러 면에서 인류의 협력이 필요하거니와, 아프리카의 역사를 제대로 밝히는 것도 하나의 과제일 것이다.

증앙일보  김기협 역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