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2022-10/ 10.01(토) 황제 도피 - 10.31(월) 변질된 핼러윈
만물상 2022-10/ 조선일보
10.01(토) 황제 도피
검찰청사 ‘단골손님들’ 사이에 떠도는 불문율 중 하나가 ‘일도(一逃) 이부(二否) 삼백’이다. 일단 걸리면 튀고, 잡히면 부인하고, 그것도 안 되면 ‘백(back)’을 쓰라는 것이다. ‘일도’ 중에서도 으뜸은 해외 도피다. 하지만 성공으로 끝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서울 강남 부유층을 상대로 모은 곗돈 수십 억원을 들고 2009년 해외로 도피한 60대 여성도 돈에 쪼들려 8년 만에 자진 귀국했다. 여러 나라 전전하다 재산을 탕진했다고 한다.

▶개중엔 호화 도피 생활을 하는 이들도 있다. 2010년 조세포탈죄로 재판을 받다가 해외로 도피한 허재호 전 대주그룹 회장은 뉴질랜드에서 한동안 호화 생활을 누렸다. 호화 요트를 타고 낚시를 즐겼고, 카지노에도 VIP 회원으로 출입했다고 한다. 그러나 검찰의 압박에 결국 4년 만에 귀국해 교도소에 수감됐다. 그는 벌금을 노역으로 때우려다 ‘황제 노역’이란 비난이 일자 224억원의 벌금을 완납하기도 했다. 낼 돈 다 낸 셈이다.
▶붙잡히지 않는 경우도 있다. 2007년 횡령 혐의로 재판받다가 도피한 정태수 전 한보그룹 회장, 4조원대 다단계 사기 사건을 저지르고 2008년 중국으로 밀항한 조희팔 등이다. 그런데 두 사람도 끝이 좋지 않았다. 여러 나라를 거쳐 에콰도르에 정착한 정 전 회장은 가짜 신분증을 사용하며 추적을 피했지만 결국 도피 11년 만에 숨졌다. ‘외국인 무연고자 사망’으로 처리됐고, 장례 비용은 약 100만원이었다. 조희팔도 도피 3년 만에 중국 호텔방에서 심근경색으로 숨졌다고 한다. 언제든 잡힐 수 있다는 불안이 있었을지 모른다.
▶쌍방울그룹 비리 의혹에 대한 검찰 수사가 본격화된 지난 5월 해외로 도피한 김성태 전 회장이 여성들을 자기 도피처로 수차례 오게 했다고 한다. 조폭 출신이자 쌍방울 실소유주로 알려진 그가 회사 직원에게 연락해 서울 강남의 고급 유흥업소, 이른바 ‘텐프로’ 룸살롱 여성 종업원을 보내라고 지시했다는 것이다. 한식과 횟감을 공수해 먹기도 했다고 한다. 상상을 넘는 ‘황제 도피’다. 검찰로선 농락당하는 기분일 것이다.
▶검찰은 그의 여권을 무효화하고 인터폴에 적색 수배를 요청했다. 해외 도피 사범에 대해 취할 수 있는 조치가 사실상 이것밖에 없다.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지 못하게 한 뒤 그물 망을 쳐놓고 걸려들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러니 가짜 신분을 사용하거나 외진 곳에 숨으면 잡기가 쉽지 않다. 김 전 회장도 그걸 모를 리 없다. 검찰은 다른 수단을 찾아야 한다. 김 전 회장 도피의 결말은 무엇일까.
10.03(월) 장관 스토킹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1997년 여름이었다. 자정을 조금 넘긴 시각, 파리 중심부의 리츠 호텔에서 벤츠 S클래스 승용차 한 대가 빠져나왔다. 찰스 3세 영국 국왕의 전 부인인 다이애나 빈, 그녀의 이집트계 애인인 도디, 그리고 앞 좌석엔 운전기사와 경호원이 타고 있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오토바이를 탄 파파라치들이 따라붙었다. 이들을 뿌리치려고 운전기사가 가속 페달을 밟았지만 파파라치도 이골이 난 프로들이었다.
▶결국 도심을 시속 100km 넘게 달리던 벤츠 승용차는 센강 변 지하차도에서 교각을 들이받고 나뒹굴었다. 셋은 현장 즉사, 다이애나는 오전 4시에 숨졌다고 공식 발표됐다. 그날 부리나케 현장에 가봤으나 폴리스 라인 저쪽에 부서진 파편들만 처참했다. 그때처럼 언론의 취재 윤리에 관한 논란이 뜨거웠던 적도 없다. 취재원의 의사에 반하는 접근은 얼마만큼 허용될 수 있는가.
▶사실 취재원을 만나서 녹음기 꺼내고 수첩에 받아 적는 전통적인 방법으론 특종이 힘들다. 그래서 선배에게 요령을 배운다. ‘뻗치기(하리꼬미)’ ‘귀대기’ ‘위장 취재’ ‘쓰레기통 뒤지기’ ‘잠입 취재’ 같은 것들이다. 가장 대표적인 방식인 뻗치기는 취재원의 집 앞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는 일인데 우직하지만 의외의 효과도 있다. 그러나 ‘미행(尾行) 취재’는 처음 듣는다. 해외로 내뺐던 범죄자가 귀국했을 때 취재 차가 공항에서 검찰 청사까지 따라붙기도 하지만 엄연히 언론사 로고가 찍혀있다.
▶최근 친민주당 쪽 유튜브 채널 관련자가 한동훈 법무장관의 관용차를 미행하다 발각됐다. 당연히 스토킹 처벌법에 저촉될 수 있다. 마치 흥신소 직원이라도 된 듯 취재원 모르게 집에서 직장으로, 그리고 반대 경로를 따라 다니는 것은 윤리적 일탈이 아니라 범법 행위다. 신당역 스토킹 살인 사건으로 충격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이런 일이 터졌다. 북미와 유럽 쪽 정치인·공직자는 30~93%가 괴롭힘과 스토킹을 당한다는 조사도 있지만 ‘얼굴 없는 미행자’는 아니다.
▶어떤 범죄학자는 스토킹을 7가지로 분류한다. 전 배우자, 연쇄 범죄자, 구애가 거절된 자, 연예인 사생팬, 정치적 목적, 청부 살인, 복수 등이다. 한동훈 장관에 대한 유튜버 미행은 ‘정치적 목적’도 의심될 뿐 아니라 ‘정당한 이유’도 희박하다. 그 행위를 언론 활동으로 볼 것이냐도 논란이다. 작년 11월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부인 김혜경씨 경우도 그랬다. “누군가 미행한다”는 신고가 접수되자 경찰은 법 위반으로 보고 기자에게 경고 조치를 내렸다.
/김광일 논설위원
10.04 축구장 난동

1969년 온두라스와 엘살바도르의 월드컵 지역 예선전은 전쟁으로 비화했다. 1차전이 온두라스에서 열리자 홈팀 응원단이 엘살바도르 선수단 숙소에 몰려가 밤샘 소란으로 수면을 방해했다. 경기에서 패한 엘살바도르는 자국에서 열린 2차전 때 온두라스 선수단 음식에 설사약과 수면제를 넣어 보복했다. 2차전에 이어 최종전까지 엘살바도르가 승리하자 온두라스는 자국 내 엘살바도르인을 추방했다. 분노한 엘살바도르가 온두라스로 쳐들어가며 전쟁이 시작됐다. 닷새 만에 휴전했지만 종전까지는 10년 걸렸다.
▶사람 잡는 흉기가 난무하는 대표적 경기도 축구다. 유고 내전 당시 세르비아 민병대 지도자였던 라즈나토비치는 축구 구단주이기도 했다. 자기 팀 서포터를 시켜 라이벌 팀 선수를 납치·감금하고 상대팀 응원단을 총살했다.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 자책골을 넣은 콜롬비아 수비수는 귀국 후 총탄 12발을 맞고 절명했다. 한국 축구팀도 몇 해 전 중동에서 올림픽 예선전을 치를 때 경기장에 날아든 폭죽에 선수가 다치는 위험한 상황을 겪었다.
▶인도네시아 자바에서 지난 주말 열린 축구 경기에서 수백명이 죽거나 다치는 참사가 빚어졌다. 1964년 아르헨티나-페루전에서 328명이 숨진 이후 최악의 인명 피해다. 대규모 인명 사고는 대개 난동 자체보다 진압 과정에서 발생한다. 이번 참사는 물론이고 몇 해 전 100여 명이 사망한 가나 참사도 경찰이 진압에 나서자 출구로 한꺼번에 몰린 관중이 넘어지며 발생했다. 축구장 난동을 예방하지 못하면 대형 사고로 이어진다.
▶이런 이유로 엄벌이 대세이지만 효과는 한계가 있다. 스위스는 폭죽을 터뜨린 관중에게 3년 징역에 10년간 경기장 출입까지 금지했다. 이탈리아는 경기장에 난입만 해도 징역 6개월에 처하는 법을 만들었다. 그러나 흥분이 극에 달한 관중은 처벌받을 것을 알아도 제어가 안 된다.
▶“악당은 나쁜 짓 하고 선인은 착하게 군다”는 견해를 성향주의라고 한다. 그러나 사회심리학에선 개인의 성향보다 주변 상황이 더 중요하다고 반박한다. 군중 속에 있으면 선량한 이도 평소 하지 않던 행동을 한다는 것이다. 축구장뿐 아니라 많은 사람이 운집하는 모든 곳이 해당한다. 남자들이 예비군복만 입으면 아무렇게나 행동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운동 경기 특성상 자신과 응원팀을 동일시하는 정체성 융화가 더해지면 인간은 난폭해진다. 사고 치지 않으려면 흥분을 가라앉힐 수단을 준비해야 한다. 영국은 “가족과 함께하는 축구장”이란 표어를 만든 후 그나마 훌리건 난동이 줄었다고 한다.
10.05 내 안의 네안데르탈인

/일러스트=박상훈
1856년 독일 뒤셀도르프 근처에서 오래된 사람 뼈가 나왔다. 네안더 계곡에서 발견된 이 뼈에 ‘네안데르탈인’이라는 이름을 붙인 박물학자 요한 풀로트는 “선사 시대에 다른 인류가 있었다는 증거”라고 했다. 2년 뒤 찰스 다윈이 ‘종의 기원’을 출판하자 풀로트의 주장은 힘을 얻었다. 4만년 전 멸종한 이 네안데르탈인의 유전자가 현대인의 몸 속에 살아 있다는 것을 증명한 스웨덴 출신 스반테 페보 박사는 엊그제 올해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당초 네안데르탈인은 사람보다 원숭이에 가까운 존재로 인식됐다. 제대로 걷지 못하고 아래턱도 크게 튀어나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됐다. 하지만 유전자(DNA) 분석과 화석 연구를 통해 복원한 네안데르탈인은 금발에 하얀 피부의 현대 유럽인과 비슷했다. 근력과 신체 능력도 우리 직계 조상인 호모 사피엔스보다 월등했고 도구를 사용하며 집단생활을 했다. 열등하다는 착각은 초창기 발견한 네안데르탈인이 심한 관절염을 앓아 구부정했고, 이가 다 빠져 있었기 때문에 생긴 오해였다.
▶페보는 2006년부터 전 세계의 네안데르탈인 뼈 샘플을 모아 PCR(유전자 증폭)과 분석을 반복했다. DNA 조각 하나를 분석하기 위해 기계를 6000번씩 돌린 끝에 2010년 30억쌍의 네안데르탈인 유전체 지도를 완성했다. 아프리카인을 제외한 모든 인류의 DNA에 네안데르탈인 유전자가 1~4% 섞여 있다는 결과가 나왔다. 아프리카에서 태어난 호모 사피엔스가 유럽과 중동으로 대규모 이주하면서 원주민인 네안데르탈인과 피를 섞고 자식을 낳았다는 증거였다.
▶'총, 균, 쇠’를 쓴 제러드 다이아몬드와 ‘사피엔스’의 유발 하라리는 네안데르탈인이 호모 사피엔스의 학살로 멸종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두 종족이 피를 섞었다는 페보의 연구는 다른 가능성을 제시한다. 학살이 아니라 공존과 다툼을 반복하다가 환경에 좀 더 적합한 호모 사피엔스가 살아 남았다는 것이다. 네안데르탈인 유적 어디에서도 대규모 학살이나 전쟁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우리 안의 네안데르탈인 유전자는 비만, 당뇨 같은 만성질환의 원인이다. 혹독한 환경에서 살았던 네안데르탈인은 적게 먹고도 생존하기 위해 빠르게 지방을 축적시키도록 진화했다. 하지만 수렵과 채집을 하지 않는 현대인에게는 이런 유전자가 불행의 씨앗이다. 남성형 탈모도 네안데르탈인 유전자가 만든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왜 먼 조상과 인류의 기원에 대해 연구해야 할까. 네안데르탈인의 유전자가 명확한 답을 주고 있다.
박건형 논설위원
10.06 자유인 김동길
김동길 교수는 서양문화사 강의를 연세대 강의실이 아니라 강당에서 했다. 2000명이 넘는 수강생을 수용할 강의실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출석부가 77쪽에 달했다. 출석 체크가 불가능했다. 그래도 결석자는 적었다. 청강생이 더 많이 들어와 강당 정원을 초과할 때가 많았다. 그의 강의는 힘이 있었고 유머가 넘쳤다. 김 교수를 흉내 낸 최병서의 개그보다 그의 강의가 더 웃겼다. 엄청난 인기였다.

▶글과 말에서 동시에 달인은 드물다. 김 교수는 드문 사람이었다. 타고났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20여 년 동안 매일 아침 6시 미국 한인 방송을 통해 강연을 했다. 방송국 사정 때문에 갑자기 결방 소식을 들은 날에도 카메라 앞에서 그냥 강연했다고 한다. 글도 200자 원고지 석 장씩 매일 썼다. 김 교수는 “혼수상태가 될 때까지 글을 쓰겠다”고 했다. 실제로 병석에 들기 직전인 지난 설날까지 글을 올렸다.
▶그는 강골이었다. 대학 때 도봉산으로 단체 친목회를 갔다가 깡패들을 만났다. 가진 것을 내놓으라고 협박당했다. 김 교수 혼자 다 때려눕혔다. 당시 유일한 여학생이던 고(故) 심치선 교수의 생전 증언이다. 그런 분이 하루 한 끼만 드셨다. 자택에서 식사를 함께 해보고 의문이 풀렸다. 그릇 크기가 대단했고 양도 상당했다. 비상한 기억력도 유명했다. 시 300수를 외웠다고 한다. 몇 편 암송을 부탁한 적이 있다. 시마자키 도손, 윤선도, 윌리엄 워즈워스의 시 3편을 순식간에 암송했다. 김 교수는 “키를 눌렀는데 시가 안 나온다? 그때가 인생 끝나는 때”라고 했다.
▶손윗누이인 고 김옥길 선생처럼 그도 사람을 좋아했다. 대문을 열어 놓고 살았고 종종 자택에서 냉면 모임을 했다. 많은 식객이 신세를 졌다. 그 가운데 부하까지 몰고 와 냉면을 가장 많이 먹고 간 사람은 5공 때 김 교수를 핍박했던 전두환 전 대통령이었다. 50여 명이 100그릇 넘게 먹고 빈대떡까지 싸갔다고 한다. 노년엔 여든 넘은 지인들과 함께 100세 클럽을 만들었다. 멤버였던 백선엽 장군과 김병기 화백이 백 살을 넘기고 세상을 떴다. 김형석 교수와 김창묵 선생은 여전히 건재하다.
▶11년 전 생일, 김 교수는 세브란스병원 의료원장에게 편지를 보냈다. “내가 죽으면 장례식, 추모식은 일체 생략하고 내 시신은 의과 대학생들의 교육에 쓰여지기 바란다”고 했다. 그리고 “누가 뭐래도 이 결심은 흔들리지 않는다”며 도장까지 찍었다. 그는 일생 자유민주주의를 전파하면서 살았다. 가는 길도 자유인이었다.
10.07 미사일 오작동
2012년 7월 동해. 이지스함 세종대왕함에서 국산 대잠(對潛) 미사일 홍상어가 발사됐다. 홍상어는 날아가다 적 잠수함 부근 상공에서 물속으로 들어가 목표물을 스스로 찾아가는 방식의 ‘미사일+어뢰’이다. 당시 목표물은 20㎞ 떨어진 수면 60m 아래의 컨테이너였다. 홍상어는 10여㎞를 날아간 뒤 낙하산이 펴지면서 정상적으로 바닷속으로 들어갔지만 이내 실종됐다.

▶홍상어는 2004년부터 1000여 억원을 들여 개발한 뒤 2009년부터 실전 배치된 무기였기 때문에 군과 업체에 비상이 걸렸다. 실전에 배치된 지 3년이 지난 무기가 ‘행방불명’된 것이다. 문제점을 확인하고 개선하기 위해 8발을 추가로 시험 발사했지만 5발만 명중하고 3발은 또 수중에서 유실됐다. 어렵게 원인을 찾아냈다. 어뢰가 입수(入水)할 때 충격으로 일종의 ‘뇌진탕’을 일으킨 것이었다. 1발당 20억원에 달해 4발만 쏴본 뒤 3발이 명중하자 성급하게 실전 배치한 탓이었다.
▶어뢰나 미사일 실패는 우리나라에서만 벌어지는 일은 아니다. 북한도 2016년 연속 실패했다. 사거리 3000~4000㎞의 중거리 탄도미사일인 무수단을 총 8차례 발사했지만 7차례나 실패했다. 발사 직후 공중 폭발하거나 엉뚱한 방향으로 날아간 적도 있었다. 당시 미국이 사이버 전자전을 의미하는 ‘발사의 왼편(Left of Launch)’ 작전으로 무수단의 연속 실패를 만들어냈다는 외신 보도도 있었다.
▶미국과 러시아, 중국 등 미사일 선진국들도 예외는 아니다. 지난 7월 미 캘리포니아주 반덴버그 공군기지에서 새 ICBM(대륙간탄도미사일)용 로켓인 ‘미노타우로스Ⅱ’가 발사 직후 11초 만에 공중 폭발했다. B-52 폭격기에서 발사되는 AGM-183A 극초음속 미사일도 성공과 실패를 되풀이하고 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전 개전 1100발 이상의 각종 미사일을 발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미 국방부는 러 미사일 실패율이 최대 60%에 달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러시아 대공 미사일이 발사 직후 유턴해 발사 장소로 되돌아가 러시아군을 덮친 것은 그중에서도 충격적이었다.
▶지난 4일 우리 군 현무-2C 미사일이 발사 직후 추락했다. 워낙 비싼 비밀 무기여서 개발 과정에서 많이 쏴보지 못했을 것이라는 얘기도 나온다. 10년 전 홍상어 미사일의 경우와 비슷한 사례일 수 있다는 것이다. 북한은 이제 중장거리 미사일에서 보기 드물게 높은 성공률을 보이고 있다. 무수한 실패가 ‘약’이 된 것이다. 무기만이 아니라 모든 개발의 역사가 그렇다.
10.08(토) 국력 한일 역전?

/일러스트=박상훈
10여 년 전 일본에서 ‘버블로 GO!’라는 코미디 영화가 히트를 쳤다. 1980년대 버블 시절에 대한 일본인의 추억을 자극한 것이 주효했다. 심야 택시를 잡느라 만 엔짜리 돈다발을 흔드는 회사원, 가지도 않을 회사를 몇 군데 돌면서 면접비를 받아 유흥비로 탕진하는 대학생들이 등장한다. 80년대 당시 미국은 일본의 산업 경쟁력에 공포를 느끼며 일본 반도체 산업을 죽이고, 엔화 가치를 강제로 끌어올렸다.
▶엔화 강세 덕에 일본 국민소득은 2000년 세계 2위(3만9173달러)까지 올라갔다. 당시 한국의 국민소득은 일본의 3분의1 수준(1만2263달러)이었다. 그 후 20년, 한국 소득이 3배(3만3801달러)로 뛰는 동안 일본은 마이너스 물가 탓에 고작 167달러 늘었다. 구매력 기준 1인당 GDP는 한국(4만3319달러·2020년 기준)이 일본(4만1775달러)을 이미 추월했다.
▶미국 명문 와튼스쿨과 마케팅 기업이 공동 조사한 ‘2022년 세계 국력 순위’에서 한국이 6위로 일본(8위)을 제쳤다. 국가의 민첩성, 기업가 정신 등 요소 10가지를 묶어 주관식 점수로 순위를 낸 것이다. 국력 쇠퇴는 일본인 스스로도 절감하고 있다. 니혼게이자이 신문이 최근 실시한 국력 평가 여론조사에서 일본인들은 정치력(강하다 5%, 약하다 58%), 군사력(강하다 9%, 약하다 50%), 외교력(강하다 5%, 약하다 61%) 등 모든 분야에서 국력이 쇠퇴했다고 자평한다.
▶한국의 성장과 일본의 쇠퇴는 디지털 전환기 적응 여부가 갈랐다는 평가가 많다. 반도체, 스마트폰, 5G 등 첨단 IT 분야에서 한국이 일본을 추월했다. 세계를 제패했던 일본 만화 산업은 IT 경쟁력을 앞세운 한국 웹툰에 무너지고 있다. 일본에서 만화 앱 이용률 1~2위를 한국 네이버·카카오 자회사들이 차지하고 있다. 한국이 코로나 선별 지원금 지급을 2주 만에 완료한 반면 일본은 전 국민에게 10만엔씩 똑같이 나눠주는 코로나 지원금 지급에도 6개월이나 걸렸다.
▶그렇다고 일본을 얕볼 순 없다. 일본의 대외 순자산은 3조1500억달러로 한국의 7배에 이른다. 한국이 고소득 월급쟁이라면 일본은 거액 자산가다. 일본은 100년 넘는 장수 기업을 3만3000곳, 세계 시장 점유율 1위 중소기업을 1000곳 넘게 갖고 있다. 한국은 이제 겨우 자체 로켓을 개발했지만 일본은 소행성에 우주선을 보내 흙을 퍼 올 정도의 기술을 갖고 있다. 일본은 여전히 기술 대국이다. 그 경쟁력을 얕보았다가는 큰코다칠 수 있다.
10.10(월) 이젠 ‘군산 홍어’ 시대
정치권에서 홍어는 호남 권력의 상징이었다. 특히 김대중 전 대통령의 홍어 사랑이 남달랐다. 1988년 평화민주당 시절 총재였던 그는 주요 행사가 있을 때면 홍어를 당사로 공수했고, 나중에 장남인 김홍일 전 의원 등이 그 전통을 이어받았다. ‘당 상징 음식’이었던 셈이다. 2005년 2월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가 한화갑 민주당 대표 취임을 축하하는 뜻으로 홍어 두 마리를 선물하기도 했다.

▶홍어 중 으뜸은 단연 전남 신안의 흑산도 홍어였다. 껍질이 얇고 부드러워 최상품으로 쳤다. 그 홍어가 목포는 물론 영산포를 통해 나주로, 또 광주로 들어가면서 호남 지역 대표 음식이 됐다. 본래 흑산도 사람들은 홍어를 날것으로 먹었는데 육지로 가면서 삭아, 삭힌 홍어가 육지 사람들에게 대중화됐다. 홍어는 그 맛을 코, 애, 날개, 꼬리 순으로 매길 만큼 버릴 것도 없다.
▶TV 드라마 ‘대장금’엔 장금이가 생선회를 먹는 장면이 나온다. 한 상궁이 이름도 안 알려주고 먹어보라고 건넨 것이었다. 마지못해 회를 오물오물하던 장금이가 이렇게 말한다. “자꾸 씹으니 맛이 납니다. 육질도 차지고 처음엔 코끝이 찡하고 다음엔 입안이 상쾌하고 그 뒤끝의 맛은 청량합니다.” 그 생선이 홍어였다. 이게 홍어 맛 아닐까 싶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홍어를 임금에게 올리는 진상품으로 썼다는 기록도 있다.
▶흑산 홍어는 값이 비싸다. 최근에도 흑산도에선 8kg급 암컷 홍어가 42만원 선에서 위판되고 있다고 한다. 한때 국산 홍어가 품귀 현상을 빚자 칠레산 홍어가 몰려든 적이 있다. 2005년 3227t가량 수입됐다. 이후 칠레 정부가 남획을 우려해 수출을 규제했을 정도였다. 그렇다고 수입 물량이 크게 준 것은 아니다. 지난해 홍어 수입량이 4614t이었는데, 그중 아르헨티나산이 절반가량을 차지했다. 칠레산은 8% 수준으로 쪼그라들었다.
▶최근 전북 군산 앞바다에서 홍어가 많이 잡히고 있다고 한다. 2017년 4t 정도였는데 지난해 1417t으로 급증했다. 전국 어획량의 45% 수준으로, 흑산도가 있는 신안보다 3배가량 많다고 한다. 2020년 신안 어획량을 앞서더니 격차를 더 벌렸다. 바닷물 온도가 오르면서 난류성 어종인 홍어 서식지가 군산까지 올라간 것으로 전문가들은 추정한다. 전북도와 군산시는 특화 상품 개발에 나서기로 했다고 한다. ‘군산 홍어 시대’를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머지않아 흑산도가 ‘홍어 1번지’ 자리를 내줘야 할지 모르겠다.
10.11 20세 골퍼 김주형
호주 멜버른에 살던 일곱 살 김주형은 골프 티칭 프로인 아버지 손에 이끌려 타이거 우즈가 출전하는 대회를 보러 갔다. 그날 이후 “나도 우즈처럼 되고 싶다”는 소망을 품었다. 꿈이 큰 사람은 사소한 어려움 앞에 담대해진다. 소년 김주형도 그랬다. 열여섯 살에 자기만의 클럽이 생길 때까지 여기저기서 얻은 클럽을 들고 대회에 나갔다. 온 가족이 중국·필리핀·태국 등 다섯 나라를 전전하며 윤택하지 않은 소년 시절을 보냈다. 그래도 주눅 들지 않고 당당했다.

▶김주형은 ‘스포츠 스타는 실력만으로 관객을 매료시키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선수다. 지난 8월 윈덤 챔피언십 첫 홀(파4)을 이른바 ‘양파’(쿼드러플 보기)로 출발했을 때, 그의 우승을 예견한 이는 없었다. 세계적 선수조차 비슷한 상황에서 포기하고 가방을 싸곤 한다. 김주형의 경기를 지켜본 이들은 끝까지 도전하는 그에게 반했다. 다른 선수들도 자극을 받았다. 올해 투어챔피언십에서 우승한 로리 맥길로이는 첫날 트리플 보기를 했지만 김주형을 떠올리며 “나도 포기하지 말아야겠다” 다짐했다고 한다.
▶PGA 첫 우승으로 혜성같이 등장한 김주형은 불과 두 달 만에 또다시 우승컵을 거머쥐었다. 타이거 우즈 이후 처음으로 21세 이전 PGA 투어 2승을 거뒀다. 2승 달성 당시 나이가 우즈는 20세 9개월인데, 김주형은 20세 3개월로 더 빠르다. 소셜미디어엔 ‘스타 탄생’이란 갈채가 쏟아진다. PGA 82승을 올린 ‘골프 황제’ 우즈와 비교하는 분석들도 쏟아지고 있다.
▶김주형은 쇼맨십에도 능하다. 지난달 미국과 세계연합팀 골프 대항전인 프레지던츠컵 18번 홀에서 3m 내리막 버디 퍼트에 성공한 뒤 타이거 우즈처럼 포효했다. 모자를 내던지고 어퍼컷 세리머니를 하는 그에게 ‘최고 활력 책임자’(CEO·Chief Energy Officer)란 별명이 붙었다.
▶고대 그리스 비극(悲劇)은 명칭과 달리 슬픈 이야기가 아니다. 그리스 비극에서 영웅은 승자가 아니라 고난과 맞서 싸우며 삶의 숭엄함을 증명하는 이다. 세계 무대를 뛰는 우리 청년들은 그런 의미에서 현대의 영웅들이라 할 수 있다. 하루 15시간 건반을 두드려 반 클라이번 콩쿠르 정상에 선 피아니스트 임윤찬, 피나는 연습으로 숨조차 흐트러지지 않는 칼 군무의 경지에 오른 K팝 스타들이 그들이다. “무슨 일이든 잘할 때까지 좋은 습관을 반복해 몸에 배면 놀라운 힘을 발휘한다”며 필드에 서는 20세 김주형도 땀의 위대한 가치를 곱씹게 한다.
10.12 북의 ‘창의적’ 도발

/일러스트=박상훈
지난 2012년 3월 북한 공군이 하루에만 650여 차례나 전투기들을 띄워 한·미군에 비상이 걸린 적이 있다. 평상시엔 100여 회, 동계훈련 기간에도 많아야 하루 300~400여 회였다. 김정은이 그해 초 공군부대를 집중적으로 시찰한 뒤 북한 공군이 충성 경쟁을 벌인 것으로 분석됐다. 그 이듬해엔 하루 비행 횟수가 700회까지 늘어나는 기록을 세운 뒤 북 전투기들의 비행은 다시 잠잠해졌다.
▶북한이 지난 8일 단일 출격 규모로는 사상 최대인 150대 동시 출격을 기록했다고 주장해 진위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전체 810여 대 북 전투기 중 비교적 신형기 비율은 10% 정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북한은 6·25전쟁 때 투입됐던 미그-15까지 출동시켰다고 한다. 실제 뜬 비행기는 수십 대 수준이라는 얘기도 나온다.
▶하지만 북한 주장을 허장성세로 보기 힘든 측면도 있다. 지난 2010~2012년 북한은 GPS 교란 장비로 우리 항공기와 민간 선박 등을 괴롭혔다. 3년간 항공기 1137대, 함정 4척, 선박 225척, 어선 36척 등 총 1402대의 기기와 장비가 전파 교란의 영향을 받았다. 북 GPS 장비의 가격은 대당 수십만원에 불과했다. 북한 입장에선 ‘가성비 갑’ 무기인 셈이다.
▶김정은이 ‘만능 보검’이라 했던 사이버전, 해커부대들도 대표적인 북한의 가성비 갑 무기다. 북 해커들은 각종 군사기밀을 빼내는 것 외에도 수조원대 가상화폐를 해킹해 김정은 정권의 생명줄 역할을 하고 있다. 북한의 ICBM 이동식 발사대는 원래 중국 특수차량을 밀수입한 것으로 10대 미만이었다. 한·미 정보 당국은 북한 기술로는 중국제와 비슷한 ICBM 이동식 발사대를 만들기 어려워 ICBM 숫자를 늘리기 어려울 것으로 봤다. 하지만 북한은 중국제를 개량해 세계에서 가장 큰 ‘괴물 ICBM’ 화성-17형 이동식 발사대를 만들어냈다.
▶북한이 전문가들을 놀라게 한 이른바 ‘창의적 도발’의 압권은 엊그제 공개된 저수지 발사 SLBM(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이었다. 물론 저수지 발사가 겨울에는 쏘기 어렵고 가뭄에는 수중발사대가 노출되는 등 한계도 있다. 합참 관계자는 “우리의 ‘킬 체인’(Kill Chain) 능력을 의식한 궁여지책으로 생각한다”며 평가절하했다. 하지만 북한은 도발 궁리만 하는 집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돈은 없지만 엄청난 노력으로 이를 상쇄하고 있다. 북한의 궁여지책이 ‘궁즉통(窮則通)’이 되면 우리에겐 악몽이 된다.
유용원 논설위원·군사전문기자
10.13 대통령 부인의 여행

대통령 부인에 대한 예우는 나라마다 조금씩 다르다. 미국은 예산과 직원을 쓸 수 있는 법적 지위를 부여한다. 단독 대외 활동도 많다. 힐러리 클린턴, 미셸 오바마 여사는 퍼스트레이디 시절 ‘나 홀로 순방’으로 대통령 못지않은 영향력을 과시했다. 조 바이든 대통령 부인 질 바이든 여사도 지난해 단독으로 도쿄올림픽 개회식에 참석하고, 지난 5월에는 예고 없이 우크라이나 서부 지역을 방문해 젤렌스키 대통령 부인과 만났다.
▶프랑스는 2017년 마크롱 대통령이 아내에게 법적 지위를 부여하는 방안을 추진했다가 “대통령 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정부 예산을 지원해야 하느냐”는 반대 여론에 부딪혀 철회했다. 어느 나라든 대통령 부인은 자신과 가족에게 엄격한 모습을 보일 때 국민의 사랑을 받는다. 육영수 여사는 자녀들에게 “청와대에서 쓰는 물건들은 국민의 세금으로 산 것이니 종이 한 장도 개인 용도로 쓰면 안 된다”고 가르쳤다고 한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대학 다닐 때도 새 옷을 사주는 대신 자신이 입던 옷을 손봐서 입혔다고 한다.
▶한국에선 대통령 부인의 단독 해외 방문은 거의 없었다. 현직 대통령 부인의 단독 해외 방문 사례는 김대중 전 대통령 부인 이희호 여사가 유일했다. 2000년 미국 국가 조찬기도회 초청을 받아 5박 6일간 미국을 방문했는데 대통령 전용기 아닌 민항기를 이용했다. 그 희귀한 기록에 문재인 전 대통령 부인 김정숙 여사가 이름을 올렸다. 2018년 인도를 단독 방문했다. 이때 청와대 요리사까지 대동했다는 사실이 최근 밝혀졌다. 대한민국 대통령 휘장이 붙은 전용기도 탔다. 장관급이 아니라 대통령 부인이 가면서 비용이 2500만원에서 3억4000만원가량으로 늘었다고 한다. 국민 세금을 엄격하게 쓴 것일까.
▶김 여사가 문 전 대통령과 함께 해외에 나간 건 48차례라고 한다. 이희호, 권양숙, 김윤옥 여사는 24~27회 정도였다고 하니 배 가까이 많다. 이집트에서 문 전 대통령과 떨어져 단독으로 피라미드를 방문하고 노르웨이에서도 뭉크미술관을 따로 관람했다고 한다. 대통령 부인이 해외에서 독자 활동을 할 수 있지만 김 여사 경우는 유독 관광지가 많았다.
▶우리나라는 대통령 배우자의 권한, 의무 등에 대한 법규가 없다. 경호 대상으로 규정한 법이 있을 뿐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부인 의전을 담당하는 청와대 제2부속실도 없앴다. 그러나 대통령의 배우자에게도 국민 세금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 이 세금이 제대로 쓰이는지 국민이 알아야 한다.
10.14 히잡이 뭐길래
무슬림 여성이 머리에 두르는 히잡의 기원은 수천년 전 메소포타미아 수메르 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는 귀부인만 입을 수 있는 옷이었다. 성경에서 유래를 찾기도 한다. 창세기에 나오는 레베카는 남편 이사악과의 첫 만남 때 너울을 꺼내 얼굴을 가렸다. 유다가 너울로 얼굴 가린 며느리를 매춘부로 착각했다는 대목도 있다. 고대 중동에선 매춘부가 베일을 썼다는 기록도 있다.

▶이슬람교를 연 예언자 무함마드는 히잡 착용을 강요한 적이 없다. 그런데 후대 이슬람 율법학자들은 ‘밖으로 드러내는 것 외에는 유혹하는 어떤 것도 보여서는 안 된다’는 코란 구절을 근거 삼아 여성에게 히잡을 쓰라고 했다. 히잡의 원래 뜻도 두건이 아니라 ‘장막’ 또는 ‘분리’다. 애초에 여성을 남성 세계에서 격리하려는 의도가 깔린 명칭이다.
▶사우디아라비아는 ‘남자는 알라에, 여자는 남자에게 복종한다’고 가르친다. 히잡보다 여성의 몸을 더 많이 가리는 ‘아바야’를 입혔다. 여자는 남성 후견인이 동의해야 진학·취업·결혼할 수 있었다. 외출하려면 코흘리개 남자 손이라도 잡아야 했다. 여성 운전도 금지였다. 여자가 몰 수 있는 것은 범퍼카뿐이란 우스개가 돌았다. 탈레반이 재집권한 아프가니스탄은 눈까지 망사로 가리는 부르카를 강요한다. 저항하면 총살했다.
▶이란에서 히잡을 제대로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도덕 경찰’에 체포된 22세 여성이 의문사하며 촉발된 항의 시위가 13일로 한 달을 맞았다. 200명 넘게 희생됐지만, 여성들은 히잡 벗은 얼굴 사진을 소셜미디어에 올리고 거리에선 ‘여성, 삶, 자유’ 등의 구호를 외치며 저항하고 있다. 젊은 남성들까지 가세해 “이슬람 공화국을 원하지 않는다”고 외친다. 인간은 인간답게 살고 싶어한다. 많은 무슬림 여성이 다양한 꽃무늬와 기하학 문양으로 장식한 히잡을 쓴다. 애틋한 느낌도 든다.
▶1979년 이슬람혁명 이전의 이란은 자유로운 나라였다. 여성이 거리낌 없이 미니스커트를 입었다. 많은 이란인이 그때를 기억하고 있다. 이슬람에서 히잡을 벗으려는 움직임은 한 세기가 다 되어 간다. 튀르키예 건국의 아버지 케말 아타튀르크는 1930년대에 공공장소에서 히잡 착용을 금지했다. 강경한 여성 억압 정책을 고수하던 사우디도 2017년 이후 여성 운전을 허용하고 후견인제를 완화하는 등 개혁에 나섰다. 사우디 여성들은 아직 부족하다고 한다. 배꼽티 입은 사진을 소셜미디어에 공개하며 “더 큰 자유”를 요구하고 있다. 이란은 언제까지 이런 흐름을 외면할까.
10.15(토) 보디 패커
미국에서 하늘길은 물론 바다 밑으로, 땅 밑으로 은밀하게 운반되는 물건이 있다. 바로 마약이다. 미국 정부가 아무리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해도 중남미 마약 조직들은 새 운반 루트를 개발한다. 그 대표적 인물이 ‘멕시코 마약왕’으로 불린 호아킨 구스만이다. 2015년 미국 법원에 제출된 문건엔 그가 마약 밀반입을 위해 미국과 멕시코 국경 지대에 땅굴을 파고, 잠수함·항공기까지 이용했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실제 적발된 내용도 대담하기 그지없다. 2011년 미국 경찰이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와 멕시코 티후아나 사이에서 길이 600m 마약 운반용 땅굴을 찾아냈는데 여기엔 환기 시설은 물론 운반용 전동 수레가 달릴 수 있는 레일, 수압식 엘리베이터까지 설치돼 있었다. 특히 이 땅굴의 멕시코 쪽 입구는 경찰서와 세관 건물에서 불과 100m 떨어진 곳에 있었다고 한다. 2년 전엔 역대 최장인 1313m 땅굴도 발견됐다.
▶3년 전엔 남미 콜롬비아에서 코카인 3t을 싣고 19일 만에 스페인에 도착한 잠수함이 스페인 경찰에 적발됐다. 유럽에서 ‘마약 잠수함’이 적발된 건 처음이었다. 20m 크기로 2m까지 물속에 들어갈 수 있게 설계된 잠수함이었다. 경로를 조사해보니 총 9000㎞를 항해한 것으로 드러났다. 올 7월엔 바다 건너 마약을 운반할 수 있는 잠수정 드론을 제작한 일당이 스페인 경찰에 체포되기도 했다. 위성항법 장치가 탑재돼 인터넷을 이용해 조종할 수 있는 신형 기기였다고 한다. 마약 밀수도 진화한다.
▶마약 업자들은 소량 운반을 위해선 마약 운반책인 이른바 ‘지게꾼’을 활용한다. 이런 지게꾼은 국내에서도 숱하게 적발된다. 생리대, 초콜릿, 믹스커피 봉지에 숨기는 등 방법도 다양하다. 이 중 가장 위험한 지게꾼이 마약을 신체 내부에 숨겨 운반하는 ‘보디 패커(body packer)’다. 보통 보디 패커로는 중남미나 동남아인들이 동원됐다. 2003년 페루에서 미국을 거쳐 한국 항공기를 타고 홍콩으로 향하던 페루인 보디 패커가 몸속에서 코카인 봉지 3개가 터져 숨지는 일도 있었다. 이들은 돈을 위해 목숨을 건다.
▶최근 서울에서 한 남성이 숨진 채 발견됐는데, 부검 결과 위장에서 마약 엑스터시가 한 알씩 담긴 봉지 200개가 발견됐다. 그중 79개가 터져 사망한 것이다. 한국인 보디 패커로는 첫 발견이다. 마약 업자들은 “밀반입되는 마약 중 약 5%만 적발된다고 보면 된다”고 말한다. 마약이 무섭게 번지고 있다. 더 많은 보디 패커가 우리 주변에 있을지 모른다.
10.17(월) 우크라 신병의 철모

주말 신문 1면에 우크라이나 신병의 뒤통수 사진이 실렸다. 영국에서 훈련받던 중 철모를 썼는데, ‘후회는 없다’ ‘자비도 없다’라고 위아래 두 줄이 쓰여 있었다. 결연하고 비장했다. 후회가 없다는 건 백척간두에 선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군인으로서의 각오다. 자비를 베풀지 않겠다는 건 조국 땅을 침범해 수많은 인명을 앗아간 러시아군을 결단코 용서하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사실 ‘철모(鐵帽)’가 정확한 말은 아니다. 총알과 파편이 쏟아지는 전쟁터에서 군인 머리를 보호하려는 헬멧은 원래 쇠로 만들었다. 그래 철모였다. 창칼로 싸웠던 시대에 투구를 썼던 것이나 비슷하다. 약점을 보완하려고 지난 30~40년 사이에 금속보다 훨씬 질기고, 튼튼하고, 가벼운 합성수지가 여럿 개발됐다. 플라스틱, 나일론, 강화섬유를 이용해 방호력이 뛰어난 헬멧을 만들고 있다. 소재를 따지지 말고 그저 방탄모로 부르는 게 낫다.
▶하지만 군용 헬멧의 대명사가 돼버린 ‘철모’의 추억은 한둘이 아니다. 예전엔 철모 안에 애인이나 연예인 사진을 넣어 다녔다. 우리 때는 브룩 실즈, 혜은이 사진이 인기였다. 지휘관들도 알고 있었으나 나무라지 않았다. 행군 중 휴식 시간에 철모를 거꾸로 깔고 앉으면 낚시 의자처럼 제격이었다. 이건 장교들이 보면 혼쭐을 냈다. ‘반합’이란 야외용 식기가 없을 땐 철모에다 물을 끓일 수도 있었다.
▶영국군은 원래 세숫대야라고 낮춰 부르던 ‘브로디 헬멧’을 썼다. 챙이 넓어서 떨어지는 파편을 잘 막아줬다. 프랑스군은 후두부 보호가 뛰어난 ‘아드리안 헬멧’을 사용했다. 미군은 원래 영국제를 카피해 쓰다가 나중에 ‘M1 철모’를 개발했다. 양차 대전 때 독일군 헬멧은 ‘슈탈헬름’이라고 불렀다. 금속 모자라는 뜻인데, 귀까지 덮는 독특한 모양이다. 영화에서 봤듯 나치 독일의 상징물처럼 됐다. 다 구시대 유물이다. 지금은 최첨단 소재와 기능을 갖춘 방탄모가 대부분이다.
▶몇 해 전 철원 화살머리 고지에서는 총알 구멍이 숭숭 뚫린 70년 전 녹슨 철모가 나왔다. 너 나 없이 가슴이 먹먹했을 것이다. 철모는 군기와 전통을 드러내는 표식이다. 한때 한국군은 M1형 ‘겉 헬멧’ 안에 유리섬유(파이버글라스)로 만든 ‘속 헬멧’을 끼워 썼다. 둘이 정확히 들어맞아야 덜그럭거리지 않았다. 똑소리 나게 생활 잘하는 병사를 “일병 하이바(파이버)!”라고 불렀다. “후회도 자비도 없다”는 병사, 그의 두 눈이 이글거리고 있을 것 같다.

▲11일(현지시간) 영국 남부 더링턴 인근에서 열린 우크라이나군 신병 훈련에 참가한 한 신병 방탄모에 '후회도, 자비도 없다'(NO REGRET, NO MERCY)라는 문구가 영문으로 적혀있다. /AFP 연합뉴스
/김광일 논설위원
10.18 네옴시티

몇 년 전 사우디아라비아의 한 스타벅스 매장에서 여성 형상의 세이렌을 지워버린 스타벅스 로고가 등장해 논란이 일었다. 이슬람 율법을 엄격히 적용하고 여성의 사회적 활동을 극도로 제한하는 사우디의 ‘와하비즘’ 전통 때문이었다. 사우디에서 근무한 적 있는 전직 외교관은 “아내 혼자 외출이 안 되니 사우디 근무가 아프리카 빈국에서 근무할 때보다도 힘들고 갑갑했다”고 말했다.
▶폐쇄적인 사우디에 변화의 바람을 몰고온 주인공이 무하마드 빈 살만(37) 왕세자다. 국제 외교가에서 ‘미스터 에브리싱(Mr. Everything)’ 또는 ‘MBS’라고 불리는 실세 중의 실세다. 지난달 빈 살만이 SF 영화에나 나올 법한 미래형 신도시 조감도를 발표했다. 사우디의 북서쪽 홍해 연안에서 출발해 서울~대전 거리인 170㎞ 길이로 선형 도시 ‘더 라인’을 만들겠다고 한다. 도시 외벽은 거울로 만들고, 지상에는 녹지 공간과 집을, 도로는 지하 터널로 대체하면서 도시의 끝과 끝을 20분 만에 주파하겠다는 구상이다. 수도 리야드의 인구가 768만명인데 사막에 건설하는 이 길쭉한 첨단 도시가 인구 900만명을 수용하는 거대 도시가 될 것이라고 한다.
▶170㎞의 길쭉한 도시 ‘더 라인’은 사우디가 추진하는 ‘네옴 시티’ 사업의 핵심 부분이다. 빈 살만은 탈(脫)석유의 ‘비전 2030′을 발표하고 사우디의 북서부에 서울의 44배 크기로 스마트 도시 네옴(Neom)시티를 추진하고 있다. 네옴시티는 새롭다는 뜻의 그리스어 ‘네오’와 미래를 뜻하는 아랍어 ‘무스타크발’의 첫 글자 M을 합친 단어다. 석유 종주국인데 기름 한 방울 안 쓰고 그린수소·태양광·풍력 등 친환경 에너지로만 작동하는 도시를 만들겠다고 한다.
▶산유국들은 언제 석유 산업이 정점을 찍고 내리막으로 돌아서느냐는 ‘피크 오일(Peak Oil)’에 관심이 많다. 친환경차가 등장하고 코로나 팬데믹을 계기로 항공 수요가 급감하면서 ‘피크 오일’이 앞당겨질 것이라는 우려도 커졌다. 그래서 산유국들도 탈(脫)석유 비즈니스 모델과 친환경 에너지로 작동하는 스마트 도시 구축에 눈길을 돌린다.
▶빈 살만 왕세자는 네옴시티와 2030 엑스포 유치로 리더십을 인정받으려는 듯 보인다. 네옴시티는 총사업비가 5000억달러(약 700조원) 넘는 대형 프로젝트다. 하지만 사우디와 부산이 2030 엑스포 유치를 놓고 경쟁 구도다. 빈 살만의 연내 방한이 무산됐다는데 사우디와 엇갈리는 이해관계 속에서 어떻게 국익을 키울지 지혜가 필요한 시점이다.
10.19 정치 ‘탑압’
최근 책을 읽다 ‘르포이센’이란 단어를 발견했다. ‘프로이센’의 오자이지만, 이런 오류를 찾아내는 게 명백한 오탈자 찾기보다 더 어렵다. 뇌과학에선 ‘뇌가 가진 선입견이 시각을 지배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눈으로 본다’는 것은 객관적 정보를 파악하는 게 아니라 뇌가 대상의 기억을 떠올려 연상하는 과정이다. 뻔히 눈앞에 있었던 것을 못 봤다고 하는 사람도 나온다. 여러 사람이 공 뺏기 놀이를 하는 와중에 고릴라 복장을 한 사람을 그들 가운데 들어가게 한 실험이 있었다. 놀이가 끝난 뒤 참가자들에게 물었더니 60%가 “고릴라가 있었느냐?”고 했다.

▶공에만 집중하느라 고릴라를 못 보는 현상을 ‘무주의 맹시(盲視)’라 한다. 무주의 맹시는 원래 생존을 위한 진화의 결과였다. 동물은 눈앞에 나타난 것이 천적인지 사냥감인지 단숨에 파악해야 했다. 꾸물대다간 목숨이 날아가거나 굶는다. 이때 뇌의 전두엽과 두정엽이 주변 풍경 등 덜 중요한 정보를 삭제한다. 복잡한 사회 관계를 맺고 사는 인간은 여기에다 호불호와 윤리 등의 가위질까지 더한다.
▶민주당 의원 17명이 그제 서울 대통령실 앞에서 윤석열 정부가 야당을 탄압한다며 항의 시위를 했다. 그런데 손에 ‘정치 탑압’이라고 잘못 쓰인 피켓을 들고 있었다. 어른 손바닥만 한 큰 글씨였는데도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다고 한다. 뇌가 ‘정치 탄압’이라는 기억을 꺼내 연상 작용을 하면서 ‘탑’이라는 커다란 글씨가 보이지 않은 것이다. 이 사진이 신문에 실리자 인터넷에선 ‘국어 탑압’이라는 풍자도 나왔다.
▶정치 탄압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민주당과 문재인 정권 사람들이 ‘정치 탑압 말라’는 피켓을 들고 엄숙하게 선 모습은 묘한 아이러니도 느끼게 한다. 문 정권 시절 혹독한 수사를 받다 극단적 선택을 한 전 정권 사람이 4명이었다. 전 정권 사람들의 징역 합계는 100년을 넘었다. KBS·MBC를 장악하려 김밥 값까지 문제 삼았다. 자신들의 잘못에 대해선 수사 뭉개기, 재판 질질 끌기로 흐지부지시켰다. 그래 놓고 야당이 되자 ‘정치 탄압 말라’고 한다.
▶뇌에 대한 지식이 없던 고대에도 인간은 눈이 마음의 지배를 받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기원전 1세기 로마의 시인·철학자 루크레티우스는 “정신의 과오를 눈에 전가하지 말라”고 했다. ‘탄압’을 ‘탑압’으로 쓰고서 못 본 것도 단지 눈의 잘못만은 아닐 것이다. 불과 얼마 전 자신의 모습에 두 눈을 다 감은 이들의 정신적 과오가 아닐까 한다.
10.20 갈치와 정치

▲은갈치
갈치는 먹잇감이 보이면 닥치는 대로 잡아먹는 어류다. 크기 25㎝ 이하인 치어 시기에는 젓새우 등 동물성 플랑크톤을, 그 이상으로 자라면 주로 오징어, 새우, 게 등을 먹지만 월동기와 산란기처럼 몰려 있는 시기에는 서로 잡아먹는 공식(共食) 현상이 많이 일어난다. 갈치 송곳니는 씹는 용도가 아니라 먹이가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붙잡는 용도다. 갈치는 먹이를 그대로 삼킨다. 그래서 월동기 등에 잡은 큰 갈치 배에서 작은 갈치가 나온다고 한다. 낙지와 꽃게도 서로 잡아먹는 어류다. 이런 어종 양식이 쉽지 않은 이유다.
▶반면 문어와 연어는 알을 낳고 부화하는 데 모든 에너지를 쓰고 죽는다. 암컷 문어는 짝짓기 전에는 활발하게 돌아다니지만 알을 낳으면 먹이 활동을 중단하고 굴 속에서 알 무더기를 지킨다. 이렇게 40일 정도 알 돌보기에 전념하다 새끼가 깨어날 즈음 죽음을 맞는다. 이런 모습을 보면 모성애가 무엇인지 숙연해지기도 한다. 연어도 알을 낳은 후 죽을 때까지 그곳을 지킨다. 알에서 깨어난 새끼들은 어미 연어의 살을 먹으며 자란다.

▶갈치가 서로 잡아먹는 습성을 갖고 있지만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생선 중 하나다. 최근 조사에서 오징어, 고등어에 이어 인기 순위 3위에 올랐다. 우리나라 근해에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온대 또는 아열대 해역에서도 살지만 서양 사람들은 갈치를 먹지 않는다. 낚시하다 잡히면 토막 내서 다른 어종의 미끼로 사용하지만 요리해 먹는 일은 드물다. 그래서 이민 간 사람들은 바닷가에서 낚시하다 갈치가 잡히면 회를 떠서 먹으며 향수를 달랜다고 한다.
▶민주당에서 ‘갈치 정치’라는 말이 나와 화제다. 이재명 대표가 지난 대선 패배 직후 주식 투자를 한 것이 알려지자 같은 당 전재수 의원은 “지지했던 숱하게 많은 사람이 널브러져 있는데 실망스러운 측면이 있다”고 했다. 그러자 친명계 안민석 의원은 ‘제 식구 잡아먹는 갈치 정치인’이라고 비판했다. ‘내부 총질’이라는 것이다. 이에 같은 당 조응천 의원은 “전 의원이 할 말을 한 것”이라며 “전 의원이 갈치라면 안민석 의원은 완전 대왕갈치”라고 맞받아쳤다.
▶'갈치 정치’인지 아닌지는 발언 내용이 얼마나 상식에 부합하느냐가 기준일 수밖에 없다. 대선 후보가 패배 직후에, 더구나 의원직 출마를 앞두고 수억원대 주식을 산 것은 누가 보아도 이상하다. 이상한 일을 이상하다고 지적한 것은 ‘갈치 정치’가 아니다. 정당에서 말을 못 하게 막는 일이야말로 ‘갈치 정치’일 것이다.
10.21 은마 아파트

서울 대치동 은마 아파트 자리는 비가 조금만 와도 물에 잠기는 저습지였다. 1970년대 서울시의 영동 구획정리로 네모반듯해진 이 땅을 세무공무원 출신 한보주택 정태수 회장이 헐값에 사들여 4400가구 아파트 단지를 지었다. 정 회장은 “물과 바람 기운이 모이는 곳이라서 반드시 성공할 명당”이라고 했다. 1978년 아파트 분양 당시 오일쇼크가 터지고 아파트가 안전자산으로 주목받으면서 100% 분양에 성공, 1000억원 넘는 현금을 손에 쥐었다. 정 회장은 “목수가 자기 집을 지으면 망한다”면서 별도 사옥을 짓지 않고 은마아파트 상가를 그룹 사옥으로 썼다.
▶사통팔달 대로변에 자리 잡은 은마아파트는 당시만 해도 보일러와 엘리베이터를 갖춘 최신식 아파트였다. 이후 경기·휘문·중동·숙명여고 등 강북 명문고들이 속속 주변에 자리 잡으면서 교육열 강한 중산층의 최선호 아파트가 됐다. 대치동 일대에 학원들이 집결하면서 은마아파트는 ‘사교육 1번지’를 상징하는 아파트가 됐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며 은마아파트는 낡은 아파트의 대명사가 됐다. 극심한 주차난, 시멘트 종유석이 자라는 천장, 지하실 쓰레기 악취, 녹물 수돗물 등등. 그래도 아파트 값은 40년 내내 우상향 곡선을 그렸다. 분양가 2330만원 아파트가 40년 새 121배 올라 작년 말 28억원 신고가를 기록했다. 재건축 대박 꿈 때문이라고 한다. 집주인은 대박을, 세입자들은 자녀 교육을 위해 이를 악물고 은마아파트에서 버텼다.
▶문재인 정부가 재건축 아파트를 받으려면 2년 실거주를 해야 한다고 하자 집주인들이 부랴부랴 입주했다. 이들은 악취에 놀라 40년 묵은 지하실 쓰레기 2300t를 치웠다. 방치했던 외벽 도색 작업도 했다. 그 와중에 희소식이 나왔다. 서울시가 5778가구(공공주택 678가구 포함)의 35층짜리 새 아파트를 짓는 은마아파트 재건축 계획안을 승인했다.
▶공공주택을 빼면 늘어나는 가구 수가 고작 676가구뿐인데 공사비 수조원을 어떻게 조달할지 숙제로 남아 있다. 일각에선 주민들이 어떻게 해서든 49층 이상 초고층 아파트로 계획을 바꿀 것이란 전망이 많다. 1970~80년대 소설 속 아파트는 급속한 도시화로 인한 내면의 황폐화를 다루는 소재로 등장했다. 2000년대 이후엔 탐욕과 절망이 충돌하는 대립의 공간으로 묘사되고 있다. 어느 소설가는 한국의 아파트 광풍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올라탄 욕망의 바벨탑’이라고 정의했다. 은마아파트를 보면 크게 틀린 말도 아닌 것 같다.
10.22(토) 태국만도 못하다는 일본 월급

인생에서 가장 추운 한 해를 보낸 곳은 유학 시절 일본 도쿄의 북향(北向) 집이다. 어찌나 각도를 태양 반대 방향으로 정확히 맞췄는지 사시사철 햇빛이 한 조각도 들어오지 않았다. 겨우내 전기장판 위에서 떨면서 잤다. 난방 시설이 없는 비좁은 방 하나와 부엌, 화장실이 전부였지만 이런 집 월세가 일본 신입 사원 월급의 절반 가까이 됐다. 일본을 “부자 나라, 가난한 국민”이라고 한다. 살아보니 이유를 금방 알 수 있었다.
▶지금 일본의 대졸 초임은 20만엔 약간 넘는다. 200만원 정도다. 30년 전과 비슷하다. 고졸 초임은 최저임금과 거의 같아졌다. 경제 논리론 이해할 수 없는 미스터리다. 초임만 낮은 게 아니다. 작년 일본의 근로자 평균 임금은 OECD 34국 중 23위였다. 한국에 밀린 지 7년이 넘었고 공산권에서 벗어난 리투아니아나 슬로베니아보다 밑이다. 일본 정부가 “부장급 연봉이 태국만도 못하다”며 임금 인상을 압박해도 기업은 요지부동이다.
▶한국의 평균 임금은 30년 동안 두 배 올랐다. 그런데 이런 나라에서 다반사로 일어나는 파업이 일본에선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 일본 노동자가 순해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기업이 제품 가격을 크게 올리지 않았다. 특히 직장인이 자주 먹는 덮밥, 라면, 도시락 등 외식과 생필품 값이 안정적으로 유지됐다. 집세는 오히려 떨어졌다. 옷에 몸을 맞추는 것처럼 온 사회가 쥐어짜듯 낮은 임금에 자신을 맞춰온 것이다.
▶덕분에 일본은 전통적 고용 제도를 유지하고 있다. 일본 기업은 비정규직을 늘리긴 했어도 웬만해선 사람을 자르지 않는다. 실업률이 세계 최저인 2%대다. 3년 뒤엔 65세 정년이 의무화된다. 70까지 회사에 다니는 날도 멀지 않다고 한다. 임금이 낮아도 고용이 길다 보니 일생 받는 ‘생애 임금’은 다른 나라보다 적다고 할 수 없다. 일본은 개인보다 전체를 중시하는 나라다. 일본 경제 시스템도 이런 전통의 연장선에 있다.
▶부작용도 클 수밖에 없다. 일본 노동생산성은 임금만큼 하위권이다. 미국의 60%에 불과하다. 한 사람이 할 일을 둘이 하고 임금도 나눠 갖는다는 얘기다. 능력 있는 사람에겐 감옥처럼 답답한 사회다. 그들은 자기를 제대로 평가해 주는 나라로 떠난다. 30년 동안 일본에서 벌어진 일이다. 장점이 있다 해도 이런 시스템은 유지될 수 없다. 요즘 가파르게 하락하는 엔화 가치도 일본의 이런 한계를 반영하고 있을 것이다. 생산성 향상 없이 임금만 올라가는 한국과 30년 임금 고정 일본, 참 다르다.
10.24(월) 파독 간호사 ‘제2의 삶’
재독 화가 노은님은 전주에서 9남매 중 셋째 딸로 태어났다. 스물한 살 때 모친을 잃고 아버지마저 사업에 실패하자 스물 넷 되던 1970년 파독(派獨) 간호사·간호조무사 모집 광고를 보고 독일행을 택했다. 그녀가 새 삶을 시작한 함부르크 병원은 험한 뱃일로 다친 선원이 많아 일이 고됐다. 쉬는 날 밖에 나가면 말이 통하지 않아 오히려 스트레스가 더했다. 온종일 집 안에 박혀 그림만 그렸다. 아파서 결근한 어느 날, 문병차 들른 간호부장이 그녀의 그림을 발견하고 눈이 커졌다. “당장 전시회를 열자” 했다.

/일러스트=박상훈
▶1973년 함부르크 시립외과병원이 마련해 준 전시회 이후 새 인생이 펼쳐졌다. 그림을 본 현지 교수 권유로 미대에 진학했다. 표현주의 일색이던 당시 독일 화단에 고향의 풍경과 새·물고기를 동심 가득 담아 표현한 노은님 화풍은 단숨에 이목을 끌었다. “동양의 명상과 유럽의 표현주의를 잇는 가교”라는 평가를 받았다. 백남준·솔 르윗 등 유명 예술가와 초대전을 열었고, 1990년부터 20년간 모교 교수로도 봉직했다.
▶파독 간호사들은 야근을 도맡아 하며 번 돈을 고향에 보냈다. 1972년 기준, 파독 간호사 1인당 한국 송금액은 451마르크(약 8만1500원)였다. 당시 독일 간호사 월급이 700마르크였으니 절반 이상을 보냈다는 뜻이다. 이국에서 겪는 외로움과 고통은 숨겼다. 노 화백도 “힘들다는 편지를 보내면 가족이 운다는 것을 안 뒤로 돈만 보냈다”고 했다.
▶가족을 위해 희생만 한 것은 아니다. 광부·간호사 파독은 1963년부터 77년까지 지속됐다. 그곳에서 저마다 새 삶을 개척했다. 권이종 한국교원대 명예교수는 서울에서 막일을 전전하다 독일에 갔다. 광부의 삶을 끝낸 뒤 늦은 학업을 시작해 박사 학위를 받았다. 영화 ‘국제시장’이 그를 모델로 만들어졌다. 김태우 신영필름 대표도 계약된 3년 근무를 마치고 영화 촬영을 배워 귀국했다. 이후 ‘왕의 남자’ ‘실미도’ 등 제작에 참여했다.
▶지난주 별세한 노은님 화백을 기념하는 미술관 건립이 올 12월 상설전시장 개관을 목표로 경기도 파주에서 추진되고 있다. 노 화백은 생전에 남긴 시화집 ‘눈으로 마음으로’에서 ‘두려워하지 말고/ 도망가지 말고/ (중략)/ 자신으로 돌아가면/ 그것이 당신의 집’이라고 했다. 대한민국 70년, 기적의 역사는 이처럼 세계 어디서든 당당하게 자신의 삶을 개척한 노 화백 같은 분들 덕일 것이다. 권 교수와 김 대표는 이미 고인이 됐다. 이런 분들의 삶과 성취를 잊지 않고 남겨야 한다.
10.25 ‘이만대장경’
팔만대장경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담긴 불경을 집대성한 것이다. 그런데 조국 사태 후 갑자기 ‘조만대장경’이 등장했다. 조 전 장관이 각종 현안에 대해 빠짐없이 자기 생각을 밝힌 방대한 소셜미디어 기록들을 일컬었다. 그런데 거기에 적힌 말과 실제 행동이 정반대여서 제 발등을 찍는 부메랑이 됐다.

▶그는 “번역해준 것만으로 논문 공동 저자가 되면 영문과 출신은 논문 수천 권 저자가 되겠다” “장관 후보 딸이 가계 곤란으로 장학금을 5회 받았다니 정말 아니다”라고 했다. 그러고는 자기 고교생 자녀는 논문 공동 저자가 되고 낙제 성적에도 장학금을 받았다. 특목고를 비판하더니 자녀는 모두 특목고에 보냈다. “공적 인물에 대해선 제멋대로 검증과 조롱도 허용된다”더니 비판 언론에 무더기 소송전을 벌였다. 그래서 ‘조로남불’ ‘조적조’(조국의 적은 조국)란 비판을 들었다.
▶한때 ‘추만대장경’도 나왔다. 추미애 전 법무장관은 청년들의 구조적 불평등을 비판하더니 자기 아들은 일반 병사는 상상도 못 할 휴가 특혜를 누렸다. 박근혜 정부 메르스 사태 땐 괴담 유포자 색출에 반대했지만 문재인 정부 코로나 땐 가짜 뉴스를 잡겠다며 몽둥이를 들었다.
▶최근엔 이재명 대표의 내로남불을 꼬집는 ‘이만대장경’이 화제다. 그는 박근혜 정부에 대한 수사 때는 “도둑 잡고 적폐 청산하는 게 정치 보복이면 맨날 해도 된다”고 했다. 그런데 자신이 수사받게 되자 “정치 탄압”이라고 한다. 이 대표는 “나쁜 짓 하면 혼나고 죄 지으면 벌 받는 게 당연하다. 정치 보복이라며 책임 안 지려는 수법은 안 통한다”는 말도 했었다. 작년엔 “특검은 시간을 끌어 정치 공세를 피하려는 적폐 세력의 수법”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번엔 특검을 주장하며 “반대하는 쪽이 범인”이라고 한다.
▶그는 과거 “공금 횡령 한 번만 저질러도 퇴출한다”고 했다. 하지만 아내의 법인카드 불법 사용이 드러나자 “7만8000원 사건”이라고 무시했다. 성남시장 때 ‘부패 지옥’을 외쳤지만 측근들이 대장동 일당에게 거액을 받은 혐의가 속속 드러나고 있다. “이해 충돌 방지 사각지대를 없애겠다”고 했는데 국회 국방위원인 자신은 방위산업 주식에 투자했다. 윤석열 후보의 전두환 발언엔 “석고대죄하라”고 해놓고 정작 본인은 “전두환도 공과가 있다”고 했다. “도박은 나라가 망할 징조”라고 했지만 그의 아들은 도박 혐의로 적발됐다. 사람이 살다 보면 자신이 전에 했던 말과 배치되는 행동을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거기에도 정도가 있어야 한다.
10.26 ‘逆월세’라는 기현상

/일러스트=박상훈
유럽, 미국에는 전력 생산 기업이 전기 구매자에게 웃돈을 주고 전기를 파는 ‘마이너스(-) 전기료’ 제도가 있다. 바람이 너무 불거나 일조량이 급증해 풍력·태양광 발전량이 급속히 늘 때 주로 적용된다. 전력거래소는 정전 사태를 막기 위해 전기 요금에 마이너스 가격을 적용해 공급량을 줄인다. 2020년 코로나 사태 초기 국제 유가가 사상 처음으로 마이너스(배럴당 -37달러)를 기록했다. 원유 저장소를 더 이상 찾을 수 없었던 원유 생산 기업들이 웃돈을 주고 재고를 넘겼기 때문이다.
▶미국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은 복지 정책 수단으로 ‘마이너스 소득세(negative income tax)’ 개념을 제안했다. 저소득 근로자들에게 면세를 넘어 국가가 세금을 보태주자는 것이다. 한국을 포함해 대다수 선진국이 이 아이디어를 차용해 근로장려세제(EITC)를 시행하고 있다.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땐 마이너스 금리가 등장했다. 중앙은행이 돈을 맡기는 금융회사에 이자를 주기는커녕 보관료를 받았다. 다수 선진국은 마이너스 금리 국채를 발행했다. 일정 비율을 장기 국채에 항상 투자해야 하는 연·기금, 보험사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마이너스 금리 국채를 샀다.
▶마이너스 금리가 촉발한 과잉 유동성은 전 세계 집값, 주가를 끌어올렸다. 한국에서도 ‘미친 집값’ ‘전세 대란’이 나타났다. 결국 반세기 만에 인플레이션이 귀환했다. 미국이 물가를 잡기 위해 금리를 급속히 올리자 자산 버블이 꺼지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집값, 전셋값이 연일 추락 중이다. 전세금 대출금리가 폭등하자 무주택자들이 월셋집으로 몰리고 있다. 월세가 전세 대출금리보다 오히려 싸기 때문이다.
▶전세 수요는 격감하는데 서울의 아파트 전세 매물은 1년 전보다 56%급증했다. 집주인들 사이에 세입자 구하기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충남 천안의 한 아파트 주인은 전세 세입자에게 1335만원짜리 샤넬 핸드백을 선물로 주겠다고 제안했다. 인천에선 전세 세입자에게 50g 골드바 2개를 주겠다는 집주인도 등장했다.
▶집을 나가겠다는 세입자에게 보증금을 돌려줘야 하는데, 새 세입자는 구할 수 없고 목돈도 없어 궁지에 몰린 집주인들은 ‘내가 매달 이자를 줄 테니 계속 살아달라”고 역(逆)월세를 제안하고 있다. 시세가 떨어진 전세보증금 1억원당 월 30만~40만원씩 집주인이 세입자에게 이자를 지급하는 방식이다. 월세의 마이너스(-) 버전인 셈이다. 미국발 금리 급등이 낳은 기이한 새 풍속도다. 금리의 위력은 역시 대단하다.
10.27 현직 대통령의 박정희 참배
쿠데타는 ‘국가에 대한 일격’이란 뜻의 프랑스어다. 군대가 정권을 탈취해 계엄령 선포, 의회 기능 정지, 언론 장악 등의 조치를 취한다. 프랑스식 명칭이 붙은 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1799년, 조카 루이 나폴레옹이 1851년 일으킨 정변을 전형적 사례로 보기 때문이다. 전자는 근대 프랑스의 기틀 확립, 영토 확장으로 이어졌지만 후자는 극도의 혼란과 유혈 사태를 남겼다.

▲윤석열 대통령이 박정희 전 대통령 서거 43주기를 하루 앞둔 25일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을 찾아 박 전 대통령 묘소를 참배하고 있다./뉴스1
▶누가 어떤 철학을 갖고 추진하느냐에 따라 쿠데타의 결과는 크게 엇갈렸다. 이집트 육군 중령 나세르가 이끄는 자유장교단은 1952년 왕정을 폐지하고 토지 개혁과 수에즈 운하 국유화 등을 밀어붙였다. 이집트는 범아랍주의, 아랍사회주의를 표방하며 한동안 아랍의 맹주로 군림했다. 신생 독립국들에 귀감이 됐다. 리비아에서 쿠데타를 일으킨 카다피는 42년 폭정과 반미 노선으로 리비아의 인권과 경제를 최악에 빠뜨렸다. 2011년 ‘아랍의 봄’ 때 시민들에게 붙잡혀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김종필은 생전에 “나세르의 이집트 혁명이 5·16의 모델이었다”고 했다. 박정희도 독재를 했지만 외자 도입, 수출 입국, 전자·중화학 육성, 농촌 혁명에 사활을 걸었다. 외자 한 푼을 벌겠다고 독일로 간 우리 광부들 앞에서 “우리는 못살아도 후손에게는 잘사는 나라를 물려주자”고 말하다 울음을 터뜨린 것이 그의 진심이었다. 세계 최빈국이자 수천 년 농업 국가였던 한국은 GDP 10위권, 무역 6위의 선진 공업국으로 탈바꿈했다. 2차 대전 이후 독립한 나라 중 선진국이 된 나라는 우리뿐이다. 원조 받던 나라에서 원조 주는 나라가 된 것도 우리뿐이다. 이를 기적이라고 하지 않는다면 기적이라는 말 뜻을 바꿔야 한다.

▶박정희의 유신 독재와 인권 탄압은 오점으로 남았다. 그렇다고 매년 봄 국민이 굶어 죽던 나라를 최첨단 산업국가로 변모시킨 그의 비전과 의지를 폄훼할 순 없다. 썩고 지리멸렬한 나라, 국민이 패배 의식과 자기 비하에 찌든 나라에 일격을 가해 국민을 흔들어 깨웠다.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자”고 앞장섰다.
▶어제가 박정희 대통령 서거 43주기였다. 윤석열 대통령이 그 전날 서울 동작동 현충원 묘역을 참배했다. 가족인 박근혜 전 대통령을 제외하고 현직 대통령이 박 전 대통령 서거 일에 즈음해 묘소를 찾은 사례는 노태우 대통령 시절 한 차례를 빼면 없다고 한다. 박정희가 없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없었을 것이다. 현직 대통령이 박정희를 추모한 것이 뉴스가 되는 일 자체가 이상한 일이다.
10.28 언론 없는 나라 大使의 언론 탓

▲싱하이밍 주한 중국대사가 26일 오전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관훈클럽 초청 토론회에서 모두 발언을 하고 있다./뉴스1
중국 대학에선 강의 때 절대 언급해선 안 되는 7가지 ‘칠불강(七不講)’이 있다. 그중 하나가 ‘언론 자유’다. 중국 언론은 신문 원고량과 방송 리포트 길이까지 공산당 지침에 따라야 한다. 시진핑 주석 기사보다 다른 지도부 기사가 길어선 안 된다. 생중계도 허용되지 않는다. 사회 불안을 조성하거나 서양의 가치관을 고취하고 정부 정책을 누설하는 보도는 금지다. 시진핑 사상 시험에 합격한 사람만 기자증을 준다.
▶시 주석은 2016년 3대 관영 매체를 찾아가 “당의 지침을 따르라”며 충성 맹세를 받았다. 이에 한 소셜미디어 스타 기업인이 “언론은 당이 아닌 국민의 것”이라고 했다. 그의 소셜미디어는 바로 폐쇄됐고 표결·선거·피선거권도 박탈됐다. 가짜 뉴스 단속과 여론 정화라며 수시로 군사 작전 하듯 매체 단속을 한다. 지침을 어기면 처벌된다. 우한 코로나를 처음 취재했던 기자는 징역 4년형을 받았다.

▶중국 정부는 홍콩 내 비판 보도를 막기 위해 친정부 기업을 앞세워 홍콩 주요 언론을 줄줄이 사들였다. 그래도 말을 듣지 않은 빈과일보는 사주가 구속되고 폐간됐다. 중국 정부에 거슬리는 특종 취재를 했던 일본 기자는 안전부에 끌려가 조사받은 뒤 추방됐다. 요즘 중국 매체들은 시진풍 우상숭배 중이다. 시진핑을 마오쩌둥 반열에 올린다고 한다.
▶중국에는 언론이 없다. 존재할 수도 없다. 모두가 공산당의 선전 기관이다. 기자는 선전 기관원이다. 이들도 해외 특파원이 있는데 기자 신분을 가장한 공산당 정보원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공산당 선전 기관이 자신들을 ‘언론’이라고 주장한다는 사실이다. 공산당 1당 독재와 1인 우상숭배에 ‘인민 민주주의’라고 민주주의 이름을 붙이는 것과 같다. 수년 전 도쿄에서 열린 한·중·일 언론인 회의에서 중국 측 단장이 “모름지기 언론이란…”이라며 20분 넘게 훈계성 장광설을 쏟아냈다. 부끄러운 줄을 모른다.
▶주한 중국 대사가 관훈클럽 토론회에서 “한국 일부 언론이 중국에 대해 지나치게 부정적 보도를 한 점이 양국 국민 감정의 불화를 초래한 주요 원인”이라고 했다. 양국 간 국민 감정이 좋지 않게 된 것은 중국 탓이다. 북핵을 막기 위한 사드를 놓고 한국을 공격하며 ‘혐한’을 조장했다. 이에 대한 반작용이 한국민의 대중 정서다. 언론이 존재하지 않는 나라의 관리들에겐 외국의 언론이 싫을 것이다. 자국이라면 당장 감옥에 넣었을 것이다. 그걸 못 하니 한국 언론 탓을 한다지만 참 어이없는 일이다.
10.29(토) 블라인드 채용
“아버지 뭐 하시노?” 영화 ‘친구’에서 선생님 역할을 맡은 배우 김광규가 학생들에게 무지막지하게 손찌검을 하면서 내뱉어 유명해진 대사다. 아버지는 밖에 나가 힘들게 일해서 돈 벌어오는데, 공부 안 하고 철딱서니 없이 살 거냐고 남고생들을 마구 몰아붙이는 장면이었다. 이 대사가 취업 현장에선 취업 준비생들에게 특히 좌절감을 안겨주는 갑질 질문으로 통한다.

▶치열한 경쟁을 거치면서 성장해온 MZ 세대는 부모의 사회적 지위가 채용에 영향을 미치는 ‘대물림 사회’의 불공정에 특히 분노한다. 2년 전 한 구인 구직 업체가 조사했더니 취준생 39%가 ‘채용 과정에서 불공정을 경험했다’고 답했다. 가족 관계, 학벌 등 ‘직무와 관련 없는 질문을 받은 경험’을 가장 많이 꼽았다. 2017년 문재인 정부가 공공 기관에 블라인드 채용을 의무 도입했다. 채용 과정에서 선입견을 유발할 수 있는 요인을 제하고 능력 중심으로 인재를 선발한다는 취지다.
▶블라인드 채용이 가져온 공정성 높이기의 긍정적 효과도 많다. 하지만 부작용도 꽤 드러났다. 자기소개서는 ‘자소설(자기소개서와 소설의 합성어)’로 통한다. 서류 정보가 제한적이다 보니 자기소개서와 면접 영향력이 커질 수밖에 없어 실제보다 자신을 과장해서 적는 ‘자소설’이 널리 퍼졌다. 취업 포털이 취준생 1070명을 대상으로 조사했더니 60.8%가 “자소설을 작성해 본 적이 있다”고 했다.
▶2019년 말 한국원자력연구원이 블라인드 채용으로 연구원을 뽑았는데 중국 국적자가 뽑혀 논란이 됐다. 원자력연구원은 ‘가’급 국가 중요 시설인데, 블라인드 채용이라 중국인이라는 사실을 알 길이 없었다는 것이다. 해외 유수 연구소는 박사급 지원자의 출신 학교와 지도교수 추천서, 연구 계획서 등을 필수 자료로 제출한다. 이런 상세 자료를 토대로 자질을 검증해 꼭 필요한 인재를 뽑는다. 우리는 박사급 연구원마저 블라인드 채용을 하면서 엉뚱한 사람이 뽑히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간 과학계에서는 연구·개발을 목적으로 하는 공공 기관에 한해 블라인드 채용을 완화해 달라고 여러 차례 건의했는데 정치 논리에 밀려 무산됐다.
▶윤석열 대통령이 공공 연구 기관에서 우수 연구자 확보를 가로막는 ‘블라인드 채용’을 우선적으로 폐지하겠다고 했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조지 애컬로프 교수가 창안한 ‘레몬 시장’이라는 개념이 있다. 정보가 불충분한 시장에서는 겉만 예쁘지 맛은 시어서 먹기 힘든 레몬이 팔리는 질 낮은 거래가 이뤄진다. 고도의 전문성이 필요한 과학기술 연구 분야까지 블라인드 채용을 획일적으로 적용했던 건 ‘레몬 시장’의 오류를 초래한 대표 사례라고 여겨진다.
10.31(월) 변질된 핼러윈
핼러윈데이는 원래 종교 축제다. ‘모든 성인의 날’이란 기독교 축일이 아일랜드 전통 축제와 섞이면서 1000년 전부터 유럽에서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일랜드와 영국, 그리고 영국 식민지였던 미국·캐나다·호주·뉴질랜드 정도에 국한된다. 같은 기독교라도 유럽 대륙의 가톨릭, 동유럽 정교회 나라에선 여전히 낯설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한국과 일본은 매우 특이하다. 종교적 의미는 사라지고 청춘들의 열기가 분출하는 축제로 변했다.
▲핼러윈 데이'(10월 31일)를 앞두고 28일 저녁 서울 용산구 이태원의 한 식당 앞에 앞치마를 두른 해골이 전시되어 있다./연합뉴스
▶핼러윈 파티가 우리 유치원, 초등학생에게 생일잔치만큼 중요하게 된 지 10년 가까이 된다. 어린이 영어 교실에서 교육에 핼러윈 축제를 활용하면서 유행했다고 한다. 성인들에겐 젊은 원어민 영어 강사들의 파티가 영향을 미쳤다. 외국인이 많이 사는 서울 이태원이 핼러윈 성지가 된 것도 이 때문이다. 일본 역시 같은 이유로 외국인 클럽이 많은 도쿄 시부야가 핼러윈 성지가 됐다. 그 과정에서 테마파크, 식품업체의 상술이 개입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환경적인 위험성도 비슷하다. 4년 전 시부야에서 일명 ‘크레이지 핼러윈 사건’이 일어났다. 한꺼번에 몰린 군중이 폭도로 돌변해 기물을 때려 부수고 패싸움을 벌인 것도 모자라 여성을 성추행하는 난동을 일으켰다. 일본인은 집회, 응원, 축제 때 비교적 질서를 잘 지킨다. 그런데 핼러윈 불상사만은 끝없이 일어난다. 10월 마지막 주가 되면 일본 경찰은 테러 대비에 준하는 경비를 시부야에서 펼친다.
▶젊은 사람이 모이면 열기가 도를 넘을 때가 있다. 술까지 취하면 더 심해진다. ‘복면 심리’도 큰 영향을 미친다. 핼러윈 축제 때 많은 사람이 기괴한 가면과 복장으로 분장한다. 한일 핼러윈엔 애니메이션 캐릭터로 변신하는 ‘코스프레’ 놀이까지 끼어든다. 영미권처럼 최소한의 종교적 경건함이 있을 리도 없다. 긴장이 풀릴 수밖에 없다. 안전이 언제든 무너질 수 있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이태원에서 아까운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안전 대비에서 아쉬운 점이 한둘이 아니지만 원점에서도 돌아봐야 한다. 외래 문화를 이런 식으로 받아들인 게 과연 정상이었을까. 남의 문화를 잘못 받아들인 것이 사고의 원인은 아닐까. 영미권에서 핼러윈 사고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이들이 이웃을 돌아다니며 사탕을 받아오는 것처럼 그들에게 핼러윈은 공동체의 결속을 확인하는 문화라고 한다. 모든 축제의 본래 의미도 사실 이런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경험한 핼러윈 속엔 축제라는 가면을 쓴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정말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