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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설수설 2022-10/ 10-01(토) 北 ‘사이버 절도 세계 1위’- 10-31(월) 규모 4.1 괴산 지진

상림은내고향 2022. 10. 31. 15:53

횡설수설 2022-10/ 동아일보

10-01(토) 北 ‘사이버 절도 세계 1위’

 

미국 국무부는 이달 초 ‘숨은 코브라 찾기(Unhiding Hidden Cobra)’라는 이름의 프로그램을 해외에 지원하겠다고 발표했다. ‘숨은 코브라’는 라자루스를 비롯한 북한 해커 집단으로 사이버 업계에서 통용되는 용어다. 이들의 해킹을 적발해 무력화하는 프로그램을 아시아, 아프리카 등 6개국에 제공함으로써 글로벌 대응을 강화하겠다는 것이다. 전 세계를 상대로 수위를 높여가는 북한의 사이버 공격에 미국이 얼마나 예민하게 반응하는지를 보여주는 움직임이었다.

 

▷북한의 사이버 금융 역량이 전 세계 1위를 기록했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미국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벨퍼센터가 발표하는 ‘국가별 사이버 역량 지표 2022’에서 집계된 순위다. 북한은 사이버 방어력, 해외정보 수집력, 인터넷 정보 통제력 등 나머지 7개 분야에서는 하위권인데 유독 사이버 금융 분야에서만 기형적으로 점수가 높다. 2위를 한 중국조차 이 분야의 점수는 10점대 초반으로 북한(50점)의 5분의 1 수준이다.

▷사이버 금융 분야 점수는 해외 금융기관의 정보통신 기반을 공격하거나 해킹으로 정보는 빼내는 등의 활동을 많이 할수록 높아진다. 조사 대상국인 30개국 중 북한, 중국, 이란, 베트남을 제외한 나머지 국가들은 모두 ‘0’점을 받았다. 이와 대비되는 북한의 고득점은 불법 사이버 활동이 가상화폐 거래소 공격 등을 통한 금전적 이익 확보에 집중돼 있음을 재확인하는 성적표인 셈이다. 각종 경제제재에 코로나19 봉쇄 여파까지 겹치면서 북한은 외화 고갈 상태에 놓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북한의 해킹은 이미 악명이 높지만 최근에는 신종 기술을 이용해 더 치밀하게 이뤄지는 게 특징이다. ‘마우이(Maui)’라고 불리는 신종 랜섬웨어가 대표적이다. 북한 해커들이 이를 이용해 미국의 공중보건, 의료 관련 기관들로부터 50만 달러 상당의 비트코인을 뜯어낸 사례가 7월 연방수사국(FBI)에 적발됐다. 북한은 가상화폐를 쪼개고 섞은 뒤 재분배하는 ‘믹서’ 혹은 ‘텀블러’라는 기술도 활용하기 시작했다. 믹싱 과정을 반복하면 가상화폐 거래 추적이 어려워진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고위당국자는 북한을 ‘국가를 가장해 수익을 추구하는 범죄조직’이라고 불렀다. 북한이 유럽과 아시아의 가상화폐 거래소를 공격해 빼낸 금액은 지난해에만 5000만 달러에 이른다. 탈취한 금액의 3분의 1은 핵·미사일 개발에 들어가는 것으로 추정된다. 국제사회의 제재도 점차 이 분야를 집중적으로 겨냥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해킹 정보를 제공할 경우 지급하는 포상금 규모도 최대 1000만 달러까지 높였다. 해킹 차단이 사이버 세계의 질서를 지키는 것이자 북한의 대량살상무기 개발을 저지하는 일임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10-03(월)  佛 최고훈장 韓 현충원 거부

 

1951년 2월 경기 양평 ‘지평리’ 전투는 6·25전쟁의 변곡점이었다. 중공군의 인해 전술에 계속 밀리던 유엔군이 거둔 첫 승리로 반격의 계기가 됐다. 유엔군은 미군과 프랑스 대대가 주축이었다. 이 프랑스 대대에는 100여 명의 한국인도 있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국군에 입대했으나 영어 소통이 가능하다는 이유로 프랑스 대대로 차출된 것. 이들의 국적은 엄연히 대한민국이었다. 당시 참전용사 박동하(94), 박문준(91) 옹이 산증인이다.

 

▷지평리 승전보가 울린 지 71년이 지났지만 프랑스 정부는 두 노병을 잊지 않았다. 올 6월 이들에게 프랑스 최고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 슈발리에’를 수여한 것. 이들은 지난해엔 프랑스 최고 무공훈장인 ‘군사 훈장’도 받았다. 프랑스에서 특별 예우를 받은 두 노병은 정작 고국에선 제대로 대접을 못 받는 신세다. 사후에 국립현충원 안장이 거부된 것. 외국이 아닌 ‘국내’ 무공훈장 수여자만 현충원에 안장한다는 현행 국립묘지법 때문이다. 보다 못한 주한 프랑스대사까지 나서서 이들의 현충원 안장을 두 차례나 요청했지만 무산됐다고 한다.

▷지난해 6월 미국 조지아주에서 6·25전쟁과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우리 교민 100여 명이 참전용사 자격을 인정받았다. 미국에서 다른 나라 출신 군인을 참전용사인 ‘베테랑’으로 인정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 길은 순탄치 않았다. 오직 미국 시민으로 참전한 경우에만 베테랑으로 인정한다는 관련법을 바꿔야 하는데 사실 불가능한 ‘희망사항’으로 비쳤다고 한다.

▷참전용사들의 헌신적 노력 덕분에 분위기가 바뀌었다. 노구를 이끌고 의원들을 찾아다니며 설득한 끝에 주 의회도 움직이기 시작한 것. 빌 히천스 조지아주 하원의장은 “‘오늘 나와 함께 피를 흘린 사람은 영원한 나의 형제’라는 말을 가슴에 품고 살았다. 법 개정에 동참해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보훈에 국경이나 국적이 따로 있을 수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떠올리게 한다.

▷프랑스 최고 훈장을 받은 두 노병처럼 외국군 소속으로 6·25전쟁에 참전한 우리 국민은 2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그러나 추정치만 있을 뿐 규모를 파악할 전체 명단조차 없다. 이런 상태라면 언젠가 이들에 대한 ‘기억’은 거의 잊혀질 것이다. 역대 정권은 해외 참전 군인들을 만날 때마다 “보훈에 국경이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법 조항 운운하면서 정작 챙겨야 할 우리 참전용사들을 나 몰라라 한다면 낯부끄러운 일 아니겠는가. 관련법도 손봐야겠지만 당장 기억의 사각지대에 놓인 2만여 명의 명단 복원도 서둘러야 할 것 같다.
정연욱 논설위원 jyw11@donga.com

 

10-04  김일과 이노키

 

흑백 TV 시절인 1970년대 시청자를 열광시켰던 양자 대결 경기로 1977년 홍수환이 파나마에서 카라스키야를 상대로 4전5기의 승리를 거둔 프로권투 경기와 더불어 1975년 김일과 안토니오 이노키가 장충체육관에서 벌인 프로레슬링 경기를 꼽을 수 있다. 아이들은 100% 진짜인줄 알고 열광했고 어른들은 긴가민가하면서도 열광했다. 이노키는 김일과 싸워 대부분 무승부에 1승 9패를 기록했다. 둘의 경기는 한국에서 열리면 이노키가 악역(惡役)을, 일본에서 열리면 김일이 악역을 맡는 식으로 정한다는 말도 있어 승패에 큰 의미를 부여하긴 어렵다. 프로레슬링은 실력이면서 연기이기도 하다.

 

▷일본 프로레슬링은 한국계인 리키도잔(力道山)에서 시작한다. 리키도잔에게는 3명의 수제자가 있었으니 자이언트 바바, 김일, 안토니오 이노키다. 셋 다 거구였지만 바바의 덩치가 가장 커 자이언트란 별명이 붙었고 그 다음이 이노키, 김일 순이다. 이노키는 일본에서 태어났으나 중학생 때 부모를 따라 브라질로 이주해 그곳에서 성장했다. 그래서 안토니오란 링네임을 얻었다. 리키도잔은 바바를 후계자로 택했다. 이노키는 실망하고 나중에 바바와 결별했다. 1976년 프로레슬링을 대표해서 프로권투의 최고봉이었던 무하마드 알리와 이종(異種) 대결을 벌였던 사람은 이노키다. 물론 알리는 서서 무릎 밑으로는 주먹을 휘두르지 못하고 이노키는 누워 있기만 해서 세상에서 가장 지루한 경기 중 하나가 되고 말았지만….

▷턱의 이노키다. 강인해 보이는 턱을 하늘로 치켜들고 주먹을 번쩍 들어올려 ‘다아∼’라고 떠나갈 듯 소리치는 것이 그의 트레이드마크다. 그는 말재주도 쇼맨십도 좋아서 정계로 진출해 두 차례 참의원에 당선되는 등 성공적인 경력을 쌓았다. 이노키는 북한에도 서른 번 이상 방문했다. 그가 북한과의 교류에 힘썼던 것은 리키도잔의 영향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리키도잔은 한국계지만 함경도 출신으로 친북 성향이었다. 북한에서도 리키도잔의 명성이 높았고 이노키는 그 덕을 봤다.

 

▷김일은 리키도잔 밑에서 연습생으로 구박을 많이 받던 이노키를 선배로서 자상하게 대해줬다고 한다. 정치인 이노키는 기본적으로 우익이지만 김일과의 관계를 의식해서인지 한일(韓日) 역사 문제에는 신중한 편이었다. 김일이 말년에 앓아누운 이후로는 거의 매해 한 번씩 방한해 김일을 병문안했는데 2000년 방한했을 때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나눔의 집’을 방문하기도 했다. 한일에서 프로레슬링의 열기는 식고 김일은 2006년, 이노키는 1일 세상을 떠났지만 두 사람이 남긴 경쟁과 우정은 오랫동안 기억될 것이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10-05  기업인 망신 주기 국감

 

2017년 11월 국회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국정감사. 밤 12시를 넘길 무렵 증인으로 참석해 있던 한 대기업 사장이 불쑥 손을 들더니 “아까 끝난 사람들은 가기로 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질문도 없이 새벽까지 앉혀놓기만 한 국감을 지켜보다 못해 ‘집에 가겠다’는 항변을 터뜨린 것이다. 이 장면을 놓고 “호통이나 면박 주기 질의를 피해 간 게 어디냐”는 말이 나왔다. 함께 증인으로 소환된 다른 대기업 대표들도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총수나 최고경영자(CEO)가 국감 증인으로 소환되면 기업에는 비상이 걸린다. 최소 2주 전부터 전담 태스크포스(TF)를 꾸리고 로펌까지 동원해 컨설팅을 받으며 모의 국감을 치르는 곳이 많다. 표정과 손짓까지 예행연습을 반복한다. 실무자들 사이에서는 예상 질의 내용은 물론이고 기업 정보를 어디까지 공개해야 할지 등을 놓고 회의가 반복된다. 올해는 총수들이 최종 명단에서 제외됐지만 전문경영인이 대신 출석한다고 해도 이 과정에 달라지는 것은 없다.

▷문제는 이런 준비가 생산적인 국회 논의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CEO들의 발언을 들을 새도 없이 몰아치는 의원들의 꾸중과 윽박지르기, 망신 주기 질책이 질의 시간을 잡아먹는다. 10시간 넘게 국감장에 앉아있으면서 답변 시간은 1분을 넘지 못한 CEO들도 있었다. 시간 낭비를 넘어 굴욕이다. 질의 내용이 기업인들에게 때로 시장을 거스르는 간접적 압박으로 작용할 여지도 적잖다. 의원들은 올해 치킨 값을 인상한 이유를 따져 묻겠다며 치킨 프랜차이즈 기업 임원들을 소환한 상태다.

 

▷“정말 너무하시는 것 아닙니까.” 백종원 더본코리아 대표가 출석했던 2018년 국감장 풍경은 좀 달랐다. 그는 자신의 프랜차이즈 사업이 소상공인들의 상권을 침해한다는 의원들의 비판에 “골목상권이랑 먹자골목을 헷갈리시는 게 정말 큰 문제”라고 맞받아쳤다. 쟁점이 된 내용들을 조목조목 반박하는 사이다 발언으로 현장의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의원들 앞에서 이렇게 큰소리칠 수 있는 CEO는 많지 않다. 발언 후폭풍이 회사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까 전전긍긍하며 몸을 낮추는 기업인이 더 많은 게 현실이다.

▷17대 평균 50명 선이었던 국감의 기업인 증인 수는 회기마다 늘어나 20대 국회에는 150명을 넘었다. 올해도 한 의원실에서만 기업인을 50명 넘게 신청해 “너무한다”는 뒷말이 나왔을 정도다. 정부의 국정 운영을 감사하는 자리에서 민간 기업인들로부터 들을 말이 그렇게 많을까. 환율과 주가가 날뛰고 재고가 급증하면서 기업들은 생존을 건 비상경영에 속속 돌입하고 있다. 이들이 위기 대응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국가경제를 위해 국회가 할 수 있는 일이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10-06  러 ‘종말의 무기’

 

1962년 핵전쟁 발발까지 갈 뻔했던 쿠바 미사일 사태에서 물러선 뒤 흐루쇼프는 “나는 무서웠다”고 했다. “겁먹었다는 것이 이 ‘미친 짓’이 일어나지 않는 데 기여했다는 것을 뜻한다면 나는 겁먹었다는 것이 기쁘다”는 말도 했다. 무엇이 핵전쟁을 막았나. ‘공포’ ‘두려움’이었다. 우크라이나에서 오래 살아 우크라이나인으로 오해받기도 했던 흐루쇼프는 2년 뒤 권좌에서 축출된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정반대다. ‘미친 짓’이라도 서슴지 않을 듯한 태세다.

▷현존 최장 길이(184m)의 러시아 최신 핵잠수함이 핵 어뢰 ‘포세이돈’을 싣고 북극해를 향해 출항했다고 한다. 핵무기 시험 가능성이 있다는 게 나토의 판단이다. 핵무기 운용 부대의 병력과 장비를 실은 러시아 열차가 우크라이나 전방으로 이동하는 모습도 포착됐다. 두 개의 뉴스 중에서도 서방이 더 관심을 보인 건 ‘종말의 무기(Apocalypse)’로 불리는 포세이돈이다.

▷포세이돈은 푸틴의 ‘절대 반지’나 마찬가지다. 잠수함에서 발사되는 만큼 미국 최첨단 미사일 방어 체계로 요격이 불가능한 비대칭 전력으로 개발된 것이다. 길이 24m, 직경 2m로 추정된다. 어뢰 모양의 무인 자율주행 잠수정에 핵탄두가 탑재된 방식이다. 최고 속도는 시속 185km, 사정거리는 1만 km에 달한다. 경량 소형의 원자로로 추진기를 작동시켜 ‘은밀하고 조용하게’ 움직인다.

 

▷서방 일각에서 추정한 대로 100메가톤급일 경우 역사상 가장 강했던 1961년 소련의 ‘차르 붐바’보다도 위력이 크다. 히로시마 원자탄의 6700배에 달한다. 이런 핵탄두가 해저에서 폭발하면 높이 500m의 방사능 쓰나미를 일으킬 수 있다고 한다. 미 해안 도시가 초토화될 수 있는 것이다. 포세이돈 위력이 과장됐다는 반박도 있지만 공포의 핵 어뢰임은 틀림없다.

▷푸틴의 노림수는 명확하지 않다. 핵 위협이 허풍이 아닐 것이라는 우려도 많다. 과대망상이나 판단력 저하 등 오만증후군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에 더 이상 개입하지 말라는 경고의 메시지를 서방에 던진 것일 수도 있다. 완전한 광인(狂人)처럼 보이는 것 자체가 수세에 몰린 푸틴의 치밀하게 계산된 행보라는 시각도 있다. 종전을 위한 협상 전술이란 얘기다.

▷쿠바 위기 직전 케네디는 “세계는 핵의 다모클레스 칼 아래 살고 있다”고 경고했다. 우연한 사고, 계산 착오, 지도자의 미친 짓에 의해 어느 순간에라도 절단될 수 있는 가느다란 실에 핵이 매달려 있는 형국이란 얘기였다. 상황은 다르지만 본질은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다. 자신의 권력을 지켜줄 거라 믿었던 핵무기가 진짜 ‘종말의 날’을 부를 수도 있다.

정용관 논설위원 yongari@donga.com

 

10-07  인공지능(AI) 권리장전

 

내 취향에 맞는 영화와 책을 골라준다. 학생 수준에 따라 맞춤형 개별 지도가 가능하다. 손떨림 없이 수술하고 지치지 않고 간병해주는 로봇 상용화도 머지않았다. 이 모든 것이 인공지능(AI) 덕분이다. 그런데 AI 기술에서 앞서가는 미국에서는 부작용도 속출하고 있다.

▷AI는 공정하리라는 기대와 달리 편향적이다. 아마존은 AI 채용 프로그램을 개발했다가 남성 지원자를 과대평가하는 편향을 발견하고 폐기했다. AI는 직원들의 축적된 인사고과 자료를 기준으로 판단하는데 고과를 잘 받는 핵심 부서엔 남성이 많았던 것. AI 재판 지원 시스템에서는 흑인의 재범 가능성을 높게 예측하는 편향이, AI 의료 검사장비에서는 여성과 유색인종의 이상 징후를 못 잡아내는 편향이 포착됐다. 백인 남성 신체가 오랫동안 표준이 돼왔기 때문이다. 기존 데이터에 의존하는 AI의 판단은 보수적일 수밖에 없다.

▷AI를 의도적으로 악용할 경우 위험성은 더욱 커진다. 딥페이크 기술을 활용한 가짜 영상이 대표적이다. 소셜미디어의 여성 사진을 누드로 편집하는 AI가 등장했고, 오바마 대통령이 “트럼프는 머저리”라고 욕하거나, 우크라이나 젤렌스키 대통령이 러시아에 항복을 선언하는 딥페이크 영상이 돌았다. 최근에는 가방이나 열쇠 같은 물건에 붙여두면 실시간 위치를 확인해 분실 걱정을 덜어주는 애플의 에어태그가 스토킹 범죄에 활용돼 논란이다. AI를 탑재한 자율살상 로봇 시장이 커지는 것도 큰 문제다.

 

▷미국 백악관은 5개조로 구성된 ‘AI 권리장전(Bill of Rights)’ 청사진을 4일 발표했다. 차별받지 않을 권리, 개인정보를 보호받을 권리, 안전하고 효과적으로 사용할 권리, AI 작동 방식에 대해 충분한 설명을 들을 권리, AI 대신 사람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다. 하지만 수정헌법 10개조로 구체화된 1791년 ‘권리장전’과 달리 법적 구속력이 없어 ‘이빨 없는’ 지침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유럽연합은 2018년 개인정보보호법을 제정한 데 이어 AI로부터 피해를 입으면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는 법안을 마련 중이다.

▷정부가 내년에 ‘디지털사회 기본법’을 제정하고 ‘디지털 권리장전’도 만든다고 한다. 최근 발표 내용을 보면 디지털 권리장전은 디지털 기술을 보편적 권리로 규정해 디지털 격차를 해소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을 뿐 윤리적 활용에 대한 고민은 빠져 있다. 기술은 빠르게 변화하는데 기본 인권을 지켜낼 제도 정비의 속도는 너무나 더디다. AI가 사람을 해치는 기술이 되지 않도록 입법과 기업 활동에 지침이 되는 정부 가이드라인을 서둘러 마련해야 한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10-08(토)  아니 에르노

 

프랑스 여성 작가 아니 에르노가 2008년 ‘Les Ann´ees’를 출간해 프랑스 국내 문학상을 휩쓸 때 파리특파원으로 있었다. 누군가가 이 책이 좋다고 권했고 그때 구입해서 갖고 있다가 2010년 귀국하면서 들고 왔다. 작가가 겪은 크고 작은 사건과 그 단상(斷想)을 무작위로, 다만 연대순으로 나열해 놓은 책이다. 쭉 읽을 필요도 없이 아무 데나 펼쳐 읽어도 좋다. 국내에서는 올 5월 ‘세월’로 번역됐다.

▷프랑스인 친구가 올여름 책을 몇 권 보내줬는데 그중 하나가 에르노의 ‘사건’이다. 책 표지에 ‘최근 인기 있는’이라고 손수 써 놓았다. 이 작품은 영화로 만들어져 2021년 베네치아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탔다. 그러나 작품 자체는 2000년 출간됐다. ‘최근 인기 있는’이라는 설명은 영화제에서 상을 탄 후 다시 널리 읽히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 책을 읽는 중에 에르노가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에르노는 1940년생으로 프랑스의 신구(新舊) 문화가 충돌하던 1960년대에 20대를 보냈다. 젊은이들은 자유연애에 빠져들었고 그럼에도 낙태가 불법인 사회에서 덜컥 임신하게 된 20대 여학생이 낙태시술을 시도하면서 겪는 심리적 육체적 고통이 ‘사건’의 내용이다. 불법이기 때문에 정보가 차단되고 시술이 비밀리에 행해지기 때문에 원시적일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서 겪는 어려움이 생생히 그려져 있다. 낙태천국이라는 한국에서도 활자화되지 못한 얘기를 프랑스 작가의 글로 보는 기분이 묘했다.

 

▷에르노는 체험한 것만 쓴다는 작가다. 체험을 바탕으로 형상화를 하는 것도 아니고 체험한 것을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쓰는 게 그의 특징이다. 그의 작품은 모두 17권이 번역돼 있는데 2001년 번역된 ‘단순한 열정’ 등 몇 권을 빼고는 대부분 최근 3년간 집중적으로 번역됐다. 자의식이 강한 프랑스 여성이 10대부터 40대까지 겪은, 1950∼1980년대의 오래전 성과 사랑의 얘기가 대부분이지만 국내에서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으로 읽히는 측면이 있다.

▷에르노는 일기의 형태로든 뭐로든 기록을 열심히 한 작가인 듯하다. 그런 기록의 나열을 아예 책으로 구성한 것이 ‘세월’이다. ‘세월’은 ‘모든 이미지는 사라질 것이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사라져가는 이미지를 잡으려고 노력한 것이 기록이다. 역사책에 나오는 큰 사건만이 사건이 아니다. 시대의 크고 작은 사건과 그 단상이 모여 시대의 구체적 모습이 드러난다. 그런 모습을 그려내는 것이 역사와 다른 소설의 존재 가치라는 점에서 에르노의 글쓰기는 소설 본연의 의미를 새삼 묻고 있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10-10(월)  칠곡 할매 글꼴

 

“폰트가 뭐꼬?” “비누 뭐 이런 거 만드는 거라예?” 폰트가 뭔지도 몰랐던 할머니들의 손글씨를 문서 작성용 글꼴로 만든 칠곡 할매 글꼴 5종이 MS오피스에 탑재된다. 지난해 먼저 탑재된 한컴오피스에 이어 MS워드와 파워포인트에서도 곧 이를 사용할 수 있게 된다고 한다. 칠곡 할매 글꼴은 경북 칠곡군 성인문해교실에서 한글을 깨친 김영분 권안자 이원순 이종희 추유을 할머니가 각각 필사를 한 1만 장의 손글씨를 바탕으로 2년 전에 개발됐다.

▷칠곡 할매 글꼴은 한글을 처음 배우는 아이의 글씨처럼 손으로 꾹꾹 눌러 또박또박 쓴 글씨체다. 가독성이 좋으면서도 정겹게 느껴진다. 요즘 동영상 자막이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글에 종종 등장하고, 전자책 텍스트를 칠곡 할매 글꼴로 바꿔 읽기도 한다. 할머니 글씨가 주는 투박하고 따뜻한 아날로그적 감성이 디지털 세대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이다. 옛것을 새롭게 재해석하는 복고 열풍과도 결을 같이한다.

▷폰트에 담긴 스토리도 감동적이다. 칠순, 팔순이 넘은 칠곡 할머니들은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6·25전쟁을 겪고 고도성장의 시기를 헤쳐 왔다. 시대가 주는 아픔과 여성에 대한 차별을 묵묵히 견뎌 왔을 터다. 어린 시절 학업을 묻는 질문에 권안자 할머니는 “학교 댕겼으면 좀 낫지. 근데 다 어렵게 살아서”라며 말끝을 흐렸다. 이원순 할머니는 “집에서 아들 공부시키고 (나는) 들에 밭 매러 다니고, 공부가 뭐라”고 했다. 그런 할머니들이 글자 한 자, 한 자를 쓰면서 깔깔깔 웃는다. 억울할 법도 한데 “내 인생 참말로 괜찮네”라고 한다.

 

▷‘논에 들에 할 일도 많은데/공부시간이라고/일도 놓고 헛둥지둥 왔는데/시를 쓰라 하네/시가 뭐고/나는 시금치씨 배추씨만 아는데’(소화자 할머니의 ‘시가 뭐고’). 2015년부터 칠곡군 성인문해교실의 할머니들은 자작시를 모아 시집을 내고 있다. 할머니들의 간결하고 솔직한 시는 짧은 글이 대부분인 SNS 감성과도 맞아떨어진다. ‘칼의 노래’ 김훈 작가는 할머니들의 시에 대해 “우리같이 직업적으로 글을 쓰는 사람들은 도저히 쓸 수가 없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삶의 무게와 질감이 실려 있다”고 했다.

▷할머니들의 시처럼, 할머니들의 글씨 역시 삶의 무게와 질감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지난해 국립한글박물관은 “정규 한글교육을 받지 못한 마지막 세대가 남긴 문화유산으로, 한글이 걸어온 역사에 큰 발자취를 남기고 새 역사를 쓴 것”이라며 칠곡 할매 글꼴을 휴대용저장장치(USB)에 담아 유물로 영구 보존하기로 했다. 자칫 잊힐 수도 있었던 할머니들의 역사를 시공간을 뛰어넘어 공유하게 됐다. 디지털 기술이 주는 선물이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10-11  또 수신료 내리는 NHK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 ‘1Q84’ 남자 주인공의 어릴 적 별명은 ‘NHK’다. 주말마다 NHK 수신료 징수원인 아버지를 따라다니다 왕따가 돼 얻은 별명. 그만큼 NHK 징수원은 악착같이 수신료를 걷는 직업으로 악명 높다. 다른 나라와 달리 일본에선 수신료 미납자 처벌 규정이 없어 징수원의 역할이 크다. 덕분에 수신료가 꾸준히 올라도 납부율은 80%대를 유지할 수 있었는데 2000년대 중반 내부 스캔들이 터지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2004년 인기 프로인 ‘가요홍백전’ PD와 NHK 서울지국장을 지낸 직원이 거액의 제작비를 빼돌린 비리가 폭로됐다. 이듬해엔 2001년 방송된 ‘전시 성폭력을 묻는다’가 집권 자민당의 외압으로 일본에 불리한 내용이 삭제된 사실이 드러났다. 수신료 납부 거부 움직임이 거세게 일었고, 재원의 거의 100%를 수신료에 의존하는 NHK는 막대한 타격을 입었다. 수신료 거부를 공약으로 내건 ‘NHK당’도 2005년 내부 비리를 고발했던 NHK 직원 출신이 만든 당이다.

▷결국 NHK는 직원 감축과 임금 삭감 등 구조조정과 방송 공정성 확보 방안을 담은 ‘신생플랜’을, 2008년엔 창사 이래 처음으로 ‘2012년 수신료 7% 인하’ 계획을 발표했다. 이후로도 수신료는 인하를 거듭해 현재는 월 1275엔(약 1만2000원)이다. 최근엔 내년 10월 추가 인하안까지 발표했다. 5년 새 3번째 인하다. 수신료 인하로 인한 적자는 적립된 잉여금과 군살빼기로 메운다는 계획이다.

 

▷일본에서도 NHK의 안정적인 재원 확보를 위해 수신료 미납자 처벌 조항을 두자는 제안이 나온 적이 있다. 하지만 공영방송이 제구실을 못할 때 시청자들이 수신료 거부권으로 견제할 수 있어야 한다는 반대 논리를 넘지 못했다. 젊은층이 다양한 민영 방송으로 옮겨가면서 ‘안 보는데 왜 내느냐’는 여론이 일기 시작한 것도 걸림돌이다. 결국 NHK는 시청자들의 신뢰를 잃지 않기 위해 지속적으로 경영을 합리화하고 수신료를 인하하는 노력을 기울이게 된 것이다.

▷KBS는 국회에 수신료를 월 3800원으로 올려 달라면서 경비 절감 등을 약속했다. 그런데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억대 연봉을 받는 직원이 51.3%로 1년 새 4.9%포인트 늘어났다. 지상파 중간광고까지 허용되자 지난해 광고 판매액은 2705억 원으로 전년도보다 16.7% 증가했다. 막대한 광고 수입에 수신료 수입까지 보장되니 방만 경영과 편파 시비가 끊이지 않는다. KBS와 한전의 3년 주기 수신료와 전기료 통합 징수 계약이 2024년 끝난다. 전기 끊길까 억지로 수신료를 내는 징수제도를 손봐야 시청자 무서운 줄 알고 공영방송의 질도 경영도 나아질 것이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10-12  노벨상 받은 ‘헬리콥터 벤’

 

불확실성의 시대’(1977년)로 한국에도 잘 알려진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가 ‘1927년 대폭락’(1955년)에서 주장한 이후 대공황의 원인으로 상식처럼 굳어진 견해가 투기 과열과 이로 인한 주식시장의 붕괴다. 그러나 밀턴 프리드먼은 1963년 안나 슈워츠와 함께 ‘미국 통화의 역사, 1867∼1960’이라는 책을 써서 대공황은 불가피한 것이 아니라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서툰 긴축 통화정책에 따른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이 통화주의의 시작이다.

 

▷프리드먼의 90세 생일을 축하하는 학술 행사가 2002년 열렸다. 당시 연준 이사였던 벤 버냉키는 그 행사에 참석해 “당신이 쓴 책에 빠져 통화사를 공부했다”면서 “대공황과 관련해 당신이 옳았다. 우리(연준)가 죄송하다. 당신 덕분에 다시는 그런 실수를 저지르지 않을 것이다”라는 연설을 했다. 그로부터 6년 뒤인 2008년 버냉키는 연준 의장으로서 대공황에 버금가는 금융위기가 찾아왔을 때 헬리콥터에서 뿌리듯 돈을 풀어 ‘헬리콥터 벤’이란 별명을 얻었지만 미국과 세계 경제를 구했다. 연준 의장은 대부분 경제학자 출신이지만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건 버냉키가 처음이다.

▷버냉키는 하버드대를 최우등으로 졸업하고 MIT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MIT는 폴 새뮤얼슨이 1940년대 하버드대에서 옮겨온 이후 케인스주의를 주도했다. 그러나 버냉키가 입학한 1970년대 중반에는 이미 케인스주의에 의문을 품은 시카고학파의 신고전주의가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는 케인스주의에도 반(反)케인스주의에도 동의하지 않고 케인스주의와 신고전주의의 종합을 추구했다.

 

▷버냉키는 대공황 연구를 거시경제학의 성배(聖杯)로 여겼다. 지질학을 연구하려면 지진을 연구해야 하듯이 경제학을 이해하려면 대공황을 연구해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그는 2000년 ‘대공황 연구’란 책을 통해 연준이 주식시장의 투기적 과열에 대한 경계심으로 성급히 금리 인상을 단행하는 바람에 대공황을 격화시켰다는 논거를 집대성했다.

▷그러나 버냉키의 ‘통화주의’는 프리드먼적이라기보다 케인스적이다. 그의 통화주의는 케인스식 재정 부양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강력한 재정 부양을 동반한 것이다. 돈을 풀었으면 제때 회수해야 하는데 경기가 다시 침체로 빠져들까 계속 우려하면서 회수를 주저한 태도도 프리드먼적이지 않다. 그가 제때 회수하지 못한 돈이 자산에 거품으로 끼어 있다가 코로나 유행 시 풀린 돈과 함께 인플레이션을 촉발했다는 비판이 있다. 2008년 이후 연준의 통화정책에 대한 평가는 이번 인플레이션이 끝나봐야 객관적으로 내려질 수 있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10-13  푸틴, 광기인가 오판인가

 

“닉슨 대통령이 요즘 스트레스가 많다. 밤에 종종 술을 마신다.” 미국이 베트남전 출구 전략을 모색하던 1970년대 초 헨리 키신저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소련의 협상 상대들에게 이런 내용을 흘렸다. “통제 불가능하니 조심하는 게 좋겠다”고 했다. 충동적으로 변한 닉슨이 언제라도 핵 단추를 누를 수 있다고 경고한 것이다. 미국은 이렇게 소련을 움직여 북베트남을 협상장에 나오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다.

 

▷‘미치광이 전략(The madman theory)’은 자신을 비이성적인 위험인물로 포장한 뒤 협상을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끌고 가는 전략이다. 예측 불가능한 극단적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공포를 유발하는 것이다. 서로가 극단으로 치닫는 치킨게임에서 효과를 보는 벼랑 끝 전술이다. 미치광이라고 손가락질 받는 독재자들의 경우 이 전략을 쓰는 건지, 아니면 실제 정신에 문제가 있는 건지를 놓고 외부 전문가들 간 논쟁이 벌어지기도 한다.

▷북한의 김정일, 김정은 부자(父子)는 미치광이 이론의 분석 대상으로 가장 많이 오르내렸던 사례다. 은둔형 독재자의 무모한 도발과 위협, 핵무기 집착을 놓고 “미쳤다”는 평가가 이어졌다. 그런 북한을 향해 미치광이 전략으로 맞대응했던 이가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다. ‘화염과 분노’ 시기 “김정은보다 더 큰 핵 단추를 갖고 있다”며 긴장감을 급격히 끌어올렸다. 트럼프 본인도 좌충우돌 정치 행보를 놓고 ‘광인’이라는 비판과 ‘미친 척하는 냉철한 비즈니스맨’이라는 평가를 동시에 받았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불러일으킨 ‘미치광이 지도자’에 대한 공포는 차원이 다르다. 6000기에 가까운 핵무기를 보유한 러시아의 지도자가 핵전쟁 위협을 넘어 실제로 전술핵을 터뜨릴 기세다. 2월 우크라이나 침공을 감행했을 때 이미 편집증, 과대망상증 같은 정신이상설이 불거졌다. 중언부언하는 연설을 지켜본 외신들이 “뭔가 달라졌다”며 코로나19 시기 크렘린궁에 고립돼 있던 그의 심리 상태에 주목했다. 예스맨 측근들에게 둘러싸여 현실 감각도 약해져 가고 있다는 게 서방 정보기관들의 판단이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최근 CNN 인터뷰에서 푸틴에 대해 “매우 잘못 판단하고 있는 이성적 행위자”라고 말했다. 푸틴이 이성을 잃지 않은 지도자라고 인정하며 다독이는 동시에 ‘이성을 되찾고 더 이상 전세를 오판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보내려 한 것으로 보인다. 광기이든 오판이든 위태로운 지도자의 손에 들린 핵 카드의 위험성은 다르지 않다. 전 세계를 벼랑 끝으로 몰고 가는 자멸적 도박은 당장 중단돼야 한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10-14  세계 최고의 직장

 

세계 청년들이 선호하는 기업의 대명사는 한동안 구글이었다. 높은 지명도에 멘토링 기회, 호텔 뷔페 수준의 공짜 구내식당, 근무시간의 20%를 자기 계발에 쓸 수 있는 자유로운 조직 문화가 지원자들을 자석처럼 빨아들이면서 2700 대 1의 경쟁률을 기록한 적도 있다. 그런데 구글보다 더 선망 받는 직장이 있다.

 

▷미국 경제지 포브스가 최근 발표한 ‘세계 최고의 직장’ 순위에서 삼성전자가 3년 연속 1위를 차지했다. 57개국의 다국적 기업 임직원 15만 명을 대상으로 4000여 개 기업의 영향력과 이미지, 인재 육성 프로그램, 임금 수준, 근무 여건을 평가하게 해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은 상위 800개 기업을 추려낸 결과다. 2∼5위는 마이크로소프트, IBM, 알파벳(구글 모회사), 애플 순으로 모두 미국계 IT 기업이다. 알파벳은 이 조사가 시작된 2017년부터 3년 연속 1위를 차지했다가 2020년부터 삼성전자에 자리를 내주고 밀려났다.

▷삼성전자의 부상은 미국 실리콘밸리의 유연하고 수평적인 기업 문화를 따라잡기 위해 수차례 인사혁신에 나선 결과다. 우선 직급별 표준 체류연한이나 승격 포인트제를 없앴다. 능력만 있으면 누구든 팀장으로 발탁된다. 직원 간 호칭은 ‘님’, ‘프로’로 통일해 서로 존댓말을 쓴다. 법정 한도의 2배를 쓸 수 있는 육아휴직 제도로 9년 연속 여성가족부의 ‘가족친화 인증 기업’으로 선정됐고, 미국 법인은 민간재단의 ‘기업평등성지수’ 평가에서 3년 연속 만점을 받았다. 역량 개발의 기회도 많다. 반도체 사내 기술대학으로 시작한 삼성전자공과대학과 사내 대학원을 졸업한 학사가 1045명, 석박사가 858명이다.

 

▷알파벳의 지난해 연봉 중간값은 29만5884달러(약 4억2000만 원)로 삼성전자 평균 연봉(1억4400만 원)의 약 3배다. 그럼에도 삼성전자 순위가 높은 건 ‘고용 브랜드’ 가치가 높기 때문이다. 글로벌 취업포털 글래스도어에 따르면 고용 브랜드에 영향을 주는 3대 요소는 조직문화, 워라밸, 일을 통한 성장이다. 세계 최고의 인재들과 좋은 기업문화 속에서 경력을 쌓을 수 있으면 연봉을 높여 부른다고 쉽게 다른 회사로 옮겨가지 않는다는 뜻이다.

▷삼성은 시작부터 인재 욕심이 많았던 기업이다. 창업주는 “1년 계획은 곡식을, 10년 계획은 나무를, 평생 계획은 사람을 기르는 일이다”는 중국 고전을 자주 인용했다고 한다. 코로나 이후 ‘대퇴직의 시대’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이제는 좋은 인재 앞에선 기업이 ‘을’인 시대다. ‘세계 최고의 직장’ 800위 안에 든 한국 기업이 지난해 38개에서 올해는 16개로 줄어들었다. 삼성전자의 약진이 기업 간 고용 브랜드 높이기 경쟁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10-15(토)  “시진핑 파면” 현수막

 

1989년 6월 5일 중국 베이징 톈안먼 광장에 탱크가 들이닥쳤다. 중국 지도부가 시위를 무력 진압하기로 결정하고 군을 투입한 것이다. 이때 흰 셔츠에 검은색 바지를 입은 남성이 탱크 앞을 막아섰다. 이후 그는 ‘탱크맨’으로 불리며 톈안먼 민주화 시위의 상징이 됐다. 30여 년이 흐른 뒤 이번에는 베이징 시내의 고가도로에 시진핑 국가주석의 퇴진을 요구하는 현수막을 내건 남성이 등장했다. 인터넷 공간에서는 탱크맨에 빗대 그를 ‘브리지(bridge·다리)맨’으로 부르며 응원하는 메시지가 올라오고 있다.

 

▷중국에서 최고 지도자를 비판하려면 때론 목숨까지 걸어야 한다. 2019년 7월 ‘시 주석과 리커창 총리는 사퇴하라’는 피켓 시위를 벌인 시민운동가 왕메이위는 투옥 2개월여 만에 숨졌다. 시민단체와 유족은 그가 혹독한 고문을 당한 끝에 사망했다고 주장한다. 2020년 1월 ‘시 주석은 물러나라’는 글을 쓴 법학자 쉬즈융은 비공개 재판을 받고 있다. 그에게는 최고 형량이 무기징역인 국가권력 전복 혐의가 적용됐다.

▷13일 베이징 쓰퉁차오(四通橋)에는 2장의 현수막이 걸렸다. 한 장에는 “독재자이자 민족반역자인 시진핑을 파면하라”고 쓰여 있었고, 다른 한 장에는 “영수(領袖) 말고 선거권을 요구한다” 등의 구호가 적혀 있었다. 현장에서 체포된 남성은 펑짜이저우라는 이름으로 인터넷에서 활동해 왔다고 미국의소리 방송이 전했다. 중국 당국은 즉각 인터넷 단속에 나섰다. SNS 위챗에 이 사건과 관련된 사진이나 글을 올린 계정 60만 개가 폐쇄됐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시 주석의 3연임을 확정하는 당 대회를 사흘 앞둔 예민한 시점에 벌어진 돌발 시위에 중국 정부는 바짝 긴장하고 있다. 흉흉한 민심에 기름을 끼얹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달 선전시에서는 수천 명이 모여 ‘제로 코로나’ 정책에 항의하는 대규모 집회를 열었다. 7월 정저우시에서는 지역 은행들이 부실화되면서 예금을 찾지 못하게 된 3000여 명이 시위를 하다 보안요원들과 충돌했다. 집회를 여는 것 자체가 어려운 중국에서 이례적인 일이다.

▷1989년 2월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을 만난 덩샤오핑은 “중국은 안정을 필요로 한다. 1년 365일 시위만 하면 어떻게 경제 개발을 계속할 것인가”라고 했다. 국민을 통제할 필요가 있고 가능하다는 취지였다. 하지만 불과 2개월 뒤 톈안먼 시위가 시작됐고 끔찍한 유혈 사태로 이어졌다. 장기 집권에 나선 시 주석은 첨단 정보기술(IT)까지 동원해 사회를 철저하게 감시하고 있다. 하지만 수면 아래에서 들끓고 있는 민심을 언제까지나 억누를 수만은 없을 것이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10-17() 트러스노믹스 38일 만의 파탄


 

“마거릿 대처는 이런 감세 공약에 동의하지 않았을 겁니다.” 영국 총리 선거를 앞둔 올해 7월, 대처 정권에서 장관을 지낸 3명의 원로는 언론 인터뷰에 동시 출연해 리즈 트러스 당시 후보의 감세 공약을 비판했다. 재정적자 감축이 병행되지 않는 트러스의 감세안이 대처리즘과는 동떨어져 있다며 “대처 전 총리가 매우 마뜩잖게 생각했을 것”이라고 했다. ‘제2의 대처’를 꿈꾸고 있던 트러스에게 특히 뼈아픈 지적이었을 것이다.

 

▷감세 정책은 대처 전 총리가 파탄 직전이던 영국 경제를 살려낸 대표적인 회생 카드 중 하나였다. ‘대처 따라 하기’를 선거 캠페인 전략으로 삼았던 트러스 총리가 주목한 정책인 게 이상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치솟는 물가와 급증하는 나랏빚, 악화하는 재정적자 같은 상황 변수를 읽지 못했다. 최악의 타이밍에 시장 흐름과 거꾸로 가는 그의 감세 정책을 놓고 “환상의 섬에서나 가능한 위험한 동화”(리시 수낵 전 재무장관)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트러스 총리가 취임 38일 만인 14일 결국 백기를 들었다. 고소득자 소득세 감면 정책을 접은 데 이어 법인세 19% 유지 계획을 철회해 25%로 인상하는 기존 정부안대로 시행키로 했다. 정치적 동지인 쿼지 콰텡 재무장관도 전격 경질했다. 영국 파운드화 가치가 역대 최저치로 떨어지고, 국채 금리가 급등하면서 국가 파산설까지 제기되는 상황을 버티지 못했다. 두 차례의 굴욕적 정책 유턴을 놓고 이코노미스트지()는 “트러스노믹스는 끝났다”고 선언했다. 정책의 효과, 파장 고민 없이 외형 베끼기에만 골몰한 결과가 참혹하다.

 

▷감세안 백지화 이후에도 성난 여론은 잦아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트러스 총리가 실책에 대한 사과 없이 콰텡 장관을 자른 것을 놓고 ‘책임을 떠넘긴 지도자’라는 비판까지 추가됐다. 미국 워싱턴에서 국제통화기금(IMF)-세계은행 연차총회 만찬에 참석 중이던 콰텡 장관은 갑작스러운 경질 예고에 식사 시작 15분 만에 부랴부랴 귀국길에 올라야 했다. 트러스 총리 본인의 입지도 위태롭다. 조기 총선을 요구하는 청원 서명자가 50만 명에 이르고, 일부 언론은 벌써부터 후임자를 거론하기 시작했다.

▷영국 보수당 내에서는 트러스 총리의 일방적인 정책 독주가 당의 정체성까지 흔들고 있다는 불만이 제기된다. 보수당 중진인 마이클 고브 의원은 감세안에 대해 “보수적이지 않다”며 정책 이념을 문제 삼고 나섰다. 위기 국면에서 민심의 요구와 경제 상황에 맞춰 정책을 조정하며 쌓아온 보수당의 유연한 이미지가 순식간에 무너질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 상당하다. ‘대처의 뚝심’처럼 포장된 독선 때문에 12년 만에 정권까지 바뀔지 모른다는 여당의 아우성이 커지고 있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10-18  ‘괴물 미사일’ 현무-5

 

한국형 유도탄인 현무 시리즈 중에서는 현무-1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탄도미사일 현무-2와 순항미사일인 현무-3가 실전 배치돼 있다. 우리나라는 사실 미사일 강국이다. 현무-3의 사거리는 1500km로 이 정도 사거리의 순항미사일은 미국 러시아 이스라엘 한국 정도만 보유하고 있다. 현무-2는 2021년 5월 한미 미사일 지침 해제 전 사거리가 800km로 제한돼 있을 때도 약간의 개량만으로도 중거리미사일로 전환할 수 있었다.

 

▷현무-4부터는 아직도 베일에 가려 있다. 탄도미사일인 현무-4는 2017년 미국이 한국의 미사일 탄두 중량 제한을 해제한 이후 개발이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1t에 불과한 현무-3의 탄두 중량을 2.5t까지 늘린 것으로 추정된다. 현무-5는 ‘괴물’로만 알려져 있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현무-5가 배치되면 재래식 전력으로도 북한의 핵 공격을 어느 정도 견제할 수 있다는 얘기가 흘러나왔다.

▷1일 국군의날 기념식에서 8초가량의 흐릿한 탄도미사일 발사 영상이 공개됐다. 그것이 현무-5였다. 군이 이 영상을 정식으로 공개하는 방안을 검토하면서 추정 제원도 나오기 시작했다. 탄두 중량이 무려 8t이다. 한미 미사일 지침이 해제될 때까지 한국이 개발하는 미사일은 사거리 제한에 묶여 있었기 때문에 한국은 폭발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탄두 중량을 늘리는 데 집중해 왔다. 그렇게 쌓은 노하우로 현무-5의 탄두 중량을 현무-4보다도 3배 이상 늘렸다.

 

▷재래식 무기의 폭발력 최대치는 10t 정도다. 탄두 중량 8t이면 세계 최대급이다. 전술핵무기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수십 개를 동시에 터뜨리면 핵 배낭과 맞먹는 폭발력을 지닌다. 관통력에서는 재래식 무기가 우수하다. 핵폭탄으로는 지하 50m 정도밖에 뚫을 수 없지만 현무-5로는 지하 100m보다 더 깊은 갱도 속의 표적도 파괴할 수 있다고 한다. 북한 김정은과 군 지휘부의 위치는 한미 정보자산에 의해 감시되고 있다. 김정은이 핵무기를 사용한다면 즉각 현무-5의 표적이 될 수 있다.

▷다만 현무-5를 현 시점에서 정식으로 공개하는 것이 바람직한지는 의문이다. 현무-5는 한미 미사일 지침이 해제된 후 개발됐기 때문에 현무-4까지 사거리가 800km로 제한돼 있던 탄도미사일과는 달리 탄두 중량을 줄이면 3000km 이상까지 날릴 수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정도 사거리면 중거리탄도미사일이다. 중국과 일본으로서는 크게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다. 북한의 미사일 도발에 맞서 국민의 안보 불안을 잠재울 필요가 있지만 더 적절한 공개 시점을 찾아야 한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10-19  군대 가는 BTS

 

세계가 주목하는 ‘군백기(군대+공백기)’가 예고됐다. 방탄소년단(BTS) 일곱 멤버가 맏형 진부터 순차적으로 입대한다고 발표한 것. 막내 정국이 2027년까지 입대를 미룰 수 있는 점을 감안하면 BTS의 군 복무로 인한 공백기는 2025년, 늦어질 경우 2029년까지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100개국 1800만 다국적 ‘아미’를 팬으로 거느린 BTS가 사병 복무를 선언하자 주요 외신도 일제히 속보를 전했다

 

▷‘BTS 병역특례법’을 놓고 논쟁하던 국회가 머쓱해졌다. 국위를 선양한 체육인과 예술인에게 주어지는 병역 면제 혜택을 대중문화인에게도 적용하는 내용의 법안인데 설문조사를 하면 찬성 여론이 약간 높게 나온다. 국위 선양으로 치자면 BTS만 한 인물이 있느냐는 것이다. BTS는 세계 5대 음악 시장에서 앨범 차트 정상을 찍었다. 미국 빌보드 핫100 1위에 6곡을 올린 한국 가수는 BTS가 유일하다. 2020년엔 한국어 노래로 1위를 차지했는데 영어 가사가 아닌 노래가 발매 첫 주 정상에 오른 것은 빌보드 62년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BTS의 누적 앨범 판매량은 3000만 장이 넘는다. 포브스는 2019년 BTS의 경제적 생산유발효과를 연간 46억5000만 달러(약 6조6200억 원)로 추산했다. 현대경제연구원은 BTS가 2014년 데뷔한 후 2023년까지 창출할 경제적 효과가 56조 원이라고 했다. 구글 검색량으로 측정한 인지도가 1포인트 올라갈 때마다 외국인 관광객 수와 옷, 화장품, 음식 수출액이 0.18∼0.72%포인트 증가하는 것으로 나왔다. 한마디로 BTS는 총 대신 마이크를 잡는 게 국익에 훨씬 이득이라는 주장이다.

 

▷반대 여론도 만만치 않다. 입영 대상이 줄어들고 있어 특례 확대는 무리인 데다 앨범 판매량 등으로 뽑는 대중음악상은 경연대회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아미들 사이에선 ‘깔끔하게 다녀오면 장수 아이돌이 될 것’이라는 기대도 나온다. 샤이니의 민호는 해병대 제대 후 주연급 배우로 활약 중이다. 군대에 가려고 미국 영주권을 포기한 2PM 옥택연은 허리 디스크로 군 대체 복무 판정을 받았지만 현역 복무를 자원했고 제대 후에도 잘나가고 있다.

▷BTS는 국내에선 ‘반듯한 아이돌’, 해외에선 ‘소셜 캠페이너(사회운동가)’로 통한다. 방황하는 청춘들이 ‘Love yourself’로 ‘나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전 세계 민주화 시위대가 ‘Not today’를 들으며 ‘우리가 지는 날이 오겠지만 오늘은 아니야’를 합창한다. 가장 성공한 7명의 청년들이 성취에 기대어 특혜를 바라지 않고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지겠다고 선언했다. 세계 정상급 노랫말과 춤사위 못지않은 선한 영향을 줄 것이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10-20  西朝鮮(서쪽의 북한)

 

미국 뉴욕타임스 최근 기사에 ‘서조선(西朝鮮)’이란 표현이 등장했다. 중국 시진핑 국가주석의 3연임 대관식 기획 보도에서 ‘전면적인 통제의 시대(Era of Total Control)’가 도래하고 있다고 비판하며 온라인에선 중국이 서조선, 즉 ‘서쪽의 북한(the North Korea to the west)’이란 닉네임으로 불린다고 썼다. “시진핑은 걸출한 인민 영수” 등 ‘시비어천가’가 울려 퍼지고 있지만 온라인에선 중국이 ‘북조선’을 닮아가고 있다는 자조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것이다.

 

▷서조선이란 말이 처음 나온 건 아니다. 10년 전 일본 누리꾼들이 먼저 자국을 비하하는 의미로 동조선(東朝鮮)이란 신조어를 썼고, 중국 누리꾼들도 따라 했다. 억압 정치, 민주주의 결핍, 서방에 대한 두려움 등에서 북한과 다를 게 없다는 점을 풍자한 조어다. 서(西)의 발음이 시(習)와 성조는 다르지만 발음은 같다는 점에서 ‘시황제의 중국’이라는 의미도 깔려 있다고 한다.

▷뉴욕타임스 기사는 “베이징은 중국인들이 접할 정보, 말할 수 있는 정보를 거의 절대적으로 통제하고 있다”고 했다. 중국은 광활하다. 인구도 14억이 넘는다. 북한처럼 철저히 외부 세계와 단절하는 게 사실상 불가능할 것 같다. 그런데도 완벽히 통제 사회를 구현하려 한다. 대체 이는 어떻게 가능한가. 각종 첨단 기술을 동원한 ‘디지털 법가’의 세상을 만든 것이다.

 

▷중국은 만리장성과 같은 ‘성벽’을 사이버 공간에도 구축했다. 이른바 ‘만리방화벽’(Great Firewall)이다. 전 세계 모든 사람이 인터넷을 통해 연결될 수 있지만 중국 인터넷은 외국과 연결될 때 검열 기능이 있는 스위치, 라우터를 경유해야 한다. ‘디지털 요새’를 만들어 놓고 중국 인민해방군은 수만 명을 고용해 공산당 정책을 일방적으로 홍보하는 포스팅을 올려 여론을 조작한다. 건당 50센트를 준다고 해서 ‘50센트 공산당’이라는 말까지 생겨났다.

▷중국은 아울러 최고의 디지털 감시 시스템인 ‘톈왕(天網)’을 가동하고 있다. 해외 도피 인사까지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는 하늘의 그물을 만든 것이다. 톈왕의 그물코는 점점 촘촘해지고 있다. 최첨단 안면인식 장비, 4억만 개가 넘는 감시 카메라, 감시 드론, 빅데이터, 딥러닝 기술을 결합한 최고의 감시 시스템이다. 인민 개개인의 생채 정보까지 정부 데이터에 쌓이고 있다.

▷북한을 빗대 ‘서조선’이란 조어가 나왔지만 이쯤이면 북한은 ‘아날로그 전체주의’, 중국은 ‘디지털 전체주의’로 규정해야 하는 것 아닐까. 빈부격차에 대한 불만이 커 ‘공동부유’를 내세운 시 주석의 노선에 동조하는 인민도 적지 않다지만 이런 빅브러더의 세상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정용관 논설위원 yongari@donga.com

 

10-21  1시간 거리 5시간 타는 택시

 

시각장애인 제삼열 씨와 휠체어를 타는 지체장애인 윤현희 씨. 부부는 수년 전 서로의 눈과 다리가 되어 영국과 프랑스 여행을 다녀왔다. 런던 시내를 걷고, 파리 에펠탑에 오르고, 베르사유 궁전도 구경했다. 서울 시내를 돌아다니거나, 남산서울타워에 오르거나, 경복궁 가는 데 걸림돌이 됐던 신체적 장애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저상버스와 지하철 타기가 너무도 쉬웠기 때문이다.

 

▷가장 놀라운 건 택시였다. 런던 시내를 걷다 블랙캡이 지나가기에 혹시나 싶어 손을 들었는데 거짓말처럼 멈춰 섰다. 일반 택시였지만 전동 휠체어를 타고도 탑승이 가능했다. 한국에선 장애인 콜택시를 불러야 한다. 운 좋으면 부른 지 30분 만에 오지만 2∼3시간을 기약 없이 기다릴 때가 많다. 부부가 서울로 이사한 첫날, 마트에 갈 땐 초저녁이어서인지 금방 오던 콜택시가 집에 가려고 다시 불렀더니 2시간이 넘도록 소식이 없었다. 결국 부부는 잔뜩 짐을 든 채 휠체어 바퀴가 지하철 승강장에 빠져가며 한밤중에 귀가했다.

▷시 경계를 넘어 이동할 땐 불편함이 더하다. 어제 동아일보에는 경기 포천에서 의정부를 거쳐 서울 영등포로 가는 장애인 문정길 씨 동행 기사가 실렸다. 자동차로 1시간 10분이면 가는 거리인데 장애인 콜택시를 탔더니 5시간 8분이 걸렸다. 포천 택시는 포천, 의정부 택시는 의정부를 벗어날 수 없어 택시만 3번 부르고 그럴 때마다 20분∼2시간 20분을 기다렸다. 경기 성남에 사는 전윤선 씨는 서울 용산에서 오후 10시 40분 장애인 콜택시를 호출한 후 갈아타고 기다리느라 다음 날 오전 6시에야 도착했다고 한다.

▷장애인 콜택시는 중증 장애인 150명당 1대를 확보해야 하는데 경기(112%)와 경남(105%)을 제외한 15개 시도의 확보율은 법적 기준에도 못 미친다. 사정이 나은 서울도 85%다. 그렇다고 장애인용 택시를 마냥 늘리는 것만이 해결책일까. 장애인이 지하철이나 저상버스를 타는 데 불편함이 없는 나라는 한국보다 장애인용 택시가 오히려 적다고 한다. 장애인도 버스와 지하철을, 휠체어 이용자도 일반택시를 쉽게 이용할 수 있는 방안을 함께 고민해야 한다.

▷제삼열 윤현희 씨 부부는 유럽여행기 ‘낯선 여행, 떠날 자유’에서 콜택시가 늦게 와 놓쳐버린 기차, 입장할 수 없었던 공연장에 대해 썼다. 언제 올지 모르는 택시가 거의 유일한 이동 수단인 사람들은 시간 약속을 할 수 없다. 정시 도착이 기본인 교육이나 취업의 기회를 갖기 어렵고, 사교와 문화생활이 여의치 않으니 고립되고 삶의 질도 나빠진다. 인간다운 생활을 하려면 ‘떠날 자유’부터 보장돼야 한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10-22(토)  자금시장 레고랜드 쇼

 

“강원도 관광은 이제껏 겪어보지 못한 새로운 지평을 열 것입니다.” 올해 3월 말 춘천시 의암호 중도에서 열린 레고랜드 준공식에서 최문순 당시 강원지사는 감개 어린 표정으로 축사를 했다. 도지사가 된 첫해 시동이 걸린 레고랜드 사업이 11년의 긴 임기 종료를 3개월여 앞두고 비로소 끝났기 때문이다. 5월 5일 어린이날에 맞춰 문을 연 레고랜드는 초등학생 자녀와 부모가 함께 갈 만한 테마파크다.

▷덴마크 조립식 장난감 레고를 테마로 한 이 놀이공원이 이번 주 한국 자본시장을 뒤흔든 나비 효과의 진원지가 됐다. 강원도와 레고랜드 운영사인 영국 멀린엔터테인먼트그룹이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출자해 만든 강원도중도개발공사(GJC)의 자산유동화기업어음(ABCP)이 문제였다. GJC는 공사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부동산 자산 등을 담보로 재작년에 2050억 원어치의 기업어음을 발행했다. 강원도가 지급보증을 선 이 어음을 10여 개 증권사가 샀다.

▷이 기업어음 지급 기일이 지난달 29일이었다. 그런데 7월 취임한 김진태 도지사가 지급을 거절했다. 여기에 더해 강원도는 법원에 GJC의 기업회생을 신청하겠다고도 밝혔다. 회생 절차를 통해 회사 자산을 팔아 빚을 갚겠다는 취지였다. 민주당 소속 최 전 지사가 레고랜드 사업을 추진하면서 생긴 빚을 국민의힘 소속 새 지사가 막대한 예산을 써가며 떠안을 생각이 없다는 뜻으로 시장은 받아들였다. 기업어음은 이달 6일 최종 부도 처리됐다.

 

▷급격한 금리 인상, 기업들의 실적 악화 속에서 빌려준 돈이 떼일까 봐 불안해하던 투자자들은 이 소식에 황급히 지갑을 닫았다. 국가와 같은 수준으로 신용등급을 인정받는 지방자치단체가 보증한 어음이 부도를 낸 데 쇼크를 받았다. 레고랜드 기업어음을 많이 들고 있거나, 부동산 개발사업 대출이 많은 증권사들이 시장에 매물로 나왔다는 말이 돌고 있다. 분양시장이 얼어붙어 자금이 달리는 일부 건설업체들도 덩달아 부도설에 휩싸였다. 강원도는 뒤늦게 “예산을 편성해 내년 1월 29일까지 돈을 갚을 것”이라고 했지만 자본시장은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세계경제는 지금 미세한 충격이 막대한 파급 효과를 낳을 수 있는 살얼음판이다. 미국 연방준비제도 관계자, 월가의 투자은행 수장, 저명한 경제학자의 자극적인 말 한마디에 각국 주가와 환율이 요동을 친다. 엔-달러 환율 150엔 선이 깨지자 1997년 태국에서 시작돼 한국 등으로 순식간에 번졌던 ‘아시아 외환위기’에 대한 두려움이 다시 커지고 있다. 중앙정부는 물론이고 지방정부, 금융시장 참가자와 기업들 모두 최대한 신중히 판단하고 움직여야 한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10-24(월)  ‘반값 아파트’

 

빛이 밝으면 그늘이 짙다. 요즘 ‘빙하기’가 도래한 부동산 시장이 딱 그렇다. 최근 3, 4년간 전례 없이 폭등했던 아파트 가격이 뚝뚝 떨어지더니 급매, 급급매에 이어 반값 아파트까지 등장했다. 지난달 서울 마포구 염리삼성래미안 전용면적 84m²가 8억 원에 거래됐는데 1년 전 가격의 절반 수준이다. 이 단지 커뮤니티가 발칵 뒤집힐 만하다.

 

▷강남 불패 신화도 깨졌다. 8월 서울 강남구 디에이치자이개포 전용면적 84m²는 8개월 전보다 9억 원 떨어진 15억 원에 팔렸다. 서울 송파구 가락동 헬리오시티 전용면적 84m²는 지난달 13억8000만 원에 거래됐다. 한 달 만에 무려 8억 원이 빠졌다. 이들 거래 중에는 직거래가 섞여 있어 집값 폭락의 전조인지, 세금을 아끼려는 증여 거래인지는 해석이 엇갈리고 있다.

▷집주인들은 반값 아파트를 막기 위해 똘똘 뭉쳤다. 반값 아파트 거래를 성사시킨 공인중개업소를 공개하고 보이콧하거나 매도인의 신상을 공개하겠다고 압박한다. 하지만 집값 하락의 추세를 거스르긴 역부족이다. 서울 강동구 한 아파트(전용면적 84m²)를 5억 원가량 낮춰 판 아파트 매도인은 유튜브에 직접 출연해 “매달 대출 이자 내줄 것도 아니면서 사유재산에 대해 왜 팔았느냐고 왈가왈부할 수는 없다”고 했다. 싸게 팔고 싶어 싸게 팔았겠느냐는 호소다.

 

▷현재 부동산 시장은 집을 사겠다는 수요가 사라진 까닭에 꽁꽁 얼어붙었다. 금리가 가파르게 인상되면서 이자 부담이 임계점을 넘어섰다. 집을 살 엄두를 낼 수 없게 된 것이다. 연말이면 주택담보대출 최고 금리가 8%가 넘을 것이라는 예상이 나온다. 거금이 필요한 전세 거래 역시 실종됐고 경매와 청약시장까지 마비됐다. 반값 경매가 유찰되고 청약에 당첨돼도 잔금을 치르지 못한다. 전문가들은 “급매 위주로 거래되다 그 가격이 고착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실거래가 기준으로 서울 아파트 3.3m²당 중위가격은 이미 2년 전 아래로 내려섰다.

▷금리에 따라 집값이 움직인다 하더라도 아파트 가격의 변동성이 지나친 것은 문제다. 실수요보다 갭 투자 같은 투자 수요가 집값을 올려놓고 집값이 떨어지자 투매한다는 분석이 가능하다. 미국 댈러스 연방준비은행에 따르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에서 한국은 팬데믹 동안 집값 버블현상이 심각했던 나라에 속한다. 거품이 사그라지는 과정에서 시장의 고통이 커질 것이다. 그래도 집값은 차츰 정상화돼야 한다. 청년들은 “내 집 마련에 따라 인생의 난이도가 달라진다”고 자조한다. 난이도가 높은 문제는 풀기를 포기하게 되듯이 인생의 난이도가 높아지면 결혼 출산 등을 포기한다. 결코 바람직한 사회가 아니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10-25  후진타오의 퇴장

 

2012년 후진타오(80)와 시진핑(69)의 권력 이양은 이례적으로 순조로웠다. 후 당시 중국 국가주석은 “원로정치 타파” 를 명분으로 전임자가 몇 년간 군권을 갖는 전례를 깨고 당과 군의 권력을 한꺼번에 물려줬다. 후임자 시 주석은 “ 고풍량절(高風亮節· 고상한 품격과 굳은 절개)을 보여줬다” 는 극찬으로 화답했다. 두 손을 맞잡고 환하게 웃던 둘은10년 후 전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어색한 장면을 노출하게 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22일 폐막한 제20차 중국공산당 전국대표대회에서 단연 눈길을 끈 장면은 후 전 주석이 폐막식 도중 화난 표정을 짓다가 수행원의 부축을 받아 퇴장하는 모습이다. 외신이 공개한 사진과 영상에는 그가 책상 위에 있는 파일을 열어보려다 시 주석의 최측근에게 제지당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측근은 파일을 빼앗다시피 했고 후 전 주석이 화내자 시 주석의 지시를 받은 수행원이 그를 끌어내는 듯한 장면으로 이어진 것이다. 중국 관영 신화통신은 ‘건강상 이유’라고 했지만 “후 전 주석을 자극해 끌려나가는 모습을 연출한 것 아니냐”는 뒷말이 나온다.

▷후 전 주석은 고위급 원로들 중 이례적으로 이번 당대회에 참석했다. 당 3대 파벌인 ‘상하이방’의 거두 장쩌민 전 주석과 주룽지 전 총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는데 시주석의 종신집권을 반대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제기됐다. 시 주석의 상하이방 척결 후 장 전 주석은 ‘반(反)시진핑’으로 돌아섰고, 주 전 총리도 올 3월 시 주석의 3연임에 제동을 거는 당 원로들의 움직임에 동참하고 있다는 미국 언론 보도가 나왔다.

 

▷시 주석에 대한 공개 발언을 자제한 덕분인지 후 전 주석은 당대회에 초대 받았지만 결과적으로 수모만 당한 셈이 됐다. 개혁·개방의 실용주의자였던 그의 퇴장은 시 주석의 중국이 정반대 길을 가게 될 것이며 이를 견제할 세력은 모두 제거됐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 리틀 후’ 로 불렸던 최측근 후춘화 부총리는 정치국 위원 24명에도 들지 못했다. 리커창 총리와 왕양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 주석도 중앙위원 205명을 뽑는 선거에서 탈락했다.

▷시 주석의 측근 그룹인 ‘시자쥔(習家軍)’이 이번에 상무위원 서열 2∼7위를 싹쓸이하면서 집단지도체제를 1인 독재체제로 바꿔놓았다. 모두 10대 시절 문화혁명을 겪으며 홍위병에 ‘가스라이팅’ 당해 뼛속까지 공산당원인 사람들이다. ‘대약진운동’이나 문화혁명 같은 광신적 정책이 되풀이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제기된다. 반대 세력을 모조리 몰아내고 전면에 나선 만큼 실패의 책임도 더 크게 돌아올 것이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10-26  인도계 영국 총리 탄생

 

“인도의 권력은 악한과 사기꾼과 약탈자들의 손에 들어가고 지도층은 무능하고 약해빠진 이들로 채워질 것이다.” 인도가 영국의 식민 지배에서 벗어나 1947년 독립을 선언했을 때 윈스턴 처칠 전 영국 총리는 악담을 퍼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제국주의 향수를 버리지 못한 채 쓴맛을 다시던 영국의 당시 분위기였다. 인도가 독립 75주년을 맞은 올해, 인도계인 리시 수낵 전 재무장관이 영국의 새 총리로 결정되자 “처칠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 일”이라는 말이 나왔다.

 

▷이민자 2세인 수낵 신임 총리는 영국 역사상 첫 비(非)백인 총리가 된다. 부모가 각각 케냐와 탄자니아에서 살다 영국으로 이주한 인도계다. 이민자의 아들, 그것도 영국 식민지였던 인도 이민자의 핏줄이 견고했던 보수당 내 ‘백인 장벽’을 깨뜨린 것이다. 인도는 전역이 흥분에 휩싸였다. “제국주의의 반전”, “영국에서 뜨는 인도의 태양”, “제국을 떨치고 일어난 인도의 자손” 같은 표현이 인터넷에 쏟아지고 있다. “역사를 제자리로 돌려놓은 정의의 실현”이라는 평가도 있다.

▷불과 50일 전 수낵이 리즈 트러스와의 경선에서 패배했을 때만 해도 그의 정치 인생은 내리막길에 들어선 것처럼 보였다. 보수당원 16만 명이 진행한 투표에서 57% 대 43%로 고배를 마셨다. 부인의 탈세 논란 등으로 상처가 나면서 빠르게 존재감을 상실했다. 영국 생활을 접고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펀드매니저로 일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기도 했다. 역전의 기회는 드라마틱하게 찾아왔다. “총리를 다시 뽑게 됐다”고 알리는 전화를 받은 것은 그가 볼링장에서 공을 굴리고 있을 때였다.

 

▷수낵 총리는 “영국은 조국이고 고향”이라면서도 자신의 종교와 문화유산의 뿌리가 인도에 있다고 강조해 왔다. 힌두교도인 그는 소고기를 먹지 않으며, 하원의원 취임식 때는 힌두교 경전을 들고 선서했다. 다만 이민자 출신임에도 그의 이민 정책은 강경하다. 그가 브렉시트에 찬성한 이유 중 하나는 영국의 국경 통제권을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경선 과정에서는 불법 이민자 단속을 강화하는 공약을 내놨다.

▷수낵 총리가 자신을 지지하는 동료 의원 100명을 다시 끌어모으는 데는 단 하루밖에 걸리지 않았다. ‘트러스노믹스’ 파장을 경고해 판단력을 입증한 그는 보수당의 강력한 대안이었다. 그러나 눈앞의 경제위기를 뚫어낼 구체적 해법은 아직 없다. 재정 보수주의자인 그가 의료, 복지 지원 확대를 원하는 민심을 어떻게 끌고 갈지도 관전 포인트다. 영국의 추락을 멈춰 세울 역량을 보여주지 못하면 ‘44일 천하’로 끝난 전임자 전철을 되풀이하지 말란 법은 없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10.27  인구배당효과의 소멸

 

사람들은 약자가 강자를 꺾은 전쟁을 오래 기억하지만 대부분의 전쟁에서 “신은 큰 군대의 편”(볼테르)이었다. 1차대전에서 승리한 연합국 병력은 4600만 명, 동맹국은 이의 절반이었다. 미국과 소련이 아프가니스탄 점령에 실패한 데는 아프간의 중위 연령이 20세 미만인 반면 두 강대국의 경우 30세를 훌쩍 넘는 인구구조의 차이도 한몫을 했다.

 

▷경제도 인구의 힘이 작용한다. 영국이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건 산업혁명에 앞선 데다 영아 생존율과 기대수명 급증으로 제국을 경영할 인력을 확보한 덕분이다. 미국은 1930년대만 해도 저출산 국가였으나 전후 귀향한 군인들이 부지런히 2세를 낳으면서 합계출산율이 3.5명으로 뛰었다. 1950년대엔 이민 유입이 본격화하기 전임에도 인구가 2배로 늘어 세계 1위 경제대국의 토대를 마련했다. 일본의 장기침체는 출산율 감소 시기와 맞물린다.

▷인구의 구조도 중요하다. 전체 인구에서 생산가능인구(15∼64세)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야 경제성장률이 오른다. 일명 ‘인구배당효과’ 혹은 ‘인구 보너스 효과’다. 중국 성장률의 5∼27%는 인구배당효과라는 추산이 있다. 국회예산정책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 회원국의 1960∼2019년 인구구조 변화와 경제성장률을 분석했는데 인구가 1% 늘면 연평균 성장률이 0.18%포인트 증가하는 것으로 나왔다. 반면 65세 이상 고령자 비중이 높아지면 성장률은 하락했다.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폭발적 경제성장에도 인구배당효과가 ‘순풍’으로 작용했다. 어제 동아일보 포럼에서는 생산인구 비중이 1975년 46%에서 2000년 64%로 증가하면서 교육비와 투자가 늘어나 경제가 급성장했다는 진단이 나왔다. 하지만 인구배당효과는 소멸 중이다. 2050년이면 생산인구 비중이 1975년도 수준으로 쪼그라든다. OECD는 한국이 저출산과 고령화라는 ‘역풍’을 맞아 2047년부터 잠재성장률이 마이너스가 될 것으로 전망했다.

▷인구배당효과를 높이려면 출산을 장려하는 동시에 고령층을 더 오래 효율적으로 일하게 해야 한다. OECD 국가들의 경우 자동화와 로봇 도입으로 고령층의 생산성이 오르면서 고령화가 성장률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도 2000년대 이후로는 이전의 절반 수준으로 줄었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유럽중앙은행 총재는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로 국내총생산(GDP)을 10%까지 높일 수 있다고 했다. 해외 이주민 유입은 경제적 효과와 사회적 비용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숫자는 승리의 가장 일반적 원칙”이라는 군사학자 클라우제비츠의 명언은 국가의 생존에도 적용된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10-28  日 ‘더 오래 내는’ 연금개혁

 

인구위기로만 보면 일본은 한국의 미래나 다름없다. 대략 20년의 시차가 난다. 2005년 일본은 초고령사회(인구 5명당 1명이 65세 이상 노인)에 진입했다. 2010년부터 거주 외국인을 포함한 총인구가 감소하기 시작했다. 한국은 2025년 초고령사회로 진입한다. 총인구는 예상보다 7년 앞선 지난해부터 감소했다. 세계 최저 합계출산율과 최고 고령화 속도를 감안하면, 일본보다 극심한 인구위기를 겪게 될 것이 자명하다.

 

▷지속가능한 사회보장제도는 인구위기를 겪고 있는 일본의 최대 숙제다. 최근 일본 정부는 국민연금의 납부 기간을 현행 59세에서 64세로 5년 연장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2040년이 되면 65세 이상 노인인구가 4000만 명에 이른다. 이들이 스스로를 부양하지 않고서는 아래 세대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숫자다.

▷현행 일본의 연금제도는 2004년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과감한 개혁 내용이 반영된 것이다. 매년 내는 돈을 인상해 현재 국민연금과 후생연금을 합친 보험료는 한국의 2배인 18.3%다. 받는 돈은 점진적으로 깎고 있다. 인구와 경제지표에 연동해 연금지급액을 자동 삭감하는 ‘거시경제 슬라이드’도 도입했다. 당시 개혁으로 100년간 연금 재정이 안정될 것으로 봤다. 그런데 노인 인구가 30%에 육박하면서 연금기금 고갈 시기가 예상을 앞질러 버렸다. 기시다 후미오 총리가 연금개혁을 서두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일본의 연금제도는 연금개혁이 논의될 때마다 참고할 만한 모델로 자주 거론된다. 일본의 공적연금은 3층 구조다. 모든 국민이 가입하고 보험료를 똑같이 납부하는 국민연금이 있다. 한국의 기초연금과 유사한데 개인과 정부가 절반씩 부담한다는 점이 다르다. 이번 개혁은 이 보험료의 납부기간을 늘리겠다는 것이다. 국민연금 위에는 후생연금을 쌓는다. 우리로 치면 국민연금과 직역연금을 통합한 형태다. 마지막으로 퇴직연금과 개인연금을 얹는다. 이처럼 촘촘하게 노후안전판을 마련한 뒤 연금 개시 연령과 정년을 맞췄다.

▷일본은 법적으로 65세 정년을 보장하고 있고, 2020년부터 70세 정년을 권고하고 있다. 연금개혁의 강도를 점진적으로 높이는 대신 은퇴 시기를 단계적으로 늦춰왔다. 더 늦게 타더라도 더 오래 벌도록 해서 개혁의 고통을 분산시킨 것이다. 한국에선 경직된 노동시장 탓에 정년 연장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지난해 보인다. 하지만 일본과 인구구조가 꼭 닮은 한국으로선 참고할 수밖에 없는 길이다. 정년 연장과 병행한 일본 연금개혁의 성과와 한계를 분석해 미리 대비해야 한다. 그래야 미래를 바꿀 수 있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10-29(토)  4050 역차별 논란

 
 

 “우리가 꿀 빨았던 세대라고요?” 세대갈등이 다시 거세지던 지난해 4050세대들이 모이는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기성세대를 향해 거칠어지는 2030세대의 불만과 비판이 중장년층의 논쟁을 부추긴 것이다. 한쪽에선 혹독한 IMF 구조조정 경험과 구직난 등을 거론하며 “후세대가 함부로 평가하지 말라”고 발끈하는 반응을 내놨다. 반면 ‘한강의 기적’을 이룬 산업화 시대 성장기에 올라타 자산을 축적해 왔으니 “꿀 빤 세대가 맞지 않냐”는 반박 의견들도 많았다.

 

▷한국의 40대와 50대는 전체 연령의 32.5%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세대다. 이 세대가 보유한 부동산 등 자산은 전체의 53.3%로 절반을 넘는다. 국가경제 측면에서 ‘경제의 허리’이자 인생 주기에서도 경제적으로 가장 안정된 시기다. 동시에 자녀 교육과 부모 부양의 부담을 양쪽에서 떠안아야 하는 고단한 ‘샌드위치 세대’이기도 하다. 자산이 많은 만큼 이 세대가 짊어진 부채 비율은 60.2%(948조 원)에 달한다.

▷요즘 4050세대 중에는 젊은 세대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이가 적잖다. 정부가 청년을 우대하는 부동산, 금융 정책을 쏟아내면서 “중장년층을 외면하는 역차별”이라는 불만이 높아졌다. 최근 발표된 ‘공공주택 50만 가구 공급대책’만 해도 종류에 따라 최대 80%가 청년층에 배분되는 구조여서 “젊은이만 국민이냐”는 볼멘소리가 나온다. 4050세대도 가계대출이 급증하는 상황에서 젊은 세대를 챙길 여력은 급속히 사라지는 분위기다.

 

▷이들의 불만을 감수하며 밀어붙이는 정부의 청년 대책이 2030세대를 모두 만족시키는 것도 아니다. 공공주택 분양은 당첨자들만 얻을 수 있는 제한적 혜택이고, 금융상품의 세제 지원도 정기적으로 돈을 부을 수 없는 청년에게는 그림의 떡이라고 이들은 항변한다. 청년희망적금만 해도 급전이 필요하다는 등의 이유로 석 달여 만에 17만 명의 가입자가 빠져나갔다. 청년들에게 4050세대의 불만은 ‘기득권을 내려놓지 않으려는 자들의 배부른 소리’일 뿐이다.

▷현재 추진되는 청년 정책의 상당수는 지난해 대선 과정에서 청년층 표심을 잡기 위해 정부가 내놨던 공약에서 출발했다. 미래 세대를 위한다는 취지는 좋지만 한정된 재원으로 특정 세대를 챙기려다 보니 불가피하게 소외되는 세대가 나올 수밖에 없다. 소수이기는 하지만 4050세대 일각에서는 납세 거부 운동을 하자는 극단론까지 나오는 판이다. 연금, 노동 개혁 같은 본질적 대책은 놔두고 보여주기식 선심성 정책을 앞세운 결과가 세대갈등을 부추기는 부메랑으로 돌아오고 있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10-31(월)  규모 4.1 괴산 지진

 

29일 충북 괴산군 북동쪽 11km 지역에서 리히터 규모 4.1의 지진이 발생했다. 진원지 인근 주민들은 “갑자기 ‘우르릉’ 하는 큰 소리가 울리면서 창문이 심하게 흔들렸다” “전쟁이 난 줄 알았다”고 했다. 지상에서 느끼는 이 지역 흔들림의 정도는 ‘거의 모든 사람이 진동을 느끼고, 그릇과 창문 등이 깨지기도 하는 수준’으로 측정됐다. 우리 국토의 중앙 지점에 위치한 이번 지진으로 충북뿐만 아니라 서울과 강원, 경남에서도 흔들림이 감지됐다.

 

▷올해 국내에서 규모 4.0 이상의 지진이 발생한 것은 처음이다. 1978년 지진 관측 이래 역대 38번째 규모다. 문제는 규모가 아니라 발생 지역이다. 괴산 등 중부 내륙은 한반도에서 지진이 가장 드문 지역으로 꼽혔다. 규모 10위권 이내의 주요 지진은 동해와 서해 해안이나 섬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발생했다. 괴산 진원지의 반경 10km 이내에서 발생한 지진 기록도 40년 넘게 없었다. ‘지진 안전지대’에서 발생한 의외의 지진인 셈이다.

▷한반도가 지진으로부터 안전한 곳이라는 통념은 규모 5.0 이상의 지진이 경주와 포항에서 잇따라 발생하면서 깨졌다. 국내에서 관측된 가장 강력한 지진은 2016년 경주에서 발생한 규모 5.8의 지진이다. ‘천년 유물’ 첨성대가 기울어졌고, 이재민 100여 명이 발생했다. 이듬해 포항 지진(5.4)은 역대 두 번째 규모였지만 이재민은 10배 이상 많았다. 특히 수능 하루 전날 발생해 시험이 일주일 연기되는 등 전국적 혼란을 가져왔다.

 

▷지진은 단층 등의 급격한 지각 변형이 원인이다. 지각이 살아 움직이는 지구엔 영원한 지진 안전지대가 없다는 것을 역사는 그대로 보여준다. 삼국사기와 고려사,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한 한반도 지진 관련 기록만 1900건이 넘는다고 한다. 이 중에 굵직한 피해가 발생한 것만 추려도 40여 차례다. 지진 발생은 영남 지방에 국한되지 않았다. 서울과 충북 등 내륙에서도 지진이 많이 발생했다. 특히 충북은 언급되지 않은 지역이 거의 없을 정도로 과거엔 지진이 잦았다.

▷지질학자들은 최근까지 활동했고, 가까운 미래에 움직일 수 있는 활성 단층이 한반도에 450여 개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정부는 경주 지진 이후 2041년까지 전국의 활성 단층 전수조사에 나섰는데, 충북 일대는 올해 조사를 시작했다고 한다. 전문가들조차 “지진 발생을 예측할 수 있는 기술이 아직 없다”고 한다. 내진설계 기준 등 잘못된 통념에 따라 만들어진 기존 대비 체계를 하루빨리 바꾸지 않으면 무방비나 다름없는 상태에서 대형 지진을 맞게 될 수도 있다./
정원수 논설위원 needj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