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박종인의 땅의 歷史] 311. 모두가 쉬쉬했던 ‘미화된 역사’ - 320. 이씨 왕실 족보 왜곡과 1537년 경회루에서 벌어진 막장 사대(事大) 대참사

상림은내고향 2022. 10. 27. 19:47

[박종인의 땅의 歷史] 2022 조선일보

2022.08.10

311. 모두가 쉬쉬했던 ‘미화된 역사’

‘헤이그 밀사 이준 할복자살’은 대한매일신보의 가짜뉴스였다

 

1962년 10월 국사편찬위원회가 발간한 ‘이준열사사인조사자료’.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로 파견됐다가 현지에서 죽은 이준의 사인 논란에 대해 자살설과 분사설에 대한 각종 기록과 증언을 취합한 문건이다. 위 81~83페이지에 “신채호와 양기탁, 베델이 민족 긍지를 위해 ‘대한매일신보’ 기사를 조작했다”는 증언이 수록돼 있다. ‘할복자살’과 ‘분사(憤死)’로 대립하던 이준의 죽음에 대해 국사편찬위는 ‘순국(殉國)’이라는 용어로 타협을 봤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불편한 진실

‘해방 후 왜곡된 민족사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하게 되었다. 일제 식민주의자들에 의한 식민주의사관도 바로잡아야 하지만 동시에 민족주의 내지는 국수주의적인 관점에서 해석되고 미화되어진 역사적 사실들에 대한 검증도 여러 분야에서 제기되었다. 이준의 사인(死因)에 관한 문제도 이와 같은 추세에서 제기되었다. 지금까지 전승되어 오던 내용과 차이가 있음이 여러 사람들에 의해 제기되었고 더 이상 자살설로 국민을 설득한다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다.’(전 국사편찬위원장 이만열, ‘이준 열사의 생애와 국권회복운동’, ‘2009년 상반기시민강좌자료집’, 서울YMCA시민논단위원회, 2009)

 

이상설, 이준, 이위종 세 헤이그 밀사 가운데 이준에게는 ‘열사(烈士)’ 칭호가 붙어 있다.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회의장에서 할복 자결해 민족 자긍심을 높인 위인으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그런데 이미 식민 시대에 이준 열사의 사인 논란이 있었고, 6·25전쟁이 끝난 1950년대에는 본격적인 논쟁이 불붙었다.

 

1962년 ‘국사편찬위원회’가 공식적으로 자살이 아닌 분사(憤死·울분을 못 이기고 죽음)라고 결론을 내렸다. 역사적 사실이 조작 내지는 미화, 왜곡됐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항일운동을 주도했던 신문 ‘대한매일신보’가 있다. 불편한, 하지만 알아야 할 진실 이야기.

 

 ▲1962년 '국사편찬위원회'가 발간한 '이준열사사인조사자료'.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밀사 파견과 퇴위당한 황제

1907년, 엄혹한 때였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나라는 실질적인 식민지로 변했다. 주권을 지킬 군사력은 없었다. 유력 정치인 중에는 “일본 밑으로 들어가자”며 노골적으로 병합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때 나온 계책이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 밀사 파견이었다. 서울에 있던 전직 검사 이준, 간도에 있던 전직 의정부 참찬 이상설 그리고 주러시아공사 이범진의 아들 이위종이 비밀리에 선정돼 헤이그로 떠났다.

하지만 회의 참석은 불가능했다. 러일전쟁(1904~1905) 승리로 조선에 대한 ‘권리’를 열강으로부터 승인받은 일본은 대한제국이 회의 참석 권한이 없다고 주장했다, 열강은 이를 받아들였다.

 

이상설과 이준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발한 한 달에 걸친 여행 끝에 6월 25일 헤이그에 도착했다. 이위종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합류했다. 비넨호프궁 회의장 입장이 불허된 이들은 7월 9일 출입기자들 초청으로 인근 국제협회 건물 회의장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5개 국어에 능통한 이위종이 ‘한국을 위한 호소(Plea for Korea)’라는 제목으로 연설을 했다. 많은 기자가 호응했지만, 활동은 거기서 끝났다. 7월 19일 일본은 밀사를 빌미로 대한제국 내각을 통해 고종을 퇴위시키고 융희제 순종을 등극시켰다. 다음 날 꼭두각시 황제 순종은 세 밀사를 ‘거짓으로 밀사라고 칭한 죄’로 처벌하라고 명했다. 이상설은 교수형, 이준과 이위종은 종신형을 선고받았다.(1907년 7월 20일, 8월 8일 ‘순종실록’)

 

▲1907년 7월 19일 ‘대한매일신보’. ‘義士 自裁(자재=자살)’라는 제목으로 ‘이준이 자결해 뜨거운 피를 뿌렸다(灑·쇄)’고 보도했다./국립중앙도서관

 

두 매체의 첫 보도 - 자결 순국

그런데 고종 강제 퇴위 사흘 전인 7월 16일 헤이그에서는 이준 장례식이 열렸다. 현지 신문 ‘하흐스허 쿠란트(Haagsche Courant)’에 따르면 이준은 7월 14일 ‘호텔방에서 갑자기 죽었다. 뺨에 난 종양을 제거했지만 살리지 못했다.’(윤병석, ‘증보 이상설전’, 1998, 일조각, p92, 93) 공동묘지에서 열린 장례식에는 이상설만 자리를 지켰다. 이상설은 “슬프다”라고 두 번 탄식했다.(1907년 7월 17일 ‘만국평화회의보’) 이미 기자회견에도 참석하지 못할 정도로 이준은 앓고 있었다. 훗날 이상설은 “약 세 첩이면 간단히 고칠 병이었는데 애석하다”고 항일 동료 이동녕에게 말했다.(이완희, ‘보재이상설선생전기초’. 윤병석, 앞 책, p96, 재인용)

 

이 소식을 조선에서 처음 보도한 신문은 ‘대한매일신보’였다. 7월 18일 이 신문은 호외(號外)를 발행해 이렇게 전했다. ‘전 평리원 검사 이준씨가 현금 만국평화회의에 한국 파견원으로 갔던 일은 세상 사람이 다 알거니와 어제 동경 전보를 받은 즉 이씨가 충분(忠憤)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이에 자결해 만국 사신 앞에 피를 뿌려서 만국을 경동케 하였다더라.’(1907년 7월 19일 ‘대한매일신보’: 호외는 남아 있지 않고, 본문은 다음 날 다시 게재됐다) 그리고 ‘격검이가(擊劔而歌: 칼을 부딪치며 노래함)’라는 제목으로 이렇게 보도했다. ‘끝내 몸안 가득한 붉은 피를 만국회의장에 한번에 흩뿌렸으니 그 충절은 만고에 필적할 이 없으리’

 

첫 보도를 경쟁지 ‘대한매일신보’에 빼앗겼던 ‘황성신문’은 이날 ‘이씨 자살설’ 제목으로 ‘자기 복부를 칼로 잘라 자살했다는 전보가 도착했다는 설이 있더라’라고 기사를 보도했다. 그리고 다음 날 ‘황성신문’은 ‘又一志士(우일지사·또 한 지사가)’라는 제목으로 특종 기사를 보도했다. ‘이준씨가 자살했다 함은 이미 보도했거니와, 또 들은 즉 이위종씨도 자살했다는 전보가 어딘가에 도착했다는 설이 있더라.’(1907년 7월 20일 ‘황성신문’)

 

 ▲1907년 7월 20일 ‘황성신문’. ‘이준씨가 자살했다’는 기사와 함께 ‘또 다른 지사 이위종씨도 자처(自處=자살)했다는 전보가 어딘가 도착했다’라고 보도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자결했다는 이위종은 그때 잠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간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미 2년 전 을사조약 직후 자결 순국한 수많은 지사(志士)들을 목격한 국민들이었다. 구체적인 출처도 없는 기사들이었지만, 이역만리에서 또 누군가가 자결했다는 보도에 대한제국 사람들은 경악했다.

 

이준의 죽음과 항일 연대

7월 17일 일본 외무차관 진타 스미미(珍田捨巳)는 이준 사인이 상처가 연쇄상구균에 감염된 단독(丹毒)이라고 통감부에 보고했다. ‘자살이라는 소문을 퍼뜨리는 자가 있으나 사실은 알려질 것’이라고 토를 달았다.(’통감부문서’5, 1. 헤이그밀사사건 및 한일협약체결 (29)한국 황제 밀사 이준 병사) 일본에서는 나가사키 ‘진세이신분(鎭西新聞)’이 ‘밀사 병사’를 처음 보도했다. ‘대한매일신보’가 받았다는 ‘자결 사망 소식을 전한 동경 전보’는 실체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어찌 됐건 이준의 할복 소식은 순식간에 국내의 여론 동향을 바꿔버렸다. 일본을 한국의 문명 개화에 도움 주는 지원국으로 생각하던 사람들을 미몽에서 깨어나게 해주고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에 처했다는 위기감을 절실하게 느끼게 해주었다.

 

이준 열사의 죽음은 한국 근대사에서 가장 잊힐 수 없는 애통하고 억울한 민족 정서를 대변해 주었다. 좌우를 막론하고 독립운동 진영에서 즐겨 불렀던 ‘용진가(勇進歌)’에는 ‘배를 갈라 만국회에 피를 뿌린 이준공과 육혈포로 원수 쏴 죽인 안중근처럼 원수 쳐보세’라는 가사가 삽입되기도 했다.(이명화, ‘헤이그특사가 국외 독립운동에 미친 영향’, ‘한국독립운동사연구’ 29집,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7)

 

 ▲1908년 1월 21일 ‘대한매일신보’. ‘의사 이준씨를 조상함’이라는 재미교포 신태규 기고문을 게재했다. ‘할복 자결했다’는 기존 보도와 달리 ‘회의장에서 이준이 방성대곡을 하다가 혼절한 뒤 별세했다’라고 사실관계가 달라져 있다./국립중앙도서관

 

밝혀지는 진실

대한매일신보는 이후 잇달아 이준의 장거를 미화하는 기사를 쏟아냈다. 7월 31일에는 참석 기자들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일본을 비판하는 연설을 했고, 이에 기자단은 만장일치로 한국을 동정하기로 결의했다고 보도했다.(1907년 7월 31일 ‘대한매일신보’, ‘평화구락부의 동정’) 또 다른 밀사 이위종이 한 연설을 이준 연설로 보도한 것이다. 8월 31일에는 ‘헤이그의 외로운 혼, 대한열사 이준을 조상함’이라는 제목으로 만가를 게재했다.

 

그런데 병을 앓다 죽었다는 사실이 여러 경로로 보도되자 대한매일신보는 ‘일전에 헤이그에서 온 전보를 받아보니 음력 6월 6일에 회의장에서 통곡하며 자살한(痛哭自裁·통곡자재) 사실이 명확하다’고 재확인했다.(1907년 9월 5일 ‘대한매일신보’)

 

대한매일신보가 주도한 ‘이준 자결 순국’ 보도는 ‘매천야록’(황현)을 비롯한 여러 문서에 인용돼 사실로 완전히 굳어졌다.

 

그런데 해가 바뀌고 1908년 1월 21일 대한매일신보는 슬그머니 ‘사실관계’를 180도로 바꿔버린다. 이날 자 1면에 이 신문은 ‘의사 이준씨를 조상하고 전국 동포에게 광고함’이라는 제목의 조사를 게재했다. 조사를 쓴 사람은 1월 8일 자에 이준을 위한 의연금 5달러를 송금한 미국 교포 신태규였고 기사 형식은 ‘기고문[寄書·기서]’였다. 요즘으로 치면 외부 칼럼이라는 뜻이다. 장문의 조사 가운데 이런 내용이 들어 있었다.

 

‘이준은 독립을 회복케 하소서 하며 방성대곡하다가 혼절하여 땅에 넘어져 피를 토하고 인사불성이 되었다. 잠시 후 깨어나 고함지르기를 (중략) 내가 혈기 남아로 한국에 다시 태어나 한국 독립을 하늘에 고할 것이다 하더니 마침내 별세한지라.’(1908년 1월 21일 ‘대한매일신보’:국한문 혼용인 원 문장을 현대어로 고쳤다)

 

할복했다는 사실은 간 곳이 없고 피를 뿌렸다는 사실도 보이지 않는다. 1면 절반을 채운 외부 칼럼을 통해 그때까지 주장했던 ‘할복자살’을 철회하고 ‘분사(憤死)’로 팩트(fact)를 고쳐버린 것이다. 순한글과 국한문혼용 두가지로 발행하던 이 신문은 이 기고문은 순한글판에는 싣지 않았다. 신문은 바뀌었지만 신화는 철회되지 않았다.

 

 ▲서울 수유리 애국선열묘역에 있는 이준 열사 묘./박종인 기자

 

해방, 그리고 바로잡은 역사

해방이 되었다. 항일운동가와 학계에서 침묵을 깨고 진실 규명을 요구했다. 1956년 사학자 이병도가 쓴 ‘국사대관’에서 병사설이 처음으로 공개됐다. 온 사회가 들끓었다. 그해 국사편찬위원회가 조사위원회를 만들고 6년 만인 1962년 10월 27일 보고서를 내놨다. 보고서 제목은 ‘이준열사사인조사자료’다. 보고서는 식민시대 문헌과 헤이그 현지 신문과 공문서, 해방 후 각종 매체 보도와 증언을 수집해 ‘자살설’과 ‘분사설’을 비교했다.

‘자살설’에 대한 1차적 근거는 ‘대한매일신보’와 ‘황성신문’이었다. 다른 문헌들은 대부분 이들 신문이 직간접적 근거였다. ‘분사설’ 근거들은 당대 독립운동가의 직접 증언과 네덜란드 언론과 공문서였다. 그리고 만주에서 항일운동을 한 독립운동가 김수산(김광희)의 증언이 보고서에 실렸다.

 

‘한 고향 사람이던 이규풍, 안병무, 김석토 등 제씨와 함께 해삼위(海蔘威·블라디보스토크)로 가게 되었다. 마침 그곳에 있던 이상설 씨와 만나게 되어 이준 선생의 사인을 확인하게 되었는데 그에 의하면 선생은 일본의 방해와 열국의 냉정으로 일이 뜻대로 되지 않으매 심화(心禍)가 터져 잔등에 종기가 생기어 드디어는 이 등창으로 말미암아 운명하였다는 것이다. 해삼위를 떠나 만주에서 만난 양기탁씨는 당시 ‘대한매일신보’ 주필이던 단재 신채호씨가 양기탁씨 본인 및 배설씨와 협의하여 이준 선생의 분사(憤死)를 민족적 긍지로서 만방에 선양할 목적으로 할복자살로 만들어 신문에 쓰게끔 하였다고 말했다.’(독립운동가 김수산(김광희), 국사편찬위 ‘이준열사사인조사자료’, 1962, pp81, 82) 양기탁과 영국인 베델은 ‘대한매일신보’ 공동운영인이었고 신채호는 이 신문 주필이었다. 생사고락을 함께 한 동료 밀사로부터 사실을 들었고, 민족을 위해 가짜뉴스를 썼노라는 고백을 그 뉴스를 쓴 당사자로부터 직접 들었다는 증언이었다. 1956년 이준 열사 추모 단체인 ‘일성회’는 “국민 사기 앙양을 참작해 분사라 해도 자살로 해두는 것이 타당하다”고 요구했다. 6년 뒤 국사편찬위원회는 일성회 요구를 수용해 ‘분사’도 ‘할복자살’도 아닌 ‘순국(殉國)’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로 결정했다.(국편위 앞 보고서, p33) ‘할복자살설은 모든 사실로 보아 근거 없는 것이지만 나라를 위해 일을 하다 타국에서 별세한 만큼 이를 순국으로 적기로 했다’는 것이다(1962년 10월 28일 ‘조선일보’ 등) 여기까지 진실이 제자리를 찾을 때까지 벌어진 이야기였다.

 

312. 광화문광장 개장에 맞춰 점검해보는 궁궐 복원

복원된 궁궐 속에 온갖 시대가 뒤엉켜 흐른다 

 

경복궁 근정전과 월대. 임진왜란 이래 폐허였던 경복궁은 1865년부터 3년 동안 흥선대원군에 의해 재건됐다가 식민시대에 만신창이가 돼 현재 복원 작업이 진행 중이다. 복원 기준 시점은 중건이 완료된 1888년이다. 역사적 기념물 복원에 관한 ‘베네치아헌장’(1964)은 ‘추측이 시작되는 지점에서 복원은 멈춰야 한다’고 선언했다. ‘대한민국 문화유산헌장’(2020)도 ‘문화유산의 원래 모습과 가치를 온전하게 지킨다’고 규정하고 있다. 경복궁 복원에는 숱한 추측과 원칙 파괴가 개입됐다./박종인 기자 

 

 서울 광화문광장이 화려하게 개장했다. 1392년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고 한양을 수도로 정한 이래 630년 만에 궁궐 앞 공간 용도가 바뀌었다. 허허벌판이던 옛 육조거리가 시민이 머물며 여가를 즐기는 광장으로 변신했다. 그리고 지난 22일 조선 법궁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 앞에 있던 월대(月臺) 시굴작업이 개시되면서 경복궁을 포함한 서울 사대문 안쪽 역사 복원작업이 마무리에 들어간다. 미흡한 점은 없는가. 21세기를 사는 대한민국 시민의 삶과 20세기까지 이 공간을 메꿨던 땅의 역사 사이에 충돌은 없는가 살펴본다.

 

베네치아 헌장과 문화유산 헌장

‘베네치아 헌장(1964)’은 ‘기념물과 사적지의 보존·복원을 위한 국제헌장’이다. 세대에 걸쳐 내려온 역사적 기념물을 보존해 후대에 물려줄 인류의 의무를 규정했다. 이 헌장은 9조에서 이렇게 규정했다. ‘추측이 시작되는 지점에서 복원은 멈춰야 한다(It must stop at the point where conjecture begins).’

 

대한민국 또한 법령과 선언으로 베네치아 헌장의 정신을 따르고 있다. 2020년에 문화재청이 만든 ‘문화유산 헌장’은 그 첫 문구가 이렇다. ‘문화유산의 원래 모습과 가치를 온전하게 지킨다.’ 그리고 베네치아 헌장과 동일하게 ‘다음 세대에 문화유산을 더욱 값지게 전해 주고자 함’이 목적이다. 문화재 복원과 보존에 대해 이 두 헌장만큼 명쾌한 기준은 없다. 이 기준에 따라 현재 진행 중인 복원작업을 살펴보자.

 

2022년 여름 광화문광장. 시민의 휴식공간으로 재탄생했지만 역사성은 무시됐다. /박종인 기자

 

역사를 덮어버린 광화문광장

‘법궁 방향을 다들 임좌(북서쪽을 등짐. 즉 남동향)라고 하였다. 그런데 대원군 지시로 지관 안명호가 방향을 쟀는데 교태전 이하 모든 건물 옛 주춧돌 및 광화문은 모두 자좌(정남향)였으며 조금도 차이가 없었다.’(국역 ‘경복궁영건일기’1, 서울역사편찬원, 2019, pp. 83~85)

 

경복궁을 중건할 때 흥선대원군이 고용했던 안명호라는 지관은 지엄하신 대원군 분부로 옛 주춧돌을 기준으로 방위를 측정해 이렇게 보고했다. (제왕이 마주해야 하는) 정남향이 틀림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껏 궁궐이 임좌라 한 것은 임진왜란 후 생긴 착각”이라고 확언했다.

 

그런데 복원과정에서 경복궁 중심 건물들은 단 하나 예외 없이 정남향도 아니고 남동향 임좌도 아닌 남서향임이 밝혀졌다. 심지어 광화문도 남서향이다. 측정 오류인지 혹은 제왕적 권력을 꿈꾸는 대원군 앞에서 알아서 거짓말을 했는지는 기록에 없다. 여하튼 궁궐 중건은 ‘정남향이라는 믿음’하에 진행됐고 완료됐다. 그런데 궁궐 중심을 따라 그 앞에 관아 거리를 지으려 하니 방향이 점점 엇나가는 것이다. 하여 육조거리 중간쯤에 방향을 남쪽으로 꺾고 나서야 이 거리가 종로거리와 만날 때에는 정남향으로 바로잡혔다. 육조거리, 그러니까 세종대로는 이렇게 애당초 휘어져 건설됐다.

 

식민시대 경복궁을 갈아엎고 총독부가 자기네 청사를 궐 안에 만들 때, 총독부 건축과장 이와이 조자부로(岩井長三郞)는 이렇게 털어놓았다. “도로가 활처럼 굽어 있다. 이건 어떤 미신이 있지 않았을까.”(‘조선’ 1926년 4월호 ‘총독부신청사 계획 및 실시에 대해’) 경복궁건축출장소장 후지오카 주이치(富士岡重一)는 이렇게 말했다. “광화문통이 히라가나 ‘く’(쿠) 자처럼 굽어져 있다.”(‘조선과건축’ 1926년 5월호, ‘신청사의 설계개요’: 이상 역사연구가 이순우, ‘일그러진 근대 역사의 흔적’ 다음카페)

 

개장한 광화문광장은 어떤가. 총독부가 만든 도로보다 더 정확하게 정남향 직선광장이다. 남서~정남으로 휘었던 옛 도로 형태는 완전히 파괴되고 명쾌하게 식민시대로 회귀했다. 시민 휴식 공간이 된 것은 분명하나 역사적 복원은 아니라는 뜻이다.

 

1907년(추정) 육조거리 실측도면 ‘광화문외제관아실측평면도’. 광화문~육조거리 축이 휘어 있다. 총독부가 왜곡한 축이 아닌, 본래의 축이다./국가기록원

 

경복궁 어떻게 복원 중?

경복궁 복원 사업은 1984년 기본 방침이 나온 이래 2045년까지 61년을 예정한 대역사(大役事)다. 복원 기준 연대는 1888년이다. 흥선대원군이 시작한 경복궁 중건 공사가 완료된 해다.(문화재청, ‘1994년 경복궁 복원정비 기본계획 보고서’)

 

복원을 위한 자료는 옛 그림과 ‘북궐도형’(1907), ‘경복궁영건일기’(1865~1868), ‘궁궐지(1901~1907)’, ‘조선고적도보’(1915~1935) 및 총독부 유리건판 사진 따위가 있다. 숫자로는 자료가 풍부해 보이지만 이들 자료는 ‘평면도’가 대부분이다.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사진과 유리건판 사진에 나오는 건물들을 제외하고는 입체적 형태나 내부 구조를 알 수 없다. 그래서 복원 계획 보고서에는 ‘초석은 장초석으로 만들고 하부는 통행이 가능하도록 구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문화재청, ‘경복궁 광화문 및 기타 권역 복원정비 계획보고서’, ‘건청궁 장안당’, p162)라는 식으로 ‘추정 복원’이 수없이 언급된다.

 

이는 ‘추측이 시작되는 지점에서 복원을 멈춰야 하는’ 베네치아 헌장은 물론 ‘원래 모습과 가치를 온전하게 지킨다’는 대한민국 문화유산 헌장을 정면으로 위반하는 작업이다. 당시 자료 미비 탓에 경복궁 복원은 이런 본질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다. 추정에 의존하더라도 문화재청이 설정한 기준을 엄격하게 지키면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겠지만, 그러지 못한 부분이 곳곳에 있다.

 

경회루는 동서남북에 서 있던 담장이 식민지 때 철거됐다. 2004년 문화재청은 이 중 동쪽과 북쪽 담장을 복원했다. 남쪽과 서쪽 담장은 복원하지 않았다. 사진까지 남아 있어서 충분히 원형 복원이 가능했지만, ‘관람객 관람 편의’가 이유였다. 흥례문 구역 서쪽 구석에는 내사복시(內司僕寺)가 있었다. 궁중 말을 관리하는 마구간과 관리소다. 해방 직후 사진에는 이 자리에 총독부 부속 건물이 서 있었다. 현재 국립고궁박물관 위치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박물관을 해체하고 내사복시를 복원하겠다는 계획은 없다. 경복궁 동쪽 건춘문 옆에는 1915년 총독부 ‘시정(始政) 5주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 때 만든 총독부박물관 부속 건물이 남아 있다. 지금 문화재청 경복궁 관리소로 사용 중이다.

 

이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엄격한 기준을 적용해 철거와 복원을 할 것인가. 혹은 현대 대한민국의 편의를 위해 현상태를 유지할 것인가. 1907년 통감부가 주도해 세운 창경궁 식물원은 올해 복원했다. 덕수궁 대한문 앞 월대는 ‘보행자 통행’에 지장을 준다는 이유로 옛 사진에 나온 규모보다 축소해서 복원 중이다. 그래서 ‘복원’이 아니라 ‘재현’이라고 명명했다. 기준이 무엇인가.

 

▲경복궁 건춘문 북쪽에 있는 경복궁관리소. 1915년 총독부 ‘시정(始政) 5주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 때 만든 총독부박물관 부속 건물이다./박종인 기자

 

 1550년에 그린 ‘비변사계회도’(부분). 근정전~근정문~흥례문~광화문~육조거리가 자세하게 그려져 있는데 광화문 앞에 월대(月臺)가 보이지 않는다. 실록에는 1431년 3월 29일 세종이 “농사철(춘분~추분)을 맞아 월대를 만들지 말라”고 명했고, 19일 뒤 광화문이 완공됐다고 적혀 있다. 문화재청은 “경복궁 복원 기준 시점인 1888년에는 월대가 존재했으므로 이전 시대 존재 여부와 상관없이 복원할 예정”이라고 했다. /서울역사박물관

 

광장과 궁궐 사이, 월대

8월 22일 발굴 조사에 들어간 광화문 월대는 문제가 종합적이다. 실록에 따르면 세종은 “월대를 만들지 말라”고 명령했다.(1431년 음력 3월 29일 ‘세종실록’) 119년 뒤인 1550년 제작된 ‘비변사계회도(備邊司契會圖)’에는 경복궁과 육조거리가 그려져 있는데, 아무리 봐도 광화문 앞 월대는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42년 뒤 임진왜란이 터졌다. 기록만으로 보면 월대는 존재한 적이 없었다. 역사상 ‘광화문 월대’가 처음 등장한 날은 정확하게 1866년 음력 3월 3일, 월대가 완공된 날이다.(국역 ‘경복궁영건일기’1, p404)

 

2011년 국립문화재연구소는 ‘경복궁 발굴 조사 보고서’에서 “향후 선대 유구에 대한 추가 조사를 실시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 추가 조사가 이제 시작됐다.

 

그런데 문화재청은 “발굴조사 결과 고종 시대 이전의 월대 유적이 있든 없든 상관없이 월대 복원 공사를 실시할 예정”이라고 했다. 이유는 ‘고종 때인 1888년이 복원 기준 연대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궁박물관 자리에 있던 내사복시와 경복궁 관리소로 사용 중인 총독부박물관 부속 건물과 미완의 경회루 담장과 이 월대는 뭐가 다른가. 이미 광화문 앞 도로는 Y자 형으로 변형이 완료됐고 월대 주변에는 각종 공사 장비와 바닥에 깔 박석 더미가 쌓여 있다.

 

‘추정 복원 금지’와 ‘원래 모습과 가치’라는 기준으로 경복궁을 짚어보았다.

 

313. 서울 공덕오거리에 서 있는 흥선대원군 별장 금표비

공덕동 빌딩 숲에 숨어 있는 권력의 쓸쓸함

 

서울 마포구 공덕동은 용산과 함께 새로운 도심으로 떠오른 지역이다. 고층 건물이 즐비하고 도로는 넓다. 주변보다 지대가 높아서 옛날부터 만리재, 애오개 두 길과 새로 뚫린 백범로 모두 언덕길이다. 그 세 길이 합류하는 지점이 공덕오거리인데, 이 로터리에서 지하철 6호선도 만난다. 사통팔달한 땅 위로 빌딩 숲이 울창하다.

 

그 지하철 공덕역 3번 출구 옆에 공원이 있는데 공원 모퉁이에는 작은 비석이 서 있다. 비석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다.

 

‘限一百二十步 孔德里禁標 同治庚午八月日’(한일백이십보 공덕리금표 동치경오팔월일)

이곳부터 120걸음 공덕리에 경작과 목축을 금한다 - 동치 경오년 8월.

 

동치 경오년은 1870년이다. 다름 아닌 당시 권세가 하늘보다 높았던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미리 봐뒀던 자기 묫자리 영역을 표시하는 표석이다. 권세가 하늘보다는 높았지만 청나라 황제보다는 못했는지 날짜는 청나라 연호 ‘동치(同治)’를 사용했다. 그렇다. 이 자리에서 서쪽으로 120걸음만 가면 그가 묻히겠다고 낙점해놓은 가묘가 있었고, 가묘 아래에는 별장으로 사용하던 집이 있었다. 이름은 ‘아소당(我笑堂)’이다. 자기 묫자리를 대원군은 ‘우소처(尤笑處)’라 불렀다. ‘내가 웃는 집’이라는 뜻이고 ‘더 웃는 곳’이라는 뜻이다.(황현, ‘매천야록’ 1 上 14. 대원군의 가묘, 국사편찬위) 참 많은 일이 아소당을 중심으로 펼쳐졌고, 이제 돌표 하나 남았다.

 

 ▲서울 마포 공덕오거리 빌딩 숲속 작은 공원 모퉁이에 비석 하나 서 있다. ‘限一百二十步 孔德里禁 同治庚午八月日’(공덕리 금표 120보 안쪽 통행금지 동치 경오(1870년) 8월)이라고 새겨져 있다. 이곳이 용산방 공덕리였던 1870년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미리 봐뒀던 자기 묫자리 영역을 표시하는 표석이다. 대원군은 묫자리 아래 집을 지어 ‘아소당(我笑堂)’이라고 불렀고 묫자리는 ‘우소처(尤笑處)’라 불렀다. ‘내가 웃는 집’이라는 뜻이고 ‘더 웃는 곳’이라는 뜻이다. 참 많은 일이 아소당을 중심으로 펼쳐졌고, 이제 돌표 하나 남았다. /박종인 기자

 

묫자리 정하던 날

1870년 추석 열흘 뒤 어전회의에서 영의정 김병학이 고종에게 이렇게 보고했다. “대원군이 공덕리로 행차할 때 신들이 동행했는데, 그 경계를 사방 100보(步) 안으로 하니 만백성이 기뻐했나이다.”(1870년 음8월 25일 ‘고종실록’)

 

미리 대원군이 짚어뒀던 자기 수장(壽藏:생전에 봐둔 묫자리) 경계를 확정하는 날이었다. 대원군은 이미 1846년 경기도 연천에 있던 선친 남연군을 충청도 예산 땅에 이장해 아들을 왕으로 만든 경험이 있지 않았는가. 무소불위한 권력을 더 확장하기 위해 대원군은 자기 묘 또한 천하 길지를 택했다. 한성 성곽 남서쪽 바깥에 있는 용산방 공덕리는 ‘국도(國都)의 진산(鎭山)이 서쪽으로 꺾여 꾸불꾸불 남쪽으로 내려와서 맥(脈)을 결성한’ 언덕이었고 ‘신령스럽고 깨끗한 기운이 실로 다 모인’ 언덕이었다.(이유원, 가오고략(嘉梧藳略) 10, ‘아소당명(我笑堂銘)’)

 

그 묫자리 경계가 100보였다. 이를 새긴 표석에는 스무 걸음 더 나간 120보라고 돼 있으니 종친에게 허용된 사방 100보 법정 상한 면적과 대동소이했다.(대전통편, ‘분묘정한(墳墓定限)’) 천하의 대원군이 그렇게 좁게 묘계를 정했으니 어전회의 참석자들은 모두 “근처 백성들이 돌아갈 곳을 얻을 수 있게 됐다”며 흡족해했다. 대원군은 그까짓 묫자리 사이즈로 까탈을 부릴 사내가 아니었다.

 

내가 웃는다, 아소당(我笑堂)

1870년은 대원군 권력이 정점에 오른 때였다. 임진왜란 이후 폐허로 방치됐던 경복궁 중건이 완료됐고 1868년 이후 당쟁 아지트였던 서원 철폐 작업에 착수한 상태였다. 호포제(戶布制)를 실시해 조선 500년 사상 처음으로 양반들로부터 세금을 거두는 혁명적 조치도 실행되고 있었다. 그런 흡족한 상황에서 대원군이 자기 수장을 골라 경계를 정했으니, 권력을 즐기려는 쾌감이기도 했고 풍수라는 전근대적 방식으로 전주 이씨 왕실 미래를 확장하려는 기획이기도 했다.

 

 ▲흥선대원군 아소당 금표비

그 경계를 밝히는 금표에서 21세기 공덕오거리를 지나 서쪽으로 걸어가면 서울디자인고등학교가 나온다. 남자 어른 보폭으로 120걸음 얼추 된다. 그 학교 교정이 아소당 터다. 중간에 만나는 공원 이름도 아소정이고 식당 이름도 아소정이다. 원래 이름은 아소당인데 어찌어찌하여 식민시대와 전쟁을 거치며 격이 팍 떨어지는 아소정으로 바뀌어버렸다. 조선조 관습에 따르면 건물 격은 전-당-합-각-재-헌-루-정 순이니 서열 2위 ‘당(堂)’이 현대에 맨 꼴찌 ‘정(亭)’으로 추락한 것이다.

 

그래도 건물 이름은 아소당, ‘내가 웃는 집’이다. ‘기쁘면 즐거워지고 즐거우면 웃는다(喜而樂樂而笑·희이락락이소)’ 여러 사람이 아소당 명칭에 대해 글을 썼는데, 1888년 좌의정 신응조가 쓴 ‘아소당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아소당 건축이 1870년인데 이 아소당기는 무려 18년 뒤에 쓴 글이다. 그사이 임오군란(1882)이 터져 대원군은 3년 동안 청나라로 끌려가 유폐된 시기였다. 그럼에도 대원군은 이리 껄껄대며 웃었다. 예순두 살임에도 권력에 곧 복귀하리라는 기대를 버리지 않은 것이다.

 

매천 황현에 따르면 대원군은 묫자리 아래 아소당을 지으며 묫자리는 ‘더 웃는’ 우소처(尤笑處)라고 불렀다. 전남 광양에 살던 황현은 이 ‘우소처를 덮는 집을 짓고 아소당이라 했다’고 알고 있으니(위 ‘매천야록’), 대원군은 ‘살아서 웃고 죽어서 더 웃는’ 영화로운 삶과 죽음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는 말이다.

 

대원군 생전에 촬영된(추정) 흑백사진은 그 자신만만한 나날을 잘 보여준다. 번듯한 아흔아홉 칸 사대부 집 오른쪽 언덕 위에 작은 집이 한 채 서 있다. 황현에 따르면 대원군은 ‘당(堂)을 지어 묫자리[壙·광]를 가렸다.’(황현, 앞 책) 웃음 가득한 별장과 ‘더 웃으며 묻힐’ 징표가 한눈에 들어와 있으니 이런 무서운 풍경이 또 어디 있다는 말인가.

 

 ▲대원군 생전 일본 장교가 촬영한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 작은 집 한 채가 서 있는 오른쪽 언덕이 그가 정한 묫자리다. 왼쪽 아래는 대원군이 즐겨 찾던 별장 아소당이다. 이곳에 살았던 동도중·공업고등학교 설립자 가족 김인수에 따르면 해방 후 6.25전쟁 때까지 당시 국방부장관 신성모가 관사로 사용했다. 운니동 운현궁에서 죽은 대원군은 이곳에 묻혔다가 파주를 거쳐 남양주에 이장됐다. /동도김형천기념사업회 제공

 

“내 아버지를 유폐한다”

1885년 음력 8월 27일 청나라로 납치됐던 대원군이 3년 만에 귀국했다. 3년 전 임오군란 때 청나라군사를 불러 난을 진압한 이래 고종 정권은 20대 중국 장교 원세개 치하에 놓여 있었다. 아들 고종은 “나의 기쁜 마음을 이루 다 말할 수 없다”라고 아비를 반겼다.(1885년 음8월 27일 ‘고종실록’) 그리고 한 달 뒤 아들은 ‘대원군 존봉 의절’ 9개항을 발표했다. 제대로 모시라는 어명인데 이 중 3개항은 이러했다. ‘운현궁 대문에 차단봉 설치’ ‘대문에 24시간 숙직’ ‘왕명 전달 외에는 관료들 일체 면회 금지’.(1885년 음9월 10일 ‘고종실록’)

 

가둬버린 것이다.

1894년 봄 동학농민전쟁이 터졌다. 여름 청일전쟁이 터졌다. 고종은 개혁정부에게 권력을 빼앗겼다. 일본은 갑오개혁 정부 수장으로 대원군을 앞세웠다. 하지만 의견이 사사건건 충돌하며 대원군은 다시 권좌에서 추락했다. 이듬해 4월 대원군 손자 이준용이 쿠데타를 기도하다 적발됐다. 대원군은 유배형을 언도받은 손자 운명에 항의하며 아소당에 은거했다.

 

그달 23일 아들 고종은 2차 대원군 존봉 의절을 발표했다. 24시간 숙직 인력은 관리 대신 경찰이, 외국 관리들은 왕실을 거쳐 왕실 직원 입회 하에 면담, 출입은 왕실에 사전 보고 및 경찰 동행. 더 심한 유폐령을 내린 것이다. 그해 10월 존봉 의절을 뚫고 잠시 아소당에 머물던 대원군은 일본인 무리에 이끌려 경복궁으로 입궐했다.

 

대원군을 앞세워 일본인과 조선인 무리들이 며느리 민비를 죽였다. 그걸로 끝이었다. 개혁의지는 사라졌고 권력욕이 번뜩이던 순간이었다. 이듬해 아관파천 이틀 뒤 고종은 3차 존봉 의절 시행을 명했다.(1896년 2월 13일 ‘고종실록’) 대원군은 영원히 유폐됐다.

 

마침내 왕이 된 사내

1898년 1월 8일 대원군 아내 여흥 민씨가 운현궁 이로당에서 죽었다. 장례 준비에 한창 어수선하던 2월 22일 대원군이 죽었다. 역시 아들을 왕으로 만들어준 운현궁 노안당에서 죽었다. 아내 병구완을 위해 운현궁에 들르겠다는 고종을 거듭 말린 아버지였지만 임종 직전에는 “주상이 아직 오지 않았느냐”고 세 번이나 큰 소리로 물었다. 황제가 된 아들은 끝내 아비를 찾지 않았다. 원하던 대로, 그리고 예정된 대로, 대원군은 공덕리 아소당 언덕에 묻혔다. 금표에서 120걸음 오르면 나오는 명당이었다.

 

을사조약 2년 뒤인 1907년 10월 1일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손자 융희제 순종에 의해 대원왕(大院王)으로 추봉됐다. 마침내 스스로가 왕이 된 것이다. 이듬해 1월 30일 황실은 파주 대덕동으로 묘를 이장하고 원(園)으로 격상했다.(이상 ‘순종실록’) 묘원 이름은 국태공원(國太公園)이라고 했다. 국태공은 바로 대원군을 이르는 말이다.

 

1966년 파주에 미군기지가 들어서면서 국태공원은 다시 한 번 이장된다. 장지는 경기도 남양주 화도읍이다. 78년 긴 세월 부침을 거듭하며 개혁의지는 사라지고 권력을 바라보던 사내의 종착역이다. 처음 묻혔던 공덕동 아소당은 주인이 여러 번 바뀌다 해방 후 송산학원을 세운 김형천이 설립한 동도중, 공업고등학교가 들어섰다. 지금은 서울디자인고등학교가 들어섰다. 본채는 신촌에 있는 봉원사로 팔려나갔다.

 

그 장구한 세월, 그 덧없고 쓸쓸함을 보려면 서울특별시 마포구 공덕동 지하철6호선 공덕역 3번출구 옆 공원에 가보라. 의미 사라지고 없는 금표(禁標)를 보라.

 

 ▲서울디자인고등학교 교문 오른쪽에 서 있는 ‘아소당’ 표석.

 

314. 친일 귀족들 땅에 조선인촌을 만든 정세권

거기, 北村 골목길에 남은 거인의 발자국 

▲서울 북촌한옥마을. ‘북촌5경’과 ‘6경’이 있는 북촌로11길 옆 골목 ‘북촌로11라길’이다. 골목 끝에 보이는 모퉁이부터 반대편 출구까지 10여m 도로는 1920년대 식민시대 친일귀족들이 대저택을 짓고 살던 이곳에 조선인 한옥마을을 건설한 정세권 명의로 남아 있다. 북촌은 물론 익선동과 삼청동에도 정세권 이름으로 등기된 토막난 땅들이 남아 있다. 일신 영달을 위해 나라를 외세에 넘긴 고관대작들 친일 행각 흔적도 물론 남아 있다. 이 사진은 정세권 손녀 정희선 작품이다.

 
 

수수께끼의 골목길

서울 북촌한옥마을에 가면 빽빽하게 들어선 한옥 처마들 틈으로 21세기 대도시 서울 전경과 1920년대, 1930년대 풍경이 두루 보인다. 마을에는 8경이 있다. 주중 주말 할 것 없이 인파에 치여 걷기도 쉽지 않은 풍광지가 제5경과 6경이다. 옛 지번으로 가회동 31번지, 도로명주소로 북촌로11길 골목길이다. 남으로는 남산과 빌딩숲이 보이고 북으로는 양옆으로 즐비한 근대 도시한옥들이 가득하다.

 

그 언덕길을 오르다 길 끝 무렵 왼쪽으로 작은 ‘북촌로11라길’ 골목이 나온다. 이 골목 안쪽 10미터 정도 되는 공간 옛 주소는 ‘종로구 가회동 33-39′다. 지목은 도로. 면적은 열 평 정도. 등기부등본을 떼보면 이 땅이 현 소유자에게 매매된 때는 1935년 5월 10일이다. 정식 등기가 난 날은 1943년 5월 2일이다. 소유자 이름은 정세권(鄭世權)이다. 갑신정변 4년 뒤인 1888년 경남 고성에서 태어나 1965년에 고성에서 죽은 사람이다. 소유자 주소는 종로구 낙원동 600. 탑골공원과 낙원상가 사이,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주소다.

 

이 사내는 누구인가. 왜 그가 죽고 57년이 지난 지금도 이 도로는 고성 사람 정세권 명의로 남아 있는가.

정세권은 바로 1920년대 이 북촌에 조선인 마을을 건설한 사람이다. 친일 귀족 몇몇이 나눠 가졌던 땅을 개발해 토굴에 살던 조선인들에게 집을 지어 판 사람이다. 오랜 기간 ‘조선왕조 500년 양반의 땅’으로 포장됐던 북촌, 실제로는 나라 팔아먹은 조선귀족들 대저택이 있었던 그리고 정세권이라는 거인(巨人)이 남긴 크고 깊은 발자국 이야기.

 

 ▲북촌11라길(가회동 33-39) 등기부. 1943년 정세권이 등기한 이래 2022년까지 주인이 바뀌지 않았다.

 

북촌 최초의 주인들, 그 귀족들

1890년대 북촌 사진을 보면 지금 한옥마을이 있는 언덕은 텅 비었다. 돌산이다. 아무도 살지 않았다. 가회동 골짜기 주변 평지에 사람들은 살았다. 고관대작들이 살았다. 멀리는 현 안국동 사거리 공예박물관 자리 안동별궁까지 평평한 곳에 살았다. 서운관이 있던 고갯길 남쪽에는 흥선대원군이 살았다. 서운관 고개에 있다고 해서 운현궁(雲峴宮)이었다. 18세기 후반 이 중에서 개혁을 꿈꾸던 박지원과 북학파들이 나왔고 갑신정변을 주도한 김옥균과 서재필도 있었다. 이 두 사람이 살던 집터에 대해서는 다음 주에 이야기하기로 하자.

 

사람 살기 어려운 돌산 능선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건 대한제국 때였다. 이미 전주 이씨 종친과 순종비 윤씨 가문이 소유한 땅에 이들이 대저택을 짓고 살았다. 그리고 이곳에 대토지를 소유했던 고종비 민씨 가문이 저택을 지었다. 민영휘와 그 아들 민대식(가회동 31, 5447평), 완순군 이재완(가회동 30, 1237평)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갑신정변 때 고종이 잠시 피신했던 계동궁(계동 147, 2318평)은 완림군 이재원과 그 아들 이기용이 살았다.(이해란, ‘서울시 북촌의 경관 변천에 관한 연구’, 한국교원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논문, 2009, 등)

 

1922년 총독부가 만든 경성지도에는 이들이 살던 북촌 영역에 이렇게 표기돼 있다. ‘민대식저(閔大植邸)’, ‘이재완저(李載完邸)’. 한 도시를 그린 지도에 집 한 채가 표시될 정도로 거대했다. 이 민대식과 이재완이 소유한 집이 현재 북촌한옥마을 대표적인 관광지로 변했다. 지도 북서쪽 삼청동 쪽을 보면 삼청동 146번지는 송병준 집이다. 3967평이다. 송병준 땅과 붙어 있는 145번지는 이완용 형 이윤용 집이다. 3241평이었다. 두 집 대지를 합치면 지금 대한민국 국무총리 관저와 얼추 겹친다.

 

 ▲2022년 지도에 표시한 1922년 현재 주요 친일 귀족들의 북촌 토지 소유 현황. 한창수, 민대식, 이재완, 한상룡은 모두 총독부로부터 작위를 받은 조선귀족들이다. 이들이 소유한 땅이 현 북촌한옥마을을 뒤덮었다. 삼청동 국무총리 관저 또한 이윤용(이완용 형)과 송병준 저택 터였다.

 

그리고 그 지도에 ‘한창수저(韓昌洙邸)’와 ‘한상룡저(韓相龍邸)’가 보인다.

 

이왕직 장관 한창수는 북촌 가회동 10번지와 26번지에 각각 3163평, 2708평을 가지고 있었다. 가회동 93번지에는 동양척식주식회사 고문 한상룡이 살았다. 988평이다. 이 집은 훗날 백인제 가문이 인수해 백인제 가옥이라 불린다. 한상룡은 1928년 이 집을 팔고 길 건너 가회동 178번지 591평 땅을 사서 또 저택을 지었다. 이 집은 지금 ‘가회동한씨가옥(嘉會洞韓氏家屋)’으로 불린다.

 

이 글에 소환된 민영휘, 민대식, 이재완, 이기용, 한창수, 한상룡 이름들에는 공통된 꼬리표가 있다. ‘조선귀족(朝鮮貴族)’이다. 1910년 8월 대한제국이 일본으로 넘어가고 두 달 뒤 총독관저에서 총독부로부터 ‘한일합방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귀족 작위를 받은 인물들이다. 작위는 물론 거액 은사금도 받았다.

 

북촌은 그러했다. 봉건시대에 받거나 그 권력으로 취득한 대토지를, 새로 취득한 권력과 금력으로 유지하고 확장한 친일지주들이 북촌에 살았다. 1917년 당시 운현궁 주인이던 흥선대원군 장손 이준용이 죽고, 운현궁 땅과 왕실 후손인 공족으로서 ‘전하’ 호칭은 그 후손 이우(李鍝)가 세습했다. 그래서 1922년 지도에는 ‘운현궁’이 아니라 ‘우공저(鍝公邸)’로 표기돼 있다. 귀족들이 살았던 저택들 가운데 남아 있는 집들은 이런 역사를 담고 대한민국 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꼭 알고 가야 할 역사다.

 

 ▲1922년 경성지도. 아예 ‘000 邸(저: 저택)’이라고 표기돼 있다. /서울역사박물관

 

거인의 등장, 정세권

남산을 중심으로 살던 일본인들이 청계천 너머 북촌으로 향한 때는 1920년대 후반이었다. 대형 북촌 임야를 가지고 있던 식민 귀족들은 경성으로 몰려드는 일본인, 조선인 수요에 맞춰 자기네 땅을 작은 필지로 나눠 팔았다.

 

‘건양사’라는 주택경영회사를 운영하던 정세권은 이 가회동 지역 개발로 돈을 벌었다. 정세권은 경남 고성에서 면장을 하다가 상경한 사람이다. 가회동 30번지와 31번지는 그때 정세권이 만든 대규모 주택단지다. 시골과 달리 좁은 땅에 방과 마당과 상하수도를 갖춘 도시형 한옥으로 구성한, 조선인을 위한 단지였다. 주택 설계는 조선일보와 표준모델을 공모해 대량 개발이 가능했다. 분양 후 개발이 아닌, 선개발 후분양이라는 소비자 지향형 판매 방식도 독특했다.

 

 ▲1920년대 북촌을 건설한 정세권(1888~1965). 조선어학회 건물도 그가 기증했고 물산장려운동 또한 그가 주도했다.

정세권은 이미 좌우 합작 조직인 신간회 서울지부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1920년대 시작된 물산장려운동이 난관에 빠지자 이를 재정적으로 지원하고, 주도했다. 등기부상 ‘가회동 33-39 소유주 정세권’ 주소 낙원동 600번지는 물산장려회 후신 ‘장산사’ 사무실 주소다(옛 기록에는 300번지로 돼 있다). 한용운은 이런 활동을 하는 정세권에 대해 “백난중분투(百難中奮鬪)하는 정세권씨에게 감사하라”고 장산사 기관지 ‘장산’에 기고했다. 정세권은 또 화동 129번지에 2층 양옥을 지어 조선어학회에 기증했다.(1935년 7월 13일 ‘조선일보’)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이 터졌을 때 정세권은 학자들 감형을 조건으로 건축 면허를 반납하고 재산 상당 부분은 압류됐다. 사업을 잃고 땅을 잃은 정세권은 몰락했다. 정세권은 그가 개발했던 왕십리에서 6·25전쟁을 맞아 크게 다쳤다. 이후 정세권은 고향 고성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죽었다. 1965년이다. 1990년 대한민국 정부는 그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극적으로 몰락한 거인 덕분에 식민 조선 사람들은 번듯한 마당과 수돗물과 하수구가 있는 한옥에 살게 됐고 학자들은 한글을 연구할 수 있었으며 21세기 대한민국 사람들은 그 흔적을 구경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굉장히 긴 시간 이 북촌을 서울시에서는 ‘조선왕조 500년 향기가 흐르는 땅’이라고 홍보해왔다. 그런데 이렇게 북촌은 친일 귀족들 악취를 씻어내며 한 거인이 뿌린 땀내가 가득한 땅이 아닌가. 서울시는 작년 봄에야 북촌이 기실 정세권이라는 거인이 만든 땅임을 떳떳하게 자백하는 한옥역사관을 만들었다. 주소는 계동4길3이다. 그 역사를 자세히 보고 이제 북촌로11라길로 간다. 그 작은 골목길에서 거인의 발자국을 따라 걸어보시라.

 

 ▲동양척식주식회사 고문 한상룡이 살던 집. 문화재로 지정될 당시 소유주명을 따서 ‘백인제가옥’으로 명명됐다./박종인 기자

 

315. 서울 종로구 화동 2번지 정독도서관 땅의 팔자

혁명가 김옥균의 흔적 위에 서 있는 매국 귀족 박제순의 돌덩이

 ▲서울 종로구 화동2번지 정독도서관 본관 뒤편 언덕에는 정체불명인 돌덩이가 보존돼 있다. 안내판을 봐도 정체가 도무지 불명이다. ‘역사적 의미가 있기 때문에 보존한다’라고 적혀 있다. 사실은 이 돌덩이는 1905년 을사조약 대표서명자인 외부대신 박제순 집터에 있던 우물돌이다. 새겨진 글자들은 박제순이 썼고, 정독도서관 부지 절반이 박제순 집터였다. 집터는 1884년 갑신정변 주역인 김옥균 집터와 겹친다. 김옥균 집터는 이 언덕 아래 잔디밭 부근이었다. 정변을 함께 한 서재필 또한 이곳에 살았다. 두 사람 집터에는 훗날 대한제국에 의해 관립학교가 설립됐고, 식민시대인 1916년 박제순이 사망하고 2년 뒤 당시 총독 하세가와에 의해 집터 또한 학교부지로 편입됐다. /박종인 기자

 

정독도서관과 정체를 숨긴 돌덩이

서울 화동 2번지 정독도서관 본관 건물 뒤편, 정독독서실 건물 앞 철책 속에 커다란 돌덩이가 있다. 돌에는 한자 24글자가 새겨져 있다. 뜻은 이렇다. ‘둥근 우물돌이다. 아마 고려 때 것 같은데 샘은 매립돼 흔적이 없고 돌만 우뚝하다. 광무4년(1900년) 겨울 평재(平齋)가 적다’ 옆에 안내판이 있는데 이렇게 적혀 있다. ‘이 우물에 새겨진 명문을 해석한 결과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사료라 여겨져 현재와 같이 관리하게 되었다. 2000년 8월 1일 정독도서관장’. 이 글을 적은 사람 ‘평재’는 1905년 대한제국 외부대신 자격으로 을사조약에 도장을 찍었던 평재 박제순이다. 우물돌이 남아 있는 바로 이 자리는 박제순이 살던 집터다. 규모는 지금 도서관 전체 부지 면적 1만1000여 평 절반인 5672평이었다. 그러니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사료’라는 애매한 말로 설명하느니 하지 않는 게 나았다. 박제순에 대해서 할 말이 우물물만큼 깊고 차가우니까. 박제순 돌덩이만 아니다. 정독도서관에는 눈여겨볼 만한 표석과 역사적 흔적이 숱하다. 지금은 여러 가지 목적으로 책을 접하려는 시민으로 붐비는데, 100년 전까지 이 도서관 터에는 숨 막히는 역사적 소용돌이가 몰아쳤다. 김옥균과 서재필, 그리고 박제순과 식민 시대까지 도서관 터 땅 팔자로 훑어보는 격변 근대사

 

▲정독도서관 본관 뒤편에 있는 박제순 우물돌./박종인 기자

 

 ▲안내문은 ‘박제순’의 ‘박’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부실하다.

 

어느 여자의 청원서와 김옥균

‘저는 예전에 한성 북부 홍현(紅峴)에 거주하다가 갑신년(1884)에 국사범으로 바다 바깥 귀신이 된 전 참판 김옥균의 처이온데, 온 가족은 어육(魚肉)의 화를 당하고 재산은 몽땅 적몰당하는 변을 만났나이다.’ 1909년 1월 29일 갑신정변 주역 김옥균 아내 유씨가 당시 대한제국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에게 청원서를 올린다.

 

글은 이렇게 이어진다. ‘제 망부가 죄를 탕척받고 관작을 회복했으나 살 곳이 전무하오니 북부 홍현에 있는 관립고등학교가 제 집터이온즉 미망인 심정을 헤아리시어 처분하기를 천만절축하나이다.’(각사등록 근대편, 청원서2, ‘김옥균 처의 청원서’, 1909년 1월 29일)

 

1884년 12월 4일(이하 양력) 김옥균이 일으킨 갑신정변은 48시간 만에 실패로 끝났다. 주모자들은 망명하고, 망명하지 못한 자들은 거리에서 죽었다. 가족은 연좌해 처형되거나 자살했다. 그리고 재산은 파가저택(破家瀦澤), 집을 부수고 못을 만들어 흔적을 없애버렸다. 1894년 3월 28일 고종 정권이 보낸 자객 홍종우에 의해 청나라 상해에서 암살된 김옥균은 4월 14일 한성 양화진에서 ‘조선왕조 최후의’ 부관참시이자 사후 능지처참을 당했다. 5월 31일 고종은 역적 처형을 축하하는 대사면령을 발표했다. 그런데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여 조선에 갑오개혁정부가 서자 고종은 이듬해 1월 22일 김옥균의 관작 회복 칙령을 내렸다.(1894년 음12월 27일 ‘고종실록’)

 

김옥균 아내 유씨는 바로 이 칙령에 근거해 나라가 가져간 재산을 돌려달라고 대한제국 총리대신에게 청원서를 올린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적시한 옛 집터가 홍현(紅峴)이었고, 1909년 당시 그 ‘붉은 고개’에 관립고등학교가 들어서 있었다. 그 관립고등학교가 훗날 경기고등학교로 이어졌고, 경기고가 서울 강남으로 이전하면서 학교 터는 도서관으로 바뀌었다. 정독도서관 잔디밭에는 김옥균 집터임을 알리는 표석이 서 있다.

 

김옥균은 고개 아래 가회동 박규수 집에서 동료들과 모여 개화 이론을 배웠다. 박규수는 북학파 태두 연암 박지원 손자다. 함께 공부했던 홍영식, 서재필이 갑신정변을 같이 주도했다. 정변 실패 후 홍영식은 거리에서 살해당했다. 아버지인 전 영의정 홍순목은 집에서 가족을 죽이고 자살했다. 피칠갑이 된 채 방치됐던 집은 훗날 미국 선교사 호러스 알렌이 인수해 병원을 차렸다. 알렌은 정변 때 죽을 뻔한 왕비 민씨 조카 민영익을 치료해준 의사였다. 서재필은 김옥균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했다. 가족은 누구는 자살했고 누구는 살해됐고 누구는 노비가 됐다가 죽었다.

 

▲정독도서관 동쪽 잔디밭에 서 있는 김옥균 집터 표석(왼쪽). 흙이 붉어서 ‘홍현(紅峴)’이라 불렸던 도서관 언덕에 김옥균이 살았다. 1884년 함께 홍현에 살던 서재필, 고개 아래 가회동에 살던 홍영식, 서광범, 박영효 등 정변 주인공들은 갑신정변 실패와 함께 죽거나 망명했다. 이후 김옥균 집터는 폐허가 됐고 대한제국 관립학교로 변했다. 1918년 북쪽 언덕에 있던 을사오적 박제순 집터 또한 학교 부지로 편입됐다. 지금은 경기고를 거쳐 도서관이 됐다. 오른쪽 사진은 그 박제순 집터 쪽에서 본 도서관 전경. 사진 왼쪽이 김옥균 집터 방향이다.

 

땅이 잊어버린 혁명가 서재필

서재필은 김옥균 옆집에 살았다. 그런데 서재필 흔적은 도서관 구내에 보이지 않는다. 미국에서 재혼 후 낳은 딸 뮤리얼 제이슨은 1950년대 정부를 상대로 토지 소유권 반환 소송을 제기했다. 1956년 4월 12일 대법원은 경기고 부지 가운데 3443평을 서재필 소유로 반환하라고 확정 판결했다. ‘경기90년사’(경기고등학교 동창회, 1990)에 따르면 ‘정부는 예산 문제로 (반환이나) 대금 지불을 미뤘고’ 결국 경기고는 1972년 강남 이전을 결정했다.(‘경기90년사’, p55)

 

후배 서재필과 선배 김옥균은 그렇게 북촌 좁은 골짜기에서 어깨를 부딪치며 살면서 근대화와 대(對)중국 독립 명분을 쌓았다. 그러니 정독도서관 잔디밭에 서재필 표석 또한 있어야 김옥균 표석이 완성된다.

 

 ▲1900년 대한제국 최초 관립중학교가 정독도서관 터에 있었음을 알리는 중등교육발상지 표석. 뒤편은 서울 강남으로 이전한 경기고등학교 표석이다./박종인 기자

 

관립학교의 설립과 박제순

1899년 대한제국 정부는 정덕(正德), 이용(利用), 후생(厚生)을 갖춘 실업인 양성을 목표로 관립 ‘중학교 관제’ 칙령을 발표했다.(1899년 4월 4일 ‘고종실록’) 그리고 이듬해 10월 현 정독도서관 자리에 관립중학교가 개교했다. 1880년대 이미 외국 선교사들에 의해 사립학교들이 설립됐지만 제국 학교는 한참 늦었고, 교과 내용 또한 1900년 3월 ‘중학교규칙’에 규정된 전문 과목은 빠져 있었다.(신편한국사 40, ‘청일전쟁과 갑오개혁-교육제도’, 국사편찬위)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1910년 한일병합조약으로 나라가 사라졌다. 관립 한성고등학교로 운영되던 학교는 1911년 총독부 1차 조선교육령에 따라 경성고등보통학교로 바뀌었다. 초대 교장은 홋카이도 교육자 오카모토 스케(岡元輔)였다.

 

학생이 늘어나면서 학교 부지 확장이 이슈가 된 1918년 2월 조선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가 학교를 방문했다. 방문 2년 전 박제순이 죽었다. 총독부가 만든 관제 성균관 ‘경학원’ 대제학으로 있다가 죽었다. 경성 용산역에서 열린 영결식에는 1000여 인파가 몰렸다. 자작 작위는 아들 박부양이 계승했다. 손자 박승유는 이에 반발해 일본군에 자원했다가 탈출해 광복군 활동을 하며 해방을 맞았다.(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박승유 독립유공자 공적조서’)

 

박제순 집은 지금으로 치면 정독도서관 잔디밭 가운데에서 본관 뒤편 언덕 너머까지였다. 그런데 박제순은 한일병합 공로로 자작 작위를 받은 귀족이 아닌가. 그래서 교장 오카모토도 그 생전에는 “학교가 좁아서…토지를…좀…” 따위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 하세가와가 학교를 찾았을 때 집은 폐허였다. 그때 총독부 학무국장 세키야 데이사부로(關屋貞三郞)가 “저 집터를 쓰면 된다”고 총독에게 제안했다. 그리 되었다. 이후 학생들이 고지대를 깎아 저지대를 메우는 작업을 했고, 1919년 현재 규모 부지가 완성됐다.(이상 ‘경기90년사’, p120)

 

그 흔적이 앞에서 말한 우물돌 돌덩이다. 1990년에 발간한 ‘경기90년사’에는 이 돌을 1970년에 발견했고 정체는 박제순 집 우물돌이라고 기록돼 있다. 따라서 2000년 8월 1일 ‘정독도서관장’ 명의로 세워놓은 ‘역사적 의미’ 운운하는 안내판은 대단히 비겁하다. 있는 그대로 안내하면 되는 것이다.

 

김옥균 시호 받던 날

나라 잘 만들겠다고 일어섰다가 그 나라가 살해한 혁명가 김옥균은 집을 빼앗기고 집안은 박살났다. 아내 유씨 청원은 거부됐다. 대신 이듬해인 1910년 6월 29일 통감부 꼭두각시 융희제 순종은 아관파천(1896) 직후 노변 척살당하고 관직삭탈된 김홍집, 어윤중과 함께 김옥균을 대광보국숭록대부 규장각 대제학에 추증하고 시호를 내리라 명했다.(1910년 6월 29일 ‘순종실록’) 전광석화처럼 부관참시와 능지처참을 당하고 또 9개월 뒤 전광석화처럼 복권된 지 16년 만이었다. 한 달이 지난 1910년 7월 29일 관립한성고등학교 옛 김옥균 집터에서 황제가 내린 시호 교지를 받는 ‘연시례(延諡禮)’ 의식이 열렸다. 시호는 ‘忠達(충달)’이었다.(김윤식, ‘속음청사’14(한국사료총서 11집), 1910년 7월 27일) 또 한 달 뒤 나라가 사라졌다.

 

맑은 가을날 정독도서관에 가보시라. 무엇이 보이는가. 가을비 궂게 내리는 날 정독도서관에 가보시라. 무엇이 보이지 않는가. 그 흔적들 모두가 역사다.

 

316. 친일 귀족 윤덕영의 경기도 구리 별장터 비석의 비밀

가정집 빨래판으로 전락한 청나라 황제 푸이의 휘호

▲경기도 구리시 구리시청 뒷산에 있는 한 가정집에는 진귀한 빨래판이 누워 있다.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가 쓴 휘호가 새겨진 비석이다. 이 집이 들어선 골짜기에는 식민시대 대표적 매국 귀족 윤덕영의 별장 강루정이 있었다. 윤덕영은 서울 옥인동에 벽수산장이라는 집을 지어 살면서 이곳에도 별장을 만들었다. 비문은 ‘선통제’라는 황제 호칭이 완전 폐지된 1924년 이전 인왕산 아래 살던 윤덕영이 푸이로부터 받아온 휘호다. 당시 윤덕영 동생이자 순종 비 윤씨 아버지인 윤택영이 중국에 있었는데, 윤택영을 통해 받아왔을 확률이 높다. 해방 후 윤덕영이 누리던 식민 권력도 사라지며 별장은 폐허가 됐고, 그가 자랑스럽게 세워놓았던 선통제 비석은 저렇게 빨래판으로 전락했다. /박종인 기자

 

2011년 봄 중국 베이징에 있는 차이나 가디언 경매회사에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부의)가 쓴 서예 작품 한 점이 출품됐다. 가로 54cm, 세로 105cm짜리 비단 3폭으로 구성된 작품이다. 한 폭에는 ‘允執厥中(윤집궐중)’ 넉 자가 적혀 있었다. 논어(論語)에 나오는 사자성어로 ‘왕위에 올라 정사에 임할 때 마음이 어느 한 곳에 치우치지 말고 오로지 그 중심을 잡아 모든 일을 처리하라’는 뜻이다. 60만위안에서 시작한 입찰은 97만7500위안까지 올라가 낙찰됐다. 2022년 환율로 한국 돈 1억9376만원이다.

 

대한민국 경기도 구리시청 뒤편 산기슭에 있는 한 민가 빨래판에도 같은 글, 같은 글씨를 새긴 비석이 누워 있다. 이 무슨 조화인가.

 

원본 왼쪽에는 ‘大淸宣統皇帝(대청선통황제)’라고 적혀 있고 오른쪽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조선 경성 인왕산록 승우원 천성정에 사는 윤덕영에게 특별히 써준다(爲朝鮮京城仁王山麓承佑園天成亭尹悳榮特書之·위조선경성인왕산록승우원천성정윤덕영특서지)’. 그러니까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가 조선 대표 매국 부호 윤덕영에게 써줬다는 말이다. 구리시 산속 빨래판에는 이 ‘준 사람’과 ‘받는 사람’ 이름이 빠져 있고, 대신 경매 출품작 세 폭 가운데 두 폭 내용이 합쳐서 새겨져 있다. 비석을 뒤집으면 나머지 한 폭 내용과 푸이, 윤덕영 이름이 새겨져 있음이 분명하다. 하여, 하도 희한해서 알아보았다. 나라가 식민지로 추락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조선 귀족 자작(子爵) 윤덕영과 자기 황민에 의해 타도된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와 경기도 구리에 있는 야산은 무슨 관계가 있었는지.

 

 ▲2011년 중국 차이나 가디언(China Guardian) 경매에 나온 푸이 휘호 원본. 각 폭마다 오른쪽에 ‘경성 사는 윤덕영에게 특별히 준다’라고 적혀 있다. 위 비석 뒷면에 이 글이 새겨져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차이나 가디언 옥션

 

조선귀족과 윤덕영

조선귀족은 조선 식민지화에 ‘당초에 대훈로(大勳勞·큰 공과 노력)가 있는 사람을 더 귀하게 하고 영화롭게 하기’ 위해 신설된 신분이다.(1915년 1월 21일 ‘매일신보’. 이용창, ‘일제강점기 조선귀족 수작 경위와 수작자 행태’, 한국독립운동사연구 43권43호,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2, 재인용)

 

이들은 후백자남(侯伯子男) 순으로 네 등급 귀족 작위와 은사금을 받았다. 76명이었다. 종친과 고관대작이라는 신분을 기준 삼아 총독부가 일방적으로 귀족 작위를 준 사람도 있었다. 거부한 사람도 있었고 반납한 사람도 있었다. 은사금만 받은 현실주의자도 있었다.

 

1910년 10월 7일 서울 남산 조선 총독 관저에서 ‘조선귀족’ 수작식이 열렸다. 작위를 수여하는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 앞에 대한제국 고관대작과 전주이씨 종친이 모였다. 혹자는 조선 전통 대례복, 혹자는 대한제국 군복 정장으로 복장은 별의별 게 다 있었으나 ‘각자 날리는 희열(喜悅)은 일장 가관이었다.’(1910년 10월 8일 ‘매일신보’ 잡보)

 

후작 작위를 받은 종친 이해승은 10월 11일 경기도 양주에 있는 선조 묘소에서 작위를 받았음을 조상에게 알리는 서작 봉고식을 거행했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 직후 자결한 조병세 사위 이용직도 자작 작위를 받았다. 이용직 또한 중부 수진동에 봉안한 선조 묘에 참배했다. 선조는 목은 이색이다.(1910년 10월 12일 ‘경성신보’, 1910년 10월 20일 ‘매일신보’. 이용창, 앞 논문, 재인용) 이용직은 3·1운동에 동조했다가 작위를 박탈당했다.

 

작위 수여식 직후 조선귀족 대표가 마차를 타고 덕수궁에 가서 이태왕 고종에게 작위 수여 사실을 보고했다. 그가 광무제 고종 비서실장 격인 전 대한제국 시종원경 윤덕영이다.(1910년 10월 11일 ‘매일신보’) 윤덕영은 자작, 동생이자 순종 비 윤씨 친부인 택영은 제일 높은 후작 작위를 받았다. 윤덕영이 받은 은사금은 5만엔이었다. 동생 택영 은사금은 50만4000엔으로 76명 가운데 최고액이었다.

 

▲윤덕영과 동생 윤택영을 포함한 조선귀족 명단이 실린 1910년 10월 12일 조선총독부 관보. /국립중앙도서관

 

식민귀족 윤덕영, 그리고 황제의 휘호

윤덕영 집안은 부유했다. 그런데 1904년 내각총리대신을 지낸 양아버지 윤용선이 죽고 순식간에 낭비벽으로 몰락했다. 황실 종친 이해승 집에 얹혀살던 윤덕영은 1906년 조카딸 윤씨가 순종 계비로 간택되면서 활짝 팔자를 고쳐버렸다. 사돈이 된 황제 고종은 벽동(이건희미술관(가칭) 예정 부지인 송현동) 일부를 윤씨 형제 땅으로 하사했다.(1926년 5월 31일 ‘조선일보’)

 

비서실장 격인 시종원경까지 발돋움했던 윤덕영은 1910년 한일병합조약 체결에 결정적인 ‘공헌’을 하며 조선 귀족 자작 작위를 받았다. 이왕직 일본인 관리 곤도 시로스케에 따르면 윤덕영은 ‘왕실 존엄과 영광을 영원히 보존할 길은 병합뿐이라고 설득해 고종 양해를 얻는 데 성공한’ 사람이었다.(곤도 시로스케, ‘대한제국 황실비사’(1926), 이마고, 2007, pp.107, 108)

 

병합조약 조인을 앞두고 조카딸인 순종비 윤씨가 황제 어새를 감추자 강압으로 어새를 빼앗아 날인했다는 말도 있다. 1926년 5월 31일 ‘조선일보’는 ‘어새를 따로 보관한 덕분에 은사금을 46만엔 받았다’고 보도했다. 당시 상해 임시정부가 출판한 ‘한일관계자료집’과 정교의 ‘대한계년사’도 ‘황후가 보관한 어새를 윤덕영이 빼앗아 이완용에게 넘겨줬다’라고 기록했다.(윤대원, ‘순종실기의 고종시대 인식과 을사늑약의 외부대신 직인 강탈 문제’, 규장각 43호, 규장각한국학연구원, 2013)

 

실제로 그가 받은 은사금은 세간에 알려진 40만엔이 아니라 5만엔이었으니 예외적인 거액은 아니었다.(‘조선귀족 약력’(1929). 심재욱, ‘1910년대 조선귀족의 실태’, 사학연구 76호, 한국사학회, 2004, 재인용) 대신 그는 ‘열심히 노력했다’. 병합 2년 뒤 윤덕영은 순종을 도쿄로 보내 천황을 알현하게 하려는 총독 하세가와 계획을 성사시켜 총독부 환심을 완벽하게 얻었다. 윤덕영은 매일 낮부터 새벽까지 ‘신랄하고 냉혹하고 끈질기게’ 덕수궁 고종 앞에 서서 심신에 피로를 안겨줘 순종 알현 허락을 받아냈다. 고종은 “조선 500년 동안 본 적 없는 간악한 자”라고 그를 비난했다.(곤도 시로스케, 앞 책, p177)

 

1910년 윤덕영은 옥인동 47번지 땅을 구입했다. 땅은 눈덩이처럼 넓어져 1927년 현재 땅 면적은 1만9467평으로 옥인동 전체 3만6361평의 절반에 달했다.(김해경, ‘벽수산장으로 본 근대정원의 조영기법 해석’, 서울학연구 62호,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 2016) 그 땅에다가 윤덕영은 집을 지었다. 망국 전 프랑스공사 민영찬이 가져온 귀족 별장 설계도를 입수해 집을 지었다. 집 이름은 ‘벽수산장’이라고 지었다.하도 크고 화려해 사람들은 ‘아방궁’이라고 불렀다. 1913년 시작된 공사는 1926년에도 미결 상태였다. 이 집에서 벌어진 어마어마한 일들은 다음에 이야기하자.

 

 ▲서울 옥인동 벽수산장에서 촬영된 윤덕영. 바위에 ‘벽수산장’ 각자가 보인다. /화봉갤러리

 

황제의 휘호, 산중의 빨래판

이제 식민 대표 주자 윤덕영과 황제 휘호 관계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 제국은 멸망했다. 이듬해 중화민국 공화국이 탄생했지만 황실까지 사라지지는 않았다. 중화민국 정부는 옛 황실과 ‘청실우대조건(淸室優待條件)’을 맺고 황제 명칭은 존속시키고 해마다 세비 400만냥을 지급하고 종묘와 능침 또한 유지시키기로 결정했다.(1912년 2월 13일 중화민국 ‘임시공보(臨時公報)’) 조선총독부가 고종 황실에 대해 ‘신분 보장 및 세비 지급’을 약속한 관계와 유사하다. 1924년 이 우대 조건이 수정될 때까지 옛 황제는 선통제 칭호를 사용했다.

그러니까 빨래판으로 쓰이고 있는 비석 휘호는 그가 등극한 1906년부터 1924년까지 어느 시점에 쓴 글씨다. 식민 귀족 윤덕영이 권세와 금력이 하늘을 찌르고 강물을 덮던 시기다. 그때 동생 윤택영은 그 많은 가산을 탕진하고 빚쟁이들을 피해 베이징으로 달아난 상태였다.

 

그 어느 시점에 황제 호칭을 유지하던 푸이로부터 인왕산에 거거대대하게 지어놓은 집에 대한 헌사를 받아온 것이다.

 

그리고 문중 사람이 집성촌을 이룬 경기도 구리에 또 별장을 지은 것이다. 고종과 민비릉이 있는 금곡 땅을 봐준 지관 서규석에게 입지를 골라 집을 짓고 이를 강루정(降樓亭)이라고 했다.(윤평섭, ‘윤덕영의 별장 강루정’, 한국전통조경학회지 5권1호, 한국전통조경학회, 1986) 구리시청 뒤편 산을 차지한 강루정에는 연못과 분수와 각종 석물이 가득했다. 동생이 받아온 휘호 3폭을 모아 비신 가득 새겨넣은 뒤 강루정 사랑채 앞에 세워놓았다.

 

1935년 윤택영이 베이징에서 객사했다. 장남 홍섭은 아버지에게 등을 돌리고 중국과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했다. 1940년 10월 18일 사치를 누리던 윤덕영이 죽었다. 신장염, 당뇨병 합병으로 한 달 동안 경성대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급성폐렴으로 죽었다.(1940년 10월 20일 ‘매일신보’) ‘일한합병의 공로자로 유일한 생존자 고 윤덕영 자작의 장례식이 엄숙히 진행됐다.(중략) 영구는 양주군 구리면 등룡동 묘지로 떠나 세시에 하관하였다.’(1940년 10월 26일 ‘매일신보’) 교문동이 된 그 등룡동에는 윤덕영 가족묘지가 있었다. 윤덕영은 가족묘 옆에 별장을 짓고 살다가 그리로 돌아갔다. 묘들은 전후 1960년대 들어 하나둘 이장되고 텅 비었다. 별장도 그리 되었다.

 

그 비석이 지금 옛 별장 자리에 들어선 가정집에 자빠져서 훌륭한 빨래판 역할을 하고 있다. 별장은 대문 기둥 하나, 석물 서너개와 연못 자리 정도 남아 있다. 세상이 바뀌어 다 사라지고, 악평밖에 없다 보니 민간은 물론 구리시청에서도 흥미를 보이지 않는다. 한 시대를 좌지우지하며 일신영달을 추구하던 한 악인(惡人) 흔적이 이 모양이다. 이 비석이 빨래질에 닳아서 없어지면 그 악인을 기억할 방법이 없다. 그러면 어찌할까. 구리 향토사학자 한철수(구지옛생활연구소장)가 말한다. “똑바로 세워서, 남 눈 두려워하며 살다 간 그 윤덕영을 모두가 볼 수 있게 해야 하지 않겠는가.”

 

317. 김구의 경교장과 박헌영의 혜화장, 이승만의 돈암장

해방 직후 정치 거물들은 경성 최고 갑부 집에서 살았

▲1945년 11월 23일 중국에서 환국한 임정 지도자 김구는 그날 오후 서울 죽첨정(竹添町)에 있는 ‘죽첨장(竹添莊)’에 들어갔다. 죽첨장은 식민시대 금광으로 떼돈을 번 친일 갑부 최창학이 살던 집이다. 공산주의자 박헌영은 함열 갑부 김해균이 사는 혜화동 저택 ‘혜화장’을 근거지로 삼았다. 미국에서 귀국한 우파 영수 이승만은 조선타이어라는 기업을 사장 정진섬의 ‘돈암장’을 숙소로 삼았다. 그해 9월 박헌영은 여운형을 끌어들여 공산주의-사회주의계열 연합 형식으로 ‘조선인민공화국’을 선언했다. 인민공화국을 창설한 장소는 경성 옥인동 47번지, 친일 귀족 윤덕영이 만든 ‘벽수산장’이었다./박종인기자

 

1946년 서울시헌장

해방이 되고 1년이 흐른 8월 10일 제정된 ‘서울시 헌장’은 ‘경성부’를 ‘서울특별자유시’로 변경했다. 새롭게 탄생한 서울시는 두 달 뒤인 10월 1일 고시를 통해 행정구획명칭도 변경했다. 개정 동명은 대체로 합방 이전 명칭을 채택하거나 위인을 기념하여 작명했고, 일본식 정(町)은 동(洞), 정목(丁目)은 가(街)로 고쳤다. 그리고 11월 21일 ‘서울특별시헌장 수여식’이 성대하게 열렸다. 경성은 사라지고 서울특별시가 앞으로 탄생할 대한민국 국도(國都)로 선포됐다. 그런데 수여식을 보도한 신문들부터 혼란스러웠다. 행사 다음 날인 11월 22일 자 ‘한성일보’는 행사장을 ‘서울중학 강당’이라고 표기했고 당일인 11월 21일 자 ‘공업신문’은 ‘경성중학’이라고 표기했다. 문영당이라는 출판사는 ‘신동명입(新洞名入) 서울안내’라는 지도를 제작해 재미를 봤다. 지명을 붉게 인쇄한 식민 시대 지도에 검은색으로 새 지명을 추가해 인쇄한 지도였다. 지도에는 출판사 주소도 신주소 ‘인현동’과 옛 주소 ‘앵정정(櫻井町)’이 병기됐다. 그 1년 사이에 참으로 많은 일이 벌어졌다. 해방된 시민들을 깜짝깜짝 놀라게 하는 사건이 그 서울특별시 대저택들에서 벌어졌다. 대저택 이름은 각각 경교장, 돈암장, 혜화장과 벽수산장이다.

 

해방, 그리고 귀국

1945년 8월 15일 정오 일본 천황 쇼와가 항복을 선언하는 라디오방송이 경성 시내에 흘러나왔다. ‘패전(敗戰)’ ‘항복(降服)’ 같은 명시적인 표현은 없었다. ‘4개국에 대하여 그 공동선언을 수락’ ‘잔학한 폭탄을 사용하여 빈번히 무고한 사람들을 살상’ 같은, 얼핏 들으면 뭔 말인지 알 수 없는 말이 가득했다. 다음 날에야 경성 사람들은, 조선인들은, 자기들이 해방됐음을 알게 되었다.

 

국내외 독립운동가들이 일제히 공개적으로 활동을 개시했다. 이미 총독부로부터 권력 인수를 제안받은 ‘건국동맹’ 지도자 여운형은 8월 15일 당일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했다. 광주에서 벽돌 공장 노동자로 은신해 있던 공산주의자 박헌영은 즉각 경성으로 올라와 8월 20일 조선공산당재건준비위원회를 결성했다. 준비위는 남조선노동당, 즉 남로당을 창당했다.

 

그리고 11월 23일 중국에서 활동하던 임시정부 요인 1진이 환국했다. 만인의 대환영 속에 귀국한 지도자 김구는 다음 날 조선중앙방송 라디오를 통해 “삼천만 동포의 지지를 받아 자주 독립 완성에 매진하겠다”고 선언했다.(1945년 11월 25일 ‘조선일보’) 1940년 강제 폐간 후 복간된 조선일보는 복간 사흘만인 11월 26일 1면에서 ‘김구 주석에의 기대 절대-국내 현실을 파악해 전선 통일이 요체’라고 주문했다. 이미 귀국해 있던 이승만이 김구를 만나 환국을 축하했고 여운형 또한 김구를 찾아가 덕담을 나눴다.

 

▲1946년 미군정 자문기관인 민주회의 창덕궁 회의를 마치고 기념촬영을 한 이승만과 김구.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김구의 경교장

위 조선일보 기사 아래에 잘생긴 건물 사진이 게재돼 있는데, 사진 설명은 이러했다. ‘국민의 시청(視聽)이 집중되는 김구 선생 숙소’. 경성 서대문 죽첨정(竹添町)에 있는 2층 양옥이다. 사람들은 이를 ‘죽첨장(竹添莊)’이라고 불렀다. 식민시대 금광으로 떼돈을 번 금광왕 최창학이 1938년 지은 저택이다.

 

죽첨정(다케조에초)은 1884년 갑신정변 당시 일본 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 이름을 딴 지역이었다. 1946년 서울시헌장에 의해 을사조약 때 자결한 민영환 시호를 따 충정로로 이름이 바뀌었다. 최창학은 천만장자로 불렸다. 김구 비서였던 선우진에 따르면 임시정부환영회의 위원장 김석황이 최창학에게 부탁해 죽첨장을 김구에게 내줬다.(오동룡, ‘대한민국 건국 전야-건국의 아버지 백범’, 월간조선 2008년 1월 호) 친일 거부 저택을 받아들인 이유에 대해서는 아무 기록이 없다.

 

나머지 임정 요인들은 옛 혼마치호텔인 충무로 한미호텔을 숙소로 사용했다. 1946년 말 주소 체계가 바뀌었어도 사람들은 죽첨장이라고 불렀다. 신문에서 죽첨장이라는 명칭은 1947년 중반까지 ‘경교장’과 혼용되다가 하반기에 가서야 사라졌다.

 

▲박헌영(안경 쓴 사람)과 여운형./위키피디아

 

박헌영의 혜화장 그리고 벽수산장

광주에 은신해 있던 박헌영은 서울로 올라오자마자 혜화정에 자리를 잡았다. 혜화정에는 전라도 익산 함열 출신 거부 김해균이 사는 저택이 있었다. 갑부인 동시에 사회주의자인 김해균은 해방 전부터 보성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공산주의자에게 경제적 후원을 하던 인물이었다.(김남식, ‘남로당연구’, 돌베게, 1984, p20) 김해균은 해방과 함께 박헌영에게 집을 내줬고, 그 집은 이후 혜화장이라 불렸다. 박헌영은 이곳에 조선공산당준비위원회를 설립했다. 박헌영은 ‘비슷한’ 사회주의 계열인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와 합작해 조직 재건을 시도했다. 건국준비위원회 멤버는 차곡차곡 공산주의 계열로 메꿔졌다. 그리고 9월 6일 박헌영-여운형은 옛 경기여고(현 헌법재판소)에서 전국인민대표자대회를 열고 ‘조선인민공화국(인공)’ 설립을 선언했다. 9월 14일 인공이 발표한 내각은 주석에 이승만, 내무부장에 김구 등 제사상 웃기처럼 민족주의 세력이 있었을 뿐 절대 다수가 공산주의자들이었다. 강령에는 민족반역자 재산 몰수 및 주요 시설 국유화가 포함돼 있었다.

 

그 강령을 만들고 발표한 조선인민공화국 사무실은 경성 옥인정 47번지에 있었다. 바로 식민시대 문을 열고 그 시대 일신 영달을 위해 마음껏 살다간 친일 귀족 윤덕영이 지은 ‘경성 아방궁’ 벽수산장이 이들 공산주의 공화국 사무실이었다. 식민시대 말 윤덕영 일가가 일본 기업에 팔아버린 이 집을 수용해 새 나라 건국 사무실로 쓴 것이다.(정상윤, ‘건준 천하 20일’, 월간 4월 5권 제9호, 사월공론사, 1971. 손세일, ‘조선인민공화국의 주석과 내무부장’, 월간조선 2010년 7월 호, 재인용) 10월에 귀국한 이승만은 11월 7일 조선인민공화국 주석 취임을 공식적으로 거부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조선인민공화국’) 벽수산장은 전쟁 뒤 한국통일부흥위원단(UNCURK) 사무실로 쓰이다 1966년 화재로 사라졌다.

 

 ▲1966년 화염에 휩싸인 ‘벽수산장’. 친일 귀족 윤덕영이 지었고, 해방 직후 박헌영의 ‘조선인민공화국’ 사무실이었고, 전후에는 한국통일부흥위원단(UNCURK) 사무실로 쓰이다 화재로 사라졌다./국가기록원

 

이승만과 돈암장

10월 16일 귀국한 이승만은 조선호텔에 여장을 풀었다가 다음날 돈암정(敦岩町)으로 거처를 옮겼다. 돈암정에는 자전거 타이어회사와 광산업으로 부자가 된 장진섭의 저택이 있었다. 황해도 출신인 민족주의계열 지도자 장덕수가 동향인 장진섭에게 부탁해 이뤄진 일이었다. 사람들은 당시 큰 저택 명칭에 유행하던 방식으로 이 집을 ‘돈암장(敦岩莊)’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장진섭은 이미 집을 내준 직후부터 “이승만이 측근들에 둘러싸여 자신을 비롯해 정치 자금을 제공한 경제인들을 멀리하고 있다”고 여기저기에 불만을 표시했다.(배진영, ‘이승만의 발자취 서린 돈암장과 마포장’, 월간조선 2017년 10월호)

 

결국 1947년 8월 이승만은 미군정 협조로 마포에 있는 옛 안평대군 정자 담담정(淡淡亭) 터이자 총독부 정무총감 다나카 다케오(田中武雄) 여름별장 자리로 거처를 옮겼다. 그리고 암살 기도 사건이 적발되면서 두 달 뒤 기업인들이 모은 돈으로 이화동 ‘이화장(梨花莊)’으로 이사했다.

 

해방, 그 혼돈과 미래

공산주의자는 자기네 이념을 좇아 사상의 건국을 추구했다. 민족주의 진영에서는 또 나름으로 민족 국가 건국을 추구했다. 35년 동안 소통이 단절된 채 벌였던 투쟁은 결국 갈등으로 폭발했다.

 

1946년 미국 언론인 마크 게인(M. Gayn)이 방한했다. 그가 꼼꼼하게 기록한 취재수첩과 수첩에 근거한 단행본 ‘재팬 다이어리(Japan Diary)’는 태평양전쟁 직후 한국과 일본 상황을 구체적으로 알려준다. 취재수첩 원문은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에 디지털화돼있다.

 

▲김구가 "국내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실상 친일파"라고 말했다고 기록한 마크 게인의 취재수첩./국사편찬위 전자사료관

1946년 11월 7일 게인이 경교장을 방문했다. ‘일본이나 친일파와 불구대천의(irreconcilable) 적인 김구가 기자회견을 한 적이 있다. 그때 “친일파를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묻자 김구는 특유의 무뚝뚝한(bluntness) 목소리로 이렇게 답했다. “사실상 조선에 있는 모든 사람은 친일파들이다. 모두 감옥에 보내야 한다(Practically everyone in Korea is a collaborator. They all ought to be in jail).”'(게인, ‘Japan Diary’, William Sloane Associates, 1948, p433)

 

게인은 ‘그런데 통역가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not even blinking) “조심스럽게 연구해야 할 문제(problem to be studied carefully)라고 하셨다”라고 통역했다’라고 기록했다. 국내파 독립운동가에 대해 임정요인들이 가지고 있던 이 같은 생각은 장덕수 평전인 ‘설산 장덕수’(이경남, 동아일보사, 1981, p329~332)에도 나와 있다. 1945년 12월 국일관에서 열린 임정요인 환영연에서 임정 측으로부터 ‘국내에 있던 사람은 크거나 작거나 간에 모두 친일파’라는 말이 튀어나오면서 극도의 갈등이 터져버렸다는 것이다. 여운형은 이같은 친일파 취급에 ‘혁명세력을 분열시키는 과오를 범하는 것’이라며 비난했다.(이만규, ‘여운형선생투쟁사’, 민주문화사, 1946, p226)

 

김구가 이 말을 한 곳이 옛 죽첨장인 경교장이었다. 마크 게인은 ‘그런 김구가 금광왕 저택에 살고 있다는 사실은 김구 또한 타협할 생각이 있다는 뜻’이라고 적었다.(게인, 앞 책, p434)

 

하지만 갈등은 해소되지 않았다. 무법천지였다. 1945년 12월 30일 송진우가 암살당했다. 1947년 7월 19일 여운형이 암살당했다. 그해 12월 2일 장덕수가 암살당했다. 1949년 6월 26일 김구가 암살당했다. 범인들은 검거됐지만 배후는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그런 갈등을 안고 1948년 대한민국이 섰다. 여전한 갈등 속에 지금 우리가 산다. 여기까지 해방 직후 벌어졌던, 하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작은 이야기였다.

 

318. 선정릉 옆 봉은사에 벌어진 조선불교 대참사와 승려 백곡처능

성리학 관료들에 의해 사라질 뻔했던 강남 봉은사  

▲성종 부부가 묻힌 선릉과 중종이 묻힌 정릉을 합쳐서 선정릉이라고 한다. 사진은 정릉이다. 봉은사(奉恩寺)는 성종릉인 선릉을 수호하는 사찰이었다. 성리학을 교조적으로 신봉했던 일반 선비와 달리 조선 왕실은 불교를 믿었다. 원래 견성사라 불렸던 봉은사는 명종 때 고양에 있던 중종릉을 선릉 옆으로 옮기면서 지금 위치로 옮겨 중창됐다. 그러자 조선팔도 유생들이 일어나 선종 사찰인 봉은사, 교종 사찰인 봉선사를 없애자고 주장했다. 폐불 운동이 극에 달했던 효종과 현종 때, 성리학을 공부했던 승려 백곡 처능이 한자 8000자가 넘는 장문의 ‘간폐석교소(諫廢釋敎疏)’를 올려 이를 조목조목 반박했다. 논리 싸움에 참패한 성리학 세력은 대찰 철폐에 실패했고, 2022년 여름날 불교를 지켜낸 백곡처능 비석이 봉은사에 섰다. /박종인 기자

 

지난여름 서울 삼성동 봉은사 부도밭 한쪽에 큼직한 비석이 제막됐다. 비석 앞면 비표는 이렇다. ‘호법성사 대각등계 백곡처능대선사 비명((護法聖師大覺登階 白谷處能大禪師 碑銘)’. 비표는 한국국학진흥원장 정종섭이, 뒷면 음기는 서예가 정도준이 썼다. 내용은 당시 조계종 총무원장 원행이 썼다. 앞면 글자들은 하나하나가 최고 존엄을 뜻한다. ‘호법’은 불법을 수호했다는 뜻이다. 성사는 존경을 넘어 성스러운 스승이며 ‘대각등계’는 열반한 승려에게 올리는 최고 존호다.

 

그런데 백곡처능대선사는 누구인가. 그가 누구길래 ‘국학진흥원’이라는 대한민국 유학진흥기관 수장이 비표를 썼을까. 오로지 성리학을 앞세워 다른 이들 신념과 종교 말살을 기도한 조선 유생들에 맞서 불교를 지켜낸 사람이다. 불타 사라질 뻔했던 봉은사를 살린 사람이다. 500년 동안 불교를 탄압한 조선 성리학 교조주의 세력과 이에 저항해 신념을 지켜낸 흔적이 바로 이 비석이다. 비석이 들려주는 광기 서린 독선과 이에 맞선 사람 이야기.

 

죽어서도 휘둘린 중종

폭군 연산군에게 배다른 동생이 있었는데 이름은 이역(李懌)이었다. ‘역(懌)’은 ‘기쁜 마음으로 복종하다’는 뜻이다. 형이 왕이 되고 5년이 지난 1499년, 나이 열한 살에 궁을 떠난 이역은 진성대군 군호를 받고 왕족으로 조용한 삶을 살았다. 그러다 7년 뒤 느닷없이 왕이 된다. 1506년 음력 9월 2일 자정 무렵 느닷없이 죽동 집으로 들이닥친 반정세력에 의해 진성대군은 왕으로 추대되고 연산군은 타도됐다. 이복형이 자기를 죽이러 왔다고 생각한 동생이 자결하려고 하자 아내 신씨가 이리 말했다. “말 머리가 집을 향하지 않고 밖을 향해 있으면 반드시 공자(公子)를 호위하려는 뜻이니 알고 난 뒤에 죽어도 늦지 않으리.” 부부가 사람을 시켜 바깥을 보니 과연 말 머리가 밖을 향해 있었다.(연려실기술, ‘중종조 고사본말’ 왕비 신씨(愼氏)의 폐위와 복위의 본말)

자살을 막아주고, 왕이 되도록 이끈 이 슬기로운 아내 신씨는 반정세력이 철퇴로 죽인 연산군 측근 신수근의 딸이었다. 후환이 두려웠던 반정세력은 일주일 뒤 중종과 왕비의 이혼을 요구했다. 새 왕은 “조강지처인데” 하고 잠시 머뭇댔지만 이들 제안에 그 자리에서 군말 없이 이혼했다.(1506년 9월 9일 ‘중종실록’)

 

38년 재위 기간 전부는 아니었지만, 중종은 자기를 왕으로 만들어준 사림세력에게 끌려다녔다. 반정세력에게 끌려다녔고, 이들을 견제하기 위해 본인이 중용한 과격파 조광조에게도 끌려다녔다.

 

죽어서도 편히 쉬지 못했다. 왕비 신씨와 이혼한 뒤 반정 가문 윤씨와 재혼한 뒤 윤씨 장경왕후가 죽고 또 다른 윤씨와 결혼했다. 이 윤씨가 문정왕후다. 중종은 장경왕후가 묻힌 경기도 서삼릉 희릉(禧陵) 옆에 묻혔는데, 이를 세 번째 왕비 문정왕후가 가만두지 않았다.

 

▲중종 첫 왕비 신씨 단경왕후가 묻힌 온릉. 경기도 양주에 있다. 사림들에 등 떼밀려 왕이 된 중종은 즉위 일주일 뒤 왕비와 강제 이혼했다. 요절한 계비 장경왕후에 이어 훗날 새 왕비가 된 파평 윤씨 문정왕후는 장경왕후 옆에 묻혀 있던 중종을 봉은사 옆으로 천장했다. 본인은 태릉에 묻혔다. 그래서 왕과 세 왕비는 지금 각각 따로 잠들어 있다. /박종인 기자

 

중종의 천릉과 봉은사 비극의 시작

요절한 인종에 이어 왕위에 오른 명종은 독실한 불교 신도였다. 어머니 문정왕후도 그랬다. 두 가지 큰 사건이 벌어졌다.

 

명종 5년인 1550년 당시 열여섯 살이던 명종 뒤에서 섭정 중이던 문정왕후는 “무자격 승려들이 많아서 군역이 모자란다”며 선종과 교종 불교 부활을 선언했다. 이미 중종 때 사림 세력은 왕을 채근해 ‘경국대전’에서 승려 자격을 뜻하는 ‘도승(度僧)’ 규정을 삭제했었다.(1516년 12월 16일 ‘중종실록’) 서대문 부근에 있다가 현 탑골공원으로 이전한 교종 본산 흥덕사(연산군에 의해 원각사로 개칭)와 선종 본산 흥천사(현 덕수궁 자리)는 각각 연산군과 중종 때 유생들에 의해 사라진 터였다. 불교도인 문정왕후는 군역 보충을 명분으로 봉은사와 광릉 봉선사를 선종과 교종 본산으로 지정하고 승려 제도를 부활시켰다.(1550년 12월 15일 ‘명종실록’) 승과(僧科) 또한 부활시켜 불교를 법제도 안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그리고 12년 뒤인 1562년 문정왕후는 성종 부부릉인 선릉의 원찰 봉은사를 현재 위치로 이건시키고 첫 계비 장경왕후와 함께 묻혀 있던 남편 중종을 봉은사 터로 천장했다. 봉은사는 이제 성종과 중종을 함께 수호하는 왕실 사찰로 신분이 수직 상승했다. 반(反)불교 성리학자인 듯한 실록 사관은 이렇게 평했다. ‘장경왕후와 같은 경내에서 중종 무덤을 함께 하지 않으려고 한 것이다. (이를 주도한 자들은) 중들을 애틋하게 여기는 자전(慈殿)을 기쁘게 하기를 힘쓰니 사람들이 모두 더럽게 여겼다(人皆醜之·인개추지).’(1562년 9월 4일 ‘명종실록’) 사관이 더럽게 여겼다고 한 대상은 기실은 자전 본인이었고 자전이 애틋하게 여기는 그 중들이 아니었겠는가.

 

불교를 향한 치졸한 상소들

왜 제목이 ‘치졸한’인지, ‘중종실록’과 ‘명종실록’ 기록만 본다. ‘석가의 도가 우리의 도를 압승할 조짐이다. 신들 모두 울분이 북받쳐 음식이 목에 넘어가지 않을 지경이다. 반드시 봉은사와 봉선사부터 헐어버리고 서적도 태워야 한다.’(1538년 9월 19일 ‘중종실록’) ‘중들의 뿌리는 봉선사와 봉은사다. 뿌리를 근절시킨다면 간사하고 더러운 무리들이 다시는 요사를 부릴 수 없게 될 것.’(1539년 6월 3일 ‘중종실록’) ‘봉은, 봉선사를 없애라는 상소를 중종이 거부하자 유생들이 성균관을 비워버렸다.’(1539년 6월 9일 ‘중종실록’)

 

경국대전에 유생이 절에 못 가도록 규정돼 있지만 사대부 치고 절에서 책 안 읽는 사람 없다. 벌하지 말라.’(1549년 9월 8일 ‘명종실록’) ‘불경은 이단의 뿌리이고 유생들은 오도가 깃들어 있는 존재다. 황언징이 봉은사에서 불경을 훔쳐왔지만 황언징은 엄연한 선비다. 절도를 고발한 요사스러운 중 목을 베라.’(1549년 9월 20일 ‘명종실록’)

 

법 규정이 뭐가 됐든 승려는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사찰은 이단의 통로이므로 유생들 독서실로 사용하다가 없애버려야 한다는 일관된 적의(敵意)가 실록 곳곳에서 무수히 발견된다. 오직 성리학만이 유일무이한 진리와 정의였다. 유생들은 이를 ‘오도(吾道)’, 곧 ‘나의 법’이라고 불렀다.

 

▲백곡처능을 기리는 비석. 봉은사 부도밭에 서 있다. 비문은 대한민국 전 조계종 총무원장 원행 스님이 짓고 앞면 글씨는 대한민국 유학 진흥 기관인 한국국학진흥원장 정종섭이 썼다. /박종인 기자

 

초강력 불교 탄압과 백곡처능

병자호란 후 강력한 교조 집단인 서인이 권력을 잡았다. 효종에 이어 현종은 즉위 1년 뒤 왕실에 속한 절 원당(願堂)들을 철폐해버렸다.(1660년 4월 3일 ‘효종실록’) 이는 예전에 송시열이 제안했다가 유야무야됐던 사안이었다. 그해 12월 19일 조선 팔도 승려들을 전원 환속시켰고(같은 해 12월 19일 ‘현종실록’), 이듬해 정월 비구니 사찰인 인수원과 자수원을 철거하고 소속 비구니들은 강제 환속시켰다.(1661년 1월 5일 ‘현종실록’) 철거된 절 건물은 분해돼 성균관 학사 건물과 병자 요양원 공사 따위에 투입됐다.(1665년 윤6월 14일 ‘현종개수실록’) 바야흐로 성리학을 제외한 철학과 학문과 신앙은 물리적으로 말살의 길을 걷고 있었다. 그리고 타깃은 선교 양종 본산인 봉은사와 봉선사였다.

 

그때 백곡처능이 현종에게 상소를 올렸다. 제목은 ‘간폐석교소(諫廢釋敎疏)’, 석가의 가르침을 없애는 데 대해 간함이다. ‘첫째, 석가가 오랑캐라서 탄압하는가. 그렇다면 순임금은 동쪽 오랑캐요 문왕은 서쪽 오랑캐다. 둘째, 왜 개국 때부터 받들어온 원당을 없애는가. 셋째, 살상을 하기로는 폭군 걸만 하겠으며 권세를 탐하기로는 진시황만 하겠는가. 불교는 그런 일 않는다.(중략) 인도의 법이라 탄압하는가. 그렇다면 공자는 노나라 바깥을 나가지 못했을 것이고 맹자는 추나라에서만 간직됐을 것이다. 세상은 비와 이슬을 같이 받아야 한다.’(백곡처능, ‘간폐석교소(1661)’. 오경후, ‘조선후기 불교정책과 대응론’, 역사민속학 31호, 역사민속학회, 2009, 재인용 정리)

 

논리 없이 뒤죽박죽 주장만 있는 교조주의자들은 성리학 경전을 두루 인용한 이 상소에 입을 다물었고 봉선사와 봉은사는 철폐를 면했다. 눈물과 감성이 아니라 논리와 실증으로 세계관과 종교의 공존을 역설한 백곡처능의 승리였다.

 

그렇다고 불교 탄압사는 끝나지 않았다. 법외 인간으로 추락한 승려들은 1895년 갑오개혁 와중에 “외국 승려처럼 조선 승려도 한성에 출입할 수 있게 해달라”는 일본 승려 사노 젠레이의 청원이 있을 때까지 조선 수도 한성에 출입조차 할 수 없었다.(김윤식, ‘속음청사’ 1895년 4월 11일 등) 그리고 또 100년이 훨씬 더 지난 여름날, 간신히 소멸을 면한 봉은사에 백곡처능의 비석이 선 것이다. 불교의 승리가 아니라 학문과 신앙과 철학의 자유가 지켜진 연유를 그제야 흔적으로 남긴 것이다. 비문은 대한민국 큰 스님이 지었고 글씨는 대한민국 국학 진흥 수장이 썼다.

 

319. 고종-민비 묻힌 홍릉과 남양주 조말생 묘의 비밀

고종, 왕비릉 이장을 위해 조말생 묘를 강제로 옮기다

 

경기도 남양주 수석동에는 세종 때 문신 조말생 묘가 있다. 원래는 남양주 금곡리에 있었는데 1900년 고종이 3년 전 왕비 민씨를 묻은 청량리 홍릉을 금곡리로 천장하면서 수석동으로 강제 이장 당했다. 금곡리에는 조말생 문중 묘 110여 기는 물론 전주 이씨 왕족묘도 허다했다. 세종 막내아들 영응대군 부부 묘 또한 그때 경기도 시흥으로 이장됐다. ‘매천야록’에 따르면 홍릉 이장으로 금곡리에 있던 무덤 2만여 기가 이장됐다. 금곡리로 천장지가 결정되는 과정도 복잡했고, 결정 후 실제 천장에는 19년이 더 걸렸다. 사진은 조말생 묘에서 바라본 장명등과 한강 풍경이다. /박종인 기자

  

1897년 10월 13일 대한제국을 선포한 광무제 고종은 일주일 뒤 경사를 맞았다. 10월 20일 궁인 엄씨가 러시아공사관에서 잉태했던 아들이 태어난 것이다. 이 아들이 영왕 이은이다. 고종은 이틀 뒤 엄씨를 귀인(貴人)으로 봉작했다. 또 나흘이 지난 10월 26일 사간원 정언을 지낸 현동건이 ‘오늘날 급선무는 인재 등용과 군사 양성과 학문 진흥’이라고 상소했다. 고종은 “잘 알았다”고 비답을 내렸다.(1897년 10월 26일 ‘고종실록’) 한 달이 갓 지난 11월 21일, 고종은 2년 전 일본인들에 의해 살해된 왕비 민씨 장례식을 치렀다. 황궁인 경운궁을 떠난 상여는 이날 청량리 홍릉으로 가서 의식이 치러졌다.

 

그러나 왕비 민씨는 편히 쉬지 못했다. 3년 뒤 남편 고종이 청량리 장지가 명당이 아니라며 이장을 결정한 것이다. 그런데 이장할 장소가 수시로 바뀌는가 하면 이장할 날짜도 계속 연기되더니 결국 1919년 고종이 죽고 나서야 왕비릉은 경기도 남양주 금곡리로 천장되고 남편 고종도 합장됐다. 그 사이에 금곡리에 있던 무덤 2만여 기는 강제로 전국으로 이장돼 버렸고, 나라는 사라져 버렸다. 이 블랙코미디 이야기다.

 

엄혹했던, 그리고 어이없던 세월

1894년 청일전쟁에서 참패한 청나라는 급속도로 몰락하고 있었다. 대한제국은 청나라를 침몰시킨 일본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로 통치됐던 세상은 바야흐로 정글로 변하고 있었다. 힘센 놈은 스스로를 정의라고 불렀고, 약한 자들은 이를 갈며 고개를 숙이는 그런 세상. 그러했다.

 

그런데 대한제국을 선포한 1897년부터 을사조약이 체결된 1905년까지 대한제국 정부가 각종 국장(國葬)에 사용한 국가 예산이 213만6000원이었다. (이윤상, ‘1894~1910년 재정 제도와 운영의 변화’,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박사논문, 1996, p141) 참고로 1900년도 대한제국 세출예산은 616만2796원이었다.(김대준, ‘고종시대의 국가재정 연구’, 태학사, 2004, p129)

 

왕비 민씨 국장, 헌종 왕비 국장, 황태자비 국장이 이 8년 사이에 치러졌다. 한 해 예산의 3분의 1을 각종 장례식에 사용했으니, 제국 선포 직후 현동건이 제시한 세 가지 급선무와는 많이 동떨어진 세금 운용 방식이다. 여기에는 1902년 청량리에 묻혔던 왕비 민씨를 이장하기 위해 사용된 45만원이 포함돼 있었다.

 

▲금곡리에 있는 홍릉. 1919년 고종이 죽은 뒤 청량리에 있던 왕비 민씨릉을 옮겨와 금곡리에 합장했다. 조선식 정자각(丁字閣) 대신 중국 황제릉 형식의 일자(一字) 각이 세워져 있다. /박종인 기자

 

“왕비릉 풍수가 나빠 나라가 이 꼴”

민비가 청량리에 묻히고 2년이 못 돼 왕비릉을 옮긴다는 소문이 돌았다. 1899년 봄에는 홍릉을 경기도 광주로 옮긴다는 풍문이 돌았다.(1899년 3월 17일 ‘제국신문’) 그런데 제국 정부는 홍릉 석물을 5만원을 들여 보수하고 동대문에서 홍릉까지 도로를 넓히고 개천도 준설해 청량리 홍릉까지 황제가 왕래하는 데 만전을 기했다.(1899년 4월 12일 ‘제국신문’) 소문은 소문으로 그치는 듯했지만, 제국신문 보도 다음 날 궁내 소식에 정통한 ‘황성신문’은 ‘천릉 후보지는 수원 용주사와 양주 차유고개[車踰峴·차유현]와 광주산성 가운데 용주사가 내정됐다’고 보도했다.(1899년 4월 13일 ‘황성신문’)

 

그리고 해를 넘긴 1900년 2월 27일 ‘황성신문’은 ‘민영준씨가 능지(陵地)를 보러 갔는데, 양주 금곡으로 결정될 듯’이라고 특종을 터뜨렸다. 훗날 민영휘로 개명한 민영준은 당시 궁중 의례를 담당하는 장례원경이었다. 마침내 6월 21일 궁내부 특진관인 종친 이재순이 공식적으로 왕비릉 이장 문제를 꺼냈다. “모두가 홍릉이 완전무결한 길지가 아니라고 하니, 억만년토록 국가의 기반이 매우 공고해지도록 홍릉을 옮기소서.” 고종은 이리 답했다. “오래전부터 논의가 있었지만 처리하지 못했다. 효성 깊은 동궁이 밤낮으로 애를 태우니, 신중히 결정하리라.”(1900년 음5월 25일(양 6월 21일) ‘승정원일기’) 사흘 뒤 청량리 홍릉을 점검한 관리들이 ‘과연 홍릉은 명당이 못 된다’고 보고했다. 고종은 “시간이 없어서 임시로 쓴 묫자리”라며 “풍수가와 조정 논의가 동일하니, 홍릉을 이장한다”고 선언했다.(1900년 6월 24일 ‘고종실록’) 비극적으로 죽은 왕비 능이 국가 운명을 저해하고 있다고 결론 내린 것이다.

 

금곡리에서 군장리로 바뀐 길지

7월 11일 전국 주요 길지 27군데를 답사한 관리들이 고종에게 후보지 네 군데를 보고했다. 양주에 있는 금곡리와 군장리, 차유고개와 화접동이 그 후보지였다. 8월 24일 이 가운데 금곡리가 최종 천장지로 확정됐다.

 

9월 1일 홍릉 천장 날짜가 확정됐다. ‘음력 8월 17일 천장을 개시. 윤8월 9일 풀을 베고 흙을 파냄. 8월 22일 관 자리 위에 움막 설치. 9월 19일 7척 깊이로 땅을 파냄. 10월 12일 서쪽 방향부터 관을 꺼내 15일 발인’ 등등. 옛 왕릉과 새 왕릉에 상여를 놓을 방위까지 모두 정해놓았다.(1900년 9월 1일 ‘고종실록’)

 

그런데 열하루 뒤 금곡리 묘터가 길지가 아니라는 보고가 올라왔다. 왕릉으로 꺼려야 하는 두 가지 지형지물이 있다는 것이다. 고종은 “새 묫자리를 고르라”고 명했다.(1900년 9월 12일 ‘고종실록’)

 

10월 15일 새 묫자리를 고르고 온 관리들이 군장리와 장안리와 팔곡산이 길지라고 보고했다. 사흘 뒤 관리들은 금곡리 옆 군장리가 상길지라고 보고했다. 10월 29일 군장리에 왕릉 예정지임을 알리는 봉표가 세워졌다. 10월 30일 작업을 마친 관리들에게 고종이 물었다. “(태조 이성계 능인) 건원릉보다 높던가?” 관리들이 답했다. “높지는 않으나 존엄한 기상이 있습니다.” 고종이 이렇게 말했다. “이제 길조를 얻었으니 매우매우 기쁘고 행복하구나(今得吉兆萬萬喜幸矣)!”(’홍릉천봉산릉주감의궤·洪陵遷奉山陵主監儀軌')

 

횡액을 만난 무덤 2만 기

그런데 고종은 원래 예정했던 금곡리도 놓으려 하지 않았다. 새 묫자리 선정 작업이 한창인 9월 21일 고종이 조령을 내렸다. 내용은 이러했다. ‘금곡리 새 능의 경계에 있는 무덤들을 모두 옮겨라.’(1900년 9월 21일 ‘고종실록’)

 

금곡리 예정지에 있는 무덤은 모두 2만 기가 넘었다.(황현, ‘국역 매천야록’ 3권 1900년 3.금곡 신릉 철도 개설과 신서선묘의 발굴, 국사편찬위) 확정도 안 된 왕릉 이장으로 옛 무덤들이 횡액(橫厄)을 만난 것이다. 무덤 주인들 가운데에는 세종 막내아들 영응대군 부부를 비롯한 왕실 종친들이 셀 수 없었고 세종 때 문신인 조말생과 양주 조씨 문중 묘 110기가 포함돼 있었다. 고종은 이들 후손에게 대토(代土)를 내주고 이장 비용과 제사 비용을 대주라고 명했다.

 

영응대군 부부묘는 경기도 현 시흥 땅으로 이장됐다. 양주 조씨 조말생 문중은 현 남양주 수석동에 땅을 하사받고 조말생 묘를 옮겼다. 다른 조씨 문중묘들은 전국으로 흩어져 이장됐다.

 

수석동 조말생 새 묫자리에는 석실서원이 있었다. 병자호란 때 척화를 주장했던 김상헌 문중 서원인데, 흥선대원군 서원철폐령에 의해 철거된 서원이다. 그러니까 아버지 대원군이 비워놓은 땅을 아들 고종이 조말생 묫자리로 내준 것이다. 다음은 실록에 기록된 당시 묘를 이장 당한 왕실 및 공신 명단이다.

 

정정옹주(貞靜翁主) 부부: 태종 일곱째 딸

숙혜옹주(淑惠翁主) 부부: 태종 아홉째 딸

영응대군(永膺大君) 이염 부부: 세종 막내 적자

의창군(義昌君) 이공: 세종 서출 10남 2녀 중 3왕자

금계정(錦溪正) 이기: 의창군 이공 아들

금성도정(錦城都正) 이위: 의창군 이공 아들

동성군(東城君) 이순: 의창군 이공 아들

사산군(蛇山君) 이호: 의창군 이공 아들

능천군(綾川君) 구수영: 세종 막내 영응대군 이염 사위

호양공(胡襄公) 구치홍: 구수영 아버지

문강공(文剛公): 조말생 세종 때 문신

안양군(安陽君) 이항 부부: 성종 셋째 아들

효순공주(孝順公主) 부부: 중종 딸

신용개(申用漑): 중종 때 문신. 신숙주 아들.

반성부원군(潘城府院君) 박응순 부부: 선조 장인(의인왕후 아버지)

능안부원군(綾安府院君) 구사맹 부부: 인조 아버지 정원군 장인(추존 인헌왕후 아버지)

능성부원군(綾城府院君) 구굉: 인조 외삼촌. 구사맹 아들.

능천부원군(綾川府院君) 구인후: 인조 외사촌 형. 구사맹 손자.

능풍부원군(綾豐府院君) 구인기: 인조 외사촌 동생. 구사맹 손자.

한원부원군(漢原府院君) 조창원 부부: 인조 장인(계비 장렬왕후 아버지)

 

그러니까 왕비 이장을 위해 개국 때부터 인조 때까지 역대 왕자와 공주, 왕비 아버지와 공신들을 떼로 금곡리에서 몰아냈으니 조선왕조 500년 사상 참으로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조말생 후손들은 1900년 당시 금곡리에서 전국으로 뿔뿔이 이장됐던 문중 묘들을 하나둘씩 수석동으로 옮겨왔다./박종인 기자

 

날벼락 맞은 이괄 문중묘

그 과정에서 횡액을 만난 문중이 하나 더 있었다. 바로 수석동 골짜기에 있던 이괄 문중 묘들이다. 1624년 인조 때 난을 일으켜 처형된 이괄 문중 무덤이 이곳에 있었다. 세간의 주목을 끌까 쉬쉬하고 있던 주민들은 이 묘들을 파묘하고 석물들을 골짜기 아래로 던져버렸다. 큰 비석은 80여년 전 마을 앞에 콘크리트 다리를 만들 때 교각 아래 파묻고 시멘트를 발라버렸다.(남양주문화원, ‘석실서원 지표 및 문헌조사’, 1998, pp.93, 94) 골짜기에는 석물들이 자빠져 있지만 비석 위에 만든 다리 자리에는 큰 교회가 들어서 찾을 길이 없다.

 

▲1900년 홍릉 천장이 결정되면서 인조 때 쿠데타를 일으켰던 이괄 문중묘가 날벼락을 맞았다. 조말생 묘가 수석동으로 이장되면서 수석동 주민들은 수석동 골짜기에 있던 이괄 문중 묘들을 파묘하고 석물들은 골짜기에 버리고 비석은 콘크리트 다리 밑에 묻어버렸다./박종인 기자

 

멸망 9년 뒤에야 이장된 홍릉

금곡리 무덤들을 다 철거하고, 군장리로 장지를 확정한 뒤 또 변고가 벌어졌다. 1901년 4월 10일 무덤 공사를 벌이던 군장리 묘터가 온통 바위투성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노발대발한 고종은 “묫자리를 정한 지관들을 몽땅 처벌하라”고 명했다.(1901년 4월 12, 13일 ‘고종실록’) 그달 21일 고종은 양주 각지를 살피고 온 관료들 의견을 따라 원래 예정지였던 금곡리를 최종 천장지로 ‘영원히’ 확정했다.

 

이후 수시로 청량리 홍릉 이장 날짜가 정해지고 천장 작업이 개시됐다. 하지만 ‘날짜가 맞지 않고’ ‘나라가 사라지고’(1905년) ‘고종이 강제 퇴위되는’(1907년) 등 사건이 발생하면서 실행은 되지 않았다. 그러다 1919년 고종이 죽고 나서야 금곡리로 청량리 홍릉 천장이 실행에 옮겨졌다. 그래서 고종은 왕비 민씨와 금곡 홍릉에 잠들어 있다.

 

꺼지지 않은 향불

3년이 지난 1922년 12월 홍릉 능참봉을 자처했던 고영근이 고종 묘호가 새겨져 있지 않은 채 누워 있던 비석에 ‘高宗太皇帝(고종태황제)’를 새겨넣고 비석을 바로세웠다.(1922년 12월 13일 ‘조선일보’) 고영근은 민비를 살해한 우범선을 일본에서 암살한 인물이다. 해방 2년 전인 1943년 6월 30일 일본에 있던 영친왕이 금곡 홍릉을 참배했다. 신분은 순종을 이은 조선 이왕(李王)이었다. 나라는 사라졌는데, 전주 이씨 향불은 꺼지지 않은 것이다.(1943년 7월 1일 ‘매일신보’)

 

2022.10.26

320. 이씨 왕실 족보 왜곡과 1537년 경회루에서 벌어진 막장 사대(事大) 대참사

‘주상 앞에서 중국 사신들은 심야까지 기생을 희롱하였다’

 

▲경복궁 경회루에서는 왕이 주재하는 연회가 수시로 열리곤 했다. 그런데 중종 때인 1537년 봄날, 명나라 사신인 한림원 수찬 공용경(龔用卿)과 호과 급사중 오희맹(吳希孟)은 배석해 있던 조정 신하들이 온몸을 떨며 분통을 터뜨릴 정도로 오만방자하게 굴었다. 평상복을 입고 나타나는가 하면 중종을 끌고 궁궐을 두루 구경하는가 하면 기녀들에게 음란한 춤을 추게 하고 먹물을 얼굴과 옷에 뿌리는 행패도 보였다. 하지만 고려 때 ‘역적 이인임’이 전주 이씨 조상이라고 기록된 명나라 문서를 고치기 위해서, 중종은 그 대참사를 그대로 지켜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나라 기록상 전주 이씨 족보를 바로잡는 ‘종계변무’는 52년이 지난 1589년에 이뤄졌다. /박종인 기자 

 

서기 1368년 주원장이 명 태조에 등극했다. 이듬해 고려 공민왕 또한 원나라를 버리고 명에 입조했다. 이미 권력은 권지국사(權知國事) 벼슬아치 이성계가 장악하고 있었다. 그때 명이 고려왕실에 축문(祝文)을 내리고 명산대천에 이를 읽으며 제사를 올리라 명했는데, 그 시작이 이러하였다. ‘고려 배신 이인임의 후손 이모(李某)가 나쁜 짓을 하므로 이를 상제(上帝)에 고하라’(1394년 음6월 16일 ‘태조실록’)

 

여기 나오는 ‘이모’는 전주 이씨 이성계이고, 성주를 본관으로 하는 이인임은 이성계의 친원파 정적이었다. 조선 건국 2년 뒤에야 이 사실을 알게 된 조선 정부는 이를 고치기 위해 눈물겨운 투쟁을 벌였으니, 이를 ‘종계변무(宗系辨誣)’라고 한다. 봉건왕조 뿌리를 뒤집어놓은 이 황당무계한 족보 왜곡을 바로잡기 위해 조선 정부는 그 어떤 가련한 일도 서슴지 않았다. 오늘 이야기는 중종 때인 서기 1537년 봄날 저녁 경복궁 경회루에서 벌어진 치욕의 사대 대참사.

 

막장의 씨앗, 족보

개국 2년째인 1394년 4월 25일 흠차내사(欽差內史) 직책을 가진 명나라 내시 황영기(黃永奇)가 조선을 찾았다. 황영기는 조선인 출신 내시였다. 그때 황영기가 가져온 축문을 보고 이성계는 자기가 정적 아들이라고 적힌 사실을 알았다.(1394년 6월 16일 ‘태조실록’) 문제는 심각했다. 이 축문을 명산대천에 두루 읽으며 스스로를 저주해야 하는 게 아닌가. 게다가 저주가 이뤄지지 않으면 ‘정토군을 일으키지 아니할 수 없다’는 협박까지 달려 있었으니, 하늘과 황실이 연합해서 조선 왕실을 멸망시키겠다는 것이다. 태조는 아들 이방원까지 명에 사신으로 보내며 “아랫사람을 슬프고 긍휼히 여겨 족보를 바로잡아 달라”고 요청했다.

 

문제가 원만히 해결된 줄 알고 있던 조선 정부는, 이방원이 왕위에 오른 직후인 1402년 명에서 돌아온 사신에 의해 이씨 왕실이 여전히 이인임 후손으로 적혀 있다는 사실을 알고 기겁했다. 태종은 이듬해 11월 명 황실에 문서를 올리며 다시 한 번 수정을 요청했다.(1403년 11월 15일 ‘태종실록’) 이듬해 명나라는 당시 황제 영락제가 조선 측 요구를 수용했다는 문서를 보내왔다.(1404년 3월 27일 ‘태종실록’)

 

114년 뒤인 1518년 중종 때 사신들이 명나라 법전 ‘대명회전(大明會典)’을 구입해왔다.(1518년 4월 26일 ‘중종실록’) 조공 국가의 조공 품목을 나열한 ‘조공-조선국’ 규정을 보니, 놀라웠다. 여전히 이성계는 이인임 아들이며, 한발 더 나아가 ‘이들 부자가 왕씨 왕 넷을 죽였다’고 기록돼 있는 게 아닌가! 정적 아들도 억울한데 그 정적과 손잡고 왕을 넷씩이나 죽인 살인범이라니. 통분(痛憤)한 조선 정부는 이후 줄기차게 기록 수정을 요구했으나 명 정부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리고 19년 뒤 어느 봄날 밤, 천자국에서 막장 사신들이 궁궐에 들이닥친 것이다.

 

사신에게 다섯번 절한 중종

1536년 12월 1일 평안관찰사 이귀령이 명나라 한림원 수찬 공용경(龔用卿)과 호과 급사중 오희맹(吳希孟)이 황실 태자 탄생 기념 조서를 들고 조선을 찾는다고 보고했다. 이들은 무신이나 조선 출신 환관이 아니라 말이 들어먹힐 문신(文臣)들이니, 족보 수정이라는 왕실 최우선 외교 목적을 달성할 기회였다. 중종은 즉시 사신을 접견할 때 입을 복식을 만들라고 명하고 접견 준비에 착수했다.(1536년 12월 1일 ‘중종실록’)

 

이듬해 봄, 압록강을 건넌 사신들이 평양에 도착했다. 이상한 조짐은 이미 그때부터 나타났다. 공식 의례를 행하기 전 사신 공용경이 사신이 가져온 칙서를 향해 중종에게 허리를 숙이는 국궁(鞠躬) 대신 오배삼고두례(五拜三叩頭禮)를 행하라고 요구한 것이다. 오배삼고두례는 다섯 번 절하고 마지막 절에는 세 번 고개를 숙이는 예법이다. ‘대명회전’에 실려 있는 예법이며 천하가 다 거행하는 예법이라는 것이다.(1537년 2월 30일 ‘중종실록’)

 

망설이던 중종은 닷새 뒤 이를 수용하고 3월 10일 서대문 밖 모화관에서 왕세자와 문무백관, 유생들을 거느리고 공용경과 오희맹을 맞이하며 다섯 번 절하고 세 번 고개를 숙였다.(1537년 3월 10일 ‘중종실록’) 개국 이래 처음 있는 예법이었고, 이후로 이는 공식 예법이 됐다.(최종석, ‘국궁인가 오배삼고두인가?’, 한국문화 83권 83호, 규장각한국학연구소, 2018)

 

그런데 이들 사신은 서울 도착 전 조정에 공식 문서를 보내 ‘당도할 때까지 여인이 시중 드는 일을 금하라’고 부탁한 보기 드문 ‘청렴한’ 인물들이었다.(1537년 2월 8일 ‘중종실록’)

 

▲평상복을 입고 나타난 중국 사신은 경회루에서 젊은 기녀 넷에게 춤을 추라 하고 큰 붓에 적신 먹물을 촛불 든 기녀에게 뿌리며 외설한 짓을 멋대로 방자하게 하였다.(‘중종실록’) /박종인 기자

 

봄날 밤 벌어진 경회루 대참극

3월 14일 오후 1시, 공용경과 오희맹이 경복궁에 입궐해 경회루 남문으로 들어왔다. 지금과 달리 당시 경회루는 사방으로 담이 둘러쳐 있는 은밀한 공간이었다.

 

가볍게 인사를 나눈 중종은 사신에게 본론부터 꺼냈다. “‘대명회전’ 편찬을 맡은 대인께서 오시니 한 나라 원통함을 씻어주시오.” 정사(正使) 공용경은 “이다음에 새로 편찬될 대명회전을 보시면 알게 될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했다. 중종은 거듭 ‘이인임은 전주이씨 왕실과 무관하다’고 말하며 다짐을 받았다. 공용경은 “같은 내용을 문서로 써서 부사(副使) 오희맹에게도 주시라”고 말했다.

 

본론이 끝나자마자 분위기가 돌변했다. 청렴과 거리가 먼 인물들이었던 것이다.

 

중종이 후원(後苑) 산책을 이들에게 권했다. 그러자 공용경이 느닷없이 “관복 대신 평상복을 입고 싶다”고 말했다. 중종이 “대인들은 그리하시라”고 하자 두 사신은 진짜 의례복을 벗고 평복으로 갈아입고 등장했다.

 

그렇게 곤룡포를 입은 중종과 평복을 입은 명나라 사신들이 경회루 2층에서 주연을 즐겼다. 이들은 백악산을 공극산, 인왕산을 필운산으로 개명하고 이를 붓으로 써줬다. 그리고 후원으로 걸어갔다. 명 사신들은 꽃을 꺾어서 중종 익선관에 꽂았는데, 하나만 꽂으려 하는 중종에게 두 개를 꽂으라 우겨서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만들기도 했다. 불편한 예복을 입은 임금이 정원을 걸으니, ‘한 나라 임금을 끌고 정원 안을 두루 걸으므로 곤룡포가 풀이슬에 질질 끌리게 되고 울퉁불퉁한 구릉과 골짜기에서 임금이 비틀거렸다.’ 이를 본 신하들은 그 무례함에 분개하고 한탄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

 

밤이 깊어 불꽃놀이를 관람한 뒤 술자리가 이어졌다. 사신들은 잔을 돌리려는 중종을 막고 큰 잔에 가득 술을 부어 나눠 마시자고 제안했다. 해산물이 안주로 나오자 공용경은 “조리를 잘 못해 입에 맞지 않는다”고 타박했다.

 

행패는 끝이 없었다. 술이 다 돌고, 공용경이 큰 글자를 써주겠다고 제안하며 이렇게 주문했다. “젊은 기녀 둘에게 촛불을 들게 하고 또 젊은 기녀 넷은 춤을 추게 하라.”

 

기녀들이 춤을 추었다. 공용경이 “선학(仙鶴)이로다!”하며 촛불을 든 기녀 머리 장식을 떼내고 얼굴을 기녀에게 들이밀었다. 그리고 큰 붓에 먹물을 적시더니 그 기녀를 향해 뿌리는 게 아닌가. 여자는 얼굴과 옷에 온통 먹물이 튀었다. 그러고는 한참 동안 허공에 붓을 놀리며 농담을 해대는 것이었다. 그때 대사헌 권예가 중종에게 이리 아뢨다. “사대는 성의 있게 해야 하지만, 저들의 소행은 미치광이 짓과 같나이다.”

 

모두가 그러했다. 중종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조상 족보를 바꿔야 하는 의무가 아니었다면 큰 사달이 났을 터이나, 중종은 “저들이 술을 권하지 않으면 나 또한 권하지 않겠다”고 참았다. 자정이 될 때까지 조선 국왕 중종과 관료들은 이 명나라 사신이 펼치는 음주 서예 ‘쑈’를 묵묵히 지켜봐야 했다.(이상 1537년 3월 14일 ‘중종실록’) 사흘 뒤 두 사신이 본국으로 돌아갔다. 태평관에 가서 이들을 만난 중종은 ‘종계변무’ 보고서를 담은 문서책을 손에 쥐여주며 이들을 환송했다.(1537년 3월 17일 ‘중종실록’)

*

화끈한 대접을 받은 그들이 조선국 소원을 들어줬는가. 들어주지 않았다. 향응 접대와 갖은 뇌물을 받은 이들이 돌아가고도 종계변무는 감감무소식이었다. 자그마치 52년이 흐른 1589년 선조 때에야 명나라에서 ‘대전회통’ 개수 작업이 이뤄졌다. 이를 성사시킨 관료 19명은 나라를 빛낸 ‘광국공신(光國功臣)’에 책봉됐다.(1589년 10월 1일 ‘선조수정실록’) 그리고 3년 뒤 임진왜란이 터졌다. 백성이 경복궁을 불태웠다. 아주 훗날 흥선대원군이 궁궐을 중건할 때까지 오래도록 경회루도 돌기둥만 서 있었다. 그사이, 아주 많은 봄날들이 갔다.

 

▲저 어스름한 달빛 아래 중종과 신하들은 중국사신 행패에 분통을 터뜨렸것다!(‘중종실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