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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전문가들의 생각15/ 허우범의 실크로드 7000㎞ 대장정 2/ (16) 우왕治水 성공 비밀 배경에 단군신화가 있었다? - (35) "좋은 것은 동쪽으로, 나쁜 것은 무조건 서쪽으로"

상림은내고향 2022. 10. 25. 19:17

중국 전문가들의 생각15/ 

◆허우범의 실크로드 7000㎞ 대장정2  - 조선일보

(16) 우왕治水 성공 비밀 배경에 단군신화가 있었다?

禹王治水는 檀君의 도움으로 가능하였다<난주(蘭州)1>

“우육면을 먹지 않으면 난주에 온 것이 아니다

 

은천을 출발한 기차는 밤새도록 달려 아침 무렵 난주에 도착한다. 난주는 해발 2000m의 황토고원에 세워진 도시여서인지 쌀쌀하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하였으니 아침식사도 하고 몸도 녹일 겸 식당을 찾는다. 가까운 곳에 우육면(牛肉麵)을 파는 식당이 보인다.

“저 식당에 가서 우육면 먹을까?
“그럼요, 난주에 와서 우육면을 먹지 않으면 난주에 온 것이 아니랍니다.

 

▲난주 우육면

 

난주 특산물은 뭐니 뭐니 해도 우육면이다. 소고기 국물에 말아주는 국수인데, 뜨거운 국물을 마시면 속이 시원하고 든든하다. 이슬람교를 믿는 회족(回族)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 그래서 이곳에서 많이 키우는 양과 소로 육수를 우려내고 소고기를 얇게 썬 편과 야채, 고추기름을 면과 함께 먹는다.

소고기는 고산지대에서 사육하는 야크(Yak)를 쓴다. 야크는 검고 긴 털을 가진 소다. 우육면은 특히 아침에 인기가 좋다. 그래서 아침이면 우육면을 먹는 중국인이 식당에 가득하다. 중국인은 우육면을 먹을 때면 삶은 계란과 야크 수육을 함께 먹는다. 삶은 계란은 면에 넣어서 국물과 같이 먹는데 이 또한 색다른 맛이다.

수육까지 같이 먹으면 그야말로 든든한 한 끼 식사가 된다. 여기에 생마늘을 반찬으로 함께 먹으면 그 맛이 천하일품인데, 마늘의 똑 쏘는 맛과 향이 쫄깃한 면과 담백한 육수와 어울려 그야말로 게 눈 감추듯 먹어치우게 된다. 난주 우육면은 중국의 대도시라면 어느 곳에서나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유명하다. 그러니 난주에 와서 우육면을 먹지 않고 가는 것은 난주를 다녀간 것이 아니다. 밀가루 음식을 좋아하는 나는 소증(素症)을 풀듯 우육면을 곱빼기로 시켜서 순식간에 먹어 치운다. 배부르게 먹고 나오는데도 뒷맛이 혀를 감싼다.


황하가 흐르는 감숙의 요충지 ‘난주’

황하가 흐르는 도시 난주는 감숙성의 성도(省都)로 정치와 경제, 행정의 중심지다. 예로부터 도읍이 될 만한 도시는 강을 끼고 있었다. 위수가 흐르는 장안, 낙수(洛水)가 흐르는 낙양, 장강이 흐르는 무한이나 남경 등이 다 그렇다. 하지만 황하가 흐르는 대도시는 난주가 유일하다. 황하가 북방민족과 경계지역에 있었던 까닭이다. 한나라 무제 때에 와서야 금성(金城)이라 불리며 도시로 발전하였고, 수나라 때 지금의 난주가 되었다. 난주는 기원전 1세기부터 실크로드로 가는 주요 길목이어서 교통의 요지이자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요충지였다.

 

▲황하 모친상

 

든든한 아침을 먹고 난주 시내를 걷는다. 황하를 따라 공원이 조성되어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여가시간을 보내고 있다. 황하가 흐르는 난주에 오면 꼭 보아야 할 석상(石像)이 있다. 황하 강변에 조성된 ‘황하모친상(黃河母親像)’이다. 부드럽고 인자한 모습의 어머니가 천진난만한 갓난아이를 배 위에서 어르며 흐뭇해하는 모습이 화강석으로 조각되어 있다.

그동안 황하는 많은 인명과 재산을 앗아갔지만, 중화문명을 일군 황하는 중국인들에게 어머니와도 같은 것이다. 그래서 자애로운 어머니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리라. 하지만 황하모친상 뒤쪽으로 거칠게 흐르는 황하를 보면 자애로운 어머니가 떠오르기보다는 무섭기만 하다. 수천 년 동안 중국인을 키워온 젖줄과도 같은 강, 황하. 그것을 알리는 황하모친상이지만 왠지 그 뜻과 실제 강의 모습이 제대로 연결이 되지 않는다. 황하모친상은 강의 흐름이 느리고 잔잔한 곳에 있어야 보다 잘 어울릴 듯하다.

황하는 중국에서 두 번째로 긴 강으로, 그 길이가 5464㎞이고 유역면적은 75 2400여㎢에 이른다. 규모로 따지면 한강의 28배가 넘는다. 황하는 그 크기만큼 무서운 강이다. 황토평원을 이리저리 깎아 물길을 바꾸기 때문이다. 긴 강이 물길을 바꾸면 인간사회는 엄청난 피해를 입는다. 중국인들은 용()을 숭배한다.

 

▲하늘에서 본 황하

 

그래서 중국인들은 황하를 곧잘 용이라 여겼다. 황하가 물길을 바꾸면 용이 화가 났다고 생각한 그들은, 황하를 잘 다스리는 것이야말로 용은 물론 자신들의 삶도 평안하게 한다고 보았다. 이렇게 중국의 고대사는 황하를 다스리는 것과 잇닿아 있었고, 황하를 잘 다스린 자들이 중국사의 주인공이 되었다. 오늘날 중국사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삼황오제(三皇五帝)의 신화와 전설도 황하를 다스려야만 살아갈 수 있는 그들의 숙명적인 삶에서 비롯된 것이다.


황하를 다스리는 자가 세상을 다스린다, ‘곤우치수 신화의 탄생’

황하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당나라 때 시인 유우석은 “1만 리 사막 길을 아홉 번 굽이돌아 출렁이는 바람타고 하늘 끝에서 온다.”고 하였다. 천산의 만년설이 녹은 청정한 물이 사막과 황토고원을 적시며 대지를 깎고 산봉우리를 돌아, 그 흘러온 시간만큼 진한 황토빛깔의 황하가 되는 것이다. 인간의 역사 이전부터 흘러온 황하 주변에 인간들이 정착하게 되었으니 중국의 역사는 바로 황하의 역사이며, 황하문명도 그 속에서 탄생한 것이다.

 

▲곤우치수신화 산해경해내경

 

빙하기 말기에 대홍수가 일어났다. 이 대홍수는 원시 인간사회에 커다란 재앙이었다, 그래서 아득한 기억이지만 동서 대륙의 민족마다 대홍수에 대한 다양한 신화와 전설을 창조해냈다. 인류 최초의 문명을 이룬 수메르 인들의 ‘대홍수 신화’, ‘성경’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 이야기, 그리고 중국신화에 나타난 ‘대우(大禹)의 치수’ 이야기는 모두 상고시대 대홍수를 다스린 이야기들이다.

중국은 황제의 신화시대 이후 요()임금의 전설시대로 접어들면서, 황하 유역에 빈번히 발생하는 대홍수를 다스려야 하는 문제에 봉착한다. 그 시대의 홍수는 어느 정도였을까? ‘상서’ ‘요전(堯典’에서는 “산과 언덕을 덮고, 넘실넘실 하늘까지 닿았다.”고 했고, 맹자도 ‘백성들이 살 곳이 없게 되어 낮은 곳에서는 나무 위에서 살고, 높은 곳에서는 동굴을 파고 살았다.’고 하였다.

‘서경’의 기록에 따르면, 상나라는 모두 5번 천도하였는데, 그 이유가 모두 황하의 대홍수 때문이다. 이러한 까닭에 홍수를 다스리고자 하는 염원과 갈망은 무리를 이끄는 지도자로서는 우선적인 일이었고, 이는 치수신화(治水神話)로 농축되어 나타난다.

중국의 대표적인 신화집인 ‘산해경(山海經)’ ‘해내경(海內經)’에는 곤우치수(
禹治水)신화가 있다. 곤이 홍수를 막기 위하여 상제(上帝)만이 가지고 있는 식양(息壤저절로 불어나는 흙)을 훔쳐 1,000리에 달하는 제방을 쌓았지만, 이것이 탄로가 나고 제방도 무너져 죽음을 당한다. 그의 아들 우는 아버지의 실패를 거울삼아 13년간의 노력 끝에 치수에 성공한다는 내용이다.

곤은 굳세고 정직하였다. 홍수를 막기 위해 9년간 전심전력으로 제방을 쌓고 물을 막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엄청난 홍수를 다스릴 수 없었다. 곤의 아들 우는 부친의 경험을 토대로 보다 발전된 방법을 연구한다. 홍수를 막을 수 없다면 길을 내어 잘 흐르게 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낸다. 그래서 제방으로 막는 한편 필요한 곳에는 물길을 내어 바다로 흘러가게 하였다. 우는 이 공적으로 대우(大禹)로 칭송받게 된다.


치수신화의 주인공 禹, ‘夏나라’의 始祖가 되다

사마천은 곤우치수 신화의 주인공인 우를 역사적 인물로 변모시킨다. ‘사기’ ‘하본기(夏本紀)’에서 우는 하나라를 건국한 시조로 거듭난다. 그가 주장한 ‘여러 자료들을 검토하여 비합리적인 요소를 제거하여 가장 그럴 듯한 것만을 골라서 본기를 저술’함으로서 신화의 역사화를 시도한 것이다.

 

▲대우치수도


중국인은 기록을 좋아한다. 문헌에 기록된 가장 오래된 신화가 곤우치수 신화인데, 그 시점은 주 왕조 초기다. 우주를 창조하였다는 반고, 인류를 창조한 여왜, 문명을 창조한 복희 신화는 후대에 기록된 것이다. 어째서 중국신화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발전하고 있을까? 이는 중국의 위정자들이 자신들의 지배를 확고히 하기 위해서 고대의 신화로부터 정통성을 부여받으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중국인들은 ‘더 오래된’ 신화를 만들고 이를 끌어내 역사화 함으로써, 그동안 용인되어 왔던 정통성을 부정하고 ‘자신들이 원하는’ 정통성을 다시 만들어낸 것이다. 곤우신화도 이처럼 새로운 정통성을 세우기 위한 도구인 것이다.

홍수를 다스려 천하를 안정시킨 우는 순()으로부터 왕권을 선양받아 하나라를 세운다. 그리고 우는 아들인 계()에게 왕권을 넘겨준다. , , 우로 이어진 선양제를 세습제로 바꾼 것이다. 이러한 전환은 제정일치 씨족사회를 벗어나 왕권이 우위를 점하게 된 것을 보여 주며, 왕조 형태의 부족국가가 탄생한 것을 암시한다. 치수에 성공한 우는 그의 업적을 찬양하는 비를 세운다. 일명 ‘우왕비’다. 호남(湖南)성 형산(衡山)의 최고봉인 구루봉에서 발견되어 일명 ‘구루비’라고도 하는데, 비문의 글자 수는 모두 77자로 많지 않다.


우왕의 치수는 단군의 도움으로 가능하였다

치수에는 과학적 지식이 필요하다. 우의 부친인 곤은 치수에 관한 한 자타가 인정한 사람이었지만 과학적 지식이 부족했다. 그렇다면 그의 뒤를 이은 아들 우는 어떻게 성공했을까? 그는 아버지 곤의 치수 방법 외에 어떤 지식을 더 갖추었을까? 그 정답은 우리가 망각한 채 뒷전에 밀어둔 ‘환단고기’ ‘단군세기’와 ‘번한세가()’에서 알 수 있다.

‘갑술 67(기원전 2267), 단군께서 태자 부루(扶婁)를 파견하여 도산(塗山)에서 우사공과 만나게 하였다. 태자가 우사공에게 오행치수(五行治水)의 방법을 전해 주었다.

‘부루 태자는 도산에 이르러 우사공에게 고하되, “나는 북극 수정(水精)의 아들이다. 그대의 왕이 나에게 청하길, 물과 땅을 다스려 백성들을 구하려 한다고 했는데 삼신상제(三神上帝)는 내가 가서 돕는 것이 옳다고 하시므로 내가 온 것이다.”라며 치수에 필요한 3가지 보물을 준다. 험준한 곳을 다녀도 위험하지 않는 천부왕인(天符王印), 물의 깊고 얕음을 측정할 수 있고 변화가 무궁무진한 신침(神針), 험요의 물을 다스리는 데 필요한 황거종(皇鉅宗)이 그것이다.

또한, ‘환단고기’ ‘고구려국 본기’에는 우왕비의 탄생과정도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사공 우가 재계하기 사흘 만에야 겨우 치수의 비결을 얻어 공을 세울 수 있었다. 이에 우는 돌을 채석하여 산의 높은 곳에 세우고 그곳에 부루 태자의 공을 새겼다.

‘환단고기’는 중국과 일본에 의해 철저하게 왜곡되고 잃어버린 우리 고대사를 복원해 줄 수 있는 몇 안 되는 귀중한 자료다. 위서(僞書)라는 주장도 있지만 중국의 사서 기록과 비교해보면 대부분의 내용이 일치한다. 이를 면면히 살펴보면 그동안 우리가 알고 배워온 우리 역사가 일 순간에 광활한 중국 대륙으로 확장된다. 그런데도 선뜻 믿기 어려운 것은 일제강점기 식민사학의 영향 때문이다. 역사는 새로운 사실을 끊임없이 발견하는 과정이다. 기록이 상대적으로 적은 고대사는 더욱 그렇다. 어제의 단정이나 속단은 오늘의 새로운 사실에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 감추거나 속인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환단고기’의 내용을 종합하면 사실관계를 좀 더 정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 , 곤의 아들인 우가 치수를 맡아 13년간 노력하였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단군조선의 단군왕검이 사자로 파견한 태자 부루에게서 오행치수법과 세 가지 보물을 전수받아 치수를 성공한 것이다. 이에 우가 치수를 기념하고 신과 같은 기술을 전수해 준 태자 부루의 공덕을 함께 칭송하기 위해 비를 세운 것이니, 그것이 곧 ‘우왕비’인 것이다.

 

▲우왕비

 

하지만 중국사 어디에도 우의 치수 성공이 단군조선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는 내용은 없다. 우리조차도 우의 치수 성공은 우가 스스로 노력해서 이룬 것으로 알고 있다. 자국의 상고사를 모르고 있으니 이런 일이 벌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요순시대의 선양은 ‘만들어진’ 평화

우리는 요순시대의 평화적 선양에 대해 누누이 들어 왔다. 공자와 제자백가, 그리고 사마천 등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인물들이 수없이 찬양하였기 때문이다. 중국의 위정자들은 이를 통치이데올로기로 활용해 왔다. 그리하여 인간사회가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낙원으로 ‘요순시대’를 선전한 것이다. 하지만 요순시대의 인간은 권력욕이 없었을까?

아니다. 요임금이 순임금에게 권력을 이양한 사건에도 권력을 향한 순임금의 의지가 깊숙이 개입되어 있다. 기록을 보면, 자발적이고 적극적으로 노력한 순은 요로부터 왕위를 선양받는다. 하지만 선양과정에서 요의 신하인 곤이 반대하고 나선다. 그러자 순이 황하치수의 실패를 빌미로 곤을 처형함으로서 정적을 제거한 것이다. 이러한 순임금의 행위는 곧 권력을 향한 욕심인 것이다.

황하치수는 요순은 물론 당시 백성들 모두의 소망이다. 우가 황하치수에 성공하자, 그들의 생활터전은 황하 중상류에서 중원 전체로 넓혀진다. 황하치수 성공이 영토 확장으로까지 이어진 것이다. 우는 치수에 성공함으로써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을 것이다. 그것은 요순시절의 좁은 생활터전에서 얻는 명성과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비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우의 명성은 곧 권력이 되었고 부친을 살해한 순을 향해 칼을 겨눌 즈음, 생명의 위급함을 느낀 순이 우에게 자리를 내준 것이다. 요순시대도 그렇거니와 순이 우에게 왕위를 물려준 것도 평화적인 선양이 아니다. 권력의 이동에 따른 피의 숙청을 두려워 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인 것이다.

이것을 마치 ‘고복격양(鼓腹擊壤)’의 평화로운 정권교체로 각색하고 인류가 도달해야할 낙원이라고 설파하니 이쯤 되면 역사를 제삼제사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공자 이래로 신고(信古:옛것을 그대로 믿음)의 필치를 더욱 단단하게 엮은 사마천에 이르기까지 모든 역사적 기록물을 ‘의고(擬古:옛것을 의심함)의 역사관’으로 다시금 살펴보는 것이 절실한 시점이다.

 

(17) 곤륜산과 天馬는 漢 武帝가 만든 작품?

漢 武帝의 河源탐색과 天馬의 의미 <난주2>

양가죽뗏목(羊皮筏子)이 흘러가는 황하


난주는 남북으로 두 개의 산을 마주보고 있다. 남쪽은 고란(皐蘭), 북쪽은 백탑(白塔)산이 다. 황하는 두 산 사이에 위치한 난주 시내를 동서로 가로지른다. 서안에서 출발한 실크로드는 난주에서 황하를 건넌다. 하서주랑의 요충지이자 서역으로 향하는 지름길과도 같은 곳이 난주인 것이다.

난주에 오면 누구나 백탑산을 오른다. 산 정상에 여러 가지 볼거리가 있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황하와 난주시내, 그리고 멀리 황토고원까지 조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백탑산으로 오르는 케이블카를 탔다. 황하를 가로질러 오르는 케이블카는 난주 시내를 흐르는 황하를 조망하기에 안성맞춤이다.

 

▲백탑산에서 본 난주 전경

 

케이블카에서 내려다본 황하는 용처럼 꿈틀거리며 흐른다. 그 위에 유람선도 떠 있고, 철교도 있어 사람들이 오고가지만 모두가 작아 보인다. 마치 용의 비늘처럼 반짝이는 물살에 언제라도 휘둘릴 것만 같다. 그런데 그 사이로 관광객을 몇 명 태운 뗏목이 허위허위 거센 물살을 헤집고 나아간다. 자칫 잘못하다간 강물에 빠질 것만 같다. 그러고 보니 뗏목도 이상하다.

“저 사람들이 탄 것은 양피파즈(羊皮筏子)예요. 양가죽에 바람을 넣어서 만든 뗏목인데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지요.

옛날에는 이러한 뗏목에 사람과 물건을 싣고 황하를 건넜는데 1t까지도 거뜬하다고 한다. 보기보다는 튼실하고 요긴한 교통수단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양피파즈를 타려면 적어도 거센 강물의 흐름을 계산에 넣어야 할 듯하다. 관광객을 태운 양피파즈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황하 물살에 떠내려가다시피 하고 있으니 말이다.

 

▲양가죽 땟목

 

“양피파즈로 강을 건너려면 2킬로미터는 내려간다고 생각해야 해요.

이제는 황하철교가 놓여 편안하게 오갈 수 있게 되었지만, 양피파즈는 옛날의 기억을 되살리는 관광 상품으로 앞으로도 오랫동안 남아있을 것이다.

백탑산에 오르니 황하와 난주 시내는 물론 저 멀리 황토고원이 한 눈에 들어온다. 산 정상에는 백탑사를 중심으로 공원이 조성되어 있는데, 대다수의 난주 시민들이 자주 찾는 명소다.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난주는 그야말로 꿈틀대는 황하를 따라 빌딩이 숲을 이루고 있다. 예부터 서역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충지인 지리적 이점을 한몫 단단히 보고 있는 것이다. 백탑산에서 황하와 난주 시내를 굽어보고 있자니 당나라 때의 시인 고적(高適)이 난주의 누각에 올라 느낀 감회가 절로 이해가 된다.

 

▲백탑산 정상의 백탑

 

북루에 올라 서쪽을 보니 맑은 하늘 가득하고北樓西望滿晴空
휘돌아 흐르는 물과 연이은 산이 그림보다 멋지다.積水連山勝畵中
우당탕 흐르는 물소리는 시위를 벗어난 화살 같고湍上急流聲若箭
성 위에 걸려 있는 새벽달은 활과 같구나.城頭殘月勢如弓

한무제가 ‘곤륜산’을 찾은 이유

한무제(漢武帝)도 황하에 관심이 많았다. 하지만 그의 관심은 치수보다는 황하의 발원지인 곤륜(崑崙)산을 찾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곤륜산은 일반적인 산이 아니라 하늘과 통하는 곳으로, 서왕모(西王母)가 살고 있는 성스러운 산이기 때문이다. 무제는 흉노에게 오랫동안 당한 치욕을 갚기 위해 흉노정벌을 계획하고 장건(張騫)을 서역으로 파견하여 대완국(大宛國:우즈베키스탄 페르가나 지역)과 맹약을 맺고 한혈마를 구해오도록 한다.

장건은 이 업무를 수행하지 못하고 흉노에 사로잡혀 있다가 13년 만에 귀국한다. 그는 한혈마를 구해오지는 못하였지만 서역에 관한 많은 정보를 무제에게 제공한다. 그중에는 황하의 발원지인 곤륜산도 포함되어 있다. 장건은 곤륜산에 사는 서왕모가 안식국(安息國:이란지역)의 서쪽으로 수천 리 지점에 있다는 소문만 가지고 돌아온다. 신화 속의 곤륜산과 서왕모는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천마가 나왔다는 악와지

 

다만, 황하의 발원지가 우전이고 그 남쪽에 옥돌이 많은 산에서 물이 흘러나오고 있음을 설명하자, 무제는 그 산을 곤륜이라 명명한다. 서왕모가 사는 곤륜산이 아닌 것을 알면서 무제는 왜 그 산을 곤륜산이라 불렀을까? 황하의 발원지와 곤륜산 그리고 서왕모는 무제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흉노는 한()을 괴롭혔다. 한은 제국의 안녕을 위하여 흉노와 굴욕적인 관계를 맺어야만 하였다. 이를 잘 알고 있던 무제는 흉노를 정벌하기 위해 칼을 갈았고, 황제에 오르자 곧바로 실천에 옮겼다. 하지만 명분 없는 전쟁은 불가한 법. 그럴듯한 명분이 필요하였다. 그래서 내세운 명분이 황하의 발원지 확인과 천마의 획득이었다.

황하는 곤륜산에서 흐르니, 중국인의 기원과도 같은 황하의 발원지인 곤륜산을 찾는 것은 중원의 지도자로서 지극히 합당한 결정이다. 흉노에게 쫓겨 간 월지를 찾아 동맹을 맺고 천마를 획득하는 일도 국가적으로 중요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사업은 모두 흉노의 영토를 지나야만 하였다. 그러니 전쟁은 필연인 것이다. 무제가 흉노를 정벌할 수 있었던 것은 축적된 경제력을 바탕으로 흉노를 능가하는 군사력을 갖출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흉노와 맞서 싸워 승리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민족정기의 근원을 찾아야 한다는 무제의 논리에 장수들과 병사들의 의기가 폭발했기 때문이다.


한무제에게 天馬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천마는 왜 필요했을까? 보병부대가 다수를 차지하던 때에, 튼튼한 몸통에 빠르고 오래달리는 말로 구성된 기병부대는 보병부대를 압도하는 최신병기였다. 그런데 그냥 말도 아니고 말 중에서도 최고라고 할 수 있는 천마로 기병부대를 갖춘다면, 제국을 유지하는 것은 물론이고 확장하는 데에도 큰 힘이 될 게 뻔하다. 이는 대완을 정벌하고 획득한 천마를 보고 지은 한무제의 ‘천마가(天馬歌)’에도 잘 나타나 있다.


천마가 오도다天馬徠
서쪽 끝從西極
사막을 건너서流沙涉
사방 오랑캐가 복종하도다九夷服
천마가 오도다天馬徠
모든 문을 열라開遠門
내 훌쩍 올라타고竦予身
곤륜으로 날아가리니 逝崑崙
천마가 오도다天馬徠
용의 짝이려니龍之媒
온 하늘을 노닐며 遊閶闔
신선이 되어보려네觀玉臺


한무제는 사방의 오랑캐를 정벌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천마를 얻어야만 하였다. 그리고 천마의 획득은 곧 하늘()로부터 사방의 오랑캐를 토벌하는 대임(大任)을 부여받는 것이기도 하다. 나아가 신선이 되고픈 염원을 밝힌다. ‘천마가’는 이 모든 것을 정당화시키기 위한 제례가(祭禮歌)인 것이다.

제국의 황제가 이루고자 하는 것은 천하제패다. 이를 드러나지 않게 감추고 성취하기 위하여 모든 것이 만들어지고 또 동원된다. 황하도, 신화도, 천마가도 천하제패를 위한 도구일 뿐이다. 이러한 황제의 뜻을 ‘한서’ ‘무제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악와수(渥洼水)에서 말이 출현하여 짐이 곧 그 말을 부렸노라. 전전긍긍, 대임을 잘 수행할 수 있을까 두렵도다. 하지만 천하를 생각하며 스스로 새롭게 하노라. ‘시경’에도 있지 않은가. “나는 듯한 4마리 수말이 끄는 전차를 타고 복종하지 않는 자 토벌하네.”라고.


神仙이 되고픈 무제, ‘天馬’를 만들다

무제는 천마 획득에 혈안이 되었다. 그 이유는 오랑캐를 무찌르기 위한 것이었지만 속내는 따로 있었다. 무제 자신이 천마를 타고 곤륜산에 가기 위함이었다. 무제는 신선이 되어 영원히 죽지 않길 염원하였다. 흉노를 무찌르고 제국을 확장시킨, 그리하여 제국의 기틀을 확고히 건설한 영원한 천자(天子)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방사(方士)들을 가까이 하였다. 곤륜산에 사는 서왕모가 불사의 약을 가지고 있다고 믿은 것도 신선이 되고픈 무제의 간절한 바람 때문이다. 무제는 한나라 황제로서 사방의 오랑캐를 정벌해야 한다는 현실적인 목표를 추구하였지만, 한편으로 천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 신선이 되어야 한다는 환상을 믿고 있었다. 그는 이 두 세계를 적절하게 연결시키는 통치술로 자신의 개인적인 소망을 추구하는 동시에 강력한 제국 건설에 매진한 것이다.

한무제가 천마를 얻었다는 악와수는 돈황 지역에 있다. 돈황 시내서 서남쪽으로 70㎞ 정도가면 남호향(南湖鄕)인데, 악와수는 이곳에서 다시 동남쪽으로 4㎞ 떨어진 곳에 있다. 인근에 수창성(壽昌城)이 있어서 ‘수창해(壽昌海)’ 또는 ‘수창택(壽昌澤)’이라고도 한다. 악와수를 보기 전에 수창성에 들렀다.

 

▲폐허가 된 수창성

 

갈대가 어지러운 곳에 ‘수창성고지(壽昌城故址)’라는 팻말이 보인다. 이 팻말이 없다면 이곳에 성이 있었는지 아무도 모를 정도다. 갈대를 헤치고 나아가니 모래뿐인 언덕이 나타난다. 언덕을 오르니 그야말로 사막평원이다. 그 사이로 언뜻언뜻 토성의 흔적이 있어서 예전에 이곳이 성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또한 얼마나 갈까. 모래바람이 서너 번 불어오면 아예 사막 속에 묻혀버릴 것이니, ‘오래도록 번창하라’고 지은 이름도 자연 앞에서는 모래알처럼 짧은 시간인 것이다. 폐허의 고성을 돌아보고 악와지로 향한다. 악와지는 과연 옛 모습이 남아있을까.

마을 골목을 지나 약간의 오르막길을 오른다. 여기저기 늪지대가 보이고 숲이 무성하다. 그야말로 오아시스다. 언덕을 오르니 조잡하게 조각된 천마상 너머로 거대한 호수가 보인다. 호수주변은 그야말로 넓디넓은 초록이다. 한눈에 보아도 천연의 목장이자 경작하기에 비옥한 땅이다. 호수 가에는 오리와 양떼들이 한가롭게 먹이를 찾고 있다. 악와수는 이곳 지역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수자원이다. 그래서 지금도 ‘황수파수고(黃水
水庫)’로 불리며 저수지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

악와수에서 천마가 나온 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악와수에서 천마가 나온 것이 되었을까. ‘한서’에 이르길, 하남성 신야현 사람인 포리장(暴利長)이 죄를 지어 돈황으로 유배를 와서 둔전을 하였는데, 악와수 강변에서 물을 마시는 야생마들 사이에서 아주 기이하게 생긴 말을 발견하고 이를 잡아 길을 들인 후 무제에게 바쳤고, 무제는 아주 흡족해하며 ‘천마’라고 불렀다고 한다.

천마에 대한 무제의 집착은 병적이었다. 특히, 신선이 되고픈 무제에게 천마는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다. 하지만 천마는 일반적인 말과는 달라야하였다. 그런 무제에게 포리장이 바친 말은 천마가 되기에 충분하였고, 악와수에서 나온 ‘신마(神馬)’로 둔갑된 것이다.


黃河도 마음먹기에 달렸다

백탑산에서 황하를 굽어보며 내려오니 유명한 중산철교(中山鐵橋) 앞이다. 중산철교는 황하에 건설된 최초의 철교다. 원래 이 자리에는 1372년인 명나라 태조 때부터 부교(浮橋)가 있었다. 그런데 1907, 청나라 정부가 물산의 수송과 교통의 편리를 위하여 독일인 기술자들을 초빙하여 이 철교를 세웠다. 당시 명칭은 ‘난주황하철교’였는데, 1942년부터는 중국 혁명의 선도자인 쑨원(孫文)의 호를 따서 중산철교로 바꿔 부른다.

 

▲황하철교인 중산교

 

철교는 사람과 자전거만 오갈 수 있게 하여 한껏 여유롭다. 황하의 물살을 내려다보며 철교를 따라 걷자니 갑자기 삼장법사 현장이 떠오른다. 장안을 떠나 인도로 향한 승려들은 모두 난주에서 황하를 건너야 하는데, 현장이 황하를 건넌 곳이 이곳 철교 부근이기 때문이다. 그때도 지금처럼 물살이 거셌을 텐데 꽤나 고생하지 않았을까? 관광객들이 양가죽뗏목을 타고 래프팅을 하며 즐거워하는 모습 위로 긴장된 얼굴로 황하를 건넜을 현장의 모습이 겹쳐진다. 그런데 현장은 오히려 나의 그러한 생각이 걱정되었는지 부처님 같은 미소로 시 한 수를 읊어준다.


그 누가 말했나, 황하는 넓다고誰謂河廣
마음먹으면 갈대 하나로도 건널 수 있는 것을一葦枯之
그 누가 말했나, 황하는 길다고誰謂河遠

마음먹으면 발돋움으로도 바라볼 수 있는 것을跂予望之

 

(18) 문화대혁명 와중에서 살아난 후진타오 전 주석 비파호(琵琶湖) 만들다

비파호를 가다 <난주 3>

병령사(炳靈寺) 석굴 가는 길

 

난주에서 실크로드의 역사를 살펴봄에 있어서 병령사(炳靈寺) 석굴을 빼놓을 수 없다. 실크로드는 동서양의 교역뿐 아니라 다양한 종교도 전파되었는데 불교가 제일 번성하였다. 그래서 불심이 강한 스님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보다 자세히 알고 싶은 욕심에 천축(天竺:인도)으로 향하였다.

병령사 석굴은 이런 구법승(求法僧)들이 난주에서 황하를 건너 서역으로 향할 때, 심신을 안정시키고 불심을 강화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병령사 석굴로 가려면 배를 타야 한다. 황하로 인한 토사유출을 막기 위해 댐을 만들었는데, 그 댐으로 인해 생긴 커다란 호수를 건너가야 하기 때문이다.

 

병령사 가는 길의 기암괴석들

 

차에서 내려 선착장으로 올라가니 유가협(劉家峽)댐이 보인다. 이 댐은 조하(洮河)와 황하가 만나는 지점에 세워진 것으로 높이가 147m, 제방 길이가 840m에 이른다. 장강에 삼협댐이 세워지기 전까지는 중국 최대의 댐이었다. 중국의 4대 벼루중 하나인 조하벼루는 이곳 조하의 바닥에 있는 돌로 만든 것이다.

병령사 석굴은 유가협댐에서 약 50㎞ 거리다. 옛날 실크로드를 오가던 사람들은 난주를 거쳐 병령사 석굴에서 숙박한 뒤 서쪽의 사막으로 향하였다. 일반 배시간은 멀었기에 5인용 보트를 탔다. 학생 3명이 같이 탔는데, 난주에 있는 친구를 만나기 위해 북경에서 두 명의 친구가 왔단다. 먼 곳의 친구를 만나기 위해 몇 달치 용돈을 절약하고 밤기차에 기대어 왔다는 북경의 친구들. 멀리서 온 벗들과 함께 병령사 석굴로 향하는 난주의 친구. “벗이 있어 멀리서 찾아오면 그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라는 공자님의 말씀을 떠올리게 할 만큼 참으로 아름다운 우정이다.

 

▲백령사모

 

바다 같은 琵琶湖

보트는 창공으로 포말을 흩뿌리며 질주한다. 물새들이 깜짝 놀라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날아오르고 기기묘묘한 절벽은 모델인 양 온갖 자태를 뽐낸다. 비파호(琵琶湖)라고 불리는 인공호수는 말이 호수지 바다처럼 넓다. 그도 그럴 것이 최대 폭이 65㎞ 에 이르고, 평균수심은 100m에 이르니 바다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보트운전자는 유가협댐을 후진타오 전 주석이 설계하고 만든 것이라고 한다. 유가협댐은 1958년에 중국과 구 소련의 공동사업으로 추진되었다. 그러나 1960년에 둘 사이가 나빠져 러시아인들이 철수하면서 잠시 중단된다. 당시 국내 최대의 수력발전소 건설사업이 중단되는 것은 커다란 손실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10년간 엄청난 인원과 노력을 동원해 완성했는데, 이때 후진타오 전 주석이 일정 부분 역할을 했던 것이다. 후진타오는 명문대학인 청화대학교에서 수력발전을 전공했고, 이를 토대로 댐건설에 열중하며 문화대혁명의 회오리를 피해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바다같은 비파호


댐 건설로 생긴 비파호는 많은 마을을 수몰시켰다. 유가협댐 아래에는 많은 사람들이 정든 고향을 떠나야 했던 아픈 역사가 잠겨있다. 댐으로 인해 호롱불 대신 전깃불이 들어오면 누군가는 행복하겠지만, 누군가는 고향을 버려야 하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아픔을 끌어안아야 한다. 천지개벽이란 이런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오늘날에는 이런 천지개벽이 여기저기서 빠르게 일어난다. 인간은 문명의 이기(利器)를 통해 편리함을 누리지만, 한편으로는 인간사회를 더 황폐화시킬 뿐이다. 푸른 호수를 바라보니 천 수백 년 전 구법승의 모습이 보인다. 조랑말과 봇짐을 지고 평화롭게 걸어가는 모습. 법현도 현장도 혜초도 보인다. 마을 백성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스님들의 말씀에 감복하며 합장하는 모습. 그야말로 하늘과 땅, 사람들이 어울린 한 폭의 낙원화(樂園畵).

지나가는 보트의 물살에 낙원의 모습은 사라지고 내가 탄 배는 한 시간을 달려 병령사 입구에 우리 일행을 내려놓는다. 광대한 호수는 어느덧 병풍처럼 둘러친 기암괴석을 품은 채 발길을 재촉한다. 입구로 들어서자 절벽에 병령사임을 알리는 누각이 보인다. 옛날 실크로드를 오가는 대상(隊商)들은 이곳에서 황하를 건넜다고 한다.


병령사 산허리의 봉우리는冰靈寺上山如削
측백 숲 사이 용이 서린 듯한데 柏樹龍蟠點翠微
황하 포말 걸친 다리는 오죽 절경이겠는가況有冰橋最奇絶
은빛 무지개 곧게 뻗은 하늘 오르는 사다리로세 銀虹一道似天梯


명나라 때의 어느 시인은 겨울의 병령사 모습을 이처럼 읊었다. 당시에는 석굴입구에도 물이 많이 흘렀던 것이다. 겨울의 병령사를 상상하며 비탈진 계곡을 오르니, 한여름 무더위도 조금은 사라지는 듯하다.


부서지고 덧칠하고, 실크로드 길목의 十萬佛

‘병령’이란 말은 ‘향파병령(香巴炳靈)’의 줄임말로 티베트어를 한자로 음역(音譯)한 것이다. ‘십만불(十萬佛)’이란 뜻인데, 일반적으로 천불동(千佛洞)이나 만불동(萬佛洞)처럼 불상이 많다는 의미로 쓰인다. 이 석굴은 길을 따라 모두 세 부분으로 나뉘는데, 43개의 석굴과 152개의 감실(龕室)이 있다. 그중 184개의 석굴과 감실이 기슭을 오르는 초입에 몰려있다.

 

▲병령사 현암대불


석굴이 언제부터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인 169호굴의 ‘서진건흥원년(西秦建弘元年)’이란 명문(銘文)으로 미뤄보아, 적어도 420년부터 시작된 것은 확실하다. 이후 불상과 벽화는 북위, 북주, , 당시대에 활발히 조성되었는데 대부분이 수당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하지만 토번(吐藩)이 이 지역을 차지한 763년 이후부터 병령사 석굴은 쇠락의 길을 걷는다. 그 뒤 원나라 때에는 이곳에 라마교가 득세했는데, 그때 상당수의 벽화를 덧그리면서 라마적인 성격의 소상(塑像)들도 많이 조성되었다. 청나라 때에는 잦은 민족분규로 불상과 벽화가 많이 파손되었다.

169
호굴은 병령사 석굴 가운데 가장 오래된 데다 불상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이다. 특히, 결가부좌한 불상이나 입상(立像) 등은 간다라 불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중국이 서진(西秦)시대 이전부터 인도와 활발하게 교류했음을 알려준다. 452, 북위(北魏)의 제5대 황제인 문성제(文成帝)가 불교부흥운동을 일으키면서 융성하게 되었는데, 7대 황제인 효문제(孝文帝)가 더욱 장려하면서 이곳 석굴도 크게 번성한 것이다.

병령사 석굴은 이 석굴을 대표하는 171호굴의 현암대불(縣岩大佛)을 중심으로 조성되어 있는데, 이곳에 함께 있던 와불상(臥佛像)은 댐건설로 인해 반대편으로 옮겨져 있다. 이 거대한 현암 좌불상(座佛像)은 당나라 때 조성되었는데 높이가 27m. 상반신은 천연의 돌기둥을 이용해 만들어졌고, 하반신은 찰흙으로 조성되어 있다.

이곳 석굴은 사암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조각하기 쉬울 뿐만 아니라 점착력도 좋아서 많은 불상이 만들어졌다. 다양한 석굴들을 감상한 뒤 옮겨 놓은 와불상을 보기 위해 반대편에 이르니, 현암좌불을 중심으로 병령사의 석굴군이 한눈에 들어온다. 지금 보아도 웅장함이 돋보이는데 옛날 실크로드 대상들과 구법승이 오가던 전성기에는 얼마나 화려하고 웅대했을까. 오색찬란한 벽화와 단청의 전각들, 그리고 황금빛 불상들이 뿜어내는 광채가 어우러져 병령사 계곡은 그야말로 극락세계였으리라.


25
년 전 중국의 自問, ‘하상(河殤)

유가협댐을 벗어나 다시 난주 시내로 돌아온다. 난주 시내는 여전히 뿌옇고 황하는 어제처럼 거칠게 흐른다. 난주를 출발하기에 앞서 한 번 더 황하 주위를 돌아본다.


그대는 아는가
하늘 아래 황하가 몇 십 구비를 돌아 흘러가는지.
돌고 도는 구비마다
몇 십 척의 배가 있는지.
수 십 척 배 위에는
또 얼마의 삿대가 드리워 있는지.
돌고 도는 구비마다
또 몇 십 명의 사공이 노를 젓고 있는지를….

 

▲하상의 내용

 

25년 전, 중국의 중앙TV는 ‘중국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엄숙한 주제의 6부작 ‘하상(河殤)’을 방영하였다. “중국의 치부를 드러냈다”는 비판과 함께 중앙정치국의 제재를 받을 정도로 “중국인의 정신을 뒤흔드는 것”이었다. 하상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어둡지만 분명하였다. 수천 년 동안 이어온 황하문명은 여러 번 외세의 충격을 받았지만, 결코 멸망한 적이 없다. 이처럼 강대한 문명의 동화역량을 잘 알고 있는 우리이기에, 우리는 새로운 문명의 에너지를 끊임없이 보충해야만 한다. 그리고 외친다.

“용의 후예들아! 황하가 우리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일찍이 우리 선조에게 다 주어버렸다. 우리 선조가 창조한 문명을 황하가 다시 낳을 수 없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황하는 1만 리를 가르고 마침내 바다로 흘러든다. 20세기 말, 그리고 21세기 개혁의 거센 바람이 눈앞에 불어 닥치고 있으니, 우리는 장차 어떠한 용기와 담력과 식견 그리고 반성의식을 준비해야 하는가?

서구를 능가하는 새로운 문명을 만들어 유구한 역사를 이어가기 위한 중국인의 비장한 각오. 이것이 ‘하상’의 목적이다. 그리고 25년이 지난 오늘, 중국은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부상하였다. 비장한 각오가 성과를 거둔 것이다. 여기에 자신감을 얻은 그들은 가장 중국적인 것으로 서구문명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새로운 이념을 창출하려 한다.

공자적 유교주의에 입각한 중화중심주의가 그것이다. 전 세계에 공자학원을 설립하고 지원하는 것이 그 단초다. 나아가 현 중국 땅에서 명멸했던 여러 국가를 자국의 역사에 포함시키려는 것도, 전 세계를 중화제국주의의 영향 아래 두고픈 소망의 우선적 조치다. 하지만 이 시대는 주종 관계가 아니라 동반자 관계를 통해서만 문명을 주도하고 선도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인가.

중국인의 근원이자 정신과도 같은 황하. 그래서 어느 나라의 강보다도 흙빛 짙은 황하. 황하가 너무도 탁하기 때문에, 100년을 기다려도 맑아질 수 없다는 뜻의 ‘백년하청(百年河淸)’이란 말이 생겨났다. 이로부터 중국인들은 가능성이 없는 일을 기다릴 때 백년하청이란 말을 쓴다. 25년 전 중국인들이 스스로의 반성에서 시작한 노력이 황하처럼 혼탁해져 초심을 잃어버리고 산으로 오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자의적이고 편의적인 역사왜곡은 백년하청을 넘어 천년하청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유가협댐

 

그러나 중요한 것은 21세기는 중세 봉건시대가 아니라는 점이다. 통치자가 시대를 잘못 판단하고 정책을 구사하면 국가의 존망이 빠르게 결정되는 시대이다. 다국적 민주주의의 힘이 대세인 시대이기 때문이다. 중국은 분명 문명대국이 될 것이다. 그러나 중국이 새롭게 창조한 문명이 인류에게 오랫동안 사랑받으려면 오랑캐를 제압하여 복속시키겠다는 봉건적 잔재를 뇌리에서 씻어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진짜 황하[]에 빠져 일찌감치 몰락[]하는 끔직한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황하의 물길이 거세진다. 뒷물이 앞 물을 밀어내는 속도가 점점 빨라진다. 생각도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그러면 우리는 어떠한가? 중국이 목적달성을 위해 거침없이 질주하는 동안, 우리는 아직도 조선시대의 행태를 답습하고 있지는 않는가? 그 치욕의 역사를 향해 치달리고 있지는 않는가? 25년 전 중국인들이 물었던 질문을 우리는 어느 때가 되어서야 물을 것인가? 세계의 흐름은 황하의 물길처럼 하루가 다르게 거세지는데, 우리는 작고 비좁은 땅에서 아귀다툼만 하고 있을 것인가.

‘다이내믹 코리아’는 좋은 말이 아니다. 이해타산에 멱살잡이나 하는 난장판을 가리는 홍보문구일 뿐이다. 국가 백년대계는커녕 10년도 생각하지 않는 우리 사회를 낑낑대며 걸어가는 우리들도 정녕 부끄러울 뿐이다. 그러니 황하의 거친 물길 옆에서 간담이 서늘해지고 온몸이 자지러짐을 느끼는 것이다. 황하문명을 창조한 중국도 스스로를 걱정하며 쉬지 않고 정진하는데, 우리는 한강의 기적에 만족하는 양 자만의 늪에서 헤어날 줄 모르고 있으니 답답하기만 하다.

황하의 물길이 무섭게 뒤섞이며 튀어 오른다. 금방이라도 삼킬 듯한 기세다. 그 황하 위에서 나지막이 읊조리는 노래가 황톳물이 되어 내 가슴에 들이친다.


굽이치는 황하
오천 년을 넘고 중원을 건너
용의 포말 흩뿌리며 오르려는데,
봉황은 벽오동 위에서
달콤한 꿈에 졸고 있는가.
창공은 이미 높고 햇살은 따가운데
언제 잠에서 깰 것인가.
삼천 깃털 하나로 펼쳐
, 언제야 날아오를 것인가.

 

(19) 실크로드 따라 新羅까지 전파된 '天馬思想' 실크로드 종착점은 경주?

유목민족의 기마전술과 천마사상의 전파<무위1>

중국 완행열차의 밤풍경

 

난주에서 무위(武威)로 이동하는 밤기차를 탄다. 중국은 땅이 넓어서 기차노선이 발달해 있다. 어느 역에서나 많은 사람들이 캐리어를 들고 기차를 기다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시민들이 저렴하고 편안한, 무엇보다 안전한 철도를 선호하기 때문이다. 난주에서 무위까지는 276㎞로 중국에서는 그야말로 가까운 거리다. 시간도 여유롭다. 밤기차의 낭만도 느껴볼 요량으로 우리의 완행열차에 해당하는 보통열차를 탔다.

 

▲무위의 사장인 마답비연상

 

열차 안은 사람들로 북적인다. 기차가 얼마를 달려왔는지 바닥은 음식물을 먹고 버린 쓰레기들로 지저분하다. 3명씩 앉는 자리이건만 누워 있는 사람들로 인해 서서 가야 할 판이다. 가장 싼 표를 끊어 자면서 가려는 요량인데, 본인은 좋겠지만 다른 사람에겐 피해가 아닐 수 없다. 앞에 사람이 서 있어도 모른 척 잠자는 시늉을 한다.

같이 앉자고 해도 못 들은 척한다. 흔들어 깨우면 언성을 높인다. 막무가내로 다른 곳으로 가란다. 지정 좌석이 아니니 어쩌겠는가. 몇 칸을 이동해 겨우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하지만 그 칸의 풍경도 비슷하다. 특히 위구르족인 듯한 일가족 4명은 3칸을 차지하고 떠든다. 이야기를 하려 들면 싸울 듯한 기세다. 목청을 돋우고 삿대질에 발길질을 연발한다. 가득이나 시끄러운 기차 안이 그야말로 난장판이다. 안하무인에 방자하기까지 하다.

한족이 지배하는 대륙에서 소수민족이 살아가는 방법인가. 아니면 그들에게 눌린 원한이 기차 안에서 드러나는 것인가. ‘좋은 게 좋은 것’이라고 그냥 넘기려고 하지만 쉽지 않다. 상황이 이러니 밤기차의 낭만은 산산조각이 나고 잠시 눈 붙이기도 힘들게 되었다. 4시간 거리가 10시간을 가는 것만 같다. 하지만 중국의 보통열차에서 느끼는 낭만은 이런 것이다. 나만 홀로 특쾌열차에서나 있음직한 고급스런 낭만을 상상한 것이다.


天馬의 도시 ‘무위’

난주에서 황하를 넘어 서북쪽으로 길을 잡으면 해발고도 3,000미터의 붉은 산들이 늘어선 오초령(烏梢嶺)이 나타난다. 오초령을 넘으면 본격적으로 하서주랑(河西走廊)이 시작된다. 하서주랑은 이곳에서부터 병풍처럼 늘어선 기련산맥(祁連山脈)을 따라 서쪽으로 옥문관(玉門關)까지 약 900㎞에 이르는데, 폭이 몇 ㎞에서 100㎞에 이르는 좁고 긴 구간이다.

 

▲하서주랑의 기련산맥

 

무위(武威)라는 지명은 한나라 때 생긴 것이다. 이곳으로 파견된 곽거병이 흉노를 고비사막으로 몰아내자, 한무제는 그에게 ‘무공군위(武功軍威)’라는 군기(軍旗)를 하사하였다. 이를 줄여 ‘무위(武威)’라고 부른 것이 현재의 지명이 되었다. 무위는 장액과 더불어 ‘금장액(金張掖), 은무위(銀武威)’로 불린다. 두 도시 모두 지리적으로 중요한 곳이기에 붙여진 별칭이다.

무위는 서역으로 나가는 실크로드 교역의 첫 도시이자 장액, 주천, 돈황을 연결하는 군사적 요충지이다. 즉 장안에서 출발한 실크로드 상인들이나 흉노 토벌을 위해 출정하는 병사와 군마가 휴식과 전열을 가다듬는 도시다. 또한, 서역을 왕래하는 승려들과 기련산맥 일대에 살고 있는 소수민족들이 함께 어울리는 오아시스 도시이기도 하다.

무위 시내로 들어서니 도시를 상징하는 천마상(天馬像)이 날아오를 듯한 기세다. 중국이 관광 상품으로까지 사용하고 있는 ‘마답비연상(馬踏飛燕像)’이다. 마답비연상이 출토된 뇌대한묘(雷臺漢墓)를 찾았다. 뇌대라는 이름은 명나라 때 건설된 뇌조관(雷祖觀)이라는 도교사원에서 비롯되었다. 그런데 이 사원은 옛날부터 내려온 고묘(古墓)의 봉토를 기초로 하여 만들어졌다. 이 봉토 밑에서 한나라 때의 장군묘가 발견되었는데, 묘 발굴과정에서 중국이 자랑하는 최고의 보물인 동분마상(銅奔馬像)이 출토된 것이다. 그런데 공식적인 발굴이 아닌 특별한 사업을 진행하던 와중에 발굴되었으니, 그 과정 또한 국보급이라 할 수 있다.

 

▲동분마가 발견된 뇌대한묘


중국의 관광로고 ‘마답비연(馬踏飛燕)’의 탄생

1969 9, 중국공산당은 전쟁이나 흉년 등의 재해를 미리 준비하고 인민을 이롭게 하자는 ‘비전(備戰), 비황(備荒), 위인민(爲人民)’의 구호 아래, 전쟁에 대비한 지하도 파기 운동이 벌어졌다. 때문에 많은 유적이 파괴되었지만, 역사적으로 오래된 무덤들이 이 운동을 통해 발굴되었다. 유명한 장사의 마왕퇴한묘도 이때 발견된 것이다.

뇌대한묘도 농민공이 호미로 땅을 파다가 발견한 것인데, 동분마를 비롯하여 231건의 문화재가 세상에 알려졌다. 뇌대한묘도 대부분의 오래된 무덤들과 마찬가지로 공식적으로 알려지기 전에 이미 두 번이나 도굴을 당하였다. 그래도 동분마는 도굴되지 않았는데, 이는 금으로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뇌대한묘의 동분마

 

동분마는 높이 34.5, 길이 45㎝의 조그마한 동상이다. 그런데 그 형상은 가히 예술적이다. 말이 날아가는 제비의 등에 오른쪽 뒷발을 딛고 고개는 왼쪽으로 약간 돌린 것이 최고의 속도로 달리는 모습이다. 빠르기로 자신 있는 제비 역시 놀란 듯 고개를 돌려 말의 모습을 보고 있다. 하늘을 빠르게 나는 제비를 올라탄 말은 곧 하늘을 나는 천마(天馬)를 의미한다. 중국 근대의 저명한 사학자인 곽말약(郭沫若)은 이 말의 형상을 보고 ‘마답비연’이라는 이름을 붙여 준다. 이후 동분마는 마답비연으로 불리게 된다.


유목민 기마전술의 중국 도입

중국인들은 고대부터 말을 숭상했다. 어디 중국뿐이겠는가. 동서양을 막론하고 산업혁명 이전까지 말은 군사․경제․문화의 척도로서 국가의 번영과 직결되는 핵심이었다. 우수한 말의 소유 여부가 곧 제국의 건설과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중국도 일찌감치 주나라 때부터 말의 중요성을 깨닫고 말의 확보와 유지관리를 위해 많은 직책을 두었다. 중국에 기마전술이 도입된 것은 전국(戰國)시대 조()나라 무령왕(武靈王) 때인 기원전 295년경이다.

조나라는 인접한 유목민족들로부터 기마전술을 배웠다. 기마전술의 도입은 전국시대의 군사작전은 물론 외교에도 중요한 변화를 가져온다. 소진(蘇秦)과 장의(張儀) 같은 유세가(遊說家)가 밀려나고 명장(名將)들이 전면에 나서게 된다. ‘전국책(戰國策)’을 보면, 무령왕은 호적(胡狄)의 이점인 승마전술과 호복을 도입하여 국방을 튼튼히 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숙부를 비롯한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친다. 천하의 중심인 중화가 오랑캐인 이적(夷狄)의 습속을 따를 수 없다는 이유다. 이에 무령왕은 기마의 필요성과 호복의 실용성을 도입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무릇 하은주(夏殷周) 삼대를 살펴보면 시대마다 의복이 달랐어도 천하를 평정하였고, 춘추시대 오패(五覇)의 나라들이 그 법도가 달랐어도 정치가 잘 이루어졌소. 지식이 있는 자들은 가르침을 항상 새롭게 하나 무지한 자들은 하나의 가르침에 매이고, 현명한 자들은 풍속을 이용할 줄 아는 반면, 어리석은 자들은 풍속에 구속당하는 법이오. (중략) 의복이 기이하면 마음이 음란해진다고 하는데 그러면 이상한 옷을 입는 오()나 월()같은 나라에서는 성인군자가 나올 수 없단 말이요? 속담에도 이르길, 책에 쓰인 대로만 수레를 몰면 말의 능력을 완전히 알 수 없고, 옛 법만 따르다가는 시대의 변천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없다고 하였소.

이때부터 중국은 기마전술을 도입하고 말을 타게 된다. 기마전술을 도입한 중국은 승마와 사육기술을 발전시켜 “종묘에는 털이 같은 것을 쓰고, 군대에는 힘이 강한 것을 쓰며, 사냥에는 빠른 것을 쓴다.”라는 기록을 남겼다. 이로 미루어볼 때 빠르면 진한 시기에 승마기술이 도입되었음을 알 수 있다.

기마전술은 부국강병을 위한 초석이기도 하였지만, 황제 개인의 신적인 능력을 보여주는 수단으로도 필요하였다. , 천자의 아들인 황제가 하늘의 명에 따라 백성을 교화시키면, 하늘은 이를 잊지 않고 신마(神馬)나 천마(天馬)와 같은 상스러운 징조를 보여 준다는 것이다. 이러한 징조는 왕권강화를 위한 필수조건이었다.


동서양의 천마사상

중국인들에게 신마는 어떤 존재인가? 중국인들에게 말은 곧 용()이며 수신(水神)과 관련된 것이다. 그것은 신마의 출발이 “황하에서 도()가 나오고 낙수에서 서()가 나왔다.”라는 하도낙서(河圖洛書)의 고사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서한시대 학자이자 공자의 11대손인 공안국(孔安國)은 하도(河圖)에 대해 설명하기를, ‘복희씨가 천하를 다스릴 때 용마(龍馬)가 황하에서 나왔는데, 그 문양을 따라서 팔괘를 그렸다'고 하였다. 이때 용마는 신비로운 동물인 신마를 의미하는 것인데, 천하가 평안하게 다스려질 때 하늘이 감응하여 내려주는 동물이다. 이러한 동물의 출현은 곧 왕권강화에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하도낙서

 

이러한 신마사상은 한나라 때 강화되는데, 그 이면에는 무엇보다 흉노와의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 그들이 타는 말보다 더 강하고 빠른 말이 절실히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당시 우수한 말은 최신병기였다. 장건이 한무제의 명을 받고 대원국을 향한 것도 그곳에서 생산되는 한혈마를 구하고자 한 것이니, 당시 명마에 대한 애착은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천마 사상은 중국에서 시작된 것은 아니다. 고대 그리스,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인디아, 아르메니아 등 유라시아 대륙 전체에 걸쳐 널리 분포한다. 우리가 익히 들어 알고 있는 그리스 신화의 날개달린 말인 페가수스는 천마의 전형과도 같다. 바빌로니아 신화에 따르면, 태양은 두 마리의 준마가 끄는 마차에 이끌려 동문에서 서문으로 움직인다고 한다.

태양은 쉼 없이 빠르게 달리는 백마에 의한 것이라는 페르시아 신화도 있고, 태양의 신 수야(Surya) 7마리의 황금빛 말이 끄는 수레를 타고 천공(天空)을 날아다닌다는 인디아의 신화도 있다. 이로 미뤄볼 때, 천마 사상은 서역에서 동방으로 전래된 것이다. 그리고 이는 동쪽의 끝인 신라에까지 전해진다.

“이에 높은 곳에 올라 남쪽을 바라보니 양산 밑 계정(鷄井) 곁에 이상한 기운이 전광처럼 땅에 비치는데 흰 말 한 마리가 꿇어앉아 절하는 형상을 하고 있었다. 그곳을 찾아가 살펴보니 붉은 알 한 개가 있는데 말이 사람을 보고는 길게 울다가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그 알을 깨어보니 사내아이가 나왔는데 모양이 단정하고 아름다웠다. 놀랍고 기이하게 여겨 그 아이를 동천(東泉)에서 목욕시켰다. 몸에서 광채가 나고 새와 짐승이 따라 춤추며 천지가 진동하고 해와 달이 청명해지므로 그 일로 인하여 그를 혁거세왕(赫居世王)이라고 하였다.


‘天馬行空’, 유목민족 천마사상의 新羅 전파

일연의 ‘삼국유사’에 기록된 위의 내용은 신라인들도 천마사상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게 해준다. 고려 때 이색(李穡)의 ‘증보동국문헌비교’에 의하면, 우리나라에 자생하는 말은 국마(國馬) 또는 향마(鄕馬)라고 부르는 3()이하의 말과 북쪽에서 들여온 호마(胡馬)의 두 종류가 있었다. 그런데 국마는 나귀와 같아서 양마(良馬)로는 사용할 수 없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호마를 들여온 것이다. 만주지역을 장악한 고조선은 유목기마민족과 접촉이 빈번했던 까닭에 양마를 수입하여 기마군단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기마군단은 한무제가 5만 대군으로 침략했을 때에도
1년간 대항하며 선전하는 발판이 되기도 하였다. 한나라와의 휴전을 위해 5,000필의 말을 주었다는 기록을 보더라도, 당시 고조선은 이미 우수한 양마를 많이 사육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부여와 고구려도 거란이나 말갈 등의 유목민족들을 통해 양마를 수입하여 강력한 기마군단을 거느렸다.

 

▲경주 천마총에서 발견된 천마도장니

 

서역으로부터 전래된 양마인 한혈마는 목숙(蓿)을 먹는다. 이 목초는 한혈마와 함께 대완국으로부터 전해졌는데, 중국과 고구려를 통해 신라에도 전해져 중앙부서인 내성(內省) 밑에 이를 관장하는 부서를 4곳이나 둘 정도로 국가적으로 관리하였다. 신라도 고구려의 도움으로 북방의 초원민족과 교류하면서 천마인 한혈마를 수입하여 사육에 심혈을 기울였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우리 민족도 일찌감치 한혈마 같은 양마를 수입하여 이민족으로부터 국가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1973
, 경주 황남동의 신라 고분에서 천마도장니(天馬圖障泥)가 발견되었다. 일명 천마도라고 부르는 이 유물은 자작나무 껍질에 하얀 천마가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는 그림이 그려진 것이다. 신라의 유물은 회화자료가 희귀한데 이 유물이 5세기의 신라 미술품인 까닭에 국보(207)로까지 지정되었다.

구름 위로 힘차게 내달리는 천마도를 일컬어 ‘천마행공(天馬行空)’이라고 하는데, 이곳 무위에서 발견된 동분마나 신라의 천마총에서 발견된 천마도나 모두 같은 형태다. 좋은 말이 국가의 군사력과 경제력을 좌우하는 시대였기에, 당시에는 나라마다 양마의 수입과 사육에 혈안이 되었으리라. 동분마나 천마도는 이처럼 고대 민족들이 중요시했던 천마숭배사상을 잘 보여 준다.

적석목곽분인 천마총은 신라 22대 지증왕의 능묘로 추정되는데, 금관(金冠)과 금모(金帽) 등 황금 유물이 많이 나왔다. 적석목곽분이나 황금은 모두 기마 유목민족의 문화다. 특히 천마도가 그려진 자작나무껍질은 기마민족들이 숭상하는 것으로, 그곳에 천마를 그린 것은 유목민족의 오랜 문화적 습성이 반영된 것이다.

더구나 천마의 몸에 그려진 초승달 무늬는 북방의 스키타이 유목민족이 주로 사용한 문양이다. 황금 역시 마찬가지다. 이로 미루어볼 때, 신라의 왕족은 기마 유목민족의 혈통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기마전술은 실크로드를 따라 천마사상을 잉태하며 중국을 거쳐 한반도의 신라에까지 전래된 것이다.

 

(20) 신라 김씨 조상은 흉노 휴도왕 태자 김일제였다

흉노왕 선우는 하늘의 아들이자 위대한 지도자 <무위2>

몽골고원의 북아시아 초원지대는 해발 1000m 이상의 고지대가 비교적 평탄하게 펼쳐져 있다. 텡게리(騰格里), 바단지린(巴丹吉林), 오로도스 사막 외에도 유목하기에 적당한 목장과 삼림이 이어져 있다. 그리고 남쪽에는 음산산맥(陰山山脈)이 있어 유목민의 활동에 천연울타리가 되어 준다. 이런 까닭으로 흉노를 비롯한 선비, 거란 등의 기마민족들이 이곳에서 창궐하였다.

음산산맥 북쪽이 유목문화의 근거지라면 그 남쪽은 농경문화의 근거지다. 그런데 음산산맥을 경계로 북쪽의 기후는 변화가 심해 식량수급에 어려움이 많았다. 이 과정에서 유목민족과 농경민족은 필연적으로 충돌하였는데, 대부분 유목민의 공격으로 싸움이 벌어졌다.

흉노는 한때 음산산맥 북쪽의 광대한 지역에 제국을 건설하였다. 전성기의 흉노는 한족 국가보다 3배나 넓은 영토를 다스렸다. 중국은 한나라 무제 이전까지 흉노에게 해마다 엄청나게 많은 조공을 바치며 굴욕적인 평화를 유지하였다. 한무제는 이런 굴욕에서 벗어나려고 즉위하자마자 흉노를 공략했으며, 위청과 곽거병 같은 장군들의 노력으로 결국 하서주랑에서 흉노를 몰아낸다.

흉노의 왕을 선우(單于)라고 부르는데, 이는 ‘탱리고도 선우(撑犁孤塗單于)’의 줄인 말이다. ‘탱리’는 하늘이고 ‘고도’는 아들을 의미하는 것이니, 탱리고도는 결국 ‘하늘의 아들이자 위대한 지도자’라는 뜻이다. 흉노는 드넓은 제국을 경영하기 위해 좌현왕과 우현왕, 좌곡왕과 우곡려왕, 혼야왕과 휴도왕을 두어 각각의 영역을 나누어 다스렸다. 하서주랑은 혼야왕(渾邪王)과 휴도왕(休屠王)이 다스리던 지역이었는데, 지금의 무위 일대는 휴도왕의 관할이었다.


한 무제의 철썩 같은 ‘김일제’ 신임

기원전 121년 여름. 곽거병 장군이 이끄는 한나라 군대는 기련산 일대를 공략하여 혼야왕과 휴도왕에게 엄청난 타격을 입힌다. 32000명을 사살하고 흉노 왕족을 포함한 2500여 명을 포로로 잡은 것이다. 흉노의 선우가 책임을 묻자 혼야왕과 휴도왕은 한나라에 투항하기로 한다. 하지만 투항하기 전에 휴도왕이 이에 동조하지 않자, 혼야왕이 휴도왕의 진영을 급습하여 휴도왕을 살해하고 4만여명의 흉노족을 이끌고 곽거병에게 투항한다.

이때 휴도왕의 태자인 일제(
磾)와 동생 윤()이 어머니와 함께 한나라로 끌려간다. 포로가 된 두 왕자는 궁정의 말을 돌보는 일을 맡았는데, 어느 날 무제가 연회를 베풀며 궁정의 말들을 사열하는 과정에서 일제를 발탁한다. 그리고 그가 흉노 출신으로 제천금인(祭天金人금가면을 쓰고 하늘에 제사지내는 사람)을 하였기에 김씨 성을 하사한다. 이때부터 휴도왕의 아들 일제는 김일제(金日磾)로 불리게 된다.

김일제에 대한 무제의 신임은 두터웠다. 그리하여 부마도위(駙馬都尉), 광록대부(光祿大夫)를 제수하고, 자신의 경호까지 맡겼다. 많은 신하들이 오랑캐 출신을 신임하는 것에 대하여 불만을 터뜨렸으나 무제는 괘념치 않았다. 그러던 중, 시중인 망하라(莽何羅)가 무제의 침실에 침입하여 무제를 살해하려는 것을 김일제가 격투 끝에 체포한다. 이 일로 무제의 신임은 더욱 커졌고 신하들도 그를 폄하하지 못하였다. 무제는 김일제를 자신의 딸과 혼인까지 시키려고 했으나 김일제는 겸손히 사양한다. 임종을 앞둔 무제는 곽거병의 동생 곽광과 김일제를 부른다.

“내가 죽거든 막내아들을 세우고 그대는 주공(周公)의 일을 하라.
“신은 김일제보다 못합니다.
“신은 외국인이요, 곽광보다 못합니다.


김일제, 무릉의 배장묘에 안치된 유일한 외국인

무제는 곽광을 대사마대장군(大司馬大將軍), 김일제를 거기장군(車騎將軍)에 임명하고, 어린 황제(소제)를 보필하라는 유조(遺詔)를 남긴다. 아울러 김일제를 제후국의 왕인 투후()에 봉한다. 투후가 다스린 지역은 지금의 산동, 섬서, 화북성 일대로 매우 넓다. 무제로부터 대단한 신임을 얻은 김일제이기에 그가 죽은 후에도 위청과 곽거병처럼 무제의 묘인 무릉(茂陵)에 배장(陪葬)되었다.

 

▲서안 무릉에 있는 김일제 묘

 

그러나 무릉의 배장묘인 김일제묘는 그야말로 초라하다. 수많은 관광객이 찾는 화려한 곽거병묘, 그 옆에 우뚝한 위청묘와는 완전 딴판이다. 묘는 가꾸지 않아서 풀만 울창하다. 묘비석이 없으면 이곳이 김일제의 묘인지조차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다. 묘비석 앞으로는 자그마한 밭이 있으니 누군가 관리부실을 틈타서 농사를 짓고 있는 것이리라. 다 같은 무릉의 배장묘인데 왜 김일제묘만 천대를 받는 것일까.

그것은 중국인의 입장에서 볼 때면 흉노출신의 외국인일 뿐, 아무런 의미 없는 묘이기 때문이다. 찾아오는 사람도 없는 묘 앞에서 상념에 빠진다. 새 한 마리가 묘비석 위에 앉는다. 역사란 현재 살고 있는 자들과 관련되지 않으면 언제나 쓸쓸한 폐허뿐인 것임을 알려주고 날아간다.

김일제 후손들은 대대로 투후를 계승한다. 그러던 중, 서한 말 왕망(王莽)이 신()을 건설하면서 전성기를 맞는다. 왕망은 서한의 마지막 황제인 원제의 황후인 왕황후 동생의 아들로 김일제의 증손자인 당()의 이모부였다. 그러므로 왕망이 신을 건국할 때 투후인 김씨 일가가 많은 공헌을 한다. 신은 건국하자마자 많은 개혁을 단행한다. 하지만 당시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조치로 호족들의 반발에 부딪혀 개국한 지 15년 만에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에게 패망하고 유수는 한나라를 부활시킨다.


김일제 후손들의 한반도 이동

왕망이 패배하자 김일제의 후손들은 엄청난 회오리에 말려든다. 대대로 세습되던 투후가 끊어짐은 물론 가문의 멸문지화를 면하기 위해서도 멀리 피신해야만 했다. 대부분은 그들의 옛 터전으로 도주하여 성을 왕()씨로 바꾸어 살았다. 그런데 한 갈래는 한반도로 들어와 신라와 가야국을 건설하였다고 한다. 김일제의 5대손인 성한왕(星漢王)이 신라김씨의 시조인 김알지가 되고, 김일제의 동생 윤의 5대손인 탕()이 가야김씨의 시조인 김수로가 되었다는 것이다.

김일제에서 비롯된 신라김씨의 내력은 ‘문무대왕릉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신라 30대 문무왕(文武王
․661681)은 삼국통일의 대업을 완수한 왕이다. 강대국 신라를 완성한 문무왕은 자신의 위대한 치적과 함께 신라에 대한 찬미, 신라김씨의 내력, 부친인 태종무열왕의 치적 등을 적었다. 그중 주목되는 것이 신라김씨의 내력이다.

 

▲문무대왕비 조각

 

‘신라 선조들의 신령스러운 근원은 먼 곳으로부터 계승되어 온 화관지후(火官之后:순임금의 관직명), 그 바탕을 창성하게 하여 높은 짜임이 융성하였다. (뿌리와) 가지의 이어짐이 비로소 생겨 영이한 투후는 하늘에 제사지낼 아들로 태어났다. 7대를 전하니 (거기서 출자)한 바다.’ 我新羅之先君靈源自 繼昌基於火官之后, 峻構方降, 由是克(紹宗)枝載生, 英異侯祭天之胤, 傳七葉而(所自出).

이 비문은 조선시대 정조 20(1796), 경주에서 밭을 갈던 농부가 발견하였다. 당시 경주부윤이던 홍양호(洪良浩)가 탁본하여 지식인들에게 공개함으로써 알려졌다. 비문 발견 당시, 글자의 반 이상이 마모되어 읽을 수 없었으나 전체적인 윤곽은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비문을 눈여겨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문무왕의 후손으로 금석문의 대가인 추사 김정희도 언급하지 않았다.

정조 때 북학파(北學派) 학자로 ‘발해고’를 지어 남북국시대론을 주창한 유득공(柳得恭)이 김일제가 계림(鷄林)의 김씨인가라는 의문에 전문(全文)을 보지 못하여 증명하지 못하겠다고 하였다. 그 후 이 비석은 돌멩이 신세가 되어 일제강점기 때 동네 아낙들의 빨래대로 사용되다가 일본인들에 의해 두 동강이 나는 수모를 겪었다. 현재 이 비석은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글자가 새겨진 위쪽은 뭉개져버리고, 글자가 없는 아래쪽만 있다. 그나마 탁본이 남아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경주부윤 홍양호께 오직 감사드릴 뿐이다.


신라김씨의 족보를 찾아서

학계의 반대 논리도 만만치 않아 김일제의 신라김씨설은 정설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지만, 역사기행을 하는 나로서는 매우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 비문의 내용이 어느 정도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학계의 의견이 분분한 까닭은 무엇일까? 문제는 ‘7대’의 해석에 있는 것 같다. 김일제의 5대 후손인 성한왕이 신라김씨의 시조라면서 그 후 7대의 연결고리가 설명되어 있지 않으니 김일제의 신라김씨 시조설이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무위 인민광장의 김일제 석상

 

아마도 이 비문에는 문무왕 선대의 기록이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깨어져나간 비문에 완벽하게 정리되어 있었을 터이지만, 지금으로서는 남아 있는 단어를 가지고 추론할 수밖에 없다. 그중 첫 번째가 ‘화관지후(火官之后)’다. 그리고 진백(秦伯), 파 경진씨(派鯨津氏), 투후(), 가 주몽(駕朱蒙), 성한왕(星漢王) 등이다.

화관지후는 기원전 2300년의 순임금을 의미한다. 마지막은 문무왕 자신의 대() 680년이다. 이렇게 볼 때, 7대’는 김일제로부터의 7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 듯하다. 그렇다면 7대의 해석은 자연스러워진다. 화관지후로부터 문무왕까지 약 3,000년 동안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었던 시기를 일컫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금문학의 권위자인 재야사학자 소남자 김재섭(金載燮)은 ‘금문속의 고조선’에서 다음과 같이 구분하였다.

 

▲무위 남성문광장의 김일제 소개문

 

1) 화관지후(火官之后) : 기원전 2300년 전
2)
진백(秦伯) : 기원전 650년대
3)
파 경진씨(派鯨津氏) : 기원전 200년대
4)
투후(
) : 기원전 100년대
5)
가 주몽(駕朱蒙) : 기원전 50년대
6)
성한왕(星漢王) : 서기 20년대
7)
문무왕(文武王) : 서기 660년대

소남자에 따르면 ‘진백’은 진시황제의 20대 선조이자 시황제가 천하통일의 대업을 달성할 수 있도록 기반을 닦은 진나라 목공(穆公)이다. 춘추시대 진()나라의 9대 군주인 목공은 춘추 5(五覇)의 한 사람이다. 동으로는 하서(河西)에서 서쪽으로는 서융(西戎)을 공략하여 사방 1,000리의 땅을 제패하여 진나라의 기반을 닦은 인물이다.

 

▲무위 남성문광장의 김일제 소개문2

 

‘파 경진씨’는 진나라가 망하자 그 일족이 한반도의 경주나 밀양으로 파견한 휴도왕의 세력으로 해석하고 있다. ‘투후’는 이미 살펴본 김일제다. ‘가 주몽’은 휴도왕의 망명세력 중 일부가 고구려를 통해 신라로 들어가 미리 자리를 잡는 과정이라 해석하고 있다. ‘성한왕’은 김일제의 5대손으로 신라김씨의 시조인 김알지이다.

참으로 기막힌 해석이 아닐 수 없다. 우리 민족의 기원이 드넓은 대륙을 차지한 기마민족이었음을 확신하는 필자에게는 논리적으로도 어느 정도 타당성이 보인다. 특히 장례형식인 적석목곽분, 황금과 말을 숭배하는 금관과 천마도 등은 모두 기마 유목민족들의 고고학적 특징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 지역에서 많이 출토된 오수전(五銖錢)은 왕망의 신나라 때 만들어진 화폐인데, 이로 미루어 보아도 김씨 일가들이 도피할 때 가져온 것임을 알 수 있다.


중국의 金文, 동이족의 비밀을 푸는 열쇠

소남자의 이러한 해석은 중국의 금문학자 낙빈기(駱賓基)의 ‘금문신고(金文新攷)’를 기초로 한 것이다. 낙빈기는 평생의 연구결과로 이 책을 썼는데, 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그의 저서로 인해 한국의 상고사가 보다 명쾌하게 해석되고 있다. 중국이 그토록 자랑하는 황제도 동이족의 시조인 신농씨의 사위였다는 부분에 이르면, 중국인은 물론 우리도 깜짝 놀라게 된다.

 

▲금문신고 표지

 

중국인은 자신들의 시조를 욕되게 했다는 점에서 그럴 터이지만 우리는 어째서 놀랄까? 우리가 어릴 때부터 배워온 역사와 상반되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중국과 일제에 의해 철저하게 왜곡된 우리의 상고사를 그대로 전수하고 전수받는 사이에 사상과 논지가 고착된 결과이다. 우리 상고사에 대한 의문을 품고 이를 파헤쳐 보려는 노력 없이 오히려 이에 안주하여 온 것이니 어찌 우리의 역사가 바로설 수 있으며, 역사관 또한 올곧을 수 있겠는가.

무위시는 휴도왕의 본거지답게 그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시 중심인 남성문(南城門) 광장에는 무위시의 역사와 출신인물들을 소개해 놓았는데 이곳에 김일제의 내력이 적혀 있다. 인민공원에는 김일제의 석상도 있다. 흉노의 태자로서 한무제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은 점을 널리 알려 이곳에 거주하는 소수민족들을 통치하는 데 활용하는 게 아닐까? 김일제의 내력과 말을 돌보는 모습의 석상을 둘러보는데, 어린 아이 두 녀석이 마치 자신들의 형 인양 석상 앞에서 장난을 친다.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모습에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바라보고 있노라니 김일제 석상도 살아서 아이들의 재롱을 한껏 받아주고 있는 것만 같다
.

(21) 왜 이곳 서역에 신라 '에밀레종'이 있는 것일까? 만들어진 시기도 전설까지 똑같다니 필시

서역에서 신라의 '에밀레종'을 만나다 <무위3>

오전 시간도 여유로워 무위 시가지도 둘러볼 겸 길을 걷는다. 도시가 전반적으로 낡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중국의 서부개발이 활기차다고 알고 있는데 이곳은 그렇지 못하다. 감숙성은 예로부터 발전이 가장 느리다. 왜일까? 그것은 모택동이 중심이 되어 내전을 벌이던 대장정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무위 시가지

 

모택동, “감숙성은 50년간 발전시키지 말라”

1935년에 일어난 대장정은 공산당의 홍군(紅軍)이 장개석이 이끄는 국민당 군과 전투를 해가며 서북쪽으로 피신하여 견고한 방어선을 구축하고 재기를 다진 사건으로 중화인민공화국 탄생의 밑거름이 되었다. 이 대장정의 과정에서 감숙성은 국민당 군과 연결되어 홍군에게 많은 피해를 입혔다. 장개석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은 모택동은 이를 좌시할 수 없어서 감숙성을 50년간 발전시키지 말라고 하였다.

60
년이 지난 지금도 그의 말은 생생하게 살아있는 것일까? 위구르민족이 사는 신장성은 사막의 열기가 무색할 정도로 서부개발 열기가 한창인데, 이곳은 대충 길만 형식적으로 닦아 놓은 듯하다. 시내의 중심이 그러하니 골목길은 어떠할까. 도로가 우둘투둘한 것이 비포장 길이다.

대운사(大雲寺)로 향한다. 대운사는 516국 시기인 363, 전량(前涼) 때 창건된 고찰로 무위뿐만 아니라 하서4군 중에서도 중요한 사찰이다. 이 절은 원래 굉장사(宏臧寺)라고 불렸는데, 9대 왕 장천석(張天錫)이 현몽을 꾼 뒤에 궁성이 있던 곳에 세웠다고 한다. 한 도사가 장천석에게 나타나 절과 탑을 세우라고 조언했다는 꿈의 내용은 이렇다.

 

▲대운사 종루


“대운사 터는 옛날 아쇼카왕 때 불사리 탑을 세웠던 자리이니, 이곳에 절과 탑을 세우면 국가를 잘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왕의 꿈은 현몽이 아니었다. 그가 전량의 마지막 왕이 되었기 때문이다. 독실한 신심이 꿈에서까지 발원하였지만, 결국은 사찰을 짓기 위하여 궁성을 허물었으니 국운의 기운도 스러질 수밖에 없으리라.


대운사의 액막이용 향불

굉장사는 비운을 안은 채 유지되어 오다가 당나라 때 여황제 무측천이 권력을 잡았던 690년에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무측천은 ‘대운경(大雲經)’에 나오는 “미륵불이 여황제로 환생하니 천하가 모두 복종하리라(彌勒下生作女皇 威伏天下)”라는 구절을 따라 스스로 미륵불임을 자임하며 전국 각주에 대운사를 짓고 대운경을 암송하게 하였다. 무위의 굉장사도 이때 대운사로 개칭하게 된다. 당 현종 때에는 안사의 난이 일어나자 위구르의 도움을 받아 난을 평정한다. 그러고 나서 위구르인들이 믿던 마니교의 회당 건립을 허락하게 되는데, 마니교의 사원을 대운광명사(大雲光明寺), 마니사(摩尼寺) 또는 파사사(波斯寺)라고 불렀다. 대운사는 이때 마니교의 사원으로도 활용된다.

대운사에 들어서자마자 향냄새가 코를 찌른다. 향불을 사르는 향의 연기가 사찰 안에 가득하다. 법회가 있는 것도 아니고, 경축일도 아닌데 무슨 일일까? 궁금하여 이곳저곳 살펴보니 화신전(火神殿)이란 곳에서 피우는 향이 원인이다. 이곳에서는 사람들이 저마다 병을 고치거나 액막이를 하기 위해 향을 태우고 부적을 사른다.

 

▲화신전 앞의 액막이


그런데 그 모습이 참으로 안타깝다. 무릎을 꿇은 사람에게 붉은 천을 씌우고 부채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을 때린다. 부적과 향에 불을 붙여 온몸을 찜질한다. 흡사 우리의 1960~1970년대 상황을 보는 듯하다. 병마와 악귀를 쫒는 행위라지만 너무도 시대에 뒤떨어진 미신행위다. 고도문명시대임에도 이런 행위가 일어나는 것은 인간의 끝없는 나약함 때문일까? 아니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을 이용하는 간사한 자들의 농간일까? 어찌 보면 이런 상황은 어디서나 볼 수 있다. 종교적 치유를 빙자해 탐욕을 부리는 곳이라면 방식에 차이가 있을 뿐, 오늘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것에 다름 아닌 것이다.

불교에서의 향은 부처님께 바치는 6가지 공양물 가운데 하나다. 자신을 태워 그 향기로 주변을 맑게 하는 해탈을 의미한다. 향을 피우는 것은 자신을 희생하는 공덕을 상징하는데, 이 때문에 이 향을 해탈향(解脫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런 행위를 통해 부처님의 가르침이 세상에 널리 퍼진다는 것인데, 대운사의 향불은 부처님의 가르침과는 정반대의 향내만 가득한 것 같아 보는 이의 마음은 씁쓸하기만 하다.


대운사에서 신라 에밀레종의 기원을 만나다

대운사는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지 않고, 절을 찾은 사람들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잊은 듯하다. 그래도 대운사의 위상을 한껏 높여 주는 명물이 있는데 바로 대운사 범종이다. 범종을 보기 위해 종루에 오른다. 듬직한 범종이 더운 바람을 맞으며 무위시내를 굽어보고 있다. 이 종은 당나라 때 만든 것이다. 커다란 규모에 소리도 웅장할뿐더러 소박하고 고풍스러운 멋을 자아내는데, 수준 높은 문양까지 갖춘 덕에 중국 6대 명종(名鐘)의 하나로 꼽힌다.

 

▲대운사 신종


청나라 때 만든 ‘대운사중수비’에 이르길, “모양이 기이하고 소리가 우렁찬 것이 구리 같기도 하고, 철 같기도 하고, 돌 같기도 하고, 금 같기도 한 것이 그것들 가운데에서 만들어졌으니 진정 신물(神物)이다.”라고 하였다. 그래서일까? 이곳 사람들은 대운사종을 ‘신종(神鐘)’으로 여긴다. 범종을 주조한다는 것은 당시 최고의 합금술과 높은 예술적 감각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범종은 일반인들에게 신비로운 물건으로 인식되기에 알맞은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뛰어난 기술을 가졌다 하더라도 커다란 종을 만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주조 과정의 어려움을 반영한 여러 전설이 생겨났다. 대운사 범종에도 특별한 전설이 담겨 있다.

“옛날 어느 황제가 자신의 덕을 알리고 태평성세임을 상징하고자 종을 만들어 세우라고 명을 내렸다. 이 명을 받은 양주 태수는 양주가 풍족한 고을임을 과시하고자 커다란 종을 만들기로 하고 세금과 모금을 함께 거뒀다. 가뭄에 허덕이는 주민들은 온갖 수탈에 시달리기만 하였다. 가난한 주종기술자는 아내에게 자식을 맡기고 종을 만드는 일에 열중하였다.

아내는 먹을 것이 없어 우는 아이를 달래지 못하고 있던 차에, 한 시주승이 찾아와 시주를 하라고 떼를 쓰자, 화가 난 김에 ‘아이라도 가져가라!’고 내뱉는다. 결국 이 말이 화근이 되어 시주승은 아이를 데려간다. 기일이 지나도 종이 완성되지 않자 주종기술자들이 차례로 죽임을 당하게 된다. 태수의 불호령은 극에 달하고 시주승의 말을 들은 태수는 곧장 아이를 노()에 넣어 종을 만들라고 명한다. 드디어 종이 완성되어 타종을 하는데 그 소리가 ‘엄마(娘呀)~엄마~’ 하고 울려 퍼졌다.

우리나라 경주에 있는 신라 성덕대왕신종인 ‘에밀레종’의 전설과 너무나도 흡사하다. 아니 똑같다. 우리만의 고유한 전설이 담긴 에밀레종이라고 들었는데, 이역만리에서 이토록 동일한 전설을 듣다니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경주 에밀레종


‘실크로드’ 동서양 문명 소통의 길

무위는 실크로드 통로인 하서주랑의 요충지다. 각종 교역과 문물의 교류가 이곳에서 집결되었는데, 서역불교의 전래에 있어서도 무위는 주요 거점이었다. 대운사종은 무측천(684~704)시기에 제작되었고 에밀레종은 771년에 만들어졌다. 두 종이 만들어진 70~80년 간의 시기는 당과 신라의 불교 교류가 활발하던 때이다. 특히, 인도의 승려들을 통해 체계를 갖춘 밀교가 중국에 직접 전해지면서 빠르게 확산되어 가던 시기다.

하서주랑의 거점도시인 무위에는 밀교사원들이 세워지고 성황리에 전파되었는데, 인도의 고승으로 중국에 밀교의 황금시대를 연 불공(不空)도 무위의 개원사(開元寺)에 머물면서 밀교의 전파에 힘을 쏟았다.

신라는 경덕왕 때인 8세기 후반에 당나라의 문물과 제도를 받아들이는 데 매우 적극적이었는데, 이때 신라의 승려들이 대거 당으로 유학길에 올랐다. 불공의 제자인 혜초(慧超)외에도 의림(義林), 현초(玄超), 혜일(惠日) 등 많은 학승들이 이곳에서 밀교를 배우고 귀국하였는데, 이때 대운사종의 전설도 함께 전해졌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신라의 성덕왕부터 경덕왕 때에는 전제왕권의 강화로 인해 권력에서 소외된 진골세력의 저항이 지속되어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시기였다. 그러다가 8세의 어린 혜공왕이 즉위한 765년을 기점으로 무열왕계의 권력은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하여 767, 김양상의 반란으로 무열왕계의 정권은 끝이 난다. 이 같은 정치적 혼란기와 민심의 동요가 전설로 녹아들어가 한국적인 것으로 토착화된 것이다.

신기하고 기이한 마음으로 대운사종을 둘러본다. 고색창연함을 드러낸 채 비바람에는 아랑곳없이 그 자리 그대로 의젓하다. 하지만 이 종은 1400여 년 전, 동쪽의 작은 나라 신라에까지 문물을 전해준 실크로드의 보물이다. 대운사종을 어루만지며 경주의 에밀레종을 떠올린다. 그리고 1000년이 넘는 기간, 이역만리 떨어져 있던 두 종이 만나는 날을 상상해 본다. 실크로드가 과거의 길만이 아니고 현재와 미래를 움직이는 살아있는 길이라는 게 느껴진다. 순간, 대운사 범종의 당좌(撞座)를 향해 심목(心木)을 힘차게 휘두른다. 에밀레종이 듣고 화답할 수 있도록 말이다.

청나라 때의 학자인 단영은(段永恩)도 이곳 종루에 올라 신종을 보았다. 그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대운사 동쪽의 위태로운 종루白尺危樓巨刹東
매서운 칼바람소리 텅 빈 하늘로 흩뿌리는데高歌倚劍嘯長空.
삼봉탑의 기세는 하늘까지 솟아오르고三峰塔
聳天表
한밤을 알리는 종소리만 낭랑히 울려 퍼지네.午夜鐘聲出梵宮.
설산 남쪽은 예부터 흰 눈이 내려앉았고雪積山南終古白
북쪽의 사막에는 석양이 붉게 지네.沙流漠北夕陽紅.
친구와 술 마시는 이 밤이 좋으니與君把酒酬佳節
이 또한 당대의 영웅이 아니런가.到此誰爲一世雄


인간의 역사만큼 무수히 많은 영웅호걸들이 세상을 호령하였건만 그들 역시 시대를 뛰어넘지는 못했으니 대운사의 종소리만 못한 것인가. 시인이 노래한 것처럼 인생이란 그저 저무는 석양을 바라보며 막걸리 한 잔으로 시름을 달래는 것인가. 사막 너머 만년설산으로 울려 퍼지는 종소리를 들으며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인생의 의미를 깨우쳐야 하는 것이리라
.

(22) 문화대혁명, "공씨네 둘째 놈(孔老二)'이라며 공자를 반동의 근원 낙인찍고 공자 유적 훼손

공자의 부활 <무위4>

성터는 간 곳 없고 옥수수만 무성


흉노는 유목민족이기에 성을 쌓지 않았다. 그러나 휴도왕은 성을 구축하기도 하였다. 무위시 양주구(凉州區) 사패진(四覇鎭) 삼차촌(三岔村)에 있는 개장성(蓋藏城)이 그것이다. 이 성은 무위시에 건설된 최초의 성으로 고장성(姑藏城)으로 불리기도 한다. 건축 당시는 남북 7, 동서 3리의 크기였다.

북문이 가장 중요했는데, 북문을 나서면 몽골고원과 직결되는 교통로가 있었다. 지금은 그 성터만 남아있다. 성터라도 보기 위해 길을 나선다. 동네 어귀에 이르자 길이 비좁고 공사 중이어서 자동차로는 갈 수가 없다. 삼차소학교 앞에 있다는 말에 학교를 찾는데, 금방이라던 학교는 30분을 가도 보이지 않는다. 다시 길을 물어 걷기를 20. 드디어 삼차소학교가 보인다.

삼차소학교 앞에 도착하니, ‘삼차성고지(三岔城故址)’라는 표지석만 덩그렇다. 주위 사람들에게 성의 흔적을 물었더니, 학교와 밭으로 변했다고 한다. 밭은 옥수수가 빼곡하다. 옥수수 밭으로 들어가면 성의 흔적이 남아 있다는 말에 미로처럼 좁은 길을 따라 들어간다. 옥수수밭 사이로 끊어진 둔덕이 드문드문 보인다.

 

▲학교와 옥수수밭으로 변한 삼차성터

 

농민들이 비료 대신으로 밭에 뿌리는 까닭에 이 마저도 얼마 지나지 않으면 사라질 것이다. 결국 학교 앞의 표지석만 이곳이 무위시에 세워진 최초의 성터였음을 알려줄 뿐이다. 문화대혁명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 휴도왕, 김일제, 한무제 및 관우를 모시는 사당이 있었는데 홍위병에 의해 파괴되어 버렸다고 한다. 문화대혁명이 중국 전 지역의 역사와 문화유산을 얼마나 많이 파괴하였는지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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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운동과 문화대혁명, “공씨네 둘째 놈인 孔子” 루쉰, 공자 비판 선봉

문화대혁명은 모택동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최대 피해자는 공자다. 중국 전 지역에서 공자를 모시는 사당이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중국을 돌아보면 아직도 공자를 모시는 문묘는 많다. 그렇게 공자유적을 파괴했음에도 공자의 유적이 지켜지고 있으니 중국은 가히 공자의 나라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공자의 고향인 산동성 곡부는 물론, 대도시마다 공자를 모시며 그의 가르침을 배우던 사당인 문묘(文廟)가 있다. 무위에도 공자의 문묘가 있다. 명나라 때인 1439년에 세워진 사당으로 중국을 통틀어 3대 문묘에 든다. 문묘는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유학원(儒學院)이다. 이곳의 문묘도 양주(凉州)지역을 대표하는 공자사상의 배움터였다.

 

▲공자를 모신 대성전

 

문묘에 들어서니 무위의 문묘임을 알리려는 듯 시의 상징인 동분마상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문묘는 어느 곳이나 건물의 배치가 일정하다. 유학원(), 공묘(孔廟), 문창궁(文昌宫)이 조성되어 있고, 중간에 대성전(大成殿)을 중심으로 반지(), 상원교(狀元橋), 영성문(欞星門) 등의 건축물이 정연하게 잘 보존되어 있다.

공자는 제자백가 가운데 하나인 유가(儒家)의 시조다. 공자로부터 시작된 유가는 중국 역사를 관통하는 사상이자 위정자들의 통치술이었다.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공자의 학설은 우리나라에서 더욱 견고하게 발전하였는데, 명·청 교체기에 공자의 덕치와 인의를 실현할 수 있는 나라는 조선밖에 없다며 스스로 ‘소중화(小中華)’를 자처할 정도였다.

하지만 공자의 명성은 1919년에 일어난 5·4운동 시기에 무너진다. 반제반봉건의 기치를 내건 이 운동은 ‘공자타도’로 이어졌다. 이 시기를 이끈 문학가 루쉰은 그의 작품 ‘광인일기(狂人日記)’를 통하여 봉건적인 가족제도, 유교사회의 위선과 비인간성을 고발하며 공자를 비판하였다. 공자타도는 문화대혁명 시기에도 계속된다.

1966
년부터 10년간 진행된 문화대혁명 시기의 공자는 ‘비림비공(批林批孔)’운동으로 타도대상이 된다. 이 운동은 정적(政敵)인 임표(林彪)와 공자의 사상을 ‘반동의 근원’으로 낙인찍어 공격한 것이다. 특히, 공자의 유교문화에 대해서는 ‘봉건적인 종법사상과 제도’라고 규정하였다. 그리하여 중국 전 지역에서 공자의 유적은 심하게 훼손되고, 공자 역시 ‘공씨네 둘째 놈(孔老二)’으로 폄하되고 만다.


공자, 대국굴기를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다

30여년이 지난 지금, 공자는 다시 부활하고 있다. 중국은 급속한 경제성장을 바탕으로 세계의 강대국이 되기 위한 소프트 파워 전략을 구상한다. 국제사회로부터 인정받는 대국이 되기 위해서는 군사력과 경제력이 아닌 문화와 외교력의 확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후진타오(胡錦濤) 전 주석도 이를 반영하여 이미 2007년에 “중국은 문화의 소프트 파워를 강화해야 한다.”라고 역설한 바 있다.

 

▲공자를 칭송하는 각종 편액들


중국의 소프트 파워 전략은 곧 공자의 부활을 의미한다. 이는 바로 중화문명의 재발견과 활용인데, 중국의 리더들은 유가사상이 서구의 시스템을 대체할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다. 그리하여 문화대혁명과 경제개발 우선주의에 의해 철저히 무시되었던 공자의 유가사상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대신하여 중국의 새로운 통치철학으로 부상하고 있다.

나아가 중국의 리더들은 이를 세계화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장쩌민의 덕치론(德治論), 후진타오의 이인위본(以人爲本), 화해사회(和諧社會), 평화발전(平和發展) 등은 바로 공자의 유가사상을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한 전략인 것이다.

한편, 내부적으로는 공산당의 일당지배만으로 더 이상 중국식 사회주의를 발전시킬 수 없다는 고민에 빠진 것이다. 이러한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서 전통사상의 현대화와 이를 통한 새로운 가치관의 필요성을 절감한 것이다. 나아가 민족적인 자존심과 자신감의 고취, 배금주의와 향락주의의 타파, 사회주의시장경제의 틀 속에서 사회주의현대화 건설에 기여하는 도덕체계의 건립이 시급해진 것이다.

그리하여 이들의 고민을 해결해줄 수 있는 인물로 ‘공자’가 논의되고, 공자를 통해 안으로는 개혁개방에 따른 젊은 세대의 가치관과 이념을 재정립하고, 밖으로는 대국굴기를 위한 인류 정신문명의 커다란 공헌자로 ‘공자’를 부활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공자학원’, 공자사상의 전령사

공자의 국가통치방식은 한마디로 가부장제(家父長制)의 확장이다. 즉 인의(仁義)와 덕치(德治)를 내세우며 충()과 경()을 요구하는 것이다. 공자가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라고 말했듯이, ‘통치자는 인의와 덕으로 통치해야 하며, 신하는 충성으로서 보필해야 하며, 아버지는 덕을 베푸는 가장이어야 하고, 자식은 공경하며 겸손해야 하는 것’이다.

 

▲문묘의 공자상

 

그러면 21세기 지구촌도 평화와 조화로운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는 것이다. 중국은 이런 공자의 사상을 전파하기 위해 전 세계에 공자학원(孔子學院)을 설립하고 있다.

공자학원은 세계적인 중국어 학습 열기에 부응하여 지구촌 모든 국가에 중화문명을 전파하는 문화센터다. 2004년부터 시작된 공자학원 건설은 그해 11, 서울을 필두로 2013년 현재 전 세계에 400여개를 건설하고 매년 240억원의 예산을 지원하고 있다. 실로 무서운 속도다.


공자, 아바타에 길을 내주다

2010년 벽두. 중국은 드디어 그들이 만세사표(萬歲師表)라며 자랑하는 공자를 부활시킨다. 공자의 삶과 사상을 영화로 제작, 인민들에게 공자의 화려한 부활을 알리기로 한 것이다. 나아가 공자를 문화콘텐츠로 만들어 전 세계인에게 관심을 갖게 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생각지도 않았던 암초를 만난다. 세계적인 화제를 불러일으킨 영화 ‘아바타’가 중국에서도 선풍적인 반응을 일으키며 대작 ‘공자’를 찬밥으로 만든 것이다.

 

▲영화 아바타 포스터

 

공자의 화려한 부활을 기대했던 중국정부는 당황했다. 언론통제나 2D가 아닌 3D만의 상영을 허락하는 등 여러 수단으로 아바타의 상영을 억제하였지만 소용없었다. 급기야는 행정명령으로 아바타를 강제 종영시키고 공자를 상영키로 한다. 이러한 사실이 인터넷을 통해 알려지자 네티즌들은 국가의 부당한 행정조치에 항의하여 공자관람거부 운동을 펼친다.

공자 역을 맡은 배우 주윤발은 자신이 맡은 공자를 보면서도 울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라는 실언까지 한다. 중국정부의 기대와는 다르게 영화 공자는 연일 최저기록을 갱신하며 씁쓸하게 주저앉고 말았다.

이처럼 중국정부가 문화콘텐츠의 대표 격인 영화를 통해 공자의 화려한 부활을 고대하였지만,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온 이유는 무엇일까. “공자는 중국의 문화이므로 무엇과 비교하더라도 뒤지게 하지 못할 것”이라는 자만심과, 영화 곳곳에서 비춰지는 다큐멘터리식의 애국주의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중국 영화의 근본적인 문제점이기도 하다.

 

▲영화 공자 포스터

 

왜냐하면 대부분의 영화는 ‘주선율(主旋律)’에 충실해야 하기 때문이다. 주선율이란 덩샤오핑이 제시한 이후, 중국정부의 문화지침과도 같은 것으로 ‘애국주의, 전체주의, 사회주의 정신의 고양 등을 통해 중국 공산당의 정책과, 사회주의 윤리의식을 강조하며 국가와 가족 등 집단주의의 고취’에 일조하는 것을 의미한다. 영화 공자는 중국정부가 21세기 대국굴기의 목적으로 내세우는 인물이니 더더욱 주선율에 충실해야하는 것이다.


진정한 공자의 가르침을 깨달아야

중국정부는 ‘공자’라는 인물을 통하여 사회주의국가라는 이미지를 벗고 21세기의 문화대국의 이미지 창출에 노력하지만, 이러한 제도적 사상적 관념에 얽매여 실패하는 것이다. 이는 중국이 중화주의적 사고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증표이기도 하다.

오직 공산당과 지도부를 위한 이론적 토대 구축과 정치경제, 문화사상적인 충돌 발생 시 애국심의 고취를 통한 민족적인 단결, 그리고 이러한 ‘중국적’ 정치체계의 세계화에 공자를 활용하고 있는 것이니, 공자가 어찌 부활하고 싶겠는가. 춘추전국시대보다 더 복잡하고 정신없는 21세기에 깨어나서 지배이데올로기의 정착과 확장에 기여하느니 차라리 조용히 잠자는 것이 백번 나을 것이다.

하지만 중국정부는 반드시 공자를 깨워 일으킬 것이다. 국제사회에서의 위상이 높아질수록 더욱 재촉할 것이다. 공자의 인의(仁義)와 덕치(德治)사상을 내세워 세계의 통치이념을 중화에서 배우도록 할 것이다. 그리고 이는 전 세계에 퍼져있는 공자학원의 파워와 정치경제적인 역학관계에 의해 부분적으로 수용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중국은 7세기 당나라가 이뤄낸 문명대국의 영광을 다시 한 번 구현하는 ‘중화제국의 전성기’를 맞이할 것이다.


공자의 부활, 唯我獨尊과 黃帝觀을 버려야 가능

그렇지만 중국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 있다. 공자의 통치술이 세계적으로 활용될지라도 가부장적 유아독존(唯我獨尊)에서 벗어나야 한다. 즉 천자(天子)로 지칭되어 온 황제관(皇帝觀)을 버려야만 한다. 21세기 지구촌은 군림하려는 천자를 원하지 않는다. 우리 시대에는 각자가 자신의 몫을 담당하면서 화해와 협력을 위해 노력하고 이를 달성하는 것을 미덕(美德)으로 삼기 때문이다. 그것이 또한 공자가 오랜 세월을 주유(周遊)하며 설파한 진정한 정치가 아니겠는가.

이런 까닭에 공자의 부활은 몇 가지 사항이 전제되어야만 통할 수 있다. 국가적인 이데올로기이어서는 안 되고, 봉건적 사고방식에 얽매인 통치자의 전유물이어서도 안 되며, 가부장적인 억압도 있을 수 없다. 공자의 부활은 ‘순수한’ 공자의 사상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문명사적 전환기의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고 모두가 공감하는 개념으로 승화될 때, 공자는 부활할 수 있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정치 이데올로기나 통치 권력의 유지를 위한 카드로 활용된다면 오히려 아바타에 주저앉은 것처럼 전 세계인들에게 혼쭐이 날 것이다.

문묘를 돌아 나오면서 우뚝 선 공자상을 돌아본다. 양손을 포갠 채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듯한 표정이다. 공자도 노나라에서 대사구(大司寇)의 직책을 맡으며 삼환씨(三桓氏)를 제거하기 위한 정치를 한 적이 있다. 비록 삼환씨의 제거는 실패로 끝나고 공자도 정치에서 밀려났지만 이를 통해 공자는 정치의 단맛과 쓴맛을 알았으리라. 그리고 쓴맛이 아닌 단맛만을 누리기 위한 권력자들의 권모술수와 암투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 공자에게 묻고 싶은 말이 있다.

“당신의 사상과는 거리가 먼 정치적인 부활이라도 진정 기쁜가요?
“내 수천 번을 죽었다가 살아나고 살았다가 죽었는데 다 무엇 때문에 그랬겠는가? 인간은 천성적으로 모두가 정치적일세. 내 사상도 결국 정치적인 것이고. 허허허.

 

(23) 2000년 전부터 로마인이 중국에서 살게 된 까닭은?

중국의 로마인 마을을 가다 <장액 1 >

무위 대운사의 종소리를 들으며 장액(張掖)으로 향한다. 그저 무덤덤하게 들을 때면 그것은 단지 음파에 지나지 않았는데, 이제 그 내력을 알고 들으니 애틋한 사연이 가슴에 절절하게 메아리친다. 하긴 사연 없는 만물이 어디 있으며, 저마다 한 편의 대하소설을 품지 않은 인간이 어디 있으랴. 여행이 인생의 스승인 것은 스스로를 깨우쳐 따뜻한 마음을 갖게 하기 때문일 것이다. 여행은 차가운 세상사에 물드는 스스로를 다잡아 다시금 따뜻한 마음을 쌓고, 따뜻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하는 소중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무위에서 장액까지는 대략 240㎞다. 자동차로 서너 시간은 달려야 하는 거리다. 무위 시내를 벗어나서 한참을 달리니 남쪽으로는 기련산맥이 휘달리고 북쪽으로는 용수산(龍首山) 봉우리가 멀리 보인다. 한 시간 정도를 달리니 금창시(金昌市) 영창현(永昌縣)이다. 여간촌(
)에 있는 고성(古城)을 찾아가자고 했더니, 장액을 향하던 후배가 의아해 한다.

“그곳에도 실크로드 유적이 있나요?"
“그럼. 엄청난 실크로드의 역사가 지금도 살아있는 곳이지.
“살아있는 곳이라고요?
“그렇다니까. 가서 직접 느껴보자고.

 

▲여간촌 입구에 있는 석상


여간촌의 원래 이름은 자래채(者來寨). 이곳에는 30m 길이에 3m 정도 높이의 성벽이 남아있는데, 1970년대만 해도 1㎞의 길이에 3층 높이 성벽이 장성처럼 이어져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곳 사람들이 성벽의 흙을 파다가 집을 짓거나 농사짓는 데 비료로 사용하면서 훼손시켜 지금의 모습만 남은 것이다. 이곳에서 한나라 때의 무덤이 발굴되었는데 무덤의 주인은 동양인이 아니었다. 하얀 피부에 빨간 머리털, 긴 얼굴과 오뚝한 코를 가진 유럽인종인 코카서스인이었다. 어찌된 일일까? 참으로 신기하고 궁금해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곳이다. 마을에 도착하니 이 마을의 내력을 알려주는 듯 세명의 동상이 반긴다.

“동상의 모양이 어때?
“어? 오른쪽의 남자는 서양인 같은데요?
“그렇지. 로마시대를 다룬 영화에서 보던 그 인물들이지?
“그러고 보니 이곳 마을 사람들의 모습이 서양인과 비슷하네요.


로마 三頭정치 크라수스군, 파르티아에 패배하고 감숙성에 안착

기원전 54. 로마제국의 집정관인 크라수스가 폼페이우스, 카이사르와 함께 삼두정치(三頭政治)를 펼칠 때다. 시리아를 포함한 동방총독인 크라수스는 자신만이 공을 세우지 못하자 이들과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지금의 이란 지역인 파르티아(Parthia) 원정을 단행한다. 그런데 욕심이 앞선 크라수스군은 파르티아군의 전술에 걸려들어 대패하고, 이때 크라수스도 목이 베이고 몸에 쇳물이 부어지는 참형을 당한다.

그 싸움에서 로마는 2만여명이 전사하고 1만여명이 포로로 잡혀 노예가 되었다. 오직 크라수스의 아들이 이끄는 6000여 명의 군사들만이 포위망을 뚫고 도망쳤다. 하지만 그들의 행방은 찾을 수 없었다. 33년이 지난 후, 로마제국과 파르티아는 종전협정을 맺고 포로교환을 하였지만, 6000여 명의 병사들은 끝내 찾을 수 없었다. 그 많은 사람들은 과연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관광용으로 개발중인 여간성

 

이 문제에 대해서 처음으로 해답을 제시한 사람은 영국의 학자 호머 더브스(Homer H. Dubs). 호머는 미국의 컬럼비아 대학 교수로 제2차 세계대전 전후 미 국무부에 소속되어 일본을 연구한 학자다. 그는 이곳 여간촌이 로마의 투항자들로 이루어진 마을이라고 주장했다. 한나라 때 ‘여간’이란 말은 곧 로마제국을 지칭하던 말이기 때문이다. 중국의 역사지리학자인 사념해(思念海)도 그의 저서 ‘하산집(河山集)’에서 이렇게 정리했다.

“여간은 현의 명칭으로 여간으로 투항한 자들로 이루어진 곳이다. 성 밖 투항자들이 설치한 현으로는 어상군(於上郡)의 구자현(龜玆縣)이 있는데, 그곳도 구자국 투항자들로 이루어진 곳이다. 이는 한나라 때 통례로 여겨지던 일이다.

그 뒤 많은 사람들이 흥미와 관심을 가지고 이곳을 방문하여 이 마을의 수수께끼를 풀고자 하였다. ‘한서 진탕전’에 보면, 중앙아시아를 차지한 서흉노 질지 선우의 부하들 가운데는 토성 밖에 목책을 3층으로 겹쳐 쌓고, 원형의 방패를 물고기의 비늘 모양으로 진을 쳐서 공격하는 ‘어린진(魚鱗陣)’을 펼쳤다는 내용이 있다.

이는 로마군이 전투에 자주 활용하는 전술이다. 질지 선우가 이끄는 군대에 로마식 전술을 사용하는 부하들이 있는 것은 어쩐 일일까? 크라수스의 아들이 이끄는 6000여 명의 로마 병사들이 로마로 돌아가지 못하고 질지 선우에게 의탁했기 때문이다. 질지 선우는 세력을 키우기 위해 자신의 딸을 주며 이들을 아꼈다.

세력을 키운 질지는 주변의 작은 나라들을 정복하고 한나라와 대적하게 된다. 이에 서역도호부의 감연수(甘延壽)와 진탕(陳湯)이 화공으로 질지군을 섬멸한다. 질지 마저 잃은 로마 병사들은 갈 곳이 없었다. 이제 와서 더더욱 로마로 돌아갈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살아남은 병사들은 한나라에 투항의사를 밝힌다. 이에 한나라는 흉노 절란왕(折蘭王)의 유목지였던 기련산 기슭의 장액군 번화현(番和縣)에 로마를 지칭하는 ‘여간성’을 쌓고 거주지를 마련해 준다. 그 후 절란(折蘭)의 음이 변하여 비슷한 ‘자래채’가 된 것이다. 그리고 근래에 문화자원을 개발한다는 의미에서 여간촌으로 다시 바뀐 것이다.


여간촌 로마식 정자에 ‘옛 로마군단 중국 귀향 기념비’

여간촌은 시내에서 뚝 떨어진 곳에 있다. 근방에 도착하니 성이 보인다. 그런데 옛 성이 아니라 최근에 지은 것이다. 살펴보니 이곳을 관광지로 만들기 위해 성을 건설하고 있는 것이다. 갑자기 하늘이 흐려지더니 소나기가 쏟아진다. 한두 명에게 물어보지만 타지에서 온 일꾼들이라 알지 못한다. 날씨는 안 좋고 마음은 급하니 직접 찾아보는 수밖에 없다. 마을이 있을 법한 곳으로 차를 몰아간다. 비포장도로를 20여분 달리자 마을이 보인다.

 

▲마을 어귀에 있는 로마식 정자

 

“이곳이 맞을까요?
“산 아래 마을은 이곳뿐이니까 아마도 맞지 않을까?

마을로 들어서자 빗발을 더 세지고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다. 확인할 길이 없으니 직접 마을 여기저기를 찾아다닐 수밖에 없다.

“로마식 정자가 있을 거야. 그것을 찾으면 이 마을이 맞는 거야.
마을 어귀 벌판을 바라보니 흙 둔덕 위에 로마식 정자가 보인다.
“찾았다! 이 마을이 여간촌이 확실해.

거센 소낙비를 뚫고 둔덕에 오른다. 이곳이 옛날 여간성이었을 텐데 이를 알려주는 팻말조차 없다. 대신 로마식 정자인 ‘여간정’만 홀로 비를 맞고 있다. 정자 안에는 2012 10월에 다시 세운 ‘옛 로마군단의 동쪽 귀향기념비’가 있다. 비석의 뒷면에는 이곳 마을의 역사를 기록해 놓았다.

 

▲여간촌이 로마인 마을임을 알려주는 설명문

 

이 마을에는 약 400여명이 살고 있는데, 그중 200여명은 훤칠한 키, 푸른색 눈, 갈색머리 등 서구인의 특징을 갖추고 있다. 여간촌을 일명 ‘황모부락(黃毛部落)’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이들의 머리색을 빗대어 부르는 말이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마을을 벗어나지 않고 살았다. 어쩔 수 없이 외부에 나갈 일이 있을 때에는 머리를 검은색으로 염색했다고 한다.


로마인 후예를 만나다

마을로 들어오니 비가 그친다. 그 사이에 양떼를 몰고 오는 마을 사람들이 보인다. 그런데 모습이 영락없는 서구인의 형상이다. 그중 한 사람을 찾아가서 확인하니 2000년전 로마인이 자신의 조상이라고 한다. 그 역시 이 마을의 유래를 잘 알고 있었다.

 

▲여간촌에서 만난 로마인 후손


“예전엔 밖에도 나가지 않고 숨어서 살았지요. 이제는 우리 마을의 특징을 널리 알려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도록 정부에서도 지원해 주고 있어요.

환하게 웃는 그의 모습에서 2000년의 시름은 사라지고, 융합과 소통의 시대를 새롭게 열어가려는 희망찬 의지를 본다.


실크로드는 교역이 주류였지만 물류만 오간 길은 아니었다. 종교와 사상이 소통하고, 지식이 융합하는 길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을 주도한 것은 바로 ‘사람들’이었다. 실크로드는 자의든 타의든 동서의 사람들이 오가고 머물며 서로 사귀고 사랑하는 길이다.

이를 통해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는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통로다. 인적 교류와 정착은 실크로드 최고의 목적이다. 인류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서도 꼭 필요한 것이다. 실크로드가 과거의 길이 아니라 현재의 길이요, 미래를 향한 길이 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24) 아들 목 베고, 강자에게 딸까지 주면서도 내려놓을 수 없는 게 권력

영국저널리스트 조지 호그 남경대학살 목격하고 人類愛 실천 <장액2>

여간촌을 벗어나니 초원지대가 펼쳐진다. 코발트색 하늘 아래 멀리 만년설 덮인 산맥들이 이어지고 야트막한 산록의 푸른 초원에는 양들이 편안하게 풀을 뜯는다.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이다. 영화필름처럼 스쳐가는 풍경화를 감상할 즈음, 부서진 토성의 흔적이 화면에 나타난다.

점점 차창으로 가까이 다가오더니 급기야 시야에서 사라진다. 도로가 성벽을 뚫어버린 것이다. 토성을 둘러보기 위해 잠시 멈춘다. 산단고장성(山丹古長城)이란 안내석이 지나치는 자동차의 매연을 맡으며 폐허뿐인 성벽을 홀로 지키고 있다.

 

▲기련산맥을 따라 이어진 장성

 

황토 성곽은 두 줄로 나란한데, 바깥은 한나라 때 만든 것이고 안쪽은 명나라 때 쌓은 것이라 한다. 한나라 때 장성은 상당 부분 훼손됐지만, 93km에 이르는 명나라 때 장성은 황토를 판축한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하지만 명나라 때 장성 또한 훼손되기는 마찬가지다. 건조한 기후와 바람, 거기에 인간의 발길이 더해져 훼손을 더욱 가속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長城, 이제는 소통을 위해 뚫어야 할 벽

장성이 흔적 없이 사라지면 성곽과 함께한 역사도 잊힌다. 대지가 판축처럼 켜켜이 쌓여 새로운 자연을 만들면 인간은 그곳에 새로운 역사를 구축한다. 그리고 지나간 시대를 기록으로 남긴다. 판축처럼 켜켜이 쌓아올린다.

자연은 항상 그대로이길 원하는데 인간은 쉬지 않고 자신의 역사를 만들고 기록하려 애쓴다. 그 역사가 찬란한들 어찌 칭송받을 수 있으며, 그 기록이 위대한들 어찌 영원할 수 있으랴. 물처럼 낮게 구름처럼 가볍게 살면 얼마나 좋을까.

다툼뿐인 역사와, 그로 인해 상처만 가득한 자연을 적셔주고 보듬어 주는 진실함으로 말이다. 그러고 보니 초원을 적시는 물줄기와 한 조각 흰 구름이 여느 때와 다르게 가슴을 울린다.

 

▲산단현 대로변의 명대 장성

 

황하는 멀리 흰 구름 속에 흘러가고 黃河遠上白雲間
높다란 산의 한 조각 성이 홀로 외롭구나 一片孤城萬仞山
오랑캐 피리는 어찌 구슬픈 이별노래만 불러대는가 羌笛何須楊柳曲
봄빛도 아직 옥문관을 넘지 못하였는데 春光不度玉門關

언지산, 唐代 최대 말 목장은 야크와 양떼만 풀을 뜯고

산단현(山丹縣)은 말 목장으로 유명하다. 이곳의 지명을 따서 지은 산단마는 천마와 버금가는 말로 예로부터 무장들이 즐겨 탔다. 산단이 목장으로 유명한 것은 기련산맥의 만년설이 만들어내는 풍부한 물이 드넓은 초원을 적시며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흉노는 이곳을 천연목장으로 사용했다.

특히 기련산맥의 지맥인 언지산(焉支山)은 하서주랑을 지나는 실크로드의 요충지다. 한 무제는 흉노로부터 이곳을 빼앗아 군현을 설치하고 그토록 애지중지하는 한혈마, 대완마(大宛馬), 화염구(火焰駒)와 같은 명마를 사육했다. 언지는 연지(臙脂)와 통하는데, 연지의 재료인 홍람(紅藍)이 이곳 언지산에서 많이 나기 때문이다.

 

▲야크와 양떼만 있는 언지산록의 초원

 

천혜의 요충지인 언지산을 빼앗긴 흉노는 황량한 고비사막으로 쫓겨나 세력이 급속히 약해진다. 반면에 이곳을 차지한 한나라는 서역과의 교역을 통해 안정적인 힘을 구축한다. 흉노는 조상 대대로 살아오던 삶의 터전을 잃었으니 그 슬픔이 얼마나 컸을까? 그들이 암담한 심정으로 쫓겨 가며 불렀을 ‘서하구사(西河舊事)’라는 노래가 전해온다.


우리가 기련산을 잃어
이제는 가축을 기를 수 없네.
우리가 언지산을 잃어
이제는 처자의 얼굴에 연지를 바를 수도 없네.


산단의 군마장을 찾아가는 길은 좌우로 온통 초록평원이다. 기련산맥을 이어온 앞산이 금방 손에 잡힐 듯 한데 가도 가도 그대로다. 한 시간을 내달려도 초원 역시 그 모습 그대로다.

중국 속담에 손에 잡힐 듯한 산을 말을 몰아 달리다가 결국 말이 지쳐 쓰러지고 말았다는데, 도대체 얼마를 더 가야만 산에 도달할 수 있을까? 좌우로 펼쳐진 초원의 끝은 또 어디일까? 흉노가 이곳을 잃고 가축을 기를 수 없게 되었다는 아픔이 저절로 느껴진다. 이토록 푸른 초원은 유목민족이면 누구나 차지하고 싶은 낙원이기 때문이다.

4000
m의 산록 아래 펼쳐진 목장은 3000여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한 무제 이후 군마사육장으로 변신한 이곳은, 그 뒤에 더욱 번창해 수나라 때는 10만여 필, 당나라 때는 70만여 필의 말을 사육했다고 한다. 이 목장은 아시아 최대이자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목장으로, 지금도 중국의 군마는 이곳에서 조달한다고 하니 가히 최고의 목장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산단군마장의 말들

 

하지만 최고의 목장에서 말을 찾아보기 어렵다. 너무 넓기 때문인가. 아니면 자동차가 말의 자리를 차지해 수요가 없기 때문인가.

말이 뛰놀던 초원에는 야크, 염소, 양 등이 풀을 뜯고 있다. 그래도 말이 보고 싶어 한참을 더 들어가니, 겨우 수십 마리의 말이 보인다. 그런데 말들이 모두 울타리에 갇혀 있다. 초원에서 뛰노는 말을 보고 싶었는데 아쉽기만 하다. 그래도 산단의 군마장에서 이렇게라도 말을 보았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한무제는 천마를 차지하기 위해 전쟁도 마다하지 않았다. 불과 100년 전만 해도 말은 소중한 자원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경마장에서나 보는 동물이 됐으니 말도 한 편의 기구한 대하소설의 주인공이 되어버린 것일까. 실로 격세지감(隔世之感)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영화촬영지로도 유명한 언지산 초원

언지산록의 초원은 말 목장뿐 아니라 영화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당 태종의 조카딸로 토번의 왕인 손챈감포(
赞干布․605년경∼649)에게 시집간 공주의 이야기를 다룬 ‘문성공주’, 중국 4대 미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기원전 1세기 흉노의 호한야 선우(呼韓邪單于)에게 시집간 한나라 원제의 궁녀 이야기를 그린 ‘왕소군’ 등 30편이 넘는 영화가 이곳에서 촬영됐다.

 

▲문성공주는 아시아에서 가장 사랑받는 왕비로 꼽힌다. 국내에서도 문성공주 이야기를 다룬 뮤지컬이 개봉됐었다.

 

한족이 세운 나라들은 자국의 힘이 약하면 오랑캐라 칭하는 이민족들과 ‘정략결혼’을 했다. 국가와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 부득이하게 취한 고육지책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권력자가 권력을 계속 유지하기 위한 방편일 뿐이다.

권력을 넘보면 아들이라 해도 목을 베고, 자기보다 힘이 센 외부 세력에게는 딸까지도 주어 무마시켰으니 얼마나 잔인한 권력인가. 그러므로 마약보다 더한 권력의 맛을 어찌 내려놓을 수 있겠는가. 참형을 앞두고도 내려놓을 수 없는 게 바로 권력이다.

하지만 분명한 진실이 있다. 백성을 위한답시고 권력을 휘두른 자는 모두 자신의 칼날에 죽는다. 이 어찌 한 나라만의 일이겠는가. 동서고금 모든 나라에 통하는 만고불변의 법칙인 것을.


영국인 저널리스트 조지 호그, 중국인들에게 人類愛를 심어주다

이곳 산단현과 관련된 ‘황시의 아이들(黃石的孩子)’이란 영화가 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는 1937년 일본의 남경대학살을 목격하고 이를 취재한 영국인 저널리스트 조지 호그(George Hogg)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다.

 

▲2008년에 개봉했던 영화 '황시의 아이들' 포스터

 

적십자 요원으로 위장한 조지 호그는 학살현장을 촬영하다 일본군에 붙잡혀 처형되기 직전 중국인 장군에게 구출된다. 그 후 호그는 호북성의 황시(黃石) 마을에서 60여 명의 고아들을 돌보게 되는데, 정신적 충격을 받은 아이들은 이방인에게 극도의 거부감을 보이다 호그의 진실한 사랑에 감동한 아이들은 점차 호그와 친해지고 행복한 삶을 만들어간다.

그러나 전쟁은 잠깐의 평화도 용서하지 않는 법. 국민당군이 아이들을 전쟁에 동원하려 하고 마을을 군사 요새로 삼으려 하자, 호그는 모두의 간섭이 없는 먼 곳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간다. 그곳은 마을에서 1000㎞가 넘는 감숙성 산단현이다.

호그와 함께 아이들은 해발 3000m의 산맥을 넘고 사막을 지나는 온갖 고난 끝에 마침내 산단현에 도착하여 새로운 삶을 꾸리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호그는 여정 중에 걸린 파상풍을 치료하지 못해 산단현에 도착한 1945 7, 30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한다.


덩샤오핑, “국제주의 전사여! 잊지 않고 기억하리라.

산단현은 조지 호그를 기념하는 능원(陵園)을 조성해 놓았는데 이름이 ‘애여와 하극(艾黎與何克)’ 능원이다. ‘하극’은 호그의 중국식 표현이다. 그렇다면 ‘애여’는 누구일까? 호그와 함께 적십자 활동을 한 뉴질랜드 친구인 ‘르위 앨리(Rewi Alley)’를 가리키는 것이다.

앨리는 영화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리’라는 간호사 역할을 하는 여성이 앨리의 역할을 대신할 뿐이다. 하지만 앨리야말로 호그의 이야기를 세상에 알리고 영화까지 만들게 한 장본인이다. 아울러 호그가 틈틈이 써 둔 유고를 모아 ‘새로운 중국을 보다(I See a New China)’라는 책을 펴내는 데도 일조한다.

자신은 드러내지 않고 동료인 호그의 인류애적 감동을 알리기 위해 헌신한 앨리. 호그에 대한 그의 진실한 우정이 없으면 불가능한 것이다.

 

▲조지 호그와 르위앨리를 기리기 위해 산단현 시내에 조성된 농원

 

“위대한 국제주의전사여! 우리 모두 영원히 잊지 않고 기억하리라.

능원에는 덩샤오핑이 쓴 글씨가 검은 대리석 위에 빛난다. 길이 7m, 높이 1.8m에 이르는 석비에는 그와 함께 호그와 앨리의 생애가 좌우에 나란히 새겨져 있다. 진실로 중국의 미래를 지켜준 두 사람에 대한 고마움이 배어 있는 듯하다.

사랑은 모든 생물을 행복하게 한다. 특히 전쟁이라는 참혹한 시련을 이겨내고 이룬 사랑은 더없이 행복하다. 여기에 국경과 민족을 넘나드는 인류애가 더해진다면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실크로드는 바로 이러한 인류애를 살펴보는 길이기도 하다.

전쟁과 탐욕으로 점철된 인간사이지만 그때마다 이를 깨닫게 하고 바로 세우는 원천은 바로 인간에 대한 사랑이었다. 인간은 선한 존재다. 선함의 근원은 바로 사랑이다. 수천 년간 사랑이 오간 실크로드에서 잊었던 사랑을 다잡는다.

더 큰 사랑, 더 넓은 사랑을 배우기 위해 실크로드에 선다. 나에게 있어 길이 곧 스승이요 친구인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25) 베네치아 상인 마르코 폴로는 왜 청년들에게 중국에 와서 쾌락을 즐기라고 했을까?

마르코 폴로의 삐뚤어진 中國觀<장액3>

오아시스 도시가 모두 그렇듯이 장액 시내가 가까워 오자 사막지대가 녹음이 우거진 곳으로 바뀐다. 인간이 만든 빌딩들도 보인다. 옛날 실크로드 대상(隊商)들이 건조한 사막을 지나 수목과 물이 있는 도시가 보이면 식사와 휴식을 위해 더욱 힘을 내어 줄달음쳤는데, 나 또한 밀려오는 허기를 채울 식당부터 찾기 바쁘다. 역시 ‘금강산도 식후경’인 것이다.


‘금장액(金張掖), 하서주랑 최고의 요충지

흑하(黑河)가 흐르는 장액은 하서주랑의 중부에 위치한 고대 실크로드의 요충지이자 무역도시다. 한약재로 유명한 감초(甘草)의 특산지여서 감주(甘州)라고도 했다. 장액이라는 지명은 흉노를 몰아낸 한 무제가 “흉노의 팔을 꺾고 중국의 팔을 펼치다(斷匈奴之臂 張中國之掖).”라고 한 말에서 나온 명칭이다.

이처럼 장액은 그 명칭에서부터 서역과의 무역 거점이라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다. 이런 유구한 역사와 문화, 풍부한 농산물로 인해, 중국인들은 장액을 ‘금장액(金張掖)’이라 부르며 하서주랑의 도시 가운데 최고로 쳤다. 문화면에서도 서역불교의 전래와 독자적인 발전을 도모한 곳이기도 하다.

 

▲장액 대불사


이런 까닭에 장액에 오면 가장 먼저 둘러볼 곳이 대불사(大佛寺). 대불사는 서하 시기인 1098년에 창건되었는데 당시 이름은 가섭여래사(迦葉如來寺)였다. 1411, 명나라 영락제(永樂帝)가 중건하면서 ‘홍인사(弘仁寺)’라는 편액을 내렸다.

청나라 강희제 때인 1678년 사찰 내에 있는 거대한 불상을 기념하기 위해 ‘굉인사(宏仁寺)’로 개칭했다. 이때부터 굉인사는 속칭 대불사라고 불리게 되었다. 1940년대부터는 훼손된 불전(佛殿)을 중심으로 다시 중건이 이루어져 지금과 같은 규모의 사찰이 되었고, 거대한 불상 덕에 1996년에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선정되었다.

요기를 하고 시내에 있는 대불사를 찾았다. 패루(牌樓)식으로 만든 산문(山門)에는 ‘부처님의 말씀은 변방이 없다.(佛法無邊)’라는 편액이 금빛 환하게 빛난다. 산문을 지나니 정전(正殿)을 중심으로 작은 전각들이 오밀조밀하다.

2
층 겹처마 구조의 정전에는 중국 최대의 실내 와불(臥佛)이 모셔져 있다. 석가모니 열반상인 이 와불은 길이가 35미터, 어깨 너비가 7.5미터다. 다리 길이만 4미터요, 귀는 2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불상이다. 와불 주변에는 부처의 10대 제자의 소상(塑像)이 살아있는 듯 생생하다.

회랑에는 18나한상(羅漢像)을 배치하고, 천장에는 ‘24제천(諸天)’을 그려 놓았는데, 열반을 앞둔 부처님의 모습이 대전 전체를 장엄하게 만든다.

와불이 뿜어내는 아름다움과 장엄함은 와불의 규모가 커서도 아니고 특별한 조형미 때문도 아니다. 숭고한 신앙심이 바탕이 되어 예배(禮拜)의 대상으로 모셔진 까닭이다. 1,0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신앙의 향기가 고스란히 살아 있기에 오늘 이곳을 찾은 신심 없는 나그네도 장엄한 분위기에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중국 최대의 와불인 대불사 열반상


열반(涅槃)이란 번뇌에 얽매이지 않는 경지를 말한다.


“내가 열반에 들지 않은 지금, 나를 공양하는 것과 나의 열반 후에 공양하는 것은 마음이 평등하므로 얻는 복덕도 똑같다.

부처의 이 말씀은 그의 열반 후에 탑을 세우거나, 열반에 드신 모습을 그림이나 조각으로 조성하여 공양하는 공덕신앙의 기반이 되었다. 부처가 계시지 않아도 열반에 드신 모습에 공양함으로서 언제나 살아 있는 법신에 공양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열반은 적멸(寂滅), 불생(不生), 적정(寂靜), 원적(圓寂)이라고도 하는데, 원래 부처님의 입멸(入滅)은 열반이라 하지 않고 반열반(般涅槃: 모든 번뇌를 완전히 소멸한 상태)이라 하였다. 그것을 중국인들이 줄여서 열반으로 쓰면서 일반화되었다.

그런데 요즘은 불도의 완성 없이 입적(入寂)한 일반 스님들에 대해서도 열반하셨다고 하니, 그릇됨을 알지만 구구절절 논함도 무상한 것이기에 그냥 지나치는 것인가. 참으로 대자대비(大慈大悲)한 부처님 세상이다.


마르코 폴로의 삐뚤어진 中國觀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상인 마르코 폴로는 1260년 고향을 떠나 원나라 각지를 여행한 뒤 ‘세계의 서술’이란 ‘동방견문록’을 완성하였다. 당시 마르코 폴로는 장액에서 1년을 머물렀다. 이때 대불사를 둘러본 그의 느낌은 어땠을까?

“캄프초(감주·장액)는 탕쿠트(서하) 안에 있는 매우 크고 훌륭한 도시다. 주민들은 우상 숭배자이지만 이슬람교도도 더러 있다. 기독교도도 있는데 세 개의 크고 이름다운 교회를 가지고 있다. 우상숭배자들은 그들의 풍습에 따라 많은 사원과 수도원을 갖고 있으며, 그 안에는 엄청나게 많은 우상들이 모셔져 있다.

 

▲마르코 폴로


어떤 것은 크기가 15미터나 되는데, 목석(木石)이나 흙으로 만든다. 그 위에 황금색을 칠하는데 그 모습이 아주 정교하다. 거대한 우상은 누워있으며 주위에는 여러 개의 작은 우상들이 경배를 드리는 것처럼 공손하게 큰 불상을 둘러싸고 있다.

마르코 폴로는 불교를 몰랐을까? 불교도들을 우상숭배자라고 불렀다. 그는 중국에서 17년 동안 생활했는데 3년 동안 관료생활도 했다. 그런 그가 중국인들이 전적으로 믿는 불교에 대해 기록하지 않은 까닭은 뭘까?

하나님 이외의 신은 모두 우상이라는 기독교적 신심이 너무도 강했기 때문일까? 마르코 폴로의 여행기는 분명 13세기 동서문명의 교류를 이해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자료다. 그러나 그가 구술한 내용을 음미하노라면 인간에 대한, 동양인에 대한 이해가 너무도 부족해 보인다.

특히, 그는 여성들의 결혼과 성에 대해서는 기회만 되면 야만인 수준으로 비하하였다. 한술 더 떠서 16세부터 24세의 청년들은 중국에 와서 쾌락을 즐기라고까지 한다. 그렇다면 그가 그토록 자부심을 갖고 있던 서양은 여성을 얼마나 존중하였던가. 뜻대로 진행되지 않으면 마녀로 몰아 화형으로 생명을 끊는 일이 비일비재하지 않았던가.

마르코 폴로는 베네치아의 상인이다. 베네치아는 무역으로 막대한 이득을 챙겨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이끈 도시다. 그러므로 이 도시의 상인은 다른 어떤 곳의 상인들보다 자부심이 강했을 것이고, 최고의 이익을 남길 생각만 하였을 것이다.

 

▲마르코 폴로 저서 세계의 서술


이를 위해 장사에 필요한 허세는 물론이고 부화뇌동도 서슴지 않는 상술을 터득했음에 틀림없다. 마르코 폴로에게는 대상인이 갖추어야 할 필수덕목인 인간에 대한 진실함과 따뜻함이 너무도 부족했던 것 같다. 그가 일평생 떠돌이로 살면서 정규교육도 받지 못한 그저 그런 장사꾼이었다는 사실이 그의 책 여기저기에 묻어 있다. 그에게 있어서는 부처님의 자비로운 지혜보다는 물질적인 이득과 육체적인 평안이 더욱 중요한 것이었다.


모든 중생이 부처가 될 수 있건만

부처님의 열반상 앞에 섰다. 황금빛 가사(袈裟)를 입은 채 게슴츠레 눈을 감고 계시다. 그런데 그 모습이 실로 숙연하다. 일신의 고통과 번뇌를 내려놓고 이제 막 입적을 앞둔 모습. 이 앞에서는 빈부귀천도 사리사욕도 모두 사라지고 오직 하나, 작은 인간만이 있을 뿐이다.


일체의 행함은 무상하나니一切行無常
진실로 생기고 나면 사라지는 법이다.信是生滅法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이 이미 없으니生滅旣滅已
적멸이 곧 최고의 즐거움이니라.寂滅爲最樂


부처의 사랑은 비움이다. 내려놓음이다. 스스로 그렇게 실천함으로써, 부처는 모든 중생에게 사랑을 베풀었다. 그리고 내려놓아 비게 된 자리는 진실함으로 채웠다. 부처가 먼저 깨닫고 행동했을 뿐, 그 또한 부처만의 특권이 아니었다. 그래서 부처는 말씀하셨다. “모든 중생이 곧 부처다.”라고. 부처를 존숭하기보다는 스스로 부처가 될 수 있음에 힘쓰라고 하셨다.

그런데 중생들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부처가 되지 못한다. 스스로를 비우지 못하고 내려놓지 못하기 때문이다. 죽음을 앞두고서도 실천하지 못할 만큼 부처의 가르침은 어려운가 보다. 그래서 중생들은 오늘도 부처 앞에 모인다. 어제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질 수 있기를, 그리고 내일은 오늘보다 더 많은 것을 갖게 되기를 갈망한다. 터지는 것도 모르고 채우려고만 하는 중생들을 오늘도 부처는 보고만 계신다.

“내 다 얘기했느니 더 무엇을 말할까. 그 역시 무상인 것을….


서역불교를 발전시켜 선진문화를 꽃피우다

한 무제는 흉노를 물리치고 하서주랑의 무위, 장액, 주천, 돈황에 하서사군(河西四郡)을 설치했다. 그 후 4세기 516국시대 약 100년간, 이곳은 오량(五凉)의 각 도읍지였다. 그래서 이 지역을 통칭하여 양주(凉州)라고도 한다. 이 지역은 서역에서 중원으로 들어가는 관문이기에 불교도 먼저 전해졌다.

불교가 장안으로 전래되기 이전에 이곳 양주 일대는 새로운 사상과 경전들을 받아들였다. 이는 당시 중원의 불교보다 선진적인 것이었는데, 하서주랑의 입지조건이 만든 것이다. 이 지역에는 석굴과 사원도 많이 조성되어 있다. 서역승려들의 수행에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불교는 양주 일대를 중심으로 그 사상을 발전시킨 것은 물론이고, 수행에 필요한 제반 문화까지도 일찌감치 정착시켰다. 양주 불교는 그 선진성으로 인해 북위 때에 이르러 그대로 중원에 흡수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도교와 유교가 통합된 중국 불교로 자리 잡는다. 오늘날의 중국 불교가 탄생하기까지, 양주 불교는 불교의 지향점이 도교나 유교와 다르지 않다는 점을 부각시키며 서역 불교를 중원에 전달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대불사에는 정전 외에도 둘러볼 곳이 많다. 장경각(藏經閣)과 장액오행탑 가운데 하나인 토탑(土塔)이다. 장경각에는 1445, 명나라 영종(英宗)이 하사한 6,000여 권의 불경이 보존되어 있다. 금빛 은빛으로 빛나는 고문서가 즐비한데, 서예가인 왕희지(王羲之)의 ‘난정서(蘭亭序)’ 탁본이 눈에 띈다.

현장 스님이 번역한 ‘대반야바라밀다심경(大般若波羅密多心經)’ 사본도 있다. 그러고 보니 대불사 입구에서 보았던 도자기 벽화가 떠오른다. 손오공과 사오정, 저팔계가 현장 스님을 모시고 천축으로 나아가는 장면을 묘사한 ‘서유기’ 장면들이 있었는데, 이곳을 거쳐 갔을 스님 일행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는 장치였다.

 

▲티베트 문화가 융합된 대불사 토탑


대전 뒤에 있는 토탑(土塔)은 높이가 약 34미터로 티베트 양식의 백탑이다. 아랫부분은 흰색 항아리처럼 둥글고 윗부분은 흙으로 탑을 쌓았는데 꼭대기의 모양이 마치 왕관 같다. 대불사는 시내에 있는 사찰임에도 고즈넉하다. 아마도 부처의 열반상이 있기 때문인가. 청나라 때의 동법(同法)도 쓸쓸한 가을날 이곳에 들렀다. 그리고 부처의 열반상을 바라보며 내려놓음의 어려움을 나직이 읊었다.


쓸쓸함 짙은 굉인사寥落宏仁寺
먼지 쌓인 불상은 한가롭고
侵佛自閑.
성현의 석비도 닳아졌는데雄碑摩聖迹
고목만 굳세게 좌선하고 있네.古木壯禪觀.
황제가 하사한 함에는 삼장이 있고玉軸函三藏
금빛 부처는 아홉 칸을 길게 누워있건만金軀臥九間.
내려놓음을 어찌해야 이겨낼 수 있는가那堪牲牧

낙타와 말이 얼룩진 이끼만 밟고 섰구나.駝馬踐苔斑.

 

(26) 왜 흑수성은 폐허가 됐을까?

고대 黑水國을 찾아서<장액4>

장액 시내에 있다는 목탑을 보기 위해 시민광장을 찾았다. 30m가 넘는 탑이어서 멀리서도 금방 알아볼 수 있다. 비둘기 떼가 어둑어둑해지는 목탑과 광장 주변을 무리지어 날아다닌다. 사람들이 던져주는 과자부스러기로 더욱 아수라장이다. 그 옆으로는 강택민 전 주석이 쓴 “금장액의 영광을 되찾자”라는 글씨가 보인다.

 

▲중후한 느낌의 장액 목탑


광장에 있는 목탑은 높이가 33m 89층탑이다. 7층까지는 벽돌로 쌓고 처마만 나무로 만들었다. 원래 이곳에는 만수사(萬壽寺)라는 사찰이 있었으나 지금은 목탑만 남은 채 광장으로 변하였다. 목탑이지만 전체적으로 중후하고 묵직한 느낌이다. 이 탑은 수나라 초기에 창건된 이래 여러 차례 중수되었는데, 청나라 말기에 태풍으로 무너진 것을 1926년에 재건한 것이다.


서너 명만 모이면 춤추는 중국인들

널따란 광장은 춤추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족히 500~600명은 됨직한 여성들이 질서정연하게 자리를 잡고 음악에 맞춰 춤을 춘다. 장액시 건강무용지도단이 시민들과 함께 하는 건강생활을 위한 무용지도다. 늘 반복해서 그런지 그들의 춤은 가무단의 공연처럼 일사분란하다.

중국을 여행하노라면 이런 광경을 자주 보게 된다. 적게는 서너 명에서 많게는 수천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다양한 춤을 춘다. 맨손체조, 사교춤, 부채춤, 기공체조인 태극권, 칼이나 창을 휘두르며 추는 춤에 이르기까지 모든 춤이 다 있다. 특히 이들은 새벽에 가장 많이 춤을 추는데, 건강을 위한 운동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춤추는 것을 보기로 마음만 먹으면, 출근 때건 한낮이건 수시로 볼 수 있으니 중국은 춤을 좋아하는 나라임에 틀림없다.

 

▲건강지도무용단과 춤추는 중국인들


춤은 인간의 자유로운 삶과 영혼을 표현하는 행위예술인데 어째서 사회주의국가인 중국에서 유행하고 있을까? 중국은 억압된 체제, 경제적 궁핍, 부패의 만연, 빈부격차의 증대 등으로 인하여 정부 당국을 바라보는 국민들 다수의 시선이 곱지 않다. 이 때문에 체제 비판적 사고와 행동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하여 건강무용이라는 미명 아래 가가호호 불러내어 희석시키려는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닐까?

세계 최대의 인구를 다스리려면 공산당이라는 1당 독재의 제국주의적 지도력을 가지고 ‘상명하달’하고 ‘책임완수’하는 국민치안 유지가 필요할 테니 말이다. 과거 우리도 군사정권 시에 무수한 인력동원과 체제교육을 받지 않았던가. 자고로 자신들의 방식이 떳떳하지 못하고 어딘가 구린 곳이 있으면 옥죄고 설쳐대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런 행동은 결국 파멸로 이어진다. 구린 곳을 도려내지 않고 가리려고만 하니 곪고 썩어 치료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黑水國을 찾아서

장액 시내를 빠져나와 서북쪽으로 30여분을 달렸다. 흑수국(黑水國) 성터를 보기위해서다. 부근에 흑하(黑河)가 흐르기 때문에 흑수성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성은, 한나라 때부터 명나라 때까지 사용된 고성으로 지금은 폐허인 채로 버려져 있다. 국도에서 4km 안쪽에 있는 흑수성을 보러 가는 오솔길에도 이미 심각할 정도로 사막화현상이 진행되어 있다.

 

▲사막화 현상이 심각한 흑수성터


인간의 문명도 거대한 자연의 힘 앞에서는 무력할 수밖에 없는가보다. 흑수성은 원래 동서 245미터, 남북 220미터 크기의 성이었다. 하지만 사막화현상이 심해지면서 지금은 대부분이 모래에 묻혀 있다. 그나마 남쪽의 성보(城堡)가 보존상태가 좋은 편이다. 흑수성도 판축을 쌓아서 만든 성이다. 그런데 일부 성벽은 벽돌로 덧쌓은 흔적이 선명하다.

명나라 때에 무너진 성벽을 벽돌로 보수했다는 증거다. 폐허가 된 성 안으로 들어가니. 오랜 세월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들이 흑자, 백자, 청자 등 도자기 파편들에 아롱져 있다.

이곳은 실크로드의 요충지답게 역참이 있었다. 당나라 때는 공필역(鞏筆驛), 원나라 때는 서성역(西城驛), 명나라 때는 소사하역(小沙河驛)이라고 불렸다. 당시 서역인들을 비롯해 많은 교역상들이 이곳에 모여들어 온갖 물품들을 거래하였으리라. 또 이민족의 침입에 대비하고 서역 교통로를 확보하기 위해 군사들도 함께 상주하였으리라.

이 성에서 발굴된 유물 중에는 ‘서유기’와 ‘삼국지연의’의 고사(故事)를 묘사한 벽화도 있는데, 이는 흑수성의 활동을 비유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흑수성 주변에는 한나라 때의 묘지들도 널리 분포되어 있다. 대부분 모래 속에 파묻혀 버렸는데, 그나마 남아 있던 것은 여지없이 도굴되었다.


전설만 뒹구는 페허의 흑수성

흑수성을 돌아보고 나오는 길에 이곳을 찾은 나를 반갑게 맞이하는 사람을 만났다. 왕장(王將)이라는 장액일보 기자인데 흑수성에 대하여 많은 연구를 하고 있다고 한다. 그와 잠깐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이곳 성과 관련된 재미있는 전설 한 가지를 들려준다.

 

▲흑수국 고성


“옛날 불심이 높은 고승이 있었습니다. 그 스님은 흑수성이 폐허가 될 것을 미리 알고 사람들을 피신시키려고 하였지만 아무도 믿지 않았지요. 하루가 다르게 서역물품이 오가고 사람들로 성시를 이루는 흑수성이 폐허로 변한다니 누가 믿겠습니까. 게다가 스님이 대추와 배를 가지고 다니며 시주를 하니 모두의 비웃음만 받을 뿐이었지요. 스님이 대추와 배를 가지고 다닌 까닭은 중국어 발음으로 대추는 ‘일찍’, 배는 ‘떠나라’와 비슷하기 때문이었는데 아무도 그 뜻을 몰랐습니다. 어느 날, 스님이 사라지고 난 후 흑수성에 풍사(風沙)가 몰아쳐서 이처럼 폐허가 되었답니다.

실크로드는 수많은 사람들이 오간 길이다. 그러하기에 실크로드에는 인간의 흥망성쇠가 오롯하게 살아있다. 많은 이들이 오늘도 실크로드를 따라간다. 인간이 남긴 발자취를 살펴보기 위해서다. 하지만 실크로드는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사랑, 이별, 믿음, 배신 등 희로애락으로 점철된 인간의 심사(心史)가 곳곳에 배어 있음도 보아야 한다.

공자는 정치를 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는 제자 자공의 물음에 이렇게 답한다.
“백성을 배불리 먹여야 하고, 국방을 튼튼히 하여야 하며, 신의를 지켜야 한다.
그러자 자공이 다시 묻는다.

“셋 중에 하나를 없애야 한다면 무엇부터 없애야 합니까?
공자는 거침없이 답한다.
“군대를 없애야 하느니라.
자공이 또 하나를 없앤다면 무엇을 없애야 하느냐고 묻자 공자는 이렇게 마침표를 찍는다.
“먹는 것이다.


‘愛民’ 모든 위정자들의 근본사상

인간은 너나없이 사랑받기 위하여 산다. 사랑이 없는 삶은 모래바람 거센 폐허와 다름없기 때문이다. 사랑은 소중한 단비와 같다. 하지만 사랑도 믿음이 없으면 공허할 뿐이다. 믿음이 견고하지 못한 사랑은 일희일비하다가 결국 이별과 배신으로 끝나버린다. 견고한 믿음은 진실함에서 나온다. 나와 상대방의 진실함이 이심전심으로 하나가 될 때 믿음은 굳건해진다. 이런 믿음이 바탕이 된 사랑은 천하를 다주어도 바꿀 수 없을 만큼 견고한 것이다.

 

▲기와와 토기 파편만 무성한 폐허의 흑수성


정치도 애민(愛民)이다. 백성을 사랑하지 않으면 정치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종교도 애민이다. 부처의 말씀도 중생에 대한 무한한 자비심에서 나온 것이니 ‘애민’하는 것이 곧 신심을 돈독히 하는 것이다. 이러한 정치나 종교의 애민도 그 근원은 모두 믿음에서 시작된다. 개인의 사랑이 신실한 믿음일진대 천하의 모든 사람을 향한 사랑이 어찌 일반적인 믿음일 수 있겠는가. 위정자나 종교인의 믿음은 모름지기 인고의 아픔을 견뎌내며 용광로처럼 끓어올라야만 하는 것이리라. 애민이 사라지면 국가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하루를 마감하는 석양이 실크로드에 걸린다. 흑수성의 모래밭을 빠져나와 다시 길 위에 선다. 바쁜 걸음과는 다르게 마음은 언지산이 그립다. 다시금 뒤를 돌아 멀리 기련산맥을 바라본다. 저 가파르고 험준한 산맥 중심에 푸르른 언지산이 있는 줄 누가 알았으랴. 초록빛 산록에 붉은 꽃 만발해도 정상에는 만년설이 쌓여있는 언지산. 이토록 평온한 곳을 차지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병사들이 피 흘리며 싸워야 했던가. 그래서 평화로운 초원도 병사들의 넋을 달래는 듯 해마다 붉디붉은 꽃을 피우는 것이리라.

시선 이백이 어느 늦은 가을날 언지산을 찾았다. 그리고 ‘추사(秋思)’라는 시 한수를 지었다. 이백은 언지산에서 무엇을 생각했을까?


연지산 낙엽 지는 계절燕支黃葉落
떠난 님 보고자 대에 높이 올랐거늘妾望自登臺
푸르른 구름 청해 언저리서 끊겼고海上碧雲斷
서역 땅 추워지니 오랑캐 몰려오겠구나.單于秋色來.
이미 서역 군사들이 사막지대에 왔다고胡兵沙塞合
한나라 사신이 옥문관에서 전해오니漢使玉關回
전쟁 가신 님 더더욱 돌아올 날 멀어져征客無歸日
시들어 가는 난초에 서글픔만 더하는구나.空悲蕙草摧.


수시로 벌어지는 전쟁은 사람을 항상 긴장하게 만들고, 사랑하는 사람과도 헤어지게 한다. 전쟁터로 떠난 님을 그리는 여인의 삶도 긴장의 연속이다. 님은 행복한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 전쟁터로 떠났지만 여인은 행복하지 않다. 그림 같고 풍요로운 생활터전도 사랑하는 님과 함께 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사랑은 굳게 믿는 것이고 행복은 믿음으로 인내하는 것임을 어렴풋이 배운다. 어느 것 하나 아픔 없이 이뤄지는 것이 없음을 말이다.

 

(27) 주왕, 주지(酒池)와 육림(肉林)에 빠져 음탕한 술자리 낮밤으로 넉 달을 지속하더니…

주천공원에서 술의 역사를 둘러보다.<주천1>

흑수성에서 물과 식량 등을 준비한 실크로드 상인들은 70km 떨어진 낙타성에 와서 다시 편안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실크로드 상인들의 발길을 따라 낙타성을 향한다. 한 시간 정도를 달려 낙타성향(駱駝城鄕)으로 접어드니 길은 또다시 메마른 사막길이다. 성터 입구에는 제멋대로 자란 낙타풀이 사람의 발길이 귀찮다는 듯 따가운 햇살에 잔뜩 독기를 내뿜으며 노려보고 있다.


낙타성을 찾아가다

낙타성은 동진(東晉)시대인 397년에 건축되어 오량 시기를 거쳐 당나라 때까지 사용되었다. 동서 425m, 남북 704m의 장방형으로 된 커다란 고성이다. 낙타성은 남성(南城)과 북성(北城)으로 나눠져 있는 것이 특징인데, 남성의 서쪽 모퉁이에는 별도의 작은 성을 쌓았다. 북성에는 동·서·남쪽으로 문이 있는데 모두 옹성으로 만들어져 있다. 적의 공격을 효율적으로 방어하기 위한 것이다. 또한 성 모서리마다 돈대(墩臺)를 설치하여 사방에서 오는 적들을 감시하였다.

 

▲폐허의 낙타성 모습

 

성 안으로 들어가니 불에 탄 토기 파편과 부서진 벽돌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오랜 시간이 지나며 새로운 주인들에 의해 부서지고 재건되고 다시 흩어진 흔적이겠지만, 실크로드의 길목에 있던 성이니 결코 평화롭게 이어오지만은 않았으리라. 흑수성보다도 큰 성을 둘러보며 이곳에 터를 닦은 오량(五凉) 정권의 막강한 경제력을 다시 한 번 떠올린다. 낙타성의 규모가 이렇게 큰 것은 무엇보다도 교역지의 길목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까닭에 낙타성을 차지하는 것은 경제적 부를 쌓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리하여 오량 정권은 낙타성의 상권을 보호하기 위해 군대를 배치하였을 테고, 때문에 인근을 지나는 많은 사람들이 안전한 낙타성으로 몰려들었으리라.


酒泉, 샘물이 술맛 같은 도시

기련산의 북쪽에 위치한 주천(酒泉)은 장액에서 226km 떨어져 있다. 예전에는 숙주(肅州)라고 불렸다. 기련산 빙하에서 흘러내린 백하(白河)가 지하로 흘러와서 주천 시내에서 솟아나는데 물맛이 아주 좋다. 주천의 옛 이름은 금천(金泉)인데, “어떤 사람이 샘물을 마시고 보니 금색이었다. 그 물을 가져다가 햇볕에 말려 금을 얻었다. 그래서 금천이라는 이름이 생겼다.”는 말이 전해온다. 당나라 때 안사고(顔師古)도 말하길, “도성 아래 금천이 있으니, 샘물 맛이 술과 같다.”고 하였다. 오늘날의 주천이라는 명칭은 한나라 시대에 만들어졌다. 표기장군 곽거병이 흉노의 본거지인 기련산을 공략하여 휴거왕과 혼야왕을 물리치자, 한 무제가 곽거병의 공적을 치하하며 어주(御酒)를 하사하였다. 황제가 하사한 술이 모든 병사에게 돌아갈 수 없자, 샘에다 붓고 그 물을 마셨는데 샘물이 모두 술이 되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금천은 주천이 되었다.

 

▲주천 샘물


시내에 있는 주천공원을 찾았다. 오늘날의 도시 이름이 탄생한 샘물이 솟아나는 곳인데 지금은 천호공원(泉湖公園)이라 부른다. 주천공원은 천연호수에 원림(園林)을 건축하는 방식으로 조성되어 있다. 많은 시인묵객들이 이곳을 찾았는데 들어서는 입구에는 이백의 시 ‘월하독작(月下獨酌)’을 내세워 주천을 한껏 자랑한다.


하늘이 술을 사랑하지 않았다면天若不愛酒
주성(酒星)이 천상에 없었을 것이고酒星不在天
대지가 술을 사랑하지 않았다면地若不愛酒
땅에는 응당 주천(酒泉)도 없었으리라地應無酒泉


술은 언제부터 존재했을까? 아마도 인류의 문화사는 술과 함께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술은 맨 처음 누가 만들었을까? 술의 탄생은 인류가 농경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생겨났다. 즉 먹다 남은 곡물이 자연적으로 발효되어 진한 향기를 내자 인간들이 그것을 먹어보는 과정에서 ‘발견’된 것이다. 이처럼 문자가 생기기 훨씬 전부터 존재했던 까닭에, 기록된 시점은 아마도 훨씬 이후였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상나라 시대에 이미 술이 대량으로 주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주왕(紂王)의 유명한 주지육림(酒池肉林) 고사가 이를 반영한 것이기 때문이다.

 

▲주천공원 입구에 있는 이백의 시 월하 독작


‘酒池肉林’의 허와 실

주왕은 상나라 마지막 왕이다. 망국의 군주가 그렇듯이 주왕도 폭군으로 알려져 있다. 폭군들의 공통점은 술과 여자다. 이를 간파한 제후국인 유소씨국(有蘇氏國)에서 주왕의 마음을 쏙 빼놓을 여자를 공물로 보냈는데, 그 여인이 바로 희대의 독부(毒婦)인 달기(妲己). 달기의 용모는 선녀와 같았고 춤과 노래 또한 잘하였다고 하니 주왕이 달기를 총애하는 것은 당연하였다.

달기는 주왕의 총애를 등에 업고 독부답게 자신의 끝없는 욕망과 흥미로움을 즐기기 위하여 무엇이든 거침없이 행동했다. 달기에 정신이 빠진 주왕은 그녀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었다. 주문왕의 아들인 백읍고(伯邑考)를 죽여 그 살로 만두를 만들어 아버지인 주문왕이 먹도록 하고, 충신인 비간을 죽이기 위해 자신의 병을 고치는데 그의 간이 필요하다고 모함했다.

또한, 별궁에 연못을 만들고는 그곳에 술을 가득 채워 주지(酒池)를 만들고, 나무에 고기를 매달아 육림(肉林)을 만들었다. 그 주변을 알몸의 남녀가 뛰어 놀며 음탕한 춤과 놀이를 하게 하였다. 음탕한 술자리는 낮에도 장막을 치고 그칠 줄 몰랐으니 넉 달이나 지속되기도 했다. 주왕은 달기의 말도 안 되는 모함을 기꺼이 받아준다. 정녕 주왕은 달기의 분신이라도 되었던가.

 

▲주천의 정자


주왕은 원래부터 폭군은 아니었다. 처음엔 지용(智勇)을 겸비한 현명한 왕이었다. 그런데 여러 제후국을 정벌하고 왕권이 강화되자 초심을 잃어버린 것이다. 게다가 달기라는 요부이자 독부가 주왕의 곁에 있게 되자, 정사(政事)를 그르치고 망국의 길로 치닫는다. 세상을 차지하는 것은 남자라지만 그 남자를 쥐락펴락하는 것은 여자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달기라는 여인도 권력자의 마음을 사로잡고 마음대로 주물렀으니 스스로의 욕망을 채운 셈이다. 하지만 달기로 인해 비롯된 주왕의 폭정은 그를 반대하는 자들에게 정치적인 빌미를 주게 된다. 주 무왕의 동생인 주공 단(周公 旦)이 상을 정벌하기
 위한 명분도 바로 이로부터 시작되니, 그에게 있어서 달기는 상나라를 멸망시키는데 필요한 방법이자 도구였던 셈이다.

 

▲영화 달기 포스터


역사의 죄인은 ‘망국의 군주’

망국의 군주는 치욕스런 삶만 부각된다. 포악, 사치, 음란 등으로 매장되어 역사의 죄인이 된다. 정녕 망국의 군주는 포악하였던가. 꼭 그런 것만은 아닐 터이다. 승자에 의해 각색된 역사가 하나 둘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주문왕의 아들인 백읍고의 죽음만 해도 그렇다. 백읍고가 달기의 모함에 죽음을 당했다는 이야기는 명나라 때의 소설인 ‘봉신연의’에 나오는 이야기다. 이야기꾼들은 주 무왕이나 주공 단은 백읍고의 동생들이니 억울한 죽임을 당한 형의 원수를 갚는 것은 정당하다는 명분론을 내세워 마치 역사적 사실인양 각색한다. 대중들은 어려운 역사책보다 쉽게 접하는 소설책의 내용이 마치 역사적 사실인양 믿게 된다. 삼국시대를 다룬 소설 ‘삼국지연의’를 마치 역사서로 이해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주지육림에서 남녀가 알몸으로 뛰어 놀며 음탕한 춤과 놀이를 하였다는 것도 잘 파악해야 한다. 지금과 같은 혼인제도가 성립되지 않았던 당시에는 환락곡(歡樂谷)이라고 하는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풍습이 있었다. , 어느 한 시기와 장소를 정해서 남녀가 숲에서 뛰노는 풍습인데, 이는 주나라 초기에도 인정하던 풍습이었다. 유교사상이 지배적인 사회에서는 음탕하기 이를 데 없는 짓이 되고, 이는 곧 망국의 군주가 짊어지는 악행이 되는 것이다. 역사는 승자의 악행을 패자의 것이 되게 하고, 패자의 선정도 승자의 것이 되게 바꿀 수 있다. 역사의 행간과 이면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오늘도 반복되는 중국인들의 역사의식

공원 안에는 수백 년은 됨직한 커다란 버드나무 옆에 주천이라 쓴 우물이 있다. 곽거병이 한 무제로부터 하사 받은 술을 샘에 부었더니 샘이 모두 술이 되어 모든 병사들이 술을 마셨다는 샘을 표시해 놓은 것이다. 우물을 들여다보니 물이 참 맑고 깨끗하다. 누군가 넣어놓은 금붕어들이 한가롭게 노닐고 있다. 우물이 지금도 깨끗한 것은 우물 밑에서 샘물이 솟아나기 때문이다. 우물 앞 쪽에는 거대한 부조물을 설치하였는데, 살펴보니 무제가 흉노를 무찌른 곽거병에게 내린 술을 샘에 부어서 모두가 즐거운 모습으로 건배(乾杯)를 하는 모습이다.

 

▲석기에 새겨진 곽거병과 주천의 역사

 

주천공원의 호수를 둘러보고 나오는데 정자에 ‘서한주천성적(西漢酒泉)’이라고 새겨진 석비가 보인다. 석비는 청나라 때 만들어진 것이다. 석비 뒷면에는 곽거병이 이곳 샘물을 술샘으로 만든 이야기를 새겨놓았다. 중국을 여행하다 보면 유적지에 산재한 전설을 역사인양 새겨놓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면 어느덧 역사로 굳어져 버리기 일쑤다.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희한한 상황이 되어버린다. 누가 문제를 제기해 거짓이 드러나도 ‘아니면 말고’라는 식이다. 사마천의 ‘사기’로부터 이곳 석비에 이르기까지 중국인들의 생각은 수천 년을 변함없이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28) '三足烏'는 새발 달린 까마귀가 아니라 세 발 달린 '검은 새',

'삼족오', 우리 민족 고유의 문양?<주천2>

주천 시내를 벗어나 자동차로 20여분을 달리자 정가갑촌(丁家閘村)에 이른다. 개장한 지 얼마 안 된 주천박물관이 번듯한 모습으로 마중한다. 박물관으로 들어서니 입구에 주천박물관의 특징을 요약해서 보여 주는 문구가 보인다. 바로 ‘사주지로(絲綢之路)’다. 사주지로는 실크로드의 중국식 표현이다. 서안에서 로마에 이르는 실크로드가 거대한 지도에 표현되어 있다. 한 무제 시기 장건의 서역 탐방을 시작으로 시대별로 실크로드에서 일어난 중요한 사건들을 정리해 놓았다. 그와 함께 실크로드 지역에서 발굴된 유물과 생활상들을 그림, 사진 등을 곁들여 살펴볼 수 있게 하였는데, 그중에서 독특한 도자기가 눈에 띈다.

 

‘馬娘의 전설’, 당나라의 자유분방함

당나라 때 만든 이 도자기의 형상이 참으로 괴이하다. 아가씨가 말()과 교접하는 모양이다. 당나라 때는 실크로드가 가장 활발했던 시기다. 더불어 당나라는 술과 시가 넘쳐나던 세계 최대의 국가였다. 그런 만큼 매일 밤 상상을 초월하는 밤 문화가 형성되었으리라. 이 도자기가 양반 댁 규수의 방에 있었는지, 기방(妓房)에 있었는지 아니면 도공이 자신의 공방에 두려고 만든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당시 성문화가 상당히 개방적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현종이 며느리였던 양귀비를 취한 희대의 로맨스가 백성들 사이에 널리 알려졌을 테니, 신료들과 평민들도 술의 힘을 빌려 부끄럼 없이 밤거리를 활보하였으리라.

 

▲주천 박물관 모습

 

어느 국가 어느 역사를 보더라도 최고의 번영기 때는 자유분방한 문화를 누렸다. 자유 분방은 문란으로 이어지기 마련인데 반드시 위로부터 시작된다. 권력층이 누구보다 먼저 자유분방함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자유분방함이 문란함으로 기우는 순간 국가도 기울기 시작한다. 인간은 천성적으로 편안하고 분방하게 즐기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한 번 맛을 들이면 좀처럼 벗어나지 못한다. 이렇게 되면 국가 경영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그 사이에 궁전의 기둥은 썩어 문드러진다. 실크로드를 통해 맺어진 동서양의 대제국 당과 로마는, 자유 분방함이 문란함으로 이어짐으로써 결국 멸망으로 치달았다는 것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위진벽화묘에서 ‘삼족오’를 보다

간추린 실크로드의 역사와 유물을 관람하고 박물관 뒤편에 있는 벽화묘를 찾았다. 이 벽화묘는 516국 시대 후량(後凉)의 여광(呂光)이 통치(386399)하던 때 만들어진 것으로 보는데, ‘위진벽화묘(魏晉壁畵墓)’라고 부른다. 반듯하게 지어놓은 박물관과는 다르게 벽화묘는 황폐한 자갈밭에 자그마한 건물 두 개만이 서로 어색한 듯 좌우로 덩그러니 서 있다. 오른쪽 건물은 관리실 겸 기념품을 판매하는 곳이고, 왼쪽의 작은 건물이 묘로 들어가는 입구다. 우중충한 날씨에 자갈밭 위로 몰아치는 바람이 매섭다. 고비사막의 모래바람이 하서주랑으로 몰아치니 그렇다. 6월이 코앞인데도 이 정도니 한 겨울의 바람은 어느 정도일까? 그야말로 천군만마의 병력이 칼을 휘두르며 달려오는 기세가 아닐까?

 

▲정가갑 묘실 입구


안내인이 입구를 열고 불을 켜자 한 사람이 지나갈 정도의 지하묘도가 비스듬히 보인다. 30m를 내려가니 묘실이 나타난다. 묘실은 전실(前室)과 후실(後室)로 나뉘는데, 바닥은 구름모양이 그려진 전석(磚石)을 깔았다. 하늘 나라의 세상임을 표현한 것이다. 방형(方形)모양의 전실은 천장과 사방이 모두 벽화다. 피라미드 모양의 5단으로 된 천장 맨 위 중심에 연화조정(蓮花藻井)이 있고 단계별로 천상(天上), 인간(人間), 지하(地下)의 세계를 표현했다. 천상의 세계는 일월(日月), 동왕공(東王公), 서왕모(西王母), 백록(白鹿), 천마(天馬)를 네 면에 표현해 놓았다.

그런데 동왕공이 그려진 벽화에 삼족오(三足烏)가 함께 그려져 있다. 우리는 삼족오를 고구려의 상징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것이다. 삼족오는 하늘의 중심인 태양에 산다고 여겨졌던 전설의 새로, 고대 동아시아 지역의 태양신을 믿는 민족들이 숭배하던 다리가 3개인 새다. 그런데 다리가 왜 세 개일까?

 

▲정가갑 위진벽화묘의 삼족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동양사상에 근거해 설명하는 것이 가장 설득력이 높다. 즉 태양은 양()이고 숫자 3도 양수(陽數)이므로, 태양에 사는 새의 발도 3개라고 생각한 것이다. 또한 천지인 사상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삼족오에 대한 기록은 중국 고대 지리서인 ‘산해경(山海經)’에 “태양 가운데 까마귀가 있으니 세 발 달린 까마귀이다.(日中有烏謂三足烏也)”라는 기록이 있다.

고고학적 발굴은 그보다 훨씬 이전으로 올라간다. 기원전 4000년경, 신석기시대 앙소문화(仰韶文化) 유적지의 토기에서 삼족오가 발견되었는데, 이는 신석기시대부터 삼족오에 대한 공동체적 믿음이 존재하였다는 증거다. 삼족오에 대한 이야기는 중국이 한나라를 창건한 이후 본격적으로 전파된다. 한나라 때의 화상석이나 유적지에서 발굴되는 비단 등에 삼족오가 두루 보이는 것도 이때부터이기 때문이다.


삼족오는 고대로부터 내려온 우리 민족의 고유한 상징?

우리나라는 고구려 때 삼족오가 나타난다. 각저총, 쌍영총, 천왕지신총 등의 고분벽화에 삼족오가 보인다. 그래서 삼족오가 고구려 고유의 상징문양인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우리 국민들에게 이런 생각을 심어준 결정적 계기는 드라마 ‘주몽’이다.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의 일대기를 그린 것인데, 주몽의 무리가 삼족오의 깃발을 들고 다니거나 처소에 삼족오를 그려놓은 장면을 보며 전 국민이 삼족오를 고구려만의 상징으로 간주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삼족오와 우리 민족은 관계가 없는가? 아니다.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왜냐하면 삼족오는 고구려 훨씬 이전부터 내려온 우리 조상들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우리 조상들은 태양신을 믿는 천손사상을 기본으로 천지인 삼재(三才)를 중시한 민족이다. 오늘날도 자랑스럽게 사용하는 한글이 바로 ‘천지인’의 결합체가 아니던가.

 

▲중국 화상석의 삼족오

 

고대 북방유목민족은 기후와 환경의 변화로 한 곳에 정착하지 않았다. 삶 자체가 이동의 연속이었다. 길을 통해 이동하고 길이 없으면 만들어서 나아갔다. 이 과정에서 먼저 정착해 살아가던 토착세력을 정복하거나 통합하며 부족국가를 건설하였다. 이들은 지금의 중국, 한반도, 일본 등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한나라 때의 화상석에 삼족오가 나타나는 지역은 산동과 하남, 하북 등 중국의 동북부지역이다.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 초기 삼족오의 분포지역이 동북아시아라는 것을 증명한다. 동북아시아는 오래전부터 고조선을 필두로 우리 민족의 거주지였다. 이런 사실들로 미루어볼 때, 삼족오가 우리 민족의 고유한 상징이라는 이야기는 더욱 설득력이 있다. 그러니 우리 민족의 원류로부터 계속 사랑받던 삼족오가 고구려 때에 보다 일반화된 것으로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그렇다면 정가갑 위진벽화묘에 그려진 삼족오는 어떻게 전해졌을까? 그것은 고구려의 대외관계 속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372, 전진(前秦)의 승려 순도(順道)가 고구려에 불교를 전해준다. 전진은 중국의 왕조로 516국시대 초반에 동진(東晋)과 함께 중국을 양분한 국가다. 전성기를 이끈 왕은 부건(符健)인데 서쪽으로는 감숙성을 포함하여 서역의 실크로드를 장악하고, 동쪽으로는 요동에 이르는 거대한 지역을 차지해 고구려와 국경을 맞댈 정도였다. 하지만 고구려와 전진은 동맹을 맺고 항상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이런 동맹관계는 서역의 지리와 문화를 알고 싶어 하던 고구려에게 매우 중요한 것이다.


위진벽화묘의 삼족오, 길을 통한 문명교류의 흔적

국가 간의 동맹은 많은 교류를 수반한다. 교역과 함께 문화도 상호 교류되는데 전진은 고구려에게 불교를 전하고, 국운상승기인 고구려도 전진에게 삼족오를 전하게 되었던 것은 아닐까? 고구려에 불교를 전한 지 10여 년이 지난 383, 전진이 멸망하고 감숙 지역에는 5량이 난립한다. 전진의 왕 부견의 수하였던 여광이 후량(後凉)을 세웠는데 그 도읍이 주천이다. 후량 때 건설된 위진벽화묘에 삼족오가 나타나는 것은, 전진 때 전래된 삼족오가 감숙 지역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왕조가 교체된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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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세기 고구려의 고분벽화와 감숙성의 고분벽화에서 나타나는 동질성은 이와 같은 교류의 산물인 것이다. 벽화의 구상이 고구려의 덕흥리 고분벽화와 똑 닮았다. 그런데 동질성은 벽화만이 아니다. 무덤의 중앙에 위치하는 묘도와 전 후실의 종렬배치, 부장품 등이 고구려와 너무도 흡사하다. 중국 어디를 찾아봐도 이처럼 고구려와 비슷한 무덤 구조는 없다. 하지만 멸망과 난립의 연속이었던 516국시대가 저물고 수나라가 통일 제국을 건설한 뒤에는 삼족오가 자취를 감춘다. 수나라는 고구려와 적대 관계였기에 교류가 끊어지면서 삼족오도 더 이상 그려질 수 없었을 것이다.

 

▲고구려 벽화의 삼족오. 머리에 볏이 있다.

 

오늘날은 우리 상고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전환이 필요한 시기다. 비단 중국의 동북공정 때문만은 아니다. 일제가 자행한 역사 왜곡으로 인한 왜곡된 역사의 파편들이 우리 민족을 오랫동안 괴롭혀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즘 들어 더 문제가 되는 것은, 국사를 사회과 과목의 일부분으로 평가절하하고 필수과목에서 제외하는 등 우리 스스로가 우리의 역사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점이다.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해서도 말로만 ‘허구’요 ‘역사왜곡’이라며 외칠 뿐, 정작 필요한 조치는 취하지 못하고 뒷짐만 지고 있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이에 더해 동아시아를 지배했던 민족이 바로 우리 조상이었고 그 조상들이 세운 나라가 배달국, 단군조선 등의 고조선 시기를 거쳐 부여와 고구려로 이어지고 이는 다시 발해와 고려, 조선으로 면면히 이어져왔음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중국 동북부 요하지역에서 발굴된 다량의 홍산문화 유적지가 바로 이러한 사실들을 입증해주는 자료임에도 우리는 연구조차 꺼려한다. 그리하여 아직도 한 무제가 설치한 4군이 한반도의 북한지역이요, 고구려의 최대 영역이 지금의 요하를 넘지 못하였으며, 수도인 평양성이 지금의 평양이라고 우기는 어처구니없는 아집 속에서 우리의 상고사는 멍들고 있다. 우리 스스로가 깨달으려 하지 않으니 더 무엇하리요.


삼족오는 까마귀가 아니라 ‘봉황’이어야

삼족오의 오()가 까마귀라는 말도 재고해야 한다. 우리 민족은 까마귀를 ‘효조(孝鳥)’라고 했다. 그러면 삼족오의 ‘오()’는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오()’는 오골계(烏骨鷄), 오죽(烏竹), 오석(烏石)처럼 예로부터 ‘검다’는 말로 쓰였다. 이렇게 볼 때 삼족오는 까마귀가 아니라 세 발 달린 ‘검은 새’를 말하며, ‘검다’는 것은 태양의 흑점을 상징한다. 그런데 까마귀가 아니라면 그 ‘새’는 어떤 새일까? 그 새는 봉황(鳳凰)이다. 중국과 일본에서 보이는 삼족오와 다르게 우리의 삼족오는 머리에 볏이 있다. 중국인들이 용의 자손이라 말하듯 우리는 봉황의 자손이다. 봉황은 동이족이 섬겨온 신조(神鳥)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국가의 문양이 봉황인 것은 이를 대대로 이어받은 것이다. ‘ᄇᆞᆰ’, ‘알’ 등의 문자도 태양과 새와 관련된 우리의 고유어다. 그러므로 삼족오는 태양 속에 사는 ‘세 발 달린 검은 봉황’인 것이다.

 

(29) 공자는 3개월 동안 고기맛을 잊을 정도로 음악에 빠졌다

악기 '장고'가 우리 것이 아니고 서역에서 전해온 것이라고?<주천3 >

정가갑 벽화묘에는 묘주와 직접 연관된 벽화도 많다. 생활도, 연회도, 행렬도가 있는데 그중 연회도에는 4명의 악사와 2명의 곡예사, 2명의 무용수가 등장한다. 4명의 악사는 거문고를 연주하는 남자와 비파, 긴피리, 장고를 연주하는 3명의 여악사로 구분된다. 그중 우리의 악기라고 생각되는 장고에 눈이 간다.

“어! 저것은 장고가 아닌가?
“맞아요. 장고입니다. 서역에서 전래된 악기이지요.
“서역?
“네. 장고뿐 아니라 비파나 피리도 다 서역에서 전래된 것입니다.

 

▲장가압 벽화묘에 그려진 요고(점선으로 표시된 부분)

 

장고는 우리의 대중적인 악기다. 그런데 장고가 우리의 악기가 아니라니. 의아하다. 하지만 사실이 그렇다. 고구려의 안악 3호분 벽화에는 정가갑 벽화와 똑같은 순서로 악사가 그려져 있는데 마지막에 장고가 없다. 고대 우리나라의 향악편성을 보아도 삼현삼죽(三絃三竹)이라 하여 거문고, 가야금, 향비파, 대금, 중금, 소금에 큰북(大鼓)과 박()이 포함될 뿐 장고는 없다. 장고는 중국의 악기에도 없는데, 문헌에는 ‘요고(腰鼓)’라고 했다. 허리 부분이 가늘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 듯하다. ‘악학궤범’에 보면, “요고의 통은 큰 것은 질그릇으로, 작은 것은 나무로 만든다. 머리는 모두 넓고 허리는 가늘다. 오른쪽은 채로 치고 왼쪽은 손으로 친다. 후세에는 이것을 장고라고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서역인의 심금을 울리는 ‘장고’로 발전

우리나라에 장고가 전해진 것은 고려시대로 당시 중국은 송나라 때였다. 초기에는 조정의 당악에 쓰였지만 그 후, 정악뿐만 아니라 민속악에까지도 널리 사용되었다. 장구는 오늘날 우리나라의 가장 기본적인 악기가 되었는데, 이는 전래 당시의 요고를 우리의 음악과 체질에 맞게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신을 부르는 소리’, ‘신과 동화되는 소리’라는 사물놀이로 세계인들을 깜짝 놀라게 하였으니 그 핵심 악기가 바로 장고인 것이다. 이처럼 서역에서 중국을 거쳐 전래된 요고는 우리나라에서 세계인의 심금을 울리는 장고로 다시 태어났다.

대금도 마찬가지다. ‘삼국사기’에 “중국의 당적(唐笛)을 모방한 것”이라고 했는데, 이는 당시 서역의 횡적(橫笛)이 중국으로 전해진 것을 몰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국은 서역에서 전래된 악기의 모양에 변화가 없는 반면, 우리나라는 보다 길어지고 커졌다. 이는 무엇 때문일까? 신체적으로 서역인보다 작은 체구임에도 악기는 왜 커졌을까? 그것은 우리의 전통음악이 저음을 위주로 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악기가 짧고 작으면 고음을, 길고 크면 저음에 강하다. 중국의 악기가 우리나라로 전래되면서 길고 커진 것은 저음 위주의 우리 음악에 맞추기 위함이다. 우리나라에 전래된 대금은 중국의 당적(42)보다 길어졌고(61), 장고도 고구려 때의 요고(42)보다 훨씬 길고(70) 커졌다. 시대가 지날수록 우리의 음악성에 맞게 변형된 것이다. 이는 두 나라가 선호하는 악기를 비교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중국은 금(), 비파, 호적(胡笛) 등 고음역 악기를 선호하고, 우리는 거문고, 대금, 아쟁 같은 저음역의 악기를 선호한다. 거문고와 가야금도 크기가 변하면서 오늘에 이르렀을 것인데, 비파는 고음 위주의 악기인 까닭에 우리나라에서는 도태된 것이다.


공자는 3개월 동안 고기맛을 잊을 정도로 음악에 빠졌다

공자는 음악을 좋아했다. 음악은 곧 공자의 인학(仁學)을 완성하는 최고 경지였기 때문이다. ‘논어(論語)’ ‘태백(泰伯)’편의 “시를 배워 일어나고, 예를 배워 바로 서며, 음악으로 완성한다.”라고 한 것에서도 잘 나타난다. 공자는 순임금의 음악인 소()를 좋아했다. 3개월 동안 고기맛을 잊을 정도로 심취했으니, 음악에 상당한 조예가 깊었음에 분명하다. 그리고 소에 대해 평하길, “소리의 아름다움이 지극할 뿐만 아니라, 그 내용의 선함도 지극하다.”라고 했다.

 

▲공자가 순임금의 음악 소를 들은 곳

 

요순시대는 태평성대였다. 순임금의 음악은 고음보다는 저음, 빠름보다는 느림이었을 것이다. 우리 민족이 추구한 음악과 같은 것이다. 우리 민족은 음악을 좋아하고 또한 즐길 줄 알았다.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라는 공자의 말 그대로다. 이로 미루어볼 때, 전 세계인을 사로잡는 K-POP도 유구히 내려온 우리 민족의 천재적인 음악성에서 비롯된 것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

정가갑 벽화묘를 나오니 날은 더욱 흐리고 어두워졌다. 갈 길이 바쁜지라 곧바로 차에 올랐다. 15분 정도 떨어진 신성(新城) 벽화묘를 하나 더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비가 귀한 지역에 빗방울이 떨어진다. 하늘이 먼 이역에서 찾아온 손님에게 최고의 예우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은 마냥 기쁘다.

신성 벽화묘도 위진(魏晉)시대의 묘다. 1972년에 발굴을 시작했는데 총 13기의 묘 가운데 8기의 묘에서 660개의 그림이 그려진 벽돌이 출토되었다. 그런데 출토된 그림들이 모두 당시 사람들의 생활을 소박하고 사실적이며 생동감 있게 표현했다. 그중에서도 당시의 농업과 여가문화가 반영된 화상전(畵像磚)은 역사적으로도 가치가 높다.


고고분야의 진정한 프로는 ‘도굴꾼’

정가갑 묘처럼 자갈밭에 우뚝 선 입구로 들어가니 지하 30여 미터의 묘도가 나온다. 정가갑의 묘가 전후실로 되어 있는 데 반해, 이곳은 전실, 중실, 후실로 구성되어 있다. 중국의 대부분의 묘들은 도굴의 아픔을 갖고 있다. 신성 벽화묘 역시 도굴 당하였는데 도굴꾼들이 파고 들어온 구멍이 묘실 입구다. 돔형으로 만든 묘실을 천장이 아닌 출입문 바로 위로 뚫었다는 것은 묘실의 구조를 잘 아는 전문가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 하기야 역사적인 유물의 발굴지에서 위치 선정이나 입구를 찾아내는 진정한 프로는 도굴꾼이라고 하지 않던가.

 

▲신성 벽화묘 부분

 

묘실(墓室)의 그림들은 대부분 생활상을 묘사한 것들인데, 수렵, 출타, 접객, 농경, 양잠, 상업, 가축도살, 요리 등 다양하다. 중요한 것은 흔히 보이는 내세의 안녕을 비는 신화적 소재가 없다는 것이다. 위진 시대는 조조가 위세를 떨치던 삼국시대를 거쳐 사마염이 위나라를 이어받아 진()을 세운 시기다. 당시 조조의 위나라는 이곳까지 영토를 넓혔는데, 워낙 변방인지라 문화적 수준은 중원보다 훨씬 뒤졌을 것이다. 또한 수시로 벌어지는 전쟁터에서 조상을 모시는 일은 그리 여유롭고 평안한 것은 못된다. 묘실의 벽화가 벽돌 단위로 구성된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리라. 벽돌의 크기가 가로 34.5센티미터에 세로 17센티미터밖에 되지 않으니 그곳에 신화적인 소재를 담기에는 한계가 있다.

그런데 이채로운 그림이 두 개 있다. 하나는 황소에 써레를 사용하여 농사짓는 모습인데, 이는 당시 사람들이 이미 선진적인 농법을 활용하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다른 하나는 뽕나무에서 뽕잎을 채취하는 그림이다. 양잠을 했으니 뽕나무 그림이 있는 것은 당연하지만, 이 그림이 정가갑 벽화묘에도 있다는 게 특이하다. 이곳은 메마른 사막인데 뽕나무 그림이 무엇이란 말인가? 하지만 이는 지금의 기후가 메마른 것이지 516국시대만 하더라도 뽕나무가 자랄 만큼 습윤 기후지대였다는 의미다.

 

▲써래질하는 모습의 화상석


文明, 자연이 베푸는 혜택을 파괴하고 얻은 산물

고대에 있어 살기 좋은 곳은 삼림이 울창한 곳이었다. 이곳은 물이 풍부하고 기후도 좋아 먹을거리도 풍성했다. 때문에 사람들도 살기 좋은 곳을 찾아 이곳으로 모이게 되었다. 씨족공동체사회에서 부족국가를 거쳐 고대국가 체제를 완성한 사람들은 국가의 위상에 맞는 거대한 건축물들을 짓기 시작했다. 삼림의 파괴가 시작된 것이다. 삼림의 파괴는 정착생활을 하면서 더욱 심해졌다. 이는 농작물 경작이 삼림을 태워 얻은 화전(火田)으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고대문명이 발달한 곳은 황하유역과 섬서, 산서, 하남, 하북 등 모두 북방지역이다. 이 지역들은 서주(西周) 때만 해도 삼림이 울창한 곳이었다. ‘맹자’ ‘등문공()’편에는 이를 증명하는 글귀가 보인다.

 

▲뽕나무에서 뽕잎 채취하는 화상석

 

“숲, , 늪지가 많고 날짐승과 들짐승이 모여들었다. (중략) 주공이 무왕을 도와 주()를 물리치고 엄()나라를 토벌했으며, 그 임금을 3년 만에 죽이고 비렴(飛廉)을 바다로 쫓아냈다. 또한 50개의 나라를 정벌하고 호랑이, 표범, 물소, 코끼리 등을 멀리 몰아내니 천하가 기뻐했다.

삼림지대에 사는 동물들이 도처에 있었음은 고고학 발굴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전국시대에 제작된 청동기에는 코끼리, 물소, 호랑이, 표범 등이 많이 보인다. 하남성을 ‘예주(豫州)’라고 불렀는데, ‘예’란 커다란 코끼리를 뜻하는 글자다. 하남성도 코끼리가 살 정도로 삼림이 울창한 지역이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죽림칠현’이나 판다를 봐도 알 수 있듯이 북방지역에도 대나무가 울창했다. 그 양이 얼마나 많았으면 서한 때 황하의 제방이 터졌을 때 대나무로 방죽을 만들어 물막이로 사용했다는 기록이 전해지겠는가.

수천 년에 걸쳐 여러 나라가 흥망 하는 동안 삼림은 황폐해졌다. 그 결과 북방지역의 풍요로운 자연환경은 급속히 사라지고, 옥토는 점차 모래와 자갈뿐인 황무지로 바뀌었다. 인간들의 욕심이 인간을 더욱 힘들게 만든 것이다.

신성 벽화묘를 보고 나오니 바람이 거세게 분다. 이 거센 바람을 피하는 길은 빨리 하서주랑을 벗어나는 것뿐이다. 옛 상인과 병사 등이 그랬듯이 가욕관에 도착해 비바람에 절은 하루의 피로를 푸는 것이다. 가욕관으로 가는 짧은 시간의 도로 주변도 온통 황폐한 평원이다. 산림의 파괴로 생긴 빈자리를 바람이 모래와 돌을 실어와 채운 것이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인간이 만든 문명의 흔적인 성벽과 봉수대도 바람이 실어온 모래와 돌에 묻히고 허물어졌다. 인간사도 결국 자연을 벗어날 수 없음을 자연은 저토록 처절하게 알려주는 것인가.

 

(30) 서세동점(西勢東漸) 이전 동세서점(東勢西漸) 있었다

만리장성 서쪽 끝 '가욕관'에 오르다<가욕관1>

 

만리장성의 서쪽 끝은 가욕관이다. 아침 일찍 시내를 나서니 만리장성의 고장임을 알리는 듯, 도로변에는 가욕관과 장성 풍경 그림이 화려하다. 하지만 그것을 보는 것도 잠시. 거리는 온통 자전거와 오토바이를 타고 출근하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그야말로 셀 수 없을 정도다. 그런데 이 많은 사람이 모두 같은 회사로 출근한다. 바로 서부지역 최대의 철강회사인 주천철강공사(酒泉鋼鐵公司). 1958년에 세워진 이 공사는 철강 콤비나트를 형성하며 거대한 철강 공단으로 발전하였는데, 그 발전 속도가 빨라 1965년에는 가욕관 시로 독립하였다. 하지만 철강회사의 이름은 당시의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가욕관, 서부지역 최대의 철강 도시

하늘이 온통 잿빛이다. 이는 거센 황토 바람이 불어서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제철소의 굴뚝에서 뿜어 나오는 연기 탓이다. 제철소에는 모두 4만여 명이 근무한다고 하니 아침 출근길의 광경이 실감 난다. 근로자가 4만여 명이면 그 가족들 또한 몇만 명일 터. 가욕관 시는 이제 만리장성의 서쪽 끝, 변방에서 벗어나 서부지역 최대의 철강 도시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다.

 

▲가욕관 입구

 

수천 명의 노동자가 밀물처럼 제철소로 몰려드는 길을 빠져나와 가욕관으로 향한다. 시내를 벗어나도 하늘은 여전히 잿빛이다. 잿빛 하늘도 아랑곳없이 제철소에서는 검은 연기를 펑펑 쏟아내고 있다. 그 모습을 보자니 공해의 터널을 지나가는 것 같아 호흡이 저절로 멈춰진다. 하지만 굴뚝산업으로 경제개발에 열을 올리는 중국에서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줄이자는 식으로 환경문제를 논하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다. 제재할 마음은커녕 더 독려할 판이니 말이다.

가욕관은 시내에서 남서쪽으로 6km 지점에 있다. 쓰촨성 서안에서 감 숙성의 이곳까지는 약 1100km 협곡인데, 가욕관은 그중에서도 가장 좁은 곳에 있다. 기련산에서 뻗어 나온 문수산과 흑산 사이 15킬로미터의 좁은 폭에 있는 가욕관에 도착하니 그야말로 당당한 위용에 압도된다. 고비사막을 바라보며 좌우 산맥 사이를 굳건히 가로막는 가욕관은 한눈에도 철옹성임을 알 수 있다.


만리장성 서쪽 끝 ‘天下第一雄關’에 오르다

가욕관이라는 이름은 가욕산에서 온 것이다. 가욕관 성루는 ‘천하제일웅관(天下第一雄關)’이라는 명칭답게 그 자태가 웅장하다. 성루에 올라 사방을 살펴본다. 그 위세가 마치 홀로 장판교를 막아선 채 조조군을 호통치는 장비와도 같다. 아니 그보다 더하다. 세계의 지붕이라는 파미르고원에서부터 북쪽의 하늘을 치받으며 내달려온 톈산산맥과 난주에서부터 이어 달려온 기련산맥이 만나 바람 길목도 안 되는 천하의 요충지에 성벽을 틀고 서 있기 때문이다. 5,000미터가 넘는 거대한 산맥들을 마주 보고 있는 가욕관은 분명히 천하의 웅관임에 틀림없다. 청나라 때의 시인 악종기(岳鐘琪)도 가욕관 성루에 올라 감회를 읊었다.

 

▲가욕관에서 바라본 만리장성


주천은 지금도 중요한 요충지酒泉今重鎭
천연의 요새로 예부터 이름 높았는데,天險古名州
들판엔 가축들뿐 인가는 없어도牧野无新幕
변방을 방어하는 가욕관은 굳건하다네.籌邊有舊樓
마른 바람은 성벽에 부딪혀 되돌아 날고風旋沙磧動
하늘은 바닷가의 구름만 띄우는데天接海雲浮
장안으로 가는 길 돌이켜보매, 回首長安路
봉화연기 만 리 가을을 태우네. 烽烟萬里秋


가욕관은 만리장성과 실크로드가 지나가는 곳으로 예로부터 교통과 군사요충지로 중시되었다. 그러나 이곳에 성을 쌓고 관문을 설치한 것은 명나라 때인 14세기 이후다. 가욕관의 성벽은 벽돌을 쌓아 만든 외성과 흙으로 만든 내성의 이중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군사방위체제에 따라 건설된 것이기 때문이다.

중심성인 내성은 1372년에 명나라 대장군 풍승(馮勝)이 당시 하서주랑까지 세력을 뻗친 몽골군을 토벌하고 재건축한 것이다. 가욕관은 이중 성벽, 옹성과 나성, 3개의 성루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방어가 주목적이니 설계부터 치밀하고 공사도 매우 견고하게 하였다. 성루의 성문은 돌을 깎아 만들었고, 성벽은 황토를 잘 다져서 쌓았다. 황토도 엄선하여 햇볕에 말려 만든 가루를 체로 거르고 찹쌀가루를 섞어 성벽에 발랐다. 이런 수고로움 덕분에 가욕관은 수백 년의 풍파 속에서도 여전히 견고하고 튼튼한 모습을 자랑하고 있다.

가욕관 외성의 동문으로 들어서니 가장 먼저 석비(石碑)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대략 3미터쯤 되어 보이는 석비에는 ‘천하웅관(天下雄關)’이라고 일필휘지한 행서체 글씨가 장쾌하다. 이 비는 청나라 때인 1809년에 세워진 것이다. 당시 숙주(肅州) 총병(總兵)인 이연신(李廷臣)이 새벽에 가욕관을 시찰하다가 그 웅장함에 매료되어 즉석에서 4글자를 썼는데, 후에 이를 새겨 비로 만든 것이다. 조금 걸어 들어가니 문창각(文昌閣)과 관제묘(關帝廟), 희대(戱台) 등 부속건물이 눈에 띈다. 모두가 명나라 때 지어진 것인데 가욕관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임을 자랑하는 문창각이 고색창연한 빛을 발한다.

 

▲천하웅관비


도교와 관우, 천하웅관을 지키는 民과 軍의 힘

문창각은 도교적인 건물이다. 문창(文昌)은 북두칠성을 이루는 6개의 별을 합해 문창궁(文昌宮)으로 부르는 데서 연유한 것으로, 문운(文運)과 벼슬운을 관장하는 문창제군(文昌帝君)이라는 믿음으로 발전한다. 수나라 때부터 시작된 과거(科擧)는 송나라 때 이르러 경쟁이 치열하였다. 그러자 합격을 열망하던 과거 준비생들은 자연스럽게 신을 받들게 되었고, 원나라 때에 이르러 문창제군은 국가로부터 과거신(科擧神)으로 책봉된다. 원나라도 과거를 중시하였고, 민간에서는 도교가 성행하였기 때문이다.


북두칠성의 6번째 별을 녹성(祿星)이라 부르는데, 공명(功名)과 녹봉(祿俸)을 관장하는 별이다. 고대 봉건사회에서 선비들의 출세 길은 오로지 과거를 거쳐 관리가 되고 부를 축적하는 것이었다. 과거시험은 문장을 짓는 시험이기 때문에 선비들은 녹신을 숭배하게 되었고, 그 결과 녹신은 모든 선비의 운명을 좌우하는 문신(文神)이 된 것이다. 관리가 되어 국가로부터 받는 급여를 녹봉(祿俸)이라 하는 것도 이런 의미에서 생긴 것이다.

 

▲관제묘(왼쪽)와 문창각

 

그런데 언제나 전시체제를 유지하며 긴장 속에서 생활해야 하는 변방국경지대에 어째서 문창각이 있는 것일까? 바로 옆에 세워진 관제묘가 그 답을 제시한다. 관제묘는 관우를 모신 사당이다. 관우는 삼국시대 촉한의 명장이다. 관우는 유비, 장비와 함께 의형제를 맺고 삼국이 정립하던 시기 최대의 용맹을 떨친 장수다. 또한 1800여년간 내려온 ‘삼국지연의’에서 제갈량과 함께 최고의 주인공으로 꼽힌다. 관우가 평생을 중시한 것은 장수로서의 충의(忠義)이다. 이는 중국의 왕조가 바뀔 때마다 위정자들이 혼란을 수습하는 방책으로써 이용했는데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관우 숭배사상이 발전하였고, 그 결과 관우는 마침내 무신(武神)의 반열에 오른다. 무신 관우의 영험을 받아 전쟁서 승리하기를 바라는 마음에 관제묘를 만든 것이고, 그와 짝을 이루는 문창각은 도교 숭배가 일반적이던 당시에 군인들과 민간인들의 일체적 단결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무신인 관우에 대비하는 문신은 공자다. 그런데 관제묘 옆에 공자의 사당인 공묘(孔廟) 대신 문창각을 세운 것은 바로 도교신앙이 민간에 널리 유포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명나라 때는 문()을 숭배했기 때문에 학문 또한 게을리하지 않기를 바라는 뜻도 담겨 있었으리라.

 

▲졸고있는 장수를 표현한 유격장군부

 

희대(戱臺)는 공연장이다. 전장에서의 공포와 고독, 우울함 등을 없애고 사기를 높이는 방법은 근심과 걱정을 없애고 흥을 돋우는 것이다. 공연은 당시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는 최고의 문화예술이었다. 그렇다면 어떤 공연이 이루어졌을까? 아마도 단골 메뉴는 관우가 조조군을 통쾌하게 무찌르는 장면일 것이다. 그리고 가족상봉의 염원을 뜨거운 눈물과 함께 쏟아냈을 것이다. 무대 앞 공터에 서니, 당시 공연을 보며 환호하고 탄식했을 병사들의 온기가 느껴진다. 이를 알려주기라도 하듯 양쪽 모퉁이의 대련(對聯) 글귀가 나그네의 마음을 애잔하게 한다.


오매불망 고향 탄식은 무대 위에 넘쳐나고 离合悲歡演往事
세상사 인간 됨됨이도 확실하게 알 수 있구나 愚賢忠佞認當場

서세동점이 있기 전에 동세서점이 있었다

 

가욕관 외성에서 내성으로 들어가는 동쪽 문은 광화문(光化門)이다. 반대편 서쪽에는 유원문(柔遠門)이 있다. 문 위에는 각각 성루가 있는데, 성벽이 건축된 지 100여 년이 지난 1496년에 축조한 것이다. 동쪽 문이 광화문인 것은 동쪽, 즉 중국으로부터 상서로운 기운이 솟아오른다는 의미다. 서쪽 문은 어떤 의미일까? 부드러움이 멀리 이어진다는 말인데, 이는 중화문명이 서역의 모든 지역에 전파되기를 바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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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 서세동점(西勢東漸)이 있기 오래전에 이미 중국은 동세서점(東勢西漸)을 염원한 것이다. 따지고 보면 실크로드의 핵심은 ‘비단’을 수출한 중국이었기에 이미 동세서점이 이루어진 것이고, 명나라 때는 이를 영원히 이어가기를 바라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산업혁명과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발전한 서구문명은 급기야 중화문명으로 대표되는 아시아를 장악하게 되었으니, 실로 서역 멀리까지 날아간 상서로운 기운이 부메랑이 되어 기세등등하던 중국의 발등을 찍은 것이다.

 

▲돌길이 바퀴자국으로 패인 가욕관 성문

 

광화문으로 들어가니 유격장군부(游擊將軍府)가 있다. 이는 가욕관의 지휘소로서 가장 핵심적인 장소다. 적의 침입 시 방어를 지휘하는 것은 물론 이곳을 드나드는 수많은 상인과 여행자들을 검사하고 서역의 중요한 정보를 수집전달하는 역할을 하였다. 당시의 지휘소를 꾸며놓았는데 안을 들여다보니 밀랍으로 만든 인형의 모습이 흥미롭다. 장교인 듯한 자가 피곤함에 겨워,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서 조는 모습이 너무도 생동감이 넘친다. 뒤쪽 벽에는 ‘가욕관 수비도’라는 지도가 붙어 있다. 가욕관이 천하제일의 철옹성인 까닭에 졸고 있어도 걱정이 없다는 뜻일까? 아니면 과중한 업무에 잠시 눈을 감고 피로를 푸는 것일까? 그도 아니면 점심 후 나른함을 못 이겨 낮잠에 빠진 것일까? 현실적인 모습을 아주 생동감 있게 표현하여 오가는 이들마다 한 번씩 더 살펴보게 한다.

두 번째 성루가 있는 유원문에 들어서니 성벽으로 오르는 경사로가 있다. 그런데 웬만한 수레도 오를 수 있는 넓이다. 그래서 일명 마도(馬道)라고 부른다. 누각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니 그야말로 일망무제(一望無際), 널따란 사막이 끝없이 광활하고 그 너머로 희미한 만년설산이 구름인 듯 아득하다. 그 어떤 용감한 병사라 하더라도 저처럼 험준한 산맥을 넘어올 수 없고, 모래폭풍 거센 사막을 건너오기 어렵다. 설령, 산맥과 사막을 헤쳐 나왔다 할지라도 길목을 지키고 서 있는 높다란 가욕관을 보는 순간, 기진맥진한 몸이 순식간에 무너지고 말 것이다. 그야말로 거침없이 당당한 가욕관의 위용이다. 100만 대군이 와도 공략하지 못할 난공불락의 요새인 것이다.


벽돌 한 장에도 전설이 깃들고

사람의 인기척은 보이지 않는 황무지 벌판. 하지만 수천 년의 역사 속에 스러져간 말발굽과 군사들의 함성이 이곳을 향해 달려오는 듯하다. 한참 동안 서쪽을 응시하다가 옹성 내부로 눈을 돌리는데, 성벽 끝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벽돌 한 장이 달랑 놓여 있다. 무슨 벽돌이기에 한 장만 있을까. 알고 보니 전설이 담겨 있는 벽돌이다. 벽돌공이 가욕관을 설계한 자에게 어느 정도의 벽돌이 필요한가를 물었는데 99 9,999개였다고 한다. 벽돌공은 만약을 위해 1개의 여분을 포함해 100만 개의 벽돌을 준비하였다. 그런데 가욕관을 완성하고 보니 정확하게 벽돌 한 장만 남았다고 한다. 가욕관이 얼마나 치밀한 계획에 따라 만든 것인지를 재미있게 알려주는 이야기인데 사실 벽돌 수를 예측하기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작업 중에 깨지거나 잘못 사용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분은 많을수록 좋다. 하지만 위의 말대로라면 공사가 한 치의 착오도 없이 진행되어야만 가능하다. 벽돌의 여분이 많으면 다른 곳에 사용하면 그만이다. 벽돌 한 장이라도 불량 내는 일 없이 어찌 공사를 완성할 수 있겠는가.

 

▲가욕관 위용

성루를 살펴보고 내려와 드디어 가욕관의 정문을 나선다. 관문은 마차 두 대가 충분히 다닐 수 있는 돌길인데 바닥은 수레바퀴 자국이 움푹 패 있다. 얼마나 많은 사람과 수레가 이곳을 지나갔기에 단단한 돌길이 마치 밀가루를 눌러놓은 것처럼 선명하다는 말인가. 하기야 서역으로 오가려면 반드시 이 관문을 지나야만 했기에 각각의 사연을 담고 오갔을 수많은 역사가 저토록 깊고 선명한 자국을 남겨놓은 것이리라. 나도 수레자국을 밟으며 1,000년 전 순례자의 마음으로 관문을 나선다.

 

(31) 萬里(만리)가 2만km?

동쪽으로 헤이룽장성~서쪽으로 신강성 하미까지라니!<가욕관2>

“長城의 확장은 中華魂을 높이는 것이다”

열다섯에 전쟁터로 출정하여 十五從軍征
여든 살이 되어서야 돌아오네.八十始得歸
동네 어귀서 마을 사람을 만나道逢鄕里人
우리 집에 누가 사느냐 물었더니家中有阿誰
멀리 보이는 것이 당신 집일 거라는데遙看是君家
소나무 잣나무 사이로 무덤만 이어있네.松柏塚纍纍

장성의 나라, 중국

 

중국의 역사는 장성의 역사다. 장성은 오랑캐를 물리치고 중원을 확장하는데 필요한 도구였다. 그리하여 성을 쌓고 성들을 이어 철벽의 울타리를 확장시켜 나갔다. 춘추시대인 기원전 8세기부터 시작된 장성은 그 길이만큼이나 기나긴 역사를 이어왔다. 그리하여 동쪽의 바다에서 서쪽의 모래사막까지 그야말로 거대한 성을 쌓았다. 그리고 북방 유목민의 침략을 막았다. 거대한 장성을 지키는 것은 막대한 인원을 필요로 한다. 열다섯의 청년이 되면 언제 올지 모르는 전쟁터로 징집된다. 살아서 오기도 쉽지 않고 죽어서 고향에 묻히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장성은 이렇게 장정들의 피로 세워지고 지켜진 것이니, 장성의 역사는 곧 전쟁의 역사인 것이다.

만리장성은 중국이 세계적으로 자랑하는 문화유산이다. 그래서인가. 가욕관 안에는 장성박물관이 있다. 만리장성에 대한 중국의 생각이 궁금하여 발걸음을 재촉한다.

 

▲가욕관에 위치한 만리장성에 위용

 

1988년에 세워진 이 박물관은 중국 최초로 만리장성과 관련된 것만을 다룬 전문박물관이다. 입구에 들어서니 ‘중국의 혼(中華之魂)’이라고 새긴 비석이 톈산산맥 그림을 배경으로 우뚝하다. ‘위대한 장성’이라는 주제로 춘추전국시대부터 명나라 때까지 3000년 장성의 역사를 모두 4개의 시대로 나누어 전시하고 있는데, 모형과 도표, 사진 등을 적절히 활용하여 많은 자료와 함께 장성의 발전과정을 살펴볼 수 있게 하였다.


고무줄처럼 뻗어가는 萬里長城 길이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만리장성을 나타낸 지도가 이상하다.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 산해관이 아니라 국경지역인 단둥을 거쳐 헤이룽장성의 목단강까지 이어져 있다. 국경지역인 단둥에 있는 고구려 박작성은 명나라 때의 호산산성으로 그럴싸하게 둔갑해 있다. 그 앞에서는 중국인 가이드가 내국인들에게 장성의 길이에 대해 열심히 설명하고 있는데 모두가 동조하는 듯한 표정이다.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다.

장성은 중국의 역대 왕조들이 북방 유목민족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건축한 군사시설이다. 이는 고대의 여러 시기에 걸쳐 만들어진 것으로, 전국을 통일한 진시황이 몽념(蒙恬)으로 하여금 성들을 연결하여 장성을 만들게 하였다. 사마천의 ‘사기’ ‘몽념열전’을 보면 이렇다.

“진나라는 천하를 병합한 후, 몽념에게 30만 군사를 이끌고 북쪽의 융적을 내쫓게 하여 하남(河南)을 차지한 뒤 장성을 쌓게 하였다. 험난한 지형을 이용하여 성곽을 쌓았는데 임조(臨洮)에서 요동(遼東)까지의 길이가 1만여 리가 되었다.

 

▲중국이 새롭게 완성한 만리장성


당나라 때 시인인 왕굉(王宏)은 ‘종군행(從軍行)’이란 시를 지었다. 그중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진시황이 장성 삼천리를 쌓았는데秦王築城三千里
서쪽의 임조에서 동쪽의 요수까지다西自臨洮東遼水

遼水의 위치 변화로 고구려 강역이 축소되었다

진시황이 쌓은 장성이 삼천리라고 하니 ‘사기’의 1만 리 하고는 대단히 차이가 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요수의 위치 때문이다. 고대 요수는 산시성(山西省)의 북쪽 대동(大同)시를 지나는 상건하(桑乾河)를 가리켰다. 하지만 욕심 때문일까? 시간이 지나면서 중국인들은 점점 더 동쪽에 있는 강을 요수로 간주하게 되었다. 그 결과 고구려 때의 요수는 허베이성의 난하(鸞河)였고, ()나라 때는 현재의 랴오닝성에 있는 요하를 가리키게 되었다.

수천 년에 걸쳐 중국의 지명이 동쪽으로 옮겨짐에 따라, 우리 고대사는 일방적으로 축소ㆍ왜곡되고 말았다. 게다가 일제 강점기 이후 식민사학자들이 이런 잘못된 역사를 앞장서서 가르쳤으니 역사 왜곡의 폐해는 실로 엄청났다. 그렇다면 도대체 얼마나 왜곡시킨 것일까? 중국의 사서(史書)에 기록된 고구려 영토에 대한 설명 중에서, 아래처럼 서너 문장만 살펴봐도 정말 어처구니가 없다는 걸 알 수 있다.


“동으로는 신라에 이르고 서로는 요수를 건너 2000리에 이른다. 남으로는 백제와 접하고, 북으로는 말갈과 1000여 리에 걸쳐 인접한다.
- 
‘周書’, 東至新羅 西渡遼水二千里 南接百濟 北隣靺鞨千餘里


“그 나라는 동으로는 신라에 이르고, 서로는 요수를 건너 2000리에 이르며, 남으로는 백제와 접한다.
- 
‘北史’, 其國東至新羅 西渡遼水二千里 南接百濟


“나라의 중심에 요산이 있으며, 요수가 흘러나오는 곳이다.
- 
‘南史’, 中有遼山 遼水所出


“고려는 본래 고구려다. 우임금이 9주로 나눈 땅 중에 기주에 속하였는데, 주나라 때는 기자의 나라였고 한나라 때에는 현토군이었다.
- 
‘宋史’, 高麗本曰高句麗 禹別九州屬冀州之地 周爲箕子之國 漢之玄菟郡也


고구려의 강역은 허베이, 산시까지

 

기주는 오늘날의 허베이성과 산시성 일대를 말한다. 기주를 중심으로 고구려의 중심에 요산이 있고, 그 산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요수라면 요수는 난하를 의미한다. 하지만 위 내용만으로는 난하가 요수임을 알 수 없다. 이를 입증하는 고구려 벽화가 있다. 평안남도 덕흥리에 있는 고분벽화에는 무덤의 주인공인 유주자사(幽州刺史) ()의 연회도가 그려져 있는데, 유주자사 진에게 13개 군의 태수가 하례를 올리는 장면이 있다.

▲송사 외국전에 기록된 고구려 영토

 

그리고 태수들 13명의 소속이 적혀 있다. 연군(燕郡), 범양(范陽), 어양(魚陽), 상곡(上谷), 광녕(廣寗), 대군(代郡), 북평(北平), 요서(遼西), 창려(昌黎), 요동(遼東), 현토(玄菟), 낙랑(樂浪), 대방(帶方)인데 모두 허베이성과 산시성에 있는 고대 지명들이다. 창려는 지금도 난하 하류에 남아 있는 지명으로 난하가 요수임을 증명 하는 귀중한 벽화다. 또한 요수 서쪽으로 2000리에 이른다고 했으니 “요서에 10개의 성을 쌓았다”라는 ‘삼국사기’의 기록과 정확히 일치한다. 고대 요수인 난하를 중심으로 요동과 요서가 모두 고구려의 강역이었던 것이다.

우리의 고대사가 중국 대륙의 한복판이었음이 이렇듯 명확한데도, 식민사학자들은 잘못 꿴 단추를 끌러 다시 채울 생각은 하지 않고 아직도 자신의 주장이 옳다고 고집하니 이를 보는 중국인은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한국의 학자들이 중국의 역사를 이롭게 전개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해 주니 말이다. 명확한 입증자료가 있음에도 우리의 고대사는 현재의 지명에 사로잡힌 채, 역사를 바로 세우지 못하고 있으니 이게 바로 매국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진나라는 전국을 통일한 지 15년 만에 망한다. 그런데 과연 1만 리의 장성을 쌓을 수가 있을까? 만리장성이 전국시대 7국의 성들을 이어서 만들었다고 해도 그 짧은 시간에 성과 성 사이를 잇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수 양제(煬帝) 100만 명의 장정을 동원해 내몽고의 유림(楡林)에서 자하(紫河)까지 장성을 쌓게 하였다가 열흘 만에 그만두었다. 그 이유는 그 사이에 반 이상이 죽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장성을 쌓는 일이 힘들고 어려운 것이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오죽하면 “요동으로 가면 오직 죽음만 있을 뿐이다. (莫向遼東浪死歌)”라는 처참한 말이 생겨났겠는가.


성을 쌓는 곳 築城處
천만 사람 일제히 달구질 소리 울린다.千人萬人齊把杵.
단단히 다졌는지 거듭 성벽을 찔러보는데 重重土堅誠行錐
채찍 든 군인감독은 더디다고 독촉만 한다.軍吏執鞭催作遲.
그때부터 일 년 동안 깊은 사막에서 來時一年深磧裡
짧은 옷마저 다 해지고 물이 없어 목이 타고 盡著短衣渴無水.
기운 빠져 달구질 소리 잦아드는데 力盡不得
杵聲
그 소리 끝나기 전에 여기저기서 죽어나간다.杵聲未盡人皆死.
집집마다 대 이으려고 사내자식 길렀건만家家養男當門戶
오늘 여기 성 아래서 흙이 되고 마는구나.今日作君城下土.

 

▲고구려 덕흘리 고분벽화 연회도에 나타난 중국 각지의 태수들.


장성을 쌓는 것은 이처럼 목숨과 맞바꾸는 엄청난 희생을 치르는 것이다. 3000리에 걸친 장성도 수많은 목숨을 담보로 한 것인데, 진시황이 어찌 그리 짧은 시간에 1만 리의 장성을 구축할 수가 있겠는가. 사마천의 ‘사기’도 그가 집필한 이후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수정 가필되어 온 것임을 유념해야 한다. 중국인의 사서편찬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춘추필법’이다. 이는 중국에 이로운 것은 사소한 것이라도 크게 확대하고, 불리한 것은 아무리 큰 것이라도 사소하게 처리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식민사학의 망령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학계

만리장성의 대대적인 개보수작업은 명나라 때 와서 진행되는데, 이는 북방의 몽골 침입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하여 이때부터 오늘날 우리가 ‘인류 최대의 토목공사’라고 부르는 만리장성이 탄생하게 된다. 중국 역사서에서 만리장성을 거론할 때면 예외 없이 동쪽의 산하이관에서 서쪽의 가욕관까지를 말한다. 그런데 어찌하여 중국의 지도책에는 만리장성의 동쪽이 한반도의 청천강까지 연결된 것일까?

여기에도 우리의 식민사학자들이 톡톡한 역할을 했다. 그들은 먼저 한 무제가 고조선을 물리치고 설치한 한사군의 위치가 지금의 평양을 포함한 지역이라고 못 박았다. 이는 “낙랑군 수성현(遂城縣)에 갈석산이 있는데 장성이 시작되는 곳이다.”라는 중국의 사서에 의거하여 황해도에 수성현이 있는 것을 찾아내어 이를 꿰맞춘 것이니 참으로 넋이 나가고 말문조차 막힐 일이다.

역사지리는 시대에 따라 변동한다는 지극히 간단한 논리를 무시한 채, 스승과 자신의 주장이 진리라고 고집하는 우리 사학계의 행태가 분노를 넘어 가엾게 느껴진다. 소통과 융합의 시대에 이를 단절시키고 스스로 함몰하는 그들에게 한 줌 억지눈물을 흘려야 할 판이다. 중국의 사학계는 신났다. 한국의 ‘뜻 맞는’ 동지적 학자들이 자신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 주니 굳이 춘추필법을 쓰지 않아도 쉽게 역사를 침탈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와중에 유네스코에서는 ‘보존 위험에 직면한 세계 유산 명단(2004)’을 발표했는데 여기에 중국의 만리장성도 들어 있었다. 중국 정부는 이를 기회로 ‘장성보호공정(20052014)총체공작방안’을 제정한다. 장성을 어떻게 보호할 것인가에 대한 방법을 마련한 것이다. 뒤이어 법률적인 효력을 얻기 위해 ‘장성보호조례’를 만들었고, 2006 9 20일에는 국무원 제150차 상무회의에서 조례를 통과시키면서 장성보호공정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하지만 장성보호공정은 유네스코의 바람과는 달리 문화유산 보호만을 위한 공정이 아니었다. 중국의 속셈은 이제 새롭게 주장하는 다민족통일국가론을 입증하는 역사적 근거로 만리장성을 활용하는 것이다. , 중국의 영토에 존재했거나 존재하는 모든 민족의 역사는 곧 ‘중국’의 역사라는 영토주의 역사관을 강화하는데 만리장성은 더없이 중요한 역사도구인 것이다. 이는 중국이 줄기차게 역사 왜곡을 감행하며 시도해온 4대 공정을 모두 아우르는 종합판인 것이다.


중국의 장성공정, “장성의 길이는 21,196.18킬로미터”

2012 6, 중국 국가문물국은 장성보호공정의 1단계 사업을 마무리하면서 역대 장성의 길이를 2 1,196.18킬로미터로 늘려 발표하였다. 그와 함께 ‘장성을 확장하는 것은 중국의 혼을 드높이는 것이다(長城長 中華魂)’는 축하행사도 열었다. 동쪽으로는 헤이룽장성 목단강까지, 서쪽으로는 신강성의 하미까지 그야말로 고무줄처럼 늘려 놓았다.

 

▲중국 정부가 장성공정을 마치고 축하행사를 여는 장면

 

고구려의 천리장성인 노변강토장성(老邊崗土長城), 발해의 목단강변장(牧丹江邊墻), 고구려와 발해 때 축조한 것으로 추정되는 연변고장성(延邊古長城) 등이 모두 중국의 만리장성에 포함된 것이다. 이는 동북공정 이후 불안전한 정치논리를 보완하기 위한 것으로 향후 몽골을 포함, 동북 3성과 관련해 한반도에서 발생할 문제에 대비한 치밀한 포석이 깔려 있는 것이다.

신강도 마찬가지다. 서북공정으로 신강 지역의 역사 왜곡에 성공하였지만 계속되는 위구르 민족의 독립운동에 쐐기를 박으려는 것이다. 이처럼 중국의 만리장성 늘리기는 중국 내 소수민족들의 독립 움직임을 차단하면서 자신들의 강역을 넓혀가려는 정치적 꼼수가 포함된 것이다.

중국은 만리장성을 늘리자 ‘역대장성’이란 말로 슬쩍 바꿔놓았다. 장성 늘리기를 교묘하게 위장한 것이다. 중국의 장성 늘리기는 어디까지, 언제까지 계속될까? 전 세계에 중국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으니 지구가 통째로 중화제국주의를 받아들이는 날까지 계속될 것이다. 그들이 만리장성을 일컬어 3,000년에 걸쳐 이룩한 위대한 중화의 산물이라고 하듯이, 앞으로도 3,000년쯤의 세월을 가지고 느긋이, 하지만 집요하게 완성하려 들 것이다. 한국은 냄비처럼 ‘빨리빨리’ 처리하고 곧 잊어버리지만, 중국은 쇠솥처럼 ‘천천히’ 하며 잊지 않기 때문이다.

 

(32)  '광개토대왕비'를 처음 발견한 자들은 조선의 심마니였다.

"광개토대왕비 건립 1600주년 역사관 확립 계기 마련해야" <안서1>

가욕관을 빠져나와 다시 서쪽으로 향한 감신공로(甘新公路)를 탄다. 길은 황량한 벌판을 가로지른다. 먼지 때문인가? 하늘이 온통 뿌옇다. 하늘과 땅의 색이 거의 같아 지평선이 어디쯤인지 가늠이 안 된다. 아지랑이 춤추는 도로에서 순간 몽롱함을 느낀다. 내가 탄 자동차가 마치 한 장의 화지 위에 붓이 되어 흘러감을 느낀다. 어디로 가는가? 길은 맞는가?


중국 서북지방에서 발생한 이슬람교도와 위구르 민족의 반란을 평정한 좌종당

얼마를 달렸을까. 눈을 뜨니 울창한 버드나무가 보인다. 잠깐 눈을 감았다가 뗀 사이에 버드나무 가로수가 나타나다니, 마치 사막 속에서 무릉도원을 만난 느낌이다. 이 버드나무는 일명 좌공류(左公柳)라고 부르는데, 청나라 말기의 정치가인 좌종당(左宗棠)이 심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고 보니 주천공원의 우물에 있던 커다란 버드나무도 좌공류였다. 당시 좌공류는 삼천리에 이르렀다고 한다. 하지만 오랜 시간 지나며 훼손되어 지금은 가욕관에서 신강성에 이르는 길에서 드문드문 볼 수 있다.

 

하서주랑에서 볼 수 있는 좌공류

좌종당은 중국 서북지방에서 발생한 이슬람교도와 위구르 민족의 반란을 평정한 사람이다. 그는 나무심기를 좋아했는데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지금의 신강으로 향할 때, 이곳 하서주랑을 지나게 되었고 군사들에게 명령해 길가에 버드나무를 심게 했다. 나무를 심고 나면 그뿐, 아무도 관리하지 않았다. 귀찮고 이득 없는 일을 굳이 나서서 할 일이 무엇인가. 이 핑계 저 핑계로 미루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매한가지다. 좌종당이 반란을 진압하고 돌아오는 길에 살펴보니 당나귀가 버드나무 껍질을 벗겨 먹고 있는데도 어느 누구도 말리는 사람이 없었다. 좌종당은 즉시 당나귀를 잡아 많은 사람이 오가는 고루 앞에서 목을 잘라버렸다. 그러고 나서 선포하였다.


“만약 또다시 나무를 상하게 하는 당나귀가 있다면 주인까지도 똑같은 죄로 다스릴 것이다.

소문은 삽시간에 퍼지고 그 후로는 버드나무를 훼손하지 않아 오늘의 멋진 풍경을 이루게 되었다고 한다. 좌종당과 동향 친구인 양창준(楊昌浚)은 좌종당의 업적을 찬양하는 헌시(左公柳)를 지었다.


장군은 변경에서 돌아올 기약 없고大將籌
边尙未还
고향의 식구들만 천산에 가득하네湖湘子弟滿天山.
새로 심은 버드나무 삼천리 길이新栽楊柳三千里
봄바람에 이끌고 옥문관에 이르네引得春風度玉關.

좌종당, ‘광개토대왕비’ 세상에 알리다

좌종당은 청나라 정치가이지만 우리에게도 잊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가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비문을 처음으로 발견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조선 영조 때인 1770, 홍봉한(洪鳳漢) 등이 왕명을 받아 ‘문헌비고(文獻備考)’를 편찬하고, 정조 때인 1782년에 석학 이만운(李萬運) 9년에 걸쳐 보완하여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를 지었다. 이곳에 보면 광개토대왕의 비문 발견 과정이 자세하게 나와 있다.

 

▲좌종당 초상


“성경성(盛京省) 회인현(懷仁縣) 통구(通溝) 등지는 바로 서간도의 경내이다. 그 땅이 압록강 오른쪽 언덕을 베고 있는데, 구련성(九連城)과의 거리가 150리다. 지금부터 300년 전에 한 비()가 산골짜기 가운데서 발견되었는데, 고종 19(1882)에 청나라 성경장군(盛京將軍) 좌종당(左宗棠)이 비로소 사람을 사서 발굴하니, 바로 고구려 광개토왕(廣開土王)의 비문(碑文)이었다. 비의 높이가 1() 8척이고, 남북 양쪽 면은 5 6, 7, 동서는 4 4, 5촌인데, 4면에 글자를 새겼다. 남쪽 면은 11, 서쪽 면은 10, 북쪽 면은 13, 동쪽 면은 9행인데, 줄마다 41()로 합계 43 1,759자이다. 그 글이 심히 간결하면서도 고아(古雅)하여 동국 사기(史記)의 빠진 글을 보충하였는데, 황초령정계비문(黃草嶺定界碑文)과 함께 이 비의 전문을 수록하여 참고자료로 삼고자 한다.

만주족은 청나라를 개국하면서 자신들의 발상지를 신성시하여 만주 지역에 출입을 금지했다. 그 와중에 조선의 심마니들이 그곳에 묻혀 있던 비석을 발견하였지만, 그것이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비석이라는 사실이 드러난 것은 좌종당 덕분이다. 그 뒤 1907년에 프랑스의 에두아르 샤반느(Edouard Chavannes)가 직접 만주를 탐방한 뒤 이 비석을 탁본해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된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고구려 광개토대왕비는 길림성 집안시에서 동북으로 3.5킬로미터가량 떨어진 지점에 있다. 비문은 고구려 제19대 왕으로서 4세기 말부터 5세기 초까지 고구려의 영토를 확장하여 동북아시아의 절대 강자로 군림한 훈적(勳籍)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비문에 의하면, 광개토대왕의 정식 시호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다. 일반적으로 줄여서 ‘호태왕비(好太王碑)’라고 부른다. 이 비를 중심으로 동북쪽 1킬로미터 지점에 장군총이 있고, 서남쪽 200미터 지점에 태왕릉이 있다. 장군총, 광개토왕비, 태왕릉이 서남쪽으로 일직선으로 놓여 있다. 태왕릉의 묘에서 명문(銘文)이 새겨진 벽돌이 발견되었는데, 이로 미루어본다면 태왕릉은 광개토대왕릉이 확실하다.


“원하옵건대 대왕의 무덤은 산 같이 안전하고 구릉같이 굳건하소서.(願大王之墓安如山! 固如丘!)

중국, 광개토대왕비에 개 배치한 채 동북공정 진행

광개토대왕비는 왕의 2주기인 414 9 29일에 그의 아들인 장수왕이 세웠다. 중국 정부는 동북공정을 끝내고 이 비를 유리 상자 속에 밀봉해 놓았다. 동북공정이 한창인 때 집안을 방문한 적이 떠오른다. 자신들의 역사왜곡작업을 남이 볼까 두려워한 나머지 외부인의 접근을 통제하고 있었는데, 사방 곳곳에 몰래카메라를 설치하고도 모자라 비석 양옆에는 군용견인 커다란 셰퍼드로 지키게 했다. 사나운 개가 인기척이 나면 곧장 짖어대며 달려오는데 목줄을 매단 길이가 족히 20~30m는 됨직한 긴 줄이었다. 비석 앞에서 사진도 찍을 수 없게 만들려는 속셈인데 그 수법이 참으로 한심하였다. 태양의 자손으로 고대 동북아시아에 또 다른 문명을 건설했던 고구려의 광개토대왕비에 한낱 미물인 개를 매어두고 지키게 하다니. 자국에 유리하면 타국의 역사쯤은 언제든 왜곡해 버리는 중국의 전략을 우리는 언제까지 보고만 있어야 하는가.

 

▲지안에 있는 광개토왕비


광개토대왕비는 6m가 넘는 사각기둥 형태의 암석으로 되어 있는데,  1800자에 달하는 비문에는 고구려의 건국신화와 광개토대왕의 정복활동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서체 또한 독특하다. 네모 반듯한 예서(隸書)를 사용했는데, 그 서체는 일찍이 중국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것이다. 가로획과 세로획의 굵기가 일정하고 급격한 파임이나 흘림도 없다. 단아하면서도 예스럽고 소박한 아름다움을 발산하는 것이 우리 민족의 정서와도 닿아 있다.

서체의 창조는 문자의 창조에 버금가는 것이다. 국력과 문화가 선진적이어야만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비문에 새겨진 독특한 서체는 당시 고구려의 선진적인 문명에서 발생한 문화적 자긍심이다. 비문의 서체를 자세히 보노라면 구수하고 질박한 남성미가 물씬 풍긴다. 가히 고구려인의 늠름하고 여유로운 기상을 느낄 수 있는 광개토대왕체(廣開土大王體)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추사체 이전에 만들어진 우리 고유의 광개토대왕체에 대하여 얼마나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가. 아니 이런 서체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광개토왕비 탁본


광개토대왕비 1600주년해 동북아역사재단 역사의식 부재를 탓하다

2012 10 18일과 19, 동북아역사재단은 광개토대왕 서거 1600주년 국제학술회의를 열었다. 주제는 ‘광개토왕비의 재조명’이었다. 신문사마다 이 내용을 보도하여 관심을 끌었는데 나는 보도된 사진을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행사장 현수막에는 학술회의 주제를 한자로 표기했는데 그 서체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안진경체였기 때문이다. 세계적으로 자랑해야 할 독특한 서체로 작성된 비문을 논하는 자리에 생뚱맞은 중국 서체로 현수막을 만든 것은 업무태만인가 아니면 사려 없는 단순함인가. 사소한 일이라고 치부할 수 있지만 이는 결코 사소한 일로 볼 수 없다. 동북아역사재단은 중국의 역사공정에 대응하기 위해 국민적 지원으로 탄생한 재단이다. 그런 재단이 어찌 독특한 광개토대왕비체를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한 마디로 역사의식의 부재를 단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사례다. 이런 역사의식으로 어떻게 고대사를 바로잡을 수 있을까? 이런 상황에서 중국과 일본의 연구자들이 내놓은 결과에 어떻게 논리적으로 대응할 수 있겠는가.

 

▲지안에서 발견된 제2 고구려비


2012
 7 29, 지린성 집안시 마선향(麻線鄕) 마선촌의 마선하 강변에서 제2의 고구려비가 발견되었다. 마선하는 압록강의 지류인데 이곳에서 돌을 캐던 농민이 우연히 땅속에 박힌 비석을 찾아내어 신고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비석이 발견된 곳을 기점으로 동남쪽으로 450m 지점에 천추묘(千秋墓)가 있고, 서남쪽으로 1100m 지점에 서대묘(西大墓)가 있다.


이 비석은 173cm의 화강암을 가공하여 만들었는데 비문의 글자 수는 광개토대왕비의 8분의 1 정도다. 현재까지 알려진 내용은 역대 왕들의 능묘에 비석을 세우고 안전하게 지키라는 당부가 새겨져 있다고 한다. 현재 집안박물관에 보관 중인데, 중국 정부는 이를 공개하지 않고 있다. 이를 두고 동북공정을 노리고 만든 가짜일 수도 있다는 의견이 있다. 중국이 떳떳하다면 비석을 공개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고대사의 유적은 관련 국가들과의 공동연구를 기본으로 그 내용을 밝히는 것이 정답이기 때문이다.

올해는 광개토대왕비가 건립된 지 16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번에 집안에서 발견된 고구려비와 함께 기존의 광개토대왕비를 새롭게 해석하는 국제학술회의가 또 열릴 것이다. 당부하건대 2014년의 학술회의는 사소한 준비과정에서도 놓침이 없이 완벽한 행사가 되기를 기원한다. 광개토대왕비에는 고대 한·중·일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데, 이것을 완벽하게 해석함으로써 우리 고대사를 바로 세울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기 때문이다.

 

(33) 강희제, 국고 빼돌린 간신 두개골 가르고 가죽을 벗겨…

강희제의 욕심이 베인 교만성<안서2>

실크로드 지도 안서

초원이 사막으로 바뀌고

 

자동차는 뜨거운 폭염에 허덕대며 달린다. 마침 한 줄기 물길이 보인다. 소륵하(疏勒河). 소륵하는 하서주랑을 오아시스로 적시는 3대 내륙하천 가운데 으뜸이다. ‘소륵’이라는 말은 몽골어를 음역한 것으로, ‘많은 물(多水)’이라는 의미다. 만년설 녹은 물이 강이 되어 사막지대를 흐르니 그 물은 바다와도 같은 것일 수밖에 없다. 소륵하는 옥문시 서북쪽을 지나 안서와 돈황을 거친다. 그리고 서쪽으로 흘러 롭노르 호수에서 사라진다. ‘롭노르’는 몽골어로 ‘많은 강물이 흘러드는 호수’라는 뜻이다. 이 호수는 타클라마칸 사막의 동쪽에 있는데 지금은 호수의 바닥까지 말라서 염분이 많은 사막으로 변하였다. 롭노르 호수는 일명 방황하는 호수라고도 한다. 이 호수로 들어오는 타림강과 공작하의 물길이 변해 호수의 위치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사막에서 물은 그야말로 생명수다. 그냥 마실 수 없으면 찻잎과 함께 끓여서라도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소륵하 주변은 실크로드를 오가는 사람들이 중시하는 길이기도 하였다. 소륵하 주변이 어떠했기에 그랬을까? 당나라 때 이길보(李吉甫)가 지은 ‘원화군현도지(元和郡縣圖志)’ 과주(瓜州) 진창현(晋昌縣)조에 보면, “동서 260, 남북 60리에 이르는데, 수초가 풍부해 목축이 성행한다.”라고 하였다. 당나라 때만 해도 이곳은 강물이 초원을 적시고 들판에는 소, , 양떼가 노니는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인간의 꿈이 만든 ‘교만성’

소륵하가 황량한 벌판을 휘저으며 물길을 낸 옆으로 폐허의 고성이 보인다. 교만성(橋灣城)이다. 교만성은 중국에서 서쪽과 북쪽으로 나아가는 교통의 요충지에 있다. 동으로는 가욕관과 연결되고 서로는 신장웨이우얼자치구에 이르며, 남으로는 기련산맥을 바라보고 북으로는 외몽골과 통하는 지역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옛날부터 이곳은 여러 민족의 각축장이 된 곳이다. 지금은 황량한 폐허로만 남아있지만 청나라 강희제 때까지만 해도 군사거점지역으로 번창하였다. 이후 회족(回族)의 반란으로 성이 부서지면서 주민들이 흩어지자 방치된 채 오늘에 이른 것이다. 소륵하에 접해 있는 교만성에는 원래 천생교(天生橋)라는 다리가 있었다고 한다. 후에 강물이 자연스럽게 굴곡을 이루며 흐르게 되자 ‘교만(橋灣)’이라 부르게 되었다.

 

▲교만성 전경


교만성에 도착하니 호양목(胡楊木)과 낙타 풀만 가득하다. 동서 320미터, 남북 122m에 이르는 성터에는 풍파를 이겨낸 성벽이 군데군데 남아 있다. 폐허의 교만 성터를 걷는다. 황토판축으로 쌓은 성벽이 송곳 햇살에 몸을 뒤척인다. 숨 막히는 바람이 햇살 사이를 가차없이 몰아친다. 교만성은 인간의 욕심이다. 부귀와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끝없는 쟁투의 결과물이다. 교만함에 가득한 인간이 잘난 척 으스대려고 만든 상징이다. 하지만 그 또한 무엇이란 말인가. 열기에 찌든 황토 흙이고 바람에 흩어지는 한 줌 먼지인 것을. 다시 한 줄기 바람이 다가온다. 그리고 단호하게 속삭인다.


“보았으니 가서 전하라. 헛된 욕심은 화를 부를 뿐이니 심신을 다스리고 비우는 법을 배워라.

무엇을 비울까? 어떻게 비울 수 있을까? 남보다 더 담기 위해 달려온 욕심인데 다스리고 비울 수 있을까? 내려놓는 연습조차 하지 않은 삶들이 어떻게 비울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실로 어려운 일이다. 모두가 인생은 공수래공수거임을 말하면서도 실천하지는 않으니 진정 이 말을 믿기는 하는 것일까. 인간의 욕심을 뉘우치게 하는 것은 아픔뿐이다. 육체적 아픔은 내려놓는 법을 배우게 하고, 정신적 아픔은 비우는 법을 깨닫게 한다. 스스로 뼈저린 아픔 없이는 내려놓지도 못하고 비울 수도 없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라고 하지만 이는 노동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진실한 아픔 속에서 초록을 틔우는 것이다.


강희제의 욕심이 나은 ‘인피고(人皮鼓)

교만성은 몽성(夢城)이라고도 부르는데, 청나라 강희제가 서역을 시찰하는 꿈을 꾼 데서 비롯된 것이다. 꿈에는 인적 없는 사막에 오아시스가 나타나서 그 물이 성을 돌아 서쪽으로 흐르는데, 물가 옆에 있는 커다란 나무 두 그루에 금빛 찬란한 황관과 옥대가 걸려 있었다. 황제는 화공에게 자신의 꿈을 그리게 하여 신하들에게 이를 살피게 하였는데, 지금의 교만성 지역이 바로 그곳이었다. 황제는 정금산(程金山) 부자에게 큰돈을 하사하고 이곳에 군사방어기지를 세우고 군대를 주둔시키게 하였다. 정씨 부자는 황제가 이처럼 황량하고 멀리 떨어진 곳까지 오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고는 초라한 성곽을 지었다. 그러고 나서 많은 돈을 빼돌려 호의호식하였다.

 

▲교만성 박물관의 강희제 상


5
년이 지나고, 흠차대신이 서쪽 변방을 순시할 때 이곳을 둘러보고 돌아가서 황제에게 사실대로 아뢰었다. 대로한 황제는 정씨 부자를 처형하고 그들의 두개골을 붙여 북 틀을 만들고 등가죽을 벗겨 내 북을 만들게 하였다. 그리고 정금산의 뒷골로는 그릇을 만들었다. 황제의 경고를 보여주기 위해 200m 떨어진 곳에 영령사(永寧寺)를 짓고 나서, 날마다 그 북을 두드려 백성은 바르게, 관리들은 청렴하게 지낼 것을 명령하였다.

황제의 칙령으로 지어진 영령사도 시대의 풍파 속에 사라지고 1992, 그 자리에는 몽성박물관이 들어섰다. 정씨 부자의 두개골과 피부로 만들어진 인피고(人皮鼓)와 인두완(人頭碗)은 청나라 때부터 보물로 전해져 내려온다. 그래서인지 박물관을 찾는 사람들 모두가 두려움과 호기심에 관심을 집중한다. 그리고 유리상자 안에 보관된 두 보물을 보며, ‘어떻게 저렇게 만들 수 있을까’하는 섬뜩함에 다시금 몸서리를 친다.


사람 가죽 벗기는 형벌 박피(剝皮)형은 오래된 형벌

중국에서 사람의 가죽을 벗기는 형벌인 박피(剝皮)형은 오래된 형벌이다. 처음에는 사람의 얼굴을 벗기는 형벌이었는데 점차 심해져 전신으로 발전한다. 온몸의 가죽을 벗기는 형벌은 ‘한서’에 처음 보인다. 경제(景帝) 때 광천왕(廣川王) 유거(劉就)가 “살아있는 인간을 찢어서 벗겼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고대 형벌 가운데 최고의 형벌은 머리와 몸통, 팔다리를 자르는 능지처참(陵遲處斬)형이다. 그런데 박피형도 이에 못지않은 끔찍한 형벌이었다. 이 끔찍한 형벌은 명나라 때에 이르면 절정기를 맞는다. 무종(武宗)은 모반자 60명의 피부를 벗겨 말안장을 만들 정도였으니 말이다.

 

▲강희제가 정금산 부자의 가죽으로 만든 인피고


박피 형벌은 그리스 신화에도 보인다. 피리의 대가인 마르시아스(Marsyas)는 자신의 연주 실력에 도취한 나머지 음악의 신 아폴론에게 누구의 음악이 뛰어난지 가려보자며 도전장을 내민다. 그 결과 아폴론이 승리하고 마르시아스는 참나무에 거꾸로 매달려 가죽이 벗겨지는 형벌을 받는다. 중일전쟁이 배경이 된 영화 ‘붉은 수수밭’에도 일본군이 중국인을 잡아 가죽을 벗기는 장면이 보인다. 이 장면은 그냥 만든 것이 아니다. 산둥성 고밀(高密)현에서 일본군이 자행한 실화를 근거로 제작한 것이다.

인피로 만든 것은 북이나 말안장만이 아니었다. 책표지에도 인피가 사용되곤 했는데 프랑스혁명 때 유행하였다. 살인자의 재판기록을 담은 문건은 살인자의 살가죽으로 제본하거나, 해부학 책표지는 해부 대상자의 살가죽을 사용하였다니, 생각만 해도 진저리가 처진다.

오늘날은 인간의 존엄성이 최고인 시대여서 박피형은 있을 수도 없다. 하지만 중세시대까지만 해도 인간의 존엄성은 존재하지 않았다. 권력자의 생각 여부에 따라 한낱 짐승처럼 취급되기 일쑤였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간의 신체에 위해를 가하여 끔찍한 고통 속에 죽게 하는 극형은 어느 시대나 있었다. 말로만 인간의 존엄성을 외칠 뿐이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에야 비로소 일반화되었을 뿐이니 그 역사 또한 일천하다.

강희제는 분명히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을 것이다. 황제의 명을 어기고 국고를 빼돌린 간신이니 그 죄를 엄중히 물어 처벌해야 한다. 처벌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그런데 왜 두개골을 가르고 가죽을 벗기라고 했을까. 강희제는 고비사막을 사이에 두고 영토 확장을 위하여 티베트, 몽골과 일진일퇴를 벌였다. 이러한 때, 전략적 요충지에서의 기선 제압은 매우 중요하다. 강희제는 지엄한 황명을 보임으로서 일반 백성과 관리들로 하여금 복종과 단결을 도모할 필요가 있었으리라. 아울러, 이러한 경고는 티베트와 몽골에도 전해져 얼마간의 효과를 노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강희제의 전략은 건륭제로 이어져 위구르를 물리치고 새로운 영토라는 뜻의 ‘신강(新疆)’을 차지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백성은 ‘고복격양’을 원한다

폐허의 성터에 다시금 바람이 분다. 햇살도 한층 강하다. 하지만 호양목과 낙타 풀은 초록을 잃지 않고 있다. 바람과 햇살에 몸을 내어주어도 초록만큼은 단호하게 간직하고 있다. 다 주고 비운 그곳에 초록이 있기 때문이리라. 욕심을 버리지 못한 것은 정금산 부자만이 아니다. 강희제 또한 천하의 제왕이 되고픈 욕망을 버리지 못한 것이다. 백성이 스스로 존경하는 통치자는 태평성세를 열어가는 자다. 영토를 확장하는 것이 태평성세인가. 아니다. 이는 통치자 개인의 욕심일 뿐이다. 백성은 통치자 개인의 욕심을 채워주는 도구가 아니다.

 

▲폐허가 된 쇄양성


그러므로 백성은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 백성은 소박함 속에서의 평안함이면 족하다. 국가와 통치자는 백성의 이러한 소박한 행복을 누리게만 관리해주면 된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왠가. 통치자의 욕심이 백성의 생각을 벗어난 까닭이다. 가야 할 길이 아닌 막다른 길로 질주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통치자는 백성의 뜻이 곧 ‘천명(天命)’이니 그 뜻을 따르겠다고 하지만 언제나 달콤한 말 뿐이다. 오히려 자신만의 천명을 만들어 그것이 백성의 천명이라고 우겨댄다. 개인의 존엄성이 최고조인 시대, 백성(百姓)의 명령은 존엄하지 않은 것인가. 진정 무엄한 시대가 아닐 수 없다.

어느덧 햇살은 오후의 강렬함을 잃었다. 서둘러 감숙공로에 오르니 모랫바람이 더욱 거세다. 자갈밭의 무덤들도 저마다 모래를 뒤집어썼다. 그 너머에서 회오리바람이 일더니 내가 탄 자동차를 비켜지나 간다. 삶과 죽음이 지척이고 하나인 길, 그 길을 나아간다.


쇄양성, 설인귀가 쇄양을 먹고 승리한 곳

다시 남쪽으로 향한다. 쇄양성(鎖陽城)을 보기 위해서다. 쇄양성은 고대 실크로드의 길목에 있는 중요한 성이다. 쇄양성 입구에 도착하니 성은 보이지 않고 황량한 모래밭에 사막식물인 홍류(紅柳)만 무성하다. 홍류를 헤치며 좁은 길을 따라 들어가니 폐허가 되어 주저앉은 쇄양성이 따가운 햇볕을 받으며 고적하게 앉아 있다. 쇄양성은 일찍이 한나라 때 지어졌다. 수나라 때에는 이곳에 옥문관을 설치했는데, 이곳 또한 서역을 오가는 길목이기 때문이다. 쇄양성은 당나라 때 전성기를 누린다. 지리적 이점뿐만 아니라 시기적으로도 실크로드 전성기의 수혜를 받았기 때문이다. 당시 쇄양성 지역은 소륵하 주변의 풍부한 수초와 끝없는 녹지가 이어진 아름다운 곳이었다. 번영을 구가하던 쇄양성도 명나라 말기부터 쇠퇴한다. 사막화 현상도 한몫하였을 터. 자연의 위대한 힘을 인간이 어찌 막을 수 있겠는가.

 

▲쇄양성 입구의 설인귀 상


쇄양성의 원래 이름은 ‘고욕성()’이었다. 그런데 왜 쇄양성이 되었을까? 이는 성 주변에 많이 자생하는 ‘쇄양’이란 식물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렇다면 원래 이름을 두고 바꾼 이유는 무엇일까. 유적지마다 한두 개의 전설이 있는 법인데, 이곳도 마찬가지다. 당나라 초기의 장군인 설인귀가 서역을 정벌하기 위해 이곳에 왔는데, 합밀(哈密)국의 원수인 소보동(蘇寶同)의 매복군에 밀려 쇄양성에 고립된다. 엄동설한에 성에 갇힌 설인귀 병사들은 원군이 도착하기까지 식량 부족에 시달린다. 병사들은 배고픔을 이겨내기 위해 눈 속을 뚫고 나온 쇄양을 먹었는데, 이를 통해 원기를 회복해 끝까지 성을 사수할 수 있었다. 이에 태종은 그 성을 쇄양성이라고 고친다. 쇄양은 고비사막의 특산품이다. 사막인삼으로도 불리는 약용식물인데 의학적으로 약효가 뛰어나다고 알려졌다. 쇄양은 영하 20도 전후에서 자란다. 그래서 쇄양이 자라는 곳에는 눈이 쌓이지 않는다.


탑이사에는 현장의 佛心만 머물고

쇄양성은 현장과도 인연이 깊은 곳이다. 현장이 천축으로 구법여행을 가기 위해 몰래 장안을 떠나 이곳 과주에 이르렀다. 과주는 광활한 사막을 건너기 전에 식량을 구할 수 있는 마지막 도시였다. 현장은 과주에서 한 달간 머물렀다. 쇄양성에서 1km 떨어진 곳에 있는 탑이사(塔爾寺)에서 강설도 하였다. 독실한 불교신자인 과주자사 독고달(獨孤達)은 양주자사로부터 현장이 현지에 오면 체포하라는 공문서도 찢어가며 현장의 구법 길을 보호한다.

 

▲현장이 설법한 탑이사


독고달의 보살핌 속에 현장은 서둘러 길을 나섰는데, 그 와중에 서역 길을 잘 아는 호인(胡人) 석반타(石槃陀)가 현장에게 오계(五戒)를 받기를 청한다. 그는 옥문관과 다섯 봉화대를 무사히 지나는 데 꼭 필요한 인물이었는데, 현장에 갈아탈 말까지 주선하였다. 석반타가 소개한 노인은 서른 번도 넘게 사막을 횡단한 야위고 기운 없는 말이었는데, 현장은 두말없이 자신의 튼튼한 말과 바꿨다. 그는 야윈 말을 믿은 것이다. 자신이 타고 온 말이 튼튼하긴 했지만 사막을 겪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사막 길을 잘 아는 노쇠한 말이 훨씬 나을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현장의 판단은 적중한다. 고비사막에서 길을 잃고 식수마저 동이나 사경을 헤맬 때, 야윈 말이 물 냄새를 맡고 오아시스를 찾아냈기 때문이다.

1km 
떨어진 탑이사를 향한다. 입구에는 폐허인 채 세상을 관조하는 탑이사를 등지고 현장의 발자취만을 알리려는 안내판이 요란하다. 부서진 탑이사를 돌아보는 데 정좌한 불상의 흔적이 부서진 아픔 사이로 보인다. 저 불상은 저토록 아픔을 참고 따가운 모랫바람을 이기며 나를 기다린 것인가. 순간 나도 모르게 두 손을 합장하며 나직이 읊조린다.

“아제아제 바라아제(가자, 가자,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가자)

 

(34)  '서유기' 손오공의 모델은 '털북숭이' 西域人?

'서유기'의 원류를 만나다< 안서3>

협곡 속에 숨어 있는 ‘유림굴’

 

안서에서 빼놓지 않고 보아야 할 곳 중 하나가 유림굴(林窟)이다. 유림굴은 쇄양성과 함께 중국의 국가급 문화재이다. 유림굴은 유림하 양쪽 강변의 절벽에 있어 붙여진 이름인데 돈황의 막고굴과 같은 불교 석굴이다. 만불협(萬佛峽)이라고도 불린다. 계곡이 보이는 자갈밭에 주차하고 계단을 통해 유림굴로 내려간다. 멀리서 보면 평지에 ‘유림굴’이란 표지석만 보일 뿐이니, 아무것도 모르고 온 사람들은 의아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아니나 다를까. 일본인 관광객을 실은 관광버스 한 대가 정차하자 한 무리의 아주머니들이 내린다. 그중 몇몇 아주머니들이 사방을 살펴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유림굴을 찾는 눈치다. 표지석 뒤에 있는 계단으로 내려가야 하는 것을 안 뒤에야 표지석과 함께 기념촬영을 한다. 허허벌판에 덜렁 표지석만 하나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표지석이 유림굴로 통하는 입구이다.

 

▲협곡속에 있는 유림굴 전경

 

발아래로는 유림하가 수천 년을 헤치고 간 길이 협곡으로 변해 있다. 대자연이 만든 길옆으로 인간이 석굴이란 집을 지은 것이다. 자갈과 흙이 뒤섞인 계단 벽을 보니, 오래전에 대홍수가 있었던 것 같다. 유림굴은 당나라 때부터 건설되어 오대, 송나라, 서하, 원나라를 거쳐 청나라에 이르기까지 시대별로 꾸준히 부처상을 모신 감실이 석굴 속에 만들어졌다. 유림굴에는 모두 42개의 석굴이 있는데, 동쪽 절벽에 32, 서쪽 절벽에 10개다. 그러므로 유림굴 관광은 동쪽에 집중된다. 안내인을 따라 콘크리트로 계단과 난간을 만든 석굴의 입구로 향한다.


佛畵, 문명교류의 변천과정을 보여주는 상징

중요문화재가 모두 그렇지만 이곳도 촬영이 금지되어 있다. 입구에 카메라를 보관하고 들어가야 한다. 그러나 이는 아쉬워할 것이 못 된다. 인류의 문화유산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일인데 촬영으로 훼손시켜서야 하겠는가. 그 또한 욕심이다. 내 뒤로 이곳에 올 무수한 사람도 봐야 할 문화재임을 생각하면 당연하다.

석굴은 입구마다 문이 굳게 잠겨 있다. 문화재 보호 차원이라고 하지만 관람객이 임의대로 볼 수 없게 만든 것이다. 안내원이 관람 가능한 석굴을 정해 안내할 때만 열고 닫는다. 안내원을 따라가는 길. 그는 제11호 굴부터 안내하기 시작한다. 사하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18나한상이 살아있는 듯하다. 12호 굴은 청나라 때 중수한 것인데 벽화는 오대의 것이라고 한다. 나한도에 그려진 인물들의 모습이 인도인이나 서역인이 아니라 영락없는 중국인이다. 당시 중국불교가 오랜 교류를 통해 서역불교 수준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유림굴 외부

 

부처의 모습을 그린 벽화에 문수(文殊)와 보현(普賢)이 빠질 수 없다. 문수는 ‘지혜’를, 보현은 ‘실천’을 주관하는 보살이다. 지혜는 깨달음에서 비롯된다. 깨달음은 자각이다. 그러나 자각은 쉽게 얻어지지 않는다. 심적정신적 아픔을 수반한다. 살아가면서 아프지 않은 적이 어디 있으랴마는 그렇다고 모두 지혜가 될 수는 없다. 지혜는 수없는 아픔 중에서 걸러낸 수정과도 같은 정수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깨달음이 어려운 것도 이 때문이리라. 그러므로 깨달음이 없는 것은 지혜가 아니다. 그냥 지식일 뿐이다.

그렇다면 지식은 얼마나 필요할까? 사회생활에 필요한 수준의 지식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정작 중요한 것은 지식보다는 지혜다. 살아가는 동안 지혜로운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다. 지식은 지혜로운 삶을 위한 도구에 불과한 것이다.


지혜 역시 실천이 따르지 않으면 지식과 다를 바 없다. 우리 선조가 실천궁행(實踐躬行)을 중시한 것도 지식을 통해 지혜를 쌓고 이를 몸소 실천하는 덕인(德人)이 되려 했기 때문이리라.


‘서유기’ 손오공의 모델은 털북숭이 ‘서역인’

16호 굴의 벽화는 좀 특이하다. 9세기 중반부터 서하에 멸망하기까지 약 200년간 이 지역을 통치한 귀의군 정권의 제2대 절도사인 조의금(曹議金)과 부인이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귀의군 정권도 당시에 성행한 불교를 숭상하고 불사 건립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또한 이 공양 벽화는 귀의군 정권의 사회와 문화, 복식 등을 알 수 있는 연구 자료라는 점에서 그 가치가 높다.

 

▲서유기 원류를 볼 수 있는 서하시대의 벽화

 

6호 굴은 유림굴에서 가장 큰 대불상을 모신 곳이다. 당나라가 가장 융성하던 때에 만든 것으로 높이가 약 25미터에 이른다. 대불의 발과 얼굴 쪽에 각각 입구를 내었는데, 이곳에서 예불이 진행되었다고 한다.

유림굴을 대표하는 제25호 굴 역시 당나라 융성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곳에 있는 ‘서방정토도’와 ‘미륵도’는 당대 회화예술의 극치를 보여 주는데, 이는 돈황의 막고굴과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는다. 유림굴에서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곳이 서하시대의 벽화가 그려진 제2호 굴이다. 이곳의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는 서하 벽화 가운데 최고의 작품으로 간주한다. 그래서인지 이 작품은 당나라 때 서화론가인 장언원(張彦遠)이 쓴 ‘역대명화기(歷代名畵記)’에도 소개될 만큼 유명하다. 이 책은 중국의 저명화가들에 대한 전기와 회화기법을 정리한 것인데, 중국의 회화사 연구에 없어서는 안 될 필독서이다.

수월관음도의 오른쪽 아래에는 인도로 경전을 구하러 가는 현장이 손을 합장하고 관음에 예불을 올리는 ‘현장취경도(玄奘取經圖)’가 함께 그려져 있다. 당대의 시인인 백거이는 이를 보고 경탄하며 시를 지었다.


청정하고 맑은 물 위淨淥水上
빛 속에 없는 무량광으로虛白光中
오로지 그 바탕만을 볼 뿐이니一睹其相
수많은 인연도 다 소용없구나萬緣皆空


현장의 모험담을 그린 현장취경도에는 현장과 그의 제자인 원숭이, 그리고 백마가 담겨 있다. 오승은의 ‘서유기’에 나오는 손오공과 사오정, 저팔계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볼 때 이 현장취경도는 ‘서유기’를 이룬 주요 소재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그림은 제3호 굴에 있는 ‘보현보살도’의 하단 부분에도 그려져 있다. 현장을 따르는 행자의 모습은 원숭이와 흡사하다.

입은 튀어나와 있고, 머리와 팔은 온통 털북숭이다. 하지만 이게 과연 원숭이를 표현한 것일까? 아닐 것이다. 현장을 따르며 길 안내를 한 자는 서역인이었던 것이다. 그의 모습이 털북숭이였기에 그렇게 표현한 게 나중에 ‘서유기’에서 원숭이 모양의 손오공이 된 것은 아닐까?


중국의 저명한 돈황학자인 단문걸(段文杰)은 안서 유림굴과 동천불동에 있는 현장취경도의 발견은 세계적으로 진귀한 것이며, 불교사상의 변화와 중국-인도 간 문화교류의 역사적 연구에 중요한 자료라고 했다. 뿐만 아니라 ‘서유기’가 완성되어 간행되기 300여 년 전에 이미 주요 인물의 예술적 형상이 창조되었음을 보여 주는 자료라고 했는데, 예술적 형상이 아니라 원래의 생김새를 사실적으로 표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유림굴에서 ‘서유기’의 원류를 생각할 줄이야. 인류의 교류가 새로운 문명을 창조하고 발전시킨다는 사실을 현장취경도를 보며 다시 한 번 깨닫는다. 길은 언제나 정직하고 성실하다. 그 위를 오가는 사람들이 상상력을 불러일으켜 새로운 형상을 남기니, 새로운 사람들은 이를 바탕으로 또 다른 문화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정직과 신의에 바탕을 둔 창의적인 상상력. 실크로드는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가르침을 길 위에 남기는 것이다.


草書의 大家 장지(張芝)의 흔적을 찾아서

해가 지기 전에 안서 시내로 가기 위해 길을 다잡는다. 어느덧 황량한 사막이 사라지고 초원과 가로수가 보인다. 이정표가 없어도 ‘오아시스의 도시’ 안서에 왔음을 알 수 있다. 길옆의 천막가게에는 수박과 멜론을 팔고 있다. 과일도 먹고 쉬어갈 겸 잠시 멈춘다. 차에서 내리자 서로 자기네 것을 맛보라고 난리다. 마음씨 좋게 생긴 아주머니가 깎아주는 과일을 한입 물었다. 달다. 아니 달다 못해 꿀맛이다. 그야말로 혀끝에서 살살 녹는다. 한 조각을 더 받아 게 눈 감추듯 먹어치우자 아주머니 얼굴이 환하다. 큰 것으로 집었더니 그것보다는 좀 작은 것이 더 맛있다고 골라준다. 아주머니가 골라준 것도 3명이 먹을 만하다. 갈증도 풀고 요기도 되니 간식으로 이만한 게 없다.

 

▲안서는 초서의 대가 장지의 고향이다

 

안서 시내로 접어들자 민가가 촘촘하다. 대문 위에는 큼지막하게 ‘가화만사흥(家和萬事興)’이라고 쓴 집들이 보인다. 우리는 ‘성공’하는 것을 좋아해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라고 하는데, 중국인들은 만사가 불타오르는 것처럼 크게 일어나는 것을 좋아해 ‘흥’이라고 하는 것 같다. 시내로 들어서니 곧게 뻗은 대로변에 깃발이 쉼 없이 연이어 걸려 있다. 처음엔 무심코 지나치다가 계속 보이는 터에 차장으로 스치는 문구를 자세히 살펴본다. ‘초성고리(草聖故里)’라 쓰여 있다.


“아, 초서의 대가 장지(張芝)의 고향이 이곳이었구나.

장지는 중국 서법사(書法史)상 초서의 대가다. 그는 한나라 말기인 헌제(獻帝)시대의 사람으로 지금부터 2,200여 년 전의 인물이다. 그의 부친은 장환(張奐)으로 흉노를 무찌른 공로를 인정받아 흉노중랑장(匈奴中郞將)을 지냈다. 부친이 탁월한 무인이었지만, 아들인 장지는 서법 학습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당대 저명한 학자이자 서법가인 최원(崔瑗)과 두조(杜操)의 필법을 익혔다.


고사성어 ‘座右銘’의 탄생

우리는 살아가면서 저마다의 좌우명(座右銘)을 말한다. 삶에 있어서 귀감이 되는 문구를 항상 옆에 두고 그 뜻을 되새기며 살아가겠다는 의미다. 이런 좌우명은 최원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스스로 지켜 행하여야 할 내용을 칼로 새겨 자신의 책상 오른쪽에 놓고 평생 잊지 않았는데, 이로 인해 ‘좌우명’이란 말이 생긴 것이다.

 

그렇다면 최원의 좌우명은 무엇이었을까.

남의 허물을 말하지 말고無道人之短
나의 자랑도 떠들지 마라.無說己之長
남에게 베푼 것은 잊어버리고施人愼勿念
세상의 명예를 좇지 마라.世譽不足慕
오직 어짐으로서 기강을 삼고唯仁爲紀綱
마음을 다잡은 후 행동하라.隱心而後動
비방하면 어찌 상처가 없겠는가謗議庸何傷
명분을 세우고 잘못을 하지 말며無使名過失
어리석음을 알고 성인의 도를 배우라.守愚聖所藏
진흙 속에 있어도 물들지 말고在涅貴不淄
어둠 속에서도 빛을 품어라.曖曖內含光
부드럽고 약한 것이 삶이니柔弱生之徒
노자는 굳세고 강한 것을 경계했다.老氏誡剛强
어리석게 행함에 뜻이 있고行行鄙夫志
유연함에 오히려 헤아릴 수 없다.悠悠故難量
말을 삼가고 음식을 절제하라愼言節飮食
족함을 알아 상서롭지 못함을 이겨내고知足勝不祥
행동함에 있어 항상 떳떳하게 하면行之苟有恒
오래도록 저절로 향기가 나는 법이다.久久自芬芳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 삶인가? 이 물음은 2,000년 전이나 오늘이나 쉽게 답할 수 없는 문제다. 스스로를 반성하고 시류에 욕심내지 않으며, 옛 성현들이 몸소 체득하여 남긴 명구를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절차탁마하는 것. 이것이 진정 모든 이에게 귀감이 되는 삶이리라. 하지만 세상은 이런 삶만을 추구하지는 않는다. 모두에게 귀감이 될지언정 정작 스스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삶이 비일비재하다. 삶의 지향점이 다른 까닭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 같은 좌우명을 실천하는 삶을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로 듣는다. 신체와 생활이 모두 자본의 향기와 맛에 길들어 있기 때문이다.

 

▲장지의 필체


최원은 서예도 뛰어나 특히 초서에서 일가를 이룬 학자다. 그의 필법은 이런 좌우명에서 비롯된 것인데, 초서를 쓸 때에도 나름대로 법칙을 새겨놓았다.

“획을 꺾을 때는 붓을 옮기지 않는다. 내려 보고 올려보아도 예의에 맞아야 한다. 생동감이 넘치며 기묘한 글씨를 쓰려면 한 획일지라도 옮기지 않고 써야 한다.(終而不離. 俯仰有儀. 放逸生奇, 一劃不可移.)

장지는 두 대가의 필법을 익혀 자신만의 비법인 ‘일필서(一筆書)’를 완성한다. 그리하여 서법가들은 장지를 일러 ‘초서의 성인(草聖)’이라고 부른다. 서성(書聖) 왕희지조차도 일생 장지를 존경하였으며, 장지의 필법을 배우려고 애썼다. 장지는 후한 말기 전란의 시대를 살았기에 세속의 명예를 추구하지 않고 마음을 다스리며 서법에 매진하였는데, 그의 이런 정신과 품격은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35)  "좋은 것은 동쪽으로, 나쁜 것은 무조건 서쪽으로"

실크로드 불교문화의 꽃, 돈황을 가다

중국 ‘서부대개발’ 경제발전전략 뒤에는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이라는 중화제국주의적 발톱이 숨어 있다

‘덩샤오핑의 先富論’, 중국 서부대개발의 정치사회적 전략

 

안서 사내를 벗어나니 곧바로 잿빛 황량한 벌판이다. 사막 길에는 언제나 먼지가 심하다. 바람이 드나듦에 장애물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는 사막에 바람의 장애물이 생겼다. 송전선과 가스관, 고속철도가 그것이다. 끝없는 사막의 벌판을 가로질러 송전선이 늘어서 있다. 가스관과 고속철도 건설을 위한 굴착공사도 한창이다. 중국의 서부대개발 사업이 속도를 내고 있는 것이다.

중국은 지난 30여년간 개혁 개방 정책으로 고도성장을 이룩하였다. 그 결과,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 되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많은 부작용도 생겼다. 지역격차, 도농격차, 빈부격차가 말해주듯이 불균형 성장이 계속됐다. 중국정부는 이를 해소하기 위하여 2000년부터 본격적인 서부대개발을 추진하고 있다. 이를 통하여 서부지역의 자원을 개발하여 서부 및 중동부의 경제발전을 촉진하고 서부지역의 소득격차를 줄여 주민들의 불만 해소 및 정치사회적으로 안정을 꾀한다는 전략이다.

중국의 경제개발은 덩샤오핑(鄧小平)의 선부론(先富論)에서 시작된다. 선부론은 여건이 좋은 곳을 먼저 발전시켜 부유하게 한 후, 이 지역을 기반으로 낙후된 지역을 발전시킨다는 정책이다. 이에 의하여 중국의 경제개발은 동부 연해지역부터 발전시킨다. 그런 후에, 점진적으로 동부에서 중부, 중부에서 서부지역으로 개발범위를 확대하는 전략이다. 서부대개발은 이러한 경제발전전략에 따른 것이다.


“좋은 것은 동쪽으로, 나쁜 것은 서쪽으로”

서부대개발은 크게 5가지 사업에 집중된다. 전기, 천연가스, 석유, , 교통이 그것이다. 이른바 국가적인 동맥을 건설하는 기간산업이다. 이중 3가지(전기, 천연가스, 석유)는 서부지역에서 동부지역으로 가져가는 것이다. 고속철도로 대별되는 교통은 ‘팔종팔횡(八從八橫)’이란 말처럼 전국적으로 교통 그물망을 구축하는 사업이다.

 

▲서부대개발 사업의 하나인 송전선 건설


오직 수자원만 장강 지역에서 서부지역으로 가져오는 것이다. 서부대개발 사업은 자원의 이동과 교통의 확장에 불과하다. , 이 사업으로 서부지역민들이 직접적인 수혜를 받기에는 아직은 먼일인 것이다. 그래서 이곳 주민들의 불만은 식을 줄 모른다.


“좋은 것은 동쪽으로 다 가져가고, 나쁜 것은 서쪽으로 다 보낸다.

나쁜 것은 무엇일까. 환경오염, 공해, 간섭 등이다. 서부지역 주민들은 자신들이 실질적인 혜택을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도로와 철도를 개설하고 그 길을 통하여 자원만 가져가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마치 눈뜨고 도둑맞는 심정으로. 이들이 이러한 생각을 갖는 것은 왜일까. 단지 경제적 격차 때문에 갖는 생각일까.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서부대개발의 집중지역은 신강(新疆)과 서장(西藏)이다. 이 두 지역은 각각 위구르민족과 티베트민족의 자치구이기도 하다. 이곳은 중국으로부터 분리 독립하려는 의지가 매우 강한 지역이다. 지금도 수시로 독립을 위한 투쟁이 벌어져 중국정부가 골치를 앓는 곳이기도 하다. 서부대개발 사업은 이처럼 정치적 독립을 원하는 두 민족과, 이를 용납하지 않고 ‘중국’이라는 하나의 국가와 체제 내로 통합하려는 치열한 움직임이 숨어 있다. 그래서 한쪽은 허울뿐인 약탈을 미워하고, 한쪽은 체제의 안정을 위하여 개발에 심혈을 쏟는 것이다.


중국 서부대개발은 중화제국으로의 비전과 연결

중국의 서부대개발은 선부론에 의거한 낙후지역의 경제개발이라고 하지만, 사업의 실질적인 뿌리는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에서 비롯된다. 이는 곧 현대 중국의 정체성과도 연결되는 중차대한 것이다. , ‘너희 가운데 우리가 있고, 우리 가운데 너희가 있다(中有我, 我中有你)’며, 한족과 소수민족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단결체임을 강조한다.

 

▲돈황시 상징인 비천상.

 

이는 국가, 영토, 민족, 역사 등이 맞물려서 종국적으로 ‘중화민족 대가족’이라는 중화제국의 건설에 닿아 있는 것이다. 특히, 소수민족의 한족화(漢族化)를 통한 민족적, 문화적 통합은 21세기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위한 최우선적 해결과제인 것이다. 서부대개발은 대외적으로 동서지역 간의 빈부격차와 지역 간의 균형성장을 위한 경제개발사업이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이러한 과제 수행의 절실함 때문에 중국정부가 시급하고도 막대한 비용을 쏟아 부으며 맹진(猛進)하고 있는 것이다.

서부대개발은 중국의 향후 국가적 비전과도 연결되어 있다. 중앙아시아와 유럽 및 인도지역으로 진출함에 있어서도 중요한 교두보가 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서는 태평양과 대서양, 인도양을 연결하는 전략적 요충지로서 중화제국의 번영을 이끄는 지역이 될 것이기에, 중국정부는 철저한 계획에 따라 절대적인 노력을 경주하는 것이다.


실크로드 꽃 ‘돈황’

돈황(敦煌)이 지척임에도 사막 길은 끝날 줄 모른다. 기련산맥이 힘을 잃을 즈음, 삼위산(三危山)이 다시 왼쪽에서 나를 굽어본다. 삼위산은 말이 산이지 산맥이나 다름없다. 시커멓고 우락부락한 산봉우리가 서로 힘자랑을 하기라도 하듯 불쑥불쑥 연이어 솟아 있는데 그 모습이 장대하다. 잿빛뿐인 사막과 시커먼 삼위산의 평행. 그 거대한 자연 사이로 미약한 삶의 인간이 종종걸음으로 달려간다.

그리고 특고압선 송전선이 함께 줄달음질 친다. 사막과 삼위산은 인간과 자연의 공존에 대하여 가르쳐 주지 않는다. 다만 함께 있으며 지켜볼 뿐이다. 바람이 대신 알려줄 뿐이다. 때로는 시원하게, 때로는 따끔하게, 때로는 땀 뻘뻘 흘리게, 때로는 눈도 못 뜨게. 하지만 인간은 전령사인 바람의 언어를 듣지 못한다. 자연이 알려주는 지구의 메시지를 어린아이들의 우스개 놀이로 치부한다. 전 지구적 문명 건설만이 듣고 싶은 정답이기 때문이다. 그러하매 그 어떤 바람도 밀쳐내며 더 거세게 자연을 몰아붙인다.

저만치 장엄한 삼위산이 끝나는 곳에 은색의 모래산이 마주 보고 있다. 명사산(鳴沙山)이다. 이제 실크로드의 꽃이자 사막 속의 오아시스, 돈황에 이른 것이다. 시내에 들어서니 한여름의 열기가 도시 전체를 감싸 돈다. 하지만 실크로드의 요충지답게 각국에서 온 관광객들이 지도를 보며 서로의 목적지를 찾는다.

 

▲명사산 풍경

 

돈황은 한 무제가 흉노를 몰아내고 무위, 장액, 추천과 함께 하서4(河西四郡)을 설치하며 붙여진 이름이다. ‘한서’ ‘지리지’에 보면, ‘돈()은 대(), ()은 성()’이라 하였으니, 곧 ‘크게 번성한다’는 뜻이다. 무제는 하서4군을 서역 정벌의 전진기지로 삼기 위하여 많은 한족을 이주시켰다. 그때부터 돈황은 이민족의 침략에 맞서고 서쪽으로 영토를 확장시키는 거점도시가 된다.

또한, 서역에서 사막을 통하여 중국으로 들어오는 모든 길은 돈황에서 만난다. 돈황은 중국으로 들어가는 첫 관문이다. 이처럼 돈황은 그 이름답게 동서교통의 중요한 요충지로서 시대마다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하여 하서4군 중 가장 빠르게 발전하였다.


한나라 때 개척된 돈황은 당나라 때 전성기를 맞는다.

중앙아시아 및 서역 각국과의 교류가 더욱 확대되고, 각종 종교와 풍속들도 함께 들어온다. 바야흐로 돈황은 동서문화의 교류지로서 백화난만(百花爛漫)한 사상을 꽃피운다. 특히, 불교문화의 응집과 번성은 돈황을 실크로드의 꽃으로 부르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風沙海 속의 ‘월아천’은 오아시스의 대명사

시내의 남쪽으로 들어서자 도로 한가운데 불쑥 솟은 명사산이 나타난다. 입구에 들어서니 황금빛 모래산이 웅장하게 펼쳐지고 사구(沙丘)마다 낙타행렬이 거창하다. 하지만, 이는 관광객을 대상으로 명사산을 둘러보는 관광 상품이다. 명사산에 오른다. 동서 40, 남북 20㎞의 거대한 모래산이 따가운 모래를 흩뿌린다.

정상에 선다. 그야말로 풍사해(風沙海), 바람과 모래가 만든 바다가 하늘까지 이어진 듯 아득하다. 수천 년 동안 죽을 고비를 넘기며 사막을 넘어온 사람들. 그들을 이곳까지 오게 한 힘은 무엇이었을까. 경제적 이득, 종교적 열정과 구원, 미지에의 동경과 사랑. 아니면 영토 확장을 통한 제국건설이었을까.

 

▲사막속의 오아시스 월아천.

 

명사산이 끝나는 곳에 반달 모양의 월아천(月牙泉)이 보인다. 월아천은 천연의 샘물이 만든 오아시스다. 이곳은 천 년이 지나도 샘물이 마르지 않고 거대한 명사산의 모래에도 매몰되지 않은 채, 그 모양을 유지하고 있으니 참으로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수많은 신기루를 물리치고 사막을 건너온 이들이 월아천을 보는 순간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살았구나’를 넘어 종교적인 희열을 느꼈으리라. 눈물의 성수(聖水)를 마시며 감사함에 향불을 피웠으리라. 그리고 깨달았으리라. 살아있음을 감사하고, 살아있음에 보답하며, 살아있음으로 이를 전하는 삶의 고귀함을. 그 어떤 굳건한 신념과 정신을 가진 자도 욕심을 내려놓고 만족할 줄 알고 쉬어가는 법도 배웠으리라. 청나라 때의 소이길(蘇履吉)도 돈황팔경의 하나인 ‘월아천의 새벽 물빛(月泉曉澈)’에 매료되어 시 한 수를 남겼다.


물 맑고 신령스런 명승지 월아천은 勝地靈泉澈曉淸
그 옛날엔 악와지로 불리었다네. 渥洼龍是昔知名.
상현달 같이 휜 물굽이에 一灣如月弦初上
반원형 맑은 물결이 거울처럼 밝구나. 半壁澄波鏡比明.
바람에 나는 모래는 샘물에 이르지 않고 風卷飛沙終不到
샘물도 모래를 넘지 않아 서로를 위하네. 潚含止水正相生.
모래와 물이 정자에서 만나 즐겁게 노니나니 竭來亭畔頻遊玩
향기로운 차 한 잔에 스스로 취하여 무르익노라. 吸得茶香自取烹.

불교문화의 정수 막고굴에서 혜초를 만나다

돈황 불교문화의 핵심인 막고굴(莫高窟)로 향한다. 막고굴은 40㎞ 길이의 명사산이 끝나는 동쪽 계곡에 있다. 막고굴은 서기 366. 낙준(僔)이란 수행승(修行僧)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가 삼위산을 가는 도중에 이곳에서 삼위산에 비친 석양을 보게 되었는데, 산봉우리가 휘황찬란한 금빛으로 빛나고 수많은 부처님의 광명과 함께 하늘을 날며 춤추는 향음신(香音神)의 형상을 보았다고 한다.

이에 낙준은 이곳에 석굴을 파고 수행을 하였다. 당시 불교는 굴을 파고 정좌로 참선 수행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속세에서 떨어진 조용한 곳이 필요한데, 명사산 절벽 아래 물이 흐르는 오아시스가 제격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막고굴은 승려와 화가, 석공과 도공 등에 의하여 하나씩 정성스레 석굴이 생겨나기 시작하여 원나라 때인 13세기까지 천여 년이 지나는 동안 수많은 석굴이 개착되었다.

 

▲돈황 막고굴.

 

당나라 무측천(武則天) 시기에 이미 천 개가 넘었다고 한다. 하지만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인간과 자연에 의하여 파괴된 석굴도 많아 지금은 492개의 석굴만 남아 있다. 막고굴의 석굴이 많이 파괴되었음에도 1987년에는 유네스코 인류문화유산에 지정된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불교예술지다. 막고굴은 당나라 때 번성하였다. 이는 실크로드의 전성기를 맞이하여 최고의 경제력을 축척한 결과이기도 하다. 전성기를 구가한 당 제국시기의 막고굴은 어떠하였을까.


눈 덮인 삼위산은 하늘 높이 솟고 雪嶺干靑漢
명사산 절벽에는 공중누각이 걸렸네. 雲樓架碧空
수많은 석굴이 겹겹이 늘어서고 重開千佛刹
사천왕상도 사방 곳곳에 나와 있네. 旁出四天宮
상서로운 난조(鸞鳥)가 구슬을 문 듯하고 瑞鳥含珠影
신령한 꽃들이 향내음을 풍기는 곳. 靈花吐蕙

번뇌를 씻으면 유유자적의 경지에 이르나니 洗心游勝境
이참에 오염된 속세로부터 벗어나고 싶구나.從此去塵蒙


막고굴에 도착하니 입구부터 전 세계서 모여든 관람객들로 붐빈다. 진정 실크로드 불교문화의 중심지인 것이 실감난다. 회랑처럼 늘어선 석굴들이 각자의 방 번호를 달고 옹기종기 모여 있다. 석굴마다 문을 만들어 불상과 벽화의 훼손을 방지하고 있다. 자물쇠가 굳게 잠겨있는 문들을 바라보자니 마치 석굴마다 스님들이 무더운 날씨를 이겨내며 하안거에 들어간 듯하다. 안내인을 따라 석굴로 향한다. 이곳은 방문객의 국적에 따라 개방하는 석굴이 틀리다.

천 년 동안 만들어진 벽화와 불상들이 약탈의 상처를 딛고 찬란한 빛을 발한다. 그중에는 한반도에서 온 우리 선조의 벽화도 보인다. 서역악기인 비파, 서역의 춤인 호선무 사이로 우리 민족의 대표악기인 장고의 초기모습도 보인다. 혜초 스님의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된 17호 굴에서는 한동안 발길을 떼지 못한다.

석굴에는 왕과 귀족은 물론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이 저마다의 염원을 위하여 돈독한 신심을 표현한 불상들이 앉았거나 누웠거나 서 있다. 석굴의 사방은 지상과 천상의 세계가 화려하게 피어 있다. 어느 것 하나 혼신을 다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들은 불상과 벽화를 만들고 흡족했으리라. 평안과 극락이 예있으리라 여겼으리라.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된 돈황 장경동 17호굴


제국주의자들의 약탈, ‘돈황학’으로 발전

그러나 오늘의 막고 굴은 황폐하다. 그 옛날 번성했던 실크로드의 요충지에는 제국주의의 문화재 약탈과 파괴의 흔적이 거세게 남아 있다. 그들은 흡족해하였다. 자국의 텅 빈 창고에 타국의 보물들을 빼앗아 채워놓음으로써 부끄러운 역사를 감추고 문화대국임을 자랑하였다. 그렇다고 정녕 문화대국이런가.

부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부서지고 빼앗기고 산산이 흩어지는 것이 곧 새로운 극락을 건설하는 것임을. 비우고 내려놓고 다 주어버림으로써 보다 넓고 새롭게 꽃피울 수 있다는 것을. 그리하여 전 세계가 ‘돈황학’으로 돈황을 알고, 돈황에 모여 ‘돈황학’을 더욱 승화시키리라는 것을 부처는 이미 오래전에 알고 있었던 것이다.

감동의 막고굴을 돌아 나오는데 더 많은 세계인이 입구에 길게 늘어선 채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순수한 영혼들이 만들어낸 찬란한 극락 막고굴은 비움으로서 이처럼 다시 차고 있는 것이다. 어찌 제국의 창고가 이에 견줄 수 있겠는가. 고요한 모습의 불상이 되돌아보는 나의 시선을 붙잡는다. 그 사이, 불현듯 다가오는 부처의 미소가 시대를 넘어 너무도 곱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