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전문가들의 생각14/ 허경구의 중국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 허우범의 실크로드 7000㎞ 대장정1(① 죽음도 갈라놓지 못한 한무제와 이부인의 사랑 - (15) 무협의 나라 중국, 역사왜곡도 ..
중국 전문가들의 생각14/
◆허경구의 중국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국제정치문제연구소 이사장 역사 기행 전문가 E-mail : appolo21@hanmail.net
◇ 2014.10.14 중국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Ⅰ)
지금 세계는 홍콩의 ‘우산혁명’을 숨죽여 예의주시하고 있다. 혹시 홍콩에서 지펴진 작은 불씨 하나가 들불처럼 온 중국으로 번져가는 천하대란의 단초가 되는 것은 아닌가 하고 말이다. 이런 관측에는 일말의 걱정과 일말의 기대감이 반반씩 섞여 있다. 다른 말로 중국이 민주화의 길로 들어서든지 아니면 다른 사단이라도 생겨나서 지금 불기둥처럼 솟고 있는 중국의 그 무서운 굴기와 웅비의 압력으로부터 조금이라도 피할 수 있는 길이 열리지 않을까 하는 희망적 관측이 섞여있다는 말이다.
몇 세기 전부터 서양인들에게 회자되기 시작한 중국의 위협(Sinic menace) 또는 황화(Yellow’s peril)론은 이제 눈앞에 다가온 현실이다. 중국의 이 무서운 질주에 누구나 할 것 없이 뭔가 제동이 걸리기를 바라는 심정이다. 말로만 듣던 황화(黃禍)론의 실체가 바야흐로 눈앞에서 그리고 세계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다. 중국이 패권을 추구하지 않고 보다 민주적이고 책임 있는 강대국으로서 제 역할을 해주기를 바라는 것이 세계인들의 바람이지만 이런 기대감이 무망하다는 것을 세계인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이러던 차에 느닷없이 일어난 것이 홍콩의 민주화 혁명의 불길이다. 이름하여 우산혁명이라고 하지만 세계인들은 거기서 거대한 변화의 불씨를 보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불씨를 제일 싫어하는 것이 바로 중국의 지도부일 수밖에 없다. 홍콩사태의 결과에 상관없이 앞으로 중국이 어떤 방향의 길로 가게 될 것인지는 중국뿐만 아니라 모든 세계인들의 초미의 관심사가 되어 있다. 중국의 앞날은 무엇으로 결착이 될 것이며 또 무엇으로 결판이 나게 될 것인가?
홍콩의 민주화혁명에 과연 중국공산당은 어떻게 대처할 것 인가하는 맥락에서 우선 세계인들의 관심을 끄는 것은 중국 공산당의 통치 능력에 대한 평가다. 중국 공산당은 금년으로 건국 65주년을 맞이하지만 지금까지 공산당의 영도력이나 정통성에 있어서 크게 손상을 입은 적은 없었다. 중국 공산당은 지금까지도 의연히 피통치자인 중국의 인민들이나 통치 주체인 중국 공산당에 대한 장악력을 한 번도 잃어본 일이 없다. 통치의 효율성을 유지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중국 공산당은 상찬 받을 만 하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냉전시대의 소련공산당과 비교해 볼 때 더욱 그러하다고 볼 수 있다. 중국 공산당의 정통성은 아직도 그 실효가 사그러들지 않고 있다. 그만큼 공산당 지도력의 권위를 잃고 있지 않다는 뜻이다. 그 원인을 따져 보면 뭐니뭐니해도 경제발전이다.
하버드 대학의 래리 섬너즈에 의하면 미국이 가장 빠르게 성장할 때 미국인들의 생활수준은 30년 단위로 배가되었다면 중국은 중국인들의 생활수준을 10년 단위로 배가 시켜 왔다고 한다. 곧 미국의 성장속도를 1/3로 단축해서 달성시켜 왔다는 얘기다. 그리고 중국의 경제적인 성장세는 앞으로도 쉽게 수그러들 것 같지 않다는 것이 대부분 경제전문가들의 진단이기도 하다. 중국의 경제발전이 중국 공산당이 갖고 있는 경쟁력의 가장 핵심이요 또 공산당이 누리는 전통성의 알파와 오메가다. 그러나 설사 경제성장에 어떤 장애가 생긴다 하더라도 이미 중국은 돌이킬 수 없는 일정한 성장의 궤도에 올라서 있는 것이 사실이다. 중국은 1982년 이래로 집단지도체제를 채택하고 있다. 등소평이 중국 공산당과 중국적 상황을 잘 가미해서 만들어 놓은 하나의 안전판적 지도체계이다. 지금까지 공산당의 이 과두체제는 더할 나위 없이 잘 작동되어 왔다. 심각한 내부 분란도 없었다. 또 일정한 의사결정의 틀을 마련해놓고 이에 따라 국정을 가감 없이 적절하게 그리고 효율적으로 처리해왔다. 황제 밑의 관리들에 의해 일사분란하게 통치되어왔던 중국의 과거 제국처럼 지금의 중국도 역시 황제만 없다 뿐 황제 밑의 유능한 관리들처럼 국사를 제대로 처리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중국적 메리토크래틱 시스템의 승리라고 해야 할 것이다.
중국의 지난 30년간의 경이적인 경제 발전의 성과는 곧 중국 공산당의 통치 성과로 치부되는 상황에서 중국 공산당의 위상은 전례 없이 높아졌다고 할 수 있다. 그 지도력의 효율성을 국제적으로도 인정받고 있다. 더 나아가서 중국 공산당은 냉전시대 소련 공산당이 미국과의 비교우위에서 언제나 폄하되고 저평가 되던 그 관행과 수모에서 벗어나 오히려 미국과의 비교 우위 면에서 우월한 평가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미국의 정치체제는 오히려 비효율의 대명사처럼 되어버렸고 이미 예산 정지 파동의 씨퀘스터의 예에서 보듯 세계 여론의 조롱의 대상이 되다시피 되었다. 중국은 세계적 여론의 고과표에서 놀라움과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고 세계 도처에서 자본 식민지를 만드는데 분주한 반면 미국은 세계 도처에서 도전과 갈등에 함몰되어 있고 국내정치적으로도 분란이 그칠 날이 없는 나락의 바닥을 헤매고 있다. 그래서일까?
중국은 이젠 노골적으로 국제 여론의 품평시장에서 미국 그리고 서구 민주주의의 정치 체제와 중국 정치 체제의 공개적인 경쟁을 선언하고 나선 참이다. 비효율의 대표격인 서구의 정치체제와 효율과 발전의 상징인 중국의 정치체제간의 경쟁을 공개적으로 선언하고 나선 격이다. 중국은 그만큼 지금 자신감에 충만해 있다. 서구식 자유와 민주주의의 뒷받침이 없는 중국식 자본주의와 정치 체제를 새롭게 구축해서 중국식 대국의 길로 나서겠다는 것이 중국이 내세우는 포부다. 우선 중국식 경제발전과 정치발전 모델이 과연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그 기대감 자체가 인류 역사상 전례가 없던 일이다. 서구의 전통으로 보면 알렉시스 토크빌이나 세이묘 마틴 립세트같은 정치학자들의 가설이 하나의 정설로 인정되어 오던 터였다. 그 가설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는 떨어질 수 없는 불가분리의 관계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그 정설에 도전해서 성공을 장담하는 국가는 일찍이 있어본 적이 없다. 이제 중국이 그 실험의 성공을 장담하고 나선 판이다.
그런데 이 실험이 실패할 확률 보다는 성공할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이 점점 확실해 지고 있다. 물론 중국식 실험에는 여러 가지 회의론이 뒤따르는 것이 사실이다. 예컨대 데이비드 램프튼 같은 학자는 중국 발전의 시나리오로 독재자의 출현, 천하대란, 삼권분립이 된 민주주의의 출현 그리고 집단 지도체제의 계속 등 몇 가지 앞으로의 전개 가능성을 예측한 바 있지만 중국은 지금의 집단 체제의 유지 내지는 그에서 비롯된 약간의 변형과 변용의 범위 안에서 통치를 계속해 갈 것으로 본다. 이것이 현재로서는 가장 타당한 예측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사실 현재의 중국 지도부는 집단지도체제에 플러스 알파를 더해서 시진핑에게 영도의 주도권을 주고있는 쪽으로 재편되고 있다. 이를테면 ‘동료중의 일인자’(the first among the equals)로 인정하고 그의 정치 내지는 정책적 이니셔티브를 인정하는 추세로 나가고 있다는 얘기다. 그런데 이런 추세에 더해서 중국 공산당의 성공을 보장하는 가능성은 오히려 미국으로부터 제공되고 있다는 사실이 특이하다면 특이하다. 우선 미국은 냉전시대의 미소의 경쟁 때처럼 중국을 무엇으로도 압도하지 못하고 있다. 민주주의라는 이념적인 측면에서 그리고 사상적인 측면에서 미국은 중국에게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다. 중국은 이렇다 할 이념이나 사상적인 배경이 없는 뒤죽박죽의 정치체제를 유지하고 있으면서도 미국에게 하등 꿀릴 것이 없다는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중국의 대국으로의 부상에 이렇다 할 이념적 도전세력이 없는 것이 중국으로서는 천만다행이라고 할 수 있다. 오히려 중국이 민주주의적 사상과 제도와 관행에 도전해도 좋을만한 하나의 세계사적 이변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중국은 이념적 공백을 공자와 유교에의 회귀로 메꾸려 하고 있다. 미국이 이념적으로 그리고 가치적인 측면에서 오히려 기력이 쇠해가고 쇠미의 기미를 보이고 있는 형국에서 중국은 이렇다 할 이념적 우월성이 없이도 국내외적으로 승승장구하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 중국은 이래저래 헝클어진 미국의 대외관계와 서방세계의 경제적 위기에 홀로 살아남아 있다. 중국공산당은 그런 측면에서 볼 때 통치의 여력을 지금도 계속 축적하고 또 남는 경쟁력은 차곡차곡 창고에 쌓아놓고 있는 형국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은 무궁무진한 정통성의 자원을 확보하고 있고 또 확보해 나가고 있는 중이다. 중국 공산당은 앞으로 어려운 날이 닥쳐도 이 창고에 쌓아놓은 곡식과 무기들을 사용할 날이 올 것으로 본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중국 공산당이 중국에서 서방적 민주주의는 맞지도 않고 채택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공언해 온 것이 헛말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중국식 정치체제와 자본주의를 혼합시킨 새로운 형태의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만들어 내야겠다고 노골적인 선전포고를 해온 것이 결코 빈 소리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다음 주 2회가 이어집니다.]
◇2014.10.21 중국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2)
한때 지구촌 여기저기서 들불 일어나듯 유행하던 민주화 혁명도 이제는 한풀 꺾였고 그나마 부분적으로 성공했던 민주화 혁명도 그 예후가 좋지 않게 끝나고 있다. 다시 말해 민주화 혁명에 대한 한 때의 부푼 기대는 이제 실망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말이다. 만약 민주화 혁명 추세가 정반대로 전개되어 미국의 민주주의가 그 경제력과 함께 강성하게 뻗어나가고 지구촌 여기저기서 민주화의 물결이 쓰나미처럼 밀려들기 시작하고 이러던 차에 홍콩에서 이번처럼 우산혁명이 일어나기 시작했다면 중국으로서는 대단히 어려운 형국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태는 바로 그 정반대로 일어나지 않았던가. 이렇게 보면 중국은 확실히 천시(天時)의 이(利)를 얻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중국이 현 단계에서 갖는 역사성이나 그 인구와 국토의 광대함으로 볼 때 그리고 중국 문화의 연속성으로 볼 때 중국적 정치발전 모델은 그 나름대로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중국이 현 단계에서 천시(天時)의 이(利)를 얻고 있다는 증좌에 다름 아니라고 본다. 우리나라에서도 한 때 지금은 고인이 된 월정사의 탄허(呑虛)스님이 내린 예언이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즉 지구 지축의 변화로 기울어졌던 지구의 위도가 제자리로 옮겨감에 따라 천기(天機)의 운세에도 일대 대이동이 일어날 것인즉 앞으로 문명의 중심지는 극동, 즉 한국과 중국이 되리라는 예측이었다. 중국 공산당은 외교정책 적으로 화전양면 전술로 나가고 있다. 한 쪽으로는 동지나해, 남지나해에서 해상분쟁을 일으키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외교적 캣치 프레이즈로 친(親), 성(誠), 혜(惠), 용(容)을 내세우고 있다. 성실하게 이웃과 친하고 발전으로 생긴 남은 힘을 이웃과 너그럽게 나눠 갖겠다는 그럴듯한 포부다. 중국의 지금의 그 욱일승천하는 기세는 실로 인과성으로만 설명하기는 어려운 측면이 있다. 이미 말 한데로 천시의 이를 보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중국은 여기에 더하여 이제는 지리(地理)의 이(利)마저 얻어가고 있는 중이다. 이것은 또 무엇을 의미할까? 그것은 중국을 위시해서 중국 주변 국가를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는 민족주의적인 추세를 말한다. 중국 공산당이 필요로 하는 민족주의의 추동력을 운 좋게도 중국 주변의 국가들이 자진해서 제공해 주고 있다. 우선 미국의 중국에 대한 봉쇄정책이 중국인들의 전통적인 외세공포증을 극도로 자극하고 있고 일본의 철없는 극우편향적 외교정책이 중국인들의 분노를 증폭시키고 있다. 다른 예를 들 것도 없이 일본의 극우성향, 예컨대 아베수상의 망동 하나만 보더라도 그것은 중국인들이 격분을 사고 하늘을 찌를 듯한 분노를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이런 중국인들의 분격(憤激)은 바로 중국인들의 감정을 한군데로 몰입시키는 좋은 재료가 되어 준다. 국민 여론을 하나의 정치적 목표물에 귀일시키는 좋은 명분이 되어준다. 이런 국민적 감정을 휘몰이해서 공산당이 추진하는 국가적 어젠다의 귀중한 동력으로 써먹을 수 있을 때 공산당은 더할 수 없는 통치 정당성의 명분을 얻게 된다. 중국공산당으로서 이 이상 더 바랄 일이 어디 있겠는가. 거기다가 소련과는 전례없이 우호관계를 유지하면서 같은 전제적 정치제도를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 중국으로서는 무엇보다 든든한 우군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중국 공산당이 얻고 있는 지리(地理)의 이(利)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중국은 민족주의란 기관차를 움직일 연료를 일본으로부터 계속 공급받을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적의 존재는 아군을 단결시킨다는 손무자의 교훈을 중국은 철저히 이용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러고 보니 중국 공산당은 천기(天機)의 도움으로 천시와 지리의 이를 아울러 얻게 된 격이나 마찬가지다. 이제 남은 것은 인화(人和)의 이(利) 한 가지 뿐이다.
중국 공산단원은 현재 8669만 명이다. 일년전 만해도 8400만 명으로 통계가 잡혔었는데 1년도 안되어 200만 명이상이 늘어난 것이다. 중국에서 가장 유능하고 유력한 젊은 인재들이 매년 공산당의 인적자원에 그 질과 양을 보태고 있는 참이다. 아마 곧 일억을 넘어설 것이다. 지금 중국공산당은 자체의 정화운동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 성패여부가 중국 공산당의 생사 여부를 결정짓는 관건이 되리라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시진핑은 그 나름의 권력 집중을 위해서 두 개의 기구를 2013년 말에 창설하였다. 아마 이번 홍콩 민주화 혁명을 당해서도 중국공산당은 작년에 창설된 국가안전위원회와 전면심화개혁 영도소조를 활발하게 운영하였을 것이 틀림없다. 이 두 기구의 주석과 조장은 시진핑이 맡고 있다. 그만큼 정책결정의 집중력과 속도와 융통성을 1인체제에 집중하겠다는 의미다. 경제전문가들은 중국의 버블 경제, 특히 그림자 금융을 앞으로 중국 경제 발전의 장애물로 지목하고 있다. 그러나 관점에 따라 이것은 중국 공산당의 영도력을 확보하는 또 다른 수단이 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이 국가에 빚을 지고 있다는 그 사실 자체는 그런 사람들의 국가체제로부터의 이반을 부추기기 보다는 지지를 유도하는데 더 유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공산당의 지지기반이 더 깊어질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그리고 중국 공산당은 막대한 재정의 이(利)를 누리고 있다. 넘쳐나는 재정으로 물이 새는 구멍을 얼마든지 막아낼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중국 공산당은 재정운영의 막대한 잉여가치를 확보하고 있고 또 그것으로 국내적으로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어르고 달래고 다독여야 할 대상이나 세력이나 국가에 대해서 쓸 수 있는 재정적 여력을 가지고 있다. 중국 공산당은 적어도 2억 4000만 명의 시골 거주자들에게 연금을 지급할 수 있는 재량권도 가지고 있다. 필요하다면 몇 억명에게 더 지급할 수 있는 재정적 수단도 확보하고 있다. 이 숫자는 미국 전체의 연금 수혜자의 수를 초과하는 숫자다.
중국 공산당은 성장률 10%대일 때 국가와 민간에 돌아가는 분배의 몫이 7 대 3 이였던 것을 이제 성장률 7%대일 때 5 대 5로 조정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중국 공산당은 역설적이게도 경제 성장에 따른 국가의 몫을 줄이고 민간의 몫을 늘임으로써 공산당의 통치 장악력을 그만큼 높일 수 있게 되었다. 중국 공산당이 이러고서도 인화의 이를 얻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중국 공산당은 민주 국가에서 갖가지 갈등 요인으로 지체되고 천연되고 중단될 수밖에 없는 여러 가지 재정 수요에 대한 결단을 가장 신속하고 유효한 수단을 동원함으로써 국정의 효율성을 상대적으로 높일 수 있는 위치에 있다. 민주주의에 대해서 오히려 전제적인 중국공산당이 큰소리를 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이러한 데 있는지 모른다. 통치(governance)의 효율성을 확보하고 국민의 생활수준을 향상시키는데 있어서 민주주의보다 전제적 통치체가 훨씬 더 유효하다는 것을 중국 공산당은 지금 세계에 대하여 웅변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중국 공산당이 이러고서도 인화의 이를 얻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한 마디로 중국 공산당은 천시, 지리, 인화의 세 가지의 이를 얻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쯤 되면 중국 공산당의 통치 정통성이 언제까지인지는 모르지만 상당기간 계속 될 수 있으리라는 것은 불문가지가 아닌가. 그래서 시진핑이 가는 곳 마다 외치는 구호가 있다. 중국의 형편이 이쯤 되었으니 이제는 더불어 이웃과 잘 살겠다는 선의의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다니는 것이다. 왈, 달즉겸선천하(達則兼善天下)다.
그러나 중국도 주의해야 할 대국적 진단이 아직 하나 남아있다. 그것은 장구한 중국 역사의 연속성으로 볼 때 그 역사에는 일정한 평화와 전란이 교체되는 주기가 존재한다는 통계다. 이것은 또 무엇을 말함인가? 중국은 B.C. 2세기 경의 진나라부터 5세기의 수나라에 이르기까지 전반 500년은 평화 후반 300년은 전란으로 지새웠고 5세기의 수나라에서 13세기의 원나라에 이르는 800년간도 전반 500년은 평화의 기간이지만 후반 300년간은 전란을 겪어야 했고 마지막으로 14세기의 명나라에서 18세기의 청나라에 이르기까지 500년간은 비교적 평화의 시기였고 1852년 태평천국의 난으로부터 그 후의 300년간은 전란의 시기로 점쳐지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지금부터 150년간은 아직도 중국에게는 전란의 시기로 남아있다는 얘기다. 명의 창건이 1368년이었고 1852년의 태평천국의 난까지 500여 년 간은 일단 전란이 뜸했던 평화의 시기였다. 전란주기의 마지막 300년이 시작되는 1852년이 또 다른 전쟁과 재앙이 시작되는 해로 보고 있다. 이런 계산이라면 2152년이 되어야 전란의 시기가 종지부를 찍고 새로운 평화의 시기인 500년이 시작된다는 말이 아닌가. 이렇게 보면 2152년까지 아직도 138년의 전란의 시기가 중국 역사에서 예비되고 있다는 얘기나 마찬가지다. 이 평화와 전란의 주기성을 중국 당국은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중국 역사에 대한 통계적 주기성을 말하는 것이지만 그 주기성을 전혀 무시할 수도 없는 것이 역사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홍콩의 민주화 혁명의 작은 씨앗조차 섣불리 작은 불씨로만 볼 일은 아니라는 것을 이 역사의 법칙은 다시 경고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것이 또 다른 장구한 세월의 재앙의 불씨가 될 수 있겠기 때문이다. Pax Sinica는 언제 시작될까? 윈스턴 처칠이 얘기한데로 이것이 시작의 시작인지 아니면 끝의 시작인지 누가 그것을 장담할 수 있겠는가?
이런 면으로 본다면 홍콩의 민주화 혁명의 작은 씨앗조차 섣불리 작은 불씨로만 볼 일은 아니지 않은가. 집단지도 체제가 갖는 정책결정의 즉 자본주의는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영양소가 없이는 자랄 수 없는 제도라는 것이 전통적으로도 중국은 일종의 능력지상주의의 관료제도였다. 지금의 공산당도 출세의 사다리를 올라가기 위한 엄격한 위계질서를 지키고 있고 그리고 거기서 능력과 경험과 성분이 철저하게 검증된 소수의 인원만 사다리의 위쪽으로 옮겨갈 수 있는 능력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과거나 현재나 일종의 메리토크래틱 시스템이다.
중국공산당은 이미 중국에서 서방적 민주주의는 맞지도 않고 채택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선언해왔다. 그리고 중국식 정치체제와 자본주의를 혼합시킨 새로운 형태의 민주주의를 만들어내겠다고 공언해왔다. 서구적 민주주의에 대한 노골적인 선전포고에 다름 아니다. 이런 공산당의 중국의 앞날에 대한 확신과 자신감은 그 말대로 실현될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그 가장 큰 원인은 중국의 대국으로의 부상에 이렇다 할 이념적 도전세력이 없는 것이 중국으로서는 천만다행이라고 할 수 있다. 오히려 중국이 민주주의적 사상과 제도와 관행에 도전해도 좋을만한 하나의 세계사적 이변현상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선 민주주의 세력의 가장 대표라고 할 수 있는 미국의 기운이 쇠미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미국의 민주제도의 관행은 오히려 중국의 조롱거리가 되고 있는 실정이다. 2014년 미행정부에 의한 예산집행이 정지 직전단계까지 갔던 세퀘스터가 바로 중국인 뿐만 아니라 세계인들이 미국의 민주주의에 대해 깊은 회의를 갖게 된 계기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민주주의가 동력이 되지 않으면 자본주의는 더 발전하지 않는다는 가설도 중국에서는 통용될 기미가 전혀 없다.
전면적인 자유가 없는 자유시장경제체제로도 부의 축적은 가능하다는 것이 중국의 예에서 실증되고 있다. 한 때 지구촌의 여기저기서 들불이 일어나듯 유행하던 민주화 혁명도 이제는 한풀 꺾였고 그나마 부분적으로 성공했던 민주화 혁명도 그 예후가 좋지 않게 끝나고 있다. 만약 이런 지구촌의 추세가 정반대로 전개되어 미국의 민주주의가 그 경제력과 함께 강성하게 뻗어나가고 지구촌 여기저기서 민주화의 물결이 쓰나미처럼 밀려들기 시작하고 이러던 차에 홍콩에서 이번처럼 우산혁명이 일어나기 시작했다면 중국으로서는 대단히 어려운 형국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태는 바로 그 정반대로 일어나지 않았던가? 이렇게 보면 중국은 천시(天時)의 이(利)를 얻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거기다가 중국공산당은 민족주의로 국민적인 열망을 한데 모으고 이 열망을 동력으로 하여 공산당의 지도력의 정통성을 높이고 그 정통성의 시한을 연장시키고 정당화시키는데 교묘하게 사용할 줄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중국공산당이 필요로 하는 이런 민족주의 동력을 운 좋게도 중국 주변의 국가들이 자진해서 제공해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선 미국의 중국에 대한 봉쇄정책이 중국인들의 전통적 외세공포증을 자극하고 있고 일본의 철없는 극우편향적 외교정책이 중국인들의 분노를 증폭시키고 있고 남지나해에서의 필리핀, 베트남 등과의 해양경계선 분쟁이 중국인들의 자존심을 크게 손상시키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중국의 민족주의의 불씨를 지피는데 정치적 불쏘시개가 되어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거기다가 소련과는 전례 없이 우호관계를 유지하면서 같은 종류의 전제적(專制的) 정치 제도를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 중국으로서는 무엇보다도 든든한 우군이라고 할 수 있다. 거기다가 몽고와도 친하게 지내고 있고 더욱이 같은 유교권인 한국이 필요한 때 같이 춤을 추어줄 수 있으니 금상첨화라고나 할 것인가. 이렇게 보면 중국은 역시 이런 점에서도 지리(地理)의 이(利)를 얻고 있다고 할 것이다.◎
◆허우범의 실크로드 7000㎞ 대장정 1 - 조선일보
① 죽음도 갈라놓지 못한 한무제와 이부인의 사랑
'실크로드와 삼국지에 미친 사람' 허우범이 실크로드 7000㎞ 대장정 기록을 연재합니다. 지난 10년간 실크로드를 답사해온 필자 허우범은 실크로드 곳곳에 산재해있는 역사 유적지를 일일이 찾아가 역사적 사실을 추적합니다. 이번 연재는 실크로드의 과거를 되짚는데 그치지 않고 실크로드를 통해 앞으로 이루어질 동서양 소통과 융합의 현대적 의미를 독자 앞에 펼쳐 보일 것입니다./편집자 주
천하의 권력도 사랑만 못하다(서안1 : 한 무제와 이부인)
▲실크로드 탐사 경로
2013년 6월. 중국 섬서(陝西)성의 서안(西安)을 다시 찾은 나는 공항의 하늘을 보고 깜짝 놀랐다. 10여 년 동안 계절을 달리하여 여섯 번을 찾았지만 이렇게 푸른 하늘을 본 것은 처음이기 때문이다. 서안의 하늘은 언제나 잿빛이었다. 그런데 장구한 역사를 간직한 실크로드의 흔적을 살펴보기 위해 그 출발점을 찾아온 나그네를 하늘이 이토록 먼저 반겨주니 매우 상서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순간 나는 직감하였다. ‘나의 실크로드 여행이 새로운 의미와 메시지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서안 시내 실크로드 출발점의 석상.
실크로드는 중국의 서안에서부터 중앙아시아와 중동지역, 터키와 지중해를 거쳐 이탈리아 로마에 이르는 무역로를 말한다. 고대로부터 수천 년을 이어오는 이 무역로를 통하여 도자기, 향신료, 유리, 보석, 쌀과 밀 등 인류가 생산해 낸 모든 물건들이 거래되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값어치 있고 주된 교역물은 중국에서 생산하는 비단이었다. 그래서 ‘실크로드’라고 부른다.
서안은 옛날에 장안(長安)으로 불렸는데, 한당(漢唐)시대에 이미 세계적인 도시였다. 분열된 중국을 통일하여 제국의 체제를 갖추고 정치와 경제, 사회와 문화 등 다방면에서 다른 국가들에게 영향력을 미칠 정도가 되었다. 이러한 우위를 바탕으로 ‘실크로드’라는 길을 통해 동서 문명교류를 증대시켰다.
실크로드는 동서 문화와 상품들의 교역로이기 이전에 우리에게 흥미진진한 전설과 모험이 넘치는 신비의 땅이며 누구나 찾아가고픈 동경의 대상이다. 그것은 실크로드가 물류(物流)와 함께 ‘인류(人流)’의 길이었기 때문이다. 실크로드 속에는 국가와 도시문명의 흥망이 있고 아울러 다양한 인간 군상의 생생한 역사와 문화가 숨 쉬고 있다. 사막을 가로지르는 대상(隊商)들의 낙타행렬만이 실크로드의 전부는 아니다. 예술, 종교, 학문, 전쟁 등 인류사의 모든 것이 이 길을 통해 오갔다. 인간이 길을 내고 그 길 위로 인간이 만든 모든 정신적 물질적 문명들이 이동한 길, 그 길이 곧 실크로드다. 그리고 그 출발점이 바로 서안이다.
▲한무제 초상 (왼쪽),한무제의 무릉.
천하의 중심이었고 실크로드의 출발지였던 장안은 지금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실크로드가 번성한 것은 당나라 때의 장안이다. 하지만 실크로드가 본격적으로 개척되던 시기는 한나라 무제(武帝) 시기다. 입국수속을 마치고 향하는 나의 첫 목적지도 당연히 무제가 잠들어 있는 무릉(茂陵)이다.
무릉은 공항에서 남서쪽으로 약 10㎞, 서안 시내서 서북쪽으로 40㎞ 떨어진 흥평시(興平市) 무릉촌(茂陵村)에 있다. 이천 여년의 세파에도 불구하고 평지 위의 무릉은 아직도 산처럼 우뚝하다. 능을 줄지어 늘어선 나무들은 무제를 호위하는 철갑군 같다. 오랜 시간 무너지고 주저앉았을 터인데 지금도 이토록 웅장하다면 당시에는 어느 정도였을까. 무제 시대는 중앙집권제를 확립하고 각종 조세를 강화하여 경제력이 최고조에 달했던 때다. 무제는 이를 바탕으로 이제까지 수세에 몰렸던 흉노공략을 시작한다.
천하를 호령했던 무제도 세파의 찌듦이 역력한가. 무릉의 묘비석에는 온통 낙서투성이뿐이다. 흉노를 몰아내고 중국 최고의 영토를 확장한 황제임에도 불구하고 사당도 기념관도 없다. 오직 능만이 벌판에 덩그러니 산처럼 솟아있을 뿐이다. 그리고 앞뒤 좌우로는 농작물을 심은 밭과 과수원이 좁은 입구를 감싸고 있다. 무릉 주위에는 배장묘가 여럿 있다. 그중 제일 가까운 서북쪽에 무제 말년의 애첩(愛妾)인 이부인(李夫人)묘가 있다.
▲이부인 묘에서 본 무릉.
전한 때에는 황제와 항후의 능은 나란히 배치를 하였는데 황제릉은 서쪽, 황후릉은 동쪽에 위치했다. 그런데 무릉은 동쪽에 황후의 릉이 없다. 무제에게 진황후와 위황후 두 명의 황후가 있었다. 하지만 진황후는 폐위되었고, 위황후는 무고(誣告)에 휩싸여 자살하고 말았다. 이런 까닭에 황후의 능이 없고 대신 무제가 말년에 의지했던 이부인의 묘가 있다. 그런데 황후의 서열에 오르지 못해 동쪽에 위치하지 못하고 무릉의 서북쪽에 위치해 있다.
이부인 역시 비천한 출신이다. 그녀의 오라버니인 이연년(李延年)은 가무(歌舞)가 뛰어난 배우였다. 작곡에 뛰어난 자질이 있어서 감미로운 선율로 변주곡(變奏曲)을 만들어 불렀는데, 무제는 물론 모두가 좋아했다. 어느 날 이연년은 무제 앞에서 춤추며 노래를 부를 기회가 생겼다.
북방에 아름다운 미인이 있어 北方有佳人
세상 제일의 미모를 독차지 했구나 絶世而獨立
한 번 웃음 지으면 온 성이 무너지고 一顧傾人城
두 번 웃음 지으면 온 나라가 기울어지네 再顧傾人國
성과 나라가 기우는 것을 어찌 모르랴마는 寧不知傾城與傾國
천하의 아름다운 미인은 다시 얻기 어려운 법 佳人難再得
이 노래를 들은 무제는 이연년의 누이동생이 노래의 주인공임을 알고 탄복하여 그날부터 이부인을 애첩으로 삼는다. 하지만 미인박명이라는 말처럼 이부인은 젊은 나이로 요절한다. 황제의 사랑은 식을 줄 모르는데, 경국지색을 보내야 하는 황제의 가슴은 얼마나 미어지겠는가. 어여쁜 얼굴이라도 한 번 보고 싶어 찾아왔으나 이부인은 보여주지 않는다. 영원한 이별을 앞두고 거듭 당부하고 어르지만 끝내 보여주지 않는다. 황제는 속상해하며 떠나고, 자매들은 이부인을 탓한다.
▲한나라 때 궁전인 미앙궁(未央宮) 터.
“폐하께서 알고 계신 얼굴은 예전의 내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렇게 추한 모습을 보이면 황제는 놀라서 우리 식구들을 절대로 보살펴주시지 않을 것입니다.” 이 부인의 이 판단은 정확했다.
그녀가 죽자 무제는 이연년을 악부의 장관인 협률도위(協律都尉)에 임명한다. 그리고 또 한명의 오빠인 이광리(李廣利)는 이사장군(貳師將軍)으로 삼는다. 이부인에 대한 무제의 애틋한 사랑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제나라의 방사 소옹(少翁)을 시켜 이부인의 혼령을 불러오게 하고, 그 애절함에 겨워 노래까지 불렀다.
부인이오, 아니오? 是邪非邪
내 멍하니 서서 그대만을 바라보노니 立而望之
어이 이다지 나폴나폴 더디게만 오시는가偏何姗姗其來遲
뛰어난 문인이었던 황제였기에 이부인의 죽음은 그를 시인으로 만들기에 충분하였다.『한서』「이부인전」을 보면 총희(寵姬)에 대한 무제의 애타는 마음이 한 편의 부(賦)에 절절하게 나타난다.
저토록 밝은 세상 두고 去彼昭昭
어둠의 세계로 떠나갔구려 就冥冥兮
신궁으로 내려가면 旣下新宮
다시는 옛 터로 돌아오지 못하나니 不復故庭兮
아아, 애달프도다! 嗚呼哀哉
그리운 혼령이 이토록 아른 하거늘 想魂靈兮
사랑은 권력보다 강하다. 권력은 처음 잡을 때는 무한한 힘을 가지나 시간이 지날수록 가벼워진다. 사랑은 다르다. 처음엔 밋밋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애틋한 그리움이 수시로 요동쳐 보고픈 마음은 한시도 식을 줄 모른다. 권력은 사랑을 버릴 수 있지만 사랑은 권력마저도 포기하게 만든다. 가장 아름다운 것이 사랑이지만, 가장 두려운 것도 사랑이다. 천하의 제왕 무제도 평생 많은 여인을 거느렸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이 그리웠다. 많은 여인들 속에서 무제가 원하는 사랑은 이부인이었다. 하지만 정들 무렵 이별이라면 그 사랑은 애가 끊어지는 처절함이 된다. 천하의 권력을 다 가졌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크지 않은 이부인묘가 광활한 벌판에 홀로 다소곳하다. 무제는 그녀의 죽음을 슬퍼하여 황후에 준하는 장례를 치르고 그녀의 묘를 ‘영릉(英陵)’으로 불렀다. ‘꽃’처럼 어여쁘고 ‘옥’처럼 귀한 여인이 잠든 곳이라는 의미다. 무제의 애끊는 사랑이 최고의 예우를 해준 것이다. 그러나 이부인묘는 그러한 예우에 개의치 않고 일편단심 동남쪽의 무릉만 바라보고 있다. 산 같은 무릉도 고적한 동풍이 싫어 서북쪽의 영릉을 향해 앉았다. 525m. 오작교 없는 벌판엔 철책이 가로 막고 있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손잡고 있을 수 없어 애틋한 그리움으로, 절절한 아림으로 오늘도 영원히 마주보아야만 하는 사랑. 그 사이를 오가는 바람만이 흐느낌으로 애절함으로 사랑의 언어를 전한다.
② 한무제 첫부인의 애가(哀歌) "한번만 더 사랑해주세요
진황후의 질투와 실연, 흔적 없는 무덤…
사랑은 사랑으로 존재할 때 아름답다- (서안2)
서안 시내로 들어서니 사방으로 통하는 길목에 종루(鐘樓)와 고루(鼓樓)가 반갑게 맞이한다. 모두 명나라 때 세워진 것인데 종루의 종은 성문을 여는 아침을 알리고, 고루의 북은 성문이 닫힌 후 밤 시간을 알려주는 시계 역할을 하였다. 한당(漢唐)의 수도였던 서안은 거대한 성벽이 도시 전체를 에워싸고 있었다. 지금도 웅장한 성벽이 서안 곳곳을 에워싸고 있지만, 이는 명나라 때 건설한 것이다. 성곽의 위치나 건설공법에 차이는 있겠지만 크기는 별반 차이가 없으리라. 종루와 고루를 돌아보고 성곽의 동문인 장락문(長樂門)에 들어선다. 순간, 나는 2150여 년 전의 한무제(漢武帝)를 떠올린다.
▲서안 종루(鐘樓).
“만일 내가 아교(阿嬌)를 아내로 맞이한다면 반드시 황금으로 된 집을 지어 줄 거예요.”
한무제의 이름은 유철(劉徹)이다. 어린 시절, 고모인 관도(館陶) 장공주(長公主) 앞에서 그녀의 딸인 아교를 황후로 삼겠다고 약속한다. 장공주는 유철의 약속에 가슴이 벅차오른다. 그래서 황제이자 오라버니인 경제(景帝)에게 유철이 14명의 황자 가운데 가장 영명하다고 끊임없이 간언한다. 장공주의 부단한 노력은 경제로 하여금 유철을 새로운 황태자로 옹립하게 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아울러 자신의 소망이 이루어졌음에 뛸 듯이 기뻤다. 황태자 유철은 16세에 황제에 오른다. 아교를 황후로 맞이하여 장공주와의 약속도 지킨다. 아교는 무제의 첫 번째 황후인 진(陣)황후가 된다.
무제도 어찌 못한 황후 아교
진황후는 예뻤지만 자존심이 강하고 질투심도 많은 여자였다. 그도 그럴 것이 어머니 장공주는 선황제와 각별한 사이인데다 남편을 황제로 만든 주인공이기에 진황후는 무척 거만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무제는 자신의 권력으로 정치를 개혁하고 싶었다. 하지만 초기 10년은 힘겹게 보낸다. 관도 장공주의 힘이 너무 강했기 때문이다. 자신을 황제에 앉혀준 데다 고모이자 장모였기 때문에 함부로 대할 수도 없었다.
▲서안 고루(鼓樓).
구세력의 정치적 보루인 진황후와 개혁으로 국가의 면모를 일신하려는 젊은 황제. 이 둘의 관계는 일반적인 부부 사이와는 달리 미묘한 갈등이 내재되어 있었다. 물론 소년시절 황태자 유철은 아리따운 아교의 모습에 반했을 것이다. 그녀에게 ‘황금으로 만든 집’을 지어주겠다고 했던 것도 사랑 때문이었으리라.
하지만 진황후를 앞세운 외척들의 견제가 강해지자 무제는 그녀에게서 점점 멀어졌다. 황후의 성격도 나긋나긋하지 않았으니 부부 사이는 이미 허울뿐이었고 자식이 생길 리 만무하였다. 황후보다 더 초초한 사람은 장공주였다. 그녀는 황후를 위해 9,000만 냥이나 들여 온갖 용하다는 처방을 써보았지만 백약이 무효였다. 부부의 애정을 어찌 약이 대신할 수 있으랴.
아이는 없고, 밖으로 나도는 무제…파탄조짐
황자를 생산하지 못하면 황후라도 권력의 심장부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다. 자식을 갖지 못한 진황후는 급기야 히스테리까지 부렸다. 무제의 관심은 더욱 밖으로 향한다. 자신의 정치역량 부족과 부부관계의 우울함을 달래기 위해 수렵에 몰두한다. 신하들이 보기에는 무제가 바깥으로 나도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황제의 권력을 회복하기 위한 절치부심(切齒腐心)의 시간이었던 것이다.
▲서안 성곽.
어느 봄날, 무제는 장안 동쪽을 흐르는 패수(覇水)에서 불계(祓禊․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기원하는 제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첫째 누이인 평양공주(平陽公主) 집을 방문한다. 평양공주는 열여덟 살의 동생 무제가 적적해함을 알고 비녀(婢女)들을 알현시킨다. 무제의 마음에 든 여인은 위자부(衛子夫)라는 가희(歌姬)였다. 아비가 누군지 몰라 어미의 성을 딴 사생아였다.
가희(歌姬)와 화장실에서 나눈 사랑
무제는 이 여인과 ‘헌중(軒中)’에서 사랑을 나눈다. 헌중은 곧 ‘화장실’을 의미하니, 화장실에서 정사(情事)를 벌였다는 말이다. 당시 화장실은 욕조와 간이 휴식용 침대까지 갖춰져 있었다. 황제의 사랑은 받은 위자부는 그날로 궁궐로 들어간다. 그리고 마침내 무제의 두 번째 황후인 위황후가 된다. 누이 평양공주가 동생의 마음을 든든히 지켜줄 배필을 마련해 준 것이다.
무제의 사랑을 듬뿍 받은 위황후는 1남 3녀를 낳았다. 넷째로 황자 거(據)를 낳자 무제는 기쁨에 겨워 동방삭(東方朔)에게 황태자 탄생을 기념하는 부(賦)까지 짓도록 하였다.
무제의 기쁨이 클수록 진황후의 가슴은 질투로 타올랐다. 불안해진 진황후는 무제의 이궁(離宮)인 건장궁(建章宮)의 사인(舍人)으로 있던 위자부의 남동생 위청(衛靑)을 죽이려고 하였다. 하지만 위청은 친구 공손오(公孫敖)의 도움으로 위기를 벗어난다. 이 사건이 있은 후 무제는 위청을 건장궁 소속 시종무관(侍從武官)으로 임명한다. 이는 무제의 특기인 인재발탁의 지혜가 번뜩인 것이기도 하지만, 자신이 더 이상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 당당한 황제라는 사실을 외척세력들에게 간접적으로 선언한 것이다. 위청은 이후 무제의 흉노정벌에 일등공신으로 활약한다.
진황후는 점점 더 깊은 실의에 빠진다. 어머니 관도 장공주도 마찬가지다. 초초하고 위태롭고 불안하면 일을 벌이는 법. 무제가 즉위한 지 12년째인 기원전 130년, 진황후가 무고(巫蠱)의 요술로 위자부를 저주한 것이 발각된다. 무제는 이 사건을 계기로 외척세력을 뿌리 뽑고 명실 공히 황제의 권력을 굳건히 하기로 결심한다.
쫒겨나는 첫 부인 진황후
진황후는 처형은 면했지만 폐위되어 장문궁(長門宮)으로 쫓겨난다. 장문궁은 장안성의 동남쪽에 있는 이궁으로, 관도 장공주가 자신의 별장이었던 것을 황제에게 헌상한 것이다. 황제가 자신의 딸과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내길 갈망하며 바쳤을 터인데, 딸이 갇히는 감옥으로 변할 줄이야. 어머니 장공주의 마음이 한없이 아팠으리라. 무제 또한 장공주의 은의(恩義)를 잊을 수 없었기에 그나마 진황후를 살려준 것이리라. 진황후는 장문궁에서 10여 년을 칩거하다가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장문궁에서 멀지 않은 패릉(覇陵) 낭관정(郎官亭) 동쪽에 묻혔다.
▲패릉묘원.
당나라의 시인 이백은 진황후의 기구한 운명을〈첩박명(妾薄命)〉이라는 시로 표현하였다.
한무제가 아교를 총애한 나머지 漢帝寵阿嬌
황금으로 지은 집을 주었네 貯之黃金屋
하늘에서 기침하다 침이 떨어지면 咳唾落九天
바람 쫒아오다 구슬 된다고 하였네. 隨風生珠玉
지극하던 사랑도 시들해져 버리고 寵極愛還歇
정이 멀어지자 투기만 깊어졌네 妒深情卻疏
황제가 장문궁 앞을 지나갈 때에 長門一步地
잠깐이라도 수레를 돌리지 않았네. 不肯暫回車
빗물은 다시 하늘로 오르지 못하고 雨落不上天
쏟아진 물은 다시 담기 어려워라 水覆難再收
황제의 사랑과 황후의 마음은 君情與妾意
동과 서로 따로 흐르고 各自東西流
어제의 아름다운 연꽃도 昔日芙蓉花
오늘은 뿌리 잘린 풀이 되었네. 今成斷根草
미색으로만 사람을 섬기면 以色事他人
좋은 시절 그 얼마이겠는가! 能得幾時好
진황후가 잠들어 있는 낭관정을 보기 위해 패릉으로 향한다. 패릉은 한나라 문제(文帝)의 릉이다. 하지만 나의 관심은 패릉보다는 낭관정에 있다. 패릉은 관광지가 아닌 까닭에 찾는 사람도 드물다. 그래서인지 몇 번을 물어야 찾을 수 있었다. 패릉은 산 전체를 릉으로 삼았는데, 풍수가들은 산의 형세가 ‘봉황의 입’모양이라 명당자리라고 한단다.
▲패릉의 낭관정터.
황제의 묏자리니 당연 명당자리일 터. 그래서인가, 지금도 공동묘지로 사용되고 있다. 부근에 낭관정이 있을 텐데 찾을 수가 없다. 마침 공무원들이 있기에 물어보았으나 낭관정 자체를 모른다. 낭관정을 찾을 수 없다는 허탈감에 젖어들 즈음, 할아버지 한 분이 오신다. 낭관정에 대해 묻자 해박한 지식과 함께 위치를 알려주신다.
“옛날에는 낭관정 주변에 300여개의 비석이 있었는데, 문화대혁명 때 다 파괴되고 일부는 사람들이 가져갔다오. 정자도 그때 다 부서졌지. 그러다가 얼마 전에 남은 비석들을 모아서 예전의 위치에 세워놓았는데, 지금은 얼마 없다오.”
나무와 풀더미만 우거진 곳, 진황후 묘는 찾을 길 없어
풀숲을 헤치고 찾아간 낭관정 터에는 7개의 비석만이 따가운 햇살을 피하는 듯 띄엄띄엄 서있다. 나무와 풀 더미 뿐 진황후의 묘는 찾을 수도 없다. 미색(美色)이 아무리 출중한들 심색(心色)만 하겠는가. 사랑은 결국 고운 마음씨에서 비롯됨을 그녀는 진정 몰랐던 것일까. 풀들은 더위에 고개 숙이고 시간보다 빠른 바람만이 풀숲을 지나친다. 순간, 어디선가 애절하게 흐느끼는 그녀의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
‘나를 한번만 더 사랑해주세요. 제발…….’
③한무제의 인기를 능가한 청년 장수 곽거병
'사방은 경계가 없고, 백성은 다른 나라가 없다'
세상사는 알 수가 없다. 어제의 천덕꾸러기가 오늘 권좌에 오르고, 오늘 나는 새도 떨어뜨리던 자가 내일은 비렁뱅이가 된다. 모든 것은 스스로 한 만큼의 결과이지만 대부분은 운명이라 치부한다. 그것이 당사자나 제삼자에게 조금은 위안이 되기 때문일까.
가희(歌姬)인 위자부가 무제의 황후가 되자 그녀의 친척들도 속속 무제의 신임을 받는다. 동생인 위청(衛靑)과 아들들은 물론, 조카인 곽거병(霍去病)까지도 포함된다. 특히, 무제는 위청과 곽거병의 무용(武勇)이 맘에 쏙 들었는데, 이들은 후에 흉노와의 전쟁에서 혁혁한 전과를 세움으로서 무제의 사람 보는 안목이 적중했음을 입증해준다.
한나라와 흉노의 숙명 같은 전쟁
무릉에서 동쪽으로 약 1㎞ 떨어진 곳에 위청과 곽거병의 묘가 있다. 무제가 신임한 최고의 장수인 두 사람의 묘는 무릉의 배장묘(陪葬墓) 역할을 하고 있는데, 곽거병묘가 오히려 무릉보다 정비와 보존이 잘되어 있다. ‘현대의 루쉰’으로 불리는 중국의 문화사학자 여추우(余秋雨)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중국인들은 황제보다 황제의 명을 받아 흉노를 물리친 장군을 더욱 흠모하는 것 같다.
한나라의 흉노와의 전쟁은 고조 유방 때부터 치욕으로 일관됐다. 이때 흉노의 군주는 최전성기를 이끈 묵돌선우(冒頓單于)다. 그의 유인책에 걸린 고조의 군대는 지금의 산서성(山西省) 대동(大同) 부근의 평성(平城)에서 포위된다. 이 포위는 눈 내리는 한 겨울 일주일간이나 지속되었는데, 고조는 선우의 부인에게 갖은 보화를 뇌물로 바치고 포위가 느슨한 틈을 타서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한다. 이를 일러 ‘평성의 치욕’이라 한다.
묵돌선우가 여태후에게 보낸 희롱 편지
▲묵돌선우가 여태후에게 보낸 편지와 여태후의 답신 기록.
고조 유방이 죽고 여태후(呂太后)가 정사를 돌보자 묵돌선우는 치욕스러운 편지를 보낸다. “한족의 황후여, 내가 사는 곳은 매우 쓸쓸하고 외로운 곳입니다. 해서 내 한 번 그대 나라로 놀러가고 싶습니다. 전하는 얘기로는 그대도 과부이시니 아주 외롭다지요? 둘 다 불쌍한 처지인데 서로 가진 것을 함께 나눌 수 있다면 좋지 않겠습니까?”
“저는 기력이 쇠하여 이도, 머리카락도 모두 빠지고 걸음걷기도 힘든 늙은이일 뿐입니다. 선우께서는 어디서 그런 소문을 들으셨는지 모르겠으나 신분을 낮추시면서까지 저를 찾아오실 필요는 없습니다. 저의 나라는 아무 잘못도 없으니 선우께서 관용을 베풀어 주시기 바랍니다. 어가 두 대와 준마 두 필을 바치오니 평소 필요하실 때 사용하시기 바라옵니다.”
흉노에 대한 회유책은 제4대 황제인 경제(敬帝) 때까지 계속된다. 명주옷, 비단외투, 허리금속장식, 갖가지 옷감 및 곡물 등을 매년 흉노에게 바쳤다. 황족의 딸도 흉노에게 시집보냈다. 한나라로서는 굴욕적인 평화를 유지한 것이다. 무제는 오랫동안 계속된 이러한 굴욕을 설욕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라고 생각했다.
무제가 재위에 오른 지 7년(B.C135년). 두태후가 사망하자, 스물두 살 젊은 황제의 친정(親政)이 시작된다. 중앙집권을 강화한 무제는 그로 인해 든든한 경제력을 구축한다. 그리고 오랫동안 준비한 흉노와의 전쟁을 시작한다. 하지만 첫 번째 흉노공략은 실패한다. 지금의 산서성 대동 부근의 마읍(馬邑)으로 흉노를 유인하여 공격할 참이었는데, 이를 간파한 흉노가 군대를 철수시켰기 때문이다. ‘평성의 치욕’을 씻기 위한 공략이 ‘마읍의 수치’를 보탠 꼴이 되었다.
흉노설욕의 명장 곽거병
본격적인 흉노설욕전은 그로부터 5년 후인 원광 6년(B.C.129)에 이뤄진다. 이 전투에서 일등공신은 위황후의 동생 위청이다. 그는 한나라가 건국한 이래로 만리장성을 넘어 북방으로 진격하여 승전보를 올린 최초의 주인공이다.
위청은 10여 년간(B.C129-119) 모두 7번을 출병하여 흉노를 무찔렀는데 5만여 명을 참수하거나 포로로 잡았다고 한다. 무제는 위청의 혁혁한 전과를 치하하여 그때마다 식읍을 내렸고, 세 명의 어린 자식을 제후에 봉했다.
▲무릉박물관 안의 곽거병묘.
위청의 무용이 식어갈 무렵, 곽거병이라는 또 한 명의 용장(勇壯)이 나타난다. 곽거병은 위황후의 조카였으니 위청은 숙부가 된다. 위청의 성격이 진실되고 중후했다면 곽거병은 과묵하면서 재기가 넘치고 민첩했다. 곽거병은 숙부인 대장군 위청을 따라 두 차례 종군했는데, 위험한 적진을 마다않고 뛰어들어 공을 세웠다. 그의 용맹은 천하를 진동시켜 나이 18세에 벌써 제후로 봉해질 정도였다.
“용감한 것도 좋지만 병법도 공부를 해보는 게 좋지 않겠는가?”
“어떤 전략을 쓸 것인가는 상황에 따라 변하기 마련입니다. 새삼스레 낡은 병법을 배우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대를 위하여 저택을 마련했노라.”
“흉노가 아직 멸망하지 않았는데 집을 꾸미고 살 필요가 없습니다.‘”
곽거병을 너무도 사랑한 무제
무제는 곽거병을 아주 사랑했다. 글도 모르고 우직하기만한 위청보다 재기발랄한 곽거병이 무제의 마음에 들었다. 무제의 특기인 인재발탁은 또다시 성공을 거둔다. 표기장군(票騎將軍)에 오른 스무 살의 곽거병은 기병 1만 명을 이끌고 흉노의 거점인 기련산(祁連山)까지 진격하여 흉노군을 격파하자 패전의 문책이 두려웠던 혼야왕(渾邪王)은 수 만여 명의 군사와 함께 투항한다. 36세의 황제는 너무 감격한 나머지 곽거병에게 대장군 위청과 동등하게 대사마(大司馬)에 임명한다. 대장군 위청의 시대가 가고 표기장군 곽거병의 시대가 온 것이다.
곽거병의 흉노정벌로 감숙성의 하서지역은 한나라 영토로 편입되고 흉노는 막북(漠北), 즉 고비사막 이북으로 달아나 더 이상 한나라를 넘보지 못했다. 흉노는 천지가 뒤집히고 억장이 끊어질 일이지만 어쩌겠는가. 이 또한 한나라가 언제까지나 발아래 있을 것이라는 오만과 나태에서 비롯된 것임을. 중요한 요충지이자 삶의 터전을 빼앗긴 흉노는 노래로서 슬픈 마음을 표현할 뿐이었다.
우리 이제 기련산을 빼앗겨 가축들을 먹일 곳이 없네.
우리 이제 언지산을 잃어버려 여인들은 화장도 할 수가 없네.
흉노정벌이 완성되어 서역으로 통하는 교통로인 감숙성을 얻게 되자, 최고 공로자인 곽거병이 24살로 요절한다. 곽거병의 죽음은 서역정벌을 구상한 무제에게 커다란 충격이었다. 무제는 엄숙하고 성대하게 장사를 지내도록 명했다. 철갑군을 동원하여 장안에서 자신의 능으로 조성하던 무릉(武陵)까지 행렬하도록 했다. 이처럼 곽거병에 대한 무제의 사랑은 죽어서도 같이 있고 싶었을 정도였다. 무제는 곽거병에게 경환후(景桓侯)라는 시호를 내렸는데 ‘무용을 드높여 영토를 확장했다’는 뜻이다. 분묘도 그가 흉노와의 전장에서 승리를 거둔 기련산의 모양을 본뜨게 했다.
곽거병묘 정상에 올라야 위청의 묘가 보이고
▲무릉박물관 입구.
무릉박물관 입구에 들어서자 정면에 기련산 모양을 한 곽거병 묘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통로 좌우에는 이곳에서 발굴된 4100여 점의 유물들을 전시하는 박물관이 있다. 곽거병 묘 앞에는 거대한 동물 석상들이 많은데 이중 특히 눈에 띄는 것이 흉노를 밟고 있는 말을 조각한 ‘마답흉노(馬踏匈奴)’상이다. 흉노를 물리치는데 혁혁한 전과를 세운 공적을 알리려는 뜻이겠지만, 한편으로는 진시황 이후 한고조 유방의 치욕을 설욕하고자했던 무제가 흉노에 대한 원한을 두고두고 갚아주려고 표현한 것이기도 하리라.
무제의 이러한 행동의 이면에는 ‘땅에는 사방의 경계가 없고, 백성에게는 다른 나라가 없다’는 중국적 논리가 숨어 있다. 즉, 중원 땅은 물론 오랑캐의 영토까지도 황제의 지배하에 두려는 야심의 반영이기도 하다. 총명한 무제가 유교를 국교로 정한 까닭도 군신관계에 있어서 군주의 절대적인 권한과 신하의 지극한 충성만이 용납되는 통치방식이 유교의 기본정신임을 알았기 때문이리라.
▲곽거병묘(오른쪽)와 위청묘.
위청의 묘는 곽거병의 묘 왼쪽에 있는데 입구에서는 보이지 않고 곽거병의 묘 정상에 올라야만 보인다. 이곳을 찾아오는 관람객들에게 곽거병을 더 사랑한 무제의 마음을 알려주려고 관람객의 동선(動線)을 이렇게 만들어 놓은 걸까? 하지만 위청의 묘는 곽거병의 묘 정상에서도 자세히 보이지 않는다. 곽거병의 묘가 있는 무릉박물관을 나와 옆길로 들어서야만 자세하게 살펴볼 수 있다.
대장군 위청은 항상 진중한 자세로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였다. 곽거병이 쉽게 대승을 거둘 수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숙부인 위청의 용맹이 흉노에게 너무나 강하게 각인되어 있어서 함부로 하지 못한 점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 그의 묘가 조카의 묘에 비해 초라해 보인다. 하지만 무덤의 크고 작음이 무슨 대단한 일이던가. 후세의 사람들에게 잊히지 않고 기억되는 것이면 그것으로 족한 일이 아니겠는가. 대장군 위청의 진중하고 과묵한 얼굴이 햇살에 미소를 짓는다. 그 미소 한 가닥이 청량한 바람을 타고 곽거병묘 너머로 흘러간다.
(4) 대당서시광장(大唐西市廣場)에 치솟아 오른 붉은 글씨
唐代의 거대한 국제시장 西市에서 느낀 두통…
1300년 전, 실크로드 장안의 서시에 서다 (서안4-당제국의 수도 장안과 서시)
“도대체 교통신호는 왜 안 바뀌는 거야. 정말 엉터리 신호등이야.”
서안 시내의 남북을 가르는 주작대로를 지난다. 극심한 정체는 풀릴 줄 모른다. 운전기사마저 짜증을 낸다. 차에서 내려 걷고 싶지만 내가 보려는 ‘서시(西市)유적지’는 너무 멀다. 서안을 여행하려면 인내심과 함께 시간적인 여유가 필요하다. 특히, 공항으로 향할 때는 출퇴근 시간은 무조건 피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비행기를 놓치기 십상이다. 인내심이 한계에 이를 즈음, 노동남로에 도착한다. 당나라 때의 서시 현장에 온 것이다.
실크로드의 핵심은 시장(市場)이다. 당대의 시장은 동시(東市)와 서시가 대표적인데 동시가 주로 관료와 귀족들을 위한 시장이라면, 서시는 일반인이 사용하는 대중적인 시장이다. 특히, 외국인들은 모두 이곳 서시에서 거래를 하였으니 서시야말로 국제시장인 것이다. 서시에는 대략 4만여 개의 상점이 있었고, 중국이 자랑하는 비단과 도자기 등이 하서주랑을 통하여 서역으로 나갔다. 서역에서는 유리와 보석, 향신료 등이 서시로 들어왔다.
▲대당서시광장(大唐西市廣場).
실크로드의 출발지인 당(唐) 장안성은 철저한 계획에 의하여 세워진 도시다. 제일 혁신적인 것은 궁전과 백성의 주거공간을 엄격히 구분한 것이다. 한나라 시기까지의 도성은 모두 궁전과 백성들의 주거공간이 혼재되어 있었다. 하지만 당대의 장안성은 제왕과 관료들의 공간과 서민들의 공간을 엄격히 구분하였다. 공공기능을 제고하고 유사시에 방어 전략을 강화하기 위해서다.
세계 최대의 도성 장안성
이러한 공간을 구분하는 기준은 길이다. 장안성은 당시 세계 최대의 정방형 도성으로, 동서 9,721m 남북 8,651m의 규모에 면적이 84㎢에 달한다. 이는 한(漢) 장안성의 2.4배에 이르고, 현재 서안에 남아있는 명대(明代) 성곽의 10배 크기다.
▲대당서시광장의 낙타와 서역 악단.
당 장안성은 주작대가를 기준으로 동서에 53방(坊)과 55방, 총 108방을 두었다. 방은 정방형으로 이루어졌는데 성벽에 버금갈 정도로 높은 울타리를 쌓고, 8개의 문을 만들어 통행하게 하였는데 방과 방 사이의 이동은 통제를 받았다. 북쪽에 위치한 황실궁전을 중심으로 거대한 벽들이 미로처럼 방을 둘러싸고 있는 장안성은 하늘에서 내려다본다면 그 안에 살고 있는 백성들은 울타리에 갇힌 짐승 꼴이었으니, 계획도시 장안성은 다름 아닌 황제와 권력자들이 백성의 생활을 장악하기 위해 만든 감옥과도 같은 도시였다.
당 고종(高宗)이 대명궁(大明宮)의 함원전(含元殿)에 올라 성안을 내려다보며 “우리(檻) 속에 있는 것 같다”고 한 것은 이를 잘 표현한 것이다. 황실과 주거공간의 구분 또한 유사시 효율적인 방어를 위한 것이라지만 이 또한 백성을 방패막이로 삼겠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대명궁 함원전터.
서시는 당시 최대의 국제무역 장소였다. 소그디아나, 페르시아, 아라비아 등 서역에서 온 상인들의 카라반 행렬이 쉴 새 없이 오가는 최대의 시장이었다. 중국 내의 물건은 물론 이국의 흥미로운 물건들로 넘쳐나는 상점, 상인들과 이곳을 찾은 수많은 이들이 숙박하는 여관과 식당, 술집 등도 즐비하였다.
서시가 세워진 것은 수(隋)나라 문제(文帝) 때인 582년이다. 처음 개설 당시에는 이인시(利人市)라 불렀고 나중에는 금시(金市)라고도 하였다. 서시는 2개의 방을 차지할 정도로 컸는데 그 면적이 1,000㎡가 넘었다. 서시는 물건을 사고파는 사람들 외에도 유흥을 즐기려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이는 바로 이국적인 고혹함을 갖춘 서역의 무희들을 보기 위한 것이었는데, 고관대작의 젊은이들은 밤만 되면 달려왔다.
오릉의 젊은이들 금시의 동쪽으로 나가는데五陵年少金市東
은 안장에 흰 말 타고 봄바람을 헤치고 가네. 銀鞍白馬度春風.
지는 꽃 다 밟으며 어디 가서 노나 했더니만 落花踏盡遊何處
미소로 유혹하는 호희의 술집으로 들어가네. 笑人胡姬酒肆中.
-이백,〈소년행(少年行)〉
곱슬머리 푸른 눈의 호희 鬈髮胡兒眼晴綠
조용한 밤 술집에서 피리부나니 高樓夜靜吹橫竹
그 소리 마치 하늘에서 내려오는 듯한데 一聲似向天上來
달빛 아래 고운 그녀 고향 그리며 울고 있네 月下美人望鄕哭
▲대당서시박물관 모습.
서역인들의 문화와 습속은 당대에 많은 인기를 누렸다. 모자를 포함한 복식은 물론 빵, 술 등 음식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유행하였는데 이러한 호풍(胡風)은 현종 때가 절정기였다. 한족 여인과 결혼도 잦아져 바야흐로 호한문화(胡漢文化)의 융합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지니, '호인은 한인의 모자를 쓰고 한인은 호인의 모자를 쓴다'는 말처럼 장안성 안에서는 일상이 된다. 당나라가 세계적인 국가로 발전한 원동력도 다름 아닌 호한문화의 융합에서 비롯된 것이니, 이미 당대에 글로벌 마인드가 정착된 것이다.
서시의 盛衰
서시는 300년간 동서무역의 번성을 이끌어오다가 904년경에 쇠퇴한다. 그로부터 1,100여 년이 지난 2006년, 중국사회과학원 고고연구소에서는 당나라 때의 서시 터를 발굴하고 그 위에 ‘대당서시박물관’을 지었다.
▲대당서시박물관에 있는 서역의 비단.
광장을 들어서니 제일 먼저 ‘대당서시광장(大唐西市廣場)’이라고 쓴 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그와 함께 날개를 펼친 듯, 좌우 대칭의 하늘다리로 연결한 건물이 웅장하게 서 있다. 광장 좌우로는 실크로드 교역을 상징하는 동물인 낙타상이 있다. 낙타를 타고 온 서역 상인들의 모습이 있는가 하면 춤추는 무희와 악단을 실은 낙타상도 있다. 상업과 문화의 대표적인 모습을 사실적으로 표현해 놓았다.
이 일대는 서안시 정부가 황성복원계획의 일환으로 복합문화공간을 조성한 것이다. 총 30만평의 면적에 서시광장과 박물관, 실크로드 풍경거리, 전통호텔 등을 만들어 서시의 역사적 복원과 실크로드 문화에 대한 이해와 체험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광장을 지나 박물관으로 향한다. 대당서시박물관은 서시의 유적 중 배수로라든가 십자교차로 터를 직접 살펴볼 수 있도록 해놓았다. 전시물도 다양하다. 당대인과 서역인의 다양한 모습을 빚은 당삼채(唐三彩)가 눈에 띠는데, 특히 서역상인들의 모습을 빚은 토용(土俑)이 인상적이다. 서시박물관의 대표적인 전시물은 동서양 교류의 상징인 동전과 비단이다.
웅장한 광장
당 현종시기에 만든 ‘개원통보(開元通寶)’라 쓰인 금화와 지금의 이란지역인 파샤의 금화와 은화가 함께 전시되어 있어, 이를 보니 1300여 년 전의 실크로드 도시 장안에 있는 듯하다. 또한, 서역의 비단을 볼 때에는 부리부리한 눈에 덥수룩한 수염을 한 서역인과 술잔을 부딪치며 실크로드 이야기로 맘껏 취한 듯하다. 관람객이 없어 여유롭게 박물관을 둘러보고 다시 광장으로 나오는데, 인적 뜸한 광장의 웅장함이 미묘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대당서시박물관에 있는 당대 파샤(이란)의 금화.
이제 대당서시광장은 서역인들이 오가고 상품이 대량으로 판매되는 그런 장소는 아니다. 관광지로서 그 면모를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나라 때의 웅장한 모습을 재현해 놓은 것은 무슨 까닭일까. 형식을 중시하는 우리네처럼 누군가가 자신의 치적을 보여주기 위하여 막대한 자금을 쏟아 부었는가. ‘현실적인’ 중국인이 그럴 리 만무하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이곳엔 과거의 영광을 되살리려는 중국인들의 노력이 숨어있다. 광장의 웅장함이 지금은 왠지 형식적이고 속 빈 강정처럼 보이지만, 저들은 이러한 허세를 문화적 자긍심이라는 골재로 보강해 과거보다 더 튼실하게 만들어 놓을 것이라는 긴장감마저 든다.
개혁개방에 따른 경제발전도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지만, 실크로드 전성기의 재현을 위한 중국인들의 열망이 그만큼 강렬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어색하고 부끄러울지라도, 그럴수록 더 노력하여 목적달성을 앞당기자는 생각이 강렬한 것이다. 중국의 위정자들이 유구한 역사 속에서 축적된 제국 운영의 경험을 적극 활용하여 나라의 비전과 방향을 수립한다면,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13억이 넘는 국민을 단결시켜 비전 달성을 향해 전진한다면 어느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사람 없는 대당서시광장에 홀로 서서 이런 생각에 이르자 왠지 모를 서늘함이 온몸을 감싼다.
뜨거워지는 광장
스산하던 광장이 뜨겁게 느껴진다. 사람들이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광장과 건물에 가득하다. 상점골목마다 호객행위 사이로 돈을 세며 미소 짓는 중국인들이 보인다. 전 세계에서 모인 사람들이 고량주를 마시며 중국의 서커스 공연에 혼이 빠져 모두 기립박수를 치며 열광하고 있다. ‘대당서시광장’이라고 쓰인 글씨는 간 곳 없고 그 자리에 ‘중화중심만세’라는 붉은 글씨가 하늘 높이 치솟는다.
순간, 나는 두통 끼를 느끼며 광장을 빠져나온다. 그럼에도 두통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대당서시광장 뒤편에 웅크리고 잠자던 붉은 기운이 서서히 기지개를 펴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5) 감옥도시 '장안', 선남선녀들의 해방구 '곡강지'
황제 당현종(唐玄宗)과 곡강(曲江)문화 <서안 5>
서안(西安)은 유구한 역사만큼이나 유적지가 많은 곳이다. 특히, 당나라 때의 유적인 자은사(慈恩寺), 화청지(華淸池), 흥경궁공원(興慶宮公園) 등은 서안을 찾는 사람이면 누구나 둘러보는 명소다. 그러나 정작 당대 문화의 꽃이던 곡강지(曲江池)는 찾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냥 호수가 있는 공원쯤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곡강지는 대당제국의 최전성기인 현종 시기의 문화를 살펴보는데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곳이다.
곡강지 유적은 시내의 동남쪽 자은사에서 약 5㎞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커다란 연못이다. 곡강은 물이 굽이쳐 흐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인데, 황실의 원림(園林)인 부용원(芙蓉園)과 누구나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곡강지로 구별된다. 곡강은 진한(秦漢)시대에 황제가 휴식을 취하는 이궁(離宮)이나 황실의 원림으로 사용되었다.
▲곡강지 입구.
진나라 때에는 의춘궁(宜春宮)을 지었고, 한나라 때는 낙유원(樂遊原)을 만들었다. 장안에서 가장 높고 사방이 평탄한 곳이다. 수나라 때에는 지대가 높고 불편하다는 이유로 사람들을 살지 못하게 하고 성 밖의 물을 끌어들여 부용지(芙蓉池)와 부용원을 만들었다.
오늘날과 같은 곡강지가 태동한 것은 수나라 때이지만 번성은 당나라 현종 때이다. 현종은 개원(開原) 연간(713~741)에 땅을 뚫어 막힌 물을 통하게 하고 자운루(紫雲樓)를 지어 명승지를 만들었다. 곡강지는 성곽으로 둘러싸인 장안성 안에서 가장 자유로움이 넘치는 낭만적인 장소였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곡강지에서 최고의 구경거리는 뭐니 뭐니 해도 과거급제자들과의 곡강연회(曲江宴會)다.
▲곡강지 풍경.
오늘의 곡강지는 어떻게 변했을까. 먼저 부용원을 찾았다. 지금의 부용원은 곡강지와 함께 서안시가 관광지와 시민들의 휴식처로 개발하여 모두에게 개방하고 있는 곳이다. 입구에 도착하니 웅장한 누각에 큼지막하게 ‘대당부용원(大唐芙蓉園)’이라고 쓴 편액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입장권을 내고 들어가니 탁 트인 공간에 넓은 호수가 자리 잡고 각종 누각과 아치형 다리가 연꽃과 버드나무 사이로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인공폭포가 요란하게 포말을 만들어 주변은 물안개로 가득하다. 넓은 공간임에도 사람들이 분주하다. 외국인들도 상당수가 눈에 띤다. 부용원은 황실의 원림답게 모든 것이 조화롭고 아름답다. 호수에 비치는 누각, 연꽃과 버들가지의 손짓, 호수 위를 미끄러지는 조각배 등 그야말로 격조 있는 한 폭의 그림이다.
▲대당부용원-운무를 내뿜는 인공폭포.
당 제국이 번영한 원동력은 경제력뿐 아니라 적절한 인재 등용이었다. 태종 때부터 시행된 인재등용은 현종 시기에도 이어진다. 과거시험은 해마다 봄이면 시행되는데 전국의 수험생들은 가을부터 장안으로 모여든다. 시험시간은 하루 종일이며, 저녁때가 되어서도 답안을 제출하지 않으면 3개의 초를 켜서 제한시간을 알린다. “3개의 초가 타면 수험생의 마음도 다 타버린다.”라는 말은 당시 과거응시생의 심정을 나타내는 실감나는 유행어다.
과거급제자들의 축제, 곡강연회(曲江宴會)
과거시험에 합격하면 급제(及第)라 한다. 여러 분야 중에서도 진사과를 중시했는데, 이 때문에 진사과는 과거시험의 대명사가 된다. 진사과 응시자는 많을 때는 2,000명까지 몰렸고 적을 때에도 1,000명이 넘었지만, 급제한 사람은 고작 30-40명에 불과하였다. 10명 미만일 경우도 있었으니 급제는 곧 최고의 영예인 셈이다.
급제한 진사는 ‘백의경상(白衣卿相)’이라 불렀는데 흰색 삼베 두루마기를 입고 시험을 치렀기 때문이다. 급제한 진사들은 자색의 관복을 입고 이부(吏部)에서 주관하는 시험인 석갈시(釋褐試)에 합격해야 비로소 관직을 받을 수 있다. 이때 1등한 사람을 장원(壯元)이라 한다. 진사들은 서로를 동년(同年)이라 부른다. 과거시험관은 지공거(知貢擧)라고 하는데 급제자들은 이들을 좌주(座主)라고 부르고, 좌주는 급제자를 문생(門生)이라고 불렀다.
좌주와 문생은 부자관계처럼 평생 동안 지속되는데 학벌의 형성과 출세의 배경이 되었다. 진사 급제는 개인의 영광은 물론 가문의 영광이기도 하다. 조상의 덕을 빛내고 가문을 일으키며 ‘의관호(衣冠戶)’라 하여 세금과 부역을 면제받는 경제적 혜택까지도 누리기 때문이다.
곡강은 경치가 제일 빼어난 곳 曲江元勝地
봄 날씨마저 쾌청하구나. 春日更淸眞
진사들 몰려와 제명회를 여니 來作題名會
황제 은혜에 보답할 자들이로세. 俱爲報主身
급제한 진사들을 위한 행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곡강연회다. 이는 급제한 진사들이 좌주와 문생의 예를 갖춘 뒤 여러 가지 연회를 베푸는 것이다. 황제가 직접 자운루에 와서 참관할 때도 있었고 공경(公卿)들은 사윗감을 고르는 절호의 기회로 삼았다. 또한, 그해 합격한 진사는 자은사 대안탑에서 잔치를 베풀고 탑에 이름을 썼는데 이를 ‘제명회(題名會)’라 한다.
▲대당부용원. 자은사 대안탑이 보인다.
하지만, 급제자들이 가장 기다리는 행사는 따로 있었다. 이는 ‘평강지악(平康之樂)’으로 당시 기생집이 많은 평강리에서 주악(酒樂)을 즐기는 것을 말한다. 정식 관리가 되면 기생집 출입이 불편하기 때문에 자유로운 신분일 때 한바탕 놀아보자는 것인데, 정작 관리가 되어 이를 지킨 자가 몇이나 되었을까.
남녀노소가 즐겨 찾는 곳으로
부용원을 나와서 조금 떨어진 곡강지로 향한다. ‘곡강지유지공원(曲江池遗址公园)’이란 푯말을 지나니 커다란 바위에 안진경(顔眞卿) 글씨체로 ‘곡강지’라고 쓴 붉은 글씨가 보인다. 곡강지는 커다란 호수를 중심으로 숲이 어우러져 있는데, 여느 공원이나 다를 바 없다. 하지만 곡강지는 남녀노소 사람들로 넘쳐난다. 곡강지는 상류층만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일반 서민들도 누구나 찾아와서 즐길 수 있는 공간이었다. 황제인 현종도 이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무슨 까닭이 있었던 것일까?
현종도 집권 초기에는 검약하였다. “덕은 옛 사람을 따를 수 없지만 검약함은 옛 철인도 부럽지 않노라.”며 사치와 낭비를 없앴다. 그가 이렇게 선언한 것은 정쟁의 대상이었던 태평공주를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개원 18년(730년), 정치적 입지가 안정되고 물질적 풍요로움이 넘치자 현종은 더 많은 욕심이 생긴다. 태평성대를 이룬 황제로서 백성들에게 은덕을 베풀고 자신 또한 천하에 부러울 것 없는 삶을 누리고 싶었다. 이를 위하여 현종은 곡강을 명승지로 개발하여 관료들은 물론이고 일반 백성들에게까지 자신의 치적을 알리기로 작정한다.
황제는 이를 위하여 과거에 합격한 진사들을 모아 곡강연회를 개최함으로서 태평성대를 이룬 자신의 능력을 보여 줌과 동시에, 신진관료들을 격려하고 그들에게 자부심과 책임감을 부여해 충성스런 군신관계를 맺으려 하였다. 여기에는 유능한 인재들을 거느린 자신의 모습을 천하에 보여 주려는 의도도 있다.
▲자운루의 모습.
이러한 의도가 내재된 연회이기에 화려하고 사치스럽다고 하여 전혀 걱정될 것이 없었다.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풍요로움은 모든 백성들에게 사치와 향락을 즐기게 하였고 아무도 그것을 문제 삼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런 행락문화를 누리지 못하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라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곡강지는 차츰 향락과 사치문화의 대명사로 발전한다. 그리하여 백성들은 국가에서 치르는 공식 연회와 상관없이 음력 이월초하룻날의 중화절(中和節), 음력 삼월삼짇날의 상사절(上巳節), 음력 구월구일날의 중양절(重陽節)에는 너나없이 곡강지를 찾았다.
곡강지는 감옥도시 장안의 해방구
당시 백성들은 왜 이토록 곡강지를 사랑했을까? 장안성은 수나라 때부터 당나라 초기까지 해질 무렵부터 통행이 금지되었다. 성 안에 만들어진 108개의 방은 각각 3m 높이의 방벽(坊壁)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백성들은 그 안에서 북소리와 종소리에 따라 일상생활을 하였다. 백성들은 바둑판처럼 잘 짜인 감시의 틀 속에서 황제의 명령에 따라 살아갈 뿐이다. 만약 이러한 규칙을 거부하면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 이런 점에서 실크로드의 출발지이자 세계적인 도시 장안도 따지고 보면 황제의 의도 아래 만들어진 감옥 같은 도시인 것이다.
상황이 이러하니 곡강지는 장안 백성들이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였다. 특히, 선남선녀들에게 있어서 곡강지는 필수적인 해방구였다.
날씨도 상쾌한 삼월 삼짇날 三月三日天氣新
곡강지 물가에 미인들이 모였네 長安水邊多麗人
농염한 자태 뽐내며 정숙하고 순진한 것이 態濃意遠淑且眞
보드라운 살결에 균형 잡힌 몸매로다 肌理細膩骨肉勻
봄과 꽃, 시와 음주가무, 선남선녀의 사랑 등이 어우러진 곡강지. 하지만 이 또한 황제가 만들어낸 축제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함에도 곡강지는 과거급제자, 청춘남녀, 관료나 귀족, 기생, 상인, 일반백성 등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이 어우러진 개방형 문화 향유의 장소였다. 이처럼 복합적인 성격을 띤 곡강지는 당대의 장안문화를 더욱 풍성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였다.
화려한 곡강 문화는 안사(安史)의 난으로 크게 위축된다. 곡강지를 에워쌌던 수많은 정자는 불타고 남은 정자들도 각종 건축물의 재목으로 조달된다. 훼손된 곡강지를 본 두보(杜甫)는〈애강두(哀江頭)〉를 지어 자신의 감회를 읊었다.
소릉 밖 늙은이 소리 없이 흐느끼며 少陵野老吞聲哭
봄날 남몰래 곡강가로 나아가니 春日潛行曲江曲
강어귀 궁전은 모든 문이 닫혔는데 江頭宮殿鎖千門
버들가지 새로운 창포는 누굴 위해 푸르른가 細柳新蒲爲誰綠
곡강문화의 부활을 위하여
두보는 부용원터를 거닐며 보았다. 얼마 전까지 환락의 축제로 들썩이던 자리가 이제는 폐허로 변한 것을. 쓸쓸한 바람에 휘날리는 버들만 있는 것에 진정 가슴이 아팠다.
▲대당부용원-한 폭의 그림같은 풍경이다.
엄동설한에 다시 부용원과 곡강지를 찾았다. 온통 뿌연 하늘은 진눈깨비를 흩뿌리고 있다. 오늘 곡강지와 부용원을 찾은 나는 두보와는 또 다른 감회에 쌓인다. 이제는 도시의 풍경을 아름답게 해주는 명물로 재탄생함과 동시에 외국인들을 위한 관광명소로 탈바꿈하였으니 역사를 재현하고, 나아가 경제발전에도 이바지하는 일석삼조의 곡강지가 된 것이다.
송나라 이후 폐허가 되었던 곡강지가 오늘날 이처럼 부활한 것은 우연이 아닌 것이니, 이 모두가 그 옛날의 화려한 곡강문화를 되찾고 싶은 중국인들의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겨울임에도 부용원 입구에는 외국인들이 어수선하다. 그 입구 너머로 힘차게 운무를 내품던 인공폭포가 봄이 오기만을 애달프게 기다리고 있다. 힘차게 피어오르는 운무에 황룡을 태우고 싶어 안달이 난 듯하다.
(6) '대당서역기'는 서역정벌을 위한 '1급 보고서'였다
당태종, 버선발로 현장을 맞이하다 <서안 6>
“가야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천축(天竺)까지 가야 한다.”
약 1,400년 전 20대 청년 현장(玄藏)이 대당제국의 수도 장안성을 몰래 빠져나간다. 지방의 명문가 출신인 그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13세에 승려가 되고, 21세에는 승려로서 습득해야 할 체계적인 계율인 구족계(具足戒)를 받으며 두각을 나타낸다. 하지만 현장의 갈증은 여전하였다. 그 이유는 경전의 일부만이 번역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불교 용어들 가운데는 도교의 용어와 개념을 빌려와 번역된 것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현장은 스스로 천축에 가서 경전을 구해오기로 마음먹고 각종 언어를 공부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갖춘다. 하지만 태종은 허락하지 않았다. 승려는 공무가 아니면 외국으로 나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현장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불심(佛心)으로 무장한 현장은 기회를 노리다가 드디어 목숨을 건 머나먼 여행을 시작한다.
장안성을 몰래 빠져나간 청년
중국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1세기경 한(漢) 명제(明帝) 시기 이전이다. 범엽(范曄)의 ‘후한서’에 보면, 명제가 꿈에 ‘금빛 몸을 한 1장 6척의 신인(神人)’을 만났다고 한다. 그리고 신하로부터 꿈속의 신인이 ‘서쪽의 성인인 부처’라는 얘기를 듣는다. 이렇게 부처의 존재가 한나라에 이미 알려져 있었으니, 불교는 적어도 명제 이전에 전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에 불경을 전한 승려들은 대부분 서역과 인도 승려들이다. 외국인이 불경을 중국어로 번역하면 오역은 피할 수 없다. 게다가 대승불교와 소승불교가 다르고, 분파도 제각각이어서 번역가들 사이에서도 불경에 대한 해석이 조금씩 달랐다. 그러므로 불경의 내용이 혼란스러웠고 심지어 충돌하는 경우도 있었다. 중국 승려들의 입장에서 보면 당혹스럽고 난해하기까지 하였으니 불경을 제대로 이해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들은 스스로 불도(佛道)를 밝혀 중생을 구제하고자 나선다. 이른바 ‘서천취경(西天取經)’, 즉 서쪽의 천축으로 가서 불경을 가져오는 일에 헌신하는 것이다.
험난한 ‘서천취경(西天取經)’의 길
위진남북조시대에 정치․사회가 혼란해지자 불교가 두각을 나타내면서 불경을 구하려는 승려의 수도 폭발적으로 늘어난다. 그중 두각을 나타낸 승려는 법현(法顯)이다. 399년, 65세가 넘는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서역으로 향한 법현은 온갖 어려움을 뚫고 천축에서 불경을 가지고 돌아옴으로서 불모지였던 중국의 원본 불경 번역계를 개척하였다.
“서역을 향해 사막을 지날 때 머리 위로 새 한 마리, 땅에 짐승 한 마리도 얼씬하지 않았다. 사방으로 아득히 펼쳐진 사막에서 도대체 어디쯤 사람 사는 곳이 있는지 예측할 수 없었다. 그저 태양을 방위 삼고 해골을 이정표로 삼을 뿐이었다. 사막의 열풍과 악귀들이 여러 차례 출현하면서 우리 앞에는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불국기.
법현은 15년 동안 애타게 갈구하던 바로 그 불경을 가지고 바닷길을 통해 귀국한다. 그리고 ‘불국기(佛國記)’를 지어 당시 자신이 지나온 국가와 지역의 상황을 기록으로 남긴다. 이러한 법현의 성과를 이어받은 이가 현장이다.
당태종은 버선발로 현장을 맞이하고
당태종 정관 19년(645년), 현장은 17년 만에 서역여행을 마치고 장안으로 돌아온다. 장안을 출발할 때는 정식 출국허가 없이 떠났지만 돌아올 때는 태종이 버선발로 맞이할 정도였다. 태종의 시급한 과제는 서북 변경지역을 위협하던 돌궐을 물리치는 것이다. 그래서 돌궐을 이간시켜 동서로 나뉘게 하고 몽골지역의 동돌궐을 제압한 뒤 중앙아시아의 서돌궐 공략에 치중하고 있던 차였다. 이런 때에 이 지역을 손바닥처럼 알고 있는 현장이 귀국하니 태종으로서는 천군만마를 얻은 것이나 다름없다. 현장도 제국을 확장하려는 태종의 야심을 알고 있기에 충언을 아끼지 않는다.
▲당태종
“폐하는 천자가 되실 상서로운 기운을 타고나시어 사해(四海)를 다스리고서부터 성덕(聖德)과 인(仁)은 모든 곳에 미치고, 순풍(淳風)은 남쪽의 열대에까지 불고 천자의 위엄은 파미르고원 밖에까지 떨쳤나이다.”
현장의 찬사에 태종은 넌지시 자신의 의중을 드러낸다.
“부처님의 나라는 너무 멀리 있어서 지금까지도 신령한 사적(史跡)과 교의(敎義)에 대하여 상세하게 기록한 책이 없소. 법사는 최근에 이 모두를 보았으니 새로운 정보를 담은 책을 쓰도록 하시오.”
서역국가 1급 정보 보고서를 만들다
현장은 불경 번역을 제쳐 두고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를 집필한다. 태종은 현장을 구법승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정치적 야심을 충족시켜 줄 1급 정보원으로 간주하였다. 현장 또한 황제의 제국 건설에 찬사를 보내며 서역 정벌에 필요한 자료를 충실하게 정리하였으니, 일차적인 목표가 불경의 획득이었다 해도 결국 황제의 눈귀와 손발역할을 톡톡히 해낸 셈이다.
▲대당서역기
이렇게 볼 때 현장의 행동은, “멀리로는 여래(如來)를 따르고, 가까이로는 유법(遺法)을 빛내는 승려가 되겠다.”라던 자신의 말과 배치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세속 세계의 우두머리라 할 수 있는 황제의 갈증을 채워주는 일에 우선적으로 매달렸으니 말이다.
가는 길은 달라도 이미 둘 사이에는 수어지교(水魚之交)의 믿음이 통하였던가. 불도를 따르는 승려 현장도 조국의 땅덩이를 넓히는데 일조하는 충실한 신민이 되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승려가 되기 전에 현장은 유교적 소양을 중시하는 가문에서 자라났으니, 유교의 중요한 덕목인 효(孝)와 덕(德),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한 충(忠)과 입신양명(立身揚名)의 정신이 현장의 무의식에 깊숙이 각인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황제가 나라의 번영과 영토 확장의 필요성을 역설하자, 즉시 서역 국가들의 상세한 정보를 정리하여 바친 것이다. 현장의 본심이 어땠을지는 모르지만, 그의 행적만 따지고 보면 귀국한 뒤에 적극적인 현실주의자이면서 철저한 이해타산주의자가 된 것이다. 현장은 1년 반 만에 12권의 방대한 저작인 ‘대당서역기’를 완성한다. 그가 이 작업에 얼마나 집중했는지 알 수 있다. 현장은 이 책을 통하여 중국에서 인도에 이르는 동안 직접 보거나 들은 138개국의 정치경제, 사회문화, 국토와 인문지리 등 그야말로 소소한 내용까지 상세하게 다루었다.
▲자은사 입구 현장상
현장이 ‘대당서역기’를 완성하여 태종에게 바쳤을 때 태종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으리라. 제국 확장을 위한 결정적 자료를 손에 쥐었으니 말이다. 책을 받아 든 태종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현장의 사업을 적극적이고 대대적으로 후원하라고 지시한다. 현장은 태종이 원하는 것을 줌으로써 이후 19년에 걸쳐 1,347권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경전 번역을 완수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648년 말, 현장의 불경 번역을 위한 대자은사(大慈恩寺)가 완성된다. 현장으로 인해 불교에 대한 당 황실의 미온적인 태도가 전폭적인 지원으로 바뀐 것이다.
자은사에서 불경을 번역하다
현장은 대자은사에서 밤낮으로 불경 번역에 매진한다. 현장은 바쁜 상황에서도 황실과의 관계를 더욱 공고히 다지면서 더 큰 관심과 많은 후원을 해줄 것을 바랐다. 이런 현장의 바람은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이 완성되어 태종에게 아뢰는 대목에 잘 나타난다.
“저 현장은 홍복사에 존상(尊像)이 처음 조성되었을 때 폐하께서 친히 가마에서 내리셔서 그 푸른 연꽃과 같은 눈을 개안(開眼)하셨던 것을 보았나이다. 지금 번역된 경론은 이 위대한 왕조의 새로운 글이옵니다. 감히 바라옵건대, 전에 홍복사에서 하셨던 인연처럼 폐하께서 높으신 글씨로 서문을 써 주시옵소서.”
이런 현장의 요청에 태종은 흔쾌히 ‘대당삼장성교서(大唐三藏聖敎序)’를 썼으리라. 현장은 또한 고종에게도 “폐하의 글씨가 아니면 해와 달처럼 빛나는 이 글을 나타낼 수 없나이다.”라는 표문을 올렸다. 부친 태종이 그랬던 것처럼 고종도 글을 내려 주었으니 이것이 곧 ‘대당삼장성교서기(大唐三藏聖敎序記)’이다. 경전 번역본의 발간을 앞두고 최고 권력자인 황제의 추천사를 받고자 애쓰는 삼장법사 현장의 모습이 어쩐지 씁쓸하게 느껴진다.
▲자은사 대안탑1
자은사는 당 고조 때 폐허가 된 수나라 무루사(無漏寺)의 옛터에 고종이 자기 어머니 문덕(文德)황후를 위해 648년에 세운 절이다. 현장은 이곳에서 11년 동안 경전 번역에 힘쓴다. 이 절은 누각식으로 지은 대안탑(大雁塔)으로 유명한데, 현장이 천축에서 가져온 불경과 불상 등을 보관하고 정리하기 위하여 건설한 것이다. 대안탑은 처음에는 5층으로 지어졌으나 현장이 죽은 뒤 701년부터 704년 사이에 개조되어 10층으로 확장하였다. 하지만 전란과 지진 등으로 파괴되어 현재의 7층탑이 되었다. 중국은 벽돌로 만든 전탑(塼塔)이 많은데 대부분은 탑에 올라갈 수가 있다. 나선형의 계단을 돌아 64미터 높이의 정상에 오르니 서안 시내 전체가 한 눈에 들어온다.
▲자은사 대안탑2
북두칠성은 북쪽 문에 있고七星在北戶
은하수는 소리 내며 서쪽으로 흐른다.河漢聲西流
희화는 밝은 해를 채찍질하고羲和鞭白日
소호는 맑은 가을을 운행한다.少昊行淸秋
진산은 갑자기 조각조각 부서지고秦山忽破碎
경수와 위수는 찾을 수가 없구나.涇渭不可求
굽어보니 단지 하나의 기운,俯視但一氣
어찌 천자의 도읍을 가려낼 수 있겠는가.焉能辯皇州
탑 내부의 남쪽 감실(龕室)에는 당 태종이 쓴 ‘대당삼장성교서(大唐三藏聖敎書)’와 당 고종이 쓴 ‘대당삼장성교서기(大唐三藏聖敎書記)’가 기록된 석비가 있다. 대안탑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또 하나 있는데, 당대의 화가인 오도자(吳道子)가 그린 보현상(普賢像)이 그것이다. 오도자는 가난했지만 천재적인 그림솜씨로 ‘오대당풍((吳帶當風)’이라는 독특한 화법을 창시하여 화성(畵聖)으로 칭송받았다. 그의 화법은 운필이 빠르면서도 대담한 기세와 포용력을 함께 갖춘 점이 특징인데, 특히 인물화에 있어서 의대(衣帶)가 바람에 나부껴 올라가도록 표현함으로써 선 자체가 살아 숨 쉬면서 화면에 생동감과 기운을 불어넣어 주는 독특한 화법이다. 이는 소그디아나 출신의 서역화가인 조중달(曹仲達)이 옷매무새가 마치 물속에서 방금 나와서 몸의 선이 보이는 듯하게 그리던 ‘조의출수(曹衣出水)’에서 탈피한 것이다.
▲현장의 서전취경을 묘사한 부급도
중국인의 뛰어난 상술(商術)
오도자의 보현상이 판각된 벽화는 사진을 찍을 수도 없게 철조망으로 가려 놓았다. 결국 오도자의 작품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탁본을 구입하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다. 탁본도 제대로 된 것이면 값어치가 있다.
“보현상 탁본한 것이 있나요?”
“물론 있지요. 근데 귀한 것이라서 비싸요. 살건가요?”
“물건을 봐야 결정하지요.”
“1,800위안입니다. 깎을 수 없습니다.”
서랍의 깊은 곳에서 꺼내더니, 보여주지도 않고 가격부터 부른다.
“진품인지 먼저 확인을 해야지요.”
“보나마나 물건 하난 확실합니다.”
언뜻 접혀진 뒷면을 보니 탁본 흔적이 없다.
“보여줄 필요 없어요. 안삽니다.”
▲오도자의 보현상
너무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했던가. 주인은 이상한 표정을 짓는다. 내가 화선지의 뒷면을 가리키며 탁본한 것이 아니라고 하니까, 싸게 준다며 다짜고짜 손목을 잡는다.
실크로드를 장악한 상인은 소그드인이지만, 중국 상인들도 그에 못지않았다. 오늘날 전 세계에 거대한 화상(華商)조직을 가지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러한 상업전략이 축적된 결과이니, 이제 다시 소그드 상인과 거래하면 누가 손해를 볼까.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둘 다 큰 이문(利文)을 남길 것이리라.
(7) 신라 고승 원측, 현장을 반박하다
현장도 두려워 한 해동(海東)의 고덕(高德), '원측' <서안 7>
신라 고승 원측, 현장을 만나다
자은사를 돌아보고 나오니 커다란 광장에는 분수 쇼가 한창이다. 음악에 맞춰 뿜어내는 분수에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신바람이 났다. 자은사 입구에 세워진 거대한 현장상도 물벼락을 맞은 채 웃고만 섰다.
▲흥교사 입구
현장은 자은사에서 불경번역에 매진하는 동안 원측(圓測)을 만난다. 원측은 신라 사람으로 진평왕(眞平王) 때 모량부(牟梁部) 왕족 출신의 승려다. 3세에 출가하여 15세 때인 627년에 당나라에 유학하였는데, 현장과 함께 법상(法常), 승변(僧辯)을 스승으로 모시고 동문수학하였다. 스승들로부터 구유식(舊唯識;마음에 내재하는 사물의 모습은 허구라는 관점)의 토대를 확고히 한 원측은 645년, 인도에서 돌아온 현장을 만나 신유식(新唯識; 마음에 비친 객관의 모습은 고유한 본성을 지니고 있다는 관점)을 접하고 사상적으로 새로운 전환을 맞는다. 원측은 현장의 불경 번역 사업에 참여하지는 않지만, 이미 현장에 버금가는 지식을 갖춘 상태였다. 원측이 신라로 돌아갔을 때 부처에 버금갈 정도로 원측을 떠받들었던 측천무후(則天武后)가 원측에게 환국을 간청할 정도였다.
▲흥교사
자은학파는 원측 비방에 열 올리고
“원측이 우리의 강설을 몰래 엿듣고 자신이 것인 양 떠들고 다닌다.”
현장은 제자 규기(窺基)와 함께 자신이 추구하던 유식론의 입장에서 불경을 번역한다. 하지만 원측은 신유식과 구유식을 아우르는 입장을 취한다. 이때부터 현장-규기-혜소(慧沼)로 이어지는 자은학파는 원측을 비방하기 시작한다. 그 뒤 현장이 규기에게 강의하는 것을 원측이 몰래 엿듣고 미리 발표했다는 도청설을 유포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이는 모두 날조된 것이다. 원측은 규기보다 스무 살 이상 많다. 원측은 자신이나 그가 속한 당파의 이름을 드높이려는 의도도 없고, 학식도 규기보다 월등이 높았다. 측천무후가 원측을 극도로 예우한 데서 알 수 있듯이, 당나라에서 원측의 명성과 위상은 매우 높았다. 또한 태종으로부터도 서명사(西明寺)의 대덕(大德)으로 지명 받아 많은 책을 집필하는데, 원측이 서명사에 기거하며 강의․찬술한 것에서 그의 제자들을 ‘서명학파’라고 할 정도로 그의 영향력이 컸다.
▲흥교사 원측탑
모든 중생이 부처가 될 수 있다
“현장! 당신의 생각은 조화롭지 못하오. 모든 중생이 다 부처가 될 수 있는 법이오.”
당시 중국 불교계의 논쟁은 ‘공(空)’과 ‘유(有)’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유식론을 중시하는 쪽은 ‘유’를 중시하였는데, 현장은 기존 유식을 넘어서는 새로운 유식을 전파하였다. 원측은 현장의 신유식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면서 공과 유를 대립적으로 보지 않고 조화시키려고 하였다. 이에 반해 현장의 적통임을 자부하는 자은학파는 신유식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종파적 입장을 견지하였는데, 이 때문에 공과 유의 조화를 모색하는 원측의 입장을 극렬하게 반박하였다.
또한 원측은 현장, 규기가 강조한 오성 가운데서도 깨닫지 못하는 종성(種性)이 있다는 ‘오성각별론(五性各別論)’을 비판하면서, 모든 중생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실유불성론(悉有佛性論)’을 주장한다. 그리고 이것이 보다 불교의 참뜻에 가깝다고 생각하였다.
원측이 주석한 경론은 신라와 일본, 그리고 티베트까지 전해진다. 원측에서 비롯된 서명학파의 유식이론이 당시 동아시아 불교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것이다. 그런데 신라 출신의 이국 승려가 자신들보다 뛰어난 사상을 편다면 중국 불교의 위상은 어찌되겠는가? 자은학파가 원측을 비방․날조한 것은 한족의 정통성과 자부심을 잃지 않으려는 몸부림이었다. 이러한 편협함 때문에 현장이 창시한 법상종(法相宗)은 대중에게 뿌리내리지 못하고 황실의 손길이 미치지 않게 되자 소리 없이 스러지고 만 것이다. 한편, 원측은 중국 불교의 번영에 엄청난 기여를 하는데, 이는 그의 사후 ‘사리탑명병서(舍利塔銘幷序)’에 적힌 글을 보면 알 수 있다.
“서명사의 대덕으로 부름을 받고서 ‘성유식론소’10권, ‘해심밀경소’10권, ‘인왕경소’3권, ‘강반야관소연론’, ‘반야심경’ ‘무량의경’등의 소를 찬술하였으며, 현장법사의 신비로운 전적을 도와 당시 사람들의 눈과 귀가 되었다. 현장을 도와서 불법을 동쪽으로 흐르게 하고 무궁한 교법을 크게 일으키신 분이다.”
세계 불교계가 주목하는 ‘해심밀경소’
원측은 중국 불교계에 커다란 업적을 남긴 승려이기도 하지만, 그의 저서인 ‘해심밀경소(解深密經疏)’는 혜초(慧超)의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 원효(元曉)의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와 함께 신라 고승의 3대 저작물로 세계 불교계에서도 주목받고 있다.
▲원측-해심밀경소
현장과 원측, 규기의 사리탑이 있는 흥교사(興敎寺)를 찾았다. 흥교사에 이르니 간간이 빗방울이 떨어진다. 서안의 주산인 종남산(終南山)기슭에 있는 흥교사는 669년에 창건된 고찰로 당대에는 번천(樊川)의 8대 사찰 중 으뜸이었다. 1862년 청나라 때 섬서성 지역 회족들의 봉기로 탑을 제외한 모든 것이 불타버린 것을 1939년까지 약 20년에 걸쳐 복원한 것이다.
현장은 태종에 이어 고종 대에 이르러서도 불경 번역 사업에 헌신하다가 664년에 입적한다. 고종은 “국보를 잃었다”라고 하며 애통해 하고 장안 동시(東市)의 비단 장사들은 3,000필의 비단을 바쳐 상여를 장엄하게 꾸미고자 하였지만, 현장의 유언에 따라 검소한 대자리 거적으로 상여를 만들었다. 현장의 사리는 여러 곳으로 분산되어 있지만 이곳 흥교사에 사리탑을 세워 모신 것은 669년이다.
흥교사 내 자은탑원(慈恩塔院)으로 들어선다. 입구는 중국의 정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둥근 원 모양의 문양으로 담쟁이 넝쿨이 고색창연함을 더해 준다. 오래된 측백나무와 대나무 사이로 세 탑이 병립해 있다. 가운데 5층 전탑(塼塔)으로 세워진 것이 현장의 사리탑이고 원측과 규기의 사리탑이 3층으로 대칭을 이루고 있다. 세 탑의 북쪽에는 세 칸의 사찰이 있는데 안에는 현장이 짐을 지고 있는 모습의 부급도(負笈圖), 현장행정도(玄藏行程圖)와 현장의 전기와 그를 기리는 물품 등이 있다. 특히, 현장의 부급도는 마치 살아 있는 현장의 모습을 보는 듯한데, 먼 길을 오고가는 동안 온갖 역경을 이겨내며 불경이 가득 담긴 행장을 지고 오는 문화교류자로서의 현장의 모습이 보인다. 이 그림은 송나라 때 전해진 그림을 본떠서 만든 것이다.
▲흥교사 자원탑원
신라에선 승직을 못 받고 중국에선 ‘해동(海東)의 고덕(高德)’으로 칭송
원측의 사리탑을 돌아본다. 그는 신라 6부의 하나인 모량부의 박씨 왕족 출신이다. 모량부는 중고시대까지 황후를 배출한 집안이다. 하지만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을 거치면서 모량부는 황후를 배출하지 못하고 쇠락한다.
신문왕 대에 이르러 구세력을 척결하는 대규모 숙청이 있었고, 그 연장선상에서 효소왕은 모량부 익선아간(益宣阿干)의 뇌물사건을 빌미로 모량부를 탄압한다. 그리하여 모량부 출신은 벼슬은 물론 승직(僧職)도 제수 받지 못하게 된다. 중국에서 ‘해동(海東)의 고덕(高德)’으로 칭송받은 원측이건만, 자국인 신라에서는 연좌제로 인하여 승려조차 될 수 없었다.
15세 소년 원측의 유학은 왕비족을 배출한 가문의 존엄을 되살려야 한다는 비장함보다는, 모량부의 정치적 탄압을 피해 불도에 더 깊이 정진하려 했던 구법유학의 성격이 강했을 것이다. 그리고 동아시아의 중심이었던 장안에서 원측은 깨달았다. 눈앞에 펼쳐진 드넓은 인간세상과 광대한 정신세계에서 승려인 자신이 가야할 길을 말이다. 이때부터 원측은 오로지 학문연마에만 몰두하였고, 그 결과 당대의 고승들 가운데서도 맨 윗자리인 상좌(上座)에 오른다.
▲흥교사 편액
흥교사 입구에는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종루가 있다. 그 안에는 한국의 어느 사찰에서 기증한 종이 있다고 하는데, 한국의 종소리를 듣고 싶어 요청했지만 시간이 이른 까닭에 안 된다고 한다. 아쉬운 마음으로 돌아서는데 대웅보전 위의 ‘흥교사’ 편액의 서체가 특이하다. 다가가서 살펴보니 중국 근대사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인 강유위(康有爲)가 쓴 것이다. 군살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꼬장꼬장하고 강직한 것이 강유위의 품성을 그대로 보여 주는 것만 같다. 명필을 대하면 절로 흥겨움에 들뜬다고 하지 않았던가. 마치 추사가 선운사에서 초의선사의 글씨를 다시 보고 감탄했던 것처럼. 흥교사를 나오는 발걸음이 가볍다. 원측 스님과의 만남이 머나먼 실크로드를 여행하는 나에게 많은 것을 깨우쳐 주었기 때문이다.
(8) 3000궁녀도 모자라 아들의 여자까지 빼앗은 당현종
현종, 경국지색 '양귀비'를 품다 <서안 8>
구름 같은 머릿결, 꽃 같은 얼굴에 금보요 팔랑 雲髮花顔金步搖
부용 휘장 하늘대는 침실, 황홀한 봄 지새우노라니 芙蓉帳暖度春宵
봄밤은 짧디 짧아 한 낮에야 눈을 뜨고 春宵苦短日高起
이로부터 임금은 정치에 관심이 없어졌네. 從此君王不早朝
모든 왕은 호색가다. 여인들의 숲에 있으니 그렇다. 현종은 특히 더하였다. 삼천의 궁녀로도 성이 안차 아들의 여자를 빼앗았다. 그녀가 바로 중국 4대 미인 중에서도 최고로 치는 경국지색(傾國之色) 양귀비다. 권력은 부자간에도 치열하여 피를 부른다. 현종은 여자를 차지하는 것에서도 아들과 다퉜다. 현종은 양귀비를 품고 살았다. 한시도 떨어지기 싫었다. 정치도 싫고, 인사도 싫었다. 알아서 다 해주길 바랐다. 현종은 오직 황제의 침실에서 양귀비와 함께 있으면 그것으로 태평성대였다. 도대체 양귀비가 어떤 여인이기에 현종은 이처럼 헤어나질 못한 것인가.
▲목욕하고 나온 양귀비를 그린 '화청출욕도'
양귀비는 현종 개원 6년(718년)경에 태어났다. 본명은 양옥환(楊玉環)이다. “태어날 때 왼팔에 옥고리 문양이 있고, 고리에는 ‘태진’이라는 글씨가 있어서 ‘옥환’이라고 지었다고 하니 출생부터 심하게 미화(美化)되어 있다. 그런데 청나라 때에는 한 술 더 뜬다.
“귀비는 어머니 태내에 13개월 동안 있었는데 태어날 때에는 방에 향기가 감돌았고 탯줄은 연꽃과 같았다. 3일 동안 눈을 뜨지 않았는데 어머니가 신인(神人)이 손으로 아이의 눈을 쓰다듬는 꿈을 꾸고 나서야 눈을 떴다. 피부는 옥과 같고 이 세상사람 같지 않은 용모였다.”
▲당현종과 양귀비의 여흥도
천하일색이니 탄생부터 신비롭지 않으면 어찌 황제가 관심을 갖겠는가. 따지고 보면 양귀비의 집안이나 태생에 대하여 밝힐 만한 것이 없으니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렇다면 사실에 가까운 양귀비는 어떤 여인인가?
‘구당서’ ‘양귀비 열전’에 보면, 그녀의 부친은 지금의 사천성인 촉주(蜀州)의 사호참군(司戶參軍)을 지낸 양현염(楊玄琰)이다. 어려서 부친이 돌아가시자 숙부인 양현요(楊玄邀)가 길렀다고 한다. 현종 때의 일을 정리한 책인 ‘개원천보유사(開元天寶遺事)’에도 양현염이 아버지라고 되어 있다. 하지만 현종의 18번째 아들인 수왕(壽王) 이모(李瑁)의 비(妃)로 정할 때 내려진 비문인 ‘책수왕양비문(冊壽王楊妃文)’에는 하남부 사조참군(河南府 士曹參軍) 양현요의 장녀로 되어 있다.
▲당현종과 양귀비의 여흥도2
“양귀비의 족보를 고쳐라”
둘 다 역사적 사료인데 왜 다른 것일까? 어떤 자료가 보다 사실에 가까울까? 비문이 1차적 사료이니 가장 중요하다. 그것도 황제가 내린 것이니 더욱 그렇다. 하지만 황제의 비문과는 달리 역사서에서는 모두 양현염을 부친이라고 적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된 일일까? 수왕의 비가 될 때의 양귀비는 숙부에게서 양녀로 키워졌으니 양현요의 장녀로 표기하였는데, 현종이 빼어난 미모에 반해 아들로부터 빼앗으려니 세간의 이목이 걸렸던 것이다. 그래서 원래의 친아버지인 양현염을 내세우고 양부(養父)는 없앤 것이다. 현종이 아들로부터 양귀비를 빼앗을 때도 잠시 도교의 여도사가 되게 하였던 점을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더욱이 필요하다면 족보나 가계를 위조하는 것이 비일비재하던 시대에 며느리를 빼앗고자 혈안이 된 황제의 명령을 누가 감히 막을 수 있겠는가.
▲화청지의 양귀비상
오늘날의 미인은 가는 허리에 늘씬한 풍모를 지닌 여성이지만, 당나라 때의 미인상은 풍만한 육체에 이국적인 풍모를 지닌 여성이었다. 양귀비가 바로 이러한 여인이었는데, 그녀는 가무와 음률에도 뛰어난 소질을 갖추고 있었다. 음악과 문학 등 예술방면에 조예가 깊었던 현종이 이러한 양귀비에 어찌 매료되지 않겠는가. 하지만 현종도 염치는 있었던가. 도교의 열렬한 신봉자였던 현종은 양귀비를 도사로 삼는 방책을 만들어 세간의 관심이 멀어지기를 기다린다. 황녀(皇女)들이 출가하여 여도사가 되는 일은 있었지만 황자의 부인이 남편을 버리고 여도사가 되는 것은 있을 수도, 허용되지도 않는 일이다. 현종은 양귀비를 5년간 도사생활을 지내게 한 뒤 궁궐로 데려온다.
화청지, 현종과 양귀비의 파라다이스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부도덕한 사랑놀이는 화청궁(華淸宮)에서 이뤄진다. 장안 동쪽 여산(驪山)에 있는 화청궁은 예로부터 유명한 온천지역인데 특히, 수도인 장안과 가까워 황제의 요양지로 애용된 곳이다. 현종이 양귀비를 만나면서부터 신년 조회도 화청궁에서 할 정도가 되었으니, 정무를 보는 관청뿐 아니라 귀족의 저택이 화청궁에 즐비하게 들어선 것도 당연한 일이다. 온천탕은 또 얼마나 요란했을까. 양귀비가 목욕하던 부용탕(芙蓉湯), 현종의 욕실이 있던 구룡전(九龍殿)은 물론이고 옥녀탕(玉女湯), 소양탕(少陽湯), 연화탕(蓮花湯), 의춘탕(宜春湯), 태자탕(太子湯)에 이르기까지 화려한 옥으로 장식된 화청궁은 그야말로 환락의 궁전이었다.
▲화청지 전경
화청지는 서안시내에서 동쪽으로 약 30㎞ 떨어진 여산의 산기슭에 위치한 곳이다. 입구에서 왼쪽으로 들어가자 수많은 미인들이 있는 연회장면을 묘사한 벽화가 눈에 들어온다. 양귀비는 현종의 왼쪽에 자리잡고 있는데, 풍만한 몸매를 특별히 부각시켜 놓았다. 연둣빛을 내뿜는 연못은 늘어진 버들가지와 어울려 운치를 더하고 있다. 연못 안에는 막 온천을 마치고 나오는 순백의 양귀비상이 요염한 자태를 하고 있다. 호수를 돌아가면 석류나무 한 그루가 고목인 채로 길게 가지를 늘어뜨리고 있는데, 모두들 이 나무 앞에서 무언가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불로목(不老木)이라고도 불리는 이 나무는 양귀비가 얼굴을 기댄 나무라하여 오늘도 미인이 되고 싶어 많은 사람들이 반질반질한 나무둥치에 얼굴을 비비려고 서있는 것이다. 뜬금없는 소문이 전설이 되고 역사가 되는 것은 아마도 이런 것일 게다.
▲양귀비가 목욕을 즐긴 부용탕
양귀비가 현종의 총애를 한 몸에 받자 그녀의 집안사람들도 덩달아 득세한다. 그중 6촌 오빠인 양국충(楊國忠)은 양씨 집안을 대표한다. 젊은 시절 주색잡기에 빠져 천대 받으며 살던 그는 장부를 다루는 능력이 뛰어났다. 그러던 그가 양귀비의 후광으로 재상까지 오르더니, 40여 가지의 직무를 겸직한다. 현종을 주무르는 양귀비 덕에 날아가던 새도 내려않지 않으면 안 될 권세를 누린 것이다.
세상이 시끌벅적해도 현종은 양귀비만 있으면 평안하였다. 세상이 태평하다고 여겼으니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현종의 일상은 양귀비가 웃고 박수치며 좋아하는 것을 보는 즐거움에 다름 아니다. 양귀비가 장안에서 수천 리 떨어진 남방에서만 나는 과일인 여지(荔枝)가 먹고 싶다는 말 한 마디에 여지전용도로를 개통한다. 여지는 3-4일이 지나면 맛과 색이 변하는 과일이다. 신선한 여지를 장안으로 가져오기 위하여 역참을 설치하였는데, 여지를 나르는 파발마가 지나가면 누구든 뽀얀 먼지를 뒤집어써야 했으리라.
“고력사 이놈! 냉큼 와서 내 신발을 벗겨라”
장안이 온통 모란축제로 들썩이는 봄날, 현종은 양귀비와 함께 흥경궁(興慶宮) 침향정(沈香亭)에서 주연을 열다가 궁정시인인 이백을 불러 시를 짓게 한다. 술 취한 이백은 양귀비의 치마폭에 쌓인 현종이 미웠던 것일까. 현종의 최측근인 환관 고력사(高力士)에게 신발을 벗기게 한다. 당시 신발을 벗기는 것은 가장 큰 모욕이다. 고력사가 황제의 눈치를 보며 신발을 벗기자 이백은 일필휘지로〈청평조사淸平調詞〉를 짓는다.
요염한 꽃가지에 향기 머금은 이슬一枝濃艶露凝香
무산의 사랑도 부질없이 애만 끊나니雲雨巫山枉斷腸
묻노라, 누가 한나라 황후와 비교하는가借問漢宮誰得似
가련한 비연은 화장으로 다듬은 미인인 것을可憐飛燕倚新粧
아름다운 꽃과 양귀비가 서로 반기니名花傾國兩相歡
임금은 언제까지나 미소를 머금고 바라보는데常得君王帶笑看
봄바람의 끝없는 시샘을 녹이려는 듯解釋春風無限恨
침향정 북쪽 난간에 기대어 서 있네沈香亭北倚闌于
▲흥경궁 공원의 침향정과 이백상
흥경궁공원은 서안시내의 동쪽, 서안교통대학 앞에 있다. 지금은 공원이 되어 일반인들에게 개방하지만 현종시기에는 그야말로 현종과 양귀비만을 위한 궁전이었을 것이다. 커다란 인공호수를 지나 침향정에 이른다. 침향정은 모란을 좋아한 양귀비가 모란꽃을 감상하기 위하여 지은 것으로 지금도 주변에는 모란이 심어져 있다. 정자 앞에는 얼큰하게 술에 취한 이백이 머리를 괴고 있는 모습을 조각한 ‘이백취와상’이 있다. 현종과 양귀비 앞에서도 이처럼 당당하게 취한 모습을 보였을까. 이백의 호탕한 성격에 미루어볼 때 충분히 그랬으리라.
양귀비의 양자 안록산, 반란을 일으키다
화청궁과 흥경궁을 오가던 현종은 점점 정사를 멀리한다. 그러자 재상 이임보와 양국충, 고력사 등이 서로 이익을 다투며 정사를 주무른다. 그리하여 모든 이권과 자리는 그들의 사람으로 채워진다. 중앙아시아 우즈베키스탄 부하라 출신의 번장(番將) 안록산도 상황판단능력이 뛰어난 자였다. 우둔한 척하며 감언이설로 교활함을 감추고 당나라 전체 병력의 1/3을 휘하에 거느리는 최고의 절도사로 성장한다. 안록산이 권력을 장악할수록 양국충과의 알력은 커질 수밖에 없다. 마침내 755년, 양귀비의 양자로서 현종을 향한 일편단심만을 외치던 안록산이 드디어 칼을 빼어든다. 명분은 양국충의 죄상을 밝히고 처단하는 것이다. 오랜 기간 철저히 준비해 온 안록산이었기에 진격은 질풍노도와도 같았다. 순식간에 낙양성이 함락된다.
756년 6월 13일 부슬비 내리는 새벽. 현종 일행은 백성들의 눈을 속이고 극비리에 장안을 벗어나 촉 땅으로 몽진(蒙塵)한다. 장안을 떠나기 전날, 현종은 자신이 직접 나서서 안록산군을 정벌하겠다는 조칙을 발표한다. 현종의 발표는 피신하기 위한 속임수였다. 민심은 천심이다. 천심을 거역하거나 배반하는 황제는 이미 황제가 아니다. 현종은 천심과도 같은 민심을 배반하면서 목숨을 구걸하기에 급급하였던 것이다. 수도 장안에서 50킬로미터 떨어진 마외(馬嵬)에 도착하자 이탈자가 속출한다. 아울러 지친 병사들 사이에서는 불만과 분노가 극에 달한다.
▲양귀비묘 전경
“천하가 도탄에 빠져 백성들은 도산하고 황제마저 수도를 버린 상황에서 도망칠 수는 없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게 된 원흉인 양국충을 죽여 천하에 사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쩔 수 없구나, 네가 죽어줘야겠다.”
일촉즉발. 현종은 병사들의 험난한 분위기를 누그러뜨리기 위해서는 양국충을 죽이는 방법밖에 없었다. 양국충은 그 동안의 폭정을 참아온 병사들에 의해 처참하게 살해된다. 피 맛을 본 병사들은 현종을 에워싸고 양귀비도 죽이라고 청한다. 현종은 어쩔 수 없이 눈물을 흘리며 돌아서고 고력사가 비단수건으로 양귀비의 목을 졸랐다. 경국지색으로 황제와 나라를 휘저으며 살았던 양귀비의 종말은 이렇게 처참하고 허무하였다.
758년. 난을 수습하고 장안으로 돌아가던 현종은 양귀비가 죽은 마외역을 지나게 된다. 백거이는 현종의 마음을 너무도 잘 표현하였다.
정세가 수습되어 황제 돌아가는 길,天旋日轉廻龍馭
마외에 오니 발길을 뗄 수가 없구나.到此躊躇不能去
마외 언덕 밑 진흙 속에 묻혔을 사랑,馬嵬坡下泥土中
고운 얼굴은 없고 죽은 자리만 남아있네.不見玉顔空死處
황제와 신하 모두 눈물로 옷깃만 적시는데.君臣相顧盡沾衣
동쪽 성문을 향해 말이 스스로 길을 열고 가네.東望都門信馬歸
▲양귀비묘
양귀비묘는 서안 시내에서는 50여㎞가 넘는 곳이다. 마외파(馬嵬坡)에 있는 그녀의 묘는 자그마하다.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봉분과도 같다. 그런데 봉분이 돌로 만들어졌다. 틈새는 시멘트로 모두 메워놓았다.
묘의 흙을 가져다 바르면 양귀비처럼 미인이 된다는 속설로 여러 번 망가졌기 때문이다. 봉분은 황제의 사랑을 독차지한 여인의 묘치고는 애처롭기 그지없다. 경국지색도 한줌 흙이 되어 이처럼 초라한 무덤으로 남았으니 공수래공수거인 인생사 부귀영화도 소용없는 것이다. 이곳을 찾은 시인묵객들도 애잔한 마음을 가눌 길 없었던지 그들이 남긴 시가 비랑(碑廊)에 아롱져있다. ‘아름다움’ 때문에 원 없이 살았으나, 그것이 또한 죄였던 여인. 이제는 바람만이 그녀를 품는다. 그녀를 품은 바람이 비랑으로 향할 제, 내 마음도 한 조각 얹어 보내고 저무는 들녘으로 발길을 돌린다.
(9) 황금의 나라 신라는 '서역인의 지상천국'이었다
어째서 무슬림은 공자를 존경하게 되었을까 <서안 9>
당대의 장안은 열린 도시였다. 서시(西市)는 외국 상인들의 점포가 밀집된 곳이지만 교역만 하는 곳은 아니었다. 로마, 그리스, 비잔틴, 인도 등 여러 문명이 각기 독특한 풍취를 내뿜으며 공존하는 융합공간이었다. 생업은 물론 그들의 언어, 문화, 종교까지 인정함으로써 당나라의 수도 장안은 세계 최고의 도시가 될 수 있었다.
이는 당나라를 건국한 세력이 북방유목민족의 혈통을 이어받아 호방하고 진취적이며 개방적인 사고를 가졌기에 가능한 일이다. 장안을 찾는 서역인들이 늘어나자 그들의 종교도 전해진다. 경교(景敎)와 마니교(摩尼敎), 조로아스터교(Zoroastrianism)가 그것인데 중국인들은 이를 삼이교(三夷敎)라 부른다.
삼이교(三夷敎)의 중국 전래
삼이교 가운데 가장 먼저 중국에 전래된 것은 조로아스터교다. 중국에서는 이를 ‘천교(祆敎)’라고 불렀는데 631년 숭화방(崇化坊)에 천교의 사원인 천사(祆祠)가 건립된다.
조로아스터교는 어둠을 몰아내고 더러운 것을 태워 정화시키는 불을 숭배하였기에 배화교(拜火敎)라고도 불린다. 조로아스터교의 교세가 삼이교 가운데 가장 컸는데 그 이유는 동서교역을 담당하던 서역인들이 가장 중시한 종교였기 때문이다. 당 황실도 이를 알고 있었기에, 서역인들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세운 살보부(薩寶府)라는 관청을 이들의 사원인 천사(祆祠) 안에 두었다.
▲경주 원성왕릉의 서역인 무역상
마니교 또한 페르시아에서 들어왔는데, 당시 소개된 많은 종교의 교리가 혼합되어 만들어졌다. 마니교가 중국에 전래된 것은 측천무후 집권기인 694년이다. 마니교의 경전을 검토한 현종은 ‘불교의 교리를 함부로 사용한 사교(邪敎)’라고 규정한 후, 서역인의 신앙으로만 허용하고 중국인에게는 엄격히 금지하였다.
한족과는 달리 위구르는 마니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생활습속마저 바꾼다. 위구르는 국가경영에 있어서 마니교를 믿는 소그드인들의 도움이 절실하였기 때문에 마니교 우대정책을 펴고 이를 대외관계에 적극 활용한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마니교를 국교화한 위구르는 당나라에도 적극 추천하기에 이르렀고, 안사의 난을 진압할 때 위구르의 도움을 받았던 당나라는 마니교의 포교를 허락한다. 대종(代宗) 때인 768년, 장안에 마니교 사원인 ‘대운광명사(大云光明寺)’가 건립되고 낙양(洛陽)과 진강(鎭江) 등에도 사찰이 세워진다.
경교는 기독교의 사제인 네스토리우스의 교설(敎說)을 따르는 일파다. 네스토리우스는 428년, 콘스탄티노플의 주교가 되어 마리아를 신격화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가 이단으로 몰렸다. 이러한 경교가 중국에 전래된 것은 635년이다. 이때는 당 태종이 통치하던 시기로 서역 경영에 주력하여 실크로드를 번성시키던 때다.
당나라 때에 로마제국을 ‘대진국(大秦國)’이라고 하였기에, 태종은 장안 시내 의령방(義寧坊)에 대진사(大秦寺)를 세워주고 승려의 신분을 부여하여 선교활동에 종사하도록 허가하였다.
당나라는 타림분지의 동쪽으로 빠지는 교통로의 요지에 위치한 고창국(高昌國)을 점령하고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를 설치하여 서쪽으로의 진출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서돌궐이 차지하고 있는 중앙아시아의 정세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때 중앙아시아로 교세를 급속히 확장하고 있던 경교가 새롭게 관심의 대상이 되고, 당으로서는 그곳 정보에 정통한 경교 사제가 꼭 필요했던 것이다.
▲대진경교 유행 중국비
명나라 때인 1625년, 경교의 중국 전래 과정을 세세히 적어 놓은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가 발견되었다. 이 비에는 경교의 교리가 전래되는 과정과 이를 수용한 당 황실의 공덕을 찬양하고 경교를 선양한 사제의 공적을 기리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대진경교유행중국비는 만주어와 한자가 혼용된 비로 비림에서 가장 지명도가 높은 국제적인 비석이다. 이 비는 고대 중원과 유럽, 중앙아시아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한다. 그런 까닭에 1867년 영국 정부의 지시를 받은 외국인이 은 3,000냥으로 이 비를 복제품과 바꿔치기 하려다가 여론의 반대에 부딪혀 복제품만 가져갔다고 한다. 영국뿐만 아니라 몇 개국에 복제품이 더 있다는데 이것만 보아도 이 비석의 중요성을 실감할 수 있다.
경교 유적지엔 염불당이 들어서고
진눈깨비를 뚫고 대진사를 찾아간다. 대진사는 서안 시내에서 남서쪽으로 60㎞ 정도 떨어진 주지현(周至縣)에 있다. 대진사에 이르니 7층의 경교탑만 우뚝하다. 그 옆에는 진품을 모방하여 만든 ‘대진경교유행중국비’가 있다. 경교탑을 둘러본다. 다행히도 문이 열려 있다. 향이 아직 타고 있는 것으로 보아 누군가 좀 전에 다녀간 듯하다. 그런데, 기도를 올린 곳에는 경교의 조각상은 없고 불상들만 둥그렇게 앉아 있다. 대진사를 사찰로 착각하여 이처럼 꾸며놓은 것인가. 그 답은 경교탑 옆에 있었다. 3층 높이의 커다란 건물이 들어서고 있는데 건물 한가운데에 ‘염불당(念佛堂)’이라고 쓰여 있다. 이곳이 당나라 때부터 내려온 유명한 곳이기에 어느 불승이 이곳에 불당을 짓고 영험한 곳이라는 소문과 함께 돈을 벌어보려는 냄새가 흥건하다.
▲대진사 경교탑 내부
이슬람교는 기독교, 불교와 더불어 세계 3대 종교다. 알라신의 가르침이 지브라일(가브리엘) 천사를 통하여 무함마드에게 계시되었다는 종교다. 이슬람교가 중국에 전래된 것은 당나라 고종 때인 651년이다. 13세기에는 중앙아시아와 중국 서북의 신강지역에까지 교세를 확장한다. 중국에서의 이슬람교는 순탄하게 발전하였다. 송나라 때에는 해상무역의 발달로 무슬림의 숫자가 대폭 늘어났다. 중국문화도 적극적으로 배우고 익혀서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도 나아갈 정도였다.
이슬람의 愛國愛敎 정신은 공자의 忠義와 일맥상통
이슬람교가 중국에 들어올 무렵에는 유불도(儒彿道)가 이미 제각기 상황에 맞게 자리를 잡은 때다. 이슬람교가 중국의 주류문화로 편입하기는 힘든 상황이었다. 그래서 이슬람교는 중앙아시아로부터 유입된 회족과 기타 소수민족에게 전파된다. 이처럼 녹록치 않은 여건에서도 이슬람교가 번성하게 된 것은 유교에 대한 태도와 수용 때문이다. 이슬람교는 불상이나 그 어떤 형상도 숭배하지 않고 제사도 지내지 않는다. 그런데 공자는 매우 존경한다. 그들은 공자의 윤리도덕을 인간이 갖추어야 할 최고의 덕목으로 여겼다. 나아가 유가의 경전을 배우고 과거에도 응시하여 급제한 사람이 많다. 어째서 무슬림은 공자를 존경하게 되었을까.
▲대진사 경교탑과 염불당
이슬람교는 응집력이 강한 정교합일(政敎合一)제다. 특히, 신도인 무슬림은 ‘애국애교(愛國愛敎)’정신으로 무장되어 있다. 국가에 충성하고 알라신께 충성하는 이슬람교의 사상은 공자로 대변되는 중국의 유가적 윤리사상과 잘 어울린다. 이슬람교가 중국에서의 전파를 위해 나름대로 중국의 제도와 풍습을 수용하기도 하였지만, ‘충의(忠義)’를 중시하는 유가사상이 이슬람 교리와도 일맥상통함을 알았던 것이리라.
이슬람 사원은 모스크(mosque)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청진사(淸眞寺)라고 부른다. 이때의 ‘청(淸)’은 ‘맑고 깨끗함’을, ‘진(眞)’은 ‘진실되고 유일함’을 뜻한다. 청진사에서는 종교 교육이나 후계자 양성을 위한 교육을 실시한다. 중국에서의 이슬람교는 불교나 도교를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않는다. 이런 까닭에 그들은 경전인 ‘코란’을 해석함에 있어서도 유교적인 입장에서 해석하는 방식을 택하였다. 이러한 방식은 이슬람교가 중국문화에 안착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서안 시내의 고루를 지나 서쪽으로 향하면 화각(化覺)골목이 나타난다. 식당과 가게가 즐비한 골목을 지나 청진사에 도착하니 눈도 그치고 사람도 없는 것이 그야말로 고요한 사원의 모습이다. 서안 청진사는 중국에서도 가장 오래되고 규모도 큰 사원이다. 중국의 전통양식과 조화를 이루어 지은 것으로 현재까지도 보존이 잘되어 있다. 이 사원은 당 현종이 천보 원년(742년)에 편액을 하사하여 건축한 이래로 시대를 내려오면서 규모가 확장되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중국 4대 이슬람 사원의 하나다.
사원 안으로 들어서니 중국식 정원에 온 듯하다. 나무로 만든 패루(牌樓) 가운데에 ‘도법삼천지(道法參天地)’라는 글씨가 보인다. ‘도법’은 이슬람교를 뜻한다고 하니, ‘이슬람이 온 천지에 가득하라’는 의미다.
▲송대 서예가 미불이 쓴 도법삼천지
서역인의 지상천국, ‘신라’
우리나라와 이슬람이 교류한 것은 신라 때부터다. 신라는 당과의 교류를 강화하고 당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혜초나 원측을 비롯한 많은 승려들이 장안에서 공부를 하였고, 서시에는 신라방을 개설하여 무역에도 힘을 쏟았다. 신라와 당의 활발한 교역은 상호 인적교류를 증진시켜 장안에 들어와 있던 많은 외국인들이 신라로도 건너오게 된다.
▲청진사 내부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의 원성왕릉 앞에는 문인과 무인의 석인상이 각각 2구씩 있다. 그런데 무인상의 모습이 특이하다. 부리부리하고 커다란 눈, 높다란 코, 얼굴을 온통 가리다시피한 수염. 게다가 한 손은 주먹을 불끈 쥐고 싸울 기세로 서 있다. 마치 무서운 맹수처럼 용맹한 모습이다. 이는 회회(回回)인이라고 부르는 아라비아 무슬림을 표현한 것이다. 신라의 역사문헌에는 기록이 없지만, 같은 시기의 무슬림 학자들이 기록한 문헌을 보면 신라시대에 이미 회회인들이 들어와서 활동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9세기에 이븐 쿠르다지바의 기록을 보면, “중국의 맨 끝 광주의 맞은편에 산이 많고 왕이 있는 나라가 있는데, 바로 신라국이다. 이 나라는 금이 많아 무슬림이 들어가면 그곳에서 나오지 않고 산다.”고 하였다.
▲청진사 예배당
11세기 글로벌 왕국, ‘고려’
고려시대에는 더 많은 외국인이 살게 되었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의 기록을 보면, 고려 초기인 현종 15년(1024년), 16년 두 차례에 걸쳐 대식국에서 100여명의 사절단이 토산물을 가지고 내방한다. 대식국은 아라비아의 중국식 표기다. 이 지역에서 대형사절단이 내방하는 것은 양 국가가 서로 교류를 확대하기 위한 조치인데, 이는 대식국의 사람들이 이미 오래 전에 우리나라에서 살고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아라비아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는 고려시대에 와서는 그들의 문화가 일반인들에게도 많이 알려지게 되고 문학작품으로도 표현되기에 이른다.
쌍화점(雙花店)에 쌍화 사러 갔더니
회회(回回)아비가 내 손목을 꼭 쥐네.
이 말이 가게 밖으로 새나가면
조그만 새끼광대 네가 그런 것으로 알리라.
그 곳에 나도 자러 가고 싶구나.
(자고나보니) 잔 곳 같이 지저분한 곳이 없더라.
▲악장가사에 기록된 쌍화점
‘악장가사’에 소개된 고려가요 ‘쌍화점’을 통하여 아라비아인이 쌍화 가게를 하며 고려여인을 희롱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쌍화(雙花)’는 흔히 만두로 알고 있다. 하지만 쌍화는 원래 ‘상화(霜花)’를 의미한다. 만두가 밀가루를 얇게 반죽하여 그 속에 여러 가지 소를 넣어 국물에 익히는 것이라면, 상화는 가루반죽을 발효시켜서 거피팥소를 넣고 쪄내는 음식이다. 상화는 고려 때 전래된 음식인데, 조선시대에는 중국에서 사신이 오면 예빈시(禮賓寺)에서 직접 상화를 만들어 대접하였을 정도로 귀한 음식이다. ‘상화(霜花)’의 우리말 고어 표기는 ‘솽화’다. 그런데 한자로 음차를 하다 보니 ‘쌍화(雙花)’가 된 듯하다. 쌍화를 위구르 말로는 ‘만투(mantu)’라고 부르는데 여기에서 한자어로 ‘만두(饅頭)’가 생겨나고, 이 말이 곧 역으로 ‘쌍화=만두’라는 의미로 굳어진 것이다.
귀신도 속을 중국인의 상술
간단한 요기를 할 요량으로 위구르 식당에 들렀다. 상화는 찾을 수 없지만 위구르인들이 즐겨먹는 양고기꼬치와 낭 빵을 시켰다. ‘낭’은 2000여년의 역사를 가진 빵으로 밀가루를 반죽하여 피자 판처럼 둥그렇게 만든 후, 화덕에 구워서 먹는데 실크로드의 민족들에게는 주식과도 같은 것이다. 낭 빵 가운데에는 독특한 문양을 새기는데 이는 만드는 곳마다 고유한 문양을 가지고 있어서 맛과 역사를 나타내는 자부심의 상징이기도 하다.
꼬치와 빵을 맛있게 먹는데 건너편 좌판에 ‘노파병(老婆餠)’이라고 쓴 과자가 보인다.
“할머니 과자라. 할머니들만 먹으라는 과자는 아닌 것 같은데 왜 이름이 노파병이지?”
알고 보니 이 과자는 일명 ‘마누라 과자’로 총각이 매일 이것을 먹으면 조만간에 좋은 배필을 만난다고 한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상술이 아닐 수 없다. 단지 밀가루에 호박을 으깨어 넣고 깨를 뿌려 만든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기가 좋다니 중국은 참으로 속이기 쉬운 나라다. 중국에서는 배고파도 음식에 신경을 써야한다. 가짜고기도 만들고 가짜계란도 만들어내는 가짜왕국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음식재료는 진짜를 쓰고 이름만 가짜인 것은 오히려 다행한 일이다. 이런 생각을 하며 꼬치와 낭 빵을 배부르게 먹는다. 아직도 보아야 할 곳은 많고 가야할 길은 멀기 때문이다.
(10) 강태공은 푸줏간의 백정이었다
관중평원을 차지한 자, 천하를 호령한다
서안을 벗어나 옛날 대상의 행렬이 향한 서북쪽으로 길을 잡는다. 보계(寶鷄)와 천수(天水)를 지나 하서주랑(河西走廊)으로 가는 길이다. 서안을 벗어나자 곧 황토평원이 펼쳐지고 황하의 지류인 위수(渭水)가 관중평원을 적시며 유유히 흐른다. 위수는 황하의 지류이긴 하지만 결코 작은 물길이 아니다.
위수 자체만 해도 860㎞에 이르는 거대한 강이다. 서안에서 보계 일대를 ‘관중(關中)평야’라고 하는데, 태곳적부터 위수의 범람과 퇴적의 반복으로 인해 비옥한 토지가 생성되었다. 또한 관중평야를 둘러싸고 있는 산들이 천혜의 요새를 만들어 주어, 천하를 도모하고자 한 역대 중국의 영웅들은 이곳을 먼저 차지하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관중평원을 차지하는 사람이 천하를 호령한다.”라는 말까지 생겨났다. 한나라를 세운 유방이나 촉한을 세운 유비는 이를 충실하게 따른 자들이다.
서안을 벗어나 옛날 대상의 행렬이 향한 서북쪽으로 길을 잡는다. 보계(寶鷄)와 천수(天水)를 지나 하서주랑(河西走廊)으로 가는 길이다. 서안을 벗어나자 곧 황토평원이 펼쳐지고 황하의 지류인 위수(渭水)가 관중평원을 적시며 유유히 흐른다. 위수는 황하의 지류이긴 하지만 결코 작은 물길이 아니다.
위수 자체만 해도 860㎞에 이르는 거대한 강이다. 서안에서 보계 일대를 ‘관중(關中)평야’라고 하는데, 태곳적부터 위수의 범람과 퇴적의 반복으로 인해 비옥한 토지가 생성되었다. 또한 관중평야를 둘러싸고 있는 산들이 천혜의 요새를 만들어 주어, 천하를 도모하고자 한 역대 중국의 영웅들은 이곳을 먼저 차지하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관중평원을 차지하는 사람이 천하를 호령한다.”라는 말까지 생겨났다. 한나라를 세운 유방이나 촉한을 세운 유비는 이를 충실하게 따른 자들이다.
▲임치의 강태공 사당
유려하게 휘어진 위수가 햇빛에 반짝이며 말없이 관중평원을 적신다. 드넓게 펼쳐진 평원은 역사가 직선이 아니고 구불구불 휘돌며 고된 삶을 적시는 곡선임을 알려준다. 세상에 대해 왈가왈부 떠드는 것이 아니라 조용히 사색하고 깨달아 그 앎을 베풀라고도 말한다. 강 같은 마음에 강 같은 평화라고 했던가. 어머니의 품과도 같은 강. 그래서 강물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평안해진다. 고요한 강이 우리네 굽이진 삶을 정화시키기 때문이리라.
섬서성 보계와 사천성 성도(成都)를 잇는 보성(寶成)철도가 이곳을 통과하고, 좁은 협곡도로가 이젠 넓고 시원한 고속도로로 변했다. 몇 년 전만 해도 서안에서 보계를 거쳐 천수에 닿으려면 하루 종일 가야 했는데 이젠 그야말로 산맥이 휙휙 내달린다. 그토록 오래 걸리던 곳을 순식간에 내달리니 답답하지 않아 좋기는 하지만, 한 명의 병사로 1만 명을 상대하던 천혜의 요새가 그 위력을 잃어버린 것 같아 왠지 아쉽다. 문명의 발전이 시공을 앞당겨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해준 대신, 굽이진 강처럼 느림이 주는 사고력과 삶의 진중함은 빼앗아가 버린 것 같다.
강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자신의 역사와 뚝심으로 흐르고 있건만 인간은 강의 겉모습에만 취해 있을 뿐이다. 우리가 강을 보고 배워야 할 것은 어머니의 가슴처럼 포근한 이미지가 아니다. 만신창이 가슴이 되어도 다시 일어서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흔들림 없는 강의 중심을 보아야 하는 것이리라.
강태공의 낚시터엔 돈 낚는 할아버지만 있고
보계시 남쪽, 자동차로 한 시간 거리에 반계곡(磻鷄谷)이 있는데 이곳에는 서주(西周) 창건의 일등공신인 태공망(太公望) 강상(姜尙)이 낚시를 하면서 때를 기다리던 조어대(釣魚臺)가 있다. 이제는 유원지로 변모하여 더위를 식히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마치 강태공인양 도롱이에 삿갓을 쓴 채 허연 수염을 길게 늘인 할아버지가 관광객을 상대로 사진을 찍어주고 돈을 낚는다. 중국인들은 돈이 되는 곳이면 어느 곳에서나 호객행위를 하는데, 이 또한 오래 전에 서역의 소그드 상인들에게서 배운 것인지도 모른다.
▲강태공
강태공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알려져 있다. 70살이 되도록 날마다 책만 읽고 위수 가에서 낚시질하며 세상에 나갈 때를 기다리다가 주(周) 문왕(文王) 서백(西伯)의 눈에 띠어 그의 책사이자 스승이 된다. 그 후, 그의 아들 무왕(武王)을 도와 상(商)나라 주왕(紂王)을 토벌하고 천하를 평정한다. 그 공으로 제후국인 제(齊)나라의 왕에 봉해져 시조가 된다. 병서(兵書)인 ‘육도(六韜)’를 지은 병법가로서 회자되기도 한다. 이런 까닭에 강태공에 관한 고사가 많다. 강태공의 아내가 집을 나갔다가 재상이 된 강태공을 찾아와 용서를 빌자 강태공이 물 한 동아리를 쏟은 뒤 다시 채울 수 없음을 알려준 복수불반분(覆水不返盆), 가난하지만 신념을 지키며 때를 기다렸다가 장차 큰 인물이 된 사람을 일컫는 위빈지기(渭濱之器), 인생의 전반부는 초라하게 살다가도 후반부는 영예를 누리며 산다는 궁팔십달팔십(窮八十達八十)등도 강태공의 행적에서 나온 고사성어다.
강태공을 역사적으로 처음 소개한 것은 사마천이다. 강태공에 대한 기록은 ‘사기’ ‘제태공세가(齊太公世家)’에 실려 있는데 설화나 전설적인 부분도 있다. 자료가 미비할 뿐더러 강태공 사후 900년의 시차가 있기 때문이다.
▲강태공이 낚시를 한 조어대
강태공은 기원전 1121년경에 태어났다. 상(商)나라 마지막 왕인 주(紂)가 요부(妖婦)이자 독부(毒婦)인 달기(妲己)를 애첩으로 맞아 주지육림(酒池肉林)을 벌이며 학정을 일삼던 때다. 부르는 이름도 많다. 원래 이름은 강상(姜尙)이다. 유목민족인 강족(姜族)의 후손임을 나타낸 것이다. 그의 옛 선조들이 지금의 하남성 남양(南陽)인 여(呂)땅을 봉지로 받아 여상(呂尙)이라고도 부른다. 태공망(太公望)이란 이름은 문왕의 부친인 태공이 오랫동안 바라던 인물을 얻었다는 의미에서 붙인 것이다. 이에 원래의 성을 붙여 오늘날 우리가 흔히 부르는 ‘강태공’이 된 것이다. 그를 자(字)를 붙여서 강자아(姜子牙)라고도 한다.
강태공은 푸줏간의 백정이었다
강태공과 낚시는 매우 친근하다. 하지만 사마천은 강태공을 낚시꾼으로 기록하지 않았다. 강태공 역시 처음에는 상나라의 주왕을 모셨다. 주왕이 포악무도해지고 정치적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그를 떠나 서쪽으로 와서 문왕에게 의지한 것이라고도 하고, 바닷가에 은거하며 지내다가 문왕 서백이 구금되자 구해내어 그의 스승이 되었다고도 한다. 낚시하며 자신의 뜻을 펼칠 때를 기다린 것과는 전혀 다르다. 굴원의 문집인 ‘초사(楚辭)’ ‘천문(天門)’에도 강태공의 낚시이야기는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푸줏간에서 고기를 다루는 백정이었다.
강태공이 저자에 있을 때 師望在肆
문왕은 어떻게 태공을 알았는가. 昌何識
칼을 두드리며 소리를 내자 鼓刀揚聲
문왕은 어찌 기뻐하였는가. 后何喜
문왕이 강태공에게 다가가서 칼을 두드리는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한다.
“어리석은 백정(下屠)은 소를 잡고, 뛰어난 백정(上屠)은 나라를 잡는 법입니다.”
이 말을 들은 문왕은 천군만마를 얻은 듯이 기뻐하며 그를 수레에 태워 궁으로 초빙한다.
강태공이 낚시를 하며 때를 기다리다가 문왕을 만났다는 기록은 ‘육도(六韜)’에만 있다. 하지만 이 책도 강태공이 지은 것이 아니라 전국시대에 병법에 밝은 자가 그의 이름을 빌려 만든 위작이라고 한다.
▲강태공으로 분장한 할아버지
강태공의 선조들은 봉지를 받을 정도로 부유하였지만 그의 시절은 가세가 기울어 매우 가난하였다. 그럼에도 그는 가족을 돌보지 않고 날마다 책만 읽었다. 70살까지 책만 읽으며 살았을 뿐 무위도식한 셈이나 다름없다. 오죽하면 그의 아내가 집을 나가겠는가. 그의 행적도 70살 이후에나 알 수 있고 그 전의 행적은 정확히 알 수가 없다. 여러 가지 문헌에 기록된 그의 직업은 낚시꾼, 장사꾼, 백정, 밥장수 등 그야말로 비천하다. 이런 그가 자신과 가문의 영광을 되살리는 길은 오직 가슴 속의 포부를 펼칠 수 있는 뜻 맞는 군주를 만나는 것이었다.
사마천과 굴원의 이야기를 종합해볼 때, 강태공은 낚시를 하며 때를 기다린 것이 아니다. 오히려 문왕의 눈에 들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노력한 것이다. 그리고 병법가이자 정치가로서 무왕을 도와 천하통일의 뜻을 펼 수 있었던 것이다.
공자의 강태공 폄하는 지역감정의 원인이 되고
산동성 임치(臨淄)에 사는 사람들은 강태공에 대한 존경심이 어느 도시보다 강하다. 이곳에 강태공사당과 의관총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웃한 곡부(曲阜)사람들과 사이가 좋지 않다. 중국의 역대왕조가 정치적으로 유교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며 공자를 띄우고 강태공을 폄하하였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로 심할까. 곡부사람이 임치에 오면 물건을 안 팔거나 바가지를 씌우고 더 심하면 숙박도 거절하기 일쑤라고 한다. 임치사람이 곡부에 가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참으로 고약하기 짝이 없다. 그런데 그 까닭을 생각하니 그 또한 길고 질기게 꼬여왔다.
▲엄자릉 조어대
무왕은 강태공의 도움으로 상의 주왕을 처단하고 천하를 거머쥔다. 그때까지 천자의 나라로 받들던 상을 멸망시키고 역성혁명(易姓革命)을 이룬 것이다. 이 과정에서 공을 세운 강태공은 제(齊)땅을, 무왕의 동생인 주공(周公)은 노(魯)땅을 봉지로 받는다. 두 사람이 각각 제나라와 노나라의 시조가 된 것이다. 똑같이 제후국의 시조가 되었지만 두 나라 사이에서는 노나라가 우위였다.
강태공이 자신의 딸을 무왕에게 시집보내 천자의 장인이 되었지만, 주공은 동생이었기에 적통이나 다름없었다. 적통을 이어받은 주공의 노나라는 예(禮)와 명분을 중시하는 정치를 펼치고, 병법과 실용에 중점을 둔 강태공의 제나라는 국력배양을 중시하는 정치를 펼친다. 그 결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노나라는 제나라의 정치적, 군사적 간섭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제나라의 국력이 노나라를 제압하고도 남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때에 노나라 출신의 공자가 나타나 유교사상을 전파하며 ‘주나라’를 본받겠다며 모범으로 삼았다. 이는 주공이 시조인 노나라에서 태어난 공자로서는 너무도 당연한 선택인 것이다. 그리고 항상 ‘주공’을 흠모하였다.
“내가 기운이 많이 쇄하였구나. 오랫동안 꿈속에서 주공을 다시 볼 수 없으니 말이다.”
공자는 왜 동시대의 인물인 강태공은 거론하지 않고 주공만 흠모한 것일까. 주 무왕의 천하통일에 있어서 강태공의 업적이 누구보다도 월등하였는데 말이다. 그 이유가 예악(禮樂)을 중시하지 않았다는 논리로는 무엇인가 부족하다. 왜냐하면 공자도 한 때는 정치가로서 자신의 의지를 펼치기 위하여 무던히도 냉정하였기 때문이다. 공자의 정치적 야심이 실패로 돌아가고 유랑생활을 하며 인의(仁義)와 예악(禮樂)의 정치가 더욱 절실하게 다가왔기 때문일까.
▲조어대 강태공상
이 모든 것을 다 인정한다고 하여도 공자의 생각 중심에는 ‘노나라가 천자국의 적통’이라는 요지부동의 결론은 지울 수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공자는 주나라야말로 이전의 두 나라(夏⋅商)의 문물을 이어받아 이를 꽃피운 나라이고, 주공은 그러한 주나라의 예를 제도적으로 완성한 <주례(周禮)>를 편찬한 위대한 인물로 칭송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역사적, 정치적 맥락이 공자의 사상을 지배하였기에 강태공은 자연스레 멀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만약 공자가 제나라 사람이었더라도 주나라와 주공을 흠모하였을까. 아마도 강태공을 흠모하는 병법가나 실용주의 노선을 추구하였으리라.
진정한 은거지사 엄자릉(嚴子陵)
흔히 세상을 등지고 산림에 묻혀 지내는 현자(賢者)를 일컬어 은거지사(隱居處士)라고 한다. 이들 은사(隱士)는 대부분 정치로부터 떠나왔거나 뜻이 없는 자들이다. 그런데 강태공의 은거생활은 이와 다르다. 그의 은거생활은 주왕으로 부터의 도피이지 세상으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다. 낚시는 보통 호수나 물의 흐름이 잔잔한 개울가에서 하는 것이 좋다. 산 속의 계곡에서 낚시를 하는 것은 어울리지도 않을뿐더러 누군가를 기다리기에도 적당하지 않다. 강태공이 낚시를 하였다는 반계곡의 조어대가 바로 이런 곳이다. 너럭바위가 많고 물길은 얕아 낚싯줄을 담그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 물살이 세고 빨라 낚시에 부적당하기 때문이다.
▲강태공 출세상
강태공의 낚시가 출세(出世)를 준비하는 것이었다면, 후한(後漢) 때의 엄자릉(嚴子陵)은 철저하게 은거(隱居)를 위한 낚시를 한 사람이다. 엄자릉은 후한을 건국한 광무제의 죽마고우다. 광무제가 황제가 되어 그에게 관직을 주고 가까이 하려 하자 오히려 이를 멀리하였다. 그래도 광무제가 포기하지 않자 부춘산(富春山)으로 숨어버렸다. 그곳에서 낚시와 농사로 일생을 마쳤다. 강태공과는 달리 낚시를 하되 꼭 낚아야 할 것이 없는 은사생활을 한 것이다.
중국을 뛰어 넘는 조선 선비의 은거시(隱居詩)
우리나라도 세상으로부터 은거하며 일생을 지낸 이들이 많다. 이들 대부분은 머리를 깎고 산으로 들어가거나 삿갓을 쓰고 방랑하거나 산 속에 묻혀 살았다. 산 속에 묻혀 낚시를 벗 삼아 지낸 선비들의 꼬장꼬장한 정신이 때로는 시구에 걸려 오늘날까지도 올곧게 남아 있다. 우리 선비들이 더 멋지게 은거생활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어느덧 해가 기운다. 김시습과 함께 생육신의 한 사람인 성삼수의 ‘낚시’라는 시를 읽으며 천수로 향한다.
낚싯대 드리우고 하루 종일 강가를 거닐다가 杷竿終日趁江邊
시원한 물에 발 담그고 사르르 풋잠에 빠져드니 垂足滄浪困一眠
꿈 속 갈매기와 만 리를 훨훨 날아간 듯하여 夢與白鷗飛萬里
퍼뜩 깨어보니 어느새 석양까지 와있네그려. 覺來身在夕陽天
(11) 여성은 '경국지색(傾國之色)', '나라를 망치는 위험한 존재'
감숙성 천수, 복희(伏羲) 신화의 고향 < 천수 1>
보계(寶鷄)를 떠나 감숙성의 소강남으로 불리는 천수(天水)로 향한다. 차창 밖으로는 멀리 위수의 강줄기가 보인다. 천수라는 지명은 ‘하늘의 강이 물을 따른다.’는 옛이야기에서 유래하였다. 천수로 향하려니 몇 년 전의 악몽이 떠오른다. ‘삼국지’ 관련 막바지 여행으로 기산의 무후사와 가정전투 현장을 둘러볼 때였다. 보계에서 천수까지 자동차로 2시간이 채 안 되는 거리인데, 좁은 비포장도로를 메운 트럭들로 인해 온종일 길에서 시간을 허비한 적이 있다. 그래서 이곳을 다시 찾게 되면 반드시 기차를 타겠다고 결심하였다. 지금은 넓은 도로가 개통되어 문제가 없다고 하지만, 그때의 아픈 기억 때문에 기차를 탔다. 특쾌열차는 좁은 협곡을 아랑곳없이 내달린다. 하나의 터널을 지났는가 하면 어느덧 또 다른 터널 속에 있다. 몇 개의 터널을 지났을까. 터널만 연이어 내달리던 열차는 어느새 천수역에 멈춘다. 역에 내리니 가장 먼저 맞이하는 글귀가 미소를 짓게 한다.
▲협곡 가로지르는 고속철
“복희 황제의 고향에 오신 손님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천수는 중국신화 중 남신(南神)인 복희(伏羲)의 고향이다. 위수가 이곳에서 커다란 강이 되어 본격적인 황하(黃河)의 위용을 갖추는 곳이기에 복희 신화의 고향으로 안성맞춤이리라. 그런데 여신인 여왜(女媧)는 왜 말이 없을까.
최초, 최고의 神은 여성이다
상고시대의 인류는 초자연적 존재에 대하여 성스러운 상상을 하였다. 그리고 이 때문에 실재하지 않는 환상적인 내용의 신화가 탄생된다. 신화의 주인공은 대부분 남신들이다. 하지만 원래부터 남신은 아니었다. 이는 여성중심의 사회를 남성중심의 사회로 변혁시킨 결과다. 이런 사실은 태초의 신이 항상 여신인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중국의 여왜(女媧), 한국의 삼신할머니, 일본의 천조대신(天照大神)이 모두 최고의 여신이다. 여신은 생명의 탄생과 양육을 관장하는 인간 존재의 근원이다. 이러한 여신은 원시모계사회를 배경으로 천지창조의 주인공으로 자리 잡는다.
▲복희상
듣건대, 옛날 옛적 큰불이 났었다네聞之遂古大火然兮
물 또한 끝없이 넘쳐 온통 바다였었다네水亦溟涬無涯邊兮
여왜가 나서서 돌을 깎아 하늘을 막았다네女媧煉石補蒼天兮
중국신화에서 여왜는 창조신이다. 천지를 만들고 흙으로 인간을 빚어낸다. 오색 돌을 다듬어 구멍 난 하늘을 메우고, 거북의 다리를 잘라서 네 기둥을 세워 하늘과 땅을 구분하고, 갈대를 태운 재로 홍수를 그치게 하였다. 여왜는 우주질서를 바로잡고 인간을 고통으로부터 구원한 위대한 여신인 것이다.
전쟁, 女神을 추락시킨 主犯
그러나 한대(漢代)로 오면서 천지를 창조하고 만물을 기르던 여신이 추락한다. 천지창조의 자리는 복희(伏羲)라는 남신의 차지가 되고 여신인 여왜는 그에 종속된 존재로 전락한다.
‘여왜는 복희의 여동생이다.(女媧, 伏羲妹)’
‘여왜는 본래 복희의 아내다.(女媧, 本是伏羲婦)’
중국 최고(最古)의 지리서인 ‘산해경(山海經)’에 묘사된 여신 서왕모는 인간이 접근하기 어려운 곤륜산 꼭대기에 사는 반인반수의 무서운 형상을 한 신으로 인간의 생사와 형벌을 주관하였다. 이러한 힘을 가진 서왕모의 모습도 중국의 역사소설인 ‘목천자전(穆天子傳)’에 이르면 주목왕(周穆王)과 사랑에 빠져 상사병에 걸리거나,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주는 대중적인 여선(女仙)으로 전락한다. 원시모계사회 때부터 위대한 신의 위치를 고수하던 여신들이 모두 추락한 이유는 무엇일까?
▲복희 여왜도
인류의 역사가 남성 위주의 가부장 중심 사회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상고시대는 모계중심사회였다. 이 시기에는 생산력의 발달에 따라 비약적인 인구증가가 나타난다. 경제의 발달과 정치의 안정은 사망률을 감소시키고, 인구의 증가는 교류를 증대시켰다. 하지만 원만한 교류만 이루어질 수는 없는 법. 씨족이나 부락 사이의 마찰과 충돌이 빚어지고 이는 갈수록 격렬해졌다. 자연재해까지 겹쳐 생활터전을 버리고 이동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진다. 이에 중원에 살던 토착민들과의 전쟁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황제와 염제, 황제와 치우의 각축은 바로 이 시기에 벌어진 전쟁이었다.
위기상황이 일어나지 않을 때는 경험 많은 여성이 권위를 지킬 수 있지만, 자연재해나 전쟁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위급한 때에는 씨족의 안전을 위해 남성이 결정권을 쥐게 된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가부장제도가 출현하고, 여타 씨족들은 그들 가운데 가장 권력이 강한 자를 우두머리로 뽑아 자신들의 안전을 보호받게 된다.
▲복희와 여왜 화상석
남성, 여신을 아내로 삼다
묏자리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화상석(畵像石)은 한나라 시대에 많이 출토된다. 이 화상석에는 중국의 신화나 역사는 물론 당대의 각종 생활상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한 모습을 조각해 놓았다. 그림이나 벽화에서도 여신의 변천을 볼 수 있는데, 창조신으로서의 여신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오직 뱀의 형상으로 남신인 복희와 일체가 되어 있을 뿐이다. 일명 ‘복희와 여왜의 교미도’인 셈인데, 이는 여왜가 창조신의 성격을 잃어버리고 복희의 배우자로서 생산에만 치중하게 된 것을 의미한다. 즉, 가부장제도의 출현으로 남신에게 자리를 내어준 것의 표현인 것이다.
중국의 역사는 상(商)나라부터 시작되는데, 이 시기에 부계제가 정착되긴 하지만 오랫동안 이어져 온 모계제의 힘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가장 큰 갈등은 바로 상주(商周)교체기다. 주나라는 모계제의 풍습을 이어오던 상나라를 타도하고 진정한 부계사회를 만든다. 부계제를 제도화한 종법제를 완성하고 이를 기반으로 주례(周禮)를 완성함으로써, 가부장 중심의 사회가 체계화되고 이후 대대로 이어지게 된다.
▲곤옥산의 서왕모를 표현한 화상석
제정일치사회에서의 점복은 매우 중요하다. 역(易)은 이러한 과정의 이치와 원리를 밝히는 것인데 당시에는 절대적인 의미를 갖는다. 상나라 때의 역은 ‘귀장역(歸藏易)’이다. 이는 곤(坤)괘를 중시한다. 곤은 땅이고 음이다. 주나라의 역인 ‘주역(周易)’은 건(乾)괘를 중시한다. 건은 하늘이고 양이다. 이러한 ‘곤건(坤乾)’에서 ‘건곤(乾坤)’으로의 변화 역시 여성이 중심인 모계사회가 남성중심의 부계사회로 바뀌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공자, 남성 중심 家父長制 완성자
중국의 사상사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두 줄기는 도교와 유교다. 도교가 카오스(chaos)적이라면 유교는 코스모스(cosmos)적이다. 도교가 유연하고 부드러우며 여성적이라면, 유교는 완고하고 강하며 남성적이다.
가부장 중심의 사회는 유가철학에 의해 사상적으로 완성되는데, 유가철학은 서주(西周) 초기에 주공(周公)에 의해 기초가 세워지고 춘추(春秋)시대 공자에 의해 완성된다. 그 후 맹자, 순자 등 뛰어난 후학들이 이를 보다 발전시키고 체계화한다. 춘추전국시대를 거치며 보다 이론적으로 무장된 유학은 한 무제가 국교로 삼으면서 국가 이데올로기로서 중국 사회를 지배하게 된다. 또한,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 주변국에까지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
유가사상이 통일 제국의 통치이념이 되면서 여성들의 지위는 더욱 하락한다. 반고의 ‘한서’ ‘외척전’에 이르면 여성은 ‘경국지색(傾國之色)’이라 하여 ‘나라를 망치는 위험한 존재’가 되어 정치에서 배제되고 급기야는 남성의 노리갯감으로 떨어진다.
물방울 머금은 배꽃들 아리따움을 자랑하고梨花帶雨爭嬌艶
안개 속 작약은 제 미모를 한껏 뽐내누나.芍藥籠烟騁媚妝
요염한 자태 움직여 얻을 수만 있다면 但得妖嬈能擧動
평생 즐거울 군왕에게 속히 데리고 갈 터인데.取回長樂待君王
여성 희생의 산물 “열녀문”
여성에 대한 존중이 사라지는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은 유향(劉向)의 ‘열녀전’이다. 이로부터 여성은 죽은 배필을 위해 남은 생을 홀로 희생해야 하고, 어머니가 되어서는 지아비와 자식의 출세를 위한 밑거름이 되어야 한다. 여성은 이제 ‘도덕’이라는 울타리에 갇혀 대의명분의 희생물이 되어야만 하는 처지가 된다. 복희의 배우자로서 자손을 낳고 지극한 효행으로 집안을 번성시켜야만 하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열녀전 서문
한나라 때의 수많은 화상석(畵像石)과 그림에 보이는 ‘복희와 여왜의 교미도’는 이제 더 이상 여왜가 여신이 아님을 천하에 선포하는 것이다. 이와 함께 여왜의 강했던 힘은 철저히 박탈당하고 지아비에게 순종하는 아내, 아이들에게 자애롭고 희생적인 어머니로서의 열녀문만 세울 것을 강요당하게 된 것이다.
삼 년의 시집살이三歲爲婦
궂은 일 힘들다 않고靡室勞矣
일찍 일어나 새벽에 잠들며夙興夜寐
조반조차 먹을 겨를 없이 지내며靡有朝矣
남편 말대로 이루고 나니言旣遂矣
오히려 이제는 구박만 하는구나.至于暴矣
형제들은 알지도 못하면서도兄弟不知
비웃는 듯 웃고 있구나.咥其笑矣
생각하면 할수록靜言思之
이 신세 한스럽기만 하구나.躬自悼矣
우리의 조선시대 또한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여성 개인의 존엄성은 찾아볼 수 없고 필요하다면 목숨마저도 버리도록 강요하였으니 말이다. 열녀문은 이런 여성들의 억울한 죽음을 감싸는 수단이자 도구인 것이다. 하지만 열녀문을 세우는 것이 저마다 자랑이요, 가문의 영광이 되어 자자손손 칭송받는 세상이 되었으니 그야말로 천하 만물을 주재하던 여신은 진흙탕 속에 처박히고 만 것이다. 공자의 말씀은 항상 언행일치를 강조하고 사람으로서의 도리와 인덕(仁德)을 중시하였지만 정작 세상의 절반을 차지하는 여성을 사람으로 존중하지 않았으니, 여성의 입장에서 보면 어찌 인의(人義)와 경애(敬愛)를 중시하는 사상이라 할 수 있겠는가.
‘읍참여왜’의 현장에서
복희 황제만 내세우고 있지만 천수 일대는 여왜신화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그래서 진안현(秦安縣) 롱성진(朧城鎭)은 여왜의 고향이라고 한다. 롱성진 마을에 이르자 장날인지 사람들로 북적인다. 북적이는 길 위로 여왜의 고향(女媧古里)이라는 팻말이 커다랗게 쓰여 있다. 이곳은 또한 제갈량과 사마의의 대결인 ‘가정전투’가 있었던 곳이다. 제갈량의 심복 마속은 제갈량의 조언을 잊고 수비하기 좋은 고지대로 이동한다. 하지만 물을 구할 수 없어 천혜의 요충지 가정을 포기하고 후퇴한다. 마속의 실수는 제갈량의 정치력에 결정타를 먹이는 꼴이 되어 결국 마속은 처형을 당한다. ‘읍참마속’의 현장에서 여왜의 사당을 보노라니 슬픈 감정이 솟구친다. 마속은 한 번 죽었지만 최고의 신에서 가부장제의 희생물로 추락한 여왜는 몇 번을 죽어야만 했던가. 눈물조차 마른 채 수천 번은 죽어야만 했으니 가정은 ‘읍참여왜(泣斬女媧)’의 현장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여왜를 최고의 신으로 모신 여왜궁
노자는 우주의 에너지를 도(道)라고 하였다. 이 도는 무질서한 것 같지만 근원적인 힘이 있으며, 한 군데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한다.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이 셋이 되며 셋이 만물을 이루기 때문이다. 이처럼 세상을 낳고 만물을 적셔주는 도의 이미지는 여성의 이미지와 같다. 여성은 창조적인 생산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여신의 부할,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다’
섞여서 이루어진 것이 있으니有物混成
하늘과 땅보다 먼저 생겨나先天地生
적막하고 고요한 것이여.寂兮寥兮
홀로 서 있되 고치지 않으며獨立而不改
두루 행하나 위태롭지 않으니周行而不殆
세상의 어미가 될 수 있도다.可以爲天下母
중국인들은 역사를 이야기할 때면 ‘일치일난(一治一亂)’이라는 말을 잘 쓴다. 한번 다스려지면 한번 어지럽다는 말인데, 이는 곧 나뉜 지 오래면 합쳐지고, 합친지 오래면 반드시 나눠진다는 말과 같은 뜻으로 순환론적 역사관을 의미한다. 이 같은 입장에서 본다면 21세기도 남성의 시대일까. 아니다. 권위적이고 폭력적인 남성의 힘은 이제 설 자리가 없다. 부드럽고 감성에 호소하며 포용심 넓은 여성의 힘이 대세다. 그리하여 이제 수천 년간 이어온 남성의 신적인 권력이 추락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다면 여왜가 다시 수천 년을 비상할 것인가. 창조신의 자리로 되돌아 갈 것인가. 그것은 그동안 인고의 세월을 이겨낸 여왜만이 알 일이다. 그리고 복희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린 것이기도 하다.
(12) 사마천 궁형사건의 진실 등이 담긴 사기 '本紀'를 훔쳐본 武帝, 사마천을 죽음으로 내몰다
화살로 바위 뚫은 飛將軍 이광<천수2>
천수는 한나라 때 비장군(飛將軍)이라고 불렸던 이광(李廣)의 고향이다. 시내의 남쪽 석마평(石馬坪)에는 그의 넋을 기리는 의관총(衣冠塚)이 있다. 쌀쌀한 날씨여서인지 찾는 사람이 없다. 입구에 들어서니 ‘비장군이 사는 곳’이라는 뜻의 편액이 푸른 기운을 뿜어내고 있다. 입구에서부터 비장군의 기운을 느끼며 계단을 올라가니 사당 뒤로 넓게 트인 곳에 그의 묘가 있다. 주변의 자갈을 이용하여 만든 봉분은 그렇지 크지는 않지만 비장군의 기상을 표현한 듯 단아하고 힘이 넘친다. 특히, 봉분 앞의 묘비 석은 높다란 탑 모양이다. 비장군의 용맹한 담력과 동서로 번쩍이던 그의 무공을 표현한 듯하다
▲이광
이광은 대대로 무장(武將)집안에서 태어나 그 역시 문제와 경제, 무제 시대의 장군이 되었다.그는 문제 때인 기원전 166년, 흉노가 침입해오자 스스로 군인이 되어 공을 세우고 왕을 호위하는 무기상시(武騎常侍)가 된다. 맹수사냥에서도 두려움 없이 가까이에서 잡는 용맹함을 보이자 문제는 ‘고황제 시절에 태어났으면 만호후(萬戶侯)가 되었을 것’이라며 극찬하였다. 이광은 명궁이었다. 사냥터에서 바위를 호랑이로 알고 화살을 쏘았더니 화살이 바위에 박힐 정도였다.
▲이광의 묘
경제 때에는 상군태수가 되어 기병 100여명으로 흉노와 전쟁을 벌였는데, 흉노의 기병 수천이 포위하자, 복병을 숨겨놓은 것처럼 느긋하게 후퇴하여 흉노군의 추격을 뿌리치기도 하였다. 두려움 속에서도 난국을 헤쳐 가는 초인적인 담력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특히, 번개처럼 빠른 몸놀림은 흉노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고 이로부터 비장군(飛將軍)이라는 별칭이 생겼다.
기원전 119년. 한무제의 흉노 공략에 이광은 고령이라는 이유로 배재된다. 이에 항의하여 참전을 하지만 무제의 지시를 받은 대장군 위청은 이광을 후방으로 돌린다. 이광은 다른 길로 흉노 공략을 시도했으나 길을 잃고 전투에 늦게 도착한다. 위청이 보고서를 작성하려고 그의 부하에게 따지자 이광은 후방부대로 배치한 위청의 전략을 비판하며 스스로 자결한다.
한무제와 이광 집안의 악연
이광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다. 두 아들은 일찍 죽었고, 막내인 감(敢)만이 곽거병을 따라 흉노와의 전쟁에 참가하여 공을 세웠다. 그리고 이광이 죽자 부친의 직위인 낭중령(郎中令)을 물려받고 관내후(關內侯)에 봉해졌다. 이감은 대장군 위청이 부친을 죽게 한 것에 분개하여 위청을 쳐서 부상을 입혔다. 마음 속 한 구석에 사죄의 마음이 있었을까. 위청은 이감을 용서했다. 하지만 곽거병은 달랐다. 무제가 궁궐에서 사냥을 할 때, 배속했던 곽거병이 이감을 활로 쏘아 죽였다.
▲한무제와 유비
무제는 곽거병을 탓하지 않고 이감이 사슴에 받쳐 죽었다고 하였다. 최고의 장수가 사슴에게 받쳐 목숨을 잃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거짓말이지만 누구 하나 말하는 자가 없었다. 천하를 뒤흔드는 권력을 가진 자에게 누가 목을 내놓겠는가. 결국 아들이 아버지를 죽게 만든 자에 항거한 것이 조카가 삼촌에게 해코지한 자를 살인한 것보다 더 나쁜 행위라는 '무제식 판결'을 보여준 것이다. 어째서 이 같은 일이 가능한 것인가. 그것은 무제가 애지중지하는 위황후의 동생이 위청이고, 위청의 조카가 곽거병이었기 때문이다.
이릉(李陵)은 비장군 이광의 장손이다. 이릉 역시 집안의 내력답게 어렸을 때부터 말 타기와 활쏘기에 뛰어나 젊은 나이에 근위기병대장이 된다. 기원전 99년. 한 무제는 잡시 쉬었던 흉노와의 전쟁을 재개한다. 이 전쟁에서 이릉은 이광리 부대의 물자운송을 담당하게 된다. 하지만 이릉은 자신과 부하들이 일당백의 전사들이었기에 일선에서 흉노와의 전투에 배속되기를 바랐다. 특히, 할아버지 이광을 많이 닮은 그였기에 억울하게 죽은 조부의 울분을 풀어드리고도 싶었다. 이릉은 무제에게 탄원하여 5천의 보병군을 받는다. 그리고 고비사막을 종단하여 선우의 본거지를 공격한다. 실로 그때까지 누구도 시도한 적이 없는 일이었다.
▲이릉
이릉이 이끄는 별동대는 한 달간 고비사막을 건너 적진을 정찰하고 돌아오는 길에 선우가 이끄는 흉노군과 마주친다. 8만의 흉노군에 포위된 이릉의 별동대는 연일 계속되는 흉노군의 공격을 막아내지만 중과부적으로 포로가 되고 만다. 이릉이 포로가 된 곳은 한나라 군대가 집결한 거연새(居延塞)에서 불과 100여리 떨어진 곳이었다. 그야말로 구원부대가 오기만 하여도 충분히 빠져나올 수 있는 거리였다.
애첩에 눈먼 ‘무제’, 정치적 희생자 ‘이릉’
이릉이 사로잡혔다는 소식을 접한 무제는 내심 기뻤다. 그 자신 답답한 정무를 이릉의 일로 처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무제의 마음을 답답하게 한 일이란 무엇인가. 이때 무제는 이부인(李夫人)을 총애하였다. 그녀의 큰 오라비인 이광리를 이사장군에 임명하고 3만 명의 기병을 주었건만 이렇다 할 전과를 올리지 못하였다. 5천의 보병을 가진 이릉만도 못했던 것이다. 그러던 차에 이릉이 포로가 되었다고 하니 무제는 이광리의 문책까지도 덮을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잡은 것이다. 애첩에 눈이 먼 무제가 그의 심중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사마천에게 이릉의 일을 묻자, 무제의 마음을 읽지 못한 사마천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한다.
▲사마천
"이릉은 효성이 지극하고 신의가 두터우며 언제나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칠 국사(國士)의 풍도를 지닌 훌륭한 무장입니다. 릉이 이번 거사에 있어 불행한 결과를 초래하였다고 해서 조정에서 일신의 보전만을 바라는 무리들이 이를 트집 잡아 이릉을 헐뜯는 것은 통탄할 일입니다. 이릉이 보병 5천으로 수만의 흉노기병과 대전하여 그의 부하가 사력을 다해싸워 경이적인 전과를 거둔 것은 옛날의 어느 명장이라 할지라도 도저히 그를 따르지 못할 것이니, 그가 구원군이 오지 않아서 적의 손에 잡혔다 하더라도 흉노에게 큰 손실을 준 점만은 천하에 공표하여 송양(頌揚)할 만한 일이고, 또 그가 죽지 않고 흉노 땅에 살아남은 것은 적당한 시기를 얻어 한실(漢室)에 보답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서 일 것입니다."
사마천의 답변을 듣는 무제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사마천이 거짓말로 이사장군을 헐뜯고 이릉을 변호한다며 대노하였다. 이릉을 변호한 사마천 또한 감옥에 갇혀 사형을 언도받는다. 허탈하기 그지없는 사마천이지만 죽을 수 없었다. 아니 이럴수록 살아서 부친 때부터 준비해온 역사책을 완성하고 싶었다. 그리하여 남자로서 최고의 치욕인 궁형(宮刑)을 선택한다. ‘사기’는 이처럼 처절한 비통함 속에서 탄생한 것이다.
자신의 本紀를 훔쳐본 무제, 사마천을 죽음으로 내몰다
무제는 단지 사마천이 이릉을 변호하는 말을 했다는 것으로 그토록 죽이고 싶었을까. 아무리 절대 권력을 가진 황제라지만 자신이 의견을 묻고 그 대답이 맘에 들지 않는다고 분노하여 사형에 처할 수 있을까. 아니다. 여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위촉오가 정립한 삼국시대의 역사책인 ‘삼국지’ ‘위서’ ‘왕숙전’에는 우리가 몰랐던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왕숙전에 보이는 사마천 궁형의 내막
위 명제가 왕숙에게 “사마천이 궁형을 받자 이에 원한을 품고, ‘사기’를 지어 무제를 비난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이를 갈도록 하지 않았는가?”
“사마천은 사실을 기록하되 찬미하거나 나쁜 것을 감추지도 않았습니다. 유향과 양웅은 그의 서술에 탄복하여 훌륭한 사관의 소질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무제는 그가 ‘사기’를 저술한다는 것을 알고 경제와 자신의 본기를 함부로 읽었습니다. 그리고 엄청 분노하여 두 편을 삭제 파기해 버렸습니다. 현재 이 두 편의 본기는 목록만 있고 내용은 없습니다. 후에 이릉의 사건이 나고 사마천은 궁형에 처해졌습니다. 잘못을 숨기고 원한을 품은 것은 무제였지 사마천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마천은 이릉을 변호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궁형을 당한 것이 아니다. 평소에 사마천에 대하여 원한을 가지고 있던 무제가 이릉사건을 빌미로 그를 제거하려고 한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는 과연 얼마가 진실일까. 진실된 역사의 복원은 얼마나 많은 심혈을 기울여야 하는지를 다시금 생각해보게 한다.
조국에의 충정이 도리어 죄가 되어
이릉이 흉노의 포로가 된 지 1년. 무제는 다시 흉노토벌을 위한 대규모 원정대를 파견한다. 이전의 출전 때보다도 훨씬 많은 기병 7만, 보병 14만의 병력이었다. 원정대가 아니라 총공격을 능가하는 규모였다. 이 원정대의 총괄도 이광리였다. 엄청난 군대를 동원한 원정대는 전과를 올리지 못하고 회군한다. 인우장군 공손오에게는 이릉을 구출해오라는 임무가 주어졌으나 흉노군의 반격으로 오히려 퇴각한다. 목숨이 위태로운 공손오는 변명한다.
"흉노 포로가 자백하기를 이릉이 선우에게 전술을 가르쳐서 한나라 군사에 대비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 군의 전과가 크지 못하옵니다."
대규모 원정이 실패로 끝나자 무제와 조정은 치욕감에 사로잡힌다. 병력과 무기도 예전보다 우수하거늘 어째서 이길 수 없는가. 패전에 대한 책임을 따져 처벌하자니 이 또한 무제를 괴롭히는 일이었다. 그런데 패전의 책임은 물론 그 원인까지도 해결할 묘수가 생긴 것이다.
'이릉이 선우에게 우리의 전술을 가르쳐 주고 있다고?'
‘한서’ ‘이릉전’에는 해답을 찾은 무제의 즉각적인 조치가 기록되어 있다.
"이에 이릉의 가족을 죽이라 명했고 어머니, 동생, 처자가 모두 처형되었다. 농서의 사대부는 이씨를 수치로 여겼다."
역사는 이렇게 만들어지는 것이다. 몇몇 참모의 감언이설과 최고실력자의 달콤한 눈감음. 오늘도 역사는 그렇게 써지고 있으며 그 기록에 맹신하니 역사의 행간을 읽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이던가.
"나는 한나라를 위해 보병 5천을 이끌고 흉노와 싸웠지만 원군이 오지 않아 패하였다. 이것이 어찌 한을 배신한 것인가? 그런데도 우리 가족을 참수하다니…."
이릉은 한의 사신으로부터 가족이 몰살당한 비보를 듣는다. 이릉이 마지막까지 지키려던 한나라에 대한 충성심은 증오심으로 타올랐다. 조국 한에 대한 미련도 없어졌다. 이릉의 비극을 안 선우는 자신의 딸을 아내로 주고 우교왕에 임명했다. 그리고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자문을 구했다. 무제는 이릉과 그의 가족을 자신의 정국 돌파의 한 방편으로 삼은 것이다. 이광리가 그의 소원인 흉노를 물리쳐주기를 바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흉노는 건재했다. 오히려 이릉이 가족의 비보를 들을 즈음, 이광리도 흉노의 포로가 되어 비운의 죽음을 맞는다.
이릉은 흉노의 땅 막북(漠北)에서 20여년을 살았다. 하지만 수구초심이라 하였던가. 한나라를 잊을 수 없었다. 잊고 싶어도 아련한 정이 솟구쳐 올라 눈시울을 적셨다. 돌아갈 고향이 없는 이릉. 술이 그의 유일한 위안이 되었을까.
만 리를 지나 사막을 건너徑萬里兮渡沙漠
군장이 되어 흉노를 떨게 했네.爲君將兮奮匈奴.
길은 막히고 활과 칼 꺾였으니路窮絶兮矢刃摧
병사들은 죽고 내 이름은 더렵혀졌네.士衆滅兮名己隤.
노모도 이미 돌아가셨으니老母已死
어찌 은혜 갚으러 돌아간단 말이냐雖欲報恩將安歸.
무제와 유비, 領土보다 더 큰 心德의 차이
촉한을 건설한 유비는 관우를 잃자 오나라를 총공격한다. 이때 황권이 선발대로 출정하고자 하였지만 유비는 북방의 방어임무를 맡기고 스스로 군대를 지휘한다. 하지만 유비군은 이릉에서 대패하고 황권도 퇴로를 차단당하여 위군에 항복하고 만다. 황권이 위에 항복하자 촉의 신하들이 그의 처와 자식들을 가두려 하였지만 유비가 허락하지 않았다.
“배신한 것은 나지 황권이 아니다.”
▲이광 묘입구
남북조시대의 학자로 삼국지의 주석을 단 배송지(裵松之)는 이 부분에 자신의 의견을 덧붙였다.
“무제는 터무니없는 말만 믿고 이릉의 가족을 참수했지만, 유비는 사법관의 주장을 듣지 않고 황권의 가족을 살렸다. 두 군주의 잃음과 얻음이 하늘과 땅 차이인 것이다.”
이광 가문은 이릉을 비롯하여 아들들이 모두 죽임을 당함으로서 안타깝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그리고 오늘, 이광의 의관총만 남아 이들 가문의 흔적을 말해주고 있다. 이에 사마천은 목숨을 담보한 기록으로 이릉을 부끄럽지 않은 인간으로 만들었고 오늘도 떳떳하게 역사의 한 장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13) 중국은 왜 무덤속에 공자를 꺼냈을까?
황제신화의 역사화와 '중화중심제국'의 건설<천수3>
화하족의 조상, ‘黃帝’
굽이도는 위수(渭水)의 기운을 받은 천수는 신화의 땅이다. 또한, 상나라를 무너뜨린 주나라의 근거지이기도 하다. 주나라는 상나라를 무너뜨리고 중화민족인 화하족(華夏族)의 중심으로 부상한다. 이들은 넓은 영토를 지배하기 위해 제후국에게 영토를 분봉하는 정책을 폈는데, 제후국들이 분열하자 260여년이 지난 기원전 771년에 북방 초원지대에 살던 융적(戎狄)에게 멸망한다. 이후 춘추시대에 제후국들이 융적을 공동으로 방어하기 위해 스스로를 ‘화하(華夏)’라고 칭하고 그들만의 정체성을 확립한다. 이때부터 자신들과 다른 이민족은 오랑캐라 하여 차별하였다. 그리고 진한(秦漢)제국시기를 거치면서 변경을 확장하고 이민족들을 한화(漢化)시켰다.
▲황제
화하족이 변경을 확장한 이유는 자원과 기후변화 때문이다. 특히, 기후가 한랭건조하게 바뀌면서 생태계가 변화해 원시농업에 타격을 입혔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화하족과 주변 유목민들의 운명은 엇갈린다. 진한 통일시기를 거치며 한족을 형성한 화하족은 문자를 통일하고 그들만의 신화와 전설을 만든 뒤, 이를 ‘역사’라고 기록함으로써 단일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한다. 문자가 없던 주변 유목민들은 한족과 자원을 공유하기 위해서도 한족의 역사를 빌려오고, 이 과정에서 정체성을 상실한 채 한족으로 동화되고 만다.
한족으로 동화되는 현상은 진한시기에 절정을 이루는데, 이는 수백 년에 걸쳐 통일된 제국이 유지되었기 때문이다. 사마천의 ‘사기’와 같은 기록이 이 시대에 쏟아져 나왔고, 한족은 이러한 역사적 기억을 대대로 계승⋅발전시키며 스스로의 이미지를 확대⋅전승하였다. 문자의 발명과 한 발 앞선 기록이 얼마나 가공할 만한 힘을 발휘하는지 잘 드러나는 장면이다. 실로 우리 문자인 한글을 발명한 세종의 위대한 고투(苦鬪)에 저절로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다.
이민족을 배척하는 한족의 태도는 중국이 근대적 국민국가를 세우면서 서서히 바뀐다. 국민국가 건립에 가장 큰 문제는 계급문제와 민족문제였다. 국민당 정부는 민족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변의 이민족들을 소수민족으로 개편한 뒤, 다수를 차지하는 한족과 함께 ‘중화민족(中華民族)’으로 재구성하였다. 현재 중국의 소수민족 자치구에서는 사회경제적⋅민족적 갈등이 심하며 소수민족들은 심각한 정체성 위기를 겪고 있다.
▲하남성 신정에 위치한 황제릉
지금도 김장감을 늦출 수 없는 티베트족 문제나 분리 독립을 요구하는 신강성의 위구르족 문제 등은 향후 중국의 행보에 걸림돌이 될 것이다. 중국은 이를 위해 국가적으로 4대 공정사업을 추진하였는데, 이는 역사왜곡을 통해 민족문제를 해결하려는 전략이다. 역사를 중시하는 그들이지만, 정작 역사의 준엄한 가르침은 배우려 하지 않는다. 치부를 가리기 위해 은밀히 조작하고 폭력을 행사하다가는 결국 부메랑이 되어 되돌아오고 만다. 이 또한 역사가 증명하고 시인들이 누누이 강조한 일이다.
이 땅을 밟으니 끝없는 회포가 솟아나고經過此地無窮事
바라보니 왕조의 흥망사에 가슴이 미어진다一望凄然感廢興
위수 터는 진나라의 중심지였고渭水故都秦二世
함양 언덕 가을 풀밭엔 한나라 왕들 묻혀있네.咸陽秋草漠諸陵
텅 빈 하늘엔 어디선가 기러기소리만 들리고天空絶塞聞邊雁
흩날리는 낙엽 너머 외딴집 등불만 반짝이누나.葉盡孤村見夜燈
검푸른 하늘 아래 새겨진 한은 그 얼마인가風景蒼蒼多少限
언 산에 걸려있는 흰 구름만 처량하도다.寒山半出白雲層
비옥한 황하유역을 차지하기 위한 전쟁, 홍수와 가뭄 등 자연재해를 이겨내려는 노력은 남성적인 힘의 결집을 필요로 하게 되고 마침내 거대한 군사력과 노동력을 동원하는 전제군주체제를 탄생시킨다. 이 과정에서 화하족의 공동조상이자 지고의 신으로 숭배되는 황제(黃帝)가 탄생된다. 하늘의 아들인 황제는 천명을 받드는 신성한 존재를 자처하며 중원은 물론 오랑캐의 땅까지 절대적 통치력을 발휘하고자 한다.
사마천에서 시작된 황제신화의 역사화
사마천은 자신의 저서 ‘사기’ ‘오제본기(五帝本紀)’에서 역사 이전의 시기를 다뤘다. 그는 중국신화에 나타나는 남성신을 다루면서 황제를 맨 먼저 언급한다. 그의 작업을 통해 당시 중원에 흩어져 살던 다양한 종족들은 ‘화하공동체’로 편입되었고 모두가 황제의 후손이라는 정체성을 갖게 된다. 사마천에 의해 황제, 전욱(顓頊), 제곡(帝嚳), 요․순(堯․舜) 등 신화 속의 남성들이 덕망을 지닌 위대한 제왕이 되어 화하족의 정신을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로 형상화된 것이다.
▲사기오제본기
사마천은 신화 속의 오제가 실존했던 인물들이기를 바랐다. 괴이하고 모순적인 요소들을 제거하여 역사적 사실에 가깝게 서술함으로써, 그는 모든 사람들이 오제를 역사적 인물로 받아들이길 바랐다. 사마천이 취사선택한 역사는 신화에서 비롯된 전통과 이를 뒷받침하는 하늘의 감응이 상호 조화를 이루는 것에서 시작된다. 황제는 이러한 신화적인 전통과 하늘의 덕을 받아 인간세계의 질서를 유지하는 상징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마천은 황제로부터 역사를 풀어가고자 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이러한 의도를 분명하게 강조하였다.
“옛날 황제가 하늘과 땅을 본받자 4명의 성군이 차례로 그 뒤를 이어서 각각의 법도를 이루었다. 당요가 왕위를 물려주었지만 우순은 기뻐하지 않았다. 훌륭한 제왕의 공덕이 만세로 전해져야 할 것이기에 ‘오제본기’ 제1을 지었다.”
중국 중심의 천하관
사마천에서 비롯된 오제의 역사화는 이후 중국인들에게 필요할 때마다 새로운 교훈을 전달하는 메시아 역할을 하였으니 이것이야말로 사마천이 바라던 것이다. 그리고 그때부터 황제는 화하족의 시조가 되어 중국 역사학자들과 위정자들의 품에서 통치 이데올로기로 활용되었고, 중화민국 초기에는 혁명의 상징으로까지 부각된다.
서쪽에서 온 황제가 치우를 이겼거늘西來黃帝勝蚩尤
숲을 향해 자유를 묻지 마라.莫向森林問自由
성스러운 땅 오랫동안 이민족에게 점령되었으니聖地百年淪異族
석양에 홀로 서 이 땅을 슬퍼하네.夕陽獨白弔神州
노예 노릇하는 것이 어찌 조상들의 뜻이랴爲奴豈是先民志
역사 기록 오래 남아 후대에 치욕되리라.紀事終遺後史羞
청나라 말기의 한족 지식인들은 이민족의 통치를 끝장내기로 뜻을 모은다. 그리하여 반청혁명은 불타오르고 지식인들은 화하족의 시조인 황제가 치우를 물리쳤듯이 이민족을 물리치고 한족의 영광을 되찾자고 주장한다. 근대 중국의 대표적 지식인인 노신(魯迅)도 마찬가지다.
마음은 피할 길 없이 신의 화살을 맞고靈臺無計逃神矢
비바람 몰아치는 바위처럼 조국은 어둡기만 하네.風雨如磐暗故園
찬 별에 뜻 전해도 향초는 이 마음 모르나니寄意寒星荃不察
나, 나의 뜨거운 피를 헌원 황제께 바치리라.我以我血薦軒轅
중국인에게 있어서 황제 헌원은 정신적 고향이다. 중화 중심의 천하, 그 세계의 보편적 질서를 이끌어 온 힘의 원천이다. 그런데 이토록 우월한 문화를 창조한 중국이 근대로 접어들면서 서구의 군사적 침략으로 굴욕을 당한다. 중화 중심의 천하질서 운영이란 당위성이 깨진 것은 물론이고 식민지로 전락한 것이다.
大國崛起를 향한 중국의 ‘역사 기획’
21세기, 개혁개방정책으로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 된 중국은 막강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중화 제국의 전통을 잇기 위한 ‘강한 중국의 부활’에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이는 다시 황제 헌원으로부터 시작된다. 하지만 부활한 황제는 신화로만 머물지 않고 진시황, 한무제, 당태종 등으로 이어지는 역사의 중심이 되었다. 나아가 한족은 물론이고 소수민족까지 아우르는 중국인의 공동조상으로 낙점되었다. 허구적 조작으로 만들어진 혈연관계는 현재 중국 땅에서 살고 있는 모든 소수민족까지 동일민족이라고 몰아가면서 중화 중심의 강력한 제국 건설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황제신화는 뿌리가 다른 소수민족들을 하나의 제국에 편입하는 데 더없이 좋은 수단인 셈이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중화문명 5,000년’이란 황제기년(黃帝紀年)을 설정한 뒤, 민족대단결과 중화 자긍심 고취를 위한 또 하나의 야심찬 역사기획을 마련한다. ‘하상주단대공정(夏商周斷代工程)’이 그것이다.
중국의 위정자들은 사마천에게서 비롯된 중화문명의 자긍심을 영원히 변치 않는 역사적 사실로 확정짓고 싶었다. 그 일환으로 중국은 ‘과학적 고고’라는 미명 하에 하상주단대공정을 시작해 하(夏)나라의 역사 연대와 상(商)과 주(周)나라의 건국 시점을 확정한다. 놀라운 것은, 그들이 사마천도 확정하지 못한 연표를 무려 1,229년이나 앞당겨 기원전 2070년으로 확정한 것이다. 신화의 세계에 있던 하나라를 역사책에 올려놓음으로써, ‘중화문명 5,000년’이라는 명제를 역사적 사실로 확정하기에 이른다.
중국, 거짓 고대사를 믿어야 하는 진흙탕에 빠지다
하지만 이 프로젝트를 역사적 사실로 인정할 수 있을까? 하나라의 존재를 입증하는 명문이나 출토문자가 있는가? 없다. 그래서 프로젝트에 참여한 학자들조차도 “같은 시대의 문자로 증명되어야 한다는 논리에 따른다면 여전히 의문이다.”라고 하였다. 과학적 연대측정이라고 하지만 그것 역시 “소망하는 것일 뿐 가능한 일이 아니다.”라고 비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역사기년을 앞당긴 이유는 무엇일까? 하상주단대공정의 이론자인 이학근(李學勤)은 아예 달성목표를 미리 정해놓고 있었다.
“연표(年表)를 만드는 정도가 아니라, 중국문명을 1,000년 정도 더 위로 밀어 올리는 것이다”
중국의 역사화 작업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하상주단대공정이 일단락되자 이제는 황제시대의 역사화 작업인 ‘중화문명탐원공정(中華文明探源工程)’이 거침없이 그리고 대대적으로 시작된다. 1단계 5개년 연구가 끝난 때인 2005년에는 요순(堯舜)시기가 역사에 포함된다. 확정연도는 기원전 2500년이다. 신화전설의 역사화 작업은 더욱 박차를 가하고, 그 결과 2010년에는 황제가 역사시대의 인물로 편입된다. 확정연도는 기원전 4000년.
중국의 역사 끌어올리기 프로젝트는 이제 삼황(三皇)과 반고(盤古)가 살았던 시대만 남겨놓고 있다. 중화 제국의 부활에 필요한 것이라면, 역사를 만들어내는 한이 있더라도 주저하지 않겠다는 그들의 의지가 철철 흘러넘치고 있는 것이다. 프로젝트에 참여한 학자들조차도 “진실한 고대사에 의문을 던지고 거짓 고대사를 믿어야 하는(懷疑眞古 相信假古) 진흙탕에 빠졌다.”고 비판하지만, 중국의 역사프로젝트는 국가적인 사업으로 폭주(暴走)하고 있다.
중화중심제국을 위해 ‘골방의 공자’를 꺼내다
중국의 역사 프로젝트는 ‘대국굴기’를 향한 것이다. 7세기 실크로드로 획득한 당대의 번영을 되찾을 뿐 아니라 청나라 때의 강역을 넘어서기 위한 국가적 비전인 것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소수민족을 변방으로 간주하거나 중화와 무관한 대상으로 확정하게 되면, 한족과 관련이 없던 땅의 소수민족들은 부담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다민족일체론’이라는 보다 확장된 중화제국이론 속으로 소수민족들을 포섭한다. 다민족일체론은 중국이 초강대국으로 자리 잡기 위해 최우선적으로 정립해야하는 이념과제인 것이다. 중국 정부가 천문학적인 예산을 쏟아 부으며 격려와 지원을 아끼지 않는 까닭도 바로 이 때문이다.
▲공자
중국은 21세기 대국굴기란 역사와 정치의 대국에서 문화의 대국에 있음을 알고 ‘문화대국’을 향하여 매진하고 있다. 이를 위하여 문화대혁명 이후 골방에 처박혀있던 ‘공자’를 전면에 내세운다. 중세봉건시대 아시아에 절대적인 영향을 주었던 공자의 유교사상이 중국이 추진하는 ‘중화중심주의’에 절대적으로 부합되는 사상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전 세계에 400여개의 ‘공자학원’을 개설하고 우리 돈으로 약 240억원을 투자하여 중화인본주의의 역사와 우수성을 알리는데 열중하고 있다.
중국의 황하문명보다 앞선 고조선의 ‘요하문명’
또한, 황하문명의 탄생지인 앙소문화 유적보다 500여년이나 앞선 요하문명인 홍산문화 유적이 지금의 요녕성 하가점(下家店) 일대에서 발굴되자, 이것은 황하문명이 동쪽으로 퍼져나간 결과라고 억지를 부린다. 중국문명의 기원을 1000년을 더 높여 잡으려는 것도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요하문명은 우리의 고조선과 관련이 깊은 동이족의 문명이다. 특히, 하가점 일대의 유물 중에는 고조선을 대표하는 유물인 비파형동검이 나왔다. 5천년 가량 된 여신상도 발견되었는데 곰발바닥 모양의 형상이 함께 있었다. 단군왕검시대의 곰 토템신앙이 역사적으로 확인된 것이다.
▲요하 문물의 산실 홍산문화유적지
문제는 우리에게도 있다. 이러한 고고학적 발굴사례가 속속들이 나타나고 있는데, 학계에선 아직도 묵묵부답이다. 자신들이 그동안 쌓아온 아성이 무너질 것만 두려워하는 눈치다. 모든 것은 새로운 것에 의해 언제든 바뀔 수 있다. 역사는 더욱 그러하다. 중국은 학계를 동원하여 정치적으로 억지를 부리는 판에, 우리는 스스로 반도사관에 안주하고 있으니 실로 억장이 무너질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요하문명의 상징인 여신상과 곰발바닥
“역사를 모르는 민족은 망한다”
치국을 위한, 치국에 의한, 치국에 복무하는 역사. 자국에 불리한 역사는 빼고, 유리한 것은 대대로 확대하며, 타국의 역사는 편리하게 예단하는 것이 중국 역사의 기록방법이다. 중국 역사학의 시작이 이곳에 있음을 우리는 항상 잊지 말아야 한다.
어디 중국뿐인가.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일본 역시 우경화정책을 앞세운 군비재무장과 제국주의적 야심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역사를 날조하는 이웃들 틈바구니에 있는 우리는 어떠한가. 역사를 등한시함은 물론 영화나 방송매체는 아무렇지도 않게 작위적이다. 인기몰이와 상업주의에 역사를 팽개친 꼴이다. 이는 역사를 모르는 청소년의 정신을 흐리게 할 뿐만 아니라 국가적인 역사인식의 부재로 이어진다.
‘역사를 모르는 민족은 망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우리의 역사를 올곧게 지켜내는 일이야말로 주변국의 역사왜곡과 국가적 간섭으로부터 이를 능히 물리치는 철옹성이 되는 것이니, 이제부터라도 우리의 역사를 아는 일에 모두가 앞장서야만 한다.
▲하가점 출토 고조선 유물 비파형 청동검
(14) 잊혀진 왕국 서하는 중원과 대등한 제국이었다
文字의 소멸은 '國魂의 滅亡'< 은천1 >
文字를 보존하는 민족은 결코 소멸하지 않는다
西夏王國을 찾아서
사라진 왕국 서하(西夏)를 찾아간다. 서하는 11세기에서 13세기에 걸쳐 중국의 서북부지역을 통치한 티베트계 민족의 왕조다. 영토는 지금의 중국 서북부 지역이었는데, 동쪽으로는 황하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옥문관, 남쪽으로는 소관(蕭關), 북으로는 고비사막을 포함하는 광대한 지역이었다. 중국인은 서쪽 오랑캐를 서융(西戎)이라 하였다.
서융 가운데 가장 번성한 것이 강(羌)과 저(氐)였다. 강과 저는 갑골문에도 자주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이미 상(商)나라 때부터 존재하였던 것 같다. 허신(許愼)이 지은 ‘설문해자(說文解字)’에 “강은 서융으로 양종(羊種)이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양을 치는 유목공동체였음을 알 수 있다. 저는 농경 위주의 정착민족이다.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는 “저인들이 주로 살았던 천수(天水), 농서(隴西)지방은 산에 숲과 나무가 많아 사람들이 판자로 집을 지었다.”고 하였다.
▲논과 늪지가 많은 은천의 모습.
서하는 강족의 일파인 당항(党項)족 탁발씨(拓拔氏)의 후예인 이원호(李元昊)가 1038년에 건립한 국가다. 송, 요, 금과 정립하며 1227년에 멸망할 때까지 195년이나 이어온 국가다. 국호를 ‘대하(大夏)’라고 했는데 후대 사람들이 요와 금의 서쪽에 있었기에 ‘서하’라고 불렀다.
서하왕국의 도읍지는 영하회족자치구의 은천(銀川)이다. 은천으로 향하는 야간기차를 탔다. 밤에 이동하는 것은 잠자리도 해결하고 시간도 번 것이니 일석이조인 셈이다. 기차는 정시에 출발한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중국여행 중에 기차를 이용하려면 항상 시간이 불투명하였다. 정시에 출발하는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즘은 연착되는 일을 제외하고는 항상 출발시간을 지킨다. 이젠 기차여행도 일정에 맞춰 편안하게 즐길 수 있으니 중국에서의 여행은 나날이 좋아지고 있는 편이다.
자리를 잡아 짐을 푼 다음, 저녁식사도 할 겸 식당 칸으로 향했다. 식당 칸은 썰렁하다. 서너 명이 앉아서 주문한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릴 뿐이다. 메뉴를 보니 간단한 밥과 반찬뿐인데 가격이 엄청 비싸다. 마침 옆 좌석에 음식이 나왔는데 별반 맛있어 보이지 않는다. 그야말로 폭리를 취하려는 요량이다. 식당 칸이 썰렁한 이유를 알겠다. 조금 싼 도시락을 주문했다. 그랬더니 표정이 굳어지며 퉁명하게 한마디 한다.
“당신들 자리에 가서 먹어요.”
“네? 여기서 먹으면 안 되나요?”
“도시락은 여기서 먹을 수 없으니, 당신들 자리로 가란 말이야!”
탁자 앞에 놓여 있던 젓가락마저도 바람처럼 집어간다. 기차는 정시에 출발하지만 서비스는 아직도 엉망이니 장거리 기차여행에서의 먹을거리는 스스로 챙겨야 할 일이다.
서하왕국의 위상, “동방의 피라미드”
은천의 아침은 평화롭다. 8차선의 도로가 시원하게 뚫려있고 도로 양 옆으로는 다양한 건물 공사가 한창이다. 일직선의 도로를 달리노라니 호수들이 많이 보인다. 고비사막과 산맥을 접하고 있는 도시에 웬 호수가 이렇게 많을까 의아할 정도다. 이는 은천에서 10㎞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황하의 물을 끌어왔기 때문이다. 이 덕분에 은천은 사막의 도시가 아닌 비옥한 평원과 호수의 도시가 되어 서하왕국의 수도가 된 것이리라. 호수 근처에는 논이 보인다. 풍부한 수자원을 활용하여 벼농사까지 짓고 있으니 가히 왕도(王都)가 될 만하다.
▲동방의 피라미드로 불리는 웅장한 서하왕릉.
서하왕국의 위용을 살펴볼 수 있는 왕릉(王陵)으로 향한다. 은천에서 서쪽으로 35㎞ 떨어진 하란산(賀蘭山) 남쪽, 드넓은 평원에 서하의 역대 제왕과 귀족들의 왕릉이 있다. 총 9개의 왕릉과 250여개에 이르는 배장묘(陪葬墓)가 왕릉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데, 다른 곳에서는 보기 힘든 팔각형이나 원형으로 쌓았다. 서하만의 독특한 능묘인 것인데 지금 보아도 기세가 등등하다. 가히 2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서하왕국의 힘을 느끼기에 충분하며 ‘동방의 피라미드’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특히, 서하시기는 중원의 송(宋), 거란의 요(遼), 여진의 금(金)과 몽골의 칭기즈칸이 상호 각축을 벌이던 시대다.
“그깟 비단옷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이러한 제국들에 맞서 서하를 당당한 독립국가로 발전시킨 이가 곧 원호(元昊)다. 그는 당과 송으로부터 하사받은 성씨인 이(李)와 조(趙)씨를 버리고 자신의 성인 외명(嵬名)을 복원시켰다. 이름도 ‘올졸(兀卒)’이라 하였는데, 이는 당항어의 중국식 발음을 음차한 것으로 ‘청천자(靑天子)’란 의미다. ‘황천자(黃天子)’라고 하는 송의 황제와 대등한 위치임을 표명한 것이다.
이러한 원호의 칭제와 건국의 시도는 태자 시절부터 확고하였다. 부친인 덕명(德明)이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 한족의 복식을 받아들이자, 원호는 민족의 전통과 본성을 지키는 것이 송으로부터 자립하는 것이고 나아가 패권을 차지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털옷을 입고 목축에 종사하는 것은 우리 민족의 타고난 천성입니다. 영웅이 세상에 나왔으면 마땅히 나라를 세우고 황제를 칭해야 할 뿐입니다. 송나라로부터 받은 그깟 비단옷이 우리에게 무슨 소용이란 말입니까?”
‘西夏’, 宋遼金과 대등한 황제국이 되다
원호의 독립과 건국정신은 계속 이어진다. 칭제에 따른 연호의 사용, 복식과 군병제(軍兵制)의 정비, 예악(禮樂)의 제정 등을 통해 독립에 박차를 가했다. 또한 당항족의 특성을 드러내기 위하여 스스로 대머리 모양의 독발(禿髮)을 하고 모든 당항인들로 하여금 당항족의 풍속인 독발을 하도록 명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당항족의 의지와 기상을 잃지 않도록 한 것이다.
▲벽화에 보이는 서하소년들의 독발.
여러 가지 시도 가운데서도 가장 획기적인 것은 문자의 제정이었다. 서하문자는 한자를 모방해 만든 것이지만 6000여 자에 이르는 독특한 글자는 서하의 주체성을 드높이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이를 보급하기 위해 각종 문서는 물론 불경과 비문 등에 이르기까지 널리 사용했다. 중국으로부터의 정치적 독립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문화적 독립이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문자의 제정은 민족의 역사와 고유문화를 지키며 전통을 이어가는 근원이기에 정치적 독립보다도 더욱 중요하다. 원호는 정치적 독립만으로는 민족의 전통과 문화를 보전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방법으로 문자를 만든 것이다.
문자를 창제한 민족은 많지 않다. 그러하기에 문자를 만든 민족은 자신들의 민족정신을 지키며 역사적으로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자신들만의 문자체계가 없는 민족은 외래문자의 차용으로 고유의 풍속마저 외래의 것에 동화되어 버리고 만다. 기층민과의 언어소통도 어려워져 이원적인 언어생활을 할 수밖에 없다. 이는 국가적으로도 커다란 손실이다. 서하는 물론 서하와 관련 있는 국가들은 모두 문자를 가지고 있었다. 요는 거란문자, 금은 여진문자, 몽골은 파스파문자를 썼다. 이들 국가들 모두 칭제를 하며 제국을 건설하였는데, 이들 국가의 번영에 있어서 가장 근원적인 힘이 곧 ‘문자의 창제’였다.
▲서하문자로된 불경.
민족번영의 원동력 ‘文字의 創製’
우리도 문자를 창제한 민족이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우리의 문자인 한글을 사용하는 민족이다.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문자로 인정받은 한글. 이는 문자 자체의 탁월성의 입증이기도 하지만 오랜 기간 동안 소멸하지 않고 사용되는 한글에 대한 찬사이기도 하다.
▲훈민정음.
조선의 세종도 서하를 건국한 원호와 같은 생각을 하였다. 이제까지 답습되어 온 중국의 습속에서 탈피하여 우리 민족 고유의 주체성과 문화를 향유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백성이면 누구나 쉽게 쓰고 배울 수 있는 문자를 만든 것이다. 글자마다 일정한 뜻을 가지도 있는 ‘표의(表意)’문자를 대신하여 소리 나는 대로 읽고 쓸 수 있는 ‘표음(表音)’문자로 바꾼다. 이는 이제까지 한자 사용으로 인한 상하층민의 이원적인 불통(不通)을 깨고 쌍방향 소통이 가능한 문자체계로의 일대 혁신을 꾀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세종이 얼마나 영명하고 위대한 임금인가를 잘 깨우치지 못한다. 그저 '한글을 만든 왕'정도로만 이해한다. 대국인 중국의 감시 아래 문자를 창제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것이다. 게다가 최만리와 같은 유림집단의 내부적인 반발도 대단하였다. 이 모든 위험요소를 이겨내고 민족의 자존과 전통을 보존한 것이니 실로 얼마나 위대한 임금인가. 이러한 세종의 진심은 얼마 지나지 않아 나타난다.
집현전 직제학 양성지, 사대주의에서 벗어나 전통문화의 중요성을 역설하다
"신이 듣건대 서하는 자신의 예법과 풍속을 바꾸지 않았기 때문에 수백 년을 유지했다고 합니다. 원호는 영웅으로서 "금의옥식(錦衣玉食)은 우리에게 편리한 것이 아니다"고 했습니다.(중략)
우리나라는 요수 동쪽에 대대로 기거하며 만리(萬里)의 영토를 가진 나라로 일컬었습니다. 삼면이 바다로 막혀 있고 한 쪽은 산을 등진 형세로 경계가 스스로 나뉘어 고유한 풍속도 다릅니다. 단군 이래로 관청을 설치하고 주(州)를 두어서 우리만의 독특한 덕과 교화를 펼쳐왔습니다.
태조는 훈요(訓要)를 지어서 백성의 의관과 언어는 우리의 것을 준수하라고 했습니다. 만약 의관과 언어가 중국과 다르지 않다면, 민심이 정해지지 않아서 제나라 사람이 노나라 사람이 된 것과 같습니다. 바라건대 의관은 조복(朝服)을 제외하고 중국을 본받지 못하게 할 것이며, 언어 또한 통역관 이외에는 옛 풍속을 지키도록 해야 합니다."
조선 세조 때인 1455년. 눌재(訥齋) 양성지(梁誠之)가 민족의 전통문화를 보존해야함을 역설한 것이다. 사대주의 세계관에서 벗어나 단군으로부터 계승된 ‘홍익인간(弘益人間)’과 ‘재세이화(在世理化)’의 정신과 문화건설에 힘쓸 것을 말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 양성지의 상소문
자국어를 지킨 국가들의 대부분이 중국과 대등한 국권을 유지하였고, 그렇지 못한 국가들은 스스로의 문화조차 소멸되고 말았다. 우리는 36년간의 일제강점기에도 민족어인 한글을 꿋꿋이 지켜냈고 우리의 문화도 오롯이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의 한글은 어떠한가. 국어보다는 영어가 중시되어 언어활동조차 어려운 간난아이를 영어 학원부터 보낸다.
우리말도 제대로 모르는 아이들에게 영어부터 가르치면 그 아이의 영어실력은 뛰어날까. 아니다. 어떤 외국어도 모국어의 구사능력이 바탕이 되어야만 비로소 실력이 배양되는 것이다. 그런데 마치 영어가 모국어인양 한글을 제치고 배우고 있으니 이는 곧 민족주체성의 포기요 대대로 이어온 우리 민족의 문화를 망각하는 일이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 하지 않았던가. 진정 필요한 만큼의 배움이 소중한 것이니, 눌재의 간언은 아직도 생생하게 살아서 우리에게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고유문자의 소멸은 국가의 멸망을 의미한다. 하지만 고유문자의 보존은 국가가 멸망하여도 다시 뭉치는 힘이 된다. 신강성의 위구르족이나 서장자치구의 티베트족 등은 아직도 그들만의 문자와 문화를 보존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도 강력한 독립의지를 꺾지 않고 있는 것이다. 반면에 제국을 건설하였던 요, 금, 서하는 그들의 고유문자도 사라졌기에 과거의 역사만을 간직한 채, 모래바람 속의 폐허로만 남아있는 것이다.
서하왕릉은 원호의 릉인 3호릉만 개방해 놓았다. 흙을 산처럼 높게 쌓아 만든 릉은 오랜 세월의 풍파에 부서지고 무너졌지만 아직도 하란산을 배경으로 웅장함을 잃지 않고 있다. 가까이 다가가서 살펴보니 7층으로 지어졌는데, 층마다 기와 파편이 즐비하다. 릉을 화려한 누각처럼 만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화려했던 서하의 문화는 흙 속의 기와파편 마냥 잠들어 있다. 원호가 그토록 중시했던 서하인만의 풍속도 사라진지 오래다. 칭기즈칸이 몽골에 항거하였다는 이유로 서하민족을 무자비하게 살육한 이유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서하문자의 소멸이 서하를 역사의 기억 속에만 남아있게 할 뿐이다.
“지키지 않으면 사라진다”
한줄기 바람이 먼지를 일으키며 왕릉 앞을 지나친다. 원호가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민족주체성도 저처럼 잡을 수 없는 한줄기 바람이었던가. 아니, 모두의 나태와 안일함이 저처럼 바람이 되게 한 것은 아닌가. 서하왕릉에서 원호를 조문한 어느 시인의 감회가 내게도 절절하게 다가온다.
대하왕국을 선포한 원호황제를 떠올리나니 拓土開疆忆昊王
이곳에 왕도 세우고 기세 또한 등등하였건만 興州定鼎勢豪强.
화려한 궁전과 전각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當年殿閣今何在
황량한 무덤만 외로이 석양을 짝하고 있구나 几處荒陵伴夕陽
▲서하왕릉 복원모형.
지키지 않으면 사라진다. 국가도 그렇고 문자도 그렇고 풍속도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치열하게 지켜야 한다. 국가를 지키고, 문자를 지키고, 풍속을 지키는 일에 너와 내가 따로 없어야 한다. 이것을 지키지 않으면 우리 모두의 존재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15) 무협의 나라 중국, 역사왜곡도 무협적?
고조선 용산문화의 상징과 만나다<은천2>
변방의 강남, ‘銀川’
서하왕국의 수도인 은천 지역은 ‘새상(塞上)’이라고 부른다. 이는 ‘새하(塞下)’와 대비되어 부르는 말로 각기 변방의 위쪽과 아래쪽 지역을 의미한다. ‘새(塞)’는 변방을 의미하는 글자로 주로 한당(漢唐)시기에 쓰였다. 한당 시기는 중국이 통일제국을 건설하고 서역으로 통하는 실크로드를 개척하기 위하여 흉노와 치열한 전쟁을 벌이던 때다.
이처럼 ‘새(塞)’는 실크로드 주도권 싸움에서 생긴 단어이지만 실질적인 지리는 황하와 관련이 깊다. 청해성에서 발원한 황하가 난주를 지나면서 동북으로 향하는 감숙성의 동쪽을 ‘새하’라 하고, 이를 지나 곧장 북쪽으로 향하는 은천지역을 ‘새상’이라고 한다. 황하가 인접한 은천은 풍요로운 혜택을 입어 ‘새상(塞上)의 강남(江南)’이라고 부른다.
은천은 자연의 풍요로운 혜택만큼이나 지정학적으로도 중요한 요충지다. 진시황은 이곳을 차지하고 동서로 이어지는 만리장성을 쌓았다. 진나라의 왕성인 함양(咸陽)이 멀다고 하여도 이곳을 든든히 방비하지 않으면 지킬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마치 제갈량이 기산과 가정을 차지하지 못하면 촉한(蜀漢)이 움직일 수 없다고 본 것과 같은 것이다.
자연적인 방어수단인 황하(黃河)와 인공적인 방어수단인 장성(長城)은 중국 역사의 상징물이다. 이는 한족과 오랑캐로 대별되는 투쟁에서 한족의 단결과 공동체적 삶을 지속시키는 정신적인 힘이자, 오랑캐를 무찌르는 지리적인 힘의 근원이기도 하다. 하지만 11세기 초, 이 땅은 흥주성(興州城)을 쌓고 서하왕국을 건설한 원호(元昊)의 차지가 된다. 아무리 견고한 방어수단도 인간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는 것이다.
진시황의 장성이 무쇠처럼 튼튼하여秦築長城比鐵牢
오랑캐가 감히 임조를 넘보지 못하였다는데蕃戎不敢過臨洮
비록 만 리 구름처럼 연이어 끝이 없을지라도雖然萬里連雲際
요임금 삼 척 궁전의 견실함에 미칠 수 있으랴爭及堯階三尺高
물리적인 힘은 더 강한 물리력에 의하여 무너지기 마련이다. 상호 존중과 배려를 통한 화합과 단결이야말로 그 어떤 물리적인 힘보다 강하고 견고한 것이며, 이러한 믿음 속에서 탄생한 대동사회(大同社會)는 황하와 장성 없이도 영원한 낙원으로 이어질 것이다.
북두칠성과 ‘7’, 우리 민족의 七星신앙
현재까지 남아 있는 서하왕릉의 유적 중 가장 웅장한 것은 3호릉이다. 나라 이름을 ‘대하(大夏)’라고 공표하고 스스로 황제라 칭하며 독자적인 연호(年號)를 사용한 원호의 릉이다. 1000여 년 전에 흙으로 쌓아 만든 릉이 지금도 이와 같은 모습이라면 당시 원호 황제릉의 크기는 어느 정도였을까. 비가 드믄 지역이라 하더라도 바람 거센 사막지대인 점을 고려한다면 현재 모습의 두 배는 되었으리라. 무너진 왕릉을 돌아보며 상념에 잠기던 나는 층층이 쌓인 기와 파편을 보다가 문득 발걸음을 멈춘다. 그리고 한줄기 생각이 번개처럼 온몸에 전율을 일으킨다.
▲7층으로 된 장군총
왕릉이 7층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길림성 집안(集安)에 있는 고구려 유적인 장군총도 7층이다. 무슨 상관이 있을까. 더 중요한 것은 은천과 집안의 중간에 홍산문화의 발원지인 우하량 유적이 있다. 이곳의 구릉에서는 한 변의 길이가 60미터인 거대한 피라미드식 적석총이 발견되었는데 이 역시 7층이다.
이 우하량의 적석총 유적은 기원전 3500여 년 전의 것으로 추정한다. 이집트의 피라미드 제작시기가 기원전 2500년경이라고 하니 지금까지 세상에 알려진 가장 오래된 피라미드인 것이다. 3500년 전, 이처럼 거대한 적석총을 만들려면 엄청난 인원이 동원되어야 한다. 이는 곧 권력의 발생을 의미하며 고고학계에서는 초기국가단계라고 주장한다.
▲7층 흔적이 보이는 서하왕릉
7이라는 숫자는 북두칠성을 의미한다. 고대인들에게 북두칠성은 시간과 생명을 주관하는 별자리로 인식되었다. 그런 까닭에 생명을 거두는 것은 북두칠성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이해하였다. 우리 민족은 고대로부터 7이라는 숫자를 중시해왔다. 오늘날 장의(葬儀)에서 칠성판을 까는 것도 바로 이러한 풍습이 전해져 온 것이다.
홍산문화 묘지의 특징 ‘피라미드 적석총’
피라미드식 적석총은 중국문명의 줄기인 중원지역에서는 볼 수 없다. 고구려와 발해가 있었던 동북3성 지역과 몽골, 한반도에서만 볼 수 있다. 홍산문화 유적에서 나온 비파형동검은 고조선의 특징이다. 이 또한 중원지역에서는 발굴되지 않는다. 이를 종합해본다면 7층의 적석총 또한 고조선과 관련된 유적인 셈이다.
▲환도산성 아래 적석총 무덤군.
이러한 고조선의 유적은 고구려로 이어진다. 집안의 장군총뿐만 아니라 환도산성 아래에 있는 수천의 무덤군도 모두 피라미드식의 적석총이기 때문이다. 북한의 단군릉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동북아지역과 다른 내몽고지역의 은천에서 흙으로 빚은 7층의 피라미드를 만난 것이다. 이는 어쩌다 만난 우연의 일치일 뿐일까. 그것은 아닐 것이다.
문화는 인간의 이동과 함께 확산된다. 이는 보다 나은 삶을 살기 위한 교류의 결과다. 홍산문화를 만든 민족은 자신들의 문화를 여러 곳으로 전파하였다. 그리하여 중심 무리는 요동과 만주지역을 거쳐 한반도로 들어오고, 한 무리는 초원길을 따라 은천까지 간 것이다. 은천지역의 피라미드는 황토고원인 까닭에 돌 대신 흙으로 쌓은 것뿐이다.
▲감숙성의 만리장성 모습.
중국 역사공정의 피해자, ‘서하’와 ‘고구려’
서하는 11세기부터 2세기 동안 수많은 전쟁과 교역 속에서 중원의 국가들과 대등한 위상을 펼치며 정족세(鼎足勢)를 유지한 제국이었다. 그런데도 송요금 시대의 일개 지방정권으로 분류하고 있다. 중국의 역사왜곡은 중국정부의 지원 아래 무차별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는 주변국의 역사를 무시한 채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역사의 판을 다시 짜겠다는 것으로 ‘역사전쟁’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왜곡의 대표적인 사례가 ‘동북공정’이다.
▲서하왕국 건설한원호의 상.
중국은 이 작업을 통하여 고구려를 수당시대의 지방정권이라며 중국의 역사에 편입시켰다. 실로 어이가 없는 일이다. 수나라는 고구려와의 전쟁으로 멸망하였는데, 중앙정권이 지방정권을 제압하기 위하여 수차례에 걸쳐 엄청난 인력을 동원하며 ‘전쟁’이란 단어를 ‘선포’할 수 있는가. 또한 당태종 이세민은 고구려와의 전쟁을 중단하라고 유언까지 하였는데, 고구려가 중앙정권에 대항하는 지방정권이라면 중원의 통일을 위해서 끝까지 싸워야 할 일이지 중단하라는 유언이 될 법이나 한 말인가.
중국의 동북공정 작업이 한창이던 2003년 겨울, 나는 집안의 고구려 유적지를 둘러보게 되었다. 그야말로 철통같은 보안 속에 이루어지는 역사왜곡의 현장이었다. 그중에서도 집안박물관을 들어섰을 때의 충격은 지금도 생생하다. 내가 한자로 쓰인 고구려에 대한 설명문을 읽으려고 하자, 안내인이 밖에 있는 사람들을 의식한 듯 조용하게 말한다.
▲운남성 곡정에 있는 제강량과 맹획의 부조상.
“고구려에 대한 설명은 그냥 참고만 하세요. 일개 지방정권 일리가 있나요. 아는 사람은 아무도 안 믿어요.”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 확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설명의 첫 부분을 읽자, 중국의 생각을 확실하고 뚜렷하게 알 수 있었다.
‘고구려는 동북아지역의 고대문명발전과 생산과정에서 중요한 영향을 미친 중국 동북지방의 소수민족이며 지방정권의 하나다.’
그야말로 제국주의적 역사관이 바탕이 된 노골적인 역사왜곡이다. 문제는 이를 알리려는 대상이 누구냐에 있다. 박물관의 설명문은 한국의 역사를 잘 모르는 중국인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이를 통해 금방은 아닐지라도 어느 정도 세월이 지나면 대다수의 중국인들이 고구려를 자국의 고대 지방정권으로 이해하고 이를 정당화시키기 위하여 나름대로 노력할 것이라는 비열한 술수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삼국지연의’의 내용 중에는 제갈량의 ‘남만정벌’이 있다. 특히, 남만의 수령인 맹획을 7번을 놓아주고 7번 다시 잡았다는 ‘칠종칠금(七縱七擒)’은 제갈량의 신출귀몰한 전술과 마음을 얻으려는 통치술을 보여주는 명장면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건은 역사적으로 사실일까. 이를 확인하기 위하여 운남성 기행을 한 적이 있다.
역사적으로 남만정벌은 제갈량이 유비 사후, 북벌을 준비하기 위하여 단행한 것으로 6개월의 짧은 기간이 소요되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맹획을 칠종칠금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현지의 한족들은 누구나 이를 역사적 사실로 굳게 믿고 있다. 탁월한 전략가인 제갈량이면 충분하고도 남는 일로 알고 있다. 역사책에서 배운 것도 아니고 소설책의 내용만 알고 사실로 받아들이는 중국인들이다. 이러함에 박물관에 붙은 설명서를 읽는 중국인들은 무슨 생각을 하겠는가. 고구려가 고대 중국의 지방정권이었음을 추호의 의심도 없이 철석같이 굳게 믿을 것이니, 이 얼마나 섬뜩하고 무서운 일인가.
역사는 과거가 아니다
우리는 역사를 과거에 있었던 일로 치부하기 십상이다. 과거의 일이기에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다. 그런데 중국은 어째서 과거의 일에 국가적인 사활을 걸고 맹진(猛進)하는가. 그것은 역사가 결코 과거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역사는 항상 진행형이다. 과거의 역사도 현재에 의해서 바뀌고 고착화된다.
그리고 새로운 미래를 여는 나침판이 된다. 역사를 중시하고 역사에서 쉼 없이 배워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오늘도 중국의 역사전쟁은 계속되고 있다. 우리 고대사는 물론 정신사까지 파먹을 기세다. 중국은 청나라의 역사인 ‘청사(靑史)’작업을 끝내고 지금 내부적으로 검토단계에 있다. 청사의 발표내용에 따라 고구려와 발해에 이어 조선시대의 역사까지도 그들의 역사 속에 옭아매어질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태연자약하다. 언제든 대응할 준비가 끝난 것인가. 아니면 비루먹은 닭이 되어 이도저도 생각 없이 졸고만 있는가. 정치와 경제가 무너지는 것은 국가존립을 위태롭게 하는 중대한 문제이지만, 역사가 무너지는 것은 민족과 그 정신이 소멸되는 실로 어마어마한 폭발임을 우리는 정녕 모르는 것일까.
중국 무협영화의 고향, ‘진북보 서부촬영장’
서하왕릉을 빠져나오는 발걸음이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기분도 전환할 겸 영화촬영장을 찾았다. 서부지역 최대의 영화촬영장소라고 하는데 입구에는 동물가죽으로 만든 ‘진북보 서부촬영장(鎭北堡西部影城)’이라는 안내가 이채롭다. 명나라 때의 성터가 남아있던 것을 장현량이란 작가가 아이디어를 내서 1993년에 영화촬영장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영화 촬영장이었음을 알리는 안내판.
입구를 들어서자 ‘중국 영화는 여기서부터 세계로 진출한다.’는 거창한 문구가 들어온다. 이곳의 위상을 말해주는 듯하다. 규모 역시 엄청나다. 칸칸이 나뉜 구획에 따라 오밀조밀하게 만든 촬영장은 고대로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없는 것이 없다. 수많은 영화를 이곳에서 찍었다고 하기에 궁금한 것이 생겼다.
“이곳에서 찍은 영화 중 유명한 것은 무엇이지?”
“유명한 영화요? 너무 많아서 이루 헤아릴 수 없어요. 무협영화는 모두 이곳에서 촬영했다고 생각하면 돼요.”
“그렇게나 많아?”
“그럼요, 한국의 사극도 이곳에서 많이 찍은걸요.”
대돈황, 신용문객잔, 서유기, 붉은 수수밭 등등 이곳에서 촬영한 영화의 사진만으로도 회랑을 만들어 놓을 정도다. 놈놈놈, 왕건, 선덕여왕 등의 한국영화나 드라마도 이곳에서 촬영하였으니 실로 무협영화의 출발지라는 자부심을 가질 만 하다.
무협의 나라 중국, 역사왜곡도 ‘무협적’
무협영화는 인간이 현실적으로는 구현할 수 없는 불가능한 상상을 여러 가지 촬영기법을 활용하여 대리만족을 시켜줌으로써 심리적인 위안을 주거나 스트레스를 풀게 한다. 그래서 무협지나 무협영화에 빠지면 마치 컴퓨터게임에 빠진 것처럼 헤어나기가 쉽지 않다.
▲진북보 서부 영화촬영장 모습.
중국은 왜 무협영화가 성행할까.
그것은 중국의 역사가 곧 무협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중원을 차지하기 위해 수많은 전쟁이 벌어졌고 이 과정에서 무고한 사람들의 피가 산하를 적셨다. 천하권력을 차지한 자는 이들을 다독이는 정치가 필요했다. 중국의 역사에서 시대가 바뀔 때마다 강조되는 문무쌍전(文武雙全)의 통치술은 이렇게 탄생된 것이다.
이러한 과정이 수없이 반복되다보니 무협이야기는 전설을 만들고 전설은 역사로 굳어진다. 그리고 무협지처럼, 무협영화처럼 생각하게 되고 마침내 ‘전설적인 역사’의 한 장을 차지한다. 중국정부의 역사왜곡도 무협영화적인 사고방식이 저변에 깔린 것인지도 모른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필요한 부분을 필요한 만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이 얼마나 가공할 위력을 가진 무협영화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