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전문가들의 생각13/ 유주열의 중국의 언어(만주어) 외 - 정인갑의 중국 엿보기 - 韓中 내시경 - 최예지 기자의 중국 '최상급' 유물들
중국 전문가들의 생각13/
◆유주열의 중국의 언어(만주어) 외
한일협력위원회(KJCC) 사무총장
◇2016.01.22 ‘불타는 돌’ 아오지(阿吾地)
중국의 소수민족 언어 중 만주어(滿洲語)가 차츰 사라지고 있다. 만주어는 본래 백두산 근처에 살던 여진족(女眞族)의 언어였다. 17세기 초 누르하치가 여진족을 통일하여 금(后金)을 세우고 그의 아들 황타이지가 민족 이름을 여진에서 문수보살을 의미하는 만주로 바꾸면서 나라 이름도 청(淸)으로 고쳤다.
그 후 청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고 베이징을 수도로 정하면서 만주어는 지금의 중국보다 더 넓은 지역에 세력을 펼치게 된다. 남쪽으로는 남중국해와 만나고, 북쪽으로는 지금의 몽골 인민공화국, 동쪽으로는 연해주와 헤이룽장 이북, 서쪽으로는 중앙아시아의 카슈가르에 이르는 역사상 가장 방대한 영토의 공용어였다. 지금 세계에서 가장 널리 쓰이고 있는 영어(英語)를 연상시킨다.
중국 대륙의 정복자 만주족은 처음에는 토착어 중국어(漢語)를 알지 못했다. 차츰 중국의 수준 높은 문화에 빠져 들면서 중국화(漢化)된 만주족은 자신들의 언어를 잊기 시작했다. 1912년 세계 최강의 대청제국이 멸망하자 그들의 공식 언어였던 만주어를 누구도 지켜주지 않았다.
베이징 자금성의 궁궐 전각 현판의 한자어 옆의 이상한 문자가 만주어(문자)이다. 꼬불꼬불하여 보기에 따라서는 문자라기보다 부스러진 라면처럼 보인다. 명(明)대 건축된 자금성 전각의 이름은 모두 한자어였는데 청나라가 자금성을 자신들의 법궁으로 사용하면서 전각의 이름을 일부 바꾸었다. 그리고 한자어 이름 옆에 만주어를 병기하였다.
조선조 고종의 외교 고문으로 활동했던 언어학자 묄렌도르프가 이러한 만주어를 라틴문자로 전사하는 방법을 고안한 이른 바 묄렌도르프 표기법을 창안하였다.
중화민국이 세워지면서 동화정책에 의해 만주족은 자신의 고유의 성과 이름을 버리고 한자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예를 들어 아이신쥐러(愛新覺羅)성을 가진 황족은 모두 진(金)씨로 바꾸었다. 아이신쥐러가 본래 황금을 의미하므로 진씨가 된 것이다.
만주족 대부분이 동화되어 만주어도 사라지고 있지만 중국 신장(新疆)위구르 자치구의 끝자락인 이리(伊犁)강 남쪽의 차부차얼(察布査爾) 시버(錫伯) 자치현에는 만주어가 화석처럼 남아 있다. 금년이 자치현 설립 62주년이 된다.
중국 최대의 영토를 정복한 건륭황제 연간인 1764년에 청의 조정은 새로운 정복지 신장(新疆 New Territory)의 토착인 위구르 족의 반란을 막기 위해 대흥안령 산록에서 사냥과 목축을 하던 용맹한 시버(錫伯) 팔기군을 가족과 함께 이주(西遷)시켰다. 18개월이 걸린 민족 대이동이었다.
시버 팔기군은 척박한 중앙아시아에 이주되었으나 항상 푸른 산림이 무성한 동북지방의 고향으로 돌아 갈 것을 염원하면서 살아 왔다고 한다. 오늘날 중국의 영토로 신장이 남아 있었던 것도 용맹한 시버 팔기군 수비대가 그 땅을 지켜 주었기에 가능했는지 모른다.
19세기 초 영국의 탐험대에 의해 발견되어 서양 언어학자들의 주목을 받고 있는 시버 팔기군 후예 3만 여 명이 아직도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목화재배를 생업으로 살고 있다. 그들의 일부는 250여 년 전 이주 당시의 옛 만주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젊은 세대들의 무관심으로 언제 사라질지 모른다.
만주어는 사라지고 있는 반면에 만주어 지명은 과거 만주족(여진족)이 거주했던 중국의 동북지방과 함경도에 아직도 남아 있다. 하얼빈(哈爾濱 어망을 말리는 곳), 하이란강의 하이란(海蘭 느릎나무), 지린(吉林 강변), 쑹화강의 쑹화(松花 은색) 등이 만주어 지명이다.
함경도의 탄광으로 악명이 높은 아오지(阿吾地)는 ‘불타는 돌’ 온천으로 유명한 주을(朱乙)은 ‘뜨거운 물’ 두만강의 두만(豆滿)은 ‘만개의 지류’라는 의미의 만주어 지명이다.
오호츠크 해의 러시아 섬 사할린도 만주어다. ‘검다’는 의미의 사할린은 본래 흑하(黑河 사할린 울라)였다. 중국은 헤이룽장(黑龍江) 러시아는 아무르 강이라고 부르는 전장 4000km로 세계 8위의 강이다. 흑하의 지류인 백두산 천지에서 발원된 강의 모습은 검은 색이 아니고 은색이라 하여 쑹화강(銀河)의 이름이 나왔다고 한다. 사할린의 지명은 만주족이 부른 흑하의 하구에서 보이는 섬 즉 ‘사할린 울라 앙가 하다’의 긴 이름에서 다른 말은 없어지고 ‘사할린’만 남았다고 한다.
중앙일보
◆한중일 삼국지
◇2016-08-23 후버 대통령의 중국어
▲스탠퍼드 대학은 제1회 졸업생인 후버대통령을 기념하여 후버타워를 세웠다
최근 미국 캘리포니아의 스탠퍼드 대학을 찾았다. 대학의 상징인 후버 타워에 올랐다. 스페인 풍의 아름다운 대학 의 캠퍼스가 한눈에 들어 온다. 대학의 건물군이 베이징의 사합원(四合院) 처럼 사방으로 옹기 종기 모여 있는 것이 특이 했다. 후버 타워에서 남중국해를 둘러싸고 미중간 갈등의 파고를 생각했다. 한국의 사드 배치에 대해 중국이 지나치게 어깃장을 놓는 것도 결국 미중 관계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후버 대통령이라면 오늘의 미중 관계를 어떻게 풀어 낼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허버트 후버(1874-1964) 대통령은 이곳 스탠퍼드 대학의 제1기 졸업생이다. 그를 재선에 실패한 무능한 대통령으로 보는 사람도 있지만 시대에 앞선 인도주의 인물로 평가되기도 한다. 그는 젊은 시절 광산 기술자로 중국에 부인과 함께 근무하여 중국을 이해하고 중국어가 유창하였다.
후버 대통령은 미시시피 강 상류의 아이오와 주의 가난한 집안출신으로 대학에 진학할 형편이 못되었다. 마침 캘리포니아의 정치가이며 거부였던 스탠퍼드 부부가 요절한 아들을 위해 스탠퍼드 대학을 설립하여 가난한 학생을 학비면제로 입학 시켰다. 후버 대통령은 이 대학에서 지질학(geology)을 전공하여 광산 기술자로 활동하게 된다.
▲허버트 후버 미국 대통령과 부인 루 헨리 후버
후버 대통령은 25세가 되는 1899년 지질학과의 클라스메이트인 루 헨리와 결혼하였다. 두 사람은 당시 미지의 세계인 중국(淸) 텐진으로 건너 가 영국계 광산회사에 취직을 하였다. 그 무렵 중국에는 의화단의 난이 일어난다. 1898년 4월부터 기독교의 선교활동이 왕성했던 산동성 지역이 극성스러웠다.
의화단은 철도 전선 교회 등 서양에서 들어 온 것은 무조건 파괴하고 선교사를 살해하였다. 당시 실권자 서태후의 암묵적 지원으로 고무된 의화단은 1900년 6월 베이징의 외국공관을 포위 공격하였다. 의화단 세력이 늘어 나면서 서구 열강들의 불안이 증대된 상황에서 외교공관이 위기에 놓이자 영국 미국 러시아 등 연합군은8개국은 연합군을 조직하여 출병을 결정하였다.
영국의 해군 사령관 시모어의 지휘아래 연합군은 6월17일 텐진 포대를 점령하고 7월14일 텐진시를 함락시켰다. 이 때 텐진에 있던 후버 대통령 부부는 위험을 무릎쓰고 의화단의 공격대상이 된 텐진 거주 외국인의 안전을 위해 활동하였다. 그 후 연합군의 활동은 찰톤 헤스톤 과 에바 가드너 주연의 1960년대 영화 “베이징의 55일”에 잘 나타나 있다.
▲허버트 후버 미국 제31대 대통령
후버 대통령의 중국에서의 인도주의적 활동 경험은 1914년 8월 1차 세계대전 발발 시에도 재연된다. 그는 당시 런던에 주재하는 민간인 신분으로 영국에 거주하거나 유럽에 여행중인 수 많은 미국인을 도와주는 자원봉사활동을 조직 그들을 안전하게 귀국시킨다.
1차 세계대전시에는 독일에 의해 침공당한 벨기에인이 식량위기에 빠지자 이를 구제하기 위한 전국조직을 결성하여 벨기에인을 기아에서 구해 낸 것으로 유명하다. 후버 대통령의 중국에서 시작한 인도적 지원활동은 그를 미국의 31대 미국 대통령이 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후버 대통령 부부의 중국어 사랑은 대통령 재임 시 백악관에서 주로 중국어로 대화하여 도청을 예방하고 프라이버시 침해를 받지 않았다고 한다.
◇2016-08-31 윤왕기 자주 만나라!
▲손잡는 한중일 외교장관. 오른쪽부터 윤병세 외교장관, 기시다 후미오 일본외상, 왕이 중국 외교부장.
◆한중일 3국 관계, 한중↔일 구도에서 한일↔중 구도로
한중일 3국의 외교 풍향이 달라졌다. 조금 전만해도 역사공조의 이름으로 한국과 중국이 협력하여 일본을 압박하는 상황이었으나 북한의 핵. 미사일 위협의 가속화와 고도화로 한일은 안보 공조로 중국의 협력을 구하는 모양새다.
지난해 12월 28일 한일 양국의 현안이던 일본군위안부문제가 합의되면서 한일관계는 점차 개선의 길로 들어서고 있다. 지난 7월 28일 ‘화해치유재단’이 공식 출범하였고 일본은 주한 일본대사관의 소녀상 이전에 연계하지 않고 재단출연금 10억 엔 출연을 각의에서 결정하였다.
반면에 한중관계는 한랭기류가 계속 흐르고 있다. 한국의 고고도미사일 방어시스템(사드 THAAD) 배치 결정을 두고 중국의 반발이 줄어들지 않고 있다. 심지어 중국은 북한을 감싸면서 북한의 미사일 발사 후 소집한 8월 초 유엔 안보리에서 사드 문제를 들어 북한의 규탄성명을 무산시켰다.
중국의 패권적 야욕의 민낯이 들어 남에 따라 국제적인 여론은 물론 한국내의 중국여론도 크게 나빠지고 있다. 한국으로서는 그간 축복으로 평가 되었던 한중관계가 안보 앞에는 아침 안개처럼 실체가 없는 것을 알게 된 셈이다.
중일관계도 긴장은 계속되고 있다. 중국은 7월12일 발표된 남중국해에 대한 상설중재재판소의 판결에 승복하라는 일본의 반응에 대한 불만으로, 센카쿠(尖閣) 열도 중국명 댜오위다오(釣魚島)의 일본 영해에 해양경비정을 수차 침범시켜 일본과 마찰을 빚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서도 한중일 외교장관의 회담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일본으로서는 한중일 3국 정상회담이 작년의 서울에 이어 금년 하반기에 일본에서 개최될 예정이다. 일본으로서 이에 대한 준비로 중국을 배려하는 분위기 조성을 위해 아베(安倍) 수상과 신임 이나다(稻田) 방위상의 연례 야스쿠니(靖國) 신사 참배를 하지 않았다.
◆ 항저우 G20 회의, 3국 간 문제 풀 좋은 계기
중국의 경우에도 이번 9.4, 5일간 중국 항저우(杭州)에서 개최되는 G20 정상회담 관련 현안문제 해결을 위해 3국 외교장관 회담이 필요했다. 남중국해의 자유항행, 북한의 핵. 미사일 고도화, 한국의 사드 배치 등 한중일 3국 외교장관이 마주 앉아 풀어야 할 문제가 산적해 있다.
지난 8월 24일 도쿄에서 한중일 외교장관회담이 어렵사리 개최되었다. 마침 그날 북한의 김정은은 이에 항의라도 하는 듯 잠수함탄도미사일(SLBM)을 발사 500km 비행을 성공시켰다.
북한의 변치 않은 도발 근성은 한국과 일본은 물론 중국도 분노케 하였다. 지난 8월 26일 유엔 안보리 북한 규탄성명 채택에서 8월 초와 달리 중국의 동의를 받아 낸 것은 도쿄의 외교장관 회담의 효과로도 볼 수 있다.
윤병세, 왕이(王毅), 기시다(岸田) 3국의 외교장관 ‘윤왕기’는 자주 만나야 한다. ‘윤왕기’가 처해 있는 동북아 정세는 예측불허의 김정은 정권에 의해 날로 요동치고 있다. 특히 왕이 외교부장의 역할이 점점 커 갈 것 같다.
◆ 왕이 중국 외교부장은 일본 문화, 마음까지 아는 일본통
필자는 오랜 중국 대사관 근무로 왕이 부장을 부장조리(차관보) 시절부터 보아왔다. 왕이 부장은 일본어가 능통하다. 대학(二外)에서 일본어를 전공하여 일본어 특기자로 외교부에 발탁되었다. 입부 직후 후야오방(胡耀邦) 총서기의 방일을 수행하였다.
왕이 부장은 일본어뿐만이 아니라 일본문화와 일본인의 마음을 잘 이해한다. 후 총서기의 방일시 연설문을 담당하였는데 그 내용이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膾炙)될 정도로 명문이었다고 한다.
그 후 주일본 대사관 참사관 등 지내고 나중에는 주일본 대사까지 역임하였다. 일본에 대한 깊은 이해로 리츠메이칸(立命館)대학의 명예박사를 받았다.
왕이 부장은 고교를 졸업 후 문화대혁명으로 헤이룽장성(黑龍江省)에 수년간 하방(下放)된 적이 있다. 왕이 부장은 외교부의 다른 간부보다 한반도 문제도 잘 이해하고 6자회담의 대표도 지냈다.
왕이 부장은 중국의 지도부에서 일본을 가장 잘 아는 자타가 공인하는 일본통이다. 친일파라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일본을 의식적으로 비판한다는 분석도 있다.
시진핑(習近平)주석은 미일관계를 양제츠(楊潔箎) 국무위원(부수상급)과 왕이 부장의 양두마차로 수행한다고 한다. 내년 가을 당 대회에서 지도부가 대폭 바뀐다. 왕이 부장은 정년에 걸리는 양제츠 국무위원의 후임이 되는 것이 우선의 목표로 보인다. 따라서 왕이 부장은 국내용일지 모르지만 당분간은 한국과 일본에 대해 강경발언이 계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한중일 3국은 영토문제며 역사적 민족주의로 얽혀 있는 것이 많다. 중국의 최고 지도부 특히 군부에서는 남중국해와 동중국해에서 일본과 갈등관계를 중시하고 한국에 대해서는 사드 배치를 이해하지 못한다. 순망치한(脣亡齒寒)의 전통적인 북한과의 관계에 대한 미련도 남아 있다.
◆ 어려운 양자 회담보다 손쉬운 3자 회담
양자 회담이 어려울 수 있는 점이다. 그러나 3자 회담은 다자 차원이 되어 서로 만나기 쉬운 점이 있다. 일단 만나면 풀어야 문제는 테이블 위에 올리면 된다. 3국은 환경문제 등 연성(軟性) 이슈도 많이 얽혀 있다. 한국과 일본을 잘 알고 동북아 정세 변화에 열쇠를 쥐고 있는 왕이 부장을 자주 불러냄으로써 ‘윤왕기’는 주기적으로 자주 만나야 한다. 누군가 “외교는 타협의 예술”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2016-09-14 한중일 3국의 추석 어떻게 다를까?
▲한국,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3국의 추석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외교관으로서 이웃 양국에서 근무한 필자로서는 같은 동양문화권으로서 ‘같은 듯 하면서도 서로 다른 추석문화’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 중국 중추제(中秋節·仲秋節)-2008년부터 공휴일로
중국은 추석을 중추제라 부른다. 춘하추동 4계절을 초(初) 중(仲) 만(晩)으로 구분하여 가을의 경우에도 초추(初秋) 중추(仲秋) 만추(晩秋)로 나눠 부른다. 중추제는 음력 8월 15일 가을의 한 가운데를 기린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이 때가 농업사회에서는 수확의 계절이기도 하다.
중추제는 설날(1.1 春節·춘제) 정월대보름(1.15 元宵節·위안샤오제)과 함께 3대 명절 중 하나다. 춘제(春節)는 과거부터 3일 연휴였지만 중추제는 2008년에서야 비로소 하루 공휴일로 지정됐다.
◆ 한족을 단합시킨 웨빙(月餠)
민족 대이동을 하는 춘제와는 달리 중추제에는 비교적 간소하게 웨빙을 주고받으며 명절 기분을 낸다. 중국에서 근무할 때 중국인 지인에게서 웨빙을 선물받곤 했는데 단팥소가 너무 달아 맛있게 먹지는 못했던 기억이 난다.
웨빙은 만드는 재료에 따라 가격도 천차만별이다. 가끔 뇌물로도 사용돼 중국 정부는 최근 부패 근절 방침을 내려 고급 웨빙을 못 만들게 금지했다. 웨빙의 기본은 밀가루 빵에 단팥소, 대추 등 말린 과일을 넣어 둥글게 만든다. 중국 사람들은 우리의 송편처럼 웨빙을 먹어야 중추제를 제대로 지낸다고 느낀다. 우리의 송편과 중국의 웨빙은 달(月)의 모습을 형상화했는데 웨빙은 둥근 달이고 송편은 반달이다.
중국 사람들은 가득 찬 것을 좋아하여 달도 보름달(滿月 full moon)을 좋아한다. 중국 사람들과 술을 마시다 보면 술잔의 술이 줄어들면 반드시 누군가가 첨잔을 해서 채워 놓는다. 중국 사람들이 즐겨 사용하는 ‘원만(圓滿)’라는 말은 둥글고 가득 찬 모습을 말한다. 가족의 화목이나 회사의 발전도 원만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자동차 중에서도 벤츠나 아우디가 특히 인기 있는 것은 상표가 원(圓)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웨빙은 한족(漢族)의 저항정신과 연결돼 있다. 몽골의 원(元)나라가 중국을 지배하고 있을 때 끊임없는 한족의 저항을 받아 결국 100년을 넘기지 못하고 멸망했다. 당시 몽골의 압제에 신음하던 한족들은 몽골인은 먹지 않는 웨빙 속에 반원거병(反元擧兵)의 비밀메시지를 넣어 몽골 관헌의 눈을 피해 봉기를 하였다고 한다.
◆ 일본의 추석, 오봉-음력 대신 양력으로 쇠어
주일 도쿄대사관에 근무할 때 8월 15일 광복절을 끼워 여름휴가를 준비했다. 자동차로 일본의 주요 역사 유적지를 둘러볼 요량으로 일본인 지인과 상의했더니 그는 “오봉데스요! 오봉! (오봉입니다! 오봉!)”하고 놀랜다.
일본은 추석을 양력 8월 15일 전후에 지내면서 ‘오봉’이라고 부른다. 우리의 추석처럼 민족대이동이 이루어지는 기간이다. 도로가 막히기 때문에 자동차 여행이 제대로 안 된다는 것이다. 이때는 항공기 기차 등도 예약이 꽉 차서 외국인들은 이 기간에는 움직이지 말고 집에 가만히 있는 것이 좋다고 충고한다.
오봉 때에는 흩어진 가족이 모여 ‘하카(墓)마이리’라고 부르는 성묘를 하고 지역에 따라 조상신을 위로하는 ‘봉오도리’라는 축제를 준비한다. ‘봉오도리’에는 가벼운 여름옷을 입은 남녀노소가 함께 춤을 추면서 공동체 의식을 높이는 것 같았다.
지인에 따르면 오봉은 우란분회(盂蘭盆會)을 줄여 말하는 것으로 우란분회는 불교행사의 하나라고 한다. ‘우란’은 고대 인도 페르시아어의 음역으로 본래의 의미는 ‘조상의 영혼’이라고 한다. 분(盆)은 조상에게 드리는 음식을 담는 용기를 말한다.
◆ 불교행사로 바뀐 일본 추석
과거 일본에서는 음력 7월 1일이 되면 저승 문이 열렸다가 중원(中元)으로 부르는 7월 15일에 다시 닫힌다고 믿었다. 그 기간에 조상의 영혼이 외출할 수 있어 이때 각 가정에서는 조상을 맞이하여 음식을 공양했다.
사회가 발전하면서 조상 공양의 풍습이 친지나 거래처 등 평소에 신세를 진 사람들에게 선물을 보내는 관습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이러한 선물을 중원(中元)을 전후하여 주고받는다 하여 일본 사람들은 이를 ‘오주껜(お中元)’이라 부른다.
일본에 살다가 느낀 것은 메이지(明治)유신 이래 과거 음력을 모두 양력으로 바뀌어 달(月)과 관련되는 전통 행사도 양력으로 바뀌어 필자가 보기엔 혼란스러워 보였다. 추석은 본래 음력 8월 15일이지만 양력으로 맞춰 쇠다 보니 달과 관련이 없게 된다. 우리와 같은 추석의 개념이 없어진 것이다.
한반도의 추석은 과거 신라시대부터 있었다고 중국의 역사서에 기록돼 있다. 신라의 문화가 일본에 전달되어 일본에도 추석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독실한 불교신자인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일본을 260년간 지배하면서 일본이 불교국가로 되다 보니 민속적인 추석보다 불교의 행사의 일환으로 바뀐 것 같다.
추석은 음력에서 나온다. 음력을 제한적으로도 사용하고 있는 우리나라와 중국은 보름달의 추석 분위기를 느낄 수 있지만 음력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 일본은 사실 추석은 없다고 봐야 할 것 같다. 보름달이 뜨고 다소 시원해진 이맘 때 일본 어디에서도 추석이야기를 들을 수 없다.
-동아일보
◇2016.10. "아프리카를 잡아라"-중일인(中日印) 3국 경쟁 치열
지구의 마지막 남은 프런티어가 아프리카라고 한다. 지하자원은 풍부하고 여전히 개발은 되지 않은 아프리카가 최근 투자와 진출의 대상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아프리카는 아시아 다음으로 넓고 세계인구의 15%인 12억 명이 살고 있다. 세계적인 불황 속에서도 경제성장률이 연평균 5% 이상인 아프리카는 기회의 땅이기도 하다.
◆ 아프리카는 ‘추위가 없는 나라’라는 뜻
아프리카(Africa)라는 말은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됐다. 그리스인들은 BC 146년 로마가 카르타고를 점령한 뒤 이 곳을 APHRIKA(without cold)라고 불렀다. 이후 북아프리카를 점령한 줄리어스 시저(Julius Caesar)는 북아프리카를 APRICA(sunny)라고 불렀다. 하지만 아프리카는 오랜 기간 서유럽이나 아시아의 관심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했다. 17세기 이후 영국과 프랑스 등 유럽의 열강이 경쟁하듯 진출해 식민지로 전락한 뒤 아프리카의 발전은 더욱 지체됐다.
◆ 말라리아 풍토병으로 외교관들 고생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아프리카는 줄줄이 독립했지만 발전은 더뎠다. 아프리카 나라들은 독립 후 세계 각국과 외교관계를 맺었지만 각국 외교관들은 가장 낙후된 아프리카로 근무 발령이 나는 걸 두려워했다. 외교관들이 가장 무서워한 것은 말라리아. 지금은 예방 및 치료약이 개발돼 크게 문제가 안 되지만 20세기만 하더라도 말라리아는 목숨을 잃을 정도로 치명적인 아프리카의 풍토병이었다. 따라서 아프리카 갈 때는 각국 정부는 말라리아 예방약을 복용하기를 권했다. 예방약으로도 안심이 안 되어 서방 선진국 가운데엔 보통 2, 3년인 해외 근무를 아프리카에 한해 1년으로 줄여주는 나라도 있었다. 필자는 아프리카에서 근무하지는 않았지만 출장이 잦았다. 그 때마다 ‘진 토닉’을 많이 마셨다. 주변 외교관들이 “‘진 토닉’은 말라리아 예방을 위해 개발된 술”이라며 아프리카 체류 시 이를 많이 마시길 권유했기 때문이다. 진 토닉에는 말라리아 예방과 치료에 쓰이는 퀴닌 성분이 들어 있다고 한다. 덕분인지 아프리카 출장 기간 말라리아에 걸리진 않았다.
▲2013년 3월 아프리카 탄자니아를 방문한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이 자카야 키크웨테 당시 탄자니아 대통령의 영접을 받고 있다. 중국은 100억 달러 규모의 탄자니아 항구 개발 종합프로젝트에 투자키로 합의했다.
◆ 중일인(中日印) 3국 아프리카 진출 경쟁 치열
아프리카 진출에 가장 열심인 나라는 중국과 인도, 일본 등 3개국이다. 21세기 들어 중국은 아프리카에 물량공세를 벌이고 있다. 중국은 아프리카 진출을 위해 ‘중국 아프리카 협력포럼(FOCAC)’을 설치했다. 아프리카엔 산업 인프라 건설을 위해 중국인이 집단으로 거주하고 있는 나라도 적지 않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지난해 12월 남아프리카의 요하네스버그에서 개최된 ‘중국 아프리카 협력포럼’에 참석해 2018년까지 600억 달러(66조 원)을 투자하겠다고 약속했다. 중국의 일대일로(一帶一路)에 의한 새로운 해상 실크로드인 ‘진주목걸이(String of Pearls)’는 인도양을 지나 아프리카 동부로 연결돼 있다.
지리적으로 인접한 인도는 아프리카와 인연이 깊다. 식민 모국인 영국과 함께 100년 전부터 아프리카에 진출해 철도 건설 등에 참여했다. 2015년 인도 뉴델리에서 개최된 ‘인도 아프리카 정상회의(IAFS)’에서 나렌드라 모디 수상은 아프리카 인프라 건설을 위해 100억 달러(11조 원) 차관을 약속했다. 올 7월에는 모잠비크 남아공 탄자니아 케냐 등 인도양 연안 4국을 방문하여 경제협력을 약속했다.
▲올해 8월 케냐 수도 나이로비에서 열린 아프리카개발회의에 참석한 아베 신조 일본 총리
◆ 유엔에서 아프리카 한 표가 아쉬운 일본
일본도 이에 뒤질세라 아프리카를 집중 공략 중이다. 아베 신조(安倍晉三) 총리는 올해 8월 케냐 나이로비에서 개최된 일본과 아프리카 50개국 정상이 참석하는 ‘아프리카 개발회의(TICAD)’에 부인 아키에(昭恵) 여사와 함께 참석했다. 중국을 의식해서인지 일본도 2018년까지 300억 달러(33조 원)를 투자하겠다고 약속했다.
일본 유수의 기업인을 대동하여 아프리카를 방문한 아베 총리는 신뢰 높은 일본 기업의 이미지를 선전하면서 안정된 아프리카 건설을 주장했다. 중국의 양보다 일본의 질을 강조한 것이다. 1993년 일본 주도로 만들어진 아프리카개발회의는 당초 5년마다 일본에서 회의를 열었지만 최근엔 이를 3년으로 간격을 줄였다. 중국과의 경쟁을 염두에 둔 일본의 아프리카 중시 정책이 반영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유엔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진출을 노리는 일본은 유엔의 개혁을 통해 아프리카 대륙에서도 안보리 상임이사국이 배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엔 가맹국 193개국 중 아프리카에는 54개국 즉 전체의 25%가 넘기 때문이다.
▲올해 5월 에티오피아를 방문한 박근혜 대통령(왼쪽에서 두번째)이 물라토 에티오피아 대통령(왼쪽에서 세번째)과 함께 코리아 에이드 에티오피아 출범식에 함께 참석해 현장을 둘러보고 있다.
◆ 아프리카 코리아 에이드(Korea Aid) - 뒤늦은 한국, 따라잡을까?
올 5월 박근혜 대통령은 에티오피아 우간다 케냐 등 아프리카 3국 순방에서 ‘코리아 에이드(Korea Aid)’ 사업을 출범시켜 맞춤형 지원 사업을 개시했다. 지난달에는 서울에서 한국과 아프리카와의 협력을 모색하는 국제 포럼이 개최됐다. 이 포럼에서 아프리카 측 참석자들은 아시아의 최빈국에서 단기간에 선진국에 진입한 한국의 ‘새마을 운동’ ‘한강의 기적’ 등을 아프리카에도 접목시켜 달라는 요구가 많았다.
우리는 아프리카 진출에 있어 협력기반이 미약한 후발주자다. 게다가 중국 일본 인도처럼 많은 자금을 투입할 수 있는 나라도 아니다. 하지만 한국은 제국주의 시대 열강에 의해 식민지가 된 경험을 아프리카 54개국과 공유하고 있다. 아프리카 나라들이 한국의 경제 발전의 성공 신화를 공유하고 싶어하는 점이 바로 이 때문이다. 단순히 선진국의 원조를 바라는 게 아니라 자신들도 한국처럼 노력하면 선진국으로 바뀔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한국과의 경험 공유를 바라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꼭 대규모 예산과 인력을 투입해야 아프리카의 마음을 잡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프리카에서도 '한강의 기적'이 재현될 수 있도록 한국은 교육 문화 지식산업 분야에서 다양한 지원활동을 펼칠 수 있을 것이다.
정부는 올해 박근혜 대통령의 아프리카 순방을 계기로 아프리카에 대한 관심을 키워 우리에게 맞는 아프리카 지원사업을 개발 중이다. 박 대통령의 아프리카 순방을 계기로 아프리카의 잠재적 가치를 인정하고 국제사회에서 부상하는 아프리카의 위상을 감안해 선택과 집중을 통해 아프리카 국가들과 전략적 협력을 다져야 할 때다. 21세기 후반엔 ‘아프리카를 얻는 자가 세계를 얻는다’라는 말이 나올 수도 있다.
: 코리아 에이드(Korea Aid):
박근혜 대통령이 올해 5, 6월 아프리카 3개국(에티오피아, 우간다, 케냐)을 순방하면서 처음 선보인 한국형 개발협력 모델. 개발협력과 문화외교(K 팝과 전통문화 공연 등)를 결합한 새로운 방식으로 공적개발원조(ODA) 사업이다. 보건 음식 문화요소를 갖춘 차량을 이용해 찾아가는 서비스를 제공한다. 음식 4대, 문화 1대, 지원차량 2대 등 총 10대의 차량을 활용해 올해 5, 6월 아프리카에서 시범실시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추진된 것으로 알려졌다.
◆2017.07.05 ‘아무르’(黑龍江)는 알고 있다.
19세기에 들어와서 세계는 대영제국의 흔들림 없는 패권 아래에서도 많은 지식인은 앞으로 세계를 지배할 나라로 미국과 러시아를 꼽았다. 미국은 광활한 서부 개척을 앞두고 있었고 러시아는 시베리아를 거쳐 북미의 알래스카까지 확장된 국토의 잠재력을 믿었다.
미국은 남북전쟁의 내전을 극복하고 서부 개척과 러시아로부터 알래스카 마저 사들여 예상대로 세계 일류 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러시아는 시베리아 개척을 위한 철도를 부설하였음에도 러일전쟁 패배와 1차 세계대전 참전 그리고 볼셰비키 혁명 등 다사다난한 국내외 사정으로 시베리아의 개척이 늦어지면서 후진국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러시아는 한국에서 가장 가까운 유럽의 나라이다. 러시아의 큰 도시의 하나인 블라디보스토크는 서울에서 비행기로 2시간 거리이고 북한에서는 두만강만 건너면 바로 러시아이다. 국토가 좁고 남북으로 갈려 있는 한국의 젊은이들을 한반도와 육속 되어 있는 러시아의 시베리아에 진출하여 언젠가 찾아올 통일에 대해 준비를 해야 한다.
1882년 청국의 일본 공사관 참사관 황준센(黃遵憲)은 ‘조선책략’을 통해 러시아를 ‘地球之上 莫大之國 爲曰 俄羅斯’라고 소개하면서 조선에 러시아의 잠재력에 경각심을 준 것이다. 러시아의 비밀병기로 불리는 시베리아는 ‘잠자는 땅(sleeping land)'의 의미이다. 아직도 시베리아는 한국인들이 깨워주기를 기다리는 ’잠자는 미녀(sleeping beauty) ‘인지도 모른다.
러시아 제국의 기원
6세기 동유럽의 볼가 강과 도내프로 강변의 평원에 사르마트(Sarmat)라는 유목민이 한가롭게 살고 있었다. 북유럽의 용맹한 고트(Goth)족은 조용한 사르마트 죽을 납치하여 비잔틴(동로마)제국에 노예로 팔았다. 착하고 순종적인 사르마트 죽은 로마인의 노예로 인기가 높았다. 그 후 사르마트 족이라는 이름은 역사에서 사라지고 노예라는 의미의 슬라브 족이 나타난다.
9세기 경 사르마트 즉 슬라브 족이 사는 동유럽에 스칸디나비아 바이킹족의 일파인 바랑기아인이 나타난다. 바랑기아인은 볼가 강과 드네프로 강의 물길을 이용 발틱해에서 흑해까지 그리고 비잔틴제국과의 무역에 종사하였다. 슬라브 족은 강을 따라 뱃길을 잘 아는 바랑기아인을 ‘루시’라고 불렀다. ‘루시’는 ‘배를 잘 타는 뱃사람‘이란 의미이다.
슬라브 족은 외부 민족의 침입과 부족끼리 갈등을 바랑기아인 수장인 류리크에게 해결해 달라고 요청한다. 슬라브 족을 위탁 지배해 외부의 침입을 막아 달라는 의미이다. 류리크는 슬라브 족을 모아 새로운 왕조를 결성한다. 바랑기아인(루시)과 슬라브 족의 이중구조의 왕국이 860년에 세워진다. 류리크 왕조는 지금의 우크라이나 키에프를 중심으로 대공국을 세우고 기타 지역에 루시 귀족이 지배하는 공국을 만들어 분할 지배하도록 하였다.
키에프 대공국의 블라미드르 대공은 슬라브 족의 다신교와 태양 숭배 신앙에 가름하는 선진적인 일신교를 도입하여 통치의 안정을 취하고자 하였다. 주변에는 비잔틴 제국의 동방정교와 이슬람교가 있었다. 긴 겨울의 추위를 막아주는 보드카를 버릴 수 없는 슬라브족에게는 금주를 해야 하는 이슬람교는 맞지 않았다. 반면에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의 소피아 성당의 찬란한 빛에 현혹된 블라미드르 대공은 동방정교를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988년경이다.
동방정교를 받아들이기 전에도 키릴로스라는 선교사가 찾아와 문자가 없는 슬라브 족을 위해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이용 새로운 문자를 만들어 성서를 번역 선교활동을 하였다. 그때 만든 문자가 지금 러시아에서 사용되고 있는 키릴 문자이다.
1240년 중앙아시아의 몽골족은 류리크 왕조의 키에프 대공국을 멸망시킨다. 류리크 왕조는 모스크바 대공국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국토가 몽골족과 타타르(돌궐족)의 지배를 받는다. 몽골 지배 300 여년 후 1552년 모스크바 대공국은 카잔의 타타르 세력을 물리치고 류리크 왕조를 복원한다. 모스크바 붉은 광장의 양파 모양의 지붕을 한 바실리 대성당은 모스크바 대공국의 이반 4세가 카잔을 정복한 기념으로 세운 성당이다.
바실리 성당이 너무 아름다워 이반 4세는 같은 성당을 다른 곳에 못 짓게 하기 위해 건축가의 눈을 뽑아 버렸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그만큼 이반 4세는 잔혹한 군주로 폭군 이반(이반 뇌제) 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비잔틴 제국의 계승자
1453년 비잔틴제국은 오스만 터키에 의해 멸망된다. 류리크 왕조의 이반 3세는 비잔틴제국의 마지막 황제의 질녀와 결혼하여 비잔틴제국의 정통성을 잇는다는 의미로 비잔틴제국의 문장인 쌍 독수리를 채용하고 비잔틴 황제의 이름 차르(로마 황제 카이사르의 러시아식 발언)를 사용한다. 이반 3세는 동방정교의 보호자로 모스크바를 ‘제3의 로마’로 자처하였다. 러시아 말에 고맙다는 ‘스파시바’의 의미는 ‘구해주세요(스파시’)와 ‘신(神 바)’의 합성어로 ‘신이여 (고맙게 해준) 당신을 구해주세요’라는 의미라고 한다.
▲중국과 러시아를 가르는 아무르강 [출처:중앙포토]
1610년 이반 4세 사후 류리크 왕조의 대가 끊어지면서 이반 4세의 처가 가문인 미하일 로마노프가 귀족회의에서 차르에 선출됨으로써 로마노프 왕조가 시작된다. 로마노프 왕조는 1917년 볼셰비키 혁명으로 니콜라이 2세가 퇴위될 때까지 300년간 이어 갔다. 러시아는 류리크와 로마노프 2개 왕조 1100년의 왕조 역사가 끝나고 공화정 역사가 이어왔다. 금년이 볼셰비키 혁명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로마노프 왕조는 모스크바에서 시작하였지만 5대 표트르 대제는 유럽에 가까운 발틱해 연안에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여 1712년 천도하여 모스크바 대공국에서 새로운 러시아 제국을 열었다. 성 페테르(베드로)의 보호를 받는다는 의미로 수도 이름을 상트페테르부르크라고 불렀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 이듬해 1918년 모스크바로 환도될 때까지 200여 년간 상트페테르부르크가 러시아 제국의 수도였다.
흔히 러시아를 대륙민족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러시아는 바이킹의 후예 루시가 만든 해양민족이다. 러시아의 지배층인 루시들은 바다를 무서워하지 않는 모험심으로 시베리아 초원의 바다와 삼림의 바다를 개척한 것이다. 진취적인 루시와 순종적인 슬라브족의 조화를 통해 오늘날까지 강대국 러시아가 이어지고 있는지 모른다.
시베리아 발견과 황금 같은 모피
러시아는 항해를 잘하는 뱃사람이라는 이름대로 초원과 삼림의 바다를 항해하여 시베리아를 발견한다. 스페인 포르투갈의 유럽 뱃사람들이 지리상의 발견을 하는 것과 유사하다. 유럽은 중남미 신대륙에서 금과 은을 가져오고 인도에서는 향료를 가져와 큰 수익을 올렸다. 러시아는 시베리아를 개척 담비 수달 밍크 등 모피를 사냥하여 유럽시장에 팔아 국부를 키운다. 당시 유럽은 소빙하기로 혹독한 겨울의 추위를 이기기 위해 러시아의 모피가 절대 필요했다.
알래스카 진출과 매각
황제가 지원하는 모피 사냥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지면서 러시아는 유라시아 대륙을 석권하고 베링해협을 건너 알래스카까지 진출한다. 국력을 키운 러시아는 오스만 터키의 내정에 간섭하다가 터키를 지원하는 영불 연합군과의 크림전쟁(1853-56)에서 패배한다. 러시아는 전비 지출에 따른 재정문제로 알래스카를 미국에 매각하게 된다. 일부 역사가들은 러시아의 알래스카 매각은 실패한 정책이라고 하지만 러시아로서는 실익을 챙긴 성공한 거래였다.
캐나다 등 북미대륙을 식민지로 가지고 있는 영국은 떠오르는 미국의 세력을 견제할 필요가 있었다. 러시아령인 알래스카를 확보하여 캐나다를 보호하고 미국의 기를 꺾어야 했다. 크림전쟁이 좋은 기회였다.
영국은 캐나다를 통해 군대를 파견 알래스카 점령계획을 세웠지만 러시아는 크림전쟁에서 패배하여 알래스카에 군대를 보낼 여력이 없었다. 러시아는 어차피 빼앗기게 될 알래스카를 미국으로 하여금 구입하도록 제안한다. 한 푼이라도 받아서 전비 조달에 충당해야 했기 때문이다. 미국의 국무장관 월리암 슈워드가 국내의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매매계약을 성공시켰다.
유라시아의 미래는 우리의 기회
우리나라는 1990년대 북방정책에 의해 공산권인 소련(1990. 9) 및 중국(1992. 8)과 수교하였다. 중국은 덩샤오핑(鄧小平)이라는 지도자를 만나 정치가 안정되면서 개혁 개방정책이 순조롭게 성공하여 한중관계는 최상의 관계를 유지했지만 한국과 러시아는 상대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맺지 못했다. 소련이 붕괴되고 러시아로 바뀌는 과정에서 혼란이 가중되어 정치적 안정을 이루지 못한 것이 이유의 하나로 볼 수 있다.
중국과는 금년이 수교 25주년이 되는 해이지만 사드배치 문제 등으로 한중관계가 어려움을 겪고 있다.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이 고도화되고 이에 대한 해결 방안이 한중간에 차이를 보이고 있다. 한국 기업으로서는 사드배치 문제가 아니더라도 차이나 플러스 1 (중국이외 한 곳에 투자) 또는 포스트 차이나(중국이 산업화를 완성할 경우)를 생각한다면 유라시아 대륙에 눈을 돌려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
러시아가 국내외 여러 사정으로 연해주 등 유라시아가 아직 덜 개발된 것이 우리에게 블루오션을 제공하는 행운이 될 수 있다. 다만 푸틴 대통령이 개방을 말로만 하지 말고 러시아의 덩샤오핑이 되겠다는 각오를 보여야 한다.
아무르 강변에서- 흑룡강은 알고 있다.
최근 러시아의 샌프란시스코라고 불리는 미항 블라디보스토크와 아무르 강과 우수리 강이 만나는 하바롭스크를 다녀왔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우수리스크 사이의 끝이 안 보이는 광활한 초원이 인상적이었다. 하바롭스크는 우리 민족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예맥(濊貊)족의 발상지라고 한다.
중국에서는 흑수 또는 흑룡강으로 부르는 아무르 강의 ‘무르’가 퉁구스(東胡)말로 ‘물’이라고 하며 몽골어의 ‘뮤렌’ 일본어의 ‘미즈’ 등도 어원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
1917년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 후 아무르 강을 둘러 싼 러시아 적군(赤軍 볼셰비키 혁명군)과 백군(白軍 반혁명 황제파)의 내전이 치열했다. 일본군은 백군을 도와 시베리아에 출병하여 하바롭스크 아무르 강 전투에서 러시아 적군과 싸웠고 블라디보스토크에 주둔한 일본군은 최재형 등 독립운동을 하는 한인과 민간인을 학살하였다.
하바롭스크에는 김 알렉산드라 스탄케비치(1885-1918)의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다. 그녀는 조선인 최초의 여성 사회주의자로 볼셰비키 혁명 후 극동 소비에트 외무위원장이 되었다가 하바롭스크를 점령한 백군과 일본군에 의해 처형되어 아무르 강에 수장되었다.
김 알렉산드라는 처형되기 전에 아무르의 강변의 모래를 밟으면서 조선의 독립을 염원하였다고 한다. 하바롭스크를 탈환한 볼셰비키 적군은 그녀를 추모하여 아무르 강의 물고기를 2년간 먹지 않았다고 한다. 우리 정부는 2009년 김 알렉산드라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했다.
중국의 대흥안령 산맥과 러시아의 스타노보이 산맥에서 발원한 아무르 강은 우리 민족의 애환과 함께 러시아와 중국을 적시면서 2824km 흘러 사할린과 마주하는 타타르 해협을 빠져 나와 오츠크 한류(리만 해류)와 함께 동해 바다로 흘러온다.
- 조선일보
◆유일(劉一)의 루쉰 이야기
여의 주식회사 상임고문
◇2016-11-01 불멸의 작품, 광기의 제품 - 문화계 정치오염의 후폭풍
▲중국 근현대 문학의 최고 거장 루쉰
문화대혁명의 광기가 전 중국을 강타하면서 류샤오치(劉少奇)와 덩샤오핑(鄧小平) 등 이른바 주자파(走資派) 세력들이 숙청되고 총리였던 저우언라이(周恩來)조차도 힘을 잃었을 때 나타나서 국정을 농단한 세력이 마오쩌둥(毛澤東)의 부인인 장칭(江靑)을 중심으로 야오원위안(姚文元), 쟝춘차오(張春橋), 왕홍원(王洪文) 등 ‘중국의 사인방(四人幇)’이다. 이들은 합법적인 정부와 별도의 법에도 없는 중앙문혁소조라는 조직을 만들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이들의 행동에 이론적인 뒷받침을 아끼지 않은 인물은 캉성(康生)이었다.
◆ 문화대혁명 광기를 일으킨 중국 사인방(四人幇)
야오원위안은 1931년 저장(浙江) 성 샤오싱(紹興) 출신으로 부친 야오펑쯔(姚蓬子) 저명한 저술가이자 번역가 및 예술평론가로 활동하는 등 지식인집안의 출신이다. 그는 상하이(上海)에서 문학평론으로 자신의 경력을 시작했는데, 그다지 주목 받지 못하는 평론가에 불과했다. 1949년 그는 신생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중국작가협회의 선전실에서 일했지만 별 영향력은 없는 실무자에 불과했다.
◆ 야오위안의 ‘해서파관을 논함’이 문화대혁명 소용돌이 신호탄
1955년 그는 작가 후펑(胡風)의 작품인 ‘분청시비(分清是非) 획청계한(劃清界限)’을 사회주의 미학적 관점에서 날카롭게 비판하면서 출세의 기회를 마련한다. 그 자신이 시인이기도 했던 마오쩌둥은 문화와 예술에 대한 그의 관점을 높이 평가하였다. 이로부터 10년이 지난 1965년 야오는 마오쩌둥의 지침 아래 상하이(上海)의 원후이(文匯)보에 ‘새 역사극 해서파관을 평함(评新编历史剧, 海瑞罢官)’이라는 평론을 발표했다. 이 평론은 10년간 전 중국을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 몰아넣은 문화대혁명의 방아쇠를 당겼다. 이후에도 그는 문혁이데올로기에 입각한 평론들을 발표하면서 자신의 입맛에 맞지 않는 작가들의 작품을 비판하고, 비판받은 작가들은 어김없이 홍위병의 손에 치욕과 폭력을 당해야 했다.
문혁 시기 그의 직위는 계속 올라 해방일보의 편집위원에서 중국 공산당 상하이 시 위원회의 선전부장, 상하이시 위원회 제2서기를 거쳐, 끝내는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위원에까지 올라 권세를 누렸다.
◆ 야오위안, 뉘우쳤지만 때는 늦어….
마오쩌둥이 숨지고 장례식을 치른 후 얼마 되지 않아 전광석화처럼 진행된 사인방의 체포과정에서 그는 체포되었다. 사인방의 다른 멤버들이 재판과정에서 자신의 입장을 강변한 것과는 달리 순순히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수형생활을 하다가 1996년 10월 출옥하여 항저우(杭州)와 상하이에 은거했다. 2005년 12월 23일 그는 당뇨병으로 죽었는데, 1998년 회고록 출간을 희망했으나 공산당 선전국의 검열 과정에서 불허되었다.
◆ 중국 근·현대 문학의 최고 거장 루쉰(魯迅)
대척점에 서 있는 사람으로는 중국 최고의 문인이었던 루쉰(魯迅)을 들 수 있다. 루쉰은 근현대 중국 문학의 최고봉을 꼽을 때 빠지지 않는 인물이다. 일본의 문예평론가 다케우치 요시미(竹內好)는 “루쉰은 소설은 너무 어려워서 재미가 없다”라면서도 “대략 18년간 루쉰은 중국 문단의 중심적 위치에서 한 번도 물러난 적이 없었다”라고 평가했다.
1881년 9월 25일 야오원위안과 같은 고향인 저장(浙江) 성 샤오싱(紹興)에서 태어난 루쉰의 본명은 저우수런(周樹人)이다. 당초 상당히 이름 있는 사대부집안의 출신이지만 어릴 때 할아버지가 뇌물사건으로 투옥되고 아버지가 병사하면서 집안이 몰락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 루쉰 문학청년, 가난 때문에 군사학교 입학
문학을 사랑한 루쉰이었지만 집안 형편 때문에 학비부담이 없는 군사학교에 입학했던 루쉰은 졸업 후 1902년에 국비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 유학을 떠났고, 1904년 센다이(仙臺)의 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기도 했다. 1909년 일본에서 귀국한 루쉰은 고등학교와 대학 등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넉넉하지는 않지만 창작을 위한 열정 하나만으로 자신의 재능을 불태웠다.
◆ 신해혁명 뒤 교육부 근무, 상급자 의견 안 맞자 홀연히 사표
신해혁명으로 중화민국이 수립된 1912년 루쉰은 중화민국 임시정부의 교육부에 자리를 마련하여 이후 교육부에서 일하게 된다. 그는 자신의 신념과 다른 문학가들에 대해서는 어떤 일이 있어도 타협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논쟁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베이징(北京)에서의 학생소요에 따라 학생들을 퇴학시키는 일이 벌어지자 교육부에 사표를 제출하고 붓을 이용한 투쟁전선에 나서기도 했다.
◆ “대가 없는 돈은 자유로운 사고에 장애”-정부 작품 지원 거절
교육부를 사직했지만 교육부장(교육부장관) 이었던 차이위안페이(蔡元培)는 루쉰의 재능을 아깝게 여겨 돈 걱정 하지 않고 작품 활동을 할 수 있도록 급여를 계속 지급하겠다고 제안했지만 루쉰은 거절했다. 루쉰은 ‘대가 없이 받는 돈은 자유로운 사고와 독립된 인격형성에 장애가 된다’라는 이유를 들었다.
그의 이름에 비해 남긴 작품의 수는 많지 않다. 하지만 그가 1921년부터 연재한 그의 대표작 ‘아큐정전(阿Q正傳)’은 세계문학사에 큰 족적을 남긴 작품이다. 루쉰의 사후 20년이 지난 1957년 누군가 마오쩌둥에게 ‘만약 루쉰이 살아 있었다면 어땠을까?’를 물었더니 마오쩌둥은 ‘감옥에 갇혀 글을 쓰고 있거나 아무 소리도 않고 가만히 있었을 것’이라고 말한 바가 있을 만큼 그의 예술에 대한 위치에 확고했다.
◆ 작금의 문화계 비선실세, 문화예술 전반 악영향 심대
문화콘텐츠업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 작금의 나라 상황을 보면 참담함이 앞선다. 문화예술인은 유사 이래 언제나 가난한 가운데 창작열을 불태워 왔으며,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국가는 문화의 발전을 위해 지원을 해야 한다. 하지만 국가의 문화예술지원을 미끼로 자신의 사복을 채우고 나아가서는 자신의 영역을 훨씬 넘어서는 국정에 자격도 없이 개입하는 행위는 문화예술 전반에 대한 심각한 악영향을 초래한다.
◆ ‘아큐정전(阿Q正傳)’과 ‘평해서파관(評海瑞罢官)
오늘날 루쉰의 작품은 세계적으로 시대를 건너뛰어 읽혀지고 있지만 야오원위안의 평론은 정치적으로 제목만 언급될 뿐 어느 누구도 문학적 시각에서 읽지 않는다. 잠시 ‘문화계의 황태자, 문화계의 비선실세’로 불리며 대한민국의 문화계에 흑풍(黑風)을 일으킨 어느 광고감독의 작품도 이렇게 잊혀질 것 같다.
▲군중들 앞에서 연설하는 루쉰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덩샤오핑이 집권한 뒤 체포된 사인방 중 한 명인 야오원위안◎
◆정인갑의 중국 엿보기
- 정인갑 베이징고려문화경제연구회 부회장 겸 사무총장, 한국 한중미래재단 이사장
2015. 조선일보
◇01.16 모택동 아들 모안영의 사망에 관하여
모택동의 맏아들 모안영(毛岸英)은 중국인민지원군 총사령관 팽덕회의 러시아어 통역을 담담하다가 한반도 6·25전쟁 때 사망했다. 그사이 ‘모안영이 중국인민지원군의 일원으로 북한에서 장렬하게 희생되었다’라고만 소설처럼 씌어져 있었고 어떻게 사망했나 하는 구체 사연은 언급되지 않았었다.
최근 몇 년간 여러 사람들의 회고록을 통해 그 구체적 사연이 밝혀졌다. 나인문(羅印文)이 집필한 지원군 제1부사령관 등화(鄧華) 장군의 전기, 그리고 다른 여러 장군들의 회고록을 통해 구체적인 사실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당시 지원군사령부는 평양부근 회창군(会昌郡) 대유동(大榆洞)에 위치해 있었다. 1950년 11월 24일 해질 무렵, 지원군사령부의 팽덕회, 등화, 홍학지(洪學智) 셋은 밖에 나와 산보를 하며 미군의 비행기가 그곳의 상공을 한 시간 남짓이 맴돌고 있음을 발견했다. 셋은 이에 지원군사령부의 위치가 미군에게 폭로된 것 같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그날 밤 9시경에 지원군사령부는 긴급회의를 열고 새로운 방공(防空) 대책의 명령을 내렸다. 1)공병에 명령하여 새로운 방공호를 만들 것, 2)새벽 3시에 일어나 아침식사를 마치고 당직자 외에는 새벽 4시 전에 모두 새로 지정된 방공호로 자리를 옮길 것, 3)4시 후부터는 모든 거처지에서 연기를 뿜는 일이 없게 할 것 등이다.
▲모택동과 그의 아들 모안영(毛岸英·오른쪽)
그런데 모안영은 3시에 일어나 밥을 한 술 먹은 후 당직 임무도 없이 새 방공호로 피신하지 않은 채 책상에 엎드려 5시간이나 잤다. 9시가 넘어서야 깨어나 난로를 피우고 계란에 밥을 볶아먹었다. 전날 저녁 북한 인민군 차수 박일우(朴一禹)장군이 팽장군에게 계란 여남은 알을 보내왔다. 그때의 어려운 상황에서 이 정도의 계란도 매우 귀한 선물이었다고 한다. 저녁 식사 후에 가져왔기 때문에 팽장군이 먹지 않은 채 남아 있었던 것이다.
아침에 양적(楊迪) 장군이 팽사령관의 사무실 옆을 지나는데 연통에서 연기가 나오므로 황급히 들어가 보니 방 안에서는 3사람이 계란에 밥을 볶아먹고 있었다. 모안영과 당직참모 고서흔(高瑞欣), 그리고 팽장군사무실 주임 성보(成普)였다.
“당신네 어찌 감히 팽사령관에게 선물한 계란을 먹을 수 있나? 빨리 난로 불을 끄고 자리를 옮겨”라고 양적이 나무라니 성보가 하소하였다.
“우리가 어찌 감히 계란을 먹겠습니까? 러시아어 통역인 저 분이 볶은 겁니다.” 팽장군 등 몇몇을 제외하고는 모안영이 모택동의 아들임을 전혀 모르고 통역으로만 알았다.
조금 지나자 미군 전투기가 날아와 다짜고짜로 소이탄을 투하하였다. 소이탄은 팽장군의 사무실을 바로 명중하였다. 팽장군의 사무실은 폭격의 화재에 주저앉았고 성보는 불붙는 몸으로 뛰쳐나와 재빨리 불에 타고 있는 솜옷과 솜바지를 벗고 땅에서 뒹굴어 불을 껐다. 고체휘발유로 만든 소이탄의 불은 물로 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성보는 불이 붙자마자 창문으로 탈출한 것이다. 그러나 모안영과 고서흔은 침대 밑으로 기어들어갔다. 불을 끄고 보니 두 사람은 이미 타서 숯처럼 되었다. 다행히 소련제 손목시계를 통해 모안영의 시체를 구분해 낼 수 있었다. 북한에 간지 34일 만에 명령에 복종하지 않고 개별행동을 하다가 비참하게 사망한 셈이다. 11월 25일에 발생한 참사이다.
중국은 6·25전쟁에 1백만 군사를 투입하였으며 36만명이나 희생했다. 그러나 1965~70년 중조관계가 나쁠 때 북한은 지원군열사의 묘지를 파헤쳐 없애버렸다. 지금 판문점 북한 군사박물관에는 지원군에 관한 내용을 전부 삭제하고 6·25전쟁을 마치 북한 혼자 치른 것처럼 만들어 놓아 중국인들의 분노를 자아내고 있다. 중국은 그때는 스탈린의 꼬임에 당했고 후에는 북한의 배신행위에 당한 셈이다. 평양에 세워져 있는 지원군 기념탑, ‘우의탑’을 허물어버릴 날도 멀지 않을 것으로 추측된다.
모안영은 모택동과 부인 양개혜(楊開慧)사이에서 생긴 맏아들이다. 1922년생이며 8살 나는 해에 양개혜가 투옥될 때 같이 옥살이를 하다가 모친이 처형된 후 보석되었다. 어릴 때 부모 없이 떠돌며 온갖 고생을 하다가 1936년에 소련에 보내져 군사학원을 졸업하고 탱크병 중위의 계급으로 베를린 점령 전쟁에도 참가했다. 1946년 중국에 돌아온 후 토지개혁, 선전사업, 공장의 책임자 등의 경력이 있다.
모안영은 지원군사령부에서 이미 심상치 않은 존재였다. 일개 통역에 불과한 그가 군사에 관한 열변을 토하는가 하면 팽장군에게 선물한 계란을 제멋대로 먹은 일, 팽장군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은 일 등은 이미 자기를 팽장군과 같은 위치, 심지어 더 높은 위치로 보았던 것이며 동료들의 반감을 샀다.
중국인들은 모안영의 죽음에 관해 의론이 분분하다. 모택동이 솔선으로 아들을 전방으로 보낸 것은 고상한 풍격이고 모안영이 사망한 자체는 불행이지만, 그로 말미암아 중국의 대권이 세습되지 못한 것이 다행이라고 한다. 지금 북한의 상황과 비추어 볼 때 김정일, 김정은 보다 몇 배 우수한 모안영이 중국의 대권을 세습 받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겠는가?
중국공산당은 1943년부터 ‘모택동 만세’를 불렀으며 모택동은 이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만세’는 임금을 옹대하는 말이고 사실 모택동은 중국의 ‘마지막 황제’였다. 모택동은 사망하기 직전 대권을 화국봉에게 넘겨주며 사안이 생기면 강청(모택동의 부인)에게 물어 하라는 유언을 남겼었다. 지금 중국공산당의 많은 고위층간부의 자식들이 ‘세습’받아 역시 고위층간부로 되었다. 모안영이 살아 있었더라면 중국의 대권을 세습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2015.01.26 방법과 결과의 통일론
어떤 행위의 방법과 결과에 4가지 경우가 있을 수 있다. a. 좋은 방법-좋은 결과, b. 나쁜 방법-나쁜 결과, c. 좋은 방법-나쁜 결과, d. 나쁜 방법-좋은 결과가 그것이다. 이중 a와 b의 행위는 굳이 따로 평가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c와 d에 해당되는 행위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상당수 중국인들은 결과 위주로 평가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중국의 한 사건을 예로 들어본다.
1976년 9월 9일 마오쩌둥(毛澤東)이 사망하자 중공중앙에서는 치열한 권력 암투가 벌어졌다. 그때 중공 13대(1973)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9인 중 마오쩌둥, 주더(朱德), 저우언라이(周恩來), 캉성(康生), 둥삐우(董必武) 등 원로가 선후로 사망하고 왕훙원(王洪文), 예졘잉(葉劍英), 리더성(李德生), 장춘챠우(張春橋) 4인만 남았다. 그중 왕훙원은 중공 제1부주석이다.
예졘잉은 우익, 왕훙원과 장춘챠우는 좌익, 리더성은 중간파다. (서술상의 편리를 기해 ‘좌익’, ‘우익’으로 표현한다. 좌익은 마오쩌둥의 총애를 받은, 마오쩌둥의 노선을 100% 옹호한 자들이다. 우익은 마오쩌둥의 냉대를 받은, 마오쩌둥의 노선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은 자들이다.)
마오쩌둥이 사망 직전 중공 제1부주석·국무총리직에 올려놓은 화궈펑(華國鋒)은 정치국상무위원도 아니고 정치배경과 권력상 나약한 인물이다. 마오쩌둥은 화궈펑을 발탁하며 ‘당신이 처사하면 나는 마음 놓는다. 유사시 쟝칭에게 많이 물어 하라’라는 유언을 남겼다. 아마 자기가 죽은 후 대권을 화궈펑을 거쳐 쟝칭에게 물려주려는 심산이었을 것이다. 그때 쟝칭은 정치국 위원이며 마오쩌둥의 부인이라는 신분까지 더하여 막강한 영향력과 정치 기반이 있었다.
그러나 화궈펑은 대권을 쟝칭에게 물려줄 생각이 전혀 없었고, 쟝칭은 거듭 화궈펑에게 도전했다. 하여 좌익 화궈펑은 결국 우익 예졘잉 편으로 기울었다. 원래 좌익은 군사에 취약했는데 1971년 좌익 린뱌우(林彪) 집단이 제거됨에 따라 더욱 취약해진 상태였다. 반면 물밑에 잠재해 있는 우익 좌장 덩샤우핑(鄧小平)은 군에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북경 경호부대(8341부대) 사령관 왕둥싱(王東興)도 좌익인데 빠르게 예졘잉 편으로 기울어졌다.
화궈펑과 왕둥싱은 비록 중요한 위치에 있지만 정치국상무위원이 아니었다. 만약 이때 정치국상무위원 또는 정치국위원의 회의를 열면 예졘잉은 질 가능성이 많았다. 뿐만 아니라 중국은 위로부터 아래로 큰 분열이 생기며 전국적인 대 혼란에 빠질 위험이 크다.
이런 형세 하에 예졘잉, 화궈펑과 왕둥싱 3인은 합심해 군사적으로 4인방을 제거했다. 1976년 10월 6일 저녁, 군사를 잠복해 놓았다가 정치국상무위원 회의에 참석하러 온 왕훙원과 장춘챠우를 즉각 체포했다. 그리고 쟝칭, 야우원웬(姚文元) 및 마우웬신(毛遠新: 마오쩌둥의 조카)도 일사불란하게 체포했다. 이것이 바로 이른바 ‘4인방분쇄’이다.
한데 ‘4인방분쇄’는 무슨 성격의 행위인가? 중국 정부의 공식 표현은 ‘4인방을 격리심사’ 했고, ‘당과 인민을 위해 반당집단 4인방을 일거에 분쇄했다’이다. 하지만 당내의 파벌싸움에 군사를 풀어 상대파벌을 체포하는 ‘격리심사’도 있다는 말인가? 그리고 마오쩌둥의 정치노선을 에누리 없이 옹호하는 파벌을 ‘반당집단’이라고 할 수 있는가? 만일 그렇다면 마오쩌둥이야말로 반당집단의 두목이란 말이 되고 마는 것 아닌가?
이런 견해 차이는 정치국상무위원 또는 정치국위원의 회의에서 충분히 토론, 변론, 협상을 거친 후 다수가결의 원칙하에 결정지어야 한다. 중국공산당의 당장(黨章)에도 이런 민주주의 원칙이 엄연히 기재되어 있다. 즉 이 사건은 군사적 방법을 썼으니 에누리 없는 군사쿠데타이다.
하지만 중국 인민 중에 이를 비난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지금까지 ‘쿠데타’라는 말도 거의 나오지 않았다. 이 쿠데타는 중국의 일대 위기를 모면하게 했고, 이 쿠데타가 있었기에 중국은 개혁개방을 순조롭게 할 수 있었으며 오늘의 큰 성과를 이룩할 수 있었다. 중국의 개혁개방은 10여 개 사회주의국가의 개혁개방을 유도했으며 세계 냉전체제의 종식에도 큰 기여를 했다.
그러기에 중국 내에서는 이 쿠데타의 의의를 아무리 높이 평가해도 과하지 않다는 사람들이 많다. 말하자면 ‘나쁜 방법-좋은 결과’의 전형적인 사례이다. 그때 당시의 형세 하에 부득이하게 쓴 ‘나쁜 방법’이 되겠지만, 결과가 좋으므로 종합적으로 평가할 때 좋은 행위로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중국인이 방법과 결과에서 결과 위주의 판단을 내리는 데는 철학적 근거가 있다. 유물주의철학의 기본은 ‘물질 제1, 정신 제2’와 ‘물질이 정신을 결정한다’이다. 사물은 서로 대립되는 한 쌍의 모순의 집합체이며 주요모순 또는 모순의 주요 면이 그 사물의 성격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물질과 정신의 모순에서, 물질은 주요모순 또는 모순의 주요 면이다. 모순의 두 면 중 어느 쪽이 물질의 범주(範疇)에 속하고 어느 쪽이 정신의 범주에 속하는가는 무난히 가릴 수 있다. 실천과 이론, 존재와 의식, 생산력(생산도구)과 생산관계, 하부구조(경제기초)와 상부구조(국가체제), 효과와 동기, 결과와 방법 등에서 전자는 물질의 범주, 후자는 정신의 범주에 속한다. 웬만한 중국인이면 이 철학 원리를 알며 이 원칙을 숙지하고 있다. 박정희의 군사쿠데타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에 참고가 될듯하여 이 글을 쓴다.
◇2015.02.11. 1989년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던 천안문사태의 시말
1989년 6월 4일, 중국군이 천안문광장에서 단식투쟁하는 대학생을 진압하는, 세계를 경악케한 일대 사건이 터졌다. 본문은 그 사건 시말의 과정을 서술한다.
89년 3월 20일 중국 전인대 7계 2차 회의가 북경에서 열렸다. 2년 전 실각되어 칩거하던 호요방(胡耀邦) 전 중국총서기가 전인대 대표의 신분으로 이 회의에 참석하였다. 회의가 끝나는 4월 4일, 그는 열변을 토하다가 심근경색으로 졸도했다(4월 15일에 사망). 4월 5일 북경대학에 호요방의 명예를 회복해주어야 한다는 대자보가 붙었다.
호요방은 81년 9월에 중국 중앙총서기로 임명되었다가 87년 1월에 애매한 원인으로 실각됐다. 사실은 등소평(사천 출신)이 실권을 쥔 후 모택동(호남 출신)시기 중공고위층의 주축이었던 호남출신을 하나하나 제거하는 와중에 마지막으로 밀려난 호남출신 관료이다.
대자보는 화제의 중심이 이내 중국정치체제에 대한 비판으로 돌려졌다. ‘소련처럼 선 정치개혁, 후 경제개혁을 하자. 관도(官倒·권력 장사)를 척결하자. 관료주의를 타도하자’를 외쳤다. 북경대학 학생들은 이어 천안문광장에 진입했으며 북경 모든 대학의 학생들도 참여했다. 당국의 태도표시가 없자 농성은 지속되었고 5월 12일부터 단식투쟁으로 돌입했으며 5월 15일 소련공산당 고르바초프 총서기가 북경을 방문할 때 최고봉에 이르렀다.
▲중국 인민대회당에서 회의가 진행되고 있는 모습/조선 DB
개혁개방 초기 실적을 이룩한 조자양(趙紫陽)은 80년 8월 화국봉(華國鋒·호남출신)을 대체하여 국무총리로, 87년 1월에는 호요방을 대체하여 중국총서기가 됐다. 그러나 군사위주석 등소평이 군림하고, 국무총리 이붕(李鵬), 국가주석 양상곤(楊尙坤)에게도 분권되어 한직으로 전락되었으며 등소평과의 갈등이 점점 심해졌다.
조자양은 부득불 학생운동에 동조하며 정치개혁을 주장하고 나섰다. ‘차관급 이상 관료의 재산을 공개하자’, ‘고위층 간부 가족의 횡령을 척결하자’ 등의 주장을 내세우며 심지어 자기 아들(수출입에 개입하여 엄청난 금품 횡령)부터 척결하겠다고 하였다. 등소평은 조자양의 주장을 들어주지 않고 군사개입을 지시했다.
5월 20일 당국은 계엄령을 선포했다. 북경시민은 외곽으로 운집하여 몸으로 계엄군의 진입을 막았다. 대부분 노인과 아줌마들이었다. 또한 학생운동을 진압하면 중국공산당은 곧 망한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당국은 부득불 군사진입을 정지시키고 보름간 비상대책 마련에 고심했다.
6월 4일 새벽 계엄군은 탱크와 장갑차로 쏜살같이 천안문광장으로 진입했다. 저지하는 시민을 주저 없이 사격하며 천안문광장을 포위했다. 수백 명의 시민이 피살됐다. 군인 9명도 사망했다.
광장의 학생들은 정치개혁이 실현될 때까지 철거하지 않겠다고 버티다가 압력에 못 이겨 ‘철거하면 추후 처벌을 안 한다’는 보증을 받아내고 모두 철거했다. 학생들이 철거하자마자 계엄군은 천안문광장에 진주해 헬기로 뿌려주는 생수와 과자를 먹으며 1주간 있었다. ‘시민의 반대가 두려워 감히 광장을 떠나지 못한다’는 이유였다.
▲천안문 사태 직후인 1989년 6월 10일 인민해방군 탱크가 천안문 광장을 봉쇄한 모습/사진=AP뉴시스
그사이 학생운동의 중견들은 모두 국외로 도피했다. 학생을 지지하던 과학자 방려지(方勵之)는 미국대사관에 망명했다가 얼마 후 미국으로 보내졌다. 당국은 이번 사건을 ‘폭란’으로 결정짓고 ‘학생들의 민주화는 잘못이 없다. 중국을 서방 국가의 식민지로 만들려는 막후분자들이 나쁘다. 보라, 실패하니 학생들을 저희들 상전 국가로 빼돌리지 않았나?’라는 선전과 ‘교육’을 대거 진행했다. 얼마 후 시민은 당국의 선전을 수긍했고 안정한 정세로 돌아왔다.
왜 이런 일대 혼란이 짧은 시간 내에 수습되고 중국공산당의 지위가 흔들리지 않았을까? 첫째는 소련 등의 경험 때문이다. 소련 및 동구 사회주의국가들은 선 정치개혁, 후 경제개혁을 하다가 모두 실패하였다. 먼저 정치개혁을 하였으므로 수억 인구를 도적놈과 게으름뱅이로 만들어 놓았다. 그러나 중국은 12억 인구를 돈벌이를 위해 혼신의 힘을 다 하는 사람들이 되게 했다.
둘째는 반정부학생들의 외국 도피를 방임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이 보름간에 생각해 낸 비상대책이었다. 유교문화에서 외국과 내통하여 조국을 반대하는 행위는 가장 큰 ‘죄’다. 지금까지 외국에 망명해 조국을 비난한 중국인은 잘잘못을 떠나 모두 중국 국민의 버림을 받았다. 계엄군이 천안문광장에 1주간 칩거한 것, 반정부학생들의 외국도피를 방임한 것, 방려지를 미국으로 보내준 것은 모두 중국 공산당의 권모술수이다. 실로 권모술수의 9단에 손색이 없다.
지금 천안문사태의 반정부학생들의 명예를 회복해주자는 주장이 산발적으로 일어나지만 당국은 끔쩍도 안한다. 외국 도피 학생들이 벌써 중국국민의 버림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나름의 판단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2015-02-14 중국인 지칭하는 '되놈'의 어원은?
중국어는 上古, 中古, 近代, 現代 4개세대로 구분되며, 각 세대 한자의 어음(語音)체계는 서로 다르다. 일본어는 8세기부터 문자가 있었으므로 일본 당용 한자는 오음(吳音), 당음(唐音)으로 구분된다.
그러나 우리말은 15세기에 문자가 생겼고 그 전의 한자음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口耳相傳) 문자로 적어놓지 않았으므로 부동한 세대 어음의 구분이 없이 단일 체계를 이룬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한자어는 대체로 중고(3~7세기) 중국어와 맞물린다. 신라 때 많은 학생이 당(唐)에 유학하였으며, 아마 그때 한자어의 기본 틀이 잡혔을 것이다.
그러나 한자어의 시대적 낙인(烙印)은 이렇듯 단순하지 않다. 중고 중국어를 기본으로 하되 상고(2세기 이전), 근대(8세기 이후), 현대 중국어의 성분도 조금 섞여 있다. 말하자면 4개 세대의 어음이 한집에 모여 사는 사세동당(四世同堂)의 양상을 이루고 있다.
기원 전 108년 고조선이 망하고 한사군(漢四郡)이 설립되며 한반도의 대부분(그것도 정치, 경제, 문화 중심지의 대부분)이 한(漢)의 통치를 받을 때 우리는 한자를 대폭 수용하였을 것이다. 다만 우리말에 문자가 없었으므로 그때 전래된 한자음은 남지 못하고 후세에 전래된 한자음과 절충되어 버렸다. 절충하기 어려운 음은 도태되었거나 ‘고유어’로 변하였다.
좀벌레. ‘蟲’자를 중국어에서 ‘충’처럼 읽으며 한자어로도 ‘충’이라 읽는다. ‘病蟲(병충)’, ‘昆蟲(곤충)’ 등이다. 그러나 상고 중국어에서 한자 ‘蟲’을 ‘좀’처럼 읽었으며 중고 때 ‘충’음으로 변했다. 그렇다면 ‘좀벌레’ 역시 ‘蟲벌레’이며 한자어와 우리말 고유어를 겹쳐 스는 ‘족발(足발)’, ‘계수나무(桂樹나무)’, ‘널판자(널板子)’ 등과 같은 유형의 단어이다.
되놈. 중국어에서 동방의 오랑캐를 ‘夷’, 서방의 오랑캐를 ‘戎’이라 했으며 통틀어 ‘夷戎’이라고도 했다. ‘夷戎’을 상고 중국어에서 ‘되놈’처럼 읽었으며 중고부터 ‘이융’처럼 읽었다. ‘夷’를 음변으로 하는 ‘荑’와 ‘木夷’의 현대 중국어에 或음 ‘ti’가 있는데 ‘夷’의 상고음의 잔여라고 보여진다. 우리말의 ‘되놈’이 한자 ‘夷戎’에서 왔다고 보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우리 민족이 ‘蟲’을 ‘좀’, ‘夷戎’을 ‘되놈’으로 읽다가 중고 중국어 발음 ‘chung’, ‘yirong’에 따라 ‘충’과 ‘이융’으로 규범하였을 것이다. 본래의 음 ‘좀’과 ‘되놈’이 없어졌으면 그만이겠지만 쉽사리 없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고유어’처럼 되어버렸다. 이런 ‘고유어’가 우리말에 꾀나 있을 것이지만 가려내기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명말(明末) 청초(淸初)에 많은 한국인이 중국에 끌려왔고 지금은 100%가 다 중국인에게 동화되었으며 찾을 수도 없게 되었다. 그러나 유독 중국인에 없는 박씨만은 한국인임을 가려낼 수 있다. 박씨가 한국인의 표적이기 때문이다.
한자의 어음도 부동한 세대의 분별적 표적이 뚜렷한 것이 있다. 이를테면 상고의 ①‘-m’받침이 중고의 ‘-ng’받침으로 변한 것, ②상고의 ‘-t’받침이 중고에 탈락된 것, ③상고의 ‘n-’초성이 중고에 ‘r-’로 변한 것, ④상고의 ‘d’초성이 중고에 탈락된 것 등이다. 위에 예로 든 ‘蟲’은 ①에 속하고 ‘夷’는④에 속하며 ‘戎’은 ③에 속한다.
필자는 중국어 음운학(音韻學: 부동한 역사시기의 중국어 어음 변화 및 그 규율은 연구하는 학문)을 반복 배웠고 또한 음운학 논문을 여러 편 썼었다. 이런 성과로 중국음운학연구회의 이사직을 담당한지 20여년이 된다. 그러므로 위와 같이 우리말의 ‘좀’과 ‘되놈’과 같은 단어들의 어원을 캐낼 수 있게 된 것이다.
◇2015.02.27 한국의 혼례문화, 북경처럼 변해갈까
북경의 혼례문화
필자는 서울에서 한국인의 혼례식에 여러 번 참가하였다. 적지 않은 하객은 부조 돈만 낸 후 뷔페만 먹고 가 버린다. 어떤 사람은 부조만 내고 밥도 안 먹고 가버린다. 부조를 안 내면 뷔페에 못 들어간다. 마지못해 아까운 시간을 할애하지만 모두 체면 하나 때문이다. “그럴 바엔 북경의 혼례문화를 배우는 것이 어떠냐?”며 북경의 혼례문화를 소개했더니 “그거 배울 만 하네” 하며 동감을 표시하는 사람도 꽤나 된다. 아래에 북경의 혼례문화를 간단히 소개한다.
▲한국의 걀혼식/조선일보 DB
대부분 북경인은 다른 사람이 알게 혼례를 치르지 않는다. 가끔 동료 젊은이가 사무실에 들어와 “시탕(喜糖·신혼사탕)”, “시옌(喜煙·신혼담배)” 하며 알사탕 한 줌, 담배 한 갑 주고 나간다. “언제 결혼했지?”라고 물으면 “서너 달 전에 여행으로”라 답한다. “축하한다.” 이것이 결혼 홍보의 전부다. 밥 한 술도 안 먹고, 술 한 방울도 안 마시며 부조 돈은 더더욱 안 쓴다.
20여년 전 어느 날 아침, 필자와 마주 앉아 5∼6년 같이 근무한 여종업원 한 분이 “시탕”, “시옌” 하는 것이었다. “신방은 어디 잡았지? 신방 구경 가도 돼?”하니 “환영!”하여 우리 부문의 종업원 7명은 1인당 1위안씩 모아 보온병 하나 사들고 찾아가 차 한 잔씩 마셨다. 20여년 후 같은 부문의 또 한 분이 “시탕”, “시옌”하여 1인당 50위안씩 모아 그릇 한 세트를 사주었다. 이 51원(약 8000원)이 근 30년 간 필자가 직장 동료를 위해 쓴 부조의 전부다. 필자가 조선족이며 책임자이니 말이지 다른 사람들은 이 51위안도 안 쓴다.
필자가 중국 조선족 사회에서 근 30년 살았다면 어떠했을까? 월평균 대사에 두 번만 참가해도 총 700번에 고농도 술 350근(175킬로)은 마셨고 부조 돈 14만 위안(약 2500만원)은 냈으며 2100시간은 소모했다. 아마 벌써 간경화에 걸려 ‘꼴까닥’했을지도 모른다. 중국 조선족의 결혼잔치는 보통 대형식당에서 치르는데 참석자가 200~300명이고 16가지 이상의 요리에 취하도록 먹고 마신다. 남는 절반 이상의 음식은 다 양돈장에서 실어간다. 조선족사회에서 해마다 돼지 아가리에 밀어 넣는 음식(돈)이 수천만 위안(수십억원)은 됨직하다.
연회가 끝나면 또 무리를 지어 노래방에 가서 맥주 마시며 밤늦게 까지 논다. 아마 한국인도 옛날에는 오늘날 조선족 사회의 결혼잔치와 비슷하였으며 수십년의 변천을 거쳐 지금까지 발전했을 것이다. 총체적으로 말해 혼례는 사회가 발전할수록 점점 간소화하는 방향으로 변해간다. 구미 선진국은 혼례를 아주 간단히 치른다고 한다. 그러면 지금 한국의 혼례문화를 한 걸음 더 발전시켜 현재 북경의 혼례문화처럼 할 수 없을까?
▲결혼식 문화를 간소화할 필요성을 인정해도 실천하기는 쉽지 않다. / 조선일보 DB
아마 다수 한국인들은 이런 풍속을 좀 더 간소화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체면 때문에 고치지 못함은 관념 때문이다. 역시 이에 관한 북경인의 관념을 살펴보자.
첫째, 북경인은 보통 대사를 개인과 집안만의 일로 본다. 필자의 경우 생일날 저녁 평소보다 볶음반찬 4접시 더 해놓고 집 식구끼리 모여 앉아 “생일 축하합니다!”를 외치며 밥 먹는 것으로 끝낸다. 가정 식구끼리 외식하는 수도 있다. 다른 사람 수십명, 백여명을 모아놓고 취하도록 마시며 생일 쇤 적이 없다. 절대 대부분의 북경인은 다 이러하다. 혼례도 마찬가지다. 위에 소개한 것처럼 “시탕, 시옌”이면 그만이다. 고작해야 두 사돈 가정에다 신랑·신부의 불알친구 각각 10여명이 괜찮은 식당에서 3상정도 주문하여 밥 한 끼 먹는 것으로 끝낸다. 이런 경우 친구들은 부조를 2000~5000위안(약 30만~80만원·대략 한 달 봉급)쯤 한다. 한 사람에게 이런 일이 몇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이다.
둘째, 북경인은 ‘못난 놈(사실은 못난 놈이 아니다)’이 혼례를 크게 치른다고 말한다. 이런 사람은 보통 가정이나 본인이 불우하며 ‘평생에 한번밖에 없는 혼례나 성대하게 해 울분을 풀어보자’라는 심리가 강력하게 작용한다. 미국제 붉은색 캐딜락 승용차 한 대를 앞세우고, 독일제 아우디 승용차 8대가 뒤따르며, 북 치고 날라리 불고, 폭죽 터뜨리며, 수백명을 식당에 끌어들여 먹고 마신다. 따라서 부조 돈도 수백만 위안(1000만원 정도) 챙긴다. 그러나 이런 사람이 많지 않다. 일반 문화인, 교원, 공무원, 괜찮은 직장인 등은 절대 이 짓을 안 한다. 누가 결혼 잔치를 크게 했다면 그를 ‘못난 놈이겠구나’ 추측하면 거의 맞아떨어진다. 극히 개별적인 권력가가 크게 하며 부조 돈을 엄청나게 챙기는 경우도 있는데 여론과 저주의 대상이 되기 일쑤다.
결혼 잔치를 크게 하여 자기를 과시하는 시대는 끝났다. 이런 행위를 낙으로 삼는 관념도 거의 사라졌다. 동료의 잔치에 참여했으며 5만~10만원의 부조 돈을 냈다는 것으로 서로간의 끈끈한 관계가 확인된다고 생각하는 자가 몇이나 될까? 오늘날 한국의 사회는 발전하여 이미 이 수준에 이르렀다. 한 발자국만 더 나아가면 북경의 혼례문화처럼 될 것이다. 필자는 이렇게 변하는 것을 좋은 변화라고 생각한다.
◇2015-03-01 중국에선 사라지고 한국에선 쓰는 술 관련 용어들
▲중국의 술 / 조선 DB
설날 연휴 중에 중국어에선 이미 골동품이 됐는데 한국에선 아직 쓰이는 술 관계 한자어들을 음미하며 술을 마시면 새로운 운치를 느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이 문장을 쓴다.
‘공복에 술을 마시다니, 먼저 요기 좀 하고….’
‘요기’는 중국어 ‘療飢’에서 온 말이며 그 출처는 3000 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시경·진풍·형문(詩經·陳風·衡門)>에 ‘泌之洋洋, 可 以療飢(철철 넘치는 샘물은 굶음을 멈출 수 있네)’라는 구절이 있다.
‘자작을 하는구려, 제가 부어 드리지요….’
자작(自酌) 중의 "酌"은 "술을 따르다"라는 뜻이다. 역시 3000 년 전의 말이다. <시경·주남·권이(詩經·周南·卷耳)>에 ‘我姑酌彼金罍, 維以 不永懷(나는 그 잔에 술을 따라 그리움을 잠시 멈추네)"라는 구절이 있고, <맹자(孟子)>에도 나온다. "酌則誰先? 先酌鄕人(누구에게 먼저 따를까? 촌노[村老]에게 먼저 따른다)."
‘밤새 술을 마셨더니 속이 안 좋아, 해장국 없나?….’ ‘해장’은 본래 ‘해정(解酲)’이다. ‘해’ 의 ‘ㅐ’가 양성모음이므로 ‘정’의 ‘ㅓ’가 양성모음 ‘ㅏ’로 동화됐다. <시경·소아·절남산(詩經· 小雅·節南山)>의 ‘憂心如酲 誰秉國成?(근심은 술 취한 몸살 같다. 누가 나라를 다스릴 수 있나?)’에 있으니 3000 년 전에 나온 말이다. ‘酲’은 ‘病酒’, 즉 ‘술로 인해 생긴 탈’이다.
‘술만 먹지 말고 안주도 먹어….’ 안주는 중국어 "按酒(혹은 案酒)"에서 유래됐으며 ‘술 마실 때 더불어 먹는 음식’이다. 송(宋) 매요신(梅堯臣, 1002~ 1060)의 시: <문혜사증신순 (文惠師贈新笋)>:‘煮之按酒美如玉,干脆入齒馋流津(끓인 안주는 옥 같이 예뻐, 사박사박 씹으니 군침이 나네).’ <서유기(西遊記)> 41회:‘那唐僧與你做得师傅,也與我做得按酒(당승이 당 신의 스승이라지만 나는 안주로도 먹으련다).’
‘나 술 재주 없어. 첨잔하지 마!’
‘첨잔’은 중국어 ‘첨안(添案, 안주를 보태다)’을 변경시킨 것이다. <성세항언·전수재착점봉황주(醒世恒言·錢秀才錯占鳳凰儔)>:‘三湯十菜, 添案少喫(10가 지 탕에 3가지 반찬 안주를 보태놓고 조금 먹자).’
중국인은 안주 위주이므로 ‘첨안’이라는 말을 쓰고 한국인은 술 위주이므로 ‘첨잔’이라는 말이 발달됐다. 한국인들도 앞으로 술 마실 때 신체를 돌보며 안주를 더 중시하기 바라며 ‘첨안’이라는 말을 만들어 썼으면 한다.
상기의 단어들은 중국어에서 모두 2000 년 전, 혹은 몇 백 년 전에 죽어버린 말이다. 그중 ‘酌’은 지금도 쓰지만 원래의 뜻은 사라졌고 ‘斟酌(짐작)’, ‘酌情(작정)’ 등 단어에서 ‘짐작하다’, ‘상의하다’라 는 뜻으로 쓰인다. 골동품으로 쳐도 여간한 골동품이 아니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날마다 그 진귀한 골동품에 밥을 담아먹는 격이니 여간 멋쟁이가 아닌가 싶다.
이러한 말들은 중국인 중에서 학자들만 안다. 웬만한 사람은 사전을 한참 찾아야 무슨 뜻인지 짐작된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날마다 상용어로 쓰고 있으니 모두 학자 수준인가 보다!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문화의 중심지일수록 언어의 변화와 발전이 빠르고 그 중심지에서 멀리 떨어질수록 보수성이 강하며 특히 타민족에 차용된 언어는 더욱 보수적이다. 국어에는 이렇듯 중국어에서 이미 죽은 골동품을 많이 목격하게 된다.
◇2015.03.12 '책 번호 장사' 에 '찬조금'까지… '남다른' 중국 출판 시장
중국에서 책을 출판했으면 하는 한국인이 최근 몇 년간 부쩍 늘어난 듯 하다. 필자에게 도와달라고 부탁하는 사람도 점점 많아지고 있다. 오늘은 중국 출판업의 상황에 대해 간단히 소개해 보고자 한다.
중국의 출판업(신문, 정기간행물―잡지, 도서의 출판)은 100% 국가에서 운영한다. 출판업체 하나를 새로 세우기는 매우 어렵다. 현재 중국에는 출판사가 570개밖에 없다. 5천만 인구 한국에 출판사가 몇 천 개 있는데 반해 14억 인구 중국에 570개밖에 없다면 출판업체의 이윤율을 짐작할 수 있다.
연도별로 조금씩 다르지만 중국 출판업체의 이윤율은 업종 2위다. 그러나 출판업을 잘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관영이라고 하지만 스스로 돈을 벌어 생존해야하며 또한 출판사마다 해마다 출판할 수 있는 새로운 책의 종류가 제한돼있기 때문이다. 보통 편집자 1인당 ISBN(국제표준도서번호)을 5개 정도밖에 안 준다. 이를테면 모 출판사에 편집자가 50명이면 출판국에서 연초에 ISBN 번호를 250개쯤 주는 것이다. 각 편집자 입장에서는 5개 안에서 돈도 벌고 이미지도 올려야 하므로 여간 신경을 쓰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중국에는 다른 나라에 없는 ‘책 번호 장사’라는 괴상한 현상이 있다. 돈을 벌만한 원고를 소지한 사람이 출판사에서 ISBN 번호를 산 후 스스로 인쇄하여 큰 돈을 버는 것이다. 규정상 불법이지만 묘하게 편법을 쓰므로 불법으로 다스리기 매우 어렵다.
▲책번호가 한정돼 출판이 자유롭지 않은 중국 도서 시장/조선 DB
몇 년 전 이런 제한이 좀 풀렸다. 570개 출판사 중 상위 100개 출판사는 ISBN 번호 제한을 받지 않게끔 됐다. 그러나 이 상위 100개 출판사는 대부분 5개 번호 안에서도 충분히 돈도 벌고 이미지도 올릴 수 있으므로 5개도 다 못 쓰는 경우가 많다.
출판물은 정치상 엄격한 통제를 받는다. 사회주의, 무산계급독재, 마레주의-모택동사상, 공산당의 영도, 이 네 가지 원칙에 위배되면 안 된다. 이 외에 28가지 사항에 속하면 출판국에 보고서를 올려 허가를 받아야 한다. 형제당의 수령(이를테면 김일성 등), 다른 나라의 국가원수(이를테면 박근혜 대통령 등), 인권문제, 소수민족문제, 종교문제 등은 허가를 받아야 한다.
사실 중국 출판업에서 가장 꺼리는 것은 음란출판물이다. 음란출판물은 에누리 없이 중징계를 받는다. 10여 년 전 중국조선족 모 대학의 출판사에서 음란 내용의 장편소설을 출판했었는데 수개월의 업무 정지에 30만 위안(한화 5천만 원)의 벌금을 내라는 처벌을 받은 적이 있다.
보고서를 올려도 허가 받는 사례는 아주 드물다. 보고서를 올렸다는 것은 문제의 소지가 있다는 말이다. 출판국의 관료로서 좋은 책을 출판하지 못하게 해도 책임이 없으며 승진에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지만 문제의 책 하나라도 잘못 냈다가는 옷을 벗어야 하기 때문이다. 즉 개인의 안전과 부귀영달을 위해 나라의 출판업을 유린하는 제도이기도 하다.
▲중국어판으로 번역돼 판매되고 있는 한국서적들/조선 DB
필자는 보고서를 올렸다가 두 번이나 출판 거부를 당한 적이 있다. 한 번은 동포 한 분이 <길림 육문毓文 중학시절의 김일성>이란 책을 써서 지방에서 출판거부를 당하자 필자에게 도와달라고 부탁했던 경우다. 또 한 번은 1993년 필자가 <한국 김영삼 정부의 부정부패 척결>이란 대형 화첩을 집필해 냈던 경우다.
이 두 가지 책의 출판 허가를 받으려 신문출판국에 보고서를 올렸다. 그런데 출판 거부 결정을 내렸을 뿐만 아니라 외교부와 각 지방출판국에 문서를 보내 이 책의 출판을 막는데 동참할 것을 호소하기까지 했다.
한국인이 중국에서 책을 출판하려면 보통 한화 500만~1000만원 정도의 찬조금을 내야 한다. 보통 1000권을 인쇄하지만 저자에게는 20권 정도밖에 안 준다. 더 필요하다면 별도로 돈을 주고 사야 한다. 그래서 출판기념식까지 치르자면 1500만 원 정도의 돈을 써야 한다.
다년간 한국출판물을 중국에 수입하는 사업을 하는 분에게 한국의 어떤 책이 중국에서 돈을 벌 수 있는가 문의한 적이 있다. ‘젊은이의 개인분투에 관한 책’, ‘아동 교육에 관한 책’이 가장 통한다고 한다. 물론 이렇게 수익성이 있는 책들은 찬조금을 내지 않거나 적게 내고도 출판할 수 있다.
◇2015-03-19 남한에선 "사주(使嗾)", 북한에선 "사촉(唆囑)"인데..
"그렇지만 모택동은 미국에서 일본군대를 사촉하거나 직접 간섭할 가능성에 대해 우려를 가시지 못하였다."
윗 글은 중국 조선족 모 신문에 실린 <대만 진공 계획을 왜 포기했는가?> 중의 한 구절이다. 모택동이 한반도 6.25전쟁을 지원하기 위하여 우려하며 원래 하려던 대만 진공을 포기하였다는 것이다. 6.25전쟁 자체에 관해서는 정치가나 역사가가 운운할 일이고 필자가 취미를 가진 것은 이 글에 나타난 "사촉"이란 단어이다.
필자는 한국에서 "사촉"이란 말을 썼다가 "창피"를 당한 적이 있다. "사주"라고 하여야 맞다고 한다. 한국에서 한문 수능시험을 치를 때 자주 "사촉"이 섞인 말을 문제로 내고 틀린 데를 고치라 한다며, 만약 이를 "사주"로 고치지 않으면 점수를 챙길 수 없다는 것이다. 필자가 이런 상식적인 문제도 모른다는 것이다. 한자어의 전문가로 자부하는 필자의 자존심이 꺾여도 여간 꺾인 것이 아니다. 하여 중국에 돌아온 후 이 문제를 품 놓고 캐보았다.
한국의 <국어대사전>(리희승 저)에는 "사주(使嗾)"와 "사촉(唆囑)"을 다 올려놓고 "사주"에는 해석을 달았지만 "사촉"에는 "사주"를 보라고 하였다. 북한 <조선어사전>(조선과학원연구소 편찬, ‘6권 사전’이라 속칭함)에는 "사주使嗾)와 사촉(使嗾)"을 다 올려놓고 "사촉"에는 해석을 달았지만 "사주"에는 "사촉"을 보라고 하였다.
즉 한국에서는 ‘사주’를 인정하고 ‘사촉’은 인정하지 않으며 북한에서는 반대로 ‘사촉’은 인정하고 ‘사주’를 인정하지 않는다. 중국 조선족은 북한과 일치하여야 한다는 국가 규정에 따라 당연 ‘사촉’만을 쓰므로 필자는 어릴 때부터 줄곧 ‘사촉’을 써왔다.
그러면 "사주"와 사촉" 중 어느 말이 맞는가? 검토해 보기로 하자. 이 말의 뿌리는 중국어 "嗾使"이다. 그 뜻은 "소리를 내여 개를 시키다"와 "다른 사람을 시키다(좋은 의미로 쓰이지 않는 말)"이다. 송나라 때부터 현대중국어 서면어까지 줄곧 써왔다. 이 단어를 한자어로 받아들일 때 순서를 뒤집어 "使嗾"이라 함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마치 중국어의 "介紹", "平衡", "士兵", "和平" 등을 한자어에서 "紹介", "衡平", "兵士", "平和"라 하듯이 말이다.
문제는 "嗾"자를 어떻게 읽느냐이다. 중국어 발음에 "嗾"자는 "蘇後切, 蘇奏切, ㅅ+ㅜ= 수, 주요음"과 "作木切, ㅈ+옥=족, 차요음, 두 가지가 있다. 한국에서는 전자 "수"음을 받아들여 "주"로 와전시켰고 북한에서는 후자 "족"을 받아들여 "촉"으로 와전시켰다.
결국 "사주"나 "사촉"은 다 맞다. 이희승 저 <국어대사전>에 ‘사촉’을 한자 ‘唆囑’으로 표시한 것은 천착(穿鑿)이다. 중국어에 ‘唆囑’이란 말이 없다.
언어는 서로 습관화되어 인정하면(約定俗成) 그만이다. 한국에서 "사주"라 해서 불편할 것 없고 북한에서 "사촉"이라 써도 어색할 것 없다. 다만 오늘은 한국 사람과 거래하고 내일은 북한 사람과 상종하는 중국 조선족이 난감할 따름이다. 또한 앞으로 남북이 통일되면 이런 분기를 어떻게 해소시킬지 근심된다.
◇2015.04.29 중국 인민이 북한보다 더 의리있다고 생각하는 國家?
세상에서 중국과 가장 가까운 나라, 중국에 가장 의리를 지키는 나라는 어느 나라인가? 이스라엘이라는 설이 중국 민간에서 꾀나 유행되고 있다.
1976년 7월 중국 탕산(唐山)에서 규모 7.8의 지진이 일어났다. 30여만 명이 사망한 인류 역사상 드문 대 참상의 지진이었다. 그때 이스라엘은 맨 먼저 중국에게 많은 의연금을 지원하겠다고 선포했다고 한다. 물론 중국은 세계 혁명의 중심이라는 자부심을 지키며 다른 나라의 지원을 한 푼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냉전시기 미국의 주도 하에 서방 17개국인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은 프랑스 파리에 대 공산권 전략물자수출 통제기구(CoCom·1949~1994)를 세우고 사회주의 국가에 대해 신기술, 특히 신식 무기의 수출과 기술을 봉쇄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여기에 가입하지 않았으며 중국에게 대량의 신식 무기와 제조기술을 제공했다고 한다.
▲시진핑(習近平,오른쪽) 중국 국가주석이 2013년 5월 9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와 만나 악수하고 있다. 시 주석은 이날“중국과 이스라엘은 줄곧 좋은 관계를 유지해왔다”며“양국 관계가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네타냐후 총리는“이스라엘은 전쟁의 아픔을 잘 알고 있다”며“중동 평화를 위해 중국이 힘써 주면 좋겠다”고 했다. /뉴시스
중국의 W-20·W-30 무인정찰기, HP무인공격기, J-10전투기, 신식 잠수함, 탱크파갑탄, 92B반탱크미사일, TAAS단병탱크 시스템, 공대공미사일, 섬유방탄의 등은 이스라엘에서 기술전수를 받아 제조했다고 한다. 이에 대한 반론도 있지만 어불성설이다. 중국의 신식무기 개발은 구(舊)소련과 이스라엘 외의 다른 국가로부터 지원받지 않았다. 무릇 구소련으로부터 지원받지 않은 신식무기는 이스라엘에게서 전수받은 것이 너무나 뻔하다. 하물며 1960~ 1970년대의 중-소간은 첨예한 대립의 관계가 아닌가?
이스라엘의 중국에 대한 신무기와 기술의 지원은 미국 몰래 행한 극비였다. 사실 그 사이 이스라엘은 중국에 최신 무기와 기술을 전수하려고 선불까지 받았다가 미국에게 발각, 제지돼 계약을 어기고 중국에게 손해배상을 하기도 했다. 그러므로 중국 당국은 위 사례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1950년 1월 이스라엘은 서방과 중동 국가 중 맨 먼저 중국을 승인했다. 그러나 중국은 1949~1980년대에 이스라엘을 유태 부흥주의, 죄악의 나라라고 얼마나 공격한 지 모른다. 또한 이스라엘의 철천지원수―팔레스타인의 건국을 최초로 승인하고 지지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중국을 한 번도 맞받아 욕하지 않았다.
북한은 중국의 지원을 수없이 받았고 조-중 우의는 선혈로 응고된 형제의 우의라고 떠벌이다가 조금만 비위에 거슬리면 중국을 욕하고 반대한다. 월남도 중국의 지원을 수없이 받았지만 걸핏하면 중국을 욕하고 반대하며 지금도 중국과 대립관계이다. 이스라엘을 중-북, 중-월 관계보다 더 가까운 나라로 보아야 된다는 많은 중국인의 생각에 일리가 있지 않은가?
중국-이스라엘의 이런 특수한 관계는 인류역사상 아주 드문 현상이며 사람들이 심사 숙고하여야 할 여지를 남겨둔다. 중국-이스라엘의 이런 관계는 사실 깊은 역사적인 원인이 있다.
19세기 말~20세기 초 많은 러시아 유태인은 공산혁명을 회피해 하얼빈(哈爾濱)에 피란 와 살았으며 최고 2만 여명이나 됐다. 2차 대전의 잔혹한 학살을 피하여 많은 유태인은 세계 각지로 흩어졌지만 히틀러가 두려워 감히 받아주지 않았다. 중국은 기꺼이 받아줘 상하이(上海)에 5만여 명의 유태인이 살았다. 이들은 대부분 이스라엘로 돌아갔으며 많은 사람이 정부 요직에 들어갔다. 이스라엘의 제17대 총리 에후드 올머트(Olmert·2006.4~2009.3) 조부의 묘소는 하얼빈에 있다.
유태인은 애증이 분명한 민족이다. 무릇 원수는 세상 끝까지 가서라도 복수하고야 말며 은인은 영원히 잊지 않고 보답한다. 중국에서 목숨을 건지고 돌아간 유태인이 7만~8만여 명이라면 지금은 20만 명 정도로 불었을 것이다. 그들의 사돈에 팔촌까지 합하면 이스라엘 인구의 몇 분의 1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중국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는 자명하다.
송나라 휘종(徽宗·1101~1122) 연간에 수도 카이펑(開封)에 많은 유태인이 살았으며 후세에 점차 중국인에게 동화되었다. 고대(176BC~630AD) 중국 신쟝(新疆)에 루란(樓蘭)이란 나라가 있었다. 유적지에서 백인종의 시체가 여럿 발굴됐고 지중해 동해안의 인류로 추정되며 유동성이 강했던 유태인과 연결시키는 설도 있다.
이스라엘에 자주 출장 가는 한국의 K목사에게서 자주 들은 말이다. 이스라엘 교회의 사람들은 중국에 대해 큰 호감을 가지고 있는데 원인이 구약 <성경>에 있는 구절 때문이다.‘중동지역은 분쟁이 끊이지 않으며 먼 미래 인구 2억의 나라가 높은 산맥에 터널을 뚫고 수 없는 군대를 파병해 중동지역의 난을 수습한다.’ 중국을 추측하는 말이라고 한다.
유태인들은 앞으로 중국의 힘을 입어 중동의 평화가 이루어질 수도 있다고 믿는다고 한다. 이런 생각을 하는 중국 사람은 전혀 없는데 말이다. 좀 허망한 말이긴 하지만 종교 신양의 차원에서 그런 허망한 환상도 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2015.05.13 중국 법조계를 주름잡는 대학은? 베이징대 칭화대?
중국의 중앙과 지방 재정이 거금의 연구비를 지원하는 랭킹 상위 아홉 개 대학은 칭화(淸華)대학, 베이징(北京)대학, 쩌쟝(浙江)대학, 상하이(上海)교통대학, 푸단(復旦)대학, 난징(南京)대학, 하얼빈(哈爾濱)공업대학, 시안(西安)교통대학, 중국과학기술대학 등이다.
중국 대학의 랭킹에 대해 이 정도만 알면 너무 단편적이다. 왜냐하면 중국의 대학은 대학 자체의 종합실력에 따른 랭킹이 있는가 하면 ‘전공별 랭킹’이라는 개념이 강하다. 전체적 수준이 높은 대학이라고 해도 어떤 전공은 수준이 낮을 수 있고, 전체적 수준이 낮은 대학이라고 해도 어떤 전공은 수준이 높을 수 있다.
한국인의 중국유학이 그 사이는 생계형 유학(취업, 사업이 목적)이 위주였다면 앞으로는 연구형 유학도 많아지리라 추측된다. ‘나는 A 분야의 학자인데, 또는 A 분야의 학문을 하려는데 중국의 어느 대학에 갈까?’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라면 당연 중국 각 대학의 랭킹도 중요하지만 자기가 하려는 전공의 랭킹을 더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중국 베이징 대학생들이 캠퍼스를 걷고 있다. /조선일보DB
베이징대학의 중문학·물리학·철학·역사학·수학 등은 랭킹 1위이지만 다른 학과는 그리 특출하지 못하다. 랭킹 1위인 중문학도 어학은 당당히 랭킹 1위이지만, 문학은 푸단대학의 중문학과와 순위에서 박빙이다. 물리학의 반도체 전공은 지린(吉林)대학만 못하다. 역사학의 송사(宋史) 전공은 허베이(河北) 대학만 못하다. 즉 문학, 반도체, 송사 등의 전공 분야자는 구태여 베이징대학에 갈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칭화대학은 토목공정, 경제관리, 기계, 전자, 핵물리 등 랭킹 1위가 많지만 다른 대학보다 수준이 떨어지는 전공도 있다. 이를테면 레이저학은 창춘(长春)레이저학원, 야금학은 둥베이(东北)대학만 못하다. 칭화대학은 원래 공과대학인데 1986년부터 인문, 정법(정치와 법을 합친 학문) 등 전공을 추가해 점점 종학대학으로 변해가고 있다. 새로 추가한 전공은 다 2류, 3류 수준이다.
칭화대학의 중문, 신문, 법률 등 학과에 응시했다가 미끄러진 한국 학생더러 인민대학의 같은 전공에 가라고 권고하면 “그런 시시한 대학에서 공부하기 싫다”라며 거절하기 일쑤다. 인민대학의 이런 학과가 칭화대학보다 월등하게 우수해 중국 법조계의 대부분 실권을 인민대학 출신들이 쥐고 있는데 말이다.
한국의 고려사, 조선사 학자가 학술연구를 위해 중국 대학에 가려면 어디를 선택해야 할까? 허베이(河北)대학과 인민대학을 선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허베이대학의 송사(宋史)전공은 랭킹 1위이며 거기에 고려사 연구에 관계되는 자료가 많을 것이다. 인민대학의 명·청사 전공은 랭킹 1위이며 그곳에 명·청사연구원도 있고 조선사의 연구에 도움 되는 자료도 많다. 독립운동을 연구하는 학자라면 지린대학이나 동북사범대학에 가는 것이 마땅하다. 어렵게 베이징대학이나 칭화대학에 갈 필요가 없다.
대학별, 전공별의 랭킹은 불변하는 것이 아니다. 1970년대까지 난카이(南开)대학, 지린대학은 랭킹 10위안에 들었고 난징대학은 랭킹 10위에서 한참 떨어졌었지만 지금은 난징대학이 6위이고 난카이대학과 지린대학은 10위밖으로 밀려나갔다. 랭킹 순위가 변함에 따라 나라에서 주는 연구비용도 물론 새로 격상한 대학으로 옮겨진다. 경쟁을 통한 이런 변화는 중국의 교육과 학술의 발전을 크게 추진하므로 한국이 따라 배울 점이다.
전공별의 랭킹 1위가 각 학교로 산산이 흩어진 원인은 각 학술분야의 최고급 학자가 산산이 흩어져 있기 때문이다. 14억 인구의 중국에서 어느 학술분야의 권위가 되기는 쉬우면서도 어렵다. 랭킹 1위의 전공을 고르고 그 분야 1~3인자의 박사학위를 딴 후 10년쯤 지나면 그 학계의 권위로 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평생 노력해도 권위가 되기 힘들다. 북경대학, 칭화대학이 제아무리 좋다고 해도 그 학교에 자기가 원하는 학술분야의 1위 전공이거나 1~3위 학자가 없으면 부득불 다른 학교를 택해야 할 것이다.
한국의 상황은 덮어놓고 서울대학이 제일이다. 보통 한국 사람들은 한국식으로 중국을 생각하여 “어느 학교를 지망하느냐?”고 물으면 주저 없이 “물론 베이징대학이나 칭화대학에 가야지”라고 대답하는데 이것은 그릇된 생각이다. 중국 문학을 하려면 베이징대학에 어렵게 비비고 들어갈 필요는 없다. 어쩌면 푸단대학이 더 낳을지도 모른다. 러시아어는 무명지배(无名之辈·이름도 없는 기관)인 흑룡강(黑龙江)대학이 최고다.
한국에서 칭화대학의 중문학과, 법률학과를 졸업한 자는 취업이 쉬우나, 인민대학의 중문학과, 법률학과를 졸업한 자는 취업이 어려운 실례를 목격하곤 한다. 후자의 수준이 전자보다 퍽 우수할 수도 있는데 말이다. 한국인, 특히 인사 분야의 사람들이 중국대학의 랭킹에 관한 인식을 갖추고 이런 상식에 어긋나는 관행을 극복했으면 한다.◎
◆韓中 내시경
2015-05-28 조선일보
◇ 한국정치는 '탁구식 정치' ①② 모택동의 축구정치와 문화혁명
탁구는 상대방이 쳐 오는 공을 고려할 사이 없이 즉흥적으로 맞받아 쳐 넘겨야 한다. 배구는 두 사람을 거쳐 세번째 이내에만 넘기면 되므로 생각할 여지가 조금 있다. 축구는 장시간의 노력으로 연마한 실력으로 기회를 엿보아 차 넣는다. 경기 중에 생각하며 온갖 전술을 쓰게 된다.
정치도 즉흥적으로 맞받아 하는 정치가 있는가 하면 천천히 전략전술을 모색하며 하는 정치가 있다. 필자는 전자를 ‘탁구식 정치’, 후자를 ‘축구식 정치’라 비유하겠다. 한국은 탁구식 정치가 많은 점이 약점이고 중국은 축구식 정치가 많은 점이 약점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한국 모 정당의 고위층 회의, 그것도 기자들이 참가한 공개적 회의에서 ‘공갈’ 운운하다가 한 정치인의 이미지가 한 방에 실추됐다. 상대방의 발언을 듣자마자 맞받아 친 막말이었다. 중국 문화 대혁명 때 홍위병 맹장들을 연상케 하는 행위였다. 최근 몇년간 한국에서 막말사건으로 실추된 정치인이 꽤나 된다. 다 전형적인 탁구식 정치겠다.
탁구식 정치는 서로 주고받는 말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이완구 총리가 성완종 로비사건에 말려들었다. 이때 이완구 총리가 빨리 총리직을 사퇴할수록 본인이나 그가 몸담은 여당에 이롭고, 늦게 사퇴할수록 야당에 이롭다. 여당은 빨리 사퇴하도록 힘쓰고, 야당은 ‘아직 조사도 안했고 범죄가 확정되지 않았는데 사퇴를 운운할 수 있나?’라며 극력 사퇴를 막아야 맞다.
만약 야당이 이렇게 끌면 이 총리는 성급하게 사퇴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보궐선거 이전에는 사퇴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여당이 사퇴를 권유한 것은 당연하지만 야당 당수도 무모하게 당장 사퇴해야 한다고 거듭 강하게 압박하였다. 부득불 보궐선거를 이틀 앞두고 사퇴하였다. 결국 성완종 사건이 ‘사면사건’으로 흘렀다. 여당은 축구식 정치, 야당은 탁구식 정치를 한 셈이며 보궐선거 승패의 여러 원인 중의 한 가지 원인이겠다.
권좌는 공중인물의 이미지를 상승시킬 수도, 추락시킬 수도 있다. 사정에 따라 판단할 일이다. 중국역사상 권좌가 한 사람을 매장시킨 예는 수없이 많다. <삼국지>의 원술은 황제로 자처하다가 이내 고립되어 망하고 굶어 죽었다. 원세개는 중화민국의 대총통을 자처하다가 전국적인 반대 폭풍에 휘말려 2년 반 만에 57세의 젊은 나이로 화병에 걸려 죽었다.
삼국지의 손권은 유비의 공격을 받아 궁지에 몰리자 조조의 도움을 받으려고 조조에게 황제의 자리에 올라앉으라는 편지를 썼다. 그때 조조는 ‘손권이 나를 틀에 올려놓고 불로 구우려하는구나’라며 올라앉지 않았다. 만약 올라앉았더라면 천하의 정치세력들은 조조 반대의 기치에 뭉칠 것이다. 조조가 축구식 정치를 한 셈이겠다. <②편에계속>
'탁구식 정치'와 '축구식 정치'
<①편에서 계속>
모택동은 임표(林彪)를 1959년부터 부각시키며 1969년에는 헌법과 당장정(黨章程)에 계승자라고 써넣었다. 그러자 군부 고위급 장령들은 임표 반대의 통일전선을 형성했으며 임표는 틀에 올라 굽히는 신세가 되었다.
아마 군부를 양분해 서로 싸우도록 만들고 어부지리를 취할 모택동의 꼼수였을지도 모른다. 11년 동안 기다리던 임표는 더 참지 못하고 쿠데타를 모의하다가 실패하고 비행기 추락으로 진짜 ‘불고기’가 되어버렸다. 임표는 계승자라는 높은 영예를 받았다가 풍비박산이 된 셈이다. 모택동의 축구식 정치와 높은 명예가 임표를 매장시킨 예이다.
▲1966년 중국 문화대혁명 초기의 모택동 모습. /조선일보DB
한국정치의 또 한 가지 예인 4대강 공사를 들어보자. 당시 4대강 공사를 하자는 주장이나 하면 안 된다는 주장이나 둘 다 확실한 근거가 부족했다. 이때 양쪽이 다 탁구식정치를 해 전자는 무작정 공사를 강행했고 후자는 무작정 공사를 반대했다. 반대 여론이 거세어 4대강 공사가 저지른 비리는 그리 엄중하지 않았다. 결국 양자는 다 이기지도 지지도 않았다.
만약 이 일을 축구식 정치로 대하면 상황이 달라진다. 전자는 하지 말거나 아주 조심스럽게 하여야 한다. 후자는 방임하거나 심지어 극력 찬양하여야 한다. 그러면 4대강 공사 관계자들은 이성을 잃고 엄청 큰 비리를 저질렀을지도 모른다. 그런 연후에 뒤통수를 때리면 한방에 넘어진다. 상대방의 잘못을 부추겨 더 크게 만들고 반격하는 축구식 정치겠다.
모택동이 문화대혁명(이하 문혁)을 발동할 때 중국공산당의 간부 다수는 반대했었다. 그러나 모택동의 권위가 너무 세고 대중이 모택동을 옹호하는 열정도 너무 높았으므로 반대해도 안 되겠다 싶어 간부들은 생각을 바꿨다. 문혁을 방임하거나 심지어 극력 찬양하였다. 결국 문혁은 엄청 큰 비극을 자아냈으며 중국을 파탄냈다. 간부들은 모택동이 죽자마자 뒤통수를 쳐 한 주먹에 문혁과 당시의 정치를 부정해버렸다. 만약 그때 간부들이 극력 반대하여 문혁의 착오가 웬만큼 줄었어도 4인방을 타도하는 명분이 서지 않으며 등소평의 개혁개방도 실패했을지 모른다.
축구식 정치는 나쁘게 말하면 ‘꼼수’, ‘권모술수(權謀術數)’, ‘음모궤계(陰謀詭計)’이고 좋게 말하면 ‘수단’, ‘전략전술’, ‘책략·방략’이다. 특정 정치인이나 정당이 상대방을 이기려면 어디까지나 책략이 있어야 한다. 그들의 잘잘못을(현재진행형에선 잘잘못을 판단하기 어렵다) 떠나서 하는 말이다.
한국의 각 정당은 어떻게 축구식 정치를 잘 할 것인가를 심사숙고할 필요가 있다.
◇ 과거제도로부터 1400년, 중국 교육의 노하우는? ① ②
한국은 교육구국(救國)의 나라이다. 공업기초가 낙후했고 자원도 결핍하지만 교육을 중요시했기 때문에 한강의 기적을 창조했다는 설이 있다. 필자는 줄곧 한국 교육은 완벽하고 중국 교육은 엉성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최근 한·중 두 나라의 교육을 자세히 대비해본 결과 각자 장단점이 있음을 발견했다.
▲2015년 3월15일 오후 부산 진구 롯데호텔 아트홀에서 열린 스카이에듀 입시설명회에 참석한 학생 및 학부모들이 강사의 설명회를 듣고 있다. /조선일보DB
한국은 국민의 높은 교육열에 따른 높은 교육 보급률, 그리고 학교 관리의 완전무결 등이 장점이다. 이 두 가지 측면에서 중국은 한국에 비해 낙후하다. 그러나 과거제도로부터 이어온 1400여 년의 역사를 가진 중국 교육도 노하우가 꽤나 있다.
첫째, 중국 교육의 인재 선발은 능력 위주다. 2년에 한 번씩 교직원에 대해 평가를 실행한다. 필기, 면접, 좌담, 투표 등 방법으로 우수한 자를 선발하여 중용하고 낙후한 자를 도태하거나 연수시킨다. 그러므로 중국 초·중·고교 교직원 직위의 승진은 생기발랄하다. 교장은 30~ 40대가 적지 않다. 성급, 시급의 전문 기관-우수교사 평선 위원회 등에서 이 일을 관장한다.
한국의 인재선발은 경력 위주이므로 교직원 직위의 승진은 경직돼 있다. 초·중·고교의 경우 20년의 교원 경력, 4년의 교감 경력, 4년의 타지방 근무 경력, 게다가 병역 등을 거친 후에야 교장 발탁이 가능해진다. 30~40대의 교장은 거의 없다. 50대, 그것도 55세 이상이 많다. 지도자의 나이가 많으면 그만큼 창의력이 떨어지며 생기가 없어진다.
둘째, 중국 교육은 규범화와 수준 지표를 매우 중요시한다. 새로운 학교를 설립하거나, 새로운 학과, 과목을 설치하려면 엄격한 심사와 허가를 받아야 한다.
선양여명기계창(瀋陽黎明機械廠)은 종업원 5만 명인 초대형 제조공장이다. 대학 졸업생이 많으며 명문대 졸업생도 적지 않다. 1977년 자체로 여명공학원이라는 4년제 대학을 설립했는데 교육부는 이 대학을 인정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반복 조사를 진행하며 해산하라는 명령을 거듭 내렸다. 그래도 해당 대학은 해산하지 않고 완강히 버티어 나갔다.
만 4년이 지난 후 전국 각 대학을 졸업하고 여명기계창에 발령받은 졸업생과 여명공학원 졸업생에게 함께 시험을 치렀다. 그 결과 전자는 합격선(60점) 이하가 한 사람도 없고, 후자는 합격선 이상이 한 사람도 없었다. 결국 불합격 인재 배출의 악명을 쓰고 해산되고 말았다.
<②편에서 계속>
<①편에계속>
1978년부터 중국은 고서 출판의 붐이 일어났다. 각 출판사는 고서 출판의 열기가 올랐으며 이 면의 인재가 시급히 수요 됐다. 많은 대학이 고전 전공의 설치를 하였으나 허가하지 않자 교육부에 찾아가 농성하였다. 교육부는 농성자 20여 명을 베이징대 고전문헌전공에 보내 청강시켰다. 두 달간 청강한 후 그들은 능력 미달을 절감하고 설치 신청을 주동적으로 철회하였다. 38년이 지난 지금도 고전문헌전공은 베이징대 외에 4개 대학밖에 없다.
▲베이징대학교 도서관. /조선일보DB
베이징대 중문학과 고전문헌전공은 1959년에 설치되어 격년모집하며 한 번에 20명씩 모집한다. 5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인재가 남아돈다. 한국의 이와 비슷한 한문학전공은 25개 대학에 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대학에 중문학과가 몇 안 되었다. 1990년부터 2005년 사이 100여 개 대학에 중문학과·중국학과가 새로 생겼다.
필자가 보건대 한국에 수준 미달 대학이 적지 않다. 한문학과, 중문학과에도 문제가 많다. 일부 대학은 애초 해당학과를 설치할 능력도 없거니와 배양해낸 학생도 수준 미달이다. 90%이상의 졸업생이 배운 전공의 분야에 종사할 능력도 없거니와 사회의 수요량도 많지 않다. 대학 설립에 엄격한 표준이 없으며 학과 설치도 학교 내의 구조조정으로 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중국의 교육은 경쟁시스템이 잘 되어 있다. 학과·전공별 랭킹이 있으며 랭킹1위는 국가로부터 연구비를 받는다. 뿐만 아니라 랭킹을 몇 년에 한 번씩 쇄신한다. 본래 랭킹 1위인 학과·전공도 유명한 교수 두어 사람이 은퇴하고, 두어 사람이 돌연 강의할 수 없게 되면 2위로 물려날 가능성이 있으므로 항상 경계심을 가져야 한다.
10여 년 전 이런 일이 있었다. 중문학과의 어학전공과 문학전공은 모두 베이징대가 1위고 상하이에 있는 푸단(復旦)대가 2위였다. 그런데 상기와 같은 원인으로 베이징대 문학전공이 2위로 밀릴 위험에 부딪혔다. 다행히 푸단대의 투표권 있는 한 교수가 푸단대에서 푸대접을 받은 앙심으로 베이징대에 표를 던져 베이징대의 문학전공이 계속 1위를 보전할 수 있었다.
허베이(河北)대는 송사(宋史)가 랭킹 1위이다. 그런데 송사권위학자 치샤(漆侠) 교수가 사망하자 송사 연구 중심의 랭킹 1위가 흔들렸다. 위기감을 느낀 허베이대는 국내외의 송사 권위학자를 영입하는 등의 노력으로 간신히 랭킹 1위를 유지하고 있다.
한국은 학과·전공의 랭킹 1위는 거의 다 서울대에 있으므로 학술상의 경쟁이 형성되기 어렵다. 경쟁이 빈약하면 학술발전이 잘 이루어지지 못한다. 한국 대학 치명적 약점 중 하나이겠다.
◇12년전 사스(SARS)-광동성의 잘못된 정책 ① ②
중국의 사스를 회고한다
12년 전 중국의 사스(SARS)는 지금 한국이 겪고 있는 메르스(MERS)와 비슷했다. 단, 사스는 ‘국산품’이었고 메르스는 ‘수입품’이다. 필자는 사스 피해지역의 주요 지역의 하나인 베이징에서 사스의 전반 과정을 겪었다. 필자의 회고가 한국인에게 참고가 될 것이다.
2002년 11월 16일 광둥(廣東) 퍼산(佛山)의 한 사람이 사스에 걸렸지만 주의를 일으키지 못했다. 그에게서 전염된 환자가 5명이었다. 12월15일 허웬(河源)의 황 씨가 사스에 걸렸으며 2003년 1월 2일부터 중산시(中山市) 중의병원에 사스 환자 12명이 선후로 입원했다. 폐렴인데도 폐렴의 방법으로 치료되지 않아 ‘원인불명의 폐렴’이라 불렀다.
사스가 발견된 지 달포가 지났지만 광둥성에서는 이 소식을 봉쇄했다. 공개하면 국내외 관광객, 사업자들이 발길을 끊을 것이고 더욱이 그때는 해마다 열리는 광저우춘계(春季)교역회(廣交會·4월 25일)를 한창 신청할 때였다. 즉, 지역의 경제에 막대한 손해를 끼칠 우려 때문이었다. 그때 광둥인이 타지방으로, 타지방인이 광둥으로 마음대로 드나들었다.
2월 3~14일 사스는 광둥에서 급속히 확산돼 200여 명이나 걸렸으며 이 때부터 중국 전역에 소문이 퍼졌다. 광둥성은 최고의 의료진을 투입했지만, 전혀 성과를 못 냈다. 단, 본 병은 같은 가족끼리와 담당의료진에게 집단적으로 전염된다는 사실만 알았다. 2월 11일 의학전문가들은 이 병을 ‘비전형폐렴(非典型肺炎)’이라 이름 짓고 ‘비전(非典)’이라 약칭하였다.
▲2003년 5월 중국 베이징에서 시민들이 사스에게서 보호하고자 마스크를 착용한 채 기차를 기다리고 있다. /블룸버그
2월 말부터 사스는 전국 각지로 확산하기 시작했다. 환자의 최초 발견을 시점으로 하면 홍콩(2월 21일), 산시(山西) 타이웬(太原·2월 27일), 베이징(北京·3월 6일), 타이완(臺灣·4월 28일)순이다. 광둥을 포함한 이 5개 지역은 중국 사스의 주요 피해지역이다. 5월 초에는 25개 성에서 수십명의 사스 환자가 나타났으나 다른 지역의 사스 환자는 서넛에 불과했다.
중국 의학전문가들은 2월 18일 본 병의 병원체를 ‘클라미디아(Chlamydia)’라는 결론을 내렸다. 4월 16일 UN의 WHO는 제네바회의에서 본 병을 ‘엄중급성호흡계통종합증(severe acute respi-retory syndrome·SARS)’이라 불렀다. 또한 병원체를 관상바이러스(corona- virus)의 변종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사스의 근본원인, 치료방법에 대해서는 명확한 제시가 없었다.
4월 20일부터 중앙TV방송국(CCTV)은 하루에 한번씩 사스의 정보를 발표하였다. 따라서 중국 전역은 비상사태로 돌입했으며 특히 중점피해지역은 극심한 공포분위기에 휩싸였다. 중점피해지역에서 출발한 손님은 항공기·기차·고속버스 등에서 내리자마자 특정장소에 가두어 넣고 보름간 관찰한 후 이상이 없어야 내보냈다. <②편에계속>
<①편에서 계속>
베이징시에서는 공공장소 진입 시 먼저 문어귀에서 체온을 재어야 했다. 좀 큰 지정된 병원은 고열 진찰실을 별도로 설치해 놓고 열이 나는 자는 무조건 그 실에 들어가 1차 진단을 거쳐 의심되면 사스전문병원으로 압송했다. 택시 기사는 병원으로 가려는 손님을 태우기 꺼려하였으며 병원 앞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4월말부터 각 직장은 장기휴식을 시켰다. 4월 27일부터 오락장소의 문을 닫았다. 4월 24일부터 초·중·고교는 등교 대신 인터넷수업을 진행했다. 5월 22일부터 고교 3학년생만은 등교했고 6월 8일의 대입시험은 정상적으로 치렀다.
4월말 베이징 샤우탕산(小湯山)에 사스전문병원을 설립키로 결정하였다. 허허벌판에 7일 만에 침대 1000개짜리 대형 병원이 준공됐다. 군부대 1200명(전부 공산당원)의 전문 의료진이 이 병원에 집결해 5월 1일부터 진료를 시작했다. 전국 1/7의 사스 환자를 이 병원에 집결시켜 치료하였으며 680명을 완치하였다(사망자는 8명뿐). WHO는 이 병원을 ‘인류 의료사의 기적’이라 찬양하였다.
한동안 사스는 모 서방제국주의가 중화민족을 멸종시키려 일부러 중국에 퍼뜨린 바이러스라는, 즉 중화민족의 DNA에만 전염될 수 있는 생물화학무기의 습격이란 말이 항간에 돌았다. 그러나 중화권 밖의 나라와 종족에게도 사스가 나타났으며 또한 죽은 사람이 있으므로 이 여론은 이내 날조로 인정되었다. 이윽고 미중 양국은 사스 연구에 긴밀한 협력관계를 맺었다.
한동안 된장과 김치가 사스 예방의 좋은 음식이라는 여론이 동포사회에서 퍼졌다. 중국조선족과 중국체류 한국인이 사스에 걸린 사람이 없기 때문에 생긴 여론이다. 그러나 동북은 사스전염지역이 아니고 베이징 거주 한국인과 조선족을 합쳐 약 9만 명, 베이징 인구의 1%도 되지 않으므로 걸린 사람이 없다 하더라도 별 설득력은 없다. 동포끼리 자화자찬한 소리에 불과했다.
▲사스(SARS) 전파의 원인으로 지목된 중국의 줄머리사향살쾡이. /조선일보DB
5월 23일 야생동물 살쾡이(果子狸)가 사스의 숙주라는 견해를 내놓았다. 살쾡이는 너구리의 일종인데 고기는 먹고 가죽은 옷을 만들며 털은 붓을 만들고 기름은 화장품 원료와 탕상(燙傷·끓는 물에 덴 상처)의 약재로 쓰이므로 광둥지역에서 많이 사육했다. 그가 사스의 숙주라는 것은 증거 불충분이다. 그러나 그때 사람들은 살쾡이를 대거 잔혹하게 학살하였다. 짐승이 억울한 속죄양이 된 셈이다.
베이징의 경우(베이징의 사스가 가장 늦게 없어졌음) 6월 초부터 사스에 걸리는 환자가 거의 없어졌으며 하지(6월 22일)부터 전혀 없어졌다. 6월 24일 WHO는 베이징을 사스 역병지역에서 제외하였으며 따라서 베이징에 대한 관광경고도 해제했다. 중국의 사스 전염병과의 전쟁은 이로써 막을 내렸다. 2002년 12월 15일부터 장장 6개월 10일이다.
◇전대미문의 사스, 中정부의 패착과 인민의 역할
중국의 사스를 회고한다-③
사스는 중국 역사상(아마 세계역사상) 전대미문의 전염병, 천재(天災)였다. 사스의 발생, 발전 및 소실의 전반 과정에서 우리는 무엇을 알았는가? 무슨 경험을 터득했는가? 이는 중요한 문제이다.
▲사스 감염을 피해 중국발 특별기를 타고 2003년 4월 28일 인천공항에 도착한 중국 유학생들이 검역관으로부터 체온검사를 받고 있다. /조선일보DB
우선 단언할 바는 중국은 사스 자체에 대해 지금까지도 미스터리이다. 그의 확실한 병원체는 무엇이고, 이 병에 걸리는 원인은 무엇이며 어떻게 예방하여야 하는가, 다 미지수이다. 그러나 사스와의 반년 남짓한 전쟁에서 일정한 경험을 쌓았다고 할 수 있다.
첫째, 정보공개, 환자격리, 시간 쟁취이다. 전염성이 막강한 역병, 이런 천재에 부딪치면 마땅히 환자를 엄격히 격리시키고 신속히 전 사회에 알리어 온 국민의 주의를 환기시켜 전민전쟁을 해야 한다. 신속히 알려야 한다는 점에서 시간은 생명이고 확산 방지의 관건이며 승패의 결정적 요소이다.
중국정부는 이 면에서 너무 어수선했다. 2002년 12월 15일을 시점으로 하여 발견 달포가 지나서야 사스의 정보를 공개했다. 만약 즉시 공개해서 대응했더라면 사스를 광둥 한 개 성 안에 국한시켰을지도 모른다. 초창기에는 체온이 높은 자를 강제, 반강제로 보름간 입원, 관찰하였는데 그 비용을 개인이 부담하였다. 무료 의료거나 의료 보험이 아닌 사람들 중 몰래 내뺀 자가 비일비재하였다. 식초가 사스 예방에 좋다는 뜬소문에 광둥에는 순식간에 식초가 동났다. 이로 인해 식초 다산지 타이웬(太原)과 광둥 간의 인적 교류가 증가했으며 이것이 타이웬에 사스가 유행된 주요 원인이었다.
4개월이 지난 4월 14일이 되어서야 국가주석 후진타오(胡錦濤)가 광둥 현지에 답사를 가서 사스의 예방과 치료에 전념할 것을 호소하였다. 4개월 8일이 지난 4월 23일에야 국무원에 사스방치 지휘부를 설치하고 방치 예산 20억 위안(3600억원)을 투입하였다. 4개월 반이 지난 5월 1일에야 베이징에 사스전문병원을 설립하였다. 사스 방치의 전반 과정에서 중국정부가 잘 했다고 칭찬할 만한 것은 베이징에 사스전문병원을 설립한 것 하나뿐이다.
둘째, 인민단결이다. 그때 광둥성 당서기는 장더쟝(張德江·현 중국 3인자)이었는데 그에 대한 질타가 거세었다. 심지어 그를 해임시켜야 한다는 여론도 있었다. 그러나 이는 전대미문의 재난, 상상 불능의 사건이므로 이해해주어야 한다는 견해가 주도적이었다. 민족의 대 재난을 당하여 어느 개인의 책임을 추궁할 것이 아니라 우선 인민이 합심해 대응하여야 한다는 중국인의 기질을 엿볼 수 있다. 그러므로 사스치료 의료인원이 대거 사스엘 걸리고 목숨을 잃은 자도 있었지만 5월 1일 신설 베이징 사스방치명원에 삽시에 1200명의 의료진을 투입시킬 수 있었다.
중국의 사스를 회고한다-④
<①편에서 계속>
셋째, 사스 바이러스는 약 섭씨 20도 좌우의 건조한 조건에서 잘 생존하며 30도 이상의 습한 조건에서는 생존하지 못하는 것 같다. 11월~2월, 광저우는 기온 20도 좌우이며 건조한 시기이다. 타이웬과 베이징은 광둥과 인적 교류가 많은 점도 있지만 지리 위치가 비슷하고(두 곳 다 북위 39도 좌우), 모두 건조하며(두 곳 다 연 강수량 모두 약 480㎜), 2월 말~3월 초에 같은 약 20도의 기후대에 처해 있었다.
그 시기 동북, 북, 서북은 15도 이하의 기후이므로 사스바이러스가 생존하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별 대책도 없이 6월부터 사스 감염자가 없어지기 시작하여 6월 말에는 근절되었다. 중국은 사스를 예방한 것이 아니라 기후의 덕을 입었다고 해야 더 정확할 것이다. 그 시기 홍콩 대만의 기온과 습도가 어떤 상황인지는 능자의 조언을 바란다. 부언할 것은 5~6월 베이징은 한국보다 약 보름 일찍 30도 이상의 기온이 다가온다.
넷째, 치료할 때 피질호르몬(cortical hormone) 약을 쓰지 않거나 적게 써야 한다. 이 약은 사스 치료에는 좋지만 뼈 괴사와 폐 섬유화를 초래한다. 이런 부작용이 있는 줄 알면서도 ‘일단 생명부터 구하고 보자’라는 동기에 피질호르몬을 주요 약제로 사용하였다. 이 약을 좀 오래 쓴 자, 의사의 부주의로 양을 많이 쓴 자(특히 홍콩의 경우)는 그 후유증으로 심히 앓고 있다. 베이징에만도 300여 명이며 홍콩에도 적지 않다. 이들은 지금 대부분 우울증에 걸렸고 자살한 자도 있으며 당초 사스로 죽느니만 못했다는 말을 하며 암울한 여생을 보내고 있다.
다섯째, 과잉 대응할 필요가 전혀 없다. 사실 직장, 학교도 며칠 정도만 휴식시키거나 심지어 휴식시키지 않을 수도 있다. 이 면에서 필자에게 엽기적인 경험이 있다. 4월 말부터 장기 휴식으로 집에 칩거하여 있던 필자는 총명한 친구로부터 이런 계발(啓發·깨우침)을 받았다
‘사스는 추호도 겁날 것 없다. 사스의 사망률은 독감의 1/10, 교통사고의 1/100 정도다. 만약 사스에 이렇듯 큰 겁을 먹으면 항상 생기는 독감과 교통사고를 감안하여 평생 집 안에 칩거해 있거나, 편벽한 농촌에서 살거나, 좋기는 달나라에 가서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손을 자주 씻고, 창문을 열어 통풍시키며, 사람들이 붐비는 곳이거나 특히 붐비는 병원에 되도록 가지 않으면 그뿐이다.’
이튿날부터 필자는 직장에도 나가고 모든 일을 정상화 했다. 활개 치며 온 시내를 누볐고 일 효율이 매우 높았다. 버스를 타도 텅텅 비어 필자의 전용버스 같았고, 특히 베이징 도서관에 가서 찾아야 할 자료를 순조롭게 찾았다. 평소에 베이징 도서관은 사람이 붐비어 웬만한 자료 하나 찾으려 하여도 몇 시간 걸리나 그때는 텅 비어 한 달간 찾아야 할 자료를 며칠 안에 다 찾았다.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필자는 한인교포신문 <베이징저널>에 ‘사스, 별거 아니다’라는 칼럼 문장을 써냈다.
베이징 주재 한국 모 재벌그룹의 사장이 필자의 문장을 본 후 초청특강을 시켰다. 그때 베이징의 직장들은 장기간의 휴식 상태였다. 중국 국유기업은 마음 놓고 휴식할 수 있지만 개인 기업이나 외국 기업은 매우 안달아 났으며 난감했다. 단 며칠간의 휴식만 하고 출근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인심이 흉흉한 그 판에 종업원들은 직장에 나와도 일을 하는 둥 마는 둥, 일을 하여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필자의 특강을 들은 후 사정이 완전히 달라졌다. 종업원들은 모든 근심 걱정을 털어버리고 평시와 같은 열정으로 근무하였다. 뿐만 아니라 베이징의 한인 사회도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이렇게 몇 달이 지나 사스가 근절될 때까지 당연 사스에 걸린 자, 사스로 죽은 자가 한 사람도 나타나지 않았다.
◇2015.07.01. 6·25 전쟁으로 쑥대밭이 된 조선족 마을
6·25남침전쟁에 참전한 중국군은 도합 109만 명, 중국 조선족은 10만명, 9%를 차지한다. 인구비례(0.2%)에 비해 45배나 많이 참전한 셈이다. 발발 초기 선봉부대의 48%가 조선족이었다. 이만하면 6·25남침 전쟁에 대한 중국조선족의 역할을 알만하다.
1950년 랴우닝(遼寧) 푸순(撫順) 필자의 고향 마을에는 조선족이 약 50여 세대, 300명이 살고 있었는데 6·25남침 전쟁에 참전한 자가 모두 10명 정도다. 그중 6명의 상황을 통하여 6·25남침 전쟁의 단면을 알아보자. 한 방울의 물이라도 세상을 비출 수 있다.
▲중국 조선족 마을의 하나인 남도마을. 6·25 전쟁에 조선족도 중공군에 징집돼, 10만명이나 참전했다. /조선일보DB
1. Y씨: 1950년 말에 입북하여 이내 전사하였다. 부인은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대리고 재가하여 또 자식 4명을 낳았다. 1960년 중국의 자연재해 때 불법 월경하여 평안남도에 거주한다. 재가한 남편이 사회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여 ‘반동사상’이라는 누명으로 온 가족이 양강도로 추방됐다. 그러나 재가 전에 낳은 자식 둘은 열사혈통이기 때문에 추방에 동행시키지 않았다. 이 둘은 추방된 부모형제가 어떻게 사는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며 산다.
2. J1씨: 1950년 7월 중학교 졸업 직전에 그 반 학생 모두 뽑혀나갔다. 나이가 어리므로 후방에서 선전사업을 하였다. 술이 그렇게 흔하였으며 미군이 있다가 떠난 자리는 양주와 통조림도 많았다. 그들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라며 매일 마셔 술이 인에 박혔다. 제대하여 고향에 돌아온 후에도 술 버릇을 뗄 수 없었으며 끝내 간경화에 걸려 55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
3. J2씨: J1의 형이며 마을의 간부였다. 지원군 모집을 관장하였으며 앞의 Y도 J2씨가 모집하여 보낸 것이다. Y씨의 마누라는 자기의 남편을 전방에 내보냈다며 항상 J2를 욕하였다. 먼저 친동생을 전방으로 보냈는데도 욕은 끊지 않는다. Y가 전사하자 더 못살게 굴어 홧김에 자진하여 입북하였다. 전쟁이 끝날 무렵 머리가 아파 후방 병원(중국)으로 보내졌는데 바로 집으로 왔다. 집에서 하루라도 누워보고 죽으면 한이 없을 것 같아서 왔다는 것이다. 약 반 년이 지난 후 만성뇌막염으로 1년 앓다가 사망했다. 전방에서 걸린 병이라며 국가에 몇 번 찾아갔지만 인정해주지 않았다. J2의 형은 동생의 치료비로 진 빛을 10년 동안 갚아야 했었다.
4. K씨: 일본이 투항하자 공산당군에 가입하였다. 광둥(廣東)까지 쳐들어가 곧 하이난도(海南島)를 진공하려는데 하루는 ‘모든 조선족은 집합하라’는 긴급통지를 받고 집합장소에 갔다. 유개화차를 타고 반나절 지나 점심식사, 또 반나절 후 저녁식사, 이런 식으로 3박4일만에 단둥(丹東)에 도착하였다. 이내 조선인민군복을 갈아입고 신의주에 건너가 조선인민군 제6사단에 편입되었다. 1949년 하반기의 일이었다. K씨는 군수물자 운송부문의 간부였는데 탐오(貪汚) 혐의로 투옥되어 병사하였다. 그러나 중국 정부는 이를 비밀로 붙이고 혁명열사로 대우하여준다.
5. H씨: Y씨와 같은 경력으로 참군하였다. 6월 25일 저녁에 몰래 38선 부근에 가서 콩을 먹으며 밤새 기다리다가 새벽에 공격 신호탄이 올라 남침 공격을 시작했다. 파죽지세로 진공하였으며 심지어 3바퀴 오토바이가 기관총 하나, 따발총 하나를 쏘며 하루에 80리를 진격한 자도 있다. 그는 전주 이남까지 진격했다가 포로가 됐다. 포로교환으로 고향에 돌아왔다. 그런데 한쪽 불알(고환)이 없다며 부인이 이혼소송을 내었다. 포로수용소에서 ‘중국 놈들 인해전술을 썼지? 씨를 말릴 테다’라며 그의 불알 한쪽을 짤랐다. 반인륜의 죄이다.
포로 경력자를 중국 정부에서 중용하지는 않지만 영예 군인으로 우대는 해주었다. 정부가 나서서 막아 끝내 이혼하지 못했다. 약 1년 후 그의 부인이 딸애를 낳았으며 신통하게 아버지를 닮았다. 전문가에 따르면 왼쪽 불알이 없으면 생식이 불가능하지만, 오른쪽 불알은 없어도 생육이 가능하다고 한다(그는 오른쪽 불알이 없다). 그래서 필자 마을 사람들은 일자무식도 남자의 불알은 왼쪽이 오리지널이고 오른쪽은 들러리라는 상식을 다 알고 있다.
6. L씨: 푸순에서 징병한 방호산의 부대에 참군하여 인민군 제6사단에 편입됐다. 제6사단은 개성역 진격에 이어 부산 서쪽까지 전진했으며 전공이 혁혁했다. 사단장 방호산은 인민군 역사상 처음으로 2중 영웅의 표창까지 받았으며 전쟁이 끝난 후 인민군 제5군단 중장 군단장이 되었다. 김일성은 1956년 친(親) 소련파를 숙청하고 1959년에는 친(親)중국파를 숙청할 기미를 보였다. 이에 방호산은 쿠데타를 모의하다가 발각되어 그와 많은 사람이 처형당하였다.
그때 L씨는 방호산 군단의 작전참모였으나 20대 중반의 젊은 나이에 자격 미달로 쿠데타 모의를 몰랐다. 그런데도 ‘반당종파분자’라는 누명을 씌우고 함경남도의 궁벽한 산골로 추방했다. 살 테면 살아보라며 옥수수 한 자루에 호미와 곡괭이를 주었다. 웬만한 사람이며 굶고 병들어 죽기 일쑤이지만 그는 악착같이 살아남았다. 너무 고생하여 한쪽 눈이 멀었다.
그런데도 말끝마다 ‘어버이 수령님’이라 하여 “김일성에게 당해 이 꼬락서니인데 ‘어버이 수령님’이 웬 말인가?”라고 물으니 “우리 수령님의 잘못인가? 밑의 간신뱅이가 나쁜 놈들이지”라고 말한다. 1991년 김정일이 북한인민군 최고사령관으로 임명되자 L씨에게 새 인민군복 한 벌을 선물하였다. 이에 L씨는 감격하여 눈물이 글썽하였다.
◇2015.07.20. 6·25 내전이라니…중국의 또다른 동북공정
필자는 전번에 쓴 ‘6·25’와 필자 고향마을을 연계시킨 글에 ‘6·25 남침전쟁’이라 표현했다. 얼핏 보기에는 남침이라는 두 글자가 뜬금없어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한·중 양국의 실정을 감안하면 남침 두 글자를 추가하는 시정은 매우 필요하다.
‘6·25’가 남침임은 온 세상이 다 안다. 그러나 북한 국민은 모르고 중국 국민도 거의 모르며 한국 국민도 매우 명석한 것은 아니다. 본문은 중국인의 인식을 중심으로 왜 ‘6·25남침전쟁’이라는 용어를 써야 하는가를 말하련다.
▲소련군의 지원으로 북한 권력을 장악한 김일성은 마침내 1950년 6월 25일 소련제 탱크를 앞세우고 38선을 넘어 남침을 감행했다. 이 전쟁은 3년을 넘게 끌며 지울 수 없는 최대의 상처만 우리 민족에게 남겼다. /조선일보DB
1950년 10월 중국이 북한으로 파병할 때 이렇게 선전했다:
“미제국주의가 남조선 괴뢰 이승만을 사주하여 북침전쟁을 도발하였다. 남조선군이 패배하자 16개국의 침략군을 조선반도에 투입시켰다. 조선반도를 삼킨 후에는 중국을 침략하게 된다. 중국 인민은 미국에 대항하고 조선을 지원하여 삶의 터전과 나라를 지켜야 한다(抗美援朝保家衛國).”
100만의 중국군은 전쟁 발발 3개월 후에 파병되었기 때문에 남침인지 모른다. 다만 남침전쟁의 선봉부대로 참여했다가 제대한 조선족 군인은 알지만 나라의 공식 입장과 반대되므로 이런 말을 공석에서 할 수 없었다. 또한 친북 성향이므로 사석에서도 이런 말을 아꼈다. 그러므로 중국인은 일관되게 ‘6·25’를 북침전쟁으로 확신하고 있다.
1990년대 중국 학자 선쯔화(沈志華)는 소련 비밀자료를 열독하고 새삼스럽게 6·25가 남침임을 알고 깜짝 놀랐다. 그는 이내 <조선전쟁의 비밀을 적발하다(朝鮮戰爭揭秘)>라는 책을 펴내 남침 내막을 밝혔다(1995). 그 후 ‘6·25’에 관한 수십 편의 논문을 발표했고 또 <모택동·스탈린과 조선전쟁>을 펴냈으며(2014), <모택동·김일성과 조선전쟁>도 곧 출간하게 된다.
그러나 중국 당국은 남침 진실의 공개를 되도록 막는 태도이다. 앞의 선쯔화의 책도 중국에서 출판할 수 없어 겨우 홍콩에서 출판됐다. 그의 논문도 영향이 크지 못한 학술지에 발표했을 따름이다. 2000년경 중공당사학회(中共黨史學會)의 잡지 <백년조(百年潮)>에 ‘6·25’는 남침이라는 문장을 실었다가 당국의 문책을 받았으며 발행금지를 당했다.
지금까지 ‘6·25’에 대한 중국정부의 공식 입장은 1993년 랴우닝성(遼寧省) 단둥시(丹東市)에 세워진 항미원조 기념탑의 벽에 새겨놓은 글에 표현되어 있다:
“1950년 6월 25일 조선반도에 내전이 폭발했다. 전화가 압록강변까지 다가오므로 중국 인민은 지원군을 파병하였다….”
그러므로 남침 내막을 아는 중국인은 일부 정치학자에게 국한돼 있다.
사실 중국이 ‘6·25’에 파병한 결정은 스탈린에게 이용당한 착오였다. 1951년 1월초 중국군이 3·8선을 넘은 후 2~3개월 정비한다며 계속 진군하지 않았다. 북한은 이를 중국군의 교활한 심보의 고의적 행위라며 지금까지 앙심을 품고 있다. 지금 북한 기념관에 ‘6·25’를 북한이 단독으로 치른 전쟁으로 돼 있어 중국인의 분노를 자아내고 있다. 1958년 중국군이 북한에서 철수하자 김일성은 곧바로 1959년에 친중국파를 숙청하여 버렸다.
중국이 ‘6·25’를 북침이라고 거짓말한데는 여러 가지 미묘한 이유가 있다. 북한과의 혈맹관계가 깨질까봐, 참전국으로서의 명분 때문에, ‘6·25’참전 100만 중국군인 및 희생자의 정서가 걱정되어서…. 그러나 이제는 시대가 변하였다. ‘6·25’는 냉전시대에 발생한 역사에 불과하다. 중국이 언급한 모든 염려를 감내하고, 뿌리치고 역사의 본래 면모를 회복시킬 때가 되었다. 중국 공산당은 항상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주장하지 않았는가!
‘내전’이란 표현은 아마 중국정부가 고심한 끝에 고안해낸 단어일 것이다. ‘북침’이라면 너무 노골적인 거짓말이고, 그렇다고 하여 ‘남침’이라 할 수는 없고…. 내전은 북침과 남침을 다 어우르는 말이니 틀린 표현이 아니지 않는가? 하물며 지금 한국에서 일컫는 ‘6·25전쟁’도 ‘남침’ 또는 ‘북침’의 두 가지를 다 어우르는 표현이 아닌가?
이렇게 볼 때 ‘6·25’를 한국은 반드시 ‘6·25 남침전쟁’이라 고쳐 불러야 한다. 중국 당국은 자기의 착오를 감추려고 말장난의 용어 ‘내전’을 썼지만 한국은 왜 ‘내전’과 같은 뜻인 ‘6·25전쟁’이란 용어를 쓰는가? 만약 중국더러 남침의 실상을 승인하고 ‘내전’이라는 모호한 단어를 쓰지 말라고 하면 중국은 이내 “당신네 한국도 ‘내전’ 뜻의 용어를 쓰지 않는가?”라고 반박하면 한국은 말문이 막힌다.
이 명칭의 시정은 한국 국내정치에도 십분 필요하다. 한때 남침이지만 한국군이 3·8선에서 남침을 유인했다는 설이 파다했으며 지금도 그 여독이 남아 있다. 한국 역사교육에 문제가 많으며 남침인지, 북침인지 모호한 인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적지 않다. 심지어 북침을 믿는 자도 있다. 종북자들은 당연 지금도 북한군의 남침을 바라고 있을 것이다.
북한은 핵무기, 미사일을 개발하고 있으며 걸핏하면 남조선을 초토화한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실로 북한의 남침은 현재진행형이다. 이런 와중에 만약 ‘6·25 남침전쟁’이라는 용어로 고착해 놓으면 한국 국민의 인식을 통일하는데 적극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을 것이다.
◇1978년 광동성에서 홍콩으로 도망가는 중국인이 年 1만8000명
▲1980년 중국 개혁·개방의 주역 중 한 명인 완리(萬里) 전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 /조선닷컴
지난 7월 15일 전 중공정치국위원, 전인대위원장 완리(萬里)가 92세 고령으로 사망하였다. 장례 날 베이징과 지방의 국기는 반기만 게양하였다. 각 언론에서는 모두 완리를 중국 개혁개방의 총기사(總工程師)라고 평가하였다. 덩샤오핑은 총설계사이다. 필자는 중국의 개혁개방은 덩샤오핑의 ‘지팡이’와 완리의 ‘눈물’로 시작되었다고 좀 더 생동하게 말하련다.
2003년 중국정치국위원은 세계 9대 강국―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 및 미국의 흥성과정에 관한 내용을 단체로 학습한 적이 있다. 후에 이를 TV다큐멘터리로 만들었으며 너무 잘 제작하였으므로 국내외의 호평을 받고 있다.
이 프로의 특징은 생동한 에피소드와 사건으로써 그 나라의 발전과정을 표현한 것이다. 포르투갈이 흥왕한 도화선은 생필품 향료이다. 향료를 넣은 떡은 오래 둘 수 있지만 넣지 않으면 이내 변질한다. 그러나 아랍국이 가로막아 동방으로 향료 사러 갈 수 없으므로 희망봉으로 돌아가다가 표류하여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게 된다. 네덜란드가 흥왕한 도화선은 한 어민이 개발한 재빠르게 청어의 배를 따는 칼이다. 러시아가 흥왕한 시발점은 페테르 대제가 서유럽에 가서 선박 제조 기술을 배운 것이다.
중국의 발전 역시 상기와 유사한 사건과 에피소드가 있다. 사건은 지금의 개혁 개방의 노선을 결정한, 아무리 높게 평가해도 과하지 않을 1978년 12월 중국 제11계 3중 전회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중국발전의 도화선을 덩샤오핑의 ‘지팡이’와 완리의 ‘눈물’로 보고 있다.
▲중국 경제개혁을 주도한 등소평 전 중국 중앙 군사위원회 주석. /조선일보DB
1978년 덩샤오핑은 광둥성(廣東省) 당서기와 함께 선쩐(深圳)을 시찰하였다. 선쩐 맞은 편 홍콩 뤄후(羅湖)는 네온등이 번쩍이는 불야성이고, 선쩐은 허허벌판에 삭막하기 그지없었다. 양쪽을 번갈아 보는 덩샤오핑의 표정은 이내 굳어버렸다.
그때 광둥성 당서기가 말을 했다. “이곳에서 홍콩으로 달아나는 중국인이 연 평균 1만8000명이다.” 덩샤오핑은 한숨을 짓다가 지팡이로 땅바닥을 두드리며 “우리 이곳에 제2의 홍콩을 만들면 될 거 아닌가? 이곳에 ‘홍콩’을 하나 만들자”라고 하였다. 그의 지팡이 두드리는 소리는 중국 개혁개방의 노선을 끌어냈으며 이어 선쩐이 중국 최초의 경제특구로 결정되었다. 이것이 중국 개혁개방의 도화선이다.
1977년 완리는 안휘성의 당서기로 발령받았다. 안휘성은 전형적인 농업성인 데다가 좌경노선이 살벌하였다. 이런 농촌은 개인 경제를 추호도 용납 못한다. 자본주의 꼬리를 자른다며 텃밭도 빼앗고 암퇘지도 못 기르게 하며 심지어 독약을 뿌려 집집마다 기르는 닭도 다 죽여 버린다. 그들의 슬로건은 ‘사회주의의 풀을 먹을지언정 자본주의의 우유는 먹지 않는다’이다.
완리가 농촌시찰 중 어떤 집에 들어가면 처녀가 방안에 북데기(짚, 풀 등이 뭉쳐진 덩어리)로 ‘새둥지’를 틀고 그 안에 팬티바람으로 앉아 있었다. 입을 바지도 없고 추워서이다. 심지어 한 집에 들어가니 발가벗은 채로 엄마는 집안의 ‘새둥지’에 두 아이는 부뚜막에, 한 아이는 솥 안에 앉아 있었다. 성 당서기가 방문 왔는데 창피하여 일어서지도 못한다.
위의 현상은 안휘성 진짜이현(金寨縣)에서 목격한 것들이다. 진짜이현은 인구가 20만인데 과거 공산당군에 참군한 자, 희생한 자가 누계 10만이나 된다. 그런데 공산당은 그들에게 한 짓이 무엇이냐? 완리는 시찰 길에서 죄책감으로 시달렸으며 눈물을 얼마나 흘렸는지 모른다.
성의 간부들은 더 황당하였다. 우선 농민들은 다 행복하게 잘 산다고 고집하며 잘 교육하여 일부 농민들이 동냥하는 습관을 근절시키는 것이 급선무라는 것이다. “배부른 자가 동냥한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소리!” 완리는 성의 간부들을 호되게 비판하고 단호하게 개혁에 착수했다.
완리의 개혁방안은 획기적이었다. 즉 경작지를 농민에게 나누어주어 개인영농을 시키는 것이다. 말이 30년 빌러준다지 사실은 경작지의 개인 소유를 인정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한 마디로 찍어 말하면 30여 년 전의 자본주의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때 중국의 개혁은 대외로 외국의 자본을 유치하고 자본주의의 선진적인 관리방법을 배우는 정도는 한국 등 외국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국내의 개혁을 어떻게 하는가는 누구도 자신감이 없었다. 사실 국내 경제개혁의 관건은 소유제의 변경이지만 누구나 감히 이 방향으로 한 발자국도 내디디기를 꺼렸다. 왜냐하면 자칫 자본주의 길로 나아간다는 감투를 쓰고 타도대상이 될 위험이 따르기 때문이다. 만약 완리가 시찰 길에서 비참한 실정에 부딪혀 눈물을 흘리지 않았더라면 이런 대담한 대안을 내놓기는 근본 불가능하다.
물론 완리의 개혁방안에 공산당의 고위층 간부들은 반대하는 자가 수없이 많았다. 하물며 지난 시기 중국 계획경제의 대부(大父) 천윈(陳雲)이 아직 버젓이 앉아있지 않는가? 덩샤오핑은 “社(사회주의) 씨이냐, 資(자본주의) 씨이냐를 따지지 말라. 발전할 수만 있으면 그만이다”라고 주장하며 완리를 지지하였다. 덩샤오핑의 ‘지팡이’, 완리의 ‘눈물’, 너무나 생동한 표현이다.
한국 한강 기적의 전형적인 사건과 에피소드는 무엇인지 궁금하다.
◇2015.08.28 스님도 인간이어서 칠정육욕이 있기 마련
쓰웅씬(釋用信, 50)은 유명한 싸우린쓰(小林寺)의 방장, 중국불교협회부회장 및 9~12대 전인대 대표(우리의 4선 국회의원에 해당)이다. 그의 성추문 때문에 중국 불교계가 들끓고 있다. 독일 언론은 그와 관계한 베이징대 예술학과 여학생이 사생아를 낳아 기르고 있다고 보도했다.
▲스융신 방장/조선일보DB
‘스님이 어떻게 그런 짓을?’하며 중국인들은 경악을 금치 못한다. 그러나 ‘스님도 보통 인간과 다를 바 없다’라는 인식을 가져야 하며 이 일은 추호도 경악할 것 없음을 피력하고 싶다.
조선시대의 패설문학에 스님의 정사(情事)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그때는 유교를 숭상하였으므로 일부러 불교의 이미지를 더럽혔기 때문이지 사실은 그렇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몇 년 전 필자는 중국 산시(山西) 타이웬(太原) 부근의 우타이산(五臺山)을 관광한 적이 있다. 중국에는 사찰이 수없이 많지만 대부분 빈집뿐이고 스님이 없다. 그런데 우타이산에는 스님이 5000명이나 있으니 정말 장관이었다.
현지 20대 여성 가이드에게 “이곳 스님들 연애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가이드는 정색하며 “스님이 어떻게 연애하는가? 당신은 학자라며 이런 상식도 모르는가?”라고 힐난했다. 필자는 이내 “농담이다, 농담”이라고 얼버무렸다.
우타이산에 있는 지장(地藏)보살관에 이르렀다. 신라왕자 김교각(金喬覺)이 최초로 지장보살의 도장을 창설한 역사 때문에 필자는 주의깊게 견학했다. 관 앞에서 30대 초반의 스님 한 분과 말을 걸었으며 알고 보니 필자 고향에서 온 사람이었다. 우리는 친숙해졌다. 필자가 넌지시 “이곳 스님 중 연애하는 사람이 없는가?”라고 물었더니 “왜 없어? 수없이 많다”라고 답하는 것이 아닌가. 이번에는 그 여성 가이드가 창피해 머리를 숙이고 말았다.
스님도 인(人)이지 신(神)이 아니다. 인간의 칠정육욕(七情六欲)이 스님에게도 있기 마련이다. 인간에게는 ‘본연의 얼굴’, ‘자제된 얼굴’, ‘승화된 얼굴’이 있다. 수요에 따라 때로는 자제된 얼굴, 때로는 승화된 얼굴을 나타내지만 본연의 얼굴은 크게 다를 바 없다. 프로이드의 책 <정신분석법>에 이렇게 씌어 있다.
무칙천 황제가 한번은 고승 다섯을 불러 “당신들은 색욕이 있는가?”라는 질문을 하였다. 신수(新秀), 현약(玄約), 노안(老安), 현색(玄賾) 네 고승은 없다고 잡아뗐다. 유독 선선(詵禪)만이 “색욕이 있다. 살아 있는 한 있고 죽어야 없다”라고 답하였다. 남조 송의 제종(濟宗) 스님은 심지어 “술, 고기, 도둑질, 오입질은 불교를 터득하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라고 말했다.
중국의 사찰은 남자스님의 묘(廟)와 비구니의 암(庵) 두 가지로 나뉜다. 보통 암은 묘에서 반경 1㎞ 안에 있다. 편리한 연애 때문이라고 한다. 이렇고 보면 스님의 금욕은 체면·자제·승화된 얼굴에 불과하고 사실은 세속사람과 비슷한 생활을 한 스님도 적지 않았겠다.
문헌 중 가장 이른 스님의 정사에 관한 기록은 남조 양원제(梁元帝·552~555재위)의 비녀 서소패(徐昭佩)가 요광사(瑤光寺)의 스님 지원도인(智遠道人)과 사통한 것이다. 중국역사상 스님과 궁궐 안 요인과 사통한 예는 너무나 많다. 무칙천(武則天) 여황제가 대표적 인물이다.
무칙천이 처음 사통한 남자는 스님이었다. 당태종이 사망한 후 비녀 무칙천은 감업사(感業寺)의 비구니가 되어 지척 백마사(白馬寺)의 스님 풍소보(馮小寶)와 사통하였다. 황제가 된 후에 풍소보는 백마사 주지로 됐고 후궁에 마음대로 드나들었다. 설회의(薛懷義)라는 성명도 하사받았다. 당태종의 고양(高陽)공주와 무칙천의 태평(太平)공주는 다 스님과 사통하였다.
이욱(李煜)은 남조 후당(後唐) 망국의 황제이다. 한번은 그가 변복 차림으로 기생집에 가서 장석(張席)이란 스님과 부딪쳤다. 장석이 먼저 왔으므로 존중하여 자기가 정사를 나누려던 기생을 장석에게 양보하고 살며시 떠나버렸다. 뿐만 아니라 ‘원양사의 스님은 풍류의 불법을 수련하네’라는 시를 써놓았다. 스님·황제·기생 간의 로맨틱한 정사의 일화이다.
여인들은 왜 스님과 사통하기를 좋아하는가? <수호전>의 두령 양웅(楊雄)의 처 반교운(潘巧雲)은 스님 배여해(裵如海)와 사통하다가 발각되어 능지처참을 당하였다. 죽기 직전 반교운은 양웅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배 스님과의 하룻밤이 당신과 10년 밤보다 더 재미있었다.”
스님에게 정말 이렇듯 큰 매력이 있을까? 이는 ‘인자견인(仁者見仁), 지자견지(知者見智)’(동일한 객체라도 보는 사람마다 해석이 다르다)에 불과하며 누구도 정답을 줄 수 없는 주제이겠다.
◇2015.08.31 스님과의 하룻밤은 당신과의 10년밤보다 더 재미있었다
스님도 인(人)이지 신(神)이 아니다. 인간의 칠정육욕(七情六欲)이 스님에게도 있기 마련이다. 인간에게는 ‘본연의 얼굴’, ‘자제된 얼굴’, ‘승화된 얼굴’이 있다. 수요에 따라 때로는 자제된 얼굴, 때로는 승화된 얼굴을 나타내지만 본연의 얼굴은 크게 다를 바 없다. 프로이드의 책 <정신분석법>에 이렇게 씌어 있다.
▲우타이산의 전경. 탑원사의 백탑이 눈에 띈다. /위키피디아
무칙천 황제가 한번은 고승 다섯을 불러 “당신들은 색욕이 있는가?”라는 질문을 하였다. 신수(新秀), 현약(玄約), 노안(老安), 현색(玄賾) 네 고승은 없다고 잡아뗐다. 유독 선선(詵禪)만이 “색욕이 있다. 살아 있는 한 있고 죽어야 없다”라고 답하였다. 남조 송의 제종(濟宗) 스님은 심지어 “술, 고기, 도둑질, 오입질은 불교를 터득하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라고 말했다.
중국의 사찰은 남자스님의 묘(廟)와 비구니의 암(庵) 두 가지로 나뉜다. 보통 암은 묘에서 반경 1㎞ 안에 있다. 편리한 연애 때문이라고 한다. 이렇고 보면 스님의 금욕은 체면·자제·승화된 얼굴에 불과하고 사실은 세속사람과 비슷한 생활을 한 스님도 적지 않았겠다.
문헌 중 가장 이른 스님의 정사에 관한 기록은 남조 양원제(梁元帝·552~555재위)의 비녀 서소패(徐昭佩)가 요광사(瑤光寺)의 스님 지원도인(智遠道人)과 사통한 것이다. 중국역사상 스님과 궁궐 안 요인과 사통한 예는 너무나 많다. 무칙천(武則天) 여황제가 대표적 인물이다.
무칙천이 처음 사통한 남자는 스님이었다. 당태종이 사망한 후 비녀 무칙천은 감업사(感業寺)의 비구니가 되어 지척 백마사(白馬寺)의 스님 풍소보(馮小寶)와 사통하였다. 황제가 된 후에 풍소보는 백마사 주지로 됐고 후궁에 마음대로 드나들었다. 설회의(薛懷義)라는 성명도 하사받았다. 당태종의 고양(高陽)공주와 무칙천의 태평(太平)공주는 다 스님과 사통하였다.
이욱(李煜)은 남조 후당(後唐) 망국의 황제이다. 한번은 그가 변복 차림으로 기생집에 가서 장석(張席)이란 스님과 부딪쳤다. 장석이 먼저 왔으므로 존중하여 자기가 정사를 나누려던 기생을 장석에게 양보하고 살며시 떠나버렸다. 뿐만 아니라 ‘원양사의 스님은 풍류의 불법을 수련하네’라는 시를 써놓았다. 스님·황제·기생 간의 로맨틱한 정사의 일화이다.
여인들은 왜 스님과 사통하기를 좋아하는가? <수호전>의 두령 양웅(楊雄)의 처 반교운(潘巧雲)은 스님 배여해(裵如海)와 사통하다가 발각되어 능지처참을 당하였다. 죽기 직전 반교운은 양웅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배 스님과의 하룻밤이 당신과 10년 밤보다 더 재미있었다.”
스님에게 정말 이렇듯 큰 매력이 있을까? 이는 ‘인자견인(仁者見仁), 지자견지(知者見智)’(동일한 객체라도 보는 사람마다 해석이 다르다)에 불과하며 누구도 정답을 줄 수 없는 주제이겠다.
◇2015.09.16 주역의 본질은 사기꾼의 허위를 최대한 가리는 것
한국의 동양철학, 한문학 등 전공자 중 <주역>을 연구하려다 너무 어려우므로 포기한 사람이 꽤나 있다. 포기하기 잘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주역>은 점서(占書)로서는 추호의 가치도 없는 책이다.
우리 한민족은 시험 치러 갈 때 찰떡을 문이나 벽에 던져 붙이는 습관이 있다. 찰떡이 ‘붙’듯이 시험에 ‘붙’으라는 뜻이겠다. 맞고 틀리는 확률이 50%겠지만 이렇게 한다. 이런 문화를 ‘무술(巫術)문화’라 하며 어느 민족이나 다 이런 무술문화가 있다. 맞고 틀리고를 떠나서 다 이렇게 하니, ‘나도 어디 한번’ 하는 생각 뿐에서이다. 일종의 문화와 풍속이다.
문화 풍속이 아니라 점을 이렇게 치면 큰일 난다. 어떤 사람이 무슨 고시에 참가하기 전 점쟁이에게 ‘붙을 수 있나, 없나’를 점쳤다. 점쟁이는 그더러 동전의 한 면은 붙는 면, 반대 면은 못 붙는 면으로 선택시키고 그 동전을 공중으로 던졌다. 이 점괘의 맞고 틀리는 확률은 각각 50%다. 그 점쟁이는 에누리 없는 사기꾼이 된다. 반드시 점치는 도구를 개선하여야 한다.
▲주역의 일부. 세상의 이치를 나타내는 8개의 괘가 그려져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만약 정육면체를 도구로 하면 한 면은 붙는 면, 반대 면은 못 붙는 면, 다른 4개 면은 붙을지 못 붙을지 아리송한 면이 된다. 그러면 그 점쟁이는 틀리는 확률이 1/6(16.7%)이므로 해먹기 퍽 쉬워진다. 1/6의 틀릴 확률도 꺼림칙하므로 점치는 도구를 좀 더 개선하여야 좋다. 즉 점괘의 숫자를 많게 불려야 한다.
동전을 쓰면 점괘가 2개이고 정육면체를 쓰면 점괘가 6개이다. <주역>의 점괘는 64괘이므로 틀리는 확률이 1/64(1.6%)이다. 괘마다 6개의 효(爻)가 부착되어(총 384개의 효) 설령 1/64의 틀리는 괘가 선택돼도 이러쿵저러쿵하는 해설효문 6가지를 붙여놓았으니 좀 아리송해진다. 한 마디로 말해 <주역>은 점치는 자의 허위성을 최대한 엄폐한 책이다. 사기꾼의 확률을 1.6%로 줄였으니 그야말로 집대성한 ‘좋은 점서’일 것이다. 이것이 <주역>의 본질이다.
<주역>은 고대에 하도낙서(河圖洛書·황하에서 나온 그림과 낙수에서 나온 책)를 근거로 복희(伏羲·7000~8000년 전 사람)가 만든 8괘가 기원이고 주(周)의 문왕(文王)·무왕(武王)이 64괘로 발전시켰다고 한다. <주역>의 기원에 대한 설명 자체도 너무 황당무계하다. 사실 <주역>은 복희, 주의 무왕·문왕과 상관없는 전한(前漢) 때 완성된 책이다.
<주역>을 만물의 변화법칙과 미래를 예지하고 사리에 통달하며 처신의 변통을 꾀할 수 있는 책으로 보건, 천지자연의 운행과 역사의 변화원리를 밝히는 책으로 보건 다 허위에 속한다. 점서로서의 <주역>은 미신에 불과하며 중국 고대문화의 찌꺼기(糟粕)이다. 베이징대학 중문학과 고전문헌전공은 4년 학과의 단계에 중국 경전 2가지를 번갈아 교재로 배운다. 지금까지 근 60년간 종래로 <주역>을 교재로 배운 적이 없다. 문화유산 중 찌꺼기이기 때문이리라.
지금까지 <주역>을 접촉한 사람은 여러 가지 유로 나뉜다. 1)너무 어려워 배우다가 포기한 사람, 2)어느 정도 터득한 후 별거 아니구나하며 외면한 사람, 3)알듯 모를듯하면서 횡설수설하며 써먹는 사람, 4)완전히 터득하고 그의 허위성 본질을 학술적으로 논술하는 사람 등이다.
필자와 같은 반 동창인 잔인신(詹鄞鑫)은 중국 화동(華東) 지역에서 꼽히는 대석학자의 한 사람이다. 그는 다년간 <주역>을 연구하여 마침내 상기 4)에 속하는 학자로 되었다. 필자가 본문에 피력한 내용은 바로 잔인신의 견해를 대충 옮긴 것에 불과하다.
서울 교보문고에 주역을 운운한 점서가 꽤 있다. 한국이나 중국조선족거주지 연변에서 ‘주역연구소’ 등 가게를 종종 발견한다. 들어가 상담해보면 <주역>의 단어 몇 마디에다가 ‘음양’이니, ‘오행’이니 반복 곱씹으며 횡설수설하다가 화제를 필자의 이름이 나쁘므로 개명하라고 유도한다. ‘무슨 이름으로 고치면 좋은가?’고 문의하면 중국 옌변에서는 200위엔(약 4만 원), 또는 한국에서는 20만원을 내면 고쳐주겠다고 한다.
<주역>은 점서의 내용 외에 다른 유용한 내용도 좀 있다. 숫자의 소장(消長) 관계를 운운하였는데 방법론과 변증법의 철학원리가 스며있다. 운문(韻文)이기 때문에(여러 구절 마지막 글자의 중성과 종성이 같음) 한자의 고대 독음을 연구하는 재료로 쓰인다. <주역>은 실용의의를 떠나서도 2000여 년 전의 작품이므로 적어도 문화재의 가치가 크다.
<주역>은 언어가 어려우며 알기 힘들다. 몇 년, 십여 년, 심지어 수십 년 연마해도 정통하기 어렵다. 이런 곁가지이며 지엽적인 것을 배우기 위해 그토록 많은 시간을 투입하는 것은 실로 밑지는 노릇이다. 대충 배워 <주역>을 개념적으로 알고 상식적으로 터득하는 것으로 끝내면 그만이겠다.
◇2015.09.30 칭화대 출신 시진핑이 박사라는데, 실상은
중국은 1980년대까지 만도 문맹이 2억이라는 설이 있을 정도로 평균문화수준이 낮은 나라다. 게다가 정치적 원인도 작용해 중국 관료의 지적 수준은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낮다.
중공정부 건립 이후 군장병들이 중국 당, 정 관료의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중공은 농촌으로부터 도시를 포위하는 전략으로 승취하였다. 문맹천지의 국가인데다가 농민이 주요 성원이니 중공군의 대부분이 문맹임은 당연하다. 필자가 5년 반(1969~75) 동안 군대에 있을 때 필자의 군부대 장교는 초졸50%, 중졸40%, 고졸10% 정도였다. 장교의 부인에 랴우닝성(遼寧省) 베이쩐현(北鎭縣)과 진현(金縣)의 사람이 꽤나 많아 알아보니 이러하였다.
1950년대 초반에 선양군구(沈陽軍區)는 젊은 공로자 문맹 장병들에게 재교육을 시켰다. 베이쩐현의 초급초등학교(초교 1~4학년)에서 일자무식자들을 배양했고, 진현의 고급초등학교(5~6학년)에서 기초가 좀 있는 자들을 배양하였다. 이들은 재교육을 거친 후 연대장 이하 장교, 현장 이하 관료로 발탁될 수 있었다. 다른 군구도 모두 이러한 방법으로 간부를 양성하였다.
/조선일보DB
주위 농민들은 이들 학교 군인학생들에게 딸아이를 시집보내는 바람이 불었다. 등교, 하교 때 학교 대문 밖은 화장한 농촌처녀들로 붐비었다. 심지어 어떤 집은 부모가 딸 서넛을 줄지어놓고 “차렷, 해방군 아저씨에게 경례!”하면 딸들은 공손히 90도 경례를 했다. 지나가던 군인학생들은 처녀들을 힐끗힐끗 쳐다보다가 끌고 나가면 혼인이 성사되곤 하였다.
1957년 중공의 정풍운동 때 많은 지식인이 공산당조직에 의견을 제출하였다. 모택동은 이내 정풍운동을 반우파운동으로 U턴시켜 의견을 제출한 지식인들을 우파분자로 몰았다. 숙청당한 지식인들은 탄광, 농촌, 공장으로 쫓겨났다. 관료 중 얼마 안 되는 지식인(고졸, 대졸)도 이렇게 없어졌다. ‘지식이 많을수록 반동이다’라는 슬로건은 1976년 모택동이 사망한 후에야 점점 없어졌다.
1970~76년 대학은 공농병(工農兵·근로자·농민·병사)학원을 모집하였다. 시험이 아니라 추천으로 뽑았으므로 초·중·고교 수준의 학생이 한데 섞여 있다. 그들은 공부는 별로 하지 않고 만날 교수들을 자산 계급이라며 비판하였다. 현재 중국의 공농병학원은 근 100만이며 이들의 평균수준은 고졸과 전문대졸 사이로 보면 맞다. 현 국가주석 시진핑도 공농병학원 출신이다. 문혁이 1966년에 일어났으니 64~65년도에 입학한 대졸생도 1~2년밖에 못 배웠으므로 전문대수준밖에 안 된다.
1977학번(1982년 졸)부터가 실질적인 대졸이다. 석사 취득자는 1985년부터이고(1982년부터 모집) 박사 취득자는 1988년부터이다. 1977~1989학번까지 대입연령자(18세)의 1~3%만 대학에 갈 수 있었다. 1980년대까지 중국 관료의 대부분은 중·고교 졸 및 공농병학원이고 소수의 대졸·초졸도 포함되어 있었다. 석·박사는 거의 없었다.
개혁개방의 새 시대에 ‘과학도 생산력’이니, ‘지식인도 노동자’이니 하며 지식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문벌(적어도 전문대졸)이 있어야 부끄럽지 않게 관직에 앉아 있을 수 있게 되었다. 1985~2005년 간에 상기 초·중·고교를 졸업한 관료들은 대부분 ‘함수생(函授生)’의 신분으로 전문대졸로 둔갑하였다. ‘함수’ 두 글자를 풀이하면 ‘통신의 방법으로 가르치다’이다.
대학에 신청하고 3년간 자습하여 시험에 합격하면 전문대졸업장을 준다. 1년에 2번 치르는 시험은 1주 전에 복습시키며 시험문제를 거의 다 알려준다. 비슷한 방법의 석·박사 학위도 있는데 이를 ‘재직연구생(在職硏究生)’이라 한다. 고위층관료의 경우 학위논문은 남의 손을 빌리는 수가 많다. 국가주석 시진핑과 국무총리 리커챵은 모두 재직연구생 박사이다.
현 중공정치국위원 25명 중 완벽하게 시험을 거쳐 4년제 대학을 나온 자가 4명(16%), 공농병학원과 64~65년 대학 입학이 14명(56%), 고졸이 7명(28%)이다. 재직연구생이 아닌 석사가 2명인데 이들은 대학을 안 다니고 바로 석사를 한 자들이다. 그 외 재직연구생 석사가 8명, 재직연구생 박사가 4명이다(중앙당교 졸은 대졸과 학위에 넣지 않았음).
문벌이 낮은 관료가 자기보다 문벌이 퍽 높은 자를 부리기는 많이 불편하다. 관료에 대졸이 조금 있었으나 사범대졸이 많았다. 중국인들은 교원직업을 싫어하므로 사범대졸은 교원을 하지 않기 위해 무식한 관료의 부림을 잘 들었을 듯하다. 1998년 베이징대학 건립 100주년 때 고위층관료에서 베이징대졸은 전자공업부 부부장(차관) 후치리(호계립·胡啓立) 한 사람뿐이었다.
필자의 말이 사실임을 확인한 베이징주재 한국기자들은 “고위층 관료 하면 일본은 도교대 졸, 한국은 서울대 졸이 쫙 깔렸는데 중국은 베이징대 졸이 한사람뿐이니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다”며 혀를 내둘렀다. 중공 18기 정치국위원에 베이징대 졸이 둘이나 들어갔다. 리커챵(李克强), 후춘화(胡春華)가 당사자이다. 중국 관료층 지식구조의 새로운 변화의 조짐이기를 기대해도 되는지 모르겠다.
◇2015.10.13 김일성의 주체사상과 노동당 설립 시기가 딱 떨어지지 않는 이유①
요즘 북한에서는 노동당 창당 70주년 대축제를 벌인다고 야단법석이다.
1985년 필자는 친척방문으로 평양에 머무르며 노동당 기념관을 견학한 적이 있다. 어느 날 오후 3시쯤 친척의 안내로 기념관에 찾아갔다. 30대 후반쯤 돼 보이는 여성 해설자가 맞이하며 내일 일찍이 오라는 것이었다. 이제 당장 견학하겠다니 해설자는 “하루 종일 견학해도 못 다 하는데 이제 당장이라니요?”라며 말렸다.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저는 두어 시간이면 충분합니다. 그리고 해설이 필요 없습니다.” 필자는 기념관 출입문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이렇게 말하였다. 해설자는 마지못해 필자를 안으로 안내하기는 하였지만 ‘이 사람 너무 건방지네’라는 얼굴 표정을 지었다. 친척도 머뭇거리다가 따라와 같이 견학하였다. 필자는 한 시간 반 정도에 견학을 다 했다.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10일 오후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열린 노동당 창건 70주년 기념 열병식에 참석해 중국 류윈산(오른쪽) 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과 함께 사열하고 있다. /뉴시스
1945년 10월 10일 김일성의 북조선공산당이 창당됐고, 1946년 3월 김두봉의 중국파 조선독립동맹이 북조선신민당을 창당했다. 같은 해 7월 공산당과 신민당 등 3당은 합당해 북조선노동당을 창당하였다. 1949년 6월 북조선노동당과 남조선노동당은 합당하여 조선노동당을 창당하였다. 조선노동당은 1946년에 설립한 것이라 적혀있으며 또한 1949년 창당설도 잠재해 있었다. 지금 1945년에 창당되었다며 69주년 또는 66주년이 70주년으로 둔갑하였다.
노동당의 핵심이 1945년에 창당한 북조선공산당이니 노동당 창당을 1945년으로 끌어 올릴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김일성은 1931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중공의 동북인민혁명군 산하 한 개 여단의 정치위원직을 담당하였다. 그때 그가 지휘하는 여단의 구성원은 몽땅 조선인이고 조선공산당의 전신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북한 노동당의 창당 연대를 1931년으로 끌어올릴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러면 다른 문제점이 생긴다. 김일성의 주체사상설은 1968년 이후에 점차 이루어지고 체계화 된 것이지만 지금 북한은 1926년 초 김일성이 중국 기린(吉林)에서 혁명할 때부터 주체사상을 만들었다고 조작해 놓았다. 만약 그가 중국 공산당의 영도 하에 혁명하였다고 하면 그때 그의 사상을 주체사상이라고 하기 불편해진다. 이것이 노동당 설립을 1945년까지 앞당겨놓을지언정 1931년까지 앞당길 수 없는 원인이겠다.
▲지난 10일 북한 노동당 창당 70주년 열병식에 이어 대규모 야간 횃불 집회가 열리고 있는 모습을 11일 조선중앙TV가 보도했다. / 조선중앙TV
출입문으로 나오려는데 해설자가 견학한 감상을 적어놓고 가라는 것이었다. 필자는 펜을 들고 머뭇거리다가 “몇 가지 질문해도 됩니까?”라고 하니 “당연 되지요”라는 것이었다.
“그때 조선 최고층에 ‘중국공산당특별지부’가 있었는데 왜 이 내용이 반영되지 않았습니까?” 광복 전 김일성 등 북한 최고위층 간부들은 대부분 중국공산당원이었다. 광복부터 북조선공산당 창당까지 약 2개월간 북한 최고위층에 ‘중공특별지부’가 있었던 상황을 필자가 문의한 것이다. 만약 특별지부의 존재를 인정하면 김일성의 주체사상에 먹칠이 된다.
“그거 어느 망령된 중국 놈들이 조작해낸 거요? 우리 수령님은 종내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적도 없고 당시 최고층에 ‘특별지부’라는 조직도 없었습니다.” 해설자의 강경한 해답이다.
김정일이 백두산에서 태어났다는 북한의 주장과 달리 中 교과서에는②
<①편에서 계속>
필자가 “그러면 수령님은 1926년부터 1945년까지 20년간 무당파로 활동했다는 말입니까? 수령님이 항상 말한 혁명은 반드시 정당의 영도 하에 하여야 한다는 교시와 위배되지 않습니까?”라고 질문하니 해설자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김정일 지도자는 ‘항일전쟁의 포화 속에 백두의 밀영에서 태어났다’고 써있는데 사실 그이는 소련 카자흐스탄에서 태어나지 않았습니까?” 필자의 두 번째 질문이다.
“무엇이 어째요? 그건 또 어떤 되먹지 못한 중국 놈의 선전이요?” 이번 질문에 해설자는 노기등등하였으며 얼굴색이 붉으락푸르락 하였다. “중국 관영출판사에서 공식 출판된 책에 그렇게 써 있고요, 또 지금 중국에 카자흐스탄에서 태어난 김정일 지도자에게 젖을 먹인 유모(乳母)가 아직 살아 있으며 그에게 들은 말이기도 합니다.” 필자의 태연한 말이다.
▲북한이 10일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열린 노동당 창건 70주년 기념 열병식에서 핵배낭 부대를 공개하고 있다. /뉴시스
김일성은 일본군의 소탕에 못 이겨 1940년에 소련 원동으로 철퇴하였다가 광복이 되어서야 북한으로 돌아왔다. 1942년에 백두의 밀영에서 김정일을 낳았다는 것은 당연 어불성설이다.
그는 더욱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필자는 친척이 허벅지를 심하게 꼬집으므로 말을 더 하지 못하고 나왔다. 친척은 “왜 허튼소리를 자꾸 하나?”라며 필자에게 심한 핀잔을 주었다.
북한이 조작한 허위 역사는 수없이 많다. 1960년대 초에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희생된 양세봉 열사의 부인이 김일성의 초청으로 평양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때의 사진(필자의 친구에게 있음)안에 김일성의 부인 김성애가 들어 있다. 1990년대에 평양에서 출판된 <세기와 더불어>라는 책에 이 사진이 삽입되었는데 김성애가 빠지고 그 자리에 엉뚱한 다른 사람이 넣어져 있다.
기념관, 화려한 축제 등으로 사기와 허위가 가득 찬 역사를 한동안은 감출 수 있겠지만 오래 가지는 못할 것이다. 북한 통치자들의 사기극이 끝날 날은 멀지 않았다.
◇문맹에서 역맹으로
요즘 국사 교과서의 국정화 논란이 뜨겁다. 지난 번 필자는 6·25 남침 전쟁이라 불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내 역사 인식을 보면서 아래의 가상 스토리가 떠 올랐다.
S시 Y학교의 김승지(金乘知) 선생은 환갑이 가까운 나이이다. 그는 한국의 역사교육에 문제점이 많다며 항상 투덜대는 사람이다. 줄곧 고등학생을 가르치다가 이번 학기에는 중3을 가르치라는 임무를 맡았다. 중3학생들이 역사과목을 중시하는지, 배운 기본지식을 어느 정도 장악하고 있는지 궁금하여 그는 고대사, 중세사 위주로 간단한 시험을 치러보았다.
8월 말, 금방 개학했을 때의 일이다. 아니나 다를까, 시험 성적이 엉망이었다. 100점 만점에 20점에도 못 미친 학생이 수두룩하였다. 김승지는 그중 빵점 맞은 학생 영철을 불렀다. 먼저 그의 거의 백지인 시험지를 내보이며 한참 훈계를 하고 나서, “듣자니 너는 싸움에만 이골이 나고 공부는 완전히 뒷전이라던데. 그래서 되겠느냐? 역사를 그렇게도 모르면 어쩌려는 생각이냐”라고 물었다. 김승지 선생의 핀잔에 영철은 머리를 숙이고 묵묵히 말이 없다. 김승지는 화제를 돌려 시험문제보다 더 쉬운 현대사의 간단한 다른 한 질문을 던졌다.
“영철학생, 말해봐! 6·25는 누가 먼저 쳤지? 이건 제대로 말할 수 있겠지.” 이 물음에 영철은 멍해서 대답이 없다. “말해보라는데, 6·25 때 누가 먼저 쳤나 말이다!” 한참 멀뚱멀뚱 눈알을 굴리던 영철은 “6·25가 무슨 뜻입니까?”라고 반문하였다. “6·25가 뭐긴 뭐야, 6월 25일이라는 뜻이지.” 김승지의 화가 치밀어 오른 목소리이다.
멍했던 영철은 침묵으로 빠졌다. 자기가 사흘 걸음으로 싸움질한 것은 사실이지만 두 달 전의 일이 기억날 리 없는데, 선생님이 왜 6월에 있었던 일을 묻는지 당황했기 때문이다.
‘6월 말 싸움을 여러 번 하긴 하였는데, 그날이 6월 25일인지, 또 누가 먼저 집적거렸는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는 다짜고짜로 “저가 먼저 치지 않았습니다, 선생님.” 이라고 대답하였다.
김 선생은 너무나 어이없어 영철을 돌려보내고 그의 담임선생을 찾았다. 20대의 여선생이다. “안 선생님, 그 반 영철에게 ‘6·25에 누가 먼저 쳤나’고 물었더니 ‘저가 먼저 치지 않았다.’라고 답하지 않겠소. 한심하기 그지없소. 학부모에게 알려 단단히 교육하여야겠소.”
/일러스트=조선일보DB
‘담임선생도 아닌데 왜 학생들 싸움질한 것도 관여하지?’ 안 선생은 의심쩍은 생각이 들었지만 더 묻지 않았다.
김 선생은 원로 교원인데다가 성격도 꽤나 날카로우니 잘못 건드렸다가는 창피 당하기 일쑤다. 안 선생은 영철 부친에게 전화를 걸고 휴대폰 메시지도 보냈다: ‘영철은 공부는 하지 않고 싸움질만 한다. 6·25에 대해, 말하면서 6월 25일에 자기가 먼저 치지 않았다고 거짓말하여 역사 선생의 핀잔을 받았다. 학부모가 신경을 많이 써 달라.’
영철 아버지는 40대 초반이며 돈을 잘 버는 기업인이다. 항상 바삐 돌아야 하므로 자식 교육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담임선생의 전화와 메시지를 받고 그는 영철을 자기 방으로 불러들여 한바탕 훈계를 하였다. 아들이 자기가 먼저 손대지 않았다고 우기니 엉덩이를 힘껏 걷어차 영철은 그만 울음보를 터뜨리고 말았다. 마침 그날이 친척들이 모이는 날이라 영철의 어머니와 친척들이 와르르 몰려들었다.
“말로 하지 때리기는 왜 때려?” 어머니는 영철을 감싸며 격분한다. “이놈이 6·25라는 날 다른 학생을 친 모양인데 자기가 안 때렸다고 거짓말을 하지 않겠어?” 아버지가 더 때리려 접어들자 삼촌, 고모, 이모 등이 영철을 에워싸며 “영철아, 빨리 네가 먼저 쳤다고 잘못을 빌어라”라고 달래 영철은 모든 것을 인정하고 아버지에게 빌었다.
이튿날 영철 아버지는 담임선생에게 전화를 걸어 ‘아들이 이미 6·25에 먼저 쳤다고 인정하며 빌었다. 그 사이 자식 교육에 등한하여 미안하다. 맞은 자에게 손해배상을 할 터이니 알려 달라’고 말하였다. 안 선생은 이 결과를 역사 선생에게 알렸다. 역사 선생은 더욱 화가 치밀어 교장을 찾아가 자초지종을 아뢰면서 ‘우리의 역사교육이 이 지경에 이렀으니 한심하다. 학생과 전 사회가 역사에 문외한이 되어가고 있다’라고 투덜대었다.
글자에 문맹(文盲) 이 있다면 역사에는 ‘역맹(歷盲)’이 있다 하겠다. 역맹을 만들고 안 만들고는 국가의 시책에 속하니 교장이 관할할 바가 못 된다. 교장의 관심사는 6·25전쟁에 누가 먼저 쳤나, 즉 남침이냐, 북침이냐 하는 문제이다. 교장은 약 100명이 되는 교원모임에서 ‘6·25전쟁에 누가 먼저 쳤나’라는 물음을 던져보았다. 딱 부러지게 답하는 자는 없고 저마다 제 나름대로 횡설수설하는 것이었다. 사실 교장 자신도 횡설수설하는 선생들을 반박한 실력이 못 됐다.
김승지 선생의 강력한 제안으로 교장선생은 부득불 이 문제를 S시 교육청에 보고하였다.
<②편에 계속>
<①편에서 계속>
S시 교육감은 이 보고를 받고 처음에는 ‘6·25전쟁에 누가 먼저 쳤나가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남침이면 어떻고 북침이면 어떤가?’라고 생각하며 무시했다. 하지만, 김승지 선생이 이 문제에 대한 정답을 내려달라고 수 차례 전화를 하고, 또 이 문제를 심심풀이삼아 내놔 봐도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한 번은 교육청 30여 명의 주요 임원의 회의 끝에 슬쩍 꺼내보았다.
우선 영철 이야기에 장내는 한참 폭소를 자아내었다.
“그건 무지한 아이의 해프닝이고, 자, 여러분! 6·25의 남침, 북침 설에 관해 각자 자기의 견해를 내놓아 보세요.”
교감의 말에 장내는 이내 잠잠해졌다. 어떤 자는 이내 도리질을 하며 이 문제에 대해 잘 모른다는 뜻을 표하였다. 그러자 A씨가 먼저 말을 꺼냈다.
“북한에서는 북침이라 하고, 남한에서는 남침이라 하는데 누구 말을 믿어야 합니까? 직접 6·25전쟁에 참가해본 자만이 알 일입니다. 이 문제는 앞으로 수십 년이 지나야 백일하에 드러나지 않겠습니까?”
역사를 전공한 B는 “남침이라고 간단히 확정지을 수 없습니다. 미국 학자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전쟁의 기원>이란 책에서 6·25전쟁을 앞둔 1949년 여름과 가을에 한국이 3·8선 부근에서 북한에 대한 잦은 도발이 있었고, 이것으로 북한의 남침을 유도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북침하고 싶은데 핑계가 없으니 3·8선에서 집적거리며 북한의 남침을 유도하였지요.” B는 자신의 주장에 자신만만했다.
C는 국제 정세를 언급했다. C는 “그런 것이 아니라, 스탈린과 모택동이 김일성을 사주하여 남침한 것입니다. 스탈린은 서방국가의 소련에 대한 압력을 동방으로 돌리려는 목적에서였고 모택동은 좋게 말하면 그가 무산계급국제주의 정신을 구현하고자 한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자기의 존재감을 전 세계에 과시하고 사회주의진영의 영도권을 쥐기 위해서였습니다. 김일성에게 큰 죄가 없습니다.” C는 B 보다 더 의기양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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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는 다른 시각을 제시했다. “아마 남침이 맞을 듯한데 남침이냐, 북침이냐를 따지는 자체에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그때 북한의 군사력이 남한보다 몇 배 강했습니다. 만약 남한의 군사력이 강했더라면 남한이 먼저 북침했을 것입니다. 책임은 냉전체제에 있지 김일성에게도, 이승만에게도 아무런 죄가 없습니다.”
종북인 E는 “남침이라 한들 무슨 잘못입니까? 우리가 북침하여 통일했거나 북한이 남침하여 통일했거나 다 좋은 일입니다. 북한의 남침을 통하여 통일했더라면 미 제국주의를 몰아내고 진정한 우리 겨레의 자주 통일이니 더 좋았을 것이 아닙니까?” E가 원래 하려던 발언 내용은 이보다 더 강했지만, 그때의 분위기를 보아 슬쩍 이 정도로 던져보았다.
“당신 그걸 말이라고 하나? 북한이 통일했으면 한반도가 소련 또는 중국의 속국이 되었을 것이 아닌가?” 바로 반박하는 의견이 나왔다. 역시 노골적인 종북은 S시 교육청 안에서는 잘 먹히지 않는 모양이다.
“6·25가 김일성의 반인간적인 남침의 죄행이라는 사실이 발발 당시 이미 전 세계에 알려졌습니다. 게다가 중국 학자 심지화(沈志華·선쯔화)가 다년간 소련의 자료를 발굴하여 쓴 <조선전쟁의 베일을 베끼다>란 책에서 6·25남침은 김일성의 단독 주장이었고 여러 차례의 노력으로 스탈린과 모택동을 설득시켜 발동한 전쟁이라는 사실이 백일하에 드러났습니다. 이에 아까 말한 커밍스 교수도 자기의 이전 견해를 뒤집었습니다. 이 책은 1995년에 출간됐으니 이미 20년이 지났습니다. 지금 전 세계가 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데 한국만 아직 갈팡질팡하며 온갖 횡설수설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비극입니다. 한국의 역사교육에 엄중한 문제가 있음을 말합니다.” 이 회의에 참관인 자격으로 참석한 김승지의 발언이다.
회의는 점점 거센 쟁론으로 이어졌다. 이때 교육감이 마무리 발언을 하였다.
“이만 합시다. 6·25에 관해 각자 의견이 다른 것은 정상적입니다. 한 가지 견해로 통일하면 얼마나 경직될 것입니까? 오늘 여러분이 한 발언은 다 옳을 수도, 다 틀릴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영철 학생의 ‘내가 먼저 치지 않았다’라는 해답이 가장 정확할지도 모릅니다. 적어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장내의 폭소).”
“동의할 수 없습니다. 어느 나라나 의무교육 단계, 초중고교 단계는 국가에서 인정하는 통일된 교과서로 실사구시의 내용을 제시해야 하고 대학 단계 이상만 연구의 차원에서 각가지 견해를 내놓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교육자이므로 마땅히 실사구시의 역사인식으로 통일하고 그것으로 우리의 후대를 가르쳐야 합니다. 그리고 명철의 예는 절대 해프닝이 아닙니다. 우리의 역사교육은 국민을 역맹으로 몰고가고 있다는 생동한 실례이니까요.”
“김승지 선생님, 됐습니다. 할 말은 많겠지만 오늘은 이만 합시다.”
회의는 이렇게 끝나고 말았다.
◇2015.11.09 진리를 외쳤지만, 구금된 마인초
중국은 1970년대 후반에 산아제한을 시작하여 1981년 말에는 1부부 1자녀로 결정했다. 1982년에는 국책으로 하고 헌법에 써넣었다. 지난 18기 5중 전회에서 1부부 2자녀 정책으로 개정해 35년간 지속된 1자녀 정책의 종말을 선언하였다.
중국의 탁월한 인구학자 마인초(馬寅初) 북경대학 총장은 1957년부터 주장하며 <신인구론>을 펴냈다. 그는 신인구론에서 계획경제 하에 인구도 계획적으로 통제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산아제한을 최초로 주장한 사람으로 여길 수 있겠다. 모택동은 처음에는 그를 지지하는 척 하다가 자산계급 인구론의 추종자, 우파분자로 매도하며 비판하였다.
영국학자 토마스 로버트 맬서스(Malthus)는 1798년에 펴낸 책 <인구론>에서 인구는 기하급수로 번식하고 생필품은 산수급수로 증가하므로 인류는 영원히 빈궁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이론을 내놓았다. 마인추는 마침내 맬서스의 추종자, 자산계급 학술 권위로 전략하여 ‘우파분자’라는 모자를 쓰고 북경대학 총장에서 해임됐다.
1958년 대약진 때 모택동은 ‘사람이 많으면 사고력도 커지고 열정도 높으며 힘도 크다’라는 말을 했다. 그로 하여 중국인은 더욱 아이를 거리낌 없이 낳았으며 인구가 급속도로 팽창했다. 1953년부터 해마다 인구가 1200만~1300만명씩 증가하였다. 1978년 개혁개방을 시작할 때에야 비로소 경제발전이 인구증가에 못 미침을 절감하고 산아제한을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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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자녀 정책은 결정되자마자 반강제 내지 강제로 실행했다. 심지어 낳을 아이도 규정된 시간에 낳아야 했다. 정부의 각 급·단위·업체마다 산아제한 사무실을 설치하여 엄격히 감독, 실행하였다. 산하제한을 어기면 비판받고, 감봉·감등당하며 인격상 수모를 겪으며 살아야 하였다.
도시의 콘돔 사용과 달리 농촌에서는 수정관절단수술을 선호했다. 수술상대의 남자가 도망치면 마을의 민병이 그의 집을 감시하다가 나타나면 마을의 위생소로 붙잡아다 장정 서넛이 깔아 눕히고 수술을 강행하는 사례도 간혹 있었다. 실로 돼지의 불알을 까는 것과 흡사하여 ‘불알 까다’로 속칭하기까지 하였다. ‘불알을 까인’자의 수모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산아제한은 이내 효과를 보았다. 식량, 주택, 교육, 취업 등의 부담이 현저히 낮아졌다. 그러나 이로 인한 부작용도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집집마다 아이 하나 만이므로 독남, 독녀들은 집안의 황제로 되었다. 그들은 자기밖에 모르고 극단적인 이기주의자이며 안하무인이다. 형제, 친척이 없는, 인정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회로 변하여 간다.
더욱 큰 문제가 생겼다. 한 쌍의 20대 젊은 부부는 40~50대 부모 4명을 모셔야 하고 바야흐로 60~70대 조부모 세대 8명을 모시게 된다. 수명 100세 시대가 다가오며 앞으로 10~20년이 지나면 16명의 증조부 세대를 모셔야 할지도 모른다. 연령구조는 기하급수로 줄어든 거꾸로 세운 금자탑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이것만이 아니다. 인구비례상 급속히 노령화 되어 젊은 노동력, 나아가서는 전반사회의 노동력이 줄어든다. 부동산업의 침체는 매우 엄중하다. 지금 중국 전역에 팔리지 않고 입주할 사람이 없어 ‘귀성(鬼城)’이라 부르는 대형 주택 타운이 65개소나 되는데 1자녀 정책도 주된 원인의 하나이다.
이번 산아 제한 폐지 결정이 반포되자마자 세계 많은 선진국이 흥분되었으며 아동,육아 업체의 주가가 급등했다고 한다. 필자는 너무 낙관하지 말라고 충고하고 싶다. 통계에 따르면 1자녀면서 생육능력이 있는 부부는 중국 전역에 9000만 쌍이지만 그 중 3000만쌍 정도만이 아이를 낳을 것으로 추정되며 그러면 2030년에 중국의 인구가 14.5억으로 밖에 안 된다.
필자가 두 번째 아이를 가질 무렵 1자녀정책이 반포되었으나 변방소수민족은 2자녀를 허용하였으므로 필자는 두 번째 아이를 가졌다. 동료들은 모두 아이 하나이며 부부 월급 100웬(元)에 1자녀 장려금을 받아 110웬에 3식구이지만 필자는 100웬에 4식구였다. 남보다 많은 고생을 하였으며 30년간 공휴일에 쉰 적이 없다. 두 번째 아이를 가진 것을 얼마나 후회한지 모른다. 지금 중국 도시사람들은 대부분 필자와 같은 심정이며 농촌으로 확산되고 있다.
마인초는 20년간 칩거하다가 산아제한을 국책으로 수용함과 동시에 사면복권이 되었으며 몇 년 후인 1982년에 101세의 고령으로 사망하였다. 만약 그가 지금까지 살았더라면 더욱 감개무량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세상의 무상(無常)을 한층 더 보고 갔을 것이니 말이다.
마인초가 산아제한을 제창하여(1957년) 엄격히 실행할 때(1981년)까지 25년이 결렸다. 칩거생활을 할 때 그는 다시 빛을 보리라는, 그의 주장이 실현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산아제한을 너무 엄격히 하여도 부작용이 크며 부득불 제한을 느슨히 하여야 하는 시대가 오리라고도 상상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실로 시간만이 진리를 검증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2017.04.24 中 해외 반출 금지한 중국 '최상급' 유물들
중국에는 수천 년 이어진 역사와 문화가 존재한다. '문화 대국'이라고 불리는 중국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옛 문물이 있는데 중국은 이동 가능한 문물을 진귀 문물(珍贵文物)과 일반 문물(一般文物)로 구분하고 있다. 진귀 문물은 다시 1, 2, 3급으로 나뉘고 이중 특히 역사, 예술, 과학 분야에서 가치를 인정받는 대표적 문물은 '1급 문물'로 지정된다.
개혁 개방 이후 중국의 대외 문화 교류가 확대되자 1급 문물의 해외 전시 및 전람 등도 늘어나기 시작했다. 문물의 소실을 염려한 중국 국가문물국은 금지출국전람문물목록을 발표하고 1급 문물 64점을 해외로 반출할 수 없도록 규정했다. 봉황망(凤凰网)에서는 중국의 1급 문물 중 14점에 대해서 집중 조명했다.
◇ 차이타오강후이관위스푸원(彩陶缸绘鹳鱼石斧纹)
▲ 차이타오강후이관위스푸원(彩陶缸绘鹳鱼石斧纹) / 사진출처 = 봉황망(凤凰网)
차이타오강후이관위스푸원(彩陶缸绘鹳鱼石斧纹)은 1978년 허난성(河南省) 린루(临汝县∙지금의 루저우시(汝州市)) 옌촌(阎村)에서 출토돼 허난성 박물관에서 보존하고 있는 채색토기다. 전형적인 신석기시대 앙소(仰韶)문화의 유형을 보여주는 이 도자기 위에는 황새가 물고기를 입에 물고 으스대고 있고 옆에는 돌도끼를 세워 놓은 그림이 그려져 있다. 이에 대해 고고학자들은 당시 황새 부족이 물고기 부족을 제압하고 난 다음 자신의 위엄을 과시하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림 속에서 물고기의 어미(魚尾)가 지워져 있는 점도 특이하다.
◇ 타오잉딩(陶鹰鼎)
▲ 타오잉딩(陶鹰鼎) / 사진출처 = 봉황망(凤凰网)
타오잉딩(陶鹰鼎)는 매의 형상을 띤 상(商)나라 시대 도기(陶器)다. 1957년 산시성(陕西省) 웨이난시(渭南市) 화센(华县) 타이핑좡(太平庄)에서 출토돼 현재 중국 국가 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 허우무우퉁딩(后母戊铜鼎)
▲ 허우무우퉁딩(后母戊铜鼎) / 사진출처 = 봉황망(凤凰网)
상(商)나라 후기에 제작된 것으로 알려진 허우무우퉁딩(后母戊铜鼎)은 1939년 허난(河南)성 안양(安阳)시 우관촌(武官村)에서 출토돼 현재 중국 국가 박물관에서 소장 중이다.
◇ 리구이(利簋)
▲ 리구이(利簋) / 사진출처 = 봉황망(凤凰网)
리구이(利簋)는 1976년 산시(陕西) 시안(西安) 린퉁(临潼)구 링커우진(零口镇)에서 출토돼 현재 중국 국가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리구이는 주(周)나라 무왕(武王) 때 관리인 리(利)가 만든 현존 최고(最古)의 서주(西周) 청동기 유물이다. 리구이에는 무왕벌주(武王伐纣)의 구체적 날짜인 '갑자일(甲子日)'이 기록돼 있어 당시 역사를 파악하는 데 중요한 의의가 있다.
◇ 동펀마(铜奔马)
▲ 동펀마(铜奔马) / 사진출처 = 봉황망(凤凰网)
동펀마(铜奔马)는 1969년 간쑤성(甘肃省) 우웨이(武威)시 량저우(凉州)의 레이타이한(雷臺汉)묘에서 출토돼 간쑤성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동펀마는 천마(天馬)가 하늘에서 달리는 와중에 날아가는 제비를 발로 힘껏 밟는 모습을 생동감 있게 묘사한 작품이다.
◇ 다위딩(大盂鼎)
▲ 다위딩(大盂鼎) / 사진출처 = 봉황망(凤凰网)
다위딩(大盂鼎)은 산시(陕西)성 바오지(宝鸡)시 치산(岐山)현에서 출토돼 현재 중국 국가박물관에서 보관 중이다. 다위딩은 서주(西周) 초기 금문서법(金文书法)의 대표작으로 평가 받는 연회용 청동기 술잔이다.
◇명나라 펑관(明代凤冠•봉황 모양의 장식이 달린 관)
▲ 6룡(龙) 3펑관(凤冠) 과 3룡(龙) 2펑관(凤冠) / 사진출처 = 봉황망(凤凰网)
▲ 9룡(龙) 9펑관(凤冠) 과 12룡(龙) 9펑관(凤冠) / 사진출처 = 봉황망(凤凰网)
펑관(凤冠)은 1957년 베이징시 창핑(昌平)현 딩링(定陵)에서 발견돼 중국 국가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명나라 효단(孝端)황후와 효정(孝靖)황후의 3룡(龙) 2펑관(凤冠), 9룡 9펑관, 12룡 9펑관, 6룡 3펑관이 있다. 관 위에는 용과 봉황이 있고 크기가 서로 다른 진주, 보석으로 장식했는데 보석의 경우 많게는 128개, 적게는 95개, 진주는 3426개에서 많게는 5449개까지 장식돼 있다.
◇진허우쑤중(晋侯苏钟)
▲ 진허우쑤중(晋侯苏钟) / 사진출처 = 봉황망(凤凰网)
진허우쑤중(晋侯苏钟)는 1992년 산시(山西)성 취워진허우(曲沃晋侯)묘지 8호 묘에서 출토됐다. 이 편종은 모두 16점으로 이 중 14점만 묘에서 도굴돼 상하이박물관과 산시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이 위에는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이를 전부 합쳐보면 주나라 33년 정월 8일에 진후소(晋侯苏)가 명령에 따라 숙이(夙夷)의 오랑캐를 토벌한 과정이 상세히 기록돼 있다.
◇허무두 출토 주치완(河姆渡出土朱漆碗)
▲ 허무두추투주치완(河姆渡出土朱漆碗) / 사진출처 = 봉황망(凤凰网)
허무두 출토 주치완(河姆渡出土朱漆碗)는 신석기 시대 토기로 1977년 저장성(浙江省) 닝보시(宁波市) 위야오시(余姚市) 하모도(河姆渡)유적지에서 출토됐다. 나무 재질의 타원형으로 된 붉은색 토기인 허무두 출토 주치완을 통해 6~7천년 전부터 사람들이 생활용기의 표면에 칠을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 수이징베이(水晶杯)
▲ 수이징베이(水晶杯) / 사진출처 = 봉황망(凤凰网)
수이징베이(水晶杯)는 1990년 저장성(浙江省) 항저우시(杭州市) 반산진(半山鎮) 스탕촌(石塘村)의 전국시대 무덤에서 출토된 잔으로 현재 항저우시 문물고고연구소(杭州市文物考古研究所)에 소장돼 있다.
◇ 시촨추투퉁진(淅川出土铜禁)
▲ 시촨추투퉁진(淅川出土铜禁) / 사진출처 = 봉황망(凤凰网)
시촨추투퉁진(淅川出土铜禁)는 1978년 허난 시촨(淅川) 샤쓰(下寺)에서 출토돼 허난성 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이 유물은 중국 실납법(失蜡法∙ 밀납으로 모형을 만들고 그 위를 진흙으로 두껍게 입힌 다음 뜨거운 불로 밀납을 녹여 빼고 그 사이에 쇳물을 넣어 주조하는 방식)을 이용해 만든 최초 동기(铜器)다.
◇ 롄허퉁팡후(莲鹤铜方壶)
▲ 롄허퉁팡후(莲鹤铜方壶) / 사진출처 = 봉황망(凤凰网)
롄허퉁팡후(莲鹤铜方壶)는 1923년 허난(河南)성 정저우(郑州)시 춘추정궈대묘(春秋郑国大墓)에서 출토돼 현재 베이징 고궁박물원과 허난성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춘추시대 중기에 술병이나 물병으로 사용된 이 한 쌍의 청동 항아리를 통해 당시 청동기 예술을 엿볼 수 있다.
◇ 청허우이칭퉁쭌판(曾侯乙青铜尊盘)
▲ 청허우이칭퉁쭌판(曾侯乙青铜尊盘) / 사진출처 = 봉황망(凤凰网)
▲ 청허우이칭퉁쭌판(曾侯乙青铜尊盘) / 사진출처 = 봉황망(凤凰网)
청허우이칭퉁쭌판(曾侯乙青铜尊盘)는 1978년 후베이(湖北) 쑤이저우(随州)의 통치자 청허우이(曾侯乙)의 무덤에서 출토돼 후베이성 박물관에서 보존 중인 제례의식용 청동 술잔과 술잔 받침이다. 이 술잔과 받침은 장식이 매우 많고 정교해 초(楚) 나라 최고의 유물로 평가 받고 있다.
◇ 인화쐉룬스얼환시장(银花双轮十二环锡杖)
▲ 인화쐉룬스얼환시장(银花双轮十二环锡杖) / 사진출처 = 봉황망(凤凰网)
▲ 인화쐉룬스얼환시장(银花双轮十二环锡杖) / 사진출처 = 봉황망(凤凰网)
인화쐉룬스얼환시장(银花双轮十二环锡杖)은 1987년 베이징 파먼쓰(法门寺 · 법무사) 디궁(地宫)에서 발견돼 법무사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손잡이 부분에 있는 4개의 둥근 테는 고(苦), 집(集), 멸(灭), 도(道)를 상징하며 12개의 작은 고리는 12부경(十二部经)을 의미한다.◎
[봉황망코리아 차이나포커스] 최예지 기자 rz@ife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