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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광종의 차이나 別曲] 1/ [1] 皇帝와 붉은 자본가 - [40] 中華에 못 미치는 중국

상림은내고향 2022. 10. 22. 20:49

중국 전문가들의 생각13/ 

◆[유광종의 차이나 別曲] 1  중국인문경영연구소 소장

2018.01.26  조선일보 

[1] 皇帝와 붉은 자본가  

 

마윈(馬雲)은 중국 최고의 기업인이다. 전자 상거래 기업 알리바바(阿里巴巴)의 창업자다. 1999년 창업해 지난해 말 재산은 25553000만위안( 424179억원)이다. 보유 재산으로는 중국 3위지만 지명도에서는 으뜸이다.

그래서 마윈은 늘 화제다. 요즘 두 행보가 눈길을 끌었다. 지난 19일 그는 '기업가 설맞이 모임(商界春晩·사진)'에서 노래 실력을 뽐냈다. 인민해방군 복장으로 무대에 올라 "반동파를 없애 세상을 바꾸자(要消滅反動派改地換天)"는 내용의 1960년대 문화대혁명 시절 중국식 오페라 노래를 불렀다. 공산당의 '코드'에 맞추려는 눈물겨운 노력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지난해 11 11, 우리식 '빼빼로 데이'인 광군제(光棍節)에 그가 만든 단편 무술 영화 제목은 '공수도(功守道)'. 앞 두 글자가 애매하다. 공수도(空手道)가 흔한 표현이거나 적어도 공수(攻守)라고 적어 공격과 수비를 나타내는 무술 정도를 가리켜야 마땅했다.

 

그 제목대로라면 '제가 쌓은 공()을 지키다()'. 그의 취미인 태극권(太極拳)과 전통의 정신 세계를 그렸다고는 하지만 다른 해석을 내놓는 사람도 있다. 공산당이 지배하는 중국에서 전전긍긍해야 하는 기업가의 고민을 보여준다는 풀이다.


"산은 높고 황제는 멀리 있다(山高皇帝遠)"는 중국 속언이 있다. 황제의 권력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으니 좋다는 얘기다. 중앙 권력이 있는 수도로부터 아주 멀고 험한 위치에 있는 광둥(廣東)과 쓰촨(四川) 지역 사람들이 즐겨 썼던 말이다. 그만큼 중국 황제의 권력은 속박이자 구속이다. 이제 옛 황제의 권력은 공산당이 대체한 지 오래다

 

황제의 발아래(皇帝脚下)에서 기업을 운영하는 마윈의 위와 같은 행보를 두고 해석은 다양하다. 그러나 중국 '황제'의 힘이 예나 지금이나 아주 세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중국의 굴기(崛起)는 그 황제가 국력의 '선택과 집중'에 성공했기에 가능했다. 바보스러운 황제가 아닌 셈이다. 그래서 중국 공산당의 저력은 우리의 크고 깊은 관심거리다.

 

[2] 대륙의 虛實

 

무실(務實)이라는 말이 있다. "실질()에 힘쓰라()"는 주문이다. 좋은 말이다. 그러나 중국인은 반대의 조어, 무허(務虛)라는 말을 잘 쓴다. 아예 '무허 회의'라는 말도 만들었다.

중국으로서는 1978년이 매우 중요했다. 복권에 성공한 덩샤오핑(鄧小平·사진) 11 3중전회(中全會·당 중앙위원회 3차 전체 회의의 약칭)에서 개혁·개방을 결정했기 때문이다. 이듬해 3월 덩의 주재로 회의가 하나 열렸다.

향후 중국의 이념적 행보를 다뤄 '무허'라는 명칭을 얻은 회의다. 단어를 글자 그대로 풀면 이상하다. 허망함에 힘을 쏟으라고? '무실'의 대척점에 놓였다고 보면 그렇게 풀 수 있다. 그러나 서로 보완의 관계라면 풀이가 달라진다.

 

개혁·개방을 결정한 덩샤오핑에게는 큰 장애가 생겼다. 자유화의 바람이 불어 혼란스러운 양상이 빚어졌기 때문이다. 이때 열린 '무허' 회의에서는 중대 결정이 내려졌다. 이른바 '4개 기본원칙(四項基本原則)'이다.

개혁·개방을 펼치되 사회주의, 프롤레타리아 독재, 공산당 영도,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쩌둥(毛澤東) 사상은 그대로 유지하겠다는 내용이다. 지금까지 중국이 이어오는 '사회주의 시장 경제'의 틀이 만들어진 계기다.

'무허'는 이론·틀·토대 등을 우선 지향한다. 구체적인 수치나 항목보다는 추상적이면서 개념적인 것을 다루는 작업이라고 보면 좋다. 전체 흐름과 형세(形勢) 등을 살펴 방향을 잡는 일이다.

그래서 이런 회의에는 숫자와 통계가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정책의 옳고 그름, 방향의 정오(正誤) 등을 따진다. 우리 식으로 보자면 전략(戰略)을 다루는 자리다. '무실' 그에 비해 전술(戰術)이 대상이다. 실리에 눈을 떼지 않으면서 중국 공산당과 기업들은 '무허' 회의를 즐긴다.


이는 '전략'으로 큰 판을 들여다보면서 '전술'로써 세부의 항목과 변수에 대응하려는 자세다. 그 근간은 싸움에서 이기기 위한 전쟁의 사유, 곧 모략(謀略)이다. 중국은 그런 모략의 전통이 충만하다. 대륙의 허풍(虛風)은 사실 칼바람이다

 

[3] 皇帝와 順民

▲/신화 연합뉴스

 

2300여년 전 전국(戰國)시대 말기, 법가의 싹을 틔운 중국 정치가 상앙(商鞅·B.C. 390~B.C. 338)은 진()에서 개혁을 주도했다. 그가 다진 토대로 진나라는 중국 전역을 통일하는 대업을 이룬다.

상앙이 남겼다는 '상군서(商君書)'에 이런 말이 나온다. '백성이 싫어하는 일을 정치가 행하면 백성이 약해지고, 백성이 좋아하는 일을 정치가 행하면 백성이 강해진다.' 이어 그가 도출한 결론은 이렇다.

'백성이 약해지면 나라는 강해지고, 백성이 강해지면 나라는 약해진다(民弱國强, 民强國弱)'이다. 상앙의 사고에서 두드러지는 이른바 '약민(弱民)'의 주장이다. 가능한 한 백성의 힘을 빼놔야 나라가 강해진다는 논리다.


백성을 물, 임금을 배로 보는 시각도 있다. 순자(荀子)가 그렇다. 그는 둘의 관계를 이렇게 풀었다.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또한 뒤집기도 한다(水能載舟, 亦能覆舟).'

민의를 존중해야 통치가 쉽다는 의미도 담겼다. 그럼에도 '배 띄우는 물'은 말 잘 듣는 순민(順民), '배 뒤집는 물' 은 통치에 거역하는 폭민(暴民)이라는 그림 또한 뚜렷하다.

중국인의 특징을 '순민의 성격'이라고 개괄하는 중국 지식인들이 적지 않다. 전통 왕조 시절의 절대 권력자 황제(皇帝) 밑에서 살아야 했던 사람들의 심리다. 폭민을 없애면서 그런 순민을 키워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고금(古今)의 중국을 이끄는 지도부다.

요즘 중국 공산당이 특히 그렇다. 느슨했던 집단 지도체제를 벗고 당 총서기 시진핑(習近平·사진)에게 모든 권력이 모아지고 있다. 개혁·개방 이후 그나마 성장세를 멈추지 않았던 민()의 요소가 움츠러들고 국가의 요소가 더 힘을 얻을 전망이다. 이른바 '국진민퇴(國進民退)'.

상앙이 제창했던 '약민(弱民)'의 흐름과 흡사하다. 권력의 고도 집중, 즉 집권(集權)을 통해 강국(强國)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공산당이 선택한 방향이다. 중국인들은 예나 지금이나 '황제' 발아래 조용히 숨죽이며 살아야 하는 '순민'인가 보다.

 

[4] 대륙의 風雨

 

"산 비 쏟아지려니 바람이 다락에 가득하다"는 시구가 있다. 당나라 허혼(許渾)의 작품이다. 원문은 "산우욕래풍만루(山雨欲來風滿樓)". 본래 단순한 서경(敍景)이었으나 현대 중국에서는 곧 닥칠 위기의 전조(前兆)를 암시하는 말로 변했다.

중국인에게 바람과 비, 풍우(風雨)는 단순한 자연 현상이 아니다. 문화적인 함의로는 불원간 맞을 변수, 위험 요소를 머금은 무엇 정도로 풀 수 있다. 풍운(風雲), 풍상(風霜), 풍설(風雪), 풍파(風波), 풍랑(風浪) 등도 모두 곧 닥칠지 모를 위기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는 중국인의 문화적인 심리를 드러내는 조어들이다. 상황이 닥치기 전 그에 먼저 대비하려는 중국식 '위기 사고'의 패턴을 잘 보여준다.


'좌전(左傳)'에 나오는 "평안할 때 위험을 생각하라"는 뜻의 거안사위(居安思危)가 대표적 경구다. 뒤로 이어지는 "미리 생각하면 대비가 있고, 준비가 있으면 환란이 없다(思則有備, 有備無患)"는 말도 유명하다.

비가 내리기 전 창문을 고치라는 뜻의 '미우주무(未雨綢繆)', 일이 번지기 전에 위기의 요소를 먼저 잠재우라는 '방환미연(防患未然)'도 같은 맥락이다. 가축을 잃었을 때 드러나는 우리와 중국인의 차이도 있다.

우리는 대개 "소 잃고 외양간 고치면 뭐 하냐"는 핀잔과 푸념이 기조를 이룬다. 그에 비해 중국인은 "양을 다시 잃지 않으려면 외양간을 고치자"는 자세를 보인다. 이른바 망양보뢰(亡羊補牢)식 위기 대응이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공산당 총서기의 행보가 화제다. 황제와 같은 권력 집중이 연일 매스컴에 오른다그러나 나름대로 위기를 겨눈 흔적도 뚜렷하다. 40년 개혁개방에서 드러난 얽히고설킨 부패와 비리, 그로써 초래될지 모를 큰 혼란이다.

우리는 중국이 쌓았던 그런 '위기'의 속내를 잘 읽어야 한다. 중국의 사회문화가 결코 피해갈 수 없는 구조적인 문제 말이다. 나날이 거세지는 중국의 부상이 기회이면서 한편으로는 위기이기도 한 우리의 입장에서는 특히 그렇다.

 

[5] '策士'와 대항마

 

요즘 중국 공산당 최고 지도부에서 두 사람이 눈길을 끈다. 왕후닝(王滬寧·63·사진)과 류허(劉鶴·66). 왕후닝은 시진핑·리커창을 포함해 7명뿐인 최상위 정치국 상무위원, 류허는 총 25명의 정치국원 중 한 명이다. 서열 못지않게 둘의 영향력은 지대하다.

두 사람은 중국의 오랜 전통에 견줘 생각해 볼 대상이다. 왕조 시절 군주를 보필했던 책사(策士)의 전통이다. 중국의 4대 기서(奇書) 중 하나인 '서유기(西遊記)'의 맥락을 떠올리면 좋다. 책은 두 유형의 축()을 보여준다.

서역(西域)의 부처 말씀, 즉 진리를 얻고자 길을 떠나는 현장 법사와 그를 돕는 손오공(孫悟空)·저팔계(猪八戒)·사오정(沙悟淨)의 행자(行者) 그룹이다. 전자는 이상과 명분을 추구하고, 후자는 당면한 현실 문제 해결에 나서는 역할이다.

 

예전 왕조 시절의 정치판 구도를 봐도 그렇다. 뜻과 이상을 펼치는 명분 중심의 군주에게는 현실적인 방도를 마련하고 실행에 옮기는 사람들이 필요했다. 이들은 보통 책사, 모사(謀士), 모신(謀臣)으로 불렸다. 위상이 더 높을 때는 제사(帝師)라고도 했다.

()를 이끌어 패권을 쥐는 데 기여한 강태공, () 환공을 도와 춘추시대 패업을 이룬 관중, 와신상담(臥薪嘗膽)의 주역 월() 구천을 보필한 범려, 유방을 보좌해 한()을 세운 장량, 모택동 밑의 주은래 등이 대표적이다.

이런 구도는 중국만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중국은 다른 어느 나라보다 더 이를 정형화했다. 싸움에서 목표를 설정한 뒤 그를 쟁취하려는 맥락의 '전략' '전술'을 중국인들은 일찌감치 체화한 것이다.


왕후닝과 류허는 각각 이데올로기와 경제 분야에서 시진핑을 돕는 옛 전통 속의 책사이자 모신이다. 이들을 달리 지낭(智囊)이라고도 적는다. 풀어 옮기자면 '꾀주머니'이다. 그 근간은 싸움에서 남을 이기고자 하는 모략(謀略)이다. 중국의 '' '모략'에 맞설 우리의 방책, 우리의 대항마는 무엇인가?

 

[6] 중국式 '냉정한 불 구경'

 

강 건너편에 난 불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우리와 중국은 차이를 드러낸다. 한국인들은 이를 '강 건너 불구경'이라는 관용구로 표현할 때가 많다. 안에 담긴 뜻은 '나와 관계없어 무관심하게 바라보는 일'이다.

중국은 '격안관화(隔岸觀火)'. 속뜻은 우리와 매우 다르다. 우선은 관망(觀望)이다. 사태의 추이를 냉정한 눈으로 지켜보겠다는 자세다. 이어 불이 번져 어떤 상황이 내게 닥칠지 주목한다.

남의 집이 불에 타 없어지는 일은 상관하지 않는다. 아울러 상대를 돕는 행위는 마음에 없다. 다음에 내가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까를 먼저 따진다. 중간에서 제 힘들이지 않고 얻는 이익, '어부지리(漁父之利)'에 더욱 관심을 둔다.

 

성벽을 쌓고 올라서서 사태를 관망한다는 뜻의 '작벽상관(作壁上觀)', 산 위에서 호랑이 두 마리의 싸움질 결과를 지켜보는 '좌산관호투(坐山觀虎鬪)'도 같은 맥락이다. 냉정한 방관자의 입장이면서 집요한 '()'의 자세가 돋보인다.

그런 셈의 전통은 중국에서 유구하다. 우선 묘산(廟算)이라는 말이 눈에 띈다. 춘추시대 이전인 주()나라 때 자리 잡은 일이다. 왕실 조상의 신위를 모신 묘당(廟堂)에서 세우는 책략이라는 뜻이다.

싸움에 나서기 전 임금과 신하가 구성하는 전략과 전술인 것이다. 셈을 할 때 사용하는 산가지()를 늘어놓아 책략을 구성한다고 해서 운주(運籌)로 적기도 한다.

그런 셈과 모략의 전통이 '손자병법'에서 '삼십육계'에 이르기까지 면면히 흐르는 곳이 중국이다. 알을 밀어올리거나 내려 거침없이 셈을 하는 주산(珠算)이 중국의 발명품이라는 점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비핵화의 이슈로 한반도가 뜨겁다. 압록강 건너편에서 이곳을 바라보며 김정은을 베이징으로 끌어들인 중국의 셈법이 관심사다. 자유와 민주라는 가치(價値·value) 체계에서 북한을 상대하는 우리에게 집요한 이해타산의 중국은 경계의 대상이다.

 

[7] '허풍' 가득한 중국 武術

 

쉬샤오둥(徐曉東·사진 오른쪽)이라는 39세의 중국인 남성이 있다. 별명은 '격투기 광인(狂人)'이다. 지난해 5월 중국 태극권(太極拳)의 유명 무술인 웨이레이(魏雷)에게 도전장을 냈다. 결과는 싱거웠다. 20초도 지나지 않아 태극권은 격투기에 무참하게 얻어맞고 무릎을 꿇었다.

올해 3월 쉬샤오둥은 다시 영춘권(詠春拳)에 도전장을 냈다. 영춘권은 세계적인 쿵푸 스타 '브루스 리', 즉 이소룡(李小龍)으로 인해 유명해진 중국 권법이다. 이 시합 또한 싱겁게 끝났다. 영춘권 고수는 줄곧 도망만 다니며 얻어맞았다.

중국이 자랑하는 전통 무술이 위기다. 그러나 사실은 요즘 두드러진 현상이 아니다. 1974년 중국의 쿵푸와 태국의 킥복싱이 맞붙었다. 당시 언론 보도는 "쿵푸 선수는 길면 2 20, 짧으면 20초를 버티지 못했다"고 전했다.

 

1954년에는 중국 남부의 전통 무술 백학권(白鶴拳)과 태극권이 맞붙었다. 발로 낭심 차기 등 동네 왈패 수준의 주먹질만 벌여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았다. 1928 400여 명의 '고수'들이 모여 벌인 무술 시합에서는 얼굴 물어뜯기, 상대방 안고 구르기 등의 졸전만을 거듭해 비난에 휩싸였다.

손에서 강력한 바람이 나가 상대를 날려버린다는 장풍(掌風)이 있고, 물 위를 걸어 다닌다는 경공(輕功)도 있다. 손에서 불을 내뿜는 화염장(火焰掌)이 있는가 하면, 사람을 밀치기만 해도 멀리 튕겨 나가게 하는 금강권(金剛拳)도 있다.

겉으로만 보면 중국 무술은 이렇듯 요란하다. 그러나 다 허풍이다. 그런 가식과 허상을 다시 깨부순 쉬샤오둥이라는 인물이 그래서 새삼 화제다. 내실보다는 겉치레에 힘을 쏟는 중국 전통문화에 당당하게 도전했기 때문이다.


중국은 그런 포장(包裝)에 능하다. 전쟁의 참혹함을 영웅들의 패권 로망으로 엮은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 도둑과 강도들을 충절(忠節)로 각색한 '수호전(水滸傳)'이 대표적이다. 어쩌면 우리는 아직 그 포장만으로 중국을 보는지 모른다. 포장지를 뜯고 그 안을 찬찬히 살펴야 할 때다.

 

[8] '孔孟' 아닌 또 다른 중국


네 갈래 길 오르막에 주막을 차린 여성. 이름은 손이랑(孫二娘). 별호는 모야차(母夜叉). 중국 4대 기서 '수호전(水滸傳)'의 양산박 108두령 명단에 이름을 올린 세 여성 중 하나다. 특기할 점은 사람의 고기로 만든 인육만두(人肉饅頭)의 제조자.

호랑이도 때려눕힌다는 장사 무송(武松)을 혼미케 한 뒤 만두소로 만들려고 했던 인물이다. 남편 장청(張靑)과 함께 사람 고기를 잘게 썰어 만두로 만들거나, 쇠고기로 위장해 장에 내다 팔던 소설 속 캐릭터다. 이를 모티브로 삼았던 홍콩 영화 '신용문객잔(新龍門客棧)'도 우리의 기억에 뚜렷하다.

 

중국의 현대 문호 루쉰(魯迅)은 자신의 유명 소설 '광인일기(狂人日記)' 집필 동기를 설명하면서 "중국인은 아직 사람을 먹는 민족"이라고 했다. 사람을 극도로 옥죄는 유가의 예교(禮敎) 질서가 지닌 폐해를 지적했다는 설명이 뒤를 따른다.

 

그러나 그의 지적은 실재했던 중국 역사 속 식인의 자취를 말한 내용이다. 학술논문의 통계에 따르면 장구한 왕조 역사에 등장하는 식인의 사례는 모두 408회다. 당나라 시인 백거이는 "강남에 기근이 들어 사람이 사람을 먹었다(人食人)"는 시를 남겼다.

각종 기록에 등장하는 사례는 아주 많다. 다양한 명칭도 따른다. 지면으로 소개하기에는 아주 끔찍해서 다 적지 않기로 한다. 그럼에도 사람을 두 다리로 걷는 양이라는 뜻에서 '양각양(兩脚羊)'이라고 적었던 점만 덧붙이자.

대개는 전쟁이 그런 참담함을 불렀다. 그에 못지않게 중국 대륙을 휩쓸었던 재난 또한 큰 요인이다. 가뭄과 홍수, 그리고 거대한 메뚜기 떼에 의해 벌어졌던 황재(蝗災) 대표적이다이런 참사는 1959년 대약진운동 무렵, 1966년의 문화대혁명 시기에도 벌어졌다.

우리는 공자와 맹자의 공맹(孔孟), 노자와 장자의 노장(老莊)이라는 사상의 맥락으로 중국을 볼 때가 많다. 그래서 착시에 자주 빠진다. 중국의 실제 역사 전개과정은 공맹이나 노장으로 포장할 수 없는 '그늘'이 아주 깊고 넓다. 이제 그 점을 제대로 살펴야 할 때다.

 

[9] 中 전통 주택에서 드러나는 차별 의식

베이징의 전통 주택 중 으뜸은 사합원(四合院)이다. 중국 북부에서 일찌감치 지어지기 시작했던 집이다. 그러나 청()대 접어들면서 베이징에 아주 많이 들어섰다. 특히 황궁이었던 자금성(紫禁城) 주변을 아직도 장식하고 있다.

특징이 몇 있다. 우선 축선(軸線)이 분명하다. 대개는 남북의 종향(縱向)이다. 동남쪽에 조그맣게 난 문을 들어서면 남북 축선을 중심으로 동서 양쪽 건물들이 대칭을 이룬다는 점도 특색이다. 앞은 외부 사람을 맞이하는 당(), 뒤는 가족들만이 사는 실()의 구조라는 점도 눈에 띈다.

'
사합원'이라는 이름은 바깥을 이루는 동서남북의 네() 면이 중간의 뜰()을 향해 합쳐진다()는 맥락에서 유래했다. 우리식 ''자의 닫힌 형태로 지어진 한옥(韓屋)을 떠올리면 좋다. 그러나 사합원은 그 '밀폐'의 정도가 더 심하다.

 

사합원 조감도

우선 동서남북 네 면의 벽이 견고한 성벽과 같은 느낌을 준다. 아울러 모든 건축물이 겉으로는 등을 돌리고 안의 뜰을 향하는 배치다. 따라서 벽을 두껍게 쌓고 외부의 것을 경계하는 심리가 강하게 드러난다.


남북 종향의 축선은 사람 사이의 높고 낮음, 즉 존비(尊卑)의 성향을 담은 건축 심리다. 집 안에 거주하는 사람의 등급에 따라 신분이 높은 사람일수록 북쪽, 정면에 자리를 잡는다. 그다음 사람들은 등급(等級)에 따라 동서로 각각 나눠 거주한다.

중국인들은 이 사합원에 매력을 느끼기 십상이라고 한다. 견고하게 쌓은 벽, 모든 것이 안으로 향하는 구조, 축선이 만들어 내는 위계(位階) 질서 등의 안정감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달리 보는 경우도 있다. 밖에 등을 돌린 모진 담과 건축물이 안으로만 향하는 구조는 폐쇄와 자기만족, 그와 더불어 얹힌 남북 축선 상의 등급과 위계는 진부한 차별 의식을 드러낸다고 보는 시각이다. 개혁·개방 초기의 활달함을 잃고 점차 강성해진 뒤 본색을 드러내는 중국을 요즘 이 사합원의 건축 심리로 살필 때가 많다.

 

[10] '縱的 질서' 되살리는 중국

/신화사

 

느닷없이 재물이 들어오면 횡재(橫財), 제멋대로 사납게 굴면 횡포(橫暴), 남의 재물을 슬쩍 챙기면 횡령(橫領), 별안간 불행이 닥치면 횡액(橫厄), 좋지 않은 일이 마구 번지면 횡행(橫行).

한자 표기를 단 위의 단어들은 '()'이라는 글자가 들어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아울러 그 새김이 대개는 '불법' '비정상' '무질서'의 흐름이라는 점도 마찬가지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감이 썩 좋지 않은 글자다.

본래 글자 뜻은 '가로'. 또 그 형태로 걸쳐 있는 상태의 무엇을 지칭한다. 그런데도 이 글자는 억울하게 불길함 또는 불행과 닿아 있다. 한자 세계가 표방하는 질서와 어긋나서 그렇다.


한자(漢字) 세계는 가로세로를 종횡(縱橫)으로 적는다. 세로인 종()이 먼저다. 세로는 상하(上下)와 귀천(貴賤)을 가르는 기준이다. 방위로 따지면 남북을 잇는 선이다. ()은 그 질서를 어지럽히는 일과 관련이 있다고 간주해 위의 단어들로 이어졌다.

옛 중국 왕조의 운영자와 조력자들은 남북의 종축(縱軸)을 가장 중시했다. 황제는 북쪽에 앉아 남쪽의 신하를 내려다보는 좌북면남(坐北面南)이어야 했다. 베이징 자금성을 비롯한 옛 중국 왕조의 궁성이 다 그렇다.

1949
년 건국한 중화인민공화국은 공산당 체제다. 국제 연대를 표방했던 초기에는 옛 왕조의 남북 종축 질서를 부정했다. 대신 평등과 연대를 내세우며 베이징 동서(東西)의 횡축(橫軸)인 창안다제(長安大街)를 강조했다.

그러나 어느덧 강성해진 2008년 중국 공산당은 옛 왕조의 축선 북쪽 끝을 12㎞ 연장한 곳에 스타디움을 세워 베이징올림픽〈사진〉을 지렀다. 올해 2월에는 시청률이 가장 높은 중앙텔레비전(CCTV) 설날 프로그램에서 옛 황제만이 행했던 태산(泰山)의 봉선(封禪) 제례를 방영해 큰 화제였다.


한자 세계가 지닌 종적인 질서, 그 테두리를 감쌌던 자국 중심의 중화주의 복원인지를 살피게끔 하는 대목이다. '중심' '주변'의 차별적 시선으로 우리를 대할 수도 있어 관심을 기울여야 할 현상이다.

[11] '太平'에 집착하는 중국

중국인들은 '비상구(非常口·Exit)'를 한때 '태평문(太平門)'으로 불렀다. 그러나 요즘은 안전문(安全門)이나 긴급출구(緊急出口)로 변했다. 바뀐 이유를 명확하게 설명하는 내용은 없다.

 

태평문은 위급한 상황에 처한 사람이 온전함을 염원하는 데서 나온 작명이었을 것이다. 저세상으로 떠나는 사람의 시신이 잠시 머무는 안치실을 중국인들은 태평간(太平間)으로 적는다.

이 태평문과 태평간은 뚜렷한 공통점이 있다. 둘 다 한 곳에서 다른 한 곳으로 나아가는 통과의례(通過儀禮)를 상정하고 있다. 위급한 상황에서 평안한 곳으로 나아가고, 이승에서 저승으로 옮겨가는 통과의 절차다. 그 과정에서 사람이 제 안녕을 염원하는 점도 같다.

 

 

중국에는 문신(門神)을 받드는 습속이 발달했다. 집 문 옆에 작은 감실(龕室)을 만들어 출입을 관장하는 신을 모신다. 먼 곳으로 떠나는 사람, 평온과 행복을 바라는 사람은 문을 나서고 들 때 이 문신에게 향을 올리고 예를 바친다. 그 문신을 향한 염원은 보통 '태평출입(太平出入)'으로 적는다.

중국 민간에 전해 내려오는 말이 있다. "태평 시절의 개로 살지언정, 난세의 사람으로는 살고 싶지 않다(寧爲太平狗, 不作亂世人)"는 말이다. 전란과 재난에 늘 시달려 온 중국인 특유의 비원(悲願)이자 안정을 향한 강박이다.

비장감까지 주는 위의 몇 사례로부터 우리는 '태평'을 향한 중국인의 집착이 어느 정도인지를 느낄 수 있다. 지독한 애착이라는 점에서 어쩌면 중국인의 문화적이면서 집단적인 콤플렉스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런 문화의 저변을 헤아리면 '비상구'가 왜 '태평문'으로 불렸는지 이해할 수 있다. 기복과 주술의 음울한 색채 때문에 명칭 자체는 사라졌지만, 그 전승은 끊이질 않는다. "안정은 모든 것을 압도한다(穩定壓倒一切)"고 한 덩샤오핑, '안정 유지(維穩)'를 통치의 핵심 근간으로 내세우는 현재의 중국 공산당 모두 이런 '태평 콤플렉스'의 충실한 계승자다. 

 

[12] 수시로 얼굴 바꾸는 중국인

 

쉴 새 없이 얼굴에 덮인 가면을 바꾸는 중국 민간 예술이 있다. 얼굴 바꾸기라는 뜻의 '변검(·사진)'이다. 서남부 쓰촨(四川)에서 생겨나 지금은 중국 서커스에서 빼놓을 수 없는 아이템으로 자리 잡았다.

중국 4대 기서(奇書) '서유기'의 대표 캐릭터 손오공이 늘 외치는 구호가 있다. "()!"이다. 난적인 요괴를 만났을 때 자신이 그를 압도하는 동물로 변신하기 위해 외치는 말이다. 소설의 핵심 키워드 중 하나다.

중국 민간에는 닥치는 변화에 먼저 대응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다. 그래서 '바람을 보고 키를 놀린다(見風使舵)' '때에 맞춰 적절하게 대응한다(臨機應變)' '상황을 보고 일을 처리한다(見機行事)' '몸 잰 뒤 옷감 자른다(量體裁衣)' '기회에 맞춰 이익을 취한다(投機取巧)' 등의 성어가 즐비하다.

고전도 이를 강조한다. '주역'은 사람이나 현상이 곤궁한 지경에 들었을 때 변화를 불러야 하고, 그래야만 오래 이어갈 수 있다는 취지의 말을 적었다. '궁즉변, 변즉통, 통즉구(窮則變, 變則通, 通則久)'. 모종의 상황에서 더 적극적인 변화를 꾀하는 변통(變通)의 사고방식이 나온 토대다.

1970
년대 말 개혁·개방 이후 중국 남부 지역에서 유행했던 '위에서 정책을 내놓으면 아래에서는 대책을 내놓는다(上有政策, 下有對策)'는 말 또한 이러한 융통성 넘치는 대응 방식의 흐름에 닿아 있다.

원칙에만 매달리지 않고 상황을 유연하게 이끌기 위해서는 이런 변통의 사고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중국에는 넘쳐나서 문제다. "임기응변의 사고 때문에 사람들이 '원만해서 두루 통하는(圓通)' 지경을 넘어 '둥글둥글해서 교활(圓滑)'해져 문제'라는 중국 문화평론가의 지적이 눈길을 끈다.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 방어 체계)를 문제 삼아 초강력 경제제재를 벌였다가 미국의 통상 압력이 거세지자 한국에 협력과 연대, 공동 대응 등을 제안하는 중국의 얼굴이 변검의 기예처럼 현란하다. 진짜 중국의 얼굴을 직시해야 할 때다 

 

[13] 자연적이라며 조작에 능한 중국

옆으로 눈이 튀어나와 출목금(出目金) 또는 툭눈이라고 하는 붕어, 눈이 위로 향해 있는 정천안(頂天眼), 머리 쪽에 혹을 돌출시켜 사자 모습을 한 금붕어(일명 오란다). 귀에 익지는 않지만 모두 이상하게 생긴 관상용 금붕어를 가리키는 이름들이다.

이런 금붕어들의 원산지는 북송(北宋) 때의 중국이다. 사람의 눈을 즐겁게 하고자 비늘을 떼거나 바늘로 찌르는 '유전자 변형'의 기술을 거쳐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16세기에는 일본, 18세기 이후에는 유럽으로 번져 세계의 상품으로 자리 잡은 '메이드 인 차이나'.

 

 

여성의 전족(纏足)도 눈길을 끈다. 어렸을 적의 여성 발을 헝겊으로 동여매 일정한 크기로 묶어 두는 일이다. '세 치 금쪽같은 연꽃(三寸金蓮)'이라는 형용이 유행할 정도로 1000년 이상 이어졌던 전통이다.

전족을 한 여성들은 한 걸음에 세 번 몸이 흔들리는(一步三搖) 자태를 지녔고, 중국 남성들은 여성의 고통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 모습을 즐겼다. 남성의 손바닥 위에 올라설 수 있을 만큼의 작은 발을 지닌 여성이 인기를 얻었다고 하니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남성이되 남성이지 않은 사람들, 내시(內侍)도 있다. 중국에서는 태감(太監)이라는 명칭이 더 일반적이다. 지금으로부터 3000여 년 전인 은()나라 때 관련 기록이 등장한다. 면면히 이어진 중국 왕조사에서 특히 강력한 권력 집단으로 활약했다.

위의 셋은 천연의 상태에 집요한 변형과 조작을 가해 만들어진 중국의 대표적 기형(畸形문화 현상들이다

그런데도 중국의 관념세계는 자연과 사람의 관계를 '천인합일(天人合一)'로 말한다. 사람은 자연에 순응하면서 조화를 꾀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겉만 그렇다. 속은 '변형' '조작'에 더 중점을 두는 흐름이 완연하다. 겉에 내세우는 '장식'과 속을 이루는 '내용'이 큰 차이를 드러낸다. 중국의 현상을 바라볼 때 종종 착시(錯視)가 생기는 이유이다. 이제 그 착시를 거둘 때다.

 

[14] 가짜와 짝퉁 끊을 양심 중국에 있나

장쩌민(江澤民) 중국 국가주석 때 일이다. 그가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각 지역 성장(省長)을 접견했다. 허난(河南) 성장과 악수할 차례였다. 장쩌민 주석은 느닷없이 이렇게 물었다. "이 사람은 가짜 아닌가?"

2000
년 무렵 베이징에서 유행하던 우스개다. 당시 가짜 제품 생산지로 유명했던 허난을 비꼬던 베이징의 블랙 유머다. 소득 수준이 낮아 베이징에서 허드렛일에 종사하던 허난 사람들로서는 억울했던 농담이다.

중국에는 사실 가짜와 짝퉁이 넘친다. 이는 중국의 오랜 '베끼기 전통'에서 비롯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 베끼기 전통에 견줘 먼저 생각해 볼 단어는 의고(擬古). '옛것을 본받다'는 뜻의 조어다.

 

 

지난 것을 익혀 새로 알아간다는 온고지신(溫故知新), 과거의 일을 배워 새로운 것을 만든다는 법고창신(法古創新) 등의 성어도 다 같은 맥락이다. 기예를 다루는 영역에서 우선 베껴가며 실력을 닦는 이런 의고의 전통은 매우 뚜렷하다.


모고(摹古)는 원래 있는 원작을 베끼는 일이다. 회화 등에서는 임모(臨摹)라고 적는다. 이를테면 모사(摹寫). 글이 대상일 경우에는 임서(臨書)라고 달리 적는다. 모조(摹造), 모작(摹作) 등이 같은 맥락의 단어다. 그러나 지나치면 문제다.

베껴서 아예 제 것으로 만들면 초습(抄襲)이자 표절(剽竊)이다. 드러내놓고 베끼는 방모(仿冒), 아예 가짜를 만드는 위조(僞造)와 변조(變造)에 이어 날조(捏造)까지 등장하면 문제는 아주 커진다.

오랜 전통 때문일까. 중국에서는 가짜와 짝퉁이 이미 흐름을 이뤘다. 이른바 '산채(山寨) 문화' 라고 하는 열악한 제풍의 생산과 유통이 심각하다. 가짜 계란, 플라스틱 쌀, 염료로 물들인 만두, 아이들을 사망케 한 엉터리 분유와 최근의 가짜 백신이 다 그렇다.


배움 단계인 모방은 나무랄 게 없다. 그러나 정직과 양심을 결여하면 가짜와 짝퉁으로 흘러 결국 사람까지 해친다. 가짜와 짝퉁을 누를 정직과 양심의 역량이 중국에 얼마나 있는가를 세계가 지켜보는 중이다. 

 

[15] 공산당에 아부하는 中 지식인들

 

백가쟁명(百家爭鳴)으로 백화제방(百花齊放)하는 시절이 있었다. 지금부터 2300년 전의 중국에서다. 그러나 춘추전국(BC 770~BC 221) 때 화려하게 피어올랐던 중국의 지식 전통은 금세 시들어 버린다.

진시황의 분서갱유(焚書坑儒)가 있었고 오로지 유가 사상만을 으뜸으로 치는 한무제(漢武帝)의 독존유술(獨尊儒術)이 있었다. 나와 다른 남을 모두 배제한다는 맥락에서 이는 '사상의 금고(禁錮)'에 해당하는 사건이었다.

중국의 지식 전통은 그 뒤로 지금까지 아주 오랜 침체기를 거친다. 춘추전국 시대에 자유를 누렸던 중국의 선비[]들은 이후 군주에게 전략을 만들어 바치는 책사(策士)로 내려앉는다. 그마저도 잇지 못해 작은 꾀를 바치는 모사(謀士)로 다시 곧 전락하고 말았다.

 

글자 잘못 써 황제의 노여움을 사 목숨을 잃는 문자옥(文字獄)이 기다리거나, 심지어는 본인 외에 수많은 친족이 죽임을 당하는 연좌(連坐)의 어두운 그늘 속을 걸어야 했다. 그래서 한나라 이후 2000년 넘는 중국의 왕조사에서 중국 지식인이 키운 것은 그저 노예근성이라는 지적이 있다.

1949
년 사회주의 중국이 들어선 뒤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1957년의 비()공산주의 계통 지식인을 대거 숙청한 '반우(反右) 운동'이 벌어졌고 1960년대의 문화대혁명 때는 숱한 지식인이 다시 참혹한 시련에 직면해야 했다.


이른바 '수퍼 차이나' 열풍을 일으킨 후안강(胡鞍鋼)이라는 교수의 몰락이 얼마 전 화제였다. 이미 중국의 국력이 많은 영역에서 미국을 앞질렀다고 주장한 사람이다. 옛 황제의 권력을 대신한 오늘날의 중국 공산당 입맛에 딱 들어맞는 노예근성의 아부였다.

중국에 '가대공(假大空)'이라는 신조어가 있다. 거짓[], 허풍[], 헛소리[]를 합친 말이다. 좋은 지식 전통을 키우지 못하면 나타나는 현상이다. 딱 그 정도에 불과한 후안강이 한국에 올 때마다 세계적 지식인으로 대우하며 호들갑을 떨었던 우리의 지식 수준도 이 기회에 함께 살펴볼 일이다.

 

[16] 현세적 가치에 묶인 중국·중국인

 

기원전 7세기에 태어난 탈레스는 밤하늘의 별을 헤아리며 걷다가 웅덩이에 빠졌다. 이웃의 누군가에게 꾸중을 들었다. "발밑의 땅도 알지 못하면서 하늘만 쳐다보느냐"는 힐난이었다. 그래도 그는 꿋꿋하게 하늘과 별을 관찰했다. 만물의 근원을 살핀 '서양 철학의 아버지'는 그렇게 탄생했다.

중국에도 하늘을 무척 궁금하게 여겼던 주체가 있었다. ()라는 춘추전국시대 작은 나라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하늘이 무너지지 않을까 걱정했다. 잠도 못 이루고, 밥도 먹지 못할 정도였다.

급기야 한 사람은 현자를 찾아가 품고 있던 걱정을 털어놓았다. "공기로 이뤄진 하늘은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서야 겨우 시름을 멈췄다고 한다. '쓸데없는 걱정'의 대명사 기우(杞憂)가 탄생하는 장면이다.

 

중국인은 ''에 삶의 많은 것을 걸어왔다. 일찌감치 화려한 농경의 문명을 피웠던 대지의 적자(嫡子)다운 면모다. 그래서 '하늘'을 묻는 사람에게는 '기우'의 고사처럼 '어리석다'는 평가가 따랐다. 별을 헤아리며 만물의 본질을 탐구했던 탈레스가 나올 문화적 토양은 없었다.

천문의 영역이 그렇다. 중국 전통 천문학의 기술적 수준은 사실 서양을 앞서기도 했다. 그러나 중국의 천문은 황제(皇帝)의 시간표, 나아가 '땅을 다스리는 기준'으로만 작용했다. 높은 수준의 관측이 결국 땅의 권력에 묶였던 형국이다.

그렇듯 땅을 향한 집착은 평면과 실용에 강한 면모를 보인다. 공간을 향하는 입체와 추상에는 둔감하다. 중국 전통 수학이 실용적인 대수(代數)에 강했지만 공간을 다룬 기하학(幾何學)을 줄곧 발전시키지 못했다는 점이 이를 보여준다.

중국인이 지향하는 가치는 그래서 대개 현세적이다. 황금, 행복, 장수, 출세, 권력 등이 큰 줄거리를 이룬다. 강대국으로 굴기(崛起)하는 중국의 국가적 지향도 그렇다. 그러나 현세적 가치에 입각한 지나친 이해타산이 문제다. 떠오르는 중국에 지구촌의 여러 나라가 경계의 눈길을 보내는 이유다. 

 

[17] 가을엔 책보다 전쟁을 떠올린 中國

 

북반구의 가을은 목가적이다. 푸르렀던 식생이 빨강, 노랑, 갈색으로 변하면서 맑고 높은 하늘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만산홍엽(滿山紅葉)의 경치에 젖었다가 바람에 흩날리는 추풍낙엽(秋風落葉)을 바라보며 감상에도 빠져든다.

계절의 변화에서 시간의 덧없음을 떠올리는 정조(情調)는 한반도와 중국이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러나 중국의 대지에는 특별한 감성이 하나 덧붙여진다. 전쟁에 뒤따르는 조바심이다.

우선 천고마비(天高馬肥)의 성어를 보는 시각차가 뚜렷하다. 우리는 이 성어 뒤에 하나를 더한다. 등화가친(燈火可親)이다. 맑고 높은 가을 하늘에 말도 살을 찌우니, 등불을 가까이해서 책 읽으라는 권유다.


하지만 이 성어를 만들어 낸 중국의 원전은 엉뚱한 뜻을 가리킨다. 바로 전쟁이다. 북방의 드넓은 초원에서 여름의 풀을 잔뜩 먹어 살을 찌운 말이 넘어온다는 얘기다. 북방 유목 제족(諸族)의 침략을 지칭한다.

원전에서는 추고마비(秋高馬肥)로 적었다. 시기는 북송(北宋) 때다. 북방의 금()나라가 곧 쳐들어올지 모르니 전쟁에 대비하자는 한 대신의 간언에서 나왔다. 따라서 예전 중국에서는 가을에 책을 잡는 대신 남부여대(男負女戴)로 피란길에 올라야 마땅했다.

오래전부터 중국 북방은 침략의 근원이었다. 특히 수확의 계절이 닥치면 북방의 유목들은 줄곧 남쪽으로 말을 달려 침략 전쟁을 벌였다. ()대에 본격 펼쳐져 명()대까지 이어졌던 가을 전쟁 대비 작업인 '방추(防秋)'는 아예 제도로 자리 잡을 정도였다.

추후산장(秋後算帳)이라는 중국 성어도 있다가을걷이 뒤에 제대로 따져보자는 얘기다. 속뜻은 오래 벼르다가 기어이 보복에 나서는 행위나 의도다. 역시 가을을 그 시기로 선택했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줄곧 전쟁으로 다져진 중국 문명의 특징이 드러나는 대목들이다. 중국인은 그렇듯 늘 싸움과 대응의 방략(方略)을 중시한다. 가을이면 독서를 우선 떠올리는 한반도의 인문(人文)과는 달라도 퍽 다르다.

 

[18] '세 자루의 칼'과 창업 열기

중국인 사회에서 '세 자루의 칼(三把刀)' 이야기는 제법 유명하다. 보통은 요리용 칼[菜刀], 머리 깎을 때 쓰는 칼[剃刀], 옷감 자르고자 사용하는 가위[剪刀]를 가리킨다. 다른 한편으로는 생업의 종류를 지칭한다. 요리사, 이발사, 재단사다. 칼의 종류는 지역에 따라 조금 다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목욕 문화가 발달했던 장쑤성 양저우(揚州)에서는 손톱·발톱 자르는 칼이 꼭 나온다. 특유의 근면함으로 요리와 이발업, 옷감 재단과 목욕업 등으로 성공한 중국인의 창업 스토리에서 이 '세 자루의 칼' 이야기는 늘 입에 오른다.

 

 

해외로 나간 화교(華僑)들이 그랬다. 전통 농경사회에서 다진 손기술과 성실함으로 화교들은 음식을 만들거나 이발업에 종사하고 혹은 옷감이나 남의 발톱 등을 매만져주면서 생업의 기반을 닦았다.

요즘에는 '세 자루의 칼' 버전이 달라졌다. 얼마 전까지는 '삼사(三師)'가 유행이었다. 엔지니어[工程師], 의사(醫師), 회계사(會計師). 최근에는 더 발전했다. 이른바 '삼가(三家)'. 과학가(科學家), 기업가(企業家), 발명가(發明家).

안정적인 직업으로 지역사회의 엘리트 반열에 들어섰던 화교들이 그 수준을 넘어 명망 높은 과학자와 기업인, 발명가의 대열로 들어서고 있다는 얘기다. 농업사회의 정체적인 환경에 묶였다가 해외로 진출해 그 속박을 벗어난 것은 최근까지 화교들에게만 해당됐다.


이제는 중국 전역에서 그런 바람이 분다. 왕성한 창업의 열기가 식을 줄 모르는 곳이 중국이다. 최근의 한 통계는 중국인의 잠재적 창업 능력이 63%에 달해 지구촌 평균(43%)을 크게 웃도는 것으로 나타났다.

'
닭의 주둥이가 될지언정 소의 꼬리가 되진 않는다(寧爲鷄口, 不作牛後)'는 중국 농촌사회의 오랜 속담이 있다. 그런 문화적 심리가 작용했을 듯싶다. 제조업의 수준이 한국을 바짝 뒤쫓는다. 추월한 분야도 일부 있다. 중국 제조업에 견준 우리의 경쟁력을 심각하게 살피면서 민관(民官)이 분발해야 할 때다.

 

[19] '총명함'에 발목 잡힌 중국

 

중국인은 바람머리 앞에 잘 나서지 않는다. 앞에 닥치는 바람이 뭘 품고 있느냐는 의구심 때문이다. 바람을 위기의 요소로 읽어서 그럴 것이다. 그래서 잘난 척하며 앞에 나서는 사람의 행위를 출풍두(出風頭)라고 하며 매우 경계한다.

중국인의 언어에는 '회색(灰色) 영역'이 발달해 있다. 좋다, 나쁘다를 함부로 입에 올리지 않는다. "좋으냐, 싫으냐?"를 물을 때면 대개 "그럭저럭…괜찮아" 정도의 뜻인 '하이싱(還行)'이라는 표현으로 얼버무린다. 가부(可否), 호불호(好不好), 시비(是非) 사이에서 사태를 더 따져 보고 대응하려는 심산에서다.

모두 중국인 처세(處世)의 가장 큰 맥락인 중용(中庸)의 흐름이다. 극단으로 향하지 않고 중간에서 제자리를 잘 지키려는 몸가짐 말이다. 아울러 사세(事勢)와 시세(時勢)를 살펴 자신의 이해(利害)를 더 따지겠다는 모략(謀略)이라는 정신세계의 표출이다.


1978
년 개혁·개방 직후 중국 대외 정책의 근간을 이뤘던 도광양회(韜光養晦)가 그렇다. '자신의 장점[]은 감추고[] 단점[]을 보완[]하자'는 뜻이다. 묵묵히 경제 발전을 이뤄 국력을 키우겠다는 자세다. 그로써 중국은 놀랄 만큼의 국력 신장에 성공했다.

하지만 지난 10여년 동안의 궤적은 많이 다르다. '도광양회' '뭔가를 이루자'는 맥락의 유소작위(有所作爲)로 바뀌더니 대국으로 일어서겠다는 대국굴기(大國崛起)로 자리 잡았다. 급기야는 '대단하다, 우리나라[厲害了, 我的國]'로까지 발전했다.

중용이나 모략은 참혹했던 삶의 현장에서 키운 나름대로의 생존 철학일지 모른다. 그러나 마음의 바탕이 바르지 않으면 중용과 모략은 권모(權謀)나 술수(術數)로 흐르기 십상이다. 그래서 나온 중국 속언이 '총명함은 오히려 총명함 때문에 그르친다[聰明反被聰明誤]'.

미국과 유럽연합을 비롯한 많은 국가가 중국의 과도한 자국 중심적 대외 확장을 심각한 경계감으로 바라본다. 중국이 전통의 지혜를 살려 스스로를 진지하게 점검해야 할 때라고 본다. 

 

[20] 울타리의 숲에 갇힌 중국인 

베이징은 '[圍墻]'의 도시다. 북쪽에는 길고 두꺼운 만리장성이 늘어서 있고 왕조 시대의 황궁 자금성(紫禁城)은 약 12m의 높은 담을 둘렀다. 공산당을 비롯한 중앙 부처의 관공서 담도 아주 높다. 도시의 전통 주택 사합원(四合院)도 견고한 담이 돋보인다. 새로 짓는 고급 아파트 또한 담장이 발달했다. 자금성과 그 외곽의 옛 도성(都城) 주위를 중심으로 고리 형태의 환상(環狀) 도로가 6차선까지 뻗어나간 점도 담의 연역(演繹)이다.

중국의 모든 지역은 '울타리[圈子]'의 숲이다. 자신과 제가 속한 집단의 외부를 성벽처럼 두르는 무형(無形)의 울타리다. 친구는 친구끼리, 공무원은 공무원끼리, 동향은 동향끼리 뭉쳐 크고 작은 이익을 주고받는다.

그 울타리 안, 또 여러 울타리의 사람들이 교통(交通)하는 방식이 '관시(關係)'. 복잡한 이해를 따지는 틀에서 벗어나기 어려워 대개 은밀하며 음습하다. 그래도 중국인의 삶은 이 관시의 범주를 결코 벗어나지 못한다.

 

 

담과 울타리는 모두 성을 쌓는 '축성(築城)'의 심리에서 비롯했다. 오래, 그리고 자주 벌어진 전쟁의 여파다. 우선 중국 국가(國歌)는 이렇게 시작한다. '일어나라, 노예로 살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여! 우리의 피와 살로 새로운 장성(長城)을 쌓자!'

국가에서마저 장성을 쌓자고 하니 중국은 완연한 담과 울타리의 나라다. '모두의 마음으로 성을 쌓는다(衆志成城)'는 오랜 중국식 교훈의 현대판이다. 이는 중국에 위기가 닥칠 때면 늘 등장하는 구호이기도 하다.

축성은 삶과 죽음을 다투는 전쟁에 서 스스로를 지키고자 쌓은 전통이다. 그 자체로서는 나무랄 데가 없다. 그러나 지나치면 문제다. 나와 다른 남을 배척해 제 이익만을 강조하는 행위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
내 집 문 앞 눈은 쓸어도 남의 집 지붕의 서리는 간여치 않는다(各人自掃門前雪, 莫管他人瓦上霜)"는 자기들 속담으로부터 현대 중국이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는지를 우리는 지켜볼 뿐이다.

 

[21] 漢字가 낳은 중국式 과장

 

미인을 형용하는 수준이 대단하다. 한 번 돌아보면 성이 무너지고, 두 번 돌아보면 나라가 무너진다. "일고경인성(一顧傾人城), 재고경인국(再顧傾人國)"이다. () 무제(武帝)가 총애했던 이부인(李夫人)의 미모를 표현한 말이다. 성어 경국지색(傾國之色)의 유래다.

 

웅장하며 멋진 여산(廬山)의 폭포를 바라보던 당나라 시인 이백(李白) '마구 흘러 곧장 아래로 삼천 척 내려오니, 마치 은하가 우주에서 쏟아지는 듯(飛流直下三千尺, 疑是銀河落九天)'이라고 적었다.


이백은 그런 표현 기법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머리에 자라난 흰머리를 '백발삼천장(白髮三千丈)'이라고 했다. 지금 단위로 환산하면 길이 3㎞다. "아침에 검었던 머리카락이 저녁에 이르니 흰 눈으로 변했다(朝如靑絲暮成雪)"고도 읊었다.

하루 못 본 님을 생각하는 사람의 마음은 3년을 지내는 듯 길었던 모양이다. '일일불견여삼추(一日不見如三秋)'라는 표현이 일찍이 등장한다. 시름이 얼마나 큰지 아느냐고 자문한 남당(南唐) 황제 이욱(李煜) "마치 동쪽으로 흐르는 온 강의 봄물(恰似一江春水向東流)"이라고 자답한다.

중국 문학의 백미인 옛 시가(詩歌)에 등장하는 전통적인 과장 기법이다. 표의(表意)문자 체계인 한자 특유의 부풀리는 성향, 즉 선염(渲染)의 특성 때문에 그렇다. 그 한자 체계를 언어의 근간으로 삼는 현대 중국도 예외일 수 없다.

최근 중국에서는 세 종류의 문체가 유행했다고 한다. 궤구체(跪求體), 곡운체(哭暈體), 혁뇨체(嚇尿體). 혼 좀 내줬더니 "무릎 꿇고[] 빌더라[]" "울면서[] 졸도했다[]" "놀라서[] 오줌 지렸다[尿]" 등이다.

 

급상승한 국력을 자랑스러워하는 중국인들이 즐겨 쓰는 문체라는 설명이다. 주로 대외 관계에서 상대를 누르는 힘을 과시할 때 썼다고 한다. 다행히 관영 인민일보 등에서 최근 "쓸데없는 과시[浮誇]의 표현은 자제하자"는 경고음을 냈다. 과장에 묶이는 자의식의 흐름마저 누를 수 있어야 중국은 세계의 진정한 이웃이다. 

 

[22] 密告者 양산하는 중국 체제

 

한국인이 많이 살고 외국 대사관이 밀집한 베이징 시내 차오양(朝陽)구에서는 언행에 각별히 신경 써야 한다. 1㎢의 면적에 평균 277명의 '감시자'들이 활동하기 때문이다. 은밀한 시선으로 낯선 이를 지켜보다 경찰에 통보하는 일이 업무다.

 

이들의 별칭은 '차오양 군중(群衆)'이다. 정부로부터 수고비를 받기도 한다. 마약을 복용하거나 매음을 한 연예인 검거에 공을 세워 유명해졌다. 정부의 통제와 감시에 적극 호응하는 밀고자(密告者)들이다.


버전도 새로워졌다. 지난해에는 정식으로 앱을 만들어 13만명의 '밀고자'를 모았다. 중국 네티즌들은 '미국 CIA, 영국 MI6, 이스라엘 모사드 등과 더불어 세계 5대 정보기구'라는 평을 내놓기도 했다.

최고 지도부 집단 거주지인 중난하이(中南海)가 있는 시청(西城)구의 아줌마들도 맹위를 떨치고 있다. 별명은 '시청 다마(大媽)'. 중년 이상의 여성들이 팔에 완장을 차고 거리를 오간다.

역시 낯설고 수상한 사람을 지켜보다 고발하는 일에 앞장선다. 최근 통계로는 종사자가 대략 10만 명. 공산당과 정부에 저항하는 외부 사람들이 지역에서 활동할 때 어김없이 따라붙어 암약한다.

밀고의 전통은 중국에 면면하다. 큰 도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부모 형제도 필요 없다는 '대의멸친(大義滅親)'은 사실 그 밀고를 부추긴 왕조의 구호다. () 때에 설치했던 동창(東廠)과 서창(西廠)이라는 정탐 및 사찰 기관이 대표적 사례다.

중국 공산당은 요즘 '펑차오 경험(楓橋經驗)'을 새삼 장려한다. 1950년대 말 수많은 아사자를 낳았던 '대약진(大躍進) 운동' 때 저장성 펑차오 주민들이 자체적인 감시와 밀고로 당시의 불안을 잠재웠던 일이다.

일당전제(一黨專制)를 강조하는 공산당과 민간이 잘 어우러지는 모양새다. 안정과 번영을 가장 우선시하는 중국 사회의 집단적 심리가 근간이다. 민주와 자유라는 가치체계가 먹히지 않는 이유다. '담에는 틈, 벽에는 귀가 있다(墻有縫, 壁有耳)'는 속언이 긴 여운을 남기는 중국이다. 

 

[23] 황금과 利慾을 향한 중국인의 사랑

 

중국에 오래 전해지는 인생의 '네 가지 큰 기쁜 일(四大喜事)'이 있다. "긴 가뭄 끝에 내리는 비(久旱逢甘霖), 낯선 타향에서 만나는 친구(他鄕遇故知), 촛불 타오르는 신혼의 밤(洞房花燭夜), 과거 급제 명단에 이름 올릴 때(金榜題名時)".


남송의 홍매(洪邁)라는 유명 문인이 저서 '용재수필(容齋隨筆)'에 당시 민간의 말을 채록하면서 유명해진 중국인의 전통적 가치관이다. 네 가지 기쁨이 모두 현실적이다. 농사라는 생업, '관시(關係)' 확대, 생육의 고민, 출세 지향이다. 이를 거꾸로 해서 익살스럽게 만든 버전도 있다.


"
오랜 가뭄 끝에 내리는 비 한 방울, 타향에서 마주친 고향 빚쟁이, 옆집의 신혼 방, 동명이인의 과거 급제"라는 설정이다. 이른바 인생의 '네 가지 슬픈 일(四大悲事)'이다. 아무튼 모두 행복과 이욕(利慾) 추구가 두드러진다.

 

공부를 장려하는 권학(勸學)의 문장에서도 이 점은 뚜렷하다. "한 치의 시간은 한 치의 황금(一寸光陰一寸金)"이라며 시간을 금에 비유한 유명 문구가 우선 심상찮다. 요즘도 중국인들이 암송하는 대표적 권학문은 북송(北宋)의 진종(眞宗)이라는 황제가 지었다.


"
먹을 것이나 집이 없어, 또는 예쁜 아내 없다고 고민하지 마라"며 운을 뗀 이 황제는 독서를 권장하며 "책에는 대단한 봉급, 황금으로 만든 집, 어여쁜 아내가 다 있다(書中自有千鍾粟, 黃金屋, 顔如玉)"고 강조한다.


현세적이면서 매우 공리(功利)적인 지향이다. 중국이라는 땅에서 키워지는 가치관은 대개 이런 흐름이다. 전쟁과 재난이 빗발처럼 자주 닥치며 개인의 삶을 심각하게 위협했던 중국 땅의 역사적 환경이 그 원인일 듯싶다.


그래서 손에 쥘 수 있는 가장 높은 '가치', 황금을 향한 중국인의 사랑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이는 개혁·개방 뒤 급속도로 성장한 중국 경제의 문화적 토양일 수 있다. 어느 누구도 황금의 유혹에 사로잡히기 마련이지만, 중국인의 집착은 때로 크게 지나쳐 지구촌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는 경우도 적지 않다. 

 

[24] 체스와 바둑의 '美·中 결투'

'메이드 인 차이나'의 오랜 명품 중 하나는 바둑이다. 이기고 지는 승부(勝負)를 다루는 전쟁 게임이다. 적어도 2500년 전에 지금의 중국 땅에서 출현했다. 복잡한 싸움 방식이 특징이다. 백병전(白兵戰)처럼 직접 달라붙어 혈전을 벌이는 게임이 아니라 공간을 먼저 차지하는 '포석'과 상대를 부지불식간에 무력화시키는 '포위'를 통해 국면을 이끌어 승부를 가린다.


여기서 '()'라고 하는 추상의 개념이 등장한다. 이는 맞붙어 힘을 직접 겨루는 '전술'과는 거리가 멀다. 상대가 눈치채지 못하는 영역을 먼저 차지하려는 '전략'이다. 그래서 바둑은 인류가 만들어낸 가장 고차원의 게임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에 비해 서양의 체스는 직접적이다. 등급에 따라 나뉜 각 구성 요소들이 제 역할을 수행하며 상대와 직접 맞붙어 승부를 가린다. 전략의 개념보다는 전술에 훨씬 가까운 전쟁 게임이다.

 

 

바둑은 지식(知識)을 바탕으로 한다. 오랜 경험으로 쌓인 지식이 판을 읽고 수()를 둘 때 큰 역할을 한다. 그에 비해 체스는 실질적인 싸움을 장려한다. 살아 움직이는 상황에 바로 대응하는 기지(機智)가 우선이다.


'
일대일로(一帶一路)' '제조 2025' 등 중·장기 전략으로 무장한 채 떠오르는 중국의 바둑과 기존의 질서를 유지하려는 미국의 체스식() 싸움법이 요즘 부딪친다. 두 나라가 무역 분쟁을 넘어 군사·외교·과학기술 영역에서 큰 파열음을 낼 전망이다.


전략에 치중하는 중국 싸움법은 보일 듯 보이지 않는 구름 속의 '()' 이미지다. 그에 비해 대규모 무력시위인 'Elephant walk'라는 자 국 공군 용어에서 드러나듯 미국은 '코끼리' 그림이다. 우선은 미국의 힘이 훨씬 견고해 보인다.


장기적인 경쟁의 최종 승부는 아직 가늠하기 힘들다. 다만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이란 구호를 내걸고 집요한 자민족 중심주의의 행보를 해온 중국은 지구촌 전체의 경계감을 높여 적()을 양산했다. 문명의 대결일 수도 있는 경쟁 흐름에서 중국의 스텝이 먼저 꼬였다. 

 

[25] 한국의 친구, 중국의 朋友

 

"꿈은 하늘에서 잠자고…"로 시작하는 조용필의 '친구여'라는 노래가 있다. 1980년대를 풍미했던 우리 대중가요다. 노래는 세상을 떠난 친구와의 추억을 떠올리다가 "모습은 어디 갔나, 그리운 친구여"로 맺고 있다.


중국과 대만, 홍콩에서 친구 노래로 가장 유명한 저우화젠(周華健) '펑유(朋友)' 가사 일부는 이렇다. "친구야 평생을 함께 가자…한마디 말에 인생을 걸고, 한 잔 술에 한평생의 정을 담고(朋友一生一起走…一句話一輩子, 一生情一杯酒)."


대중에게 잘 알려진 한국과 중국의 두 노래는 모두 '친구'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정서는 사뭇 다르다. 한국의 노래가 서정적이고 낭만적인 데 비해 중국의 그것은 비장하다.


벗끼리의 유대를 강하게 표현하는 우리말 속의 성어나 단어는 대개 중국에서 만들어진 한자(漢字). 그 또한 비장감이 돋보인다. 목숨을 바쳐서라도 친구를 지킨다는 문경지교(刎頸之交)가 우선이다. 생사(生死)와 존망(存亡)을 건 약속이다.


뜻이 맞고 가는 길이 같다는 뜻의 지동도합(志同道合)도 그렇고, 닥친 어려움을 함께 이겨간다는 뜻의 환난지교(患難之交)도 마찬가지다. 한데 뭉쳐 위기를 헤쳐나가자는 취지의 풍우동주(風雨同舟)도 같은 맥락이다.


쇠나 돌처럼 굳고 강한 친구 사이인 금석지교(金石之交), 가난하고 어려울 때 사귄 빈천지교(貧賤之交), 벗이 사라지면 자신의 즐거움을 끊는다는 맹세의 지음(知音)도 있다.


새겨볼 대목이다. 우리 쓰임으로도 정착했지만 이런 표현들이 나타날 수밖에 없었던 중국의 인문(人文) 배경을 제대로 살펴야 한다는 얘기다. 전란과 재난이 아주 잦았던 중국의 실제 역사 환경이 그 대상이다.


중국인들은 '친구'로 말할 수 있는 사회적 네트워크 확장에 큰 비중을 둔다. 그래서 '관시(關係)'에 혈안이다. 사람 사이를 정감과 포부로 얽는 유대감이 장점이지만, '끼리끼리' 문화로 부패의 온상을 이루는 맹점도 있다. 중국을 살피면서 빼놓을 수 없는 영역이다.

 

[26] 달빛에서도 '간첩' 떠올리는 중국

문의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달빛이 있다면 먼저 시정(詩情)이라도 품을 만하다. 그러나 갈라진 틈에 싸움 또는 전쟁을 잇는 사고(思考)가 일찍이 중국에서 나왔다. 한자 간()을 두고서다. 이 글자는 본래 한()으로 적었다.


()에 달빛을 가리키는 월()이 붙었다. 문틈으로 들어오는 달빛이다. 나중에 달빛을 햇빛[]으로 대체한 글자가 간()이다. 모두 문의 '', '사이'에 주목한다. 중국의 사유 체계는 이를 상대의 빈틈으로 파고드는 간첩(間諜)의 차원으로 끌어올렸다.

 

 

간첩'이라는 조어는 '육도(六韜)'라는 병법서에 일찌감치 등장한다. 이를 본격적으로 개념화해 사용한 사람은 병법의 대가 손자(孫子). 그는 간첩의 효용성을 강조하며 다섯 종류의 스파이를 거론했다.


상대 국가의 일반인을 쓰는 인간(因間), 정부에 진입한 사람을 포섭하는 내간(內間), 타국 스파이를 거꾸로 활용하는 반간(反間), 붙잡혀 처형당할 수 있는 혼란 전파자 사간(死間), 정보를 수집해 살아 돌아오는 생간(生間) '오간(五間)'이다.


싸움의 사고, 즉 모략(謀略)의 전통에서 일찍 뿜어져 나왔던 스파이의 개념들이다. 명칭도 다양하다. 세작(細作)은 정규전 외에 별도의 정교한 공작을 벌인다는 뜻이다. 나쁘게 부르면 간세(奸細).


특별 임무 수행자는 특무(特務) 특공(特工), 남의 침상 밑에 숨은 사람은 와저(臥底), 비밀스레 염탐한다고 밀탐(密探)이다. 1800년 전 이미 간첩 업무를 전담하는 교사(校事)라는 기관도 등장했다.


중국은 비정규전의 싸움 방식을 중시한다. 정규전을 지칭하는 정()과 비 정규전의 방식인 기()를 동렬에 놓고 그 중요성을 강조했던 손자가 대표적이다. '간첩'의 맥락이 그런 비정규전의 큰 축이다.


요즘 중국의 통신장비 대표 기업 화웨이(華爲)를 비롯해 유학생, 학자 등이 서방의 집중 감시를 받고 있다. 모두 간첩의 혐의가 있다는 이유에서다. 보이지 않는 싸움에 능한 중국의 모략적 속성이 서구의 경계감에 크게 부딪히는 형국이다. 

 

 [27] '말발' 약해진 중국 공산당

지도를 보면 길이 800, 200여 ㎞의 커다란 산줄기가 중국의 복판을 흐른다. 친링(秦嶺)이라는 산맥이다. 옛 당나라의 수도 장안(長安)이 있던 산시(陝西)가 무대다. 큰 관심을 받는 곳이다.


지상의 최고 권력자인 황제의 기운이 흐른다고 하는 풍수상의 용맥(龍脈) 관념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산맥의 한 줄기도 개혁·개방 이후 거센 개발 붐에 싸인 적이 있다.


산맥의 북쪽 한 자락이 옛 장안, 지금의 시안(西安)으로 흘러내리는 곳에 호화 별장이 많이 들어섰다. 2000년 이후 지금까지의 상황이다. 2012년 중국 공산당 총서기 자리에 오른 시진핑(習近平) 2년 뒤 이 별장들을 철거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중국을 이끄는 공산당 총서기의 명령은 그러나 잘 먹히지 않았다. 보도에 따르면 지금까지 시진핑은 모두 여섯 차례에 걸쳐 철거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말발'이 먹히지 않자 시진핑은 아주 분노했다는 후문이다.


마침내 이 친링의 호화 별장군은 2018년 들어 대규모 철거 작업의 국면을 맞았다. 거듭 이어지는 공산당 최고 권력자의 명령을 피할 수 없었던 까닭이다. 개발 이익을 노렸던 현지 지방정부의 관료들은 이제야 법의 철퇴를 맞고 있다.


친링산맥은 생태 환경이 좋아 국가 차원의 보호가 필요한 곳이다. 따라서 시진핑의 거듭 이어진 지시가 어색하지 않다.


더 큰 관심사는 이를 두고 "정치 명령이 중난하이를 벗어나지 못한다(政令不出中南海)"는 말이 나돈 점이다. 최고 지도부의 지시가 그들이 살고 있는 중난하이에서만 맴돈다는 뜻이다. 공산당 중앙의 통제력이 예전만 못하다는 시선이 깔려 있다.


경제 침체의 가능성에 무역·과학기술·군사·외교 영역에서 미국과의 충돌이 불가피한 중국 공산당 지도부는 요즘 '정치적 단결'을 연일 강조한다. 친링의 호화 별장 철거 스캔들과 맥락을 함께하는 현상이다. 중국이 이래저래 어수선하다. 

 

 [28] 권모와 술수의 바다

 제왕(帝王)이 머무는 곳을 궁()이라고 한다. 깊고 넓어 보통은 구중궁궐(九重宮闕), 구중심처(九重深處) 등으로도 적는다. 그러나 어딘가 음습한 분위기도 풍긴다. 깊고 넓은 그곳에서 벌어지는 그악한 다툼 때문이다.


땅 위의 최고 권력을 쥐려는 사람들이 벌이는 경쟁이니 지독하기 짝이 없다. 황후와 비빈, 관료와 제왕의 인척(姻戚), 궁녀와 내시(內侍) 등 다양한 그룹 사이에서 벌어진다.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끔찍한 방법이 다 펼쳐진다.

 

 

독을 타서 상대를 죽이는 독살(毒殺)은 외려 평범하다. 반역의 틀에 가둬 멸문멸족(滅門滅族)을 이끌어 내는 경우도 허다하다. 추잡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사람의 간계(奸計)가 온갖 형태로 펼쳐진다.


그 토대는 '권모(權謀)와 술수(術數)'라고 하는 중국의 오랜 사고 패턴이다. 정면에서 당당하게 승부를 가리는 싸움법이 아니다. 기만(欺瞞)과 사술(詐術)이 주조를 이루는 암투(暗鬪)에 가깝다.


중국 역사에서 권모와 술수가 가장 빈발했던 곳이 '궁정(宮廷)'이다. 제왕의 개인적인 공간인 궁궐의 안뜰, 즉 내정(內廷)을 일컫는 단어다. 요즘 중국 TV 드라마의 대세는 궁정극(宮廷劇)이다.


역대 왕조의 궁중 암투를 소재로 다루는 내용들이다. 음험하지만 흥미진진해서 대중은 열광한다. 이는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 등 고전소설, 각종 무협지와 무술 영화 등의 전통을 잇는 중국 특유의 현상이다.


최근 중국 공산당은 이를 제재할 움직임을 보였다. 궁정극의 '5대 죄악'을 거론하면서다. 시대에 맞지 않는다고 우선 비판했다. 그러나 "사회주의 핵심 가치에 맞지 않는다"는 점을 들어 궁극적 의도는 체제 안정에 있음을 내비쳤다.


권모와 술수는 중국 문명의 깊고 어두운 '그늘'이다. 지독한 이기(利己)와 현세적 가치관에 사람을 가두기 때문이다. 이를 비판하는 일은 필요해 보인다. 그러나 기왕이면 문명적 차원의 더 크고 너른 성찰이어야 바람직하겠다. 

 

[29] 江湖라는 중국의 민간 세계

 

묘당(廟堂)이라는 단어가 있다. 왕실 제사를 벌였던 종묘(宗廟)와 정치를 논했던 명당(明堂)을 합성한 말이다. 나중에는 나랏일을 집행하는 조정(朝廷)의 뜻으로 발전했다. 이 묘당의 대척점이 지금도 실재하는 '강호(江湖)'. 유래에는 여러 풀이가 있다. 그러나 큰 흐름으로 보면 나라 행정과 정치가 벌어지는 곳으로부터 떨어진 일반인 삶의 터전이다.


형식과 절차에 구애받지 않는다. 정치적 구속력이 약해 자유롭다. 그러나 나름대로 고단하다. 치열한 생존의 경쟁이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수준으로 펼쳐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분위기가 때로는 매우 험악하다. 언어도 공식적인 말과 사뭇 다르다. 은어(隱語)가 풍성하다. 강호에서 쓰였던 말은 달리 순전(唇典)이라고 했다. 그와 발음이 유사해서 보기 좋게 춘점(春點)으로 적거나, 시어(市語) 또는 항화(行話)라고도 불렀다. 예를 들면 어떤 목적으로 사람을 잡아두는 인질(人質)을 현금으로 바꿀 수 있는 표()로 표현한다. 그 인질을 묶어두면 방표(), 살해한다면 '찢다'의 뜻을 곁들여 시표(撕票)라고 적는 식이다.


강호를 구성하는 직업인은 많다. 상인(商人)과 걸인(乞人), 재주를 파는 예인(藝人), 숨어 사는 은자(隱者), 점술가, 무뢰배, 도적 등이다. 협객(俠客)이 나타나 정의를 구현한다는 설정은 무협지식() 상상에 불과하다. 정치나 행정, 제도의 딱딱한 틀로부터 벗어나 있어 중국 민간의 실제 감성과 사고를 잘 드러내는 세계다. 그래서 묘당이 중국의 얼굴이라면 강호는 그 몸체다. 개혁·개방 이후 짝퉁 제품 양산에 이어 이제는 강력한 경쟁력을 갖추기에 이른 '산채(山寨) 문화'가 바로 그런 중국 강호의 소산이다.


국가의 요소를 키우고 민간의 그것을 줄인다는 국진민퇴(國進民退)가 요즘 중국 집권 공산당의 큰 흐름이다. 그에 따라 중국 강호의 고수(高手)들이 긴장한다. 관이 짓누르면 민간이 반발한다는 관핍민반(官逼民反)의 성어가 있음에도 중국 공산당은 늘 자신만만한 모양새다.

  

[30] 제갈량 신드롬의 속내

"주유가 있는데 왜 제갈량을 세상에 나오게 했습니까(旣生瑜, 何生亮)."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 조조(曹操) 군대에 맞서 적벽(赤壁) 싸움을 치른 주유(周瑜)가 동맹군이었던 제갈량(諸葛亮)을 시기하며 내뱉은 유명한 탄식이다. 그러나 새빨간 거짓이다. 둘은 생전에 만난 적이 없다. 제갈량은 이 전투에 아예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중국 역사에서 퍽 유명한 이 싸움의 진정한 주역은 주유다.

 

 

제갈량이 싸움을 잘했다는 말도 거짓이다. 그는 유비가 죽은 뒤 벌인 여러 차례의 북벌에서 사마의(司馬懿) 등에게 우롱만 당했다. 바람과 비를 부른다는 호풍환우(呼風喚雨)의 경지에 닿았다는 제갈량의 실제 전쟁 지휘 능력은 꽝이다. 그럼에도 유비의 촉한(蜀漢)을 정통으로 삼아 이야기를 펼치는 소설에서 제갈량은 끊임없이 꾸며진다. 전쟁 승리의 화신, 모든 이를 압도하는 최고 전략가, 뛰어난 정치인으로 말이다.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실제 역사 기록에 등장하는 제갈량은 진지한 성품이 돋보였다. 조심하며 삼가는 근신(謹愼), 임금을 향한 변치 않는 충절(忠節), 백성을 돌보는 애민(愛民)의 지향도 뚜렷했다. 중국의 지식 전통인 '우환의식(憂患意識)'의 흐름이다. 유가(儒家)에서 가장 뚜렷하게 등장하는 이 경향은 쉽게 풀면 우국충정(憂國衷情)이다.

 

제 개인의 수양을 넘어 국가와 사회, 민족의 이익에 헌신하려 걱정[憂患]에 젖는 지식인의 마음과 자세다. 공자(孔子)에서 비롯한 이 같은 유가의 전통적 흐름은 일반 지식인의 사유 형태에서도 풍부하게 드러난다. 그 상징으로 가장 내 세울 만한 인물이 바로 제갈량이고 중국 대중의 정서는 따라서 그를 늘 미화한다.


개혁개방 이후 거세게 일어선 중국의 동력 중 하나가 어쩌면 이런 지식인들의 우환의식이다. 그러나 시선이 제 나라, 민족에게만 지나치게 묶여 있다. 이제는 이웃인 동아시아, 더 나아가 세계를 위한 이바지에 걱정의 에너지를 쏟으면 어떨까. 중국발 미세 먼지를 겪으며 품어본 생각이다.

 

[31] 중국의 요즘 '아줌마'

 

중국뿐 아니다. 가끔씩 세계의 토픽 한가운데 서는 중국 여성들이 있다. 이른바 '다마(大媽)'. 우리식으로 풀면 '아줌마'가 적격이다. 조용하며 다소곳한 전통적 중국 여성의 이미지와는 사뭇 다르다.


2013
년 중국 언론 등에 '다마'라는 이름이 오르면서 이제는 세계적인 관찰 대상으로 변했다. 이들의 모습은 우선 중국의 모든 도시 광장에서 볼 수 있다. 큰 소리로 음악을 틀어놓고 전통 무용이나 서양식 댄스로 몸을 단련한다. 때로는 시간을 불문하고 시끄러운 음악을 틀어둔 채 춤을 춰서 주변 사람들이 몸서리를 칠 정도다.

 

이들의 춤은 대마무(大媽舞)라고 적는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金門橋) 주변, 프랑스 파리 루브르 박물관 앞 광장 등에도 벌써 진출했다. 1970년대 우리 '복부인'의 역할도 수행한다. 세계의 증시 등락에 일희일비하며 적극적인 투자에 나서는가 하면, 중국인 특유의 '황금 사랑' 첨병으로 세계 금 시장의 큰손으로 나선 지 퍽 오래다.


'
중국인의 기행(奇行)'이라고 여길 만한 세계 화제 뉴스에도 꼭 등장한다. 화려한 크루즈 여행에서 차려놓은 음식이 금세 동나거나 오스트레일리아 마트에서 갑자기 분유나 다른 식품 등이 대량으로 사라질 때 어김없이 이들 중국의 아줌마가 얼굴을 내민다.


최근에는 장가가 늦어진 아들의 색싯감을 직접 고르려고 길을 오가던 여성 행인을 일일이 탐문하던 중국 여인이 미국 경찰에 붙잡혀 화제에 올랐다. 때로는 중국의 이미지를 크게 해치는 존재라고 비판을 받지만, 처절했던 문화대혁명 등 고난의 시기를 거친 뒤 이제는 좀 살 만해진 중국 여성들의 특별한 모성(母性) 발휘로 이해하려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막무가내에 지나칠 정도로 거리낌이 없어 문제다. 도를 넘어서는 행위가 빈발해 세계인들이 눈살을 찌푸린다. 나라의 몸집은 빠르게 커지는데 국민의 수준은 그 뒤를 따르지 못하는, 또 다른 맥락의 국진민퇴(國進民退) 아닌지 잘 살펴야 할 대목이다.

 

 [32] 좋은 황제 콤플렉스

 

역대 중국인 모두는 땅 위 최고의 권력자 황제(皇帝)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삶의 대부분을 지배했던 존재였기 때문이다. '황제와 순민(順民)'의 구도는 그래서 중국 땅에서 살았던 사람 대부분의 생활 형태였다. 제 힘이 없어 권력의 정상에 오르지 못하는 모든 사람은 그저 황제의 발아래 노예처럼 엎드려 살아야 했다는 얘기다. 그래도 기왕이면 훌륭한 황제 밑에서 살기를 원했을 테다. 이른바 '좋은 황제 콤플렉스(好皇帝情結)'라는 말이 중국에서 나오는 이유다.


중국인이 요즘에도 많이 다루는 궁중 드라마의 큰 줄거리를 이루는 흐름이다. ()을 세운 유방(劉邦), () 태종 이세민(李世民), ()의 주원장(朱元璋) 등 역대 군주가 화려하게 부활한다. 특히 청()의 옹정제(雍正帝)는 탐관오리를 없앤 근면한 제왕으로 인기가 높다.


지난해 말 타계한 중국 작가 얼웨허(二月河)는 청나라 성세(盛世)의 축이었던 그 옹정제의 소설로 큰 인기를 끌었다. '좋은 황제 콤플렉스'라는 전통적이며 대중적인 심리로 개혁·개방 뒤 만연했던 부정부패를 잘 겨냥했던 작가다.


일당전제(一黨專制)의 틀로 공산당이 옛 황제를 대체한 지 오래다. 건국에 이어 개혁·개방으로 거대한 성취를 이룬 점은 세계가 인정한다. 짧은 시간에 부국강병(富國强兵)의 꿈을 이뤄가는 공산당에 열광하는 중국의 대중도 많다. 강력한 반()부패 드라이브로 입지를 다진 공산당 총서기 시진핑(習近平)은 어쩌면 중국인의 그 심리구조를 잘 다뤄 성공한 최근의 정치인이다. '황제와 순민'의 전통적 구도는 공산당과 시진핑에 의해 더 깊어질 전망이다.


그러나 어딘가 어둡다. 이 그림의 근간은 주인(主子)과 노비(奴婢)의 관계설정이다. 위에서 내려주는 은혜(皇恩)에 아래가 굽실거려야(卑屈)하는 모습이다. 대중이 제 삶의 대부분을 스스로 결정한다는 '민주(民主)'라는 방식은 아직 중국인에게는 멀고도 낯선 이름인 모양이다 

 

 [33] 城을 바라보는 중국인의 정서

()은 예로부터 중국인들이 안정적인 삶을 이어가는 장치였다. 안에는 정사를 논의하는 조정(朝廷)이 있고, 일반인 동네 여염(閭閻)이 있었다. 성이 외부와 이어지는 곳은 교(). 따라서 성 주변은 교외(郊外). 그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은 야(). 때로는 비()로도 적었다. 둘을 합치면 야비(野鄙). 우리도 잘 쓰는 '야비하다'의 그 단어다. 퍽 나쁜 뜻이어서 성 안팎의 아주 다른 위상을 실감케 한다.


요즘도 도시 외곽에 사는 중국인은 자신의 경우를 '성외(城外)'라고 부른다. 도시인은 제 처지를 '성리(城裡)'라고 한다. 성의 안과 밖을 집요하게 구별하는 시선이다. 중국 도시의 성은 거의 없어졌다. 1949년 중국의 건국과 함께 벌어진 현상이다. 그러나 요즘도 여전히 도시에 적()을 뒀느냐는 호구(戶口)의 유무(有無)로 까다로운 차별이 벌어진다. 이를테면, 호구는 현대판 '성벽'이다.

 

 

중국 현대 소설의 백미(白眉)로 꼽히는 작품이 있다. 첸중수(錢鍾書)라는 문인이 1947년 낸 '위성(圍城)'이다. 명문가 출신의 남성이 파란 많은 애정 행각을 벌이며 살아가는 이야기가 큰 줄거리다. 뛰어난 문체로 당시 시대상을 세밀하게 반영해 현대 소설의 최고봉으로 꼽힌다. 여기에 등장하는 유명한 말이 있다. "성에 갇힌 사람은 밖으로 나가길 바라지만, 바깥 사람들은 안에 들어오고 싶어 한다"는 내용이다. 이 소설이 뛰어난 이유의 하나는 성벽에 오래 깃든 중국인의 경계(境界) 심리를 문화적 흐름으로 잘 묘사했기 때문이다. 성안에 사는 사람의 일탈(逸脫), 밖에 있는 사람들의 안주(安住) 심리의 엇갈림이다.


중국인들은 오늘도 ''을 중심으로 살아간다. 일탈은 그저 생각에 그칠 때가 많다. 대개는 그 테두리가 주는 안정감에 만족한다. 성으로의 진입을 꿈꾸는 사람도 여전히 많다. 안정을 내세웠던 왕조적 통치(統治)가 늘 잘 먹혔던 중국의 오랜 문화적 근간이다.

 

 [34] 예절 뒤에 숨긴 칼

 

술을 마셔도 혼자 마시는 독작(獨酌)보다는 상대와 어울리는 대작(對酌)이 낫다. 술자리에서 흔히 쓰는 말 '권커니 잣거니'의 뜻, 수작(酬酌)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비록 이 말은 요즘 '웬 수작이냐'고 눈 부라릴 때의 쓰임으로 전락했지만…. 잔을 적당히 채우면 짐작(斟酌)이다. 앞뒤를 잘 헤아려 술잔을 채우면 참작(參酌)이다. 마침내 알맞게 잔을 채우면 작정(酌定)이다. 누군가 내게 잔을 권했으면 돌려서 따라줘야 한다. 보수(報酬)와 응수(應酬). 제사를 올리거나 남과 교제하는 예법(禮法)에서 나온 조어(造語) 행렬이다. 음주 예절 하나만으로도 이렇게 많은 낱말을 만들어 낸 곳이 중국이다. 그 점에서 중국은 세계적이다. '의례(儀禮)' '주례(周禮)' '예기(禮記)' 등 서적이 쏟아졌고, 예를 정치의 근간으로 삼자는 예치(禮治)의 주창자 공자(孔子)의 유가(儒家)는 중국인의 관념을 2000년 넘게 지배했다.

예전 우리도 썼던 말에 동가(東家)라는 단어가 있다. 머물고 있는 집의 주인을 가리킨다. '동녘 동()'이 들어간 유래는 고대 중국 예법과 관련이 있다. 주인은 동편, 손님은 서편에 서도록 했던 옛 예제(禮制)의 유산이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요즘에도 집주인을 방동(房東)으로 적는다. 주식을 보유한 주주는 고동(股東)이다. 동쪽 길에 있는 주인이라는 뜻의 동도주(東道主)는 행사와 경기 등의 주최자를 가리킨다.

오랜 예법의 전통을 지닌 곳이라 중국의 예절은 복잡하며 화려하다. 국가 단위, 또는 지방정부 차원의 의전(儀 典)은 특히 거창하고 장중(莊重)하다. 한국인 대부분은 여기에 흠뻑 빠져든다. 그러나 중국인들이 즐겨 쓰는 성어가 있다. 선례후병(先禮後兵)이다. 처음에는 예의로써 상대하지만 곧 싸움을 벌인다는 뜻이다. 번잡한 예절 이면에는 칼이 숨어 있다는 얘기다. '형식에 가린 내용' '복잡한 겉면에 숨은 의도'는 우리가 중국을 살필 때 늘 눈길을 둬야 하는 대목이다.

 

[35] 중국엔 왜 暗器가 많을까

 기계적인 장치를 이용해 멀리 쏘는 활이 쇠뇌(). 인류의 무기(武器) 발전사에서 한 획을 그을 만한 발명이다. 이 쇠뇌가 처음 만들어진 곳은 중국이다. 지금으로부터 2500년 전인 춘추시대 전에 이미 등장한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날아오는 살상 무기다. 원거리에서 상대를 공격하니 매우 효율적이다. 그러나 당당한 싸움법과는 거리가 멀다. 우직하게 정면에서 곧장 달려들어 승부를 내는 결전 방식은 결코 아니다.

 

 

중국의 전통적인 싸움 방식은 일정한 패턴을 지니며 발전했다. 바둑의 예에서 드러나듯 보이지 않게, 조용히, 상대가 눈치 채지 못하게 우회해 싸움을 벌인다. 서로 마주 서 있다가 순간적으로 총을 꺼내 쏘는 서양식 카우보이들의 결투를 보면 '꼭 저래야 할까?'라며 답답하게 여기는 중국인들이다.

그래서 일찌감치 등장했던 쇠뇌의 제작 전통은 다양한 '암기(暗器)'의 생산으로 이어진다.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상대의 의표를 찌르는 비밀 병기다. 소매에서 느닷없이 튀어나가는 조그만 화살, 부채로 위장한 칼, 독을 묻힌 바늘 등이다. 손으로 던지는 단순 투척용, 화약을 써서 약물 등을 분사하는 방식, 술잔에 몰래 타는 독물, 손가락에 끼는 반지 형태의 칼날 등 종류가 아주 다양하다. 비밀 무기를 사용하는 이런 싸움 방식에서 중국은 분명 세계 문명사의 으뜸을 차지할 만한 수준이다.

그러나 모두 기만(欺瞞)을 바탕으로 삼아 발전한 싸움의 양태다. 그래서 남과의 다툼에 나선 중국인의 사고는 곧잘 어두운 곳을 향하기 마련이다. 상대를 자신이 펼친 덫에 빠지도록 만드는 음모(陰謀)가 흐름을 이루기 십상이라는 얘기다. 크게는 사느냐 죽느냐, 작게는 이해를 두고 펼치는 모든 경합(競合)의 마당에서 중국인이 드러내는 뚜렷한 경향(傾向)의 하나다. 특히 각종 비즈니스에서 겉으로 내세운 화려하고 거창한 명분이나 형식과 달리 중국인의 생각이 어두운 색조(色調)로만 느껴지는 이유다.

 

[36] 부패가 번지기 쉬운 사회

 

남을 높이 우러른다는 뜻의 경()이라는 글자는 중국에서 이상하게 쓰일 때가 있다. 효경(孝敬)이나 빙경(氷敬), 탄경(炭敬), 별경(別敬) 등의 조어와 함께다. '효경'은 본래 부모를 잘 모시며 공경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뇌물의 동의어다. 윗사람에게 상납하는 금전이나 재화다. 여름철 무더위를 이기라고 건네는 그것은 '빙경', 겨울철 추위를 잘 견디라는 뜻에서 주는 것은 '탄경'이다. 헤어질 때 바치는 것은 '별경'이라고 했단다.


관직도 부수입이 좋으냐 안 좋으냐에 따라 크게 나뉜다. 두둑하게 챙기는 자리는 살이 찐다는 의미의 비결(肥缺), 그러지 못하는 곳은 수척해진다는 맥락의 수결(瘦缺)이다. 덤으로 흐뭇하게 챙기는 수익 자체는 외쾌(外快).


몇 년 전 관영 인민일보가 관료의 부패 유형을 다섯 범주로 분류했다. 우선 '두 얼굴형'이다. 겉으로는 청렴과 근면을 외치지만 속으로는 마구 해먹는 경우다. 둘째 유형은 '가족형'이다. 내세우는 틀은 중국이 홍콩에 자유와 민주를 허용하는 일국양제(一國兩制)와 유사하다. 이른바 일가양제(一家兩制). 남에게는 가혹한 잣대를 들이대면서 제 혈육에게는 무한정 부패 여지를 열어주는 사람이다. 셋째는 '엘리트형'이다. '대담하게, 박력 있게, 요령 있게' 부수입을 챙긴다. 다음은 친구에게 잘못 휘말리는 타입이다. '주고받는 게 예의(禮尙往來)'라며 함께 해먹다가 철창으로 향한다. 마지막으로는 '산채(山寨)'이다. 도적처럼 떼를 지어 단체로 해먹다 들통이 난 케이스다. 제 근거지를 중심으로 파벌까지 형성해 광역으로 부패를 번지게 한 집단이다.


개념이 풍부하고 스타일이 다양하다는 사실은 중국이 그만큼 부패와 부정, 뇌물에 물들기 쉬운 사회 구조라는 점을 말해준다. 지난 6년 동안 줄곧 대대적 사정 작업에 나섰던 중국 지도부는 어쩌면 개혁·개방 40주년의 진짜 위기가 이 부패에 있다고 여겼는지 모른다.

 

[37] 전통을 誤讀하는 중국 지도층

'칠월류화(七月流火)'라는 성어가 있다. 지독한 더위를 이르는 듯하지만, 사실은 그 반대다. 무더위를 상징하는 대화(大火)라는 별이 서쪽으로 흐르면서 여름이 가을에 자리를 비킨다는 뜻이다. 중국의 대학 중문과 1학년 학생이 배우는 성어다. 유명 학부인 인민대학(人民大學) 총장이 이 말을 잘못 썼다. 대만의 고위 정치인이 2005년 여름에 학교를 방문하자 이 성어를 사용하면서 "환영의 열기가 어디 날씨뿐이겠느냐"고 했다.

 

 

더 큰 사달도 났다. 지난해 명문 베이징(北京)대학 개교 120주년 기념식이었다. 린젠화(林建華) 총장은 학생들에게 커다란 뜻을 지칭하는 '홍곡(鴻鵠)'의 포부가 필요하다는 내용의 연설을 했다. 그러나 정작 그는 '홍곡' '홍호(鴻浩)'로 발음했다. 중국을 상징하는 최고 학부의 총장이 '고니'를 가리키는 곡() '크다'는 뜻의 호()라는 글자를 구분하지 못했다. 이들은 그래서 글자를 제대로 읽지 못하는 '백자선생(白字先生)'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중국의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 또한 자유롭지 못하다. 그는 최근 들어 몇 차례 연설문을 오독했다. '노인을 돌보다'는 섬양(贍養)이라는 단어를 '우러르며 공경하다'의 첨앙(瞻仰)으로 읽었고, 소중하게 여기는 규칙 금과옥률(金科玉律)을 금과률옥(金科律玉)으로 발음했다. 우리 식으로 설명하자면 금과옥조(金科玉條)를 금과조옥(金科條玉)으로 발언한 셈이다. 몇 해 전 국제회의에서는 상업과 농업을 진작시키자는 성어 통상 관농(通商寬農)의 뒤 두 글자를 '위에 걸쳐 입는 옷'이라는 엉뚱한 맥락의 관의(寬衣)로 읽어 화제로 떠올랐다.


다 전통에 대한 이해 부족이 원인이다. 그러면서 최근의 중국은 복고(復古) 분위기다. 지나친 자국 중심의 세계관인 옛 중화주의 흐름도 있다. 폐해가 컸던 그 전통을 제대로 읽고는 있을까. 그래서 관심이 가는 중국 지도층의 '전통 오독' 사례들이다.

 

[38] 중국 공산당의 呪文

 

유명 고전소설 '서유기(西遊記)'에 등장하는 주문이 있다. 철없이 날뛰는 원숭이 손오공(孫悟空)을 제압하려 현장법사(玄奘法師)가 외는 '긴고주(緊箍呪)'. 손오공 이마에 채운 쇠고리는 이 주문이 나오면 마구 조여져 심한 고통을 준다. '불안정성'을 상징하는 캐릭터 손오공은 그로써 길들여진다. '긴고주'에 해당하는 현대 중국 공산당의 주문이 있다면 '안정이 모든 것을 압도한다(穩定壓倒一切)'는 말일 것이다. 개혁·개방의 총설계사 덩샤오핑(鄧小平)의 유훈과도 같다.


덩샤오핑 이후의 중국 지도자들은 이를 주문처럼 외우다시피 했다. 다양한 문화적 갈래를 지닌 중국을 이끌기 위해서는 안정이 꼭 필요하다는 판단에서다. 잦은 전란 속에서 늘 태평(太平)을 갈구했던 중국 전통 사유의 공산당식 연역이다. 요즘 표현은 '안정을 유지하다'라는 뜻의 유온(維穩)이다. 2000년에는 정식으로 공산당 중앙에 유온판(維穩辦)이라는 공식 기구가 출범해 중국 전역의 사회 안정 업무를 총괄해왔다. 무엇보다 정치적 안정이 핵심 목표다. 공산당의 지속적인 일당 통치를 위한 작업이다. 따라서 통제가 우선이다. 사회 안정을 위협하는 모든 존재와 행위가 다 대상이다. 14억 인구를 감시하는 첨단의 안면 인식 체계부터 촘촘하게 깔려 전국을 감시하는 폐쇄회로 카메라도 다 그 안에 들어간다. 정부로부터 돈을 받고 국가 방침에 반하는 여론을 공격하는 네티즌, '우마오당(五毛黨)'의 급여도 관리한다. 사회 기층에서 낯선 외부인을 감시하는 아줌마 부대, 군중 치안 조직도 마찬가지다. 연간 예산은 올해 중국 국방비( 190조원)를 능가한다는 추정이다.


그럼에도 공산당 간부의 부패와 토지 등을 둘러싼 지방의 관민(官民) 소요는 이어진다. 최근에는 경기 하강 가능성에 미국과의 마찰이 더해져 불안정 요소가 훨씬 깊어졌다. 개혁·개방 이후 지금까지의 기상과는 다른 '풍우(風雨)'가 중국에 닥치는 분위기다.

  

 [39] 전통의 지혜로부터 멀어진 공산당

 

사람 됨됨이를 따질 때 중국인들은 일정한 잣대가 있다. 남보다 먼저 제 밑천을 드러내는 사람에겐 결코 높은 점수를 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제 의중을 드러내지 않고 셈에 셈을 거듭하며 신중하게 처신해야 중국에서는 '된 사람' 취급받는다. 우리말 사전에도 올라 있는 성부(城府)라는 한자 단어가 있다. 중국에서는 '속이 깊은 사람'의 의미다. 이 말은 원래 도시의 성벽, 큰 저택의 담을 가리켰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마음의 담을 쌓아 자신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라는 새김을 얻는다. 마음속에 이런 담을 쌓아 좀체 속내를 상대에게 드러내지 않는 이가 중국인에게는 '괜찮은 사람'이다. 가슴에 그런 속성을 지녔다는 흉유성부(胸有城府)라는 성어도 나왔다. 그에 비해 자신이 지닌 칼끝을 훤히 드러내면 어리석은 사람이다. 성어 봉망필로(鋒芒畢露)의 경우다.


자신의 재주를 과시하며 남을 압도하는 이도 지적을 피할 수 없다. 성기릉인(盛氣凌人)이라는 성어는 깝죽대며 남을 업신여기는 '팔불출'과 동의어다. 겉은 우둔해 보여도 속은 지혜로운 외우내지(外愚內智), 밖으로는 원만해도 내 속으로는 엄격한 외원내방(外圓內方)이 사람 됨됨이를 놓고 중국인이 가장 높게 치는 스타일이다.


개혁·개방 뒤 중국이 대외정책의 근간으로 삼았던 도광양회(韜光養晦)도 같은 맥락이다. 자신의 장점[]을 감추고[] 단점[]를 보완하라[]는 뜻이다. 그러나 중국 당국이 이 틀을 벗고 뭔가를 해서 남에게 보여야 한다는 '유소작위(有所作爲)'의 구호로 돌아선 지 꽤 오래다. 그 결과는 요즘 벌어지는 미국의 거센 견제다. 과도하다 싶은 자기중심적 민족주의, 지나친 권력 집중화로 중국 공산당이 신중했던 예전의 의사 결정 구조에서 멀어지며 빚어진 현상으로 보인다. 중국이 '성부'라는 지혜로운 전통을 너무 쉽게 벗어던졌다는 느낌이다.

 

2019.05.31

[40] 中華에 못 미치는 중국

 

'중국'은 본래 성벽으로 싸인 타운을 지칭했던 단어다. 처음에는 국중(國中)으로 적었다. 한자 국()에는 네모가 두 개 있다. 안의 네모는 작은 성(), 밖의 네모는 더 큰 성인 곽()이다. 성을 두 개나 두를 정도면 옛사람들 생활 수준으로 따질 때 아주 큰 정치적 주체다. 따라서 '국중'은 주()나라 천자(天子)가 있는 도성이라는 뜻이다. 그러다가 차츰 '중국'으로 적었다. 중국의 옛 명칭은 다양하다. 북부 중국의 일부를 점유했던 주나라는 적현(赤縣)으로도 불렀다. 빨강을 숭상하는 전통 때문이다. 전역을 아홉으로 나눴다고 해서 얻은 이름은 구주(九州).


인도가 중국을 불렀던 호칭 중 하나는 치니(Chini). 여기서 나온 명칭이 지나(支那). 중국 전역을 최초로 통일했던 진()나라를 가리키면서 나온 이름이다. 캐세이(Cathay)는 거란(契丹)이 다스릴 당시의 중국 이름이다. 화하(華夏)는 중국인들이 자랑스레 쓰는 표현이다. ()는 본래 꽃을 가리켰으나 나중에 '아름다움' '훌륭함'의 의미를 더 얻었다. 그 뒤에다가 전설상 왕조 하()를 덧댔다. 이후 중국인들은 자신을 아예 중화(中華)라고 적는다. 하지만 주변을 오랑캐[]로 치부했다. 중화주의(中華主義)의 화이(華夷) 관념이다. 지나친 자기중심적 논리다.


그럼에도 중화주의는 가치적 지향이 있었다. 보편적 도덕 원리를 토대로 삼았다는 점이다. 현대의 중 국은 그 점에서 조금 다르다. 자국 이익이 핵심이다. '가치(value)' '이익(profit)'으로 대체한 느낌이다. 그래서 중국이 '중화'를 거론할 때면 퍽 어색하다. 요즘 중국에 위기감이 아주 높아졌다. 미국이 거세게 공격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식 표현으로 하자면 병림성하(兵臨城下). 적군이 성 아래까지 당도했다는 얘기다. 그 대응이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