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전문가들의 생각6/박승준의 차이나 워치1/ 2014-12-17 덩샤오핑은 왜 고향을 찾지 않았나 - 2017-12-17 제2488호 문 대통령은 ‘변검(變臉)의 달인’?
중국 전문가들의 생각6/박승준의 차이나 워치1/ 2014-12-17 덩샤오핑은 왜 고향을 찾지 않았나 - 2017-12-17 제2488호 문 대통령은 ‘변검(變臉)의 달인’?
■박승준의 차이나 워치1 - 주간조선
박승준 인천대 중어중국학과 초빙교수 중국학술원 연구위원 전 조선일보 베이징·홍콩 특파원
◆ 2014-12-17 덩샤오핑은 왜 고향을 찾지 않았나
▲ 중국 쓰촨성 광안시 파이팡촌 덩샤오핑 고향 마을의 덩샤오핑 동상
오늘의 중국에 부(富)를 가져다 준 사람은 덩샤오핑(鄧小平)이다. 중국 사람은 그를 ‘개혁개방의 총설계사’라고 부른다. 중국은 1978년 12월 덩샤오핑이 이끄는 개혁개방정책에 따른 빠른 경제 발전으로 36년 만에 미국을 위협하는 경제대국이 됐다. 중국 사람은 그 공은 당연히 덩샤오핑의 몫이라고 말한다. 덩샤오핑의 전임자 마오쩌둥(毛澤東)은 중국을 ‘가난한 사회주의 국가’로 만들어 놓았다. 덩샤오핑은 가난한 사회주의 국가에 살던 중국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어 놓은 많은 말들을 남겼다. “가난이 사회주의는 아니다.” “시장경제는 자본주의의 전유물이 아니다. 사회주의도 시장경제를 할 수 있다.” “인민을 등 따뜻하고 배부르게 만들어 주겠다.” “무엇이 두려우냐, 기회를 잡았을 때 발전해 나가자.” 키가 155㎝에 불과했던 덩샤오핑은 “하늘이 무너지면 나보다 키 큰 사람들이 먼저 다칠 거다”라는 말을 해서 중국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기도 했다.
그러나 많은 중국 사람은 덩샤오핑을 “무서울 정도로 자기관리가 철저한 지도자였다”고 말한다. 덩은 쓰촨(四川)성 광안(廣安)현 시에싱(協興)향 파이팡(牌坊)촌이라는 시골마을에서 1904년에 태어났다. 16세에 고향을 떠나 프랑스로 유학을 갔고, 1927년 23세 때 귀국해서 1978년 74세에 중국공산당 최고 권력자가 됐으며, 1997년 2월 93세로 베이징(北京)에서 병으로 사망했다. 놀라운 것은 그가 16세 때 고향을 떠난 이후 한 번도 고향을 찾아가지 않았다는 점이다. 해마다 춘절(春節·설날)이면 몇천㎞의 먼 길도 마다않고 귀성을 떠나는 것이 중국의 라오바이싱(老百姓)들의 최고 즐거움이지만 덩샤오핑은 그 흔한 춘절 귀성 한 번 하지 않았다. 그라고 해서 왜 고향에 가보고 싶지 않았을까만, 생전에 측근들이 “고향에 왜 안 가시느냐”고 물으면 “촉도난(蜀道難·쓰촨성의 길은 험하다는 뜻)이라, 돌아가기가 쉽지 않네…”라고 답했다고 한다.
2007년 2월 덩샤오핑 사망 10주기에 필자는 그의 고향 파이팡촌을 찾아가 본 일이 있다. 과연 ‘촉도난’이었다. 우리가 두견새를 ‘귀촉도(歸蜀道)’, 다시 말해 중국대륙의 서쪽 머나먼 촉(蜀·쓰촨성)으로 돌아가지 못해 해마다 봄에 피울음을 우는 새라고 부르는 이유를 알 만했다. 베이징(北京)에서 충칭(重慶)까지 비행기로 날아가서 충칭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덩샤오핑 고향으로 가면서 ‘촉도난’을 실감했다. 양쪽이 다 깎아지른 절벽 위로 난 외갈래 길을 다 낡아빠진 시외버스로 털털거리며 달리는 것은 어떤 공포영화를 보는 것보다 더 짜릿한 스릴과 서스펜스를 안겨주었다. 그러나 막상 광안현(지금의 광안시)에 도착해 보니 거기는 지명이 넓을 광(廣), 편안할 안(安)인 것처럼 기름진 땅이 펼쳐져 있었다. 충칭에서 헬기로 날아간다면 짧은 시간 안에 도착할 수 있는 곳이었다. 비로소 덩샤오핑은 고향으로 못 돌아간 것이 아니라, 안 간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덩샤오핑 고향 사람들은 왜 그가 한 번도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았느냐고 묻자 이런 말을 들려주었다.
“그는 용(龍)의 상을 타고났다. 그는 고향의 강을 떠나 가릉강(嘉陵江)으로 갔고, 다시 장강(長江)을 따라 대해(大海)로 가서 용이 됐다. 큰 바다로 간 용은 되돌아오지 않는 법이다.”
중국공산당의 최고 권력자 자리에 오른 뒤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은 지도자는 덩샤오핑뿐만이 아니다. 중국을 가난한 사회주의 국가로 만들어놓고, 자신은 지금도 천안문에 초상화로 걸려 있는 데다가, 천안문광장 남쪽 마오 주석 기념당에 미라로 만들어져 하루에 한 번씩 중국 인민들의 알현을 받는 마오쩌둥도 고향으로는 발길을 돌리지 않았다. 그는 딱 한 번 1959년 6월에 비밀리에 고향을 찾아가 부모 산소에 가서 절을 한 일이 있었다. 나중에 알려진 일이지만 그는 자신이 고향에 간 일을 비밀에 부치라고 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고 후난(湖南)성 창사(長沙)시 샤오산(韶山)현 사람들은 필자에게 들려주었다. “선배들이 있는 힘을 다해 고생을 해야 자손들이 복을 누리지(先輩們廣盡磨難 而子孫們享了福)….”
1998년 총리가 되어 중국 사람들에게 ‘청렴한 총리’로 기억에 남은 주룽지(朱鏞基) 역시 총리 재임 시 한 번도 고향으로 가지 않았다. 자신이 고향을 돌아보면 고향 사람들이 마치 ‘굶주린 호랑이(餓虎)’처럼 이권을 찾아나서게 되고 ‘굶주린 늑대(餓狼)’처럼 치부(致富)할 방법을 찾아나서게 될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중국 사람들은 이해하고 있었다.
중국 사람들에게 현재의 풍요한 생활이 가능하게 만들어 준 개혁개방의 총설계사 덩샤오핑은 1997년 2월 93세에 파킨슨병으로 사망하기 전에 이런 유언을 남겼다. “사고 행위가 끝난 사회주의자의 신체는 아무 쓸모가 없는 것이다. 내가 죽으면 태워서 바다에 뿌려 달라.” 그의 유언대로 평생 고향에 한 번 되돌아가지 않고 중국 인민을 ‘등 따뜻하고 배부르게(溫飽)’ 해주기 위해 애쓴 키 155㎝의 ‘작은 거인’ 덩샤오핑의 유해는 베이징 서쪽 팔보산(八寶山) 혁명공묘에서 화장되어 인민해방군 수송기로 동중국해 넓은 바다에 부인 줘린(卓琳)의 눈물과 함께 뿌려졌다. “개인숭배는 절대로 안 된다”는 그의 당부에 따라 그의 사진이 천안문에 걸리지도 않았고, 천안문광장에 새로운 기념관이 만들어지지도 않았다. 그의 그런 깔끔한 죽음은 자신이 평소 존경하던 프랑스 유학파 선배 저우언라이(周恩來) 전 총리나 저우언라이의 부인으로 중국공산당 여성 지도자였던 덩잉차오(鄧潁超)의 죽음과 같은 모습이었다. 저우언라이 역시 “사고 행위가 끝난 사회주의자의 신체는 아무 쓸모가 없으니 태워서 뿌려 달라”고 하고 떠났고, 덩잉차오 역시 “남편 언라이와 똑같이 처리해 달라”는 유언에 따라 화장으로 처리됐다.
중국 사람들은 지도자들의 운명에 대해 이런 말들을 한다. “하늘이 대임(大任)을 어떤 사람에게 맡길 때, 먼저 그 심지(心志)를 괴롭게 하고, 그 근골(筋骨)을 힘들게 하는 법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최근 청와대 내부 문제로 마음이 괴로워졌는지 “세상 마치는 날이 고민이 끝나는 날”이라고 했다는데, 인민들의 존경을 받는 덩샤오핑을 비롯한 중국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죽은 뒤에 발생할 문제까지 걱정했던 치열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요즘 중국의 부국강병(富國强兵)이 가능했다는 사실이 대통령에게 위로가 되지는 않을까.
◆ 2015-09-16 명성황후와 박근혜 대통령, 100년이 바꾼 것
▲ 천안문 성루에 선 박근혜, 푸틴, 시진핑.(왼쪽 두 번째부터) photo 뉴시스
명성황후가 경복궁 건청궁에 난입한 일본군에 시해된 것은 1895년 10월 8일이었다. 이보다 6개월 전인 1895년 4월 17일 일본 시모노세키(下關)에서 청 전권대표 리홍장(李鴻章)과 일 전권대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시모노세키조약에 서명했다.
조약의 제1조는 “청국은 조선이 완전무결한 자주독립국가임을 인정한다.… 지금까지 조선이 청에 대해 행해오던 조공을 비롯한 모든 전례(典禮)는 폐지한다”는 것이었다. 1894년 7월 25일 서해 풍도(豊島) 부근에서 일본 해군이 청 해군을 공격함으로써 시작된 청일전쟁에서 개전 9개월 남짓 만에 청이 패전했기 때문에 맺어진 것이 시모노세키조약이었다. 때문에 그 조약의 제1조 내용이 그 모양이었다.
다시 말해 청으로서는 “이 조약 체결 이후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포기한다”고 선언한 셈이었고, 일본으로서는 “이 조약 체결 이후 조선은 우리 일본이 관리한다”는 권리를 획득했음을 온 세계에 선포한 셈이었다. 500년 조선왕조의 황후가 거처하는 경복궁 건청궁에 일본군과 일본 낭인들이 난입할 당시의 국제정세는 그런 것이었다.
명성황후가 시해된 지 10년 만인 1905년 9월 5일 미국 뉴햄프셔주의 항구도시 포츠머스에서는 일본 외상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郞)와 러시아 재무장관 비테가 이른바 포츠머스조약에 서명했다. 1904년 2월 8일 랴오동(遼東)반도 끝머리의 뤼순(旅順)에 주둔하고 있던 러시아군을 일본군이 공격함으로써 시작된 러일전쟁이 1년7개월 만에 일본의 승리로 끝났기 때문에 맺어진 조약이었다. 조약의 제1조는 일본이 조선에 대해 정치·경제적으로 배타적인 권리를 갖는다는 것이었다.
시모노세키조약과 포츠머스조약의 체결로 조선에 대한 관할권은 일본의 손에 들어갔다. 조선의 운명이 그렇게 비참하게 될 조짐은 명성황후가 시해되기 10년 전인 1885년 3월 1일 거문도에서 빚어졌다. 거문도에는 영국군이 상륙했고 거문도를 불법 점령한 영국군은 2년 만인 1887년 2월 5일 철수했다. 조선의 임금인 고종은 처음에는 거문도가 영국군에 불법 점령당한 사실을 몰랐다. 나중에 청의 북양대신 리홍장이 편지를 보내 거문도가 영국군에 점령당한 사실을 알려주자 사람을 보내서 확인해 보고서야 알았다고 중국 측의 기록에 남아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로 바뀌는 변화의 시간에 조선의 운명이 일본의 손에 맡겨진 것은 세계 최강국이 영국에서 미국으로 바뀌던 중에 벌어진 일이었다. 유럽에서, 아프가니스탄에서, 극동(Far East)을 비롯한 세계 곳곳에서 러시아와 대치하고 있던 영국은 러시아가 시베리아횡단철도를 깔자 그 방향이 한반도 부근을 향하는 것을 보고 모스크바에 경고하기 위해 발틱함대를 시켜 세계를 한 바퀴 돌아 한반도 남해안 거문도를 점령하게 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거리가 너무 멀고, 영국과 극동 사이에 광활한 러시아 땅이 가로놓여 있음을 감안하여 일본을 자기네 편으로 끌어들이기로 했다. 그런 구도에서 일본을 후원하던 영국은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보고 1902년 영·일 동맹을 체결해서 지금의 동북아시아 지배권을 일본이 차지하도록 국제정치판을 짰다. 이 영·일 동맹을 배경으로 일본은 지금의 다롄(大連)에 전진 배치돼 있던 러시아군을 공격하게 된다.
그로부터 100여년 역사는 흐르고 흘러 2015년 9월 3일 한국의 박근혜 대통령은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의 친절한 안내를 받으며 천안문 서쪽 통로를 통해 천안문 성루에 올랐다. 시진핑 주석은 박근혜 대한민국 대통령을 ‘중국인민 항일전쟁 승리와 반(反)파시스트 전쟁 승리 70주년’ 기념행사에 러시아 푸틴 대통령 다음으로 중요한 외국 지도자로 대접해서 천안문 성루 자신의 오른쪽, 푸틴 다음 두 번째에 서도록 배려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한국 국가원수로서는 처음으로 천안문 성루 위에서 중국인민해방군 육해공군의 열병과 분열을 사열했다.
조선노동당 비서 자격으로 천안문에 오른 최룡해는 시진핑 주석의 오른쪽 끝부분에 섰다. 1954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5주년 기념 퍼레이드 때 북한의 김일성이 마오쩌둥(毛澤東) 당시 주석의 옆에 섰던 것과 비교하면 참으로 역사의 변화를 실감하지 않을 수 없는 광경이다. 천안문 성루 위 시진핑 주석 왼쪽에는 장쩌민(江澤民)과 후진타오(胡錦濤) 전 국가주석, 그리고 리커창(李克强) 총리와 중국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이 서열에 따라 자리를 잡고 섰다.
시진핑 주석은 천안문 아래 단문(端門) 앞에서부터 박근혜 대통령을 왼쪽에,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오른쪽에 위치해서 계단을 오르도록 배려했다. 그런 배려를 한국 외교당국자들이 중국 측으로부터 미리 통보받지 못했는지, 아니면 박 대통령이 시진핑 주석의 중국어를 잘 알아듣지 못했는지 박 대통령은 시종 대한민국 대통령에 대한 그런 환대에 어리둥절해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49개국의 국가원수와 대표들이 천안문 성루에 오르고 보니 한가운데에 시진핑 주석, 그 오른쪽에 푸틴 대통령, 그 다음이 박근혜 대통령, 세 사람 건너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오른쪽 끝에는 북한의 최룡해가 서고, 시진핑 왼쪽에는 중국공산당 지도자들이 서는 대열이 형성됐다.
시진핑과 중국 지도자들의 생각이 어쨌건 박근혜 대통령이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 지 100여년 만에, 식민지에서 광복된 지 70년 만에 중국 최고 실권자 바로 옆에 선 것은 대한민국의 위상이 그럴 만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중국에 대한 정책을 100여년 전 명성황후의 친청(親淸)정책에 비유해서 일본 산케이(産經)신문이 “또다시 과거 조선왕조의 민비 꼴을 당하고 싶으냐”는 어조로 비아냥거려도 이제 국제사회는 일본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세상이 아닌 것이 분명하며, 한국의 실력과 위상도 100년 전과 달라진 것이 분명하다. 천안문 성루 위에 서서 중국군을 사열한 박근혜 대통령의 가슴속에는 “이제 다시는 세계사의 뒤안길에서 국가의 운명을 남의 손에 맡기는 일은 없도록 해야겠다”는 다짐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 2016.11.01 “고구려는 독자적 역사”...중국이 동북공정을 거둬들이는 까닭은?
▲ 청니나 지린대 교수
동북공정(東北工程)’.
한때 우리 민족의 피를 끓게 만들었던 말이다. 정확히는 ‘동북변강(邊疆) 역사와 현상계열 연구공정’. 2002년 2월에 정식으로 공정이 개시되어 5년간 지속되면서 중국은 우리 민족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 특히 고구려가 한반도의 역사가 아니라 중국 역사의 일부라고 한 대목에서 우리의 마음속에 중국은 결코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나라로 자리 잡았다. 초등학생이고 중·고생이고, 역사 연구와 관계없는 필부(匹夫)에게도 동북공정이란 말은 응어리가 되어 가슴을 치게 만들었다. 우리의 광개토대왕비에 유리로 차단벽을 설치하고 지붕을 덮어놓은 사진을 보고 할 수 있는 욕이란 욕은 몽땅 다 중국을 향해 내뱉었다.
“고구려는 중국 고대에 중국의 지방 소수민족이 세운 정권이다. 고구려와 고려 정권 사이에는 필연적 관계가 없다. 고구려와 현재의 남북한 정권 사이에도 필연적 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고구려의 본체는 이미 중화민족 대가정에 흡수됐다. 그 갈래의 하나가 현재의 중국 내 조선족들이다.”
이상이 2007년 2월에 종결된 이른바 동북공정의 결론이었다. 그런 결론에 따라 중국 정부 당국은 고구려 최초의 수도 오녀산성과 광개토대왕비, 장수왕릉 등 고구려 유적을 자기네 문화유산으로 분류해서 보존 작업을 해왔다.
그런데 지난 9월 23일 중국 랴오닝(遼寧)대학이 한국고등교육재단(KFAS)의 후원으로 랴오닝성 선양(瀋陽)에서 개최한 ‘십자로에 처한 동북아 정치와 경제’라는 제목의 학술대회에서 뜻밖의 논문이 발표됐다. 지린(吉林)대학 문학원 중국사학과 교수로, 중국민족사학회 부회장을 맡고 있는 중진 여류 사학자 청니나(程妮娜·63) 교수가 발표한 ‘동북아 봉건 조공체제하의 고구려국의 자리매김(定位)’이라는 논문이다. 이 논문은 중국이 지금까지 해오던 동북공정에 따른 고구려의 정의를 근본부터 바꾸어 놓는 획기적 내용을 담고 있었다.
“중국 역대 왕조들의 동아시아 봉건 조공체제의 역사는 2000년 넘게 지속돼왔다. 청대의 강희(康熙) 옹정(擁正)제 시대까지 계속된 이 체제에는 내·외 두 가지 종류의 체계가 공존해왔다. 하나는 변강 민족의 조공체제 가운데 ‘내권(內圈)’이라고 부를 수 있는 체제가 있었고, ‘외권(外圈)’이라고 부를 수 있는 체제가 있었다. 고구려국이 동북아 조공체제에서 보유하고 있던 지위는 고구려국 역사의 전후 기간에 걸쳐 일정한 변화를 겪었는데, 초기에는 ‘내권’적 성격을 갖고 있다가 이후에는 ‘외권’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겪었다.”
중국민족사학회 요(遼)·금(金)·거란·여진사 분회 부회장과 지린성 고구려연구센터 전문가위원회 위원이기도 한 청니나 교수의 위치로 보아 동북공정에서 내려진 고구려의 정의를 모르고 쓴 논문이라고는 볼 수 없다. 오히려 동북공정이 내린 고구려의 정의가 아무래도 전체 역사의 흐름과 맞지 않아 수정하려는 중국 역사학계의 뜻이 담긴 것으로 보는 게 맞다.
청니나 교수의 논문에 따르면 고구려라는 국명은 ‘한서 지리지(漢書 地理志)에 처음 나타난다. “(한사군의 하나인) 현도(玄菟)군에 3개의 현이 있었는데 그 이름은 고구려, 상은대(上殷台), 서개마(西盖馬)였다. 이 가운데 고구려현은 가구 수 4만5600에 인구 22만1845명이었다.…”
이른바 동아시아 조공체제의 역사에서 보면 여기에 기록된 고구려는 내권 시절의 고구려였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서한(西漢) 말년에 송화강 중상류의 부여인 주몽(朱蒙)이 나타나 고구려인들을 이끌고 현도군 내의 변두리 산악지대를 장악해서 고구려 왕국을 세웠다. 이후 기원전 37년 한나라 건소(建昭)2년에 현재의 랴오닝성 환런(桓仁·환인)에 수도를 정하고 ‘고구려국’이라는 국명을 선포했다. 청 교수에 따르면 그때부터 고구려는 명백히 중국 왕조들의 내권이 아닌 외권으로서 조공체제를 확립해서 한반도의 신라·백제와 함께 3국을 정립하는 역사를 만들어갔다는 것이다. 외권으로서의 조공체제를 갖춘 것은 당시로서는 중국과의 무역 형식을 띤 조공체제 바깥에서는 경제를 유지하기가 어렵기 때문이었다.
청니나 교수 논문의 요지는 한마디로 “고구려는 발생 초기에는 중국 변방의 소수민족이 세운 지방정권에 불과했지만, 주몽이 나타나 고구려인들을 이끌고 환인을 수도로 정한 고구려국을 건국한 이후에는 중국 중원의 ‘외권(外圈)’으로서 독자적인 역사를 써왔다”는 것이다. 청니나 교수의 논문은 이제 비로소 고구려가 신라·백제와 함께 한반도에서 3국 정립의 역사를 만들어온 독립 왕국이었다는 점을 인정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동북공정의 결과 내려진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 소수민족이 세운 정권’이라는 무리한 정의는 고구려가 기원전 37년에서 기원 668년까지 무려 7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나라였던 반면 한(漢)과 수(隋), 당(唐) 등 중국의 왕조 중에는 고구려 역사 700년보다 긴 역사를 가진 나라가 없었다는 사실을 어떻게도 설명하기가 불가능한 무리수였다. 배보다 큰 배꼽이 있을 수 없는 것처럼 명백한 오류적 명제를 담고 있는 것이 동북공정에서 정의한 고구려의 역사였던 것이다.
말도 안 되는 동북공정을 입안한 것은 리톄잉(李鐵映) 사회과학원장이었다. 각 지방의 성장도 개입하도록 하는 실제 공정사업은 후진타오(胡錦濤) 전 국가주석이 국가부주석 시절에 결재를 함으로써 시작됐다. 중견 사학자 청니나 교수의 논문이 한국인도 참여한 국제학술회의에서 공개적으로 발표된 것은 아무래도 중국 정부 당국이 동북공정을 슬그머니 거둬들이려는 의도를 갖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사드(THAAD)의 한국 배치 반대, 서해안 불법조업 현장을 놓고 한·중 외교가 충돌을 빚는 가운데 조용히 발표된 청니나 교수의 논문이 만약 동북공정을 철회하는 첫걸음이라면 우리는 한·중 외교의 가닥을 보다 길게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일본처럼 ‘탈아입구(脫亞入歐)’를 외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보면, 비가 오고 바람이 불더라도 한·중 관계는 결코 외면하거나 벗어던질 수 없는 우리의 숙명 같은 것이 아닌가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출처 | 주간조선 2429호
◆ 2017.01.02 역술인이 점치는 2017 중국 운세
중국의 역술가 녹숙공(祿叔公)이 뽑아본 2017년의 괘(卦)는 본괘가 감(坎)이고 변괘가 손(巽)이다. 물을 가리키는 감과 바람을 뜻하는 손은 모두 육충(六沖)괘로 본괘나 변괘 모두 육충이다. 2017년에는 온 천지에 예측이 불가능한 풍운(風雲)이 가득할 전망이다. 기운이 불순(不順)하고 음양(陰陽)이 균형을 잃어 수재(水災)와 풍재(風災)가 사람들의 근심거리가 될 전망이다. 다른 역술가 만천설(滿天雪)은 한걸음 더 나아가서 “2017년 상반년에 중국은 끊임없이 국제분쟁에 휘말리고, 국제적인 명예가 더럽혀질 전망이다. 갈수록 심각해지다가 하반년에 가서야 숨을 돌릴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내다본다. 또 다른 역술가 리리푸(李立富)도 “2017년에는 풍우가 불순하여 여름철에 농작물에 심각한 피해가 발생할 것이며, 서북쪽에서는 지진과 대형화재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고 예상한다.
왕이(王毅) 중국 외교부장은 지난 12월 22일 중국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와 인터뷰를 갖고 2017년의 중국 외교를 전망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2017년에 우리 중국이 해야 할 가장 큰 일은 중국공산당 제19차 당 대회를 순조롭게 개최하는 일과 13차 경제발전 5개년 계획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는 일이다. 2017년 세계의 대세는 평화와 발전이 큰 흐름으로 지속되는 가운데, 각종 어지러운 현상(亂象)이 지속될 전망이다. 새로운 1년 동안 우리는 시진핑(習近平) 동지를 핵심으로 하는 당 중앙의 영도 아래서 난국 중에서 안정할 수 있는 힘을 비축해야 하며, 변화하는 국면 속에서도 기회를 잡아 중국 특유의 대국외교라는 새로운 국면을 열어가야 한다.”
왕이는 그러면서 2017년에 중국이 수행해내야 하는 과제를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첫째, 대국(大局)을 보는 안목을 길러 당의 19차 당 대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할 수 있는 외부환경을 조성하고, 둘째로는 일대일로(一帶一路) 전략 추진을 위한 각국 정상 회의와 제9차 브릭스(BRICS) 정상회의의 개최도 성공적으로 치러내야 한다. 세 번째로는 중·미(中美) 관계를 평온하게 만들 수 있는 새로운 협력구조를 조성해야 한다. 건강하고 안정된 중·미 관계를 조성한다는 큰 틀 아래서 세계 각국과 우호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한 새로운 장정(長征)에서 새로운 승리를 획득하고,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이라는 중국의 꿈이 실현되도록 기반을 다지는 1년이 펼쳐져야 한다. 중국공산당 총서기 겸 국가주석 시진핑에게 2017년은 “시진핑식의 새로운 정치”를 중국 안팎에 과시하느냐 마느냐 하는 중대한 선택의 1년이 될 전망이다. 시진핑은 2016년 10월 24일부터 27일까지 개최된 중국공산당 제18기 중앙위원회 6차 전체회의(6중전회)에서 ‘시진핑 동지를 핵심으로 하는 당 중앙’이란 호칭을 회복하는 대단한 기세를 보여주었다.
‘~를 핵심으로 하는 당 중앙’이라는 호칭은 마오쩌둥(毛澤東), 덩샤오핑(鄧小平), 장쩌민(江澤民) 세 명의 역대 최고지도자들에게 붙여졌다. 하지만 후진타오(胡錦濤)가 2002년 당 총서기에 오른 뒤에는 장쩌민의 위세에 눌려 ‘후진타오 동지를 당 총서기로 하는 당 중앙’이라는 격하된 표현이 사용됐다. 2012년 말에 당 총서기에 오른 시진핑 역시 그동안은 ‘시진핑 동지를 당 총서기로 하는 당 중앙’이란 호칭에 머물다가 지난해 6중전회에 가서야 ‘시진핑 동지를 핵심으로 하는 당 중앙’이라는 표현을 회복했다. 그런 기세를 몰아 시진핑은 자신의 위세에 눌려 점차 목소리가 작아지고 있는 리커창(李克强) 총리를 2017년 가을에 열릴 예정인 19차 당 대회에서는 전국인민대표대회 의장 정도의 자리로 밀어내고, 이번 가을에 은퇴해야 하는 왕치산(王岐山)을 중앙기율검사위원회 서기에서 국무원 총리로 끌어올리는 ‘백색 쿠데타’를 감행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하는 국면인 것으로 전해졌다.
시진핑으로서는 ‘~를 핵심으로 하는 당 중앙’이라는 호칭을 회복한 여세를 몰아 자신의 반부패 캠페인을 당 중앙기율검사위 서기의 자리에서 잘 보필해온 왕치산을 당내의 연령 불문율인 ‘칠상팔하’(68세 이후에는 새로운 영도 직위 취임 불가)까지 무시해가며 총리로 끌어올려야 하느냐 마느냐를 결정해야 하는 국면이라는 이야기가 베이징(北京) 권부 중심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온다. 왕치산을 2017년 가을 당 대회에서 은퇴시키지 않고 오히려 총리로 끌어올릴 경우, 1989년 장쩌민이 당 총서기가 된 이후 안정적으로 작동해오던 중국공산당의 권력승계 시스템에 평지풍파를 일으키는 모험을 감행해야 한다.
거기에다가 2022년의 제20차 당 대회 때의 권력구조를 위해 후춘화(胡春華·1963년생)와 쑨정차이(孫政才·1963년생)라는 두 개의 새로운 별을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발탁해서 빛나게 해야 하는 임무도 시진핑의 어깨에 걸려 있다. 더구나 시진핑의 전임 당 총서기 후진타오가 강력히 후원하는 리커창 총리를 총리직에서 끌어내리기에는 너무나 커다란 모험을 해야 하는 부담을 감수해야 하는데 과연 그런 모험을 감행할 만큼 시진핑의 정치적 입지가 단단한지에 대해서는 의문부호가 남아 있다. 시진핑을 겨냥한 당내 투고까지 나온 터라 시진핑 체제의 불안정성을 극복하고 시진핑이 자신만의 개성을 강조하는 정치를 펼칠 수 있을지는 여전히 미지수라고 해야 할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후, 미국은 “중국이 일방적으로 달러를 흡수하는 현재의 무역구조를 뜯어고칠 것”이라고 호언장담하고 있어 중국 경제는 불안요소를 안게 된 형세다. 트럼프가 “모든 중국산 수입품에 45%의 관세를 물리겠다”는 선거 공약을 어떻게 실현하려고 할지 중국으로서는 잘 대비해야 한다. 트럼프 당선 이후 달러화 강세 흐름이 형성되면서 위안(元)화 약세가 진행되고 있는 점도 중국 경제에 그림자를 던지고 있다. 안 그래도 당의 결정으로 GDP성장률을 6.5%로 내려잡은 상황에서 투자와 생산 분야 위축이 두드러지는 분위기다. 이를 어떻게 다시 치어 업(cheer up)할 것인지도 신경 써야 하는 것이 2017년 중국 경제에서 예상되는 흐름이다.
2017년 중국의 운세는 주역 팔괘가 예상하듯 풍운이 불순하고 음양이 균형을 잃어 난세가 예상되는 형세라는 역술가들의 말을 중국 지도자들은 잘 기억해야 할 듯싶다
주간조선 2439호
01.09 두 중국 지도자의 수첩에 담긴 경구들
어이없게도 많은 국민들을 실망시키고 탄핵 대상이 되어 있는 박근혜 대통령은 권좌에 오르기 전 ‘수첩공주’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다. 정치와 민생 현장을 다니면서 뭔가 깨알같이 수첩에 메모하는 습관을 갖고 있다고 해서 얻은 별명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그만큼 정치와 민생 현장을 열심히 찾아다닌다는 긍정적인 평가에 따라 얻게 된 별명이었다. 그러나 최순실 국정농단(弄斷)의 소용돌이 속에서 파헤쳐진 박근혜 대통령의 대통령으로서의 생활은 “도대체 수첩에 뭘 적으면서 살아왔길래 그렇게 세상사에 어둡고 국정에 등한한 대통령이 됐을까” 하는 의문을 일으키게 한다. 오히려 “그동안 수첩에 적은 것들이 쓸데없는 행정 실무부처들에 대한 인사 간여나 나라에 도움이 안 되는 쓸데없는 것들만 적어온 게 아닌가” 하는 의문까지 일으킨다.
이런 때에 ‘중국 지도자의 수첩’을 성균관대학교 중국연구소(소장 이희옥)가 지난해 12월 16일에 펴내 화제가 되고 있다.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과 리커창(李克强) 총리가 2012년 11월 당 총서기와 총리로 선출된 후 중국 전역의 현장을 누비면서 한 많은 연설들 가운데 중국공산당과 행정부인 국무원의 관리들이 대부분 수첩에 메모했을 것으로 판단되는 구절들을 모아 한 권의 책으로 펴낸 것이다. 시진핑과 리커창이 현장에서 강조하고 또 강조한 구절들 가운데 우선 고전에서 인용한 글귀들부터 보자.
시진핑 당 총서기는 당 총서기 선출 직후인 2012년 11월 17일 제18기 중앙정치국 제1차 집체 학습을 시작하면서 한 연설에서 소식(蘇軾)의 범증론(範增論)에 나오는 ‘물필선부 이후충생(物必先腐 而後蟲生)’이라는 글귀를 인용해서 자신이 반부패운동에 나설 것임을 예고했다. “사물이건 사람이건 먼저 썩어야 그 썩은 곳에 벌레가 생긴다”는 뜻이다. 시진핑 총서기는 이 구절을 인용하면서 “최근 일부 국가에서 오랫동안 쌓여온 갈등으로 인해 국민의 불만이 폭발하여 사회 혼란과 정권 붕괴로까지 이어지기도 했다”고 말하고 “여기까지 가는 데는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가장 큰 문제는 부정부패이며, 수많은 사례들이 부정부패가 심해지면 국가를 망치는 원인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면서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리커창 총리는 2013년 3월 17일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가진 내외신 기자회견에서 ‘이정 재능정인(已正 才能正人)’이라는 구절을 힘주어 강조했다. ‘논어’ 자로편(子路篇)에 나오는 이 말은 “우선 자신이 바르게 되어야 다른 사람을 바르게 할 수 있다”는 무서운 가르침이 들어있는 말이다. 그러면서 그는 “벼슬을 하는 것과 부자가 되는 것은 두 갈래의 다른 길이며, 공직을 맡았으면 공익을 위해 일해야 하기 때문에 부자가 될 생각을 애초부터 끊어 버려야 한다”고 말했다. 리커창 총리의 이 말을 듣는 많은 중앙과 지방 관리들은 이 구절을 들으면서 가슴이 서늘했을 것이다.
시진핑 총서기는 2013년 3월 9일 브릭스(BRICS) 국가에서 온 기자들과의 합동 기자회견에서 ‘도덕경’에 나오는 ‘치대국약팽소선(治大國若烹小鮮)’이라는 구절을 인용하여 국가를 다스리는 권력자들의 마음가짐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설명했다. “큰 나라를 다스리는 일도 마치 작은 생선을 요리하듯 조심조심 다루어야 한다”는 뜻이다. 무심하게 내버려두면 타버릴 것이고, 노심초사 너무 자주 뒤집으면 생선이 다 부스러진다는 실생활 경험을 담은 교훈이다. 시진핑 총서기는 “지도자가 국가 상황을 깊이 있게 이해하고 국민이 바라는 것을 잘 알아서 얼음 위를 걷거나 깊은 연못가에 있는 것과 같은 위험에 대한 자각이 필요하며, 작은 생선을 요리할 때처럼 조금이라도 태만하거나 신중하지 못하면 생선이 타버리거나 다 부스러져서 못 먹게 된다”고 강조했다.
시진핑은 국가부주석 시절이던 2007년 8월 당 간부들과 고위관리들이 어떻게 행동하고 말을 해야 설득력을 가질 수 있는가를 토론하는 석상에서 인사말을 통해 ‘논어’의 안연(顔淵)편에 나오는 ‘정치란 바른 것이라서 자신이 바르면 명령을 내리지 않아도 행해지고, 자신이 바르지 못하면 명령을 내려도 따르지 않는다(政也, 正也. 其身正 不令而行, 其身不正 雖令不從)’는 구절을 인용했다. 그러면서 “그렇지 않으면 단상에서 간부가 연설해도 단 아래에서는 그 간부를 욕하는 상황이 벌어진다”고 경고했다.
리커창 총리는 취임 직후인 2013년 3월 26일 국무원 제1차 청렴정치 공작회의에 나가서 “권력은 양날의 검(權力是雙刃劍)”이라는 말을 했다. ‘잘 사용하면 국민을 위해 일을 할 수 있지만, 잘못 사용하면 국민에게 해를 끼치고 일도 그르치며 심지어 부패를 초래하기도 한다’는 뜻이었다. 그러면서 “정부가 관여하지 말아야 할 일들을 많이 하면 정작 관여해야 할 일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게 된다”고 거듭 강조했다.
시진핑 총서기는 2014년 5월 4일 베이징(北京)대학 교수학생 좌담회에 나가서는 ‘관자(管子)’ 목민(牧民)편에 나오는 지도자의 몸가짐에 대한 구절을 소개했다. ‘나라에는 네 가지 기둥이 있는데 그것은 예의염치라는 것이며, 이 네 가지가 제대로 서지 않으면 나라는 반드시 멸망한다(國有四維 禮義廉恥 四維不張 國乃滅亡)’는 구절이었다. 즉 예의와 정의, 그리고 청렴함과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가짐이 없으면 나라가 망한다는 뜻이었다.
물론 중국공산당과 행정부 관리들의 부패는 외국인들이 상상을 못 할 정도로 심각한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시진핑과 리커창도 부패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안팎의 소문이 설득력을 얻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시진핑과 리커창 두 최고지도자는 중국 고전에 나오는 경구(驚句)를 수첩에 적어가지고 다니면서 기회 있을 때마다 중국 지도 간부들이 메모하고 실천할 수 있도록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의 일탈은 어느새 대한민국을 예의염치가 실종되고, 기초가 무너진 나라로 만들어 놓았다. 시진핑 총서기가 2013년 5월 4일 우수청소년 대표들과 좌담을 하면서 소개한 ‘국어(國語)’에 나오는 ‘선을 따르는 것은 등산을 하는 것처럼 어렵고, 악을 따르는 것은 마치 산이 무너지듯 빠르게 세상을 무너뜨린다(從善如登 從惡如崩)’라는 구절과 같은 상황이 박근혜 대통령과 우리 국민들이 모르는 가운데 빠르게 진행돼 오늘의 참상에 이르고 말았다. 대통령도 국민들이 보는 가운데 거짓말을 하고, 그 비서들도 거짓말하고, 대학총장도, 학장도 모두가 거짓말을 하면서 예의염치를 모르는 뻔뻔한 얼굴을 국민들 앞에 치켜드는 나라가 되고 말았다.
2440호
01.20 중국과 전쟁하면 승리한다...베트남이 중국을 다루는 법
1979년 2월 17일 쉬스요우(許世友)와 양더즈(楊得志) 장군이 지휘하는 중국 인민해방군 20만 병력이 중국과 베트남 국경 지대를 2개 방향에서 남하해 침공했다. 탱크도 200여대 동원됐다. 중국 인민해방군이 실전(實戰)에 나선 것은 1953년 한국전쟁 휴전 이후 처음이었다.
그해 1월 1일 중국공산당 지도자들 가운데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한 덩샤오핑(鄧小平)은 지미 카터 미 대통령에게 이런 말을 했다.
“조그만 친구가 말을 안 듣는다. 아무래도 엉덩이를 좀 때려줘야겠다.(小朋友不聽話 該打打屁股了)”
불과 엿새 전인 1978년 12월 25일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침공한 사실을 두고 한 말이었다. 당시 캄보디아 국경을 넘은 베트남군은 1979년 1월 7일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을 함락시켰고, 중국이 지원하는 크메르루주 지도부는 국외로 탈출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베트남의 버릇을 가르치기 위한 침공에 나서기 직전인 2월 15일, 중국은 1950년 체결된 소련과의 우호협력 조약을 폐기한다고 선포했다. 1971년 닉슨 미 대통령의 안보보좌관 키신저가 베이징(北京)을 비밀리에 방문해서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와 세기의 회담을 한 이후 국제정세는 눈이 핑핑 돌 정도로 급변했다. 중국과 소련이 동맹관계를 청산하는가 하면, 마침내 사회주의 중국이 사회주의 베트남에 ‘교훈을 주기 위한 제한전’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중국의 침공을 받은 베트남은 즉각 총동원령을 선포했다. 캄보디아로 보냈던 병력의 주력부대를 빼고, 베트남 중부와 남부에 있던 병력을 중국과의 국경지대로 급파했다. 중국·베트남 국경을 넘은 중국 인민해방군은 국경 근처의 몇 개 도시를 점령하는 듯했다. 그러나 개전 후 27일 만인 3월 16일, 중국 인민해방군은 돌연 “베트남 수도 하노이로 통하는 관문을 열어놓았으며, 베트남을 벌주기 위한 임무는 이미 완수했으므로 병력을 철수시킨다”고 선포했다. 중국군 당국은 이 전쟁에서 모두 6만2500명의 사상자와 550대의 군용차량, 115문의 포가 파괴됐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베트남군은 공식 희생자 수 발표를 하지 않았다. 중국군 추정에 따르면 베트남군은 5만7000명의 사상자와 7만명의 민병이 희생됐다.
27일간의 전쟁이 끝난 후 중국과 베트남 정부는 모두 자신들이 승리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에 대해 ‘교훈’을 주겠다고 중국군이 나선 것이 전쟁의 원인이었는데 베트남군의 캄보디아 주둔은 1989년까지 계속됐다는 사실이다. 이를 보면 중국이 “엉덩이를 때려주고 교훈을 주겠다”고 나선 목적이 제대로 달성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는 사실을 온 세계가 알게 됐다. 중국이 투입한 병력도 당초 발표된 20만명이 아니라 정규군 9개 군단, 30개 사단의 60만 병력이었던 것으로 추정됐다. 기갑부대도 탱크 수백 대 규모가 아니라 수천 대의 탱크와 장갑차가 투입됐다고 베트남 측은 주장하고 있다.
中越전쟁은 철저한 실패의 전쟁
1979년의 중국과 베트남 전쟁에 대해 대표적인 중국 지식인들의 블로그인 ‘철혈망(鐵血網)’은 2013년 “중월전쟁을 어떻게 보아야 하나, 중국이 철저히 실패한 전쟁은 아니었던가”라는 물음을 제기했다. 철혈망은 다음과 같은 글을 인터넷에 올렸다.
“전쟁은 유혈의 정치요, 정치는 피가 흐르지 않는 전쟁이다. 1979년의 중월전쟁은 사회주의 중국과 사회주의 베트남이 벌인 전쟁으로 사회주의 진영 내부에서 미국이 보는 가운데 일으킨 전쟁이었다. 철저한 실패의 전쟁이었다.”
중국이 베트남을 가르치기 위해 침공했다가 창피를 당한 경우는 190년 전 청나라 때도 있었다. 당시 베트남 왕인 완혜(阮惠·1753~1792)는 1788년 11월 25일 스스로 황제라고 칭하고 연호를 광중(光中)이라 했다. 청의 건륭(乾隆)제는 당시 20만 대군을 보내 베트남을 침공했으나 그때도 1979년과 비슷한 결과가 빚어졌다. 청은 광둥(廣東), 광시(廣西), 구이저우(貴州), 윈난(雲南) 등의 4개 성에서 20만 대군을 동원해 3개의 방향으로 나눠 베트남을 침공했다. 청군은 사령관의 지휘 아래 접경지대 세 방향으로 진격했다.
베트남 왕 완혜는 곧바로 수륙 양면에서 대군을 동원해 북진했다. 접경지대에 이르는 동안 전력을 증강해 10만 군사에 전투용 코끼리 100마리의 전력을 갖췄다. 그는 엄청난 속도전을 펼쳐 청군을 기습했다. 당시 20만 청군은 거의 전멸하며 치욕적인 패배를 당했다.
패전 소식을 접한 건륭제는 즉시 내각관(內閣官) 복강안(福康安)을 양광(兩廣) 총독으로 임명하고 7개 성의 병마를 동원해 다시 베트남을 평정하도록 했다. 광시에 도착한 복강안이 사람을 베트남에 보내 먼저 사죄를 요구하자 완혜는 즉시 그에게 금은을 보내 남진을 저지하는 한편 조카 2명을 청조에 파견해 조공을 바치고 책봉을 요청했다. 건륭제는 이미 금은으로 매수된 복강안 등의 간곡한 제안에 따라 완혜 황제의 직접적인 알현을 약속받고 그를 안남 국왕으로 책봉했다. 이에 완혜 황제는 신하 중 자신과 용모가 비슷한 가짜를 내세워 건륭제를 알현하도록 했다. 가짜 안남 국왕이 중국 황제를 알현하는 희대의 사건이 발생한 셈이다. 청도 이 사실을 알았지만 무력으로 베트남을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절감했기 때문에 가짜 안남 국왕의 알현을 용인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후대의 해석이다.
베트남은 939년 중국 대륙이 5대10국의 혼란기에 접어든 틈을 타 독립한 이후 명나라 때 일시적으로 식민지가 됐던 20년간을 제외하고는 프랑스 식민지가 될 때까지 줄곧 독립을 지켰다. 베트남은 독립 이후에도 송, 원, 명, 청 등 중국 역대 왕조와 끊임없이 전쟁을 치러야 했으나 그때마다 마치 고양이 같은 앙칼진 성깔을 보여 중국 역대 왕조들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며 중국의 체면을 구겨놓곤 했다.
청군 20만명 전멸, 치욕의 패배
지금도 마찬가지다. 남중국해에서 중국 외교를 사면초가에 빠뜨리고 있는 골칫거리는 베트남의 반(反)중국 움직임이다. 베트남은 그동안 남중국해 일원의 해저 천연가스 개발과 영해 설정을 두고 중국과 신경전을 벌여왔다. 2011년 6월 13일에는 베트남 총리가 나서서 전쟁을 대비한 동원령 관련 법안에 서명했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비록 즉각적인 동원령은 아니었지만, 베트남이 동원령을 준비하고 나선 건 1979년 중국과의 국경 분쟁 이후 32년 만이라는 점에서 중국을 긴장시켰다.
중월전쟁 당시 베트남 정부는 18~45세 국민에 대한 총동원령을 발동했다. 인구 8600만의 베트남은 45만명의 현역과 500만명 규모의 예비군을 유지하고 있다. 베트남과 중국의 갈등은 지난 2011년 5월 베트남의 자원조사선이 난사군도에서 작업 도중 중국 해양감시선의 방해로 작업용 케이블이 절단되면서 빚어졌다. 베트남 정부는 이후 “중국이 도발을 계속한다면 우리는 미 항모의 베트남 기항을 허용할 것”이라고 발표해 중국 지도자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물론 베트남보다 중국의 신경을 더 건드리는 것은 일본이다. 일본 자위대는 2011년 미국의 중국에 대한 재개입(re-engagement) 전략이 발표되고 일본과 중국과의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釣魚島) 영해 갈등이 본격화되자 이른바 자위대 최강이라는 제7사단 병력 5400명, 1500대의 전차를 동원해서 원래의 주둔지이던 홋카이도(北海道) 지역을 떠나 일본 서남부 오키나와로 이동하는 기동훈련을 실시했다. 일본 자위대 제7사단의 기동훈련은 일본과 동중국해에서 센카쿠열도를 놓고 영토분쟁을 벌이고 있는 중국 인민해방군이 일본 오키나와를 침공한 상황을 가상해 실시한 훈련이라는 점이 중국을 긴장하게 만들었다. 이 훈련은 전통적으로 러시아를 제1의 적으로 가상하던 일본이 주적을 중국으로 가상했다는 점에서 중국의 신경을 날카롭게 만들었다. 이에 대해 중국 인민해방군 기관지 해방군보(解放軍報)는 다음과 같은 진단을 내렸다.
“일본의 이번 군사훈련은 미국과 연관돼 있다는 점에 의미가 있다. 최근 일본은 새로 수정한 방위대강(防衛大綱)을 통과시켰다. 이 대강에는 ‘동태적 방어(動態防禦)’라는 구상이 처음으로 도입됐다. 동태방어 구상은 일본의 서남 해역에 대한 방어를 강조한 구상이며, ‘중국에 대한 방어를 강화하기 위한 것’이라는 내용이 명시돼 있다. 이전의 방위대강은 러시아와 북한을 최대의 위협으로 간주하고 있었으나, 이번 방위대강에서는 일본과 미국의 중국에 대한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일본과 미국의 동맹을 강화하는 내용도 포함됐다. 이 훈련은 중국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한 최초의 대규모 훈련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처음인 자위대 제7사단의 남부 기동훈련 실시 이외에도, 내년 초에 인도와 해상합동 군사훈련을 실시하기로 양국 국방장관 사이에 이미 합의를 해놓았다. 또 필리핀과도 중국을 겨냥한 해상 군사협력을 강화하는 회담을 진행해서 중국 외교 당국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인도와 해상 군사훈련을 실시하기로 한 일본의 움직임은 일본과 중국의 동중국해 분쟁 과정에서 중국 정부가 TV 등 전자제품 생산에 필수적인 희토류(稀土類·rare earth)의 일본 수출을 금지시키자, 일본이 또 다른 희토류 생산국인 인도와 수출 협상에 나서면서 시작된 것이어서 중국 외교부의 속을 끓게 하고 있다.
일본도 베트남도 중국의 군사적 침공과 외교적 공세에 대응할 수순을 갖추어 놓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중국의 사드(THAAD) 배치 반대 공세에 아무런 대응책을 마련하지 못하고 쩔쩔매고 있다. 우리는 중국의 사드 반대 제재 위협에 매에 놀란 닭처럼 뒤로 숨기만 할 것인가.
출처 | 주간조선 2441호
01.23 중국어를 ABC처럼 표기 111세 저우여우광의 죽음
중국인들이 쓰는 스마트폰의 자판은 얼마나 많을까. 놀랍게도 우리와 비슷한 수의 자판으로 되어 있다. 중국인들이 스마트폰에 ‘韓國’이라고 입력을 하려면 영어철자로 된 자판에서 ‘h-a-n-g-u-o’라고 입력하면 LED창에 ‘1.韓國 2.喊過 3.汗國 4.漢國’이라고 네 개의 같은 발음 한자 단어가 뜬다. 스마트폰 자판으로 ‘1’을 누르면 LED창에 ‘韓國’이 입력된다. 우리가 ‘한국’을 스마트폰에 입력할 때 ‘ㅎ-ㅏ-ㄴ-ㄱ-ㅜ-ㄱ’을 입력하면 ‘한국’이라는 글자가 조자(造字) 되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다.
입력하는 데 걸린 시간은? 중국어 쪽이 조금 더 걸릴 것 같지만 중국 스마트폰에서는 때때로 ‘h-g’만 입력해도 ‘韓國’이라는 글자가 떠오르는 경우가 많다. 그럴 경우 우리의 스마트폰 자판으로 한국어를 입력하는 것보다 훨씬 짧은 시간에 ‘韓國’을 입력할 수 있다. 더구나 요즘 중국 젊은 세대들의 손가락이 스마트폰 자판 위에서 움직이는 속도는 놀라워서 중국어 문장 입력 속도가 우리 젊은 세대들의 한글 입력 속도에 결코 뒤지지 않는 수준이다. 데스크톱 컴퓨터에 붙어 있는 키보드의 구조도 스마트폰의 구조와 똑같다. 중국의 젊은 세대들이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의 박자는 우리 젊은이들이 키보드 두드리는 속도보다 느리다고 말할 수 없는 수준이다.
현대 중국에서 컴퓨터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고, 스마트폰으로 문자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 가능한 이유는 한자(漢字) 발음을 로마자로 표기하는 ‘한어병음(漢語併音·Pinyin)’이라는 발음 표기 시스템이 일찍이 만들어져서 1958년 우리의 국회 격인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채택됐기 때문이다. 특히 현대 중국인들이 그 복잡하고 엄청난 숫자를 자랑하는 상형문자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컴퓨터 시대와 스마트폰 시대를 맞을 수 있게 된 것은 지난 1월 14일 베이징(北京)에서 111세로 세상을 떠난 저우여우광(周有光)의 공(功)이다.
이 인물에 대해서 미 뉴욕타임스는 ‘저우여우광, 중국어를 ABC처럼 쓸 수 있게 한 사람, 111세로 타계’라고 썼다. 중국 관영 매체들은 ‘그가 한어병음 방안을 만들고, 간소화된 한자를 제정하지 않았으면 중국의 이전 문맹률 85%가 그대로 유지됐을 것’이라고 저우여우광의 공을 기렸다. 중국 관영매체들은 ‘외국인들이 중국의 문자 언어 생활에 접근하려 할 때 받는 고통도 저우여우광이 크게 줄여주었다’고 진단하기도 했다.
저우여우광은 1906년생이다. 중국 동부의 창저우(常州)에서 출생해서 만청(晩淸), 중화민국, 중화인민공화국 세 시대를 살아왔다. 그의 파란만장한 일생에는 중국의 근대사가 그대로 녹아 있다.
원래 그는 언어학자가 아니었다. 청조의 관리 집안에서 태어난 저우여우광은 상하이(上海) 성 요한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고 신화(新華)은행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는 1946년 신화은행 뉴욕 대표기구로 발령이 났다. 그는 월스트리트에서 3년간 일하고 1949년 10월 중국공산당이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를 수립하자 중국으로 귀국했다. 귀국 후 몇 년간 상하이 푸단(復旦)대학에서 경제학을 가르쳤다.
당시 중국공산당은 통일된 중국을 관리하기 위해 ‘보통화(普通話)’라는 이름의 표준어를 제정해서 보다 체계적인 언어소통이 이루어지도록 애쓰고 있었다.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은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의 주도로 언어주비위원회를 만들어서 문자의 간소화와 표준어의 보급을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이때 저우언라이 총리의 눈에 띈 사람이 저우여우광이었다.
그때로서는 많지 않았던 미국 뉴욕 근무자로 영어를 잘 이해하고 있던 은행원 저우여우광을 언어위원회에 발탁한 것은 저우언라이 특유의 안목 때문이다. 저우 총리는 저우여우광이 평소에 언어학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전문 분야가 아니라는 이유로 저우여우광은 언어위원회 근무에 난색을 보였다. 저우언라이는 “어차피 우리 모두가 문외한”이라는 말로 저우여우광을 끌어들였다.
더구나 당시 이상적인 공산사회의 건설을 꿈꾸고 있던 마오쩌둥(毛澤東)이 이른바 ‘반우파 투쟁’을 벌이고 있었던 상황도 저우여우광을 언어학자로 다시 태어나게 만들었다. 뉴욕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는 경제학자로 분류된 저우여우광을 어쨌든 본보기로 처형하려던 것이 마오의 생각이었다면, 저우언라이는 저우여우광의 근무지를 언어위원회로 바꾸어줘서 중국인의 언어 문자 생활 개선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해놓았다.
저우여우광은 이때부터 평생 동안 중국어와 한자의 간소화를 연구하도록 새로운 임무가 부여됐다. 저우여우광은 1955년 중국어를 로마자로 적는 한어병음 방안을 만들어냈다. 중국 어음의 표기를 로마나이즈화하고, 음소(音素)를 분리하고, 문어(文語)가 아닌 구어(口語)로 적는다는 원칙을 세웠다. 저우여우광은 베이징(北京)대학을 비롯한 대학들을 순회하면서 ‘한자개혁 개론’을 강의하기도 했고, 한어병음 사전을 만드는가 하면 중국어를 로마자로 표기하는 한어병음 방안에 국제 표준화 기호 ISO7098를 따서 붙여놓기도 했다.
저우여우광의 한 세기에 걸친 노력 덕분에 중국인은 컴퓨터 부품 이름과 컴퓨터에 사용하는 용어를 모두 중국어로 번역해 표기하는 게 가능해진 세상에서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앞으로 중국어를 배워 중국을 잘 이해해 보기를 원하는 외국인들에게는 모든 컴퓨터 용어를 중국어로 통일적으로 번역해서 표기하는 중국어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안 그래도 중·고등학교 수준에서 간체자를 배울 기회가 없어 중국의 거리에서 문맹이 되어버리는 한국인들이 듣도 보도 못한 중국어 컴퓨터 용어 앞에서 난감해하는 표정을 짓는 상황은 갈수록 심화될 것 같다. 각종 컴퓨터 용어를 영어 그대로 사용하는 우리도 영어를 비롯한 외국어 번역을 주관하는 통일적 언어관리 위원회를 조속히 만들어서 컴퓨터 시대에 빠르게 적응하는 중국어에 보조를 맞춰나가야 할 것이다.
2442호
02.06 박 대통령은 ‘중국철학사’ 다시 읽어보길
박근혜 대통령은 2007년 3월 26일 매일경제신문 34면에 ‘내 삶을 바꾼 책’이라는 기고를 했다. ‘한나라당 전(前) 대표’의 직함을 단 이 기고에서 박 대통령은 자신의 삶을 바꾸어놓은 책으로 펑여우란(馮友蘭)의 ‘중국철학사’를 소개했다. 해당 신문의 기획 시리즈 두 번째 기고였다. 이 글에서 박 대통령은 자신과 ‘중국철학사’와의 인연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22살 나이에 어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시면서 내 인생의 행로는 완전히 달라졌다. 어머니가 남기고 가신 빈 자리를 메우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하면서 내가 꿈꾸었던 삶은 접게 되었다. 그리고 몇 년 되지 않아 아버지마저 또 그렇게 보내드려야 했다. 20대 나이에 감당하기 힘든 고통과 시련이 몰려왔다. 부모님 모두를 총탄에 보내야 했던 충격에다 믿었던 사람들이 등을 돌리고 일방적으로 매도하는 온갖 비난의 화살을 감당해내야 했다. 숨 쉬는 것조차 힘이 들었다.”
그런 상황에서 만난 책이 ‘중국철학사’라고 박근혜 대통령은 적어놓았다.
“그때 인상 깊게 읽은 책이 바로 펑여우란의 ‘중국철학사’다. 논리와 논증을 중시하는 서양철학과 달리 동양철학은 깨달음을 중시한다. 중국을 대표하는 철학자 펑여우란 선생의 ‘중국철학사’ 역시 자신을 바로 세우고 바쁘게 살아가는 인간의 도리와 어지러운 세상을 헤쳐나갈 지혜와 가르침이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여기서 ‘그때’란 1952년생인 박 대통령이 22세 때인 1974년에서 29세가 되는 1981년 사이의 기간으로 보아야 자연스러울 것이다. 박 대통령은 자신이 ‘중국철학사’에서 얻은 교훈이 무엇이었던가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나는 책을 읽을 때 메모를 하는 습관이 있다. ‘중국철학사’를 읽으면서도 깊이 공감이 가고 깨달음을 준 글귀들을 한 자 한 자 노트에 메모를 하면서 함축된 언어와 행간에 숨겨진 진리를 마음에 새겼다. 요즘도 가끔 옛날 노트를 들여다본다. ‘최선의 수양 방법은 고의적인 노력이나 목적을 둔 마음 없이 자기의 할 일을 다하는 데 있다. 이것이 바로 도가들이 말하는 무위이며 무심(無心)이다.’”
“공자는 최선을 다하여 노력하고 나머지 문제점을 명(命)에다 남겨두었다. 명을 안다는 것은 현존하는 세계의 불가피성을 인정하고, 자기의 외적인 성공이나 실패를 상관하지 않는 것을 뜻한다. 그 밖에도 ‘자기 자신을 언제나 남의 입장에 두고 살펴보라. 그것이 바로 인(仁)이다’ ‘깊은 방안에 앉아 있더라도 마음은 네거리를 다니듯 조심하고, 작은 뜻을 베풀더라도 여섯 필의 말을 부리듯 조심하면 모든 허물을 면할 수 있게 된다’는 글귀들은 지금도 큰 울림을 주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그 글의 뒷부분에서 이렇게 썼다. “나는 그런 과정을 통해 고통을 이겨내고 마음의 평화를 되찾을 수 있었다. ‘중국철학사’를 비롯한 동서양의 고전을 읽고, 명상을 하고, 매일 일기를 쓰면서 나를 돌아보며 마음의 중심을 잡아갔다.… 오랜 세월 묻어두었던 동양정신의 유산을 빛나는 보석으로 닦아내서 어지러운 세상을 헤쳐나가는 가르침을 주는 펑여우란 선생의 ‘중국철학사’, 일독을 권하고 싶다.”
마음의 중심을 잘 잡아서인지 박근혜 대통령은 2012년 선거에서 당선이 됐고, 대통령 취임 직전인 2013년 1월 10일 특사로 서울에 온 장즈쥔(張志軍) 중국 외교부부부장도 박 당선인에게 “펑여우란 선생이 바로 나의 스승”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박 당선인이 2007년 3월 매일경제에 기고한 글이나, 이후 2007년 5월 월간 에세이라는 잡지에 비슷한 내용으로 기고한 글을 입수해서 읽고서 한 말이었다.
박 대통령의 ‘중국철학사’ 애호는 그렇게 해서 중국 외교가와 중국인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2013년 6월 말 한국 대통령으로서 중국을 국빈 방문했을 때 중국인들 사이에서 박 대통령의 인기는 하늘 높이 치솟아 있었다. “펑여우란 선생의 ‘중국철학사’를 읽고 인생의 슬픔을 이겨낸 한국 최초의 여자 대통령”이라고 수많은 중국 온오프라인 매체들이 보도하는 바람에 엄청난 수의 퍄오진후이(朴槿惠) 미니 블로그가 생겨날 정도였다. 2013년 6월 29일 박 대통령이 칭화(淸華)대학에서 학생들에게 강연을 하고 난 직후에는 1990년에 이미 사망한 펑여우란 선생의 외손녀가 ‘일편빙심 재옥호(一片氷心在玉壺·한 조각 얼음처럼 맑은 마음이 옥항아리에 담겨 있네)’라고 펑여우란 선생이 직접 쓴 족자를 선물하기도 했다.
그러나 얼마 안 가 중국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박근혜 대통령이 읽은 것이 ‘중국철학사’인가, 펑여우란 선생의 또 다른 저작인 ‘중국철학간사(中國哲學簡史)’인가” 라는 물음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논쟁의 결론은 “‘중국철학사’는 대화체의 백화문(白話文)판이 없고 중국 고전과 마찬가지의 문언문(文言文)으로 되어 있어 웬만한 실력의 중국인도 읽기 힘들다는 점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20대의 젊은 시절에 읽었다는 펑여우란 선생의 저서는 1940년대 펑여우란 선생이 미국 대학에서 강의할 때 중국철학을 쉽게 설명한 내용을 영어로 출판한 ‘중국철학간사’일 가능성이 크다”는 쪽으로 모아졌다.
펑여우란의 ‘중국철학사’는 박근혜 대통령이 20대 시절인 1977~1981년보다도 무려 20년 가까이 흐른 1999년에야 까치출판사가 첫 한글 번역본을 내놓았다. ‘간명한 중국철학사(중국철학간사)’는 정인재 교수(현 서강대 명예교수)의 번역으로 1977년에 형설출판사가 출간했다. 따라서 박근혜 대통령이 20대에 보았다는 펑여우란의 저서는 정확히는 ‘중국철학간사’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물론 그런 차이는 책 이름을 ‘간명한 중국철학사’라고 붙인 데도 원인이 있을 것이며, 같은 저자가 쓴 저서이므로 크게 문제될 것도 없을 것이다.
오히려 문제는 55세 때인 2007년에 20대 시절의 메모를 보아가며 “자기 자신을 언제나 남의 입장에 두고 살펴보는 것이 바로 인(仁)”이라거나 “자기의 외적인 성공이나 실패를 상관하지 않는 것이 바로 명(命)”이라고 치열한 독서 메모를 한 박근혜는 과연 어디로 갔느냐는 점이다. 탄핵으로 직무가 정지된 박 대통령이 젊은 날의 ‘중국철학사’ 독서 메모도 다시 읽어보고, ‘중국철학간사’가 아닌 ‘중국철학사’ 한글 완역본 상하권을 찬찬히 읽으면서 젊은 시절에 이어 또 한 번 마음을 가다듬기를 권해 본다.
2443호
2017.02.13 2017 최대의 ‘블랙 스완’은 김정은 제거 작전?
‘블랙 스완(Black Swan)’은 ‘검은 백조’로 번역하면 안 될 듯하다. ‘검은’과 ‘백’이라는 개념이 서로 충돌하기 때문이다. ‘검은 고니’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원래 ‘블랙 스완’이라는 말은 학문적으로는 ‘현재 있는 개념을 거꾸로 뒤집어서 생각해 보기’라는 뜻으로 쓰였다. 그러나 존 레이섬이라는 영국 생물학자가 1790년 호주에서 실제로 검은 고니가 서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함으로써 ‘블랙 스완’은 발생할 가능성이 거의 없는 일이 실제로 일어나는 것을 뜻하는 말로 바뀌었다.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가 전 세계로 확산되는 것을 보면서 레바논 출신의 경제학자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Nassim Nicholas Taleb)는 ‘검은 고니 이론(black swan theory)’이라는 개념을 창안했다.
“칠면조는 자신을 기르는 주인에 대해 자신에게 먹이를 가져다주는 존재라는 판단을 내린다. 어제도 그랬고, 그저께도 그랬으며, 오늘도 그렇게 하는 것을 보면 주인은 먹이를 가져다주는 존재라는 것 이외의 판단이 오히려 부자연스럽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놀랍게도 12월 어느 수요일 칠면조 앞에 나타난 주인은 먹이를 주지 않고, 칠면조의 목을 비틀어 끌고 간다. 칠면조의 입장에서는 결코 일어날 것으로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실제로 일어난 것이다. 경제학의 세계에서도 이런 일은 흔히 일어날 수 있으며 미국의 프라임모기지 사태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가운데 실제로 발생한 금융위기의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블랙 스완’은 중국어로는 ‘헤이티엔어(黑天鵝)’라고 한다. ‘고니’ ‘백조’라는 뜻의 ‘바이티엔어(白天鵝)’에서 ‘희다’는 뜻의 ‘바이’를 빼내고 그 자리에 ‘검다’는 뜻의 ‘헤이’를 집어넣은 말이다. 홍콩에서 발행되는 시사주간지 아주주간(亞洲週刊)은 최근호에서 2017년을 ‘블랙 스완’이 잇달아 출현하는 한 해가 될 것이라고 예고했다. 2016년에는 영국의 EU 탈퇴를 말하는 브렉시트(Brexit), 미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당선된 사건, 한국의 박근혜 대통령이 일으킨 ‘친신간정(親信干政·친구가 정치에 간여한 사건)’이라는 세 가지 사건이 2016년에 일어난 검은 고니급 사건들이라고 진단했다.
신랑(新浪), 소후(搜狐) 등 검색 엔진들은 2017년에는 더 많은 검은 고니들이 중국 하늘에 날아다니겠지만, 우선 예상으로는 3월 15일로 예정된 네덜란드 총선, 4~5월의 프랑스 대선, 그리고 10월의 독일 대선 등에서 놀라운 결과가 빚어질 가능성이 있을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물론 한국의 탄핵 결과와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 일으킬 물의 등이 또 다른 검은 고니가 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아마도 중국에 최대의 헤이티엔어(검은 고니)가 될 것은 북한 핵문제 해결을 위해 트럼프 행정부가 시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김정은 제거 특수전’이 될 것이 분명하다. 최근 국내 인터넷 매체들은 미 공군 특수전 사령부(USAF Special Operation Command)가 2월 3일에 웹페이지에 올렸다는 사진을 인용해가면서 “3월 김정은 제거를 위해 미 공군 특수전사령부가 미국 시각 2월 3일 수직이착륙기 오스프리(Osprey) 2개 대대를 동원하여 저공침투를 위한 편대훈련을 실시했다”고 전했다. 작전에 참가한 제8, 20 특수작전비행대대는 전 세계를 작전지역으로 삼는 부대로, 이번 훈련은 뉴멕시코주의 캐논 공군기지에서 이륙하여 약 1700㎞ 떨어진 플로리다주 헐버트 공군기지로 이동하면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매체들은 오스프리는 최소속력 시속 509㎞로 일반 헬기에 비해 약 2배 빠르며, 헬기와 달리 활공도 가능하기에 최대항속거리는 약 3590㎞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고 전했다.
이와 함께 이번 훈련과 별도로 미 해병대는 국내 강원도 지역에서 우리 해병대와 1월 15일부터 2월 17일까지 5주간 혹한기 동계훈련에 돌입했다. 국방부는 한·미 해병대 혹한기 훈련에 참여한 병력 및 장비에 대해서 밝히지 않은 채 “장진호전투의 교훈을 잊지 않겠다”고만 밝혀 김정은을 제거하기 위한 훈련이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암시했다고 인터넷 매체들은 전했다.
국내 인터넷 군사뉴스 미디어들이 전하는 이 충격적인 뉴스의 신뢰도가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중국 최대 검색엔진 바이두에 따르면, 미 공군 특수전 사령부가 김정은을 참수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훈련을 한다는 사실은 지난해부터 이미 중국 인터넷 공간에 많이 돌아다닌 구문(舊聞)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더구나 1971년 닉슨 대통령의 안보보좌관 키신저와 마오쩌둥(毛澤東), 저우언라이(周恩來) 사이의 세기적 비밀 회담 이래 한반도 문제에 관한 한 미국과 중국이 서로 상대방에게 의논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작전에 나선다는 것은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로 간주돼왔다. 만약에 미국이 사전에 중국에 알리지 않고 공군 특수전 사령부를 동원해서 김정은 제거 작전을 감행한다면, 미 트럼프 행정부가 1971년 이래 50년 가까이 유지되어온 미국과 중국 관계가 독립 변수이고 한국과 북한 관련 문제는 종속 변수라는 공식을 깨버리는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실제로 러시아 푸틴 정부와의 관계를 중국보다 중시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기는 했다. 그러나 지난 50년 동안 친(親)중과 반(反)러시아를 주조로 하는 세계 전략을 수정했는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중국 매체들은 트럼프가 취임도 하기 전에 차이잉원(蔡英文) 대만 총통과 통화를 하면서 “하나의 중국 원칙을 꼭 지켜야 하는가”라고 말하는가 하면, 트럼프가 키신저 박사에게 “하나의 중국 원칙을 꼭 지켜야 하느냐”고 질문을 했더니 “미국의 국익을 위해서라면 두 개의 중국이 아니라 세 개의 중국을 인정한들 어떠냐”라고 했다는 소식도 워싱턴발로 전했다.
그런 언저리를 보고 있으면, 트럼프 행정부가 실제로 북한의 김정은 제거에 나선다면 아무래도 그 사건이 중국에 최대의 검은 고니가 될 것이 뻔하다. 실제로 그런 일이 진행된다면 중국의 반응은 어떤 것일까. 중·조 우호협력조약 제2조에 명시된 대로 ‘이 조약 체결 쌍방 중 일방이 제3국의 공격을 받으면 즉각 전면적으로 개입한다’는 조항에 따라 행동하지 않을까. 어쨌든 한반도에서 그런 상황이 전개된다면 중국에는 2017년 최대의 ‘블랙 스완’이 될 것이 분명하다.
2444호
02.27 김정남은 과연 중국식 개방론자였나?
지난 2월 13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공항에서 독살당한 김정남(金正男·46)은 왜 죽임을 당해야 했을까. 북한의 체제 구조상 최고권력자 김정은(金正恩·33)의 교사(敎唆) 없이는 김정남의 죽음은 현실화될 수 없었다. 김정은의 생모는 재일동포 출신의 고용희였고, 김정남의 생모는 성혜림이었다. 김정일(金正日)을 같은 아버지로 하는 이복형제라는 핏줄과 권력 다툼이 김정은으로 하여금 김정남을 죽이지 않고는 결코 살아갈 수 없는 불구대천의 관계로 만든 것일까.
김정남의 사망을 보는 중국 웨이보(微博) 블로거들의 견해는 좀 다르다. 김정은이 김정남을 독살 교사한 것은 당연히 패륜이지만 그것은 북한 내에 중국식 개혁개방을 둘러싸고 벌어진 노선 투쟁에서 최종적으로 김정남이 지지하던 개혁개방 노선이 패배한 결과라는 것이다. 김정남의 패배는 2013년 12월 12일 친중(親中)주의자 장성택 조선노동당 행정부장이 김정은의 지시에 따라 고사총 숙청을 당함으로써 예고됐던 패배였다. 2010년 김정일이 세 차례나 베이징을 방문해서 후진타오(胡錦濤) 총서기를 비롯한 중국공산당 지도자들을 만나 이른바 ‘개혁개방 학습’을 할 때 김정일의 옆에 바짝 붙어 서서 중국 지도자들과 김정일의 대화를 메모하던 모습을 보여준 것이 장성택이었다. 김정일과 장성택의 그런 모습은 많은 중국 지도자들에게 김정일의 북한이 보다 개방적이 되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갖게 해주었다.
그러나 2011년 12월 17일 김정일의 돌연한 사망은 북한 내 중국식 개혁개방 노선의 사망선고이기도 했다. 웨이보 블로그에 뜬 차이나데일리 뉴스에 따르면, 1971년생인 김정남은 9세 때부터 스위스 유학을 하는 10년 동안 개방적인 서양을 충분히 구경하고 왔다. 이후 귀국해서 중국을 여행하는 동안 ‘북한이 중국식 개혁개방을 해야 국제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어렴풋한 생각의 씨앗을 갖게 됐다. 김정남은 1990년 평양으로 귀국한 뒤 1994년 할아버지 김일성이 사망하자 기회 있을 때마다 아버지 김정일에게 중국식 개혁개방에 대한 자신 나름의 생각을 전달했다고 한다.
김정남은 1989년 12월 처음으로 중국 여행을 했고, 1995년부터 2005년까지 10년간은 주로 중국에서 거주하면서 특히 상하이(上海)의 고속발전을 자주 가서 보았다. 그러나 김정일의 생각은 확고했다. 북한이 중국식 개혁개방을 하면 더 이상 김씨 왕조의 권력세습은 어려워질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더구나 2008년 9월 9일 김정일은 북한 정권 수립 기념일 행사에 불참했고, 이유는 뇌출혈과 심장쇼크로 반신불수 상태에 빠진 때문이라는 사실이 공개됐다. 김정일의 마음은 다급해졌고, 그런 김정일의 눈에 순수 백두혈통은 아니지만 어린 김정은이 자신의 후계자로 더 적합한 것으로 판단됐다.
당시 김정일의 장남 김정남은 이미 2001년 5월 도미니카공화국 위조여권으로 일본에 밀입국하려다 적발돼 추방당하는 사건이 벌어짐으로써 김정일의 눈에서 결정적으로 벗어났다. 김정남은 그 이전에도 세 차례나 일본에 밀입국을 시도한 일이 있었으며, 일본 언론 보도에 따르면 김정남은 일본의 홍등가에도 출현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2003년부터는 북한 군부에서 김정은과 김정철의 생모인 고용희 숭배 분위기가 조성됐고, 이는 중국식 개혁개방을 바라지 않는 군부가 김정은을 지지한다는 의사표시로 인식됐다. 2004년 고용희가 병사했을 때 김정은은 23세가 됐다. 김정남은 이미 자신을 컴퓨터게임과 주색(酒色)에 빠진 플레이보이로 위장하고 있었다. 도쿄(東京)신문 서울특파원과 베이징특파원을 지낸 고미 요지(五味洋治)가 김정남과 주고받은 이메일을 바탕으로 쓴 ‘아버지 김정일과 나 : 김정남의 고백’이라는 책에 따르면 김정남은 겉으로는 주색에 빠진 인간으로 위장하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독서도 많이 하고, 주변 상황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고 한다.
2011년 12월 17일 김정일의 사망은 북한 내 개혁개방파들에 대한 사망선고였고, 김정남과 김정남을 지지하는 장성택 그룹에 최후의 날이 됐다. 여기에는 중국식 개혁개방을 거부하는 북한 군부의 동향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결국 2017년 2월 13일 김정남이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공항에서 독살당함으로써 당분간 북한 내에는 중국식 개혁개방을 선호하거나 추진하는 세력은 발붙일 수 없게 됐다.
중국식 개혁개방이란 1976년 9월 원론적인 중앙계획경제주의자 마오쩌둥(毛澤東)이 죽고 1978년 12월 권좌에 오른 덩샤오핑(鄧小平)이 중국공산당 제11기 3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를 통해 ‘사상해방과 실사구시(實事求是)’를 내외에 선포함으로써 시작된 또 다른 혁명이다. 덩샤오핑이 말한 ‘사상해방’은 “마오쩌둥 사상에서 해방되자”는 말이며, ‘실사구시’란 “마오쩌둥의 유훈에 따른 유훈통치를 거부하고 모든 판단은 현실에 대한 판단에서 출발한다”는 말이었다. 북한이 1994년 김일성이 사망한 다음 아들 김정일이 ‘유훈통치’를 선택한 사실과 사뭇 다른 흐름이었다.
그때로부터 40년, 중국 경제는 사회주의 계획경제에서 사회주의 상품경제 단계를 거쳐 사회주의 시장경제 단계에 도달해 있다. 물론 여기에는 덩샤오핑이 개혁개방을 시작하면서 던진 “시장경제는 자본주의 전유물이 아니며, 사회주의도 시장경제를 할 수 있다”는 말과 ‘선부론(先富論·누구든 먼저 부자가 되면 여러 사람이 먹고살 수 있다)’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현재 중국공산당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도 이미 헌법에서 지워버렸으며, 생산수단의 공유화란 구절도 삭제했다.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통해 부자가 된 사람도 중국공산당 가입이 전면적으로 허용되는 변화를 이루어왔다.
중국식 개혁개방을 선호하던 김정남의 사망으로 이제 북한은 스탈린주의자 김정은과 개혁개방을 거부하는 군부가 끌고 가는 세상이 됐다. 이제 겨우 22세인 김한솔이 백두혈통의 장손이기는 하지만 김한솔 역시 언제 김정은의 공작에 희생될 지 모르는 처지다. 말 그대로 북한은 퇴색한 스탈린주의자 김정은이 아무런 출구 없는 통치를 하는 국면을 맞게 됐다. 김한솔이 제2의 김정남이 되어 북한에 대한 미국과 중국의 김정은 정권 레짐 체인지(regime change) 플랜의 카드가 될 수 있는 날은 과연 언제쯤일까.
2446호
03.08 “롯데 쫓아내자” 시진핑의 모순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지난 1월 17일 스위스 다보스포럼에 참석해서 기조연설을 했다. 시진핑의 연설은 미국 트럼프 대통령의 당선으로 전 세계가 보호무역주의의 태풍을 걱정하고 있는 가운데 “경제의 글로벌화와 자유무역을 이제부터는 중국이 보호해 나가겠다”고 강조해서 뜨거운 박수를 여러 차례 받았다.
“영국 문학가 찰스 디킨스는 산업혁명 이후의 세계를 ‘가장 훌륭한 시대이자 동시에 최악의 시대’라고 묘사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모순이 가득한 세계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곤혹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세계는 도대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 걸까요. 곤혹감에서 벗어나려면 우선 문제의 근원을 찾아내야 합니다. 요즘 세계가 어려워진 것은 모든 것이 경제의 글로벌화 때문이라고 보는 관점이 있습니다. 경제의 글로벌화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알리바바의 동굴로 인식되는가 하면, 적잖은 사람들에게는 판도라의 상자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현재 국제사회는 경제의 글로벌화를 놓고 광범위한 토론을 벌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계 경제가 처한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협동을 견지하고 개방을 통해 윈윈하는 협력 모델을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인류는 이미 ‘당신 속에 내가 있고, 내 속에 당신이 있다(你中有我 我中有你)’는 경지의 운명공동체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익은 고도로 융합되고, 피차 상호 의존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모든 국가는 대소(大小)와 강약(强弱), 빈부(貧富)와 관계 없이 모두가 국제사회의 평등한 구성원입니다. 모두가 결정에 참여할 수 있고, 권리를 향유해야 하며, 의무를 이행해야 합니다. 신흥 시장경제 국가와 발전 도상의 국가들도 대표성과 발언권을 부여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중국의 발전은 세계에 기회를 제공하고 있으며, 중국은 경제 글로벌화의 수익자(受益者)이자 동시에 공헌자입니다.…”
“…각국의 상공업계는 중국의 발전이 여전히 그들에게 기회라고 인식하고 있고, 중국의 대문은 세계를 향해 시종일관 활짝 열려 있으며, 절대로 닫히지 않을 것입니다. 문이 열려 있기 때문에 세계가 중국으로 진입할 수 있고, 중국이 세계를 향해 달려갈 수 있게 돼 있습니다. 우리는 세계 각국의 문이 중국 투자자들에게도 공평하게 활짝 열려 있기를 바랍니다.…”
중국공산당 총서기를 겸하고 있는 시진핑이 엘리트 자본주의자들의 연례 총회인 다보스포럼에 참석해서 기조연설을 한 것은 이색적인 광경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이 ‘아메리카 퍼스트(America First·미국 제1주의)’를 구호로 보호무역주의를 표방한 가운데 중국공산당 총서기가 “대세는 자유무역과 경제의 글로벌화이며 앞으로는 중국이 그 흐름을 지켜나갈 것”이라고 선포한 것도 이례적이었다.
시진핑은 그 다음 날 1월 18일에는 제네바에서 열린 유엔회의에 나가서 ‘인류의 공동운명체를 함께 건설해 나가자’는 제목의 연설을 통해 중국이 각국의 주권이 평등함을 잘 인식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각국의 주권이 평등함은 국가의 대소와 강약, 빈부를 가리지 않는 데 그 요체가 있으며, 주권의 존엄은 필수적으로 존중받아야 하며, 내정간섭은 용납되지 않으며, 각 주권국가들은 사회제도와 발전의 길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고 소리 높여 강조했다.
시진핑 국가주석은 그렇게 각종 국제회의에 나가 “중국 시장의 개방성과 주권의 존엄은 국가의 대소(大小)를 가리지 않고 존중돼야 한다”고 강조했는데, 중국의 관영 언론과 외교부는 엉뚱한 소리를 내고 있다. 지난 2월 28일 롯데가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를 위해 한국 국방부와 성주 골프장 환지(換地) 계약을 체결하자 중국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가 발행하는 국제문제 전문지 환구시보(環球時報)는 기다렸다는 듯이 “롯데를 타격해서 한국을 징벌하는 것 이외에 중국이 선택할 길은 없다”는 논평을 실었다.
“한국은 동북아 평화의 최대 수익자이다. 한국은 1992년 중·한 수교 이후 획득한 발전 성과로 선진국 대열에 섰다. 한국이 사드 배치를 결정한 것은 동북아 평화협력 논리를 배반한 것이다. 한국의 사드 배치에 롯데가 실제로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서 우리 중국은 관심 없다. 롯데를 중국 시장에서 축출해서 중국의 국가이익에 대한 위해를 제거하는 것은 하나의 기업을 죽여 100개의 기업에 경고를 보내는 것이다. 중국이 대국으로서의 위엄을 보이기 위해 해야 하는 일이다.”
그런가 하면 겅솽(耿爽)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지난 2월 28일 “사드의 한국 배치에 중국 민중들이 외치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라면서 “외국 기업들의 중국 내 경영 성공 여부는 중국 소비자의 결정에 달린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 인민들도 중국 내에 104개나 되는 롯데마트에 대한 불매운동에 불을 붙이고 나섰다.
중국은 1980년대 이후 덩샤오핑(鄧小平)의 개혁개방 정책의 덕분으로 지난 30여년간 경제발전을 해왔다. 경제발전을 해오면서 중국에 가장 필요한 것은 경제발전 경험과 동북아 평화였다. 덩샤오핑은 1985년 첸지천(錢其琛) 당시 외교부 부부장에게 한국과의 수교를 독촉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한국과 중국이 수교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국의 경제발전을 가능하게 해줄 것이다.” 한마디로 현재 중국의 경제력은 지난 30여년간의 동북아 평화와 한국의 경제발전 경험을 참고한 덕분이다.
1992년 수교 당시 중국은 세계에서 가난한 나라 중의 하나였고, 한국은 이미 신흥공업국의 지위에 올라 있었다. 그런데도 중국이 ‘음수사원(飮水思源·물을 마시며 그 근원을 생각한다)’을 못 하고, 한국의 주권 사항에 해당하는 사드 배치에 대해 내정간섭을 넘어서 국방부와 환지한 롯데라는 민간기업을 중국 땅에서 축출하겠다는 대국답지 못한 논리를 구사하고 있다. 참으로 한심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래갖고서야 어떻게 중국이 시진핑 주석이 말하는 경제 글로벌화와 자유무역의 수호신이 될 수 있을까.
일단 우리 정부로서는 세계무역기구(WTO) 제소를 통해 맞서고 볼 일이 아닐까. 명청(明淸) 시기에 조선 왕조가 당한 굴욕적 사건들을 생각하면, 사드 배치에 대한 중국의 내정간섭에 굴복해서 밀리면 우리가 앞으로 어디까지 밀려가야 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안시성 공격에 나선 당 태종을 물리친 것은 당 태종의 눈에 박힌 안시성 성주 양만춘의 화살이었다는 것이 역사의 평가다.
출처 | 주간조선 2447호
2017.03.15 중국인들의 집단행동은 어떻게 끝났나
1800년대 초반 청(淸)은 세계 최고 부자나라였다. 미국 경제학자들의 추산으로 당시 청은 전 세계 GDP의 30%가 넘는 부(富)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던 청이 1840년 홍콩 앞바다에서 영국 군함과 청 지상군 사이의 포격전으로 시작된 아편전쟁에서 손도 써보지 못하고 패배했다. 화약이란 원래 중국의 4대 발명품 중 하나였지만 영국의 대포는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성능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청군이 해안에서 쏴대는 대포는 영국 군함 근처에도 가닿지 못했다. 결국 1842년에 청은 영국과 ‘난징(南京)조약’을 맺어 홍콩섬을 떼어주고, 2100만위안(元)을 배상해줬다. 거기에다가 상하이(上海)와 광저우(廣州)를 비롯한 5대 항구를 무역항으로 개방하는 굴욕을 경험해야 했다.
1894년 7월 25일 인천 앞바다 풍도에서 시작된 청일(淸日)전쟁도 웨이하이(威海)에 있는 해군기지를 기습당한 청 해군의 궤멸로 일본이 승리하는 깜짝 놀랄 결과가 빚어졌다. 전쟁은 1년도 채 안 된 1895년 4월 17일, 일본 시모노세키에서 청을 대표한 이홍장(李鴻章)과 일본을 대표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사이에 시모노세키조약 체결로 끝을 맺었다. 시모노세키조약 제1조는 ‘청은 조선이 완전무결한 독립국임을 인정한다. 그동안 조선이 해오던 조공은 시행하지 않는다’는 것이었고, 제2조는 ‘요동(遼東)반도 일부와 대만(臺灣), 그리고 부속도서를 일본에 할양한다’는 것이었다. 요즘 한창 중국과 일본 사이에 해양영토분쟁이 벌어지고 있는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는 이때 일본의 소유로 넘어갔다.
1919년 5월 4일 베이징(北京) 시내 대학생들에게 ‘그동안 독일이 점유하고 있던 산둥(山東)성 일원에 대한 이권을 일본에 넘긴다’는 파리강화회의 소식이 전해졌다. 대학생 3000여명은 천안문으로 달려갔고, 외세에 항거하는 이 집단시위는 ‘5·4운동’으로 이름 붙여졌다. 지금도 베이징대학 학생들은 해마다 5월 초에 5·4운동 기념 토론대회를 열고 있다. 이보다 앞서 1899년 산둥지방에서 처음 조직된 의화단(義和團)운동은 중국의 권법(拳法)으로 외세를 물리치자는 운동이었는데, 영국·프랑스·일본·미국·러시아를 주축으로 한 서양 8개국 연합군에 간단히 진압됐다. 오히려 수도 베이징이 8개 지역으로 쪼개져 서양 8개국 연합군의 통치를 받아야 하는 처지가 됐다. 그 과정에서 베이징 북서쪽에 있던 고급관리들 집단 거주지였던 원명원(圓明園)은 불에 타고 깨어져야 했다. 지금 중국공산당은 그렇게 파괴된 원명원을 “역사를 잊지 않겠다”며 파괴된 채 잘 보존하고 있다.
서양 제국주의에 의해 반(半)식민지가 된 중국은 1911년 청 왕조를 무너뜨리고 중화민국을 수립했으나, 곧바로 마오쩌둥(毛澤東)이 이끄는 중국공산당과 장제스(蔣介石) 국민당 간의 국공내전이 벌어졌다. 내전은 1949년 장제스가 대만으로 도피하는 것으로 종결됐다. 중국공산당은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했다. 100년이 넘는 외세의 중국 점령이 공식적으로 종결된 시점이 이때였다. 1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서양제국주의의 식민지 상태를 끝내기까지 중국 지도층은 이렇다 할 저항을 보여주지 못했다. 중국 민중들이 외세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는 것이 그나마 저항수단이었다.
1989년 4월, 베이징 시내 천안문광장에는 많은 대학생과 시민들이 모여들었다. 사망한 후야오방(胡耀邦) 전 총서기를 추모한다는 것이 구실이었다. 실제로는 민주화와 반(反)부패가 구호로 외쳐졌다. 광장에는 6월 3일 밤까지 연일 100만이 넘는 대학생과 시민들이 꽉 들어차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반부패와 민주화를 외치던 시위 군중들은 6월 3일 밤부터 시작된 중국 인민해방군의 ‘광장 청소작업’ 결과 해산됐다. 6월 4일 새벽 광장에는 인민해방군 이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1999년 5월 8일 옛 유고연방 베오그라드 주재 중국대사관에 미군 전투기가 미사일을 발사해서 중국 기자 3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일어났다. 당시 미군은 ‘오폭(誤爆)’이라고 주장했으나, 중국 정부는 ‘의도적 공격’이라고 규정했다. 이때도 베이징 주재 미국대사관 주변을 수많은 시민, 대학생들이 에워싸고 시위를 벌였다.
2001년 4월 1일에는 중국 남부 하이난다오(海南島) 상공에 미군 정찰기 한 대가 tt나타났다. 중국의 공군 전투기 2대가 사상 처음으로 중국 영공 부근으로 날아온 미 정찰기를 근접 견제하다가 한 대는 추락해서 조종사가 사망하고 미 정찰기는 기체 손상을 입어 하이난다오에 불시착할 수밖에 없었다. 베이징에 있는 미 대사관 주변에는 수많은 시민, 대학생들이 몰려들어 반미(反美) 구호를 외쳤다. 이 시위는 그러나 당시 장쩌민(江澤民) 총서기가 “아직은 미국과 싸울 때가 아니다.… 실력을 기르자”는 간곡한 설득으로 중단됐다. 여기에 빌 클린턴 당시 미 대통령이 중국을 향해 공개사과를 한 것도 영향을 미쳤다.
2008년 8월은 베이징올림픽이 예정돼 있었다. 그해 3월에 티베트에서 소수민족 차별에 항의하는 대규모 폭력시위가 발생하자 프랑스 사르코지 대통령은 달라이 라마를 초청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티베트 분리독립을 지원하는 사르코지의 그런 행동에 대한 중국인들의 분노는 엉뚱하게도 중국에 진출한 프랑스 유통업체인 카르푸에 대한 불매운동으로 나타났다. 카르푸는 “우리 직원 대부분이 중국인”이라는 점과 “불매운동을 계속하면 중국인 종업원들이 직장을 잃는다”는 논리로 맞섰다. 프랑스 정부는 중국통인 장피에르 라파랭 전 총리를 특사로 보내 후진타오(胡錦濤) 당시 국가주석에게 ‘화해’를 요청함으로써 카르푸 사태는 겨우 진정됐다.
사드의 한국 배치를 빌미로 한 중국인들의 롯데마트에 대한 불매운동과 규정 트집 잡기는 2012년 센카쿠열도를 둘러싼 해양 영토분쟁 때 중국인들이 ‘자동차 등 일본 제품 불매운동’을 벌인 이후 최대 집단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롯데가 할 수 있는 일은 중국 내 ‘롯데마트 유한공사’가 얼마나 많은 중국인을 고용하고 있는지, 어떤 중국 제품을 매장에 올려놓고 있는지를 홍보하면서 기다리는 것밖에 없다. 카르푸에 대한 중국인들의 공격은 결국 중국 관영TV가 “카르푸가 달라이 라마를 지원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고 보도한 이후 눈 녹듯이 사라졌다. 어차피 배치된 사드에 대한 더 이상의 항의는 실익이 없다는 사실을 중국 지도부가 깨달을 날이 머지않았을 것으로 판단된다.
출처 | 주간조선 2448호
2017.03.24 美中 정상회담, 강 건너 불이 아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사이의 첫 정상회담이 오는 4월 6~7일 이뤄질 전망이다. 션 스파이서 백악관 대변인은 지난 3월 13일(미국 시각) “트럼프 대통령과 시 주석의 회담 일정 조정이 진행 중”이라고 말하고 “현재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이 준비 작업을 위해 일본, 한국, 중국을 방문 중이다”고 확인해주었다. 스파이서 대변인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4월 6~7일 플로리다 마라라고(Mar-a-Lago) 별장을 방문할 것이라는 보도를 확인해달라”는 기자 질문에 그렇게 답했다.
파이서 대변인은 “공식방문이 아니라 실무방문(working visit)이 될 그 회담을 통해 무엇을 논의할 예정이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북한과 사드(THAAD)의 한국 배치를 둘러싼 긴장을 완화하는 문제가 논의될 것”이라고 말하고 “늘 그렇듯이 미국 대통령과 중화인민공화국 주석 간의 회담에서는 광범위한 상호 관심사에 대한 논의가 이뤄진다”고 덧붙였다. 스파이서 대변인은 “현재 (트럼프 행정부의) 중국 주재 미 대사도 파견돼 있지 않고, 동아시아 담당 차관보도 결정이 돼 있지 않은 형편에 관련 회담에 대해 어떻게 대통령에게 설명할 것이며 어떻게 미 대통령이 강력한 입장에 설 수 있게 할 것이냐”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틸러슨 국무장관이 해당 지역을 방문 중”이라는 대답으로 대신했다.
중국 매체들이 ‘시터후이(習特會)’라고 부르는 시진핑·트럼프 정상회담에 대해 확인해달라는 기자의 질문에 화춘잉(華春瑩) 중국 외교부 대변인도 3월 14일 “중국과 미국 쌍방은 양국 간의 고위층 교류를 중시하고 강화하고 있으며, 현재 쌍방은 긴밀한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있는 중이고, 진일보한 소식이 있으면 때에 맞추어 발표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백악관과 중국 외교부 대변인의 말을 비교해 보면 틸러슨 국무장관이 17~18일 베이징을 방문하면서 시진핑 주석과 왕이(王毅) 외교부장을 만나 시터후이의 구체적 일정과 안건을 확정할 예정인 것으로 관측됐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대통령선거 유세를 통해 중국에 대해 “미국민들의 일자리를 빼앗아가고 있다” “내가 당선되면 미국으로 수입되는 중국 상품에 45%의 고율 관세를 매길 것”이라고 험악한 말을 했었다. 뿐만 아니라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안보보좌관으로 1971년 미국과 중국의 데탕트를 성공시킨 헨리 키신저 박사에게 “하나의 중국 정책은 꼭 지켜야 하는 거냐”라고 묻기도 했다. 키신저는 트럼프의 질문에 대해 “미국의 국익을 위해서는 두 개의 중국이면 어떻고, 세 개의 중국이면 어떠냐”라는 대답을 했다는 사실이 베이징에 알려져 중국 지도자들을 긴장하게 만들었다. 실제로 트럼프는 당선 직후 차이잉원(蔡英文) 대만 총통에게 전화를 걸어 대만에 대한 계속적 지지를 약속해 중국 지도자들을 화나게 했다. 그러나 당선된 이후에는 시진핑 주석의 당선 축하 전화를 받았고, 이에 대한 답례로 중국의 정월 대보름날인 2월 8일 시진핑 주석에게 전화를 걸어서 “시진핑 주석과 중국 인민들이 즐거운 명절을 맞기를 바란다”고 인사를 하면서 “미국은 하나의 중국 원칙을 존중할 것”이라고 말해 워싱턴과 베이징 사이에 따뜻한 기운이 흐르기 시작했다.
트럼프가 시진핑을 초청할 것으로 알려진 플로리다의 마라라고 리조트는 트럼프 소유의 골프장이다. 트럼프는 지난 2월 이 골프장으로 외국 국가원수 가운데 제일 처음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를 초청해서 18홀 풀코스 골프를 치면서 환담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시진핑 국가주석은 골프를 칠 줄 모르기 때문에 마라라고 골프장을 트럼프와 산책하면서 북한의 핵실험과 한국 사드 배치에 관한 미국의 입장을 듣고, 이에 대한 중국의 입장을 설명할 것으로 판단된다. 트럼프와 시진핑은 물론 미·중 무역 문제와 환율 문제도 이야기할 것으로 예상된다. 두 정상은 마라라고 골프장을 산책하면서 트럼프의 ‘미국 우선(America First)’이라는 생각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시진핑의 ‘중국의 꿈(中國夢·China Dream)’이 어떤 목표를 가진 구상인지에 대해 서로 확인할 기회를 가질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문제는 우리다. 지난 3월 6일 이미 사드 발사대 2기가 오산 미군기지에 도착함으로써 배치가 이미 기정사실화됐는데도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비롯한 야당 인사들은 “박근혜 전 대통령이 결정한 사드 배치를 중단하라”느니 “사드 문제는 국회 비준을 받아야 하는 문제이니, 다음 정부로 넘기라”는 등의 주장을 하고 있다. 아마도 우리 야당의 주장이 마라라고 골프장에서 이루어질 트럼프·시진핑 회담에서 언급된다면 그것은 트럼프 대통령의 입을 통해서가 아니라 시진핑 국가주석의 입을 통해서 트럼프에게 전달될 가능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한국 내에 사드 배치를 반대하는 주장이 상당히 퍼져 있으며, 다음 대통령선거에서 여론조사 지지율 1위를 고수하고 있는 문재인 전 대표가 바로 그런 주장을 하고 있다는 점은 시진핑이 트럼프에게 사드의 한국 배치를 반대하는 논리를 전개할 때 큰 도움이 되는 자료가 될 것이 분명하다. 트럼프로서는 한국의 다음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많은 인물이 사드 배치를 반대하고 있다는 시진핑의 이야기에 어떻게 멋진 답을 할 수 있을지 고민거리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1971년에 이루어진 닉슨 미 대통령의 안보보좌관 키신저와 저우언라이(周恩來) 중국 총리 사이의 세기의 비밀회담 당시 미국은 박정희 대통령이 이끄는 한국 정부에 사전에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았다. 반면 저우언라이 총리는 사전에 김일성에게 “미국과 비밀회담이 진행될 것이니 요청사항이 있으면 메모로 보내달라”고 알려주었다. 당시 김일성은 주한미군 완전 철수, 미국의 남한에 대한 핵우산 제공 중단, 한·미·일 합동 군사훈련 중단을 비롯한 8개항의 메모를 보냈고, 저우언라이는 이 메모를 키신저에게 전달했다.
우리로서는 사드의 한국 배치에 대해 중국이 보여주고 있는 경제 제재와 한류 제재가 부당한 것임을 트럼프를 통해 시진핑에게 전달해야 할 입장인데 과연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이나 윤병세 외교부 장관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그런 뜻을 전했는지, 아니면 전할 예정인지 전혀 알 수 없다. 미·중 정상회담은 결코 우리가 강 건너에서 구경만 할 일이 아니라 우리가 활용해야 하는 회담인데 우리 외교당국도 과연 그렇게 판단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출처 | 주간조선 2449호
2017.04.03 홍콩의 새 통치자 캐리 람의 고민
홍콩은 1997년 7월 1일 주권이 중국에 반환됐다. 홍콩은 중국의 SAR(Special Administrative Region·특별행정구)로, 행정수반은 ‘행정장관’이라고 부른다. 올해로 주권반환 20주년을 맞는 홍콩에 제5대 행정장관이 선출됐다. 광둥(廣東)어(Cantonese) 이름은 람쳉 위에트오(林鄭月娥), 영어명은 캐리 람(Carrie Lam). 1957년 홍콩 완차이(灣仔) 출생으로, 아버지는 대륙 저장(浙江)성 출신의 노동자였다.
캐리 람은 지난 3월 26일 실시된 행정장관 선거위원회 위원 1194명이 투표하는 간접선거에서 777명(65.07%)의 지지를 얻어 5년 임기 행정장관에 당선됐다. 람은 홍콩의 중립지 명보(明報)가 3월 16~20일에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는 32.1%의 지지를 받아 2위에 머물렀다. 람은 2014년 8월에 벌어진 홍콩 시민·대학생들의 행정장관 직선제 요구 시위를 강경진압해 1000명의 구속자가 나올 당시 홍콩정청의 2인자 정무사장(政務司長)이었다. 이 일로 람은 750만 홍콩 시민들로부터는 거부감을, 베이징(北京)의 중국공산당과 정부로부터는 신임을 받게 됐다.
홍콩은 1840년 영국과 청 사이에 벌어진 아편전쟁에서 청이 패배함에 따라 영국의 조차지가 됐다. 화약을 가장 먼저 발명한 중국이지만 15~16세기 영국에서 시작한 산업혁명의 결과 과학기술에 뒤진 청의 대포는 바다에 떠 있는 영국의 전함에 가닿지 못한 반면 영국 전함이 발사한 대포는 육상의 청 연안 방어진지를 철저하게 파괴했다. 모두 두 차례의 아편전쟁에서 패배한 청은 홍콩의 주권을 영국에 넘겨주는 한편 상하이(上海)와 광저우(廣州)를 비롯한 5개의 항구를 개방항으로 열어주어야 했다.
140년이 흐른 1980년대에 대륙의 통치권을 쥐고 있던 덩샤오핑(鄧小平)은 영국의 마거릿 대처 총리와 홍콩 주권 반환협상에 나서 ‘일국양제(一國兩制·One Country Two Systems)’를 해결방안으로 제시했다. 주권을 중국에 넘겨주어 외교와 국방권을 장악하게 한 다음 50년간 자치권과 자본주의 경제권을 확보하게 해준다는 방식이었다. 홍콩의 주권은 덩샤오핑 사망 4개월 뒤인 1997년 7월 1일 중국 정부에 넘겨졌다. 중국 인민해방군은 6월 30일 밤에 영국군 국경수비대와 임무교대를 했다.
홍콩의 주권반환은 당초 영국이 희망하던 일이 아니었으나, 대륙의 작은 거인 덩샤오핑이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에게 “만약 영국이 홍콩의 주권을 약속대로 반환하지 않으면 홍콩 외곽에서 홍콩 이주를 희망하는 많은 중국인들의 홍콩 입경(入境)을 막고 있는 인민해방군의 경비를 풀어버릴 것”이라고 위협해서 대처 총리는 회담장인 베이징 인민대회당을 걸어나오다 다리가 후들려 계단에서 넘어질 뻔했던 일화를 남겼다. 인민해방군의 홍콩 외곽 경비를 풀어버릴 경우 수백만 명의 대륙 중국인들이 홍콩으로 밀려가 홍콩의 질서는 엉망이 될 것이 불을 보듯 뻔했기 때문이었다.
홍콩이 완전히 중국의 일부가 되는 것은 1997년 7월 1일부터 50년이 흐른 2047년 7월 1일부터다. 현재 세계에서도 가장 활발한 자본주의 제도의 실험장이 되고 있는 홍콩이 앞으로 30년 뒤에는 사회주의 시장경제 시스템을 채택 중인 중화인민공화국에 완전 편입된다. 현재 자본주의를 향한 제도 전환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는 중국의 경제시스템이 30년 뒤 홍콩 경제와 통합할 때 어떤 문제가 발생할 것인지는 세계사적 관심사가 될 전망이다.
중고등학교 시절 반에서 항상 1등을 하던 캐리 람은 이탈리아계의 세인트 카노시안 칼리지의 홍콩분교에 입학했다가 다시 홍콩대학으로 진학했다. 1980년에 사회과학 학사를 획득한 뒤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서 홍콩정청의 정무직 공무원이 됐다. 사회복지, 부동산 관리를 하다가 2004년 홍콩·런던 경제무역사무소 소장을 거쳐서 2012년 홍콩특구 정부의 2인자인 정무사장으로 취임했다
캐리 람은 2007년 홍콩발전국 국장에 취임한 이후 많은 시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영국 통치를 상징하는 역사적 건축물인 퀸스피어(Queen’s Pier·황후부두) 철거를 강행해서 베이징에 강한 인상을 남겼다. 2011년에는 대륙에 가까운 신계(新界·New Territory) 지역의 불법 건축물 단속을 잘해 시민들의 호응을 얻었다. 홍콩 시민·대학생들의 홍콩 행정장관 직선제 요구를 강경진압해 지지율이 하락한 전임 렁춘잉 행정장관이 지난해 12월 연임을 포기하자 지난 1월 정무사장을 사퇴하고 행정장관에 출마해서 사상 첫 여성 행정장관에 선출됐다.
캐리 람은 27세이던 1984년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연수 중에 이 대학 수학박사인 중국인 람시우포(林兆波)와 만나 결혼했다. 남편 람은 홍콩중문대학에서 교수를 지내다 은퇴 후 국적지인 영국으로 갔으나 베이징 사범대학에 자리를 얻어 현재 재직 중이다. 남편과 두 아들은 모두 국적이 영국이지만 캐리 람은 중국 국적이다. 큰아들은 2016년 4월부터 베이징의 자동차 회사에 다니고 있다. 남편 람 교수는 부인 캐리 람의 홍콩 통치에는 일절 간여하지 않을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영국의 식민지로 150년을 지낸 홍콩인들의 아이덴티티는 36년간 일본 식민지를 지낸 우리 국민들과는 사뭇 다르다. 우리에게 일본은 의심할 길이 없는 제국주의자였지만, 홍콩인들에게는 영국이나 만다린(Mandarin·대륙의 표준 중국어)을 구사하는 중국이나 다 같은 지배자로 인식됐다. 오히려 자본주의 경제와 자유로운 입법활동을 보장해주던 영국이 홍콩인들에게는 더욱 지지를 받는 형편이다. 영국에서 귀족들이 총독으로 파견되던 시절에도 홍콩 총독들은 아침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시장통으로 경호원 없이 조깅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2014년 8월 홍콩 시민·대학생들의 행정장관 직선제 요구시위는 앞으로 캐리 람 행정장관에게 홍콩의 정치 분위기를 보다 민주적으로 이끌어야 할 필요성을 제기해주고 있다. 캐리 람은 그러면서도 베이징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 어려운 처지가 될 것이다. 홍콩 최대의 반(反)중국 영자지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가 최근 마윈의 알리바바에 인수되면서 여론의 독립성도 의문시되고 있는 분위기이다.
2451호
04.10 트럼프의 ‘미국 우선’ vs 시진핑의 ‘중국 꿈’
고촉통 전 싱가포르 총리는 지난해 5월 우리 외교부가 제주도에서 개최한 제주평화포럼에 참석해서 중국을 ‘수영장 안에 뛰어들어온 코끼리’에 비유한 일이 있다. “중국은 수영장에서 수영하고 있는 작은 아세안 멤버들 사이에 뛰어들어온 큰 코끼리와 같은 존재다. 수영장이 크지 않기 때문에 조심해야 하는데, 중국이 지나치게 자기 주장을 펼치면 다른 아세안 국가들의 자유가 억제될 수 있다.”
생각해 보면 동북아시아나 동남아시아에서 중국은 최근에 새로 뛰어들어온 코끼리로 볼 수 있다. 근대 이후에 동북아시아와 동남아시아라는 풀장에 중국보다 먼저 뛰어들어온 코끼리는 미국이라고 볼 수 있다. 19세기 말까지 세계 최강의 국가는 영국이었지만, 1900년 동아시아에서 미국과 유럽이 각축하는 사이에 세계 최강의 국가가 영국에서 미국으로 바뀌었다. 동북아시아에 위치한 우리나 동남아시아에 있는 싱가포르나 미국과 중국이라는 두 마리의 코끼리가 서로 다투지 않고 조용히 지내야 수영장 안의 안전이 보장된다는 점에서 어쨌든 미국과 중국이 서로 조용히 지내도록 하는 지혜를 찾아내야 하는 처지다.
미국과 중국이라는 두 마리의 코끼리는 현재 어느 정도의 경제적인 덩치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세계은행(World Bank)이 조사한 자료를 보면 미국의 GDP가 전 세계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15년 말 현재 24.7% 정도다. 미국의 GDP를 현재 달러 가격으로 계산하면 18.375조달러, 전 세계 GDP의 총계는 74.152조달러 정도다. 이에 비해 중국의 GDP가 전 세계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15년 말 현재 14.8%, 중국의 GDP는 11.008조달러 정도다. 이에 비해 한국의 GDP가 전 세계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15년 말 현재 1.8% 정도에 불과하다. 과거 미국에 이어 세계 ...
04.27 중국인 눈에 비친 ‘전쟁을 두려워하는 한국’
중국 공산주의청년단(共靑團) 기관지 ‘중국청년보’는 지난 4월 19일 ‘미국이 위세를 가하자 왜 한국이 공황상태에 빠지고, 조선은 조용한가’라는 제목의 논평을 실었다. 필자는 저장(浙江)대학 한국연구소 객원연구원 겸 사회과학원 조선반도 문제 전문가 리둔추(李敦球).
“조선반도(한반도)에 긴장이 높아가고 있는 상황에서 재미있는 것은 미국의 전략 역량이 조선(북한)에 대한 무력공격 태세를 갖추자 조선은 기이하게도 조용한데 한국 사회에 공황상태가 나타난 점이다. 한국에서는 전쟁을 걱정하는 논의가 분분한 가운데 조준혁 외교부 대변인은 4월 11일 기자들에게 ‘미국은 우리와 의논 없이 새로운 정책이나 조치를 취하지 않기로 분명히 약속했다’고 말했다.”
리둔추는 서울에서 발행되는 한 신문이 ‘미국이 과거에도 북한에 대한 무력공격 위협을 했지만 실제로 행동에 옮기지는 못했으며, 현재 트럼프의 북한에 대한 위세도 한국의 동의 없이는 실제 무력공격을 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는 글을 실었다고 소개했다. 그는 또 4월 13일 SBS와 기자협회가 공동 주관한 5대 정당 대선후보 토론회에 나온 후보들이 미국의 북한에 대한 선제공격에 대한 대책을 묻는 질문에 “미국이 북한을 선제공격하지 못하도록 할 방지책이 필요하다”는 답을 했다고 전했다. 리둔추는 “한국은 평상시에는 조선에 대해 강경한 말을 쏟아놓으면서도 실제로 전쟁위기가 닥치자 막상 무서워하는 것은 한국 측”이라고 비꼬았다.
그에 따르면 북한의 반응은 한국과는 상반되는 것이었다. 모든 일상이 정상으로 돌아가는 가운데 생산활동도 정상이었고, 거리의 질서는 정연했으며, 지도층은 각종 활동에 공개적으로 참석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한성렬 외무성 부상은 AP통신과 인터뷰를 통해 “만약 미국이 선제공격을 가해 올 경우 평양도 팔짱을 낀 채 죽음을 기다리지는 않을 것”이라며 40분간의 인터뷰 내내 평온하고 안정된 자세를 보여주었다고 리둔추는 전했다.
평소에도 한국에 대해서는 비판적이면서 북한을 옹호하는 글을 자주 쓰는 리둔추가 아니더라도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의 한국 배치를 계기로 1992년 한·중수교가 이뤄진 이래 중국에서는 요즘 ‘한국 때리기’가 유행병처럼 번져가고 있다. 지난해 5월에는 한류 드라마 ‘태양의 후예’에 그려진 한국군의 모습이 실제 한국군의 모습인가를 놓고 중국 네티즌들 사이에 한바탕 댓글 달기 사태가 빚어지기도 했다.
“드라마 ‘태양의 후예’의 남자주인공 유시진이 진정 한국군의 모습인가. 중국 관중들의 이 문제에 대한 인식은 분열되어 있다. 노령의 중국인들 마음속에 그려져 있는 한국 군대의 모습은 1960년대 문화대혁명 기간의 혁명모범극 ‘기습 백호단(白虎團)’에서 나온 이승만 군대의 모습이다. 조선전쟁 기간 중 한국군은 우리 인민지원군의 공격에 ‘낙화유수(落花流水)’처럼 나가떨어지는 모습이었다. 그러던 것이 요즘 젊은 한류 팬들에게는 한국군의 형상이 과장되게 그려지고 있다고 할 것이다.”
문화대혁명 기간 중의 혁명모범극 ‘기습 백호단’이란 6·25전쟁에서 한국군 전투부대 중 개전 후 28개월 동안 한 번도 패배하지 않을 정도로 가장 잘 싸우던 백호부대를, 자기네들의 영웅적 군인 양위차이(楊育才)가 소규모 분대를 이끌고 후방기습을 통해 완전히 무너뜨린 영웅담을 그린 것이다. 미군이 한국군 부대 가운데 ‘킹카드(King Card)’로 부르던 백호부대를 인민지원군이 ‘상가견(喪家犬·상갓집 개)’처럼 만들었다는 연극이다.
1950년 6월 25일 전쟁 발발 이후 4개월 만인 10월 25일 압록강을 건너 한반도에 침입한 ‘중공군’들 앞에 나타난 한국 군인들의 모습은 한심한 상태였던 것으로 그려져 있다. 군사 전문가들이 만든 블로그 ‘사해연운(史海烟云)’에 소개된 한국전쟁 당시 한국 군대의 모습은 전쟁을 할 수 없는 군대의 모습이었다.
“한국군 병사들은 우선 나이가 어린 데다가 대부분 열흘 정도의 훈련을 받고 전선에 투입된 터라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군대가 아니었다. 전쟁 후반으로 가면서 나아지기는 했지만 고급 장교라고 해야 30세 안팎의 나이였고, 상관의 명령 없이는 지뢰밭을 반 걸음도 움직이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그런 데다가 ‘체면’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어 장교들도 자신들의 체면을 깎아내릴 보고는 기피하는 경향이 있어서 전투에 나쁜 영향을 끼치기 일쑤였다.”
게다가 한국군 부대는 당시 이승만 정부의 경제 사정을 반영하듯 급식 수준이 형편없어서 대부분 소금물에 절인 콩나물이 반찬의 전부였고 짠지는 물론 고추도 없어서 미군에 포로로 붙잡힌 중공군 병사들보다 못한 식사를 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을 보게 된 밴플리트 미 8군 사령관이 한국 정부에 직접 건의를 해서 나중에 일본으로부터 된장에 절인 반찬과 절인 생선, 육류 통조림을 사오게 된 것으로 중공군 참전군인들은 기억하고 있다고 중국 군사 전문가 블로그는 묘사하고 있다.
우리는 6·25 전쟁 당시 “중공군이 양잿물을 탄 물을 마시고 취해 인해전술로 밀어붙이는 바람에 미군과 우리 한국군의 기관총 탄환이 떨어져 후퇴해야 할 지경이었다”고 기억하고 있으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중국 측 사진 기록에 남아 있는 중공군들의 옷차림은 솜을 넣은 방한복을 잘 차려입은 모습인 데다가 영양상태도 우리 국군보다 나았던 것으로 보인다.
되돌아보면 612년의 살수대첩과 645년의 안시성전투에서 중국대륙에서 침공해온 군대를 격퇴시킨 고구려와 1010년 거란의 침략을 막아낸 강감찬 장군이 이끄는 고려군의 영웅적 전투 이후에는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승전보는 없는 것이 우리의 딱한 전쟁사다.
지금도 중국이 사드의 한국 배치를 반대한다며 우리의 주권을 무시하는 농단을 해도 아무런 대책이 없는 것이 우리 정부의 모습이다. 그런 가운데 대통령 후보들은 하나같이 “미국이 북한을 선제타격하려고 하면 미국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중단시킬 것”이라는 말도 안 되는 안보관을 말하고 있으니, 중국의 한국 전문가들에게 실소(失笑) 대상이 되는 것도 당연하지 않을까. 정말 이래도 괜찮은 것일까.
주간조선 2454호
05.04 중국의 첫 국산 항모의 이름이 ‘산둥호’인 이유는?

▲ 중국 최초 국산 항공모함 산둥호(가칭) 진수식. photo 신화·연합
중국 해군이 지난 4월 26일 오전 9시 랴오닝(遼寧)성 다롄(大連)항에서 최초의 국산 항모 ‘산둥(山東)호’(가칭) 진수식을 가졌다. 진수식은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 판창룽(范長龍) 상장(우리의 대장에 해당)과 인민해방군 해군사령관 선진룽(沈金龍) 중장이 주재했다. 산둥호는 앞으로 전자장비 버그(bug) 바로잡기 작업을 거쳐 내년 12월 말쯤 작전에 투입될 예정이다.
미 랜드(RAND)연구소의 중국군사문제 전문가 마이클 체이스를 비롯한 미군 전문가들에 따르면, 산둥호는 중국이 1998년 우크라이나에서 수입한 5만5000t급(표준배수량) 항모 랴오닝호보다 체적이 다소 적은 5만t급이다. 구소련의 쿠즈네초프급 디자인으로, 핵 추진이 아닌 석유스팀터빈 방식의 항모다. 중국 관영 CCTV의 4월 26일 다롄 현지발 보도에 따르면, 산둥호는 랴오닝호에 비해 체적은 다소 적지만 갑판 위의 함도(艦島·Island) 구조물이 차지하는 넓이를 대폭 줄여 러시아제 전투기 수호이(Su)-33의 중국판 J-15를 36대까지 탑재할 수 있는 갑판 넓이를 확보했다고 한다. 그러나 미국의 중국군사 전문가들은 산둥호가 24대의 J-15 함재기를 탑재할 수 있다고 추정했다.
산둥호는 랴오닝호와 마찬가지로 갑판의 선수(船首) 부분이 위쪽으로 경사져 있는 이른바 ‘스키 점프대 스타일’의 활주로를 갖고 있다. 갑판 앞부분이 평평한 미군 항모들에 비해 함재기에 연료와 폭탄을 많이 실을 수 없다. 산둥호가 진수식을 가지는 시간에 한반도에 근접한 미 항모 칼빈슨호는 배수량 10만t의 니미츠급 항모로 85~90대의 함재기를 탑재할 수 있다. 중국 관영 매체들도 “산둥호로는 칼빈슨호를 대적하기엔 역부족”이라고 보도했다. 미 해군이 건조 중인 최신예 포드급 항모에 많이 못 미치는 2급 항모라는 평가도 솔직하게 내리고 있다.
최초의 국산 항모를 진수한 중국 해군은 미국과 경쟁하는 해군력을 보유하기 위한 첫걸음을 내디딘 셈이다. 중국 해군은 현재 상하이(上海)에서 세 번째 항모를 건조 중이며, 오는 2020년까지 265~270척의 전함과 잠수함, 병참함을 보유할 계획을 착착 실행에 옮기고 있다. 현재 미 해군이 보유 중인 275척의 전함과 잠수함 등에는 모두 10척의 항모와 62척의 구축함, 75척의 잠수함이 포함돼 있다. 산둥호의 건조로 2척의 항모를 작전운용할 예정인 중국 해군은 32척의 구축함과 68척의 잠수함을 보유하고 있다. 미 해군 장병의 숫자는 32만3000명이고, 중국 해군은 23만5000명의 장병을 보유하고 있다.
산둥호 진수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해군력은 아직 미군에 맞서기에는 역부족이다. 하지만 앞으로 미 해군이 독무대를 이루던 동아시아 해역과 인도 해군이 지배하던 인도양에서 힘의 균형을 깨뜨릴 전망이다. 이미 지난해부터 작전에 투입된 랴오닝호와 내년 말 작전에 투입될 산둥호, 현재 상하이에서 건조 중인 세 번째 항모의 건조로 중국 해군력은 일본과 인도를 제치고 동아시아와 남아시아에서 제해권(制海權)을 장악할 것으로 예상된다.
중국이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한 것은 1894년 7월 25일 인천 앞바다 풍도에서 개전한 청일전쟁에서 패했기 때문이었다. 1895년 4월 17일 일본 시모노세키(下關)에서 청의 북양대신 리훙장(李鴻章)과 일본 내각총리대신 이토 히로부미 사이에 체결된 종전조약의 제1조는 “청은 조선이 완전무결한 독립국임을 인정하며, 이 조약 체결 이전에 조선이 청에 대해 시행하던 전례(典禮·조공을 뜻함)는 더 이상 시행하지 않는다”라는 구절로 돼 있었다. 그러니까 ‘이 조약 체결 이전에 조선은 청에 대해 완전무결한 독립국이 아니었다’는 표현을 사용한 셈인데, 조선이 청에 연례행사로 제공하던 조공은 시모노세키조약 체결 이후 역사에서 사라졌다. 청은 일본과의 전쟁에서 패해 체결된 시모노세키조약 결과 대만도 일본에 식민지로 넘겨줬고, 랴오둥(遼東)반도 일부를 포함한 7개 지역을 조차지로 제공했다. 2300년 중국 역사에서 중국의 대륙세력이 ‘남만(南蠻) 오랑캐 왜(倭)’라고 부르던 바다 건너 일본에 패해 중국땅을 할양한 첫 번째 역사였다.
지난 4월 6~7일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소유의 마라라고 골프리조트에서 진행된 트럼프·시진핑(習近平) 정상회담에서 “시진핑이 한반도가 한때 중국의 일부였다(Korea actually used to be a part of China)고 하더라”라고 트럼프가 전한 말이 우리의 속을 긁어놓았다. 실제로 시진핑이 그렇게 말했다면 시진핑이 중화주의에 젖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고, 트럼프가 잘못 전했다면 미 대통령으로서 무식한 것이라고 부아를 터뜨렸다.
우리는 시진핑의 중화주의와 트럼프의 무식함을 탓하기 이전에 시모노세키조약의 제1조를 되돌아볼 줄 알아야 한다. 시모노세키조약 10년 뒤인 1905년에 일본 도쿄(東京)에서 일본 내각총리대신 가쓰라 다로(桂太郞)와 미 육군장관 윌리엄 태프트(Taft) 사이에 체결된 밀약도 되씹어봐야 한다. 이른바 ‘가쓰라·태프트 메모’의 형태로 남아 있는 이 밀약에서 미국과 일본은 각각 필리핀과 한반도에 대한 서로의 배타적 지배권을 인정했다는 점을 우리는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당시 러일전쟁에서도 승리한 일본은 1905년 미 포츠머스 항구에서 미국이 지켜보는 가운데 러시아와 종전조약을 체결했는데 그 조약의 제2조가 “일본은 한반도에서 정치·경제적으로 배타적인 권리를 갖는다”는 것이었다.
중국 네티즌들이 중국의 첫 국산 항모의 이름을 ‘산둥호’로 짓자고 많은 댓글을 단 데에는 산둥성 웨이하이에서 1895년 일본에 당한 패배를 씻어보자는 뜻이 깔려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중국의 첫 항모 진수에서 122년 전에 일본에 뺏긴 동아시아의 패권을 되찾겠다는 시진핑 중국 지도부의 야망을 우리는 읽어야 한다. 중국의 군사력에 대한 최소한의 BOP(Balance of Power·힘의 균형)라도 갖추자는 논의는커녕, 미군의 사드(THAAD) 한반도 배치에 대한 중국의 간섭에도 우리 대선후보들이 찬반으로 나뉘어 왈가왈부 토론을 벌이고 있는 우리의 현실에 슬프다는 말을 안 할 수 없다.
출처 | 주간조선 2455호
05.08 시진핑의 새 수도 건설에 숨은 전략
중국공산당 중앙과 국무원은 지난 4월 1일 이런 발표를 했다. “시진핑(習近平) 동지를 핵심으로 하는 중국공산당 중앙은 중대한 역사적 전략을 선택했으며, 이는 (1980년의) 선전(深圳) 경제특구 건설과 (1990년의) 상하이(上海) 푸둥(浦東)신구(新區) 건설에 비교될 만한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는 계획으로, 천년대계(千年大計)의 국가대사(國家大事)라 할 수 있다.”
중국공산당의 발표는 현재의 수도 베이징(北京)에서 직선거리로 100㎞ 남서쪽에 떨어져 있는 허베이(河北)성 슝현(雄縣), 안현(安縣), 룽현(容縣) 일원의 2000㎢ 지역에 베이징의 ‘도시병’을 극복할 수 있는 초현대적 도시를 하나 건설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슝안(雄安)신구(新區)’로 명명된 이 새로운 수도는 시진핑 당 총서기가 “천년대계 국가대사”라고 그 의미를 부여한 바 있다. 단순히 이 지역에 새로운 베이징의 부도심을 건설하는 것이 아니라 베이징과 150㎞ 떨어진 곳에 위치한 톈진(天津), 그리고 중국공산당이 국민당과의 내전에서 승리를 선언한 바오딩(保定)시가 이루는 정삼각형의 중앙에 인구 2500만명의 베이징이 현재 안고 있는 단점을 극복한 환경친화적이고 첨단 IT시설을 갖춘 새로운 수도를 건설한다는 포부다.
중국의 빠른 경제발전이 시작된 1980년 ‘개혁 개방의 총설계사’ 덩샤오핑(鄧小平)은 ‘자본주의의 꽃’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던 홍콩 바로 옆 인구 3만의 조그만 어촌인 선전에 ‘경제특구(經濟特區)를 건설하라’는 명령을 당과 정부에 내렸다. 1949년에서 시작해서 1976년까지 계속된 마오쩌둥(毛澤東)의 사회주의 계획경제에 시장경제를 이식시키기 위해서는 연안지역에 자본주의식 경제운용이 허용된 특별경제구역이 필요하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덩샤오핑은 포르투갈 식민지 마카오 바로 옆에는 주하이(珠海) 경제특구를, 대만섬 건너편에는 샤먼(廈門)과 산터우(汕頭) 경제특구를 건설해서 각각의 교과서(홍콩, 마카오, 대만)를 학습할 것을 촉구했다. 경제특구로 지정된 도시들에는 철조망을 둘러치고, 여권에 해당하는 출입증을 소지한 사람들만 통과할 수 있도록 했다. 중국 남부의 경제특구들은 이후 놀라운 발전속도를 과시하며 중국의 경제발전을 선도하는 도시의 역할을 했다.
덩샤오핑은 다시 1990년에는 당 총서기 장쩌민(江澤民)에게 상하이 남북을 가로지르며 흐르는 황푸강(黃浦江) 동쪽 지역 미개발지에 세계 최고의 고층빌딩군을 건설하도록 지시했다. “6500㎞ 장강(長江)이 바다와 만나는 상하이에 ‘용의 머리(龍頭)’를 건설하라”는 것이었다. 푸둥 지역은 1992년에 개발을 시작해서 현재는 중국의 빠른 경제발전을 상징하는 지역으로 자리 잡았다. 전 세계 투자자들이 상하이 푸둥의 고층빌딩군을 보고 중국에 투자를 해서 푸둥 지역은 외국의 FDI(Foreign Direct Investment·외국인직접투자)를 끌어들이는 쇼룸 역할을 하고 있다. 시진핑 현 당 총서기가 슝안신구 발전계획을 발표하면서 “선전특구와 푸둥신구에 비교될 만한”이라고 언급한 것은 슝안신구에 건설될 베이징의 새로운 부도심이 부도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사실상 새로운 수도가 될 것임을 의미한다.
그러나 5월 2일 중국 관영 CCTV의 심층 보도프로그램 ‘초점방담(焦點放談)’이 상세하면서도 화려하게 보도한 슝안신구 건설 계획 추진과정에는 톈진시 당서기 출신 장가오리(張高麗) 정치국 상무위원과 쉬쾅디(徐匡迪) 전 상하이 시장의 얼굴만 보일 뿐 정작 보여야 할 리커창(李克强) 총리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지난 3월 5일 전국인민대표대회 개막식 당일에도 시진핑 총서기는 바로 뒤따라 입장해서 왼편에 자리 잡고 앉은 리커창 총리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고 귀엣말 한 번 하지 않았다. 올해 초 스위스 다보스포럼에도 으레 그러하듯 경제 조타수인 리커창 총리를 참석시키지 않고 국가주석인 시진핑 본인이 참석하는 모습을 과시했다. 아직 그 내막이 알려지지 않고 있지만 시진핑은 새로운 수도 건설에서도 리커창 총리를 배제할 심산인 것으로 보인다. CCTV와 인민일보를 비롯한 관영 매체들은 새로운 수도의 건설이 어디까지나 시진핑 동지가 2013년 취임 직후부터 구상해온 웅대한 계획이라는 점에 방점을 찍어 강조하고 있다.
허베이성 슝안신구에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려는 계획은 현재 추진 중인 베이징-톈진-허베이성 세 지역을 이어 붙여 메가로폴리스를 건설 중인, 이른바 징진지(京津冀) 프로젝트와 맞물려 더욱 원대한 수도권 개발계획으로 발전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앞으로 베이징을 비롯한 3개 도시의 산업군을 합해 거대한 산업클러스터(Industrial Cluster)로 발전시킨다는 것이 시진핑을 핵심으로 한 중국 지도자들의 구상이다. 슝안신구는 이 징진지 산업클러스터와 조금 떨어진 쾌적한 행정도시를 건설한다는 구상이다.
앞으로 징진지 산업클러스터가 자리 잡을 경우 전 세계가 20~30개 정도의 산업클러스터로 재편될 때 동북아시아의 중심 클러스터가 될 전망이다. 일본에도 1~2개의 산업클러스터가 자리 잡을 전망인데 만약 우리가 수도권을 산업클러스터로 제대로 육성하지 못한다면 우리 경제는 징진지 클러스터에 흡수될 가능성마저 따져봐야 할 형편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 경제에 지금 필요한 것은 분배 위주의 복지 정책이 아니라 획기적 성장 전략이다. 인구도 줄어들고 있는 마당에 한반도 남쪽에 산업클러스터 하나 자리 잡지 못할 경우 우리는 자연스레 중국 징진지 클러스터의 일부로 흡수될 가능성마저 예견되고 있는 형편이다.
우리 정치 지도자들은 북한과 중국에 맞서 ‘BOP(힘의 균형)’를 맞추는 노력도 해야 하지만, 경제적으로도 점차 거대한 몸집의 산업클러스터로 변화해가고 있는 징진지 지역의 발전에 맞설 만한 산업클러스터를 우리 수도권에 건설해야 한다는 화두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지 않을 경우 머지않은 장래에 서울에서 원화보다는 위안화가 더 활발하게 유통되는 날이 올지도 모를 일이다.
[2456호]
05.15 中 관영매체들이 쏟아낸 ‘문재인 일가의 흥남철수’
“새로 한국 대통령으로 당선된 문재인은 1953년 1월 24일 한국 동남부의 경상남도 거제도 출생이다. 하지만 문재인의 부친과 그 조상들은 조선(북한) 경내의 함경남도 흥남에 살던 사람들이다. 원래 조선 사람이어야 할 문재인이 어떻게 해서 한국의 대통령이 됐을까. 여기서 우리는 60여년 전의 조선전쟁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항미원조(抗美援朝·‘조선을 도와 미국에 대항하다’라는 뜻으로 중국의 한국전쟁에 대한 공식 표현)전쟁 사상 중국지원군이 최초로 거두었던 미군 섬멸 작전 성공의 장진호전투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문재인 대통령의 당선이 확정된 5월 10일 중국의 관영매체들은 1950년 11월 27일부터 12월 13일 사이에 벌어진 한·미군과 중국군 간의 장진호전투와 흥남철수에 관해 온·오프라인 기사들을 쏟아냈다. ‘문재인 일가는 전쟁으로 조선을 탈출한 사람들… 가난한 집 아들이 한국의 대통령이 되다…’ ‘끝없는 시체들의 행렬… 반세기 전의 광란의 부산행…’ ‘영화 국제시장…’ ‘한국인들이 본 장진호전투의 기억…’. 기사에는 이런 제목들이 달렸다. 문재인 대통령의 당선을 계기로 중국 관영매체들은 중국 측이 기록한 장진호전투의 상황과 흥남철수 상황을 공개했다. 다음은 중국 측 시각으로 본 장진호전투와 흥남철수 상황이다.
‘1950년 11월 27일 흰 눈이 뒤덮인 개마고원 위를 북풍이 몰아치는 가운데 중국인민지원군 제9병단(兵團)이 장진호 일대에 포진해 있던 미군 제10군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을 단행했다. 이 병단에는 중국군 제20군단, 26군단, 27군단 소속 12개 사단 15만명이 배속돼 있었다. 장진호 부근에서 벌어진 17일간의 격전 끝에 중국과 조선 합동군은 미군 제10군과 한국군 연합부대를 흥남 부근으로 밀어붙일 수 있었고, 한·미 연합군은 장진호에서 120㎞ 거리에 있는 흥남항에 교두보를 만들고 해상철수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 극동해군은 300여척의 함정을 흥남 앞바다에 집결시켰다. 미군 제10군의 철수를 지원하기 위해 미군은 흥남항 주변에 육·해·공 입체 화망(火網)을 만들어 병사들의 승선을 엄호했다. 당시 흥남항에는 식품과 비누, 식용유, 커피, 주스 등이 400m 길이로 산적해 있었다. 미군 병사들과 항구 노동자들은 하루 종일 샌드위치와 돼지고기캔, 과일주스를 먹는 모습이 보고됐다. 한쪽에서는 조선 부녀자들이 50파운드(약 25㎏)와 100파운드(약 50㎏)짜리 푸대에 든 쌀과 밀가루를 어깨나 머리에 이고 운반하는 모습이었다. 12월 23일까지 흥남부두에서는 미군 10만5000명과 피란민 9만1000명, 차량 1만7500대, 화물 35만t이 배에 실려 한국 남부 부산으로 해상 대철수를 했다.’
장진호전투에서 미군이 중국군에 패배한 이유에 대해 중국 매체들은 북풍이 몰고 온 영하 30도 이하의 강추위가 중요한 원인이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미 언론인 데이비드 핼버스탬(Halberstam)이 2007년에 출간한 ‘가장 추웠던 겨울, 미국과 한국 전쟁(The Coldest Winter; America and Korean War)’과 미군의 한국전쟁 기록 영상물들에 따르면, 당시 장진호 부근에는 역사상 기록적인 영하 41도의 추위가 몰아쳤다. 이로 인해 탱크와 기관총, 대포 등 미군이 우위를 차지하는 장비들의 윤활유가 얼어붙어 가동이 제대로 되지 않는 바람에 미군들은 이른바 ‘흥남으로 철수작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국 관영매체들은 “당시 장진호에서 흥남에 이르는 120㎞ 철수로 길 옆에는 미군 동사자들의 시신이 가득해 ‘죽음의 도로’로 불리었다”고 전했다.
중국 관영매체들은 문재인 일가가 흥남 철수선을 타고 부산으로 피란한 데 대해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두 가지 제도에 대한 인식이 있었던 것은 아닌 듯하고, 일반 백성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가능한 멀리 전쟁터에서 벗어나는 일이었다. 어쨌든 살아남을 방법을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문재인 일가의 탈출도 그런 시대 배경 아래서 보통 백성들이 보여준 모습의 하나일 뿐이며, 조선전쟁은 조선민족 전체의 비극이었다”고 묘사하기도 했다. 1950년 12월 흥남 철수선을 타고 부산으로 온 문재인 부모는 그로부터 1년2개월 만인 1953년 1월 24일 거제도에서 장남 문재인을 출산했다. 두 살 위 누나와 두 여동생, 남동생 등 다섯 자녀의 피란민 가정은 가난할 수밖에 없었다.
1950년 12월 24일 2척의 순양함과 7척의 구축함, 3척의 미사일 발사함으로 구성된 미군은 모두 3만4000발의 포탄과 1만2800기의 미사일을 흥남항에 퍼붓고 500개의 1000파운드급 폭약을 폭발시켜 흥남항 미군과 피란민들의 철수를 엄호했다. 그날 흥남항 곳곳에서는 시커먼 버섯구름이 솟아올랐다. 미군의 의도는 중국군이 흥남항에서 어떤 것도 활용할 수 없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중국 관영매체들은 기록했다.
그런 난리통에 흥남 철수선을 타고 거제도로 온 문재인 대통령의 부모는 장남 문재인에게 흥남철수 때의 그 모진 추위와 미군 함정 위에서 겪은 일들을 반복해서 들려주었을 것이다. 한국전쟁 당시의 어떤 피란민들보다도 흥남항과 장진호 일원의 그 혹독하게 추웠던 겨울의 기억은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부두에~’로 시작하는 노래를 들으면 더 절절했을 것이다. 그런 흥남철수의 쓰라린 기억을 들으며 자란 문재인 대통령에게는 한반도의 분단과 한국전쟁의 쓰라린 기억이 누구보다도 절절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문 대통령이 한반도의 핵위기 해소와 평화로운 남북관계 구축를 위해 의미 있는 진전을 임기 중에 이룰 것으로 기대해 본다.
장진호전투에서 중국군에 쓰라린 패배를 당한 미국은 67년 만인 지난 5월 4일 미 버지니아주 콴티코 해군기지에서 장진호전투 기념비를 제막했다. 미군의 입장에서는 장진호전투가 ‘중국군의 포위망을 뚫고 무사히 흥남에 도착해서 10만에 가까운 피란민들을 한반도 남쪽으로 이동시킨 성공적인 전투’였던 것으로 미군 전쟁사에 기록돼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문재인 신임 대통령의 부모가 겪었을 그해 겨울 흥남부두의 혹독한 추위와 피란생활의 고달픔이 다시는 한반도에서 재현되지 않도록 문 대통령이 잘해나갈 것으로 기대해 본다.
2457호
05.25 중국 시진핑의 현대판 우공이산 ‘일대일로(一帶一路)’
지난 5월 14~15일 이틀간 베이징에서 열린 ‘일대일로(一帶一路·One Belt One Road) 정상회의’에는 모두 29개 국가의 대통령과 총리, 국가원수가 참가했다. 또 130개 국가의 대표단과 70개 국제조직의 대표들 1500여명이 참석했다. 15일 오전 10시 베이징 시내에서 북쪽으로 50㎞쯤 떨어진 곳에 있는 화이러우(懷柔) 지역 옌치후(雁栖湖) 국제회의센터에서는 29개국 정상들이 거대한 원탁에 앉은 가운데 포럼 개막식이 열렸다. 29개국 국가 정상들 명단을 중국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가 나열한 순서대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아르헨티나 마커리 대통령, 칠레 바첼레트 대통령, 체코 제만 대통령, 인도네시아 조코위 대통령, 카자흐스탄 나자르바예프 대통령, 케냐 케냐타 대통령, 키르키스스탄 아탐바예프 대통령, 라오스 분냥 대통령, 필리핀 두테르테 대통령, 러시아 푸틴 대통령, 스위스 로이타르트 대통령, 터키 에르도안 대통령, 우즈베키스탄 미르지요예프 대통령, 베트남 쯔엉떤상 국가주석, 캄보디아 훈센 총리, 아제르바이잔 라시자데 총리, 에티오피아 하이얼마리암 총리, 피지 바이니마라마 총리, 그리스 치프라스 총리, 헝가리 오르반 총리, 이탈리아 마타렐라 대통령, 말레이시아 나지브 총리, 몽골 에르덴바트 총리, 파키스탄 샤리프 총리, 폴란드 카친스키 총리, 세르비아 부치치 총리, 스페인 라호이 총리, 스리랑카 위크레메싱게 총리, 아프가니스탄 카르자이 대통령.’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마치 과거 중국 봉건왕조의 천자가 지방 제후들의 알현을 받는 것처럼 회의장 밖에 미리 도착해서 대기해 있다가 한 사람씩 입장하는 각국 수뇌들과 차례차례 악수를 했다. 이들 29개국 수뇌들은 모두 만만찮은 국력을 지닌 나라의 대표들이다.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 김용 세계은행 행장, 라 가르드 IMF 총재를 포함한 국제조직 대표들도 마찬가지 방식으로 한 사람씩 입장해서 알현하듯 시진핑 주석과 악수했다.
중국이 많은 국가의 수뇌들을 불러모아 회의장 밖에 미리 와서 대기하게 하고 중국 국가주석이 회의장 안에서 기다리다가 마치 제후들을 맞는 천자처럼 한 사람씩 악수로 맞이하는 광경은 지난 2008년 8월에 열린 베이징올림픽 때부터다. 8월8일 밤 8시에 개막한 베이징올림픽 식전행사가 열린 베이징 북쪽의 냐오차오(鳥巢·Bird Nest) 경기장 안은 수많은 관중이 몰린 데다 경기장 덮개가 열 확산을 차단해 40도가 넘는 더위였다. 당시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주석과 장쩌민(江澤民) 전 주석을 포함한 중국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들은 본부석 가운데 커다란 책상에 앉아 잘 나오는 에어컨 공기를 즐긴 반면 조지 부시 미 대통령과 이명박 한국 대통령,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김영남 북한 최고인민회의 의장을 포함한 수십 개국의 국가정상들은 관중석과 다를 것이 없는 의자에 앉아 땀을 뻘뻘 흘려야 했다. 그 뒤로도 중국에서 열리는 APEC 회의나 G20 정상회의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연출됐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마치 국제사회에서 천자급의 ‘갑(甲)’인 것처럼 행동할 것이 뻔한데도 이번 일대일로 국가정상 포럼에 참석한 29개국 국가정상들이 기꺼이 ‘을(乙)’이 되기로 자청한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갈수록 커져가는 중국의 경제력 때문이다. 세계은행 통계에 따르면 중국의 GDP 규모는 2014년 말 현재 10조3511억달러 규모로 미국에 이어 세계 2위다. 중국의 GDP 규모는 앞으로 8년 뒤인 2025년에는 20조달러 규모를 넘어설 것으로 전망되고 있으며, 시진핑이 ‘중국의 꿈(中國夢·China Dream)’을 이루겠다고 장담하는 2050년이면 중국의 GDP가 미국의 GDP 규모를 넘어서 세계 1위로 올라설 것이라고 전 세계의 많은 경제학자들이 전망하고 있다. 국익을 위해 을(乙)의 입장을 감수하기로 한 29개국 국가원수들이 거대한 하나의 원탁에 앉아 경청하는 가운데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다음과 같은 개막사를 했다. “고대의 실크로드를 다시 열겠다고 하는 이유는 이 실크로드 주위의 각국들에 교류의 새로운 창구를 열어주기 위해서입니다.… 앞으로 일대일로 사업에는 전 세계 100여개 국가가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시진핑 주석은 개막연설에서 “지난 2014년에서 지난해 말까지 중국은 일대일로 주변 국가들과 이미 500억달러가 넘는 투자 계약을 체결했으며, 중국 기업들은 실크로드 주변 국가들 20여개국에 이미 56개 경제협력지역을 만들어 해당 국가들에 11억달러의 세수를 올려주고, 18만개가 넘는 일자리를 만들어냈다”고도 밝혔다. 또 관영 신화통신에 따르면 이번 일대일로 국가정상 포럼 기간 동안 중국 정부는 참석한 각국 대표들과 모두 76개 큰 항목에서 270개 항의 경제협력 사업 추진에 대한 계약을 체결했다고 한다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틀에 갇혀 있던 중국 경제에 발전의 불을 붙인 것은 1980년 시작된 덩샤오핑(鄧小平)의 개혁개방 정책이었다. 덩샤오핑은 개혁개방과 함께 “가난이 사회주의는 아니다” “사회주의도 시장경제를 할 수 있다” “누구든 먼저 부자가 되어야 한다”는 구호들로 경제발전을 독려했다. 1904년생인 덩샤오핑은 1997년 93세로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정책은 사후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변함없이 추진되고 있다.
시진핑 국가주석이 2013년에 시작한 것이 일대일로 사업이고, “사업 규모로 보아 일대일로는 앞으로 최소한 수십 년에서 길게는 100년이 걸릴지도 모르는 프로젝트”라는 것이 중국 사회과학원 학자들의 추정이다. 1953년생인 시진핑의 임기는 앞으로 5년이면 끝나고, 그의 수명도 100세가 되는 2053년을 넘기지는 못할 것이다. 아마 우리 정치인들로서는 덩샤오핑에 이어 시진핑도 자신의 수명을 넘어서서 추진해야 할 프로젝트들을 거침없이 발표하고 집행하는 것을 이해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눈에는 ‘우공이산(愚公移山)’으로 비칠지는 모르지만,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정책은 불과 30여년 만에 중국 경제에 ‘벽해상전(碧海桑田·바다가 뽕나무밭이 되다)’의 변화를 만들어놓았고, 덩샤오핑의 뒤를 이어 시진핑은 중국을 세계 1위의 국가로 만들겠다는 ‘중국의 야심’을 현실로 만들기 위한 계획들을 착착 추진 중이다. 우리 정치지도자들도 이제는 자신의 자연적 수명을 넘어 추진되는 ‘코리아의 꿈’을 실현하기 위한 계획을 마련해 봐야 하지 않을까.
출처 | 주간조선 2458호
05.29 노무현과 문재인, 저우언라이와 덩샤오핑
중국 관영매체들은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5월 23일 김해 봉하마을에서 열린 노무현 전 대통령 8주기 추도식에 참석한 사실을 전하면서 “문재인 대통령과 노무현 전 대통령 사이의 교우(交友)관계는 ‘금란지교(金蘭之交)’라고 평가할 수 있다”고 호평했다. 중국 관영매체들은 박근혜 전 대통령이 사드(THAAD)의 한국 배치 결정을 발표하기 전 박 대통령을 “펑유란(馮友蘭)의 ‘중국철학사’를 읽고 아버지 잃은 슬픔을 극복한 지도자”라고 극찬하다가 사드 배치 발표 이후에는 태도를 180도 바꾸어 “미국의 앞잡이”라고 비난하는 자세를 취했었다. 이해찬 중국특사가 전하는 내용을 보면 일단 문재인 대통령이 사드 배치를 철회할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중국 관영매체들이 문 대통령을 호평하는 태도를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만약 문 대통령이 사드 배치를 추인할 경우 중국 관영매체들의 태도는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속편(續篇)의 평가를 문 대통령에게도 내릴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고 할 수 있다. 중국 관영매체들의 보도 기준은 “우리 중국공산당이 혁명의 성공을 위해서는 총과 붓(槍干子和筆干子)을 모두 쥐고 있어야 한다”고 한 마오쩌둥(毛澤東)의 지시에 따라 중국공산당의 이익이 최고의 기준이기 때문이다. 중국 관영매체들의 태도 바꾸기는 자본주의의 상업성 짙은 언론들에 결코 뒤지지 않는 수준이다.
중국 관영매체들이 문 대통령과 노 전 대통령의 관계를 ‘금란지교’라고 평가한 것은 저우언라이(周恩來) 전 총리와 개혁개방의 총설계사 덩샤오핑(鄧小平)의 관계를 금란지교라고 평가한 이후 한국인에 대해서는 처음 사용한 표현이다. ‘금란지교’란 주역(周易)에서 처음 사용된 용어로, 친구 사이의 관계가 ‘금강석처럼 단단하고 난초처럼 향기로운 관계’일 때 쓰는 표현이다. 주역은 금란지교를 “두 사람의 마음이 통해서 그 단단하기가 쇠를 끊을 정도이고, 같은 마음에서 나오는 말씀은 난초 향기와 같다(二人同心 其利斷金, 同心之言 其嗅如蘭)”고 설명하고 있다. 무협소설에 나오는 금란지교는 “태어난 것은 동년 동월 동일이 아니지만, 죽는 것은 동년 동월 동일에 함께하기를 바라는 관계”라고 설명하고 있다.
중국 관영매체들이 ‘금란지교’를 이룬 것으로 평가하는 저우언라이 전 총리와 덩샤오핑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는 “20세기 최고의 진정한 교우관계”라는 표현도 사용한다. 덩샤오핑의 아들 덩푸팡(鄧樸方)이 중국공산당 당사(黨史) 편찬 때 증언한 바에 따르면, 1898년생인 저우언라이와 1904년생으로 여섯 살 아래였던 덩샤오핑은 저우언라이가 1920년 11월 프랑스 유학을 위해 파리에 도착하고 덩샤오핑이 한 달 앞서 파리에 도착한 이래 한 집에서 같이 거주하며 평생을 같이했던 친구 사이였다. 1923년 파리에서 중국 청년들이 청년공산당 파리지부를 결성해서 첫 대표대회를 개최했을 때 저우언라이가 서기로 당선됐고 덩샤오핑은 대표 중의 한 명이었다. 당시 덩샤오핑은 ‘소년’ ‘적광(赤光)’ 등의 공산주의 선전 간행물의 발행을 담당하면서 물과 빵이 전부인 식사를 저우언라이와 함께하며 동고동락하기 시작했다.
1945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됐을 때 저우언라이는 총리, 덩샤오핑은 저우 총리를 보좌하는 부총리 직무를 맡았고, 이 관계는 1966년 문화대혁명이 시작될 때까지 지속됐다.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자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의 미움을 사 ‘주자파(走資派)’로 낙인이 찍혀 장시(江西)성 등지의 벽지로 유배되는 생활을 해야 했는데 당시 저우언라이는 베이징(北京) 권좌의 소식을 비밀리에 전해주면서 덩샤오핑이 살아있을 수 있도록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 당시 지방 벽지로 유배간 중국 정치인 대부분이 폐렴 등으로 사망했으나, 덩샤오핑은 60살이 넘은 나이에 트랙터 공장에서 나사 깎는 일을 하면서도 집 주변에 산책로가 새로 만들어질 정도로 걷고 또 걸으며 건강을 유지했다. 그런 덩샤오핑에게 저우언라이는 “마오 주석이 아직도 너에 대한 언사가 곱지 않으니 말조심 하라”는 등의 전갈을 보냈다. 때로는 비밀리에 베이징으로 불러서 닭고기를 먹이며 영양실조를 막아주기도 했다. 당시 저우언라이의 덩샤오핑 보호는 마오 주석에게 알려질 경우 목숨이 위태로울 지경이었지만 덩샤오핑을 향한 저우언라이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1976년 1월 저우 총리가 78세로 세상을 떠나자 덩샤오핑은 베이징으로 복귀해서 장례위원장을 맡았다. 하지만 저우 사망을 애도하는 베이징 시민들이 천안문 광장에서 시위를 벌이자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에 의해 시위의 배후인물로 찍혀 또다시 유배되는 고난을 겪었다. 덩샤오핑은 1976년 9월 마오가 사망하자 마오의 ‘바지 후계자’ 화궈펑(華國鋒)으로부터 당권을 빼앗아 중국의 개혁개방 시대를 여는 총설계사의 역할을 하게 된다. 사회주의 사회의 완성을 추구하던 마오쩌둥의 이상주의 때문에 피폐해진 중국 경제에 자본주의 시장경제 시스템 도입이라는 현실주의를 택한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시대는 저우언라이가 덩샤오핑의 목숨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지 않았으면 시작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역사의 아이러니라고나 할까. 노무현·문재인 ‘금란지교’의 공적(公敵)이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18년 동안 권좌에 앉아 있던 박정희 대통령이었다면, 함께 프랑스 유학을 한 저우언라이와 덩샤오핑 ‘금란지교’의 공적은 1949년 10월부터 1976년 9월까지 27년 동안 중국의 최고 권좌에 앉아 중국을 가난에 빠뜨린 마오쩌둥이었다. 노무현과 문재인 두 사람이 금란지교를 이루며 정치에 뛰어든 배경에는 박정희라는 거물을 넘어서 새로운 나라를 만들어 보겠다는 동심이 있었다면, 저우언라이와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이라는 사회주의 원칙론자가 중국을 가난에 빠뜨린 것을 고치기 위해 금란지교를 쌓아왔다는 공통점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앞으로 문재인 대통령이 미·중 관계를 모순의 강에 빠뜨린 사드 한국 배치를 과연 솔로몬의 지혜로 해결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거기에 실패할 경우 문 대통령과 노 전 대통령을 금란지교로 평가했던 중국 관영매체들의 호평은 얼마 안 가 표변할 것이 뻔한 상황이다.
2459호
06.05 ‘일대일로(一帶一路)’에 맞서는 인도·일본의 ‘자유의 회랑’
“아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세 나라는 중국과 인도, 일본이다. 아시아의 운명은 이 세 나라에 의해 결정된다. 중국의 굴기(崛起·Rising)가 계속되고 있는 현재 인도와 일본의 관계는 날로 강화되고 있다. 현재 중국과 인도, 중국과 일본의 관계에는 분쟁이 빚어지고 있다.”
인도 자와할랄네루대학의 국제문제연구소 스와란 싱 교수는 지난 5월 28일 상하이(上海) 푸단(復旦)대에서 열린 ‘2017 상하이포럼’의 한 세션에 나와 중국 측 참석자들을 향해 이렇게 경고했다. 한국고등교육재단(KFAS)과 푸단대학이 5월 27일부터 사흘간 공동주최한 이번 상하이포럼은 주로 중국의 ‘일대일로(一帶一路·One Belt One Road)’ 프로젝트를 논의하기 위해 개최된 학술회의였는데, 이 포럼에 참가한 싱 교수가 중국 측 참가자들을 깜짝 놀라게 한 경고를 한 것이다.
중국의 일대일로 프로젝트는 중국이 세계를 지배하는 미국에 글로벌 지정학적으로 맞서 보기 위해 중국에서 중앙아시아를 거쳐 유럽을 잇는 과거의 실크로드 주변에 있는 국가들의 사회간접자본 건설을 경제적으로 지원하면서 미국 대 중국·중앙아시아·중동·유럽을 연결하는 국제정치학적 연대의 벨트를 건설하겠다는 구상이다. 2012년 말 중국공산당 당 총서기 겸 국가주석의 권좌에 앉은 시진핑(習近平)이 자신의 운명뿐만 아니라 앞으로 몇십 년간의 중국의 운명을 걸고 펼치고 있는 거대한 세기의 프로젝트가 바로 일대일로 사업이다. 중국은 이 프로젝트의 지원을 위해 AIIB(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를 설립하고, 한국의 중요성을 고려해서 홍기택 전 산업은행장을 부행장에 앉혔으나 홍씨가 부인과 함께 유럽을 여행하다 잠적함으로써 한국인 몫의 부행장 자리가 없어져 버리는 해괴한 사태가 박근혜 전 대통령의 집권 말기에 벌어졌다. 이후 중국은 자신들이 야심 차게 추진하고 있는 이 프로젝트에서 한국을 배제시키겠다는 태도를 굳혀가고 있다.
“일대일로 프로젝트의 진전에 따라 아시아를 중국이 지배하려는 흐름이 나타나고 있는 점을 우리 인도와 일본은 경계하고 있다. 아시아의 안정을 위해서는 중국과 인도, 일본 3개국 간의 관계가 안정되어야 하며 그 균형이 깨어지는 것은 곧 아시아의 불안정으로 연결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도와 일본은 최근 중국의 일대일로를 견제하기 위해 ‘아시아·아프리카를 위한 자유의 회랑(Freedom Corridor)’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이 같은 말과 함께 싱 교수는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와 아베 신조 총리가 지난 5월 23일 뉴델리에서 만나 합의한 자유의 회랑 프로젝트 내용을 소개했다. 모디와 아베 두 총리가 합의한 ‘자유의 회랑’ 프로젝트는 인도와 일본이 중심이 돼 아시아가 아프리카 국가들의 사회간접자본 건설을 지원하는 커넥션을 형성할 수 있도록 하자는 구상이다. 이 구상의 실현을 위해 우선 인도는 스리랑카의 트린코말리항구 건설을 지원하고, 일본은 현재 인도가 주도하고 있는 이란의 차바하르항구 건설에 공동 참여하기로 합의했다. 싱 교수에 따르면 인도와 일본은 태국과 미얀마 국경지대에 있는 다웨이항구 건설에도 공동 참여하기로 했다. 일본은 또 아베 총리의 제의로 중국의 중앙아시아·중동·유럽 연결 사회간접자본 건설 프로젝트에 맞서기 위해 ‘질 높은 사회간접자본 건설을 위한 파트너십(Partnership for Quality Infrastructure)’ 프로젝트도 인도와 함께 추진하기로 합의했다.
인도 자와할랄네루대학 싱 교수의 발표가 있기 전에 발표자로 나선 일본 국제문제연구소의 다카기 세이치로(高木誠一郞) 교수도 싱 교수 못지않은 자극적인 발표를 해서 중국 학자들의 신경을 날카롭게 만들었다.
“현재 일본과 인도의 관계는 아주 좋은 반면 중국과 인도, 중국과 일본 사이는 별로 좋지 않다. 일본과 인도는 중국을 위협으로 느끼고 있다. 우리 일본은 중국이 일본의 보통국가화를 거부하면서, 중국 자신은 국제사회에서 보다 큰 역할을 맡으려 나서고 있고, 중국의 굴기는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위협을 느끼고 있다.”
싱 교수와 다카기 교수의 발표를 듣는 동안 ‘아, 인도와 일본은 중국의 몸집이 빠른 속도로 커지는 것을 앉아서 구경만 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전략적 구상을 끊임없이 만들어내고 또 실현에 옮기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육지와 바다로 중국과 경계를 마주하고 있는 우리는 어떤가. 중국의 국력과 군사력이 하루가 다르게 확대되어 가고 있지만 우리는 중국과 BOP(Balance of Power·힘의 균형)를 맞추기 위한 아무런 전략적 구상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무기력에 빠져 있다. 뿐만 아니라 북한의 핵과 미사일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또 우리와 주한 미군의 보호를 위해 사드(THAAD) 시스템의 한국 배치를 미국이 추진하는 데 대해 중국이 “반대한다”고 외치는 말만 듣고도 온갖 위협을 느끼면서 쩔쩔매기만 하는 우리 지도자들의 모습은 참담하기까지 하다. 더 나아가 사드의 한국 배치를 박근혜 정부가 이미 결정을 내렸는데도, 확정된 사드 배치 과정의 하나로 4기의 발사대가 반입된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는 문재인 대통령의 언사에 많은 국민들이 충격을 받는 모습은 딱하기까지 하다. 뿐만 아니라 중요한 군사기밀을 아무렇지도 않게 상세하게 공개하는 우리 정부 최고위층들의 모습은 더욱 충격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언제 인도 자와할랄네루대학의 싱 교수가 상하이포럼 중국 측 참가자들을 향해 당당하게 외치는 모습을 흉내라도 낼 수 있을까.
“인도가 핵보유국이라는 점을 중국은 잊지 않고 있을 것이다. 일본은 미국의 핵우산 아래 잘 보호되고 있다. 인도와 일본, 그리고 중국 세 나라의 관계가 안정되어야 아시아 전체가 안정될 수 있다는 점을 중국은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일대일로 프로젝트 추진으로 중국의 굴기가 계속될수록 인도와 일본의 공조 체제인 ‘자유의 회랑’도 갈수록 확대될 것이다.”
2460호
06.12 우리가 발톱을 세워야 중국 사드 압박 끝난다
“사드 문제의 핵심은 국내 공론화가 부족했고, 국민 공감대를 얻지 못한 것이며, 문제의 핵심이 그런 부분에 있었기 때문에 국회 논의가 필요하다고 본다.… 사드 배치는 한·미 공동의 결정으로, 우리의 방위를 위해 (내린 결정이며) 북한 핵 미사일 도전에 직면한 상황에서의 결정이었다는 데 대한 공약은 확실하다.… (사드와 관련한 대중국 설득 방안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깊이 있는 대화가 필요하며 (한국 기업 등에 대한 보복이) 부당한 제재임을 설명하고 즉각적인 중단을 촉구하겠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 후보자는 지난 6월 7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인사청문회에서 사드의 한국 배치를 놓고 1년 가까이 진행되고 있는 중국과의 외교전에 대한 해법을 묻는 의원들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강경화 후보자는 과연 문제를 제대로 파악한 것일까.
문제는 문재인 정부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이 지난 5월 21일 장관 지명을 받은 강경화 후보자가 뉴욕을 출발해서 6월 7일 청문회에 나서기까지 일주일 정도의 기간에 파악한 느슨한 현실보다 훨씬 심각하고 악화돼 있다는 점이다. 지난 6월 6일 중국 공산주의 청년단 기관지 중국청년보는 국무원 발전연구센터 조선반도 연구소 리둔추(李敦球) 주임의 다음과 같은 글을 실었다.
“사드 문제에서 문재인 정부에 대한 환상은 버려야 한다.… 현재 문재인 정부가 추구하고 있는 것은 사드 한국 배치에 대해 정당하고 합법적인 절차를 거치려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최근 서울을 방문한 딕 더빈 미 민주당 상원 원내총무를 만난 자리에서 ‘박근혜 전 정부가 사드 배치를 발표할 때 국민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내 생각에 사드의 한국 배치가 합법적이고 정당한 절차를 거치는 데 다소 시간이 걸리겠지만 미국 정부가 이해해주기를 바란다. 시간이 흐르면 사드의 한국 배치는 실현될 것이다’라고 귀띔해주었다. 문재인 대통령 취임 후 많은 중국인들은 한국의 새 정부에 대한 기대로 충만해 있었고, 문재인 정부가 박근혜 전 정부의 사드 한국 배치 결정을 취소하기를 희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심정은 이해가 가지만 문재인 대통령이 더빈에게 이야기한 것을 보면 문재인 정부에 대한 환상을 버려야 할 것이다.”
차이나 넷(中華網)의 토론방에서는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5월 30일 사드 발사대 4기가 추가로 한국에 반입된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고 말한 이유”를 놓고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대체로 3가지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첫째, 중국과 러시아를 향해 문재인 자신은 무고(無辜)하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어서 그랬을 것이다. 사드의 한국 배치에 대해 중국과 러시아는 결연하게 반대해왔고, 특히 중국의 반대는 한국에 큰 상처를 입혔을 것이다. 그래서 문재인 대통령은 자신은 사드의 한국 배치에 반대한다는 태도를 표방해왔다. 그런데 사드 발사대 4기가 돌연 증가한 사실을 알고는 한편으로는 한·미 간의 협의에 공연히 반대한다고 하고 싶지는 않고, 한편으로는 중국에 ‘득죄(得罪)’하고 싶지도 않았다. 이를 어떻게 하나. 코를 쥐고 흔들어서 상대방의 눈을 흐리게 만들듯이 모르는 척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4기의 추가 발사대는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한 이후에 반입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지 않고서야 문재인 대통령이 자신이 결백하다는 것을 그렇게 돌려서 말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왜 사드 발사대 4기의 추가 도입을 모르고 있다가 알게 된 것처럼 충격적이라고 말했는가에 대한 중국 네티즌 논객들의 두 번째 이유는 “자기네 국민을 향해 자신에게는 책임이 없다는 점을 펼쳐 보이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이와 관련 중국 네티즌들은 “만약 일국의 대통령이 그런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면 그런 대통령을 대통령이라고 할 수 있을까”라고 추리를 전개했다. 중국 네티즌들은 문 대통령이 충격적이라고 말한 이유에 대해 “발사대 4기의 추가 도입 책임을 박근혜 전 정부의 국방부 탓으로 돌리고 국방부에 새 피를 수혈하기 위해서”라고 추정하기도 했다.
중국의 관영 언론과 네티즌들은 무엇이든 감추는 게 없고 무슨 정보든 터뜨리고 공개하는 한국 언론을 열심히 읽는다. 특히 사드 배치에 대한 한국 내 움직임과 중국의 반대 입장에 대한 반응을 샅샅이 검색해서 읽은 후 엄청난 디테일을 자랑하는 해설과 논평을 자랑스럽게 하고 있다. 더구나 한국에 주재하는 중국 외교관들은 사드 배치에 대한 중국의 반대 입장 표명에 우리 국민과 정부가 민감하게 반응하는 점을 잘 관찰하고는 “한국 국민들이 오해하지 않기를 바라며 우리 중국 정부의 입장은 ‘사드 배치 취소와 중단’이라는 점을 똑똑히 알아야 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최근 서울을 방문한 중국 난징(南京)대학의 한 한국통 국제정치 전공 교수도 “중국 정부의 사드 한국 배치에 대한 반대 입장은 확고하며, 사드 사태의 끝은 한국 정부가 사드 배치를 포기해야 볼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가 이런 중국의 태도를 꺾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문재인 대통령이나 강경화 외교부 장관 후보자가 이제는 단순한 설명이나 설득으로는 전혀 불가능한 상태에 빠졌다는 판단을 해야 할 국면으로 판단된다.
우리는 남중국해에서 중국과 해상 영토 분쟁을 벌이고 있는 베트남 정부가 때로는 결연한 태도로 “전쟁도 불사할 것이며, 국민 총동원령을 선포할 것”이라고 강력하게 중국에 맞서는 태도에서 사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야 할지 모른다. 복날 강아지처럼 축 늘어진 자세가 아니라 발톱을 세운 고양이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우리 한국 정부는 중국이 우리의 주권을 침해하면서 사드 반대를 계속 주장할 경우 전쟁도 불사할 것”이라고 결연한 선포라도 해야 비로소 중국 지도자들과 관영 언론들의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할 것이라는 점을 우리 정부 당국자들은 알아야 한다.
아니면 2011년 10월 베트남과 중국 접경지대의 메콩강에서 중국 선원 13명이 살해된 엽기적인 사건 같은 것이라도 서해상에서 발생해야 중국 측의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할지도 모르겠다. 사드 배치에 대한 중국의 오만방자한 내정간섭을 끊으려면 안이한 상황인식에서 벗어나 서슬 퍼런 모습을 갖춰야 비로소 사드 사태의 끝을 볼 수 있을 것이다.
2461호
06.19 美 펜타곤 보고서 ‘중국군 전략의 이해’
미 국방부는 지난 6월 6일 중국 군사력에 관한 2017년 보고서를 미 의회에 제출했다. 이 연례 보고서는 제2장에 ‘중국의 전략에 대한 이해(Understanding China’s strategy)’라는 부분을 포함하고 있다.
25년 전인 1982년 8월 24일 한국은 중국과 수교한 이래 대체로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관계를 유지해왔다. 그러나 지난해 7월 박근혜 전 대통령이 사드(THAAD)의 성주 배치를 전격적으로 발표한 이후로는 올해의 수교 25주년 기념행사를 거의 치르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중국 당국은 “사드가 배치된 한반도 지역을 타깃으로 하는 미사일을 배치할 것”이라는 발표까지 했다. 1950년 한국전쟁에서 서로 적으로 대치한 이래 60년 만에 처음으로 적대적인 상황을 서로 머릿속에 그리기 시작했고, 유사시에 우리는 한·미 군사동맹의 일원으로, 중국은 중·조 우호협력조약에 따라 적대적인 대치를 하게 될 가능성까지 염두에 두어야 하게 됐다.
그러나 북한군을 ‘주적(主敵)’으로 삼고 있는 한국 군은 중국군을 대상으로 한 아무런 대책도 마련하지 않고 있다. 중국군을 대상으로 한 전쟁교리의 개발은 물론 대응 작전 개념조차 만들어져 있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중국군은 어떤 성격의 군이며, 누구를 대상으로 하고 어떤 작전개념에 따라 움직이는 군인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우리 국민들이 하기 시작할 때 미 국방부가 의회에 제출한 ‘중국 군사력 연례보고서’에 중국군의 기본 전략개념이 담긴 것이다. 이 보고서의 제2장 ‘중국군 전략에 대한 이해’의 내용을 소개해 본다.
보고서에 따르면 중국 인민해방군(PLA)에 가장 중요한 전략적 목표는 ‘중국공산당 통치의 영구화’인 것으로 되어 있다. 2002년부터 시진핑(習近平)을 비롯한 중국 지도자들은 21세기의 첫 20년을 “전략적인 기회의 기간”이라고 판단했다. 중국 지도자들은 “이 기간에 국내적인 발전과 종합국력의 확대를 달성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중국공산당 통치의 영구화라는 목표 달성에 활용할 수 있는 기간이 되도록 해야 한다는 판단을 내렸다. 중국군이 전략적으로 달성해야 할 또 다른 목표들은 국내적인 안정의 유지, 경제발전의 지속, 주권과 영토의 완전성 유지, ‘대국(great power)’으로서의 지위 유지와 지역 내에서의 우월적 지위 견지, 해외에서의 중국 국익 보호 등이다.
‘중국의 꿈’이라는 중국공산당의 목표에는 대국에 걸맞은 군사력을 발전시킨다는 개념이 포함돼 있다. 중국 지도자들은 지역 내에서 우월성을 지닌 국가로서 영향력을 발휘하기 위해 군사력과 외교력, 경제력을 지렛대로 활용하는 경향을 강화해나가고 있다. 중국은 물론 자신들의 경제발전에 필수적인 지역 내 평화를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지역 내 우월적인 지위를 확보하고, 또 중국공산당의 국내 정치권력 독점을 유지시키려는 목표를 설정해두고 있다.
중국군은 중국공산당의 통치 영구화라는 커다란 목표 달성을 위해 내부적으로 해야 할 전략목표들도 설정해두고 있는데 그 첫째는 ‘군의 현대화’이다. 중국 지도자들은 2020년까지 중국군의 기계화와 정보화라는 두 가지 현대화를 추진할 계획이다. 현대화의 목표는 미군에 대해 경쟁력을 갖는 것으로, 21세기의 첫 20년 안에 미군에 대한 경쟁력을 갖기를 희망하고 있다. 2015년 중국 군부 지도자들은 중국군이 “지역 전쟁, 특히 해전(海戰)에서 정보화 전술의 우월적 지위를 갖도록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군 고위지도자들은 ‘전략 가이드라인’을 통해 “전쟁 개념의 설정, 위협에 대한 판단, 전투 기획에서의 우선순위 선정, 전력의 배치” 등에 대해 설명했다. 이 지시는 특히 해상전쟁에서 중국군의 능력이 업데이트되기를 희망한다는 의도라고 설명돼 있다.
중국 지도부는 소련의 해체 이후 두 차례 전략 가이드라인을 수정했다. 1993년 장쩌민(江澤民) 전 국가주석은 인민해방군에 “걸프전에서 미군이 보여준 현대적이고 첨단기술을 갖춘 전투력을 중국군도 발전시켜야 한다”고 촉구했다. 2004년 후진타오(胡錦濤) 당시 국가주석은 “지역 내에서 벌어지는 정보화 조건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문했다. 현재 중국군의 전략목표 대상 지역에는 대만과 인도, 북한이 포함돼 있다.
2015년 중국군은 ‘8가지의 전략 임무’를 규정했다. 영토주권의 보호, 대만과의 통일, 우주와 사이버 스페이스에서 중국 국익 보호, 전략적 저지력의 견지, 국제 안보협력에 참여, 국내 정치와 사회 안정 보호, 재난 구조, 공민들의 권리와 이익 보호 등이었다. 중국 군부 지도자들은 2020년 이내에 기계화와 정보화 전투에서의 전투력 강화를 추진해왔다. ‘정보화 전투력’이란 미군이 확보하고 있는 인터넷 네트워크를 활용한 ‘네트 센트릭(Net-Centric)’ 전투력을 가리키는 말이다. 발전된 정보통신 기술을 활용해서 전술적 이익을 확보하자는 것이다. 중국군의 많은 저작물은 전술적 기회를 확보하기 위해 정보통신을 활용해서 신속하면서도 통일적으로 전투에 대비해야 한다는 내용을 기술하고 있다. 중국군에 대해 특기할 것은 ‘적극적 방어(Active Defense)’라는 개념을 설정해두고 있다는 점이다. 적극적 방어란 전략적으로는 방어 태세를 취하고 있으나 전술적으로는 공세를 취하고 있는 국면을 말한다. 이는 곧 전략적으로 어려운 국면에서 언제든 전략적 공세 국면으로 전환할 준비를 갖추고 전쟁에 임하는 개념을 말한다.
시진핑 현 국가주석은 1980년대 덩샤오핑(鄧小平) 이후 두 명의 국가주석을 건너뛰어 생성된 군 경험을 가진 당 지도자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당 총서기 겸 국가주석 취임 후 군부에 대해 “군은 전쟁을 할 수 있어야 하며, 전쟁을 하면 승리할 수 있어야 한다(能打仗, 打勝仗)”는 지시를 내려 중국 군 지도자들을 놀라게 했다. 우리의 경우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한 전두환·노태우 대통령 등 군부 지도자들의 시대가 지난 이후 4대에 걸친 문민 대통령들이 한국군을 어떤 지경으로 만들어 놓았는지 어느 국민도 모르는 상황이라 판단된다. 북한 핵위협에 대처할 아무런 수단도 갖추지 못했으면서도, 과연 우리의 대통령이 밤잠을 제대로 자는지 실로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2462호
06.21 중국군에 무방비상태인 우리 군(軍)...이래도 되는가?
美 펜타곤 보고서 ‘중국군 전략의 이해’
미 국방부는 지난 6월 6일 중국 군사력에 관한 2017년 보고서를 미 의회에 제출했다. 이 연례 보고서는 제2장에 ‘중국의 전략에 대한 이해(Understanding China’s strategy)’라는 부분을 포함하고 있다.
25년 전인 1982년 8월 24일 한국은 중국과 수교한 이래 대체로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관계를 유지해왔다. 그러나 지난해 7월 박근혜 전 대통령이 사드(THAAD)의 성주 배치를 전격적으로 발표한 이후로는 올해의 수교 25주년 기념행사를 거의 치르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중국 당국은 “사드가 배치된 한반도 지역을 타깃으로 하는 미사일을 배치할 것”이라는 발표까지 했다. 1950년 한국전쟁에서 서로 적으로 대치한 이래 60년 만에 처음으로 적대적인 상황을 서로 머릿속에 그리기 시작했고, 유사시에 우리는 한·미 군사동맹의 일원으로, 중국은 중·조 우호협력조약에 따라 적대적인 대치를 하게 될 가능성까지 염두에 두어야 하게 됐다.
그러나 북한군을 ‘주적(主敵)’으로 삼고 있는 한국 군은 중국군을 대상으로 한 아무런 대책도 마련하지 않고 있다. 중국군을 대상으로 한 전쟁교리의 개발은 물론 대응 작전 개념조차 만들어져 있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중국군은 어떤 성격의 군이며, 누구를 대상으로 하고 어떤 작전개념에 따라 움직이는 군인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우리 국민들이 하기 시작할 때 미 국방부가 의회에 제출한 ‘중국 군사력 연례보고서’에 중국군의 기본 전략개념이 담긴 것이다. 이 보고서의 제2장 ‘중국군 전략에 대한 이해’의 내용을 소개해 본다.
보고서에 따르면 중국 인민해방군(PLA)에 가장 중요한 전략적 목표는 ‘중국공산당 통치의 영구화’인 것으로 되어 있다. 2002년부터 시진핑(習近平)을 비롯한 중국 지도자들은 21세기의 첫 20년을 “전략적인 기회의 기간”이라고 판단했다. 중국 지도자들은 “이 기간에 국내적인 발전과 종합국력의 확대를 달성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중국공산당 통치의 영구화라는 목표 달성에 활용할 수 있는 기간이 되도록 해야 한다는 판단을 내렸다. 중국군이 전략적으로 달성해야 할 또 다른 목표들은 국내적인 안정의 유지, 경제발전의 지속, 주권과 영토의 완전성 유지, ‘대국(great power)’으로서의 지위 유지와 지역 내에서의 우월적 지위 견지, 해외에서의 중국 국익 보호 등이다.
‘중국의 꿈’이라는 중국공산당의 목표에는 대국에 걸맞은 군사력을 발전시킨다는 개념이 포함돼 있다. 중국 지도자들은 지역 내에서 우월성을 지닌 국가로서 영향력을 발휘하기 위해 군사력과 외교력, 경제력을 지렛대로 활용하는 경향을 강화해나가고 있다. 중국은 물론 자신들의 경제발전에 필수적인 지역 내 평화를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지역 내 우월적인 지위를 확보하고, 또 중국공산당의 국내 정치권력 독점을 유지시키려는 목표를 설정해두고 있다.
중국군은 중국공산당의 통치 영구화라는 커다란 목표 달성을 위해 내부적으로 해야 할 전략목표들도 설정해두고 있는데 그 첫째는 ‘군의 현대화’이다. 중국 지도자들은 2020년까지 중국군의 기계화와 정보화라는 두 가지 현대화를 추진할 계획이다. 현대화의 목표는 미군에 대해 경쟁력을 갖는 것으로, 21세기의 첫 20년 안에 미군에 대한 경쟁력을 갖기를 희망하고 있다. 2015년 중국 군부 지도자들은 중국군이 “지역 전쟁, 특히 해전(海戰)에서 정보화 전술의 우월적 지위를 갖도록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군 고위지도자들은 ‘전략 가이드라인’을 통해 “전쟁 개념의 설정, 위협에 대한 판단, 전투 기획에서의 우선순위 선정, 전력의 배치” 등에 대해 설명했다. 이 지시는 특히 해상전쟁에서 중국군의 능력이 업데이트되기를 희망한다는 의도라고 설명돼 있다.
중국 지도부는 소련의 해체 이후 두 차례 전략 가이드라인을 수정했다. 1993년 장쩌민(江澤民) 전 국가주석은 인민해방군에 “걸프전에서 미군이 보여준 현대적이고 첨단기술을 갖춘 전투력을 중국군도 발전시켜야 한다”고 촉구했다. 2004년 후진타오(胡錦濤) 당시 국가주석은 “지역 내에서 벌어지는 정보화 조건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문했다. 현재 중국군의 전략목표 대상 지역에는 대만과 인도, 북한이 포함돼 있다.
2015년 중국군은 ‘8가지의 전략 임무’를 규정했다. 영토주권의 보호, 대만과의 통일, 우주와 사이버 스페이스에서 중국 국익 보호, 전략적 저지력의 견지, 국제 안보협력에 참여, 국내 정치와 사회 안정 보호, 재난 구조, 공민들의 권리와 이익 보호 등이었다. 중국 군부 지도자들은 2020년 이내에 기계화와 정보화 전투에서의 전투력 강화를 추진해왔다. ‘정보화 전투력’이란 미군이 확보하고 있는 인터넷 네트워크를 활용한 ‘네트 센트릭(Net-Centric)’ 전투력을 가리키는 말이다. 발전된 정보통신 기술을 활용해서 전술적 이익을 확보하자는 것이다. 중국군의 많은 저작물은 전술적 기회를 확보하기 위해 정보통신을 활용해서 신속하면서도 통일적으로 전투에 대비해야 한다는 내용을 기술하고 있다. 중국군에 대해 특기할 것은 ‘적극적 방어(Active Defense)’라는 개념을 설정해두고 있다는 점이다. 적극적 방어란 전략적으로는 방어 태세를 취하고 있으나 전술적으로는 공세를 취하고 있는 국면을 말한다. 이는 곧 전략적으로 어려운 국면에서 언제든 전략적 공세 국면으로 전환할 준비를 갖추고 전쟁에 임하는 개념을 말한다.
시진핑 현 국가주석은 1980년대 덩샤오핑(鄧小平) 이후 두 명의 국가주석을 건너뛰어 생성된 군 경험을 가진 당 지도자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당 총서기 겸 국가주석 취임 후 군부에 대해 “군은 전쟁을 할 수 있어야 하며, 전쟁을 하면 승리할 수 있어야 한다(能打仗, 打勝仗)”는 지시를 내려 중국 군 지도자들을 놀라게 했다. 우리의 경우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한 전두환·노태우 대통령 등 군부 지도자들의 시대가 지난 이후 4대에 걸친 문민 대통령들이 한국군을 어떤 지경으로 만들어 놓았는지 어느 국민도 모르는 상황이라 판단된다. 북한 핵위협에 대처할 아무런 수단도 갖추지 못했으면서도, 과연 우리의 대통령이 밤잠을 제대로 자는지 실로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출처 | 주간조선 2462호
06.26 4억짜리 골프 회원권 들고 냉가슴 앓는 중국 골퍼들
골프를 중국어로는 가오얼푸(高尔夫)라고 한다. 중국 개혁개방의 총설계사 덩샤오핑(鄧小平)은 1980년 개혁개방과 빠른 경제발전을 시작하면서 중국의 대도시 부근에 골프장을 건설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골프장이 있어야 외국으로부터 FDI(외국인직접투자)를 순조롭게 끌어들일 수 있다고 판단한 때문이었다. 그런 덩샤오핑의 지시에 따라 수도 베이징(北京) 근교 명나라 황제들이 묻힌 십삼릉 근처 야산 중턱에 1986년 베이징 국제 가오얼푸클럽이 중·일 합자로 건설됐다. 광둥(廣東)성 중산(中山)시에 이어 중국 내 두 번째의 골프클럽이었다.
베이징에 거주하는 외국인들 사이에 이른바 ‘십삼릉골프클럽’으로 불린 이 국제골프클럽은 건설과 관리가 일본 최고급 골프장 수준으로 이뤄져 조니워커 클래식을 비롯한 국제적 골프대회도 여러 차례 열렸다. 덩샤오핑은 혁명 동지 룽가오탕(榮高棠·1912~2006)을 중국 골프협회 회장으로 앉혀 중국 전역의 골프장과 골프대회 관리를 맡겼고, 자신의 오른팔이던 자오쯔양(趙紫陽·1919~2005) 당 총서기에게 골프를 배워서 주말에는 베이징 근교의 골프장에 나가 골프를 치는 모습을 보여주도록 배려했다. 골프를 개혁개방을 상징하는 스포츠로 양성하려는 것이 덩샤오핑의 생각이었다. 덩샤오핑의 그런 생각에 따라 중국 전역에는 수많은 골프장들이 문을 열었고, 베이징 근교에도 2012년 시진핑(習近平) 당 총서기가 선출되기 직전까지 50여개의 골프장이 문을 열었다. 광둥성 선전(深圳)에는 216홀짜리 세계 최대 골프장이 생겨나기도 했다.
중국의 골프장 건설붐은 시진핑 당 총서기가 반(反)부패운동을 벌이면서 급브레이크가 걸렸다. 반부패운동의 세부 항목에는 “당 간부와 정부 관료들이 술을 파는 클럽이든 골프클럽이든 호화판 클럽에는 출입하지 말라”는 내용이 포함됐고, 외교부 관리들조차 외국인과 골프장에 나가는 일을 삼가면서 중국 내 골프장들에는 중국인들의 발길이 끊어지기 시작했다. 2014년에는 부실 골프장에 대한 조사를 구실로 전국 66개 골프장의 영업을 중단시켰고, 베이징 근교에 있는 3개의 골프장도 영업을 중단했다. 2015년에는 12개의 골프장이 조사 대상으로 추가 발표됐는데, 이때 전국 최우수였던 베이징 십삼릉골프장도 포함돼 영업을 중단했다.
문제는 중국 내 골프장 영업 중단이 회원들에게 제대로 된 설명이나 통보 없이 갑자기 이뤄졌다는 점이다. 십삼릉골프장의 경우 회원권 가격이 한창 때는 210만위안(약 4억원)까지 올라갔는데 그런 회원권을 보유하고 있던 회원들이 어느 날 골프를 치러갔다가 골프장 출입문이 잠겨 있어 놀라는 일이 벌어졌다. 어느 날은 골프장 영업 중단이 풀렸는가를 알아보려고 차를 타고 진입로에 들어가는 동안 페어웨이에 어린 나무가 촘촘하게 심어져 있는 광경을 보고 또 한 번 놀라기도 했다.
화가 난 회원들은 수소문을 해서 골프장 관계자를 찾아내 항의했지만 들을 수 있는 말은 “골프장 소재지의 구청(區廳)이 나무를 심으라는 지시를 내려 할 수 없이 그렇게 했다”는 것이었다. 회원들은 창핑(昌平)구 구청을 찾아가 항의를 했지만, 구청 당국은 “그런 지시 내린 일 없다.… 골프장 일은 골프장 측에 물어보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결국 골프장이 영업을 중단한 지 1년 반이 넘도록 회원권 보상은 물론 아무런 공식 설명 없이 “골프장 영업이 중단된”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일본인과 한국인 회원들이 자신이 아는 정부 관리나 중국공산당 간부에게 물어보자 희한한 대답이 돌아왔다. “골프장 진입로가 폐쇄된 것은 아니지 않느냐. 골프장 클럽하우스로 진입하는 철문이 잠겨 있는 상태이고 페어웨이에는 어린 나무들을 심어놓았지만 골프장 측이 철문에 내건 안내문에는 ‘잠정(暫停·일시 영업중단)’이라고 되어 있지 않느냐. 폐업과는 다른 개념이다. 조급해 하지 말고 기다리면 영업이 재개될 날이 올 거다. 페어웨이에 심은 나무야 뽑아버리고 다시 정리하면 될 것이니 큰 문제가 아니다.”
무려 4억원에 가까운 회원권을 사서 묵혀두라는 말에 중국 내 외국인들의 마음은 편치가 않다. 중국 개혁개방의 상징이라던 골프가 “개혁개방을 심화시키겠다”고 외치고 있는 시진핑 정권에서 찬바람을 맞고 있는 현실에 회원들은 마주 앉으면 불평을 한다. 외교부 관리가 외국인과 함께 골프를 치러가는 것은 유일하게 허용한다지만 요즘 같은 분위기에서 선뜻 골프를 치려는 외교부 관리는 없다. 개혁개방의 바람을 타고 너도나도 골프를 배워 주말이면 골프장에 나가던 주한 중국대사관 외교관들도 요즘은 골프 이야기조차 입밖에 꺼내지 않는 분위기다.
우리에게도 그런 날들이 있었다. 우리의 경우도 골프를 치기 시작한 것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미군들과의 사교를 위해, 경제발전에 필요한 개방적인 분위기를 위해 골프를 배워 치기 시작하면서였고, 이와 함께 골프장이 건설되기 시작했다. 우리의 골프는 아이러니하게도 문민 대통령임을 자부하던 김영삼 대통령 취임과 함께 찬 서리를 맞기 시작했다. 김영삼 대통령 집권 초기인 1993년 4월 13일자 조선일보 사설은 ‘골프 불협화음’이란 제목으로 대통령과 총리, 그리고 집권당을 질타했다.
“골프 치는 문제를 둘러싼 청와대와 총리실과 민자당의 3각 혼선을 보면서 우리는 새 정부의 사정의 본질이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을 갖게 되며, 동시에 이 나라에 신권위주의가 싹트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금할 수 없다. 골프가 도대체 무슨 중요한 국사이길래 한 나라의 대통령과 총리와 집권당 대표가 서로 쳐도 좋다, 아직 안 풀렸다, 누가 치라고 그랬느냐는 따위의 지극히 비생산적인 화제에 휘말려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국가 중대사도 아닌 골프 따위의 문제로 한 나라를 운영하는 책임자들이 우왕좌왕하며 눈치 보기 급급한 요즘의 상황은 한마디로 우습고 언짢고 불유쾌하기 그지없다.”
우리에게는 언론의 자유와 정부에 대한 비판이 허용되지만 중국은 다르다. 헌법에 보장된 언론자유는 있지만 “혁명의 완성은 총과 펜을 다 장악하고 있어야 한다”는 마오쩌둥(毛澤東)의 교시에 따라 국내 정치 비판이 일절 허용되지 않는다. 중국 내 외국인들의 경우 비싼 회원권 가격에 대한 보상 없이 무기한 계속되는 골프장 영업중단으로 불평의 소리가 높지만 그런 외국인들의 불만을 보도해주는 매체는 없는 실정이다.◎
2463호
2017.07.06 美가 보는 장진호전투, 中이 보는 장진호전투
문재인 대통령은 한국 대통령으로서 방미 첫날인 6월 28일(현지시각) 콴티코 미 해병대국립박물관 앞 공원에 지난 5월 4일 설치된 장진호전투 기념비에 헌화한 후 기념 연설을 했다.
“67년 전인 1950년, 미 해병들은 ‘알지도 못하는 나라, 만난 적도 없는 사람들’을 위해 숭고한 희생을 치렀습니다. 그들이 한국전쟁에서 치렀던 가장 영웅적인 전투가 장진호전투였습니다. 장진호 용사들의 놀라운 투혼 덕분에 10만여명의 피란민을 구출한 흥남철수 작전도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 메러디스빅토리호에 오른 피란민 중에 저의 부모님도 계셨습니다.… 1950년 12월 23일 흥남부두를 떠나 12월 25일 남쪽 바다 거제도에 도착할 때까지 배 안에서 5명의 아기가 태어나기도 했습니다. 크리스마스의 기적! 인류 역사상 최대의 인도주의 작전이었습니다. 2년 후, 저는 빅토리호가 내려준 거제도에서 태어났습니다. 장진호의 용사들이 없었다면, 흥남철수작전의 성공이 없었다면, 제 삶은 시작되지 못했을 것이고, 오늘의 저도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 저는 이곳에 한 그루 산사나무를 심습니다. 산사나무는 별칭이 윈터 킹(Winter King)입니다. 영하 40도의 혹한 속에서 영웅적인 투혼을 발휘한 장진호전투를 영원히 기억하기 위해서입니다.”
한국학 중앙연구원이 발간한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에 따르면, 장진호는 개마고원 위를 흘러 압록강으로 들어가는 장진강 중류를 막아 건설된 인공호수로 1934년 일제가 완공했다. ‘장진호전투’는 1950년 11월 27일부터 12월 11일까지 2주간에 걸쳐 동부전선의 미 제10군단 소속 제1해병사단이 서부전선 제8군단과 접촉을 유지하기 위해 장진호 북쪽으로 진출하던 중 중공군 제9병단 예하 7개 사단 규모의 병력이 형성한 포위망을 벗어나기 위해 전개한 철수작전이다.
그해 9월 15일 인천에 상륙한 맥아더 장군이 지휘하는 미군은 병력을 둘로 나누어 제8군은 서해안을 따라, 그리고 제10군과 한국군 제1군은 동해안을 따라 함흥으로 올라간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후 제10군과 한국군 제1군은 장진강을 따라 압록강으로 진출해서 제8군과 합류한다는 계획이었다. 미군 제10군과 한국군 제1군의 진로를 차단하고 나선 것이 10월 25일 압록강을 건너 개마고원 일대에 산개해 있다가 장진호 부근에 집결한 중국군 제9병단 소속 7개 사단 규모 병력이었다.
베트남전쟁을 취재해서 퓰리처상(賞)을 탄 미국의 저널리스트 데이비드 핼버스탬(David Halberstam)이 2007년에 출판한 ‘가장 추웠던 겨울: 미국과 한국전쟁(The Coldest Winter: America and the Korean War)’에 따르면, 장진호전투에서 화력장비가 월등한 미군이 중국군에 패배한 원인은 사상 유례없이 영하 40도 부근으로 떨어진 혹독한 추위였다. 일반적으로 겨울에 따뜻하고 여름에 시원한 것으로 알려졌던 장진호 부근에는 그해 혹한이 밀어닥쳤다. 혹한은 미군 탱크와 대포들의 윤활유를 얼어붙게 해 곳곳에서 멈추어 섰고, 결국 소총을 기본으로 한 중국군과 같은 조건이 되고 말았다.
핼버스탬의 ‘가장 추웠던 겨울’은 참전 미군들의 인터뷰를 통해 1950년 여름에서 1951년 봄에 이르는 기간 중의 한국전쟁을 그리고 있다. 책의 앞뒤 표지는 미 해병대 1사단을 따라 장진호전투에 종군했던 사진작가 데이비드 더글러스 던컨(David Douglas Duncan)이 찍은 사진이 장식하고 있다.
중국 최대의 검색 엔진 바이두(百度)도 장진호전투 당시의 추위를 기록해놓았다. “쑹스룬(宋時輪) 중장이 지휘하는 중국 인민지원군 제9병단은 압록강을 건너 조선 동북지방으로 진출하는 과정에서 장진호 부근에서 알몬드 소장이 지휘하는 미군 제10군과 만나 17일간의 엄한(嚴寒) 기후조건 아래에서 포위작전을 전개할 수 있었다. 알몬드 소장이 지휘하는 연합군 병력은 6만5000명 정도였고, 중국군 제9병단은 16만명 정도였다. 동상과 보급부족, 그리고 무기의 열세로 미군의 흥남 방향 철수를 막을 수는 없었다.”
바이두는 미군이 전쟁 후에 발표한 자료들을 취합해서 2주간의 장진호전투에서 미군 측은 사망 2100명, 포로 300명을 포함해서 1만3000명의 병력 손실을 입었고, 중국군 측은 동사 4000여명을 포함한 전사자 1만1000명에 병력 손실은 5만6000명이었던 것으로 집계했다.
장진호전투의 결과 원산평원 이북의 북한 지역이 중국군에 장악당하게 됐고, 9월 15일 인천에 상륙해서 중·북 국경지대로 적을 몰아붙이던 미 10군의 주력이 흥남을 통해 부산으로 빠져나가는 결과가 빚어져서 한국전 전체 전황에 결정적 변화를 가져오게 됐다. 바이두는 이 장진호전투에 대해 맥아더 장군은 “전략적 후퇴 작전의 성공”이라고 표현했지만, 1950년 12월 11일자 시사주간지 타임은 “미군이 이전에 경험해 보지 못한 패배”라고 표현했고, 뉴스위크도 “미국이 진주만 사건 이래 가장 참혹하게 당한 패배”라고 표현했다고 전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중국 측은 당시 압록강을 건너 개마고원으로 산개한 중국군을 ‘인민지원군’이라고 표현하고 있으나, 사실은 대만 수복을 위해 대만해협 건너 푸젠(福建)성에서 대기 중이던 홍군 정예부대였다는 것을 중국인들 가운데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청의 해군이 일본군에 패해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한 중국이 장진호전투를 통해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다시 회복하는 결과를 빚었다고 할 수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장진호전투를 자신의 가족사와 관련 지어서만 생각하지는 않겠지만, 이번 방미를 계기로 ‘알지도 못하는 나라, 만난 적도 없는 사람들’을 위해 많은 미국 청년들이 목숨을 잃은 역사적 사실을 결코 소홀히 생각하지 않도록, 또 한·미 동맹을 소홀히 하는 것처럼 비치지 않도록 외교 흐름을 잘 끌어나가기를 바란다.
출처 | 주간조선 2464호
07.15 개혁 나선 중국군 목표는 미국 넘어서기?
중국 인민해방군(PLA)은 오는 8월 1일로 창군 90주년을 맞는다. 1927년 8월 1일 새벽 2시 저우언라이(周恩來), 주더(朱德), 허룽(賀龍), 류보청(劉伯承), 예팅(葉挺) 등 중국공산당 간부들은 장시성 난창(南昌)에 주둔하고 있던 국민당 군대에 대해 최초의 군사 공격에 나섰다. 4시간의 전투 끝에 중국군은 적 3000명 사살, 소총 5000여점 획득, 실탄 100만발과 대포 수문 확보 등의 대승을 거둔다. 중국군은 이날을 기념해서 매년 8월 1일을 건군 기념일로 삼아 기리고 있다.
중국 내부 사정에 밝은 홍콩의 시사주간지 아주주간은 최근호에서 “창군 90주년을 맞은 중국 인민해방군 내부에서 사상 최대의 군 개혁작업이 진행되고 있다”고 전했다. “개혁의 범위는 지금까지 90년간 유지되어 오던 중국군의 편제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세계 최강의 실전화(實戰化) 군대를 건설하는 것이 목표”라는 것이다.
당 총서기 겸 국가주석, 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인 시진핑(習近平)이 총지휘하는 중국 군 개혁작업은 2012년 11월 시진핑이 당 총서기 겸 군사위 주석으로 선출된 직후 “군대는 전쟁을 할 수 있어야 하고, 전쟁을 하면 승리해야 한다(能打仗 打勝仗)”는 지시에 따라 기존의 ‘군구(軍區)’ 체제를 ‘전구(戰區)’ 체제로 전환하는 작업부터 진행 중이라고 한다. 인민해방군은 지금까지 중국 대륙 전역을 7대 군구로 나누어 육·해·공군과 미사일부대를 모두 포함하는 집단군을 배치하는 편제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 개혁으로 편제를 단순화해서 중국 대륙 전역을 동부·서부·남부·북부·중부의 5대 전구(戰區)로 나누는 ‘전구(戰區) 시대’를 열어놓았다.
군종(軍宗)별 조직도 육·해·공군과 미사일부대, 전략지원부대의 5종으로 간소화했다. 또 각 군구에 2~3개 육군 집단군을 배치하던 과거에서 탈피, 지금까지의 18개 집단군을 13개로 간소화해서 배치하기로 했다. 아주주간은 베이징(北京)의 한 군사평론가의 말을 인용해 “중국의 최고 권부인 중남해(中南海)는 인민해방군의 조직 개편은 세계의 주요 강대국들이 국가안전을 수호하기 위해 군사전략을 대폭 수정 중이라는 판단에 따라 추진하고 있는 것”이라고 전했다.
중국 집단군은 자기네들이 이른바 ‘항미원조(抗美援朝) 전쟁’이라고 부르는 한국전에 참전한 27군, 천안문사태 때 출동했던 38군 등 유명한 집단군에 대해 모두 70가지의 부대명을 자랑스럽게 사용해왔다. 중국군은 현재 진행 중인 군 개혁을 통해 지금까지 90년간 사용해오던 숫자 부대명을 버리고, 71 이후 숫자를 새로운 집단군의 명칭으로 사용하기로 했다. 예컨대 동부전구에는 71·72·73 세 개의 집단군을, 서부전구에는 76·77 집단군을, 북부전구에는 78·79·80 집단군, 중부전구에는 81·82·83 집단군을 배치해두었다. 우리 군 관계자들은 중국군의 편제명이 이렇게 달라졌음을 숙지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아주주간은 현재 진행 중인 중국군의 개혁이 팔다리를 수술하는 정도의 개혁이 아니라 목 위의 머리를 수술하는 ‘보즈(脖子·목 부분) 이상’에 대한 개혁 작업임을 강조하고 “각 군의 총참모부, 총정치부, 총후근부 등의 ‘총부’ 체제도 수술의 대상이며, 대륙군으로만 머물던 과거와 완전히 이별하고 해·공군을 강화하는 개혁이 추진되고 있다”고 전했다.
특히 군의 최고 지휘부를 당과 국무원의 중앙군사위원회로 설정해두던 지금까지의 생각도 완전히 바꾸어 중앙군사위원회 대신 ‘중앙군민(軍民)융합발전위원회’라는 조직을 신설, 이미 지난 6월 20일 시진핑 당 총서기가 주관하는 제1차 전체회의까지 개최했다고 한다. 이 회의에서 중앙군민융합발전위원회의 주임에는 시진핑, 부주임에는 리커창(李克强) 총리와 류윈산(劉雲山), 장가오리(張高麗) 등 당 정치국 상무위원 3명이 지명됐다. 군 병력 감축은 ‘30만명 감축’이라는 최소 규모로만 실행하기로 했다. 그것도 2017년 말까지 감축하려고 했던 당초 계획을 바꾸어 앞으로 3년 동안 단계적으로 30만명 감축을 단행하기로 했다.
이와 함께 이번 개혁작업을 통해 그동안 군이 직접 나서 교육·신문출판·문화체육·통신·인재교육·건설엔지니어링·장비수리 등 10여개 부문의 비즈니스에 종사하며 돈을 벌어 군의 운영비로 충당하는 이른바 ‘돈 버는 군대’의 이미지를 완전히 버리기로 결정했다. 중국군의 사상 최대 개혁은 이미 2013년 11월 이후 시진핑이 관련 법규를 정비하거나 만들어가며 진행해왔다고 전해졌다,
문제는 역시 한국인 듯하다. 중국군이 한국을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지는 지금까지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일단 유사시 중국이 한국과 다른 입장에 설 가능성이 높은 가상 적이 될 수 있는데도 한국 정부는 아직도 중국군에 대한 이렇다 할 개념 정립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주지하다시피 중국은 북한과 동맹조약을 체결하고 있다. 미국과 동맹을 유지하고 있는 한국과의 관계 설정에 대해 심사숙고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제 중국과의 군사충돌이 빚어질 경우 1950년 10월 25일처럼 압록강 근처에 모여 있다가 압록강을 도강하는 작전이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산둥성 일원의 중국군 해병 공정대가 한반도 전역에 낙하산으로 투하되는 그림이 그려질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을 해야 할 것이다.
19세기를 지배한 세계 최강국은 영국이었고, 1900년 동아시아에서의 혼란을 계기로 20세기 세계 최강국은 미국으로 바뀌었다. ‘중국의 꿈(中國夢)’을 내걸고 21세기에 과거 당이나 청 왕조와 같은 세계 최강국으로의 복귀를 꿈꾸고 있는 중국에 대한 한국의 군사적 준비는 무엇인지 한국의 정치 지도자들에게 묻고 싶다.
2466호
07.24 쑨정차이 낙마는 党 원로 향한 시진핑의 도전장
중국 관영 신화(新華)통신은 지난 7월 15일 오전 다음과 같은 짤막한 보도를 했다. “일전에 당 중앙위원회는 결정했다. 쑨정차이(孫政才) 동지가 충칭(重慶)시 당위원회 서기 직무를 겸직하지 않기로. 천민얼(陳敏爾) 동지가 충칭시 당위원회 상무위원·서기를 맡고 구이저우(貴州)성 당위원회 서기 직무를 담당하지 않기로 당 중앙위원회는 아울러 결정했다. 구이저우성 당위원회 서기에는 쑨즈강(孫志剛) 동지가 임명됐다.”
중국공산당은 피라미드 구조로 되어 있다. 지난해 말 기준 8600만명이 넘는 당원들 가운데 3000명 정도가 대표로 선출되어 5년마다 한 차례씩 개최되는 전국대표대회(全大)에 참석한다. 전대의 임무는 새로운 당 중앙위원과 최고지도부를 선출하는 것이다. 중앙위원은 현재 376명으로, 이들의 임무는 해마다 가을에 한 차례씩 열리는 중앙위원회 전체회의(中全會)에 참가해서 그 다음해의 당과 정부 운용전략을 승인하는 일이다. 국가 운용전략은 25명으로 이루어진 중앙정치국에서 마련해서 중전회에 넘긴다. 정치국 회의는 유사시에 수시로 열린다.
25명의 정치국원 가운데 7명이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이들은 베이징(北京) 중난하이(中南海)에 함께 거주한다. 이들은 수시로 만나 차를 마시며 국가 중대사를 의논한다. 중난하이는 베이징 한가운데 고궁(故宮) 서쪽에 인접한 3개의 호수 주변으로, 부총리급 이상의 지도자들이 집단거주하는 곳이다. 이들은 매일 당 중앙서기처에서 국가 중대사를 요약한 보고서를 회람하면서 중요사에 대해서는 모여서 의논을 한다. 현재 7인의 정치국 상무위원들은 국가주석 시진핑(習近平·64), 국무원 총리 리커창(李克强·62),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 장더장(張德江·71),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 주석 위정성(劉正聲·72), 중앙당교 교장 류윈산(劉云山·70), 중앙기율검사위원회 서기 왕치산(王岐山·69), 부총리 장가오리(張高麗·71)이다.
현재의 정치국 상무위원 7인의 구성은 전 당 총서기 장쩌민(江澤民)과 시진핑의 전임 당 총서기 후진타오(胡錦濤) 사이의 정치 타협으로 이루어졌다. 이들 가운데 총리 리커창만이 후진타오가 길러낸 인물이고, 시진핑 이하 6인 모두는 장쩌민의 입김에 따라 선출된 인물들이다. 현재의 정치국 상무위원 7명 가운데 오는 가을 개최 예정인 제19차 당 대표대회에서 유임될 수 있는 사람은 시진핑과 리커창 2명에 불과하고, 나머지 5인은 모두 퇴진한다는 것이 5년 전에 열린 제18차 당 대표대회의 배후에서 장쩌민과 후진타오가 합의한 결과다. 일종의 정치적 타협안이었다.
1978년 개혁개방을 시작한 총설계사 덩샤오핑(鄧小平)은 경제 개혁에만 착수하고 정치 개혁은 보류했다. 대신 은퇴한 80대 노인들이 수렴청정으로 좌우하던 정치 구조를 바꿨다. 이른바 ‘7상8하’(67세까지는 당과 정부의 고위직을 담당할 수 있지만 68세부터는 일체의 당과 정부 고위직에 임명되지 못한다는 원칙)를 덩의 후계자인 장쩌민이 확립하도록 해서 정치안정을 확보하도록 했다.
이번 당 대회에서 정치국 상무위원이 될 후보들 중에는 현재 25명의 정치국원 가운데 이번에 실각한 쑨정차이(54) 충칭시 당 서기를 비롯해서, 리위안차오(李源朝·67) 국가부주석, 왕양(汪洋·62) 부총리, 후춘화(胡春華·54) 광둥(廣東)성 당 서기, 한정(韓正·63) 상하이시 당 서기 겸 시장, 쑨춘란(孫春蘭·여·67) 통일전선공작부장, 자오러지(趙樂際·60) 당 중앙서기처 서기 겸 조직부장, 류치바오(劉奇葆·64) 당 중앙서기처 서기 겸 선전부장, 장춘시엔(張春賢·64) 신장위구르자치구 당 서기, 천민얼 신임 충칭시 당 서기 등 9명이다.
이들 중에서 후춘화와 쑨정차이는 각각 2022년 20차 당 대회에서 당 총서기와 총리로 내정되어 이번 19차 당 대회에서 가장 연소한 나이로 정치국 상무위원회에 진입할 예정이었다. 시진핑 당 총서기가 그런 쑨정차이를 충칭시 당 서기에서 끌어내리고 대신 자신의 홍보를 담당하던 천민얼을 가장 가난한 성 가운데 하나인 구이저우성 당 서기에서 중국 4대 직할시 가운데 하나인 충칭시의 당 서기로 옮겼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잘 짜여지고 질서정연하게 후계자를 임명하도록 설계한 장쩌민과 후진타오의 정치 플랜을 무력화시켰다는 것을 뜻한다. 특히 이번 19차 당 대회를 계기로 3세대 주자 장쩌민을 밀어내고 4세대 대표로서 막후 수렴청정을 하려던 후진타오의 정치 설계를 무너뜨렸다는 것을 뜻한다.
시진핑이 쑨정차이를 날림으로써 전임 당 총서기 장쩌민과 후진타오가 마련한 정치 스케줄을 무너뜨린 데 만족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지난 5년 동안 자신이 끌어온 반(反)부패 드라이브 과정에서 오른팔 역할을 해준 69세의 왕치산을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유임시킨다면 바로 7상8하의 원칙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개혁개방과 함께 확립된 인사원칙을 무너뜨리고 “이제는 내 원칙대로 한다”는 도전장을 당 원로들을 향해 내던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978년 개혁개방 정책과 빠른 경제발전이 이루어진 배경에는 7상8하 원칙이 있었다. 덩샤오핑이 내건 ‘연경화(年輕化)’ 구상을 바탕으로 이 원칙이 잘 확립되고 적용된 덕분이었다. 이를 통해 안정적인 정치 환경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 별다른 풍파 없이 유지되어오던 중국공산당 내부 정치는 30여년 만에 그 기조가 무너지고 그 빈자리에 시진핑의 정치 변주곡(變奏曲)이 울리기 시작했다. 지난 5년 동안 대외적으로 대국굴기(大國崛起)를 추구해온 시진핑은 최근 들어서는 새로운 실크로드 건설 사업인 일대일로(一帶一路)를 착수하면서 이른바 ‘중국의 꿈’을 달성하겠다는 약속을 14억 중국인들에게 내걸었다. 제2의 마오쩌둥(毛澤東)이 되려는 야심의 싹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그동안 경제 개혁에만 치중하고 정치 개혁은 거들떠보지도 않던 시진핑이 울리기 시작한 변주곡이 혹시 새로운 중국 정치 혼란의 비극의 서막이 되지는 않을지 전 세계가 지켜보게 됐다. 그런 가운데 중국공산당은 제19차 당 대회를 오는 10월 또는 11월에 개최할 준비를 진행하고 있다.
2467호
07.31 사드 보복 시진핑 물러나야 끝난다
우리는 15년 전인 2002년 중국이 뜬금없이 들고나온 ‘동북공정(東北工程)’이란 괴물 때문에 민족의 자존심을 손상당하고 가슴 아파했다. 동북공정이란 ‘동북변강(邊疆) 역사와 현상계열 연구공정’을 줄인 말로 ‘열강에 의해 침탈당한 랴오닝(遼寧), 지린(吉林), 헤이룽장(黑龍江) 3개 성의 고대사와 이웃 나라들과의 국경선 획정 문제 등에 관한 총정리 사업’을 뜻하는 학술 프로젝트였다.
중국 정부는 동북공정을 진행하면서 이전까지 ‘조선반도 역사의 일부’로 인정해오던 고구려사를 “중국 동북의 소수민족이 세운 지방정권”이라는 표현으로 바꾸어서 각종 학술서적과 중·고 교과서, 비학술 서적에 기재하도록 강력한 행정력을 동원했다. 그러면서 2002년부터 2007년까지 5년간 역사 왜곡작업을 강행했다. 동북공정의 결과 중국은 “고구려와 조선반도에 있던 고려 사이에는 필연적인 관계가 없다”는 결론을 만들어냈고, “고구려와 현재의 조선(북한) 정권 사이에도 아무런 필연적 관계가 없으며, 고구려와 현재의 한반도 남부 한국 정권 사이에도 아무런 필연적 관계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동북공정의 결과 지린성 지안(集安)에 있는 광개토대왕비에는 유리 덮개가 씌워지고 중국식 기와지붕이 얹혔다. 비문의 유래를 설명하는 안내판에는 ‘고구려는 고대 중국의 지방 소수민족이 세운 지방정권으로…’라는 글귀가 새겨졌다.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 시절에만 해도 중국과 북한이 공동으로 고구려 유적을 조사하면 유물들은 모두 북한에 넘겨줬다. 그런 이웃나라 사이의 역사연구 사업은 사라졌다. 마오쩌둥(毛澤東) 시대 최고로 추앙받던 문인 궈모뤄(郭沫若)가 자신의 저작 곳곳에 ‘고구려는 조선반도에 있던 고대 정권’이라고 쓴 표현들도 모두 부정됐다.
동북공정이 진행되던 기간 중국 지식인들은 묘한 귀띔을 해주었다. “동북공정을 시작한 사회과학원 원장 리티에잉(李鐵映)이란 인물은 중국공산당 혁명 원로 리웨이한(李維漢)과 조선족 여성 김유영(金維映) 사이에 태어난 사람으로, 김유영은 원래 지하공작을 하던 덩샤오핑(鄧小平)의 내연의 처였으나, 중국공산당 최초의 해방구 루이진(瑞金)에서 공작을 하던 리웨이한과 덩샤오핑 사이의 연락업무를 담당하다가 리웨이한의 처가 된 사람이었다.” “조선족 여인의 혈육이었던 리티에잉은 실제로는 덩샤오핑의 아들로, 덩샤오핑 시대에 승승장구 출세를 하다가 사회과학원장의 자리에까지 올라 자신의 출생과 관련된 중국 동북지방의 역사를 정리할 필요가 있다는 판단에 따라 동북공정을 시작하게 됐다”는 설명이었다.
동북공정은 2002년 시작할 당시 국가부주석이던 후진타오(胡錦濤)의 서명날인과 사업에 대한 지지를 바탕으로 국가적 사업으로 강력히 추진됐다. 동북공정은 후진타오가 중국공산당 총서기의 권좌에 오른 2002년 말 이후 5년간 강력히 추진됐고, 그 과정에서 우리 정부는 이렇다 할 항의나 이 사업을 저지하기 위한 국제적 행동 한 번 제대로 못 했다. 일본 제국주의마저 부인하지 않았던 것이 고구려·신라·백제 3국의 한반도 정립(鼎立)의 역사다. 그 삼발이 솥에서 한 개의 발을 빼내감으로써 3국 정립이라는 솥은 제대로 서 있지 못하고 옆으로 쓰러지고 만 것이다.
후진타오가 2012년 11월 권좌에서 내려오면서 동북공정이 “종결됐다” “흐지부지 됐다”는 말을 중국 지식인들로부터 들었다. 그러나 우리에게 가슴앓이를 안겨주던 동북공정의 역할을 다른 것이 차지했다. 소문으로 떠돌기 시작한 미국의 고고도미사일방어시스템 사드(THAAD)에 대한 중국의 반대가 그것이다. 사드의 한국 배치 소문과 중국 측의 반대 의사 표시는 17세기에 확립된 유럽의 베스트팔렌 체제를 기반으로 한 현대의 주권국가 체제를 부인하고 한국의 주권을 무시하는 중국의 대표적인 행동으로 자리를 잡았다.
중국의 사드 반대는 지난해 7월 8일 박근혜 대통령이 그때까지의 NCND 방침과는 달리 “신속한 배치”를 돌연 발표함으로써 한·중 사이에 대표적인 갈등으로 떠올랐다. 1992년 8월에 한·중 수교가 체결된 이후 한 번도 전례가 없던 한국 기업들의 중국 내 경제활동에 대한 제재도 시작됐다. 중국 젊은이들을 사로잡던 한류(韓流)의 중국 내 유통도 금지됐다. 한국이 베스트팔렌 체제에 따른 주권국가임을 깔아뭉개면서 진행되는 중국의 사드 반대와 대응 공격 경고로 중국 내 현대차 판매는 반토막이 났고, 중국 전역에 진출해 있던 롯데 유통업은 전면적인 브레이크가 걸려 수많은 매장이 문을 닫게 됐다. 한류의 TV 공연도 일제히 중단됐다.
중국인들의 사드 배치 반대가 확산된 데는 다분히 중국공산당 총서기 겸 국가주석 시진핑의 책임이 크다는 것이 중국 지식인들의 말이다. 일반적으로 당과 국가의 전략적인 문제나 거시적인 문제에 대해 발언하는 것이 관례였던 시진핑 당 총서기가 사드라는 특정 무기에 대한 반대 발언을 함으로써 사드가 무엇인지 잘 모르는 중국인들도 덩달아 사드 반대를 외치는 흐름을 형성하게 됐다는 것이다.
중국의 사드 반대는 과연 언제까지 가야 사라지거나 흐지부지될 수 있을까. 중국 지식인들의 예상은 “중국 정치의 현실상 시진핑 주석이 사드 반대를 철회하거나 더 이상 언급하지 않을 때까지 계속 확산될 것”이라는 진단이다. 이들의 말이 맞다면 중국의 사드 반대는 올해 말 5년의 재임 기간을 새로 시작하는 시진핑 당 총서기의 임기 시간표에 따를 수밖에 없다. 결국 시진핑의 임기가 끝나는 2022년 말 제20차 당 대회 무렵에 가서야 사드에 대한 반대가 중국에서 사라질 수 있을 것이라는 예상들이다.
중국의 사드 반대가 만약 성공해서 우리가 사드를 철수한다든지 하는 일이 벌어진다면 중국은 한걸음 더 깊숙이 우리의 자존심을 파고들 제2의 동북공정이나 제2의 사드 사태를 만들어낼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그런 사태가 진전된다면 그 귀결은 베이징대학의 원로 국제정치학자 천펑쥔(陳峰君)이 주장하는 것처럼 “한반도에 통일 국가 형성을 조장해서 한반도 전체를 미국과의 완충지대로 만들자”는 말로 나타날 것이고, 그에 앞서 “이제는 미군이 한반도에서 나가야 할 때”라는 주장이 나올 것이 틀림없다. 중국의 사드 배치 반대에 우리가 결연히 대처하지 않는다면 그 다음에 벌어질 일들을 예상하는 게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 서글픈 현실이다.
2468호
08.10 중국의 일대일로(一帶一路) 프로젝트에 무관심하면 한반도는 섬으로 전락 할 것
중국은 서북쪽 4분의 3이 넘는 땅이 해발 2000m에서 4000m에 이르는 고산지대다. 그래서 산업혁명을 일으킨 영국의 해군 군사력이 1840년 중국 남쪽을 돌아 홍콩에 와서 아편전쟁을 벌이기까지 중국은 유럽과 분리되어 살아왔다. 분리된 중국과 유럽을 잇는 유일한 길이 바로 실크로드였다. 실크로드는 항저우(杭州)를 중심으로 한 중국 동해안 장강(長江) 하류의 고온다습한 기후에서 생산된 비단이 유럽으로 운반되는 통로였다. 장강 하류에서 시안(西安)을 거쳐 란저우(蘭州)에서 장예(張掖·옛 甘州), 시닝(西寧), 둔황(燉煌)이 차례로 연결되는 하서회랑(河西回廊)을 통과해서 지금의 신장(新疆)위구르자치구의 사막지대를 넘어 터키·로마에 까지 가닿는 유라시아 대륙 횡단로가 바로 실크로드였다. 이 실크로드는 시진핑 중국공산당 총서기가 2013년부터 주도하고 있는 ‘일대일로(一帶一路·One Belt One Road)’ 전략 때문에 주목을 받고 있다.
“일대일로는 과거와의 연속인가, 새로운 창의인가.… 실크로드에서 일대일로까지.”
지난 7월 31일 하서회랑의 중심부에 있는 도시 장예시에서 열린 일대일로 심포지엄에서 중국 상하이 푸단(復丹)대학의 역사지리학 원로 거젠슝(葛劍雄) 교수는 과거 2000년 이상 중국과 유럽을 연결하는 실크로드의 형성과 시진핑의 중국공산당과 정부가 주도하는 일대일로 프로젝트를 비판적으로 따져보는 발표를 했다.
“2000년 넘게 동서양을 연결한 실크로드는 중국이나 유럽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연 것이 아니다. 서로 이익이 있었기 때문에 열린 길이며, 그 길을 통해 중국과 유럽의 문화와 문명의 상호 교류가 이뤄졌다. 서로 간에 윈윈하는 관계였기 때문에 실크로드가 2000년 넘게 이어져온 것이며, 그 길을 통해 중국과 유럽은 운명공동체로 연결됐다.”
푸단대의 원로교수 거젠슝 교수의 발표를 듣는 동안 이 심포지엄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에서 상하이(上海)를 경유해 시닝으로 가면서 중국동방항공의 기내 잡지에 실린 ‘언어가 세계를 연결한다: 일대일로와 언어’라는 글이 생각났다. 기내 잡지에 실리기에는 격이 맞지 않는 듯한 이 글은 과거 2000년 동안 중국과 유럽을 연결한 실크로드를 통해서 이뤄진 활발한 문화와 문명 교류의 내용을 현재 중국에서 사용되는 언어 분석을 통해 짚어보는 내용이었다.
“동아시아 여인들이 상의 저고리 장식으로 귀하게 여기던 보석 ‘호박’은 페르시아어 카르파이(karupai)를 음역한 것이다. 유리는 산스크리트어 벨루리아(veluria)를 음역한 것이고 포도, 석류, 연지곤지, 재스민, 수박 등도 유럽과 중앙아시아에서 실크로드를 타고 중국으로 전래된 것들이다. 고추와 후추, 참깨 등도 마찬가지다.”
그런가 하면 실크로드를 타고 중국으로 전래된 불교는 산스크리트어를 통해 중국어가 표현할 수 있는 어휘의 의미 영역을 크게 넓혀놓았다.
“찰나, 참회, 지옥, 번뇌, 방편, 평등, 세계 등의 용어는 산스크리트어가 표현하던 불교 세계의 관념이 중국으로 전파된 것이다. 현재 중국 정부가 계획하고 있는 일대일로가 연결하는 곳에는 모두 64개 국가에 2400여종의 언어가 사용되고 있다. 일대일로 사업이 진행되면 이 언어들이 일대일로를 타고 서로 뒤섞이면서 새로운 세상을 얽어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 중국은 일대일로를 타고 전파될 물류와 사회간접자본 건설과 금융에 대한 준비뿐만 아니라 이들 언어의 변화를 연구할 기구를 필요로 한다.”
중국에서 열리는 학술회의에 발표자로 나선 학자가 당과 정부에 대해 비판적인 자세를 보여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거젠슝 교수는 푸단대의 원로교수로서 그만한 명성을 쌓아왔기 때문이다. 과거 실크로드가 일방적으로 중국 쪽에서 연 길이 아니라 유럽과 중국이 서로 필요로 하는 문화와 문명 교류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2000년 넘게 유지돼온 것처럼, 시진핑의 중국공산당과 리커창(李克强) 총리의 중국 정부가 2013년부터 추진해온 일대일로 사업은 “중국이 혼자 부르는 독창이 아니라 아시아가 함께 운명공동체가 되어야 할 프로젝트”라는 인식을 중국 지도자들뿐만 아니라 우리 정치 지도자들도 인식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경우 당나라 때 활발하게 교류가 이뤄진 실크로드를 통해 아라비아인들이 한반도에 와서 장(張)씨 성을 달고 살기도 했고, 호박이나 유리병이 페르시아 쪽에서 전래되어 한반도 사람들의 애호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우리 정부와 국민들은 일대일로 사업이라는 프로젝트를 시진핑의 중국이 일방적으로 진행하는 미국 견제용 국제 정치 프로젝트쯤으로 간주하는 분위기다. 그래선지 중국 학자들은 “한국이나 북한이 지금처럼 일대일로 사업을 무관심하게 대하면 나중에 한반도는 ‘두 개의 외로운 섬(Lonely Island)’이 되고 말 것”이라는 말을 충고처럼 들려준다.
우리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 임명한 홍기택이라는 AIIB(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 부총재가 중국이 일대일로 사업에 대한 한국의 적극적 기여를 바라는 뜻으로 부총재 자리를 배려해주었는데도 부인과 유럽 여행 중에 잠적한 뒤 사표를 제출한 어이없는 행동을 한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 중국이 이미 세계 70여개국과 각종 계약을 맺어가면서 진행하고 있는 일대일로 프로젝트는 앞으로 우리의 국가 운명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 틀림없다. 중국이 미국과의 갈등의 와중에서 한반도에 사드(THAAD)라는 방어무기를 배치하는 데 대해 한국의 주권을 무시하면서 반대하는 것도 잘못된 처사이지만, 사드를 둘러싼 갈등 때문에 우리가 일대일로 프로젝트를 등한시하는 것은 우리의 미래를 어둡게 하는 일이 될 것이다.
우리는 과연 일대일로 프로젝트의 결과 이루어질 중국과 중앙아시아, 유럽 사이의 문화 교류에 대비할 언어 교육은 실시하고 있는가 한번 따져봐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해발 2000m에서 4000m에 이르는 칭짱(靑藏) 고원지대에서 이미 시작되어 진행되고 있는 문명적 변화를 이해하기 위한 노력을 얼마나 하고 있는지도 궁금하다.
출처 | 주간조선 2469호
08.14 중국 지도자들의 황제 놀음
“계속되는 중국의 굴기(崛起·rise)로 권위주의적인 독재정치가 부활하고 있는 반면에 미국과 유럽에서는 민주주의적 가치가 약화되고 있다. 중국은 상하이 협력기구를 통해 권위주의적인 중앙아시아와 러시아 정권들과 권위주의적이고 독재적인 정치 기술과 도구를 서로 교류해가며 발전시키고 있다. 그런 가운데 필리핀의 로드리고 두테르테 대통령은 ‘악에 대한 독재’를 선포했으며, 몽골에서는 몽골 유도협회장을 오래 지내던 칼트마 바툴가가 새로운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두테르테와 바툴가는 필리핀과 몽골의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다.”
민주주의 이론의 세계적 권위자인 미국 스탠퍼드대학의 래리 다이아몬드(Larry Diamond) 교수는 8월 8일 한국고등교육재단(KFAS) 초청으로 방한해 ‘민주주의의 위기: 그 현상과 원인, 정책 대응’이라는 제목의 강연을 해서 흥미를 끌었다. 지난 10년 동안 세계 곳곳에서 나타난 민주주의의 후퇴와, 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부상하고 있는 포퓰리즘, 소셜미디어 때문에 확대되고 있는 양극화와 관용적인 정신의 쇠퇴, 중국의 부상과 군사력 투사, 권위주의 정치의 부활 등에 대한 강연이었다.
“물론 아직도 많은 국가들이 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고, 중부 유럽과 동유럽에서는 민주주의가 강화되고 있으며, 한국과 대만에서도 민주주의가 더욱 단단해지고 있어 희망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한국의 지식인들은 중국 내에서 민주주의가 자라날 수 있도록 지원을 해야 할 것입니다.”
래리 다이아몬드 교수의 강연은 한동안 잊고 있던 민주주의라는 가치를 다시 떠올려주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지난 10년 넘게 계속된 중국의 빠른 경제 성장, 갈수록 덩치가 커져가는 GDP, 날로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군사력, 그리고 우리에 대한 사드 배치 반대 압력 등 점점 괴물이 되어가는 중국의 근육만 쳐다보고 위기감을 키워가며 살아왔다. 중국이 중국공산당이 주도하는 당국가(party state)로 민주주의를 향한 어떤 노력도 기울이지 않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깜박 잊고 있었다.
정확히 9년 전인 2008년 8월 8일 오후 8시에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이 개막을 선언한 베이징올림픽은 ‘더 높이, 더 멀리, 더 빨리’라는 고대 그리스의 정신과는 전혀 거리가 먼 개막식 모습을 전 세계에 보여주었다. 천제가 거처하는 황궁이라는 뜻의 ‘자미(紫薇)’에서 가져온 자금성(紫禁城) 한가운데에는 남북을 관통하는 축선이 그려져 있다. 그 자금성의 축선을 북쪽으로 12㎞ 연장한 곳에 지어올린 냐오차오(鳥巢·Bird Nest) 스타디움에 중국 전설에 나오는 불사조 봉황이 하늘로부터 되돌아온다는 줄거리를 형상화한 개막식은 오후 8시에 시작해서 밤 12시 넘어까지 계속됐다.
안 그래도 더운 베이징의 8월 8일 밤 8시에 새 둥지 모양의 스타디움 안은 40도가 훨씬 넘는 더위였다. 초대된 100여개 국가의 대통령과 총리, 정치 지도자, 세계의 중요 기업 대표들은 부부 동반으로 일반 관중석과 별로 다르지 않은 좌석에 앉아 말 그대로 고구마나 감자처럼 푹푹 삶아졌다. 그러나 놀랍게도 장쩌민(江澤民) 전 국가주석과 후진타오 당시 국가주석, 그리고 8명의 중국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들은 널찍한 책상과 편안한 등받이 의자에 앉아 다리 밑에서 나오는 에어컨의 냉기를 쐬며 의젓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은 물론 이명박 대통령과 동서양의 국가원수급 지도자들은 부부 동반으로 겨우 엉덩이만 붙일 수 있는 조그만 의자에 앉아 온몸에 땀을 흘리다가 살아남기 위해서 화장실을 연신 드나들었다. 유일하게 그곳에서 나오는 에어컨의 찬바람을 쐬어 정신을 차리고는 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의 좌석이 화장실 근처였다는 점이었다. 부시 대통령은 화장실을 드나드는 전 세계 지도자들을 볼 때마다 연신 자리에서 일어나 땀이 흘러내리는 얼굴 만면에 웃음을 띠고 “하이!”라고 친근한 인사를 건네 “역시 미국 대통령…”이라는 찬사를 듣는 아이러니를 연출하기도 했다. 그날 밤 100여개 국가의 지도자들 가운데 유일하게 중국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의젓함을 유지한 것은 북한 최고인민회의 의장 김영남이었는데 놀랍게도 김영남이 앉은 자리, 김영남의 뒤통수 바로 뒤에서는 에어컨 바람이 뿜어나오는 구멍이 있었다는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있었다.
2008년 8월 8일 밤 8시에 개막된 베이징올림픽 개막행사에 참석했던 100여개 국가의 국가원수와 지도자들은 모두 다 그런 중국 지도자들의 ‘암수(暗手)’ 때문에 분노와 불안감에 치를 떨어야 했을 것이다.
시진핑(習近平)을 비롯한 중국 지도자들은 그런 황제놀음에 재미를 붙였는지 지난해 항저우에서 개최된 G20 정상회의나 올해 베이징(北京) 외곽의 옌치후 국제회의장에서 개최된 일대일로(一帶一路) 국가지도자 회의 때 외국 정상들을 문 밖에 모여 기다리게 했다. 외국 정상들이 먼저 입장한 시진핑에게 차례로 다가가 허리를 굽혀 인사하며 악수를 하는 광경을 연출했다.
그런 흐름을 타고 베이징 인민대학의 자오팅양(趙汀陽)이란 철학교수는 “주권국가들 간의 평등을 주장하는 미국과 유럽의 베스트팔렌 체제는 지난 300년간 강대국들의 약소국에 대한 침해로 불평등한 국제사회를 만들어놓았다”고 주장하면서 “과거 2000년 동안 계속된 중국의 천하체계는 힘 있는 중화국가가 약소국을 보호하는 체제로, 천하체계가 부활되어야 국제사회가 비로소 진정한 평등사회가 될 수 있다”는 주장을 담은 ‘천하체계론’이라는 책까지 출판해 중국 지식인들 사이에 ‘천재’라는 말을 듣는 웃기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
중국은 비록 식민지이기는 하나 민주정치를 하던 홍콩과 마카오를 접수한 뒤에 민주적 선거제도 대신 중국공산당이 후보를 제시하는 비민주를 정착시키려고 애쓰고 있다. 북한의 김씨 왕조 독재체제에 대해서도 겉으로 말은 안 하지만 끝내 원유 수송파이프 닫기를 거부하는 것으로 은근한 지원을 하고 있다. 그런 중국에 대해 “중국 때문에 아시아의 민주주의가 위기에 빠졌다”는 래리 다이아몬드 교수의 강연은 새삼 신선한 느낌을 주었다. 특히 “한국이 중국의 민주주의를 위한 지원을 해야 한다”는 촉구는 수교 25주년을 썰렁한 분위기에서 맞는 한·중 관계의 미래에 특별한 의미를 던져주는 말이었다.
2470호
08.21 중국 역사학자가 벗긴 中·北 갈등의 역사
선즈화(沈志華·67) 교수는 상하이 화동사범대 소속의 저명 역사학자다. 주로 중국과 소련, 중국과 북한의 현대사를 연구해왔다. 중국 내에서는 가장 많은 자료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근년에 들어서는 주로 중국공산당과 조선노동당 사이의 갈등사를 연구해왔다. 그는 1999년에 ‘중·소 동맹과 조선전쟁 연구’, 2009년에는 ‘마오쩌둥, 스탈린과 조선전쟁 연구’, 2015년에 ‘1948~1960년 중국 속의 소련 전문가들’이란 책을 출판했다.
선즈화 교수가 8월 초 중국과 북한의 1950년대 갈등을 다룬 ‘최후의 천조(天朝): 마오쩌둥, 김일성과 1945~1976년 중·조(中朝) 관계’란 책을 홍콩 중문대학출판부에서 냈다. 중국 내 사정에 밝은 홍콩에서 발행되는 시사주간지 아주주간(亞洲週刊)은 ‘중·조 관계의 역사적 진상을 복원해놓았다’는 제목으로 이 책을 소개했다.
“당대 중국과 조선 관계는 조선전쟁의 영향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수천 년 동안 계속되어온 ‘천조(天朝) 관계’, 다시 말해 천자국과 주변국가 관계에 영향을 받았으며, 마오쩌둥(毛澤東) 시대에는 같은 사회주의 진영 내에 속해 있으면서 소국을 이끄는 대국으로서 중국이 조선의 내정에는 간섭하지 않는 것이 옳다는 원칙을 확립했다”는 것이다.
또 중국과 북한의 관계에는 크게 보아 중국과 소련 사이의 사회주의 주도권 다툼이 배경에 작용하고 있으며 “마오쩌둥은 폴란드와 헝가리 사태를 겪으면서 소련이 수정주의의 길로 들어섰다고 판단하고, 원래는 아시아의 사회주의 주도국으로서의 지위만 확보하려던 생각을 버리고 전 세계의 사회주의 주도국이 되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 중국과 북한 관계에 영향을 미쳐 불간섭주의 색깔이 짙어지게 됐다”고 아주주간은 설명했다.
선즈화 교수는 이 책의 출판과 관련 아주주간과 인터뷰를 갖고 “1956년 8월 김일성이 친중 노선의 연안파(延安派)를 숙청할 때 중국은 수동적으로 지켜보기만 했으며 최근 김정은이 친중 노선의 장성택 일파를 숙청할 때도 중국은 수동적으로 지켜보기만 했는데 역사적으로 북한 내부의 친중파에 대한 중국의 태도는 어떤 것인가”라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했다.
“마오쩌둥은 자신의 시대에 전 세계 사회주의 국가들의 리더가 되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소련이 폴란드와 헝가리에 무력 개입하는 것을 비판하면서 중국은 북한을 포함한 주변국에 대해 내정간섭은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우는 바람에 1956년 북한 김일성이 연안파를 숙청할 때 수동적으로 지켜보기만 했다.”
선즈화 교수는 “1956년 8월의 연안파 숙청과 최근 김정은의 장성택 숙청은 서로 다른 사건”이라며 “김일성의 연안파 숙청 때 중국의 지도자는 마오쩌둥이었지만, 김정은의 장성택 숙청 때 중국 지도자는 현 당 총서기 시진핑으로, 김정은의 장성택 숙청 때 당연히 화가 났을 것인데 아무 대처도 하지 않은 데 대해서는 나도 이해하기 힘들다. 중국 지도자들이 북한 내부 사정에 대해 이해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던 탓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선즈화 교수는 자신의 저서 ‘최후의 천조: 마오쩌둥, 김일성과 1945~1976년 중·조 관계’에서 1950년 6월 25일에 있었던 일화를 소개하기도 했다. 중국은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정부 수립을 선포하면서 인민해방군 총사령관 주더(朱德)의 명령으로 국민당 최대의 저항세력인 대만 지역에 대한 수복을 목표로 수십만의 군사들을 대만섬 건너편에 집결해 두고 있었다. 당시 대만섬으로 패퇴한 장제스(蔣介石)는 죽음을 각오하고 공산당군의 공격을 막아낼 준비를 하고 있던 터였다.
그런데 1950년 6월 25일 김일성이 남한을 침공했다는 보고를 받고 장제스는 다음과 같은 말을 측근들에게 했다. “이는 하느님의 성령이 우리와 함께하고 계신다는 증거다.” 장제스는 손에 들고 있던 닭수프 그릇이 떨어지는 것도 모르고 “조선이 마오에게 참전을 요청하건 말건 마오는 참전할 것이 분명하다.… 대륙의 조선전쟁 참전은 곧바로 우리를 공격할 여력이 없어진다는 것을 뜻한다.… 하느님의 성령은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세계 사회주의 국가들 사이에서 리더로 군림하려 하는 마오쩌둥의 생각을 정확히 읽고 있던 장제스는 한국전쟁 발발 소식을 듣고는 곧바로 중국공산당의 참전을 예언했다는 것이다.
1956년 4월 조선노동당 제3차 당 대회를 거치면서 김일성은 자신에 대한 개인숭배 작업을 시작해 전국 각지에 기념비와 초상화를 세우고 영화와 가곡, 저작 등을 통해 자신을 미화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연안파의 핵심으로, 한국전쟁 초기에 베이징(北京)에 주재하면서 마오쩌둥과 김일성 사이를 연결했던 이상조는 “조선 인민 혁명 박물관이 김일성의 개인 역사박물관으로 변했다”는 보고를 베이징으로 했고, 이에 대응해서 김일성은 이상조와 또 다른 연안파의 거두로 황푸군관학교 출신인 최용건을 ‘반당집단’으로 규정해 숙청하기에 이르렀다.
중국에서 마오쩌둥이 죽고 덩샤오핑(鄧小平)이 권력을 잡은 직후인 1978년 9월 덩샤오핑이 평양을 방문했을 때 덩샤오핑은 김일성이 개인숭배를 위해 거대한 금빛 동상을 세워놓은 것을 보고 “이 동상 세우는 데 우리가 원조한 인민폐가 얼마나 들어갔을까”라고 탄식했다고 한다. 나중에 귀국해서 “더 이상 조선에 대한 원조를 늘리지 말 것”을 지시했다는 일화도 선즈화 교수의 ‘최후의 천조’는 전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은 김일성의 개인숭배 조장을 적극적으로 저지하지 못했으며, 북한은 경제적으로도 중국이 주문하는 개혁 작업에 나서지 않았다. 이는 중국을 대신해서 미국과 싸우는 역할을 해주면 중국은 꼼짝 못 한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던 김일성이 북한의 가장 주요한 전략을 반미(反美)로 표방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선즈화 교수는 하고 있다. 선즈화 교수의 저서는 우리 외교와 통일 분야 당국자들이 꼭 읽어 봐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2471호
08.30 시진핑 사상’ 당 강령에 등장?
중화인민공화국은 1949년에 수립됐고, 헌법은 5년 후인 1954년에 제정됐다. 중국은 1978년 개혁개방을 시작했고, 1983년에 헌법 개정이 이뤄졌다. 그 헌법 전문(前文)은 다음과 같이 흘러간다.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역사가 오랜 국가 중의 하나다.… 1911년 쑨중산(孫中山) 선생이 이끄는 신해혁명이 봉건제를 폐지하고 중화민국을 창립했다.… 1949년 마오쩌둥(毛澤東)을 영수(領袖)로 하는 중국공산당이… 중화인민공화국을 건립했다.… 중국의 각족 인민들은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쩌둥 사상, 덩샤오핑(鄧小平) 이론과 ‘3개 대표’의 중요 사상 인도 아래… 부강하고 민주적이며 문명스러운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해왔다.”
중국공산당 당장(黨章·당 강령)은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쩌둥 사상, 덩샤오핑(鄧小平) 이론과 ‘3개 대표’의 중요 사상에다가 ‘과학발전관’을 지도사상으로 추가해놓았다. ‘3개 대표’ 이론이란 덩샤오핑이 발탁한 장쩌민(江澤民) 총서기가 주도하는 당 중앙이 ‘중국공산당이 생산력과 문화, 전 인민을 대표한다’고 규정함으로써,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결과 생겨난 부유층 부르주아들도 당에 입당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놓은 이론이다. 즉 중국공산당이 더 이상 계급투쟁을 목표로 하는 프롤레타리아 정당이 아니라 전 인민의 대표라고 규정한 것이다. ‘과학발전관’은 장쩌민의 후임 총서기 후진타오(胡錦濤)가 주도한 당 중앙이 ‘중국이 지속가능한 성장을 추구한다’는 방침을 확립한 이론이다.
중국의 정치 이론은 마르크스레닌 ‘주의’와 마오쩌둥의 ‘사상’, 덩샤오핑의 ‘이론’, 그리고 과학발전 ‘관’이라고 지도사상의 등급을 구분해놓았다. ‘주의’는 국가를 초월해서 적용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라는 뜻이고, ‘사상’은 중국 내에서 시대를 초월해서 적용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를 말하고, ‘이론’은 특정 시대에만 적용 가능한 이데올로기를 말한다. ‘관’은 특정 지도자가 제시한 이데올로기라는 뜻이다.
요즘 중국 관영 매체들은 ‘시진핑(習近平) 사상’이라는 용어의 사용 빈도를 높이고 있다. 개혁개방 시대를 이끌어온 당의 지도사상이 그동안 덩샤오핑 이론, 장쩌민의 3개 대표론, 후진타오의 과학발전관 세 가지였으나 여기에다가 중국공산당 창당 100주년이 되는 2021년까지 중진국을 달성하고 중화인민공화국 100주년이 되는 2049년까지는 선진국을 건설한다는 시진핑의 민족부흥 이론을 추가한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공산주의 청년단의 온라인 뉴스 ‘중청재선(中靑在線)’은 지난 3월 28일 “중국어본과 영어본 책자 ‘시진핑 사상(習近平思想·Xi Jinping Thought)’이 영국에서 출판됐다”고 타전했다. 이 책자는 시진핑이 당서기를 지낸 저장(浙江)성 자싱(嘉興)시의 구시원(求是園) 문화전파공사가 출판해서 영국으로 수출한 것으로, 런던의 내셔널리버럴클럽에서 열린 출판기념 행사에는 영국 주재 중국대사관원들과 일부 국가 외교관들이 참석했다고 전했다. 중청재선은 중국어본 ‘시진핑 사상’과 영어본 ‘Xi Jinping Thought’의 사진도 함께 게재했다.
홍콩의 시사주간지 아주주간(亞洲週刊) 8월 27일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올해 말에 열릴 중국공산당 제19차 당 대회에서 시진핑 사상이 마오쩌둥 사상과 덩샤오핑 사상에 이어 세 번째 중국공산당의 지도사상으로 당 강령에 삽입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민족부흥을 골자로 하는 ‘시진핑 사상’이 장쩌민 이론과 후진타오의 과학발전관을 제치고 마오쩌둥·덩샤오핑의 지도사상급으로 격상되어 ‘사상’이라는 이름을 달고 당 강령에 등장하게 될 예정이라는 것이다.
아주주간은 지난 3월 영국에서 판매되기 시작한 ‘시진핑 사상’이라는 책의 내용 중에 “마오쩌둥 사상은 20세기 전반부 전쟁과 혁명 시대의 지도사상이었고, 덩샤오핑 사상은 20세기 후반부의 평화와 발전 시대 지도사상이었으며, 시진핑 사상은 21세기 전반부 개혁과 창조의 시대에 지도사상이 될 것”이라는 서술도 있었다는 점을 소개했다. 시진핑 사상이 덩샤오핑 이론과 장쩌민 이론, 후진타오의 과학발전관에 이어 네 번째 지도사상으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마오쩌둥 사상과 덩샤오핑 사상에 이은 세 번째 지도사상으로 격상돼 등장할 것이라는 예측이다.
영국에서 판매되기 시작한 시진핑 사상의 저자로 중국 국방대학 교수인 류밍푸(劉明福)는 “1945년 중국공산당이 ‘마오쩌둥 사상’을 당 강령에 써넣을 때 마오는 ‘당 활동의 주체는 개인이 아니며, 나는 당의 집단지도체제를 대표해서, 아울러 당의 이익을 고려해서, 마오쩌둥 사상이 당 강령에 삽입되는 것을 반대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했다”고 강조했다. 시진핑 사상이라는 말 역시 시진핑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현재의 당 집단지도체제를 대표한 용어라는 주장이다.
아주주간은 이와 함께 중국공산당이 오는 19차 당 대회에서 그동안 7인으로 구성돼 있던 정치국 상무위원회를 5인 위원회로 축소하면서 시진핑 시대의 국가전략 수립을 주도해온 왕후닝(王滬寧·62) 당 중앙정책연구실 주임을 새로운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발탁할 것이라는 예상도 곁들였다.
아울러 시진핑의 오른팔로 그동안 반(反)부패 활동을 주도해온 왕치산(王岐山·69) 당 중앙기율검사위원회 주임을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유임할 것이라는 예상도 덧붙였다. 왕치산의 유임은 당 간부의 연경화(年輕化)를 위해 67세까지는 당 간부에 임명 가능하지만 68세부터는 불가라는 덩샤오핑 개혁개방 시대에 수립된 중국공산당의 ‘칠상팔하(七上八下)’ 원칙을 무너뜨리는 모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무려 70여년 전인 1945년 제7차 당 대회에서 있었던 마오의 언급까지 되살려가며 ‘시진핑 사상’을 당 강령에 써넣으려는 시도는 중국공산당 내에서는 이해가 될 일일지 모르지만 미국과 유럽 등 외국의 시각으로는 시대착오적이라는 말을 듣지 않을지 궁금하다. 70여년 전의 중국과 21세기에 G2로 자라난 중국은 국가의 위상이 너무나 달라졌는데 중국공산당 내에서 시대착오적인 일이 벌어진다면, 분위기에 따라서는 중국공산당 내부에 이번 제19차 당 대회를 치르면서 일진광풍(一陣狂風)이 불지도 모를 일이다.
출처 | 주간조선 2472호
2017.09.04
2473호 새로 등장한 시진핑의 아이들 5인방
중국공산당의 권력구조는 피라미드식으로 되어 있다. 14억 인민들 가운데 8600만명이 당원이다. 이들 당원들 가운데 전국에서 3000명 정도가 5년마다 한 번씩 베이징 인민대회당에 모여 당대회를 개최한다. 3000명의 대표들은 당대회에서 앞으로 5년간 중국공산당을 이끌고 갈 300명 정도의 중앙위원을 선출한다. 이들 중앙위원들 가운데 10분의 1 선인 30명 정도가 정치국원으로 선출된다. 정치국원들 가운데 5~7명 정도가 정치국 상무위원이 되어 상근직으로 당과 국가를 관리한다. 중국공산당의 최고지도자인 당 총서기는 정치국 상무위원 가운데 한 사람이 선출된다. 현재 당 총서기인 시진핑(習近平·64)은 국가원수인 국가주석을 겸임하고, 군을 통수하는 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도 겸임한다.
현재 7명인 정치국 상무위원들은 시진핑, 리커창(李克强·62·국무원 총리), 장더장(張德江·71·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 위정성(兪正聲·72·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 주석), 류윈산(劉云山·70·중앙당교 교장), 왕치산(王岐山·69·중앙기율검사위원회 서기), 장가오리(張高麗·71·부총리) 등이다. 이들 가운데 시진핑과 리커창을 제외한 5명이 68세 이상의 나이 때문에 올해 말 개최 예정인 제19차 당대회에서 은퇴할 예정이다.
새로운 정치국 상무위원이 될 후보들로는 현재 25명인 정치국원들 가운데 지난 7월에 실각한 쑨정차이(孫政才·54) 전 충칭시 당 서기를 제외하고, 리위안차오(李源潮·67) 국가부주석, 왕양(汪洋·62) 부총리, 후춘화(胡春華·54) 광둥성 당 서기, 한정(韓正·63) 상하이시 당 서기 겸 시장, 쑨춘란(孫春蘭·여·67) 통일전선공작부장, 자오러지(趙樂際·60) 당 중앙조직부장, 류치바오(劉奇葆·64) 당 중앙선전부장, 장춘시엔(張春賢·64) 신장위구르자치구 당 서기, 천민얼(陳敏爾·56) 신임 충칭시 당 서기 등이 꼽혀왔다. 당초 예상은 이들 가운데 5명이 새로운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발탁될 예정이었다.
그런데 요즘 중국공산당 인사 동정을 보고 있으면 이들 정치국원 가운데 5명이 정치국 상무위원이 된다는 안정적 전망이 불투명해지고 있다. 중국공산당의 ‘핵심’으로 불리기 시작한 시진핑이 자신의 지지자들을 일제히 당과 국가의 중요 포스트에 전진 배치하면서 안정적 구도가 깨져버렸기 때문이다. 2~3개월 이내에 열릴 당대회에서 새로운 권력자로 등장할 ‘시진핑의 아이들’은 쑨정차이 전 충칭시 당 서기를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한 천민얼, 천민얼이 맡고 있던 구이저우(貴州)시 당 서기로 발탁된 쑨즈강(孫志剛·63), 지난 5월 수도 베이징(北京)시 당 서기로 떠오른 차이치(蔡奇·62), 칭화(淸華)대 총장에서 베이징시 시장으로 발탁된 천지닝(陳吉寧·53), 시진핑 시대의 국가전략과 대외정책을 기획한 왕후닝(王滬寧·62) 당 중앙정책연구실 주임, 당의 살림을 책임지고 있는 리잔수(栗戰書·67) 중앙판공청 주임 등 5명이다.
마이니치(每日)신문을 비롯한 일본 언론들은 천민얼이 시진핑의 후계자로 내정되어 이번 당대회에서 정치국 상무위원이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그러나 그렇게 될 경우 지난 2012년에 열린 제18차 당대회에서 장쩌민(江澤民)·후진타오(胡錦濤) 전 당 총서기가 합의해놓은 권력 후계구도를 깨야 한다. 당시 두 사람은 시진핑의 후임 당 총서기로 후춘화 광둥성 당 서기를 점찍어놓았다. 만약 후춘화를 밀어낼 경우 시진핑이 안아야 할 정치적 부담이 너무 크다는 점에서 천민얼이 시진핑의 후계자가 될 가능성은 높지 않다고 보는 편이 합리적일 것이다. 일본 언론들은 확인해야 할 일이 있을 때 애드벌룬성 보도를 가끔 한다. 새로 충칭시 당 서기로 임명된 천민얼이 과거 시진핑의 연설문 작성을 주로 했다는 전력을 근거로 시진핑의 후계자가 아니냐는 식의 풍선을 띄워 본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면 이번 당대회에서 당초 정치국 상무위원 후보로 예상되던 기존 인물들과 새로 떠오른 시진핑의 아이들 5명을 더한 14명 가운데 누가 진짜 시진핑의 후계자가 될까. 일단 후계자가 되려면 5년 뒤인 2022년 제20차 당대회에서 정치국 상무위원이 될 수 있는 67세 이하라는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이 조건을 총족시킬 수 있는 인물은 후춘화와 왕양, 자오러지, 천민얼, 차이치, 천지닝, 왕후닝 등 7명뿐이다. 이 중 시진핑의 후계자로 2022년 이후 10년간, 즉 2027년의 제21차 당대회 이후 5년간 당 총서기직을 담당할 수 있는 50대의 인물은 후춘화, 천민얼, 천지닝 3명으로 압축된다.
따라서 중국 국내 정치가 순리대로 흘러간다면 후춘화가 시진핑의 후계자가 되고, 천민얼과 천지닝 가운데 1명이 리커창의 후임 총리로 내정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일본 언론들의 보도대로 천민얼이 시진핑의 후임 당 총서기가 되려면 현재 광둥성 당 서기를 맡고 있는 후춘화가 낙마해야 한다. 후춘화는 지난 2009년부터 3년간 내몽골자치구 당 서기를 맡으면서 내몽골의 경제를 무려 17%나 성장시켰지만 그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그가 의욕적으로 조성한 인구 100만명의 도시 오르도스가 도시 기반이 제대로 조성되지 않아 입주희망자가 없는 ‘유령의 도시’로 낙인찍혀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을 비롯한 서양 매체들의 입방아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런 점들이 쑨정차이에 이어 그가 낙마할 가능성의 배경이 될 수도 있다. 그럴 경우 천민얼이 시진핑의 후임 당 총서기, 시진핑의 칭화대 후배로 환경전문가인 천지닝이 총리 자리에 오를 가능성을 예상해 볼 수도 있다.
최근 중국에서 만나본 중국공산당 간부들의 말을 들어 보면 시진핑이 전임자 장쩌민과 후진타오 사이의 합의를 깨고 지난 7월 쑨정차이 전 충칭시 당 서기를 낙마시킨 데 이어 다시 두 전임자 사이의 가장 큰 합의사항인 후춘화까지 밀어낼 가능성은 커 보이지 않는다. 시진핑이 자신의 후임자 내정 구도를 다시 깨버릴 가능성에 대해 다들 “부하오슈오(不好說·그 이야기는 하지 말자)”라는 반응들이다. 국내 정치에 대해서라면 당 총서기의 결정에 대해 “옳다”는 말을 해야 할 당 간부들이 손을 내저으며 “그 이야기는 하지 말자”라고 하는 것 자체가 쑨정차이를 낙마시킨 데 대한 여론이 좋지 않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래저래 연말에 개최될 제19차 당대회는 전 세계 미디어의 관심의 초점이 될 전망이다.
2474호 중국이 對北 송유관 못 잠그는 진짜 이유
9월 3일 북한의 수소폭탄 실험은 북한과 가까운 지린(吉林)·랴오닝(遼寧)·헤이룽장(黑龍江) 동북 3성 주민들의 신변에 불안감을 안겨주었다. 환경 안전에도 불안감을 안겨주었다. 북한이 5차례에 걸친 핵실험을 하는 동안 한 번도 그런 불안감에 대해 언급을 않던 중국 외교부 대변인도 이번 6차 핵실험 직후에는 공개적으로 걱정스럽다는 말을 했다. 겅솽(耿爽) 대변인은 핵실험 다음 날인 9월 4일 브리핑에 나와 처음으로 상세하게 불안감을 설명했다.
“중국 정부는 중국 공민들의 인신 안전과 환경 안전을 보호하는 데 고도의 중요성을 부여하고 있다. 중국 정부의 관련 부문은 앞으로 이 실험이 중국에 미칠 영향에 대해 전면적인 이해를 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이와 함께 앞으로 중국 경내의 공민들의 인신 안전과 환경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들을 다 취할 것이다.”
겅솽 대변인은 북한이 하필이면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주관하는 브릭스(BRICS, 브라질·러시아·인도·중국·남아공) 정상회의 때 수소폭탄 실험을 감행한 데 대해서도 불쾌감을 감추지 않았다. 북한은 브릭스 정상들이 중국 남부 항구도시 샤먼(厦門)에 모여 개막식을 하고 있던 시간에 수소폭탄 실험을 했다.
“조선(북한)이 언제 하더라도 핵실험을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유엔 안보리 결의안 위반이며, 국제사회의 보편적인 희망에도 위배되는 것이다. 중국은 이에 대해 확고히 반대한다. 내가 방금 설명했듯이 중국 외교부는 베이징(北京)에 주재하는 조선대사관의 책임자에게 엄정한 반대의 뜻을 전달했다.”
북한이 필요로 하는 원유의 90% 이상을 중국이 공급하기 때문에 원유 공급을 중단하면 너무도 간단히 북한의 핵실험에 브레이크를 걸 수 있을 것으로 보이는데, 왜 중국은 국제사회에 얼굴을 돌린 채 파이프 잠그는 일을 하지 않으려는 것일까. 중국 외교부나 중국의 지도층들은 그동안 마치 벙어리나 된 듯 이에 대한 설명을 기피해왔다. 그런데 중국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가 발행하는 국제문제 전문지 환구시보(環球時報)가 북한이 수소폭탄 실험을 한 9월 3일 오후 4시쯤 온라인에 올린 사설을 통해 비교적 상세한 속내를 드러내 보여주었다.
“우리 중국이 일단 조선에 대한 석유 공급을 완전히 단절하거나 중·조(中朝) 국경을 봉쇄한다고 해서 조선의 핵 활동을 저지할 수 있을지는 불확정적이다. 오히려 중·조 관계가 전면적이고 공개적인 대립 국면에 들어갈 가능성이 발생할 수 있다. 그렇게 될 경우 중·조 간의 대립은 일정한 기간 동안 조선반도를 둘러싼 최고의 모순을 돌출하게 될 것이다. 중·조 간의 대립이 발생할 경우 현재 미·조 대립의 에너지의 대부분을 흡수하는 고도의 긴장 국면을 조성할 것이다. 워싱턴과 서울은 그동안 조선 핵 문제의 외연을 중국으로 확대하려는 기도를 해왔다. 그런 상황은 중국의 국가이익에 부합하지 않는 상황이 될 것이다.”
환구시보의 사설은 중국의 국익에 관해 이런 속내도 보여주었다.
“조선 핵 문제의 근원은 한·미 동맹의 군사적 압력이 평양에 엄중한 불안감을 조성한 것이다. 평양은 핵을 보유하는 것을 정권 생존의 유일한 보장책으로 보는 착오를 범했다. 뿐만 아니라 미국 본토에 대한 타격 능력을 보유하는 것을 자기 안전의 관건으로 생각하는 착오도 범했다. 중국은 이런 복잡하고 첨예한 도박 속에서 언제든 함정에 빠져들 위험을 안고 있다.… 중국은 대국(大國)이다. 중국의 어젠다와 이익은 글로벌한 것이어야 한다. 조선반도의 문제는 중국 주의력의 전부가 될 수는 영원히 없는 일이다.…”
환구시보의 논리는 중국 지도층과 지식인의 생각을 반영하고 있다. 환구시보는 중국이 압록강을 건너 북한으로 연결되는 석유 파이프를 잠그지 않아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요약해서 결론지었다.
“조선의 새로운 핵 활동은 유엔 안보리의 새로운 제재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중국 사회는 조선의 핵 활동에 대해 엄청나게 화가 나더라도 절대로 충동적인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된다. 중국은 결코 조선에 대한 전면적인 수출 금지나 극단적인 제재 수단에 가벼이 동의해주는 일을 해서는 안 될 것이다.”
환구시보의 사설은 그동안 잘 드러내 보이지 않던 두 가지의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다. 하나는 중국이 북한에 대한 유엔의 제재나 원유공급 중단을 늘 흐지부지해오던 이유가 과거 마오쩌둥(毛澤東)의 한국전쟁 참전이나 그 무슨 혈맹(血盟)이라는 용어 때문이 아니라 나름의 냉철한 국익 계산에 따른 것이라는 점이다. 또 다른 한 가지는 북한에 대한 원유공급 중단이라는 결정에 대해 북한이 보여줄 반응을 중국은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중국은 자신들이 1992년 한국과 수교를 하자 북한이 이후 8년 동안 모든 고위층 교류와 경제 교류를 끊었고, 한국과의 수교 직후인 1993~1994년에 닥친 홍수와 가뭄의 자연재해 때문에 수많은 북한 사람들이 굶어죽었는데도 북한이 중국에 식량원조 한번 요청하지 않으면서 김정일의 지도로 ‘고난의 행군’을 한 사실을 잘 기억하고 있다.
김정은은 2011년 말 김정일 사망 이후 권력을 잡자 김정일을 가장 측근에서 보좌하던 대표적인 친중파(親中派)이자 자신의 고모부인 장성택을 고사포로 흔적도 없이 사살해버리기까지 했다. 이런 것을 보고 중국 지도자들은 내심 혀를 내둘렀다. 한마디로 발끈하는 북한의 반응이 두려운 것이다. 비교적 극단적인 결론을 내리기 싫어하는 중국인들의 심성에 그런 북한은 마치 목을 줄로 묶어놓으면 제 성질을 못 이겨 죽어버리는 살쾡이로 비친 것이다.
그런 반면 한국의 지도자들은 귀여운 강아지 시추 정도로 비쳤을 것이다. 주권 사항에 속하는 사드 배치에 대해 반대한다는 내정간섭적 발언을 해도 공개적인 국제회담장에서 화 한번 내지 않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여러 경로를 통해 한국 정부와 정계 지도자들이 “한국인은 자기들끼리 싸우는 데는 귀신, 외부의 적과 싸우는 데는 등신”이라고 자조하는 말을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중국 외교부 사람들은 자기네가 사드 배치에 반대한다고 해도 화를 내는 한국인을 만나기 어렵다는 사실을 신기해하고 있다. 우리는 왜 북한과 한민족인데 북한처럼 중국에 살쾡이로 비치지 않는 것일까.
2475 北 수폭 뉴스에 중국 SNS 호떡집 불난 듯
중국 최대 검색 엔진 바이두(百度)는 지난 9월 10일 조선중앙TV를 인용해 북한이 평양 인민극장에서 제6차 핵실험 축하공연을 한 사실을 오후 5시쯤부터 사진을 곁들여서 보도했다. 김정은과 부인 이설주가 이 공연을 참관했으며, 공연장의 무대 한가운데 설치된 스크린에서는 지난 9월 3일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에서 실시된 제6차 핵실험이자 수소폭탄 폭발실험으로 주위의 산림이 진동하는 모습이 방영됐다고 전했다. 바이두는 “아직 확인되지는 않았다”면서도 해당 화면이 수폭 실험으로 인한 산의 떨림을 보여주었다는 한국국방안보포럼 고위 분석가의 말을 전했다. 바이두는 한국국방안보포럼의 분석가가 “북한이 실시한 것이 제6차 핵실험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한 내용도 함께 전했다.
그러자 모바일 바이두의 뉴스에는 수많은 중국인들의 댓글이 달리기 시작했다. 댓글은 PC에서 단 것도 있고, 모바일 단말기에서 단 것도 있었다. 다음은 이 뉴스에 대한 댓글을 가려 뽑지 않고, 일정 시간 동안 떠오른 것들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연속으로 인용해서 번역한 것이다.
(2.6千) “맘에 안 들어.”
(binrui黃) “미친 놈, 중국을 귀찮게 하는군.”
(136******051) “너 그렇게 말하면 이전 같으면 반역죄야, 죽고 싶어? 매국노야.”(스마트폰에서 단 댓글로 추정됨)
(134******223) “네가 틀렸어. 사람이란 누구든 자기 보호를 필요로 해.”
(139******223) “김정은이 강적을 두려워하지 않는 정신은 칭찬을 받아야 해. 우리 중화민족도 하늘도, 땅도, 사람도 두려워하지 않는 전투정신을 가져야 세계무대에서 한자리라도 차지할 수 있을 걸.”
(回復ta) (앞에 댓글을 달았던 사람이 다시 등장했다는 뜻) “배우기 좋아하는 닭대가리. 나중에는 싸워야 할 대상이 없어 자기와 싸워야 할 걸. 결국 자기 때문에 자기가 멸망하게 될 거야. 도철(饕餮·게걸스러운 악마)처럼 뭐든 처먹다가, 최후엔 자기를 처먹게 될 걸.”
(天羽平川) “맨날 싸우니 백성들은 먹을 밥이 없지.”
(3425230429kkk) “조그만 나라에 무슨 핵이 필요한가. 특히 조선(북한) 같은 극단적인 전제국가에 1인이 정치를 마음대로 하는 건 너무 위험해. 모든 일을 제 뜻대로 하니 아시아가 핵위기에 빠졌지.”
(181******665) “나는 조선이 수소폭탄을 만들어서 기뻐. 먼저 한국을 때리고, 다시 일본 귀신들을 때리고, 마지막으로 미국을 때려. 나는 칭찬 한마디 보내고 싶어. 꼭 성공할 거야.”
(182******706) “미국이 근육 쇼를 벌이니, 조선은 기공(氣功)을 연마하고…, 그래봐야 아무도 안 움직일 걸.”
(sgxlove520) “중국은 움직이는 거야, 안 움직이는 거야.”
(139******223) “김정은 동지를 학습하자!”
(回復ta) “조선은 때려줘야 돼! 국제법정은 김정은이 세계평화를 파괴한 죄로 사형에 처해야 해.”
(秦照凡) “네가 죽어야 해.”
이런 댓글이 달리기 시작하다가 어느 순간 북한에 대한 비난 댓글은 사라지고 북한의 수소폭탄 폭발실험을 칭찬하는 내용 일색으로 댓글이 달리기 시작했다.
(darwccc) “조선 인민들은 골기(骨氣)가 있어.”
(136******421) “그래도 김씨네에 인재가 있어. 용감하게 행동하고, 하늘도 땅도 무서워하지 않아. 사랑스럽고 대견해.”
(135******958) “골기를 가진 민족이야.”
(向新西岸) “인터넷에 보니 김정은의 부인이 (한국전쟁 때 한반도에 와서 죽은 마오쩌둥의 아들) 마오안잉(毛岸英)을 위한 노래를 부르던데. 감동적이었어.”
(183******769) “조선인들이 좋아. 미국의 개들에게 감히 대항하잖아.”
(139******098) “미국인들은 사람을 너무 심하게 속여. 오늘과 같은 결과도 필연이야. 맞서려면 세게 맞서야지. 역사를 잊으면 안 돼. 중국도 얼마나 많이 속아왔어. 승리하는 길만이 속지 않는 길이야. 협력해서 투쟁하자. 그 길만이 유일한 전략이야. 용감한 사람이 이기는 거야.”
(abc風雨同舟777) “미국놈들 사람을 너무 심하게 속여. 조선이 핵미사일 개발하는 것은 필수야.”
(wjlin616) “한국은 계속해서 미국과 결맹하고 있으니, 사망을 재촉하는 거야.”
중국 관영 매체의 기자들과 이야기해 보면 “중국에 언론자유가 없다고 하는데 SNS 댓글에 관한 한 이미 언론통제란 무너진 지 오래됐다”고 말한다. 무려 6억명이 넘는 네티즌 숫자를 자랑하는 중국의 SNS를 통제하는 것이 이미 불가능한 일이 되고 말았다고 한다. 물론 어느 정도의 통제나 댓글의 분위기를 다른 방향으로 트는 정도의 간섭은 충분히 이뤄지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 당국은 중국인들이 SNS를 통해 중국공산당에 반대하고, 정부에 반대하는 여론의 흐름을 만들까봐 페이스북, 트위터 등 미국산(産) SNS에는 중국인들이 접속하지 못하도록 차단하고 대신 ‘웨이보(微博)’라는 중국산 미니 블로그에만 접속할 수 있도록 통제해놓았다.
그러나 이 중국산 SNS를 통해서도 중국 네티즌들은 언론자유를 거의 누릴 수 있게 됐다고 판단된다. 중국 네티즌들은 지난 2010년에도 웨이보를 통해 김정일의 비밀 중국 방문 사실을 전하며 김정일이 가는 곳마다 사진을 찍어 올리는 바람에 김정일의 비밀 방중은 거의 공개 방중이 되고 말았다.
중국 외교부 관리들은 “그런 점에서 중국 외교는 네티즌들의 댓글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으며, 공공외교의 성격을 띠지 않을 수 없게 됐다”고 말한다. 우리의 대중 외교도 그런 점에 착안한 공공외교의 측면을 강화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이라고 하겠다.
2476 “조선 核은 우리에게도 위협” 한 중국 지식인의 외로운 목소리
베이징(北京)대 국제관계학원(대학원) 자칭궈(賈慶國·61) 원장은 중국의 대표적 국제정치학자다. 자칭궈 원장은 중국공산당이 비(非)공산당 계열의 정치집단을 통제하기 위해 만든 통일전선 조직인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정협) 상무위원으로 비공산당 계열의 중국민주동맹의 중앙상무위원이기도 하다. 주로 중·미 관계와 대만 문제, 주변국 관계 등 중국의 대외정책에 관해 많은 글과 저서를 낸 학자이자 중국에서 몇 안 되는 양심적 지식인이기도 하다. 바이두(百度)와 신랑(新浪) 등 중국의 대표 검색엔진들도 그의 말을 퍼나르기 시작해 중국 내에서 북한 문제에 관한 논쟁이 시작되고 있다.
“조선(북한)의 앞날과 관련 우리는 최악의 상황에 대비한 준비를 해야 한다.”(국제정치 영문잡지 ‘동아논단’ 기고. 9월 13일 블로그 sinovision에 뜸)
“조선 핵은 우리 중국에도 위협이다.”(서울안보대화에서 한 발언. 9월 10일 온라인 네트워크 중평망(中評網)에 게재)
“우리가 잘못 인식하고 있는 조선에 관한 세 가지 착오.”(2016년 8월 28일 www.360doc.com 웹페이지에 게재)
지난해 8월 온라인에 떠오른 자칭궈의 ‘조선에 관한 세 가지 착오’의 첫 번째는 “중국인이 북한을 미국, 일본과의 군사력 ‘완충지대(buffer zone)’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라고 그는 적시했다. “이는 일종의 전통적 관점이며, 현재는 비행기와 미사일이 날아다니는 시대다. 외국 세력이 만약 중국을 침공하고자 한다면 과거의 일본처럼 조선을 통해 오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적지 않은 중국인은 이 점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다음으로 조선은 사회주의 국가로, 우리와 공동의 의식 형태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점이다. 실제로 조선은 사회주의 국가가 아니라 주체사상 국가다. 주체사상이란 김일성이 제기한 ‘조선 위주의 사상’을 말하는 것으로 중국 특유의 사회주의를 실현하려고 하는 것과 큰 차이가 있다. 주체사상과 중국 특유의 사회주의는 결코 같은 것이 아니다.”
“조선에 관한 세 번째 인식 오류는 중국과 조선이 선혈이 뭉쳐서 생긴 우의를 공유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쌍방 모두 이런 관계를 부인하고 있지는 않은데, 현실은 우리 중국은 그런 생각을 갖고 있지만 조선은 별로 그런 생각을 않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뭔가 필요한 게 있을 때는 그런 표현을 한다. 예를 들어 조선에 있는 중국인민지원군 열사능원을 이야기하면서는 우리가 듣기 좋은 이야기를 몇 마디 한다. 그러나 뭔가 필요한 것을 챙겨가고 나면 자기네들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버린다.”
자칭궈는 북한 핵 문제에 대해서도 “우리와 미국 사이의 공동이익이 더 크며, 중국과 미국은 핵 불확산이라는 점에서 중대한 이익을 공유하고 있다”는 견해를 밝히고 있다. 그는 한국에 사드(THAAD)를 배치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사드 문제는 미국과 한국 때문에 생긴 문제이지만 문제의 근원은 조선에 있다. 조선이 더 이상 핵을 개발하지 않으면 미국도 한국에 사드를 배치할 이유가 없다”는 견해를 갖고 있다. 사드에 대해 시진핑 국가주석을 비롯한 대부분의 중국 지도자나 중국인들과 다른 견해를 밝히고 있다는 점은 양심적 지식인들이 위험에 처하는 일이 잦은 중국에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자칭궈 원장은 최근 발행된 영문 국제정치 잡지 ‘동아논단’에 발표한 ‘조선의 최악의 결과에 대한 준비를 해야 할 때(Time to prepare the worst in North Korea)’라는 기고문에서는 여섯 가지 상황을 제시했다.
“현재 미국과 한국이 갈수록 대규모 합동군사훈련을 하는 상황에서 만약 미군이 북한을 공격할 경우 여전히 미국 군대가 북위 38도선을 넘지 않기를 바라는 중국의 입장을 미국에 분명히 밝혀두어야 한다. 다음으로 북한 핵무기의 처리 문제에 있어 비록 북한 핵폭탄이 어떤 기술적 가치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미군이 38도선을 넘지 않게 하려면 미리 미국과 협상을 통해 중국군이 북한 핵을 처리할 수 있도록 해놓아야 한다. 또 유사시 북한 난민들이 대량으로 중국에 유입될 경우 중국이 안게 될 어려움을 고려해 미리 북한 내로 중국군이 진입해 난민촌을 북한 내에 구축해 놓아야 할 필요가 있다.
북한에 새로운 정부가 구성될 경우 미국과 한국이 주도해서 북한에 새 정부를 구성하게 하는 것보다는 국제사회의 감시 아래 북한 새 정부가 구성되도록 준비를 해야 한다. 사드 문제는 미국도 한국도 북한 핵을 겨냥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만큼 북한 핵이 제거된 이후에는 사드를 한반도에서 철거하도록 미리 미국과 한국의 양해를 받아둘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중국 정부는 현재 ‘중국은 중국 대륙의 입구인 조선반도에서 어떤 전란도 발생하는 것을 윤허하지 않을 것’이라는 태도를 밝히고 있지만 그런 생각은 어디까지나 일방적인 생각일 뿐이다. 미국과 한국의 공격으로 김정은 정권이 붕괴하고 철저히 파괴된 뒤에도 우리 중국은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처지가 될까.”
자칭궈 원장은 최근 서울에서 발언해 중국의 온라인 ‘중평사(中評社)’ 웹페이지에 전재된 “조선 핵은 우리 중국에도 위협”이라는 말에 대해서는 “갈수록 많은 사람들이 조선의 핵무기가 중국에도 위협이 된다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으며, 조선의 핵은 동아시아와 전 세계 평화 유지에도 문제를 던지고 있다. 다른 나라와 협력해서 북한에 대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견해를 밝혔다. 그는 “조선 핵 문제는 한국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미국의 문제이고, 중국의 문제이기도 하다”라고 말했다.
자칭궈 원장의 요즘 발언을 듣고 있자면 지난해 6월 지방 특강을 갔다가 교통사고로 사망한 우젠민(吳建民) 전 외교학원 총장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는 중국과 미국 사이의 갈등을 증폭시키고 민족주의를 부추기기에 여념이 없는 후시진(胡錫進) 환구시보(環球時報) 주필을 향해 “환구시보가 포퓰리즘과 민족주의에서 출발한 전쟁과 혁명에 대한 습관적 사고의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고 질타하다가 세상을 떠난 진정한 지식인이자 평화주의자였다. 우젠민 전 총장의 ‘불운’에 자칭궈 원장이 결코 가까이 가는 일은 없어야 할 텐데….
2477호 환구시보의 충고 “북한은 카자흐스탄의 핵 포기를 배우라”
지난 9월 23일 오후 5시30분쯤 북한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 핵폭발 실험장 부근 지하에서 발생한 진도 3.5 정도의 지진은 어쩌면 북한 핵문제의 귀결을 김정은이 생각지도 못했던 방향으로 끌고 갈 수도 있는 희망의 뉴스가 될지도 모른다. ‘미국의 소리(VOA)’ 방송이 지난 9월 25일 인터뷰한 미 컬럼비아대 라몬트-도허티 지구관측소 김원영 박사에 따르면, 9월 23일의 지진은 지진파형 분석 결과 자연지진일 가능성이 크며, 풍계리 지하 핵실험장 갱도 부근의 암반이 깨지면서 발생한 지진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김원영 박사에 따르면, 지난 9월 3일의 수소폭탄 폭발 실험 며칠 후의 인공위성 사진에도 풍계리 핵실험장 부근의 돌무더기들이 많이 떨어져 내려와 있는 것이 관측됐다. 김 박사는 “지난해 9월 9일의 5차 핵실험 이틀 후에도 규모 2.0 정도의 지진이 관측됐다”며 “이 지진 역시 풍계리 지하갱도 부근의 암반들이 깨지면서 발생한 자연지진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북한의 5차와 6차 핵실험 직후에 발생한 자연지진들이 우리에게 ‘굿 뉴스’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말은 풍계리 지하갱도의 내부 붕괴는 곧바로 앞으로 장기간 암반의 균열 틈새와 지하수 맥 등을 통해 방사능 오염물질들이 풍계리 지표로 노출될 가능성을 뜻하기 때문이다. 김원영 박사에 따르면 미국 네바다 사막이나 구소련의 카자흐스탄 핵실험장의 경우 지표에서 지하로 수직으로 파고들어가서 폭발실험을 해도 결국 핵실험장 부근이 방사능에 오염됐다고 한다. 보다 쉬운 방식으로 산을 파고들어간 풍계리의 경우에는 갱도 붕괴가 네바다나 카자흐스탄 경우보다 쉽게 일어나 풍계리 일대의 방사능 오염 가능성이 더 크다는 것이다.
중국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가 발행하는 국제문제 전문지 환구시보(環球時報)는 지난해 11월 17일 “조선(북한)은 국제사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핵무기 개발로 국가의 안전을 모색하고 있지만, 중앙아시아 국가인 카자흐스탄은 올해로 ‘세계 4대 핵강대국’ 지위를 포기한 지 20주년이 된 것을 경축했다”고 보도했다. 환구시보에 따르면, 카자흐스탄에서 최초 핵실험이 실시된 것은 1949년 8월 29일 오전 7시였다. 당시 구소련이 터뜨린 최초의 원폭이 카자흐스탄 동(東) 카자흐스탄주(州)의 현 쿠르차토프(비밀도시명 세미팔라틴스크)에서 폭발했다. 이후 소련이 실시한 715회의 핵폭발 실험 가운데 64%에 해당하는 456회가 이 쿠르차토프에서 실시됐다. 카자흐스탄의 핵실험장 부근에는 지반 함몰로 차간(Chagan)이라는 인공호수도 만들어졌는데, 지난 2006년에 측정한 수치로도 고농도의 방사능으로 오염돼 있었다. 최초의 핵실험은 카자흐스탄 국민에게 “국가의 안전을 담보해주는 희소식”으로 받아들여졌으나, 이후 456회의 핵폭발 실험을 거치는 동안 1957년에서 1960년까지 불과 3년간 모두 160만명의 방사능 오염 환자와 이후 50만명의 사망자가 발생하면서 핵실험에 대한 카자흐스탄 국민의 생각은 달라졌다.
구소련은 카자흐스탄에 전략미사일 부대와 전략폭격기 발진 기지를 만들고, 수백 개의 핵탄두를 배치했다. 그러는 동안 핵실험장 반경 150㎞ 지역이 방사능에 오염됐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구소련은 1980년대에 들어오면서 아프간전쟁에서 실패하자 공산당의 국내 정치에 대한 장악력도 떨어졌다. 그런 흐름을 읽은 카자흐스탄의 반핵 조직과 미국의 반핵주의자들은 ‘네바다·세미팔라틴스크 선언’이라는 조직을 만들어 핵실험장의 폐기와 카자흐스탄 독립 운동을 벌였다.
이미 경직화된 소련 지도부는 그런 카자흐스탄 내부의 변화를 무시하고 1989년 2월 12일과 17일 또다시 두 차례의 핵폭발 실험을 실시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방사능 기체가 핵실험장 부근에 확산된 사실이 밀반입된 방사능 측정 장비에 검출됐다. 그 소식은 핵실험장 부근의 주민들을 격분시켰다. 마침내 1989년 10월 19일 카자흐스탄에서 실시된 최후의 핵폭발 실험 결과 나타난 것은 환호의 꽃술과 붉은 깃발이 아니라 수십만의 남녀노소로 이루어진 카자흐스탄 국민들의 반핵 시위였다.
구소련의 붕괴로 카자흐스탄은 1991년 독립을 선포했다. 독립을 선포하고 보니 카자흐스탄은 무려 1410기의 핵무기를 보유한 세계 4위의 핵대국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미국과 러시아, 우크라이나에 이은 제4위 핵대국이었다. 모두 52기의 SS18 대륙간 탄도탄과 40기의 TU(투폴레프)95 전략폭격기와 370기의 이동식 핵탄두 장착 순항미사일 등이 붕괴한 구소련의 유산으로 카자흐스탄에 남았다. 일부 군인들은 “핵무기로 영구히 국가의 안전을 보장받자”는 주장을 폈다.
그러나 나자르바예프 현 대통령이 이끄는 카자흐스탄 지도자들은 “핵무기를 끌어안고 방사능 오염으로 죽어가는 나라 대신 핵무기를 포기하고 방사능이 없는 잘사는 나라”의 길을 선택했다. 1992년부터 1995년까지 3년 동안 카자흐스탄은 핵탄두를 탑재한 대륙간 탄도탄과 전략폭격기 등을 러시아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1996년 9월 24일 유엔에서 포괄적 ‘핵실험 금지조약(CTBT)’에 서명했다. CTBT에는 2011년 12월까지 모두 182개국이 서명하고 이 가운데 156개국이 국내 비준절차를 마쳤다. 중국은 협약에 서명은 했으나 아직 국내 비준절차를 거치지 않고 있다.
북한이 6차 핵실험을 감행한 다음 날인 지난 9월 4일 겅솽(耿爽)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브리핑에 나와 “중국은 북한의 이번 핵실험으로 방사능 오염이 이루어질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느냐”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했다. “중국 정부는 공민들의 인신 안전과 환경 안전을 고도로 중시하고 있으며, 관련 부처가 이번 조선 핵실험이 중국에 미칠 영향에 대해 앞으로 전면적인 상황 파악을 할 것이며, 중국 경내 공민들의 인신 안전과 환경 안전에 대해 필요한 조치를 취할 것임을 밝혀둔다.”
만약 풍계리의 지난 9월 23일 지진이 핵실험 갱도 내의 붕괴 때문이고 이 붕괴로 방사능이 기체나 지하수를 통해 중국 동북부 지방을 오염시키고 있는 것으로 확인될 경우 중국 정부가 ‘필요한 조치’를 취할 것이라는 말이다. 안 그래도 북한의 핵실험을 혐오하는 중국 네티즌들의 험악한 댓글들은 중국 정부를 움직이게 할 것이다. 앞으로 북한이 카자흐스탄의 길을 걷지 말란 법이 없을 것이다. 때마침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지난 9월 21일 뉴욕에서 카자흐스탄 외교장관과 회담을 하고 북한에 대한 공조를 다짐한 것은 시의적절한 조치인 것으로 판단된다. 우리 정부는 보다 적극적으로 북한이 카자흐스탄의 모델을 따르도록 전방위 외교를 펼쳐야 할 것이다.
2478호 디리펀진 5년! 제19차 전당대회 감상법
디리(砥砺)’. “숫돌에 칼을 갈듯 연마하다”라는 뜻을 가진 어려운 말이다. ‘디리펀진(奮進)의 5년’이라면 “숫돌에 칼을 갈듯 단련하며 달려온 지난 5년”이라는 뜻이 된다. 지난 9월 20일 베이징(北京) 시각으로 저녁 7시(한국시각 저녁 8시) 매일 한 차례씩 전 중국 대륙을 연결하는 중국 관영 중앙TV의 네트워크 뉴스 ‘신원롄보(新聞聯播)’는 ‘시진핑(習近平) 총서기의 촉구로 디리펀진하며 달려온 지난 5년’이라는 제목으로 중국 남부 광둥(廣東)성의 첫 번째 경제특구 선전(深圳)의 발전상을 소개했다.
공교롭게도 이날의 신원롄보는 때마침 베이징을 방문한 리셴룽(李顯龍) 싱가포르 총리를 시진핑과 리커창(李克强)을 비롯한 7명의 정치국 상무위원이 당내 서열 순으로 차례로 만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신원롄보는 중국 내 뉴스 흐름을 리드하는 뉴스 프로그램이자, 14억 전체 인민을 대상으로 하는 비중 있는 뉴스만을 다루는 프로그램으로 유명하다. 이런 프로그램이 시진핑 총서기가 지난 2012년 11월 제18차 당 대회에서 총서기에 선출된 이후 집권한 기간을 “디리펀진의 5년”이라는 표현과 함께 소개하기 시작한 배경에는 중대한 의미가 깔려 있음을 중국을 관찰해온 사람들이라면 감지했을 것이다.
더구나 시진핑 당 총서기가 오는 10월 18일 제19차 당 대회까지 지난 5년간 달려온 과정을 “숫돌에 칼을 갈듯 단련해온”이라고 표현하기 시작한 날 베이징을 방문한 리셴룽 싱가포르 총리를 8700만 중국공산당원을 이끄는 핵심 권력인 7인의 정치국 상무위원 전원이 차례로 만나는 모습은, 리셴룽 싱가포르 총리가 아버지 리광야오(李光耀) 총리에 이어 싱가포르를 성공적으로 통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중국인 시청자들에게 부각시키기 위한 뉴스라는 점을 짐작게 했다.
더 나아가 중국 시청자들은 이 뉴스를 오는 10월 18일 개막되는 제19차 당 대회에서 나이 제한에 걸려 퇴진해야 하는 왕치산(王岐山) 당 중앙기율검사위원회 서기의 유임과 총리직 담당을 희망한다는 의미를 담은 것으로 보았을 것이다. 왕치산은 이번 당 대회에서 새로운 5년 임기의 당 총서기로 선출될 예정인 시진핑 당 총서기의 오른팔로, 그동안 시진핑의 반(反)부패운동을 사실상 전담해서 추진해왔다. 그런 그를 시진핑이 유임시키고 싶어 한다는 강력한 희망의 뜻을 표현한 뉴스라는 것이다.
리셴룽 싱가포르 총리에 관한 뉴스는 그 다음날부터 사라졌지만 ‘디리펀진의 5년’이라는 시진핑 띄우기 뉴스는 그 이후 10월 11일 저녁까지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방영됐다. 예컨대 9월 21일 신원롄보 톱뉴스는 ‘디리펀진의 5년’이라는 제목으로 시진핑 총서기가 당위원회 서기를 지낸 푸젠(福建)성의 빠른 발전상을 소개하는 내용이었다. 9월 22일에는 같은 제목으로 다가오는 10월 18일의 제19차 당 대회를 기다린다는 뉴스가 중국 전역으로 전파를 타고 퍼져나갔다.
9월 25일에는 시진핑과 리커창을 비롯한 7인의 정치국 상무위원들이 베이징 전람관(展覽館)에서 개막한 ‘디리펀진의 5년’이라는 전시회를 참관하는 광경이 신원롄보의 톱뉴스였다. 그날 관영 신화통신도 ‘시진핑 총서기가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위해 계속 분투해왔다’는 제목을 달아서 7인의 정치국 상무위원들이 ‘디리펀진의 5년’이라는 전시회를 관람한 소식을 보도했다.
홍콩과 일본 언론들이 이번 당 대회를 통해 시진핑이 새로운 5년 임기의 당 총서기로 선출되는 데에 만족하지 않고 오는 2022년의 제20차 당 대회 이후까지 권력을 유지하려는 시도를 할 것이라고 보도하기 시작한 것은 신원롄보의 그런 보도 태도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러나 10월 1일 중국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는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정부 수립 68주년 국경절(國慶節)을 기리는 사설을 통해 신원롄보의 그런 들뜬 보도 태도에 일침을 가했다. 이날 인민일보는 “오늘의 중국이 역사상 어느 시기보다도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이라는 목표에 근접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절대로 자만(自滿)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고 “위대한 역정은 이제 막 시작됐으며, 위대한 승리는 아직도 여전히 우리의 앞날에 달려 있다”고 촉구했다.
중국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는 1990년대 초에도 개혁파의 리더 덩샤오핑(鄧小平)과 보수파 경제이론가로 덩샤오핑의 오랜 경쟁자였던 천윈(陳雲)과의 갈등에서 보수파의 손을 들어주는 태도를 보여줬다. 지나치게 빠른 경제발전은 사회주의의 틀을 파괴한다는 천윈의 주장을 지지하는 자세를 취한 것이었다. 당시의 갈등에서 덩샤오핑은 자신의 개혁개방 정책의 수혜자였던 상하이(上海)와 남부 광둥성의 경제특구들을 돌며 현지 신문들이 인민일보의 논조에 반대하는 ‘무엇이 두려운가, 기회를 잡았을 때 발전해나가자’는 사설을 쓰도록 독려했고 결국 여론전에서 이겼다. 경제특구 신문들의 논조가 인민일보를 압도하게 하는 정치력을 발휘한 것이다. 결국 덩샤오핑은 나중에 베이징으로 귀환한 후 인민일보 논설 지휘부를 교체하는 수술을 단행했다.
이번 10월 1일자 인민일보의 사설 후반부는 시진핑을 비롯한 현 중국공산당 지도부가 지난 5년간의 업적에 너무 자만하지 말고 정치적인 틀을 깨거나 파격을 단행하는 결정들을 내리지 말도록 경고한 것으로 보인다. 10월 18일의 제19차 당 대회를 앞두고 시진핑의 새로운 임기나 직위 설정, 지난 35년간의 정치 규칙을 깨고 왕치산을 유임하는 결정들이 과연 이루어질지 10월 18일의 시진핑 공작보고 내용을 보아야만 알 수 있게 된 형세라고 할 수 있다. 열흘에서 2주 정도 개최되는 당 대회는 최종일에 발표되는 공보(公報)를 통해 새로운 임기 5년의 정치국 상무위원 면면과 약 30명의 정치국원 면면을 소개한다.
중국공산당 당 대회는 1921년 7월 제1차 대회를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서 개최한 이후 지난 96년간 대체로 5년마다 한 차례씩 중국의 국책을 결정하는 중앙위 전체회의를 개최하게 된다.
2479 중국공산당 19차 당대회 참관기
과거 현재 미래의 권력이 한자리에 모였다
‘권력 트로이카’ 에워싼 노장(老壯) 권력자들
중국공산당 제19차 전국대표대회(全大·당대회)가 지난 10월 18일 수도 베이징(北京) 인민대회당에서 초가을 가랑비가 내리는 가운데 개막됐다. 중국공산당이 제1차 전대를 열어 창당한 것이 1921년이다. 96년 만에 제19차 당대회를 개최한 것은 거의 한 세기 동안 5년마다 한 차례씩 전당대회를 개최해온 중국공산당의 저력을 온 세계에 과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중국공산당 전대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임기 5년의 중앙위원 약 200명을 선출하는 것이다. 약 8900만명인 중국공산당 당원 가운데 전국에서 2280명의 대표가 모여 오는 10월 24일까지 1주일간 회의를 열면서 새로운 5년 임기의 중앙위원 약 200명을 선출한다. 이번 당대회에서 선출된 중앙위원들은 앞으로 매년 한 차례씩 중앙위원회 전체회의(中全會)를 열어 그해 국가 정책을 심의하고 의결하게 된다. 이 중앙위원들은 오는 10월 25일 중국공산당 제19차 중앙위원회 제1차 전체회의를 열어 앞으로 5년간 중국공산당을 이끌고 갈 25명의 정치국원과 7명 안팎의 정치국 상무위원, 그리고 새로운 5년 임기의 당 총서기를 선출하게 된다.
10월 18일 오전 10시에 시작된 제19차 전대 개막식은 시작 전부터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아왔다. 일본과 홍콩 언론들이 그동안 현 당 총서기 시진핑이 “1인 체제를 구축해서 황제의 자리에 오를 것이다” “자신의 측근 왕치산(王岐山) 당 중앙기율검사위원회 서기를 유임시키거나 총리로 발탁해서 새로운 시진핑의 시대를 열어 갈 것이다”라는 추측성 보도를 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어 보니 시진핑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거나, 덩샤오핑(鄧小平)이 지도자의 연경화(年輕化)를 위해 설계한 ‘칠상팔하(七上八下·당과 국가의 중요 직위에 67세까지만 등용하고 68세 이후는 제외한다)’의 인사원칙을 깰 가능성은 낮은 것으로 관측됐다.
장쩌민과 후진타오의 입장
오전 10시 중국 전역에 TV로 생중계되는 가운데 19차 전당대회를 관리할 243명의 주석단이 인민대회당 무대 위로 입장했다. 주석단의 맨 앞에는 42명의 주석단 상무위원들이 입장했다. 맨앞에는 앞으로 5년간 중국공산당을 이끌고 갈 것으로 내정된 시진핑(習近平) 18기 중앙위원회 당 총서기가 입장했고, 시진핑의 바로 뒤에는 놀랍게도 올해 91세인 시진핑 전전임자(前前任子) 장쩌민(江澤民) 전 총서기가 특유의 커다란 검은 안경을 쓰고 입장했다. 장쩌민의 뒤를 이어 시진핑의 전임자 후진타오(胡錦濤·75) 전 총서기도 입장했다. 장쩌민은 91세의 고령이라 입도 이유 없이 오물거리고 자주 눈물도 닦는 모습이었지만, 75세의 후진타오는 현역 당 총서기 시절의 냉정한 표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시진핑의 바로 뒤를 따라 입장한 장쩌민과 후진타오는 시진핑의 바로 왼쪽 자리와 오른쪽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총리직을 겸직하고 있는 중국공산당 권력서열 2위 상무위원 리커창(李克强)과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을 겸직하고 있는 권력서열 3위 장더장(張德江)을 비롯한 18기 정치국 상무위원 6인은 시진핑, 장쩌민, 후진타오 트로이카의 바깥쪽 오른쪽, 왼쪽 자리에 나누어 앉았다.
인민대회당 중앙무대 제일 앞자리에 가로로 한 줄로 늘어서 앉은 42명의 주석단 상무위원석에는 놀랍게도 100세의 쑹핑(宋平) 전 정치국 상무위원과 리펑(李鵬·89), 주룽지(朱鎔基·89), 원자바오(溫家寶·75) 등 3명의 전 총리가 앉아 있었다. 상하이(上海)시 당 서기 출신의 장쩌민을 무사히 베이징의 권력 무대에 정착시킨 쩡칭훙(曾慶紅·78)을 비롯한 전직 상무위원급 원로들도 총출동했다.
이번 대회를 관리하고 총 책임질 대회 주석단 상무위원석에는 이들 원로들 이외에도 인민대회당 건축 책임자로 목수 출신의 권력자로 불린 리루이환(李瑞環), 장쩌민 시대 ‘상하이방(幇)’의 실력자였던 우방궈(吳邦國)를 비롯 자칭린(賈慶林), 리란칭(李嵐淸), 우관정(吳官正), 리창춘(李長春) 등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대회 진행을 지켜보았다. 시진핑 2기를 꾸려갈 새로운 권력자들의 얼굴들도 보였다. 마카이(馬凱), 왕후닝(王滬寧), 류옌둥(劉延東·여), 류치바오(劉奇葆), 쉬치량(許其亮), 쑨춘란(孫春蘭·여), 리젠궈(李建國), 리위안차오(李源潮), 왕양(汪洋), 장춘셴(張春賢), 판창룽(范長龍), 멍젠주(孟建柱), 자오러지(趙樂際), 후춘화(胡春華), 리잔수(栗戰書), 궈진룽(郭金龍), 한정(韓正) 등이 주석단 상무위원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번 당대회를 앞두고 시진핑이 발탁한 천민얼(陳民爾) 충칭시 당 서기는 대회 주석단 상무위원 자리는 차지하지 못했지만 상무위원단 바로 뒤 대회 주석단 자리에 앉아 시진핑 당 총서기의 대회 보고를 열심히 메모했다.
시진핑은 이날 당대회 보고에서 “신(新)중국 건국(1949년) 100주년 즈음인 2050년까지 전체 인민의 공동부유(共同富裕)를 기본적으로 실현한 사회주의 현대화 강국을 건설하겠다”는 장기 비전을 선포했다. 그는 “덩샤오핑 동지는 공동부유가 ‘사회주의 본질’이라며 최종적으로 이를 실현하는 것이 사회주의 길을 가는 것이라고 강조했다”고 말했다.
시진핑, 신시대 36차례 언급
시진핑은 2280명의 당 대표들이 참석한 이날 개막식에서 3시간24분간 읽어내려간 업무보고를 통해 ‘신(新)시대 중국 특색 사회주의 사상’이라는 통치이념을 제시했다. 그는 이 사상이 “마르크스 레닌주의, 마오쩌둥(毛澤東) 사상, 덩샤오핑 이론과 부자들의 입당을 허용한 ‘3개 대표 중요사상’, 지속가능한 성장을 강조한 과학적 발전관을 계승하고 발전시킨 것으로 마르크스주의 중국화의 최신 성과”라고 설명했다. 그의 통치이념은 10월 24일 폐막 전에 결정될 당장(黨章·당헌) 개정에서 공산당의 지도사상으로 추가될 것으로 전망됐으나, 그의 이름이 명기되지는 않은 채 사상의 내용만 당장에 들어갈 가능성이 큰 것으로 예상됐다.
19대 개막으로 집권 2기(2018~2022년)를 시작하게 된 시진핑은 덩샤오핑이 제시한 ‘중국 특색 사회주의’에 ‘신시대’를 추가했는데 그가 업무보고에서 신시대를 언급한 횟수는 36차례에 달했다. 그는 “신시대의 진입은 중화민족이 일어서서 부유해지고 강대해지는 위대한 비약과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실현하는 밝은 미래를 맞이하게 됐음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시진핑이 말한 신시대는 △전면적인 샤오캉(小康·편안하고 풍족한 생활) 사회 실현 △사회주의 현대화 강국의 전면 실현 △전체 인민 공동부유 점진 실현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이란 중국의 꿈 실현을 위한 분투 △중국이 세계 무대 중심으로 가고 인류에 크게 기여하는 시대로 설명됐다.
그는 특히 “중국 특색 사회주의를 발전시켜 2020년까지 전면적 샤오캉(小康·중산층이 널리 확보된) 사회를 실현하고 이 기초 위에서 2단계에 걸쳐 21세기 중엽(2050년)까지 부강하고, 민주적이고, 문명적이고, 조화롭고, 아름다운 세계 1위의 사회주의 현대화 강국을 건설하겠다고 다짐했다. 시 주석은 사회주의 현대화를 기본적으로 실현하는 1단계인 2035년까지 경제력과 과학기술력을 크게 키워 혁신형 국가의 앞자리를 차지하는 걸 목표로 잡았다. 이 시기까지 중산층 비율이 늘고 빈부격차가 줄어 공동부유를 향한 중요한 걸음을 내디딜 것으로 시 주석은 예상했다. 또 생태환경도 좋아져 아름다운 중국 건설이 기본적으로 실현될 것으로도 예상했다.
‘전면적인 샤오캉 사회’와 ‘세계의 지도국가로 부상하겠다’는 2개의 100년 목표 실현을 위해 시 주석은 혁신능력과 경쟁력을 끊임없이 강화할 수 있는 현대화 경제체제를 구축하겠다고 밝혔다. 이와 함께 공급 사이드에 대한 경제 구조 개혁 심화, 혁신형 국가 조기 건설, 농촌진흥 전략, 지역균형발전 전략,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 보완, 전면적으로 개방된 새로운 구도 형성 등 6가지 방향도 제시했다. 이들 정책 방향은 앞으로 19대 중국공산당 지도부의 경제정책 노선으로 더욱 뚜렷한 색채를 띠게 될 전망이다.
공급 측 개혁은 종전과 달리 과잉공급 해소보다 세계 수준의 선진 제조업 클러스터를 몇 곳 육성키로 하는 등 양질의 공급 확대에 역점을 두는 방향으로 바뀔 전망이다. 시진핑은 인터넷, 빅데이터, 인공지능 등과 실물경제를 심층적으로 융합해 중고급소비, 혁신 유도, 녹색저탄소, 공유경제, 현대 서플라이체인, 인력자원 서비스 등에서 새로운 성장동력을 형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기업가정신을 불러일으켜 창업과 혁신에 더 많은 사회주체가 나서도록 권장해야 한다”는 주문도 했다.
혁신형 국가 건설을 위한 기초과학 연구도 강조됐다. 획기적 기술혁신을 통해 과학기술강국, 품질강국, 항공우주강국, 인터넷강국, 디지털강국, 스마트사회 건설을 뒷받침해야 한다는 것이다. 비즈니스모델 혁신이나 서방의 기술을 저가에 모방하는 식으로 고성장해온 중국 IT기업이 기술 혁신에 승부를 걸 수 있도록 유도하겠다는 것이다.
지역균형발전 정책으로는 시진핑의 집권 1기에 추진하기 시작한 징진지(京津冀·베이징~톈진~허베이성) 개발, 창장(長江)경제벨트 발전, 허베이성 슝안(雄安)신구 건설을 재확인했다. 슝안신구관리위원회가 지난 9월 말 발표한 48개 입주 기업 리스트에는 알리바바, 텐센트, 바이두, 징둥금융, 차이나텔레콤 등 중국의 간판기업들이 대거 포함됐다.
“부패는 중국공산당에 대한 최대 위협”
대외개방에서는 시진핑이 국책사업으로 내세운 일대일로(一帶一路·육해상 실크로드) 건설에 무게중심을 두었다. 일대일로를 통해 외자유치와 대외진출을 병행한다는 전략이다. 또 상하이, 광둥성 등 11곳에 조성된 자유무역시험구에 더욱 큰 개혁 자주권을 부여하고, 자유무역항 건설을 모색하기로 했다. 그는 “중국이 안고 있는 문제도 새로운 시대에 진입하면서 바뀌었다”고 말했다. “중국이 신시대에 접어들면서 사회 주요 모순도 인민의 날로 늘어나는 아름다운 생활에 대한 수요와 불균형적이고 불충분한 발전 사이의 모순으로 전환됐다”는 것이다. 시진핑은 “인민의 물질·문화 생활에 대한 요구뿐 아니라 민주·법치·공평·정의·안전·환경 등에서의 요구도 갈수록 커지고 있다”며 “사회생산력이 전체적으로 크게 향상되고 세계적으로 선두에 있지만 불균형적이고 불충분한 발전 문제가 뚜렷하다”고 지적했다.
시진핑은 “부패는 중국공산당에 대한 최대 위협”이라며 반부패 운동을 지속할 것임을 분명히 밝혔다. 시급 및 현급 당위원회 순찰제도를 수립하는 한편 국가급·성급·시급·현급 감찰위원회를 설립해 당 기율검사위원회와 손잡고 모든 공직자들을 감찰 범위에 포함하겠다고 했다. 법치주의를 강화하기 위해 전면 의법치국(依法治國) 영도소조(領導小組)도 만들기로 했다.
이날 대회가 열린 인민대회당과 천안문(天安門)광장, 고궁(故宮) 주변에는 무장경찰들이 곳곳에 보안검색대를 설치하고 인민들의 출입을 사실상 통제했다. 천안문 앞에는 일정 숫자 이상의 사람들이 모이지 못하도록 광장 동서를 경찰이 봉쇄한 채 일일이 신분증과 여권 검사를 했다.
과거 당대회와는 달라진 모습도 보였다. 과거에는 당대회가 열리면 베이징 시내 주요 건물에는 각종 구호를 적어 넣은 붉은 바탕, 흰 글씨의 대형 플래카드가 즐비했다. 이번에는 시내 곳곳의 교통 요지에 조그만 크기의 LED 전광판에 ‘초심을 잃지 말고 계속 전진하자’ ‘제19차 당대회는 휘황한 미래를 보장한다’ 등 10자 안팎의 세련된 구호판만 24시간 내걸렸다. 중국공산당의 홍보 전략도 조금씩 세련되어 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2480 11.02 중국공산당과 북한 조선노동당은 北·中의 혈관
북 한에 대한 비핵화 주장을 거둬들일지 알 수 없는 일
중국공산당 전국대표대회(全大·전당대회)는 당 각 부문 책임자들의 생각과 업무진행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대회 기간 이들 책임자들이 내외신 기자회견을 자청해서 자신들이 관장하는 업무에 대해 브리핑을 하기 때문이다.
중국 국내외 미디어들이 좀처럼 평소에 접근할 수 없는 당 대외연락부 궈예저우(郭業洲) 부부장은 지난 10월 21일 당 대회장 미디어센터에 나와 기자회견을 했다. 현재 중국과 북한 사이에는 중국공산당과 조선노동당 사이의 당대당 관계만 살아있는 상황이어서 이날 대외관계를 담당하는 궈예저우 부부장의 기자회견은 베이징(北京) 주재 외국 대사관과 언론들의 주목을 받았다.
궈예저우에게 최근의 중국·북한 관계에 대해 질문을 한 것은 블룸버그통신이었다. 블룸버그통신은 로이터통신에 이어 통신사로는 둘째로 많은 특파원을 베이징에 파견해 놓고 중국의 움직임을 전하고 있다.
“근년의 중국·북한 관계는 다소 악화된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중국공산당과 조선노동당 사이의 관계는 냉담해진 것으로 보인다. 지난번 쑹타오(宋濤) 대외연락부 부장이 조선의 카운터 파트와 만난 것이 언제였던가.”
이에 대한 궈예저우 부부장의 대답은 이런 것이었다.
“중·조(中朝) 관계는 근린관계로, 두 나라는 전통적인 우호협력 관계를 잘 유지하고 있다. 중·조 간 우호협력 관계를 잘 지키고, 발전시키고, 우호협력 관계를 공고히 하는 것은 쌍방의 이익에 부합하는 것일 뿐 아니라 이 지역의 평화 안정에도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 중국공산당과 조선노동당 양당지간의 교류는 양국 관계 발전에 중요한 추진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우리 당과 조선노동당 양당 관계는 전통적인 우호 교류를 유지하고 있다. 쌍방은 언제, 어디서나 여러 등급의 인적 교류를 유지하고 있다. 쌍방의 필요와 편리에 따라 달라진다.”
궈예저우 부부장의 대답은 북한의 계속된 핵실험으로 인한 유엔의 제재 결의안을 중국이 실행에 옮겨야 할 때이며, 이 때문에 최근 양국 관계가 냉랭해져가고 있다는 점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대답이었다. 한편으로는 현재의 중국·북한 관계의 기본은 중국공산당과 조선노동당 사이의 당대당 관계이며, 정부 대 정부의 교류는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으면서도 중·북 관계가 쉽게 파탄에 이르지 않는 이유를 잘 설명해줬다고도 할 수 있다.
더구나 지난 9월 27일 리진쥔(李進軍) 주북한 중국대사가 북한 거주 화교들과 기업인, 유학생들을 모아 개최한 중화인민공화국 정부 수립 기념 초대회에 이길성 북한 부외상이 방문했다고 북한 주재 중국대사관 웹페이지가 기록하고 있다. 리진쥔 중국대사는 이길성 부외상에게 “조선인민들이 김정은 동지를 리더로 하는 조선노동당의 지도 아래 조선식 사회주의 강성국가 건설에서 새로운 성과를 이룩하고 있는 점을 축하한다”고 말했다.
이런 분위기는 지난 4월 28일 중국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가 발행하는 국제문제 전문지 환구시보(環球時報)가 “중·조(中朝) 관계가 전례 없이 악화되고 있으니 베이징은 조선에 대해 새로운 위엄을 세워야 할 것”이라고 촉구한 것과 다르다. 환구시보의 촉구가 실제의 중·북 관계를 반영하지 못하는 속임수이거나 거짓 기사일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제시하고 있다. 당시 환구시보의 기사는 “중국이 조선을 제재하겠다는 안보리 결의를 엄격히 집행하고 있다는 사실은 모두들 공통적으로 목격하는 현실”이라면서 “만약 평양이 계속해서 핵미사일 활동을 계속한다면 중국이 유엔 안보리의 더욱 엄격한 제재안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환구시보는 다음과 같은 논지의 주장을 전개했다.
“조선반도의 문제는 총체적으로 미·조(美朝) 사이의 모순에서 이루어진 것들인데 조선이 중국과의 국경선에서 100㎞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핵실험을 하는 것은 동북지방의 안전을 위협하는 것이다. 중국은 조선의 핵실험을 반대하느라고 중·조 관계에 손상을 입었고, 사드 배치에 반대하느라고 중·한(中韓) 관계가 급전직하 나빠졌다. 중국은 조선반도 남북에서 동시에 손해를 입고 있으면서도 아직도 미국을 도와주지 못해 안달을 하고 있다. 중국과 미국에는 각자의 전략적 이익이 있겠지만 조선이 핵미사일 기술을 발전시킨다는 이유로 베이징이 평양에 압력을 가하기 전에 우선 우리의 국가이익을 지킬 줄 알아야 할 것이다. 미국을 위한 일꾼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중국공산당 당대회 기간에 기자회견을 자청한 궈예저우 부부장은 파키스탄 통신사 기자가 “중국공산당이 주변 국가의 정당들과 당대당 관계를 발전시키는 것이 중국과 이들 국가들과의 정부 간 관계 발전에 어떤 작용을 한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현재 중국과 파키스탄의 관계는 산보다도 높고, 바다보다 깊으며, 철보다도 단단하고, 꿀보다도 달콤하다.… 우리 중국은 현재 육지로 연결된 14개 주변국이 있으며 이들 주변국에 대해서는 ‘주변이 안정되지 않으면 나라 안도 편안할 수 없다’는 개념을 바탕으로 교류하고 있다.”
중국은 파키스탄과 인도, 그리고 과거에는 세계 4대 핵무기 대국이었던 카자흐스탄을 주변국으로 가지고 있다. 중국이 생각하는 북한 핵문제의 해결책이 궁극적으로 비핵화인지는 좀 더 따져봐야 할 일인지 모른다. 중국은 인도가 핵무기 보유국이 되면서 파키스탄이 인도에 맞서기 위해 핵실험을 할 때도 꿀 먹은 벙어리처럼 적극 반대하는 자세를 취하지 않았다.
당 대회 기간에 궈예저우 부부장이 내외신 기자회견장에 나온 것은 중국공산당의 이른바 ‘통일전선 공작’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과거 마오쩌둥(毛澤東)이 중국공산당의 최후 승리를 위해 중국 내 각계 인사들을 모두 모아 정치협상회의를 개최하는 통일전선 공작으로 국공내전에서 최후의 승리를 거둔 점을 생각해 보면 중국공산당과 조선노동당의 앞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통일전선 공작 차원에서 생각한다면 중국이 언제 북한에 대한 비핵화 주장을 거둬들일지 알 수 없는 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2481호 양제츠를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
지난 10월 18일부터 일주일간 개최된 중국공산당 제19차 전국대표대회(당대회), 그리고 10월 25일 열린 제19기 중앙위원회 1차 전체회의(19기 1중전회)에서 시진핑(習近平)은 새로운 5년 임기의 당 총서기에 재선됐다.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원수에 해당하는 국가주석에는 내년 3월 초 열릴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재선될 예정이다.
시진핑은 19차 당대회와 19기 1중전회를 통해 그동안 중국공산당의 최고 리더십을 결정해온 두 개의 중대한 인사 원칙 가운데 ‘격대지정(隔代指定)’은 무너뜨렸으나 ‘칠상팔하(七上八下)’는 무너뜨리지 못했다. ‘격대지정’이란 개혁개방의 총설계사 덩샤오핑(鄧小平)이 중국 정치지도자들의 권력 승계 안정화를 위해 자신의 권력을 넘겨주는 후임자에게 그 다음의 권력 승계자를 미리 지정해주는 독특한 방식의 권력 이양 시스템을 말한다.
덩샤오핑은 1989년 6월 천안문사태라는 정치동란을 겪으면서 자신이 후계자로 키워온 후야오방(胡耀邦)과 자오쯔양(趙紫陽)을 팔순 원로들의 공격으로 잃고 당시 상하이(上海)시 당 서기를 맡고 있던 장쩌민(江澤民)을 후임 총서기로 발탁했다. 당시 총리를 맡고 있던 리펑(李鵬)이나 천시퉁(陳希同) 베이징시 당 서기 등 빠른 경제발전을 우려하던 보수파들을 제치고 대외개방적일 수밖에 없는 상하이시 서기를 총서기로 발탁했다. 덩샤오핑은 장쩌민 이후에도 중국이 t錦濤)로 미리 내정하라”는 당부를 했고, 장쩌민은 13년 동안 권좌에 있다가 덩샤오핑과의 약속을 지키고 2002년 당 총서기직을 후진타오에게 넘겨주었다.
장쩌민 역시 당 총서기직을 후진타오에게 넘겨주면서 “그대의 후임자는 시진핑”이라고 못 박아 두었다. 시진핑은 후진타오가 약속을 지킨 덕분에 정치국 상무위원과 국가부주석을 거쳐 2012년 제18차 당대회에서 총서기에 올랐다. 그동안 중국 안팎에서는 후진타오 역시 자신의 권력을 시진핑에게 물려주면서 “귀하의 후임자는 후춘화(胡春華)로 하라”고 다짐을 받아두었다는 말이 나왔다. 2012년의 약속대로라면 이번 제19차 당대회와 1중전회를 통해 시진핑은 올해 54세인 약관의 후춘화를 7인의 정치국 상무위원 명단에 포함시켜야 했다. 그래야 5년 뒤인 2022년 제20차 당대회 때 후춘화가 당 총서기에 오를 포지셔닝을 갖추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시진핑은 이번에 후춘화를 정치국에 머물게 하고 정치국 상무위원으로는 발탁하지 않음으로써 ‘격대지정’의 원칙을 거부해버렸다. 이로써 후진타오가 시진핑의 후계자로 낙점한 후춘화는 5년 뒤 20차 당대회 때 정치국 상무위원의 벽을 뛰어넘어 당 총서기로 점프해야 하는 어려움을 안게 됐다.
이번에 중국공산당의 핵심 집단지도체계를 이루는 7인의 정치국 상무위원들 가운데에는 왕양(汪洋·62), 왕후닝(王滬寧·62), 자오러지(趙樂際·60) 세 사람만이 5년 뒤인 20차 당대회 때 67세 미만이 되어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재선될 수 있는 연령이다. 그러나 이들 모두 5년 뒤 당대회에서 새로운 10년 임기의 당 총서기로는 선출될 수 없는 연령이어서 현 정치국 상무위원들 가운데에는 시진핑의 후계자가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시진핑은 이번에 지난 5년 동안 자신을 도와 반부패운동을 이끌어온 왕치산(王岐山·69)을 유임시키려 했으나 장쩌민과 후진타오 두 전임자의 반대에 부딪혀 ‘7상8하’의 인사원칙을 깨뜨리는 데는 실패했다. 7상8하의 원칙에 따르면 5년 뒤의 당대회에서 10년 임기의 당 총서기에 선출될 수 있는 인물은 후춘화와 천민얼(陳敏爾·57) 두 사람뿐이다. 이들 가운데 후춘화는 그동안 맡고 있던 광둥(廣東)성 서기직에서 면직됐는데 내년 3월의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경제담당 부총리로 발탁될지의 여부가 관심을 끌 전망이다. 시진핑이 새로운 충칭(重慶)시 서기로 발탁한 천민얼 역시 이번에 정치국원에 머물렀기 때문에 어떤 형식으로 정치국 상무위원회에 들어가 시진핑의 후계 대열에 설 수 있을지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시진핑 자신도 5년 뒤 20차 당대회 때는 69세에 이르러 이번 당대회를 통해서도 살아남은 7상8하의 원칙 때문에 3연임을 달성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전망된다.
이번 중국공산당 고위 인사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외교부장을 지낸 양제츠(楊潔箎·67) 외교담당 국무위원이 25명의 정치국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발탁되고, 왕이(王毅·64) 현 외교부장이 376명의 중앙위원 중 한 사람으로 남은 점이다. 양제츠는 주미 대사 출신으로 대미(對美) 외교를 책임지고 있는 반면, 아주국장과 주일 대사 출신의 왕이는 한반도를 포함한 일본과 북한 등 아시아 외교를 총괄해왔다.
이번에 중국공산당 19차 당대회가 끝난 뒤 1주일 만에 중국이 사드 문제를 포함한 한·중 관계를 새로 정립하려는 움직임을 보인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미국의 부시 대통령 집안과 개인적으로도 가까운 양제츠가 정치국원으로 당내 지위가 높아짐으로써 중국이 사드 문제로 더 이상 미국, 한국과 갈등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는 판단을 내렸을 가능성을 짐작해볼 수 있다. 미국통을 정치국원으로, 일본통을 중앙위원으로 자리매김한 시진핑의 의중 또한 앞으로 대미 관계를 보다 부드럽게 만들려는 시도라고 전망된다.
특히 양제츠는 이번에 중앙외사공작 영도소조의 판공실 주임과 해양권익보호공작 영도소조의 판공실 주임을 맡아 중국이 북한 문제와 남중국해 문제를 놓고 미국과 갈등하는 상황을 줄여갈 가능성을 예상해 볼 수 있다. 양제츠는 온화한 성격의 상하이(上海) 출신 외교관으로, 비교적 자신을 드러내기를 좋아하는 베이징(北京) 출신 왕이에 비해 훨씬 부드러운 대외정책을 기대해 볼 수 있다.
2482호 11.13 북핵(北核)은 외면하면서… 시진핑 외교 진짜 달라질까?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지난 10월 18일 중국공산당 제19차 당대회 개막날 당 총서기로서 업무보고를 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앞으로 5년간 중국 외교는 인류 운명 공동체의 건설을 추진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내년 3월 임기 5년의 국가주석으로 재선출될 예정인 그는 앞으로 5년간 자신이 끌고 갈 중국 외교의 기조에 대해 “세계 문명의 다양성을 존중, 문명 간의 교류가 문명 간의 차이를 넘어서게 할 것이며, 문명 간의 충돌이 아닌 문명 간의 상호 존중과 공존을 추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인류 운명 공동체의 건설을 위해 중국이 자주적이고 평화적인 외교정책을 고수해서 “각국이 자주적으로 발전의 길을 선택할 수 있게 할 것이며, 국제적인 정의가 실현되어 자신의 의지를 남에게 강요한다든가, 다른 나라의 내정에 간섭하는 일이 없어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평화와 발전의 길이 결코 중단되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이며, 화이부동(和而不同·서로 어울리되 서로의 다른 점을 인정하는 것)의 세계를 촉진할 것”이라고도 다짐했다.
시진핑의 업무보고 다음 날인 10월 19일 왕이(王毅) 외교부장은 내외신 기자회견을 열고 ‘시진핑 신시대 중국 특색 대국외교’의 특징과 목표와 관련해 “앞으로 중국이 추구할 신형 국제관계의 내용은 ‘상호존중과 공평정의, 윈윈협력’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세 개의 목표는 “강자가 약자를 괴롭히는 밀림의 법칙이 아니라 ‘지속적인 평와와 보편적인 안전, 공동번영, 개방 포용, 그리고 깨끗하고 아름다운 세계’를 추구하는 것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중국 국가주석과 외교부장의 이런 미사여구(美辭麗口)만으로 중국 외교가 진짜 달라질까. 19차 당대회가 끝나면서 한국에 대한 사드 보복을 끝내려는 태도를 보여준 것도 중국 외교의 기본 정신과 목표가 달라졌기 때문일까.
당대회 이후 시진핑 주석의 첫 해외 방문 예정지는 APEC이 열리는 베트남이다. 시 주석의 방문을 준비하기 위해 왕이 외교부장은 지난 11월 3일 하노이로 베트남 공산당 총서기와 총리를 찾아갔다. 그는 이 자리에서 “중국공산당 제19차 당대회 직후 시진핑 총서기가 방문하는 첫 나라가 베트남”이라며 “이번에 시진핑 총서기가 와서 중국과 베트남이 어떻게 정치적인 신뢰를 증강시키고, 어떻게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를 확립해서 양국 관계를 새로운 단계로 발전시키게 할 것인지 두고 보라”고 장담했다.
현재 베트남은 일본의 권유에 따라 미국과 인도, 베트남, 일본 4개국 간 공동 해상훈련을 계획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시진핑 국가주석이 이번 APEC 기간 중 전통적 기피국인 베트남과 얼마나 관계 개선을 할 수 있는지가 주목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베트남과의 관계 개선이 시진핑 자신이 선언한 “인류 운명 공동체를 건설하는 신시대 중국 특색의 대국외교”가 허상인지 아닌지의 여부를 판가름하는 잣대가 될 전망이다.
중국은 전통적인 ‘숙적’ 관계인 인도에 대해서도 밝은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화춘잉 외교부 대변인은 최근 “인도 주재 러시아 대사가 최근 인도와 중국이 일대일로 사업에 있어서 서로의 이해도를 높여 일정한 공통인식에 도달할 것이라고 했다는데 이에 대한 대변인의 견해는 무엇인가”라는 기자들의 질문에 이렇게 말했다. “얼마 전에 폐막한 중국공산당 19차 당대회에서 일대일로 사업은 당 규약에 명시됐으며, 당 규약에 명시된 이상 중국의 일대일로 사업추진은 고도로 중시될 것이며, 확고하게 추진될 것이다.”
중국 국내외 미디어들이 평소에 좀처럼 접근할 수 없는 당 대외연락부 궈예저우(郭業洲) 부부장은 지난 10월 21일 당 대회장 미디어센터에 나와 기자회견을 했다. 현재 중국과 북한 사이에는 중국공산당과 조선노동당 사이의 당대당 관계만 살아 있는 상황이어서 이날 대외관계를 담당하는 궈예저우 부부장의 기자회견은 베이징(北京) 주재 외국 대사관과 언론들의 주목을 받았다.
이 자리에서 그는 이런 말을 했다. “중·조(中朝) 관계는 근린관계로, 두 나라는 전통적인 우호협력 관계를 잘 유지하고 있다. 중·조 간 우호협력 관계를 잘 지키고, 발전시키고, 우호협력 관계를 공고히 하는 것은 쌍방의 이익에 부합하는 것일 뿐 아니라 이 지역의 평화 안정에도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 중국공산당과 조선노동당 양당지간의 교류는 양국 관계 발전에 중요한 추진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우리 당과 조선노동당 양당 관계는 전통적인 우호 교류를 유지하고 있다. 쌍방은 언제, 어디서나 여러 등급의 인적 교류를 유지하고 있다. 쌍방의 필요와 편리에 따라 달라진다.”
궈예저우 부부장의 말은 북한의 계속된 핵실험으로 인한 유엔의 제재 결의안을 중국이 실행에 옮겨야 할 상황에서 최근 양국 관계가 냉랭해져가고 있다는 점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대답이었다. 한편으로는 현재 중국·북한 관계의 기본은 중국공산당과 조선노동당 사이의 당대당 관계이며, 정부 대 정부의 교류가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으면서도 중·북 관계가 쉽게 파탄에 이르지 않는 이유를 잘 설명해줬다고도 할 수 있다.
이 같은 중국과 북한 관계는 후진타오(胡錦濤) 총서기 시절 열린 당 외사영도소조 회의에서 나온 “북한의 핵문제 해결과 북한과의 선린 우호관계를 연계시키지 않는다”는 결정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북한의 핵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는다고 해서 중국과 북한의 우호선린 관계를 훼손하는 일은 하지 않겠다는 희한한 결정이었다. 우리와 미국을 비롯해 북한 핵문제 해결을 시도하는 국제사회의 기대를 중국이 늘상 저버리는 배경에는 이 같은 비논리적인 이상한 결론이 도사리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시진핑 신시대 중국 특색 사회주의 대국외교’가 국제사회에서 인정받으려면 인류의 공동 운명체 건설에 무엇보다 방해가 되는 북핵 문제의 해결에 중국이 논리적이면서도 적극적인 자세로 임하는 모습부터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2483호 ‘중국이 이겼다’
‘China Won.’ 11월 13일 발매되기 시작한 미 시사주간지 타임은 표지를 ‘중국이 이겼다’는 뜻의 영어와 중국어 ‘中國赢了’로 달았다. 미국인들의 심사를 생각해서 미 국내판은 제외하고 국제판의 커버 앞뒷면에 걸쳐 ‘China Won’이라고 달았다. 이 커버스토리는 ‘리스크 컨설턴트 유라시아 그룹’ 이안 브레머(Ian Bremmer) 회장이 썼다.
브레머는 ‘중국 경제는 어떻게 미래에 승리를 거둘 자세를 취하고 있나’ 라는 제목의 커버스토리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최근의 일본, 한국, 중국, 동남아시아 순방에서 불안해 하는 동맹국들에 ‘아메리카 퍼스트’를 내세웠으나 중국의 영향력에 균형을 맞춰주지는 못 했다고 평가했다. 브레머는 트럼프가 시진핑을 만난 시점이 때마침 시진핑이 중국공산당 당 총서기에 재선출되면서 ‘신시대’를 선언한 때였고, 트럼프는 한국과 일본, 그리고 중국 지도자들에게 무역불균형 문제를 지렛대로 삼아 북한 핵 문제를 해결하려 했기 때문에 미국이 국제경제에서 가장 강력한 행위자(actor)라는 점을 제대로 과시하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브레머의 진단에 따르면, 분명한 점은 5년 전만 해도 중국의 ‘독재적 자본주의’ 시스템은 보다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하다는 국제적 컨센서스가 이뤄져 있었으나 지금은 달라졌다는 사실이다. 불과 5년 만에 중국의 정치·경제 시스템이 아메리칸 모델보다 더 잘 갖춰져 있고, 더 지속가능하다는 인상을 국제사회에 던져주고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앞으로 다가오는 21세기에 미국과 중국 가운데 어느 나라가 AI(인공지능)산업에 더 많은 투자를 해서 성과를 거두느냐가 될 것인데, 놀랍게도 그동안 맨해튼 프로젝트와 달 착륙 사업, 그리고 실리콘밸리 건설 등에서 압도해왔던 미국이 AI 분야에서 중국보다 더 많은 투자를 계획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
2484호 ‘사드 한국’ 중국인 속마음 알려면 댓글을 봐라
“당신은 중·한 관계가 철저하게 개선될 수 있다고 보십니까?”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지난 11월 22일 중국 베이징을 방문, 조어대국빈관에서 왕이(王毅) 외교부장과 만난 뒤 문재인 대통령의 12월 국빈방문에 합의한 것으로 전해졌다. 문 대통령이 방중하면 취임 후 첫 방문이 된다. 중국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가 발행하는 국제문제전문지 환구시보(環球時報)는 이를 계기로 앞으로 한·중 관계가 과연 강경화 장관이 말하는 것처럼 전방위로 개선될 수 있을 것인지 즉석 온라인 여론조사를 실시 중이다.
특히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문제에 대해 강경화 장관이 “앞으로 계속 이 문제에 관해 중국 측과 협의해나가겠다”고 말한 데 대한 의견도 묻고 있다. “당신은 중·한 관계가 철저하게 개선될 수 있다고 보십니까”라는 질문에 환구시보의 중국인 독자들은 11월 22일 오전 9시14분31초 현재 744명이 참여해서 ‘그렇다(26명·3%) 대(對) 그렇게 보지 않는다(718명·97%)’의 조사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여론조사는 찬반을 표시한 다음 그 이유를 댓글로 적도록 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는데 댓글 가운데 우리 국민들이 참고해야 할 만한 것들을 소개한다.
산둥(山東)성 허저(荷澤)시 네티즌: “중국과 한국의 역사적인 관계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겠다. 중국은 한국이 철저하게 미국으로 기울어져서 중국의 전략적 이익에 손해가 되지 않도록 한국을 중국 편으로 끌어들여야 한다.”
상하이(上海)시 자베이(閘北)구 네티즌: “꿈꾸지 마라. 미국은 이미 한국을 자기네 편으로 끌어들여 버렸다. 중·한 관계의 철저한 개선은 대단히 어렵다. 부분적으로 따뜻해지는 것은 가능할 수도 있다. 중·한 관계의 최대 장애물은 한국을 철저히 독립자주의 길로 가게 할 방법이 없다는 점이다. 한국은 자신의 사정을 자신들이 충분히 말하게 하는 것이 어려운 나라다.…”
광둥(廣東)성 광저우(廣州)시 네티즌: “중국과 한국의 관계는 몇 마디 입에 발린 말로 호전될 수 있는 관계가 아니다. 현재의 국제 형세는 중·미 간의 경쟁이 기본 형세이고 한국은 중·미 사이에서 행동할 수 있는 방법을 파악했다. 한국이 중국의 국가이익에 손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전제 아래서 중국과 교류하는 것, 그 이상의 것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헤이룽장(黑龍江)성 네티즌: “고려몽둥이(한국인을 비하하는 말)들은 미국과 일본의 개들이다. 개들이 똥을 먹는 걸 바꾸어놓을 수는 없다.”
장쑤(江蘇) 전장(鎭江)시 네티즌: “문재인 대통령은 당선된 지 2개월 반 만인 지난 7월 29일 4세트의 발사차량을 배치했다. 오늘 2017년 11월 22일 많은 한국 민중들이 항의하고, 저지하고, 반대하는 가운데 기재를 가득 실은 50량의 트럭이 난방시설을 한다는 이유로 사드 배치 지역에 반입됐다는데, 한 가지 물어봅시다. 50량의 트럭에 가득 실린 기재는 도대체 무엇인가요. 다음 달 중·한 정상회담 이전에 급히 들여놓아야 할 기재들 아닌가요?…”
광시(廣西)자치구 충쭤(崇左)시 네티즌: “중국을 견제하려는 미국의 장기말. 마(馬) 앞의 졸(卒)이 기꺼이 되려는 것이 한국일 뿐이다. 중·한 관계가 호전되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후베이(湖北)성 네티즌: “중·한 관계의 근본적인 개선은 불가능하다. 한국은 미국에 기대어 있으며 ‘괴뢰’의 모습을 하고 있다. 미국이 동북아에서 철수해야 문제를 풀 수 있을 것이다.”
광둥성 광저우시 네티즌: “강경화 한국 외교부 장관이 말하는 ‘전방위’라는 말은 주로 경제를 가리키는 말이다. 한국은 군사 지휘권을 미국에 넘겨주고 군사적으로 미국에 기대어 서 있는 나라다. 그런 나라가 어찌 ‘3불’을 이야기하는가. 한국이 뭐라고 말하건, 사드는 여전히 한국에 배치돼 있는 것이고, 한국인들이 뭐라고 말하건 그들의 말을 믿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산둥성 빈저우(濱州)시 네티즌: “사드는 여전히 철수하지 않은 상태에서 중국과 관계개선을 하겠다고? 중국인을 바보로 아는가. 중국인으로부터 어떤 말을 듣고 싶은가. 군사적으로는 미국에 기대어 서 있고, 경제적으로는 중국의 편의를 활용해 보려는 한국인이야 말로 두 다리로 두 척의 배에 올라가서 양쪽 배에 걸터앉으려는 것과 마찬가지 아닌가. 부끄러움을 모르네.”
베이징(北京)시 네티즌: “한국은 미국과 일본의 식민지일 뿐이다. 독립 주권국가가 아니다. 미국과 일본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다.”
후베이(湖北)성 스옌(十堰)시 네티즌: “한국 건국 때부터 한국인들은 미국에 감격하고 있었다. 상하이 한국 임시정부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반독립 정부가 어찌 철저한 관계개선에 나설 수 있겠는가.”
허베이성 탕산(唐山)시 네티즌: “한국은 미국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특히 사드 문제에 있어 한국은 미국의 조종대로 움직여왔다. 중·한 문제는 개선하기가 어렵다.”
광둥성 선전시 네티즌: “한국이 스스로 독립한 다음에야 중국과 화해가 가능하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것이 허황될 뿐이다.”
중국 네티즌들의 사드 관련 반응에는 우유부단한 태도로 미국과 중국 양쪽 모두를 쳐다보며 어물쩍 넘기려는 불성실한 우리 정부의 태도가 그대로 전달돼 있다. 우리 정부는 “사드 배치는 대한민국의 주권 사항이니 중국은 사드 배치에 관해 불필요한 간섭을 하지 말라”고 분명한 태도를 밝힐 필요가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지난 11월 11일 베트남 다낭에서 있었던 한·중 정상회담에서도 시진핑 국가주석이 사드 문제에 대해 “우리의 핵심이익을 건드리지 말라”면서 강한 어조로 비난했는데도 청와대는 “시진핑 주석이 그런 말을 한 일이 없다”고 거짓 보고를 했다. 그리고 이제는 또다시 사드 문제에 대한 분명한 우리의 입장을 밝히는 대신 “양국이 봉합키로 했다”는 희한한 말로 문제를 호도(糊塗)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과 강경화 장관이 12월 한·중정상회담에서는 분명한 태도를 취하길 기대해 본다.
2485 중국 시진핑의 ‘화장실 혁명’이 중요한 이유
1988년 10월 하순 조선일보 홍콩특파원으로 일하던 필자는 옌볜대학 초청으로 처음으로 중국 여행에 나섰다. 당시 홍콩에서 옌지(延吉)로 가려면 홍콩→베이징(北京)→창춘(長春)→옌지를 통과해야 했다. 홍콩에서 베이징까지는 비행기편으로 갔고, 나머지는 열차를 갈아타야 하는 여정이었다. 베이징을 출발한 열차가 창춘에 도착한 것이 새벽 3시. 오후 5시까지 숙소에서 쉬고 다시 창춘→옌지행 열차를 타야 했다.
그때 처음 본 것이 창춘역 앞의 공중화장실이었다. 처음 본 중국 지방도시의 역 앞 공중화장실 안은 한마디로 가관이었다. 안으로 들어서니 한쪽에 직사각형의 구멍만 50여개 뚫어져 있는 것이 전부였다. 옆 사람을 가리기 위한 가림막 장치 같은 것은 없었다. 그래도 그 시간 지방도시에서는 역전 화장실이 나은 건지 화장실 안에는 신문조각과 책을 든 중국 인민들이 일렬로 죽 늘어앉아서 일을 보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일을 보면서 서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광경이었다. 격벽 건너 여자화장실에서도 서로 잡담하고 떠드는 소리가 남자화장실로 건너오는 것을 보면, 여자화장실 안도 사람 사이의 가림막은 없는 것으로 추정됐다. 중국에서 처음 본 지방도시 역 앞 공중화장실의 풍경은 그 후 몇 년 동안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고, 꿈에도 가끔 나타났다.
그로부터 28년. 지난 10월 25일의 중국공산당 제19기 중앙위원회 1차 전체회의(19기 1중전회)에서 권력구조 내에 광범위한 이른바 ‘시자쥔(習家軍)’을 형성한 시진핑 당 총서기가 지난 11월 29일 전체 당원과 행정조직이 일제히 ‘변소 혁명’에 나설 것을 지시했다고 관영 신화통신이 전했다. 중국에서는 화장실을 ‘처수오(厠所·변소)’, ‘시소우지엔(洗手間·화장실)’으로 나눠 부르는데, 정확히 시진핑은 ‘처수오 혁명’에 나서라고 지시했다. 처수오는 우리말로 ‘뒷간’ ‘측간’ 등으로 번역된다.
신화통신 보도에 따르면 시진핑은 “변소는 조그만 곳이지만 커다란 민생 문제를 안고 있는 곳”이라고 전제하고 “중국의 변소는 많은 사람들이 ‘불가(不佳·아름답지 못하다)하다’고 느끼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마디로 “더럽고(臟), 어지럽고(亂), 수준이 떨어지고(差), 구석에 처박혀 있고(偏), 작다(少)고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두 덩어리의 벽돌과 하나의 구덩이면 충분하고, 파리가 날아다니는 가운데 냄새로 가득 차 있다”고 시진핑은 중국의 지방 공중화장실을 묘사했다. 그러면서 “샤오캉(小康·중진국) 사회이건 아니건 변소가 더러워서는 안 된다”고 했다. “전면적인 샤오캉 사회의 건설과 민족 부흥이라는 위대한 목표도 화장실 혁명을 하지 못하면 역사적 결함을 갖게 될 것”이라고도 했다. 따라서 “화장실 혁명에 대한 사상적 인식과 정책적 조치, 시스템의 개선 등 일련의 심각한 변혁이 뒤따라야 한다”고 강조했다.
중국의 웬만한 변소에 들어가면 우선 중국인들의 인내심을 존경하게 된다. 이미 넘친 똥오줌으로 발판 위에 발 디딜 틈이 없고, 여름철이면 맹렬한 속도로 날아다니는 엄청난 파리떼와 각종 벌레들이 엉덩이 피부가 닿을 만한 곳에서 꾸물거리는 것이 중국의 화장실 풍경이다. 그런데 신문지 한 조각 들고 그 속에 들어가서 일을 보고 나오는 중국인들을 보면 인내심을 높이 평가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신화통신 보도에 따르면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화장실에 남녀 구분이 생긴 것은 40여년 전이다. 열여섯의 나이에 아버지가 문화대혁명에서 피해를 입을 것을 우려해 자진해서 산시(陝西)성 시골 마을로 하방(下放) 내려간 ‘지식청년’ 시진핑이 만든 화장실이었다고 한다. 당시는 물론 지금도 웬만한 지방에서는 ‘땅바닥에 구덩이 하나 파고, 주위를 나무판대기로 대충 가린 후, 지붕이라고는 풀더미로 덮은 것’이 화장실이다. 그런 시골 화장실을 열여섯 살의 시진핑이 “벽돌로 보다 넓은 곳에 비교적 깨끗한 공간을 만들고 남녀 구분을 한 것이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생긴 선진 화장실이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1989년 4월 중순부터 6월 초까지 50여일간 천안문광장을 가득 메운 베이징 시민과 대학생 100만명의 시위 과정에서 보게 된 ‘끔직한’ 광경을 전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이야 천안문광장 사방에 군데군데 화장실이 세워져 있지만 놀랍게도 1989년 당시에는 천안문광장 사방에 화장실이 없었다. 광장 북쪽 시위 학생 지도부가 팔괘진을 치고 드러누워 있는 인민영웅 기념탑 주변에는 시위 학생들이 먹다가 버린 빵조각, 우유, 소시지 등 음식물쓰레기가 학생들과 함께 뒤엉켜 썩어가고 있었다. 100만명이 넘는다는 학생들은 광장 사방의 하수도 위를 덮은 직사각형 철판을 하나씩 들어내고 거기를 화장실로 썼다. 물론 남녀 학생 구분도 없고 가림막도 없었다. 여학생의 경우 친구 몇 명이 둘러서서 가려주는 것이 고작이었다.
시위가 한 달 넘게 계속되자 인민영웅기념탑 주위에서는 썩은 냄새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그때 광장 서쪽의 인민대회당에 설치된 확성기에서 이런 말이 흘러나왔다. “학생들은 소독차가 들어갈 길을 터주기를 바란다. 지금 이대로 가서 광장 안에 전염병이 돌면 여러분들은 다 죽는다. 그러니 소독차가 들어갈 길을 터주기 바란다.” 길이 열리자 소독차가 들어와 6·25전쟁 때 포로들의 머리 위에 뿌렸다는 DDT로 추정되는 허연 소독약을 시위 학생들의 머리 위에 한바탕 뿌리고는 돌아 나갔다. 당시 광경은 전 세계에서 날아온 외국 기자들이 다 보았지만 어디에서도 보도하지 않았다. 아마도 이 글이 천안문사태 당시의 화장실과 소독에 대해 전하는 첫 글일 가능성이 있다.
필자는 시진핑의 화장실 혁명이 성공하기를 진정으로 바란다. 이번 화장실 혁명이 성공하면 아마도 아시아를 보는 서양인들의 눈길이 바뀔 것이다. 중국 정부는 지난 11월 20일 화장실 혁명을 성공시키기 위한 입법안으로 ‘농촌인 거주환경 정돈 3년 행동방안’이라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신화통신의 표현처럼 “시진핑 동지를 핵심으로 하는 당 중앙이 이끄는 화장실 혁명이 한 건 한 건씩이라도, 그리고 조그만 승리들을 모아 커다란 승리를 만드는 식으로라도” 꾸준히 전진하기 바란다. 그렇게 해서 화장실 혁명이 성공한다면 “중국 인민들을 역사상 처음으로 부자로 만든 위인은 덩샤오핑(鄧小平), 수천 년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화장실 혁명에 성공한 것은 시진핑”이라는 말을 듣게 될 것이다.
2486 中共 최고지도자 선출 방식 경쟁 체제로 바뀌었다
중국공산당이 10월 18~24일의 제19차 전당대회와 10월 25일의 제1기 중앙위원회 전체회의(1중전회)를 개최하면서 남긴 가장 큰 변화는 최고지도자 선출 방식을 바꾼 것이다. 지금까지는 퇴임하는 당 총서기가 권력을 넘겨주는 당 총서기의 다음 후계자를 미리 지명하는 ‘격대지정(隔代指定)’ 또는 ‘격세간택(隔世揀擇)’의 방식이었다. 하지만 중국공산당은 이제 더 이상 그런 최고지도자 내정 방식을 채택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제부터는 최고지도자 후보들이 앞날이 정해지지 않은 가운데 다른 후보들과의 경쟁을 통해 자신의 능력을 입증한 다음 당대회 때 당 총서기로 선출되는 방식을 채택하기로 한 것으로 확인됐다.
1978년 12월에 열린 중국공산당 11기 3중전회에서 덩샤오핑(鄧小平)이 전임자 마오쩌둥(毛澤東)이 병사(病死)하면서 공백으로 남겨놓은 권력을 장악한 뒤 지금까지 모두 3명의 당 총서기가 선출됐다. 장쩌민(江澤民·1989~2002), 후진타오(胡錦濤·2002~2012), 시진핑(習近平·2012~) 등이다. 장쩌민은 1989년 6월의 천안문사태의 회오리바람 속에서 실각한 후야오방(胡耀邦)과 자오쯔양(趙紫陽) 총서기가 남긴 3년 임기와 1992년부터 2002년까지 5년 임기 두 차례를 합해 모두 13년간 중국공산당 최고지도자의 권좌에 앉아 있었다.
장쩌민의 후임 후진타오가 총서기의 자리에 오른 것은 장쩌민의 전임자 덩샤오핑이 권력을 장쩌민에게 넘겨주면서 “당신의 후계자로는 이 사람 후진타오를 선택하시오”라는 정치적 다짐을 받아두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장쩌민은 13년 동안 당 총서기직을 잘 수행하다가 덩샤오핑과의 약속대로 후진타오에게 최고권력을 넘겨주었다. 후진타오를 1992년에 정치국 상무위원, 1998년에 국가부주석으로 선출하는 등 조기 출세시킴으로써, 자신이 덩샤오핑과의 약속을 지켜가고 있다는 사실을 내외에 과시했다.
장쩌민은 2002년 당 총서기 자리를 후진타오에게 물려주면서 “당신의 후계자는 시진핑”이라는 다짐을 받아두었다. 후진타오는 장쩌민이 자신에게 한 것과 마찬가지로 장쩌민이 후계자로 미리 지정한 시진핑을 2007년에 정치국 상무위원, 2010년에 국가부주석으로 조기 출세시켰다. 시진핑은 후진타오의 배려에 따라 2012년 당 총서기 자리에 올랐다. 후진타오 역시 2012년 당 총서기직을 시진핑에게 물려주면서 ‘격대지정’이라는 인사 원칙에 따라 “당신의 후임 당 총서기는 후춘화(胡春華)”라는 지시를 내려두었다.
후진타오와의 약속에 따른다면 시진핑은 이번 당대회와 1중전회를 통해 후춘화(54·광둥성 당위원회 서기)를 7인의 정치국 상무위원 중의 한 사람으로 발탁해야 했다. 그러나 지난 10월 25일 1중전회 결과 발표된 7인의 정치국 상무위원 명단에 후춘화는 없었다. 후춘화는 정치국원 25인 중의 한 사람으로 남았다. 이를 놓고 중국 안팎의 관찰자들은 “시진핑이 자신의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았다” “시진핑이 5년 뒤의 20차 당대회에서 당 총서기 3연임을 획책하고 있다” “시진핑은 이제 마오쩌둥과 같은 황제의 반열에 올랐다”는 성급한 결론을 내놓았다.
그러나 당대회 이후 한 달 남짓 시간이 흐르는 동안 대륙과 대만의 중국정치 전문가들은 “시진핑이 3연임을 획책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공산당이 최고지도자 선출 방식을 바꾼 것이며, 지금까지의 격대지정 대신 경쟁을 통한 지도자 선출 방식으로 전환한 것”이라는 견해를 밝히고 있다. 한셴둥(韓憲棟) 베이징 정법대학 정치학과 교수는 “격대지정의 원칙에 따라 차기 지도자로 미리 내정된 경험을 갖고 있는 시진핑 당 총서기 본인이 당내에 ‘차기 지도자를 미리 내정해두는 것은 너무 일찍 주목을 받게 돼 부담스럽기도 하고, 위험한 측면도 많다’는 견해를 전달해서 이번부터는 격대지정의 방식 대신 경쟁 방식을 채택하기로 했다는 견해가 있다”고 전했다. 한 교수는 “시진핑 당 총서기 본인이 중국공산당의 차기 지도자 선출 방식으로 격대지정은 문제가 많다는 견해를 강력하게 전달했다는 이야기도 있다”고 전했다.
대만 정치대학의 중국공산당 인사 전문가 커우젠원(寇建文) 교수는 “이번 당대회에서 시진핑이 유임을 희망한 왕치산(王岐山) 당 기율심사위원회 서기가 은퇴한 것은 과거 당 지도자들의 연경화(年輕化)를 설계한 덩샤오핑과 장쩌민이 세워놓은 ‘칠상팔하(七上八下)’의 원칙이 지켜졌다는 의미이며, 그런 의미에서 5년 뒤 69세가 되는 시진핑 본인부터가 20차 당대회를 계기로 칠상팔하의 원칙에 따라 퇴임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을 뜻한다”고 말했다. 커우젠원 교수는 “칠상팔하라는 ‘획선리퇴(劃線離退·특정한 연령의 선을 그어놓고 그 연령에 도달하면 일제히 물러나는 제도)’는 어떻게든 지키려는 것이 중국공산당 내의 합의”라고 전했다.
문제는 19기 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들 간의 관계다. 18기 때만 해도 시진핑 당 총서기와 다른 정치국 상무위원들 간의 관계는 수평적 관계였으나, 이번에 정치국 상무위원 명단을 발표하고 보니 이전과는 달라졌다. 예를 들어 시진핑과 리잔수, 왕후닝, 자오러지, 왕양 등은 시진핑이 발탁한 인물이어서, 이들은 시진핑의 말에 복종할 수밖에 없는 관계라는 점이 특이한 점으로 남았다. 이런 관계는 과거 덩샤오핑과 후야오방, 자오쯔양 사이의 관계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시진핑이 25인의 정치국원 대부분과 이른바 상하관계라고 할 수 있는 관계를 맺고 있는 점도 앞으로 관찰해 보아야 할 대상”이라고 커우젠원 교수는 지적했다.
중국공산당 최고지도자 선출 방식이 경쟁을 통한 방식으로 바뀜에 따라 이번에 선출된 정치국 상무위원 7명은 시진핑 당 총서기를 포함해서 전원이 칠상팔하에 따라 은퇴해야 하는 연령구조로 되어 있다. 25인의 정치국원 가운데에는 후춘화(54) 광둥성 당위원회 서기와 천민얼(57) 충칭시 당위원회 서기, 딩쉐샹(55) 서기처 서기 겸 당 중앙판공청 주임 3명만이 시진핑의 다음 총서기 자리를 놓고 경쟁을 벌일 수 있는 연령대다. 이들은 5년 뒤 20차 당대회 때 각각 59, 62, 60세가 되며, 다시 5년 뒤인 21차 당대회 때는 각각 64, 67, 65세로 당 총서기의 연령 컷오프를 통과할 수 있게 된다. 앞으로 5년간 중국 정치는 이들 3명이 벌이는 경쟁이 최대의 드라마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2487 도대체 문재인 대통령과 강경화 장관은 중국에 무슨 발목을 잡혔길래...
우리는 사드를 단서로 시진핑에게 이웃 국가의 존엄성을 재교육해야 할 것이다.
1949년 10월 1일 오후 마오쩌둥(毛澤東)이 중화인민공화국 정부 수립을 선포한 천안문 누각에는 꼭 있어야 하는데 보이지 않는 두 사람이 있었다. 한 사람은 마오의 동지들이 미리 모스크바 병원으로 보내놓은 ‘내연의 처’ 장칭(江靑)이었다. 또 다른 인물은 베이징(北京) 주재 소련대사 로시친(N.V. Roshchin) 중장이었다.
로시친은 이날도 중국 남부 광둥(廣東)성에서 스탈린이 국민당에 보내는 지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로시친 대사가 중화인민공화국 정부 수립 기념행사에 참석하지 않은 것은 당연히 스탈린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 스탈린은 마오의 홍군을 마치 농민 유랑(流浪) 걸식대 정도로 우습게 알았고, 중국 공산주의자들을 인정하지 않았다.
나중에 스탈린은 마오를 중국 정부 수반 자격으로 모스크바에 초청했다. 하지만 초청해놓고도 3일간 일정을 잡아주지 않았다. 때문에 마오는 호텔에서 빈둥거릴 수밖에 없었다.
스탈린이 사망한 후 1955년 흐루시초프가 집권하자 마오는 스탈린에게 뺨 맞고 흐루시초프에게 분풀이하는 식의 복수극을 펼쳐 나갔다. 1957년 7월 흐루시초프는 뭔가를 항의하기 위해 베이징 주재 소련대사 유딘을 마오에게 보냈다. 마오는 자리에 없었다. 그러자 흐루시초프는 유딘의 상급자인 미코얀을 모스크바에서 마오에게 보냈다. 마오는 미코얀에게 “항저우로 오라”는 전갈을 남겼다.
마오는 항저우로 날아온 미코얀을 작은 창문이 두 개밖에 없고 에어컨 시설도 없는 다락방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방 안은 찌는 듯이 무더웠으며 온통 눅눅했다. 미코얀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 인민복 정장 차림으로 정좌를 하고 마오의 말을 들었다. 마오의 뺨에서도 구슬 같은 땀방울이 뚝뚝 떨어져 내렸고 통역사의 공책은 흠뻑 젖었다. 마오는 마치 땀 흘리는 부처처럼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한참을 생각하더니 “당신이 말한 내용에 동의하오”라고 거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얼마 안 가 흐루시초프가 베이징을 방문했을 때 마오는 흐루시초프를 베이징 서쪽 향산(香山)의 수영장이 딸린 호텔에 묵게 했다. 그곳은 냉방시설이 되어 있지 않은 곳이었다. 흐루시초프는 너무 더워서 밤에 테라스에 나가 있다가 모기에 엄청나게 물렸다. 다음날 흐루시초프는 비참한 표정으로 “내가 중국에 오니 모기들조차 당신을 도와주려고 애쓰고 있네요”라고 말했다.
그날 이후로 중·소 외교 관계는 최악의 상태로 기울었다. 마오는 평생 한 번도 수영을 해본 일이 없는 흐루시초프에게 수영장 안에서 헤엄을 치며 회담을 하자고 제의했다. 어린 시절부터 장강(長江) 유역에서 수영을 익힌 마오는 마치 돌고래처럼 흐루시초프를 능숙하게 끌고 다녔다. 통역관들은 수영장 안으로 굴러떨어지지 않고 마오의 후난성 사투리를 흐루시초프에게 전달하느라 수영장 가장자리를 허둥지둥 뛰어다녔다. 흐루시초프는 마오가 힘을 주어 앞으로 끌면 얼굴이 처박혀 물을 엄청나게 먹었다. 소련 K.G.B 요원들도 흐루시초프에게 구명대를 씌워주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당시 흐루시초프는 비밀리에 중국을 방문했었지만 모스크바로 돌아갈 때 마오는 전 세계에 흐루시초프의 방중을 공개했다.
평소 신경질적일 정도로 날카로운 문학적 지성과 기억력을 갖고 있는 마오는 스탈린이 자신을 무시하고 조롱하는 것을 결코 놓칠 수 없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초기 중국은 소련으로부터 모든 공업 기반과 기술자까지도 수입할 형편이었다. 마오로서는 스탈린이 자신에게 가하는 굴욕에 인내로 대응해야 했다. 마오는 그랬다가 나중에 흐루시초프에게 복수를 제대로 한 것이다. 뺨은 스탈린에게 맞고, 분풀이는 흐루시초프에게 했다.
우리가 ‘대국(大國)’ 외교를 추구하는 시진핑(習近平)의 중국에 맞서려면 문재인 대통령도 선이 굵은 외교를 펼쳐야 한다. 있었던 일을 “없었다”며 꼼수를 부리다가 “사드 문제는 중국의 핵심이익이 걸린 사항”이라면서 “역사에 대한 책임을 져라” “양국 관계와 인민들에 대한 책임을 져라”고 시진핑이 도덕적인 훈계를 하는데도 중국어는 알아듣지도 못하는 우리의 방중 대표들은 “시진핑은 사드 문제에 대해 전혀 거론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판이다. 이런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의 외교로는 중국을 제대로 대할 수도, 나중에 중국에 가르침을 줄 수도 없다. 꼼수로는 대중 외교의 선을 굵게 할 수가 없다.
팩트는 팩트대로 챙겨서 국민들에게 정확히 보고하고, 시진핑과 왕이(王毅) 외교부장이 하는 무도(無道)하고 섭섭한 말은 그것대로 챙겨 두면 나중에 마오가 흐루시초프에게 한 것처럼 시원하게 복수할 수 있는 기회가 올 것이다. 문 대통령은 시진핑과 마주 앉았을 때 “시 주석, 그런데 한반도 방어무기 배치에 중국이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것은 1992년 8월 24일 대등한 평등조약을 맺고 시작한 한·중 관계에 대한 심각한 위반이며, 중국이 애지중지하는 ‘평화공존 5원칙’에도 위반이 아니냐”고 똑떨어지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도대체 문 대통령과 강경화 장관은 중국 측에 무슨 발목을 잡혔길래 시진핑이 사드에 대해 말을 했는지 안 했는지 어물쩍 넘어가려 하고, 3불(不)을 말했느니 안 했느니 꾸물대는가.
중국이 비록 지난 10월의 제19차 당대회를 거치면서 “앞으로 우리 외교의 목표는 인류 사회 공동체의 건설”이라고 크게 치고 나왔다지만, 아직도 대국 외교의 기반이 무엇인지도 분명히 밝히지 못하는 수준이다. 우리는 사드를 단서로 시진핑에게 이웃 국가의 존엄성을 재교육해야 할 것이다.
중국은 1840년부터 영국과의 아편전쟁에서 두 차례나 철저히 패한 끝에 19세기 후반에 가서야 1648년 베스트팔렌(Westphalia System) 체제를 기반으로 형성된 현대 주권국가 사회에 가담한 처지다. 이를 전혀 인지 못 하는 시진핑 주석이 “사드는 우리의 핵심이익을 침해한다”고 뻗대고, 이에 대해 반대 한마디 못하는 중국 내의 황당한 국제관계 이론가들을 반드시 교육시킬 기회가 올 것이다.
2488호 문 대통령은 ‘변검(變臉)의 달인’?
미국의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erminal High Altitude Area Defence·THAAD)라는 새로운 미사일 방어체계가 일본과 한국에 배치되면서 중국 가까이로 다가오자 중국인민해방군의 선전 선동 전문가들은 ‘사드’의 중국어 음역으로 ‘사더(薩德)’를 선택했다.
‘사더(薩德)’라는 단어는 원래 중국인에게 200년 전 활동했던 프랑스의 음란작가 ‘사드(de Sade)’의 이름으로 인식돼 있었다. 1740년 6월 2일 파리에서 출생해 1814년 12월 2일 파리 근교에서 세상을 떠난 사드는 지금까지 인류가 생각해낼 수 있는 모든 음란한 성행위를 묘사한 ‘소돔의 120일’이라는 작품으로 유명해졌다. 중국인들도 이 작품을 통해 ‘사더’라는 인간 말종 같은 프랑스 작가의 이름을 기억했다. 그러니까 ‘사더(THAAD)’라고 하면 인간 정신을 타락시킨 질 나쁜 인간의 표상 ‘사더(de Sade)’부터 떠오른다.
그런데 대체 누구의 작품일까. 중국 인민해방군의 선전선동가들은 자신들이 처음으로 맞닥뜨려야 하는, 그 성능을 짐작하기 힘든 방어무기 체계인 THAAD를 미군이 일본에 이어 한국에도 배치하려 하자 이미지 나쁜 작가 ‘de Sade(薩德)’와 발음이 비슷하다는 점에 착안해서 ‘사더(薩德)’라는 이름으로 퍼뜨렸다. ‘THAAD(薩德)’의 중국어 음역에 인류 최악의 작가 ‘de Sade’의 이름이 치환돼 들어가는 절묘한 작업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사드’는 지금까지 있던 미군의 무기 체계 가운데 자신들을 괴롭히는 가장 질 나쁜 무기 체계로 중국인들의 머릿속에 자리 잡았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2016년 7월 한국 정부의 사드 배치 결정을 발표하기 전까지는 중국인들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다. 부모 모두를 총탄에 잃고도 난관을 극복해 한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됐다는 점에서 중국 네티즌은 수많은 ‘박사모’ 블로그를 만들었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6억이 넘는 중국 네티즌은 30만개가 넘는 댓글을 달고 그의 새로운 사진을 자기네 블로그와 미니 블로그에 올렸다.
지난해 7월 이후에는 마치 제초제라도 뿌린 듯 댓글들이 자취를 감추었다. 박 전 대통령이 탄핵을 당하고,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하는 정치적 격변이 일어나자 중국인들은 문 대통령에 대한 기대감도 내비쳤다. 중국인들은 ‘한국판 다캉(達康) 서기’라는 별명을 문 대통령에게 붙였다. 항상 잘 웃고 늘 인민에게 다가가려는 사람 좋은 다캉 지방의 당 서기를 그린 TV드라마에 나오는 배우와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었다.
하지만 ‘사람 좋은 당 서기’로 불리던 문재인 대통령이 최근 들어서는 ‘변검(變臉)의 달인’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중국 각 지방에는 원대(元代)에서부터 내려오는 전통 오페라가 있다. 베이징(北京) 지방의 오페라를 경극(京劇)이라고 한다면 상하이(上海)에는 호극(滬劇)이 있으며, 쓰촨(四川)에는 천극(川劇)이 중국인의 사랑을 받으며 맥을 이어왔다. 천극의 일부로서 지금도 쓰촨 사람들뿐 아니라 전 대륙의 중국인들에게 사랑받는 것이 ‘변검(變臉)’이다. ‘천극지화(川劇之花·쓰촨 오페라의 꽃)’라고도 불리는 변검은 파촉 공연 예술뿐 아니라 파촉 문화의 명물로서 자리를 지키고 있다.
변검이란 천극을 공연할 때 배우가 얼굴에 쓴 중국식 탈 ‘검보(臉譜)’를 극의 분위기에 따라 순간적으로 바꾸는 연출 기법을 말한다. 한마디로 눈 깜박할 사이에 얼굴에 쓴 마스크의 색깔과 모양이 뒤바뀐다. 마스크의 종류는 대체로 20가지가 넘는다. 변검은 천극에서만 독특하게 발달한 연기기술로서 등장인물의 감정 변화와 독특한 개성을 얼굴에 표현하는 얼굴 분장이기도 하다. 이 공연 기법은 고도의 숙련된 기술이 필요하다. 변검이라는 배우의 서스펜스를 통해 관중을 극 속으로 몰입시키며 오락성과 재미를 한층 고조시킨다. 지금도 변검 공연장 맨앞에 앉아 아무리 눈을 뜨고 지켜보아도 변검 배우는 순간적으로 얼굴의 마스크를 새로운 것으로 갈아 낀다. 변검 배우들의 손놀림이 하도 빠르다 보니 한때 서울을 방문해서 공연을 한 변검 배우의 동작을 TV카메라가 슬로비디오로 찍어 돌려 보았지만 도대체 어떻게 해서 얼굴을 바꾸는 것인지 밝혀내지 못했다.
전통적인 변검에는 크게 말검(抹臉)·취검(吹臉)·차검(扯臉) 세 가지가 있다. 말검은 배우가 분장용 물감을 얼굴의 일정 부분에 여러 겹 덧칠하고 손으로 비벼 얼굴을 다른 색으로 변하게 하는 방법이다. 취검은 갖가지 색의 화장분을 배우가 사용하는 용기나 술잔과 같은 그릇에 담아 무대의 특정위치에 비치해 두고 변검을 할 때마다 눈을 감고 숨을 멈추고 입으로 한 번 힘껏 불어 얼굴색을 변하게 하는 방법이다. 차검은 배우가 비단 위에 그린 몇 장의 검보를 얼굴에 여러 겹 겹쳐 두고 매 장마다 실을 매달아 특정위치에 고정해 두었다가 한 장씩 찢어버리는 방법이다. 이때 배우는 검보를 바꾸는 동작이 관중들에게 보이지 않도록 해야 한다. 변검의 유형으로는 얼굴 전면을 바꾸는 ‘변정검(變整臉)’과 부분적으로 바꾸는 ‘변국부(變局部)’가 있다.
중국 사람들이 문재인 대통령을 ‘변검의 달인’이라고 부르는 데 긍정적 의미가 담겨 있지는 않다. 어린이부터 어른까지 중국인이 모두 동경하는 변검의 달인 배우 같다는 긍정적인 의미가 아니다. “문 대통령은 얼굴 표정을 바꾸는 데 대가라서 어느 표정이 진짜 표정인지 알 수가 없다”는 뜻으로 ‘변검의 달인’이라는 말을 쓰는 것이다. 실제 문 대통령은 대통령이 되기 전에는 “사드 문제를 처리할 복안이 내게 있다”라고 했다가, 어느 날 밤중에 4기의 사드 미사일 발사대를 추가 배치하도록 결정을 내리는가 하면, 또 어느새 “한국에 사드 추가 배치는 없다”면서 3불(不)을 말했다. 이러는 동안 중국인들이 문 대통령을 ‘변검의 달인’으로 부르게 된 것이다.
중국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체면(體面)’을 중시하면서 살아왔다. 체면 중시는 우리보다 더하다. 늘상 체면을 바꾸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제일 경멸한다. 중국인들이 우리 대통령을 ‘변검의 달인’이라고 부르는 걸 보면 마음이 편치 않다. 사드란 원래 중국이 간섭할 권리가 없는 우리의 주권 사항에 속하는 건데, 쓸데없이 중국 사람들에게 “이렇게 하겠다” “앞으로는 이렇게 할 방침이다” “앞으로 이렇게는 결코 안 하겠다”는 등 불필요하면서도 해괴한 외교적 약속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