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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전문가들의 생각4/ 김용한의 한 글자로 본 중국3/ 2017년 01월 호 라오닝 성 - 10월 호 마지막 회 《네이멍구자치구》

상림은내고향 2022. 10. 10. 20:49

중국 전문가들의 생각4/ 김용한의 한 글자로 본 중국3/ 2017년

◆ 01월 호  라오닝 성

◇영원히 걱정하고기억하는 땅

| 전쟁과 교류의 두 얼굴

랴오닝은 이민족에겐 중원의 간섭을 받지 않고 힘을 키우다 중원을 기습하는 근거지였고, 한족에겐 중원을 지키고 요동을 장악할 요충지였다. 수많은 공방전 속에 주인도 수시로 바뀌었다. 그러나 여러 민족이 만나고 교류하는 땅, 조선과 중국 사신이 오가는 연행사의 땅, 의주 상인 만상이 큰 부를 축적한 무역의 땅이기도 했다.

▲금강산(錦江山) 공원의 금강탑에서 바라본 중국 단둥과 북한 신의주. 고층 빌딩과 허허벌판이 양국의 국력차를 보여준다.

 

랴오닝(遼寧)성 단둥(丹東)은 작은 도시다. 인구는 244만 명, 도시권 인구는 86만 명이지만, 중국은 행정구역을 넓게 잡기 때문에 시내 중심부를 거닐어보면 한적함을 느낄 수 있다. 사람 많고 땅 넓은 중국을 돌아다니다 단둥에 오니 도시라기보다 시골 읍내 같다.

시 중심에서 남쪽으로 조금 내려가니 압록강이 나왔다. 강 건너로 북한 신의주가 보였다. 순간 ‘촌동네’ 단둥은 뉴욕 맨해튼 중심가처럼 보이고, 신의주는 캄보디아 시골 마을 같았다. 중국에서는 매우 작고 초라한 도시지만 북한과 비교하니 빌딩 숲이 즐비한 초현대식 도시로 보였다. 그나마 신의주는 중국과 교류하며 제법 발전된 국경 관문도시이고, 당성(黨性)이 우수한 인재들이 와서 견학·관광을 하는 곳이다 

밤이 되니 더 극단적인 대조를 보인다. 단둥 압록강변은 가로등이 휘황찬란하게 빛났고, 떠들썩하게 노는 것을 좋아하는 중국인들은 커다란 음악 소리에 맞춰 춤추고 왁자지껄 떠들며 산책을 했다. 반면 신의주 쪽은 불빛 몇 개만이 성글게 켜졌고, 지독히 적막하고 고요해 유령 마을처럼 보였다. 필자의 미숙한 수영 실력으로도 마음만 먹으면 헤엄쳐 건널 수 있을 듯 가깝다.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멀고 멀어 遼寧

 

조선시대 사신단이 오간 길도 바로 이곳이다. 연암 박지원은 명색이 국가의 공식 사절단이었지만, 넉넉잖은 출장비를 쪼개 쓰느라 제대로  먹지도 못한 듯하다. 박지원은 만상(灣商, 의주 상인)의 밥상을 부러운 듯 묘사한다.  
 
“만상 패거리는 자기들끼리 한곳에 자리를 잡았는데, 시냇가에서 닭 수십 마리를 씻고 투망으로 물고기를 잡아 국을 끓이고 나물을 볶으며 밥알은 자르르 윤기가 나는 것이 일행 중에서 가장 푸짐하고 기름졌다.
 
만상은 청나라와 무역하며 큰돈을 벌었다. 그들의 밥상은 공무원인 연행사(燕行使)보다 훨씬 풍성했다. 그토록 부유했던 이들의 후예, 의주보다도 더 중국에 가까운 신의주가 오늘날 저토록 초라한 것을 보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한반도와 중국을 잇는 요동, 랴오닝에 오니 만감이 교차했다.

랴오닝성의 약자는 ‘멀 요()’ 자다. 얼마나 먼 곳이기에 이런 이름이 붙었을까. 고대 중국의 중심 허난성 뤄양(洛陽)에서 랴오닝의 중심 랴오양(遼陽)까지는 1600km나 된다

랴오닝 가는 길은 멀고 험하다. 조조의 참모 유엽의 말처럼 “물길로 가려 하면 바다가 있고, 육로로 가려 하면 산으로 막혔다”. 대흥안령 산맥과 발해가 중원과 랴오닝을 갈라놓는다. 거대한 강 요하(遼河)가 요서와 요동을 나누고, 강 주변에는 광활한 늪지대 요택(遼澤)이 펼쳐져 지극히 험난한 길이었다. 수양제가 고구려를 정벌하러 요택을 건널 때 종군한 병사들의 해골이 끝없이 이어져 벌판에 널렸고, 당태종이 고구려를 원정할 때도 동서 200리 진창을 메워 길과 다리를 만드는 토목공사를 한 후에야 진군할 수 있었다.

이처럼 중원의 손이 닿기 힘든 이 곳엔 여러 부류의 종족이 살았다. 고조선·부여·고구려를 세운 예맥계와 발해·금·청을 세운 숙신계(말갈·여진), 삼연(三燕)·요·원을 세운 동호계(오환·선비·거란·몽고), 한족 중국계 등 온갖 부류의 사람들이 섞여 살았다. 이들은 작게는 요동과 만주의 패권을 장악했고, 크게는 중원을 차지했다 

랴오닝은 중국 밖 세력에는 중원의 간섭을 받지 않고 힘을 키우다가 중원을 휩쓸기 좋은 근거지였고, 중국에는 중원을 지키고 요동을 장악할 수 있는 요충지였다. 자연스레 이 땅에서 수많은 공방전이 일어나며 주인이 수시로 바뀌었다. 그래서 박지원은 말했다.

 

끊이지 않은 북소리, 징소리

“아하! 여기가 바로 영웅들이 수없이 싸웠던 전쟁터로구나. () 천자가 모든 것을 좌지우지할 수 있을 것 같으나, 천하가 편안한지 위태로운지는 항상 요동 들판에 달려 있었다. 요동 들판이 편안하면 나라 안이 잠잠하고, 요동 들판이 시끄러우면 천하에 전쟁이 일어나 일진일퇴하는 북소리, 징소리가 번갈아 울렸음은 무엇 때문인가. 진실로 1000리가 툭 터진 이 평원과 광야를 지키자니 힘을 모으기 어렵고, 버리자니 오랑캐들이 몰려들어 그야말로 대문도 마당도 없는 경계인 것이다. 이것이 중국엔 반드시 전쟁을 치러야 하는 땅이 되는 까닭이며, 천하의 힘을 다 기울여서라도 지켜야만 천하가 안정되는 까닭이다.

그러나 랴오닝이 전쟁터였던 것만은 아니다. 여러 민족이 만나고 교류하는 길, 조선과 중국의 사신이 오가는 연행사의 길, 의주 상인 만상이 큰 부()를 축적한 무역의 길이었다.

랴오닝은 이처럼 거리적, 지형적, 민족적, 문화적으로 중원과는 다른 독자적이고 역동적인 역사를 만들어왔다. 5500년 역사의 요하 홍산문화(紅山文化) 4000년 역사의 황하문명보다 앞선다. 예맥계의 고조선을 필두로 여러 유목민 세력이 살던 랴오닝에 처음 손을 뻗은 중국 세력은 연나라다. 연소왕의 명장 진개(秦開)는 동호의 1000, 고조선의 2000리 영토를 정복했다. 진·한 초기에는 중국계와 유목민족 세력이 어느 정도 균형을 이뤘으나, 한무제 때 한의 국력이 절정에 이르자 사방으로 정복사업을 펼쳤다. 한무제가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한사군을 설치한 후 중국계 세력이 랴오닝에 본격적으로 파고들었다.

그러나 달도 차면 기우는 법. 후한 말 조정의 기강이 문란해지자, 탐관오리는 백성을 쥐어짰고 군대는 약했다. 머나먼 변경에서 착취에 시달리던 이민족들은 자연스레 반란을 일으켰고, 조정은 토벌군을 보냈다. 이 과정에서 변방 지역부터 군벌들이 등장한다. 서량(간쑤성)에 동탁, 마등, 한수 등의 군벌이 나타났듯, 요서에는 공손찬, 요동에는 공손도가 실력자로 등장했다

 

막강 군벌의 등장

공손찬은 여러 유목 부족을 기마부대 ‘백마의 종’으로 제압할 만큼 무용(武勇)이 탁월했고, 요서와 유주(허베이성 북부)를 장악한 북방 최강자였다. 사세삼공(四世三公)의 후예 원소도 8년에 걸친 전쟁 끝에야 겨우 공손찬 세력을 평정할 수 있었다

여기에는 오환족의 도움이 컸다. 공손찬은 이민족을 가혹하게 때려잡아 원한을 샀기에 오환족 답돈은 원소를 도와 공손찬을 격파했다. 원소는 유주를 차지하고, 오환은 요서를 차지했다. 이후로도 원소는 답돈 등 이민족의 우두머리에게 선우의 인수를 내리고, 친척의 딸을 시집보내는 등 후하게 대접했다 

원소와 오환의 제휴는 굳게 이어졌다. 조조가 관도대전으로 원소를 격파한 후 업성을 차지했을 때, 원상·원희 형제가 요서의 답돈에게 도망치자 유주·기주 관리와 백성 10만 호가 따랐다. 그만큼 원씨 일가는 하북과 오환에서 두루 인심을 얻고 있었고, 원상은 오환족에 의지해 재기를 시도했다 

조조의 참모들은 유표가 유비를 보내 후방을 공격할 것을 우려해 철수하자고 했지만, 곽가만큼은 원상·답돈이 더욱 위험하다고 경고했다 

“지금 원상을 남겨놓고 남쪽을 정벌하면 원상은 오환족의 도움을 받아 다시 주인을 위해 죽음을 사양치 않을 신하들을 불러들이게 될 것이고, 호족들이 또 한 차례 충돌하면 백성과 오랑캐가 모두 호응하게 될 것이며, 오환의 선우 답돈은 남쪽으로 중원을 넘볼 것이니 그가 만일 제업(帝業)을 이루려는 야심을 품으면 아마도 청주(산둥성)와 기주도 지킬 수 없을 겁니다.

조조는 곽가의 진언을 받아들인다. 조조가 원상·오환 연합 세력을 토벌하기 위해 제일 먼저 착수한 일은 교통로를 마련하는 토목공사였다. 요서 지역은 여름에서 가을까지 물이 흐르는데, 얕아도 수레와 마차가 지날 수 없고, 깊어도 배가 뜨기 어려워 군대를 움직이기에 가장 어려운 길이었기 때문이다. 조조는 2개의 운하를 건설하고 500여 리에 걸쳐 산을 파고 계곡을 메워 백단을 지나 평강을 거쳐서야 오환족의 근거지에 이를 수 있었다

 

50년 공손씨 정권의 최후

장료가 선우 답돈을 베고 오환을 격파하자 원상 형제는 요동의 공손강에게 도망친다. 공손강은 공손도의 아들로 대를 이어 요동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는 대단한 야심가였다. 일찍이 196년 조조가 공손도를 무위장군에 영녕향후로 봉하자 공손도는 노발대발하며 조조가 내린 인수(印綬, 벼슬 등급을 나타내는 관인을 몸에 차기 위한 끈)를 창고에 처박아버렸다

“나는 요동의 왕인데, 어찌 일개 고을의 후(鄕侯)란 말인가!

조조가 심복 량무를 낙랑태수로 파견하자, 공손도는 요동을 후방의 낙랑으로 견제하려는 속셈을 간파하고 량무를 억류했다. 조조가 관도대전에서 승리하고도 원씨 세력을 평정하느라 동분서주할 때 공손도는 조조의 뒤를 칠 생각까지 했다

“조조는 원정하느라 업에 수비가 없다고 한다. 지금 내가 3만 보병과 1만 기병으로 업을 친다면 누가 그것을 막을 수 있겠는가. 

공손강은 아버지만한 야심은 없었지만, 독립왕국이나 다름없는 요동의 지배자였다. 외부 세력이 달가울 리 없었다. 조조가 요동을 친다면 원상과 연합해 대항해야겠으나, 조조가 요동을 칠 생각이 없다면 오랫동안 눈엣가시이던 원씨 일가를 처단하는 게 나았다. 조조는 요동의 정치적 역학관계를 귀신처럼 꿰뚫어봤다. 조조가 요동을 치지 않으니 공손강은 원상 형제의 목을 베어 조조에게 보냈다. 

이후 위·촉·오가 중원에서 난전을 벌이자, 요동의 공손씨 정권은 독립왕국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제갈량이 죽고 삼국 간 전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들면서 공손연이 오와 사신을 보내며 교류하자, 위는 후방의 요동이 매우 불편해졌다. 나아가 공손연은 스스로 연왕(燕王)을 칭하며 독립했다. 결국 사마의는 4만 군대를 일으켜 공손연을 주살하고, 관원·장군 2000여 명, 15세 이상 장정 7000여 명을 죽였다. 요동의 공손씨 정권은 50년 반세기의 역사를 비참하게 끝냈고, 요동은 위나라에게 귀속됐다. 

 

고구려, 발해, 고려의 활약

이로 인해 고구려와 위는 국경을 맞닿게 됐고, 고구려 동천왕이 서안평(단둥 동부)을 친 것을 기화로 양국은 전쟁에 돌입한다. 위의 관구검은 고구려를 비류수 전투에서 격파하고 수도 국내성을 기습해 함락했고, 이후 고구려는 한동안 힘을 전혀 못 썼다.

그러나 살아남은 자가 강하다고 했던가. 위·진이 망하고 516국이 명멸하는 와중에도 고구려는 끝내 살아남아 더욱 강해졌고, 수·당이 중원을 천하통일할 때 이미 요동의 패자로 군림하고 있었다. 그래서 수·당 시절에 ‘요동=고구려’였다. 수·당은 여러 차례 고구려를 공격한 끝에 당 고종이 신라의 도움을 받아 고구려를 멸망시켰지만 이 땅을 얻을 수는 없었다. 안동도호부를 설치했으나 고구려 부흥운동 등 반발이 극심해 곧 유명무실한 기관이 됐고, 끝내 안사의 난(755~763년 안녹산과 사사명 등이 일으킨 난)이 일어나며 91년 만에 폐지된다.

고구려·말갈 연합세력이 세운 발해는 랴오닝의 새 주인이 되어 해동성국으로 불릴 만큼 세력을 과시했다. 그러나 여러 유목민족이 잇달아 일어나, 발해는 거란족의 요나라에, 요나라는 여진족의 금나라에, 금나라는 몽고족의 원나라에 각각 무릎을 꿇었다. 중국 세력 당이 물러간 후 랴오닝은 유목민족이 발흥하는 주무대가 됐다

역사상 세계 최대의 정복국가인 원나라는 고려를 사실상 속국으로 삼으며, 요동에 고려총독부라 할 수 있는 정동행성을 세웠다. 훗날 명이 원을 중원에서 몰아낼 때, 고려 공민왕은 요동을 정벌했다. 신궁(神弓) 이성계는 “편전(片箭) 70여 발을 쏘아 모두 적군의 얼굴을 명중”시키는 대활약을 펼치며 오녀산성과 요동성을 점령했다. 군수 보급 문제로 점령하자마자 퇴각해 요동을 영토로 삼지는 못했으나, 요동 정벌은 총독부가 있던 요동을 침으로써 고려가 더 이상 원의 속국이 아님을 밝힌 정치·외교적 사건이었다.

 

요동 정벌과 위화도 회군

▲다롄의 중산(中山)광장. 러시아가 설계한 원형광장 주위에 근대식 건물이 들어섰다

 

▲압록강 너머 북한 땅을 바라보는 관광객.

 

▲박물관으로 사용되는 옛 뤼순 감옥.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장소다.

 

명은 원을 축출해 한족 통일왕조를 재건했고, 이성계는 제2차 요동정벌을 가던 중 위화도에서 회군해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열었다. 명태조 주원장의 경계와 정도전의 요동 정벌론으로 양국 사이가 험악해지기도 했지만, 결국 명이 요동을 차지하고 조선이 화친으로 돌아서며 양국은 명이 멸망할 때까지 친선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명나라는 랴오닝을 독자적인 성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요동도사는 산둥성 소속이었으며, 단지 위소만을 세워 군대로써 그곳을 둔수(屯戍, 군영을 지킴)할 뿐이었다. 랴오닝이 수도 베이징과 워낙 가까워 반드시 지켜야 할 요충지이긴 했지만 적극적으로 개발하려는 의지는 없었다 

명도, 조선도 손을 뻗지 않은 무주공산 랴오닝은 자연스레 다시 유목민족이 활약하는 터전이 됐다. 여진의 여러 부족은 원나라에 망한 좌절을 딛고 만주 일대에서 새롭게 일어났다. 그중에서도 특히 랴오닝의 건주 여진이 선두주자였다. 중국·조선과 가까운 이점을 살려 양국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며 활발하게 교역했다. 그 결과 “주거와 경작을 좋아하고 옷감 짜기를 잘해서, 음식과 복식이 모두 화인(華人)과 같다”는 평을 들었고, 매년 500명이 명나라로 들어가 조공무역을 했다. 

가까운 만큼 양국의 혜택도 많이 받았지만 견제도 많이 받았다. 명나라는 여진 부족들을 이간질해 싸우게 만드는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을 폈다. 건주 여진도 이간질에 희생돼 그 후손인 누르하치는 명나라에 강한 반감을 품었다. 명나라가 건재할 때는 감히 저항할 수 없었지만, 명나라에 암군(暗君, 어리석은 임금)이 연달아 등장해 기강이 문란해지고, 임진왜란으로 막대한 손실을 입고 쇠퇴의 길을 걷자 비로소 여진족이 날개를 폈다.

 

나아가면 兵, 들어가면 民

누르하치는 1615년 사냥 조직을 사회·군사 조직으로 일원화한 팔기(八旗) 제도를 정립했다. 팔기군은 “나아가면  ()이 되고, 들어가면 민()이 되어, 경작과 전투 둘 가운데 어느 하나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누르하치는 1616년 후금을 세워 금나라가 다시 찬란하게 부활했음을 선포했고, 여진의 여러 부족이 단결했다는 의미로 만주족이란 이름을 썼다. 1619년 사르후 전투에서 명의 10만 대군을 자신의 3~4만 병력으로 대파한 뒤 여세를 몰아 여진 전체를 통일했다. 

명장 원숭환이 영원성 전투에서 누르하치를 꺾고, 영금대첩으로 홍타이지를 격파해 청이 요서를 넘지 못하게 막았으나, 청은 반간계로 원숭환을 제거하고 배후 근심거리인 조선을 병자호란으로 굴복시킨 뒤 허베이의 산해관을 넘어 천하를 통일했다

오랜 시간 전란에 시달린 랴오닝은 많은 지역이 초토화했다. 만주족이 산해관 밖 관외(關外)에 살 때 중국인들은 변경의 위험지역에 가는 것을 꺼렸다. 그러나 청나라가 중원에 들어오자 랴오닝은 더 이상 변경이 아니었고, 주인 없는 넓은 땅은 많은 중국인을 유혹했다. 만주족의 중국 정복은 역설적으로 한족의 요동 정착을 도왔다

관외에 한족 인구가 폭증하자 강희제는 만주가 만주족의 색채를 잃어버리고 한화(漢化)하는 것을 경계해 봉쇄령을 내렸지만, 인구 이동은 황제 힘으로도 막을 수 없었다. 건륭제는 베이징에 살던 만주족인 경기인(京旗人)에게 요동 땅을 주며 정착게 했지만, 이미 농사짓는 법을 잊어버린 만주족은 한족 이주민을 소작인으로 고용했고, 세월이 흐르며 근면한 한족이 땅을 사서 주인이 됐다. 점차 랴오닝은 만주족의 땅에서 한족의 땅으로 변했다.

 

중국 흥망성쇠 압축판

그러나 외세의 중국 진출 교두보인 랴오닝을 둘러싼 각축전은 끝나지 않았다. 갑오전쟁은 우리에게는 동학농민운동이지만, 중국에는 청일전쟁을 의미한다. 1894년 일본은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하며 조선에 대한 지배력을 확고히 했고, 청일전쟁에서 승리해 랴오닝을 차지했다. 모든 일이 단 1년 사이에 일어났다. 

이때 복병 러시아가 나타났다. 동북아로 진출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던 러시아는 프랑스·독일과 함께 일본이 랴오닝을 포기하도록 종용했다. ‘삼국간섭’ 끝에 러시아는 랴오닝 반도 끝 요충지를 군항으로 확보하고, 러시아에서 멀고도 먼 항구에 ‘다리니’, 즉 러시아어로 ‘멀다’는 뜻의 이름을 붙였다. 훗날 일본은 러일전쟁 승전 후 이 항구의 이름을 ‘다롄(大連)’으로 고쳤다. 산해관의 동쪽, 즉 ‘관동(關東)’ 랴오닝은 일본 관동군 핵심 근거지로서 중국과 동아시아 침략의 선봉이 됐다 

이 와중에 랴오닝을 근거지로 일어난 군벌 장쭤린(張作霖)은 ‘동북왕’으로 군림했으나, 일본의 공작으로 폭사했고, 그의 아들 장쉐량(張學良)은 동북군을 이끌고 남하해 중원 대전을 끝내고 장제스(蔣介石)를 정상에 세웠다가, 시안사변(1936 12 2일 시안에 주둔 중인 장쉐량의 만주군이 난징에서 온 장제스를 감금하고 국공(國共) 내전 정지와 항일을 요구한 사건)을 일으켜 장제스가 국공합작을 하도록 종용했다. 훗날 공산당은 장제스의 국민당을 대만으로 몰아넣었으니, 장제스에게 장쉐량은 공도 으뜸이지만 죄도 으뜸인 애증의 존재였다.

일본이 패망하자 1945 8 24일 소련은 중국 공산당에 만주를 넘겼고, 공산당은 비로소 국민당을 능가할 수 있는 근거지를 갖게 됐다. 랴오닝의 파란만장한 역사는 중국의 흥망성쇠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청나라 이후 동북 지역이 중국에 편입된 지 300년이 넘었다. 그럼에도 중원은 아직 동북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동북 역시 중원과 일체감을 느끼지 못한다. 왕하이팅의 ‘넓은 땅 중국인 성격지도’나 천관런의 ‘중국 각지 상인’ 등은 중국 각 지역의 특색을 성()별로 서술했지만, 유독 랴오닝·지린·헤이룽장성 동북 3성은 한데 묶어 ‘둥베이(東北)’ 지역으로 다룬다. 중원에 산해관 밖 ‘관외’는 차이점이 없을까. 

작가 쑤쑤는 에세이 ‘쑤쑤, 동북을 거닐다’에서 동북 출신 한족이 느끼는 소외감을 표출했다. 쑤쑤는 만리장성을 보며 ‘한쪽 밖으로 내몰려 있으면서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도 들어갈 수 없는 그런 느낌’을 받고, 동북과 중원을 가르는 거대한 장애물 만리장성의 목소리를 듣는다

 

東北 프레임

▲다롄 싱하이(星海) 공원에서 서양 관광객에게 춤을 가르쳐주는 중국인들

 

▲호산장성(虎山長城)에서 바라본 요동 벌판.

 

“동북이여, 너는 중원이 영원히 걱정하고 기억하고 있으며, 또한 항상 방어를 취하는 곳이며, 문밖에 내보내놓고도 억지로 품 안으로 끌어들이려고 하는 존재다. 

산둥성 이주민 후손인 쑤쑤는 랴오닝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면서도 오히려 중원을 고향으로 여기는 이민자의 정서를 가졌다. 그런데 중원이 동북을 받아들이지 않으니 중원의 인정을 받기 위해 애쓴다. 중원의 편견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해 동북인은 “덩치와 주먹, 목소리가 커서 겉모습만 보면 다른 사람들을 기죽게 하지만, 똑똑한 머리로 타인을 압도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역대 중국 황제 누구와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는 누르하치, 강희·건륭제는 동북인이 아니었던가. 금나라 때 전쟁포로로 끌려온 송나라 사람들이 동북에 ‘문화의 꽃’을 피웠다고 말하는 대목에선 한족 특유의 중원 중심주의가 드러난다

“한때 유명한 가문 출신이던 한족들이 지금은 마치 씨를 뿌리듯이 북방 벌판에 들어왔고, 척박한 오랑캐의 땅이던 북방 벌판은 이렇게 중화민족의 번영을 누릴 수 있게 됐다.

쑤쑤의 언행은 동북의 소외감을 드러낸다. 동북 3성 중 가장 발전한 랴오닝도 예외가 아니다. 랴오닝은 면적 148400(한반도의 66.4%), 인구 4390만 명으로 인구·크기 면에서는 중국 내에서 중간 정도의 성이지만, 2015년 명목 GDP 4614억 달러, 1인당 GDP 1만 달러로 경제적으로는 홍콩, 마카오, 대만을 제외한 중국 본토 내 10위권에 든다. 외관상으로는 중국에서 부유한 동부 연해지역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북방의 홍콩’ 다롄은 컨테이너 물동량 기준으로 세계 15위의 무역항이다. 

그러나 내실을 따져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동북 3성은 노후 중화학공업 위주 산업구조를 갖췄다. 중앙 정부의 전폭적 지원으로 2003년부터 10년간 고속성장을 했지만, 2013년부터는 약발이 떨어졌다. 2015년 랴오닝은 GDP 성장률 3%로 전국 최하위 성적을 기록했다. 제조업 특성상 노동자 확보도 중요한데, 노동자들이 임금·복지가 더 좋은 광둥성 등 외지로 나가 노동력 유출도 심각하다. 이를 메우기 위해 북한 노동자를 수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경제에 정치까지 겹쳐보면 상황은 더욱 미묘하다. 2015 7 27일 시진핑(習近平) 주석은 랴오닝을 방문해 경제 부흥을 독려하고 부정부패를 척결하라고 했다. 사람들은 ‘경제 부흥’에 방점을 찍었으나, 시진핑의 속내는 ‘부정부패 척결’에 방점을 찍은 듯하다. 2016 9월 랴오닝성에서 선출된 전국인민대표대회(우리의 국회) 대표 102명 중 45, 랴오닝성 인민대표(광역의원) 3분의 2가 넘는 452명이 금품수수·부정선거 혐의로 자격이 박탈됐다

전인대 자격 박탈은 신중국 건국 이래 초유의 일. 랴오닝성은 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 출신 리커창(李克强) 총리가 당서기를 지낸 곳이다. 리커창의 지지 기반인 랴오닝방(遼寧幇)을 와해하려는 게 아니냐는 추측이 나왔다. 10월 말 중국공산당 18 6중전회가 끝나자 시진핑의 약진과 공청단의 몰락이 엇갈렸다. 

 

북한 ‘알박기’ 풀어야

침체된 랴오닝을 살리기 위한 절반의 해답은 한반도에 있다. 랴오닝은 중원과 한반도를 잇는다. 여진족은 명나라와 조선 사이에서 교역을 하며 축적한 부를 바탕으로 청나라를 세울 수 있었고, 만상 역시 대청(對淸) 무역을 통해 큰 부자가 될 수 있었다. 현재 한반도 북부에서 ‘알박기’를 하는 북한은 동북아시아 전체의 원활한 교역을 가로막고 있다. 이는 랴오닝뿐 아니라 한국과 중국, 더 나아가 러시아, 일본에도 손실이다. 빗장이 풀리고 사람들이 자유롭게 오가며 교류할 때 랴오닝은 다시 활기를 찾을 수 있으리라.

이것은 바로 우리 자신의 이야기다. “오늘은 중국으로 드라이브하러 갈까” 하고는 서울에서 출발해 압록강 다리를 건너 중국을 오갈 수 있기를, 가깝게는 중국·러시아를 돌아보고, 멀게는 중앙아시아를 지나 서유럽의 끝 포르투갈의 파고 곶까지 달려볼 수 있기를, 그런 날이 어서 빨리 오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東北 소외’에 지친 ‘만주 호랑이’

중원의 배후 랴오닝

산해관 너머 베이징을 노려보던 ‘만주 호랑이’ 랴오닝은 한족과 이민족의 전쟁터이자 교역의 땅이었다. 광개토대왕이 말 달리던 광활한 만주 벌판이자 중원을 호령한 ‘장쭤린 동북군’의 근거지이기도 했다. 한때 중화학공업 육성으로 곳간을 채웠지만, 산업구조 노후화로 성장률이 전국 최하위로 추락하고 리커창의 랴오닝방(遼寧幇)은 ‘부패 척결’ 철퇴 앞에 휘청거린다. 한족이 씌운 ‘둥베이 프레임’에 피로감은 더해간다. 〈관련기사 440쪽〉

 

▲다롄 싱하이(星海) 공원의 번지점프.

 

▲다롄 어부의 부두(漁人碼頭). 미국 동부 해안마을을 본떠 만든 곳으로, 독일 브레멘 항 등대 복제 건물이 랜드마크다

 

▲다롄 싱하이 공원에서 결혼사진을 찍는 커플

 

▲압록강 단교(斷橋)를 건너려는 펑더화이(彭德懷) 동상. ‘평화를 위해(爲了和平)’ 조선을 도와 미국에 저항하는(抗美援朝) 전쟁에 뛰어들었다고 소개한다.

 

▲압록강변을 지키는 호산장성(虎山長城).

 

▲일제 강점기에 단재 신채호 선생이 수감된 뤼순의 옛 일본·러시아 감옥.

 

◆02월 호  마카오

◇현실과 환상의 경계 사라진 슬픈 섬

澳 카지노 왕국의 그늘

무역이 끊기면서 도박과 성매매를 호구지책으로 삼은 마카오. 100여 년 뒤 그 호구지책은 주력 산업이 됐고, ‘동양의 몬테카를로’는 세계 최대 도박장이 됐다. ‘완전고용’과 ‘흑자 예산’을 자랑하는 돈 많은 카지노 왕국이지만, 민초들의 삶은 힘겹기만 하다. 변변한 의료·교통시설은 찾아볼 수 없고, 카지노산업 외에는 마땅한 일자리도 없다. 차별은 여전하고 민주화의 길은 요원하다.

▲몬테 요새에서 바라본 마카오 시내.

 

1991 KBS 드라마 ‘야망의 세월’은 어릴 때 무척 재미있게 본 드라마다. 격동의 한국 근현대사를 살아가는 인물들의 이야기가 흥미진진했다. 일제강점기 사업가 박만석이 흰 모자에 흰 재킷, 흰 바지, 흰 구두로 ‘쫙~’ 빼입고 등장하자 그의 지인들이 “와, 마카오 신사 됐수다!” 하며 감탄하는 장면은 지금도 생생하다 

신사의 대명사 마카오, 이름도 이국적인 마카오는 어떤 곳일까. 마카오는 그 이름만으로도 호기심과 상상력을 자극한다. 훗날 마카오가 중국이라는 걸 알았을 때 적잖이 실망한 기억이 난다. 그래도 마카오는 어릴 적 필자의 환상을 아쉽게나마 달래주었다. 대항해의 선구자 바스코 다 가마와 예수회 창시자 로욜라의 동상이 시내에 서 있고, 희고 노란 파스텔톤 건물들 사이를 걸으며 먹는 에그 타르트와 푸딩은 유럽의 정취를 자아낸다.

 

대항해시대가 낳은 마카오

마카오의 약칭은 ‘깊을 오()’ 자다. ‘오()’는 배가 정박하기 쉽게 해안선이 움푹 들어간 곳을 말한다. 마카오는 중국어로 ‘아오먼(澳門), 천혜의 항구임을 뜻한다. 그러나 세계적으로는 마카오라는 이름이 훨씬 친숙하다. 식민지 이름이 대체로 그렇듯, 마카오라는 이름도 제국주의자와 현지인의 대화로 만들어졌다.
 
중국 뱃사람들은 바다의 수호여신인 ‘마조(媽祖)’를 섬기고 사원을 지었다. 포르투갈인이 마카오의 마조 사원 근처에 정착하며 현지인에게 이 땅의 이름을 물었다. 현지인은 사원의 이름을 묻는 것으로 착각해서 “아마 까오(마조 사원)”라고 알려주었다. 이때부터 이곳은 마카오라는 이름으로 세계에 널리 알려졌다 

포르투갈인은 왜 마카오에 자리를 잡았을까. 광둥성의 중심 광저우(廣州)는 명·청(明淸) 쇄국정책 때에도 유일하게 개방한 대외무역항이었다. 중국과 교역하길 원하는 각국의 배들이 광저우에 몰려들어 “강을 따라 떠들썩한 번화가, 순식간에 수천 척의 배가 솟아난다”는 장관을 연출했다. 광둥성의 젖줄 주장(珠江)은 광저우의 남쪽으로 흘러 남중국해로 들어간다. 주장과 남중국해가 만나는 지점, 중국 대륙의 땅끝에 마카오 반도가 있다. 즉 마카오는 당시 세계 최대 항구였던 광저우와 가까우면서도, 중국 조정의 삼엄한 감시를 ‘살짝’ 피할 수 있는 곳이었다. 중국과 교역하는 한편, 독자적인 사회를 만들고 싶은 해외상인 집단이 탐낼 만했다.

포르투갈은 “육지는 이곳에서 끝나고, 바다는 이곳에서 시작된다”는 말처럼 유럽의 서남쪽 끝에 있다. 대서양과 지중해의 경계이고, 유럽과 아프리카의 경계이며, 가톨릭 문화권과 이슬람 문화권의 경계다. 예부터 포르투갈은 라틴족, 켈트족, 게르만족 등 유럽민족과 카르타고인, 무어인, 베르베르인 등 북아프리카인들이 부대끼며 살았다. 따라서 다양한 종족과 문화를 접하며 교역하는 것에 익숙했다 

더욱이 포르투갈은 땅도 작고 인구도 적다 보니 장사가 아니면 먹고살기 힘들었다. 그러나 베네치아공화국이 지중해를 장악하고 있어 대서양으로 나가는 다른 항로를 찾아야 했다. 열악한 사정을 극복하려고 몸부림치던 포르투갈은 대항해시대를 열었다. ‘항해 왕자’ 엔리케가 아프리카를 탐색했고, 바스코 다 가마는 아프리카의 희망봉을 돌아 인도 항로를 열었다. 포르투갈의 동진은 거침없었다. 인도를 넘어 동남아시아를 지나 중국과 일본까지 닿았다

 

외교, 전쟁, 밀무역

다만 포르투갈이 마카오에 안착하는 과정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포르투갈은 동남아 일대를 석권할 수 있는 요충지 말라카를 점령한 후, 1517년 국왕 마누엘 1세의 공식 사절 토메 페레스를 명나라 황제에게 보내 외교·교역 관계를 수립하려고 했다. 이때 명나라 황제 정덕제는 스스로 대장군에 봉하고 몸소 몽골군과 싸우는 등 기행을 일삼은 황제이긴 했으나, 외국 문물에 관심이 많았다. 자금성에서 살기보다 북해공원 근처에 몽골식 천막을 치고 생활하는 것을 좋아했고, 몽골어와 산크리스트어에 능해 서역인과의 만남을 즐겼다. 그런 만큼 정덕제 자신은 포르투갈과의 관계도 흥미롭게 검토해볼 만했다

마침 말라카의 사신이 명나라에 와 ‘포르투갈이 범선과 화포로 왕국을 점령하고 국왕을 축출했다’며 구원을 요청했다. 말라카는 ‘칙서를 내려 책봉한 나라’로 명나라 조공 질서의 일원이었다. 포르투갈의 말라카 점령은 명나라 중심의 국제 질서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었다. 신하들은 일제히 포르투갈을 비난했다 

“지금 그들이 왕래하여 무역하는 것을 듣건대, 위세를 내세워 반드시 싸우고 살상을 자행하니 남방의 환란과 위태로움이 끝이 없습니다. 

포르투갈은 외교관계를 맺지 못하자 함포로 명나라 문을 열고자 했다. 포르투갈은 대항해시대 선두주자답게 화력도 만만치 않았으나 명나라를 압도할 정도는 아니었다. 두 차례 전투 모두 명나라의 승리로 끝났다. 

외교와 전쟁, 두 가지 공식 루트가 모두 실패하자 남은 길은 비공식 루트, 즉 밀무역뿐이었다. 포르투갈 상인들은 중국 해안에서 밀무역과 해적질을 일삼았다. 포르투갈의 탐험가 핀투는 당시 저장성 닝보(寧波)에 있던 불법체류 포르투갈촌()의 규모가 어마어마했다고 전한다

“닝보에는…(중략)…약 3000명의 포르투갈인이 백인과 인도인 혼혈 여성과 결혼해 살았고, 두 곳의 병원과 연간 약 3만 크루자도(cruzado·금화)로 유지되는 성당 2곳이 있었으며, 도시 의회는 매년 6000크루자도의 세금을 거둬들였다. 그 규모로 미루어 아시아에서 가장 고풍스럽고 부유하고 풍족한 도시라는 것은 분명한 듯했다.

그러나 이 같은 불법행위로 포르투갈 상인들은 이익을 볼지 몰라도, 포르투갈 왕국이 이익을 보는 것은 아니었다. 1552년 포르투갈 왕실함대 사령관 리오넬 데 소사가 포르투갈 해적선과 밀무역 상인을 소탕해 명나라 조정의 환심을 샀다. 소사는 포르투갈 왕국이 질서와 명예를 중시하는 ‘바다의 제국’이며 일부 몰지각한 포르투갈 무뢰배들과 다르다고 강조했다.

 

한편 광둥성은 진()나라가 정복하기 이전에도 이미 남중국해의 중요 무역항일 정도로 상업의 역사가 뿌리깊은 곳이었다. 광둥의 현지 관원과 호족들은 조정과 달리 교역을 원했다. 이들이 조정에 통상 허용을 계속 탄원하자, 조정도 이들의 의견을 일부 수용했다. 포르투갈은 이에 편승해 명의 조공국인 말라카의 무역선으로 위장하고 중국과 교역을 시작했다.

앉으면 눕고 싶고, 누우면 자고 싶기 마련이다. 포르투갈인은 무역·해군기지로 쓸 수 있는 마카오 반도를 탐냈다. 1553년 포르투갈 상인은 바닷물에 젖은 화물을 말린다며 마카오 반도에 상륙 허가를 받았다. 이후 소사는 상인의 경거망동을 자제시키는 한편 중국에 20%의 세금을 내며 마카오에 은근슬쩍 눌러앉았고, 결국 1557년 조정은 포르투갈인이 마카오에 살 수 있는 거주권을 부여했다 

당시 황제가 가정제였던 것이 포르투갈에 큰 행운이었다. 가정제는 불로장생술에 빠져 생리혈과 아침이슬 등으로 불사의 약을 만든답시고 궁녀들을 학대했다. 학대를 견디지 못한 궁녀 16명이 황제를 목 졸라 죽이려 한 사상초유의 일이 벌어질 정도였다. 이토록 불로장생에 집착하던 가정제가 찾던 물품 중 하나가 용연향(龍涎香)이었다. 용연향은 ‘용의 침으로 만든 향’이라는 뜻으로, 향유고래의 토사물이다. 오늘날에도 ‘바다의 금덩이’라고 불릴 만큼 희귀한 최고급 향료다. 가정제는 환관을 채향사(採香使)로 임명해 방방곡곡에서 용연향을 구하게 했고, 못 구하면 중형으로 다스렸다. 

그러나 10여 년이나 애타게 찾아도 구하기 힘들던 용연향을 마카오의 포르투갈 상인이 구해주었다. ‘향료천국’ 인도와 동남아를 석권한 포르투갈 상인에게 용연향 조달은 비교적 쉬운 일이었다. 조정은 마카오에 향의 품질을 관리하는 향산험향소(香山驗香所)를 세웠다. 포르투갈인은 ‘위험한 오랑캐’에서 황제에게 꼭 필요한 상인으로 바뀌었고, 마카오에서 당당하게 살 수 있게 됐다. 그래서 “중국은 아편으로 홍콩을 잃고, 용연향으로 마카오를 잃었다”는 말이 생겼다. 

 

“천여 채 집, 만여 명 오랑캐”

“초왕(楚王)이 마른 여자를 좋아하니 많은 후궁이 굶어죽었다”는 말이 있다. 황제가 마카오 포르투갈 상인에게 사치품을 사니, 황제 아래로 수많은 사람이 마카오에서 물건을 구했다. 당시 문헌에 따르면, 마카오는 “천여 채의 집에 만여 명의 오랑캐”가 사는 무역항으로 성장했다. “높은 건물이 치솟고 서로 바라다 보일 정도로 즐비하여” “1년도 지나지 않아서 수백 블록이 되더니 지금은 거의 1000블록 이상”이 됐고, 만력제 중기에 이르면 “마카오로 모이는 자가 1만 가구 10여만 명”에 달했으며 “서양 국적을 지닌 자가 대략 6000~7000명”이었다.

1591
년 극작가 탕현조는 마카오에 와서 중국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 속에 사는 사람들을 묘사했다

“부유한 상인은 전원에 살지 않고 뽕나무도 심지 않지만, 마노(수정) 장식에 비단옷을 입고 구름 같은 돛대에서 내렸고, 꽃 같은 얼굴의 오랑캐 여인 열다섯이 장미 이슬로 아침 단장을 했다. 

당시 마카오는 “황금의 명령이 하늘을 지배하고, 돈의 신이 땅에 우뚝 솟은” 땅이었다. 광둥의 권세가들은 대형 선박을 건조해 상업 활동에 뛰어들었고, 경쟁이 격화되자 상인들은 태풍이 와도 출항을 강행해 목숨을 잃곤 했다 

임진왜란(1592~1598) 이후 명이 일본과의 교역을 금지하자, 마카오는 전성기를 맞았다. 정치적 이유로 무역을 금지하긴 했지만, 중국은 일본의 은이 필요했고, 일본은 중국의 비단이 필요했다. 포르투갈은 이 틈을 비집고 들어가 양국과 중계무역을 했다. 포르투갈이 구축한 ‘포르투갈 리스본~인도 고아~동남아 말라카~중국 마카오~일본 나가사키’의 무역 네트워크 중 ‘마카오~나가사키’ 구간이 최고의 수익을 올렸다

그러나 마카오의 삶이 속 편한 일만은 아니었다. 스페인을 꺾은 신진 강호 네덜란드가 마카오를 노렸다. 1601년부터 네덜란드는 장장 20년 동안 마카오 점령을 시도했다. 포르투갈은 마카오에 성벽과 요새를 지으려 했으나, 명나라는 포르투갈인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포르투갈인이 성벽을 쌓으면 광둥성 군대가 곧바로 출동해 성을 허물어버렸다.

그러던 중 포르투갈에 또 한 번 행운이 찾아왔다. 누르하치가 이끄는 만주군이 명나라에 맹공을 퍼붓자, 1621년 천계제는 마카오에 100명의 정예병, 몇 명의 뛰어난 포수와 문사(文士, 가톨릭 신부)를 파견해 관군들에게 화포 사용법을 가르치라는 성지를 내렸다. 마카오에서 사들인 홍이포는 후금을 격퇴하는 데 큰 공을 세워 일개 쇳덩어리인데도 ‘안변정로진국대장군(安邊靖虜鎭國大將軍)’에 봉해졌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마카오의 포르투갈인은 중국인과 같은 권리를 보장받았고, 마카오의 숙원사업인 군사방어시설 건축도 허가받았다.

그러나 이들이 역사를 바꿀 수는 없었다. 명나라는 이미 기강이 무너지고 통제력을 잃은 상태였다. 만주족 역시 포르투갈에서 화포를 수입해 화력을 강화했다. 결국 한족의 명나라는 만주족의 청나라로 바뀌었다. 

 

‘건달’ 출신 해상왕

대륙에서 격변이 일어나는 와중에도 마카오는 활력이 넘쳤다. 명나라 말기 필리핀 마닐라는 멕시코에서 수입한 백은 26448000페소 중 2569만 페소(97.1%)를 중국으로 수출했다. 이 중에서 마카오를 거친 양은 2025만 페소로, 중국 전체 유입량의 79.1%에 달했다. 마카오는 서양 최대의 동방무역항이 됐다. 

이때 마카오를 찾은 중국의 한 건달이 훗날 동중국해를 주름잡는 해적왕이 된다. 바로 정성공(鄭成功)의 아버지 정지룡이다. 푸젠성 말단 관리의 아들로 태어난 정지룡은 천성적으로 게을러서 배우고자 하는 열의가 없던 반면, 힘이 세고 무술을 좋아했다. 골칫덩이 정지룡은 아버지의 첩과 동침하는 대형 사고를 치고 마카오의 외갓집으로 도망쳤다. 외가 황씨 가문은 마카오에서 큰돈을 번 상인이었다. 많은 마카오 상인대부분이 그렇듯 그들의 사업도 합법과 불법 사이를 오갔을 것이다 

건달 정지룡은 거친 바다 사나이들과 쉽게 의기투합했다. 그는 마카오 밀수단 두령인 이단의 오른팔이 돼 광둥·푸젠뿐 아니라 필리핀, 베트남, 일본 등 동아시아 바다를 종횡무진 누볐다. 포르투갈 상인, 선교사들과 어울리며 당대 국제 무역공용어였던 포르투갈어를 익혔고, 무역과 밀수, 해적이 묘하게 뒤섞인 활동을 하며 ‘바다사업’에 눈을 떴다

이단이 죽은 후 정지룡은 밀수단을 크게 키워 해적왕이 됐다. 그는 네덜란드의 지원을 받아 사략선(私掠船, 무장한 사유 선박)을 지휘하며 유럽의 항해술과 해적의 노하우까지 습득했다. 쇠약한 명나라 조정은 정지룡에게 “해적을 토벌하는 공을 세우면 전 해역을 통제하는 도독에 임명하겠다”고 제안했다. 전형적인 차도살인(借刀殺人) 전략이지만, 정지룡은 동료 해적을 소탕하고 중국 바다를 석권했다. 명 조정은 다시 이이제이 전략을 써서 네덜란드에 무역을 허가해줄 테니 정지룡을 치라고 했지만, 정지룡은 이미 400척의 정크선과 6~7만 명의 인력을 자랑하는 선단을 거느리고 있었다. 네덜란드 해군이 패한 뒤 정지룡을 제압할 자가 없어지게 되자 조정은 별수 없이 벼슬을 내렸다. 훗날 명나라가 망할 때 조정은 정지룡이 구원해주길 바랐으나 정지룡은 명에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청에 투항했다. 다만 그의 아들 정성공은 대만을 근거지로 삼아 죽는 날까지 반청복명(
復明)을 포기하지 않았다. 마카오는 정지룡·성공 부자를 바다의 제왕으로 만든 숨은 공신이다.

청나라는 대만의 정성공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연해지역에 사람을 살지 못하게 하고 널빤지 한 장 바다 위에 띄우지 못하게 하는 해금령(海禁令)을 내렸다. 시랑이 대만을 정복한 후 해금령이 완화되긴 했지만, 조정은 한인들이 해외에 나가는 것을 경계했다. 한족 선비가 동남아 등에서 재상이 돼 청나라의 화근이 될 수도 있었다. 이 과정에서 마카오는 다소 부침을 겪었지만, 순치제·강희제의 신임을 받던 선교사 아담 샬과 페르비스트 덕분에 큰 타격은 받지 않았다. 

 

뜨는 홍콩, 지는 마카오

▲17세기 초 네덜란드의 침공을 방어하기 위해 예수회가 세운 요새.

 

▲가톨릭 공동묘지, 파스텔톤의 성당과 집, 포르투갈어로 씌어진 문패 등 포르투갈의 색채가 묻어난다

 

▲가톨릭 공동묘지, 파스텔톤의 성당과 집, 포르투갈어로 씌어진 문패 등 포르투갈의 색채가 묻어난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며 마카오의 위상은 갈수록 약해졌다. 마카오 항은 수심이 얕아 범선은 드나들 수 있었으나 거대한 무역선과 군함이 정박하긴 어려웠다. 포르투갈의 국력이 약해지며 상업도 쇠퇴했고, 시대의 변화에 맞춰 마카오를 발전시킬 수도 없었다. 신진 강호 영국은 아편전쟁으로 청을 꺾고 홍콩을 차지했다. 수심이 깊고 항만이 넓은 홍콩은 산업시대의 거함을 정박시키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영국이 홍콩에 근대 인프라를 확충하자 홍콩은 무역뿐 아니라 금융·교육·문화의 중심이 됐다. 

홍콩이 떠오르며 마카오는 급속히 쇠퇴했다. 청말 광둥 순무는 조정에 보고했다

“마카오에 거주하는 포르투갈인을 보면, 관청은 제대로 정치를 하지 못하며, 상인은 장사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노동자는 선의를 갖고 있지 못합니다. 유감스럽게도 도박장과 사창가가 불법적으로 비도를 비호하고, 관리들은 이들로부터 뇌물을 받는 것을 자연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중략)…포르투갈에서는 이미 상선이 왕래하지 않고 마카오는 지리적인 이점으로써 도모할 만한 것이 없으며, 시장은 경기가 없고 인정은 메말라 있으니 곤경에 처하여 활로를 찾지 못하는 상황이 곧 도래할 것입니다. 

1842
년 영국이 홍콩을 식민지로 만든 것을 본받아 포르투갈도 1887년 마카오를 식민지로 만들었지만, 딱히 마카오에 큰 변화를 주지는 못했다. 1835년 화재로 앞면만 남은 성 바오로 성당도 복원하지 않았고, 몬테 요새의 대포도 1860년 이후로 바뀌지 않았다. 무역이 끊긴 마카오는 도박과 성매매로 생계를 이어갔다. 임시방편 호구지책이던 도박과 성매매가 어느새 주력 산업이 됐다. 

1847
년 마카오 당국이 도박을 합법화한 지 몇 년 안 돼 마카오에 200개가 넘는 도박장이 들어서 ‘동양의 몬테카를로’라는 별명을 얻었다. 상업의 활기가 환락의 광기로 변했다. 마카오는 중국 3대 악()인 성매매·도박·마약(黃賭毒)의 천국이었다. 작가 헨드릭 드리우는 1930년대 마카오를 보고 말했다 

(마카오는) 세상의 모든 하층민과 술 취한 선장들, 바다의 부랑자들, 낙오자들, 세계 어느 항구의 여인들보다 뻔뻔하고 아름다우며 야만적인 여인들의 집으로 지옥이 따로 없다.

오늘날 푸룽신제(福隆新街)의 집들은 흰 벽과 빨간 대문·창문으로 단장했지만 원래 이 거리는 퇴폐 마사지와 성매매가 판을 치던 곳이다. 말 그대로 ‘쾌락의 거리(Rua da Felicidade)’인 환락가요, 홍등가였다. 

날이 갈수록 홍콩은 선진화하며 부유해졌지만, 마카오는 도박과 성매매로 푼돈을 벌었다. 지역 격차는 지역감정을 낳았다. 영화 ‘천장지구(원제 天若有情)’의 비극적인 러브 스토리도 사실 홍콩과 마카오의 현실에 근거한다. 배우 유덕화는 마카오에서 홍콩으로 돈 벌러 온 창녀의 사생아다. 그는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창녀촌에서 창녀 이모들 손에 자라 건달이 된다. 반면 오천련은 홍콩의 부잣집 딸이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했어요”라는 노래가 애절하게 울려 퍼지며 둘은 격렬하게 키스하고, 턱시도와 웨딩드레스를 입은 채 오토바이를 타고 홍콩 거리를 질주한다. 두 연인의 뜨거운 사랑도 지역 격차와 신분 격차를 극복하지 못하고 파국으로 향한다. 

 

the Gate to Nowhere

홍콩과 마카오가 모두 중국에 반환된 후 제작된 영화 ‘익사일(Exiled, 放逐)’에서도 첨예한 지역감정이 드러난다. 마카오 조폭 보스는 홍콩 조폭 보스에게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드러내며 말했다. “난 타지에서 온 놈이랑 협력할 생각은 없어.” 브로커가 “그래도 우린 같은 정권하에 있잖아요. 모두 다 중국인이고”라며 흥정을 붙이려 하자, 마카오 보스는 딱 잘라 말했다. “아니, 우린 마카오 사람이지만, 페이는 홍콩 놈이잖아.” 지역감정의 앙금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마카오의 랜드마크인 성 바오로 성당은 앞면만 보면 엄청나게 크고 근사하다. 기대를 품고 문 안에 한 발짝 들여놓으면 텅 빈 공터만 펼쳐진다. 앞면 껍데기가 전부다. 서양인은 성 바오로 성당을 ‘어디로도 통하지 않는 문(the Gate to Nowhere)’라고 부른다. 성당을 흔히 ‘천국에 이르는 문(the Gate to Paradise)’이라 부르는 것을 빗댄 별명이다

‘성당인 듯, 성당 아닌, 성당 같은’ 성 바오로 성당은 마카오를 은유한다. 마카오에서는 현실과 환상, 진실과 거짓이 불분명하다. 세계 최대 카지노인 베네치안 리조트는 중국의 변두리인 마카오에 있지만,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손꼽히는 베네치아를 재현해놓았다. 이 실내의 베네치아는 항상 푸른 하늘과 흰 구름을 보여준다. 여기서 공간, 시간, 기후, 날씨 등은 모두 의미를 잃고, 현실과 환상의 경계도 사라진다

The House of Dancing Water’ 쇼에서는 가짜 용이 춤을 추고, 경견장의 경주용 개들은 가짜 토끼를 쫓아 미친 듯이 질주한다. 현실감각은 뒤틀리고, 돈은 그저 한낱 종이쪼가리 게임용 칩처럼 느껴진다. 안내방송과 전광판은 시도 때도 없이 누군가 횡재했다고 요란스레 떠든다.

“축하합니다. 당첨이 되셨습니다. 빵빠라 빵~.  

“상금 150만 위안의 주인공이 오늘 밤 드디어 탄생했습니다! 

돈이 넘쳐나고, 공짜 음료수는 무제한이다. 행운이 여기저기 널려 있다. 이곳에만 있으면 나도 일확천금의 주인공이 될 것 같다. 도박의 규칙은 너무도 간단해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고, 쉽게 돈을 딸 수 있다는 착각을 낳는다. 블랙잭은 숫자 21에 가깝기만 하면 되고, 슬롯머신은 레버를 당기기만 하면 된다. 룰렛은 구슬을 던지기만 하면 된다. 홍콩인은 “오늘은 은행에 가서 돈을 찾아야겠어”라고 말하며 마카오 카지노에 와서 일확천금을 노린다. 그러나 마카오는 돈을 맡길 수만 있을 뿐, 돈을 찾을 수는 없는 신기한 은행이다.

마카오는 흔히 ‘동양의 라스베이거스’로 불려왔다. 그러나 마카오 카지노의 수입은 이미 2007년에 라스베이거스를 넘어서 “라스베이거스가 75년 만에 해낸 일을 우리는 15년 만에 해냈다”며 자랑스러워했다. 2013년에는 라스베이거스 수입의 7배에 달하는 450억 달러를 벌었다.

 

라스베이거스 수입의 7

 

▲중국 특유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뒷골목.

 

4200개의 게임테이블과 슬롯머신이 있는 베네치안 리조트를 필두로 세계 10대 카지노 중 8개가 마카오에 있다. 마카오는 명실 공히 세계 최대의 도박장이다. 관광보다 쇼핑, 쇼핑보다 도박에 열중하는 중국인 덕분이다. 마카오의 한 카지노 사장은 말한다

“우리는 ‘할아버지(본토 도박꾼)’가 와서 도박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들은 도박 판돈도 크고 시원시원하며, 돈을 잃어도 우리를 귀찮게 하지도 않아 아주 편합니다.

 

마카오의 빛 이면에 중국의 그림자가 있다. VIP룸의 본토 도박꾼 중에는 기업이 초대한 정부관계자가 많다. 많은 사업가가 접대비 명목으로 회사 공금을 정·관계 인사들의 도박자금으로 대주고 있다 

물론 도박하고 돈 잃는 이들은 하수에 불과하다. 도박장을 창조적으로 활용하는 고수들도 있다. 전 샤먼(廈門)시 부시장 란푸(藍甫)는 마카오에서 도박으로 65만 달러와 33만 홍콩달러를 따서 ‘도박의 신(賭神)’으로 불렸다. 그러나 사실은 도박장과 짜고 친 고스톱이었다. 란푸는 비자금을 도박장에 건넸고, 도박장은 비자금을 깨끗한 카지노 칩으로 바꿔주었다. 도박은 돈세탁 수단이 됐고, 카지노는 돈세탁 전문 금융기관이 됐다. 정쥔난 지린대 법학원 부교수는 보수적으로 추정해도 매년 약 6000억 위안이 해외와 홍콩·마카오 도박장으로 유출돼 중국 경제와 공익산업에 직접적인 악영향을 끼친다고 말했다. 2013년 미국 의회 산하 의회·행정부 중국위원회(CECC) 연례보고서는 매년 2020억 달러의 불법자금이 마카오로 흘러 들어가고 있을 것으로 추측했다. 

중국인은 돈 못지않게 교육도 중요하게 여긴다. 중국인들은 끊임없는 난리에 시달리면서도 교육을 포기하지 않았기에 스스로를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중국인이라고 다 교육을 중시하지는 않는다는 걸 보여주는 산증인이 바로 마카오인이다. 마카오에서 교사가 학생에게 공부하라고 훈계하면 학생은 이렇게 대꾸한다 

“카지노에 가면 나는 지금이라도 당장 취직할 수 있고 선생님보다 많은 돈을 벌 수 있어요.

세계 최대 도박 도시 마카오에서는 일자리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 카지노에는 언제나 일자리가 있다. 그러나 뒤집어 말하면 마카오에서는 일하고 싶어도 카지노 외에는 일할 곳이 없다. 카지노가 다른 산업을 모두 삼켜버린 카지노 경제의 빛과 어둠이다.

사실 마카오에 부임했던 숱한 포르투갈인 총독도 도박 외의 돈벌이 수단을 찾으려 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마카오의 작은 땅과 적은 인구는 한계였다. 흔히 ‘홍콩·마카오’로 묶어 말하지만 홍콩과 마카오는 면적과 인구에서부터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홍콩은 면적 1104, 인구 723만 명의 대도시다. 도시국가 싱가포르의 면적 718, 인구 546만 명을 뛰어넘는다. 이에 반해 마카오는 면적 30.5, 인구 64만 명에 불과하다. 서울시 관악구(29.57, 52만 명) 수준이다. 명색이 특별자치구이나 땅 넓고 인구가 많은 중국에서는 극단적으로 땅 좁고 인구가 적은 곳이다. 

홍콩과 마카오의 역량 차이는 일국양제(一國兩制)하에서 정치적 권리도 달라지게 했다. 도시국가로서 어느 정도 자립이 가능한 홍콩은 형식적으로나마 보통선거권을 확보했고, 더 많은 자유와 권리를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마카오는 보통선거권을 얻지 못했고, 중국의 인가를 받은 정재계위원회 위원 300명의 투표에 따라 행정장관이 결정된다. 추이스안(崔世安) 2009년 마카오 행정장관에 당선됐고, 2014년 재선돼 2019년까지 행정장관 임기를 이어가고 있다. 당연 친중국 인사다. 

중국에서 부패 척결을 외칠 때마다, 마카오 비자 발급을 규제할 때마다 도박산업 의존도가 높은 마카오 경제는 크게 요동친다. 그래서 주민들 역시 전반적으로 홍콩에 비해서는 더 친중국적이고 중국에 고분고분한 편이다. 그렇다고 불만이 없는 것은 아니다. 크나큰 빈부 격차, 수십 년을 일해야 살 수 있는 주택, 열악한 의료·교통 등 민생 문제가 쌓여 있다.

 

‘카지노 왕국’을 넘어

2014 8 25일 마카오 주민 1000여 명이 임금인상, 이주노동자의 카지노 취업 규제 등을 요구하며 샌즈카지노에서 정부청사까지 행진하는 시위를 벌였다. 경제 불만은 정치 불만과 함께 간다. 2014 8 24일 ‘열린 마카오 사회(Open Macau Society)’의 의장 저우팅시(周庭希)는 마카오 주민들이 보통선거권을 지지하는지, 추이스안을 신임하는지 묻는 국민투표를 추진했다. 투표 첫날 경찰은 저우팅시를 포함한 투표소 자원봉사자 5명을 체포했고, 검사는 경찰에 대한 심각한 불복종 혐의로 저우팅시를 기소했다. 마카오 주재 중앙정부 연락사무소는 비공식적인 국민투표를 비난하며 특별행정구는 이런 행동을 조직할 권리가 없다고 말했다. 

2016
6 3일의 시위는 매우 색다르다. 마카오 주민 300여 명이 차량 공유 서비스 업체인 ‘우버(Uber)’ 합법화를 요구하며 행진했다. 흔히 택시는 지역주민의 발이고, 관광객에게 바가지를 씌우곤 하지만, 마카오에서는 택시가 관광객의 발이다. 택시는 지역주민의 승차를 거부하거나 웃돈을 요구한다. 마카오 택시는 불과 1300. 주민 64만 명, 관광객 3000만 명을 소화할 수 없다. 택시는 독과점 지위를 이용해 큰돈을 벌었다. 2015년 우버의 마카오 상륙은 마카오인에게 복음과 같았다. 순식간에 우버 기사 2000명이 생기고, 2100만 마카오 파타카( 293200만 원)의 수익을 냈다. 그러나 정부는 우버를 인정하지 않고 벌금을 매겼다

64
만 명의 인구로 매년 라스베이거스의 7배나 되는 돈을 벌어들이는 마카오. 완전고용 상태를 유지하며 세수의 83%를 카지노에서 걷어 정부예산 흑자 세계 2위를 자랑하는 마카오. 그러나 카지노 왕국에서 살아가기란 쉽지 않다. 변변한 의료시설이 없어 아프면 홍콩이나 태국으로 가야 하고, 택시도 타기 힘들다. 돈은 넘치나 민생은 힘겹다. 그 와중에 간간이 민주화의 목소리가 들린다. 한때 동방무역의 중심이었던 마카오. 카지노 왕국을 넘어서 새로운 모습을 역사에 보여줄 수 있을까 

 

포르투갈 상인의 숨통 ‘카지노 왕국’의 한숨

대륙의 ‘땅끝 마을’ 마카오

 

1500년대 대항해시대, 마카오는 포르투갈 상인들의 숨통이었다. 세계 최대 무역항 광저우와 가깝고, 중국의 간섭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대륙의 ‘땅끝 마을’로 자연히 상인들이 몰려들었다. 홍콩이 부상하면서 교역이 끊기자 마카오는 성매매와 도박에 손을 댔고, 150년이 지난 오늘날 세계 최대 도박도시가 됐다. 하지만 열악한 도시 인프라와 공공시설, 카지노 외에는 마땅한 일자리가 없는 것은 분명 ‘카지노 도시’의 그림자다. 옛 동방무역의 왕국 마카오는 카지노 왕국을 넘어 새로운 왕국을 꿈꾼다. 〈관련기사 426 쪽〉

 

▲카지노 테마파크 

 

마카오 관광 1번지 세나도 광장(Senado Square).

 

▲중국 특유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뒷골목

 

▲성 바오로 성당 유적.

 

▲마카오 항구 부두.

 

◆03월 호   닝샤회족자치구

◇중국판 할리우드 꿈꾸는 아라비아 후예들

황하가 준 선물 닝샤회족자치구

 아리비아 상인’의 후손 후이족(回族) 1000년간 중국인과 통혼하면서 한족(漢族)화했다. 탈종교화 추세에 반드시 이슬람교를 믿는 것도 아니다.


한족과 후이족을 구분하는 건 종교와 문화. 후이족은 한족이 사랑하는 돼지고기를 금하고, 이슬람 교리를 따르는 식당을 찾는다. 가끔 사막에서 낙타를 끌고 가는 후이족 안내인의 뒷모습에서 아라비아 상인의 체취를 느낄 뿐이다. 

▲인촨 근교의 사호(沙湖). 드넓게 펼쳐진 오아시스를 사막 체험 테마파크처럼 꾸며놓았다

 

▲서하(西夏)의 창건자 이원호 동상

 

▲서하의 공예 수준을 잘 보여주는 청동상

 

▲역대 제왕의 분묘로 서하 문화의 독특함이 잘 드러나 있다.

 

▲화하 서부영화 촬영지.

 

▲쇼핑과 관광의 중심인 인촨 고루 보행가.

 

가난과 사막화에 신음하는 마화룡의 기개

| 大夏의 영광 꿈꾸는 변방

 

 닝샤는 면적 66400, 인구 660만 명의 작은 지방이다. 중국 내에서 티베트, 칭하이 다음으로 가난한 지역이지만 1000년 전에는 간쑤, 내몽골 초원을 기반으로 300만 백성을 거느린 대하(大夏) 제국의 심장이었다. 청나라의 공격에도 인육을 먹으며 결사항전한 이슬람의 후예(回族)들은 오늘날 ‘사막과의 전쟁’을 치르며 중국판 할리우드를 만들고 있다.

 

▲닝샤의 성도 인촨(銀川)시 풍경

 

며칠 전 친구들과 저녁식사 중 한 친구가 “신동아 3월호에는 어느 지방에 대해 쓸 거니?” 하고 물었다. 닝샤(寧夏) 지방에 대해 쓰고 있다고 하자 모두들 내게 되물었다

“닝샤가 어디야? 

중국은 한국인에게 매우 친숙한 나라다. 그러나 닝샤는 생소하다. 서북 변방의 조그만 땅이라 존재감도 약하다. 그런데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뿐, 한국인 상당수가 대중문화를 통해 닝샤를 본 적이 있다. 서북 변방을 배경으로 찍은 중국 영화 상당수가 닝샤에서 촬영됐기 때문이다 

저우싱치 주연 ‘서유기: 선리기연’에서 손오공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후회한다

“저는 과거에 사랑을 앞에 두고 아끼지 못하고 잃은 후에 큰 후회를 했습니다…(중략)…하늘이 다시 기회를 준다면 그녀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겠소. 만약 기한을 정해야 한다면 만년으로 하겠소. 

그리고 구법 여행을 떠난 손오공은 모래투성이 성벽 위에서 다투는 석양무사와 그의 연인을 본다. 자신의 옛모습을 떠올린 손오공은 두 사람을 맺어주고 다시 길을 떠난다

 

天下 黃河 富寧夏

 

이 밖에도 맹렬한 모래 폭풍 속에서 린칭샤, 장만위, 전쯔단 등이 불꽃 튀는 접전을 벌이는 쉬커 감독의 ‘신용문객잔’, 노을 아래 사람의 살결도, 모래도 붉게 타오르던 장이머우 감독의  ‘붉은 수수밭’ 등 많은 영화가 닝샤에서 촬영됐다. 김용의 무협지 ‘천룡팔부’에 등장하는 서하국(西夏國) 근거지도 바로 닝샤다. 서하국은 잔인한 4대 악인 등 무림 고수들을 고용해 중원을 위협하다가, 절정고수 허죽이 서하의 부마(사위)가 되면서 송나라와 좋은 사이가 된다. 이처럼 닝샤는 알게 모르게 친숙한 곳이다.
 
닝샤후이족자치구(寧夏回族自治區)의 약칭은 ‘편안할 녕()’ 자다. ‘寧’ 자는 중국의 지명에 곧잘 쓰인다. 동북지방을 대표하는 랴오닝(遼寧), 광시좡족자치구의 성도 난닝(南寧), 칭하이성의 성도 시닝(西寧) 등 ‘寧’ 자가 들어간 지역의 공통점은 중원에서 멀고도 먼 변방이라는 것이다. 변방이 시끄러우면 중원이 불안해졌고, 중원이 흔들리면 변방이 무너졌다. 중국의 안정은 변방에 달려 있었기에, 중국인들은 변방의 안녕을 간절히 기원했다. 닝샤라는 이름에도 이 지역에 난리가 일어나지 않고 평온하기를 바라는 중국인의 염원이 녹아 있다. 

칭하이성에서 발원한 황하는 굽이굽이 북쪽으로 흐른다. 간쑤성 성도 란저우에서 몽골의 오르도스 초원까지 흐른 황하는 내몽골의 낭산(狼山)에서 비로소 남쪽으로 꺾여 중원으로 흘러든다. , 황하는 중원 농경민의 강이기 이전에 초원 유목민의 강이다. 황하가 란저우에서 오르도스로 흐르는 중간에 닝샤의 성도 인촨(銀川)이 있다

닝샤는 허란산(賀蘭山), 오르도스 고원, 황토고원, 리우판산(六盤山) 등 산과 고원으로 둘러싸여 있지만, 안에는 황하가 흐르는 닝샤 평원이 있다. 연평균 강수량이 100~400mm로 매우 건조하지만(한국 중부는 1100~1400mm), 황하 덕분에 땅이 비옥하고 녹지가 많아 ‘천하의 황하, 닝샤를 부유케 했다(天下黃河富寧夏)’는 말이 생겼다.

특히 인촨은 황하를 끼고 있으며 하란산이 고비사막의 모래바람을 막아주는 배산임수 지형이라 닝샤의 중심지로 발전했다. 인촨은 ‘은빛 하천’이라는 뜻이다. 황하와 72개의 크고 작은 호수가 햇살에 은빛으로 빛난다는 의미다. 인촨 근교의 사호(沙湖) 300ha의 사막섬을 감싸고 있는 660ha의 큰 호수다. 사호를 보면 인촨이라는 이름의 유래가 이해가 간다.

초원과 황하를 낀 닝샤는 농경과 목축이 모두 가능한 땅으로 오래전부터 사람들이 살아왔다. 닝샤의 고대인들은 3000~1만 년 전에 하란산의 바위에 많은 그림을 남겨 옛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짐작게 한다 

()나라는 일찍부터 닝샤 지역에 장성을 쌓으며 세력을 뻗쳤다. 닝샤는 진나라의 근거지인 산시(陝西) 성 서북방을 감싸고 있는 ‘관중의 장벽(關中屛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변경 지역의 특성상 닝샤는 중원이 혼란스러울 때 독자성을 드러낸다. 516국 시대로 가보자.

 

흉노가 부활시킨 漢나라

▲인촨시 중심 상권은 한족이 차지하고 있어 ‘후이족의 고향’다운 느낌은 나지 않는다

 

▲큼지막한 닝샤의 명물 양꼬치. 

 

진무제(晉武帝) 사마염은 삼국시대를 끝내고 통일왕조를 열었다. 사마염은 조위(曹魏)가 할아버지 사마의에게 권력을 뺏긴 까닭을 황족의 힘이 약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조위를 거울 삼은 사마염은 사마씨 일족의 힘을 강화하기 위해 일족에게 강한 권력을 나누어주었다. 그런데 오히려 이 조치가 진을 와해시켰다 
 
사마염 자신은 말년에 사치 향락에 빠지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명민한 군주였다. 그러나 사마염의 아들 혜제(惠帝) 사마충은 ‘백치 황제’였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프랑스 혁명 당시에 “빵이 없으면 고기를 먹으면 되지”라고 말했다는 것은 유언비어지만, 혜제가 “곡식이 없으면 어째서 고기죽을 먹지 않는 것이냐(何不食肉糜)?”라고 말한 것은 정사인 ‘진서 혜제기’에 버젓이 기록된 사실이다. 

황제는 멍청하고 황족들은 제각기 병권을 갖고 있으니 저마다 권력을 갖기 위해 싸움을 벌였다. 팔왕의 난(八王之亂·제위 계승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진 황족들의 내란) 중에 장군 왕준이 선비족·오환족과 결탁해 공격하자, 성도왕 사마영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다. 이때 사마영에게 볼모로 잡혀 있던 흉노 유연(劉淵)은 “동호(東胡)가 아무리 날래다고 해도 5부 흉노는 당해내지 못합니다”라고 호언장담하며 자신을 흉노에 보내주기를 청했다. 흉노로 돌아간 유연은 바다에 들어간 교룡(蛟龍)과 같았다. 유연은 사마영의 숙적 사마등을 격파하고 산시(山西)성을 장악했을 뿐 아니라, 위진(魏晉)에 의해 끊어진 한나라를 부활시키겠다며 ‘한()’의 황제를 자처했다. 

한고조 유방이 흉노 묵돌선우에게 패하고 화의를 맺은 후에 한나라와 흉노는 “근심과 안락을 함께” 한 형제의 나라가 됐고, “형이 죽으면 동생이 뒤를 계승해야” 하며, 유연 자신이 유()씨 성을 갖게 된 이유도 한 황실 유씨 사람들이 흉노와 결혼해 사돈이 됐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대의명분은 그럴듯하지만, 오랑캐인 흉노에 의해 중국 정통 왕조인 한나라가 부활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하긴 서양에서도 로마제국을 멸망시킨 게르만족이 훗날 ‘신성로마제국(Holy Roman Empire)’을 열었으니, 역사란 원래 얄궂은 것인가. 유연의 한나라는 516국 시대를 연 1번 타자였고, 이후 수많은 유목 부족국가가 명멸했다.

그중 하나가 혁련발발(赫連勃勃)이 세운 하()나라다. 혁련발발은 유씨였으나 ‘아름답고 빛나는(徽赫) 하늘’이라는 뜻의 흉노식 이름으로 바꾸었다. 중국식 성에서 흉노식 성으로 개명한 것을 보면 흉노의 자주의식을 보여주는 듯하나, 왕조 이름은 얄궂게도 중국 최초의 왕국 하나라다 

문헌적 근거가 없지는 않았다. 사마천은 흉노가 “하()나라의 국운이 쇠하자 벼슬을 잃은 이들이 서융(西戎)에 들어가 살게 된 하후씨(夏後氏)의 후손”이라고 말했다. 이는 하늘 아래 왕의 땅이 아닌 곳이 없듯, 세상 사람 모두가 천하의 근원인 중원에서 비롯됐다는 중화사상에 입각한 말이다. 그러나 흉노 역시 이 전설을 받아들였다. 뼈대 있어 보이는 족보가 좋아서였을까, 중원 지배를 정당화할 수 있어서였을까. 

혁련발발은 대단한 야심가이자 잔혹한 완벽주의자였다. ‘천하를 통일해 만방에 군림하겠다(統一天下 君臨萬邦)’는 뜻으로, 내몽골과 산시성(陝西)성이 만나는 오르도스 초원에 수도 통만성(統萬城)을 세웠다. 병기를 만들 때 화살이 갑옷을 못 뚫으면 화살 만드는 사람을 죽였고, 화살이 갑옷을 뚫으면 갑옷 만드는 사람을 죽였다. 통만성을 쌓을 때는 성벽에 송곳이 한 치만 들어가도 그곳을 쌓은 자를 그 자리에서 죽여 성벽 속에 처넣으며 성을 쌓았다. 그 결과 성벽이 어찌나 단단한지, 벽을 숫돌 삼아 칼과 도끼를 갈 수 있었고, 16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유목민족이 쌓은 성곽 중 원래의 모습이 가장 잘 남아 있는 성곽이다.  

혁련발발은 철옹성을 쌓고 오르도스 일대를 장악하며 북방의 강자 북위와 건곤일척의 싸움을 벌이려 했다. 그러나 그가 45세에 죽자 하나라 후계자들은 내분에 휩싸였고, 북위의 침공을 받고는 25년의 역사를 마감한다. 불꽃같은 창업자처럼 짧고 강렬한 역사였다.

북위는 하, 북연, 북량 등을 정복해 북중국을 통일하고, 통일왕조인 수·당의 모체가 됐다. 당나라 때 칭하이에 살던 탕구트족은 닝샤로 이주해서 살다가 ‘황소의 난(875~884년 일어난 농민 반란)’을 진압하고 장안을 수복하는 데 공을 세웠다. 탕구트의 지도자 탁발사공(拓跋思恭)은 이 공로로 하국공(夏國公)에 봉해지고 황실의 이()씨 성을 하사받았고, 훗날 송나라가 510국을 평정할 때 이덕명은 송에게 칭신해 송나라 황실의 조()씨 성을 하사받았다.

 

닝샤의 절정, 대하 제국

송 태조 조광윤, 태종 조광 형제는 함께 중원을 통일한 명장이었지만, 끝내 요나라 정벌에 실패하고 베이징을 포함한 연운 16주도 되찾지 못한다. 이후 송나라 군사 활동은 지리멸렬하다. 1004년 요나라가 남하하자, 송나라는 매년 비단 20만 필, 10만 냥을 보내기로 하고 화친을 맺는다(澶淵之盟). 그나마 송나라가 형이 되고, 요나라가 동생이 되기로 해서 중화의 체면만 간신히 살렸다. 

의기양양한 요나라는 바로 옆에 있는 소국 닝샤를 찔렀다. 1020년 요 흥종이 50만 대군을 이끌고 친정했지만, 닝샤의 조덕명은 이를 격퇴한다. 닝샤는 요나라와 싸워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은 동시에 송나라가 얼마나 나약한지를 깨달았다.

조덕명의 아들 조원호가 송나라의 신하 노릇을 그만하자고 했을 때 덕명은 말했다

“우리가 용병한 지 오래돼 피로하고 지쳤다. 우리 부족이 30년 동안 좋은 비단을 입은 것은 송의 은덕인데 저버릴 수는 없다. 

그러자 야심가 원호는 당차게 말했다 

“영웅이 세상에 나왔으면 마땅히 패왕이 돼야 합니다. 비단옷을 입고 어찌 패왕이 될 수 있겠습니까! 

아버지의 뒤를 이은 원호는 1036년 간쑤성 일대를 석권해 하서회랑을 차지했다. 하서회랑은 실크로드 상인들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길로,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곳이었다. 날랜 군사에 풍족한 자금이 더해지니 호랑이가 날개를 단 것과 같았다. 마침내 1038년 원호는 성()을 이씨로 바꾸고 ‘대하(大夏)’의 건국을 선포하며 황제 자리에 올랐다. 이무렵 대하는 인촨을 중심으로 닝샤, 간쑤, 산베이(陝北), 서부 내몽골 오르도스 초원을 아울렀고, 탕구트족을 중심으로 한족, 티베트족, 위구르족, 거란족 등 300만 백성을 거느린 다민족 제국으로 성장했다. 역사적으로는 대하가 아닌 ‘서하(西夏)’라는 송나라식 명칭으로 불린다.

무력한 송나라 군대는 소국 서하의 군대에도 연전연패했다. 다행히 송나라에 인재가 없지는 않았다. 송나라를 개혁하려다 좌천돼 고향인 산시(陝西)성에 있던 범중엄은 3년이나 서하의 침공을 막았다. 범중엄은 이 공로로 재상이 됐으나 개혁의 뜻은 펼치지 못한 채, 서하와 화친협정이 체결되자 재상 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천하의 근심을 미리 걱정하고, 천하의 즐거움을 나중에 누린다”는 명언을 남긴 범중엄은 나라를위기에서 구했지만 경세제민(經世濟民)의 포부는 이룰 수 없었다. 

 

外華內貧

 

▲1 2_화하서부영화촬영지는 중국의 할리우드로 불린다.

 

그러나 송나라는 날이 갈수록 허약해지며 개혁 목소리가 높아져 갔다. 송은 북방의 강자 요나라에 패한 것도 모자라 변방의 소국 서하에도 패했다. 송이 서하에 쩔쩔매는 것을 본 요나라는 1042년 ‘전연의 맹’을 개정할 것을 요구했다. 매년 비단 20만 필, 10만 냥의 세폐(공물)를 매년 비단 30만 필, 20만 냥으로 늘려 양국 간 ‘형제애’를 더욱 돈독하게 했다. 1044년 송은 매년 비단 15만 필, 5만 냥, 2만 근을 서하에 보내기로 하고 전쟁을 끝냈다.

송나라는 겉은 화려했으나 실속이 없었다. 겉으로 보기에 송은 2만 관료, 125만 대군을 거느린 데다 상업이 발달해 부유한 대국이었다. 그러나 관료는 많지만 당쟁을 일삼으며 나라를 혼란스럽게 했고, 군사는 많지만 외적에게 연전연패했으며, 돈은 많지만 낭비가 심해 국고는 텅텅 비었다. 비효율의 극치였다. 관리는 남아돌고 황실은 사치를 일삼는 가운데(冗官冗費), 민중은 약해지고 가난해져만 갔다(積弱積貧). 

당나라가 강력한 지방절도사들의 반란으로 쇠망의 길을 걸은 것을 보고, 송나라는 무신을 경계했다. 장군은 변란이 있을 때마다 임시로 임명했고, 지방에 파견한 군대도 3년마다 교체했다. 그래서 “장수는 병사를 모르고, 병사는 장수를 몰랐다(將不識兵,兵不識將).” 장수와 병사의 자질도 북방 유목국가에 비해 크게 뒤떨어지는데, 설상가상으로 송나라의 국방정책은 장수와 병사 간의 호흡마저 안 맞게 만들었다

왕안석은 선배 범중엄보다도 훨씬  과감한 신법 개혁을 추진했다. 그러나 기득권 세력과 옛법을 옹호하는 구법당의 반대가 심했고, 신법 개혁도 많은 진통과 부작용이 있어 결국 개혁은 실패했다. 구법당과 신법당은 이후 송나라 당파싸움의 씨앗이 된다. 그나마 구법당의 사마광과 신법당의 왕안석은 일파의 종주들답게 진충보국의 마음만큼은 한결같은 명신이었으나, 후대의 붕당들은 권력을 차지하고 적대 세력을 없애기 위한 당리당략에 의해 움직였다. 송나라는 더더욱 병들어갔다. 이처럼 변방의 사건은 중원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한편 서하는 송의 세폐를 받으며 강소국의 지위를 누린다. 서하가 하서회랑을 장악했기 때문에 요나라와 송나라 모두 서하를 통해야만 서역과 무역을 할 수 있었다. 하란산을 병풍 삼은 벌통 모양의 서하왕릉(西夏王陵)과 서하문자 등은 서하의 독특한 문화를 보여준다. 서하는 요나라가 망했을 때도 건재했고 금나라 말기까지 살아남았다. 서하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것은 당대 세계 최강 몽골군이었다. 

칭기즈칸은 금나라의 모진 탄압을 이겨내고 끝내 몽골을 통일한다. 칭기즈칸이 숙적 금나라를 치기 전에 서하를 침공한다. 금나라와 몽골군이 정면에서 맞붙을 때, 서하는 몽골의 중심부를 측면에서 노릴 수 있었다. 일찍이 한무제가 흉노를 토벌할 때도 산시에서 정면으로 들이친 전법은 그리 성공적이지 않았다. 명장 곽거병이 먼저 흉노의 한쪽 날개를 꺾고 하서회랑을 장악한 뒤, 흉노의 본진을 치면서 한나라는 승기를 잡을 수 있었다. 이 전법을 금나라가 활용한다면 몽골이 위태로웠다. 따라서 금을 치기 전에 서하를 제압해야 했다.

 

빈자리 채운 回族

▲서하왕릉(西夏王陵), 한자에 기초한 서하문자가 관람로를 따라 새겨져있다. ▶화하서부영화촬영지.

 

1227년 서하의 수도 영하(寧夏)를 친 것이 칭기즈칸 최후의 전쟁이었다. 칭기즈칸은 영하를 함락하기 전 눈을 감았고, 몽골군은 영하를 함락한 후 영하의 모든 백성을 도륙해 칭기즈칸의 아쉬움을 달래주었다. 서하는 이로써 189년의 역사를 허망하게 끝냈다.

서하의 빈자리는 중동의 이슬람 상인들이 채웠다. 하서회랑·장안과 가까이 있어 교역이 편리하고 황하를 끼고 있어 입지조건이 좋은 데다, 주인 없던 땅인 닝샤는 이슬람 상인들에게 매력적이었다. 닝샤는 후이족(回族)의 땅으로 점점 변해갔다.

당나라 때부터 활발해진 서방 교역은 원나라 때 절정을 이뤘다. 교역이 활발해지며 후이족의 수도 점점 많아져 명나라 때에 이르면 무시 못할 수준이 되었다. 이재(理財)에 밝은 후이족은 상업으로 부를 축적했다. 사업 영역은 다양했고, 소금 밀매조직 같은 어둠의 사업까지 포괄했다. 한족과 후이족의 갈등이 있을 때 관아는 종종 편파적으로 한족의 편을 들었기 때문에 후이족은 사회에 불만을 품었다. 

농경·목축·상업이 고루 발달한 닝샤는 ‘변방의 강남(塞上江南)’이었다. 강희제의 평가를 보면 이 말이 빈말은 아닌 듯하다. 청나라 초기 몽골계 준가르의 갈단은 외몽골에서 칭하이성에 이르는 광활한 서부지역을 휘젓고 다녔다. 준가르 토벌은 강희제 최대의 숙원 사업이었다. 강희제는 친히 고비사막을 넘어 갈단을 토벌했다. 이 과정에서 강희제는 북중국 일대를 지나며 유목민다운 평을 남겼다. 산이 많은 산시(山西·陝西) 지역은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좋은 곳은 ‘제법 볼만’ 하지만, 안 좋은 곳은 “가소로움의 극치를 이룬다”고 비평했다. 그나마 이런 평가는 나름 객관성을 유지하려고 애쓴 흔적이 보이지만, “두 곳(山西·陝西)의 산천과 황사(黃沙), 사람을 놀라게 하는 높은 절벽들을 떠나오니 참으로 기쁘다”는 말에서 강희제의 속내가 드러난다. 

이에 비해 닝샤에 대해서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곳의 풍경은 비록 남방지역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이번 순행에서 짐이 지나온 지방과 비교한다면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있다. 이곳에는 온갖 물자가 다 있고 식품 값도 싸다. 서쪽으로는 허란(賀蘭)산맥에 가깝고 동쪽으로는 황허에 임하고 있으며 성의 주변은 모두 논이다. 예부터 구변진(九邊
鎮)의 하나였다. 짐은 이미 칠변진(七邊鎮)에 다다랐는데 지나온 변진 가운데 오직 닝샤만이 언급할 만하다.

 

게다가 강희제는 닝샤를 떠나고도 닝샤의 음식을 찾았다

“짐은 닝샤로 사람을 보내 음식과 곡식, 국수 등을 구해 오게 하였다. 국수는 궁궐에서 먹는 것보다 더 낫고 포도도 아주 맛있다. 

초원과 황하가 어우러지는 닝샤가 강희제의 피 속에 흐르던 유목민 여진족의 영혼을 깨웠기에 이토록 애착을 보였던 것이리라 

그러나 청나라 초기 화기애애했던 분위기는 국운이 기울며 악화됐다. 태평천국 난이 중국을 한바탕 휩쓸던 1862년 간쑤·닝샤·신장 등 서북 지역에서 후이족의 반란이 크게 일어났다. 발단은 지극히 사소했다. 한족 상인과 후이족이 대나무 장대 값을 두고 실랑이를 벌이다 싸움이 일어났다. 개인의 싸움은 곧바로 패싸움으로 번졌다. 한족 주민들이 후이족 마을을 습격해서 불을 지르고 무고한 양민들을 죽였다. 분노한 후이족 20만 명이 봉기를 일으켜 18대영(十八大營)을 이루었다. 서북에 주둔하던 관군으로는 도저히 막을 수 없어, 청 조정은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한 전쟁영웅 좌종당을 급파했다

 

人肉 먹으며 결사항전

▲닝샤 허란산에는 고대 원시인들의 암각화가 잘 남아 있다. 

 

당시 자흐리 교단의 제5대 교주인 마화룡(馬化龍)은 후이족들의 신망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그의 고향인 닝샤 금적보(金積堡)는 중요한 종교·상업 중심지였다. 그는 이곳을 기반으로 내몽골·베이징과 교역하며 부를 축적했고, 후이족들의 힘을 모아 수로와 500여 개의 요새를 구축하며 세력을 떨쳤다
 
문무를 겸비한 좌종당도 전 병력을 동원해 금적보를 포위했지만 16개월이나 마화룡을 제압하지 못했다. 후이족들은 화살이 떨어져도 돌을 던지고, 식량이 떨어져도 인육을 먹어가며 결사항전했다. 그러나 끝내 모든 힘을 다 소진해버린 마화룡은 항복했고, 능지처참을 당했다. 예언자 마호메트처럼 추앙받던 마화룡을 제압하자 각지의 후이족 반란 진압은 순조롭게 끝났다. 그러나 청 조정은 후이족의 근본적인 불만과 민족 간 갈등을 해결하지 못했고, 후이족은 음력 1 13일에 비참하게 순교한 마화룡을 ‘13일의 어르신(十三太爺)’이라고 부르며 추모했다. 

오늘날 후이족은 여러모로 특이한 존재다. 1000만 후이족은 중국에서 좡족 다음으로 많은 소수민족이다. 그러나 긴 세월 동안 후이족은 중국 전역에 퍼졌다. 정작 닝샤에 살고 있는 후이족은 200만 명에 불과하다. 더욱이 성도 인촨의 중심 상권은 한족이 장악해 ‘후이족의 고향’에 온 기분이 전혀 들지 않는다. 

후이족이 아라비아인, 페르시아인의 후손이라고 하지만, 1000년이나 중국인과 통혼해왔기 때문에 종족적으로 한족과 구별할 수 없고, 언어 역시 중국어를 써온 지 오래다. 현실적으로 후이족을 후이족답게 구별하는 것은 이슬람 종교와 문화뿐이다.

‘한화(漢化)=문명화’라고 굳게 믿어 의심치 않는 한족은 한화되지 않은 후이족을 기묘한 존재로 치부한다. 일단 식사 문제부터 부딪힌다. 중국인이 원체 먹는 것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특히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함께’ 먹는 것이다. 중국에서 함께 밥을 먹는다는 것은 단순히 식욕을 해결하는 차원을 넘어서 ‘관시(關係)’를 맺는 첫걸음이다. 그런데 이슬람교도는 한족이 사랑하는 돼지고기를 먹지 않고, ‘이슬람풍(
清真)’이라고 쓰여 있는, 이슬람 교리를 따르는 식당에 간다. 이처럼 함께 밥 먹는 것부터가 쉽지 않으니 많은 한족이 후이족과 거리감을 느낄 만도 하다. 

또한, 현대의 탈종교화 추세에 따라 후이족이라고 꼭 이슬람교를 믿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중국의 호구제는 출신 민족을 명기하게 되어 있어서, 출신 민족은 후이족인데 후이족다운 정체성은 하나도 없는 상황도 연출된다. 

변방은 권력에 저항하는 자를 유배시키기에 안성맞춤인 장소다. 문화대혁명 기간 중국은 현대사 최다의 유배자를 양산했다. 닝샤 역시 서북 변방으로서 최적의 유배지였다. 많은 지식인과 청년, ‘반동분자’들이 닝샤에 끌려왔다. ‘반동학술권위’ 혐의로 닝샤 노동개조소로 끌려갔던 저우유광(周有光)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닝샤에 있을 때도 노동개조범은 대부분 돌아오지 못했다. 그때 1개 단위에 5000명씩, 모두 24개 단위가 있었는데…(중략)…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운 좋게 죽음을 피한 거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이 참혹한 역사가 오늘날 닝샤를 ‘중국의 할리우드’로 만들었다. 닝샤 노동개조대로 끌려갔던 12만 명 중에 21세의 청년 장셴량(張賢亮)이 있었다. 그는 장쑤성 난징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강남 문인의 후손답게 그는 13세부터 시를 쓰기 시작한 문학소년이었지만, 반우파투쟁 중 반동분자로 몰려서 21세에 닝샤의 노동개조대로 끌려갔다. 그리고 당시 나이보다 더 긴 세월인 22년 동안 그곳을 빠져나오지 못했다

 

중국의 할리우드

변방에 많은 것 중 하나는 요새다. 명나라는 변방 닝샤에 보루를 설치해 몽골의 재남침을 막았는데, 그중 하나가 진북보(鎭北堡)였다. 장셴량 당시 진북보는 버려진 채 오래된 폐허로 노동개조대의 숙소가 근처에 있었다. 장셴량은 노동개조대에서 풀려나 명망 있는 작가가 된 후 1992년 진북보에 ‘화하서부영화촬영지(华夏西部影视)’를 설립했다.

미국의 할리우드가 비는 적고 해는 길어 영화 촬영의 메카가 된 것처럼, 닝샤 역시 일조량은 풍부하고 강수량은 적어 영화 촬영에 적합했다. 더욱이 버려졌던 만큼 오히려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는 명나라 때의 고성은 돈을 따로 들일 필요가 없는 완벽한 세트장이었다. 장이머우의 ‘붉은 수수밭’을 비롯해 숱한 영화가 여기서 촬영되었다. 서부영화촬영지는 “중국 영화는 이곳에서부터 세계에 진출했다(中國電影從這裡向走世界)”는 찬사를 받았다.

오늘날 닝샤는 면적 66400, 인구 660만 명의 작은 지방이다. 성급 행정구역 중에서는 하이난 섬 다음으로 면적이 작고, 인구는 홍콩( 700만 명) 수준에도 미치지 못한다. 2015년 명목 GDP(국내총생산) 42억 달러로 티베트·칭하이 다음으로 끝에서 3위다. 뚜렷한 산업이나 차세대 동력도 없다. 중국 정부가 지역별로 전략적 신산업을 토론할 때도 베이징·광둥성은 IT, 상하이는 항공·위성을 차세대 성장동력으로 삼겠다고 명확히 밝혔지만, 닝샤는 구체적인 분야를 언급하지 못했다. 

더욱이 사막화가 심각한 환경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닝샤의 현들은 개간한 농지를 숲으로 되돌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방사림(防沙林)·방호림(防護林)을 조성하는 등 ‘사막과의 전쟁’을 벌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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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 최대의 잔혹한 유배로부터 ‘중국의 할리우드’를 낳은 것처럼, 닝샤가 오늘의 도전을 이겨내고 다시 한 번 대하(大夏)의 영광을 부활시킬 수 있을까

 

◆05월 호  길림성

◇북한 항구 빌려 태평양 향하는 ‘강가의 마을’ 사람들

吉林, 수탈지에서 수출기지로

▲백두산 천지를 바라보는 관광객들.

 

만주어로 ‘강가의 마을(吉林拉)’에서 생긴 지명 ‘지린’은 쑹화(松花)강이 흐르는 구릉지대. 부여와 고구려, 발해는 이 땅에서 중국의 초강대국과 어깨를 나란히했다. 만주족과 한족, 조선족이 일군 만주는 일본의 약탈로 눈물의 땅이 됐다. 6·25전쟁 이후 조선족은 인민재판의 피바람과 한국인과는 모습만 같은 도롱뇽, 중국인과는 습성만 같은 오리와 닭이라는 정체성 혼란을 겪어야 했다. 이제 ‘강가의 마을’ 사람들은 출항을 준비한다. 북한으로 가는 교통로인 창춘-지린-두만강 지역을 개발하는 ‘창지투(長吉圖) 개방 선도구’ 사업을 통해 태평양으로 향한다 

 

▲지안 국내성. 위풍당당한 옛모습은 어디 가고 돌담길처럼 보인다. () 백두산에서 도를 닦는 아주머니들. (아래)

 

▲국내성 흔적을 일부나마 볼 수 있는 고구려유지공원(高句麗遺址公園).

 

▲백두산 천지. 압록강, 두만강, 쑹화강의 발원지다.() 옌지(延吉) 야경. (아래)

 

고구려의 기상 청나라의 위력 만주국의 침탈 조선족의 혼돈

  韓中이 함께 키워낸 사과배

 

랴오닝의 대흥안령, 헤이룽장의 소흥안령, 지린의 장백산맥이 그리는 삼각형 안에 랴오허(遼河)와 쑹화(松花)강이 흐르고 만주 벌판이 펼쳐져 있다. 지린은 만주의 지리적 중심이다. 고대왕국 부여에서 근대 일제의 만주국에 이르기까지, 만주를 장악하려는 이들은 반드시 지린을 중심으로 삼았다. 발흥과 몰락이 공존하는 곳, 그러나 민초는 고단하다.

 

▲고구려 수도였던 지안(集安) 국내성으로 흐르는 강.


“동북삼성(東北三省)을 왜 여름에 가? 
중국인 친구는 내 여행 계획을 듣고 의아하게 여겼다
“동북은 겨울에 눈과 얼음축제(冰雪節)를 보러 가는 곳이라고. 여름에 가면 재미없어(沒意思).

나는 생각했다. ‘그래. 너희 한족들에게 동북은 눈 구경을 하러 가는 곳이겠지. 하지만 나는 고구려 사람들이 어떤 땅에서 살면서 말을 타고 질주했는지 보고 싶어. 너희는 결코 이해하지 못할 거야. 고구려가 우리 한민족에게 어떤 울림을 주는지,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지린(吉林)성은 고구려 초기 근거지인 국내성이 있던 곳이다. 광개토대왕비가 있고, 민족의 성산(聖山) 백두산이 있다. 이런 곳을 돌아다니려면 추운 겨울보다는 북방의 바람이 상쾌한 여름이 제격 아닌가! 

지린성의 약칭은 ‘길할 길()’자. 지린성 한복판에 있는 지린시는 쑹화강이 흐르는 구릉지대다. 만주어로 ‘강가의 마을’을 ‘지린우라’라고 불렀고, 이 말을 한자로 음차한 ‘吉林
拉’를 줄여 ‘지린’이 됐다. 현지어를 음차해서 중국식 지명을 지었다는 점에서 구이저우(貴州)성과 유사하다. 두 지역 모두 한족의 손이 미치지 못하고 원주민들이 세력을 떨치던 변경이었다.

 

‘강가의 마을’ 吉林

랴오닝의 대흥안령, 헤이룽장의 소흥안령, 지린의 장백산맥. 이 세 산맥이 그리는 삼각형 안에 랴오허와 쑹화강이 흐르고 만주 벌판이 펼쳐져 있다. 지린은 만주의 지리적 중심이다. 고대왕국 부여에서 근대 일제의 만주국에 이르기까지, 만주를 장악하려는 이들은 반드시 지린을 중심으로 삼았다. 

지린 북쪽의 평야는 점점 높아져 중국과 한반도의 지리적 경계선을 이루는 장백산맥이 된다. 장백산맥의 최고봉 장백산, 즉 백두산은 2750m 높이에서 만주 벌판을 위풍당당하게 내려다보고 있다. 백두산 천지(天池)는 압록강, 두만강, 쑹화강이 발원하는 삼강지원(三江之源)이다. 하늘에 닿을 듯 위엄 있고, 생명 같은 물을 아낌없이 보내주는 백두산은 한민족뿐 아니라 동북아 여러 민족의 성산이요, 영산(靈山)이다.

부여는 지린 북부 평야지대의 첫 주인공이었다. 진수의 ‘삼국지 동이전(三國志 東夷傳)’이 말해주듯 부여는 “동이 지역에서는 가장 평평하고 앞이 탁 트여 있고, 오곡을 심기에 적당”한 2000리 땅에 8만 호() 주민을 거느린 강국이었다. 부여는 기원전 2세기 초반에서 3세기 중반까지 500년 동안 동북의 왕자였으며, 494년 멸망할 때까지 700여 년을 존속했다.

부여의 전설적인 명성은 한반도까지 흘러들어 고구려와 백제 모두가 부여의 후손임을 자처했다. 특히 백제는 왕의 성씨도 부여씨였다. 예컨대 근초고왕의 이름은 부여구, 의자왕의 이름은 부여의자다. 백제 성왕은 국호를 ‘남부여(南扶餘)’로 바꾸고 사비성을 수도로 삼았다. 사비성은 오늘날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이 되었으니, 부여의 명성은 21세기에도 살아 있는 셈이다. 

한편, 부여의 한 무리가 남쪽으로 내려와 현지 토착세력과 함께 세운 나라가 바로 고구려다. 고구려는 “산하의 형세가 험하고 견고”한 졸본(랴오닝성 환런현)을 첫 도읍으로 삼았다가, 압록강 유역의 국내성(지린성 지안)으로 수도를 옮겼다.

 

부여, 고구려, 백제

고구려의 터전은 부여와 크게 달랐다. 진수가 말했듯, 고구려는 “높은 산과 깊은 계곡이 많고, 평원과 호수는 없다. 산과 계곡을 따라 거주하고 계곡물을 마신다. 좋은 밭이 없으므로 비록 힘써 농사지어도 배불리 먹기에는 부족하다. 

진수는 부여인과 고구려인에 대해 크게 다른 평가를 내렸다. 부여인은 “키가 크고 성격이 강인하고 용맹하지만 조신하고 순후해 다른 나라를 침략해 약탈하는 일이 없”는 반면, 고구려인은 “성격이 사납고 급하며 약탈과 침략을 좋아한다.” 이는 양국의 자연환경이 크게 달라 부여는 자체 생산력이 높아 자급자족하기 충분해 안으로 지킬 뿐 밖으로 원정을 나가지 않아도 됐던 반면, 고구려는 주변 지역을 정복해 물자를 확보하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리라.

따라서 고구려는 초창기부터 대외정복이 중요한 사업이었다. 도읍을 선정할 때는 “산과 물이 깊고 험”해 방어에 유리한 것이 최우선 고려사항이었고, 도성을 지을 때도 평지성 하나, 산성 하나로 두 개씩 지었다. 고구려인은 평소에는 평지성에서 살다가 전쟁 시에는 산성에서 농성했다. 이처럼 고구려는 철저하게 전쟁을 염두에 둔 국가였다

그러나 정복전쟁을 성장의 원동력으로 삼은 것은 위험성이 매우 컸다. 초창기에 주변의 만만한 소국을 칠 때는 문제가 없었지만, 어느 정도 성장하자 강한 상대를 만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가장 강력한 적은 중국이었다. 위나라의 관구검이 국내성을 함락해 불을 질렀고, 516국시대 전연(前燕)의 모용황이 또 한 번 국내성을 파괴했다. 전연에 참패한 고국원왕은 남부 정벌로 고구려를 중흥시키려다 역풍을 맞았다. 백제의 전성기를 이끈 근초고왕은 고구려군을 격퇴하고 평양성을 포위했으며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다.

급박한 위기 상황에서 즉위한 소수림왕은 율령을 반포하고 불교를 공인하는 등 일대 개혁을 수행했다. 고구려는 삼국 중 가장 먼저 고대 국가 체제를 정비해 반전의 기틀을 마련했다. 때맞춰 광개토대왕이 나타났다. 광개토대왕은 불과 18세에 즉위해서 20여 년간 남으로 백제, 북으로 거란·숙신, 서쪽으로 후연, 동쪽으로 동부여 등 동서남북을 종횡무진 정벌했다.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하고 백제의 수도 한성을 점령하며 고구려는 전성기를 맞았다.

그러나 전성기 다음은 쇠퇴의 내리막길이다. 고구려가 확장되자 귀족들은 자기들끼리 정벌의 성과를 두고 다툼을 벌였고, 왕권은 통제력을 잃고 약화됐다. 이때쯤 중국은 516국이 끝나고 남북조 시대가 되어 다소 안정을 찾았다. 또한 백제와 신라는 동맹을 맺어 고구려의 남진을 막고 역공을 펼쳐 고구려의 한강 유역을 빼앗았다.

바보 온달과 평강공주 이야기에서 사람들은 낭만적인 두 사람의 사랑이야기에 주목하지만, 역사적 가치가 있는 것은 이야기 뒷부분이다. 온달 장군은 “한강 유역을 되찾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고 비장하게 출전했지만 결국 한강을 되찾지 못하고 전사한다. 사람들이 온달의 시신을 관에 넣고 돌아가려 했으나, 여러 장정이 들려 해도 관은 꼼짝하지 않았다. 평강공주가 와서 관을 쓰다듬으며 “죽고 사는 것이 이미 결정됐으니 어서 돌아가도록 해요”라고 말하자 비로소 관이 움직였다. 이 설화는 고구려의 전성기가 끝났음을, 고구려인들이 한강도 지키지 못하게 된 처지를 원통해했음을 알려준다.

 

▲국내성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고구려유지공원(高句麗遺址公園).

 

권력투쟁

외부의 도전은 더욱 거세졌다. 중국에서는 통일제국 수·당이 등장했고, 한반도에서는 백제와 신라가 성장했다. 고구려의 권력다툼은 끝내 연개소문의 살육으로 이어졌다. 연개소문은 반대파 귀족 180여 명을 죽이고, 영류왕을 죽이고는 시체를 토막 내 도랑에 버렸다. 당시 고구려의 귀족 연립 체제는 3년마다 최고의 귀족이 ‘대대로’에 올라 나라를 다스렸지만, 연개소문은 ‘태대대로’에 취임해서 평생 철권통치로 반대파를 탄압하고 막강한 권세를 누리며 아들들에게 높은 자리를 주었다. 

고구려는 초강대국 수·당의 침공을 막아냈지만, 상처뿐인 영광이었다. 방어전에 성공했을 뿐, 나라는 만신창이가 되었고 백성의 살림은 거덜 났다. 연개소문이 죽자 억눌려왔던 모순이 폭발했다. 게다가 아들들끼리 권력 다툼을 벌이자 고구려는 안에서부터 무너졌다.

 

대조영의 대장정

그래도 700여 년 동북의 강자였던 고구려의 위명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고구려 부흥운동이 잇따라 일어나자, 당나라는 고구려 유민을 요서 영주에 끌고 와 살게 했다. 이 지역은 오늘날 랴오닝(遼寧)성 차오양(朝陽)으로, 베이징과 랴오닝성의 성도 선양(瀋陽)의 중간에 있는 곳이다. 당나라가 만주를 장악하며 고구려인, 말갈족, 거란족 등 여러 북방민족을 이곳에 수용했다. 영주 관리가 무거운 세금을 거두는 것에 반발해 거란족이 반란을 일으키자, 대조영도 자신을 따르는 고구려인·말갈족과 함께 반란에 동참한다.

그러나 당나라의 정예군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정면 대결에서 패배한 대조영은 동쪽으로 도망쳤다. 중간에 천문령에서 당의 추격군을 격파한 후 다시 동쪽으로 피해 지린성 둔화(敦化)에서 발해를 건국했다. 영주에서 장장 2000, 현대의 도로망으로도 800 km에 달하는 대장정이었다. 발해는 “고구려의 옛 터전을 되찾고 부여의 풍속을 소유”했다며 부여와 고구려의 후손임을 자처했다. 

발해 이후 만주는 요·금·원이 돌아가며 차지하다 명나라 때는 여진족의 주무대가 됐다. 여진족의 성장에는 조선도 본의 아니게 한몫했다. 조선은 성종 때 전성기를 맞이하며 점점 사치에 빠졌다. 담비 모피를 입는 게 유행이 되자 여진족은 만주의 특산물인 담비를 팔고 대신 조선의 소, , , 농기구, 소금 등을 사들였다. 이 물품들은 생활필수품인 동시에 전략물자였다

연산군 때 이미 “조선 양도의 소가 모두 담비 모피를 사들이는 데 사용됐고, 그 결과 조선민은 말에 멍에를 메어 경작하는 경우도 있게 됐다.” 중종 때에 이르면 소뿐만 아니라 말도 많이 유출돼 “예전에는 기병이 1000여 명이나 됐지만 지금은 겨우 사오십 명밖에 되지 않아, 변방에 사변이 생겨도 어떻게 막을 방법이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국방력이 약화되며 북방에서 여진족이, 남방에서 왜구가 기승을 부려 ‘변방의 일을 대비한다’는 비변사(備邊司)가 설치됐는데, 처음에는 비상 조직이었지만 외부의 침략이 많아지자 나중에는 아예 상설기구화했다. 

조선이 약해지는 반면, 여진족은 강해졌다. 여진족은 조선의 소와 농기구로 농업생산력을 발전시켰고, 말과 철제 화살촉을 쓰며 군사력도 크게 강화했다. 임진왜란 때문에 명나라와 조선이 만주 지역의 감시·통제에 소홀해지자, 누르하치라는 영웅이 나와 만주를 석권했다. 이후 만주족의 청나라는 중국을 정복해 명나라의 뒤를 잇는 대제국이 됐다.

만주족은 만주를 신성시해 외부인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봉쇄했지만, 외부인들은 만주족이 만주의 보물인 인삼·모피·녹용 등을 독점하려는 수작이라고 여겼다. 엄격한 인구통제에도 불구하고 많은 한족과 조선인이 만주로 들어갔다. 중원과 조선에 흉년이 한 번 들 때마다 만주의 인구가 부쩍 늘어났다. 

 

대공황과 만주 침탈

만주족, 한족과 조선인들은 함께 만주를 일구며 만주의 주민이 됐다. 그러나 청나라가 망한 후 만주를 차지한 것은 일본이었다. 일본은 한발 빠른 근대화 덕분에 ‘아시아에서 벗어나 유럽이 되자(脫亞入歐)’던 목표를 어느 정도 달성했다. 1894년 청일전쟁, 1904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하며 아시아 최강이라고 뽐냈다. 1918년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이 되면서 독일의 조계지였던 중국 산둥성 칭다오를 얻고 전쟁 특수로 호황을 누렸다.

그러나 1929년 대공황이 전 세계를 덮쳤다. 선진국이던 미국·유럽도 큰 혼란에 빠졌으니, 기초체력이 훨씬 약한 일본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1931년 일본은 파국으로 치달았다. 가난한 농촌은 딸을 팔아 ‘딸지옥’이 됐고, 전국에 온 가족의 동반 자살이 잇달았다. 일본인들은 쌀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고, 노동쟁의도 최고조에 이르렀다. 아시아 최고의 인재라고 자타가 공인하던 도쿄제국대 법학부 졸업생조차 겨우 26%만 취업할 수 있었으니 전체 실업률은 처참할 정도였다. 

당시 일본 군부의 엘리트로서 ‘지략의 이시와라’로 불리던 이시와라 간지는 주장했다

(일본의) 국정은 거의 한계에 도달했고, 인구·식량 등 중요한 문제는 모두 해결책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따라서 광활한 영토와 자원이 있고, 중국대륙 침략의 근거지가 되는 만주·몽골 지역을 차지하는 것만이 일본이 살아날 유일한 길이다.

1932
년 일본은 만주국을 세웠다. 만주국은 중국의 통제를 받지 않는 ‘독립국’이지만 식민지 조선처럼 일본의 뜻대로 움직여야 했다. 이를 위해 일본은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선통제)였던 푸이를 만주국 황제로 세웠다. 이미 중국은 장제스(蔣介石)가 이끄는 중화민국 천하였다. 푸이는 아무런 힘이 없으면서도 만주에서 창업한 청나라 황실의 적통이므로, 일본이 찾던 ‘바지 사장’ 노릇에 적합했다. 힘이 없으니 일본에 의존할 수밖에 없고, 청나라의 천자였으니 만주국을 대표하기에 완벽했다 

 

‘바지 사장’ 푸이

푸이는 청나라 황실을 중흥하고자 자충수를 뒀다. 푸이는 주장했다. “짐, 일본 천황폐하와 정신일체다.” 따라서 “만주국 황제에 불충한 자가 있으면 그것은 곧 일본 천황에 대한 불충이고, 일본 천황에 불충한 자가 있으면 바로 만주국 황제에 불충하는 것”이다. 푸이는 관동군의 일본 천황에 대한 충성심을 이용해 관동군이 자신에게 충성하길 바랐다. 그러나 관동군이 푸이에게 충성할 리 없었다. 오히려 푸이는 중국인들의 자존심을 긁으며 ‘매국노’가 됐다. 안팎의 지지를 모두 잃은 패착이었다

 

만주국의 이상은 매우 화려했다. 만주에 사는 모든 민족이 협력하고 화합해(五族協和) ‘공존공영’하는 ‘왕도낙토’를 꿈꿨다. 만주국 홍보처는 자화자찬을 아끼지 않았다

“만주국의 건국이상과 건국정신은 세계 역사에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숭고한 것이어서…(중략)…세계의 정치학자는 만주국을 위해 새로운 정치학설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어이없는 자화자찬이지만, 비참한 현실에 염증을 느낀 많은 일본인이 환호했다. 많은 이상주의자가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 꿈을 품고 만주 동토에 뼈를 묻었다. 오늘날 적지 않은 진보적 일본인조차 “그래도 만주국은 특별했다”며 만주국의 이상이 좌절됐음을 안타까워하는 이유다. 

그러나 이상과 현실은 비참할 정도로 달랐다. 모든 일은 관동군에 의해 결정됐다. 한 프랑스 작가는 만추리아(만주)를 ‘마느캉추리아(마네킹 왕국)’로 불렀다. 프랑스어로 ‘마느킹(mannequin)’은 자기 의지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남의 말에 고분고분 따르는 사람을 은유한다

실권을 쥔 일본인들은 만주 현지의 사정을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일을 처리했다. 만주국은 후진국이므로 선진국 일본의 표준을 따라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한 만주인은 항변했다. “만계(만주계 인사)는 무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유럽 정치학을 일본 학교에서 번역해 만주에 가지고 와서 조직의 망으로 덮어씌우는 것보다 만계 쪽이 만인에 대해서는 더 잘 알 것이다.

민족차별은 일상까지 파고들었다. 전차를 탈 때 일본인만 특등칸에 탈 수 있었고, 중국인은 보통칸에만 탈 수 있었다. 만주국은 일본에서 온 이주민들에게 땅을 주기 위해 현지 중국인·조선인 농민들이 애써 일군 땅을 강제로 헐값에 매수했다. 농민들은 울부짖었다. “비적(匪賊)은 금품을 약탈하지만 땅까지 빼앗지는 않는다.  

비적보다 무서운 官匪

만주가 병참기지화하자 수탈은 더욱 더 가혹해졌다. 만주국은 생산비의 반값도 안 되는 가격으로 곡식을 사들였고, 온갖 물자를 징발했다. 많은 농민이 집뿐만 아니라 옷과 이불까지 빼앗긴 채 영하 40℃의 혹한을 맞아야 했다. “눈()은 칼과 같이 벌거숭이 알몸을 난자했다. 온 천지에 원성이 가득했다. 토비(土匪, 도적)보다 더 무서운 것이 관비(官匪), 법비(法匪).

일본과 타민족의 불화 앞에 한 관동군 막료가 토로했다. “만주는 일·만 제휴의 나라가 아니라 일·만 투쟁의 나라다.” “지금 만약 일·러 전쟁이 일어난다면 일본군 가운데 10개 사단 정도는 만주인을 상대로 싸워야 한다. 

그런 상황에서도 일본은 만주국의 자원에 의지해 제2차 세계대전을 수행했다. 1932년부터 1944년 사이에 일본은 22300여만t의 석탄, 1100여만t의 선철, 580t의 철강을 동북에서 약탈했다. 그러나 끝내 일본은 패망했고, 1945 8 17일 만주국은 해체돼 13년의 짧은 역사를 마쳤다. 

“낮에는 관동군 사령부가 만주국을 지배하고, 밤에는 아마카스가 지배한다”던 막후의 실력자 아마카스 마사히코는 유언과 같은 한마디를 남기고 청산가리를 마셨다

“큰 도박, 원금도 이자도 없이 빈털터리.” 한판 도박에 모든 것을 잃은 만주국과 일본의 처지를 정확히 꼬집은 말이었다. 


일제가 낳은 부산물 중 하나는 조선족이다. 일제강점기 전후로 많은 조선인이 만주로 갔다. 더러는 흉년의 배고픔을 이기지 못해, 더러는 출세하기 위해, 더러는 일제에 맞서 싸우러 갔다. 그리고 더러는 일제가 만주를 개발하기 위해 노예처럼 강제로 끌고 갔다.

▲고구려 환도산성. 첩첩산중의 난공불락 요새다

 

조선족의 운명

‘지난날 강가에서 말 달리던 선구자’가 ‘일송정 푸른솔’ 아래서 ‘한줄기 해란강은 천년 두고 흐르는’ 풍경을 지켜보던 곳도 지린성이고, 독립운동사에서 길이 빛나는 청산리·봉오동 전투가 벌어진 곳도 지린성이다. 악에 받친 일제가 대학살(간도 참변)을 벌인 곳도 지린성이다.

조선족이 일제의 수탈에 시달리다 간신히 해방되자마자 6·25전쟁이 터졌다. 중국은 이 전쟁을 제2의 임진왜란으로 보았다. 해양세력이 한반도를 발판으로 대륙에 진출하려고 하고 있으니, 대륙이 아닌 한반도를 전장 삼아 해양세력을 축출하는 것이 중국에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중국은 6·25전쟁을 ‘항미원조(抗美援朝) 전쟁’, 즉 미국에 대항하고 조선을 돕는 전쟁으로 규정하고, 조선족에게 “조국이 미제의 침략을 당하고 있으니 전쟁에 지원하라”고 호소했다. 많은 조선족 청년이 중국 인민지원군에 참전했다. 통역이 가능한 조선족은 비전투요원으로도 매우 중요한 자원이었다. 

전쟁이 끝난 다음에도 살아남는 것은 만만치 않았다. 조선족이 고생 끝에 허허벌판 황무지를 간신히 푸른 논으로 만들었더니, 인민공사가 모든 땅을 접수했다. 문화대혁명이 일어나자 참전했던 조선족은 ‘북한 간첩’이나 ‘남조선 특무’라는 누명을 쓰고 인민재판을 받았다. 조선족 대다수가 가난을 못 이겨 만주에 온 빈농 출신이었음에도 ‘조선에서 지주였던 반동분자’라는 모함을 받기도 했다. 

혹독한 시련 속에서도 조선족은 고유의 문화와 언어를 꿋꿋하게 지켰다. 언젠가는 ‘조국’의 품에 안겨 행복하게 살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간직해서였을까. 조선족 작가 리혜선의 표현대로 “고국문이 처음 열렸을 때만 해도 사람들의 트렁크 속에는 그리움 외에는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았다.” 그런데 점차 경제에 눈을 뜬 조선족은 청심환을 팔거나 일해서 돈을 벌려고 한국에 오기 시작했다. 1989년부터는 ‘뽕도 따고 님도 보고’ 식으로 그들의 마음속에 그리움 외에도 비즈니스 계획이 더 들어 있었다. 

 

한국의 이중성

▲옌볜조선족자치주의 중심지 옌지(延吉).

 

재회의 감동은 순식간에 끝나고, 어느새 미움과 갈등이 자라났다. 초창기에 일하러 온 조선족은 상당수가 불법체류자여서 기본적인 인권을 보호받지 못했다. 노동량에 비해 턱없이 낮은 임금을 제때 받기라도 하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임금 체불은 다반사고 아예 떼어먹히는 일도 흔했다. 불법체류자 신분이어서 권리를 박탈당하고도 죄를 지은 듯 숨어살아야 했다

“병들어 죽어도 묻힐 곳이 없고, 임금 체불을 당하고도 신고할 곳이 없고, 산재 피해를 당해도 법을 이용해 자신을 보호할 수 없고, 검문당하면 빚더미를 진 채 강제 출국을 당하고, 차별을 당해도 감내하기만 해야 한다. 

조선족은 빈부갈등, 노사갈등을 겪을 뿐만 아니라 기본적인 인권도 없고 숨도 편하게 쉬고 살 수 없었다. ‘고국이고 동포인데 너무하네’라는 원망이 자랐다. 조선족은 한국과의 첫 만남인 출입국심사대에서부터 차별을 느꼈다. 심사관이 미국 교포가 오면 반색을 하면서, 중국 조선족이 오면 인상을 찌푸린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중국 조선족이나 미국 조선족이나 다 똑같은 사람인데 차별하지 마세요!” “부잣집에 시집간 딸만 딸이고, 가난한 집에 시집간 딸은 딸도 아닌가요?

그런데 실제로 대한민국은 조선족을 말로만 동포라고 했을 뿐 현실적으로 동포로 여기지 않았다. 한국의 재외동포법은 “1948년 대한민국 수립 후에 나간 사람”만을 동포로 인정했기에 일제강점기에 이주한 조선족은 법적으로 동포가 아니었다. ‘재외동포법이냐, 제외(除外)동포법이냐’라는 비판까지 나왔다 

2001
년 ‘재외동포의출입국과법적지위에관한법률(재외동포법)’이 헌법재판소의 헌법불합치 판결에 따라 2004년 법이 개정됐으나, 정작 법무부의 시행령은 ‘불법체류 다발 국가’ 동포들의 자유 왕래를 제한했기 때문에 이름뿐인 법 개정이었다. 2007년 방문취업제와 2008년 재외동포법 개정을 통해서야 조선족은 비로소 동포로 인정받은 셈이다.

2015
년 현재 한국에 체류하는 외국인은 약 190만 명이고, 그중 절반인 95만 명이 중국인이다. 또 중국인 중 한국계 중국인은 63만 명으로 전체 외국인 중 33%를 차지한다. , 한국에 사는 외국인 3명 중 1명은 한국계 중국인이다. 어느새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이웃이 되었다.

 

두 마리 도롱뇽

그러나 그 이웃에 대한 우리의 시선은 여전히 곱지 않다. 검색 엔진에서 ‘조선족’이라고 입력하자마자 화려한 자동검색어들이 튀어나왔다. 조선족 여자, 조선족 범죄, 조선족 도우미, 조선족 살인, 조선족 사건사고…. 조선족이 한국을 본격적으로 찾아오기 시작한 지도 어언 20년이 넘었지만, 조선족에 대한 시선이 여전히 곱지 않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연관검색어들이었다. 

조선족은 법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동포 취급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조선족 작가 금희는 소설 ‘세상에 없는 나의 집’에서 조선족이 중국인·한국인에게 느끼는 이질감을 토로한다

(한국인과 조선족은) 아주 많이 닮아 있었지만, 같은 배경 속에서 살고 있지 않은, 곧 분화의 위기에 놓인 두 마리의 도롱뇽 같아서 도무지 같은 시각으로 함께 현실을 해석할 수 없었다. 반면 (중국인과 조선족은) 애초부터 한 배경 속에서 살고 있는 오리와 닭이었다. 우리는 우리의 시대와 배경을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개인적인 습관과 취향을 송두리째 공유할 수는 없었다. 

한국과 중국 중에서는 그래도 중국이 더 포용력이 있다. 한국인은 조선족더러 중국 사람 다 됐다, 중국 냄새가 난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정작 중국 냄새의 진원지인 이곳(중국)에는 하나가 아니라 몇 십 개의 냄새가 뒤죽박죽 섞여 있어서 사람들은 누구의 냄새가 어떠한지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냄새가 어딘가 자기의 것과 다르다고 여기면서도 어차피 ‘중국’ 냄새라는 것에서는 동일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조선족은 법적으로 ‘중국 공민’이다.

 

옌볜, 227만 중 조선족 80

개혁개방 이후 조선족 사회는 큰 전환기를 맞고 있다. 개혁개방 전에는 이동이 자유롭지 못해서 오히려 조선족 사회를 유지하기 쉬웠다. 그러나 개혁개방 이후 이동이 자유로워지자 젊은 층은 더 나은 기회를 찾아 중국 대도시나 해외로 나가는 반면, 옌볜 등 조선족이 많이 살던 지역에 한족이 대거 이주해오며 조선족 입지는 점점 더 좁아지고 있다. 2015년 현재 옌볜 조선족자치주의 227만 인구 중 80만 명이 조선족이다. 자치주가 되려면 소수민족의 인구 비율이 30% 이상이라야 하는데, 옌볜은 조선족 비율이 35%에 불과해 아슬아슬하게 자치주 자리를 지키고 있다. 더욱이 이 비율은 계속 감소 중이다

또한 중국 각지로 흩어진 조선족은 예전처럼 조선족끼리 뭉쳐 조선족 사회를 이루기보다는 중국인과 함께 어울려 살아간다. 이런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조선족임을 자각하지 못하고 중국인으로서 산다 

중국이 약했을 때 동북은 외세 침략의 교두보였지만, 중국이 강해진 지금은 세계로 뻗어갈 수 있는 무대다. 그러나 지린성은 크나큰 취약점을 갖고 있다. 동해와 매우 가깝지만 항구가 없다. 부동항을 탐내던 러시아가 제2차 아편전쟁에서 승리하고 1860년 베이징조약을 체결해 연해주를 빼앗았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동방을 정복하라’라는 뜻의 블라디보스토크를 세워 태평양 진출의 거점으로 삼았다. 반면 지린성은 항구가 없어 랴오닝의 다롄을 이용해야 했다. 만주 한복판에서 항구까지 가는 물류비가 만만치 않아 오늘날 지린은 동북3성 중에서도 가장 낙후한 지역이 되었다. 

 

항구 빌려 바다로…

중국은 이 난관을 타개하기 위해 ‘항구를 빌려 바다로 나간다(借港出海)’는 전략을 수립했다. 북한의 나진·청진항을 빌려 동해로, 태평양으로 나가겠다는 뜻이다. 이에 따라 중국은 지린성에서 북한으로 가는 교통로인 창춘-지린-두만강 지역을 개발하는 ‘창지투(長吉圖) 개방 선도구’ 사업을 진행 중이다 

우선 중국·북한·러시아 3자 교역이 기대된다. 2011년 두만강의 국경도시인 지린성 훈춘을 방문한 김연철 인제대 통일학부 교수는 말했다 

“러시아는 광학이 발달해 있어 망원경이나 현미경 등이 싸고 질이 좋다. 우리 일행 모두 러시아제 군용 망원경을 하나씩 샀다. 북쪽 지역을 잘 관찰하려고 중국 땅에서 러시아제 망원경을 사니, 이곳이 세 나라가 얽혀 있는 국경도시라는 것이 실감났다. 

여기에 한국과 일본, 동남아까지 가세한다면 나진항은 동북아에서 손꼽히는 항구가 될 수 있고, 지린성 역시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2016
년 이종석 세종연구소 연구위원은 북·중 국경지대를 답사한 후, 유엔의 대북 경제제재에도 불구하고 북·중 교역은 활발하고, “특히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결정 이후 북·중 교역이 현저하게 늘어나는 추세라는 것이 현지 무역 관계자들의 공통된 평가였으며, 단순한 외부 관찰만으로도 북한 경제 상황의 호전 추세를 분명하게 감지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중국과 북한의 정치적·경제적·안보적 관계는 매우 끈끈하고, 지린성과 나진항은 그 관계의 중심축이다. 

리혜선의 ‘사과배 아이들’은 조선족이 사과배를 키워내는 사연을 담은 동화다. 조선의 사과나무는 만주와 풍토가 맞지 않았다. 그러자 조선족은 중국의 배나무와 조선의 사과나무를 접지해 사과배를 탄생시켰다. 사과배는 “사과같이 예쁘고 달고, 배같이 물이 많고 시원”한 “이 세상에 둘도 없는 새 과일”이 됐다. 리혜선은 사과배에서 조선족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조선족은 중국의 풍토에서 조선의 문화를 품고 자란 독자적인 존재임에 긍지를 느낀다. 사실은 조선족의 고향인 지린성 자체가 중국과 한국이 함께 길러낸 사과배와 같은 땅이리라

 

◆06월 호  장시 江西

◇ 중국사의 조연, 세계사의 주연

장시의 어정쩡한 지정학적 위치와 낮은 생산력은 예부터

장시인들을 외지로 내몰았다. 가난은 천형이었고,

멸시와 눈총, 편견 속에서 중국사의 조연에 머물렀다.

그러나 장시의 자연은 세계적인 히트 상품을 낳았다.

마창토와 고령토는 유럽을 휩쓴 도자기를,

험난하지만 수려한 경관은 불후의 명시(名詩), 파양호 대전은

주원장의 명(), 정강산은 마오쩌둥의 신중국을 낳았다.

장시의 반전은 드라마틱하다.

▲우아한 자태를 뽐내는 징더전(景德) 도자기

 

▲1 징더전 도자기는 현대미술 영역을 넘본다. 2 맑고 푸른 바탕에 산수화가 새겨진 도자기. 3 황실·궁중용 도자기를 굽던 어요창(御窯廠).

 

4 자기를 장대에 얹어 어깨에 메고 나르는 인부 동상. 5 징더전 서민들의 일상.

 

贛 도연명의 詩, 도자기, 마오쩌둥 신중국

중국 히트 상품 제조기

 

역사 속 장시는 줄곧 변두리다. 오늘날에도 큰 주목을 받지 못한다. 장시에 관한 뉴스는 홍수, 가뭄 등 천재지변과 조류인플루엔자, 돼지 폐사, 밀감 흉작 등 농업 기사가 많다. 그러나 장시는 세계적 히트 상품을 낳았다. 유럽을 휩쓴 ‘중국 도자기’를 낳았고, 아름다운 장시의 자연은 명시가 되고, 마오쩌둥의 신중국을 품었다.

 

▲여산에서 바라본 장시성.

 

장시(江西)성 여산에 갈 때 중국인 친구와 동행했다. 그는 주장(九江)의 대학인 구강학원(九江學院) 뒷산이 여산이니까 구강학원에 가자고 했다. 그런데 구강학원에서 그가 세 명의 여학생에게 “여기 뒷산에 어떻게 가느냐”고 묻자, 그들은 당혹스러워하며 “우리 학교에는 뒷산이 없다”고 답했다. 그가 “여기 뒷산이 여산 아니었느냐”고 묻자 한 여학생은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경악하는 표정을 지었다. 

다행히 구강학원과 여산은 실제로 가까운 거리였다. 나는 중국인 친구에게 “왜 그런 실수를 했느냐”고 물었다. 그는 장시성 남부의 중심인 간저우(贛州)에서 대학을 다녔는데, 간저우대에는 뒷산이 있으니, 다른 대학에도 뒷산이 있을 것이고, 구강학원은 여산과 매우 가까우므로 구강학원의 뒷산은 곧 여산일 거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참 희한한 논리 전개였다.

장시의 또 다른 명물은 우위안(
)의 유채화다. 산골 가득 만발한 유채화는 숱한 이를 끌어들인다. 우위안의 유채화가 언제 피냐고 묻자, 그는 6월쯤 필 거라고 말했다. 나는 그 말만 믿다가 유채화 구경 시기를 놓쳤다. 우위안의 유채화는 3월 중순에 핀다. 그는 미대생이라 사생 실습으로 우위안에 가봤다고 하면서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오늘의 교훈 하나. “현지인이라고 항상 현지를 잘 아는 것은 아니다! 

장시성의 약칭은 ‘강 이름 감()’이다. 장시성 젖줄 감강(贛江)에서 따온 글자다. 감강은 산시·후베이의 한수(漢水), 후난의 상강(湘江)과 함께 장강 중류의 3대 지류다. 감강은 장시의 등을 훑고 올라가 중국 최대의 담수호인 파양호(鄱陽湖)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는 장강에 합류한다. 장시를 ‘감강과 파양호의 땅(贛鄱大地)’이라고 할 만큼, 감강과 파양호는 장시의 상징이다.

강남은 ‘장강의 남쪽’이라는 뜻이기는 하지만 사실상 ‘강남’이라 할 때 떠올리는 지역은 장쑤성과 저장성의 강동(江東)이다. 강동은 오()와 월()의 처절한 사투가 일어났고, 항우는 강동의 8000 자제를 이끌고 중국을 제패했으며, 강동의 호랑이 손견을 필두로 손책·손권·주유 등이 활약한 곳이다. 

 

오의 머리, 초의 꼬리(吳頭楚尾)

그에 반해 장시, 즉 강서 지방은 생소하다. 장강의 남쪽에 있으니 강남은 강남이지만 어딘지 강남스럽지 않다. 강남의 요건은 풍요로운 부()와 화려한 문화다. 강서는 강동의 풍요로움이 없어 강남 대접을 받지 못한다. 

이처럼 장시는 쟁쟁한 이웃들 때문에 존재감이 약하다. 장시는 동쪽으로 저장·푸젠성, 남쪽으로 광둥성, 서쪽으로 후난성, 북쪽으로 후베이·안후이성을 접하고 있다. 장시는 다채로운 개성을 자랑하는 이웃들 틈에 끼어 있어서, 다양한 사람과 문화가 뒤섞인다. 그래서 장시는 ‘오의 머리이고 초의 꼬리이며, 월의 집과 민의 뜰(吳頭楚尾,
戶閩庭)’이다

장시성에는 감강과 파양호를 위시해 2400여 줄기의 하천이 흐르고 곳곳에 호수가 있어 생산력도 제법 있다. 그러나 평야지대가 20%에 불과해 산은 많고 밭은 적다(山多田少). 어정쩡한 위치에 애매한 생산력. 그래서 장시는 중국사에서 주인공이 아닌 조연이었다

그래도 장시의 아름다운 산수는 큰 사랑을 받았다. 중국인들은 말한다. “장시성에 여산이 없으면 쓸쓸한 장강과 호수만 남고, 안후이성에 황산이 없으면 하늘의 신선들이 내려올 곳이 없다. 

소동파는 변화무쌍한 여산을 보고 “여산의 참모습 알기 어렵다(不識廬山眞面目)”고 찬탄했고, 이백은 여산폭포를 과장되게 묘사했다 

“폭포가 나는 듯 곧바로 떨어져 삼천 척, 은하수가 하늘에서 떨어지는가(飛流直下三千尺, 疑是銀河落九天). 
무엇보다도 장시의 대시인 도연명이 무릉도원의 전설을 담은 ‘도화원기(桃花源記)’를 남겨 장시의 신비로운 이미지를 한껏 부풀렸다. 게다가 도연명은 현령 자리를 박차고 나오며 호기롭게 말했다. 

“내 어찌 닷 말의 쌀에 허리를 굽히겠는가? 
도연명의 말은 ‘쥐꼬리’만 한 월급에 매여 사는 월급쟁이들의 심금을 울린다. 닷 말의 쌀을 버리고 무릉도원을 택한 사람. 이렇게 보면 도연명은 속세에 관심 없는 전원시인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상황이 그리 간단하지는 않다 

 

어찌 닷 말 쌀에 허리 굽히나”

사마씨의 진나라가 삼국을 통일한 지 얼마 안 돼 안으로는 ‘팔왕의 난’(八王之亂·제위 계승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진 황족들의 내란)이 일어나고 밖으로는 이민족들이 쳐들어왔다. 진나라는 장강 아래로 내려가 피난 정부를 꾸린다. 이것이 동진(東晉)이다. 장강 너머 이민족의 위협은 다소 줄어들었지만, 황제는 허약했고 반란이 잇따랐다. 이때 도연명의 증조부인 도간은 반란 진압에 큰 공을 세워 한미한 가문 출신이면서도 병권을 장악하는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권문세족들은 미천한 가문이 떠오르는 것을 극력 저지했다. 한 귀족은 도간과 함께 수레를 탄 귀족을 비웃었다 

“어찌 이런 소인과 함께 수레를 탑니까? 


도간이 죽은 후 권문세족의 핍박은 더욱 심해져 그 후손들은 모함으로 살해당하기도 했다. 도연명이 태어났을 때 도씨 가문은 힘없는 선비 일족에 불과했다. 도연명은 도간의 증손자이며 명사 맹가의 외손자임을 자랑스럽게 여겼고, 도씨 일족의 중흥에 대한 야망도 은밀히 품고 있었다. 청년 도연명은 “큰 뜻은 사해를 달리고, 날개를 활짝 펴고 멀리 날아오르길 기다렸다.

그러나 세월은 호의적이지 않았다. 동진은 환현과 유유 등의 잇따른 반란을 겪으며 가사상태에 이르렀고, 반란이 또 다른 반란에 의해 엎어지는 와중에 반역자의 혐의를 쓰고 처형되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렇다고 무작정 출사를 거부하기도 힘들었다. 모반자는 자신의 쿠데타를 정당화하기 위해 유명 인사를 초빙했고, 이 초빙을 거절하면 화를 입게 마련이었다. “가을 풀 아직 노랗게 시들지 않았지만, 따뜻한 바람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인 하수상한 시절이었다. 

그런 난세 속에서도 권문세족의 텃세는 결코 수그러들지 않았다. 도연명은 청운의 꿈을 안고 29세에 조정에 나아갔으나, 41세에 현령직에서 물러났다. 도연명의 12년 관직 생활은   위태롭고 아슬아슬했다. 그래서 도연명은 관직에서 물러나며 노래했다

“오랫동안 새장 안에 갇혀 있다가, 이제 다시 자연으로 돌아왔네.

도연명은 집 앞에 버드나무 다섯 그루를 심고 ‘오류선생전(五柳先生傳)’을 지었다. 이 자전적 수필은 이렇게 시작한다. 출신과 가문을 중시하던 당대 사회를 한껏 비웃은 말이다.

“선생이 어디 사람인지는 알 수 없다. 또 그의 성과 자도 알려지지 않았다. 

이후 도연명은 유유자적한 전원생활과 술을 낙으로 삼았다. “세상에 바라는 바 없고, 오직 좋은 술과 오래 사는 것”만을 바랐다. 훗날 백거이는 도연명을 이렇게 추모했다

“술을 사랑하지 명예 사랑하지 않고, 술 깨는 것 걱정하지 가난 걱정 않았다네. 다른 점은 따르지 못하겠지만, 얼큰히 취하는 건 본받으려네. 

 

▲징더전 도자대학. 중국 유일의 도자예술 관련 고등교육기관이다.

 

진우량, 장사성, 주원장

‘삼국지연의’에서 형주(후베이)의 유표가 죽고 조조가 형주를 공략하기 시작할 때, 손권은 이미 시상(장시성 주장)에 군대를 이끌고 와 있었다. 형주를 차지하고 조조의 남진을 막을 생각이었으나, 형주의 유종이 싸우지도 않고 조조에게 항복하는 바람에 손쓸 틈이 없었다.

이때 조조가 손권에게 항복을 제의하자, 손권 진영은 싸우자는 파와 항복하자는 파로 갈렸다. 손권 역시 막강한 조조의 군세 앞에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나라 안의 일은 장소와 상의하고, 나라 밖의 일은 주유와 상의하라”는 손책의 유언을 떠올린 손권은 파양에 사람을 보내 주유를 불렀다. 그러나 급박한 정세를 감지한 주유는 이미 손권에게 오고 있었다.

정리해보자. 손권은 근거지인 회계(장쑤성 쑤저우)를 떠나 시상에 전진배치했다. 주유는 장시성 파양호에서 수군을 훈련시키다가 시상에 와서 조조와 싸우자고 주장했고, 곧바로 후베이성 적벽으로 출격해 조조의 군대를 격파했다. , 장시는 오나라 정치의 중심 장쑤성과 방어의 중심 후베이를 잇는 지역으로 평소 군대를 훈련시키다가 유사시 어디로든 수월하게 갈 수 있는 지역이었다. 

장강의 요지를 잇는 장시성 파양호는 원나라 말에 대격전의 현장이 된다. 원나라의 가혹한 정치에 대기근까지 겹치자, 중국 각지에서 군웅이 일어났다. 그중 장시 주장(九江)의 진우량, 장쑤성 쑤저우(蘇州)의 장사성, 난징(南京)의 주원장이 돋보였다

진우량은 후베이·후난·장시에 안후이성 남부 일대를 장악해 최대 세력을 자랑했다. 장사성이 차지한 장쑤성 쑤저우와 저장성 일대는 장강 삼각주의 곡창지대이자 으뜸가는 상업지역이어서 당시 중국 총 조세액의 3분의 1을 내던 지역이었다. 그러나 주원장은 이처럼 엄청난 양대 강적 사이에 포위됐음에도 굴하지 않았다. , 진우량은 강했고, 장사성은 부유했으며, 주원장은 투지가 넘쳤다. 

모든 여건은 진우량에게 유리해 보였다. 진우량은 지용(智勇)을 겸비한 호걸이었고, 이미 군웅 최대의 판도를 구축했다. 장시에서 장강의 순류(順流)를 타면 주원장의 난징을 거침없이 공략할 수 있었다. 또한 장사성과 함께 동서에서 협공한다면, 가뜩이나 세력이 약한 주원장을 깰 수 있다. 

진우량은 큰 전함만 100, 작은 전함 수백 척을 이끌고 주원장을 쳤다. ‘일제히 창을 던지면 강물을 끊고, 배는 꼬리를 물고 천리를 잇는’ 위세 앞에 주원장 군대도 크게 겁을 먹었다. 투항하자는 사람도 있었고, 몰래 달아나려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주원장의 장자방인 유기는 의연했다. 장사성은 큰 야심이 없고 사치향락에 젖어 있어 군대를 움직이지 않을 것이니, 재빨리 진우량을 격파한 뒤 장사성을 평정하고 북으로 중원을 취해 왕업을 이룬다는 전략이었다. 주원장은 진우량의 군대를 거짓 항복으로 꾀어낸 다음 매복 공격으로 전군을 섬멸하고 2만여 명을 포로로 잡았다. 진우량은 의심이 많고 도량이 작아 재주 있는 사람을 꺼리고 못난 사람을 감쌌기 때문에 내부에 불화가 잦았다. 주원장은 진우량의 불만세력을 흡수해가며 세를 불리니, 주원장의 세력은 날로 강해졌고 진우량의 세력은 날로 약해졌다. 

 

파양호 최후의 결전

화가 난 진우량은 큰 전함을 수백 척 만들었다. 큰 배는 3000, 작은 배는 2000명을 태울 수 있는 거대 전함이었다. 진우량과 주원장은 파양호에서 최후의 결전을 벌였다. 진우량이 자칭 60만 대군을 이끌고 오자, 주원장은 20만 군대로 36일간 싸웠다. 주원장 군의 배는 작지만 기동성이 좋아 화포 무기를 십분 활용해 화공(火攻)과 ‘치고 빠지기’ 전법을 병행했다.

그러나 주원장의 피해도 적지 않았다. 7 21일 하루 동안 진우량군은 6만 명, 주원장군은 7000명이 죽었다. 주원장이 전투를 독려할 때 몇 차례나 곁에 있던 위사(衛士·경호원)들이 전사했고, 타고 있던 배가 격침되고 좌초되는 등 주원장 스스로도 숱한 위기를 겪었다

파양호 대전은 원말 군웅전쟁 중 가장 돋보이는 한판 승부였고, 주원장 일생 최대의 고비였다. 위급한 상황이었던 탓일까. 이때 장시 사람들의 도움을 받은 주원장은 흰소리를 했다. “내가 황제 자리에만 오르면 장시 사람 모두를 사촌형제(老表)로 모시겠소. 어려운 일이 있으면 나를 찾아오시오. 

훗날 주원장은 명 태조가 된 후, 장시가 심각한 홍수 피해를 입어 장시 촌로들이 탄원하자 장시성의 세금을 3년간 면제했다. 이때부터 ‘장시의 사촌형제(江西老表)’라는 호칭이 생겼다고 한다. 그런데 미담의 끝은 그다지 깔끔하지 않다. 1398년 주원장은 장시 사람들이 “사소한 일도 잘 참지 못하고 직접 수도까지 와서 소송장을 제출한다”고 질책했다. 명나라 말 장시성의 한 평론가는 장시성의 성도 난창(南昌) 사람들이 “부지런하지만 베푸는 데에 인색하고, 의무감은 작은데 쟁론을 좋아하며, 교활하게 말을 잘하고 송사와 중상모략을 좋아한다”고 비평했다. 

 

장시의 사촌형제(江西老表)

장시인들에 대한 비난은 현대에도 상당히 남아 있다. 왕하이팅은 ‘넓은 땅 중국인 성격지도’에서 말했다 

“장시 사람들은 무슨 일에나 변명이 많다. 말에는 가시가 있고 각박하며 금방이라도 싸울 태세다. 식당에서 손님이 음식을 주문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나오지 않아 종업원에게 사정을 알아보면 그제야 주문한 음식의 재료가 다 떨어졌다는 대답이 돌아온다…(중략)…변명만 잔뜩 늘어놓을 뿐 미안하다는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왜 장시 사람들에 대한 인상이 이토록 안 좋을까. 장시는 평지가 적고 산이 많아 사람들이 일찍부터 외지로 나가 일했다. 명나라 선비 왕사성은 말했다

“장쑤·저장·푸젠 세 성은 인구가 많은 데 비해 토지가 좁아 세 성을 다 합쳐도 중원의 한 성 면적에 미치지 못한다. 그러므로 기술을 습득하지 못하면 입에 풀칠을 할 수가 없고, 기술이 있어도 외지로 나가지 않으면 팔 재간이 없는 형편이다. 특히 장시 지역은 그런 경향이 더욱 두드러졌다. 

명나라 여행가 서하객은 천하 곳곳에 장시인들이 있음을 알고 상당히 놀랐다. 명말청초 장헌충이 반란을 일으키며 쓰촨인을 대학살하자, 청나라는 쓰촨성 복구를 위해 외지인의 이주를 장려했다. 그러자 “후광인(湖廣人)이 쓰촨을 채우고, 장시인이 다시 후광을 채운다”는 말이 생겼다. 후베이·후난인들이 대거 쓰촨으로 이주하자, 그 빈자리를 장시인이 채웠다는 뜻이다.

오늘날 허난성 사람들이 외지에서 가난한 농민공(農民工·농촌을 떠나 도시에서 일하는 노동자)으로 일하면서 외지인들에게 멸시받는 것을 떠올려보자. 그래도 허난은 인구부양력이 뛰어난 중원이라 농민공을 배출한 역사는 개혁개방 이후로 매우 짧다. 반면 장시인들은 옛날부터 외지로 나가 일하면서 따가운 멸시의 눈총을 받아왔다. 장시인에 대한 편견에는 이처럼 오랜 역사가 있다. 


산시(山西)성과 안후이성도 상황은 비슷했지만, 이 지역은 상업에 성공해 거대 상인 조직인 진상(晉商)과 휘상(徽商)을 탄생시켰다. 이에 반해 장시는 상업에 그만큼 성공을 거두지도 못해 이미지를 개선하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도자기 메카’ 징더전

그러나 장시의 자연이 결코 가난과 역경만 안겨준 것은 아니다. 장시의 강산은 풍부하고 우수한 도자기 원료를 선사했다. ‘도자기의 메카’ 징더전(景德鎮) 부근의 마창산은 ‘맑고 투명한 것이 옥과 같은’ 마창토를 주었고, 고령산(高嶺山)은 고령토를 주었다. 영어 카올린(kaolin)은 ‘도자기를 제작하는 데 쓰이는, 부드럽고 고운 흰색 점토’를 뜻하는데, 바로 고령의 중국 발음 ‘가오링(高嶺)’에서 나온 말이다. 지명이 ‘도토(陶土)’라는 보통명사가 될 만큼 장시는 탁월한 도자기 생산지였다. 

장시의 잠재력은 풍부했고 일찍부터 개성 있는 도자기를 만들었지만, 중원이 중국의 중심일 때에는 빛을 보지 못했다. 북방 유목국가인 금나라에 수도 카이펑을 함락당한 뒤, 남송이 저장성 항저우를 수도로 삼으면서 강남은 중국의 중심이 됐다. 특히 남송은 위기 상황을 극복하고 정부와 군대의 재원을 마련하고자 수출 산업을 육성했다. 징더전은 중국 도자기의 중심으로 성장했다. 

원나라의 세계 정복은 단순히 영토 확장이 아니라, 국경 없는 자유무역 시대를 열었다. 원이 남송을 정복한 후 도자기는 중요 수출품이 됐다. 징더전 도자기는 크기, 모양, 색깔, 장식 등에서 일대 변화를 겪었다. 원나라 특유의 유목문화에 주요 고객인 아라비아·페르시아 문화가 스며들었다 

중국은 전통적으로 작고 얇은 개인 그릇을 선호했으나, 몽골족은 왁자지껄한 잔치와 축제에 쓸 크고 튼튼한 그릇을 좋아했다. 송나라는 청자를 좋아했지만, 원나라는 백자를 좋아했다.

한편 중동의 이슬람교는 사치를 경계하기 위해 금·은 식기를 쓰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자신을 과시하고 싶은 것은 인간의 욕망이고, 손님을 잘 대접하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이다. 부자들은 금·은 식기 대신 도자기를 썼다. 당시 중동 도자기의 품질은 중국 수준에 미치지 못해, 흰 바탕색을 칠하고 그 위에 페르시아산 코발트블루를 써서 멋을 냈다. 흰 바탕에 푸른 문양의 페르시아 양식이 징더전의 도자기 기술과 만나 청화백자를 탄생시켰다.

‘옥같이 희고 하늘처럼 푸르며, 거울처럼 투명하고 종이처럼 얇으며, 종과 같이 맑은 소리를 내는’ 징더전의 도자기는 세계적 히트 상품이 됐다 

명나라 정화의 대원정은 대제국 중국을 동남아시아, 남아시아, 중동, 아프리카까지 널리 알려 중국 상품에 대한 수요를 촉발했다. 중동에서 큰 인기를 얻은 도자기는 유럽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중국 열풍’ 시누아즈리(Chinoiserie)

▲장쩌민 칠필의 '징더전시 조소 자기 전시회'.

 

근대 유럽에는 시누아즈리(Chinoiserie·17~18세기 유럽 귀족 사이에 일어난 중국풍 취미), 즉 중국 열풍이 불었다. 유럽의 귀족들은 중국의 비단옷을 입고, 중국의 도자기에 중국의 차를 따라 마셨다. 포르투갈 황제의 여름용 별궁인 리스본 산토스 궁전에는 청화백자방이 있다. 피라미드형 천장의 4면을 청화백자 260점으로 빽빽하게 뒤덮은 방이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선장들에게 “중국 자기를 얻지 못하면 돌아올 생각을 하지 마라”는 명령을 내렸고, 유럽의 범선들은 매년 수백만 점의 도자기를 수입했다. 셰익스피어 희곡에 나오는 한 속물은 “중국 접시는 아니지만 굉장히 좋은 거”라며 자신의 “3펜스짜리 접시”를 자랑했다. 빛을 사랑한 화가 베르메르는 과일을 담은 중국 도자기의 아름다운 형상과 문양을 그리고, 접시 위에 반사된 창문의 형상까지 섬세하게 담아냈다. 정물화가들에게 과일을 담은 중국 도자기는 그림에 우아한 기품을 더해주는 필수요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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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를 전후로 중동과 유럽의 힘이 역전돼, 17세기 이후로는 유럽 시장의 소비가 이슬람권을 앞질렀다. 자연스레 징더전의 자기에도 고객의 요구에 따라 유럽 왕실·귀족 가문의 문장, 라틴어, 종교화 등이 새겨졌다. 징더전은 유럽 수출용 가마를 따로 만들어 유럽 취향의 자기를 대량생산했다. 이 자기들은 “Sapienti Nihil Novum(현자에게 새로운 것이란 없다)” 등의 라틴어 경구, 예수의 탄생·십자가형·부활·승천 등 4대 테마가 그려졌고, 종류도 일반적인 식기부터 맥주잔, 촛대, 겨자 항아리 등 유럽식 생활에 필요한 다양한 물품을 망라했다. 개중에는 접시 밑바닥에 치마를 걷어 올려 엉덩이를 보여주는 미녀가 그려져 있는 자기도 있었다.

 

신중국을 품은 정강산(井岡山)

고유명사 ‘China’는 ‘중국’을 말하지만, 보통명사 ‘china’는 ‘도자기’를 뜻한다. 어느새 중국과 도자기가 동일시되기에 이르렀다. 중국의 변두리 장시는 역설적으로 중국을 대표하는 상품을 낳았다. 그러나 영원한 것은 없다. 문화의 힘도 결국 국력을 따라간다. 산업혁명 이후 유럽의 힘은 중국을 능가했다. 중국은 더 이상 선망과 동경의 대상이 되지 못했고, 도자기 역시 예전처럼 매혹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더욱이 영국은 동물의 뼛가루를 이용한 본차이나(bone china)를 발명하고 공장제 대량생산을 통해 도자기 최강자로 떠올랐다.

청나라가 붕괴한 후 중국은 열강에 위협당하고, 안에서 지역 군벌들이 할거하는 내우외환에 시달렸다. 중국의 국부 쑨원(孫文)은 중국의 혼란을 종식시키기 위해 북벌을 단행했다. 쑨원은 정파를 초월해 국공합작(國共合作)을 하며 통일된 중국을 꿈꿨다

쑨원의 후계자 장제스는 순조롭게 북벌을 이끌어갔다. 그는 일단 국공합작을 유지하기는 했으나, 쑨원과 달리 공산당을 국민당의 암 덩어리로 여겼다. 1927 3, 남중국의 중심지인 난징과 상하이까지 손에 넣자, 북벌의 완성이 코앞에 다가왔다. 장제스는 1927 4 12일 상하이 공산당과 노동조합을 습격했고, 이후 세력이 닿는 모든 곳에서 공산당 박멸 작전을 벌였다. 

위기에 빠진 공산당은 도박을 벌였다. 중국의 도시와 농촌 전역에서 봉기를 시도했다. 그러나 승산 없는 싸움이었다. 국민당 군대는 맨주먹 민중의 산발적 봉기를 간단히 진압했다. 자포자기성 자살행위와도 같은 8~9월 봉기 중에 저우언라이의 난창 봉기와 마오쩌둥의 후난성 추수 봉기가 있었다. 추수 봉기의 실패로 마오쩌둥과 1000명의 동지만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군사력의 중요성을 절감한 마오는 주장했다

“이제부터 우리는 군사 문제에 최대의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만 한다. 

 

‘수호지’ 양산박의 재현

당 중앙은 마오가 군대에 집착하며 ‘자중지란을 일으킨다’며 비판했지만, 마오는 당이 ‘군사적인 문제를 무시하면서 동시에 대중을 무장화하려는 모순된 정책’을 펼친다고 비판하며 창사 공격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 마오는 90%의 세력을 잃었고, 국공합작 붕괴로 국민당 직함을 잃었다. 명령 불복종으로 공산당의 직책마저 잃었고, 심지어 한때 공산당원의 당적이 박탈되기도 했다 

1928
년 여름, 마오는 고향 후난을 떠나 후난과 장시의 경계에 있는 정강산으로 도망쳤다. 절벽으로 둘러싸인 바위투성이 산골 오지로 길도 없고 수레도 없었다. 정강산으로 도망쳤다기보다 정강산에 갇힌 셈이었다.그러나 한 사람의 진정한 가치는 역경에 처했을 때 드러난다. 지금껏 쟁쟁한 선배들에게 눌려 있던 풋내기 마오는 정강산에서 진정한 정치가로 거듭났다. 정통 마르크스주의자인 천두슈 교수는 ‘프티부르주아지’에 불과한 농민들은 혁명의 주역이 될 수 없고, 오직 공산당과 노동자계급의 지도를 따를 수 있을 뿐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마오는 중국인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이야말로 중국 혁명의 주역이라고 보았다. 마오는 소총 120정을 빌리고 정강산 산적 600명과 유랑민을 받아들이며 솜씨 좋게 세력을 불려나갔다 

대도시 창사의 공산당 대표는 “어떻게 산에 마르크스주의가 있을 수 있겠는가”라고 일갈했지만, 마오는 오히려 산이 중요한 근거지라고 생각했다. 국민당이 천하를 지배한다고 해도  변두리 산골까지는 힘이 미치지 못한다. 공산당이 산에 확고한 근거지를 마련하고 점차 세력을 넓혀나갈 수 있다. 바로 ‘수호지’ 양산박의 재현이다. 마오는 말했다

“근거지가 자리 잡은 지역과 부대의 관계는 궁둥이와 사람의 관계와 같다. 

일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쉬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쉬지 못하는 사람은 곧 지쳐 쓰러지고, 근거지가 없는 세력은 곧 소멸한다. 공산당·홍군은 물고기와 같고, 인민은 물과 같다.

마오는 정강산에서 부호의 토지를 몰수해 농민들에게 분배하고 일률적으로 15%의 세금을 받았다. 모든 고난을 함께 똑같이 짊어지는 평등과 민주주의의 정신으로 열악한 상황을 버텨나갔다 

무모한 군사적 모험을 하지 않고, 잘 도망치다가 재빨리 규합해서 적보다 병력 숫자가 많아졌을 때 공격하는 게릴라 전술을 확립했다. 또한 “규율이 거의 없는 1만 명의 오합지졸”에게 정강산의 3대 규율을 불어넣었다 

“명령에 복종하고, 가난한 농부의 재산은 어떤 것도 빼앗지 말아야 하며, 몰수한 지주의 재산은 즉시 정부에 전달해서 처리한다. 

 

‘마오의 연인’ 허쯔전 vs 장칭

마오주의의 거의 모든 것이 이때 싹을 틔웠다. 정강산은 마오의 학교이자 양산박이었다. 게다가 정강산은 마오의 결혼 소개소이기도 했다. 여기서 마오는 세 번째 부인 허쯔전(賀子珍)을 만났다. 당시 18, 활달하면서도 기품 있는 미녀 허쯔전은 곧 마오의 ‘혁명적 연인(愛侶)’이 됐다. 

당시 홍군은 명장 주더(朱德)와 마오가 이끄는 투 톱 체제였다. 홍군 사이에서는 유행가가 떠돌았다 

“주 군장(軍長)은 참호 사이로 쌀 나르느라 열심이고, 마오 군장은 연애 하느라 열심이네.

마오는 허쯔전과의 열렬했던 사이를 이렇게 회고했다

(허쯔전은) 나와 함께 산 10년 동안 연초에 아이를 낳고 연말에 또 임신을 해 모두 6명의 아이를 낳았다. 

마오는 정강산의 경험을 바탕으로 저우언라이·주더 등과 함께 장시성 남부에 장시 소비에트를 마련했지만, 당시 공산당 주류의 오판으로 결국 장시 소비에트도 궤멸됐다. 공산당은 살아남기 위해 도망쳐야 했다. 훗날 ‘대장정(大長征)’이라는 근사한 이름이 붙었지만, 성공했으니 미화된 역사일 뿐이다. 당시 공산당은 그 어떤 ‘약속된 땅’도 희망도 없이 도망칠 뿐이었다.

허쯔전은 셋째를 임신한 몸으로 장시성에서 산시성까지 25000리를 걸으며 몸에 스무 군데가 넘는 부상을 입었다. 조강지처(糟糠之妻)란 쌀겨와 지게미를 함께 먹던 아내, 즉 가난과 고생을 함께 겪은 아내라는 의미다. 칠거지악(七去之惡)을 범했더라도 조강지처라면 내칠 수 없었다. 고난을 함께 겪은 동지에 대한 의리를 저버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허쯔전은 마오와 폭격을 함께 맞아가며 사지(死地)를 헤쳐 나왔다. 조강지처도 이런 조강지처가 없다. 후난성 ‘촌놈’ 마오가 공산당 주석이 되고, 신중국을 열 수 있었던 배경에도 허쯔전의 내조를 빼놓을 수 없다. 그러나 둘 사이의 결말은 좋지 않았다. 마오는 바람기를 자제하는 남자가 아니었고, 허쯔전은 이를 용납할 여자가 아니었다. 허쯔전은 말했다

“우리 둘이 싸울 때, 그가 나무 걸상을 들어 올리려고 하면 나도 바로 의자를 들어버리지.” 마오 역시 지지 않았다 

“허쯔전은 무쇠와 같고 나는 강철과 같아서 둘이 만나면 크게 부딪치기만 할 뿐이다.

1938
년 상심한 허쯔전은 치료 겸 유학차 모스크바로 떠났고, 마오는 곧 산둥성 출신 여배우인 장칭(
青)을 총애했다. 오랜 혁명 동지들은 허쯔전과 장칭을 비교하며 걱정했다

“허쯔전은 동고동락해온 오랜 동지로, 혁명의 정이 깊고 서로가 믿고 소통하는 사이였소. 그러나 장칭은 이곳에 처음 온 사람이고 젊기 때문에, 여러 동지와 공통된 경험을 나눌 수 없소. 만약 주석님 곁에서 말썽을 일으키기라도 한다면 큰일일 텐데, 이 또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훗날의 역사는 그 우려대로 됐다. 1947년 허쯔전은 모스크바에서 돌아와 마오에게 편지를 썼다

“저는 소련의 전쟁 기간에 생활이 많이 힘들어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일해야 했습니다. 장정 때보다 더 고생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이젠 다 과거의 일이죠. 저는 자오자오(嬌嬌·딸 리민)와 안칭(
·아들 마오안칭)을 데리고 베이징에 올라가 주석님을 뵙고 악수라도 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중국공산당 중앙조직부의 특파요원들은 허쯔전이 베이징에 들어오는 것을 막고, 리민과 안칭만을 데려갔다. 마오의 답장은 박정했다 

“혁명이 최우선이고, 그다음이 건강이고, 남을 배려하는 것도 중요하오. 대국적 관점에서 행동합시다. 

 

변두리 장시의 내일

허쯔전은 정신분열 증세를 보여 상하이에서 치료를 받았다. 두 사람은 1959년 여름 장시성의 여산 회의에서 20여 년 만에 재회했다. 마오는 짧은 만남 뒤 줄담배를 피우며 탄식했다. “저 여자는 아주 늙고 병이 깊구나. 

그것이 두 사람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여산 회의가 끝난 후 대약진운동의 실패를 신랄히 비판한 펑더화이(彭德懷)는 숙청됐고 린뱌오(林彪)가 신임 국방부장이 됐다. 마오는 옛 징강산 혁명 시절을 재현하려는 듯 문화대혁명을 일으켜 일생 최대의 오점을 남기고 1976년 세상을 떴다. 허쯔전은 1984년 상하이 병원에서 쓸쓸하게 죽었다.

중국인들은 후난 남자와 장시 여자가 고집이 세고 다루기 어렵다며 ‘장시의 늙은 처, 후난의 노새(江西老妻,湖南騾子)’라고 말한다. 그러나 장시 여자 허쯔전 역시 겉으로는 씩씩해도 속으로는 사랑을 갈구하는 여자였다. 또한 후난 남자 마오쩌둥과 장시 여자 허쯔전의 파란만장한 결혼 생활은 ‘장시의 늙은 처, 후난의 노새’란 말과 얄궂게 겹쳐져 쓴웃음을 짓게 한다.

오랜 역사 동안 장시는 줄곧 변두리였고, 오늘날에도 큰 주목을 받지 못한다. 장시에 대한 뉴스는 홍수, 가뭄 등 천재지변과 조류인플루엔자, 돼지 폐사, 밀감 흉작 등 농업 관련 기사가 많다. 성도 난창은 장강 중류 개발의 중요 거점이기는 하지만, 후베이의 우한, 후난의 창사에 여러모로 밀린다. 

그러나 장시는 변두리이면서도 중국을 대표하는 도자기를 낳아 세계를 휩쓸었고, 아름다운 자연은 많은 이들을 매혹시켰으며, 숱한 불후의 명시를 낳았다. 장시의 예기치 않은 내일을 기대해볼 수 있는 이유다

 

◆ 7월 호 헤이룽장성

◇黑 검은 용이 휘도는 白山黑水의 땅

 

중국에서 중화학공업이 가장 먼저 발달한 헤이룽장성은 그 때문에 중국에서 가장 낙후한 공업지대가 됐다. 스스로 약점을 잘 알기에 산업구조를 선진화하고, 금융·물류업, IT 서비스 분야를 육성하며, 러시아·몽골 등과의 교류에 나서지만 성과는 쉽게 나타나지 않는다. 대제국 청나라를 세운 근거지 헤이룽장은 이제 러시아, 몽골, 남북한, 일본, 미국 등 주변국들의 공존공영에서 새로운 길을 찾고 있다.

 

▲추운 북방이지만 강과 기름진 평야가 있어 농어업이 가능한 헤이룽장성

 

여행 가이드북의 대명사 ‘론리 플래닛’은 헤이룽장 여행의 첫 번째 하이라이트로 중국 최북단 마을 모허(漠河)를 꼽으며 이렇게 설명했다. 

“좀처럼 보기 힘들지만 장엄한 오로라를 볼 수 있기를 기대해보라.

하지 무렵 오로라를 볼 확률이 가장 높고, 이때 오로라 축제(北極光節)가 열린다고 했다. 나도 생애 처음 오로라를 보길 기대하며 한번 가보려는데 마침 모허에 갔다 온 친구를 만났다. 이 친구는 모허에 하루 이틀 머무른 게 아니라 제법 오래, 한 달이나 있었다고 했다.

“그럼 오로라 봤어? 

“못 봤어. 

“한 달이나 있었는데도 못 봤단 말이야? 

“내 친구 아버지는 사오십 년을 모허에 살면서 오로라를 딱 두 번 보셨대.

“그런데 매년 하지에 모허에서 오로라 축제가 열리잖아?

“거짓말이지(騙人). 

그는 친절하게 조언을 계속했다. 

“오로라를 보고 싶으면 캐나다, 러시아, 북유럽에 가봐. 중국에선 보기 힘들어.

생각해보니 론리 플래닛도 오로라를 “좀처럼 보기 힘들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오로라를 볼 수 있길 기대해보라”며 사람을 현혹한 것이다. 가이드북의 대명사 론리 플래닛도 결국 중국의 상술과 타협한 걸까. 

헤이룽장(黑龍江)성의 약칭은 ‘검을 흑()’ 자다. 세계에서 10번째, 중국에서 장강, 황하 다음으로 긴 흑룡강에서 따온 약칭이다. 흑룡강은 이름 그대로 검은 용처럼 동북아시아를 휘감고, 양대 강국인 중국과 러시아 국경을 가른다. 그래서 중국 이름은 흑룡강이고, 러시아 이름은 아무르(Amur) 강이다. 

 

2동북아를 휘감는 龍

프랑스 작가 아멜리 노통브는 소설 ‘공격(Attentat)’에서 “‘아무르’는 프랑스어로 ‘사랑’을 뜻한다”며, 아무르 강을 ‘사랑의 강’으로 해석한다. 

 

“강과 사랑의 닮은 점 중에 가장 놀라운 건, 결코 마르지 않는다는 점이야. 가뭄이 들면 얕아지고 심하면 없어져버린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 하지만 강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아. 옛사람들이 왜 강을 신으로 섬겼는지 알 만하지. 

감수성이 남다른 노통브답게 매우 아름답고 낭만적이지만, 실제와는 동떨어진 해석이다. 아무르는 ‘큰 강’ 또는 ‘검은 물’이란 뜻의 퉁구스어에서 나온 이름으로 추정된다.

추운 북방, 산은 항상 눈에 덮여 있어 희고, 차디찬 강은 검푸르다. 백산흑수(白山黑水). 만주 남쪽의 백두산과 북쪽 흑룡강은 동북의 자연환경을 상징한다. 중국인은 찬탄한다.

“흰 산이여, 높고도 높구나! 검푸른 강이여, 흐르고 또 흐르는구나!(白山兮高高,黑水兮滔滔)

대흥안령과 소흥안령이 둘러쳐진 헤이룽장성에는 헤이룽강, 쑹화강, 우수리강이 흐르며 비옥한 토지를 만든다. 나선정벌에 참가했던 조선 무장 신류도 헤이룽장의 흑토 대지에 감탄했다.

“이달 6월은 지난 5월보다 가뭄이 더 심했다. 그런데도 밀, 보리, 수수, 조 등 밭곡식이 말라 죽지 않는다. 이곳 땅이 얼마나 기름진지 알 만하다.

흑수(黑水)가 흑토(黑土)를 적셔주는 흑색의 헤이룽장은 황하(黃河)와 황토(黃土)가 어우러지는 황색의 중원과 색채부터 선명한 대비를 이룬다.

중원과 이질적인 이곳에는 누가 살았을까. 중국 사서는 만주의 북부에 살던 이들을 ‘숙신(肅愼)’이라고 기록한다. 숙신계는 읍루(挹婁), 물길(勿吉), 말갈(靺鞨), 여진(女眞) 등 쟁쟁한 종족을 포괄한다. 남부의 예맥계(고조선·고구려), 서부의 동호계(거란·몽골)와 팽팽하게 겨루던 세력이다. 

그러나 숙신은 단일한 집단이 아니다. 오늘날에도 헤이룽장에는 다우르족, 허저족, 오로첸족, 에벤키족 등 다양한 소수민족이 산다. 중국의 소수민족 분류는 엄밀한 문화인류학적 분류라기보다 행정관리를 위한 편의적 분류의 성격이 강한데도, 이처럼 여러 집단으로 나눈 것은 동북방 일대 민족들이 그만큼 다양하다는 뜻이다. 따라서 옛날에는 부족마다 성격이 상당히 다르고 독립성 역시 더욱 강했을 것이다. 그러니 ‘숙신’이란 말은 ‘북만주 일대에 살던 온갖 사람들과 세력들’을 통칭한다고 생각하자. 

 

다우르, 허저, 오로첸, 에벤키族

▲고구려 불교예술의 영향을 받은 발해 석등(渤海 石燈) 복제품(헤이룽장 박물관)

 

삼림이 빽빽한 추운 북방의 산에 살던 이들은 생존을 위해 농사·채집·수렵·어로·목축 등 매우 다양한 활동을 했다. 만주 삼림의 유목민은 몽골 고원의 유목민과도 크게 달랐다. 몽골 유목민이 소·양·말을 키우며 초원의 풀을 뜯게 했다면, 만주의 에벤키족은 순록을 키우며 삼림의 리트머스 이끼를 먹게 했다. 

헤이룽장 모허 출신 작가 츠쯔젠(遲子建)의 소설 ‘어얼구나 강의 오른쪽’에서 에벤키족의 순록 예찬을 들어보자. 

“순록은 머리는 말을 닮았고, 사슴처럼 생긴 뿔, 나귀 같은 몸집에 발굽은 소와 비슷하다. 말과 흡사하지만 말이 아니고, 사슴과도 비슷하지만 사슴이 아니고, 나귀와도 비슷하게 생겼지만 나귀도 아니고, 소 같기도 하지만 소도 아니었다. 한족은 이러한 모습을 두고 ‘사불상(四不像)’이라고 불렀다. 순록은 말머리처럼 위풍당당하고, 사슴의 뿔처럼 아름답고, 나귀의 몸처럼 건강하고, 소발굽처럼 강인하다. 

숙신의 용맹함과 뛰어난 궁술은 멀고 먼 중원까지 알려졌다. 공자는 새에 꽂힌 정체불명의 화살을 보고 숙신의 화살임을 알아맞혔고, 진수도 ‘삼국지 동이전’에서 숙신의 후예인 읍루(挹婁) 사람들은 대부분 용감하고 힘이 세며 활쏘기에 뛰어나다고 했다.

숙신 땅은 부여보다 훨씬 춥고, 인구는 적고, 통일국가를 이루지 못했다. 진수는 읍루에 “대군장(大君長)은 없고, 마을마다 대인(大人)이 있다”고 했다. , 통일된 지도자가 없고 마을 단위로 족장이 있을 뿐이었다. 국가체제를 정비하지 못하고 군소 부족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살았다. 훗날 부여와 고구려가 헤이룽장까지 영향력을 미치기는 했지만, 헤이룽장을 중심으로 삼은 것은 아니었다. 

헤이룽장을 중심으로 삼은 첫 국가는 발해다. 고구려 멸망 후 만주는 당·돌궐·신라의 세력이 미치지 못해 힘의 공백지대가 됐다. 698년 대조영은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규합해 요동에서 탈출한 후 지린성 둔화시 동모산에 이르러 발해를 건국했다. ‘동북의 왕자’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명분은 만주 일대의 호응을 얻었다. 727년 무왕은 성공리에 주변 세력을 통합했음을 일본에 알렸다. 
“열국(列國)을 주관하고 제번(諸蕃)을 거느려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고 부여의 풍속을 잇게 되었다. 

발해는 흑수말갈·당·신라의 도전을 물리치고 동북의 새로운 주인으로 자리를 굳혔다. 동북아시아의 정세가 안정되자 발해는 당나라의 선진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제도를 정비해 내실을 다졌다. 

755
년 당나라에서 안록산의 난이 일어나자, 756년 문왕은 상경용천부(헤이룽장 닝안현)로 천도했다. 안록산은 3개 절도사를 겸해 허베이·랴오닝·산시(山西) 일대를 장악하고 있었다. 발해는 안록산의 습격을 우려해 방어에 더 유리한 상경으로 천도한 것으로 보인다.

상경용천부는 넓은 평야지대에 무단강(牡丹江)과 징푸호(鏡泊湖)를 끼고 있다. 무단강은 쑹화강 최대 지류이고, 징푸호는 95㎢ 면적에 오늘날에도 40종의 물고기가 사는 천연 저수지다. 이처럼 상경용천부는 강·호수·산으로 둘러싸여 농어업과 방어에 유리했다.

마침 8세기는 지구적 온난기여서 추운 만주에서도 농경·목축 여건이 좋아졌다. 안록산의 난 이후 기운이 크게 쇠퇴한 당나라는 더 이상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대내외적 호재가 겹쳐 발해는 ‘동방의 풍요로운 나라(海東盛國)’가 되었다. 발해 영토는 고구려의 두 배에 달했고, 상경용천부는 당시 아시아에서 당나라 장안성 다음으로 큰 도시였다. 상경용천부의 둘레는 16km. 600년 뒤에 세워진 조선 한양(둘레 18km)보다 조금 작을 뿐이다.

 

3무궁화 나라, 화살의 나라

이런 재원은 어디서 나왔을까? 발해 특산품인 가죽·모피·인삼·꿀을 수출한 덕분일 것이다. 920년 일본 왕자가 담비 모피옷을 여덟 벌이나 겹쳐 입고 발해 사신을 맞이했을 정도로 모피는 고귀함의 상징이었다. 

국력이 충실해지자 문화도 발전했다. 발해는 당나라에 60번 이상 사신을 파견해 중국의 문물을 받아들였으며, 빈공과 급제자도 신라 다음으로 많았다. 당나라 시인 온정균은 당나라를 방문한 뒤 귀국하는 발해 왕자를 전송하며 노래했다.

“그대의 나라는 비록 바다 너머에 있으나, 수레 타고 글 읽는 문물은 본디 한집안이네(疆理雖海重, 車書本一家). 

국력이 신라보다 강해졌다고 생각한 발해는 당나라에 발해 사신이 신라 사신보다 윗자리에 앉을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으나, 당은 거절했다. 

“국명의 선후는 (국력의) 강약에 따라 칭하는 것이 아니니, 조제의 등급을 어찌 지금의 성쇠(盛衰)로써 바꿀 것인가. 마땅히 옛 관례에 따르도록 하라.

이에 신라의 최치원은 ‘발해에 윗자리를 허락하지 않은 것에 감사하는 표문(謝不許北國居上表)’을 올렸다. 최치원은 당대 최고의 명문장가답게 찬사에도 능했지만 조롱에도 능했다. 지증대사가 별세했을 때 “오호라! 별들은 하늘나라로 되돌아가고 달은 큰 바다로 빠졌다”고 애도한 최치원은 발해에 대해서는 신랄한 조롱을 아끼지 않았다.

최치원은 발해가 본래 말갈족 오랑캐의 무리로 “고구려가 아직 멸망하지 않았을 때는 본래 사마귀처럼 보잘것없는 부락이었는데 (중략) 올빼미 같은 자들이 백산에서 소란스럽게 모여들고 솔개 같은 무리는 흑수에서 떠들썩하게 울어대” 천하를 혼란케 했으니, “만약 폐하의 뛰어난 생각과 외로운 결단이 신필로 내려지지 않았다면, 근화향(槿花鄕, 신라)의 염치와 겸양의 기풍이 가라앉고 호시국(矢國,발해)의 독통(毒痛)이 더욱 성하게 되었을 것이라”고 감사를 표했다. 신라를 아름다운 ‘무궁화의 나라’로 칭하고, 발해를 사나운 ‘화살의 나라’라고 칭한 대목도 눈여겨볼 만하다. 발해와 신라 사이의 치열한 라이벌 의식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해동성국 발해의 최후는 어이없을 정도로 허망했다. 925 12 16일 요나라 태조 야율아보기가 출격한 지 한 달도 안 돼 926 1 12일 발해는 멸망했다. 발해 국경의 부여부가 함락된 지는 11, 수도 상경용천부가 포위된 지 고작 사흘 만이었다. 역사서에 전하는 바가 없어 속사정은 상세히 알 수 없다. 

다만 역사가들이 추측하기로 발해는 당나라 제도를 받아들였지만 중앙집권력은 크게 떨어졌다. 수많은 토착 세력이 각 촌락의 군사·행정적 권한을 갖고 있어 이들의 합의와 지지가 매우 중요했다. 그런데 발해 말기 기강이 해이해지고 내분이 일어났을 때, 요나라가 발해의 토착세력들을 포섭하며 진격해 순식간에 발해를 제압한 듯하다. 야율아보기 스스로도 말했다.

“발해 사람들의 분열을 틈타 출격했기에 싸우지 않고 이겼다.

 

만주의 해동청, 여진족

요나라는 유목민족 최초의 대제국이었다. 몽골, 만주, 화북의 요지를 장악한 요나라는 송나라에 막대한 세폐를 받고, 교역을 장려하며 부강한 나라가 됐다. 흑룡강 일대에 살던 흑수말갈(黑水靺鞨)을 고구려·발해도 제압하지 못했으나, 요나라는 흑룡강까지 손을 뻗쳐 흑수말갈에 조공을 요구했다. 그러나 과도한 조공 요구는 스스로 무덤을 판 격이 되었다.

흑수말갈의 하나로 여진족이 있었다. ‘여진()’은 해동청이라는 뜻이다. 날래고 용맹한 해동청은 여진족의 이상형이었고, 만응지신(萬鷹之神)이었다. 요나라는 여진족에게 해동청을 공물로 바치기를 강요했다. 해동청은 10만 마리의 매 중에 하나 있을까 말까 할 정도로 희귀한 데다 여진족의 자존심을 상징하는 터라, 요나라의 처사는 여진족의 공분을 샀다. 동북의 왕자 부여·고구려·발해에도 굽히지 않은 흑수말갈의 후예 여진족은 거란족에게 결코 굴복하지 않았다. 

이때 영웅 완안아골타(완옌아구다)가 등장해 여진족을 규합하고 요나라에 반기를 들었다. 요나라 역시 막강한 대제국이었지만, 1만 명이 뭉치면 천하가 당할 수 없다’던 여진족 앞에서는 무력했다. 아골타는 1114년 요의 10만 대군을 출하점(出河店, 헤이룽장성 자오위안현)에서 격파하고, 1115년 금()나라 건국을 선포했다. 

“요나라는 ‘빈철(賓鐵)’을 국호로 삼아 철의 강인함을 취했다. 그러나 철이 비록 강하다 할지라도 언젠가는 부서지고 변할 것이다. 오직 금()만이 변하지 않는다.

요 황제는 20만 대군을 이끌고 친정했지만, 아골타는 겨우 2만 명으로 요나라 군대를 궤멸시킨다. 이후 금나라는 거칠 것 없이 1122년 베이징을 함락하고 3년 뒤에는 요나라를 멸망시킨다.

그러나 금나라는 아골타의 희망대로 영원한 제국이 되지 못했다. 금나라는 요나라의 전철을 그대로 밟았다. 금나라는 용맹한 몽골족을 쥐어짰고, 희대의 영웅 칭기즈칸이 몽골족을 규합해서 금나라를 멸망시켰다. 그러나 금나라는 화북·만주 일대를 100여 년간 지배하며 여진족의 정체성을 확실히 잡아놓았고, 동시에 역량을 키웠다. 비록 금나라는 몽골족에게 망했지만, 그 몽골족을 쫓아낸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 천하를 제패한다. 청나라는 첫 국호를 후금(後金)이라고 지었을 만큼 금나라 계승 의지가 뚜렷했다.

 

대제국 러시아의 등장

그런데 청나라가 중국을 삼키고 있을 때, 저 멀리 서방에서 라이벌이 나타났다. 또 하나의 대제국으로 비상하고 있던 러시아였다. 몽골의 압제에 시달리던 러시아는 부지런히 힘을 키워 마침내 몽골을 몰아냈다. 이반 4(이반 뇌제)는 대외 정복사업을 활발히 벌였다. 그의 주요 관심사는 발트해를 둘러싼 북유럽 일대였지만, 북방의 사자 스웨덴을 제압하기에는 아직 무리였다. 치열한 전투에 비해 실익은 크지 않았다. 그러나 동쪽은 달랐다. 몽골의 잔여 세력을 제외하고는 큰 세력이 없어 러시아의 질주를 막을 수 없었다. 더욱이 시베리아의 풍부한 담비 모피는 러시아의 큰 수입원이 됐다. 

유럽은 아메리카 대륙의 은이 쏟아져 들어오며 상업혁명이 일어났다. 막대한 부를 축적한 귀족·상인 계급은 부유함을 과시하기 위한 사치에 열을 올렸다. 그중에서도 어둠보다 까맣고, 백설보다 부드러운 담비 모피는 유사 이래 절대적 지위의 상징이었다.

러시아는 모피를 찾아 끝없이 동쪽으로 진군했다. 1650년대 러시아 총수입의 10~30%가 모피 무역에서 나왔다. 러시아는 시베리아 정복으로 영토 대국이 됐을 뿐 아니라, 담비·물고기·소금 등 시베리아의 특산물로 막대한 수입을 올렸다. 이렇게 축적한 재원으로 러시아는 근대화 개혁을 추진하며 막강한 군대를 조직했다. 시베리아 정복을 통해 대제국 러시아가 탄생했다. 

거침없이 동진하던 러시아는 시베리아의 동쪽 끄트머리에서 처음으로 강력한 맞수 청나라를 만났다. 만주와 시베리아가 교차하는 헤이룽장성에서 양대 제국 청나라와 러시아는 교전을 벌였다. 다만 양국 모두에 변방이었기에 대규모 전쟁이 일어나지는 않고 소규모 교전에 그쳤다. 

이때 청나라 주력은 중국 본토를 평정하느라 바빴기 때문에, 청나라는 조선에 지원군을 요청했다. 마침 당시 효종은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어내자며 북벌(北伐)의 기치를 높이 들고 정예 포수들을 육성했다. 효종은 1654년과 1658년 두 차례 지원군을 보내 청군과 함께 러시아 원정대를 격퇴했다. 이 때문에 청·러 국경분쟁 사건은 우리에게는 ‘나선정벌’로 유명하다. 청나라를 치자는 대의명분으로 양성한 군대가 오히려 청나라를 도와 러시아를 친 것은 분명 아이러니지만, 조선 포수의 탁월한 사격술은 러시아군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러시아군은 벙거지(戰笠) 쓴 조선군을 두고 말했다. 


“머리 큰 병사들이 두렵다. 

이후 청나라는 중국 전역을 장악하고 삼번의 난을 평정하며, 대만의 정씨 왕조를 정복해 중국 지배를 공고히 했다. 내부가 안정되자 청나라는 러시아의 알바진 요새를 공략하고 1689년 네르친스크 조약을 맺어 북만주의 국경 분쟁을 끝냈다. 이때 만주는 태평양까지 이어진 광활한 땅이었다. 

그러나 청나라와 러시아의 국력이 역전되면서 국경선도 변했다. 아편전쟁으로 청나라가 위기에 몰린 틈을 타서 러시아는 태평양으로 나갈 수 있는 연해주를 확보했다. 니콜라이 1세는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러시아 제국의 국기는 한번 올라가면 다시 내려오지 않는 법이니라.

1860
년 베이징 조약을 체결한 러시아는 본격적으로 만주에 영향력을 확대했다. 동쪽의 블라디보스토크, 서쪽의 랴오닝, 다롄을 양 날개 삼아 남하했다. ‘동방을 정복하라’는 뜻인 블라디보스토크는 러시아의 야심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이때 러시아는 하얼빈을 동북의 허브로 삼았다. 하얼빈은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블라디보스토크, 다롄을 잇는 북만주의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심각한 위기를 느낀 것은 일본이었다. 러시아의 남하 정책은 일본의 북진 정책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일본은 시간이 흐를수록 불리하다고 판단했다. 대국 러시아가 ‘제국의 통로’ 철도를 완비하고 나면 막대한 물량을 순식간에 만주로 투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본은 러시아를 선제공격했고, 1년 반의 전쟁 끝에 힘겹게 승리한다.

 

“코레아 우라!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하얼빈 역 현장

 

지금 돌이켜보면 희한한 일이지만,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했을 때 많은 아시아인이 환호했다. 당시 아시아는 영국·미국·러시아 등 서구 열강의 침략과 수탈에 시달리며 서양에 열등감을 느꼈다. 황인은 제아무리 애써봤자 백인에게 안 된다고 자조하는 풍조가 퍼졌다. 그런데 일본이 러시아를 이기자, 아시아인들은 “우리도 하면 된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중국의 쑨원, 인도네시아의 네루도 모두 일본의 승전에 기뻐했고, 인도의 간디는 “일본의 승리가 사방 곳곳에 뿌리를 내려서 이제 그 열매를 그려볼 수 있게 되었다”는 말까지 했다.

조선의 청년 안중근도 일본의 승리에 기뻐했다. 그러나 당시의 정세로 보면 큰 오판이었다. 조선의 고종과 명성황후는 신진 강호 러시아로 청나라와 일본을 견제한다는 전략을 갖고 있었다. 일본은 1895년 청나라를 꺾고 명성황후를 살해하며 조선을 손아귀에 넣으려 했지만, 이듬해 고종은 궁을 탈출해 러시아 대사관으로 피신하면서까지(俄館播遷) 친일내각을 견제했다. 러시아와 일본이 팽팽하게 대립할 때에는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견제하는 전략[引俄拒日]’이 효과 있었다. 그러나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이기자 유일한 견제 세력인 러시아가 사라졌다. 이제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로 삼는 데 방해될 것이 없었다.

1905
 9 5일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자마자, 11 17일 이토 히로부미는 을사늑약 체결을 강행했다. 이로써 조선은 정식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했고,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통감부 초대 통감이 되어 조선의 내정에 깊숙이 관여했다. 고종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특사 이준·이상설·이범진을 파견해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렸지만, 열강의 동정을 샀을 뿐 변화를 이끌어낼 수는 없었다. 1907년 고종 황제는 퇴위했고, 조선의 군부와 무관학교가 폐지되어 외교안보 주권이 모두 사라졌다.

그 후 2년 뒤 1909 10 26일 안중근 의사는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다. 청나라 영토지만 러시아 동청철도가 관할하는 하얼빈 역에서 조선 독립군 참모중장이 일본의 수상을 벨기에제 권총 FN M1900으로 사살하며 에스페란토어로 외쳤다.


“코레아 우라(대한제국 만세)!”안중근 의사의 의거는 하얼빈이 얼마나 다양한 세력 간 이해관계가 얽혀 돌아가는 땅인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안중근은 먼저 러시아 관헌에게 체포돼 심문을 받았으나, 러시아는 그가 조선 국적을 가졌기에 러시아 재판에 회부하지 않고 일본에 인계했다. 일본은 ‘한국 신민과 일본제국 신민을 동등하게 대하는’ 을사늑약과 일본제국의 형법에 의거해 안중근을 사형시켰다.

1910
 8 29일 일본이 대한제국의 통치권을 받아내며 대한제국은 멸망했다. 조선총독부가 조선을 다스리는 일제강점 시대가 되었다. 한반도를 식민지로 삼은 일본은 푸이의 괴뢰정부를 내세워 만주국을 사실상 식민통치했다. 일본제국은 미국·영국과 적대하며 교류·유학이 모두 끊어졌고 서양 문명을 만날 곳이 없었다. 이때 하얼빈은 “일본인이 접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서양”이었다. 1917년 러시아혁명 후 많은 백계(반공) 러시아인, 유대인, 동유럽의 폴란드인, 중앙아시아의 무슬림들까지 하얼빈에 망명했다. 하얼빈은 30여 민족이 섞여 사는 국제도시였고 ‘서양문명의 프런티어’였다. 

더욱이 나라가 망하고 비참한 신세가 된 러시아인을 보며 일본인은 자부심을 느끼기도 했다. 소설가 다치바나 소토오는 말했다. 


“하얼빈! 바다가 없는 상하이…(중략)…엽기와 소설적인 것(로맨틱한 것)과 모험이 소용돌이치며, 과거와 미래가 지그재그로 교향악을 울리고 있는 북만의 국제도시! 그리고 쇠락한 제정 러시아의 대공작이 길모퉁이에서 행인의 구두를 닦으며 제실(帝室) 가극단의 간판 무용수가 나이 들어 길가에서 성냥을 팔고 있는 슬픈 도회!

 

4새로운 무기, 세균

▲곳곳에 러시아풍 건축물이 있는 하얼빈 풍경

 

그러나 일본의 기고만장함은 오래갈 수 없었다. 중국은 연이은 패전에도 불구하고 항일 의지를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소련은 힘겨운 내전과 혼란을 극복한 뒤 5개년계획으로 경제를 추스르고 다시금 대국의 저력을 보여주었다. 군사모험주의에 맛들인 일본은 소련을 공격해보았으나 연달아 패했다. 1939년 할힌골 전투에서 참패한 일본은 소련과 불가침조약을 맺었다. 이로써 제2차 세계대전에서 소련은 독일과의 전쟁에, 일본은 중국과의 전쟁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전력을 집중한다고 해도 광활한 중국 대륙을 정복하는 것은 버거운 일이었다. 일본은 물량 부족을 만회하기 위해 세균전 무기를 개발했다. 당시 일본군 수뇌는 주장했다.

“일본은 철·광물 등 무기를 만들 수 있는 원자재가 부족하므로 새로운 무기를 개발해야 한다. 세균전 무기가 그중 하나다. 

하얼빈에 설치된 731부대는 사람을 통나무(마루타) 취급하며 잔학한 생체실험을 했다. 또한 일본은 “다 죽이고, 다 태우고, 다 뺏는(殺光, 燒光, 搶光)” 삼광작전(三光作戰)을 수행하며 중국을 잔혹하게 지배했다. 

그럼에도 일본은 패전했다. 일본은 끝내 중국을 제압하지 못했고, 미국은 일본 본토에 원자폭탄을 투하했으며, 소련은 만주로 진격했다. 소련의 명장 바실레프스키는 ‘8월의 폭풍’ 작전을 시작한 지 한 달도 안 돼 만주 전역을 점령했다. 국민당에 비해 절대 열세였던 공산당은 역전의 순간이 온 것을 직감했다. 마오쩌둥은 말했다.

“만약 우리가 모든 근거지를 다 잃는다 해도 동북만 있다면 중국 혁명의 기초는 견고하다. 물론 다른 근거지도 잃지 않고 동북도 있다면 중국 혁명의 기초는 더욱더 공고하다.

국민당의 장제스도 만주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지만, 공산당의 주력이 북방에 있는 반면, 국민당의 주력은 남방에 있었다. 더욱이 소련은 다롄항을 폐쇄해 국민당의 수송선을 들여보내주지 않았고, 철도도 이용하지 못하게 했다. 

국민당의 발이 묶인 사이에 공산당은 재빨리 만주 요지를 장악했다. 소련은 노획한 일본군 항공기 925, 전차 369, 야포 1226, 소총 30만 정 등 막대한 무기와 탄약·식량·군수품을 대부분 홍군에 넘겨주었다. 

1948
년 린뱌오가 만주 전역에서 국민당 군대에게 승리를 거두면서, 공산군은 확실히 승기를 잡기 시작했다. 결국 공산당은 만주를 기반으로 천하를 통일한 청나라의 정복을 재현했고, 압도적 우위에 있던 장제스는 거짓말처럼 마오쩌둥에게 밀려 대만으로 도망치는 신세가 되었다. 중국은 전통적으로 “중원을 얻어야 천하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해왔지만, 청나라 이후로는 “만주를 얻어야 천하를 얻을 수 있다”는 말이 생겼다.

 

“만주 얻어야 천하 얻는다”

공산혁명 초기에 중국과 소련의 관계는 매우 굳건했다. 그러나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이 있을 수 없다던가. 소련이 사회주의 진영의 맹주로 나서며 ‘사회주의 형제국’들의 내정에 간섭하자 중국은 크게 반발했다. 양국의 긴장은 헤이룽장성 지역 국경분쟁으로 이어졌다.

츠쯔젠의 소설 ‘돼지기름 한 항아리’는 중국·소련의 미묘한 관계 변화에 휘둘리는 헤이룽장 사람들의 일면을 그려냈다. 중국과 소련의 관계가 좋았을 때, 헤이룽장의 한 산촌에서 살던 여자가 출산을 앞두고 극심한 진통이 왔다. 산촌에서 중국 읍내까지 가기보다 차라리 강 건너편 소련 읍내에 가는 게 훨씬 빨랐다. 그래서 가족은 썰매로 얼어붙은 강을 건너 소련의 병원에서 무사히 아이를 낳았다. 그러나 문화대혁명이 일어나고 양국 관계가 험악해지자, 소련에서 출산한 가족 전체가 소련 스파이로 몰려 고초를 겪었다. 모든 광풍이 지나가고 난 다음 그녀는 “날개를 활짝 펴고 강 양안 사이를 날아다니는 새들의” 자유로움을 부러워한다.

외교에는 영원한 친구도 적도 없다. 중국은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을 끌어들였지만, 오늘날은 미국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와 협력하고 있다.

오늘날 헤이룽장성은 다소 모순적인 상황에 빠져 있다. 중화학공업이 중국에서 가장 먼저 발달한 곳이지만, 그 때문에 오히려 중국에서 가장 낙후한 공업지대가 됐다. 중국·러시아·몽골·한반도를 잇는 동북아의 허브임에도 인근 지역의 경제가 그리 발달하지 않고 경제교류가 제한적이라 물동량 부족으로 허브 구실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러시아 창구이나 러시아는 중국과 협력·친선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어마어마한 중국 인구가 연해주를 잠식할 것을 우려해 극동 교류에는 소극적이다. 

헤이룽장의 경제는 과거의 덫에 걸려 있다. 1차산업은 쌀·옥수수·콩 위주고, 2차산업은 노후한 중화학 공업이며, 3차산업은 유통·요식·교통 등 전통 서비스업 위주다. 헤이룽장도 스스로의 약점을 잘 알기에 산업구조를 선진화하고, 금융·물류업, IT 서비스 분야(클라우드 컴퓨팅) 등을 육성하며, 러시아·몽골 등과의 교류를 촉진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걸리며 성과가 쉽게 나타나지 않는다. 

헤이룽장을 둘러싸고 있는 중국·러시아·몽골·남북한·일본·미국 등 여러 나라가 화해 협력하고 공존공영을 추진할 때 헤이룽장에 진정한 번영이 찾아오지 않을까. 과거 긴장의 땅이었던 헤이룽장이 미래에는 협력의 땅이 되기를 바란다.

 

◆8월 호 黑龍江

◇아골타의 꿈, 누르하치의 기개가 서린 땅

 

헤이룽강은 이름 그대로 검은 용처럼 동북아시아를 휘감고, 양대 강국인 중국과 러시아 국경을 가른다. 추운 북방, 산은 항상 눈에 덮여 있어 희고, 차디찬 강은 검푸르다(白山黑水). 1122년 금나라 아골타(阿骨打)는 이곳에서 2만 병력을 일으켜 베이징을 함락시켰고, 500여 년 뒤 누르하치(努爾哈赤)는 이곳에서 정명(征明)의 기치를 들어올렸다. 아골타와 누르하치의 후손들은 이제 낙후된 중화학공업 도시를 털고 금융, 물류 중심의 동북아 경제 허브로 달려가고 있다.

 

▲곳곳에 러시아풍 건축물이 있는 하얼빈 풍경.

 

▲모스크바, 블라디보스토크, 랴오닝, 다롄 등을 잇는 교통의 요지 하얼빈 역

 

▲로봇 놀이기구에 탑승한 중국 어린이

 

▲결혼식을 준비하고 있는 하얼빈 유대인 회당.

 

▲세균전과 잔혹한 인체실험(마루타)으로 악명 높던 일제 관동군의 731부대 유적지.

 

▲하얼빈 스탈린 공원.

 

▲러시아풍 건축물이 있는 하얼빈 시내.

 

▲태양섬(太陽島)으로 가는 케이블카와 유람선.

 

◆10월 호 마지막 회 《네이멍구자치구》

◇蒙 말발굽 소리 사라진 칭기즈칸의 고향 

 

1) 천하무적의 맹장 여포와 그의 적토마가 달리던 땅. 세계 최대 정복자 칭기즈칸을 배출한 땅. 그러나 오늘날의 내몽골은 ‘사람은 늘고 가축은 줄어든’ 흔한 현대 도시일 뿐이다. 서투른 개발로 초원은 사막이 되고, 지하자원을 캐내 간 현장엔 지독한 오염만 남았다. 몽골 전사의 후예들은 말한다. 돈 벌어 아파트 사고 싶다고.

 

▲하늘과 구름, 드넓은 땅. 몽골 초원에서 보이는 모든 것이다.

 

여행 중 내몽골 출신 중국인을 만났을 때, 나는 물었다. “와~ 그러면 너도 어릴 때 말 타고 다녔어? 

그는 어이없다는 듯 대답했다. “아니거든?! 내몽골도 이제 차 타고 다니거든!

훗날 내몽골의 구도(區都) 후허하오터(呼和浩特)에 가보니 높은 빌딩이 줄지어 서 있고 넓은 차도에 차들이 달리는 평범한 도시였다. 말 한 마리 눈에 띄지 않아 내몽골의 흥취를 느낄 수 없었다. 

한 남자가 차도를 무단횡단해 중앙선 가드레일을 넘는 모습이 그나마 가장 내몽골다웠다고 할까? 그는 가슴 높이의 가드레일을 매우 날렵하게 뛰어넘었다. 한달음에 말 위에 올라타는 몽골 전사 같았다. 

네이멍구자치구(內蒙古自治區)의 약칭은 ‘어리석을 몽()’자다. 몽골어로 ‘몽골’은 ‘세상의 중심’이란 뜻이다. 그러나 중원의 한족은 몽골족에 ‘몽고(蒙古)’라는 이름을 붙였다. ‘무지몽매하고[] 고루한[] 것들’이라는 이미지를 덮어씌운 것이다. 한족에게 몽골족은 무지함을 일깨워줘야 할, 즉 계몽(啓蒙)의 대상이었다. 

이 같은 편견은 몽골의 조상, 흉노 때부터 시작됐다. ‘흉노’는 흉노어로 ‘사람’이라는 뜻인데, 중원은 ‘흉악한 노예’를 떠올리게끔 ‘흉노(匈奴)’라고 음차했다. 사마천은 비교적 점잖게 하()나라 하후(夏侯)씨의 후예가 북방으로 가서 흉노족이 되었다고 설명했지만, 전국시대 중원의 노예들이 혼란을 틈타 북방으로 도망쳐 흉노족이 되었다는 속설이 횡행했다. 중원의 떨거지들이 북방 오지에 가서 야만스럽게 산다는 멸시가 깔려 있다.

 

‘황소 꼬리가 부러지는 추위’

▲후허하오터의 이슬람 사원 모스크, 몽골은 여러 종교 및 문화에 관용적이었다.
 

그러나 흉노는 중원의 편견에 휘둘리지 않았다. 중원이 천하의 중심이라고 자부했듯이, 흉노 역시 자신의 터전을 세상의 중심으로 여겼다. ‘하늘의 아들’, 즉 천자(天子)가 중원을 다스리듯이, 역시 하늘(Tengri)의 아들인 탱리호도선우가 북방을 다스렸다.
 
북방 초원은 매우 거친 땅이다. 북쪽인 데다 고원지대라 겨울은 매우 길고 여름은 매우 짧다. 몽골국의 관공서는 매년 9월 중순 난방을 틀기 시작해 5월 중순에야 멈춘다. 몽골어는 추위를 구분하는 말이 발달했는데, ‘양이 잠자는 바닥이 어는 추위’ ‘3살 된 황소의 뿔이 얼어 부러지는 추위’ ‘4살 된 황소의 꼬리가 얼어 부러지는 추위’ 등 추위의 이름도 매우 살벌하고 다양하다. 

초원은 일조량과 물이 적고 건조해 풀만 자랄 수 있을 뿐 농사에 부적합하다. 풀조차 가축이 다 뜯어먹으면 초원은 금세 황무지와 사막으로 변한다. 따라서 몽골 고원에 사는 이들은 가축을 데리고 목초지를 옮기며 살아가는 유목민이 되었다. 

유목은 초원에 가장 적합한 생활양식이었지만, 그 삶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정성껏 가축을 길러도 벼락 한 번, 폭설과 홍수 한 번에 몰살당하기도 한다. ‘장군도 화살 한 대면 끝장나고, 삼대 부자도 폭설 한 번이면 망한다’는 몽골 속담은 초원 생활의 어려움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따라서 유목민이라 해도 유목만으로 생활하기란 힘들었다. 사냥, 약탈, 장사 등 여러 활동을 병행해야 했다. 이런 유목민에게 전사(戰士)는 매우 중요했다. 목초지와 가축을 지키고, 사냥을 이끌며, 전쟁·약탈을 수행하는 일은 부족의 생존과 직결돼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북방 유목민들은 용사를 존경했고, 지도자를 뽑을 때에도 능력을 최우선으로 고려했다.

 

2)초원의 戰士들

여러 부족이 모여 회의를 통해 우수한 지도자를 선출하는 것은 평등하고 합리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부작용도 만만치 않았다. 회의 결정에 불복하고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 안다”며 부족 연맹 간 전쟁을 치르는 일이 잦았기 때문이다. 탁월한 영웅이 유목민족을 규합해 위세를 떨치다가도, 순식간에 분열해 사라지는 일은 유목민족 역사의 전형적인 패턴이 되었다.

춘추전국시대 말에 진시황이 중국 천하를 통일했을 때, 흉노의 영웅 두만선우는 북방의 여러 부족을 병합했다. 남방의 진나라와 북방의 흉노가 팽팽히 겨루는 국면이 형성됐다. “진나라를 망하게 할 사람은 호(亡秦者胡也)”라는 점괘를 들은 진시황은 ‘호()’를 오랑캐, 그중에서도 북방의 흉노라 여겼다. 그만큼 흉노는 진나라에도 위협적인 존재였다.

기원전 215년 몽염 장군은 30만 대군으로 흉노를 쳐서 오르도스를 빼앗고 44개의 성을 이어 쌓아 만리장성을 만들었다. 그러나 진시황이 죽자 차남 호해(胡亥)는 간신 조고와 함께 국정을 농단했다. 진나라는 연이은 반란으로 안에서부터 무너졌다. ‘망진자호야’의 ‘호()’는 바로 진시황의 아들 호해다. 

기원전 209년 진승·오광의 난 이후부터 기원전 202년 유방의 천하 통일까지 장장 7년이 걸렸다. 천하 통일 이후에도 한나라가 제후의 반란을 평정하고 전란의 상처를 수습하는 데에는 상당한 세월이 필요했다. 

중국의 견제가 사라진 사이 흉노는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두만선우가 영웅이라면 그의 아들 묵돌은 대영웅이었다. 두만은 총애하던 후궁의 아들을 태자로 세우고 싶어서, 묵돌을 경쟁국인 월지에 인질로 보내놓고 월지를 공격했다. 월지의 손으로 묵돌을 제거하려는 차도살인(借刀殺人)의 계략이었다. 그러나 묵돌은 혼란한 틈을 타서 월지의 명마를 훔쳐 타고 흉노로 돌아왔다. 영웅을 숭상하는 흉노인에게 묵돌의 인기는 한껏 높아졌다.

묵돌은 자신에게 절대적 충성을 바치는 친위대를 양성했다. 묵돌이 소리 나는 화살인 명적(鳴鏑)을 날리면 1만 명의 친위대도 무조건 일제히 화살을 쏘도록 했다. 묵돌은 애마를 향해 명적을 날린 다음, 주군의 애마가 다칠까봐 주저하고 화살을 쏘지 않은 이들을 죽였다. 다음으로 애첩을 향해 명적을 날리고, 역시 화살을 쏘지 않은 이들을 죽였다. 마지막으로 아버지 두만선우에게 명적을 쏘았을 때는 화살을 쏘지 않은 이가 아무도 없었다.

 

한나라 위 흉노

흉노를 장악한 묵돌은 숙적 월지를 격파하고 인근의 26국을 평정했다. 다시 한 번 남중국과 북흉노가 대립하는 시기가 되었다. 항우를 꺾은 유방도 흉노에게 여지없이 완패했다. 한나라는 흉노와 형제의 맹약을 맺고 휴전한다. 한나라는 매년 솜 비단 쌀 술 등의 물품을 지급하며 황실의 여자를 흉노 선우에게 시집보내기로 약속했다. 

이후 흉노는 한나라 위에 군림하는 태도를 보였다. 묵돌은 유방이 죽자 홀몸이 된 여태후에게 “내게 있는 것으로 그대에게 없는 것을 채워주겠다”는 음담패설을 국서로 보냈다. 여태후는 성질이 고약해 황제 유방도 그녀를 꺼렸었다. 그녀는 묵돌의 모욕적인 편지를 받고 “피를 토할 지경이 되었지만”, 흉노군의 위력 앞에서는 성질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 여태후는 “저는 이제 늙어서 기력이 쇠하고 머리카락과 이도 다 빠져버려 대왕의 마음에 드시지 않을 것”이라고 겸양하며 묵돌에게 수레 두 대와 말 여덟 필을 보냈다.

한문제(漢文帝) 1 1촌 목간(木簡)의 국서를 보내자 노상계죽선우는 그보다 큰 1 2촌의 목간에 형처럼 으스대는 내용의 답장을 보냈다. “천지가 생겨난 곳, 해와 달이 머무는 곳의 흉노 대선우, 삼가 한의 황제에게 묻노니 안녕하신가? 

이 시기 흉노가 자부한 대로 “여러 활을 쏘는 민족은 합쳐져 일가가 되고, 북방의 고을은 모두 안정되었다.” 흉노는 동서교역로의 상권을 장악해 재원을 확보하며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한나라 문제·경제는 2대에 걸쳐 와신상담하는 자세로 부지런히 힘을 길렀고, 한무제는 반세기나 흉노와 집요하게 싸웠다. 결국 흉노는 한나라의 힘에 밀려 세력이 꺾인다. 동시에 권력을 둘러싸고 내분이 일어났다. 여기에 더해 악천후로 흉노의 살림살이가 큰 피해를 입자 흉노에 복속되었던 여러 유목민족(정령 오환 오손 등)이 만만해진 흉노를 공격한다. 한나라는 이들 유목민족을 후원한다. 

한서(漢書) 흉노전은 전한다. “수개월에 걸쳐서 눈이 그치지 않아 가축은 죽고, 백성은 병에 걸리고, 곡식은 열리지 않았다.” “정령은 흉노의 쇠약함에 힘입어 그 북쪽을 공격하고, 오환은 그 동쪽을 치고, 오손은 그 서쪽을 공격하였다. 이들 세 나라는 수만 명의 백성과 수만 필의 말과 그 밖에 수많은 소와 양을 죽였다. 더욱이 기아에 따른 사망도 이어져 백성의 10분의 3, 가축의 10분의 5가 죽었다. 

흉노는 내분 끝에 남흉노와 북흉노로 갈라졌다. 한편 한나라는 왕망의 찬탈로 멸망했다가 광무제 유수가 후한을 열었다. 이때 광무제는 오환족 기병의 도움을 많이 받았고, 이후 북방 유목민과 곧잘 제휴했다. 남흉노가 북흉노에게 밀리자, 광무제는 남흉노의 8부락을 병주(幷州)에 살게 했다. 남흉노로 북흉노를 견제하는 전략이었다

후한 말 병주는 산시(山西)성과 내몽골 일부 지역을 합친 지역이다. 이곳은 유목민과 한족이 섞여 살며 독특한 기풍을 지니게 됐고, 유목민족이 중국으로 진출하는 발판이 되었다.

 

3)여포의 영웅담은 ‘사실’

‘삼국지연의’는 한족 중심의 역사소설이라 이민족은 조연일 뿐이다. 그런데 삼국지를 읽었건 읽지 않았건 누구나 다 아는 내몽골 출신의 용사가 있다. 천하무적의 맹장 여포다. 여포는 병주 오원군 구원현(州 五原郡 九原縣) 출신이다. 이 곳은 오늘날 내몽골의 바오터우(包頭)시 주위안(九原)구다. 

삼국지연의는 사실과 허구가 절묘하게 배합된 소설이다. ‘이건 사실이겠지’라고 여긴 것은 허구이고, ‘이건 뻥이겠지’라고 여긴 것은 사실인 경우가 종종 있다. 여포와 관련된 삼국지연의의 기록은 의외로 사실과 일치하는 부분이 많다. 

여포가 멀찍이 세워둔 화극(畵戟)의 창날을 활로 쏴 맞춰 유비와 원술의 싸움을 중재한 ‘원문사극(轅門射戟)’ 이야기는 창작이라 여겼지만, 정사인 진수의 ‘삼국지’에도 버젓이 기록된 사실이다. 이처럼 여포는 활쏘기와 말타기에 매우 뛰어나 스스로 ‘비장(飛將)’이라 자부했다. 여포의 고향이 내몽골임을 감안하면 그가 활 쏘고 말 타는 법을 어디서 배웠을지 짐작이 간다.

여포에게 명마 ‘적토(赤兎)’가 있던 것 역시 사실이다. 삼국지연의의 3대 명마는 여포의 적토마, 조조의 절영, 유비의 적로마지만, 실제로 정사에 기록된 말은 적토마가 유일하다. “세상에 말은 많지만 그중 단 한 마리뿐인 적토마야, 천하에 사람은 많지만 그중 단 하나뿐인 여포 봉선(馬中赤兎 人中呂布)”이라는 말도 당대에 실제로 회자되었다.

적토마는 아할테케(Akhal-Teke)로 추측된다. 오늘날 투르크메니스탄의 천연기념물이며, 크고 늘씬한 체구에 황금빛 털로 빛나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이라는 찬사를 받는 명마다. 말을 중시하는 내몽골 현지인들이 초원 실크로드 교역을 통해 투르크메니스탄의 명마를 입수했던 것이리라. 

여포가 유비를 동생으로 여겼다는 것도 사실이다. 여포는 유비를 만나자 매우 반가워했다. “나와 그대는 모두 변변치 못한 변방 출신이오.” 그러고는 ‘유비를 장막 안에 있는 부인의 침대에 앉히고 아내에게 술잔을 따르게 하고는 동생으로 삼았다. 

여포의 이와 같은 기행(?)은 중원의 예법으로는 매우 무례하게 비쳤지만, 북방의 풍습으로는 엄청난 친근감을 보인 것이 아니었을까? 여포가 유비에게 변방 출신으로서의 동질감을 강조한 것도 변방에 대한 중원의 싸늘한 시선에 서러웠는데, 같은 변방의 무장을 만나 반가웠던 때문이리라. 다만 역시 북방 출신인 유비가 여포의 태도를 달가워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봐서는 아무래도 이 모두가 여포 개인의 기행이었던 듯하다. 같은 북방이라도 유비의 허베이성과 여포의 내몽골 풍습이 크게 다른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칭기즈칸, 고귀한 왕의 이름

▲몽골 천막 게르 내부. 몽골인의 영혼, 칭기즈칸 초상화가 걸려 있다.

 

여포는 조조에게 사로잡혔을 때도 호언장담했다. “명공이 보병을 거느리고 나 여포로 하여금 기병을 거느리게 한다면 천하를 쉽게 평정할 수 있을 것이오. 

조조도 그 말에 마음이 흔들릴 만큼 여포의 무용은 뛰어났다. 조조는 배신을 일삼은 여포 개인은 처단했지만, 여포 휘하의 장수인 장료·장패 등은 중용했다. 위나라 기병이 삼국 최강이었던 것도 오환·선비 등 북방 유목민의 기병을 고용했기 때문이다.

진나라가 삼국을 통일할 때까지는 이들 북방 유목민들을 잘 제어했다. 그러나 내부에서 팔왕의 난이 일어나고 북방에 대한 통제력을 잃자 곧 516국시대가 열렸다. 한화(漢化)한 선비족의 수·당이 중국을 통일했고, 당태종 이세민은 북방 유목민들에게서 ‘천가한(天可汗·칸 중의 칸)’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당나라 이후 송나라가 중원을 통일했지만, 북방의 주도권만큼은 유목제국인 요나라에 고스란히 내어주어야 했다. 

몽골 고원에서는 오랫동안 여러 소부족이 각축전을 벌였다. 유목제국 요나라, 금나라는 유목민들이 한번 결집하면 걷잡을 수 없도록 강해진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래서 요·금은 군소 유목민 집단이 성장하는 것을 방해했다. 한 세력이 제법 커지면 다른 소부족을 키워서 그 세력을 없앴고, 이 부족이 다시 커지면 또 다른 부족을 키워 없애버렸다. 이런 과정이 반복되니 몽골의 모든 부족이 저마다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원한 관계를 맺었다.

칭기즈칸의 아버지 예수게이도 한창 떠오르는 유망주였으나 적대 부족에게 독살됐다. 몽골은 쇠로 된 말 등자 하나만 있어도 부자라 할 만큼 가난한 지역이었는데, 칭기즈칸 부족은 그중에서도 더욱 가난했다. 칭기즈칸 일가를 먹여 살리기 힘들었던 부족은 일가의 재산을 빼앗고 밖으로 내쫓았다. 칭기즈칸 일가는 유목민의 생계수단인 가축 한 마리 없이, 허허벌판에서 들쥐를 잡아먹으며 연명했다. 

훗날 ‘세계 최대의 정복자’라는 칭호를 얻은 칭기즈칸은 의외로 ‘타고난 영웅’이 아니었다. 어릴 때에는 몽골인 최고의 친구인 개를 무서워했고, 활쏘기나 힘은 동생보다 못했으며, 용병술은 의형제 자무카만 못했다. 

자무카가 용병의 천재 조조 같았다면, 칭기즈칸은 인덕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휘어잡은 유비와 같았다. 칭기즈칸은 자신이 배반당할지라도 상대를 배반하지 않았다. 이익에 흔들리지 않고 대의명분을 따랐다. 칭기즈칸을 이긴 자들은 작은 이익을 얻었지만, 칭기즈칸 자신은 패배하면서도 몽골인들의 마음을 샀다. 그래서 칭기즈칸은 몰락해 도망 다니는 상황에서도 끝끝내 다시 일어섰고, 그의 주변에는 사람들이 모였다 

또한 칭기즈칸은 총명하지는 않았지만 고난과 실패 속에서 배운 교훈을 잊지 않았다. 자무카에게 참패를 당한 칭기즈칸은 최후의 결전에서 압승을 거뒀다. 결과적으로 전술의 귀재 자무카는 칭기즈칸을 ‘전쟁의 신’으로 만들어준 스승이 되었다.

이렇게 초원의 격전 속에서 대기만성의 영웅으로 성장한 칭기즈칸을 막을 자는 아무도 없었다. “우리 몽골 말들의 발굽은 어디든 간다. 하늘을 오르기도 하고 바다에 뛰어들기도 한다”고 몽골인들이 자부할 만큼 몽골의 말은 탁월했다. 몽골인들은 어떤가? “한가할 때 한족은 이를 잡고, 우리는 칼을 간다”고 할 만큼 거친 용사들이다. 게다가 칭기즈칸을 깊이 흠모한 몽골의 용사들은 맹세했다. “그가 나를 불로 보내건 물로 보내건 나는 간다. 그를 위해 간다.” 뛰어난 용사와 뛰어난 말, 그리고 이 모두를 규합하는 대영웅을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몽골군은 중국, 중동, 동유럽 일대를 휩쓸었다. 중국인들은 몽골군이 “하늘이 무너지는 것처럼 나타났다가 번개처럼 사라졌다”고 두려워했고, 영문학의 아버지 제프리 초서는 ‘캔터베리 이야기’에서 노래했다. “이 고귀한 왕의 이름은 칭기즈칸이었으니, 그는 당대에 큰 명성을 떨쳐 어느 지역 어느 곳에도 만사에 그렇게 뛰어난 군주는 없었다”.

 

4)신이 손가락을 여럿 주신 이유

그러나 몽골이 세계제국으로 발전한 것은 단지 군사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몽골은 상업을 진흥하고 열린 자세로 여러 문화와 민족을 수용했다. 

우구데이칸은 상인이 부르는 값의 두 배를 주며 상품을 사들였고, ‘상인이 얼마를 요구하든 거기에 10%를 얹어 사겠다’고 포고했다. 몽골제국의 수도 상도(上都)는 일확천금이 보장되는 땅, 따라서 상인에게는 천국과도 같은 땅이었다. 곧 상도는 유럽 상인들에게 ‘재나두(Xanadu·이상향)’로 불렸다. 

몽골의 관용적 자세는 종교 수용에서도 엿볼 수 있다. 유럽에서 온 선교사가 천주교의 절대성을 주장하자, 뭉케칸은 종교대회를 열었다. 대결을 좋아하는 몽골인들은 종교대회를 씨름대회처럼 진행했다. 천주교 이슬람교 불교 대표들을 뽑아 선수단과 심판단을 구성했고, 각자 자신이 믿는 종교의 우수성에 대해 논증하면 심판단이 제일 우수한 논증에 손을 들어주었다. 그리고 한 라운드가 끝날 때마다 선수들은 마유주를 벌컥벌컥 들이켜야 했다.

처음에는 제법 논리적으로 흘러갔지만, 선수들은 곧 술에 잔뜩 취했다. 천주교도가 목청 높여 찬송가를 부르기 시작하자, 이슬람교도는 코란을 큰소리로 암송했다. 불교도는 명상에 빠져 ‘고요함으로 격렬함을 제압(以靜制動)’하고자 했다 

결국 대회는 최종 승자 없이 모두 비긴 것으로 끝났다. 뭉케칸은 말했다. “신이 손에 여러 손가락을 주셨듯 사람들에게도 여러 가지 길을 주셨소.” 하나의 종교만을 고집하지 않고, 여러 사상과 종교를 모두 인정하는 관용의 자세였다. 

칭기즈칸의 손자 쿠빌라이는 남송을 정복하고 대원(大元)의 건국을 선포했다. 천하에서 ‘으뜸[]’가고, 위대한 ‘시작[]’을 여는 ‘텡그리[乾元]’의 나라라는 뜻이다.

‘원사 지리지’는 말한다. “봉건이 변하여 군현이 된 이후로, 천하를 가진 자 가운데 한·수·당·송 등이 강성하였다. 그러나 그 강역의 넓이는 모두 원에 미치지 못하였다. 한은 북적(北狄·흉노)에 괴로움을 당하였고, 수는 동이(東夷·고구려)를 굴복시키지 못하였으며, 당은 서융(西戎·위구르) 때문에 환란을 겪었고, 송의 걱정거리는 언제나 서북에 있었다. 그러나 원은 삭막(朔漠)에서 일어나 서역을 병합하고 서하를 평정하였으며, 여진을 멸하고 고려를 신속시켰고 남조(南朝·대리국)를 평정하고 마침내 강남(江南·남송)을 떨어뜨려 천하가 하나가 되었다.

 

분할된 몽골

▲몽골 초원의 석양. 

 

훗날 몽골을 몰아내고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도 몽골이 중국의 주인이었음을 시인했다. “몽골이 비록 오랑캐이긴 하나 100년 동안이나 중국을 지배했으니, 짐과 경들의 부모는 모두 그들에 기대어 자란 것이다.” 명나라는 중국 전통의 천명사상에 입각해, 원나라를 정통 왕조로 인정하고 그 천명이 명나라에 계승되었다고 주장했다 

또한 청태종 홍타이지는 1632년 몽골의 릭단칸을 격파하고 칭기즈칸의 옥새를 손에 넣은 뒤 청나라가 대원제국의 정통성을 이어받았음을 천명했다. 몽골과 관련 없는 한족의 명나라도, 만주족의 청나라도 모두 원나라의 후계자임을 자처했다. 그만큼 세계제국 원나라의 위상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았다. 

한편 북방으로 쫓겨 간 몽골족은 여전히 강력했다. 군사적 재능이 탁월했던 명나라 영락제도 여섯 번이나 대대적으로 몽골 원정에 나섰지만 끝내 몽골을 완전히 제압하지 못했다. 그 후손 정통제는 50만 명을 거느리고 원정에 나섰지만, 몽골의 일개 부족인 오이라트에게 포로로 잡히는 치욕을 당했다. 청나라가 만주 일대를 장악하고 산해관을 넘을 때에도 몽골 기병은 중요한 파트너였다. 

청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고 한 동안 잠잠하던 몽골 고원에 또 하나의 영웅이 등장해 선풍을 일으켰다. 준가르 부족의 지도자 갈단은 광활한 초원을 장악하고 청나라를 위협하는 패자로 떠올랐다. 강희제는 세 차례나 몸소 친정(1696~1697)한 끝에 결국 갈단을 처치했다

강희제는 일생일대의 숙제를 끝낸 기분으로 말했다. 2년 동안 나는 세 차례나 친정을 하면서 바람에 쓸리고 비에 젖은 사막을 건넜고, 황량하고 사람도 없는 벌판에서 하루걸러 식사를 했다. … 끊임없는 이동과 고난이 이 같은 위업을 이끌어낸 것이며, 갈단이 아니었다면 나는 그런 일을 결코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몽골족의 생명력은 실로 질겼다. 건륭제 때 준가르는 중앙아시아와 신장성 일대를 위협하는 세력으로 자랐다. 건륭제는 한 지역을 점령할 때마다 주민을 몰살하는 초강수를 두었고, 훗날 자신의 십전무공(十全武功·건륭제의 10대 원정) 중 준가르 박멸을 으뜸 공로로 꼽았다 

근대적 제국인 청나라와 러시아는 몽골의 활동 영역을 크게 잠식해갔다. 결국 20세기에 이르러 몽골은 몽골국(외몽골)과 내몽골로 분할된다. 몽골국은 소련의 위성국가가 되었고, 내몽골은 중국의 네이멍구자치구가 되었다. 한때 자신이 지배했던 세력에 양분된 것이다.

언어는 집단적 정체성과 공감대의 기초다. 소련은 몽골어를 억압하고 키릴 문자와 러시아어 사용을 강요한 반면, 중국은 몽골어 사용을 허가하며 네이멍구자치구의 언어와 문화를 존중하는 척했다. 그러나 몽골을 근대 사회로 개조하려 한 점은 양국 모두 마찬가지였다.

 

5) 자연의 ‘복수’

신중국이 출범했을 때 재건을 위해 건축 자재나 공장 설비 등을 옮기는 동력 수요가 높았다. 그러나 자동차가 부족했다. 이에 정부는 몽골의 말을 운송 동력으로 이용하기 위해 몽골에 말을 대대적으로 키우도록 했다 

초원은 매우 취약한 땅이다. 유목민들은 가축이 풀을 먹어도 뿌리까지 먹지 않도록 목초지를 옮겨가며 초원을 세심히 보호해왔다. 그러나 정착 농경 사회인 중국은 유목민들의 목초지에 울타리를 두르고 정착생활을 강요했다. 더욱이 ‘과학적인 생산방식’으로 매년 몇 퍼센트씩 생산량을 향상시키도록 목표치를 할당했다. 자연의 운행에 맞추어 풀이 잘 자랄 때는 가축을 늘리고, 못 자랄 때는 가축을 줄인 전통적 유목 방식과 상극되는 조치였다. 초원은 곧 황폐해져 사막이 되었다. 

정부는 가축을 해치는 늑대를 초원의 적으로 규정하고 대대적으로 사냥했다. 처음에는 늑대가 줄어들어 가축 생산량이 늘어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천적이 사라지자 쥐와 토끼, 가젤 등이 폭증해 초원의 풀을 죄다 뜯어먹었다. 결국 초원은 사막이 되었고, 가축 역시 전보다 더 키우기 힘들어졌다. 한족 이주민들은 초원을 개간해 농지로 만들었다. 그러나 물이 부족하고 지력이 약한 땅에서 농사가 잘될 리 없었다. 개간 농지 역시 곧 사막이 되었다. 세상만사는 돌고 도는 것. 파괴자 베이징도 자연의 복수를 피할 수 없었다. 몽골의 사막은 베이징에 도시 전체를 뒤덮는 황사를 보냈다. 

장룽의 소설 ‘늑대 토템’은 문화대혁명 시대에 한족이 어떻게 내몽골을 잠식해가는지, 어떻게 몽골 초원이 파괴되어가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주인공은 트랙터가 초원을 갈아엎고 농지로 개간하는 모습을 보며 상념에 잠긴다 

“트랙터 시대가 옴으로써 풀을 생명처럼 여기는 민족과 풀을 제거해야 살아남는 민족 간의 깊은 갈등이 결국 어떤 결말을 맺게 될지 눈에 뻔히 보였다. 동남쪽에서 불어오는 새로운 농경 바람이 마침내 서북의 유목 바람을 압도하고 말 것이다. 하지만 결국 서북쪽에서 황사라는 거대한 폭풍이 일어나게 되면 동남쪽 모두를 덮어버리고 말 테지….

몽골이 중국의 한 주로 편입된 지 어언 70. 몽골은 이제 완전히 변했다. 한족이 내몽골 인구( 2500만 명) 80%를 차지하고, 몽골족( 400만 명)은 ‘소수민족’이 되어버렸다. 내몽골 박물관 광장에는 ‘민족단결보정(民族團結寶鼎)’이 놓여 있다. 한족, 몽골족 구분 없이 ‘중화민족’으로 단결하자는 취지에서 세운 상징물이다. 그런데 정작 그것은 유목민의 상징인 말이 아니라 중원의 상징인 청동솥[]이다. 한족과 몽골족의 역관계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네이멍구자치구는 가축 생산기지이자 광업기지가 되었다. 초원의 생태계는 파괴되어 이제는 온갖 동물이 뛰어노는 모습을 볼 수 없다. 곳곳에 밭이 들어섰고, 풍차와 태양전지가 즐비하게 놓여 있다. 

 

소수민족 된 몽골인

유목민은 정착생활을 한다. 게르는 체험용 관광상품이 되었다. 아니, 게르조차 온전하지 않다. 희한한 데서 비상한 창조력을 발휘하는 중국인은 콘크리트 게르를 지었다. 기왕 내몽골까지 왔으니 게르 체험은 하고 싶지만 현대 건축물의 편리함은 포기하고 싶지 않은, 모순된 욕망이 찾아낸 기묘한 타협책이다. 여행서 론리 플래닛 기자가 만난 몽골인은 내몽골의 변화를 한 마디로 표현했다. “사람은 늘고, 가축은 줄었어요. 

유목민들도 21세기 속에 살고 있다. 말 대신 오토바이를 타고 양을 친다. SNS로 가축을 매매한다. 어린 소녀는 소박한 꿈을 꾼다. “여성 사업가로 성공해서 TV, 냉장고, , 아파트를 사고 싶어요. 

한족과 몽골족 구분 없이 같은 꿈을 꾸니 이제 같은 민족이 된 것일까? 중국 정부는 내몽골의 경제를 발전시키고 인민의 삶의 질을 향상시킨 것을 자신의 공적이라 자랑한다. 내몽골 경제 발전은 석탄 천연가스 희토류 등 내몽골의 풍부한 자원 덕분이다. 그러나 그 자원은 대체로 내몽골 외부의 경제 발전에 쓰이고, 광업 개발과 관련한 권리는 대부분 한족이 차지한다. 몽골족 유목민은 공해, 오염, 환경 파괴로 인해 생계를 위협받는다. 소수민족 자치구 중에서는 꽤 안정되고 민족 통합이 꽤 진행된 내몽골이지만, 민족 갈등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이유다. 

2011
 5 10일 몽골 유목민 메르겐은 20여 명의 동료와 함께 석탄 트럭이 목초지에 난입하는 것을 막으려다가 트럭에 치여 150m나 끌려간 끝에 죽었다. 불과 닷새 후, 한 탄광의 한족 노동자가 탄광 공해에 항의하던 몽골 유목민 옌원룽을 지게차로 고의로 쳐서 죽였다. 연달아 일어난 사건으로 수천 명이 시위에 나서는 등 내몽골 분위기가 악화되자 후진타오 정부는 사건의 주범인 두 명의 한족 노동자를 신속하게 사형시켰다. 그러나 겨우 넉 달 뒤인 10, 석유 트럭이 목초지에 난입하는 것을 막으려던 몽골 유목민이 죽는 사건이 또 일어났다.

초원은 황폐화되고 사막은 넓어져간다. 황사가 베이징을 덮치자, 방목지를 초원으로 돌리고[退牧還草], 농지를 초원으로 돌리는[退耕還草] 프로젝트를 개시했지만, 초원의 복원력은 한없이 약하다. 기업들은 내몽골 자원을 캐내는 데 혈안이 돼 있을 뿐, 그 뒤처리에는 무관심하다. 어느새 절대 다수를 차지한 한족은 ‘소수민족’ 몽골족을 존중하지 않는다. 몽골족 역시 현대 문명의 세례를 받아 목가적 생활 대신 도시의 삶을 꿈꾼다. 그리고 돈벌이에 열중하지만 쉽지는 않다. 

난마처럼 얽힌 숙제가 내몽골을 짓누른다. 열악한 환경을 딛고 세계제국을 만들었던 몽골의 영광을 다시 볼 수 있을까 

 

內蒙古

적토마 달리던 戰士들의 땅

 몽골의 전사들은 거칠다. “한가할 때 한족은 이를 잡고, 우리는 칼을 간다”고 말한다. 동시에 현명하다. 관용적 자세로 여러 문화와 종교, 민족을 수용하며 세계제국으로 거듭났다. 그러나 오늘날 내몽골에서 몽골인은 소수민족이다. 전통 주거 ‘게르’는 관광 상품으로 변했다. 말이 달리던 초원은 사막이 되어 황사 바람을 일으킨다.

 

▲몽골 초원을 질주하는 말들. 

 

▲'푸른 도시’, 네이멍구자치구의 성도 후허하오터 시내 풍경.

 

▲후허하오터의 티베트식 불교탑. 세계제국이었던 몽골의 도시답게 다양한 종교가 공존한다.

 

▲몽골식 성황당인 어워. 

 

▲몽골제국에 영광의 시대를 안겨준 칭기즈칸.

 

▲몽골 문자가 쓰여 있는 후허하오터즈 시 쇼핑몰.

 

▲몽골 고원에 뚫린 고속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