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재윤의 슬픈 중국5/ 〈41〉 탈북자 강제 북송, 왜 중국을 따라했을까 - <50회> 시진핑의 반부패 운동과 문재인의 적폐 청산, 같은점과 다른 점
송재윤의 슬픈 중국5/ 조선일보
2022.07.23
〈41〉 탈북자 강제 북송, 왜 중국을 따라했을까
대륙의 자유인들

▲<1989년 5월 24일, 개인 날 톈안먼 광장에 고인 빗물에 민주 시민의 깃발이 반사되고 있다. 사진/Associated Press>
중국 당국, 목숨 걸고 북한서 탈출한 사람들 체포해 줄곧 강제 북송
1990년대 이래 중국 당국은 줄곧 목숨을 걸고 북한에서 탈출한 사람들을 체포해서 북한으로 송환해왔다. 중국 당국은 탈북자의 난민 지위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대신 그들을 경제적 불법체류자로 분류하여 강제 북송한다. 그러한 행정 절차의 법적 근거는 1960년 북·중 사이에 체결된 “도주 범죄자 송환 조약” 및 1986년 체결된 “국가 안보 및 사회 질서 유지를 위한 국경 협력 의정서”다.
물론 중국의 이와 같은 조치는 국제법상 반인류적 정치 범죄라 할 수 있다. 유엔은 1951년 난민 협약(Refugee Convention, 제네바 협약), 1967년 난민지위에 관한 의정서, 1984년 고문방지 협약에 따라 탈북자의 북송을 전면 금지한다. 북한으로 송환된 탈북자들은 십중팔구 구속, 고문, 성폭행, 강제노역, 처형 등 참혹한 인권유린을 피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라디오 프리 아시아(RFA)>>에 의하면, 2021년 7월 14일 중국 당국은 팬데믹으로 북·중 국경이 막힌 지 1년 반 만에 버스 두 대에 남녀 탈북자 50명을 실어서 압록강 건너 북한의 신의주로 돌려보냈다. 단둥(丹東)에서 탈북자의 송환 과정을 지켜본 중국인들은 “목숨을 걸고 탈출한 사람들을 다시 북한으로 돌려보내면 곧 처형될 수밖에 없다”며 큰 우려를 표현했다. 국제인권감시기구(Human Rights Watch)의 보고서에 따르면, 2021년 현재 중국은 1170명의 탈북자를 억류하고 있다.
한국 정부는 왜 중국 당국의 인권유린을 따라했을까
문재인 정권은 2019년 11월 2일 공해상에서 나포된 후 귀순 의사를 명백히 밝힌 탈북어민 두 명을 흉악범으로 몰아서 강제로 북송하는 놀라운 조치를 취했다. 그 과정에서 정부는 바로 그 두 명이 선상에서 16명을 죽인 흉악범이라는 북한 측 주장을 맹목적으로 수용했다.
2022년 7월 18일자 <<조선일보>>의 보도에 따르면, 당시 검역관의 선박 소독 과정에서 혈흔조차 발견되지 않았다. 같은 날 <<자유일보>>의 분석에 따르면, 현실적으로 길이 15미터의 오징어잡이 목선에 19명이 함께 타고 숙식하며 조업을 할 수가 없다. 탈북 어부 2명이 16명을 살해한 흉악범이라는 북한 측 주장은 거짓말일 개연성이 매우 높다는 얘기다. 대체 왜 대한민국 정부는 물증도 없이 북측 주장만 믿고 두 사람을 살인마로 몰아 북송하는 반인권적 조치를 취했는가? 왜 또 그 과정에서 두 사람이 귀순의사가 없었다고 거짓말을 했는가?
철저한 조사로 밝혀야 하겠지만, 지난 정권의 수뇌부가 1980년대 “민족해방노선”의 주사파 운동권 출신들로 채워져 있었다는 사실과 결코 무관할 수 없어 보인다. 그 당시 표현대로 “한번 주사(主思)를 맞은 자들은 영원히 수령님을 흠모하고 숭배하기” 때문이다.
마오와 김일성 이념에 오염된 주사파, 톈안먼 대학살 앞에서 ‘멘붕’
1980년대 후반 대한민국의 대학가는 공산세력의 해방구였다. 아니, 좌익소아병자들의 병동이었다. “운동의 대중화” 시대 마르크스-레닌은 신문화의 아이콘이고 마오쩌둥, 김일성은 아시아민중의 메시아였다. 대학 주변 서점가엔 공산주의를 찬양하는 좌익서적, 김일성을 찬양하는 북한 책들이 버젓이 진열돼 있었다.
그 시절 분위기를 한 시인은 버스 운전자가 핸들을 오른쪽으로 획 꺾으면 승객들은 왼쪽으로 휙 쏠릴 수밖에 없다고 풍자했었는데, 1987년 이후 한국정부는 오른쪽으로 돌아갔던 “핸들”을 이미 다시 왼쪽으로 돌린 후였다. 북한서적까지 모조리 공개해서 국민의 이념적 면역력을 높이자는 자유방임적 “반공” 전략이었다. 그럼에도 1980년대 말까지 한국의 대학가는 온통 공산주의 이념, 그 중에서도 마오쩌둥과 김일성의 좌익 민족지상주의 이념에 오염되어 있었다. 당시 대학가의 지식인들은 한 치 앞도 못 내다보는 이념적 청맹과니들이었다.

▲<1990년 8월 연세대에서 열린 제1차 범민족대회. 북한 및 해외동포의 연계 하에 열린 이 대회는 90년대 주사파 운동의 중심이었다. 사진/중앙포토>
한국의 지식계가 끝없이 좌로, 좌로 행진하던 그 시절 그때 마른하늘의 청천벽력처럼 톈안먼 대학살이 벌어졌다. 자유와 민주를 외치던 대한민국의 소위 “진보세력”은 그 엄청난 사태를 보면서 “멘붕”에 빠졌다. 곧이어 동구권의 공산정권이 차례로 몰락하고 동독이 서독에 흡수되고 급기야 소련이 붕괴했을 때, 한국의 진보세력은 안절부절 밑천 털린 보부상처럼 절망의 나락을 배회했다.
“슬픈 중국”에서 구태여 1980년대 한국 좌파운동을 논하는 까닭은 1980년대 이후 전 세계는 이미 촘촘한 유기체의 시스템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 세계 각 지역 여러 국가 긴밀한 상호 영향 하에서 동시적으로 변화하고 있었다. 바로 그 시절 “베이징 나비의 날갯짓이 뉴욕 센트럴 파크에 비를 뿌린다”는 이른바 “카오스 이론”이 전 세계적으로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빌 게이츠가 “윈도우 95″를 들고 나와서 새로운 정보혁명을 선언하기 불과 수년 전이었다.
1989년 5월 ‘페레스트로이카’ 고르바초프의 방중...톈안먼 시위대 “환영”
1989년 5월 15일-5월 18일 베이징에서 중소 정상회담이 개최되었다. 1959년 9월 흐루쇼프의 방중 이래 중·소 정상회담은 재개되지 않고 있었다. 이후 중·소 분쟁은 계속 격화되어 급기야 1969년3월 만주 우수리 강의 전바오(珍寶)도에서 군사충돌이 발생해서 거의 6개월 간 일촉즉발의 대결국면이 이어지기도 했다. 중·소 분쟁 사이에서 미국은 중국을 끌어안았다. 그러한 의미에서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은 중국이 소련을 등진 채 적극적으로 미국으로 향하는 중·소 분쟁의 신국면이었다.
전통적으로 소련은 미·중 사이에 쐐기를 박고 틈새를 벌여 공산권의 맹주로 군림하려 했다. 단적인 예로 1950년 스탈린은 마오쩌둥을 유도해서 한반도에서 미국과의 전쟁을 성사시키는 군사·외교적 묘략을 펼쳤다. 돌이켜 보면, 미국의 대중국 포용정책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스탈린의 생존전략에 미·중이 놀아났다고도 할 수 있다. 1964-1982년 브레즈네프(Leonid Brezhnev, 1906-1982) 집권기 소련은 이른바 “제한주권론”의 명분으로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동맹군으로 체코를 침공해 프라하의 봄을 짓밟았고, 아시아 공산권 전체를 아우르는 안보 조약을 이루려는 강공 노선으로 일관했다.

▲<톈안먼의 ‘인민해방군,’ 1989년 6월. 사진/Sadayuki Mikami>
1985년 3월 집권한 이후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 1931- )는 바로 그러한 구소련의 외교노선을 전면 수정했다. 그가 추진한 글라스노스트(Glasnost, 개방)와 페레스트로이카(Perestroika, 구조 개혁)는 미국과의 군사·외교적 관계를 개선하고, 나아가 아시아 및 유럽과 관계 개선을 통해 소련 경제를 살리는 실용적 데탕트를 핵심으로 했다. 1986년 7월 28일 고르바초프는 “블라디보스토크 선언”을 통해 몽고, 동(東)러시아 및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련군대를 철수하겠다고 선언했다. 아울러 중국을 향해선 아무르와 우수리 강 유역 중국 측 강둑을 중·소 국경선으로 삼겠다며 러브콜을 보냈다. 곧이어 중국과 소련은 각각레닌그라드와 상하이에 각기 영사관을 설립했다. 1988년 7월 바르샤바 외교 회의에서 고르바초프는 미국을 향해 군비감축 협상을 제안했다.

▲<1989년 5월 15일-18일 방중 중에 양국의 국기 아래서 연설하고 있는 고르바초프의 모습. 사진/Associated Press>
급기야 1989년 5월 15-18일 양국의 사전 물밑 협의를 거쳐 고르바초프는 중국을 방문했다. 중공중앙은 톈안먼 시위를 싹 정리하고 광장에서 성대한 환영식을 거행하려 했지만, 그 계획은 공항의 약식 환영식으로 대체될 수밖에 없었다. 덩샤오핑과 고르바초프는 사전 조율에 따라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양국의 국교 정상화를 선언했고, 중국공산당 총서기 자오쯔양(趙紫陽, 1919-2005)과 고르바초프는 중국공산당과 소련공산당의 당 대 당 관계의 회복을 확인하긴 했는데······.
표현과 언론 자유 확대하고 경제 분권화 추진한 고르바초프...중·소 관계 난기류
톈안먼 광장의 시위가 더욱 거세지자 중·소 관계엔 미묘한 난기류가 흘렀다. 덩샤오핑은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괴뢰처럼 지배하고 있다며 베트남을 압박해 철군시키라고 요구했지만, 고르바초프는 내정일 뿐이라며 간섭을 거부했다. 고르바초프는 일단 톈안먼 민주화 운동에 대해선 판단 중지를 선언했지만, 광장의 시위대는 고르바초프를 “민주주의의 대사”라 부르며 그의 방중을 환영하고 있었다. 그 당시 상황에서 고르바초프의 글라스토스트와 페레스트로이카가 톈안먼 민주화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음은 중·소뿐만 아니라 전 세계 모든 나라 사람들이 뻔히 아는 사실이었다.
고르바초프는 표현과 언론의 자유를 확대하고 경제적 분권화를 추진한 소련 해체의 주역이었다. 그는 동구의 몰락에 군사적 개입을 거부했고, 아울러 독일의 통일을 방치했다. 또한 그는 1989-90년 동구의 공산국가들이 민주화를 이룰 때 무력으로 진압하는 구소련 공산제국주의의 전철을 밟지 않았다. 그는 냉전을 종식하고, 군축을 개시하고, 소련의 정치적 자유를 확대한 공로로 1990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무엇보다 그는 1991년 12월 25일 공식적으로 크렘린에서 소련 깃발을 내리고 러시아 깃발을 올린 그 인물이었다.

▲<톈안먼 광장에서 “글라스노스트” 러시아어 플래카드를 들고 고르바초프를 환영하는 시위 군중. 사진/https://www.balticasia.lt/en/straipsniai/tiananmen-square-protests-2/>
톈안먼 광장의 대학생들 “자유 아니면 죽음을!”...민주 압살한 중국공산당
고르바초프 방중을 전후해서 톈안먼 광장의 대학생들은 더욱 기민하게 국제정세의 변화를 감지했다. 그들은 외신 기자를 향해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 “자유가 아니면 죽겠노라!”의 구호를 들이대며 공산권에 몰아닥친 자유화의 훈풍을 호흡했다. 지나서 보면, 바로 그때 광장의 대학생들이 가장 정확하게 세계사의 도도한 물결을 타고 있었다.
1989년 벽두부터 동구에서 일어난 자유화의 물결은 거대한 해일로 일어나 공산권의 독재정권을 뒤흔들고 있었다. 폴란드와 헝가리에선 엘리트 주도의 선거개혁으로 공산주의 압제가 종언을 고했다. 동독과 체코슬로바키아에선 도도한 민중의 봉기 앞에서 독재정권이 무릎을 꿇었다.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고, 1991년 12월 26일 사회주의 종주국 소련 연방이 해체되었다. 요컨대 톈안먼 민주화 운동은 냉전이 종식되고 공산주의의 망령이 퇴각하는 세계사의 큰 변화 속에서 일어난 국제적 사건이었다.

▲<1991년 11월 13일 베를린에서 베를린 장벽과 함께 파괴된 레닌의 동상. 사진/Patrick Piel/Gamma-Palph>
그 순간 전 세계 인류를 통합하는 위대한 이념은 자유, 민주, 인권의 세 키워드로 압축되었다. 자유의 깃발은 공산 전체주의의 견고한 둑을 깨는 날카로운 창이었다. 민주의 깃발은 독재 권력의 손발을 묶는 굵은 밧줄이었다. 인권의 깃발은 인간을 압살하는 낡은 이념, 헛된 약속, 거짓 유토피아의 망념을 깨부수는 거대한 망치였다.
중국, 북한, 남한 주사파의 반인권 삼각연대... 동아시아 문명사의 흑암(黑暗)
중국의 민중은 비로소 동구와 구소련의 민중과 연대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유의 칼을 들고, 민주의 밧줄을 쥐고, 인권의 망치를 휘두르며 인류의 이름으로 중국공산당을 압박했다. 그렇게 위대한 중국 인민의 각성과 기의(起義)를 중국 밖의 세계 시민들은 숨죽이며 바라보고 있었다. 그해 5월 말 계엄령이 떨어지고 제1차 병력의 투입이 실패로 돌아갔을 때, 세계 시민들은 안도의 숨을 쉬며 가슴을 쓸어내렸지만, 중공중앙은 결국 가장 야만적인 방식으로 자유를 배신하고, 민주를 압살하고, 인권을 유린했다. 오늘날 전 세계의 골칫거리가 된 “중국 문제”의 뿌리는 일차적으로 1989년 6월 4일 대학살에 닿아 있다.
톈안먼 대학살을 행한 중공 정부가 탈북자를 잡아서 북송해온 바로 그 정권이다. 북한 정권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탈북자를 북송한 대한민국 지난 정권의 핵심부는 1980년대 마오쩌둥과 김일성을 숭배했던 바로 그 집단이다. 중국과 북한과 남한 주사파의 반인권 삼각연대, 동아시아 문명사의 흑암(黑暗)이다. <계속>
〈42〉 “우리 예금 돌려달라”… 사유재산 지키려는 중국민들

▲<2022년 7월 10일, 중국 허난성 정저우 중앙인민은행 앞에서 시위하는 시민들. “허난 은행은 우리들의 합법적 예금, 일반 백성의 목숨을 지키는 예금을 돌려 달라!” 사진/BBC News>
2022년 7월 정저우 1000여명 시민, 은행예금 동결조치 규탄 시위
2022년 7월 10일, 중국 허난(河南)성 정저우(鄭州)시 “중국인민은행” 건물 앞 계단 위에 천여 명의 시민들이 모여서 지방은행의 예금 동결을 규탄하는 시위를 벌였다. 그들은 정부의 부패와 무책임을 규탄하며 “예금은 인권이다!”란 현수막을 펼쳐 들고 “예금을 돌려 달라!” 소리쳤다. 그날 오전 11시경 흰색 셔츠를 입은 정체불명의 남성들이 현장을 덮치고 무차별 폭력을 가해서 시위는 강제로 해산되었다. 중국 밖 민주주의 사회의 관점에선 지방 도시의 소규모 시위 정도로 폄하될 수도 있겠지만, 중국의 현실에선 철옹성의 방화벽에 생겨난 섬뜩한 균열의 조짐일 수도 있다.
현재 중국 정부는 “제로 코로나”의 광풍 속에서 인민의 권리 주장을 극도로 제한하고 방역 정치를 2년 넘게 이어가고 있다. 높은 이자율을 보장하며 지방민의 쌈짓돈을 끌어모은 지방의 작은 은행들은 “제로 코로나” 정책으로 중국 전체가 경제난에 휩싸이면서 심각한 자금난에 봉착해 있다. 결국 지난 4월부터 허난성에서 자금난에 시달려 온 촌진(村鎭, 시골과 소도시) 은행들은 수십억 원 대의 예금을 동결하는 초강수를 두었다. 격분한 예금주들은 들끓기 시작했다. 그들은 우선 인터넷 공간을 활용해서 예금 동결의 부당함을 알리는 여론전을 이끌었다. 중국 정부는 해시태그를 삭제하면서 여론의 확산을 막았지만, 예금주들은 정부의 감시망을 피해 새로운 해시태그를 만들면서 홍보전을 이어갔다.

▲<2022년 7월 10일, 정저우에서 정체 불명의 사복조가 시위대를 덮치기 전 주변 도로에 집결해 있다. 사진/Associated Press>
두 달 넘는 분투 끝에 시민들은 마침내 공안의 철통같은 경계를 뚫고 1천여 명이 모이는 쾌거를 연출했다. 시위대가 들고 있는 현수막 중엔 암흑세계와 손잡은 지방정부를 규탄하는 구호도 있었다. 실제로 문제가 된 촌진(村鎭, 시골 및 소도시) 은행은 현재 암흑가 검은 세력과 결탁한 혐의로 경찰의 조사를 받고 있다. 그 점에서 이번 사태는 비단 허베이성이나 안후이(安徽)성뿐만 아니라 전 중국 금융 부패의 한 단면일 수 있다. 오늘날 중국 금융 시스템의 근원적 불안전성이 표출되었을 수 있다는 얘기다.
이 시위는 일당독재의 사회주의 국가에서 공민 개개인이 사유재산권을 지키기 위해 자발적으로 나선 집단행동이다. 그 점에서 이 사건은 실제로 중국공산당 통치의 정당성에 관한 강력한 이의제기라 볼 수 있다. “예금은 인권이다!”라는 구호 속에는 인민의 사유재산권을 보장하지 못하는 중국공산당 정부에 대한 강력한 질타가 표현돼 있다. 정치적 자유가 제한된 중국에서 인민에겐 오로지 예금만이 인간다운 삶을 유지할 수 있는 인권의 보루이다. 그 보루가 지금 흔들리고 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중국 인민은 격분할 수밖에 없다. 비단 허난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2022년 7월 10일, 갑자기 들이닥친 사복조가 그날 현장에서 시위하는 시민들을 끌고 가는 동영상의 한 장면. 사진/Reuters>
톈안먼 사건 이후... 사유재산권 보장 약속하고 정치적 자유 박탈
사유재산권은 근대 민법의 출발점이다. 자유나 인권은 공허한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인간 개개인의 사유재산권에서 시작된다. <<정부론>>2편 제5장에서 로크(John Locke, 1632-1704)가 논증하듯 모든 인간은 스스로 노동해서 획득한 재화를 배타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천부(天賦)의 사유재산권을 갖는다. 로크에 따르면, “떡갈나무 아래서 도토리를 주워서, 숲속 나무에서 사과를 따서” 영양을 섭취한 사람은 바로 그 도토리와 사과를 직접 손으로 잡는 순간 그 두 열매에 대한 사적 소유권을 갖게 된다.
1989년 톈안먼 대학살 이후 중공중앙과 중국 인민 사이에는 암묵적 합의가 이뤄졌다. 탱크로 시위군중을 짓밟은 중공중앙은 인민을 향해 경제적 보상을 약속했다. 중국 인민은 그 반대급부로 정치적 자유를 헌납했다. 입 닫고 일당독재에 복종하는 대신 중국 인민은 현실적으로 돈을 벌고 모을 수 있는 경제적 자유의 길을 택했다. “공민의 합법적 사유재산은 침해될 수 없다”는 1982년 수정 헌법의 총강 제13조가 형식적으로 공민의 사유재산권을 지켜 주는 헌법적 근거가 되었다. “치부광영(致富光榮, 부자가 되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다)”는 최고영도자 덩샤오핑의 슬로건은 공민의 재산권을 인정하는 중공중앙의 정치적 보증이었다.
톈안먼 대학살 이후 중국 인민은 비록 공개적으로 정부를 비판하거나 정치적 자유를 누릴 수는 없다고 할지라도 스스로 일해서 번 돈과 재투자로 불린 재산만큼은 1950-60년대처럼 무력하게 강탈당하지 않고 온전히 지킬 수 있다는 견고한 믿음을 갖고 있었다. 지난 7월 10일 정저우 “중국인민은행” 앞의 시위는 정부와 인민 사이의 암묵적 합의가 무너지고 있음을 알리는 불길한 신호탄이다. 최근 시진핑 총서기와 리커창 총리가 이구동성으로 외쳐대는 “공동부유(共同富裕)”라는 구호 역시도 사유재산권을 위협하는 “좌 클릭”의 노이즈(noise)라 여겨지고 있다.

▲<“허난 은행은 우리의 피와 땀이 섞인 돈을 돌려 달라!” 2022년 7월 10일 허난 정저우시 “중국인민은행” 앞 시위 장면. 사진/AP>
요컨대 바로 지금 많은 중국 인민은 은행에 넣어 둔 쌈짓돈까지도 불시에 빼앗길 수도 있다는 공포에 떨 수밖에 없게 됐다. 이번 시위가 다른 어떤 시위보다 심각한 이유가 바로 그 점에 있다. 중국공산당이 외쳐대는 마르크스-레닌주의, 마오쩌둥 사상, 사회주의, 공산주의는 모두 허울 좋은 거대명분일 뿐이다. 중국 인민이 일당독재에 복종했던 이유는 중국공산당이 최소한 인민의 사유재산권만큼은 보장해줄 것이란 믿음 때문이었다. 중국 인민들 사이에서 바로 그 믿음이 깨지는 순간 사유재산을 지키려는 “자유인”의 대탈주가 일어날 수 있다. 1950년대처럼 다시 재산을 빼앗기면 인민은 자유를 잃고 다시 국가의 농노로 전락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유재산 보장해줄 것이란 믿음 깨져...정저우 시위가 심각한 이유
정저우 시위를 보면서 새삼스럽게 떠오르는 질문이다. “사람들은 언제, 왜 봉기하는가(When men revolt and why)?” 사람들은 과연 언제 정부의 권력에 대한 승인과 복종을 철회하는가? 사람들은 과연 왜 막강한 정부의 무력에 대항해서 목숨을 걸고 봉기하는가? 현대 사회에서 이 질문은 국가권력의 정당성에 관한 가장 원초적이고도 중대한 사회과학적 물음이다.
국가의 권위가 살아 있는 “정상 정치(normal politics)” 상황에서는 공권력에 도전하는 모든 위법, 탈법, 불법 행위는 당연히 법적 처벌의 대상이 된다. 반면 국가의 권위가 의심받는 “분쟁 정치(contentious politics)”의 상황에서는 정부가 휘두르는 공권력 자체가 심각한 불법 시비에 휘말릴 수도 있다.

▲<1989년 5월 트럭 위에 올라타고 시위하는 톈안먼 광장의 시위대. 맨 위 깃발 옆에 유니폼을 입은 경찰도 보인다. 사진/David Chen>
“분쟁 정치”의 상황이 발생하면, 민주정권은 대체로 정치적 타협책을 모색하지만, 독재정권은 대체로 군경을 동원해서 분쟁의 주체들을 탄압하고 처벌하는 극단적 방법을 사용한다. 민주정권이 무력해서가 아니라 국민주권과 권력 분립을 명시한 입헌주의의 제약 아래 놓여 있기 때문이다. 반면 권력 분립을 부정하고 인권을 하는 독재정권은 군경의 폭력으로 권력을 유지하려 한다.
물론 그 과정에서 국민의 저항이 거세지고 군경의 이탈과 반란이 초래되면, 독재정권 자체가 와르르 무너질 수도 있지만, 군경만 완벽하게 장악할 수 있다면 이론상 독재정권은 얼마든지 유지될 수도 있다. 북한이나 중국과 같은 군사 국가에서는 인민의 저항이 쉽게 정치 투쟁으로 확대될 수 없다. 칼을 든 강도와는 맞서 싸울 수도 있지만, 기관총을 쏘아대는 갱단은 피하는 게 상책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 점에서 1989년 톈안먼 대학살은 이후 중국공산당의 권력 유지를 가능하게 한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저항하면 죽는다는 선례를 남김으로써 중국공산당은 인민의 평화적 시위까지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보였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생물학자이자 철학자 장 로스땅드(Jean Rostand, 1894-1977)이 말했듯, “한 명을 죽이면 살인자가 되고, 수만 명을 죽이면 정복자가 되고, 다 죽이면 신이 된다.”

▲<학생들을 비난하는 정부에 항의하며 시위하는 학생들. 현수막엔 “학생들의 죄명은 ‘전혀 근거 없다!’”란 구호가 적혀 있다. 사진/David Chen>
그러한 공포 증후군이었을까? 얼마 전 중국 밖의 SNS에선 정저우의 시위 진압을 중국 정부가 정저우시에 탱크부대가 급파했다는 소문이 급속하게 퍼졌다. 결국 이 소문은 해군 기지가 있는 산둥 르자오(日照)시에서 찍힌 동영상을 근거로 퍼져나간 가짜뉴스로 밝혀졌다. 중국 붕괴를 바라는 사람들의 음모이거나 중국의 변화를 열망하는 이들의 착시였겠지만, 적어도 그 밑바탕에 1989년 대학살의 트라우마가 깔려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대학살의 트라우마...톈안먼의 나비 효과
1989년 6월 4일, 톈안먼 대학살이 자행된 직후, 전 세계 언론은 앞다퉈 그 참혹한 상황을 실시간으로 보도했다. 그해 4월 중순부터 시작된 베이징의 민주화 시위에 이미 두 달 넘게 세계인의 이목이 쏠려 있는 상태였다. 5월 15일-18일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 1931- )의 방중(訪中)을 앞두고 구미 언론사는 경쟁적으로 취재진을 급파했다.
중공중앙은 외국의 취재진의 활동을 제약하고 감시했지만 기자들의 취재 본능을 통제할 수는 없었다. 기자들은 호텔 발코니에서 커튼 틈으로 카메라 들이대고 망원 렌즈로 도심의 광경을 촬영한 후, 불시에 들이닥칠 중국 공안의 눈을 피해 기민하게 필름을 숨겨야만 했다.
6월 5일 월요일 이른 아침 서울의 바쁜 출근길 시내버스 스피커에서도 전날 베이징의 심장부를 강타한 총성이 “탕, 탕, 탕, 탕” 울려 퍼졌다. 그 총소리를 배경으로 깔고 톈안먼 대학살을 보도하는 기자의 떨리는 목소리가 지금도 생생하게 들려온다. “여러분은 지금 중국 베이징 톈안먼 광장에서 군대가 민주화를 요구하며 시위하던 시민들을 향해 발포한 총성을 듣고 계십니다!”

▲<최근 트위터에는 허난 정저우 시위 이후 탱크가 등장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이후 이 소문은 상하이 정기 군사훈련을 허난 시위 진압 장면으로 왜곡한 가짜뉴스임을 밝혀 졌다. 사진/twitter.com>
톈안먼 대학살은 그렇게 세계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공공연히 자행된 중공중앙의 야만적 폭거였다. 실시간으로 참혹한 학살의 영상이 방영되자 전 세계에선 중공중앙의 만행을 규탄하는 목소리가 봇물처럼 터졌다. 중공중앙은 국제사회의 목소리에 스스로 귀를 닫은 채로 인민들의 입을 틀어막았다.
독재 권력은 늘 그렇게 외부 세계의 정당한 항의와 압박을 제국주의적 “내정간섭”이라며 빠져나간다. 개인의 자유와 인권을 짓밟으면서 “민족해방”이나 “계급투쟁” 등 집단주의의 구호를 외쳐댄다. 영어권에서 흔히 인용되는 사무엘 존슨(Samuel Johnson, 1709-1784)의 명언처럼, “애국심은 악당의 마지막 도피처다(Patriotism is the last refuge of the scoundrel)!” <계속>

▲<1989년 5월 중순 고르바초프의 방중을 계기로 세계 여러 나라의 방송 기자들이 베이징의 톈안먼에 몰려들었다. 당시 전 세계인의 이목이 톈안먼 민주화 운동에 쏠려 있었다. 그 점에서 톈안먼 민주화 운동은 동구와 구소련의 붕괴를 불러오는 세계사적 변화와 불가분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사진/David Chen>
〈43〉 중국 “말로 알리지 않았다고 말하지 말라”...대만 침공 가능할까

▲<2019년 6월 16일 대만 타이베이에서 일어난 반중 시위. 거리에 나온 학생들이 “대만은 홍콩을 지지한다!” 등의 구호를 들고 있다. 당시 홍콩에서는 범죄인 인도 법안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연일 벌어지고 있었다. 사진/Wu Min-zhou/the Epoch Times>
대만 간 펠로시 “일인지배냐, 민주주의냐 선택의 기로...대만 국민과 연대 중요”
“완화자분(玩火自焚).” “불을 갖고 놀다가 자신을 태워버린다”는 뜻. 지난 7월 28일, 시진핑 총서기가 바이든 대통령과 전화통화를 할 때 미국은 “하나의 중국” 정책을 견지하라며 흘린 경고의 메시지다. 시진핑 총서기의 이 도발적 발언은 대만 방문 의사를 밝혀 온 미국하원의장 낸시 펠로시(Nancy Pelosi, 1940- )를 겨냥한 것이라고 해석되었다. 바이든 대통령도 미국 군부의 우려를 전하며 펠로시의 대만 방문에 우려하는 제스처를 보였다.
미국의 유수한 언론에서도 펠로시의 대만 방문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상당히 고조됐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프리드만(Thomas L. Friedman, 1953- )은 대만을 위기로 몰아넣는 “전적으로 무모한(utterly reckless)” 행동이라며 펠로시의 방중을 노골적으로 비난했다. 프리드만이 반드시 중국 입장을 변호했다고 볼 순 없다. 그는 호저(豪猪, porcupine)의 등에 빽빽하게 자란 빳빳한 가시털처럼 대만 땅에 충분한 양의 미사일이 배치될 때까지는 미국도 영리한 외교를 이어가야 한다는 신중론을 펼쳤을 뿐이다.
조야의 우려와 비판이 고조되자 82세의 펠로시는 정면승부를 택했다. 보란 듯이 미 공군 제트기를 타고 타이베이의 쑹산 공항에 착륙한 직후, 그는 중공중앙의 시진핑을 정 조준해서 말의 포탄을 쏘았다.
“세계가 일인지배(autocracy)냐, 민주주의냐의 선택에 직면하고 있는 바로 지금, 미국과 2300만 대만 국민의 연대는 그 어느 때보다 더욱 중요합니다.”
펠로시는 왜 독재(dictatorship), 압제(tyranny), 폭정(despotism) 같은 보다 일반적인 단어 대신 굳이 “일인지배(autocracy)”란 단어를 사용했을까? “일인지배”라는 말로써 펠로시는 푸틴과 시진핑을 동시에 비판했음이 분명해 보인다. 우크라이나가 증명하듯 세계는 지금 권력욕에 눈 멀어 인민을 담보로 전쟁을 일으키는 “일인지배”의 광기에 직면하고 있다. 대만을 군사적으로 위협하는 시진핑도 헌법까지 뜯어고쳐 재집권을 꾀하는 “일인지배”를 연출하고 있다.

▲<2022년 8월 2일 밤 11시 경 타이베이 쑹산공항에 도착한 낸시 펠로시와 대표단 일행. 사진/https://twitter.com/SpeakerPelosi>;
노회한 정치인 펠로시는 미·중 갈등을 “민주주의와 일인지배의 대결”로 규정했다. 아울러 펠로시는 트위터에 올린 글에서 미국이 일인지배의 중국에 위협당하는 대만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연대할 것임을 분명히 했다.
“우리의 방문은 미국이 대만과 함께 함을 다시 강조합니다. 대만은 강건하고 역동적인 민주주의며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미국의 중요한 파트너입니다.”
환구시보 전 편집장 “펠로시가 탄 비행기와 호위 전투기 격추할 수도 있다”
1991년 톈안먼 광장을 방문했던 캘리포니아 민주당 의원 펠로시는 “중국의 민주화를 위해 죽은 이들을 위하여”라 적힌 배너를 들고서 톈안먼 대학살의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장면을 연출했던 인물이다. 톈안먼 대학살 이후 그는 수천 명의 중국학생들이 미국에 계속 남을 수 있게 하는 법안을 통과시킨 주역이었다. 이후로도 그는 달라이 라마를 옹호하며 중국 정부의 인권유린을 규탄하는 등 민주당 내 반중 매파의 면모를 유감없이 과시해 왔다.

▲<낸시 펠로시 의원이 벤 존스(Ben Jones, 왼쪽)의원과 존 밀러(John Miller, 오른쪽) 의원과 함께 “중국의 민주주의를 위해 죽은 이들을 위해서”라 적힌 배너를 들고 있다. 1991년 9월 4일 TV 화면. 사진/ AP file>
그러한 펠로시의 대만 방문 계획이 알려지자 중국의 전랑(戰狼) 외교관과 언론인들은 경쟁적으로 과격한 언사들은 내뱉었다. 일례로 트위터 중국공산당의 선전원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는 <<환구시보(環球時報)>>의 전(前) 편집장 후시진(胡錫近, 1960- )은 중국이 펠로시가 탄 비행기를 격추할 수도 있다는 말까지 했다.
“펠로시가 탄 비행기가 대만에 착륙할 때 미국 전투기가 호위한다면, 이는 침략이다. 중국 군대는 강압적으로 펠로시의 비행기와 미국 전투기를 쫓아버릴 권리가 있다. 공포를 쏘고 방해 전술을 쓸 수도 있다. 필요하다면 그 비행기들을 격추할 수도 있다.” (7월 29일, twitter.com/HuXijin_GT])
지금까지 쏟아낸 전랑 외교의 발언들만 놓고 보면, 중국공산당은 당장이라도 대만을 무력으로 응징하고 통일을 이루려고 하는 듯하다. 실제로 중국은 현재 대만을 둘러싸고 강력한 군사 시위를 하고 있다. 과연 이번 사태가 무력충돌로 이어질까? 과연 시진핑은 우크라이나를 공격한 푸틴처럼 대만을 침공할 수 있을까? 전랑들의 극단적 발언만 보면, 전쟁이 임박한 듯하지만, 시진핑은 결코 대만을 침공할 순 없을 듯하다. 중국 매체가 연일 쏟아내는 과격한 발언은 최후통첩이 아니라 블러핑(bluffing, 엄포)일 수 있다는 얘기다.
중, 군사 충돌 예고하는 최후통첩의 수사 “말로 알리지 않았다고 말하지 말라”
“물위언지불예(勿謂言之不預)!” 군사충돌을 예고하는 중국 방식의 외교적 수사다. “말로 알리지 않았다고 말하지 말라!”는 뜻. 곧 말로 할 때 상대가 꼬리를 낮추지 않으면 무력으로 응징하겠다는 엄포성의 발언이다.
1949년 1월 16일 베이징 점령을 앞두고 “인민해방군” 사령관 린뱌오(林彪)와 정치위원 뤄룽환(羅榮桓)이 베이핑(北平, 베이징) 방위 사령관 푸쭤이(傅作義, 1895-1974)에게 발송한 공식 서한에서 이 표현을 썼다. “성이 무너지는 날에는 반드시 엄중한 응징을 가하고 조금의 관용도 베풀지 않을 터이니 말로 알리지 않았다고 말하지 말라!” 압박을 못 이긴 푸쭤이는 중국공산당에 투항했다. 1949년 1월 31일 “인민해방군”은 베이징에 무혈 입성하는 장쾌한 승리의 드라마를 연출했다. 1949년 2월 1일자 <<인민일보>> 1면에 바로 바로 이 공문이 통째로 실렸다.

▲<1949년 1월 31일 국민당 장군 푸쭤이(傅作義, 1895-1974)의 투항으로 베이징에 무혈 입성하는 중국 공산당군과 환영 인파. 사진/ 공공부분>
이후 1962년 10월 20일에서 11월 21일, 중국은 1개월에 걸쳐 중국과 인도의 히말라야 국경에서 무력 충돌을 벌였다. 이 사건을 약 한 달 앞둔 1962년 9월 22일 <<인민일보>>는 “이를 참는다면 무엇인들 못 참으랴!”는 제목의 사설에서 “우리는 인도 당국에 정식으로 통고하니, 말로 알리지 않았다고 말하지 말라!”는 표현을 썼다. 이 분쟁으로 중국 측에선 722명이 전사하고, 697명이 부상을 입었다. 인도 측은 사상자가 4885명에 달했고, 3698명이 생포되는 수모를 겪었다.
중국의 관영매체인 신화사(新華社)는 1967년 7월 “소련에 대한 우리 외교부의 강력한 항의”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또 한 번 “말로 알리지 않았다고 말하지 말라!”는 표현을 썼다. 2년 후인 1969년 중·소는 우스리(Ussuri) 강의 전바오도(珍寶島)에서 무장 충돌했다. 양측 각기 15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상당 규모의 군사 대결이었다.
1978년 12월 25일 <<인민일보>>는 “우리의 인내엔 한계가 있다”는 사설에서 베트남을 향해서 다시금 “말로 알리지 않았다고 말하지 말라!”는 표현을 썼다. “소련의 지지를 믿고 욕심을 내서 계속 망동을 부리면 반드시 응당한 징벌을 받을 것이다. 우리는 미리 앞서서 경고하니 말로 알리지 않았다고 말하지 말라!” 이후 1979년 2월 17일부터 3월 16일까지 1개월에 걸쳐 중국은 20만 병력을 동원해서 베트남을 침략했다. 양측이 발표한 사상자는 큰 차이를 보이지만, 서방 국가들은 중국 측 사상자를 6만3000명 정도로, 베트남 측 사상자는 6만2000명 정도로 파악하고 있다.
이상 네 번의 구체적 사례를 통해서 중국공산당 정부는 국민당, 인도, 소련, 베트남을 향해서 군사 행동을 감행하기 전 관례적으로 “말로 알리지 않았다고 말하지 말라!”는 최후통첩을 날렸음을 알 수 있다.

▲<1979년 2월 17일부터 3월 16일까지 중국은 한 달 간에 걸쳐 베트남을 침공했다. 사진/공공부문>
중 관영 매체의 최후통첩 발언 남발... 말만 앞세우는 ‘전랑 외교’?
시진핑 정부 출범 이후 중국의 관영매체는 바로 그 최후통첩의 표현을 지나치게 자주 스스럼없이 막 쓰고 있다. 2013년 11월 센가쿠 열도 분쟁이 일자 <<인민일보>>는 군사과학원 부총장 뤄위안(羅援, 1950- )의 발언을 인용해서 일본을 향해 “말로 알리지 않았다고 말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중·인 국경분쟁이 고조되던 2017년 8월 6일 <<중국신문사, China News Service>>는 여러 군부 인사들의 발언을 소개하면서 또 바로 그 표현을 사용했다.
2018년 4월 6일 미·중 무역 분쟁이 고조되자 신화사는 미국을 향해 “중국의 핵심 이익과 전 지구의 공동 이익을 위해서 중국인은 견결히 투쟁할 수 있으니, 말로 알리지 않았다고 말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2018년 12월 9일 캐나다 정부가 미국 정부과의 사법 조약에 따라 화웨이사 부회장 멍완저우(孟晚舟, 1972- )를 체포했을 때도 <<인민일보>>는 캐나다 정부를 향해서 “중국은 크게 떠벌리지 않는다”며 “말로 알리지 않았다고 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급기야 2019년 5월 29일 <<인민일보>>는 미·중 무역마찰이 고조될 때 “미국은 중국의 제압 능력을 낮춰 보지 말라!”며 다시금 “말로 알리지 않았다고 말하지 말라!”며 미국을 정조준했다.

▲<중국의 전랑 외교를 풍자한 반체제 삽화가 왕리밍(王立銘, 1973-, 예명 Rebel Pepper)의 작품. 2013년 표현의 자유를 찾아 중국을 떠난 이래 그는 현재 미국에 체류하며 중국공산당을 비판하고 있다. 그림/rfa.org>
2020년 이후 중국의 관영매체는 대만에 이미 최소 네 차례 이상 “말로 알리지 않았다고 말하지 말라!”며 군사 행동이 임박했음을 강력하게 경고해 왔다. 그 언어를 보면 섬뜩하기까지 하다.
“대만은 기본 이성을 가져야 한다. 스스로 옳다 여기고 이판사판 막가면 비통한 대가를 치를 수 있다. 말로 알리지 않았다고 말하지 말라!”(2020년 4월 10일, <<환구시보(環球時報)>>)
“차이잉원 당국은 더더욱 외세를 끼고 몸값을 높이면서 외부의 반중세력과 더욱 긴밀히 결탁하여 자꾸만 사태를 악화시키며 양안(兩岸)의 화평 및 대만해협의 안정을 위해하고 있다. 우리는 정보와 치안 부문에서 대만의 독립을 지키려는 완고한 분자들에게 불을 갖고 놀면 스스로를 태우는 죽음의 길밖에 없다고 정식으로 경고한다.······ 말로 알리지 않았다고 말하지 말라!” (2020년 10월 15일, <<인민일보>>)
“대륙에선 유관한 동향을 면밀히 살피고 있다. 한줌 밖에 되지 않는 ‘대독(대만 독립)’ 분자들이 대만 민중의 이익과 복지를 살피지 않은 채로 ‘대독’이라는 위험한 도발을 이어가고 있다. 이는 오직 양안 관계의 동요를 가중시키며 대만을 위험한 지경으로 몰고 가서 대만 수많은 동포들에 재난을 몰고 올 뿐이다. 대륙은 섬 안에서 ‘헌법을 고쳐서 독립을 꾀하려는(守憲謀獨)’ 그 어떤 형식의 분열적 행동에도 견결히 반대하며, 필요한 도는 조치를 강구해서 이를 제압할 것이니 말로 알려주지 않았다고 말하지 말라!”(2021년 4월 28일, 국무원 대만 사무 판공실 신문국 국장 마샤오광[馬曉光, 1955- ]의 발언)
이렇듯 중국의 관료 및 언론인들은 덩샤오핑 시대 “도광양회(韜光養晦)”의 신중함을 버리고 경쟁적으로 퇴로 없는 막말과 폭언의 릴레이를 펼치고 있다. 1949년에서 1978년 사이 중국 관영 매체가 불과 4 차례에 걸쳐서 “물위언지불예”를 선언했고, 4차례 다 군사행동으로 그 경고가 빈말이 아니었음을 증명했다. 반면 시진핑 정부 출범 이후 2013년부터 현재까지 틈만 나면 중국의 관영매체는 말로만 으름장을 놓고 있을 뿐이다. 시진핑 정부가 노리는 “전랑(戰狼) 외교”는 결국 말의 성찬일 뿐인가?
펠로시와 차이잉원 “미국과 대만의 연대는 일인지배에 맞서는 민주주의 연대”
펠로시와 차이잉원의 연대를 이해하기 위해선, 지난 해 말 2021년 11/12월 <<포린 어페어즈(Foreign Affairs)>>지에 실린 차이잉원의 기고문 “대만과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을 재독할 필요가 있다.
중국공산당 100주년을 맞아 시진핑은 “중국몽”을 “위대한 중화민족의 부흥”이라 정의했다. 시진핑은 줄곧 중국이 대만을 흡수해 통일해야 함을 강조해 왔다. 이에 대해서 차이잉원은 “대만이 무너진다면 (인도-태평양) 지역의 평화와 민주주의의 동맹 체제에 파멸적 결과가 올 것이라 경고했다. 또한 그는 “2차 대전 이래 국제질서를 규정해 온 자유민주주의적 질서에 도전하는 더욱 단호하고 자신감 넘치는 권위주의의 흥기”에 맞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국을 전 세계 민주주의의 공적으로 지목한 셈이다.
차이잉원은 오늘날 국제 정세를 자유민주주의와 권위주의의 투쟁이라 해석한다. 같은 맥락에서 펠로시는 국제 정세를 “민주주의와 일인지배의 투쟁”이라 단정하고, “미국과 대만의 연대”는 일인지배에 맞서는 민주주의의 연대임을 분명히 했다.

▲<2020년 1월 선거 결과 압승하여 재집권에 성공한 후 활짝 웃고 있는 대만의 총통 차이잉원의 모습. 그 왼쪽 부총통 라이칭더(賴清德, 1959- )는 대만독립운동을 이끌고 있는 민진당의 정치인이다. 사진/ AP: Chiang Ying-ying>
펠로시와 차이잉원이 손을 잡고 이중창으로 일인지배에 대항하는 자유민주주의의 연대를 노래 부르는데, 중국이 과연 어떤 군사 도발을 할 수가 있을까? 오늘날 2300만 대만의 국민들이 선양하는 가치는 자유, 민주, 인권, 평등 등 인류적 보편가치이다. 반면 14억 인구의 “중국은 하나”이므로 대만을 흡수해서 통일해야 한다고 주장할 뿐이다. 자유와 인권과 번영을 누리는 민주주의의 대만이 왜 일인지배의 중국에 흡수되어야 하는가? 이 본질적 질문에 대한 시진핑의 대답은 고작 “위대한 중화민족의 부흥” 밖에는 없다.
중국은 현재 대만을 둘러싸고 신경질적 무력시위를 이어가고 있지만, 이 사태의 엄중함을 과장할 필요는 없다. 지난 10년간 중국 전랑들의 행태를 되짚어 보면, 대만을 향해 “말로 알리지 않았다고 말하지 말라!”는 중국의 “최후통첩”은 엄포성 블러핑에 그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계속>
〈44〉 중 헌법학자 장첸판 “독재자 이름을 치욕의 기둥에 새겨야”

▲<중국 베이징 대학 로스쿨의 대표적인 헌법학자 장첸판 교수(張千帆, 1964- ). 2014년 11월 23일. 사진/wiki commons>
중국의 비판적 지식인, 베이징대 로스쿨 장첸판 교수
일전에 한국의 한 헌법학자가 물었다. “중국엔 중국공산당의 일당독재를 비판하고 헌법을 통해 국가권력 제약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지식인이 없나요? 중국처럼 큰 나라라면 비판적 지식인 그룹이 분명히 있을 텐데, 좀처럼 소식이 들려오지 않아서요.”
그 질문을 받는 순간 베이징 대학 로스쿨의 저명한 헌법학자 장첸판(張千帆, 1964- ) 교수가 떠올랐다. 2011년 9월 27일 베이징 대학 로스쿨에서 장첸판 교수는 “신해혁명과 중국 헌정(憲政)”이라는 제목 아래 강연했다.
여기서 헌정이란 헌법에 근거한, 헌법의 통치, 곧 법의 지배(rule of law)를 의미한다. 시진핑 정권이 상용하는 “의법치국(依法治國)”은 “법의 지배”가 아니라 말 그대로 “법에 의(依)한 지배(rule by law)”라 할 수 있다. “법의 지배”란 법의 정신을 구현하는 입헌주의의 요체이지만, “법에 의한 지배”는 법을 구실삼아 인민을 통제하는 독재 권력의 수단으로 전락하기 쉽다.
2011년 당시 장첸판 교수는 이미 중국공산당 일당독재의 전제성을 비판한 지식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이날 장 교수의 강연은 시쳇말로 ‘대박’이었다. 큰 강의실에 앉을 자리가 없어 강의실 문밖에서 까치발을 딛고 서서 강연을 듣는 학생들도 있었다. 엷은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학생들을 보면서 장 교수는 온화하지만 단호한 음성으로 강연의 말문을 열었다.
“앞으로 2주 쯤 후면 신해혁명 100주년이 됩니다. 모두가 신해혁명에 대해서 큰 관심을 보입니다.······ 이러한 주제를 베이징 대학에서 말할 수 없다면, 누가 어디서 얘기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베이징 대학이 이 주제를 거론하지 않는다면, 베이징 대학의 치욕(恥辱)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제 강연의 주제는 바로 치욕에 관한 것입니다. 저는 베이징 대학이 치욕이 없어서 좋았는데, 이번에 베이징 대학 당국은 저명한 역사학자 위안웨이스(袁偉時, 1931- ) 교수의 ‘신해혁명 100년 헌정’과 같은 강의를 허용했어야 합니다. 실상 위안 교수는 저보다도 훨씬 더 온건합니다.”

▲<시진핑 정권은 “의법치국(依法治國)”을 강조하면서 “헌정(憲政)” 담론 자체를 금기시한다. “시진핑, 사회주의 민주정치와 의법치국을 말하다. 의법치국 전면추진에 관한 논술 발췌. 사진/今日中國>
이어서 장 교수는 말로 하면 격해질 수 있기에 마음속의 생각을 글로 써왔다며 준비된 원고를 낭독했다. 첫머리부터 장 교수는 명징한 문장으로 청중의 귀를 사로잡았다.
“황제체제 무너뜨린 신해혁명 100년 지났지만 중국은 아직도 전제 정권”
“2011년 신해혁명이 황제 체제를 무너뜨리고 100년이 지났지만, 중국은 아직도 관료부패와 사회위기에 빠져 있다. 우창(武昌) 병변(兵變)은 쓰러져가는 대청제국을 무너뜨리고 수천 년 황권 통치를 종식했지만, 황권의 종결은 진정한 공화의 시작이 아니었다. 100년 동안 중국은 전란에 휩싸이고 생령(生靈, 백성)은 도탄에 빠지고 인민은 반복해서 호겁(浩劫, 커다란 겁탈)을 겪었으며, 헌정의 운명은 기구했다.”
장 교수는 신해혁명 이후 100년을 “민권(民權)은 신장되지 않고 공권(公權)만 무한 팽창한” 역사라고 규정했다. 100년 전 “제국(帝國, 황제의 나라)”을 무너뜨리고 “민국(民國, 국민의 나라)”을 세웠는데, 대륙은 지금도 전제정권의 통치 아래 놓여 있다. 장 교수는 비장한 어조로 헌정의 당위를 역설했다.
“지난 100년의 풍파와 앞날의 불행은 모두 인민을 노예로 부리는 전제(專制, 독재 제도)에서 기인한다. 전제는 참으로 교활하고 완고하다. 혁명을 일으켜도 타파되지 않는다. 정반대로 혁명은 왕왕 더욱 강대한 폭정을 낳는다. 청제국의 멸망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때에 맞춰 헌정 개혁을 시행해야만 혁명의 비극을 피할 수 있다는 점이다. 만약 집정자가 미욱해서 깨닫지 못하고, 개혁을 거절하면 불을 갖고 놀다 스스로를 태우는 데 머물지 않고, 중국 사회 전체가 혁명과 폭정의 악순환에 빨려들어 간다. 중화민족의 문명은 문란해진다. 부패가 횡행한다. 자원이 고갈된다. 환경이 파괴된다. 급기야 인민은 안심하고 살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백년 역사가 충분히 증명한다. 오직 헌정(憲政)만이 중국을 구할 수 있다.”

▲<쑨원(孫文, 1866-1925)과 신해혁명에 참여한 군인들. 1912년 1월 추정. 사진/공공부문>
장 교수는 헌정의 실현을 위해선 전제를 타파해야 한다고 말한다. 헌정은 독재를 막고 국가권력을 제약하는 “법의 지배”를 이른다. “법의 지배”를 실현하기 위해선 법 위에 군림하는 전제적 지배자들을 끌어내려야만 한다. 장 교수는 그 주체가 인민이라 주장한다. 주권재민의 원칙을 쉽고 명료하게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전제를 타파하기 위해선 반드시 인민에 의존해야 한다. 헌정을 세우기 위해서 인민은 스스로의 존엄을 확립해야 한다. 개인의 존엄은 국가 헌정의 기본 조건이다.······ 전제의 가장 큰 죄악은 인간의 존엄을 짓밟는 데 있을 뿐만 아니라 개인이 스스로 [인간의] 존엄을 회복할 수 있는 능력 자체를 박탈하여 개개인이 스스로 기꺼이 타락하여 음험한 전제 권력에 복종하도록 만든다는 데 있다.”
장 교수는 간명한 언어로 입헌 자유주의(constitutional liberalism)의 핵심 논리를 설파했다. 요컨대 헌정의 주체는 정부가 아니라 존엄성을 갖는 인간 개개인이다. 기본권을 보장받은 자유로운 개개인의 자발적 참여를 통해서만 헌정이 실현될 수 있다. 존엄성을 상실한 인간은 전제정의 노예로 전락하고 만다. 바로 그 전제 권력을 무너뜨리지 않고선 인간의 존엄이 확립될 수 없다. 신해혁명 이후 100년의 과정에서 중국은 극심한 전쟁의 폐해와 혁명의 광란을 겪었음에도 인간 존엄은 여전히 요원한 꿈이다. 바로 중국공산당이 헌법 위에 군림하며 전제적인 통치를 이어가기 때문이다.
장첸판 교수의 마오쩌둥 비판 “헌정 파괴자, 치욕의 기둥에 적어야”
강연 막바지에서 장 교수는 비장한 어조로 다음 문장을 낭독했다.
“진보를 압살하고, 인민에 대항하고, 헌정을 억압하고, 개혁을 거절한 자는 아무리 그가 생전에 스스로를 신성한 지위에 봉했다 할지라도 중국 역사의 치욕을 적는 기둥에 영원히 그 이름을 새겨 넣어야만 한다.” (동영상, 1시간 42분 46-56초)
이 문장을 읽고 나자 약 2-3초 정도 짧고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장 교수가 잠시 한 모금 물을 마시자 학생들은 갑자기 반사적으로 뜨거운 손뼉을 쳤다. 연사와 청중이 자발적으로 주고받은 미묘한 대화였다. 장 교수는 왜 바로 그때 물을 마셨을까? 청중이 보인 그 짧은 침묵의 의미는 무엇일까? “생전에 스스로를 신성한 지위에 봉한” 자는 누구일까?

▲<2011년 베이징 대학 로스쿨에서 “신해혁명과 중국 헌정”이란 제목으로 강연하고 있는 장첸판 교수. 자막: “생전에 스스로를 신성한 지위에 봉했다 할지라도 중국 역사의 치욕을 적는 기둥에 영원히 그 이름을 새겨 넣어야만 한다.” 사진/youtube.com 캡쳐>
물론 장 교수는 마오쩌둥의 실명을 언급하진 않았지만, 중국인이라면 누구나 마오쩌둥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아마도 학생들은 장 교수가 중국현대사의 “인격신” 마오쩌둥을 “진보를 압살하고 인민에 대항하고 헌정을 억압하고 개혁을 거절한 자”라고 비판했음을 자각하고는 짧은 찰라 당황했던 듯하다. 감동을 손뼉으로 표현하기까지는 대략 2-3초의 시간이 필요했다.
마오쩌둥은 중국사 그 어떤 황제보다 더 큰 권력을 누린 일인지배의 화신이었다. 그는 스스로 황제가 되어 헌정을 억압하고 민국의 꿈을 파괴한 전제군주였다. 그는 살아서 스스로를 신격화했지만, 장 교수는 당당하게 그 이름자를 역사의 치욕을 기록하는 기둥이 새겨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서 장 교수는 헌정의 실현을 위한 중국 인민의 궐기를 촉구하는 말로 강연의 대미를 장식했다.
“모든 중국인이 일어나서 개인의 존엄과 후대의 행복과 민족의 앞날을 위해 인간으로서의 책임을 스스로 지고, 스스로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지키고, 자신의 양지(良知)와 용기를 발휘하여 공평하고 정의로운 국가 질서를 창조하고, 스스로 각성과 행동을 통해서 중화문명에 비치는 헌정의 서광을 맞이하자! 한국, 대만, 구소련, 동구, 남아프리카, 칠레, 인도네시아, 태국, 네팔, 이집트, 튀니지, 리비아의 인민이 할 수 있다면, 중국 인민도 반드시 할 수 있다!”
학생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큰 박수를 보냈다. 한국, 대만은 민중이 자발적 노력으로 군부독재를 종식한 성공적인 자유민주주의 체제이다. 2011년 봄 이집트, 튀니지, 리비아 등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국가들에 민주화의 열풍이 불었다. 장 교수는 바로 그 “아랍의 봄”을 의식하고 중국 인민도 역시 전제 정권을 타도하는 민주화의 주체가 될 수 있다고 부르짖었다. 영상 밑에 달린 댓글 중에는 다음 구절이 눈에 띈다.
“장 첸판 교수가 2011년 9월 이 강연을 할 때, 일존(一尊, 시진핑)은 아직 국가주석이 아니었다. 10년의 과거를 돌아보면, 장 교수가 했던 말이 오늘날 한 치의 차이도 없이 100% 실현됐다. 그의 강단과 혜안에 존경을 표한다. 당시의 학생들은 이제 30세 전후가 되었다. 그들이 오늘날의 극심한 국가적 타락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할까 궁금하다. 당시는 후진타오(胡錦濤, 1942- )와 원자바오(溫家寶, 1942- )의 시대였다. 사상, 언론의 자유가 그래도 어느 정도 있었다. 만약 요즘 같았다면, [장 교수는] 탄압당하고 투옥됐을 것이다.”
장첸판, 미국서 물리학 박사학위 후 다시 정치이론으로 박사...로스쿨 교수로
베이징 대학 로스쿨의 장첸판 교수는 저명한 헌법학자다. 1980년 열여섯에 난징(南京)대학 물리학과에 입학했고, 1984년 스무 살 나이로 미국 유학길에 올라 1989년 카네기멜런 대학(Carnegie-Mellon University)에서 물리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수재다. 2년 후 그는 어떤 이유에선지 미국의 메릴랜드 대학 로스쿨에 입학했는데, 비싼 등록금을 댈 수 없어 자퇴해야 했다. 그는 그 대학의 컴퓨터 센터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주경야독하듯 로스쿨 수업을 청강했다. 이후 1995년-1999년 그는 미국 텍사스 오스틴 대학에서 정치이론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99년-2002년 난징 대학 로스쿨에서 교수가 되었고, 2003년 이래 베이징 대학 로스쿨의 교수가 되어 헌법학, 비교 헌법학, 중국 헌법 및 헌정 원리 등을 가르치며 연구해 왔다.
장 교수는 2010년대 초부터 중국공산당의 전제적 통치를 비판하면서 헌정(憲政) 담론에 불을 지핀 중국의 대표적인 헌법학자이다. 베이징 대학과 쌍벽을 이루는 칭화(淸華) 대학 로스쿨의 쉬장룬(許章潤, 1962- ) 교수 역시 2010년대 헌정 담론을 이끌었던 대표적인 헌법학자이다.
2011년 9월 27일 장첸판 교수의 강연 영상은 이후 잠시 널리 퍼져나갔지만, 곧 모두 삭제되었다. 지금은 중국 내에선 볼 수 없는 유투브를 통해서만 장첸판 교수의 강연을 볼 수가 있다. 현재 중국의 대표적인 비디오 플랫폼에서는 장첸판 교수의 강연이나 인터뷰는 아예 찾아볼 수가 없다.
시진핑 정권 출범 직후, 중국공산당 중앙당교(中央黨校)의 이론가들은 당시 활발하게 일어나던 헌정 담론을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그 후로 장첸판 교수는 인터넷 매체나 대중강연을 자유롭게 할 수는 없게 됐지만, 헌법학자로서 그는 조금도 굽히지 않고 계속 저술 활동을 이어갔다.

▲<2021년 3월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 부위원장 왕천파(王晨發)는 “동승서강(東升西降, 동방이 상승하고 서방이 하강한다)”의 세계관을 피력하면서 절대로 서방식 헌정의 길을 가선 안 된다고 발언했다. “중국은 헌정, 삼권분립, 사법독립의 길을 절대 가서는 안 된다”는 시진핑 총서기의 발언을 그대로 강조한 셈이다. 사진/rfa.org 自由亞洲電台 >
중국공산당 일당독재를 개인의 존엄성을 해치는 전제주의 통치라 비판하는 장첸판 교수를 시진핑 정부가 그대로 둘 리 없었다. 2019년 1월 말 중국 정법대학의 한 교수는 헌법학 교재가 “서방 가치관을 선전하고 사회주의를 조소한다”는 이유로 중국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던 장첸판 교수의 교과서 <<헌법학 도론>>을 정부 당국에 고발했다. 결국 중국 정부는 중국의 모든 대학에서 이 책이 교과서로 사용될 수 없게 했다. 곧이어 이 책은 금서의 목록에 올랐고, 인터넷 서점에서도 자취를 감췄다. 중국공산당 정부는 왜 장첸판 교수의 <<헌법학 도론(導論)>>에 금서의 낙인을 찍었을까? 중국공산당은 왜 장 교수를 두려워하는가? 장 교수의 명저 <<헌법학 도론>> 속으로 들어가 보자. <계속>
〈45〉 ‘논리의 힘’ 없는 독재 정권이 ‘힘의 논리’로 표현의 자유 탄압

▲<2016년 6월 19일, 중국 광둥성 우칸(烏坎)의 마을 사람들이 마을 지도자의 석방을 요구하면 시위하고 있다. 사진/The Asahi Shimbun/>
중국 공산당, 왜 헌법에 보장된 ‘표현의 자유’조차 허용 못하나
논리의 힘이 없는 정권은 힘의 논리를 쓴다. 논리의 힘은 다수 국민의 자발적 동의를 유도하지만, 힘의 논리는 거센 반발과 민심 이반을 야기한다. 1989년 6월 4일 텐안먼 대학살이 증명하듯, 독재정권은 힘으로 반대의견을 억누르고 저항과 시위가 거세지면 군을 투입해서 인명을 살상한다. 9500만 당원을 자랑하는 중국공산당은 명실 공히 세계 최대 규모의 막강한 정치조직이다. 그렇게도 강력한 집단이 왜 헌법에 보장된 “표현의 자유”조차 허용하지 못하는가? 덩치만 클 뿐 논리의 힘이 없기 때문이다.
베이징 대학 로스쿨의 장첸판(張千帆, 1964- ) 교수는 중국의 대표적인 헌법학자다. 그가 쓴 <<헌법학 도론(導論)>>은 중국의 여러 대학에서 널리 사용되어 온 중국의 대표적인 헌법학 교과서다. 2004년 중국 사법부 직속의 법률출판사에서 초판이 출판된 후, 장 교수는 2008년, 2014년 내용을 보강하고 업데이트해서 증보판을 펴냈다. 15년 간 중국의 유수한 로스쿨에서 널리 읽혀 온 이 책이 2019년 1월 갑자기 중국공산당의 금서(禁書) 목록에 올랐다. 이 책이 “서방(西方) 가치를 선양(宣揚)한다”는 이유였다. 현재 중국에선 인터넷 서점에서도 이 책을 구매할 수가 없다. 중국공산당은 대체 왜 그런 무리한 조치를 취해야만 할까?

▲<2015년 1월 5일 중국 매체의 위헌적 입장을 비판하는 베이징 대학 로스쿨의 저명한 헌법학자 장첸판(張千帆, 1964- ) 교수. 사진/law.ytu.edu.cn>
장첸판 베이징대 로스쿨 교수의 ‘헌법학 도론’ 금서 처분
700장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헌법학 도론>>을 정독해보면, 그 이유를 쉽게 알 수 있다. 이 책에서 장 교수는 간명하고도 재기 넘치는 문장으로 중국의 독자들에게 헌법이란 국가폭력으로부터 인간의 존엄과 개인의 권리를 지키는 가장 강력한 방어의 무기임을 명쾌하게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 책은 견제와 균형, 삼권분립, 연방주의, 선거를 통한 민주적 권력 창출의 절차 등 헌법에 의한 통치, 곧 헌정(憲政) 실현의 필수 조건을 상세히 논구(論究)한다.
헌법학 자체가 중국 전통의 산물이 아니라 서구 근대에서 발전한 입헌주의의 전통에서 나왔다. 헌법학자라면 그가 중국인이든, 인도인이든 국가권력을 제약하고 개인의 기본권을 보장하기 위한 정교한 이론의 그물을 짤 수밖에 없다. 장첸판 교수가 바로 그런 이론가이다. 물론 중국공산당은 그를 서방 이론을 추종한다고 비난하지만, 장첸판 교수는 이미 한 세기가 넘는 중국 헌정사의 전통을 내세워 중국공산당의 헌법 유린을 비판한다.
1908년 망해가던 청조(淸朝)가 <<헌법대강>>을 반포한 이래 중국 지성계는 줄곧 헌정을 실현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 왔다. 장 교수는 오늘날 중국 헌법이 중국공산당 집권 이전부터 꾸준히 축적된 헌정 담론의 결과임을 논증한다. 오늘날 중국 헌법의 이론적 근거를 파헤쳐 보면, 근대 서구의 입헌주의 전통은 물론, 신해혁명 이후 국민당 통치 시기의 영향도 발견된다. 공산주의 국가 “중화인민공화국”의 헌법이 “공민의 기본권”을 구체적으로 천명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그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오늘날 중국의 근본 문제는 바로 그 헌법의 권리 조항을 중국의 인민들이 현실에서 제대로 누릴 수 없다는 점이다.
2019년 2월 15일 중국공산당 기관지 <<구시(求是)>>에 게재된 강화(講話)에서 시진핑 총서기는 “중국은 절대로 서방의 헌정, 삼권분립, 사법독립의 길을 가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장 교수의 <<헌법학 도론>>이 판금 조치된 지 채 한 달이 안 된 시점이었다. 두 사건은 연동되어 있다. 베이징 대학 로스쿨의 헌법학 교수가 중국 헌법의 전제성을 비판한다는 사실을 중국공산당은 받아들일 수가 없다. 물론 중국공산당은 장 교수의 이론을 반박할 논리의 힘이 없다. 국가폭력을 휘둘러 장 교수의 책을 없애는 힘의 논리만 휘두를 뿐.

▲<2019년 금서(禁書)가 되어버린 장첸판 교수의 명저 “헌법학 도론” 표지. 사진/캡처>
장첸판 교수 “도는 어디에나 있다....헌법은 공민 권리의 수호신”
흥미롭게도 장체판 교수는 <<헌법학 도론>> 서두에서 <<장자(莊子)>><지북유(知北遊)>편에 나오는 동곽자(東郭子)와 장자(莊子)의 대화를 인용한다.
동곽자(東郭子)가 장자(莊子)에게 물었다.
“도는 대체 어느 곳에 있나요?”
장자가 말했다.
“도는 어디에나 있다오.”
“예를 들어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죠!”
“개미 몸 위에 있습니다.”
“어째서 그처럼 하찮은 곳에 있습니까?”
“강아지풀과 논에 자라는 피에도 있소!”
“어찌 더욱 하찮은 곳에 있나요?”
“깨진 기와나 벽돌에도 있소!”
“어째서 더욱 심해집니까?”
“오줌도 똥에도 있소!”
장 교수가 장자의 고사를 인용한 의도는 도가 세상 어디에나 있듯 헌법 또한 인간사(人間事) 어디에나 적용되는 기본 원칙임을 알리기 위함이다. 헌법이 어디에나 있고, 모든 사건에 적용될 수 있음을 안다면 중국 인민은 스스로 권리를 지킬 수 있는 무기를 갖게 된다. 장 교수는 중국에서 철거민들이 당하는 불이익을 중국에 흔하디흔한 사건 하나로 보여준다.
“당신의 집이 곧 철거된다. 정부는 일부 보상을 받고 정해진 시한 내에 인근 도시에 들어서는 새 주거지로 이주해야 한다고 통지한다. 당신은 이사할 ·생각이 없다. 정부가 주는 이사 비용도 턱없이 부족하다고 느낀다.
또 정부 관리와 개발업자가 막후 교역으로 당신과 주변 이웃의 정착 비용을 침탈해서 이윤을 나눠먹는다고 의심한다. 그래서 마을 대표를 찾아서 의견을 전하려 하지만, 그가 누구인지 알 길이 없다. 주변에 물어봐도 아무도 모른다. 긴박한 상황에서 당신은 불만을 품은 이웃사람들을 찾아내고, 함께 정부 청사까지 몰려가서 항의하지만, 투입된 전투경찰에 의해 해산되고 현지 책임자에 의해 ‘군중을 모아서 소동을 일으켰다’는 혐의로 피소된다. 이어서 사회에 나쁜 영향을 조장했다는 죄목으로 공안국에 붙잡혀서 이틀간 구류를 살고 또 샅샅이 조사까지 당한다. 풀려나기 직전엔 주의 사항을 듣고 경고를 받는다.”
“철거일이 임박해서 개발업자들은 ‘대표 정부’를 만들어서 ‘신속 철거! 이주 촉진!’이라는 구호 아래 철거를 강행하고, 철거민들은 큰 피해를 입게 된다. 당신은 지방 법원에 이 사태를 고발을 하지만, 관련 행정 부문은 법원에 압력을 행사하고, 상급 법원도 통지문을 하달해서 사건의 수리 자체를 거부한다. 정부 내의 부패 집단과 민간 개발업자가 결탁하여 자신의 권리를 박탈한다고 생각하여 당신은 법관과 관리를 고발하는 격문을 언론에 발표한다. 그 결과 먼저 타인을 고소하지도 않았는데 타인들이 당신을 명예훼손죄로 고소한다. 결국 1심 판결에서 패배한 당신은 갈 곳 없는 지경까지 내몰린다.”

▲<중국 한 도시의 철거되는 건물들. 사진/ 중국인터넷>
“헌법을 잘 이용하면 빼앗긴 권리를 되찾을 수 있다”
오늘날 중국인이면 흔히 주변에서 접하는 사건이다. 지방 관리, 개발업자, 법원, 행정기관, 공안국까지 관련한 총체적 부패 고리가 빤히 보이지만, 자기 집에서 쫓겨난 미약한 개인은 과연 어떻게 거대 권력에 맞서 투쟁할 수 있을까? 장 교수는 이 부패 사건이 바로 헌법 문제임을 설명한다.
도가 하찮은 사물에 깃들어 있다고 말하는 장자처럼 장 교수는 헌법이 “닭털이나 마늘 껍데기”처럼 “작은 사건”에도 적용된다고 주장한다. “헌법이 이렇게 작은 일에 관여할 수 없다면, 큰일에도 관여할 수 없다!” 장 교수는 중국의 공민이 헌법을 잘 이용하면 거대 권력에 박탈당한 권리를 되찾을 수 있음을 알리려 한다.
위의 사례처럼 부당하게 집을 빼앗긴 철거민은 헌법을 무기 삼아 정부를 상대로 싸울 수가 있다. 바로 “공민의 주택은 침범될 수 없다”(제39조), “공민의 합법적 사유재산권은 침범될 수 없으며,” “국가는 법률 규정에 따라 공민의 사유재산권을 보호한다”(제13조)는 조항이 헌법 속에 명기돼 있기 때문이다.
지방 정부가 공안을 동원해서 개인의 언론 활동을 제약한 조치 역시 위헌이다. 중국 헌법 제35조는 언론의 자유를 보장한다. 철거민을 잡아서 구류를 살린 공안국의 조치도 위헌이다. 중국 헌법 제37조에 따르면, “공민의 인신 자유는 침범될 수 없으며, 불법 구금 및 기타 방법에 따라 부당하게 공민의 인신 자유를 박탈하거나 제한하는 행위는 금지된다.”

▲<2014년 2월 산둥성 칭다오의 주민들이 “거주민의 정상적인 물 사용권”을 보장하라며 투쟁하고 있다. 사진/ http://www.lhjfdc.com/Article/dlaj/201402/20140222183730.html>;
강제로 공권력을 사용해 철거민의 집단 시위를 해산시킨 점 역시 헌법 35조에 보장된 “결사의 자유”를 침해한다. 게다가 중국 헌법 41조는 “공민이 어떤 국가 기관이나 국가 공무원에 대해서도 비판하고 항의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규정한다. 법원이 행정 부문의 압력 아래서 철거민의 민원을 거부한 점 역시 헌법 제126에 명시된 “사법독립의 보장” 규정에 저촉된다.
마지막으로 장 교수는 위의 사건에서 철거민이 마을 대표를 찾아도 알 수 없는 상황 역시도 헌법에 어긋남을 지적한다. 헌법 제97조에 따르면, 공민은 유권자의 직접선거를 통해서 각 구역의 인민대표를 선출할 수 있는 권리를 갖기 때문이다.
장 교수는 헌법이 “현묘하고 고원한 이론이 아니라 실생활 속 일상사에 관계되는”을 필수불가결의 법망(法網)이라 강조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공기처럼, 어디나 편재(遍在)하는 섭리처럼, 헌법은 인간 사회 모든 일상사의 밑바탕에 놓여 있다. 안타깝게도 중국의 많은 사람들은 바로 그 무소부재(無所不在)의 헌법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헌법을 모르기에 많은 중국인들은 정부가 때리면 맞고, 빼앗으면 뺏기고, 잡아가면 잡혀간다. 중국의 헌법학자들이 흔히 말하듯, “헌법은 있으나 헌정은 없다!”
계속되는 장첸판 교수의 헌정 투쟁... “중국의 헌정이 寒流를 만났다”
2019년 1월부터 그의 책은 금서가 되었지만, 장첸판 교수는 이에 굴하지 않았다. 그는 2021년 중국의 헌정 담론을 정리한 <<헌정 중국 연강록(憲政中國講演錄)>>1, 2, 3권을 출판했다. 도합 738쪽의 이 방대한 편찬서는 2010년대 이래 중국에서 뜨겁게 일어났던 이른바 헌정 담론의 주요 논문, 대담, 강연을 집대성하고 있다.
물론 이 책은 정부의 검열을 피해 홍콩에서 출판되었다. 장첸판 교수는 이 책의 서문에서 홍콩 성시(城市) 대학 출판부의 사장 주궈빈(朱國斌) 교수의 성원과 편집부의 노고에 감사의 뜻을 전하면서 아래와 같이 썼다.
“바로 그들의 노력으로 이 책이 광대한 독자층을 만날 수 있게 되었으니 중국의 헌정이 한류(寒流)를 만난 이때, 헌정 탐색의 온기와 생기가 유지될 수 있다.”

▲<계속되는 중국공산당 정부의 압박에도 2021년 홍콩에서 “헌정중국 연강록”을 출판한 베이징 대학 로스쿨의 저명한 헌법학자 장첸판 교수. 오른쪽은 책 표지. 사진/캡처>
“중국의 헌정이 한류를 만났다”는 표현은 시진핑 정권의 사상 탄압이 극심해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헌정 탐색의 온기와 생기가 유지된다”는 문장에선 정치적 탄압에 맞서는 도전과 저항의 정신이 읽힌다. 사상의 해방구로서 비판적 지식인의 무대였던 홍콩은 지금 시진핑 정부의 공격을 받아 함락 직전의 요새가 된 듯싶다.
2018년 3월 11일 전국인민대표대회는 99.8%의 찬성률로 1982년 헌법의 제79조에 명시된 국가주석의 임기제한을 삭제했다. 그 결과 시진핑이 종신토록 집권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2020년 5월 28일엔 99.7%의 찬성률로 홍콩의 정치적 자유를 근본적으로 제약하는 홍콩 보안법을 통과시켰다. 2021년 3월 11일엔 99.97%의 찬성률로 홍콩의 선거제를 베이징의 입맛에 맞게 뜯어고치는 법안까지 통과시켰다. 이후 시진핑 정권은 반민주 법안을 칼날처럼 휘둘러 민주화 인사들을 대거 구속하고 있다.
그렇기에 “헌정 중국”이 홍콩에서 출판됐다는 사실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 책은 사법 개혁, 법치 제도 확립, 중앙·지방의 권력 분립, 언론자유 등 중국공산당이 금기시하는 민감한 “헌정” 의제를 논하고 있다. 또한 이 책의 저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중국공산당의 전제성”을 비판하는 지식인들이다. 바로 작년 초 이 책이 홍콩에서 나올 수 있었다는 사실은 중국의 지식인들이 홍콩 지식인들과의 연대 속에서 중앙정부에 대항한 저항과 투쟁을 이어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계속>

▲<중화인민공화국 헌법을 읽는 중국의 한 어린이. 사진/ 중국인터넷>
〈46〉 중국식 디지털 전체주의 “전 인민을 감시하라”
최첨단 장비로 개인을 감시 위협하는 ‘철창 속의 사회’

▲중국 선전에서 열린 중국 공안 엑스포에서 관람객들이 안면 인식 기술을 체험하고 있다/로이터
아득한 먼 과거를 이상화하는 경향은 여러 문명에서 관찰된다. 기독교 문명엔 실낙원(失樂園)의 신화가 있다. 유교 문명엔 먼 과거 성왕(聖王)이 통치하던 대동(大同) 사회의 이상이 있다. 발전사관은 기껏 18세기 계몽주의 이래 널리 퍼져나간 근대인의 견해일 뿐이다. 인류사 거의 모든 문명권에 상고의 인간사회를 유토피아로 그리는 로맨티시즘이 널리 퍼져 있었다.
먼 과거 한 때 모두가 다 잘 살았다는 믿음의 역사적·심리적 뿌리는 무엇일까? 현실의 고통을 잊기 위해 인류가 만들어낸 가상현실인가? 현실 도피의 대체 역사인가? 현실 비판의 이념적 준거인가? 모두 다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 선사시대 인류가 오늘날 우리보다 더 풍족하고 평화롭고 행복하게 잘 살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인류의 유전적 오디세이를 추적하는 바이오역사학(biohistory)의 성과에 따르면, 7-8만 년 전 해빙기 북아프리카를 빠져나온 현생인류는 유라시아 전역으로 퍼져 나가 아메리카 대륙으로 옮겨 갔다. 장구한 인류의 대이동은 대략 1천 년 전 남태평양 뉴질랜드 부근에서 막을 내렸다. 인류사 대부분은 그렇게 기껏 20-30여 명 사람들이 작은 무리를 지어 끊임없이 전 세계로 뻗어간 탐험과 이산(離散)의 과정이었다.
수백만 년 멀리멀리 떠돌아다니던 인류가 1만 년 전 시작된 농업혁명으로 문명의 철창 속에 감금당했다. 문명의 수인(囚人)이 돼 버린 인류는 가혹한 노동, 반복되는 전염병, 침략전쟁, 대량학살, 신분적 예속의 악순환을 벗어날 수 없었다. “철창 없는 사회”(cageless society)에 살던 인류가 “철창 속의 사회(caged society)”에 갇힌 격이다.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지만, 어디를 가나 사슬에 묶여 있다!” 루소(Jean-Jacques Rousseu, 1712-1778)의 이 유명한 발언은 문학적 수사가 아니라 사실적 묘사일 수도 있다. 문명의 늪에 빠져버린 호모사피엔스의 서글픈 숙명에 관한. 산업혁명으로 근대문명을 일으키고 과학기술혁명을 거쳐 디지털 정보혁명까지 나아간 인류는 오늘날 과연 자유롭고, 평화롭고, 행복한가? 정보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우왕좌왕 헐떡이다 보면 18세기 루소의 통찰이 더욱 가슴에 와 닿는다. 진정 우리는 지금 세계 어디를 가나 사슬에 묶인 채 감시당하고 있는 듯하다.

▲<중국 센스타임(商湯)이 개발한 안면 인식 기계. 사진/wsj.com>
비대해진 국가 권력 “너희는 지금 감시당하고 있다!”
20세기 문명사의 가장 큰 특징은 국가권력의 비대화다. 전근대 국가가 제아무리 강했다 해도 현대의 기준에선 유약하기 짝이 없었다. 세계사의 여러 제국의 정치구조를 보면, 중앙권력은 방대한 영토를 실질적으로 지배하기 보다는 지방의 토호 세력에 권력을 위임하고 물러나 있는 상징적 권위에 머물렀다. 교통·통신의 미발달과 행정력의 한계 때문에 강력한 중앙집권화의 이념은 요원한 꿈이었다.
2차 대전 이전까지만 해도 미국 내 각급 정부의 모든 세수는 국민총생산의 10%에도 미치지 않았다. 그 수치가 불과 반세기 후인 1990년대에는 35%를 넘을 정도로 비대해졌다. 미국이 그나마 다른 산업화된 국가들에 비해 그 비율이 낮은 편이었다. 인류는 2차 대전을 겪고 나서야 진정한 리바이어던(Leviathan)의 출현을 경험하게 되었다.
2020년대 디지털 정보혁명에 힘입어 국가권력은 더더욱 커져만 간다. 세상 어디를 가나 인공지능이 조정하는 감시 카메라가 놓여 있다. 카메라는 개개인의 안면, 음성, 홍채, 걸음걸이, 소비성향, 생활습관 등 생체 정보와 생활 습관까지 정교하게 채집한다. 실시간 생성되는 빅 데이터가 빅브라더의 슈퍼컴의 하드드라이브에 집적된다. 모든 이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빅브라더는 개개인의 실적을 점수화해서 사회신용의 등급을 매긴다. 빅브라더는 말한다. “어여쁜 백성들은 두려워 말라! 범죄자, 범법자, 일탈자만 잡아내는 알고리즘의 통치다.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위한 최첨단의 시스템이다.”

▲<2019년 3월 15일 베이징, 수 개의 감시 카메라가 뒤로 중국 국기가 휘날리고 있다. 사진/ AP Photo>
엄격한 법 통해 모두 범법자로 만든 뒤 골라서 처벌하면 누구나 걸려든다
결코 망념이나 기우가 아니다. 이미 구현된 21세기 중국공산당의 디지털 전체주의의 실상이다. 언론엔 날마다 감시 카메라의 위력을 알리고 칭송하는 뉴스가 즐비하다. 허난 성 정저우(鄭州)에서 안면인식 안경을 쓴 경찰관이 히로뽕 밀매업자를 잡는다. 안후이 성 우후(蕪湖) 시에선 감시 카메라가 살인 용의자를 찾아낸다. 중국 동남부에서 한 도시에서 경찰은 전과자 세 명이 같은 호텔에 투숙했음을 실시간으로 알아낸다. 반정부 시위 경력이 있는 한 사내가 베이징 행 기차표를 구매할 때 제깍 경찰이 현장으로 출동한다. 푸젠 성에서 정신 병력을 있는 한 여인이 집을 나서자 집 앞의 카메라가 돌아가기 시작한다. 산둥 성 청도(靑島)의 맥주 축제에 몰려든 대규모 군중 중에서 AI 카메라는 스물네 명을 콕 집어서 잠재적 범죄자로 분류한다.
중국의 많은 도시에는 이미 거리 곳곳에 대형 스크린이 설치돼 있다. 누군가 적신호에 길을 건너면 그의 안면을 인식한 AI 카메라가 즉시 그의 신원 정보를 대형 스크린에 띄워서 공개적으로 모욕을 준다. 사람들은 날마다 실시간으로 빅브라더의 감시망에 걸려든 일탈자의 초라한 얼굴을 혀를 차고 손가락질하지만, 스스로 예외일 수 없음을 알기에 공포를 느낀다. 오웰이 예언했듯 “빅브라더가 너희를 보고 있다.”

▲<후베이 샹양(襄陽) 창홍(長虹)대교 부근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 사진/視覺中國>
<<노자(老子)>>73장에 “천망회회(天網恢恢), 소이불실(疎而不失)”이란 구절이 나온다. 하늘의 그물은 느슨하지만 아무것도 빠져나갈 수 없다는 뜻. 인과응보(因果應報)나 사필귀정(事必歸正)의 의미로 새길 수 있지만, 전 인민을 감시하고 처벌하는 법가(法家) 통치의 원리로 해석될 수도 있다. 법이 작동하려면 정부는 법을 은밀하고 교묘하게 적용해야 한다. 엄격한 법을 만들되 장시간 법 집행을 아니 하면, 어느새 모두가 범법자가 된다. 그때 통치자는 법의 칼을 빼들고 한, 두 명 처형대에 올리면 된다. 느슨하고 성글게만 보이는 법망의 그물코를 당기면 모두가 걸려든다.
중국 감시 시스템 天網 “하늘의 그물은 빠져나갈 수 없다!”
1984년 작 <<터미네이터(Terminator)>>는 스스로 지각능력을 갖게 된 슈퍼 인공지능 스카이네트(Skynet)와 인간의 투쟁을 그린 영화다. 스카이네트의 중국어가 바로 “천망”인데, 중국공산당 정부는 안면인식 기술과 빅 데이터 분석 기술을 활용하는 세계 최대 규모의 감시 시스템을 구축하고, 이를 일컬어 “톈왕(天網, 천망, Skynet)”이라 한다. 중국에선 그 누구도 천망을 피해 달아날 수 없다. 중국공산당은 천망은 중국 밖까지 그물코를 드리우고 있다. 중국공산당은 바로 그 천망을 이용해서 해외로 도피한 인사들까지 샅샅이 색출해서 “본국”으로 “소환”한다.
중국은 2005년부터 전국 규모의 디지털 감시망을 만들기 시작했다. 시진핑 정부가 출범하던 2013년 중공중앙은 중국에서 “천망” 시스템이 작동하고 있음을 온 세상을 공개했다. 2013년 당시 전국에는 2천 만 개의 감시 카메라가 설치되었다. 일반 대중을 감시하는 카메라 외에도 신장의 모스크, 티베트의 사원, 반정부 투사들의 주거지에도 카메라가 설치되었다. 2017년부터 중공중앙은 인민의 휴대전화기에 감시용 앱(app)을 깔게 했다. 지방 정부는 국가 치안 목적으로 모바일 앱을 작동시켜 인민들에게 주위의 불법행위를 모두 고발하라 종용한다.
중공중앙은 2018년 대민 감시에 최첨단의 안면인식 장비를 도입했다. 이후 시진핑 정권은 감시의 고삐를 더욱 조여서 감시 드론, 로봇 경찰, 빅 데이터 슈퍼컴를 동원한 감시체제를 거의 완성해 가고 있다. 2019년 말까지 전 세계에 설치된 7억 7천 만 개의 감시 카메라 중에서 4억 1천 5백 80만 개가 중국에 있었다. 2019년 디지털 정보회사 컴페리테크(Comparitech)의 조사에 따르면, 전 세계에서 가장 감시가 심한 도시 10개 중 8개가 중국에 있다. 충칭(重慶), 선전(深圳), 상하이(上海)가 그중 단연 “톱3″로 꼽힌다. 현재 세계 전역엔 10억 개 이상의 감시 카메라가 설치돼 있는데, 그중 절반 이상이 중국에 있다.

▲<중국 베이징의 인공지능 회사 메그비(Megvii)의 본부에서 사용되는 안면인식 소프트웨어. 사진/Gilles Sabrie, nytimes.com>
전 세계 감시카메라 7억7000만개 중 4억1580만개가 중국에
2022년 6월 21일 뉴욕타임스는 1년에 걸쳐서 중국공산당이 지향하는 전체주의적 대민 감시 시스템에 관한 보고서를 분석한 기사를 게재했다. 10만 건 이상의 “경찰 구매 입찰 문서”들을 분석한 기사이다. 여기서 “경찰 구매 입찰 문서”란 유수한 민간 기업들에게 생산비, 장비, 아이디어 및 기술력을 밝히고 정부 발주의 감시 시스템 구축 사업에 참여하라 독촉하는 경찰의 공문이다.
지금껏 중공중앙의 최첨단 감시 시스템을 만들어 온 중국의 기업으로는 텐센트(Tencent, 騰訊), 다화 기술(Dahua Technology, 浙江大華技術), 히크비전(Hikvision, 海康威視), 센스타임(SenseTime, 商湯), 바이트댄스(ByteDance, 字節跳動), 메그비(Megvii, 曠示), 화웨이(Huawei, 華爲), ZTE(中興通訊) 등 최첨단의 디지털 기술력을 갖춘 중국의 기업들이다.
중국공산당이 전일적 감시 체제를 국정과제로 제시하면, 중국 공안은 필요한 장비의 구축을 위해 구체적 사업을 발주한다. 이에 최첨단 기업들은 경쟁적으로 창의적인 기획안을 써서 입찰한다. 박탈된 기업은 인민의 혈세를 받아 대민 감시의 시스템을 개발한다. 인민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디지털 전체주의는 그렇게 관민(官民) 합작으로 굴러가는 기묘한 체제다.
중국 인민은 얼굴생김, 목소리뿐만 아니라 혈액, DNA 프로필, 홍채 스캔 등 개개인의 모든 생체 정보를 정부에 빼앗기고 있다. 빅 브라더는 안면 인식기에 성문(聲門, voiceprint) 분석기를 결합한다. 그 위에 안구 홍채와 유전자 정보까지 종합해서 14억 인구 모두를 감시하고 통제할 수 있는 최첨단의 디지털 감시망이 형성된다. 언뜻 느슨하고 성글어 보이지만, 그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는 “하늘의 그물”이다.
중국식 디지털 감시체계, 아시아 아프리카 권위주의 정권에 수출
전후좌우 일말의 견제도 없이 일당독재의 단일체로 질주하는 중국공산당 정권이 급기야 최첨단의 디지털 감시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중국의 감시체계는 이미 아시아, 아프리카의 권위주의 정권에 수출되고 있다. 전 세계 독재정권이 중국식 모델을 따라 인민을 감시하고 반대자를 색출한다.
비단 권위주의 독재정권만의 문제가 아니다. 자유민주주의 국가들도 예외일 수 없다. 영국의 런던 시에만 94만 2천여 개의 감시 카메라가 설치돼 있다.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위해 언제 어디서든 어느 정권 아래서든 개인은 기꺼이 감시당해야만 하는 세상이다. 디지털 전체주의의 시대, 그 최첨단의 기술을 중국이 이끌고 있다.

▲<2019년 홍콩 민주화 시위 때 등장한 구호. “폭정은 반드시 망한다.” 사진/npr.org>
구글, 애플, 페이스북 등 미국의 빅테크 회사들이 미 국방부와 공조하여 미국 전역에 디지털 감시망을 깔고 있다면 미국의 시민들은 어떻게 대응할까? 한국 정부가 삼성, LG, SK 등 한국의 대기업과 결탁하여 중국식 천망을 구축하려 한다면, 한국의 시민들은 무엇을 해야 할까? 혹시 이미 자유민주주의 국가들 역시 중국만큼이나 디지털 전체주의를 구현하고 있진 않나?
오늘날 인류는 어디를 가나 집요하게 디지털 감시망에 갇힌 채 신상을 털리고 있다. 공공장소 어딘가에 숨어 있는 정교한 기계가 나의 안면을 인식하고, 전화기를 추적하고, 목소리를 식별하고, 홍채를 인지하고, 나의 취향과 생각과 습성까지 파악해서 나를 지배한다. 자유민주주의 헌법이 비대화된 권력, 강력해진 정부로부터 개개인의 기본권과 자유를 보장하는 최소한의 보호망이라지만, 과연 우리는 안전한가? 중국식 디지털 전체주의가 인류의 미래인가? <계속>
09.03
〈47〉 세계 최고라는 중국의 정부 신뢰도, 과연 믿을 수 있나

▲<중국의 대중, 그들의 여론은 과연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사진/공공부문>
여론조사는 가치 중립적인 과학인가...여론조작은 독재의 수법
2022년 3월 10일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 결과는 여론조사 기관의 예측을 멀리 벗어났다. 그 차이가 크게는 7~8%로 오차범위를 훌쩍 뛰어넘는다. 역대 대선 막판 여론조사가 이토록 엇나간 전례가 없다. 막판 일주일 “깜깜이 기간” 조사에 따른 대형 기관의 예측도 완전히 빗나갔다.
우리는 과연 여론조사를 신뢰할 수 있나? 여론조사가 과연 가치중립적인 과학인가? 여론조사가 혹시 여론조작의 매체는 아닌가? 상식을 가진 시민이라면 그러한 질문을 아니 할 수 없다. 일부의 생각을 다수 여론으로, 전체 “국민의 의지(the people’s will)”로 바꿔치는 여론조작의 야바위 놀음은 판에 박힌 독재의 수법이기 때문이다.
여론만 조작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합법을 가장한 권력집단의 다수 독재(tyranny of the majority)가 가능해진다. 민주주의는 폭민주의(mobocracy)로 전락한다. 대권 후보 단일화, 장관후보 임면(任免), 대통령 탄핵, 심지어는 외교안보, 에너지 등 백년대계의 국가 정책까지 여론조사를 내세운 선정적 여론몰이가 판치는 나라에선 더더욱 그러하다. 자연스럽게 묻지 않을 수 없다. “민주 국가의 여론조사, 과연 믿을 수 있나?”

▲<2019년 9월 15일, 홍콩의 시위. 사진/공공부문>
중국민의 정부 신뢰도 91% 세계 최고...프랑스보다 2배 이상 높아
중국공산당에 대한 중국 인민의 지지도를 정확히 파악해야만, 전 세계 여러 나라들은 올바른 대(對)중국 정책을 세울 수가 있다. 중국의 여론조사가 세계적 관심을 끄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문제는 언론의 자유도, 지식인의 비판도 제대로 허용되지 않는 일당독재의 중국에서 여론조사가 과연 정확할 수 있냐는 점이다. 민주 국가의 여론조사도 의심을 받는데, 공산국가의 여론조사를 신뢰할 근거는 없다.
일례로 최근 스태티스타(Statista) 연구단에서 발표한 조사를 보면, 2021년 중국 인민의 정부 신뢰도는 91%로 단연 세계 최고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가장 신뢰도가 높은 스위스보다 7-8% 높은 수준이다. 호주, 캐나다, 독일보다는 30% 이상 높고, 40%대에 머무는 이스라엘, 한국, 프랑스, 터키 보다는 2배 이상이나 높다.
물론 이러한 조사 결과를 액면 그대로 신뢰하는 지식인은 없다. 독재정권의 여론조사는 언제나 정치적 목적에 따라 왜곡되고 과장되고 조작되기 때문이다. 독재 치하의 인민들은 “응답 편향(response bias)”을 보일 수밖에 없다. 과거 공산권의 독재정권은 국가주도로 여론조사를 실시하고 그 조사 결과를 이용해서 독재 강화의 선전전을 펼쳤다.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 사회에서 일반 민중의 여론을 가늠하기 위해선 다양한 기법의 특수한 방법이 적용될 수밖에 없다.

▲<2022년 7월 1일 중국공산당 100주년 기념식, 중국의 애국주의 교육의 단면을 보여준다. 사진/공공부문>
하버드대 애쉬 센터 조사 “중국공산당, 높은 체제 유지 능력 보여”
하버드 대학 애쉬 센터(Harvard’s Ash Center for Democratic Innovation)에서는 2003년부터 2016년까지 모두 여덟 차례에 걸쳐 중국 각층의 인민 3만1000명과 심층적인 대면 인터뷰를 진행했다. 이 조사는 중앙, 성(省), 현(縣), 향촌 네 단계 정부에 대한 인민의 만족도를 파악하기 위함이었다.
이 조사에 따르면, 중앙 정부에 대한 인민의 만족도는 최저 80.5%(2005년)에서 최고 95.9%(2009)를 보였다. 성급 정부에 대한 만족도는 최저 75%(2003년)에서 최대 89.2%(2009년)의 분포였다. 현급 정부에 대한 만족도는 최저 52%(2003년)에서 최고 74.8%(2007년)였다. 향촌 단위 정부에 대한 긍정평가는 최저 43.6% (2003년)에서 최고 70.2% (2016년)였다. 2003년에서 2016년까지 13년에 걸쳐 중앙에서 향촌까지 네 단계 정부에 대한 중국 인민의 만족도가 모두 지속적으로 상승하는 추세가 보인다.
지방 공무원의 태도에 대한 평가 여론 추이를 보면, “냉담하고 거만하다(aloof and conceited)”고 생각하는 여론은 꾸준히 40%대를 보인 반면, “친절하다(kind)”는 대답이 39.1%(2003년)에서 74.1%(2016년)로 급증했고, “자신들의 이득만 챙긴다”는 대답은 49.8%(2003)에서 37.5%(2016년)로 확연히 줄었다. 정부 기관을 통해서 “민원을 해결했다”고 대답한 비율도 19.3%에서 55.9%까지 치솟았고, “결과에 만족한다”는 비율도 31.7(2003년)에서 75,1%(2016년)로 두 배 이상 상승했다.

▲<2017년 7월 30일, 네이멍구(內蒙古)의 주르허 훈련장에서 군사 행진에 참가하고 있는 중국의 특수 무장경찰단. 사진/ Pang Xinlei/ Xinhua>
이 조사 결과에 근거해서 애쉬 센터는 중국공산당의 통치가 높은 탄력성(resilience)을 보인다는 결론을 도출했다. 여기서 탄력성이란 수많은 인권유린과 정치범죄를 저질렀음에도 중국공산당이 발휘하는 체제 유지의 능력을 이른다. 인민의 자유를 제한하고 소수민족을 탄압함에도 중국정부에 대한 인민의 신뢰도가 상승세를 보인다면, 여하튼 중국공산당은 통치에 성공했다고 말할 수도 있다. 물론 이 조사만으로는 중국의 여론 지형과 추이를 제대로 파악할 순 없다. 미국의 학계에는 판이하게 다른 조사도 발표되어 있다.
떠오르는 중국의 중산층, 비판적 여론 이끌어
2012년 이래 최근까지 미국 스탠포드 대학의 판(Jennifer Pan) 교수와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의 이칭 쉬(Yiqing Xu) 교수는 다양한 매체를 활용하는 새로운 분석 방법으로 중국의 실제 여론 동향을 질적으로 탐구해 왔다. 이들의 최신 연구에 따르면, 중국공산당의 공식 노선에 찬동하지 않는 비판 여론의 기류가 감지된다. 어쩌면 중국에 “자유 성향의 침묵하는 다수(a liberal silent majority)”가 이미 형성되어 있다고 해석할 여지도 있다.
특히 교육수준과 소득수준이 높은 계층일수록 정치적으로 자유적(liberal) 성향이며, 시장 친화적이고, 개방적이다. 시진핑 정부는 과격한 비자유적, 국가주의적, 민족지상주의의 입장을 표명해 왔다. 개방적 중산층이 권위적 정부와 긴장 상태에 놓여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만약 언젠가 중국에 모종의 큰 정치적 변화가 닥친다면, 바로 그 개방적 중산층이 변화의 물꼬를 틀 주체라 예측된다.
권위주의 국가의 여론을 파악하기 위해선 새로운 방법이 요구된다. 정부에 대한 승인 여부를 묻는 일반적 지지율 조사로는 인민의 의식 상태를 파악할 수 없다. 판과 쉬는 “현 정권을 지지하느냐?”와 같은 번연한 질문 대신 구체적인 정책에 대한 인민의 선호도를 분석하는 방법을 쓴다. 2018년과 2019년 조사에서 다수의 응답자들은 정치, 경제, 사회, 군사·안보, 외교 등 각 방면에서 중국공산당의 기본 정책에 반대를 표명했다.
구체적으로 1) “정부가 자녀 출산에 간섭할 수 없으며, 산아 수 제한은 부당하다”는 견해에 대해서 응답자의 46.9-48%가 동의했고, 22.5-22.9%만 반대했다. 2) “정부 정책에 대해서 인민의 찬반 의사 표현을 정부가 허락해야 한다”는 질문에 대해서는 58.1%가 찬성한 반면 반대는 불과 13% 정도였다. 3) “민간 자본에 의한 사립 병원 설립을 허용해야 한다”는 견해에 대해서도 47.3-53.3%가 찬성을 표명했고, 반대자는 18.5-24.2%에 불과했다. 4) “군사적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 정부는 외교적·경제적 수단으로 주권과 영토를 보전해야 한다”는 견해에 대해서 73.5-76.5%가 찬성한 반면, 반대자는 5-6%의 미미한 수준에 머물렀다.

▲<1979년부터 실시된 산아 제한 정책 홍보 벽화. 사진/Reuters>
이상 네 가지 조사 결과만 보아도 현재 중국에는 이미 상당히 리버럴한 중산층이 형성되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들은 정치적 자유를 옹호하고, 경제적 시장주의를 선호하며, 중공중앙의 민족주의 외교노선에 반대한다. 다수 중국인들은 애국주의로 무장하고 있지만, 그 애국심이 표출되는 방법은 다양할 수 있다. 무엇보다 재산이 많고 교육 수준이 높은 계층일수록 정부의 호전적 외교 정책에 반대한다. 엘리트일수록 정부 시책에 대한 맹종을 거부한다는 얘기다.
2012, 2014, 2018, 2019년 발표된 판과 쉬의 연구에 따르면, 정치적으로 리버럴한 견해를 갖는 사람들은 자유 시장을 선호하고, 중공중앙의 외교적 쇼비니즘과 군사주의에 반대한다. 반면 권위주의적 정치 제도를 선호하는 부류는 경제적 간섭주의와 중국공산당의 군사·외교적 강경책을 지지한다. 기존의 많은 연구자들 중국과 같은 권위주의 정권 하에서는 강력한 사상 통제와 이념 교육 때문에 인민 스스로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일관된 반대여론을 형성하기 어렵다고 주장해 왔다. 이에 반해 판과 쉬의 연구는 중국의 중산층이 이미 국가 정책에 관한 조직적이고도 일관된 독자적 여론 집단을 형성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중국 여론 동향의 파악, 올바른 대(對)중국 정책의 핵심
그 어느 시대, 그 어떤 나라, 그 어떤 체제든 가변적인 다수 여론만으로 국가의 대계를 결정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진 않는다.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국정의 성공은 다수 여론이 아니라 최고의 전문 지식과 효율적 행정력이 결합될 때에만 이뤄질 있다. 국민 여론이 반드시 좋은 정책을 지지한다는 보장이 없다. 다수 견해가 합리적이고 정당하다는 보장도 없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좋은 통치가 실현되기 위해선, 좋은 정책을 개발하는 만큼 그 정책의 당위를 국민 앞에 잘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하버드 대학 애쉬 센터의 주장처럼 중국공산당의 통치가 탄력적이라면, 중공 중앙은 과연 어떤 통치술로 그 탄력성을 유지하는가? 중국공산당 정부는 어떻게 그토록 놀라운 신뢰도를 자랑할 수 있는가? 중국공산당이 주장하듯 중국 정부가 좋은 정책으로 인민의 복리를 증진했기 때문인가? 강력한 이념 교육과 인민의 의식을 정치적으로 지배하기 때문인가? 중앙선전부의 교묘한 선전선동 기법으로 여론을 조작하고 왜곡하기 때문일까? 무관용의 공포 정치로 반대 여론을 짓밟아온 덕분인가?

▲<1989년, 무너지는 베를린 장벽. 사진/ 공공부문>
구미 학자들의 고전적인 “정권 교체(regime change)” 이론에 따르면, 국가 폭력, 권력 집중, 인(人)의 지배 등 권력 집단의 부패와 전횡이 만연하는 권위주의 체제는 불안정하다. 정권의 불안정은 통치의 정당성을 훼손하며, 급기야 정부의 정통성마저 파괴한다. 정당성을 상실한 정권, 정통성을 상실한 정부는 다수 인민의 저항에 부딪혀 결국 붕괴될 수밖에 없다. 구소련의 붕괴, 동구 공산정권의 해체, 한국, 대만의 민주화뿐만 아니라 2011년 중동과 북아프리카의 시민혁명 등의 사례가 고전적인 “정권 교체” 이론을 뒷받침한다.
중국은 “정권 교체” 이론이 적용되지 않는 최대 규모의 예외적 국가이다. 중국은 대약진 운동으로 최대 4천 5백만의 인명을 굶겨 죽이고, 문화대혁명으로 1억 명 이상에게 정치적 타격을 입히고, 톈안먼 대학살을 자행했음에도 여전히 90% 이상의 국민적 신뢰도를 자랑하고 있다. 만약 진정 그러한 조사가 정확하다면, 중국공산당의 선전처럼,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 체제는 그 어떤 체제보다 건강하다는 결론이 도출될 수도 있다.
물론 상식적으로 그럴 수는 없을 듯하다. 중국 인민의 90% 이상이 정부를 신뢰한다면, 왜 중국공산당 정부는 공민의 기본권을 그토록 제약해야만 하는가? 공민의 기본권이 제약당하고 있음에도 중국 인민의 90%가 중국공산당을 신뢰할 수 있는가? 판엔 쉬의 조사는 중국 정부의 공식 통계와는 달리 중국 내부에 생겨난 두터운 중산층이 비판적 여론집단으로 성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세계 모든 나라가 대(對)중국 정책을 세울 때 반드시 염두에 둬야 할 점이다. <계속>
〈48〉 中 차이샤 교수 “권력이 교체돼야 중국이 산다”

▲<현재 미국에 체류하며 강력하게 시진핑 정권을 비판하는 중국의 대표적 자유파 지식인 차이샤(蔡霞, 1952- ) 전 중공 당교 교수. 사진/rfa.org>
역사에 기록될 “2022년 포위된 대륙”의 참상
훗날의 역사가들은 아마도 “2022년 포위된 대륙”이란 제목으로 오늘날 중국의 역사를 기록할지도 모르겠다. 팬데믹, 도시봉쇄, 경제위기, 이상기온, 가뭄, 지진, 군중 시위, 군사작전 등등 하루도 그냥 넘어가는 날이 없다. 역병이 돌고, 자연재해가 이어지고, 살림살이가 팍팍해지고, 민심은 흉흉하다. 한(漢) 제국이 와해되던 삼국지(三國志)의 첫 배경처럼 음울하고 불길하다.
무엇보다 벌써 3년째 계속되는 “제로(zero) 코비드” 정책은 광활한 대륙의 14억 인구를 송두리째 포로로 잡아버렸다. 퇴로를 막아 놓고 앞으로만 달려가는 무관용, 무절제, “무대뽀”의 폭주 기관차를 연상시킨다. 이미 바이러스와의 전쟁을 제대로 치르고 마스크를 벗은 채 적응기에 들어간 중국 밖의 세계 시민들이 보기에 중공 중앙의 봉쇄정책은 비과학적이고, 불합리하고, 비이성적이고, 몰상식하게만 느껴진다.
지난봄 두 달 넘게 2천6백만 상하이가 봉쇄 상태였다. 지금도 2천1백만 충칭의 시민들이 집 밖으로 나갈 수가 없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흰색 비닐 작업복을 껴입은 방역대원들이 아파트 단지의 철문마다 자물쇠를 채워놓았다. 그들은 철문을 두드리며 자물쇠를 풀라고 소리치는 시민들의 행동을 감시하고만 있다. 70일 넘게 이어진 폭염과 60년 만의 극심한 가뭄으로 양쯔강 지류들은 이미 강바닥이 드러낸 상태다. 쓰촨 지역 수력발전소의 전기 생산이 절반으로 줄었다. 중국 남부 9개 성의 2천4백만 명 이상이 심각한 물 부족을 겪고 있다.

▲<중국 시진핑 정권의 제로 코로나 정책. 사진/China Daily via Reuters>
지난 8월 말 극심한 가뭄으로 땅바닥이 쩍쩍 갈라지자 지질학자 겅칭궈(耿慶國.,1941- )는 곧 닥칠 지진을 예측했다. 그는 25만의 인명을 앗아간 당산 대지진을 예측했다고 전해진다. 가뭄 발생 후 최대한 3년 안에 대규모 지진이 잇따른다는 이른바 “한진(旱震) 이론”이다. 놀랍게도 그의 예측은 적중했다. 9월 5일 쓰촨 서부에 6.8도의 강진이 강타했다. 피해 규모가 갈수록 커져만 간다. 불행 중 다행으로 피해지역이 2천1백만이 봉쇄당한 충칭시에서 500킬로미터 이상 떨어져 있지만, 충칭시에서도 건물이 흔들렸다. 놀란 시민들은 감겨 있는 철문을 흔들며 탈출을 시도했지만, 검역 대원들의 감시와 통제로 속수무책이었다.
차이샤 “시진핑 대신하는 새 인물 등장해 자유화와 민주화 추진해야”
대체 이 광란의 끝은 어디인가? 지금 중국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그렇게 질문을 하고 보면, 바로 눈앞에 제20차 중국공산당 전국 대표대회가 성큼 다가와 있다. 내달 16일 계획대로 제20차 전체 대표대회가 개시된다. 중국 안팎의 대다수 언론은 제3기 시진핑 정권의 출범을 내다보고 있다. 일부 구미 언론은 그날을 시진핑 황제의 대관식(coronation)이라 비꼬기도 한다.

▲<2022년 중국 쓰촨 지역에 닥친 60년 만의 극심한 가뭄. 사진/google image>
물론 어느 나라서든 정치는 생물(生物)이고, 중국 정치도 살아서 꿈틀대는 권력 투쟁의 현장이다. 그 결말은 섣부른 예측을 불허한다. 가능성은 크지 않아 보이지만, 정치국 상임위원들의 반대나 원로 집단의 훼방으로 시진핑 총서기가 낙마하고 새로운 인물이 추대될 확률도 아예 제로는 아니다.
전(前) 중공 중앙당교의 저명한 이론가 차이샤(蔡霞, 1952- ) 교수는 바로 그 가능성을 조심스레 언급한다. 차이샤 교수는 설혹 그 가능성이 이번에 실현되지 않는다 해도 시진핑 정권 제3기는 절대로 순탄 대로를 갈 수 없다고 경고한다. 차이샤 교수는 어떤 근거로 시진핑 정권의 몰락을 예언하고 있는가?
며칠 전(2022년 9월 6일) 미국의 대표적인 국제정치 저널 <<포린어페이스(Foreign Affairs)>>에 차이샤 교수의 기고문 “시진핑의 약점: 중국의 미래”가 실렸다. 25장에 달하는 장문의 시론(時論)이다. 차이샤 교수는 중국을 위해서 가장 바람직한 시나리오가 제20차 전국 대표대회에서 시진핑 대신 새로운 인물이 등장해서 경제적 자유화와 정치적 민주화를 추진하는 것이라 주장한다. 차이샤 교수는 시진핑 정권이 과학을 부정하고, 상식을 거부하고, 국제질서를 무시하고, 민간경제의 자율성을 파괴하고, 최첨단 디지털 기술을 악용해서 전 인민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전체주의 정권이라 비판한다. 그 맨 밑에는 시진핑이라는 권력에 중독된 일개인의 허영과 편집증이 깔려 있다고 지적한다.

▲<2020년 8월 19일, 라디오 자유 아시아(rfa.org)에 보도된 차이샤 교수. “중앙당교 전교수 차이샤, 당적을 박탈당하다.” 차이샤: “흑방(암흑조직)과 같은 정당에서 완전히 벗어나서 너무나 기쁘다!” 사진/rfa.org>
중국 국무원 지인을 통해 확보한 차이샤 교수의 자료에 따르면, 지난 2월 코비드 바이러스의 오미크론 변종이 상하이에 퍼져나갈 때 중국 내 60여 명의 방역 전문가들이 온라인 회담을 통해서 민생을 살리고 바이러스를 통제하는 유연한 방역 기준에 이구동성으로 합의했었다. 상하이시의 당간부들과 의료전문가들도 유연한 접근법에 흔쾌히 동의했는데, 문제는 역시나 최고 영도자의 아집이었다.
전문가 집단이 결정한 유연하고 실용적인 방역 대책을 전해 들은 시진핑은 격노하여 “청령(淸零)을 실시하라!” 소리쳤다. 청령이란 제로 코비드의 중국어다. 확진자의 수가 영(零)에 달할 때까지 전 도시를 봉쇄하고 바이러스를 청소하라는 전제군주의 칙령과도 같았다. 바로 그 “일인 지배”의 불합리가 2천6백만 명을 포로로 잡는 광기를 낳았다. 구미 선진국이 바이러스에 당해 속수무책으로 무너질 때, 중국은 가장 효율적이고 치밀한 방역으로 14억 인구를 안전하게 보호한다고 선전해 왔다. 지금 여기서 물러나면 시진핑의 제로 코비드 정책은 세계의 웃음거리가 되고 만다. 정책 실패를 자인하면 연임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 지금도 제로 코비드를 외치며 수천만 명의 대도시를 전면 봉쇄하는 시진핑의 권력욕은 허영이다. 권력자의 편집증이다.

▲<상하이, 2016년 3월. 벽에 붙은 시진핑의 포스터를 한 시민이 바라보고 있다. 사진/foreignaffairs.com>
중공 중앙당교서 40년간 정치이념 가르친 차이샤, 시진핑 신화 해체
중국공산당 중앙당교에서 40년간 마르크스-레닌주의와 중국공산당의 정치 이념을 연구하고 가르쳐온 차이샤는 시진핑 정권의 폭정과 실정을 통렬하게 비판해 온 중국의 대표적인 자유파 지식인이다. 시진핑보다는 한 살 연상이다. 두 사람은 문화대혁명이 절정으로 치닫던 1966-67년 당시 10대 중반의 나이로 날마다 “마오 주석 만세!”를 외치며 교정 바깥 광장의 정치집회에서 머리가 굵었던 소위 홍위병 세대다.
중공 8대 원로라 칭송되는 시중쉰(習仲勛, 1913-2002, 시진핑의 부친) 정도는 아니지만, 차이샤의 부모도 출신 성분이 좋았다. 부친은 난징에서 인민해방군 부대 간부로 복역했고, 모친은 난징 정부의 관원이었고, 외조부는 제1차 국공합작 때 공산당에 들어가서 1927년 상하이에서 지하운동을 했던 인물이다. 차이샤는 스스로가 시진핑과 함께 홍이대(紅二代, 붉은 이세)에 속한다고 말해왔다. 홍이대란 고위 간부의 자제들을 일컫는 문혁 당시의 속어다. 홍위병 세대의 홍이대로서 차이샤는 자신이 시진핑이라는 한 개인의 성장배경, 지적 편력, 사고방식, 정치 경력, 처세술과 음모술수에 이르기까지 빠삭하게 꿰고 있음을 강조한다.

▲<젊은 시절 지방 관원으로 복무할 때의 시진핑. 사진/ 공공부문>
무엇보다 차이샤는 강렬한 직설의 문체로 신격화된 시진핑 신화를 해체해 왔다. 중국 안팎에서 시진핑이라는 인물은 정치적 박해에 시달리던 부친 밑에서 고난의 소년기를 보내면서도 탁월한 총명함과 남다른 성실함 덕분에 최고 명문 칭화대학에 들어가고, 지방 정부의 여러 직위에서 탁월한 업적을 쌓아 자력으로 최고 영도자의 지위를 쟁취한 입지전적 인물이자 불세출의 영웅이라고 알려져 있다. 차이샤에 따르면, 시진핑의 정치적 출세는 오로지 아버지 시중신의 후광과 인맥에 따른 지위의 세습일 뿐이었다.
가령 1980년대 초 시진핑이 30대 초반의 나이로 허베이성에서 일개 현(縣) 간부로 근무할 때, 그의 모친은 허베이성 당서기에게 아들의 진급을 부탁하는 청탁형의 서신을 보냈다. 마침 청탁 및 뇌물 수수를 비난하는 정치 운동이 일어나던 때였다. 인사 비리가 발각된 후 시진핑은 정치적 위기에 봉착했는데, 시중쉰이 푸젠성 당서기와의 개인적 친분을 통해서 시진핑을 푸젠성으로 피신시킬 수 있었다. 1988년 시진핑은 지방선거에서 상무 부시장에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이후 근무 실적이 부진해서 지방관청에 묶여 있던 시진핑은 또 한 번 모친의 도움을 받아 푸젠성 정부에 입성할 수 있었다. 중공의 관계에선 지방관청을 벗어나 성급(省級) 정부에 진입하는 장벽이 매우 높다. 차이샤에 따르면, 시진핑은 부친의 관시(關係)와 모친의 치맛바람으로 그 높은 장벽을 넘을 수 있었다. 중국 안팎의 친중 세력이 중국공산당의 통치를 합리적인 능력주의라 미화하는데, 차이샤는 정치권력의 세습 과정을 까발린다.
물론 중국공산당이 차이샤가 휘두르는 우상파괴의 필봉을 그대로 내버려 둘리 없었다. 2016년 차이샤 교수의 모든 글은 중국 인터넷에서 모조리 삭제되었다. 중국인의 표현을 빌리면, 차이샤는 전망봉살(全網封殺)의 박해를 받았다. 인터넷 전체에서 그의 모든 글이 봉쇄되고 말살(抹殺)되었다는 얘기다. 전망봉살의 핍박을 당하면서도 차이샤는 당당하게 중국공산당과 최고 영도자 시진핑을 향한 비판을 멈추지 않았다. 결국 중국에서 구속을 피할 수 없었던 차이샤는 2019년 이래 미국으로 옮겨가서 쉬지 않고 중국공산당과 시진핑을 향한 비판을 쏟아내고 있다.

▲<1982년 덩샤오핑이 도입한 집단 지도체제의 원칙을 무너뜨리고 스스로 마오쩌둥의 길을 가는 시진핑. 사진/scmp.com>
정치국 상무위원들 권력 투쟁 조짐 보여... 차이샤 “시진핑 물러나야 중국이 산다!”
2018년 3월 11일 전국인민대표대회는 99.83%의 찬성률로 중국 헌법 39조에 명기된 국가주석의 임기 규정을 삭제하기로 결정했다. 그때부터 중국 안팎에서는 시진핑의 제3기 연임이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시진핑은 집권 초기부터 강력한 반부패 캠페인으로 당·정·군 내부의 반대 세력을 모조리 숙청하는 권력 투쟁을 이어갔다. 막강한 시진핑의 권력에 도전장을 던질 세력은 보이지 않는다.
“당·정·군·민·학, 동·서·남·북·중, 당이 일체를 영도한다!” 지난 2월 13일 중국공산당이 당대회에서 들고나온 강력한 레닌주의 구호다. 일찍이 레닌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전위부대로서 공산당이 사회 전 분야에서 전면적 영도력을 발휘해야 함을 강조했다. 레닌주의 원칙에 따라 마오쩌둥은 당의 영도를 강조했지만, 실제로는 스스로 황제의 지위에 올라 종신토록 전 인민을 지배했다. 시진핑은 이제 당의 지배를 내걸고 스스로 황제가 된 마오쩌둥을 답습하려 한다. 레닌의 공산주의 혁명 이론이 21세기 중국에서 여전히 일인 지배의 거짓 명분으로 악용되는 현실이다.
일체를 지배하는 당의 영도는 전체주의적 통제를 지향한다. 당이 나서서 어린 학생들의 비디오 게임 시간까지 규제하고, 전 인민의 행적을 추적해서 사회신용의 등급을 매긴다. 표면상 중국공산당의 영도력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고, 최고 영도자 시진핑은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
그러나 과연 시진핑의 권력 기반은 완벽하게 안전한가? 진정 강력한 권력이라면, 인민들을 자유롭게 방임할 수 있다. 고대로부터 가장 교묘한 법가의 통치술은 도가풍의 무위(無爲)로 구현될 수 있다. 마오쩌둥의 막강한 권력은 결국 문혁의 광기로 표출됐을 뿐 절대 오래 지속될 수는 없었다. 인민이 국가의 간섭을 느끼면 느낄수록 정부의 권력 기반은 그만큼 불안하다 할 수도 있다. 시진핑이 쉬지 않고 권력의 칼날을 거칠게 계속 휘둘르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는 지금 떨고 있나?
정치국 상무위원 7인의 행적만 살펴봐도 권력 투쟁의 조짐이 읽힌다. 국무원 부주석 한정(韓正, 1954- )은 장쩌민 상하이방(上海幇)의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경제 관료 출신인 국무원 총리 리커창(李克强, 1955- )은 이미 여러 번 암울한 중국의 경제지표를 적시하며 시진핑과 대립각을 세워 왔다. 2000년 5월 리커창은 중국 인구의 43%에 달하는 6억 명 이상의 월수입이 1000위안(미화 140) 이하라는 통계를 폭로해서 중국 안팎에 큰 충격파를 던졌다.

▲<시진핑 총서기와 리커창 총리. 중국 정치의 분석가들은 두 사람 사이의 마찰과 갈등에 주목해 왔다. 사진/Reuters>
2022년 5월 리커창은 당 간부 10만 명이 접속한 온라인 회의에서 현재 중국의 경제 상황이 심각하다며 시진핑을 압박했다. 게다가 리커창과 그의 수하 인물들은 코비드 정책에 반대를 표하기 위해 마스크를 벗고 다니는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4월에는 장시성 난창시에서 리커창이 연설할 때, 그의 비서들은 참석자들에게 마스크를 벗으라 말했다.
차이샤는 최고 엘리트 집단의 알력과 갈등이 언젠가는 시진핑의 전체주의적 독재에 반감을 품고 있는 정부 각층 및 사회 각계로 확대될 수 있으리라 희망한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쩌둥 사상을 추종하는 중국의 좌파는 시진핑 정부의 노동자 탄압에 실망해서 돌아선 상태다. 당·정의 내부 개혁을 요구해 온 중국의 중도파는 시진핑의 반동적 노선에 환멸을 품고 돌아섰다. 1980년대 후야오방과 자오쯔양 이래 자유, 민주, 헌정을 부르짖어 온 중국의 우파는 시진핑 집권 이후 침묵을 강요당해 왔지만, 이들의 비판과 저항은 땅 밑으로 흐르는 도도한 강물이다.
좌·우·중도 막론 오늘날 중국의 정치세력은 모두 시진핑에 반감을 품고 있다는 해석이다. 무엇보다 시진핑에 대한 엘리트 집단의 실망이 중국의 일반 민중에게 전파되고 있다는 점이다. 바로 그 점에서 차이샤는 중국 정치의 미래에 아직 희망이 있다고 전한다.
그는 중국공산당의 최고위 권력 집단을 마피아 조직에 비유하고, 9천5백만 당원을 자랑하는 중국공산당을 통째로 “정치 좀비”라 비판한 당차고도 건강한 자유파 지식인이다. 제20차 전체 대표대회를 한 달 앞둔 지금 그가 세계를 향해 던지는 메시지는 쉽게 단 두 마디로 요약된다.
“권력이 교체돼야 나라가 선다!”
“시진핑이 물러나야 중국이 산다!”
〈49〉 시진핑 반부패 운동으로 적폐는 더 쌓이고 일인지배 기반 강화
▲<2013년 9월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인 전 충칭(重慶)의 당서기 보시라이(薄熙來, 1949- ), 사진/ Xie Huanchi/Xinhua>
새 정권은 지난 정권의 비리와 실정을 파헤치고 단죄해야
새 정권이 들어서니 지난 정권의 부정부패와 비리·비위(非違)가 활화산 용암처럼 분출한다. 탈원전 경제성 조작, 탈북자 강제 북송, 서해 공무원 피살 은폐, 태양광 비리, 기무사 쿠데타 모의 조작 등등 정권 교체가 없었다면 그대로 묻혔을 지난 정권의 중대 범죄가 속속 드러나고 있다. 법을 무기 삼아 대숙청을 감행했던 지난 정권의 그 권력자들이 이제 법의 칼을 맞을 차례다.
왜 선거를 민주주의의 꽃이라 부르는가? 바로 그 열매가 정권 교체이기 때문이다. 총칼 들고 싸울 필요 없이 평화적 선거를 통해 무능하고 부패한 권력을 내칠 수 있다면, 가장 효과적인 정부 감시, 경제적인 정권 심판이다. 새 정권은 결단코 지난 정권의 비리와 실정을 파헤치고 단죄해야 한다. 그 의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는다면, 정권 교체의 이유가 과연 무엇인가?
▲<2020년 12월 9일, 부패 감시(Corruption Watch) 활동가들의 시위. 사진/Saint Nic Meda/ https://www.transparency.org/en/blog/iacd-2020-anti-corruption-for-days><;
정적 제거를 목표로 한 부패 척결 시도는 더 큰 부패 낳아
사법부의 독립이 보장된 국가라면 산 권력의 부정도 밝혀지겠지만, 역사를 돌아보면 정권 교체 후에야 지난 정권의 부정이 드러난 사례가 부지기수다. 민주화를 이룩한 한국이 정치의 제도화(institutionalization of politics)는 아직도 이루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정치의 제도화란 권력 교체, 정권 이양, 법규 입안, 정책 추진 등 정치의 전 과정이 투명하게 게임의 규칙에 따라 진행될 수 있는 법적, 제도적 조건을 의미한다. 한국에서 상용되는 “시스템 통치”라는 용어와 정치의 제도화는 그 의미나 쓰임새가 비슷해 보인다.
정치의 제도화가 이뤄지지 않은 국가에선 법제와 규칙을 벗어나는 권력 투쟁이 끊이지 않는다. 대립하는 정치집단의 권력 투쟁은 마피아 ‘구역 전쟁(turf war),’ 야쿠자 ‘나와바리(繩張)’ 다툼을 방불케 한다. 정권의 획득을 위해 정치집단은 법망을 뚫고 제도의 허점을 파고든다. 민주화 이후 정치의 제도화가 실현되지 못하면, ‘지저분한 정치(nasty politics)’가 끊이지 않는다. 지저분한 정치를 종식하기 위해선 엄정한 법의 메스가 공정하고, 투명하고, 신속·정확하게 정부 내부에 퍼져 있는 부정부패의 암세포로 향해야만 한다. 권력자가 오로지 정적 제거를 위해 법을 악용한다면, 부패 척결 시도가 더 큰 부패를 낳고 만다. 부정과 비리의 악순환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중국 시진핑 총서기는 집권 초기부터 “반부패 운동”의 깃발을 들었다. 물론 이는 중국만의 현상이 아니다. 세계 어디서든 신정권이 들어서면 흔히 부패 척결을 권력 강화의 제1 수단으로 삼게 마련이다. 인도의 모디 (Modi) 정권, 터키의 에르도간(Erdogan) 정권, 헝가리의 오르반(Orban) 정권도 그러했다. 워싱턴을 장악하면 “늪의 물을 빼겠다(drain the swarp)” 공언했던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은 취임 후 실제로 얼마간 광폭하게 해고의 칼날을 휘둘렀다.
▲<2015년 중국 산시(山西)성 구자오(九交)시 정부 포스터. “부패 문제의 확실한 해결을 위해선 반드시 파리떼와 호랑이를 모두 때려잡아야!” 사진/Ng Han Guan/AP>
시진핑 반부패 운동 본질은 권력 투쟁...정적 보시라이·저우융캉 제거
보시라이는 이른바 “충칭(重慶) 모델”로 중국 안팎의 주목을 받으며 강력한 권력자로 떠오르던 태자당 기린아였다. 저우융캉은 당내 최고 권력 7인 중 한 명이었다. 곧 “형불상상위(刑不上常委, 형벌은 상무위원에 적용되지 않는다)”는 중공의 불문율이 깨졌다는 의미다. 그 과정에서 시진핑은 정적을 제거하고 상하이방 원로 그룹을 고립시켰다. 일인 지배를 강화하는 강력한 수단이었다. 그 점에서 반부패 운동은 본질상 권력 투쟁이었다.
물론 표면상 시진핑은 중국공산당 내부의 부패와 비리를 일소하고 당의 통일성을 확보한다는 명분을 쥐고 있었다. 그 결과 그는 당·군·정 모든 방면에서 권력을 공고화할 수 있었다. 집권 후 시진핑은 “당(黨)·정(政)·군(軍)·민(民)·학(學), 동·서·남·북·중, 당이 일체를 영도한다!”는 구호를 강조했다. 당의 일체를 영도하는데, 그 당 내부에선 현재 시진핑의 권력을 견제할 수 있는 제도도, 인물도 없는 듯하다. 당·정·군이 일인 지배의 체제로 굴러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부패와의 전쟁을 통해서 공산당 총서기로서 시진핑은 일인 지배의 기반을 공고화하고, 종신 지배의 길을 텄다.
부패와의 전쟁 통해 시진핑 일인 지배 공고화하고 종신 지배의 길로
30년 넘게 반부패 고문으로 활약해 온 싱가포르 국립대학 콰(Jon S.T. Quah) 명예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시진핑의 반부패 운동은 최소 네 가지 면에서 1978년 이래 가장 강력한 정치 운동이었다. 1) 내부고발자와 네티즌이 SNS로 부정부패와 비리 행각을 고발하고 비판하는 폭로의 게릴라전이 펼쳐졌고, 2) 지방의 현 및 하급 부서의 부패 관리들은 대규모 참호전이 지속됐으며, 3) 기업 부문의 부패와 상거래 뇌물까지 처벌하는 전면전으로 확대되었고, 4) 본질적으로 정적을 제거하고 권력을 독점하기 위한 시진핑의 권력 투쟁이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시진핑 반부패 운동을 홍보하는 화면 캡처. 망치를 든 시진핑 총서기가 네 마리의 호랑이를 때려잡고 있다. 자막에는 보시라이(薄熙來, 1949- ), 저우융캉(周永康, 1942- ), 쉬차이허우(徐才厚, 1943-2015), 궈보슝(郭伯雄, 1942- )의 이름이 적혀 있다. 화면/Tencent Video>
시진핑은 특히 자동차, 연회(banquets), 해외여행 등 정부 관료들이 대대로 누려온 갖가지 이른바 삼공소비(三公消費)라는 뿌리 깊은 공무원의 부가 혜택(fringe benefits)에 대해서도 반부패의 메스를 들이댔다. 중국에선 전통적으로 당·정·군·민·학, 어디 부문에서나 수십 명이 모여서 대규모 향연이 벌이는 오랜 관행이 있다. 개혁개방 이후 경제가 급속하게 성장하면서 향연의 문화는 더욱 화려하고 사치스러워졌다. 중국 언론에 따르면, 2005년 한 병에 200위안 정도였던 구이저우(貴州) 마오타이주가 2012년엔 가격이 2000위안으로 10배 뛸 정도였다. 관계의 향연이 그만큼 빈번해졌다는 얘기다.
마오쩌둥은 혁명이 만찬 향연이 아니라 한 계급이 무력으로 다른 계급을 무너뜨리는 전쟁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마오쩌둥은 그렇게 혁명적 금욕주의를 노상 강조했지만, 사치스러운 향락 문화는 중국 관계의 고질병이다. 개혁개방 이전에도 관료 부패는 상존(常存)했는데, 그 이후엔 비할 바 없이 만연해졌다. 1993년 조사에 따르면, 1992년 한 해에만 관계 만찬 향연에 사용된 공적 자금의 규모가 미화 180억 달러에 달했다. 시진핑 정부는 출범 직후부터 관계의 기강을 잡는 강력한 단속 조치를 감행했다.
2012년 12월 4일 관료의 해외순방 빈도, 관용차 수준, 관저 규모, 향응 회수 등을 대폭 축소하고 규제하는 “8항 규정”이 발표되어 이듬해 1월부터 중국 전역에 시행되었다. 중앙 기율·검사 위원회는 부패 관료들이 애용해 온 VIP 법인카드를 모두 압수했다. 고관대작들이 고가의 만찬 연회, 무도회 출입은 물론, 볼링장, 사우나 욕실, 안마시술소, 고급 휴양지를 제집처럼 사용해 온 오랜 관행에 철퇴가 가해졌다.
▲<윈난(雲南)성 쿤밍(昆明)시 한 연회장 풍경. 이 테이블에서는 아무도 식사를 하지 않아서 결국 차려진 음식이 모두 쓰레기가 되었다. 사진 /https://theworld.org/stories/2013-02-08/incredible-waste-chinese-banquets>;
2013년 5월 1일엔 BMW나 벤트리 따위 외국산 고가 자동차의 소유주들이 군대 혹은 무장경찰 번호판을 달 수 없게 했다. 중국에서 군대나 무장경찰 번호판을 달면 교통 신호도 무시하고 고속도로 사용료도 내지 않는 무법의 특권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2013년 11월 국무원은 관용 자동차의 사적 사용을 금지했고, 2014년 1월 14일, 국무원은 군대 장교의 외국산 자동차 구매를 금지했다. 공무원 회식 때엔 상어지느러미 요리 등 비싼 메뉴의 주문을 금지하고, 담배와 술의 무료 제공도 불법화했다. 2013년 12월엔 지방 특산물 상납, 사치 행각, 호화 활동, 공금의 사적 사용, 도박 행위 등을 엄금하는 “6항 금령”을 반포했다.
시진핑 정권은 중앙에서 “순시조(巡視組)”를 직접 파견하여 현장을 조사하는 방법을 취했다. 부패가 심하다고 판단되는 성급(省級) 정부, 각계 부서, 국영기업체 등에 나간 순시조는 현장의 간부, 관원, 정치 고문 등의 행적을 철저하게 조사했다. 집권 초기부터 시진핑은 “호랑이와 파리떼를 다 때려잡자(老虎蒼蠅一起打)”는 구호를 외쳤다. 이때 “호랑이”는 부패한 기업인, 중앙당 고위 간부 혹은 고급 관료를, 파리떼는 부정행위를 일삼는 민간의 자산가들이나 하급 관료를 이른다. 전방위적으로 정권 내내 지속된 중국의 “반부패 운동”은 과연 성공했는가? 중국은 더욱 청렴한 나라로 거듭났는가?
반부패 운동으로 중국은 청렴한 나라로 거듭났을까?
콰(Jon S.T. Qua) 교수는 이미 7년 전 시진핑의 반부패 운동이 근본 원인은 방치한 채 증상만을 건드리는 피상적 개혁이라 지적한다. 개혁개방 이후 중국 전역에 부패가 만연하게 배경에 관해 콰 교수는 다섯 가지 근본 원인을 제시한다.
첫째, 중국 공무원들이 박봉에 시달리고 있는 현실이다. 2003년에서 2010년 사이 첨단기술, 금융, 부동산, 에너지, 문화, 의료, 교통 등 중국 9개 부문 평균 연봉 인상률을 비교해 보면, 공공부문의 연봉은 최저치에 머물렀다. 박봉의 공무원은 공권력의 허점을 노려 축재의 기회로 삼게 마련이다. 오죽하면 1058년 북송의 개혁가 왕안석(王安石, 1021-1086)이 황제를 향해 부패 근절을 위해선 관리의 봉급을 올려서 청렴성을 키워야 한다는 이른바 “고신양렴(高薪養廉)”의 방법을 제안했겠는가.
둘째 중국의 부패는 구조적으로 불필요한 규제와 복잡한 행정절차에 기인한다. 이른바 “레드 테입(red tape)”이라 불리는 불필요한 관공서의 요식 행위가 만연해 있다. 세계은행이 발표하는 “사업하기 쉬운 순위”를 보면, 중국은 2015년까지 180개국 중 90위 권에 머물러 있었다. 놀랍게도 2019년 중국의 순위가 46위, 2020년 30위로 뛰어오르는 기현상이 나타났는데, 이후 세계은행은 자체 검증을 통해 중국의 자료를 조작하는 부정행위가 있었음을 자인하고 18년간 지속해 온 이 조사의 발표를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2012년 11월 베이징 인민대회당 주차장에 주차된 아우디(Audi) A6 세단. 시진핑 정권은 고급 외국산 자동차의 관용 구매를 전면 금지했다. 사진/ Sim Chi Yin/nytimes.com>
셋째, 현실적으로 중국에선 부패 행위에 따르는 “위험은 매우 작고 보상은 매우 크다.” 관료행정을 맡은 공무원의 입장에선, 아무리 부정을 저질러도 잡힐 확률이 지극히 낮다는 계산이 나온다. 법 규정은 비현실적으로 엄격하고, 공무원은 관행적으로 불법을 일상화한다. 그러한 부패의 포화 상태는 권력자에 유리한 조건이 된다. 누구든 표적이 되면 언제든 부패 혐의를 걸어서 잡아넣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공무원은 관행적으로 부정부패를 저지르고, 중앙의 권력자는 일단 부패를 그대로 덮어둔다. 원한다면 언제든 모든 공직자의 목에 날카로운 법의 칼날을 들이댈 수 있는 까닭이다.
넷째, 개혁개방 이후 중국의 부패는 분권화에 직결된다. 중앙정부의 권력이 대폭 지방정부로 이양되면서 특히 현(縣) 단위 공산당 위원회 서기들의 정책 결정권이 강화되었다. 당위 서기들은 중앙의 지시를 슬금슬금 어기면서 지방에 “독립적 왕국”을 건설했다. 무엇보다 재정 분권화로 독자적인 재정권을 확보한 지방정부는 이른바 “소금고(小金庫)”를 갖게 되었다. 소금고에 쌓인 재원은 지방의 권력자들이 감시나 조사도 없이 마구 횡령하고 퍼 쓸 수 있는 검은돈이다. 비자금이 잔뜩 쌓인 소금고는 지방정부뿐만 아니라 국영기업체에 만연한 조직적 비리의 온상이다.
다섯째, 선물을 주고받는 중국 특유의 “관시(關係)” 전통 또한 부패의 근절을 어렵게 하는 문화적 요인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중국의 “관시” 문화를 그저 전통적 미풍양속이라 볼 수는 없다. 오히려 1950-60년대 공산주의 명령경제 속에서 비현실적으로 엄격한 규정과 금지사항을 슬쩍 에둘러가는 방법이다. 간부에게 작은 뇌물을 먹이면 조금이라도 더 많은 곡물을 받아 가족을 먹일 수 있었기에 “관시” 문화가 생겨났다는 해석이다.
중앙정부와 중국공산당에 대한 신뢰도 오히려 낮아져
2010년과 2014년 두 차례에 걸쳐서 4천 명의 표본 집단과 인터뷰를 수행한 하버드 대학 정치학과 왕위화(Yuhua Wang)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시진핑 정권의 반부패 운동은 중앙정부와 중국공산당에 대한 대중적 신뢰도는 오히려 낮아졌다. 왕 교수는 부패 사례가 연일 언론에 보도되자 원래는 정부를 신뢰했던 사람들이 지지를 철회했다고 설명한다.
부패인식지수(CPI)를 보면, 시진핑 집권 이후 중국의 부패 인식도는 현격한 개선을 이루지는 못했다. 2012년 39점으로 세계 180개국 중 80위였던 중국의 부패 인식도는 이후 7, 8년간 횡보 상태를 면치 못했다. 부패와의 전쟁이 최고조에 달하던 시절의 점수를 보면, 2015년 37점(83위), 2016년 40점(79위), 2017년 41점(77위)으로 계속 옆으로만 기다가 2018년 39점(87등)으로 뒷걸음질했다. 다만 팬데믹이 터진 2020년과 2021년에는 각각 42점(78위)과 45점(66위)으로 눈에 띄게 성적이 올랐는데, 이는 과도한 방역 정책에 따른 일시적인 반등 효과로 보인다.
▲<시진핑 반부패 운동을 풍자하는 삽화. 그림/Craig Stephens/SCMP>
빈 수레가 요란하다 했던가? 10년간 전개된 중국의 “반부패 운동”은 부패 척결의 성적은 저조했다. 다만 그 과정을 통해서 시진핑의 권력 기반은 공고화되었을 뿐이다. 그 점에서 최근 10년 중국을 휩쓸고 간 반부패 운동의 폭풍은 정적 제거를 위한 권력 투쟁으로 보인다. 반부패 운동의 실제 목적은 정치의 제도화가 아니라 권력의 공고화(consolidation of power)에 불과했다.
진정 부패를 척결하고 적폐를 청산하려면 요란스럽게 구호를 남발할 필요가 없다. 거칠고 시끄럽게 시작된 운동은 용두사미로 끝나는 사례가 많다. 법으로 정의를 세우는 과정은 외과수술처럼 차분하고 신중하게 진행돼야 한다. 참된 개혁은 정적 제거가 아니라 정부 개조, 권력의 공고화가 아니라 정치의 제도화를 지향한다. 바로 지금 날카로운 법의 칼을 들고 암 덩이 같은 지난 정권의 비리를 파헤치는 새 정권의 대통령, 법무부 장관, 검찰, 경찰이 꼭 명심해야 할 시진핑 정권 반부패 운동의 반면교사가 아닐까. <계속>
10.08
<50회> 시진핑의 반부패 운동과 문재인의 적폐 청산, 같은점과 다른 점

▲2019년 한·중·일 정상회의 참석차 중국 베이징을 찾아 시진핑 국가주석과 만난 문재인 대통령./뉴시스
최고 실력자의 지시에 따라 정적 겨냥해 전쟁 치르듯 전개된 정치운동
세계는 이미 전(全) 지구적 네트워크로 촘촘히 얽히고설켜 반대편 작은 나라 외딴 지방 하나도 따로 떼놓을 수 없는 유기체적 시스템을 이루고 돌아간다. 주체의 기치 아래 국제적 고립을 자초한 쇄국의 동토(凍土) 북한조차도 틈만 나면 벼랑 끝에서 핵실험을 감행하며 존재를 과시한다. 하물며 수출주도형 경제성장으로 무역 입국에 성공하여 세계 10대 부국이 된 대한민국임에랴.
2021년 현재 전 세계 193개국에 732만여 명의 한인들이 거주하고 있다. 한국은 이미 한반도에 국한된 반도국이 아니라 전 세계와 연결된 최첨단의 네트워크 국가다. 한국의 문화와 토양만 따지는 협소하고 고루한 “민족주의”의 관점으론 한국의 역사 현실을 파악할 수조차 없다. 디지털 혁명의 시대, 한국이 세계이고, 세계가 한국이다.
우리가 한국 정치판을 관찰하고 분석할 때, 중국 정치판을 동시적으로 늘 살펴야 이유도 자명하다. 이미 중국을 떼놓고 한국 현실을 설명할 수 없다. 한국 없는 중국도 상상할 수 없다. 그렇기에 더더욱 문재인 전 정권의 “적폐 청산” 캠페인과 시진핑 정권의 반부패 운동이 우리의 뇌리에서 교차(交叉)될 수밖에 없다. 양자 모두 최고 실력자의 특별 지시에 따라 정적을 겨냥해서 전국적으로 전쟁 치르듯 일사불란하게 전개됐던 초법적 정치 운동이었기 때문이다.
문재인 “대단히 무례한 짓” 감사원 조사 거부... ‘촛불 군중’ 향해 SOS 친 셈
며칠 전 문재인 전 대통령 측은 ‘서해 공무원 피살 사건’ 관련 감사원의 서면 조사 요청을 거부하면서 “대단히 무례한 짓”이라 했다. 민주당은 정치보복이라며 “국민이 촛불 들길 원하냐?”고 했다. 전직 대통령이 조여오는 법망을 벗어나려 “촛불 군중”을 향해 SOS를 친 셈이다. 여론을 제 편으로 끌어당겨서 법망을 피해 가려는 대중 동원의 전술인데, 정치도의나 법리상 성공 확률은 높지 않다. 이미 헌정사 거의 모든 대통령이 권좌에서 물러난 후 법의 심판을 받아왔기 때문이다.
▲2017년 2월 11일, 서울 광화문 광장 촛불 집회에 참가한 문재인 전 대표와 이재명 성남시장./뉴시스
확률상 불리함에도 적어도 일곱 가지 이유에서 문 전 대통령으로선 충분히 해볼 만한 싸움이다. 1) 퇴임 직전까지 그가 40%대의 지지율을 유지했다는 점, 2) 현재 대통령 국정 지지도는 저조하다는 점, 3) 한국 정치에선 여론이 법치를 허문 사례가 부지기수라는 점, 4) 국내 언론 환경이 불리하지 않다는 점, 5) “촛불 군중”은 대통령 탄핵에도 성공한 강력한 세력이라는 점, 6) “진보 진영”은 조직력, 기획력, 행동력을 갖춘 프로 운동가들이 이끌고 있다는 점, 7) 2년 후 총선, 5년 후 대선을 앞두고 전직 대통령에 대한 공격은 자칫 야권의 집결을 부르는 여권의 자충수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문 전 대통령은 이미 “무례한 짓”이라는 한 마디로 지지층을 향해 총궐기의 신호탄을 쏘아 올린 듯하다. 전임 대통령의 부정·비리에 관한 형사사법의 문제를 자기편을 공격하는 상대편의 진영 전쟁으로 뒤바꾸는 정치적 마술이다. 그러한 정치적 마술은 한 명의 머리가 아니라 대개 진영 수뇌부 전체의 치열한 토론에서 나온다. 정치적 위기에 봉착할 때마다 그들은 “촛불 군중”을 불러 모으는 기민한 대중 노선으로 법치를 가로막고 허물어 왔다. 지지층을 규합하는 그들의 정치술은 마오쩌둥의 게릴라 전술을 떠올리게 한다. 일찍이 마오쩌둥은 말했다. “물고기가 바다에서 헤엄치듯 게릴라는 인민 속을 파고들어야 한다.”
과연 “촛불 군중”을 파고드는 문 전 대통령의 게릴라 전술은 성공할 수 있을까? 어제의 “촛불 군중”은 과연 마오쩌둥을 보위하는 홍위병처럼 “우리 이니”의 구속을 저지하는 대규모 시위를 연출할 수 있을까? 군중을 파고드는 게릴라 전술이 성공한다면, 그는 모든 의혹을 모두 불식하고, 다음 두 선거에 승리하여 정권을 재탈환하는 권토중래(捲土重來)를 꿈꿀 수도 있으리라. 실패한다면, 그는 앞선 두 명의 전직 대통령처럼 철창 안에 갇히는 신세를 면할 수 없으리라. 현재로선 작금의 진영 대립이 어찌 될지 가늠하기 어렵다. 권력 투쟁이 정치보복의 악순환을 부른다면, 출구는 단 하나, 법의 정신을 등불 삼아 엄정한 수사, 공정한 재판, 명석한 판결로 법치를 완성하는 길밖에 없다. 머리 맞대고 꼼수를 짜내 봐야 그 나물에 그 밥일 뿐, 권력 투쟁의 출구전략으로 사법 정의의 확립보다 더 좋은 묘수는 있을 수 없다.
▲2018년 10월 27일, “적폐 청산”을 요구하는 촛불 시위./인터넷 캡처
정부 기관 동원해 먼지털이식 조사...친정부 매체가 대대적 선전·선동
일전에 한국의 한 정치학자가 물었다. “문재인 정권의 적폐 청산이 시진핑 정권의 반부패 운동을 모방한 혐의는 없는가? 정적 제거를 위해 국가 권력을 총동원한 점에서 매우 유사해 보인다.”
시진핑 정권은 출범 직후부터 부패 청산의 기치 아래 정적을 제거하고, 관행적 부패를 도려내고, 산업계 거물 및 금융계 큰손을 압박해서 길들이고, 정치적 반대 여론을 탄압하고, 미국에 맞서는 공격적 대외전략을 펼치는 한편, 최첨단 디지털 장비를 동원해서 대민 지배력을 강화했다.
문 정권의 적폐 청산은 지난 정권 대통령. 재벌 총수, 청와대 핵심 인물들을 구속해서 중형에 처했다는 점에서 분명 시진핑의 반부패 운동과 유사해 보인다. 정부 기관을 총동원해서 표적이 된 인물들에 대한 먼지털이 조사를 벌였다는 점, 친정부 매체를 동원해서 대대적인 선전·선동에 나섰다는 점, 정적의 제거를 지지 세력을 규합하는 여론전으로 이끌고 가는 마오쩌둥식 게릴라 전술도 꼭 빼닮았다.
다만 양자 사이엔 결정적 차이점이 있다. 시 정권의 반부패 운동은 과거 1950-60년대 마오쩌둥 시대의 반부패 투쟁과 달리 대중을 동원하는 정치집회로 전개되지 않았다. 오히려 철저하게 중앙정부에 지휘에 따르는 관계의 자정(自淨) 운동처럼 전개되었다. 중앙기율검사위를 통해 위로부터 추진된 중국공산당 내부의 숙정이었다는 의미다.
반면 문재인 정권의 “적폐 청산”은 탄핵 정국 이후 “촛불 군중”의 강력한 지지 기반 위에서 전개되었다. 그 점에서 문 정권의 “적폐 청산”은 그 방법과 동력이 문혁 시절 마오쩌둥의 대중 노선과 유사해 보인다. 다만 한국의 정치 상황은 중국과는 비할 바 없이 다원화, 다각화, 다양화되어 있다. 중국과 달리 한국 정치는 좌·우파 양대 세력 사이의 진영 대결로 전개된다. 탄핵 정국 이후 촛불과 태극기로 양분된 국민이 몇 달 동안 맞불집회를 이어가지 않았나.
▲2017년 인민일보에 게재된 반부패 운동 포스터. 그림/徐駿, people.com.cn
정권 재창출, 문 정권은 실패하고 시 정권은 성공한 이유는?
그 정치학자가 또 물었다. “시진핑의 반부패 운동을 모방했다면, 문재인 정권은 왜 시진핑 정권과는 달리 정권 재창출에 실패했다고 보는가?”
표현의 자유가 제약된 중국에서는 시진핑 정권의 반부패 운동에 대한 공고한 반대 여론이 형성될 수가 없다. 불만 세력은 있을 수 있지만, 그 불만을 정부 비판을 넘어 정치 운동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정치적 반대 세력이 형성될 수 없다. 반면 한국은 다양한 언론매체가 공존하며 날마다 여론전을 벌이고 있다. 그 때문에 정부는 늘 감시 상태에 놓여 있다. 중국에서는 정치 엘리트 사이의 파벌싸움과 권력 투쟁이 있을 뿐 진정한 의미의 권력 교체, 나아가 정권 교체의 방법은 근원적으로 차단돼 있다.
▲2022년 8월 30일, 베이징 인민대화당에서 공무원 시상식에 참석한 시진핑 총서기. 사진/Li Xueren/AP
중국과는 달리 한국은 선거를 통한 권력 교체가 실질적으로 가능한 자유민주주의 국가다. 문 정권이 적폐의 칼날을 제아무리 휘둘러도 국민 다수의 민심을 잃는 순간 권력을 유지할 수가 없다. 문 정권이 시 정권과 달리 권력 강화에 실패했는데, 그 이유는 거듭되는 실정으로 민심을 잃었기 때문이다.
중국은 공산당 영도 체제를 절대화한 일당독재의 레닌주의 국가이다. 시진핑 정권은 정적과의 투쟁에서 승리했고, 그 과정에서 권력 독점을 이룰 수 있었다. 헌법 위에 당이 있고, 당의 구심점은 다름 아닌 시진핑 일인이다. 반면 한국은 이미 권력자가 법을 넘어 자의적으로 권력을 휘두를 수 없는 법의 시스템이 작동하고 있다. 문 정권이 적폐 청산의 구호를 외치다가 스스로 적폐의 주체가 되었을 때, 검찰총장이 맨 앞에 서서 “사람에 충성하지 않는다”며 정권에 맞섰고, 바로 그 경력을 발판 삼아 대권을 잡을 수 있었다.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에선 ‘팬덤 정치’ 극심해도 권력 독점 어려워
문 정권은 적폐 청산의 깃발을 들고 “보수 궤멸”과 “30년 집권”까지 운운하는 반민주적 교만을 떨었음에도 권력 기반을 독점할 수가 없었음을 보여준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법적·제도적 시스템이 이미 중국식 일당독재나 인민민주독재를 용납할 만큼 호락호락하지 않다. 특정 정치인을 옹위하는 팬덤 정치의 광신이 아무리 극심해도 일부 세력에 국한된 공허한 메아리에 그치고 만다.
들불처럼 거세게 일었던 지난 정권의 “적폐 청산”은 용두사미로 끝이 났다. 법의 공정성을 허물고 “내로남불”의 늪에 빠졌기 때문이다. 적폐 청산 5년 만에 스스로 적폐의 온상이 된 꼴이다. “적폐 청산”의 기세가 날카로웠지만, 문 정권은 시 정권처럼 권력의 공고화도 이룰 수 없었다. 여론이 바뀌면 권력이 교체되는 선거 민주주의가 대한민국의 기본 제도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문 정권은 시 정권의 반부패 투쟁을 답습해서 권력을 독점하려 했지만, 한국 헌정사의 전통이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지난 정권의 “적폐 청산”은 정적 숙청의 정치쇼로 그쳤을 뿐, 법치 확립의 새로운 전기가 되지 못했다. 지난 정권의 잘못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현 정권은 비리를 파헤치는 현 정권의 권력 기구가 위헌적, 탈법적, 관행적, 자의적 권력의 오·남용을 범하지 않는지 투명하게 감시하고 철저하게 통제해야만 한다. 정부의 자기반성적 규율과 기강이 확립되지 않으면, 적폐 청산의 시도는 적폐의 중첩 구조를 낳고 실패한다.
거짓 선동가는 제 편의 갖은 부패는 죄다 덮어둔 채 정적들만 잡기 위해 법의 칼날을 망나니 칼춤 추듯 휘둘러 댄다. 참된 개혁가는 암세포를 제거하는 노련한 집도의처럼 신중하고 정밀하게 곪고 썩은 권력의 환부에 법의 메스를 가한다. 과연 제대로 할 수 있을까. 현 정권의 권력자들은 비스마르크의 냉소를 명심해야 한다. “우리가 역사에서 배운 것이 있다면, 그 누구도 역사에서 배우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뿐.” <계속>
▲“호랑이”와 “파리떼”를 청소하는 시진핑 총서기. 삽화/Adolfo Arran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