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 2022-09/ 09-01(목) 비운의 개혁가 고르비 - 09-30(금) ‘얼굴 보고’ 보이스피싱
횡설수설 2022-09/ 동아일보
09-01(목) 비운의 개혁가 고르비

1985년 3월 54세의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 오르자 세계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원고 없이 연설하고 부축 받지 않고 걷는 소련 지도자의 모습 자체가 신기했다. 소련은 이미 노쇠할 대로 노쇠한 제국이었다. 권력 핵심부터 늙고 병들었다. 불과 3년 사이에 브레즈네프, 안드로포프, 체르넨코로 이어지는 당서기장 3명을 포함해 지도부가 줄줄이 사망했다. 일찍이 고르비는 지도부의 단체사진을 가리키며 “모두 조만간 밥숟가락을 놓을 분들 아닌가”라고 한탄했다. 안드로포프가 “늙은 말은 밭고랑을 망가뜨리지 않네”라고 타일러도 그는 “작은 도토리가 강건한 상수리나무로 성장하죠”라며 굽히지 않았다.
▷“계속 이렇게 살 순 없다. 변화가 있어야 한다.” 시골 출신의 젊은 야심가 고르비는 달랐다. 소련의 경제적 파탄으로 이미 그 방향은 정해져 있었다. 고르비는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를 통해 소련 체제에 활력을 불어넣으려 했다. 하지만 결과는 사회주의 종주국 소련의 해체였다. 한 번 풀린 권력의 실타래를 되감기는 불가능했다. 동구권 국가들이 하나둘 떨어져 나갔고 막강했던 초강대국은 15개 나라로 분리됐다. 그로선 결코 의도하지 않았던 ‘제국의 파괴자’가 된 것이다. 국내적으로도 보수파의 쿠데타, 개혁파의 이반에 따른 희생양이 되어 권좌에 오른 지 7년도 안 돼 굴욕스럽게 물러나야 했다.
▷동서 냉전을 종식시키고 핵전쟁의 공포를 밀어낸 평화주의자로서 세계인의 찬사를 받는 고르비지만 국내에선 동구권을 서방에 넘기고 러시아의 몰락을 가져온 배신자라는 비판에 시달렸다. 1996년 대선에 출마해 얻은 0.5%의 초라한 득표율은 국가적 조롱거리가 됐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선택을 결코 후회한 적이 없다고 했다. ‘다시 한 번 같은 기회가 주어진다면 어떻게 했겠느냐’는 질문에도 늘 이렇게 답하곤 했다. “뒤로 물러서서 다른 선택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똑같은 길을 갔을 것이다. 더욱 끈질기고 단호하게.”
▷20세기 후반 세계사의 가장 큰 전환점을 만든 소련의 마지막 지도자 고르비가 지난달 30일 타계했다. 향년 91세. 실패한 비운의 개혁가 고르비의 몰락 이후 러시아 정치는 보리스 옐친 10년의 혼란과 좌절에 이어 새로운 정치적 괴물을 탄생시켰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소련 붕괴는 20세기 최대의 지정학적 재앙”이라며 옛 소련의 부활을 꿈꾼다.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략을 두고 고르비는 “인간의 생명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며 전쟁의 즉각 중단을 촉구했다. 냉혈한 권력자 푸틴의 앞날은 여전히 진행형인 고르비에 대한 역사적 평가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09-02 ‘1폰 2번호’ 시대

정관계와 재계 유력 인사들의 재킷이나 바지 주머니가 이상하게 두툼한 것은 대개 휴대전화를 두 개씩 넣어 다니기 때문이다. 과도한 업무 연락에 시달리거나 공적으로 노출돼 있는 인사들 상당수가 업무폰 외에 개인폰을 따로 갖고 다닌다. “당신에게 알려준 것은 내 개인폰 번호”라고 은근히 귀띔하기도 한다. 그만큼 상대에게 신뢰를 갖고 있다는 메시지다. 번호를 분리할 필요가 있는 이들에게 묵직한 휴대전화 두 개를 챙겨 다니는 수고로움은 감내해야 할 대가였다.
▷1대의 스마트폰으로 2개의 전화번호를 동시에 쓸 수 있는 서비스가 이달부터 시작됐다. 앞으로는 스마트폰에 직접 장착하는 유심(USIM)칩 외에 기기 안에 내장돼 있는 e심을 병용해 2개의 회선을 동시에 사용할 수 있다. 세컨드폰을 가뿐히 내려놓을 수 있게 된 것이다. 휴대전화를 한 개만 사용해온 이들에게도 반가운 소식이다. 기존 통신사 서비스를 유지하면서 알뜰폰의 저렴한 데이터를 이용하거나 해외출장 시 현지 국내요금제를 선택할 수 있는 혜택이 열렸다.
▷이른바 ‘듀얼심’의 기술 자체는 새로운 게 아니다. 독일기업 지멘스가 관련 기술의 특허를 낸 게 1990년대였다. 핀란드 통신업체 베네폰이 2000년 내놓은 첫 듀얼심 휴대전화 ‘트윈폰’은 기기 뒷면에 유심칩 두 개를 나란히 꽂아 사용하는 형태였다. 칩을 4개까지 장착할 수 있는 쿼드(quad) 모델이 나오기도 했다. 현재 듀얼심 서비스를 운용하는 통신사는 2020년 말 기준으로 전 세계 69개국 175개. 해외에서는 이미 상용화된 서비스이건만 한국은 유심칩 판매수익 감소를 우려한 통신사들의 견제 등으로 도입이 늦어졌다.
▷휴대전화 번호가 주민등록번호보다도 자주 쓰이는 핵심 개인정보가 돼 버린 세상이다. 통화와 문자 송수신 같은 기본 커뮤니케이션 외에 본인 인증, 금융 거래 등에도 전화번호 입력은 필수다. 각종 웹사이트 가입부터 배송 정보 입력, 식당에 대기 순번을 걸어놓는 일까지 번호 노출을 요구받는 상황은 점점 늘어나고 있다. ‘본캐’ 번호를 함부로 갈아치울 수 없으니 ‘부캐’ 번호가 필요해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다. ‘1폰 2번호’ 사용이 프라이버시와 디지털 정체성의 문제로 직결될 수 있다는 말이다.
▷이 서비스를 시행 중인 해외 국가에서는 번호를 2개 쓰면서 바람을 피우다 배우자에게 적발되는 사례들이 종종 뉴스가 되기도 한다. 듀얼심을 악용하려는 사람들도 생겨날 것이다. 그래도 2025년이 되면 전 세계 스마트폰의 절반 이상이 듀얼심을 탑재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각자의 필요에 따라 최적화된 방식으로 휴대전화를 이용, 관리하는 게 관건일 것이다. 한국의 ‘투넘버 시대’는 어떻게 열릴지 궁금해진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09-03(토) 올리가르히 잇단 의문사

1996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부시장으로 일하던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중앙 무대로 끌어올려 준 사람은 보리스 베레좁스키였다. 올리가르히(러시아 신흥 재벌)의 상징인 베레좁스키의 후원으로 푸틴은 크렘린에 부국장으로 입성했고 총리를 거쳐 2000년 대권을 잡았다. 하지만 푸틴이 대통령이 된 이후 두 사람의 관계는 멀어졌고, 결국 영국 런던으로 망명한 베레좁스키는 2013년 자택 욕실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푸틴 시대 올리가르히의 첫 의문사였다.
▷러시아의 최대 민영 석유업체인 루크오일의 라빌 마가노프 회장이 1일 모스크바의 병원에서 추락사했다. 러시아 국영 매체들은 그가 우울증 치료제를 복용했다면서 극단적 선택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발코니에서 담배를 피우다 실족한 것이라는 민간 매체의 보도도 나왔다. 하지만 서방 언론들은 루크오일이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직후 “무력 충돌이 최대한 빨리 끝나기를 바란다”는 성명을 발표하는 등 비판적 자세를 보였다는 점에서 마가노프의 죽음에 러시아 당국의 개입을 의심하는 분위기다.
▷앞서 4월 러시아 액화천연가스 기업 노바테크 전 부회장이 스페인에서, 국영 천연가스 기업 가스프롬 자회사 가스프롬은행의 전 부회장은 모스크바에서 각각 가족들과 함께 사망했다. 이어 5월에는 가스프롬 소유 리조트의 임원이 절벽에서 추락해 숨졌다. 이처럼 올해 들어 올리가르히의 석연치 않은 죽음이 잇따르고 있지만 자살인지 타살인지조차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사망 배경에 대한 궁금증만 계속 커질 뿐이다.
▷올리가르히는 1991년 소련 해체 이후 국영기업의 민영화 과정에서 막대한 부를 쌓았다. 이들은 보리스 옐친 전 대통령을 지지하며 경제와 정치에서 영향력을 확대했고 정부와 올리가르히는 상부상조하는 관계였다. 하지만 푸틴은 “기업인들은 정치판에 기웃거리지 말라”고 견제하면서 독자적으로 권력을 구축해 나갔다. 이후 최대 부호였던 미하일 호도르콥스키 전 유코스 회장이 10년간 옥살이를 하고 망명길에 오르는 등 반(反)푸틴 성향의 올리가르히는 축출되고 친푸틴 기업인들만 남았다.
▷푸틴은 KGB와 군대 등 안보·정보를 담당하던 부처 출신의 이른바 ‘실로비키’를 중용해 통치의 기반으로 삼고 있다. 그동안 올리가르히뿐 아니라 야권 정치인 알렉세이 나발니, 보리스 넴초프 전 부총리 등 푸틴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암살되거나 죽음의 문턱까지 갔었다. 러시아 선거법상 푸틴은 2036년까지 집권이 가능하다. 푸틴의 철권통치가 계속된다면 러시아에 의문사의 그림자가 사라질 날은 아직 멀어 보인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09-05(월) ‘20년 퇴보한 코로나 학력’

“4학년 학생들의 성적이 20년 전 수준으로 돌아갔다.” 뉴욕타임스는 미국 전역에서 올해 실시된 4학년 대상 전국학업성취도평가 결과를 이렇게 한마디로 평가했다. 올해 평균 수학 점수(234점)는 1999년 점수, 읽기 점수(215점)는 2004년 점수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코로나19 팬데믹 초입이던 2020년에 비해 점수가 수직 하락한 탓이다. 교사와 학생이 차곡차곡 쌓아 온 성취가 팬데믹 기간 동안 사라진 셈이다.
▷팬데믹 기간 동안 미국 교실은 파행을 겪어 왔다. 초기에는 아예 학교 문을 닫았다가 온라인 수업으로 전환됐다. 학생 백신 접종이 시작된 지난해 가을에야 학교가 문을 열었는데 그동안 누적된 학습 손실이 이번에 수치로 입증된 것이다. 온라인 수업을 하는 아이를 지켜본 부모라면 예상할 수 있었던 결과이기도 하다. 온라인 수업의 집중력은 대면수업에 비할 수 없었고 책읽기와 멀어지니 독해력 자체도 떨어졌다. 교사, 또래와의 상호작용 없는 학습은 그 효과가 현저히 떨어졌다.
▷초등 4학년의 기본 학력은 진학률과 취업률을 예측하는 결정적인 요소라고 한다. 이 시기 학습 손실이 인생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는 얘기다. 그런데 기초학력 양극화가 팬데믹 기간을 지나며 더 심각해졌다. 읽기 점수의 경우, 성적이 상위 10%인 학생 점수(2점)보다 성적 하위 10% 학생의 점수(10점)가 5배나 더 떨어졌다. 흑인이나 히스패닉이나 경제적 취약계층 등 사회적 약자들의 성적이 전반적으로 낮은데 이 격차가 더 벌어졌다는 것이다. 성적이 높을수록 개인 노트북을 가진 비율, 초고속 인터넷 접속 비율이 높았다는 점도 성적이 온전히 개인적 성취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한국의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다. 2021년과 코로나19 이전인 2019년의 고2 학생의 학업성취도평가를 보면 국어 영어 수학 전 과목에서 기초학력 미달 비율이 일제히 증가했다. 영어는 10명 중 1명, 수학은 6명 중 1명이 기초학력조차 갖추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코로나 세대’의 학력 저하를 회복하는 데 다시 한 세대가 필요할 것이라는 우울한 전망이 나온다. 더욱이 학력 저하는 코로나 세대가 경험한 상실의 일부일 뿐이다. 태어나면서부터 마스크를 쓴 아이들은 언어 발달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뛰어놀지 못한 아이들은 비만 등에 시달린다. 사회적 단절은 정신건강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이대로 ‘코로나 세대’를 잃어버린 세대로 남겨둘 수는 없다. 이번 평가를 주도한 베벌리 퍼듀 미 국가평가관리위원장은 “4학년 학생들의 학력 저하는 그들의 미래를 위협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계속 코로나19만 비난할 수 없다. 더 가르쳐야 한다”고 했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09-06 英 3번째 여성총리 트러스

리즈 트러스 영국 외교장관은 ‘카멜레온’이라는 평가를 받는 정치인이다. 군주제 폐지와 마약 합법화 등을 외치며 진보당에서 활동하다가 보수당으로 옮겨 외교수장 자리에까지 올랐다. 2014년부터 8년간 환경·농림부와 법무부, 재무부, 통상부 장관을 두루 거쳐 “직업이 장관”이라는 말도 듣는다. 5일 당 대표 경선에서 승리하면서 그는 이제 마거릿 대처, 테리사 메이 전 총리에 이어 세 번째 여성 총리 탄생이라는 역사를 쓰게 됐다.
▷“당황스럽다. 왜 여성 정치인들은 늘 대처와 비교당하느냐.” 그는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자신이 대처 전 총리의 ‘코스프레’를 하고 있다는 세간의 평가를 반박했다. 그러나 인터넷에는 대처 전 총리와 트러스 장관을 비교하는 각종 사진이 넘쳐난다. 통이 넓은 흰색 리본 블라우스, 러시아 모스크바 광장에서 눌러쓴 모피 털모자 같은 패션부터 탱크 위에 올라탄 사진 구도 등은 30여 년 전 대처 전 총리의 것과 판박이다. ‘대처의 아바타’라고 불릴 법하다.
▷트러스 장관은 전속 사진사를 두고 인스타그램 활용을 극대화해 온 ‘이미지 관리의 달인’이다. 그런 그가 “나는 그저 나 자신일 뿐”이라고 강변해도 이를 곧이곧대로 믿는 이는 많지 않았다. 대처 전 총리는 과감한 노조 개혁과 재정 개혁을 통해 1970년대 영국병을 치유해낸 ‘철의 여인’으로 평가받는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윈스턴 처칠에 이어 두 번째로 존경받는 지도자 자리를 놓치지 않고 있다. 대처 전 총리에 이어 26년 만에 두 번째 여성 지도자가 된 메이 전 총리도 선거 과정에서 ‘제2의 대처’ 이미지 활용을 망설이지 않았다.
▷세 여성 지도자는 보수적인 영국 정치권, 그것도 보수 토리당의 유리천장을 잇따라 깨뜨리는 성공 스토리를 썼다. 옥스퍼드대 출신의 엘리트라는 점도 공통점이다. 대내외적으로 강경한 정책을 밀어붙인 매파 정치인들이기도 하다. 이들은 때로 파격적이기까지 한 시도로 “차갑고 완고하다”는 평가를 바꿔 왔다. 메이 전 총리는 100권이 넘는 요리책을 사 모으는 취미와 호피무늬 구두를 비롯한 과감한 패션 스타일이 화제였다. 트러스 장관은 두 딸을 키우며 노래방을 즐기는 일상을 공개해 왔다.
▷트러스 신임 총리가 직면하게 될 현실은 엄중하다. 영국은 브렉시트(Brexit)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여파까지 겹치면서 치솟는 물가와 인력난, 에너지난에 신음하고 있다. 대처 전 총리에 대한 영국인들의 향수가 점점 짙어지고 있는 것은 이런 국가적 위기 때문일 것이다. 대처 이미지의 모방을 넘어 그에 못지않은 리더십을 보임으로써 영국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어 달라는 게 이들의 요구다. 영국 사상 최초 40대 여성 총리의 어깨가 그만큼 더 무거워졌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09-07 “차례상에 전 안 올려도 돼요”

‘추석 차례상은 송편과 나물, 구이, 김치, 과일, 술이 기본이고 육류와 생선, 떡 정도를 추가할 수 있다.’ 성균관이 추석을 앞두고 차례 음식을 최대 9가지만 올리도록 간소화한 차례상 새 표준안을 발표했다. 차례 음식 가운데 며느리들의 원성이 자자한 전은 올리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동그랑땡 생선전 녹두전 등은 기름 냄새 맡으며 온종일 부쳐야 한다. 허리라도 펼라치면 ‘아이고’ 소리가 절로 나는 고역이다. 심지어 ‘명절 때 조상 덕 보면 해외여행 가고, 조상 덕 없으면 전 부친다’는 시쳇말이 있을 정도다.
▷전 없는 차례상의 근거는 조선시대 예학 사상가인 김장생이 사계전서(沙溪全書)에서 ‘기름진 음식을 써서 제사 지내는 것은 예가 아니다’라고 쓴 데 있다. 차례상은 조선 후기 양반 경쟁으로 인해 본래 예법과 다르게 호화스럽게 변질됐다는 게 정설이다. 석주 이상룡, 명재 윤증, 퇴계 이황 종가에서는 ‘제사상은 간소히 차리라’는 지침이 전해 내려온다. 제사상 크기는 가로 99cm, 세로 68cm로 정하고 유과나 전은 올리지 않도록 했다.
▷새 차례상을 반길 법도 한 며느리들이 되레 “그동안 전 부친 게 억울하다”며 성균관을 성토하고 있다. “왜 이제야 발표하나. 지난 명절에 이혼했다” “TV 보며 노는 남자들 밥상 차리는 게 더 열 받는다” “이미 차례 안 지내는 집이 많다”. 가족의 해체와 성평등 문화의 확산 등 우리 사회의 급격한 변화에 비해 성균관의 인식이 뒤처진다는 지적이다. 가족 간 거리 두기가 강제된 코로나19 팬데믹 동안 추석, 설 명절 문화가 과거로 돌아갈 수 없을 만큼 바뀐 탓도 있다.
▷이제라도 유교 전통문화를 새롭게 정립하려는 성균관의 노력을 폄훼만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최영갑 성균관 의례정립위원장은 새 차례상 발표에 앞서 “유교가 현대화 과정에서 옛 영화만을 생각하며 선구자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고 했다. ‘명절증후군’ ‘시가와 처가 차별’ 등이 잘못된 의례에서 비롯됐음을 알고서도 관행을 바꾸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는 “차례는 후손들의 정성이 담긴 의식인데 이로 인해 고통받거나 가족 사이 불화가 초래된다면 바람직하지 않다”고 했다.
▷가족이 모여 정을 나누고 나의 뿌리를 되돌아보는 것, 명절의 본질이다. 고루한 형식에 매몰돼 가족끼리 싸움이 나고 따스한 밥상조차 나누지 못한다면, 그 본질에서 한참 벗어난 것이다. 유서 깊은 종가에선 “남녀 구분 없이 함께 음식을 준비하고 불합리한 예법은 손질해 집안별로 가가례(家家禮·각 집안의 예법)를 세워 따르면 될 일”이라고 한다. 예법은 시대에 맞게 다시 쓰여야만 그 본질을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09-08 빅4에 백인男 없는 英내각

영국 내각에는 ‘The Great Offices of State(국가 중요 관직)’라고 불리는 4개의 자리가 있다. 내각 구성원 중에서도 특히 역할이 중요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인데, 총리와 재무장관, 외교장관, 내무장관을 가리킨다. 6일 출범한 리즈 트러스 내각은 이 ‘빅4’를 모두 백인 남성이 아닌 인물들로 채웠다. 영국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보수당 소속이면서도 취임 일성으로 “개혁”을 외친 트러스 총리의 승부수다.
▷내각의 2인자로 평가되는 쿼지 콰텡 재무장관은 아프리카 가나 출신으로, 사상 첫 흑인 재무장관이 됐다. 영국인 부친과 시에라리온 출신 모친 사이에서 태어난 제임스 클레벌리 외교장관은 “혼혈이라는 이유로 어린 시절에 끊임없이 놀림을 당했다”고 스스로 밝히기도 했다. 출입국 정책 등을 담당하는 내무부를 지휘하게 된 수엘라 브래버먼 역시 아프리카와 인도 혈통이 섞인 비백인 여성이다. 보수층에서는 “주요 직위에 백인 남성의 자리는 없느냐”는 불만이 나온다.
▷반면 야당 노동당에서는 이들의 발탁을 놓고 “구색 맞추기에 불과하다”는 혹평을 내놨다. 불법 이민자 단속을 강화하겠다는 트러스 총리는 물론 세 명의 장관 모두 보수 일색이라는 것이다. 콰텡은 브렉시트와 감세에 적극 찬성했고, 클레벌리는 러시아와 중국에 대한 강경한 대응을 주문해왔다. 브래버먼은 학교가 학생들의 성(性)적 지향을 존중할 법적 의무는 없다는 칼럼을 쓴 적이 있다. 세 사람은 트러스의 당 대표 선거를 지원한 핵심 측근들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트러스 총리가 파격 인사를 통해 메시지를 던진 것은 분명해 보인다. 영국에서 백인 인구 비율은 1991년 94%에서 2011년에는 87%로 줄어든 반면 흑인, 아시아계 등은 늘고 있다. 수도 런던은 인구 중 절반 이상이 비백인이고 2016년부터 파키스탄 출신 무슬림 사디크 칸 시장이 재임하고 있다. 인종 다양성에 관심을 높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여성 장관을 늘리는 것은 전통적으로 여성 유권자에게 인기가 없는 보수당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한 방안이다.
▷영국 보수당은 전 세계 보수정당의 원조라고 할 만큼 역사가 길다. ‘토리’라는 정파가 생긴 지는 300년이 넘었고, 보수당이라는 이름의 정당으로 활동한 지도 200년 가까이 된다. 그동안 디즈레일리, 처칠, 대처 같은 지도자들은 원칙을 중시하면서도 정치·사회적 변화를 요구하는 민심을 적극 수용했고, 그 힘을 바탕으로 보수당은 유지돼 왔다. 트러스 총리의 성패는 이런 과거의 교훈을 얼마나 잘 이해하고 개선해서 실행할지에 달렸을 것이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09-09(금) “엄마, 키워줘서 고마워”

서른일곱에 얻은 늦둥이여서일까. 사춘기 반항이 한창이라는 남의 집 중2와 달리 아들은 엄마와 꼭 붙어 다니는 ‘엄마 껌딱지’였다. 폭우가 쏟아지던 6일 새벽도 그랬다. ‘차를 옮기라’는 관리사무소 방송에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는 엄마를 따라나섰다. 그날은 따라오지 말라고, 엄마 혼자 가겠다고 끝까지 말렸어야 했다.
▷그날 새벽 태풍 ‘힌남노’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날이 개고 있던 수도권과 달리 경북 포항의 수해 상황은 심각했다. 인근 하천이 범람해 모자가 사는 아파트 지하주차장으로 물이 밀려들었다. 엄마는 차를 빼려다 포기하고 나오려 했지만 수압에 차 문이 열리지 않았다. 밖에 있던 아들이 문을 열어줬다. 이미 걷기 힘들 정도로 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몸이 약해 탈출할 자신이 없었던 엄마는 떨어지지 않으려는 아들을 어렵게 돌려세웠다. “너라도 살아서 나가. 수영 잘하잖아.”
▷기독교인인 엄마는 천장 모서리 배관 위에 엎드려 구조될 때까지 15시간을 기도하며 버텼다. 늦둥이를 살아서 보겠다는 의지로 체온이 35도까지 떨어지는 상황을 견뎠을 것이다. 하지만 엄마를 기다리고 있어야 할 아들이 보이지 않았다. 다음 날 기력을 회복할 즈음에야 남편이 믿기 어려운 말을 했다. “마음을 단디 먹어야 우리 아이 마지막을 볼 수 있다.” 아, 이 지옥을 보라고 신은 나를 어렵게 살려낸 건가. 왜 늙은 내 몸을 거두어가지 않고 축구와 떡볶이를 좋아하던 열다섯 어린아이를 데려가셨나.
▷고인이 된 박완서 소설가는 26년간 자랑스럽게 키워온 의사 아들이 사고로 앞서 갔을 때 묵주를 집어 던지며 신을 원망했다. “그 애 없는 세상의 무의미함도 견디기 어렵거니와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기에 이런 벌을 받나 하는 회답 없는 죄의식은 더욱 참혹하다”고 썼다. “참척(慘慽)을 당한 어미에게 하는 조의는 그게 아무리 조심스럽고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위로일지라도 모진 고문이다.”
▷그날 물 빠진 지하주차장에서는 늦둥이 김 군과 함께 해병대를 갓 전역한 서 씨(22), 20년 넘게 홀어머니를 모셔온 홍 씨(52), 33년간 장손집 살림을 꾸려온 허 씨(55), 베트남 참전 용사 안 씨(76), 자식에 손 벌리기 싫어 퇴직 후에도 지게차를 몰던 남 씨(71)와 아내 권 씨(65)가 발견됐다. 성실했던 이들의 황망한 죽음을 보고서야 매뉴얼을 뜯어고치고, 차수벽을 세우고, 배수펌프를 설치하느라 부산하다. 포항의 비극 이후 세상은 좀 더 안전해지겠지만 그리운 이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100년 만에 가장 둥근 보름달이 뜬다는 올 추석, 엄마는 선물인 듯 비수인 듯 늦둥이의 마지막 인사를 뇌고 또 뇌며 통곡할 것이다. “엄마. 키워줘서 고마워요.”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9-13(화) 北 ‘핵 숭배’ 법령화

세계 첫 핵실험의 거대한 폭발을 지켜본 ‘원자폭탄의 아버지’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관제소 안 기둥을 붙들고 힌두교 경전의 구절을 떠올렸다. “천 개 태양의 빛이 하늘에서 일시에 폭발한다면, 그것은 전능한 자의 광채와 같으리라.” 하지만 뒤이어 그의 머릿속에 들어온 다른 구절은 이랬다. “이제 나는 죽음이요, 세계의 파괴자가 된다.” 핵무기의 가공할 위력은 전율과 경외를 부르지만, 그것이 가져올 참상은 경악과 공포의 시간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핵은 우리의 국위이고 국체이며 공화국의 절대적 힘이고 인민의 크나큰 자랑이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8일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 정의한 북한 핵무기의 위상이다. 한때 ‘만능의 보검’이라 불리던 핵무기는 어느덧 ‘국위이자 국체, 절대권력’이 됐다. 흔히 주권을 누가 가지느냐에 따른 국가 형태를 국체(國體)라 하는데, 이제 북한은 인신(人神)인 독재자 수령에 더해 물신(物神)인 핵무기까지 숭배하는 핵·수령 일체국가가 됐다.
▷북한은 국가 법령으로도 핵이 곧 김정은임을 거듭 천명했다. 새 법령은 ‘핵무력은 국무위원장의 유일적 지휘에 복종하며, 국무위원장은 핵무기와 관련한 모든 결정권을 가진다’고 규정했다. 아울러 ‘핵무력 지휘통제 체계가 위험에 처하는 경우 핵타격이 자동적으로 즉시에 단행된다’고 밝혔고, 5가지 핵 사용 조건을 통해 핵공격의 문턱을 대폭 낮췄다. 그게 오판이든 변덕이든 김정은의 결심에 따라 모든 것이 가능하도록 핵무기 운용 체계를 만든 것이다.
▷북한 핵무기는 이제 할아버지의 주체사상, 아버지의 선군정치를 뛰어넘는 김정은의 위업이 됐다. 더욱이 모래탑 같은 선대의 사상적 업적과 달리 김정은이 만들어낸 것은 핵탄두와 미사일이라는 유형의 실체가 있는 성과물이다. 당장 휴전선 너머 같은 민족은 물론 멀리 바다 건너 강대국까지 위협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신을 부정하는 유물론 국가임에도 사교집단 같은 광신적 수령 숭배와 가혹한 감시·억압으로 지탱되는 체제에선 앞으로 핵 숭배를 위한 법제화를 넘어 각종 교리와 상징체계, 비의(秘儀)까지 만들어낼 가능성도 있다.
▷김정은은 일찍이 “핵 단추가 내 사무실 책상 위에 항상 놓여 있다”고 미국을 위협했다. 이에 전임 미국 대통령은 “내겐 더 크고 강력한 핵 버튼이 있다”며 유치한 말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비록 ‘말폭탄’이었지만 예측불허의 지도자 손에 쥐어진 핵무기의 위험성에 대한 논란을 불렀다. 머지않아 김정은에게도 미국과 러시아처럼 늘 곁에 묵직한 핵가방이 따라붙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위험한 핵전쟁 격발장치는 외려 정권의 자폭장치가 될 공산이 크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09-14 대통령실 ‘군기 잡기’

“모든 보고는 내게 먼저 하라.” 2017년 7월 취임한 존 켈리 백악관 비서실장은 전 직원을 소집해 강경한 어조로 말했다. 4성 장군 출신의 켈리는 파벌 간의 암투와 보고체계 붕괴로 혼란스럽던 도널드 트럼프 초기 대통령실의 기강을 잡기 위해 투입된 소방수였다. 그는 실세로 평가받던 백악관 공보국장을 내쳤고, 대통령의 딸과 사위까지 먼저 자신에게 보고하도록 했다. 그가 근무했던 1년 반이 트럼프 시절의 백악관에 그나마 질서가 유지됐던 때였다.
▷한국에서도 대통령실의 기강이 해이해지면 대통령이나 비서실장이 나서곤 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3년 비서관들의 ‘새만금 헬기 유람’으로 비난 여론이 커지자 직원 조회를 주재하면서 “(대선 공로에 대한) 보상의 유효기간은 어떤 경우는 6개월, 어떤 경우는 1년”이라고 경고했다. 이명박 정부 정정길 전 비서실장은 대통령실 직원의 성폭행 혐의 등으로 어수선했던 2009년 직원회의를 소집해 “작은 실수 하나도 국민에게 실망을 줄 수 있다”며 기강 잡기에 나섰다.
▷김대기 비서실장이 13일 첫 직원 조회를 연 것도 흐트러진 대통령실의 분위기를 다잡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앞서 대통령실은 지난달 말부터 이달 초까지 진행된 대규모 감찰 및 업무평가를 통해 행정관 및 행정요원급 직원 50여 명을 교체했다. 이렇게 단기간에 대통령실 실무진을 대거 교체한 것은 전례를 찾기 어렵다. 그만큼 내부 상황이 심각한 수준이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김 실장이 “어디서 날아올지 모르는 짱돌”이라는 직설적인 표현을 쓴 것도 이런 배경에서 나왔을 것이다.
▷문제는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한 반성은 없었다는 점이다. 윤석열 대통령 임기 초반부터 대통령실의 기강이 흐트러졌다는 것은 대통령실 첫 인사에 문제가 있었다는 점을 방증한다. 감찰 과정에서 “대통령실이 윤핵관의 비서들로 가득 찼다”는 말이 나올 만큼 여권 핵심 인사들의 사람 심기가 만연해 있었다고 한다. 윤 대통령 지인의 아들, 김건희 여사의 코바나컨텐츠 전 직원 등이 대통령실에 근무해 ‘사적 채용’ 논란도 있었다. 인사 라인에서 충분한 검증을 거쳐 채용한 것인지 의문이 여전하다.
▷현 정부 들어 대통령실에서 민정수석이 폐지되면서 공직기강비서관은 비서실장 직속으로 바뀌었고, 인사검증은 법무부로 넘어갔다. 오랫동안 유지돼온 시스템이 바뀐 만큼 관련 업무에 공백이 생길 여지가 있다. 또 수석비서관 이상에 대한 감찰을 강화하려면 특별감찰관 임명이 필요한데, 대통령실과 국회 간에 원활한 협의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이런 문제점들에 대한 보완과 개선이 병행돼야 기강을 바로 세울 수 있다. 비서실장 혼자서 군기 잡기에 나서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09-15 오영수 댄스

모든 시상식의 주인공은 수상자다. 그제 열린 미국 에미상 시상식에선 아시아 최초로 감독상과 남우주연상을 받은 ‘오징어게임’의 황동혁 감독과 배우 이정재가 특히 주목받았다. 그런데 시상식 뒤풀이를 뒤집어 놓은 건 조연배우 오영수(78)였다.
▷에미상 뒤풀이 참석자가 소셜미디어에 올린 35초짜리 영상엔 ‘오영수 꺾기 춤’ 현장이 담겼다. 점잖게 정장을 차려입은 백발의 신사가 뜻밖에 관절을 꺾어가며 격렬하게 춤추자 사람들이 박수치고 환호하는 영상은 시상식 하이라이트 장면 못지않게 화제가 됐다. 해외 누리꾼들도 “깐부 할아버지의 대변신” “78세 배우에게 이런 에너지가 나오다니”라는 댓글을 달며 놀라워했다. 그가 요즘도 매일 아침 집 근처 남한산성 밑에서 평행봉 50개를 하며 속 근육을 단련하는 줄 모르나 보다.

▲에미상 뒤풀이에서 춤을 추고 있는 배우 오영수. 트위터 @Meena Harris
▷오영수는 팔순 가까워 찾아온 전성기를 누리는 중이다. 오징어게임에서 ‘1번 참가자’ 오일남 연기를 선보인 후로는 마스크를 쓰고 나가도 “사인해 달라”며 줄을 선다. 에미상 남우조연상 수상은 불발됐지만 올해 1월 미국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한국 배우로는 처음으로 TV부문 남우조연상을 받았다. “이제 세계 속의 우리가 아니라 우리 속의 세계입니다”라는 그의 수상소감은 명대사 “우린 깐부잖아”와 함께 해외 언론도 보도했다. ‘글로벌 스타’의 티켓 파워는 다르다. 오징어게임 이후 출연작인 연극 ‘라스트 세션’은 전석 매진이었다.
▷시작은 미미했다. 월남한 흙수저 집안에서 ‘오세강’으로 태어나 막노동 하다 1967년 극단 광장에서 ‘오영수’로 배우 인생을 시작한다. 연기가 좋아서가 아니었다. 학력이 보잘것없어 번듯한 직장을 구하기 어려웠다. 그래도 “존재감 없던 내가 무대에선 관객을 웃기고 울리는 황홀한 경험”을 하는 맛에 50여 년간 200편 넘는 연극에 출연했다. 동아연극상(1980년)과 백상예술대상(1994년) 연기상을 수상한 실력자이지만 데뷔 45년 차에도 언더스터디, 즉 주연배우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 투입되는, 무대에 선다는 기약도 없는 배역을 마다하지 않았다. 빛나지 않아도 무대에 진심이었던 시간은 내공으로 쌓였다.
▷그는 에미상 시상식 후 기자간담회에서 “전에는 민족의 나약한 면을 느꼈는데, 이제는 자신감을 인식하게 하는 계기가 됐다”고 했다.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145달러이던 시절 연기를 시작해 3만5000달러였던 지난해 오징어게임으로 전 세계 미디어업계를 흔들어 놓았다. 가난한 나라의 ‘딴따라’였던 그가 이제는 대중문화의 최강국에서 ‘명배우’로 대접받는다. 오영수는 흥이 날 만도 한 것이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9-16 트럼프보다 더한 바이든

“공화당의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는 공허했고,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은 외톨이였다. 동맹국과 적국 모두 트럼프 리더십을 무시하고 비웃었다.” 2020년 대선 당시 조 바이든 대통령의 공약집에 나온 내용이다. 트럼프를 강도 높게 비판하는 바이든을 보면서 그가 당선되면 미국의 대외 정책에 일대 변화가 있을 것으로 기대하는 국가들이 많았다. 하지만 바이든 취임 1년 8개월이 지난 지금 ‘뒤통수를 맞았다’는 탄식마저 흘러나오고 있다.
▷근래 바이든은 ‘메이드 인 아메리카’의 최전선에 서 있는 전사다. 인플레이션감축법(IRA)과 ‘반도체·과학법’을 통해 전기차와 반도체를 미국에서 생산하도록 압박하고 있고, 15일에는 중국과 관련 있는 외국 기업들이 반도체, 바이오 등 분야의 미국 기업을 인수합병하지 못하게 할 수 있는 행정명령도 내렸다. 중국산 제품에 관세를 높여 중국을 견제하려 했던 트럼프의 정책에 비해 효과가 직접적이고 파급력이 크다. 중국을 넘어 한국과 유럽 등으로 불똥이 번지고 있다.
▷집권 초 바이든의 외교 전략은 트럼프와 반대 방향으로 가는 듯 보였다. 트럼프가 탈퇴했던 파리기후협약과 세계보건기구(WHO)에 재가입하면서 국제사회에 ‘미국이 돌아왔다’고 선언했다. 민주 진영 110개국 정상들을 모아 ‘민주주의 정상회의’를 개최했고, 트럼프가 추진했던 주독 미군 감축 계획도 중단시키는 등 유럽과의 관계 개선에 공을 들였다. 트럼프 시대에 의미가 퇴색했던 동맹, 인권 같은 단어들에 다시 무게가 실렸다.
▷하지만 ‘미국의 국익’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바이든은 트럼프에 결코 뒤지지 않았다. 취임 7개월 만에 아프가니스탄에서 철군을 완료한 것이 단적인 예다. 탈레반의 복귀로 인권 악화가 뚜렷하게 예상됐음에도 바이든은 강행했다. 1990년대 인종 청소가 자행된 보스니아 내전에 미국 정부가 소극적 태도를 보이자 “모든 나라가 자국의 이익만 염두에 두고 행동한다면 세상은 훨씬 더 위험해질 것”이라고 비판했던 그였지만 ‘의원 바이든’과 ‘대통령 바이든’은 달랐다.
▷미 언론에선 “트럼프는 말로 했지만 바이든은 행동으로 한다”는 평가가 나온다. 사실 ‘미국 우선주의’는 미국 내에서 19세기 중반부터 이어져온 개념이다. 트럼프가 이를 전면에 앞세우면서 브랜드화했을 뿐이다. 오히려 정치 초보였던 트럼프는 두서없이 미국 우선주의를 밀어붙여 실제 효과는 크지 않았다. 반면 6선 의원 출신에 외교가 주특기인 바이든은 제도적으로 정교하게 진행하고 있다. ‘조 아저씨(Uncle Joe)’의 웃음 뒤에 가려진 전략을 치밀하게 분석하고 준비하지 않으면 이런 고수를 상대하기 어렵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09-17(토) 美中이 찾은 사이언스파크

서울 마곡 LG사이언스파크의 공동실험센터에선 LG전자, 화학, 이노텍, 디스플레이 등 다른 계열사 연구원들이 같은 사무실을 쓴다. 미래사업에 쓸 소자를 함께 개발하고 소재, 부품 관련 연구를 하려면 서로 가까이 있어야 한다고 본 것이다. 필요에 따라 뭉쳤다가 성과를 낸 뒤 흩어지는 빠른 대응이 이 회사 연구개발(R&D)의 노하우다.
▷어제 중국 공산당 서열 3위인 리잔수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이 LG그룹 R&D단지인 사이언스파크 내 제품 전시장을 찾았다. 1시간 동안 머물며 단지 관련 설명을 듣고 가전 로봇 디스플레이 등 대표 제품을 눈으로 확인했다. 리 위원장의 사이언스파크 방문은 올 7월 재닛 옐런 미국 재무장관의 방문 이후 두 달 만이다. 당시 옐런 장관은 사이언스파크 내 LG화학연구소에서 전기차 배터리 충전에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 한 번 충전으로 얼마나 달릴 수 있는지 등을 물었다.
▷리 위원장의 사이언스파크 방문은 중국 측의 요청에 따른 것이라고 LG 측은 전했다. 기업 R&D 허브에 대한 설명을 직접 듣고 싶어 했다는 것이다. 실제 66명 규모의 중국 대표단에는 경제 산업 분야 고위급 인사가 많이 포함돼 있다. 5월 미국 조 바이든 대통령이 방한할 당시 삼성전자 평택공장을 가장 먼저 찾은 것도 미국 측이 원했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기술패권 전쟁이 격화하면서 미중의 한국 기업에 대한 관심도 커지고 있다.
▷2016년 중국은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를 이유로 한국산 배터리를 보조금 대상에서 제외했다. 사드 갈등 6년 만에 중국이 한국의 대표 배터리 기업을 방문한 것은 미국이 주도하는 경제안보블록과 공급망 재편 움직임 때문으로 보인다. 특히 미국이 핵심 미래 산업인 ‘BBC(배터리 바이오 반도체)’ 분야에서 ‘메이드 인 아메리카(made in America)’ 전략을 추진하면서 중국은 더 다급해졌다. 중국으로선 ‘반도체 굴기’를 이루기 힘들어졌을 뿐 아니라 ‘세계의 공장’이라는 위상도 지키기 쉽지 않은 상황이다.
▷미중 최고위 당국자의 잇단 방한은 한국에 일종의 러브콜이자 압박이다. 한국 기업이 가진 기술력 덕분에 미중이 서로 자기편으로 끌어당기려 하고 있지만 등을 돌린 어느 한쪽이 언제 어떤 보복을 하고 나설지 모를 일이다. 서방과 비서방 간 신냉전이 가속화될수록 한국의 딜레마도 커질 수밖에 없다. 국익 차원에서 최선의 선택을 해야 한다. 무엇보다 지금 미중이 한국을 찾는 것은 기업의 기술이 그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기술전쟁에서 낙오하는 순간 한국은 공급망에서 배제될 뿐 아니라 동맹도 찾지 않는 나라가 될지 모른다.
홍수용 논설위원 legman@donga.com
09-19(월) “살아서 퇴근하고 싶다”

서울 신당역 여자화장실에서 발생한 스토킹 살인은 여러모로 충격적이다. 역무원인 피해자는 제복 차림으로 순찰 중이었다. 공격당한 직후 곧바로 비상벨을 눌러 1분 만에 동료 역무원들이 달려왔고, 119구조대가 8분 만에 도착했다. 하지만 제복도, 적시의 대응도 참사를 막지 못했다. 스토킹이 얼마나 무서운 범죄인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이번 사건은 스토킹 범죄의 특징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스토킹 가해자는 대부분 피해자와 아는 사이다. 피해자 A 씨(28)와 가해자 전모 씨(31)도 서울교통공사 입사 동기였다. 일반 범죄의 경우 특별한 원한 관계가 아니면 동일인을 상대로 반복해서 저지르진 않는다. 하지만 스토킹은 상대가 마음을 받아주거나, 물리적으로 스토킹을 못 하게 되는 경우가 아니면 장기간에 걸쳐 반복된다. A 씨는 입사 이듬해인 2019년부터 전화와 문자로 300차례 이상 스토킹을 당했다.
▷스토킹의 세 번째 특징은 갈수록 피해가 커진다는 점. 전 씨는 처음엔 ‘만나 달라’ ‘친구로 지내자’고 했다가 ‘불법 촬영물을 유포하겠다’며 협박하는 단계로 갔다. A 씨는 지난해 10월 불법 촬영과 협박 혐의로 전 씨를 고소했지만 이후로도 피해가 계속되자 올 1월 스토킹 혐의로 재차 고소했다. 징역 9년을 구형받은 전 씨는 결국 A 씨를 잔인하게 살해했다. 1심 선고 하루 전날이었다. 범행 당일 법원에 두 달 치 반성문을 제출하고도 신당역에서 1시간을 기다렸다가 범행을 저질렀다.
▷그래서 스토킹은 초기에 대응해야 한다. 하지만 전혀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나 좋다고 따라다니는데 바로 경찰에 신고하기란 쉽지 않다. 괜히 자극했다가 더 큰 봉변을 당할까 겁도 난다. 가족이나 직장에 피해가 갈까 숨기는 경우가 많아 주변에서 도와주기도 어렵다. A 씨도 피해가 3년 가까이 이어진 후에야 경찰을 찾았다. 법의 보호도 허술했다. 법원은 도주 우려가 없다는 이유로 전 씨의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그가 회계사 자격증을 가진 점도 참작했을 것이다. 경찰은 피해자가 원치 않는다는 이유로 신변보호 조치를 소홀히 했다.
▷이번 사건은 지난해 10월 스토킹방지법이 시행된 후 발생했다. 스토커 김태현의 서울 노원구 세 모녀 살해 사건이 발생한 직후 통과된 법이다. 예전엔 과태료 10만 원의 경범죄로 처벌하던 스토킹 범죄를 이제는 5년 이하 징역이나 5000만 원 이하 벌금형으로 다스린다. 하지만 무거운 형벌이 범죄를 막아주진 못한다. 스토킹을 사소한 범죄쯤으로 여기는 인식이 바뀌지 않는 한 신당역 같은 일상의 공간은 “살아서 퇴근하고 싶다”는 메모로 가득한 두려움의 공간으로 남게 될 것이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9-20 “3등도 위태로운 일본”

세계 제일 일본(Japan As Number One)’이라는 말에 일본인들이 자부심을 느끼며 환호하던 시절이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의 놀라운 경제성장을 지켜본 미국 하버드대 에즈라 보걸 교수가 1979년 쓴 책에서 비롯된 표현이다. 당시 일본은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었고 미국에서는 “일본을 배우자”는 열기가 뜨거웠다. 하지만 이제는 ‘과거의 영광’이 됐다. 일본 경제가 중국에 2위 자리를 내준 지 이미 오래고, 3위를 지키는 것도 만만치 않은 일이 됐다.
▷올해 들어 엔화 가치가 빠르게 떨어지면서 근래 1달러에 140엔 선에서 거래되고 있다. 이런 흐름이 이어진다면 올해 일본의 국내총생산(GDP)은 30년 전 수준으로 후퇴하고, 4위인 독일과 비슷한 규모가 될 것이라고 니혼게이자이신문이 19일 보도했다. 한때 전 세계 GDP의 15%를 차지했던 일본 경제의 점유율은 4% 아래로 줄어들게 된다. 2000년 세계 2위까지 올랐던 1인당 GDP는 지난해 28위로 떨어졌고, 8월 일본 무역수지는 사상 최대의 적자를 기록하는 등 암울한 소식이 이어지고 있다.
▷이에 일본 내부에서는 위기감이 커지고 있다. “일본은 지금까지 약 50년간 선진국의 지위를 누렸지만 이제는 거기에서 미끄러져 내려오기 직전”(노구치 유키오 히토쓰바시대 명예교수), “일본은 쇠퇴도상국이자 발전정체국”(데라사키 아키라 일본 정보통신진흥회 이사장) 등 경고의 목소리가 나온다. 현재 일본의 상황을 “청나라 말기 같다”고 비유한 학자도 있었다. 변화를 거부하다 쇠락의 길을 걷는다는 점에서 비슷하다는 것이다.
▷그만큼 일본 사회는 정체돼 있고 변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 일본 정부는 팩스와 도장으로 상징되는 아날로그식 행정을 바꾸기 위해 지난해 디지털청까지 신설했지만 별로 달라진 게 없다. 65세 이상 인구의 비율이 30%에 가까운 초고령사회에 접어든 데다 총인구는 13년째 감소했다. 아베노믹스가 이어지면서 기업들은 기술 혁신보다는 엔저에 기대 수익을 창출하는 데 익숙해졌고, 세계 최고를 자랑하던 일본의 노동생산성은 이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중간 수준으로 떨어졌다.
▷1980년대 전성기를 누렸던 일본 경제는 1990년대 들어 주가와 부동산이 폭락하면서 위기를 맞기 시작했다. 이후 경기 침체에서 완전히 회복하지 못하고 있어 ‘잃어버린 30년’이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호황일 때 거품이 생기는 것을 막지 못했고, 세계 경제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한 대가를 오랫동안 치르고 있는 셈이다. 일본의 사례를 거울삼아 쉼 없이 혁신하지 않으면 한국의 앞에도 긴 내리막길이 이어지지 말란 법이 없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09-21 “팬데믹은 끝났다”

“팬데믹은 정말로 끝난 것일까?”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코로나19 대유행의 종식을 선언한 이후 외신이 쏟아내고 있는 질문이다.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상당수 현지 언론의 판단은 “아니요”. 미국에서는 여전히 하루 평균 2만 명 넘는 신규 확진자에 400명의 사망자가 나오고 4300명이 새로 입원한다. 미국 보건부가 석 달 단위로 연장해온 공중보건 비상사태 국면도 유지되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이 “팬데믹은 끝났다”라고 불쑥 언급한 곳은 디트로이트 모터쇼 방문을 계기로 진행한 CBS ‘60분’과의 인터뷰에서였다. 북미 최대 규모의 모터쇼에서 마스크 쓴 사람이 거의 없었다는 게 그의 확신을 키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발언은 당장 백악관 당국자들부터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코로나19 대응을 위해 의회에 추가 요청해 놓은 224억 달러의 예산을 받아내기가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정부의 백신 접종 캠페인도 동력이 떨어질 판이다.
▷야당인 공화당은 “바이든 대통령의 말이 맞다면 공중보건 비상사태부터 해제하라”고 공격하기 시작했다. 해제할 경우 1500만 명의 취약계층이 백신 접종과 치료 시 보험 적용을 받지 못하게 된다. 미국 내 전문가들도 우려와 비판을 쏟아내고 있다. “허튼소리”, “역겨운 발언”, “중간선거를 의식한 보건 포퓰리즘”이라는 날 선 반응까지 나왔다. 모더나와 화이자 등 백신업체들의 시가총액은 하루 만에 90억 달러(약 12조5000억 원) 넘게 날아가 버렸다. 후폭풍이 한동안 이어질 조짐이다.
▷2년 반 동안 지속돼온 팬데믹이 종식 단계로 가고 있다는 데 이의를 제기하는 전문가는 없다. 세계보건기구(WHO) 사무총장도 “끝이 보인다”고 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주요국들은 전부 실내 마스크 착용 의무를 해제했고, 자가 격리 규정도 대폭 완화했다. 스위스에서는 코로나19에 걸려도 사무실로 출근하고 회의에도 참석한다. 그렇다고 ‘종식’을 공식 선언하는 건 다른 차원의 문제다. 백신과 치료제에 힘입어 팬데믹 양상을 바꿔 놓기는 했지만 바이러스 자체의 위험성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국가별, 지역별 의료체계와 대응 상황도 천차만별이다.
▷마스크조차 벗지 못하는 한국에 코로나 종식 논란은 일러도 한참 이르다. 실내 마스크 착용 규정을 풀어 달라는 요구가 커지고 있지만 보건당국은 아직 단호하다. 독감의 5배에 이르는 현재 코로나바이러스의 전파력(R0)이 더 낮아지고, 위중증 이완율 등 수치가 더 떨어져야 방역 완화의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올겨울 독감과 코로나가 함께 유행하는 ‘트윈데믹’ 가능성도 남아 있다. 결국 과학적인 데이터와 지표에 근거해서 차근차근 연착륙을 향해 나아가는 것 외에는 길이 없어 보인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09-22 “신문(新聞) 총리”

“저는 몰랐고, 신문을 보고 알았다.” 한덕수 국무총리는 19일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논란이 된 878억 원 영빈관 신축 계획에 대해 이같이 답변했다. 이수진 더불어민주당 원내대변인은 “식물 총리를 넘어 신문 총리, 변명 총리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주었다”고 공세를 폈다. 국민의힘 송석준 의원도 “얼마나 코미디 같은 일이냐. 중요한 영빈관 관련 예산을 몰랐다고 말하는 거 보고 모골이 송연해졌다”고 지적했다. 한 총리 답변이 오죽 궁색했으면 여당 의원까지 비판에 나섰을까 싶다.
▷다음 날 민주당 김병주 의원은 한 총리에게 “8월 중순 대통령 헬기가 나무에 부딪혀 꼬리 날개가 손상된 것을 알고 있느냐”고 물었다. 한 총리는 “신문 보고 알았다”고 답변했으나 이 사실은 언론에 보도된 적이 없었다.
▷통상 대통령과 총리는 매주 월요일 오찬을 겸한 주례회동을 한다. 새 정부 출범 후 주례회동만 벌써 7차례나 했다. 이 자리에서 국정 전반에 걸쳐 현안이나 정책 논의가 이뤄진다. 윤석열 대통령과 정례적으로 만나는 한 총리가 대통령실의 민감한 영빈관 신축 계획이나 헬기 사고 등을 모를 리 없었을 것이라고 보는 이유다. 더욱이 영빈관 정부 예산을 통과시킨 지난달 말 국무회의는 한 총리가 직접 주재했으니 더 챙겨보지 않았을까.
▷하지만 영빈관 예산은 한 총리가 정말 몰랐을 가능성도 아주 없지는 않다. 대통령실 수석급 고위 인사들도 “언론 보도를 보고 알았다”고 말하지 않았나. 그래서 영빈관 신축 계획은 극히 소수의 참모들과 경호처 인사들이 밀실에서 논의한 뒤 정부 예산안에 전격 반영시킨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영빈관 신축 논의 과정에서 한 총리 ‘패싱’이 이뤄졌다면 한 총리가 “나는 몰랐다”며 ‘신문 총리’ 비판을 감수한 것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대통령중심제에서 총리는 명목상 ‘정부 2인자’이지만 ‘2인자’에 걸맞은 권한이 거의 없다. 윤 정부에선 장관 추천권을 행사하는 책임총리제를 강조했지만 한 총리가 적극적으로 인사권을 행사했다고 할 만한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
▷실제로 그동안 우리나라 총리는 대통령을 대신하는 그림자 역할을 많이 했다. 대통령이 참석하지 못하는 행사에 대신 참석하는 ‘의전 총리’, 대통령을 대신해서 연설문이나 메시지를 읽는 ‘대독(代讀) 총리’가 대표적이다. 대통령이 전면에 나서기 껄끄러운 현안을 해결하기 위해 총대를 멘 뒤 책임지고 물러나는 ‘방탄 총리’도 있다. 이번 일을 계기로 한 총리처럼 ‘모르쇠’로 일관하면서 대통령 대신 야당 공세의 뭇매를 맞는 ‘신문 총리’ 유형도 추가되는 것 아닌지 모르겠다.
정연욱 논설위원 jyw11@donga.com
09-23 푸틴의 국민 동원령

러시아는 18∼27세 남성들을 대상으로 징병제를 실시하고 있으나 복무 기간은 1년에 불과하다. 직업 군인은 대우가 좋지 않은 데다 최상층은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측근 기업가나 정보 관계자가 장악하고 있어 우수 인력이 드물다. 중요한 것은 사기인데 군인들은 푸틴의 독단에 의해 시작된 우크라이나 전쟁을 납득하지 못하고 있다. 최근 하르키우 지역을 빼앗기는 등 러시아 쪽 전세가 불리해지자 푸틴은 21일 대국민 TV 연설을 통해 예비군 동원령을 내렸다. 공산주의 시절이나 지금이나 양적 우위와 인해전술로 적을 압도한다는 사고는 변함이 없다.
▷러시아의 예비군은 약 2500만 명에 이른다. 현재 동원이 예정된 예비군은 30만 명이지만 더 늘어날 수도 있다고 한다. 전쟁에서 개죽음을 당하느니 팔이 부러지는 게 낫다고 여겼던지 인터넷에서는 ‘팔 부러뜨리는 방법’ 등의 검색 건수가 늘었다. 징집을 피하려고 인접국으로 향하는 직항 항공편이 동나고 곳곳에서 반전시위가 벌어졌다.
▷푸틴의 논리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전쟁은 그동안 전쟁이 아니라 특수군사작전이었을 뿐이다. 우크라이나의 신나치 조직에 위협받는 러시아계 주민의 요청에 따라 그들을 돕는다는 명분을 내세웠으나 명분에 맞지 않게 부대의 정체를 숨기는 Z라는 기장을 사용했다. 이제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점령한 후 각 지역에 세운 친러시아 공화국들이 합병을 청원하고 러시아는 그 청원을 받아들일 태세다. 합병이 이뤄지면 우크라이나 정부군은 러시아 영토를 공격하는 게 되고 특수군사작전은 전쟁이 된다. 예비군 동원령을 내린 해괴한 논리다.
▷어린 시절 푸틴은 다른 아이들보다 체구가 작았다. 그러나 누군가 자신을 깔보거나 무시하면 달려들어 격렬하게 싸웠고, 물어뜯든 할퀴든 어떤 비열한 방법을 써서라도 반드시 이기려 했다. 게다가 그는 지금 코너에 몰린 쥐 꼴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패배한 것으로 결론이 나면 몰락이 확실하다. 스스로 발을 빼는 걸 기대하기 어렵다.
▷1989년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의 철수는 소련의 해체로 이어졌다. 당시 고르바초프 공산당 서기장은 전쟁 패배의 인정이 소련의 해체로 이어질지 예상 못 했다. 푸틴은 독일 드레스덴에 파견된 KGB 요원으로 그 과정을 지켜봤다. 그래서 걱정이다. 그러나 소련 해체로 몰락한 것은 러시아나 동유럽 국가 자체가 아니라 그 속의 공산 독재 세력이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진다고 해도 러시아가 몰락하는 건 아니다. 푸틴의 무모한 전쟁을 막을 수 있느냐는 국제사회의 더 일치된 노력과 러시아 국민의 반전 의지에 달려 있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09-24(토) 1조 넘은 MRI 진료비

‘효도검진 자기공명영상(MRI) 이벤트’ ‘추석맞이 MRI 검사 20% 할인’ 동네 정형외과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광고다. 뇌·뇌혈관과 복부·흉부에 이어 올해 척추 MRI 검사까지 건강보험이 적용되자 병·의원들이 환자 유치 경쟁을 벌이는 것이다. 지난해 건강보험이 부담한 MRI 검사비는 1조145억 원으로 건강보험 적용 이전인 2017년에 비해 3.3배나 늘어났다.
▷2018년 도입된 ‘문재인 케어’는 MRI를 비롯해 로봇수술, 초음파 등 건강보험 적용 항목을 확대해 지난 20년 동안 60%대에 머문 건강보험 보장률을 70%까지 높이는 내용이다. 보장률이 높아진다는 건 건강보험이 지원하는 의료비가 늘고 환자가 부담하는 의료비가 줄어든다는 의미다. 평균 60만 원이었던 MRI 검사비는 건강보험이 적용된 이후 평균 15만∼20만 원만 내면 받을 수 있게 됐다.
▷MRI 촬영 건수는 ‘문재인 케어’ 도입 이후 매년 두 배씩 폭증했다. 그동안 비용 부담에 검사를 망설였던 환자들이 쉽게 검사를 받게 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머리가 아프다’ ‘허리가 뻐근하다’고만 해도 MRI를 마구 촬영하는 지경이 됐다. 고가 MRI 장비를 구비한 병·의원들이 수익을 내기 위해 MRI 검사를 적극적으로 권한다. 도덕적 해이를 부추기는 ‘공유지의 비극’이 벌어진다. 백내장 수술이 필수가 되거나 도수 치료로 정형외과 병상이 꽉 차는 것처럼 건강보험 적용이 확대될 때마다 반복되던 현상이다.
▷2020년 건강보험 보장률은 65.3%로 매년 상승했음에도 ‘문재인 케어’의 당초 목표에는 못 미친다. 건강보험이 적용되면 의료 행위의 가격이 통제된다. MRI 검사비만 해도 큰 병원으로 갈수록, 기기가 비쌀수록 가격이 달라졌는데 이제는 일정한 수준이다. 건강보험이 적용된 급여 진료만으로는 수익을 내기 어려운 병원들은 비급여 진료를 계속 늘려 왔다. 새로운 기기나 시술을 도입하는 풍선효과로 비급여 진료가 줄기는커녕 5년간 200개 이상 늘어났다.
▷건강보험 덕분에 한국 의료의 ‘가성비’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수술 한 번 받았다가 재난적 의료비에 시달리는 미국이나, 수술은 공짜인데 얼마나 기다려야 할지 모르는 영국 등에 비하면 한국만큼 의료 접근성이 좋은 나라는 없다. 하지만 건강보험 재정이라고 마르지 않는 우물일 리 없다. 보험료도 가파르게 올라 이미 그 부담이 만만치 않다. 정말 아픈 환자들이 병원비 부담 없이 치료받을 수 있으려면 건강보험 지출 우선순위부터 조정해야 한다. 과잉 진료나 의료 쇼핑으로 곶감 빼 먹듯 건강보험 재정을 축내는 일도 자랑이 돼선 안 된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09-26(월) “미진단 감염 1000만 명”

영국 정부는 7월 헌혈자 1만3000여 명의 혈액을 검사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코로나 항체를 갖고 있는지를 조사했다. 그 결과 국민의 73.4%가 감염을 통해 항체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그런데 이 중 절반이 넘는 38.8%는 확진 판정을 받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영국 인구를 감안하면 2600만 명 이상이 코로나에 걸리고도 제대로 검사를 받지 않았다는 얘기가 된다. 이보다는 적지만 한국에서도 미확진 감염자가 1000만 명에 이른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2020년 9월 정부가 발표한 한국인의 항체양성률은 0.07%에 불과했다. 1만 명 중 7명만 코로나 항체를 갖고 있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국립보건연구원의 23일 발표를 보면 항체양성률은 97%를 넘었다. 약 2년 동안 항체를 가진 사람이 비약적으로 늘어난 것이다. 항체가 있다고 해서 감염 위험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중증으로 진행될 가능성을 낮추는 데에는 도움이 된다고 전문가들은 이야기한다. 오늘부터 실외마스크 착용 의무가 전면 해제되는 등 코로나 출구 전략이 진행 중인 상황에서 반가운 소식이다.
▷하지만 경계해야 할 대목도 눈에 띈다. ‘숨은 감염자’들이 예상보다 많다는 것이다. 이번 조사에서 감염에 의해 항체를 갖게 된 사람의 비율은 57.65%였다. 그런데 확진 판정을 받은 사람은 전체 국민의 38.15%다. 그 차이인 19.5%포인트는 실제로는 감염됐지만 검사를 받지 않은 사람들이다. 증상이 없거나 자가진단키트 검사에서 확인되지 않아 넘어간 경우는 어쩔 수 없더라도 확진자가 되는 것을 피하려고 일부러 검사를 받지 않는 것은 문제다.
▷한국은 백신 접종률이 높은 편이지만 여전히 100명 중 12명은 한 번도 백신을 맞지 않았다. 변이가 거듭되면서 코로나에 한 번 걸렸어도 다시 감염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격리되지 않은 채 활동하는 감염자가 많아지면 확진자 증가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최근 1주일 평균 인구 100만 명당 신규 확진자 수를 보면 한국이 대만, 브루나이, 슬로베니아 등에 이어 8번째로 많다는 점도 걱정스러운 대목이다.
▷오미크론이 초기 코로나에 비해 덜 독한 것은 사실이다. 2020년 초 코로나 1차 유행 당시 2.1%에 이르렀던 치명률이 올여름 6차 유행에서는 0.05%로 뚝 떨어졌다. 하지만 언제라도 새 변이가 발생할 수 있고, 보건당국은 겨울 재유행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 아프면 쉬고 밀집한 곳에서는 마스크를 쓴다는 기본 방역마저 손을 놓기에는 이르다. 다른 나라들이 코로나 종식을 선언할 때 우리나라만 뒤처지는 일은 없어야겠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09-27 ‘여자 무솔리니’

2019년 이탈리아 젊은이들이 ‘이오 소노 조르자(Io Sono Giorgia)’라는 제목의 리믹스 곡에 맞춰 몸을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극우 성향 정치인인 조르자 멜로니가 한 집회에서 높은 톤으로 외쳐댄 발언에 디스코풍의 리듬을 입힌 곡이었다. 진보적 디제이들이 그를 조롱하려고 만든 이 음악 동영상은 아이러니하게도 1200만 조회수를 기록하며 돌풍을 일으킨다. 군소정당을 이끌던 고졸 출신의 40대 미혼모 정치인이 일약 스타로 도약하는 순간이었다.
▷이탈리아 사상 첫 여성 총리 자리를 눈앞에 두고 있는 멜로니 ‘이탈리아형제들(FdI)’ 대표는 ‘여자 무솔리니’로 불리는 극우파다. 그는 과거 인터뷰에서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에 대해 “그가 했던 모든 일은 조국을 위한 것이었다”고 추켜올렸다. “50년 동안 그런 정치인은 나온 적이 없었다”고도 했다. 음악으로 각색된 3년 전 연설도 ‘무솔리니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듯한 내용이다. “나는 조르자, 어머니이고 이탈리아인이며 기독교”로 시작되는 당시 발언은 무솔리니 정권의 슬로건이었던 ‘신, 조국, 가족’과 유사하다.
▷무솔리니는 언론과 반체제 인사를 탄압하며 21년간 장기 집권의 흑역사를 썼다. 아돌프 히틀러와 함께 유럽의 양대 미치광이 독재자로 꼽힌다. 전위 민병대 ‘검은 셔츠단’을 앞세워 나라를 파시즘의 광기 속에 몰아넣었던 그의 말로는 비참했다. 그런 무솔리니와 비교되는 것에 대해 멜로니는 “웃기는 일”이라고 일축해 왔다. 파시즘을 역사의 한 페이지로 받아들인다면서도 자신은 ‘네오 파시스트’가 아니라고 부인하고 있다. 논란이 된 파시스트 슬로건에 대해서는 “사랑에 대한 아름다운 선언일 뿐”이라고 했다.
▷반대파들은 그를 향해 ‘위험한 극단주의자’, ‘이탈리아의 히틀러’라는 독설을 쏟아내고 있다. 국내뿐 아니라 유럽 전체에서 화살이 날아드는 형국이다. 탈(脫)유럽연합(EU)을 외쳐온 그가 EU의 단결을 흔드는 뇌관이 될 것이라는 경계심이 상당하다. 그가 이끄는 우파연합의 친러 성향으로 볼 때 향후 러시아에 맞선 서방의 대동단결 전선에 구멍을 낼 것이라는 우려도 높다. “유럽에서 가장 위험한 여성”이라는 딱지가 붙은 이유다.
▷이탈리아는 지난 20년간 정권이 11번 바뀔 정도로 정치적 리더십이 불안정하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에너지난과 인플레이션, 치솟는 국가부채 등 경제위기에 직면해 있다. 대러시아 제재와 나토(NATO), EU 통합 같은 대외 현안들도 쌓여 있다. 이탈리아의 선택이 주변국에 미칠 연쇄적 파급 효과는 적잖을 것이다. 새 총리가 어떤 본색을 드러내느냐에 유럽의 운명이 걸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게 됐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09-28 사상 최저 찍은 英 파운드

영국 파운드화는 미국 달러,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 유로, 일본 엔화에 이어 4번째로 많이 거래되는 통화다. 그러나 영국은 경제력으로는 독일보다도 작아 유로존 전체에 큰 격차로 뒤떨어지고, 일본처럼 세계 최대 순채권국도 되지 못해 파운드화는 달러 가치 변동에 유로나 엔화보다 훨씬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
▷1파운드는 1940년만 해도 4.03달러에 고정돼 있었다. 1949년 브레턴우즈 체제에서 30% 절하돼 2.8달러에 거래됐다. 1960년대 파운드화는 절하 압력을 받아 2.4달러까지 내려갔다. 가장 큰 위기는 1976년에 일어났다. 노동당 정부의 재정지출 확대로 적자가 커졌다. 금융시장은 파운드화가 과대평가돼 있다고 봤다. 노동당 정부는 파운드화 가치의 자유 낙하를 허용하든가 아니면 긴축을 약속하고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아야 했고 결국 후자를 택했다.
▷파운드화는 1985년 1.03달러까지 떨어져 바닥을 쳤다가 보수당 마거릿 대처 총리의 통화주의 정책이 뒤늦게 효과를 보면서 1989년에 1.7달러까지 올랐다. 대처는 1990년 파운드화의 안정을 위해 유럽환율메커니즘(ERM)에 가입했다. 그것은 1파운드를 2.95마르크 주변에 고정시키는 것이었다. 영국 정부가 보유 외환을 풀어 인위적으로 환율을 유지하는 걸 눈치 챈 투기세력의 공세로 환율이 치솟는 사태가 발생했으니 그것이 1992년 9월 16일 ‘검은 수요일’이다. 영국은 ERM에서 탈퇴했다.
▷파운드의 가치가 26일 1.03달러로 폭락했다. 역사상 최저치인 37년 전 1985년과 같은 기록이다. 연초만 해도 1.35달러였으나 연말쯤에는 가치가 더 떨어져 1파운드=1달러 시대가 오리라는 전망이 나온다. 파운드화 폭락은 보수당 리즈 트러스 정부의 대규모 감세안 때문이다. 경제성장을 위해 감세안을 내놓았지만 금융시장은 1970년대 노동당 정부의 재정지출 확대 정책과 마찬가지로 재정 악화로 이어질 것으로 전망하고 파운드화를 내다 팔았다.
▷영국이 다시 IMF 구제금융을 받을 수 있다는 우려까지 나온다. 국채금리가 유로존의 병자(病者) 국가인 이탈리아나 그리스보다 높아졌다. 국가부도 위험이 그만큼 더 높아졌다는 의미다. 우리나라는 문재인 정부 때의 늘어난 재정을 유지하고 거기에 더해 감세 정책까지 펴고 있다.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인데 무역에도 빨간불이 켜졌다. 외인(外人)들이 원화를 팔아치우는 공세가 시작되면 그것이 퍼펙트 스톰이다. 한국 같은 나라가 대비하는 길은 국가부채를 평소 낮게 유지하고 외환보유액을 쌓을 수 있는 만큼 많이 쌓는 것밖에 없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09-29 러 점령지 “병합 찬성” 99%?

2002년 이라크 독재자 사담 후세인의 집권 연장 여부를 놓고 진행된 주민투표 찬성률은 100%였다. 쿠바에서는 라울 카스트로 공산당 총서기가 2008년 선거에서 99.4%의 지지율을 얻었다. 북한에서 제14기까지 치러진 대의원 선거는 모두 투표율 99%에 찬성률 100%를 기록했다. 직접투표, 비밀투표 등 원칙을 규정해 놨지만 이대로 진행됐다고 믿는 사람은 없었다. 총칼의 위협이 아니고서는 나올 수 없는 숫자였다.
▷독재 체제를 연구해온 학자 프랑크 디쾨터는 “독재에도 연출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공포와 폭력만으로는 권력 유지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이를 받쳐줄 기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선거와 주민투표를 앞세워 민주주의로 포장하는 것은 대표적인 연출 기법 중 하나다. 아이티와 콩고, 베트남 등에서도 과거 95∼99%가 넘는 찬성률이 나왔다. 100%를 넘어서는 기이한 투표율로 국제사회의 조롱을 받기도 했다. 공정성과 투명성이라는 투표의 기본 원칙이 지켜지지 않은 결과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내에 점령한 지역 4곳을 자국 영토로 편입시키기 위해 실시한 주민투표에서 찬성률이 최대 99%로 집계됐다고 한다. 투표는 총으로 무장한 러시아 헌병과 선관위 직원이 가가호호 찾아가 투표용지를 받는 식으로 진행됐다. 투표소에는 러시아 용병기업 와그너그룹의 상징인 해골 모양 마크를 단 군인이 경계를 섰다. 배치된 투표함은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투명한 박스였다. “그들이 원하는 대로 투표하지 않는 것은 지하실로 끌려가는 직행 티켓”이라는 게 한 우크라이나 언론이 외신에 전한 분위기다.
▷병합 대상 지역 중 이미 독립을 선언한 도네츠크, 루한스크는 러시아계 인구 비율이 40%에 육박하는 곳이어서 일찌감치 ‘가결’이 예상됐던 곳이기는 하다. 2월 전쟁이 시작된 이후 러시아에 반대하는 지역주민 수만 명은 이미 다른 곳으로 탈출한 상태다. 남은 유권자 가운데 투표에 반대하는 이들은 집에 없는 것처럼 커튼을 치고 집에 전등을 꺼놓는 식으로 저항했다. 이들의 침묵은 투표에 반영되지 않았다. 압도적인 찬성률은 투표가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정해져 있었던 것이나 다름없었다.
▷러시아가 무리수를 써가며 우크라이나 동남부 병합을 밀어붙이는 이유는 핵무기 사용을 포함한 화력 보강의 빌미를 만들기 위해서라는 게 정설이다. 병합 지역이 공격받게 되면 ‘영토 수호’를 주장하며 대대적인 총공세에 나설 가능성이 높다. 러시아는 새 병합지와의 조약 체결, 병합의 합헌 여부 검증, 의회와의 협의 및 비준 동의, 대통령 최종 서명 등 절차를 준비 중이다. 핵전쟁의 방아쇠가 될 수도 있는 ‘땅따먹기 쇼’가 21세기 지구촌 한복판에서 벌어지고 있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09-30(금) ‘얼굴 보고’ 보이스피싱

얼마 전 40대 의사 A 씨가 서울중앙지검 검사를 사칭한 보이스피싱범에게 41억 원을 뜯긴 일이 있었다. 단일 보이스피싱 피해액으로 역대 최고액이었다. A 씨는 예금과 적금, 보험, 주식 해약금을 영업 창구에서 현금으로 인출한 뒤 보이스피싱범이 지정한 장소에서, 자칭 ‘금감원 직원’을 만나 이 돈을 건넸다. 최근 변호사와 연구원 등 고학력 전문직 종사자를 상대로 10억 원 가까운 고액 피해 사례가 발생하고 있는데, 이 역시 비슷한 유형이다.
▷보이스피싱의 원조는 계좌로 돈을 송금 받는 계좌이체형이다. 하지만 2015년부터 고액을 계좌로 송금하기 어렵게 하는 제도가 하나씩 만들어졌다. 신규계좌 개설자가 증빙서류를 제출하지 못하면 인터넷이나 모바일뱅킹, 현금자동입출금기(ATM)의 이체 한도를 하루 30만 원으로 제한한 것이 대표적이다. 이때부터 영업 창구에서 본인이 직접 인출하면 한도가 없는 허점을 노린 대면편취형이 늘었다. 2년 전 대면편취형(1만5111건)이 처음으로 계좌이체형(1만596건)을 추월했다.
▷피해자를 직접 만나 돈을 뜯어내는 대면편취형은 분업화된 아르바이트생을 고용해 점조직처럼 운영된다. 총책과 관리책의 지휘 아래 아르바이트생은 현금 수거와 송금, 인출 등으로 칸막이처럼 역할을 나눈다. 예를 들면 현금 수거 아르바이트생은 피해자로부터 돈 봉투를 전달받아 5% 정도를 수수료로 챙기고, 나머지를 보이스피싱범이 지정한 계좌에 입금한다. 그 돈을 인출해 총책이나 관리책에게 송금하는 아르바이트생도 있다. 수사기관의 추적도 어렵고, 적발되더라도 꼬리 자르기가 쉽다.
▷최근 보이스피싱 범죄자의 60% 이상이 20, 30대 청년이라고 한다. 대면편취형의 비극이라 할 수 있다. 고액 아르바이트라는 말에 속아 취업난에 경제적으로 궁핍한 청년층이 뛰어든 것이다. 청년층은 일부 역할만 담당해 범죄를 저지른다는 인식이 낮다고 하지만 엄연히 범법 행위다. 대면편취형을 줄이지 못하면 청년층이 또 다른 청년층의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수백만 원을 뜯어내는 범죄에 이용되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어렵다.
▷보이스피싱범은 자신들의 범죄 수법이 노출되거나 한계에 부닥치면 새 수법을 개발한다. 2006년 우리나라에서 처음 보이스피싱 범죄가 발생했는데, 당시엔 중국에서 걸려온 국제전화였다. 국제전화 식별 제도를 만들자 발신번호를 조작하는 중계기까지 만들어 피해자에게 접근했다. 범정부 차원에서 보이스피싱 대책을 29일 내놨지만 대면편취형에 대한 대응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고강도, 전방위 대책이 나오지 않는다면 ‘그놈 목소리’에 당하는 피해자가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정원수 논설위원 needj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