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2022-09/ 09.01(목) 선수와 병역 - 09.30(금) 악마의 가래\
분수대 2022-09/ 중앙일보
09.01(목) 선수와 병역
병역 회피 논란으로 ‘제2의 유승준’이라 지탄받던 축구대표팀 출신 공격수 석현준(31)이 마침내 귀국한다. 신변을 정리한 뒤 조만간 한국으로 건너와 병역법 위반에 따른 처벌을 받고, 군 복무도 이행할 예정이다.
지난 2019년 병무청이 정해준 기한을 넘겨 프랑스에 무단 체류하며 병역 기피자 명단에 오른 지 3년 만이다.
국방의 의무는 대한민국의 신체 건강한 젊은 남성이라면 예외 없이 수행해야 한다. 운동선수도 마찬가지다. 통상적인 군 입대 연령인 20대 중후반은 운동선수들의 전성기와 대략 겹친다. 운동 능력이 절정에 오른 시기에 유니폼을 벗어야 하는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오늘도 다양한 종목의 스포츠 선수들이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군복으로 갈아 입는다.
운동선수가 입대하지 않고 병역의 의무를 이행하는 길도 있다. ‘예술·체육요원’에 편입하면 된다. 국위 선양 및 문화 창달에 기여한 예술·체육 특기자의 군복무를 대체하기 위한 제도로 1973년 탄생해 현재까지 운영 중이다. 다만 진입 장벽이 높다. 체육요원의 경우 ‘올림픽 3위 이상(금·은·동) 입상자’ 또는 ‘아시안게임 1위(금)로 입상자’로 자격을 엄격히 제한한다.
한창 때 군 입대하는 게 부담스럽고, 예술·체육요원 발탁의 문은 좁다 보니 석현준처럼 검은 유혹에 빠지는 스포츠 선수들이 종종 있다. 미국프로골프(PGA) 무대에서 2승을 거둔 배상문(36)이 해외 체류 연장을 위해 행정 소송까지 제기했던 과정은 석현준과 비슷했다. 하지만 패소한 뒤 2015년 귀국과 함께 현역 입대해 소총수로 군 복무를 마쳤다.
미국 메이저리그(MLB) 무대에 도전했던 백차승(42) 케이스는 정반대다. 2000년 병역 기피자 명단에 올랐고, 5년 뒤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며 스스로 한국 국적을 버렸다. 2016년 국적 회복을 위한 소송을 제기했지만, 법원은 “병역 기피 목적이 명확하다”며 원고 패소 판결했다. 프로야구 NC 2군 투수 인스트럭터로 활동 중인 현재까지도 이른바 ‘검은 머리 외국인’ 신분이다.
석현준은 두 사례의 중간 단계다. 다만, 뒤늦게나마 국방의 의무를 이행하기로 결심했다는 점에서 향후 삶의 터전을 국내에 둘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셈이 됐다.
송지훈 스포츠디렉터 차장
09.02 윤핵관
기사에 ‘관계자’를 등장시킬 때가 있다. 실명 보도가 원칙이지만 익명을 전제로 해도 보도의 가치가 충분하다고 보는 경우다. 단독으로 확인된 내용을 앞세우거나 기사의 ‘야마(やま·핵심)’를 살리는 발언이 필요할 때 관계자 인용 보도를 한다.
관계자발 보도에도 문법은 존재한다. 급에 따라 표현을 달리한다. 예를 들어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대통령비서실 수석비서관(수석) 이상을 가리킨다. 보통 정무·홍보수석일 때가 많다. 비서관 이하는 ‘대통령실 관계자’다. 고위 관계자가 아니어도 부처에서 파견된 ‘늘공(직업 공무원)’ 비서관을 관계자로 인용한 단독 보도는 주목도가 높다. 정책 방향을 가늠할 수 있어서다.
‘대통령실 핵심 관계자’는 누구일까. 대변인은 비서관급이지만 대통령이 주재하는 회의에 대부분 참석하고 현장 일정에 빠짐없이 동행한다. 대변인 브리핑이 끝나고 이어지는 백브리핑 발언이 핵심 관계자로 인용되는 이유다. 물론 수석 이상이지만 발언 내용으로 당사자가 특정될 경우를 우려해 일부러 핵심 관계자로 급을 낮출 때도 있다. 국가 안보사항과 관련된 내용을 단독 보도할 때 ‘국가안보실 고위 관계자’라고 적시하는 경우는 없다.
국회에서도 ‘고위 관계자’란 표현을 쓴다. 대통령을 배출한 여당(與黨)의 당 대표와 최고위원의 비공식 발언은 ‘여권 고위 관계자’로 인용 보도된다. ‘여권 핵심 관계자’란 표현도 종종 볼 수 있다. 대통령실발이지만 대통령실로 특정될 것을 우려해 여권으로 누그러뜨릴 때 쓴다. 대선이 가까워져 당 대선 후보가 최종적으로 선출되면 ‘대선 캠프 관계자’ 또는 ‘대선 캠프 핵심 관계자’ 발언에 관심이 집중된다.
관계자 문법에서 봤을 때 ‘윤핵관(윤석열 대통령 측 핵심 관계자)’은 틀을 깬 조합이다. 대통령실이나 국회 같은 공조직이 아니라 대통령 한 사람의 측근임을 자임해서다. 그런데 관계자의 존재가 부각될수록 대통령은 가려지게 된다. 이제는 ‘장핵관(장제원 의원 측 핵심 관계자)’ ‘권핵관(권성동 원내대표 측 핵심 관계자)’이란 말까지 나오고 있다. 관계자의 관계자한테 줄을 서는 형국이다. 권력자가 가만있진 않을 것이다. ‘선당후사(先黨後私)’라고 했다. 윤핵관의 퇴장은 ‘대통령실 사정에 밝은 여권 고위 관계자’ 정도면 충분할 것 같다.
위문희 사회2팀 기자
09.05(월) 신조어
‘알·잘·딱·깔·센’
최태원 대한상공회의소 회장(SK그룹 회장)이 공식석상(2030 부산 세계박람회 유치위원회 2차 회의)에서 쓰면서 뉴스 헤드라인을 장식한 신조어 혹은 유행어다. 이 말은 2018년 게임 스트리머이자 ‘신조어 부자’, 우왁굳의 방송 중 생성됐다. 그러다 2020년 방탄소년단(BTS) 자체 콘텐트에 등장해 대중성을 확보하더니, 드디어 여기까지 왔다. 최 회장은 “알아서 잘·딱·깔끔하고·센스 있게 잘 준비해 주신 여러분들의 노고에 감사드린다”고 인사했다. 현장 분위기는 매우 좋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 발언을 계기로 MZ세대의 마음을 잡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하는 대기업 회장님이 늘어난 이유에 대한 분석도 쏟아졌다.
요즘 신조어는 만들어지는 경로도 다양하고 유행 주기도 빨라 다 아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십중팔구, 반짝 유행하다 사라진다. 억지로 띄우려는 신조어도 많다. 몰라도 된다고 무시하고 싶지만, 이 같은 뉴스가 나오면 ‘다 아는 데 나만 모르고 있다’는 조바심이 자극된다.
트렌드 소개 뉴스레터 트렌드어워드(Trend a Word)가 만든 20개 문항의 ‘2021년 신조어 테스트’에 15만명이나 참여한 배경에는 이런 불안 심리가 작용했을 것이다. 블라인드 등에서 화제가 된 신조어 테스트 덕에 이 레터의 구독자는 두 달 만에 70명에서 1000명으로 늘었다고 한다. 뉴스레터 제작자는 “핵심 타깃을 포모(FOMO·Fear Of Missing Out) 증후군을 앓고 있는 사람들로 잡았다”고 소개한다.
이쯤에서 MZ 신조어에 대한 중장년의 방침을 정해볼 필요가 있다. 3개의 길이 있다. (1)공부해서 나도 쓴다 (2)공부하되 쓰지 않는다 (3)공부도 하지 않고 쓰지도 않는다. 고민 끝에 2번을 선택했다. 10~20대로 돌아가 당시 유행어를 부모님이나 쓴다고 상상해보니, 결정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주변 MZ들이 질색한다.
신조어나 은어는 애초에 한 집단이나 세대가 타 집단과 구분되기 위해 만들어내는 일종의 암호 체계에 가깝다. 적극적으로 쓴다고 젊어 보이거나 소통이 원활할 것 같지 않다. 그래도 내 욕을 하는 데도 못 알아듣는 것은 서글프니, 틈틈이 들여다보긴 해야겠다.
전영선 K엔터팀 팀장
09.06 외환위기
외환위기의 정의는 간단하다. 원화와 맞바꿔 쓸 달러(외환)가 모자라 생긴 위기다. 1997년 한국이 경험했다. 한국은 외환보유액이 바닥나며 국가 부도 위기에 직면했다. 그해 11월 국제통화기금(IMF)에 200억 달러 구제금융을 요청해야 했다. 대가는 컸다. IMF는 강도 높은 긴축을 요구했다. 지독한 돈 가뭄에 주택 대출금리는 연 20%대, 중소기업 대출금리는 30%대로 치솟았다. ‘한강의 기적’이라 불렸던 한국 경제는 빠르게 침몰했다. 수많은 기업이 무너졌고 가계 파산이 이어졌다.
IMF 외환위기가 한국인에 남긴 상처는 컸다. 경제가 불안하게 흘러갈 때면 외환위기 공포가 소환되는 이유다.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때 그랬다. 당시 외국인 자금이 급하게 빠져나가고 원화 값이 추락했다. 2차 IMF 위기가 닥치는 것 아니냐는 공포가 시장에 번졌다. ‘3월 위기설’ ‘9월 위기설’이 연이어 돌았다. 그해 10월 이명박 대통령이 라디오 연설에서 “어렵긴 하지만 외환위기 당시와는 상황이 많이 다르다”고 해명할 정도였다.
최근 IMF 외환위기 공포가 다시 엄습했다. 일단 물가와 환율이 심상찮다.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5~6%(전년 대비)를 넘나들고 있다. 1998년 7.5% 이후 14년 만에 가장 높다. 외환위기가 한창 진행 중이었던 97년 4.4%를 웃돈다. 원·달러 환율은 1300원 선을 뚫고 1400원대를 향해 가고 있다. 원화가치가 하루에 10원 안팎 무서운 속도로 떨어지고 있다(환율은 상승). 금융위기 때나 있던 일이다. 그런데 정부 반응도 그때와 비슷하다. 지난달 29일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국회에서 “외환 보유가 충분하다. IMF 외환위기와 다르다”고 말했다.
사실 당연한 얘기다. 외환위기도, 금융위기도 경제위기의 한 종류일 뿐이다. 위기는 언제나 모습을 달리했고 또 진화했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폴 크루그먼은 책 『불황의 경제학』에서 ‘위기는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의 매우 똑똑한 인물들을 포함한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할 새로운 차원을 계속 발전시켜 보여준다’고 했다.
새로운 위기가 다가오고 있다. IMF 외환위기의 기록을 뛰어넘는 최악의 경제위기가 아니기만을 바랄 뿐이다.
조현숙 경제정책팀 차장
09.07 블록딜
지난달 31일 두산은 두산에너빌리티 지분 35% 가운데 4.47%(2854만주)를 시간 외 대량매매(블록딜) 방식으로 시장에 매각했다고 공시했다. 이 발표에 당일 두산에너빌리티 주가는 6.2% 하락했고, 다음날에도 5.7% 빠졌다.
블록딜은 대량으로 주식을 팔 때, 살 사람을 미리 정해놓고 거래하는 걸 말한다. 주로 기관투자자나 외국인이 산다. 장중에 한꺼번에 많은 물량을 내놓으면 쉽게 팔리지도 않겠지만, 주가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주로 장 시작 전이나 후에 주식을 넘기고, 이후 공시를 한다.
통상 블록딜은 주가 하락 요인이다. 일단 대주주의 지분 매각 자체가 ‘고점 신호’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마트에서 많이 사면 깎아주듯 블록딜에도 일정한 할인율이 적용된다. 두산의 경우 블록딜 가격이 주당 2만50원으로 전날(30일) 종가보다 7.6% 싸게 팔았다. ‘할인가=적정주가’란 인식이 자연스레 생길 수 있다. 시세보다 싸게 물량을 산 매수자가 차익을 노려 시장에 내놓으면 그 역시 악재다.
‘블록딜 쇼크’는 생소하지 않다. 지난 7월 2대 주주의 블록딜을 발표한 SK아이이테크놀로지는 그날에만 주가가 14.4% 빠졌다. 지난 8월 KB국민은행이 카카오뱅크 블록딜 공시를 했을 때도 주가가 8.2% 내렸다.
하지만 개인투자자는 공시 전까지 블록딜 여부를 알 수 없다. 두산의 블록딜 공시 전날 개인투자자는 두산에너빌리티 주식을 300억원가량 순매수했다. 카카오뱅크 블록딜 때도 당일 개인투자자는 206억 원어치를 순매수했다. 내일 주가가 떨어질 게 뻔한데도 모르고 샀다는 얘기다. ‘개미만 피눈물을 흘린다’는 지적이 나올 만하다.
블록딜을 장외에서 거래하도록 한 것 자체가 투자자 보호 조치이긴 하나, 정보 비대칭에 따라 소액주주가 피해를 보는 건 문제가 있다. 미국은 주요 주주가 주식을 매도할 땐 신고서와 거래계획서를 사전에 제출하도록 규제한다. 곧바로 매도하지 못하도록 의무보유기간을 두거나 분할 매도를 유도해 블록딜의 부작용을 줄이는 방법도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당선인 시절, 블록딜 관련 제도를 손봐야 한다는 뜻을 밝힌 바 있다. 야당(이용우 의원)도 지난 4월 사전 신고를 의무화하는 내용의 자본시장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룰이 공정하지 않으면 서둘러 고치는 게 맞다.
장원석 S팀 기자
09.08 조용한 퇴사
오전 9시, 업무 시작. 내 프로젝트 범위 내에선 되도록 성실하되, 초과 업무나 돌발 상황엔 응하지 않는다. 오후 6시, 업무를 칼같이 종료함과 동시에 휴대전화를 끄고 e메일은 무시한다. 저녁은 동료나 상사가 아닌 가족·친구와 함께한다.
일은 충실히 하되, 완벽을 추구하진 않는다. 사표는 던지지 않았지만, 회사의 평가·경쟁과는 결별했다. 회사가 내게 제공한 것 이상을 되돌려줄 생각이 없으며, 조직에서 더 나은 지위·조건을 얻으려 애쓰지 않는다.
미국 MZ세대 사이에 급속도로 번지고 있는 ‘조용한 퇴사(Quiet quitting)’ 방식이다. 미국 뉴욕의 24살 엔지니어 자이어드 칸이 자신의 틱톡에 이 개념을 올린 뒤 널리 퍼졌다. 미국의 많은 젊은이가 “내가 꼭 이런 식으로 일하고 있다. 많은 일을 완벽히 하려다 크게 아픈 뒤, 이 방식을 택했다”라며 공감했다.
소셜미디어를 강타하고 있는 조용한 퇴사에 대해 일각에선 “저성과자들의 무책임한 행동”이라 비판한다. 조직 전체의 분위기를 흐리고, 동료의 불만을 야기하는 부적응 행위라며 “보상만을 위해 일하는 것은 불행하며, 업무를 즐기거나 몰입하지 못한 채 시간 낭비하는 건 슬픈 일”이라 동정하기도 한다.
뉴욕타임스 등 주요 외신은 “일이 삶의 중심이 돼야 한다는 통념의 거부, 초과 근무를 할 것이란 ‘당연한’ 기대에 저항, ‘일을 사랑하라’는 허슬(hustle) 문화에 대한 반발”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하버드비즈니스리뷰의 시각은 좀 더 새롭다. “조용한 퇴사는 나쁜 직원이 아닌 나쁜 상사에 관한 문제”라고 짚었다. 직원들의 동기 부족은 관리자의 행동에 대한 반응이자, 신뢰할 수 없는 리더십의 결과라는 것이다. 조용한 퇴사를 감행한 직원을 손가락질하기 전에, 직원들은 자신의 에너지·창의성·시간·열정을 ‘자격이 있는 조직과 리더’에 주고 싶어한다는 사실부터 명심하라고 강조한다.
미국 얘기지만 가슴 한쪽이 뜨끔하다. 지난달 기록적 폭우 다음날 회사에 2분 늦어 시말서를 썼다는 사연, 새마을금고 출근 첫날부터 밥 짓고 수건 빨래했다는 여직원 얘기는 일부이긴 하지만 한국 직장의 여전한 현실이다. 미국도 한국도, MZ 탓 직원 탓 말고 리더의 자격부터 돌아볼 때다.
박형수 국제팀 기자
09.09(금) 명절음식
K명절이 부활했다. 명절에 빠지지 않는 게 명절음식이다. 추석에 음식을 만들어 먹는 건 2000년도 더 된 풍습이다. 고대사회부터 풍농제(豊農祭)를 지냈고, 삼국사기에 신라 3대 왕인 유리왕 때 술과 음식을 마련해 가을 길쌈놀이를 즐겼다는 기록이 있다. 명절음식은 전 세계 공통 현상이기도 하다. 한국 사람들이 송편을 만들듯 중국은 월병을, 일본은 당고(団子)를, 미국에서는 칠면조구이와 호박파이를 만들어 추수감사절을 기념한다.
하지만 먹을 것이 넘쳐나는 현대에는 명절음식이 불필요·불합리·불공평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경우도 적잖다. 설·추석마다 귀경객들이 버리고 간 명절음식 쓰레기로 전국 고속도로 휴게소들이 몸살을 앓는 게 대표적 단면이다. 이 기괴한 풍경의 이유는 크게 두 가지라고 한다. “입에 맞지도 않는 음식, 차례 지내고 남은 음식을 싸주니 받아오긴 하는데 어차피 먹지 않으니 빨리 버린다”는 이기주의, 그리고 “피곤한 명절 끝에 시댁(혹은 처가)에서 준 음식이 싫어 무조건 버린다”는 감정주의의 결합이다. 이번 추석에도 버려진 명절음식들이 인류 최대 과제인 탄소중립을 곳곳에서 해칠 것이다.
지난 5일 성균관 의례정립위원회가 간소화한 ‘차례상 표준안’을 발표한 건 그래서 더 의미 있다. “차례상의 기본 음식은 송편·나물·구이(적·炙)·김치·과일·술 등 여섯 가지며, 여기에 더 올린다면 육류·생선·떡을 놓을 수 있다.” 국내 유교문화 최고 기관이라는 성균관이 명절 노동의 주범으로 여겨지는 전 등 기름에 지진 음식을 차례상 요소에서 제외했다. 지난 7월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일반 국민(1000명)의 40.7%, 유림 관계자(700명)의 41.8%가 ‘간소화’를 차례상 최대 개선점으로 꼽은 결과다. 성균관 측은 “조상을 기리는 마음은 음식의 가짓수에 있지 않으니 많이 차리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며 “이번 표준안 발표가 경제적 부담은 물론 남녀갈등·세대갈등을 해결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제언했다.
사회적 거리두기 없는 명절이 2020년 설 이후 2년8개월 만이다. 그간 코로나로 많은 사람이 아팠고, 아픈 만큼 성숙해지기도 했을 것이다. ‘명절증후군’과 ‘남녀차별’ 같은 해묵은 논쟁에서 자유로운 추석을 기대해 본다. K명절이 시대와 세계를 선도하면 그 또한 자랑 아니겠나.
심새롬 정치팀 기자
09.13(화) 엘리자베스
흔히 ‘태정태세문단세’로 외우는 조선시대 왕의 이름은 사후에 붙이는 ‘묘호’다. 왕자가 태어나 받는 이름은 이방원(태종), 이산(정조) 등으로 일반인들과 언뜻 비슷해 보인다. 그러나 대부분 외자였다. 임금의 이름은 누구도 함부로 부를 수 없고, 문서에도 쓸 수 없었기 때문에 실생활에서 잘 쓰이지 않는 한자 하나만으로 지었다. 왕의 이름자는 뜻이 통하는 글자로 바꾸거나 획을 생략하는 등의 방법으로 회피했는데, 이를 '피휘'라 한다.
반면 서구에선 부모나 조상이 썼던 이름을 다시 쓰는 경우가 흔하다. 최근 서거한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재위 1952~2022)의 본명은 엘리자베스 알렉산드라 메리다. 엘리자베스는 어머니, 알렉산드라는 증조모, 메리는 조모의 이름에서 따왔다. 단, 군주의 이름이 중복될 땐 로마 숫자를 붙여 이전의 왕과 구분했다.
엘리자베스 1세(재위 1558~1603)는 잉글랜드 군주였다. 평생 결혼하지 않고 후사를 남기지 않아 튜더 왕조의 마지막 왕이 됐다. 엘리자베스 2세는 윈저왕가 4번째 왕으로, 영국과 영연방의 수장이다. 엘리자베스 1세와 다스리는 영역은 다르지만, 국가를 승계했으므로 2세라 붙였다.
엘리자베스는 히브리어 ‘엘리세바’에서 유래했다. 구약성서에선 '엘리세바'로, 신약에선 ‘엘리사벳’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영어 성경에선 엘리사벳을 ‘Elizabeth’로 번역했다. 독일과 프랑스 등에선 ‘z’ 대신 ‘s’를 써서 ‘Elisabeth’로 표기한다.
서양에서 결혼한 여자는 남편 성을 따른다. 영국 윈저왕가는 원래 빅토리아 여왕(재위 1837~1901)의 부군을 따라 독일식 가문명을 썼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으로 반독일 감정이 심해지자 영국식인 윈저로 명명하고, 후에 여왕이 나와도 이를 바꾸지 않기로 한다. 엘리자베스 2세가 남편 성을 따르지 않고 윈저 가문 이름을 고수한 이유다.
대통령실이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의 서거에 애도의 뜻을 표하는 트위터 메시지를 작성하면서 이름을 'Elizabeth'가 아닌 ‘Elisabeth’로 잘못 올렸다가 황급히 수정하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s'와 'z'는 각각 철자 하나에 불과하지만, 영국식이냐 독일식이냐를 가르는 기준이 되므로 무심히 넘기긴 어렵겠다.
이경희 이노베이션랩장
09.14 수리남
연휴 기간 화제가 된 넷플릭스 드라마 ‘수리남’에는 기상천외한 장면이 여러 번 나온다. 거물 마약상 전요환 목사가 수리남 현지 경찰을 사병(私兵)처럼 동원해 마약 구매자를 환대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그는 수리남 권력의 심장부까지 매수한 실력자였다.
드라마는 부패한 정부가 나라를 어디까지 혼란으로 빠뜨릴 수 있는지 보여준다. ‘마약, 조직, 부패한 정부가 모두 있는 수리남’이란 극중 내레이션에서 핵심은 단연 부패한 정부다. 정부를 매수한 덕분에 코카인 유통을 독점할 수 있었고, 이렇게 번 돈으로 대형 범죄 조직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전요환의 모티브가 된 실존 인물 조봉행 역시 수리남 현지 네트워크를 총동원해 고위층과 친분을 맺었다. 수리남에 입국하는 아시아계 승객의 명단을 미리 받아볼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데시 바우테르서 전 대통령과도 친분이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독재자로 악명을 떨친 바우테르서는 1980년 쿠데타로 수리남의 실권자가 됐다. 신문사는 단 한 곳만 발행을 허락받았고, 독재를 비판한 언론인 등 15명이 고문을 당한 뒤 총에 맞아 죽었다. 바우테르서는 1999년 코카인 밀매 혐의로 네덜란드 현지 궐석재판에서 징역 11년 형을 선고받은 적도 있다. 그러나 각종 의혹에도 그는 2010년 간접선거를 통해 수리남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수리남의 국가별 부패인식지수(CPI)는 2010년대 이후에도 30~40점대를 오가고 있다. 조사 기관인 국제투명성기구(TI)는 50점은 돼야 “절대부패로부터 벗어난 정도”라고 평가한다. 2020년 정권 교체가 되며 바우테르서의 장기 집권이 막을 내리긴 했지만, 마약 카르텔과 부패 문제는 여전하다. 절대부패가 만성화한 것이다.
한국의 지난해 CPI는 62점으로 수리남보다 높다. 하지만 같은 해 국민 10명 중 6명이 만성적 울분 상태에 있고, 가장 큰 원인이 ‘정치·정당의 부도덕과 부패’라는 조사(유명순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가 발표되는 등 체감 부패지수는 마냥 낮다고만 하기 어렵다. 윤석열 정부가 ‘검수완박’ 법안(검찰청법·형사소송법)을 우회하는 시행령 개정안을 10일 시행했다. 부패척결을 앞세워 야당의 반발도 무마한 만큼, 같은 편의 부패에도 추상같은 정권이 되길 바란다.
한영익 정치에디터
09.15 성남FC
프로축구 K리그1(1부리그) 소속 성남FC는 최근 들어 스포츠 이외의 영역에서 더욱 자주 언급된다. 지난 2014~16년 당시 구단이 후원금 명목으로 일부 기업에게서 받은 돈이 연고지 성남시의 인·허가 특혜를 염두에 둔 뇌물인지 여부가 관건이다.
사실 관계는 수사기관이 엄정하게 조사해 밝혀내겠지만, 불미스러운 논란이 지속되며 성남FC 관계자들이 겪는 심적 고통의 수위가 점점 높아지는 상황이다. ‘해체’ ‘연고이전’ ‘매각’ 등 구단의 존폐와 관련한 흉흉한 이야기가 안팎에서 쏟아지니 선수도 팬들도 경기에 온전히 집중하기 힘들다. 성남이 올 시즌 내내 K리그1 최하위(12팀 중 12위)에 머무르며 사투를 이어가는 걸 단순히 경기력만의 문제로 치부하기 어려운 이유다.
요즘 ‘논란의 아이콘’ 취급을 받지만, 성남FC는 명실상부 K리그를 대표하는 명문 구단이다. 1989년 일화 천마라는 명칭으로 출발해 성남 일화, 성남FC로 간판을 바꿔 달며 33년의 역사를 쌓아왔다. 프로축구 최초로 3연패(1993·94·95)를 달성한 것을 포함해 7차례 정상에 오르며 전북 현대(9회 우승)에 이어 통산 우승 횟수 2위를 달리고 있다. 아시아 최고의 축구 클럽을 가리는 챔피언스리그 무대도 두 차례(1995·2010)나 제패했다. 프로축구에 연고지 정책이 뿌리내리기 전 서울·천안 등 타 도시에 연고를 둔 적이 있지만, 2000년대 들어서면서 꾸준히 성남에 터전을 두고 성장했다.
성남FC 구단주이기도 한 신상진 성남시장은 ‘성남의 정상화’를 기치로 내걸어 시민들의 선택을 받았다. 같은 맥락에서 성남 팬들은 구단주가 성남FC도 정상화해주길 바란다. 썩은 부위가 있다면 도려내고 비효율적인 부분은 혁신하되 ‘성남 연고 프로축구팀’의 정체성만큼은 유지해 달라는 주문이다. 성남FC가 배출한 축구대표팀 스트라이커 황의조(올림피아코스)도 자신의 SNS에 “성남FC는 단 한순간도 잊어본 적 없는 내 팀”이라며 “성남시와 K리그, 그리고 한국 축구에 언제나 존재하길 바란다”고 썼다.
“성남FC의 지역 연고 유지를 목표로 투자 유치를 진행해 축구단 운영에 유리한 방식을 찾겠다”는 성남시의 최근 약속이 바람직한 방향으로 실현되길 기대한다. 스포츠는 스포츠 그 자체로 존재할 때 가장 아름답다.
송지훈 스포츠디렉터 차장
09.16(금) 공직선거법
공직선거법은 제230조에서 제259조에 이르기까지 총 29개 유형의 부정선거행위에 대한 처벌을 명시하고 있다. 대선부터 총선, 지방선거 등 모든 공직 선거에 적용되는 통합선거법이다. 1994년 3월 공직선거및선거부정방지법 제정 전까지 우리나라 선거제도는 대통령선거법, 국회의원선거법 등 개별법 형태로 관리됐다.
지난 12일 검찰에 따르면 20대 대선과 관련해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입건된 선거사범 숫자는 총 2001명이었다. 19대 대선(878명)과 비교해 입건 인원이 127.9% 늘어났다. 허위사실공표죄(제250조) 등에 해당하는 흑색선전 사범이 810명으로 19대 대선(164명)에 비해 급증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기소율은 떨어졌다. 20대 대선 기소율은 30.4%(609명)로 19대 대선 당시 58.3%(512명)에 비해 27.9%포인트 급감했다. 상대 후보자에 대한 근거 없는 고소·고발이 급증했기 때문으로 검찰·경찰은 분석한다.
공직선거법엔 공소시효 논란이 항상 따라 다닌다. 독일이나 미국 등은 일반범죄와 동일한 3년 또는 5년의 공소시효를 적용하고 있다. 이와 비교해 현행 공직선거법의 공소시효(제268조)는 선거일로부터 6개월까지인 단기 공소시효다. 선거범죄를 조속히 처리해 당선인 등의 법적 지위를 안정화한다는 것이 명분이다. 그러나 다각적인 정황 증거를 확보해 윗선의 범죄 혐의를 입증하려면 6개월은 짧다고 봐야 한다. 수사기관에 따르면 정치인이 소환조사 통보에 늑장 출석할 때가 가장 골치 아픈 경우라고 한다. 공소시효 만료를 한두 달여 앞두고 접수되는 사건도 있다.
선거사범 공소시효 폐지나 연장에 대한 공론화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오지만 난망하다. 국회의원이 스스로 공직선거법을 개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1947년 공직선거법의 모태가 되는 입법의원선거법 제정 당시만 해도 1년이었던 공소시효는 1950년 국회의원선거법으로 전부 개정되면서 3개월로 단축됐다. 13대 국회가 1991년 국회의원선거법을 개정해 6개월로 연장하기까지 40여 년이 걸렸다.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정치권이 단기 공소시효로 부실수사를 유도한다는 비판을 피하려면 재판에 성실히 응하는 시늉이라도 보여야 할 것이다.
위문희 사회2팀 기자
09.19(월) 흑인 인어공주
‘디즈니한테 또 영업 당했네’. 디즈니가 지난 9일 공개한 ‘인어공주’ 실사 영화의 1분 24초짜리 예고편을 보고 든 생각이다. 디즈니는 이날 개막한 팬 축제 ‘D23 엑스포’에서 내년 5월 개봉할 영화의 한 조각을 보여주었다.
이 짧은 영상은 3년 전 흑인 가수 겸 배우 핼리 베일리가 주인공 에리얼 역에 캐스팅되자 터진 논란을 재점화하는 데 충분했다. 1989년 개봉한 애니메이션 ‘인어공주’의 에리얼은 빨간 머리에 푸른 눈, 흰 피부를 지니고 있다. 미국 언론은 흑인 에리얼이 등장한 예고편을 본 어린 흑인 소녀들이 “나와 같다”고 감동하는 순간을 공유하는 트렌드, ‘나의 에리얼이 아니다’라며 반대하는 현상을 전하고 있다. 관심이 뜨거운 만큼 디즈니 유튜브에 올라온 이 예고편은 공개 8일 만에 2000만 조회 수를 넘겼고, 댓글은 무려 21만개가 달렸다.
인어에 어떤 피부색이 적합한지 논쟁하는 것은 사실 기이한 현상이다. 국내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는 일명 ‘원작 수호론자’들은 마치 인어를 보기라도 한 듯, ‘빨간 머리의 백인이 아니다’라고 불평한다. 그러나 원작 파괴는 애초에 디즈니 애니메이션이 먼저 시작했다.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의 원작 동화(1837) 속에선 인어 공주는 이름도 없고 외모에 대한 묘사도 구체적이지 않다. 디즈니는 초록색 꼬리와 보색을 이루는 빨간색 머리를 택했지만, 그 이전 나온 영화나 애니메이션에선 인어는 대체로 금발로 묘사된다. 디즈니는 또 희생으로 완성되는 사랑을 강조한 원작의 결말 대신 완벽한 디즈니식 해피엔딩을 보여준다.
애니메이션 ‘인어공주’의 원작 변형은 두말할 것 없이 상업적 성공을 위한 선택이다. 이 덕에 ‘인어공주’는 80년대 디즈니의 암흑기를 종료시킨 흥행작 반열(전 세계에서 약 2억3500만 달러를 벌어들였다)에 올랐다. 흑인 인어공주 캐스팅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디즈니는 짧은 예고편 하나로 이 낡은 이야기를 꼭 확인해야 직성이 풀릴 팬과 안티팬을 충분히 만들어냈다. 무엇보다 누가 ‘디즈니 공주’로 선택되는지가 굉장히 중요한 문제인 것처럼 보이게 하는 사회적 착시 생산에도 성공했다. 내년 창립 100주년을 맞는 세계적 콘텐트 기업의 내공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전영선 K엔터팀 팀장
09.20 자이언트 스텝
문화체육관광부와 국립국어원은 한 달에 두 번꼴로 ‘쉬운 우리말 쓰기’ 자료를 낸다. 이해하기 어려운 외국어를 알아듣기 쉬운 우리말로 바꿔 쓰자는 취지다. 지난달 3일 발표 자료에선 베이비 스텝, 빅 스텝, 자이언트 스텝을 바꿔야 할 말로 지목했다. 베이비 스텝은 소폭 조정, 빅 스텝은 대폭 조정, 자이언트 스텝은 광폭 조정으로 각각 고쳐 쓰자고 권했다.
베이비 스텝은 시장이 충격을 덜 받도록 중앙은행이 아기 발걸음(baby steps)처럼 한 번에 0.25%포인트씩만 조금씩 기준금리를 올리는 걸 뜻한다. 빅 스텝은 크다(big)란 수식어에 걸맞게 0.5%포인트 금리 인상을 의미한다. 모두 미국 현지에서 쓰는 말이다.
그런데 자이언트 스텝이 문제다. 0.75%포인트 인상을 뜻한다는데 정작 미국 현지 언론과 경제부처 발표에서 보기 어렵다. 콩글리시란 얘기다. 출처는 불분명하다. 올해 1~2월 증권사 리포트와 국내 언론에 가끔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년도 안 돼 당당히 온라인 경제용어사전에 오를 정도로 빠르게 자리 잡았다. 국립국어원에서 바꾸자고 권고할 만큼 널리 쓰이는 단어가 됐다.
최근 등장한 울트라 스텝(1%포인트 인상)은 말할 것도 없다. 역시 콩글리시다.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나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 같은 외환·통화 당국 수장이 빅 스텝이란 말은 써도 자이언트 스텝, 울트라 스텝이란 단어는 잘 언급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어원이 불분명한 한국산 조어지만 작명은 잘한 편이다.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가 내디딘, 말 그대로 거인(giant)의 발걸음에 쑥대밭이 된 한국 외환시장을 보면 절묘하다. 오는 20~21일(현지시간) 미국 기준금리를 결정하는 회의가 열린다. Fed는 또 한 차례 거인의 발걸음을 준비하고 있다. 0.75%포인트 금리를 또 올린다는데 7월과 8월에 이어 벌써 세 번째다. 0.25%포인트씩 아기 걸음마를 계속하고 있는 한은이 따라잡기엔 벅차도 너무 벅차다.
미국 현지에서도 안 쓰는 자이언트 스텝이란 단어가 한국에 널리 퍼진 건 금리 인상에 대한 관심과 공포가 그만큼 커서다. 거인에 맞서는 다윗의 지혜가 당국에 보이지 않아 더 불안하다.
조현숙 경제정책팀 차장
09.21 악수
악수는 두 사람이 서로 한 손을 내밀어 잡는 인사다. 옛날 옛적 적에게 무기가 없다는 걸 증명하려 한 게 기원이라고 한다. 매너에 조금씩 차이가 있긴 해도, 국가나 문화권과 관계없이 가장 보편적으로 쓰는 인사법이다.
악수는 많은 얘깃거리를 생산한다. 화제가 된 인물로 김장수 전 국방부장관이 있다. 그는 2007년 남북 정상회담 때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악수를 하면서 머리를 숙이지 않고 꼿꼿한 자세를 유지해 ‘꼿꼿장수’란 별명을 얻었다. 2006년 당시 대선 경쟁자였던 박근혜·이명박 대통령이 악수하다가 박 대통령이 소리를 지른 일도 유명하다. 잦은 악수로 손을 다친 상태였는데 “너무 꽉 쥐어 그런 것 아니냐”며 양측 지지자가 충돌하기도 했다.
축구 국가대표 이동경은 지난해 도쿄올림픽 축구 조별리그 뉴질랜드전 패배 후 악수를 청한 상대 선수의 손을 툭 치고 가버렸다가 거센 비판을 받고 결국 사과했다. 2021년 5월 한·미 정상회담 때 카멀라 해리스 미국 부통령이 문재인 대통령과 악수한 후 손을 옷에 닦는 행동을 했다가 외교 결례란 지적을 받은 일도 있다.
며칠 전 김의겸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한동훈 법무부장관이 악수 장면을 의도적으로 연출했다”고 주장했다가 왜곡 논란에 휩싸였다. 한 장관이 같은 행사에 참석한 이재정 더불어민주당 의원을 엘리베이터까지 쫓아가 악수를 요청하고, 이 장면을 협치로 포장한 보도자료를 배포했다는 내용이다. 이에 한 장관은 “허위 사실”이라며 강한 유감을 표했다. 실제로 두 사람이 악수한 장소는 엘리베이터가 아닌 행사장 내부였고, 악수를 먼저 청한 것도 이 의원이었다.
더 곱씹어볼 대목은 김 의원이 전한 이야기의 앞부분이다. “이 의원한테 들었어요. 윤호중 의원이 생각이 났대요. 그래서 일부러 피했답니다.” 지난 5월 김건희 여사와 만나 활짝 웃는 사진이 공개된 후 일부 당원으로부터 난타를 당한 윤호중 당시 비상대책위원장에 대한 언급이다. 지지층에게 찍힐까 인사나 악수조차 편치 않은 속내다.
정치인에게 악수는 숨 쉬는 것과 같다. 유권자나 주변의 마음을 잡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그래서 ‘악수 한 번에 한 표’ 말도 있다. 코로나19 확산으로 악수에 대한 인식이 변했다지만, 지금 정치판에서 벌어지는 악수 다툼은 가히 기이하다.
장원석 S팀 기자
09.22 왕관의 무게
여왕이 떠났다.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은 지난 19일(현지시간) 열흘간의 길고도 호화로운 장례 절차를 마치고 남편 필립공 곁에서 영면에 들었다. 동그란 눈동자, 반짝이는 은빛 머리, 온화한 미소는 이제 지난 기억이 됐다.
여왕의 빈자리는 즉각 장남 찰스 3세 국왕이 채웠다. 하지만 ‘영국’ 하면 저절로 떠오르던 ‘여왕’의 상징성은 텅 빈 채 그대로다. 96세 70년 재위라는 역사적 숫자가 말해주듯, 여왕은 ‘항상 그대로의 존재’였고, 그 한결같음으로 영국을 넘어 영연방을 묶는 구심점이 됐다.
생전 여왕은 “의무가 먼저고 나 자신은 다음”이란 헌신의 자세로 유명했다. 영국 대문호 셰익스피어의 『헨리 4세』에 등장하는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는 대사에 부합한 삶을 살았다.
유별나게 강한 책임감은 큰아버지 에드워드 8세로 인한 트라우마의 발현이기도 하다. 의무보다 개인의 자유·낭만이 우선이었던 그는 왕관 대신 사랑을 택했다. 그 결과 동생 조지 6세, 조카인 여왕의 삶까지 송두리째 바꿔놨다. 왕관 앞에서 여왕이 보인 헌신은 자신이 받은 상처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다짐으로도 읽힌다.
찰스 3세는 애도 기간, 공개 석상에서 두 번의 ‘왕짜증’으로 구설에 올랐다. 한번은 방명록에 서명하다 잉크가 손에 묻었다고, 다른 한 번은 책상 위 펜대를 치우라면서다. 이 짜증 영상은 ‘#NotMyKing(나의 왕이 아니다)’ 해시태그와 함께 퍼졌다.
국왕은 여왕의 서거로 왕위와 함께 5억 달러(6900억원)의 재산, 343억 달러(47조원)의 부동산을 상속했다. 버킹엄 궁전 등 런던 전역의 왕실 소유 토지까지 모두 찰스 3세의 몫이 됐다. 상속세는 한 푼도 안 냈다. 개인보다 국가를, 권리보다 의무를 최우선에 두라는 ‘왕관의 무게’ 값이다.
왕관의 무게를 재는 저울추는 국민 삶의 무게다. 영국 국민은 어느 때보다 춥고 배고픈 겨울을 앞뒀다. 당장 다음 달 가계 에너지 요금부터 80% 인상된다. 군주제 폐지론자들은 “내 집 난방비도 부족한데, 왜 세금으로 왕실 교부금(1590억원)을 내냐”고 외친다. 올겨울, 찰스 3세가 더 무거워진 왕관의 무게를 가늠하지 못하면 ‘#NotMyKing’은 현실이 될 수 있다.
박형수 국제팀 기자
09.23(금) 스토킹 범죄
1998년 1월 경기도 광명시의 한 주택가에서 결혼한 지 8개월 된 30대 여성이 손도끼로 무참히 살해된 채 발견됐다. 범인은 결혼 전 결별한 전 남자친구. 그는 이별 직후 과도로 한 차례 그녀를 찔렀다가 상해죄로 구속됐다. 그러나 재판에서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다시 피해자를 찾아가 기어이 범행했다.
스토킹 범죄의 원조로 불리는 ‘광명 살인사건’이다. 과도한 집착→선행(先行) 범죄→살인으로 이어진 정황이 지난 14일 벌어진 신당역 살인사건과 똑같다. 그동안 숱한 스토킹 범죄가 공론화됐다. 그래도 24년째 비극이 반복된다. 여전한 ‘법 사각지대’와 남녀 대결 구도에 갇힌 ‘인식 사각지대’가 스토킹 근절을 막는 양대 요소로 지목된다.
현행 스토킹 처벌법이 불과 1년 6개월 전 제정됐다. 그 전까지는 2013년 개정한 경범죄처벌법으로 10만원 이하 벌금형에 처한 게 전부였다. 경찰청이 이동주 민주당 의원실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10월 21일 스토킹 처벌법 시행 이후 올 6월까지 9달간 5434건을 처벌했다. 시행 첫 달(7건)을 빼면 하루 평균 20건이 넘는다.
이렇게 일상적 범죄인데도 ‘무엇이 스토킹이고 얼마나 위험한지’에 대한 인식이 턱없이 부족하다. 아직 수사 현장에서조차 스토킹을 일상적 구애나 관심의 연장선상으로 보려는 관성이 혐의 불성립 논쟁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한다. 정신과 전문의인 이시형 박사는 1998년 2월 본지 인터뷰에서 “20대 여성의 10% 정도가 스토킹에 시달린 적이 있을 것”이라며 “범죄를 저지르는 이들의 80%가 남성”이라고 진단했다. 위성곤 민주당 의원실에 따르면 지난해부터 집계된 피해자(7715명)의 80.7%가 여전히 여성(6228명)이다.
하지만 같은 기간 적잖은 남성(1289명) 역시 스토킹 피해를 봤다. 성별 신고율이 다를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스토킹은 결코 여성혐오 범죄로만 치부할 문제가 아니다. 국회에서도 여야가 앞다퉈 대책 마련에 나서고 있다. 야당 의원들의 국정감사 자료 공개가 이어지고 22일 당·정이 모여 긴급 협의회를 열었다. 이번만큼은 달라야 한다. 성별과 정파를 벗어나 스토킹 범죄를 멈출 실질적 방법을 한마음으로 강구할 때다.
심새롬 정치팀 기자
09.26(월) 달러 패권
‘달러 패권’의 시작점엔 금이 있다. 18세기 산업혁명이 진행되며 이전까지 거래수단인 금 외에 좀 더 손쉽게 사용할 수 있는 화폐가 인기였다. 은행에 금을 맡기면 같은 가치의 화폐로 교환해줬다. 당시 세계 무역을 장악했던 영국의 화폐인 파운드가 기축통화(국제간 금융 거래의 기본 화폐)로 쓰였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벌어졌고 영국은 전쟁 자금 마련을 위해 파운드 발행을 늘렸다. 화폐 가치는 떨어졌고 불안해진 사람들은 파운드를 금으로 바꿨다. 영국은 이를 감당할 만큼의 금이 없자 금본위제도(금과 화폐의 일정량을 등가관계로 유지)를 포기했다. 1944년 세계 주요 국은 당시 전 세계 금의 80%를 보유한 미국 화폐인 달러를 기축통화로 정했다.
1960년 베트남 전쟁이 시작됐다. 미국은 15년간 이어진 전쟁 자금 마련을 위해 달러를 무한정 찍어냈고 결국 금도 바닥을 보였다. 1971년 미국도 금본위 제도를 포기했다. 달러는 더는 금으로 바꿀 수 있는 금태환이 아닌 종이돈(피아트 머니)일 뿐이었다. 1974년 미국은 사우디아라비아의 국가안보를 책임지는 대신 석유수출대금을 달러로 받으라는 협정을 맺었다. 종이돈은 페트로 달러(오일 머니)가 됐고, 현재까지 세계 기축통화다.
최근 미국은 물가 안정을 이유로 기준 금리를 공격적으로 높이고 있다. 지난 6개월간 3%포인트 올렸다. 그런데 사실 금리 인상 외에 물가 안정을 위한 별 조치도 없어 보인다. 예컨대 중국을 겨냥한 높은 관세는 여전하다. 무역 장벽 축소는 뛰는 물가를 잡기 위한 강력한 조치로 꼽힌다. 에너지 대란을 겪고 있지만, 화석연료 산업을 배척하는 태도도 여전하다.
그런데도 여전히 미국은 추가 금리 인상을 예고하고 있다. 전 세계가 미국의 급격한 금리 인상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데도 말이다. 이미 한화 가치는 역대 세 번째로 낮은 수준이다. 이로 인해 대출금리 인상, 소비 위축, 경기 침체 등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다.
달러 패권의 부정적 효과가 지속한다면 결국 균열이 생기게 된다. 세계 무역 결제의 70%를 차지하는 달러 가치가 1%만 하락해도 각국의 자산 감소는 천문학적이다. 세계 경제가 혼란에 빠지면 결국 미국도 피해를 피할 수 없다. 포도 한 알 먹기 위해 포도밭 전체를 태우는 누를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때다.
최현주 금융팀 기자
09.27 박물관 외교
1851년 영국 런던 하이드 파크에서 최초의 세계박람회인 만국박람회가 열린다. 모든 국가의 산업품을 전시한다는 취지로 야심 차게 개최한 행사는 600만 명 넘게 관람했다. 당시 영국 인구 3분의 1이 넘는 숫자다. 영국은 박람회에 출품된 뛰어난 공예품과 디자인 작품을 전시해 대중을 교육하고 창작 활동에 영감을 주겠다는 취지로 1852년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V&A) 뮤지엄을 설립한다.
영국박물관과 함께 런던의 대표적인 박물관으로 꼽히는 V&A에서 지난 24일 ‘한류(HALLYU! THE KOREAN WAVE)’ 특별전이 개막했다.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됐던 나라가 수십 년 사이에 음악·영화·드라마·패션과 뷰티 등을 전 세계에 전파하게 된 다이내믹한 성장사를 보여주는 자리다. 영국 가디언은 “한국 문화에 대한 즐겁고 현란한 기념”이라 평하며 별점 5점 만점을 줬다. 1970년대 압구정 아파트를 배경으로 농부가 소 끌고 밭 갈던 풍경부터 백남준의 미디어아트, K팝 스타의 의상과 응원봉, 드라마 ‘오징어 게임’ 코스튬, 영화 ‘기생충’의 반지하 변기 세트장 등이 나왔다. 한류가 갑자기 뚝 떨어진 게 아니라 오랜 시간을 두고 다양한 부문에서 약진해왔음을 보여주는 기획이다.
이번 전시 역시 갑자기 튀어나온 건 아니다. 1888년 초대 주미전권공사 박정양(1841~1905)은 미국 스미소니언박물관에 전시된 조선 유물을 둘러보고 “구비된 것이 일본박물관에 미치지 못한다”는 소감을 『미행일기(美行日記)』(푸른역사)에 남겼다. 그런 상황은 100년 넘게 이어졌다. 한국 정부가 문화외교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해외 박물관에 한국실을 설치하기 시작한 건 1990년대 들어서다(『한국외교 60년』).
1992년 V&A에 40여평 규모의 삼성관(한국실)이 설치됐다. 2012년엔 삼성전자UK의 후원으로 첫 정규직 한국관 큐레이터 자리가 생겼다. 당시 채용된 로잘리 킴(한국명 김현경)이 이번 한류 전시 기획자다. 그럼에도 중국·일본실에 비해 초라하다는 평이 많았고, 문화체육관광부는 국외박물관 한국실 지원사업의 하나로 V&A에 2021년부터 5년간 20억원 예산을 편성했다. 일부는 이번 전시에 투입됐다. 박물관 한국실은 한국의 소프트파워를 자랑하고 긍정적 인식을 심어주는 공간이다. 이렇게 쓰이는 세금은 아깝지 않다.

▲한류 전시회가 열리고 있는 빅토리아 앤 앨버트 박물관. 사진=연합뉴스

▲한류 전시에 출품된 작품. 사진 V&A

▲한류 전시관 모습. 오징어게임 코스튬과 한복, 책가도 병풍 등이 보인다. 사진 V&A

▲V&A 한류 전시를 관람하는 관객. Photo by Vianney Le Caer/Invision/AP=연합뉴스

▲한류 전시에 나온 미인도 병풍. 사진 V&A

▲기생충의 반지하 세트 전시물을 관람하는 관객. Photo by Vianney Le Caer/Invision/AP=연합뉴스
이경희 이노베이션랩장
09.28 안건조정위원회
우리 국회법에는 다수당의 입법 폭주에 제동을 거는 조항이 있다. 대표적인 게 안건조정위원회다. 상임위 재적 의원 3분의 1 이상이 요구할 경우, 6명의 조정위원이 최장 90일간 법안을 숙의한다. 핵심은 “다수당에 속한 조정위원의 수와 다수당에 속하지 않은 조정위원 수를 같게 한다”는 조항이다. 토론을 거쳐 가능하면 합의안을 만들어보라는 취지다.
그러나 쟁점법안 심사 때마다 안건조정위는 무용지물이 됐다. 매번 다수당과 뜻을 함께하는 무소속 또는 위성정당 국회의원이 소수당 몫 조정위원 자리를 차지해서다. 6명의 조정위원 가운데 3명을 보유한 다수당은 소수당 몫 조정위원 1명만 포섭하면 안건조정위 의결정족수(재적 조정위원 3분의 2 이상)를 채울 수 있다.
가까운 예는 4월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법안 처리다. 당시 더불어민주당은 우군으로 여겼던 양향자 무소속 의원이 입법에 부정적인 입장을 내비치자, 민형배 의원을 탈당시켜 법사위로 보냈다. 양 의원의 자리를 대신해 안건조정위에 합류한 민형배 ‘무소속’ 의원의 활약으로 검수완박 법안은 상정 8분 만에 법사위를 일사천리로 통과했다.
사례는 더 있다. 민주당의 비례위성정당 출신 의원들 역시 소수당 몫 조정위원 역할을 맡아 강행처리를 도왔다. 지난해 문체위에선 민주당이 밀어붙였던 언론중재법 개정안이 김의겸 열린민주당 의원의 찬성으로 안건조정위를 통과했다. 교육위에선 사학법 개정안이 강민정 열린민주당 의원의 찬성으로 통과됐다. 두 의원 모두 지금은 민주당 소속이다. 환노위에선 민주당에서 제명된 윤미향 무소속 의원의 찬성으로 탄소중립법 제정안이 처리됐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신속 처리”를 공언하는 양곡처리법 역시 비슷한 수순을 밟을 가능성이 크다. 양곡관리법은 정부의 ‘쌀 의무 매입’을 골자로 하고 있다. 이에 국민의힘 농해수위원들은 26일 “쌀 의무 매입은 포퓰리즘”이라며 안건조정위를 신청하는 등 강력히 반발하고 있지만, 야당 몫 조정위원 한 자리를 윤미향 의원이 차지하고 있어 법안이 안건조정위를 통과하는 건 시간문제다. 법안을 둘러싼 심도 있는 토론보다 당론이 우선인 한국 국회에서 숙의민주주의를 기대하는 건 지나친 욕심일까.
한영익 정치에디터
09.29 수리남 외전
최근 넷플릭스 드라마가 큰 인기를 끌며 주목받는 남미 국가 수리남은 남한의 1.5배 크기에 전 국민이 54만 명에 불과한 작은 나라다. 우리나라와는 교류가 거의 없다가 드라마 흥행과 맞물리며 일약 ‘핫 플레이스’로 떠올랐다. 한국전쟁 당시 수리남 군인 115명이 유엔군 일원으로 참전한 이력이 있으니 우리에겐 ‘알려지지 않은 혈맹’이기도 하다.
드라마의 영향으로 홍어·마약·갱단·부패 등의 키워드가 먼저 떠오르지만, 해외에서 수리남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단어는 다름 아닌 축구다. 17세기 이후 지난 1975년까지 네덜란드의 식민 지배를 받은 영향으로 사람과 자원의 교류가 빈번했는데, 축구도 예외가 아니었다.
수리남은 북중미축구연맹(CONCACAF) 소속으로 월드컵 예선에 나서는데, 대표팀은 FIFA 랭킹 143위(9월 기준)로 지역 내 강호 멕시코(12위), 미국(14위), 코스타리카(34위) 등과 차이가 크다. 월드컵 본선 무대를 밟아본 적도 없다.
특이한 건 수리남 혈통으로 ‘오렌지 군단’ 네덜란드의 레전드 반열에 오른 축구 스타들이 차고 넘친다는 점이다. 현재 세계 최고의 중앙수비수로 첫 손에 꼽히는 버질 판데이크(31·리버풀)가 대표적이다. 중국계 수리남인 어머니의 피를 물려받은 그는 네덜란드대표팀 주장으로 오는 11월 카타르 월드컵 무대를 밟는다.
은퇴 선수 중에도 수리남 출신 월드 클래스가 즐비하다. 1980년대 마르코 판바스턴(58)과 더불어 ‘오렌지 삼총사’ 멤버로 각광받은 루드 굴리트(60)와 프랑크 레이카르트(60)가 수리남 이민 2세대다. 두 선수의 아버지가 수리남에서 네덜란드로 함께 건너와 형제처럼 지낸 인연도 있다. 에드가 다비즈(49), 클라렌스 세도르프(46), 패트릭 클라위베르트(46) 등도 수리남의 피를 물려받았다.
드라마엔 “수리남 인구의 4분의 3이 마약산업과 관련이 있다”는 내레이션이 나온다. 극적 과장이 섞인 대사겠지만, 실제로 적지 않은 수의 국민이 직·간접적으로 마약 비즈니스에 연루돼 있다고 한다. 어떤 환경에서 어떤 목표를 설정하느냐에 따라 누군가는 마약왕으로, 다른 누군가는 축구왕으로 성장하는 곳, 인구 54만의 소국 수리남의 두 얼굴이다.
송지훈 스포츠디렉터 차장
09.30(금) 악마의 가래
0.03g. 일회용 주사기 안에 채워 넣는 필로폰 1회 투약량이다. 1회분 시가는 10만원. 지난 26일 강남의 한 호텔에서 작곡가 겸 가수 돈스파이크가 경찰에 체포됐다. 그는 당시 필로폰 30g을 소지하고 있었다. 1000회분으로 시가는 1억원 상당이다. 중독이 심해지면 주사기의 반 칸(0.05g)을 필로폰으로 채우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합성마약인 필로폰은 일본에서 개발돼 한때 합법적으로 유통되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1년 일본의 한 제약회사가 ‘히로뽕(ヒロポン)’이란 각성제를 판매한 것이 시작이다. 마약사범을 가리키는 ‘뽕쟁이’란 속어도 히로뽕에서 유래했다.
화학물질인 필로폰은 체내에 축적되면서 각종 부작용을 유발할 수밖에 없다. “히로뽕은 인간이 인공적으로 만들어낸 사탄의 가래같은 거고, 코카인은 자연적으로 태어난 주님의 은총이야.” 넷플릭스 드라마 ‘수리남’에서 코카인 밀매 독점권을 가진 전요환 목사가 외치는 대사다. 코카인은 코카나무 잎에서 추출한 환각 성분으로 만든 천연 마약이다. 한마디로 코카인은 장기 복용이 가능하고, 필로폰은 한 방만 맞아도 몸이 망가진다는 거다.
한국은 필로폰을 제조하는 동남아시아와 가까워 필로폰 유통량이 많다. 양경숙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 따르면 지난해 적발된 마약류 밀수량만 1272㎏이다. 관세청 개청 이래 가장 많은 양이었다. 최근 5년치(2017~2021년) 밀수량(2264㎏)의 56.2%를 차지했다. 종류별로 보면 5년간 적발된 필로폰(1008㎏)이 가장 많았다.
마약사범도 당연히 증가 추세다. 텔레그램이나 다크웹을 통해 젊은 층의 마약 거래가 크게 늘어나고 있다. 지난해 마약 사범(1만626명) 세 명 중 한 명(33%)은 20대(3507명)였다. 같은 해 인터넷과 다크웹 등을 이용해 검거된 마약류 사범도 전체에서 31.8%(3377명)를 차지했다. 초범자 비율이 높아진다는 게 수사기관의 고민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식품에 ‘마약’ 등 유해약물 표시를 금지하자는 법안도 발의됐다. 권은희 국민의힘 의원은 지난달 23일 ‘식품 등의 표시·광고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발의했다. 현행법상 음란한 표현뿐만 아니라 ‘유해약물·유해물건’과 관련한 표현도 식품에 붙이지 말자는 것이다. 마약김밥이란 표현부터 경각심을 가져야 하는 요즘이다.◎
위문희 사회2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