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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이야기9/ 시진평 독재의 꿈2/ 시진핑과 자다산의 우정과 의리 - 절대권력 시진핑의 신시대, ① 미군식 군제, 벽돌 찍듯 군함 제조 - ⑧·끝 도광양회 사라진 중국 외교 어디로 가나

상림은내고향 2022. 9. 29. 19:15

중국 이야기9/ 시진평 독재의 꿈2/ 시진핑과 자다산의 우정과 의리 - 절대권력 시진핑의 신시대

■권부비화  홍인표(洪仁杓) 고려대 연구교수  중앙일보  2016-11-10 

◆시진핑과 자다산의 우정과 의리 1

▲시진핑 당시 푸젠성 부서기가 1997 29일 병석에 누운 자다산을 찾아가 위로하고 있다. 자다산은 시진핑 병문안을 받은 지 불과 11일만인 220일에 세상을 떠났다.

 

1982 3, 29세의 시진핑(習近平, 1953~)은 인민해방군 지휘부인 중앙군사위원회를 떠나 허베이(河北) 성 정딩(正定) 현 부서기로 부임했다. 정딩 현은 베이징에서 서쪽으로 300km 떨어진 곳에 있는 농촌이다. 문화 유적이 많았다. 삼국시대 유비(劉備)를 보좌했던 상산(常山) 조운(趙雲, 자는 자룡)의 고향이었다. 상산은 정딩의 옛날 이름이다. 당시 시대적 분위기는 문화혁명이 끝난 지 6년이 지났지만 후유증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문혁 때 농촌에 갔던 도시 출신 지식청년들은 서둘러 자기 집이 있는 도시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도시 청년들은 새로운 지식을 얻기 위해 외국 유학에 관심이 많았다. 이런 상황에서 시진핑은 농촌으로 달려가 밑바닥부터 차근차근 올라가기로 결심한 것이다.

 
시진핑은 칭화(淸華)대학을 졸업한 뒤 1979년 중앙군사위원회 비서장 겅뱌오(, 1909~2000) 비서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겅 비서장은 예젠잉(葉劍英) 원수 측근으로 문혁의 주범인 4인방 체포 당시 크게 활약해 잘 나갔지만 새롭게 떠오른 실권자 덩샤오핑(鄧小平)은 그를 그다지 탐탁찮게 여겼다. 모시고 있던 겅뱌오가 비서장에서 물러나면서 시진핑은 중앙군사위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농촌에 가서 일할 수 있도록 중앙조직부에 요청했고 그래서 얻은 자리가 정딩 현 부서기였다.

 

▲1991년 당시 푸젠성 푸저우시 서기이던 시진핑이 부인 펑리위안 여사와 함께 정딩현에 가서 자다산과 만났다.

 

시진핑이 정딩에 부임한 다음 가장 먼저 찾은 인사는 자다산(賈大山, 1942~1997)이었다. 자다산은 정딩 현 출신으로 당시 이름난 작가였다. 시진핑은 부임 이전에 자다산 소설 작품을 여러 편 읽으면서 유머감각 넘치는 문체와 예리한 분석, 아름다운 묘사에 매료된 상태였다. 그는 어느 날 저녁 식사를 마친 뒤 문학계 인사인 리만톈(李滿天, 1914~1990)을 앞세워 자다산을 찾아다녔다. 먼저 그의 집에 들렀다가 당시 자다산이 몸담고 있던 정딩 현 문화관으로 찾아갔다. 리만톈은 당시 중국작가협회 허베이 성 주석으로 때 마침 창작 활동을 위해 정딩 현에서 살고 있었다. 자다산과는 둘도 없는 친구였다.

당시 자다산은 사무실에서 문학 동호인들과 작품 토론을 하고 있었다. 그는 교사, 극작가, 감독, 배우를 한 적이 있을 만큼 모르는 게 없고 입담도 대단했다. 당시는 문학의 시대였다. 가는 곳마다 문학청년이 있었다. 가는 곳마다 문학토론회가 열렸다. 시진핑은 녹색의 낡은 군복을 입고 있었다. 부드러운 인상에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그래도 20대 젊은이였다. 어떻게 보면 군대를 막 제대한 군인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수줍은 문학청년 같았다. 그래서 그런지 시진핑이 리만톈 안내로 사무실로 들어섰을 때 한참 토론에 열을 올리던 자다산은 연설을 멈추지 않았다. 시진핑은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아 조용히 그의 연설을 듣고 있었다. 조금 있다가 자다산이 물을 마시는 틈을 타 리만톈이 그를 소개했다. 그때서야 자다산은 키가 크고 마른 편인 젊은이가 새로 부임한 현의 2인자 고위간부라는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자다산의 첫 반응은 시진핑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자다산은 머리를 돌리면서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게 와서는 우리를 어쩌겠다는 겁니까. 이 말은 시진핑을 데리고 온 리만텐에게 나지막하게 건넨 말이었지만 시진핑은 분명히 들을 수 있었다. 당시 자다산은 만 40세로 혈기가 넘쳤다. 작품이 고교 교과서에 실렸을 정도로 잘 나가는 소설가였고, 꼬장꼬장한 성격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가 자기보다 11살 연하인 처음 보는 당 간부에게 이런 식으로 대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시진핑은 그의 발언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여전히 만면에 웃음을 지었다. 현장 분위기는 일순 어색한 듯 했지만 곧 활기를 찾았다. 주인과 손님은 악수를 나누었다. 시진핑은 훗날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우리는 처음 만났지만 마치 오랫동안 못 본 친구 같았다. 다양한 화제를 놓고 의견을 나누었다. 헤어질 때 배웅을 하지 말라고 그에게 말했다. 하지만 그는 알아듣지 못한 듯 했다. 우리는 걸어 나오면서 말을 하다보니까 어느 듯 현 문화원 입구까지 나와 헤어졌다.

▲자다산 생전 모습

 

자다산은 1942 7월 정딩에서 태어났다. 조상 대대로 잡화점을 하고 있어 그나마 먹고 살만은 했다. 위로 8명의 누나가 있었고 그가 9번째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사랑을 독차지했다. 그는 중국 전통의 경극을 좋아했다. 그리고 문학은 더욱 좋아했다. 고교 다닐 때부터 작품을 발표했다. 고교를 졸업한 다음에는 출신성분이 좋지 못해 대학에 진학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석회 공장에서 일하다가 나중에 농촌으로 갔다. 이런 경험 덕분에 그는 땀 냄새가 물씬 풍기는 농촌 문화에 익숙했고 이것이 그를 작가로 만든 원동력이었다. 1977년 그는 단편소설 <취경(取經. 불경을 구하다)>을 발표해 문단을 놀라게 했다. 이 작품으로 제1회 중국 우수 단편 소설상을 받았다. 문화혁명 이후 허베이 성에서 중국 문학 분야 최고상을 받은 최초의 인물이었다. 자다산은 몸집은 중간이었지만 탄탄했다. 그의 용모에 대해 가까운 친구였던 톄닝(鐵凝, 현 중국작가협회 회장)은 이렇게 회고했다. 그는 얼굴이 대추 같고, 입은 크고, 눈썹이 검다. 머리카락은 짧고 단정하며 맑은 눈을 갖고 있었다. 세상을 꿰뚫어 보는 듯 했다.

 그는 천재 형 소설가였다. 창작 습관이 독특했다. 마음속으로 먼저 구상을 다듬고 그런 다음 펜을 드는 스타일이었다. 그는 생각을 정리한 다음 친한 친구들을 불러 자신의 구상을 일일이 암송했다. 그는 기억력이 마치 명료한 컴퓨터 스크린과 같았다. 친구들이 그의 작품에 대해 의견을 제시하면 다시 고친 다음에 암송했다. 이런 방식을 거친 뒤 그가 원고지에다 내용을 그대로 옮겨 적으면 구절 하나하나가 주옥과 같았다. 그런 다음 작품을 세상을 내놓았다.

 

◆시진핑과 자다산의 우정과 의리 2 

▲정딩현 부서기 시절 시진핑이 사무실에 앉아 있다.

 

11살의 차이, 문화혁명의 고난 경험 강한 동질감

 시진핑(習近平) 정딩(正定) 현 부서기가 자다산(賈大山) 같은 정딩 현의 문화관 부관장과 만난 지 며칠이 지났다. 이번에는 자다산이 시진핑 사무실을 찾았다. 현 당위원회 건물은 옛날 정딩부 관아가 있던 곳이다. 현 부서기 사무실은 시진핑이 숙소를 겸하고 있는 곳이었다. 침대 하나, 서랍 세 개가 있는 책상 하나, 의자 두개, 보온병 하나, 갓 없는 전등 하나가 전부였다. 서가도 없어 창틀이나 책상 위에 책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자리에 앉은 다음에 그들은 서로 나이를 물어보았다. 자다산은 말띠였고, 시진핑은 뱀띠였다. 자다산이 11살 연상이었다. 그래서 그가 형님이 되었다. 그런 다음 차를 나누고 담배를 피우면서 담소를 나누었다. 그들은 확실한 서로 비슷한 구석이 많았다. 우선 가정 문제 때문에 고생을 한 것이 같았다.  


◆ 시진핑, 산시 성 농촌서 분뇨 나르고 농사

 시진핑은 문화혁명이 시작된 이후 산시(陝西) 성 북부 지방 농촌으로 내려갔다. 불과 16세도 되지 않은 나이였다. 이런 고통은 부친(習仲勳)이 억울한 사건에 연루되어 실각했기 때문이다. 자다산은 상인 집안 출신이어서 엄청난 핍박을 받았다. 1964년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다 농촌으로 쫓겨 갔다. 시진핑은 농촌에서 농사를 짓고 분뇨통을 나르고 힘들고 궂은일은 무슨 일이든 다 했다. 숙소인 동굴 안은 이가 너무 많아서 엄청나게 고생했다. 온 몸이 이에게 물어 뜯겨 물집이 생겼을 정도였다.  


◆ 자다산, 농촌서 선전원, 배우에 연출까지

 자다산도 1년 내내 힘들고 거친 일을 해야 했다. 그들은 고통을 겪으면서 얻는 것도 있었다. 시진핑은 농민들과 열심히 일하면서 인민공사 대대 당지부 서기로 추천받았다. 자다산은 농촌에서 선전원을 맡아 스스로 단막극을 만들고 배우에 연출까지 맡았다. 이 덕분에 허베이(河北) 성과 화베이(華北) 지방에서 문예부문 상을 휩쓸었다. 가장 신기한 것은 그들이 농촌에서 보낸 시절이 똑같이 7년이었다. 현실 문제에 대해 그들은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예컨대 정딩 현이 식량 생산은 많지만 국가에 바치는 목표량이 너무 많아 농민들은 결국은 다른 곳에서 고구마를 사서 끼니를 해결하는 문제. 정딩 현의 역사 문물을 어떻게 보호할 것이냐. 사회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풍조를 어떻게 고칠 것이냐를 놓고 두 사람은 의기투합했다.

 

▲시진핑 주석은 문화대혁명 시절 산시 성 옌촨 농촌으로 하방돼 7년 동안 농사를 지었다. 시 주석이 농기구를 들고 농민들과 함께 들일을 하러 나가고 있다.

 

◆ 의기투합, 시국 토론하다 보면 금방 새벽

 자다산이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이미 새벽 3시가 넘었다. 현 당위원회 대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경비실 창문은 불이 꺼져 암흑 세상이었다. 대문은 높이 2미터여서 뛰어넘기도 쉽지 않았다. 두 사람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심야에 3월이라 날씨도 차가왔다. 곤히 잠들어 있는 경비원을 깨우는 수밖에 없다고 자다산은 생각했다. 이 때 갑자기 시진핑이 땅에 주저앉아서 어깨에 올라타라고 손짓을 했다. 자다산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지만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시진핑 어깨에 올라탄 자다산은 두 손으로 대문 철책 난간을 잡고 조심스럽게 넘어섰다. 자다산은 과거 무술을 배운 적이 있어 몸놀림이 가벼웠다. 두 사람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웃었다. 그리고 대문을 사이에 두고 작별인사를 했다.

 

◆ 시진핑은 정치, 철학, 경제 관심↔자다산은 문학, 역사, 불교에 관심

이후 일정한 간격을 두고 두 사람은 만나기 시작했다. 시진핑 사무실에서 만날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 자다산 집에서 만났다.


 그들은 차이도 많았다. 시진핑은 여러 책을 두루 읽는 편이었다. 특히 정치, 철학, 경제에 관심이 많았다. 그러나 자다산은 문학, 역사, 불교에 집중했다. 현실 문제에 대해 시진핑은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문제가 있으면 고쳐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힘든 일이 있고 앞날이 제대로 보이지 않아도 줄곧 낙관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자다산은 관직 생활에 큰 미련이 없었다. 학교에 다닐 때 공청단에 입단하지 않았다. 직장에 다니면서도 공산당에 입당하지 않았다. 허베이 성 작가협회는 여러 번 허베이 성 성도(성 정부가 있는 도시)인 스자좡(石家莊)에 와서 일하자고 권유했으나 그는 한사코 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작가였다. 현실을 냉정하게 지켜보고 현실을 분석하는 것이 작가의 기본이었다. 그가 문학상을 받은 작품들은 현장의 간부와 보통 농민들과의 관계를 그린 것이었다. 정딩 현이라는 고향, 국가, 민족에 대해 그는 깊은 사랑과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러니까 근본적으로는 두 사람은 서로 비슷한 점이 많다고 볼 수 있다. 두 사람은 얘기를 나누다보면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새벽 2시나 3시가 되었다. 그러면 왜 이렇게 늦게까지 대화를 나누었나. 그것은 문화혁명 시기의 잔재였다. 문혁 당시 회의가 새벽까지 열리는 것은 다반사였다. 더구나 당시는 즐길만한 게 없었다. 그저 책을 읽거나 아니면 마음에 맞는 친구와 얘기를 나누는 것이 당시 지식인들이 밤을 지새우는 가장 좋은 방식이었다. 


◆ 시진핑, 자다산을 3단계 올려 발탁, 문화국장에

 1982 12 23일 오후, 시진핑이 자다산에게 전화를 걸어 저녁에 만나기로 약속했다. 그러자 자다산은 “오늘은 구내식당에서 식사하지 말고 우리 집에서 밥 한 끼 합시다”라고 말했다. 자다산은 시진핑과 알고 지낸지 1년 가까이 지났지만 한 번도 집에서 식사 대접을 한 적이 없었다.

 

 물론 그동안 자다산은 여러 번 식사 초대를 했지만 번번이 시진핑이 거절했다. 그저 차 한 잔이면 족하다는 것이었다. 시진핑은 이번에는 워낙 간곡한 청이라 거절하지 못했다. 시진핑은 문인 리만톈(李滿天)과 함께 자다산 집을 찾았다. 자다산이 대접한 음식은 양고기를 살짝 익혀 먹는 훠궈(火鍋) 요리였다. 열기가 오르면서 대화의 주제는 자연스럽게 현 문화국 상황에 이르렀다. 현 문화국은 산하에 극단, 신화서점, 문화관, 문서보관소 등 7개 기관을 두고 있었다. 인원은 모두 400명 정도였다. 모두들 개성이 강한 지식인과 배우들이라 상황이 매우 복잡하고 내부 갈등이 심각했다. 더욱이 정딩 현에 9개의 국가 문화재가 있지만 오랫동안 보수를 하지 못한 상태였다. 리만톈이 농담처럼 말했다.  


“자다산. 당신이 문화국장을 맡으면 일처리를 제대로 할 수 있나?

 자다산은 어렸을 때부터 현지 문화계 인사들과 잘 알고 지냈을 뿐 아니라 현직 문화관 부관장이라 누구보다 사정에 정통했다. 고향에 있는 어느 탑이나 어느 불상이나 모두 훤하게 꿰뚫어보고 있었다. 그는 취기가 오른 김에 “물론 가능합니다. 내게 맡겨만 준다면 깔끔하게 해낼 수 있습니다”라고 호언했다. 그리고는 문화국장이 되면 이런 일을 하겠다고 줄줄이 말했다. 그러자 시진핑 부서기가 끼어들면서 “좋습니다. 선생이 이제부터 현의 문화국장을 맡으십시오”라고 말했다. 자다산은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자다산(오른쪽) 1990년 여름 정딩 현을 찾은 유명 문인인 왕쩡치(汪曾祺)와 함께 정딩 현의 고찰인 룽싱(隆興)사에서 기념 사진을 찍고 있다.

 

◆ 자다산, 강직, 열정, 행정력, 3박자 갖춰

 그런데 시진핑은 이 말을 불쑥 꺼낸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동안 문화국 난맥상에 대해서 문제점을 파악했고 국장 인선을 위해 나름 고심하고 있었다. 허위(何玉) 문화 담당 부현장과 의견을 나눈 끝에 자다산을 후임 국장으로 임명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인선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자다산이 성품이 강직하고 소설을 잘 쓸 뿐 아니라 행정능력도 갖추고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문화재, 문화 사업에 대한 그의 관심과 열정이었다. 3박자를 모두 갖춘 셈이었다. 하지만 그는 당원이 아니었다. 그리고 관직에 대해 관심도 없었다. 그러나 여러 번 교류를 통해 시진핑은 자다산의 성격을 충분히 이해했다. 그래서 현 당위원회 상무위원회에서 자다산에게 문화국장을 맡기자고 제안했고, 승인을 받은 것이다. 시진핑은 그날 밤 자다산에게 이런 인사내용을 미리 통보하러 간 길이었다. 시진핑은 이제는 소설만 써서는 안 됩니다. 정딩의 문화사업전체를 위해 공헌해야 합니다. 이렇게 당부했다


 자다산은 시진핑의 말을 믿기 어려웠다. 당시 당원이 아닌 인사가 현의 간부를 맡는다는 것, 특히 정식 국장 자리를 맡는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이튿날 아침, 당원이 아닌 자다산은 일약 현 문화국장을 맡았다. 문화국 산하 문화관 부관장에서 3단계 벼락승진(관장, 부국장, 국장)을 승진한 것이다. 정딩 현 사상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시진핑과 자다산의 우정과 의리 3

전례 없는 발탁인사로 정딩(正定) 현 문화국장에 기용된 자다산(賈大山)은 유감없이 능력을 발휘했다. 그는 일단 현장을 중요시했다. 문제점을 찾아내 제도를 만들어 해법을 찾으려 했다. 특히 그동안 어수선했던 문화 분야 현안을 질서 있게 정리했다.


◆ 일벌레 자다산, 야전침대 놓고 공사 독려

창산(常山)극장은 정딩 현의 인민대회당이라고 부른다. 현에서 중요한 회의는 모두 여기서 열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전에 지은 목조 건축물이어서 안전이 문제였다. 이 건물을 시진핑(習近平) 부서기가 새로 짓자고 제안했다. 자 국장은 극장 신축 공사장에 야전 침대를 놓고 공사를 독려할 만큼 일벌레였다. 정딩에 있는 룽싱(隆興)사는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대형 사찰로 국보급 문화재였다. 서기 586년 수나라 문제(文帝) 때 세워졌다. 그러나 지은 지 너무 오래되고 제대로 관리를 하지 못해 낡았다. 전면 보수를 한다면 당시 돈으로 엄청난 3000만 위안이 필요했다. 이것은 티베트 라싸(拉薩)의 당나라 때 유물인 포탈라 궁에 이어 2번째로 많은 돈이 들어가는 공사였다. 시 부서기는 중국의 권위 있는 전문가들을 자주 불러 의견을 들었다.

 

실무 책임자인 자다산은 베이징(北京), 허베이(河北) 성 성도인 스좌좡(石家莊)을 수십 번 오가며 일처리를 하느라 심신이 극도로 피로했다. 위궤양까지 생겼다. 출장을 자주 다니면서 약병을 늘 달고 살았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한약을 달여 먹었다. 마침내 중앙 정부의 지원을 받아 거액의 보수예산을 따는 데 성공했다. 돈은 확보했지만 사찰 주변에 살고 있는 60가구를 다른 곳으로 옮겨야 했다. 마침내 룽싱사 복구공사는 무사히 끝났고 정딩 현에서 가장 유명한 문화상품이 되었다. 하지만 춘제(春節) 때만 되면 그는 룽싱사 관리에 잔뜩 신경을 썼다. 목조 건축물이라 불에 취약했기 때문이다. 그는 고향의 문화 사업을 위해 역량을 모두 쏟았다. 톈닝(天寧), 카이위안(開元), 린지(臨濟), 광후이(廣惠)사 보수와 정딩 현 문묘(文廟) 복원과 같은 수많은 문화재 복원에 자다산 문화국장의 땀이 배어 있다. 이 기간 시 부서기는 서기로 승진했다. 시 서기는 시간이 더 없었지만 그래도 틈을 내 평소와 같이 자다산과 만나 밤을 지새우곤 했다.

 

▲자다산 일가족 사진. 아래 앉은 사람 중 오른쪽이 자다산이다.

  

◆ 시진핑, 푸젠 성 발령 소식에 자다산 며칠간 말을 잊어

1985 5월 어느 날, 자다산은 이미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데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알고 보니 시 서기가 사람을 보낸 것이다. 시 서기가 다른 곳으로 발령이 났고 이튿날 오전 7시 지프를 타고 떠난다는 전언이었다. 그동안 업무 인계를 하느라 바쁘게 일하다 지금 시간이 났으니 사무실로 잠시 와달라는 시 서기 요청을 전하러 온 것이다. 당시 상황에 대해 자다산은 단 한 번도 꺼내지 않았다. 하지만 시진핑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그날 밤, 우리는 마지막으로 얘기를 길게 나누었다. 서로 헤어질 때 감정이 북받쳐 올라 눈물을 흘렸다.

 

석별의 정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다. 두 사람이 헤어졌을 때 공교롭게도 새벽 3시였다. 시진핑은 자다산을 현 위원회 입구까지 바래다주었다. 서로 만감이 교차했지만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이전과 달랐던 점은 그날은 현 위원회 대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는 점이다. 자다산 아내는 그날 남편이 돌아오면서 당삼채(唐三彩. 세 가지 색깔로 만든 당나라 도자기) 2개를 품에 안고 있었다고 회상했다. 하나는 낙타, 다른 하나는 말을 형상화한 도자기였다. 시진핑 서기가 사무실에 있던 것을 작별 선물로 준 것이다. 자다산은 아내에게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곧 잠이 들었다. 이튿날 한낮이 되어서야 일어났다. 하지만 침대에서 일어난 다음에도 그는 멍한 표정이었다. 아내는 그가 병에 걸렸다고 여겨 약을 먹으라고 재촉했다. 그는 머리를 흔들면서 천천히 말했다. 시 서기가 다른 곳으로 전근 갔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2014년 중국 공산당 기관지 광명일보에 기고한 자다산 회상기

 

◆ 시진핑, 푸젠 성 간 뒤 자다산에게 가끔 편지, 안부 전화

시 서기는 정딩 현을 떠나 동남부 경제특구인 푸젠(福建) 성 샤먼(厦門) 시 부시장으로 옮겼다. 그는 푸젠 성에 있으면서도 정딩 현, 그리고 오랜 친구 자다산을 잊지 않았다. 시간을 내 안부 편지를 보냈다. 하지만 자다산은 답장을 거의 보내지 않았다. 이후 시진핑도 일이 바빠 그에게 편지를 거의 보내지 못했다. 어쩌다가 자다산과 전화통화를 하면서 안부를 묻곤 했다. 시닌핑은 인편으로 여러 차례 자다산에게 편리할 때 푸젠 성에 오라고 초청했다. 하지만 그는 시진핑이 바쁜데 굳이 폐를 끼칠 필요가 없다면서 푸젠 성에 가지 않았다. 어쩌다가 정딩 현 사람들이 푸젠 성을 찾아올 때면 시진핑은 그들을 통해 조그만 선물을 자다산에게 전달했다. 해마다 춘제 전날에는 시진핑이 자다산에게 연하장을 보냈다.

 

1991년 춘제 때 정딩 현을 떠난 지 6년이 되던 해 시진핑은 정딩 현 초청을 받아 제2의 고향인 정딩 현을 찾았다. 당시 시진핑은 푸젠 성 샤먼(廈門) 시 닝더(寧德) 지방위원회 서기를 거처 푸젠 성 푸저우(福州) 시 서기로 일할 때였다. 시진핑은 시간을 내 자다산 집으로 찾아갔다. 당시 그는 때마침 9년 동안 일했던 현 문화국장에서 물러나 자문기구인 정딩 현 정치협상회의 부주석으로 있었다. 시진핑과 만났을 때 그는 여전히 활달하고 유머가 넘쳤다. 간부였지만 소설 창작도 열심히 하고 있었다. 자다산은 당시 49세로 정력이 넘치고 창작의 욕망이 강렬했던 황금기였다. 그는 무슨 소설을 잡지에 발표했고, 어떤 소설은 여러 개의 잡지에 나란히 실렸다고 자랑이 대단했다. 지금 구상을 하고 있는 작품이 무엇인지도 자세히 설명했다. 시간이 너무 촉박해 두 사람은 오래 얘기를 나눌 수 없었다. 아쉽지만 헤어져야 했다.


◆ 자다산, 1997년 식도암으로 55세에 하늘나라로

1995년 가을 푸저우 시 서기로 있던 시진핑은 지인으로부터 자다산이 식도암에 걸려 수술을 받았다는 얘기를 전해들었다. 수술은 성공이라고 했지만 시진핑은 자다산의 건강이 걱정이었다. 수시로 그가 회복했는지를 물었지만 돌아오는 소식은 똑같았다. 호전이 쉽지 않아 날마나 몸이 말라간다는 전언이었다. 1997년 춘제 즈음 자다산은 검사를 받기 위해 베이징에서 가장 유명한 셰허(協和)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시진핑은 당시 푸젠 성의 2인자인 부서기로 승진한 상태였다. 때마침 베이징에서 열린 회의에 참석하러 갔던 시진핑은 시간을 내 자다산이 입원한 병원을 찾아갔다. 자다산은 더 이상 과거 모습이 아니었다. 안색이 초췌하고 몸이 앙상했다. 병상에 누워 끊임없이 기침을 했다. 깊이 파인 두 눈만 형형하게 빛날 뿐이었다. 자다산은 시진핑의 손을 잡고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이어 평정을 되찾은 뒤 병의 경과를 설명했다. 시진핑은 침상머리에 앉아 몇 마디 위로의 말을 건넸다. 병실을 나서면서 시간을 내서 반드시 정딩을 찾아가겠다고 약속했다. 불과 열흘이 지난 1997 2 9, 음력 정월 초사흘, 시진핑은 약속한 대로 정딩을 찾았다. 당시 자다산은 체력이 이미 소진된 상태였다. 얼굴은 초췌했고 몸은 더욱 야위었다. 목소리는 갈라졌고 눈동자는 흐릿했다. 몇 마디를 하고는 이내 거친 숨을 내쉬었다. 당시 시진핑은 그가 세상을 떠날 날이 멀지 않았다는 것을 직감했다. 슬픈 감정이 솟구치면서 시진핑은 자신도 모르게 자다산의 손목을 힘껏 쥐었다. 그리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이 모습을 모고 자다산은 오히려 침착하게 시진핑을 위로했다.

 

시진핑이 기념사진이나 찍자고 말했다. 자다산은 웃으면서 사람 모양이 아닌데라고 하면서도 포즈를 취했다. 2 21일 시진핑이 정딩을 떠난지 10여일만에 갑작스레 전화벨이 울렸다. 투병 중이던 자다산이 2 20일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었다. 향년 55세였다. 시진핑은 직접 조문을 하려 했지만 시간을 내지 못해 인편으로 조화를 보냈다.


◆ 시진핑, 국가주석 취임 후 자다산 사망 17년 만에 중국 관영 언론 시-자 우정 크게 조명

시진핑과 자다산의 나이를 뛰어넘은 우정은 자다산이 세상을 뜬지 17년이 지난 2014년 갑자기 관영 언론이 앞장서면서 눈길을 끌었다. 그해 1월 당 기관지 광명일보는 시진핑 주석이 자다산이 세상을 뜬 지 1년 뒤인 1998년 푸젠 성 부서기 시절 썼던 <자다산을 기억하며>라는 글을 실었다. 이어 2월에는 자다산 기일에 맞춰 당 기관지 인민일보가 자다산과 같은 허베이 성 출신의 톄닝(鐵凝) 중국작가협회 주석이 쓴 추모의 글을 실었다. 이들의 우정이 뒤늦게 주목을 받은 이유는 친구의 불행에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시진핑의 인간미를 보여주면서 최고지도자로서 이미지를 구축하려는 의도가 다분히 배어있는 관영 매체들의 보도였다.

 

▲시진핑과 자다산의 우정과 의리를 다룬 다큐멘터리 <친구

 

◆2016-10.31   13억 중국인의 가슴에 별이 된 천쉐썬

2016 10 19, 중국의 6번째 유인 우주선 선저우(神州) 11호가 실험용 우주정거장 톈궁(天宮) 2호와 도킹에 성공했다. 올해는 중국이 우주개발에 착수한 지 60년이 되는 해여서 중국 우주항공업계 종사자들에게는 특히 의미가 깊다.

▲중국 우주개발의 대부 첸쉐썬(錢學森·1911~2009)

 

◆ 중국 우주개발의 대부 천쉐썬

  중국 우주항공 개발 역사는 세계적인 로켓 전문가 첸쉐썬(錢學森·1911~2009)의 귀국으로 거슬러간다. 첸쉐썬은 미국 MIT와 칼텍에서 항공공학 교수로 있다가 공산주의자로 몰려 5년 동안 미국 당국으로부터 연금을 당했다. 중국 정부가 한국전쟁 당시 붙잡은 미군 포로 조종사 11명을 풀어주는 대가로 간신히 귀국할 수 있었다. 

 

그는 1955 9 17일 여객선을 타고 미국 로스앤젤레스를 출발해 10 8, 광둥(廣東)성 선전(圳)에 도착했다. 그는 광저우(廣州)와 상하이(上海)를 다니면서 대학, 연구소, 공장을 두루 둘러보았다. 베이징(北京)에 도착한 것은 10 28일이었다. 11 1일 밤에는 궈모뤄(郭沫若) 중국과학원 원장이 베이징 호텔에서 환영 연회를 베풀었다. 11 5, 천이(陳毅) 부총리가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를 대표해서 그를 접견하고 중국 과학원에서 일을 하도록 지시했다. 당초 중국 정부는 천쉐썬에게 중국 과학원에 역학연구소를 새로 만들어 소장을 맡길 계획이었다. 그동안 역학연구는 중국과학원 수학연구소 역학연구실이 맡고 있었는데 이것을 확대 개편한 것이다.

 

 그는 11 22일부터 12 21일까지 랴오닝(遼寧), 지린(吉林), 헤이룽장(黑龍江) 등 동북 3성을 둘러보았다. 당시 중국에서 중공업 분야가 가장 발전한 곳이 동북지방이었다. 중국의 중공업과 고등교육 수준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도록 중국 당국이 그에게 동북지방 출장 기회를 마련했던 것이다. 그는 대학과 연구소 탄광 기업 20여 곳을 찾았다. 당초 헤이룽장 성 하얼빈(哈爾濱)에 있는 군사공정학원(국방과기대학의 전신)은 목적지에 들어있지 않았다. 당시 보안규정 때문에 외부인의 출입을 제한했기 때문이다. 1955 11 24, 하얼빈의 동북열사기념관을 참관했을 때 첸쉐썬이 안내를 맡은 중국과학원 관계자들에게 군사공정학원에 근무하고 있는 제자를 만날 수 있느냐고 물었다. 과학원 관계자들이 헤이룽장 성 당 위원회에 연락을 했고, 곧 중앙의 허가를 받았다.

 

 당시 베이징에 머물러 있던 군사공정학원 천겅(陳賡·1903~1961) 원장은 이 소식을 듣자마자 군용기로 서둘러 하얼빈으로 돌아갔다. 첸쉐썬을 직접 맞이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한국전쟁에도 참전했던 백전노장으로 당시 현역 대장이었다. 11 25, 첸쉐썬이 하얼빈 군사공정학원에 도착했다. 이것은 그가 귀국한 이후 처음 중국의 국방 관련 대학 수준을 점검하는 기회였다. 천겅 원장이 직접 공군 공학과, 해군 공학과, 포병 공학과를 안내했다. 일행이 포병 공학과 실험실을 참관했을 때 당시 포병 공학과 부주임이던 런신민(任新民) 교수가 상세하게 현황을 보고했다. 첸쉐썬은 그와 중국 로켓 연구개발에 대한 의견을 나누었다. 그날 밤, 하얼빈 군사공정학원은 환영 만찬을 베풀었다.

 

▲1955년 미국에서 고국으로 돌아온 '중국 로켓의 아버지' 천쉐썬, 그는 중국에 돌아오자마자 로켓, 미사일 연구소를 만들고 핵폭탄과 로켓 개발에 일평생을 바쳤다.

 

◆ “외국인이 만드는 데 우리도 만들 수 있습니다.

“보시기에 어떻습니까. 우리도 로켓을 만들 수 있습니까”
천 원장이 첸쉐썬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안 됩니까. 외국인이 만드는 데 우리도 만들 수 있습니다”
천쉐썬은 아주 자신 있는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했다.

 

세계적인 학자의 긍정적인 대답은 천겅 원장에게 로켓 개발에 대한 자신감을 가져다주었다. 그해 12월 런신민 교수를 비롯한 하얼빈 군사공정학원 포병공학과 교수들은 연명으로 국방부에 편지를 보내 중국도 로켓 기술 연구개발에 착수하자고 건의했다. 1956 1월 천겅 원장 안내로 첸쉐썬은 베이징 인민해방군 총정치부 문화예술 공연단 연습장에서 고위 군 간부를 대상으로 로켓과 미사일 기술과 관련한 강연을 사흘 동안 했다. 참석자 모두 미사일 개발에 대해 큰 관심을 보이면서 미사일 열풍이 불었다. 이어 천쉐썬은 저우언라이 총리 초청을 받아 중국 최고 지도부가 있는 중난하이(中南海)의 회의장인 화이런탕(懷仁堂)에 가서 당과 국가 지도자들에게 로켓 관련 강의를 했다. 중국도 미사일을 개발할 수 있다고 단언한 이후 첸쉐썬은 군 지도부의 귀빈이 되었다. 이것은 그의 앞날에 변화를 가져왔다. 펑더화이(彭德懷) 중앙군사위 부주석 겸 국방부장은 총참모부 장비계획부장 완이(萬毅)를 보내 첸쉐썬과 함께 미사일 개발 문제를 논의하도록 했다. 1956 1 20, 펑더화이 부주석은 중앙군사위 회의를 주재하면서 완이 부장이 제출한 로켓 무기 연구개발과 제조에 관한 보고를 논의했다. 그래서 당 중앙위원회에 미사일 연구개발을 제안하는 보고를 하기로 결정했다. 이와 동시에 국무원(내각) 2기계공업부(방위산업 담당 정부 부처) 자오얼루(趙爾陸) 부장(현역 상장)도 국무원에 미사일 연구개발 제조에 대한 보고서를 냈다.


◆ 마오쩌둥, 37번 테이블 배정된 천쉐썬을 1번 테이블로

 1956 2 1일 밤, 마오쩌둥(毛澤東)은 국가주석, 중국 공산당 주석(당시는 총서기가 아니라 주석이 당 최고 직위였음), 중앙군사위 주석 신분으로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 위원들에게 성대한 연회를 베풀었다. 당시 첸쉐썬은 전국정협 위원으로 당선된 직후여서 이 연회에 초청을 받았다. 원래 초청장에 적힌 좌석은 37번 테이블이었다. 그런데 막상 연회장에 도착하니 안내원이 그를 1번 헤드 테이블로 모셨다. 마오쩌둥 주석 오른쪽이었다. 그날 연회의 최고 주빈으로 모신 것이다. 알고 보니 마오쩌둥은 연회 참석자 명단을 챙기면서 붉은 연필로 37번 테이블에 있던 첸쉐썬 자리를 헤드 테이블로 바꾼 것이다. 이것은 마오쩌둥의 그에 대한 믿음이 얼마나 두터운 지 잘 보여주었다. 그리고 앞으로 미사일 개발의 실무 책임을 누가 맡을 것인지 미리 보여주는 것이었다.

 

1956 2 17, 첸쉐썬은 저우언라이 총리 주문을 받아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에 중국 국방 항공 산업 건설에 관한 의견서를 제출했다. 이 보고서는 중국 미사일 기술의 원칙, 조직방안, 발전 계획과 구체적 조치를 담고 있었다. 기본적인 원칙은 연구, 설계, 생산 3개 분야를 동시에 추진하되 시작할 때는 생산에 중점을 두기로 했다. 이어 설계, 연구 순으로 진행하도록 했다. 그리고 연구기관과 학교에 있는 21명의 전문가 명단을 붙여 이들을 미사일 연구개발에 동원하기로 했다. 물론 당시 중국의 경제적 상황으로 보면 당장 미사일 개발에 착수하기가 상당히 어려웠다. 그렇지만 첸쉐썬 의견을 담은 보고서는 미사일 기술 개발의 타당성을 강조했다. 이것은 중국 최고 지도부가 엄청난 돈을 들여 미사일을 연구 개발하는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과학적인 근거를 제공했다.

 

1956 3월 로켓, 미사일 개발 담당 항공산업위원회 극비 설치

 1956 3 14일 저우언라이 총리는 중앙군사위 회의를 주재하면서 첸쉐썬이 마련한 건의안을 토론했다. 국방 항공 산업을 전담할 부처로 항공산업위원회를 만들기로 했고 저우언라이 총리, 네룽전(聶榮臻) 중앙군사위 부주석 겸 부총리, 첸쉐썬 3 사람이 로켓과 미사일 개발을 통괄 지휘하도록 했다. 항공산업위 산하에는 설계기구, 과학기구, 생산기구를 두기로 했다. 4 13일 국무원은 네룽전 부주석을 신설 항공산업위원회 주임, 중앙군사위 비서장 황커청(黃克誠)과 제2기계공업부장 자오얼루를 부주임, 총참모부 장비계획부장 안둥(安東), 첸쉐썬을 위원으로 하는 항공산업위원회를 만들기로 결정했다. 보안상 이유로 외부에는 당분간 공개하지 않기로 했다.

 

1956 5 26일 저우언라이 총리는 중앙군사위 회의에 출석해 네룽전이 이끄는 항공산업위원회가 제안한 중국 미사일 연구에 대해 토론했다. 저우언라이 총리는 이 회의에서 모든 조건을 갖춘 다음 생산을 개시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많은 사람들을 동원해 미사일 연구와 제조 작업을 해야 한다, 산업 현장, 대학, 연구소, 군에서 인력을 동원하되 군이 앞장서야 한다고 지시했다. 

 

1956 8 6일 항공산업위 관리기구인 국방부 5국이 출범했다. 로켓과 미사일 개발을 담당하는 컨트롤 타워였다. 첸쉐썬은 국방부 5국에서 제1부국장 겸 총공정사(총괄 엔지니어)를 맡았다. 이어 그는 항공산업위 연구기구인 국방부 제5연구원을 만드는 일에 착수했다. 1956 10 8일 국방부 제5연구원은 창립대회를 열었다. 국방부 제5연구원 초대 원장은 예상대로 첸쉐썬이 맡았다.

 

▲각고의 노력 끝에 천쉐썬을 필두로 한 중국 원자탄 연구팀은 원자폭탄 및 수소폭탄 실험에 성공했다.

 

◆ 천쉐썬을 중국으로 보낸 미국, 통한의 후회

 이로부터 중국의 로켓과 미사일 개발은 첫 발을 내디뎠다. 첸쉐선이 귀국했을 당시 그와 함께 일했던 미국의 동료 과학자들은 이 천재 과학자가 조국에 돌아가서 농사나 지으면서 조용하게 지낼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실제로 그는 중국에 돌아가서 중국 로켓과 미사일 개발을 진두지휘했다. 시간이 흘러가면서 미국 정부가 보고 싶어 하지 않았던 일이 하나하나 현실이 되었다. 중국 첫 인공위성 발사, 중국 원자폭탄 개발에는 첸쉐썬 공로를 빼놓고는 얘기할 수 없다. 덕분에 그는 ‘중국 로켓의 아버지, 중국 우주항공의 대부’라는 호칭을 얻었다.

 
◆ 대한민국 우주개발의 대부는 어제 나올 것인가

 중국이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힘은 천쉐썬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09 10 31일 그가 9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을 때 13억 중국인은 그를 애도했다. 그는 13억 중국인의 가슴 속에 별이 되었다. 일본은 소행성 탐사선을 보내고 북한은 인공위성을 쏘아 올리는 데 아직도 1단 로켓을 만들지 못해 쩔쩔매는 대한민국 우주 개발 대부는 과연 언제 나올 것인가.  

 

◆13억 중국인의 가슴에 별이 된 첸쉐썬

1956 1, 중국 국무원은 12년 과학기술발전계획(1956~1967)을 짜면서 방위산업 목표를 어떻게 잡을 것인가를 놓고 고민하고 있었다. 당초 군부는 항공기를 집중 개발해 제공권을 확보하자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첸쉐썬(錢學森)의 견해는 달랐다. 항공기 개발도 중요하지만 당장 급한 것은 미사일 개발이라는 것이었다. 왜 그런가. 미사일은 속도가 마하 20까지 나오는 반면 초음속 비행기는 아무리 빨라도 마하 2에 불과하다. 더구나 전투기를 개발하려면 재료 확보가 어렵다. 재료 문제는 하루아침에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리고 꾸준히 경험을 쌓아야 한다. 전투기 재료 문제를 해결하려면 10년 이상 길게는 20년 이상 걸린다. 반면 미사일은 재료 확보가 그다지 어렵지 않다.


◆ 錢學森, “전투기보다 미사일 개발이 더 시급”

 당시 중국의 여러 조건과 사정을 감안하면 미사일을 만드는 것이 전투기를 만드는 것보다 쉽다. 류야러우(劉亞樓) 공군 사령관(1910~1965)은 첸쉐썬 견해를 충분히 반영해 항공기 개발 계획을 포기하고 미사일 개발을 과학기술발전계획에 넣기로 건의했다. 그러면 미사일 개발은 어떻게 할 것인가. 가장 좋은 방법은 미사일을 보유하고 있는 소련의 기술 지원을 받는 것이었다. 중국은 소련에 지원을 요청했고 소련 최고 지도자 흐루시초프는 흔쾌히 동의했다. 당시 동유럽에서 벌어지고 있던 반 소련 운동과 국내 정적을 상대하기 위해 마오쩌둥(毛澤東) 지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중국 방위산업을 책임지고 있는 네룽전(聶榮臻) 부총리(원수, 중앙군사위 부주석)를 단장으로 첸쉐썬이 포함된 대규모 대표단이 모스크바에 갔다. 1957 10 15, 네룽전 부총리는 소련과 국방신기술원조협정에 서명했다. 이제 소련의 기술지원으로 중국 유도탄, 원자탄, 수소탄, 인공위성 개발 프로젝트가 시작했음을 보여준 것이다.

 

▲마오쩌둥 중국 국가주석이 1962년 개발한 중국의 초기 미사일 모형을 살펴보고 있다.

 

◆ 소련 도움으로 미사일, 원자탄, 수소탄, 인공위성 개발 시작

 소련은 2차대전 당시 독일이 만들었던 V-2 로켓을 본뜬 P-2 미사일 2기를 제공했다. 미사일 전문가도 중국에 보냈다. 중국 유학생 50명을 받아 로켓 공부를 소련에서 하도록 했다. 원자탄 모형과 설계도도 제공했다. 네룽전 원수는 특별 지시를 내렸다. 소련의 도움이 있는 만큼 미사일 개발을 더욱 빨리 이룰 수 있다. 그러나 자력갱생 원칙을 잊어서는 안 된다. 소련 미사일을 본뜬 제품을 만든 다음 우리 스스로 설계해서 국산 미사일을 만들어야 한다. 중국은 소련 미사일 1기는 연구용으로 남겼고 1기는 복제를 위해 해체했다. 1958 4월 중국 과학자들은 소련 P-2 미사일을 복제한 둥펑(東風) 1호 미사일 제작에 들어갔다. 둥펑이라는 이름은 마오쩌둥의 발언 동풍이 서풍을 압도하다(사회주의 세력이 서방세력을 누른다는 뜻)에서 따온 것이었다.


◆ 소련과의 밀월 3년 만에 깨져

 그러나 소련과의 밀월관계는 불과 3년 만에 깨졌다. 1959 6 20, 소련은 30년 만기로 맺었던 국방신기술원조협정을 파기하겠다고 일방적으로 선언했다. 중국이 보기에 원인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소련이 중국에 연합함대를 만들자고 제안했으나 마오쩌둥은 거부했다. 또 하나는 소련이 미국과 관계개선을 위해 중국의 이익을 포기했다는 것이다. 반면 서방사회가 보기에는 마오쩌둥의 과대망상에 흐루시초프가 손을 들었다는 것이다.


1960 1390여 명의 소련 기술고문 일제히 철수

 마오쩌둥은 1957년 핵전쟁을 불사하겠다고 밝혀 소련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1960 8, 중국에 왔던 소련 과학자와 기술 고문 1390여 명이 전원 귀국했다. 343건의 계약, 257건의 두 나라 기술협력 프로젝트는 한순간에 없던 일이 돼버렸다. 이제 중국 미사일 연구자들은 스스로 문제를 풀어야 했다. 둥펑 1호 미사일 시험 발사는 소련 과학자들이 귀국한 상황에서도 1960 11 5일 주취안(酒泉) 발사기지에서 성공적으로 이뤄졌다. 둥펑 1호는 길이 17.68m. 무게 20.4t, 액체연료 로켓 엔진을 사용했다. 최대 사거리는 600㎞였다. 그러나 실전 배치를 하지는 않았다.


◆ 미사일 발사 실패 - 네룽전 “실패를 교훈삼아 다시 도전하라”

 첸쉐썬은 둥펑 1호 제작은 물론 사거리 1200㎞ 중거리 탄도 미사일 둥펑 2호 독자 개발을 주도했다. 1962 3 21, 둥펑 2호 미사일은 발사 69초 만에 주취안 발사기지 위로 떨어졌다. 야심 차게 개발했던 미사일이 한순간에 폭발해 잿더미가 되는 것을 보고 발사장 현장에 있던 과학자들과 기술자들은 모두 울음을 터뜨렸다. 실패를 했으니 누군가 책임을 져야 했다. 그러나 네룽전 원수는 “책임을 묻지 마라. 실패를 교훈삼아 다시 도전하라”고 지시했다. 모두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과학자들은 미사일의 문제점을 찾아냈다. 우선 유도 제어 시스템을 설계할 때 로켓에서 일어나는 미세한 진동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엔진과 로켓 구조의 연결이 약했다는 점이다. 설계를 수정한 둥펑 2호 미사일은 17번의 대형 지상 시험, 그리고 105번의 엔진 시험을 거쳤다. 그리고 1964 6 29, 둥펑 2호 미사일은 2번째 시험발사에 성공했다. 나중에 16번의 발사 시험에서 15번 성공했다. 그런 다음 둥펑 2호 미사일은 실전배치를 했다.


◆ 원자탄, 미사일 개발 포기 여부 놓고 치열한 논쟁

 둥펑 2호 미사일 시험 발사가 성공한 즈음 중국이 극비리에 추진하던 원자탄 개발도 사실은 막바지 단계에 접어들고 있었다. 첸쉐썬은 핵 전문가는 아니었다. 핵 개발에 적극 참여하기보다는 핵개발 필요성을 적극 강조했다. 그의 이런 충고는 중국 지도부에 큰 격려가 되었다. 1961년 여름. 대약진 운동의 실패로 베이다이허(北戴河)에서 열린 방위산업회의는 원자탄과 유도탄 개발을 계속할 건가, 아니면 포기할 것인가를 놓고 당 간부들이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경제가 어려운 만큼 원자탄과 유도탄 개발을 포기하자는 주장이 만만찮았다. 그러나 네룽전 원수는 원자탄 유도탄 개발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끝까지 주장했다. 첸쉐썬의 지론, 원자탄과 유도탄이 당장 돈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걸 갖고 있어야 전쟁을 막을 수 있고 결과적으로 경제발전에 도움이 된다는 주장이 중국 지도부가 지속적인 원자탄, 미사일 개발을 하겠다고 결정한 데 대해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 마오쩌둥, “원자탄, 미사일 개발 가속화하라” 지시

 1962 11 3, 마오쩌둥 주석은 원자탄 개발을 가속화하겠다는 보고서를 승인하면서 아주 좋다. 이대로 하라. 모두 협조해서 이 일을 잘 마무리하라고 지시했다. 이를 계기로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저우언라이 총리를 주임으로 하는 15인 전문위원회를 만들어 원자탄, 미사일 개발에 박차를 가하기로 했다.

 

중앙전문위원회에는 7명의 부총리, 7명의 부장(장관)이 들어갔다. 미국과 소련, 프랑스는 중국 원자탄 보유를 막기 위해 1963 7 25, 핵실험 금지조약을 맺었다. 다만 지하핵실험은 허용했다. 중국이 지상에서 핵실험하는 것은 막고 이미 핵을 가진 나라들은 지하에서 핵실험을 하는 것은 무방하다는 의미였다.

이에 대해 중국은 강력하게 반발하는 한편 원자탄 개발을 예정대로 진행했다. 원자탄 설계를 완성했고 농축 우라늄공장도 가동했다. 1964 1월 중앙전문위원회는 핵실험을 10월 전후해서 하겠다고 당중앙위원회에 보고했다. 그해 6월에는 칭하이(靑海)성 핵연구개발기지에서 모의 핵실험도 성공적으로 진행했다.

 

소련 전문가들은 당초 둔황의 사막에 비행기로 원자탄을 터뜨리는 방식을 추천했지만 중국은 신장위구르자치구 타클라마칸 사막에 있는 로프 노르(중국식 표기로는 뤄부호수) 기지에 높이 100m 철탑에 매달아 원자탄을 터뜨리는 방식을 선택했다. 중국 인민해방군 각 총부, 신장군구, 란저우군구를 비롯해 중국 과학원, 군사공정학원과 같은 26개 기관, 5058명이 핵실험에 참가했다.

 

▲1964 10월 중국이 첫 원자탄 실험에 성공한 직후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기술자들이 환호성을 지르고 있다

 

 

◆ “소련 기술자 철수 1959 6월을 잊지 말자”- 첫 원자탄 번호 596으로 붙여

 

당시 국제정세는 심상찮았다. 미국이 전투기를 보내 중국 핵실험기지를 폭파할 것이라는 흉흉한 소문마저 돌았다. 9 16일과 17, 저우언라이 총리는 중앙전문위원회를 열어 핵실험을 서두를 건가, 아니면 미룰 건가를 놓고 논의했다. 회의가 끝난 뒤 마오쩌둥에게 보고를 하자 마오는 핵실험이라는 게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게 목적이 있으니 실험을 서두르는 게 좋겠다고 밝혔다. 그래서 첫 핵실험은 10 15일부터 20일까지 선택하되 현지 기상 조건을 감안해 결정하기로 했다. 핵실험에 사용하는 원자탄 596(이 코드 번호는 1959 6월 소련이 전문가 철수를 결정했던 때를 절대로 잊지 말자는 뜻으로 붙임)은 칭하이(靑海) 핵 실험기지에서 만들었다. 그 곳에서 신장위구르 로프 노르 기지까지 옮기는 것이 무엇보다 걱정이었다. 미국이 전투기를 보내 폭파를 하거나 스파이를 보내 운반 열차를 폭파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극비리에 원자탄을 옮겼고 1964 10 16일 오후 3, 중국의 첫 핵실험이 성공했다. TNT 20킬로톤의 폭발력을 가졌다. 그날 밤 10, 중국 중앙라디오가 핵실험 성공 소식을 보도했고 당 기관지 인민일보는 호외를 찍었다. 맥나마라 당시 미국 국방장관은 중국이 원자탄 실험을 성공했다고 해도 5년 이상 핵탄두를 옮길 운반 수단은 갖지 못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서방 언론도 중국은 탄환(원자탄)은 있지만 총(미사일)은 없다고 지적했다. 중국이 이미 여러 차례 극비리에 둥펑 2호 미사일을 성공적으로 발사한 사실을 서방에서는 제대로 몰랐던 것이다.


◆ 미사일에 핵탄두 적재, 타클라마칸 사막에 쏘아 보내 실험

 1966 3 11, 저우언라이 총리는 중앙전문위원회 제15차 회의를 주재했다. 이 자리에서 둥펑2호 미사일에 원자탄 탄두를 장착하도록 결정했다. 이것은 세계적으로도 전무후무한 미사일 원자탄 동시 실험이었다. 1966 10 26일 오전, 주취안 발사기지에서 둥펑 미사일에 원자탄 탄두를 결합했다. 현장에는 네룽전 원수와 첸쉐썬이 참관했다. 10 27일 오전 8, 발사 준비를 모두 마쳤다. 발사장 요원들은 모두 10킬로미터 밖 지휘소로 이동했다. 다만 7명의 기술자는 핵탄두 장착 미사일로부터 불과 100미터 떨어진 지하 통제실 안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7일 동안 버틸 수 있는 비상식량과 물을 준비했다. 그리고 산소마스크를 준비했다. 그러나 만일의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핵탄두를 실은 둥펑 미사일은 800㎞를 날아가 정확하게 타클라마칸 사막의 로프 노르 핵 실험장에서 폭발했다. 네룽전 원수는 훗날 당시 핵탄두가 일찍 폭발했거나 발사 직후 미사일이 추락했거나 목표지점을 벗어났더라면 결과는 너무나 끔찍해 상상하기도 겁났다고 회고했다.

 

▲마오쩌둥 중국 국가주석이 미사일과 인공위성 개발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첸쉐썬을 만나 격려하고 있다.

 

◆ 미사일, 핵 개발 성공 뒤 1966년 인공위성 도전, 1970 4월 성공 발사

 미사일 외 중국 우주개발에서 첸쉐썬이 기여한 공로는 중국 첫 번째 인공위성을 제작하는 일이었다. 그는 중국에 귀국하자마자 인공위성 제작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1958 1월부터 인공위성 제작을 주도했다. 당시 소련은 1957 104일 최초의 위성 스푸트니크 1호 발사에 성공했고, 113일 스푸트니크 2,

 

이듬해인 1958 515일 스푸트니크 3호 발사에 성공했다. 자연스럽게 인공위성 제작은 중국의 최우선 과제로 떠올랐다. 마오쩌둥은 1958 5 17일 반드시 인공위성을 발사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경험을 쌓은 인력과 방대한 돈이 들어가야 하는 만큼 선뜻 착수하기가 어려웠다. 1965년 만신창이가 된 중국 경제가 그나마 회복 기미에 접어들었다. 1965 1, 첸쉐썬은 위성 개발 프로젝트 건의문을 당 중앙위원회에 제출했다. 그는 중거리 미사일과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개발하면 인공위성을 발사할 수 있다며 서둘러 착수하는 것이 좋다고 건의했다. 1966 5월 첸쉐썬은 중국 첫 번째 인공위성 이름을 마오쩌둥을 찬양하는 혁명 가극 둥팡훙(東方紅)으로 이름 짓고 1970년 창정(長征) 1호 로켓에 실어 발사하기로 결정했다. 인공위성 프로젝트는 첸쉐썬으로서는 모험이었다. 자칫 실패로 돌아가면 그동안 쌓았던 명성에 흠이 가고 마오를 찬양하는 둥팡훙이라는 노래가 제대로 들리지 않을 경우 정치적 위기를 맞을 수 있었다. 1970 424일 오후 935분 둥팡훙 1호 위성 발사는 성공적으로 이뤄졌다. 중국은 소련 미국 프랑스 일본에 이어 세계에서 5번째 위성 발사 국가가 되었다. 물론 일본이 중국보다 2개월 앞서 인공위성을 발사한 점이 첸쉐썬으로는 아쉬운 점이었다. 하지만 당시 문화혁명 여파로 인공위성 개발에 결정적인 역할을 해야 할 중국 과학원 자오주장(趙九章) 위성설계연구원장(1907~1968)을 비롯해 전문가 20명이 홍위병의 수모를 견디지 못하고 자살했던 점을 감안하면 나름 최선의 결과였다.

 

◆14억 중국인의 가슴에 별이 된 첸쉐썬 3

 첸쉐썬(錢學森)은 만년의 모습을 보면 온화하고 겸손한 인상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렇지 않았다. 귀국 직후만 해도 이른바 돌직구를 날렸다. 인정사정 보지 않았다. 다이루웨이(戴汝爲, 1932~)는 베이징대학 수학과를 졸업하고 1955년 중국과학원 역학연구소로 발령받았다. 원장 첸쉐썬의 문하생이 된 것이다. 하루는 연구소 도서관에 갔다가 때마침 책을 보고 있던 첸쉐썬과 만났다. 잘됐다 싶어어떤 책을 읽어야 연구하는 데 참고가 될까요?”라고 공손하게 물었다. 그러자 첸쉐썬은 연구하는 사람은 독립적인 사고를 가지고서 문제를 풀어야 하는 거야. 나한테 묻지 마. 이렇게 잘라 말했다. 얼마나 말투가 매정했던지 다이루웨이는 무안해서 얼굴이 벌겋게 되고 말았다. 한번은 연구소에서 학술적인 견해를 발표하는 기회가 있었다. 그의 발표를 듣고는 첸쉐썬 원장은 매정하게 말았다. “자네가 뭘 말하려고 하는지 도대체 알 수가 없네. 말에 논리가 없어. 한마디로 말하면 헛소리란 말이야.” 다이루웨이는 당시 연구소에서 첸 원장에게 야단을 맞지 않은 연구원이 없었다고 회고했다. 다이루는 첸쉐썬 원장이 미국에서 펴냈던 유명한 저서 엔지니어링 사이버네틱스를 중국어로 번역해 책으로 냈고 이후 인공지능에 대한 연구를 계속해 1991년 중국 과학자들의 최고 영예인 중국과학원 원사(우리의 학술원 회원과 같은 영예)가 됐다. 하지만 아직도 첸쉐썬 원장에게 당했던 질책을 잊지 못하고 있다.  


◆ “
아니 자네는 이런 것도 모르나?” - 학문 앞에서 매서웠던 첸쉐썬

 첸쉐썬의 연구소 원장 초대 비서였던 장커원(張可文)은 베이징대 수학과를 졸업하고 역학연구소 원장로 발령받았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베이징대학의 수학과 교수가 첸쉐썬 원장에게 뭔가를 물어보려고 왔다. 사무실에 들어왔는데 의자가 있었지만 췐쉐썬 원장은 앉으라고 권하지도 않았다. 수학과 교수는 원장 책상 앞에 서서 10분 이상을 얘기를 주고받았다. 마침내 첸 원장이 한마디 했다. 아니 자네는 이런 것도 모르나. 교수는 얼굴이 벌개져서 어쩔 줄 모른 채 한참을 멍하니 서 있다가 첸쉐썬에게 큰 절을 하고는 사라졌다. 장커원 비서는 정확한 대화 내용은 모르지만 이런 것도 모르냐는 원장의 호통은 들을 수 있었다. 아무래도 이대로 넘어가서는 안 되겠다고 판단한 그녀는 나중에 한가한 틈을 타 첸쉐썬 원장에게 말했다. 원장님. 연구소에서 모두들 원장님을 무섭다고 해요. 수준이 낮더라도 좀 살갑게 대해주세요. 다들 원장님께 조금이라도 배우려고 그러는 거잖아요. 자존심도 있고요. 당시 첸쉐썬 원장은 한참 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분명한 것은 그 날 이후 원장이 더 이상 매정하게 사람을 대하지 않았다. 훗날 첸쉐썬은 첫 비서 장원커가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말했다. 장원커 비서는 그 말을 듣고는 원장님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의미를 잘 몰랐다. 췐쉐썬 아들 첸융강(錢永剛)은 사람마다 자존심이 있다는 장 비서 말이 부친에게 크게 일깨워주는 바가 있었다고 전했다

 

▲첸쉐썬이 미사일 관련 강의를 하고 있다.

 

문화대혁명 앞에서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

  1957년 중국에서 반()우파 투쟁(마오쩌둥이 자신에게 반대하는 공산주의자를 탄압하기 위해 중국 내 우파를 제거한다는 명목에서 전개한 정치운동)이 일어났다. 이것은 첸쉐썬이 귀국한 이후 처음으로 겪는 정치운동이었다. 그는 이런 운동 경험이 전무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알지 못했다. 일단은 운동에 참가하려면 대자보를 붙여야 했다. 당시 역학연구소는 원장을 비난하는 대자보를 붙인 사람은 없었다. 원장이 천신만고 끝에 귀국했고 모두들 이런 그를 존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자보가 전혀 없어도 문제가 될 수 있었다. 따라서 장커원 비서는 첸쉐썬 웬장과 상의를 해서 서로 비난하는 대자보를 붙이기로 했다. 장 비서는 원장이 너무나 엄숙하고 민중들에게 다가가는 것이 모자라다, 이런 내용의 대자보를 붙였고, 첸쉐썬 원장은 비서가 너무나 어린 아이 같다는 대자보를 붙였다.

 

  1965년 첸쉐썬은 인공위성 연구제작 사업을 진두지휘했다. 중국 최초 인공위성이어서 정치적 의미가 큰 사업이었다. 중국 정부가 요구한 것은 한 번에 성공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인공위성이 무사히 지구궤도에 올라간 다음에는 지상으로 신호를 보낼 수 있었다. 그런데 신호라는 게 일반 사람들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래서 위성 설계자들이 고안한 아이디어가 마오쩌둥을 찬양하는 혁명 가극 둥팡훙(東方紅) 시작 부분 8소절을 반복해서 지상으로 전송하면 어떠냐는 것이었다. 첸쉐썬은 이런 내용의 보고서를 상부에 냈다. 중앙은 이런 계획을 승인했고 정치임무라고 지시했다. 중국의 정치임무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반드시 이뤄야 하는 지상명령이다. 위성이 가극 둥팡훙을 방송하는 것은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일단 하늘에 올라간 다음에 노래가 이상하게 나온다거나 잡음이라도 생기면 당시는 문화혁명 시기라서 목숨마저 내놓아야 할 판이었다. 둥팡훙 노래를 정확하고 듣기 좋게 하기 위해 첸쉐썬은 여러 차례 위성 설계자들의 보고를 듣고 설비를 챙겼다. 둥방훙 노래를 전송하는 것에 지장을 주는 것이라면 포기하게 만들었다. 1970 425일 중국은 첫 인공위성을 성공적으로 발사했고 다행히 둥팡훙 노래도 잡음 없이 잘 들렸다.  

 

마오쩌둥 충성심 보이려 첫 인공위성에서 찬양가 둥팡훙(東方紅) 흘러나오게 해

 1958년 중국은 인공위성 연구를 시작하기 전이었지만 대약진 운동과 소련 위성 발사 성공으로 생산위성이라는 신조어가 나왔다. 농촌마다 생산기록을 잇따라 경신했다고 상부에 보고했다. 1958 6 8일 당 기관지 인민일보는 허난 성의 한 농촌에서 200평당 밀 생산량이 2105(1근은 500그램)을 기록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면서 이것은 첫 생산위성을 발사한 것과 마찬가지라고 평가했다. 6 12일 새로운 기록이 나타났다. 200평당 3520근의 밀을 생산했다는 것이다. 이런 생산량은 상식에 어긋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소식이 전해진지 4일 만에 첸쉐썬은 공청단 기관지 중국청년보에 기고문을 실어 이런 생산위성이 과학적 근거가 있다고 주장했다. 벼나 밀, 보리가 햇빛을 이용하고 공기에 있는 이산화탄소와 물을 합쳐 영양분을 만들면 식량 생산은 엄청나게 늘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1958 4 29일 첸쉐썬은 인민일보에 집단지혜를 발휘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라는 글을 기고했다. 역시 생산량을 크게 늘리는 것이 가능하다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200평에서 1만근의 밀을 생산하는 것이 환상임은 금세 현실로 드러났다. 1959년 봄이 되자 대약진 운동의 기세는 한결 사그러들었다. 그럼에도 첸쉐썬은아는 것이 힘이다잡지(1959년 제5)에 높은 식량 생산이 가능하다는 주장을 거듭했다. 이를테면 연간 200평의 땅에 비치는 햇빛은 94만근의 탄수화합물을 생산한다. 작물이 햇빛을 100% 완벽하게 이용한다면 연간 94만근의 식량을 생산할 수 있다. 이런 주장이었다. 문제는 현실성 여부와 관계없이 첸쉐썬이라는 무게감 덕분에 그의 논문이 중국 사회에 큰 반향을 불렀다는 점이다. 이후 대약진운동의 후유증을 보면 첸쉐썬이 당시 발표한 주장의 잘못에 대해 나중에라도 공개 사과를 했어야 했다. 이런 의견도 만만찮다

 

▲인민일보가 원자폭탄 실험 성공을 호외로 전하고 있다.

 

문화대혁명 기간 상급자 억지 비판도

  1975년 복권에 성공했던 덩샤오핑(鄧小平) 격하 운동이 다시 벌어졌다. 그해 연초 국방과학위원회 주임을 새로 맡은 장아이핑(張愛萍. 1910~2003) 장군은 덩샤오핑 추종 세력으로 몰렸다. 그래서 장아이핑을 비판하는 분위기가 생겼다. 당시 첸쉐썬은 국방과학위 부주임이었다. 그는 비판대회에서 상급자인 장아이핑 주임과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 그러면서 대자보를 붙였다. 장아이핑을 대국 배타주의에 물들었다고 비판했다. 구체적으로 그가 1960년대 장아이핑 장군을 수행해서 미사일 발사장에 갔을 때 일어난 일을 고발했다. 장아이핑 장군이 지도를 가리키면서 몽골은 과거 중국의 땅이었다.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이다. 당시 첸쉐썬 대자보가 큰 반향을 일으킨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첸쉐썬이 비판대회에서 했던 발언은 장아이핑에게는 엄청난 상처를 주었다. 장아이핑 장군 아들 장성(張勝) 2007년 나온 아버지 전기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사실 부친은 다른 사람 비판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평생 너무 많은 일을 겪었기 때문이다. 장아아핑은 듣고 싶은 거만 들으면 돼. 무슨 대수라고. 늘 이런 식으로 치부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학자인 첸쉐썬 발언은 그를 너무나 당혹스럽게 했다. 첸쉐썬은 비판대회에서 장아이핑은 어떤 사람인가. 내가 보기에 악마다. 나보고 손짓하면 악마가 부르는 것 같아 몸서리가 처진다. 이렇게 말했다. 결국 장아이핑은 충격을 받아 심장병이 갑자기 도져 병원에 입원했다. 훗날 운명의 장난처럼 장아이핑은 덩샤오핑 복권 이후 대륙간탄도미사일 개발을 비롯한 방위산업의 최고 책임자가 되었다.  

 

자신을 추방한 미국, 숱한 초청에도 끝내 응하지 않아

 개혁개방 이후 미국은 여러 번 첸쉐썬에게 미국 방문을 요청했다. 그러나 그는 모두 거절했다. 미국은 그의 청년시절을 보낸 제2의 고향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그가 다시 가기를 원한다고 여겼지만 그는 실제로 다시는 미국에 가지 않았다. 비서 장커원은 첸쉐썬 원장이 유명한 과학자라서 자존심이 엄청 강했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에서 공정하지 못한 대우를 받았고 이것에 대해 엄청난 모욕으로 받아들였다. 1950년 매카시즘이 성행하면서 반공의 물결 아래 그는 미국에서 강제 추방을 당했다. 추방을 당하기 전에는 연구도 하지 못한 채 5년 동안 연금 생활도 했다. 1980년대 후야오방(胡耀邦) 당시 공산당 총서기는 첸쉐썬에게 이렇게 권했다. 박사님 국제적으로 영향력도 크시니 미국이 초청하시니 초청을 받으시죠. 나가서 한번 둘러보세요. 박사님이 나가시는 건 다른 사람과 다릅니다. 중국과 외국이 과학기술 교류를 추진하는 데 엄청난 영향을 미칠 겁니다. 오늘날 세계도 변하고 중국도 변하고 미국도 변하고 있습니다. 몇 십 년 전에 일어난 일 이제 다 잊으시고요. 너무 마음에 두실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해 첸쉐썬은 이렇게 대답했다. 미국 사람들이 공개적으로 잘못했다고 시인을 하지 않는 마당에 제가 미국에 가는 것은 적절치 않습니다. 이에 대해 후야오방 총서기는 제 말은 권유를 하는 것이지 반드시 가셔야 한다는 명령은 아닙니다. 가시기 불편하시다면 박사님 의견을 존중하겠습니다.

 

음악애호가에 아마추어 사진작가, 귀국한 뒤 돈 없어 못해

 나중에 미국 정부는 중국 측에 이런 제안을 했다. 과거 미국 정부가 첸쉐썬에 대했던 것은 잘못이었다. 공정하지 못했다. 인정한다. 첸쉐썬이 미국에 온다면 미국 과학원 원사와 미국 공학원 원사 칭호를 드리겠다. 첸쉐썬은 나중에 이 일을 알고는 이렇게 말했다. 미국이 얼마나 교활한지 잘 보여주는 거다. 나는 걸려들지 않을 거다. 나는 미국을 떠났을 당시 강제추방을 당했다. 미국 법률 규정에 따르면 나는 다시 미국에 갈 수가 없다. 미국 정부가 공개적으로 명예회복을 하지 않는다면 나는 평생 미국 땅을 다시 밟지 않을 것이다.

 

 1989년 국제 이공연구소는 첸쉐썬에게 노벨상과 버금가는 명성을 가진 로크웰 주니어 과학상을 수여했다. 이것은 현대 이공계 최고의 영예였다. 첸쉐썬은 당시 중국 과학자로는 첫 수상자였다. 그러나 그는 미국 뉴욕에 가서 상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대신 그를 위해 수상을 한 사람은 당시 주미 중국 대사다. 첸쉐썬은 취미가 다양했다. 부인 장잉(張英)과 마찬가지로 음악 애호가였다. 서양 음악사에 정통했다. 트렘펫도 잘 불었다. 어렸을 때는 꽃과 새 그림을 잘 그렸다. 미국 유학시절에는 촬영이 취미였다. 그는 요즘 말로 셀카로 자신의 사진을 찍기도 했다. 그러나 중국에 귀국한 다음에는 사진 취미를 포기했다. 왜냐. 이런 일이 있었다. 귀국 전 부부는 중국 생활형편이나 연구조건이 미국과 천양지차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미리 고생을 해야겠다. 이런 마음의 준비를 했다. 하지만 실제로 어떤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다. 첸쉐썬은 1급 교수로 월급이 300위안이었다. 다른 사람들보다는 수입이 많았다. 귀국한 직후 첸쉐썬 부부는 300 위안으로 얼마나 많은 물건을 살지 몰랐다. 첸쉐썬은 미국에서 귀국하면서 아끼던 사진기를 갖고 왔다. 그래서 처음에는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사진을 현상했더니 월급이 날아가 버린 것이다. 그때서야 미국처럼 마음대로 돈을 쓸 수 없구나. 아껴야겠구나. 이로부터 첸쉐썬은 사진기를 상자에 집어넣었다. 이후 그는 다시 사진을 찍지 않았다.

 

■절대권력 시진핑의 신시대

2017.10.23 중앙일보 예영준 기자

 미군식 군제, 벽돌 찍듯 군함 제조 … “2050 미군 이긴다

중국 인민해방군의 위안위바이(袁譽柏) 남부 전구(戰區)사령원은시진핑(習近平) 개혁 상징이다. 해군잠수함학원을 졸업한 이래 줄곧 잠수함을 탔고 함장, 기지 사령관과 북해함대 사령관을 거치는 동안 번도 해군을 떠난 적이 없는 그가 중국 남부의 육해공군과 미사일부대까지 총괄 지휘하는 전구사령관이 됐다

집권 2년간 반개혁 세력 치밀 제거
해군 장성, 육군도 지휘하게 개편
자국산 항모 진수 장비 현대화
초음속 미사일 사거리, 함정 압도

미군에 비유하면 해군 장성이 태평양군 사령관을 맡아 휘하의 육해공 병력을 지휘하는 격이다. 주석의 개혁이 아니었다면 상상도 하지 못할 인사였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주석은싸워서 이기는(能打仗 打勝仗) 군대 개혁의 최상위 목표로 내걸었다. 뒤집어 말하면 주석이 보기에 여태까지의 중국인민해방군은 전쟁을 수행할 준비태세도, 싸워 이길 능력도 없었다는 의미다. 가장 이유는 인민해방군의 오랜 체질과 낡은 제도 때문이었다. 2015 12월의 편제개혁 단행 때까지 인민해방군에는 육군사령관이란 직책이 따로 없었다. ‘인민해방군=육군이었고 ·공군은 육군과 평등한 군종이 아니라 부속 개념의 특수 병종에 지나지 않았다. 중국 대륙을 지역별로 나눈 7 군구에 ·공군도 형식적으로 편입돼 있었지만 군구사령관은 평시엔 ·공군 부대에 대한 지휘권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현대전에 필수적인 합동작전을 위한 훈련이나 작전 개발은 뒷전이었다. 
  
이를 깨고 주석은 연합참모부를 창설했다. 지난해 4월에는 직접 각반까지 위장복 차림으로 연합참모지휘센터에 나타나기도 했다. 7 군구는 5 전구로 재편됐고 전구 사령관에는 전에 없던 합동작전지휘권이 주어졌다. 그리하여 해군 출신이 육군을 지휘하는 제도적으로 가능해진 것이다. 이는 수십 년간 계속돼 소련군식 편제 대신 미군식 제도를 도입한 것이다. 주석과 친분이 두터운 류야저우(劉亞洲) 상장은경쟁 상대인 미국의 장점을 흡수하기 위해서라고 제도 개편 목적을 밝혔다
  
기득권 세력의 반발을 사기 마련인 개혁은 치밀한 시나리오에 따라 진행됐다. 집권 2 동안은 군내 부패 척결에 치중해 ()개혁 세력의 싹을 제거했다. 집권 3년차인 2015년부터는 윗부분(脖子以上)’이라 불리는 상층 지휘부 개혁을 단행했고 올해부터는 아래부분인 실전 부대 개혁과 인원 재배치를 진행 중이다. 13 집단군을 과감하게 8개로 감축하며 육군의 몸집을 줄이고 12000명이던 해병대를 4 명으로 늘리기로 대표적이다
  
제도 개혁, 체질 개선과 함께 힘을 쏟는 부분은 장비 현대화다. 4 자국산 최초의 항공모함 진수를 포함해 상반기에만 ·대형 함정 10척을 건조했다. 서방국가의 베이징 주재 무관은마치 공장에서 벽돌 찍어내듯 군함을 건조하고 있다이런 추세가 510 계속된다고 생각하면 섬뜩해지지 않을 없다 말했다.

                             

양뿐 아니라 성능도 무시할 없는 수준이다. 6 진수한 055 자국산 미사일 구축함은 스텔스 기능과 레이더 성능, 정보처리 능력, 순간 최고속도 등이 미군 주력인 줌월트보다 앞선다고 중국은 자부한다. 여기에 장착된 초음속 순항미사일 발사장치 YJ18 사정은 540㎞여서 미군 함정을 압도한다. 해상전투가 벌어지면 미국 군함의 사정권 밖에서 공격을 가할 있다는 얘기다. YJ18 장착 구축함을 2020년까지 20척가량 취역시킬 전망이다.                             

 

주석은 18 당대회 개막식에서 “2035년에 장비현대화의 기본 골격을 완성하고 2050년에 세계일류의 군대가 이라고 말했다. 군사 전문가들은 중국군이 종전 방어전략 위주에서 탈피해 해외에서의 전력투사(戰力投射) 목적으로 하는 분명하다고 분석한다. ‘싸워 이기는 군대 거듭난 활동범위를 해외로 넓힌 중국군과 세계가 맞닥뜨릴 날이 다가오고 있다는 얘기다 

 

선부론 넘어 공부론....양극화 해소는 시진핑 최대의 도전과제

중국 공산당 대회 이틀째인 지난 19, 지방 대표단별 회의 장면이 언론에 공개됐다. 비공개리에 진행되는 중앙위원 선출ㆍ당장 개정안 이외의 비교적 민감한 토론 내용을 공개하면서 언론 보도를 유도하는 일종의 홍보성 이벤트였다. 내외신 기자들 앞에서 성ㆍ직할시 서기들이 앞다퉈 강조한 내용은 지역별 탈빈(脫貧), 빈곤퇴치 성과였다. 푸젠(福建) 서기 유취안(尤權)푸젠의 빈곤인구는 2012 130만명에서 현재 20여만명으로 줄어들었다 발표했다. 후난성 회의에서는극빈촌 스빠둥(十八洞)촌의 산간 광천수를 상품화해 수백년 가난에서 해방됐고 주식 15% 주민 몫이 됐다 홍보했다.   

 

▲극빈촌이었던 스빠둥촌은 환골탈태했다. [출처: 이매진 차이나]

 

지방 서기들이 역내총생산(GRDP) 성장율 경제성장 실적을 과시하기에 바쁘던 몇년 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모습이었다. 여기엔 이유가 있다. 시진핑(習近平) 주석이 지역별 성장율을 서기 평가의 최우선 잣대로 삼아왔던 것을 지난해부터 바꿔 빈곤퇴치 목표 달성 여부로 평가하고 목표에 이르지 못하면 엄중 문책키로 했기 때문이다. 주석은 특히 빈곤 인구가 많은 22 성의 서기들에게 시기별ㆍ내용별로 구체적인 빈곤퇴치 계획서를 제출토록 했다. 이후 전국 산간벽지 곳곳에서 빈곤 퇴치 운동이 일어났고탈빈 공정 한국의 새마을 운동을 연상시키는 국가 프로젝트가 됐다. 하지만 여기에 투입되는 인력과 자금의 규모는 새마을 운동에 비할 아니다. 대기업 헝다(恒大)그룹은 구이저우성 다팡(大方)촌의 주택ㆍ학교 건설과 일자리 창출 등에 110억위안(1 8700억원) 쏟아부었다.  

주석중국 사회에 새로운 모순 출현
도농, 지역간 불균형 발전과 양극화 문제 제시
지니계수 0.465 여전히심각하게 불평등
모두가 사는 공동부유 사회가 목표

▲쉬자인 헝다그룹 회장(가운데) 빈곤 지역 하나인 구이저우성 비제시에서 노인을 만나고 있다. [출처: 구이저우 민족보]

 

▲탈빈 공정 지역 하나였던 구이저우 비제시. [출처: 차이나닷컴]

 

▲빈곤지역으로 꼽히던 구이저우성 비제시 다팡촌은 탈빈공정을 통해 말끔하게 변했다.[출처: 차이나닷컴]

 

주석이 탈빈공정에 강한 의지를 보이고 있는 배경은 18 당대회 연설에서 읽을 있다. 그는중국 사회에 새로운 모순이 출현했다생활수요와 불균형ㆍ불충분 발전간의 모순 ()시대에 해결해야 과제로 제시했다. 이전 덩샤오핑(鄧小平) 시대의 모순은  ‘물질문화 수요와 낙후한 생산 사이의 모순’(1981 11 6중전회) 이었다. 실용주의자였던 덩은 낙후된 생산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있는 사람부터 먼저 사는선부론(先富論) 주창했다. 잘사는 것을 죄악으로 여기며 절대 평등주의에 갇혀있던 당시 중국으로선 혁명적 전환이었다.   

 

▲중국은 소강사회를 열기 위해 재정자금을 쏟아붓고 있다.


반면 주석은 도농(都農)ㆍ지역간 균형 발전과 소득 분배 격차의 해소를 통해 공동부유의 사회를 건설하겠다고 강조했다. 시진핑 공부론(共富論) 셈이다. 주석은 “2020년까지 7000만명에 이르는 연간소득 6200위안(105만원) 이하의 빈곤인구를 없애겠다 공언해왔다. 엄밀히 말하면 이는 극빈층 구제 사업일 뿐이다. 극빈층은 줄어들어도 중국 사회 전체의 구조적 문제인 양극화의 문제는 여전히 해결의 전망이 보이지 않고 있다. 소득 불평등 지수인 지니계수는 0.465(지난해 ) 1년전에 비해 높아졌다. 1 가까울수록 소득 분배가 불균등함을 나타내는 지니계수는 0.4 넘으면 심각하게 불평등한 사회로 간주된다. 서민들을 절망으로 몰아 넣는 부동산 폭등이나 부의 세습 문제는 주석 집권 이후 심해졌다.   


불평등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성장도 발목이 잡힐 아니라 사회 불안의 요소가 된다. 중국의 (中國夢) 단계는 모든 인민이 의식주 문제를 해결하고 여유를 누리는 소강(小康) 사회 실현이다. 목표 시점은 주석 임기 내인 2020년이다. 양극화 해결은 소강 사회로 가는 관문이자 시진핑에게 주어진 최대의 과제인 셈이다.   

 

만연한 시진핑 개인숭배

시진핑(習近平) 신시대사상 함께 19 당대회에서양학일주(兩學一做)’ 용어가 새롭게 당장(黨章) 명기됐다. 시진핑 집권 이후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4자성어라 있는 용어는두가지 공부로 하나의 목표를 이루자 뜻이다. 두가지 하나는 당장, 다른 하나는 시진핑 동지의 중요 연설문, 시진핑 어록이다. 두가지를 공부해 훌륭한 당원이 되자는 양학일주 캠페인이다. 캠페인이 퍼지면서 8900만을 헤아리는 당원은 물론, 입당을 꿈꾸는 예비당원 대학생들까지 1 7000 분량의 당장을 열심히 베껴쓰는 운동이 일어났다. 더구나 이번 당대회에서 시진핑 사상이 당장에 정식으로 들어갔으니 공산당원들은 시진핑 사상을 달달 외울 정도가 되어야 한다. 당장 수정안을 통과시키며 발표한 결의문에서도시진핑 신시대사상으로 두뇌를 무장하고 실천을 지도하며 부분이 나온다.    

 

▲[EPA=연합뉴스]

 

시진핑 사상은 초등학교 교과서에까지 수록될 예정이다. 막연한 예상이 아니라 천바오성(陳寶生) 중국 교육부장(장관) 지난 22 기자회견에서 공언한 내용이다. 중국 교육당국의 복안으론 초등학교 56학년 때부터 시진핑 신시대사상을 가르친다는 것이다.   


물론 남녀노소 불문하고마오쩌둥(毛澤東) 어록집 상시 휴대하고 다녀야 했던 1960년대 문화대혁명기와는 비할바 아니지만, 최근의 사상 학습 캠페인은 1978 개혁개방 이후 중국 대륙에서 가장 강도가 것이다.   

이번 당대회 참가자들이 주석을 표현한 용어에서도 심상치 않은 단어들이 등장했다. 19 대표들은 시진핑에게영수(領袖)’조타수혹은총설계사 별칭을 말을 썼다. 영수와 조타수는 마오쩌둥에게 사용하던 용어다. 특히 영수란 말은개인숭배 뉘앙스가 강해 덩샤오핑 시대 이후에는 터부시 말이었으나 지난해 10 인민일보 계열의 잡지인 인민논단이 주석이 간부와 국민 사이에서 광범위하게 영수로 인정받고 있다 사용 빈도가 잦아졌다. 이번 당대회에서 주석의 핵심 측근인 차이치(蔡奇) 베이징시 서기는 공개적으로시진핑 동지는 신시대의 총설계사(디자이너)”라고 공개적으로 발언했다. 총설계사는 덩샤오핑을 개혁개방의 총설계사라고 칭할때만 쓰던 용어다.   

▲시진핑 주석의 1 숭배 현상이 강화되고 있다. [AP=연합뉴스]

 

1976 마오쩌둥 사망으로 문화대혁명이 종결된 이후 개인숭배를 모든 오류의 근원으로 보는 시각이 강했다. 개인숭배 금지는 1980년대초 제정한 중국 공산당 당내생활준칙(당장 다음 가는 규범) 명문화됐다. 지난해 6중전회 버전이 나왔지만 여전히 개인숭배 배격 조항을 유지했다.   


특히 문혁때 수난을 겪었던 세대나 가족들은 개인숭배에 대한 거부감이 강하다. 지난해 5 문혁 시기의 1 우상화 공연을 연상시키는 노래와 춤으로 채워진 10대소녀 악단 ‘56꽃송이공연에 시진핑 주석의 사진이 등장하고, 공연에 공산당 선전부가 관여한 사실이 알려지자 혁명 원로 마원루이(馬文瑞) 딸이 중앙판공청에 비판 서한을 보낸 대표적이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하지만 이런 역사적 경험에도 불구하고 1 숭배를 연상케 하는 기류들이 최근 빈번히 나타나고 있다. 이는 시기적으로 시진핑 집권기와 일치한다. 반부패 사정 등을 통해 권력이 강고해진 덕분이다. 이런 추세는 시진핑 사상의 당장 명기로 더욱 가속화될 분명하다. 민주ㆍ개방을 향해가는 시대의 흐름에 역행한다는 외부의 비판도 함께 높아질 있다. 강준영 한국외대 교수는 “1 숭배는 중국인들에게 문혁시절의 아픈 기억을 불러일으킬 있어 내부서도 우려가 있다 주석이 수위조절은 하겠지만 과도한 권력집중이 나타나면 추후 반발이 있을 있다 말했다.  

베이징=예영준 특파원, 서유진 기자 yyjune@joognang.co.kr 

 

시진핑의 자오러지, 복심 리잔수 … ‘중국 키신저왕후닝 

  상무위원 5 

시진핑(習近平) 2 체제를 이끌 지도부의 면면이 25 공개됐다. 주석과 리커창(李克强) 총리 이외에 5명의 새로운 상무위원이 이날 열린 1 중앙위원회 전체회의(1중전회)에서 선출된 것이다
  
주석의 측근 이외에도 공산주의청년단·상하이(上海) 출신 인사들이 골고루 포함돼 계파 균형을 이뤘다. 하지만 측근·()측근을 불문하고 주석과 함께 근무한 경험이나 가문 내력 주석과의 인연이 깊은 사람들로 채워진 눈에 띈다.   

 

영원한 비서실장 리잔수 
, 지방근무 때부터 30 인연 
비서실장 5 맡겨 절대신임 
밑바닥중앙 진출시와 같은 코스 

경제사령탑 왕양 
새장 비워 바꾼다등롱환조 
광둥 경제개혁, 시의 뉴노멀에 영향 
30 덩샤오핑이 직접 발탁 

최고권력의 브레인 왕후닝 
장쩌민 이후 3대째 통치자의 책사 
주석신시대 사상 완성시켜 
로브와 헨리 키신저 합친 인물 

새로운 저승사자 자오러지 
할아버지 대부터 가문과 친밀 
시진핑 1 인사부문 장악 
왕치산 후임 기율위 서기 맡을  

상하이방 대표주자 한정 
화학공장 일하다 주룽지에 발탁 
상하이 서기·시장, 시진핑과 호흡 
장쩌민계이지만 능력 인정받아  

▲중국의 새로운 상무위원 5인방, 그래픽=김주원 기자

 

시진핑의 복심 리잔수 

서열 3위의 리잔수(栗戰書) 주석의 측근 측근이다. 비서실장 격인 중앙판공청 주임을 5 내내 맡겼다는 주석의 절대 신임을 말해 준다
  
신임의 배경에는 30 청년 시절부터 쌓은 인연이 작용하고 있다. 주석이 1983 허베이(河北) 정딩(正定) 서기로 일할 주임은 인접한 우지(無極) 서기였다. 지방 근무가 처음인 주석은 나이가 위인 데다 행정 경험이 풍부한 리에게 많은 조언을 구했다. 나중에 리가 주석 일가의 고향인 산시(陝西)성으로 옮겨 것도 주석과의 인연을 깊게 하면서 집안끼리의 친분도 두텁게 했다. 30 허베이성 시골에서 맺은 인연이 지금의 중난하이(中南海)로까지 이어진 배경이 것이다
  
리잔수는 한때 베이징 중앙무대와는 거리가 삼북(三北) 간부 전형으로 통했지만 역시 그의 출세에 밑거름이 됐다. 삼북이란 화북(華北서북(西北동북(東北) 말하는 것으로 광둥(廣東상하이 동남 연안지방에 비해 낙후된 지방이다. 리는 허베이·산시·헤이룽장(黑龍江)에서만 40년간 일했고 2010 역시 낙후 지역인 구이저우(貴州) 서기로 발탁되면서 처음 삼북에서 벗어났다
  
그러는 동안 밑바닥 () 서기부터 () 서기, 성장(省長), 서기의 단계를 모두 밟았다. 주석과의 공통점이다. 18 정치국원 25 가운데 농촌 지역 서기를 거친 지도자는 주석과 주임 사람밖에 없었다. 현장과 바닥에서의 경험과 단련을 대단히 중시하는 주석의 눈에 수밖에 없는 하나의 이유였다.  


경제사령탑 왕양  

수석부총리로 경제 분야에서 계속 일할 것으로 점쳐지는 왕양(汪洋) 비교적 개혁 성향이 강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충칭(重慶)·광둥성의 서기를 차례로 거쳐 경험도 풍부한 편이다
  
광둥성 서기 왕양이 추진한등롱환조(騰籠換鳥·새장을 비워 새를 바꾼다는 )’ 정책은 낙후 산업을 퇴출시키고 첨단 기술과 고부가가치 산업을 집중 육성한다는 전략이다. 2008 세계 금융위기 당시 그는시대에 뒤처진 기업을 억지로 살려선 된다 발언하기도 했다. ‘광둥 모델 불린 왕양의 정책은 다른 지방 간부들이 줄지어 견학을 위해 방문하는 벤치마킹 대상이 되기도 했다. 주석이 현재 역점을 두는 중성장시대의 구조 개혁 정책인 뉴노멀(新常態·신창타이) 경제전략을 10 이상 앞당겨 시행한 셈이다
  
안후이(安徽)성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왕양은 식품공장 노동자 생활을 하면서 공산주의청년단에 들어가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지방 시장을 하던 90년대 초반부터 과감한 개혁 성향을 보였다. 당시의 최고지도자 덩샤오핑(鄧小平) 30대의 젊은 지방 간부인 왕양을 직접 불러 면담하고 격려한 유명한 일화다. 이후 38세에 안후이성 부성장에 등용되는 고속 승진의 길을 달렸다
  
시진핑 1 체제에선 국무원 부총리로 농업과 대외무역을 맡았다. 주석이 역점을 빈곤 퇴치 대책을 총괄하면서 주석과의 접점도 많이 생겨났다. 4 · 정상회담의 결과로 창설된 · 경제대화에 수석대표로 참석하는 국제적 활동의 폭도 넓히고 있다
  
방한 경력도 차례에 이른다. 2009 광둥성 서기 시절 외교부 초청으로 방한했고, 2015년에는 중국 방문의 사절로 한국에 ·재계 지도층 인사들을 두루 만났다.  


중국의 키신저 왕후닝  

왕후닝(王滬寧) 서열 5 상무위원 진입은 공산당의 정통 엘리트가 아닌 학자 출신이란 점에서 이례적인 발탁으로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이미 장쩌민(江澤民) 국가주석 시절부터 3(장쩌민-후진타오-시진핑) 중국 최고권력자의 책사(策士) 역할을 하며 중국 공산당의 통치 철학을 만들어 왔다는 점에서 그의 비범함을 엿볼 있다
  
왕은 29세에 상하이의 명문 푸단(復旦) 조교수, 33세에 정교수가 중국 정치학계의 기대주였다. 교환교수로 1년간 미국 생활을 했지만 학문 성향은 서구 민주주의 체제에 비판적이다. 그는 중국과 같은 변혁기의 국가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정치체제 안정이 가장 중요하다는()권위주의입장의 대표 격이었다. 이를 눈여겨본 장쩌민은 95 왕을 중앙정책연구실로 불러들여 ‘3 대표론(三個代表論)’ 완성하는 핵심 역할을 맡겼다. 공산당이 타도할 대상이었던 자본가는 이론에 따라 공산당에 입당할 있는 길이 열렸다. 장쩌민의 후임 후진타오(胡錦濤) 자신의 통치 이론인과학적 발전관 완성하는 임무를 왕에게 맡겼다. 이번 당대회에서 주석이 내건신시대 사상 왕에 의해 완성됐다고 봐야 한다
  
평소 주석의 연설 원고와 중요 발언도 왕의 손을 거쳐 나온다. 주석의 정상회담과 주요 국내 회의에 반드시 왕이 배석하는 이유다. 당내 사정에 밝은 관계자는정치국 회의가 소집되기 며칠 정치국원들을 대상으로 사전 브리핑이 열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사전에 의견을 조율하기 위한 것인데 이를 주도하는 사람이 왕후닝이라고 전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 로브(조지 W 부시 대통령 시절의 책사) 헨리 키신저를 합친 인물이라고 왕을 평가하기도 했다.   


시진핑의 자오러지   

서열 6위에 오른 자오러지(趙樂際) 시진핑 1 체제에서 누구보다 바쁜 나날을 보냈다. ‘저승사자왕치산(王岐山) 이끄는 중앙기율검사위원회가 호랑이든 파리든 가리지 않고 부패 관리를 적발하고 나면 결원을 메우는 인사 후속작업은 자오가 이끄는 중앙조직부의 몫이었기 때문이다. 왕치산이 물러난 자오가 왕의 후임 기율위 서기를 맡는 것은엄정한 관리 양대 축인 조직부와 기율위의 업무 연관성을 고려할 당연한 수순처럼 보인다. 그는 중앙순시영도소조 부조장을 겸임하며 조장인 왕치산과 긴밀하게 협조했다. 쩡칭훙(曾慶紅허궈창(賀國强) 조직부장이 상무위원으로 발탁된 전례도 적지 않다
  
혁명가 2 출신인 그는 오랫동안 서북 변경인 칭하이(靑海)성에서 경력을 쌓았다. 그가 42세에 칭하이 성장, 46세에 칭하이 서기에 오른 것은 모두 전국 최연소 기록이었다. 자오의 가문은 시진핑의 가문과 혁명으로 인연을 맺은 관계다. 할아버지 자오서우산(趙壽山) 주석의 부친인 시중쉰(習仲勳) 부총리와 서북 지역에서 함께 일했고, 16세에 혁명에 가담했던 부친 자오시민(趙喜民) 시중쉰의 부하였다
  
고향도 같은 산시성이다. 2007 산시성 서기로 옮긴 자오러지는 푸핑(富平)현에 있던 시중쉰 묘를 말끔하게 단장하고 기념관을 조성하는 성역화 사업을 추진했다. 청년 시진핑이 문화대혁명 기간에 7 동안 하방(下放) 생활을 량자허(梁家河)촌의 성역화에 앞장선 것도 자오러지다
  
산시성 서기 재직 시절 그의 업적 가운데 하나가 시안(西安) 삼성전자 반도체공장을 유치하고 건설에 착수한 것이다. 이로 인해 한국 기업인들과도 교류가 잦았다.   


상하이방 대표주자 한정   

현직 상하이 서기인 한정(韓正) 42년간의 공산당 경력을 모두 상하이에서 보냈다. 두세 곳의 지방 근무를 거치게 하는 중국 공산당의 인재 양성 시스템에서 이례적인 존재다. 그에게는 자연스레 장쩌민 주석 계열의상하이방()’이란 꼬리표가 붙었다

청년 시절 창고관리원과 신발공장 근무 밑바닥에서부터 사회생활을 시작한 그는 주경야독으로 야간 대학을 졸업한 자수성가형이다. 그를 발탁한 사람도 장쩌민 계열인 주룽지(朱鎔基) 총리였다. 87 상하이 서기 시장이던 주룽지가 화학공장 시찰에 나섰을 당시 부공장장이던 한정을 눈여겨보고 상하이시의 공청단 간부로 발탁한 것이다. 이후 상하이 인민대표 역대 최고 득표율, 최연소 상하이 시장 등의 기록을 세웠다
  
하지만 주석과의 접점도 예사롭지 않다. 2007 천량위(陳良玉) 실각사건 직후 상하이 서기로 부임해 주석의 밑에서 시장으로 일하며 7개월간 호흡을 맞췄다. 주석 집권 후에는 간부 가족들의 이권 개입을 엄격하게 통제하는 규정을 선제적으로 만들었다. 이는 주석이 강조하는엄정한 관리(종엄치당)’ 모범으로 인정받았다. 상하이방 색깔이 짙어 불리할 것이란 예상을 깨고 그가 상무위원에 발탁된 이유로 풀이된다
  
상하이를 방문한 한국 요인들과도 접촉이 많았다. 그를 만나 사람들은예의 바르고 곧은 사람이란 인상을 받았다기업체 관리자 경험이 있어 기업문화를 이해하는 이라고 말했다


시진핑의 인맥지도와 용인술  - 중국 공산당에 새로운 계파가 탄생했다

깡촌서 토굴생활하던 시진핑 1인자로 만든 '측근 지도'

 親시진핑 세력, 공산당 4계파 '시자쥔' 형성
새로 선출된 정치국 25 14명이 시자쥔
시진핑 측근인 리잔수는 서열 3 등극


당의 요직을 분점해 전통의 공청단파와 상하이방() 태자당에 이은 4 계파라 부를만 하다. 수적으론 열세지만 파워는 나머지 파벌을 합친 것보다 세다.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의 친위군단을 일컫는시자쥔(習家軍)’얘기다. 최근엔시파이(習派)’ 부르기도 한다.   

 

▲시진핑 집권 2기를 이끌 중국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 7명이 25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기자회견에 참석했다. [신화=연합뉴스]

  
2012 공산당 1인자가 때만 해도 주석은 당내 인맥이 두텁지 않았다. 젊은 시절부터 줄곧 지방에서만 근무한 데다 후야오방(胡耀邦)-후진타오(胡錦濤)-리커창(李克强) 이어져 공청단(공산주의 청년단) 출신이나 장쩌민 (江澤民)이후 중앙에 세력을 형성한 상하이방처럼 든든한 정치적 배경이 없었던 탓이다. 대신 주석은 지방 근무시절 끈끈한 관계를 맺었던 부하들을 차례로 발탁해 올렸다. 이들이 당ㆍ정ㆍ군ㆍ지방의 요직을 차지하면서 새로운 세력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25 선출된 정치국 25 가운데 14명이 시자쥔으로 분류된다.   

 

▲그래픽=심정보 shim.jeongbo@joongang.co.kr

 

▲시진핑 이력과 인맥

  
시자쥔의 형성은 시진핑의 인생 역정이나 정치 행로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주석은 청소년 시절을 산시성 량자허(梁家河) 깡촌에서 토굴 생활을 하며 보냈다. 문화대혁명기 베이징의 지식청년들을 농촌으로 내려보낸상산하향(上山下鄕)’운동에 합류한 것이다. ()부패 사정을 주도하며 시진핑 1 체제를 떠받친 왕치산(王岐山) 기율위 서기와의 반세기 인연은 시작됐다. 주석은 이웃 마을에 배치된 왕의 토굴을 찾아가 책을 빌려보고 밤새워 인생상담을 했다

 

▲왕치산 중앙기율위 서기

  
대학졸업후 중앙군사위 판공실에서 잠깐 일한 지방근무를 자청한 주석은 허베이성 정딩(正定) 부서기로 내려갔다. 서열 3위의 상무위원에 오른 리잔수(栗戰書) 중앙판공청 주임과는 여기서 만났다. 지방 근무가 처음인 주석은 이웃 서기인 리에게 많은 조언을 구했다

 

▲리잔수(栗戰書·67) 상무위원

  
주석은 3 푸젠성으로 내려가 17년을 일하는 동안 차이치(蔡奇)베이징 서기, 황쿤밍(黃坤明)선전부 부부장, 허리펑(何立峰) 국가발전개혁위 주임 시자쥔의 주축 인물들과 인연을 맺었다. 쉬치량(許其亮) 중앙군사위 부주석 군내 인맥도 넓혔다
  
가운데 차이치와 황쿤밍의 운명은 특히 흥미롭다. 공직 입문이래 줄곧 푸젠에서만 근무하던 사람은 1999 저장(浙江)성으로 옮겨갔다. 과성(跨省)교류, 지방간 인사교류를 권장한 중앙의 방침에 따라 푸젠성과 저장성이 지방 간부를 명씩 맞바꿨기 때문이다. 그들은 3년뒤인 2002 저장 서기로 승진해 주석과 재회했다. 주석과의 친밀도는 갑절로 깊어졌다. 재미있는 사실은 저장으로 옮긴 사람은 주석 집권 이후 출세가도를 달려 이번에 정치국원이 됐지만, 반대로 저장에서 푸젠으로 옮겨간 사람의 공직생활은 평범했다


▲천민얼 충칭 서기

 

주석은 저장에서 또한번 측근 인맥을 넓혔다. 천민얼(陳敏爾) 충칭 서기, 리창(李强) 장쑤 서기, 잉융(應勇) 상하이 시장, 중산(鐘山) 상무부장, 멍칭펑(盟慶豊) 공안부 부부장 열거하기 힘들 정도다. 이중 서기는 새로 부임해 주석 명의로 4년간 232편의 신문 칼럼 연재를 기획하고 책임졌다. 
  
주석은 2007 상하이로 당서기로 재직한 7개월의 짧은 기간에도 측근 부하를 만들었다. 이번에 정치국원이 딩쉐샹(丁薛祥) 중앙판공청 부주임과 양샤오두(楊曉渡) 기율위 부서기가 대표적이다.   

 

▲딩쉐샹 중앙판공청 부주임

  
시진핑은 10년전의 17 당대회에서 상무위원으로 발탁되면서 25년간의 지방 근무를 마치고 베이징으로 올라왔다. 차기 지도자로 낙점된 그에게 국가부주석겸 중앙당교 교장 보직이 주어지자 당교 평교수이던 리수레이(李書磊) 놓치지 않고 연설문 담당으로 발탁했다. 리는 14 나이에 베이징 대에 합격해 신동으로 유명했지만 당의 엘리트 코스와는 거리가 상태였다. 리는 이후 푸젠성 선전부장, 베이징 부서기를 거쳐 이번에 기율위 부서기로 발탁됐다. 주석의 배려가 있었음은 물론이다

 

(6) 광속도로 시진핑 1인체제 구축

중국 공산당 대회가 끝나기 무섭게 시진핑(習近平)  1 권력을 강화하는 조치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중국 개혁개방 이래 40 가까이 확립된 집단지도체제를 허무는 조치들이다. 이와 함께 발빠른 후속인사로 상하이방과 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 다른 계파의 색채가 짙었던 상하이와 광둥(廣東)성까지 시진핑 친위세력인시파이(習派)’들이 장악하기 시작했다.

시진핑 이외 용은 없다...2인자 리커창도 시진핑에 보고 의무화
최고 지도부 7 상무위원 대등관계 깨고 상하관계 명확히

 

▲시진핑 집권 2기를 이끌 중국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 7명이 25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기자회견에 참석했다. 시진핑 국가주석(가운데) 리커창 국무원 총리(오른쪽 셋째) 유임됐고 나머지 5명은 새로 선출됐다. 왼쪽부터 한정 상하이시 당서기, 왕후닝 중앙서기처 서기, 리잔수 중앙판공청 주임, 주석, 총리, 왕양 국무원 부총리, 자오러지 중앙기율검사위원회 서기.[신화사=연합뉴스]

 

시진핑 2 체제에 접어들면서 상무위원 7명은 이상 대등한 권한과 권력을 나눠 갖는다고 말할 없게 됐다. 주석은 지난 27 지도부 확립후 정치국 회의를 열어 중앙 집중영도 강화 호위에 관한 약간의 규정 통과시켰다. 여기에는 정치국원 25 전원이 총서기인 주석에게 매년 서면으로 업무보고를 하도록 했다. 과거에 없던 일이다. 서열 2위인 리커창(李克强) 총리든 누구든 예외가 없다. 

 

덩샤오핑(鄧小平) 설계한 집단지도체제 아래에서 총서기는 상무위원회를 소집할 있는 권한만 가질 표결ㆍ발언권은 나머지 상무위원들과 동등했다. 분공제(分工制) 하여 각각의 상무위원들이 담당하는 고유 업무 분야에 대해서는 총서기조차 관여할 없었다. 후진타오(胡錦濤) 집권기엔 9명의 상무위원들 사이에 이런 전통이 지켜져구룡치수(九龍治水)’ 용어가 나왔다. 하지만 앞으로는 주석 이외의 다른 용은 존재할 없게 됐다.   

 

▲중국 공산당 중앙 정치국 구조


강등인사도 불사한 시진핑 용인술

19 공산당 대회 인사에서는 예전에 보지 못하던 강등 인사도 나왔다. 18 정치국원이던 류치바오(劉奇보<艸머리 아래 >64) 중앙선전부장과 장춘셴(張春賢ㆍ64) 당건설공작 영도소조 부조장이 204명의 중앙위원 명단에는 이름을 올렸으나 25명의 정치국원 명단에선 제외된 것이다. 정치국원에서 중앙위원으로 강등된 것으로 여태까지 공산당 인사에서 전례가 없던 일이다. 1980년대 후야오방(胡耀邦) 총서기가 정치국원으로 강등된 적이 있으나 이는 사실상의 정치적 실각으로 이번과는 성격이 다르다.   

 

차기 지도자 꼽히던 후춘화 향후 5 가혹한 시련 예상

류ㆍ장 사람 모두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의()호감계파 출신이란 점이 공통점이다. 부조장은 장쩌민 계열로 분류되며 정치적 비중이 신장(新疆)자치구 서기로 있다 관할 인터넷 매체에시진핑 퇴진촉구 서한 게재된 이후 자리를 옮겼다. 부장은 대표적인 공청단 중앙 출신이다. 반면 그의 아래 있던 푸젠ㆍ저장 출신의 주석 측근 황쿤밍(黃坤明) 부부장은 이번에 정치국원으로 발탁돼 선전부장에 오를 것이 확실시된다. 주석은능력에 따라 파격승진도,  강등인사도 모두 가능하다능상능하(能上能下)’원칙을 내세웠으나 공산당 고위간부인 정치국원에 대해 강등인사를 단행한 이번이 처음이다.   
  
이밖에 정치국원을 차례 연임했던 리위안차오(李源潮) 국가부주석은 아예 중앙위원에도 오르지 못했다. 공청단 1서기 출신의 그는 아직 정년 연령에는 이르지 못했음에도 사실상 퇴진의 길을 걷게 됐다.  

 

▲후춘화 광둥성 서기


이는 이번에 상무위원으로 승진하지 못하고 정치국원으로 연임하게 후춘화(胡春華) 정치적 장래에도 시사점이 있다. 그는 광둥 서기를 떠나 베이징으로 올라와 국가부주석이나 부총리를 맡게 전망이다. 만약 5년후 그가 상무국원에 오르지 못하면 리위안차오의 전례를 따르게 있다. 한때 강력한 차기 지도자감으로 여겨지던 후춘화에게 시진핑 2기체제 5년은 시련과 도전의 기간이 전망이다.   
 

 

(7) 거침없는 외교 

마오쩌둥이 96 창당한 곳에서 공산당 입당선서 다시 외친 시진핑

상무위원 6명과 상하이·난후 방문
중화민족 승리의 운항 위해 분투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비롯해 진용을 갖춘 공산당 상무위원 7 전원이 지난달 31 입당선서를 했다. 불끈 오른 주먹을 들어 올리고 주석의 선창에 따라 나머지 상무위원이 선서문을 복창하는 장면이 TV에도 방영됐다. 이미 당의 최고 직위에까지 오른 이들이 수십 했던 입당선서를 반복한 것은 이날 중국 공산당의 창당대회 장소를 단체로 찾았기 때문이다
  
주석을 포함한 7명의 정치국 상무위원 전원은 지난달 31 상하이의 창당대회 개최지와 이웃 저장(浙江) 자싱(嘉興) 난후(南湖) 방문했다. 중국 최고 수뇌부인 상무위원들이 이렇게 단체로 난후를 찾아가 선서를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중국 공산당은 96 전인 1921 7 당시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지 건물에서 마오쩌둥(毛澤東) 13명이 참석한 가운데 비밀 창당대회(1 당대회) 열었다. 당대회 기간 경찰 당국에 적발되자 자싱으로 탈출한 호수 유람선에서 선상 연회를 하는 위장하며 대회를 속개했다. 창당 당시 전국의 당원은 53명이었던 것이 96 만에 8900 명에 이르는 초대형 정당으로 발전했다
  
주석이 이곳을 찾은 이유는 그의 정치 슬로건인초심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입당선서를 재연한 창당 이래 96년간 우리 당은 세계가 괄목할 만한 위대한 성취를 했고 이는 자부심을 가져도 만하다. 하지만 우리의 사명은 끝이 없기에 초심을 잃어서는 된다 강조했다. 그는 이어초심을 잃지 않고 분투해야만 중화민족 위대한 부흥의 배가 풍랑을 헤치고 빛나는 목적지를 향해 승리의 운항을 있다 말했다. 시진핑 2 지도부 출범 후의 단체 활동은 주석이 내건사회주의 현대화 강국 실현을 위해 공산당 통치 체제를 더욱 강화할 것임을 예고한 행보였다. 또한 주석이 상무위원 6명을 대동한 모습은시진핑 1 천하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줬다.  


· 도광양회 사라진 중국 외교 어디로 가나

▲중국 공산당 19 대회를 앞두고 베이징전람관에서 열린 업적 전시회 외교 분야의 성과를 모은 전시관. 대국외교, 인류운명공동체 시진핑 외교의 주요 캐치프레이즈들을 모았다. [사진=신경진 기자]

 

1989 9 피로 물든 6·4 천안문 사건을 수습한 덩샤오핑(鄧小平) 장쩌민(江澤民리펑(李鵬) 원로를 모두 집으로 불렀다. “첫째, 냉정하게 관찰하시오(冷靜觀察), 둘째, 내부 진영을 공고히 하시오(穩住陣脚). 셋째, 침착하게 응대하시오(沈着應付). 서둘지 말고. 절대로 조급하면 안되오.” 이듬해 여기에 12절대로 선두에 서지 말라(決不當頭)” 당부를 보탰다. 92 4월에는칼집의 칼을 드러내지 말고 힘을 기르며(韜光養晦·도광양회) 여러 해를 보내라 덧붙였다. 덩샤오핑의 외교 철칙이자 개혁개방 40 내내 중국 외교의 지침이었다.


신시대 내세운 시진핑(習近平) 주석은 덩샤오핑 외교의 종언을 선언했다

선두 서지 말라덩샤오핑 유훈 버리고 선두국가 선언
상호존중·공평정의·협력공영내세운 신형국제관계 주창

도광양회 뿐만 아니라 선두에 서지말라는 지시도 버렸다. 주석의 말은 거칠다. 국가부주석이던 2008 베이징 올림픽을 앞두고시끄럽게 우는 새를 들어내면 새장은 조용해진다 무관용을 말했다. 2009 멕시코에서는중국은 혁명도, 가난을 수출하지 않았는데 배부르고 없는 외국인이 간섭한다 말했다. 이번 대회 보고에서는 어떤 나라도 중국이 자신의 이익에 손해를 끼치는 열매를 삼킬 것이라는 헛꿈은 버려야 한다 경고했다.  
 
2008 글로벌 금융위기를 거치며 주요 2개국(G2) 인정받은 중국은 적극적인 외교로 전환했다. 시진핑 외교는 분발유위(奮發有爲·떨쳐 일어나 해야할 일은 하겠다) 나아갔다. 뉴쥔(牛軍) 베이징대 국제관계학원 교수는지난 5 중국 외교의 커다란 차이는 지도사상의 변화라며과거 도광양회가 유소작위(有所作爲·때가 되면 일부 공헌을 한다) 변했고 심지어 분발유위가 됐다 평가했다. 주석은 이번 대회에서 지난 5 외교를 평가하며중국 특색의 대국외교를 전면적으로 추진했다 일대일로(·해상 실크로드) 건설 등을 주요 업적으로 내세웠다.


▲중국 공산당 19 대회를 앞두고 베이징전람관에서 열린 업적 전시회 외교 분야의 성과를 모은 전시관. 대국외교, 인류운명공동체 시진핑 외교의 주요 캐치프레이즈들을 모았다. [사진=신경진 기자]

 

주석은 여기에 5 18대에서 처음 등장한 신형대국관계를 신형국제관계로 발전시켰다


쑤거(蘇格) 중국국제문제연구원장은신형국제관계의 정의는 상호존중·공평정의·협력공영이라며전통적인 약육강식, 제로섬 게임을 버리고 일률적으로 평등한 새로운 국제관계를 건립하자는 이라고 해석했다. 성균중국연구소는중국이 세계 강대국으로 부상하면서 미국 대국관계를 자극하지 않으려는 전략적 의도라고 풀이했다.

주석은 여기에 세계를 대국·주변국·개발도상국으로 나누는 천하 삼분론을 내세웠다. “총체적으로 안정되고 균형적으로 발전하는 대국관계, 친밀·성실·호혜·포용 이념의 주변 나라와의 관계 심화, 올바른 의리관과 진지·진실·친근·성실의 이념으로 개발도상국과 협력 강화 언급했다.


거침없는 시진핑 외교의 목표는 건국 100주년인 2049 종합 국력과 국제 영향력에서 세계 선두국가 건설이다. 덩샤오핑 시대 외교는 찾을 없다. 주석은 당헌에 자신의 이름을 마오쩌둥(13) 덩샤오핑(12) 이어 11 명기하면서 외교 부분도 쇄신했다. 정확한 의리관, 인류운명공동체 건설, 공동협상·공동건설·공동향유 원칙, 일대일로가 새롭게 당헌에 기입됐다. 자신이 외교 공약을 과감하게 추진하라는 지시인 셈이다.


그러자 미국이 견제에 나섰다. 중국 19 개막 직후 렉스 틸러슨 미국 국무장관은인도와 100 군사·경제·외교 동반자관계를 지속발전시키겠다 인도와 동맹 강화 의지를 밝혔다. 트럼프 행정부는미국-일본-인도-호주’ 4개국이 연대하는 인도양-태평양 신전략 계획을 내놨다. 추이톈카이(崔天凱) 주미 중국대사는 즉시어떤 나라도 중국을 봉쇄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강하게 비판했다.


주석은 이번 상하이ㆍ광둥 인사로 차이치(蔡奇) 베이징, 천민얼(陳敏爾) 충칭, 리훙중(李鴻忠) 톈진과 함께 중국 31 성ㆍ직할시 가운데 가장 중요한 지방 5곳을 모두 자신의 핵심 측근들로 채우며 친정체제를 굳혔다. 덩샤오핑 이래 어느 집권자도 못했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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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