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이야기7/ 중국의 패권주의 - 시안서 본 ‘일대일로(一帶一路) 전략’ - 중국은지금 어지로 가고 있는가 - 중국의 거악
중국 이야기7/ 중국의 패권주의 - 시안서 본 ‘일대일로(一帶一路) 전략’ - 중국은지금 어지로 가고 있는가. - 중국의 거악
■중국의 패권주의
◆2016년 04월 06일 실크로드 기점 시안서 본 ‘일대일로(一帶一路) 전략’
▲ 실크로드의 기점인 시안을 대표하는 문화유적 병마용
이강국 / 駐시안 총영사
시안(西安)에서 동북쪽으로 세 시간 정도 고속도로를 달리면 한청(韓城)시에 도착할 수 있다. 한청은 한국(韓國)의 ‘한(韓)’자가 서로 같아 우리에게 친근하게 느껴지는데, 역사의 성인이라고 불리는 사성(史聖) 사마천(司馬遷)의 고향이다. 황허(黃河)강이 바로 내다보이는 야산인 배산임수의 명당에 사마천 사당이 자리하고 있다. 사마천은 정치적인 이유로 궁형(宮刑)을 당하는 아픔 속에서 역사의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 ‘사기(史記)’를 저술했다. 이때는 한(漢)나라의 최전성기로 실크로드를 개척한 한 무제(武帝)의 집정 시기이다.
◇실크로드 길의 개척= 한 무제는 흉노에게 패한 대월지와 연합해 흉노를 제압하고 서역으로 통하는 교통로를 확보하길 원했다. 군사 동맹을 맺기 위해 파견된 사신 장건(張騫)은 갖은 고생 끝에 대월지에 가서 흉노를 치자고 대월지 왕을 설득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비옥한 땅에서 풍요를 누리고 있었던 대월지로서는 굳이 한나라와 동맹하여 흉노를 공격할 까닭이 없었다. 그렇지만 장건의 여행은 헛되지 않아 그의 서역에 관한 정보 보고는 한나라가 대외 정책을 세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를 바탕으로 한나라의 영토 확대와 서역 개척에 지대하게 공헌한 인물이 바로 곽거병이다. 또 당 현종 때 안서도호부 부절도사로서 고구려 유민의 아들인 고선지는 힌두쿠시 고원의 험준한 길을 타고 파미르 고원을 넘어 서역을 정벌했다.
◇문명 교류의 길, 실크로드 = 실크로드는 동양과 서양을 잇는 문명 교류의 길로 경제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종교적으로도 중요하다. 당나라 태종 때 현장 법사는 갖은 고생을 하면서 천신만고 끝에 인도에 들어가서 구법을 하고 많은 진귀한 불교 경전을 가지고 실크로드를 통해 장안으로 돌아왔다. 인도 모디 총리가 자신의 고향이자 현장법사가 들렀던 곳 가운데 하나인 구자라트에서 시진핑(習近平) 주석을 맞이했을 때, 시 주석도 자신의 고향인 시안에서 영접하겠다고 말했는데, 약속대로 2015년 5월 시안에서 맞이하면서 대자은사(大慈恩寺)와 대안탑은 그 옛날 현장법사가 불경을 가져와 번역했고 불경을 보존한 곳이라고 설명했다. 혜초는 해상 실크로드를 따라 인도에 가서 순례하고, 험난한 서역의 길을 돌아 육상 실크로드를 통해 당나라 장안으로 왔으며,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이라는 불후의 기행문을 남겼다.
중국 역사상 가장 국제적이고 개방적이었던 왕조인 당나라의 수도였던 장안에는 동시(東市)와 서시(西市) 등 두 개의 시장이 자리 잡고 있었다. 권문세가들이 동쪽에 거주하고 있었던 만큼 동시가 주로 고관들을 대상으로 하는 국내시장이었다면 서시는 실크로드를 통한 국제무역의 중심지였다. 서시가 있었던 곳을 대당서시(大唐西市)라는 실크로드 문화산업단지로 복원해 많은 사람의 관심을 끌고 있으며, 작년에 주시안한국총영사관은 이곳에서 시안-한국문화 주간 행사를 개최해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널리 알렸다.
◇시진핑, 일대일로 전략 추진 = 2012년 말 제18차 당 대회에서 중국의 지도자가 된 시 주석이 일성으로 꺼낸 것이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의 중국의 꿈(中國夢)’이며, 이를 실현하기 위해 제시한 것이 신실크로드 정책인 일대일로(一帶一路, 육·해상 실크로드) 전략이다. 이는 중국 내륙지역 개발과 주변국 개발을 연계하고, 중앙아시아·동남아시아·중동 및 유럽까지 60여 개 연선 국가들을 인프라로 연결하고자 하는 거대한 개발 계획이다.
현재 중국의 일대일로 전략은 중앙정부가 구상하고 지방정부들이 구체적인 프로젝트를 만들어가면서 입체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시 주석은 파키스탄을 방문해 460억 달러의 경협 프로젝트를 추진하기로 해 ‘중국-파키스탄 경제회랑’ 구축에 탄력을 불어넣고 있다. 2013년 10월 시 주석이 설립 구상을 공식 제안한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도 일사천리로 진행돼 올해 1월 16일 베이징(北京)에서 개소식을 함으로써 공식 출범했다.
◇한국, 일대일로 전략 활용 = 일대일로 전략을 통해 앞으로 거대한 인프라 사업이 진행될 것이며, 도로·철도·항만 등 기초 인프라뿐만 아니라 통신 설비·정보기술(IT) 서비스 등 다양한 분야에서 한국 기업들에 진출 기회가 열릴 수 있다. 한국의 가장 큰 교역, 투자 대상 국가인 중국이 추진하는 일대일로 전략을 타면서 국익을 창출해 나가야 한다. 일대일로는 피할 수 없는 흐름이며, 이를 우리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중앙아시아, 이란 등 일대일로 전략 대상 지역 환경에 대한 다각적인 관찰과 면밀한 활용 전략을 마련해 나가야 한다. 유라시아 이니셔티브와 접목하면서 외교 영역을 확대하고, 문화 영토를 넓히며, 경제 진출의 활력을 배가해 나가야 한다.
문화일보
◆2016년 07월 12일 “시진핑, 남중국해 전투태세 명령”… 美·中 대치 일촉즉발
중재안 오늘 선고… 긴장 고조
中매체 군사소식통 인용 보도
“남부戰區 1급 전쟁 준비태세
남해함대·공군 전쟁직전상태”
美 항공모함 필리핀서 대기중
‘强 대 强’ 대립 격화될 가능성
중국과 필리핀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남중국해 영유권 문제에 대한 상설중재재판소(PCA)의 판결이 12일 오후(이하 한국시간) 내려질 예정인 가운데, 이번 판결이 분쟁 해소의 계기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관련국들의 갈증과 역내 긴장의 심화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특히 PCA가 중국 측에 불리한 판단을 내릴 것이란 관측이 지배적임에 따라 중국이 판결에 반발해 남중국해 군사거점화 등 영유권 강화를 위한 활동을 더 적극적으로 실시할 경우 필리핀, 베트남 등 관련 국가들뿐만 아니라 미국과의 마찰도 극에 달할 것으로 보인다.
네덜란드 헤이그에 위치한 PCA는 이날 오후 6시쯤 필리핀이 지난 2013년 중국을 상대로 제기한 중재안에 대한 심의를 마무리하고 판결을 내릴 예정이다. 이번 PCA 판결의 핵심 쟁점은 크게 두 가지다. 문제가 된 남중국해 영유권이 어느 나라에 있느냐는 것과 인공섬 매립과 같은 중국의 남중국해 영유권 강화 조치가 적절한지 여부다.
전문가들은 PCA가 이번에 영유권에 관해선 판결하지 않고 중국의 남중국해 영유권 강화 조치에 대해서만 위법 판결을 내릴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중국은 그동안 ‘구단선(九段線)’을 명분으로 남중국해 영유권을 주장해 왔으며, 따라서 인공섬 조성도 합법적인 영유권 활동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구단선은 중국이 남중국해 해역과 해저에 대해 영유권을 주장하기 위해 남중국해 주변을 따라 그은 U자 형태의 9개 선으로 남중국해 전체 해역의 90%를 차지하고 인접한 필리핀, 베트남, 말레이시아 등 여러 국가의 배타적경제수역(EEZ)과 겹친다.
중국은 구단선이 PCA 판결의 근거가 되는 유엔해양법협약(UNCLOS) 발효(1994년) 이전인 1953년에 확정된 것인 만큼 PCA 중재재판의 대상이 아니라고 맞서고 있다.
이번 판결에 대한 중국의 강경 대응이 전망되고 있어 판결 자체의 내용뿐만 아니라 향후 중국과 그 주변국 및 미국 간의 마찰이 어떤 국면으로 이어질지도 주목되고 있다. 특히 PCA의 판결과 관계없이 중국은 남중국해 영유권을 강화하기 위해 각종 군사적 조치를 강화하고 있다.
미국에 서버를 둔 중화권 매체 보쉰(博迅)은 이날 베이징(北京) 군사소식통을 인용,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 겸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이 PCA에서 중국에 불리한 판결이 나올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최근 인민해방군에 전투준비태세를 명령했다고 보도했다. 이에 중국 남부 전구(戰區)는 이미 1급 전쟁준비태세에 들어갔으며 남해함대와 로켓군, 공군은 전쟁 직전 상황인 것으로 전해졌다.
앞서 지난 9일 중국 CCTV는 남중국해 파라셀 군도(중국명 시사(西沙) 군도)에서 실시한 대규모 군사훈련 영상을 공개했다. 또 실효적 지배 상태임을 주장하기라도 하듯 지난 11일에는 스프래틀리 군도(중국명 난사(南沙) 군도)의 4개 인공섬에 등대를 가동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PCA 판결에 따라 아세안(동남아국가연합)과의 협력을 이어가면서 대(對)중국 압박을 강화할 전망이다.
특히 미국 태평양함대 소속 존 C 스테니스호와 로널드 레이건호 등 항공모함 2척은 현재 남중국해와 가까운 필리핀 동쪽 해역에서 대기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따라서 이번 판결 후 중국과 미국의 군사적 대치가 이뤄지면 남중국해는 동남아의 화약고로 변질될 우려도 있다.
박준희 기자 vinkey@munhwa.com
◆2016.07.14 "중국, 天安門 사태 이후 최대 외교적 타격"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
남중국해 영유권 완패 후폭풍… 美·中 갈등 최고조로
- 中, 이지스함 배치해 군사 시위
방공식별구역 선포 가능성 경고… 美 겨냥 "法 빙자한 정치광대극"
- 美, 재판 결과 환영하며 압박
"우리가 눈감는 일은 없을 것… 판결은 최종적이고 구속력 있어"
미국과 중국이 13일(현지 시각) 남중국해 영유권 관련 판결을 둘러싸고 정면으로 충돌했다. 네덜란드 헤이그의 필리핀·중국 중재재판소는 전날인 12일 남중국해에 대한 중국의 영유권 주장이 법적 근거가 없다고 판결했다.
대니얼 크리튼브링크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아·태 담당 선임 보좌관은 이날 싱크탱크인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 토론회 주제 발표를 통해 "우리는 어떤 다른 분야의 협력에 대한 대가로 이 필수적인 수로에 대해 눈을 감는 일을 절대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모든 국가가 크기나 힘에 관계없이 법에 따라 동등한 권리를 누려야 한다"며 "우리는 중재재판소가 제시한 것처럼 외교적 절차와 평화적인 방법을 지지한다"고 말했다.
▲13일 필리핀 마닐라만(灣)에서 일본과 필리핀의 해양경비대가 해적선 추적 합동 훈련을 펼치고 있다. 전날인 12일 헤이그의 상설중재재판소가 중국의 남중국해 영유권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판결을 내린 이후 동아시아에 군사적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EPA 연합뉴스
존 커비 국무부 대변인은 판결 직후 성명을 통해 "국제해양법 조약에 가입할 때부터 당사국들은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강제 분쟁 조정에 동의한 것이다. 이번 판결은 최종적이고, 중국과 필리핀 양쪽 모두에 구속력이 있다"며 중국을 압박했다.
중국 외교부는 미국에 대한 비난을 쏟아냈다. 추이톈카이 주미(駐美) 중국 대사는 크리튼브링크 보좌관 주제 발표 직후 연단에 올라 "이번 중재 판결은 선의가 아닌 분명한 정치적 목적에 따라 이뤄졌다"면서 "어떤 압력에도 굴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오바마 대통령의 소위 '아시아 중시 정책' 이후 남중국해 긴장이 높아졌다"며 "미국은 그럴 힘이 있으면 중동(中東) 문제 해결에나 치중하라"고 했다.
왕이(王毅) 외교부장도 성명에서 "이번 판결은 영유권 분쟁의 직접적인 당사자가 아닌 국가에 의해 통제되고 조작됐다"며 "법을 빙자한 정치 광대극"이라고 미국을 정면 겨냥했다. 루캉(陸慷) 외교부 대변인도 발표문에서 "미국은 자신에게 이익이 되면 국제법을 내세우고 안 맞으면 버리는 이중적 태도를 갖고 있다"며 "남에게는 유엔해양법협약 준수를 촉구하면서 정작 스스로는 협약에 가입조차 않고 있다"고 비판했다.
▲13일 중국남방항공 소속 여객기가 필리핀과 영유권 분쟁이 벌어지고 있는 남중국해 스프래틀리 제도(중국명 난사군도) 내 미스치프 산호초에 건설된 신공항에 착륙하고 있다. /신화 연합뉴스
재판부 구성 문제에 대해서는 일본을 겨눴다. 루 대변인은 "중재 법정 재판부가 일본 출신 야나이 슌지(柳井俊二) 전 유엔 국제해양법재판소(ITLOS) 소장에 의해 구성돼 애초부터 공정성을 잃었다"고 말했다. 야나이가 아베 신조 총리의 안보 법제 간담회 좌장을 맡아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가능하게 하는 데 협력한 인물이라 중재 재판 자체가 정치화됐다는 주장이다.
중국 정부가 이처럼 격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그만큼 외교적 타격이 컸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는 이날 "이번 판결은 중국에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현실로 나타난 것"이라며 "1989년 (천안문 사태) 이후 최대의 외교적 타격"이라고 보도했다. 미국 내 전문가들도 "이번 판결을 강제할 수단은 없지만 중국에는 엄청난 압박이 될 것"이라고 했다.
중국은 군사적 위협 카드도 꺼냈다. 류전민(劉振民) 중국 외교부 부부장은 이날 내외신 기자회견을 열어 방공식별구역(ADIZ) 선포 가능성을 경고했다. ADIZ는 자국 영공(領空)에 접근하는 타국 군용 항공기를 조기에 식별하기 위해 임의로 설정하는 지역이다. 그는 "중국은 남중국해상에 방공식별구역을 선언할 권리를 보유하고 있다"며 "설정은 (위협에 대한) 중국의 종합적인 판단을 토대로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12일에는 052D형 이지스함 겸 중국 최대의 미사일구축함인 인촨(銀川)함을 남중국해에 추가 배치했다. 이로써 남중국해를 관할하는 중국의 이지스함은 네 척으로 늘었다. 중국 인민해방군은 또 11일부터 20일까지 북서부 모 훈련기지에서 9일간의 육상훈련에 돌입했다.
◆2016.11.23 21세기의 중국은 왜 ‘제국’의 길을 걷는가
중국에서 지배의 정당성 문제는
지배자의 민족적 출신이 아니라
누가 천하를 통일하느냐로 판단
제국(帝國)은 ‘황제가 다스리는 나라’ 또는 ‘다른 민족을 통치하는 정치 체계’ 정도로 풀이할 수 있다. 한데 주권재민(主權在民)의 공화국(共和國)을 표방하고 있는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최근 ‘제국’을 주장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다. 21세기의 중국에 등장한 제국 논의는 무얼 말하나. 앞으로 중국이 걷고자 하는 길을 예시하는 것은 아닐까. 중국의 급격한 부상이 야기하는 제국 담론을 보면서 그 이웃인 우리는 과연 어떤 대비를 해야 하나.
일반적으로 국가는 그 지배의 정당성을 민주주의에서 찾는다. 그러나 현재 중국 안팎에선 그 지배의 정당성을 제국에서 찾는 지식인이 늘고 있다. 여기에서 지배의 정당성이란 무언가. 그것은 곧 ‘중화제국(中華帝國)이라는 통일체’를 유지하는 것을 말한다. 이게 왜 그렇게 중요한가. 중국은 다민족으로 구성된 국가이기 때문이다. 분열이 아닌 통합은 그 자체가 안정을 의미하는 것이다.
천하가 하나로 통일된다는 의미인 ‘대일통(大一統)’이 회자되는 건 그래서이다. 역사상 모든 중화 왕조는 예외 없이 통합된 제국을 목표로 했으며 그 유혹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었다. 중국에서 지배의 정당성은 지배자의 민족적 출신으로 판단하는 게 아니다. 누구든 대일통을 실현하는 왕조야말로 ‘정통’의 중화 왕조라고 인식하는 사고방식이 있었다. 정통의 근원은 ‘천(天)’이라는 ‘중화’적 정치 신화에서 유래한다.
중국 전한(前漢) 시기의 유학자 동중서(董仲舒)는 이른바 ‘천(天)→천하(天下)→민(民)→천자(天子)’, 반대로 ‘천→천자→민→천하’로 이뤄지는 천하사상에 의한 지배 정당성 탄생의 사이클을 완성함으로써 중화제국의 통치 이데올로기를 완벽하게 구축했다고 할 수 있다.
한데 여기에서 ‘천하’란 것은 중화나 중국을 중심에 넣고 그 주변에 네 개의 오랑캐를 뜻하는 ‘사이(四夷)’를 집어넣어야 비로소 완성된다. 따라서 대일통이란 의미는 주변의 ‘사이’를 세력 범위 안에 넣는 것을 말하며, 이것이 바로 중국 역사에서는 ‘제국성(帝國性)’ 그 자체로 인정을 받았던 것이다.
이제 ‘중국=제국’ 논의에 불을 댕기고 있는 세 명의 유명 지식인을 만나보자. 첫 번째는 미 시카고 대학의 자오딩신(趙鼎新) 교수다. 그는 최근 『The Confucian-Legalist State : A New Theory of Chinese History』란 책을 출판했는데 중국 내 주요 잡지들이 별도의 서평 코너를 마련해 소개할 정도로 주목을 받고 있다.
자오는 이 책에서 대일통 국가의 정치 전통은 1911년 신해혁명(辛亥革命)으로 끝난 게 아니라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대일통의 전통이 장제스(蔣介石)의 중화민국, 마오쩌둥(毛澤東)의 중화인민공화국 시기를 거쳐 시장경제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 지금까지도 강력하게 지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중국 신좌파(新左派)의 대표 주자라 할 수 있는 왕후이(汪暉)다. 그는 ‘대일통의 제국’에 대한 강렬한 욕망을 드러내고 있다. 그가 추구하는 것은 과거 조공 체계의 업그레이드판이라고 할 수 있는 ‘과체계사회(跨體系社會·trans systemic society)’다. 따라서 티베트나 위구르, 대만, 홍콩 문제 등은 중국의 변경 문제가 아닌 중심 문제라고 천명한다.
세 번째는 일본의 문화비평가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이다. 그는 『제국의 구조-중심·주변·아주변』이란 저서를 통해 중국이 제국의 원리로 미국 제국주의를 극복해야 한다고 말한다. 가라타니는 중국에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들어서면 소수민족은 물론 한족도 분열할 것이기 때문에 중국 일국 차원에서도 지배의 정당성을 갖지 못할 뿐 아니라 세계사적으로도 유익하지 못하다고 본다.
이 때문에 현재의 중국 정부로서는 ‘제국의 재구축’이 제일 중요한 급선무라고 주장한다. 한데 이 같은 제국의 재구축을 위해선 조건이 필요하다. 경제 발전과 사회주의적 평등이 그것이라고 한다. 이처럼 최근 중국을 연구하는 주류 학자들이 중국에 대일통 제국의 의식이 현재까지도 도도하게 흐르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건 그것이 미래 중국에서 재구축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말하려는 것으로 해석된다.
지식인들의 ‘제국’에 대한 상상은 중국 정부가 나아갈 방향과 연결돼 있는 것이다. 이들은 주권적 근대 국가의 문제를 극복할 대안적 통치 형태로 제국을 불러오려 한다. 여기에서 제국은 침략 성향을 지닌 제국주의와 달리 단지 정복만 하고 식민화하거나 동화시키지 않는 느슨한 방목 형태로 다가온다. 이들에게 중화제국은 제도만이 아니라 가치다.
어떤 면에서 제도이고 또 가치인가. 중국 역사학자 이중톈(易中天)에 따르면 정반대의 것으로 보이는 방국(邦國) 제도가 뜻밖에도 제국의 초석이 됐다. 주(周)나라 방국 제도의 핵심은 ‘자치’를 핵심으로 하는 봉건(封建)이다. 봉건은 그 자체로 일종의 질서였다. ‘안정이 모든 것에 우선하는’ 중국에서 이것은 제도일 뿐 아니라 가치이기도 하다. 천하(天下), 국(國), 가(家)는 등급이 뚜렷하다. 이것이 ‘봉건’이다. 경제제도는 정전(井田), 정치제도는 봉건, 사회제도는 종법(宗法), 문화제도는 예악(禮樂)이었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선진적이고 우수한 제도로 알려진 이 제도를 만든 이는 주공(周公)이었다. 공자(孔子)가 주공을 꿈에서도 잊지 못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이후 변방인 진(秦)나라가 통일을 이뤘음에도 불구하고 이 제도가 한(漢)나라에 그대로 보전돼 대일통 제국을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같은 성숙한 ‘봉건 질서’를 바탕으로 했기 때문이었다.
진나라는 대일통의 국가 체제와 중앙집권적 정치 체제를 만들어 중화 왕조의 기본 구조를 만들었다. 그리고 주변의 이민족 집단에 대해선 직접 지배를 하지 않고 ‘자치’를 허용하는 전통을 남겼다. 이 전통은 지금까지 일관되게 계승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같은 대일통 제국을 주요 내용으로 펼치는 중국 담론의 현실이 한국을 비롯해 동아시아 지역에 미칠 파장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대일통의 제국은 ‘속은 법가이지만 겉은 유가(法裏儒表)’의 구조로 이뤄져 있다. 중국 공산당이 이젠 혁명당이 아니라 집권당으로 거듭나기를 촉구하는 분위기가 있고 보면 유학과 사회주의의 결합이 앞으론 유가와 법가의 결합으로 전환하는 건 시간문제로 보인다. 그러면 사회 통합의 주요 이념인 평등은 수사(修辭)로만 남을 가능성이 크다.
특히 제국 관련 이야기를 상식의 차원에서 보면 ‘중화제국’이란 말 자체가 국민국가체제를 본류로 하는 ‘근대’의 이념과 근본적으로 충돌한다. 『제국』의 저자 헤어프리트 뮌클러에 따르면 ‘패권’은 형식적으로 평등한 정치적 행위자들로 이뤄진 집단 내에서의 우세함인 데 반해, ‘제국’은 이 같은 최소한의 형식적 평등마저 없애고 약한 국가들의 지위를 종속국이나 위성국으로 낮춘다. 형식과 실질의 역설이 존재하는 것이다.
최근 중국에서 ‘제국론’을 펼치는 사람들은 국민국가(nation-state)에 대립하는 문명국가(civilization-state)의 틀을 상정한다. 근대의 문제를 넘어서기 위해 전통 시기 제국론으로 올라가 돌파구를 마련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제국론이 물론 중국의 부상이라는 현실을 반영하는 담론이긴 하지만 그것이 중국의 현실 문제와 긴장 관계 속에서 논의되지 못하는 순간 현실 정치에 이용될 가능성과 더불어 반(反)서구적 중국 중심주의로 떨어질 위험성을 안고 있다.
한국은 고립주의를 내세우는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미국과 제국으로의 회귀가 임박한 중국, 양자 사이에서 긴장과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동아시아를 다원적 세계로 이끌어 중국이 대국주의로 흐르지 않도록 해야 하기 때문이다.
대국인 중국과 인접한 우리 입장에선 중국과 대립하면서도 공존해야 한다. 150년 전의 ‘서구의 충격’ ‘일본의 충격’에 이어 우리는 다시 ‘중국의 충격’을 얼마나 자각하고 있는가. 이제 양국의 국력과 규모의 비대칭성을 냉철하게 인식하면서도 주권국가로서 할 말은 하면서도 수용과 거부의 양면작전을 구사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미국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공자도 “어진 자만이 좋은 것은 좋다고 하고 나쁜 것은 나쁘다고 한다(唯仁者 能好人 能惡人)”고 하지 않았던가. 여기서 인자(仁者)란 사심 없이 종합적 판단을 할 수 있는 식견을 가진 사람을 뜻한다.
중앙일보 조경란 연세대 국학연구원 교수
◆2014.09.24 중국에 여전히 홍콩이 필요한가?
1997년 홍콩이 중국에 반환된 후로 정치제도를 둘러싼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특히 지난달 31일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상무위원회가 홍콩 행정장관 직접·보통 선거의 틀을 마련하면서 홍콩의 정치제도가 다시금 주목을 받고 있다. 중국 정부는 홍콩의 보통선거(직선제)가 국가의 안보에 직결되는 문제로, 보통선거를 통해 선출될 행정장관은 반드시 나라와 홍콩을 사랑하는 ‘애국 인사’여야 한다고 수차례 밝혀왔다. 이를 위해 중국은 홍콩 행정장관 후보자 입후보 단계에서부터 ‘검증 절차’를 도입해 결국 중국이 지지하는 사람만이 선출될 수 있도록 원칙을 마련했다. 이 원칙을 빌어 중국이 홍콩의 행정장관 선거에 개입하여 ‘항인치항(港人治港·홍콩인이 홍콩을 다스린다)’이라는 원칙을 뒤흔들고 있다는 홍콩인의 지적이 쏟아지고 있다. 하지만 중국 정부는 홍콩 행정장관 선거가 정권의 향방에 관한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반드시 중국 정부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당선되어야 한다며 한 치의 양보도 하지 않고 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당시에는 홍콩과 마카오, 타이완이 분리되어 있었다. 70년대 들어 덩샤오핑(邓小平)이 ‘일국양제(一國兩制·한 국가에 자본주의 체제와 사회주의 체제 공존)’를 제시하며 이 지역과 중국 간에 존재하는 제도와 생활방식의 차이를 인정함과 동시에 통일의 청사진을 그려왔다. 중국과 영국이 홍콩의 미래를 논의하는 자리에서 중국은 ‘일국양제’, ‘고도자치(高度自治)’, ‘항인치항’의 원칙을 내세우며 홍콩을 안정적으로 발전시키고 홍콩의 생활방식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 밝혔다. 그 결과 홍콩이 중국에 반환되었고, ‘일국양제’라는 원칙 덕분에 홍콩은 중국의 사회주의 체제를 따르지 않고 그동안 유지해 온 자본주의제도와 가치관을 유지해나갈 수 있었다.
역사적으로 전례 없는 시도인 ‘일국양제’ 하에 홍콩은 자신들만의 행정·입법·사법제도와 영국의 영향을 받은 관료제도를 유지해나갔다. 그 결과 중국보다 홍콩이 서구사회의 가치관에 더욱 친숙해졌다. 또한, 홍콩은 고도의 자치권을 가지고 있어 기본법에 명시된 경우와 국방, 외교 분야를 제외하면 정치적으로 중국이 홍콩에 개입할 수 없다.
그렇다면 중국이 어째서 홍콩에 폭넓은 자치권을 허용했을까? 이 문제에 답을 찾기 위해서는 중국의 근대 발전에 홍콩이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 그 특수성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1842년 홍콩이 중국에서도 가장 먼저 서구 열강의 침략을 받으며 영국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하지만 영국의 식민지배를 받던 홍콩은 서양의 문명을 배워나가며 중국과 서양의 문화를 잘 융합해왔다. 과거 홍콩에서 유학하던 쑨원(孫文)이 낙후된 중국과는 달리 영국의 지배하에 놓인 홍콩은 제도와 사회적 체제가 잘 갖추어져 있다는 것을 깨달을 정도였다.
청나라 말부터 중국의 국력은 급속도로 쇠하기 시작했고, 열강의 침략에 나라가 기울기 시작했다. 그러자 서양의 문명을 배우고 제도를 개혁함으로써 나라를 바로 세우고 열강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하는 지식인들이 많아졌다. 이들이 주장한 대로 서양의 문명을 배우기 위해서는 홍콩이 가장 적합한 곳이었다. 홍콩은 서구화된 중국이었고, 정치적 견해가 다른 이들을 보호하고 청나라 정부가 ‘반역자(대부분이 서양을 배우자고 주장한 개혁파)’로 낙인 찍은 이들에게 은신할 곳을 제공해주었다. 또 홍콩은 공산당원들이 국민당의 추격을 피할 수 있는 피난처였다. 그리고 1949년 중국 성립 직전, 중국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주요 지식인과 문화인들이 홍콩에 먼저 들어와 중국이 안정되기를 기다려 공산당원들의 보호 하에 중국으로 돌아갔다. 즉, 중국의 근대사에서 홍콩은 중국의 혁명과 진보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특수한 의미를 가진다.
중국의 지도자들은 ‘일국양제’가 임시방편이 아니라 홍콩이 자신들의 체제를 지켜나가게 하기 위한 중국 정부의 진정성있는 원칙이라고 주장한다. 1978년 개혁개방이 실시된 후, 외자유치·경영·기술도입·인재육성 등 여러 분야에서 홍콩이 중국의 현대화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중국의 개혁개방의 성공 여부가 불투명했던 때에도 홍콩의 많은 기업들은 중국에 투자했다. 성패와 상관없이 이들이 훗날 중국의 경제 발전에 기초를 마련해 준 덕분에 30년의 공백에도 불구하고 중국이 순조롭게 국제질서에 편입될 수 있었다. 여러 시범 조치를 거듭하며 중국은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었으며, 이 모든 것이 홍콩의 특별한 역할에서 비롯했다.
중국이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올라선 지금, 홍콩에게는 어떤 역할이 기대될까? 행정장관 직접 선출을 위한 홍콩인의 요구가 빗발치던 지난 6월 10일, 중국 국무원이 ‘일국양제’에 관련된 백서를 발간하며 중국 중앙 정부가 홍콩 특별행정구역의 전면적인 관할권을 가진다고 명시했다. 그리고 중국 관료들 역시 홍콩 행정장관 보통선거는 국가의 안보에 관련된 문제로 중앙 정부가 인정하지 않은 사람이 정권을 잡도록 좌시하지 않을 것이라 여러 차례 밝혀왔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홍콩의 특수성을 인정하고 관용을 보이던 중국은 이제 ‘하나의 국가’를 강조하며 홍콩의 자치권을 제약하고 있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이 이제 중국에 홍콩은 더는 특별하지 않으며 더 이상의 특별대우는 없을 것을 예고하는 것은 아닐까?
홍콩 행정장관 보통선거에 관한 전인대 상무위원회의 결정은 홍콩에 큰 변화를 불러올 것이다. 중앙 정부가 홍콩의 보통선거에 개입하며 중국의 다른 도시와 홍콩을 동일시한다면 홍콩 뿐 아니라 중국에도 아무런 이득이 없을 것이다.
[중국어 원문]
中國還需要香港嗎?
自1997年香港回歸中國大陸之後,政制發展便一直成為爭議不絕的議題,到了今年,香港的政制發展更進入了最關鍵時刻——全國人大常委將會在8月31日公布對香港實行普選的框架原則。中國政府多次公開表示 , 香港普選關乎國家安全,經普選產生的行政長官必須「愛國愛港」,而為了保證可以一定選出一個獲北京認可的「愛國愛港」行政長官,北京會在提名階段設下幾重關卡,確保最後能出線的候選人都是北京屬意的人選,這項安排,被不少香港人視為是北京意圖操控特首選舉,違反「港人治港」的承諾。然而,北京似乎已經下定決心,不會讓步,因為正如一些北京官員所言:特首選舉關乎「政權落在誰人手上」的大問題,不容有失,當選者必須是北京信得過的人。
中共在1949年奪得政權時,香港、澳門和台灣仍未回歸,到上世紀70年代,已故領導人小平提出一國兩制,希望可以令港、澳、台三地願意回歸大陸母體,而又不會改變當地的制度和生活方式。到了中英就香港前途展開談判,北京進一步把一國兩制的內涵發揚光大,演繹成為一國兩制、高度自治、港人治港;北京承諾保持香港繁榮穩定,港人的生活方式不變。結果,香港順利回歸,大部分港人認為一國兩制的安排符合大數人的利益,而「兩制」亦可以令香港保持過去百多年的資本主義制度和價值觀,毋須跟隨中國大陸的社會主義體制。
一國兩制是史無前例的嘗試,在兩制之下,香港有自己的行政、立法和司法制度,承襲英國人留下的管治文化,令香港跟西方價值觀的認同和銜接遠較跟中國大陸來得緊密。在一國兩制之下,香港可以實行高度自治,中南海的政令除國防、外交及《基本法》規定的全國法律,大陸的一套都不能影響和干預香港。
對北京來說,願意給香港高度自治的原因是什麼?要回答這個問題,必須了解香港對中國近代發展的貢獻及其獨特地位。香港在1842年成為英國殖民地,揭開了中國受西方列強欺凌的慘痛一頁,然而在英治底下,香港卻成為了中西文化融合、學習西方文明的一處化外之地。國父孫中山先生在香港讀書時,已深感在英國管治下香港的制度和社會管理井井有條,跟大陸的落後愚昧形成強烈對比。
中國從晚清開始 , 國力即不斷走下坡,列強恣意侵奪,國勢一蹶不振,當時從朝廷到民間,都有不少有識之士主張學習西方文明、改革制度,重振國本,避免中國最後可能被列強瓜分的命運。在向西方學習的過程中,香港成為一個獨一無二的地方,它既是一個「西化」的中國人城市,也是一個庇護不同政見、可以供那些不容於清政府的「叛亂份子」(絕大部分是希望向西方學習的改革派)作藏身之所。在尚未建立政權的歲月,香港也是中共黨員逃避國民黨追捕的避難所;到了49年前夕,大批準備返回中國的知識界、文化界要人,都是先進入香港落腳,靜待大陸局勢明朗,才由中共派員逐批把他們接回中國內地。可以說,在中國近代史之中,沒有一個地方可以跟香港一樣,對中國的革命和進步發揮過如此重要的影響。
中國領導人曾經多次強調,一國兩制並非權宜之計,而是中國政府「真心誠意」讓香港保留自己「一制」的特色。在78年之後推行的改革開放,香港無論在引入外資、管理、技術以及人才等各方面,都對中國大陸走向現代化發揮了巨大作用,當年全世界仍在觀望中國的改革開放會否走回頭路時,香港不少企業家已經走入大陸投資,他們有些成功,有些失敗,然而這批先行者都為日後中國的經濟起飛奠下基礎,令中國在脫離世界經濟體系近三十年之後仍然可以順利跟國際接軌,從摸着石頭過河的探索中,取得驕人成績,這一切都跟香港發揮的特殊作用息息相關。
當中國起飛成為全球第二大經濟體之後,香港還有它的作用嗎?在香港普選行政長官的諮詢期,中國政府發表了一份一國兩制白皮書,宣示中國對香港擁有全面管治權,中國官員也多次重申,香港普選涉及國家安全,北京不會坐視政權落入不是北京認可的人選手中。種種迹象顯示,北京已經從過去強調香港的獨特性、對香港寬鬆包容,變成現在強調「一國」、少提高度自治;這是否表示,北京認為香港的獨特作用已經大減,毋須要給予過多的「特殊處理」!
人大常委有關香港普選框架的決定,對香港有深遠影響,如果北京要把香港的普選「管死」,令香港成為一個中國的普通城市,這對香港絕不是好事,對北京也沒有好處。
찬킹청(陳景祥)
홍콩 신보 총편집인
◆2014.10.14 중국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1)
지금 세계는 홍콩의 ‘우산혁명’을 숨죽여 예의주시하고 있다. 혹시 홍콩에서 지펴진 작은 불씨 하나가 들불처럼 온 중국으로 번져가는 천하대란의 단초가 되는 것은 아닌가 하고 말이다. 이런 관측에는 일말의 걱정과 일말의 기대감이 반반씩 섞여 있다. 다른 말로 중국이 민주화의 길로 들어서든지 아니면 다른 사단이라도 생겨나서 지금 불기둥처럼 솟고 있는 중국의 그 무서운 굴기와 웅비의 압력으로부터 조금이라도 피할 수 있는 길이 열리지 않을까 하는 희망적 관측이 섞여있다는 말이다.
몇 세기 전부터 서양인들에게 회자되기 시작한 중국의 위협(Sinic menace) 또는 황화(Yellow’s peril)론은 이제 눈앞에 다가온 현실이다. 중국의 이 무서운 질주에 누구나 할 것 없이 뭔가 제동이 걸리기를 바라는 심정이다. 말로만 듣던 황화(黃禍)론의 실체가 바야흐로 눈앞에서 그리고 세계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다. 중국이 패권을 추구하지 않고 보다 민주적이고 책임 있는 강대국으로서 제 역할을 해주기를 바라는 것이 세계인들의 바람이지만 이런 기대감이 무망하다는 것을 세계인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이러던 차에 느닷없이 일어난 것이 홍콩의 민주화 혁명의 불길이다. 이름하여 우산혁명이라고 하지만 세계인들은 거기서 거대한 변화의 불씨를 보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불씨를 제일 싫어하는 것이 바로 중국의 지도부일 수밖에 없다. 홍콩사태의 결과에 상관없이 앞으로 중국이 어떤 방향의 길로 가게 될 것인지는 중국뿐만 아니라 모든 세계인들의 초미의 관심사가 되어 있다. 중국의 앞날은 무엇으로 결착이 될 것이며 또 무엇으로 결판이 나게 될 것인가?
홍콩의 민주화혁명에 과연 중국공산당은 어떻게 대처할 것 인가하는 맥락에서 우선 세계인들의 관심을 끄는 것은 중국 공산당의 통치 능력에 대한 평가다. 중국 공산당은 금년으로 건국 65주년을 맞이하지만 지금까지 공산당의 영도력이나 정통성에 있어서 크게 손상을 입은 적은 없었다. 중국 공산당은 지금까지도 의연히 피통치자인 중국의 인민들이나 통치 주체인 중국 공산당에 대한 장악력을 한 번도 잃어본 일이 없다. 통치의 효율성을 유지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중국 공산당은 상찬 받을 만 하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냉전시대의 소련공산당과 비교해 볼 때 더욱 그러하다고 볼 수 있다. 중국 공산당의 정통성은 아직도 그 실효가 사그러들지 않고 있다. 그만큼 공산당 지도력의 권위를 잃고 있지 않다는 뜻이다. 그 원인을 따져 보면 뭐니뭐니해도 경제발전이다.
하버드 대학의 래리 섬너즈에 의하면 미국이 가장 빠르게 성장할 때 미국인들의 생활수준은 30년 단위로 배가되었다면 중국은 중국인들의 생활수준을 10년 단위로 배가 시켜 왔다고 한다. 곧 미국의 성장속도를 1/3로 단축해서 달성시켜 왔다는 얘기다. 그리고 중국의 경제적인 성장세는 앞으로도 쉽게 수그러들 것 같지 않다는 것이 대부분 경제전문가들의 진단이기도 하다. 중국의 경제발전이 중국 공산당이 갖고 있는 경쟁력의 가장 핵심이요 또 공산당이 누리는 전통성의 알파와 오메가다. 그러나 설사 경제성장에 어떤 장애가 생긴다 하더라도 이미 중국은 돌이킬 수 없는 일정한 성장의 궤도에 올라서 있는 것이 사실이다. 중국은 1982년 이래로 집단지도체제를 채택하고 있다. 등소평이 중국 공산당과 중국적 상황을 잘 가미해서 만들어 놓은 하나의 안전판적 지도체계이다. 지금까지 공산당의 이 과두체제는 더할 나위 없이 잘 작동되어 왔다. 심각한 내부 분란도 없었다. 또 일정한 의사결정의 틀을 마련해놓고 이에 따라 국정을 가감 없이 적절하게 그리고 효율적으로 처리해왔다. 황제 밑의 관리들에 의해 일사분란하게 통치되어왔던 중국의 과거 제국처럼 지금의 중국도 역시 황제만 없다 뿐 황제 밑의 유능한 관리들처럼 국사를 제대로 처리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중국적 메리토크래틱 시스템의 승리라고 해야 할 것이다.
중국의 지난 30년간의 경이적인 경제 발전의 성과는 곧 중국 공산당의 통치 성과로 치부되는 상황에서 중국 공산당의 위상은 전례 없이 높아졌다고 할 수 있다. 그 지도력의 효율성을 국제적으로도 인정받고 있다. 더 나아가서 중국 공산당은 냉전시대 소련 공산당이 미국과의 비교우위에서 언제나 폄하되고 저평가 되던 그 관행과 수모에서 벗어나 오히려 미국과의 비교 우위 면에서 우월한 평가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미국의 정치체제는 오히려 비효율의 대명사처럼 되어버렸고 이미 예산 정지 파동의 씨퀘스터의 예에서 보듯 세계 여론의 조롱의 대상이 되다시피 되었다. 중국은 세계적 여론의 고과표에서 놀라움과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고 세계 도처에서 자본 식민지를 만드는데 분주한 반면 미국은 세계 도처에서 도전과 갈등에 함몰되어 있고 국내정치적으로도 분란이 그칠 날이 없는 나락의 바닥을 헤매고 있다. 그래서일까?
중국은 이젠 노골적으로 국제 여론의 품평시장에서 미국 그리고 서구 민주주의의 정치 체제와 중국 정치 체제의 공개적인 경쟁을 선언하고 나선 참이다. 비효율의 대표격인 서구의 정치체제와 효율과 발전의 상징인 중국의 정치체제간의 경쟁을 공개적으로 선언하고 나선 격이다. 중국은 그만큼 지금 자신감에 충만해 있다. 서구식 자유와 민주주의의 뒷받침이 없는 중국식 자본주의와 정치 체제를 새롭게 구축해서 중국식 대국의 길로 나서겠다는 것이 중국이 내세우는 포부다. 우선 중국식 경제발전과 정치발전 모델이 과연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그 기대감 자체가 인류 역사상 전례가 없던 일이다. 서구의 전통으로 보면 알렉시스 토크빌이나 세이묘 마틴 립세트같은 정치학자들의 가설이 하나의 정설로 인정되어 오던 터였다. 그 가설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는 떨어질 수 없는 불가분리의 관계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그 정설에 도전해서 성공을 장담하는 국가는 일찍이 있어본 적이 없다. 이제 중국이 그 실험의 성공을 장담하고 나선 판이다.
그런데 이 실험이 실패할 확률 보다는 성공할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이 점점 확실해 지고 있다. 물론 중국식 실험에는 여러 가지 회의론이 뒤따르는 것이 사실이다. 예컨대 데이비드 램프튼 같은 학자는 중국 발전의 시나리오로 독재자의 출현, 천하대란, 삼권분립이 된 민주주의의 출현 그리고 집단 지도체제의 계속 등 몇 가지 앞으로의 전개 가능성을 예측한 바 있지만 중국은 지금의 집단 체제의 유지 내지는 그에서 비롯된 약간의 변형과 변용의 범위 안에서 통치를 계속해 갈 것으로 본다. 이것이 현재로서는 가장 타당한 예측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사실 현재의 중국 지도부는 집단지도체제에 플러스 알파를 더해서 시진핑에게 영도의 주도권을 주고있는 쪽으로 재편되고 있다. 이를테면 ‘동료중의 일인자’(the first among the equals)로 인정하고 그의 정치 내지는 정책적 이니셔티브를 인정하는 추세로 나가고 있다는 얘기다. 그런데 이런 추세에 더해서 중국 공산당의 성공을 보장하는 가능성은 오히려 미국으로부터 제공되고 있다는 사실이 특이하다면 특이하다. 우선 미국은 냉전시대의 미소의 경쟁 때처럼 중국을 무엇으로도 압도하지 못하고 있다. 민주주의라는 이념적인 측면에서 그리고 사상적인 측면에서 미국은 중국에게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다. 중국은 이렇다 할 이념이나 사상적인 배경이 없는 뒤죽박죽의 정치체제를 유지하고 있으면서도 미국에게 하등 꿀릴 것이 없다는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중국의 대국으로의 부상에 이렇다 할 이념적 도전세력이 없는 것이 중국으로서는 천만다행이라고 할 수 있다. 오히려 중국이 민주주의적 사상과 제도와 관행에 도전해도 좋을만한 하나의 세계사적 이변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중국은 이념적 공백을 공자와 유교에의 회귀로 메꾸려 하고 있다. 미국이 이념적으로 그리고 가치적인 측면에서 오히려 기력이 쇠해가고 쇠미의 기미를 보이고 있는 형국에서 중국은 이렇다 할 이념적 우월성이 없이도 국내외적으로 승승장구하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 중국은 이래저래 헝클어진 미국의 대외관계와 서방세계의 경제적 위기에 홀로 살아남아 있다. 중국공산당은 그런 측면에서 볼 때 통치의 여력을 지금도 계속 축적하고 또 남는 경쟁력은 차곡차곡 창고에 쌓아놓고 있는 형국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은 무궁무진한 정통성의 자원을 확보하고 있고 또 확보해 나가고 있는 중이다. 중국 공산당은 앞으로 어려운 날이 닥쳐도 이 창고에 쌓아놓은 곡식과 무기들을 사용할 날이 올 것으로 본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중국 공산당이 중국에서 서방적 민주주의는 맞지도 않고 채택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공언해 온 것이 헛말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중국식 정치체제와 자본주의를 혼합시킨 새로운 형태의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만들어 내야겠다고 노골적인 선전포고를 해온 것이 결코 빈 소리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다음 주 2회가 이어집니다.]
허경구
국제정치문제연구소 이사장
E-mail : aronge76@naver.com
◇2014.10.21 중국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2)
한때 지구촌 여기저기서 들불 일어나듯 유행하던 민주화 혁명도 이제는 한풀 꺾였고 그나마 부분적으로 성공했던 민주화 혁명도 그 예후가 좋지 않게 끝나고 있다. 다시 말해 민주화 혁명에 대한 한 때의 부푼 기대는 이제 실망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말이다. 만약 민주화 혁명 추세가 정반대로 전개되어 미국의 민주주의가 그 경제력과 함께 강성하게 뻗어나가고 지구촌 여기저기서 민주화의 물결이 쓰나미처럼 밀려들기 시작하고 이러던 차에 홍콩에서 이번처럼 우산혁명이 일어나기 시작했다면 중국으로서는 대단히 어려운 형국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태는 바로 그 정반대로 일어나지 않았던가. 이렇게 보면 중국은 확실히 천시(天時)의 이(利)를 얻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중국이 현 단계에서 갖는 역사성이나 그 인구와 국토의 광대함으로 볼 때 그리고 중국 문화의 연속성으로 볼 때 중국적 정치발전 모델은 그 나름대로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중국이 현 단계에서 천시(天時)의 이(利)를 얻고 있다는 증좌에 다름 아니라고 본다. 우리나라에서도 한 때 지금은 고인이 된 월정사의 탄허(呑虛)스님이 내린 예언이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즉 지구 지축의 변화로 기울어졌던 지구의 위도가 제자리로 옮겨감에 따라 천기(天機)의 운세에도 일대 대이동이 일어날 것인즉 앞으로 문명의 중심지는 극동, 즉 한국과 중국이 되리라는 예측이었다. 중국 공산당은 외교정책 적으로 화전양면 전술로 나가고 있다. 한 쪽으로는 동지나해, 남지나해에서 해상분쟁을 일으키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외교적 캣치 프레이즈로 친(親), 성(誠), 혜(惠), 용(容)을 내세우고 있다. 성실하게 이웃과 친하고 발전으로 생긴 남은 힘을 이웃과 너그럽게 나눠 갖겠다는 그럴듯한 포부다. 중국의 지금의 그 욱일승천하는 기세는 실로 인과성으로만 설명하기는 어려운 측면이 있다. 이미 말 한데로 천시의 이를 보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중국은 여기에 더하여 이제는 지리(地理)의 이(利)마저 얻어가고 있는 중이다. 이것은 또 무엇을 의미할까? 그것은 중국을 위시해서 중국 주변 국가를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는 민족주의적인 추세를 말한다. 중국 공산당이 필요로 하는 민족주의의 추동력을 운 좋게도 중국 주변의 국가들이 자진해서 제공해 주고 있다. 우선 미국의 중국에 대한 봉쇄정책이 중국인들의 전통적인 외세공포증을 극도로 자극하고 있고 일본의 철없는 극우편향적 외교정책이 중국인들의 분노를 증폭시키고 있다. 다른 예를 들 것도 없이 일본의 극우성향, 예컨대 아베수상의 망동 하나만 보더라도 그것은 중국인들이 격분을 사고 하늘을 찌를 듯한 분노를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이런 중국인들의 분격(憤激)은 바로 중국인들의 감정을 한군데로 몰입시키는 좋은 재료가 되어 준다. 국민 여론을 하나의 정치적 목표물에 귀일시키는 좋은 명분이 되어준다. 이런 국민적 감정을 휘몰이해서 공산당이 추진하는 국가적 어젠다의 귀중한 동력으로 써먹을 수 있을 때 공산당은 더할 수 없는 통치 정당성의 명분을 얻게 된다. 중국공산당으로서 이 이상 더 바랄 일이 어디 있겠는가. 거기다가 소련과는 전례없이 우호관계를 유지하면서 같은 전제적 정치제도를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 중국으로서는 무엇보다 든든한 우군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중국 공산당이 얻고 있는 지리(地理)의 이(利)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중국은 민족주의란 기관차를 움직일 연료를 일본으로부터 계속 공급받을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적의 존재는 아군을 단결시킨다는 손무자의 교훈을 중국은 철저히 이용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러고 보니 중국 공산당은 천기(天機)의 도움으로 천시와 지리의 이를 아울러 얻게 된 격이나 마찬가지다. 이제 남은 것은 인화(人和)의 이(利) 한 가지 뿐이다.
중국 공산단원은 현재 8669만 명이다. 일년전 만해도 8400만 명으로 통계가 잡혔었는데 1년도 안되어 200만 명이상이 늘어난 것이다. 중국에서 가장 유능하고 유력한 젊은 인재들이 매년 공산당의 인적자원에 그 질과 양을 보태고 있는 참이다. 아마 곧 일억을 넘어설 것이다. 지금 중국공산당은 자체의 정화운동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 성패여부가 중국 공산당의 생사 여부를 결정짓는 관건이 되리라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시진핑은 그 나름의 권력 집중을 위해서 두 개의 기구를 2013년 말에 창설하였다. 아마 이번 홍콩 민주화 혁명을 당해서도 중국공산당은 작년에 창설된 국가안전위원회와 전면심화개혁 영도소조를 활발하게 운영하였을 것이 틀림없다. 이 두 기구의 주석과 조장은 시진핑이 맡고 있다. 그만큼 정책결정의 집중력과 속도와 융통성을 1인체제에 집중하겠다는 의미다. 경제전문가들은 중국의 버블 경제, 특히 그림자 금융을 앞으로 중국 경제 발전의 장애물로 지목하고 있다. 그러나 관점에 따라 이것은 중국 공산당의 영도력을 확보하는 또 다른 수단이 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이 국가에 빚을 지고 있다는 그 사실 자체는 그런 사람들의 국가체제로부터의 이반을 부추기기 보다는 지지를 유도하는데 더 유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공산당의 지지기반이 더 깊어질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그리고 중국 공산당은 막대한 재정의 이(利)를 누리고 있다. 넘쳐나는 재정으로 물이 새는 구멍을 얼마든지 막아낼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중국 공산당은 재정운영의 막대한 잉여가치를 확보하고 있고 또 그것으로 국내적으로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어르고 달래고 다독여야 할 대상이나 세력이나 국가에 대해서 쓸 수 있는 재정적 여력을 가지고 있다. 중국 공산당은 적어도 2억 4000만 명의 시골 거주자들에게 연금을 지급할 수 있는 재량권도 가지고 있다. 필요하다면 몇 억명에게 더 지급할 수 있는 재정적 수단도 확보하고 있다. 이 숫자는 미국 전체의 연금 수혜자의 수를 초과하는 숫자다.
중국 공산당은 성장률 10%대일 때 국가와 민간에 돌아가는 분배의 몫이 7 대 3 이였던 것을 이제 성장률 7%대일 때 5 대 5로 조정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중국 공산당은 역설적이게도 경제 성장에 따른 국가의 몫을 줄이고 민간의 몫을 늘임으로써 공산당의 통치 장악력을 그만큼 높일 수 있게 되었다. 중국 공산당이 이러고서도 인화의 이를 얻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중국 공산당은 민주 국가에서 갖가지 갈등 요인으로 지체되고 천연되고 중단될 수밖에 없는 여러 가지 재정 수요에 대한 결단을 가장 신속하고 유효한 수단을 동원함으로써 국정의 효율성을 상대적으로 높일 수 있는 위치에 있다. 민주주의에 대해서 오히려 전제적인 중국공산당이 큰소리를 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이러한 데 있는지 모른다. 통치(governance)의 효율성을 확보하고 국민의 생활수준을 향상시키는데 있어서 민주주의보다 전제적 통치체가 훨씬 더 유효하다는 것을 중국 공산당은 지금 세계에 대하여 웅변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중국 공산당이 이러고서도 인화의 이를 얻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한 마디로 중국 공산당은 천시, 지리, 인화의 세 가지의 이를 얻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쯤 되면 중국 공산당의 통치 정통성이 언제까지인지는 모르지만 상당기간 계속 될 수 있으리라는 것은 불문가지가 아닌가. 그래서 시진핑이 가는 곳 마다 외치는 구호가 있다. 중국의 형편이 이쯤 되었으니 이제는 더불어 이웃과 잘 살겠다는 선의의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다니는 것이다. 왈, 달즉겸선천하(達則兼善天下)다.
그러나 중국도 주의해야 할 대국적 진단이 아직 하나 남아있다. 그것은 장구한 중국 역사의 연속성으로 볼 때 그 역사에는 일정한 평화와 전란이 교체되는 주기가 존재한다는 통계다. 이것은 또 무엇을 말함인가? 중국은 B.C. 2세기 경의 진나라부터 5세기의 수나라에 이르기까지 전반 500년은 평화 후반 300년은 전란으로 지새웠고 5세기의 수나라에서 13세기의 원나라에 이르는 800년간도 전반 500년은 평화의 기간이지만 후반 300년간은 전란을 겪어야 했고 마지막으로 14세기의 명나라에서 18세기의 청나라에 이르기까지 500년간은 비교적 평화의 시기였고 1852년 태평천국의 난으로부터 그 후의 300년간은 전란의 시기로 점쳐지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지금부터 150년간은 아직도 중국에게는 전란의 시기로 남아있다는 얘기다. 명의 창건이 1368년이었고 1852년의 태평천국의 난까지 500여 년 간은 일단 전란이 뜸했던 평화의 시기였다. 전란주기의 마지막 300년이 시작되는 1852년이 또 다른 전쟁과 재앙이 시작되는 해로 보고 있다. 이런 계산이라면 2152년이 되어야 전란의 시기가 종지부를 찍고 새로운 평화의 시기인 500년이 시작된다는 말이 아닌가. 이렇게 보면 2152년까지 아직도 138년의 전란의 시기가 중국 역사에서 예비되고 있다는 얘기나 마찬가지다. 이 평화와 전란의 주기성을 중국 당국은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중국 역사에 대한 통계적 주기성을 말하는 것이지만 그 주기성을 전혀 무시할 수도 없는 것이 역사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홍콩의 민주화 혁명의 작은 씨앗조차 섣불리 작은 불씨로만 볼 일은 아니라는 것을 이 역사의 법칙은 다시 경고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것이 또 다른 장구한 세월의 재앙의 불씨가 될 수 있겠기 때문이다. Pax Sinica는 언제 시작될까? 윈스턴 처칠이 얘기한데로 이것이 시작의 시작인지 아니면 끝의 시작인지 누가 그것을 장담할 수 있겠는가?
이런 면으로 본다면 홍콩의 민주화 혁명의 작은 씨앗조차 섣불리 작은 불씨로만 볼 일은 아니지 않은가. 집단지도 체제가 갖는 정책결정의 즉 자본주의는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영양소가 없이는 자랄 수 없는 제도라는 것이 전통적으로도 중국은 일종의 능력지상주의의 관료제도였다. 지금의 공산당도 출세의 사다리를 올라가기 위한 엄격한 위계질서를 지키고 있고 그리고 거기서 능력과 경험과 성분이 철저하게 검증된 소수의 인원만 사다리의 위쪽으로 옮겨갈 수 있는 능력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과거나 현재나 일종의 메리토크래틱 시스템이다. 중국공산당은 이미 중국에서 서방적 민주주의는 맞지도 않고 채택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선언해왔다. 그리고 중국식 정치체제와 자본주의를 혼합시킨 새로운 형태의 민주주의를 만들어내겠다고 공언해왔다. 서구적 민주주의에 대한 노골적인 선전포고에 다름 아니다. 이런 공산당의 중국의 앞날에 대한 확신과 자신감은 그 말대로 실현될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그 가장 큰 원인은 중국의 대국으로의 부상에 이렇다 할 이념적 도전세력이 없는 것이 중국으로서는 천만다행이라고 할 수 있다. 오히려 중국이 민주주의적 사상과 제도와 관행에 도전해도 좋을만한 하나의 세계사적 이변현상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선 민주주의 세력의 가장 대표라고 할 수 있는 미국의 기운이 쇠미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미국의 민주제도의 관행은 오히려 중국의 조롱거리가 되고 있는 실정이다. 2014년 미행정부에 의한 예산집행이 정지 직전단계까지 갔던 세퀘스터가 바로 중국인 뿐만 아니라 세계인들이 미국의 민주주의에 대해 깊은 회의를 갖게 된 계기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민주주의가 동력이 되지 않으면 자본주의는 더 발전하지 않는다는 가설도 중국에서는 통용될 기미가 전혀 없다.
전면적인 자유가 없는 자유시장경제체제로도 부의 축적은 가능하다는 것이 중국의 예에서 실증되고 있다. 한 때 지구촌의 여기저기서 들불이 일어나듯 유행하던 민주화 혁명도 이제는 한풀 꺾였고 그나마 부분적으로 성공했던 민주화 혁명도 그 예후가 좋지 않게 끝나고 있다. 만약 이런 지구촌의 추세가 정반대로 전개되어 미국의 민주주의가 그 경제력과 함께 강성하게 뻗어나가고 지구촌 여기저기서 민주화의 물결이 쓰나미처럼 밀려들기 시작하고 이러던 차에 홍콩에서 이번처럼 우산혁명이 일어나기 시작했다면 중국으로서는 대단히 어려운 형국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태는 바로 그 정반대로 일어나지 않았던가? 이렇게 보면 중국은 천시(天時)의 이(利)를 얻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거기다가 중국공산당은 민족주의로 국민적인 열망을 한데 모으고 이 열망을 동력으로 하여 공산당의 지도력의 정통성을 높이고 그 정통성의 시한을 연장시키고 정당화시키는데 교묘하게 사용할 줄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중국공산당이 필요로 하는 이런 민족주의 동력을 운 좋게도 중국 주변의 국가들이 자진해서 제공해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선 미국의 중국에 대한 봉쇄정책이 중국인들의 전통적 외세공포증을 자극하고 있고 일본의 철없는 극우편향적 외교정책이 중국인들의 분노를 증폭시키고 있고 남지나해에서의 필리핀, 베트남 등과의 해양경계선 분쟁이 중국인들의 자존심을 크게 손상시키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중국의 민족주의의 불씨를 지피는데 정치적 불쏘시개가 되어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거기다가 소련과는 전례 없이 우호관계를 유지하면서 같은 종류의 전제적(專制的) 정치 제도를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 중국으로서는 무엇보다도 든든한 우군이라고 할 수 있다. 거기다가 몽고와도 친하게 지내고 있고 더욱이 같은 유교권인 한국이 필요한 때 같이 춤을 추어줄 수 있으니 금상첨화라고나 할 것인가. 이렇게 보면 중국은 역시 이런 점에서도 지리(地理)의 이(利)를 얻고 있다고 할 것이다.
◆2014.10.17 아편전쟁, 홍콩을 영국에 넘기다
홍콩과 아편전쟁
英, 무역 불균형 해결 위해 아편 수출
아편전쟁에서 청나라에 승리한 후 1842년 난징조약 맺어 홍콩 빼앗아
1997년 중국에 반환된 홍콩, 외교·국방 제외 50년 자치 허용받아
요즘 노란 우산을 쓴 홍콩 시민이 뉴스에 자주 등장해요. 비도 오지 않는데 이들이 우산을 들고 나선 이유는, 중국에 속했으면서도 중국과는 다른 홍콩을 지키기 위해서랍니다. 이들의 시위는 경찰이 쏜 최루탄을 우산으로 막아내 '우산혁명'이라고도 불려요. 시위에 나선 홍콩 시민은 중국의 정치적 간섭에서 벗어난 '홍콩의 민주화'를 요구하고 있지요. 사실 그동안 홍콩은 중국의 역사적 상황에 따라 운명이 달라지곤 했습니다. 현재 '중화인민공화국 홍콩특별행정구'라는 이름으로 중국에 속했지만, 외교·국방을 제외한 나머지 제도는 자율적으로 운영해요. 그렇다면 홍콩은 왜 중국과 다른 모습을 갖게 되었을까요?
▲ 영국은 중국의 아편 단속을 빌미로 아편전쟁을 일으켰어요. 이 전쟁은 최신식 화기와 증기선을 가진 영국 함대의 일방적 승리로 끝났지요. / 위키피디아
19세기, 산업혁명에 성공한 서양의 여러 나라는 공장에서 만든 물건을 판매할 시장을 찾아 아시아에 진출하였어요. 당시 중국을 지배하던 청나라는 드넓은 영토와 많은 인구, 풍부한 자원을 가져 남부러울 게 없었지요. 청나라 황제가 "중국에는 무엇이든 다 있기 때문에 무역이 필요 없다. 필요하다면 교류하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가 오랑캐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이다"고 말했을 정도예요. 서로 사고파는 무역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중국에 은을 주고 물건을 사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중국의 차(茶)를 마시는 것이 일상생활이 된 영국의 문제가 가장 심각했어요. 당시 어마어마한 양의 은이 영국에서 중국으로 흘러들어 갔거든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식민지 인도에서 재배한 아편을 중국에 수출하였어요. 중독성이 강한 마약의 일종인 아편이 중국에 들어가면서 무역의 흐름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중국에 아편 중독자가 점점 늘어나 19세기 중반 약 4만 상자의 아편이 수입되었지요. 학자들은 당시 중국에 400만명가량의 아편 중독자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해요. 곳곳에 아편을 피우는 아편굴이 생기고, 중독자들은 아편을 사기 위해 집과 땅, 심지어 아내와 자식까지 팔았어요. 이제는 중국의 은이 영국으로 마구 흘러가기 시작했습니다. 세금으로 낼 은이 점점 줄어들자, 사람들은 도망치거나 도적 떼에 가담했어요. 관리들은 부정부패를 일삼고, 군대의 기강은 무너졌지요. 중국인의 몸과 정신이 모두 망가져 버렸어요. 반면 영국에 아편 무역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와 같았습니다.
▲ 아편을 피우는 중국인 모습. 19세기 중반 아편 중독자가 크게 늘면서 중국 사회는 몹시 혼란해졌어요. / Corbis/토픽이미지
청나라 황제는 임칙서(林則徐)라는 신하를 광저우에 파견하여 아편 문제를 뿌리 뽑게 했어요. 임칙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지요. 외국 상인의 아편을 몰수하고, 다시는 팔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게 했어요. 그렇게 빼앗은 2만 상자가 넘는 아편 가루를 구덩이에 넣고 석회와 섞어 바다로 흘려보내는 데만 20일 넘게 걸렸습니다. 강하게 저항하는 영국 상인에게는 물과 식량 보급을 끊고, 모든 무역을 금지하였어요. 그러자 화가 난 영국인은 본국에 청나라와의 전쟁을 요구합니다.
결국 1840년 영국과 청나라 사이에 아편전쟁이 일어나요. 영국은 아편을 더 판매하겠다는 비도덕적인 목적을 숨기고, '정상적인 무역을 위한 전쟁'이라는 구실을 붙였어요. 2년 동안 계속된 전쟁으로 중국의 동남 해안가 일대는 쑥대밭이 되었습니다. 나무로 만든 낡은 배에 보잘것없는 화포를 장착한 중국과 달리 영국 함대는 당시 최신식 3단 화포를 발사하는 증기선을 보유했거든요.
전쟁은 영국의 일방적 승리로 끝났고, 1842년 8월 '난징조약'이라는 불평등조약이 맺어졌어요. 중국은 상하이·샤먼·푸저우·닝보·광저우 등의 항구를 더 개방해야 했고, 배상금을 포함하여 2100만달러라는 큰돈을 지불하게 되었어요. 그리고 홍콩을 영국에 빼앗겼답니다. 홍콩은 아시아로 연결되는 길목에 있는 요충지였거든요. 자신들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여겼던 중국의 자존심은 사정없이 짓밟혔어요. 게다가 정작 중요한 아편 무역에 대한 규정은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조약이었지요. 이렇게 홍콩이 영국에 넘어간 뒤, 제2차 아편전쟁을 거치면서 홍콩의 경계 확정을 위한 조약이 체결되었어요. 1898년 신제와 235개의 섬을 99년간 영국에 빌려준다는 약속이 맺어졌습니다.
▲ 지난 15일 홍콩 시위대가 경찰이 쏜 후추 스프레이를 우산으로 막는 모습이에요. /AP 뉴시스
이후 중국이 열강의 간섭을 받으며 고단한 역사를 이겨내는 동안, 홍콩은 영국의 지배 아래 자본주의 경제를 성장시켰어요. 1941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의 지배를 받기도 했지만, 다시 영국 땅이 된 뒤로는 아시아 금융·무역의 허브로 자리 잡았지요. 그리고 약속한 99년이 끝난 1997년 7월 1일, 영국 식민지가 된 지 155년 만에 홍콩은 다시 중국 영토가 되었습니다. 이때 홍콩에 50년간 외교·국방을 제외한 분야의 자치(自治)를 허용한다는 협정이 맺어졌고요. 이렇게 1국가 2체제의 '홍콩특별행정구'가 탄생했답니다.
100년 넘게 서로 다른 역사와 문화를 지니고 산 이들이 하루아침에 하나가 되기란 쉽지 않을 거예요. 오늘날 국제사회가 요구하는 대화와 타협, 약속을 지키려는 태도가 홍콩을 품은 중국에 필요하지 않을까요?
조선일보 공미라 | 세계사 저술가
◆2014.10.25 홍콩의 衰落(쇠락)과 서울
영국과 아르헨티나의 포클랜드 전쟁이 영국의 승리로 끝난 지 3개월 뒤인 1982년 9월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와 덩샤오핑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이 베이징에서 만났다. 아편전쟁 이후 영국이 점령해 온 홍콩을 중국에 반환하는 협상을 하기 위해서였다.
먼저 덩이 기선 잡기에 나섰다. 양측 배석자들에게 "홍콩은 포클랜드가 아니고, 중국은 아르헨티나가 아니다"고 운을 뗐다. 이어 여러 미묘한 발언을 했지만 대처는 대범하게 넘겼다. 대처가 덩의 일국양제(一國兩制·한 국가에 두 체제를 두는 것) 구상에 대해 "홍콩의 특수한 역사적 환경을 고려할 때 상상력이 풍부한 해결책"이라며 치켜주자 회담이 순조롭게 진행됐다. 덩은 홍콩의 제도를 1997년 반환 후 50년 동안 바꾸지 않고 홍콩인들의 자치(自治)도 유지하겠다고 보증했다. 대처가 "왜 50년입니까?"라고 묻자 덩은 "그때쯤 중국의 경제 수준이 선진국을 따라잡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덩의 생각은 1978년 시작된 개혁·개방 전략의 교두보로 홍콩을 50년간 활용하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17년밖에 지나지 않은 지난달 찬킹청(陳景祥) 홍콩신보 총편집인이 프리미엄조선에 칼럼을 보내왔다. 제목은 '중국에 여전히 홍콩이 필요한가'였다. 그는 "중국은 세계 2위 경제 대국으로 올라선 지금 '양제(兩制)'보다는 '일국(一國)'을 강조하며 자치권을 제약하고 있다. 이제 홍콩은 중국에 더는 특별하지 않으며 더 이상 특별 대우는 없을 것을 예고하는 것은 아닐까?"라고 물었다.
홍콩은 1980~90년대에 한국·싱가포르·대만과 함께 '아시아의 4룡(龍)'으로 일컬어졌다. 홍콩 부자들은 산 좋고 물 좋은 캐나다 밴쿠버로 대거 이주해 허드렛일을 백인에게 시켰다. 밴쿠버는 '홍쿠버'가 됐다. 뉴욕 맨해튼에서 서양 명품을 입고 다니는 잘생긴 아시아인 미남 미녀는 상당수가 홍콩 출신이었다.
하지만 홍콩인들의 자부심은 오래가지 못했다. 강력한 경쟁자가 급부상했기 때문이다. 상하이였다. 세계적 금융회사들이 홍콩보다 상하이에 터를 잡고, 홍콩항을 찾던 배들은 상하이의 배후에 있는 양산항의 거대한 부두로 뱃머리를 돌렸다. 지난해 홍콩의 경제성장률은 2.9%에 그쳤지만 상하이는 7.7% 성장했다. 홍콩의 경제 발전이 더뎌지면서 덩샤오핑의 자치 약속도 점점 희석되는 분위기이다. 영국이 떠난 뒤 자치를 원하는 홍콩인들의 운명은 들판의 잡초처럼 바람 부는 대로 흔들리고 있다.
이번 홍콩 사태는 함께 아시아의 용으로 불렸던 한국에도 시사점이 적지 않다. 홍콩처럼 한국도 경제적으로 점점 중국에 밀접해지고 있는 반면 서울의 경제성장률은 상하이는커녕 홍콩보다도 낮은 2.0%(2012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만약 미국마저 떠난다면 어떻게 될까?
홍콩은 중국어로 '샹강[香港]', 즉 '향기가 나는 항구'로 불린다. 그러나 지금 홍콩의 향기는 상하이의 짙은 향수 내음에 밀려 시들해지고 있다. 서울의 향기도 시들까 걱정이다.
조선일보 김기훈 프리미엄뉴스부 차장
■중국의 거악(巨惡)
[中공산당이 밝힌 '7대 巨惡']
국영 석유기업 주무르며 一家가 막대한 떡고물 챙겨
시진핑 부패의혹 外信에 유출, 反시진핑 쿠데타 모의說도… 조강지처 살해 혐의도 받아
중국 공산당은 6일 저우융캉(周永康) 전 정치국 상무위원을 검찰에 송치하면서 그의 7가지 부패 혐의를 공개했다. 뇌물 수수·직권 남용은 물론 간통·매춘 등 소문으로만 떠돌던 혐의가 모두 망라됐다. 중국에서 사형으로 다스리는 국가기밀 누설 혐의도 포함됐다. 중화권 매체가 7일 보도한 저우융캉의 부패 실태는 입이 벌어지는 수준이다.
◇"저우융캉 일가 재산 900억위안(약 16조2000억원)"
중국 당국은 "저우융캉이 직권을 이용해 거액의 뇌물을 받았고, 국유 자산에 중대한 손실을 끼쳤다"고 밝혔다. 석유대학을 졸업한 저우융캉은 '석유방(石油幇·석유업계 세력)'의 우두머리다. 그는 연간 수백조원의 매출을 올리는 국영 석유 기업을 주무르며 막대한 '떡고물'을 챙겼다. 뉴욕타임스는 지난 4월 "저우융캉의 장남 저우빈(周濱)이 처가 식구들과 함께 다수의 중국 에너지 기업에 핵심 주주로 등재돼 있다"고 전했다. 로이터 통신은 "저우융캉 일가가 부정 축재한 재산이 최소 900억위안(약 16조2000억원)에 이른다"고 밝혔다.
▲저우융캉은 쓰촨(四川)성 당서기 시절 권력을 이용해 조폭 류한(劉漢)의 뒤를 봐줬다. 류한은 저우의 비호 덕분에 살인을 저지르고도 7조원대의 재산을 모았다. 그러나 저우융캉 낙마 이후 사형을 선고받았다.
◇시진핑·원자바오 일가 축재 유출 혐의
블룸버그 통신은 2012년 6월 "차기 주석인 시진핑 부주석 일가가 3억7600만달러 규모의 기업 투자, 17억3000만달러 규모의 희토류 기업 지분, 5560만달러 상당의 부동산, 2000만달러 규모의 정보기술기업 상장 주식 등 20억달러 이상의 재산을 보유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어 그해 10월에는 뉴욕 타임스가 '서민 총리'로 알려진 원자바오 총리 일가의 재산이 27억달러(약 3조원)에 달한다고 폭로했다.
홍콩 명보는 이날 "저우융캉에게 적용된 국가기밀 누설 혐의는 최고지도부의 축재 규모를 해외에 유출한 것"이라고 전했다. 저우융캉 자신은 16조원대의 축재를 해놓고, 시진핑·원자바오 일가의 부패 의혹을 외신에 흘렸다는 의미다. 당시 저우융캉은 공안·정보 기관을 총괄하는 위치(정법위원회 서기)였기 때문에 군(軍)을 제외한 모든 정보에 접근할 수 있었다고 명보는 전했다.
◇저우융캉 별명은 '백계왕(百鷄王·100마리 암탉의 왕)'
중국 당국은 저우융캉 혐의로 간통·매춘을 적시하면서 "권력과 금전을 매개로 다수의 여성과 관계했다"고 밝혔다. 미국에 서버를 둔 중화권 매체 보쉰은 이날 "저우융캉 별명이 '백계왕(百鷄王·100마리 암탉의 왕)'"이라며 그의 여성 편력을 고발했다. 저우융캉이 CCTV 앵커 등 29명의 정부(情婦)를 거느렸으며 400여명의 여성과 잠자리를 했다는 것이다. CCTV 부사장을 지낸 리둥성(李東生) 전 공안부 부부장이 저우융캉에게 여성을 소개하는 역할을 맡았다고 한다. 중국 당국이 최고지도부를 지낸 인사의 성(性)추문까지 공개한 배경에는 '망신 주기'로 이번 숙청의 명분을 강화하려는 의도가 깔렸다는 해석이 나온다.
◇조강지처 암살설·쿠데타 모의설 등도 조사 가능성
중화권 매체는 그동안 저우융캉의 범죄 혐의로 '조강지처 암살설'과 '쿠데타 모의설' 등도 제기했다. 홍콩 명경망은 "저우융캉이 쓰촨성 서기 시절 28세 연하의 CCTV 여기자 자샤오예(賈曉燁)와 결혼하기 위해 조강지처를 교통사고로 위장해 살해한 혐의가 있다"고 전했다. 또 보쉰 등은 "저우융캉이 작년 여름 동지였던 보시라이(薄熙來·무기징역) 전 충칭시 서기의 몰락 이후 자신의 운명을 예감하고 시한폭탄과 독침 등으로 시 주석을 해칠 계획을 세웠다"고 말했다. 중국 당국이 이번에 밝힌 저우융캉 '기타 혐의'에는 쿠데타 모의설 등이 포함된 것이란 관측이 제기된다.
☞저우융캉 前정치국 상무위원
후진타오 정권에서 공안·사법·정보 분야를 총괄하는 중앙정법위원회 서기 겸 최고지도부인 정치국 상무위원을 지냈다. 중국 석유대학 출신으로 석유업계에서 잔뼈가 굵었으며, 쓰촨성 당 서기를 거쳐 공안 분야를 장악하며 중국 정계의 실력자로 등장했다. 보시라이(薄熙來·무기징역) 전 충칭시 서기 등과 시진핑 집권에 반기를 들었으며, 작년 초부터 연금 상태에서 부패 혐의 조사를 받아왔다.
조선일보 안용현 주북경특파원
■권력 투쟁
◆2015.04.18 "린뱌오가 국가주석 노린다"고 판단한 마오쩌둥
▲중국홍군의 아버지 주더(오른쪽)와 함께 만찬에 참석한 린뱌오. 1968년 인민대회당.
1949년 9월 21일부터 열흘 간, 베이징에서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가 열렸다. 회의 첫 날, 중공 주석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을 중앙 인민정부 주석에 선출했다. 10월 1일 마오쩌둥은 국가주석 자격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
1959년 4월, 마오쩌둥은 “모든 정력을 중요한 문제에만 집중시키겠다”며 전국인민대표대회(全人代)에 사직원을 제출했다. 류사오치(劉少奇·유소기)가 마오의 뒤를 이었다. 문혁이 발발하자 류사오치는 타도 대상으로 전락했다. 1969년 가을, 약 한 첩 제대로 못 쓰고 세상을 떠났다. 국가주석은 공석이 됐다.
보기 싫은 것들을 없애버린 마오쩌둥은 국가주석 제도가 못마땅했다. “있으나 마나 한 쓸 데 없는 자리, 없느니만 못하다.” 70년 3월 8일, 마오는 헌법 개정과 국가체제 개혁, 국가주석 폐지에 관한 의견을 중앙정치국에 전달했다.
마오의 건의는 지상명령이나 다름없었다. 9일 후,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 주재 하에 중앙 공작회의가 열렸다. 헌법 개정을 놓고 토론을 벌였다. 만장일치로 마오의 건의를 통과시켰다. 이때 린뱌오(林彪·임표)는 수저우(蘇州)에 있었다. 마오에게 의견을 전했다. “마오 주석이 국가주석에 취임하기를 바란다.” 중앙 정치국은 토론회를 열었다. 다들 린뱌오의 의견에 동의했다.
마오쩌둥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국가주석은 형식이다. 허직(虛職)은 없는 게 낫다.” 이어서 특유의 어투를 구사했다. “삼국시대에 이런 일이 있었다. 손권(孫權)은 조조(曹操)에게 황제가 되라고 권했다. 속셈이 따로 있었다. 조조를 화로 위에 올려놓고 구울 심산이었다. 너희들에게 권한다. 나를 조조로 만들지 마라. 너희들도 손권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충돌 초기의 마오쩌둥과 린뱌오. 표정들이 심상치 않다.
린뱌오는 완강했다. 우파셴(吳法憲·오법헌)과 만난 자리에서 짜증까지 냈다. “명분이 분명해야 국민이 순종한다. 무슨 조직이건 우두머리가 있어야 하는 것처럼, 국가에는 국가주석이 있어야 한다. 리쭤펑(李作鵬·이작붕)과 함께 개헌 논의 소조에 참여해라.”
정치국은 헌법 개정에 착수했다. 캉셩(康生·강생), 우파셴, 장춘차오(張春橋·장춘교), 리쭤펑 등이 머리를 맞댔다. 헌법이라는 게 있는 줄은 알았지만 처음 보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보니 불평이 많았다. 우파셴이 특히 심했다. “헌법인지 뭔지, 이런게 왜 필요한지 모르겠다. 어제와 오늘이 다르다. 규정만 따르다 보면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 무슨 일이 생기면 우리끼리 의논해서 결정하면 된다. 그래도, 국가주석은 꼭 있어야 한다.”
예췬(葉群·엽군)은 린뱌오의 추종자인 마르크스주의 이론가 천보다(陳伯達·진백달)에게 속내를 드러냈다. “국가주석을 선출한다면, 남편이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마오 주석은 한번 갔던 길은 다시 안가는 사람이다. 사직을 자청했던 국가주석에 복직할 리가 없다. 부주석이 나서서 마오쩌둥을 국가주석에 추대하면 다들 찬성하겠지만 마오는 사양할 것이 분명하다. 국가주석은 자연스럽게 린뱌오 몫이 된다.”
예췬의 추측은 근거가 있었다. 1년 전, 중공 제 9차 대표자대회 첫번 째 회의에서 린뱌오가 주석단 주석을 권했을 때 마오는 “나보다 린뱌오 동지가 적합하다”며 사양한 적이 있었다.
담벼락에도 눈이 있는 시절이었다. 마오쩌둥은 린뱌오가 국가주석 직을 탐낸다고 판단했다. 중공 9차대회 두 번째 회의를 소집했다. “헌법 수정과 경제계획, 전쟁준비 강화 등을 토론하자.” 회의 장소는 알리지 않았다. 다들 베이징이겠거니 했다
▲텐안먼 성루의 린뱌오와 천보다. 1967년 봄.
문혁 시절 상하이시 서기를 역임한 쉬징셴(徐景賢·서경현)은 92년 봄, 홍콩의 한 월간지에 생생한 기록을 남겼다. “70년 초여름, 운무(雲霧)에 휩싸인 장시(江西)성 뤼산(廬山)에 봉쇄령이 내렸다. 노련한 정원사와 건물 수리공들이 줄지어 산으로 올라갔다. 성 간부들은 난창(南昌)과 지우장(九江)의 요리사와 운전기사, 요식업소 접대원들을 직접 심사했다. 정치적으로 문제가 없는 사람들을 선발해 뤼산으로 보냈다. 규율이 엄격했다. 서신 왕래나 전화는 물론이고 자신이 와 있는 장소를 누설하지 않겠다는 각서에 서명을 받았다. 뤼산에는 거류민들이 많았다.
가장 번화한 지역인 중국 과학원과 식물원 인근에는 특히 많았다. 뤼산 범위 내에 있는 수 천명의 거주자들은 영문도 모른 채 엄격한 심사를 받았다. 적합 판정을 못 받은 사람들은 산에서 쫓겨났다. 절이나 도교사원에 남아 있던 승려와 도사들도 산에서 내려가라는 명령에 따랐다. 산이 텅 비자 무장군인들이 산을 에워쌌다.
지우장 비행장에는 온종일 뜨고 내리는 군용기 소리가 요란했다. 도처에 레이다 기지와 헬기 이착륙장이 설치됐다. 수목 사이사이에 무장군인들의 눈이 번득거렸다. 문혁 시절이었지만, 인간세상은 어쩔 수 없었다. 혁명이다 뭐다, 중국 천지가 요동을 쳤지만 놀러 다니는 사람도 많았다. 유람객들은 무슨 영문인지 멍한 기색이었다. 멀리 있는 봉우리들 바라보며, 감탄만하다 발길을 돌렸다. 천하의 명산에서 마오쩌둥과 린뱌오가 격돌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2015-06-05 리콴유의 싱가포르 모델을 따라가는 중국
⊙ 싱가포르 난양이공대학, 20년간 중국 공무원 1만3000명 교육, 전직 장관들이 수업 진행
⊙ “중국은 싱가포르 본보기로 한 ‘강한 정부+자유시장경제’ 체제 추구”
(姚洋 베이징대학 국가발전연구원장)
⊙ 시진핑, “싱가포르가 개발도상국이 보이는 ‘장기 성장정체 현상’ 빠져나온 점 배워야”
任桂淳
⊙ 71세. 이화여대 사학과 졸업. 美일리노이대 사학과 박사(중국사 전공).
⊙ 한양대 사학과 교수, 同인문대학장, 대통령자문 동북아경제중심추진委 위원 역임.
現한양대 명예교수, 中베이징대 중한역사문화연구센터 연구원.
⊙ 저서: 《청조팔기주방흥쇠사(淸朝八旗駐防興衰史)》 《청사(淸史): 만주족이 통치한 중국》
《중국인이 바라본 한국》 《우리에게 다가온 조선족은 누구인가》 등.
▲1978년 11월 리콴유와 만난 덩샤오핑. 이후 중국은 싱가포르의 발전모델을 적극 도입했다.
지난 3월 23일 싱가포르 건국의 아버지 리콴유(李光耀) 전 총리가 91세의 나이로 서거하자 중국의 시진핑(習近平) 총서기 겸 국가주석, 국무원 총리 리커창(李克强), 전국인민대표회의 상무위원장 장더장(張德江) 등은 다투어 깊은 애도의 뜻을 표했다.
이렇게 중국 정계가 리콴유의 죽음에 깊은 관심을 보이는 이유는 그의 원적(原籍)이 광둥(廣東)성 메이저우(梅州)인 싱가포르 국적 화인(華人)이래서만은 아니다. 리콴유와 싱가포르가 중국의 개혁개방과 발전에 많은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며, 최근 중국 정계가 그가 이룩한 싱가포르 발전을 주시해 왔기 때문이다.
2013년 중국공산당 18차 3중전회(제18기 3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채택한 <전면적 개혁심화를 위한 몇 가지 중대 문제에 대한 중공중앙의 결정>은 향후 10년간 중국의 개혁과 발전 노선을 확정한 것이다. 이를 검토한 중국 칼럼니스트인 장팅빈(張庭賓)은 2013년 11월 18일자 《제일재경일보(第一財經日報)》에서 ‘중국이 싱가포르를 개혁의 모델로 삼았다’고 논평했다.
사실, 중국 정계가 싱가포르 모델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더 이른 시기인 개혁개방 초기부터였다. 싱가포르 모델은 1980년대 초기에 중국의 경제건설과 경제운영 방법의 참고자료가 되었고 후에는 사회관리에 있어 본보기가 되어 왔다.
덩샤오핑, 前 싱가포르 부총리 초빙
▲1980년대 후반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을 자문한 고겅수 전 싱가포르 부총리.
중국 문화대혁명이 끝난 후 당시 부총리이며 훗날 개혁개방의 총설계사였던 덩샤오핑(鄧小平)은 1978년 11월에 중국 지도자로서는 처음으로 싱가포르를 방문했다. 74세의 덩샤오핑은 싱가포르의 경제건설과 사회관리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당시 덩샤오핑과 리콴유는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
< 덩: 1920년 프랑스로 유학가는 길에 처음 싱가포르를 방문했을 때 싱가포르는 상당히 낙후되어 있었는데 이번 두 번째 싱가포르에 와 보니 아주 깨끗한 도시로 변했군요.
리: 천만에요. 이곳은 아주 작은 지방이라 관리하기 쉽습니다.
덩: 그래요. 만약 내가 상하이 정도의 지방을 관리한다면 정말 좋았을 텐데.
리: 아니에요. 싱가포르에 온 중국인들은 모두 광둥(廣東)이나 푸젠(福建)성에 한 뼘의 땅도 없고,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노동자들의 후예입니다. 중국대륙에는 중원(中原)의 관리, 문인, 학사, 장원의 후예들이 많은데 싱가포르 같은 것을 만드는 것이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중국은 못할 것이 없습니다. 만들어도 더 좋게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싱가포르에서 돌아온 덩샤오핑은 개혁개방을 적극 추진하고 싱가포르를 모델로 삼아 외자를 유치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싱가포르의 사회경제적 모델이 공산당 집권을 위협할까 염려하여 ‘마르크스주의, 마오쩌둥 사상, 공산당 영도,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유지’하면서 외자유치에 한해서만 싱가포르 모델을 따르기로 했다. 그는 또한 싱가포르의 개국공신이자 재무부 장관과 부총리를 역임한 고겅수(吳慶瑞)를 1985년부터 중국 국무원 경제고문으로 초청하여 직접 싱가포르의 경험을 받아들였다. 고겅수는 6년간 중국의 첫 외국고문으로 활동하며 선전(深圳), 주하이(珠海), 산터우(汕頭)와 샤먼(厦門) 4곳의 경제특구 발전과 관광산업에 관해 조언했다. 여기서 중국이 개혁개방 초기, 중국 남부지역의 경제발전에 싱가포르의 경험을 직·간접적으로 받아들였음을 알 수 있다.
南巡講話 이후 관심 고조
중국에서 싱가포르 모델이 본격적으로 부각된 것은 1992년 덩샤오핑의 ‘남순강화(南巡講話)’ 이후라 볼 수 있다. 덩샤오핑은 개방정책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기 위하여 개방의 선두지역인 선전으로 남행하였는데, 여기서 싱가포르의 사회질서를 칭찬하며 중국도 이를 본받아 더 엄하게 시행해야 한다고 했다. 이후 “싱가포르를 배우자”는 열풍이 급속도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이에 화답이라도 하듯 1993년 5월 당시 싱가포르 고문(顧問)장관이던 리콴유 전 총리는 쑤저우(蘇州)공업단지 합작개발을 통하여 싱가포르의 경험을 중국에 제공하기로 했다. 덩샤오핑의 뒤를 이은 장쩌민(江澤民)도 싱가포르 모델에 관심을 보이기는 했지만, 이를 본격적으로 추진하지는 못했다.
싱가포르 모델이 더욱 주목을 받은 것은 2007년 중국공산당 17대 전국대표대회가 ‘사상해방’을 언급하면서부터이다. 후진타오의 심복 왕양(汪洋)이 광둥성 서기로 임명된 후 사상해방의 대토론을 개최했는데 그는 강연 중 “선전은 싱가포르에 도전해야만 한다”, “싱가포르와 남방의 사상해방을 학습하여 개혁의 새 방향을 심화하자!”고 역설(力說)했다.
선전에서 활발한 토론회의 개최와 함께 정계와 학계에 이르기까지 싱가포르를 학습하자는 열풍이 불었다. 중국 지도자들의 인솔하에 많은 단체가 싱가포르에 가서 경험을 배워 오기 시작했다. 2007년 11월에는 원자바오 총리가 싱가포르를 방문하여 사회보장제도와 정체제도에 관심을 표명하기도 했다.
중국이 싱가포르에 주목하는 이유
중국 지도자들이 싱가포르 모델을 지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크게 5가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 싱가포르는 중국인(華人)이 중심이 된 사회로 중국과 유사점이 많다. 덩샤오핑은 “싱가포르의 중국인이 할 수 있다면 그보다 훨씬 넓은 960만km²에 사는 중국인이 왜 못해 내겠는가? 왜 중국은 싱가포르를 확대한 것 같은 큰 국가가 될 수 없는가?”라고 호소했다고 한다. 덩샤오핑은 중국에 싱가포르 같은 도시 1000여 개를 세우는 것이 자신의 꿈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고 한다.
두 번째, 싱가포르의 총리 리콴유가 뛰어난 지도자라는 점이다. 싱가포르의 인민행동당이 50여 년간 장기집권하고 있지만 관료청렴 정도는 아시아에서 으뜸이고, 다민족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건국 이래 민족 간 충돌이나 큰 단체가 주도하는 주목할 만한 큰 사건이 거의 없으며, 경제상황이나 국민들의 생활수준도 양호하고 사회노령화에 대한 준비 또한 잘되어 있다. 리콴유는 어떻게 싱가포르를 이런 국가로 건설하고 관리하였는가가 중국 지도자들이 배우고 싶은 점이다.
세 번째, 작은 섬나라로 제3세계 개발도상국이었던 싱가포르가 아시아의 4룡(龍) 중 하나이자 세계 유수의 선진국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부강한 나라가 된 것은 ‘경제가 먼저이고 민주는 나중’이라는 노선을 선택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싱가포르는 서양의 모델을 따르지 않고 독자적인 노선을 추구하여 부강한 국가를 건설했다. 중국도 현재 민주주의보다 경제발전을 우선으로 하기 때문에 싱가포르 모델에 더욱 주목한다.
네 번째, 중국이 싱가포르 모델에 집착하는 이유는 중국의 현 정치체제하에서 미국이나 유럽의 양당제나 복수정당이 돌아가며 집권하는 체제는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1당이 장기집권하는 싱가포르 식의 정치운영은 국가가 개방의 진전과정과 속도를 조종할 수 있어 집권당이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당내(黨內)정치를 조정·처리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바로 이 때문에 중국 지도자들이 싱가포르 모델에 친근감과 매력을 느낀다고 볼 수 있다.
다섯 번째, 싱가포르는 정책을 실행하여 효과를 보는 국가인데 이는 엄격하게 법치를 실현하여 공직자들이 청렴과 효율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도 추진하고 있는 정책들이 효과를 보려면 우선 중국사회에 만연한 부정부패부터 척결하고 법치국가를 건설해야 하기 때문에 중국 지도층은 싱가포르 모델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중국공산당 해외黨校’
1992년부터 중국공산당은 싱가포르 난양이공대학(南洋理工大學)에 장기연수나 학위취득을 목적으로 간부를 파견하기 시작했다. 1997년부터는 중국 시장(市長)들의 연수를 위한 ‘중국 시장고급연수반’을, 1998년에는 중국 공무원들을 위해 중국어로 수업하는 ‘관리경제학 석사과정’을 개설했다. 난양이공대학은 2005년부터는 전문적인 ‘공공관리대학원’을 설립하여 대규모의 중국 공무원을 배출하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난양이공대학은 ‘중국공산당 해외당교(海外黨校)’라는 별명을 얻었다. 20년간 난양이공대학에서만 1만3000여 명의 중국 중급·고급 공무원을 교육했다. 인민행동당 부비서장, 재정부 장관, 외교부 정무장관, 국회의원 등을 역임한 전직 싱가포르 정계 요인들이 그들의 교육을 맡았다. 중국 중간층 공무원들 사이에서는 “당신 싱가포르에 갔었나?”가 만났을 때 인사말이 될 정도로 싱가포르 연수열풍이 거세다.
중국의 간부들은 난양이공대학에서 주로 싱가포르의 경제, 공공관리, 사회통치, 환경보호, 반부패에 관련된 제반 정책에 대해 배운다. 수업의 목표는 3가지이다. 첫째, 국제적 시각으로 외국의 성공과 실패의 경험을 배울 것, 둘째, 실제와 이론을 연결할 것, 셋째, 중국의 국정에 배운 것을 결합할 것이다.
예를 들어, 시장반의 졸업논문은 그들이 귀국하여 자신들이 관리하는 현(縣), 시(市), 국(局) 내에서 실시할 수 있는 것을 주제로 한다. ‘장관과의 대담’이라는 시장반 과정에서는 중국 간부들이 장관을 지낸 정계요원이 중심이 된 교수들과 함께 앉아 한 주제에 관하여 토론하고 교류하면서 싱가포르의 성공 경험을 학습한다.
중국공산당은 싱가포르의 집권당인 인민행동당이 어떻게 국가를 통치하는지 연구하도록 대표단을 파견하기도 했다. 2007년 중국공산당 방문단원 중의 한 사람인 중앙당교 연구실 부주임 쩡예쑹(曾業松)은 싱가포르의 인민행동당을 ‘세계에서 다당제(多黨制)를 실행하는 국가 중 국가에 대한 지배능력이 가장 강하고 집권기간이 가장 긴 정당’이라 평했다. 현 중국 국가부주석인 리위안차오(李源潮)는 중앙조직부 부장 재임시(2007~2012) “우리가 싱가포르를 지도자간부들의 해외연수 기지로 가장 먼저 선택한 것은 싱가포르의 발전경험이 중국에 본보기 역할을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중국 공무원들의 싱가포르 연수와 더불어 중국 내에서는 싱가포르 학파가 형성될 정도로 싱가포르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사회보장 시스템도 전수
▲싱가포르는 쑤저우공업단지를 조성하면서 도시계획부터 사회보장제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경험을 전수했다.
싱가포르는 중국 지방정부와 대형 공업단지 건설사업들을 공동으로 추진해 오고 있다. 이미 쑤저우(蘇州)공업단지의 건설, 우시(無錫) 신구(新區)에 중국 최대 태양광발전 산업기지 건설, 톈진(天津)생태도시 건설을 완성했으며, 광저우(廣州)지식도시 사업과 서부개발의 핵심지역인 쓰촨성 청두(成都)에 싱가포르-쓰촨 혁신과학기술단지 건설을 추진 중이다.
가장 두드러진 성과를 보인 싱가포르-중국 합작의 쑤저우공업단지 건설의 예를 살펴보자. 1993년 5월 당시 리콴유 고문장관이 무상으로 싱가포르의 경험을 중국에 제공하기로 하고 양국의 지도자들은 쑤저우공업단지 건설에 합의했다. 이를 위해 1994년을 전후해서 1000여 명의 처급(處級) 이상 중국 간부들이 싱가포르에 가서 시구(市區) 구획, 도시발전과 관리, 외국투자, 업무기술 훈련, 사회보장 시스템과 고객서비스 등의 방면에 교육을 받았다.
쑤저우공업단지 개발은 도시계획 발전과 무역담당 관료의 훈련 면에서는 다른 어떤 국가보다, 심지어 홍콩, 마카오, 대만과의 합작보다 월등히 나은 모델이 되었다. 특히 공단의 노동관리잠행규정(勞動管理暫行規定) 중에 중앙 공적금(公積金)제도, 단체계약제도 및 노동조합, 그리고 원스톱 서비스(One Stop Service) 등은 모두 싱가포르의 경험으로부터 배워 제정한 것으로 당시 중국 내에는 전례가 없던 것들이었다.
시범적으로 시행한 쑤저우공업단지는 중국인이 세계를 이해하는 중요한 창구가 되어 더 개방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로 세계의 유익한 경험을 익히는 본보기가 되었다. 쑤저우공업단지는 쑤저우 전체 중 4%의 토지와 인구를 차지하지만 전시(全市)의 15%의 지역생산총가와 재정수입을 올리고 있다. 수출입총액, 실제외자이용, 고정자산투자 면에서 이 공단 지역주민 수입의 지표가 매년 쑤저우 전 시에서 1위다. 쑤저우공업단지 설립 이래로 주요경제지표는 연평균 30% 정도 증폭하고 있으며 종합발전지수는 국가급 개발구 중 제2위다. 생태환경지표 또한 전국 개발구 중에서 앞서 있어 ‘국가생태공업시범단지’가 되었다. 쑤저우공단은 개혁개방 30년 동안의 가장 중요한 국제협력 사업일 뿐만 아니라 중국건국 이래 외국과 합작한 사업 중 가장 성공한 케이스로 꼽힌다.
쑤저우의 성공은 사람들로 하여금 싱가포르의 경험이 중국화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중국 각지로부터 25만명 이상의 공무원이 쑤저우공업단지에 와서 이 경험을 학습했다.
쑤저우공단을 통하여 싱가포르 식의 공단운영과 싱가포르의 다양한 소프트웨어가 중국대륙 깊숙이 퍼져 나가고 있다. 쑤저우공업단지의 모델은 쑤저우 주변의 쑤첸(宿遷), 난퉁(南通), 추저우(滁州), 우시뿐만 아니라 신장(新彊)의 훠얼궈쓰(霍爾果斯)로까지 확산되고 있다. 1000개의 싱가포르를 중국에 건설하고자 했던 덩샤오핑의 꿈이 현실이 되어 가고 있는 셈이다.
시진핑의 싱가포르 따라 배우기
시진핑은 싱가포르가 개도국 장기 성장정체 현상을 극복한 데 주목하고 있다.
개혁개방의 기치를 내세운 지난 30여 년 동안 중국은 세계가 놀랄 만한 경제적 성과를 보였다. 그러나 이와 함께 부패, 빈부격차, 도덕적 해이 등이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었다. 2012년 11월에 중국 총서기직과 군사위원회 주석직을 물려받은 시진핑이 직면한 도전은 바로 이러한 사회적·정치적 모순을 해결하는 출구를 찾는 것이다. 그는 중국의 자본주의화한 경제와 사회질서를 유지하여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 그는 공산당을 혁신하여 국민의 지지를 받고 당의 장기집권을 보증할 수 있는 권위주의 정치모델이 필요하다.
시진핑은 집권하기 이전부터 싱가포르 모델에 관심을 보였다. 그는 “싱가포르가 개발도상국이 보이는 장기 성장정체 현상(middle income trap)을 빠져나온 점을 중국이 배워야 한다”고 한 것으로 보아 싱가포르의 지속적인 경제성장에 관심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그는 자유경제와 다양한 정치적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인민행동당이 싱가포르 건국 이후 계속 장기집권하고 있는 점에 주목했을 것이다. 아마도 중국의 정치지도자들은 정치·언론·거주를 제한적으로 통제하는 싱가포르 식의 정치체제에 매력을 느끼고 있음에 틀림없다.
시진핑이 싱가포르 모델에 관심이 있다는 것은 2012년 18대 중국공산당 전국대표대회를 전후로 시진핑 주관의 중앙당교 간행물인 《학습시보(學習時報)》에 게재된 문장들을 통해 알 수 있다. 이들의 내용은 주로 싱가포르의 정치권력 운영과 감독제도, 서비스형 정부건설 경험 및 통치경험을 중국이 어떻게 배울 것인가 하는 것이다.
부패척결에도 관심
▲야오양 중국 베이징대 국가발전연구원장.
앞에서 언급했듯이 2013년 18차 3중전회(三中全會)에서 향후 10년간의 중국 개혁과 발전 노선을 확정했다. 베이징대학 국가발전연구원 원장 야오양(姚洋)은 “18차 3중전회에서 결정한 바의 목표가 만약 2020년에 전부 실현될 수 있다면 중국은 ‘강한 정부+자유시장경제’ 체제가 성립되는 것으로, 이는 싱가포르의 ‘강한 정부+자유시장경제’ 모델을 본보기로 한 것”이라고 말했다.
2014년 18차 4중전회에서는 의법치국(依法治國)의 문제와 탐오(貪汚)와 부패척결을 핵심으로 삼았는데, 이 또한 기본적으로 ‘공직자 재산신고제도’ 등 싱가포르 모델을 참조한 것이다. 부패척결 정책은 이미 실천으로 옮겼고 노동을 통한 재교육제도의 개혁과 수입분배제도에 대한 개혁은 시진핑 ‘신정(新政)’의 기점이 되고 있다. 이런 사실들을 학자들이나 기자들은 싱가포르 모델을 선호하는 시진핑의 적극적인 신호로 보고 있다.
시진핑의 개혁은 여러 가지 실험을 통해 추진되겠지만 그 모든 것은 공산당 1당 체제라는 틀을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한 한계에서 볼 때 1당이 장기집권하면서 국민의 자유와 인권보다 경제발전을 중시해 여러 가지 제한을 가하지만, 눈부신 성장을 이룩한 싱가포르의 모델은 중국 지도층이 선호하는 모델임에 틀림없다.
시진핑의 정치지도부 구성원들은 왕양과 리위안차오가 포함된 중앙정치국 위원 25명과 정치국 상무위원으로는 시진핑을 포함하여 리커창, 장더장, 위정성(兪政聲), 류윈산(劉雲山), 왕치산(王岐山), 장가오리로 이들 대부분이 싱가포르 모델에 관심이 많은 지도자들이다.
싱가포르와 중국의 차이점
하지만 중국 일각에서는 싱가포르 모델이 중국에 적합한지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싱가포르를 연구한 톈진 시위당교연구생부(市委黨校硏究生部) 강사인 니밍성(倪明勝)은 《학습시보》에 ‘싱가포르 통치경험을 어떻게 학습할까’라는 글을 기고했다. 이 글에서 그는 중국과 싱가포르의 정황적 차이와 사회경제 발전단계의 차이를 내세워, 섬의 통치경험이 대륙에 적합할지는 의문이라고 하였다.
싱가포르관리대학 정치과 부교수 브리짓 웰시(Bridget Welsh)도 싱가포르 모델을 중국이 직접적으로 받아들 수 있을지에 대해서 회의적이다. 그는 니밍성의 주장에서 한층 더 나아가 “중국공산당 내 부패의 정도가 매우 광범위하고 깊어서 중국 지도부는 당의 쇄신에 먼저 전력(全力)을 쏟아 부어야 할 것”이라고 일침을 놓았다.
그렇다면 싱가포르와 중국의 다른 점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이에 대해 베이징대학 국가발전연구원 원장 야오양은 크게 4가지 차이점을 제시했다.
첫째, 규모 면에서 중국은 정부가 모든 정보를 장악하기가 불가능하다.
둘째, 중국에는 수많은 국영기업이 있는데 정부가 국영기업을 통하여 경제에 개입하고 있다.
셋째, 중국에는 시장을 독립적으로 운영하는 실체로서의 강대한 지방정부가 존재한다.
넷째, 중국 정부가 장악한 자원이 싱가포르 정부의 것보다 월등히 많다.
이 같은 차이점 때문에 야오양 등 전문가들은 싱가포르 모델을 중국에 적용하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한다.
중국 베이징대 정치학자 리판(李凡)은 “중국 집권 당국이 싱가포르 모델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면서 “싱가포르 국민은 기본적으로 결당(結黨)과 결사(結社), 언론의 자유를 보장받고 있지만 중국은 그렇지 못하다”고 지적한다. 언론인 자오링민(趙靈敏)도 “중국 지도자들이 싱가포르의 정치체제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2011年 5월 싱가포르 대선(大選)에서 야당인 노동당이 여러 명의 후보자가 나오는 대선거구에서 승리했고 이후 두 번의 보궐선거에서도 승리했다. 싱가포르 정부는 반대당을 탄압하기 위한 어떠한 부정적인 조치도 취하지 않았고 싱가포르 민중은 정치적 견해를 표현하는 데 어떠한 거리낌도 없었다. 그러므로 중국 지도층이 반대의 목소리를 용납하는 싱가포르의 체제를 수용하기 어려울 것이다. 덧붙이자면 정치제도와는 무관하지만 중국의 지도층이 자신들이 향유하고 있는 수많은 기득권을 포기해 가며 싱가포르 모델을 받아들일지도 미지수이다. 또한 오랜 전통과 역사과정에서 형성된 복잡하게 얽혀 있는 중국의 현황을 단지 표면적으로 받아들인 싱가포르의 제도와 정책으로 타개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전문가들은 중국이 싱가포르 모델을 받아들이려 한다면 몇 가지 선행(先行)해야 할 조건이 있다고 말한다.
첫째, 시진핑이 절대적으로 권력을 장악해야만 싱가포르 모델을 받아들이는 데 장애가 되는 것들을 제거할 수 있다.
둘째, 더 중요한 것은, 본받으려는 싱가포르 모델의 껍데기가 아닌 그 배후의 주요 원칙 혹은 정신을 먼저 본받아야 한다. 즉, “위기를 직시한다,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실무적인 사업 수행에 힘쓴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국민을 근본으로 한다, 단련하고 용감하게 나아간다” 등이다.
리콴유의 해법
이와 관련하여 생전에 리콴유가 지적했던 중국의 문제점과 해결방안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리콴유는 89세 때 미(美) 국방부 고위관료였던 그레이엄 앨리슨(Graham Allison)과 로버트 블랙윌(Robert Blackwill) 전 인도주재 미국대사와 인터뷰를 가졌다. 이 인터뷰에서 리콴유는 ▲외국인에게 어려운 언어 ▲자유로운 교류와 경쟁이 허용되지 않는 문화 ▲전근대(前近代)의 틀을 벗지 못한 법치가 없는 통치체제 ▲극심한 부패와 지역간의 경제적 격차 등을 중국이 안고 있는 문제점으로 꼽았다.
리콴유는 “중국공산당은 그들의 안정을 보장하기 위해, 군벌(軍閥)시대가 다시 도래할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다당제의 일인일표제(一人一票制) 민주주의를 원하지 않지만, 통신·교통의 발달로 중국인들은 다른 나라의 제도와 문화에 노출될 것”이라면서 중국이 현 체제를 유지하면서도 당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했다.
정부가 지금처럼 실용적인 정책을 취하면서 철저한 보안통제를 유지하여 폭동이나 반란을 허용하지 않는 동시에 성(省), 도시에 더 많은 권한을 주고 민초들에게도 더 많은 권한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해법이었다. 리콴유는 “작은 마을에서부터 의회제 민주제를 실시하여 장기간에 걸쳐 서서히 발전하도록 할 수도 있다”고 제안했다. 그는 또 “근대국가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명확한 행정법규와 실질적으로 중앙권위를 강화하는 법률제도를 정비하여 법으로써 지방정부와 공무원 그리고 국민을 다스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위기의식과 소통
▲찰리 멍거 버크셔 헤서웨이 부회장.
세계적인 투자자 워런 버핏(Warren Buffett)의 파트너인 찰리 멍거(Charlie Munger) 버크셔 헤서웨이 코퍼레이션 부회장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정치제도는 특정 상황하에 성공적으로 적응한 싱가포르의 정치제도”, “싱가포르 정부 체제가 세계에 존재하는 가장 성공한 정부체제”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는 세계 정치사를 연구하려면 리콴유의 생애와 그의 업적을 연구하라고 말한다.
싱가포르 모델이 싱가포르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영토가 작아 통치하기 용이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싱가포르 모델이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싱가포르가 처했던 특수한 정치·군사·외교·경제적인 환경으로 인한 위기의식과 이것을 지도자가 국민과의 소통을 통해 국민을 이해시켰고 국민의 신뢰를 받았기 때문이다.
중국의 경우 중국이 자신의 성장 모델로 싱가포르 모델을 선택한다고 해도 어느 수준까지 실현될 수 있을지 필자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다. 분명 1980~1990년대의 개혁개방 시기 선전특구를 위시하여 연해지역 경제특구에서 외국인 투자유치의 싱가포르 모델 실험은 성공적이었다. 그리고 쑤저우공업단지와 같은 싱가포르와 중국과의 합작사업을 통해 싱가포르 식의 관리운영 기법과 기업윤리 및 다양한 싱가포르의 소프트웨어가 중국에 전수되어 좋은 결과를 가져오고 있다.
개혁의 성공 여부는 지도자의 의지와 역량에 크게 좌우된다. 중국공산당 중앙문헌연구실은 공산당 총서기에 취임한 2012년 11월 15일부터 2014년 4월 1일까지의 시진핑의 발언과 강연 내용을 발췌하여 《시진핑, 개혁을 심화하라》를 편찬했다. 이 책을 통해 시진핑은 그의 개혁의지를 분명히 밝히면서 ‘지금이야말로 개혁을 심화할 때’라고 강조했다.
리콴유, 시진핑 극찬
리콴유는 생전에 시진핑에 대해 “대범하고 시야가 넓으며 통찰력이 깊고 신중하고 당당한 데다가 카리스마까지 넘치는 인물이다. 문화대혁명 기간 시련을 겪었지만 이를 잘 극복하여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넬슨 만델라에 비할 만하다”고 극찬한 바 있다. 오랜 세월 세계의 수많은 지도자들과 교류해 온 리콴유이니만큼 그의 관찰은 정확할 것이다. 따라서 개혁주체로서의 시진핑의 역량은 의심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시진핑과 싱가포르 모델》의 저자인 우진성(武津生)은 “시진핑에게 ‘강인정치(强人政治)’, 즉 ‘수퍼맨과 같은 지도자’가 되도록 조언한 것이 바로 장쩌민과 리콴유였다”고 말한다.
2013년 이후 시진핑의 발언과 그가 추진하는 정책 등을 미루어 볼 때 중국이 변하고 있음은 확실하다. 시진핑은 싱가포르 식의 부패척결 정책을 추진하고 있으며 법치국가 건설을 위한 초석을 다지고 있다. 이제 중국 지도층이 국민을 우선으로 하는 창의적이고 효율적이면서도 실무적인 싱가포르의 경험과 그 정신을 접목시켜 발전한다면 중국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세계 1등 국가로 탈바꿈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중국이 싱가포르 모델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필요로 하는 법치주의, 사회보장체계, 조직관리체계, 사회관리 서비스 시설, 다양한 소프트웨어 등을 받아들일 것임에는 틀림없다. 그리고 시진핑 정부가 추진하는 도시화정책과 맞물려 덩샤오핑이 소망한 것이 현실이 되어 중국대륙에 쑤저우공업단지, 톈진생태도시, 그리고 광저우지식도시와 같은 도시들이 1000여 개 들어서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다.
중국이 양적(量的)성장을 넘어 질적(質的)성장에도 성공할 경우, 동북아(東北亞)에서 대한민국은 어디쯤에 위치하게 될지 무척 걱정이 된다. 지금 우리야말로 과거 리콴유나 지금 시진핑처럼, 다음 세대를 위한 전면적인 제도 개혁에 나서야 하지 않을까?
출처 | 월간조선 5월호
◆2015년 08월 28일 ‘中 전승절’의 모든 것
둥펑 - 5B 등 100% 중국産 첨단무기 총동원 ‘열병’
서방 뺀 49개국 정상급 참가… 대내외 ‘中國夢’ 과시
오는 9월 3일은 ‘중국 인민의 항일전쟁 및 세계 반파시스트전쟁 승리 70주년(전승절)’으로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열병식을 포함한 대대적인 기념 행사가 열린다. 한국에서는 약칭해서 ‘중국 전승절’이라고 부르지만 중국에서는 ‘중국 인민의 항일전쟁 및 세계 반파시스트전쟁 승리 70주년’으로 부른다. 박근혜 대통령을 비롯해 49개국의 전·현직 정부수반과 고위급대표가 참석하는 이번 행사는 2차대전 이후 70년간 비약적으로 성장해온 중국의 저력을 드러내면서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이 추구하는 ‘중궈멍(中國夢)’을 보여주는 자리가 될 것이라는 점에서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1 전승절 유래는
9월 3일은 지난해 2월 열린 전국인민대표대회 상임위원회 회의에서 처음으로 ‘중국 인민의 항일전쟁 승리기념일’로 지정됐다. 이와 함께 12월 3일은 난징(南京)대학살 희생자 국가 기념일로 정해졌다. 올해는 세계2차대전 종전 70주년을 맞아 역사를 되새기자는 의미에서 9월 3일 기념 열병식을 열기로 하고 3일부터 5일까지를 공휴일로 정했다.
2 열병식 리허설은
지난 주말인 베이징 톈안먼(天安門) 광장 일대는 계엄이 내려져 철저한 통제가 이뤄지는 가운데 열병식 리허설이 열렸다. 리허설은 지난 22일 밤부터 23일 오전까지 1만여 명의 장병과 500여 대의 무기 장비, 200대에 가까운 군용기가 총동원된 가운데 진행됐다. 리허설에는 실제 열병식을 상정해 주력 전투기들이 열을 지어 비행하는 에어쇼와 공중 조기경보기를 선두로 전폭기들이 무지개색 연기를 뿜으며 삼각 편대로 비행하는 한편, 공중급유기로부터 급유를 받는 전투기들도 목격됐다. 또 항일전쟁에서 공을 세운 팔로군, 신사군, 동북항일연군, 화남유격대 등 10개 항일부대의 깃발 70개도 등장했다.
3 어떤 신무기 등장하나
열병부대는 11개 보병부대, 27개 장비부대, 10개 공중제대 등 총 50개 부대로 구성되며 40여 종의 (무기 등) 장비 500여 대와 20여 종의 비행기(군용기) 200대가량이 동원된다. 미사일은 7종류가 등장하며 규모와 수적인 면에서 과거 어떤 열병식보다 크고 많을 것으로 전망된다. 중국은 2009년 건국 60주년 열병식에서 5종류의 미사일 108기를 선보인 바 있다.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둥펑(東風)-5B와 초음속 순항미사일 잉지(鷹擊)-18도 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둥펑-5B는 1984년 국경절 열병식에 모습을 드러낸 바 있어 이번에 등장한다면 중국 미사일 기술 수준의 향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줄 수 있다. 최신예 조기경보기, 폭격기, 전투기, 함재기, 헬리콥터 등 다양한 종류의 군용기도 200대가량 등장한다. 미국의 해군용 함재기인 F/A-18E/F, 슈퍼호닛에 필적하는 젠(殲)-15도 열병식에 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올해 열병식에 동원되는 무기는 100% 중국산이며 이 가운데 84%가 신무기라고 중국 정부는 밝혔다.
4 눈길끄는 여군 의장대
중국 열병식을 앞두고 사상 처음으로 등장하는 여군 의장대에 대한 중국 매체의 관심도 높다. 모델 대회 수상자 등 화려한 외모를 자랑한다. 베이징군구 등에서 선발돼 훈련 중인 여군 의장대원은 62명으로 이 가운데 51명이 17명씩으로 나눠 육·해·공 남녀 혼성 의장대 방진(네모꼴 형태의 진형)에 들어가 실제 열병식에 참가한다. 훈련에 참가하는 여군 의장대원의 평균키는 178㎝, 평균연령은 20세로 이들 중에는 CCTV 모델 선발대회에서 전국 10대 모델에 꼽힌 대원도 있다. 여군 의장대는 인민해방군 창설 이후 62년 만인 지난해 2월 처음 만들어졌고 지난해 5월 중국을 방문한 투르크메니스탄 대통령의 환영행사를 계기로 공식 활동 모습이 최초로 공개됐다. 중국 열병식에 여군 의장대가 참가하는 것은 1949년 신중국 출범 이후 처음이다. 중국 매체들은 이들이 그러나 다른 남성 군인들과 똑같이 연습에 참가하고 있으며 젓가락을 입에 물고 미소를 연습하고 있다고 전했다.
5 외국 군대 참여 현황
러시아와 몽골, 파키스탄, 이집트, 쿠바 등 11개 국가가 열병식에 75명 안팎의 군인을 파견해 실제 열병식에 참가한다. 아프가니스탄, 베네수엘라 등 6개 국가는 7명 내외의 대표단을 보내 열병식에 참가하며 한국을 비롯한 14개국이 군 대표로 참관단을 보내 총 31개 국가가 열병식에 참여한다고 중국 정부는 밝혔다.
6 참석하는 외국 정상
중국 정부가 25일 기자회견에서 밝힌 이번 전승절 행사에 참석하는 국가는 모두 49개국이다. 이 중 30개 국가에서는 국가원수나 정부 수뇌부 등 국가지도자급이 참석하고 19개 국가에서는 정부 고위급 대표가 참석하며 10개 국제기구에서 책임자가 행사에 참석할 것이라고 밝혔다. 지도자급 인사가 참석하는 국가로는 남북한과 러시아 외에도 캄보디아, 카자흐스탄, 타지키스탄, 라오스, 남아프리카공화국, 이집트, 몽골, 미얀마, 베트남, 쿠바, 폴란드, 아르헨티나, 베네수엘라, 수단 등 30개국이다.
프랑스와 인도, 브라질, 뉴질랜드, 이탈리아 등 19개국은 국방·외무장관 등 정부 대표를 파견하며 유엔, 세계보건기구(WHO), 유네스코(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 상하이협력기구(SCO) 등 국제기구 수장 10명이 참석한다. 구체적으로 중국 측이 밝힌 30개국의 국가 지도자는 박근혜 대통령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비롯해 동유럽과 중앙아시아, 동남아시아, 중남미와 아프리카 등지 국가의 지도자들이다. 국제기구 수장으로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을 비롯해 마거릿 챈 WHO 사무총장, 이리나 보코바 유네스코 사무총장, 리융(李勇) 유엔 공업개발기구 사무총장, 피터 마우러 국제적십자회 총재 등이 참석한다. 전직 정상급 지도자로는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와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독일 총리,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전 일본 총리, 조지프 에스트라다 전 필리핀 대통령 등이 참석한다.
7 박 대통령 참석 이유는
박 대통령은 이번 방중을 통해 북한 핵 문제를 풀기 위한 ‘한·미·중’ 삼각협력 체제의 실질적 강화를 모색할 것으로 예상된다. 일각에서는 버락 오바마 미 행정부의 불참 ‘압력설’이 제기됐지만, 오바마 미 행정부가 박 대통령의 전승절 참석을 한·미 동맹의 균열로 여기지는 않는다고 밝힌 것이 박 대통령의 발걸음을 가볍게 한 것으로 보인다. 북한을 6자회담 테이블로 끌고 나오려면 중국의 강력한 압박 외에 방법이 없다는 게 박 대통령의 생각으로 보인다. 미 동맹국 가운데 유일하게 중국의 전승절에 참석하는 ‘리스크’가 적지 않지만 ‘실(失)보다 득(得)이 많다’는 판단을 내렸다는 것이다.
8 北, 왜 최룡해 보내나
북한은 이번 중국 전승절 기념행사에 당초 거론되던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보다 공식 서열이 낮은 최룡해 노동당 비서를 참석시키기로 했다. 북한은 11개국 군대가 참가하는 열병식에 인민군뿐 아니라 참관단도 파견하지 않는다. 혈맹관계를 자랑하던 북·중 관계 이상설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방중 무산에다 지난 5월 러시아 전승절 행사에 김영남이 참석했던 것을 감안하면 최룡해를 보내는 것은 악화된 북·중 관계를 방증하는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최근 한반도 긴장 고조 국면에서 남한 쪽에 기운 듯한 행보를 보인 중국의 체면을 깎아내리려는 의도가 포함된 것 같다는 적극적인 해석도 있다.
그러나 이와 정반대 분석도 나온다. 그동안 대중국 외교를 전담해 온 최룡해를 통해 북·중 관계 개선의 돌파구를 마련하려는 북한의 복안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이 경우 최룡해가 김 제1위원장의 친서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에게 전달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9 과거의 열병식 행사
중국이 9월 3일 개최하는 열병식은 1949년 신중국 출범 이후 15번째이며 국경절(건국기념일)이 아닌 항일전쟁 승리 기념일(전승절)에 개최하는 것도 처음이고 외국 정상을 초청한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2009년 건국 60주년 기념일에 이어 6년 만이며 시 국가주석 체제 들어 처음 개최되는 열병식이기도 하다. 역대 최대규모로 치러지는 이번 열병식은 항일전쟁 승리의 의미를 되새기는 동시에 ‘군사굴기’ 행보와 함께 시진핑 체제의 공고함을 과시하려는 의도가 담겼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10 中·佛·러 전승절 왜 다른가
2차대전 시기가 같지만 각국이 전승절을 다르게 기념하고 있는 것은 2차대전 당시 전승 상대가 어디인지에 따라 시기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중국이 9월 3일을 항일전쟁 승리 기념일로 정한 것은 1945년 9월 2일 일제가 미군 미주리호 함상에서 정식으로 무조건적 항복 문서에 서명한 날이기 때문에 이 다음날을 전승절로 정한 것이다. 러시아는 나치 독일이 무조건 항복한 날을 자국 시간 기준에 맞춰 5월 9일을 전승절로 기념한다. 프랑스 등 유럽 주요 국가들의 전승기념일은 5월 8일이다.
베이징 = 박세영 특파원 go@munhwa.com,
■ 2015-08-29 ‘용의 부활’… 빅 이벤트
“깨어나면 위험하다. 잠자는 사자 중국을 흔들어 깨우지 말라!”(19세기 초 프랑스 나폴레옹 1세)
“중국이라는 사자는 이미 깨어났다.”(2014년 3월 프랑스를 방문한 중국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
다음 달 3일 중국 베이징(北京)의 중심 톈안먼(天安門)과 창안제(長安街)에서 ‘중국 인민 항일전쟁 및 세계 반파시스트 전쟁 승리(전승절) 70주년 기념’ 열병식이 열린다. 중국 정부는 2009년 건국 60주년 열병식에 이어 6년 만에 개최하는 이번 대규모 열병식을 통해 중국이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강대국으로 부상했음을 세계로부터 인정받기를 기대하고 있다.
연일 폭락하는 중국 증시와 경기 침체가 세계 경제를 놀라게 하고 있다면 미국 전역을 직접 타격할 수 있는 신형 대륙간탄도미사일(ICMB)인 둥펑(東風)-41과 차세대 스텔스 전투기인 젠(殲)-20 등 열병식을 장식할 중국군 첨단 무기의 위용은 중국의 군사력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할 것이다.
1949년 신중국 건국 이후 15번째이자 시 주석 집권 이후 처음 열리는 이번 열병식은 시 주석의 탄탄한 집권 기반을 대내외에 알리는 것이자 중국의 높아진 위상과 국방 역량을 국제사회에 과시하는 무대가 될 것으로 관측된다. 열병식에 참석하는 49개국 가운데 주요국으로 분류되는 한국의 박근혜 대통령은 톈안먼 망루의 중앙 자리에 설 것으로 전망된다. 이 자리는 북한 김일성이 1954년 10월 1일 건국 5주년 기념식에서 마오쩌둥(毛澤東) 주석과 나란히 섰던 자리라는 점에서 남다른 의미가 있다.
▼ 49개국 대표단 불러 모은 힘… 시진핑의 ‘외교 굴기’▼
‘긴장 속 축제 분위기 고조’
요즘 베이징의 하늘은 ‘열병식 블루’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맑고 푸른 하늘이 연출되고 있다. 20일부터 홀짝제 차량 운행이 시행된 것이 큰 요인이다. 시내 건축 현장과 정부 기반시설 공사도 중단됐다. 베이징 시, 톈진(天津) 시, 허베이(河北) 산시(山西) 산둥(山東) 허난(河南) 성과 네이멍구(內蒙古) 자치구 등 7개 지역은 28일부터 다음 달 4일까지 오염물 배출을 작년보다 30% 이상 줄이도록 했다.
23일 열병식 ‘예행연습’이 베이징 중심에서 열리는 등 베이징에선 ‘전승절 70주년’ 분위기가 점차 무르익고 있다. 톈안먼 광장에는 3000m²의 면적에 만리장성 축소판이 설치되고 각종 꽃으로 장식됐으며 ‘1945’ ‘2015’라고 쓴 대형 숫자 표지가 세워졌다. 전국 각 지역의 위성TV 방송사는 다음 달 1일부터 5일까지 오락 프로그램의 방송을 중단하고 역사의식과 애국심을 고취하는 역사 및 교양물 등을 대거 편성할 계획이다.
테러 방지 등 안전을 위한 조치도 엄격히 시행되고 있다. 행사 당일인 3일 오전 9시 30분에서 낮 12시 30분까지 베이징의 서우두(首都) 공항과 난위안(南苑) 공항에선 모든 비행기의 이착륙이 금지된다. 이에 앞서 20일부터 체육, 오락, 광고 등을 목적으로 비행기구를 띄우는 행위가 일절 금지됐으며 22일부터 9월 4일까지 헬리콥터, 패러글라이딩, 열기구 등의 운행이 전면 금지됐다.
‘명실상부한 첫 국제 열병식’
중국은 1949년 신중국 건국 이후 1959년까지 매년 10월 1일 건국기념일(국경절)에 열병식을 열었다. 1950년대 냉전 시기에는 소련 북한 몽골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등 공산권 국가의 정상급 인사들이 주로 중국의 열병식에 참석했다. 북한 김일성 전 주석, 니키타 흐루쇼프 전 소련 공산당 서기장도 중국을 방문해 열병식을 지켜봤다.
하지만 대약진 운동(1958∼1960년)과 문화대혁명(1966∼1976년)의 광풍 속에서 중단됐다가 건국 35주년을 맞은 1984년 덩샤오핑(鄧小平)에 의해 부활했다. 이어 건국 50년과 60년인 1999년과 2009년 국경절에 각각 장쩌민(江澤民),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의 주재로 열렸다. 군 통수권자인 공산당 중앙군사위 주석을 지낸 역대 최고지도자는 모두 열병식 사열대에 올랐다.
올해 열병식은 국경절이 아닌 항일전쟁 승리 기념일(전승절)에 개최된다는 점에서 역대 열병식과 차별화된다. 중국은 과거 관계가 밀접했던 국가의 외빈들을 열병식에 초대했으나 이번처럼 51개국에 초대장을 보내 49개국의 국가원수와 정부 대표 등이 참석하는 ‘국제 행사’로 치르기는 처음이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등 국제기구 수장 10명도 참석한다.
타국 군대도 참가하는 ‘국제 행사’로 치르는 것 역시 과거 열병식과는 다른 점이다. 러시아 쿠바 카자흐스탄 몽골 등 11개국은 각각 75명 안팎의 의장대를 파견해 ‘사각형의 방진(方陣·네모꼴 형태의 진형)’을 이뤄 열병 행진을 벌인다. 아프가니스탄 라오스 베네수엘라 등 6개국은 방진 행렬은 하지 않지만 열병 행진에는 참여한다. 한국 프랑스 이란 베트남 태국 말레이시아 등 14개국은 참관단 몇 명을 파견해 열병식을 지켜보게 된다. 이와 관련해 국방부는 정경두 합동참모본부 전략기획본부장(공군 중장), 박철균 국방부 국제정책차장(육군 준장), 최석윤 합참 군사협력과장(해군 대령) 등 3명을 파견한다고 26일 발표했다.
그런데 중국의 전승일은 왜 9월 3일일까. 한국은 일왕의 항복 발표일인 8월 15일을 광복절로, 러시아는 독일 나치 정권이 항복 문서에 서명한 5월 9일을 전승일로 각각 기념하고 있다. 중국의 전승일이 9월 3일이 된 까닭은 1945년 9월 2일 일본이 도쿄 만에 정박한 미주리함상에서 일본 대표가 항복 문서에 서명한 다음 날을 기념일로 삼았기 때문이다. 장제스(蔣介石) 당시 중국 국민당 총통은 9월 3일을 경축일로 선포하고 사흘간 국기를 게양하도록 했다. 일본은 연합군에 9월 2일 항복 문서에 서명한 것과는 별개로 중국과는 일주일 후인 9월 9일 장쑤(江蘇) 성 난징(南京)에서 항복 문서 서명식을 열었다.
‘동북아에 지정적학 리더십 과시’
올해 중국의 ‘전승절 열병식’은 준비와 개최 과정을 둘러싸고 ‘전승절 외교’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주목받았다. 특히 미국의 영향력이 약화하고 중국이 부상하는 등 ‘지구촌 권력구도’가 변화하는 시점에서 열려 어느 국가가 참가할지가 최대 관심사였다. 미국과 일본으로부터 ‘무언의 압력’을 받은 서방 국가들이 참석 발표를 미루거나 잇달아 참석자의 격을 낮추면서 긴장감이 감돌기도 했다.
아시아에서는 미국의 ‘아시아 재균형 정책(Pivot to Asia)’과 일본의 재무장 군사대국화가 동반된 미일동맹 강화에 중국이 맞서는 형국이다. 유럽에서는 지난해 3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크림공화국 병합 이후 서방과 러시아 간에 신냉전이 벌어지고 있다. 또한 중국은 동중국해에서는 일본과, 남중국해에서는 베트남 필리핀 등과 각각 해양 영토 갈등을 벌이고 있다.
중국은 이번 행사를 통해 참가국과 중국의 양국 관계를 가늠하고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재설정하는 계기로 삼을 것으로 예상된다. 김한권 국립외교원 교수는 “대규모 전승절 행사를 개최하는 것은 ‘강한 중국’을 바라는 인민들의 열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민족주의적 목적과 공산당의 지도력을 공고화하는 것도 있지만 미국의 아시아 패권주의에 반대하는 메시지를 보내려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중국의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창설이 지리경제학적 리더십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전승절 행사 개최는 지정학적 리더십의 과시를 위한 것이라고 김 교수는 풀이했다.
중국은 미국이 일본과의 동맹 강화를 통해 자국을 견제하는 것에 맞서 이번 열병식을 계기로 러시아 등 전략적 우방들과의 연계를 본격적으로 강화하는 계기로 삼으려는 의도도 없지 않다는 관측이 나온다. 하지만 중국 학자들은 이 같은 견해에 좀처럼 동의하지 않는다. 베이징대 국제관계학원 주펑(朱鋒) 교수는 “열병식은 국내적인 대사”라며 “너무 대외적인 의미 부여를 할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주 교수는 “신임 최고지도자가 임기 내에 열병식을 갖는 것은 덩샤오핑 이후 관례화된 것으로, 특히 전승 70주년은 큰 역사적 의의가 있다”고 덧붙였다.
이번 열병식은 시진핑 주석의 권력기반이 공고해졌음을 보여주는 성격도 띠고 있다. 비록 ‘전승 70주년’이라는 계기도 있지만 과거 지도자와 달리 집권 3년 만에 이처럼 대규모 행사를 개최하는 것은 충분히 권력기반을 다졌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분석이 나오는 것. 장쩌민 주석은 집권 10년, 후진타오 주석은 집권 7년이 지나서야 각각 건국 50년과 60년 국경절에 맞춰 열병식을 개최했다.
열병식에 즈음해 시 주석 정부가 40년 만에 특별사면을 단행하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는 24일 ‘일부 복역 범죄인에 대한 특사 관련 결정’ 안건을 통과시켰다. 이번 특사는 1975년 이후 40년 만에 단행되는 것이자 역대 8번째다. 이는 전승절을 앞두고 사회 통합과 화합을 도모하려는 것으로, 시 주석의 리더십 강화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 美 MD뚫을 둥펑-41, 스텔스 젠-20 앞세운 ‘군사 굴기’ ▼
‘육지와 공중에서 펼쳐질 입체 열병식’
▲중국 베이징 톈안먼 광장에서 23일 열린 첨단 무기 공식 리허설에서 ‘둥펑’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운반차량이 광장을 통과하고 있다. 사진 출처 환추시보
9월 3일 오전 9시경 시작될 기념대회는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 생존 노병들에 대한 훈장 수여 등으로 진행된다. 이어 궈진룽(郭金龍) 베이징 시 서기의 개회 선포와 함께 열병식이 시작된다. 중국의 56개 민족이 항일 승전 70주년을 축하한다는 의미에서 56문의 대포가 70발의 예포를 발사한다. 이어 중국 국가와 행진곡이 연주된다.
시 주석은 박 대통령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등 각국 지도자들과 함께 톈안먼 성루 위에 모습을 드러낼 예정이다. 시 주석의 연설에 이어 열병식이 전개된다.
열병식 동원병력은 총 1만2000여 명. 육해공군과 전략 미사일 부대인 제2포병, 무장경찰부대, 4대 총부 직속 단위 부대들이 참가한다. 열병부대는 ‘방진’ 형태의 11개 행진부대, 2개 항전노병 부대(차량으로 이동), 27개 장비부대, 10개 공중제대(비행편대) 등 총 50개 부대로 구성된다. 또 40여 종의 무기·장비 500개와 20여 종의 각종 군용기 200대 정도가 동원된다. 동원되는 무기·장비는 100% 중국산으로 그중 84%가 이번에 처음 공개되는 것이다.
열병식은 ‘진입’ ‘행진’ ‘열병’ ‘분열’ ‘해산’ 등 5단계로 진행되며 모두 70분 정도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군악대 2400여 명이 ‘항일군정대학교가’ ‘보위황하’ ‘태행산 위에서’ ‘인민군대(중국군)의 당에 대한 충성’ 등 항일전쟁 시기에 불렀던 노래 30여 곡을 연주한다.
‘항일’ 주제에 맞게 일본군과 싸웠던 팔로군, 신사군, 동북항일연군, 화남유격대 등 ‘항일부대’도 열병부대 편대로 조직됐다. 여기에는 90세 이상 노병들이 참가한다.
베이징 상공에서는 주력 전투기들이 열을 지어 비행하며 오색 연기를 내뿜는 에어쇼를 펼친다. 헬리콥터 20대는 항일전쟁 승리 ‘70주년’을 상징하는 ‘70’이란 숫자를 하늘에 새기며 비행한다.
올해 열병식에는 처음으로 여군 의장대가 참가한다. 육해공 남녀 혼성 의장대 방진 행진에 참가하는 여군 51명의 평균 키는 178cm, 평균 연령은 20세다. 88%가 대학 재학 이상의 학력이고 관영 중국중앙(CC)TV 선발대회에서 뽑힌 전국 10대 모델도 있다. 여군 의장대는 인민해방군 창설 이후 62년 만인 지난해 2월 처음 만들어졌다.
열병식 이후에는 인민대회당에서의 오찬 ‘초대회’(리셉션)와 ‘문예연회’(무대 공연 등이 어우러진 연회) 등이 이어진다. ‘승리와 평화’를 주제로 인민대회당에서 90분간 펼쳐질 문예연회에는 중국 지도자와 외국 정상, 항일노병, 베이징 각계 대표 인사 등 6000여 명이 참석한다. 합창, 중창, 교향악, 민족음악, 뮤지컬, 춤, 시낭송 등이 무대에 올려지며 중국의 항일 역사와 중국의 부흥을 부각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열병식의 꽃은 첨단 무기’
전승 기념식의 하이라이트가 열병식이라면 열병식의 하이라이트는 무기와 장비들이다. 올해 열병식에서는 원거리·중거리·근거리, 핵·일반(재래식)·신형 미사일 등 7종의 미사일이 총동원될 예정이다. 역대 열병식 가운데 최대 규모다. 2009년에는 미사일 5종을 선보인 바 있다.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인 ‘둥펑(DF)-31B’와 차세대 ICBM ‘둥펑-41’이 공개될지도 주목된다. 미국 국방부에 따르면 둥펑-31B는 러시아제 RT-2PM 토폴(Topol)의 중국 모델로 지난해 9월 첫 시험발사에 성공한 다탄두(MIRV) ICBM이다. 사거리는 1만1200km로 웬만한 미국 지역을 타격할 수 있다.
사거리 1만4000∼1만5000km의 둥펑-41은 목표물 명중 오차가 120m 이하로 둥펑-31(300m)보다 정교하고 핵탄두를 10발까지 탑재할 수 있다. 미국의 미사일방어(MD) 체계를 무력화할 수 있는 핵미사일로도 꼽힌다.
전략 폭격기를 운용하는 나라는 미국과 러시아 외에 중국뿐이다. 중국은 핵폭탄 탑재형인 H-6A, 정찰기인 H-6B, 재래식 폭탄을 탑재하는 H-6C, 공중급유기 H-6U, 순항미사일 탑재기 H-6H 등 130대가량의 H-6 기종을 운용하고 있으며 이 중 일부가 공개될 것으로 전망된다.
‘중국판 스텔스 전투기’인 젠-20(J-20)과 젠-31(J-31) 그리고 함재기 젠-15(J-15)도 관심을 끈다. 2011년과 2012년에 자체 개발된 J-20과 J-31은 아직 본격적으로 실전 배치되지 않았다. 러시아 SU-33을 모델로 제작된 J-15는 2010년 시험비행 과정에서 처음 모습을 보인 작전반경 1000km의 함재기로, 항공모함 랴오닝(遼寧)호에 탑재된 것 외에는 알려진 정보가 거의 없다.
2009년 10월 1일 건국기념일에 처음 소개된 조기경보기 쿵징(空警)-2000은 470km 떨어진 표적 60∼100개를 동시에 추적할 수 있다고 중국은 주장한다.
올해 행사의 핵심 키워드 중 하나는 ‘항일’
올해 행사의 두 가지 키워드는 ‘항일’과 ‘반파시스트’다. ‘항일 전승절’은 지난해 초부터 본격화한 시진핑 정부 ‘항일 공정’의 결정판이다.
중국은 지난해 역대 어느 정권보다 많은 ‘항일 역사’를 되새기는 활동을 했다. 중일전쟁의 발단이 된 1937년 7·7사변(루거우차오·蘆溝橋 사변) 기념식에 시 주석이 국가주석으로는 처음으로 참석했다. 9월 3일을 처음으로 국가 ‘항일전쟁 승리 기념일’로 지정하고 12월 13일도 처음으로 ‘난징대도살 희생자 국가 애도일’로 지정됐다. 외신 기자들을 초청해 창춘(長春) 선양(瀋陽) 문서 보관소(당안관)의 위안부 관련 자료들을 공개하는가 하면 일본 전범들의 일기를 시리즈로 공개했다.
올해도 계속됐다. 일왕이 제2차 세계대전 후 무조건 항복을 발표한 8월 15일에 맞춰 헤이룽장(黑龍江) 성 하얼빈(哈爾濱)에 ‘중국 침략 일본군 731부대 죄증(罪證) 진열관’이 문을 열었다. 1930, 40년대 일본 관동군이 자행한 생체 세균전 실험 관련 자료 1만여 점이 전시돼 있다.
9월 3일 전승절 기념식을 전후해 전국 각지에서는 ‘항일 역사’ 등을 주제로 한 전시회, 좌담회, 항일 노병들에 대한 위문, 항일 유적지 보수활동, 문예작품 창작활동 등도 동시 다발적으로 열린다.
하지만 중국 정부는 이번 열병식이 현재의 일본을 겨냥한 게 아니라는 점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열병식 영도소조 판공실 부주임인 취루이(曲叡) 인민해방군 총참모부 작전부 부부장은 21일 기자회견에서 “이번 열병식은 그 어떤 국가도 겨냥하고 있지 않다. 일본 군국주의는 중국 인민뿐만 아니라 일본 인민에게도 심중한 재난을 초래했다”고 말했다. 취 부부장은 “열병식은 현재의 일본 국민을 겨냥하고 있지 않다”고 밝혀 과거사 때문에 현재와 미래의 중일관계에 영향을 주지 않아야 한다는 점을 시사했다.
전문가들도 중일 간 관계 개선을 향한 움직임은 계속될 것으로 예상한다. 박영준 국방대 교수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의 방중 포기에도 불구하고 양국은 각 부처의 실무급 회담, 심지어 군사 분야 협의체까지 가동하고 있다”며 “표면적으로는 대치하고 있지만 관계가 개선되는 양상으로 언제든 정상회담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중국 국무원발전연구중심의 리보(李波) 연구원은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중일관계는 중국으로서는 매우 중요해서 어떻게 양국 관계를 잘 처리하는지가 양국 모두에 피할 수 없는 중요한 문제”라고 말했다.
베이징=구자룡 특파원 bonhong@donga.com
◆2015.09.04 중국 전승절, 우리가 몰랐던 세가지 이야기
1. 사열때 연주된 정율성의 선율
열병식에선 한국인이 작곡한 음악이 흘렀고
중국 항일 전쟁 승리 70주년 열병식의 막은 한국인이 만든 선율이 열었다. 전남 광주 출신으로 중국 현대음악의 별로 추앙받아 온 정율성(1914~1976·사진)이 작곡한 '중국인민해방군행진곡(일명 팔로군행진곡)'을 군악대·합창단 2400명이 웅장하게 연주하는 가운데 시진핑 주석의 사열이 시작된 것이다. 중국에서는 으뜸가는 군가이자 국민 애창곡인 이 노래가 연주될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분위기였다.
현 광주광역시에서 태어난 그는 열아홉 살에 형들을 따라 중국으로 건너가 항일운동에 몸담았다. 영화 '암살'로 새롭게 주목받고 있는 독립운동가 김원봉이 조직한 '의열단'이 운영하던 '조선혁명 간부학교'에 들어가면서 중국 항일 인사들과 교류하는 한편 1939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그해 항일 투쟁의 동지이던 시인 궁무(公木)가 쓴 노랫말에 힘차면서도 웅장한 멜로디를 붙인 것이 '중국인민해방군행진곡'이다.
본명은 부은(富恩)이지만 '선율로 성공하겠다는 포부로 율성(律成)으로 이름을 바꿀 정도로 음악을 사랑했고 또 천재적인 음악성으로 주목받았다. 그가 항일투쟁 시절 사기를 북돋기 위해 작곡한 노래들은 지금까지도 애창되고 있고, 북한에서도 민족 작곡가로 이름을 알렸다.
이런 탓에 한국에서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다. 그러나 중국 현대사에서의 확고한 위상 때문에 앞으로 관심이 높아질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고향 광주에서는 2005년부터 '정율성 국제음악제'를 열면서 그를 재조명하고 있다.
2. 시진핑이 입은 옷은?
시진핑은 오랜만에 중산복을 꺼내입었고
▲1945년 8월, 중국 충칭에서 열린 평화회담을 위해 모인 마오쩌둥(사진 왼쪽), 패트릭 헐리(중간) 미국 특사, 장제스(오른쪽). 마오쩌둥과 장제스는 둘 다 중산복을 입고 회담에 참석했다. /광명일보
3일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항일 전쟁 승리 70주년 열병식에 참석한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은 검은색 중산복(中山服) 차림이었다. 역대 중국 주석들도 매년 10월 1일 열리는 국경일(건국기념일) 열병식 때 중산복을 입었다. 중산복은 '중국 건국의 아버지'라고 하는 쑨원(孫文)의 호에서 따온 이름이다. 쑨원은 인민이 편하게 입을 수 있는 옷을 찾다가 주름과 장식을 배제한 단순한 디자인의 중산복을 고안했다. 중산복은 1923년 쑨원이 광저우에서 중국 혁명정부의 대원수로 취임할 때 입어 유명해졌다.
중산복은 부위마다 고유한 의미를 지닌다. 가슴 상하단에 두 개씩 달린 큼지막한 주머니 총 4개는 춘추시대 제(齊)나라 재상 관중(管仲)이 '국가의 네 가지 근본'이라고 칭한 예·의·염·치(禮·義·廉·恥)를 상징한다. 상의 앞자락에 달린 단추 다섯 개는 서양의 '삼권 분립'에 대응해 쑨원이 제시했던 '5권(입법·사법·행정·감찰·고시) 분립'을, 양 소매에 3개씩 달린 단추는 쑨원의 '삼민(民)주의'의 바탕이 되는 민족·민권·민생을 각각 상징한다. 또 뒤트임이 없이 재단했는데, 이것은 국가가 분열되지 않고 통일을 지향한다는 의미다.
3. 시진핑이 탄 자동차는?
대륙의 롤스로이스 '훙치'타고… 기술력 과시
▲3일 중국 베이징 톈안먼(天安門) 광장에서 열린 전승절 열병식에서 시진핑 국가주석은 중국산 최고급 세단인 '훙치(紅旗·사진)'를 타고 사열했다.
훙치는 상하이(上海)자동차, 둥펑(東風)자동차와 함께 중국 3대 국영자동차그룹인 디이(第一)그룹에서 생산한다. 공산당의 붉은색 깃발에서 이름을 땄다. 미국의 캐딜락, 영국의 롤스로이스, 일본의 도요타 센추리처럼, 중국을 대표하는 VIP용 자동차다. 훙치는 1956년 자국산 의전용차가 필요하다는 마오쩌둥(毛澤東) 당시 국가주석의 지시로 1958년 처음 생산됐다. 개혁개방 이후 외국차와의 경쟁에 밀려 명맥만 유지하다가 2012년 양산을 재개하는 등 부침을 겪었지만, 중국 열병식에서만큼은 늘 함께했다.
훙치는 1959년 건국 기념 열병식에서 처음 국가주석 사열용으로 쓰였다. 24년간 중단됐다가 재개된 1984년 열병식 때는 덩샤오핑, 1999년 건국 50주년 기념일 때는 장쩌민 당시 국가주석이 훙치를 타고 사열했다. 후진타오 전 국가주석도 2009년 건국 60주년 기념행사 때 이 차를 탔다. 현행 훙치 모델은 현대적인 디자인의 H7과 고전적인 디자인의 L5 등 두 가지가 있다. 이번에 시 주석이 탄 차량은 훙치 L5 의전용 모델이다. L5는 최고급 나무 장식 및 가죽을 사용해 실내도 붉게 꾸몄다. 값은 500만~600만위안(9억~11억원)에 달한다.
◆2015.09.09 열병식이 열린 천안문은 자금성의 정문이 아니다
9월 3일 중국의 항일전쟁승리기념일(항전기념일)을 맞아 사상 최대 규모의 열병식이 베이징 천안문(天安門)을 배경으로 펼쳐졌다. 주최국인 시진핑(習近平) 중국공산당 총서기 겸 국가주석을 비롯해 박근혜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최룡해 북한 노동당 비서 등은 열병식에 앞서 단문(端門)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함께 천안문 성루로 올라가서 70분간의 열병식을 지켜봤다. 하지만 이날 열병식을 보도한 일부 한국 언론들은 천안문을 ‘자금성(紫禁城)의 정문’이라고 표기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황성의 정문인 천안문. /바이두
엄밀히 말해 자금성의 정문은 천안문이 아니다. 자금성의 정문은 열병식 참가사절들의 기념사진 배경이 된 ‘단문(端門)’ 바로 북쪽에 있는 ‘오문(午門)’이다. 밋밋하게 생긴 천안문에 비해 큰 새가 날개를 펼치듯이 생긴 오문은 훨씬 장중하고 우아한 멋을 자랑한다. 중국 역사극에서 자주 등장하는 “오문 밖에서 참수하라” 할 때의 그 오문이다. 하지만 마오쩌둥(毛澤東)의 초대형 초상화가 내걸린 천안문과 자금성이 워낙 중국을 대표하는 이미지로 전 세계인들의 머릿 속에 각인돼 있는 탓에 ‘천안문이 곧 자금성의 정문’이란 오해가 자리잡은 셈이다. 베이징을 찾는 관광객들도 대개 천안문 바로 옆 출입구를 통해 자금성 관광에 나서기 때문에 ‘천안문이 자금성의 정문’이란 잘못된 인식을 많이 갖고 있다.
▲자금성(궁성)의 정문인 오문. /바이두
<①편에서 계속>
천안문을 이해하려면 옛 베이징의 방어 시스템을 먼저 파악할 필요가 있다. 명청(明淸) 양대에 걸쳐 건설된 자금성은 황제가 사는 ‘궁성(宮城)’으로 불린다. 이 궁성을 중심으로 동심원이 뻗어나가듯이 황성(皇城)이 그 주위를 둘러싸고, 그 밖을 내성(內城), 다시 그 외부를 외성(外城)이 지키고 있다. 모두 4중의 성벽 방어 시스템으로 건설된 셈이다. 이 가운데 궁성과 황성을 통틀어서 황궁(皇宮)으로 부르는데, 이 때 궁성(자금성)의 정문이 오문이고, 황성의 정문이 바로 천안문이다.
그리고 궁성과 황성을 보호하고 있는 내성의 정문은 천안문광장 남쪽에 있는 정양문(正陽門)이다. 속칭인 ‘전문(前門)’이란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정양문은 외적과의 전투가 벌어지면 중요 방어기능을 담당해야 하는 문이다. 이에 천안문이나 오문보다 군사적 기능에 더 충실하게 설계됐다. 서울의 동대문과 같이 앞뒤 두겹으로 성벽을 나란히 세운 구조로, 육중한 성벽에 화살구멍과 총구가 촘촘히 뚫려있는 ‘전루(箭樓)’라는 이중성벽이 별도로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정양문보다 더 남쪽에 있는 영정문(永定門)은 베이징 방어의 제1선이라 할 수 있는 외성의 정문에 해당한다. 베이징의 가장 중요한 문이라고 할 수 있는 오문, 천안문, 정양문, 영정문 등 이들 4개 대문은 자금성의 정전인 태화전(太和殿)을 기준으로 남쪽으로 뻗어있는 일직선상에 나란히 배치돼 있다.
▲내성의 정문인 정양문(전문)과 그 아래 지하철역. /바이두
이들 황성, 내성, 외성 각각의 남대문에 해당하는 천안문, 정양문, 영정문을 중심으로 황성에 4개, 내성에 9개, 외성에 7개의 성문이 나있다. 이들 성문을 일컫어 ‘내구외칠황성사(內九外七皇城四)’라고 줄여서 일컫는다. 베이징에서 길을 잃고 헤매지 않으려면 적어도 ‘내구외칠황성사’에 해당하는 성문들의 이름과 위치를 기억하는 것이 필수다. 베이징의 지하철 역시 성벽 아래 방어시설의 일종인 ‘해자(垓子)’를 따라서 부설한 것들이 많아서 상당수 지하철역 이름은 성문 이름을 차용했다.
베이징 지하철 1호선의 천안문을 중심으로 각각 동서에 있는 건국문(建国門)과 부흥문(复興門, 옛 장안문), 순환선인 베이징 지하철 2호선의 전문(정양문)역을 중심으로 시계 반대방향으로 숭문문, 건국문, 조양문, 동직문, 안정문, 서직문, 부성문, 부흥문, 선무문, 화평문 등이다. 이들 성문 상당수는 베이징의 도시 팽창과정에서 헐리고 사라진채 이름만 남아있다. 하지만 개중에는 아직도 육중한 위용을 과시하며 서있는 문들이 남아있어 역사도시 베이징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이동훈 주간조선 기자의 중국관통
◆2015.09.21 中 원로정치의 그늘①②
지난 9월 3일 중국 베이징 천안문(天安門)광장에서 열린 열병식은 중국 원로들의 힘을 보여줬다고 얘기된다. 이날 천안문 성루 제일 앞줄에 자리 잡은 당 원로들은 당 총서기 겸 국가주석이었던 장쩌민(江澤民·89), 후진타오(胡錦濤·73), 총리였던 리펑(李鵬·87), 주룽지(朱鎔基·87), 원자바오(溫家寶·73) 등등이다. 특히 장쩌민과 후진타오는 현 최고지도부(정치국 상무위원 7인)보다 시진핑 주석의 바로 좌측(성루에서 광장 보는 방향)에 가깝게 자리를 잡았다. 그 옆으로 시진핑을 제외한 현 지도부 6인이 자리를 잡고, 다음으로 역대 지도부 서열 순서대로 자리를 잡았다.
천안문 열병식에서는 후진타오 정권 때만 해도 ‘사실상 2인자’였던 국무원 총리의 비중이 축소됐음을 보여줬다. 리커창 총리는, 인민복을 입고 천안문 성루에서 황제조서를 읽듯이 ‘중요강화’를 발표하는 시진핑 총서기의 뒤에서 사회를 보는 2인자로 각인됐다. 과거 국경절 열병식은 총리가 아닌 베이징시 당서기가 줄곧 사회를 봤었다. 2009년 국경절 60주년 열병식 때는 당 중앙정치국원인 류치(劉淇) 베이징시 당서기가 사회를 봤고, 앞서 1999년 국경절 50주년 열병식 때는 역시 당 중앙정치국원으로 베이징시 당서기로 있던 자칭린(賈慶林·75)이 사회를 봤다. 열병식 사열을 받는 ‘수열부대’ 총지휘를 역대 중국 7대 군구 중 베이징군구 총사령관이 맡아온 관례와 비슷하다. 당 서열 2위 국무원 총리가 국가주석 뒤에서 사회를 봤다는 점에서 “열병식 자체가 격상됐다”는 평가도 있지만, 보는 사람들은 생경한 광경에 고개를 갸우뚱거릴 수밖에 없었다.
▲자칭린(왼쪽부터), 쑹핑, 리란칭, 쩡칭홍, 우관정, 리창춘, 뤄간, 허궈창. /주간조선
자리 배치에서도 총리 위상의 변화를 드러냈다. 장쩌민 정권에서 각각 1기, 2기 총리를 지낸 리펑과 주룽지는 현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다음에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후진타오 정권에서 10년간 국무원 총리를 하면서 ‘2인자’로 군림한 원자바오는 리펑, 주룽지와 간격을 조금 띄운 채 리루이환(李瑞環·81)과 우방궈(吴邦國·74) 다음에 자리를 잡았다. 리루이환 전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정협) 주석은 14기, 15기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을 지냈고, 우방궈는 후진타오 정권에서 당시 의전서열 2위인 전인대 상무위원장(국회의장에 해당)을 맡았었다. 이로써 시진핑 정권에서는 ‘총리’에 대한 별도의 의전상 특별대접은 없다는 것이 명확해졌다.
후진타오 정권 때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당 중앙기율검사위 서기를 맡은 허궈창(賀國强·72)은 말석에 자리 잡았다. 허궈창은 후진타오 정권 당시 의전서열 8위였다. 하지만 시진핑 정권 출범과 함께 9인이었던 정치국 상무위원 수가 다시 7인체제로 줄어들었고 이 때문에 8위였던 허궈창은 가장 말석으로 밀려난 것으로 보인다. 시진핑 정권 출범과 함께 ‘신(新)사인방’으로 몰려 체포된 서열 9위 저우융캉(周永康·73) 전 정치국 상무위원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저우융캉은 지난 6월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다.
‘노(老)동지’들로 불리는 중국공산당 원로들의 자유분방한 개성도 잘 드러났다. ‘노동지’들 가운데 가장 젊은 리창춘(李長春·71) 전 정치국 상무위원은 커다란 망원렌즈가 달린 DSLR 카메라를 갖고 천안문 성루 위에 올랐다. 리창춘은 후진타오 집권 시절 이데올로기와 선전 등을 담당하는 ‘선전담당’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일했다. 중국판 트위터 웨이보 등에서는 “리창춘이 고사포를 들고 왔다”는 우스갯소리가 회자됐다.
<②편에 계속>
천안문 성루에 오른자와 못오른자의 명암
<①편에서 계속>
1989년 6·4 천안문사태 때 강경진압을 주창해 ‘천안문 학살자’로 불리는 리펑(87) 전 총리는 양복 상의에 금빛 번쩍이는 ‘훈장’을 달고 천안문 성루에 올랐다. 이에 ‘훈장’의 정체를 두고 “6·4(천안문사태) 진압 훈장 아니냐”는 얘기가 나왔다. 백발이 성성한 주룽지 전 총리와 우방궈 전인대 상무위원장은 검정색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나타났다. 당 원로 가운데 최고령이자 열병식 최다(3회) 참석자인 쑹핑(宋平·98)은 ‘드레스 코드’를 어기는 파격을 선보였다. 열병식을 주관하는 당 총서기 겸 국가주석만 입도록 허용된 인민복을 입고 빨간 모자를 쓴 채 천안문 성루에 올랐다. 쑹핑은 정치국 상무위원을 지낸 ‘강경 좌파’의 대부로 불린다. 1987년부터 1989년까지 당 중앙조직부장으로 인사실무를 총괄했고, 간쑤성 서기로 있을 때 후진타오를 천거해 ‘백락(伯樂·인재를 알아보는 사람)’으로 불린다. 쑹핑은 98세 나이에도 천안문 성루 위에 끝까지 자리를 지키며 노익장을 과시했다.
▲시진핑(왼쪽부터), 장쩌민, 후진타오, 리커창. /주간조선
간발의 차이로 천안문 성루에 못 올라간 당 최고 원로들도 있다. 차오스, 완리, 웨이젠싱이다. 장쩌민, 리펑과 함께 트로이카 체제를 형성했던 당 원로 차오스(喬石·91세 사망)는 지난 6월 작고했고, 덩샤오핑과 함께 중국공산당 8대 원로 반열에 드는 완리(萬里·99세 사망) 전 전인대 상무위원장은 지난 7월 작고했다. 2009년 국경절 때 모습을 드러냈던 웨이젠싱(尉健行·84세 사망) 전 기율위 서기 역시 지난 8월 사망해 이날 천안문 성루에는 오르지 못했다.
이날 시진핑 주석이 주관한 열병식 역시 덩샤오핑이 행한 대열병의 틀과 규격을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다. 덩샤오핑은 1984년 국경절 35주년에 천안문광장에서 열병식을 진행했다. 당시 덩샤오핑은 인민복을 입은 채 홍기(紅旗) 리무진을 타고 출연해 사열을 진행하면서 “동즈먼하오(同志們好·동지들 안녕하신가?)”라고 외쳤다. 이때 해방군 병사들이 “셔우장하오(首長好·대장 안녕하십니까?)”라고 복창하고, 재차 “동즈먼싱쿠러(同志們辛苦了·동지들 수고한다)”라고 외치면 병사들은 “웨이런민푸우(爲人民服務·인민을 위해 복무합니다)”라고 재차 답했다. 당시 덩샤오핑은 157㎝의 단신에도 불구하고, ‘쓰촨 사투리’로 막강 카리스마를 뿜어냈다. 이후 열병식을 거행한 장쩌민, 후진타오 역시 이런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시진핑 역시 이 틀을 고수했다.
천안문 열병식 직후 전격적인 감군을 발표한 것도 덩샤오핑 모델이다. 덩샤오핑은 1984년 천안문 대열병 직후 ‘인민해방군 100만명 감축’이란 카드를 꺼내들었다. 전 병력의 4분의 1을 감축하는 충격 발표였다. 시진핑 역시 덩샤오핑의 전례를 이어받아 “인민해방군 30만명 감축”이란 카드를 열병식 당일 전격 발표했다. 하지만 시진핑은 홍기 리무진을 타고 사열 당시 수차례 ‘왼손’으로 거수경례를 붙여서 ‘인민해방군 경력’의 진위 여부를 두고 설왕설래를 자아냈다
이동훈 주간조선 기자
◆2015.09.23 北·中 국경까지 고속철 잇단 완공… 한반도 코앞까지 온 '一帶一路'
[中, 지난달 선양~단둥 이어 20일 창춘~훈춘 고속철 개통]
창춘~훈춘 고속철 - 北·中·러 경협 촉진 시킬듯
선양~단둥 고속철 - 통일 땐 서울연결 가능성
중국 소식통 "미래 대비하며 北의 뒷마당 정돈하는 중"
중국이 북한으로 통하는 양대 거점인 랴오닝성 단둥과 지린성 훈춘까지 모두 고속철도로 연결하는 작업을 마쳤다. 시진핑 국가주석의 대외 확장 전략인 '일대일로(一帶一路)'가 한반도 코앞까지 다가온 모양새다.
중국은 지난달 말 랴오닝성 선양~단둥을 잇는 고속철을 완공한 데 이어 20일에는 지린성 창춘~훈춘을 연결하는 고속철을 개통했다. 북·중 압록강 국경인 단둥과 두만강 국경인 훈춘이 중국횡단철도(TCR)와 고속철로 이어진 것이다. 선양~단둥 고속철은 207㎞ 구간을 시속 200㎞로 달린다. 3시간 30분 걸리던 여행 시간을 1시간 10분으로 단축했다. 창춘~훈춘 노선은 360㎞에 달하며 옌볜 조선족자치주의 주요 도시를 거쳐 간다. 지린성 중심도시인 창춘과 북·중·러가 만나는 훈춘을 '3시간 생활권'으로 만들었다. 특히 백두산을 거치기 때문에 관광 철도로도 인기를 끌 전망이다. 신화망은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고속철"이라고 말했다.
창춘~훈춘 고속철은 북·중·러의 경제 협력을 촉진할 것이란 분석이 많다. 훈춘은 북한 나선과 러시아의 하산을 잇는 3국 경제 협력 벨트의 꼭짓점에 해당하는 곳이다. 중국은 두만강 하구를 통해 우리의 동해로 나가는 출해권(出海權)을 얻는 것이 숙원 사업이다. 중국 지린성과 북한이 지난 6월 훈춘~나선~상하이를 연결하는 '컨테이너 정기선' 출항식을 개최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베이징 대북 소식통은 "중국이 나선항을 통해 상하이 등으로 활발하게 석탄을 운송하고 있다"며 "나선항과 연결된 중국 항구가 6개에 이른다"고 말했다. 지린성은 북한·러시아와 함께 훈춘 인근 두만강 삼각주 일대에 무(無)비자로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 '국경 없는 국제관광구' 건설도 추진하고 있다. 훈춘 고속철은 북·중·러 삼국 협력을 염두에 둔 포석이란 분석이 나온다.
단둥까지 뚫린 중국 고속철은 한반도에 평화가 무르익거나 통일이 되면 평양을 거쳐 서울까지 연결될 가능성이 있다. 신의주~평양~서울은 한반도의 인구 밀집 구간이기 때문이다. 특히 단둥은 북·중 교역의 70% 이상이 이뤄지는 곳이다. 중국은 북한과 경제 협력을 활성화해 냉각된 북·중 관계를 풀어보려고 한다. 랴오닝성이 오는 10월 단둥에 북한 주민이 하루 최대 8000위안(약 150만원)까지 무(無)관세로 중국 제품을 살 수 있는 무역구를 만들려는 것도 대북 당근책의 일환으로 풀이된다.
현재 북·중 관계는 북한이 장거리로켓 발사 및 핵실험을 시사하면서 더욱 꼬이는 양상이다. 그러나 중국은 고속철과 신(新)압록강대교를 잇달아 완공하며 미래를 준비하는 모양새다. 동북 3성(라오닝·지린·헤이룽장)은 중국에서 경제가 가장 낙후한 지역이다. 지난 7월 시진핑 주석이 옌볜 조선족자치주 등 동북 3성을 순시한 것도 경제 성장을 독려하기 위해서였다. 선양의 소식통은 "중국은 동북 3성의 철도·도로 등을 현대화하며 북한 뒷마당을 정돈하고 있다"며 "시 주석이 밀어붙이는 일대일로가 블랙홀처럼 한반도에 다가올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안용현 주북경특파원
◆2016.07.19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중국
▲ 중국 SNS를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는 '중국 영토' 이미지
지난 주 한국 청년들의 대중(對中) 감정에는 아주 중요한 변화가 있었다. 계기는 남중국해였다.
네덜란드 헤이그 상설중재재판소(PCA)가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에 대해 "중국이 남중국해에서 필리핀의 주권을 침해했다"고 판결하자 중국인들은 일제히 분노했다. 여기까지는 그나마 이해할 수 있다. 문제는 중국 '연예인'들이 대열에 동참하면서부터 불거졌다.
중국에서 국민적 인기를 누리고 있는 여배우 판빙빙(范冰冰)은 누구보다 빠르게 자신의 인스타그램과 웨이보(중국판 트위터)에 "중국은 하나의 점도 잃을 수 없다(中國一点都不能少)"는 슬로건과 사진을 올리며 PCA 판결을 비판하는 포스팅을 올렸다. 이어서 곽건화, 임심여, 왕카이, 이역봉 등의 인기 연예인들도 같은 내용으로 의견을 드러냈다.
'한국에서 데뷔한 중국 연예인들'의 계정에도 같은 글이 올라오면서 한국인들의 심경은 더욱 복잡해졌다. SM엔터테인먼트에서 걸그룹 에프엑스로 데뷔한 빅토리아는 판빙빙이 글을 올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SNS에 "중국은 하나의 점도 잃을 수 없다(中國一点都不能少)"를 올렸다.
이건 시작이었다. JYP엔터테인먼트에서 걸그룹 미쓰에이로 데뷔한 페이와 지아, SM엔터테인먼트에서 보이그룹 엑소로 데뷔한 레이도 동참했다. 엑소로 데뷔했지만 탈퇴해 중국에서 활동 중인 크리스, 루한, 타오 역시 같은 글을 올렸다. '묘족 연예인'으로 한국 시청자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 걸그룹 피에스타 멤버 차오루 역시 대열에 합류했다.
▲(왼쪽부터) 판빙빙, 빅토리아, 차오루 / 사진출처=스포츠조선
우선 부각되는 근본적인 문제는 한국인들 대다수가 남중국해 문제를 바라보는 중국의 시각에 전혀 동감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중국은 하나의 점도 잃을 수 없다(中國一点都不能少)'는 슬로건과 함께 확산되고 있는 지도 이미지를 자세히 보면 중국인들의 영토 개념은 경악을 금치 못할 수준이다. 서해의 2/3가량이 중국 영유라는 식으로 금을 그었다. 그동안 외교당국은 동아시아 영토 분쟁이 한국에게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전혀 이해시키지 못했지만, 이게 결코 '남의 일'이 아니라는 점을 '중국산 그림' 한 장이 하루 만에 납득시켰다.
문제는 다음으로 이어진다. 이 이슈는 '온라인 국가주의'를 자극하고 있다. 최근 중국에서 큰 인기를 누리며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소녀시대 윤아의 인스타그램은 좋은 사례다. 그녀의 SNS에는 지난 13일 하루 동안에만 수천 개의 댓글이 달렸다. 댓글을 단 이들 상당수는 중국인이었다.
이들이 윤아에게 댓글을 단 요점은 '중국에서 계속 돈을 벌고 싶다면 남중국해 문제에 대한 입장을 조속히 표명하라'는 것이었다. 이 요구의 근저에는 '우리 마음에 드는 입장이 아닐 경우 공격하겠다'는 의사가 깔려 있다.
윤아의 SNS는 이들과 이들을 비판하는 이들의 논쟁으로 난장이 돼버렸다. 한국인들의 반중 감정도 다시 한 번 자극됐다. 단언컨대 이번 사건은 역사 속 유물로만 생각됐던 중화(中華) 사상이 현재까지 얼마나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중국에서 일하고 싶다면 남중국해 문제에 대한 입장을 드러내라고 요구하는 중국인들의 견해에는 논리적인 맹점이 있다.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중국 연예인들이 자국 일방적인 관점을 표명하는 것도 똑같은 문제를 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건 마치 한국에서 활동 중인 중국 연예인들에게 "우리나라에서 계속 활동하고 싶다면 독도는 한국 땅이라고 말하라"는 것과 비슷한 수준의 억지다. 당연한 얘기지만 중국인들에게 그런 요구를 하는 한국인이 있다면 한국에선 그쪽이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는다.
한국은 '작지만 강력하고 중요한 시장'이다. 일부 중국 연예인들은 그런 한국의 장점을 편한대로 이용한다. 한국의 주요 기획사에서 우선 데뷔해 잠시 활동하다 갑작스럽게 탈퇴나 잠적을 감행하고 중국으로 건너가 톱스타가 되는 수순은 이미 하나의 패턴으로 자리 잡았다. 한국 팬들은 번번이 배신감을 느끼지만 애초부터 뜻이 중국에 있었던 연예인 입장에선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이미 한국 대중들은 일부 중국 연예인들의 이런 이기주의에 염증을 느끼던 상태였다. 그랬던 차에 더없이 '중국적인' 견해를 거리낌 없이 드러내는 중국 연예인들의 모습은 팬들에게 복구가 불가능한 감정적 타격을 안겨줬다. '중국인 멤버는 언젠가 어떤 식으로든 반드시 문제를 일으킨다'는 편견은 점점 더 확산되고 있다.
눈에 보이는 국경선만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심리적 장벽이 순식간에 쌓아 올려졌다. '21세기 중화사상'은 중국을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으로 만들어버리고 있다. 그저 예쁘고 멋져서 그들을 동경했을 뿐이던 팬들은 졸지에 '심리적 관세(關稅)'를 부담해야 하는 처지가 돼버린 것이다.
글 | 이원우 대중문화평론가
◆2016.02.11 중국 내 美CIA의 소련 미사일 탐지 기지를 허용한 덩샤오핑(鄧小平) 이야기
▲ 등소평
우리가 북한 핵미사일에 대한 대응으로 미국과 사드(THAAD,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문제를 논의하자 중국과 러시아가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화춘잉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연합뉴스의 질의 답변서에서 "중국의 (한반도) `미사일방어` 문제에 대한 입장은 한결같고, 명확한 것"이라며 "한 국가가 자신의 안전을 도모할 때에는 다른 국가의 안전 이익을 훼손해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이 말을 풀이하자면 간단하다. 한국 사람들보고 한국 안보보다 중국 안보를 먼저 생각하라는 이야기이다. 한국을 중국의 속국으로 여기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매우 오만한 주장이다.
7일에는 김장수 주중 한국대사를 불러 한국의 결정에 대해 우려를 전달했다. 민영언론이라고는 없는 중국에서 언론을 통한 공세도 개시했다. 관영 영자지 글로벌타임스는“한국의 성급한 사드 동참 결정은 전략적 안목이 결여된 것으로 동북아 안보 상황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 것”이라며 “한국에 배치된 사드는 공식적으로 중국군에 의해 표적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공식적인 표적인 된다니...역시 풀이하면 간단하다. 시키는대로 안하면 언제든 때려부수겠다는 협박이나 다름없다. 역시 속국을 대하는 자세다.
러시아도 정도의 차이지만 우려를 표시한다. 러시아 외교부 외교차관이 9일 박노벽 대사를 불러 한미 양국의 사드 한국 배치 협상 개시 결정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다고 공개했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중국이야말로 인접국의 안보를 위태롭게 할 미국의 레이더기지 건설을 승인했던 전례가 있는 나라다.
1979년 이란에서 이슬람혁명이 발생한 직후의 일이다. 혁명 직전까지 이란의 팔레비국왕은 친미 노선을 추구했다. 미국은 팔레비 국왕의 협조로 이란 국토 안에 소련의 미사일을 감시할 수 있는 기지를 설치 운영했다. 그런데 이슬람혁명은 반미노선을 걸었으며,미국의 대소 미사일 탐지 시설도 폐쇄했다.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소련의 미사일 발사실험이나 활동을 탐지해야만 하는 미군 입장에서는 크나큰 손실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당시 미국의 카터 행정부 시절 미국의 지도부는 중국의 실권자 등소평(鄧小平)에게 소련미사일의 활동을 탐지할 미 중앙정보국(CIA) 기지를 중국 영토 내에 건설하는 문제를 타진했다.
미국에서 이 임무의 책임자는 스탠스필드 터너 중앙정보국(CIA)국장이었다. 미국의 저명한 언론인 밥 우드워드가 1988년에 출판한 책 ‘VEIL’에는 이와 관련된 내용이 일부 담겨 있다. 우드워드에 따르면 워낙 비밀리에 추진한 일이었기 때문에 터너 국장은 중국을 여행할 때 가명을 사용했으며, 심지어는 가짜 콧수염까지 달고 다녔다는 것이다.
현재 미국 부통령인 조 바이든 당시 상원의원이 중국을 방문해 등소평을 만난 자리에서도 이 문제가 논의됐는데 등소평이 적극적으로 이 아이디어를 추진했다는 것. 결국 1979년 후반기에 두 나라 간에 공식적인 합의가 이루어져 미국은 1980년부터 중국 영토 내에서 소련 미사일 활동을 탐지할 군사기지를 운영할 수 있었다.
1981년 6월18일 미국 뉴욕타임스가 보도한 바에 따르면, 중국 내 미국의 소련 미사일 탐지 기지는 신장위구르자치구에 건설돼 1980년부터 운영됐다. 소련의 중요 미사일 시험장이었던 아랄해와 발하시 호에서 가까운 지역으로 중-소 국경에서 불과 3백km 떨어진 지역이었다. 이 중국 내 기지는 미국의 정보자산 중 가장 민감하고 중요한 것이었다.소련 미사일의 발사에서 비행과 다탄두 분리 과정까지를 모두 모니터 할 수 있었다. 또 소련이 신형 미사일을 개발하는 지의 여부도 완벽하게 탐지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 소련미사일 탐지 기지에서 운용되는 장비는 물론 미국이 제공했으며, 운영에는 중국인들도 참가했다. 그리고 미국 CIA고문들이 정기적으로 방문했다. 그리고 이곳에서 얻은 정보는 두 나라가 공유하도록 했다. 그리고 또 중극은 미국으로부터 일정한 미국 무기를 수입할 수 있게 됐다.
소련이나 러시아나 이 사실이 드러난 다음에도 크게 문제를 삼지 않았다고 한다. 당연한 일 아닌가? 항의해봤자 중국이 소련이나 러시아 한테 미안하다고 할 나라도 아니고, 아무리 공산주의 형제국이라지만 엄연히 남의 나라에서 벌어지는 일 아닌가?
다시 우리나라에 배치되는 사드로 돌아가보자.
당장 북한에서 핵실험도 펑펑하고, 미사일도 마구 발사하는 상황이다. 우리로서는 북한이 핵미사일을 쏘면 방어할 수단이 없다. 막말로 백령도를 북한이 기습점령한 다음에 한국이 탈환을 시도하면 핵 미사일을 날려버리겠다고 협박하면 대응할 방도가 없다. 우리에게는 미국의 사드가 완전하지는 않지만 아쉬운대로 당장 앞가림할 유일한 방어수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중국이나 러시아를 상대로 “한국에 배치된 사드 체제는 중국이나 러시아를 겨냥한 것이 아닙니다. 탐지거리가 2,000km인 전진 배치용은 평택에 배치되면 중국 내륙, 멀리 몽골 부근까지 탐지가 가능하지만, 유효 탐지거리 600km 안팎인 종말탐지용은 북한 지역만 탐지가 가능합니다”하고 구차하게 해명해야 한다. 마치 한국의 존재와 생존에 대해 중국과 러시아에 구차하게 해명하는 것과 뭐가 다른가?
심지어 국방부 관계자는 “사드는 한반도에서 대한민국과 주한미군을 방어하기 위한 방어체계이지 미 본토 방어를 위한 체계는 아니다. 북한의 스커드, 노동, 무수단과 같은 단거리 및 준중거리 탄도미사일에 대한 방어체계이다. 중국에서 미국으로 향하는ICBM(대륙간탄도미사일)의 비행경로는 한반도 배치 사드 레이더의 탐지범위를 넘어선다”고 덧붙인다. 명색이 혈맹이라는 나라의 군인들의 입에서 나온 이런 말들을 미국인들이 들으면 어떤 심정일까?
중국의 등소평은 미국을 위해 중국 내에 미국의 소련미사일 탐지 기지를 건설하게 해 주었다. 당연히 소련의 안보에 치명적으로 위해를 가하는 일이었다. 요즘 돈 잘버는 중국인들의 국부격인 등소평의 결정에 비하면 한국의 사드 배치는 국가생존과 관련되는 절박한 사안이다. 이를 모를리 없는 중국이 한국의 사드배치를 반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국을 속국으로 대하는 대국의식, 패권의식 탓도 크다. 하지만 더욱 심각한 것은 한국내에 사드 배치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제법 있기 때문일 것이다.
중국 내 미국의 소련 미사일 탐지 기지는 소련이 멸망한 다음에도 죽 운영되었다고 한다. 중국은 1990년대 초반에 이 미 CIA 기지들이 폐쇄되었다고 했지만, 대만 언론들은2000년대까지 오히려 확장운영되었다고 주장한다.
한국 외교관들이 중국이나 러시아 외무부에 불려가 사드에 관한 항의를 들을 때 다음 질문을 한번 던져봤으면 한다.
“중국 신장위구르자치지역에 있는 미CIA의 소련-러시아 미사일 탐지 기지는 지금도 운영되나여?”
그리고 국내에 사드에 반대하는 야당인사들에게도 비슷한 질문을 던지고 싶다.
“중국 등소평이 중국 내 미CIA의 소련-러시아 미사일 탐지기지를 설치하도록 승인했는데, 그럼 등소평은 반중국친미사대주의자인가여?”
글 | 우태영 조선뉴스프레스 인터넷뉴스부장
◆2017.06.29 中의 류샤오보 석방에서 웜비어를 떠올린다
간암 말기 류샤오보 풀어준 것… 웜비어 사망 직전 석방과 같아
'최악 인신매매국' 리스트에도 북한과 나란히 오른 게 중국
대북 공조 함께해야 하지만… 文 정부, 中에 환상 갖지 말길
서구 여론이 '중국판 웜비어 사건'으로 들끓고 있다. 노벨 평화상 수상자이자 중국의 대표적인 양심수인 류샤오보(劉曉波·61) 얘기다. 투옥 9년째인 그가 지난달 돌연 가석방됐다. 중국 당국이 그를 갑자기 풀어준 사연을 알아보니 간암 말기 선고를 받고 투병 중이라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그의 변호사는 "류샤오보가 회복될 가망이 거의 없다"며 "중국 정부는 그를 더 일찍 풀어줬어야 했다"고 울분을 터뜨렸다. 인터넷에 퍼지고 있는 동영상에선 류샤오보의 아내 류샤(劉霞·57)가 "남편은 수술도 방사선 치료도 화학치료도 받을 수 없다"며 오열했다. 미국의 한 인권운동가는 트위터에 "류샤오보는 지난 4월 옥중에서 신체검사를 받았지만 교도소 측은 그의 병에 대해 가족에게조차 알리지 않았다"는 글을 올렸다.
서구 언론과 인터넷에서는 "미국 대학생 오토 웜비어를 식물인간으로 만들어 놓고 죽기 며칠 전에야 풀어준 북한과 중국이 도대체 뭐가 다르냐"는 분노가 번지고 있다. 하지만 중국 관영 영자지 글로벌타임스는 "류샤오보는 중국 최고의 암 전문가 8명으로부터 치료를 받고 있다"며 서구의 비난 여론에 대해선 "웬 소란이냐"고 했다.
27일(현지시각) 홍콩 소재 중국연락사무소 앞에서 중국 인권운동가이자 2010년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류사오보의 완전한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진 가운데, 류사오보 부부의 사진이 중국연락사무소 건물 벽면에 붙여져 있다. 최근 간암 말기 판정을 받은 류샤오보는 8년 6개월 만에 가석방돼 현재 중국 선양의 한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부인 류샤는 2011년부터 가택연금 상태로, 최근 심각한 우울증을 앓는 것으로 알려졌다. /AP 연합뉴스
류샤오보는 2008년 국가전복 선동죄로 11년형을 선고받고 랴오닝성의 한 감옥에 수감됐다. 엄청난 죄목의 실상은 중국의 민주화를 요구하는 중국 지식인들의 '08헌장' 선포를 도와줬다는 것이다. 민주화를 요구했다는 이유만으로 감옥에 가둬버렸다. 노르웨이 노벨위원회 위원장의 말을 빌리면 "양심과 의사 표현의 자유를 행사했다고 투옥"된 것이다. 그는 2010년 옥중에서 노벨 평화상 수상 소식을 접했다. 중국 정부가 '중국 감옥에 있는 사람에게 노벨상을 준 것은 중국에 대한 모욕'이라고 반발하면서 그는 시상식에 갈 수 없었다. 중국은 노르웨이산 연어 수입을 중단하는 등 경제 보복에 나섰다. 중국 정부는 이후 류샤오보에게 외국에 나갈 것을 종용하기도 했지만 그는 일관되게 "나는 무죄다"라며 중국을 떠나라는 압박을 뿌리쳤다. 그 사이 그의 아버지가 2011년 간암으로 세상을 떴고, 이제는 자신도 간암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은 것이다. 미국의 뉴욕타임스는 류샤오보가 겪는 고난을 '국가에 의한 보복적 분풀이'라고 규정했다.
마코 루비오 미국 상원의원이 "류샤오보가 미국에서 인도적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트럼프 대통령이 나서야 한다"고 요청하는 등 그의 즉각적인 석방과 해외 치료를 요구하는 여론이 거세지고 있다. 그러나 실현 여부는 불투명하다.
중국은 그가 외국으로 나갔을 경우에 예상되는 득실 계산에 바쁜 모습이다. 중국 글로벌타임스는 "왕단, 웨이징성 등 중국 내 반체제 범죄자들이 정작 해외로 나가면 주목도가 떨어져 존재감이 사라졌다"며 "류샤오보도 예외가 아닐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노벨 평화상 수상자 신분인 그가 해외에서 치료를 받는다면 서구의 반중(反中) 여론을 전에 없이 부추길 위험도 있다"고 주장했다.
류샤오보의 상황을 묻는 외신 기자들의 질문에 줄곧 "알지 못한다"고 일축했던 중국 외교부는 엊그제 미국 정부가 중국을 북한과 함께 '최악의 인신매매국' 리스트에 올리자, "미국의 잣대로 중국을 재단하지 말라"며 발끈했다. 중국이 그간 북한에서 가혹 행위를 당한 끝에 죽음에 이른 것으로 보이는 미국 대학생 웜비어 소식에 사실상 침묵했던 이유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중국 관영 환구시보는 지난 21일 웜비어 사건을 다룬 사설에서 "이 사건을 빌미로 미국이 (대북 제재를 더 강화해야 한다고) 중국을 압박하면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는 엉뚱한 주장을 펴기도 했다. 이런 중국을 상대로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의 한반도 배치도 설득하고, 대북 공조도 강화해야 하는 것이 한국 외교가 처한 고단한 현실이다. 문재인 정부가 중국에 대해 불필요한 환상만큼은 갖지 않았으면 한다.
조선일보 이길성 베이징 특파원
◆2017.07.03 조선 모욕하던 20대, 중국서 ‘배신의 아이콘’ 되다
1883년 9월16일 총판조선상무위원(總辦朝鮮商務委員)으로 조선에 파견돼 한성에 상무위원공서(총영사관에 해당)를 설치했던 청나라 관원 진수당(陳樹棠)은 1885년 9월23일 귀국했다. 그 후임은 임오군란 당시 오장경 제독의 부하장교로 조선에 왔던 위안스카이(袁世凱, 1859~1916)가 맡았다.
▲위안스카이 [사진 중앙포토]
과거시험 낙방하자 양부 도움 정실인사로 군인 돼 조선에 파견
허난(河南)성 샹청(襄城)현 출신인 위안스카이는 과거 1차 시험에 해당하는 향시에 두 차례나 떨어진 ‘낙방거사’였다. 문과로는 도저히 관직에 오를 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대신 무관의 길을 걷게 됐다.
임오군란으로 조선 온 위안스카이
갑신정변 진압 성공으로 출세길 열려
청일전쟁 패배 후 쑨원과 청나라 무너뜨려
중화제국까지 세웠지만 봉기로 몰락
그는 태평천국의 난 진압의 공으로 북양대신을 맡고 있던 거물정치인 이홍장의 참모인 오장경의 부하로 들어갔다. 양아버지 원보경(袁保慶)의 인맥을 활용한 정실인사였다. 22살 때인 1881년이었다.
그러다 이듬해인 1882년 조선에서 임오군란이 터지면서 흥선대원군이 정권을 잡자 위기에 처한 명성황후가 중국에 도움을 청해 오장경이 출동하자 그를 수행해 조선으로 왔다.
23살에 조선에 온 위안스카이는 한성에 머물며 오장경을 보좌했다. 그런 그가 출세하게 된 계기는 조선의 정변과 관련이 깊다. 바로 1884년 12월4일 조선에서 벌어진 갑신정변이었다.
▲화재로 소실된 우정국 [사진 중앙포토]
이날 저녁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서광범, 홍영식 등 개화당은 우정국 낙성식을 계기로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그러자 민씨 일족은 한성에 주둔하고 있던 청나라 군대에 도움을 청했으며 위안스카이는 12월6일 병력 1500명을 이끌고 창덕궁에 쳐들어가 개화파를 진압했다. 개화파를 돕던 일본군도 이를 막지 못하고 후퇴했다. 위안스카이가 진압에 나서는 바람에 개화파의 득세는 3일천하로 끝났다
▲일본으로 망명한 갑신정변 개화당, 왼쪽부터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김옥균 [사진 중앙포토]
개화파는 14개조의 혁신안을 제시했고 고종도 조선 최초의 근대적 개혁인 이를 재가했으나 위안스카이가 이끈 청나라 군대의 공격으로 물거품이 됐다. 개화파는 일본과 미국 등으로 망명했으며 그들의 가족들은 연좌제로 처형되는 등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 서재필은 거의 전 가족이 연좌제로 몰살됐으며 이를 계기로 조선에 등을 돌리고 일평생 미국 시민으로 살았다. 해방 이후에 일시 귀국했으나 조선인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했다. 갑신정변이 실패하면서 조선은 보수파의 세상이 됐다.
당시 청나라의 북양대신 이홍장은 베트남의 종주권을 둘러싸고 프랑스와 전쟁을 벌이면서 수세에 몰린 상황이었다. 그런 와중에 발생한 갑신정변을 사흘 만에 진압하고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재확보했으니 위안스카이를 총애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정 간섭의 본거지, 명동 중국대사관
하지만 청나라 군대를 끌어들였던 명성황후가 이번에는 러시아와 일본을 끌어들여 청나라를 견제하려고 하자 중국으로 일시 귀국한 위안스카이는 1885년 대원군의 귀국을 주선해 견제를 시도했다. 임오군란 직후 조선에 진주한 청나라 군대에 의해 1882년 7월 중국으로 납치당했던 대원군은 4년 만에 귀국하게 됐다.
1885년 8월 대원군과 함께 다시 조선에 들어온 위안스카이는 그해 9월23일 귀국한 진수당의 후임이 됐다. 이홍장으로부터 ‘주찰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駐紮朝鮮總理交涉通商事宜)’라는 이름의 벼슬을 받았다. 진수당의 직책인 총판조선상무위원보다 높아 보인다. 이후 위안스카이는 1894년 청일전쟁 직전에 중국으로 황급하게 탈출하기 전까지 거의 10년간 이 직함으로 조선의 내정을 간섭했다.
▲2005년 최진연 대한사진예술가협회 회장은 25일 그동안 공개되지 않았던구한말 황실의 모습을 보여주는 희귀사진을 공개했다. 왼쪽부터 영친왕, 순종, 고종, 귀비엄씨, 덕혜옹주 모습. 이 사진은 한국 사진의 선각자이자 흥완군(대원군의 형)의 손자 고 이해선(순종의 육촌형제, 민영환의 사위)선생의 유품속에서 발견된 것으로 당시 조선 황실의 사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사진 중앙포토]
지금 명동 중국대사관 자리가 그가 벌였던 내정 간섭의 본거지였다. 간섭을 넘어 좌지우지란 표현이 오히려 맞을지도 모른다.
그는 조선 군주인 고종에게 제대로 예의를 차리지 않은 것은 물론 툭하면 혼군이라고 모욕을 주고 물러나라고 압박했다. 그의 위세를 짐작할 만하다. 당시 조선 주재 외국 외교관들은 위안스카이가 사실상 총독이라고 여겼을 정도라고 한다. 부끄러운 역사의 한 토막이다.
귀국 뒤 군권 장악하고 신해혁명 나자 청나라 멸망 앞장서
위안스카이가 귀국한 뒤 청일전쟁이 벌어졌으며 이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그의 후견인 이홍장은 실권을 잃었다. 이홍장은 청나라 말기의 혼란 속에서 권력을 되찾았지만 1901년 세상을 떠났다. 위안스카이는 그의 뒤를 이어 북양군을 통솔하면서 권력자가 됐다.
▲쑨원(좌), 위안스카이(우) [사진 중앙포토, 바이두 백과]
그는 1912년 신해혁명이 발생하자 혁명가 쑨원(孫文, 1866~1925)가 타협해 청나라를 무너뜨리고 중화민국을 건국하는 데 상당한 역할을 했다. 그 대가로 중화민국의 초대 대총통이 됐지만 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1915년 12월 중화민국을 폐지하고 중화제국을 세워 자신이 초대 황제인 홍원제로 즉위했다.
하지만 전국에서 이에 반대하는 봉기가 일어나자 3월22일 황제에서 물러났다가 그해 6월6일 요독증으로 급사했다. 57세였다. 조선의 갑신정변을 무력으로 진압한 뒤 내정에 간섭하며 어두운 역사를 만들었던 위안스카이는 중국 현대사에 커다란 오점을 남기고 죽었다. 그는 청나라와 중화민국을 모두 저버리면서 '배신의 아이콘'이 됐다.◎
채인택 중앙일보 논설위원(ciimccp@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