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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이야기2/ 삼국지의 여인들1/ ① 동탁과 왕 美人 - ⑤ 조조, 조비, 조식 모두가 사랑한 원소의 며느리 견씨

상림은내고향 2022. 9. 24. 16:59

중국 이야기2/ 

■삼국지의 여인들  -  신동아

① 동탁과 왕 美人

지은이 민희식

80. 서울대 불문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 프랑스 슈트라스부르 대학 불문학 박사.
⊙ 서울대, 한양대 교수 등 역임
⊙ 프랑스 최고문화훈장. 파키스탄 정부 초빙으로 간다라 역사문화 연구 중.
⊙ 《프랑스문학사》 《성서의 뿌리와 이해》 《예수와 붓다》 등 200여 권의 저서와 역서.


삽화 - 유승배
⊙ 애니메이션 220만 신화 ‘마당을 나온 암탉’ 미술감독 및 순천만 정원박람회 주제영상
‘달의 정원’ 미술감독.
⊙ ‘Design Leader's Choice’에서 디자이너 그랑프리상 수상.
⊙ 현재 유기견 애니메이션 기획.

 

36만의 군사 조직은 명령이 떨어지자 황색포를 머리에 감았다

 

[작가의 말연재를 시작하며]

본인이 1950년대 말에서 1960년대 초 프랑스에서 불문학을 연구할 때 가장 흥미 있게 읽은 책이 《삼국지》와 《손자병법》이었다. 당시 나는 발자크에 대한 논문을 쓰기 위해 프랑스 르와르 지방의 벽촌에 방을 얻어 공부에 힘쓰고 있었다. 마을은 고요하고 인구도 적었는데 주민들은 도시인과 달리 순박하였고 한국인이 지방의 도서관에서 연구에 몰두하는 것에 매우 호의적이었다. 벽촌에는 영화관이 하나 있었으나 목요일에 영화 한 편을 상영하고 6일은 쉬는 형편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교양이 있는데다 동양의 문물에 강한 호기심을 갖고 있었다. 해서 나는 그들의 청으로, 파리에 갔다 올 때 《삼국지》를 사 갖고 와서 틈나는 대로 같이 읽는 시간을 가졌다. 작품 속 인물들의 사고방식이 프랑스인의 상상을 초월하는 내용이라 그들은 매우 놀라워하며 열심히 읽었다.


그런데 많은 프랑스인이 《삼국지》에 여자 이야기가 없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프랑스 문학은 기본적으로 여성이 인생의 중심적 역할을 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여성이 중심 역할을 하는 삼국지를 써보고자 하였다. 그러기 위해서 한국판, 일본판, 중국판, 프랑스판, 영어판 등의 삼국지를 읽으며 여성을 중심으로 한 삼국지를 구상하였다. 그것이 오랜 세월 머릿속에 저장되어 숙성되어 가다가 이번 작품으로 탄생하게 된 것이다.


 
나는 이 작품이 《삼국지》를 아끼는 모든 이에게 《삼국지》에 대한 새로운 흥미와 비전을 주었으면 하고 바란다
.

 


때는 한제국(漢帝國) 중흥(中興)의 조(), 광무제(光武帝)로부터 11대가 지난 효령황제(孝靈皇帝) 유굉(劉宏) 시대의 일이다. 황제는 정사는 돌보지 않고, 관직을 팔아 사복을 채우며 환관들을 중용하고 외척에게 주요 직위를 주었다. 조정의 부패가 극에 달하니 하늘이 조정을 버린 것인가. 어느 날 파란 구렁이가 옥좌(玉座)에 앉고 암탉이 수탉이 되고 대지진과 해일이 일어났다. 메뚜기 떼가 밭을 메우고 기아로 아사자가 속출하였다. 측근과 환관들이 보고조차 하지 않으니 황제 유굉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였다.

 

 유굉은 13세에 즉위하였다. 20여 년간 낙양의 궁전에서는 매일같이 연회를 열었다. 전국에서 가려 뽑은 미녀들과 함께 환락을 즐기는 게 그의 주요 일과였다. 이 어리석은 황제는 그것이 자기가 해야 할 일이라고 믿고 있었다. 환관들 또한 황제를 돈과 여자와 술에 빠뜨려 정치에 마음 쓰지 못하도록 책략을 써 왔다. 환관 가운데 제일 윗자리의 열 명을 십상시(十常侍)라 하였는데 조금이라도 그들을 비판하는 자는 국외로 추방하거나 참혹하게 살해하니 백성들은 그들의 이름만 들어도 두려움에 떨었다.


 
환관의 두목이자 황제로부터 아버지라 불리는 장양(張讓), 매일의 일과로서 금소(禁所)에 드나들었다. 황제는 반나체 상태로 취해 있기 일쑤고 주위에는 노래와 춤이 질펀하게 펼쳐지는 가운데 술과 음식이 넘쳐흘렀다. 여자들도 아편에 취해 나체로 지냈다. 누워 있는 나체 여자의 음부에는 남근을 본뜬 장형(張形)이 박혀 있기도 하였다. 환관들은 여자와 관계를 가질 수 없는 몸이라 금소에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지만, 성욕을 채울 수 없는 한을 풀기 위해 대신 권력다툼과 돈벌이에 열중하였다. 황제가 가장 아끼고 집착하는 왕 미인(王美人)은 몸을 움직이기만 해도 상의가 찢어질 만큼 크고 아름다운 유방을 가졌다. 장양은 황제가 없으면 그 부드럽고 탄력 있는 유방을 쓰다듬고 즐겼으나 거기까지뿐이었다. 그는 ‘황제여, 마음껏 즐기시오. 우리 십상시는 비록 여자를 어떻게 할 수는 없으나 그대보다 더 부자올시다’ 하고 속으로 외쳤다. 또한 ‘아들아, 정치는 이 아비가 할 터이니 너는 지금처럼 그렇게만 계속 지내다오. 설령 비명에 간다 해도 새 황제를 옹립하여 이 권세 천년만년 누리리라’, 그렇게 속말을 하며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왕 미인의 불안

왕 미인은 눈만 뜨면 언제나 황제의 몸 위에 있었다.


 
왕 미인이 15세 나이로 제의 측실(側室)이 된 지 어느덧 7. 7년 전 왕 미인의 아버지는 그녀를 대가로 고관의 요직을 샀다. 모든 것이 돈으로 통하는 세상인지라 아름다운 딸을 가진 자는 누구나 부자가 될 수 있었다. 황제는 매일 궁녀를 상대로 치정소동을 벌이다가 마지막에 가서는 반드시 왕 미인을 껴안고 지냈다. 아무리 탐해도 싫증이 나지 않는 것이 두 가지 있었는데 그것은 관직을 팔아 돈을 버는 것과 아름다운 여자를 품는 일이었다


 
황제는 왕 미인을 품을 때면 ‘쾌락이란 끝이 없구나, 단지 그 쾌락을 끝없이 즐길 수 있는 시간과 몸이 따라주지 않는 것이 원망스럽도다’ 하고 한탄하였다. 황제가 이렇게 생각하는 동안 일반 백성들은 남녀관계는커녕 초근목피로 근근이 연명하고 있었다. 황제는 백성이란 어차피 그런 존재들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러니 만백성의 주린 창자에서 나는 가여운 소리보다 왕 미인의 교태 섞인 신음이 훨씬 중요하였다.


 
그런 왕 미인이 자리에서 일어나면 시녀들이 꽃잎과 향수가 든 통을 가져와 몸을 씻겨 주고 화장을 해 주고 옷을 입혀 주었다. 거울에 비치는 왕 미인의 가는 허리와 매끄러운 손발과 긴 목, 눈처럼 흰 살결, 큰 유방, 빛나는 눈동자를 보며 시녀들은 감탄과 함께 질투 어린 눈길을 감추기 바빴다. 왕 미인을 질투하다 못해 증오하는 여인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하 황후였다.

 

황제가 “그대는 누구보다 아름다우니 죽을 때까지 안고 싶다”고 속삭이자 왕 미인은 “저 또한 황제 폐하의 품에 이렇게 안겨 영원히 지내고 싶습니다. 하지만 하 황후가 저를 시기하여 저와 아들 협을 해할까 늘 두렵답니다” 하며 얼굴 가득 수심을 드리웠다.


 
“그게 무슨 소리냐?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짐이 끝까지 지켜 줄 것이니 아무 걱정 말아라.


 
황제가 안심시켰으나 왕 미인의 불안은 가시지 않았다. 게다가 황제의 몸은 하루가 다르게 쇠약해져 가고 있었다. 저러다 덜컥 자리에 눕기라도 하면…. 결코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왕 미인은 황제의 생모(生母)인 동 태후(童太后)를 더 자주 방문하게 되었다. 황제에게는 하 황후가 낳은 장남 유변(劉弁)이 있으나 동 태후는 왕 미인이 낳은 유협(劉協)을 더 귀여워하였다. 유변보다 다섯 살이나 어린, 6살에 지나지 않은 유협은 유변보다 총명하였고 왕 미인을 닮아 외모 또한 수려하였다. 어린 유협이 어머니에게 그날그날의 일을 꼬치꼬치 보고하니 왕 미인은 아들이 나날이 철이 든다고 기뻐하였다. 영악한 왕 미인은 황제의 사랑 속에서 아들 유협을 키우며, 동 태후를 등에 업고 황제의 어미가 되는 야망을 키워 나가고 있었다.


영제 (靈帝)의 죽음에 의한 세습 다툼

 어느 날 황제는 여느 때처럼 궁녀와 노닌 후 왕 미인의 방으로 갔다. 그러나 그녀를 안아도 남근이 말을 듣지 않았다. 당황한 황제는 그녀의 옷을 찢으며 짐승처럼 난폭한 행동을 하다가 지쳐 돌아갔다. 왕 미인은 두려움에 떨며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또 다른 황제의 무서운 모습이었다


 
며칠 후 황제는 왕 미인을 불러 강제로 하반신을 노출시키고 음부에 장형을 넣었다. 장형에는 가죽끈이 달려 있고 가죽끈은 허리에 묶게 되어 있었다. 황제는 열쇠가 달린 기구로 장형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조치하였다.


 
“폐하, 제발 이것만은 말아 주세요.


 
왕 미인이 몸을 비틀며 호소했으나 황제는 간단히 무시했다


 
“짐은 이미 남자의 역할을 할 수 없는 몸이다. 이제 너를 더 이상 안을 수 없구나. 이 장형은 나 자신과 같은 것이니 항상 몸에 지녀야 한다. 열쇠는 내가 가지고 있으니까 필요할 때는 말하마.


 
장형에는 황제의 이름인 ‘宏()’이라는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몸 한가운데 장형을 단 왕 미인은 처음에는 걸을 수조차 없었다. 시녀들의 목욕 시중도 뿌리쳐야 했고 특히 아들 협이 이 사실을 알까 조마조마하였다. 용변을 볼 때면 너무도 수치스러워 홀로 울음을 삼켰다. 황제의 그녀에 대한 애착이 도를 넘어 탐욕적이고 광적인 소유욕으로 변질돼 갔으니 왕 미인은 황제를 원망하며 야위어 갔다.


 
중평 6(189). 황제가 연회석에서 갑자기 쓰러져 자리에 눕게 되었다. 병이 깊어져 목숨이 위태로워지자 황제는 십상시 건석(蹇碩)을 불렀다. 건석이 동궁(東宮)을 내정하실 것을 청하니 황제가 병상에서 대답하였다


 
“짐은 협이 태자로 적합하다고 생각하오. 동 태후께서도 협을 아끼고 있고 그러니 왕 미인이 황후가 되는 것이 좋겠소. 나이는 형 유변이 많지만 그릇이 작고 범용하니 말이오.


 
십상시들도 유협을 태자로 삼는 데 찬성하였다. 마음이 놓인 황제가 마침내 숨을 거두었다. 유굉은 그 무능 때문에 영제(靈帝)라 했다. 십상시들이 모인 자리에서 두목 장양이 말했다.


 
“우리가 유협을 지지하면 하 황후와 하진 장군이 가만있지 않을 거요.


 
“제가 돌아가신 사실을 잠시 감추고, 세습 문제로 제가 보자 한다며 불러들여 죽이는 것이 어떨는지.


 
십상시 건석이 말했다. 다들 동의하자 하진(何進) 대장을 부르러 갔다. 궁 안에는 병사들을 잠복시켰다. 그런데 첩자가 이 음모를 하진에게 일러바쳤고 분노한 하진은 5000의 군사와 함께 궁전에 들어가 십상시에게 외쳤다


 
“황제의 승하를 감춘 채 태자를 폐하고 협을 황제로 세우려 들다니! 이런 음모를 꾸미고도 너희가 감히 살기를 바라느냐!


 
그러고는 건석을 칼로 베니 장양과 환관들이 모두 머리를 숙이고 사죄하였다.


 
“장군을 해하려 한 자는 오직 건석뿐이옵니다. 우리는 모두 반대했습니다. 그저 목숨만 살려 주십시오.


 
이에 하 황후가 하진을 타일렀다


 
“죄진 자는 건석뿐인가 보오. 다른 자들은 그만 용서해 주지 그래요.


 
하진은 우유부단한 데다 또한 누이동생을 어려워해 나머지 사람들을 용서하고 말았다. 다만 그 자리에서 태자를 유변으로 바꾸고 황태후 자리에 하 황후를 앉혔다. 유협은 발해왕(渤海王)에 봉하였다(후에 다시 진류왕·陳留王으로 격하시킨다).


 
유변의 어머니인 하 황후는 하층계급 출신이었다. 하지만 키가 크고 피부가 뽀얀 미인인 그녀는 십상시의 추천을 받은 데다, 천한 집안 출신이니 외척이 힘을 쓰지 못할 거라는 동 태후의 계산에 힘입어 황후가 된 것이다. 그녀의 오빠인 하진은 원래 돼지 잡는 일로 생계를 유지한 자였다. 누이동생이 태자를 낳자 그 힘으로 관위(官位)를 얻어 출세해 어린 나이에 무관의 최고위 대장군이 되었다. 하진은 이제 한나라의 모든 군대를 통제하고 있었다. 그러나 하 황후는 왕 미인이 황제의 총애를 받게 되자 그녀를 날마다 미워하게 되었다. 귀인(貴人)도 아니고 미인(美人) 주제에, 아들을 낳았답시고 저리 사랑을 받다니 용서할 수가 없었다.
 


 
왕 미인은 하 황후의 잔인한 성정으로 볼 때 언제 위험이 닥칠지 몰라 유협과 함께 동 태후의 관에 숨은 채 병을 핑계로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하 태후와 하진은 선제(先帝)의 어머니인 동 태후에 대적할 수는 없어 눈엣가시 같은 왕 미인과 유협을 당분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자식을 지키기 위한 왕 미인의 도박

 백성들은 나라의 혼란 속에서 흉년과 천재지변과 과도한 세금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궁전 중축에까지 동원되면서 피골이 상접한 몰골들이었다. 관리는 뇌물로 모든 일을 해결하니 썩을 대로 썩었고, 이에 뜻 있는 자는 토지를 버리고 유랑민이 되었다. 또는 도적이 되거나 황건적에 들어가 조정 타도를 위한 반란군을 결성하였다. 부패한 조정이었지만 그럴수록 나라를 염려하는 이들도 각지에서 늘어났다


 
원소(袁紹)와 조조(曹操)도 정의감과 우국의 뜻을 품고 낙양에 왔으나 부패한 조정을 보며 그 원흉이 십상시와 환관들임을 알게 되었다. 정치권력을 장악한 십상시·환관들 대() 병권을 장악한 하진 오누이의 대립은 더욱 격해졌다. 십상시는 하진을 제압코자 동 태후를 선동하였다. 동 태후의 조카인 동중(董重)을 장군으로 삼고 군대를 내려 궁전을 지키게 했다. 동 태후 자신도 궁전에 나가 정무를 보았다. 하 태후는 권력욕을 내비치는 동 태후가 다시 진류왕 유협을 들고 나올까 두려웠다. 이에 자주 연회를 열어 동 태후와 왕 미인을 초대해 의중을 살폈다.


 
“여자가 나라 일에 개입하면 흉사가 흔하다는 옛말이 있지 않습니까. 조정의 일은 대신과 원로에게 맡기는 것이 순리라고 봅니다.


 
하 태후의 입에 발린 말에 동 태후는 “태후야말로 오빠 하진의 권한을 믿고 자기 아들을 제로 삼으니 이는 선제의 유언을 무시하는 게 아니고 무엇이오. 보시오. 선제는 협을 제로 삼았어요. 우리는 지금 선제의 은혜를 저버린 꼴이 되었소. 돼지 잡던 일족이 어찌하여 나라를 좌지우지하게 되었는지 통탄스러울 뿐이오” 하고 치를 떨며 쏘아붙였다.


 
왕 미인은 두 사람의 살벌한 설전을 들으며 살아도 살아 있는 기분이 들지 않았다.


 
하 태후와 동 태후 사이에 설전이 있은 그날 밤, 하 태후와 하진은 군대의 중진들을 불러 모았다. 바로, 병권을 쥐고 있는 동중 장군의 관을 포위하고 장군 지위를 반환하라고 윽박질렀다. 동중은 형세를 되돌릴 수 없다고 보고 자살하고 말았다. 하진은 이어서 동 태후도 잡아 가두었다. 위험을 느낀 장양 등 십상시는 급히 금은보화를 모아 하진의 친척 중 고위직에 있는 자에게 건네고 보호를 요청했다. 우유부단한 하진은 친척의 말만 듣고 십상시를 계속 중용하였다. 그런 와중에도 하진은 몰래 자객을 보내 동 태후를 암살하였다.


 
동 태후라는 큰 배경을 잃어버린 왕 미인은 마지막 수단에 호소했다. 동 태후와 동중의 먼 친척뻘인 서량의 태수 동탁(董卓)에게 구원을 청하기로 한 것이다. 왕 미인은 아들 유협의 이름으로 피가 밴 밀서를 써서 동탁에게로 보냈다.


 
선제께서 본인의 황위 계승권을 인정하고 나라의 후사를 맡겼으나 하진 장군과 하 태후가 범용한 형 유변을 황위에 앉히려고 허위문서를 만들었습니다. 그것을 바로잡으려고 한 동 태후와 장군 동중도 살해되었습니다. 나는 진류왕으로 봉해져서 지금 목숨이 위험합니다. 정치를 맡은 십상시들은 자신들의 보신에만 열중하며 나쁜 짓을 일삼고 있습니다. 역적 하 일가를 물리치고 조정을 바로잡아 환관을 배제하고 선제의 뜻을 이어 나가기 위해서는 동탁 장군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군을 이끌고 가능한 한 빨리 낙양에 들어오기 바랍니다. 


 
원래 야심을 품고 있던 동탁은 밀서를 받자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역적 십상시를 친다는 표문을 들고 병사들을 이끌고 급히 낙양으로 들어왔다.


환관들의 죽음과 유협의 황제 등극

 동탁이 대군을 이끌고 온다는 보고를 받은 환관들은 크게 당황했다

 

 ‘하진이 우리를 죽이려는 게 틀림없다.


 
그렇게 생각한 장양은 하 태후의 이름으로 하진을 불러들여 죽이기로 결심했다. 원소와 조조는 하진에게 “이는 십상시의 올가미이니 가시면 안 된다”고 만류했다. 그러나 하진은 이를 무시했다. 원소와 조조는 할 수 없이 병사 500을 거느리고 하진을 뒤따랐다. 그러나 관리가 하진 장군 외에는 들여보내지 말라는 명이라며, 하진이 들어가자마자 궁궐문을 닫아 버렸다. 둘은 문 밖에서 대책 없이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장양이 “하진이 선제의 뜻을 무시하고 동 태후를 죽였다!”고 외치며, 홀로 들어선 하진을 그 자리에서 죽여 버렸다.


 
조조와 원소는 하진이 돌아오지 않자 큰소리로 장군을 불렀다. 그러자 성안에서 누가 하진의 머리를 던졌다. 분노한 원소는 “환관이 하진을 죽였다!”고 외치며 궁 안으로 쳐들어가 십상시를 모조리 도륙하였다

 

 왕 미인은 이 혼란 속에서 재빨리 유협을 데리고 비밀통로를 통해 낙양성을 빠져나가 숲속에 숨었다. 이튿날 아침 둘이서 성 밖을 서성거리다 ‘董’()이라는 문자가 새겨진 깃발이 휘날리는 곳에서 무장한 군대를 만났다. 왕 미인은 동탁의 군대임을 알아보고 대장으로 보이는 자에게 말을 걸었다.


 
“대장 이름이 무엇이오?


 
동탁은 그녀의 아름다움에 눈이 멍했으나 오만한 태도로 답하였다.

 

 “서량의 태수 동탁이오.


 
“우리는 진류왕 유협과 그 어미요. 잘 오셨습니다.


 
이 말을 듣고 동탁은 말에서 내려 엎드려 절하였다.


 
“진류왕의 밀서를 받고 이 동탁이 몸을 바치기 위해 불철주야 달려왔습니다. 이제 안심하십시오. 제가 한을 풀어 드리겠습니다.


 
“태산처럼 듬직한 장군을 보니 마음이 든든하구려. 자 그만 일어나세요.


 
동탁은 죽은 동 태후가 아꼈다는 유협을 살펴보며 과연 용모가 수려하고 총명함이 얼굴에 씌어 있으니 천자의 자리에 오를 만하다고 바로 단정하였다. 그리고 선제가 가장 사랑했다는 왕 미인의, 어떤 사내라도 녹일 만한 미모와 탄력 있는 몸매를 보고는 두고 보기 아깝다고 생각하였다


상국 동탁

동탁은 왕 미인과 유협을 수레에 태우고 선두에서 대군을 이끌며 의기양양하게 낙양에 입성하였다. 성내에서는 원소가 십상시와 환관 일족을 다 죽이고 있었다. 동탁이 입성한다는 소식을 듣고 조조와 원소가 나가 보니 대군이 왕 미인과 진류왕을 모시고 낙양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 수는 낙양수비대의 4배나 되었다.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욕심 많은 돼지가 죽고 열 마리의 까마귀를 잡아 없앴나 했더니 이번에는 살쾡이가 나타났으니” 하고 조조가 불쾌한 얼굴로 말하자 원소도 “하진과 십상시가 사라지자 군과 정치가 모두 혼란에 빠져 버렸소. 동탁은 속이 검은 자요. 진류왕을 옹호하는 척하며 이 기회에 나라를 빼앗으려 할 것이 틀림없소” 하고 걱정하였다.

 

 동탁은 대군의 위세를 업고 문무백관을 모이게 한 후 옥좌에 유변을 앉히고 곁에 하 태후를 앉혔다. 그리고 왕 미인과 유협과 함께 신하의 자리에서 황제에게 아뢰었다.


 
“지금 하진 장군이 죽고 십상시도 사라지고 나라가 매우 혼란합니다. 제게 대장군의 지위를 내려주시면 군을 다스려 바로 혼란을 가라앉히겠습니다.


 
황제 유변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어미인 하 태후만 바라보았다. 하 태후도 달리 방법이 없어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가 말했다

 

 “그대를 대장군으로 삼겠소.


 
“그러면 대장군의 지위를 인수받고자 합니다.


 
동탁은 대장군의 지위를 얻자 사위 이유(李儒)에게 미리 준비해 둔 글을 읽도록 하였다.


 
“금상폐하는 선제의 유언을 무시하였다. 태자 유협을 즉위시키라는 유언이 허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제위를 찬탈했으니 죄가 있다. 이것을 막은 동 태후, 동중을 죽인 죄 또한 크다. 따라서 대장군 동탁은 천명(天命)과 진류왕의 요청으로 황제를 폐하여 홍농왕(弘農王)으로 봉하고 진류왕을 황제로 하겠노라.


 
이유가 다 읽고 나자 “불복하는 자는 지금 말하시오. 이 자리에서 군법에 따라 처치하겠소” 하고 동탁이 눈을 부릅뜨니 모두 무서워서 한마디 말도 못하였다. 그때 원소가 소리쳤다
 

 “당신은 역적이오. 황건적 정벌에 실패하고 뻔뻔스럽게 뇌물로 서량 태수 지위를 산 걸 모르는 줄 아시오? 이 살쾡이 같은 자. 어디 죽이려면 죽여 봐라.


 
“이놈, 당장 죽이고 말겠다.


 
동탁이 칼을 뽑는 시늉을 하자 이유가 말렸다. 명문가의 후손인 원소를 죽였다간 민심이 사나워질 뿐 아니라 궐기의 단초를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동탁 또한 명성과 직위에 약한 인물로, 일찍이 유비 관우 장비 세 의형제가 황건적 토벌의 공을 세웠을 때에도 관직이 없고 이름을 들어보지 못했다는 이유로 그들을 무시했던 전력이 있었다. 그런 동탁이기에 천하에 명성이 자자한 원소 가문을 함부로 건드릴 수가 없었다.


 
동탁은 자리를 박차고 떠나는 원소의 뒷모습을 씁쓸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천하대세는 이미 자신에게로 기울었음을 확신하고 아직도 겁에 질려 있는 문무백관들을, 내 말만 잘 들으면 두려워할 것 없다는 시선으로 훑어보았다. 그리고 이유를 향해 새 황제를 어서 옥좌에 모시지 않고 뭐 하느냐고 꾸짖었다.

 

 이유가 좌우의 부하에게 명하자 부하들은 황제 유변을 옥좌에서 끌어내려 신하의 자리에 앉혔다. 이어서 이유는 하 태후의 옷을 벗기고 유변 앞으로 발로 차 앉게 하였다. 동탁은 진류왕을 옥좌에 앉히고 왕 미인을 황태후로 삼아 백관에게 축하하도록 하였다.


 
이어서 전 황제와 하 태후를 영안궁(永安官)에 가두고 사람의 출입을 금하였다. 젊은 황제는 4월에 등극하여 9월에 쫓겨난 셈이다. 동탁에 의해 새 황제가 된 진류왕 유협은 아홉 살 된 소년이었다. 그가 바로 헌제(獻帝)로 연호를 초평(初平)이라고 했다. 동탁은 삼공보다도 높은 상국(相國)이 되어 황제의 어전에서도 무례한 행동을 일삼았다. 영안궁에 갇힌 전 황제와 하 태후에게는 의복과 음식을 나날이 줄여 가며 그들이 종일 울며 지내게 하였다


 
하 태후와 황제 유변 독살

 태후가 된 왕 미인이 어느 날 동탁을 궁으로 불렀다.


 
“돼지 백정의 여동생과 홍농왕이 살아 있는 한은 마음 놓고 잘 수가 없어요. 그들을 죽여 주세요.


 
“하지만 그런 짓을 하면 신하의 면목이 서질 않습니다.


 
동탁의 짐짓 예를 갖춘 말에 왕 태후가 실소하였다


 
“나는 처음부터 그대를 믿었고 지금도 믿고 있거늘 어찌 내 말을 거역하오.


 
“그래도 신하 된 도리가 아닌지라… 차차 생각해 보겠소.


 
동탁이 망설이자 왕 태후가 화를 내며 소리쳤다.


 
“그대 같은 변방의 장수가 대장군이 되고 상국까지 된 게 도대체 누구 덕이오. 이제는 황제도 태후도 우습게 보이는 거요?


 
궁에서 물러난 동탁은 기분이 몹시 언짢았다. 이에 연회를 열어 계집을 끼고 술을 마시며 마음에 안 드는 자 하나를 지목해 그가 채찍에 맞아 죽는 걸 보며 기분을 풀었다. 동탁 눈에는 하 태후도 왕 태후도 한낱 계집일 따름이었다. 감히 그 누구도 자신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수 없었다. 죽이든 살리든 자기 마음이며 원한다면 살려 달라고 울면서 가랑이 밑을 기게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동탁이기에 왕 태후가 뭐라고 지껄이든 한쪽 귀로 들으며 두 눈은 그녀의 굴곡진 몸을 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왕 태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하 태후와 전 황제를 죽일 기회가 제 발로 찾아왔다. 황제가 두 마리의 제비가 뜰에 날아든 것을 보고 지었다는 시 한 편이 동탁 손에 들어왔는데 그 내용이 가관이었다.


 
푸르른 풀 연기처럼 자욱하고
나는 쌍제비 저리도 자유롭구나
외줄기 파란 강물 흐르는데
들판의 사람들 부럽기 그지없네
멀리 푸른 하늘 구름 떠가는 곳
거기가 나 살던 옛 궁전 아닐는지
충의를 지킬 어느 뉘 있어
한 맺힌 이 마음 풀어 줄까


 
嫩草綠凝煙
裊裊雙飛燕
洛水一條靑
陌上人稱羨。
遠望碧雲深,
是吾舊宮殿。
何人仗忠義
泄我心中怨


 
살려 두어 음식을 주고 있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해야 할 터인데 이토록 원망하는 마음을 품고 있다니! 동탁은 비위가 상했다. 이참에 후환을 없애야겠다고 결심했다. 전 황제라는 존재 자체가 원소를 비롯한 반동탁 세력들이 결집할 구심점을 제공하는 구실이 될 터였다


 
동탁은 사위인 이유를 불러 전 황제가 다시는 시 따위를 짓지 못하게 그 입을 영원히 봉하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그 어미에게도 아들과 함께 죽을 수 있는 영광을 주라고 하였다.


 
전 황제와 하 태후를 죽이라고? 이유는 자칫 역사의 죄인으로 낙인찍힐 그 일을 꼭 제 손으로 해야 하는지 원망스러웠으나 누구의 명령인데 감히 거역하겠나 싶었다. 그리고 어쩜 장인이야 말로 조만간 황제가 되실 분 아닌가. 이참에 큰 공을 세워야겠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이유는 병사를 데리고 가 하 태후와 홍농왕에게 술을 권하며 말했다.


 
“상국께서 베푸는 술입니다. 건강에 좋은 술이니 드시죠.


 
공포에 사로잡힌 하 태후가 발악하듯 쏘아붙였다

 

“그렇게 좋은 술이라면 네가 먼저 마셔라.


 
이유의 눈이 잔인하게 빛났다.


 
“잔소리 말고 마시시오.


 
이유는 하 태후의 목을 쥐고 입 안에 강제로 술을 흘려 넣었다. 하 태후는 몸부림치다 피를 토하고 숨을 거두었다


 
 “너도 마셔라.


 
폐위된 황제 유변은 울며 술을 마시고 죽고 말았다. 여섯 달을 황제로 있었기 때문에 후에 소제(少帝)라 불렸다.


동탁의 만행

왕 태후는 단도를 꺼내 동탁의 어깨를 찌르다.

 

이유의 보고를 받은 동탁은 잠시 눈을 감고 두 분의 명복을 빈 다음 왕 태후에게 갔다.


 
“홍농왕과 하 태후가 술 한 잔을 드신 후 조금 전 편안히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랬어요? 거 참 안됐군요. 왕가의 혈통이니 장사나 잘 지내 주시구려.


 
왕 태후는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고 말했다. 동탁은 이대로 가다가는 모든 것이 그녀의 뜻대로 될까 적이 염려가 되었다. 이쯤에서 행동을 취할 필요가 있었다. 꿩 먹고 알 먹고의 방책이 하나 있었다.


 
“이번 기회에 상을 받고 싶습니다.


 
“무엇이 필요한가요.


 
“태후의 몸입니다.

 
동탁은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왕 태후에게 덤벼들어 걸치고 있는 옷을 남김없이 벗겨 버렸다. 태후의 하반신에는 선제가 부착한 장형이 가죽띠로 매어져 열쇠가 걸려 있었다.


 
“이게 대체 무엇이오?


 
동탁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자 왕 태후는 수치와 분노로 알몸을 부들부들 떨기만 했다

 

 저항하는 태후를 억누르고 단도로 띠를 자르자 음부에서 장형이 튀어 나왔다. 거기에 선제의 ‘宏’이 새겨져 있는 것을 보고 동탁이 말했다.


 
“선제를 위해 정조를 지켜 오다니 훌륭한 일이로다. 그런 망령(亡靈)보다는 생신(生身)의 남자 것을 맛보아야지.


 
왕 태후가 놀라 격렬하게 저항하자 동탁은 더욱 몸이 달아올랐다. 태후는 짐승이 된 동탁에게 새벽까지 열 번 이상 범해졌다. 아침이 되어 기가 꺾이고 순해진 왕 태후에게 동탁이 정복자의 거만한 태도로 말했다.

 

 “정말 남자를 못 견디게 하는 여자로군. 선제가 장형을 박아 넣은 것도 무리는 아니지. 앞으로는 내가 당신 남편이오. 궁 안에 자유로이 드나들고 천자의 침대에서도 자겠소. 상관있소?


 
동탁은 침착하게 장형을 주워서는 잠시 생각한 후 ‘宏’자를 단도로 깎아 ‘卓’이라고 자기의 이름을 새겨 넣었다. 그것을 왕 태후에게 주며 스스로 음부 속에 끼어 넣도록 하였다.


 
“앞으로는 내가 없을 때는 몸 안에 이것을 달도록 하시오.


 
그러고는 열쇠로 잠그고 큰소리로 웃었다


 
왕 태후는 ‘卓’자가 새겨진 장형을 보자 너무 분해서 살이 떨렸다. 생각할 틈도 없이 단도를 꺼내 방을 나가는 동탁의 어깨를 뒤에서 찔렀다. 동탁은 비명을 질렀으나 가죽옷을 입은 데다 왕 태후의 힘도 약해 상처는 가벼웠다. 동탁은 단도를 뽑아 돌아서서는 바로 왕 태후의 심장을 찔렀다. 왕 태후는 아들 협의 이름을 부르며 절명하였다. 그녀의 나이 25세였다. 왕 태후의 죽음은 누군가의 독살로 처리되었다.


 
태후는 죽었지만 시신이 너무 아름답고 당돌해 동탁은 그녀를 먹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몰래 요리사를 불러 밀실에서 그녀의 몸을 해부하였다. 그녀의 목을 베어 식탁에 올려놓고 그녀의 장으로 만든 순대를 먹으며 도착적인 쾌감에 잠겼다. 당시 중국에서는 기근이 들면 사람고기 먹는 일이 없지 않았다. 또한 문무백관들이 역적이나 배신자의 시신을 씹어 먹기도 하였다. 동탁은 왕 태후를 실컷 농락한 후 그녀의 온몸을 요리해 먹었다.


 
동탁은 그 후에 황제 유협의 조종자로 대권을 쥐고 낙양과 장안에서 난폭한 짓거리를 되풀이하며 악명을 떨친다. 왕 태후가 목숨을 걸고 지킨 아들 유협은 기구한 운명의 굴레를 쓴 후, 훗날 위()에 제위(帝位)를 양보하게 되는 한제국 마지막 황제가 되었다. 조조의 아들 조비(曹丕)에 의해 산양공(山陽公)에 봉해진 후 서기 234년에 죽으니 그때 그의 나이 54세였다. 제위를 선양하였기에 죽은 후 헌제(獻帝)라고 불렸다.


 
동탁을 끌어들여 난세를 심화시킨 왕 미인, 여포를 부추겨 동탁을 죽이게 해 나라의 기틀을 잡은 초선…. 《삼국지(三國志)》의 큰 뼈대는 이렇게 가녀린 여성들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② 조조와 초선

 

 삼국지에 나오는 여성들 중 가장 유명한 여성은 아마도 초선(貂蟬)일 것이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전국구 스타인데, 그 유명세는 중국 4대 미인 중 하나로 꼽히는 그 빼어난 미모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니다. 달도 부끄러워 숨었다는 폐월(閉月)의 미모 속에 감춰진 지략과 담대함, 그리고 혼탁한 나라를 구하고자 한 간절함이 역사의 물줄기를 바꿔놓았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왕미인(王美人)이 동탁(董卓)을 끌어들여 가뜩이나 혼란한 나라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고 갔다면 초선은 독재자 동탁을 죽여 새 왕조의 시대를 앞당기는 데 초석을 놓은 여인이었다. 그녀가 동탁 앞에서 춤을 추었을 때의 모습을 후세 시인은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춤추는 미인은 본래 소양궁 궁녀로다
그 모습 놀란 기러기처럼 날씬하고
동정호 봄물 따라 나르는 듯하다
양주곡에 맞춰 경쾌하게 춤추니
또한 바람에 하늘거리는 나뭇가지 같도다
화당에 향이 풍기어 누를 길 없는 춘정


 
原是昭陽宮裏人
驚鴻宛轉掌中身
只疑飛過洞庭春。
按徹梁州蓮步穩
好花風
一枝新
畫堂香暖不勝春。


 
너무도 짧았던 조조(曹操)와의 첫사랑, 포악한 동탁의 애첩으로 보낸 서글픈 나날, 단번에 매혹된 여포(呂布)와의 열정적인 사랑, 그리고 다시 조조에게 되돌아간 기구한 운명의 여인 초선. 그녀는 나라를 위해 동탁을 제거한 구국의 성녀이며, 또한 열정적인 사랑에 빠지기도 한 지극히 여성스러운 인간이었다. 그녀의 그러한 운명이 시대를 뛰어넘어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또 격정에 차오르게 한다.


어린 시절의 초선

동탁은 권력을 잡은 후 한없이 교만하고 방자해졌다. 장안성에서 250여 리 떨어진 곳에 별궁을 짓고, 25만명을 혹사시켜 장안성과 다름없는 높은 벽을 세우고는 거기에 20년 이상 먹을 곡식을 쌓아두었다. 황금, 보물, 비단이 산더미에다 각지에서 잡아들인 미녀만 1000여 명이었다. 그뿐 아니다. 북지군(北地郡)에서 투항해 온 포로들의 수족을 자르고 눈알을 후벼내고 혀를 뽑고 큰 가마솥에 삶아 죽이는 만행을 태연히 저지르고는 마냥 즐거워하였다. 포로들의 비명은 천지에 퍼졌고 백관들은 공포심에 오그라들기만 하였다


 
그동안 동탁에게 협조해 온 사도 왕윤(王允)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는 지경에 나라는 이르렀다. 왕윤에게는 양녀가 하나 있었으니 바로 그 유명한 초선이다.


 
황건의 난이 일어났을 때 초선의 양친은 황건적에게 살해되었다. 그녀는 당시 여덟 살로 길거리에서 음식을 주워 먹으며 연명하고 있었다. 그러다 황건적이, 어린 나이에도 미모가 예사롭지 않음을 보고 잡아서 노예로 비싸게 팔아먹었다. 천만다행으로 그녀를 산 자는 당시 예주의 자사(刺史)로 황건적을 물리쳐 그 명성이 궁중에도 알려진 왕윤이었다. 노예로 끌려가는 그녀의 모습이 하도 처량하고, 처량한 것 이상으로 예뻐 돈을 아끼지 않고 그녀를 사 집으로 데리고 왔다.

 

“얘야. 이제는 아무 걱정 마라. 여기가 너의 집이라고 생각하고 편히 지내렴.


 
상가에서 태어나 부유하게 자란 그녀였지만 모든 것이 낯선데다 두렵기만 해 벌벌 떨며 울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왕윤은 아이가 너무도 가여웠다.


 
“오늘부터 너는 나의 딸이다. 내가 너를 잘 길러서 좋은 가문에 시집보낼 것이야.


 
왕윤은 소녀의 낡고 누덕누덕한 옷을 벗기고 물을 데워 목욕시켰다. 부끄러워하며 몸을 움츠리는 그녀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왕윤은 이 소녀에게 특별히 매혹되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는 목이 길고 얼굴이 작고 또한 눈동자에 빛이 있어 매우 영리해 보였다. 코에서 턱으로 예쁘고 균형 있게 갈라져 뻗은 법령, 그 안에서 평행으로 길게 뻗친 인중, 발그레한 뺨과 입이 멋진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말을 할 때마다 목소리가 방울소리처럼 울리니 귀엽기 그지없었다.


 
밤마다 그녀는 왕윤의 팔에 안겨 새근새근 잠들었고 그는 그 천진무구한 모습을 보며 행복감에 빠져들었다. 후에 동탁을 매혹하고 여포를 꾀어 동탁을 죽이는 사건이 벌어지기 8년 전의 일이다.


 
황건의 난이 수습되자 왕윤은 투옥되었다. 왕윤이 황건적과 내통했다고 환관이 모함한 때문이었다. 왕윤은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황건의 난 때 공을 세운 이들의 탄원으로 목숨만은 건졌다. 왕윤이 무사히 집으로 돌아오자 초선은 기뻐하며 그의 가슴에 뛰어들었다. 밤새 울었는지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얘야. 고맙다. 이제는 아무 걱정 없다. 나는 너하고 평생을 같이할 것이야.


 
이처럼 두 사람은 아버지와 딸의 정으로 얽혀 서로를 보듬었다.


하진 장군을 거절하는 초선

중평 6(189), 환관을 보호해 온 영제(靈帝)가 죽자 누이동생인 하태후의 배경을 업고 대장 하진이 실권을 쥐었다. 당시 초선은 13세로, 낙양의 장관인 왕윤의 양녀가 된 지 어느덧 5년이 되었는데 여자다운 매력이 활짝 피어나는 중이었다. 그녀가 연주하는 금()은 듣는 이의 마음을 녹였고 그녀가 움직일 적마다 다양하게 연출되는 몸맵시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옥처럼 부드럽고 섬세한 흰 살결에다 무용으로 가꾼 날씬한 몸매는 보는 이의 감탄을 자아냈다. 일찍부터 수많은 혼처가 있었으나 왕윤은 그 어느 하나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왕윤이 양녀를 데리고 살 생각이라는 소문을 냈다.


 
대장군 하진도 초선을 보는 순간 바로 매혹되었다. 왕윤의 저택에서는 자주 연회가 벌어졌는데 하루는 술이 거나해진 하진이 용기를 내어, 초선을 자기에게 달라고 떼를 썼다.


 
“하진 나리. 부탁건대 그것만은 좀 참아주시오.


 
말은 그렇게 했지만, 하진과 그녀가 맺어지면 막강한 권력을 손아귀에 쥘 수 있다는 걸 곱씹고 있었다. 이에 왕윤은 초선에게 하진의 뜻을 넌지시 전했다. 당시의 관습으로 아버지의 말은 법과 같은 것이었다. 초선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아버님. 그 남자는 별로 쓸모가 없는 인물입니다. 누이동생 덕에 온갖 부귀와 영화를 누리고 있는 것으로 덕도 없고 재능도 없는 실로 한심한 인간입니다. 제아무리 부귀영화가 좋다 해도 그런 사람과 살 수는 없어요.


 
이에 왕윤이 탄식하며 말했다.


 
“정말 영리하구나. 네 말이 옳다. 네 뜻을 알았으니 하진 장군은 내가 잘 설득해 돌려세우마. 집안에 화가 미치지 않게 조심해서 일을 처리해야겠구나.


 
이듬해 하진이 환관들에게 살해돼 왕윤은 한숨을 돌렸다. 하나 이내 그보다 더 고약한 악이 나타났으니 바로 서량의 태수 동탁의 등장이었다


 
권력을 잡은 동탁의 신임을 얻은 왕윤은 사도(司徒)의 직책을 갖게 되었다. 동탁은 막강한 군사력을 배경으로 제멋대로 행동하며 왕미인의 아들이자 유변의 이모제(異母弟)인 유협을 옹립하고 하태후와 유변을 죽이기에 이르렀다. 동탁의 약탈과 능욕이 도를 넘으니 낙양은 공포의 잿빛으로 물들었다. 왕윤은 미쳐 돌아가는 세상을 바로잡고 싶었으나 구체적인 대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궁중에 나가서도 제대로 건의도 못 하고 깊은 한숨만 내쉬었다.


조조의 과감한 계획

당시 왕윤과는 달리 구체적인 대안을 갖고 동탁에 맞서려고 한 자가 있었으니 그는 바로 조조였다. 조조는 ‘나에게 칠성검(七星劍)만 있다면 반드시 동탁을 처치해 보이겠다’고 큰소리쳤다. 칠성검은 왕윤의 집안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보도였다. 조조는 황건의 난에서 크게 활약한 바가 있어 낙양에서는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왕윤은 그의 날카롭고 자신에 넘치는 눈초리를 보고 그에게 한 가닥 기대를 걸기로 했다.


 
왕윤은 초선에게 멋진 향연을 준비하라고 일렀다. 이윽고 잔칫상이 차려지고 조조가 초대되어 왕윤과 단둘이 대작하게 되었다. 차를 나르고 물러나는 초선을 눈여겨본 조조가 말했다.


 
“왕윤 나리… 저 여인은 누굽니까?


 
여느 사내들처럼 조조도 첫눈에 초선에게 반한 것 같았다. 왕윤은 불안에 사로잡혔다. ‘중대사를 앞두고 여자의 꽁무니부터 좇는 자가 동탁을 과연 처치할 수 있을까?


 
“저의 양녀올시다.


 
“그래요?


 
순간 조조는 여인에 대한 호기심을 거두고 큰 결단을 앞둔 대장부의 얼굴로 되돌아가 있었다. 이에 왕윤은 안도하였다. 그날 밤 초선이 왕윤에게 아뢰었다.


 
“저분은 하늘이 낳은 사람이 분명합니다. 가문의 배경 없이도 큰일을 할 수 있는 분 같습니다.


 
이튿날 조조가 다시 왕윤을 찾아왔다.


 
“어제 본 그 아이…. 이름이 초선이라 했나요. 정말 매력이 넘치더군요.


 
벌써 초선에게 홀딱 반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뒤이어 조조는 전혀 다른 말을 했다.


 
“저 애를 동탁에게 헌납하는 게 어떻겠소. 저 애가 연주하는 금과 요염한 춤을 보면 놈은 정신을 못 차릴 게 분명하오. 그럼 놈은 분명 연회를 열고 술에 취해 그녀를 안고 깊은 잠에 빠지게 될 것이오.


 
조조가 양녀의 모습을 유심히 살펴본 이유를 알게 되자 왕윤은 당황하였다.


 
“초선을 동탁에게 바치라 말이오? 그 포악한 놈에게?


 
“아니 바치는 연극을 꾸미자는 거요. 거사가 성공하면 그때 나리의 딸과 내가 결혼하리다.


 
“물론 그렇게만 된다면 동탁의 목은 우리 것이나 다름없겠지요. 하지만 초선이 그 제안을 받아들일는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조조라면 초선의 짝으로 맞아도 괜찮다고 생각했으나 조조의 계획을 들은 후 왕윤은 고심하기 시작했다. 역시 조조는 조조였다. ‘어찌할까?’ 왕윤이 고심할 때 숨어서 그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던 초선이 갑자기 튀어나와 외쳤다.


 
“의부님. 그 역할을 하겠습니다. 걱정 마세요.


 
그녀의 눈에는 강한 의지가 서려 있었다.


 
“얘야. 네가 함부로 나설 일이 아니다. 가서 잠이나 자거라.


 
“아니에요. 이번만은 의부님의 명을 듣지 않겠습니다. 의부님이 그토록 심한 시름에 빠져 있는데 제가 편히 잠을 잘 수 있다고는 생각 마세요. 저는 당장에라도 조조 나리와 함께 동탁에게로 가겠습니다.


 
“어허 네 뜻이 천 근 바위보다 무겁구나. 그럼 초선아… 기어이 그리하겠다면 내 너에게 뒷일을 부탁한다. 이제 나라의 운명이 한 어린 여인의 손에 달렸는지도 모르겠구나.


 
그 말과 함께 왕윤은 조조에게 “자 조조 나리, 이제 초선을 동탁에게 데려가 주시오”하고 부탁했다. 초선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조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은 사모하는 사람을 바라보는 뜨거운 눈동자이자 그 사랑을 통해 나라를 바로 세우겠다는, 그 나이의 여자로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강렬한 염원의 눈동자였다


 
왕윤은 지금까지 그녀와 함께 지낸 그 숱한 시간들을 생각하고 눈물을 흘리며 말없이 초선을 안았다. 초선은 왕윤의 품에서 소리 죽여 울었다.


초선의 매혹적인 춤으로 시작된 조조의 동탁 암살극

그로부터 열흘 후 왕윤의 집으로 온 조조는 초선을 조심스럽게 안아 말에 태웠다. 스스로 선택한 일이지만 왕윤은 초선이 너무도 안쓰러웠다. 그러나 이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조조는 태연하게 왕윤이 준 칠성검을 뽑아 빛을 내는 7개의 보석을 응시하고 있었다.


 
“왕윤 나리. 거사가 성공하면 이 칼은 제가 가져도 될는지요.


 
“물론이오. 자 시간이 없으니 어서 칼을 집어넣고 떠나시오.


 
이미 초선도 칠성검도 다 가진 듯한 조조의 행동이었다. 길을 떠나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왕윤은 갑자기 이상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황건적에게 살해당한 아이의 친아버지처럼 이 아이의 운명도 그렇게 되는 게 아닐까… 왕윤은 두려움에 떨며 방으로 들어갔다. 자신이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것인가 자책하였지만 배는 이미 떠난 뒤였다.


 
동탁의 인상은 조조가 상상한 것 이상으로 흉악하였다. 날카로운 눈초리에 냉혹함마저 느껴지는 엷은 입술. 그의 주위에 있는 자들은 하나같이 긴장으로 몸이 경직되어 있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자는 때려죽이거나 혀나 눈을 뽑아버리거나 손발을 절단하거나 미인을 데리고 논 다음 요리해 먹는다는 소문이 결코 헛소문은 아닌 것 같은 인상을 주었다. 그를 대면하기 무섭게 기가 죽어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조조는 잠시나마 왕윤에게 큰소리치며 보검까지 빌려 여기 온 것을 후회하였다. 넓은 방에는 침묵만이 가득했다. 이윽고 정신을 차린 조조가 동탁에게 말했다.


 
“오늘 이 검으로 멋진 검무를 보여드리고자 하나이다.


 
“검무라니?


 
“네. 제가 오늘 금을 기가 막히게 잘 타는 낙양 제일의 미녀를 데리고 왔습니다.


 
그러자 조조의 뒤 멀찌감치 서 있던 초선이 고개를 들었다. 요염한 웃음을 짓고 있는 초선을 본 순간 동탁은 눈을 크게 떴다. 일찍이 보지 못한 미모였다. 손만 까딱하면 달려와 품에 안길 궁녀들이 지천에 널려 있었지만 그녀는 다른 그 누구와도 달랐다. 동탁은 꿀꺽 침을 삼켰다. 비대한 살이 욕망으로 떨렸지만 동탁은 짐짓 태연한 척 조조에게로 눈을 돌렸다.


 
“그럼 어디 자네의 검무 솜씨를 한 번 볼까.


 
넋이 나갈 듯한 초선의 금 연주에 맞춰 검무를 활달하고도 멋지게 추고 난 조조는 초선과 함께 동탁이 마련한 잔칫상에 앉았다. 동탁은 시종일관 초선만을 바라보았다. 살인마의 어두운 눈이 이번에는 욕정으로 이글거렸다

 

 술을 한 잔 올린 조조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


 
“마음에 드시는지요? 장군께서 마음이 있으시다면 곁에 두시지요.


 
“그게 진심인가?


 
“네. 초선도 동탁 나리라면 매우 기뻐할 것입니다.


 
“그럼 술부터 한 잔 따르라고 해보라.


 
초선은 고개를 숙인 채 동탁에게 다가가 섬섬옥수를 들어 술을 따랐다. 그녀가 술을 따르자 술마저 그녀의 체취를 담은 듯 입안에서 더없이 향기로운 냄새를 풍겨왔다. 동탁은 오감이 다 만족하여 조조에게로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고맙군. 자네 오늘은 우리 집에 머물지 그러나. 자 이 잔부터 받게.


 
“네. 황공합니다.


 
잔을 들이켜면서 조조는 ‘오늘 밤이 네놈의 마지막이 될 것이다’라고 속으로 외쳤다.


 
보름달이 너무나 밝았다

 

 “날을 잘못 택한 건가.


 
그러나 곧 마음을 다잡았다. 오늘 반드시 끝장을 내야 했다. 술에 잔뜩 취한 동탁은 장안의 최고 미녀를 헌상한 조조를 거듭 치하한 후 비곗덩어리 몸에 초선을 꿰차고 침실로 들어갔다. 많이 취한데다 지나치게 흥분을 불러일으키는 초선의 위에서 조급하게 행위를 마치고 난 동탁은 곧 깊은 잠에 든 듯했다. 객실을 빠져나간 조조는 미리 눈여겨봐 둔 동탁의 침실로 접근해 갔다. ‘이제 곧 동탁의 머리가 굴러 떨어지고 초선 너는 나의 여자가 될 것이다.’ 조조는 호위병들을 피해 동탁의 침실로 그림자처럼 스며들어갔다. 그 순간 으스스한 기운이 조조를 사로잡았다.


 
“왔느냐.


 
동탁이 눈을 크게 뜨고 웃고 있었다


 
당황한 조조를 즐거운 듯 바라보는 동탁의 손에는 한 장의 종이가 쥐여 있었다.


 
왕윤이, ‘조조의 속마음을 알 수 없으니 오늘 밤 조심하라’는 밀서를 이미 동탁에게 보내놓은 것이었다. 조조가 실패할 경우 초선도 죽게 되리라는 어버이의 염려에서, 우선은 그녀를 살리고 보자는 조급한 마음이 그렇게 시킨 것이었다. 영문을 모른 채 절망적인 얼굴로 쳐다보는 초선을 외면하며 조조가 외쳤다


 
“동탁, 오늘은 날이 아니구나. 하지만 나 조조 기필코 다시 오겠다. 그때는 동탁 너 돼지의 목을 따 주마.


 
“이런 미친놈.


 
조조는 이번에는 무섭게 초선을 노려보았다.


 
“네년이 저 돼지를 깨워 나를 기다리게 한 거냐. 요망한 것이 눈치도 빠르구나. 어디 돼지와 함께 한번 잘 살아보거라.


 
이렇게 외치고 조조는 날쌔게 침실에서 사라졌다


 
“멍청한 놈. 날 죽이는 게 그렇게 쉬운 줄 아나. 초선아 저놈 말 들었지. 널 저주하다니 제정신이 아닌 놈이다. 하여튼 이제부터 너는 나의 곁을 떠나지 마라. 그래야 네 양부도 늘그막에 편안히 지내지. 조조놈은 내가 씹어먹고 말 테니 염려 놓거라.


 
초선은 그래도 무섭다는 듯 동탁의 품 안을 파고들었다.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어디 잘 살아보거라’고 한 조조의 말이 원망스러워서가 아니었다. 행여 공모의 의심을 받게 될까 봐 임기응변으로 한 말임을 모르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녀를 노려보던 눈 속에 서려 있던 안타까움과 연모의 빛을 초선은 놓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조조님 부디 무사히 벗어나세요. 언젠가 만날 날이 오겠지요. 오늘 당신의 그 말씀 그 어떤 사랑의 달콤한 말보다 더 내 가슴을 울리는군요.


 
동탁의 부하들이 사방으로 뛰어다니며 조조를 잡으려고 애썼으나 조조는 용케 변장을 하고 빠져나가 낙양을 벗어났다

  
여포의 등장

 후궁에는 미녀가 800명이나 대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동탁은 자신의 침실에 틀어박혀 초선의 몸만 미친 듯 탐닉하였다. 조조의 예에서 보듯 언제 누가 또다시 암살하러 올지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그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그녀를 탐하고 싶을 만큼 그녀는 사람을 미치게 하는 여자였다.


 
왕윤은 동탁에게 조조의 습격을 피하셨다니 천만다행이라고 겉치레로 아뢰었다. 밀서를 보내 암살을 모면케 한 왕윤의 충정을 동탁은 치하하며 앞으로도 나를 위해 열심히 일해 달라고 당부하였다. 왕윤은 원하지 않게 동탁의 오른팔이 되었다. 도읍을 낙양에서 장안으로 옮긴 후에도 그 관계는 변치 않았다. 왕윤은 모든 것을 체념하였다. 동탁을 거역할 수도 없고 초선을 되찾아 올 수도 없었다. 특히 초선은 절망적인 심정으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암살이 실패한 그날 밤 이래로 초선은 조조가 자기를 구하러 오기만을 기다렸다. 밤마다 동탁의 무거운 몸에 깔려, 압사되는 듯한 고통의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조조가 전국의 제후들에게 반동탁연합의 격문을 보내 군사를 일으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초선은 다시 희망에 부풀었다. 조조의 무공이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소식을 듣고 그녀는 때가 멀지 않았음을 확신했다. 그런 중 장안으로 가는 동탁을 추격했던 조조의 군대가 그만 참패하고 말았다. 패퇴를 거듭한 반동탁연합군이 마침내 해산되자 초선은 희망을 버려야 했다.


 
그런 그녀에게 삶의 보람이 있다면 그건 여포였다. 그녀가 처음 여포를 만난 것은 수도가 아직 낙양에 있던 무렵으로 반동탁군과 동탁군이 패수관에서 격돌하기 며칠 전이었다. 그날 동탁의 명으로 초선은 장군들 앞에서 악곡을 연주하였다. 전투 전에 장군들의 사기를 고무하기 위한 것이었다. 모두 그녀의 미모에 사로잡혀 연주를 들으며 정신을 잃는 가운데 여포가 나타났다


 
“여쭙니다. 곳곳에서 전투가 치열한데 동탁 나리께서 도통 전투에 나서지 않으시니 그 연유를 묻고 싶습니다. 나라가 위급한 이때 한낱 여자에게 빠지신 건지….


 
여포는 동탁 앞에서도 당당했다. 머리털을 3으로 가르고 그 위에 사자의 모습이 그려진 투구를 썼는데 붉은 군복에는 야수들이 싸우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어서 대답하시오. 동탁 나리!


 
“어허, 유능한 장수들이 모두 나섰거늘 내가 그들의 공적을 뺏어야 옳단 말이냐?


 
동탁은, 스스로 생각해도 명답을 말했다는 듯 거만하게 웃었다


 
“그래서 누가 나리께 확실한 승리를 가져다주었습니까?


 
오만하리만큼 당당한 목소리로 여포가 외쳤다.


 
옆에 있는 장수가 초선에게 “저분이 여포요”하고 속삭였다. 초선도 여포의 소문은 익히 들은 바 있었다. 낙양을 점령한 동탁과 부자의 연을 맺고 양부 정원을 죽인 사나이, 야수처럼 전쟁터를 뛰어다녀 모든 장수가 두려워하는 자. 이 세상에서 그처럼 강해 보이는 인간을 초선은 처음 보게 된 것이다. 여포의 그 힘차고 늠름하고 거대한 모습을 보며 초선은 갑자기 유두가 돌덩이처럼 굳어지는 것을 감지했다. 동탁에게서는 경험하지 못한, 처음으로 성욕이라는 걸 느끼는 순간이었다. 뒤이어 부끄러움과 강한 자책의 염이 그녀를 사로잡았다. 그러나 유두는 여전히 딱딱했고 이제는 몸의 어딘가가 젖어오는 느낌마저 들었다


 
“아니지…. 내겐 그보다 머리가 훨씬 뛰어나고 교양 있는 데다 멋진 시를 읊는 조조가 있거늘…. 대체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그리고 내 몸은 도대체 어떻게 된 건가.


 
초선의 뜻하지 않은 육체의 반응과는 관계없이 장내의 긴장감은 높아만 갔다. 왕좌에 앉은 동탁의 다소 언짢은 듯한 표정을 무시하고 여포는 다시 소리를 질렀다.


 
“저에게 적토마를 주면 저 혼자서라도 적군 20만쯤은 섬멸해 드리겠소!


 
초선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 남자 정말 멋지구나. 아무리 적토마라지만 혼자서 20만 병사를 무찌를 수는 없지. 죽는 것은 뻔한 일. 그래도 그는 해볼 만한 일이라고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어. 조조는 도망의 선수인데 여포는 투쟁의 선수로구나…. 정말 양극이야.’ 초선은 적토마를 타고 달리는 여포의 모습을 상상했다. ‘그의 가슴에 안겨 숲 속을 달린다면 얼마나 좋을까.


 
동탁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여포. 내 너에게 적토마를 내릴 테니 마음껏 전쟁터를 달려보라.


 
이 말을 듣자 여포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고는 빠른 걸음으로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여포는 이곳에 들어온 후 초선과 눈을 마주친 적이 없었다. 반면 초선은 여포만을 처음부터 끝까지 쳐다보며 계속 감탄하고 있었다. 동탁은 초선의 마음속 미묘한 동요는 눈치채지도 못하고 그녀에게 말했다.


 
“초선아. 저놈은 아주 단순하고 순수하지만 난폭하고 강하기로도 천하제일인 여포라는 녀석이다. 보기만 해도 늠름하지 않으냐.


여포를 이용해 동탁을 치려는 초선의 비책

남자 가운데 남자다운 여포가 있고 말 가운데 으뜸가는 적토마가 있다. 활통을 등에 메고 손에는 긴 창을 든 여포가 바람처럼 빠른 적토마를 타고 적진으로 쳐들어가는 장쾌한 모습! 관운장과의 멋진 대결과 패수관에서의 여포의 활약에 대해, 환도한 장안에서 동탁에 안겨 들은 바 있는 초선은 때때로 여포를 생각하며 감회에 젖고는 하였다. 반동탁연합군이 패수관에서 괴멸되고 조조의 반격군이 참패한 것은 오직 여포의 공적으로 봐야 했다. 희망의 싹이 짓뜯긴 곳의 상처가, 여포를 생각할 때마다 치유되어 가는 것을 초선은 느꼈다. 동탁의 무거운 몸 아래서도 초선은 여포를 생각하며 행복감을 맛보았다. 조조에 대한 연정과는 또 다른 연모였다. 한마디 말도 주고받은 적 없건만 초선은 여포에 대한 그리움으로 온몸이 타들어가고 있었다. 이성은 조조를 사랑하라고 하고 있었으나 본능은 여포를 추구하고 있었다


 
초선은 동탁의 허락을 받고 오랜만에 왕윤의 집으로 돌아갔다. 그즈음 왕윤은 동탁의 폭정에 하늘을 우러러 비통해하며 참담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나마 동탁의 애첩이 된 초선이 잠시 다니러 오니 부녀의 정을 다시금 확인하며 작은 위안을 받고 있었다.


 
하루는 모란정 근처에서 길게 탄식하는 기척이 있어 초선이 다가가 보니 의부 왕윤이었다.


 
“아버님, 밤이 늦었사온데 어이 주무시지 않고 이리 나와 계시는지요. 무슨 근심이 있으신 게옵니까.


 
왕윤은 과년한 딸 초선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나이 어느새 16. 동탁 같은 돼지가 갖기엔 그 재주와 용모가 너무나 아까운 아이였다.


 
초선의 말을 듣고 왕윤은 다시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초선아, 네가 이렇게 나오는데 내 어찌 입을 다물고 있겠느냐. 이 나라의 운명이 어쩜 한 여인의 손에 달려 있는지도 모르겠구나.


 
나라의 운명이… 이 말은 예전에도 들은 바가 있었다. 조조와 함께 동탁에게 가기 전의 일이었다. 초선은 다시 때가 온 것을 알았다.


 
“우선 화각으로 가자.


 
화각에 이르자 왕윤은 초선을 자리에 앉히고 갑자기 절을 했다. 초선이 깜짝 놀라 꿇어앉았다.


 
“대감, 어찌 이러십니까!


 
“초선아. 네 정녕 이 나라의 백성들을 불쌍히 여긴다면 나를 도와줄 수 있겠느냐.


 
왕윤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초선도 그 눈물의 뜻을 아는 듯 눈시울이 붉어졌다.


 
“말씀드린바 이 몸 나라 일에 소용이 된다면 백 번 만 번 죽어도 사양치 않겠습니다.


 
“그래. 내 모두 말하마. 알다시피 지금 백성들은 말할 수 없는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동탁이라는 놈이 호시탐탐 천자의 자리를 노리는데도 조정의 문무백관은 그저 눈치만 보고 있구나. 이제 방법은 하나밖에 없는 것 같다. 잘 들어라. 동탁에게는 여포라는 양자가 있는데 둘 다 보기 드문 호색한이다. 맞불을 놓아 산불 끄듯 연환지계(連環之計)를 쓴다면 희망이 없는 것도 아니다. 우선 너를 여포에게 보여주었다가 다시 동탁에게 돌려보낼 것이다. 무슨 뜻인 줄 알겠느냐?


 
“미련한 년이지만 어찌 대감의 뜻을 모르겠나이까. 걱정 마시고 제게 맡겨주세요. 제가 두 장수의 눈을 멀게 하여 거꾸로 세상을 밝히겠나이다.


 
왕윤은 초선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대견하기도 하고 가엾기도 했다. 왕윤은 탄식하며 속말을 했다. ‘내 이러려고 너를 키운 게 아니건만 난세가 너를 요구하는구나. 네가 두 사람 사이를 이간하여 여포의 손으로 동탁을 죽이게만 한다면 그날로 천하가 바로잡힐 것이다.


 
“의부님. 그럼 이제 여포를 부르세요.


 
“알겠다. 하지만 그는 여간 난폭한 자가 아니다. 조심해야 할 거야.


 
“그만큼 단순하다는 얘기이기도 합니다. 저에게 맡겨두세요.


 
동탁에게 그토록 시달리면서도 여전히 총명한 초선의 눈동자를 보고 왕윤은 탄식과 함께 안도를 하였다. 왕윤은 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의부님, 기억나십니까. 우리가 여기서 나라를 위해 조조와 계획을 짠 것을요.


 
“오, 그랬지. 하나 조조가 먼저 칼을 뽑았고 그는 실패했다. 그 뒤로 나는 또다시 너를 위험에 빠뜨리게 될까 봐 두려웠다. 해서 그때 우리가 계획한, 동탁을 암살하는 일은 잊기로 한 것이다.


 
“아니에요, 아버님. 지금이야말로 기회입니다. 일전에 여포를 보고 바로 계책이 떠올랐어요. 이참에 여포 장군의 손으로 동탁을 없애버리고 싶습니다. 아버님께서는 그저 여포만 이리로 불러오시면 됩니다.


 
‘하지만 동탁의 양아들 여포가 과연 응할 것인가? 초선이 동탁의 애첩인 건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인데 여포가 이를 무시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왕윤의 속을 꿰뚫어본 듯 초선이 말을 이었다.


 
“사실 저는 여포 나리를 사모하고 있습니다. 사모하는 사람의 손을 통해 짐승에게서 벗어나고 싶습니다. 그러니 동탁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우리의 뜻대로 되도록 제가 일을 꾸미겠습니다.


 
‘뭐라고? 여포를 사모한다고? 어허 여자의 마음은 어찌 이리도 알 수가 없는가.’ 왕윤은 탄식을 하였다.


 
“묻겠다. 조조에 대한 그리움은 없느냐.


 
“그는 옛 남자일 뿐입니다. 개의치 마시어요.


 
왕윤은 그만 입을 다물었다. 여포의 어떤 매력이 초선을 사로잡았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동탁보다는 인간미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여인이 사나이에게 미쳤는데 더 이상 무슨 도리가 있겠나. 초선의 너무나 확고한 결심과 애원하는 눈동자를 보고 왕윤은 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쩜 진짜 기회가 온 것인지도 모르겠구나. 아무리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이지만 나라의 운명보다 더 중히 여길 수는 없지. 내가 어리석었어. 동탁에게 밀서 따위를 보내 조조가 그를 죽일 수 있는 천우의 기회를 날려버리게 하다니. , 나야말로 사소한 부녀의 정 때문에 나라를 망치고 있는 소인배구나.’ 심한 자책 속에서 왕윤은 이번에야말로 자신의 운과 나라의 운명을 제대로 걸어보기로 했다.

 

③ 초선과 여포

 

▲여포는 초선과 함께 도망쳤다.  

 

동탁의 애첩이 된 초선이 잠시 휴가를 얻어 집에 다니러 오자 초선의 의부이자 한나라의 사도(司徒)인 왕윤(王允)은 초선과 함께 여포(呂布)를 이용하여 동탁을 제거하기로 한다. 이에 여포의 저택으로 왕윤의 사자가 달려갔다. 여포는 칠보로 장식된 황금 관을 쓰고는 적토마를 타고 왕윤의 저택으로 갔다. 여포가 오자 얼굴에 화색이 도는 초선을 보고 왕윤은 몰래 한숨을 쉬었다.
 

 “왕윤 나리. 어인 주안상입니까?


 
여포는 느닷없는 환대에 뭔가 미심쩍은 얼굴을 하였다. 왕윤은 준비해 둔 말을 늘어놓았다.


 
“장군의 용기는 한나라의 자랑거리입니다. 패수관에서 대승을 하고 변경까지 안정시키니 사방에서 장군에 대한 칭송이 자자합니다. 이 나라에 장군을 당할 자 그 누가 있겠습니까. 허니 이 늙은이가 경의를 표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습니까. 진작 이러한 자리를 마련했어야 했는데 그간 결례가 컸습니다.


 
그 말을 듣자 여포는 기분이 매우 좋아졌다. 왕윤이 시녀에게 신호를 보내자 초선이 나타났다


 
“부르셨어요, 아버님.


 
오늘따라 유독 멋지게 차려입은 그녀였다.


 
“이 여인이 바로 댁의 따님이었군요. 처음 본 것이 패수관 전투 때이니…. 벌써 2년이 지났소. 그때도 아름다웠지만 지금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답습니다.


 
“저를 기억해 주시니 소녀 기쁩니다. 그날처럼 오늘 밤도 장군을 위해서 이 초선이 검무를 보여드리겠습니다.


 
초선이 손에 칼을 들고 다시 나타났다. 여포는 깜짝 놀랐다. 왕윤은 땀에 젖은 손을 꽉 쥐었다


 
“검무라니…. 기대되는구려.


초선의 劍舞로 싹튼 여포의 戀心

 스스로 의식하지 않아도 그녀의 모습과 표정에는 요염함과 순진한 맛이 뒤섞여 있었다. 때로는 요염하게 때로는 과감하게 초선은 자기가 지닌 모든 기교를 선보이며 춤을 추었다. 한 번씩 칼끝이 여포를 향함에도 여포는 까딱하지 않았다. 초선은 춤에 열중하면서 조조를 만났을 때 자신이 추었던 검무를 떠올렸다. 냉혹하고 재치 있는 조조에 비해 여포는 통이 크고 상대적으로 정이 넘쳐흐르는 듯 느껴졌다. ‘조조님 죄송합니다. 이제 저는 약속을 지킬 수 없게 되었습니다. 당신을 믿고 기다릴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녀는 춤을 추며 눈물을 흘렸다. 왕윤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그 눈물의 의미를 왕윤도 여포도 알 리가 없었다. 검무를 마친 초선이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여포 나리. 저를 데려가 주세요. 저는 이미 나리를 심중에 두고 있습니다. 동탁 곁으로는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여포는 당황하였다. 주군인 동탁의 애첩이 자기를 마음에 두고 있다? 동탁이 이 말을 들으면 그는 초선을 죽일 것이다. 이것이 그녀의 진심일까?


 
“오늘은 제가 과음한 것 같소이다. 왕윤 나리 그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여포는 적토마에 올라탔다. 왕윤과 초선은 둘 다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왕윤은 긴장으로 초선은 춤과 격정적인 심정으로 그리된 것이었다


 
여포가 왕윤의 표정을 제대로 살폈더라면 여포를 이용해 동탁을 제거하려는 초선의 계획은 꼬리를 잡혔을지도 모른다. 고문이라도 하면 왕윤도 자백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리석은 여포는 그런 생각을 할 머리가 없었다. 물론 초선이 여포를 사모하는 건 사실이었다. 초선으로서는 동탁도 제거하고 여포도 얻는, 그야말로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얻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기울어가는 한나라를 재건하고 백성을 고통 속에서 구해내는 일이었다.


 
초선과 왕윤의 계획은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동탁 정벌

왕윤은 동탁에게 편지를 보냈다. 이번에는 조조를 조심하라고 한 일전의 그 밀서와는 전혀 다른 성격의 편지였다. 말하자면 은밀한 초대였다. 동탁은, 그렇지 않아도 초선이 왕윤의 집으로 간 지 여러 날이 되어 무척 궁금하던 차였다. 초선이 없는 틈을 타 눈여겨둔 몇몇 궁녀를 겁탈하듯 품어보았으나 초선만 한 여자가 없다는 사실만 새삼 확인했을 따름이었다.


 
편지에서 초선의 달콤한 향취가 풍겨오는 것만 같아 동탁은 지체없이 왕윤의 저택을 방문하였다. 수레에서 내린 동탁은 무장한 100여 군사의 호위를 받으며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동탁이 자리에 앉자 왕윤은 동탁의 공덕을 찬양하기 시작했다


 
풍류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산해진미와 좋은 술이 연이어 나왔다. 왕윤은 동탁이 한나라의 뒤를 계승하게 될 것이라고, 천문학의 건상(乾象)을 살핀 결과임을 과시하며 말했다. 동탁은 그 말을 듣고 자기는 그것을 바라지 않는다고 겸손을 떨었지만 눈빛은 음흉하게 빛났다. 왕윤은 동탁의 도의와 패기로 그 뜻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다시 치켜세웠다. 동탁은 마지못한 척, 천명이 자신에게 오면 왕윤에게도 거기에 어울리는 자리를 주겠다고 약조하였다.


 
왕윤이 그때를 놓치지 않고 초선을 부르니 악사들의 현금 연주소리가 은은히 울려오는 가운데 초선이 나타나 매우 미묘하고 교태 어린 춤을 추었다. 춤이 끝나자 동탁은 초선에게 가까이 오라고 하였다. 초선은 오랜만에 보는 낭군에게 다가가서 머리를 숙였다. 동탁은 그녀의 뛰어난 미모와 자신에 대한 그리움에 불타는 듯한 눈동자를 보고 다시금 넋이 나간 채, 그 비대한 몸 어딘가에 행복이라는 게 밀려오는 느낌을 받았다


 
“왕윤 사도. 나는 정말 복받은 사람인 것 같소. 당신 같은 인재에다 초선과 같은 절세미녀를 곁에 둘 수 있으니 말이오.


 
“동탁 나리. 초선이 매우 피곤한 것 같습니다. 들어가 쉬라고 해도 괜찮겠습니까.


 
“아니오. 그녀는 나와 함께 지금 성으로 돌아가야 하오. 요즘 여포가 이곳에 드나든다는 말을 언뜻 들었소. 하하 나 이 동탁이 걱정이 좀 되는구려. 여포 이 친구가 내 시녀와 정을 통한 전과가 있어서 하는 말이오.


 
시녀와의 치정사건은 여포가 어전에서 동탁의 호위를 맡고 있을 때의 일이었지만 이 말을 듣는 초선의 얼굴은 금세 어두워졌다. 그것을 혐오감의 표출로 본 동탁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걱정할 것 없다. 그 녀석이 아무리 단순무식해도 내 여자에게 손댈 만한 바보는 아니니까.


 
동탁이 어젯밤 초선을 데리고 돌아갔다는 소식을 듣고 여포는 바로 적토마를 타고 왕윤에게로 달려갔다.

 

 “왕윤 나리. 어제의 일은 대체 어찌된 것이오.


 
“어찌되다니요. 장군이 스스로 찾아온 것뿐이온데….


 
여포의 낭패한 모습을 보고 왕윤은 얼버무렸다.


 
“설마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겠죠?


동탁 곁의 초선을 본 여포

 흥분한 여포가 다그쳤다


 
“나도 초선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소. 동탁 태사야말로 여포 장군이 초선에게 마음이 있는 게 아닌가 하고 걱정하더이다.


 
“뭐라고요? 초선이 무슨 말을 하기 전에 당장 내 뜻을 장군에게 알려야겠소.


 
이렇게 말하고 여포는 질풍처럼 사라졌다. 초선의 앞날을 생각하자 왕윤은 매우 우울해졌다.


 
“이러다 내 딸과는 영영 이별이 되겠구나.


 
왕윤은 한숨을 쉬었다

 

여포가 왕윤의 집에서 나올 무렵 초선은 동탁의 품에 안겨 있었다. 쾌락에 젖은 척 신음을 내던 그녀가 탄식하며 말했다.


 
“저번에… 여포 장군이… 오셨을 때… 사실 사랑을 고백받았습니다.


 
“뭐라고?


 
동탁은 그 절구통 몸을 멈추고는 어서 고하라고 재촉했다


 
“그것뿐입니다. 그 말에는 응할 수 없다고 전했습니다. 여포 장군은 제가 동 태사의 애첩인 것 때문에 괴로워했습니다.


 
“흠, 그래 알겠다. 내 오늘은 몹시 피곤하구나. 그만 쉬거라.


 
의외로 동탁은 추궁을 멈추었다. 초선은 알고 있었다. 동탁의 가슴에 질투의 뜨거운 불길이 타오르는 것을.


 
여포가 동탁의 처소로 가자 아니나 다를까 동탁 곁에 초선이 붙어 있었다. 젖은 눈동자에서 방사되는 눈빛이 여포의 몸을 녹여내듯 휘감아왔다. 그 요염한 눈길을 털어버리듯 입구에 우뚝 선 채로 여포가 동탁에게 말했다


 
“나리께서 오해하는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저는 동 태사께 거듭 충성을 맹세코자 왔습니다.


 
“물러가라. 오늘은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다.


 
여포는 동탁의 심상치않은 기색을 보고 불안한 마음으로 돌아섰다.


 
며칠 후 초선은 여포에게 <여포 나리. 저를 영원히 가져보지 않겠습니까> 하고 단도직입적으로 적은 편지를 보냈다. 단순한 여포에게는 구구절절 설명보다는 강렬한 한마디가 통할 거로 보았던 것이다. 만약 여포가 거절하면 왕윤 부녀의 목숨은 이미 저세상으로 간 거나 다름없었다. 동탁은 배신을 절대 용서하지 않는 인간이었다. 얼마 전 사도 장온이 원술과 내통했다고 사람을 시켜 무고하고는, 연회석에서 그를 죽여 그 시체를 요리하여 문무백관과 나누어 먹고 나머지는 개에게 준 적이 있는 동탁이었다.


 
여포를 달랜 동탁

여포도 동탁을 쳐야 할 이유가 없었다. 동탁이 죽으면 각지에서 반동탁파의 제후들이 일어설 것이고 그전에 동탁의 부하들이 난을 일으킬 것이 뻔했다. 그러면 자신도 매우 위험해진다. 여포는 초선을 손에 얻는 일과 이 위험을 저울질하였다. 초선이 조조나 동탁 앞에서도 검무를 춘 것을 알고 있는 여포로서는 그녀를 손에 넣는 것은 그들에 대한 승리이기도 했다.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한 여포지만 사랑의 전투에서만은 초짜였다. 그러기에 사모의 정이 한 번 거세게 일어나자 그 불길은 모든 우려를 잠재우며 활활 타올라 꺼질 줄 몰랐다. 여포는 생각했다. 초선을 위해 동탁을 죽여야겠구나. 하나 워낙 목숨이 걸린 일인지라 아직은 주저하고 있었다.


 
어느 날 여포가 동탁이 편찮다는 말을 듣고 문병차 들르자 동탁은 잠에 빠져 있고 초선은 침실에서 눈물을 떨구고 있었다. 여포는 가슴이 터지는 듯하였다. 잠에서 깨어난 동탁은, 여포가 침상 뒤를 주시하고 있고 거기에 초선이 서 있는 것을 보고는 화를 내며 소리쳤다.


 
“이놈, 내가 아끼는 계집을 넘보아 어쩌려는 거냐! 다시는 이곳에 오지 마라.


 
동탁은 감미로운 쾌락에 젖는 시간을 잠시도 낭비할 수가 없었다. 동탁은 초선을 맞은 후부터 아예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동탁이 조금만 몸이 아파도 초선은 잠은커녕 허리띠도 풀지 않고 정성껏 돌보는 시늉을 하여 동탁은 거기서 헤어날 수가 없었다. 여포는 분을 참은 채 그 자리를 물러섰다. 돌아오는 길에 동탁의 사위 이유를 만나 억울한 속사정을 털어놓았다. 이유는 그 길로 동탁을 찾아갔다.


 
“천하를 손에 넣으실 태사께서 어찌 하찮은 일로 여포를 책망하십니까. 여포의 마음이 변하면 천하대사를 그르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럼 나보고 어쩌라는 거냐.


 
“내일 여포를 불러 금은보화를 내리시고 달래시죠.


 
다음날 동탁은 여포를 불러 위로하였다. 동탁이 마지못해 사과하고 금품을 하사하자 여포는 기분이 다소 풀렸으나 마음은 이미 초선에게 가 있었다


 
어느 날 동탁이 헌제와 대담하는 틈을 타 여포는 동탁이 거주하는 승상부로 말을 몰았다. 후당에 꿈에 그리던 초선이 있었다. 초선은 후원 봉의정(鳳儀亭)에 가 기다리라고 속삭이고는 얼마 후 옷을 갈아입고 거기로 나타났다. 초선이 여포의 가슴에 안기며 울먹였다.


 
“저는 왕 사도의 친딸은 아니지만 친딸처럼 아낌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그런데 장군을 만나뵙고 사모하게 되어 평생 장군을 모시리라는 소원을 품었는데 동탁 태사께서 이 몸을 다시 더럽혔습니다. 이 초선은 그저 죽고만 싶습니다. 이제 다행히 장군을 뵈었으니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 더는 장군을 모실 수 없으니 장군님 앞에서 목숨을 끊고자 합니다.


초선과 껴안고 있는 여포를 발견한 동탁

초선은 갑자기 난간을 붙잡고 연못에 뛰어들려고 하였다. 여포는 다급하게 초선을 붙들고 애간장이 타는 심정으로 속삭였다


 
“나도 그 마음을 알고 있소. 진작 말을 나누지 않은 내 잘못일 뿐이오.


 
“초선에게는 하루가 일 년처럼 지루합니다. 저를 불쌍히 여기신다면 속히 구해주세요.


 
초선이 슬프게 바라보니 여포의 가슴은 불타는 듯했다.


 
“지금은 잠시 몰래 빠져나온 것이오. 의심을 살지 모르니 우선은 돌아가야겠소.


 
“장군님께서 이처럼 남의 눈을 두려워하신다면 제 눈은 햇빛을 볼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여포는 초선을 달랬다

 

 “나에게도 생각이 있으니 두고 보오.


 
여포가 급히 가려 하자 초선이 앞을 가로막고 말했다.


 
“장군께서 천하의 영웅이라는 소문이 이 궁 안에서는 자자합니다. 전쟁터에서 우레와 같이 지른 소리는 어디 갔습니까. 그 명성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무엇이 두렵단 말입니까.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여포는 부끄러워서 얼굴이 붉어졌다. 여포는 다시 말에서 내려 초선을 품에 안고 위로하였다. 두 사람은 서로 껴안은 채 떨어지지 않았다


 
동탁은 주위에 여포가 보이지 않자 수상쩍은 생각이 들어 급히 헌제와 작별하고 승상부로 돌아왔다. 승상부 앞에 여포의 적토마가 매여 있는 것을 보고 문지기에게 여포가 돌아왔느냐고 물었다.


 
“네, 장군께서는 후당으로 가셨습니다.


 
동탁은 급히 후당으로 갔으나 여포는 보이지 않았다. 초선도 보이지 않았다. 시첩이 초선 아씨는 후원에서 꽃구경을 하고 있다고 아뢰었다. 동탁이 그곳에 가보니 여포와 초선이 서로 부둥켜안고 있었다. 분노한 동탁이 고함을 지르자 놀란 여포가 뒤를 돌아보고는 도망치려 하였다. 여포는 동작이 민첩해 급히 도망쳤고 비대한 동탁은 그를 따를 길이 없었다. 화가 난 동탁이 창을 던져 여포를 죽이려 했으나 날랜 여포는 그 창을 받아 땅에 내던졌다. 동탁은 여포를 쫓아 뒤뚱대며 달려가다 후원 문 밖에서 한 사내와 부딪쳐 그만 나가떨어졌다. 동탁과 부딪친 자는 모사 이유였다. 이유는 동탁을 일으켜세워 서원으로 모시고 갔다


 
“여포 이놈이 나의 계집을 희롱하다니! 그놈은 죽어 마땅하다.


 
“태사님께서 잘못 생각하고 계시는 겁니다. 초선으로 말하자면 하나의 계집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포는 태사님을 지켜주는 심복입니다.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초선을 여포에게 주면 여포는 그 은혜에 감동하여 목숨을 바쳐 태사님을 도울 것입니다.


 
동탁은 이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을 하였다.


 
“그것도 일리 있는 말이군. 잘 생각해 봐야겠다.


 
이유가 돌아가자 동탁은 초선을 불렀다


 
“너는 왜 나 몰래 여포와 정을 통하느냐?


왕윤과 여포의 만남

 초선이 억울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제가 후원에서 꽃구경을 하는데 갑자기 여포 장군이 나타난 것입니다. 여포가 ‘나는 동탁 태사의 아들인데 왜 나를 피하느냐?’ 하고 소리치며 덮치려 했습니다. 분하고 두려워 연못에 몸을 던져 죽으려 하는데 붙드는 바람에 억지로 그의 품에 안기게 되었습니다. 그때 태사님이 갑자기 나타나신 것입니다.


 
“…정녕 그러냐? 이왕지사 이렇게 된 거 내 너를 여포에게 주려고 한다. 네 생각은 어떠냐?


 
초선은 눈물을 하염없이 쏟았다


 
“저는 태사님의 것인데 갑자기 그런 말씀을 하시다니… 그럴 바에야 죽어버리겠습니다.


 
초선이 벽에 걸린 칼을 집어 자기 목을 찌르려 하자 동탁이 놀라 칼을 빼앗고 초선을 달랬다.


 
“내가 농담 삼아 해본 말이다.


 
초선은 동탁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흐느꼈다


 
“태사님. 이것은 이유의 모략입니다. 그는 여포와 친한 사이라 태사님의 체면은 아랑곳 않고 저를 선물처럼 주고받으려는 겁니다.


 
“어찌 내가 너를 버리겠느냐.


 
“태사님이 소첩을 불쌍히 여기고 사랑해 주셔도 이제는 이곳에 머물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언젠가는 여포가 해를 가해올 것입니다.


 
“염려 마라. 내가 누구냐. 나는 동탁이다.


 
다음날 이유가 동탁을 찾아왔다.


 
“오늘 초선을 여포에게 보내시지요.


 
“어찌 초선을 그 녀석에게 내주겠느냐. 부자지간임을 고려해서 저번 일은 용서해 주겠다는 말이나 전하라.


 
“태사님, 초선에게 너무 깊이 빠지면 안 됩니다.


 
“그럼 네놈은 네 부인을 여포에게 줄 수 있겠느냐. 초선의 일을 더 이상 거론하면 네놈의 혀를 뽑겠다.


 
이유는 불길한 예감에 탄식을 하며 돌아섰다


 
그날로 동탁이 초선을 데리고 미오성(塢城)으로 가겠다고 명을 내리자 문무백관이 모두 허리를 굽히고 전송하였다. 초선을 실은 수레가 멀어져 가자 여포는 언덕 위에서 수레바퀴가 내는 먼지를 보며 분개하였다. 이때 여포의 등 뒤에서 말 멈추는 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사도 왕윤이었다.


 
“이 노부가 몸이 불편해서 며칠간 장군을 뵙지 못했습니다. 오늘 태사님께서 미오로 가신다기에 나와봤는데 오히려 장군을 뵙게 되는군요. 한데 어찌 한숨만 쉬고 계십니까.


 
“왜겠습니까? 사도님의 따님 때문이지요.


 
이에 왕윤은 시치미를 떼고 말했다


 
“그럼 아직 태사님이 제 여식을 놓아주지 않았나요.


 
“흥, 그 늙은이 혼자 재미 보기 바쁘죠.


 
“어허, 안타까운 일입니다. 집으로 가서 자세한 이야기를 하십시다.


왕윤의 계략

여포는 왕윤을 따라 그의 저택에 갔다. 이윽고 주안상이 나오고 술이 취하자 여포는 봉의전에서 있었던 일을 자세하게 늘어놓았다.


 
“태사가 장군이 사랑하는 여자를 놓아주지 않는다니 난감하군요.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태사보다는 오히려 장군을 비웃을 겁니다.


 
왕윤의 말에 여포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두고 보시오. 내가 동탁을 죽여서라도 초선을 되찾고 말겠소.


 
“장군, 말조심하십시오. 그러다가 우리 모두 큰 화를 입게 될 거요.


 
“남아 대장부가 모욕을 당하면서까지 남의 밑에 있을 수는 없지 않소.


 
“하긴 장군처럼 능력 있는 분이 동 태사 밑에 있을 필요가 있겠소만….


 
여포의 마음이 이미 정해졌음을 왕윤은 알 수 있었다.


 
여포가 돌아가자 왕윤은 심복 중에 활 잘 쏘는 무사 손서와 황완을 불러 이 문제를 의논하였다. 손서가 먼저 말했다.


 
“듣자니 주상께서 병환에서 회복되셨다 합니다. 말재간 있는 자 하나를 동탁에게 보내, 주상께서 의논할 일이 있다 한다고 전하죠. 한편으로는 천자의 밀서를 여포에게 내리게 하여 대궐문 안에 군사를 매복시켰다가 동탁이 들어올 때 주살하는 것이 어떨는지요.


 
이에 황완이 물었다.


 
“그럼 누구를 보내는 것이 좋을까요.


 
“여포의 고향 친구 이숙이 어떤지요. 그는 동탁이 좋은 벼슬을 주지 않아 앙심을 품고 있습니다. 그를 보내면 동탁은 그의 말을 따를 겁니다.


 
왕윤이 여포를 불러 의논하니 여포도 동의하였다. 이숙을 불러 여포가 말하였다


 
“이숙, 지난날 공께서 나더러 정원(丁原)을 죽이고 동탁의 편이 되라고 하지 않았소. 그런데 지금 동탁이 백성을 못살게 굴지 않소. 그러니 공께서 조서를 만들어 미오로 가 동탁에게 입궐하라고 전하시오. 그런 다음 복병을 매복시켜 입궐하는 동탁을 주살해 문무백관과 만백성의 시름을 덜어주는 게 어떻겠소.


 
이숙이 이에 답했다.


 
“나도 그 역적놈을 제거해야 한다고 오래전부터 생각해 왔소. 다만 뜻을 같이할 동지가 없었는데 장군이 그런 뜻을 가지셨다면 기꺼이 그 일을 해야지요.


 
“성공하면 큰 벼슬을 얻게 될 것입니다.


 
다음날 이숙은 수십 기병을 이끌고 미오로 가 천자의 조서를 가지고 왔다고 알리고 동탁에게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무슨 조서인가.


 
“아마도 천자께서 문무백관 앞에서 태사님께 제위를 물려줄 뜻이 있어 이 조서를 내리신 듯합니다.


 
이 귀가 솔깃할 말에 놀라 동탁은 다그쳐 물었다.


 
“거기에 대한 왕윤의 의견은 어떤가?


 
“왕 사도께서는 찬성이십니다. 태사님이 오시기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간밤에 용이 내 몸을 감싸는 꿈을 꾸었는데 오늘 이런 기쁜 소식을 듣는구나.


동탁의 최후

 동탁은 심복 이각, 곽범에게 정병 3000명으로 미오를 지키라고 이르고 바로 장안으로 들어갈 준비를 하였다. 초선에게 궁궐에 간다고 알리고 수레를 타고 장안을 향해 떠났다. 중도에서 동탁을 태우고 가던 말이 갑자기 울부짖더니 말고삐가 끊어지고 재갈이 벗겨졌다. 동탁이 이숙에게 물었다


 
“혹시 불길한 징조는 아니겠지.


 
“태사께서 한나라의 제위를 받게 되시니 옛것을 버리고 새것을 맞이하는 징조입니다.


 
그 해석이 그럴듯하여 동탁은 매우 기뻤다. 동탁이 승상부에 오르자 여포가 축하 인사를 드렸다. 동탁은 ‘내가 등극하게 되면 너는 천하의 군사를 거느리는 자가 될 것이다’라고 뻐기듯이 말했다. 이 말에 여포는 감사를 표하였다.


 
다음날 동탁이 측근들을 거느리고 대궐문에 들어서니 수많은 군신이 예복을 입고 늘어서 그를 맞이하였다. 이숙은 10명의 군사만 수레를 따르게 하고 나머지는 궐문 밖에서 기다리게 하였다. 동탁이 둘러보니 왕윤을 비롯한 여러 장수가 보검을 손에 들고 전문에 서 있었다. 동탁은 놀라 이숙에게 물었다


 
“왜 보검을 들고 있느냐.


 
이숙은 대답 대신 동탁의 수레를 전문으로 밀어 넣었다. 이때 왕윤이 고함을 쳤다.


 
“역도가 왔다. 무사들은 어디 있느냐!


 
그러자 100여 명의 무사들이 창과 칼을 휘두르며 나타났다. 동탁은 예복 밑에 갑옷을 입고 있었다. 한 무사가 동탁의 팔을 찌르자 동탁은 수레에서 굴러 떨어지며 큰 소리로 여포를 불렀다. 여포가 수레 뒤에서 뛰어나와 “여기 역적 동탁을 죽이라는 천자의 조서를 가져왔다”고 외치며 긴 창으로 동탁의 급소를 찌르자 이숙이 그의 머리를 베어버렸다. 문무백관이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동탁의 시체는 지나치게 살이 쪄 군사들이 그의 배꼽에 심지를 박고 불을 붙이자 기름이 지글지글 끓어 땅바닥에 넘쳐흘렀다. 지나가는 백성들이 머리를 발로 차고 시체를 마구 짓밟았다


 
여포는 왕윤의 명을 받고 군사 5만을 거느리고 미오로 갔다. 여포는 먼저 동탁의 재산부터 몰수하였다. 금은보화와 비단 등 갖가지 보물이 헤아릴 수 없이 쏟아져 나왔다. 몰수한 재물을 왕윤에게 바치자 왕윤은 그것을 군사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동탁이 그렇게 간단히 처치된 후 1000명 가까운 후궁의 여인들은 능욕당하고 보물이 있는 궁전에서는 병사 간에 경쟁이라도 하듯 약탈전이 벌어졌다. 이 지옥에서 초선은 여포의 힘으로 화를 면할 수 있었다. 피와 시체의 아비규환 속에서 두 사람은 뜨겁게 포옹하였다.


 
“초선아, 오늘 너는 정말로 아름답구나.


 
여포답지 않은 이 말에 초선은 능욕의 현장에서도 철없이 깔깔대고 웃었다. 그날 밤 초선은 평생 처음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잠자리를 하였다. 아침 일찍 여포는 여태 꿈을 꾸고 있는 초선을 남겨놓고 밖으로 나갔다. 동탁의 잔당을 완전히 소탕해야 했다. 잠에서 깨어난 초선은 여포가 보이지 않자 말을 타고 그를 찾으러 나섰다. 한참 후 그녀는 여포를 찾았고 여포는 이상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나리. 저도 함께 싸우겠습니다.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초선은 적토마에 올라타 여포의 등에 바짝 붙었다. 그녀의 굳은 결의에 행복해진 여포는 말없이 적토마를 달리게 하였다. 동탁군을 무찌르고 여포의 군은 산으로 숨어 들어간 이각, 곽범의 군과 싸웠다. 여포와 초선은 결전 이외의 경우에는 항상 붙어 지냈다. 서로 어루만지고 도취되는 끝없이 달콤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초선은 이 행복이 오래가지 않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왕윤도 동탁파를 소탕하는 일에 앞장섰다. 초선은 장안의 의부가 걱정이 되었다


 
“나리, 대감님의 안위가 걱정이 되어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도 그러하니 어서 장안으로 가야겠다.


 
여포는 초선을 안은 채 적토마를 타고 장안으로 향했다.


 
여포가 달려갔을 때 이미 장안은 불바다가 되어 있었다. 이각과 곽범이, ‘동탁을 죽인 왕윤이 서량의 모든 백성을 죽이려 한다’는 소문을 퍼뜨려 장안은 불바다에 아수라장이었다. 그 와중에 기동대가 나타나 왕윤을 처형하고 말았다. 의부의 죽은 모습을 본 초선은 너무나 슬픈 나머지 눈이 바짝 말라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강직한 성격 때문에 모함과 오해도 많이 받았지만, 누가 뭐라 해도 한족의 부흥을 위해 평생을 바친 의부였다

 
여포와 조조와 초선, 사랑과 전투

장안을 떠난 지 2, 여포는 영토가 없는 장군의 몸으로 군사를 이끌고 방랑하였다. 초선과 여포가 공을 세운 대가는 그 무엇도 없었다. 그에 비해 조조는 동탁의 죽음으로 세력을 회복하고 황건적을 쳐 그 잔영을 자기 군에 편입시켜 진동장군이라는 칭호를 조정에서 받게 되었다. 조조의 군사는 10만을 넘었다. 초선은 조조에 대한 애증으로 괴로워하다가 분연히 일어나 하나의 계략을 세웠다. 우선 여포의 곁을 떠나 방랑생활을 빙자하여 조조에게 갔다.


 
초선은 갖은 계책을 써가며 몰래 여포를 돕고자 하였다. 그러다 여포에게 기회가 왔다. 조조가 살해당한 부친의 보복을 위해 연주를 떠나 서주로 쳐들어간 것이다. 천하평정의 라이벌이고 사랑의 경쟁자인 여포는 이 틈을 타 연주를 빼앗았다. 전승의 축하연 때 초선은 장군들 앞에서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검무를 추었다. 광야를 떠돌며 방랑하던 여포와 장군들도 눈시울을 붉혔다. 지금까지의 숱한 고생이 보답을 받는 기분이었다.


 
조조는 연주가 공격당했다는 보고를 받고, 서주태사 도겸을 도우러 온 유비의 화친 서신을 받은 김에 급히 연주로 돌아갔다. 서주에서 돌아온 조조군에게 부하들이 패배하여 여포는 영토와 성을 잃게 된다.


 
최후의 전투 때 초선은 여포의 적토마에 매달려 조조와 싸웠다. 전황이 점점 불리해지자 초선은 여포를 설득했다.


 
“이번 전투에서 조조의 목적은 저를 취하는 것입니다. 저를 여기 버리고 가면 조조는 싸움을 멈출 것입니다.


 
“아니다. 내가 어찌 너를 두고서 혼자 살아남기를 바라겠느냐.


 
여포는 초선과 함께 도망쳤다. 그러나 상황은 더 불리해졌다. 설상가상으로 극도로 약체화된 그를 원소까지 공격해 왔다. 결국 초선은 마지막 희망으로 유비의 땅으로 도망치라고 여포를 설득하였다.


 
“유비는 덕이 있으니 나리를 도울 것입니다.


 
결국 서주로 도망쳐 여포는 다시 근거지를 마련할 수 있었다. 그 후 여포는 서주를 빼앗고 유비는 조조에게로 도망쳤다.


 
여포는, 원술의 대군 20만을 피해 서주 근처 소패성에 든 유비를 다시 물리쳤다. 그러나 성내의 백문루(白門樓)의 싸움에서 조조군에게 패하였다. 그전에 여포에게는 마지막 활로가 있었다. 조조에게는 전쟁을 오래 끌 수 없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하나는 도시를 비워놓는 위험, 또 하나는 인마와 양식의 수송이 어려운 겨울이 다가온 것이었다. 군량미를 치면 여포의 군에 길이 열릴 수가 있었다. 그러나 성을 떠나는 것은 위험하였다. 성 안에서 누가 배반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초선은 여포에게 매달려 이 전투를 만류하였다.


 
“전투는 장군의 영역입니다. 제가 간섭할 일은 아닙니다.


 
“그렇소.


 
“거듭 말씀드리지만 저를 조조에게 넘겨주고 도망가세요.


 
그녀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의 결단 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결국 여포는 초선을 포기하지 않기로 한다. 성을 사수하기로 한 것이다. 그 순간 초선은 여포의 천명이 여기서 끝나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의 운명도 마찬가지였다. 그날 밤 초선의 침소에 조조의 밀서를 가지고 온 사자가 있었다. <여포는 이제 끝장이다. 나에게 돌아오라.> 초선은 수고했다고 말하고, 하나 조조의 부름에 응할 수 없노라며 사자를 돌려보냈다. 그러자 잡병으로 변장하여 그 근처에 와 있던 조조가 들어섰다.

 

“나요. 우리에게는 아직 남은 시간이 많소. 나와 함께 갑시다.


 
혼란에 빠진 초선은 멍하니 있었다. 조조를 따라나서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인가. 초선이 움직이지 않자 “생각할 시간을 주겠소. 눈이 내릴 때 데리러 오겠소” 하고 조조는 돌아갔다.


 
초선은 조조의 말뜻을 곰곰이 되새겨 보았다. 며칠 후 여포군에게는 패망의 눈이, 초선에게는 절망의 눈이 내렸다. 그 와중에 여포에게 불만을 품은 신하들 가운데 배신자가 나왔다. 적토마를 도적맞은 채 잠자다 결박된 여포는 성 밖으로 끌려나와 처형되었다


 
처형당하기 전에 여포는 조조에게 ‘자기가 기병을 인솔하고 그대가 보병을 인솔하여 둘이 힘을 합쳐 싸우면 천하에 두려울 것이 없을 것이다’라며 목숨을 구걸하였다. 조조는 그 순간 매우 망설였으나, 유비가 여포는 의부인 정원과 동탁을 연이어 죽인 자이니 또다시 배반할 것이라고 해 결국 여포를 교살하였다.


조조의 눈물

 “아. 그리운 여포님.


 
눈만 감으면 함께 적토마를 타고 달리던 여포의 체온이 몸에서 되살아났다. 그 소리, 냄새, 몸이 닿는 감각. 추억 속의 여포는 언제나 순하고 당당했다. 갑자기 달콤한 꿈을 깨뜨리는 소리가 수면을 깨고 메아리쳤다. 그립고도 가증스러운 초선의 첫 남자, 조조였다. 조조는 한번 마음먹은 것은 기필코 취하는 인간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늦었다고 초선은 생각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지금 내게 무슨 삶의 보람이 남아 있단 말인가?


 
초선은 결국 마지막 선택을 한다. 독을 탄 술을 마시고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조조는 그 싸늘한 몸을 안고 말없이 눈물을 흘렸다. 이 기묘한 운명…. 병사들은 그녀가 여포에게 바친 사랑에 감격하여 적과 동지를 가리지 않고 눈물을 흘리며 두 사람을 제사지냈다


 
초선이 없었더라면 조조가 일찍이 항전을 계속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며 동탁이 제국을 세울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조조는 사람 보는 눈에 빈틈이 없었다. 관운장을 유비에게 돌려보낼 때, 조조는 관운장의 그 의리가 후에 가장 어려웠던 적벽전에서 자신을 구해주리라는 것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그런 조조였지만 초선이 여포의 여자가 되어 자신에게 칼을 겨눌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한 여인의 마음을 얻는 것이 천하를 얻는 것보다 힘들었던 것이다.

 

④ 조조를 패배시킨 추씨

 

조조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다 그제야 사태를 제대로 이해했다.

 

곽사 아내의 질투

동탁이라는 한 지방군관이 갑자기 권력을 쥔 것이나 그의 부장(副將)에 지나지 않는 이각()이 천자를 자기 군에 들여 장안 일대를 혼란에 빠뜨린 것은 후한말 동란의 시대가 아니고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각, 곽사, 장제, 번주의 무리는 동탁이 죽자 재빨리 몸을 피한 후 장안에 사람을 보내 상소문을 올리고 항복할 터이니 죄를 사해줄 것을 청했다.


 
왕윤은 이 상소문을 받고 코웃음을 쳤다. 동탁의 죄가 모두 그들의 죄이므로 사면은 불가하다고 선언했다. 사자가 이 사실을 이각 무리에게 알리자 그들은 도망갈 궁리부터 하였다. 그때 모사 가후(賈詡)가 나섰다.


 
“우리가 군사를 버리고 흩어지면 지방장관들이 수수방관할 리 없습니다. 우리를 붙잡아 당장 중앙에 넘길 것입니다. 그러면 다 죽게 되니 이참에 병마를 모아 동탁의 원수를 갚는다는 구실로 장안에 쳐들어가는 게 좋을 것입니다.


 
모두 여기에 찬성하고 묘안을 세웠다. 동탁을 죽인 왕윤이 서량(西涼)의 백성들을 다 죽이려 한다는 유언비어를 퍼트리기로 한 것이다. 이 유언비어가 백성들을 혼비백산케 해 다시 모여든 무리가 10여 만에 이르렀다.


 
이각과 곽사(郭汜)는 군사를 이끌고 장안성에 들어가 불을 지르고 금은보화를 약탈하였다. 이각과 곽사가 헌제를 시해하려 하자 장제(張濟)가 말렸다. 이각, 곽사, 장제, 번주 등의 무리가 헌제를 협박하자 천자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벼슬을 줄 수밖에 없었다


 
이각과 곽사가 대궐을 손아귀에 쥔 후 백성들에게 가한 잔악한 행위는 이루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헌제는 눈물을 글썽이며 호소했다.


 
“짐은 두 역도에게 말할 수 없는 수모를 받았소. 그놈들의 목을 벨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소.


 
이에 태위 양표가 아뢰었다.


 
“신에게 한 가지 계교가 있습니다. 우선 이각, 곽사 두 놈을 싸우게 하고 조조에게 밀명을 내려 그놈들을 소탕토록 지시를 내리시면 조정이 편안해질 것입니다.


 
“무슨 수로 그 두 놈을 싸우게 한단 말이오?


 
“곽사의 아내는 질투가 매우 심한 여자입니다. 그 질투심에 불을 지른다면 그들은 서로 개처럼 싸울 것입니다.


 
헌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양표에게 조조를 부르는 밀서를 보내라고 명했다. 어전에서 나온 양표는 그의 아내를 은밀히 곽사 집에 보냈다. 양표의 아내는 곽사의 부인에게 선물을 주고 친교를 맺은 후 이렇게 속삭였다.


이각과 곽사 대결의 승자는?

 
 

부인께서 말해주지 않았다면 나는 아무것도 모를 뻔했구려.” 

 

“곽 장군께서 이각의 부인과 은밀히 정을 통한다는 소문이 자자합니다. 이 사실을 이각이 알면 큰일이 날 터이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부인은 두 사람이 만나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부인께서 말해주지 않았다면 나는 아무것도 모를 뻔했구려. 그년이 평소에도 여우처럼 구는 걸 보고만 있었건만. 내 결단코 꼬리를 잡고 말겠어요.


 
곽사의 아내는 양표의 아내에게 수없이 감사를 표했다. 며칠 후 곽사가 이각의 집에서 연회가 열린다며 외출하려 하자 처가 가로막았다


 
“이각은 성미가 사납고 믿을 수 없는 자입니다. 두 영웅은 한자리에 설 수 없는 법, 그가 음식에 독이라도 섞게 되면 제 신세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곽사가 연회에 참석하지 않자 저녁 늦게 이각의 시녀가 술과 안주를 가져왔다. 곽사가 음식을 먹으려 하자 처가 말렸다.


 
“밖에서 온 음식은 먹지 마십시오.


 
부인이 그 음식을 부엌으로 갖고 가 몰래 독을 탄 후 개에게 던져주었다. 개는 그것을 먹고 발광하다 그 자리에서 죽었다. ‘이각, 이놈이?’ 곽사는 분노로 두 눈이 이글거렸다. 다음부터 이각의 초청을 계속 거절한 곽사는 더 이상 핑계가 없어 마침내 이각의 연회에 참석했으나 집으로 돌아와서는 속이 메스꺼워 먹은 음식을 모두 토했다


 
“음식에 독을 넣은 게 분명해요.


 
부인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말했다. 곽사는 살기가 등등한 얼굴로 외쳤다.


 
“내가 그놈과 함께 대사를 도모하고 있거늘, 권력을 독차지하려고 감히 나를 죽이려 하는구나. 내가 선수를 쳐 놈을 먼저 죽여버리겠소.


 
곽사는 수하의 군사를 이끌고 이각의 집으로 쳐들어갔다. 이각은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분개하였다


 
“곽사란 놈이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구나.


 
이각 역시 수하의 군사를 몰고 곽사를 치러 나갔다. 두 장수가 거느린 군사는 수만에 이르렀으며 이 혼전 가운데 도적떼가 약탈을 하고 사람들을 마구 죽였다. 이후 이각과 곽사는 50여 일을 계속해서 싸웠는데 이 와중에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람이 죽어나갔다. 이각과 곽사는 이르는 곳마다 백성의 재산을 빼앗고 노약자와 어린이까지 죽이고 장정들을 붙잡아 화살받이로 이용하니 그들의 군세는 오합지졸의 집단이 되어 결국 망하고 말았다. 이리하여 동탁의 무리는 소탕되었다.


조조를 패퇴시킨 추씨

酒池肉林, 張濟의 館

 

조조는 예주(豫州)로 향한 유비와 여포를 치기 위해 급히 출전 준비를 하였다. 그때 한중 장제의 조카 장수(張繡)가 완성(宛城)에 진출하여 모신 가후의 건의로 유표와 동맹을 맺고 도읍지로 쳐들어오려 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화가 난 조조는 장군 하후돈(夏侯惇)을 앞세워 15만 병사를 이끌고 완성으로 진격하였다. 장수는 가후가 ‘조조의 군세가 강해 방어할 도리가 없습니다. 항복하는 것이 무난합니다’하고 진언하자 싸우지 않고 항복하였다


 
장수의 완성에 입성한 조조군은 성 안을 상세하게 조사하였다. 병사(兵舍), 무기고, 마구간, 식량창고, 각료들의 거주지를 모두 조사해 그 세부사항을 파악해 두었다. 조조는 “성내에 불온한 움직임은 없는가?”하고 본진에 모인 각 부대장에게 물었다.


 
“가후가 신고한 무기, 식료, 기마, 보물을 모두 정리해 서류로 갖추어 놓았습니다.


 
곽가가 보고를 했다.


 
“정말 멋진 개성입니다.


 
순욱이 말했다.


 
“장수 그자가 나에게서 헌제를 빼앗아 천하를 통일하겠다고 떠들어댔다며? 그 못난이… 그자의 아저씨라는 장제놈이 이각과 곽사에게 붙어 장안의 백성들을 도륙하고 헌제를 빼돌리려다 제 명에 못 죽었으면 됐지 뭐하러 자기까지 아저씨의 뒤를 잇겠다는 건가? 한심한 놈.


 
조조가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곽가와 순욱은 조조의 말을 반만 수긍하는 태도였다. 조조 진영의 젊은 인재인 곽가와 순욱 두 사람은 사실 장수보다는 장수의 모신 가후를 두려워하였다. 비록 항복을 해왔으나 그의 무서운 재능에 순욱은 등골이 오싹했다. 곽가도 적이지만 그를 존경할 정도였다. 이번 조조의 개성도 가후의 진언에 의한 것으로, 항복 후의 일처리도 빈틈이 없을 것으로 둘은 생각하고 있었다.


 
“다른 보고가 없다면 장수가 마련한 환영연에나 가보지.


 
조조가 그 말끝에 일어서서 연회장으로 가니 장군들이 모두 따랐다. 연회가 한창 무르익을 때 조조의 장남 조앙()과 조카 조안민(曹安民)은 서로 가만히 눈짓을 하였다. 조앙은 22, 조안민은 20세의 혈기왕성한 젊은이들이었다. 둘은 연회석을 슬그머니 빠져나와 낮에 봐둔 곳, 장수가 비밀리에 드나드는 관으로 향하였다. 문지기가 있었으나 감히 둘을 제지하지 못하였다. 관 안에 들어간 조안민은 미소를 지으며 말하였다.


 
“가후가 여긴 보고하지 않은 것 같군.


 
“보고했을 리가 없지. 여기는 장제가 남겨놓은 주지육림의 관이니까.


 
조앙이 투구를 벗으며 대답하였다. 두 사람의 시선 끝에는, 아편에 취해 몽롱해진 수백 미녀들이 거의 나체로 노래하며 춤추고 있었다. 둘은 옷을 벗어 던지고 마음에 드는 여자들을 차례차례 겁탈하였다. 여자들은 전혀 저항하지 않고 오히려 자진해서 몸을 바쳐왔다. 젊은 두 사람은 동이 틀 때까지 각자 20명 이상의 미인을 골라 데리고 즐겼다


 
“이 세상에 이처럼 성적 기교가 뛰어난 여자들이 있다니 정말 놀랄 일이군.


 
조앙이 혀를 내두르자 조안민도 수긍하였다.


 
“이곳이야말로 극락 아닌가. 시중을 드는 악사들은 여자들을 쳐다보지도 않는군.


 
조안민의 말에 나체의 한 여인이 대답하였다


 
“저 남자들은 모두 환관입니다. 여기서 일어나는 일은 절대 지껄이지 않지요. 혀를 다 뽑아버렸으니까요.


두 젊은이 앞에 나타난 미녀

아침나절에도 두 사람은 장제의 관에 머물렀다. 그들은 사흘이나 관 안에 머무르며 차례로 몰려오는 부드러운 육체들을 애무하였다. 둘이서 노곤해진 몸을 쉬게 할 겸 술을 마시고 있을 때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반라의 여인이 두 미녀를 양쪽에 끼고 나타나 이렇게 말하였다.


 
“마음에 드셨나요, 젊은이들. 이곳 여자들을 한 번 안고 나면 다른 곳 여자들은 고깃덩어리로 느껴진답니다.


 
그러자 두 미녀가 조앙과 조안민에게 다가와 둘의 다리 사이로 손을 뻗어 희롱하였다. 둘이서 미녀들을 쓰러뜨리려 하자 미녀들은 이를 가볍게 제지한 후 입술과 혀로 그들을 공격하였다. 너무나 묘한 성적 기교에 놀라 조앙이 여인에게 물었다


 
“너희는 도대체 누구냐?


 
“나는 장제의 부인이고 이 두 여인은 나의 시녀입니다.


 
처음에 말을 걸어왔던 반라의 여인이 두 미녀를 대신해 대답했다.


 
조안민이 멍하니 있자 장제의 부인 추씨(鄒氏)가 말했다


 
“우리는 기녀가 아닙니다. 한 남편만을 위해 봉사하죠. 이 관에 오는 남자는 우리 남편이거나 남편이 될 수 있는 남자뿐이지요. 그 사실을 알고 오셨겠죠.


 
“우리는 조조의 아들 조앙과 그 조카 조안민입니다. 이제 부인을 상대해도 되겠지요.


 
둘이 추씨의 탄력 있는 몸을 함께 쓰다듬으니 마치 그녀의 살 속으로 온몸이 스며드는 듯하였다.


 
“저에게 두 남편은 필요 없어요. 한 분으로 정하세요.


 
둘은 얼굴을 마주보았으나 서로 양보할 기색이 없었다. 그래서 추씨는 선수를 쳐 두 젊은이를 완전히 정복해 버렸다.

 
“조조 나리께서 이곳을 아시나요?


 
추씨가 물었다.


 
“아니오.


 
조앙이 고개를 저었다


 
“조조 나리는 천하제일의 영웅으로 지금 이 성의 주인이 되었지요. 이곳도 완성의 것이니 진짜 주인이 여기 와야 하지 않겠어요?


 
“그럼 우리더러 조조 나리를 모시고 오라는 건가요?


 
조카 조안민이 말했다.


 
“글쎄요. 오늘의 일을 조조님께서 조만간 알게 되지 않을까요.


 
두 사람은 꿈에서 깨어나 관 밖으로 나갔다. 성 안에서는 연일 연회가 개최되어 모두들 반쯤 취한 상태였다. 해서 두 사람이 사라진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오후 늦게 시치미를 떼고 연회에 참석하였다. 조조가 옆에 있는 장군에게 뭐라고 속삭이는 것을 보고 조안민이 그에게 물었다. 그러자 그는 ‘나리께서 이 성에 멋진 여인이 없느냐’ 물었다고 답했다. 조안민은 ‘조조가 그 관을 알게 되면 호통을 치겠지. 추씨가 나보단 조앙을 고른 것 같은데 그녀를 빼앗길 바에는 차라리 나리에게 헌납해야지’하고 생각하고 조조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나리, 어젯밤 성 안을 돌아보니 장수의 관 한구석에 이 세상 인간이 아니라고 여겨질 정도의 아름다운 여인이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죽은 장제의 처 추씨라고 하던데요.


 
그 순간 조조의 눈빛이 변했다.


 
“그래? 어디 그녀가 있는 곳으로 안내해 보라.


추씨의 ‘사랑의 108技’

조조는 조안민을 따라 관으로 갔다. 조안민이 먼저 안으로 들어가, 추씨에게 조조가 온 것을 알리고 맞이할 준비를 시킨 후 당부했다
“우리가 여기서 지낸 며칠간의 일은 말하지 마세요.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나요?


 
추씨가 웃으며 대답하자 조안민은 안심하고 조조를 안으로 모셨다. 추씨는 조조를 매우 정성스럽게 받들었다. 조조는 그녀의 아름다움에 정신을 잃었다.


 
“가히 절세가인이구나. 네가 원한다면 온갖 호강을 다 시켜주겠다.


 
“나리는 천하의 영웅, 저는 남편을 잃고 눈물로 지새우는 몸입니다. 나리가 그렇게 말씀하시니 너무나 기쁘나이다. 이렇게 와주신 나리야말로 제 남편이나 다름없습니다.


 
추씨의 어투는 정절한 부인과는 아주 달랐다. 조안민은 그녀가 자기가 상대할 수 있는 여자가 아님을 깨달았다. 조조는 사람들을 다 내보내고 그녀와 잠자리에 들었다. 그녀의 몸은 조조의 몸에 찰싹 붙어 온몸을 흡수하는 듯하였다. 낙지의 흡반처럼 달라붙으니 조조는 지상 최대의 행복을 느꼈다


 
“정말 믿을 수 없도다. 수백 명의 여자와 잤지만 이런 명기(名器)는 처음이로구나.


 
조조가 이렇게 중얼대자 추씨는 부끄러운 시늉을 하며 조조의 온몸을 가볍게 꼬집었는데 그것은 조조에게는 말할 수 없는 쾌감이었다.


 
“잠자리를 같이한 이상 저는 나리의 것, 다른 여자와 비교하지는 마시옵소서.


 
“참 귀여운 소리로구나. 정말 예쁘고 애교로 넘치는구나.


 
조조는 새벽까지 추씨와 수없이 사랑을 나누었다. 그 사랑은 사흘이나 계속되었다. 그 후엔 추씨 측근의 미녀 둘이 가세해 셋이서 조조를 꼼짝 못하게 하였다. 이야말로 조조가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최상의 육체적인 쾌락이었다.


 
“이 기술은 장제가 가르쳤느냐?


 
너무나 만족한 조조가 물었다.


 
“네. 저에게 사랑의 108()를 다 가르쳐 주었답니다.


 
“흥. 그는 전술은 나만 못해도 이 면에서는 나의 스승이로구나.


 
조조는 추씨의 끝없는 매력에 놀라 주위의 맹장을 모두 물러가게 하였다


 
“나는 이 관에서 잠시 머물 것이다. 그동안 108기를 나에게 다 실현해 보라. 그것들을 다 맛보기 전까진 아무도 얼씬 못하게 해야겠구먼. 천하제일의 장수 전위가 양손에 창을 들고 버티고 서 있으니 아무 걱정이 없도다.


 
조앙은 추씨를 잊을 수가 없어 관을 찾아왔다가 조안민이 밖에서 호위병처럼 서 있는 걸 보고 안에 조조가 와 있음을 알게 됐다. 조앙은 조안민에게 ‘왜 아버님께 이곳을 가르쳐 주었느냐’고 화를 냈다.


 
“어차피 알게 될 터인데… 의심받기 전에 알린 것뿐이야.


 
“추씨는 내 여자야!


 
조앙이 그렇게 소리쳐도 조안민의 귀엔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천하의 영웅이자 아버지인 조조에게 감히 덤벼들기야 하겠는가 싶었다


조조를 미치게 한 추씨의 성 기교

 조조는 열흘을 관에서 머물렀다. 조조는 추씨에 빠져 전쟁에 대한 것은 다 잊어버렸다. 그동안 추씨는 단 한 번도 똑같은 기교를 쓰지 않고 때로는 소녀들과 함께, 때로는 자극적인 의상으로, 때로는 이상한 장소를 만들고, 때로는 여러 개의 도구를 써 108가지의 기교를 차례차례 선보였으며 조조는 새삼스럽게 이 세상에 태어난 행복을 맛보았다. ‘내가 온 세상을 무력으로 정복한 것보다 이것이 더 보람이 있다’고 그는 외쳤다.


 
조조가 관에 묵고 있는 것은 비밀이었지만 이처럼 오랫동안 얼굴을 보이지 않자 소문이 퍼져나가 성 밖에 있는 장수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장수는 화가 나 낯빛이 변했다


 
‘조조 녀석 나를 우습게 알아도 유분수지, 정도가 지나치군.


 
비록 항복하기는 하였지만 장수에게 추씨는 아저씨의 부인이었다. 그뿐 아니라 그의 숙부 장제가 죽은 후 추씨는 사실상 장수의 측실이었다. 장수도 추씨의 성적 기교에 사로잡혀 있던 터라 그 천국의 시간을 결코 조조와 나눠 가질 아량은 없었다. 모신 가후는 장수의 뜻을 알고 계책을 세웠다.


 
‘성 밖에 너무 오래 진을 치고 있어 도망치는 병사가 많고 단속이 어려우니 성 안의 본진(本陣) 주위로 진을 옮기고 싶다’고 조조에게 청을 넣어보라고 진언했다. 관 밖을 지키고 있는 전위로부터 장수의 편지를 전해 받은 조조는, 추씨가 제공하는 황홀경 속에서 편지를 읽고는 무심코 이를 허락하였다. 가후는 장수의 군사 5만을 성내에 들어오게 하여 추씨의 관을 멀리서 포위하게끔 병사를 세웠다. 가후는 관 앞에 우뚝 서 있는 태산 같은 전위를 먼발치에서 지켜보았다


 
‘조조는 독 안에 든 쥐지만 관 앞에 서 있는 전위가 문제구나. 잘못 건드렸다가는 우리가 당할 터. 우선 저놈이 가지고 있는 창부터 빼앗아야 하는데.


 
다음날 가후에게 추씨의 편지가 왔다.


 
‘제가 오늘 문지기가 정신을 잃게 만들겠어요.


 
가후는 추씨의 관을 습격할 준비를 갖추라고 전군에게 명하고 전위의 모습을 살폈다. 저녁이 되자 추씨의 시녀 둘이 술과 음식을 들고 전위에게 다가왔다


 
“조조님께서 드리는 것입니다. 좀 쉬시라고요.


 
전위는 조조에게 감사를 표하며 두 미녀가 주는 술과 음식을 실컷 먹었다. 그 와중 두 미녀가 옷을 완전히 벗고 몸을 비틀며 양 곁에서 춤을 추자 전위는 너무나 황홀하고 피곤하여 그만 잠이 들고 말았다. 그런 중 갑자기 병사들의 외침 소리가 들려 전위는 잠에서 깨어났다. 수백 명의 병사가 관으로 돌입하려 하고 여기저기서 불길이 치솟았다. 전위는 창이 사라진 걸 보고 부하의 칼을 빼앗아 닥치는 대로 적을 무찔렀다.


아들을 죽인 조조

 전위가 하도 칼 솜씨가 뛰어나 군사들은 감히 접근하지 못하고 멀리서 활을 쏘아 그를 쓰러뜨렸다. 조조는 아편과 술에 취한 채 추씨의 108 성적 기교 중 최후의 것을 제공받으며 별천지를 거닐다 갑자기 깨어나 성내의 소동을 이해하였다


 
‘장수 이놈이 배반을 했구나. 나의 목숨은 여기서 끝인가.


 
조조가 모든 것을 체념하고 죽음을 각오하고 있는데 조카 조안민이 이끄는 100명의 기동대가 장수의 군대를 돌파하여 관으로 들어왔다.


 
“나리, 빨리 탈출하셔야 합니다.


 
조조는 조안민의 등에 업힌 채 호위병들에 둘러싸여 겨우 관을 빠져나왔다. 손과 발에 상처를 입은 조조는 애마마저 추격군의 화살을 맞고 쓰러졌으나 어느새 달려온 조앙의 말에 올라타 간신히 죽음만은 면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다 한참 후에 정신을 차린 조조는 조앙이 말을 멈춘 채 벌겋게 단 얼굴로 추씨의 행방을 묻자 의아해졌다. 그제야 사태가 제대로 이해되었다. 장수놈을 미쳐 날뛰게 만든 이 모든 사태의 원인은 바로 추씨였던 것이다


 
“추씨는 나를 섬겼다. 자진해서 몸을 의탁했지. 한데 네 이상한 얼굴 꼴을 보니 네가 나보다 먼저 그녀와 놀아났구나.


 
“놀아난 게 아닙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했습니다.


 
대로한 조조가 조앙의 창을 빼앗고 그를 말에서 밀어내려 하자 조앙이 칼을 뽑아들었다. 추씨 생각에 정신이 반 나간 상태에서 자신도 모르게 방어적으로 한 행동이었으나 조조는 ‘이놈도 미쳤나’ 생각하며 창으로 칼을 떨어뜨리려 했다. 그 와중에 그만 조조의 창이 조앙의 심장을 찌르고 말았다. 조조가 조앙을 안아 들었을 때는 이미 조앙은 죽어가고 있었다.


 
“아버님… 소자는…”


 
이 말끝에 조앙은 숨을 거뒀다. 그가 못다 한 말이 무엇이건 간에 이제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아들이 추씨와 놀아났든 사랑이란 걸 했든 그건 문제가 아니었다. 눈앞에서 아들이 죽고 만 것이었다. 그것도 자신의 손에


 
조조는 죽은 조앙의 말을 타고 포위망을 빠져나와 성 밖에 진을 치고 있는 하후돈의 부대로 갔다. 한편 우금은 조조의 군사가 도망쳐 오고 있는 것을 알고, 호를 파고 사수들을 사방에 배치하여 장수를 공격하기 위한 준비를 하였다.


 
우금의 예측대로 장수의 군세는 둘로 나뉘어 쳐들어왔다. 진영을 갖추고 대기하고 있던 우금은 사수들을 격려하여 활을 쏘고, 장수의 군사들이 허둥대자 총공격을 하였다. 우금의 도움으로 겨우 목숨을 건진 조조는 상처투성이 몸을 이끌고 헌제를 모시고 있는 허도로 돌아갔다


 
며칠 후 두문불출하는 조조의 방으로 곽가와 순욱이 조앙과 조카 조안민의 죽음을 애도하러 왔다. 조조는 마음이 심히 심란하였다. 아들과 조카의 죽음도 죽음이지만 전위가 죽은 것이 더 비통하였다. 그처럼 술이 취한 상태에서도 100군데나 상처를 입어가며 필사적으로 자신을 구해낸 전위, 그런 충신과 용사를 어디 가서 또 구한단 말인가. 조조가 한 신하의 죽음에 그토록 비통해하자, 과연 조조는 통이 큰 인간이라고 모두가 감탄하였다.


조조를 패퇴시킨 추씨의 책략

조조를 죽일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완벽했으나, 조조군을 패퇴시킨 걸로 만족한 장수는 다시 완성의 주인이 되어 추씨의 관에 들어갔다. 가후가 추씨에게 다가와 말했다


 
“마님. 성을 열고 조조를 받아들여 조조가 마님의 포로가 되게 한 점, 그리하여 조씨 일족의 의를 상하게 하여 조조를 혼내준 계략이 성공하였습니다.


 
“하지만 나의 남편 장제의 원수는 갚지 못했습니다.


 
“조조에게는 아직도 천운(天運)이 있나 봅니다. 천하는 혼란하고 앞으로 조조가 잡을지 원소가 잡을지 모르지만 제가 보기에 장수는 그럴 만한 인물은 못 됩니다. 그는 우둔하고 성미가 급해 왕이 될 그릇이 못 되죠. 저는 이긴 자를 받들지 않고 앞으로 이길 수 있는 자를 받들고자 합니다.


 
이 말을 듣고 추씨가 가후에게 말했다.


 
“그럼 천하의 추세가 결정될 때까지 기다릴까요? 그러나 나는 왕인 남자보다는 지금 내 눈앞에 있는 남자를 받들겠어요. 어차피 남편의 복수는 실패했으니까요”


 
“그가 누굽니까?


 
추씨는 깔깔 웃더니 옷을 남김없이 벗고 가후를 잠자리로 끌고 갔다.


 
장수는 이후 조조와 화해하고 그의 부하가 되어 전장에서 죽는다. 가후도 조조와 화해했으며 조조가 죽자 그의 아들인 가목(賈穆)도 위나라의 중신이 되었다. 추씨는 자기의 이름을 바꾸고 가후와 평생 즐겁게 지냈다

 
서서의 어머니

  
 
유비의 참모를 탐내는 조조

 

서서(徐庶)는 유비의 군사로 3년을 지냈으나 피치 못할 사정으로 후반 생은 위의 조조 밑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는 유비에게 공명을 추천한 인물이고 그야말로 유비의 패업 달성에 크게 공헌한 자이다. 본래 이름은 복()으로 가난한데다 신분이 낮은 집안 출신이었다. 젊은 시절에는 무술을 즐기고 의협심이 강해 불쌍한 사람을 곧잘 도왔다. 못된 짓 하는 자를 혼내주려다 그만 죽인 적도 있었다. 권력가에게 미움을 받아 얼굴에 흰 흙가루를 바르고 산발한 채 미친놈 행세를 하며 지냈고 유비를 만난 후부터 선복이라고 불리었다.


 
검술로 남을 돕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보고 학문에 열중하던 그는 동탁 토벌의 싸움이 시작되자 신야로 가 공명의 참모가 되었다. 공명은 서서의 재능을 높이 샀다


 
공명은 “직무를 수행하는 자는 항상 남의 의견을 물어 참고로 해야 하며 자기와 다른 의견도 검토하는 자세를 갖춰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위험에 처하기 쉽다. 서서는 겸손하면서도 남의 장단점을 지적해 고쳐주고 도와주므로 그를 모범으로 삼으라”하고 신하들에게 말했다.


 
조조는 서서의 계책에 걸려 패전한 장수 조인에게 “싸움은 지는 수도 있고 이기는 수도 있다. 한데 유현덕에게 병법을 조언하는 인재가 있다는데 그가 누구냐”고 물었다


 
그러자 모사 정욱이 대답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칼싸움을 즐겨 지난 중평 말년에 친구의 원수를 갚아주려다 사람을 죽여 관리에게 잡혔습니다. 동료의 도움으로 도망친 후 학문에 뜻을 두고 고명한 스승을 찾아다녔습니다. 이윽고 학문이 뛰어난 경지에 이르러 사마휘 같은 분과 담소를 나눌 정도가 되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조조는 긴 한숨을 쉬며 탄식했다


 
“아깝도다. 왜 그렇게 뛰어난 인물이 유현덕에게 가 있나…. 그런 인물을 맞상대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무슨 대책이 없는가.


 
“서서는 효성이 지극한 자입니다. 일찍이 아버님을 여의어 지금은 늙은 어머님만 계십니다. 승상께서 사람을 보내 그의 어머니를 극진히 대하고 차후 어머니의 서신을 보내면 그는 틀림없이 승상을 찾아뵐 것입니다.


 
이에 조조는 서서의 노모를 극진히 대접한 후 이렇게 말했다.


 
“자제분의 재주가 매우 뛰어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지금은 유현덕 곁에 있으나 우리에게 온다면 황제께 말씀드려 큰 인물이 되게 하겠습니다. 노모께서 친히 자제분 앞으로 편지를 써주시면 어떻겠습니까.


 
조조는 부하에게 지필묵을 가져오게 했다. 서서의 노모가 ‘유비는 어떤 분이냐’고 묻자 조조는 ‘그는 소인배로 쓸모없는 인간이라 자식이 그의 곁에 있는 것은 아까운 일’이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노모는 큰소리로 조조를 꾸짖었다. 그리고 유비를 칭찬하였다. 뿐만 아니라 벼루를 집어들어 조조에게 던졌다. 옆에 있던 정욱이 급히 말리고 조조에게 아뢰었다


 
“저 노모를 이곳에 잡아두고 서서가 몸 둘 바를 모르게 만드시죠. 그는 효성이 지극한 자라 더 이상 유현덕을 보필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 후 멋진 계략을 써 그가 승상을 보필토록 해보지요.


 
조조는 서서의 노모를 별당에 모시라고 하였다. 그 후 정욱은 날마다 서서의 모친에게 문안을 드리고 서서와 자기는 친구라고 거짓말을 하였다. 정욱의 흉계를 모르는 노모는 고맙다는 편지를 정욱에게 보냈다. 이 편지를 받은 정욱은 그녀의 필적을 본떠 가짜 편지를 만들어 신하를 통해 신야에 있는 서서에게 편지를 전했다.


 
서서가 급히 편지를 펼치자 그 내용이 다음과 같았다

 

  <그동안 네 아우도 세상을 떠나고 나는 무척 외로웠다. 그런데 조조 장군이 사람을 보내 나를 허도로 데려왔다. 네가 조정을 배반했다며 나를 옥에 가두었다. 다행히 정욱이 나를 보호해 줘 목숨만 겨우 부지하고 있단다. 네가 장군에게 귀순하지 않으면 죽음을 면할 수 없다고 하는구나. 그것도 그렇고 너도 무척 보고 싶으니 이 편지를 받는 대로 나에게 돌아오너라.>


아들을 꾸짖는 늙은 어머니

 
 

노모께서 대들보에 목을 매고 자살하셨습니다.” 

 

어머니의 편지를 읽은 서서는 눈물을 흘리며 그 편지를 가지고 유현덕에게 갔다.


 
“조조가 저의 노모를 허도로 끌고 가 옥에 가뒀습니다. 이제 죽이려까지 합니다. 어머니가 불쌍해서 아니 갈 수가 없습니다. 여기 머무르며 나리에게 봉사하고 싶은 마음 간절하오나 노모께서 이 지경에 있으니 널리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 말을 들은 유비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모자의 정은 천륜이거늘 어찌 끊을 수 있겠소. 비록 노모를 뵈러 간다 하더라도 기회를 보아 다시 돌아와서 나를 도와주기 바라오.


 
서서가 조조 곁으로 가는 것을 신하들이 막고자 하였으나 유비는 노모를 죽게까지 하면서 그를 여기에 둘 수는 없다고 하였다. 날이 밝자 장수들은 성 밖에 술상을 마련하여 서서와 이별의 정을 나누었다. 연회가 끝나고 서서가 말에 오르자 유비는 서서의 손을 쥐고 이별을 안타까워하였다. 서서는 눈물을 흘리며 유비에게 말했다.


 
“제가 마음이 매우 어지러워 꼭 말씀드려야 할 걸 잊을 뻔했습니다. 양양성에서 30리 밖에 있는 융중(隆中)에 가시면 뛰어난 선비가 한 분 계십니다.


 
“그대가 뛰어나다고 할 정도면 보통 인물이 아니겠구려. 그렇다면 그를 만나도록 해주시오.


 
“그분은 불러서 올 분이 아닙니다. 나리께서 직접 찾아가셔야 합니다. 만일 나리께서 그분을 손에 넣을 수 있다면 장차 큰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그분의 존함이 어떻게 되오?


 
“그분은 낭야의 양도(陽都) 출생으로 성명은 제갈량(諸葛亮)이라 하며 자는 공명(孔明)입니다. 그들 형제가 사는 집 부근에 와룡이라는 큰 언덕이 있어 자기 호를 와룡이라고 지었다 합니다. 나리께서는 당장 수레를 몰고 융중으로 가십시오. 그분만 측근에 두면 천하를 다스려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말을 끝내고 서서는 유비와 작별을 하였다. 말을 타고 달리던 서서는 불현듯 한 생각이 떠올랐다


 
‘만일 유비가 와룡을 찾아가도 와룡이 만나기를 거절한다면?


 
걱정이 돼서 그는 말머리를 융중으로 돌렸다. 서서가 공명의 초가로 들어서자 공명은 무척 반가워했다. 서서는 공명에게 자신의 사정을 이야기하고 유비가 공명을 찾아오면 평생 닦은 재능을 그를 위해 발휘해 달라고 간절히 부탁하였다.


 
서서가 허도로 온다는 말을 듣고 조조는 곧 순욱, 정욱 등의 참모들을 불러 정중히 맞이하라고 명했다. 이윽고 서서가 오자 조조는 반갑게 그를 맞이하고 말했다


 
“이제 여기 오셨으니 노모님과 함께 행복하게 지내시고 나도 역시 가르침을 받겠소.


 
서서는 조조에게서 물러나 어머니를 만나러 갔다. 목메인 소리로 어머니를 부르자 어머니는 그 목소리를 듣고 크게 놀랐다.


 
“네가 어쩐 일로 여기에 왔느냐.


 
“신야에서 유비 나리를 돕고 있다가 어머님의 편지를 받고 급히 달려왔습니다.


 
어머니는 주먹으로 책상을 치며 아들을 심하게 꾸짖었다.

 

“가문을 더럽힌 네가 강호를 돌아다니다 마침내 철이 든 줄 알았는데 이게 어찌된 일이냐. 충과 효는 동시에 행할 수 없는 일이다. 왜 위조된 편지 한 장에 속아 경솔하게 옛 주인을 버렸느냐. 이제 악명을 얻게 되었으니 정말로 어리석구나. 네가 이제 조상을 욕되게 했으니 이 일을 어찌하면 좋으냐.


 
땅에 엎드려 모친의 이 꾸중을 듣고 있던 서서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서서의 어머니는 아무 말 없이 자리를 떠났다. 그런데 조금 후 누군가가 달려와 울먹이며 아뢰었다.


 
“노모께서 대들보에 목을 매고 자살하셨습니다.


 
그 얘기에 놀라 급히 뛰어가 어머니의 모습을 본 서서는 주먹으로 땅을 치며 통곡하다 기절해 버렸다. 서서는 어머니를 장사지내고 3년상을 치렀다. 그 기간 조조가 수많은 선물을 보내며 마음을 표시했지만 그는 단 하나도 받지 않았다.

 

⑤ 조조, 조비, 조식 모두가 사랑한 원소의 며느리 견씨

 

▲저 유씨를 죽여주세요. 무서운 여자입니다. 원소의 애첩들을 모조리 죽인 여자죠. 제발 저 여자를 죽여주세요.  

 

헌제(獻帝)를 등에 업고 마음껏 권력을 휘두르는 조조(曹操)에 대해 위협을 느낀 하북의 패자(覇者) 원소(袁紹)는 군사 70만을 거느리고 조조군 섬멸에 나섰다. 참모인 전풍이 원소에게 “지금은 싸울 때가 아니니 조용히 때를 기다려야 한다”고 충고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참모 저수(沮授)도 “적은 소수이지만 정병입니다. 지금은 방어태세로 적의 병량이 소모되기를 기다릴 때입니다”하고 간했으나 역시 원소의 노여움을 샀다. 라이벌 공손찬(公孫瓚)을 패퇴시키고 하북의 4개 주를 거느리는 100만 군세의 최고 통치자로서 원소는 조조의 7만 군대를 우습게 볼 여유가 있었다.


 
원소의 70만 군사는 남하하여 관도에 자리를 잡았다. 조조군이 비록 정병이라 하지만 10분의 1 병력으로는 원소의 대군을 감당할 수 없었다. 참모 순욱이 “원소의 군은 수는 많지만 오합지졸이고 아군은 정병이니 승부는 단숨에 결정지어야 합니다”하고 진언하였다. 조조는 이 의견을 채용하였다. 조조는 하후돈(夏侯惇), 조홍(曹洪)에게 각기 3천의 군을 주어 적진으로의 돌입을 명하였다
 

 원소의 참모 심배(審配), 조조군의 움직임을 미리 알고 석궁대 1만을 양측에 배치하고 중앙에 사수 5천을 두어 일제히 대응하였다. 이 전투에서 조조군은 거의 전멸하였다. 단기전을 바란 조조이지만 적진에 침입하는 데 실패하였다. 원소는 조조진의 정면에 수십 개의 작은 산을 만들었다. 산 위에 진을 치고 조조군의 진영을 향해 화살을 쏴댔다. 조조는 막료를 소집하여 대책을 강구하였다.


 
참모 유엽(劉曄)이 “진지와 산을 부수기 위해 발석차가 필요하다”고 하였다. 발석차란 지렛대의 원리로 거대한 돌을 쏘아대는 신무기였다. 조조는 수백 개의 발석차를 만들어 원소군의 진지와 산을 공격하였다. 진지와 산은 삽시간에 무너져 내렸다. 이에 당황한 심배는 땅굴을 파 공격로를 확보하고자 하였다.


 
여기에 유엽은 진영의 전면에 참호를 파 저지시켰다. 그때 경계를 서던 부장이 원소군의 간첩을 잡았다. 심문을 하자 간첩은 한맹(韓猛)이 병량을 싣고 오기로 되어 있어 그 연락을 위해 본영에 간다고 자백했다. 조조는 한맹을 습격하고 원소의 구원대와 결전을 벌이라고 명하였다


 
원소는 진중의 북서 방향에서 불이 난 것을 발견하였다. 도망쳐온 병사로부터 수송대가 조조군의 기습을 받아 병량이 타버렸음을 알고 장합(張郃)과 고람(高覽)을 보내 조조군의 퇴로를 폐쇄하였다. 순우경(淳于瓊)에게는 2만의 병사를 주어 병참기지가 있는 오소로 파견해 식량의 증발과 수송의 역을 맡겼다.


식량창고 기습에 성공한 조조

조조도 병량이 부족하여 허도를 지키는 순욱(荀彧)에게 양식을 수송하도록 사자를 파견했으나 원소의 막료 허유에게 잡혀버렸다. 허유(許攸)는 젊었을 때 조조와 친한 사이였으나 그 후 원소에게 가 막료가 된 자이다. 조조의 편지를 읽은 허유는 바로 원소에게 가 “조조의 군량이 바닥났으니 이때 허도를 급습하면 점령할 수 있습니다. 병량이 부족한 조조군을 포위하면 그들은 그대로 자멸할 것입니다”하고 진언하였다


 
원소는 허유의 계에 대해 “조조는 책략이 뛰어나므로 이 편지가 우리를 유인하기 위한 계략일 수 있다”며 반대하였다. 게다가 원소는 심배가 보낸 편지를 읽었는데, 그 편지엔 허유가 구주에서 상인으로부터 뇌물을 받은 일, 그의 아들이 무거운 세금으로 사복을 채운 내용이 적혀 있었다. 원소는 이것을 보고 노발대발하였다.


 
목숨이 위험해진 허유는 원소의 진에서 도망쳐 나와 조조에게 투항하였다. 조조는 “원소가 허유의 계책대로 허도를 급습했더라면 참패할 뻔했는데 하늘이 도왔다”며 기뻐하였다. 그리고 허유에게 원소를 칠 수 있는 계략에 대해 물었다. 허유는 “원소는 무기, 병량의 전부를 병참기지인 오소에 두고 있습니다. 기지의 수장인 순우경은 술 마시기를 좋아하는 놈이라 기지의 수비는 허점투성이입니다. 그 허점에 대해 자세히 조사하고 치면 됩니다”라고 설명했다


 
조조는 그의 계략을 채용, 오소를 기습기로 하고 스스로 5천 정병을 이끌고 공격의 선두에 섰다. 원소의 참모 저수는 진중에서 천문을 보다가 금성이 역행하는 것을 보고 원소에게 “금성이 역행하는 것은 야습의 징조이므로 오소의 경비를 더 강화해야 한다”고 진언했다. 술과 여자에 빠져 있던 원소는 “엉뚱한 미신”이라며 그 말을 일소에 부쳤다.


 
조조군의 기습 부대는 오전 2시경에 오소 기지에 도착하였다. 수비병에게 기지를 도우러 왔다고 속이고 문을 열게 하였다. 안으로 진입한 조조의 병사들은 산더미처럼 쌓인 병량과 무기에 불을 지르고 당황하는 수비병들을 마구 죽였다. 수비대장 순우경은 술에 취한 채 막사에서 자고 있다가 조조의 군사에게 체포되었다.

 

원소는 북방에서 불기둥이 오르고서야 조조군의 병참기지 습격을 알았다. 기지 구원을 위해 출진을 준비할 때 참모 곽도(郭圖)가 “조조군이 오소를 급습했으니 그의 본진은 허술할 것입니다. 적의 본진을 급습해야 합니다”고 진언했다. 원소는 교현(橋玄)에게 조조의 본진을 급습하라고 명하였다. 원군이 본진에 이르자 좌에서 하후돈, 우에서 조인, 정면에서 조홍의 군대가 나타나 원소군은 패하였다.


 
본진 강습이 실패하여 입장이 불리해지자 곽도는 패전의 책임을 장합과 고람에게 뒤집어씌워 “그 둘이 이전부터 조조에게 항복하려 했다”고 보고했다. 원소가 화가 나 두 사람을 송환코자 하자 그들은 목숨의 위험을 느끼고 조조에게 투항하였다. 이에 원소군의 병력은 극감하고 사기는 땅에 떨어졌다. 조조는 장합과 고람을 선두로 야습을 하기로 하고 그날 밤 삼경 세 방향에서 원소군의 진영에 돌입하였다

 

조조가 이어 허위정보를 퍼뜨리자 여기에 놀란 원소는 셋째 아들 원상(袁尙)에게 5만의 군사, 신명에게 5만의 군사를 주어 여양으로 급히 보냈다. 조조는 이것을 알고 전군을 8로 나누어 일제히 공격했다. 원소군은 이에 완전히 붕괴되었다. 원소는 본진에 돌아와 심한 병이 들었다. 건안 7(서기 202) 마침내 원소는 피를 토하며 죽는다. 조조의 가장 강력한 맞수이자 명문 귀족의 후손으로 높은 인망과 막강한 군세와 인재를 거느리고 그 자신이 천하의 패권을 쥘 수도 있었던 원소는, 젊은 시절의 무용과 식견을 유지하지 못하고 자만과 독선에 빠져 조조에게 대패함으로써 자신뿐 아니라 일족 모두가 괴멸하는 단초를 제공하였다.


조조 부자 앞에 선 업성의 두 여인

 건안 9(서기 204) 7, 마침내 조조는 원소의 본거지인 업성(鄴城)을 함락했다. 14세 때 부친 조조를 따라나선 후 3년에 걸쳐 원소군과 싸워 온 장남 조비(曹丕)는 매우 흥분하였다. 10배가 넘는 원소의 대군을 물리치고 중원을 제패한 기쁨에 정신을 잃을 정도였다. 성안을 둘러보던 조조의 장남 조비는 원소의 사저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한 미인을 발견하였다. 머리카락은 흐트러지고 얼굴엔 때가 껴 꾀죄죄한 모습임에도 상쇄해 큰 눈동자, 고귀한 자태 등 아름다움이 뿜어나왔다. 그 미색에 놀라 조비가 물었다.


 
“그대는 누구인가?


 
“그녀는 제 둘째 아들 원희(袁熙)의 처 견씨(甄氏)입니다.


 
견씨의 미모에 정신이 팔려 미처 그 존재를 알아채지 못했던 한 중년 여인이 어느새 다가와 말했다.


 
“그럼 당신이?


 
“네, 제가 바로 원소의 처 유씨입니다.


 
“이거 뜻밖이군요. 당신을 보니 당신이 총애해 마지않는 셋째 아들 원상의 외모에 대해 하는 얘기가 과장은 아닌가 보오.


 
“칭찬인가요?


 
“잡아서 참수하기엔 아까운 외모란 뜻이오.


 
이 말을 들은 유씨는 새파랗게 질렸다. 지금은 업성을 떠나 있는 원상을 잡아 참수하겠다는 건지, 자신을 참수하겠다는 건지, 아니면 둘 다 참수하고 말겠다는 건지, 극도의 두려움이 밀려왔다. 원소의 아내로서 최고의 권력에 온갖 호사를 누리며 신하나 첩의 목숨 따위는 파리 목숨처럼 여겨왔던 유씨는 이제 17세 애송이 앞에서 벌벌 떨며 목숨을 구걸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런데 당신의 며느리 또한 그냥 두고 보기 아까운 미모군요.


 
조비의 이 말에 유씨는 한 가닥 희망의 빛을 보는 듯했다.


 
“마음에 드시나요?


 
“마음에 든다면 내게 주기라도 하겠다는 거요?


 
“여부가 있나요. 여자는 때로 정복당하는 욕망에 시달리기도 하죠. 더구나 상대가 천하를 호령하는 조조 나리의 장남이라면 그 누가 거부할 수 있겠어요?


 
조비는 며느리를 팔아서라도 목숨을 유지해 보려는 유씨의 노골적인 속셈을 알아채고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견씨는 그저 오들오들 떨고만 있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그녀는 조비보다는 유씨를 더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조조에게 목숨을 구걸하는 원소의 처 유씨

유씨는 견씨와 조비의 손을 잡고 규방으로 안내했다. 조비는 견씨의 매력에 견딜 수가 없어 그녀의 옷을 벗기고 그대로 어색하게 껴안았다. 그녀는 유씨에게 원망 섞인 표정을 지으며 할 수 없다는 듯 그에게 몸을 맡겼다. 조비로서는 최초의 여인 경험이었다. 다음날 아침 유씨는 입성한 조조에게 인사를 하였다.


 
“아드님이 우리를 지켜주어서 이처럼 목숨을 건졌습니다. 감사의 뜻으로 견씨를 젊은이의 부인으로 바치고 싶으니 허락해 주십시오.


 
조조는 아들이 벌써 마음에 들어 하는 여자가 생긴 것을 보고 매우 놀랐다.


 
“나이는 몇이오.


 
“스물두 살입니다.


 
“아들보다 다섯 살이나 많군. 어디 데리고 와 보게.


 
유씨가 견씨를 조조 앞으로 데리고 와 인사를 시키자 조조는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정말 내 아들은 여자를 볼 줄 아는구나”하고 중얼댔다.


 
대장 원소가 병사하였으나 세 아들 장남 원담(袁譚), 차남 원희, 삼남 원상과 조카 고간(高幹) 등 넷은 각기 자신의 영지에서 전투 준비를 하고 있었다. 특히 장남 원담과 삼남 원상은 서로 원소의 후계자를 자처하며 영토를 두고 분쟁을 벌이고 있었다. 상황에 따라 원담은 조조에 게 붙었다가 원상과 연합하는 등 매우 어지러운 행태를 보이고 있었다. 조조는 사분오열된 원소의 자식들을 치기 위해 조비를 불러 말했다.

 

“너도 부인을 얻었으니 남자가 된 것이다. 원소의 아들과 전투를 해 공도 세워야 할 게야. 네가 원희의 처를 빼앗은 이상 원희를 살려둘 수는 없다. 네 손으로 그를 없애라.


 
그가 원희를 처치하면 조조는 원소의 세 아들 중 가장 강적인 원상을 처치할 계획이었다.


 
조조는 원소의 관에 머무르며 만찬회가 벌어지자 유씨를 불러 술을 따르게 했다


 
“전처의 아들이라고는 하지만 남편의 아이인데, 그 며느리를 보신을 위해 적과 결혼시키다니 대단한 여자로구나.


 
“여자란 혼자서는 살 수 없는 법입니다. 보살펴주어야 할 분이 필요하죠. 살아 있다 해도 여자 하나 지키지 못하는 남편이 무슨 가치가 있겠습니까.


 
그러면서 유씨는 조조에게 몸을 기대었다. 조조는 처소로 가 유씨의 옷을 벗기고 가슴을 만지면서 말했다.


 
“원소가 여자를 아는군.


 
“나리의 뜻대로 하세요.


 
유씨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런데 지금 이 눈물은 무슨 뜻이오? 그대야말로 피도 눈물도 없는 여자 아닌가. 남편 원소가 죽은 후 그의 애첩 다섯과 그 일족을 잔혹하게 죽였다고 들었소만.


 
유씨는 긴장한 얼굴로 말했다.


 
“제가 어찌 그리하겠습니까. 밑의 사람들이 한 일입니다.


 
“글쎄. 오늘은 좀 젊은 여인을 안고 싶으니 나를 견씨 방으로 안내해 주겠소?


견씨를 ‘공유’하게 된 조조와 조비

유씨는 할 수 없이 조조를 견씨의 방으로 데리고 갔다. 잠들어 있던 견씨는 갑자기 조조가 찾아오자 매우 놀랐다. 조조는 견씨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안으며 같이 잠자리에 들자고 하였다.


 
“아니 되옵니다. 저는 이미 아드님의 처이온데…”


 
견씨가 벌벌 떨면서 말하자 조조는 말없이 그녀의 옷을 벗기고 완력으로 그녀를 정복해 버렸다. 견씨는 처음에는 다소 반항을 하였으나 이겨내지 못하고 그냥 몸을 맡겼다.


 
“그런데 너처럼 잘난 여자가 왜 세 형제 중 제일 못난 원희와 결혼했느냐. 무슨 이유라도 있는 거냐.


 
견씨는 할 수 없다는 듯 사실을 털어놓았다.


 
“저는 본래 원소 나리가 좋아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저 유씨가 질투가 심해서 나리가 유씨의 협박에 못 이겨 그만 아들 원희에게 저를 주었지요.


 
꼼짝없이 조조와 견씨가 정사하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어야 했던 유씨의 안색이 변했다.


 
“그럼 그렇지. 역시 원소의 여자였구나. 원소나 그 아들은 여자를 즐겁게 해줄 주변머리가 못 되는데 너의 몸은 그래도 남자를 즐겁게 해줄 줄 아는구나. 너는 앞으로 나의 여자다. 물론 아무에게도 말을 하면 안 되지.


 
정사를 마음껏 즐긴 후 조조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견씨는 그의 손을 잡고 청이 있으니 들어달라고 하였다


 
“무슨 청이냐?


 
“저 유씨를 죽여주세요. 무서운 여자입니다. 원소의 애첩들을 아주 잔인하게 죽인 여자죠. 이제 저도 죽이려 들 것입니다. 제발 저 여자를 죽여주세요.


 
“네 말이라면 못 들어줄 거 없지.


 
조조는 새파랗게 질린 유씨의 목을 잡고 방 밖으로 나가 형우를 불렀다.


 
“이 여자는 나를 농락하고 원소의 복수를 한답시고 틈을 타 나를 죽이려 했다. 밖으로 데려가 목을 쳐라.


 
유씨는 비명을 지르며 발광을 하였지만 결국 형우의 칼에 목이 달아났다


 
“이제 나와 너의 관계를 아는 사람은 없구나.


 
그 후 조조는 조비가 원정에 나가 돌아올 때까지 매일 밤 견씨와 잠자리를 같이하였다. 어느 날 조조는 정사를 마친 후 견씨에게 말했다.


 
“그대의 아름다움이 남자를 끌어당기도다. 아들이 이 일을 알게 되면 나를 죽이려 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도저히 그대 곁을 떠날 수 없으니…. 그러니 그대가 말 한마디만 잘못 해도 천하의 추세가 바뀔 수도 있지…. 정말 망국의 미녀로다.


 
“그럼 제가 살아 있는 것이 죄인가요?


 
“죄이건 아니건 살아서 나를 즐겁게 하라. 내가 그대에게 원하는 건 그것이 전부이다.


아버지가 누군지 알 수 없는 아이를 낳다

이듬해 견씨는 아들을 낳았으니, 바로 조예(曹叡). 조조는 손자 조예를 몹시 귀여워했다. 건안 12(서기 207) 9월 원소의 아들 삼 형제 중 3남 원상, 차남 원희의 목이 조조에게 보내졌다. 이 둘은 중국 동쪽 요동의 태수 공손강(公孫康)에게 구원을 청하였으나 조조를 두려워한 공손강이 두 사람의 목을 베어 바친 것이다. 이리하여 7년에 걸친 원씨 일족과의 싸움이 끝나고 중평은 조조의 것이 되었다


 
전 남편 원희의 죽음을 안 견씨는 슬프게 울었다. 남편이 있는 몸으로 적장의 여인이 되어 그 아들과 결혼하고 아이까지 낳았으니 왜 아니 슬프겠는가.


 
조조는 원소 일족을 멸한 그 위세를 떨치기 위해 업의 서북쪽에 동작대(銅雀臺)를 세웠다. 그 후 조조는 조비를 미워하고 총명한 조식(曹植)을 사랑하였는데, 이 조식 또한 천하절색 견씨를 오랫동안 짝사랑하였다


 
어느 날 조조의 귀에 조예가 조조의 아들이라는 소문이 들려왔다. 그 때문에 견씨를 멀리하게 되었다. 일설에는 견씨가 조비의 여자가 되기 전 이미 원희의 아이를 임신한 몸이었다는 얘기가 있다. 이럴 경우 얘기는 더욱 복잡해진다. 아무튼 견씨가 32세 때 조조는 그녀보다 젊은 여자를 사랑하게 되고 조비도 황후와 측실을 두고 그녀를 멀리하였다.


균열이 생긴 조씨 家

그 후부터 조비는 냉정한 인간이 되었으니, 세 동생 중 아버지의 장례에 늦게 왔다고 4남 조웅(曹熊)을 자살하게 하고 차남 조창(曹彰)은 전선에 보내 죽였다. 견씨는, 원소의 유산을 형제가 서로 탐내 싸우다 조조에게 패한 사실을 돌아보며 조비 형제의 분란을 염려했다. 마침내 견씨는 미쳐서 발광하다 조비로부터 자살을 명받고 39세에 죽는다. 조비도 5년 후 재위 7년 만인 39세에 세상을 떠난다. 이후 위()의 제2대 황제에 조예가 오른다

 
피리 부는 여인 蔡琰과 조조

평범하지 않은 조조의 기질

조조는 어린 시절에는 방탕아였다. 공부는 별로 하지 않고 요령을 부리며 남을 속이는 걸 재미있어 하기도 했다. 청년시절에는 유명한 인물 감정가 허소(許劭)에게 자신을 평해 달라고 부탁하여, ‘치세(治世)의 능신, 난세(亂世)의 간웅’이라는 유명한 평을 들었다. 조조는 이 평을 듣고 크게 웃었다고 한다. 조조의 담대한 성격이 엿보이는 부분이다.


 
조조는 20세 때 효렴의 천거를 받아 낙양의 경비를 맡았다. 황건적 토벌의 공로로 황궁의 금위군 통솔자인 기도위가 되고 이후 전군교위를 역임한다. 동탁(董卓)이 권력을 잡자 반동탁연합군을 결성한 조조는, 동탁이 낙양을 불태우고 장안으로 천도한 후 황건적 잔당을 몰아내고 세력을 확장하였다. 이때 항복한 청주(靑州)의 병사 30만을 수용하여 전력을 크게 강화하였다. 이각, 곽사의 난을 진정시키고 후한의 마지막 황제 헌제를 옹호하여 허도(許都)를 수도로 정한 조조는 주변의 여러 세력을 제압하고 실력을 길러 중원에 큰 거점을 만들었다. 그리하여 그의 주위에 유능한 참모가 모여들기 시작했다


 
조조는 여포(呂布), 원술 등 각지의 군웅들을 차례차례 평정해 나갔다. 서주의 여포를 물리치고 유비(劉備)를 익주로 몰아낸 조조는 그 이전부터 대립하고 있던 원소와 중원의 지배를 놓고 다툰다. 백마, 관도의 싸움에서 승리한 조조는 마침내 중원을 지배하고 원소가 죽은 후 그 자식들을 차례로 무찌르고 하북 지방을 차지하게 된다. 이제 그는 후한의 중심인물로서 궁전을 지배하게 된다. 인재들이 모이고 그들의 진언을 받아들여 정치에 큰 성공을 이룬다. 이어 그는 천하통일을 향해 나아갔다.


 
조조는 유표(劉表)의 형주를 노렸다. 유표가 죽고 후계자를 둘러싼 내분이 일어나자 조조는 형주를 침공하였다. 유언서 위조로 새 태수가 된 유종(劉琮)은 싸우지도 않고 조조에게 항복하였다. 조조는 유종을 청주자사로 봉하고 임지로 가는 그를 우금(于禁)에게 명해 죽였다. 형주를 손에 넣은 조조는 신야성의 유비를 습격하지만 유비는 유표의 장남 유기(劉琦)가 지키는 강하성으로 피신한다 


 
장강 이남 진출을 노린 조조는 형주 분할을 미끼로 손권에게 유비의 토벌을 요청한다. 조조는 원소로부터 빼앗은 병사에 형주의 항복한 군을 합해 83만의 대군을 이루었다. 조조는 이것을 100만 군대라 칭하고 오의 손권(孫權)을 위협하였다. 오는 이에 굴하지 않고 대항하였다. 오의 군세는 겨우 3, 동맹관계에 있는 유비의 군사를 합해도 4만에 이르지 못하였다. 조조는 안심하고 오를 칠 수 있다고 보았으나 당시의 조조군은 네 가지 약점이 있었다. 완전히 평정되지 못한 북국의 적대시, 마초(馬超)의 수도 공격 우려, 수전(水戰)의 미약함, 원소와의 오랜 전투로 인한 피로 등이었다. 인마(人馬)와 식량도 절대 부족했다. 게다가 적군 주유(周瑜)와 공명(孔明)의 계략이 너무 뛰어났다. 조조는 마침내 황개(黃蓋)의 ‘고육의 계’, 방통(龐統)의 ‘연환의 계’에 넘어가 대패하고 만다.


 
조조는 패기와 투지를 잃지 않고 허도로 퇴각하여 체제 확립에 힘썼다. 우선 숙적인 마초의 군사를 격퇴하고 위신을 되살렸다. 조조는 《삼국지》에 나오는 인물 가운데 가장 뛰어난 존재로 비단 전투에 능하였을 뿐 아니라 참모를 잘 쓰기로도 정평이 나 있다. 또한 학문에도 깊이가 있어 그의 《손자병법》 해설은 오늘날에도 탁월한 병법서로 남아 있다. 그 밖에 그는 시를 좋아하고 뛰어난 예술가를 아꼈다


 
조조의 예술적 능력을 높이 평가할 수 있는 이야기는 많지만 그중 전장으로 가는 도중 악기를 능숙하게 다루는 채염(蔡琰)과의 관계를 다룬 장면은 매우 감동적이다.


피리 부는 명랑한 소녀

중국의 서동관에서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풍성한 숲이 있다. 그 숲에 둘러싸여 있는 장원은 남전이라 부르는 지방의 유명한 토지로 채옹(蔡邕)의 영지다. 그는 그곳 영주인 동시에 교양인으로서 추앙받고 있었다. 한때는 한나라 조정에서 불러들여 높은 지위에도 있었다. 그러나 어리석은 황제를 둘러싸고 있는 사리사욕에 눈먼 환관들의 모함으로 마침내 장원으로 내쫓긴 것이다. 젊은 조조가 그런 그를 따르며 어느 날 물은 적이 있다


 
“영주님의 장원은 사방이 흉노족 등 적으로 둘러싸여 있는 데도 항상 평화로우니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


 
채옹은 웃으며 대답했다.


 
“어느 태수가 오든 예의를 지킨다네. 이민족에 대해서도 왕이건 관리건 친교를 맺으며 적개심을 내비치지 않지. 그리고 상대가 어려울 때는 기꺼이 도와주되 나 자신을 위해선 부탁을 하지 않네. 이 모든 것이 영민들과 채씨 일가가 살아남기 위해서이네. 대대로 장원의 영주들이 땅을 지켜온 방식대로 나도 그렇게 해오고 있네.


 
조조는 이 말에 감동을 받았다. 힘으로 상대를 누르려는 자신과는 생각 자체가 달랐던 것이다. 채옹에게는 15세 된 채염이라는 귀여운 딸이 있었다. 조조는 한때 그녀를 좋아했다


 
“조조님은 ‘치세의 능신, 난세의 간웅’이라는 평을 받았는데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난세인가요, 치세인가요”하고 채염이 조조를 만났을 때 장난기로 물은 적이 있다.


 
“난세에 가까운 치세라고 해두지.


 
이 답에 그녀는 다시 깜찍하게 대꾸했다


 
“그럼 맹덕 나리께서는 지금 간웅이 되어가고 있군요.


 
그러자 조조는 껄껄 웃었다. 이어 조촐한 연회가 벌어지자 그녀는 호가를 연주하였다.


 
“그건 이민족의 피리인가”하고 조조가 물었다


 
“흉노의 악사가 준 건데 음색이 매우 아름답습니다. 언젠가는 나도 곡을 만들어보고 싶습니다.


 
그녀의 눈은 선율처럼 반짝였다.


결혼식날 약탈당한 신부

 20세가 된 채염은 아버지의 권유로 한 성실한 호족의 젊은이 위중도(衛仲道)와 결혼하게 되었다. 혼례가 있는 날 축하하러 온 영민들을 밀어제치며 거친 패거리 수십 명이 무기를 들고 나타났다. 채옹이 급히 나와 물었다.


 
“무슨 일인지요. 보시다시피 오늘은 결혼식 날입니다.


 
말썽을 두려워한 채옹이 종이에 돈을 싸서 주자 그들은 그것을 세어보고 주머니에 넣었다.


 
“우리도 축하하러 왔소이다. 호가를 잘 분다는 그 아가씨나 좀 보여주시오.


 
주위에서 “영주님, 관리를 부르세요. 저들이 무슨 짓을 할지 모릅니다”하고 간했으나 채옹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자칫 일을 키울 수도 있소. 잘 달래서 보내야 하오.


 
아버지가 곤경에 처한 모습을 본 채염은 제 발로 나와 패거리에게 고개 숙여 절을 하였다.


 
“축하해 주러 오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음식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관에는 사람이 꽉 차 들어갈 수 없으니 정원에 음식을 차려 올리겠습니다.


 
“참 멋진 여자군. 이 동네 사나이와 결혼하기는 아깝지 않나? 우리 왕에게 바치면 큰 상을 받을 게야.


 
우두머리 남자가 신호를 보내자 부하들이 모두 달려들어 그녀를 납치해 사라졌다. 딸을 납치당한 채옹은 그 자리에서 기절하였다. 그 남자들은 산에 살며 말 장사를 하는 거친 흉노족이었다


 
결국 채염은 흉노족의 2인자인 좌현왕 앞으로 끌려갔다. 좌현왕이 그들의 두목에게 말했다.


 
“우리에게 알리지도 않고 멋대로 말 장사를 하다니, 전원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느냐.


 
두목은 넙죽 엎드려 채염을 바치며 선처를 구했다


 
“앞으로는 말 장사를 하지 않겠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이 한나라 여자는 좌현왕께 바치는 선물입니다. 부디 받아주십시오.


 
좌현왕은 놈들의 천한 태도에 화가 나 다 처형해 버렸다. 채염은 좌현왕의 측실이 돼 사랑을 받으며 두 아이를 낳았다. 흉노와 거친 생활을 하다 고향이 그리울 때면 호가를 불며 마음을 위로했다.


조조의 마음을 사로잡은 채염의 노래

 몇 년 후 조조가 있던 허도에서 한 노래가 유행했다. 한의 정승 조조는 누가 작곡한 노래인지 알고 싶었다.


 
“참으로 슬픈 노래입니다. 결혼식 날 납치당해 흉노 좌현왕의 측실이 된 채염의 곡이라고 합니다”하고 신하가 아뢰었다. 조조는 그녀가 대문호 채옹의 딸임을 알고 크게 놀랐다.


 
그 곡을 들을 적마다 조조는 그녀의 가련한 모습이 떠올랐다


 
그처럼 밝고 명랑하던 소녀가 이처럼 슬픈 곡을 작곡한 연유를 안 조조는 좌현왕에게 사자를 보내 채염을 천금에 사겠다고 하였다. 좌현왕이 놀라 그녀를 불러 물어보았다.


 
“어찌하여 한나라 정승을 알고 있소?


 
“조조 나리를 어릴 적 아버님 때문에 알게 되었습니다.


 
“하긴 당신의 아버님은 한나라의 대문호였으니 문인을 유독 존중하는 정승이 친교를 왜 아니 맺었겠소. 그런 정승께서 특별히 부탁하니 내 어찌 천년만년 그대를 잡아둘 수 있겠소.


 
채염이 말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자 좌현왕이 다시 말했다


 
“가시오. 돈은 받지 않겠소이다. 대신 아이들은 두고 가오. 정승께 안부나 잘 전해주오.


 
천하를 호령하는 조조가 원하는데 어찌 거절할 수 있으랴.


 
좌현왕은 돈은 받지 않고 정중하게 그녀를 돌려보냈다. 그 후 채염은 조조의 알선으로 동사(董祀)라는 관리와 결혼하였다. 둘 사이에 아들이 태어나자 그녀의 얼굴에도 이전의 웃는 모습이 되살아났다

 
채옹이 남긴 마지막 수수께끼

동탁이 죽은 후 옥사한 채옹의 뒤를 이어 채염은 장원을 잘 가꾸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일 보러 나간 사이 원정 도중의 조조가 방문하였다. 그녀는 황급히 조조를 맞아들였다.


 
“내 진작 그대가 처한 일을 알았더라면 더 빨리 손을 썼을 터인데 미안하오.


 
채염은 수많은 전쟁을 치르고 난관을 헤치며 오늘의 위치에 오른 한 영웅의 모습에서 그 옛날 고향의 장원에서 만난, 젊은 시절의 수려했던 조조의 모습을 떠올리고 아련한 아픔에 휩싸였다. 그때 조조는 자신의 철없는 응석을 귀엽다는 듯 받아주곤 했다. 그런 시절을 기억하고 있는지 조조는 채염을 애틋한 시선으로 바라보고는 이어 방 안을 둘러보았다. 그때 이상한 것이 눈에 띄어 조조가 물었다.

 

 “저것이 무엇이오.


 
“조아(曹娥)의 비입니다. 후한 4대 소제 때 조한이라는 무용을 잘하는 무당이 있었습니다. 어느 해 5 5일에 술에 취해 춤을 추다 배에서 떨어져 죽었습니다. 당시 그의 딸 조아는 열네 살이었는데 17일간 울다가 자신도 물에 몸을던져, 며칠 후 아버지의 시체를 등에 이고 수면으로 떠올랐습니다. 현령의 도상이 약관 20세의 수재 한단순(邯鄲淳)을 시켜 그녀의 효행을 비문에 남기게 하였습니다. 그 비는 무덤 옆에 세워졌는데 아버님 채옹이 빛이 바랜 글자를 알아볼 수 없어 손으로 더듬어 읽고는 비 뒤에 8개의 문자를 크게 썼습니다. 그것이 이 척본입니다.


 
‘황견유부 외손제구(黃絹幼婦 外孫). 이것이 무슨 뜻일까.


 
아무도 그 뜻을 풀지 못할 때 양수(楊脩)가 나서 조조도 같이 생각하였다.


 
“이것은 은어로군. 나는 풀었네.


 
조조가 8개의 문자를 4로 나누어 황견은 색이 있는 포이므로 절()이고 유부는 소녀의 뜻이라 묘()라고 풀어내자, 양수는 외손은 딸의 아이이므로 호()이고 제구는 신맛이 나는 음식을 담은 그릇이라 사()라고 풀었다. 이에 ‘절묘호사(絶妙好辭·아주 묘하고 좋은 말)’가 되니 모두 조조와 양수의 기지를 찬양하였다


 
조조가 채염에게 호가 한 곡을 청하자 그녀는 최근에 작곡한 조아의 곡을 불었다. 조조는 그 애절한 음률 속에서 그녀의 과거 비참함과 두고 온 자식들에 대한 그리운 마음을 엿볼 수 있었다. 조조는 그녀의 집을 나와 전쟁터로 갔고 그 후 두 사람은 다시 만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