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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상 2022-08/ 08.01(월) 반 토막 난 서울대 도서관 대출 - 08.31(수) ‘대동강의 기적

상림은내고향 2022. 9. 1. 16:05

만물상 2022-08/ 조선일보

08.01(월)  반 토막 난 서울대 도서관 대출

 대학 도서관의 대출 목록을 보면 학생들 독서 실태를 엿볼 수 있다. 소설가 한강의 작품집 ‘채식주의자’가 2018년과 2019년 연거푸 서울대 도서관 대출 1위에 올랐을 때 “학생들이 책을 별로 안 읽는다”고 생각했다. 책은 2007년 발표됐는데 2016년 맨부커상을 받고 뒤늦게 베스트셀러가 됐다. 매일 생업으로 바쁜 일반인이 책까지 신경 쓰긴 쉽지 않다. 하지만 좋은 책을 누구보다 먼저 찾아 읽어야 할 대학생들조차 이 책을 주목하지 않았다는 증거 아닌가.

 

 

▶가끔 발표되는 각 대학 도서관 대출 통계는 부끄러운 수준이다. 서울대라고 다르지 않다. 엊그제 나온 서울대 도서관 통계를 보니 학부생 1인당 평균 대출량이 2018년 9.15권, 2019년 8.37권 등 한 해 10권이 채 안 됐다. 그마저 2020년부턴 4권으로 반 토막 났다. 연간 대출이 90~100권 넘나드는 하버드나 옥스퍼드에 비하면 얼굴을 못 들 정도다. 빌려간 책 1위도 의대 교재인 안과학(眼科學)이었다.

 

▶미국 공립 고교 독서 목록은 권장 도서라고 하지 않고 ‘필독서’라 한다. 수업에 읽고 들어오지 않으면 토론에 낄 수 없고 과제물 작성도 불가능하다. 대학도 다르지 않다. ‘그레이트 북스’라는 교육 과정을 운용하는 세인트 존스대학은 4년간 100권 넘는 고전을 읽어야 졸업장을 준다.

 

▶비슷한 사례가 우리도 있었다. 10여 년 전 서울대에 그리스 고전 읽기 교양 강좌가 개설됐다. 학기 중 고전 15편을 읽고 작품마다 에세이를 제출하는 강행군이라 ‘기피 강좌’ 후보였다. 그런데 “교양 쌓이고 작문 실력도 는다”는 평판이 돌며 30명 정도로 시작한 강좌에 200명 가까이 몰려들었다. 2014년엔 서울대 도서관 대출 베스트 10 가운데 4권이 이 강좌의 독서 리스트였다.

 

▶대학 도서관 대출 순위나 횟수가 학생들의 실제 독서량을 정확히 반영하지 못한다는 반론도 있다. 서울대 고전 강좌만 해도 지금은 대부분 학생이 문서 파일 형태로 책을 PC에 넣어 읽는다. 대학 재학생 1인당 종이 책 대출 권수가 2011년 8.3권에서 지난해 2.3권으로 급락하는 사이 전자 문서 이용 건수는 같은 기간 130건에서 277건으로 늘었다는 통계도 있다. 코로나 이후 비대면 수업으로 학교 갈 일이 줄면서 신입생들은 도서관 출입도 대출도 생소하게 여긴다. 아무리 그래도 대학생 40%가 책 한 권도 대출하지 않고 대학 문을 나서는 현실은 바뀌어야 한다. 입사 시험 자기소개서에 ‘내가 읽은 책’ 목록이라도 내게 해야 할 판이다.

김태훈 논설위원

 
 

08.02  ‘脫공무원’ MZ세대

지난해 일본 행정고시 경쟁률이 역대 최저(7.8대1)를 기록했다. 합격자 중 도쿄대 비율(14%)은 10년 새 반 토막이 났다. 홋카이도에선 지방 공무원 시험 합격자 중 60% 이상이 임용을 포기하는 통에 채용 예정 인원의 3배수를 합격시키는 궁여지책을 쓰고 있다. 우수 청년들의 공무원 기피 현상에 대해 일본에선 잦은 야근, 무차별 전근, 상명하복 등 MZ세대가 극도로 혐오하는 조직 문화 탓이라고 분석한다.

 

▲국가공무원 7급 공개경쟁채용 제1차 시험이 치러진 지난달 23일 서울 강남구 한 시험장에서 수험생들이 시험 시작을 기다리고 있다./뉴시스

 

▶우리나라에서도 100대1이라던 9급 공무원 시험 경쟁률이 올해 29대1로 떨어졌다. 7급 공무원 경쟁률(42.7대1)도 43년 만의 최저를 기록했다. 아직도 높지만 언제 한 자릿수 경쟁률이 될 지 모른다. 신참 공무원들이 조기 퇴직하는 사례도 급증하고 있다. 지난해 사표를 낸 5년 차 이하 공무원이 1만명을 넘어섰다. 4년 전의 2배다. 정년이 보장되는 ‘신의 직장’을 왜 포기할까.

 

▶공무원 380명, 대기업 회사원 420명을 대상으로 조직 만족도 조사를 했다. ‘일과 가정의 양립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에 회사원 10명 중 6명이 ‘가능하다’고 답한 반면 공무원은 4명만 ‘그렇다’고 답했다. ‘말이 통하지 않는 상사가 있느냐’는 질문에 공무원 10명 중 4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직을 생각한 적이 있느냐’는 질문엔 공무원 37%가 ‘그렇다’고 답해 회사원(30%)보다 많았다. 공무원들은 월급, 꼰대 문화, 민원인 스트레스, 잦은 야근 등을 불만 요소로 꼽고 있다.

 

 

▶공무원은 한때 시대를 선도한 신흥 직업이었다. 19세기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효율적 국가 운영을 위해 전문화, 분업화, 법치를 근간으로 한 관료제를 처음 선보였다. 우리는 독일 관료제를 도입한 일본 영향을 받아 유럽식 직업 공무원 제도를 갖게 됐다. 이 제도가 육성한 전문 관료들이 산업화, 정보화를 이끌며 국가 발전을 선도했다.

 

▶30년 전 싱가포르 리콴유 총리는 “민간보다 나은 대우로 최고 인재를 뽑아 국가 경영을 맡겨야 한다”면서 독창적 공무원 보수 체계를 만들었다. 법조계, 금융, 회계 등 전문직 여섯 업종에서 8명씩 최고 소득자를 선별한 뒤, 이들을 소득 순으로 줄 세우고 그 중앙값의 3분의 2 수준을 고위 공직자의 연봉 기준선으로 삼았다. 그 결과 싱가포르 총리 연봉은 미국 대통령보다 4배 많고, 장관 연봉은 5억~8억원에 이른다. 앞으로도 엘리트 청년들이 공직을 맡아야 한다. 그러려면 공무원 조직 문화와 보상 시스템부터 수술해야 한다.

김홍수 논설위원

 

08.03  ‘非친족 가족’ 100만 시대

몇 해 전 외신에 소개된 미국 가족 사연은 가족의 변화를 실감케 한다. 두 백인 남자가 흑인 자녀 8명을 입양했다. 아빠도 엄마도 아닌 보호자와 피부색 다른 자녀가 만나 한 지붕 아래 산다. 우리도 비슷한 사례가 있다. 경기도 한 신도시에 일곱 자녀를 둔 부부가 산다. 두 아이만 친자식이고 다섯은 경제적 어려움 등으로 부모와 살 수 없는 게 딱해 품에 안은 아이들이다. 경기도의 가족이나 미국 가족처럼 혈연을 넘어선 가족을 ‘공동체 가족’이라 한다.

 

 

▶공동체 가족 말고도 다양한 가족이 생겨나고 있다. 출신 국적이 다른 다문화 가족, 결혼 않고 사는 동거 가족, 재혼 부부와 그들의 성(姓)이 다른 자녀로 구성된 패치워크(조각보) 가족 등이다. 맞벌이 부부가 자녀를 낳지 않고(Dink·Double Income No Kids) 애완동물(pet)을 키우는 ‘딩크펫’ 가족, 사이버 공간에서 취미가 같은 이들끼리 만나 친밀감을 쌓는 사이버 가족도 있다.

 

▶이로 인해 전에 없던 갈등이 빚어지거나 새로운 서비스가 등장하기도 한다. 유명 재즈 축제인 자라섬 페스티벌은 올해부터 반려동물 동반 좌석제를 도입했다. 외국에선 사이버 공간에서 만난 이성과 친밀감을 쌓는 배우자에게 “인터넷에서 피우는 바람도 외도”라며 다투는 신종 부부 싸움도 벌어진다. 그사이 젊은 남녀가 결혼해 자녀를 낳아 키우는 전통적 형태의 가족은 쪼그라들고 있다. 미국에서 부모와 그들의 혈연 자녀로 이루어진 전통 가족은 다섯 중 하나에 불과하다. 한국 사정도 다르지 않다. 2030년쯤엔 33%까지 줄어들 전망이다.

 

▶혈연 아닌 사람으로 구성된 5인 이하 가구를 뜻하는 ‘비(非)친족 가구’가 지난해 처음으로 100만명을 넘어섰다고 통계청이 발표했다. 47만 가구로 전체의 2%다. 2015년엔 21만 가구였는데 그새 두 배 넘게 뛰었다. 배우자나 부모·자녀가 싫어도 피붙이란 이유로 참고 살던 시대는 가고 “내가 행복해질 수 있는 사람과 살겠다”는 인식이 확산한 결과다.

 

▶이런 신(新)가족 중엔 평소 얼굴 못 보고 사는 ‘원(遠)거리 가족’도 있다. 이들은 근무지·학교·주거지가 달라 주말부부로 지니며 자녀는 방학 때나 만난다. 이런 가족이 유지되는 걸 보면 함께 살아야만 가족인 것도 아니다.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재임 시절 ‘아버지의 날’을 맞아 두 딸에게 했던 다짐을 공개했다. “아버지로서 내 의무는 가족을 조건 없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다. 가족 형태가 어떻게 바뀌어도 ‘사랑’이란 가족의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다.

김태훈 논설위원

 

08.04  낸시 펠로시

아시아 밖에서 가장 큰 차이나타운이 있는 곳은 미국 샌프란시스코다. 청나라 말기 가난한 중국인들이 ‘미국에 가면 금으로 된 산이 있는데 빗자루로 쓸어 담기만 하면 된다’는 말을 믿고 배를 타 도착한 곳이다. 중국에선 지금도 샌프란시스코를 ‘구금산(舊金山)’이라고 부른다. 샌프란시스코 인구 약 20%가 중국계다. 이곳을 지역구로 둔 미 연방하원 의원이 낸시 펠로시 의장이다.

 

 

 ▶펠로시는 원래 동부 메릴랜드주 볼티모어 출신이다. 1940년 이탈리아 이민자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 토머스 달레산드로는 볼티모어 시장과 연방하원 의원을 지냈다. 어려서부터 부친의 선거운동을 도우면서 자랐다. 1963년 폴 펠로시와 결혼해 1남 4녀를 키우다 남편의 사업 때문에 1977년 샌프란시스코로 이사했다. 여기서도 민주당원으로 활발히 활동하다 1987년 하원 의원 보궐선거에서 처음 당선됐고 이후 35년간 내리 18선을 했다.

 

▶지역구에 중국계가 많아서 그런지 유독 중국 민주화와 인권에 관심이 많다. 천안문 사태 2년 뒤인 1991년 중국을 방문해 사전 허가 없이 몰래 천안문 광장으로 달려가 ‘중국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에게’라고 적은 플래카드를 펼쳐 보였다가 중국 공안과 추격전을 벌인 일화는 유명하다. 펠로시 의장은 훗날 “나는 도망쳐 뛰기 시작했다. 동료 의원들은 약간 맞기도 했다. 기자들은 구금되기도 했다”고 했다. 1997년 장쩌민 중국 주석이 워싱턴을 방문했을 때는 폭군이라고 부르며 항의 시위를 했고, 2008년 티베트 독립운동의 구심점 달라이 라마와 만났다. 베이징 올림픽 외교적 보이콧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의 대만 방문이 세계적 이목을 끌었다. 전 세계 292만명이 그가 탄 비행기 항적을 추적했다. 미국에서도 대만 방문 반대 여론이 적지 않았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는 “완전히 무모하고 위험하며 무책임한 처사”라고 했다. 중국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쟁에 군사 지원을 하지 않도록 외교적 노력을 기울이는 시점에 중국을 자극하는 것이 적절치 않다는 것이다. 정치 전문 매체 폴리티코는 “백악관이 좋아하든 싫어하든 펠로시는 세계 무대에서 자신의 경력을 마무리하고 싶어 한다”고 했다.

 

▶우리 젊은 층 일부는 그의 대만 방문과, 2020년 트럼프 대통령 바로 뒤에서 트럼프 연설문을 찢는 사진 등을 올리며 ‘직진녀’라고 부르기도 한다. 펠로시 의장은 김정은을 ‘깡패’라고 지칭하며 북한 인권에도 관심을 가져왔다. 그가 북한을 향해 어떤 메시지를 내놓을지도 관심이다.

황대진 기자

 

08.05  ‘문샷(Moonshot)’

1954년 케이 밸러드가 발표한 재즈곡 ‘다시 말해서(In other words)’는 당시에는 인기를 끌지 못했다. 하지만 1964년 프랭크 시나트라가 첫 가사 ‘나를 달로 데려가주오(Fly me to the moon)’로 제목을 바꿔 앨범에 넣으면서 불멸의 히트곡이 됐다. 인간을 달에 보내겠다는 케네디 대통령의 아폴로 계획으로 미국 전역이 흥분해 있을 때였다. 1969년 아폴로 11호 우주인들이 달에 착륙할 때 달 궤도를 돌던 사령선에 이 노래가 울려 퍼졌다.

 

 다누리를 탑재한 미국 스페이스X의 팰콘9이 미우주군기지 40번 발사장에서 기립하고 있다./뉴스1

 

▶아동문학가 윤석중은 아폴로 11호 달 착륙을 본 이듬해 동요 ‘앞으로’를 썼다. ‘아폴로’를 ‘앞으로’로 표현한 언어유희적 제목의 이 곡에는 ‘온 세상 어린이가/ 하하하하 웃으면/ 그 소리 들리겠네/ 달나라까지’라는 소절이 나온다. 달 탐사가 미국인들의 자긍심을 높여준 것은 물론, 지구 반대편에 있는 어린이들의 꿈을 키워주는 역할까지 한 것이다.

 

▶'80일간의 세계 일주’를 쓴 쥘 베른은 1865년 달에 가는 구체적인 방법을 담은 소설 ‘지구에서 달까지’를 발표했다. 베른은 과학 지식을 총동원해 지구의 자전 속도를 최대한 이용하는 방법, 포탄을 대포로 쏘아 올려 달로 보낼 수 있는 궤도 등을 묘사했다. 미 나사(NASA) 발사장인 케네디 스페이스 센터의 위치는 베른의 소설에서 대포가 발사된 곳과 놀랄 만큼 비슷하다. 로켓의 아버지로 불리는 러시아 과학자 치올콥스키는 30년 뒤 이 소설의 내용을 검증하면서 이론을 확립했다.

 

 

▶아폴로 계획은 당시 기술로는 불가능한 도전이었다. 하지만 막대한 예산과 국민적 성원 덕분에 10년도 되지 않아 성공을 거뒀다. 이후 혁신적인 기술 개발을 문샷(moonshot)이라고 부른다. 미국·영국·일본 같은 나라는 물론 기업들도 앞다퉈 문샷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인터넷 기업 구글은 문샷을 전담하는 비밀 조직 ‘구글X’를 만들어 자율주행차 상용화를 선도했고 인간 수명을 500세까지 늘리는 연구도 진행하고 있다.

 

▶53년 전 아폴로 11호가 발사됐던 미국 케이프커내버럴 공군 기지에서 오늘 한국의 첫 달탐사선 다누리가 발사된다. 당장은 스페이스X의 팰컨9 로켓을 이용하지만 8년 뒤에는 발사체부터 탐사선·착륙선·로버까지 모두 국산화하는 계획도 진행되고 있다. 선진국들이 이미 오래전 간 길을 뒤늦게 간다고 폄훼하면 안 된다. 스페이스X가 설립 20년 만에 글로벌 시장을 주도하는 우주 기업이 된 것처럼 아직 기회는 충분하다. 우주를 무대로 한 대항해 시대는 이제 막 시작됐을 뿐이다.

박건형 논설위원

 

08.06(토)  피라미드 위를 나는 한국 전투기

이집트 기자(Giza)에 있는 3대 피라미드는 4500년 전 고(古)왕국 시기 파라오였던 쿠푸와 그의 아들 카프레, 손자 멘카우레가 만들었다. 가장 큰 쿠푸 피라미드는 대(大)피라미드로 부른다. 무게 2·5t 사각돌 300만개를 146m 높이로 쌓고 석회암으로 외벽을 마감했으며 꼭대기를 황금으로 장식했다. 기하학과 건축 지식을 총동원한 당시 문명의 총화이자 건축 미학의 결정체였다. 움집에서 살며 고인돌이나 쌓던 외부인들 눈엔 외계의 것으로 비쳤을 것이다. 오늘날에도 이 경이로운 건축물을 외계인 작품이라고 상상하는 영화가 만들어진다.

 

 

▶이집트가 고왕국 시대에만 번성한 것은 아니다. 맘루크 왕조 전성기인 14세기 카이로는 동서 무역 중개로 풍요를 누리던 인구 50만 대도시였다. 당시 런던 인구가 5만이었다. 도시를 방문하는 외지인에게 무료로 숙식을 제공할 정도로 돈이 넘쳤다. 지금도 많은 이집트인이 찬란했던 맘루크 시대 이집트의 번영을 잊지 못한다.

 

▶많은 정복자가 그런 이집트를 발 아래 둠으로써 위대함을 증명하려 했다. 페르시아제국과 알렉산더 대왕, 로마제국 초대 황제 옥타비아누스가 이집트를 정복하며 지중해 세계 지배자가 됐다. 오스만이 이슬람 세계의 지배자가 된 것도 이집트를 정복한 뒤 였다. 나폴레옹도 유럽의 맹주가 되기 전 이집트 원정부터 나섰다.

 

▶이집트가 신생 대한민국의 근대화 본보기였던 적이 있다. 1952년 이집트 청년 장교들이 나세르를 중심으로 자유장교단을 결성해 군주제를 폐지하는 군사혁명을 단행했다. 농업 국가에서 벗어나 서방처럼 잘살자며 토지 개혁과 산업화를 추진했다. 훗날 독재와 이슬람 근본주의가 충돌하며 빛이 바랬지만 당시엔 빈곤율이 떨어지고 빈부 격차도 개선되는 성과를 보였다. 김종필 전 총리는 “이집트 혁명이 5·16의 모델이었다”고 술회했다.

▶FA-50 전투기와 같은 비행기로 구성된 한국 공군 블랙이글 특수비행팀이 그제 이집트 피라미드 상공에서 에어쇼를 펼쳤다. 6·25 남침 때 전투기 한 대 없었던 약소국이 만든 초음속 전투기가 고대 인류 문명의 최첨단 상징물 위를 나는 장면을 보며 “가슴 벅차다”는 반응이 나오고 있다. 이집트가 블랙이글을 초청해 피라미드 위를 날게 한 것은 FA-50 전투기를 대량 구매하려는 뜻이라고 한다. 이집트 원정에 나선 나폴레옹은 “이 피라미드 위에서 4000년 역사가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다”고 했다. 이틀 전 바로 그 피라미드 위에서 4500년의 역사가 망국과 가난을 딛고 일어선 한국이란 나라를 지켜보았을 것이다.

김태훈 논설위원

 

08.08(월)  사라진 택시

야근 후 카카오택시 호출을 했는데 1시간 넘게 ‘배차 실패’ 메시지가 떴다. 버스도, 지하철도 끊긴 시간대라 집에 갈 방법이 없어 난감했다. 경기도 김포에 사는 한 지인은 지하철 막차를 놓쳐 강남에서 10만원을 내고 카카오블랙을 탔다고 했다. 배우자가 “다음엔 제발 사무실서 자라”고 했단다. 야근 끝나고 1시간 반 동안 택시 부르다 포기하고 ‘따릉이’ 자전거를 타고 한강 다리 건너 집에 갔다는 친구도 있다.

 

 

 ▶'사위를 고르려면 택시를 잘 잡는 사람을 택하라. 그런 청년이 현대의 경쟁 사회에서 두각을 나타낼 수 있다.’ 1978년 한 신문 기사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1970년대 극심한 택시난을 보여준다. 그 시절 합승과 불법 ‘따따블(4배 요금)’이 횡행했다. 택시난은 1988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택시가 늘어나면서 다소 해소됐다. 요즘 서울의 심야 택시 대란은 택시 잡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다는 1970년대와 맞먹는다.

 

1970년 버스요금이 10원일 때 택시 기본요금은 60원이었다. 버스요금 오를 때 택시요금은 그 절반만 올라 얼마 전까지는 학원 가는 초등학생이나 중학생도 서넛 모여 버스 대신 택시 타고 갔다. 서울은 택시가 잘 잡히고 저렴한 도시라는 말이 최근 쏙 들어갔다. 밤 시간에 12㎞ 거리를 카카오블랙을 타고 갔더니 5만4000원이 나왔다. 평소 1만4000원 택시 요금의 4배였다. 도쿄 택시로 가면 4700엔(약 4만6000원), 런던 택시론 33파운드(약 5만2000원) 나오는 거리다. 택시 비싸기로 악명 높은 일본이나 영국보다 한국 택시 값이 비싸진 셈이다.

 

▶‘옐로 캡’은 뉴욕을 상징하는 택시다. 차량 공유 서비스 우버가 저렴한 요금을 무기로 택시 승객을 빼앗아 가면서 크게 타격을 입었다. 비싸게 산 택시 면허 가격이 폭락했다며 극단적 선택을 한 택시 기사도 여럿이었다. 그런데 반전이 일어났다. 얼마 전 미국 CBS 방송사가 조사했더니 뉴욕 택시 요금이 우버보다 35~83% 저렴해졌다. 우버가 남발하던 할인 이벤트도 끝나고, 코로나 확산으로 우버 기사를 그만두는 사람이 늘면서 우버 요금이 올라갔기 때문이다. 뉴요커들은 “요즘 비싸서 우버 못 탄다”고 한다. 규제가 아닌 가격이 떠났던 택시 승객을 돌아오게 한 셈이다.

 

▶한국은 상황이 나아질 조짐이 별로 안 보인다. 택시 잡기 가장 어려운 시간대에만 승차 공유나 탄력 요금제를 허용하는 식의 융통성 있는 해법도 생각해 봄직하지만 ‘총대’ 메는 책임자가 없는 모양이다. 시민만 택시 지옥에 빠져 고생이다.

김신영 논설위원

 

08.09  노 룩(no-look) 증후군

▲박용진 민주당 당대표 후보가 7일 유세에서 정견 발표를 마치 뒤 이재명 후보와 악수하는 장면./뉴스1

 

커뮤니케이션 방법론에서 ‘메라비언 법칙’은 비언어적 표현의 중요성을 설명한다. 누군가에 대한 호불호를 결정할 때 말의 내용이 차지하는 비중은 7%에 불과하다. 반면 보디랭귀지 55%, 목소리 38% 등 본질보다 태도가 훨씬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비중이 가장 큰 보디랭귀지에서 몸 동작보다 중요한 요소가 눈길, 즉 시선이다. 시선은 신념, 확신, 불신, 불안, 오만 등 자신의 감정을 나타내 상대의 감정에 직접 파고들기 때문이다.

 

▶시선 처리법이 취업준비생의 중요한 면접 노하우인 것도 이 때문이다. 10년 전 한 대기업이 ‘입사 생생 가이드북’을 냈다. “아이 콘택트가 매우 중요한데 눈을 직접 바라보는 게 부담스럽다면 면접관의 미간을 보라”고 권유했다. 모범 답안은 면접관을 고르게 바라보는 것이다. 가끔 면접관의 약간 뒤에 시선을 두는 것도 괜찮다고 한다. 눈을 깔거나 먼 산을 바라보는 ‘시선 회피’가 최악으로 꼽힌다.

 

 

▶아무리 작은 규모라도 강의를 해보면 시선의 중요성을 바로 안다. 다수의 마음을 얻어야 하는 정치인은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한국에선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정치인이 많다. ‘노 룩(no-look)’은 이쪽을 보면서 저쪽으로 패스한다는 농구 용어다. 몇 년 전 이 ‘노 룩 패스’가 한국 정치권에서 문제가 됐다. 정치인이 공항에서 눈길도 주지 않고 자신의 비서에게 여행 가방을 굴려 보내는 장면이 노출된 때문이다.

 

▶시선 회피는 심리 문제의 일종이다. 상대를 똑바로 보지 못하는 정시(正視) 공포, 남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해 안절부절 못하는 횡시(橫視) 공포 등으로 나타난다. 심하면 대인 공포증이 되고 더 심해지면 공황 장애로 악화된다. 그런데 한국 정치인에게서 나타나는 시선 회피 증상은 이런 일반적 증상과 반대가 아닌가 싶다. 타인을 증오하거나 무시하기 때문에 상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 ‘시선 무시’ 증후군이다. ‘안하무인(眼下無人)’ 증후군이란 말도 어울리는 듯하다.

 

▶이번엔 야당 당권 경쟁에 나선 유력 정치인의 ‘노 룩 악수’가 입길에 올랐다. 보통 ‘노 룩 악수’는 이 사람과 악수하면서 눈은 다른 사람을 보는 경우였다. 그런데 이번엔 손은 경쟁 후보의 손을 잡고 있는데 눈길은 자신의 스마트폰에 가 있었다. 좀 더 심한 ‘노 룩’이다. 일부에선 평소에 자신과 경쟁하는 사람에 대해 그렇게 감정을 드러냈다는 얘기들이 나왔다. 눈은 뇌에 가장 솔직하게 반응하는 기관이라고 한다. 당내 압도적 지지가 ‘노 룩’의 오만을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선우정 논설위원

 

08.10  구멍 난 하늘

▲9일 오전 서울 여의도 63스퀘어에서 바라본 한강. 집중호우로 불어난 흙탕물이 제방 안쪽을 가득 메웠다. /뉴스1

 

엄청난 비가 내렸다. 비는 주로 한강 유역에 내렸는데, 9일 오후 5시까지 이틀간 서울의 누적 강우량이 453㎜였다. 1907년 기상 관측 시작 이래 115년 만의 최대 폭우였다. 한강 유역 전체 면적(3만5770㎢)에 고르게 300㎜씩 내렸다고 치면, 강우 총량은 107억t에 이른다. 국내 최대인 소양강댐 저수량(29억t)의 3.7배에 달하는 비가 한꺼번에 쏟아졌다. 하늘에 그런 ‘구름의 호수’가 있다는 것도 경이롭고, 한강이 그런 폭우를 견디고 있는 것도 놀랍다.

 

▶9일 아침 기준 서울과 경기도 일대, 강원 일부 지역에 호우 경보가 발령됐다. 같은 시각 부산·경남은 폭염 주의보가 내려져 있었다. 부산일보의 9일 자 1면 톱기사 제목은 ‘이런 무더위 난생처음…11일째 잠 못 드는 부산’이었다. 대구, 제주에도 폭염 경보가 내려져 있었다. 울릉도·독도는 강풍 주의보, 동해 먼바다엔 풍랑 주의보가 내려졌다. 좁은 땅덩어리에 다채로운 기상 상황이 펼쳐졌다.

 

 

▶전국 댐 34곳을 관장하는 기관이 수자원공사다. 수도권에 폭우가 쏟아지던 8일 수자원공사는 전남 순천 주암댐에서 ‘전국 가뭄 대책 점검 회의’를 열고 있었다. 댐 용수 비축과 댐 간 연계 운영 대책을 논의했다고 한다. 수도권과 남쪽 지방 날씨 사정은 그만큼 판이했다. 섬진강댐은 저수량이 예년 대비 55%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번 폭우는 야행성이다. 주로 저녁부터 새벽 사이 집중적으로 쏟아졌다. 기상 전문가들 설명으론 ‘하층 제트’ 탓이라고 한다. 원래의 제트기류는 지상 9~12㎞에서 부는 강력한 서풍이다. 하층 제트는 고도 3㎞ 안팎에서 분다. 여름엔 북태평양 고기압이 한반도 상공에서 시계 방향으로 돌면서 남쪽에서 뜨겁고 습한 공기를 운반해온다. 낮엔 지면 부근 공기가 데워지면서 상승해 하층 제트의 진로를 방해하지만, 밤엔 지면이 차가워지면서 공기가 가라앉아 하층 제트가 방해 없이 수증기를 다량 공급한다는 것이다.

 

▶강물이 바싹 말랐을 때와 가득 찼을 때의 유량비(比)를 하상계수라고 한다. 그 수치가 유럽의 라인강, 센강은 10~30배인데 한강은 390배나 된다. 여름에 비가 집중적으로 오는 데다 순식간에 강으로 몰려 바다로 흘러 나가는 지형 탓이다. 그래서 댐을 짓고 보를 운영해 사계절 수위가 큰 차이 없게 관리해야 한다. 우리처럼 집중호우가 쏟아지는 나라에선 도시의 배수와 강물의 홍수·가뭄 조절이 국가의 기본 책무다. 폭우가 그걸 다시 깨치게 했다.

한삼희 선임 논설위원

 

08.11  반지하 집 소녀의 마지막 문자

소설가 하성란의 단편 ‘카레 온 더 보더’는 반지하에 사는 사람들 이야기다. ‘방에는 해가 들지 않았다.(중략) 지하방은 지상에서 고작 열 계단 아래였다. 그런데도 그녀가 상상할 수 없는 어둠이 펼쳐졌다.’ 2020년 기준 전국 32만 가구가 지하나 반지하에 산다. 90%가 수도권에 몰려 있고, 서울 가구 중엔 백에 여섯이 반지하다. 그곳에 깃든 어둠을 볕 좋은 집에 사는 이들은 상상하기 어렵다고 소설은 쓴다. 소설 주인공은 집안 가득한 곰팡내를 지우기 위해 카레를 끓인다. 누가 냄새 없애려 카레를 끓인다고 상상하겠나.

 

 

 ▶반지하·옥탑방·고시원을 합해 ‘지옥고’라 한다. 한국의 열악한 주거 환경을 상징하는 어휘다. 그중에도 반지하는 최악으로 꼽힌다. 영화 ‘기생충’에 나오는 기택네 반지하의 벽지는 곰팡이와 물때로 얼룩져 있다. 밖에서 안이 들여다보이고 도로의 매연과 소음, 노상 방뇨 악취가 들어오기 때문에 창문은 닫아 둔다. 습하고 환기가 안 되니 벌레도 꼬인다. 요즘은 반지하라도 깨끗한 집이 많다. 하지만 본질적인 열악함은 피하기 어렵다.

 

▶반지하살이 최악의 고역은 침수 피해다. 계단을 타고 내려와 집안을 물바다로 만든다. 화장실에선 오수가 역류한다. ‘기생충’의 기택네 식구들은 소독차가 동네에 나타나면 창문을 닫지 않고 활짝 연다. 해충에 시달리느니 잠시 소독 가스 참기를 택한 것이다. 그렇게 버텼지만 홍수로 물이 목까지 들어차자 세간도 건지지 못하고 탈출한다. 외신은 이번 물난리를 보도하며 ‘banjiha’(반지하)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naeronambul(내로남불)에 이어 씁쓸한 한국 단어가 하나가 더해졌다.

 

▶8일 밤 집중호우가 서울 신림동 반지하 주택을 덮쳐 40대 엄마와 초등학교 6학년 딸, 장애를 앓던 엄마의 언니가 목숨을 잃었다. 사고 4시간여 전, 병원에 입원한 할머니에게 보낸 아이의 문자가 알려지며 많은 이가 눈물을 쏟았다. ‘할미 병원에서 산책이라두 하시면서 밥도 드시고 건강 챙기시구요. 기도도 많이 했으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편안하게 계셔요.’

 

▶기도한다는 건, 꿈이 있다는 뜻이다. 아이는 모아 쥔 두 손으로 할머니의 건강한 귀가를 기도했다. 장차 훌륭한 어른으로 자라는 미래도 꿈꿨을 것이다. 엄마도 한 달 전 언니 침대와 아이 책상을 새로 장만했다. 가족의 행복한 앞날을 소망했다는 뜻이다. 그날 불행을 당한 이들이 있던 자리가 내 자리였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꿈을 피우지 못하고 시든 이 가족의 비극이 더 반복되지 않기를 기도한다.

김태훈 논설위원

 

08.12  猛犬

며칠 전 아내와 산책하다 시커먼 개가 맞은편에서 오는 걸 보고 기겁했다. 흑표와 마주 선 느낌이었다. 목줄을 했는데도 위협적이었다. 인터넷을 뒤져보니 카네코르소라는 맹견이었다. 무는 힘이 엄청나다고 소개돼 있다. 이로 무는 힘을 psi(제곱인치당 파운드)로 표시한다. 사람의 무는 힘은 약 150psi다. 맹견의 대명사인 도사견이 550psi인데 카네코르소는 700psi다. 물리면 뼈가 으스러지고 죽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런 개가 입마개도 하지 않고 돌아다닌다.

 

 

 ▶맹견일수록 주인에 대한 충성심이 강하고 주인 곁에 다른 사람이 다가가는 것을 경계한다. 주인 입장에선 맹수나 다름없는 개가 내겐 순한 양처럼 구니 좋아하는 것을 넘어 의지하는 감정까지 생긴다고 한다. 일부는 그런 맹견의 목줄을 당기며 통제하는 데서 자기만족을 느낀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그런 사람이야말로 맹견을 키울 자격이 없다고 지적한다. 위험한 개를 과시용으로 달고 다니지 말라는 뜻이다.

 

▶애견 인구가 늘면서 어디를 가든 개가 넘쳐나고 개 물림 사고도 빈발한다. 2016~2020년까지 총 1만1152명이 개 물림 사고로 병원에 실려갔다. 해마다 2000여 건, 하루 6~7명꼴이다. 그런데도 많은 개 주인이 “우리 개는 안 문다”며 목줄조차 하지 않는다. 이러니 인터넷에 맹견 퇴치법 게시글이 뜨고, ‘우리 개는 안 물어요. 주인이 벌금 물어요’같이 성토하는 글이 올라온다.

 

▶후년부터 맹견을 수입하거나 키우려면 시·도지사 허가를 받고 책임보험을 들어야 한다. 농림축산식품부가 그제 대통령 업무보고에서 밝혔다. 현행법상 맹견은 도사견, 아메리칸 핏불테리어, 아메리칸 스태퍼드셔 테리어, 스태퍼드셔 불테리어, 로트바일러 등 5종이다. 그러나 이 조치로 개 물림 사고가 줄어들지는 의문이다. 전문가들은 이 5종에만 입마개 착용을 의무화한 법규도 비합리적이라고 한다. 맹견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사람 무는 개가 맹견이라는 것이다. 얼마 전 울산에서 8세 초등학생의 목을 물어뜯어 중상을 입힌 개도 5종에 포함된 맹견이 아니었다.

▶애견 문화가 발달한 나라일수록 강력한 개 관련 처벌 규정을 두고 있다. 그래야 사람뿐 아니라 개도 보호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미국은 목줄을 하지 않은 개를 풀어놓은 견주를 현장에서 체포하고, 개가 사람을 물려고만 해도 경찰이 발포할 수 있다. 개 입마개조차 반대하며 무조건 개를 감싸고 도는 이들은 그런 태도가 오히려 개 혐오를 부추긴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김태훈 논설위원

 

08.13(토)  등(等)의 마법

여러 개 열거하다 그다음이 생각나지 않을 때 쓰는 말이 ‘기타 등등’이다. 기타(其他)는 그 밖의 다른 것, 등등(等等)은 그 밖의 것을 줄인 것을 뜻하니 기타 등등은 구체적으로 제시한 것 이외의 것들을 의미한다. 중요도에서 밀렸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어느 기타교실 학원장은 기타의 장점을 설명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세상 모든 악기는 ‘기타’와 ‘기타 등등’으로 나뉜다.”

 

 ▲한동훈 법무부 장관./뉴스1

 

▶ 그러나 법령(法令)에서의 ‘등’은 그렇게 만만한 존재가 아니다. 간혹 손오공의 여의봉처럼 대상을 마구 늘리는 마법을 부린다. 2003년 금융 당국이 미국계 사모펀드 론스타의 외환은행 인수를 승인한 것도 ‘등’을 활용한 것이었다. 당시 외환은행은 매각할 수 있는 부실 금융기관이 아니었지만 금융 당국은 “부실 금융기관 정리 ‘등’ 특별한 사유가 있다고 인정되는 경우 요건을 갖추지 않아도 된다”는 시행령 예외 조항의 ‘등’에 기대서 외환은행을 매각 대상에 밀어 넣었다. 당시 확대 해석이란 논란이 일었다.

 

▶민주당이 밀어붙인 ‘검수완박’ 법안 시행을 앞두고 법무부가 검찰 수사 대상을 상당 부분 원상 복구시키는 시행령을 11일 입법예고하자 민주당이 반발하고 있다. 법안에서 검찰 수사 대상을 공직자·선거 등 6대 범죄에서 부패·경제범죄 등 2대 범죄로 줄였는데 시행령에서 수사 범위를 늘린 것은 입법권 침해라는 것이다. 이런 논란이 생긴 것도 법안의 ‘등’ 자 때문이다.

 

 

▶법안은 ‘부패범죄, 경제범죄 등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중요 범죄’를 검찰 수사 대상으로 정하고 있다. ‘등’을 넣어 수사 범위를 시행령(대통령령)에서 정하도록 한 것이다. 법무부는 이를 활용해 원래 공직자 범죄였던 직무유기·직권남용 등을 부패 범죄로 분류하는 방식으로 수사 범위를 넓혔다. 한동훈 법무장관은 “법안은 (중요 범죄 범위를) 얼마든지 넓힐 수 있는 재량권을 줬다”며 “(오히려) 중요 범죄를 최소한으로 규정했다”고 했다. 법 취지대로 했다는 것이다.

 

▶누구 말이 맞는 걸까. 법률가들은 대부분 법무부가 맞는다고 했다. 법 문언상 방점이 ‘중요 범죄를 대통령령으로 정한다’에 있지, 부패·경제범죄로 수사 대상을 한정한 것으로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또 입법자 의사와 다르더라도 법 문언이 명백하면 문언대로 해석하는 게 원칙이라고 했다. 원래 이 조항은 법사위 통과 당시 ‘부패·경제범죄 중’이었는데, 여야 협의 과정에서 ‘중’이 ‘등’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민주당이 ‘등의 마법’을 무시하다 큰코를 다친 셈이다.

최원규 논설위원

 

08.15(월)  코로나 거리두기 끝낸 미국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가 코로나 새 가이드라인에서 지난 2년 반 유지해온 ‘6피트(1.82m) 거리 두기’를 공식 해제했다. “바이러스는 사라지지 않는다”며 ‘바이러스와 함께 오래 살아가는’ 방식으로 전환한 것이다. 밀접 접촉자의 선제적 격리와 정기 검사, 마스크 착용 조치도 삭제했다. 확진자는 5일 이상 집에 머물고 10일간 마스크를 쓰라는 권고만 남겨 두었다. 최근 미국의 하루 평균 신규 확진자 수가 10만여 명으로 우리보다 적기 때문에 가능한 조치일 것이다.

 

 

▶영국은 이미 지난 2월 ‘코로나와 공존’을 선언하면서 확진자 자가 격리 등 코로나 관련 규제를 대부분 풀었다. 3월에는 백신 미접종자 입국 규제 등까지 없앴다. 요즘 영국은 코로나 이전 세상과 거의 다름이 없다. 여왕 즉위 70주년 기념식인 플래티넘 주빌리가 전국에서 성대하게 치러졌고 코로나로 취소했던 글래스턴베리 음악 축제, 윔블던 테니스 대회도 다시 열렸다.

 

▶이제 코로나가 팬데믹(세계적 유행병)에서 엔데믹(주기적·국지적인 감염병)으로 바뀐 것일까. 전문가들은 2년 전에 비하면 격세지감이지만 아직 엔데믹이 적절한 단어는 아니라고 했다. 인플루엔자는 특정 계절에만 오지만 코로나는 4~5개월 간격으로 새로운 변이가 출현해 유행하고, 코로나 감염으로 여러 장기에 염증·후유증이 적지 않은 등 아직은 질병으로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코로나라는 야생마가 아직 충분히 길들여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만 팬데믹에서 엔데믹으로 가는 도중에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가려는 미국·영국 등에 비해 한국 상황은 좋지 않다. 다른 나라들은 유행이 한풀 꺾였지만 우리는 코로나 재유행이 길게 이어지면서 14일 주말인데도 12만명에 가까운 신규 확진자가 발생했다. 확진자 발생과 1~2주 시차를 두고 나타나는 위중증 환자도 석달 여 만에 최다 수준을 기록해 증가세가 심상치 않다. 위중증 환자 중 88%가 60세 이상인 점도 우려를 낳고 있다. 일부에서 응급실이나 병상 상황을 걱정하기 시작했다.

 

▶2009년 신종플루가 유행했을 때 우리나라 사망률은 0.016%였다. 코로나의 누적 치명률은 0.12%로, 신종플루의 8배에 달한다. 지금 유행하는 오미크론 변이도 치명률이 0.04%로 낮아지긴 했지만 신종플루 때보다 두 배 이상 높다. 하지만 치료제가 확보된 데다 오미크론의 하위 변이인 BA5에도 효과가 있는 개량 백신까지 곧 나온다. 지긋지긋한 코로나도 이제 팬데믹의 끝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은 확실한 것 같다.

김민철 논설위원

 

08.16  ‘파트와 테러’

살만 루슈디가 뉴욕에서 흉기에 찔렸다는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다. 올해 일흔다섯인 그는 1988년 발표한 소설 ‘악마의 시’ 때문에 이슬람 신성모독 논란에 휘말렸다. 그게 34년 전이다. 그는 인도 뭄바이의 이슬람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열네 살에 영국으로 유학하면서 종교관이 바뀐 것 같다. 국내에도 번역된 ‘악마의 시’는 예언자 무함마드의 아내 둘을 매춘부 이름으로 부르는 등 “불경한 묘사”가 섞여 있다.

 

 

 ▶그가 2008년 본지와 국내 첫 인터뷰를 했다. 대면(對面)은 어려웠고, 뉴욕 자택으로 연결된 전화 통화였다. 당시에도 이미 책을 불태우는 시위로 열여덟 명이 숨졌고, 작가와 번역자를 겨냥한 테러로 서른일곱 명이 목숨을 잃은 상태였다. 그는 문제의 소설을 내놓았던 첫해 무려 아홉 번이나 거처를 옮겼다고 했다. 한 친구가 그에게 “너는 신문 1면 속으로 사라진 인간”이라고 했다니 당시 상황이 어땠는지 짐작이 간다.

 

▶그에겐 사형선고 비슷한 ‘파트와’가 내려져 있었다. ‘파트와’는 원래 이슬람 학자들이 율법에 따라 발표하는 칙명일 뿐이다. 지금까지 50개 가까이 된다. 나라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탄산 음료를 마셔도 좋다’ ‘자살 테러에 반대한다’ ‘여성 록 밴드는 안 된다’ ‘담배 피우지 말라’ ‘여성은 취업할 수 없다’ 같은, 뭘 금지한다는 내용이 많다. 심지어 이란에서 나온 파트와가 핵무기의 반입과 개발을 금지한 적도 있다. 가장 최근 파트와는 2018년 인도네시아에서 돼지 세포를 이용했다는 이유로 MMR 홍역 백신을 금지했다.

 

▶7년 전 프랑스 주간지 ‘샤를리 에브도’는 이슬람을 비꼬는 만평을 자주 싣다가 편집진을 포함한 12명이 총기 난사 테러로 숨졌다. 30년 전 이집트에선 신성모독의 죄를 뒤집어쓰고 202명이 피살됐는데, 유명 작가 파라그 포다 역시 희생됐다. 세월이 흘러 방심한 탓에 경호가 느슨했던 것일까. 이번엔 루슈디였다. 그는 뉴욕 강연장에서 무대로 뛰어오른 스물네 살 시아파 극단주의 범인에게 목과 배를 열 차례 넘게 찔렸다.

 

▶이쯤 되면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라는 말이 오히려 한갓지게 들린다. 루슈디에게 내려진 파트와는 10년 뒤 공식 해제됐다지만, 근본주의 테러범에게는 평생 ‘스탠딩 오더’였던 셈이다. 이런 작가들은 때로 체포·구금·추방·테러의 위험 속에 목숨을 내놓은 채 글을 쓴다. 14년 전 본지 인터뷰 때 루슈디는 이렇게 말했다. “싫은 것을 싫다고 쓰는 것이야말로 작가에겐 유일한 무기입니다.”

김광일 논설위원

 

08.17  입국 전 코로나 검사 요지경

▲7월 26일 인천국제공항 1터미널에서 해외 입국자들을 위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검사 센터가 운영되고 있다. 정부는 전날부터 해외 입국자의 PCR(유전자증폭) 검사 시기를 입국 후 3일에서 입국 1일 차로 다시 강화했다. /뉴스1

 

지난주 일본에 다녀올 때 가장 걱정한 것은 현지에서 코로나 양성이 나오지 않을까였다. 우리나라는 현재 해외 입국자에 대해 출발 48시간 이내 PCR 검사 또는 24시간 이내 신속 항원 검사 음성 확인서를 요구하고 있다. 양성이 나오면 귀국이 7일 이상 늦어져 여간 낭패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기우였다. 귀국 당일 여행사 안내를 받아 신속 항원 검사를 받을 때, 의료진은 진단봉을 코에 살짝 넣었다 빼는 정도로 검사했다. 이 검사는 진단봉을 코 깊숙이 찔러야 정확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 그 정도로는 걸렸어도 양성이 나오기 어려울 것 같았다.

 

▶특정 사례 아니냐고 할 수 있지만 언론 보도를 보면 더 가관이다. 태국 방콕의 한 의료 기관은 귀국을 앞둔 한국인들로 북적이는데, 신속 항원 검사를 의료진이 아니라 본인이 스스로 하는 방식이다. 관광객들이 진단봉을 형식적으로 코에 넣거나 아예 넣지 않고 시늉만 하는 방식으로 ‘음성’을 받는다고 했다. 포털 여행 카페 등에 들어가면 나라별로 ‘음성 확인서 수월하게 받을 수 있는 곳’을 소개하는 글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유럽 정보에서도 ‘감기 기운이 있으면 검사 느슨하게 하는 곳을 찾아가라’는 충고를 볼 수 있다.

 

 

▶여행객은 양성이 나올 경우 번거로운 데다 체류 비용 등이 늘고, 해당 국가는 굳이 코로나 양성자를 더 머물게 할 이유가 없다. 양쪽 이해가 맞아떨어져 형식적 검사를 하는 셈이다. 인터넷에서는 신속 항원 검사에서 양성이 나오자 의료 기관을 돌며 더 검사해 결국 음성을 받았다는 체험담도 찾을 수 있다. 이 정도면 입국 전 코로나 검사는 하나 마나가 된 셈이다.

 

▶이미 주요국은 코로나 백신 접종 완료자의 입국 전 코로나 검사 의무를 폐지했다. 입국 전 또는 후에 코로나 검사를 받으라는 나라는 있지만 입국 전후 두 번 코로나 검사를 받으라고 하는 국가는 OECD 38국 중 한국이 유일하다. 수차례 지적이 나왔는데도 고쳐지지 않고 있다. 여행 업계와 관광객들은 정부의 ‘면피 행정’이 꼼수를 유도한다고 비판한다.

▶코로나 국면 초기에는 해외 바이러스 유입을 막기 위해 입국 규제가 절실했다. 지금은 해외 유입 확진자가 국내 발생 확진자에 비해 미미한 수준(0.4% 미만)이다. 해외 유입이 거의 의미가 없는 수준인데도 입국 전후로 두 차례나 음성 확인서를 요구하는 것은 과잉 규제다. 해외 왕래를 줄이려는 목적이 아니라면, 왜 효과도 없고 과학적이지도 않은데 입국 전후 검사를 둘 다 유지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김민철 논설위원

 

08.18  전자전

 케이블이 연결되기 전까지 사람들은 생선뼈 모양의 안테나를 통해 TV를 시청했다. 집집마다 꽂혀 있어 도시 미관을 해치는 주범이라고 했다. 이 안테나는 1926년 개발됐다. 일본의 개발자 이름을 따 ‘야기·우다 안테나’라고 한다. 세계 방송사를 바꾼 기술로 꼽히지만 세계 전쟁사를 바꿨다는 소리도 듣는다. 전자전(電子戰)의 서막을 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기술을 활용해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 나라가 일본이 아니라 미국이란 사실이 흥미롭다

 

 

 ▶야기 안테나 기술은 전파를 더 멀리, 더 많이 보내는 탁월한 지향성이 장점이다. 군사용 레이더에 사용하면 적을 더 빨리 포착할 수 있었다. 미국이 가치를 알아본 것은 절실함 때문이었다. 진주만 공습 때처럼 미국은 일본 주력 전투기 ‘제로센’의 항속 거리와 기동력을 당해낼 수 없었다. 적보다 느렸기 때문에 먼저 찾아내야 대비할 수 있었다. 일본은 적보다 빨랐기 때문에 자만했고, 안방 기술을 경시하다가 전자전에서 까막눈이 됐다.

 

▶전쟁 다큐의 명작인 NHK의 ‘태평양전쟁’은 제로센의 참혹한 종말을 다루고 있다. 제로센은 출격 직후 미군의 고성능 레이더에 포착된다. 높은 상공에 숨어있던 미 전투기 ‘헬캣’이 기습해 제로센의 기동력을 무너뜨린다. 2차 사냥은 전파장치를 장착한 미 함대의 대공포탄이 담당했다. 일정한 거리에서 자동 폭발해 산탄으로 제로센을 격추한다. 전자전에서 무력화된 제로센은 결국 가미카제의 자살 전투기로 전락해 태평양에 수장돼 버렸다.

 

▶현대의 전자전은 누가 먼저 적을 포착하는지 겨루는 수준이 아니라고 한다. 전자 무기로 적의 감시와 통신 시스템까지 엉망으로 만든다. 좌표가 엉망이 되면 최첨단 스텔스 전투기를 보유해도 띄울 수 없고 최신형 미사일을 도입해도 쏠 수가 없다. 겨우 전투기를 띄운다고 해도 유령을 찾아 헤매다가 적을 보지도 못한 채 격추된다. 제로센처럼 ‘날아가는 관짝’ 신세가 되는 것이다. 미국이 세계 최강인 것은 2차 대전 이후 전자전에서 초격차 기술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낸시 펠로시 미 하원의장이 대만을 방문할 때 중국군이 최신 구축함과 전투기를 동원해 펠로시 의장이 탑승한 비행기를 추적했지만 실패했다고 한다. 미 군용기의 전파 방해 때문에 중국 장비가 모두 먹통이 됐다는 것이다. 미국의 진짜 위력은 이런 게 아닐까 한다. 펠로시 방문 이후 중국은 대만을 포위하고 미사일을 쏴대면서 무력시위를 벌이고 있다. 기세등등해 보이지만 결국 부처님 손바닥 안에서 용쓰는 것이다.

선우정 논설위원

 

08.19  대한극장

1958년 서울 충무로에 등장한 대한극장엔 창문이 없었다. 영화 볼 때 빛의 방해를 받지 않도록 설계한 대한민국 1호 ‘무창(無窓) 영화관’이었다. 성능 좋은 공기 정화 시설을 갖춘 덕분이었다. 70㎜ 필름 영화를 소화할 수 있는 대형 와이드 스크린도 이 극장밖에 없었다. 알프스의 드넓은 초원에서 ‘도레미송’을 부르는 ‘사운드 오브 뮤직’이나 ‘벤허’의 전차 경주 장면에 사람들은 탄성을 질렀다. 대한극장은 오늘날로 치면 3D 화면과 좌석 진동 장치까지 갖춘 첨단 멀티플렉스였다.

 

 

▶이후 대한극장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닥터 지바고’ 등 대작 상영관으로 명성을 날렸다. 3개월 장기 흥행작이 속출했고 ‘벤허’는 6개월이나 스크린을 차지했다. 1970년대 극장 애니메이션 붐도 이끌었다. ‘로보트태권V’와 ‘철인007′을 보려고 어린이 관객 수십만명이 이 극장을 찾았다. 많은 이가 그 시절 대한극장 앞에 길게 늘어선 줄을 기억한다. 매표소에서 시작해 극장을 한 바퀴 돌아 한국의집까지 수백m 이어지곤 했다.

 

▶대한극장은 ‘로보캅’ ‘백 투 더 퓨처’ 등이 흥행하며 1985년부터 8년 연속 관객 동원 1위를 기록했다. 혼자만 영화를 누린 것도 아니다. 단성사·서울·명보·중앙·스카라·국도·피카디리·아세아·허리우드도 ‘10대 극장’으로 꼽히며 잘나갔다. 방학 때면 학생들도 가세해 조조할인 표마저 구하기 힘들었다. 극장 앞엔 암표상이 들끓었다. 신작 영화를 개봉관 한두 곳이 차지하는 단관 극장 전성시대의 풍경이었다.

 

▶대한극장이 조조할인 시간대를 오후 1시로 옮겼다고 한다. 메가박스, 롯데시네마, CGV 등 대기업 멀티플렉스와의 오전 할인 경쟁에서 밀리자 취한 선택이다. 영화 한 편을 1000곳 넘는 스크린에서 동시 상영하는 시대가 되면서 자본이 부족한 옛날식 극장은 설 자리를 잃었다. 일부는 멀티플렉스로 변신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온라인 동영상(OTT) 서비스와 거실을 차지한 80인치 대형 TV는 각 가정을 영화관으로 만들었다. 대한극장의 ‘오후 조조’는 그런 변화에 맞춰 살아남기 위한 분투일 것이다.

 

▶추억은 대개 공간에 대한 기억으로 남는다. 극장 하나 사라질 때마다 극장에 얽힌 추억도 묻힌다. 가수 이문세는 ‘조조할인’에서 그 시절 청춘 남녀가 아침 일찍 영화관에서 만나는 모습을 노래했다. ‘아직도 생각나요 그 아침 햇살 속에/ 수줍게 웃고 있는 그 모습이/(중략)/ 가끔씩 나는 그리워져요’. 10대 극장 중에 서울과 명보가 지난해 문을 닫았다. 이제 대한극장만 남았다.

김태훈 논설위원

 

08.20(토)  공급 달리는 필수 의료

의사면허를 따면 대학병원서 숙식하며 배우는 인턴을 하는데, 이들 숙소에 가면 전문의별 월급 랭킹이 걸려 있다. 특정 분야 전문의가 되는 레지던트를 지원할 때 참고하라는 뜻이다. 거기서 피안성(피부과, 안과, 성형외과), 정재영(정신건강의학과, 재활의학과, 영상의학과)이 인기라는 말이 나온다. 대개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분야거나, 제도적으로 의무 채용이 많은 과이거나, 검사로 먹고사는 한국 병원 구조와 관련 있다.

 

 

 ▶미국 전문의 소득 랭킹을 보면 우리와 좀 다르다. 거기도 성형외과가 1등이지만, 그다음이 정형외과, 심장내과, 비뇨기과, 이비인후과, 영상의학과, 소화기내과, 종양내과 순이다. 한국서 인기 적은 외과, 호흡기내과, 병리과, 산부인과 등도 평균 위에 놓여 있다. 미국은 생명을 다루는 분야에 보상을 충분히 해주고, 외과의사별 수술 사망률을 공개하는 식으로 의료 질 관리를 철저히 한다.

 

▶피부 미용, 비만 치료 간판의 클리닉 의사 대다수는 가정의학과 전문의다. 주치의 제도도 없는데 가정의학과 의사가 한 해 250~300명 나온다. 신규 전문의의 약 10%로, 외과보다 많다. 전국 보건소 의사의 2% 정도가 가정의이고, 서울 지역 가정의 다섯 중 하나는 강남구에 있다. 가정의학과가 미용 의료 진출 루트라는 말이 나온다. 필수의료 분야 의사가 모자란다고 하면서, 왜 가정의학과 전공의는 한 해 300명을 뽑는지, 설명이 안 된다.

 

▶국내 의사 양성 운용 체계를 보면, 이해 가지 않는 게 한둘 아니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고령화되고 있는데, 노인의학 전문의 제도는 없다. 지방은 점점 무의촌이 돼가고 있는데, 지역 근무 의료인에 대한 지원 제도가 없다. 뇌종양, 뇌혈관, 어깨, 팔, 발, 무릎, 위장, 대장, 췌장 수술 의사가 다 따로따로 배출된다. 이러다 엄지 수술 의사, 약지 수술 의사가 나올 판이다. 자기 세부 전공이 아니면 생명이 위태로운 상황의 환자 수술도 못 하는 분위기다.

 

▶응급 수술이 많아서 삶의 질이 나쁘거나, 분만사고처럼 의료분쟁이 나면 거액 배상을 해야 하거나, 중환자의학처럼 스트레스 받으며 한 일에 비해 보상이 적은 분야에 의사가 없다. 진료에 반드시 필요하나 경제성이 없어 생산 또는 수입을 기피하는 약제를 정부가 별도 지원하는 퇴장 방지 의약품 제도가 있다. 분야별로 충분히 공급되어야 할 의료 행위도 정부가 정해서 지원하는 퇴장 방지 의사 제도가 필요하다.

/김철중 논설위원, 의학전문기자

 

08.22(월)  위인전의 타락

어릴 적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서 만난 알렉산더 대왕은 흠잡을 데 없는 영웅이었다. 성인이 되어 읽은 알렉산더는 사뭇 달랐다. 동방 원정 길에서 자주 취했고 직언하는 장군을 술김에 살해했다. 부왕을 시해한 패륜 의혹도 있다. 위인전은 특성상 인물의 장점만 강조하기 십상이다. 그러다가 자주 왜곡의 함정에 빠진다.

 

 

 ▶부풀려졌던 위인전이 퇴출당하는 일도 심심찮게 벌어진다. 탐험가 로버트 피어리는 북극 탐험 기록이 훗날 허위로 밝혀지고 이누이트족 여아를 임신시킨 사실이 드러나 위인전 시장에서 사라졌다. 고환암을 이긴 사이클 영웅 랜스 암스트롱은 약물을 복용했다는 사실이 들통난 뒤 자서전을 읽은 독자들에게 손해배상 소송을 당했다. 이런 위험을 피하기 위해 위인전은 대개 역사적 평가가 끝난 제왕이나 장군, 예술가를 다룬다.

 

▶전기의 주인공들도 시대에 따라 바뀐다. 요즘 청년들의 선망 대상인 체육인 김연아나 손흥민, 방송인 유재석, 가수 아이유 관련 책자들이 많이 팔리는 이유다. 아무리 그래도 현직 대통령이나 정치인을 위인전 주인공 삼는 것까지 눈감고 지나치긴 어렵다. 몇 해 전 발간된 한 유력 정치인의 만화 위인전은 ‘꼭 필요한 거짓말도 못하는 정치인’ ‘원칙을 중시하는 면면 뒤에 감춰진 따뜻함’ 등 아부성 내용이어서 “북한 위인전 같다”는 비아냥을 들었다.

 

▶김원웅 전 광복회장 재임 시절 광복회가 ‘독립운동가 100인 만화 위인전’을 만들었다. 위인전 목록에 김 전 회장 모친 전월선 여사가 포함된 사실이 엊그제 드러났다. 분량이 430쪽으로 김구(290쪽)보다도 두껍고, 김 전 회장이 태어나는 장면도 포함돼 있어 “대놓고 집안 미화한 것 아니냐”는 비판이 일었다. 루쉰은 “위인이 화석이 되고, 사람들이 그를 위인으로 칭찬하면 그는 꼭두각시가 되어 있는 것”이라고 했다. 전월선 여사가 딱 그 신세 같다. 김 전 회장은 자신의 영달을 위해 어머니를 꼭두각시 삼았다고 지적해도 반박할 말이 없을 것이다.

 

▶이 만화 시리즈엔 김원봉도 포함돼 있다. 북한 정권 수립에 참여하고 6·25 때 인민군으로 대한민국을 없애려 했던 인물이다. 정작 임정 초대 대통령이자 대한민국 건국 대통령인 이승만을 제외했다. 애국가를 만든 안익태도, 나라를 전란에서 구해낸 백선엽 장군도 없다. 아이들에게 읽히고 싶은 인물이 빠진 자리를 우리 청소년이 본받아선 안 될 인물이 차지했다. 위인전의 타락이 아닐 수 없다. 아이들이 어떤 위인전을 읽는지 감시라도 해야 할 판이다.

김태훈 논설위원

 

08.23  최고의 상소문

명령을 거역한 이순신 장군에 대한 선조의 분노는 여러 기록에 나와 있다. 출정 명령을 듣지 않자 삼도수군통제사 이 장군을 “한산도 장수”로 낮춰 부르면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편안히 누워만 있다”고 했다. 투옥한 다음엔 “임금을 속인 자는 반드시 죽게 돼 있다”며 “형벌을 끝까지 시행하겠다”고 했다. ‘장하(杖下)에 죽는다’는 말이 있다. 끝까지 매를 때리겠다는 것은 끝내 죽이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구명 운동이 시작됐다. 이 장군의 종사관을 지낸 정경달(丁景達)이 조정에 달려가 외쳤다. “이순신의 전쟁 능력은 예를 찾을 수 없습니다. 싸움을 미루는 것은 전술인데 어찌 죄입니까. 그를 죽이면 나라가 망하는데 어찌 하시렵니까.” 대놓고 “임금이 틀렸다”고 한 것과 마찬가지다. 구구절절 옳은 말이고 막힌 가슴을 뚫어주는 시원한 발언이지만 임금의 분노에 기름을 부어 구명은커녕 이순신을 오히려 위험에 빠뜨릴 수 있었다. 선조는 그의 말을 무시했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우의정 정탁(鄭琢)이 상소문을 올렸다. “이순신은 큰 죄를 지었지만 성상께서는 극형을 내리지 않고 인(仁)을 베푸시려는 일념으로…이순신을 살릴 수 있는 길을 찾아보시려고… 생명에 대한 임금의 어진 뜻이 죽을 죄를 진 자에게까지 미치니 감격을 이길 길이 없습니다.” 임금의 속 좁은 뜻과 반대였다. 정탁도 알면서 그런 것이다. 성인군자로 추켜세우니 임금은 어쩔 수 없었다. 문제아에게 “잘한다, 잘한다” 하면 잘하는 때가 있는 것과 같다.

 

▶상소문은 이순신을 깔아뭉개는 문장으로 이어진다. “용기로 치면 원균에게 미치지 못하고 남의 공로를 탐내서 제 공로로 만들어 속였기 때문에 이순신이 무슨 변명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서 이순신의 작은 공적 몇 가지 열거한 다음 “무릇 인재는 나라의 보배이므로 주판질하는 사람까지 재주가 있으면 아껴야 하는데 장수의 재질을 가진 자를 오직 법률에만 맡길 수 있겠느냐”고 호소했다.

 

▶정탁의 상소문은 거의 사실이 아니다. “하얀 거짓말”이라고 할까. 선조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거짓말에 마음을 돌렸다. 이순신을 죽이면 졸장부라는 말이니 선조도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상소문이 이순신을 살렸다. 결과적으로 나라를 구했다. 정탁의 상소문은 최고의 상소문으로 꼽힌다. 결과만 대단해서가 아니라 염라대왕의 마음도 바꿀 수 있는 완벽한 설득의 기술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 상소문 초고가 국가 보물에 지정될 것이라고 한다. 아직 보물이 아니었다는 게 오히려 의외였다

선우정 논설위원

 

08.24  전쟁 인질 된 자포리자 원전

▲우크라이나 남동부에 위치한 자포리자 원전의 모습. 우크라이나 정부 제공. / 뉴스1

 

미국 샌디아국립실험연구소가 1988년 제트 전투기 동체를 시속 775㎞로 가속해 콘크리트에 충돌시키는 실험을 했다. 전투기가 원전 격납 건물에 정면충돌하는 상황을 가정한 것이다. 결과는 콘크리트 겉면에 6.4㎝ 깊이 홈이 파였을 뿐이다. 미국은 9·11 테러를 겪은 다음 해인 2002년에는 보잉767 항공기가 최고 이륙 중량으로 충돌하는 상황을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도출했다. 역시 격납 건물이 다소 깨졌을 뿐이다. 사용후핵연료를 저장하는 냉각 수조 구조물도 충돌에 멀쩡했다.

 

▶지난 3월 초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의 자포리자 원전 단지를 점령했다. 그 뒤 수시로 원전 단지 부근에서 포격전이 벌어지고 있다. 교전 과정에서 폭탄 파편이 원전 격납 건물 표면으로 튀는 일이 있었고, 단지 내 훈련 센터에서 화재도 발생했다. 최근엔 위성 촬영을 통해 원자로 6기 가운데 2기 인근에 포탄을 실은 러시아군 트럭들이 배치돼 있는 것이 확인됐다.

 

 

▶우크라이나는 1986년 체르노빌 원전 폭발 사고를 겪은 나라다. 당시 방사성물질이 바람을 타고 유럽 거의 전역으로 퍼졌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가 핵 재앙을 일으킨 후 우리 탓으로 덮어씌우려고 포격을 가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체르노빌 사건을 겪은 우크라이나가 그런 자해 행위를 할 것이라 믿기는 어렵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군이 단지 내에 미사일 발사대 등을 설치해 놓고 원전을 방패 삼아 공격하는 더러운 전략을 쓰고 있다”고 비난했다. 러시아가 원전 생산 전기를 자기네 쪽으로 끌어가려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자포리자 원전은 유럽 최대 규모다. 원전 6기에서 우크라이나 전력의 5분의 1을 공급해왔다. 러시아의 VVER 원자로를 갖추고 있고, 격납 건물조차 없던 체르노빌 원전과는 완전히 다른 3세대 가압수형 원전 설비다. 러시아군이 점령하고 있지만 우크라이나 직원 1만명이 원전을 가동하고 있다.

 

▶원전 구조물은 항공기 충돌도 견딜 만큼 튼튼하더라도 문제는 냉각 장치를 돌리는 전력 공급 시스템이다. 비상시 원자로 가동을 중단해도 열은 계속 발생한다. 이 열을 식히는 것이 냉각 장치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도 쓰나미로 냉각 장치를 돌릴 전기가 공급되지 않아 발생했다. 자포리자 원전의 전력 공급선 4개 가운데 2개는 이미 파손됐다고 한다. 디젤 비상 전원이 있지만 오래 버티지는 못한다. 원전이 전쟁의 인질이 된 초유 사태다. 무사히 수습될지 세계가 초조하게 바라보고 있다.

한삼희 선임 논설위원

 

08.25  ‘감기 빨리 낳으세요’

지난 2013년 ‘경복궁 게장’ ‘경복궁 간장 게장’이 포털 실시간 검색어 상위에 올랐다. 당시로는 낯선 ‘궁궐 야간 개장’ 소식을 접한 어린 세대가 개장(開場) 대신 ‘게장’을 입력하면서 시작된 일이었다. ‘요즘 애들이 이렇다’는 소문이 퍼지며 장난삼아 ‘경복궁 게장’을 입력하는 사람까지 덩달아 늘었다.

 

 

▶”자기야 아프지 말고, 빨리 낳아.” 여성 커뮤니티에는 남자 친구가 ‘낳아라(나아라)’ ‘이상한 냄세(냄새)’ ‘연애인(연예인)’ ‘안되(안돼)’ 식으로 맞춤법을 틀리게 쓴다는 글이 자주 올라온다. 이른바 ‘남친 맞춤법’ 걱정이다. 한 결혼 정보 회사가 미혼 1000여 명을 대상으로 ‘연인에게 정 떨어지는 순간’을 물었다. ‘약속을 지키지 않았을 때(43.4%)’에 이어 ‘반복적으로 맞춤법을 틀릴 때’가 32.3%였다. 기념일을 잊었을 때, 시사 상식이 부족할 때를 합친 것보다 많았다. 맞춤법 문제를 택한 응답자 성비는 여성 81.6%, 남성 18.4%였다.

 

▶한자를 몰라 벌어지는 일도 흔하다. 최근 한 업체가 사과문에 ‘심심한 사과’라는 표현을 썼다. ‘난 하나도 안 심심하다’ ‘심각한 일에 심심하다고 쓰다니’ 같은 반응이 나왔다. 깊이, 간절하게 뜻의 ‘심심(甚深)하다’를 지루하다는 뜻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한자 문맹(文盲)이 낳은 일이다. 한자 교육을 제대로 안 받으니 한자어 까막눈이 늘어난다. ‘금일(今日)’을 ‘금요일’로, ‘무운(武運)을 빈다’를 ‘운이 따르지 않기를(無運) 빈다’로 오해하는 일도 벌어진다. 한 신입 사원은 이역만리(異域萬里)를 이억(二億)만리로 썼다가 한동안 놀림당했다.

 

▲'감기 다 낳았어요?'는 '감기 다 나았어요?' 의 오류다. 인터넷에는 이런 글을 캡쳐해 올리는 경우가 많다.

 

▶'일해라 절해라(이래라 저래라) 하지 마세요’ ‘에어컨 시래기(실외기)’로 시작해 ‘미모가 일치얼짱(일취월장)’ ‘삶과(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곱셈(꽃샘)추위’ ‘괴자(계좌)번호’…. ‘우리말 모욕’의 사례는 차고 넘친다.

 

▶더 심각한 것은 글을 읽고 나서 딴소리하는 ‘문해력’ 문제다. OECD 국제성인역량조사(PIAAC, 2013 발표)에 따르면 한국의 ‘문해력’은 273점으로 평균 266점보다 높았다. 16~24세 한국인은 4위였다. 이후 뚝뚝 떨어진다. 45세 이후 하위권, 55∼65세 최하위권이었다. 문해력은 원래 나이 들수록 떨어지는데, 유난히 낙폭이 컸다. 2017년 국가평생교육진흥원은 “성인 22%인 960만명이 일상생활에 필요한 충분한 문해력을 갖추지 못한 실질적 문맹”이라고 발표했다. 전문가들은 그 원인이 말과 생각의 깊이에 관여하는 책 읽기의 부족이라고 한다.

박은주 에디터 겸 에버그린콘텐츠부장

 

08.26 20억짜리 약

▲척수성근위축증 치료제인 노바티스 '졸겐스마' 제품 사진. 주사 1회당 가격은 20억원에 달한다. /노바티스 제공

 

희소병인 척수성근위축증 치료제 ‘졸겐스마’는 약값이 약 20억원이다. 이 질환은 태어날 때부터 운동신경세포가 망가져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생명까지 위험해지는 병이다. 졸겐스마는 정맥 주사로 한 번만 맞으면 병 진행을 막고 환자를 살릴 수 있는 ‘원샷 치료제’다. 정부가 이달부터 이 약에 대해 건강보험을 적용해 지금까지 2명의 아기가 약을 맞았다. 원래 투약 비용이 19억8000여 만원인데, 건보 적용으로 환자 부담이 600만원으로 줄었다. 지금까지 전 세계적으로 2300명이 이 약을 맞았다.

▶최근까지 졸겐스마가 세계에서 가장 비싼 약이었다. 하지만 지난 17일 미국 블루버드의 빈혈 유전자 치료제 ‘진테글로’가 미국 FDA 승인을 받으면서 2위로 밀려났다. 진테글로는 280만달러, 우리 돈으로 36억원이 넘는다. 이 질환에 걸린 환자는 2~5주마다 수혈을 받아야 살 수 있는데, 임상 시험에서 이 약을 맞은 환자 90%가 2년 내에 치료됐다. 그래서 세계에서 가장 비싸지만 시장 반응은 나쁘지 않다고 한다.

 

 

▶중증이나 희소 질환 환자는 숫자가 적기 때문에 약이 초고가인 경우가 많다. 1인당 연간 3억원 이상 들어가는 약을 고가 약이라 하는데, 지난해 기준 15개 품목이다. 모두 288명의 중증·희소병 환자가 1086억원의 건보료를 썼다. 1인당 3억8000만원이 들어간 셈이다. 급성 림프성 백혈병 등 치료제인 ‘킴리아’도 비급여일 경우 약값이 4억원이다. 지난 4월부터 건보 급여가 적용돼 환자 부담이 600만원으로 줄었다.

 

▶고가 의약품에 건보를 적용하는 문제는 난제 중의 난제다. 건보 재정은 한정돼 있으니 우선 순위를 정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정부도 졸겐스마를 올해에 한해 14명까지, 내년부터는 7명까지만 투약할 수 있도록 했다. 또 보험 적용 조건은 생후 24개월 이내로 제한했다. 그랬더니 24개월에서 몇십일을 초과한 아이 부모가 적용 확대를 호소하고 있다. 무엇이 최선인지 아무도 답할 수 없는 문제다.

 

▶중증·희소병 신약은 첨단 기술을 활용하면서 점점 비싸지고 있다. 치료약이 있음에도 고가라는 이유로 생명을 포기해야 하는 환자 가족들의 안타까움은 외면할 수 없다. 문제는 초고령화 사회를 앞두고 건강보험 재정에도 빨간불이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영국은 제약 회사와 정부, 민간재 단이 희소 질환 치료제에 대해 기금을 조성해 지원하고 있다. 호주와 이탈리아도 별도 기금을 운영해 고가의 희귀 의약품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고 있다. 우리도 이런 방식의 지원책을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김민철 논설위원

 

08.27(토)  물 없는 화장실

▲지난 16일 서울 시내 한 호텔에서 만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사진=삼성전자 제공

 

‘서울의 고층 빌딩을 바라볼 때 나는 그 속의 파이프를 통해 흘러내리고 있을 X의 폭포를 생각한다. (…) 서울의 이 거대하고 운명적인 X을 생각하면서 나는 문득 삶에 대한 경건성을 회복한다.’ 김훈의 산문집 ‘연필로 쓰기’에 나오는 대목이다. 작가가 소년 시절인 1950년대 분뇨로 넘쳐난 서울 골목길을 회상하며 쓴 글의 마지막 부분이다. 요즘 서울시는 분뇨를 하루 1만1844㎥(2020년 기준) 처리하고 있다. 이 작업이 닷새 정도만 지연되면 도시는 마비된다.

 

▶18세기 유럽의 도시에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큰 골칫거리 중 하나가 분뇨 처리였다. 2층 이상에 사는 사람들은 요강이 차면 하수구나 길거리에 그냥 부어 버렸다. 당시 유럽 도시의 길거리 위생 상태는 최악이었다. 여성들은 외출할 때 분뇨가 옷에 묻지 않도록 굽 높은 구두를 신었다. ‘하이힐’의 원조라고 한다. 챙 넓은 모자도 창 밖 투척에 대비해 옷과 머리를 보호하려고 만든 것이라고 한다. 그 냄새를 감추기 위해 향수가 발달했다. 수세식 화장실을 개발하고 하수도 체계를 정비하면서 이 문제를 해결한 것이 250년 전이다. 수세식 화장실은 인류의 위대한 발명품 중 하나로 칭송받고 있다.

 

 

▶하지만 이런 화장실은 물과 전기가 없는 저개발 국가에서는 그림의 떡일 뿐이다. 여전히 세계 인구의 절반에 가까운 35억명은 비위생적 화장실을 쓰거나 그마저도 없어 야외에서 볼일을 본다. 이에 따른 수질 오염으로 매년 5세 이하 어린이 36만명 이상이 장티푸스, 설사, 콜레라 같은 질병으로 사망한다고 한다.

 

▶빌 게이츠 재단은 2011년부터 2억달러 이상을 들여 물과 전기를 쓰지 않는 새로운 개념의 화장실을 만드는 프로젝트를 공모했다. 사용자당 하루 비용이 5센트가 넘지 않는 조건이었다. 그동안 아이디어나 시제품이 120여 건 나오긴 했다. 바이오 막을 이용해 오염 물질을 걸러내거나 태양열로 가열해 바로 비료로 만드는 방식 등이다. 그러나 가정에서 쓰기에 적합하지 않거나 대량생산하기에는 너무 비용이 많이 들었다. 결국 게이츠 재단은 2018년 삼성에 참여를 요청했다.

▶삼성종합기술원이 3년 연구·개발 끝에 내놓은 기술은 고체와 액체를 분리한 뒤 고체는 탈수·건조·연소 과정을 통해 재로 만들고, 액체는 바이오 정화 방식을 적용해 물로 바꾸는 방식이다. 우리나라에서 수세식 화장실이 일반화된 것도 불과 얼마 전이다. 6·25 때 한국에 온 미군은 도처에 널린 분뇨에 경악했다고 한다. 그런 나라가 이제 저개발국에 첨단 화장실을 지원하게 됐다.

김민철 논설위원

 

08.29(월)  BTS 온다, 하루 숙박 500만원

 몇 해 전 가을, 뉴욕 퀸스의 시티 필드 인근 주차장에 텐트 100여 개가 들어섰다. 시티 필드는 명문 야구 구단인 뉴욕 메츠의 홈구장이다. 어떤 주민은 대단한 경기가 있는 줄 알았다고 했다. 사실은 일주일 전부터 텐트가 들어섰는데, 월드스타 방탄소년단의 공연이 열리기 때문이었다. 대개 이런 공연의 그라운드 입석은 선착순으로 채워진다. 북미권 최고 인기 가수인 저스틴 비버, 테일러 스위프트 공연장에서도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국내에선 밤샘을 하러 맨 먼저 도착하는 팬을 ‘총대’라고 부른다. 그가 늦게 온 팬들의 손목에 번호도 적어주고 출석 체크도 한다. 일부는 팀을 이뤄 호텔이나 찜질방을 찾지만, 안 되면 아스팔트 바닥에 돗자리를 펴고 텐트를 친다. 공연이 임박하면 꼼짝없이 현장을 지켜야 한다는 ‘줄 픽스’가 이뤄진다. 2001년 HOT가 잠실에서 공연할 때는 2월 차가운 날씨 속에 이불을 뒤집어쓴 학생 팬 300여 명이 일주일 밤샘을 했다.

 

▶방탄소년단이 10월 15일 부산에서 공연을 갖는다. 이들이 홍보 대사를 맡고 있는 ‘2030 부산세계박람회’의 유치를 기원하는 무료 콘서트다. 장소가 부산 기장군에 있고, 예상 관객은 10만명이다. 그런데 이곳 숙소 가격이 상상을 초월할 만큼 폭등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극단적인 경우겠지만, 평소 2박에 30만원 하던 숙소가 1000만원을 호가한다고 했다. 예약을 취소하고 다시 10배쯤 올려 받는 곳도 있다는데, 그나마 매진이다.

 

▶”이날만 장사할 거냐” “부산엑스포를 망치려는 것이냐” 같은 격한 반응도 보인다. 인근 도시에서 자고 당일 버스를 대절하겠다는 팀들도 생겨났다. 부산시는 잔뜩 긴장하고 있다. 숙박 문제에 덧붙여 교통 대란 우려도 보통 심각한 게 아니다. 교통편을 크게 증편하고, 관객들이 15분 이상 걸어야만 공연장에 도착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콘서트는 오후 6시에 시작되지만 이른 오전부터 관객을 들여보내 인파를 분산시키는 대책도 마련 중이다.

▶방탄소년단은 ‘세계 기록’을 여럿 갖고 있다. 2020년 온라인 콘서트는 107개 나라에서 75만6000명 관람했고, 영국 기네스 월드 레코드에도 등재됐다. 유튜브 최다 시청자 수, 24시간 이내 최고 뷰 달성 같은 기록도 있다. 10억뷰가 넘는 뮤직비디오만 예닐곱 개에 이른다. 코로나 없을 때 1년 누적 관람객이 수백만명에 이르렀다. 이제 10월 부산 공연에서 별로 달갑잖은 ‘숙박 바가지 기록’까지 세울까 씁쓸하다.

/김광일 논설위원

 

08.30  공포의 교실

영화 ‘친구’에서 아버지 직업을 묻는 교사에게 고교생이 “건달입니다”라고 하자 교사가 손목시계를 푸는 장면이 나온다. 2000년대 이전 중·고교를 다닌 남자라면 그 디테일의 의미를 모를 리 없다. ‘지금부터 흠씬 때리겠다’는 예고다. 실제 신경 거스른 학생을 불러내 교단부터 교실 끝까지 뺨을 때리며 몰고 가는 등 교사의 학생 폭행은 적지 않았다. 그런 날이면 학생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그때는 그런 일을 ‘교육적 체벌’로 여기고 넘어가던 시절이었다.

 

 

▶요즘 그랬다간 당장 소송이다. 이젠 오히려 학부모와 학생이 교사를 때리는 일이 흔해졌다. 7년 전 경기 이천의 어느 고교에서 벌어진 ‘매 맞는 기간제 교사’ 사건은 큰 충격을 줬다. 수업 시간 중 학생들이 촬영한 영상엔 남학생 5명이 교사에게 침을 뱉고 욕설을 내뱉는 장면이 담겼다. “그만하라”는 교사의 머리를 때리기도 했다. 오죽하면 교권 침해 보험도 나왔다. 어느 보험사가 만든 이 보험엔 2018년 한 해에만 3863명이 가입했다.

 

▶교사들은 “큰 소리로 꾸짖으면 소송 대상이 되고, 뒤로 나가 서 있게 하면 인권 침해로 몰리는 게 현실”이라고 한다. 9년 전 한국교총이 ‘교사들의 애환과 자긍심 찾기’ 수기를 공모했을 때 어느 교사가 올린 글의 제목이 ‘사면초가(四面楚歌)’였다. 상황은 지금도 그대로다. 교총이 지난 7월 전국 유·초·중·고 교사 8655명을 설문조사했더니 응답자의 61%가 주 5회 이상 학생들의 문제 행동을 접했다고 했다. 교사 10명 중 6명이 하루 한 번꼴로 수업 방해나 욕설 등의 문제로 시달린다는 것이다.

 

▶교실 붕괴는 미국이 원조급이다. 지난해 미국 어느 고교에서 학생이 장애가 있는 교사를 때리고, 다른 학생이 그 영상을 휴대전화로 찍어 소셜미디어에 올렸다. 미국 10대들 사이에 교사 폭행 장면을 소셜미디어에 올리는 ‘선생님 때리기(Slap a teacher)’ 챌린지가 유행한다는 우려가 제기됐다. 북한 외무성까지 “미국에선 철부지 어린이들마저 패륜아로 전락되고 있다”고 한마디 거들었을 정도였다.

 

▶충남의 한 중학교에서 남학생이 수업 중 교단에 드러누워 휴대전화로 여교사를 아래 위로 촬영하는 듯한 영상이 온라인에 유포돼 논란이다. 지난 26일 동영상 플랫폼에 게재된 영상이다. 교실엔 상의를 벗은 학생도 있었다. 그래도 교사는 그냥 수업을 진행했다. 아마 제지해도 소용없다는 무력감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일이 일상화되기도 했을 것이다. 교실이 교사에게 공포의 공간이 되고 있다.

최원규 논설위원

 

08.31(수)  ‘대동강의 기적’

▲이서현씨가 지난 6월 UCLA에서 열린 강연 플랫폼 테드(TED) 행사에서 북한에서의 삶을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그는 “대동강의 기적을 이뤄낼 발판을 설계하는게 꿈”이라고 말했다. /TEDxTalks 유튜브

 

북한에 백신 지원 사업을 벌였던 재미 한국인 과학자가 얼마 전 자신의 실패담을 들려줬다. “백신을 주겠다니 북한이 좋다고 했다. 그런데 백신을 실어 나를 트럭이 없다고 했다. 트럭을 사주니까 이번엔 백신을 보관할 냉장고가 없다며 사달라고 했다. 트럭에 냉장고를 싣고 북한의 백신 접종 현장에 갔더니 이번엔 냉장고를 돌릴 전기가 없었다. 어쩔 도리가 없어 포기하고 돌아왔다.”

 

▶해방 직후 한반도 전기의 92%를 북한 지역의 발전소가 생산했다. 압록강의 수풍 수력발전소는 당시 아시아 최대, 세계 3위 규모였다. 1948년 대한민국 건국을 앞두고 북한이 전기 공급을 끊자 남한 전체가 암흑 천지로 변했다. 이랬던 북한이 한국에 전기를 달라고 요구하기까지 50년도 걸리지 않았다. 세계 산업사의 미스터리로 꼽힌다.

 

 

▶비료도 그렇다. 해방 직후 흥남의 질소비료 공장은 아시아 최대, 세계 5위 규모였다. 한반도에 필요한 비료 전량을 공급하고도 남아돌아 매년 18만t가량을 수출했다. 이랬던 북한이 역시 50년 만에 한국으로부터 비료를 지원받아야 했다. 공장을 돌릴 인력도 있었다. 한국과 달리 북한은 일본인 기술 인력을 장기간 체류케 해 필요한 기술을 뽑아냈다. 남한의 사회 혼란과 좌파 사상 유행 때문에 한국 고급 인력도 대거 북한에 유입됐다. 일제 말기 경성제대 이공학부를 졸업한 인재 중 40%가 월북했다.

▶1960년대까지 한반도에서 경제 기적이 일어난다면 한강이 아니라 대동강 중심일 것이라고 했다. 광물 자원이 압도적이었고 만주 경영과 전쟁 물자 공급을 위해 세운 일본의 중화학 설비가 북한에 집중돼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많던 자원과 설비가 어디로 어떻게 갔는지 모른다. 월북 인재들도 북한 정권의 눈밖에 나 상당수 흔적 없이 사라졌다. 경제정책을 비롯한 모든 것을 한 사람이 결정하는 신정 체제에선 최대 설비도, 최고 인력도, 퍼주기 지원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북한에 억류돼 고문받고 숨진 미국 대학생을 기리는 오토 웜비어 재단의 첫 장학생 이서현씨가 인터뷰에서 “한국이 한강의 기적을 이뤄낸 것처럼 북한이 대동강의 기적을 이뤄낼 발판을 만드는 것이 꿈”이라며 “김씨 정권에 희생되는 사람이 없도록 북한 시스템을 변화시키고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체제를 세우는 것이 꿈을 이루는 방법”이라고 했다. 북한을 아는 탈북민이기에 이런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강의 기적은 한국이 자유민주 국가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대동강의 기적 역시 자유민주주의 아니면 일어날 수 없다.◎

선우정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