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2022-08/ 08.01(월) 공매도 - 08.31(수) 탄핵
분수대 2022-08/ 중앙일보
08.01(월) 공매도
-최근 수사하는 공매도가 늘었나? 사건이 많은 건 아니다.
-기관·외국인 투자자 불법 공매도 적발 사례가 있나? 없다.
-대통령 지시에 서둘렀나? 대통령이 당선인 때부터 공매도 관심이 컸다.
지난달 28일 ‘불법 공매도 적발 및 처벌 강화, 공매도 관련 제도 보완 방안’ 브리핑에서 기자와 금융당국 담당자 사이에 오간 문답이다. 최근 정치권에서 불붙은 공매도 불길이 뜨겁다.
앞서 25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정부가 한시적 공매도 금지를) 아직 검토만 해 매우 아쉽다”며 기름을 부었다. 그러자 27일 윤석열 대통령이 “공매도 불법 행위 대책을 수립하라”고 지시했고 28일 금융위원회·금융감독원·한국거래소에 대검찰청까지 총출동해 하루 만에 대책을 내놨다.
공매도는 주식을 빌려서 매도한 후 실제로 주가가 하락하면 싼값에 사들여 빌린 주식을 갚는 투자 전략이다. 특정 주식의 가격이 급등할 때 매도 주문이 늘면 주가가 정상 수준으로 진정될 수 있어 유동성 공급이라는 장점이 있다.
반면 매도 주문을 한 후 주가가 내려가야 차익을 얻을 수 있는 특성상 개인 투자자 사이에선 주가 하락 주범으로 꼽힌다. 예컨대 공매도 후 주가 하락을 유도하기 위해 부정적 소문이나 평가를 퍼뜨린다는 것이다. 국내 공매도 시장에서 개인 대 기관·외국인 투자자 비중은 2대 98 수준이다.
불법 공매도 근절이라는 목표는 좋다. 그런데 이번 대책은 의도가 아리송하다. 투자 피해 예방보다 처벌이 초점이다. 신속한 강제 수사 전환, 1년 이상 유기징역 또는 부당 이득액의 3~5배 벌금 부과 등이 주요 내용이다. 그나마 처벌도 쉽지 않아 보인다.
한국거래소와 학계는 아직 증시와 공매도의 상관관계를 밝혀내지 못했다. 그간 표기 위반 같은 실수 외에 주가 조작 불법 공매도 적발이 없었던 이유다. 몰수해야 할 부당 이득 산정방식도 마련되지 않았다. 검찰에서 임의로 따진 벌금액을 법원이 받아들일지 알 수 없다.
심지어 개인 공매도 참여를 확대했다. 개인 피해가 늘 수 있단 우려에도 개인 담보비율을 140%에서 120%로 낮췄다. 서둘러 내놓은 정교하지 못한 대책을 보며 ‘심기 경호’라는 의구심을 떨치지 못하는 이유다. 오랜 기간 쌓여온 금융당국에 대한 불신이 이후 더 깊어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최현주 금융팀 기자
08.02 조기취학
1970년대엔 유아교육이 보편적이지 않았다. 교육열 높은 부모는 아이 나이를 속여서라도 학교에 일찍 보내려 했다. 1976년 10월, 서울시 교육위원회는 국민학교 취학적령 미달 아동 492명의 입학허가를 취소했다. 미리 호적을 고친 800여 명은 구제됐다. 조기취학 시도가 많아 1981년 정부는 아예 입학연령을 만 5세로 낮추는 방안을 검토했다. 그러나 가뜩이나 ‘콩나물 교실’이던 과밀학급 현상이 심해진다는 등의 이유로 보류됐다.
취학연령 하향 시도는 이후에도 꾸준히 있었다. 1986년 교육개혁심의회는 어린이들의 신체 및 지능발달이 크게 향상됐다며 취학연령 하향을 건의했다. 문교부는 취학연령을 단계적으로 낮추는 방안을 마련했으나, 조기취학 대상자 선별 과정에서 입시교육을 조장할 수 있다는 이유로 백지화하기에 이른다. 이명박, 박근혜 정부에서도 꺼냈다가 집어넣은 정책인데 윤석열 대통령이 “신속히 강구하라”고 박순애 교육부장관에게 지시했다. 교육과정은 발달과정에 맞춘 것이니 선행학습시키지 말라던 교육부와 교육청의 숱한 지침이 무색해진다.
지금도 조기취학은 열려 있다. 1998년 초·중등교육법이 시행되면서 학교장 재량에 맡겼고, 2007년에는 그 제한 규정마저 사라졌다. 그러나 2007년 조기입학 아동 수는 2000명대인 반면, 만6세 취학을 미룬 입학 유예 아동은 4만여 명으로 18배에 달했다. 빠른 1~2월생 조기취학 제도가 사라진 2009년 일시적으로 조기입학 아동 수가 9000명대로 치솟았으나, 이후 꾸준히 줄어 2021년엔 537명에 그쳤다. 입학유예 아동 수 역시 757명으로 고만고만하다. 이젠 적기 입학이 대세다.
취학연령을 낮추면 졸업이 빨라져 산업 현장에 인력을 일찍 공급하는 부수적 효과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워킹맘의 경력단절도 1년 앞당길 가능성이 크다. 종일 돌봄을 해주는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은 많지만, 초등 1학년은 점심만 먹으면 집에 오기 때문이다. 돌봄 교실은 인원이 제한적이고, 학교에서 운영을 책임지지 않아 교육의 질도 기대하기 어렵다. 저학년일수록 소득 수준이나 맞벌이 여부 가리지 않고 학교가 오후 늦게까지 아이를 돌보는 시스템을 갖추는 게 교육 불평등이나 저출산 해소에 더 크게 기여할 것 같다.
이경희 이노베이션랩장
08.03 계급배반
1970년대 스웨덴의 복지 체계를 완성시킨 올로프 팔메 총리는 상류층 출신이다. 그가 속한 팔메 가문은 스웨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의 재력을 자랑했지만, 올로프 팔메는 좌파 정당(사회민주노동당)에서 평생 정치를 했다. 총리 재직 시절 그는 대학등록금 전면 무료화, 연금법 개정 등을 이끌었다. 역대 스웨덴 총리 가운데 가장 급진적이란 평가를 받는다.
경제·사회적 계급과 정치사상이 일치하지 않는 사례는 생각보다 흔하다. 주요 좌파 사상가 및 활동가들의 상당수가 중산층 이상의 지식인 출신이었다.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로자 룩셈부르크, 블라디미르 레닌 등이 모두 중상류층 출신이다.
투표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난다. 2016년 미국 대선에서는 몰락한 백인 계층 노동자들이 보수정당의 재벌 출신 후보 도널드 트럼프를 지지하며 이변을 일으켰다. 반면 버니 샌더스 같은 미국의 급진 진보는 고소득·고학력자가 주된 지지층이다. 고소득자의 진보 정당 지지를 두고는 ‘살롱 좌파’ ‘캐비어 좌파’ ‘강남 좌파’처럼 유명한 신조어가 생겨난 지도 오래됐다.
계층·투표의 불일치 때문에 정치인이 답답함을 토로하는 경우도 있었다. 1992년 12월 민주당 대선 후보였던 김대중 전 대통령은 충남 유세에서 “30년 군정(軍政) 기간 중 가장 많은 차별과 천대를 받은 계층이 농민들이다. 뭐가 좋다고 선거 때만 되면 여당(민자당)을 찍고 선거가 끝나면 후회를 하는가”라고 했다.
불일치의 원인은 뭘까. ‘프레임 이론’으로 유명한 조지 레이코프는 베스트셀러 『코끼리는 생각하지마』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사람들이 언제나 자기 이익에 따라 투표한다는 가정은 심각한 오해다. 그들은 자신의 정체성·가치관에, 자기가 동일시하고픈 대상에게 투표한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최근 “고학력·고소득자는 우리(민주당) 지지자가 더 많고, 저학력·저소득층에 국민의힘 지지자가 많다. 안타까운 현실인데, 언론 환경 때문에 그렇다”고 말해 논란이 일었다. 저학력·저소득층 상당수가 언론에 포획됐다는 의미로, 그들의 정체성·가치관을 존중하는 마음이 있다면 하기 어려운 발언이다. “대선 패배의 책임은 제게 있다. 낮은 자세로 경청하겠다”는 그의 말도 빈말이었던 것일까.
한영익 정치에디터
08.04 고집
고집(固執). 자신의 의견을 바꾸거나 고치지 않고 굳게 버틴다는 의미다. 전국시대 조나라 때 병법서를 맹목적으로 익혀 임기응변을 발휘하지 못 하고 책에 나온 방식대로만 전쟁을 치르다 참패한 장수 조괄의 고사에서 유래했다. 부정적인 뉘앙스를 살리려면 ‘독선(자기 혼자만이 옳다고 믿고 행동하는 일)’이나 ‘아집(자기중심의 좁은 생각에 집착하여 다른 사람의 의견이나 입장을 고려하지 아니하고 자기만을 내세우는 것)’으로 바꿔 써도 된다.
긍정적인 느낌을 풍기고자 할 때도 ‘고집스럽다’는 표현을 쓴다. ‘뚝심(굳세게 버티거나 감당하여 내는 힘)’과 비슷한 의미다. 좀 더 고상하게 접근한다면 ‘철학(자신의 경험에서 얻은 인생관·세계관·신조 따위를 이르는 말)’ 쯤으로 포장할 수도 있겠다. ‘버틴다’는 느낌의 뼈대는 비슷할지 몰라도 긍정과 부정의 온도 차는 꽤 크다.
11월 카타르월드컵 본선을 준비 중인 파울루 벤투(53·포르투갈) 축구대표팀 감독의 최근 행보는 ‘고집’이 갖는 의미 스펙트럼에 폭넓게 걸쳐있는 듯하다. 축구 팬들은 체력과 투지를 제1 덕목으로 치던 한국 축구의 통념을 깨고 ‘볼 점유율을 높이는 패스 위주의 전술(빌드업)’을 이식하려는 벤투 감독의 의지를 뚝심으로 받아들인다. “퍼포먼스가 뛰어나도 내 전술과 맞지 않는 선수는 과감히 배제한다”는 발언은 그만의 축구 철학으로 존중한다.
그런데 월드컵 본선을 불과 3개월 여 앞두고 여론의 동향이 빠르게 변하는 분위기다. 상대 전술과 선수, 경기 상황 등 변수를 감안하지 않고 ‘빌드업’만 강조하는 게 독선이 아닌지 의심하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부상을 당해도, 컨디션이 나빠도 특정 선수들만 선발하는 경향을 아집으로 여기는 이들도 많다. 지난달 27일 동아시안컵 한일전에서 0-3으로 완패하고서 벤투 감독이 “일본이 90분 내내 한국보다 잘 뛰었고, 우리 선수들은 잦은 실수의 대가를 치렀다”며 ‘유체이탈 화법’을 선보인 후엔 ‘책임감 결여’ 이미지가 더해졌다.
똑같은 고집이어도 경우에 따라 독선이 되기도 하고 뚝심이 되기도 하는 게 세상 이치다. 둘을 구별하는 기준은 주어진 상황을 객관적으로 읽는 눈, 그리고 열린 마음으로 편견 없이 듣는 귀다. 비단 벤투 감독만을 위한 충고는 아닐 듯싶다.
송지훈 스포츠디렉터 차장
08.05(금) 대통령 휴가
1942년부터 미국 대통령의 전용 별장이었던 ‘캠프 데이비드.’ 워싱턴포스트에 따르면 미 대통령이 가장 많이 찾는 여름 휴양지다. 미국은 개인 별장이나 고급 휴양지에서 여름 휴가를 보내는 대통령도 많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텍사스주 크로퍼드에 위치한 개인 목장에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매사추세츠주 마서스 비니어드 섬의 고급 맨션을 빌려 여름 휴가를 보냈다.
한국의 역대 대통령은 대체로 대통령 전용 별장으로 여름 휴가를 갔다. 대통령 별장은 여러 곳이 있다. 경남 거제 북단의 저도(猪島)는 이승만 대통령이 처음 휴양지로 사용한 뒤 박정희 대통령 시절인 1972년 대통령 별장으로 공식 지정됐다. ‘바다의 청와대’라는 뜻에서 ‘청해대(靑海臺)’로 불렸다. 1983년엔 전두환 대통령 지시로 충북 청원군 대청호 인근에 ‘청남대(靑南臺)’가 준공됐다. 원래 ‘봄을 맞이하듯 손님을 맞이한다’는 뜻의 ‘영춘재(迎春齋)’로 불렸다가 1986년 ‘남쪽의 청와대’라는 청남대로 이름이 바뀌었다.
청남대는 김영삼 대통령이 애용해 ‘청남대 구상’이라는 단어가 탄생할 정도였다. 금융실명제 같은 굵직굵직한 조치가 김 대통령이 청남대로 여름휴가를 다녀오면 발표되곤 했다. 김 대통령이 청남대를 자주 찾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취임 직후 권위주의 청산 차원에서 청남대만 남겨두고 다른 곳은 대통령 별장에서 해제했기 때문이다. 청남대도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3년 민간에 전면 개방됐다.
저도는 2008년 이명박 대통령이 다시 대통령 별장으로 지정했다. 사실상 유일하게 남아 있는 대통령 휴양시설인 셈이다. 저도와 함께 경호가 용이하고 통신 시설이 잘 갖춰진 군 휴양시설도 선호되는 추세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일부터 닷새간의 여름 휴가에 들어갔다. 지방 방문 일정을 취소하고 서울 서초동 자택에 머무르는 중이라고 한다. 취임 이후 지금까지 윤 대통령의 국정 운영은 거침이 없었다. 결과는 취임 후 석 달도 안 돼 20%대로 떨어진 국정 수행 지지율이다. 온전히 휴식만 취할 수 없었을 첫 휴가다. 휴가 복귀 후 윤 대통령이 내놓을 정국 구상에 관심이 쏠린다. 대통령이 바뀌면 지지율도 반등할 것이다. 내년에는 저도가 됐든, 제주도가 됐든 여름 휴가를 만끽하는 대통령의 모습을 보고 싶다.
위문희 사회2팀 기자
08.08(월) 짤
“우리는 역사 중간의 아이들. 지구를 탐험하기엔 너무 늦었고, 우주를 탐험하기엔 너무 이르지.”
영어권 인터넷 밈(meme), 그러니까 ‘짤’의 대부분이 유통되는 커뮤니트 사이트 레딧에 8년 전 올라와 유명해진 문장이다. 여기에 추천을 가장 많이 받은 답변은 다음과 같다. “‘쩌는(dank)’ 밈 탐색엔 딱 좋은 시대에 태어났지.”
한국에선 밈보다 ‘짤방’(짤림방지)과 ‘짤’이 먼저 쓰였다. 밈과 짤을 구분해야 한다는 사람도 있으나, 함께 써도 대세에 지장 없다. 짤은 온라인 사진 커뮤니티에 글을 올릴 때 사진을 첨부하지 않으면 운영진이 삭제해서 생긴 말이다. 귀여운 동물이나 연예인 사진을 첨부해 짤림을 막던 단순 형태에서 텍스트를 넣거나 움직이는 수준으로 다양하게 진화했다. 해외에서도 진원지는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다. 온라인 논쟁이 길어지면 반드시 서로를 나치라고 비난하게 된다는 ‘고드윈의 법칙’을 만든 미국 변호사 마이클 고드윈이 가장 먼저(1994년) 밈 개념을 인터넷에 끌어다 썼다.
문화 유전 설명을 위해 모방(mimesis)과 유전자(gene)를 단어로 조합한 영국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는 자신의 개념이 인터넷 바이럴이라는 의미로 ‘납치된’ 상황을 썩 좋아하지는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실 도킨스 본인도 꽤 사랑받는 짤 재료다. 그의 얼굴이 ‘밈을 밈이라고 하는 것이 밈이야’와 같은 문장과 합성돼 온라인을 떠돈다. 어쨌든 밈은 도킨스가 46년 전 쓴 『이기적 유전자』의 핵심 논지보다 유명해졌다.
왜 사람들은 끊임없이 짤을 생산할까. 가장 큰 이유는 큰 노력 없이 내 생각을 불특정 다수에게 ‘감염’ 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대중의 반응이 오면 느끼는 소소한 성취감도 중독적이다.
덕분에 이젠 프로들이 이 세계에 뛰어든다. 짤은 각종 마케팅과 정치 캠페인에 어색한 형태로 등장해 흥행을 꿈꾼다. 최근 몇 개의 억지 짤과 혐오 짤을 보면서 이 문화가 세대를 넘어 유전될지 궁금해졌다. 몇몇 초등학생 부모에게 물었더니 “애들 사이에선 이제 짤을 잘 안 쓴다”는 말이 돌아왔다. 대신 메신저에서 ‘크크루삥뽕’과 같은 외계어를 주고받으며 논다고 한다. 짤의 시대, 그다음은 더욱 해석하기 힘들 전망이다.
전영선 K엔터팀 팀장
08.09 대통령 지지율
미국 역사상 가장 인기가 없었던 대통령은 누구일까.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중도 사퇴한 리처드 닉슨, 성 추문으로 탄핵 직전까지 갔던 빌 클린턴, 임기 내내 막무가내식 언행을 일삼았던 도널드 트럼프. 모두 아니다.
1945년부터 53년까지 제33대 미국 대통령을 지낸 해리 트루먼이다. 임기 후반 그의 지지율은 22%로 주저앉았다. 미국 여론조사기관 갤럽이 대통령 지지율 조사를 시작한 1938년 이후 가장 낮은 수치다. 닉슨(24%)과 트럼프 전 대통령(34%)도 이 기록은 깨지 못했다. 트루먼 취임 직후 2차 세계대전이 끝났다. 전쟁 후유증은 혹독했다. 물가가 급등했고 실업자가 속출했다. 1947년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14.4%를 찍었다. 70~80년대 오일쇼크 때도 깨지지 않은 대기록이다. 높은 물가와 실업률에도 트루먼 대통령은 제대로 된 해법을 내놓지 못했고, 여론은 최악의 지지율로 화답했다.
그렇다면 한국 대통령 중에선 누가 가장 인기가 없었을까. 미국과 달리 비교할 대통령이 많진 않다. 대통령 지지율 조사의 역사가 그리 길지 않아서다. 살벌한 군부 독재 시절엔 제대로 된 여론 조사가 가능했을 리도 없고. 1988년 이후 한국갤럽이 정기적으로 시행한 대통령 직무 수행 평가를 기준으로 한다면 김영삼 전 대통령이다. 임기 말 그의 지지율은 단 6%에 불과했다. 1997년 IMF 국가 부도 사태가 터진 때다.
대통령의 인기를 결정짓는 가장 큰 요인은 무엇보다 경제다. 지지율의 역사가 말해준다.
윤석열 대통령의 지지율이 최근 화두다. 취임 석 달 만에 20%대로 미끄러진 지지율을 두고 분석이 난무한다. 인사 실패와 만 5세 입학 논란으로 대표되는 정책 난맥상, 불통, 오만. 여러 이유가 꼽히지만 핵심은 경제 지표다.
1998년 이후 최고치로 올라선 물가 상승률, 금융위기 때와 맞먹을 만큼 불안하게 움직이는 금리와 환율. 곳곳에서 위기 징후가 나타나고 있지만 무력하다 못해 경제에 무관심해 보이는 대통령에 여론은 무엇보다 화난 거다.
각종 경제 관련 회의에 찬조 출연해 장관들에게 “잘 챙기라” 잔소리하고, 하나 마나 한 현장 순시 몇 번 더하는 건 소용없다. 그리고 분명한 건 대통령 임기는 유한하지만 ‘실패한 대통령’이란 꼬리표는 영원하다는 점이다.
조현숙 경제정책팀 차장
08.10 실력
실력. 윤석열 대통령이 유난히 강조하는 키워드다. 취임 전에는 주로 전 정부를 비판하는 데 썼다. 지난해 12월 경제 유튜브 삼프로TV에 출연해 “실력 없는 정부는 하면 할수록 마이너스다. 지금 정부는 실력 없는 정부”라고 직격탄을 날린 게 대표적이다.
취임 이후엔 주로 인사의 당위성을 옹호하려 썼다. 지난 3월 기자회견에선 “각 분야에서 최고 경륜과 실력 있는 사람을 뽑아야 한다”고 말했다. 한동훈 법무부 장관을 임명하면서 “절대 파격 인사가 아니다. 영어 실력이 유창하다”고 말한 것도 유명한 일화다. 검찰 편중 인사, 서오남(서울대 출신 50대 남성) 일색 인사란 지적이 쌓여갈 때도 윤 대통령은 ‘일을 잘할 테니까 믿어달라’고 대응했다.
한데 지금 이 정부의 실력에 박수 칠 국민이 얼마나 될까. 속도만 앞세운 경찰국 설치는 공감을 얻지 못했다. “가뜩이나 먹고 살기 힘든데 이게 그리 급한 일이냐”는 비판 앞에 ‘경찰의 민주적 통제’라는 명분은 퇴색됐다. 청년을 돕겠다며 내놓은 채무조정 지원방안은 “빚내서 주식·코인에 투자한 사람을 왜 우리 세금으로 돕느냐”는 반발을 샀다. 시대의 화두가 ‘공정’인데 민심을 제대로 읽지 못한 탓이다. 코로나19 재확산에도 존재감이 없는 질병관리청이 ‘질병관람청이냐’는 조롱을 듣는 것도 딱히 이상하지 않다.
화룡점정은 초등학교 입학 연령을 5세로 조정하는 학제 개편안. 이 나라에서 가장 강력한 파워를 자랑하는 학부모를 상대로, 전혀 준비되지 않은 키워드를 던졌다. 실력은 차치하고, 최소한의 정치 감각조차 안 보인다. 장관이 발표한 걸 대통령실이 해명한다는 건 사전 조율 기능에 문제가 생겼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런 일이 수차례 반복되고 있다.
정부의 실력은 정책에서 나온다. 정책은 애초에 그림도 잘 그려야 하지만, 일 처리도 깔끔해야 한다. 일단 내부의 원활한 소통이 전제돼야 동력이 생긴다. 생각이 다른 정책 수요자를 설득하고, 속도 조절을 하는 것도 필수다. 이 모든 걸 잘해도 칭찬받는 건 쉽지 않다. 반면 실력 없다고 찍히는 건 한순간이고, 회복도 어렵다. 윤 대통령이 처한 상황을 낙관하기 힘든 이유다.
일주일 뒤면 취임 100일을 맞는다. 지지율은 29.3%(8일 리얼미터). 국민이 지금, 대통령의 실력을 묻고 있다.
장원석 S팀 기자
08.11 블랙 엘리펀트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 영국 극작가 버나스 쇼(1856~1950)가 직접 주문·제작했다는 묘비명이다. ‘우물쭈물’은 오역이라 알려졌지만 ‘이렇게 살지 말았어야 했는데’라는 후회를 무덤까지 반복했다는 허무하고도 해학적 표현이 공감을 얻어, 그 자체로 새로운 명언이 됐다.
이 문장이 주는 교훈은 ‘알고도 못한 일’에 대한 한탄이다. 생각도 못 한 천재지변을 당하면 황망하고 고통스러울지언정 후회할 건 없다. 하지만 뻔히 알고도 방치하다 스스로 키운 재앙과 맞닥뜨리는 일만큼 뼈아픈 일도 없다.
미래학에선 이런 부류의 재앙을 ‘블랙 엘리펀트’라 부른다. 방안의 커다란 코끼리가 온 집안을 풍비박산 내는 데도, 집주인은 관성대로 못 본 척하며 아무 조치도 하지 않는 상황, 즉 실현 가능성이 매우 높은 위기에 대응하지 않아 벌어진 재난을 뜻하는 용어다.
널리 알려진 ‘블랙 스완’은 ‘예상치 못한 일이 실제 벌어져 맞이한 위기’란 의미로, 블랙 엘리펀트와 다르다. 백두산 화산 폭발이나 혜성의 지구 충돌 같은 극단적 사건이 블랙 스완이라면, 기후 위기나 출산율 저하 등 ‘예고된 위기’가 블랙 엘리펀트다.
불확실성이 커지면 블랙 스완도 블랙 엘리펀트로 둔갑한다. 팍스 아메리카나(미국 주도의 세계 평화)의 종말, 3차 대전 등은 전형적인 블랙 스완 시나리오 사례였지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중국의 대만 위협을 목도한 지금은 블랙 엘리펀트로 바꿔 보는 시각도 많다.
지난 8일부터 수도권에 쏟아진 기록적 폭우를 두고 정치권에서 책임 공방이 격화되고 있다. 특히 서울의 고질적인 침수 지역인 강남역 일대가 또다시 물에 잠기면서 서울시의 예방 대책이 미흡했단 지적이 나오자, 해법 찾기에 앞서 ‘박원순 탓, 오세훈 탓, 시의회 탓’ 등 ‘네 탓 시리즈’가 쏟아졌다.
강남역 일대는 상습 침수 지역이다. 2010년, 2011년, 2012년, 2020년 집중호우 때도 막대한 피해를 보았다. 기후 변화로 국지적 집중호우가 더 잦고 강해질 것 역시 예고된 일이다. 이번 물난리가 누구 탓인지 모르겠으나, 분명한 건 모두가 알면서도 재앙으로 키운 블랙 엘리펀트란 사실이다. 우물쭈물, 아니 네 탓 공방하다 이럴 줄 알았다.
박형수 국제팀 기자
08.12(금) 정치의 사법화
‘정치의 사법화’(judicialization of politics)는 국가의 주요 정책이 정치 과정이 아닌, 사법 과정에서 결정되는 현상을 일컫는 말이다. 국내에서는 대법원과 함께 양대 최고법원 지위를 가진 헌법재판소가 줄곧 그 논란의 대상이었다. 2004년 ‘서울=수도’라는 관습헌법을 근거로 헌재가 신행정수도건설특별법 위헌 결정을 내렸을 때가 대표적 예로 꼽힌다. 당시 강금실 법무부장관이 “이 문제는 정치가 해결해야 할 문제지 법으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다”라고 꼬집었지만, 여야는 끝내 노무현 정부 최대 국정 현안이었었던 행정수도 이전 문제를 헌재 심판대에 올려놓았다.
이외에도 이라크 파병(2004), 통합진보당 해산(2014), 김영란법 존치(2016) 등 굵직한 현안이 그간 헌재 손에서 판가름났다. 법조계 일각에는 “민주주의·법치주의 확산과 함께 전 세계 여러 국가에서 널리 확산되는 현상”(윤영미 고려대 교수)이라며 정치의 사법화를 불가피한 것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헌재 연구관 출신인 윤 교수는 2018년 논문에서 ‘헌재가 국민의 지배적 여론에 부합하거나 적어도 그것에 반하지 않는 결론을 내리는 경향이 뚜렷하다’고 적었다.
문제는 정치의 사법화가 최근 헌재 차원을 넘어 일선 법원과 검찰에까지 만연해졌다는 점이다. 지난 대선 과정에서 더불어민주당이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를, 국민의힘이 이재명 민주당 후보를 여러 건 고소·고발했다. ‘누가 이겨도 피의자 대통령’ ‘검찰 칼끝에 선 대선’ 등의 오명 속에 지난달 초 여야 지도부가 대선·지방선거와 관련된 상호 고소·고발을 일괄 취하하자고 논의했지만 결국 성사되지 않았다.
이제 정치의 사법화는 본안 소송도 아닌 가처분 인용 여부에 집권 여당의 운명이 내맡겨지는 수준까지 전락했다.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지난 10일 자신의 대표직을 박탈하고, 비상대책위원회 체제로 전환하려는 당의 결정에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서를 냈다. “정당의 운명을 정치인들이 결정 못 하고 판사가 결정하는 한심한 정당이 될 수는 없다”(하태경 의원)는 내부 우려가 무색했다.
물밀듯 밀려오는 여의도발 갈등에 법원도, 검찰도 난색을 보이고 있다. 학계에서도 “사법적 결정에 대한 정치적 평가는 필연적으로 개개 법관의 독립을 위협하게 된다”(김병록 조선대 교수)는 비판이 나온다.
심새롬 정치팀 기자
08.15(월) 반지하 퇴출
지하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1970년부터다. 당시 남북 관계가 일촉즉발로 치닫자 정부는 일반 주택에도 벙커가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주택 지하층 설치를 의무화했다. 전쟁에 대비해 만든 지하층은 당시 주택난과 맞물려 저렴한 주거공간으로 활용됐다.
1984년 주택 지하층의 지상 노출 높이가 3분의 1에서 2분의 1로 완화되면서 ‘반’지하가 등장했다. 이전 지하보다 채광·환기가 다소 유리했고 궁한 서민들에게 저렴한 안식처 역할을 했다.
반지하에 대한 인식은 물난리 이후 달라졌다. 1990년대 들어 반지하 침수 피해가 도마 위에 올랐고 정부는 ‘반지하 퇴출’에 나섰다. 1998년 서울시는 상습 침수지역 피해의 80%가 반지하(지하)라며 침수 피해가 잦은 지역의 반지하 신축을 금지했다. 1999년은 주택 지하층 의무 설치 규정을 폐지했다. 2001년, 2010년도 물난리가 나자 피해 지역의 반지하 신축 금지 카드를 빼 들었다. 2020년엔 반지하 거주자의 공공임대주택 이주 지원 대책을 내놨지만, 아직 실태 조사도 마치지 못했다.
115년 만의 폭우로 지난 8일 서울 관악구의 반지하에 살던 장애인 가족이 목숨을 잃었다. 이틀 만에 서울시는 또다시 수해 예방 대책이 아닌 반지하 퇴출 대책을 내놨다. 반지하 신축을 금하고 20년 안에 기존 반지하를 없애며 반지하 거주자의 공공주택 입주·주택 바우처를 지원하겠단다.
구조상 침수에 취약한 반지하를 없애겠다는 취지는 좋다. 문제는 반지하 거주자들의 거취다. 이들도 주거 여건이 열악하다는 것을 알지만, 당장 ‘먹고 사는 일’이 급해 저마다 이유로 반지하를 택했다.
공공주택 입주 지원은 요원하다. 지난해 서울 주거 상향 사업을 통해 공공주택에 입주한 가구(1669가구) 중 반지하 가구는 247가구(14.8%)에 불과하다. 1년간 월 최대 12만원을 지원하는 주택 바우처도 현실성이 없다. 서울의 3.3㎡(약 1평) 쪽방 평균 월세도 30만원이다. 결국 이들은 반지하보다 더 열악한 고시원이나 판잣집으로 가야 할 판이다. 반지하 소유주의 반발도 만만찮다. 임대료를 받기 위해 매입한 개인 재산을 정부가 박탈하는 셈이라서다.
애꿎은 반지하 탓이 아니라 그냥 ‘수해 대비가 미흡했다. 도시 배수 시스템을 정비하겠다’고 담백하게 대응할 수는 없는 걸까.
최현주 금융팀 기자
08.16 맨홀
‘맨홀(manhole)’은 사람이 드나드는 구멍이다. 상·하수도, 도시가스, 전력선, 통신망 등 지하 시설을 점검하고 보수하기 위해 지상과 수직으로 연결한 통로다. 평소에는 묵직한 맨홀 뚜껑으로 막아둬 보행자나 차량이 빠지지 않도록 한다.
맨홀의 역사는 고대 로마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로마의 토목 기술자들은 벽돌로 지하 하수도를 만들어 오물을 먼 하류로 흘려보냈다. 오수와 접촉할 일이 사라지니 악취와 함께 전염병 위험도 줄어들었다. 당시에도 하수도에 접근해 청소할 수 있는 통로를 만들었고, 돌로 맨홀 뚜껑을 만들어 덮었다. 서기 100년경 하수도 기반시설이 완공됐고, 이는 로마가 인구 100만이 넘는 대도시로 성장하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로마제국이 멸망하면서 18세기 중엽 근대적 하수도가 탄생할 때까지는 큰 발전이 없었다.
18세기 산업혁명이 시작되면서 도시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자 오물과 쓰레기가 하천으로 흘러들어 악취가 진동했다. 영국 빈민구호법 제정 위원회 책임자로 일했던 에드윈 채드윅은 이 같은 오염물에서 발생하는 유독가스가 전염병의 원인이라면서 상하수도 설치, 수세식 화장실 사용, 하수도 및 하수관로 설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1848년 영국 공중위생법이 제정되고, 근대적 상하수도 시스템이 정착되기 시작한다.
『한국 하수도 발전사』에 따르면 우리나라에 근대식 하수도 시설이 본격적으로 축조·개수된 건 1918년부터 7년간 162만원을 투입한 제1기 하수도 개수사업부터다. 철근콘크리트로 만든 하수관을 지하에 묻고, 지름 1.2~2m짜리 원형 맨홀을 35군데에 설치했다. 당시 개거(위가 열린 수로) 1만3115m, 암거(땅에 묻은 수로) 4691m가 마련됐다. 그로부터 1세기가 지난 오늘날 하수관로 총 길이는 서울 1만184㎞, 전국 16만 3099㎞에 달한다. 하수관로에 설치된 맨홀만 100만개에 육박하며, 그중 4분의 1이 서울에 있다.
맨홀은 평소 시민의 안전을 지켜주는 시설이지만, 이번 폭우 같은 재난에선 공포의 대상이 된다. 맨홀 사고는 드물지만 치명적이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지난 10년간 각종 관거·맨홀 등에서 작업하다 숨진 이가 15명에 달한다. 보행자와 지하에서 작업하는 노동자 모두 안전한 도시가 돼야 한다.
이경희 이노베이션랩장
08.17 내부총질
정치권에서는 당 내부 비판을 종종 ‘내부총질’이란 말로 표현한다. 선거를 앞두고 끄집어내는 경우가 많다. 전쟁을 앞두고 아군을 공격해 전력을 약화한다는 이유다. 윤석열 대통령이 최근 이준석 전 대표를 “내부총질이나 하던 당 대표”라고 언급한 메시지 역시 대선 과정을 염두에 뒀을 가능성이 크다. 민주당 대선 경선 과정에서도 이낙연 전 대표가 이재명 의원의 대장동 특혜 의혹을 지적했을 때 “내부총질” 주장이 여러 차례 나왔다.
2010년대 중반 이후 내부총질 사용 빈도가 더 잦아지고 있다. 한국언론진흥재단 ‘빅카인즈’를 보면 전국 종합일간지·방송3사 뉴스에서 ‘내부총질’이 사용된 건 216건이었는데, 대부분 2016년 이후 사용됐다. 정치적 입장에 따라 같은 사람이 내부총질 용어로 비판을 하기도, 받기도 한다. 정청래 민주당 의원은 2015년 문재인 당시 대표가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 묘소를 참배한 뒤 “독일이 사죄했다고 유대인이 히틀러 묘소를 참배할 수 있겠느냐”고 직격했다가, “뒤에서 대표에게 총질한다”(주승용 최고위원)는 비판을 받았다.
8·28 전당대회에서 친명 최고위원 후보로 나선 정 의원은 최근 “사법리스크 운운하면서 내부총질하는 건 동지의 언어가 아니다”라며 공격하는 입장이 됐다. 기소될 경우 당직을 정지하는 민주당 ‘당헌 80조’ 개정에 대한 당내 비판을 견제하는 발언이었다.
장제원 의원도 2017년 “당이 혁신이라는 이름으로 극우화되는 것 같아 심각한 우려를 하게 된다”고 말했다가, 홍준표 당시 대표로부터 “내부총질은 안 된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에 장 의원이 “제 주장은 내부 총질이 아니다”라며 항변하는 일도 있었다.
반대로 2020년 부산시장 보궐선거를 앞두고 “후보가 안 보인다”는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을 향해 장 의원은 “당 대표가 이렇게까지 내부총질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공격했다. 장 의원은 이준석 전 대표를 둘러싼 당 내홍 상황에서도 그를 ‘내부총질러’라며 공격하는 입장에 가깝다.
달라지지 않는 원칙도 있다. 내부총질은 늘 당 주류가 이견을 억누르는 언어였다는 점이다. 결과적으로 내부 비판을 입막음해 당이 다원성을 상실할 가능성도 크다. 양당이 조금 더 내부총질에 관대한 정당이 됐으면 좋겠다.
한영익 정치에디터
08.18 대통령배
2022년 고교야구 최강팀을 가리는 제56회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 우승 트로피는 대전고의 품에 안겼다. 17일 서울 목동야구장에서 열린 결승전에서 대전고는 전주고를 7-4로 꺾고 정상에 올랐다. 1994년 이후 28년 만에 이 대회 왕좌를 되찾아 환호했다.
대통령배는 우승한 개인 또는 팀에게 대통령의 명의로 주는 상배(賞杯), 또는 그 상배를 주는 대회를 일컫는다. 국가원수의 명칭을 타이틀로 쓰는 만큼, 대통령배의 권위와 존재감은 종목을 막론하고 비교 불가다. 축구·야구·배구 등 메이저 스포츠뿐만 아니라 씨름·수영·복싱·경마·e스포츠 등 다양한 분야에서 대통령배는 공히 가장 주목 받는 대회다.
국제적으로 널리 이름을 알린 사례도 있다. 1971년 창설해 1999년 역사 속으로 사라진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다. 명칭은 수차례 바뀌었다. 박대통령컵 쟁탈 아시아축구대회(1971~75)로 시작해 박대통령컵 쟁탈 국제축구대회(1976~79),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1980~1993)를 거쳐 코리아컵 국제축구대회(1995~99)로 마감했다.
명칭 변화만큼이나 우여곡절이 따랐지만, 아시아에서 변방으로 취급받던 한국 축구는 대통령배를 통해 세계 무대를 경험하며 경쟁력을 키웠다. 멕시코·크로아티아·에콰도르 등 각국 대표팀뿐만 아니라 에인트호번(네덜란드)·레버쿠젠(독일)·벤피카(포르투갈) 등 유럽 명문 클럽도 출전했다. 대통령배는 한때 메르데카컵(말레이시아)·킹스컵(태국)과 더불어 아시아 3대 축구대회로 자리매김했다.
대통령배 고교야구 대회는 한국 야구의 젖줄 역할을 했다. 선동열·박용택(이상 은퇴)·추신수(SSG)·강백호(KT) 등 이 대회 MVP 출신들을 비롯해 김시진·이만수·이승엽·이종범(이상 은퇴)·류현진(토론토)·이정후(키움) 등 두각을 나타낸 선수들이 한국 야구의 기둥으로 성장했다.
대통령배를 높이 들며 올해 고교야구 무대를 제패한 대전고 청춘들에게 축하 인사를 전한다. 우승 문턱에서 멈춰 선 전주고를 비롯해 나머지 참가 팀에게도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대통령배 타이틀 아래 최선을 다해 도전하며 경험한 땀과 눈물과 좌절, 그리고 환희가 저마다의 선수 인생에 값진 자양분이 되길 바란다.
스포츠디렉터 송지훈 차장
08.19(금) 총경 인사
총경은 ‘경찰의 꽃’으로 불린다. 일선 경찰서장으로 나가 수백 명에서 1000여 명의 부하 직원을 지휘한다. 11개 경찰 계급 중 다섯 번째로 높은 계급이다. 지난 6월 말 기준 13만2421명 경찰 조직에서 총경은 0.48%인 632명뿐이다.
일선 경찰서장 중에서도 서울 지역 서장은 ‘꽃 중의 꽃’이다. 서울 경찰서장을 지내야 바로 위 계급인 경무관으로 가는 데 유리하기 때문이다. 경무관은 ‘경찰의 별’이라고 한다. 31개 서울 경찰관서 중 한 곳에서 서장을 지내고 경찰청 또는 서울경찰청 참모 생활을 하면서 경무관으로 승진하는 것이 경찰 내부의 승진 ‘룰(rule)’이다. 옛날엔 강남경찰서나 영등포경찰서처럼 일이 많은 곳을 선호했지만, 요즘은 꼭 그렇지도 않다. 부임할 순서가 돌아오면 대부분 거주지와 가까운 곳을 써낸다고 한다.
지난 11일 총경 293명에 대한 상반기 전보 인사가 발표됐다. 총경 인사가 주목받는 건 경무관 승진자 20%를 순경 등 일반 출신으로 채우겠다는 윤석열 대통령 공약 때문이다. 그러려면 바로 아래 계급인 총경급부터 경찰대나 간부후보 출신이 아닌 일반 출신이 많아져야 한다. 본 게임은 하반기 총경 승진 인사다.
경찰청에 따르면 6월 말 기준 총경 아래 계급인 경정은 총 3030명. 이들을 입직별로 분석해보면 일반 출신이 1677명(55.3%)으로 가장 많았다. 다음으로 경찰대 852명(28.1%), 간부후보 483명(15.9%), 고시특채 18명(0.6%) 순이다. 총경급으로 가면 경찰대 출신(381명, 60.3%) 비율이 높아지고 일반 출신(85명, 13.4%) 비율은 떨어진다.
총경 승진 인사에선 소속 지방청장의 평가가 중요하게 작용한다. ‘경찰공무원 승진임용 규정’에 따르면 총경 이하 경찰공무원에 대해서는 지방청장이 승진대상자 명부를 작성한다. 승진심사 기준에도 지방청장의 점수가 포함돼있다. 지방청장 17명 중 경찰대 출신은 12명(70.6%). 비경찰대 출신 고위직에게 물어보면 경정에서 총경으로 승진할 때가 가장 힘들었다고 말한다.
지난 2일 총경 이상 경찰 고위직 인사를 담당하는 행정안전부 경찰국까지 출범하면서 경정급들의 셈법이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다. 연말 총경 승진 인사를 향한 본 게임은 이미 시작됐다.
위문희 사회2팀 기자
08.22(월) X세대
‘1970~79년 사이에 태어난 세대’. 시각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한국에선 통상 이렇게 정의한다. ‘알 수 없는 미지수 세대’라는 평가 속에서 등장했다. 화려한 패션과 이전 세대와 완전히 구분되는 가치관으로 주목받은 시기는 짧았다. 서태지 데뷔(1992년)와 외환위기(1997년) 사이 쏟아진 X세대 담론이 무색하게 그 이후 조용하게 살고 있다. 신인류는 어쩌다 투명인류가 된 것일까.
우선 X세대의 결정적 특징 하나. 바로 ‘n86’(80년대 학번 60년대생) 후배 세대라는 것이다. 사회생활을 시작할 때부터 모셔온 n86은 아직, 아주, 매우 건재하다. 그 사이 기센 밀레니얼(1980년대 초~2000년대 초 출생)은 이미 사회 중심으로 진격했다. 70년대생을 제치고 상장사 대표도 되고, 공당 대표에도 오른다.
X세대는 n86의 디테일하지 않은 지시를 속으로 욕할지언정 이행해내는 데 익숙하다. ‘그걸 왜?’라고 따지는 밀레니얼을 달래느니, 직접 하는 게 빠르다는 경험을 쌓아왔다. 이러니 밀레니얼 입장에서 X세대는 n86과 한통속이다. X세대 리더십이 보이지 않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높은 확률로 n86세대와 동반 퇴장, 혹은 ‘패싱’이 예고돼 있다.
X세대를 ‘저평가 우량주’라고 보는 『다정한 개인주의자』 김민희 작가는 조금은 희망적 관측을 내놓는다. 그는 X세대가 밀려난 이유에 대해 ‘자리싸움은 애초에 자리를 차지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야 가능한데, (자리에) 관심 있는 X세대가 많지 않다’고 본다. 또 현재 X세대가 영원한 조연으로 남거나 나다움을 찾아 새로운 시대의 리더가 될 갈림길에 있다고도 분석한다.
여기까지 읽으면 뜨거운 각성이 와야 하는데, 그보다 조기 퇴장의 장점을 애써 생각해내려고 하는 것을 보니 이 X세대는 아무래도 틀린 것 같다. 그래도 희망은 있다. X세대는 문화에서 만큼은 독보적 존재감을 뽐낸다. 정치·경제·사회 무대에서 밀려나도, 입맛에 딱 맞는 보고 즐기고 소비할 거리가 공급 중단될 일은 없다. 그리고 X세대의 선택은 자주 메가트렌드가 된다(『영 포티, X세대가 돌아온다』). 그동안 길러온 취향과 안목은 누구도 빼앗지 못한다. 그러니, ‘힘내라, X세대’.
전영선 K엔터팀 팀장
08.23 밈 주식
‘밈 주식(Meme stocks)이 돌아왔다.’
지난 19일(현지시간) 뉴욕타임스에 실린 기사 머리글이다. 밈은 트위터나 페이스북 같은 소셜미디어를 타고 유행하는 사진·동영상을 뜻한다. 주식이란 말이 뒤에 덧붙어 밈 주식이란 단어가 생겨났다. 밈 주식에서 매출·순익 등 지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름 그대로 소셜미디어에서 떴다 지는 유행 같은 주식이다.
밈 주식이 부상한 건 지난해다. 월가가 아닌 커뮤니티 사이트 레딧을 주 무대로 활동하는 미국의 젊은 개인투자자가 열풍을 주도했다. 이들은 쓰는 말도 남다르다. 자신을 ‘유인원’이라고 칭한다. 영화 ‘혹성탈출’에서처럼 자신들의 무지함을 비웃는 인류(월스트리트 엘리트 투자가)를 몰아내고 지구(주식시장)를 점령하겠다는 욕심을 숨기지 않는다. 손실이 나도 흔들리지 않고 가격을 떠받치는 투자자를 ‘다이아몬드 손’이라 칭송하고, 주가를 끌어올리며 ‘달을 향해(to the moon)’ 가자고 외친다. 가격이 떡상(급등)할 때까지 존버(끝까지 버티기)한다는 동학·코인개미와 닮았다.
밈 주식 대표주자는 게임스톱이다. 사양 산업인 비디오게임 유통을 하던 게임스톱은 실적 부진으로 파산 위기에 몰렸다. 헤지펀드의 공격 대상이 된 게임스톱을 지켜내자며 개인투자자가 뭉쳤다. 2020년 4월 주당 3.25달러에 불과했던 게임스톱 주가는 지난해 1월 347.5달러까지 치솟았다. 1만692%에 이르는 무시무시한 수익률을 자랑했다. 몇몇 헤지펀드의 파산도 이끌어냈다.
하지만 상처뿐인 승리였다. 게임스톱 주가는 이후 수십 분의 1 수준으로 추락했고, 고점에 산 투자자는 손실을 떠안았다. 영화관 체인 AMC 엔터테인먼트, 생활용품 업체 베드배스앤드비욘드(BB&B), 블랙베리 등 다른 밈 주식도 비슷한 길을 걸었다.
밈 주식이 최근 미국 증권가를 다시 달구기 시작했다. BB&B나 AMC 같은 밈 주식이 하루 사이 폭등과 폭락을 거듭하는 중이다. 미국 중앙은행이 긴축 속도전을 벌이고 있어 주가 붕괴 우려는 지난해보다 더하다. 블룸버그 기고에서 몰딘투자연구소의 투자전략가인 재러드 딜리언은 밈 주식에 다시 빠진 개미들을 두고 월가의 오랜 속담을 다시 꺼내 들었다. ‘(쉬지 않고 굴러오는) 증기 롤러 앞에서 동전을 줍고 있다.’
조현숙 경제정책팀 차장
08.24 리볼빙
‘회전하다’는 뜻의 영어 revolve는 ‘돌다’는 의미의 라틴어 volvere에 접두사 re가 붙은 단어다. 자동차 브랜드 볼보(volvo), 회전식 연발 권총 리볼버(revolver) 등과 뿌리가 같다. 금융권에서 리볼빙(revolving)은 하나의 서비스명으로 쓰인다. 정식 명칭은 ‘일부결제금액이월약정’이다. 이달 결제대금 중 일부를 다음 달로 넘긴다는 뜻이다.
매달 100만원씩 쓰고, 사전에 정한 결제비율이 10%라면 첫 달엔 10만원만 결제하고, 90만원은 이월된다. 다음 달에도 100만원을 썼다면 총 결제금액은 이월된 90만원을 합해 190만원이지만 역시 10%인 19만원만 결제하고, 171만원은 다음 달로 넘어간다.
카드 산업이 발달한 영미권에선 리볼빙이 널리 쓰인다. 신용카드 소지자 중 리볼빙 사용자 비중이 70%에 달한다. 자동차·가전 같은 내구재를 제외하곤 할부가 별로 없기 때문인데, 리볼빙으로 할부 효과를 얻는 셈이다. 상대적으로 한국은 리볼빙 사용자가 적다. 식당 같은 서비스업에서도 할부가 일반적이니 대금 자체는 일시불로 결제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국내에 리볼빙 서비스가 상륙한 건 대략 20년밖에 안 됐다.
리볼빙은 장점이 있다. 당장의 상환 부담을 줄이면서, 연체까지 피할 수 있어서다. 결혼·여행같이 갑자기 지출이 늘 때 쓰면 좋다. 하지만 대금 납부를 공짜로 미뤄줄 리 없다. 국내 카드사의 리볼빙 평균 금리는 최고 연 18.43%. 현금서비스나 카드론 못지않다.
그런데도 쓰겠다는 사람이 많다. 7월 말 리볼빙 이월 잔액은 6조6651억원으로 또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 3월 이후 줄곧 늘어나는 추세다. 리볼빙은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규제에 포함되지 않는다. 돈줄 막힌 서민이 리볼빙을 사실상 추가 대출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는 셈이다. 당국도 비상등을 켰다. 지난 7월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리볼빙 불완전 판매에 대한 우려가 있다”며 금리 산정 내역 공개, 공시 주기 단축 등을 언급했다.
리볼빙을 ‘돌려막기’ 수단으로 쓰면 대출과 다르지 않다. 일반 대출은 상환 일정이라도 있지만, 리볼빙은 최장 5년까지 덜 갚은 대금과 이자가 계속 쌓인다. 스며들듯 빚의 수렁에 빠지기 쉽다. 리볼빙은 중도상환수수료가 없다. 급할 때 잠깐 쓰고 빨리 갚는 게 이득이다. 당장 어렵다면 결제비율이라도 꾸준히 높이는 게 맞다.
장원석 S팀 기자
08.25 심심한 사과
한국신문협회는 매년 NIE(신문활용교육) 워크북을 제작해 전국 초·중·고교의 신청을 받아 무료 배포한다. 워크북은 주요 시사 이슈를 주제로 정하고, 관련 기사 읽기를 통해 사고력을 기를 수 있게 구성됐다. 월드컵·전염병 등 시의성과 흥미, 학습 가치가 고루 있는 주제가 선정된다.
올해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세계의 선거 등 굵직한 이슈가 많아 ‘전쟁’이나 ‘선거’를 다룰 거라 예상했지만, 보기 좋게 빗나갔다. ‘신문기사 밑줄 치며 즐겁게 읽기’였다. 이슈가 아닌 ‘읽기 활동’ 자체를 다룬 거다.
신문협회에 주제 선정 기준이 바뀐 이유를 묻자 “요즘 학생들에겐 읽기가 가장 시급하다”고 대답했다. 초·중은 물론 고교에서도 짤막한 기사 하나 읽고 내용을 파악하는 학생이 드물다는 것이다. 시사 이슈에 대한 통합적 사고활동을 유도하던 워크북이, 충실한 정독과 사실적 이해를 돕는 교재로 바뀐 연유다.
최근 불거진 ‘심심(甚深)한 사과’ 논란은 워크북의 달라진 편제에 공감하게 한다. 깊고 간절한 마음을 담아 사과를 전한다는 의미를 가진, 매우 공적이고 정중하며 관용적인 이 표현이 어쩌다 ‘지루한 사과’로 오독돼 일부 네티즌이 분노 버튼을 누르게 됐을까.
문해력 논란은 이번이 처음도 아니다. 지난해엔 ‘금일(今日)’이 오늘이냐 금요일이냐를 두고, 2020년엔 ‘사흘’이 3일이냐 4일이냐에 대해, 2019년엔 대중문화 평론가가 ‘명징과 직조’란 고급 어휘를 써도 되느냐 마느냐에 대해 논쟁이 불붙었다.
이 논란은 종종 “누가 옳으냐”의 격한 다툼으로 번진다. “금일의 뜻은 오늘입니다”란 설명에 “오해 소지가 있는 단어를 쓰면 어떻게 하냐”고 쏘아붙이고, ‘명징과 직조’란 표현을 사용한 평론가를 향해 “대중을 상대로 한 글로 먹고살면서, 대중이 모르는 말을 쓰는 건 문제”란 힐난하는 식이다.
베스트셀러 『역행자』에선 이런 태도를 과잉 자의식이라 부른다. 자신의 문제는 회피하고 상대의 잘못으로 돌려 위안을 얻는 ‘무한 합리화’이자 발전을 가로막는 자기모순이라 설명한다. 부족한 문해력을 키우는 방법은 많다. 한자 학습, 독서, 사전 검색 등이 대표적이다. 과잉 자의식의 해결법은 탐색과 인정이다. “내가 그걸 몰랐네”라는 단순한 인정에서 발전이 시작된다.
박형수 국제팀 기자
08.26(금) 음성권
얼굴에 초상권이 있다면, 목소리에는 음성권이 있다. 음성권은 자신의 음성이 허가 없이 녹취되거나 공표되지 않을 권리를 뜻한다. 법원은 4년 전 판례에서 음성권의 실체를 처음 인정했다. 2018년 10월 서울중앙지법이 ‘누구나 자신의 음성이 함부로 녹음되지 않을 헌법상 기본권을 가진다’고 판시했고 항소심도 이를 받아들였다.
실정법 보호를 받기 시작한 데는 최근 몇 년간 음성권이 무방비로 빠르게 침해받은 환경이 영향을 미쳤다. 과거 녹취에는 ‘보이스레코더’ 등으로 불린 소형 기계가 사용됐다. 하지만 이젠 스마트폰 이용자 누구나 언제, 어디서건 주변 소리를 자유롭게 녹음한다. 삼성 갤럭시 등 국내 스마트폰에는 통화 중 녹음 기능도 있다.
유독 높은 차량용 블랙박스 보급률 역시 부지불식간 음성 녹취를 빈번히 일으키는 요인으로 지목된다. ‘법대로’, ‘증거 보존’을 좋아하는 한국인들의 차량용 블랙박스 보급률이 거의 80~90%에 달한다는 게 업계 추산이다. 미국·유럽 등 서구뿐 아니라 이웃나라 일본도 아직 보급률이 10~20%에 머무는 것과 대조적이다.
몰래 녹음이 늘 나쁜 의도로 취급되지는 않는다. 서울교통공사가 지난달 18일 직원들에게 녹음기 기능을 탑재한 목걸이형 신분증 700여개를 지급했다. 연간 150건이 넘는 지하철 이용객들의 폭행·폭언에 시달리는 역무원들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다. 간호사·판매원·캐디 등 접객 업무 종사자들 사이에서도 스마트워치나 사원증, USB 모양의 녹음기를 소지하는 게 불문율이라고 한다. 성희롱성 발언이나 폭언, 이른바 ‘진상’ 손님 등에 상시 노출된 이들이 찾아낸 일종의 자기방어책이다.
이런 가운데 상대방 동의 없는 대화 녹음을 최대 징역 10년형으로 처벌하는 내용의 통신비밀보호법 개정안이 등장해 논란이다. 윤상현 국민의힘 의원이 지난 18일 “동의받지 않은 녹음이 헌법상 행복 추구권의 일부인 음성권을 침해한다”며 박덕흠·김선교·박대수 의원 등 같은 당 의원 10명과 함께 법안을 발의했다.
의원들이 기자와의 통화, 티타임, 식사 자리에서 녹음 여부를 살피는 장면을 종종 마주하곤 한다. “지금 내 말 녹음 (안)하나”란 질문에 가장 좋은 답은 “앗, 해야 했는데 하지 않았다”라는 걸 알았다.
심새롬 정치팀 기자
08.29(월) 대통령 경호
경호는 무리가 생기고 우두머리가 등장하면서부터 있었다. 우두머리에 대한 신변의 위협은 측근들에겐 자신의 몰락이나 죽음으로 이어졌기 때문에 그를 보호해야 했다. 고조선 등 국가가 형성된 후엔 대개 군사조직에서 왕을 호위했다.
고려 후기 궁중 경호만 담당하는 최초의 경호기관인 순군만호부가 등장했다. 현재 같은 대통령 경호실이 등장한 건 1963년 박정희 대통령이 취임하면서다. 별도 독립기관인데다 수장인 경호실장은 장관급이었다. 전 세계에 독립된 대통령 직속 경호실이 있는 국가는 한국과 미국 정도다. 대개 경찰에서 경호를 맡는다.
대통령과 가족의 일거수일투족을 관리하고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다는 특성상 경호실장은 정권마다 핵심 실세로 꼽혔다. 군사정권 시절엔 ‘소통령’으로 불리며 기세가 대단했다. 군사정권이 막을 내린 후엔 권력 남용, 부정 축재 등으로 질타를 받았다. 박근혜 정부 시절엔 비선실세인 최서원(옛 최순실) 등을 ‘보안 손님’으로 구분해 검문·기록 없이 청와대 출입을 허용해 국정농단 사태 단초를 제공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대통령 경호처(실)가 요즘 또다시 죽상이다. 윤석열 대통령 취임 3개월여 만에 경호처장 경질설까지 나왔다. 대통령 일정·사진이 ‘사적인 경로’로 유출되는 잇단 보안사고 때문이다. 지난 24일 김건희 여사 팬클럽 SNS에 “윤석열 대통령 대구 서문시장 8월 28일 12시 방문입니다”는 글이 게재됐다. 대통령 동선은 보안업무규정상 2급 비밀이다. 공무원이 2급 비밀을 유출하면 형사처벌도 받을 수 있다.
그런데 비슷한 상황이 석 달 전에도 있었다. 윤 대통령 부부가 집무실과 용산 청사 잔디밭에서 반려견과 찍은 사진들이 팬클럽 SNS에 게재됐다. 취임 사흘 후엔 ‘국정 내조’를 한다며 김 여사가 만들었다는 샌드위치를 먹는 회의 참석자들의 사진이 나왔었다. 대통령실 청사 안에선 언론의 사진 촬영조차 엄격하게 통제되는데 말이다.
대통령 경호처가 유출자를 알아내긴 어렵지 않을 테다. 윤 대통령 일정이나 사진을 올린 사람에게 입수 경로를 확인하면 될 일이다. 그런데 석 달 전에도, 지금도 ‘알아보고 있다’는 두루뭉술 태도다. 사적인 경로로 유출된 정보를 보며 전 정권의 ‘보안 손님’이 떠오르는 게 기우이길 바란다.
최현주 금융팀 기자
08.30 한복
한복은 ‘우리나라의 고유한 옷’이다. 뿌리는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흔히 조선시대 복식을 전통한복이라 여긴다. 개화기 이후 유입된 서양 문물, 국권 침탈 이후 일제의 의복 통제 등으로 일상에선 점차 사라졌다. 1960~70년대에는 개량한복이 보급됐으나 한식당 유니폼으로 굳어지면서 패션으로는 매력을 잃었다.
그랬던 한복이 다시금 전성기를 맞은 듯하다. 블랙핑크의 신곡 ‘핑크 베놈’ 뮤직비디오가 공개 1주일 만에 유튜브 조회 수 2억회를 돌파했다. 멤버들이 입은 한복 의상 역시 전 세계에 소개됐다. 블랙핑크와 방탄소년단(BTS) 등 한류스타가 한복을 입고 공연하는 건 흔한 모습이다. 이들의 의상은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전통한복은 아니다.
지난주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문화체육관광부 주최 한복박람회 ‘한복상점’이 열렸다. 70여 한복 업체가 내놓은 상품은 전통한복이라기보다 한복에서 모티브만 딴 경우가 많았다. 풍성한 치마선, 한복을 연상시키는 소재와 문양, 고름이나 깃 등 한복 구성 요소의 일부만 차용하는 식이다. 디자이너들은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한복의 영역을 확장해왔다. 소비자가 선택하는 패션이어야 생명력을 잃지 않기 때문이다.
최근 패션잡지 보그 코리아가 청와대에서 한혜진 등 톱모델을 데리고 화보를 찍었다가 날벼락을 맞았다. 정치권에선 모델이 입은 의상은 한복이 아닌 것 같다, 국빈을 맞이하던 영빈관에 누워서 촬영하다니 국격을 떨어뜨렸다는 등의 비판을 쏟아냈다. 한복의 현대화와 세계화에 힘쓴 고 이영희(1936~2018) 디자이너가 파리 프레타 포르테 쇼에 참가해 저고리 없이 치마만 두른 한복을 선보여 ‘바람의 옷’이라 찬사받았던 게 무려 30년 전 일이다.
보그는 청와대보다 더 유서 깊은 경복궁 등 4대 궁에서도 화보를 촬영한 바 있다.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은 2018년 비욘세와 Jay-Z 뮤직비디오 촬영 장소로 내주고, 이를 투어 코스로 만들어 지금도 활용하고 있다. 뮤직비디오 덕에 그해 루브르 방문객이 25% 증가한 1000만 명으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가디언). 화보와 패션의 완성도에는 이의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건으로 한복 부흥이나 문화재 활용 정책 자체가 퇴행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이경희 이노베이션랩장
08.31(수) 탄핵
헌법상 탄핵심판 대상이 되는 공직자 가운데 실제로 탄핵이 된 사람은 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이 유일하다. 국회에서 소추안이 통과돼 헌법재판소 탄핵심판을 받은 사람도 3명에 불과하다. 박 전 대통령과 노무현 전 대통령(2004년), 임성근 전 판사(2021년)다. 헌재는 노 전 대통령과 임 전 판사 탄핵소추안은 각각 기각·각하했다. 국회 탄핵소추안이 헌재로 넘어간 사례 3건 가운데 2건이 최근 5년 내에 이뤄졌다는 건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애당초 한국 헌정사에서는 공직자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발의되더라도 국회 표결까지 간 경우가 드물었다. 유태흥 전 대법원장은 1985년 독재정권에 저항한 판사들을 좌천했다는 이유로 탄핵소추안이 발의돼 표결이 이뤄졌지만 부결됐다. 편파수사와 정치중립성 훼손 등을 이유로 발의된 김도언(1994년)·김태정(1999년) 전 검찰총장 탄핵소추안 역시 모두 국회 표결 단계에서 부결됐다. 여당이 다수당이었던 만큼, 야당 역시 가결을 기대하진 않았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소수 야당이 발의·표결을 통해 정치적 시위를 한 것에 가깝다.
문재인 정부에서는 장관에 대한 탄핵소추 시도가 전례 없이 자주 이뤄졌다. 보수 야당이 홍남기 전 경제부총리,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에 대한 탄핵소추안을 여러 차례 발의했다. 홍 부총리는 2020년 총선을 앞두고 재난지원금 지급 등을 문제 삼았지만, 기간 만료로 자동 폐기됐다. 반면 ‘조국 사태’로 윤석열 대통령(당시 검찰총장)과 극한 갈등을 연출했던 추 전 장관에 대한 탄핵소추안은 표결까지 이어졌다. 민주당이 압도적 다수여서 부결이 자명했지만, 표결 이후 민주당 내 이탈표 여부를 두고 여야가 갑론을박을 벌이며 정치적 전선은 더 선명해졌다.
원내 169석을 보유한 더불어민주당 지도부가 출범 하루 만인 29일 한동훈 법무부 장관과 이상민 행안부 장관 탄핵 추진 가능성을 시사했다. “두 장관이 탄핵의 요건을 스스로 쌓아가고 있다. 국회가 가진 기본권이 탄핵인데, 이것을 하지 못한다면 국회도 무능하게 되는 것”(서영교 최고위원)이라면서다. 한 장관도 “할 일 하면서 헌법 절차에 당당히 임하겠다”며 정면으로 맞섰다. 어느새 장관 탄핵 공방도 국회의 일상이 되고 있다. 정치 양극화의 낯선 부산물을 언제까지 지켜봐야 할까.◎
한영익 정치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