餘談6/ 2022/ 05.03(화) 아버지의 유산, 설렁탕 - 08.23 보는 이의 눈시울을 적시는 사진 한 장
餘談6/ 2022/ 05 - 08
05.03(화) 아버지의 유산, 설렁탕
고3때 나와 대화 없던 무뚝뚝한 아버지 “저녁마다 설렁탕 같이 먹자”
말없이 “후릅” 한 숟갈 뜨고 “우걱우걱” 먹다 “후루룩” 국물 삼키고…
요즘도 가까워지고 싶은 이와 설렁탕 먹는다… 20년 전처럼 소리 내면서
고등학교 3학년이 되면서 아버지와 하는 대화가 점점 줄어들었다. 아버지는 계속 성적이 떨어지는데도 밤새 영화와 만화를 보는 내가 못마땅했다. 나는 점점 일이 떨어지는 속에서도 친구들과 밤새 술을 마시고 들어오는 아버지가 못마땅했다. 서로 못마땅하면서도 모르는 척하자니 자연스레 대화가 사라져갔다.
평소에도 공통 화제가 없었기에, 분명 대화를 시작하면 서로의 못마땅함만이 공통 화제가 될 것 같았다. 집에 단둘이 있을 때의 정적이 너무 힘들었다. 간혹 아버지가 헛기침을 하면, 나도 덩달아 헛기침을 하면서, 조금이라도 소통하는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것을 전하려고 애썼다. 아버지도 그걸 느끼셨는지 ‘흠흠’ ‘쯥쯥’ ‘어이구’ 등등 다양한 소리를 시도하여 마음을 전하려고 애썼다. 나도 그때마다 ‘으흠’ ‘쓰읍’ ‘흐아아’ 등등의 응용 버전으로 열심히 소리를 주고받았다. 소리만 주고받았는데도 꽤 깊은 대화가 이루어진 느낌이었다. 아버지도 그걸 느끼셨는지 (평소 아버지 성격으로는) 꽤 용기가 넘치는 제안을 하셨다.

/일러스트=이철원
수험생은 밥을 잘 먹어야 한다면서, 저녁마다 설렁탕을 사주시겠다고 한 것이었다. 그렇게 거의 반년간, 나는 아버지와 매일 저녁 설렁탕을 먹었다. 그 반년 동안에도 특별한 대화는 없었다. 설렁탕이 나올 때까지 물을 마셨다. 그냥 한 번에 마시면 시간이 많이 남아서 다시 어색해졌다. 꽤 맛있는 물을 음미하는 것처럼, ‘크으’ ‘캬아’ ‘허어’ 같은 감탄사를 적절히 조합하고 재구성하며 한 모금씩 천천히 마시는 것이 비결이었다.
설렁탕이 나오기만 하면 모든 어려움이 끝났다. 뜨거운 국물은 어색함을 물리치는 최고의 선물이었다. 국물을 ‘후후’ 불기도 하고, ‘후릅’ 하면서 한 숟갈 먼저 떠먹어 보기도 하며, 숟가락질을 정신없이 하며 ‘우걱우걱’ 흡입하기도 하고, 그릇을 양손으로 들고 ‘후루룩’ 삼키며 깨끗하게 비우기까지, 디테일이 무수한 소리가 있었다.
때때로 순서를 바꿔서 ‘후루룩’으로 먼저 시작하는 파격을 선보일 수도 있었다. 아버지가 ‘후후’를 하면 아들은 ‘후루룩’을 하고, 아버지가 ‘후릅’을 하면 아들은 ‘우걱우걱’을 하면서 매일 저녁 국물의 2중창을 시연했다. 그렇게 반년 동안 아버지와 아들은 설렁탕으로 대화했다
20년이 흘러서 나는 마흔이 되었다. 나는 지금도 설렁탕을 가장 많이 먹는다. 술을 마시면서 안주로 먹고, 술 마신 후에 허한 기분을 달래려고 먹고, 술 마신 다음 날 쓰린 속을 달래려고 먹는다. 가끔 홀로 설렁탕을 먹을 때가 있는데, 그때마다 20년 전에 냈던 소리를 일부러 크게 내본다. 소리와 소리 사이에 자연스럽게 간극이 생긴다. 그것은 아마도 반년간, 아버지와 설렁탕을 먹으며, 아버지의 소리를 기다리는 과정에서 생겨난 간극일 것이다. 그 간극에서, 나는 종종 20년 전 아버지의 후후와 후루룩을 듣는다.
아버지가 알려준 방법대로 20년 내내 설렁탕을 먹는다. 양념장을 한 숟갈 떠서 젓가락으로 휘저으며 국물을 진하게 만든다. 국물이 너무 뜨거우면 깍두기나 김치를 한 젓갈 국물에 넣어서 뜨거움을 식힌다. 밥을 3분의 1씩만 말아서 국물 맛이 연해지지 않게 먹는다. 이게 가장 맛있는 방법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게 아버지와 가장 가까워지는 맛이다.
나는 아버지에게 설렁탕을 유산으로 물려받았다. 어색한 사람과 가까워지고 싶을 때 설렁탕 집으로 함께 향한다. 만난 지 얼마 안 된, 아직은 공통 화제를 만들어내기 힘든 사이일수록 뜨거운 국물이 고마워진다. 후후와 후릅과 우걱우걱과 후루룩만으로도 꽤 깊은 대화를 나눈 것 같다.
내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만난 좋은 사람은, 대부분 설렁탕 덕을 톡톡히 봤다. 아마 다른 이들에게도 각자의 국물이 있을 것이다. 가까운 후배는 마음이 허할 때마다 소고기 뭇국을 먹는다고 한다. 힘들고 지칠 때마다 외할머니는 언제나 말없이 소고기 뭇국을 끓여주셨고, 손자는 또 말없이 뜨거운 소고기 뭇국을 후후 불며 마음을 달랬다고 한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이후에도 가끔 소고기 뭇국을 먹다가 후후 불면, 눈 앞에 말없이 계실 것 같아서 울컥한다고 했다.
내가 많이 힘들었던 날, 후배는 나와 마주 앉아 설렁탕을 먹어주었다. 이제 곧 나의 차례가 올 것이다. 후배가 언젠가 많이 힘든 날이 오면, 그 앞에 마주 앉아 소고기 뭇국을 먹어줄 날이 올 것이다. 소고기 뭇국 그릇에는 또 얼마나 많은 소리가, 얼마나 많은 마음의 허기가 가득 담겨 있을까. 내 마음이 벌써부터 배고파진다.
조선일보 오세혁 극작가·연출가
05.10 ‘어머니의 날’에 심금 울린 사진 한 장
한국에선 5월 8일이 ‘어버이날(Parents’ Day)’이지만, 서양에선 5월 둘째 주 일요일을 ‘어머니의 날’, 6월 셋째 일요일을 ‘아버지의 날’로 구분하고 있다. 올해는 지난 8일이 일요일이어서 모처럼 한국의 어버이날과 서양의 어머니의 날이 겹쳤다(be overlapped).

이날 서방 언론에는 ‘아들에게 작별 인사하는 그리스 어머니의 사진(Photo of Greek Mother Saying Goodbye to Son)’이 소개돼 많은 이의 심금을 울렸다(tug at many people’s heartstrings). 한국의 6·25전쟁 참전을 위해 떠나는 그리스 장병 행군 대열에 뛰어들어 아들에게 마지막 작별의 말을 건네는(give one last farewell to her son) 어머니 모습이다. 1950년 여름에 찍힌 것으로 보이는 이 사진은 전쟁에서 꼭 살아남아(survive the war) 돌아오라는 마지막 순간의 소망을 귓속말로 속삭이는(whisper last-minute wish) 어머니의 애끓는 심정을 여실히 보여준다(depict her desperate heart just as it is).
그리스인들은 고대 시대부터 유래한(stem from ancient times) 어머니와의 특별한 유대감을 갖고 있다(have a special bond with their mothers). 고대 그리스인들은 어머니의 날이 생겨나기 훨씬 전부터 어머니를, 생명을 주신 분으로 존중해왔다. 대지의 여신 가이아는 천지만물을 낳은(give birth to all creatures) 자연의 화신으로 여겨졌고(be regarded as the personification of nature) 궁극의 최고 신으로 숭배를 받았다(be worshipped as the ultimate deity). 또 가이아의 딸 레아는 그리스 신화(Greek mythology)에 나오는 여러 신들을 낳은 ‘신들의 어머니’로 추앙을 받았고, 고대 그리스인들은 매년 봄 축제를 자연과 생식력의 여신(goddess of nature and fertility) 레아를 경배하는 행사로 열었다.
그리스인들은 원래 성모 마리아가 탄생 40일째 된 예수를 성전에 바친 날을 기리는 봉헌 축일 2월 2일을 어머니 공경의 날로 삼았었으나, 1960년대 들어 종교 축제와 분리해 서양의 다른 국가들과 마찬가지로(like the rest of the West) 5월 둘째 일요일을 어머니의 날로 기념하기 시작했다.
그리스는 한국의 6·25전쟁 당시 전투 부대를 파견한 16국 중 하나로, 5년간의 내전이 끝난 직후였음에도(just out of its own five-year civil war) 약 4700명의 원정군을 보내 참전했다(participate in the war by sending an expeditionary force). Hellenic Army로 불리는 그리스 육군의 최정예 보병 대대(the most elite infantry battalion)와 7대의 수송기 등 공군 병력도 포함시켜 유엔연합군의 다섯 번째 대규모 병력 파병국(the fifth largest troop contributor to the combined UN Forces)이 됐다.
참전 그리스군 중 장교 15명과 병사 168명은 전사했으며(be killed in action), 33명의 장교와 577명의 병사는 전쟁 기간 중 부상을 입었다(be wounded during the conflict).
조선일보 윤희영 에디터
월간조선 06월 호
대통령의 편지
⊙ 미국, 1991년 공화당 출신 부시가 민주당 출신 클린턴에게 편지 남기고 퇴임하면서 후임자에게 편지 남기는 전통 생겨
⊙ “당신이 이곳에서 행복하기를 바라… 당신의 성공이 나라의 성공”(아버지 부시 → 빌 클린턴)
⊙ “우리는 우리의 선조들이 피 흘리며 싸워 지킨 법치, 분권, 평등한 보호, 시민적 자유 등의 민주적 제도와 정책의 수호자 역할”(오바마 → 트럼프)

▲아버지 부시’가 퇴임하면서 후임자인 빌 클린턴에게 남긴 편지. ‘대통령의 편지’의 시초이자 모범이 됐다
1993년 1월 20일, 백악관에 입성한 신임 대통령 빌 클린턴(제42대)은 집무실 책상에서 편지를 하나 발견했다. 전임자인 조지 H.W. 부시(아버지 부시·제41대)가 백악관을 떠나면서 남겨놓은 편지였다. 편지를 읽은 새 대통령은 전율에 휩싸였고, 새 퍼스트레이디는 울음을 터뜨렸다.
〈친애하는 빌. 나는 지금 집무실에 들어오면서, 4년 전 느꼈던 것과 같은 경이와 존경을 느끼고 있습니다. 당신도 느끼게 될 겁니다. 당신이 이곳에서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나는 몇몇 전임 대통령이 묘사했던 외로움을 결코 느낀 적이 없습니다. 당신은 매우 힘든 날을 겪게 될 것이고, 부당하게 느껴지는 비판으로 더 힘들 수도 있습니다. 나는 훌륭한 조언자는 못 되지만, 그런 비판 때문에 용기를 잃거나 정도를 벗어나는 일은 없도록 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당신이 대통령직을 잘 수행하고, 가족들도 이곳에서 평온하기를 바랍니다. 당신의 성공이 바로 나라의 성공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을 굳건히 지지하겠습니다. 행운을 빌며-조지.〉
부시와 클린턴
두 사람은 모든 면에서 정반대의 삶을 살아온 사람이었다. 인생 역정도, 철학도 달랐다. 부시는 명문가의 자제였다. 클린턴은 유복자로 태어나 계부의 가정폭력 밑에서 자라면서 불우한 성장기를 보냈다. 부시는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폭격기 조종사로 참전했고, 몇 차례 죽음의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부시의 아들뻘인 클린턴은 전후(戰後) 베이비붐 세대로 베트남전 반전(反戰)시위에 참여했던 반항아였다. 부시는 평생 아내 바버라에게 충실했고, 클린턴은 바람둥이였다. 부시는 보수주의자였고, 클린턴은 리버럴이었다. 아내도 정반대였다. 부시의 아내 바버라는 전형적인 현모양처형이었고, 클린턴의 아내 힐러리는 정치적 야심에 불타는 페미니스트였다.
1992년 대선은 당초에는 부시에게 유리하게 시작되었다. 연방하원의원, 주(駐)유엔대사, 주중연락사무소장(주중대사), CIA국장, 부통령 등 화려한 공직을 거친 후, 로널드 레이건의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된 부시는 냉전(冷戰) 해체를 효과적으로 관리하고 쿠웨이트를 침략한 사담 후세인을 몰아내면서 인기 절정에 있었다. 빌 클린턴은 미국에서도 작고 가난한 주(州) 중 하나인 아칸소주의 법무장관과 주지사 경력이 전부였다. 당시 민주당 후보들은 ‘일곱 난쟁이’라고 불릴 정도로 고만고만한 사람들이었다. 부시의 재선은 따놓은 당상으로 보였다.
하지만 경제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빌 클린턴은 “문제는 경제야, 바보야!(It's the economy, stupid!)”라는 유명한 슬로건으로 부시를 궁지로 몰았다. 부시는 “우리 집 강아지가 저 두 멍청이(빌 클린턴과 앨 고어)보다 국제 문제를 더 잘 알 것”이라며 반격했지만, 별 재미를 보지 못했다.
당초 경쟁 상대조차 못 된다고 생각했던 아들 또래의 천방지축 리버럴 정치인에게 불의의 일격을 당하고 재선에 실패했으니, 부시는 속이 꽤나 쓰렸을 것이다. 하지만 부시는 그런 아픔을 달래며 후임자의 성공을 비는 편지를 남기고 백악관을 떠난 것이다.
“그는 당파보다는 애국심을 앞에 뒀다”
사실 후임자에게 편지를 남기기 시작한 사람은 조지 H.W. 부시의 전임자인 로널드 레이건(제40대)이었다. 레이건의 편지는 자신의 정부에서 부통령으로 8년간 봉직했고, 자신의 정부를 물려받게 된, 같은 당 소속 대통령에 대한 기분 좋은 응원의 편지였다. 하지만 부시가 클린턴에게 남긴 편지는 자신과 정반대의 이력과 철학을 가진 반대당 소속 후임자에게 남긴 것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남달랐다.
이후 조지 H.W. 부시와 빌 클린턴은 정당과 세대를 뛰어넘어 ‘친구’가 되었다. 두 사람은 2004년 동남아 쓰나미, 2005년 허리케인 카타리나 피해 구제를 위한 모금 활동을 함께 벌이기도 했다. 빌 클린턴은 조지 H.W. 부시의 아들이자, 논란이 많았던 2000년 대선에서 자신의 밑에서 부통령을 지낸 앨 고어를 꺾고 대통령이 된 조지 W. 부시(아들 부시·제43대)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2018년 12월 1일 조지 H.W. 부시가 9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자 빌 클린턴은 자신이 받았던 조지 H.W. 부시의 편지 원본을 공개했다. 빌 클린턴은 “누구도 이 편지보다 더 그가 누구였는지를 잘 드러낼 수 없다”며 “그는 미국과 우리의 헌법, 제도, 공동미래를 믿었던 존경스럽고 예의 바른 사람이었다”고 추모했다. 그는 또 “부시 전 대통령은 정치싸움에서 거칠기도 했지만, 거기에는 정당한 이유가 있었다”면서 “그는 정치보다 사람을, 당파보다는 애국심을 앞에 뒀다”고 높이 평가했다.
“오늘부터 당신은 우리 모두의 대통령”

▲2009년 1월 7일 백악관에 모인 미국 역대 대통령들. 왼쪽부터 조지 H.W. 부시(41대), 버락 오바마 대통령 당선인(44대), 조지 W. 부시 당시 대통령(43대), 빌 클린턴 전 대통령(42대), 지미 카터 전 대통령(39대). 사진=퍼블릭 도메인
조지 H.W. 부시가 빌 클린턴에게 편지를 남기고 백악관을 떠난 후, 퇴임하는 대통령이 후임자에게 덕담을 담은 편지를 남기는 것은 전통이 됐다. 이 편지는 바로 공개되지는 않지만, 몇 년이 지난 후 공개되어 국민들에게 깊은 감동을 안겨주곤 했다.
2001년 1월 빌 클린턴은 8년 전 자신에게 편지를 남겼던 전임자의 아들 조지 W. 부시(공화당)에게 편지를 남겼다. 그는 “당신은 자랑스럽고, 품위 있으며, 선량한 국민들을 이끌게 됐습니다. 바로 오늘부터 당신은 우리 모두의 대통령입니다. 당신에게 성공과 행복이 따르기를 기원합니다. 지금 당신이 어깨에 지고 있는 짐은 분명 무겁지만, 실제보다 과장돼 있을 때도 종종 있습니다. 당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행하는 순수한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것입니다”라면서 “당신과 당신의 가족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하늘의 축복이 있길!”이라고 축복했다.
조지 W. 부시도 2009년 1월 퇴임하면서 민주당 출신 신임 대통령 버락 오바마(제44대)에게 편지를 남겼다. 그는 “힘든 순간들이 있을 것입니다. 비판이 계속되고 ‘친구들’은 실망을 시킬 것입니다”라면서 대통령직을 수행하는 것이 녹록지 않은 일임을 상기시키면서도 “그러나 당신에게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위로와 당신을 사랑하는 가족들이 있고 또 나를 포함해 당신을 성원하는 국가가 있습니다. 당신이 이끄는 국민들의 기질과 이해가 영감을 줄 것입니다”라고 격려했다.
“우리는 이 자리를 잠시 맡을 뿐”
2017년 1월 퇴임한 버락 오바마도 공화당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제45대) 앞으로 편지를 남겼다. 그는 “놀라운 선거 운동을 축하합니다. 수백만 명이 당신에게 희망을 걸었고, 우리 모두는 당을 불문하고 당신 임기 중 번영과 안보가 확장되길 바라야 합니다”라면서 “우리는 이 자리를 잠시 맡을 뿐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선조들이 피 흘리며 싸워 지킨 법치, 분권, 평등한 보호, 시민적 자유 등의 민주적 제도와 정책의 수호자 역할을 합니다.
일상의 정치가 흔들리는 것과는 무관하게, 이러한 우리 민주주의의 수단들이 최소한 더 약해지지는 않도록 지키는 게 우리의 몫입니다”고 당부했다. 마치 앞으로 시작될 트럼프의 폭주를 예견하고 견제하는 듯한 발언이었지만, 거기에는 품위가 있었다. 오바마는 “미셸과 나는 이 위대한 모험을 떠나는 당신과 멜라니아의 행운을 기원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어떤 식으로든 도울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주십시오”라는 말로 편지를 끝맺었다. 트럼프는 “오바마 대통령이 남긴 아름다운 편지를 발견했다”고 했다.
선거 부정 논란과 의회 의사당 폭력 점거 사태라는 소란 속에서 2021년 백악관을 떠난 도널드 트럼프도 후임자인 조 바이든 현 대통령(제46대)에게 편지를 남겼다고 하는데, 그 내용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다음 정부, 우리 정부와 비교받게 될 것”
문재인 전 대통령은 퇴임을 닷새 앞둔 5월 4일 자기의 치적을 자랑하는 백서(白書) 발간을 자축하는 오찬 자리에서 “다음 정부의 경우에는 우리 정부의 성과를 전면적으로 거의 부정하다시피 하는 가운데 출범을 하게 되었기 때문에 더더욱 우리 정부의 성과, 실적, 지표와 비교를 받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전날 윤석열 당선인의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발표한 국정과제를 염두에 둔 소리였다. 문 전 대통령이 한 소리는, 대선 이후 감사원이나 공공기관에 기를 쓰고 자기 사람들을 박아 넣고, 새 정권의 사정(司正) 기능을 마비시키는 ‘검수완박법’까지 강행해서 국회를 통과시키고 공포한 것으로도 모자라, ‘그래, 윤석열이, 너는 얼마나 잘하나 두고 보자’는 악담(惡談)을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치열했던 선거전의 기억과, 자신 혹은 자신의 뒤를 이어주기를 바랐던 같은 당 후보의 패배를 잊고, 정당을 초월해서 후임자를 축복하고 격려하는 편지를 남기고 물러가는 미국의 퇴임 대통령들과는 달라도 너무나 다른 모습이다. 이는 대통령 자리에 있는 인물의 품격의 문제일까? 아니면 그 나라 정치문화, 아니 국민의 품격의 문제일까?⊙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ironheel@chosun.com
07.05 ‘2년 후, 우리 결혼하자’
중학교 자퇴 후 공장 등 전전한 러 시인 브로드스키의 서정시 후렴구
세상이 아무리 나빠져도 사랑은 굴복하지 않는다는 고집스러운 다짐
소련 체제서 ‘사회의 기생충’ 죄명으로 추방된 후 1987년 노벨문학상
이오시프 브로드스키(Iosif Brodsky·1940~1996). 1987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이 시인 이야기를 꼭 한번 하고 싶었다. 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난 유대계 러시아인으로, 중학교 자퇴 후 공장, 시체 보관소, 선박 보일러실, 지질 탐사 현장을 전전하며 시를 썼다. 대학 문턱에도 못 가봤지만, 혁명 작가 막심 고리키 표현대로라면, 그에겐 길 위의 삶이 곧 ‘대학’이었다.
아니, 길 아래 삶이 곧 대학이었다고 봐야 옳다. 스탈린에 이어 흐루쇼프가 집권하면서 소련에 ‘해빙기’가 도래했다. 비공식으로나마 비틀스 음악이 들어오고, 서구 문학이 유통되고, 폭넓은 청바지와 장발이 유행한 시기다. 그러나 브로드스키가 속했던 언더그라운드 문화는 사회주의 리얼리즘 원칙에 대한 도전으로 여겨져 언제건 체포와 유형의 빌미가 되었다. 당국이 표방한 ‘해빙’의 자유란 체제를 선전하고 합리화하는 장치였을 뿐, 억압과 탄압은 여전했으며, 누구도 내일의 안위를 예측하기 어려웠다.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는 사람이 많았다.

▲일러스트=이철원
청년 브로드스키 역시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사람이다. 세 번의 체포와 정신병원 감금, 북극 강제 노동형을 거쳐 영구 추방되었다. 시민권을 박탈당한 채 적절한 이별 의식도 없이 무작정 빈으로 가는 비행기에 실려진 시인의 여행 가방에는 타이프라이터와 보드카 두 병, 그리고 17세기 영국 시인 존 던(John Donne) 시집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돌아오지 못할 유배길을 함께했던 그 가방과 모자가 지금은 페테르부르크 아흐마토바 기념관에서 전시 중이다.
한 용감한 유대계 여인 덕분에 1964년의 브로드스키 재판 전모는 현장에서 기록되어 전 세계에 전파됐다. 죄명은 ‘사회의 기생충’. 요즘 우리 사회에서야 ‘기생충’도 함부로 대하면 안 될 듯한 분위기지만, 당시 소련에서 그 단어는 반(反)소비에트 ‘인민의 적’을 의미했다. 심문은 정해진 프레임에 따른 것이었다.
판사: 하는 일은?
피고: 시 쓰고 번역한다고 생각한다.
판사: 당신 생각은 중요치 않다. 직업이 무엇인가?
피고: 시인. 시인-번역가.
판사: 누가 당신을 시인이라고 인정했나? 누가 당신을 시인으로 분류하던가?
피고: 아무도. 누가 나를 인간으로 분류했을까?
시인이 되고자 무슨 교육을 받았냐는 질문에는 ‘그것은 교육 문제가 아니다. 신에게서 오는 것이다’라고 답했다. 그의 재판 노트를 읽는 것은 부조리극을 관람하는 일과도 같다. 삶 자체가 한 편의 연극일진대, 브로드스키는 패배 앞에서 승리를, 모멸 앞에서 존엄을 일관되게 연기해낸 뛰어난 배우였다. 어떤 순간에도 짓밟혀 쓰러짐 없이 솟아오르던 그의 힘은 다름 아닌 서정의 원동력, 즉 아름다움의 날갯짓이었다. 노벨상 수상 연설에서 시인이 말하기를, 예술은 사회적 동물(인간)을 자율적 자아로 격상하며, 개인의 미적 경험은 그의 윤리적 선택 방향을 잡아준다. 아름다움을 체험할수록, 그리하여 확고한 취향을 지니게 될수록, 도덕적으로 더 민감하고 사적으로 더 자유로울 수 있다는 거다. 아름다움을 아는 사람은 쉽게 오염되지 않고, 아름다움을 ‘추앙’하는 사람은 추함의 진흙탕에서 어떻게든 헤어 나오려 한다.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한다’는 도스토옙스키 명제의 진의가 그것이다.
아름다움이 무엇인가. 논증 경로를 뒤집어 생각해보면, 자신의 위엄을 잃지 않는 것, 사회적 동물의 집단 본능과는 거리를 두는 것, 지금 여기 너머를 볼 줄 아는 것, 실존의 도구들(언어, 행동거지, 눈초리 같은)을 순화하여 존재의 순간순간을 덜 더럽히는 것, 뭐 그런 것이다.
소비에트 언더그라운드 시절 브로드스키는 ‘서정시’란 제목의 연애시를 썼다. ‘2년 후/ 아카시아는 말라 죽고,/ 주가는 떨어지겠지,/ 세금도 올라 있겠지./ 2년 후/ 방사능은 더 늘어날 거야./ […] / 2년 후/ 내 목은 부러지고,/ 팔도 부러지고,/ 얼굴도 박살 나 있겠지./ 2년 후/ 우리 결혼하자./ 2년 후./ 2년 후.’
왜 하필 2년 후인지는 나도 모른다. ‘2년 후, 우리 결혼하자.’ 당장 내일의 과제도, 그렇다고 먼 훗날의 막연한 꿈도 아닌 이 언약은 연인을 향한 프러포즈 이상의 자기 다짐이다. 외적 현실에 역행하는 내적 현실의 고집스러운 후렴구라 할 수 있다. 세상이 아무리 나빠져도(나빠질수록) 사랑은 굴복하지 않으며, 결국은 해피 엔딩의 대단원에 이를 것이다. 출구 없는 소련 사회 틈바귀에서 열아홉 살 젊은 시인이 그토록 아름다운 오기를 부리고 있었다. 오직 하나뿐인 사적 삶의 각본을 쓰며 어느새 세상 모든 험악한 각본을 밀어내고 있었다.
조선일보 김진영 연세대 노어노문학과 교수
07.05 갈라치기

최명원 성균관대 독어독문학과 교수
요사이 ‘갈라치기’라는 말이 심심치 않게 들린다. 젠더 갈라치기, 세대 갈라치기, 편먹고 갈라치기 등등. 이 말 속에는 이쪽저쪽으로 나누어 생각하는 이분법적 관점이 들어있다. 그런데 무서운 것은 이렇게 둘로 나누어 생각하는 가운데, 옳고 그름, 좋고 나쁨이라는 가치평가가 함께 작동하게 될 때다. 단순히 이것 아니면 저것이 아니라, 이것이 옳으면 저것은 틀린 것으로 보는 세상눈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 곳곳에 만연한 이분법적 사고는 은근히 그 영향력을 발휘한다. 천국과 지옥 또한 여기에 속한다. 독일 유학 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이런 질문을 받았다. “재미난 지옥(한국)과 지루한 천국(독일) 중에서 어디를 선택할래?” 지루한 천국에 싫증 난 독일 친구들은 융통성으로 포장된 한국의 역동성에 열광하며 기꺼이 재미난 지옥에 손을 들어 주었다. 반면 한국에 돌아와 이리저리 치이는 느낌을 받았던 나는 원칙을 우선으로 편안함과 안정을 느낄 수 있었던 지루한 천국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좋은 천국과 나쁜 지옥의 이분법에서 던져진 묘한 질문이었다.
젠더·세대 등 편가르기 유행
옳고 그름, 좋고 나쁨 이분법 아닌
이쪽저쪽 모두의 가치 인정해야
우리가 별생각 없이 누렸던 이분법적 관점에는 막상 듣고 보면 말이 안 되는 것들도 많다. 한 예로 남자와 여자를 보자. 그리고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을 여기에 함께 달아두면, 세상 온갖 것이 이 둘로 나뉘는 일들이 허다하다.
우리가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에 남녀공학은 드물었고 남학교, 여학교가 대세였다. 각 학교는 교장선생님 재량으로 영어 이외에 또 하나의 외국어(제2외국어)를 선택할 수 있었는데, 남학교에서는 독일어를, 여학교에서는 불어를 가르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독일어는 남성적이고 불어는 여성적이라는 이유를 달아서.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갈라치기 현장이다. 게다가 남학생들은 까까머리에 바지를, 여학생들은 단발머리 (귀밑 2㎝), 혹은 어깨 정도 길이를 양 갈래로 땋은 머리에 치마 교복을 입는 용모 규정도 있었다. 일상에서 여성들이 바지를 즐겨 입는 요즈음에도 화장실 안내표시는 치마와 바지 모양으로 남녀를 가르고 있다.
대학 시절 한 친구는 간혹 자기 부모님의 가벼운 부부싸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두 분 모두 두터운 믿음을 가진 교인이셨는데, 어머니는 교회에 열심이신 반면 아버지의 신앙생활에서 교회는 그리 열심이지 않으셨다고 했다. 일요일마다 벌어지는 설전에서 어머니는 “당신은 너무 머리로만 믿어서 탈이에요”라고 하시는 반면, 아버지는 “당신은 너무 가슴으로 믿어서 탈이요”라고 반박하셨다는 이야기였다. 머리와 가슴의 믿음은 어떻게 다를까.
뜨거운 열정의 가슴과 냉철한 이성의 머리 또한 이렇게 이분법적 사고의 틀을 만들고 있다. 이를 굳이 인간의 언어활동과 관련시키면 “가슴(마음) 속에 담고 있는 말”과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이 될까. 뇌과학이 발달하면서 마음도 뇌의 작용으로 설명하려 하지만, 우리가 마음을 말할 때면 손이 자연스레 가슴에 얹혀진다. 이렇게 마음속에 담아둔 말은 때론 여리고 때론 격한 감성으로 가슴앓이에 어울리고, 머릿속에서 떠올리는 말은 두 손으로 감싸 안은 딱딱한 뇌와 짝을 이뤄 깊은 고뇌로 간혹 우리를 골(머리) 아프게 한다.
우리가 어렸을 때는 왼손잡이를 금기시했다.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왼손잡이 아이들이 정서적 학대를 받으면서, 오른손으로 밥을 먹고 글을 쓰도록 매를 들어 강제되었다. 지금은 왼손잡이에 대한 그릇된 편견이 사라지고, 오히려 왼손잡이를 두둔하거나 양손잡이가 두뇌 발달에 좋다며 천재적 기질을 발휘하기 위해 양손을 쓸 것을 권장하고 있다.
이렇게 너무나 엄격하던 잣대가 힘을 잃고 완전히 다른 가치가 추구되는 것을 생각하면, 지금 이런저런 갈라치기에 덧붙여 이러쿵저러쿵 옳고 그름을 따지는 행태가, 훗날 터무니없던 시절로 치부되는 그 부끄러움도 알게 될까.
우리의 생각은 깔끔하고 논리 정연한 것을 좋아해서 이분법적 관점으로 세상을 재단하는 데 익숙하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가 조심해야 하는 것은 이편저편 쪼개고 나누는 일상에서, 당연한 듯 근거 없는 가치 평가로 한쪽의 손을 들어주는 편견이 만들어질 때다. 이것이 옳기에 다른 것은 그르다는 잘못된 확신은 자칫 위험한 갈라치기 덫을 파고 온갖 것들을 어느 한쪽으로 매몰시킨다. 이쪽이 아니면 저쪽일 수도 있지만, 그것이 옳고 그름의 판단이 아니라, 이쪽저쪽 모두에 제 나름의 가치가 있음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택한 이쪽은 항상 옳기에 다른 쪽은 틀리고 나쁜 것이 되는 오만과 오류를 피하려면.
중앙일보 최명원 성균관대 독어독문학과 교수
07.22 인위(人爲) 예찬
도가 철학을 공부한 사람으로 알려진 내가 인위를 조금 좋게 대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더 나아가 예찬까지 하니 많이 놀라실 것이다. 놀라는 것으로 그친다면, 그래도 다행이다. 십중팔구는 나를 잘못된 사람이거나 뭘 모르는 사람으로 비웃기 쉽다. 우리 주변에는 문명을 비판적으로 보고, ‘인위’를 부정적으로 대하며, 삶에서 무언가를 이루려고 ‘일부러’ 하는 악착같은 태도를 하찮게 봐야 인간적인 경지에 이른 사람으로 보는 시각이 분명히 존재한다.
‘정치적 동물’ ‘이성적 동물’ ‘도구를 쓰는 동물’ 등 인간을 규정하는 모든 내용이 솟아나는 밑바닥에는 인간이 문명을 건설하는 존재라는 인식이 자리한다. 자연 속에서 아무리 아름다운 것을 만나도 그것을 예술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냥 자연일 뿐이다. 거기에는 인간이 일부러 하는 동작이 들어있지 않다. 예술은 일부러 만들려고 애를 쓰는 인간의 인위적인 손길이 닿고서야 겨우 나온다. 예술적 영감도 자연스럽게 오지 않는다.
문명은 인위의 힘으로 만들어진 것
노자 “뒤로 물러나면 오히려 앞서”
우리도 야망 품고 지식 섭취해야
그래야 지혜로운 자 될 수 있어
일부러 만들려고 애쓰는 정도가 한계를 넘으면서 선물처럼 온다. 그래서 나는 손을 놓고 영감이 자연스럽게 오기를 기다리는 한가한 예술가는 믿지 않는다. 예술의 경지에 이르려고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일부러’ 부단히 무언가를 만드는 지친 예술가를 믿는다. 인간은 ‘일부러’하는 존재로 이 별에 왔다.
문명은 ‘생각’의 결과다. 물건, 제도 심지어는 생각마저도 생각이 만든다. 생각은 마음속으로 자연스럽게 들락거리는 의식에 ‘일부러’ 방향성을 부여하고 결을 만드는 인위적인 활동이다. 의식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따르는 것이 아니라 목적을 가지고 ‘일부러’ 벼린 의식을 생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자연 이외의 것은 하나도 예외 없이 다 누군가가 ‘일부러’ 해서 남긴 것들이다. 문명은 근본적으로 인위의 힘으로 축조됨을 알 수 있다.
인위를 부정하는 방식으로 인간적인 높은 경지에 도달하는 내용을 주장한 사람으로는 보통 노자를 먼저 떠올릴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오해다. 노자는 ‘인위’가 아니라 ‘유위’(有爲)를 비판하거나 부정했을 뿐이다. ‘일부러’ 하는 인위성을 부정해야 인간의 고도를 이룰 수 있다고 보는 사람들은 노자를 인위성을 부정하는 철학자로 만들어버린다. ‘무위’의 철학자로 알려진 노자는 ‘뒤로 물러나거나’ ‘사적인 의욕을 버릴’ 것을 주장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도덕경』 제7장에는 “자신을 뒤로 물러나게 하면, 자신이 오히려 앞선다” “사적인 의욕을 버리면, 오히려 사적인 의욕을 이룰 수 있다”고 쓰여 있다.
노자의 시선은 자신을 뒤로 물러나게 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앞서게 되는 결과를 향한다. 노자는 사적인 의욕을 버리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사적인 의욕을 이루는 것에 목적을 두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앞서게 된다’거나 ‘사적인 의욕을 채울 수 있다’는 결론은 애써 읽지 않고, ‘뒤로 물러나’거나 ‘사적인 의욕을 버리’는 것만 읽는 경향이 있다. 노자는 ‘무위’(無爲)보다는 ‘무불위’(無不爲)에 목적을 둔 것이 분명하다. 내가 그렇게 해석한 것이 아니라 노자가 그렇게 써 놓았다. “무위하면 되지 않을 일이 없다”(“無爲而無不爲” 『도덕경』 제48장)
무위는 모든 인위적인 일이 완성되는 조건이라는 점에서만 의미가 있다. 노자는 세상사 인위적인 ‘모든 일을 이뤄지게 하는’(無不爲) 방법으로서 ‘무위’를 주장하였지, 그냥 자체의 가치 때문에 ‘무위’를 주장하지 않았다. ‘무불위’의 최종 목적지는 ‘천하를 차지’(取天下)하는 것이었다. 노자는 천하 경영이라는 야망의 곁에 있었던 사람이다.
퇴행적인 경향을 가진 사람들은 지식보다는 지혜가 중요하다고 하면서 지식을 무시해야 지혜를 얻을 수 있다고 오해한다. 인위적인 노력과 그 노력의 결과로 오는 선물을 착각하면 이렇게 된다. 지식을 쌓는 인위적인 노력을 부단히 하면, 자신이 가진 야망의 강도에 따라, 어느 순간 선물처럼 오는 것이 지혜다. 지식이 지혜로 바뀌는 순간에 가장 강력하게 작용하는 계기는 야망의 강도나 순도다. 진실하고 강한 야망의 인도를 받아 지식이 생산력과 적응력을 발휘하면 지혜가 된다.
우리는 그저 야망을 품고 지식 섭취라는 인위적인 활동을 꾸준히 ‘일부러’ 하면 된다. 이런 인위적인 활동을 통해서만 지식과 지혜 사이의 변증법적 긴장이 유지되어 지혜로운 자가 될 수 있다. 야망도 없고, 지식을 쌓는 인위적인 활동도 없으면, 지혜도 없다. 이현주 목사가 번역한 도교 경전 『화호경』 제5장에 이렇게 나온다. “한 번 고요해지면 저절로 펼쳐지고, 마침내 끝없이 넓어져서, 헤아릴 수 없는 밤하늘처럼 된다.” 우리는 고요를 지키기 위해서 고요해지려는 것이 아니다. 펼쳐지고 넓어져서, 헤아릴 수 없이 풍요로운 밤하늘을 갖는 이익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고요에 이르려는 인위적인 동작을 ‘일부러’ 단련하고 또 단련하면, 자연스러운 밤하늘에 이를 것이다. 이렇게 하여 인위가 자연을 초대하고, 결국 탄성 있는 일체를 이룬다.
중앙일보 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명예교수·새말새몸짓 이사장
07.26 콩쿠르는 노벨상이 아니다

▲피아니스트 임윤찬(18)이 세계적인 피아노 콩쿠르인 '제16회 반 클라이번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우승했다. 올해 60년을 맞은 이 대회 역사상 최연소 우승이다. (반 클라이번 재단 트위터) 2022.6.19/뉴스1
“조성진과 임윤찬 가운데 누가 잘 쳐요?”
지난달 반 클라이번 콩쿠르에서 피아니스트 임윤찬(18)이 우승한 직후 가장 많이 들은 질문이다. 간단한 질문 같지만 막상 대답하기는 쉽지 않다. 복잡한 맥락과 배경을 거두절미한 채 오로지 양자택일만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콩쿠르의 역사부터 차분하게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콩쿠르는 철저하게 20세기의 산물이다. 이른바 ‘3대 콩쿠르’로 불리는 쇼팽 콩쿠르(1927년),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1937년), 차이콥스키 콩쿠르(1958년)의 탄생 연도만 보아도 알 수 있다. 피아니스트 선우예권과 임윤찬이 연이어 우승한 반 클라이번 콩쿠르(1962년) 역시 미소(美蘇) 냉전과 짧은 해빙(解氷)의 산물이다. 1958년 소련에서 열린 제1회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우승한 미국 피아니스트 반 클라이번(1934~2013)을 기념하기 위해 창설했으니 말이다. 우스갯소리지만 스탈린 사후의 해빙이 없었다면 미국 피아니스트가 우승하는 일은 없었을 테고, 결과적으로 한국 젊은 연주자들이 대회 정상에 오르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수백 년의 클래식 음악사에서 콩쿠르는 뒤늦게 생겨난 ‘최신 트렌드’에 가깝다. 쇼팽·리스트 같은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들은 당연히 콩쿠르 수상 기록이 없다. 반면 ‘콩쿠르의 유엔’이라는 국제 음악 콩쿠르 연맹(WFIMC)에 등록된 대회만 현재 120여 개에 이른다.
20세기 들어서 콩쿠르가 우후죽순으로 생겨난 이유가 있다. 음악 교육 방식의 근본적 변화 때문이다. 이전까지 스승 문하에서 도제식으로 공부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전문 음악 학교를 의미하는 ‘콘서바토리(conservatoire)’가 정착하면서 악기별로 연주자들이 쏟아졌다. 자연스럽게 옥석(玉石)을 가려낼 장치가 필요해졌다. 그 검증 장치가 콩쿠르다. 콩쿠르가 젊은 연주자들의 등용문(登龍門)으로 불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노벨상보다는 차라리 조선 시대 관료들을 선발하기 위한 과거 시험과 비슷하다는 의미다.
2000년대 임동민·동혁 형제를 필두로 손열음·김선욱·선우예권·조성진·문지영·박재홍까지 한국에서도 세계적 콩쿠르를 통해서 화려하게 데뷔한 피아니스트가 크게 늘었다. 이 중에는 임윤찬처럼 해외 유학 경험 없는 연주자도 적지 않다. 한국 음악 교육 시스템의 빛나는 성과다. 다만 이들이 세계 음악계의 ‘과거 시험’을 갓 통과한 젊은 연주자들이라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오늘날에도 정약용이 위대한 학자로 존경받는 건 그가 과거 시험의 답안지를 잘 썼기 때문이 아니다. 유배 같은 고난 속에서도 ‘목민심서(牧民心書)’ 같은 저서들을 남겼기 때문이다. 음악 역시 마찬가지다. 콩쿠르라는 비좁은 관문을 통과한 젊은 연주자들은 거장으로 거듭나기 위해서 다시 세계 음악계에서 치열한 경쟁을 펼쳐야 한다. 피아니스트 손열음이 자신이 좋아하는 슈만뿐 아니라 20~21세기 현대음악에도 공들이는 것도, 김선욱이 피아노뿐 아니라 지휘에도 묵묵히 매진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소년등과(少年登科)에 정승 드물다’는 사실을 가장 잘 아는 건 실은 연주자 자신들이다.
그런데도 이들이 이미 세계 정상을 모두 정복한 것처럼 묘사하는 건 연주자뿐 아니라 음악계와 팬들을 위해서도 그리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다. ‘반짝 열기’보다 중요한 건 이들이 꾸준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지속적인 관심을 갖고 응원을 보내는 풍토다. 그런 의미에선 차라리 이렇게 질문을 바꿔보는 편이 좋을 것 같다. “조성진과 임윤찬 가운데 누구를 더 좋아하세요?”라고.
조선일보 김성현 기자
07월 26일 그리스 신화의 제우스 “권위 버리고 열린 자세여야 인재 얻는다”
제우스, 혈통주의 우선했지만
인간들과도 열린 자세로 협력
단, 실력 제대로 검증돼야 기용
상대방 위해 자신 낮추며 변신
신뢰 얻고 절대 권력 입지 다져
그리스 신화에서 최초의 신은 공간의 신(카오스)이었다. 그다음에 태어난 대지의 여신(가이아)은 세상의 중심을 차지하며 최초의 권력자로 군림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낳은 하늘의 신(우라노스)에게 밀려났고, 우라노스도 역시 자기 아들 시간의 신(크로노스)에게 잔혹하게 거세되며 권력을 잃고 말았다. 크로노스는 티탄 신족들과 함께 세상을 지배했지만, 그도 역시 자식에게 밀려나고 말았다. 자식이 부모를 밀어내고 권력을 잡는 반역의 정점에 서 있는 이가 바로 제우스다. “당당한 티탄 신족은 높은 오트뤼스 산을 거점으로, 반면 크로노스와 레아가 낳은 신들은 올림포스 산을 거점으로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제우스는 아버지의 권력에 맞서 싸워 승리를 거둔 후에도 올림포스 산을 근거지로 삼아 세상을 다스려 나갔다. 그의 권력은 영원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들의 권력 투쟁에서 최종 결론인 셈이다.
신화는 문자가 발명되기 이전에, 모든 정보와 지식을 오롯이 기억에만 의존해서 만들어내고 이어나가던 구술시대에 만들어졌다. 그것은 단지 ‘심심풀이 땅콩’처럼 지루한 일상을 즐기기 위한 여흥으로 만들어낸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사실 그 막장과도 같은 흥미진진함도 기억을 잘하기 위한 묘안의 결과였다. 지식은 세상을 잘 살아나가기 위한 무기와 같은 것이다. 그러니 한 공동체의 집단 지성은 험한 세상을 이해하고 설명하며, 삶의 숱한 문제들을 이겨내는 데 필요한 지식과 정보, 지혜를 신화 속에 필사적으로 담아냈던 것이다. 신들의 권력 투쟁의 서사 안에는 역사와 권력의 비밀과 진실이 담겨 있다. 그리스 신화는 그 대표적인 사례다. 그렇다면 제우스의 이야기에는 지금도 되새겨보아야 할 진리가 있을 법하다. 다소 지루한 헤시오도스의 ‘신통기’나 아폴로도로스의 ‘신화집’은 그래서 여전히 곱씹어 볼 고전으로 살아 있다.
흥미로운 것은 제우스가 권력을 영원히 유지해 나간 비결이다. 그것은 지금의 시선으로 본다면 비판받아 마땅한 구시대의 유물처럼 보인다. 제우스는 권력을 확고하게 하려고 자신의 형제자매들과 함께 세상을 나누어 다스리기로 한다. 하지만 권력을 확장해 나가는 가운데 더 많은 협력자가 필요함을 느끼자, 그는 거침없는 ‘바람둥이’가 되어 수많은 인재를 낳기 시작했다. 그들 중에 똘똘한 자식들은 이른바 ‘올림포스 12신’의 일원이 되었다. 인간 세상의 문명을 창출하는 계획에서 그는 ‘하찮은’ 인간 여성들과도 기꺼이 관계를 맺고 탁월한 영웅들을 낳아 세상에 대한 지배를 다져나갔다. 이 모든 과정에서 그는 순수 혈통주의를 고수했으니, 가장 긴밀한 사적인 관계를 통치 협력자 채용의 제일 기준으로 삼은 셈이다. 이런 제우스의 권력 확장과 확립의 비법이 신화에 담긴 지혜요, 진실이라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신화는 상징적 이미지와 이야기의 조합이며,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의 은유라고 한다. 은유는 드러난 표현 그대로가 아니라, 그 속에 숨겨진 뜻을 헤아려야만 가치를 빛낼 수 있는 법이다. 이야기 속에서도 제우스가 혈통을 기준으로 삼긴 했지만, 그 무엇보다도 실력이 제대로 검증된 대상만을 협력자로 삼았다는 점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그 ‘혈통’은 말 그대로 혈통이라기보다는 ‘신의, 신뢰’의 은유이다. 더욱더 중요한 것은, 제우스가 편협한 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활짝 열린 자세로 인재를 얻으려고 했다는 것이다. 훌륭한 상대가 발견되면, 제우스는 자신의 권위와 자존심을 돌보지 않고, 상대에 맞춰 자신을 다양하게 변신시켰다. 전 우주를 호령하는 천하의 제우스가 상대를 얻기 위해 비에 흠뻑 젖은 뻐꾸기로 변신하고 또 황소로, 백조로, 구름으로 자신을 바꿨던 것이다.
옛날에 권력은 사적인 소유물처럼 여겨졌다. 어쩌면 제우스 이야기는 그런 구시대 실상을 우의적으로 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이상의 의미가 분명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숨어 있는 뜻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권력을 확고하게 다지고 정치적 이상을 펼치려는 이라면, 겉으로 드러난 이야기에 빗대어 조롱의 대상이 돼선 안 될 것이다.
문화일보 김헌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교수
08.08 펜타포트 무대 선 미셸 자우너 “엄마 나라 한국, 눈물 못 멈춰”
내한공연 미셸 정미 자우너
글쓰는 뮤지션으로 깜짝 스타
첫 책 ‘H마트…’, NYT 올해의 책
올해는 그래미상 2개 부문 후보
미국서 소수인종에게 큰 반응
“내 음악·책이 위로준다니 감사”

▲6일 오후 인천펜타포트록페스티벌 무대에 ‘재패니즈 브렉퍼스트’로 선 미셸 정미 자우너. ‘일본인’이란 오해를 자주 사는 그의 밴드명은 우연히 본 일본식 조식 사진이 마음에 들어 따온 것이다. /인천펜타록페스티벌
“당신이 없다면 이곳이 무슨 의미가 있죠?(What’s this place if you’re not here?)”
6일 인천 연수구에서 열린 펜타포트록페스티벌 무대에 선 재패니즈 브렉퍼스트(미셸 정미 자우너·33)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엄마에 대한 그리움이 담긴 곡 ‘더 보디 이스 어 블레이드’의 영어 가사를 부르던 때. 배경에는 어릴 적 자신과 엄마의 사진이 띄워져 있었다.
공연 직후 현장에서 만난 미셸은 “전에는 이 곡을 부르다 운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한국이란 나라 자체가 엄마와 맞닿아 있는 공간이란 생각에 감정이 요동쳤고, 멈추기 어려울 정도로 울음이 터졌다”고 했다. 한국인 엄마, 미국인 아버지 사이에 태어난 그의 미들네임 ‘정미’는 모친의 이름과 같다.
미셸은 지난해 펴낸 첫 책 ‘H마트에서 울다’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다.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의 추천도서, 뉴욕타임스·아마존 ‘올해의 책’에도 꼽혔다. H마트(미국의 한국 식료품 체인)에 갈 때마다 2014년 암으로 세상을 떠난 엄마에 대한 추억이 떠오른 일화를 절절하게 풀어낸 책. 미셸은 “다른 엄마들처럼 우리 엄마도 자식에게 베푸는 가장 큰 사랑이 ‘잘 차려진 밥상’이라 생각했다. 덕분에 내 위장(stomach)이 한식 없인 살 수 없게 됐음을 적은 책”이라고 했다. 이날도 “‘코리안 브렉퍼스트’로 홍대에서 김치찌개를 먹었다”고 했다.
올해는 ‘재패니즈 브렉퍼스트’로 한국을 찾았다. 올 초 64회 그래미상 2개 부문 후보, 2017년 2집 앨범을 롤링스톤 ‘올해의 앨범 50′에 올린 미셸의 또 다른 이름. 남편인 ‘피터 브래들리’도 기타리스트로 함께 무대에 섰다.
미셸에게 문학과 음악은 어머니를 잃은 슬픔을 치유하기 위한 공간이었다. 첫 책에서 한식의 기억을 엄마에 대한 그리움으로 연결시켰다면, 2016년 데뷔 앨범 ‘사이코폼프’에는 호전이 없자 암 치료 자체를 포기한 엄마를 지켜본 슬픔을 담았다. 지난해 3월엔 전작보다 밝아진 3집 ‘주빌리(Jubilee·이스라엘에서 50년마다 선포되는 안식년)’를 선보였다. “그간 엄마가 떠난 슬픔에 대해 많이 쓰다보니 어느 정도 그 감정이 해소됐고, 이제는 그 이상의, 내가 하고픈 이야기를 해야겠다 생각했죠.”
이날 미셸이 공연에서 밴드 새소년 멤버 황소윤과 함께 한국어로 부른 ‘비 스위트’도 3집 수록곡. 엄마와 이모가 좋아한 가수이자 한국 록의 대부 신중현이 쓴 ‘부메랑(바니걸스)’에 영향을 받아 쓴 곡이다. 미셸은 “사실 전에는 한국 노래는 잘 안 들었다. 내가 쓰는 곡과 거리 먼 ‘K팝’이라 생각해 낯설었다. 그런데 신중현의 곡을 듣고 음악의 토대를 이루는 부분이 너무 좋았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했다.
다만 미셸은 “미국에서도, 한국에서도 내가 항상 아웃사이더 같았다. 내가 속해 있을 공간을 창조하고 싶단 생각이 좋은 ‘예술적 선물’이 됐다”고 했다. 그가 어린 시절 미국 인디 록 밴드 ‘예 예 예스(yeah yeah yeahs)’ 보컬 ‘캐런 오’에게 많은 영향을 받은 것도 “미국 인디 밴드 중 처음 본 아시아계(아버지가 폴란드계 미국인, 어머니가 한국인) 여성이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우리 엄마는 그런 록밴드 같은 거 절대 하지 말라 했지만요.(웃음) 이젠 혼혈이거나 어디 섞이지 못 한 이들이 내 음악과 책으로 위로 받았다는 말에 뿌듯하고, 스스로도 ‘이젠 아웃사이더가 아니구나’ 위로를 받아요.”
미셸은 조만간 “‘한국에서 1년 살기’를 할 계획”이다. “한국에서 1년만 살면 네가 할 수 있는게 훨씬 많아질텐데. 모든 물건이 있는 편의점처럼, 다채로운 면을 갖게 될 거야”란 모친의 생전 조언 덕분. ‘간장게장’ 네 글자를 한국어로 또박또박 발음한 뒤 “다만 지금 당장은 이게 먹고 싶다. 이건 미국에 없어서”라며 웃은 미셸이 말했다. “한국에서 그날그날 일을 기록하고 그걸 모아 두 번째 책을 낼 거에요. 한국어를 배워 큰 이모(성우 이나미)와 대화도 자유롭게 하고 싶네요.”
조선일보 윤수정 기자
08.15 무속(巫俗)의 허와 실
무속은 간단하지 않다. 1만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원시 종교이다. 무속에는 3대 기능이 있다. 첫째 예언, 둘째 치병(治病), 셋째 안심(安心) 기능이다. 따지고 보면 이 3가지 기능은 제도권 종교의 역할과도 겹쳐지는 부분이다. 무속과 제도권 종교는 그 기본 골격이 같다는 말이다.
우선 안심 기능을 보자. 프로이드와 카를 융의 후예들이 이 기능을 대체하고 있다. 무속에 가지 않고 심리상담소로 가게 되었지만 일부 한국 사람은 무속에 가야지 속이 시원해진다. 20년 전쯤 우면산 아래에 사진점쟁이라고 하는 유명한 점쟁이가 있었는데, 여기로 점을 치러 가면 특징이 열댓명의 고객들을 한 방에 몰아 넣고 오픈 방식으로 점을 치는 행태였다. 방에 같이 앉아서 그 사람의 점괘, 즉 내밀한 사생활의 문제들을 모두 들을 수 있다는 게 민망하기도 하였다. ‘너 신랑은 바람을 피워야 사업이 잘돼, 열 여자도 부족해. 그러니까 너무 안달복달하지 마!’ ‘당신은 몸에서 구린내가 나네. 혹시 정화조 사업 하는 사람이여?’ ‘지금은 아들이 백수이지만 40대 중반이 되면 문서를 만져서 크게 돈을 벌게 돼. 좀 참고 기다려!’ 등등. 점집에 앉아서 이런 점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나름대로 심리 치료가 된다. 다른 사람 고민도 나랑 비슷하구나! 하는 깨달음이다.
치병의 사례를 보면 러시아의 라스푸틴(1869~1916)이 있다. 193㎝ 장신이었다. 러시아 황제의 아들 로마노프 황태자의 난치병을 고쳐 주어서 황실의 전폭적인 신임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무속이 가지고 있던 치병 능력을 현대화된 종합병원이 대체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예언 기능이 문제이다. 인공지능 AI가 아무리 딥 러닝을 돌려 보아도 인간의 운명을 예측할 수 없다. AI의 천적은 무당이다. 운명에 대한 욕구, 즉 운욕(運欲)은 여전히 시장에서 끊임없이 요구하는 강력한 수요이다. 시장의 수요가 있는 한 공급은 이루어진다. ‘미친X 널뛰는 팔자’인 사업가와 정치인은 강력한 수요자이다. 물론 무당의 점괘가 다 맞는 것은 아니고 틀릴 때도 많다. 유능한 주식 전문가를 시장에서 가려내는 것처럼, 용한 점쟁이도 그 승률을 시장에서 가려낸다.
무속의 문제점은 사적 욕망에 치중한다는 점이다. 공심(公心)이 희박하다. ‘영발(靈發)’의 파워를 사리사욕을 채우는 수단으로만 이용하면 천벌을 받는다. 권력과 가까운 무당이 공심이 없고 이권 챙기는 데 몰두하면 위험해진다.
조선일보 조용헌 건국대 석좌교수·문화컨텐츠학
08.20 ‘골프계 우영우’ 이승민 “또 태어나도 엄마 아들로”… 엄마는 웃다 울었다
[아무튼, 주말] [김윤덕 기자의 사람人]
’제1회 장애인 US오픈’에서 우승한
자폐인 골퍼 이승민과 어머니 박지애
“당신의 아이는 다른 아이들과 다릅니다.”
2000년 가을, 미국 보스턴의 한 병원. 만 세 돌 된 아이를 관찰한 의사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직 어려서, 미국 생활이 처음이라 말이 더디고 행동이 특별한 거라 믿었던 그녀는 “쇠망치로 머리통을 두드려 맞은 느낌”이었다. 정밀진단을 해보겠냐는 물음에 대답할 정신도 없이 아이를 카시트에 앉힌 뒤 자동차를 운전했다. 하늘은 눈부시도록 파란데 그녀에겐 온 세상이 암흑처럼 어두웠다. 이제 뭘 해야 하지? 절망의 시작이었다.
다섯 살 된 아이는 서울 독립문 근처 어린이집에 다녔다. 생일을 맞은 친구의 엄마가 전화를 걸어왔다. 생일파티를 위해 아이들을 모두 자기 집으로 데려간다고 했다. 그런데 얼마 후, 아이가 사라졌다고 했다. 혼비백산해 달려나가니 아파트 단지 앞에서 아이가 혼자 울고 있었다. 친구 집에 들어가려는데 다른 아이들이 “넌 오지 마. 넌 바보니까 오지 마”라고 했단다. 길을 헤매느라 눈물·콧물로 범벅이 된 아이를 안았다. 절망의 터널은 끝이 없어 보였다.
2022년 7월 20일(현지 시각)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파인허스트 리조트에서 열린 제1회 장애인 US오픈에서 자폐 장애인 골퍼 이승민(25)이 물세례를 받으며 우승컵을 들어올렸을 때 박지애(56)씨는 울지 않았다. “울고 말고 할 정신이…. 기뻐도 힘들어도 저에겐 울 여가가 없었어요. 승민이와 산다는 건 매일매일이 전쟁이라 이거 하나 막고 저거 막는데 급급하지, 내 감정에 치일 여유가 없으니까요. 우는 대신 이를 악물고 살았죠. 긴장이 풀릴까 봐(웃음).”
미국골프협회(USGA)가 올해 창설한 장애인 US오픈에서 초대 챔피언이 된 뒤 귀국한 이승민 선수와 어머니 박지애씨를 지난 16일 수원 컨트리클럽(CC)에서 만났다. 우승을 축하한다고 하자 이 선수가 수줍어하며 “가… 감사합니다”라고 했다. 우승한 날 숙소에서 짐을 쌀 때 대통령 축전을 받고 놀랐다는 승민씨 모자는, 광복절 경축행사에도 초청받았다. 박씨는 “우승한 뒤 알아보는 사람도 많고 축하 문자도 받으면서 승민이가 요즘 많이 웃는다”고 했다.
우승 후 ‘골프계 우영우’란 별명을 얻은 이승민과 어머니, 그리고 두 사람이 ‘형’이라 부르는 윤슬기(42) 캐디 겸 코치는 US오픈 3라운드 18번홀의 두 번째 샷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박세리의 맨발 샷’ 못지않은 스토리가 있었다.
▲키 183㎝, 몸무게 78㎏의 건장한 체격이지만 이승민 선수는 엄마 박지애씨 앞에선 어린아이다. 드라마 속 자폐인 변호사 우영우가 김밥만 먹는다면 승민씨는 가리는 음식이 없단다. 골프선수인 아들 때문에 날씨 전문가가 됐다는 박씨는 “광복절이 지났으니 이제 죽을 듯한 더위는 없을 것 같다”며 웃었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어떡하지? 어떡하지?
-3라운드 18번홀이 가장 큰 고비였다고 하던데요.
윤슬기(이하 윤): “우승을 다투던 스웨덴 펠리스 노르만 선수와 동타였는데 그 선수는 페어웨이에 공을 잘 떨어뜨린 상태였고, 승민이는 커다란 나무 아래, 그러니까 트러블 상황에 놓여 있었죠. 승민이가 당황하면 같은 말을 반복해요. 공을 칠 생각은 안 하고 ‘어떡하지? 어떡하지?’ 하고만 있길래 제가 소리를 질렀죠. ‘승민아, 정신 차려!’”
이승민(이하 이): “형(윤슬기 캐디)이 소… 소리를 쳐서 정신이 번쩍 들었어요. 확 깨서 혀… 형이 일러준 대로 (공이 가야 할) 길을 딱 보고 길게, 세게 쳤어요. (그러자 공이) 그린 앞에 다서여섯 발? 파… 파를 칠 수 있게 된 거죠.”
박지애(이하 박): “실수하면 안 되는 상황인데 파로 잘 막아서 연장전으로 간 거죠. 똑바로 치면 나뭇가지를 맞고 지나가는 거라 그것까지 계산해서 조금 더 길게 치라고 슬기형이 주문한 건데 ‘어떡하지’만 연발하고 있었으니 속이 터졌을 거예요(웃음).”
-’할 수 있다’는 구호를 여섯 번 외쳤다고요.
윤: “6번이 아니라 경기 시작부터 끝까지 계속 중얼거렸어요. 승민이 같은 자폐인들이 곧잘 딴생각을 하는 경우가 많아 일종의 제시어를 준 거죠. ‘할 수 있다’를 되뇌이면 다시 집중할 수 있으니까. ‘할 수 있다’로 유명한 박상영 선수 펜싱 영상도 여러 차례 보여줬어요.”
박: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 자폐스펙트럼 장애인 우영우가 법률 얘기를 한참 하다가 갑자기 고래 얘기로 넘어가잖아요. 승민이도 골프 치다가 순간 샛길로 빠지는 경우가 많아서 형이 정신을 다시 잡아오는 용도로 만든 거예요. ‘정신을 차리자!’도 있어요. 형이 ‘정신을!’ 하면, 승민이가 ‘차리자!’ 외칩니다(웃음).”
-당황하거나 불안할 때 말고도 샛길로 빠지는 경우가 많나요.
박: “우영우가 고래라면 승민이는 개미예요, 그것도 불개미. 특히 전지훈련 가는 베트남에는 페어웨이에 개미들이 곧잘 집을 짓는데, 그걸 발견하면 공은 쳐다도 안 보고 쭈그려 앉아 개미만 관찰합니다.”
-자폐인들이 집중력이 높다고도 하던데요.
윤: “순간 집중력, 몰입력이 아주 좋아요. 트러블 상황이라도 정확히 떨어져야 하는 위치에 떨어져야 파세이브 할 수 있는 원포인트 자리가 있는데 그걸 딱딱 쳐내는 걸 보면 천재성을 느끼죠.”
-이번 대회 중에 최경주 선수도 응원 메시지를 보냈다던데요.
이: “휴대폰 영상으로, 끄… 끝까지 참고 기다리면 (기회는) 온다고. 절대 포기하지 말라고.”
박: “상대 선수는 버디도 잘 들어가는데, 승민이는 경기가 뒤로 갈수록 어려워한다는 소식을 듣고 격려 해주신 것 같아요.”
-우승 트로피는 어디 있나요?
이: “지… 집에.”
-승민씨 방에요?
이: “아니, 마루에.”
박: “순은이라 매일매일 잘 닦아서 보관하고 있어요. 순회배 대회라 1년 뒤 돌려줘야 하거든요. 우승한 선수의 이름을 새겨서 1년 동안 보관하다가 다음 해 우승한 선수에게 전달하는 트로피입니다. 승민이가 시합 때 썼던 모자와 드라이버는 미국골프협회 박물관에 기증하고 왔습니다.”
▲지난 7월20일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에서 열린 제1회 장애인 US오픈에서 우승한 이승민 선수가 물세례를 받으며 기뻐하는 모습. /USGA
◇해병대 출신 캐디를 만나다
이승민은 중학교 1학년 때 골프에 입문했다. 어린이채널이 아니라 골프채널을 틀어놓으면 조용해지는 아들을 보고 박지애씨가 자폐 치료의 일환으로 골프를 떠올렸다. “그때가 타이거 우즈 전성기였는데 종일 우즈 경기만 보고 있더라고요.” 아들이 처음으로 자신의 소망을 말한 것도 골프였다. “고… 공이 멀리, 하늘로 멀리 날아가는 모습이 좋았어요.”
다행히 아이에겐 재능이 있었다. 골프학과가 있는 신성중학교에 체육특기생으로 입학해 김종필 프로 등에게 배웠다. 일반 선수들 사이에서 승민은 ‘걸어다니는 시한폭탄’이었지만 실력은 일취월장했다. 2014년 KPGA 프로 자격을 획득한 데 이어, 발달장애가 있는 선수로 처음 2017년 한국골프협회(KPGA) 정회원이 됐다. 윤슬기 캐디와 만난 건, 정글이나 다름없는 프로 세계에 진입한 뒤 길을 잃었을 때였다. 처음 도전한 중국 프로골프 투어에서 처참히 무너진 이승민 선수를 다잡아 일으켜준 사람이 ‘해병대 출신 슬기형’이었다.
-이번 US오픈에서 우승하고 귀국한 다음 날 새벽 6시부터 연습을 했다면서요. 쉬지도 않고.
윤: “US오픈으로 시합이 끝나는 게 아니니까요. 승민이가 연습할 때 가장 좋은 본보기가 된 사람이 이달 초 PGA 윈덤챔피언십에서 최연소 우승해 화제가 된 김주형 선수입니다.”
-어떤 일이 있었길래요?
윤: “재작년 군산 오픈에서 우승한 김주형 선수가 바로 다음 날 새벽 6시에 수원CC에서 연습을 하고 있더라고요. 우승 후 인터뷰 요청이 너무 많아지니 연습할 시간이 부족하다며 새벽에 온 거래요. 승민이가 그 말을 같이 들었어요. ‘너도 우승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물었더니 ‘나도 6시부터 연습하겠다’고 하더군요.”
박: “2019, 2020년 그 무렵이 승민이에게 가장 힘든 시기였어요. 다섯 번 도전한 끝에 KPGA 정회원이 되고, 세미 프로에서 투어 프로 선수로 격상되면서 큰 산을 넘었다 생각했는데, 그다음부터는 그야말로 전쟁이더라고요. 우리가 넘은 건 언덕이었고, 저 위로 높고 높은 에베레스트가 솟구쳐 있는 거죠. 중국 투어에서 실력을 절감한 뒤 아, 이제 그만둬야 할 때가 온 건가 했습니다.”
-성적이 처참했나요?
윤: “바닥이었죠. 소위 말하는 입스(yips·운동 선수들의 불안증세)가 승민이에게 왔어요. 쉬운 샷도 공이 제멋대로 날아가는가 하면, 티박스에 서는 것조차 두려워하더라고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생각했죠.”
-지적 장애를 가진 선수를 가르치기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윤: “승민이 지능이 다섯, 여섯 살 수준이에요. 하루 두세 시간 몸 풀기 정도로 연습하고 가던 아이에게 프로선수의 생활을 가르치는 게 가장 힘들었죠. 새벽 4시 반에 일어나 6시까지 골프장에 와서 연습하고 오후에는 웨이트 트레이닝과 마사지 받는 일상을 반복해야 하니까요.”
-연습하다 도망친 적도 있다면서요.
윤: “드라이버샷을 교정하기 위해 하루 종일 드라이버만 치게 했더니 못 하겠다고 화를 내면서 뛰쳐나가더라고요. 힘든데 왜 자꾸 세게 치라고만 하냐고 따지면서.”
이: “그땐 저, 정말 싫었어요. (공이) 삑사리 나서 이리 갔다 저리 갔다….”
박: “너무 힘드니까 승민이가 한번은 ‘엄마, 나 알바 할까?’ 그래요. 알바로도 돈 벌 수 있다는 걸 알고요. 그래서 ‘알바 하는 것도 좋은데, 가게 사장님이 너처럼 느리게 일하는 아이를 좋아할까? 시키는 일을 빨리빨리 못해서 잘리면 어떡하지?’ 했더니 계속 골프를 치겠다고 하더라고요(웃음).”
-경찰서에 간 적도 있다면서요.
윤: “화가 나면 승민이는 골프채를 휘둘러요. 그 분노와 폭력성을 없애야 한다는 생각에 제가 승민이를 데리고 동네 파출소에 갔어요. 네가 골프채를 휘두르면 형은 너를 경찰서에 고소할 수밖에 없다면서(웃음). 파출소 소장님도 폭력과 위협이 왜 범죄가 되는지 설명해주시니 승민이가 알아듣더라고요. 그러고 며칠 뒤 저와 사소한 언쟁이 생겼는데 내 목소리가 높아지자 승민이가 갑자기 ‘쉿! 조용히 해. 경찰 와, 경찰’ 하더라고요, 하하!”
-허인회, 안신애, 허윤경 프로 등 유명 선수들 캐디로 16년 동안 활약하셨던데, 굳이 장애가 있는 승민씨를 전담한 이유가 있을까요.
윤: “전담 코치가 되기 전, 승민이를 필드에서 처음 본 건 중2 때인데, 아이가 자기 꿈은 마스터스 어거스타 내셔널 골프클럽에서 마지막 라운드 18번홀을 걸어나오면서 사람들의 환호와 박수를 받는 것이라고 하더라고요. 뭉클했죠. 그 꿈을 이뤄주고 싶었습니다.”
-장애인 선수들끼리면 몰라도 일반 선수들과 그게 가능할까요? 예선 통과도 하늘의 별따기일 텐데.
윤: “승민이 같은 자폐인 선수는 뭔가를 시키면 핑계 대지 않고 될 때까지 반복하며 노력하는 집념이 있어요. 100㎞의 길을 시속 100㎞로 1시간 만에 갈 거리를 시속 5㎞로 이틀에 걸쳐서 가지만 목표 지점에 도달하기 위해 꾸준히 연습하고 또 연습죠. 그런 장점을 활용하면 정말 좋은 선수가 될 수 있겠다 싶었어요.”
-의사 소통은 잘되던가요.
윤: “승민이와 대화가 온전히 되기 시작한 게 불과 1년이 안 돼요. 모두가 보라색이라고 해도 승민이는 흰색이라고 우기는 게 장기죠(웃음). 바로잡아주려고 하면 고집을 피우다 화를 내고 폭력성을 보여요. 승민이가 그렇게 된 건 어머니 잘못도 있어요. 주위 사람들 시선이 날아드니 그 상황을 빨리 모면하려고 아이를 달래기만 했던 거죠. 그래서 저는 계속 아이와 싸우면서 가르쳤어요. 골프 동호회에 데리고 다니며 낯선 사람들과 눈 마주치며 대화하는 법, 남을 배려하는 법도 가르쳤죠. 덕분에 사회성은 많이 좋아졌는데, 대신 ‘막가파’일 때의 천재성이 줄어든 게 아닌가, 하는 아쉬움은 있습니다, 하하!”
-엄마 입장에서는 포기하고 싶을 때 있었을 것 같습니다.
박: “승민이가 공을 치기 시작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매일요! 주변에선 장애인이 이런 섬세한 운동을 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계속 말려요. 라운딩할 때 속도도 느리고 다른 선수들 라인을 밟으며 방해만 하는데 대체 왜 데리고 나왔느냐며 대놓고 항의하는 분도 있었죠. ‘죄송합니다, 미안합니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어요.”
-왜 그만두지 않았나요.
박: “아이가 아프고 병들어서 스스로 놓을 때까지는 내가 먼저 짐을 싸진 않으려고요. 기름이 다 떨어져가는 자동차처럼 아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늘 조마조마하지만, 아직은 자기가 좋아서 가는 상황이라 기다리고 있어요.”
윤: “승민이 어머니를 보면 늘 안타까워요. 장애인을 바라보는 불편한 시선들을 25년간 견디며 사는 거잖아요. 늘 이를 악물고 다니시는데 저러다 죽겠다 싶은 마음도 들더라고요. 그래서 승민이는 제게 맡기고 어머니도 생활을 좀 가지세요, 했지요. 바로 후회했지만요, 하하!”
▲윤슬기씨가 이승민 선수의 퍼팅 자세를 바로잡아주는 모습. 승민씨는 “형은 가장 무섭지만 내게 힘을 주는 분”이라고 했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여기가 끝이 아닐 겁니다”
발달장애 자녀를 둔 대개의 부모들처럼 박지애씨도 처음엔 아이의 장애를 숨기고 싶었다.
“조금 독특한 것뿐이야. 시간이 지나면 좋아질 거야”라며 부인했다. 아들의 장애를 알리기로 마음먹은 건 외교관 남편을 따라 미국에 갔을 때였다. 특수학교를 보내기로 결정했을 때 만난 심리학자가 “부모가 장애를 인정하면 아이는 너무나 편안한 삶을 살지만, 부모가 숨기고 감추려고만 하면 아이는 그때부터 지옥의 삶을 살게 된다”고 했다. “아이의 어제와 오늘, 오늘과 내일만 딱 비교하라고 했죠. 자꾸 미래를 보려고 하면 너무 힘들어질 거라면서. 이후 저의 철판 인생이 시작된 겁니다(웃음).”
-엄마에게도 꿈이 있었을 텐데요.
박: “어릴 땐 의사가 되고 싶었지만 성적이 안 돼 전공을 하진 못했어요. 꿈이라기보다는 30대 가정주부가 사는 대개의 삶, 40대, 50대 엄마가 사는 삶이라는 게 있는데 그런 걸 못해봤어요. 매일 아침 눈뜨면 승민이의 삶을 같이 살아야 했으니까요. 나도 모르게 ‘이건 사는 게 아니야’라는 말을 중얼거릴 때도 많았죠. 여기에 하나의 문제만 더 얹혀졌더라도 못 살았을 거예요. 남편이 헛짓거리를 했거나 서로 반대의 길을 가자고 했거나, 경제적으로 힘들어 아이를 돌보기 어려운 상황이 됐다면 저도 어떻게 했을지 몰라요.”
-남편과는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나요?
박: “너무 바쁘니까. 둘 중 하나는 맨정신으로 살아야 하니, 10가지 나쁜 일이 있다면 9가지는 말하지 않았어요.”
-최근 들어 발달장애 가족이 삶을 포기하는 사건이 늘고 있습니다.
박: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저라도 그렇게밖에 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저도 승민이가 말 안 듣고 속 썩이면 ‘너랑 나랑 손잡고 아파트 옥상 올라가는 거지 뭐’라고 윽박지를 때 있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만 더 생각해보라고, 지금 당장 너무 캄캄하지만, 여기가 끝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한 번만 더 가졌으면 좋겠어요.”
-승민씨는 넉넉한 집에서 태어나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어서 가능하지 않았을까요.
박: “경제적 여건이 물론 중요하지만, 그 절망감의 깊이는 다 똑같을 거라고 생각해요. 다만 저는 아이를 골방에 두어선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아이를 사회로 나가게 해서 사람들과 어울리게 해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얼굴에 철판을 깔았고, 무조건 고개를 숙이고 살았죠(웃음).”
-사회에 나와서 오히려 상처받는 경우도 있지 않나요.
박: “열 분 중 한 사람은 이해하고 도와주셨어요. 그래서 여기까지 왔을 거예요. 요즘도 주치의 선생님 만나러 1년에 두 번 병원에 가는데, 대기실에 있는 어린 장애아들이 하는 행동을 보면 우리 승민이도 저랬었지 싶어요. 승민이는 정말 많이 좋아졌어요. 얼마 전엔 외할머니와 운전면허 문제집을 공부해 자동차 면허도 땄고요. 일본 히라가나, 가타가나도 모양 그대로 외워서 일본 투어 때 식당에서 까막눈인 저희 대신 메뉴판을 보고 주문했지요. 느리지만, 아이 스스로 계속 도전해갈 수 있는 기회를 하나씩 만들어주려고요.”
윤: “발달장애인의 90%가 집에 있다는 건 그들의 엄마가 육아에서 평생 졸업을 못한다는 뜻입니다. 골프는 발달장애인들에게 정말 좋은 운동이지만 선수 하나를 키우는 데 몇 억이 든다는 말처럼 비싼 종목이지요. 그런 진입장벽을 낮춰주는 걸 우리 사회와 기업이 도와줬으면 좋겠어요. 승민이를 7년째 후원해주고 있는 하나은행처럼요. 예를 들어 골프 남자 구단이 22개가 있는데 이들이 구단마다 장애인선수를 2명씩만 고용해줘도 장애인 선수들만의 리그가 생기고, 골프를 배우려는 장애인들이 늘어날 겁니다. 골프 말고도 스키, 스케이트처럼 개인 운동에 도전할 수 있는 기회도 많아졌으면 해요. 승민이와 제가 궁극적으로 꿈꾸는 것도 장애아를 대상으로 한 골프 아카데미를 만들어 무료로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승민이에게 늘 말하죠. 네가 반드시 성공해서 장애아들의 타이거 우즈가 되라고!”
인터뷰 중 ‘엄마의 꿈’이라는 말에 꽂힌 승민씨가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가 의사가 되려고 했어?” “응. 근데 공부를 못해서 의사는 못 됐어. 대신 승민이 엄마가 됐지.” 박지애씨에게 잔인한 질문을 던졌다. “다시 태어나도 승민이 엄마가 되고 싶은가요?” 당황한 그녀가 웃었다. “글쎄요, 결혼도 안 했을 것 같은데요. 하하!” 승민씨에게 물었다. “다시 태어나도 엄마 아들이 되고 싶어요?” 이 사랑스러운 청년은 주저하지 않았다. “네… 엄마 아들로 태어날 거예요.”
▲'골프계 우영우'로 불리는 이승민 선수와 어머니 박지애씨가 지난 16일 수원컨트리클럽에서 손을 잡고 웃는 모습. 스물다섯살 건장한 청년이지만 이씨는 엄마만 보면 좋아서 해맑게 웃었다 -영상미디어 이신영 기자
조선일보 김윤덕 주말뉴스부장
08.23 보는 이의 눈시울을 적시는 사진 한 장
“천 마디 말보다 더 의미 있는(be more meaningful than a thousand words) 사진 한 장.”
페이스북에 올라온 미국 오리건주의 어린 형제 사진이 전 세계인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strike a chord in the hearts of people all around the world). 말기 암을 앓고 있는(suffer from terminal cancer) 열다섯 살 형이 남동생에게 자신이 곧 죽을 거라고 말한 뒤 흐느끼는 동생을 위로하는(comfort sobbing younger brother) 모습이다.
이안이라는 이름의 형은 2019년 뼈암의 일종인 골육종 진단을 받았다(be diagnosed with osteosarcoma, a type of bone cancer). 수술과 수개월에 걸친 화학 요법 치료 후(after undergoing surgery and months of chemotherapy) 암이 없어졌다는(be cancer free) 담당 의사 말을 듣고 온 가족이 뛸 듯이 기뻐했었다(be over the rainbow).
그런데 2021년 11월, 청천벽력 같은(like a bolt from the blue) 소식이 전해졌다. 암이 재발해 온몸에 펴졌다는(spread throughout his body) 것이었다. 병원 측으로부터 더 이상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는 최후통첩을 받았다(get an ultimatum). 곧 세상을 떠나게 될(depart this life) 거라고 했다.
형으로부터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be numbered) 말을 들은 어린 동생은 형 품에 안겨 울음을 터뜨렸다(break down in tears). 동생은 형 가슴에 기대어 울고(lean on his elder brother’s chest and cry) 형은 동생을 팔로 감싸 안았다(hold him in his arms). 형은 짐짓 태연한 척하며(deliberately put on a brave face) 동생을 달랜다(console his sibling). 병을 이겨내지 못한 형이 미안하다면서(apologize for not being able to beat the disease) 동생 이마에 입을 맞춘다(give him a kiss on his forehead).
두 형제 간의 뭉클한 순간을 찍은 이 가슴 아픈 사진(heartbreaking photo of the touching moment)은 페이스북에 올라오자마자(shortly after being uploaded to Facebook) 많은 이의 눈시울을 적시게(be moved to tears) 했다. 형 본인도 처음에 곧 죽게 되리라는 말을 듣고는 눈물을 쏟았다고(burst into tears) 한다. 죽는 것이 두려워서(be scared of dying)가 아니라 부모님과 동생, 친구들, 그리고 이 세상을 위해 한 가지도 좋은 일을 한 게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고 한다.
마음이 미어지게 하는 이 사진(gut-wrenching picture)을 올린 가족 지인에 따르면, 이안은 마냥 죽음을 기다리며 헛된 시간을 보내지(sit around dying) 않겠다고 한다. 가족과 주위 사람들을 위해 이제부터라도(from here on out) 죽음이 현실이 될 때까지, 마지막 숨을 거두는(breathe his last) 그 순간까지 바삐 살고 싶다고 했다.◎
조선일보 윤희영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