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危機의 韓半島 2022-08/ 08월 03일 中 겁박에 안 밀린 美·대만 - 08월 30일 NPT 무력화와 북핵 대응 ‘제3의 길’

상림은내고향 2022. 8. 31. 12:28

危機의 韓半島 2022-08/

08월 03일  中 겁박에 안 밀린 美·대만…尹대통령도 펠로시 만나야

 중국의 격렬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낸시 펠로시 미국 하원의장이 1박 2일 일정으로 2일 저녁 대만을 방문한 것은, 미·중·대만 3각 관계 차원을 넘어 글로벌 신냉전 정세에도 상당한 의미를 갖는다. 미국과 대만은 민주주의 국가 연대가 ‘하나의 중국’ 원칙보다 우선임을 확고히 했기 때문이다. “전 세계가 독재와 민주주의 사이에서 선택을 마주한 상황” “대만 민주주의를 지원하려는 확고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왔다”는 펠로시 의장의 대만 도착 성명만 봐도 알 수 있다. 외형상 의회 지도자의 방문이지만, 조 바이든 행정부는 물론 미국 전반의 중국 견제 기류를 반영한다. 교역·교류 등 중국과 밀접한 ‘양안 관계’를 유지해온 대만 역시 홍콩 사태 등을 거치면서 자유 진영과의 안보·경제 협력을 강화하는 쪽으로 급속히 선회했다. 대만은 서슴없이 미국 주도의 ‘칩4’ 참여 의사도 밝혔다.

중국이 대만과 미국을 군사적으로 겁박하고 나선 것도 이런 맥락 때문이다. 미 권력 서열 3위인 하원의장의 대만 방문은 25년 만이다. 1997년 뉴트 깅그리치 의장 방문 당시 중국은 ‘하나의 중국 원칙’ 위배라며 미사일 훈련 등으로 반발했는데, 이번엔 시진핑 주석까지 나서 “불장난을 하면 타죽을 것”이라고 위협했다. 대만해협이 아니라 대만을 포위하는 식의 실탄 군사훈련 등 무력시위에도 돌입했다. 이런 대만해협 긴장은 갈수록 높아질 것이다.

미·중 전략이 충돌하는 핵심 지대라는 점에서 한국과 대만의 입장은 흡사하다. 펠로시 의장은 3일 오후 방한한다. 그런데 공식 일정은 4일 김진표 국회의장과 회동 및 오찬뿐이다. 대통령실은 ‘윤석열 대통령이 휴가 중이어서 만나기 어렵다는 입장을 전하고 양해를 구했다’고 한다.

국가 안보와 한미동맹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윤 대통령은 펠로시 의장과 만나야 한다. 휴가 중이라도 서로의 체면을 구기지 않을 프로토콜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펠로시 의장은 앞서 방문한 싱가포르·말레이시아·대만에서 모두 국가 정상을 만났고, 한국에 이은 일본 방문 때는 기시다 후미오 총리를 만날 예정이다. 2015년 방한 때도 당시 박근혜 대통령을 만난 바 있다. 미국에선 대만과 한·일 방어 문제를 묶어서 본다. 서울에 온 펠로시 의장을 만나지 않는 것은 중국과 북한 등에 잘못된 신호가 될 수도 있다.

문화일보 사설

 

08.04  펠로시 안 만나는 尹, 美·中에 잘못된 신호 주는 건 아닌지

▲3일 대만 의회를 방문한 낸시 펠로시 미 하원의장./AFP 연합뉴스

 

미국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이 중국의 강력한 반대에도 2일 대만을 방문한 뒤, 3일 내한했다. 그는 대만에선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인권과 법치를 무시하고 있다”며 “전 세계가 독재와 민주주의 사이에서 선택을 앞두고 있다”고 했다. 펠로시 의장의 대만 방문에 신중한 입장을 보이던 백악관도 “대통령은 하원의장의 순방 결정을 존중하며 이것이 미국의 정책과 완전히 일치한다고 믿는다”고 했다. 중국은 대만 주변에서 군사 훈련을 하고 “행위의 성질이 극도로 악랄하고 후과는 극히 엄중하다” “불장난을 하면 반드시 불에 타 죽는다”며 강하게 맞섰다.

 

이런 가운데 윤석열 대통령은 휴가 중이기 때문에 방한한 펠로시 의장을 만나기 어렵다는 입장을 전했다. 미 의전 서열 3위인 펠로시 의장은 이번 아시아 순방에서 한국을 제외한 나라들에선 정상들을 만났다. 대만 차이잉원 총통은 물론이고 싱가포르 리셴룽 총리, 말레이시아 이스마일 사브리 야콥 총리와도 회동을 가졌다. 일본에선 기시다 후미오 총리를 만날 예정이라고 한다.

 

윤 대통령은 대선 과정과 취임 이후 굳건한 한미 동맹을 강조해왔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선 한미 동맹을 군사 동맹을 넘어 경제·기술 동맹으로 격상하는 데 합의했다. 나토 정상회의 연설에선 자유민주주의 국가 간 협력을 강조하며 “자유와 평화는 국제사회 연대에 의해서만 보장된다”고 했다. 이런 윤 대통령이 서울에 있는데도 ‘사전 양해를 구했다’며 펠로시 의장을 만나지 않는 것에 대해 일각에선 중국 눈치를 보는 것 아니냐는 해석도 나온다. 펠로시 의장은 2015년 방한 당시에는 박근혜 대통령과 회동했었다.

 

중국은 우리 최대 교역국이자 북핵 문제 핵심 관련국으로 신중하게 다뤄야 할 대상이다. 하지만 문재인 정권처럼 굴종적 자세로는 왜곡된 관계만 계속될 뿐이다. 윤 대통령이 펠로시 의장을 만나지 않는 것이 미국과 중국에 잘못된 신호를 주지는 않을지 걱정이다.

조선일보  사설

 

08.05  美 펠로시 의장 ‘의전 실종’으로 드러난 우리 정치권의 모습

▲낸시 펠로시 미국 하원의장이 3일 오후 경기도 평택 소재 주한 미 공군 오산기지를 통해 입국하고 있다.(주한미국대사관 트위터 캡쳐) 2022.8.4/뉴스1

 

낸시 펠로시 미국 하원의장이 4일 국회에서 “안보에 대한 미국의 강력한 의지를 보여주는 여러 방법 중 하나가 동맹국인 한국에 감사를 표하는 것”이라고 했다. “어떻게 하면 한미 동맹 관계를 발전시킬 수 있을지 논의한다는 점에서 이번 방문은 굉장히 특별하다”고도 했다. 펠로시 의장과 김진표 국회의장은 회담 직후 공동 언론 발표문을 통해 “국민이 체감할 수 있는 강력하고 확장된 대북 억지력을 바탕으로 실질적인 비핵화와 평화 정착을 위한 양국 정부의 노력을 지원해 나가기로 했다”고 밝혔다.

 

펠로시 의장은 이렇게 한미 동맹을 강조했지만 3일 밤 그의 입국 당시 우리 측 의전은 이와 동떨어진 모습이었다. 펠로시 의장이 경기 평택 오산 기지에 도착할 당시 국회와 정부 관계자 아무도 영접을 위해 공항에 나가지 않았다. 펠로시 의장은 주한 미국대사와 주한미군사령관 등 미국 관계자들만이 도열한 가운데 한국 땅을 밟았다. 펠로시 의장이 대만 타이베이에 도착할 당시에는 대만 외교부 장관 등 주요 인사들이 공항에 나와 영접했다.

 

펠로시 의장은 공식적으로 김진표 의장과 회담을 위해 방한했기 때문에 국회 책임이 크다고 볼 수밖에 없다. 외교부는 “외국 의회 인사 방문에 대한 의전은 국회가 담당하는 것이 외교 관례”라고 했다. 국회 측은 “공항에 의전을 나가지 않기로 미국 측과 사전 협의를 거쳤다”고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우리 경제 안보의 핵심 동맹국의 서열 3위 인사가 방문하는데 그 손님을 맞으러 나간 국회 인사나 정치인이 단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이 잘한 일인가. 국회 외교위원회 소속 의원 한 명도 공항에 나가 손님을 맞지 않았다. 그보다 바쁘고 중요한 어떤 국사가 있었나.

 

이 어이없는 일은 지금 여야가 제각각 심각한 내분에 빠져있는 우리 정치 상황을 보여주는 한 장면일 수도 있다. 국민의힘은 당 비상대책위원회 출범을 놓고 친윤(親尹)계와 이준석 대표 측이 연일 독설을 주고받으며 충돌하고 있다. 민주당은 28일 새 당대표와 최고위원을 뽑는 전당대회를 앞두고 이재명 후보와 친명(親明)계, 박용진 후보, 강훈식 후보, 친문(親文)계 등이 서로 뒤엉켜 난타전을 벌이고 있다. 여야 없이 모두 내분에 정신을 팔고 있으니 정작 중요한 외교 의전엔 관심도 없었을 것이다.

조선일보 사설

 

08월 05일  대만 상공으로 미사일 쏜 中…이런데도 ‘동맹’ 홀대한 尹

 중국이 타이베이 상공을 통과하는 미사일을 쏘아대는 등 대만에 대한 무력 겁박에 나선 것은, 시진핑 체제의 중국이 우크라이나를 무력 침공한 러시아와 다름없다는 본질을 새삼 명확하게 확인시켜준다. 세계 각국이 국익을 위해 날카로운 외교적 대립이나 ‘말과 논리 전쟁’을 벌일 수는 있지만, 실제로 무기를 사용해 주변국을 침공하거나 거기에 준하는 행동을 하는 것은 국제법 위반으로 규탄받아야 마땅하다. 특히 중국처럼 수많은 핵미사일을 비롯해 세계 최고 수준의 무력을 보유하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거부권까지 가진 나라가 그렇게 하는 것은 대만은 물론 동북아, 나아가 세계 평화에 대한 정면 도전이다.

중국의 이런 무력 겁박은 외형상 낸시 펠로시 미 하원의장의 대만 방문에 반발하는 것이지만, 기본적으로 ‘공산당 독재 체제’인 중국의 본질과 관련이 있다. 미·중 갈등이 격화하면서 앞으로 더 심각한 공격적 행위도 할 가능성이 다분하다. 중국은 최첨단 스텔스 전투기 등 100여 대 군용기와 항모, 핵잠수함까지 동원한 상태에서 장거리 로켓포와 탄도미사일을 퍼부었다. 일부는 대만 상공을 가로질렀고 일본의 배타적 경제수역(EEZ)에 떨어졌다고 한다. 대만 외교부가 “중국이 북한에서 배운 것 같다”며 개탄했는데, 실제론 훨씬 심각하다. 4일 하루에만 항공기 650대가 영향을 받았고, 선박 15척이 군사훈련 구역에 발이 묶였다고 한다. 대만 해협 일대는 세계 컨테이너선의 절반 이상이 통과하는 해상 물류 요충지다. 우리나라가 수입하는 중동산 원유의 90%도 이 지역을 통과한다.

이럴수록 자유민주주의 진영의 연대가 더욱 중요해진다. 그런데, 윤석열 대통령은 펠로시 의장 면담을 놓고 갈팡질팡하다 40분 통화로 면피했다. 대통령 휴가를 면담 회피 빌미로 삼았지만, ‘대중 관계를 고려해 만나지 말아야 한다’는 기류가 강했다고 한다. 중국의 대만 겁박에 놀란 윤 정부가 펠로시 의장 방한을 부담스러워하며 의도적으로 그랬다는 주장도 있다. 사실이 그렇다면 더욱 심각한 문제다.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와의 연대를 약속하고 온 것이 얼마 전이다. 이젠 외교·안보마저 불안해지고 있다.

문화일보  사설

 

08.09  ‘천안문 망루’와 ‘펠로시 패싱’

동맹 강조 尹의 뜻밖 선택
휴가 이유 대다 “국익 고려”
中 눈치 본 것으로 해석될 수밖에
정부 외교 지향점은 어디인가

낸시 펠로시 미국 연방하원의장이 지난 3일 경기 평택시에 위치한 오산 미 공군기지를 통해 입국하고 있다. 이날 한국측에서는 아무도공항 영접을 나가지 않아 '의전 홀대' 논란이 있었다. 주한미국대사관 트위터 캡쳐

 

올 초 박병석 국회의장이 스리랑카를 방문했을 때 수도 콜롬보 공항에는 현직 장관 4명이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자정이 다 된 늦은 시간에 영접하러 나온 것이다. 예우하겠다는 국가 차원의 의지가 있으면 이렇게도 한다.

 

지난주 낸시 펠로시 미 하원 의장의 방한 때 ‘텅 빈 공항’이 논란이 되자 우리 외교부는 ‘입법부 외빈 의전은 국회가 담당하고, 행정부는 관련 없다’고 했다. 관료주의적 책임 회피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의전 지침은 깨면 큰일 나는 절대 법칙이 아니다. 상황에 따라 필요하다면 융통성을 발휘할 수 있다. 펠로시가 대만·일본에 도착했을 때는 외교부 장·차관들이 공항 영접을 나갔다. 이 나라들은 의전을 몰라 이랬겠는가.

 

국회와 대통령실은 “미국 측이 공항 영접을 사양했다”며 사전 양해가 있었다고도 했다. 미 측이 한국에는 ‘안 나와도 된다’고 하고 일본·대만에는 ‘나와달라’고 했을 리는 없다. 그런데 우리만 안 나갔다. 한 전직 고위 관료는 “선물 받는 쪽에서 ‘뭘 이런 걸 다…’라고 하니, 한국만 ‘그래? 그럼 안 줄게’라고 한 상황이 벌어진 느낌”이라고 했다.

 

윤 대통령이 펠로시를 만나지 않은 결정은 좀 더 짚어볼 필요가 있다. 윤 대통령은 최근 방한한 미국 싱크탱크 인사들을 만나려 한 적이 있다고 한다. 대통령이 만나줄 ‘거물급’은 아니었다. 결국 일정이 안 맞아 성사는 안 됐지만, ‘도움만 된다면 급이 무슨 상관이냐’는 윤 대통령의 실용 스타일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생각한다. 윤 대통령은 취임 전에 차관보급인 성김 미 대북특사와 따로 식사하는 파격을 보인 적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휴가’라지만 서울에 머문 윤 대통령이 미 대외 정책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치는 펠로시를 ‘패싱’한 것은 더 도드라질 수밖에 없었다. 한미 동맹 복원과 자유민주주의를 강조해온 윤 대통령이 펠로시를 만나는 건 튀는 행보가 아니었다. 펠로시가 방문한 유럽·아시아 모든 나라에서 정상들을 만났기 때문에 부담도 적다. 해석이 분분한데 한 외교 소식통은 “바이든 대통령도 펠로시 대만 방문을 탐탁지 않아 한다는 소식이 들리니 대통령과 참모들이 최초 판단을 잘못했던 것 같다”고 했다.

 

속사정이 어쨌든 ‘휴가 때문’이라고 발표를 했으면 일관성을 지켜야 했는데 그러지도 못했다. 펠로시 방한을 전후한 대통령실의 뒤섞인 메시지는 ‘여론 안 좋으니 만나는 걸 고려했다가, 다시 그건 너무 모양새가 빠지니 통화 정도로 절충’했다고 비칠 수밖에 없다. 대통령실이 나중에 만남 불발에 대해 “국익을 총체적으로 고려한 결정”이라고 한 것은 참사 수준의 실언이다. ‘휴가 때문’이라는 애초 설명과 앞뒤가 안 맞을뿐더러, 거창한 전략적 고려가 있었다면 ‘중국 때문’ 말고 달리 해석하기 어렵다. 그런 뜻이 아니라고 수습하긴 했지만, 많은 사람은 과거 박근혜 대통령이 자유민주주의 진영 지도자 중 유일하게 천안문 망루에 올라간 것을 떠올렸을 것이다.

 

물론 한미 관계는 이 정도 사건으로 흔들릴 만큼 허약하지 않다. 대통령 지지율 하락과 맞물려 필요 이상으로 이슈가 커진 측면도 있다. 다만 외교 결례니 의전 홀대니 같은 가십성 논란을 넘어, 이번 건은 우리 외교 안보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부호를 남겼다. 컨트롤타워가 중심을 잡고 있는지, 이에 따라 일선 조직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지, 동맹국과 소통하는 데는 문제가 없는지, 무엇보다 우리 외교가 명확한 지향점과 원칙을 갖고 있는지 말이다. 펠로시가 떠난 뒤 중국은 “예의 바른 결정”이라고 했고, 미 조야에선 불편한 반응이 나왔다. 이게 의도한 결과는 아니지 않은가.

조선일보  임민혁 기자

 

08.09  윤 대통령이 펠로시를 만났어야 할 이유

지금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싱긋이 미소 짓고 있을지 모른다. 그의 시선은 중국 해군 함정에 탑승한 병사의 어깨 너머로 대만 해안선과 산세가 보이는 사진에 꽂혀 있을 것이다. 낸시 펠로시 미 하원의장이 기어이 대만에 발을 디디는 순간 크게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건 울고 싶을 때 얻어맞은 뺨이었다. 이번 일을 핑계로 중국의 정예 공군기와 함정이 대만해협 중간선을 넘어섬으로써 수십 년 묵은 양안 관계의 금기를 깨뜨린 게 가장 큰 소득이다. 한번 깨진 금기는 더 이상 금기가 아니다. 5년 만의 가을 당 대회를 앞두고 대내 결속이 필요한 시기에 국내 정치적으로도 소득이 있다. 관영방송이 대만 봉쇄 훈련 장면을 반복적으로 튼 이면에는 ‘미국이 항공모함을 출동시켜 놓고도 구경만 하지 않았느냐, 그러니 인민은 당과 지도부를 믿고 따르라’는 행간의 의미가 깔려 있었을 것이다.


물론 이런 셈법이 반드시 옳은 건 아니다. 시진핑은 더 큰 리스크와 미래의 불확실성을 떠안게 됐다. 미·중 갈등의 위험예고 지수는 확연하게 상승했다. 이대로 가다간 남중국해에서 미국이 펼치고 있는 항행의 자유 작전이 대만해협으로도 확대될 가능성에 대비해야 한다. 미국의 대만 방어 공약은 더욱 확고해지고, 대만인의 반중 정서가 더욱 확산될 것이다. 그럴수록 시진핑이 불멸의 업적으로 삼고 싶어 하는 양안 통일의 장애물은 더 높아진다.


대만해협의 파고가 높아지면 필연적으로 한반도에 여파가 닥친다. 대만 긴장과 한반도 정세의 함수관계는 지리적 거리뿐 아니라 전략자원 배치와 군사력 균형 등 복합적 요인에 의한 것이다. 이는 북한의 6·25 남침 직후 미국이 가장 먼저 한 일이 7함대를 대만 해역으로 보내 중국부터 견제했던 데서도 입증된다.

 

지난 4일 낸시 펠로시 미 하원의장의 방한 당시 휴가중이었던 윤석열 대통령은 전화통화로 면담을 대신했다. [연합뉴스] 

 

지극히 당연한 말이지만 한국은 대만해협의 파고를 예의주시하며 긴장의 끈을 늦추지 말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펠로시가 대만을 거쳐 한국에 온 건 미국 정부·의회의 동향과 언론에 보도되지 않는 속내는 어떠하며, 중국의 반발에 대해서는 어떤 대응책을 갖고 있는지, 차이잉원 대만 총통의 전략과 결심은 어떠했는지, 대만의 ‘칩4’ 가입 등 반도체 협력 논의는 어떤 진전이 있었는지 등을 확인해 볼 수 있는 기회였다. 하나같이 우리 국익과 밀접하게 연관되는 사항들이고, 윤석열 대통령이 직접 만나 물었어야 할 사안들이다. 야당 출신 국회의장과의 대화엔 한계가 있는 법이다. 그런데 대통령실은 펠로시와의 면담을 회피했다가 부랴부랴 전화 통화로 대체했다.


그 이유가 대통령의 휴가 때문이란 보도를 접하고 2년 전 해양수산부 공무원 피살사건을 떠올렸다. 공무원 이대진씨가 생사의 갈림길에 있던 시각, 청와대 비서실장과 안보실장, 국방부·통일부 장관 등이 심야 회의를 열고서도 문재인 대통령에게는 보고하지 않았다. “대통령의 잠을 깨울 수 없어 아침까지 기다렸다”고 했다. 그런 변명이 용인되지 않는 건 안면(安眠)을 보장받을 대통령 개인의 권리가 국민의 생명 안전을 지킬 의무를 앞설 수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대통령의 휴가와 국익이 걸린 중요한 외교 일정이 충돌하는 일이 있어선 안 된다. 윤 대통령이 갑작스레 용산 집무실에 나타나 “중요한 외빈이 방한해 휴가를 쪼갰다”고 얘기했다면 지지율 추락을 0.1%쯤은 억제할 수 있지 않았을까.


윤 대통령이 펠로시와의 만남을 피한 진짜 이유는 중국 눈치를 본 것이란 분석이 더 설득력있게 퍼져 있다. 그게 사실이라면 문재인 정부 시절의 대중 외교 행태를 답습한 것이란 비난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웃집 눈치 보느라 내 집으로 찾아온 손님을 피했다는 건 윤석열 정부가 내걸었던 당당한 외교 원칙에도 맞지 않고 한·미 동맹 강화와도 거리가 멀다. 중국의 눈치를 보았건, 대통령의 휴가를 지키려 했건 모두 다 국민의 눈에 마뜩잖은 일이다. 이런 일들이 쌓여 지지율이 내리막길에서 못 벗어나는 것이다.

중앙일보  예영준 논설위원

 

08월 10일  中 왕이 ‘5개 요구’는 주권 침해, 일고의 가치도 없다

 박진 외교부 장관과 왕이 중국 외교부장의 9일 회담은, 윤석열 정부 5년을 넘어 수교 30년(오는 24일)을 계기로 향후 30년의 양국 관계를 좌우할 수 있다는 점에서 국내외의 관심을 모았다. 양국은 두 차례 회담과 만찬 등 300분 동안 대화를 이어가면서 서로 할 말은 허심탄회하게 다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공동성명도 한 줄 내지 못했다. 개별적으로 나온 양측 발표를 종합하면, 사드·북핵·공급망 문제 등 현안을 놓고 입장 차이가 심각하다.

 

특히 왕 부장이 제기한 5가지 요구 사항은 대한민국 주권 침해라고 할 만큼 터무니없고 무례하다. 중국 외교부의 회담 발표문 제목부터 ‘5가지 응당 해야 할 것을 견지하라’였고, 왕 부장은 “양국 국민 뜻의 최대공약수”라고 했다. 한국 정부에 제시한 최소한의 가이드라인이며, 이를 벗어나면 응징하겠다는 협박이나 다름없다. 첫째 요구는 ‘독립·자주를 견지하고 외부의 장애와 영향을 받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을 독립국·자주국도 아님을 시사하는 것은 물론, 한미동맹의 파기를 요구하는 의미도 된다. 둘째는 ‘서로의 중대 관심 사항을 배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표현은 그럴듯하지만, 중국 관계자들은 사드 3불 폐기 등에 반대하는 취지임을 밝히고 있다. 셋째는 공급망·생산망 안정, 넷째는 내정 불간섭, 다섯째는 유엔헌장 견지 등인데 한결같이 일방적 요구일 뿐이다.

중국이 상호 배려를 내걸면서도 한국을 위협하는 북한의 탄도미사일 도발을 감싸는 것은 이율배반의 극치다. 더구나 거부권으로 유엔안전보장이사회의 대북 제재 결의를 허물었다는 점에서 유엔헌장을 언급할 자격도 없다.

결국, 왕 부장이 한·중 관계 미래 30년을 언급하며 5개 요구를 꺼낸 것은 앞으로 미국 편에 서지 말라는 협박이다. 윤 대통령이 낸시 펠로시 미 하원의장 방한 때 눈치를 보며 전화 회동으로 대체하자 자신감을 얻은 중국이 사드 3불에 5개 요구를 얹어 윤 정부를 겁박하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 첫해 ‘사드 3불’을 받아낸 과정을 윤 정부에도 강요하겠다는 뜻이다. 윤 정부는 중국의 5개 요구가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것을 행동으로 분명히 보여주어야 한다. 중국 요구와는 달리 동맹 강화·확대에 나서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앞으로 수십 년 동안 중국에 끌려다닐 수 있다.

문화일보  사설

 
 

08.11  내정 간섭 말자는 中, 한국 내정인 ‘사드 3不’은 강요

▲박진 외교부 장관(왼쪽)과 왕이 중국 외교부장. /중국 외교부

 

윤석열 정부 출범 후 첫 한·중 외교장관 회담에서 왕이 부장은 박진 장관에게 ‘내정 불간섭’ ‘상호 중대 관심 사항 배려’ ‘공급망 안정’ 등을 요구했다. 미국 주도 반도체 공급망 협의체인 ‘칩4′와 인도태평양 경제프레임워크(IPEF)에 참여하지 말고 ‘사드 3불(不)’을 지키며 대만·남중국해 문제에 관여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한국의 경제·안보 주권을 무시하는 요구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중국은 최근 “새로운 관리는 과거 부채를 외면할 수 없다”며 사드 3불을 노골적으로 압박했다. 이번 회담에서도 같은 요구를 했다고 한다. 3불은 사드 추가 배치, 미국 미사일 방어 체계(MD) 참여, 한미일 동맹 불가 등을 한국이 약속했다는 것이다. 모두 한 나라의 주권에 관한 사항이다. 국가 간 공식 합의나 약속도 아니었다. 문재인 정부의 입장 표명이었을 뿐이다. 구속력이 없다. 중국이 북한을 압박해 핵·미사일 위협을 없애면 사드는 필요도 없다.

 

중국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쏜 북한에 대한 유엔 추가 제재안에 반대했다. 북 규탄 성명도 무산시켰다. 북한이 한국을 위협하는 데엔 동조하면서 이 위협을 피해 자신을 지키려는 한국의 조치는 방해한다. 자국 내정엔 간섭하지 말라면서 남의 나라 안보 주권은 침해해도 되나. 중국은 걸핏하면 우리 방공식별구역(KADIZ)을 침범하고 서해 중간수역 너머로 군함을 보내고 있다. 시진핑 주석은 한반도가 중국의 일부였다는 말까지 했다.

 

‘칩4′와 IPEF 참여도 경제적 국익 차원에서 우리가 결정할 문제다. 정부는 “특정 국가를 배제하기 위한 게 아니다”라고 수차례 설명도 했다. 대만과 남중국해 문제 또한 국제법과 평화 원칙에 따라 원론적 입장을 밝힌 것이다. 정부는 중국과 협력은 확대해 나가되 부당한 압력에는 단호하고 당당하게 맞서야 한다. 중국 공산당은 상대가 약세를 보이면 굴종시키려 든다.

조선일보  사설

 

08.12  文 정부 ‘사드 운용 제한’ 中 요구 들어주고 국민에 거짓말했나

▲정의용 외교부 장관과 왕이 중국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 /연합뉴스

 

중국 외교부가 한국 사드 배치와 관련해 “한국 정부가 대외적으로 ‘3불(不)과 1한(限)’ 정책을 선시(宣示·널리 선포해서 알림)했다”고 주장했다. 3불은 사드 추가 배치, 미국 미사일 방어체계(MD) 참여, 한·미·일 군사 동맹 불가 등을 한국이 약속했다는 것이고, 1한은 사드 레이더에 중국 방향 차단막을 설치하는 등 사드 운용에 제한을 둔다는 것이다. 1한은 그동안 중국 관영 매체가 몇 차례 거론했지만 중국 정부가 공식화한 것은 처음이다.

3불은 향후 추가적 조치를 하지 않겠다는 의미지만 1한은 이미 배치한 사드의 운용까지 중국 눈치를 보며 우리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더 심각한 안보 주권 포기다. 이것이 사실이면 세계에서 자국 군사 장비 사용에 다른 나라 간섭을 허용한 전무후무한 일일 것이다.

 

강경화 외교장관은 “중국이 1한을 추가로 요구한 사실이 없고 사드 운용을 제한할 생각이 없다”고 했었다. 하지만 이번에 중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1한을 들고 나오면서 문재인 정부가 중국에 이면 합의를 해주고 국민에겐 거짓말을 해온 것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2017년 당시 문 대통령은 중국의 사드 반발을 무마하고 방중(訪中) 하기 위해 몸이 달아있었다.

 

실제로 문 정부는 임기 5년 내내 사드 정식 배치를 미뤘다. 성주 사드 기지에 대한 환경영향평가는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일반 환경영향평가로 바꿨고, 통상 1~2년이면 끝나는 절차를 하나도 진행하지 않았다. 좌파 단체들의 시위와 방해로 오랜 기간 물자 반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병사들이 컨테이너 생활을 하고 기지 운영도 차질을 빚었다. 미 국방장관이 우리 정부에 직접 불만을 토로했다. 문 정부가 중국의 1한 요구를 실질적으로 들어주고 있었던 셈이다. 그런데 강경화·정의용 전 외교장관 등 문 정부 인사들은 이런 의혹에 대해 아무런 해명도 않은 채 침묵하고 있다.

 

현 대통령실은 “사드는 결코 협의 대상이 아니다”며 “이달 중 기지 운용이 완전히 정상화될 것”이라고 했다. 미국도 중국의 요구는 부적절하다고 일축했다. 사드는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에 맞서 국민 생명과 안보를 지키는 최후의 방어 수단이다. 중국의 부당의 압력에 굴복해 이것을 포기한다면 주권 국가도 아니다. 문 정부 당시 우리 안보 주권을 포기하는 이면 합의나 약속이 있었는지 밝혀야 한다.

조선일보  사설

 

08.15 사드 ‘3불’과 ‘3불1한’

▲유상철 중앙일보 중국연구소장

 한중 사드(THAAD, 고고도미사일방어) 갈등이 윤석열 정부 들어서도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중국이 박진 외교부 장관과 왕이(王毅) 중국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의 지난 9일 회담, 그리고 10일 중국 외교부 대변인의 발언 등을 통해 사드 문제에 관한 입장을 다시 밝히면서다. 중국의 입장은 ‘3불1한(三不一限)’에서 달라진 게 없다. 한데 국내 일각에선 중국이 기존 3불에 1한을 덧붙였다고 말한다. 또 1한이 뭔지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답답하다. 사드 갈등이란 엄중한 사태를 겪고 있음에도 아직도 이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너무 단편적이고 부족하지 않나 싶은 생각에서다.

 

 ▲박진 외교부 장관(왼쪽)이 지난 9일 중국 산둥성에서 왕이 중국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과 만나 악수하고 있다. [사진 외교부]

 

기본부터 다시 살피자. 우선 3불이다. 이 말이 나온 건 2017년 10월 31일 당시 문재인 정부가 사드 갈등을 풀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중국과 협의해 공표한 내용에 기초한다. 당시 양국은 ‘한중 관계 개선 관련 양국 간 협의 결과’를 발표했다. 내용은 크게 다섯 문단으로 나눌 수 있다. 이 중 네 번째 문단에 3불 내용이 나온다. “중국 측은 MD 구축, 사드 추가 배치, 한미일 군사협력 등과 관련하여 중국 정부의 입장과 우려를 천명하였다. 한국 측은 그간 한국 정부가 공개적으로 밝혀온 관련 입장을 다시 설명하였다.”


즉 한국이 1) 미국의 미사일방어 시스템에 참여하지 않으며 2) 사드 추가배치를 하지 않고 3) 한미일 군사협력이 동맹으로 발전하지 않게 하겠다는 뜻이다. 이 같은 내용이 알려지자 한국 사회 곳곳에서 격렬한 반발이 나왔다. 한국의 주권적 사항을 중국에 약속한 게 아니냐는 취지였다. 이후 우리는 3불만을 따졌다. 한데 중국은 줄곧 1한도 같이 주장했다. 1한은 10. 31 협의 결과에서 가장 긴 세 번째 문단에 기초한다. 다소 길긴 하지만 이해를 높이기 위해 전부 읽어볼 필요가 있다.

 

“한국 측은 중국 측의 사드 문제 관련 입장과 우려를 인식하고, 한국에 배치된 사드 체계는 그 본래 배치 목적에 따라 제3국을 겨냥하지 않는 것으로서 중국의 전략적 안보 이익을 해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중국 측은 국가안보를 지키기 위해 한국에 배치된 사드 체계를 반대한다고 재천명하였다. 동시에 중국 측은 한국 측이 표명한 입장에 유의하였으며, 한국 측이 관련 문제를 적절하게 처리하기를 희망하였다. 양측은 양국 군사당국 간 채널을 통해 중국 측이 우려하는 사드 관련 문제에 대해 소통해 나가기로 합의하였다.”


이 문단을 보면 중국이 한국에 이미 배치된 사드에 대해선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겠다고 하는 입장을 읽을 수 있다. 대신 그 운용에 있어 중국의 전략적 안보 이익을 해치지 않게 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한국에 배치된 사드 체계는 그 본래 배치 목적에 따라 제3국을 겨냥하지 않는 것으로서’라고 한 대목이 바로 그 내용이다. 이어 한국의 구체적인 조치를 요구한다. ‘한국 측이 관련 문제를 적절하게 처리하기를 희망하였다’ 부분이 그것이다. 이는 사드가 중국을 겨냥한 게 아니라고 한국이 말하고 있으니, 그럼 중국을 겨냥하지 않는다는 것을 한국이 적절한 조치를 통해 중국이 믿게 해달라는 것이다. 당시 중국이 요구한 한국의 조치로 사드 운용 상황을 중국에 통보하거나, 사드 레이더가 중국을 탐지하지 못하도록 중국 쪽으로 담을 쌓아달라는 것과 같은 말이 돌았다.

 

그리고 중국은 마지막으로 한국이 적절한 조치를 취했는가를 확인하는 문구까지 넣었다. ‘양측은 양국 군사당국 간 채널을 통해 중국 측이 우려하는 사드 관련 문제에 대해 소통해 나가기로 합의하였다’가 그것이다. 한국이 중국이 요구한 대로 중국의 이익을 해치지 않도록 사드 운용을 제한하는 조치를 제대로 취하고 있는가를 앞으로 군사당국 간 채널을 통해 확인하자는 이야기다. 이게 바로 1한으로 중국은 이후 줄곧 3불1한을 말해왔다. 한데 우리 사회에선 1한은온데간데 없어지고 3불의 불합리성만 문제를 삼았다. 왜 그렇게 됐나.


우리 정부가 중국의 요구대로 1한을 해 줄 수 없게 되자 그냥 모른 체하며 방치한 결과로 풀이된다. 당시 문재인 정부는 10. 31 협의 결과로 사드 갈등이 해소된 것처럼 말했다. 그러나 중국은 3불은 앞으로 한국이 해 나갈 일이며, 당장 한국이 할 일은 사드 운용 제한인 1한으로서, 사드에 대한 중국의 의구심을 풀어달라는 것이었다. 강경화 당시 외교부 장관이 11월 중국을 방문했을 때도 중국은 역시 ‘한국의 적절한 처리’를 요구했다. 중국에서 말하는 ‘한국의 적절한 처리’는 바로 1한을 가리키는 것이다. 한데 미군이 운용하는 사드를 한국이 어떻게 제한하나.

 

여기에 10. 31 협의의 크나큰 맹점이 있다. 한국이 해 줄 수 없는 사항에 대해 중국에 기대를 갖게 한 것이다. 이후 한국은 중국에 ‘약속’한 적이 없다고 말을 한다. 당시만 해도 ‘3불 원칙’이란 말이 많이 쓰였다. 그러다 이를 지킬 수 없게 되자 ‘원칙’이 아닌 ‘입장’으로 표현을 바꿨다. 그리고 이젠 약속이나 원칙이 아닌 그저 입장 표명이었고, 이제는 입장이 바뀌었다는 식으로 대처하고 있는 것이다. 2017년 12월 문재인 대통령의 방중 때 수행 기자가 폭행을 당하는 등 냉대를 받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중국은 한국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고 봤던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자명해진다. 10. 31 협의 결과가 잘못된 것이다. 왜 이런 일이 생겼나. 이 협의가 누구 사이에 체결됐는가를 보면 답이 나온다. 한국은 ‘남관표 국가안보실 2차장’이고, 중국은 ‘쿵쉬안유(孔鉉佑) 중화인민공화국 외교부 부장조리’다. 우리 외교부가 문안 작성에 참여하지 못했다는 후문이다. 그 결과 문안이 중국에 철저하게 유리하게 작성돼 훗날 중국에 공격을 당할 빌미를 많이, 그것도 아주 많이 남기게 된 것이다. 당시 우리가 서두른 게 문제였다. 그 이유는 이듬해 2월 평창동계올림픽 때 북한 초청을 앞두고 중국과의 관계를 서둘러 안정화하려 했기 때문이다.

 

 ▲지난 11일 중국 외교부 홈페이지에 올라온 왕이 외교부장 활동 소개 중 9건의 소식 가운데 한국 관련이 5건이나 된다. [중국 외교부 홈페이지 캡처]

 

사드 결정은 박근혜 정부가 했다. 한데 사드 배치를 내켜 하지 않았던 문재인 정부가 중국의 홀대를 더 받았다. 중국에 사드 배치 철수나 연기와 같은 잘못된 기대를 갖게 한 이유가 크다. 특히 10. 31 협의 결과 발표를 해 놓고 지키지 않는다는 생각을 중국에 갖게 했기 때문이다. 사드 사태는 한중 수교 30년 이래 양국 관계에 악영향을 준 최대의 사건이다. 박근혜 정권에서 시작돼 문재인 정부 내내 양국 관계를 괴롭혔고, 윤석열 정부에까지 미치고 있다. 그런 불행한 사건이 재발하지 않도록 무엇이, 왜 잘못됐는지에 대한 우리의 철저한 성찰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유상철 중국연구소장 you.sangchul@joongang.co.kr
 
 
 

월간조선 08월 호

수교 30주년, 韓中 관계를 다시 생각한다

美中갈등과 한국의 선택

프랑켄슈타인이 민주주의 문명을 지배할 수는 없다

 

⊙ 美中 디커플링 격화… 한국산 반도체를 美中에 동시에 파는 시대 끝나
⊙ 우크라이나 침공한 러시아는 중국에 비하면 ‘리틀 프랑켄슈타인’에 불과
⊙ “유럽이 어떻게 중국 시장을 대체할 수 있느냐”는 말은 무식한 소리… 나토는 글로벌 GDP의 6할 차지하는 선진국 집단
⊙ 中, 중국 내 외국 기업 제품의 제조·공정에 관한 기술 전부를 중국 정부에 넘기는 ‘국가표준’ 강행
⊙ 美, 미국산 첨단 제품이 포함된 물건의 중국 수출도 금지하는 ‘反중국 관련법’ 추진
⊙ 서방은 古代 그리스 이래 수평적 동맹 관계에 익숙… 아시아는 동맹 개념과 거리 멀어

劉敏鎬
1962년생.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일본 마쓰시타정경숙(松下政經塾) 졸업(15기) / 딕 모리스 선거컨설팅 아시아 담당, 《조선일보》 《주간조선》 등에 기고 / 現 워싱턴 에너지컨설팅 퍼시픽21 디렉터 / 저서 《일본직설》(1·2), 《백악관의 달인들》(일본어), 《미슐랭 순례기》(중국어) 등 

▲지난 2월 4일 베이징동계올림픽 개막식에서 중국 국기가 게양대로 옮겨지고 있다. 사진=조선DB

 

“어쩌면 우리는 프랑켄슈타인을 만들어낸 것인지도 모르겠다(We may have created a Frankenstein).”

리처드 닉슨 전(前) 미국 대통령이 1994년 세상을 떠나기 전에 윌리엄 사파이어에게 남긴 말이다. 사파이어는 1960년대부터 닉슨 연설문 작성 스태프로 일했던 사람이다.

여기서 ‘프랑켄슈타인’은 중국을 의미한다. ‘프랑켄슈타인’은 19세기 영국 소설가 메리 셸리가 창조해낸 괴물 인조인간의 대명사다. 과학적 명성을 얻으려던 빅터 박사의 야심에 의해 흉측한 모습으로 태어난 괴물은 비관·저주에 사로잡혀 자신을 창조한 빅터 박사를 공격, 결국 죽음으로 내몬다.

중국을 국제사회에 끌어들인 것은 미국이다. 닉슨은 1972년 2월 21일 베이징(北京)을 전격 방문, 중국을 국제무대로 끌어냈다. 미국과 닉슨이 빅터 박사인 셈이다. 빅터 박사가 그러했듯이 미국도 괴물 인조인간의 복수로 사라질 수도 있다. 닉슨 최후의 메시지는 반성인 동시에 공포라 볼 수 있다.

셸리의 소설 속의 괴물은 자신을 만든 빅터 박사를 죽이는 정도에서 끝난다. 중국이라는 이름의 프랑켄슈타인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인류 전체의 운명을 파괴할 수도 있는 역량을 가진 나라이기 때문이다.

지난 6월 말 윤석열(尹錫悅) 대통령은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린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정상(頂上)회의에 참석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여파가 극동(極東)의 한반도까지 미치고 있다는 증거다. 민주주의 국가의 일원으로서 한국도 러시아에 맞설 수밖에 없다. 물론 고통 분담도 감수해야만 한다.

그러나 러시아는 중국에 비교해 보면 ‘리틀(little) 프랑켄슈타인’에 불과하다. 경제력이라는 측면에서 러시아는 중국의 10분의 1 수준이다. 글로벌 무역시장에서의 중국의 비중은 약 20% 정도다. 러시아는 2% 정도로, 한국보다도 낮다. 인구는 말할 것도 없고, 무기 수준도 핵무기를 제외한 거의 모든 분야에서 중국이 ‘압도적’으로 강하다. ‘빅(big) 프랑켄슈타인’ 중국이 움직일 경우 얼마나 큰일이 벌어질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2052년을 향한 한국인의 出師表

올해는 한중(韓中)수교 30주년이 되는 해다. 이런 해에는 보통 연초(年初)부터 양국을 오가며 갖가지 기념행사가 벌어지기 마련인데 올해는 감감무소식이다.

한국 입장에서 한중수교 30년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30년간 양국 간 수출이 몇백 배가 늘었고, 민간 교류가 수백만~수천만 명에 달한다거나, 양국이 얼마나 가깝고 중요한지에 대한 이야기들이 넘칠 듯하다.

 

그러나 한국인 모두가 알고 있듯이, 내일의 한중 관계는 결코 밝지 않다. 이미 여기저기서 나타나고 있지만, 정치·경제·외교·군사·문화 어디 하나 희망적인 곳이 없다. 어두운 터널 속으로 급속히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다.

준비가 필요하다. 산에 오르기보다 내려가기가 더 힘이 든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한중 관계와 관련해 이미 시작된 시련과 도전에 맞선 ‘국가적 차원’의 결의가 필요하다. 축하하고 덕담(德談)을 나눌 때가 아니다. 30년 뒤 펼쳐질 한중수교 60년을 맞는 2052년을 향한 ‘한국인의 출사표(出師表)’가 필요할 때다. 2052년에 가서 회고해도 부끄럽지 않을, 중국에 대한 한국의 결의가 올해 중에 마련돼야만 한다. 물론 민주주의 국가로서의 자유·인권·법치는 중국을 대하는 한국의 기본 원칙이 되어야 할 것이다.


“자유는 자유무역보다 더 중요하다”

▲지난 6월 30일 윤석열 대통령은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린 나토정상회의에서 스톨텐베르그 나토 사무총장과 만났다. 사진=나토

 

윤석열 대통령은 나토정상회의를 통해 민주주의 세계가 어디로 흘러갈지, 시대정신이 무엇인지, 팬데믹 이후 국제정치가 어떻게 변할지 등에 대해 많은 것을 느꼈을 것이다. 물론 눈앞의 현안은 우크라이나 전쟁과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이다. 하지만 이런 문제는 당장 눈앞에 보이는 ‘점(點)과 선(線)’에 불과하다. 2022년 여름, 자세히 보면, 점·선을 연결한 면(面)·입체(立體)의 변화가 세계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세 인물의 리더십을 통해 최근 세계의 변화를 읽어보자.

첫째, 6월 말 나토정상회의를 주도한 인물인 옌스 스톨텐베르그(Jens Stoltenberg) 사무총장이다. 윤석열 대통령보다 한 살 많은 62세인 그는 원래 노르웨이 총리를 두 번 역임한 노동당 출신 정치가다.

“자유는 자유무역보다 더 중요하다”는 말은 스톨텐베르그의 리더십과 세계관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명언(名言)이다. 이 말은 지난 5월 말 스위스 세계경제포럼(World Economic Forum·다보스 포럼) 기조연설의 핵심 내용이다.

간단히 말해 자유를 위해서라면 자유무역이 훼손되는 것도 감수하겠다는 결의다. 정경분리(政經分離) 정책은 글로벌 시대의 이념 중 하나다. 체제와 가치가 다르더라도 ‘지구는 하나’를 외치며 상호 자유무역에 매진했다. 그러나 자유무역으로 부(富)를 축적한 뒤에 거꾸로 자유를 억압하는 나라들이 등장했다. 스톨텐베르그의 말은 정경분리가 아니라 정경일체(政經一體)를 의미한다.


“우크라이나 침략 이전으로 돌아가지는 않을 것”

두 번째 주인공은 독일의 올라프 숄츠 총리다. 지난 6월 27일, 주요 7개국 정상회담(G7) 기자회견에서의 발언을 보자.

“우크라이나 침략 이전 상태로 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올해 G7 회담은 독일이 주최국으로, 알프스의 엘마우성(城)에서 열렸다. 숄츠의 말은 ‘전쟁이 끝난다 해도 독일과 러시아와의 관계가 이전처럼 회복될 수는 없다’는 의미다. 잘 알려져 있듯이 독일은 러시아를 서방으로 끌어들이는 데 앞장선 나라다. 독일은 미국이 적극 반대하는 데도 러시아산 석유와 가스의 유럽 수입을 주도했다.

러시아산(産) 에너지 수입 프로젝트는 한국인 귀에도 익은, 선거철 단골 메뉴 중 하나다. 뭔가 거창하고도 역사적 사명처럼 느껴지는, 시베리아-몽골-중국-북한-한국으로 이어지는 에너지 파이프 프로젝트다.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뛰는(?) ‘통 큰 계획’의 근거는 독일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러시아(소련)와 전쟁을 벌인 독일도 러시아산 에너지를 수입하는데, 한국이라고 해서 못 할 이유가 무엇이냐는 식의 ‘환상적인’ 논리다.

숄츠 발언의 핵심은 러시아산 가스·석유 수입 문제에 있다. 러시아산 에너지 수입을 전면 재검토, 아니 장기적으로는 전면 중단하겠다는 것이 속내다. 러시아는 숄츠의 결의를 꺾으려고 선수를 쳤다. 푸틴 제재에 앞장서는 독일에 대한 보복 차원이기도 하지만, 베를린으로 향하는 에너지 파이프를 차단해나가고 있다.

독일의 결론은 원전(原電) 재가동이다. 국민들도 원전 재가동 찬성으로 돌아서고 있다. 독일의 원전 정책은 문재인(文在寅) 정부의 탈(脫)원전 정책의 모델이었다.

앙겔라 메르켈 전 총리는 2011년 독일 내 원전 6개 가운데 3개의 가동 중단을 결정했다. 이유는 후쿠시마(福島) 원전 사고였다. 원래 예정대로라면 나머지 3개도 올해 중에 폐기될 계획이었다. 메르켈은 원전을 대신해, 러시아산 에너지 수입 확대에 나섰다. 그는 에너지 수입을 통해 러시아와 가까이 지내면서 독일제 물건도 팔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문재인 정부의 원전 폐기 정책은 메르켈의 생각을 절반 정도 흉내 낸 것이다. 러시아산 에너지 도입을 위해 원전을 폐기하는 것까지는 동일하다. 그러나 러시아와의 관계 증진보다 파이프 경유지인 북한·중국과의 경제 일체화가 주목적이었다. 에너지 수입선이란 것은 한번 굳어지면 바꾸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중국·북한·한국이 에너지로 묶일 경우, 미국과의 관계도 멀어질 수밖에 없다.

올해 G7은 러시아에 맞선 서방 7개 선진국 결의대회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다. 독일의 근본적인 변화가 모두에게 천명됐기 때문이다. 독일은 GDP 대비 국방예산 2% 이상 증액을 약속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이 추구해온 정치·외교·군사 정책에서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음을 보여주는 선언이다.
 

 

日 기시다, 5년 내 국방예산 倍增 선언

▲기시다 일본 총리는 지난 6월 10일 싱가포르에서 열린 IISS 회의에서 국방비 배증을 선언했다. 사진=AP/뉴시스 

 

세 번째 주인공은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총리다. 6월 10일, 그는 싱가포르에서 열린 아시아안전보장회의에 참석해 기조연설을 했다. 영국의 국제전략연구소(IISS)가 주최하는 안보 관련 아시아 최고위자급 회담이다.

기시다 총리는 기조연설에서 GDP 대비 일본의 국방예산을 5년 내로 100% 올리겠다고 공언했다. 일본의 현재 연간 국방예산은 한국과 비슷한 수준인 약 500억 달러 정도다. 2027년까지 연간 1000억 달러의 국방예산 확보에 나서겠다는 것이 기시다 연설의 핵심이다. 일본 국방예산 증액 뉴스는 사실 지난 3월 이후 계속되어 온 구문(舊聞)이다.

필자가 주목한 부분은 발표 장소가 싱가포르라는 점이다. 일본 국방예산 증액 방침과 결의를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이 점령했던 싱가포르에서 발표했다는 것이 놀랍다. 좀 과장하자면, 서울에서 일본 국방예산 100% 증액을 발표하는 것과 같다. 일본이 조금만 움직여도 ‘군국주의 부활, 군사대국 야심’ 운운하는 소리가 스테레오 타입처럼 나오는 한국이 보기에는 흥미로울 정도로 일본의 국방예산 100% 증액에 대해서는 반대의 목소리가 거의 없다. 과거 일본의 침략으로 고통을 겪었던 베트남·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필리핀 등도 반대는커녕 적극 환영했다. 기시다가 천명한 ‘자유·민주주의·법치에 기초한 항해의 자유’에 찬성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물론 ‘빅 프랑켄슈타인 중국’ 때문이다. ‘군사대국 일본’은 남중국해 질서를 교란하는 중국에 맞서는 대항마이다.

나토·독일·일본, 세 지도자들의 변화는 2022년의 ‘리틀 프랑켄슈타인’ 러시아와 2022년 이후에 밀려올 ‘빅 프랑켄슈타인’ 중국의 힘자랑에서 비롯된 것이다. 중국과 러시아는 미국·유럽에 맞서 기존 질서를 부정하는 세력 타파 국가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한국은 기존의 국제질서를 준수하고 활용하는 과정에서 평화와 번영을 유지해온 나라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두 프랑켄슈타인과 도저히 어울릴 수 없는 나라가 한국이다.


경제를 생각해도 중국보다 나토 선택해야

그러나 일부에서는 듣기도 좋고 말하기도 편한 양비론(兩非論)이나 양시론(兩是論)에 매달리고 있다. 그들은 기존 질서 국가와 세력 타파 국가 양쪽에서의 줄타기도 주문한다. 독일이 근본적으로 변하고, 일본 군사화가 용인되는 상황인데도 ‘이쪽저쪽’ 모두를 고려해야 한다는 ‘한가로운 주장’을 펼친다.

7월 초 한국의 야당 지도자가 윤석열 대통령의 나토정상회의 참가에 대해 평가하면서 던진 발언은 무심하고 무책임한 양비론·양시론의 전형적인 본보기다. 그는 “신(新)냉전시대에 한쪽을 선택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중국이 자극받는데 참고 있다. 중국에 대해 추가적인 노력을 해서 진정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유·인권·민주주의·법치주의를 통한 가치관의 공유(共有)라는 측면에서의 나토정상회담 참가 의미는 무시한다. ‘중국의 보복’을 암시하는 듯한 경고도 대한민국 대통령에게 던진다. 그가 중국에 주목하는 이유는 ‘경제’이다. “유럽의 한 국가 인구가 500만~700만 명인데 어떻게 중국 시장을 대체할 수 있느냐”는 소리도 했다. 기본 팩트는 물론 국제정치의 현황도 알지 못하는 무식한 소리다.

윤석열 대통령은 어느 특정 국가와의 만남을 위해 유럽에 간 것이 아니다. 전부 37개 나라 정상이 모인 서방 나토회의, 즉 11억 인구에다 글로벌 GDP 총합 6할 정도의 선진국 집단의 회의에 참석한 것이다. 중국·러시아와 그들을 따르는 국가들의 글로벌 GDP 총합은 3할 이하에 그친다. 민주주의 가치관이 아니라, ‘돈’이란 관점에서 선택한다고 해도 중국이 아닌 나토를 선택하는 것이 상식이다.
 

 

국가표준’

▲중국 주하이에 있는 반도체 공장. 중국은 ‘중국표준’을 강제하면서 외국의 기술을 탈취하려 하고 있다. 사진=AP/뉴시스

 

경제 문제와 관련해 현재 중국과 미국에서 벌어지는 ‘살벌한 상황’을 보면, 양비론·양시론은 무지를 넘어선 ‘파멸’ 차원의 괴담(怪談)처럼 느껴진다.

먼저 중국에서 진행 중인 살벌한 상황부터 살펴보자. ‘국가표준(國家標準)’이란 말은 7월 이후 중국발(發) 경제 뉴스의 키워드 중 하나다. ‘국가표준’은 시진핑(習近平)이 내세운 이른바 ‘중국제조 2025’ 정책의 하부 방침으로, 현재 중국 내 외국 기업들의 운명을 가를 비수(匕首)가 될 전망이다.

중국 하이테크 제품을 전 세계 표준으로 만들기 위해 외국 기업들도 중국 정부에 협력해야만 한다는 것이 주된 골자다. 어떤 협력일까? 중국 내 외국 기업 제품의 제조·공정에 관한 기술 전부를 중국 정부에 넘겨야만 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국가표준’에 따르면, 중국에서 만드는 한국 반도체의 설계에서부터 재료나 제조와 관련된 기술과 정보 전부를 중국 정부에 제출해야만 한다.

만약 외국 기업이 응하지 않을 경우, 엄청난 벌금에서부터 추방에 이르는 무제한 제약을 가할 수 있다. 한국 기업이 반도체 설계도를 넘기지 않을 경우 중국에서 쫓아낸다는 의미다. 전기 자동차의 테슬라는 물론, 아이폰의 애플도 ‘국가표준’의 대상이 된다.

그동안 외국 기업들은 ‘국가표준’ 계획을 설마설마하면서 방관해왔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전쟁과 미중(美中) 디커플링(Decoupling) 가속화로 인해 상황이 급변했다. 큰일이 없는 한 내년부터 ‘국가표준’이 정식으로 발효될 전망이다. 정보·통신·자동차 같은 하이테크만이 아니라, 의료·에너지·금융 관련 외국 기업들도 그 대상이다. 정보와 기술을 전부 중국에 바치든지, 아니면 나가라는 의미다.


‘박쥐 국가’는 안 통한다

시진핑의 국가표준 강행은 곧 시행될 미국의 ‘반(反)중국 관련법’에 맞선 보복책이라 볼 수 있다. 현재 미국 의회의 초당적(超黨的) 지지하에 완성 단계에 들어서 있는 ‘반중국 관련법’은 미국 자본의 중국 내 하이테크 투자를 ‘근본적으로’ 차단할 수 있다.

이 법에 따르면 미국 정부의 심사에 따라 중국 내 투자 여부가 결정된다. 하이테크 산업 자체만이 아니라, 인공지능(AI)이나 핵심 부품 소재도 해당한다. 자본주의 체제에 어긋나는 법처럼 느껴지지만, 의원 대부분이 찬성하는 분위기다.

미국은 이미 중국 기업의 미국 내 투자 제한법을 가동하고 있다. 중국 기업이 미국 내 하이테크 기업의 투자·합병에 나설 경우 사전(事前)에 미국 정부에 보고하고 심사를 받아야만 한다. 검증 과정은 최하 1년이 걸린다. 투자·합병은 시간을 다투는 비즈니스이기 때문에 이 법에 의하면 사실상 중국 기업의 미국 내 투자가 불가능해진다.

현재 진행 중인 반중국 관련법과 기존의 중국 기업의 미국 내 투자·합병에 대한 심사권을 보면, 미국 정부가 지향하는 ‘분명한 의도’를 읽을 수 있다. 하이테크 산업에 관련된 중국과의 관계 자체를 ‘전부’ 끊겠다는 방침이다. 문자 그대로 디커플링이다.

 

양비·양시론자들은 중국에서는 중국법에 맞게, 미국에서는 미국법에 맞게 행동하자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박쥐 국가’로 나가자는 생각이지만, 실현 불가능한 망상에 불과하다. 미국 의회의 ‘반중국 관련법’이 미국 기업만이 아닌, 외국 기업에도 적용되기 때문이다.

한국 최첨단 반도체의 경우, 설계나 핵심 부품 일부에 ‘Made in USA’ 제품을 ‘반드시’ 사용한다. ‘반중국 관련법’은 미국산 첨단 제품이 포함된 물건의 중국 수출도 금지할 수 있다. 의류·신발과 같은 일용품은 예외겠지만, 혹여 ‘Made in USA’ 첨단 부품을 사용할 경우 중국 수출이 불가능해진다.

구체적으로 미국이 어디까지 관여하면서 제동을 걸 것인가? 한국을 포함한 13개국이 참가하고 있는 ‘인도·태평양 경제 프레임워크(IPEF)’가 주무대가 될 것이다. IPEF는 독재정권·반인권 국가와의 경제 관계 차단에 주력할 것이다. 냉전(冷戰) 당시 맹위를 떨쳤던 ‘대공산권수출통제위원회(COCOM·코콤)’의 21세기 버전이라 보면 된다. 가까운 시일 내에 유럽도 이에 참가할 전망이다.

중국이라고 명문화하고 있지는 않지만, 구체적인 IPEF 강령을 통해 첨단 기술의 중국 수출이 차단될 것이다. 만약 어길 경우 ‘강력한’ 벌금이 기다리고 있다. 물론 ‘Made in USA’ 첨단 부품 공급도 중단될 수 있다.


델로스 동맹의 盛衰

민주주의(Democracy)와 전제주의(Autocracy) 대결은 팬데믹 이후 본격화되고 있는 21세기 국제질서의 기본 프레임이다. 흥미로운 것은 두 진영의 위기 대응 방식의 차(差)이다.

전제주의 대표주자인 중국과 러시아는 최고 지도자의 판단에 의해 서로의 이익을 지켜나가려 하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의 관계는 동맹이 아닌, 지도자 차원의 협력에 불과하다. 시진핑이나 푸틴이 사라질 경우 두 나라가 어떤 관계로 나갈지 알 수 없다.

이에 반해 민주주의 진영은 개인이 아닌, 복수(複數) 국가끼리의 집단안보동맹(Collective Security Alliance)을 통해 전제주의에 맞서고 있다. 법과 제도로 서로 간의 책임과 의무를 규정한 집단 차원의 군사 동맹이 기본이자 기반이다.

서방 동맹은 2500여 년 전 고대(古代) 그리스를 모델로 하고 있다. 그리스는 1000여 개의 도시국가(Polis)로 구성된 나라다. 바다를 낀 땅에 살기 때문에 식량 자급률도 평균 30%에 불과했다. 교역을 하거나, 아예 상대를 공격해 약탈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구도다. 집단 동맹은 그 같은 상황에서 탄생된 결과다.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카오스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법이 동맹이다.

집단 동맹은 그리스의 해상 진출에 필수불가결한 수단이자 목적이기도 했다. 그리스 당시의 전함이나 수송선은 주기적(週期的)인 보급을 필요로 했다. 아무리 길어도 출항(出港) 후 일주일에 한 번은 물과 양식을 찾아 다른 섬에 들러야만 했다. 동맹 도시국가라면 빨리, 무료로 제공받을 수 있다.

무엇보다도 그리스 집단 동맹의 핵심은 군사적 영역에 있다. 오늘날과 같은 경제 동맹, 문화 동맹 같은 개념이 애초부터 없다. 죽느냐 사느냐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집단 해결 방안이 동맹이기 때문이다.

역사가들은 일반적으로 고대 그리스의 몰락은 동맹국에 대한 아테네의 폭정(暴政)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한다. 기원전 477년에 결성된 그 유명한 델로스 동맹(Delian League)은 최전성기에는 330개 도시국가가 참가한 동맹이었다. 그리스 전체 도시국가의 3할 정도가 참여한, 당대 최고(最高) 최대(最大)의 동맹이었다. 델로스 동맹은 페르시아의 침략에 맞서기 위해 아테네가 주도해서 결성된 군사 동맹이었다. 전함(戰艦) 건조에 필요한 비용을 동맹국 모두가 공동 지출하면서 서로의 안전과 평화를 지켜나갔다.

하지만 종주국 아테네는 점차 자기보다 약한 도시국가들을 무시하기 시작했다. 전함 건조 비용을 아테네 신전 건립에 전용(轉用)하기도 한다. 현재 아테네에 남아 있는 파르테논 신전은 당시 전함 건조 비용 횡령의 증거다.

이처럼 아테네가 제멋대로 행동하면서 동맹 관계도 흔들리게 됐다. 기원전 431년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그 같은 배경하에서 터졌다. 스파르타가 아테네의 전횡(專橫)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는 도시국가들의 대표주자로 나서면서 전쟁이 터진 것이다. 기원전 404년, 27년간의 전쟁 끝에 스파르타가 아테네를 점령했다. 이와 함께 델로스 동맹도 사라졌다.


펠로폰네소스 동맹 vs. 델로스 동맹

▲펠로폰네소스 전쟁 당시 전사자 추모 연설을 하는 아테네의 지도자 페리클레스. 아테네의 성공과 실패는 ‘동맹’과의 관계에 달려 있었다

 

그리스 역사에 관심이 있다면 펠로폰네소스 전쟁까지의 상황은 머릿속에 저장돼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테네가 스파르타에 패하고 알렉산더 대왕이 등장하기까지, 약 70여 년간의 역사는 공백으로 처리하기 십상이다.

어떤 역사가 나타났을까? 스파르타가 전쟁에서 이기기는 했지만, 장기간 국력(國力)을 소모한 탓에 그리스 전체가 힘의 진공(眞空) 상태로 들어갔다. 필자는 이 ‘힘의 진공 상태’ 속에서 아테네의 의미와 위상에 관해 주목하고 있다.

놀랍게도 기원전 377년 아테네를 중심으로 ‘제2차 델로스 동맹’이 부활했다. 적(敵)은 당시 그리스 전체 실력자 스파르타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전 상황에서 역전된 셈이다.

펠로폰네소스 동맹은 스파르타의 기반이 된 집단군사 협력체다. 기원전 550년에 결성된 동맹으로 아테네의 델로스 동맹보다 무려 72년 전에 세워졌다. 그러나 두 동맹은 출발점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펠로폰네소스 동맹은 참가 도시국가가 10여 개 정도에 그친다. 사실상 스파르타가 지배하는 도시국가들이 참가한, 수직적 관계의 동맹이다.

아테네 델로스 동맹은 다르다. 서로가 필요로 하고, 역할과 책임을 분담하는 과정에서 창조된 수평적 차원의 자유 동맹에서 출발한다. 아테네의 기금 횡령 이후 신뢰가 깨지고, 결국 동맹도 유명무실(有名無實)하게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핵심은 서로가 수평적 관계에서, 자유롭고도 자발적으로 탄생했다는 점에 있다. 자유·수평·자발이 제2차 델로스 동맹을 부활시킨 동인(動因)이다. 펠로폰네소스 동맹에는 그 같은 요소가 ‘전혀’ 없다.

제2차 델로스 동맹은 이후 기원전 355년 사라진다. 동맹국 내 반란을 틈타 페르시아가 중재자로 나서면서 아테네의 영향력도 줄어든다. 그리스 탄생 집단 동맹의 역사 자체가 사라진다. 이후 알렉산더 대왕 등장과 함께 그리스 시대가 저물고, 헬레니즘 새 시대가 열린다.



동맹 개념이 없는 아시아

▲중국과 러시아는 2021년 8월 중국 서북부 닝샤회족자치구에서 합동군사훈련을 실시했다. 사진=AP/뉴시스

 

그리스 동맹의 역사는 2022년 현재 한국이 참고할 나침반이다. 한미 동맹 같은 1대 1 관계가 아닌, 집단 동맹 체제이기 때문이다. 호메로스의 일리아드, 십자군 전쟁, 중세유럽,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에서 보듯, 서방 역사 자체가 집단 동맹이 진화(進化)해온 역사이기도 하다.

민주주의 체제도 집단 동맹국 사이의 약속과 의무를 통해 발전돼왔다. 집단 동맹 속의 법과 의무가 국제질서의 근간이 된 것은 물론이다. 기원전 5세기 당대의 관점에서 보면, 델로스 동맹은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서방은 실패한 집단 동맹을 보면서 수많은 교훈과 모델을 발견·발전시켜왔다.

중국의 경우에서 보듯, 아시아는 동맹 개념과는 거리가 멀다. 강한 나라가 나타나면 주변 모두 힘을 합쳐 대항하기보다, 조공(朝貢)을 바치면서 자신의 생존을 보장받기에 급급했다. 아시아는 집단 사이의 균형에 근거한 힘이 아닌, 혼자 독식(獨食)하는 데 익숙한 문화다. 물론 상대에 대한 신뢰도 없고, 서로 간에 지켜야 할 법이나 의무 같은 것도 간단히 무시했다. 결론적으로 입으로만 떠드는 대의명분(大義名分)만이 발달해왔다. 중국과 북한이 동맹이라고 하지만, 눈앞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등을 돌릴 수 있는 관계에 불과하다.


파티는 끝났다

한국산 반도체를 미국과 중국에 동시에 팔 수 없는 현실이 눈앞에 닥쳐오고 있다. 경제 전반이 디커플링 체제로 나아가고 있다. 민주주의 진영은 집단 동맹 체제를 통해 위기에 대응하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는 냉전 당시 소비에트 이상의 프랑켄슈타인으로 변해가고 있다.

양비론·양시론으로 대응하면서 적당히 넘어갈 수 있는 시간은 이미 끝났다. 독일과 일본이 재무장에 들어가고, 자유를 위해서라면 자유무역이 훼손되는 것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 2022년의 현실이다.

‘빅 프랑켄슈타인’ 중국의 모습은 지난 30년간과는 전혀 다르게 나타날 것이다. 뻔한 수법이지만, 회유·공갈·압박도 번갈아가면서 행할 것이다. 경제·문화제재는 물론, 중국 군함이나 전투기의 한반도 침범도 일상화될 것이다.

손가락만 빨면서 기다리다가 당해서는 안 된다. 스스로의 결의와 자세를 미리 분명히 밝히면서 대응하는 것이 중요하다. 앞서 강조했듯이, 민주주의 국가로서의 자유·인권·법치가 향후 30년간 중국과 함께할 한국의 나침반이 될 것이다.

‘좋은 게 좋다’면서 파티를 벌이던 시대는 끝났다. 아무리 좋더라도, 자유·인권·법치에 어긋날 경우 나쁜 것이 될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는 상위(上位) 문명과 품격의 문화로 나아가는 기본이자 기반이다.

2022년 중국의 문명·문화에 감동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한국 2030세대에게 물어보라. 반대로 중국 2030세대에게 21세기 한국의 문명·문화를 얼마나 동경(憧憬)하는지 확인해보라. 힘자랑이나 일삼는 프랑켄슈타인이 민주주의 문명과 문화를 지배할 수는 없다.⊙

 

08월 25일  시진핑 “전략적 소통 강화” 진심이면 韓 안보주권 존중해야

 한·중 관계는 1992년 8월24일 수교 당시 ‘우호협력관계’에서 21세기를 향한 협력동반자 관계(1998년), 전면적 협력동반자 관계(2003년), 전략적 협력동반자 관계(2008년)로 격상되며 발전해왔다. ‘전략적 관계’는 교역·교류 관계를 뛰어넘어 안보 문제까지 포함한 고차원적 의제도 논의하는 관계라는 의미다. 그런데 최근 몇 년 동안 한·중 관계에 심각한 장애가 발생하고, 전략적 관계가 수사(修辭)에 그치는 퇴행을 보여온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24일 서울과 베이징에서 각각 열린 수교 30주년 행사에서 양국 정상이 상황 타개 의지를 보인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주석님을 직접 만나 협의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했고, 시진핑 주석도 “대통령님과 함께 전략적 소통을 강화하고자 한다”고 했다. 특히 시 주석은 베이징 댜오위타이에서 왕이 외교부장이 대독한 메시지에서 “나는 중·한 관계 발전을 고도로 중요시한다”면서 윤 대통령과 소통 강화에 대한 기대감을 내비쳤다. 현 상황을 “세계가 새로운 변혁기에 들어선 중대한 시점”으로 규정하면서 동주공제(同舟共濟·한 배를 타고 강을 함께 건넌다) 정신도 강조했다. 미국이 중국을 안보에 위협적인 전략적 경쟁자로 규정하고, 글로벌 공급망 디커플링을 추진하는 상황에서, 한국이 미국과 동맹국임에도 미국과 같은 편에 서지 말라는 식으로 위협한 것이다.

국가 간에는 다양한 양자·다자 현안을 둘러싼 입장 차이가 불가피하지만, 시 주석의 말이 진심이라면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다. 북한 핵무기 문제를 다룰 한·중 고위급 안보 대화부터 강화해야 한다. 한국 답방에 대해서도 성의를 보여야 한다. 사드 정상화와 북핵 저지는 한국의 생존과 안보 주권이 걸린 문제다. 사드 보복을 철회하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거부권을 활용해 북한 핵무기 개발을 감싸는 행태를 중단하는 것이 전략적 소통 강화의 첫 단추다.

문화일보 사셜

 
 

08월 25일  한미동맹도 공짜 아니다

 김남석 워싱턴 특파원

19일 미국 버지니아주 알링턴국립묘지에서 열린 6·25전쟁 참전용사 존 싱글러브(John Singlaub) 전 유엔군사령부·주한미군 참모장의 추도·안장식에 참석했다. 1월 테네시주 자택에서 100세를 일기로 별세한 싱글러브 장군은 1953년 철의 삼각지대 김화지구 전투에서 대대장으로 중국군에 맞서 싸웠다. 무엇보다 그는 유엔사 참모장이던 1977년 지미 카터 대통령이 주한미군 철군 계획을 밝히자 “미군이 철수하면 반드시 전쟁 날 것”이라며 정면 비판했다. 현역 장성으로 대통령 결정에 공개 반대한 그는 이듬해 강제 전역당했지만 주한미군 철수 계획은 백지화했다. 이후 싱글러브 장군은 ‘주한미군 철수에 반대하지 않았다면 별 몇 개를 더 달았을 텐데 아쉽지 않나’라는 물음에 “내 별 몇 개를 (한국인) 수백만 명 목숨과 바꿨다면 그보다 보람있는 일이 어디 있겠는가”라고 답했다. 이날 추도식에서 만난 부인 조앤 래퍼티 여사는 “그를 기억해줘 감사하다”며 오히려 고마워했다.

 

내년 70주년을 맞는 한미동맹과 주한미군에 대해 “한국보다 미국 국익·필요에 의한 것” “한국이 떠밀어도 나가지 않을 것” 등의 낙관론을 간혹 접한다. 전시 작전통제권을 회수하고 자주국방을 달성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거나 지정학 요충지 한반도에 주둔하는 만큼 방위비 분담이 아니라 지부티처럼 주둔비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현실과는 거리가 멀다. 미군이 빠진 자주국방보다 주한미군을 활용한 국방 강화가 더 싸고 안전하다는 것은 자명하다. 주한미군은 여러 차례 철군 위기를 겪었고, 싱글러브 장군 같은 이들의 희생 덕에 살아남았다. 1972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 당시 1개 사단이 철수했고, 카터 대통령 때도 3400명이 철군했다. 조지 H W 부시 대통령과 아들 조지 W 부시 대통령 때도 철군이 논의됐으나 북한 핵 개발, 한국군 이라크 파병 등으로 무산됐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철수를 주장하자 측근들이 “두 번째 임기에 하자”고 설득해 넘긴 것도 불과 3년 전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한미동맹이 와해하고 주한미군이 철수하면 한반도에서 벌어질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보여준다. 전체주의 독재자의 오판으로 전쟁이 시작되자 우크라이나는 국제사회에 도움을 호소했다. 하지만 서방은 핵보유국과 충돌을 우려해 조약 동맹이 아닌 우크라이나를 위해 대러 제재에 나설지언정 직접 참전에는 끝까지 선을 긋는다. 6·25전쟁에 파병돼 공산주의에 함께 맞서 싸운 미 참전용사들은 한미동맹이 혈맹임을 입증하는 산 증인들이다. 하지만 10·20대였던 이들은 이제 80·90대가 돼 하나둘 세상을 뜨고 있다. 올해만 싱글러브 장군은 물론 스티븐 옴스테드 장군, 윌리엄 웨버 대령 등이 영면에 들었다. 영원한 동맹은 없다. 그러나 현 한반도 정세는 70년 전만큼이나 위태롭고 한미동맹이 필요하다. 한미동맹의 증인이 한 명이라도 더 남아 있을 때 안보·경제 등 전방위로 동맹을 굳건히 해 누구도 쉽게 흔들 수 없는 관계를 만드는 노력이 시급하다. 워싱턴DC의 한국전 참전용사기념공원 추모의 벽엔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한미동맹도 거저 주어지지 않는다.

문화일보 

 
 

08.26  한중 수교 30년, 중국 앞에 우뚝 선 대한민국

강자의 횡포 부리는 중국
세계인의 민심 잃어
한국은 경제강국·매력국가
중국이 호소력 가지려면
주권국 독립자주 침해하는
지금 같은 방식으론 안 돼

윤석열 대통령은 대만을 거쳐 방한한 펠로시 미국 하원의장을 만나지 않았다(8월 3~4일). 비난 여론이 컸다. 민주주의와 권위주의를 가르는 ‘가치 외교’로 ‘펠로시 패싱’을 비판하는 것은 일리가 있다. 중국에 엎드린 문재인 정권을 윤 대통령이 질타한 데다 한국 사회엔 반중 정서가 거세다. 하지만 윤 대통령 선택은 현명했다. 외교는 감정이 아님을 대한민국 국가이성이 웅변하기 때문이다.

 ▲정재호 주중대사가 24일 오후 중국 베이징 댜오위타이(釣魚臺) 국빈관 17호각에서 열린 한중 수교 30주년 기념 리셉션에서 윤석열 대통령 축사를 대독하고 있다. /연합뉴스

 

펠로시 대만행은 미·중 전쟁을 부를 뻔했다. 대만 전쟁을 시진핑 중국 주석의 엄포로 여긴다면 우크라이나 전쟁을 직시해야 한다. 바로 6개월 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면 침공을 예측한 전문가는 없었다.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미 군부도 펠로시 대만행을 반대했다. 미국 조야는 우크라이나 전쟁 중에 대만 위기를 부추긴 펠로시를 비난했다. 제국 미국은 두 개의 전쟁을 동시에 치를 여력이 없다.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곳’인 대만해협에서 전쟁이 터지면 한반도가 직격탄을 맞는다. 국가이성의 냉정한 판단이다.

 

한·중 수교 30주년, 펠로시 사태는 ‘중국 문제’의 폭발성을 증언한다. 여기서 중국 문제는 제국 중국이 한국에 던지는 국가 존망 위기와 도전을 가리킨다. 윤 정부가 펠로시 사태를 잘 풀었는데도 중국은 8월 9일 한·중 외교장관 회담에서 ‘5개 응당(應當)론’을 들고 나왔다. ‘독립 자주, 근린 우호, 개방 협력, 상호 내정 불간섭, 다자주의’로 꾸몄지만 사드 철수, 중국 겨냥 경제 동맹 불참, 대만 문제 불개입, 한미 동맹 해체를 요구했다. ‘상호 내정 불간섭’하자면서 한국 내정에 간섭한다.

 

한국 사회의 혐중 정서를 만든 건 중국이다. 2016년 이래 계속된 사드 보복은 한국의 ‘독립 자주’를 침해하는 국가가 중국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중국 표현대로 ‘대국 중국이 소국 한국’을 힘으로 길들이려 한다. 그러나 자유와 평등에 익숙한 한국인은 강자의 횡포를 혐오한다. 중국몽이 세계의 악몽으로 귀결되고 지구촌 곳곳에 반중 정서가 비등한 것도 중화 제국의 업보다.

 

‘수출 대국 한국이 중국과 결별할 수 있는지’ 묻는 이들이 있다. 요소수 대란처럼 GDP 대비 수출입 비율이 8할이 넘는 한국이 중국 보복으로 붕괴할 수 있다는 가설이다. 하지만 경제 공중증(恐中症)은 틀렸다. 국제 분업 체제에서 중국이 한국에 보복하면 중국도 치명상을 입기 때문이다. ‘21세기 산업의 쌀’ 반도체가 결정적 증거다. 세계 메모리 반도체 절대 강자(삼성전자·SK하이닉스의 세계시장 점유율이 D램 72.6%, 낸드플래시 46.4%)인 한국 없이는 중국 IT 전자 산업 전체가 마비된다. 한한령이 관광업과 화장품 등에 머문 배경이다. 중국에 주눅 들 까닭도 없고 중국과 결별할 이유도 없다는 게 한국 국가이성의 목소리다.

 

중국의 ‘5개 응당’ 요구는 한국인을 모욕했다. 제국 중국은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의 ‘평등한 주권국가들의 평화 공존’에 입각한 세계 질서를 부정한다. 수정주의 학자들은 1648년 이후에도 전쟁이 그치지 않았다며 베스트팔렌 이념을 꼬집는다. 하지만 베스트팔렌 조약이 국제 질서의 보편적 토대임을 부인하면 ‘만인이 만인에게 늑대가 되는’ 우크라이나 침략 전쟁의 참극만 남는다. 양차 세계 대전의 폐허 위에 인류가 함께 쌓은 국제연합(UN)은 베스트팔렌 질서의 현대적 성과다. 한국을 6·25전쟁 절멸(絶滅) 위기에서 구한 유엔이야말로 베스트팔렌 이념의 최대 성취라는 국가 철학이 통절하다.

 

국권이 민권을 억누르는 중국과 러시아의 국가이성은 반동적이다. 이와 달리 민권을 국권보다 중시하는 미국과 한국의 변증법적 국가이성은 보편사적 호소력이 있다. 민주주의·법치·인권이 없는 중국이 세계인의 민심을 잃을 때 한국의 한류는 세계를 매혹한다. 중국이 우리를 겁박할 땐 베스트팔렌 질서에 입각해 의연히 대응하면 된다. 오늘의 한국은 약소국이기는커녕 세계 10대 경제 강국이자 매력 국가다. 중국 국가 대계(大計)의 첫걸음은 한국을 동등한 주권국으로 인정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선진국 시민인 우리는 반중 감정을 넘어서야 한다. 1992년 이래 국익에 투철했던 한·중 수교 30년이 상호 번영을 불렀다. 2022년 이후 정립될 새 한·중 관계 30년도 냉철한 국가이성이 이끌어야 한다. 지금은 대한민국이 중국 앞에 우뚝 선 반만년 역사의 첫 순간이다. 한·중 두 나라가 진정한 선린호혜(善隣互惠) 문턱에 섰다.

조선일보  윤평중 한신대 명예교수·정치철학

 

08.29 푸틴·시진핑·김정은과 어깨 맞댄 대한민국의 미래

한·중 수교 30년, 러시아 수교 32년
사회주의 경제 실패 딛고 호전적 존재감 과시하는 양국 지도자
이 엄중한 전환기에 대통령은 무엇이 중요한가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노동개혁을 강조하면서 “독일에서 노동개혁 하다가 사민당이 정권을 17년 놓쳤지만 독일 경제와 역사에서 매우 의미 있는 개혁을 했다”고 언급했다. 노동개혁으로 독일 경제를 되살린 건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총리의 남다른 업적이다. 그런데 올해 78세의 슈뢰더는 20년 전 업적에 대한 긍정 평가는 거의 상실하고 노후 망신살을 사고 있다. 러시아 푸틴 대통령과의 과한 우정 때문이다. 푸틴과 친분을 유지하면서 퇴임 후에도 이런저런 자리와 편의를 제공받고 그를 옹호했다가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거센 비난을 샀다. 전직 총리에게 주어지던 각종 권리를 독일 의회에서 박탈당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슈뢰더의 업적뿐 아니라 과오가 시사하는 바도 적지 않다.

▲푸틴.시진핑,김정은

 

2000년대 초반 푸틴과 슈뢰더의 친분은 꽤 정의롭게 출발했다. 프랑스의 자크 시라크 대통령까지 가세해 독·불·러 정상이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전쟁에 반대하는 반전(反戰) 연대로 활약했다. 1999년에 총리, 2000년에 대통령이 된 푸틴은 당시에는 정상 지도자의 면모를 보였다. 구소련 붕괴 후 파탄 났던 러시아 경제는 푸틴 집권기에 에너지 가격 상승에 힘입어 회복세를 보였다. 그 덕에 지지를 얻고 실권을 장악했다. 그러고는 민주주의가 정착된 나라의 지도자와는 다른 길을 걸었다. 2008년 대통령 연임을 마치고 권력 연장 꼼수를 썼다. 총리를 4년 하고 다시 대통령이 됐고 개헌을 통해 종신 집권의 길을 열었다. 부정 선거 논란, 정적과 언론인 암살 의혹이 끊이질 않는 가운데 러시아 역사를 후퇴시키며 24년째 집권 중이다. 이 독재자는 구소련의 영광을 외치며 이따금 ‘침략 이벤트’로 국민을 열광시키는 위험한 리더십으로 권력을 유지한다.

 

시간이 흐르면 사람은 변한다. 권력자는 더더욱 쉽게 변한다. 국력과 지도자에 의해 국제 질서의 세력 균형도 유기체처럼 변한다. 변화를 직시하고 제때 대응하지 못하거나, 대응력 없는 나라는 국민의 운명이 비참해진다. 22년 전 푸틴이 대통령에 당선될 때만 해도 이토록 장기 집권하면서 국제 질서를 뒤흔들 것으로 누구도 예상 못했다. 더 극적인 변화는 중국에서 일어났다.

 

지난 24일로 한·중 수교 30주년을 맞았다. 러시아와는 그보다 2년 앞서 수교가 이뤄졌다. 미·소 냉전이 종식되고 세계사의 거대한 흐름이 바뀌는 전환점을 놓치지 않고 노태우 전 대통령이 북방 외교를 개척했다. 그로부터 30년, 국제 질서는 다시 전환기를 맞고 있다. 세계 지도를 펴면 대한민국이 처한 지정학적 운명이 새삼 무겁게 다가온다.

 

1980년 중국의 1인당 GDP는 남미의 10분의 1 수준인 300달러였다. 영리한 실용주의 노선으로 빗장을 열고 세계 자유 무역 질서에 편승해 경제력을 키웠다. 2019년 중국의 1인당 GDP가 1만달러를 넘었고, 작년 GDP 규모는 미국의 77%에 도달했다. 2013년 집권한 시진핑 주석은 세계 2위 경제력을 바탕으로 군사력을 키우며 근육을 실룩거린다. 홍콩 민주화를 탄압하고 대만 통일을 공공연히 천명하면서 건국 100주년인 2049년의 중국몽으로 달려간다. 경제적으로 부유해지면 중국도 국제 질서에 평화롭게 편입될 것이라는 가정이 헛된 기대라고 판단한 미국이 중국 제재에 나섰다. 중국과 한국 경제가 동반 성장하던 시절도 끝나간다.

 

우리를 둘러싼 국제 정세와 역사를 되짚어보면 북·중·러 지도자의 호전성이 이처럼 동시에 높아진 때가 6·25 전쟁 이후 또 있었나 싶을 정도다. 6·25 전쟁은 소련의 스탈린, 중국의 마오쩌둥, 북한 김일성의 3인방 하에서 일어났다. 사회주의를 구현하고 독재 권력을 장기화하기 위해 집단 학살, 침략도 서슴지 않았던 호전적 지도자들이다. 공교롭게도 소련의 영광을 재현하겠다는 ‘제2의 스탈린’ 푸틴, 마오쩌둥의 100년 중국몽을 외치는 시진핑, 3대 독재 세습의 북한 김정은·김여정 남매가 우리 머리 위에서 동시 다발로 으르렁댄다.

 

홍콩 민주화 투쟁, 코로나 팬데믹과 중국 공급망 붕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대만해협 위기 등 일련의 국제 정세를 겪으며 각국이 미몽에서 깨어나듯 현실 정치로 복귀하고 있다. 부국강병이라는 고전적 과제, 그리고 국민이 자유롭고 공정한 나라에서 보호받는다는 국가 정체성과 심리적 국력 지수의 필요성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법치와 공정이 흔들리고, ‘우리는 작은 나라’라고 머리 조아리고, ‘삶은 소대가리’ 욕을 먹어도 짝사랑을 멈추지 않던 정권을 유권자 절반이 멈춰 세운 건 이 엄중한 시대를 반듯하고 믿음직한 리더십으로 헤쳐 나가달라는 기대가 있어서였을 것이다. 소소한 인연에 집착하고 사소한 실수를 거듭하며 집권 초반기 아까운 시간을 넉달이나 흘려보냈다.

조선일보  강경희 논설위원

 

08.29  유럽서 식어가는 중국몽… 독일 74%, 스웨덴 83% “중국이 싫다”

 여름 성수기로 들어선 파리 중심가의 백화점에는 중국어가 들리지 않는다. 불과 몇 년 전 유럽의 명품가와 고급 식당들은 중국 관광객들로 넘쳐 났다. 사업가들은 앞다투어 중국어를 배웠고, 중국에 지사를 개설했다. 중국과 관계된 세미나에는 주제를 불문하고 청중이 몰렸다. 그 분위기가 바뀌고 있다. 중국에 대한 열기는 유럽에서 빠르게 사그라들고 있다.

 

중국은 유럽에 있어 거대한 시장이자 투자 파트너이다. 유럽연합(EU)은 1975년 중국과 수교 이후 다양한 형태의 정치적, 경제적 교류를 강화해 왔다. 특히 최대 교역국인 독일은 ‘무역을 통한 변화’라는 원칙하에 중국과 실용적인 관계 증진을 모색해 왔다. 그러나 일대일로 전략을 비롯한 중국의 정치, 경제적인 팽창은 유럽의 우려를 키우기 시작했다. 2019년 발표된 EU의 대(對)중국 전략 보고서는 중국을 유럽의 ‘체계적, 경제적 경쟁자’로 간주하기 시작했다. 지난 6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정상회의에서도 중국은 ‘체계적 도전’으로 규정되었다. 코로나 팬데믹의 전 세계적인 확산과 미·중 갈등 구도의 강화는 유럽에서 중국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심화시켰다.

 

유럽의 대(對)중국 인식은 작년과 올해 두 개의 결정타를 맞았다. EU가 중국 신장-위구르 지역의 인권문제를 지적하며 유엔 차원의 인권 결의안을 채택하자 중국은 유럽의회 의원, EU이사회 정치안보위원회, 그리고 유럽 기업인들을 대대적으로 제재 대상에 포함시키는 사상 초유의 외교적 강공을 펼쳤다. 홍콩 민주주의 문제와 맞물리며 중국과 유럽 사이에는 인권 문제에 있어서 깊은 단층대가 형성되었다. 게다가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중국이 러시아의 입장을 옹호하기 시작하면서 유럽과 중국은 돌이킬 수 없는 루비콘 강을 건넜다.

 

지난 4월 1일 개최된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과 시진핑 주석 간의 정상회의에서 유럽은 우크라이나 사태와 홍콩 인권 문제를 집중적으로 제기한 반면, 중국은 EU가 미국으로부터 독립적인 입장에서 중국과 협력하며 글로벌 성장에 기여하라는 추상적 메시지로 응수했다. 접점을 상실한 양측의 논쟁은 ‘농아들의 대화’가 되었다. 대만 문제 역시 중국과 EU를 갈라 놓았다. 중국의 강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일련의 유럽 정·재계 인사들은 대만을 방문했고, 낸시 펠로시 미 하원의장의 대만 방문에 대해서도 긍정적 입장을 보였다. 반도체 등 첨단산업 공급망에 대한 유럽과 대만의 협력도 강조되어 왔다. 대만을 외교적으로 인정한 리투아니아에 대해 중국은 전면적인 제재와 관계 단절을 선언했지만, 오히려 유럽 내에서 그 후폭풍은 만만치 않다.

 

 

중국과 유럽의 가치관 충돌은 양자관계 악화의 주원인이다. 다극적 세계질서 하에서 주도적 입지를 강화하려는 중국은 인권, 민주주의 등 유럽이 강조하는 가치규범으로부터의 제약에 반발하며 애국주의에 기반한 공격적인 ‘전랑(戰狼) 외교’를 펼쳐 왔다. 이는 또한 오는 가을로 예정된 제20차 중국 공산당 전국대표대회에서 시진핑 주석의 3연임을 위해 대외적 압력에 대한 갈등을 증폭시키며 대내적 결속을 모색하려는 시도와도 연결된다. ‘제로 코로나’ 정책하에서 인적교류 중단과 투자 부진 역시 중국에 대한 유럽의 기대 수준을 더욱 낮추고 있다. 유럽의 대(對)중국 무역수지 적자 폭이 계속 증가하는 가운데, 중국 주도로 중·동부 및 남부 유럽을 아우르는 경제협력기구인 ‘16+1′ 체제도 와해되고 있다. 유럽에서의 ‘중국몽(夢)’은 차갑게 식어가고 있다.

 

중국을 둘러싼 유럽과 한국의 고민은 유사성이 있다. 중국은 양측에 미국과 변별력을 가지는 보다 독립적 입장에서 중국과의 경제 협력을 추진할 것을 공통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유럽과 한국은 동맹국인 미국과의 협력을 우선적으로 고려하고 글로벌 공급망 재편에 동참하면서도, 시장으로서의 중국과 한반도 평화에 있어서의 중국의 필요성을 간과할 수 없다. 선택의 상황은 끊임없는 딜레마를 던져주고, 양자 및 다자 차원에서의 해법을 위해 머리를 맞대게 한다. 인도·태평양 전략을 매개로 유럽 및 아·태 4개국(한, 일, 호주, 뉴질랜드)과의 정치적, 경제적 공통분모도 커지고 있다.

 

대(對)유럽 외교의 강화는 한국이 중국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서 더욱 중요해졌다. 한반도 평화 정착에 대한 지지뿐만 아니라, 중국 관련 의제를 다루는 데 있어서 EU 및 유럽 주요국들과 정치, 경제적인 보조를 맞추며 불가피한 선택에 따른 비용을 낮춰야 한다. EU 특사단 방문 및 대통령의 NATO 정상회의 참석은 대(對)유럽 외교에 있어 전례 없이 유용한 기회가 되었지만, 그 모멘텀을 살리기 위해서는 보다 긴밀한 후속 조치들을 필요로 한다. 한국 외교의 가치, 원칙 및 동맹구조에 대한 재정비는 유럽과의 공조에서 참조할 여지가 많다. 특히 유럽의 외교적 어법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유럽은 국제규범, 법치, 인권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명확한 원칙을 견지하지만, 인도·태평양 전략을 비롯한 주요 지정학적 의제에 있어 중국을 명확히 지칭하지 않으면서 개입과 대화의 여지를 남겨두는 외교적 수사를 사용해 왔다. 오랜 역사적 균형감과 신중함은 여전히 유럽 외교의 덕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의 대(對)중국 외교는 새로운 형질 변경을 시작했다. 중국몽은 새로운 현실을 맞고 있다. 국제정치 주체들 간의 협력과 견제의 중심추가 이동하기 시작했고, 보이는 외교와 보이지 않는 외교를 병행해야 하는 난도는 더욱 높아졌다. 국제 질서의 큰 해류가 변하는 격랑의 시점에는 고민과 가치를 함께 하는 보다 견고한 선단에 속해 있는 것이 유리하다. 한국에 있어서 유럽을 포함한 범(凡)동맹외교가 필요한 이유이다.

조선일보  이재승 고려대 국제대학 장 모네 석좌교수

 

08월 30일 NPT 무력화와 북핵 대응 ‘제3의 길’

남성욱 고려대 통일외교학부 교수, 前 국가안보전략연구원장

국제협약을 통한 국제질서 관리 체제가 무너지고 있다. 인류를 위협하는 핵무기 개발 제재에 국제 공조가 작동되지 않고 있다. 7년 만에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열린 핵확산금지조약(NPT) 평가회의가 선언문을 채택하지 못하고 4주 만에 폐막했다. 우크라이나 자포리자 원전 주변 군사행동 우려 등이 포함된 데 대한 러시아의 반발 때문이다.

 

당초 NPT 평가회의의 36쪽짜리 선언문 초안에는 △한반도의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비핵화(CVID)에 대한 지지 △국제 비확산 체제를 위협하는 북핵에 대한 우려 △유엔 대북 제재의 충실한 이행 △6차례 북한의 핵실험 규탄과 향후 추가 핵실험에 대한 경고 등이 담겨 있었다. 핵무기 위협에 대한 국제사회의 단합된 대응을 촉구하는 것이 핵심이었으나, 선언문 채택 무산으로 북핵 대응에 빨간불이 켜졌다. 미국은 러시아를 제외하고는 190개 회원국이 지지했다고 강조했으나, 선언문 불발의 의미는 간단치 않다.

우선, 유엔과 국제협약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다는 것을 상징한다. 우크라이나 사태 이후 국제정치의 구조적인 틀(framework)이 바뀌었다.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미·중·러 간의 갈등은 77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다자 안보기구인 유엔을 무력화했다. 안보리 상임이사국이 특정 국가를 침공하는 현실은 각국이 각자도생을 모색하게 한다.

둘째, 기존 NPT를 강화하고 점점 심각해지는 핵무기·군비 증강 문제를 효율적으로 다루기 위한 구체적 ‘액션 플랜’을 짤 기회를 놓쳤다. 핵무기 위협이 어느 때보다 높은 상황에서 러시아의 몽니로 핵군축은 요원한 과제가 됐다. 이번 회의 내내 중·러와 미국을 비롯한 서방이 사사건건 부닥쳤다. 우크라이나 자포리자 원전 포격 비판에 대한 러시아의 어깃장을 비롯해 나토의 핵 공유, 이란 핵합의(JCPOA), 미국·영국·호주가 핵추진 잠수함에서 협력하는 오커스(AUKUS) 등에서 첨예하게 맞섰다.

 

셋째, 한국은 북핵에 대응할 제3의 길을 고심해야 한다. 지난 5월 하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한국·일본 방문 후 워싱턴 귀국길에 북한이 중거리탄도미사일을 발사했으나 유엔 안보리의 제재 결의안은 중·러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무산됐다. 미국은 안보리의 계속되는 침묵의 대가는 너무나 비싸다고 강조했지만, 국제 공조를 통한 북핵 대응에 한계를 드러냈다. 당시 중국은 미국이 더 매력적이고 유연한 대안을 북한에 제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68년 출범해 핵 비확산 체제의 초석이자 핵 군축 및 핵에너지의 평화적 사용 진전에 필수라는 NPT의 존립이 흔들리고 있다.

6차례의 핵실험과 각종 미사일 성능 개량으로 북핵의 실존적 위협이 심해지고 있다. 안보리와 NPT를 더는 의식하지 않는 북한의 핵 질주를 통제할 방안을 다각도로 검토해야 한다. 한미동맹을 통한 확장억제를 계속 강화하면서 유럽식 핵 공유 등 다양한 제3의 길을 논의해야 한다. 국제 공조를 통한 북핵 대응은 한계에 부닥쳤다. 독자적인 핵 대응 자강 능력을 확충하기 위한 다양한 대책을 마련해야 할 때다. 공포의 핵 공격을 억제하는 대안을 제시하면, 전쟁하자는 것이냐는 종북적 사고방식의 궤변은 지양돼야 한다. 핵 위협은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대응 방식이 적용되지 않는다.◎

문화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