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어있는 세계사/ 2017-1/ 01.05 '아랍의 봄' 이후 6년째 내전 - 06.29 불타오른 런던… 더 타오른 민심
숨어있는 세계사/ 조선일보 2017 -1
2017.01.05 '아랍의 봄' 이후 6년째 내전
2011년 민주화 시위에서 전쟁 시작… 러시아·미국·터키 등도 개입
IS 침공에 쿠르드족은 민병대 꾸려… 대규모 난민 발생해 유럽도 혼란
지난달 30일 휴전협정 체결했지만 교전 계속돼 불안한 상황이에요
6년간 시리아 내전을 벌인 정부군과 반군이 지난달 30일 휴전협정을 체결했어요. 2011년부터 시작된 시리아 내전은 시리아와 주변 지역 사람들의 삶을 완전히 망가뜨렸답니다. 수십만 명이 죽었고 1000만명 가까운 난민이 발생했어요. 그리스로 시리아 난민을 태우고 가던 배가 침몰해 터키 남서부의 한 해변에서 숨진 채로 발견된 세 살 아기 '쿠르디'의 모습이 담긴 사진은 전 세계에 큰 충격을 주기도 했지요. 대체 시리아에서는 왜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된 걸까요?
◇유럽과 북아프리카를 잇는 요충지
시리아가 있는 지역은 예부터 전쟁이 끊이지 않았어요. 농사가 잘되고 지중해와 가까울 뿐 아니라 유럽과 북아프리카를 잇는 교통의 요충지로 여겨졌기 때문이죠.
▲ 내전으로 황폐해진 시리아 알레포에서 군인이 어린이들에게 주스를 나누어주고 있어요. /AP 연합뉴스
오랫동안 튀르크족의 오스만제국에 속해 있던 시리아 지역에 아랍인의 나라가 세워진 건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였어요. 1차 대전 당시 연합국은 아랍인들에게 "오스만제국이 무너지면 아랍인의 국가를 세우도록 돕겠다"고 약속했고, 아랍인들은 이 약속을 믿고 오스만제국에 맞서 봉기를 일으켰어요. 그 결과 1920년 시리아와 레바논, 팔레스타인, 요르단을 합친 지역에 '시리아 아랍 왕국'이 수립되었답니다.
하지만 시리아 아랍 왕국은 오래가지 못했어요. 1차 대전에 승리한 연합국 최고위원회가 시리아 아랍 왕국의 영토를 프랑스가 위임 통치하도록 결정했기 때문이죠. 왕국은 프랑스와 영국에 의해 갈기갈기 쪼개져 위임 통치를 받게 되었어요.
시리아는 겉으론 독립국이 되었지만 실질적으로는 프랑스의 지배를 받는 처지였어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인 1946년 아랍연맹의 지지를 받고서야 실질적인 독립을 이룰 수 있었지요.
◇알아사드 정권의 등장
이후 시리아는 여러 번의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정치적 혼란이 이어졌어요. 혼란이 잦아든 건 1970년 바트당의 하페즈 알아사드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 이후지요. 바트당은 민족주의와 세속주의를 지향했기에 대통령이 된 하페즈 알아사드 장군도 세속주의 정책을 취했답니다.
그러자 세속주의에 반대하는 수니파(이슬람 다수파)의 원리주의자들이 불만을 가지게 되었어요. 급기야 수니파 극단주의자들이 하페즈 알아사드를 암살하려 한 사건이 벌어졌답니다. 간신히 죽음을 면한 하페즈 알아사드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수니파 극단주의자들이 모여 살던 '하마'시를 공격해 사람들을 학살했어요.
민족주의와 세속주의를 내세운 하페즈 알아사드 정권은 이렇게 독재 정권이 되고 말았어요. 현재 시리아 대통령인 바샤르 알아사드도 하페즈 알아사드의 아들입니다. 2대째 독재정치가 계속되고 있는 것이죠.
◇'아랍의 봄'과 혼돈의 내전
시리아 내전이 시작된 계기는 2011년 '아랍의 봄'으로 불리는 민주화 운동이에요. 그해 3월 '데라'라는 도시에서 10대 소년들이 아랍 민주화 운동에서 사용된 구호를 벽에 썼다가 체포된 일이 벌어졌어요.
이에 항의하는 시위가 벌어지자 시리아 정부군은 실탄을 발사하고 탱크를 동원해 시위대를 잔혹하게 진압했답니다. 이에 분노한 시민들은 알아사드 대통령과 집권층의 퇴진을 요구하며 무장을 하고 정부군과 맞서기 시작했어요. 시리아 내전이 시작된 것이죠.
시간이 지나면서 내전의 양상은 복잡해졌어요. 수니파 국가인 터키·사우디아라비아 등이 반군을 지원하고 시아파의 맹주국인 이란이 시리아 정부군을 지원하면서 내전이 이슬람 세계의 종파 분쟁으로 번진 것이죠. 러시아는 정부군을, 미국과 여러 서방국가는 반군을 지원했고요. 여기에 이라크에서 등장한 이슬람국가(IS)가 시리아에 넘어와 세력을 넓혔고 쿠르드족이 민병대를 꾸려 반군과 이슬람국가에 대항하고 있답니다.
지난달에 체결된 휴전협정도 불안정한 상태예요. 2일(현지 시각) 반군 측은 "휴전협정 이후에도 정부군이 폭격과 공격을 계속하며 협정을 위반하고 있다"면서 "위반이 계속되면 앞으로 열릴 평화회담에 불참할 것"이라고 밝혔어요. 휴전 후에도 정부군과 반군의 교전이 계속되고 있는 데다 이슬람국가 등은 휴전협정 대상에서 아예 빠진 상태입니다.
시리아 내전으로 발생한 난민들이 터키와 유럽으로 넘어가면서 유럽 사회도 큰 혼란을 겪고 있고, 끔찍한 테러도 계속되고 있어요. 아무쪼록 이번 휴전협정을 계기로 시리아에 진정한 평화가 정착될 방법이 나오길 바라봅니다.
[이슬람 원리주의와 세속주의]
이슬람 근본주의라고도 부르는 이슬람 원리주의는 '코란(Koran·이슬람교의 경전)의 가르침에 따라 원래의 이슬람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종교·정치 운동이에요. 이슬람 세계가 번영하려면 서양 문명을 거부하고 이슬람 교리에 따라 정치·사회를 운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슬람국가(IS)는 이슬람 원리주의를 가장 극단적으로 주장하는 세력이지요.
반면 세속주의는 종교가 정치·사회를 지배하는 것에 반대하는 입장입니다. 이슬람 세계는 세속주의와 원리주의 간의 갈등이 계속되고 있어요.
윤형덕 하늘고 역사 담당 교사
01.19 면벌부 비판으로 시작된 개혁, 근대 세계를 열다
교황청, 성당 증축하려 면벌부 팔자 루터가 반박문 발표해 개혁 시작
교황청 지배 벗어난 신교도 급증, 유럽 전체로 신교·구교 갈등 번져
30년 전쟁 후 종교의 자유 획득… 중세 막 내리고 근대가 시작됐어요
올해는 종교개혁이 시작된 지 5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종교개혁이 시작된 독일에서는 종교개혁을 기념하는 여러 행사가 열리고 종교개혁을 일으킨 마르틴 루터(1483~15 46)의 유적을 찾는 관광객이 세계 각지에서 몰려들고 있대요.
1517년 루터로부터 시작된 종교개혁은 기독교뿐 아니라 유럽 세계에 큰 변화를 일으켰어요. 나아가 유럽 문명이 중세를 벗어나 근대로 발전하게 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답니다. 오늘은 종교개혁이 어떤 변화를 불러왔는지 함께 알아보도록 해요.
◇루터, 면벌부를 공격하다
▲ 종교개혁을 일으킨 마르틴 루터. /위키피디아
유럽의 중세는 로마가톨릭교가 사회 전반을 지배한 시대였어요. 로마가톨릭교의 수장인 교황은 왕보다 더 강력한 권위로 각국 정치·군사·사회 문제에 깊숙이 관여했답니다. 교황 뜻을 거역하면 곧 신의 뜻을 거부하는 것으로 받아들여 추방하거나 사형에 처할 큰 죄로 여겼어요.
15~16세기 무렵 오랜 시간 막강한 힘을 휘두른 교회와 성직자들이 부패하면서 부정 축재를 일삼고 황제·군주와 결탁해 농민들을 착취하는 일이 흔해졌어요. 그러자 이를 비판하는 사람도 하나둘 늘어났답니다. 법학자의 길을 포기하고 신부가 된 루터도 그중 하나였지요. 당시 교황청은 성 베드로 대성당을 증축하고자 사람들에게 면벌부(2003년 7차 교육과정 개편으로 '면죄부'가 '면벌부'로 바뀜)를 팔았어요. "면벌부를 산 사람은 아무리 죄를 지어도 지옥에 가는 벌을 받지 않고 천국에 갈 수 있다"며 신도들을 상대로 장사를 벌인 것이죠. 보다 못한 루터는 면벌부를 파는 교황청과 로마가톨릭교의 문제를 지적하는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하였답니다.
사실 루터는 종교개혁을 벌일 생각은 없었어요. 부패한 교회와 교황청을 비판하며 자신이 생각한 진정한 신앙을 주장했을 따름이었죠. 하지만 루터의 반박문은 교황과 황제의 억압을 받던 제후와 농민의 큰 지지를 얻었어요. 교황청은 루터를 파문하고 신교를 탄압했지만 오히려 신교도는 점점 늘어났고, 독일은 루터를 지지하는 신교 세력과 황제와 교황청을 지지하는 구교 세력으로 나누어지게 되었어요.
◇구교와 신교의 갈등, 전쟁으로 치닫다
로마가톨릭교의 변화를 주장하는 종교개혁의 불길은 독일을 넘어 유럽 곳곳으로 번져나갔어요. 스위스 제네바에서 활동한 신학자 장 칼뱅(1509~1564)의 프로테스탄트도 큰 호응을 얻으며 영국·프랑스·네덜란드 등에서 신자가 늘어났답니다.
그러자 유럽 곳곳에서는 신교도와 구교도 간 유혈 충돌이 벌어졌어요. 1572년 샤를 9세를 대신해 프랑스를 통치하던 섭정 카트린 드메디시스가 프랑스 신교도 지도자들을 유인해 살해하고 6일 만에 신교도 3000여명이 구교도에게 죽임을 당한 성 바르톨로메오의 학살이 대표적입니다.
▲ 1572년 프랑스 신교도들이 대거 학살된 성 바르톨로메오의 학살을 묘사한 그림이에요. 종교개혁으로 유럽 곳곳에서 신교도와 구교도의 유혈 충돌이 벌어졌어요. /위키피디아
두 세력의 갈등은 급기야 국가 간 전쟁으로도 번졌어요. 1618년 보헤미아(오늘날 체코) 왕이자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페르디난트 2세가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칙령을 취소하자 신교도가 반란을 일으키면서 30년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신교 국가였던 덴마크와 스웨덴이 신성로마제국이 다스리던 독일을 침공하자 구교 국가인 스페인이 신성로마제국을 지원하였어요. 신교 국가였던 네덜란드는 스페인을 상대로 독립 전쟁을 벌였고요. 독일 전역은 유럽 각지에서 몰려든 신교도와 구교도가 피를 흘리며 싸우는 전쟁터로 변했어요.
◇근대 세계의 문을 열다
유럽 최후의 종교전쟁인 30년 전쟁은 프랑스의 지원을 받은 신교 국가의 승리로 끝났어요. 계속된 전쟁과 끊임없는 약탈, 학살로 독일은 인구의 3분의 1이 목숨을 잃었고 국토는 쑥대밭이 되었지요. 1648년 30년 전쟁을 끝내는 베스트팔렌 조약이 체결되면서 신교도는 종교의 자유를 얻었어요. 신교를 믿어도 더 이상 탄압받지 않게 된 것이죠.
종교개혁은 종교의 자유를 가져왔을 뿐 아니라 유럽 세계 전체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어요.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중세를 지배하던 로마가톨릭 교회와 신성로마제국은 힘을 잃었습니다. 교황의 간섭에서 벗어난 군주들은 근대적인 국가와 절대왕정을 발전시킬 수 있게 되었지요.
종교개혁은 자본주의 발전에도 크게 이바지했어요. 중세 기독교는 부를 쌓고 상공업에 종사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보았어요. 반면 프로테스탄트는 사유재산을 긍정하고 근면 성실하게 일해 자본을 모으는 것을 신의 축복이라고 여겼습니다. 그 결과 부를 많이 쌓은 상공업자들이 자본가가 되면서 자본주의가 발전하게 되었지요. 근대를 대표하는 평등, 자유, 이성과 같은 가치도 종교의 자유와 신 앞의 평등을 주장한 종교개혁을 거쳐 발전하게 되었어요.
☞청교도(Puritan)와 장로교회
영국에서 칼뱅의 프로테스탄트를 따르는 신자를 청교도라고 불렀어요. 청교도는 크게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가 존 녹스의 영향을 받은 장로파와 철저한 신앙의 자유를 주장한 독립파로 나뉘어 있었답니다.
제임스 1세와 찰스 1세가 청교도를 탄압하자 청교도 장로파 일부는 영국의 식민지였던 미국으로 넘어갔어요. 이들은 장로를 중심으로 교회를 운영하는 미국 장로교회를 세웠지요. 미국 장로교는 선교사 언더우드를 통해 우리나라에 전해졌고, 오늘날 한국 개신교의 약 70%를 장로교가 차지하고 있습니다.
김승호 인천 포스코고 역사 교과 교사
02.02 보수주의자 비스마르크, 노동자 위한 사회보험 만들다
독일 통일 후 사회주의 탄압하며 복지 제도 도입해 노동자 회유
경제 대공황·2차 대전 거치면서 영국 등 유럽에서 복지 제도 확산
심각한 비효율로 '복지병' 생기자 일 독려하는 '생산적 복지' 도입
올해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대선 주자들이 하나둘 복지 공약을 내놓고 있어요. 최근에는 기본소득제를 두고 정치인들이 날 선 공방을 벌이기도 했지요. 근래 선거에서는 어떤 복지 정책을 내세우느냐에 따라 당락이 갈릴 정도로 복지 제도가 중요한 이슈가 되고 있습니다.
복지 제도는 국민이 건강하고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게 하는 국가·사회 제도를 뜻해요. 부양자와 소득이 없는 사람을 위한 기초생활수급보장을 비롯해 의료보험·산업재해보험·국민연금 등을 대표적인 복지 제도로 꼽을 수 있지요.
사실 복지라는 개념이 등장한 건 얼마 되지 않았어요. 먼 옛날에도 먹을 것이 부족한 봄에 농민에게 쌀을 빌려주거나 가난한 사람에게 보조금을 주는 정책이 있었지만, '가난한 백성이 불쌍해 나라가 은혜를 베푸는 것'으로 여겼답니다. 오늘날처럼 국민의 복지를 위해 국가와 사회가 책임을 공유하는 복지 제도가 역사에 등장한 건 130여 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어요.
◇철혈재상의 품에서 태어난 복지 제도
근대적 복지 제도를 처음 만들어낸 사람은 독일의 '철혈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 (1815 ~1898)입니다. 19세기 중반까지 독일은 여러 제후국으로 갈기갈기 찢어진 상태로 외세의 간섭을 받고 있었어요. 1862년 신흥 강국으로 떠오른 프로이센의 재상이 된 비스마르크는 독일 통일을 꿈꾸며 군사력을 증강하는 '철혈정책'을 추진했고, 그 결과 덴마크와 오스트리아 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며 북독일 연방을 결성했답니다. 이어 1870년에는 강대국 프랑스와 전쟁에서 승리하며 독일을 통일하고 독일 제국을 수립하였어요.
▲ 1871년 프로이센의 국왕 빌헬름 1세가 프랑스 파리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 제국의 황제로 취임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에요. 독일 통일을 이끈 재상 비스마르크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기 위해 최초의 복지 제도를 도입하였어요. /위키피디아
통일된 독일을 강대국으로 발전시키려 했던 비스마르크는 곧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의 거센 반발에 부딪혔어요. 연이은 전쟁과 빠른 산업화로 생계가 어려워지거나 불만에 찬 노동자가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를 지지하며 사회 운동에 나선 것이죠. 1875년에는 독일사회주의노동당이 결성되어 의회에 진출하고 노동조합 운동도 활발해지면서 노사대립이 격화되었답니다.
이에 비스마르크는 당근과 채찍을 동시에 꺼내들었어요. 1878년 사회주의·공산주의 단체를 모두 불법으로 규정하고 노동조합을 해체하는 강경책을 구사하면서 노동자를 포섭하기 위한 최초의 사회 복지 제도를 발표했어요. 1883년 의료보험범을 시작으로 공장에서 일을 하다 다친 사람을 위한 산업재해보험, 노인을 위한 노령연금제도 등이 차례로 도입되었답니다. 엄격한 보수주의자였던 비스마르크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이라고 할 수 있는 복지 제도 도입을 통해 '노동자의 복지와 권리는 사회주의 정당이 아닌 국가가 지켜주겠다'는 메시지를 던진 것이죠.
◇2차 대전과 베버리지 보고서
비스마르크 이후에도 서구에서는 자유방임주의의 한계가 드러나고 사회주의·공산주의 운동이 성장하면서 이에 대응하기 위한 복지 제도가 빠르게 성장했답니다. 1930년대 전 세계를 덮친 경제 대공황은 정부의 시장 개입과 복지 제도의 필요성을 더 부각시켰어요.
더욱 광범위한 복지 제도가 도입된 계기는 제2차 세계대전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고 생존자도 삶의 터전이 완전히 파괴되면서 국가의 책임과 복지 제도의 필요성이 어느 때보다 절실해진 것이죠.
이에 영국에서는 2차 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 전후 영국과 국민의 삶을 재건하기 위한 복지 정책을 담은 '베버리지 보고서'가 발표되었답니다. '결핍·질병·무지·나태·불결'이라는 5가지 중대 문제를 제거할 복지 정책을 제시한 이 보고서는 영국 국민으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어요.
이후 집권 정당이 된 영국 노동당은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구호를 내세우며 가족수당, 국민보험, 포괄적 의료제도 등 다양한 복지 정책을 펼치며 복지 국가로 나아갔습니다. 베버리지 보고서를 기초로 한 영국의 복지 제도는 큰 호평을 받으며 유럽 곳곳으로 확산되었지요.
◇대처리즘과 생산적 복지
하지만 시간이 흐르자 복지 국가도 문제가 생겼어요. 복지 제도가 확산되면서 정부와 공공부문이 비대해졌고, 이 탓에 경제와 사회 전반에 심각한 비효율이 발생했습니다. 과도한 복지에 기대어 무기력과 나태에 빠지는 사람도 늘어났고요. '영국병' '복지병'이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였답니다. 여기에 1970년대 오일쇼크로 전 세계에 경제 위기가 닥치자 경제 호황을 누렸던 복지 국가들의 재원에도 큰 문제가 생겼지요.
영국은 1979년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가 수상이 되면서 복지 제도의 비효율 문제를 해결하기 시작했어요. 대처는 강성 노조와 여러 국민의 반대를 무릅쓰고 세금과 정부 지출, 과도한 복지 지출과 기업 규제를 줄이는 '대처리즘'으로 영국 경제의 부흥을 이끌어냈답니다. 여러 선진국도 과도한 복지는 줄이고 사람들이 열심히 일을 하도록 독려하는 '생산적 복지'라는 개념을 도입하게 되었고요.
오늘날 각국의 복지 제도는 그 나라의 경제 사정과 정치·문화·사회적 차이에 따라 제각각 다르답니다. 지금도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가 어떤 복지 제도가 더 좋은 것인지를 두고 끊임없이 논쟁을 벌이고 있지요. 앞으로 대선 주자들이 내놓을 여러 복지 공약이 우리나라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여러분도 잘 고민해보도록 해요.
☞기본소득제란?
기본소득제도는 재산이나 소득, 취업 여부나 일할 의지에 상관없이 모든 국민에게 동일한 생활비를 국가가 지급하는 복지 제도예요. 핀란드에서는 지난 1일부터 실업자 2000명을 대상으로 2년간 월 560유로(약 70만원)의 소득을 국가가 지급하는 기본소득제가 시작되었어요.
기본 소득에 찬성하는 입장은 “기본 소득은 근로 의욕을 높이고 불평등 문제를 해결할 뿐 아니라 복지 행정 비용도 줄일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반대하는 쪽은 “기본 소득이 근로 의욕을 높이거나 실업 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오히려 국민의 세금 부담만 더 키울 것”이라고 말해요.
김승호 인천포스코고 역사 교과 교사
02.09 대만이 올림픽에서 국기를 들지 못하는 이유는?
트럼프, 당선 후 대만 총통과 통화… '하나의 중국' 원칙 부정 뜻 비쳐
국공내전 벌였던 중국과 대만, 서로 자신이 합법적인 정부라 주장
1970년대 미국·중국 수교 이후 대만은 정식 국가로 인정 못 받죠
최근 'G2'라는 미국과 중국 사이에 긴장감이 흐르고 있어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당선 직후 차이잉원 대만 총통과 통화한 것이 발단이었습니다. 지난 대선에서 중국의 무역 정책을 비판했던 트럼프 대통령은 대만 총통과의 통화로 '중국이 미국에 협조하지 않으면 중국 정부가 주장하는 하나의 중국 원칙을 인정하지 않을 수 있다'는 뜻을 비친 것이죠.
'하나의 중국'은 "중국 대륙과 대만, 홍콩, 마카오 등은 별개 나라가 될 수 없으며, 오직 합법적 정부는 하나만 있다"는 원칙입니다. 이 원칙은 독립을 주장하는 중국 내 소수민족에게도 적용되고 있어요. 이 원칙에 따라 중국 정부는 자신과 외교 관계를 맺는 나라에 대만 정부와 관계를 단절할 것을 요구해왔습니다. 이에 맞서 대만도 '하나의 중국' 원칙을 내세우며 "중국을 대표하는 합법적 정부는 중국 정부가 아닌 대만 정부"라는 태도를 보였어요.
◇국공내전과 대만
대만이 중국 역사에 등장한 건 16세기 무렵입니다. 중국 대륙과 무관하게 여러 부족이 살고 있던 대만 섬을 아시아로 진출한 스페인과 네덜란드인들이 점령했어요. 이후 만주족의 침략으로 명나라가 멸망하자 정성공이 대만에 넘어와 서양 세력을 몰아내고 명나라 부흥 운동의 거점을 마련했답니다. 하지만 청나라 군대가 정성공 세력을 진압하면서 대만은 청나라의 지배를 받게 되었어요. 청나라 말기에는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대만을 할양받았지요.
중국과 대만의 대립은 20세기 초에 시작된 중국 공산당과 국민당의 갈등에서 비롯되었어요.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면서 청나라가 무너지고 중화민국이 세워졌지만 중국 전역은 여러 군벌(軍閥·사병을 모아 지방을 지배하던 군인 세력)이 나누어 차지하고 있었답니다. 이에 중화민국 수립을 주도했던 국민당은 공산당과 손을 잡고 군벌 토벌에 나섰어요(1차 국공 합작).
그런데 국민당을 이끌던 쑨원이 죽자 국민당 군대를 이끌던 장제스가 쿠데타를 일으켜 국민당을 장악했답니다. 철저한 반공주의자인 장제스는 공산당과 합작을 중단하고 공산당과 군벌을 동시에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국민당 군대의 공세에 공산당은 전멸 위기에 몰렸지만, 중국 북서부 옌안으로 이동하는 대장정을 통해 무너진 조직을 정비할 기회를 마련했어요.
▲ 1945년 마오쩌둥(왼쪽)과 장제스(오른쪽)가 일제의 패망을 기뻐하며 건배하는 모습이에요. 두 사람은 제2차 국공 합작으로 함께 일제에 맞섰지만, 일제가 패망한 이후 중국 대륙의 패권을 놓고 내전을 벌였어요. /위키피디아
장제스는 재차 공산당을 공격하려 했지만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본의 위협이 커지고 부하들의 반발이 일어나면서 다시 공산당과 손을 잡고 중일전쟁에 나섰어요(제2차 국공 합작). 1945년 일본이 패망하고 대만을 돌려받게 되자 장제스의 국민당과 마오쩌둥의 공산당은 중국의 패권을 놓고 다시 내전에 돌입했답니다.
내전 초기에는 미국의 지원을 받은 국민당이 우위를 보였지만, 시간이 흐르자 전세는 공산당에 유리해졌어요. 국민당 관료들이 지나치게 무능하고 부패한 탓이었죠. 1949년 공산당이 중국 대륙 전체를 차지하자 장제스는 본토인 약 200만명을 이끌고 대만으로 탈출했어요. 장제스는 대만 토착 세력을 무력으로 제압한 뒤 타이베이를 새로운 중화민국의 수도로 정했답니다. 그해 마오쩌둥의 공산당은 중화인민공화국 정부 수립을 선언하였어요.
◇'하나의 중국'과 양안 관계
이후 두 나라는 '하나의 중국'을 주장하며 치열한 경쟁을 벌였어요. 1960년대까지는 미국 지원을 받은 대만이 유엔 상임이사국을 차지하는 등 국제 무대에서 앞서갔답니다. 무력 통일을 내세우던 중국은 미국과 갈등을 피하기 위해 평화적·정치적 통합을 추진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어야 했지요.
그런데 1970년대에 들어 대만과 중국의 위치는 완전히 뒤바뀌었어요. 베트남전 패배를 계기로 공산권 국가와 관계 개선에 나선(데탕트·프랑스어로 '휴식') 미국이 중국 정부가 주장하는 '하나의 중국'을 수용했기 때문이죠. 1972년 닉슨 미국 대통령은 중국을 방문하고 '미·중 공동 성명'을 통해 중국 정부를 중국인들의 유일한 합법정부라고 인정했답니다. 그 결과 대만은 국제사회에서 정식 국가로 인정받지 못하는 처지가 됐어요. 유엔은 물론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WB) 같은 주요 국제기구에서도 추방당했고, 미국뿐 아니라 우리나라와 일본 등 중국과 수교한 나라와 모두 공식 외교 관계가 끊어졌답니다. 미국은 비공식적 외교 관계로 대만을 지원하고 있지만 여전히 대만은 정식 국가로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이후 양안 관계는 대만 정치 상황에 따라 우호와 갈등을 반복하고 있어요. 근래 대만은 "하나의 중국 원칙을 고수해야 한다"는 입장과 "하나의 중국을 버리고 대만이 별개 국가로 독립해야 한다"는 입장이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답니다. 차이잉원 대만 총통은 대만 독립에 우호적인 입장으로 알려져 있지만 중국은 여전히 '하나의 중국'을 주장하며 대만 독립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어요.
☞쯔위가 흔든 '청천백일기'
대만 국기는 ‘청천백일기’입니다. 붉은 바탕에 하얀 태양이 푸른 하늘에 떠있는 모습은 쑨원의 삼민주의를 상징하지요. 중화민국의 국기로 만들어졌지만 국민당 정부가 대만에 정착하면서 자연스레 대만의 국기가 되었답니다. 그런데 대만은 올림픽 등 각종 국제 스포츠 대회에서 이 국기를 사용하지 못해요. 중국 탓에 국제 스포츠 무대에서도 정식 국가로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대만 운동선수들이 국제 대회에 나갈 때에는 국기 대신 대만 올림픽위원회의 깃발을 사용합니다.
지난해에는 아이돌그룹 ‘트와이스’의 대만 출신 멤버 쯔위가 방송에서 청천백일기를 흔들었다가 중국 네티즌의 비난을 받는 일이 있었어요. ‘하나의 중국’을 주장하는 중국 사람들이 대만을 상징하는 청천백일기를 인정하지 않아 생긴 일이었죠.
윤형덕 하늘고 역사 교과 교사
02.23 강대국이 그은 식민지 경계, 국경선으로 이어졌어요
말레이시아는 영국 점령지, 인도네시아는 네덜란드가 지배
포르투갈은 동티모르 장악
복잡하게 그어진 동남아 국경… 식민 지배의 흔적이에요
지난 13일 김정일 전 북한 국방위원장의 장남이자 김정은의 이복형 김정남이 말레이시아에서 피살되는 사건이 있었어요. 세계를 놀라게 한 이 사건이 벌어진 뒤 말레이시아가 어디에 있는지 지도를 찾아본 사람도 있을 듯합니다.
말레이시아는 말레이반도와 보르네오섬 북부 지역을 차지하고 있는 나라입니다. 그 남쪽에는 수마트라섬과 자바섬을 비롯해 크고 작은 섬으로 이루어진 인도네시아가 있고요.
이 일대는 과거부터 해상 교통과 중개무역이 발달해 다양한 인종이 모여 살았어요. 서쪽에서는 인도인과 아랍인이, 동쪽에서는 중국인이 몰려왔고 폴리네시아 원주민까지 이곳에 넘어와 살기도 했지요.
2세기부터 13세기까지는 말레이반도와 수마트라섬·자바섬을 중심으로 스리위자야 왕국이 번성했어요. 몽골의 침략 후 세워진 마자파힛 왕국은 풍부한 자원과 해상무역을 기반으로 이 일대와 필리핀 남부까지 지배했던 해상 제국이었지요.
10세기 이후로는 아랍 무역상들을 통해 이슬람교가 유입되면서 이 지역 곳곳에 크고 작은 이슬람 왕국이 세워졌어요. 14세기에는 이슬람 세력이 말레이반도를 장악하고 말라카 왕국을 세웠답니다. 말라카 왕국도 말라카해협을 차지하고 서역과 동아시아를 잇는 중개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쌓았어요.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
그런데 16세기가 되자 식민지를 찾는 유럽 세력이 이 지역에 진출하면서 동남아시아는 서구 열강의 전쟁터가 되고 맙니다. 포르투갈의 침략에 말라카 왕국이 멸망했고 뒤이어 동인도회사를 앞세운 네덜란드 세력이 말레이반도와 인도네시아 도서 지역을 장악하면서 마자파힛 왕국이 무너졌어요. 17세기부터는 영국이 이 지역에 진출을 시도하면서 네덜란드와 치열한 싸움을 벌였답니다.
19세기 초가 되자 말레이반도와 보르네오섬 북부는 영국이 차지하게 되었어요. 영국은 이 일대 해안에 싱가포르 등 무역 도시를 건설하고 '해협식민지(1826~1946)'를 구축했습니다. 보르네오섬 북부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과 수마트라섬·자바섬은 1800년 네덜란드 영토로 공식 편입되었고요(네덜란드령 동인도). 두 나라는 1814년 런던조약, 1824년 영란조약을 통해 이 일대에 각자가 가진 식민지를 인정하기로 하였지요.
▲ 그래픽=김란희
이렇게 정해진 식민지 경계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가 독립한 뒤 두 나라 간의 국경선이 되었어요. 1962년 인도네시아가 "보르네오 섬은 원래 인도네시아 영토"라며 전쟁을 일으켜 두 나라가 4년간 전쟁을 벌이기도 했지요. 싱가포르는 말레이시아에 속해 있다 1965년 독립해 도시국가가 되었어요. 보르네오섬 북부에 있는 이슬람 왕국 브루나이는 2차 대전 이후에도 영국의 지배를 받다 지난 1984년에 독립하였습니다.
◇뉴기니섬에 그어진 직선 국경
인도네시아의 동쪽에는 오세아니아에 속해 있는 세계에서 둘째로 큰 섬 뉴기니가 있어요. 이 섬은 한가운데 그어진 직선 국경을 중심으로 서쪽은 인도네시아, 동쪽은 파푸아뉴기니가 차지하고 있어요. 이 직선 국경도 서구 열강의 식민 지배가 남긴 흔적입니다.
뉴기니섬은 16세기 초 포르투갈 항해사 조르즈 드 메네세가 발견했어요. '새로운 기니'라는 뜻의 '뉴기니(new guinea)'라는 이름은 이 섬에 처음 도착한 유럽인들이 섬 주민들을 보고 "이곳 주민들은 아프리카 기니 사람들과 닮았다"고 말한 데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처음 뉴기니섬을 발견한 건 포르투갈이었지만 1828년 네덜란드가 뉴기니섬 서쪽을 점령해 식민지로 삼았어요. 19세기 말에는 독일이 뉴기니섬 동북부 지역을 장악해 '독일령 뉴기니'를 세웠고요. 그 외 섬 동쪽 지역은 영국이 지배하는 '영국령 뉴기니'가 되었어요.
섬의 서쪽과 동쪽을 나눠 가진 네덜란드와 영국은 1895년 뉴기니섬 한가운데에 직선의 식민지 경계를 그었습니다. 이 경계가 오늘날 두 나라의 국경선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죠.
1902년 영국령 뉴기니의 통치권을 넘겨받은 호주는 1914년 독일령 뉴기니를 점령하였어요. 2차 대전이 끝나자 영국령 뉴기니는 파푸아뉴기니로 이름이 바뀐 뒤 호주의 통치를 받았고, 지난 1975년에 독립하였어요. 네덜란드가 지배했던 뉴기니섬 서쪽은 1969년 인도네시아 영토로 귀속되었어요.
☞포르투갈과 동티모르
16세기에 동남아시아에 진출한 포르투갈은 17세기가 되자 네덜란드와 영국에 밀려 이 일대 지배권을 대부분 상실했어요. 그럼에도 지배권을 유지한 곳이 일부 있었는데 그중 한 곳이 바로 티모르(Timor)섬입니다.
하지만 이곳도 네덜란드의 침공을 받아 섬 서쪽은 네덜란드에 내주어야 했어요. 현재 티모르섬 내 인도네시아와 동티모르(East Timor)를 가르는 국경도 19세기 후반 네덜란드와 포르투갈이 티모르섬을 동과 서로 분할하며 정해진 거예요. 2차 대전 이후 네덜란드가 지배하던 티모르섬 서쪽은 인도네시아에 귀속되었지만, 동티모르는 계속해서 포르투갈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1975년 동티모르는 포르투갈 내정이 불안한 틈을 타 독립을 선언했어요. 하지만 며칠 뒤 인도네시아의 침공을 받아 다시 식민지 신세가 되고 말았답니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독립 투쟁을 벌인 동티모르는 2002년 마침내 독립국가가 되었어요. 독립 후 동티모르는 현지어인 테툼어와 포르투갈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있답니다.
김승호 인천포스코고 역사 교사
03.02 "주사위는 던져졌다" 로마를 바꾼 카이사르의 선택
|갈리아 원정 성공한 카이사르
원로원·폼페이우스가 음모 꾸미자 군대 이끌고 로마 진격해 권력 장악
후계자 옥타비아누스가 황제 등극
오늘날 '루비콘강을 건넜다'는 말은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란 뜻이에요
최근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미국 내 주요 언론이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뉴욕타임스(NYT)와 CNN 등을 겨냥해 "가짜 뉴스이자 미국의 적"이라고 강도 높게 비난하자 NYT는 '진실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는 광고를 내며 맞대응했지요. 이를 두고 다른 언론들은 "트럼프와 주류 언론이 루비콘강을 건넜다"고 표현했습니다.
'루비콘강을 건넜다'라는 말은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졌기에 그대로 밀고 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을 뜻해요. 이탈리아 북동부에 있는 작은 강 루비콘이 TV나 신문에서 번번이 언급되는 이유는 고대 로마의 대정치가 율리우스 카이사르(BC 100~BC 44)와 깊은 연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명문가 청년, 빚더미에 앉다
카이사르가 태어났을 무렵 로마는 극심한 정치적 혼란을 겪고 있었어요. 귀족들이 원로원과 집정관(로마 공화정의 최고 관직) 등 공화정 내 권력을 독점하며 대농장을 운영한 탓에 평민과 귀족 간의 빈부 격차가 너무 커졌기 때문이었죠. 이에 농지 개혁을 주장하는 민중파와 개혁에 반대하는 귀족파가 격렬한 대립을 보였고, 이는 민중파 마리우스와 귀족파 술라 간의 내전으로 이어졌습니다. 내전에서 승리한 술라는 무자비한 숙청으로 공포정치를 펼쳤는데, 카이사르는 이 시기에 유년 시절을 보냈어요.
▲ 기원전 52년 카이사르가 알레시아 전투에서 승리한 뒤 갈리아 족장이 카이사르에게 항복하는 모습을 상상해서 그린 그림이에요. /위키피디아
카이사르의 집안이 마리우스파로 지목된 탓에 카이사르의 출세는 남들보다 조금 늦은 편이었습니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명석한 두뇌와 뛰어난 친화력으로 맡는 관직마다 탁월한 성과를 보이며 대정치가로서의 기반을 쌓았어요.
특히 그는 막대한 빚을 져 방탕한 생활을 하는 것으로 아주 유명했습니다. 책이나 옷을 사는 데에 돈을 전혀 아끼지 않았고, 아리따운 여인들에게 값비싼 선물을 주는 것도 아까워하지 않았지요. 하지만 그의 빚 대부분은 사실 자비로 도로 보수 사업이나 검투사 대회를 열었기 때문이었어요. 빚더미에 앉은 대신 로마 시민의 열렬한 지지를 얻은 것이죠.
◇삼두 정치와 갈리아 원정, 그리고 루비콘강
승진을 거듭한 카이사르는 히스파니아(오늘날 스페인) 속주의 총독을 마치고 로마로 돌아온 뒤 집정관이 되기 위해 당대 최고의 장군 폼페이우스를 찾아갔어요. 당시 폼페이우스는 그의 병사들에게 토지를 나눠주는 문제로 원로원과 갈등을 빚고 있었는데, 이를 간파한 카이사르는 "내가 집정관이 되면 당신의 부하들에게 농지를 나누어 줄 테니 집정관에 선출될 수 있게 도와 달라"고 제안했어요. 폼페이우스가 이를 승낙하자 카이사르는 로마 최고의 부자였던 크라수스도 끌어들여 집정관이 되는 데 성공합니다. 이후 로마의 정치는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크라수스 세 사람의 동맹에 의해 좌지우지되었는데, 이를 '삼두 정치'라고 하지요.
집정관으로 뛰어난 업적을 남긴 카이사르는 갈리아 지방(오늘날 프랑스)의 총독으로 부임했어요. 이후 8년간 카이사르는 탁월한 군사적 재능으로 갈리아인과 게르만족을 제압해 로마 영토를 갈리아 전역으로 넓혔어요. 그 결과 카이사르는 막강한 정치적·경제적 영향력을 얻었고 로마 시민들 사이에서 인기도 한층 더 높아졌습니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곧 중대한 위기에 빠졌어요. 갈리아 원정에 나선 사이 크라수스가 파르티아전쟁 중 사망했고, 농지 개혁에 적극적인 카이사르를 못마땅하게 여긴 원로원 보수파 귀족들이 폼페이우스를 끌어들이면서 삼두 정치가 무너졌기 때문이죠.
폼페이우스를 등에 업은 원로원은 갈리아 원정을 마친 카이사르에게 "군대를 해산하고 로마에 돌아오라"는 명령을 내렸어요. 카이사르가 무장을 해제하고 로마에 들어오면 여러 가지 죄목을 씌워 제거할 심산이었죠. 이를 간파한 카이사르가 귀국을 미루자 원로원은 폼페이우스에게 카이사르를 격파하라고 요구했어요.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향하던 카이사르는 갈리아와 로마 본국의 경계인 루비콘 강변에 도착했습니다. 당시 로마의 법은 장군이 군대를 이끌고 루비콘강을 건너지 못하도록 했어요. 이를 어기면 반역죄로 간주하였지요.
잠시 고민한 카이사르는 부하들에게 "주사위는 던져졌다"며 루비콘강을 건널 것을 명령합니다. 강을 건너는 순간 카이사르는 쿠데타에 성공해 권력을 잡거나 반역죄로 죽음을 당하는 두 가지 운명 중 하나를 피할 수 없게 되었지요.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는 뜻의 '루비콘강을 건너다'는 말은 여기서 유래한 것입니다.
◇카이사르의 죽음과 로마제국의 탄생
카이사르가 예상보다 빨리 루비콘강을 건너 로마로 진격하자 당황한 폼페이우스와 원로원 귀족들은 이탈리아 밖으로 도망쳤어요. 폼페이우스는 반격을 노렸지만 카이사르는 히스파니아와 그리스에서 폼페이우스의 군대를 물리치고 종신 독재관이 되었습니다. 명실상부 로마의 1인자가 된 것이죠.
하지만 그의 1인 통치는 '카이사르가 왕이 되려 한다'는 의심을 키웠고, 이 의심은 화살이 되어 카이사르에게 날아왔습니다. 기원전 44년 원로원 회의장으로 들어서던 카이사르는 양아들 브루투스와 공화정을 옹호하는 귀족들이 휘두른 칼에 숨을 거두었어요. 죽기 전 양아들을 본 카이사르는 "브루투스 너마저"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지요.
하지만 카이사르의 등장과 죽음은 더 이상 로마가 공화정으로는 지탱될 수 없다는 걸 의미했습니다. 카이사르가 죽자 그의 후계자로 지목된 양아들 옥타비아누스가 여러 경쟁자를 물리치고 로마 초대 황제가 되었어요. 이렇게 450여년간 이어진 로마 공화정은 무너졌고, 로마는 제국으로 재탄생했습니다. 그 발단은 카이사르가 루비콘강을 건넌 순간이었어요.
김승호 인천포스코고 역사 교과 교사
03.09 비스마르크가 흘린 '가짜 뉴스', 전쟁의 도화선으로
독일 통일 꿈꾼 재상 비스마르크
왕이 보낸 전보 내용 조작해 통일 반대하던 프랑스와 전쟁 유도
전쟁 시작 두 달 만에 승리 거두고 독일 제국 수립하며 통일 이뤘죠
최근 전 세계가 '가짜 뉴스(fake news)'로 골머리를 앓고 있어요. 가짜 뉴스란 넓게는 거짓 정보나 조작된 사실이 담긴 뉴스, 좁게는 기사의 형식을 그대로 따라 해 거짓 정보나 조작된 사실을 퍼트리는 뉴스를 뜻합니다. 온라인을 통해 기사를 접하는 경우가 늘어나면서 여론을 선동하거나 사람들을 속일 목적으로 가짜 뉴스들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죠. 지난 미국 대선에서는 '교황이 도널드 트럼프 지지를 선언했다'거나 '힐러리 클린턴이 테러 단체에 무기를 판매했다'는 가짜 뉴스가 퍼졌고, 우리나라에서도 "구테흐스 유엔사무총장이 반기문 전 총장은 대선 출마 자격이 없다고 말했다"는 등 여러 가짜 뉴스가 퍼져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했어요.
가짜 뉴스는 사람들의 눈을 가리고 선동해 사회 전체를 혼란에 빠뜨린다는 점에서 큰 문제가 됩니다. 역사를 살펴봐도 거짓 정보나 조작된 사실이 사람들을 속여 큰 문제를 일으킨 일이 많았어요. 150여 년 전 프랑스는 조작된 사실이 담긴 뉴스에 속아 전쟁을 일으켰다가 큰 낭패를 보기도 했지요. 오늘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과 이를 촉발한 엠스 전보 사건을 알아보도록 합시다.
◇비스마르크, 독일 통일에 나서다
19세기 중엽 유럽에는 민족주의가 퍼지면서 한 민족이 하나의 국가를 이루려는 통일 운동이 곳곳에서 일어났어요. 중세부터 늘 여러 나라로 찢겨 있던 독일에서도 이런 움직임이 나타났답니다. 그 중심에는 '철혈 재상' 비스마르크가 이끄는 프로이센이 있었어요. 비스마르크는 강한 군사력을 양성해 무력 통일을 추구하는 '철혈정책'을 추진했고, 그 결과 독일 지역에 번번이 간섭하던 덴마크와 오스트리아를 제압한 뒤 1867년 북독일 연방을 결성하는 데 성공했어요. 독일 통일이 가까워진 것이죠.
하지만 완전한 통일을 위해서는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 있었어요. 강대국 프랑스였습니다. 덴마크, 오스트리아와 마찬가지로 프랑스도 독일 통일에 부정적이었어요. 통일된 독일은 향후 프랑스에 큰 위협이 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죠.
이를 간파한 비스마르크는 '프랑스를 꺾어야만 독일 통일이 완성된다'고 생각하며 프랑스와 전쟁을 벌일 명분을 찾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 명분을 찾을 만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1868년 스페인에서 왕정을 무너뜨리고 입헌군주정을 세우려는 혁명이 일어난 것이죠.
◇왕이 보낸 전보를 본 비스마르크의 선택
당시 스페인 혁명정부는 이사벨 2세를 몰아내고 프로이센 왕가의 사람을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프랑스 왕 나폴레옹 3세(나폴레옹의 조카)가 강하게 반대하고 나섰어요. 프로이센 왕가가 스페인을 차지할 경우 프랑스가 서쪽과 동쪽 양쪽에서 프로이센의 압박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죠. 프랑스의 강한 반대에 비스마르크와 빌헬름 1세는 스페인 왕위를 받는 건 큰 실익이 없다고 판단해 스페인 혁명정부의 제안을 거절하였어요.
하지만 프로이센을 믿지 못한 나폴레옹 3세는 재차 빌헬름 1세에게 "스페인 왕위를 탐내지 않겠다고 공식적으로 다짐하라"고 요구했답니다. 이에 비스마르크는 "이미 사양했기 때문에 그런 요구는 불필요하다"고 답했어요. 마음이 놓이지 않은 나폴레옹 3세는 급기야 빌헬름 1세가 휴양 차 온천을 즐기던 엠스(오늘날 바트엠스·Bad Ems)로 대사를 파견하며 '제대로 된 다짐을 받아오라'고 지시했어요.
▲ 1866년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전쟁에 나선 프로이센 국왕 빌헬름 1세와 재상 비스마르크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에요. 비스마르크는 독일 통일을 완수하기 위해 빌헬름 1세가 엠스에서 보낸 전보를 조작해 프랑스와 전쟁을 일으켰어요. /AFP
지시를 받고 엠스로 간 프랑스 대사는 빌헬름 1세 앞으로 불쑥 나타나 '공식적인 다짐을 해달라'고 요구했답니다. 이에 빌헬름 1세는 "이미 끝난 얘기"라고 답한 뒤 보좌관을 통해 "할 말이 더 있다면 양국 대사나 언론을 통해서 하자"고 전했어요. 그리고 엠스에서 있었던 일을 전보로 비스마르크에게 보냈지요.
엠스에서 보내온 전보를 받은 비스마르크는 이때부터 '외교의 천재'다운 모략을 벌이기 시작했어요. 전보 내용을 조작해 전쟁의 명분을 만들기로 한 것이죠. 비스마르크는 전보에 적힌 문장 일부를 덜어내어 '프랑스 대사가 무례하게 다짐을 요구했고, 분노한 국왕이 프랑스 대사와의 접견을 거부했다'는 수정된 내용의 전보를 언론에 공개했어요.
◇여론이 격화되며 전쟁이 시작되다
비스마르크가 조작한 전보가 뉴스를 통해 알려지자 프로이센에서는 '늙은 국왕이 무례한 프랑스 대사에게 모욕을 당했다'는 여론이 불붙었습니다. 재미난 건 프랑스에서 더 격한 분노의 여론이 일었다는 사실입니다. 당시 프랑스 신문사들이 외신을 인용하는 과정에서 잘못된 번역을 하는 바람에 '프랑스 대사가 정중하게 질문을 하였으나 빌헬름 1세가 하급 관리를 시켜 대사를 문전박대하고 모독했다'는 식으로 기사가 났기 때문이죠.
비스마르크가 의도한 대로 두 나라의 여론이 격화되면서 프로이센과 프랑스는 전쟁에 돌입했습니다. 전쟁이 시작되자 프로이센 군대는 파죽지세로 프랑스 영토를 점령했고, 프랑스는 두 달도 버티지 못하고 항복을 선언했어요. 오래전부터 전쟁을 준비한 프로이센과 달리 프랑스는 여론에 휩쓸려 급하게 전쟁을 벌인 탓에 이런 결과가 나온 것입니다. 승전국 프로이센은 파리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 제국의 수립을 선포하고 빌헬름 1세를 독일 제국의 초대 황제로 추대하는 제위식을 열었어요. 독일로서는 역사상 첫 통일 국가를 이룬 감격스러운 순간이었지만, 반대로 프랑스 역사에서는 가장 치욕적인 순간 중 하나로 꼽힙니다.
엠스 전보 사건은 비스마르크의 지략을 잘 보여주는 일로 유명하지만, 프랑스 입장에서는 가짜 뉴스로 나라가 비참한 운명을 맞은 비극의 시작이었어요. 가짜 뉴스가 범람하는 요즘 우리도 가짜와 진짜를 분별하는 지혜를 길러야 하겠습니다.
윤형덕 한일고 역사 교사
03.16 '실지왕'이 서명한 양피지, 근대 헌법의 뿌리 됐어요
과도한 세금에 불만 폭발한 귀족들, 존 왕에 맞서 마그나카르타 만들어
국왕의 과세권과 체포권 등 제한… 근대 헌법 탄생에도 기여
최초의 성문헌법인 미국 헌법, 기본권 지키기 위한 투쟁 결과예요
지난 10일 헌법재판소는 재판관 8명 전원 일치로 대통령 파면을 결정했어요. 현직 대통령이 파면된 것은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지요. 헌재는 파면을 결정한 이유 중 하나로 "헌법수호의지가 보이지 않았다"고 말했어요. 대통령이 헌법을 위반했을 뿐 아니라 이를 바로잡으려는 노력도 부족했기 때문에 파면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죠.
헌법은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동시에 국가의 통치 방법을 규정하는 최상위 법입니다. 대통령뿐 아니라 모든 국민은 반드시 헌법을 지켜야 하지요. 모두가 헌법을 지키고 통치 행위도 헌법을 벗어나지 않아야 시민이 가진 권리를 제대로 보장할 수 있기 때문이에요.
우리나라뿐 아니라 다른 민주주의 국가도 한 공동체의 모든 생활이 헌법을 벗어나면 안 된다는 입헌주의를 따릅니다. 이렇게 여러 나라에서 헌법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를 역사를 통해 알아볼까요?
◇실지왕(失地王)의 폭정에 재갈을 물리다
13세기 초 영국에서는 국왕을 원망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었어요. 1199년 왕좌에 오른 존(1167~1216) 왕이 연이어 전쟁을 일으켰지만 번번이 패배했기 때문이죠. 존 왕의 아버지인 헨리 2세가 국왕일 때 영국은 프랑스 영토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존 왕이 번번이 전쟁에서 진 탓에 그 땅을 대부분 잃어버리고 말았답니다. 화가 난 영국 사람들은 존 왕을 가리켜 '땅을 많이 잃은 왕'이라는 뜻의 '실지왕'(John The Lackland)이라는 별명을 지어주었어요.
▲ 존 왕이 마그나카르타에 서명하는 장면을 상상해 그린 그림이에요. /위키피디아
하지만 존 왕은 "잃어버린 땅을 되찾아야 한다"며 전쟁을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답니다. 급기야 전쟁에 필요한 돈을 마련하기 위해 세금을 더 걷기 시작했어요. 그러자 몇몇 귀족이 "더 이상 병사나 세금을 내놓지 않겠다"며 존 왕에게 맞서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귀족들은 선대 왕인 리처드 1세의 십자군 원정 탓에 많은 세금을 내어 불만이 많았는데, 존 왕이 더 많은 세금을 요구하자 참았던 불만을 터트리기 시작한 것이죠.
그럼에도 존 왕은 아랑곳하지 않고 전쟁을 일으켰고, 여느 때와 다르지 않게 또 패배하고 말았어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생각한 귀족들은 기사들을 이끌고 존 왕이 있는 런던으로 달려갔습니다. 인기기 땅에 떨어진 존 왕은 귀족들의 무력시위에 굴복해야 했고, 결국 그들이 내민 양피지에 서명을 했지요.
▲ 1297년 에드워드 1세가 발행한 개정판 마그나카르타 원본이에요. 이 원본은 지난 2007년에 열린 경매에서 2130만달러(약 200억원)에 거래됐어요.
1215년 존 왕이 서명한 이 양피지가 바로 근대적 헌법의 토대로 여겨지는 '마그나카르타(Magna Carta·대헌장)'입니다. 마그나카르타에는 귀족 의회 승인 없이 국왕이 마음대로 세금을 부과할 수 없고, 재판이나 법률에 근거하지 않고 사람을 체포하거나 국외로 추방하지 못하도록 하는 내용 등이 담겼어요. 사고뭉치 실지왕이 더 이상 폭압적인 통치를 하지 못하도록 재갈을 물린 것이죠.
그 전까지 영국 국왕은 마음대로 법을 만들고 그 법을 스스로 어겨도 되는 초월적인 존재였지만, 마그나카르타가 등장하자 상황이 달라졌어요. 왕도 반드시 따라야 하는, 왕보다 더 높은 법이 만들어진 것이죠. 또 사람들은 "시민은 왕도 침해할 수 없는 고유한 권리를 갖고 있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마그나카르타는 오직 귀족의 권리만 보장했다는 한계가 있지만, 이후 300여 년간 국왕을 견제하고 귀족과 평민의 권리를 보호하는 영국 의회제도가 발전하는 기틀이 되었어요. 훗날 평민들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거나 부당한 왕의 통치에 저항할 때에도 마그나카르타는 그 근거가 되었고요. 영국 국왕이 의회와 시민의 권리와 자유를 재차 보장한 권리청원과 권리장전의 뿌리이기도 합니다. 근대적 헌법도 마그나카르타처럼 전제정치에 맞서 개인의 생명과 재산 등 기본권을 지키는 과정에서 탄생했어요.
◇최초의 성문헌법은 미국 헌법
1787년 마련된 미국의 헌법은 세계 최초의 근대적 성문헌법(문자로 적어 표현하고 문서의 형식을 갖춘 헌법)입니다. 그 전에도 여러 성문법이 있었지만, 미국 헌법처럼 통치 조직을 규정하는 동시에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한다고 명확하게 적어 놓은 법은 없었어요.
미국의 헌법도 개인의 권리를 위한 투쟁의 산물입니다. 영국이 식민 지배를 하던 시절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한 사람들은 종교적 자유와 일정한 자치권을 인정받고 있었어요. 그런데 1763년 경제 사정이 나빠진 영국이 아메리카 식민지에 더 많은 세금을 요구하면서 갈등이 시작되었답니다. 식민지 사람들은 "우리가 동의하지 않은 부당한 세금을 낼 수 없다"며 맞섰고, 이는 1776년 독립선언과 영국과의 독립전쟁으로 발전하였어요. 이 전쟁에서 식민지 민병대가 승리를 거두면서 미국이라는 나라가 탄생한 것이죠.
영국 정부의 강압을 딛고 독립을 이끈 당시 미국의 지식인들은 미국 정부가 영국 정부처럼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에 통치 조직을 분산하고 개인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수단으로 성문헌법을 택한 것이죠. 이렇게 헌법은 오늘날에도 민주주의와 시민의 기본권을 지키는 가장 중요한 규칙이자 수단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김승호 인천하늘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배준용 기자
03.23 보어인과 영국인, 줄루족 땅 빼앗고 흑인 차별했어요
백인 우월 의식 네덜란드인들, 케이프 식민지 세운 후 흑인 착취
영국 식민 정부도 흑인 감시·억압
인종차별 악명 '아파르트헤이트'… 1994년 만델라 대통령 취임 후 종결
아프리카 대륙 남단에 있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는 한때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라는 악명 높은 정책이 있었습니다. 남아공 국민을 백인과 흑인, 유색인종으로 나누어 인종 간 거주 지역을 통제하고 흑인이 대중 버스나 공공시설을 이용할 때 여러 제한을 두는 인종차별 정책이었지요. 국제사회의 비난에도 아파르트헤이트는 1993년까지 지속되었고, 이듬해 넬슨 만델라 대통령이 취임한 뒤에야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최근 남아공에서 인종 간 갈등이 다시 일어날 조짐이 보여요. 제이컵 주마 대통령과 여러 정치인이 "백인들의 토지를 몰수해 식민지 이전의 상태로 돌려놓자"는 주장을 내놓았기 때문입니다. 오래전부터 백인이 흑인을 착취하고 차별한 대가를 지금이라도 치르도록 하겠다는 것이죠. 남아공에서 어떤 일들이 있었기에 인종 갈등이 계속되는 걸까요?
◇보어인의 탄생
15세기 전까지 남부 아프리카에는 수천 년 전부터 반투족(반투는 '인간'이라는 뜻)이 살고 있었어요. 이들은 짐바브웨 왕국, 콩고 왕국 등 찬란한 문명을 세워 번영을 누리기도 했습니다. 18세기 후반에는 반투족의 한 갈래인 줄루족에서 '검은 나폴레옹'이라 불린 샤카 왕이 등장해 줄루 왕국을 세웠지요.
그런데 15세기부터 인도로 가려는 포르투갈인들을 시작으로 유럽인들이 하나둘 남아프리카로 이주하기 시작했어요. 17세기 중엽에는 동인도 회사를 앞세운 네덜란드인들이 오늘날 케이프타운 일대에 케이프 식민지를 건설하고 대거 정착하였답니다. 네덜란드인들은 그 일대에 살던 흑인을 노예로 삼고 농장을 운영하였어요.
18세기 말 영국이 케이프 식민지를 점령하자 영국인들이 대거 케이프 식민지로 이주해왔습니다. 이후 영국 식민 정부가 영국인을 중시하는 통치를 펼치면서 네덜란드인들은 불만을 품기 시작했어요. 특히 식민 정부가 흑인 노예를 해방하는 조치를 내리자 불만이 극에 달했습니다. 백인 우월 의식을 갖고 있던 네덜란드인들은 흑인 노예 해방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었죠.
이에 네덜란드인들은 하나둘 케이프 식민지 북쪽으로 이주해 식민 정부의 지배에서 벗어나 살기 시작했어요. 이들을 가리켜 네덜란드어로 '농장주'를 뜻하는 '보어(Boer)'인이라고 부르게 되었지요.
사실 흑인 노예를 해방한 영국 식민 정부도 흑인에게 우호적이지 않았어요. '통행법'을 만들어 해가 지면 흑인은 거리에 다니지 못하게 할 정도로 엄격한 통제와 감시, 차별을 하였습니다. 보어인들도 비슷한 흑인 차별을 계속하였고요. 이런 관행과 악법이 이어져 훗날 아파르트헤이트로 발전한 것이죠.
◇다이아몬드가 부른 보어전쟁
케이프 식민지 북쪽으로 이주한 보어인들은 줄루족과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당시 줄루 왕국의 왕 딩가네는 의심이 많고 흉포한 성품을 가졌는데, 그는 북쪽으로 이주한 보어인들이 줄루 왕국을 노리는 것이라 의심했어요.
결국 딩가네는 보어인들을 잔치에 초대한 뒤 잔혹하게 죽이는 '통곡의 학살'로 선제공격을 하였어요. 기습을 당한 보어인은 전열을 가다듬어 줄루 왕국과 전쟁을 벌였지만 패하고 말았어요. 보어인을 돕는다는 명분으로 전쟁에 뛰어든 '세계 최강' 영국군도 줄루 전사(임피·impi)의 용맹함을 당해내지 못했고요.
▲ 1838년 줄루족이 보어인들의 거주지를 습격하는 장면을 담은 그림이에요. 18세기 말 이후 남아프리카에서는 줄루족과 보어인, 영국인 사이에 갈등과 전쟁이 계속되었어요. /위키피디아
재차 전열을 가다듬은 보어인들은 신중한 군사작전을 펼쳐 줄루 왕국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냈고, 케이프 식민지 북쪽에 보어인의 나라인 나탈리아 공화국을 수립하였답니다. 하지만 나탈리아 공화국은 영국 식민 정부의 압력에 굴복해 케이프 식민지로 편입되고 말았지요. 이에 보어인들은 다시 북쪽으로 이동하여 트란스발 공화국(1852년)과 오렌지 자유국(1854년)을 세웠어요.
보어인이 세운 두 나라와 영국 식민 정부, 줄루족 간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트란스발 공화국과 오렌지 자유국에서 다이아몬드와 금이 대거 발견되었기 때문이었죠. 농장을 운영하던 보어인들도 너나 할 것 없이 광산으로 달려갔고, 케이프 식민지에 사는 영국인들도 두 나라로 넘어가 광맥을 찾을 정도로 남아프리카에는 다이아몬드 열풍이 불었어요. 이에 영국인과 보어인 사이에 다이아몬드와 금 광산을 둘러싼 이권 다툼이 벌어지기 시작했답니다.
다이아몬드를 탐낸 영국은 이권을 차지하기 위해 트란스발 공화국과 오렌지 자유국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켰어요. 이 전쟁이 바로 보어전쟁(1899~1902)입니다. 초반에는 지형을 이용해 게릴라 전술을 펼친 보어인 군대가 선전하였지만, 3년 만에 항복하고 말았어요. 당시 보어인 인구는 50만명, 군대는 7만명 정도였는데 영국 정부가 무려 45만명의 군대를 투입해 보어인의 농장과 집을 깡그리 불태우는 전멸 작전을 펼친 결과입니다.
줄루 왕국도 무사하지 못했어요. 줄루 전사에게 뼈아픈 패배를 당했던 영국군은 1879년 줄루 전쟁에서는 개틀링 기관총을 가져가 대승을 거두었어요. 줄루 왕국은 여러 부족으로 분할되었고, 마지막 왕 세츠와요가 사망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영국은 1909년 줄루 왕국의 땅과 케이프 식민지, 트란스발 공화국, 오렌지 자유국 전체를 하나로 묶어 '남아프리카연방(남아연방)'을 수립하였어요. 남아연방은 영국의 지배를 받다가 1961년 자치령에서 벗어나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독립하였지요. 하지만 케이프 식민지 시절부터 시작된 보어인과 영국 백인의 흑인·유색인 차별은 남아공 수립 이후에도 계속되었습니다. 아파르트헤이트를 청산한 남아공이 상처 깊은 역사까지 잘 이겨내고 진정한 화합을 이뤄내길 기원해 봅니다.
윤형덕 한일고 역사 교사
03.30 손잡느냐 맞서느냐… 두 친구의 엇갈린 외교 전략
2300년 전 중국 전국시대
소진, 힘 약한 여섯 나라가 뭉쳐 강국 진나라에 맞서는 합종 이뤄
소진 도움받아 진나라 재상된 장의, 6국 동맹 깨뜨리고 연횡책 달성
오늘날 '합종연횡'으로 전해져요
제19대 대통령 선거 날짜가 오는 5월 9일로 확정되면서 여러 정당은 각자 대선에 나갈 본선 후보를 뽑는 경선을 벌이고 있어요. 여러 후보가 도전장을 내밀면서 후보들 간에 '합종연횡(合從連橫)'이 벌어질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오고 있지요.
합종연횡은 보통 '약자들이 뭉쳐 강자에 맞서거나, 강자가 약자들을 흩트려 자신에게 맞서지 못하게 하는 외교 전략'을 뜻합니다. 정확하게는 약 2300년 전 중국에서 등장했던 합종(合從)이라는 전략과 연횡(連橫)이라는 전략을 묶은 말이지요.
◇전국시대와 소진의 합종
기원전 4세기 중국은 일곱 나라로 나뉘어 끊임없이 전쟁을 벌이는 전국시대(戰國時代)였습니다. 일곱 나라 중 중국 서쪽을 차지한 진(秦)나라가 가장 강대하였어요. 법치를 중시하는 상앙(商鞅)이 재상이 되어 단기간에 국력을 크게 키운 덕분이었지요. 중국 동쪽은 연(燕)나라를 비롯해 제(齊)·초(楚)·한(韓)·위(魏)·조(趙)나라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이 무렵 각 나라를 돌며 자신의 외교 전략을 설득하는 사상가들이 있었는데, 이들을 '종횡가'라고 불렀어요. 종횡가 중에 가장 돋보인 활약을 펼친 주인공이 바로 소진(蘇秦)과 장의(張儀)입니다. 두 사람은 종횡가의 시조인 귀곡자(鬼谷子) 아래에서 함께 공부한 절친한 사이였지만, 각자 주장하는 외교 전략은 전혀 달랐어요.
소진은 진나라에 대항하여 다른 여섯 나라가 정치·군사 동맹을 맺는 '합종'을 주장했습니다. 약소국이 모두 힘을 합치면 아무리 강대국이라도 섣불리 약소국을 공격하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 위키피디아·바이두, 그래픽=유두호 기자
여섯 나라를 설득하기 위해 소진은 연나라로 갔습니다. 연나라 제후를 만난 소진은 "연나라가 진나라의 공격을 받지 않는 이유는 조나라가 남쪽에서 길목을 막고 있기 때문"이라며 "연나라가 조나라를 멀리하면 결국 연나라도 위험해질 것"이라며 합종의 필요성을 논했습니다. 이 말에 설득된 연나라 제후는 소진을 재상으로 삼고 금은보화를 주어 다른 나라를 합종에 끌어들이도록 했어요.
기세등등한 소진은 조나라를 찾아가 "여섯 나라가 합치면 진나라보다 땅은 다섯 배가 크고 병사는 열 배가 많다"며 "진나라의 신하가 되느니 여섯 나라가 뭉치는 게 낫지 않으냐"고 설득했고, 시큰둥하던 조나라도 결국 합종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소진은 같은 논리로 한·위·제나라를 합종에 끌어들였고, 여섯 나라 중 가장 강대한 초나라는 "합종에 참여하면 초나라가 여섯 나라의 우두머리가 될 수 있다"고 꼬드겼어요.
그렇게 여섯 나라는 진나라에 맞서 강력한 동맹 체제를 이루었습니다. 합종을 이룬 소진은 여섯 나라의 재상을 모두 겸하며 부귀영화와 권세를 누리게 되었지요. 이후 15년간 진나라는 소진의 합종에 가로막혀 동쪽으로 진출하지 못했어요.
하지만 합종은 소진 혼자만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건 아니었어요. 소진의 라이벌이자 절친한 친구였던 장의가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기에 합종이 완성될 수 있었습니다.
◇소진이 라이벌 장의의 출세를 도운 이유
장의는 진나라가 여섯 나라와 제각각 동맹을 이루어 여섯 나라가 서로 힘을 합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연횡'을 주장했습니다. 약소국을 하나씩 구슬린 뒤 분열시켜 강대국에 맞서지 못하도록 하는 전략으로, 소진이 주장한 합종과는 반대되는 것이었어요. 즉 합종이 이루어지면 연횡이 될 수 없고, 연횡이 이루어지면 합종이 될 수 없었습니다.
장의가 세상에 나섰을 때 소진은 이미 세 나라의 합종을 이루어 재상이 되어 있었어요. 장의는 출세한 소진의 도움을 받기 위해 그를 찾아갔지만, 어찌 된 일인지 소진은 장의를 무시하고 박대하였어요. 마음이 상한 장의는 "반드시 연횡을 이루어 소진을 무너뜨리겠다"는 결심을 하였답니다.
하지만 장의의 수중에는 정작 진나라로 갈 여비조차 없었어요. 이때 한 상인이 나타나 장의의 사정을 물었고, "연횡을 이루도록 도와주겠다"며 자금을 빌려주었습니다. 덕분에 진나라로 간 장의는 온 힘을 다해 진나라 제후 혜문왕을 설득했고, 마침내 진나라의 재상이 될 수 있었어요.
재상이 된 장의가 상인에게 은혜를 갚으려 하자, 상인은 놀라운 말을 하였습니다.
"사실 저는 소진 나리의 보좌관입니다. 소진 나리께서 일부러 나리를 박대하는 척하며 뒤로는 저에게 나리의 출세를 물심양면으로 도우라고 하셨습니다."
소진은 일부러 장의를 박대해 승부욕을 불태우도록 한 뒤, 보좌관을 통해 장의를 도와 진나라의 재상이 되도록 한 거예요.
그 이유는 합종을 이루기 위해 장의의 도움이 꼭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소진이 여섯 나라를 설득하는 동안 진나라가 전쟁을 일으키면 합종이 무너질 수 있었어요. 이에 소진은 친구 장의가 진나라 재상이 되어 진나라가 전쟁을 일으키지 않도록 도와주길 바랐던 것입니다.
친구의 깊은 뜻에 감복한 장의는 한동안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고, 그 사이 소진은 다른 세 나라를 설득하여 합종을 이룰 수 있었어요.
◇연횡의 성립과 두 종횡가의 최후
진나라가 합종에 가로막힌 지 15년이 지나자 장의는 자신이 꿈꿔온 연횡책을 펼치기 시작했어요. 위나라를 찾아간 장의는 "형제간에도 재물을 두고 다투는 데 여러 나라 간의 약속을 믿을 수 있느냐"며 "만약 진나라가 위나라를 공격하면 아무도 도우러 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진나라의 강대한 국력을 바탕으로 위협과 설득을 병행한 것이죠.
이런 장의의 논리에 위나라는 물론 초·한나라도 합종을 포기하고 진나라와 친하게 지내는 연횡으로 돌아섰습니다. 제나라도 "진나라에 맞서 싸워 여러 번 이긴 조나라도 수많은 군사와 땅을 잃었을 뿐"이라는 장의의 말에 연횡을 택했고요. 조·연나라도 장의의 협박과 설득에 굴복하면서 마침내 연횡이 완성되었습니다.
연횡이 완성되고 합종이 무너지면서 권세를 잃은 소진은 제나라로 몸을 피했지만, 자신을 시기한 인물에게 암살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어요. 장의의 끝도 좋지 않았습니다. 혜문왕이 죽고 무왕이 즉위하자 장의는 재상 자리에서 쫓겨났고, 위나라로 넘어가 재상이 된 뒤 1년 만에 죽고 말았어요. 안타까운 결말이지만 라이벌이자 절친한 두 지략가가 중국 대륙을 쥐락펴락했던 이야기는 '합종연횡'이라는 말로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김승호 인천하늘고 역사 교사
04.06 진나라 통일 후… 선비들은 왜 대나무 숲에 들어갔을까
사마씨 가문이 권력 독점하자 귀족들 사이에 사치·향락 유행
지식인은 정치 현실에 등 돌려
유목 민족 침략받아 동진 세웠지만 귀족층은 정치 하찮게 여기고 외면
300여 년간 혼란 계속됐어요
수업 시간 학생들에게 삼국지를 아느냐고 물으면 삼국지를 읽지 않은 친구도 유비·조조·손권 같은 이름을 댑니다. "그럼 삼국을 통일한 나라가 어딘지 아느냐"고 물으면 한동안 교실이 잠잠하다가 자신 없는 답들이 나옵니다. "위나라…아닌가요?" 땡! 조조가 세운 위나라는 제갈량의 공격을 여러 차례 막아내고 촉나라를 멸망시킬 정도로 강성했지만, 삼국 통일을 완성한 나라는 사마의의 손자 사마염이 세운 진(晋)이었어요. 사마염은 위나라 황제 조환으로부터 황제 자리를 빼앗아 진나라를 세운 뒤 280년 오나라를 무너뜨리고 통일을 이루었습니다.
하지만 진의 천하는 오래가지 못했어요. 오히려 통일 전보다 더 큰 혼란이 중국을 덮쳤답니다. 오늘은 뉴스에도 자주 언급되는 '삼국지'의 결말 이후 중국에서 벌어진 일들을 함께 알아보도록 합시다.
◇건국부터 망조가 든 진나라
진나라가 일찌감치 무너진 건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었습니다. 위나라 말기부터 조정의 권력은 사마의부터 사마염에 이르는 사마씨 가문이 독점하고 있었어요. 이들이 국정을 좌지우지하면서 귀족 계층과 지식인들은 점차 정치를 외면하게 되었습니다. 대신 사치·향락에 빠지거나 현실을 등지는 염세주의에 빠져들었지요. 이 중 가장 유명했던 일곱 사람을 '죽림칠현(竹林七賢)'이라고 불렀는데, 이들은 자연을 벗 삼는 노장사상을 따르며 권력자를 조롱하고 기이한 행동을 하고 다녔습니다.
▲ 3세기 무렵 중국에서 활동했던 죽림칠현(竹林七賢)의 모습을 상상해 그린 그림입니다. 위나라 말기부터 중국에 부정부패가 퍼지자 지식인들은 정치 현실에 등을 돌리고 숲에 모여 거문고를 연주하고 술을 마시며 세월을 보냈어요. 이 중 가장 유명했던 일곱 명의 선비를 후대 사람들이 ‘죽림칠현’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어요. /위키피디아
사마씨 가문은 죽림칠현을 억지로 흩트려 놓았지만, 이들로 대표되는 정치 혐오와 염세주의는 진나라가 통일을 이룬 뒤에도 계속되었어요. 사마염(무제)도 통일을 이룬 뒤에는 사치와 향락에 빠져 살았고, 그의 아들 혜제가 즉위한 뒤에는 왕비 가황후와 그의 집안이 10여 년간 국정을 농단하는 정치적 혼란이 계속되었기 때문입니다.
보다 못한 사마씨 일족이 군사를 일으켜 가씨 일족을 몰아냈지만, 이후에는 사마씨 일족 실력자 8명이 권세를 다투는 '팔왕의 난(300~306년)'이 일어나면서 더 큰 혼란이 벌어졌어요. 진나라의 상황은 유비가 관우·장비와 도원결의를 맺었던 한나라 말기만큼 혼탁하고 피폐해졌습니다. 농민들이 죄다 사마씨 일족의 군대로 끌려가면서 중국 곳곳에는 기근이 퍼졌어요.
사마씨 일족이 중국 외곽에 살던 유목 민족들을 군대로 끌어들이면서 상황은 더 심각해졌어요. 진나라의 실상을 알게 된 흉노족과 선비족 등 다섯 유목 민족이 화북 지역을 대거 침략하는 '영가의 난(307~312년)'이 일어난 것입니다. 허술한 진나라는 유목 민족의 침략을 이겨내지 못하고 316년에 멸망하였어요. 사마염이 천하 통일을 이룬 지 불과 36년 만이었습니다.
그나마 황족 사마예가 이듬해 강남지역에 동진(東晉)을 세워 진의 명맥을 이은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지요. 진나라 대신 중국 북부 지역을 차지한 다섯 유목 민족은 제각각 나라를 세워 각축을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300여 년간 45개 왕조 235명의 군주가 난립했던 5호16국, 남북조 시대가 시작되었어요.
◇귀족 사이에서 퍼진 정치 혐오
동진에서도 귀족층의 사치·향락과 지식인의 염세주의는 계속되었습니다. 특히 동진의 폐쇄적인 관리 등용 제도가 이를 부추겼지요. 동진은 관직을 9개 등급으로 나누어 능력에 따라 인재에게 관직을 내리는 구품관인법을 두었는데, 실제로는 능력이 아닌 가문에 따라 관직이 주어지는 제도로 변질하였어요. 이에 아무리 학식과 능력이 뛰어나도 가문이 변변치 않으면 관리가 될 수 없거나 하급 관리밖에 될 수 없었습니다. 엉터리 구품관인법은 419년 동진이 멸망하기 전까지 유지되었어요.
나아가 귀족들은 "강남지역은 우리가 잠시 머무르는 곳이며, 언젠가 고향인 화북 지역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으로 정치를 하찮게 여기기 시작했습니다. 정작 중요한 행정 실무와 군대 지휘는 가난하고 힘없는 집안 출신 중 귀족에게 아첨하는 자들이 맡게 되었고요. 귀족은 황제의 명령도 "무능한 황제보다 내가 더 낫다"며 무시하기 일쑤였습니다.
이렇게 정치와 국방이 귀찮은 일로 여겨진 탓에 중국 남쪽에 세워진 왕조들은 모두 수명이 짧았어요. 수많은 나라가 세워졌다 망하길 반복하는 동안에도 귀족들의 태도는 전혀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무고한 백성만 원성과 한탄 속에서 살아야 했지요.
◇수나라 문제가 천하를 통일했지만…
긴 혼란을 잠재우고 중국을 통일한 주인공은 북주의 황제 자리를 빼앗아 수나라를 세운 양견(문제)이었어요. 앞서 선비족이 세운 북위(北魏)는 유목민의 풍습을 한족의 풍습으로 바꾸는 한화(漢化)정책으로 황제의 권력을 강화해 중국 북부를 통일하였어요. 하지만 한화정책은 유목민의 반발을 일으켰고, 북위는 다시 동위(북제·北齊)와 서위(북주·北周)로 찢어졌습니다.
북주는 북위와 정반대로 한족의 풍습을 유목민의 풍습으로 바꾸는 호화(胡化)정책을 추진해 강력한 군대를 꾸렸고, 이를 바탕으로 북제와 여러 나라를 무너뜨려 천하 통일을 눈앞에 두게 되었어요. 그런데 북주의 뛰어난 군주인 무제가 이른 나이에 죽고 정치가 혼란스러워지자 북주의 실력자였던 양견이 실권을 장악하고 황제 자리를 빼앗아 수(隋)나라를 세웠어요. 양견의 수나라는 후량과 진(陳)나라를 무너뜨리고 589년 대륙을 통일했습니다.
우리에게 '고구려를 침략한 수나라 황제'로 잘 알려진 양견은 사실 국내 정치에선 탁월한 능력을 보였어요. 남쪽 귀족의 사치와 무능, 부정부패를 잘 알고 있었던 양견은 과거제도 실시, 세금제도 개혁, 사치 금지 등을 통해 귀족 세력을 철저히 견제하였습니다. 하지만 본인과 아들 양제가 고구려를 침공하며 국력을 소진한 탓에 민심을 잃었고, 수나라는 건국 50여 년 만에 당나라에 멸망하는 운명을 맞았어요.
윤형덕 한일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배준용 기자
04.13 주도권 다툰 두 강대국, 전쟁으로 같이 무너졌어요
패권국 스파르타와 신흥국 아테네… 주도권 두고 펠로폰네소스전쟁
시칠리아 원정 실패한 아테네, 페르시아 손잡은 스파르타에 항복
스파르타가 다른 도시국가 괴롭혀 고대 그리스 세계 몰락했어요
'투키디데스 함정'이란 "새로운 강대국이 부상하면서 기존의 강대국이 새로운 강대국을 두려워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전쟁이 발생한다"는 고대 그리스 역사가 투키디데스의 주장을 압축한 말입니다. 투키디데스는 고대 그리스에서 벌어졌던 펠로폰네소스전쟁을 보며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대요. 펠로폰네소스전쟁 무렵 그리스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던 걸까요?
◇아테네의 부상을 두려워한 스파르타
기원전 5세기 무렵 고대 그리스는 여러 도시국가(폴리스)로 이루어져 있었어요. 이 중 스파르타와 아테네가 특히 강력했습니다. 아테네는 기원전 5세기 초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급격히 힘을 키운 신흥 강국이었어요. 아테네는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도시국가들을 모아 델로스동맹을 만들고 맹주가 되었습니다. 그러곤 에게해에 있는 델로스 섬에 동맹국의 공동 자금을 모아 관리하였는데, 아테네 지도자 페리클레스(Perikles)는 이 자금으로 아테네 공직자의 임금을 올리고 대함대를 만들어 아테네를 해상 제국으로 발전시켰어요.
이렇게 아테네가 급격히 성장하자 스파르타는 자신들의 입지가 흔들리는 공포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에 '기회가 되면 아테네를 공격해 기세를 꺾어놓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요. 전쟁에 대비해 스파르타는 아테네가 동맹 자금을 마음대로 사용하는 것에 불만을 품은 도시국가들을 끌어들여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펠로폰네소스동맹을 더 강화하였어요.
그러던 차에 도시국가 '케르키라'와 '코린토스' 간에 분쟁이 일어났고, 두 나라의 요청으로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분쟁에 개입하면서 펠로폰네소스전쟁이 일어났어요. 그리스의 주도권을 두고 두 강대국은 20년 넘게 전쟁을 이어갔습니다.
◇전염병과 시칠리아 원정 실패
당시 아테네는 막강한 해군력을 가지고 있었던 반면 스파르타는 그리스 내에서 가장 강력한 육군을 가지고 있었어요. 이에 페리클레스는 육상에서의 정면 대결을 피하고 해전으로 스파르타를 꺾는 전략을 세웠습니다. 이에 아테네의 모든 주민을 성채 안쪽으로 피난시켜 성 안에서 스파르타의 육군을 막고, 바다에는 아테네 대함대를 출격시켰지요.
이 전략은 잘 먹히는 듯했지만 아테네 성채 안에 전염병이 퍼지면서 전세가 역전되었어요. 전염병으로 아테네 인구 약 3분의 1이 죽었고, 전쟁을 지휘하던 페리클레스도 전염병에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었죠.
전쟁의 주도권을 쥔 스파르타는 맹공을 퍼부었지만 아테네도 끈질기게 저항하였어요. 지지부진한 전쟁에 지친 두 나라는 일시적으로 휴전을 맺었고, 이 시기에 아테네는 다시 국력을 회복하며 스파르타를 공격할 새로운 방법을 궁리하였어요.
그렇게 새로 나온 전략이 이탈리아반도 아래에 있는 시칠리아 섬을 공격하는 것이었어요. 당시 스파르타는 시칠리아 섬에서 식량을 보급하고 있었는데, 이곳을 아테네가 점령하면 스파르타는 식량이 부족해져 큰 타격을 입을 수 있었습니다.
이에 명문가 출신의 알키비아데스가 지휘하는 아테네 원정군이 시칠리아 섬 공격에 나섰어요. 알키비아데스는 페리클레스의 조카이자 소크라테스의 제자 출신으로 화려한 말솜씨와 빼어난 용모를 갖고 있어 인기가 아주 높았어요. 하지만 그만큼 그를 시기하는 사람도 많았지요.
이런 알키비아데스가 지휘관이 되어 아테네를 떠나자 그를 시기하던 사람들이 "알키비아데스가 사실은 큰 죄를 지었다"고 고발하였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알키비아데스는 처벌을 두려워한 나머지 적국 스파르타로 망명하고 말았어요. 그는 스파르타에 아테네가 세운 작전을 모두 알려주었고, 그 결과 아테네의 시칠리아 원정은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모두가 패배한 전쟁
다시 승기를 잡은 스파르타는 아테네를 공격하였지만, 아테네는 쉽사리 항복하지 않았어요. 스파르타는 결국 페르시아 함대를 끌어들여 아테네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나서야 아테네의 항복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한때 나라의 운명을 걸고 전쟁을 벌였던 페르시아 군대를 내전에 끌어들여 승리한 것이죠.
▲ 펠로폰네소스전쟁 도중 스파르타 해군과 아테네 해군이 전투를 벌이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에요. /Getty Images 이매진스
펠로폰네소스전쟁에서 패한 아테네는 이후 몰락의 길을 걸었어요. 델로스동맹은 해체되었고 그리스 내 주도권은 기존의 패권국이었던 스파르타가 홀로 쥐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스파르타는 전쟁 전보다 더 가혹하게 다른 도시국가를 다루었고, 스파르타의 횡포는 또 다른 분쟁을 일으켰어요. 이는 고대 그리스 세계 전체가 모두 몰락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펠로폰네소스전쟁은 승패와 무관하게 그리스 전체가 패배한 전쟁이 된 것이죠.
아테네 장군으로 펠로폰네소스전쟁에 참가했던 투키디데스는 자신의 책 '펠로폰네소스전쟁사'에서 "스파르타와 아테네 간 전쟁은 피할 수 없었다"고 주장했어요. 아테네가 급부상하면서 그리스 내 힘의 균형이 무너졌고, 이에 두려움을 느낀 스파르타가 전쟁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투키디데스 함정이에요.
투키디데스 함정을 언급한 앨리슨 교수는 "제1·2차 세계대전 등 역사 속 큰 전쟁은 투키디데스 함정을 피하지 못한 결과"라고 말합니다. 여러 이슈를 두고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전통의 강대국 미국과 신흥국 중국이 신중하게 갈등을 풀어가도록 우리 정부도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해야겠어요.
김승호 인천하늘고 역사 교과 교사 기획·구성=배준용 기자
04.20 '스페인의 땅끝마을', 300년 전 영국 땅 된 사연은?
영국이 통치하는 지브롤터, 최근 스페인 정부가 영유권 주장
18세기 초 에스파냐 왕위 놓고 프랑스와 영국·오스트리아 전쟁…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영국이 차지
현재도 군사·경제적 요충지예요
최근 스페인 정부는 영국이 점유하고 있는 지브롤터(Gibraltar)의 영유권을 주장하고 나섰습니다. 지브롤터는 스페인 남쪽 끝에 지중해를 향해 뻗어 있는 곳이에요. 해안에는 길이 약 4㎞, 높이 약 400m의 깎아지르는 듯한 바위산 '지브롤터 바위'가 있는데, 산 위에는 군용 비행장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산 서쪽에는 군함과 무역선이 오가는 항구가 있고요. 지브롤터를 내놓으라는 스페인의 주장에 대해 영국 정부는 "지브롤터 주민 다수가 영국령으로 남기를 바라고 있다"며 영유권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보였어요.
▲ 이베리아반도 끝에 위치한 지브롤터의 모습이에요. 지브롤터는 지중해와 대서양을 잇는 군사·경제적 요충지입니다. /위키피디아
유럽 대륙 서쪽 끝과 아프리카 대륙 북서쪽 끝이 마주 보는 지브롤터는 아주 오래전부터 군사·경제적 요충지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인지 많은 나라가 이곳을 차지하기 위해 전쟁을 벌였지요. 그럼 지브롤터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고, 영국은 어떻게 지브롤터를 차지했는지 함께 알아볼까요?
◇'헤라클레스의 기둥'에서 '자발 타리크'로
고대 그리스·로마 사람들은 지브롤터를 '헤라클레스의 기둥'이라고 불렀어요. 그리스 신화를 보면 엄청난 힘을 가진 영웅 헤라클레스가 아틀라스 산을 무너뜨려 바다를 메우고 소 떼를 이끌고 바다를 건너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스·로마인들은 지브롤터 바위산을 보고 아틀라스 산이 무너진 일부라고 생각해 '헤라클레스의 기둥'이라고 부른 것이죠.
'헤라클레스의 기둥'으로 불리던 바위산이 '지브롤터'로 불리게 된 건 8세기 초 이슬람 세력이 이베리아반도로 진출한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7세기 초 아라비아반도에서 등장한 이슬람교는 빠르게 세력을 넓혀 아라비아반도 전체를 장악했고, 사산왕조 페르시아를 멸망시켜 제국으로 발전하였어요. 이들은 유럽 쪽으로도 세력을 넓히려 했지만 오늘날 터키와 그리스 일대를 차지한 비잔티움 제국이 이슬람 진출을 가로막았습니다.
그러자 이슬람 군대는 말머리를 돌려 북아프리카로 세력을 넓혔고, 마침내 아프리카 대륙 북서쪽 끝에 닿았어요. 그리고 해협 너머로 보이는 이베리아반도로 진출하기 시작했습니다. 타리크 이븐 지야드(Tāriq ibn Ziyād·?~720)가 이끄는 이슬람 군대는 해협을 건너 바위산을 점령한 뒤 사령관의 이름을 따 '자발 타리크(Jabal Tāriq·'타리크의 언덕'이라는 뜻)'라는 이름을 바위산에 붙여주었어요. 이 '자발 타리크'가 후대에 전해지는 과정에서 '지브롤터'로 변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자발 타리크를 넘은 이슬람 군대는 이베리아반도를 지배하던 서고트 왕국을 무너뜨렸고, 이후 15세기까지 이베리아반도에는 이슬람 세력권이 유지되었어요. 하지만 13세기부터 이베리아반도 내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려는 재정복운동(Reconquista)이 활발해지면서 이슬람 세력은 점차 작아졌고, 1492년 에스파냐 왕국 군대가 이슬람 세력의 최후 거점인 그라나다를 점령하면서 지브롤터는 에스파냐 왕국이 통치하게 되었습니다.
◇에스파냐 왕위 계승 전쟁과 지브롤터
에스파냐 왕국이 다스리던 지브롤터를 영국이 차지하게 된 건 지금부터 약 300년 전인 18세기 초의 일입니다. 17세기 말 에스파냐 왕국은 합스부르크 왕가 출신인 카를로스 2세가 다스리고 있었어요. 당시 합스부르크 왕가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와 독일 국왕, 오스트리아 대공, 에스파냐 국왕 자리를 모두 차지해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습니다.
▲ 에스파냐 왕위 전쟁 당시 영국·네덜란드 해군과 프랑스 해군의 해전을 그린 그림.
그런데 카를로스 2세가 후사를 남기지 않고 죽자 스페인 왕위를 누가 이을 것인지를 두고 여러 나라 사이에 다툼이 벌어졌어요. '태양왕' 루이 14세가 다스리던 프랑스는 "카를로스 2세의 조카 손자이자 루이 14세의 손자인 앙주 공작 필리프가 에스파냐 왕위를 이어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카를로스 2세가 앙주 공작 필리프에게 왕위를 물려주겠다는 유언을 남겼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영국·오스트리아·네덜란드 등은 "카를로스 2세의 조카이자 신성로마제국 황제 레오폴트 1세의 아들 카를 대공이 에스파냐 왕위를 이어야 한다"며 프랑스에 맞섰어요. 만약 앙주 공작 필리프가 에스파냐 국왕이 되어 프랑스와 스페인이 합병하면, 프랑스가 너무 강력해지는 결과가 나왔기 때문입니다.
양쪽의 입장 차이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고 결국 프랑스와 영국·오스트리아·네덜란드를 중심으로 한 동맹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어요. 이것이 '에스파냐 왕위 계승 전쟁(1701~1713)'입니다. 10년이 넘는 전쟁에 지친 양측은 앙주 공작 필리프가 '펠리페 5세'가 되어 스페인 왕위를 잇는 대신 프랑스가 스페인을 합병하지 않기로 약속하는 위트레흐트 조약을 맺어 전쟁을 끝냈어요.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에스파냐·합스부르크 왕가가 유럽 각지에 가지고 있던 영토는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등이 나누어 갖게 되었습니다. 영국도 위트레흐트 조약을 통해 막대한 이득을 차지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에스파냐 왕국으로부터 지브롤터를 할양받은 것입니다. 이때부터 지브롤터는 영국이 쭉 지배하게 된 것이죠.
영국이 지브롤터를 할양받은 건 지브롤터의 전략적 가치가 아주 높다는 걸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지중해 인근 국가들은 지브롤터를 지나야만 대서양으로 나갈 수 있었어요. 지브롤터해협이 봉쇄되면 이들에게 지중해는 호수나 다름이 없었지요.
이 점을 간파한 영국은 지브롤터를 차지함으로써 지중해 제해권을 장악할 수 있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도 지브롤터는 군사 요충지로서 미군의 작전기지로 사용되었고, 지중해 제해권을 노린 독일 공군이 지브롤터를 폭격하기도 했지요.
20세기 이후 세계 각지에 있던 식민지를 포기한 영국이 오늘날까지 지브롤터를 포기하지 않는 건 역사로 증명된 지브롤터의 전략적 가치가 오늘날에도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에요.
윤형덕 한일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배준용 기자
04.27 폴란드 왕국 기병대, 날개 펄럭이며 맹활약했죠
16~17세기에 활약한 폴란드 기병… 날개 달린 갑옷으로 공포심 일으켜
자신보다 수십 배 많은 적군 꺾고 폴란드 연합 왕국의 전성기 열어
제2차 빈 포위전에서도 맹활약해 오스만의 유럽 침공 막아냈어요
중소 국가의 공군력에 맞먹는 전투력을 갖춘 미국 핵 추진 항공모함 칼빈슨(Carl Vinson)호가 며칠 내로 동해에 다다를 예정입니다. 아파트 25층 높이에 갑판 넓이가 축구장 3배인 칼빈슨 호에는 신형 함재기(항공모함에 이·착륙하는 전투기) 80여 대가 실려 있어요. 군사 전문가들은 "미국이 칼빈슨호를 한반도에 보낸 건 북한에 군사 도발을 하지 말라고 강력히 경고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오늘날 미국은 항공모함과 핵 잠수함 등 최첨단 무기로 막강한 군사력을 갖추어 세계 최강대국 지위를 누리고 있어요. '강력한 무기와 군사력을 갖추어야 강대국 지위를 유지할 수 있다'는 역사의 교훈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죠.
▲ 16~17세기 폴란드 왕국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폴란드 기병‘윙드 후사르’를 묘사한 그림이에요. /위키피디아
실제로 역사 속 강대국들은 늘 그에 걸맞은 신식 무기나 강한 군대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역사의 변방에 머물던 폴란드 왕국이 16~17세기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며 전성기를 누릴 수 있었던 것도 강력한 군사력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었죠.
◇폴란드 왕국의 전성기를 연 '윙드 후사르'
독일과 러시아 사이 위치한 폴란드는 약 10세기 무렵 그 역사가 시작되었어요. 하지만 스웨덴, 러시아, 오스만 튀르크 등 여러 강대국이 주변에 있어 좀처럼 세력을 펴지 못했지요. 그런데 16세기부터 세력을 키우기 시작해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연합왕국(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왕국)을 구축했고, 17세기에 들어서는 오늘날 발트 3국(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과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일대를 차지한 유럽 최강대국 중 하나로 거듭났지요.
그 배경에는 '윙드 후사르(winged hussars·날개 달린 후사르)'라는 강력한 기병대가 있었습니다. '후사르(hussar)'는 당시 동유럽에서 활약한 기병을 가리키는 말로, 헝가리 등 주변 국가에서는 대부분 가벼운 무장을 하고 소규모로 활동하며 적군을 교란하거나 보병을 보조하는 역할을 맡았어요.
하지만 16세기 등장한 폴란드의 윙드 후사르는 이들과 많이 달랐어요. 튼튼한 쇠갑옷으로 중무장해 적군의 총알에도 거침없이 돌격할 수 있었지요. 이들의 갑옷 등 부위나 말 안장에 달린 화려한 깃털 장식은 윙드 후사르의 상징이었습니다. 이 깃털은 체구를 더 크게 보이도록 해 적군의 기세를 꺾고 공포심을 주는 역할을 한 것으로 보여요. 윙드 후사르의 명성이 유럽 전역에 알려지면서 이 깃털 장식은 더 유명해졌습니다.
▲ 제2차 빈 포위전 당시 윙드 후사르와 오스만 군대의 전투 장면을 묘사한 그림.
화려한 외형과 강력한 전투력을 동시에 갖춘 윙드 후사르는 자신보다 수배 많은 적군도 무참히 짓밟았어요. 단 2500명의 윙드 후사르가 단 한 번의 돌격으로 1만2000명의 스웨덴군을 무너뜨리거나 300명의 윙드 후사르가 1만5000명의 오스만 튀르크 군대로 돌격해 1000여 명을 죽이는 일도 있었지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왕국은 윙드 후사르의 힘을 바탕으로 영토를 넓히고 전성기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오스만의 서유럽 침공을 저지하다
윙드 후사르의 위력이 가장 잘 드러난 전투는 17세기 말에 벌어진 제2차 빈 포위전이었습니다. 16세기부터 국력이 쇠퇴하던 오스만 튀르크는 1683년 신성 로마 제국의 국력이 약해진 틈을 타 10만명이 넘는 군대를 보내 신성 로마 제국의 요충지였던 빈을 포위하였어요. 빈을 점령하고 서유럽으로 영토를 넓혀 과거의 영광을 되찾으려는 게 오스만 튀르크의 속셈이었습니다.
2만여 명의 신성 로마 제국 군대와 빈 백성은 성 안에서 오스만 군대의 공격을 잘 버텨냈지만, 두 달 가까이 포위가 계속되고 물자가 떨어지자 점점 힘이 떨어졌어요. 이를 간파한 오스만 군대의 총공세가 펼쳐졌고 결국 빈 성벽의 한쪽이 무너져내렸습니다.
빈이 함락되기 직전이던 그때, 1만8000여 명의 윙드 후사르가 모습을 드러냈어요. 신성 로마 제국의 구원 요청을 받은 폴란드 국왕 얀 3세 소비에스키가 윙드 후사르와 구원군을 이끌고 빈에 도착한 것입니다.
국왕의 돌격 명령을 받은 윙드 후사르는 화려한 날개를 휘날리며 오스만 튀르크 군대로 달려들었습니다. 오스만 군대의 기병이 맞서려 했지만 윙드 후사르의 상대가 되지 못했어요. 윙드 후사르의 용맹한 돌격에 오스만 군대의 진영은 완전히 무너졌고, 심지어 군대 본진까지 점령될 처지에 놓였지요. 뒤이어 6만여 명의 폴란드 군대가 모습을 드러내자 오스만 병사들은 허겁지겁 달아났습니다. 영화 '반지의 제왕 2' 후반부에 등장하는 기마 전투 장면도 바로 제2차 빈 포위전에서 윙드 후사르가 펼친 극적인 활약을 본떠 만든 것이죠.
제2차 빈 포위전 패배로 국력을 손실한 오스만 튀르크는 더 이상 유럽을 위협할 수 없을 정도로 급격히 쇠퇴했습니다. 몇몇 역사가는 "제2차 빈 포위전은 서유럽과 오스만 튀르크 사이의 힘의 관계가 역전된 계기"라고 말하지요. 윙드 후사르를 지휘해 제2차 빈 포위전을 승리로 이끈 얀 3세 소비에스키는 "기독교 세계를 구한 인물"로 불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18세기 들어서자 폴란드 왕국은 급격히 쇠퇴하였어요. 잦은 전쟁으로 국력이 피폐해지고 지도층 내분과 외교적 실수가 겹친 탓입니다. 급기야 1772년에는 프러시아와 오스트리아, 러시아에 의해 나라가 분할되는 비참한 운명을 맞았지요(1차 삼국분할). 후사르도 총의 성능이 점점 좋아지면서 그 역할이 점점 줄어들었고, 제1차 세계대전 때 참호와 철조망, 기관총으로 이루어진 전선(戰線)이 등장하면서 후사르와 기병은 전쟁터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되었습니다.
김승호 인천하늘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배준용 기자
05.04 '중국 4대 미녀' 왕소군이 흉노에 시집간 사연은…
고대 중국 통일했던 한나라
북방 유목민족 흉노 침입 막으려 음식·옷감 바치고 왕실 여인 보내
군사적·경제적 이득 보기 위해 약소국이 먼저 조공 제의하기도
서열 정해 이득 나눈 관계였죠
최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만난 뒤 "한국은 역사적으로 중국의 일부였다(Korea actually used to be a part of China)"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 말을 어디서 들었느냐"는 물음에 트럼프 대통령은 "시진핑 주석에게 들었다"고 답했지요. 백악관에서 "우리는 한국이 수천년간 독립적인 국가였던 것을 잘 알고 있다"고 해명했지만, 많은 분이 황당함을 넘어 분노를 느끼기도 했어요.
이번 해프닝을 두고 일각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이 조공(朝貢)-책봉(冊封) 관계를 잘 알지 못해 그런 발언을 한 게 아니냐"는 얘기가 나왔어요. 과거 동아시아만의 독특한 외교 방식인 조공-책봉 관계를 단순히 '지배하는 나라와 지배받는 나라의 관계'로 생각해 그런 말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죠. 그럼 조공-책봉 관계가 무엇인지 좀 더 자세히 알아볼까요?
◇스스로를 '아황제'라 부르다
조공-책봉 관계는 지금부터 약 3000년 전에 등장했어요. 기원전 11세기 무렵 중국에서는 상(商)나라가 무너지고 주(周)나라가 들어섰습니다. 이때 주나라 임금(천자·天子)은 상나라를 무너뜨리는 데 공을 세운 신하와 친족들에게 영토를 조금씩 나누어주고, 그 영토를 다스릴 권리와 작위도 주었어요. 이렇게 영토와 작위를 받은 사람들을 '제후(諸侯)'라고 불렀는데, 이들은 정기적으로 천자를 찾아가 옷감이나 귀한 음식 등을 조공으로 바쳐야 했습니다.
▲ 고대 중국 한나라의 미인‘왕소군’이 유목 민족 흉노의 왕과 혼인을 맺으러 가는 모습을 상상해 그린 그림이에요. 한나라는 흉노의 침입을 막기 위해 한동안 옷감과 음식을 바치고 왕실의 여인을 흉노족의 왕과 혼인하도록 했습니다. /중국 국립 도서관
이런 조공-책봉 관계는 중국에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가 등장하면서 주변 국가와의 외교에도 적용되기 시작했어요. 조선도 명나라나 청나라를 주인 나라로 섬기며 조공을 바쳤고, 새로운 임금이 즉위하면 명·청 황제로부터 인정(책봉)을 받아야 비로소 정식 국왕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습니다. 조선뿐 아니라 중국 주변에 있었던 여러 나라가 중국으로부터 책봉을 받고 조공을 바치는 주인-신하 관계를 맺었지요.
이렇게 보면 조공-책봉 관계가 마치 '중국이 주변 국가들을 지배하던 방법'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어요. 거꾸로 중국 황제가 다른 나라 황제를 섬기고 책봉을 받은 일도 있었답니다. 10세기 무렵 '후당'이라는 나라에 석경당(石敬瑭)이라는 신하가 있었어요. 야심이 컸던 석경당은 후당의 황제를 몰아내고 자신이 황제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유목민족의 나라 거란(契丹)에 도움을 청했어요.
석경당은 거란의 황제 아율덕광(태종)에게 "거란이 군사를 보내 후당을 무너뜨리면 영토 일부를 바치고 거란의 신하가 되겠다"는 뜻을 전했습니다. 거란과 조공-책봉 관계를 맺겠다고 제의한 것이죠.
아율덕광은 이를 수락하고 군대를 보내어 후당을 멸망시켰습니다. 거란군과 함께 후당을 무너뜨린 석경당은 후진(後晉)을 세우고 황제가 되었어요. 그리고 약속대로 거란을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아율덕광은 책봉식을 열고 석경당을 후진의 황제로 인정하였어요. 석경당은 아율덕광과 부자관계를 맺고 아율덕광을 '부황제(父皇帝·아버지 황제)', 자신을 '아황제(兒皇帝·아들 황제)'라고 불렀답니다. 또 후진의 땅 일부를 거란에 넘기고 비단 30만필을 조공으로 바치기도 하였어요. 이렇게 동아시아에 있던 여러 나라는 국력 차이, 전쟁의 결과 등에 따라 책봉을 하기도 하고 조공을 바치기도 했습니다.
◇한나라 미인 왕소군이 흉노에 시집간 사연
기원전 3세기 무렵에는 중국을 통일한 한(漢)나라가 유목민족 흉노(匈奴)에게 사실상 조공을 바치는 일도 있었어요. 한나라 초대 황제 유방(한 고조)이 진(秦)나라를 무너뜨리고 중국을 통일했을 무렵, 북방 유목민족 흉노(匈奴)는 묵특선우(선우는 흉노의 왕을 가리키는 호칭)의 지휘 아래 거대한 유목 제국을 이루고 있었어요. 흉노가 한나라에 큰 위협이 될 것이라 생각한 유방은 30만명이 넘는 대군을 이끌고 흉노 정벌에 나섰습니다.
하지만 전쟁의 결과는 예상과 달랐어요. 묵특선우의 전략에 휘말린 유방은 평성이라는 조그마한 곳에 완전히 포위되고 말았습니다. 식량이 떨어져 목숨마저 위태로운 지경이 되자 유방은 묵특선우의 아내에게 선물을 보내어 포위를 풀어달라고 사정하였지요. 아내의 설득에 묵특선우는 포위망 한쪽을 슬쩍 열어주어 유방이 달아날 수 있게 봐주었습니다. 이 일은 중국 역사서에 '평성의 치(치욕)'라고 기록될 정도로 한나라에 굴욕적이었지요.
이후 한나라는 막강한 흉노의 침입을 막기 위해 한동안 옷감과 음식을 바치고 왕실의 여인을 보내어 흉노의 선우와 혼인하도록 했습니다. 한나라는 이를 조공이라 부르진 않았지만, 사실상 조공을 바치는 신세가 되었던 것이죠. '중국 4대 미녀'로 꼽히는 한나라 미인 왕소군이 흉노의 호한야선우와 혼인한 것도 흉노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였어요.
◇조공-책봉 관계는 독립된 두 나라의 관계
조공-책봉 관계를 보면 책봉을 하는 나라가 조공을 받아 경제적 이득을 취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조공을 바치는 나라가 더 큰 이득을 보기도 했어요. 바로 '회사(回謝)'때문이었습니다.
회사란 조공을 받은 나라가 답례로 하사품을 내리는 것을 말합니다. 조공-책봉 관계에서는 조공을 받은 나라가 조공품 이상의 하사품을 내리는 게 관례였어요. 그래서 조선시대에는 명나라가 "조공을 받는 게 오히려 손해"라며 조선에서 조공 사신을 보내지 못하게 한 일도 있었습니다.
책봉을 내리는 나라는 주인 대접을 받았지만 조공을 바치는 나라의 내정에 간섭하지는 못했어요. 조선 말 서구 열강들이 청나라에 "조선이 쇄국정책을 포기하고 우리와 외교관계를 맺게 해달라"고 요구했지만, 청나라는 "사대관계라도 내정에 간섭하지 못하니 알아서 하라"고 답변하기도 했답니다.
이렇게 조공-책봉 관계는 독립된 두 나라가 힘의 차이에 따라 서열을 정하고 서로 이득을 나누는 외교 관계였어요. 힘 있는 나라는 책봉을 통해 주변 정세를 안정시킬 수 있었고, 약소국은 조공을 바치는 대신 내정 간섭을 받지 않고 필요에 따라 군사적·경제적 이득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윤형덕 한일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배준용 기자
05.11 모두가 마다한 황제, 제후들이 선거로 뽑았어요
신성로마제국 프리드리히 2세, 교황에게 파문당하고 병으로 사망… 이후 20년 가까이 황제 자리 비어
"새 황제 빨리 뽑아라" 교황 통보에 선거권 가진 제후들이 회의 열어 합스부르크 가문 루돌프 1세 선출
오늘 제19대 대통령이 선출되면서 약 두 달간 비어 있던 대통령 자리가 다시 메워지게 되었습니다. 5월에 열려 '장미 대선'이라 불렸던 이번 선거에는 10명이 넘는 후보가 출마해 "내가 가장 훌륭한 대통령이 될 수 있다"며 열띤 선거전을 펼쳤어요. 그리고 이 나라의 주인인 국민이 투표를 통해 새로운 대통령을 뽑았습니다.
그런데 13세기 유럽 신성로마제국에서는 이와 정반대로 제후들이 서로 왕관을 마다하는 바람에 황제 자리가 20년 가까이 비어 있던 때가 있었어요. 이 시기를 대공위시대(Great Interregnum·1254~1273년)라고 합니다. 선거마다 후보들은 서로 당선이 되려고 하는데, 대공위시대에는 왜 아무도 황제가 되지 않으려 했던 걸까요?
◇신성로마제국의 기원
고대 서로마제국이 게르만족의 이동으로 무너진 뒤 서유럽은 오랫동안 분열의 시대를 보냈습니다. 7~8세기에는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한 이슬람 세력이 피레네 산맥을 넘어 서유럽 세계를 공격했고요. 이런 위기 상황에서 프랑크 왕국의 유능한 신하였던 카롤루스 마르텔이 이슬람의 침공을 막아냈어요. 서유럽 세계의 영웅이 된 카롤루스 마르텔은 프랑크 왕국의 실권을 차지하게 되었지요. 나아가 카롤루스 마르텔의 권력을 이어받은 아들 피핀은 강제로 왕을 끌어내리고 자신이 프랑크 왕국의 왕이 되었답니다.
▲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선출할 권한을 가졌던 7명의 선제후(選帝侯)들이 회의하는 모습을 묘사한 그림이에요. /위키피디아
피핀에 이어 왕이 된 카롤루스 대제(742~814년)의 활약으로 프랑크 왕국은 서유럽 대부분 지역을 장악하였어요. 그러자 교황은 카롤루스 대제를 '서로마제국의 후계자'이자 '로마제국의 황제'로 지목하였습니다. 하지만 카롤루스 대제가 죽고 난 뒤 프랑크 왕국은 카롤루스 대제의 손자들에 의해 동프랑크, 중프랑크, 서프랑크 왕국으로 분열되었고, 노르만족의 침입을 받으면서 '로마의 황제'를 계승할 사람도 사라졌어요.
10세기 무렵, 서유럽을 둘러싼 여러 민족이 재차 서유럽을 공격했어요. 이때 동프랑크 왕국(독일 왕국)을 지배하던 오토 1세(912~973년)가 마자르족의 침입을 막아냈고, 교황은 오토 1세를 '로마제국의 황제'로 인정하였어요. 962년 오토 1세가 황제로 즉위하자 사람들은 "마침내 고대 로마제국이 부활하였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신성로마제국의 시작이었어요. 이후 독일 왕국의 국왕은 자연히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겸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선거를 통해 정해졌어요. 물론 이 선거는 오늘날과 다르게 아주 형식적이었습니다. 죽음을 앞둔 황제가 자신의 아들이나 혈족 중에 후계자를 지목하면, 제후들이 선거를 통해 후계자를 새로운 황제로 인정하는 절차였지요. 이는 성인 남성이 모여 다수결을 통해 부족의 지도자를 뽑았던 고대 게르만족의 전통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황제의 권력이 무너진 대공위시대
신성로마제국 초기에는 황제와 교황이 친하게 지냈어요. 황제는 자신의 권위를 뒷받침해주는 교황이 필요했고, 교황은 자신의 권위를 권력과 군사력으로 지켜줄 황제가 필요했기 때문이었죠. 하지만 서유럽 세계가 점차 안정되면서 둘 사이에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들이 독일에서 이탈리아까지 영토를 넓히길 원했기 때문이었어요.
특히 프리드리히 2세(1194~1250년)가 교황이 지배하던 로마를 노리자 황제와 교황의 갈등은 아주 심각해졌습니다. 급기야 화가 난 교황이 프리드리히 황제를 교회에서 파문(破門·신도로서의 자격을 빼앗고 내쫓음)해버렸어요. 중세 서유럽 세계는 기독교가 강력한 힘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황제가 파문된 것은 큰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각 지역을 다스리던 제후들이 파문당한 프리드리히 2세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기 시작했어요.
각지에서 반란이 이어지자 신성로마제국의 힘은 급격히 약해졌습니다. 힘도 명예도 잃은 황제의 권위도 바닥에 떨어졌고요. 거듭된 반란을 진압하다 지친 프리드리히 2세는 장염에 걸려 죽었고, 그의 아들 콘라드 4세도 황제로 인정받지 못한 채 4년 뒤 죽음을 맞았습니다.
이후 신성로마제국은 '황제가 없는 나라'가 되어버렸어요. 일각에서 "새로운 황제를 뽑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지만, 제후들은 각기 다른 사람을 추천하며 황제 자리를 마다했습니다. 굳이 힘도 권위도 없는 황제가 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죠. 이것이 바로 대공위시대였어요.
◇'황제 선거'로 새로운 명문가가 탄생하다
하지만 황제 자리가 오랫동안 비어 있자 신성로마제국은 점점 혼란스러워졌습니다. 지방 도시에서 반란이 끊이지 않고 도둑과 강도가 늘어나 교회를 약탈하거나 교황의 영지를 침범하는 일이 벌어졌어요. 그러자 황제와 갈등을 빚었던 교황도 '새로운 황제를 뽑아 혼란을 끝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에 교황은 제후들에게 "이번엔 반드시 새로운 황제를 선출해달라. 만약 이번에도 황제를 선출하지 못하면 내 마음대로 황제를 지목하겠다"고 통보했습니다
교황의 통보에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뽑을 권한을 가진 7명의 제후가 선거회의를 열었어요. 그리고 1273년, 스위스 산악지역의 작은 영지를 다스리던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인 루돌프 1세(1218~1291년)가 새로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선출되었습니다. 이전에 열렸던 형식적인 선거와 달리 루돌프 1세는 실질적인 선거를 거쳐 황제가 된 것이죠.
이렇게 대공위시대는 '황제 선거'를 통해 막을 내렸어요. 그리고 이 선거는 이후 유럽 전체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루돌프 1세는 뛰어난 정치력으로 황제의 권한을 다시 강화하였고, 덕분에 향후 600여년간 합스부르크 가문은 황족 가문으로 유럽 여러 나라에 왕을 배출하며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황제 선거'가 작은 귀족 가문을 중세 유럽을 지배한 명문가로 만든 셈이에요.
김승호 인천하늘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배준용 기자
05.18 2000년 전 중국 비단이 로마로 건너간 6400㎞ 길
중국 한나라 때 개척된 실크로드, 고대부터 중동·유럽까지 이어져
동·서양 문명간 교역의 축… 13세기 몽골 제국 때 교류 번창
동양서 발명된 종이·화약·나침반… 실크로드 거쳐 서양에 전해졌어요
최근 중국은 국제사회에서 '일대일로(一帶一路)'라는 대규모 경제·외교 프로젝트 참여를 권유하고 있어요. 과거 동양과 서양이 실크로드로 이어졌듯이, 동아시아에서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 나아가 유럽과 아프리카까지 육로와 해로를 잇고 철도와 송유관 등을 설치해 경제 협력을 넓혀가자는 겁니다. 그래서 일대일로를 '신(新) 실크로드'라고도 부르지요.
지난 14일부터 이틀간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일대일로 국제협력 정상 포럼'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약 8500억위안(약 138조 5500억원)을 이 프로젝트에 추가로 투자하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중국이 이렇게 큰돈을 써가며 새로운 실크로드를 만들려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장건과 한 무제가 교역로를 열다
실크로드가 문을 연 건 고대 중국 한나라의 무제 때입니다. 중국 북쪽 고원·사막지대를 차지하고 있던 유목민족 흉노족과 대립하던 한나라는 흉노보다 더 서쪽에 있는 '월지'라는 나라가 흉노와 사이가 좋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이에 한 무제는 월지와 손을 잡고 흉노를 치기로 결심하였지요.
▲ 과거 실크로드의 주요 거점이었던 중국 간쑤성 둔황 부근 밍사산의 모습이에요. 과거에는 교역 상인들이 이 부근을 지나다녔지만, 최근에는 밍사산을 구경하려는 관광객이 더 많지요. /조선일보 DB
하지만 월지가 어디 있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이 없었어요. 게다가 중국 서쪽은 티베트 고원과 높은 산맥이 가로막고 있어 월지로 가려면 흉노족이 차지하고 있는 고원·사막지대를 반드시 지나야 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신하도 선뜻 월지에 사신으로 가겠다고 나서지 않았지요.
이때 장건(?~기원전 114년)이라는 신하가 월지에 사신으로 가겠다고 나섰어요. 무제의 허락을 받은 장건은 100여 명의 병사를 데리고 월지로 떠났습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흉노족에게 붙잡혀 억류되고 말았어요. 그렇게 10여년간 흉노족과 어울려 살던 장건은 감시가 소홀해진 틈을 타 흉노족 땅을 탈출했습니다. 그리고 한나라가 아닌 서쪽으로 향했어요. '월지와 동맹을 맺고 오겠다'는 한 무제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수십 일간 여러 나라를 거쳐 파미르 고원을 지난 장건은 마침내 월지에 도착하였지요. 이 무렵 월지는 흉노와 주변 강대국을 피해 오늘날 중앙아시아 사마르칸트 일대에 자리 잡고 있었어요. 비옥한 땅과 평화로운 생활에 젖은 월지 사람들은 흉노족과 전쟁할 마음이 사라져버린 상태였습니다. '한나라와 힘을 합쳐 흉노를 공격하자'는 장건의 제안도 거절하였지요.
어쩔 수 없이 장건은 한나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다시 흉노족에 붙잡혔다 1여년 만에 탈출한 장건은 '월지와 동맹을 맺겠다'며 떠난 지 13년 만에 한나라 수도 장안에 도착하였어요. 장건은 한 무제에게 13년간 자신이 직접 살펴본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의 여러 나라에 대해 자세히 보고했습니다.
장건의 말을 들은 한 무제는 군사를 일으켜 흉노족을 더 북쪽으로 몰아내고 중앙아시아로 나아가는 길을 개척했어요. 이어 중앙아시아에 있던 여러 나라와 외교 관계를 맺고 교역을 시작했지요. 이렇게 장건과 한 무제가 개척한 교역로는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더 번창했고, 서아시아와 유럽의 로마 제국까지 이어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실크로드예요. 총 길이 약 6400㎞에 이르는 실크로드는 이후에도 오랫동안 유라시아 대륙의 동과 서를 잇는 교역로로 번창했습니다.
◇로마 제국까지 전해진 중국의 비단
이 길이 실크로드로 불리게 된 건 수많은 교역품 중에서도 특히 중국의 비단이 이 교역로를 통해 서역으로 많이 수출되었기 때문입니다. 서아시아 여러 나라뿐 아니라 로마의 귀족도 비단의 뛰어난 품질과 아름다운 자태에 홀딱 빠졌거든요. 비단이 얼마나 인기가 높았던지 1세기 무렵 로마의 지식인 플리니우스는 "비단 수입에 엄청난 돈이 낭비되고 있다"며 한탄했고,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재정난을 막기 위해 비단 수입을 규제하고 황후도 비단 옷을 입지 못하게 할 정도였습니다. 수천 년 전부터 이미 실크로드에서는 수많은 교역품과 어마어마한 돈이 오갔던 거예요.
4~8세기 무렵에는 이란계 소그드 상인이 실크로드로 활발히 무역을 하며 막대한 부를 쌓았지요. 소그드 상인은 중국 서북쪽 지역까지 진출해 근거지를 마련하고 아예 중국에 정착해 살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강, 석, 안 등을 자신의 성씨로 삼았는데, 8세기 중반 중국 당나라의 몰락을 열었던 '안사의 난'(755년)의 주인공 안녹산(安祿山·703?~757년)도 바로 소그드 상인 집안 출신이었습니다. 안록산 본인도 6개 국어에 능통하고 실크로드를 통해 한족과 이민족 간의 중개 무역을 하던 상인이었고요.
◇동서 문명 교류의 축이 되다
실크로드는 동양 문명과 서양 문명이 각자의 문물을 전하는 문화 교류의 통로이기도 했습니다. 중국에서 발명된 제지술이 이슬람 세계와 유럽에 전해진 것도 실크로드 덕분이었어요. 8세기 무렵 이슬람 우마이야 왕조와 중국 당나라가 중앙아시아와 실크로드의 주도권을 두고 맞붙은 탈라스 전투에서 당나라 제지 기술자들이 포로로 붙잡힌 것이 계기가 되어 종이가 중동 지역에 전파되었습니다. 제지술이 다시 유럽으로 전해지면서 비로소 서양 문명도 종이를 사용하게 되었지요.
13세기에는 몽골 제국이 유라시아 대륙 대부분을 차지하면서 실크로드를 통한 동서 무역이 더 활발해졌습니다. 베네치아 출신 탐험가 마르코 폴로가 실크로드를 거쳐 중국 원나라에 도착해 쿠빌라이 칸을 만난 것도 이 시기였지요. 더불어 이 시기에 중국에서 발명된 화약과 나침반이 유럽에 전해졌고, 이는 15세기 대항해 시대의 근간이 되었어요.이때부터 동양 문명에 뒤처져 있던 서양 문명이 힘과 기술을 길러 훗날 동양 문명의 힘을 앞지르게 되었지요. 실크로드를 통한 교역과 교류가 동서 문명의 힘의 균형을 뒤집어버린 셈입니다. 중국이 일대일로를 내세우는 것도 어쩌면 새로운 실크로드로 국제사회의 중심을 다시 아시아로 돌리려는 건 아닐까요?
윤형덕 공주 한일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배준용 기자
05.25 종교·관습 포용한 다민족 제국… 2400㎞ 도로망 깔았죠
[페르시아]
양치기에서 왕이 된 키루스 2세
관용 정책 앞세워 주변 국가 정복… 기원전 6세기 중동에 대제국 건설
다리우스 1세 때 최대 영토 확보… 도로망·공공사업으로 최전성기
알렉산더 대왕 침략으로 멸망했죠
지난 19일(현지 시각) 치러진 이란 대통령 선거에서 중도·개혁파 후보 하산 로하니(69) 대통령이 득표율 57%로 강경·보수파 단일 후보 이브라힘 라이시를 제치고 다시 한 번 대통령에 당선되었어요. 지난 2013년 대통령이 된 로하니가 4년 더 집권하게 되면서 향후 이란은 더 폭넓은 개혁·개방 정책을 펼칠 것으로 보입니다.
이란은 페르시아 민족의 나라입니다. 페르시아인들은 고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여러 번 막강한 왕국을 수립했어요. 그중에서도 고대 오리엔트 세계를 제패했던 페르시아 제국은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고 찬란한 문명을 꽃피웠답니다.
◇양치기 소년이 대제국을 건설하다
페르시아 제국의 기원은 기원전 8세기 무렵 페르시아인들이 중동 지역에 세운 아케메네스 왕국(얀잔 왕국)이에요. 주변 강대국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던 아케메네스 왕국은 기원전 6세기 키루스 2세 (키루스 대왕·BC 585?~BC 529년)가 왕이 되면서 대제국으로 발전하였지요.
▲ 페르시아 제국의 왕 다리우스 1세가 여름 궁전을 짓고 살았던 페르세폴리스 유적지의 모습입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페르세폴리스 유적지의 규모는 축구장 25개를 합친 것과 비슷해요. /Flickr
키루스 2세의 어머니는 오늘날 이란 북서부에 있던 메디아 왕국의 공주 만다네였어요. 만다네의 아버지인 메디아 왕국 국왕은 어느 날 만다네가 낳은 아들이 메디아를 멸망시킬 것이라고 암시하는 꿈을 꾸었어요. 겁이 난 메디아 국왕은 딸 만다네를 변방의 작은 나라였던 아케메네스 왕국의 왕 캄비세스 1세와 혼인시켰지요.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던지 만다네가 키루스 2세를 낳자마자 부하를 불러 키루스 2세를 납치해 죽이라고 지시했습니다.
부하는 키루스 2세를 납치하는 데 성공했지만, 차마 자기 손으로 갓난아기를 죽일 마음이 들지 않았어요. 그래서 산에 살던 양치기에게 아기를 건네고 돈을 주며 아기를 죽여달라고 부탁했답니다. 하지만 양치기는 아기를 죽였다고 거짓말을 하고 키루스 2세를 친아들처럼 키웠어요. 그렇게 아케메네스 왕국의 왕자는 양치기 소년이 되었지요.
건장하고 영리한 청년으로 자란 키루스 2세는 자신이 원래 왕자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기원전 559년 아버지 캄비세스 1세를 이어 아케메네스 왕국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9년 뒤 메디아 왕국을 멸망시켰지요. 이후 키루스 2세는 인근에 있는 리디아 왕국, 신바빌로니아 왕국 등을 정복해 페르시아 제국을 건설했어요.
키루스 2세가 대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여러 지역의 고유한 종교와 관습을 인정해주는 관용 정책을 폈기 때문이었지요. 페르시아의 라이벌이었던 신바빌로니아는 비옥한 땅에서 여러 민족이 어울려 사는 강대국이었어요. 하지만 국왕과 후계자가 종교 탄압을 일삼고 빈부 격차가 커지면서 백성의 원성이 컸지요. 반면 키루스 2세는 여러 종교와 관습을 존중하고 군인들이 점령지 주민을 약탈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러자 신바빌로니아 백성들이 직접 성문을 열어 키루스 2세를 맞이하였고, 덕분에 키루스 2세는 손쉽게 신바빌로니아를 정복할 수 있었어요. 키루스 2세의 관용 정책은 훗날에도 이어져 페르시아가 다민족 제국으로 번영하는 기틀이 되었답니다. 키루스 2세는 오늘날에도 이란 국민 사이에서 '이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으로 불리고 있어요.
◇제국의 전성기를 연 다리우스 1세
페르시아 제국은 다리우스 1세(BC 550~BC 486년) 때 전성기를 맞이하였어요. 키루스 2세의 아들 캄비세스 2세가 죽고 페르시아 왕실이 혼란에 빠지자 귀족이었던 다리우스 1세는 왕실의 혼란을 잠재우고 페르시아 제국의 왕이 되었지요. 뛰어난 책략가였던 다리우스 1세는 제국 곳곳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고 정복 전쟁을 일으켜 동쪽으로는 인도 서북부 인더스강 유역, 서쪽으로는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인 다르다넬스 해협까지 모두 페르시아 제국의 땅으로 만들었지요.
두 번에 걸친 그리스 정벌은 모두 실패로 돌아갔지만, 페르시아 제국이 전성기를 누리는 데 큰 영향을 주지는 않았어요. 다리우스 1세가 정교한 통치 체제를 갖추고 여러 공공사업을 일으켜 제국의 번영을 이끌었기 때문입니다.
다리우스 1세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광대한 도로망을 갖춘 것입니다. 다리우스 1세는 수도 파사르가다 남쪽에 페르세폴리스라는 도시를 건설해 수도를 옮기고, 그보다 서쪽에 있는 수사를 제2의 수도로 삼았어요. 그리고 페르세폴리스와 수사, 그리고 제국 서쪽의 경제 도시 사르디스를 잇는 도로를 지었습니다. '왕의 길'이라 불린 이 도로의 총길이는 약 2400㎞에 이르렀지요. 페르시아 제국은 '왕의 길'을 통해 지방에 걷은 세금을 중앙 정부로 신속히 옮기고 반란이 일어난 지방이나 국경 지대에 더 빨리 군대를 보낼 수 있게 되었어요.
다리우스 1세는 역참 제도를 갖추어 '왕의 길'을 통치 수단으로도 활용했어요. 도로를 따라 여관과 말을 갈아탈 수 있는 역을 100여 개나 설치하고 우편물도 역참을 통해 전달하게 하였지요. 왕의 지시를 지닌 전령들은 역참을 통해 쉬지 않고 말을 달려 지방 곳곳에 다리우스 1세의 명령을 전했습니다. 지방 총독을 감시하는 비밀경찰도 '왕의 길'과 역참을 통해 지방 곳곳을 옮겨다니며 총독들의 움직임을 살피고 다리우스 1세에게 신속히 보고하였지요.
이렇게 페르시아 제국은 종교·문화에 대한 관용과 정치·경제적 안정이 어우러지면서 번영을 누렸어요. 다리우스 1세는 페르세폴리스에 여름 궁전, 수사에 겨울 궁전을 짓고 새해가 되면 연회를 열었어요. 이 연회에는 귀족과 관료, 주변 나라에서 몰려든 무역 상인과 외교 사절 등 1만 5000여 명이 모여 며칠 동안 쉬지 않고 수만 마리의 동물을 잡아 고기를 먹고 술을 마셨다고 해요. 페르시아 제국이 얼마나 번성했는지 짐작이 되지요?
하지만 다리우스 1세가 죽고 왕실에 잦은 내분이 벌어지면서 국력이 서서히 약해졌고, 기원전 4세기 말 페르시아 제국은 알렉산더 대왕의 침략을 받아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이란의 옛 이름은 '페르시아']
1935년 나라 이름을 바꾸기 전까지 이란의 국명은 '페르시아(Persia)'였어요. 고대 그리스인들은 오늘날 이란 남서부 해안 지역에 사는 민족을 '파르스(Fars)'라고 불렀어요. 이'파르스'가 라틴어로 바뀌면서 '페르시아'로 변한 것입니다.
페르시아 제국은 기원전 4세기에 멸망하였지만, 기원전 3세기 중반 파르티아 제국이 수립되면서 페르시아 제국의 명맥이 이어졌어요. 이후 사산왕조 페르시아·사파비 왕조·팔레비 왕조 등을 거쳐 오늘날 이란에 이르게 되었지요.
김승호 인천하늘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배준용 기자
06.01 노예제 없애고 근대화 이끌었던 마지막 황제
[브라질 제국 페드루 2세]
아버지 페드루 1세가 왕위 떠넘겨 섭정 거친 뒤 16세부터 통치 시작
정치 안정과 근대화로 번영 이끌어
'황금법'으로 노예제 폐지했지만 반대파 쿠데타로 유럽으로 망명
오늘날 훌륭한 황제로 평가받아요
삼바와 축구의 나라 브라질이 최근 극심한 정치적 혼란에 빠졌어요. 미셰우 테메르 브라질 대통령이 뇌물을 받은 정황이 드러나면서 테메르 대통령을 탄핵해야 한다는 여론이 커지고 있거든요. 지우마 호세프 전 대통령이 뇌물을 받은 문제로 탄핵이 된 지 9개월여 만에 브라질은 또다시 대통령이 탄핵될지도 모르는 상황에 처했습니다.
16세기부터 포르투갈의 식민 지배를 받은 브라질은 1822년 독립한 후로도 끊임없는 정치적 혼란을 겪었어요. 하지만 브라질 제국 두 번째 황제이자 마지막 황제였던 페드루 2세(1825~1891) 시기에는 정치적 안정과 근대화를 통한 번영을 누렸지요. 오늘날에도 페드루 2세는 브라질 역사에 가장 자랑스러운 인물 중 한 사람으로 꼽힌답니다.
◇브라질 독립과 브라질 제국의 수립
약 300년간 포르투갈이 브라질을 지배하면서 브라질은 사탕수수를 대량으로 경작하는 플랜테이션이 크게 발달했습니다. 지주들이 광대한 땅에 노예를 부려 사탕수수를 재배하고 설탕을 만들어 돈을 벌었어요. 플랜테이션을 위해 아프리카에 살던 수많은 흑인이 노예로 브라질에 끌려오기도 했습니다.
플랜테이션으로 포르투갈에 막대한 부를 안기던 식민지 브라질은 나폴레옹의 등장으로 큰 변화를 겪게 됩니다. 나폴레옹이 포르투갈을 정복하면서 포르투갈 왕실이 브라질로 도피했기 때문이죠. 13년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가 포르투갈의 임시 수도가 되기도 했고요. 나폴레옹이 몰락하면서 포르투갈 왕실은 다시 본국으로 돌아갔지만, 정치·경제적으로 성장한 브라질을 더 이상 식민지로 취급하기 어렵다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이에 브라질을 왕국으로 격상시키고 포르투갈과 연합 왕국을 수립한다고 선언했답니다. 브라질 왕국에는 폭넓은 자치권을 허용하기로 하였지요.
하지만 포르투갈 의회가 이런 결정에 반대하고 나섰어요. 나아가 연합 왕국 해체와 브라질을 다시 식민지로 격하한다는 결의안을 통과시켰지요. 이에 분노한 브라질 국민들은 독립운동에 나섰고, 1822년 브라질에 머물고 있던 포르투갈 주앙 6세의 아들 동 페드루가 브라질의 독립과 브라질 제국의 수립을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브라질 제국의 초대 황제 페드루 1세로 즉위하였어요.
◇근대화와 정치 안정을 이끌다
즉위 초에는 하늘을 찌를 듯하던 페드루 1세의 인기는 얼마 지나지 않아 추락하기 시작했습니다. 페드루 1세는 입헌군주제를 선언했지만 독재적인 통치를 펼쳤고, 브라질 내 극심한 정치적 갈등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어요. 급기야 브라질 남부 지역이 우루과이로 독립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낙심한 페드루 1세는 고작 다섯 살이던 아들 페드루 2세에게 황제 자리를 떠넘기고 포르투갈로 떠나버렸어요.
열여섯 살 전까지 섭정(攝政·군주가 직접 통치할 수 없을 때 군주를 대신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이 통치하는 동안 페드루 2세는 외롭고 불우한 환경에서 황제가 될 수업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하지만 이런 환경 속에서도 페드루는 황제로서 나라를 발전시키겠다는 강한 의무감과 국가에 헌신할 책임감을 갖춘 황제로 자라났어요. 그리고 1841년부터 직접 통치를 시작하면서 그의 뛰어난 능력과 성품이 빛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 19세기 브라질 제국을 다스린 페드루 2세는 정치 안정과 근대화 정책, 노예제 폐지 등 여러 뛰어난 업적을 남겼어요. /위키피디아
당시 브라질은 경제적으로도 어려운 상황이었어요. 네덜란드를 비롯한 여러 유럽 열강이 식민지를 개척하고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을 벌이면서 브라질 플랜테이션의 경쟁력이 떨어졌기 때문이었죠. 이에 페드루 2세는 사탕수수와 설탕 대신 커피 생산을 장려해 브라질 경제를 회복시켜 나갔습니다. 오늘날 브라질 커피가 유명한 것도 이때부터 커피 생산을 늘린 덕분이지요.
학문과 과학, 예술 분야에도 깊은 관심과 재능을 가졌던 페드루 2세는 유럽에 유학생을 보내 선진 문물을 배우게 하고 학교를 세워 브라질 근대화를 위해 노력하였어요. 브라질에 철도, 전신 시설이 놓이고 증기선 운항이 늘어난 것도 페드루 2세 덕분이었지요. 페드루 2세는 1840년 직접 카메라를 들여와 브라질 최초의 사진사가 되기도 했습니다.
페드루 2세는 뛰어난 정치력으로 브라질 정치 상황도 안정시켰어요. 독재적으로 정치를 하지 않고 보수파와 자유파의 의견을 모두 존중했습니다. 두 파를 교대로 내각에 등용해 정치적 화합을 위해 노력했지요. 언론·표현의 자유를 보장하고 시민의 기본권을 보호하는 데에도 힘썼고요. 그 결과 페드루 2세는 브라질 국민으로부터 높은 인기와 존경, 사랑을 받게 되었습니다.
◇노예제 폐지가 부른 제국의 붕괴
하지만 오랜 세월 페드루 2세의 통치가 이어지자 브라질 사람들은 그의 뛰어난 통치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되었고, 그만큼 그의 인기도 서서히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1889년, 페드루 2세는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 유럽으로 추방되고 말았습니다. 페드루 2세가 노예제를 폐지한 것이 그 발단이 되었어요.
브라질은 페드루 2세 통치 시절에도 노예제가 만연하였어요. 플랜테이션으로 정치·경제적 영향력을 쥐고 있던 지주들에게 노예는 없어선 안 될 존재였기 때문이죠. 반면 인권을 중시하고 근대화를 추진했던 페드루 2세는 집권 초부터 노예제 폐지를 위해 노력했답니다. 그 결과 1850년대에는 대서양 노예무역 금지법이 마련됐고 1871년에는 여자 노예가 낳은 아이를 노예가 아닌 자유 시민으로 인정하는 법도 제정되었지요. 하지만 지주들의 강한 반대에 막혀 노예제 폐지까지 나아가지 못했고, 그 결과 브라질은 라틴아메리카 국가 중 유일하게 노예제가 있는 나라가 되었어요.
▲ 1888년 5월 노예제 폐지 법안이 통과되자 환호하는 브라질 군중의 모습. /위키피디아
고심하던 페드루 2세는 정치적 반대를 무릅쓰고 1888년 노예제를 폐지하는 황금법(아우레아법)을 만들었어요. 그러자 지주들은 군인들을 부추겨 '제국을 무너뜨리고 공화국을 수립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쿠데타를 일으켰답니다. 1889년 11월 15일 쿠데타가 성공하면서 브라질 제국이 무너지고 브라질 공화국 수립이 선언되었어요. 페드루 2세를 지지하던 브라질 국민 대부분에게도 깜짝 놀랄 일이었지요. 쿠데타 소식을 들은 페드루 2세는 "그럼 이제 나는 은퇴하면 되겠군. 그동안 너무 열심히 일해서 아주 피곤해. 이참에 쉬어야겠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틀 뒤 그는 가족과 함께 유럽으로 추방되었지요.
프랑스로 망명한 페드루 2세는 1891년 병으로 급작스럽게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의 유해는 약 30여 년이 지난 1920년에야 브라질로 돌아올 수 있었지요. 공화국이 수립되고 오히려 브라질이 정치·경제적 위기에 처하면서 페드루 2세의 업적을 높게 평가하는 여론이 높아졌기 때문이었지요. 페드루 2세의 유해는 그의 이름을 딴 도시 페트로폴리스에 안장되었고, 오늘날까지 그는 브라질의 발전과 번영을 이끌었던 황제로 기억되고 있어요.
윤형덕 공주 한일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배준용 기자
06.08 살기 위해 타협하느니 '사형'을 선택한 철학자
[소크라테스 재판]
잦은 설전으로 집권자에 밉보여… 아테네 패전 후 희생양으로…
"젊은이들 타락시킨 죄" 고발당해
시민 찬반투표로 유무죄 판결
순순히 감형 받을 수도 있었지만 고발 내용 인정 않고 독 마셨어요
지난 3월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로 대통령이 파면당하는 일이 벌어졌어요. 이후 전직 대통령이 구속돼 법정에서 재판받게 되자 많은 사람이 어떤 결과가 나올지 궁금해하고 있지요. 첫 재판 방청객으로 68명을 받는데 525명이나 몰릴 정도였으니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주목하고 있는지 알 수 있겠죠?
사실 오늘날엔 수많은 재판이 매일같이 이뤄지고 있어요. 한 사람의 인생이 재판 결과에 따라 극과 극으로 갈릴 수도 있죠. 오늘은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기원전 470~399)의 재판에 대해서 살펴볼게요.
◇아테네 몰락의 희생양이 된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는 오늘날 서양철학의 뿌리와 같은 사람이에요. 인간의 존재와 내면에 대해 탐구했어요. 인간은 '알지 못함'을 깨닫는 순간 앎으로 한발 더 다가설 수 있다고 믿었어요. 그가 있었기에 제자인 플라톤을 거쳐 아리스토텔레스, 먼 훗날 데카르트와 칸트를 거쳐 현대까지 인간에 대한 심도 있는 탐구가 이뤄질 수 있었죠.
▲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가운데 흰 옷 입은 사람)가 독약을 마시고 죽기 직전 제자와 동료들에게 마지막 말을 하고 있어요. 소크라테스는 법정에서 자신의 가르침이 잘못됐다 인정하면 사형을 피할 수 있었지만“품위와 위엄을 잃는 일 따위는 하지 않겠다”면서 독배를 택했어요. /위키피디아
소크라테스가 활동했던 기원전 404년 아테네는 스파르타와의 전쟁에서 패해 정치적 간섭을 받게 됐어요. 아테네에는 패전의 암울한 기운이 떠돌았고, 그 상처를 떠넘길 희생양이 필요했어요. 패전 이후 아테네의 집권자가 된 아니토스는 소크라테스를 바로 그 대상으로 삼았어요. 소크라테스가 희생양이 된 이유는 두 가지였어요. 하나는 아니토스 반대파에 소크라테스 제자가 많았다는 점, 또 하나는 소크라테스를 미워하는 지식인이 많았다는 점이에요. 소크라테스는 평소에 정치인, 희곡 작가, 철학자 등과 같은 지식인들을 찾아다니며 설전을 벌여 이겨 명성을 떨쳤는데요. 이 때문에 소크라테스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사람이 많았어요. 특히 당시 아테네의 주류 지식인 집단 '소피스트'들의 미움을 받았죠. 소크라테스는 설전 과정에서 상대방이 대답을 못 할 때까지 질문을 던지며 면박을 줬어요. 당한 사람들은 소크라테스의 못생긴 외모를 비꼬며 숲의 정령 '사티로스'나 '악마'라고 비난했죠. 이런 배경에서 그는 고발당해 아테네의 민중재판소라는 법정에 서게 돼요.
◇찬반 투표로 유죄·무죄를 선고한 민중재판
그리스 세계를 대표하는 아테네에는 오늘날 배심원 제도에 가까운 민중재판소가 운영되고 있었어요. 재판은 극장에 모인 민중재판관들이 찬반 투표를 해서 투표수의 많고 적음으로 판결을 내리는 방식이었어요. 민중재판관은 아테네 시민들이 1년 임기로 돌아가며 맡았어요. 재판을 열려면 시민 개인이 고발해야 했죠. 고발이 접수되고 재판이 시작되면 고발인이 고소한 이유에 대해 설명한 다음 피고인이 변론했어요. 이 과정이 끝나면 고발인과 피고인이 각각 증인을 불러와 신문하고, 민중재판관들이 판결을 내리게 됩니다. 민중재판관들은 유죄라고 생각하면 구멍이 있는 도자기 조각을, 무죄라고 생각하면 구멍이 없는 도자기 조각을 투표함에 넣었어요.
소크라테스가 고발당한 이유는 "젊은이들을 타락시키고 국가가 인정한 신을 거부하고 새로운 신을 믿게 했다"는 것이었어요. 소크라테스는 법정에서 고발이 부당하다는 점을 조목조목 논리적으로 반박했어요. 하지만 재판 과정에서 자신의 유무죄를 판가름할 민중재판관들에게 무례한 말을 많이 해 오히려 분노를 일으켰죠. 그래서 유죄 280표, 무죄 220표로 사형을 선고받아요.
◇스스로 죽음의 길을 선택한 소크라테스
유죄·무죄 사이 표 차이가 크지 않았기에 소크라테스는 민중재판관들을 설득해 사형보다 가벼운 형벌을 받을 수도 있었어요. 당시 법에 따라 피고인은 유죄 평결 후 최후 변론에서 구류, 벌금, 추방, 침묵 강요 등 네 가지 중 하나를 요청할 수 있었죠. 소크라테스는 최후 변론에서 "가벼운 벌금만 내게 해 달라"고 했어요. 문제는 그가 뉘우치는 기색 하나 없이, 푼돈에 지나지 않는 금액을 벌금으로 내겠다면서 민중재판관들의 심기를 더욱 건드린 것이에요. "국비로 나에게 평생 향응을 제공하라"는 조롱 섞인 요구까지 하려는 것을 제자들이 만류했어요. 민중재판관들은 더욱 분노해 소크라테스에게 사형 360표, 벌금형 140표란 압도적 차이로 사형을 확정했어요.
사형수가 된 소크라테스는 감옥에 갇혀 사형 집행을 기다렸어요. 친구가 찾아와 아테네를 탈출해 다른 도시로 망명하라고 조언했지만 소크라테스는 "내가 도망치면 고발 내용이 모두 사실임을 인정하는 꼴"이라며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그러고는 결국 담담하게 독약을 들이켜 생을 마감했어요.
현대 재판 제도와 비교해봤을 때 아테네 재판 방식의 허술함을 몇 가지 찾아볼 수 있는데요. 우선 피고인에게는 고발인과 증인에게 반대로 질문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어요. 민중재판관들이 투표 이전에 토론하며 의견을 나누는 과정도 없었고요. 대부분 하루 만에 재판이 끝나기 때문에 민중재판관들은 이성적 판단보다는 재판 과정에서 느낀 감정으로 표를 던질 수밖에 없었죠.
만약 소크라테스가 법정에서 목소리를 낮추고 불의, 허위와 타협해 목숨을 구걸했다면 살 수는 있었겠죠. 하지만 우리가 오늘날까지 기억할 정도의 명예와 존경은 결코 얻지 못했을 것이에요. 어쩌면 그는 자신의 죽음이 옳았음을 역사 속에서 증명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여러분이 소크라테스였다면 어떻게 했을까요?
☞소피스트(Sophist)
기원전 5세기~기원전 4세기 아테네를 중심으로 활동한 그리스 지식인·철학자들을 일컫는 말이에요. 소크라테스가 살던 아테네에서 소피스트들은 비싼 수업료를 받고 주로 웅변술, 논증법 등을 가르쳤어요. 때론 지나치게 논쟁적이어서 소피스트란 말은 오늘날'궤변론자(얼핏 들으면 그럴듯하지만 따져 보면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을 하는 사람)'라는 의미를 갖게 됐죠. 이들에 비해 소크라테스는 보수도 받지 않으면서 대화 속에서 지식을 스스로 깨닫도록 이끌어, 청년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어요. 이런 이유로 아테네의 주류 소피스트들이 소크라테스를 싫어했다고 해요.
06.15 대통령 8명 바뀌는 동안 무소불위 권력
[후버 FBI 초대 국장]
미국, 州 경계 넘어간 범인 잡으려 강력한 권한의 '연방수사국' 설치
48년 장기 집권한 후버 FBI 국장, 지문 수집 등 현대 수사기법 도입
알 카포네 검거하며 명성 얻었지만 불법 감시 도청 일삼아 오점 남겨
최근 미국에서는 제임스 코미 전 미국연방수사국(FBI) 국장의 청문회가 화제예요. 코미 전 국장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러시아 사이 내통 혐의를 수사하다 해임당했는데요. 코미가 청문회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러시아 수사를 중단할 것을 요구했다"고 주장해 파문을 일으켰어요. 논란의 중심에 있는 FBI는 대체 어떤 조직일까요? 오늘은 FBI의 역사와, 역대 대통령들조차 두려워했던 FBI 초대 국장의 이야기를 해볼게요.
◇현대적 수사기관의 틀을 놓다
영화나 소설로 우리에게 친숙한 FBI(Federal Bureau of Investigation)는 미국 법무부 기관으로 범죄를 수사하고 미국 내 정보 수집 업무를 담당하고 있어요. 미국은 주(州)마다 별도 법률을 가지고 있는 데다가 행정 조직도 별도로 운영하기 때문에, 한 주에서 범죄를 저지른 범죄자가 경찰을 피해 다른 주로 도망가면 잡기가 쉽지 않았죠. 주 경계를 넘나들며 범죄자를 잡아들일 강력한 연방 수사기관의 필요성이 제기됐고, 1908년 법무부 산하 수사국(BOI)이 탄생했어요. 이후 1935년 FBI로 이름을 바꾸면서 법무부 내 독립기관으로 탈바꿈하죠. FBI의 독립과 재탄생을 이끈 사람이 바로 제이 에드거 후버(1895~1972) 초대 FBI 국장이에요. 그는 BOI 국장 시절까지 포함해 무려 48년이나 연방수사국을 이끌며 현재 FBI의 위상을 구축했어요. 지문 등록, 과학 수사 등 현대적 수사 기법이 도입된 것도 후버 국장 때예요.
▲ 제이 에드거 후버(왼쪽) 초대 FBI 국장이 1940년 자신과 마피아 두목의 팔목에 수갑을 연결해 채우고 법정으로 들어가고 있어요. 후버 국장은 FBI의 수사권을 독립시키고 현대적인 수사 기법을 도입했지만 불법 도청과 감시를 일삼기도 했어요. /미 의회도서관
후버는 변호사 시험 합격 후 법무부 공무원으로 공직을 시작했어요. 공산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 소탕에 공을 세워 29세인 1924년 BOI 국장에 임명됐지요. 그는 당대 가장 악명 높았던 갱단 두목 알 카포네와 존 딜린저 등을 검거하는 성과를 올렸어요. 1933년 취임한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후버에게 날개를 달아줍니다. 원래 연방수사국은 주 정부의 자치권을 침해할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에 강력한 수사권을 갖지 못했죠. 그러나 뉴욕시 경찰청장을 역임한 바 있는 루스벨트 대통령은 범죄와 싸울 강력한 국가기관이 필요하다고 믿는 사람이었어요. 특히 1920년대 금주법 시행으로 급격히 성장한 범죄조직들을 하루빨리 소탕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이에 루스벨트 대통령은 FBI의 독립과 연방 각 주에 대한 수사권, 그리고 면책 특권까지 부여했어요. 이렇게 후버는 1935년 FBI의 초대 국장이 돼 막강한 권력을 얻었죠.
◇대통령조차 함부로 못 건드린 FBI 국장
강력해진 FBI와 후버 국장이 좋은 결과로만 이어진 것은 아니었어요. 반공주의에 과도하게 심취한 후버는 조금이라도 진보적 입장을 보이는 사람은 무차별 감시했어요. 연예인부터 기자, 과학자까지 그 대상은 광범위했습니다. 일부 음모론자는 케네디 대통령 암살(1963)이나 흑인 민권운동가 마틴 루서 킹 목사 암살(1968)의 배후에 후버 국장이 있다고 주장하기도 해요. 또한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정치인들에 대한 불법 도청과 감시도 마다하지 않았어요. 수많은 정치인은 후버와 FBI의 힘을 제한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후버가 가지고 있는 자신들에 대한 정보 때문에 아무 말도 못 하고 전전긍긍할 뿐이었죠.
▲ 제임스 코미 전 FBI 국장이 지난 8일 미 의회 청문회에서 증언하고 있어요. /연합뉴스
심지어 FBI 국장의 인사권을 가지고 있는 미국 대통령들조차 후버를 두려워했어요. 린든 존슨 대통령은 후버를 종신 국장으로 임명하기까지 했죠. 결국 누구도 후버 국장을 해임할 수 없었고, 후버 국장은 무려 8명의 대통령이 바뀌는 동안 FBI 국장으로 재임했어요. 후버가 FBI 국장에서 물러난 것은 1972년 그가 심장마비로 사망한 후였습니다. 말 그대로 죽을 때까지 FBI 국장이었던 것이지요. 이후 후버 같은 인물이 다시 나올 것을 걱정한 미국 의회는 FBI 국장의 임기를 10년으로 제한하는 법률을 통과시켰습니다. 하지만 FBI 국장의 수사권을 존중해 대통령도 함부로 개입하지 않는 전통은 유지됐죠.
오늘날 후버는 FBI라는 조직을 성장시킨 사람이라는 호의적인 평가와, 정보조직의 힘을 이용해 자신의 이익을 챙긴 괴물일 뿐이라는 비판을 동시에 받고 있습니다. 우리 각자가 후버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는 개인이 판단할 문제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민주주의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사회라면 수사기관이 정보를 이용해 시민을 괴롭히는 일이 벌어져선 안 될 것이란 점입니다.
06.22 '왕의 나라' 아닌 '신의 나라'를 택한 이란
[이란 혁명]
영국 미국 지원받은 팔레비 왕조,급격한 서구화 추진해,국민반발
국외로 추방된 성직자 호메이니, 1979년 이슬람혁명 성공 이끌어
모든 법이 이슬람 교리에 기초한 신정국가 세우고 최고지도자 등극
이란 수도 테헤란에 있는 국회의사당과 호메이니 묘에 지난 7일 무장 괴한이 침입해 사람들에게 총격을 가했어요. 그 결과 17명이 숨지고 40여명이 부상했는데요. 이후 이슬람 수니파 극단주의 무장 단체 이슬람국가(IS)는 자신들이 테러를 저질렀다고 밝혔어요. 특히 호메이니의 묘소에서 테러가 발생해 이란 사람들은 큰 충격에 빠졌어요. 호메이니 묘는 이란 사람들이 신성하게 생각하는 '혁명의 성지'이기 때문이죠.
◇팔레비 왕조의 서구화 정책
팔레비 왕조(1925~1979) 시절 이란은 급격한 서구화를 추진했어요. 영국의 지지를 받은 국왕 레자 샤(페르시아어로 왕이란 뜻)는 상비군을 두어 권력을 강화하고, 서구 국가처럼 사법제도를 정비하는 한편 근대적 교육을 실시했죠. 교육과 사법 분야를 쥐고 있던 이슬람 성직자들이 크게 반발했지만 레자 샤는 반대 세력을 탄압하면서 개혁을 멈추지 않았어요. 1941년 왕위에 오른 그의 아들 모하메드 레자 팔레비는 친서방·반이슬람 색채를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냈어요. 그는 보수 이슬람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토지 개혁, 문맹 퇴치, 여성 참정권 부여 등 근대적 개혁을 밀어붙였죠. 얼핏 보면 좋은 개혁 같지만, 팔레비의 목표는 이슬람 세력을 무력화하는 것이었어요. 문맹 퇴치로 국민 교육 수준이 높아지면 이슬람 공동체에서 성직자들이 갖고 있던 영향력이 줄고, 토지 개혁으로 이슬람 공동체 소유 땅을 빼앗아 재정 기반과 정치적 영향력을 약화시킬 수 있죠. 또 여성의 지위가 높아지면 남녀의 역할을 엄격히 따지는 이슬람의 권위도 떨어지게 돼요.
▲ 이슬람혁명이 일어나기 전 테헤란대학교 여대생들이 캠퍼스에서 자유로운 복장을 하고 있어요(왼쪽 사진). 1979년 혁명으로 이란이 종교와 정치가 결합된 신정(神政) 국가가 되면서 이란 여성은 외출할 때 몸과 머리카락을 가려야 해요. 2015년 테헤란의 한 카페에서 젊은 여성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어요(오른쪽 사진). /파르스타임스, 블룸버그
사실 팔레비 왕조는 근대화를 추진한다면서 왕권을 강화해 민주화에 역행했어요. 또 이란의 석유 채굴권을 영국 기업에 넘겨준 대가로 서방의 든든한 지원을 받았죠. 1951년 반(反)외세 민족주의를 주장하며 총리로 선출된 모하메드 모사데크는 석유를 국유화해서 외세의 경제 침탈로부터 벗어나려 했어요. 그러나 모사데크는 팔레비와 영국·미국의 지지를 등에 업은 군부 쿠데타로 실각하고 말아요. 이때부터 미국이 이란 정치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됐고, 미국에 대한 이란 국민의 반감이 커졌어요.
이슬람 성직자들을 중심으로 한 반정부 운동이 거세지면서 중심인물로 떠오른 이가 아야톨라(시아파 고위 성직자) 루홀라 호메이니였어요. 팔레비 정부는 1964년 11월 새벽 4시에 아침 예배에 참석하러 사원으로 향하는 호메이니를 납치해 공항으로 데려가 국외로 추방시켜버렸죠. 호메이니는 15년간 이란에 들어가지 못하고 이라크와 프랑스 등지에서 망명 생활을 하며 반정부 투쟁을 이끌어요.
◇호메이니와 이란 이슬람공화국
호메이니는 국외에서 육성 녹음테이프나 편지를 통해 이란 사람들에게 투쟁의 방향을 제시했어요. 이란의 종교 지도자들과 대학생들은 이에 호응해 반정부 투쟁을 이어갔죠. 1977년 11월 29일 호메이니의 아들이 협심증으로 사망했다고 이란 정부가 발표했어요. 이란 국민은 국왕이 암살한 것이라고 믿었죠. 호메이니 아들에 대한 추도 물결은 반정부 시위에 기름을 부었어요. 이란 국민의 불만은 1978년 1월 폭발하고 말았어요. 이란 북부에서 대학생들이 벌인 반정부 시위에 경찰이 총격을 가해 학생 4명이 사망한 거예요. 이에 호메이니는 전국의 이슬람 사원에서 이 학생들의 죽음을 기리는 집회를 40일마다 한 번씩 열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실제로 그때마다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어요.
▲ 1979년 이란혁명 당시 테헤란 시민들이 ‘샤(왕) 기념탑’ 주변에 모여들어 구호를 외치고 있어요. 군중 틈에는 종교지도자 호메이니의 대형 사진이 들어간 피켓이 여럿 보여요. 혁명이 성공한 후 이 탑은 ‘아자디(자유) 기념탑’으로 이름이 바뀌었죠. /위키피디아
1978년 라마단(이슬람교에서 매년 한 달 해가 떠 있는 동안 금식하는 의식) 기간에 반정부 투쟁은 절정에 달했어요. 라마단의 마지막 날(9월 8일) 전국에서 수백만 명의 국민이 시위에 나서 호메이니의 귀국과 이슬람 공화국의 설립을 요구했어요. 팔레비 정부는 주요 도시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시위와 야간 통행을 금지시켰죠.
테헤란에 5000여명의 시위대가 모이자 정부군이 헬기와 탱크로 무자비하게 진압해 수천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어요. 이란 국민은 이날을 '검은 금요일'이라고 부르며 지금까지 애도하고 있어요. 12월 11일 전국적으로 최소 600만명이 반정부 시위에 참여했어요. 당시 이란 인구가 약 3700만명이었으니 인구의 15% 이상이 길거리로 나온 것이죠. 엄청난 규모의 시위가 이어지자 정부군은 분열했고, 미국도 더 이상 이란 정부가 혁명을 통제할 수 없다고 판단했어요. 팔레비 왕가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1979년 1월 15일 이집트로 탈출했어요.
호메이니는 2월 1일 테헤란에 입성해 정부청사, 방송국, 왕궁 등을 완전히 장악했어요. 그는 왕정을 폐지하고 이슬람공화국으로 전환을 묻는 국민투표를 치러 무려 98.2%의 찬성표를 얻었어요. 4월 1일 세계 유일의 이슬람공화국 수립을 선포하고 호메이니는 최고 지도자에 올랐죠. 이슬람 교리에 기초한 헌법도 통과시켰어요. 이전까지 자유로운 복장으로 다니던 이란 여성은 이제 머리에 히잡을 쓰고 몸을 가려야 하죠. 오늘날까지 이란은 종교 지도자가 국가 최고 지도자를 겸하는 신정(神政)국가로 남아 있어요.
공명진·숭문중 역사 교사 기획·구성=박승혁 기자
06.29 불타오른 런던… 더 타오른 민심
1666년 화재로 도심 80% 잿더비...
빵집에서 난 불 바람타고 번지는데 서로 책임 미루다 '골든타임' 놓쳐
진화 후 성난 민심 불 타올라 무고한 외국인을 사형에 처하기도
320년만에 빵집 후손이 사과했어요
영국 런던 서부의 24층 서민 아파트 '그렌펠 타워'에 지난 14일 화재가 발생해 600여 주민의 터전이 새카맣게 타버렸어요. 런던 경찰은 확인된 사망자만 79명(27일 기준)이며 파악하지 못한 사람까지 합치면 희생자가 더 있을 것이라고 말했어요. 이번 화재는 351년 전 발생했던 '런던 대화재'와 아주 닮은꼴인데요. 1666년 런던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볼게요.
◇화재와 전염병에 취약했던 런던
1660년대 런던은 좁고 구불구불한 길 사이로 주택이 무질서하게 들어서고, 도심에만 8만명이 밀집해 위생 상태가 아주 열악했어요. 1665년에는 하루에 1000여 명씩 죽어나간 '런던 대역병'이 돌기도 했죠. 성벽 안 주거지에는 대장간, 유리 제조소 등 화재 위험이 큰 작업장들이 6층 정도 주택과 공존했어요. 건물 1층은 주로 작업실이나 상점으로 쓰였고, 2층부터는 거주지였어요. 1층 너비에 따라 세금이 결정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1층은 좁게 만들고 2층부터 넓게 지었죠. 창문을 열어 이웃집과 악수할 수도 있었다고 해요. 건물 위층이 옆 건물과 가까우면 불이 빠르게 번지겠죠? 실제 런던에선 1666년 이전에도 몇 차례 화재가 있었는데 크게 번진 적이 없어서 별다른 후속 조치가 없었대요.
1666년 9월 2일 오전 1시. 런던 왕실에 빵을 조달하는 토머스 패리너란 제빵사의 빵집이 불길에 휩싸였어요. 건조한 날씨와 심한 가뭄으로 볏짚과 목재가 바싹 말라있던 데다, 설상가상으로 동쪽에서 강풍이 불어와 서쪽으로 불길이 금세 번졌어요. 시민·상인들의 조합 형태로 운영됐던 민간 소방서는 "불난 빵집은 조합 소속이 아니다"는 이유로 아무 대응도 하지 않았어요. 책임자인 런던 시장은 한술 더 떴죠. 집주인들이 없다는 이유로 화재 현장 주변 건물을 무너뜨리지 못하게 했어요. 게다가 불길을 보고 "여자가 오줌으로도 끌 수 있겠네"라는 망언을 남기고 자리를 떠버렸어요.
▲ 1666년 런던의 한 빵집에서 시작된 런던 대화재는 나흘 동안 집과 가게 1만3200채와 세인트폴 대성당까지 잿더미로 만든 뒤 겨우 진화됐어요. 런던 도심 ‘시티 오브 런던’의 80%가 불에 탔죠. 이후 대도시들이 근대적인 소방 체계를 갖추는 계기가 됐답니다. /위키피디아
우왕좌왕하는 사이 불길은 더욱 번져 동이 틀 무렵 300여 채 건물이 불탔고 런던 브리지 북쪽까지 화마(火魔)가 옮겨가고 있었어요.
시민들은 불 끄는 것을 포기했어요. 물에 젖은 담요를 뒤집어쓰고 집 안 귀중품을 꺼내 템스 강에서 배를 타고 도시를 떠났죠. 배를 구하지 못한 사람들은 성벽 밖 공터로 피신했어요. 수레나 배를 이용해 비싼 값을 받고 물품을 운반해주는 장사치가 등장하는가 하면 빈집에 들어가 도둑질을 하는 사람들도 나타나는 등 도시는 대혼란에 빠졌어요.
◇분노의 불길이 타오르다
날이 밝자 국왕 찰스 2세와 동생 제임스(훗날 제임스 2세)는 군대를 동원해 불길이 번지지 못하도록 주변 건물들을 무너뜨렸어요. 길거리로 나온 사람들에게 돈과 음식을 주며 즉석에서 소방관으로 고용했습니다. 화재 발생 나흘째에 바람이 약해지면서 불길은 겨우 진압됐어요. 4일간 화재로 집과 상점 1만3200채, 교회 87곳, 세인트폴 대성당 등이 사라졌어요. 런던 도심의 80%가 잿더미로 변해버렸고, 10만여 명이 살 곳을 잃었죠. 공식적인 사망자는 9명뿐이었어요. 가난한 서민 희생자는 집계하지도 않은 데다 시체가 불에 타버려 정확한 수를 파악하지 못한 것이죠.
찰스 2세는 실의에 빠진 시민들에게 구호물자를 지원했지만 그들의 마음을 달래주지는 못했어요. 건조한 날씨, 거센 바람, 무능력한 시장 등으로 화재 원인을 돌려도 분노가 잦아들지 않았죠. 런던 시민들은 거리로 나가 외국인과 가톨릭교도를 무자비하게 폭행했어요. 성공회를 믿었던 영국 국민이 가톨릭에 대해 감정이 안 좋았고, 네덜란드와는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이들이 주요 표적이 됐어요. 참사 직후 '화재를 일으킨 프랑스와 네덜란드 놈들이 런던 시민을 죽이고 물건을 약탈한다'는 유언비어가 돌아 감정을 더욱 악화시켰죠. 찰스 2세는 시민들의 분노가 자칫 왕실에 대한 반란으로 이어질까 봐 이를 가만히 놔뒀어요.
런던에서는 방화범을 밝혀내기 위해 화재 조사 위원회가 결성되었어요. 빵집 주인은 자신의 오븐이 완전히 꺼져 있었기 때문에 잘못이 없다고 주장했죠. 엉뚱하게도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프랑스인 시계수리공 로베르 위페르가 범인으로 지목됐어요. 재판에 참석한 사람들은 위페르의 증언이 앞뒤가 안 맞았지만, 그가 외국인이고 가톨릭 신자니까 방화범이 확실하다며 사형을 선고했어요. 사형이 집행된 후에야 위페르가 화재 시작 이틀 후 런던에 도착했음이 알려졌어요. 위페르는 고문을 받아 거짓 자백을 한 것이었죠. 결국 320년이 지난 1986년, 화재가 시작됐던 빵집의 후손이 빵집 직원의 실수로 화재가 발생했다고 인정하고 사과문을 발표함으로써 완전한 진상이 드러났어요.
1667년 1월 화재 조사 위원회는 "하느님의 징벌, 거센 바람, 건조한 날씨 외에는 다른 이유가 없다"고 결론을 내렸는데 사람들은 가톨릭 교인들이 범인이라는 생각을 멈추지 않았어요. 심지어는 화재 진압에 발 벗고 나선 제임스가 가톨릭 신자이므로 범인이라는 소문도 돌았죠. 1800년대 중반까지 런던 대화재를 애도하기 위해 세워진 기념탑에 "불은 꺼졌지만, 이 재앙을 가져온 교황 세력의 광란은 아직 꺼지지 않았다"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고 해요. 도시의 불길은 나흘 만에 진화됐지만 마음속 불길은 200여 년간 지속됐던 것이죠.
351년 전 영국인들은 안전 불감증에 빠져 안일하게 이익만 추구하다가 대화재를 맞이했어요. '그렌펠 타워' 화재 사건은 과거의 교훈을 잊고 인간을 최우선으로 생각하지 않는 사회에 대한 일종의 경고일 수 있어요.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끊임없이 경계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재앙은 우리 곁으로 찾아올 수 있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되겠죠?◎
공명진·숭문중 역사 교사 기획·구성=박승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