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어있는 세계사/ 2014.01.03 한국 설날은 음력, 일본 설날은 양력? - 12.26 컴퓨터, 암호 해독기에서 시작되었답니다
숨어있는 세계사/ 조선일보 2014
2014.01.03 한국 설날은 음력, 일본 설날은 양력?
새해 첫날은 대부분 나라에서 중요한 명절이에요. 우리나라에서는 정월 초하루(음력 1월 1일)를 설날로 지키고 있어요. 중국에서는 이날을 춘절(春節), 베트남에서는 뗏(Tet)이라고 부르지요.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 문화권 국가들은 예로부터 유교와 불교, 한자 등 공통적인 문화 요소가 많았어요. 벼농사를 짓고, 젓가락으로 음식을 먹는 점도 아주 비슷하죠. 그래서 명절이나 절기도 유사한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 주변국과는 다르게 일본은 양력 1월 1일을 '간지쓰(元日)'라고 부르며 한 해의 시작으로 여깁니다. 일본의 명절은 언제부터 양력으로 바뀌었을까요?
1853년 일본의 한 바닷가에 미국 배들이 무역을 요구하며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움직이는 이 배들을 '흑선'이라고 불렀지요. 당시 일본을 통치하던 막부는 서양의 강한 군사력을 이길 방법이 없었어요. 결국 1년 후 미국과 불평등조약을 맺으면서 일본의 쇄국정책(鎖國政策)이 무너졌습니다. 쇄국정책이란 다른 나라와 무역 등을 하지 않는 정책을 말해요. 이 일로 막부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지요. 이때 12세기경 무사 정권인 막부가 들어서면서 권력에서 소외되었던 일왕(日王) 세력이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어요. 일왕은 막부를 제거하자는 사람들과 힘을 합쳐 쿠데타에 성공했답니다.
1868년 1월 3일, 메이지(明治) 일왕은 정부와 함께 새로운 일본을 통치하겠다고 발표했어요. 700년간 권력을 잡았던 막부를 쫓아내고, 일왕이 통치하는 시대를 다시 연 것이죠. 사람들은 당시 16세였던 메이지 일왕을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구심점으로 삼았습니다. 일왕의 이름을 따서 '메이지유신'이라고 불린 이 개혁은 헌법이 제정된 1889년까지 이어졌어요.
▲ 일본 전통의상인 기모노를 입은 미키마우스의 모습이 신기하지요? 일본은 메이지유신 이후 서양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어요(위). 메이지유신으로 일본을 개혁한 메이지 일왕 모습이에요(아래 왼쪽). 일본이 1871년부터 2년간 미국과 유럽에 파견한 이와쿠라 사절단 모습이에요(아래 오른쪽). /뉴시스·위키피디아
지방 영주들이 가지고 있던 땅도 모두 일왕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일왕은 전국을 현(縣)으로 다시 나누어 관리를 파견했지요. 무사 계급을 없애는 등 신분제도도 폐지했어요. 무사를 대신해서 모든 남자는 3년간 군대에 가도록 하고, 서양식 무기를 갖춘 군함도 만들었어요. 일왕의 군대가 탄생한 것이지요. 문맹을 없애고자 의무교육 제도도 신설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군대를 양성하고 학교를 유지하려면 많은 돈이 필요하답니다. 그래서 세금 제도를 바꾸고, 수출 산업을 발전시켰어요. 외국에 사절단을 파견하고 서양 문화도 받아들였지요. 이 시기에 음력을 폐지하고 서양처럼 양력만 사용하도록 하면서 양력 1월 1일이 일본의 설날이 되었어요.
수도인 도쿄 모습은 하루가 다르게 변했어요. 서양식 단발머리가 유행하면서 이발소가 생기고, 벽돌로 만든 서양식 건물도 지어졌어요. 프랑스처럼 가스등이 밤거리를 수놓았지요. 마차와 인력거꾼들이 사람을 태워 나르고, 일요일이면 교회에 가는 사람이 늘어났어요. 유행을 이끄는 멋쟁이들은 양복 차림에 구두를 신고 맥주를 마셨습니다. 돈가스와 소고기를 밥 위에 얹어 먹는 냄비 요리도 크게 유행했어요. 덴무 일왕이 불교 신앙에 어긋난다며 육식을 금지한 이후 1200년 만에 고기 요리가 유행하기 시작한 거예요. 일본인 사이에서는 체형(體型)도 서양 사람처럼 변하기를 바라는 마음마저 생겨났어요.
하지만 이러한 변화에 불만을 가진 사람도 늘어났습니다. 바로 무사 계급이었어요. 칼을 차고 다니는 것이 금지되고, 무사의 자존심과도 같았던 머리카락도 잘려나갔거든요. 신분제가 폐지되면서 그동안 누렸던 특권까지 사라졌지요. 이때 무사 계급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조선에 쳐들어가야 한다는 정한론(征韓論)이 등장했으나 반대에 부딪혀 이루어지지 않았어요.
이와 더불어 일본에서는 일왕을 나라의 중심으로 만들기 위한 전국 순회가 이어졌습니다. 행차 때마다 붉고 둥근 태양을 상징하는 깃발이 걸리고, 작은 조약돌이 큰 바위가 되어 이끼가 낄 때까지 충성하겠다는 의미를 담은 기미가요가 울려 퍼졌지요. 1889년에 만들어진 일본 제국헌법에서는 "대일본제국은 만세일계의 천황(일왕)이 통치한다"고 명시하며 일왕을 누구에게도 간섭받지 않는 '신성불가침의 존재'로 만들었어요. 이를 계기로 일본은 조선 등 아시아 각국을 침략하며 태평양전쟁을 주도했습니다. 메이지유신이 일본 근대화를 앞당긴 개혁임은 틀림없지만, 일왕을 중심으로 제국주의 기반을 다지며 침략 전쟁을 일으켜 주변국에 씻을 수 없는 큰 상처를 주었어요.
지난해 12월, 일본 아베 총리의 야스쿠니(靖國) 신사 참배에 대해 전 세계의 비난이 쏟아졌어요. 야스쿠니 신사는 원래 메이지 유신을 위해 목숨을 바친 3588명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만든 곳이에요. 이후 점점 규모가 커지면서 지금은 자그마치 250만명에 달하는 사람의 제사를 지내고 있어요. 문제는 그중에 제2차 세계대전을 주도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은 A급 전쟁 범죄자 14명이 있다는 거예요. 야스쿠니란 이름은 '평화로운 나라'라는 뜻인데요. 정말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일으킨 범죄자를 신(神)으로 섬기는 어처구니없는 일은 하지 않아야겠지요?
공미라 | 세계사 저술가
01.10 지금은 2014년, 우리나라는 4347년
새해가 밝은 지 열흘이 지났지만, 아직도 달력에 적힌 '2014'라는 숫자가 낯설어요. 겨울방학이 며칠이나 남았을까 셈하며 달력을 들여다보는데 갑자기 누나가 아는 체하며 한마디를 던졌어요.
"올해가 서기 2014년이니까 기원전 2333년을 더해 단기로는 4347년이네요."
"그렇지! 우리 딸이 아주 똑똑하구나!"
누나 말을 들은 아빠께서 크게 웃으며 칭찬하셨어요. 저는 누나가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지요.
"서기와 단기라고요? 그게 뭐예요? 기원전은 또 무슨 말이에요?"
생각해 보니 작년에도 아무 생각 없이 '올해는 2013년'이라고 여기며 살았네요. 도대체 작년과 올해는 언제부터 2013번째, 2014번째 해인 걸까요? 또 그 앞에 붙는 '서기'란 과연 무슨 뜻일까요?
"서기는 '서력기원(西曆紀元)'의 약자란다. 과거의 어느 해를 기준으로 해를 계산하는 방법을 기년법(紀年法)이라고 하는데, 서력기원은 서양에서 들어온 기년법을 뜻하지."
▲ ‘서기 1년’은 그리스도가 태어난 해를 말해요. 올해는 그로부터 2014번째 해이지요. /위키피디아
지금으로부터 약 1500년 전 유럽에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스(Dionysius Exiguus)라는 신학자가 살았어요. 그는 교황의 명령으로 '부활제의 서'라는 책을 쓰면서 그리스도가 태어난 해를 계산했대요. 그해가 바로 서기 1년이 되었답니다. 그러니까 서기 2014년은 그리스도가 탄생한 지 2014년째 되는 해를 뜻하는 것이죠. 그리고 서기 1년 이전의 해는 거꾸로 계산하여 '서기 전 몇 년' 또는 '기원전 몇 년'으로 세기 시작했답니다.
"역사책에서 어떤 연도 앞에 'BC'라는 글자가 붙은 것을 본 적 있지? 이는 'Before Christ(그리스도 탄생 전)'의 줄임말로, '기원전'이란 뜻이란다."
"그럼 '서기'는 영어로 어떻게 불러요?"
제 질문에 누나가 끼어들어 대답했어요.
"그건 'AD'라고 써."
"와~ 누나 정말 똑똑한데? 그럼 'AD'는 무슨 말의 약자야?"
"음, 그게 뭐였더라…. After… 아이, 잘 모르겠어!"
어라? 척척박사인 누나도 모르는 게 있었네요? 그때 엄마께서 나타나 누나를 도와주셨어요.
"'AD'는 'Anno Domini'라는 라틴어의 줄임말이란다. '그리스도의 해'라는 뜻이지."
와~ 엄마께서는 정말 모르시는 게 없네요. 누나와 저는 감탄하며 손뼉을 쳤어요. 그때 아빠께서 뭔가 떠올랐다는 듯 말씀하셨어요.
"그런데 나중에 밝혀진 바로는 서기 1년은 진짜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난 해가 아니라고 해. 그리스도가 태어난 해는 기원전 4년이라는 설도 있고, 기원전 7년이라는 주장도 있단다."
아빠의 설명을 듣고 나니 갑자기 혼란스러워졌어요. 그리스도 탄생을 출발점으로 서기 몇 년을 세기 시작했는데, 그리스도가 태어난 해가 서기 1년이 아니라고요? 하지만 이제 와서 서기 1년을 앞당길 수 없기 때문에 그대로 쓰는 거라고 해요.
▲ ‘단기’는 단군이 고조선을 세운 때를 기준으로 해를 계산하는 방법이에요. /토픽이미지
"아니, 그럼 그리스도가 '그리스도 탄생 전(Before Christ)'에 태어난 게 되잖아요?"
누나와 저는 깔깔깔 웃었어요. 실제로 태어난 해보다 7년이나 늦게 출생신고를 한 아이 모습이 떠올랐거든요. 그럼 어떻게 될까요? 남보다 7년이나 늦게 초등학교에 들어간 그리스도의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하하하.
"요즘에는 유럽뿐 아니라 우리나라를 포함한 전 세계에서 서력기원을 공통으로 쓴단다. 그래서 서기 1년을 '그리스도 탄생의 해'가 아니라 그냥 '인류 공통의 해'로 보자는 의견도 있어. 그런 의견을 가진 사람들은 서기 1년을 '공통 시대(Common Era)'라고 부르면서 'CE'로 줄여 쓴단다."
서기 대신 'CE'를 쓰면, 기원전도 'BC'가 아니라 'BCE(Before Common Era)'가 된답니다. 실제로 이웃 나라 중국에서는 우리처럼 서기라는 말을 쓰지 않고 '공원(公元)'이란 말을 쓴대요. '공공의 기원'이라는 뜻이니까 'CE'와 같은 생각이 깔린 거예요. 달력에 쓰인 '2014'라는 숫자에 이렇게 깊고 복잡한 뜻이 담겨 있었군요.
"참! 아까 누나가 말한 '단기'라는 것은 뭐야?"
"응, 그건 '단군기원(檀君紀元)'의 줄임말이야. 단군 할아버지가 고조선을 세운 때로부터 해를 세는 방법이지. 고조선이 기원전 2333년에 세워졌으니까 단기를 계산하려면 서기에다 2333을 더해야 해."
누나가 다시 또랑또랑하게 대답해 줬어요. 서기가 세계 여러 나라가 함께 쓰는 기년법이라면, 단기는 우리나라 사람끼리만 통하는 기년법이군요. 저는 부모님과 누나 앞에서 다부지게 말했어요.
"그럼 나는 올해부터 나만의 방법으로 해를 세야지."
그러자 엄마께서 반색하며 말씀하셨어요.
"어머, 우리 아들이 철드나 보네. 그럼 올해가 공부 열심히 하는 첫 번째 해겠지?"
"아니요. 용돈 많이 받는 첫 번째 해."
제 대답에 아빠와 누나가 크게 웃었어요. 엄마랑 저는 '톰과 제리'처럼 한참 쫓고 쫓겼답니다.
강응천 | 세계사 저술가
01.17 스파르타는 왜 모든 아이를 군인으로 키웠을까
헬리콥터맘, 타이거맘, 스칸디맘, 돼지엄마…. 여러분은 최근 이런 말을 들어봤나요? 자녀 교육에 열정을 지닌 부모의 서로 다른 모습을 표현하는 말들이에요. 이 중 '타이거맘'은 마치 호랑이처럼 자녀를 엄격하고 혹독하게 가르치는 엄마를 말해요. 스칸디맘은 자녀와의 정서적 소통이나 바른 인성, 책임감, 자율성 등을 중시하는 엄마를 뜻하고요. 하지만 이렇게 양육 태도가 달라도 자식을 위하는 부모 마음은 다 똑같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옛날 사람은 어떻게 자녀를 가르쳤을까요? 오늘은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였던 스파르타의 교육법을 살펴볼 거예요. 스파르타는 아이를 국가 소유로 여기며, 국가가 나서서 엄격한 교육을 했답니다.
▲ 스파르타의 왕이었던 레오니다스 동상이에요. 동상에서도 강인함이 느껴지지요? /Corbis 토픽이미지
먼 옛날 스파르타의 어느 집에 검은 곱슬머리의 사내아이가 태어났다고 가정해 봐요. 아이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공회당에서 신체검사를 받아요. 건강하다고 판정되면 부모의 품으로, 그렇지 못하면 골짜기에 버려집니다. 스파르타에서는 아이가 병약하면 부모와 국가 모두에게 짐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부모 품으로 돌아간 아이는 7살이 될 때까지 공놀이, 수레바퀴 굴리기, 그네타기 등을 하며 즐겁게 생활해요. 이때까지가 아이의 '황금기'라고 할 수 있어요.
7살이 되면 아이는 부모와 떨어져 국가가 운영하는 교육기관에 들어갑니다. 여기서 아이들은 조를 짜서 조장을 중심으로 단체 생활을 해요. 머리는 삭발하고, 아무리 추워도 옷 한 벌로 1년을 버텨야 해요. 신발도 신지 않습니다. 잠자리는 자신이 직접 강가에서 뜯은 갈대를 엮어서 만들었고요. 먹을거리는 늘 부족했어요. 배고픔을 이기는 것도 훈련의 하나였으니까요. 게다가 너무 배가 고플 때에는 도둑질하는 것도 훈련에 포함되었다고 해요. 하지만 도둑질을 하다가 들키는 날에는 두들겨 맞아야 했어요. 도덕적으로 나쁜 짓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들켰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철저하게 거짓말하는 법까지 배웠답니다. 이 모든 교육은 전쟁에 대비한 실전 훈련이었지요. 공부는 아주 기초적인 읽기와 셈하기 정도만 배웠습니다. 달리기, 말타기, 씨름, 창던지기 등 체육 시간에 배우는 과목이 가장 중요했어요. 아이는 오로지 용맹하고 국가에 충성하는 군인이 되도록 교육받았고, 제대로 하지 못할 땐 호된 벌을 받았습니다.
▲ 스파르타의 혹독한 교육은 리쿠르고스가 세운 법에 따른 것이라고 해요. /위키피디아
스무 살 즈음이 되면 본격적인 군대 생활이 이어져요. 전쟁이나 폭동이 일어나면 목숨을 걸고 싸웠고, 전쟁이 없을 때에도 계속해서 훈련받으며 어린 아이들을 지도했어요. 서른 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국가로부터 시민의 자격을 얻고 결혼할 수 있었지요. 하지만 이것은 기숙사 생활에서 벗어났다는 뜻이지, 군인을 그만둔다는 게 아니에요. 시민은 끊임없이 군사 훈련을 받으며 전투에 참가해야 했어요.
여자도 예외 없이 강한 체력 훈련을 받았습니다. 여자가 건강해야 튼튼한 남자아이를 낳고 기를 수 있으니까요. 또 남자들이 모두 전쟁터에 나갔을 때 반란이 일어나면 여자들이 나서서 진압해야 했고요. 스파르타의 어머니들은 전투에 나가는 아들에게 "방패를 들고 돌아오든지 아니면 방패 위에 얹혀서 돌아오라"고 말했대요. 전쟁에서 승리하여 살아 돌아오든지, 아니면 죽어서 돌아오라는 뜻이에요. 스파르타 사람들은 전쟁에서 패배하고 죽어서 돌아온 아들은 자랑스럽게 여겼지만, 살아서 돌아온 아들은 집안의 수치로 여겼다고 해요.
스파르타는 왜 이렇게 혹독한 교육을 했을까요? 스파르타의 독특한 인구구성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어요. 스파르타는 기원전 1200년경 펠로폰네소스 반도 남쪽으로 내려온 도리아인이 원주민을 정복하고 세운 나라예요. 당시 도리아인들은 자신들을 헤라클레스의 후손, 즉 '헤라클레이다이(Heraclides)'라고 불렀지요. 그들은 영토를 빼앗는 과정을 '헤라클레이다이의 귀환'이라고 부르며 정당화했어요. 스파르타 시민은 정치·외교·군사 활동을 담당하며, 아래 계급인 페리오이코이 계층에 수공업·무역 등 경제활동을 맡겼어요. 또한 원주민의 후손을 '헤일로타이'라고 부르며 억압하고 노예처럼 부렸습니다. 헤일로타이들이 자기 신분을 잊지 않도록 개가죽 모자와 가죽조끼를 입히고 매로 때렸대요. 이들을 매질하지 않는 시민은 국가에 벌금까지 내야 했어요.
그런데 스파르타에는 이 세 가지 신분 중 헤일로타이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았어요. 자신들보다 20배 가까이 많은 헤일로타이를 거느리고 살려니 스파르타 시민은 늘 불안했지요. 내부의 반란을 막고 외부의 적을 물리치려면 시민은 더욱 강해져야만 했어요. 그래서 전설 속의 인물인 리쿠르고스(Lykurgos)가 강한 국가를 만들기 위해 세웠다는 법에 따라 엄격한 교육을 한 거예요. 강한 군대를 양성한 스파르타는 한때 그리스의 패권을 장악하기도 했지만, 엄하기만 하고 창의성을 배제한 교육 탓인지 그 위상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어요.
▲ 스파르타 군대의 전투 모습을 담은 그림이에요. /Corbis 토픽이미지
2014년 소치 동계올림픽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동계올림픽 참가 선수들은 막바지 훈련에 온 힘을 기울이고 있지요. 선수들의 인터뷰를 보면 "스파르타식 훈련을 받았다"는 말이 종종 나와요. 스파르타의 교육법을 알고 나니 이 말이 다르게 들리지 않나요? 선수들이 얼마나 치열하게 훈련하는지 짐작되지요? 한겨울의 혹한에도 투지를 불태우는 우리 선수들에게 힘찬 응원을 보냅니다.
공미라
01.24 똑같은 그리스도 믿는데 교회는 왜 여러가지일까
우리나라에 세 번째 추기경이 탄생했다는 소식을 학교에서 들었어요. 추기경은 가톨릭에서 교황 다음으로 높은 지위를 가지며, 나중에 교황으로 뽑힐 수도 있다고 해요. 그런데 우리나라에 추기경이 나온 게 세 번째라면, 지금 교황은 과연 몇 번째일까요? 성당에 다니는 영석이에게 묻자 영석이가 엄마께 전화해 보더니 자랑스럽게 대답했어요.
"지금 로마에 계신 프란치스코 교황이 266번째래!"
그러고 보니 어제 프란치스코 교황이 8월에 우리나라에 올지도 모른다는 뉴스를 봤어요. 가톨릭(Catholic)은 도대체 얼마나 오래되었기에 교황이 266명이나 나왔을까요? 호기심이 발동한 저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엄마께 여쭤봤지요.
"엄마, 첫 번째 교황은 누구예요?"
"가톨릭에서는 그리스도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베드로를 초대 교황으로 여긴단다. 베드로는 로마에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전하다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하였다고 해. 당시 로마제국은 크리스트교를 금지하고 있었거든."
▲ 가톨릭에서는 그리스도의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인 베드로를 초대 교황으로 여겨요(위). 바르톨로메오스 정교회 세계총대주교예요. 크리스트교는 서기 1000년 무렵 가톨릭과 정교회로 분리되었답니다(아래 왼쪽). 16세기 종교개혁을 이끈 마르틴 루터 모습이에요. 종교개혁을 통해 개신교가 탄생했지요(아래 오른쪽). /위키피디아
가톨릭은 그리스도를 믿는 크리스트교 중 하나라고 해요. 엄마 덕분에 호기심은 풀렸지만, 내친김에 공부를 더 하겠다는 마음으로 역사책을 뒤지기 시작했지요. 베드로 교황이 순교한 것은 약 2000년 전이었어요. 그 뒤로 265명의 교황이 더 나왔으니, 한 사람이 평균 7년 남짓 교황 자리에 있었던 셈이네요. 베드로 교황이 순교하고 나서도 로마제국은 계속해서 크리스트교를 탄압했어요. 폭군인 네로 황제는 로마에 큰불이 일어나자 크리스트교 신도들을 범인으로 몰아 마구 처형하기도 했지요. 하지만 크리스트교 신도들의 믿음은 꺾이지 않았고, 1600년 전쯤 마침내 로마제국이 크리스트교를 받아들였지요.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북쪽에서 게르만족이 밀려 내려오고, 로마제국은 멸망했어요. 이후 게르만족도 크리스트교를 받아들였는데, 이때 게르만족이 세운 나라들이 오늘날의 영국, 독일, 프랑스 등으로 이어졌지요. 그래서 지금도 이 나라 사람들은 크리스트교를 가장 많이 믿는답니다.
"왜 같은 크리스트교인데 이름이 달라요?"
이 의문은 마침 퇴근하여 집에 오신 아빠께서 풀어주셨어요.
"크리스트교는 서기 1000년쯤 되었을 때 두 갈래로 나뉘었단다. 로마를 중심으로 한 서쪽과 콘스탄티노플(지금의 터키 이스탄불)을 중심으로 한 동쪽의 교회가 서로 비난하면서 갈라졌지. 그때 로마 교황이 이끄는 서쪽 교회는 가톨릭, 동쪽 교회는 정교회라고 불리게 되었어."
가톨릭은 '보편'을 뜻하는 말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천주교'라고도 불린대요. 아하, 그래서 성당을 천주교회라고도 하는구나! 아빠의 설명이 더 이어졌어요.
"그 후로 500년쯤 더 지나서 가톨릭은 다시 둘로 나뉘었어. 가톨릭교회의 지도를 받지 않고도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종교 개혁가들이 나타난 거야. 루터(Luther), 칼뱅(Calvin) 등 종교 개혁가를 따르는 사람들은 가톨릭으로부터 갈라져 나와 나름의 교회를 세우고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지. 이렇게 새로 나타난 교회들을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라고 한단다."
프로테스탄트는 우리말로는 '개신교'라고 해요.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등 여러 교회가 여기에 속하지요. 그리하여 이 세상에는 정교회, 가톨릭, 개신교 등의 크리스트교가 존재하게 되었어요. 그러고 보니 학교에서 영석이랑 개신교를 믿는 소영이가 서로 자기네 교회가 좋다며 입씨름을 벌이던 기억이 나요. 똑같이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왜 그러나 했더니, 아빠 말씀을 들으니까 이해가 되는 것도 같아요.
"엄마, 교황(敎皇)이 무슨 뜻인지 아세요?"
"'교회의 황제'라는 뜻이겠지."
"그럼 영어로는 뭐라고 할까요?"
"글쎄….잘 모르겠네. 교회는 'church', 황제는 'emperor'니까, 'The Emperor of Church'가 아닐까?"
"땡! 틀렸어요! 그냥 'pope'라고요. 척척박사인 엄마도 모르시는 게 있네요."
'pope'가 무슨 뜻이냐고요? 이탈리아에서 교황을 부르는 'Papa(아빠라는 뜻)'에서 유래한 것으로, 신앙의 지도자를 친근하게 부르는 호칭이랍니다. 이렇게 친근한 이름을 '교황'이라는 무거운 호칭으로 번역한 것은 일본 사람들이었어요. 그 번역을 우리나라에서도 받아쓰게 된 것이지요. 저는 가톨릭 신자는 아니지만, 교황보다 '파파(Papa)'가 더 가깝게 느껴져서 좋아요. 더구나 교황은 황제처럼 대를 이어 세습하는 지배자가 아니라 민주적인 선거를 통해 뽑는 지도자 아닌가요?
지금은 각 나라 가톨릭의 대표자인 추기경들이 밀실에 모여 새 교황을 뽑지만, 옛날에는 신자들이 한데 모여 적합한 사람의 이름을 외쳤다고 해요. 여러 신자의 입에서 한 사람의 이름이 나오면 하늘의 뜻으로 여겼답니다. 참 독특하고 재미있는 선거방법이지요? 학급회장 선거도 그렇게 하면 어떨까요? 그날 밤, 저는 우리 반 아이들이 입을 모아 제 이름을 외치는 꿈을 꾸었답니다.
강응천
02.21 1000년간 가장 중요한 발명은 금속활자?
여러분, 학교에서 새 학년 교과서를 받았나요? 새 교과서 내용이 궁금해서 벌써 펼쳐본 친구도 있겠지요? 요즘은 종이로 만든 교과서 말고도 컴퓨터로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는 e-교과서도 사용되고 있어요. 그저 읽기만 하는 교과서가 아니라 게임을 하고, 노래하고, 말하는 교과서로 바뀌는 중이지요. 그런데 여러분은 언제부터 책이 사람들에게 널리 읽혔는지 아나요? 지금이야 우리 주변에 무수히 많은 책이 있지만, 먼 옛날엔 정말 귀하디귀한 존재였답니다.
5000여년 전, 문자가 처음 만들어진 후로 사람들은 많은 이야기를 기록했어요. 그 시절에는 바위나 진흙으로 만든 점토판, 나무판, 동물의 가죽, 금속판 등 다양한 곳에 글을 남겼지요.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은 책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똑같은 책을 여러 권 만들기가 매우 어려웠어요. 내용을 사람 손으로 일일이 베껴 써서 만들어야 했거든요. 중국에서 발명된 종이와 목판 인쇄술이 유럽에 전해지고 나서도 유럽 사람들은 여전히 책을 손으로 베껴 써서 만들었어요. 이렇게 어떤 내용을 손으로 베껴 쓰는 것을 필사(筆寫)라고 하는데, 이 일은 대부분 가톨릭 교회의 수도사(修道士)들이 맡았답니다.
▲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로 인쇄한‘42행 성서’예요. /Corbis 토픽이미지
중세 수도사들이 책을 만든 과정을 알아볼까요? 먼저 양가죽으로 만든 양피지를 부드럽게 만들어 글씨 쓸 준비를 해요. 그러고는 깃털로 만든 펜에 잉크를 찍어 한 글자씩 정성껏 옮겼지요. 여백은 아름다운 그림으로 장식했고요. 이렇게 만든 여러 장의 양피지를 하나로 묶고, 멋진 표지를 붙이면 한 권의 책이 완성됐답니다. 책 한 권을 만드는 데 2~5개월씩 걸릴 정도로 매우 어려운 과정이었어요. 만약 글을 베끼는 중에 불이라도 나면 정말 큰일이겠지요? 그래서 수도사들은 추운 겨울에도 난로를 피우지 않고, 어두운 밤에도 촛불을 켜지 않았다고 해요. 이렇게 만들어진 책 중에 가장 귀한 것은 바로 성경이었어요. 당시에 성경을 읽고 쓴다는 것은 곧 예수와 만나 대화하는 것을 의미했어요. 그래서 성경 필사는 아무나 할 수 없는 대단한 일로 여겨졌지요.
또한 책이 몹시 귀하고 비싸다 보니 이 시기에는 도서관이나 교회 혹은 돈 많은 사람만이 책을 가질 수 있었어요. 심지어 독일의 한 대학에서는 책을 책상에 쇠사슬로 묶어 놓았을 정도라고 해요. 학생들은 자기 책을 가질 수 없으니 수업 내용을 잘 듣고 필기한 내용으로 공부할 수밖에 없었고요.
14~16세기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러 사람들은 인간과 자연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어요. 이러한 관심은 지식에 대한 욕구로 이어졌고, 사람들은 더 많은 책을 원하기 시작했지요. 책을 급하게 많이 만들다 보니 글자를 휘갈겨 쓰거나 틀리게 써서 알아보기 어려운 책이 많아졌어요. 자기 생각이나 신앙심, 사는 지역에 따라 같은 단어를 다르게 해석해서 옮기기도 했지요. 오랜 세월 수없이 베껴 쓰는 동안 원래 책의 내용이 무엇이었는지도 불분명해졌습니다.
그 무렵 독일 마인츠에 살던 요하네스 구텐베르크는 이런 현실이 안타까웠어요. 그는 모든 교회에서 같은 내용의 성경을 볼 수 있다면 종교가 서로 갈라지는 일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한꺼번에 많은 책을 찍어낼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던 구텐베르크는 1450년경 알파벳을 한 자씩 금속활자로 만들어 인쇄하는 새로운 방법을 찾아냈습니다.
▲ (왼쪽 사진)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유럽 전역에 퍼지면서 누구나 책으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시대가 열렸어요. (오른쪽 사진)금속활자는 우리나라에서 세계 최초로 고안됐어요.‘직지심체요절’은‘42행 성서’보다 70년 이상 앞서 인쇄됐지요. /위키피디아·조선일보 DB
구텐베르크의 인쇄소에서는 어떻게 책을 만들었을까요? 먼저 아름다운 글자체를 디자인하여 금속으로 활자를 만들어요. 그런 다음 성경 내용 그대로 인쇄기의 틀 속에 알파벳을 한 자씩 배열하지요. 사람들이 읽기 쉽도록 글자 사이 간격이나 줄 간격도 정확하게 맞춥니다. 배열한 금속활자에 잘 번지지 않는 잉크를 발라 종이에 대고 누름틀로 고르게 누르면 책 한 쪽이 완성되지요. 이렇게 전체 면을 인쇄하여 하나로 묶은 다음 표지를 붙이면 한 권의 책이 탄생해요.
구텐베르크의 인쇄법으로 처음 만든 책은 '42행 성서'입니다. 첫 인쇄 작업에서 180권 정도를 만들었다고 해요. 이 중 48권이 지금까지 전해지는데, 이 책들은 인류가 만든 책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책으로 인정받는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토록 놀라운 인쇄술을 만들어낸 구텐베르크는 이 기술 때문에 망하고 말았어요. 푸스트라는 사람에게 돈을 빌린 것이 화근이었지요. 제날짜에 돈을 갚지 못한 구텐베르크는 인쇄소와 인쇄기를 모두 빼앗기고 말아요. 하지만 그의 인쇄술 덕분에 후대 사람들은 누구나 책을 가질 수 있게 됐어요. 이 말은 곧 누구나 책을 통해 무한한 지식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지요. 1997년 미국의 라이프지(誌)는 지난 1000년간 가장 중요했던 사건으로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로 성서를 인쇄한 일'을 꼽았다고 해요.
사실 금속활자를 이용한 인쇄법은 우리나라에서 세계 최초로 고안했어요. 1234년에 '상정고금예문(詳定古今禮文)'을 금속활자로 인쇄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고, 현재 남아 있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인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은 구텐베르크의 성서보다 70년 이상 앞서 인쇄되었습니다. 자랑스러운 우리 조상의 과학기술을 우리가 잘 이어가야겠지요? 또 지금은 인쇄술에서 더 나아가 3차원 입체 프린터로 물건까지 만들어내는 디지털 세상이 도래했어요. 옛날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지식과 정보가 인터넷에 떠돌고요. 홍수처럼 쏟아지는 정보 가운데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을 선별하는 능력과 정보를 다루는 바른 자세를 가져야 할 때입니다.
공미라
03.14 빵과 장미 외치며… '세계 여성의 날' 탄생했죠
"아니, 얘는 무슨 초콜릿을 이렇게 숨겨 뒀어? 이걸 혼자 다 먹으려나?"
누나 방을 청소하던 엄마께서 혼잣말하시며 예쁘게 포장된 초콜릿 상자를 들고 나오셨어요. 마침 귀가하던 누나가 그 모습을 보고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달려왔습니다.
"엄마! 제 물건을 왜 함부로 만지세요!"
버럭 소리를 지른 누나는 초콜릿 상자를 빼앗아 자기 방으로 뛰어들어 갔어요.
"아니, 쟤가 왜 저래?"
엄마는 어이없다는 듯 누나 방 쪽을 쳐다보셨어요. 그 이유를 아는 저는 엄마 옆에서 히죽히죽 웃었지요. 엄마께서는 수상하다는 눈빛으로 제게 이유를 물으셨어요.
"왜 그러는지 정말 모르세요? 누나가 화이트데이 선물로 남자 친구한테 받은 초콜릿이잖아요."
그러자 엄마뿐 아니라 아빠께서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이구동성으로 말씀하셨어요.
"남자 친구?"
그러자 누나가 방문을 벌컥 열고 나오며 제 말을 반박하는 게 아니겠어요?
"아니에요. 그냥 같은 반 남자애들이 준 거예요. 오늘이 화이트데이니까요."
아, 그러고 보니 오늘이 화이트데이였군요. 엄마를 위해 아무것도 준비 못 한 아빠께서는 그 말을 듣고 머쓱한 표정을 지으셨어요. 때마침 놀러 오신 이모와 이모부께서 아빠를 구해주셨지요. 이모부께서도 초콜릿이나 선물을 안 사셨다는 거예요. 이모께서는 전혀 섭섭하지 않다는 듯한 표정이고요. 의아해하는 우리에게 이모부께서 당당히 말씀하셨습니다.
▲ 지난 8일 브라질 상파울루에서 열린 세계 여성의 날 행사 모습이에요. 세계 여성의 날은 1908년 3월 8일에 미국 여성 노동자들이 뉴욕 러트거스광장에서 벌인 시위를 기념하고자 지정됐어요. /신화 뉴시스
"2월 14일을 '밸런타인데이(Valentine Day)'로 정하여 여자가 남자에게 초콜릿을 선물하는 날로 삼은 것은 일본 초콜릿 회사의 판매 전략이었어. 한마디로 초콜릿을 많이 팔기 위해 만들어낸 풍습이지. 화이트데이(White Day)는 밸런타인데이에 딸려 만들어졌고 말이야. 이모랑 나는 그런 의미 없는 기념일엔 관심 없단다. 게다가 나는 이미 지난주에 이모한테 예쁜 꽃다발을 선물했거든."
이모부 말씀에 누나와 저는 눈이 휘둥그레졌어요. 우리는 이구동성으로 물었습니다.
"지난주요? 지난주에 무슨 일이 있었는데요?"
우리가 알기로 이모 생신은 3월이 아니거든요. 이모와 이모부의 결혼기념일도 봄이 아니라 가을이고요. 그런데 왜 지난주에 꽃을 선물하셨을까요?
"지난주 토요일, 그러니까 3월 8일이 '세계 여성의 날'이었거든. 유엔이 기념일로 지정하여 세계 각국에서 기념하는 날이지."
듣고 보니 그런 이야기를 신문에서 본 것 같아요. 하지만 세계 여성의 날이 화이트데이보다 생소한 것은 사실이지요. 그때 역사에 밝은 아빠께서 말씀하셨어요.
"지금으로부터 100여년 전 1908년 3월 8일에 1만5000여명의 미국 여성 노동자가 뉴욕 러트거스광장에서 '10시간 노동제 실시' '작업 환경 개선' '여성 참정권 허용' 등을 외치며 시위를 벌였단다. 그날을 기념하여 매년 3월 8일을 '세계 여성의 날'로 정했지. 여성의 인권과 지위 향상을 기원하는 날이야."
미국 여성 노동자들이 왜 이런 시위를 벌였을까요? 당시 미국 여성 노동자들은 먼지가 자욱한 현장에서 하루 12~14시간씩 일했다고 해요. 선거권이나 노동조합 결성의 자유도 없었고요. 인간다운 권리를 보장받지 못한 채 오로지 굶어 죽지 않기 위해 일했던 거예요. 그러다가 뉴욕의 어느 열악한 작업장에서 화재가 발생해 많은 여성 노동자가 불에 타 숨졌대요. 이때 숨진 여성들을 기리고자 1908년 3월 8일에 시위가 일어났던 거예요.
▲ (왼쪽 사진)독일 여성운동가 클라라 제트킨의 제안에 따라 1911년부터 각국에서 세계 여성의 날 행사가 열리고 있어요. (오른쪽 사진)캐나다 밴쿠버에서도 지난 8일 세계 여성의 날 행사가 열렸어요. /독일연방노동사회성·신화 뉴시스
"그때 시위를 벌이던 여성 노동자들은 '빵과 장미'를 달라고 외쳤단다. 빵은 가난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뜻이고, 장미는 선거권과 같은 정치적 권리를 달라는 뜻이었지."
그날 미국 여성 노동자들의 시위는 전 세계 여성의 공감을 불러일으켰어요. 2년 뒤인 1910년에 독일의 유명 여성 운동가인 클라라 제트킨은 미국 여성 노동자들의 시위를 기념해 3월 8일을 '세계 여성의 날'로 정하자고 제안했어요. 이 제안에 많은 사람이 동의해 1911년부터 각국에서 세계 여성의 날 행사가 열렸답니다.
"유엔은 1975년에 이날을 기념일로 지정했어. 우리나라도 1984년부터 이날을 전후해 기념행사를 열고 있지. 2001년에는 우리 정부에 여성가족부가 만들어져 여성의 지위 향상을 국가 차원에서 챙기고 있단다."
그때 아빠의 설명을 듣던 엄마께서 한마디 하셨어요.
"그렇게 잘 알면서 왜 지난 8일에 빈손으로 들어오셨을까?"
아빠는 다시 머쓱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어요. 누나와 저는 또 한 번 이구동성으로 외쳤지요.
"아빠, 역사는 현재의 거울이라면서요?"
우리는 모두 하하하 웃었습니다. 내년 3월 8일에는 엄마께서도 예쁜 장미 꽃다발을 받고 환하게 웃으시겠지요?
강응천
03.21 '백의(白衣·흰옷) 천사' 나이팅게일이 활약한 크림전쟁
세계 지도를 유심히 살펴보면 흑해 북쪽에 '크림(Krym) 반도'라는 달콤한 이름을 가진 지역이 있어요. 영어로는 '크리미아(Crimea) 반도'라고 부르지요. 북쪽으로는 우크라이나에 연결되고, 동쪽으로는 케르치 해협을 사이에 두고 러시아와 마주 보고 있어요. 크림반도는 구소련 시절에 우크라이나에 편입되었으나, 1991년 자치권을 얻어 우크라이나의 자치공화국이 되었지요. 주민 대부분은 러시아인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여러분도 뉴스에서 많이 보았겠지만, 요즘 국제사회에서는 크림반도의 러시아 귀속 문제로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어요. 지난 16일, 이 문제를 놓고 주민투표가 이루어졌는데 '투표 주민의 약 97%가 러시아 귀속에 동의한다'는 결과가 나와 전 세계가 크림반도를 주목하고 있지요. 귀속을 찬성하는 크림반도 주민과 러시아, 그리고 이를 반대하는 서구 열강 사이의 갈등도 커지는 추세입니다. 그런데 크림반도를 둘러싼 러시아와 국제사회의 갈등은 이번에 처음 벌어진 게 아니에요. 역사적으로 이미 여러 차례 반복되었지요. 오늘은 19세기에 일어난 '크림전쟁' 이야기를 들려줄게요.
▲ 크림반도는 주민 대부분이 러시아인으로 구성됐어요. 최근 크림반도의 러시아 귀속 문제로 국제사회에 분쟁이 일었지요. /Corbis 토픽이미지
16세기 이래 아시아와 유럽, 아프리카에 걸쳐 대제국을 수립한 오스만제국(지금의 터키)은 19세기에 들어서며 그 세력이 점차 약해졌어요. 외부에서는 영국·프랑스·러시아 등의 강대국이 호시탐탐 오스만제국의 영토를 차지하려는 야욕을 내비치고 있었지요. 특히 러시아는 얼지 않는 항구를 찾아 남쪽으로 내려가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답니다. 내부에서는 오스만제국의 지배를 받던 많은 민족이 독립을 요구하며 끊임없이 반란을 일으켰고요.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오스만제국은 서양식 군대를 만들고 탄지마트라는 개혁을 시도했지만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어요.
마침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가 가톨릭교도들의 인기를 얻고자 오스만제국에 예루살렘 성지(聖地)에서 가톨릭교도에게 특권을 줄 것을 요구하면서 문제의 씨앗이 뿌려졌습니다. 남쪽으로 내려갈 기회만 엿보던 러시아의 니콜라이 1세는 이것이 오스만제국 내에 거주하는 그리스 정교도에 대한 위협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는 이 땅의 그리스 정교도를 돕는다는 명분으로 오스만제국에 선전포고를 했지요. 그러자 영국·프랑스·프로이센·사르데냐가 오스만제국의 편을 들어 러시아와 맞서면서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흑해와 크림반도를 둘러싸고 1853년부터 1856년까지 3년간 벌어진 이 전쟁을 '크림전쟁'이라고 불러요. 전쟁 당시 러시아는 크림반도의 세바스토폴항(港)에서 끝까지 버텼지만, 결국 패배하고 말았지요. 동유럽 일대를 크게 뒤흔든 크림전쟁은 이후 러시아에 근대화 개혁의 바람을 불러일으켰어요. 오스만제국은 전쟁에서 승리했으나, 이후 제국 영토가 점점 작아져 '유럽의 병자(病者)'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고요.
크림전쟁은 무엇보다도 간호위생학 발전에 큰 계기가 되었답니다. 당시 전쟁으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콜레라까지 유행하여 병사들은 속수무책으로 죽어갔어요. 다친 병사들은 크림반도에서 흑해를 건너는 배에 실려 이스탄불로 옮겨졌지만, 의사도 간호사도 충분하지 않았지요. 게다가 당시에는 간호사를 매우 천한 직업으로 여겼기에 누구도 선뜻 간호사로 나서지 않았습니다.
▲ (왼쪽 위 사진)1853년 크림전쟁이 일어났을 당시 주변국 상황이에요. (왼쪽 아래 사진)크림반도를 둘러싼 러시아와 국제사회의 갈등은 과거에도 여러 번 있었어요. 1853년 일어난‘크림전쟁’도 그중 하나이지요. (오른쪽 사진)나이팅게일은 크림전쟁에서 활약하며 간호학 발전을 이끌었어요. /위키피디아
이때 용기 있게 등장한 사람이 바로 우리가 잘 아는 '백의의 천사'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이에요. 영국의 부유한 가정에서 자라 전문적인 간호 교육을 받은 나이팅게일은 넘치는 교양과 통찰력을 지니고 있었어요. 그녀는 38명의 간호대를 조직하여 이스탄불에 있는 위스퀴다르 병원으로 갔지요. 당시 군 병원은 이름만 병원이었지, 응급치료를 마친 환자들이 군복을 그대로 입은 채 제대로 씻지도 먹지도 못했어요. 나이팅게일은 무엇보다도 환자들의 위생 상태를 개선하기 위해서 깨끗한 환자복을 입히고, 침대 시트를 청결하게 관리하며 합리적인 병원 체계를 갖춰 나갔습니다. 병원 운영에 잘못된 관습이 있다면 과감히 바꾸기도 했어요. 아군과 적군을 가리지 않고 치료하며 환자들에게 살고자 하는 의지를 심어주기도 했지요. 밤에는 등불을 들고 병사 한 명 한 명의 상태를 돌보고 다녀 '등불을 든 천사'라는 별명도 얻었어요.
그녀의 활약상이 전해지자 뜻있는 사람들이 성금을 모아 훗날 전쟁이 끝난 후 런던에 간호학교를 세웠다고 해요. 또한 나이팅게일이 꾸준히 써 내려간 '병원에 관한 노트'와 '간호 노트' 등은 각 나라로 전해져 간호법이나 간호사 양성을 위한 기초 교재가 되었습니다. 나이팅게일을 통해 많은 여성이 간호 전문 인력으로 일할 수 있게 되었고요. 여성의 사회 참여와 함께 사회적 지위가 올라가는 큰 변화까지 가져왔답니다.
지금도 간호사가 되려는 사람들은 "나는 일생을 의롭게 살며 전문 간호직에 최선을 다할 것을 하느님과 여러분 앞에 선서합니다. 나는 인간의 생명에 해로운 일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지 않겠습니다…"라는 내용의 나이팅게일 선서를 해요. 국제적십자를 만든 앙리 뒤낭은 "내가 적십자를 만들기 위해 나선 것은 크림전쟁에서 보여준 나이팅게일의 희생과 봉사정신 때문이었다. 적십자를 만든 건 내가 아니라 나이팅게일이다"라고 말했다고 해요. 나이팅게일의 삶은 피비린내 나는 전쟁 속에서도 한 사람의 숭고한 정신이 세상을 얼마나 아름답게 변화시키는지 잘 보여줍니다.
공미라
04.11 대한제국에서 '대한민국'으로
"아빠, 궁금한 게 있어요."
호기심 많은 누나가 아침부터 아빠께 질문 공세를 펼치기 시작했어요.
"우리나라가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기 전까지는 황제의 나라였잖아요?"
"그렇지."
아빠는 고개를 끄덕이시며 가볍게 미소 지으셨어요. 마치 무슨 질문을 하려는지 다 아신다는 듯한 표정이었지요.
"그럼 빼앗긴 나라를 되찾았을 때 다시 황제의 나라가 되어야 했을 텐데, 왜 그렇게 되지 않았어요?"
누나의 질문을 들으니 저도 덩달아 궁금해지네요. 생각해 보면 우리나라는 일제에 국권을 빼앗길 때까지 대한제국(大韓帝國)이었잖아요? '제국'이란 황제가 다스리는 나라를 뜻해요. 조선은 본래 '왕'이 다스리는 왕국이었는데, 일제의 식민지가 되기 13년 전에 고종이 이보다 더 높은 황제의 나라를 선포하면서 대한제국으로 이름을 바꿨답니다. 고종은 '광무(光武)'라는 독자적인 '연호(年號)'도 사용하였어요. 연호란 중국에서 비롯되어 한자를 사용하는 아시아의 군주국가에서 쓰던 기년법(紀年法·어떤 특정 연도로부터 햇수를 세는 방법)을 말해요. 그러다가 나라를 빼앗겼으면 독립 후에 당연히 대한제국으로 돌아가려고 하지 않았을까요?
"이번 주 일요일(13일)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기념일이라는 것을 알고 묻는 거지?"
▲ 1919년 3·1운동 직후, 우리 독립운동가들은 조국 독립을 위해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였지요. 사진은 지난달 1일 서울 광화문에서 열린 3·1운동 재연 행사 모습이에요. /이태경 기자
아빠께선 환하게 웃으며 되물으셨어요.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지 9년 뒤 중국 상하이에 세워진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 단체랍니다. 1919년 3월에 온 겨레가 독립을 요구하는 만세 운동을 펼친 사실은 우리 국민 누구나 알고 있지요. 그 무렵 나라 안팎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민족 지도자들은 독립을 체계적으로 추진할 임시정부를 세워야 한다는 데 뜻을 같이했어요. 그래서 서울과 중국, 러시아 등지에서 임시정부를 선언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답니다. 그런 임시정부들을 하나로 모아 상하이에 세운 것이 바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였어요.
"네. 학교에서 '민국(民國)'은 국민이 주인인 나라라는 뜻이라고 배웠어요. 그렇다면 대한제국과 달리 대한민국은 황제를 인정하지 않는 나라지요? 그렇다면 우리 독립운동가들은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으려 한 것이 아니라 새 나라를 세우려 한 것이잖아요?"
"그렇지. 네 말대로 우리 독립운동가들은 단지 빼앗긴 나라를 되찾으려고 일제에 저항한 게 아니란다. 조선이나 대한제국보다 훨씬 더 나은 나라를 세우기 위해 그것을 방해하는 침략자들과 싸운 거야."
물론 처음에는 황제가 다스리는 대한제국을 되찾으려고 노력한 독립운동가들도 있었대요. 주로 조선 왕조나 대한제국에서 높은 지위를 누리던 유학자들이 그런 노력을 했지요. 이처럼 군주가 다스리는 나라를 되살리려 한 것을 '복벽(復�)운동'이라고 해요. 우리나라뿐 아니라 중국에서도 1917년에 청 왕조를 부활시키려는 복벽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대요.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점점 더 많은 독립운동가가 왕국이나 제국을 낡은 시대의 유물로 여기고, 국민이 주인이 되어 나라를 직접 운영하는 공화국(共和國)을 꿈꿨답니다. 공화국이란 주권을 가진 국민이 직접 또는 간접 선거를 통해 일정한 임기를 가진 국가원수를 뽑는 국가 형태를 말해요. 그때 영어에 자신 있는 엄마께서 말씀하셨어요.
"당시에는 공화국을 '민국'이라고도 불렀어. 대한민국을 영어로는 '리퍼블릭 오브 코리아(Republic of Korea)'라고 하지? 여기서 '리퍼블릭'이 바로 공화국이라는 뜻이란다."
그러자 아빠께서도 이에 질세라 설명을 이어가셨어요.
"3·1운동이 일어나기 2년 전에는 신채호, 박은식, 신규식, 조소앙 같은 민족 지도자들이 상하이에 모여 우리 민족의 독립국은 공화국이 될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혔단다."
▲ (왼쪽)1919년 중국 상하이에 세워진 대한민국 임시정부청사 모습이에요. (오른쪽)1917년 중국에서는 청 왕조를 되살리려는 복벽운동이 일어났어요. 사진은 중국 마지막 황제 로 알 려 진‘푸이’예요. /조선일보 DB·위키피디아
아빠께서는 그것이 바로 '대동단결 선언'이었다고 말씀하셨어요. 여기서 민족 지도자들은 일제에 국가의 주권을 빼앗긴 것은 대한제국의 황제이지, 국민이 아니라고 주장했어요. 황제가 국가의 주권을 포기하면 그 주권은 당연히 그 나라의 국민에게 가는 것이지, 일제 같은 바깥의 침략자에게 가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였지요.
"대동단결 선언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 국민이 황제 대신 나라의 주인이 되었다는 것을 온몸으로 보여준 것이 바로 3·1운동이었단다. 3·1운동을 원동력으로 삼아 민족 지도자들이 한마음으로 '대한제국'이 아닌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할 수 있었어."
부모님의 설명을 들은 누나가 눈을 반짝이며 외쳤어요.
"아하! 그래서 우리나라 헌법 전문(前文)에도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자랑스럽게 적어둔 것이군요!"
대한민국 헌법의 맨 앞에 나오는 전문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으로 시작한답니다. 저도 누나에게 질세라 큰 소리로 말했어요.
"일제가 총칼을 앞세워 황제를 굴복시키고 국권을 빼앗았는데 10년도 안 되어 온 국민이 일어나 독립을 선언하다니, 우리 국민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겠어요! 그것도 황제의 나라가 아닌 국민의 나라로 가는 길을 활짝 열었잖아요!"
우리 가족은 모두 하하하 웃은 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기념일에 무엇을 할지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답니다.
강응천
05.02 불교, 어떻게 인도에서 세계로 퍼졌을까?
먼 옛날, 지금의 인도와 네팔 국경 부근 히말라야 산기슭에 작은 나라가 있었어요. 기원전 563년 음력 4월, 이 나라의 왕비였던 마야 부인은 아기를 낳기 위해 친정으로 향했습니다. 그녀는 길을 가던 중 네팔의 룸비니라는 곳을 지나가다 아름다운 호수를 만났어요. 호수에서 몸을 씻고 잠시 쉬는 사이, 갑자기 진통이 찾아왔습니다. 마야 부인은 나무 아래에서 아들 고타마 싯다르타를 낳았어요. 이 아이는 먼 훗날 '깨달음을 얻은 자'라는 뜻의 '부처'라는 이름을 갖게 되지요. 그리고 자비와 평등의 종교, 불교(佛敎)를 만들었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음력 4월 8일(올해는 양력 5월 6일)을 '부처님 오신 날'로 지키며, 이날 연등행렬·법회·방생 등 다양한 행사를 열어요. 불교를 믿는 다른 아시아 국가에서도 날짜에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모두 부처님 오신 날을 크게 기념합니다. 그런데 인도의 작은 나라에서 만들어진 불교가 어떻게 세계적인 종교가 되었을까요?
▲ 부처님 오신 날을 앞두고 지난달 16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봉축 행사의 시작을 알리는 탑등 점등식이 열렸어요. /이명원 기자
불교가 만들어지고 300여 년이 흐른 후, 인도 땅에 큰 변화가 나타났어요. '마우리아'라는 통일왕국이 처음으로 들어선 거예요. 찬드라굽타가 세운 이 나라는 인도 남동쪽 칼링가와 남부 지역을 제외한 대부분 지역을 모두 통일했어요. 그리고 제3대 왕인 아소카는 마우리아 왕국을 가장 강력한 나라로 만들었지요. 그는 왕이 되기 위해 100명이 넘는 형제와 권력 다툼을 벌였고, 99명의 형제를 살해한 끝에 왕위에 올랐다고 해요. 이에 반대하는 신하들도 모두 죽임을 당했습니다.
아소카는 왕이 된 후 영토를 넓히고자 칼링가를 침략했어요. 보병 60만명, 기병 10만명, 코끼리 9000마리로 구성된 대군을 이끌고 치열한 전투를 벌였지요. 이 전투로 10만명의 사람이 죽고, 15만명이 포로가 되었습니다. 바람대로 왕국의 영토는 넓어졌지만, 아소카의 마음은 편하지 않았어요.
'무엇을 위해 사람을 죽였을까' '왜 여자와 어린아이처럼 죄 없는 사람이 희생되어야 했을까' 등 많은 후회가 밀려왔지요. 승리의 기쁨은 잠시였고, 죄책감에 잠 못 드는 밤이 늘어났어요. 잔인한 왕이었던 아소카는 칼링가 전투를 계기로 자신의 욕심이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주었는지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비'와 '평화'라는 부처의 가르침에 따라 왕국을 통치하기로 마음먹지요.
▲ (사진 왼쪽)아소카 왕은 나라 곳곳에 불교의 가르침을 담은 돌기둥을 세웠어요. 그가 세운 사자 장식 돌기둥은 지금 인도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사진 오른쪽)아소카 왕은 자비와 평화를 통치 이념으로 삼고, 그리스·이집트 등 전 세계로 불교를 전파했어요. /Corbis/토픽이미지, 위키피디아
아소카가 불교를 믿기 시작하면서 인도에 많은 변화가 생겼어요. 생명을 살리고자 사람과 동물을 위한 병원이 만들어지고, 육식이 금지되었습니다. 각 지역에 도로가 건설되고 여행자를 위한 숙소도 생겼지요. 가난한 사람을 위한 구호시설을 세우고, 길에는 과일나무를 심어 언제든지 나그네가 열매를 따 먹을 수 있도록 했어요. 곳곳의 우물과 저수지는 누구나 이용할 수 있었지요. 아소카 왕은 부모와 어른을 공경하고, 무거운 짐을 들고 가는 사람이 있으면 도와주라고 백성에게 강조했어요.
아소카 왕은 이러한 내용을 절벽의 바위나 돌기둥에 새겨 널리 알리도록 했습니다. 불교의 가르침을 담은 수십 개의 돌기둥이 세워지고, 사람들은 자비와 평등을 실천하기 시작했어요. 특히 사르나트에 세운 사자 장식 돌기둥은 오늘날 인도의 상징이 될 만큼 아름답게 만들어졌지요. 아소카는 부처와 관련된 유적지를 순례하고 돌기둥을 세웠어요. 오랜 세월 방치된 룸비니가 부처의 탄생지라는 사실이 알려진 것도 아소카가 세운 돌기둥 덕분이었답니다. 그는 부처의 몸에서 나온 사리를 찾아내 8만4000개로 나누어 각 지역에 전하고, 사리를 보관하는 스투파(탑)를 곳곳에 세웠다고 해요. 그리고 불교를 전파하는 사람들을 지중해 주변의 그리스·마케도니아·이집트·시리아 등으로 파견했습니다. 아소카의 아들과 딸이 동남아시아의 실론(지금의 스리랑카)에 불교를 전하면서 미얀마·태국까지 불교가 퍼져 나갔어요. 욕심을 버리고 자비와 평등을 강조하는 불교 교리에 아소카의 노력이 더해져 세계적인 종교로 성장하기 시작한 거예요.
한때 잔인한 왕의 상징이던 아소카는 이제 '평화'를 상징하는 왕이 되었어요. 지금도 많은 인도인이 아소카를 인도를 대표하는 왕으로 기억한답니다. 불교에서는 위대한 왕을 '전륜성왕(轉輪聖王)'이라고 부르는데, 아소카는 속세(俗世·불교에서 일반 사회를 이르는 말)를 다스리는 전륜성왕이라는 칭송을 받아요. 아소카가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우리아 왕국은 멸망하지만, 불교는 계속해서 퍼져 나갔지요. 이후에 들어선 쿠샨 왕국의 카니슈카 왕은 비단길을 따라 중국·우리나라·일본 등 동북아시아 지역에 불교를 전파했답니다.
세월호 참사의 슬픔 속에 맞이하는 부처님 오신 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아소카가 세운 돌기둥에는 저마다 다른 내용이 담겼지만, '경건한 마음과 생명 존중, 정직한 태도'는 공통으로 강조되어 담긴 덕목이에요. 요즘 이 말의 의미가 더 가슴 깊이 와 닿습니다.
공미라
05.09 중국은 6월, 캐나다는 11월… 나라별로 달라요
▲ 우리나라의 ‘어린이날’을 만든 소파(小波) 방정환 선생이에요.
"얘들아, 축하해!"
지난 월요일(5일)은 어린이날이었어요. 아침 일찍 엄마께서 예쁘게 포장된 선물 상자를 저희 남매에게 안겨 주셨습니다. 저는 포장을 풀면서 누나 것을 힐끔힐끔 쳐다봤어요. 누나는 뭘 보냐는 듯이 인상을 쓰더니 선물을 들고 홱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답니다.
"엄마, 누나는 중학생이니까 이제 어린이가 아니잖아요?"
누나가 사라지자 저는 엄마께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투정 부렸어요.
"저한테만 선물을 줄 수 없으니까 누나도 끼워 주신 거죠? 그런데 설마 제가 중학교 들어가면 둘 다 안 주실 거예요?"
걱정스러운 듯한 제 질문에 아빠께서 피식 웃으며 대답하셨습니다.
"우리 아들은 아무래도 어른이 되려면 한참 멀었는걸. 중학생이 아니라 고등학생, 대학생이 되어서도 어린이날 선물을 받아야겠어!"
그러자 엄마께서 덧붙여서 말씀하셨어요.
"사람들은 보통 초등학생을 어린이로 여기지만, 우리나라 아동복지법에는 '만 18세 미만'을 아동의 기준으로 정해 놓았단다. 하지만 엄마한테 너희는 언제까지나 어린이 아니겠니? 선물은 얼마든지 줄 테니 바르게만 자라다오."
엄마 말씀을 듣고 보니 생각나는 게 있었어요. 할아버지 할머니 댁에 갔을 때 할머니께서 아버지더러 '우리 새끼, 우리 새끼' 하시면서 마치 아이처럼 대하던 모습이지요.
"엄마 아빠가 어릴 때도 어린이날이 있었어요?"
"그럼! 엄마는 시골에서 학교 다녔는데 어린이날이 되면 학교에서 사탕도 주고, 신나는 놀이도 해서 그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
"아참, 그렇구나! 소파 방정환 할아버지가 어린이날을 만드셨다고 했지!"
엄마 말씀을 듣고 생각해 보니 우리나라에 어린이날이 만들어진 지도 벌써 100년이 다 되어 가네요. 방정환은 1919년 3·1운동 당시 민족 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던 천도교 교주 손병희의 사위였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아동을 '아이' '애' '어린애' 등으로 부르면서 어른들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존재로만 여겼대요. 그런데 3·1운동 이후 방정환 같은 분들이 우리 사회가 아동을 보호하고 민족의 대들보로 잘 키워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아동을 높여 부르는 말로 '어린이'를 쓰기 시작하고, 1923년부터 어린이날을 제정해 행사를 가졌답니다. 그때는 어린이날이 5월 1일이었다가 해방 후에 5월 5일로 바뀌었어요.
▲ 지난 5일 어린이날 서울 강북구 북서울꿈의숲에서 즐겁게 노는 어린이들의 모습이에요. 우리나라에서는 1923년부터 어린이날을 제정해 기념했어요. /김지호 객원기자
"그런데 다른 나라에는 어린이날이 없어요? 중국에 간 형식이가 이메일을 보냈는데, 거기는 5월 5일이 어린이날 아니래요."
"어린이날은 나라·문화권에 따라 다른데, 우리나라와 일본은 5월 5일을 어린이날로 정했단다. 그런데 일본은 3월 3일을 따로 '여자 어린이의 날'로 정해 기념한다는구나."
그러자 아빠께서 대답을 이어가셨어요.
"중국은 어린이날이 없는 게 아니라 6월 1일을 '국제아동절'로 정하여 기념하고 있지."
아빠 말씀에 따르면, 1925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아동 복지를 위한 세계 회의'에서 처음으로 전 세계가 어린이날을 정해 기념하기로 했대요. 우리 민족이 어린이날을 제정한 것보다 2년이나 늦었군요! 우리나라는 나라를 빼앗긴 상황에서 민족의 미래를 이끌 어린이의 소중함을 더 일찍 깨달은 것 아닐까요?
"중국의 어린이날인 6월 1일은 1949년 구소련(현재는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열린 국제민주여성연맹이사회가 정한 날이야. 세계적으로 이날을 어린이날로 정한 나라가 가장 많다고 해."
6월 1일을 어린이날로 기념하는 나라는 40개국이 넘는다고 해요. 그다음으로 많은 날은 11월 20일이에요. 1954년 유엔총회에서 이날을 세계 어린이의 날로 정했는데, 캐나다, 필리핀 등 10개국 정도가 이날을 어린이날로 기념한대요. 그런데 갑자기 아까 자기 방으로 들어갔던 누나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방문을 열고 나왔어요.
"엄마, 이 소설 너무 슬퍼요!"
누나는 오늘 선물로 받은 책 '올리버 트위스트'를 읽다가 나온 것 같아요. 그러고 보니 저는 선물 상자를 뜯다 말았군요. 제 상자 안에도 초콜릿과 함께 어린이용 '올리버 트위스트'가 들어 있었어요.
▲ 영국 작가 찰스 디킨스는 1838년 출간한 소설 ‘올리버 트위스트’를 통해 당시 영국 사회의 불평등한 계층화와 산업화의 폐해를 비판했어요. 사진은 영화 ‘올리버 트위스트’ 한 장면이에요. /Sony Pictures
"이 소설에 나오는 올리버가 너무 불쌍해요. 고아로 태어난 어린이한테 이런 고생을 시키다니, 영국도 옛날엔 나쁜 나라였네요!"
'올리버 트위스트'는 영국 작가 찰스 디킨스가 1838년에 쓴 장편소설이에요. 영국 런던의 뒷골목에서 힘겹게 자라는 고아 소년의 성장 과정을 통해 당시 영국의 어두운 모습을 비판한 명작이지요. 작가인 디킨스도 어릴 때 구두약 공장에서 일하면서 어렵게 자랐다고 해요.
"옛날에는 영국 같은 선진국에서도 어린이를 보호하지 않고 하루 10시간 넘게 강제 노동을 시키는 일이 많았단다. 그런 과거가 있기 때문에 유엔 등 국제기구에서 어린이날을 정하여 지키라고 하는 거야."
아빠 말씀을 들으니까 옛날 어린이들이 무척 불쌍해졌어요. 하지만 이 세상에는 아직도 어린이한테 강제로 일을 시키거나 심지어는 총을 들고 싸우게 하는 나쁜 어른이 많답니다. 2013년 기준으로 5~14세 사이 어린이 1억 5300만명이 힘든 노동에 시달린다고 해요.
"엄마 아빠! 우리를 안전하게 지키고 잘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는 선물 투정하지 않고 말 잘 듣는 어린이가 될게요."
갑자기 철든 소리를 하는 저를 보며 엄마 아빠는 환하게 웃으시고, 누나는 영문을 몰라 한참 동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답니다.
강응천
05.16 공자·노자·장자… 전쟁이 키운 사상가들
어제는 스승의날이었어요. 우리나라 스승의날은 한글을 만든 세종대왕이 태어난 날이지요. 다른 나라들도 교육 발전을 위해 힘쓴 사람이 태어난 날이나 숨진 날을 스승의날로 정하여 기념하고 있어요. 최근 중국에서는 공자가 태어난 9월 28일을 스승의날로 정하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습니다. 사마천이 쓴 역사책 '사기(史記)'에 따르면, 공자는 제자를 3000명 거느렸다고 해요. 제자가 아주 많았다는 의미이지요.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교육했고, 제자의 특성에 따라 방법을 달리하여 가르쳤던 공자의 교육법은 오늘날에도 귀감이 됩니다. 그런데 공자가 활동하던 시기, 중국에는 공자 말고도 수많은 선생님이 있었어요. 오늘은 '춘추전국(春秋戰國)'이라고 하는 시대에 중국에서 어떤 선생님들이 활약했는지 살펴보기로 해요.
춘추전국시대는 기원전 770년부터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기원전 221년까지 매우 혼란했던 시기를 말해요. 중국 역사상 가장 긴 분열의 시대였지요. 이 시기에는 수십 나라가 중국을 차지하고자 서로 다퉜답니다. 춘추시대에는 제(齊), 진(晉), 초(楚), 오(吳), 월(越) 등 다섯 나라가, 전국시대에는 제(齊), 초(楚), 진(秦), 연(燕), 위(魏), 한(韓), 조(趙) 등 일곱 나라가 세력을 떨쳤지요. 그런데 이 나라들이 끊임없이 전쟁을 하려면 많은 것이 필요했어요. 강한 군대와 많은 식량, 새로운 무기 그리고 지략을 갖춘 지도자 등 무엇 하나 빠짐없이 갖추어야만 강한 나라가 되어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이 시기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어요. 당시 정치 상황은 매우 혼란했지만, 혼란한 만큼 많은 분야에서 큰 발전을 이루었거든요.
▲ 공자는 3000명의 제자를 두었는데, 제자의 특성에 따라 교육법을 달리하여 가르쳤다고 해요. /Corbis 토픽이미지
이 시기 사람들은 불의 온도를 높이고 철을 다루는 기술을 알게 되면서 새로운 무기와 농기구를 만들기 시작했어요. 농사에 소를 이용하기도 했고요. 땅을 더 깊이 갈아 농사를 짓게 되자 곡식 생산량이 증가하고 인구도 늘어났습니다. 먹고 남는 곡식을 거래하면서 화폐와 시장이 생겨났지요. 칼이나 농기구 모양 화폐가 통용된 것으로 보아 당시 사람들은 실제 사용하는 물건 모양을 본떠 화폐를 만든 것 같아요. 철로 만든 무기를 들고 전쟁터에 나설 때에는 겁나는 게 없을 정도였답니다. 전쟁 규모가 커지고, 중국 영토도 넓어졌어요. 철을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경제와 사회가 몰라보게 발전한 거예요.
한편 각 나라의 제후들은 국적과 신분을 따지지 않고 인재라고 여겨지는 학자를 받아들여 벼슬을 주었어요. 신분보다는 능력이 중요한 사회였지요. 많은 학자가 강하고 부유한 나라를 만들기 위한 아이디어를 가지고 이 나라 저 나라를 찾아다녔습니다. 학자와 선생님에게는 존경한다는 의미로 '자(子)'라는 칭호를 주었는데, 이때 공자(孔子), 맹자(孟子), 노자(老子), 장자(莊子), 묵자(墨子), 한비자(韓非子) 등 여러 선생님이 등장했답니다. 그리고 이들이 제자들을 이끌며 새로운 학풍을 만드는 것을 '가(家)'라고 하였어요. 이 시기에 많은 선생님이 여러 가지 학풍을 만들면서 동양 사상이 크게 발전하였다는 의미로 '제자백가(諸子百家)'라는 말을 쓴답니다.
'이 혼란한 세상을 어떻게 다스리면 좋을까요?'라는 제후들의 물음에 학자들은 마치 새들이 울듯이 앞다투어 의견을 내놓았습니다. 공자는 "사람에게는 저마다 어울리는 일이 있습니다. 왕은 백성을 덕으로 다스리고, 신하는 왕을 충성으로 섬기며, 백성은 자신이 맡은 바를 다하면 됩니다.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도리를 가르치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요.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며,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고,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합니다"라고 말하며 유가 사상을 이끌었어요. 도가 사상을 주장한 노자와 장자는 "인간이 만든 도덕이나 법은 백성을 힘들게 합니다. 가만히 두어도 질서가 있는 자연처럼 인간도 자연의 모습 그대로 두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라고 주장했지요. 엄격한 법을 강조한 한비자는 "그냥 가만히 내버려 두다니요? 안 됩니다. 부강한 나라가 되려면 신분을 막론하고 엄격한 법을 정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누구나 처벌이 무서워 법을 지킬 테니까요"라고 말했고요.
▲ (위 왼쪽)춘추전국시대는 기원전 770년부터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기원전 221년까지를 말해요. 이 시기에는 여러 나라가 중국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다퉈 정치적으로 매우 혼란했어요. (위 오른쪽 사진)춘추전국시대에 통용된 농기구 모양 화폐인 포전이에요. (아래 사진)중국 엄성춘추놀이공원에 재현된 제자백가 모습이에요. 춘추전국시대에는 유가, 도가, 법가 등 새로운 학풍이 많이 등장하여 동양 사상을 크게 발전시켰지요. /조선일보 DB·바이두
이렇게 다들 목소리를 높이고 있을 때 묵자는 "전쟁은 지배층에게만 이로운 것입니다. 백성을 위해서는 그만두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사랑하며 서로 존중하려는 태도를 가진다면 세상에는 평화가 찾아올 것입니다"라고 호소했어요. 손자는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로워지지 않습니다. 전쟁을 해서 이기는 것보다 전쟁하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선입니다"라는 말과 함께 '손자병법'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이 사상들은 훗날 중국에 큰 영향을 끼쳤어요. 유가는 유교로 발전하여 중국뿐 아니라 우리나라와 일본의 통치 질서와 생활 윤리에 영향을 미쳤어요. 도가는 도교로 변화되어 마음의 위로와 안식을 주는 종교로 거듭났지요. 법가는 이후에도 사회의 규범과 법률을 만드는 데 기여했답니다. 중국 사상의 중심이 된 많은 선생님이 등장했던 춘추전국시대. 여러분이 만약 춘추전국시대의 제후였다면 어떤 선생님의 사상을 받아들였을까요?
공미라
06.13 최초의 민주주의 국가 아테네… 시민이 직접 정치 참여
▲ 클레이스테네스(왼쪽 사진)와 페리클레스는 고대 아테네의 민주정치를 이끈 대표적인 정치인이에요. /www.ohiochannel.org·위키피디아
'민주주의(民主主義)'란 무엇일까요? 어떤 단어를 쉽게 설명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중 하나는 반대말을 찾는 거예요. 국가권력을 한 사람이 부당하게 가진 독재정치가 바로 민주주의의 반대말이라고 할 수 있어요. 민주주의는 국민이 국가의 주인으로서 국가권력을 스스로 행사하는 정치 체제를 말하거든요. 우리나라는 민주주의 역사가 짧지만, 깨어 있는 많은 시민이 독재에 저항하며 민주주의를 발전시켜왔어요. 국민이 투표로 결정한 헌법에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명시했지요. 그리고 국가권력이 한곳에 집중되지 않도록 삼권분립을 보장해요. 삼권분립이란 국가권력을 입법부·사법부·행정부 셋으로 나누어 균형을 이루게 하는 제도를 말해요. 또한 국민의 정치 참여를 실현하기 위해 지방자치제를 실시한답니다.
지난 4일에는 온 국민의 관심 속에 지방선거가 시행되었어요.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불립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국민이 투표를 통해 자신의 정치적 의사를 표현하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우리의 한 표는 종이 한 장의 무게를 넘어 아주 무겁고 큰 가치를 갖는답니다. 그럼 이러한 민주주의는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요? 오늘은 민주주의가 처음 시작된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로 함께 떠나 봐요.
아테네는 원래 왕이 다스리는 도시국가였어요. 그러나 전쟁이 잦아지고 귀족이 기마부대로 활약하면서 귀족정치가 이루어졌지요. 이후 전쟁이 더 잦아지자 이번에는 갑옷과 투구, 창을 들고 보병으로 활약한 부유한 시민의 세력이 커졌어요. 귀족과 부유층이 대립하는 사이에 '참주정치'라는 독재정치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기원전 5세기,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해군이 큰 승리를 거두면서 또 다른 변화가 찾아왔어요. 승리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사람들이 바로 배의 밑바닥에서 노를 젓던 평범한 시민이었거든요. 시민을 정치에 참여시키고, 독재를 방지하기 위한 민주적인 정치 개혁이 이루어진 거예요
▲ 그리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언덕 아래에 있는 아고라 광장은 고대 아테네 민주정치의 상징이에요. 아테네 시민은 이곳에서 1년에 40여 차례 민회를 열어 나랏일을 함께 의논하고 결정했어요. /토픽이미지
아테네의 정치인인 클레이스테네스는 전국을 10개의 마을(demos)로 나누고, 추첨을 통해 500명의 공무원을 뽑게 했어요. 물론 모든 마을에서 동일한 숫자의 대표가 뽑혔지요. 남자들은 18세가 되면 추첨을 하거나 순서를 정해 번갈아가며 공무원으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아르콘이라는 최고 지도자도 분야별로 뽑았고요.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는 아크로폴리스 언덕 아래에 있는 아고라(광장)에서 민회(民會)를 열어 함께 결정했어요. 1년에 40여 차례 회의가 열렸다고 해요. 9일에 한 번꼴이었지요. 그래서 아고라는 늘 토론하는 사람이나 장사하는 사람, 재판을 구경하는 사람, 민회에 참가한 사람 등으로 북적였어요. 아고라는 살아 숨 쉬는 아테네의 심장과 같은 곳이었답니다.
그런데 클레이스테네스에게 한 가지 걱정이 있었어요. 혹시 독재를 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 공무원으로 뽑힌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것이었지요. 그래서 아고라에 모인 시민은 독재 가능성이 있는 사람의 이름을 아무도 모르게 도자기 조각에 적는 선거를 했어요. 6000표가 넘게 나온 사람은 별수 없이 아테네에서 10년간 추방당해야만 했지요. 이를 '도편추방법'이라고 합니다. 독재자가 될지도 모르는 사람을 뽑아 추방함으로써 아예 독재의 싹을 잘라버린 거예요. 클레이스테네스는 자신의 개혁으로 시민 모두에게 동등한 권리가 주어졌다고 믿었어요. 단, 여자와 외국인, 노예를 제외하고 말이에요. 아테네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페리클레스는 유명한 연설을 통해 "몇 사람이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 골고루 나누어 맡은 우리의 정치를 '민주 정치(democratia)'라고 부른다"라며 자랑스러워 했어요. 모든 사람(demos)에 의한 지배(kratos)라는 뜻이지요. 오늘날 민주주의를 뜻하는 영어 단어 'democracy'도 여기에서 유래했습니다.
▲ 고대 아테네에서는 독재 가능성이 있는 사람의 이름을 도자기 조각에 적어 투표하는 ‘도편추방법’을 실시했어요. 여기서 뽑힌 사람은 10년간 추방되었대요. /Giovanni Dall’Orto/위키미디어
제한된 직접 민주정치를 시행한 아테네와 달리 현대 국가들은 인구가 많고 영토가 넓어서 직접 민주정치를 시행하기 어려워요. 그래서 선거를 통해 대표를 선출하는 대의제 민주정치를 시행하고 있지요. 그리고 아테네와 달리 대부분 나라에서 성별·인종·종교·교육·신분·재산 등에 관계없이 일정 연령 이상의 사람 누구에게나 선거권을 주는 보통선거를 시행해요. 우리나라는 만 19세 이상이면 누구에게나 투표권을 인정하고 있어요.
민주주의의 발달 과정과 선거 모습은 나라마다 차이가 있어요. 문맹률이 높았던 1950년 우리나라에서는 막대기 개수로 후보를 표시하기도 했습니다. 인도는 후보자의 이름 옆에 아직도 손바닥이나 텔레비전, 연꽃 등의 기호를 그리고 있지요. 벨기에·룩셈부르크·필리핀·오스트레일리아 등은 투표에 불참하면 벌금을 내야 하고, 볼리비아는 은행 거래가 중단되며, 에콰도르는 아예 시민권을 박탈해 버린다고 합니다.
선거를 시행한다고 해서 민주주의가 완성되는 것은 아니에요. 지구촌 곳곳에는 여전히 인간의 존엄성이 무시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민주주의는 언제든 다시 후퇴할 수도 있어요. 민주주의는 제도의 완성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우리가 생활 속에서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답니다. 자유와 평등의 소중함을 느끼고, 나와 다른 사람의 차이를 인정하는 마음을 생활 속에서 실천해 보세요.
공미라
06.27 드로그바(축구선수) 덕분에… 월드컵 후 평화 찾아온 코트디부아르
▲ 브라질월드컵에 출전한 디디에 드로그바 선수의 모습이에요. /AP 뉴시스
지난 13일 월드컵 축구 대회가 시작되었어요. 저는 아빠와 함께 브라질에서 열린 월드컵 축구 대회 조별 예선 경기를 빠짐없이 보고 있답니다. 대회 개막 이틀 뒤 열린 일본과 코트디부아르의 대결도 지켜보았지요. 일본이 먼저 골을 넣어 앞서가고 있을 때 코트디부아르가 선수 교체를 했어요. 교체된 선수가 경기장으로 들어서자 관중석에서 큰 함성이 울렸어요.
"아빠, 저 사람이 누군데 이렇게 사람들이 좋아해요?"
"코트디부아르에서 가장 유명한 축구 선수인 '디디에 드로그바' 선수란다. 축구를 무척 잘해서 우리나라에도 팬이 아주 많아."
아닌 게 아니라 드로그바 선수가 들어가자 경기 흐름이 확 바뀌었어요. 뒤지고 있던 코트디부아르가 동점골을 넣더니 곧이어 역전 골까지 성공해 승리를 거머쥐었지요. 그러자 우리 아파트 단지의 이 집 저 집에서 환호성이 들려오는 게 아니겠어요? 일본과의 경기이다 보니 우리나라 사람들은 전부 코트디부아르를 응원하고 있었나 봐요. 더구나 최근 들어 일본에서 '일본군이 위안부 동원에 관여했다'고 인정했던 고노 담화(河野 談話)의 검증 결과를 발표하여 한·일 관계가 더욱 나빠졌잖아요.
"디디에 드로그바 선수는 정말 대단하네요. 축구 실력도 좋지만 축구장 밖에서도 좋은 일을 많이 한다면서요?"
제 질문에 가만히 계시던 엄마께서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대답하셨어요.
"아까 드로그바 선수가 나왔을 때 사람들이 환호한 데는 다른 이유가 있어. 코트디부아르가 지난 2006년 월드컵 본선에 나가게 되었을 때 드로그바 선수가 TV 카메라 앞에 꿇어앉았대. 그리고 당시 끊임없이 내전을 벌이던 자기 나라 사람들에게 월드컵 기간만이라도 전쟁을 멈춰 달라고 호소했다는구나. 더욱 놀라운 것은 그 호소를 듣고 내전을 벌이던 군인과 정치가들이 정말 휴전을 했고 이듬해에는 협정을 맺어 내전을 끝냈다는 사실이야."
▲ 코트디부아르는 1990년대부터 군부 쿠데타가 잇따르며 혼란이 계속되었어요. 2002년부터 5년간 벌어진 내전으로 수만명이 희생되고, 70만명에 달하는 난민이 발생했다고 해요. /Patrick Robert/Corbis
와~ 축구에는 도통 관심이 없던 엄마께서도 관심을 가질 만큼 훌륭한 선수네요. 저는 그날 이후로 드로그바 선수의 팬이 되었어요. 코트디부아르의 내전에 얽힌 역사도 흥미롭게 보았답니다.
코트디부아르는 아프리카 서부 기니만(灣) 연안에 있는 아름다운 나라예요. 코트디부아르(Cote d'Ivoire)라는 나라 이름은 프랑스어로 '상아 해안'을 뜻합니다. 15세기 후반부터 유럽 열강들이 코트디부아르의 해안에 몰려들어 코끼리의 송곳니인 상아(象牙)를 가져간 데서 유래한 이름이래요. 그런데 나라 이름을 왜 프랑스어로 지었을까요? 그것은 코트디부아르가 1893년부터 60년 넘게 프랑스의 식민지였기 때문입니다.
이 무렵 아프리카 국가 대부분은 유럽 열강의 식민지가 되었어요. 코트디부아르를 비롯하여 알제리·튀니지·모로코 등은 프랑스의 지배를 받았고, 수단·탄자니아·케냐 등은 영국의 지배를 받았지요. 그 밖에도 이탈리아·벨기에·스페인·포르투갈 같은 유럽 국가들이 아프리카를 식민지로 삼았어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아프리카 각지에서 민족해방운동이 펼쳐지면서 1951년 리비아를 시작으로 많은 나라가 독립하였습니다.
코트디부아르는 1960년 완전한 독립을 이루었어요. 당시 '아프리카민주연합(RDA)'을 결성하여 독립 투쟁을 벌인 펠릭스 우푸에 부아니가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지요. 그리고 풍부한 자원을 활용하여 한때는 '서아프리카의 모범국'이라 불릴 정도로 눈부신 발전을 이루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종족 간 갈등과 지역감정이 폭발하면서 1990년대부터는 군부 쿠데타가 잇따르고 내전이 끊이지 않는 위험한 나라가 되었어요.
30년 이상 장기 집권하였던 우푸에 부아니가 1993년 사망하자 당시 국회의장이던 앙리 코낭 베디에가 정권을 잡습니다. 베디에는 1995년 실시한 대선에서 96% 지지율로 대통령에 당선돼요. 하지만 그는 정치적 억압과 부정부패로 큰 비난을 받았지요. 1999년엔 참모총장을 지낸 로베르 구에이가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하는 등 군부 쿠데타가 이어지면서 정치·사회적 혼란이 계속되었어요. 이후 2000년 대선에서 로랑 그바그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는데, 반대파인 북부 반군이 대선 결과에 불복하면서 2002년에 본격적인 내전이 발발했다고 해요. 5년간 지속한 내전은 2007년 평화협정이 체결되면서 겨우 잦아들었습니다.
"아빠, 사람들은 누구나 전쟁보다 평화가 더 좋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이 세상에는 왜 전쟁이 끊이질 않는 걸까요?"
"오랫동안 전쟁의 역사를 연구해온 영국 역사학자 마이클 하워드는 사실 인류가 전쟁 없이 평화롭게 사는 세상을 꿈꾸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라고 지적했단다."
▲ 상아 해안에 자리 잡은 코트디부아르의 옛 수도 ‘아비장’이에요. 아비장은 지금도 코트디부아르의 경제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지요. /Corbis/토픽이미지
먼 옛날에는 사람들이 전쟁을 으레 일어나는 일상적인 일로 받아들였다고 해요. 그러다가 무기가 발달하면서 전쟁으로 인한 피해가 엄청나게 커지자 이러다가는 인류가 전쟁 때문에 멸망할지도 모른다는 깨달음을 얻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전쟁 없이 평화롭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며, 평화를 위해 노력하게 되었지요. 한마디로 '평화'라는 개념은 근대에 들어와서 '발명'된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이에요.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가 쓴 '전쟁과 평화'라는 소설도 그런 깨달음에서 나온 거군요. 그렇다면 드로그바 선수야말로 평화를 발명한 사람이네요!"
그날 밤 저는 텔레비전 화면을 가득 채운 드로그바 선수가 환하게 웃는 꿈을 꾸었어요.
강응천
07.11 지구를 둘로 쪼개 나눠 가진 포르투갈·에스파냐
16세기에 포르투갈 식민지 된 브라질… 아프리카 흑인 노예가 전파한 삼바 춤, 세계 최대 리우 카니발로 발전시켰어요
브라질월드컵 결승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혹시 어제 새벽에도 네덜란드와 아르헨티나의 경기를 보느라 잠을 설치지는 않았나요? 이미 월드컵에서 다섯 번이나 우승한 적 있는 축구 강국 브라질은 이번 월드컵을 유치하며 여섯 번째 우승을 기대했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난 9일 독일과의 4강전에서 1대7로 크게 패하며 결승전 진출에 실패하고 말았어요. 브라질 국민의 실망도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축구를 잘한다'는 것 외에 브라질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나요? 브라질은 남아메리카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자랑하는 나라입니다. 남아메리카 지역의 나라 대부분은 에스파냐어를 사용하는데, 유독 브라질만 포르투갈어를 사용하지요. 브라질이 포르투갈어를 사용하게 된 데에는 어떤 사연이 있을까요?
15세기경 지중해 서쪽 구석에 위치한 포르투갈의 엔리케 왕자는 바다 건너 미지의 세계로 눈을 돌렸어요. '우리가 살길은 오직 저 푸른 바다를 헤치고 나가 인도에 가는 것뿐이다'라고 생각한 것이에요. 엔리케 왕자의 바람대로 훗날 포르투갈의 탐험대는 아프리카 대륙의 서쪽 해안을 끼고 돌아 남쪽 끝에 도착하여 '희망봉'을 발견하지요. 1497년에 바스쿠다가마가 희망봉을 돌아 인도로 가는 항로를 여는 데도 성공하고요. 이렇게 항로 개척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포르투갈은 새롭게 찾아내는 영토를 자신의 소유로 확인받고 싶었어요. 그래서 1480년 교황으로부터 '아프리카의 기니와 카보 보자도르 남쪽에서 발견되는 땅은 모두 포르투갈의 영토'라는 확인서를 받았답니다.
▲ 16세기 포르투갈은 식민지 개척을 위해 아프리카 노예를 브라질로 끌고 왔어요. 당시 흑인 노예가 추던 삼바 춤이 지상 최대의 축제인‘리우 카니발’로 발전했대요. /Corbis 토픽이미지
그런데 1492년 에스파냐(스페인의 다른 이름)의 후원을 받은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항로를 개척하면서 영토 분쟁이 발생했어요. 콜럼버스가 자신을 후원해 주지 않은 포르투갈 왕에게 자신이 얼마나 멋진 땅을 발견했는지 자랑했거든요. 그리고 1493년 에스파냐는 발 빠르게 교황 알렉산더 6세에게 새로운 확인서를 받아냈습니다. 남북을 연결하는 가상의 선을 대서양에 그어 동쪽은 포르투갈이, 서쪽은 에스파냐가 갖는다는 내용이었어요. 그 기준은 당시 유럽인이 세상의 서쪽 끝이라고 생각했던 카보 베르데에서 서쪽으로 100레구아(당시의 거리 단위·약 480㎞) 떨어진 지점이었지요.
이 소식을 들은 포르투갈의 주앙 2세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어요. '1480년 교황에게 받은 확인서에 따르면 콜럼버스가 발견한 땅은 우리 땅이잖아. 그런데 1493년에 에스파냐가 교황에게 새 확인서를 받았으니, 이걸 무효로 하자고 할 수도 없고…. 더구나 에스파냐 출신 교황이 내 말을 들어줄 리도 없지. 에잇! 확 전쟁을 일으켜 버릴까? 아니야, 그럴 수야 없지. 이번에는 에스파냐와 외교적으로 협상을 해봐야겠어.'
결국 1494년 6월 7일, '토르데시야스(Tordesillas)'라는 마을에서 에스파냐의 이사벨라 여왕과 페르디난드 왕, 포르투갈의 주앙 2세가 만나 역사적인 조약을 맺습니다. 에스파냐는 전쟁을 벌이기보다는 평화적으로 조약을 맺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고, 포르투갈은 측량사와 지리학자를 동원하여 어떻게든 자신에게 유리한 내용으로 협상하려 했어요. 이날 체결된 '토르데시야스 조약'에 따라 카보 베르데에서 서쪽으로 370레구아(약 1770㎞) 떨어진 지점을 기준으로 남북을 연결하는 새로운 선이 그어졌어요. 지도에는 그저 '미지의 세상'이라고만 적어 넣었습니다. 포르투갈과 에스파냐가 지구를 둘로 쪼개서 나눠 갖는다는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한 것이지요. 지도에 선 하나를 쭉 그어 나눠 갖는 뻔뻔한 발상은 이후에 아프리카나 북아메리카에도 유행처럼 이어졌어요.
새롭게 그어진 선을 경계로 남아메리카 대륙의 운명은 바뀌기 시작했어요. 에스파냐는 서쪽에 어떤 땅이 있는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지요. 그래서 마젤란을 보내 서쪽으로 항해하게 했어요. 마젤란 일행이 서쪽으로 항해하여 지구 한 바퀴를 돌아 결국 제자리로 돌아온 일은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밝히는 계기가 되었답니다. 그런데 이들은 새로 발견한 남아메리카 땅의 원주민 마을을 약탈하고, 문명을 파괴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어요. 결국 브라질을 제외한 대부분의 나라는 에스파냐의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 1494년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은 지구의 남북을 잇는 세로선을 그어 땅을 나눠 갖는‘토르데시야스 조약’을 맺었어요. 이 조약에 따라 브라질이 포르투갈의 식민지가 되었어요.
토르데시야스 조약에 따라 서경 46도 부근을 지나는 브라질은 포르투갈의 영토가 되었습니다. 포르투갈은 1500년부터 탐험을 통해 파우-브라질(Pau-Brasil)이라는 나무를 채취해 갔어요. 높이 약 10m, 지름 1m에 달하는 파우-브라질 나무는 붉은 염색약의 재료가 되었는데, 바로 이 나무의 이름을 따서 '브라질'이라는 나라 이름이 탄생하였지요. 그리고 식민지 개척을 위해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이 이곳으로 끌려왔습니다. 사람들은 흑인을 '삼보'라고 부르며 멸시하였지만, 흑인들이 추던 춤인 '삼바'는 오늘날 지상 최대의 축제로 꼽히는 브라질의 '리우 카니발'로 발전하였어요. 혼혈이 많아지면서 특히 백인과 흑인 사이의 혼혈인 '물라토(mulato)'도 많아졌어요. 원산지가 아프리카인 커피는 환경이 유사하다는 이유로 브라질에서 대규모로 상업 재배되기 시작했지요. 포르투갈이 심은 새로운 문화는 브라질을 이전과 전혀 다른 곳으로 만들었습니다.
포르투갈에서 독립한 후에도 이어진 식민 지배와 군사정권 독재, 강대국의 개입 등으로 브라질의 정치 상황은 계속 혼란스러웠어요. 빈부격차 문제는 아직도 해결해야 할 큰 과제로 남아 있지요. 월드컵 경기가 열리는 중에도 경기장 밖에서는 반대 시위가 열리고 있습니다. 경제 상황이 어려운데도 월드컵 개최에 막대한 돈을 투자했다는 이유 때문이지요. 브라질은 향후 경제 발전이 기대되는 'BRICs(브라질·러시아·인도·중국) 국가'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월드컵의 성공적 개최만큼 국가적 성장도 빠르게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공미라
07.25 일본 제국주의의 발판이 된 전쟁은?
이달 초 일본의 아베 정부는 '가까운 관계에 있는 국가가 공격받으면 일본도 개입할 권리가 있다'는 결정을 내려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어요. '일본이 직접 공격받았을 경우를 제외하고는 전쟁을 금지한다'는 일본 평화헌법의 해석을 변경해서 '전쟁할 수 있는 나라'가 된다는 의미이지요. 특히 센카쿠(중국명 댜오위다오)를 놓고 중국과, 독도를 둘러싸고 우리나라와 갈등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더 큰 관심을 모으고 있어요. 이에 발맞춰 중국은 과거 청일(淸日)전쟁의 치욕을 잊지 않고 마음 깊이 새기겠다며, 일본에 침몰당한 배를 복원해 역사 교육 현장으로 활용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어요. 청일전쟁을 둘러싸고 청나라와 일본, 우리나라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 1895년 일본과 청나라는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었어요. 이 즈음부터 일본의 제국주의는 점점 기세를 떨치기 시작해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할 때까지 계속됐지요. /AFP
지금으로부터 꼭 120년 전, 1894년 7월 25일 이른 아침 풍도(지금의 안산 대부도 부근) 앞바다. 평화롭기만 한 아침 바다에 떠있던 중국 함대를 향해 일본군이 포탄을 쏘아대기 시작했어요. 갑작스러운 공격에 청나라 군사들은 당황했지만, 최선을 다해 저항했지요.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 벌어졌어요. 일본의 공격을 받은 청 함대는 큰 손실을 입은 반면, 청의 공격을 받은 일본 함대는 멀쩡한 거예요.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일까요? 청군 1000여명은 그 자리에서 바닷속으로 잠기고 말았어요. 풍도해전이라고 부르는 이 사건이 바로 청일전쟁의 시작이었답니다.
일본은 청과 1871년 서로 싸우지 않겠다는 조약을 맺었지만, 사사건건 부딪치고 있었지요. 아편전쟁에서 진 이후에 청은 리훙장이 주도하는 개혁 운동을 벌이고 있었어요. 일본에서는 메이지 유신이라는 근대화 운동을 하고 있었지요. 두 나라의 개혁 방향은 독일의 정치가 비스마르크의 말을 통해 잘 알 수 있어요. 그는 "청은 독일에서 최신식 전함을 사 가는 것이 목표였으며, 일본은 독일의 제도와 시스템을 배워 가는 것이 목표였다"고 말했지요. 당시 청은 서양 무기만 있으면 강한 나라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최신 무기만 있다고 강해지는 것은 아니었어요. 청의 관리들은 자기 주머니를 챙기기에 급급했고, 서태후의 별장인 이화원 건축과 생일 파티 준비에 군사 비용을 퍼다 쓰는 형편이었죠. 청의 이러한 사정을 알고 있는 일본은 서양식으로 제도까지 개혁한 후 전쟁 기회를 노리고 있었어요.
▲ 1894년 일본은 우리나라의 허락도 받지 않고 인천항으로 군대를 보냈어요.
1894년 조선에서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조선 정부는 청에 도움을 요청했어요. 6월에 청의 군대가 도착했는데 생각지도 않았던 일본군도 조선에 도착했어요. 이전에 갑신정변 후 맺은 톈진 조약에서 '청과 일본은 조선에 군대를 파병할 때에는 서로 알린다'는 조항을 이유로 내세우며 들어온 거죠. 두 나라 군대가 들어온 후 동학농민군은 전주성에서 정부군과 협의하고 고향 땅으로 돌아갔어요. 동학농민군 문제는 사실상 해결된 셈이었죠. 조선 정부에서는 청·일 두 나라 군대에 돌아가라고 요청했지만, 어쩐 일인지 청나라 군대도 일본 군대도 꼼짝을 하지 않았어요. 조선을 사이에 두고 밀고 당기는 기 싸움을 벌이는 중이었죠. 먼저 발 빠르게 움직인 것은 일본이었어요. 군사를 동원해 경복궁과 4대문을 점령하고 조선에 청과의 관계를 끊으라고 강요했어요. 그리고 며칠 후 일본은 풍도 앞바다에서 청을 공격해 전쟁을 시작한 거죠.
자, 이제 풍도해전에서 일본은 거의 피해가 없었는데 청은 크게 패한 이유를 살펴봅시다. 당시 청의 군대가 쓰던 포탄은 무늬만 포탄이지 사실은 진흙으로 구워 만든 흙덩이였어요. 포탄 대부분이 흙덩이에 검은 칠을 한 것이었지요. 착실히 전쟁을 준비해 온 일본 앞에서 청은 처참하게 무너지고 말았지요. 청은 성환 전투와 평양 전투 등 이어진 싸움에서도 크게 패했어요. 청나라 근대화의 상징이었던 주력 함대의 대표적인 배는 1894년 황해해전에서 일본군에 침몰당했죠. 일본의 기세가 점점 커졌고, 중국은 본토까지 침략당할 위기에 놓이자 결국 패배를 인정했어요.
▲ 일본이 청과의 전쟁에서 이기고 조약을 맺은 것을 기념하는 전시관이에요. /일본 방위성
1895년 4월 17일, 일본의 시모노세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요릿집에서 청의 리훙장과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가 마주 앉아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었답니다. 이에 따라 청은 조선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했어요. 그리고 청의 국가 예산의 2배가 넘는 큰돈을 배상금으로 일본에 지불했지요. 일본은 이 돈으로 철을 만들고 무기를 만드는 공장을 세워 산업혁명에 더욱 속도를 붙일 수 있었답니다. 그뿐만 아니라 랴오둥 반도, 타이완, 펑후 섬 등도 일본이 차지하게 됐어요. 그즈음 일본은 은근슬쩍 센카쿠 열도를 일본의 영토로 삼았답니다. 랴오둥 반도는 러시아의 간섭 때문에 중국에 되돌려주기는 했지만, 청일전쟁 이후 아시아의 주도권은 중국에서 일본으로 넘어갔어요. 그리고 일본이 아시아 최초로 제국주의 국가가 되는 데 발판이 되었죠. 반면 조선은 청과 일본 사이에서 하소연할 곳도 없이 고스란히 피해를 보았고, 수차례 개혁마저 실패해 일본의 식민지가 되고 말았지요.
청일전쟁 후 120년, 중국도 일본도 우리나라도 과거 모습과는 달라졌어요. 하지만 역사를 기억하지 않으면 실패가 되풀이될 수도 있어요. 이번 방학에 유익한 역사 체험을 하고 싶으면 용산 전쟁기념관에 가보는 것은 어떨까요? 그곳에서 청일전쟁과 당시 우리나라의 관계를 살펴볼 수 있는 전시회가 열리고 있거든요. 과거를 통해 동아시아 각국의 미래를 찾아보는 의미 있는 시간을 갖길 바랄게요.
공미라
09.19 영웅이 된 해적, 드레이크 경
올여름 극장가에서는 바다와 해적(海賊)이 등장하는 영화가 많이 개봉되었어요. 1700만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한 '명량'에는 일본의 해적 구루지마가 등장해 카리스마를 뽐냈지요. 물론 이순신 장군에게 호되게 당했지만 말이에요. 조선의 국새를 꿀꺽 삼킨 고래를 찾아 떠난 해적의 소동을 그린 영화도 있었어요. 소설·영화·만화 등에서 해적은 때로는 바다의 악마로, 때로는 영웅으로 등장합니다. 소설 '피터팬'에 나오는 해적이 애꾸눈의 악당이었다면, 어떤 컴퓨터 게임에서는 해적이 세계를 정복하는 모험가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지요. 오늘은 해적 이야기의 원조가 된 진짜 해적, 프랜시스 드레이크의 이야기를 들려줄게요.
콜럼버스가 대항해를 시작한 16세기 유럽에서는 바다를 호령하는 나라가 곧 세계를 지배할 수 있었어요. 그 선두에 선 나라가 바로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이었지요. 아메리카 대륙의 새로운 문물은 배를 통해 유럽으로 들어왔는데, 진귀한 보물을 가득 실은 배는 언제나 약탈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당연히 바다에는 해적이 넘쳐났고요
▲ (왼쪽)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은‘해적 드레이크를 넘겨 달라’는 에스파냐 국왕 펠리페 2세의 요구를 무시하고, 드레이크에게 기사 작위를 내렸어요. (오른쪽)영국의 항구도시 플리머스에 세워진 드레이크 동상. /Corbis 토픽이미지
이 무렵 영국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드레이크는 어려서부터 낡은 배에서 생활했어요. 13세에 선원 생활을 시작하여 아메리카와 유럽을 오가며 노예를 사고팔아 돈을 벌었다고 해요. 그러던 중 멕시코 앞바다에서 에스파냐 배들의 습격을 받아 물건과 배를 몽땅 빼앗기고 말았지요. 목숨만 겨우 건진 그는 에스파냐에 복수를 다짐했어요. 이때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은 빼앗긴 것을 되찾기 위해 해적이 되는 건 정당하다며 해적 허가증(사략 허가증·privateer's license)까지 내주었어요. 국가가 공식적으로 해적을 인정해준 것이에요.
1572년부터 에스파냐 함대를 향한 드레이크의 해적질은 대담하게 이루어졌어요. 에스파냐 함대가 가는 곳은 어디든 따라다녔지요. 해적질을 한 후에는 바람과 물결을 이용해 교묘하게 에스파냐 함대를 따돌리고, 그들의 식민지를 습격하기도 했어요. 에스파냐는 배를 더 크게 만들고 대포로 무장했지만 드레이크를 당해내지 못했습니다. 에스파냐 사람들은 그를 '엘 드라케(용·악마)'라고 부르며 치를 떨었어요. 게다가 드레이크는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지원을 등에 업고 에스파냐의 보물선을 공격하여 황금을 비롯한 수많은 재물을 약탈했지요. 이렇게 빼앗은 금은보화로 그는 영국 왕실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었습니다.
드레이크는 에스파냐 해역을 따라 항해하던 중 1577년부터 1580년까지 약 3년에 걸쳐 세계 일주까지 하게 되었어요. 마젤란에 이어 두 번째로 세계 일주에 성공한 셈이에요. 마젤란은 항해 도중 필리핀에서 사망했으니, 드레이크는 자신의 배로 끝까지 항해에 성공한 첫 번째 선장이 되었지요. 황금으로 가득 찬 드레이크의 배를 보고 사람들은 '살찐 황금 암사슴 같다'고 말했답니다. 이후 그의 배는 '골든 하인드(The Golden Hind·황금 암사슴)호'로 불렸어요.
드레이크에게 당한 에스파냐의 왕 펠리페 2세는 심기가 몹시 불편했어요. 즉시 영국에 항의하며 해적 드레이크를 넘겨 달라고 요구했지요. 그러자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은 드레이크를 궁으로 불러 영웅이라 부르며, 귀족 작위까지 수여해요. 남의 나라 배를 노략질하던 해적 드레이크가 영국 귀족인 '드레이크경(卿)'이 된 거예요.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가 분노한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겠지요. 게다가 가톨릭 신자인 펠리페 2세는 신교를 믿는 엘리자베스 1세에게 청혼했다가 거절당한 적도 있었거든요. 영국을 차지한 후 세계를 정복하겠다는 야심을 품은 펠리페 2세는 '무적함대(無敵艦隊)'를 편성하였어요.
팽팽한 긴장이 감돌던 두 나라는 결국 전쟁에 돌입합니다. 1588년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칼레 앞바다에서 전투가 벌어졌어요. 에스파냐는 3만명의 군대와 150여척의 군함을 이끌고 나타났지요. 이에 맞서는 영국은 하워드 총사령관을 중심으로 바다에 익숙한 해적 출신의 호킨스, 드레이크 등이 8000여명의 군대와 80여척의 함대를 이끌었습니다. 숫자상으로는 에스파냐가 우세해 보였지만, 작고 날렵한 영국 함대에 덩치 큰 무적함대는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했어요. 드레이크는 화약을 가득 실은 배를 에스파냐의 무적함대를 향해 돌진시켰지요. 화염을 피하기 위해 에스파냐 함대는 뿔뿔이 흩어졌고, 때마침 불어닥친 폭풍우로 처참하게 무너졌습니다.
칼레 해전의 패배는 에스파냐의 쇠퇴로 이어졌어요. 반대로 영국은 아메리카 식민지를 확보하면서 '해가 지지 않는 나라'의 발판을 마련했고요. 에스파냐의 식민지였던 네덜란드도 기회를 잡아 독립했습니다.
그 후에도 드레이크는 해적으로 활약하다가 배 위에서 죽음을 맞았다고 해요. 그의 시신은 납으로 만든 관에 넣어 바다에 던져졌는데,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고 하니 참으로 '해적 왕'다운 최후라고 할 수 있겠지요?
공미라
10.03 베르사유 궁전에는 화장실이 없었답니다
지금 이 순간, 혹시 먹고 싶은 음식이 있나요? 맛있는 음식을 배불리 먹고 싶은 것은 인간의 본능이에요. 그런데 마음껏 먹고 마시고 난 뒤에는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본능이 또 하나 있어요. 바로 배설입니다. 그런데 문명이 발달하고 도시가 생기기 시작한 청동기 시대부터 배설은 사회문제가 되기 시작하였어요. 농촌에서는 배설물이 퇴비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도시에서는 문제가 달랐거든요.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배설물의 양도 많아지면서, 환경은 점점 비위생적으로 변하여 각종 전염병이 창궐하였어요. 심지어 중세 유럽 도시의 사람들은 집 안에 배설물을 모아두었다가 밤에 창 아래로 던지곤 했지요. 사람들은 머리에 오물을 뒤집어쓰지 않기 위해 모자를 쓰고, 길바닥에 버려진 오물을 밟지 않으려고 하이힐을 신었습니다. 지독한 냄새를 없애기 위해서 향수를 뿌렸고요. 1800년대에 유행한 콜레라를 막기 위해서 유럽 국가들이 하수 처리 시설을 개선했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오늘은 왕의 은밀한 공간, 화장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줄게요.
우리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에는 어느 날 갑자기 왕의 역할을 맡게 된 광대가 나옵니다. 처음으로 궁에 들어온 그는 화장실을 찾지 못해 쩔쩔매지요. 그때 눈치 빠른 궁녀 하나가 매화틀을 가져다줘요. 광대가 방에 앉아 매화틀에 볼일을 보는가 싶더니, 갑자기 방문이 활짝 열리며 궁녀들이 일제히 "전하, 감축드리옵니다"라고 외칩니다. 몹시 당황한 광대의 표정에 많은 관객이 배꼽을 잡고 웃었지요.
▲ (사진 왼쪽)조선시대 왕이나 왕비가 쓰던 휴대용 변기인 ‘매화틀’이에요. (사진 오른쪽)하이힐을 신은 루이 14세의 초상. 루이 14세는 작은 키 때문에 하이힐을 신었다고 하는데, 유럽의 더러운 거리 탓에 16세기경부터 하이힐이 대중적으로 유행하였대요. /국립고궁박물관·위키피디아
'매화틀'은 조선시대 왕과 왕의 가족이 사용하던 일종의 휴대용 변기예요. 요즘 아기들이 쓰는 변기처럼 앞쪽이 트인 'ㄷ'자 모양의 나무틀로 만들어졌지요. 나무 위는 비단으로 덮고, 내부에는 잘게 썬 여물이나 재를 미리 뿌려 두었다고 해요. 왕이 볼일을 보고 나면 옆에서 대기하던 상궁이 명주 수건으로 뒤를 닦아주었어요. 매화틀 안에 든 배설물은 내의원으로 옮겨져 왕의 건강 상태를 확인하는 데 쓰였습니다. 왕의 사생활 보호보다는 국가를 책임지는 통치자의 건강을 잘 관리하는 게 더욱 중요했기 때문이겠지요.
그런데 은밀한 화장실에서 큰 권력을 드러내 놓고 누린 왕이 있답니다. '태양왕'으로 불리는 프랑스의 루이 14세예요. 여섯 살에 왕이 된 그는 재상 마자랭의 도움으로 성장한 후 절대권력을 누린 것으로 유명하지요. '왕의 권력은 신(神)이 내린 것'이라는 왕권신수설을 지지하고, 상업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자 했어요. 군대를 양성하고, 유능한 관리를 임명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데 활용하였고요. 또한 그는 아버지의 사냥터가 있던 습한 땅에 화려한 베르사유 궁전을 지었습니다. 이곳에서 왕과 귀족이 함께하는 다양한 파티를 열어 자신의 권력을 보여주었지요. 축제 기간에는 약 1만명의 사람이 베르사유 궁전에 머물렀을 정도예요. 프랑스에서 유행하는 미뉴에트에 맞춰 유럽인이 춤을 추고, 프랑스 왕실의 예의를 뜻하는 에티켓이 유럽 귀족이 갖춰야 하는 교양으로 자리 잡았지요. 베르사유 궁전에서 루이 14세는 유럽 절대왕정의 전성기를 누렸습니다.
▲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 모습이에요. ‘왕의 권력은 신이 내린 것’이라고 생각한 루이 14세는 베르사유 궁전에서 귀족들과 수많은 파티를 열어 자신의 권력을 보여주었어요. /토픽이미지
그런데 놀랍게도 이 화려한 궁전에는 공식적인 화장실이 없었어요. 당시 정원에 400여개의 분수를 설치하기 위해 수로를 변경할 만큼 훌륭한 기술을 지녔음에도, 수많은 사람을 위한 위생 시설은 갖추지 않은 것이에요.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휴대용 변기를 이용하거나, 숲 속 혹은 커튼 뒤에서 볼일을 봐야 했지요. 여성은 폭이 넓은 드레스로 가리고 해결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해요. 아름다운 궁전은 오염물로 넘쳤고, '쇼핀'이라는 하이힐이 유행하였어요. 쇼핀은 신발 위에 덧신처럼 신는 나막신으로, 높이가 무려 60㎝에 이르는 것도 있었지요. 하인들이 열심히 뛰어다니며 배설물을 치웠지만, 코를 찌르는 냄새까지 막을 수는 없었어요. 그래서 사람들은 다양한 향수를 뿌리고, 궁전 내부의 인테리어도 수시로 바꾸었습니다.
그럼에도 궁전에서 왕과 함께 생활한다는 것은 귀족의 높은 지위를 보여주는 상징이었어요. 특히 변기 위에 앉은 왕을 만나는 것은 더없이 큰 영광이었지요. 유난히 먹을 것을 즐겼던 루이 14세는 장을 비워야 건강하다는 의사의 조언에 따라 설사약을 먹고 하루에 12번도 넘게 화장실을 다녔다고 해요. 그런데 그 화장실에서 왕을 지켜보다가 미리 준비한 부드러운 천으로 엉덩이를 닦아주는 귀족이 있는가 하면, 변의 상태를 검사하는 귀족도 있었답니다. 심지어 왕의 변기를 관리하는 관리가 되려면 많은 돈을 바쳐야 했대요. 자신이 신과 같은 권력을 가졌다고 생각한 루이 14세는 배변의 본능조차도 특별한 권위의 상징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에요.
내년부터 우리나라 초·중·고등학교 화장실을 '쾌적하고 가고 싶은 곳'으로 바꾼다는 보도가 있었어요. 학생의 정서를 고려하여 창조적인 사고가 가능한 새로운 디자인의 화장실을 만들 계획이라고 해요. 하지만 화장실 시설 개선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개인의 위생 관리 습관이에요. 3시간 정도만 손을 씻지 않아도 손에 약 26만 마리의 세균이 살게 된대요. 비누로 손가락 구석구석까지 잘 씻기만 해도 수인성 전염병의 70%를 예방할 수 있다니, 손 씻기를 더욱 잘해야겠어요.
공미라
10.17 아편전쟁, 홍콩을 영국에 넘기다
요즘 노란 우산을 쓴 홍콩 시민이 뉴스에 자주 등장해요. 비도 오지 않는데 이들이 우산을 들고 나선 이유는, 중국에 속했으면서도 중국과는 다른 홍콩을 지키기 위해서랍니다. 이들의 시위는 경찰이 쏜 최루탄을 우산으로 막아내 '우산혁명'이라고도 불려요. 시위에 나선 홍콩 시민은 중국의 정치적 간섭에서 벗어난 '홍콩의 민주화'를 요구하고 있지요. 사실 그동안 홍콩은 중국의 역사적 상황에 따라 운명이 달라지곤 했습니다. 현재 '중화인민공화국 홍콩특별행정구'라는 이름으로 중국에 속했지만, 외교·국방을 제외한 나머지 제도는 자율적으로 운영해요. 그렇다면 홍콩은 왜 중국과 다른 모습을 갖게 되었을까요?
▲ 영국은 중국의 아편 단속을 빌미로 아편전쟁을 일으켰어요. 이 전쟁은 최신식 화기와 증기선을 가진 영국 함대의 일방적 승리로 끝났지요. / 위키피디아
19세기, 산업혁명에 성공한 서양의 여러 나라는 공장에서 만든 물건을 판매할 시장을 찾아 아시아에 진출하였어요. 당시 중국을 지배하던 청나라는 드넓은 영토와 많은 인구, 풍부한 자원을 가져 남부러울 게 없었지요. 청나라 황제가 "중국에는 무엇이든 다 있기 때문에 무역이 필요 없다. 필요하다면 교류하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가 오랑캐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이다"고 말했을 정도예요. 서로 사고파는 무역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중국에 은을 주고 물건을 사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중국의 차(茶)를 마시는 것이 일상생활이 된 영국의 문제가 가장 심각했어요. 당시 어마어마한 양의 은이 영국에서 중국으로 흘러들어 갔거든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식민지 인도에서 재배한 아편을 중국에 수출하였어요. 중독성이 강한 마약의 일종인 아편이 중국에 들어가면서 무역의 흐름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중국에 아편 중독자가 점점 늘어나 19세기 중반 약 4만 상자의 아편이 수입되었지요. 학자들은 당시 중국에 400만명가량의 아편 중독자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해요. 곳곳에 아편을 피우는 아편굴이 생기고, 중독자들은 아편을 사기 위해 집과 땅, 심지어 아내와 자식까지 팔았어요. 이제는 중국의 은이 영국으로 마구 흘러가기 시작했습니다. 세금으로 낼 은이 점점 줄어들자, 사람들은 도망치거나 도적 떼에 가담했어요. 관리들은 부정부패를 일삼고, 군대의 기강은 무너졌지요. 중국인의 몸과 정신이 모두 망가져 버렸어요. 반면 영국에 아편 무역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와 같았습니다.
▲ 아편을 피우는 중국인 모습. 19세기 중반 아편 중독자가 크게 늘면서 중국 사회는 몹시 혼란해졌어요. / Corbis/토픽이미지
청나라 황제는 임칙서(林則徐)라는 신하를 광저우에 파견하여 아편 문제를 뿌리 뽑게 했어요. 임칙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지요. 외국 상인의 아편을 몰수하고, 다시는 팔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게 했어요. 그렇게 빼앗은 2만 상자가 넘는 아편 가루를 구덩이에 넣고 석회와 섞어 바다로 흘려보내는 데만 20일 넘게 걸렸습니다. 강하게 저항하는 영국 상인에게는 물과 식량 보급을 끊고, 모든 무역을 금지하였어요. 그러자 화가 난 영국인은 본국에 청나라와의 전쟁을 요구합니다.
결국 1840년 영국과 청나라 사이에 아편전쟁이 일어나요. 영국은 아편을 더 판매하겠다는 비도덕적인 목적을 숨기고, '정상적인 무역을 위한 전쟁'이라는 구실을 붙였어요. 2년 동안 계속된 전쟁으로 중국의 동남 해안가 일대는 쑥대밭이 되었습니다. 나무로 만든 낡은 배에 보잘것없는 화포를 장착한 중국과 달리 영국 함대는 당시 최신식 3단 화포를 발사하는 증기선을 보유했거든요.
전쟁은 영국의 일방적 승리로 끝났고, 1842년 8월 '난징조약'이라는 불평등조약이 맺어졌어요. 중국은 상하이·샤먼·푸저우·닝보·광저우 등의 항구를 더 개방해야 했고, 배상금을 포함하여 2100만달러라는 큰돈을 지불하게 되었어요. 그리고 홍콩을 영국에 빼앗겼답니다. 홍콩은 아시아로 연결되는 길목에 있는 요충지였거든요. 자신들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여겼던 중국의 자존심은 사정없이 짓밟혔어요. 게다가 정작 중요한 아편 무역에 대한 규정은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조약이었지요. 이렇게 홍콩이 영국에 넘어간 뒤, 제2차 아편전쟁을 거치면서 홍콩의 경계 확정을 위한 조약이 체결되었어요. 1898년 신제와 235개의 섬을 99년간 영국에 빌려준다는 약속이 맺어졌습니다.
▲ 지난 15일 홍콩 시위대가 경찰이 쏜 후추 스프레이를 우산으로 막는 모습이에요. /AP 뉴시스
이후 중국이 열강의 간섭을 받으며 고단한 역사를 이겨내는 동안, 홍콩은 영국의 지배 아래 자본주의 경제를 성장시켰어요. 1941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의 지배를 받기도 했지만, 다시 영국 땅이 된 뒤로는 아시아 금융·무역의 허브로 자리 잡았지요. 그리고 약속한 99년이 끝난 1997년 7월 1일, 영국 식민지가 된 지 155년 만에 홍콩은 다시 중국 영토가 되었습니다. 이때 홍콩에 50년간 외교·국방을 제외한 분야의 자치(自治)를 허용한다는 협정이 맺어졌고요. 이렇게 1국가 2체제의 '홍콩특별행정구'가 탄생했답니다.
100년 넘게 서로 다른 역사와 문화를 지니고 산 이들이 하루아침에 하나가 되기란 쉽지 않을 거예요. 오늘날 국제사회가 요구하는 대화와 타협, 약속을 지키려는 태도가 홍콩을 품은 중국에 필요하지 않을까요?
공미라
10.31 여자도 학교에 가게 된 것은 언제부터일까
지난 10일 파키스탄의 여성 인권운동가 말랄라 유사프자이(Malala Yousafzai)가 인도의 카일라시 사티아르티(Kailash Satyarthi)와 함께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공동 지명되었어요. 올해 열일곱 살인 그녀는 노벨상이 생긴 이래 가장 어린 수상자예요. 말랄라는 '여자 어린이도 교육받을 권리가 있다'는 운동을 전개하였답니다. 여성이 교육받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우리로서는 이런 운동을 왜 벌이는지 이해하기 어렵지요.
말랄라가 태어나고 자란 파키스탄의 스와트밸리는 2007년 이슬람 근본주의 운동 조직인 탈레반이 점령한 지역이에요. 이곳에서 탈레반은 서양 문화를 없애고, 이슬람 고유의 문화를 지킨다는 이유로 여성을 억압하는 조치를 취했어요. 여성이 교육받을 권리를 없애고, 여성들끼리는 외출도 하지 못하게 하였지요. 만약 딸을 학교에 보내는 사람이 있다면 강하게 처벌하였고요.
▲ 올해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말랄라 유사프자이는 탈레반의 정책에 저항하며, ‘여자 어린이도 교육받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였어요. /AP 뉴시스
말랄라는 11세 때 이러한 탈레반의 정책에 저항하여 영국 BBC방송 블로그를 통해 여자 어린이도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공개적으로 연설하고, '가난한 소녀 학교 보내기' 운동을 전개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15세 때 학교에서 돌아오던 중 탈레반이 쏜 총에 머리를 맞아 목숨까지 잃을 뻔하였지요. 말랄라는 몇 차례 뇌수술 끝에 기적처럼 살아나 여성 교육의 아이콘이 되었습니다. 여성이 교육을 받지 못하고 사회에 진출할 수 없다면, 인간으로서 기본 권리까지 빼앗긴다는 것을 어린 소녀가 온몸으로 보여준 것이에요.
사실 과거에는 여성 교육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어요. 어느 시대에나 교육은 존재하였지만, 여성은 그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지요. 인류 문명이 발생한 메소포타미아에서 처음으로 학교교육이 등장하였는데, 여자가 교육받았다는 기록은 없어요. 고대 그리스의 스파르타에서는 여자도 교육을 받았으나 그것은 전사의 후예를 길러내기 위한 교육일 뿐이었습니다. 동서양의 역사를 살펴보면, 대부분 여성은 자녀 양육과 집안일에 필요한 기술을 배우는 게 전부였어요. 학교교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좋은 일자리도 얻지 못했고요. 남자와 결혼해야만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당연히 정치에도 참여할 수 없었고, 남편의 지위에 따라 여성의 지위가 결정되었어요.
▲ 제1차 세계대전 때 공장에서 탄피를 만드는 여성들의 모습이에요. 당시 여성들은 전쟁에 동원된 남성들을 대신하여 군수물자를 만들고 나라 경제를 이끌었지요. /Corbis/토픽이미지
근대에 들어서는 교육받는 여성도 생겨났지만, 남성과 똑같이 정치에 참여할 수는 없었어요. 프랑스혁명(1789)과 미국 독립혁명(1776) 중 발표된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 '독립선언문' 어디에도 여성 인권에 대한 내용은 없었습니다.
'전쟁'과 '인권'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이지만, 정말 이상하게도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인권을 갖게 된 데는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의 힘이 컸어요. 4년간 계속된 이 전쟁은 유럽 전체 인구의 2%가 참전하는 총력전(總力戰·국가가 가진 모든 분야의 힘을 기울여서 수행하는 전쟁)으로 진행되었거든요. 무기를 들고 싸울 만한 성인 남자는 대부분 전쟁터로 나갔다는 뜻이지요. 남자들이 떠난 공장의 빈자리는 여자와 어린아이, 노인으로 채워졌어요. 이런 상황에서 여성들은 전쟁에 필요한 물품을 만들고 경제를 이끌어가야 했지요. 전쟁 후 새롭게 만들어진 민주주의 국가에서 여성의 지위는 예전보다 향상되었고,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도 갖게 되었어요. 아시아나 아프리카의 여성들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라가 독립하면서 기본권을 누리게 되었고요.
우리나라 역사에서도 신사임당이나 허난설헌 같은 몇몇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여성은 교육을 받지 못했어요.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 이전에는 거의 문맹이나 다름없었고요. 게다가 유교의 영향으로 여자가 학문을 갈고닦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했지요.
▲ 1886년 선교사인 스크랜턴 부인이 우리나라 최초의 여학교인 이화학당을 세웠어요. /이화여자대학교 이화역사관
1886년 선교사 스크랜턴 부인이 우리나라 최초의 여학교인 이화학당을 열었을 때도 학생 모집이 무척 어려웠다고 해요. 하지만 학생 1명으로 시작한 이 학교는 점차 학생이 증가하였고, 다른 여학교도 생겨났지요. 이렇게 여학생이 늘자, 학교에서는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이라는데, 남자 선생님과 여학생이 한 교실에서 마주 보며 수업해도 되느냐'며 걱정하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웃지 못할 지침이 생겨났답니다. '남자 선생님이 교실 앞에 와서 헛기침하면, 여학생들은 일제히 고개를 운동장 쪽 창밖으로 돌린다. 선생님이 칠판을 향한 채 헛기침을 하면 학생들은 고개를 돌려 앞을 본다. 선생님은 칠판만 보며 수업하고, 학생들은 선생님의 뒤통수를 보며 수업을 듣는다. 수업이 끝나면 선생님이 다시 기침을 하고, 학생들이 운동장을 바라보는 사이 문을 열고 나간다.' 어때요? 선생님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하는 정말 신기한 수업이지요?
광복 후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는 처음부터 여성이 교육받을 권리와 정치에 참여할 권리를 인정했어요. 교육받은 여성이 늘면서 여성의 지위도 함께 올라가고, 남자만 할 수 있던 일에 여성이 도전하는 일도 많아졌답니다.
여성이 교육받고 정치에 참여하며 남성과 동등한 인권을 누리게 된 역사는 그리 길지 않아요. 아직도 개발도상국이나 후진국에서는 여성이 교육의 기회를 갖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종교적 이유나 가난 때문에 교육받지 못하는 어린이도 많고요. 어린 소녀 말랄라처럼 우리가 꿈꾸고 행동하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어요.
공미라
11.14 오렌지색, 왜 네덜란드 상징 되었을까?
조선 효종 4년(1653년), 파란 눈에 피부가 하얀 사람들이 제주도 바닷가에 표류했어요. 네덜란드에서 대만을 거쳐 일본의 나가사키로 가던 중 태풍을 만나 제주도로 오게 된 하멜(Hendrik Hamel·1630~1692) 일행이었습니다. 하멜은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조선 정부는 그에게 화약이나 무기를 다루는 기술을 배우기 위해 보내주지 않았어요. 군사훈련과 온갖 노동에 시달리다가 14년 만에 일본으로 도망친 하멜은 네덜란드에 돌아가 조선에서의 생활을 담은 '하멜 표류기'라는 책을 써서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당시로써는 베일에 싸였던 신비로운 동양의 나라 조선을 처음으로 서양에 소개한 책이었거든요.
▲ 축구 경기를 보며 오렌지색 옷을 입고 열정적으로 응원하는 네덜란드 국민 모습이에요. 오렌지색은 네덜란드의 상징 색인데, 왕위를 계승하는 오라녜(Oranje·영어로‘orange’) 가문의 이름에서 비롯되었어요. /Corbis 토픽이미지
하멜이 표류한 지 360여년이 지난 지금, 우리나라와 네덜란드는 활발히 교류하는 사이가 되었어요. 얼마 전 방한한 빌럼 알렉산더르 네덜란드 국왕 부부는 경복궁에서 하멜이 효종을 만나는 장면을 재연한 행사에 참가했다고 해요. 여러분은 '네덜란드' 하면 무엇이 먼저 떠오르나요? 튤립, 풍차, 운하, 나막신 같은 것들이 생각나겠지만, 네덜란드는 지난 2002년 한·일월드컵 때 우리나라와 4강 신화를 함께 일군 축구 감독 히딩크의 나라이기도 해요. 네덜란드는 축구 강국으로 유명한데, 유난히 눈에 띄는 주황색 유니폼을 입은 네덜란드 선수와 국민을 '오렌지 군단'이라는 별명으로 부릅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요? 오렌지가 자라기에는 너무 기온이 낮은 네덜란드에 왜 '오렌지 군단'이라는 별명을 붙였을까요?
16세기 네덜란드는 지금의 네덜란드뿐 아니라 벨기에·룩셈부르크·프랑스 북부까지 포함하는 지역이었어요. 항구를 따라 상업과 무역이 크게 발달하여 경제적 번영을 누렸으며, 유럽의 그 어느 지역보다 사상이 자유로운 곳이었지요. 바다를 막는 간척사업을 할 정도로 강인한 정신력도 가졌고요. 특히 북부 지역에는 근검절약을 강조하는 칼뱅의 신교 사상이 깊이 뿌리내렸어요. 문제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가 이곳을 지배한다는 것이었지요.
펠리페 2세는 네덜란드를 신교로부터 지키기 위해 강력한 가톨릭 정책을 펼쳤어요. 네덜란드를 가톨릭 국가로 만들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결혼까지 감행하고, 신교도를 탄압하는 종교재판을 열었어요. 상업을 하는 사람에게는 막대한 세금을 거두었고요. 신교도들이 종교의 자유를 외치며 저항하자, '거지떼'라고 부르며 탄압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아예 거지 밥그릇 등을 반란의 상징으로 삼아 폭동을 일으켰어요. 성당으로 몰려가 마리아 상을 부수고 유리창을 깨며 성경책을 불태웠지요.
이 폭동을 잠재우기 위해 펠리페 2세는 알바 공작을 총독으로 파견하였는데, 그는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 잔인한 사람이었어요. 잘 훈련된 군사 1만명을 거느리고 잔혹하게 사람들을 짓밟았지요. 분쟁 재판소에서 반란군 재판을 열어 신교도 수천명을 학살하였다고 해요. 분쟁 재판소는 '피의 재판소'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했습니다. 반란군을 이끌던 오라녜공(公) 빌럼 1세는 재판을 피해 독일로 도망가야만 했어요. 가혹한 공포정치가 계속 이어지자, 종교를 넘어 '정치적 자유'가 더 중요한 문제로 떠올랐습니다. 에스파냐로부터 독립을 요구하기 시작한 것이에요. 독일에서 돌아온 오라녜공의 지휘 아래 많은 사람이 독립 투쟁을 벌였답니다.
▲ 네덜란드 독립을 이끈 오라녜공(公) 빌럼 1세. /위키피디아
1579년 북부의 7개 주는 위트레흐트 동맹을 맺고, 1581년 7월 22일 독립을 선언했어요. 오라녜공 빌럼 1세는 네덜란드의 초대 총독이 되었고요. 그는 가톨릭 신자에게 권총으로 암살당할 때까지 '네덜란드 자유의 수호자' 역할을 했답니다. 이후 에스파냐의 무적함대가 영국에 격퇴당해 세력이 약해지고, 네덜란드는 해상 강국으로 발전하였어요. 네덜란드는 이후 왕정(王政)으로 정치 형태를 바꾸었는데, 오라녜 가문에서 왕위를 계승하고 있습니다. '오라녜(Oranje)'를 영어로 '오렌지(Orange)'라고 쓰는데, 이 때문에 오렌지색이 네덜란드 왕가와 국가를 상징하게 된 것이에요. '오렌지 군단'이란 별명도 여기서 탄생했답니다.
네덜란드 남부의 사정은 좀 달랐어요. 가톨릭 세력이 강하고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남부는 독립한 북부와 달리 계속해서 에스파냐의 지배를 받았거든요. 그리고 세월이 지나면서 오스트리아, 프랑스, 네덜란드의 지배를 받다가 19세기에 룩셈부르크와 벨기에가 되었지요.
얼마 전 OECD 회원국 가운데 '아동의 삶 만족도'가 가장 높은 나라로 네덜란드가 꼽혔다는 뉴스가 나왔어요. 복지제도가 잘 갖춰진 네덜란드는 돈이 많은 것을 큰 자랑거리로 여기지 않으며 불우한 이웃을 위해서 써야 한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다고 해요. 우리나라 경상도와 강원도를 합친 면적보다 작은 나라이지만, '평등'을 존중하는 마음만큼은 큰 나라입니다.
공미라
11.28 히틀러 때문에 탄생한 '국민 자동차'
우리 생활을 편리하게 하는 발명품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컴퓨터, TV, 냉장고, 휴대전화, 비행기 등 여러 가지가 있겠지요?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자동차'를 빼놓을 수 없을 거예요. 전 세계 수많은 사람이 매일 자동차를 이용한답니다. 하지만 자동차는 환경오염 등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키기도 해요. 그래서 최근엔 연료 소비가 적은 소형차나 환경오염을 일으키지 않는 그린카(green car)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답니다. 지난 8월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도 "가장 작은 한국차를 타고 싶다"며, 4박5일간 소형차를 타고 우리 국민을 만났지요. 작은 차에 탄 사람의 큰 인품이 돋보였습니다. 오늘은 우리 생활 속 필수품으로 자리 잡은 자동차에 얽힌 역사 이야기를 들려줄게요.
▲ 폴크스바겐을 생산하던 독일 공장 모습이에요. 히틀러의 말을 믿고‘나도 차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 독일 국민의 꿈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허무하게 사라졌지요. /Corbis 토픽이미지
▲ 폴크스바겐은 자동차 공학자인 페르디난드 포르셰(사진 왼쪽)가 히틀러의 명령을 받아 만들었대요. /Getty Images 멀티비츠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하는 화가이자 과학자, 발명가였던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장난감처럼 태엽을 감아서 움직이는 자동차를 만들었어요. 움직일 때마다 태엽을 감아주는 건 쉽지 않았겠지요? 아주 멀리 가기도 어려웠을 테고요. 1600년경 네덜란드의 시몬 스테빈은 바람의 힘으로 움직이는 풍력 자동차를 발명했는데, 이 자동차는 바람의 반대 방향으로는 절대 달릴 수 없다는 문제가 있었어요. 최초의 자동차로 널리 인정받은 것은 프랑스의 니콜라 퀴뇨가 1769년에 만든 증기 자동차예요. 앞바퀴 하나와 뒷바퀴 2개로 시속 5㎞의 속도를 냈는데, 브레이크가 없어서 처음 운전하던 날 교통사고를 내고 말았대요. 그래서 사람을 죽이는 기계로 알려지면서 널리 활용되지 못했어요. 독일의 칼 벤츠와 고트리브 다임러가 가솔린 엔진을 장착한 자동차를 발명하기 전까지 자동차는 쇠로 만든 당나귀 취급을 받기 일쑤였지요. 두 사람이 만든 다임러-벤츠사(社)는 메르세데스 벤츠를 생산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자동차 회사가 되었답니다.
20세기 초, 미국의 포드사에서 자동차를 대량으로 생산하기 시작했지만, 가격이 비싸 누구나 가질 수는 없었어요. 게다가 이 무렵 전 세계에 경제 대공황이 광풍처럼 불어닥쳐 유럽 경제는 속수무책으로 스러져 갔습니다. 특히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하여 어마어마한 배상금을 물어줘야 했던 독일은 실업자가 증가하면서 소련과 같은 사회주의 국가를 만들어 보겠다는 움직임까지 등장하여 사회가 무척 혼란스러웠어요. 그러다가 1933년 나치당(Nazis·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당)의 우두머리인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1889~1945)가 독일 총리 자리에 오르면서 큰 변화가 나타났어요. 히틀러는 '무너진 독일의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하여 잃어버린 땅을 되찾고, 사회주의로부터 독일을 지키며, 경제공황의 위기를 극복해 아리아인의 영광을 되찾자'고 연설하였어요. 사람들은 히틀러의 연설에 열광하였고, 이를 위해 여러 가지 조치가 취해졌어요. 600만명이 넘는 실업자를 다 구제할 수는 없었지만, 무기 공장이나 군대, 도로 공사 등에 많은 사람을 투입하였지요. 독일의 자동차 전용 고속도로인 '아우토반'의 기초를 닦으며 산업을 일으켰어요.
히틀러는 경제가 살아났다는 증거를 보이기 위해 전에 없던 '국민차 프로젝트'를 진행했어요. 자동차 공학자로 이름이 높았던 페르디난드 포르셰를 만나 누구나 부담 없는 가격으로 살 수 있는 튼튼하고 안전한 차를 만들라고 지시하였지요. 그런데 여기에 특별한 조건이 추가되었어요. 첫째 성인 2명과 어린아이 2~3명이 충분히 탈 수 있을 것, 둘째 시속 100㎞의 속도로 달릴 수 있을 것, 셋째 연비가 뛰어날 것, 마지막으로 가격이 1000마르크 이내일 것이었지요.
▲ 제2차 세계대전 후 승용차로 다시 태어난 폴크스바겐은 오늘날 가장 사랑받는 차 중 하나가 되었어요. /블룸버그
1938년 드디어 자동차가 완성되었어요. 한눈에 보아도 동글동글한 귀여운 외관에 시속 97㎞까지 안정적으로 달릴 수 있는 앙증맞은 작은 차였어요. 히틀러는 이 차에 'KdF (Kraft durch Freude)-wagen'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였습니다. '기쁨의 힘 자동차'라는 뜻이지요. 자동차를 만든 포르셰는 '국민차'라는 뜻의 독일어로 '폴크스바겐(Volkswagen)'이라 불렀고요.
히틀러는 독일 국민에게 저축운동을 통해 900마르크의 우표를 사면, 이 자동차를 한 대씩 받을 수 있다고 선언하였어요. 부의 상징이었던 자동차를 누구나 가질 수 있다는 말에 독일 국민 모두가 너 나 할 것 없이 우표를 사들였지요. 하지만 이 돈은 고스란히 제2차 세계대전의 전쟁 비용으로 들어가 버렸어요. 폴크스바겐은 전쟁터에서 다양한 용도로 활용되었고요. 결국 국민차의 꿈은 지키지 못할 약속으로 허무하게 사라져 버렸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은 또다시 독일의 패배로 막을 내렸어요. 히틀러의 지시로 폴크스바겐을 설계한 포르셰는 전범으로 2년 동안 감옥살이를 하였지요. 하지만 전쟁 후 승용차로 재탄생한 폴크스바겐은 우수성을 인정받으며 미국에서 큰 인기를 끌게 됩니다. 그리고 다양한 디자인과 성능으로 진화하여 오늘날 가장 인기 있는 자동차 중 하나가 되었답니다. 우리가 매일 타는 자동차에도 여러 가지 역사가 얽혀 있다니, 참 신기하지요?
공미라
12.12 창문 막힌 영국식 건물, 세금 때문이래요
'세상 사람 누구도 절대 피해갈 수 없는 두 가지는 죽음과 이것이다.'(서양 속담)
'가혹한 이것은 호랑이보다도 무섭다.'(중국 공자)
위의 문장에 공통으로 들어갈 '이것'은 과연 뭘까요? 다들 곰곰이 생각해 봤나요? 정답은 바로 '세금'이에요. 세금은 국가나 지방자치단체에서 필요한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거둬들이는 수입을 말해요. 모든 국민에겐 '납세의 의무', 즉 세금을 내야 할 의무가 있지요. 국가나 지방자치단체는 거둬들인 세금으로 공무원의 월급을 주고, 도로·상하수도 시설 등을 개선하며, 각종 복지사업을 벌입니다. 수입이 많은 사람에게 더 높은 세율을 적용해 빈부 격차를 줄이는 역할도 하고요. 듣고 보니 세금은 꼭 내야 하는 것 같지요? 그런데 왜 공자는 세금이 호랑이보다 무섭다고 한 것일까요? 세금은 우리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꼭 필요하지만, 역사적으로 공정하지 못하거나 지나치게 무거운 세금이 부과된 사례도 적지 않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이에 저항하기도 하였어요.
고려를 세운 태조 왕건은 민심을 얻고자 세금을 줄이는 정책을 시행했습니다. 인도에서는 이슬람교로 개종하면 인두세(人頭稅·성별이나 신분, 소득 등에 관계없이 성인이 된 사람에게 일률적으로 부과하는 세금)를 면제해 주는 정책을 써서 이슬람 세력이 확대되기도 하였고요. 중국 청나라는 인두세를 받지 않고 토지세만 받는 지정은제를 시행하자,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였지요. 그만큼 백성이 세금 부담을 크게 느꼈다는 뜻이에요. 신라 말 진성여왕 때나 고려의 무신집권기, 19세기 조선의 세도정치기에 농민 반란이 끊이지 않은 것도 모두 지나치게 많은 세금을 거두었기 때문이랍니다. 프랑스혁명이나 러시아혁명이 일어난 배경도 결국 공평하지 않은 세금 때문이었고요. 미국 독립전쟁 역시 영국이 차(茶)에 높은 세금을 부과하자 아메리카 식민지 주민이 이에 반발하면서 일어났어요.
▲ 영국의 어느 건물 모습이에요. 군데군데 창문이 막힌 모습이 이채롭지요? 1696년 창문 개수에 따라 세금을 내는 ‘창문세’가 생기자, 영국 사람들은 세금을 피하고자 아예 창문을 막아버렸다고 해요. /Whilesteps/위키피디아
역사를 살펴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권력자들은 세금을 조금이라도 더 거두기 위해 온갖 아이디어를 동원했습니다. 그중 가장 어이없는 세금으로 '창문세'가 있어요. 명예혁명(1688년)으로 영국의 왕이 된 윌리엄 3세는 잦은 전쟁으로 많은 돈이 필요했어요. 그는 어떻게 하면 부자들에게 더 많은 세금을 거둘까 고민하였지요. 당시에는 정확한 소득을 공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부유한 사람의 기준을 무엇으로 하느냐는 매우 중요한 문제였어요. 게다가 그때 이미 영국에는 벽난로가 있는 가정에 세금을 부과하는 '난로세'도 있었거든요. 호화로운 주택에서 벽난로를 사용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집집마다 들어가서 난로가 있는지 확인하는 절차는 매우 번거로웠어요. 낯선 사람이 집에 들어와 난로를 확인하면 자유를 침해당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난로세를 내지 않으려고 난로를 없애버리는 사람도 많았고요.
▲ '창문세'를 만든 영국의 윌리엄 3세 초상. /위키피디아
윌리엄 3세는 민심을 얻고자 난로세를 폐지하고, 1696년 '창문세'를 신설하였어요. 부유한 가정일수록 집이 크고, 집이 크면 창문이 많았기 때문이에요. 창문의 수가 6개 이하이면 세금 면제, 7~9개는 2실링, 10~19개는 4실링, 20개 이상은 8실링의 세금을 내게 하였지요. 집 안을 살펴봐야 확인할 수 있는 난로와 달리 창문은 집 밖에서도 쉽게 개수를 셀 수 있어서 세금을 걷기에도 편리하다고 생각했답니다.
하지만 세금을 내야 하는 사람들의 생각은 달랐어요. 그들은 세금을 내느니 차라리 암흑 속에 갇히는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유리창을 나무판자로 막아버리거나 아예 벽돌을 쌓아 없애 버린 거예요. 창문을 세는 관리가 찾아오는 날에만 잠시 창문을 없앴다가 나중에 다시 사용하기도 하였어요. 두 개의 창문을 마치 한 개처럼 보이게 하는 방법도 사용하였고요. 그래서 덩치는 커다랗지만, 창문은 몇 개 되지 않는 이상한 건물들이 생겨났답니다. 부유한 사람들은 정원에 나와 햇볕을 쬐고 신선한 공기를 마셨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난로도 창문도 없는 집에서 음산하게 지내야만 했어요. 그러자 국민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하고, 우울증을 호소하는 사람도 크게 늘었습니다. 창문세는 150여년간 지속하다가, 1851년 주택세가 생기면서 폐지되었어요.
▲ 프랑스에는 창 너비에 따라 세금을 매기는 창문세가 있었대요. 그래서 프랑스 사람들은 집에 폭이 좁고 긴 창문을 냈답니다. / Corbis/토픽이미지
그런가 하면 프랑스는 영국보다 먼저 창문세를 거둔 적이 있답니다. 필립 4세 때인 14세기와 백년전쟁(1337~1453년) 중에 창문세를 부과하였는데, 1789년 프랑스혁명 후 귀족들에게 세금을 거두기 위해 다시 만들었어요. 영국처럼 창문 개수를 세는 것이 아니라 창문 폭에 따라 세금을 내게 하였지요. 부유한 사람일수록 창을 크고 넓게 낸다는 것에 기준을 두었답니다. 그러자 프랑스 사람들은 세금을 덜 내기 위해 폭이 좁고, 세로로 긴 창문을 만들기 시작했어요. 우리가 아름답다고 평가하는 낭만적인 프랑스식 창문은 이런 이유로 생겨났답니다. 창문 없는 영국식 건물과 길고 좁은 창문을 가진 프랑스식 건물에는 부적절한 근거로 세금을 걷는 정부를 비난한 당시 사람들의 마음이 숨겨져 있습니다.
공미라
12.26 컴퓨터, 암호 해독기에서 시작되었답니다
▲ 영국 수학자 앨런 튜링은 치밀한 연산이 가능한 기계를 만들어 독일군 암호기인 에니그마를 해독하는 데 성공하였어요. 그 덕분에 영국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지요. /블룸버그
"열려라, 참깨!"
이 말을 모르는 어린이는 없을 거예요. 알리바바가 동굴을 가로막은 커다란 바위를 향해 크게 외치자 바위 문이 열립니다. 알리바바는 동굴에 들어가 도둑들이 숨겨 놓은 보물을 몽땅 가져가 버리지요.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40인의 도둑은 몹시 당황합니다. 허술한 암호 관리로 모든 것을 잃어버렸으니까요. 아라비안나이트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암호 관리의 중요성'이라는 새로운 교훈을 줍니다.
최근엔 소니픽처스가 만든 코미디 영화 '인터뷰(The Interview)'가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였어요. 북한 김정은을 암살하는 내용을 다루었기 때문이에요. 예고편 영상을 공개하고 나서는 알 수 없는 단체에 의해서 영화사가 해킹을 당하였지요. 해킹 단체로부터 테러 위협까지 받은 소니픽처스는 영화 상영을 포기하였다가 다시 상영하겠다고 발표하기도 했어요. '해킹(hacking)'이란 다른 사람의 컴퓨터 시스템에 무단으로 침입하여 데이터와 프로그램을 없애거나 망치는 행위를 말합니다. 몇 년 새 해킹으로 큰 피해가 발생하면서 정보 보호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지요.
그런데 암호를 만들어 보안을 강화하는 사람과 암호를 풀어내는 사람 사이의 싸움은 오늘날에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이 싸움은 인류의 역사 속에서 계속됐답니다. 가장 어려운 암호를 만들고, 그 암호를 해독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기계가 바로 오늘날의 컴퓨터로 발전하였지요.
고대 로마의 학자였던 플루타르크가 쓴 역사책에 따르면, 최초의 암호는 기원전 400년경 그리스의 스파르타 군대에서 사용되었어요. 전쟁 중 비밀리에 편지를 주고받기 위해 암호를 썼다고 해요. '스키테일(Scytale)'이라는 나무봉을 사용한 암호였지요. 기다란 양피지에 쓴 편지를 봉에 돌돌 말아야 정확한 내용이 보이는 방법이었어요. 반드시 굵기가 같은 스키테일을 사용해야만 암호를 해독할 수 있었습니다.
▲ 오늘날 기상 예측, 우주탐사 등에 사용되는 수퍼컴퓨터예요. 인류 생활을 혁신적으로 바꾼 컴퓨터는 사실 세계대전 중 만들어진 암호 해독기에서 시작되었대요. /Corbis/토픽이미지
로마의 카이사르도 암호로 된 편지를 즐겨 사용하였어요. 카이사르 암호는 우리도 간단히 만들 수 있답니다. 암호로 만들고자 하는 내용을 알파벳으로 적은 다음, 그 글자보다 몇 번째 뒤나 앞의 글자로 바꾸는 방식이거든요. 예를 들어 'I LOVE YOU'를 쓰고 싶을 때는 각 알파벳보다 세 자리 뒤의 것으로 바꿔서 'L ORYH BRX'라고 쓰는 거예요. 어때요? 원리를 알고 나니 암호 만들기도 생각보다 어렵지 않지요?
암호의 역사에서 빠지지 않는 것은 세계대전 중 독일이 만든 에니그마(Enigma·그리스어로 '수수께끼'라는 뜻)예요. 타자기 모양으로 생긴 이 기계에 문서를 입력하면 내부에 있는 회전체가 돌면서 구멍을 뚫어 이해할 수 없는 2200만개의 배열로 바뀌었어요. 입력한 글자가 다른 글자로 바뀌어서 나오는 신기한 기계였지요. 에니그마로 작성한 문서는 에니그마 없이는 해석할 수가 없었습니다. 더구나 독일은 암호 조합 방식도 매일 새롭게 바꾸었고요. 24시간 안에 암호를 해독하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었으니, 에니그마는 한마디로 난공불락의 암호 생성기 겸 해독기였답니다. 독일군은 U보트라는 잠수함 무리를 이끌고 연합군이 지나는 바다 밑을 지키다가 일시에 공격하는 방법을 사용했어요. 언제, 어디서, 어떻게 공격한다는 내용은 모두 에니그마로 작성되었고요. 바다 밑으로 다니는 잠수함이 어떻게 공격해 올지 모르는 영국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답답하였을 거예요.
▲ 고대 그리스의 스파르타 군대가 사용한 스키테일 암호(사진 위).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이 사용한 암호기 ‘에니그마’. /위키피디아
결국 영국은 유능한 과학자들을 블레츨리 파크라는 연구소에 모아 에니그마 해독 작업에 착수했어요. 수학자 앨런 튜링(Alan Turing·1912~1954)이 중심이 된 이 연구소에서는 치밀한 수학 계산이 가능한 봄베·콜로서스 등의 기계를 만들었지요. 그러고 나서 이 기계와 침몰한 독일 잠수함에서 찾아낸 암호 책을 가지고 에니그마를 해독하기 시작했어요. 전날 해독된 암호들은 과감히 지우고, 자주 사용되는 단어에 주의를 기울이며 군대 용어와의 연관성을 찾아나갔지요. 이런 작업을 반복하여 경우의 수를 점차 줄여나가면서 영국 과학자들은 드디어 암호 해독에 성공하였습니다. 독일군의 작전을 알게 된 영국군은 이제 적의 공격에 미리 대비하며 역공할 수 있게 되었지요. 이로 인해 전세가 뒤바뀌었고, 결국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의 히틀러는 대서양 전투에서 크게 패하고 말았어요.
튜링이 만든 기계에 내장된 테이프는 지금의 컴퓨터 메모리로 발전하였어요. 테이프를 읽고 쓰기 위한 장치는 컴퓨터의 메모리칩과 입출력 장치가 되었으며, 작동규칙표는 중앙처리장치(CPU)가 되었습니다. 천재 수학자였던 튜링의 암호 해독 노력에서 오늘날의 컴퓨터공학이 시작되었지요. 그러니 컴퓨터 사용에서 암호가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예요. 매년 컴퓨터공학 분야에서 큰 업적을 남긴 사람에게 주는 '튜링상'은 노벨상 못지않은 명성을 얻고 있어요.
정보의 중요성은 과거에는 주로 전쟁에서 나타났지만, '손안의 컴퓨터'라고 할 수 있는 스마트폰이 등장하면서 정보 보호는 누구에게나 중요한 문제가 되었어요. 은행 거래를 할 때도, 인터넷 학습 사이트를 이용해 공부할 때도, 아파트 현관문을 열 때도 비밀번호를 알아야 하는 세상에 살고 있잖아요. 지금은 주로 알파벳이나 숫자, 특수문자를 조합한 비밀번호를 쓰고, 그리는 패턴을 사용하거나 지문 인식 방식을 쓰기도 해요. 첩보 영화에서는 홍채를 인식하는 장면도 자주 등장하고요. 컴퓨터를 기반으로 한 정보사회에는 정보가 곧 힘이 돼요. 여러분도 소중한 개인 정보를 잘 지킬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답니다
공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