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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인의 땅의 歷史] 301. 식민 조선의 왕공족(王公族) ①고종의 자녀들 - 310. 남대문 괴담과 사라진 국보 번호

상림은내고향 2022. 8. 10. 15:08

[박종인의 땅의 歷史] 2022  조선일보 

2022.05.11

301. 식민 조선의 왕공족(王公族) ①고종의 자녀들

일본 천황은 이들을 조선 왕족으로 책봉했다

 

▲덕혜옹주(1912~1989). 대마도 번주 가문 장손에 시집간 덕혜옹주는 소아성 치매를 앓다가 해방 후 귀국해 창덕궁 낙선재에 살았다. 아버지는 고종이고 어머니는 복녕당 양씨다. /문화재청

 

조선 황족에서 일본 왕족으로

‘갑신정변 주역인 김옥균과 박영효를 죽이기 위해 자객을 보냈던 고종은 이완용 등 을사오적을 죽이기 위해 자객을 보낸 적이 없었다. 을사조약과 합방으로 을사오적이 호의호식하는 것보다 더 황실은 편안한 일상을 보냈다. 식민지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은 분명하다. 고종이 뛰어난 지략가로 외세를 잘 이용하고 나라의 근대화를 위해 절치부심하고 굶주리는 백성을 위해 눈물로 베갯잇을 적셨다고 해도 그 책임은 면할 수 없다.’ 2004년 김윤희, 이욱, 홍준화라는 세 역사학자가 쓴 ‘조선의 최후’(다른세상)에 나오는 글이다.

 

한 나라 그것도 500년 지속해온 왕국이 똑같은 기간 멸시해온 오랑캐 일본에 식민지가 됐는데, 대한제국 초대황제 광무제 고종은 나라를 팔아먹었다는 을사오적을 죽이라 명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40년 넘도록 그 나라를 이끌었던 이 황제를 일본은 죽이거나 신분을 떨어뜨려 모멸감을 주지도 않았다. 오히려 일본은 고종과 그 가족을 천황 황명으로 조선 왕(王)과 조선 공(公)에 책봉해 식민시대 내내 우대했다. 1910년 8월 29일 일본 천황 메이지가 내린 조령은 이러했다.

 

‘전 한국 황제(韓國皇帝·순종)를 책봉하여 왕(王)으로 삼고 창덕궁이왕(昌德宮李王)이라 칭하니 이 융숭한 하사를 세습해 종사(宗祀)를 받들게 한다. 태황제(太皇帝·고종)를 태왕(太王)으로 삼아 덕수궁이태왕(德壽宮李太王)이라 칭한다. 그 배필을 왕비, 태왕비 또는 왕세자비로 삼아 모두 황족(皇族)의 예로써 대한다.’(1910년 8월 29일 ‘순종실록’)

 

고종과 순종 직계 혈족인 이들이 ‘조선 왕족(王族)’이다. 그리고, ‘이강(고종 아들) 및 이희(고종 형)는 이왕(李王)의 친족으로 공(公)으로 삼고 그 배필을 공비(公妃)로 삼아 세습해 황족의 예로써 대한다.’

 

이 고종과 순종 형제들이 ‘조선 공족(公族)’이다. 메이지 조령은 이렇게 이어진다. ‘일본 황족으로서 대대손손 세습해 복록(福祿)을 더욱 편안히 하여 영구히 행복을 누리게 한다.’

 

문장 하나로 정리하면 이렇다. ‘이왕 가문은 천황 황족과 같은 왕공족으로 세습 신분과 재산을 보장한다.’

식민시대 35년 위 학자들 표현대로 ‘을사오적보다 더 호의호식했던’ 이들 왕공족의 삶을 들여다본다. 총 한 방 쏘지 않고 나라가 망한 이유가 거기 있을지도 모른다.

 

▲1901년 이전 촬영한 고종과 순종과 영친왕 이은(왼쪽 두루마기 차림). 고종은 왕비 민씨가 죽고 1896년 2월 러시아공사관으로 피난한 뒤 그곳에서 엄비와 생활했다. 영친왕은 러시아공사관에서 환궁하고 6개월 뒤인 1897년 8월 17일 태어났다. /버튼 홈즈, ‘1901년 서울을 걷다’, 푸른길, 2012

 

도쿠주노미야이태왕(德壽宮李太王)

1907년 7월 헤이그밀사 사건이 터졌다. “나는 밀사를 보낸 적 없다”고 고종은 극구 부인했다.(‘통감부문서’ 5권 1.헤이그밀사사건급한일협약체결 (9)밀사 파견에 대한 한국 황제에의 엄중 경고 및 대한 정책에 관한 묘의 결정 품청 건)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대한제국으로부터 세권(稅權)과 군사권, 재판권을 빼앗아버렸다.(앞 문서, (3)헤이그 체재 한국 황제의 밀사 성명·자격 조회 및 대한 조치에 관한 건) 7월 16일 을사오적을 포함한 제국 내각 대신들이 고종에게 퇴위를 요구했다. 버티던 고종은 결국 7월 20일 양위식을 치렀다. 고종도 순종도 없이 내시가 의례를 대신하는 권정례(權停例)로 황제가 바뀌었다.(1907년 7월 19일 ‘고종실록’)

 

고종은 상왕으로 물러났다. 대한제국 황궁은 고종이 살던 경운궁에서 융희제 순종이 새로 거처를 정한 창덕궁으로 바뀌었다. 경운궁은 궁호가 덕수궁(德壽宮)으로 변경됐다. 조선 개국 직후인 1400년 태조 이성계가 왕위에서 물러난 뒤 개경에 지은 궁궐 이름과 같다.(1400년 음 6월 1일, 1907년 양 8월 2일 ‘순종실록’) 이후 고종은 1919년 사망할 때까지 덕수궁이태왕, 도쿠주노미야이태왕으로 불렸다. 창덕궁에 살던 순종은 창덕궁이왕, 쇼도쿠노미야이왕이라 불렸다.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합조약이 공포되고 나라가 사라진 뒤에도 그들은 그렇게 불렸다. 왜? 일본 천황 메이지가 그들을 조선 왕으로 책봉했으니까.

 

식민지 왕의 일상

덕수궁으로 이름이 바뀐 옛 황궁에서 이태왕은 심심하게 살았다. 덕수궁 일상을 일지로 기록한 ‘덕수궁 찬시실 일기’에는 고종의 하루 일과가 세세하게 기록돼 있다. 1911년 2월 1일 찬시실 일기에 따르면 고종은 새벽 3시에 함녕전 침실 잠자리에 든 뒤 오전 10시40분에 잠에서 깼다. 11시30분 각종 탕약과 차를 마신 뒤 당직자 보고를 받고 오후 1시20분 점심을 먹었다. 이어 간식 차를 마신 뒤 야간 당직자 명단을 보고받고 조선 귀족과 고위직을 접견했다. 저녁은 오후 6시20분에 먹었고 오후 7시에는 역대 조선 국왕 초상화를 모신 선원전과 위패들을 모신 경효전, 의효전 보고를 받았다. 경효전은 첫 왕비 민씨 위패를 모신 곳이고 의효전은 첫 며느리 민씨 위패를 모신 곳이다. 오후 9시55분에 야식을 먹고 이날은 새벽 2시35분에 잠자리에 들었다. 이런 일상이 계속적으로 반복됐다.(신명호, ‘덕수궁 찬시실 편찬의 일기 자료를 통해본 식민지 시대 고종의 일상’, 장서각 23집, 한국학중앙연구원, 2010)

 

그런데 고종이 덕수궁에 같이 살았던 식구는 태왕비로 호칭이 바뀐 영친왕 친모, 황귀비(皇貴妃) 엄씨와 후궁들이었다.

 

아관파천 중 잉태된 영친왕

1897년 10월 20일 상궁 엄씨가 아들을 낳았다. 제국을 선포하고 1주가 지난 날이었다. 이 아들이 영친왕 이은이다. 아들이 태어나고 이틀 뒤 고종은 엄 상궁을 후궁인 귀인(貴人)으로 승격시켰다. 3년 뒤인 1900년 8월 3일 고종은 귀인 엄씨를 정1품 후궁인 빈(嬪)으로 승격시키고 그녀를 순빈(淳嬪)으로 봉작했다. 그날 고종은 또 다른 후궁 귀빈 이씨를 정2품 후궁 소의(昭儀)로 봉했다. 소의 이씨 또한 일찍 딸을 낳았었는데 요절했다.(이상 ‘고종실록’, ‘순종실록부록’)

 

‘순종실록부록’에는 ‘소의 이씨가 낳은 딸이 요절하자 엄비가 대신 입궁했다’라고 기록돼 있다.(1911년 9월 1일 ‘순종실록부록’) 그런데 또 다른 기록이 있다.

 

‘고종이 전 상궁 엄씨를 불러 계비(繼妃)로 입궁시켰다. 민 왕후가 생존해 있을 때는 고종이 두려워하여 감히 그와 만나지 못하였다. 10년 전 고종은 우연히 엄씨와 정을 맺었는데, 민후가 크게 노하여 죽이려 했지만 고종의 간곡한 만류로 목숨을 부지하여 밖으로 쫓겨났다가 이때 그를 부른 것이다. 시해 사건이 발생한 지 겨우 5일째 되던 날이었다.’(황현, ‘매천야록’ 2, 1895년 ③ 11. 상궁 엄씨의 입궁, 국사편찬위)

 

그러니까 1895년 10월 왕비 민씨가 일본 낭인들에게 살해되고 닷새 뒤에 옛 연인을 불러들였다는 뜻이다. 황현 기록에는 ‘도성 사람들이 모두 한탄하였다’라고 적혀 있다.

 

넉 달 뒤 고종이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공사관으로 달아난 ‘아관파천’도 엄 상궁이 주도한 일이었고, 1897년 2월 경운궁으로 환궁하고 8개월 뒤 영친왕이 태어났으니 이은은 그 러시아공사관에서 잉태된 아들이었다.

 

을사조약 직전인 1905년 10월 5일 황제 고종은 황귀비 엄씨에게 서봉대수훈장(瑞鳳大綬勳章)을 수여했다. 서봉장은 1904년 3월 신설한 여자 전용 훈장이며 황귀비는 그 첫 수훈자였다.

 

▲경운궁(덕수궁)에서 촬영된 고종과 둘째아들 영친왕 이은. 1907년 황제위에서 강제로 퇴위된 뒤 영친왕이 일본으로 유학 가기 전으로 추정된다. /국립고궁박물관

 

1911년 7월 엄비의 죽음 1912년 5월 덕혜의 탄생

1911년 7월 20일 태왕비 엄씨가 죽었다. 장례는 8월 20일 치러졌고 위패는 엄씨가 살던 덕수궁 영복당에 모셔졌다. 영복당 권역은 궁녀들이 살던 공간이었다. 1912년 고종에게 딸이 태어났다. 이 딸이 고종이 아꼈던 외동딸 덕혜옹주다. 어머니는 궁녀 양춘기였다. 덕혜옹주가 태어난 날은 양력 5월 25일이었다. 엄비 장례 기간에 덕혜가 잉태된 것이다. 소주방(주방) 궁녀였던 양씨는 복녕당(福寧堂)이라는 당호를 받고 후궁이 되었다.

1852년생인 고종은 그해 환갑을 넘겼고 양씨는 서른 살이었다. 창덕궁에 살던 고종 맏아들 순종은 38세였다.

 

고종은 딸이 태어난 날 궁녀 방을 찾아가 딸과 딸의 엄마를 부둥켜안았다. 이후 고종은 하루에 두세 번씩 복녕당을 찾아가 시간을 보내고 함녕전으로 돌아오곤 했다. 딸이 태어나고 한 달 보름이 지난 7월 13일 고종은 아기를 함녕전으로 데려와버렸다. 친엄마 복녕당 양씨는 함께 오지 못했다. 대신 변복동이라는 유모가 아기를 길렀다. 아기는 오래도록 이름 없이 ‘복녕당 아기씨(福寧堂阿只)’라 불리다가 1921년 5월 4일 아홉 살 생일을 21일 앞두고 배 다른 오라버니 순종에 의해 ‘덕혜(德惠)’라는 이름을 받았다.(1921년 5월 4일 ‘순종실록부록’)

 

후궁이 낳은 딸이라 공주가 아니라 옹주였고, 그래서 우리가 ‘덕혜옹주’라 부르는 그녀는 불우하게 살았다. 일본으로 반 강제 유학을 떠난 덕혜는 1929년 5월 친엄마 복녕당이 유방암 후유증으로 죽었을 때 귀국했다. 일주일 남짓한 장례를 마치고 서둘러 일본으로 돌아간 덕혜는 대마도 번주 장손과 결혼했지만 이내 소아성 치매를 앓다가 이혼했다가 해방 후 귀국했다.

 

▲덕혜옹주 생모 복녕당 양씨. 엄비 사망 직후 장례 기간 고종 승은으로 덕혜를 회임했다. /국립고궁박물관
 
 

덕혜의 두 남동생

덕혜가 고종에게 막내딸은 맞지만 막내 자식은 아니었다. 덕혜가 태어나고 2년이 지난 1914년 7월 3일 밤 고종에게 아들이 태어났다. 아들을 낳은 여자는 궁녀 이완덕이었다. 나이 열셋에 세수간 궁녀로 입궐했던 이씨는 스물여덟 살에 승은을 입고 이듬해 아들을 낳고 광화당이라는 당호를 받았다. 고종은 예순두 살이었다. 아들 이름은 육(堉)이었다. 고종은 이번에는 아들 육과 친모 광화당을 함녕전으로 불러들여 같이 살았다.

 

한 해가 지나 1915년 8월 20일 예순셋 먹은 고종에게 또 아들이 태어났다. 이름은 우(堣)라 지었다. 친모는 서른세 살 먹은 궁녀 정씨였다. 정씨는 보현당이라는 당호를 받고 후궁이 되었다. 아들 우는 친어머니 곁을 떠나 함녕전에서 아버지와 배 다른 형제들과 함께 살았다. 짧지만 함녕전에는 네 살배기 덕혜와 두 살짜리 이육, 석 달배기 이우 세 남매가 아버지 고종과 함께 살았다. 그런데 광화당이 낳은 아들 육은 1916년 1월 22일에, 보현당이 낳은 아들 우는 반년 뒤인 7월 25일 요절했다.

 

고종은 또 김옥기라는 또 다른 궁녀를 후궁으로 들였는데 자식을 낳지 못해 후궁 지위에는 오르지 못했다. 훗날 순종이 그녀에게 삼축당이라는 당호를 내렸다. 이들 후궁은 모두 고종 생전부터 급료를 받았다. 1926년 3월 복녕당이 받은 월급은 580원이었고 보현당은 280원, 광화당은 480원, 후궁이 되지 못한 김씨 삼축당은 115원을 받았다.(김용숙, ‘조선조 궁중풍속연구’, 일지사, 1987, p11)

 

1919년 고종이 죽었다. 고종과 함께 살았던 후궁들은 사간동에 지어준 집에 함께 살았다. 후궁 신분을 일본 황실로부터 인정받지 못했기에, 이들 가운데 덕혜옹주를 제외한 그 누구도 왕족이나 공족에 책봉되지 못했다. 요절한 우와 육은 서삼릉 고종왕자묘에 묻혀 있고, 그 태항아리는 국립고궁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망국 황제 고종은 그렇게 그들과 함께 살았다. <다음주 계속>

 

 ▲덕혜옹주의 남동생들인 고종 8남(왼쪽)과 9남 태항아리. 두 사람 모두 출생 후 아기 시절에 요절했다./국립고궁박물관

 

 ▲아기 덕혜옹주 기념사진. 고종 막내딸인 덕혜옹주는 엄비가 죽고 10개월 뒤 후궁 복녕당 양씨와 고종 사이에 태어났다. /국립고궁박물관

 

 ▲1929년 6월 벌어진 복녕당 양씨 장례식 장면. 유방암을 앓던 양씨가 투병 끝에 사망하자 일본에 있던 딸 덕혜옹주가 급거 귀국했다. 사진은 1929년 6월 6일자 '조선신문'에 실린 장례장면과 상복을 입은 덕혜옹주. /국립중앙도서관

 

302. 식민 조선의 왕, 왕공족 ②1917년 순종의 천황 알현

조선 왕 순종, 식민 통치 미화작업에 끌려다녔다


1909년 2월 4일 창덕궁 인정전 앞에서 순종 일행이 신의주까지 다녀온 서순행(西巡幸)을 기념해 촬영한 단체 사진이다. 가운데 대한제국 황제 융희제 순종이 앉아 있고 왼쪽에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서 있다. 나라가 망하고 7년이 지난 1917년 6월, ‘조선 창덕궁 이왕’에 책봉된 전 제국황제 순종은 대한해협을 건너 일본 도쿄로 가서 일본 천황이 책봉한 왕족 자격으로 천황 다이쇼를 알현했다. 중국에 사대했던 조선 500년사에도 없었던 초유의 일이었다. /국립고궁박물관 

 

‘이왕 전하 도쿄로 납신다’

1917년 6월 3일 총독부 기관지 격인 ‘매일신보’ 2면 한가운데에 군복을 입은 창덕궁이왕(昌德宮李王·순종) 사진과 함께 이런 기사가 실렸다. ‘李王殿下御東上(이왕전하어동상) - 8일 경성 출발 약 2주간 체류’. 이왕전하는 순종을 뜻하고 ‘御(어)’는 왕 관련 용어에 붙이는 접두어다. ‘東上(동상)’은 ‘동쪽으로 간다’는 뜻이다. 식민 본국인 일본 수도가 도쿄(東京)이니 ‘東上’은 도쿄로 납신다는 뜻이다. 지금 서울로 갈 때 상경(上京)한다는 말과 동일한 맥락이다. 식민 시대 기준은 도쿄였다. 경부선 철도는 부산행이 상행선이었고 경성행이 하행선이었다. 그러니까 7년 전인 1910년 9월 1일, 한일병합조약이 공포되고 사흘 뒤 창덕궁 인정전에서 당시 천황 메이지(明治)에 의해 조선 이왕으로 책봉된 순종이 후임 천황 다이쇼(大正)를 알현하기 위해 조선을 떠나 일본 도쿄로 간다는 뉴스였다. 명과 청 왕조를 통틀어 중국에 사대했던 조선왕조 500년 동안에도 없었던 입조(入朝: 사대 본국에 가서 인사를 하는 행위)였다.

 

 1917년 6월 3일자 ‘매일신보’. 이왕 전하(순종)가 도쿄로 가서(東上·동상) 천황을 알현한다는 기사다.

 

침묵 속에 진행된 책봉식

한일병합을 주도했던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순종을 ‘대공(大公)’으로 격하시키려 했다. 대한제국 쪽 협상 주도자인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은 “중국에 조공할 때도 왕(王) 지위를 유지했다”고 주장해 이를 관철시켰다.(고마쓰 미도리(小松緑·전 통감부 외사국장), ‘明治外交祕話(명치외교비화)’, 原書房, 1976, p283) 일본 내각 또한 이를 수용했다. 그리하여 전주 이씨 황실은 왕족 지위를 유지하게 되었다. 전 황제 고종은 덕수궁이태왕, 순종은 창덕궁이왕에 책봉됐다.

 

1910년 9월 1일 천황 메이지가 보낸 이왕 책봉 칙사가 창덕궁 인정전에 도착했다. ‘왕 전하도 칙사도 침묵 속에 있었고 양측 수행원은 석상처럼 숨죽여, 엄숙했다는 말밖에 형언할 수 있는 말을 찾을 수 없는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다. 그리고 이왕은 ‘대한제국 황제 의장을 갖춰 입고 영국식 의전복을 입은 기병 호위 속에 황제 깃발을 펄럭이는 마차를 타고’ 총독 관저를 찾아갔다. 생애 마지막 제국 황제 의장이었다.(곤도 시로스케(權藤四郞介·전 대한제국 궁내부 사무관 등), ‘대한제국황실비사’, 이마고, 2007, p103, 104)

 

이토 히로부미의 계산

1907년 7월 20일 헤이그 밀사 사건을 빌미로 광무제 고종을 퇴위시킨 조선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바로 그해 12월 고종과 엄귀비 사이 아들 영친왕 이은을 도쿄로 보냈다. 영친왕은 순종에 이어 조선 왕위를 물려받을 왕세자였다. 열 살 먹은 왕세자는 1963년 박정희 정부에 의해 귀국이 허용될 때까지 일본인으로 살았다.

 

그리고 히로부미는 갓 황제가 된 순종을 통감 자격으로 배종해 1909년 1월과 2월 두 차례에 걸쳐 북쪽과 남쪽으로 순행(巡幸)시켰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기차로 여행한 1월 여행을 남순행, 신의주까지 북상하고 돌아온 2월 여행을 서순행이라고 한다.

 

왕세자 영친왕 유학은 명목상 권력자인 전주 이씨 왕실을 식민체제에 정신세계부터 길들이려는 조치였다. 이왕 순행은 조선왕조 내내 대중이 한 번도 보지 못한 군주를 대면시켜 식민 조선인에게 자발적인 복종을 유도하려는 계획이었다. 천황 메이지를 일본 전국에 여행시켜 ‘근대화 방법을 놓고 분열돼 있던 여론을 결집시키고 중앙정부 중심의 정치체제를 확립할 수 있었던’ 메이지 유신 경험을 그대로 써먹은 작업이었다.(이왕무, ‘대한제국기 순종의 서순행 연구’, 동북아역사논총 31, 동북아역사재단, 2011)

 

남순행과 서순행

“나는 임금 자리에 오른 뒤 도탄에 빠진 백성 생활을 구원할 일념뿐이었다. 하여 직접 지방 형편을 시찰하고 그 고통을 알아보려고 한다. 통감인 공작 이토 히로부미에게 특별히 배종할 것을 명한다.”(1909년 1월 4일 ‘순종실록’) 그리고 사흘 뒤 순종은 궁내부 관료 41명, 대한제국 내각 42명, 통감부 요원 13명을 데리고 경성 남대문역에서 열차에 올라 대구~부산~마산~경성으로 6박7일 대장정에 올랐다. 철길 매 5~10리마다 일본 헌병이 경호하고 연도에는 한일 두 나라 국기를 든 학생들이 도열했다.(‘내각일기’, 순행시제반준비략(巡幸時諸般準備畧): 이왕무, ‘대한제국기 순종의 남순행 연구’, 정신문화연구 30권 2호, 한국학중앙연구원, 2007, 재인용)

대한제국 황제가 민정 순찰에 나섰는데 경호는 일본 헌병이 하고, 환영 인파는 일장기를 들었다. 목적지 가운데 한 곳인 대구에서는 “이등박문이 황제를 일본으로 납치하려고 한다”며 철길에 드러눕는 일도 벌어졌다.

(‘통감부문서’ 9권, 8. 한국황제남순관계서류 (54) 이토 통감 연설 후 한민의 반향 및 봉영 상황) 작은 소란이 계속되는 가운데 1월 7일 오후 3시 25분 순종이 대구에 도착했다. 예포 21발이 열차를 환영했다.

 

부산과 마산도 마찬가지였다. 부산에서는 기차역 앞과 교차로마다 환영 문(門)을 세웠고 일본 육해군이 도열해 환영했다. 1월 8일 오전 9시 40분 부산에 도착한 순종 일행은 일본 천황 메이지가 보낸 축하 전보를 받았다. 내용은 ‘일본 함대를 부산과 마산으로 보내 경의를 표한다’였다. 다음 날 부산항에서 일본 해군 장갑순양함 아즈마(吾妻)함이 예포 21발을 쏘았다.

 

부산을 떠난 순종은 마산을 거쳐 12일 귀경길에 대구에 다시 들렀다. 대구에서는 전 시민이 환영과 환송에 동원됐다. 순종은 달성공원을 방문했다. 공원은 도로를 개수하고 만국기를 달고 가짜 꽃으로 겨울나무를 장식해놓은 상태였다. 노인들 가운데 일본인은 순종 자리 옆에 따로 자리를 만들었고 조선인 노인 240명에게는 선물을 하사했다. 통감 이토는 별도로 조선인 유력 인사들에게 통감 정치를 정당화하는 연설회를 가졌다.(위 문서 (53) 한국 황제폐하 일행 봉영송 상황 보고 건)

 

1월 13일 창덕궁으로 돌아온 순종은 14일 뒤인 27일 다시 신의주를 향해 7박8일 여정으로 서순행을 떠났다. 여정은 평양~의주~신의주~평양~개성~서울이었다. 이 또한 통감부가 계획해놓은 순행이었고, 순행 규모는 남순행보다 늘어난 279명이었다.

 

일본으로서는 대한제국 황실의 위엄을 빌려 민심을 얻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통감부는 관보를 통해 구체적인 일정을 공개했다. 사진가 2명을 따로 고용해 전 일정을 모두 사진으로 남겼다. 남순행과 서순행 전 일정에 걸쳐 통감부와 일본에 거칠게 저항하는 민심은 보이지 않았다. 아직 구시대 권위를 상징하던 황제를 앞세운 선전극은 성공적이었다. (이왕무, 앞 ‘서순행’ 논문)

 

2017년 4월 대구 중구청은 순종이 걸었던 달성공원 앞 도로를 ‘순종황제 남순행로’로 조성하고 순종 동상을 세웠다. 국비 35억원을 포함해 74억원이 투입됐다. 동상 앞에는 ‘시대 상황에 굴하지 않는 민족정신’이라고 적혀 있다. 대구 중구청은 ‘치욕의 역사도 보존한다’는 ‘다크 투어리즘’의 일환이라고 홍보했다.

 

 2017년 대구광역시 중구 달성공원 앞에 국비를 포함해 74억 원을 투입해 중구청이 만든 ‘순종황제 남순행로’와 순종 동상. 이토 히로부미가 주선한 1909년 1월 대구 방문을 기념하는 동상이다. 동상 앞에는 ‘시대상황에 굴하지 않는 민족정신’이라고 새겨져 있다./박종인 기자

 

허수아비로 끌려간 도쿄 알현

1910년 한일병합조약 이후 7년이 지났다. 1917년 5월 9일 순종은 전주 이씨 왕실 본궁인 함경도 함흥으로 참배를 떠났다. 함흥은 이성계가 조선을 창건할 때 뿌리가 된 본향이었다. 하지만 함흥 본궁 참배는 역대 조선 국왕 그 누구도 거둥하지 않은 일이었다. 이미 황실은 사라지고 없고 황실을 대신하는 조직 ‘이왕직’과 총독부가 조율해서 나온 행사였다.

 

참배를 하고 제사를 올릴 때 순종은 대한제국시대 황제 복식을 착용했다. 참배용 제물(祭物)은 선박을 이용해 원산에서 함흥으로 운반했다. 황제에서 이왕으로 격하됐지만 제사 형식은 대한제국시대 그대로였다. 총독부는 옛 권위에 대한 복종심을 적극 활용해 식민 권력에 대한 자발적인 복종을 유도한 것이다.

 

5월 15일 열차편으로 서울로 복귀한 순종은 6월 8일 다시 열차를 타고 부산을 거쳐 일본 도쿄로 향했다. 1912년 메이지 천황이 죽었을 때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도쿄 참배를 주장한 적이 있었는데, 마침내 그 동상(東上) 계획이 구체화된 것이다.

 

6월 8일 서울을 출발해 그 달 28일 귀경한 20박21일의 장기 여행이었다. 모든 일정은 총독부가 일본 궁내성과 함께 기획했고, 순종은 일본 황족(皇族)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다. 일본 육군대장 정장을 입었지만 가는 곳마다 황족에 준하는 예포 21발로 환영을 받았다. 이왕직은 순종을 위해 일본 현지 숙소에 조선식 아궁이와 솥까지 마련해놓았다.(‘어동상일기(御東上日記)’ 6월 8일: 이왕무, ‘1917년 순종의 일본 행차에 나타난 행행의례 연구’, 한국사학보 57, 고려사학회, 2014, 재인용)

 

 ‘어제 이왕이 천황을 알현했다’는 1917년 6월 15일자 ‘매일신보’

9일 순종 일행은 부산에서 황족깃발을 게양한 일본 군함 히젠(肥前)함을 타고 일본으로 향했다. 히젠함은 러일전쟁 때 일본이 러시아로부터 획득한 전리품이었다. 효고현 마이코(舞子)에서는 방적회사에서 일하고 있던 조선 여공 120명이 나와 환영했다. 나고야에서는 동생 영친왕을 만났다. 6월 13일 도쿄에 도착한 순종은 다음날 오전 천황 다이쇼(大正)을 만났다. 배석했던 곤도 시로스케에 따르면 ‘덕담이 오가고 이왕 전하는 다시 절을 하고 물러났다.’(곤도 시로스케, 앞책, p200)

 

천황 전용 제사전인 현소(賢所) 참배, 영친왕 이은이 복무중인 근위보병 2연대 방문, 메이지천황릉 참배 등등 다양한 일정을 소화하고 순종은 6월 28일 부산을 거쳐 서울로 돌아왔다. 옛 황제의 권위와 식민 권력의 권위를 중첩시켜 식민 조선백성들에게 자발적인 복종을 이끌어내려는 거대하고 정교한 이벤트였다. 식민 본국과 총독부가 연출하고 왕공족 순종이 출연한 거대한 연극이었다.

 

일본 효고현 마이코(舞子) 아카시방적에서 일하는 조선인 여공들이 순종을 환영하는 장면(6월 14일 ‘매일신보’).

 

303. 임진왜란 발발 직후 선조의 명나라 망명이 무산된 진상

선조는 정말 류성룡의 반대로 명나라 망명을 포기했을까?

문경새재 2관문 ‘조곡관(鳥谷關)’. 1592년 4월 26일 임진왜란 개전 보름이 못돼 새재를 무혈통과한 고니시 유키나가 부대가 한성에 임박하자 사흘 뒤 선조는 의주로 도주했다. ‘“명나라로 가겠다”는 선조를 류성룡을 비롯한 관료들이 단념시켰다’는 통설과 달리 선조는 “여진족 지역 폐기된 관아 건물에 수용하겠다”는 명 정부의 실질적인 망명 거부 통보에 망명을 포기했다. 조곡관은 2년 뒤인 1594년 류성룡 건의에 의해 충주사람 신충원에 의해 건축됐다./박종인 기자

 

“명나라로 내부(內附)하는 것이 본래 나의 뜻이다.” 임진왜란이 터지고 한 달이 채 못 돼 함락 위기에 빠진 한성을 탈출한 선조가 던진 말이다. ‘내부(內附)’는 ‘한 나라가 다른 나라에 들어가 붙는다’는 뜻이다. 즉 망명이다. 항전 한번 제대로 독려하지 않은 왕이 압록강 건너 중국으로 도주하겠다는 말에 당시 영의정 류성룡이 이렇게 말했다. “왕이 우리 땅 밖으로 한 걸음만 떠나면 조선은 우리 땅이 되지 않습니다(大駕離東土一步 則朝鮮非我有也·대가리동토일보 즉조선비아유야).”(1592년 음 5월 1일 ‘선조실록’)

 

많은 사람은 류성룡이 보인 이 단호한 결기가 선조 마음을 바꿨고 그리하여 선조가 조선에 남아 전쟁을 치렀다고 알고 있다. 그런데 당시 기록을 보면 실상이 다르다. 결론부터. 요동 망명에 관해 선조는 류성룡을 비롯해 그 누구 말을 받아들인 적이 없었다. 선조는 끝까지 망명을 고집했다. 그러다 명나라 황실에서 실질적인 망명 거부 통보를 받고서야 조선 탈출을 포기한 것이다. 우리가 몰랐던, 조금 더 비겁했던 지도자 선조 이야기.'

 

도주를 결정하기까지

14대 조선 국왕 선조는 인복이 많았다. 이황과 이이, 류성룡, 이원익, 이항복, 이덕형, 이산해, 정철, 윤두수, 이순신, 권율, 정탁 같은 쟁쟁한 문무 관료들이 선조를 보좌했다.

그런데 인덕은 부족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터지자 중국으로 망명하겠다며 우중(雨中) 야중(夜中) 수도 한성을 탈출한 지도자가 선조였고, 그 지도자에게 한성 백성은 경복궁을 불태워 분노를 폭발시켰다.

 

1753~1759년 사이 영조 때 그린 ‘도성대지도’(부분). 임진왜란 때 불탄 경복궁(아래 동그라미)와 경회루는 기둥만 남아 있다. 경복궁은 1592년 4월 30일 새벽 선조가 빗속에 한성을 떠나자 분노한 한성 주민들에 의해 방화됐다. /서울역사박물관

시작은 일본군이 동래에 상륙하고 8일이 지난 4월 21일이었다. 문경에 도착한 경상 순변사 이일이 조정에 급전을 날렸다. 열여덟 자였다. ‘今日之賊有似神兵 無人敢當 臣則有死而已(금일지적유사신병 무인감당 신즉유사이이)’. ‘오늘 적은 신이 내린 병사 같아서 감당해낼 자가 없나이다. 신은 오직 죽을 따름입니다.’(박동량, ‘기재사초(寄齋史草)’ 下, 임진일록 권1, 4월 21일)

 

신립 부대까지 대패했다. 조선 정부는 전율했다. 선조는 즉시 여행용 미투리(짚신)을 구해놓고 말들을 대기시키라 명했다. 다음 날 함경도에서 용맹을 떨친 무관 신립을 충주로 내려보냈다. 신립은 전략 요충지인 문경새재를 비워버리는 한심한 계책을 썼다가 고니시 유키나가 부대에게 새재 너머 달천 평야에서 궤멸됐다.

 

한성을 버리던 날

선조는 이미 궁궐에 들어와 있던 광해군은 물론 궐 밖에 살던 식구들도 모두 불러들였다. 경복궁에는 선조와 그 비와 후궁 5명, 아들 7명, 딸 2명, 며느리 5명, 사위 1명 이렇게 22명과 두 형이 집합해 있었다.(신명호, ‘임진왜란 중 선조 직계 가족의 피난과 항전’, 군사 81호, 군사편찬연구소, 2011)

 

4월 27일 “죽을 따름”이라고 했던 이일이 상주전투에서 대패했다. 이일은 ‘말을 버리고 옷을 벗어던지고 머리를 풀어 헤치고 알몸으로 달아나’(류성룡, ‘징비록’, 김시덕 역주, 아카넷, 2013, p178) 조정에 패전 보고서를 올렸다.

 

그날 요동 망명이 처음으로 어전회의 안건으로 상정됐다. 상정한 사람은 선조 본인이었다. “계속 기세를 몰아온다면 나는 요동으로 건너가 천자(天子)에게 간절히 요청하려 한다. 상국이 어찌 애처롭게 여겨 주지 않겠는가.”(회의 참석자 이정귀, ‘월사집’ 1, ‘임진피병록’) 류성룡이 말했다. “한번 다른 나라로 건너가면 곧 기공(寄公·나라 잃은 임금)이 됩니다.”

 

그런데 선조가 원하던 말은 영의정 이산해에게서 나왔다. “천문(天文)을 보니 천자가 반드시 허락해 줄 것입니다.” 즉시 선조가 말을 이었다. “중국은 땅이 넓다. 왜군이 요동에 난입하면 버티지 못하겠지만 북경이 있고, 북경이 버티지 못해도 남경으로 옮겨가 피할 것이다. 요동으로 건너간 뒤에는 왜적이 중국을 침범하더라도 차차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군 최종 목표가 중국이고 북경에서 명 황실과 지낸 뒤 대륙을 횡단해 남경에서 안전하게 지내겠다는 뜻이었다.

 

다음 날 선조는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했다. 이틀이 지난 4월 30일 새벽, 선조를 태운 가마가 빗속을 뚫고 모래재를 넘었다. 류성룡이 모래재에서 뒤를 보니 한성이 불타고 있었다. 흙탕을 뚫고 도착한 임진나루는 칠흑처럼 어두웠다. 일행은 나루를 관리하는 승청(丞廳)을 불태워 앞을 밝혀 강 건너 동파관에 도착했다.(앞 ‘징비록’, p207)

 

경기도 파주 임진강 임진나루 주변. 동파리에서 본 모습이다. 야반도주한 선조는 사진 왼쪽 강 건너편 임진나루를 건너 동파관에 닿은 뒤 “명나라로 가겠다”고 재차 선언했다. /박종인 기자

 

5월 1일 꺾이지 않은 고집, 망명

5월 1일 동파관을 출발해 개성으로 향하기 전 선조가 이산해와 류성룡을 불렀다. “내가 어디로 가야 하겠는가.” 류성룡이 말했다. 나흘 전 중국 고사를 인용한 발언보다 더 강경했다. “왕이 우리 땅 밖으로 한 걸음만 떠나면 조선은 우리 땅이 되지 않습니다.” 선조가 뜸도 들이지 않고 말했다. “내부(內附)하는 것이 본래 나의 뜻이다.” 류성룡이 안 된다고 했다. 영의정 이산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의주로 간 뒤 위급하면 요동으로 가자”고 했던 도승지 이항복은 좌의정 류성룡으로부터 심한 질책을 받았다.(1592년 음 5월 1일 ‘선조실록’)

 

탈출하는 난파선 사람들

동파관을 떠난 일행이 개성으로 향했다. 왕실 사람들은 동파관과 판문에서 끼니를 때웠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이틀째 굶었다. 황해도 장단에 이르러 비로소 서흥에서 온 호위병 봇짐에서 현미 두어 말을 찾아 백관이 배를 채웠다. 경기도에서 따라왔던 병졸과 하급 관리들은 달아나고 없었다. 개성에 도착해 모두가 잠이 들었는데, 호위병 가운데 가위에 눌려 헛소리를 지르는 자도 있었고 치고받고 싸우는 소리도 크게 들렸다. 궁녀 가운데에는 목을 칼로 찔러 자살하려는 이도 나왔다.(1592년 음 5월 1일 ‘선조실록’) 그 사이 한성을 점령한 일본군은 종묘를 불태웠다. 일본군에 붙어 길잡이 노릇을 하는 무뢰배가 매우 많았다.(1592년 음 5월 1일 ‘선조수정실록’)

 

6월 11일 “평양 사수” 선언과 도주

5월 7일 피란을 거듭하던 선조 일행이 평양에 도착했다. 개전 직전 명 황제 생일을 맞아 성절사(聖節使)로 유몽정이 선정됐는데, 선조는 평야에서 유몽정에게 이리 명했다. “북경에 도착하면 먼저 내가 망명하겠다는 뜻을 전하라.”(1592년 음 5월 1일 ‘선조수정실록’) 망명 계획은 여전히 유효했던 것이다. 유몽정은 “일단 전황 보고부터 하겠다”고 답하고 북경으로 떠났다.

 

6월 2일 선조가 평양성 문에 나아가 “죽음으로 나라를 지키겠다”고 선언했다.(1592년 음 6월 2일 ‘선조실록’) 8일 일본군이 황해도를 휩쓸고 대동강변에 도착해 군영을 설치했다. 10일 왕비가 함흥으로 가기 위해 채비를 하자 평양 주민들이 난을 일으켰다. 호조판서 홍여순도 두드려 맞았다. 칼과 창을 든 주민들이 거리마다 고함을 질러댔다.(1592년 음 6월 10일 ‘선조실록’) 다음 날 선조가 영변으로 떠났다.

 

6월 13일 요동 망명 최종 결정

6월 13일 영변에서 선조가 회의를 소집했다. “일찌감치 요동으로 가지 않아서 이 지경이 되었다.” 대신들이 “요동은 인심이 몹시 험하다”며 우회적으로 만류했다. 선조가 이리 말했다. “그렇다며 갈 곳을 말하라. 천자의 나라에서 죽는 것은 괜찮지만 왜놈 손에 죽을 수는 없다(予死於天子之國可也 不可死於賊手·여사어천자지국가야 불가사어적수).”

 

그래도 반대 의견이 다수였다. 선조가 또 다른 계획을 내놓았다. “그렇다면 세자를 여기 놔두고 나만 가면 되지 않겠는가.” 광해군에게 국내 문제를 맡기고 자기는 망명하겠다는 의지였다. 그리고 이렇게 거듭 말했다. “왜적 손에 죽느니 어버이 나라에 가서 죽겠노라(無寧死於父母之國·무녕사어부모지국).” 대신 최흥원이 “안 받아줄 수 있다”고 의견을 냈다. 선조는 이리 답했다. “받아주지 않더라도 기필코 압록강을 건널 것이다(雖然予必渡鴨綠江矣·수연여필도압록강의).”

 

“안남이 멸망하고 중국에 입조해 나라를 살렸듯, 나 또한 나라를 살리려는 것”이라고 해명했지만, 아무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날 밤 선조를 밀착하며 호종하던 사관(史官) 조존세, 김선여, 임취정, 박정현이 사초(史草)를 불태우고 달아나버렸다.

 

선조는 다음 날 세자 광해군에게 병력 모집과 민심 위무를 위한 분조(分朝)를 명하고 망명과 원병을 청하는 자문을 명나라에 보냈다. 전시 관리는 세자가 맡고 본인은 요동행을 택한 것이다. 선조는 그 길로 의주를 향해 떠났다.(1592년 음 6월 13일, 14일 ‘선조실록’, 6월 1일 ‘선조수정실록’)

 

6월 18일 류성룡의 선택, 권력 이양

망명을 결사반대했던 류성룡은 요동행을 막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류성룡은 더 과격한 계획을 세웠다. 선조로부터 세자에게 왕권을 양보받으려 한 것이다.

 

의주 가는 길목 선천에서 명나라 회답을 기다리는 동안 남인인 류성룡과 서인인 정철이 선조를 뵙자고 청했다. 두 사람은 “모두가 신(臣)들의 죄”라 아뢰고 별 이슈 없이 물러났다. 그런데 실록 사관은 이렇게 기록했다. ‘두 사람은 “요동행밖에 방법이 없으니 아예 세자에게 왕권을 넘기고 가시라고 하자”고 했으나 이 말을 하지 않았다.’(1592년 6월 18일 ‘선조실록’) 세자에게 모든 권력을 이양해 전쟁을 지휘하게 하려 했다는 뜻이니, 아무리 간이 크고 결기 가득한 사람이라도 실천 불가능한 계획이었다.

 

6월 26일 거부된 망명

6월 26일 명나라에서 첩보가 들어왔다. 다음은 실록 기록이다. ‘명나라에서 우리나라가 내부(內附)를 청한 자문을 본 뒤 우리나라를 관전보(寬奠堡)의 빈 관아에 거처시키려고 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상이 드디어 의주에 오래 머물 계획을 하였다.’(1592년 음 6월 26일 ‘선조실록’)

 

‘걸내부(乞內附·망명을 구걸한다)’라는 제목으로 ‘몸 둘 곳 없어 식구 몇을 데리고 갈 수 있게 해 달라’(김영진, ‘임진왜란 2년 전쟁 12년 논쟁’, 성균관대 출판부, 2022, p90 재인용)고 애걸한 망명 요청에 압록강 건너 100리 북쪽 여진족 지역에 폐기된 관아 건물에 수용하겠다고 답한 것이니, 실질적인 거부였고 오지 말라는 말이었다. ‘북경이 무너지면 남경까지 가겠다’고 했던 선조는 망명을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형식은 ‘조선 잔류 결정’이지만 실질은 거부당한 것이다.

 

7월 11일 명 황실 답이 도착했다. 첩보대로였다. ‘원하면 100명까지 관전보 수용, 구원병은 보냄’. 황명을 첨부해 명 황실 병부가 요동 도사(遼東都司)에 보낸 자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조선이 대대로 동방에서 왕위(王位)를 누려 대국(大國)으로 일컬어졌는데 어찌하여 왜가 한번 쳐들어오자 멀리서 보기만 하고는 달아났는가. 놀랍고 이상스럽다.’(1592년 음7월 11일 ‘선조실록’) 이상 귀 닫은 지도자, 선조의 요동 도주 미수 전말이다.

 

304. 지석영보다 80년 먼저 종두법을 개발한 박제가, 이종인, 정약용

종두법 선구자들은 모두 당쟁에 휘말려 역사에서 사라졌다


▲서울 연건동 서울대병원 구내 옛 대한의원 건물 앞에 있는 지석영 동상. 1880년 일본으로부터 우두법과 근대 의학을 도입한 인물이다. 우두법이 도입되기 전 1800년 북학파 학자 박제가와 의사 이종인은 정약용과 함께 천연두 환자 고름을 이용한 인두법을 연구해 접종법 개발에 성공했다. 하지만 이들은 개발 이듬해인 1801년 역모와 천주교 신앙에 연루됐다는 혐의로 유배형을 받고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인두법 또한 종적을 감췄고, 조선을 500년 동안 괴롭혔던 마마 퇴치는 근 100년을 더 기다려 지석영에 의해 치료되기 시작했다. /박종인 기자

 
 

죽거나 박색으로 살거나

조선 시대 ‘두창(痘瘡)’이라고 불렸던 천연두는 호랑이와 함께 조선 백성을 괴롭혔던 가장 무서운 전염병이었다. 걸리면 죽었다. 죽지 않고 살아나면 눈이 멀어서 ‘눈 먼 사람 가운데 십중팔구는 원인이 천연두였고’ 얼굴이 곰보로 변해버려 ‘하늘이 내린 미용을 하루아침에 잃게 하는’ 끔찍한 병이었다.(지석영, ‘우두에 관하여’, 황성신문 1903년 3월 24일)

 

태종 이방원 아들 성녕대군 이종도 열세 살에 천연두로 죽었다.(1418년 2월 4일 ‘태종실록’) 숙종 때인 1677년부터 1683년까지 한성에 천연두가 대유행해 숙종 본인도 천연두에 걸려 고생했다. 추한 용모를 뜻하는 ‘박색(縛色)’은 그 단어 자체가 천연두에 걸리면 그 자국으로 얼굴이 얽어버려서(縛: 얽을 박) 생긴 말이었다.(1738년 7월 3일 ‘영조실록’) 현존하는 조선 후기 사대부 초상화 180여 폭 가운데 초상화 주인공 16명 얼굴에 곰보 딱지가 그려져 있으니, 비교적 신분이 높은 사대부들도 열 가운데 한 명은 천연두를 피하지 못했다는 뜻이다.(김호, ‘조선후기 ‘두진’ 연구’, 한국문화 17호, 규장각한국학연구소, 1996)

 

그 무시무시한 천연두가 지구상에서 소멸했다. 제1공신은 1796년 우두법을 개발한 영국인 제너다. 조선에서 제1공신은 지석영이다. 1880년 지석영이 일본을 거쳐 조선에 수입한 우두법이 서서히 전국에 보급되면서 조선인은 호환 마마 가운데 마마로부터 해방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천연두에 걸린 소 고름을 쓰는 우두법이 수입되기 전, 조선에서는 천연두 환자 고름을 사용한 ‘인두법’이 한때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천연두 환자를 성 밖 초가에 격리시키고 죽을 날만 기다리던 속수무책의 조선에 희망을 싹 틔운 사람들이다. ‘인두법’을 개발한 이 선구자들 이름은 박제가, 이종인 그리고 정약용. 공통점이 또 있다. 이들은 개발 직후 인두법을 보급하기도 전에 정치적인 이유로 유배형을 당해 역사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조금 더 일찍 조선에서 천연두가 사라질 수 있었던, 아쉬운 이야기.

 

 ▲천연두와 함께 조선을 500년 동안 괴롭혔던 호환(虎患). 식민시대 총독부는 ‘유해 동물 퇴치(害獸驅除·해수구제)’ 사업을 통해 궁궐과 민가를 가리지 않고 출몰하던 호랑이를 사냥했다. 그 결과 호환(虎患)도 치료됐지만 호랑이는 멸종됐다. 사진은 소나무 아래 호랑이를 그린 민화. /국립중앙박물관

 

천연두 귀신이 만든 곰보

동서를 막론하고 17세기까지 홍역(麻疹·마진)과 천연두(痘瘡·두창)는 구분되는 병이 아니었다. 증세가 비슷한지라 대처하는 방식도 구분이 없었다. 앞에 언급한 성녕대군 사인도 정확하게 천연두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주술과 무속의 시대, 사람들은 신과 귀신에 의지했다. 숙종 때 장희빈 사건에 연루된 궁녀 숙영은 비단 옷감에 ‘두신(痘神·천연두 귀신)’ 이름을 적어 벽에 끼워 저주를 했다고 자백했고(1701년 9월 26일 ‘숙종실록’), 훗날 영조로 등극한 세자 연잉군이 마마를 앓고 치유되자 “임금이 짚으로 천연두 귀신을 만들어 떠나보냈다(送神·송신)”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1711년 11월 24일 ‘숙종실록’)

 

스스로 합리적이라 믿었던 성균관 유생들은 “역병이 돌면 무지한 백성은 귀신 탓을 하지만 목숨은 귀신 마음이 아니라 운명에 달린 것”이라고 상소를 하기도 했다.(1544년 12월 21일 ‘중종실록’) 그런데 귀신을 혐오한 이 유생들은 이리 결론을 내렸다. “부모로부터 받은 몸 속 오물과 고혈 찌꺼기가 밖으로 나와서 두창이 되는 것이다.” 결론에서 보듯, 역병에 대한 그 성리학적 결론은 너무나도 성리학적이었다.

 

‘동의보감’ 저자 허준 또한 두창의 원인을 ‘태독(胎毒)과 운기(運氣)’로 규정했다. 그래서 허준은 갓난아이가 배 속에서 받은 독 기운이 바깥 독기를 만나면 천연두에 걸린다고 판단하고 ‘쓴 약물로 아기 입을 씻고 탯줄을 태운 재를 먹여’ 태독을 제거하면 증세가 완화된다고 처방했다.(허준, ‘언해두창집요(諺解痘瘡集要)’ 上, 해독면두방(解毒免痘方): 오재근, ‘조선 의관 허준의 두창 의학과 변증(辨證)’, 의사학 30권1호, 대한의사학회, 2021, 재인용) 1752년 영조 때 의사 임서봉은 마진(홍역)에 대해 ‘野人乾(야인건)’을 특효약으로 처방하고 ‘회충을 조심하라’고 부기했다. 야인건은 ‘말린 사람 똥’을 뜻한다.(임서봉, ‘홍진경험방’, 1752: 김호, ‘다산 정약용의 종두법 연구’, 민족문화연구 72호,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2016, 재인용) 똥은 열을 낮추는 효과는 있었지만 치료는 불가능했다.

 

전·현직 관료와 의사의 협업, 인두법(人痘法)의 탄생

시작은 동시다발적이었다. 1800년 규장각 검서관 초정 박제가가 규장각에 근무했던 전 형조참의 정약용을 찾아왔다. 정조의 ‘문체반정(文體反正)’을 통해 사상의 자유를 통제하던 때였다. 박제가는 ‘북학의(北學議)’를 통해 상공업 및 무역 진흥을 주장한 북학파였다. 정약용은 천주교 신봉 문제로 구설을 피해 고향인 경기도 마현에 은둔 중이었다.(정약용은 박제가가 검서관이라고 기록했지만, 1800년 박제가는 이미 경기도 영평현령(포천군수)로 재직 중이었다.)

 

사상 통제로 거시적인 개혁 주장이 잠수해버린 그때, 정약용은 바로 이 천연두 퇴치법을 연구 중이었다. 이미 정약용은 “풍속에서는 똥을 즐겨 써서 병이 있으면 빈번히 똥을 썼으나 사실은 잘 알지 못하고 있으니 한심하다”며 ‘마과회통’(1798)이라는 마진과 두창 의서를 저술해놓은 터였다.(김호, 1996) 정약용은 “한 해의 운수(운기·運氣)라는 것이 어떻게 천연두를 일으킨다는 말인가”라고 기존 처방을 비판했다.(정약용, ‘마과회통’, 운기(運氣))

 

박제가가 방문했을 때 정약용은 ‘종두방(種痘方)’이라는 청나라 천연두 의서를 탐독 중이었다. 책에는 “천연두 환자 고름딱지를 처리해 그 즙을 코에 넣으면 치료가 된다”는 ‘인두법(人痘法)’이 적혀 있었다.

 

몇 페이지가 달아나고 없는 이 책을 박제가가 보았다. “나한테도 비슷한 책이 있다.” 박제가가 보내준 책과 이 책을 합치고 정약용이 주석을 붙여 책이 완성됐다. 그 책을 포천군수 박제가가 읽고선 “여름과 겨울에 유효기간이 다르다”고 알려줬다. 그리고 박제가가 희소식을 전해왔다. “관아 이방(吏房)이 흥분해 종두를 자기 아이에게 접종하고, 관노가 자기 아이에게 그리고 내가 조카에게 접종하니 쾌차하였다.”

 

임상시험이 완료된 그 종두를 포천에 사는 이종인이라는 의사가 포천 남쪽 한성 이북 선비들에게 접종해 큰 성공을 거뒀다.(이상 정약용, ‘여유당전서’, 문집 10, ‘종두설(種痘說)’) 포천에서 박제가와 협업했던 의사 이종인은 의서 ‘시종통편(時種通編)’을 저술해 민간에 인두법을 보급했다(이종인 또한 정약용 기록과 달리 박제가와 협업 시기를 1798년이라고 기록했다).

 

3인의 협업이었다. 영국인 제너가 우두법을 내놓고 4년 뒤, 이 인두법이 나옴으로써 우두법보다 효과가 떨어지고 부작용도 컸지만 천연두 귀신에 기대던 전 근대적 치료법이 폐기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이다.

 

 ▲1800년 영평현령 시절 의사 이종인과 함께 종두법을 연구해 접종에 성공한 박제가. 이방과 관노 자식 그리고 자기 조카에 종두를 접종해 천연두 예방에 성공했다. /실학박물관

 

당쟁과 박해, 눈송이처럼 사라진 종두법

이들이 인두법 임상 시험을 완료한 1800년 6월 정조가 죽었다. 다음은 정약용이 남긴 기록이다.

 

‘이해 임금이 승하하였다. 다음 해 봄에 나는 장기(長鬐)로 귀양 가고 초정은 경원(慶源)으로 귀양 갔다. 그런데 간사한 놈이 의사 이씨를 모함하여 신유사옥(辛酉邪獄)으로 무고하니 의사 이씨가 고문받아 거의 죽게 되고 두종도 단절되었다.’

 

정조가 금지한 서학(西學)을 정약용이 신봉한다는 구실로 남인 박멸을 꿈꾸던 세력이 정약용에게 유배형을 내린 것이다. 박제가는 역모 사건에 연루돼 함경도 경원으로 귀양을 보내버렸다. 의사 이종인 또한 천주교도로 몰아 고문을 가해 반죽음으로 만들어버렸다.

 

1807년 강진에서 유배 생활을 할 때 정약용은 ‘상주에 사는 의사가 인두법으로 사람을 구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미 이들이 개발한 인두법이 차츰 퍼져나가 민간에서는 마마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을 극복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엄격한 통제 속에서 제대로 된 의학 연구와 신의학 수입은 진흥되지 못했다. 1828년 유배에서 풀린 정약용은 1798년 탈고했던 ‘마과회통’을 증보편찬하면서 부록으로 ‘영국신출종두기서(英咭利國新出種痘奇書)’라는 청나라 소책자를 소개했다. 제너의 우두법이 청나라까지 전파된 과정을 소개한 책자다. 정약용은 이 책을 ‘신증종두기법상실’이라는 제목으로 첨부하면서 이 글에 나오는 모든 서양 지명과 인명, 연도를 지워버렸다. 언뜻 보면 서양인이 쓴 책인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권복규 등, ‘정약용의 우두법 도입에 미친 천주교 세력의 영향’, 의사학 6권1호, 대한의사학회, 1997) 정약용은 마과회통 서문에 이렇게 썼다. ‘내가 편집한 본방(本方)을 난리에 잃어버렸으므로 여기에 전말을 기록하여 아이들에게 보인다.’

 

그리고 1880년 지석영이 마침내 우두법을 도입해 조선팔도에 퍼뜨렸다. 1882년 임오군란 때 종두법 실험장이 불타는 고난도 겪었지만 조선은 결국 천연두로부터 차츰 해방됐다. 학문과 사상 통제가 없었다면 많이 앞당겨질 수 있었던 해방이었다. 우두법을 도입한 지석영 또한 1909년 12월 12일 이토 히로부미 추도식에서 추도문을 낭독한 혐의로 명예를 잃고 2003년 과학기술부 선정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 15인에서 제외됐다.

 

 

305. 조선 대표 건달 권력자, 선조 아들 임해군

“한강 남쪽은 어디든 일본에 줄 테니 나를 살려내라”

 

경기도 남양주에는 조선 14대 국왕 선조의 맏아들 임해군 무덤이 있다. 혼이 저승으로 무사히 가도록 인도해주는 장명등은 무덤 아래 지붕과 몸체가 떨어져나간 채 팽개쳐져 있다. 임해군은 막내 순화군과 함께 백성에게 악명을 떨친 건달이었다. 폭력으로 모은 재화가 많아서 임진왜란 개전 초기 임해군이 살던 집은 난민이 떼로 침입해 불태웠다. 전쟁 기간에도 멈추지 않은 악행에 질린 백성들은 반란을 일으켜 임해군과 순화군을 가토 기요마사 부대에 넘겨버렸다. 임해군은 전쟁 후에도 악행을 일삼다 유배당한 뒤 살해됐다. 부서진 장명등은 그 악행에 대한 흔적이다. /박종인 기자

 
 

조롱당한 선조와 그 아들

임진왜란 소강상태가 지지부진하게 이어지고 정유재란이 임박한 1597년 가을이었다. 장소는 국립중앙박물관이 있는 서울 동작진 포구였다. 서대문에 있는 모화관에서 명나라 총사령관 양호가 행선지를 밝히지 않고 남대문을 나가버렸다. 만류하는 사람들을 뿌리치고 말을 몬 양호가 동작진에 도착했다.

 

양호를 붙잡으라는 신하들 성화에 선조는 가마를 타고 서둘러 남대문을 나섰다. 급한 걸음으로 성문을 나서는 왕을 보면서 길 위에 한성 주민들이 몰려나와 통곡을 했다. “명나라로 달아나겠다”며 북쪽으로 도주했던 왕이었던지라 이번에도 또 백성을 버리고 도망칠까 두려웠던 것이다. 그 순진한 백성은 “중국 장수를 따라 강가까지 갔다 온다”는 선조 말에 ‘서로 조아리며 감격하여 울지 않은 백성이 없었다.’ 신뢰를 잃은 지도자는 그렇게 초라했지만, 순진한 백성이 기댈 언덕은 그 지도자밖에 없었다.

 

둔지산(현 대통령 집무실 북쪽)을 넘어 동작진에서 선조가 양호를 만났다. 양호는 강 건너 대기 중인 1000여 명군 기마부대를 지휘해 대규모 군사 훈련을 선보였다. 그리고 이 명나라 사령관은 조선 국왕을 이리 책망했다. “왜 활 잘 쏘는 조선이 한 방에 일본에 무너졌는가.” 선조는 “천군(天軍) 위력이면 왜적쯤이야 굳이 평정할 것도 없겠다”고 공치사를 하며 겨우겨우 양호를 한성으로 복귀시켰다.(1597년 9월 12일 ‘선조실록’)

 

그런데 선조와 양호 대화 도중 뒤쪽에서 누군가가 말 한 마리를 거칠게 몰고 달려와 양호를 가로막았다. 왕과 명나라 장수 대화를 끊어버린 이 용감무쌍한 사내는 선조 맏아들 임해군이다. 연산군과 함께 조선을 대표하는 건달 권력, 그래서 조선 백성이 붙잡아 일본군에 넘겨줘버린 폭력의 상징 임해군 이야기.

 

건달로 자라난 왕자들

1583년 가을날 왕자를 가르치는 사부 하낙(河洛)이 사표를 내며 이리 말했다. “임해군(臨海君)이 역사서 공부를 거의 마쳐 가는데도 아직 그 줄거리(강령·綱領)조차 알지 못합니다. 제 죄이옵니다.”(1583년 음 8월 5일 ‘선조실록’) 열한 살짜리 다 큰 사내아이가 글 읽을 줄을 모른다는 말이었다.

 

임해군은 성질이 거칠고 게을러 학문에 힘을 쓰지 않고 종들이 제 마음대로 하도록 놔두어 폐단을 더욱 심하게 일으키곤 했다. 반면 동생 광해는 행동이 조심스럽고 학문에 부지런해 백성들이 마음으로 따랐다.(1592년 음 4월 14일 ‘선조수정실록’) ‘선조수정실록’은 인조 때 반(反)광해파인 서인이 편집한 책이니, 광해군과 임해군에 대한 이 평가는 객관적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1589년 선조 슬하 왕자들이 결혼을 하고 궁 밖에 집을 짓는데 저마다 남의 논밭을 빼앗아 땅을 넓혔다. 임해군만 아니라 여러 왕자들이 땅을 빼앗았고 뇌물을 대놓고 받았는데, 임해군은 연장자로서 가장 횡포해 조야가 근심스럽게 여겼다.(1589년 음 4월 1일 ‘선조수정실록’)

 

여러 왕자 가운데 여섯째 순화군도 마찬가지였다. 순화군은 ‘임해군이나 정원군 행패보다는 덜했다 하더라도 도성 백성이 그를 호환(虎患) 피하듯 하였다.’(1607년 음 3월 18일 ‘선조실록’) 여기 나오는 ‘정원군’은 훗날 인조가 된 능양군의 아버지며 선조의 다섯째 아들이다. 이 세 왕자는 실록 도처에 백성을 괴롭히고 사욕을 취한 대표적인 건달 권력자로 묘사돼 있다.

 

백성이 일본군에 넘긴 건달 왕자들

정부 내에서는 근심거리요 백성에게는 두려움과 공포였던 장남 임해군은 결국 세자가 되지 못했다. 1592년 음력 4월 28일, 전쟁 개전 직후 선조는 맏아들 대신 둘째 광해군을 세자로 선택했다. 그리고 임해군과 순화군에게 전국 각지로 가서 근왕병을 모집하라고 명했다. 세자 광해군은 국정을 대리해 국내에 머물라고 명했다.(1592년 음6월 1일 ‘선조수정실록’ 등) 본인은 명나라를 목표로 의주를 향해 떠났다.

 

근왕병 모집을 위해 함경도로 떠난 임해군과 순화군은 ‘좋은 말이나 보화를 보면 반드시 이를 빼앗았고’ ‘적이 바로 보이는데도 백성을 흩어지게 할 생각밖에 없었다.’(이호민, ‘오봉선생집’24, ‘정문(呈文)’, 정례부대당(呈禮部大堂)) 또 ‘사나운 종들을 부려서 민간을 노략하고 어지럽히는가 하면’ ‘수령들을 몹시 핍박해 인심을 크게 잃었다.’(민인백, ‘태천집’ 2, ‘용사일록(龍蛇日錄)’ 계사년 10월) 전시(戰時)를 분간 않는 만행 행각 속에 두 왕자가 회령에 도착했다. 기다리고 있던 회령 사람들은 이들을 밧줄로 꽁꽁 묶은 뒤 성문을 열고 일본군에게 넘겨줘버렸다.(이호민, 앞 책)

 

반란을 주도한 회령 아전 국경인과 그 무리는 두 왕자를 객사 방 안에 꽁꽁 묶어서 물건처럼 차곡차곡 쌓아 놓았다. 혼자 말을 타고 입성해 이를 본 가토 기요마사가 “이들은 너희 국왕 친자(親子)인데 어떻게 이렇게까지 곤욕을 가하는가?”라고 놀랄 정도였다.(1592년 음7월 1일 ‘선조수정실록’: 이긍익, ‘연려실기술’ 15, ‘선조조고사본말’, 북도의 함락과 정문부의 수복)

 

기이한 북관대첩

석 달 뒤 함경도 북평사 정문부가 의병을 모집해 일본군과 반란군을 제압했다. 두 왕자 구출은 실패했지만, 함경도를 회복한 이 전투를 ‘북관대첩’이라고 한다. 숙종 때인 1709년 이를 기념하는 북관대첩비를 함경도 길주에 세웠다. 비석은 1905년 러일전쟁 때 일본군이 도쿄 야스쿠니신사로 가져갔다가 2005년 반환됐다. 실물은 원위치인 함북 김책시(옛 길주)로 돌려줬고 경기도 의정부 정문부 묘와 서울 경복궁에 복제비가 서 있다. 전투를 이끈 정문부는 인조 때인 1624년 역모 혐의로 고문받다가 시종 “원통하다”고 하며 죽었다.(1624년 음11월 8일 ‘인조실록’)

 

 ▲임해군을 일본군에 넘긴 국경인(鞠景仁) 반란 토벌과 기요마사 부대 퇴치를 기록한 ‘북관대첩비’ 복제본. 경기도 의정부 정문부 묘에 있다. 실물은 일본 야스쿠니 신사에 있다가 반환받고 원 위치인 북한에 돌려줬다. 북관대첩을 지휘한 정문부는 인조 때 모함으로 고문사했다. /박종인 기자

 

“삼남을 주고 나를 살려라”

여러 경로를 통해 조선에 전달된 강화 협상 조건은 대체로 ‘대동강을 경계로 한 명과 일본의 조선 분할 통치’였다. 일본군 수중에 떨어진 임해군과 순화군은 종전 무렵까지 전쟁 수행에 큰 장애가 됐다.

 

협상을 담당한 사람은 명에서 파견된 심유경이었다. 1593년 음력 3월 15일 심유경이 고니시 부대가 주둔한 한성 용산(현 서울 원효로 부근)에서 회담을 가졌다. 심유경은 선상(船上)에서 뭍에 있는 고니시와 담판을 벌인 뒤 조선군 사령관 김명원에게 편지를 보냈다. ‘임해군이 사람을 시켜 이렇게 전했다. “우리를 돌아가게 해준다면 한강 남쪽 땅은 어디든 가리지 않고 일본에 다 줄 것이다(倘得歸國 漢江以南 不拘何地 任意與之·당득귀국 한강이남 불구하지 임의여지).”'(류성룡, ‘징비록’, 김시덕 역, 아카넷, 2013, p649) 영토를 줘서라도 자기를 살려내라는 것이다.

 

심유경은 명-일본 사이에서 문서 조작을 해가며 협상을 이끌던 모사꾼이었으니, 이 말의 신빙성은 문제가 있다. 하지만 바로 며칠 전 임해군은 평안도 안변에서 “지금 휴전이 안 이루어지면 우리는 바다 건너 일본으로 가게 된다”며 조선 정부 관리에게 경비 조달을 요구한 적이 있으니(1593년 음3월 4일 ‘선조실록’), 땅과 자기 목숨을 바꿔달라는 말은 사실일 가능성이 크다.

 

전후 막장으로 치달은 악행

전쟁이 끝났다. 정유재란이 터지기 전 가까스로 풀려나 목숨을 건진 임해군 행태는 막장으로 치달았다. 1600년 임해군은 인질 억류 시절 자기를 도와줬던 홍산군 이득의 노비 4명을 강탈해갔다. 1603년에는 특진관 유희서의 첩과 간통한 뒤 유희서를 청부 살해했다. 이듬해 수사 결과 임해군이 진범으로 밝혀지자 선조는 수사반장인 포도대장 변양걸을 고문하라 명했다.(1604년 음1월 1일 ‘선조수정실록’) 남의 남편을 죽이고 그 아내를 하인을 시켜 끌고온 뒤 그 하인에게 짝을 지어 입을 틀어막고(1603년 음3월 9일 ‘선조실록’) 민가에 들어가 사람을 구타한 뒤 노비를 빼앗는가 하면 기생을 몇 년씩 불법으로 데리고 살며 사람 죽이기를 초개(草芥)와 같이 하였다.(1606년 8월 23일 ‘선조실록’) 동생 순화군은 의인왕후 상중에 빈전 뒤에서 궁녀를 강간하고(1600년 음7월 16일 ‘선조실록’) 술을 가지고 온 아낙을 옷을 벗겨 구타하고 눈먼 여자 생니를 뽑고 장석을시라는 여자 생니 9개를 쇠망치로 부수는 변태 행각을 벌였다.(1601년 음2월 23일 ‘선조실록’)

 

두 아들을 비호하던 선조는 결국 순화군의 군호를 삭제하고 유배 보내는 데 동의했다. 순화군은 1607년 음력 3월 18일 가택 연금 상황에서 죽었다.

 

임해군은 선조가 죽자마자 동생 광해군 정권에 의해 역모 혐의를 쓰고 1608년 전남 진도를 거쳐 강화도 교동으로 유배 됐다가 살해됐다. 유배소를 지키는 군관 이정표가 윽박질러 독을 먹게 했으나 거부하다가 목이 졸려 죽었다.(1609년 음4월 29일 ‘광해군일기’)

 

건달에 걸맞은 무덤 풍경

경기도 남양주에는 그 임해군 무덤이 있다. 자식 없이 죽은 탓에 입적시켜준 양자 후손들이 무덤에 비석을 세워놓았다. 하지만 혼이 저승으로 무사히 가도록 인도해주는 장명등은 무덤 아래 지붕과 몸체가 떨어져나간 채 팽개쳐져 있다. 419년 전 실록 사관은 이렇게 평했다. “백성에 의해 포박돼 적에게 보내졌으니 극도로 사무친 원망이 아니면 어찌 이렇게 하였겠는가.”(1603년 음8월 6일 ‘선조실록’)

 

 ▲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임해군 묘. 후손이 묘를 정비해놓았다. /박종인 기자

 

306. 정읍 송시열 수명유허비 ‘독수(毒手·독 묻은 손)’의 비밀

나라를 망가뜨린 노론 조작정치의 그늘

▲충북 괴산에는 조선 후기 노론 영수 우암 송시열 무덤이 있다. 영조 때 경기도 수원에서 이리로 이장된 묘 아래 비각 안에는 정조가 비문을 지은 신도비가 서 있다. ‘효종이 송시열과 함께 북벌을 추진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그런데 송시열은 효종을 독대(獨對)한 자리에서 북벌 10년 계획을 세우자는 제안을 “마음 수양부터 한 뒤 뭘 해도 하라”며 거부한 인물이다. 노론 지지를 받으며 등극한 정조는 사실과 다른 내용을 비문에 기록했다. 송시열이 지휘한 서인(西人)과 노론(老論)은 정적인 남인과 소론을 대상으로 수시로 공작정치를 벌였다. 그리고 사실과 다른 내용을 여러 비석에 기록함으로써 진실을 은폐했다. /박종인 기자

 

조선 후기 서인(西人) 영수이자 노론계 정신적 지주인 우암 송시열은 1689년 음력(이하 음력) 6월 3일 전북 정읍에서 죽었다. 숙종이 내린 사약을 마시고 죽었는데, 그가 약을 받은 자리에는 비각이 서 있다. 비각 속 비석 이름은 ‘우암수명유허비(尤菴受命遺墟碑)’, 송시열이 왕명을 받든 자리를 알리는 비석이다. 비문은 훗날 노론 영수가 된 이의현이 1731년에 썼다. 세 번째 줄에 이런 글이 나온다. ‘흉악한 무리가 먼저 독이 묻은 손을 뻗쳤다(羣兇先逞毒手·군흉선령독수).’ 남인 세력이 송시열을 증오해 선수를 쳐서 죽음으로 몰았다는 뜻이다.

 

충북 괴산에는 송시열 무덤이 있다. 원래는 경기도 수원에 있었는데 풍수가 사나워 1757년 10월에 이리로 이장했다.(1757년 8월 10일, 10월 2일 ‘영조실록’) 묘 아래 비각 속에는 1779년 만든 송시열 신도비가 서 있다. 정조가 직접 지은 비문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고자 효종대왕 최측근(帷幄·유악)으로서 책임에 힘썼다.’(정조, ‘홍재전서’ 15, 문정공송시열신도비명) 두 비문을 연결하면 송시열은 북벌(北伐)이라는 대의를 추구하는 당대 지도자 오른팔로 활동하다가 간신들에 의해 모함을 받고 억울하게 죽었다는 뜻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권력을 둘러싼 갈등 방식에는 공작과 조작이 끼어 있다. 이제 비석에 각인되지 않은 진실을 파헤쳐보자. 독이 든 손은 누가 먼저 뻗쳤고 북벌은 누가 추진했는지 알아보자.

 

▲전북 정읍에 있는 ‘우암수명유허비(尤菴受命遺墟碑)’(부분). 숙종 때인 1689년 송시열이 사약을 받고 죽은 자리에 서 있다. 남인과 소론을 대상으로 공작정치와 진영정치를 한 인물이지만 그 후예들은 ‘흉악한 무리가 먼저 독 묻은 손을 뻗쳤다(羣兇…先逞毒手·군흉…선령독수)’라고 기록했다. /박종인 기자

 

서인의 권력욕과 술수

‘서인 무리들은 영광과 명성을 공경하고 사모해서 이를 위해 스스로 이용되는 것을 즐겁게 여겼다. 끓는 물이나 불 속에 들어가 죽더라도 피하지 않았다. 반면 남인은 그 기질이 구속받기를 싫어하고 빈틈이 많아 스스로 경계하는 일에 소홀하였다. 사람을 모아 당을 수립하려는 계책은 서인의 술수가 한 수 위였다.’(남하정, ‘동소만록’(1779), 원재린 역, 혜안, 2017, p303)

 

1623년 인조반정 이래 띄엄띄엄 몇십년을 제외하고 집권당이었던 세력은 서인이었다. 숙종 때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당된 뒤 ‘순혈 서인’인 노론은 망국 때까지 집권 여당이었다. 18세기 남인 남하정이 쓴 위 ‘동소만록’에는 남인이 권력 유지에 실패한 이유가 명쾌하게 적혀 있다. 한마디로 ‘계책’과 ‘권력욕’ 부족이었다. 남인은 권력을 즐기려고만 했을 뿐 유지하거나 확장할 계책을 세우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 계책에는 공작과 조작, 그리고 진영 논리도 포함돼 있다.

 

1682년 공작정치-남인 역모 사건

1682년 10월 21일 ‘남인이 장사 300명을 동원해 세 정승과 육판서는 물론 비변사 대신들까지 찍어죽이고 나라를 깨뜨리려는’ 어마어마한 역모 사건이 발각됐다. 내용은 구체적이었다. 남인 유생 허새(許璽)가 “주상은 덕이라고는 조금도 없고 어둡고 흐려 어질고 현명한 이로 왕을 바꾸면 태평성대가 온다”며 모의를 주도했고, 여기에 다른 남인 16명이 가세했다고 했다. 전국 주요 도시에 가짜 의금부 도사를 파견해 현지 수령들을 체포하고 궁궐에는 군사 300명을 매복시켜 때를 기다린다고 했다.(1682년 10월 21일 ‘숙종실록’)

 

한마디로 쿠데타였다. 강력한 왕권을 휘두르던 숙종은 분기탱천했다. 즉각 관련자들을 구속해 수사가 진행됐다. 역모를 꾀했다고 고발된 남인들은 고문을 동반한 수사 과정에서 죄를 자백하고 하나씩 처형되거나 고문 도중 죽었다. 그런데 처음 고발된 허새와 허영을 제외하고는 자백을 한 자가 한 명도 없었다. 무릎을 바위로 짓이기는 압슬형을 받고도 무죄라 주장하다 죽는 이까지 나왔다. 갈수록 수사가 미궁에 빠지더니 결국 그 모든 것이 서인인 우의정 김석주와 어영대장 김익훈이 남인 박멸을 목표로 조작한 사건임이 드러났다. 우의정 김석주가 김환이라는 서인을 “명을 따르지 않으면 목을 베겠다”고 위협해 남인에 침투시킨 뒤 공작해낸 역모였고(권상하, ‘한수재선생문집 부록’, 황강문답), 김석주를 대리해 일을 진행한 주모자가 역시 서인인 어영대장 김익훈이었다.

 

이 같은 내용을 자기 문집인 ‘한수재선생문집’에 기록한 ‘권상하’ 또한 서인 총수 송시열의 최측근 인사였으니 서인이 남인을 박멸하기 위해 조작해낸 사건임을 서인 수뇌부가 모두 알고 있었다는 말이다.

 

진영 논리-우리 편 처벌 불가

이에 서인 가운데 젊은 소장파가 수뇌부에 반기를 들었다. “역모를 사주한 김익훈은 본인이 역적이 된 것보다 심하다.”(이건창, ‘당의통략’, 이덕일 역, 자유문고, 2015, p199) 승지 조지겸은 “시비를 분명히 해야 한다”고 숙종에게 재수사를 요구했다.(1682년 11월 10일 ‘숙종실록’) 사헌부 지평 박태유와 유득일은 김석주에 대한 유배형을 요구했다. 골치가 아파진 숙종은 두 지평을 거제도와 진도로 발령내버렸다.(1683년 2월 2일 ‘숙종실록’)

 

그런 와중에 1682년 11월 고향 충청도 회덕에 있던 송시열이 숙종 명에 의해 한성으로 올라왔다. 조지겸이 여주로 가서 그를 마중했다. 역모 사건 전모를 들은 송시열이 이렇게 말했다. “(공작을 한 김익훈은) 비록 죽는다 해도 애석할 것이 없다.” 이 말을 전해들은 서인 소장파들이 ‘드디어 크게 기뻐하면서 어른의 소견도 자기네의 뜻과 같다’고 하였다.(권상하, 위 책, 같은 글)

 

이듬해 1월 서울에 도착한 송시열에게 김익훈 가족이 찾아가 곡절을 호소했다. 1월 19일 아침, 숙종이 주재한 회의에서 송시열이 입을 열었다. “김익훈은 내 스승 김장생의 손자다. 스승에 대한 도리로서 내가 죄인이다.”(1683년 1월 19일 ‘숙종실록’)

 

추상 같은 정의(正義)를 기대하던 소장파에게 날벼락이 떨어진 것이다. 놀라서 찾아간 제자 김간에게 송시열이 재차 이렇게 확인했다. “김익훈은 스승 문중의 자제이니 구제하지 않을 수 없다. 진실로 그가 죽음에 이르게 되면 나는 마땅히 나의 거취(去就)를 내놓고 싸워서 살리겠다(師門子弟 不可不救 苟至於死則吾當以去就爭之·사문자제 불가불구 구지어사 즉오당이거취쟁지).”(송시열, ‘송자대전’ 부록 15 ‘김간(金榦)의 기록’)

 

‘원칙’과 ‘대의’를 주장하던 송시열 입에서 진영 논리가 튀어나오자, 젊은 서인들이 등을 돌렸다. 이들이 서인에서 분리된 소론(少論)이며, 소론을 배척하고 진영을 지킨 이들이 노론(老論)이다.

 

▲우암 송시열(1607~1689) /국립중앙박물관
 
 

위선과 은폐의 정치

1689년 1월 10일 숙종이 희빈 장씨가 낳은 아들 이름을 짓겠다고 선언했다. 이 아이가 곧 세자가 되고 이어 숙종이 죽으면 왕이 될 것이다. 장희빈은 남인의 지지를 받는 여자였다. 그러니 그 아들이 왕이 되면 서인, 그중에서 노론에 불어닥칠 피바람은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2월 1일 노론 지도자 송시열이 집안사람을 통해 아들 명호(名號) 반대 상소를 숙종에게 올렸다. 숙종이 말했다. “송시열 뜻이 이렇다면 그 문하 제자들이 잇달아 일어나게 될 것이고 그러면 소론인 윤증 제자들과 또 싸움이 벌어지리라.”(1689년 2월 1일 ‘숙종실록’) 그날 밤 숙종은 노론 정승들을 파직하고 빈자리를 남인으로 채웠다. ‘기사환국(己巳換局)’이다. 송시열은 벼슬과 품계를 박탈당하고 제주도로 유배됐다.

 

장희빈과 아들 명호를 반대한 사람 가운데 소론 박태보가 있었다. 박태보는 법전에 없는 고문까지 다 당한 뒤 전남 진도로 유배를 떠나다 서울 노량진에서 죽었다. 그리고 숙종은 남인 정권 요청에 유배 중인 송시열을 서울로 재소환했다. 귀경 도중 소식을 들은 송시열은 ‘눈물을 흘리며 소식(素食·죽은 이에 대한 예로 육식을 금하는 것)을 하고 자손에게 박태보 이름을 부르지 말라고 하였다.’(1689년 5월 4일 ‘숙종실록’)

 

그런데 ‘연려실기술’은 소론 나양좌가 쓴 ‘명촌잡록(明村雜錄)’을 인용해 그 뒷이야기를 이렇게 기록했다. ‘송시열이 손자에게 “박태보와 관련된 문자는 모두 불에 넣으라” 하였다.’(이긍익, ‘연려실기술’ 35, 숙종조고사본말, 원자의 명호를 정하다) ‘송시열이 앙숙이었던 윤선거의 외손자 박태보를 헐뜯고 다녔는데 급히 그 글들을 태워버리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앞과 뒤가 다른 위선은 물론 그 위선을 덮으려는 은폐까지 사료(史料)에는 다 기록돼 있다.

 

북벌의 허구와 독 묻은 손

1659년 3월 11일 즉위 11년차 효종이 송시열과 독대했다. 사관도 없었고 내시도 없었다. 대화 내용은 훗날 송시열이 ‘악대설화(幄對說話)’라는 제목으로 공개한 글에 적혀 있다.

 

“나는 포병(砲兵) 10만을 길러 청나라 산해관(山海關)으로 쳐들어갈 계획이다.”(효종) “국가가 망하게 된다면 어찌하시렵니까?”(송시열) 효종이 또 물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급선무인가?” 송시열은 군자금 모금 방법과 군사 모집 방법 따위를 자세하게 답한 뒤 이렇게 덧붙였다. “이 모든 것은 기강을 먼저 세워야 시행할 수 있는데, 기강은 전하가 사심(私心)을 없애야 세울 수 있나이다.”(송시열, ‘송자대전습유’ 7, ‘악대설화’)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봤자 마음공부가 돼 있지 않으면 헛일이라는 말이었다. 송시열은 “북벌보다는 선비들 습관을 바로잡는 일이 급선무”라고 덧붙이기까지 했으니, 이는 북벌 계획 동참이 아닌 실질적인 거부에 불과했다. 독대 한 달 뒤 효종이 급서했다.

 

16년 뒤인 1675년 남인에 의해 수세에 몰렸을 때 송시열은 본인이 작성한 대화록을 전격 공개했다. 이는 훗날 ‘효종대왕-송시열’ 듀엣의 북벌 대계로 확대포장됐다. 노론을 등에 업고 왕이 된 정조는 송시열을 북벌론 주도자로 포장해 비문을 쓰고(1779년) 1787년에는 송시열 문집인 ‘송자대전’도 편찬했다.

 

제주로 송시열을 쫓아보낸 남인은 “송시열 나이가 80이 넘었으니 굳이 국문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숙종은 남인들 요구를 수용해 “의금부도사가 송시열을 만나는 그 자리에서 사약을 내리라”고 명했다. 1689년 6월 3일 상경 중인 송시열이 정읍을 지날 무렵 조정에서 보낸 의금부도사가 눈앞에 나타났다. 송시열은 사약을 받았다. 42년 뒤 그 제자 이의현은 그 자리에 비석을 세우며 ‘흉악한 무리가 독 묻은 손을 먼저 뻗쳤다’라고 기록했다. 이상 위선과 조작과 공작이 난무했던 17세기 피비린내 가득한 정치 이야기였다.

 

307. 세종의 실수, 수령고소금지법

세종의 실수...“사또를 고소하는 자는 곤장 100대에 처한다”

▲서울 광화문광장에 있는 세종대왕 동상. 많은 업적을 남긴 지도자였다. 하지만 성리학적 질서를 강화하고 중앙집권적 국가 시스템 완성을 위해 마련한 ‘수령 고소 금지법’은 조선 백성에 큰 상처를 남겼다. 지방 관리들의 비리를 고발하지 못한 백성은 그 억울함을 삭이며 살 수밖에 없었다. /박종인 기자

 

건국세력의 설계: 중앙집권

새 나라를 세울 때 이성계와 정도전이 이끄는 군사-신진사대부 연합 세력이 꿈꾼 나라는 강력한 중앙집권제 국가였다. 중앙정부와 그 정부가 파견한 지방관이 군사와 경제와 행정을 장악하는 나라였다. 건국 세력의 정적인 옛 고려 지방 토호 세력을 약화시키고 군왕에서 백성까지 성리학적 수직 질서가 확립된 이상 사회를 꿈꿨다. 그래야 고려왕조가 말기에 보여준 부패한 모습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다.

 

지방관, 다시 말해 중앙 권력을 대리하는 사또(수령·守令) 권력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4대 조선 국왕 세종은 결정적인 정책을 내놨다. 즉위 4년 만인 1422년 음력 2월 3일(이하 음력) ‘세종실록’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형조에서 “수령을 고발한 백성은 장 100대를 치고 3000리 유배형에 처한다”고 하니 상(上)이 그대로 따랐다.’

 

때로는 신념과 의도가 현실을 그릇되게 이끌기도 하는 법이다. 세종이 결재한 ‘수령고소금지법(부민고소금지법)’은 지방관 권한을 대폭 강화했으나 이후 오래도록 백성의 민의 상달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작용했다. 조선 공동체 민의 통로를 단절시킨 수령고소금지법 이야기.

 

예조판서 허조의 정지 작업

강직하기 짝이 없는 선비 허조를 태종 이방원은 끔찍이 아꼈다. 끝없는 바른말에 곤장을 때리고 파직도 했지만 결국 태종은 허조를 재차 불러 고위직에 중용했다. 셋째 아들 이도에게 왕위를 물려준 뒤 어느 잔칫날 상왕 태종은 세종 앞에서 허조 어깨를 만지며 이리 말했다. “허조는 나의 주춧돌(주석·柱石)이다.”

 

허조는 또 사람을 대할 때 ‘반드시 존비(尊卑)와 장유(長幼)의 분별을 엄히 하는’ 사람이었다. 허조를 자기 주춧돌이라 불렀던 태종은 허조가 바른 소리를 하면 바로 귀를 기울이고 실천에 옮기곤 했다.(이상 1439년 12월 28일 ‘세종실록’ 좌의정 허조의 졸기)

 

상왕을 물러나 있던 1420년 9월 4일 태종이 자기 거처인 낙천정(서울 광진구)으로 가는 길에 중랑천 천변 송계원평 들판으로 허조를 불렀다. 이런저런 대화 도중 허조가 불쑥 이리 말했다.

 

“아전과 백성이 수령의 잘못을 고발하는 자가 흔히 있으니 풍속이 심히 나빠져 화가 납니다. 이를 막지 못하면 아내는 남편을 아들은 아비를 배반하고 노비는 주인을 음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리 덧붙이며 땅바닥에 머리를 찧고 눈물을 흘렸다. “(수령 고발 금지를) 주변에서 반대해 오늘에야 아룁니다.” 감동한 태종은 즉시 시행하겠다고 약속했다.(1420년 9월 4일, 1422년 2월 3일 ‘세종실록’)

 

들판에서 태종을 만나기 1년 석 달 전인 허조는 회의석상에서 세종에게 “수령에 대한 고소·고발을 금지해 풍속을 두텁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이에 우대언(우승지) 이수(李隨)가 “(탐관오리를 고발하지 않는다면 그 해가 필히 백성에게 미친다”며 반대했다. 허조는 “수령이 하는 짓은 고발 없어도 많은 사람 귀와 눈에 드러난다”고 반박했다. 세종은 좌중에 술을 다섯 잔씩 돌리고 서둘러 회의를 끝냈다.(1419년 6월 21일, 1422년 2월 3일 ‘세종실록’) 허조는 바로 이날 회의를 가슴에 삭이고 있다가 자기를 신뢰하던 상왕 태종에게 직보한 것이다.

 

세종, 고소금지법을 결재하다

태종을 만나고 9일 뒤 허조는 세종을 만났다. 이렇게 주장했다. “천하와 국가에는 상하 구분이 없을 수 없다. ‘별처럼 작은 불이라도 온 들을 태운다’고 한다. 만약 이대로 두면 임금이라도 신하를 둘 수 없게 되고 아비라도 자식을 거느릴 수 없는 지경이 되리라. 따라서-.”

 

보고가 이어졌다. “상전을 고발하는 노비는 목을 베시라. 또 아전이나 백성이 고을 수령을 고발하면 역모와 살인죄가 아닌 한 수령에게 죄가 있더라도 처벌하지 말고, 만일 고발이 음해와 무고라면 고발한 사람을 중죄로 처벌하시라.” 허조는 “고려 때는 수령을 능멸하면 그 집을 연못으로 만들었다”고 덧붙였다. 이날 실록은 이렇게 끝난다. ‘이에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1420년 9월 13일 ‘세종실록’)

 

2년 뒤 형조에서 구체적인 처벌 규정을 정해 세종에게 보고했다. ‘수령을 고발한 사람은 장 100대를 치고 3000리 유배를 보낸다. 고발당한 수령은 역모와 살인죄가 아닌 한 고발의 진위 여부와 상관없이 처벌하지 않는다.’ 이 또한 ‘세종은 그대로 따랐다.’(1422년 2월 3일 ‘세종실록’)

 

지금까지 논란이 되고 있는 ‘노비의 주인 고소 금지법’과 ‘부민의 수령 고소 금지법’이 탄생한 날이었다(이 글에서는 ‘수령 고소 금지법’에 대해서만 알아보기로 한다).

 

신문고를 만든 태종 부부 무덤, 헌릉. /문화재청

 

태종의 개혁 – 신문고

태종은 즉위하고 일곱 달이 지난 1401년 7월 18일 궁궐에 신문고를 설치했다. 처음 명칭은 ‘등문고(登聞鼓)’였다. 그리고 다음 달 태종은 “하소연할 데 없는 백성으로 원통하고 억울한 일을 올릴 자는 북을 울리라”고 명하고 이름을 ‘신문고(申聞鼓)’로 고쳤다. 억울한 일을 관청에서 받아주지 않으면 누구든 북을 치되, 남을 무고하기 위해 북을 울리면 처벌한다고 조건을 달았다.(1401년 8월 1일 ‘태종실록’)

 

이듬해 정월 태종은 신문고 기능을 대폭 확대했다. 정치의 득실, 민생 문제도 신문고 대상이 되었고 고한 내용이 이치에 맞지 않아도(雖或不中·수혹부중) 면책을 한다고 했다. 역모나 반란 사건에는 집단 고발도 받아들이고 대규모 포상도 약속했다.(1402년 1월 26일 ‘태종실록’)

 

신문고를 주로 이용한 사람들은 왕조 교체 과정에서 불법적으로 노비가 되거나 노비를 남에게 빼앗긴 사람들이었다. 13년 뒤까지 북을 치는 민원이 노비 문제에 한정되자 태종은 “도성 내외 백성에게 억울한 처벌과 불법 강제 처분을 당한 사람은 언제든 북을 치라 이르라”고 다시 한번 강조하기도 했다.(1415년 7월 8일 ‘태종실록’)

 

개국 초기 어수선한 정국 속에서 중앙에서 파견한 수령들은 자질이 저질인 사람이 많았다. 1409년에는 밀양군수 우균이 지역민 4명을 이유 없이 때려 죽이는 사건도 있었다. 하지만 우균은 형법적인 처벌을 받지 않고 오직 파면에 그쳤다.(1409년 윤4월 20일 ‘태종실록’) 수령의 비리에 대한 중앙정부의 처분이 미봉책에 그치자 지역 세력들이 신문고를 두드리는 사례가 급증했다.

 

1410년 4월 사간원이 태종에게 개선책을 올렸다. “수령은 임금의 명을 받아 정사를 맡는 사람이다. 비록 허물이 있다 해도 백성은 그 허물을 숨겨줘야 한다. 그런데 간사한 백성이 수령을 고소하는 죄는 놔두고 수령만 죄를 주는 것은 잘못이다. 고소를 금지하라.” 의정부는 이에 대해 “간악하고 사나운 무리에게 징계할 문이 사라진다”고 반대했다.(1410년 4월 8일 ‘태종실록’) 조선왕조 사상 ‘수령 고소 금지법’이 처음으로 언급된 날이었다.

 

태종은 사간원의 개선책을 받아들이지 않고 신문고를 유지시켰다. 오히려 앞에 언급했듯 ‘억울한 처벌’과 ‘불법 처분’까지 신문고를 두드리도록 신문고 기능을 대폭 강화했다. 그러자 지방 토착 세력이 신문고를 두드리는 대신 수령과 결탁해 함께 부패를 저지르는 일이 빈번해졌다. 수령 권한도 강화됐지만 그 강화된 권한을 이용한 부정부패가 오히려 은폐되는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조병인, ‘세종의 ‘부민고소금지법’ 제정과 시행에 관한 연구’, 범죄수사학연구 통권 9호, 경찰대학 범죄수사연구원, 2019)

 

세종의 꿈: 삼강오륜의 나라

이와 같은 복잡한 상황 속에서 태종이 물러나고 세종이 등극했다. 세종이 즉위하고 두 달 만인 1418년 10월 사헌부에서는 “법을 제정해 삼강(三綱)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건의했다. 사헌부는 “윤리에 반해서 아비와 남편, 상전을 고소한 사람은 법률로 처단하라”고 건의했다. 세종은 의정부와 육조판서 연석회의에 이를 안건으로 올렸고, 이들 의견을 좇아 ‘윤리의 입법화’에 동의했다.(1418년 10월 6일 ‘세종실록’) 이로써 고려왕조 때는 경전에서나 볼 수 있었던 상하, 존비, 귀천, 장유의 구별이 현실 세계를 활보하게 되었다.(조병인, 앞 논문)

 

그리고 이듬해 6월 21일 강직한 예조판서 허조가 새 왕에게 수령에 대한 고소를 금지해야 한다고 나섰다. 왕은 이에 대해 “옛 법을 함부로 고칠 수 없다”고 했고 우대언 이수는 “탐관오리를 놔두면 백성에게 화가 미친다”고 반대했다.(1419년 6월 21일 ‘세종실록’)

 

그런데 세종은 이들에게 술을 먹여 논쟁을 가라앉히면서도 허조의 주장에 ‘그 또한 그렇게 여겨(上亦以爲然·상역이위연)’ 각 관청이 금지법 검토 지시를 내렸다.(1422년 2월 3일 ‘세종실록’) 심정적으로 허조의 주장에 절반쯤은 기울어 있었다는 뜻이다.

 

입이 막혀버린 백성들

결국 백성이 수령을 고소하는 행위는 공식적으로 금지됐다. 1년이 지난 1423년 백성의 억울함이 곳곳에서 감지되자 세종이 대책회의를 열었다. 병조참판 최사강은 “관찰사가 수령의 비리를 적발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주장했고 공조참판 황상은 금지법 폐지를 주장했다. 이에 이조판서 허조는 “중국처럼 소송 사태가 날 수 있다”며 폐지 불가를 주장했다. 세종은 “법의 폐단이 생기면 그때그때 대처하자”고 말했다.(1423년 6월 8일 ‘세종실록’)

 

세종은 각 지역에 관리를 보내 민생 문제와 수령의 비리를 조사하는 방법으로 수령 고소 금지법 보완을 시도했다. 법규정과 달리 수령을 고소한 백성을 처벌하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공익 신고는 계속 금하되 ‘자기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소장만은 허용’으로 금지법을 완화했다.(1433년 10월 24일 ‘세종실록’) 하지만 원천적인 문제는 풀릴 수 없었다.

 

마침내 1437년, 사헌부가 관리 기강 확립책을 내놨다. 그중에 고소 금지법 폐지안이 들어 있었다. “탐혹한 관리는 법을 믿고 위엄을 세워 마음대로 백성을 침해하는데 백성은 입을 봉하고 숨을 죽이며 원망을 품고 하늘에 호소한다. 이제부터 재물을 탐하고 정사를 어지럽게 하며 백성을 사납게 하는 일에는 모두 고소하게 하기를 허락하여 억울함을 펴게 하라.”(1437년 6월 1일 ‘세종실록’)

 

세종은 이후 지방에 관원을 파견해 수령과 감사의 횡포를 조사하라고 명했지만 수령 고소 금지법 자체에 대한 폐지 건의는 수용하지 않았다. 이 법은 300년 뒤인 숙종 때까지도 어전회의에서 언급되면서 백성의 억울함 호소에 제동을 거는 장치로 작동했다. 건국 초기 무질서한 시스템을 통제하기 위해 만든 법이 엉뚱한 방향으로 굴러가버렸다.

 

308. 청와대 옛 관저 뒷산 ‘천하제일복지’ 암각의 비밀

가짜뉴스를 만들어서라도 가지고 싶었던, 권력

▲청와대 옛 대통령 관저 뒷산 기슭에 새겨져 있는 ‘天下第一福地(천하제일복지)’ 여섯 글자. 1990년 청와대 신축 공사 과정에서 발견된 이 글자는 ‘청와대 명당설’을 뒷받침하는 결정적인 물증이었다. 그런데 조사 결과 이 글자는 1850~1860년대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던 시기에 누군가가 새겨넣은 글자로 추정됐다. 궁궐 중건이라는 대규모 공사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왕권에 정통성을 주려는 의도였다. 당시 ‘기이하게도’ 자하문 부근 땅 속에서는 ‘을축년(1865년) 흥선대원군이 이 잔을 받으리’라고 새긴 구리 그릇이 발굴되기도 했다. 각자가 됐든 구리 그릇이 됐든 도참과 풍수를 조작해 권력에 정당성을 주려 한 전형적인 조선시대 정치술이었다. /박종인 기자

 
 

바위에 새겨진 ‘천하제일복지’ 여섯 자

개방된 지 두 달 지난 청와대 옛 대통령 관저 뒷산 절벽에는 큼직한 글자 여섯 개가 새겨져 있다. ‘天下第一福地(천하제일복지)’. 끝에는 ‘延陵吳据(연릉오거)’라고 작은 글씨가 희미하게 보인다. 과연 무엇인가. 1990년 청와대 신축공사 과정에서 발견된 이 글자는 세간에서 떠돌던 소문 하나를 입증해줬다. ‘청와대 자리는 예로부터 명당이다.’

 

청와대 개방 후 이 글자가 만천하에 공개되자 이 소문을 뒷받침하는 여러 이야기가 쏟아졌다. ‘청와대 터가 예로부터 명당이라는 것은 이곳에서 발견된 ‘천하제일복지’라는 문구에서도 엿볼 수 있다. 와서 보니 청와대 일대는 길지라고 보는 것이 맞는다.’(2022년 5월 31일 ‘매일경제’) ‘병자호란 이후 청국 체류의 경험이 있는 소현세자나 봉림대군이 관여한 것으로 추정된다.’(2022년 5월 6일 ‘한국일보’) ‘풍수지리에서 말하는 최고 명당이란 의미다. 고려 때 새긴 것으로 추정되는 표석은 노태우 정부 시절인 1990년 청와대 관저 신축공사 중 발견됐다.’(2022년 4월 13일 ‘중앙일보’)

 

결론부터. 이 여섯 글자를 새긴 시기는 구한말 19세기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불탄 궁궐을 흥선대원군이 중건하던 즈음에 누군가가 새긴 글자다. 이미 1990년 글자가 발견될 당시 결론이 난 사안이다. 그런데 호사가들은 “한양이 풍수에 따라 수도로 결정됐고 경복궁이 그 중심”이라는 풍수설 근거로 다시 이를 들먹인다. 사실과, 사실에 근거한 합리적인 추정을 통해 알아본다.

 

홀연히 발견된 ‘풍수’의 증거

1990년 2월 대한민국 신문과 방송은 일제히 ‘청와대에서 표석 발견’ 기사를 쏟아냈다. 화강암 암벽을 깎아 가로 2m50㎝, 세로 1m20㎝ 규모로 해서체로 ‘천하제일복지’라고 새겨진 표석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기사는 대개 ‘청와대 본관 동북쪽 가파른 암벽에 있는 탓에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라고 끝났다. 특히 글씨 주인인 듯한 ‘延陵吳据(연릉오거)’라는 인물은 ‘풍수지리에 밝은 역학가일 가능성도 있다’는 보도도 나왔다.(1990년 2월 23일 ‘경향신문’)

 

표석이 발견된 암벽 아래쪽은 식민시대 총독 관사가 있던 자리다. 1939년 당시 조선총독부 총독 미나미 지로가 남산에 있던 관사를 이곳으로 옮기고 6년 뒤 해방이 됐고 이후 이 관사는 대한민국 대통령 집무실로 쓰였다. 원래 관사 자리는 조선시대 경무대(景武臺) 자리였다. 과거 시험과 무술 경연이 벌어지던 너른 터였다. 그래서 해방 후 대통령 집무실은 경무대로 불렸다. 뿌리가 총독 관사에다 ‘4·19로 퇴각한 자유당 정권을 상징한다’는 이유로 민주당 정권은 경무대를 청와대로 개칭했다. 그리고 1990년 6공화국 노태우 정부 때 일제 잔재 청산 명분으로 청와대를 신축하고 3년 뒤 옛 청와대를 훼철했다. 철거한 자리에는 1983년 신축한 청와대 남쪽 현관 지붕 꼭대기 절병통을 남겨 위치를 표시해뒀다.

 

그런데 그 뒷산에서 이 자리가 명당임을 알리는 글자가 튀어나온 것이다. 청와대 사람들은 “새 청와대를 밝히는 길조(吉兆)”라고 했고(위 같은 신문) 훗날 사람들은 “원래 표석 자리가 명당인데 총독 관사를 지을 때 차출된 지관들이 일부러 비켜난 곳을 잡아 총독들을 망하게 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1997년 12월 11일 ‘동아일보’)

 

150년밖에 안 된 새 글자

명당과 길지에 대한 호기심과 흥분이 가라앉은 1990년 10월, 처음 이 글자를 감정했던 금석학 대가 임창순(1914~1999)이 8개월 동안 연구 결과를 내놨다. 내용은 이러했다.

 

첫째, 이 여섯 글자는 12세기 남송 시대 명필 연릉 오거의 필체다.

 

둘째, 글자를 새긴 연대는 빨라야 구한말인 1850년대 전후다.

 

임창순에 따르면 연릉 오거는 남송시대 서예가다. 중국 강소성 진강(鎭江)변 북고산(北固山) 관광지에 있는 감로사(甘露寺)라는 절에 오거가 쓴 ‘天下第一江山’ 여섯 글자가 커다랗게 붙어 있다. 6세기 북고산에 놀러온 양무제가 ‘천하제일이로다’라고 새겨넣은 친필이 파손되고 이후 오거가 이를 다시 새겼다는 전설이 붙은 글씨다. 임창순은 “오거의 글씨를 탁본으로 구해와 ‘福地’라는 글자를 집자(集字)해 새겼다”고 했다(1990년 10월 29일 ‘서울신문’).

 

그리고 임창순이 추정한 각자 연대는 1850년대다. 그가 이리 말했다. “화강암에 음각한 획의 풍화 정도가 ‘깨끗하다’고 할 만큼 매우 낮다. 화강암의 석질이 본래 비바람에 약한 점을 고려할 때 각자 연대는 빨라야 1850년 전후다.”

 

“경복궁은 풍수로 계획된 도시 한양의 중심”이라는 주장에 결정적인 물증이라고 주장한 사람들에게는 큰 타격이었다. 한양 천도 당시인 14세기는커녕 전쟁 때 홀딱 타버린 경복궁이 근 300년째 폐허로 남아 있던 19세기 작품이었으니까.

 

 중국 강소성 감로사에 있는 연릉 오거의 '천하제일강산'. /jianshu.com

 

2022년 청와대 안내문

1993년 당시 청와대가 세워놓은 안내판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삼각산의 정기를 이어받아 북악을 거쳐 경복궁 쪽으로 길게 뻗어내린 이곳은 일찍이 명당으로 알려져 고려 숙종 9년 1104년 왕실의 이궁이 자리 잡았던 곳이다. 이 가운데 융문당과 융무당이 있던 높은 터를 경무대라 불렀다. 예로부터 천하제일복지라고 알려졌던 이곳 명당 터에 일제는 1939년 7월 총독관사를 건립하여 민족정기 단절을 획책함으로써 이 건물은 경복궁 내 조선총독부 청사와 더불어 외세 침탈의 상징이 되었다.’

 

이 안내판은 바로 옛 청와대 현관 지붕 위 절병통이 놓여 있는 잔디밭 옆에 서 있다. 신축공사 당시 우연히 발견된 ‘천하제일복지’ 여섯 글자가 만든 결과다. ‘예로부터 천하제일복지로 알려졌던’이라는 표현은 수정돼야 마땅하다. 누가 봐도 확연한 근대 암각을 내세워 엉뚱한 방향으로 대한민국 시민을 오도하는 설명이다. 그런데 -.

 

▲1865년 자하문 근처 땅속에서 정권을 축복하는 구리 그릇이 발굴되자 고종은 그 내력을 적은 ‘수진보작명첩(壽進寶酌銘帖)’을 제작해 고위층과 종친에 배포했다. 하늘이 내린 권력임을 입증한다는 것이다. /국립고궁박물관

 
 

또 다른 ‘신의 선물’

천하제일복지 여섯 글자가 북악산 절벽에 새겨지던 무렵, 조선 왕실에 또 다른 경사가 났다. 1865년 음력 5월 4일이었다. 이날 어전회의에서 열세 살 먹은 왕 고종이 내시를 시켜 구리 그릇 하나를 가져와 신하들에게 보여주었다. 창의문 근처에 있는 정자 석경루(石瓊樓) 땅속에서 발굴한 그릇이라고 했다. 발굴한 사람은 박경회라는 사내였다.

 

그릇에는 덮개가 있었고 덮개 속에는 소라처럼 생긴 술잔, 나작(螺酌)이 들어 있었다. 뚜껑 안쪽에 이런 글이 새겨져 있었다. ‘壽進寶酌 華山道士袖中寶 獻壽東方國太公 靑牛十廻白巳節 開封人是玉泉翁(수진보작 화산도사수중보 헌수동방국태공 청우십회백사절 개봉인시옥천옹: 화산도사 소매 속에 있던 보물로 동방의 국태공에게 바치니 을축년 4월 이를 열 사람은 옥천옹이니라)

 

신하들은 “을축년 4월에 이 귀한 그릇을 누군가가 열어보게 된다는 뜻”이라고 했다. 바로 ‘동방국태공’이 을축년 4월에 국가의 큰일을 하게 되리라는 예언이라는 것이다.

 

동방 국태공이 누구인가. 흥선대원군이다. 그러니까 하필 ‘을축년’ 1865년 4월 대원군이 조대비를 통해 경복궁을 중건하겠다고 선언하고 딱 한 달 이틀이 지난 뒤 이 어마어마한 예언이 담긴 구리 그릇이 발견된 것이다.(1865년 4월 2일, 5월 4일 ‘고종실록’ ‘승정원일기’ 등) 회의에 불참했던 문신 송근수는 훗날 ‘이를 보고도 신고하지 않은 자는 동방의 역적(看此不告 東國逆賊·간차불고 동국역적)’이라고까지 했다.(송근수, ‘용호한록’3, 853. 수진보작도, 국사편찬위)

 

고종이 말했다. “이 그릇을 보기만 해도 기쁜 마음이 그지없다. 효성을 바쳐야 하는 도리로 볼 때 이 기쁨을 기록하는 일을 그만둘 수 없으니 모두 글을 지어 바치도록 하라.”(1865년 5월 4일 ‘고종실록’, ‘승정원일기’) 막대한 예산과 인력이 투입될 토목공사에 대한 반대 여론은 이것으로 봄날 눈처럼 사라졌다.

 

고종은 이 그릇을 발견한 박경회라는 사내를 수소문해 그날로 중앙군 지휘관인 오위장(五衛將)으로 특채했다. 그리고 그릇 발굴 과정을 적은 글을 이날 회의 참석자들에게 낱낱이 기록해 책으로 만들라고 명했다. 제작된 ‘수진보작기’는 고위 관료와 종친에게 배포됐다.

 

정치적 기반이 없는 상황에서 권력을 차지한 대원군과 고종이었다. 권력을 확장하고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는 정당성 확보였고, 이를 위해 풍수와 도참과 조작을 동원한 것이다. 식민시대 언론인 차상찬(1887~1946·필명 청오생)은 이렇게 썼다. ‘지금 생각하면 우스운 이야기 같지만 천하를 압도하던 영웅도 인심을 수습하는 데 얼마나 고심했을까 가히 추측할 수 있다.’(1927년 1월 1일 ‘별건곤’ 3호) 권력의 맛이 더욱 달콤한 지금은 오죽할까.

 

▲1993년 옛 청와대를 철거한 자리에 있는 절병통. 1983년 옛 청와대 남쪽 현관 지붕 꼭대기에 있던 기물이다. /박종인 기자

 

309. 1904년 한일의정서 한 장에 사라진 용산 둔지미 마을

‘일본은 조선 땅 어디든 수용할 수 있다’-한일의정서

▲서울 용산구 동부이촌동 경원선 용산역과 서빙고역 사이에 있는 이 건널목 이름은 ‘돈지방’이다. 조선 후기 이 일대 행정명 ‘둔지방(屯之坊)’이 변형된 명칭이다. 조선시대 이 지역은 ‘둔지방’이었고 현 한강대로 서쪽 지역은 ‘용산방(龍山坊)’이었다. 각각 해당지역 최고봉인 ‘둔지산’과 ‘용산’에서 유래된 명칭이다. 1904년 한일의정서에 의거해 둔지방에 주둔한 일본군은 새롭게 형성된 신시가지 전 지역을 ‘용산’이라 불렀고, 그 과정에서 ‘둔지산’은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둔지산기슭에 있던 마을 ‘둔지미’와 그 주민들에 대한 기억도 실종됐다./박종인 기자

 

▲서울 용산구 동부이촌동 아파트촌 입구에는 기차 건널목이 있다. 경원선 용산역과 서빙고역 사이에 있는 이 건널목 이름은 ‘돈지방’이다. 돈지방은 조선 후기 이 일대 행정명 ‘둔지방(屯之坊)’이 변형된 명칭이다. 조선시대 이 지역은 ‘둔지방’이었고 현 한강대로 서쪽 지역은 ‘용산방(龍山坊)’이었다. 각각 해당지역 최고봉인 ‘둔지산’과 ‘용산’에서 유래된 명칭이다. 1904년 한일의정서에 의거해 둔지방에 주둔한 일본군은 새롭게 형성된 신시가지 전 지역을 ‘용산’이라 불렀고, 그 과정에서 ‘둔지산’은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둔지산기슭에 있던 마을 ‘둔지미’와 그 주민들에 대한 기억도 실종됐다./박종인 기자

 

 

‘일본군이 서빙고와 둔지미, 이태원 등 12개 동 토지에 말뚝을 박았다. 이미 내부(內部)와 약정이 된 사안이지만 내부는 주민에게 이를 알리지도 않았고 집행 예고도 없었다. 때가 이르러 일본군에 쫓겨난 주민이 각 동별로 수천이니 하루아침에 집도 밭도 없는 신세가 되어 거리에서 통곡을 했다. 파헤쳐진 무덤 또한 백 군데가 넘었다. 하늘을 찌르는 원망으로 만민이 함께 내부에 고발했지만 관리들과 백성 사이 싸움이 벌어져 사무실 유리창이 돌에 깨지고 내부대신 이지용은 뒷문으로 도주했다.’(김윤식, ‘속음청사’ 下, p148, 1905년 8월 19일, 국사편찬위)

 

도대체 무슨 일인가. 대한제국 ‘행정자치부’가 제국 영토 그것도 제국 수도 한성 남쪽 12개 동에서 난동한 외국군을 방치하고 이를 고발하는 주민들을 피해 장관이 도망가다니. 바로 러일전쟁 개전 직후 한일 두 제국 사이에 체결된 ‘한일의정서’와 이를 체결한 고종 정권과 이로 인해 날벼락을 맞고 사라져버린 용산 둔지미 마을 이야기다.

 

기습적인 ‘중립 선언’

동아시아를 넘어 근대 세계 강국이 된 일본과 태평양을 향해 동진 정책을 벌이던 러시아는 충돌이 필연적이었다. 그 사이에 낀 대한제국에 살길은 중립 혹은 한쪽에 연합하는 길밖에 없었다. 고종 정권은 중립을 택했다. 1903년 내내 고종은 각국 주재 제국 공사를 통해 ‘러일전쟁이 터지면 대한제국은 중립을 지킨다’는 뜻을 전달하고 지지를 요청했다. 일본과 러시아에 주재하는 공사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잠재적 전쟁 당사국인 러일 양국은 이를 거부했다. 결국 고종은 ‘일본과 러시아가 전쟁을 하면 본국은 관계하지 않고 중립을 지킨다’고 국내에 공식 선언했다.(1903년 11월 23일 ‘고종실록’)

 

그리고 이듬해 1월 21일 중국 지부(芝罘)에서 고종이 보낸 특사가 전시 중립 전보를 각국에 타전했다. 내용은 이러했다. ‘…한국 정부는 황명을 받들어 엄정 중립을 선언한다.’(‘일본외교문서’ 37권1책 332, 박희호, ‘대한제국의 전시국외중립선언시말’, 국사관논총 60집, 국사편찬위, 1994, 재인용) 전쟁에 임박해 대한제국을 병참기지로 이용하려던 일본에는 말 그대로 불의의 한 방이었다. 그런데 전혀 대미지가 없는 주먹이었다. 황제의 선언에 그 어느 국가도 동참하지 않은 것이다.

 

외면당한 중립선언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 군사력이 중립을 지켜주지 못했다. 그렇게 많은 무기를 수입하고 군사예산을 투입했지만 대한제국은 ‘무기제조창을 설치한 지 20년이 넘었음에도 총알 한 개 주조하지 못했다.’(1904년 3월 1일 ‘승정원일기’) 또 제국 건국 2년 뒤인 1899년부터 1904년까지 6년 동안 군부대신이 25명 바뀌었다.(장영숙, ‘고종의 정권 운영과 민씨척족의 정치적 역할’, 한국학 31권3호, 영신아카데미 한국학연구소, 2008) 그래서 ‘장수는 병사를 모르고 병사는 장수를 모를 정도로’ 군기 또한 전쟁은커녕 중립 유지도 불가능할 정도였다.(1900년 4월 17일 ‘고종실록’)

 

이런 상황을 당시 러일전쟁 종군기자 F. 매켄지는 이렇게 묘사했다. “당신들이 자신을 보호하지 않는데 남이 보호해줄 턱이 있는가.”(F. 매켄지, ‘Korea’s fight for freedom’, Fleming H Revell Company, 1920, p78)

정부 관료들조차 국가 운명을 두고 극단적으로 대립했다. 중립선언을 주장하는 중립파와 일본과 연합하자는 밀약파가 목숨을 걸고 갈등했다. 중립파는 아관파천 이후 친러노선을 걷던 고종과 고종 최측근 이용익이 핵심이었다. 밀약파는 외부대신 이지용과 군부대신 민영철이 주도했다. 이지용은 직접 주한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에게 접근해 ‘운동비’ 1만엔을 수뢰했다. 친러파였던 원수부 회계국총장 이근택도 가세했다. 이들은 하야시에게 “의정서 체결에 목숨을 걸겠다”고 맹세할 정도였으니(‘주한일본공사관기록’ 18권 12.한일의정서 (20)한일밀약체결안 협의진행과정 보고 건, 1904년 1월 19일) 단순한 정책 갈등을 넘어 사욕(私慾)이 국익을 넘은 대표적인 매국노들이라 하겠다.

 

 ▲한일의정서’(1904) 제4조. ‘대한제국정부는 일본제국정부 행동에 편의를 제공하고 대일본제국정부는 이를 위해 군사 목적상 필요한 지점을 <마음대로(隨機·수기)> 수용할 수 있다’라고 규정돼 있다. /국사편찬위

 

공(公)과 사(私)의 양다리, 고종

‘황제 폐하께서 망명자들 때문에 괴로워하시고 계시다 하니 저들을 변경 깊숙한 곳에 보내서 엄중하게 구속해 둘 터이니 명단을 폐하께서 교시해 주시기 바랍니다.’ 1903년 12월 27일 일본 외무대신 고무라 주타로가 주한공사 하야시에게 보낸 전문이다. 고무라는 “이런 내용을 황제에게 알려달라”고 주문하며 한마디 덧붙였다. “필요하다면 상당한 금액을 증여하는 것도 무방하므로 이유와 금액을 알려달라.”(‘주한일본공사관기록’ 18권 12.한일의정서 (2) 한국망명자 처리에 관한 건)

 

본질적인 원인은 황제 자신이었다. 고종은 1895년 민비 암살 사건 직후 아관으로 파천한 이래 민비 암살 복수에 집착해 있었다. 일본은 바로 이 심리를 이용해 일본에 망명해 있던 암살범들 처리를 미끼로 던진 것이다. 다음 날 공사 하야시는 “망명자 처리에도 고종이 요지부동이면 경성에서 무력시위를 해달라”고 고무라에게 주문했다.(위 같은 책 (4) 한국조정 회유책에 관한 품신 건)

 

고종은 즉시 ‘일본법으로 망명자 엄중 처벌’ ‘대한제국 황실 안전과 독립’ ‘대한국 영토 특히 수도 한성의 안전 보장’을 조건으로 외부대신 이지용에게 의정서 협상 개시를 명했다. 그리고 암살범 우범선을 죽인 고영근에 대한 관용 또한 요구했다.(위 같은 책 (5)한국인망명자 처분 교섭에 대한 칙지) 이듬해 1월 4일 고영근이 특사로 풀려나자 고종은 이지용을 통해 암살집단 27명 명단을 일본에 통보하고 이 가운데 주범인 이두황과 권동진은 국내 송환을 요청했다. 이틀 뒤 하야시는 이지용과 민영철, 이근택에게 1만엔을 뇌물로 제공했다.

 

1월 18일 의정서 초안이 나왔다. ‘망명자에 대한 상당한 제재’가 조항에 삽입됐고 ‘전쟁 수행에 대한 대한제국정부의 충분한 편의 제공’ 조항이 들어갔다. 그런데 다음 날 일본 측은 ‘망명자 조치’ 조항을 본문에서 삭제하고 하야시 공사의 공문(公文)으로 보장하기로 방침을 바꿔버렸다.

 

그리고 사흘 뒤인 1월 21일 고종은 ‘황제 본인이 아닌’ ‘외부대신 명의’로 ‘중국에서’ ‘실현 불가능한 중립’을 선언했다. 다시 말해서 고종은 공인(公人)으로서는 중립화안을 고집하면서도 그나마 발표를 외부대신에게 미루고, 사인(私人)으로서는 개인적인 원한 때문에 중립화안과 배치되는 일본 측 밀약 체결에 응한 것이다.(박희호, 앞 논문) 개인적 원한으로 시작한 협상은 주도권을 상실했다. 이어 기습적 중립선언 후 일본군이 하야시가 주문했던 ‘경성 무력시위’를 벌이는 과정에서 고종이 원하던 ‘망명자 처분’ 조항은 삭제돼 버렸다. 대신 ‘대일본제국이 군사상 필요한 지점을 <마음대로((隨機·수기> 수용할 수 있다’는 한층 강화된 조항이 본문에 삽입돼 버렸다. 그 조항 그대로, 1904년 2월 23일 러일전쟁 개전 직후 ‘대한제국’과 ‘대일본제국’ 사이에 한일의정서가 체결됐다.

 

닷새 뒤인 2월 28일 고종은 고종 본인과 두 아들인 황태자와 영친왕 이름으로 러일전쟁 군자금 명목으로 일본에 백동화 18만원을 기부했다.(일본 외무성 ‘일본외교문서’ 37권 1책, p273, ‘한국황제 내탕금 아군 군수 지원’) 한 달 뒤인 3월 22일 일본 특파대사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에게 30만엔이 입금된 제일은행 경성지점 통장을 헌납했다.(‘일본외교문서’ 37권 1책, p297, ‘3월 20일 이토 특파대사 내알현시말’·2022년 7월 19일 본지 <이토 히로부미를 짝사랑한 고종> 참조)

 

 ▲용산공원 부지 미군 드래곤힐즈 호텔 정원에 있는 둔지미 마을 흔적. 신분이 높았음 직한 무덤 석물들을 미군 측이 호텔 앞에 세워놓았다. /박종인 기자

 

슬픈 둔지미 마을

그 한일의정서에 의거해 일본군은 대한제국 각지 1000만평을 마음대로 수용했다. 그 가운데 ‘성저십리(城底十里)’라 불리는 한성 남쪽 ‘둔지방(屯之坊)’이 있다. 지금 개방을 눈앞에 둔 용산공원 부지다. 부지 한가운데에 둔지산이 있다고 해서 이 지역 마을을 ‘둔지미’라 불렀고 행정명은 둔지방이 되었다. 원래 용산(龍山)은 현 마포대교 쪽에 있다. 그쪽 행정구역은 ‘용산방’이었다. 용산 기슭 용산방과 둔지산 기슭 둔지방은 엄연히 다른 공간이었다. 일본군이 신시가지를 형성하면서 둔지방과 용산방은 용산이라는 명칭 하나로 합쳐졌다. 둔지방은 동부이촌동 철길 ‘돈지방건널목’처럼 관습적인 명칭에나 남아 있다.

 

용산공원 부지에는 대한제국정부에 외면당하고 일본제국 폭력 속에 고향을 떠난 둔지미 마을 추억이 파편처럼 흩어져 있다. 일본군이 직선화한 옛길도 남아 있다. 개울도 남아 있다. 둔지산 기슭에 있었음 직한 무덤가 석물(石物)들도 미군이 보존해 놓았다. 서글프지 않은가. 글로 표현하기 힘든 옛 권력자들에 대한 배신감.

 

 ▲일본군이 용산기지 부지를 수용한 뒤 강제철거시킨 둔지미 마을 석물. 뒤쪽 철담장 안은 대통령집무실 공간이다. /박종인 기자

 

 

310. 남대문 괴담과 사라진 국보 번호

가토 기요마사가 통과해서 남대문이 ‘총독부 보물’이 됐다고?

▲서울 남대문은 국보1호였다. 2021년 문화재청이 문화재 관련법을 개정해 지정번호 표기를 없애면서 ‘국보 남대문’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 가토 기요마사 부대가 남대문으로 입성해 한성을 함락시켰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조선총독부가 남대문을 보물1호로 등재시켰다는 이야기가 초래한 결과다. 찬찬히 뜯어보면, ‘일본 전승 기념을 위한 남대문 보물 지정’설은 앞뒤가 맞지 않는 괴담이다. /박종인 기자

 

2008년 2월 10일 밤 남대문이 전소된 이후 남대문은 역사상 가장 많은 관심을 받았다. 남대문은 무사히 복구됐지만 또 다른 논쟁이 터졌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 2번대 가토 기요마사 부대가 남대문을 통해 한양에 입성했고, 식민 시대에 총독부가 남대문을 ‘전승문(戰勝門)’으로 기념하기 위해 조선 보물 1호로 지정했으며 그 체계를 답습한 대한민국 정부가 일본 전승문을 ‘국보 1호’로 삼아왔다는 것이다. 논란 끝에 2021년 남대문은 물론 ‘보물 1호’였던 동대문도 1호 딱지가 떨어졌다. 전국 팔도 모든 국보·보물 번호가 사라졌다.

 

이런 조치가 합리적이 되려면 다음 세 가지 질문에 전부 “맞는다”라고 답해야 한다. 첫째, 가토 기요마사가 남대문으로 한양에 입성했는가? 둘째, 조선총독부는 그 남대문을 조선 보물 1호로 지정했는가? 셋째, 가토 기요마사의 개선문이기 때문에 그렇게 지정했는가? 조목조목 본다.

 

임진왜란과 남대문

‘1592년 4월 가토 기요마사가 지휘한 2번대는 한강을 건너 계속 전진해 5월 2일 저녁 남대문을 통해 경성에 입성했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1번대는 그날 오후 8시 동대문에 접근했으나 성문이 닫혀 있었다. 이에 장사 몇 명을 시켜 수문을 파괴하고 진입해 안에서 성문을 열게 했다. 이로써 아군 전 병력이 경성을 점령했다.’(日本參謀本部 編 ‘日本戰史-朝鮮役’, 偕行社(도쿄), 1924, pp167, 168) 1924년 일본 참모본부 ‘일본전사(日本戰史)’에 실린 내용이다. ‘실록’과 ‘징비록(류성룡)’ 같은 다른 기록에도 유사한 내용이 들어 있으니 남대문과 동대문은 일본군이 한성 함락 작전 때 통과한 문이 분명하다. 첫 번째 질문 답은 ‘사실이다’.

 

1934년 조선총독부 관보. 남대문과 동대문에 조선 보물 1, 2호 번호가 붙어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조선총독부의 보물 선언

1934년 8월 27일 자 ‘조선총독부 관보’에는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령’(이하 ‘보존령’)에 관한 고시가 게시됐다. ‘보물’ 153점과 ‘고적’ 13군데, ‘명승천연기념물’ 3군데가 보존할 문화재로 지정됐다. ‘보물’ ‘고적’ ‘명승’ ‘천연기념물’ 리스트 첫머리는 이러하다.

 

제1호 남대문, 2호 동대문, 3호 보신각종, 4호 원각사지탑, 5호 원각사비.

 

해방 후 이들 ‘보물’을 일체 ‘국보’로 격상시킨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이들 가운데 가치가 떨어지는 문화재를 ‘보물’로 격하했다. 다음은 그 대한민국 ‘국보’와 ‘보물’ 상위 명단이다.

 

국보 1호 남대문, 보물 1호 동대문, 국보 2호 원각사지탑, 보물 2호 보신각종, 국보 3호 진흥왕 순수비, 보물 3호 원각사비.

 

국보와 보물 명단을 통합하면 ‘진흥왕순수비’ 외에는 총독부 보존령 보물 명단과 일치한다. 이게 대한민국 국보 체계가 일재 잔재라고 주장하는 근거다. 따라서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도 “사실이다.”

 

 ▲조선회고록’(1915). 필자인 전 요미우리신문 주필 나카이 긴조는 남대문 파괴를 주장하는 하세가와 요시미치에게 자신이 남대문은 가토 기요마사 전승문이라며 존치를 설득했다고 적혀 있다./일본국회도서관

 

“남대문 부수지 마라, 가토 장군 입성한 문이다!”

2008년 겨울 남대문이 불에 타 사라지면서 전 국민 관심이 남대문에 집중됐다. 그리고 문득 장안에 있는 모든 신문과 방송은 2002년 서울대 대학원 유학생인 일본인이 쓴 석사 논문에 주목했다.

 

오타 히데하루(太田秀春)라는 당시 서울대 국사학과 대학원생이 쓴 논문 제목은 ‘일본의 식민지 조선에서의 고적 조사와 성곽 정책’이다. 오타는 현재 가고시마국제대 교수다.

 

논문 가운데 남대문에 관한 부분은 충격적이었다. ‘1905년 을사조약에 의해 통감부가 개설되자 일본거류민회는 용산을 포함한 40만~50만 인구를 수용할 수 있는 대도시 건설을 계획했다. 문제가 된 것은 교통상 장애가 되는 남대문 처리 문제였다. 당시 조선군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는 “포차(砲車) 왕래에도 지장이 생기니까 그런 낡아빠진 문은 파괴해버리라”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논문에 인용된 위 하세가와 말 출처는 ‘조선회고록(朝鮮回顧錄)’(1915)이라는 책이다. 필자 나카이 긴조(中井錦城)는 ‘요미우리신문(讀賣新聞)’ 주필까지 지낸 언론인이다. 조선에서 ‘한성신보’를 운영하고 일본인 거류민단 단장을 지낸 인물이었다. 본명은 나카이 기타로(中井喜太郞)다.

 

회고록에 따르면 나카이는 이렇게 하세가와를 설득했다. ‘”남대문은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가 빠져나간 문이다. 그 당시 건축물은 남대문 외에 두세 개밖에 없다. 파괴하는 것은 아깝지 않은가?” 그러자 장군은 내 주장을 받아들였고 나는 문 양쪽 도로를 넓히는 방안을 내놨다. 그리고 도면을 첨부해 공사관에 제출했다. 그 결과 내 방안이 통과됐다.’(中井錦城, ‘朝鮮回顧錄’, 糖業硏究會出版部(도쿄), 1915, p169) 논문 저자 오타는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 선봉인 가토 기요마사가 남대문을 통과해 서울을 함락시켰다는 사실 때문에 남대문은 보존됐던 것이다. 동대문이 보존된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잿더미가 된 남대문 앞에서 망연자실한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남대문이 일본 전승문이라서 총독부 보물이 됐다’는 소식은 강력한 뺨따귀였다. “남대문 복원해내라”는 여론과 동시에 “국보 1호 지정을 해제하고 대신 ‘훈민정음’을 국보 1호로 하라”는 여론이 빗발쳤다. 결국 문화재청은 법을 바꿔 지정 번호 자체를 없애버리는 조치로 여론에 대응했다.

 

 ▲1910년 세키노 다다시 조선문화재 목록. 남대문이 맨 처음 나온다./일본국회도서관

 

1910년 세키노 다다시 리스트와 남대문

자, 가등청정이 남대문으로 입성한 사실도 맞고 조선총독부가 남대문을 지정 번호 1번 보물로 정한 것도 맞는다. 그렇다면 세 번째 질문이다. ‘남대문이 일본 전승문이기 때문에 보물 1호로 지정했는가?’

 

건축사학자인 세키노 다다시(關野貞·1868~1935)는 조선 문화재 연구 선구자다. 1902년 조선 고건축 조사를 시작하면서 당대 조선 예술과 문화 연구를 주도하기 시작했다. 식민 시대 고건축 연구에 필수적인 사진 도록 ‘조선고적도보’는 세키노가 주도해 만든 대작이다.

 

1909년 9월 세키노는 통감부 치하 대한제국 탁지부 용역을 받고 서울과 개성, 평양, 의주를 답사했다. 이듬해 세키노가 ‘조선예술의 연구(朝鮮藝術之研究)’라는 보고서를 내놨다. 이 책 첫 꼭지에 실린 논문 ‘조선건축조사략보고(朝鮮建築調査略報告)’에 공식적인 조선 보물 분류표가 첫 등장한다.

 

경성을 보면 남대문-원각사십삼층탑-명정전 등 창경궁 건물 일부-창덕궁 돈화문과 인정전 등이 나열돼 있다. 뒤쪽에 동대문과 남묘, 북묘가 보인다. 각 문화재에는 甲(갑)~丁(정) 등급이 매겨져 있다. 세키노는 ‘최우수인 갑과 을은 특별히 보호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 세 번째인 병은 조선 전역을 조사한 후 을(乙) 편입 여부를 결정할 대상’이라고 설명했다.(세키노 다다시 등, ‘朝鮮藝術之硏究: 朝鮮建築調査略報告’ p2, 度支部建築所, 1910)

남대문이 갑(甲)인 이유는 이러했다.

 

‘개국부터 임진왜란 때인 선조까지 약 200년 기간은 명나라 영향을 받으면서도 고유한 발전이 있었던 시대였다. 실질적으로 한국적인 목조건물이 시작된 시기다. 이 시대 목조건축이 다소 남아 있는데 가장 오래된 건축물은 개성 남대문과 경성 남대문이 있다.’(세키노, 앞 논문 pp25, 26)

 

이 1910년 세키노 다다시 분류표가 1937년 조선총독부 보존령에 따른 조선 보물 리스트의 뿌리다. 분류 기준은 ‘시대’와 ‘대표성’이었다.

 

건립 시기가 가장 오래된 남대문(1396년)이 갑 가운데 경성 소재 문화재 중 맨 첫머리에 기록됐다. 1467년에 건립된 ‘원각사십삼층석탑’ 또한 갑으로 분류됐다. 19세기 중엽인 1869년 중건된 동대문은 병으로 분류됐다.

타국 학자가 건방지게 남의 나라 보물 순위를 매긴 사실은 열 받지만 가토 기요마사 따위 민족사적 서사가 개입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1917년 총독부 보물 목록(1924년 인쇄판). 남대문과 동대문은 없다. /국립중앙박물관

 

1917년 총독부 리스트: 사라진 남대문과 동대문

1916년 총독부는 유물과 명승을 조사, 보존을 위해 고적조사위원회를 설치하고 전국 각지 고적과 유물을 파악해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1917년에 완성된 그 목록이 ‘고적 및 유물 등록대장(古蹟及遺物登錄臺帳)’이다. 1924년판 이 대장 초록에 등록된 문화재는 193개다. 1호는 원각사지십층석탑이고 2호는 원각사비, 3호는 보신각종, 4호는 장의사지당간지주, 5호는 북한산신라진흥왕순수비다.

 

눈치챘는가. ‘가토 기요마사가 입성한 남대문’은 고사하고 ‘고니시 유키나가가 입성한 동대문’은 사라지고 없다!

 

고적조사위원회는 총독부 관할이고 최종 결정권자는 조선총독이다. 1916년 총독은 누구인가. 바로 “가토 기요마사 전승문을 부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는 전 조선주차군 사령관이자 육군원수, 2대 조선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였다. 총독이 존치를 다짐했다는 전승문들이 목록에 없다면, 이는 목록 작성에 민족 감정이나 군인 정신 대신 그 당시 ‘시대’와 ‘대표성’이라는 기준이 적용됐다는 뜻이다.

 

부실 논문에 선동된 대한민국

온 국민을 흥분하게 했던 오타 히데하루 논문은 허점이 많다. 오타는 ‘첫째, 1905년 을사조약으로 통감부가 개설되자 일본거류민단이 대도시 건설 계획을 내놨고 둘째, 제일 방해가 되는 장애물이 남대문이었고 셋째, 남대문을 폭파해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한 하세가와 요시미치에게 거류민단장 나카이 긴조가 그 역사성을 강조해 남대문이 살아남았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시간대도 주인공도 뒤죽박죽이다. 을사조약 체결일은 1905년 11월 17일이다. 통감부는 3개월 뒤인 1906년 2월 1일 개설됐다. 따라서 거류민단이 통감부에 도시 계획을 내놓은 시점은 1906년 2월 통감부 개설 뒤다. 그때 나카이 긴조는 거류민단장이 아니었다. 나카이는 1905년 12월 민단장 직을 사임했고 1906년 1~2월 민단장은 와다 쓰네이치(和田常市)와 후치가미 사다스케(淵上貞助)라는 골동품상 겸 기업인이었다.(국역 ‘경성부사’ 2권(경성부, 1934), 서울역사편찬원, p649)

 

그러니 어떻게 ‘전직 단장’ 나카이가, ‘아직 입안도 되지 않은’ 대도시 건설 계획에 대해서 ‘군사령관’ 하세가와에게 왈가왈부할 수 있는가. 또 나카이는 남대문 존치 계획을 하야시 공사에게 제출해 승인받았다고 기록했는데, 일본공사관은 1906년 1월 해체되고 없었다. 따라서 자기가 강력하게 주장해 역사에 무지한 군인을 각성시켰다는 전직 언론인 나카이 긴조 주장은 과장한 기록이거나 허풍이 분명하다.

 

역사에 눈을 부릅떠야 하는 이유

식민 시대 관광객들은 ‘가토 기요마사 개선문’ ‘고니시 유키나가 개선문’ 따위 문구가 적힌 가이드북을 들고 경성, 전주, 평양 대문들을 구경 다녔다. 이는 최근까지도 식민지 때 전북 무주에 뚫은 터널을 ‘신라와 백제 국경인 나제통문’이라고 선전해온(2018년 1월 24일 ‘땅의 역사’ 참조) 21세기 대한민국 관광업계와 유사한 발상이니 고려할 가치도 없다.

 

무엇보다 ‘회고록’은 객관적인 사료로 삼으려면 다각적인 교차 검증이 필수적인 기록물이다. 그 검증 작업을 누구도 하지 않았기에 논문이 통과가 됐고 대중적 화제가 됐으며 대한민국 문화재 체계가 뒤흔들렸다. 남은 것, 아니 사라진 것은 국보와 보물 번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