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 여행/ 국가별83/ 홍콩 Hong Kong 1/ 홍콩이 뿔났다
지구촌 여행/ 국가별83/ 홍콩 Hong Kong 1/ 홍콩이 뿔났다
■홍콩 Hong Kong 1
香港 중화인민공화국 홍콩 특별행정구, Hong Kong Special Administrative Region of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
중국 남부 해안 어귀 주장 강 동쪽에 있는 도시. 홍콩 섬, 주룽 반도의 남쪽 부분과 스톤커터 섬, 신계로 이뤄진다. 영국의 식민지였으나 1997년 7월 1일 중국으로 반환됐다. 홍콩 섬에 있는 빅토리아는 1841년 영국이 처음 상륙한 곳으로 행정•경제 활동의 중심지다. 초기에는 천혜의 자연항구와 수익성 좋은 중국 무역의 전진기지로 발달했고 산업적 성장으로 세계 무역 및 경제 중심지 가운데 하나가 됐다. 인구 과밀, 무역거래의 기복, 사회•정치적 불안이라는 문제에 직면해 있지만 화물집산지, 제조 및 금융의 중심, 그리고 중국의 무역과 현대화에 있어서의 중요한 대리인으로서의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전에는 영국 식민지였으나 1997년 7월 중국으로 반환되었다. 홍콩 섬과 인근의 작은 섬들, 스톤커터 섬, 본토의 주룽 반도(九龍半島)뿐만 아니라 본토 일부와 란터우 섬, 그외 230개가 넘는 섬들로 이루어진 신계까지 포함된다. 남북길이 43km, 동서길이 56km이다. 북쪽은 광둥 성과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남쪽은 남중국해에 면해 있다. 행정중심지인 빅토리아는 홍콩 섬에 있다.
1990년 중국이 공표한 '홍콩특별행정구에 관한 기본법'(이하 기본법)은 1997년 중국이 홍콩에 대한 주권을 회복되면서 효력을 발생하게 되었다. 기본법은 행정장관에게 행정권을 부여하되 그를 중국 중앙정부의 사법권하에 두고 임기는 5년으로 규정하고 있다. 입법권한은 입법국에 있으며 60명의 의원이 4년 임기로 봉사하되 임기가 끝나기 전에 행정장관은 의회를 해산할 수 있다. 초대 행정장관과 의회 의원들은 중국 정부가 임명한 400명으로 구성된 선출위원회에 의해 선출되었다.
민법과 형법은 대체로 영국 코먼로에서 따온 것이다. 기본법에는 이러한 체제가 그대로 유지되는 것으로 되어있다. 최고사법기구는 항소법원이다. 정부의 사회복지체계에 따라 실업자·불구자·노인에게는 보조금을 지급하며, 공공병원에서는 의료보장도 되고 있다. 홍콩의 초등교육은 무상·의무 교육이다. 대부분 중국어로 수업을 하며, 영어도 함께 쓰고 있다. 고등교육기관으로 홍콩대학교(1911), 홍콩중문대학(1963), 홍콩과학기술대학(1972) 등이 있다.
홍콩은 영국 행정부하에서 대체로 언론자유가 실천되어 왔으며, 동아시아의 주요한 출판 및 인쇄 중심지이다. 홍콩의 문화는 본질적으로 중국 문화이기는 하지만 서구문화의 영향을 받았다. 홍콩 박물관은 동서양의 예술품을 다양하게 전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18, 19세기의 중국과 영국의 교류를 보여주는 화보를 전시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홍콩은 1970년대 이래 주요 영화생산국으로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특히 무술, 액션, 코미디 영화에서 개성적인 작품들을 선보였으며 헐리우드 영화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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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이 뿔났다
2019.05.08 홍콩시민 100만 명 거리로…'중국송환 반대' 시위 격화
▲2019.05.08 중국과 범인 인도 협정 개정 반대 100만 시위
06.14 홍콩 시위… '자유 vs 억압' '민주 vs 전체주의' 국제대결로
中·홍콩, 폭도로 몰며 강경대응… 총기 형태 진압 장비도 첫 등장
중국으로의 범죄인 인도 허용 법안을 둘러싼 홍콩 시위 사태가 '자유 대(對) 억압' '민주 대 전체주의'의 국제 대결 구도로 변하고 있다. 중국 정부와 홍콩 당국은 시위대를 '폭도'로 몰며 강경 대응했지만, 서구 각국 정상들과 국제기구 리더들이 일제히 홍콩 시민들을 지지하고 나선 것이다.
12일 홍콩 도심은 입법회(의회)의 법안 심의를 막으러 나온 수만명의 시위대가 외치는 "(범죄인 개정안) 철회" 구호로 귀가 먹먹했다. 홍콩 경찰들은 시위대를 향해 최루탄과 고무탄을 쏘며 폭력적인 진압 작전에 나섰다. 방패와 곤봉, 헬멧과 방독면을 갖춘 경찰 틈에서 전담 요원들이 수시로 튀어나와 사격을 가했다. 홍콩에서 총기 형태의 진압 장비가 등장한 것은 1997년 홍콩 주권 반환 이후 처음이었다. 경찰의 폭력 진압으로 이날 72명이 다쳤고, 머리를 다친 두 명은 위중한 것으로 알려졌다. 분노한 홍콩 시민들은 13일 시내 곳곳에서 '홍콩 시민에 대한 사격을 중지하라'는 팻말을 들고 침묵시위를 벌였다.
▲12일(현지 시각) 홍콩 의회인 입법회 건물 인근 하코트로(路)에서 중국으로 범죄인 인도를 허용하는 법안 반대 시위에서 한 참가자가 도로 위에 앉아 있다. 이날 시위에는 수만 명이 참여해 ‘법안 철회’ 구호를 외쳤다. 홍콩 경찰은 시위대를 향해 최루탄과 고무탄을 쏘며 폭력 진압해 72명이 다쳤다. 홍콩에서 총기 형태의 진압 장비가 등장한 것은 1997년 홍콩 주권 반환 이후 처음이었다. /AFP 연합뉴스
캐리 람 홍콩 행정장관(행정수반)은 전날 밤 배포한 동영상을 통해 시위 참가자들을 '폭도'로 규정하고, 강경 대응을 예고했다. 그는 "어떤 문명 법치 사회도 노골적으로 조직된 폭동으로 평화와 안녕을 해치는 위법 행위를 용인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겅솽 중국 외교부 대변인도 13일 브리핑에서 "우리는 홍콩 특별행정구 정부가 법에 따라 처리하는 것을 지지한다"고 말했다. 홍콩HK01 등 매체들은 "홍콩 당국은 이번 시위를 동구권을 무너뜨렸던 '색깔 혁명'과 같은 성격으로 간주하면서 절대 양보해서는 안 된다는 판단을 내렸다"고 보도했다.
서구 지도자들은 정반대의 목소리를 냈다.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는 12일(현지 시각) "영국은 전(前) 식민지의 자유를 공개적으로 지지해야 하는 특별한 책임이 있다"며 "(홍콩 정부가 추진하는) 범죄인 인도 법안은 영국·중국 공동선언에서 정한 권리 및 자유와 긴밀히 연결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낸시 펠로시 미 하원 의장도 "범죄인 인도법은 반체제 인사를 침묵시키기 위해 법을 짓누르고 홍콩민의 자유를 억압하려는 뻔뻔한 의향을 보여준다"고 비판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홍콩에서) 100만명이 시위를 했고 이는 내가 본 것 중 가장 큰 시위였다"며 "시위 이유를 이해한다"고 말했다. 미 하원 제임스 맥거번 의원은 "평화로운 집회 참여자들이 홍콩 경찰의 끔찍한 폭력에 맞닥뜨리는 것에 대해 초당적인 분노가 있다"며 "공화당 의원들과 함께 홍콩이 미국으로부터 무역과 경제의 특별대우를 받을 만한 자치권을 가졌는지 검토하기 위한 입법을 추진 중"이라고 말했다.
EU(유럽연합)는 "홍콩 시민들은 집회결사 및 자유롭고 평화로운 의사표현이라는 기본권을 존중받아야 한다"고 했고,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홍콩 당국에 "집회의 자유를 존중하라"고 촉구했다. 호주 정부도 "홍콩 정부의 범죄인 인도법 개정은 홍콩에 고도의 자치와 자유를 보장한 일국양제(一國兩制·한 국가 두 체제)의 바탕 위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요구했다. 이번 홍콩 시위는 범죄인 인도 법안이 직접적인 이유이지만, 갈수록 노골화되는 중국의 내정간섭에 홍콩의 자유와 민주체제가 위협받는 것에 대한 불만이 폭발한 것이다.
2014년 홍콩의 우산혁명(행정장관 완전 직선제 등을 요구했던 민주화 시위) 이후 중국은 시위 지도자들을 하나둘씩 체포한 뒤 모두 감옥에 보내고 선거에서 뽑힌 민주파 인사들을 온갖 이유로 의회에서 쫓아냈다. 언론사와 비판 서적 출판사들도 잇따라 친중 자본에 넘어가, 언론의 자유도 갈수록 위축됐다.
이처럼 일국양제가 허물어지는 상황에서 중국에 범인을 인도할 수 있는 법안이 통과되면 반중 정치범은 중국으로 보내져 목숨을 보장할 수 없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시진핑 국가주석 집권 이후 노골적으로 권위주의화하고 있는 중국이 이번 법안을 철회해 (대만이나 티베트 등) 다른 지역들에 나쁜 신호를 주는 선택을 할 리가 없다"고 전했다. "(중국과 서구) 가치 체계가 대립하는 상황에서 결국 서구가 민주주의와 법치 편에 서야 하고 그렇게 못한다면 서구는 더 이상 중국인들에게 대안으로서 자격을 상실할 것"이라는 것이다.
조선일보 베이징=이길성 특파원
06.14 시위대 '폭도' 규정·폭력 진압… '홍콩판 리펑' 비난받아
홍콩 행정장관 캐리 람, 2014 우산시위 강경 진압 등 중국 정부 입장 충실히 반영
▲/AFP 연합뉴스
홍콩 시위대 강경 진압 명령을 내린 캐리 람(林鄭月娥·62·사진) 행정장관(행정수반)을 두고 '홍콩을 팔아넘기는(매콩·賣港) 중국 정부의 꼭두각시'라는 비난이 커지고 있다.
람 장관은 지난 12일 성명에서 시위를 '조직적 폭동'으로 규정하고 강경 진압 방침을 밝혔다. 홍콩 야권인 민주당 주석 우치와이(胡志偉)는 13일 입법회(국회 격) 앞에서 "정부가 시위를 폭동으로 규정한 것은 30년 전 톈안먼(天安門) 사태를 떠오르게 한다"면서 "람은 30년 전 리펑 총리"라고 비난했다. 1989년 6월 톈안먼 사태 때 리펑 총리는 민주화 요구 시위를 '폭동'으로 규정하고 강제 해산시켰다.
람 장관은 홍콩의 1인자이지만 홍콩인들은 그를 '중국 정부의 충실한 집행자'로 여긴다. 중국 심기를 건드리는 시위들을 강경 진압한 공으로 고속 승진을 거듭했기 때문이다. 람은 상하이 출신 아버지와 홍콩 출신 어머니를 뒀다. 5남매 중 넷째로 태어나 명문 홍콩대에 합격했고, 1980년 졸업 직후 곧바로 홍콩 정부에서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 2007년 고위 공무원에 속하는 홍콩 개발국장에 오르자 영국 국적을 버렸고, 같은 해 영국 통치를 상징하는 퀸스 피어(항구) 철거 반대 시민 점거 시위를 해산시키고 철거를 강행했다. 2012년 홍콩의 2인자인 정무사장에 발탁됐고, 2014년 행정장관 직선제를 요구한 민주화 시위인 '우산혁명'을 강경 진압해 79일 만에 해산시켰다. 이후 1000명에 달하는 시위 참가자를 체포하는 데도 앞장섰다. 이 공으로 중국 정부의 신임을 얻었다.
람은 2017년 3월 선거에서 중국의 전폭적 지지를 업고 행정장관에 당선됐다.사실상 홍콩 총독인셈이다. 홍콩의 행정장관은 홍콩인이 직접 뽑지 않고 중국이 사실상 구성하는 선거위원이 뽑는데, 람은 1194명의 선거위원단으로부터 777표를 받아 당선됐다. 선거 직전 여론조사에서 람의 지지율은 겨우 32.1%로 존 창 전 재무사장(52.8%)에 크게 뒤졌다. 개표 현장에서 람의 당선이 확정되자 "람은 지옥에나 가라. 우리는 직선제를 원한다"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람에게는 '777 아줌마'라는 별명이 따라붙었다.
람은 당선 직후 노골적인 친중 행보를 보였다. 당선이 확정되자 곧바로 중국 정부 출장소에 해당하는 중앙인민정부 연락판공실(中聯辦)을 방문했고, 중국 관영 신화통신과 가진 인터뷰에서는 "홍콩인들은 어릴 때부터 '나는 중국인'이라는 의식을 가져야 한다"며 "중국사를 중학교 필수과목으로 정하겠다"고 밝혔다. 취임하자마자 내각 16명 중 15명을 친중 인사로 채워 '중국 당국의 하수인'이라는 비난도 받았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람은 홍콩의 골 깊은 반중 정서와 중국 정부의 압력 사이에서 힘겨운 시간을 보낼 것"이라고 비판했다.
람은 중국으로 범 죄인 인도 허용을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이어진 지난 12일 TVB 인터뷰에서 "자식이 매번 요구하는 것을 들어주면 당장은 모자 관계가 좋을지 몰라도 자식이 장성하면 말리지 않았던 어머니를 원망하게 될 것"이라 했다. 홍콩 언론들은 "람이 100만 시위대를 떼쓰는 아이로 폄하했다"면서 "이것이 홍콩 행정수반이 가지고 있는 국민에 대한 인식"이라고 탄식했다.
조선일보 이벌찬 기자
06.14 홍콩 사상 최대 103만 시위, 시작은 20대의 치정살인 사건
홍콩에서 6월 9일부터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고 있는 이유는 홍콩 정부가 추진하는 ‘범죄인 인도 법안’의 입법회(의회) 심의에 반대하고 이를 저지하기 위해서다.
▲지난 6월 9일 범죄인 인도 법안을 거부하며 시작된 홍콩 시위는 멈출 줄 모르고 계속되고 있다. 12일 홍콩 거리에서 경찰이 최루탄을 발사하자 시민들과 취재진이 흩어지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그런데, 사실 이 엄청난 정치 사태의 발단은 20대 홍콩인이 대만에서 저지른 치정 살인 사건이었다. 홍콩 신문인 명보(明報), 동방일보(東方日報)가 운영하는 인터넷 신문인 동망(東網), 대만과 홍콩에서 발행하는 빈과일보(苹果日報), 대만의 중국시보(中國時報) 등의 보도를 종합해 사건을 정리한다.
대만서 임신한 여친 살해 하고 홍콩 도주
홍콩 법원, 절도·장물취득죄 징역 29개월
인도협약 없어도 중국 송환 가능 법안 추진
▲지난 6월 9일 범죄인 인도 법안을 거부하며 홍콩 거리를 가득 메운 시위대의 모습. 이들은 범죄인 인도협약을 맺지 않은 중국으로 범죄인을 보낼 수 있게 하는 이 법안이 홍콩 내 민주인사나 반중국인사를 탄압할 길을 열어줄 수 있다고 우려한다. [AP=연합뉴스]
사건은 지난해 2월 17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대만 타이베이(臺北)의 한 여관에서 홍콩인 찬퉁카이(陳同佳·20)가 함께 여행 중이던 여자친구 판샤오잉(潘曉穎·사망 당시 20세)을 치정문제로 살해했다. 그는 다음날 시신을 트렁크에 넣어 역 주변 공원의 풀밭에 유기한 뒤 홍콩으로 달아났다. 두 사람은 그해 2월 각각 다니던 대학을 자퇴한 뒤 2월 8일 대만으로 여행을 떠났으며 13일 사건이 발생한 호텔에 투숙했다.
▲지난 6월 9일 범죄인 인도 법안을 거부하며 시작된 홍콩 시위는 갈수록 확산하고 있다. 13일 홍콩 입법기관인 입법회 근처의 건물 벽에 시민들이 구호를 적은 포스트잇을 벽에 붙여 놓았다. '나는 홍콩을 사랑한다' '홍콩 힘내라' '홍콩인은 홍콩을 지킨다' 등의 구호가 보인다. [로이터=연합뉴스]
대만 경찰은 딸과 연락이 되지 않는다는 판샤오잉의 부친의 신고를 받고 수사에 들어가 CCTV를 통해 찬퉁카이를 범인으로 지목했다. 대만 당국의 연락을 받은 홍콩 당국은 3월 13일 그를 체포했다. 홍콩 경찰은 심문 끝에 그로부터 범행과 시신 유기 장소를 자백받았다. 대만 법의학자들은 판샤오잉이 임신 중이란 사실을 확인했다. 남은 것은 기소와 재판, 처벌뿐이었다. 하지만 사건 경위가 이렇게 명백하게 밝혀졌는데도 처벌은 절대 간단하지 않았다.
▲지난 6월 9일 범죄인 인도 법안을 거부하며 홍콩 거리에서 시위에 나선 시민들의 모습. 가운데 노란 우산은 2014년 홍콩 정부 수장인 행정장관의 직선을 요구하며 벌였던 학생 사위 당시 등장했던 것으로 지금은 홍콩 민주화의 상징이 되고 있다. [AP=연합뉴스]
우선 그를 범행 지역인 대만으로 송환할 수가 없었다. 당연히 대만 당국은 찬퉁카이의 신병을 인도받아 타이베이에서 살인죄로 기소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홍콩은 대만과 범죄인 인도 조약을 맺지 않고 있어 홍콩 당국은 그를 합법적으로 대만으로 보낼 수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를 홍콩에서 처벌할 수도 없었다. 홍콩 형법은 ‘장소적 적용 범위’ 조항에서 속지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홍콩 내에서 죄를 저지른 내국인과 외국인에게만 형법을 적용한다. 실행이나 결과 중 어느 하나라도 홍콩 영역 안에서 발생하면 형법을 적용할 수 있지만 판샤오잉 피살 사건은 여기에 해당하지 않는다. 홍콩 당국은 그를 살인범으로 처벌할 수도, 대만으로 보낼 수도 없었다.
▲지난 6월 9일 홍콩에서 경찰들이 범죄인 인도 법안을 거부하며 시위에 나선 홍콩 시민들을 진압하고 있다.. [AP=연합뉴스]
홍콩 당국이 궁여지책으로 그에게 적용할 수 있었던 혐의는 여자친구의 돈을 훔친 절도와 장물처리 혐의가 고작이었다. 수사 과정에서 찬퉁카이가 홍콩으로 도주한 뒤 판샤오잉의 현금카드로 돈을 인출해 사용한 것을 발견했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만 처벌할 수 있었다. 재판 막바지에 돈세탁방지법 위반 혐의를 적용했다. 재판 결과 지난 4월 29일 찬퉁카이에게 29개월의 징역형이 선고됐을 뿐이다. 그러자 홍콩과 대만 모두에서 ‘살인하고도 무죄인가’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홍콩 시위대가 12일 거리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대만 검찰은 2018년 12월 3일 찬퉁카이를 대상으로 최장 시효 37년 6개월짜리 지명수배령을 내렸다. 10년이고, 20년이고 그의 송환이 이뤄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신병을 인수하면 대만에서 재판해 단죄하겠다는 의지를 확실히 한 셈이다.
이에 따라 홍콩 당국은 범죄인 인도 조약을 체결하지 않은 국가나 지역에도 범죄인을 인도할 수 있도록 올해 3월 29일 ‘범죄인 인도 법안’을 마련하고 4월 3일 입법회 본회의에서 1차 심의를 했으며, 원래 6월 12일 2차 심의가 예정돼 있었다. 홍콩 정부 수반인 캐리람(林鄭月娥) 행정장관과 정부, 그리고 친중파 의원들은 ‘홍콩 사법체계의 허점을 방치해선 안 된다’는 명분을 앞세워 이 법안을 계속 밀어 붙여왔다.
이 법안은 공식명칭이 ‘2019년 도주범과 형사 사무 상호법률협조(수정) 조례초안(2019年逃犯及刑事事宜相互法律協助(修訂)條例草案)인데 줄여 부르는 말을 보면 홍콩인의 심리를 짐작할 수 있다. 공식적으론 줄여서 ’도범조례 수정초안(逃犯條例修訂草案)으로 불리지만 미디어와 일반인들은 보는 시각에 따라 도주범조례(逃犯條例), 인도조례(引渡條例), 중국송환조례(送中條例) 등으로 각각 달리 부른다.
▲지난 6월 9일 범죄인 인도 법안을 거부하며 홍콩 거리를 가득 메운 시위대를 경찰이 최루탄을 발사하며 해산시키려 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중국송환조례’라는 축약어는 홍콩인들이 이 법안으로 인한 민주인사들의 중국 송환과 처벌을 얼마나 두려워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실제로 홍콩의 민주파와 시민들은 이 법안에 필사적으로 반대해왔다. 중국 정부가 이 법을 악용해 홍콩에 거주하는 중국은 물론 홍콩의 반중국 인사나 인권운동가를 중국 본토로 잡아가면서 홍콩의 민주주의와 표현의 자유를 억압할 것으로 우려한다. 사형제도가 유지되고, 영장이나 법원 판결 없이도 사람을 잡아가서 구금하거나 가택 연금을 하는 중국을 믿을 수 없다는 ‘두려움’의 표현이기도 하다.
▲홍콩 입법기관인 입법회 바깥에서 비옷을 입은 학생들이 쓰레기를 치우고 있다. 홍콩 시위는 시민 정신을 보여주는 비폭력 시위로 진행 중이다. 시민들은 관공서와 거리를 보호하며 사위를 벌이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실제로 6월 9일 이 송환법안에 반대하는 홍콩 시위에선 주최 측 추산 103만 명, 경찰 추산 24만 명이 참가해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1997년 홍콩이 중국에 반환된 뒤 벌어진 시위로는 가장 크다. 홍콩의 역대 시위 중에는 1989년 천안문 사건 당시 150만 명이 벌였던 동조 시위 이후 최대 규모다.
홍콩 주민들의 이 법안에 대한 거부감이 얼마나 큰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 있다. 지난 6월 4일 홍콩에서 벌어졌던 6·4 천안문 민주 항쟁 30주년 추모 집회에 몰린 사람이 18만 명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나마 천안문 관련 집회 사상 최대 규모다. 이번 범죄인 인도 반대 시위에 그 5.7배가 모였으니 열기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13일 홍콩 거리에서 학생들이 시위 현장에 쌓인 쓰레기를 치우는 뒤로 홍콩 경찰 버스가 지나고 있다. 홍콩 주민들은 이번 시위를 계기로 민주주의와 인권을 앞세우는 홍콩인의 정체성을 더욱 강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로이터=연합뉴스]
중국 정부가 30년 전 베이징에서 벌어졌던 천안문 사태에 대한 추모 열기보다 당장 중국에 송환될 수도 있다는 공포, 홍콩의 민주주의와 인권이 침해받을 수 있다는 불안감, 중국의 압력에 홍콩이 휘둘릴 수 있다는 압박감이 홍콩 주민을 더욱 자극한 셈이다. 홍콩 주민들이 이번 사태를 얼마나 심각하게 여기고 중국을 얼마나 두려워하는 지를 이보다 더 잘 보여주는 수치는 없을 것이다. 2019 홍콩 시위 사태의 발단은 치정살인이었지만, 사태가 진행될수록 민주주의와 인권 수호 투쟁으로 확산하고 있다. 시위 사태가 조용히 끝날 것 같지 않을 것으로 관측되는 이유다.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주간조선 2562호 2019.06.17자
홍콩에 사는 누구라도 조마조마했을 순간이 결국 오고 말았다. 중국에 대한 반감을 숨겨온 사람들의 인내심은 끊어졌다. 절정은 2019년 6월 9일이었다. 1997년 홍콩이 중국에 반환된 뒤 최대 인원이 아스팔트 위를 가득 채웠는데 무려 103만명에 달했다. “철회! 철회! 철회!” 7명 중 1명꼴로 거리로 쏟아져나온 시위대는 ‘범죄인 인도 법안’ 반대 구호를 외치며 걸었다. 오후 3시 홍콩섬 빅토리아공원을 중심으로 모여든 인파는 코즈웨이베이 거리와 완차이를 지나 애드미럴티의 홍콩 정부청사와 의회로 향했다. 어린이부터 노인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마치 축제를 즐기듯 걸었는데, 마지막 행렬이 목적지에 도착하는 데 무려 7시간이 걸릴 정도였다.
그들을 거리로 불러낸 건 홍콩 입법회가 6월 12일 표결에 부치기로 한 ‘범죄인 인도 법안 개정안’이었다. 홍콩 정부는 올해 2월, 범죄 용의자의 신병 인도 절차를 간소화하고 현재 맺고 있는 20개국 이외의 다른 나라들로 범죄인 인도조약을 확대한다는 내용의 개정안 통과를 요구했다. 그동안 홍콩은 인도 협정을 맺은 곳들에서 요청할 경우만 용의자를 잡아 보냈는데, 이제는 그런 협정을 맺지 않은 나라들에서 요청이 들어와도 보내겠단 얘기다. 성사된다면 중국 본토로 송환하는 것도 가능해지는데 이게 홍콩인들을 자극했다. 중국이 반중 인사나 인권운동가 등을 본토로 송환하도록 악용할 수 있어서다.
개정안에는 우려할 점이 몇 가지 더 있다. 일단 인도 절차에서 의회에 해당하는 입법회의 감독 권한이 사라졌다. 지금은 반드시 입법회 심의를 거쳐야 해 의회 소수인 ‘민주파’ 등의 견제가 가능했지만 개정될 경우 그런 절차가 필요 없어진다. 홍콩 행정장관이 결정하고, 법원이 심리를 거친 뒤 ‘문제없다’고 판단하면 인도 여부를 승인할 수 있도록 했다. 대상도 광범위하다. 홍콩인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 외국인 거주자나 여행자, 심지어 홍콩 공항을 환승하는 사람도 포함된다. 홍콩 내에 있기만 하면 모두가 대상자다.
‘미래 세대를 위한’ 개정안 반대
개정안을 추진하는 홍콩 정부도 나름 이유를 갖고 있다. 개정안 추진 계기는 ‘찬퉁카이 사건’이다. 2018년 2월 홍콩인 젊은 여성이 대만에 여행을 갔다가 살해됐다. 용의자는 함께 여행을 간 남자친구 찬퉁카이(20)였다. 그는 여자친구를 살해하고 시신을 유기한 뒤 홍콩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찬퉁카이가 절도와 돈세탁방지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고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여자친구 살해를 자백했다. 하지만 홍콩은 속지주의를 적용하기 때문에 홍콩 밖에서 발생한 범죄에 대해서 처벌할 수 없다. 찬퉁카이는 결국 살인 사건에 대해서는 기소되지 않은 채 절도죄와 돈세탁방지죄 등을 적용받아 징역 29개월을 선고받았다. 당시 홍콩 정부는 “찬퉁카이를 대만으로 보내고 싶었지만 범죄인 인도 조약이 체결되지 않아 보낼 수 없게 됐다”며 “범죄인 인도 법안을 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 미래 세대를 위해서 홍콩이 범죄인의 도피처가 되는 허점을 막아야 한다”는 게 정부 측 주장이었다.
그런데 정부의 생각과 홍콩인의 생각은 간극이 넓다. 100만명의 시위대에서 볼 수 있듯 홍콩 정부의 주장을 반대하는 세력은 광범위하다. 일반 시민은 물론이고 교육계와 변호사, 종교계, 인권단체 등도 반대 일색이다. 이들은 중국 사법계를 믿을 수 없는 존재로 생각한다. 중국에서는 법원이 중국공산당의 지배 아래 있고, 형사 기소된 사람의 99% 이상이 유죄 판결을 받는다. 자의적이거나 애매한 혐의로 체포되거나 외부와 연락이 끊어진 채 구속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중국에서 그런 취급을 받는 건 중국 국민만이 아니다. 지난해 12월 캐나다인 마이클 코프릭과 마이클 스페이버가 스파이 혐의로 구속되기도 했다. 중국 당국이 금지한 책을 팔았다는 이유로 스웨덴 국적의 홍콩 출판업자 구이민하이가 중국 여행 중 사복경찰에게 끌려간 일도 있었다. 외국인도 예외란 없다.
다양한 문제에서 중국의 의향을 존중해온 홍콩 정부 역시 홍콩인들에게는 불신 대상이다. 지금의 홍콩 정부는 중국의 눈치를 살피며 홍콩의 자유를 제약하는 것에 주저가 없다고 홍콩인들은 생각한다. 흥미로운 대목은 평소 홍콩 정부나 중국 당국과 대립하는 것을 꺼리며 협력 관계를 유지하던 홍콩 경제계마저 이번 사안에 대해서는 반대를 표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금융업이 중심이 된 홍콩 경제계는 2014년 이른바 ‘우산혁명’ 때도 지지 성명 하나 내놓지 않은 채 관망했다. 그런데 이번은 좀 다르다. 자유롭고 공정한 사법이 위협을 받는다면 국제 비즈니스 거점으로서의 홍콩이 위태로워지기에 이번만은 반대하고 있다. 외국 기업의 경영자와 직원이 언제 중국 당국에 구속될지 알 수 없는 상황에 놓인다면? 홍콩이 선전(深圳)과 같은 중국 도시와 무엇이 다르냐는 게 이들의 생각이다. 그간 중국에서는 외국 기업 관계자가 입증되지 않은 혐의로 체포돼 비공개 법정에서 재판을 받는 사례가 끊이지 않았다.
단순히 중국 본토의 사법체제로 넘겨질 위협에 반대하기 위해서 100만명이 모였다는 건 쉽게 설명하기 힘들다. 여기에는 영국 일간지 가디언의 해석이 좀 더 적확하게 와닿는다. “홍콩은 권리와 자유의 도시인데 이런 정체성이 끊임없이 위협받게 되자 시위로 불만을 표현하고 있다”고 가디언은 봤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시위를 이끄는 주축은 ‘미래 세대’인 청년들이다. 홍콩 정부는 ‘미래 세대를 위해서~’라고 항변했지만 그런 홍콩 정부에 대항하는 주도 세력이 미래 세대라는 건 역설적이다.
나는 중국인이 아닌 홍콩인이다
홍콩의 젊은이들은 베이징에 대한 반발이 특히 강한 집단이다. 홍콩대가 지난 5월 실시한 설문조사가 이를 보여준다. 홍콩대는 1989년 천안문사건에 대한 중국 정부의 대처에 관해 조사했는데 “중국 정부의 대처가 틀렸다”고 답한 사람은 68%였다. 흥미로운 건 세대별 응답이다. 18~29세는 무려 83%가 중국 정부의 잘못을 지적했다. 30~49세가 73%, 50세 이상이 60%인 것과 비교하면 그들의 반중 감정은 거세다.
자연스레 젊은이들은 자신들을 중국인이 아닌 홍콩인으로 정의한다. 중국인이길 거부하고 그들과 구분 짓는다. 홍콩대 민의연구계획이 홍콩인들의 정체성에 관해 조사한 자료를 보면 2007년 자신을 중국인이라고 인식하는 홍콩인은 43.1%나 됐다. 홍콩인이라고 응답한 사람이 55.2%였으니 대등한 편이었다. 베이징올림픽을 앞두고 있어서 중국 귀속감이 그 어느 때보다 컸던 시기였다. 그런데 10년 뒤 2017년 조사에서는 정반대의 현상이 나타났다. 자신을 홍콩인이라고 답한 사람은 63.3%였던 반면, 중국인이라고 답한 사람은 34.9%였다. 1997년 홍콩이 중국에 반환될 때 38.7%가 중국인이라고 답했는데 더 낮은 결과가 나왔다. 특히 젊은층의 거부가 강했다. 2017년 조사에서는 18~29세 중 무려 93.7%가 자신을 중국인이 아닌 홍콩인이라고 답했다.
가장 강한 반중 감정을 가진 이들은 막상 ‘영국의 홍콩’을 겪어보지 못한 세대다. 영국 통치를 겪었던 윗세대와 달리 태어났을 때부터 그들에게 홍콩은 늘 중국이 지배하는 홍콩이었다. 이들은 어렸을 때부터 ‘중국의 일부’가 되는 교육을 받았다. 실제로 1997년 반환 때부터 홍콩에서는 국민 통합 작업이 진행됐다. 홍콩인들 사이에서 중국을 사랑하는 애국심이 자라나는 현상이야말로 중국 정부가 기대하는 상황의 전개였을 거다. 그런데 지금 청년들은 그 누구보다 중국에 반감이 강하고, 그 누구보다 홍콩의 지역주의와 자율을 강하게 외치고 있다. 통치만을 받아오던 홍콩인들의 정체성은 통치의 주체를 바라보는 시선과 맞물려 있기 마련이다. 브라이언 퐁 홍콩교육대 교수는 “홍콩인들 의 정체성은 결국 중국을 어떻게 인식하는지와 연관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젊은 세대가 지금 아스팔트에 서기까지는 그들 나름의 히스토리가 있다. 이번 시위는 홍콩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근본적 의문이 담겨 있다. 지금 20대를 맞은 홍콩 청년들은 이미 10대 때 베이징이 실시했던 국가 교육과정을 뒤엎었던 경험이 있었다. 2007년 홍콩 반환 10주년 기념식. 홍콩을 방문한 후진타오 당시 국가주석은 홍콩에 애국 교육의 강화를 요구했다. 베이징은 홍콩의 젊은이들에게 중국이 겪은 고난의 근현대사와 현재 중국이 처한 엄혹한 국제 환경을 이해시키고 싶었다. 구미 열강과 일본에 둘러싸인 중국의 현재를 제대로 알려 외세를 경계하고 중국공산당을 중심으로 단결하게끔 하는 게 베이징의 계획이었다.
중국화의 압박 겪은 세대
2012년 중국 정부는 베이징에 협력하는 홍콩 기득권층마저 반대하는 렁춘잉(梁振英·1954~)을 행정장관으로 임명했다. 강경파 렁 장관 임명은 홍콩의 자율성을 유지하기보다 통제하겠다는 신호로 봐야 했다. 그리고 나온 게 2012년 9월, 홍콩의 초·중·고에 ‘국민교육’이라는 교과목을 의무교육으로 도입한다는 계획이었다. ‘국민교육’은 홍콩에서 청소년들의 격렬한 저항을 받았다. 세뇌교육이 될 것이라는 우려가 급속히 퍼졌다. 학부모와 학생들은 반대 단체를 재빨리 결성했고 홍콩 정부청사 앞에서는 연일 수만 명 규모의 집회가 열렸다. 이들이 내세운 슬로건은 ‘반(反)세뇌’였고 이를 주도했던 곳은 고등학생들로 이뤄진 단체 ‘스콜라리즘’이었다. 결국 렁 장관은 “모든 학교는 자율적으로 교과목을 선택할 수 있으며 자신의 임기 동안 국민교육을 강제로 시행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라고 밝히며 물러서야 했다.
홍콩의 중국화 도전을 막아낸 학생들은 2년 뒤 또다시 10만여명이 아스팔트 위로 몰려나왔다. 세계가 주목한 ‘우산혁명’ 때였다. 간선제로 뽑는 홍콩 정부의 수장직인 행정장관을 직선제로 뽑게 해달라는 정치적 운동이 도화선이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단순히 직선제를 얻기 위한 정치적 목적만으로 이뤄진 시위는 아니었다. 중국에 반환된 뒤 우울해진 홍콩의 모든 문제가 터졌기 때문이다. 정치적 불만에 더해 사회·경제적 불만이 한꺼번에 폭발했다. 미국에서 벌어진 ‘월가를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가 홍콩으로 건너가 ‘아큐파이 센트럴(Occupy Central)’로 변신해 시위 명칭으로 자리 잡았다. 당시 홍콩 현지의 반응을 취재하다 접촉했던 홍콩 시민 러우롱씨는 “중국 본토의 경제는 매우 좋지만 지금 홍콩은 정반대다. 본토인들이 홍콩에 몰려와 부동산에 마구잡이로 투자하면서 원주민들이 피해를 받고 있다”고 말했다.
본토의 홍콩 부동산 투자로 가장 큰 타격을 입은 계층은 청년들이었다. 홍콩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젊었을 때 소형 아파트를 구입해 점점 큰 집으로 넓혀가며 자산을 형성하는 게 전통적 방식이다. 하지만 이제는 시작부터 청년들이 손을 내밀 수 없는 가격에 도달한 지 오래다. 2002년엔 홍콩 구룡의 40㎡ 미만 아파트를 구입하는 데 평균연봉의 4년치가 들었지만 이제는 20년치를 모아도 살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시대가 됐다. 인생 설계를 하기 어려울 지경이다.
2014년의 우산혁명은 세계의 찬사를 받았지만 홍콩인들에게는 실패로 끝난 저항이었다.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는 패배감에 젖었고 그새 중국화 공세는 홍콩 전역에서 강하게 진행됐다. 2017년 홍콩 문제를 맡았던 중국공산당 서열 3위 장더장 당시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은 “홍콩의 젊은이들에게 국가와 법률 교육을 강화하고 젊을 때부터 국가에 대해 올바른 생각을 기르게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여기에 화답하듯 2017년 새로 홍콩 행정장관이 된 캐리 람은 “중국인이라는 의식을 기르기 위한 교육을 유치원 수준에서 진행하겠다”고 밝혔다.
사상의 교환이 이뤄져야 할 대학도 예외는 없었다. 대학은 정치적 교화의 장으로 변질돼갔고 학생들은 점점 엄격한 분위기를 요구받았다. 예를 들어 홍콩대 학생들 중 일부는 민주화를 넘어 자결권이나 독립까지 요구한다. 중국에서 분리하는 게 유일한 방법이라는 건데 이런 이상적인 주장을 펼치는 것조차 언젠가부터 대학 내에서 설 자리를 잃고 있다. 피터 매디슨 홍콩대 전 부총장은 “예를 들어 홍콩의 독립 주장은 비현실적이지만 대학 캠퍼스는 이런 생각하기 어려운 주장을 생각하는 것이 허용되는 장소여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는 점을 그는 우려했다. “홍콩대 학생이 독립을 믿는 건 실수라고 무시할 수 있지만 지금은 그들의 미래에 대해 걱정하게 된다.”
그러는 사이 홍콩인들에게 홍콩은 점점 지는 별이 돼갔다. 과학기술업이 밀집한 중국 선전시의 총생산은 2018년 처음으로 홍콩을 능가했다. 경제가 자랑인 홍콩이 밀려나며 느끼는 박탈감은 매우 컸다. 과거 중국 본토인들은 홍콩인을 “잘난 척한다”며 싫어했지만 이미 옛말이다. 게다가 젊은이의 빈곤화는 세계 공통의 문제지만 홍콩의 경우는 ‘중국’이라는 불만의 원인이 명확하게 존재했다.
해외 이민 고민하는 젊은층 증가
홍콩의 미래를 불안해하는 증거 하나. 최근 홍콩에서 해외 이민을 원하는 청년들이 눈에 띄게 늘어나는 것도 이런 흐름과 맞닿아 있다. 2018년 홍콩 중문대학이 실시한 조사를 보면 18~29세 청년 중 51%가 “해외 이민을 고려하고 있다”고 답했다. 2017년보다 5.5%포인트가 상승했다. 1980년대 홍콩 반환 협상이 시작됐을 때도 홍콩의 미래를 걱정한 사람들의 이민이 잇따랐다. 다만 그때는 재산을 가진 중장년층이 탈(脫)홍콩을 고민했지만 지금은 가진 것 없는 20대가 탈홍콩을 꿈꾼다는 게 다르다.
AP통신은 “홍콩의 청년들은 시진핑 주석이 홍콩을 베이징 같은 도시처럼 만들려는 시도를 포기할 때까지 시위를 계속할 것이다”라고 전했다. 시위대의 저항에 6월 12일 예정됐던 법안 심사가 연기되면서 일단은 홍콩 정부가 한발 물러섰다. 하지만 여전히 통과시키겠다는 게 베이징의 의지다. 시위에 참가 중인 홍콩의 르포작가 제이슨 잉은 “홍콩 젊은이들에게 중국을 자신의 일부라고 인식시키고 싶은 건 중국 정부의 바람일 뿐이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강제로 정할 수는 없다. 강요할수록 우리는 저항한다”고 말했다. 베이징의 의지도 강하지만 홍콩 거리의 의지도 5년 전보다 강해졌다.
김회권 객원기자 judge003@gmail.com
06.17 '200만 피플 파워' 中 굴복시킨 홍콩
[홍콩 피플 파워] 범죄인 중국 송환법 무기 연기… 람 행정장관, 어젯밤 사과 성명
캐리 람 "실망시킨 점 사과"… 시민들 "사퇴하라"
중국으로 범죄인 인도를 허용하는 법 개정에 반대하는 시위대를 '폭도'로 몰며 버티던 홍콩 정부가 거리로 몰려나온 100만명 이상의 피플 파워에 굴복했다. 홍콩 행정수반인 캐리 람 행정장관은 지난 15일(이하 현지 시각) "범죄인 인도법 개정을 잠정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번 사태에 대한 사과 한마디 없이, '완전 철회는 아니다'라고 한 그의 발표에 분노한 홍콩 시민들은 16일 검은 옷 차림으로 다시 거리로 나섰다. 이날 시위에는 홍콩 반환 이후 최대였던 지난 9일의 103만명을 웃돈 200만명이 참가했다고 주최 측이 밝혔다. 캐리 람 행정장관은 결국 이날 오후 8시 30분 "정부 업무에 부족함이 있었음을 인정한다"며 "많은 시민을 실망시키고 가슴 아프게 한 점을 사과한다"는 성명을 냈다.
그는 전날 오후 3시 긴급 기자회견에서 "개정안 심의는 보류될 것이며 대중의 의견을 듣는 데 있어 시간표를 제시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사실상 무기한 연기 입장을 밝힌 것이다.
홍콩 정부는 홍콩과 범죄인 인도 협약이 없는 중국, 대만, 마카오 등에 범죄인을 넘길 수 있도록 법 개정을 추진해왔다. 시민들은 "법 개정이 이뤄지면 중국에 비판적인 인사들이 공산당이 좌우하는 중국의 법정에 합법적으로 넘겨지게 돼 홍콩의 정치·언론 자유가 무너질 것"이라고 반발해왔다.
홍콩 언론들은 캐리 람〈사진〉 장관이 기자회견을 하기 전 선전에 내려온 한정 중국 정치국 상무위원을 만났다고 보도했다. 중국 지도부는 홍콩 사태가 자칫 유혈 사태로 번질 것을 우려했으며, 특히 이달 말 일본 오사카 주요 20국(G20) 정상회의 때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과 무역 전쟁 타결을 위한 협상에 집중해야 하는 상황에서 사태 수습 쪽으로 선회한 것이라고 홍콩 언론들은 분석했다.
▲홍콩 시민들이 16일 저녁 ‘범죄인 인도 법안’의 철회를 요구하며 행진하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그러나 홍콩 시민들은 16일에도 '항의'를 상징하는 검은 옷을 입고 오후 3시부터 홍콩섬 빅토리아 공원에서 입법회까지 '검은 대행진'을 벌였다. 주요 간선도로는 검은 강으로 변한 듯했고, 시민들이 외치는 '반송중(反送中·범죄인 중국 인도 반대)' '악법 철회(撤回)' 구호가 빌딩 숲 사이에서 메아리쳤다. 시민들은 람 장관의 사퇴도 요구했다.
한편 15일 밤에는 범죄인 인도법 개정에 반대해 도심 빌딩에서 농성을 하던 30대 남성 량( 梁)모씨가 떨어져 숨지는 일이 발생했다. 이번 시위 사태 이후 첫 사망자였다. 사고 현장에는 많은 홍콩 시민이 찾아와 꽃과 촛불을 놓고 고인을 추모했다. 시민들의 분노가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자 캐리 람 장관은 사과 성명을 냈다. 하지만 그는 "가장 겸허한 태도로 비판을 수용하면서 (오류를) 고쳐 나가 더욱 많은 시민을 위해 일하겠다"며 사퇴를 거부했다
조선일보 홍콩=이길성 특파원
06-26 홍콩 역풍 맞은 시진핑 리더십… 덩샤오핑 같은 지혜 아쉽다
홍콩 ‘송환법 반대시위’의 함의
일국양제 침해 우려가 부른 시위, 그 이면엔 덩샤오핑이 우려했던
英이 홍콩에 남긴 ‘독약’ 있어… ‘민주개혁’으로 발현된 피플파워
송환법이 뇌관되어 약발 발휘… 시진핑의 조급한 리더십에 경종
▲홍콩 반환 이후 최대 규모인 200여만 명의 시민이 쏟아져나와 시위를 벌인 16일 시민들이 거리와 육교를 가득 메우고 있다. 시위대가 ‘악법 철회’와 ‘극도로 애통하다’는 문구가 쓰인 대형 배너를 들고 행진을 하고 있다(1). 시위대가 ‘공산당에 추파를 던지느라 홍콩에 해를 입히고 있는 캐리 람 장관 사퇴하라’(2) ‘우리를 죽이지 말라’(3)고 쓰인 피켓이나 문구를 들고 있다. 홍콩=AP 뉴시스
▲구자룡 논설위원
최근 홍콩 시위에는 홍콩 전체 인구의 4분의 1 이상이 참가했다. 민주주의가 행해지는 특정 국가와 지역의 인구 기준으로 시위 참가자 비율로만 보면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16일 벌어진 ‘범죄인 인도 법안’(송환법)에 반대하는 시위에는 200만 명 이상이 참가했는데 이는 전체 인구(745만 명·2018년)의 26.8%에 이른다. 반환 22주년을 맞는 7월 1일에는 300만 명이 쏟아져 나올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송환법에 대한 강한 저항은 반체제 인사나 민주활동가뿐 아니라 중국의 눈에 벗어나는 누구라도 정당한 인권을 보장받지 못하는 중국으로 보내져 조사받거나 재판받을 수도 있다는 불안이 가장 크다. 하지만 거대한 역사의 물줄기가 노도(怒濤)처럼 분출되는 이 광경을 이런 이유만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송환법 파동은 무엇보다 법안이 가진 ‘일국양제(一國兩制·1국가 2체제)’ 침해 가능성이 가장 큰 요인이다. 홍콩에 일국양제를 구상한 것은 덩샤오핑으로 알려졌지만 그 전에 저우언라이의 ‘홍콩 보석론’도 있다. 국민당의 장제스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하면 홍콩을 무력으로라도 되찾겠다고 했지만 공산당의 저우언라이는 ‘보석은 그대로 두는 것이 낫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덩샤오핑은 영국이 홍콩을 돌려주기 전에 홍콩에 몇 가지 ‘독약’을 남겨둘 수 있다고 우려했다. 영국인들이 이권을 차지하는 대규모 사업을 벌여 반환 후 홍콩 정부의 재정을 거덜 내는 것도 한 종류로 봤다. 이와 관련해 미국 하버드대 에즈라 보걸 명예교수는 덩샤오핑도 전혀 예견하지 못한 것이 있는데 바로 ‘민주개혁’으로 반환 후 중국 정부의 홍콩에 대한 장악력을 약화시킬 것이라고 분석했다.(‘덩샤오핑 평전’)
홍콩에서 민의 대변 기관인 입법국(반환 후 입법회) 의원 중 일부가 시민에 의해 처음 선출된 것은 반환 6년 전인 1991년이었다. 마지막 총독 크리스 패튼(1992년 4월∼1997년 6월 재임)은 투표권 및 민선 의원 확대 등 정치개혁을 추진했다. 보걸 교수의 분석대로라면 이번 홍콩 피플파워는 영국이 남긴 ‘독약’이 시진핑 주석의 강권과 만나면서 제대로 약발을 발휘하고 있는 형국이다.
○ ‘홍콩인에 의한 홍콩통치’ 무력화 가능성 제기
홍콩 당국은 미국 영국 등 20여 개 국가와 범죄인 인도 조약을 맺고 있다. 인도 대상은 국제적으로 공인된 37건의 심각한 형사범죄 용의자다. 하지만 송환 대상 국가에 중국이 포함되고 입법원의 동의 없이 줄곧 친중파인 행정장관의 결정만으로 범죄인 인도가 가능하게 되면 홍콩 사법 체제의 독립성은 무너질 수 있다는 게 시민들의 우려다.
1997년 홍콩이 반환된 뒤 헌법 격인 ‘홍콩 기본법’은 반환 후 50년 동안 국방과 외교 외에는 ‘고도의 자치’, 즉 항인항치(港人港治·홍콩인에 의한 홍콩 통치)를 보장하고 있다. 그런데도 2015년 중국 지도부에 비판적인 책을 팔아온 홍콩섬의 ‘퉁뤄완(銅(나,라)灣)’ 서점 관계자 5명이 선전과 태국 파타야 등에서 중국으로 납치 및 연행됐다. 이들은 소식도 끊긴 채 최소 6개월 이상 조사를 받았고 한 명은 아직도 행방이 알려지지 않았다.
홍콩 정부가 송환법을 추진한 경위에 대한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지난해 2월 대만에서 20세 홍콩 남성이 밸런타인데이 여행을 함께 떠났던 동갑 여성을 살해하고 홍콩으로 도피하자 이 남성을 대만으로 보내 처벌하자는 것이 송환법을 만드는 계기가 됐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실제론 중국이 오래전부터 홍콩에서 중국에 비판적인 활동을 하거나 대륙에서 범죄를 저지르고 도피한 인물을 합법적으로 연행해 조사하기 위해 기회를 노리다 대만 살해 사건을 좋은 명분으로 삼았다고 보는 시각이 많다.
○ “홍콩 독립” 등 레드라인 넘는 구호 등장
송환법이 뇌관이 되어 폭발한 홍콩 시민들의 불만은 시진핑 정부 들어 통제가 강화되고, 홍콩 정부도 민심에 귀를 닫는 일이 잦아진 결과물이다.
후진타오 주석 시절인 2003년과 2012년 국가안전법과 중국 본토식 국민교육 과목 도입 추진에 대한 반대 시위가 일어나자 모두 유보 혹은 보류됐지만 시 주석 집권 이후는 달랐다. 2014년 홍콩 행정수반 완전직선제를 요구한 ‘우산혁명’ 시위는 79일 만에 강경 진압됐다. 이어 반체제 서점 관계자 납치 연행 사건, 중국 국가 모욕에 대한 처벌을 규정한 국가법(國歌法) 시행, 독립 성향 야당 후보의 입법원 피선거권 박탈 등도 이뤄졌다.
2016년 2월 중화권 최대 명절인 춘제(설날)에 경찰이 어묵 등을 파는 전통 노점상을 단속하면서 촉발된 시위에서는 ‘홍콩의 독립’ ‘반공(反共)’ 같은 ‘레드라인(허용 한계)’을 넘는 구호까지 등장했고 시위도 과격해졌다.
홍콩의 미래가 흐려질 경우 등장하는 화두가 ‘홍콩 엑소더스’다.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에 따르면 지난해 이민을 떠난 홍콩인은 2만4300명으로 2012년 이후 가장 많았으며 2016년 6100명에 비해 4배나 늘었다고 보도했다. ‘홍콩 엑소더스’는 반환 전 이미 두 차례 나타났다. 중국과 영국의 반환 협상이 난항을 겪던 1983년과 1989년 6·4톈안먼 사태 직후였다. 이어 반환 직후 캐나다 밴쿠버로의 이주 등 ‘미니 엑소더스’가 나타난 데 이어 송환법 파동으로 다시 한 번 엑소더스 우려를 던지고 있다.
홍콩 시민이 차라리 홍콩을 떠나자고 하는 데는 반환 이후 가속화하는 중국화에 대한 거부감도 작용하고 있다. 이미 홍콩에는 반환 이후 본토에서 넘어온 주민이 100만 명이 넘어 비중이 13%를 웃돈다. 과거에는 저임금 근로자들이 목숨을 걸고 일자리를 찾아왔지만 반환 후 건너온 대륙 사람들은 보다 나은 교육 의료 등을 찾아온 부유층으로 집값을 앙등시키고 상대적 박탈감까지 느끼게 한다.
○ 시진핑, G20회의서 궁지에 몰릴지 관심
시 주석은 집권 2기를 맞아 국가주석 연임 제한을 폐지하는 헌법 개정을 단행하는 등 국내적으로는 ‘시황제’ 권력을 휘두르고 있지만 홍콩이라는 큰 돌부리를 만났다. 한 전문가는 “시위 파고가 높아져 시 주석의 지도력이 크게 손상을 입었지만 6·4톈안먼 사태 같은 유혈 진압은 생각할 수도 없다는 것이 딜레마”라고 말했다. 당장 일본 오사카에서 28, 29일 열리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서 홍콩 시위로 어떤 견제구를 당할지 관심이다.
홍콩 송환법 시위가 반환 이후 최대 규모로 커진 데는 미중이 패권 전쟁기에 들어가고 있다는 시대적 상황을 떼어 놓고 생각하기 힘들다. 입법회에서 송환법 제정을 논의하기 시작한 것은 2월부터다. 그런데 6월 들어 시위가 본격화한 것은 미중 갈등이 무역, 기술, 남중국해 등 전방위로 확대되고 있는 기류를 타고 있다. 미국은 중국과의 패권 경쟁에서 대만과 함께 시위 지지 등을 명분으로 홍콩 카드도 사용할 의도를 내비치고 있다.
홍콩 시위는 단일 지도부가 있어 의도적으로 시위를 주도하고 방향을 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중국화가 가속화하는 홍콩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미중 패권 전쟁 시기를 타 중국에 대한 저항을 시작했다. 그런 점에서 섣부르게 송환법을 통해 홍콩을 장악하려 한 시진핑의 선택은 홍콩 시민의 저항이 미중 갈등 구도 속으로 들어가게 함으로써 더욱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상황에 빠져들고 있다.
‘반환 후 일국양제하 50년 고도의 자치’를 보장한 홍콩기본법에도 불구하고 서둘러 홍색으로 물들이려는 것에 대한 홍콩인들의 저항이 송환법 반대로 표출됐다. 시 주석이 대륙에서 권력을 강화한 자신감으로 홍콩을 제압하려다 ‘악수(惡手)’를 두었으며 그 역풍을 세게 맞을 것으로 보인다. 중국이라는 거대한 나라를 이끌 지도자답지 못한 조급함은 시 주석의 리더십이 저우언라이와 덩샤오핑의 지혜에 미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구자룡 논설위원 bonhong@donga.com
주간조선 2564호 2019.07.01자
21세기 홍콩발 역도미노게임
도미노게임은 벽돌 모양의 작은 블록(패)을 촘촘히 세워놓고 맨 앞에 있는 첫 번째 블록을 쓰러뜨리면 그 뒤의 블록들이 연이어 쓰러지도록 만드는 놀이를 말한다. 이 게임에서 파생된 국제정치학 용어가 ‘도미노이론(Domino Theory)’이다. 존 포스터 덜레스 전 미국 국무장관은 1953년 동남아에서 한 국가가 공산화하면 도미노 패가 연달아 넘어지듯 차례차례 주변국들이 공산화한다는 도미노이론을 처음 제시했다. 덜레스 전 장관은 동북아에서 공산주의 세력의 팽창은 미국의 6·25전쟁 개입으로 한반도 허리에서 저지됐지만 서방의 전략적 입지가 약한 동남아 지역에서는 상황이 다르다고 지적했다.
인도차이나의 공산화 도미노
이런 경고는 베트남에서 실제 상황이 됐다. 프랑스는 1954년 국제사회의 중재로 제네바협정에 따라 북위 17도를 경계로 베트남을 남북으로 나누는 분할안에 합의하고 식민 지배를 포기했다. 이에 따라 북위 17도 위쪽 지역엔 호찌민의 베트남 공산당이 주축이 된 베트남민주공화국(북베트남·월맹)이, 아래쪽엔 응우옌 왕조의 마지막 제13대 황제인 바오 다이를 총리로 하는 베트남공화국(남베트남·월남)이 각각 세워졌다. 월맹이 첫 번째 도미노 패가 된 것이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전 대통령은 덜레스의 조언에 따라 도미노의 다음 패인 월남의 공산화를 막기 위해 월남에 상당한 지원을 해주었다. 아이젠하워 전 대통령은 “인도차이나는 도미노의 첫 줄”이라며 “인도차이나가 무너지면 버마(미얀마), 태국, 인도네시아가 다음이며 이후 일본, 대만, 필리핀은 물론 호주와 뉴질랜드까지 위험하다”고 지적했다. 아이젠하워 전 대통령의 전략을 존중했던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도 월남에 군사 지원까지 해주었고, 후임인 린든 B. 존슨 전 대통령은 베트남전에 대규모 병력까지 투입했다. 하지만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은 1973년 1월 월맹과 파리평화협정을 체결하고 미군을 철수시켰다. 이에 따라 월맹은 1975년 4월 월남을 무력으로 통일시키고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베트남)을 세웠다. 이후 캄보디아와 라오스가 차례로 공산화됐다.
20세기 인도차이나반도에서 도미노이론이 실현됐듯이, 21세기에도 도미노이론이 적용될 수 있는 지역들이 있을까. 만약 도미노이론이 적용된다면 첫 도미노 패는 어디가 될 것인가. 아이러니하게도 중국이 1997년 영국으로부터 주권을 넘겨받은 홍콩이 될 가능성이 높다. 중국은 청나라가 서구 열강과의 제1차 아편전쟁(1840~1842)에서 패배해 난징조약을 맺고 홍콩을 영국에 할양한 것을 치욕의 역사라고 생각해왔다. 이 때문에 중국의 최고지도자였던 덩샤오핑은 홍콩을 되찾기 위해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와 끈질기게 협상을 벌였다.
하지만 대처 총리는 홍콩에 구축해놓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체제가 붕괴될 것을 우려해 홍콩의 주권을 중국에 반환하기를 꺼렸다. 이를 간파한 덩은 홍콩에 이른바 ‘일국양제(一國兩制)’라는 세계 역사상 초유의 제도를 50년간 보장한다고 밝혔다. 일국양제는 하나의 국가에 2개 체제, 다시 말해 국가는 사회주의 체제의 중국이지만 홍콩의 자본주의 경제 체제와 민주주의 정치 체제에 따른 각종 제도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을 말한다
홍콩의 중국화 밀어붙인 시진핑
하지만 시진핑 국가주석은 홍콩을 중국으로 완전히 귀속시키기 위해 2014년 6월 10일 ‘홍콩특별행정구의 일국양제 실천’이란 제목의 백서를 발표하면서 덩의 약속을 깨고 새로운 일국양제 원칙을 제시했다. 이 백서에는 “홍콩의 관할권은 중앙정부가 전면적으로 보유한다. 일국양제의 ‘양제’와 ‘일국’을 동등한 가치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양제’는 ‘일국’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내용이 들어갔다. 특히 시 주석은 “양제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를 병행할 수 있다는 경제 체제의 원칙을 가리킨 것일 뿐, 정치 체제는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체제를 기본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시 주석의 의도는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체제를 홍콩에 도입해 ‘홍콩의 중국화’에 박차를 가하겠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홍콩의 민주주의 체제를 2047년까지 그대로 유지시킬 경우 대만과의 통일을 어렵게 할 뿐만 아니라 티베트와 위구르 등 소수민족들의 독립과 자치권 요구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티베트의 정신적인 지도자 달라이 라마 14세는 그동안 홍콩처럼 티베트에 고도의 자치권을 부여해줄 것을 촉구해왔다. 또 신장위구르 지역에선 동투르크이슬람운동(ETIM) 등 과격세력들이 무장투쟁을 통해 분리독립운동을 벌여왔다. 게다가 시 주석은 홍콩의 민주주의 체제에 영향을 받은 중국의 민주화 세력이 서구식 민주주의 개혁을 요구할 경우 자칫하면 공산당의 일당독재 체제가 흔들릴 수도 있다는 점을 우려해왔다.
중국 정부가 2014년 9월 ‘우산혁명’이라고 불린 홍콩 대학생과 시민들의 행정장관 직선제 등을 요구하는 대규모 민주화 시위를 홍콩 경찰을 동원해 철저하게 저지하도록 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중국은 영국과의 주권반환 협정에서 2017년 홍콩 시민들의 직접선거로 행정장관을 선출하기로 합의한 바 있었다. 결국 홍콩 대학생과 시민들이 행정장관 직선제 약속을 지키라며 벌였던 민주화 시위는 실패했다. 이후 중국 정부는 각종 정치 문제에 개입하고 입법부와 사법부, 언론에 대한 통제를 대폭 강화하는 등 ‘홍콩의 중국화’ 정책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우산혁명’을 이끌었던 지도부는 징역형이 선고됐고, 독립을 주장했던 홍콩민족당은 강제로 해산됐다. 독립 성향을 가진 야당 후보들은 피선거권을 박탈당했다. 중국 정부는 2015년 반중 서적 출판업자들을 홍콩에서 중국으로 강제연행하기도 했다.
홍콩의 민주화, 대만 차이 총통을 살리다
이처럼 중국 정부의 지나친 중국화 정책에 대해 불만과 반감을 느껴왔던 홍콩 시민들은 홍콩 정부 수장인 캐리 람 행정장관이 ‘범죄인 인도법’ 개정을 추진하자 지난 6월 9일과 16일 두 차례에 걸쳐 각각 100만여명과 200만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대규모 시위를 벌이는 등 강력하게 반발했다. 홍콩법은 영국법의 속지주의를 따르고 있어 타국에서 발생한 범죄를 처벌할 수 없으며, 범죄인 인도 조약을 체결하지 않은 국가나 지역에 범죄자를 인도할 수 없도록 하고 있다. 개정안은 중국, 대만, 마카오 등 범죄인 인도 조약을 체결하지 않은 국가나 지역에도 사안별로 범죄인들을 인도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홍콩 시민들은 중국 정부가 반체제 인사나 인권운동가를 중국 본토로 송환하는 데 이 법을 악용할 수 있다면서 개정에 반대했다. 다시 말해 홍콩의 민주주의와 법치를 침해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중국 정부는 홍콩을 자국의 통제에 두려다 오히려 홍콩 시민들의 반감에 불을 붙인 셈이 됐다.
홍콩 시위 사태는 동북아 지역에 도미노이론이 적용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대만에서 중국이 그동안 주장해온 일국양제 통일론에 대한 거부감이 증폭되고 있다. 특히 중국 정부가 눈엣가시로 여겨온 차이잉원 대만 총통이 내년 1월 실시될 총통 선거에서 재선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차이 총통과 집권 여당인 민진당은 지난해 11월 실시된 지방선거에서 중국의 강력한 제재 조치에 따른 경제난으로 제1야당인 국민당에 참패했다. 이 때문에 차이 총통은 민진당 주석(대표)직에서 사임했고 차기 총통 선거에 도전하지도 못할 것이란 말까지 나왔었다. 중국 정부는 ‘하나의 중국’ 원칙과 일국양제를 거부해온 차이 총통과 대만 정부를 전방위적으로 압박해왔다. 하지만 차이 총통은 지난 6월 12일 민진당 총통 후보 경선에서 도전자인 라이칭더 전 행정원장을 제치고 후보로 선출됐다. 대만 언론들은 차이 총통이 중국 정부의 일국양제 통일론 압박에 단호하게 대응한 덕분에 지지율 반등에 성공했다고 분석했다. 특히 차이 총통은 각종 여론조사에서 국민당 후보들에게 크게 밀렸지만 홍콩 시위 사태 이후 지지율이 뚜렷이 반등하고 있다. 차이 총통은 “홍콩 시민들의 민주, 자유, 인권을 수호하려는 시위를 볼 때 일국양제는 절대로 수용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친중 성향인 국민당의 유력한 총통 후보인 한궈위 가오슝시 시장은 “홍콩 시위를 잘 모른다”고 말했다가 여론의 질타를 받자 “내 주검을 밟고 넘어가지 않는 한 대만에서 일국양제는 없을 것”이라고 입장을 바꿨다. 국민당 후보 경선에 나선 대만 최고 부자인 궈타이밍 훙하이 정밀공업 회장도 “홍콩의 일국양제는 실패했다”고 밝혔다. 중국 정부는 국민당 후보가 차기 대만 총통에서 승리하기를 바라면서 물밑에서 눈에 보이지 않게 지원해왔다. 하지만 홍콩 시위 사태를 계기로 대만에서 중국에 대한 거부감이 높아지고 있어 대만 총통 선거에 대한 중국 정부의 시나리오에 차질이 빚어질 수 있다.
홍콩 일국양제 성공 여부는 대만 통일과도 직결
일국양제의 성패는 시 주석의 중국몽(中國夢) 실현 여부를 가늠할 중요한 요소다. 홍콩에서 일국양제가 실패하면 대만과의 통일도 자칫하면 물 건너갈 수 있다. 시 주석은 올 초 ‘대만 동포들에 전하는 연설’에서 “체제의 차이는 통일의 장애물이 아니며, 분열의 핑계는 더더욱 아니다”라면서 “일국양제는 대만의 현실적 상황을 고려한 통일 방식”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시 주석은 홍콩의 일국양제를 성공 사례로 들었다. 하지만 차이 총통이 연임에 성공할 경우 양안의 갈등은 더욱 증폭되고 중국의 대만과의 통일은 요원해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홍콩 시민들이 궁극적으로 중국으로부터 독립을 추구할 경우 중국 정부에 엄청난 부담이 될 것이 분명하다. 베트남의 공산화가 도미노이론에 따라 인도차이나반도의 캄보디아와 라오스에 영향을 미쳤듯이, 홍콩의 독립 추구가 대만은 물론 중국 본토의 티베트와 신장위구르까지 확산될 수 있다. 다시 말해 ‘공산화’ 도미노가 아니라 ‘독립과 민주주의’라는 역(逆)도미노 상황이 나타날 수 있다.
이런 사태가 우려되자 시 주석은 지난 6월 20일과 21일 평양을 1박2일간 방문하면서 ‘북한 카드’를 전격 꺼내들었다. 무역전쟁을 벌이고 있는 미국을 자극할 수 있는 평양 방문을 주저해왔던 시 주석으로선 미국이 홍콩과 대만 문제 등 가장 아픈 지점을 건드리기 시작하자 ‘북한 카드’로 견제구를 던질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시 주석의 방북은 홍콩에 몰렸던 국제사회의 관심을 분산시키고 북한 핵 문제에 최소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미국에 보내려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특히 시 주석은 미국의 홍콩과 대만 개입을 막기 위해 김정은 정권의 ‘뒷배’가 되겠다는 약속까지 했다. 시 주석은 김정은에게 “중국은 조선반도 문제의 정치적 해결을 지지한다”면서 “중국은 조선이 합리적 안보·발전 관련 관심사를 해결할 수 있도록 힘이 닿는 한 도움을 주겠다”고 밝혔다. 이런 발언은 북한에 체제 안전 보장과 경제 지원을 해주겠다는 뜻이라고 분석할 수 있다. 시 주석은 6월 21일 김정은과 함께 중·조 우의탑을 찾아 6·25전쟁에 참전한 중국 인민지원군 전사자들을 추모하며 ‘혈맹’임을 과시했다.
홍콩 시위 사태라는 도미노 패가 대만과 티베트, 신장위구르 등으로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한 시 주석의 ‘북한 카드’가 효과를 볼 수 있을까. 중국 정부가 홍콩 시위 사태를 언급하면서 가장 강력하게 경계한 것이 ‘외세의 개입’이다. 겅솽 외교부 대변인은 “홍콩은 중국의 특별행정구역이고, 홍콩의 사안은 중국의 내정”이라면서 “홍콩 내정에 대한 외세 간섭은 반드시 실패할 것”이라는 성명을 여러 차례 내놓았다. 외세는 미국을 겨냥한 것이다. 중국의 입장에서 볼 때 홍콩의 가치는 북한에 비해 엄청나다. 홍콩의 지난해 국내총생산(GDP)은 3630억달러로 싱가포르(3611억달러), 말레이시아(3543억달러), 필리핀(3308억달러)보다 많다. 세계적인 글로벌 금융도시인 홍콩은 중국 경제에 자금을 공급하는 루트다. 홍콩은 광저우, 선전을 연결하는 주장삼각주의 중심 지역이다. 주장삼각주는 중국에서 제조업의 심장이다. 이 때문에 홍콩의 경제적 중요성은 북한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또 홍콩의 정치·안보 및 지정학적 가치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트럼프 대통령이 홍콩 시위 사태에 개입한다면 중국 정부와 시 주석은 상당한 타격을 입을 것이 분명하다.
홍콩 사태로 위기 느낀 시진핑 북한 카드 꺼내
대만은 경제는 물론이고 정치·안보 및 지정학적 가치 면에서 홍콩보다 더욱 중요하다. 특히 대만은 ‘하나의 중국’이라는 중국 정부와 공산당의 정체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금까지 대만 카드를 만지작거리면서 시 주석을 자극해왔다. 심지어 미국 국방부는 지난 6월 1일 발표한 ‘인도·태평양 전략’ 보고서에서 민주주의 국가들과 동맹 관계를 강화하려는 미국의 노력을 기술하면서 대만을 ‘국가(country)’라고 처음 명기했다. 미국 정부는 1979년 중국과 수교하면서 중국 대륙과 대만·홍콩·마카오를 모두 중국의 영토로 보고 ‘하나의 중국’ 원칙을 인정했다. 보고서의 내용으로 볼 때 트럼프 대통령은 시 주석과 중국 정부를 압박하기 위해 ‘하나의 중국’ 원칙을 폐기하고 ‘대만 카드’를 꺼낼 수 있다는 점을 경고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시 주석의 ‘북한 카드’는 역도미노를 막기 위한 적절한 패는 아니다. 시 주석이 ‘북한 카드’로 트럼프 대통령에게 공세를 편다면, 트럼프 대통령은 ‘대만 카드’를 꺼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물론 시 주석이 말 그대로 ‘제2의 천안문사건’를 감수하더라도 홍콩 시위 사태를 진압(?)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아무튼 홍콩판 도미노게임에서 궁지에 몰린 것은 시 주석과 중국 정부인 것만은 분명하다.
이장훈 국제문제애널리스트 truth21@empas.com
07.02 홍콩 시위대, 의사당 난입해 '영국령 홍콩기' 걸어
반환 22주년 기념일에 충돌… 경찰 제지 뚫고 의회 들어가
지난달 홍콩 정부의 범죄인 중국 인도법 개정 추진으로 촉발된 반정부 시위가 홍콩 반환 22주년 기념일인 1일(현지 시각) 격화됐다. 이날 오후 시위대 일부가 경찰의 제지를 뚫고 홍콩 입법회(의회) 건물에 난입해 의사당을 점거하고 연단에 영국령 홍콩기를 내거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1일 오후(현지 시각) 헬멧, 고글, 마스크를 쓴 시위대 수백명이 홍콩 입법회 건물 내부로 진입해 이동하고 있다. 이날 중국으로의 홍콩 주권 반환 22주년을 맞아 홍콩 시민 수만명이 범죄인 인도법 개정안 완전 철폐와 캐리 람 행정장관 사퇴를 요구하는 시위에 참가했고 시위대 중 일부가 입법회(의회) 유리벽과 철제 셔터를 부수고 들어갔다. /로이터 연합뉴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 등 외신에 따르면 시위대는 이날 오전부터 검은 옷과 노란색 헬멧, 마스크를 착용하고 홍콩섬 도심에 있는 입법회 건물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오후에는 수만 명의 시위대가 캐리 람 행정장관의 사임과 범죄인 인도법 완전 철회를 요구하며 도심 지역에서 대규모 행진을 벌였다.'
시위는 오후 들어 점점 더 격해졌다. 입법회 건물 밖에 게양된 오성홍기(중국 국기)를 내리고 '민주주의의 죽음'을 상징하는 검은색 홍콩기를 게양하는 퍼포먼스가 벌어졌다. 이어 오후 5시 무렵 입법회 건물을 포위한 시위대는 "입법회로 진입할 준비가 됐다"며 대치하던 경찰과 거친 몸싸움을 벌였다.
▲홍콩 반정부 시위대가 의사당 연단에 영국 식민지 시절 사용하던 영국령 홍콩기를 내걸고 있다. /AFP 연합뉴스
쇠봉과 철제 구조물을 든 시위대 일부가 철제 정문과 바리케이드를 부수고 들어가 유리로 된 건물 출입문을 깨트렸다. 홍콩 경찰은 입법회 건물 주변에 적색경보를 발령했다.
이번 시위는 지난달 9일 홍콩 정부가 범죄인을 중국 본토로 송환할 수 있도록 범죄인 인도법 개정을 추진하면서 촉발됐다. 홍콩 내 반정부 인사들이 중국에 강제로 송환될 거라는 우려가 커지자 분노한 시민들이 거리로 나선 것이다. 람 행정장관은 지난달 15일 범죄인 인도법 개정을 무기한 연기한다고 발표했지만 시위대는 법 개정 완전 철회와 람 행정장관의 사퇴를 요구하고 있다.
이날 홍콩 반환 22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람 행정장관은 "나를 포함해 홍콩 정부의 통치 방식 전반을 점검하고 개혁하겠다"고 했지만 시위대를 달래기엔 역부족이었다. 홍콩 반환 기념식은 그동안 줄곧 야외에서 열렸지만 올해는 홍콩 컨벤션 센터 실내에서 열렸다. 홍콩 정부는 "전날 비가 내려 실내 기념식을 진행했다"고 설명했지만, 영국 가디언 등 외신은 "대규모 반정부 시위를 의식한 조치"라고 전했다.
▲의회 유리벽 쇠봉으로 부숴 - 1일 오후(현지 시각) 마스크를 쓴 홍콩 시위 참가자 한 명이 입법회(의회) 건물 내부로 진입하기 위해 쇠봉으로 유리벽을 부수고 있다. 이날 중국으로의 홍콩 주권 반환 22주년을 맞아 홍콩 시민 수만명이 범죄인 인도법 개정안 완전 철폐와 캐리 람 행정장관 사퇴를 요구하는 시위에 참가해, 시위대 중 일부가 입법회 안으로 진입했다. /로이터 연합뉴스
경찰은 입법회 건물 내외에서 최루 스프레이를 뿌리며 "불법 행위 시 전원 체포한다"고 소리쳤지만 시위대 난입을 막지 못했다. 시위대는 오후 9시쯤 입법회 내부로 진입해 의사당을 점거하고 의사당 연단에 영국 식민지 시절 사용한 홍콩기를 내걸었다. 이는 홍콩 내정에 간섭해온 중국의 강압적 통치를 거부하고 과거 영국이 보장했던 자치를 요구하는 퍼포먼스로 풀이된다.
시위대 일부는 의사당 벽에 스프레이로 '범죄인 인도법에 반대한다'는 문구를 그리거나 붉은 페인트를 뿌렸다. 의사당 한편에는 '남은 방법이 없다' '폭동은 없고 폭정만 있을 뿐'이라고 쓰인 검은 현수막이 걸렸다.
시위대의 입법회 난입 사태에 대해 가디언은 "홍콩 경찰이 시위대를 저지하지 못한 건 지난달 대규모 시위에서 고무 총탄 등을 발사하며 폭력 진압을 한 것에 쏟아진 비판을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이날 홍콩 민주파 의원들도 입법회 건물 주변에서 "민주주의를 요구하면서 폭력을 행사해선 안 된다"며 시위대를 만류했지만 입법회 난입을 막지 못했다. 의사당이 점거된 후 홍콩 정부는 "시위대의 정부 건물 습격은 모든 사람의 안전을 위협하는 것"이라며 "당장 멈춰라"는 성명을 밝혔다. 홍콩 경찰은 이날 밤늦게 시위대에 퇴거하라고 경고하며, 병력을 투입해 진압하겠다고 밝혔다.
영국과 중국은 홍콩 시위를 둘러싸고 날 선 신경전을 벌였다. 지난달 30일(현지 시각) 영국 외무부는 제러미 헌트 외무장관 명의 성명에서 "우리는 홍콩 사태를 면밀히 주시하고 있으며, 최근 홍콩에서 이어진 시위들은 홍콩반환협정에 대한 영국의 약속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 홍콩반환협정의 일국양제(一國兩制·한 국가에 두 정치 제도) 조항이 보장하는 홍콩의 민주주의와 자치를 중국이 존중해야 한다고 압박한 것이다.
이에 대해 겅솽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1일 "중국 정부는 1997년 7월 1일을 기해 홍콩에 대한 주권을 회복했으며 홍콩의 일은 중국 내정에 해당한다"며 "영국이 홍콩에 간섭하는 것을 중단할 것을 권고한다"고 맞섰다.
조선일보 배준용 기자
주간조선2565호
그날 밤 홍콩은 분노의 섬이었다
지난 7월 1일 새벽 5시30분, 경찰차 사이렌 소리에 잠을 깼다. 홍콩섬 완차이(灣仔)에 있는 호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22층 창밖을 내려다봤다. 홍콩섬을 동서로 연결하는 왕복 8차선 글로체스터로드가 텅 비어 있었다. 옛 해안선을 따라 만든 도로로 불야성(不夜城) 홍콩에서 24시간 자동차로 북적이던 곳이다. 자동차가 달리고 있어야 할 새벽의 도로 위에는 시위진압 장비를 갖춘 파란 제복의 경찰들이 대오를 맞춰 애드미럴티의 정부청사 쪽으로 진군하고 있었다. 경찰 병력을 뒤따르던 경찰차들이 90도로 방향을 돌려 도로를 가로막는 것이 보였다.
홍콩 TVB 뉴스채널에서는 새벽 4시부터 시위대가 입법회(우리의 국회)에서 완차이의 홍콩컨벤션센터로 가는 길을 바리케이드와 대형 쓰레기통으로 막고 있다는 속보가 나왔다. 전날 애드미럴티의 입법회 앞에서 농성 중이던 시위학생이 넌지시 알려준 이날 ‘행동 개시’ 시점이 아침 6시였는데 그것보다 2시간이나 빨리 시위대가 움직이고 있다는 얘기였다. 이날 오전 8시 홍콩컨벤션센터에서는 홍콩 반환 22주년을 맞아 중국 국기인 오성홍기를 올리는 국기게양식이 예정돼 있었다. 시위대는 오성홍기가 홍콩 하늘에 나부끼는 것을 저지하겠다고 별러왔다. 드디어 터질 게 터졌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마비된 홍콩의 중심 애드미럴티
지난 6월 29일, 홍콩 첵랍콕공항에 도착해 휴대폰을 켜자 외교부에서 보낸 문자가 들어왔다. ‘홍콩 정부청사, 입법회 건물 등 인근 방문 자제 및 신변안전 유의’. 지난 6월 9일과 16일, 각각 100만과 200만명이 넘는 대규모 시위가 홍콩에서 벌어진 후 홍콩에 입국하는 자국민에게 보내는 경고문자였다. 그래도 첵랍콕공항에서 입국수속을 밟는 여행객들의 표정은 시위 소식에 상관없이 들떠 있었다. 기자 역시 홍콩 정부청사가 있는 애드미럴티를 찾아갔다.
애드미럴티(金鐘)는 명실상부한 홍콩의 중심이다. 홍콩 특별행정구 정부청사를 비롯해 행정장관 집무실, 입법회, 홍콩 주둔 인민해방군 사령부, 경찰본부, 고등법원 등 주요 관공서가 몰려 있다. 홍콩섬 동서와 커우룽(九龍)반도, 홍콩섬 남부 애버딘섬(압레이차우)을 연결하는 지하철만 3개 노선이 지난다. JW매리어트, 콘라드, 샹그릴라 같은 특급호텔들이 몰려 있는 복합쇼핑몰 퍼시픽플레이스(太古廣場)는 늘 화려함으로 생기가 도는 애드미럴티의 랜드마크다.
하지만 이날 퍼시픽플레이스 앞에는 망자(亡者)를 추모하는 흰 국화꽃이 줄줄이 놓여 있었다. 이곳은 지난 6월 15일, ‘반송중(反送中·중국으로 송환법 반대)’ ‘캐리 람(林鄭月娥) 행정장관 하야’ 플래카드를 내걸고 고공시위를 벌이던 30대 청년 량(梁)모씨가 투신자살한 곳이다. 국화꽃 옆에 걸린 흰 도화지에는 ‘희망을 봐서 견디는 것이 아니고, 견디기 때문에 희망을 볼 수 있다’ ‘홍콩인 힘내라’는 글귀들이 적혀 있었다.
투신 당시 노란 비옷을 입고 있어 ‘레인코트 보이’라고 알려진 이 청년은 경찰이 급히 설치한 에어매트 대신 콘트리트 바닥에 떨어져 목숨을 잃었다. 송환법 반대시위 과정에서 생긴 최초 사망자였다. 지나가던 홍콩 시민들은 국화꽃 앞에 잠시 멈춰 서서 묵념을 하고 지나갔다. 빗물에 테이프가 떨어져 너덜너덜해진 도화지를 다시 정리하는 사람도 보였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중얼중얼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애드미럴티 정부청사와 입법회 앞도 만신창이였다. 정부청사와 입법회는 주 출입구만 다를 뿐 한 건물로 연결돼 있다. 정부청사 동관(이스트윙) 외벽에는 ‘레인코트 보이’가 입었다는 노란색 비옷이 내걸렸고 빈소도 설치되어 있었다. 빈소 주위로는 ‘송환법 반대’ ‘캐리 람 행정장관 하야’ 등을 요구하는 포스트잇이 형형색색의 물결을 이루고 있었다. 정부청사 외벽에는 ‘부착물 금지’라는 경고문이 붙어 있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어 보였다.
마침 이날은 일본 오사카 G20 정상회의가 끝나는 날이었다. 한국 여의도 국회의사당을 배경으로 ‘G20에 대해 도움이 필요합니다’라고 한국어로 적힌 전단이 눈길을 끌었다. G20 정상회의 참가국들에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는 의미로 읽혔다. 한국의 ‘촛불시위’ 당시 사진을 걸어놓은 전단도 있었다. 전단에는 ‘3년 전 남한의 촛불바다, 2000만명이 참여해 박근혜가 낙마하기까지 23주 연속 집회가 열렸다’라고 적혀 있었다. 한국 사례를 들어 캐리 람 행정장관 낙마 때까지 시위 지속을 촉구하는 내용이었다.
입법회로 들어가는 일반인 출입구는 시위대가 붙여놓은 대자보로 인해 틀어막혔다. 시위대는 ‘송환법 완전 철폐’ ‘경찰 강경진압 규명 독립조사위원회 설치’ ‘캐리 람 행정장관 하야’ 등을 요구조건으로 내걸고 출입구 앞에서 철야농성을 벌이고 있었다. 섭씨 30도를 웃도는 폭염에 일부는 웃통을 벗고 드러누워 있었다. 입법회 앞에서 만난 한 시위 참가 20대 여대생은 “순번을 돌면서 친구 4명과 함께 이곳에서 지내고 있다”며 “한국에서도 많이 보도해달라”고 말했다. 한류 드라마로 배웠다며 ‘사랑해요’란 말까지 덧붙였다
만신창이가 된 홍콩 경찰본부
다시 7월 1일 오전 7시, 반환 기념식을 저지하려는 시위대를 해산하는 경찰의 진압이 시작됐다. 검은옷을 입은 시위대는 머리에는 노란색 안전모 또는 자전거 헬멧, 눈에는 경찰이 쏘는 고추스프레이를 막기 위한 투명고글, 입과 코에는 최루탄과 채증에 대비해 쓴 마스크, 팔과 다리는 주방용 비닐랩으로 칭칭 감고 있었다. ‘비닐랩을 왜 감았냐’는 기자의 질문에 천(陳)씨라고 밝힌 한 시위학생은 “비닐랩을 팔다리에 두르면 고추스프레이를 맞아도 덜 따갑고, 곤봉에 맞아도 덜 다친다”고 말했다. 직접 만져보니 그 정도의 효과가 있을지는 의심스러웠다.
‘앞으로 전진, 앞으로 밀어’라는 구령과 함께 경찰이 서서히 방패와 곤봉으로 시위대를 밀어냈다. 우산을 휘두르며 맹렬하게 저항하는 시위대를 향해서는 에프킬라처럼 생긴 고추스프레이도 과감히 분사했다. 고추스프레이를 정면으로 얼굴에 맞은 시위학생은 손으로 눈을 감싸고 괴로워했다. 동료들은 고추스프레이를 맞은 동료의 얼굴에 연신 생수를 뿌렸다.
그나마 경찰들은 강경진압 비난여론을 의식한 듯 마구 곤봉을 휘두르는 것은 자제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6월 12일 강경진압 때는 “인민해방군이 홍콩 경찰 옷으로 바꿔 입고 시위진압에 투입됐다”는 유언비어까지 난무할 정도로 완전군장의 무장경찰들이 시위대를 향해 무자비하게 곤봉을 휘둘렀었다. 하지만 이날은 검은 옷을 입은 무장경찰이 아니라 파란 제복을 입은 일반경찰이 시위대와 맞섰다.
지난 6월 12일 최루탄과 고무탄을 꺼내든 직후부터 홍콩 경찰은 줄곧 수세에 몰렸다. 입법회와 대각선 건너에 있는 홍콩 경찰본부는 기자가 찾았을 때 누더기가 돼 있었다. 경찰본부를 알리는 간판은 시위대에 의해 뜯겨져 나가 있었다. 표지판과 입구에는 차마 지워내지 못한 붉은 페인트와 ‘개 구(狗)’란 글자가 보였다. 경찰본부 주위 CCTV 카메라는 시위대가 채증을 막기 위해 칠한 노란색 페인트로 덮여 있었다. 지난 6월 26일 경찰의 과잉진압에 항의하며 약 1000여명의 학생시위대가 경찰본부를 6시간 동안 포위한 여파였다.
영국 식민지 경찰 시절부터 시위 진압에 나름 노하우가 있는 홍콩 경찰은 이번 시위에는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시위 지령이 주로 외국에 서버를 둔 텔레그램 등을 통해 전파되는데, 도대체 몇 명이나 호응할지부터 파악할 수 없었다. 이에 병력과 장비를 얼마나 투입할지 몰라 어려움을 호소해왔다고 한다. 시위대 속에 채증 등을 위한 사복경찰도 투입했으나, 시위대에 발각돼 레이저빔을 맞고 줄행랑을 치는 사건도 있었다.
입법회 앞에서 만난 학생들은 경찰의 강경진압을 조사하기 위한 독립조사위원회 설치와 당시 강경진압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진 영국 국적 홍콩 경찰 간부 2명의 신상과 증거사진까지 전단에 내붙이고 처벌을 요구했다. 홍콩 영화를 통해 식민지 시절 영국 경찰의 횡포를 수없이 보고 자란 시위대는 영국 국적의 경찰이 강경진압을 주도했다는 사실에 격분한 듯 보였다. 실제로 1973년 식민지 홍콩의 영국 경찰 간부 피터 고드버의 부패 스캔들로 인해 1975년 대대적인 학생시위가 벌어진 적이 있었다. 홍콩의 반부패기구인 ‘염정공서’가 출범한 것도 고드버 스캔들 때다.
법무부·인민해방군 부두도 포위당해
이번 홍콩 시위대 중 일부가 과격해진 것도 지난 6월 12일 강경진압 이후다. 주요 정부 기관들이 시위대에 의해 포위되는 일도 일어났다. 행정장관 관저(官邸)로 쓰는 빅토리아피크(太平山) 초입의 예빈부(禮賓府·옛 홍콩 총독부) 바로 아래는 법무부 격인 율정사(律政司)가 있다. 율정사 역시 지난 6월 27일 연좌시위를 벌이는 시위대에 겹겹이 포위됐다. 건물에 꼼짝없이 갇혔던 율정사장(법무장관)은 시위대가 해산한 직후에야 겨우 건물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애드미럴티 정부청사 바로 옆 홍콩 주둔 인민해방군 사령부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중환군영(軍營)’으로 불리는 이 사령부는 1997년 홍콩 반환 전까지 ‘프린스 오브 웨일스 빌딩’이라고 불린 홍콩 주둔 영국군 사령부였다. 1997년 7월 1일 인민해방군은 홍콩에 진주한 뒤 건물을 넘겨받아 건물 꼭대기에 ‘8·1(인민해방군 건군절)’ 자가 들어간 큼직한 붉은 별을 붙였다.
빅토리아항과 곧장 연결되는 사령부 앞 부두는 과거 영국 해군(로열네이비)이 ‘타마르 해군기지’라고 부르던 곳이다. 홍콩 정부는 옛 타마르 해군기지 일대를 매립해 수변공원으로 조성한 후 공원 일부를 해방군 전용부두로 사용하려고 계획해왔다. 전용부두라고 해봤자 배 한 척이 겨우 정박할 수 있을 만한 150m 정도의 안벽이다. 기자가 찾아갔을 때도 홍콩 경찰 소속의 소형 선박 한 척이 정박해 있었다.
하지만 ‘송환법’ 반중시위와 맞물려 야당인 민주파 쪽에서 해방군 전용부두를 ‘할지송중(割地送中·땅을 떼서 중국에 보낸다)’이라고 재차 이슈화하면서 문제가 커졌다. 급기야 지난 6월 28일에는 시위대가 이곳에 몰려와 ‘정부 토지 출입금지’라고 경고문이 붙은 펜스를 뜯어내고 전단을 붙이는 등 한바탕 홍역을 치렀다. 잡초가 무성한 해당 부지를 찾았을 때 몇몇 사람들은 펜스 너머로 연신 셔터를 눌러댔다.
현장에서 만난 한 여성은 “이렇게 전망 좋은 곳을 군부대가 혼자 차지하는 것이 맞느냐”고 했다.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다른 행인은 안에서 지키고 있는 경찰에게 거칠게 욕을 퍼붓고 삿대질을 하고 지나갔다. 빅토리아항으로 난 전용부두가 바라다보이는 인민해방군 사령부 문 앞에는 완전무장하고 방탄모를 쓴 군인이 총을 들고 서 있었다. 마치 해방군의 인내를 시험하는 것 같았다.
배편으로 행사장 상륙한 행정장관
다시 7월 1일, 애드미럴티에서 도보로 15분 정도 거리에 떨어진 완차이의 홍콩컨벤션센터. 캐리 람 행정장관 등 귀빈들은 이날 시위대를 피해 자동차가 아닌 배편으로 행사장에 ‘상륙’했다. 지난 6월 18일 홍콩 시민들에게 공식 사과한 후 모습을 감췄던 캐리 람 행정장관이 약 2주 만에 공개석상에 나타난 순간이었다. 마침 아침에 흩뿌린 비로 인해 매년 홍콩컨벤션센터 앞 골든바우히니아광장(금자형광장)에서 진행된 기념식은 실내 개최로 바뀌어 있었다.
행사 하루 전날, 기자가 찾았을 때 행사장으로 연결되는 통로는 모조리 봉쇄돼 있었다. 컨벤션센터와 연결된 그랜드하얏트와 르네상스호텔에서 이어지는 통로 역시 차단돼 있었다. 현장에는 경찰들이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고 경계근무를 서고 있었다. 현장에서 만난 한 경찰은 “내일까지 컨벤션센터 출입이 안 된다”고 되돌아갈 것을 요구했다. 행사에 매년 참가해오던 보이스카우트 등 어린 학생들에게도 불상사를 염려해 참석하지 말라는 통지가 이미 전달된 상태였다.
오전 8시 정각, ‘일어나라, 노예가 되기 싫은 인민이여’로 시작하는 중국 국가 ‘의용군 행진곡’이 장내에서 군악대의 연주로 울려 퍼졌다. 홍콩 주둔 인민해방군 3군 의장대는 골든바우히니아광장의 국기게양대에 오성홍기와 홍콩의 상징인 바우히니아(자형화)가 그려진 특별행정구기를 동시에 게양했다. 캐리 람 행정장관을 비롯한 내외빈들은 자리에 선 채로 홍콩컨벤션센터 안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으로 이 장면을 지켜본 뒤 샴페인을 들어 건배하며 홍콩 반환 22주년을 자축했다.
기념식은 베이징에서 쓰는 표준어인 보통화와 영어 두 가지 언어로 진행됐다. 하지만 캐리 람 행정장관은 홍콩에서 쓰는 광둥어로 “앞으로 더 많은 시간을 사용해 젊은이들과 접촉하겠다. 정책 제정 때는 더 많은 의원들과 소통하겠다”고 기념사를 했다. 기념사 와중에 야당인 민주파 소속 여성 의원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만 이내 장내에 있던 요원에 의해 문 밖으로 끌려나갔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홍콩 반환 기념식을 치르는 것은 1997년 홍콩 반환 이후 22년 만에 처음이었다.
오성홍기 올라가자 과격해진 시위대
같은 시각, 애드미럴티의 정부청사 앞. 오성홍기가 올라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정부청사와 입법회 앞 도로를 점거하고 있던 시위대가 일순 동요했다.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 새벽부터 오성홍기 게양을 저지한다며 공들인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 순간이었다. 행사가 끝나자 경찰도 서서히 포위망을 풀고 인근 경찰본부로 퇴각했다. 정부청사와 기념식 행사장이 있는 애드미럴티역과 완차이역을 무정차 통과하던 지하철도 다시 정차하기 시작했다.
기념식이 끝나자 흩뿌리던 비가 완전히 그치고 다시 햇볕이 뜨거워졌다. 대치하던 경찰마저 떠나버린 왕복 8차선 아스팔트 도로 위에 덩그러니 남겨진 시위학생 대부분은 정부청사와 경찰본부 앞 육교 아래에 퍼져버렸다. 섭씨 30도가 넘는 폭염 속에 유일하게 그늘이 생기는 곳이었다. 시위학생 중 일부가 분을 참지 못하고 우산과 기물을 집어던지며 격분하자, 다른 동료들이 ‘워워’ 하면서 진정하라고 말리기도 했다.
일부 시위대는 시위대 속에 섞여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던 중년 남성을 우르르 에워싸고 “경찰 프락치 아니냐”며 거칠게 몰아세우기도 했다. 기자 역시 검은 옷을 입은 시위학생들로부터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지 말라는 제지를 몇 차례나 받았다. 그나마 ‘프레스’라고 적힌 기자 신분증을 꺼내들고 “한국 기자”라고 외친 덕에 봉변을 당하는 일은 없었다. 평화시위라는 말만 믿고 시위대에 맞춘 검은 옷과 서양 기자들처럼 ‘PRESS’가 적힌 야광조끼를 챙기지 못한 것이 후회되는 순간이었다.
정부청사 앞에서 오성홍기가 올라가는 것을 지켜보던 시위대의 마지막 희망은 코즈웨이베이(銅鑼灣)에서 출발해 정부청사까지 밀려들어올 대규모 거리시위대와의 접선이었다. 지난 6월 9일에는 103만명, 6월 16일에는 200만명이 이 코스를 따라 행진하며 전 세계의 주목을 끌었다. 시위대와 반중매체들은 전날부터 이날 오후 3시 코즈웨이베이 빅토리아공원에서 시민들이 모여 애드미럴티의 정부청사까지 행진할 것이라는 뉴스를 전파했었다.
하지만 이날 거리행진에 가담한 시위군중은 주최 측 추산 55만명에 그쳤다.(경찰 추산은 19만명) 상당한 인파였지만, 지난 두 차례 거리행진에 비해서는 확연히 줄어든 숫자였다.
결국 이날 오후 정부청사와 입법회 앞에서 농성 중이던 과격파 일부가 입법회 진입을 시도했다. 쇠파이프와 벽돌, 손수레 등 손에 잡히는 온갖 기물을 동원해 정부청사의 방탄유리를 두들겨 팼다. 제지하는 경찰은 보이지 않았다. 오후 5시30분쯤 우산 하나가 들어갈 만한 틈이 생겼다.
이날 밤 9시, 시위대는 중간문까지 깨뜨리고 입법회 본회의장에 난입해 단상에 유니언잭에 사자(영국)와 용(중국)이 들어가 있는 영국령 홍콩기를 내걸었다. 이날 오전 기념식에 중국 국기인 오성홍기를 게양한 것에 반대한다는 뜻으로, 과거 치욕의 상징이던 식민지 깃발을 내건 것이다. 본회의장을 점거한 일부 시위학생은 영국 국기인 ‘유니언잭’을 흔들기도 했다. 시위대가 선을 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었다.
“홍콩에서 법치보다 중요한 것 없다”
7월 1일 자정을 넘긴 시각, 시위진압 장비를 갖춘 무장경찰들이 입법회 앞으로 대오를 갖추고 들어왔다. 오전 현장에 투입됐던 일반경찰과 달리 다시 완전무장을 갖춘 무장경찰들이 모습을 나타냈다. ‘최루탄을 쏜다’는 검은색 경고 깃발을 올린 무장경찰은, 최루탄을 쏘며 시위대를 내쫓고 입법회를 다시 탈환했다. 7월 1일 홍콩 반환 22주년 기념일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가 자정을 넘긴 시간에 시위대를 해산한 듯 보였다.
캐리 람 행정장관은 7월 2일 새벽 4시, 모두가 자는 이례적인 시간에 경찰본부에서 기자회견을 자청했다. 캐리 람 행정장관은 “홍콩에서 법치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고 특유의 단호한 어조로 시위대를 강력 비난했다. 흑(黑)과 백(白)이 뒤바뀌어버린 무간도(無間道)가 열리는 순간이었다. 홍콩 반환 22주년을 기념한 긴 하루가 한 편의 홍콩 누아르영화처럼 끝났다.
홍콩= 이동훈 기자 flatron2@chosun.com
07월 12일 홍콩 사태와 일국양제 허구성
김충남 베이징 특파원
‘캐리 람(홍콩 행정장관) 당신은 우리 어머니가 아니다. 퇴진하라.’ 사상 최대인 200만 명의 홍콩 시민이 모인 지난달 16일 등장한 시위 문구 중 하나다. 중국으로의 범죄인 인도 법안(일명 송환법)에 반대를 외치는 시위가 계속돼왔다. 람 장관은 앞서 12일 입법회(국회) 주변 경찰과 시위대 간 충돌 사태 후 “법안 철회는 없다”며 당시 상황을 모자 관계로 비유했다. 자식의 요구를 다 들어주기만 하다간 나중에 오히려 자식의 원망을 듣는다는 비유였다. “어머니가 아니다”라는 구호는 이런 람 장관을 홍콩 시민들은 행정장관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선언인 셈이다. 람 장관은 대규모 시위가 계속되자 “무기한 법안 보류”(6월 15일)→ “내년 6월이면 입법회 임기가 끝나 송환법은 기한이 다 될 것”(7월 2일)→ “송환법은 사망했다”(7월 9일)로 말을 바꿨다. 사퇴 여부에 대해서는 “겸허한 자세로 듣고 경제 발전과 시민들의 삶을 개선하겠다”며 계속 버티고 있다. 홍콩 시민들도 물러날 기세를 보이지 않고 그를 계속 압박하고 있다.
홍콩판 ‘철의 여인’ ‘완벽주의자’로 불리며 송환법에 드라이브를 걸었던 람 장관은 사실상 ‘항복 선언’에도 왜 사퇴 압력에 직면하게 됐는가. 홍콩 야당이 그에게 붙인 ‘중국의 꼭두각시’라는 딱지가 모든 것을 말해준다. 람 장관은 2017년 6월 행정장관으로 선출되기 전 행정장관 직선제를 요구하던 ‘우산 혁명’ 시위대를 강경 진압해 성공했다. 그는 이런 자신감을 바탕으로 ‘홍콩의 중국화’에 가속 페달을 밟았다. 이는 중국의 권위주의적 통제 체제가 홍콩에 이식되는 것을 뜻한다. 일국양제(한 국가 두 체제)와 50년간 고도의 자치권을 보장받았지만, 입법회부터 친중파에 의해 장악되더니 언론출판과 집회 및 결사의 자유마저 짓눌리기 시작했다. 송환법은 범인 인도마저 중국의 입김에서 자유롭지 못한 행정장관에게 최종 판단을 맡긴다는 점에서 ‘홍콩의 포기’로 받아들여졌다. 홍콩이 그동안 자랑해온 ‘법치주의’의 근간마저 흔들리는 사태였던 셈이다. 최근 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집회 참가자의 90%가 송환법이 통과되면 홍콩 당국이 중국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홍콩 시민들을 중국 법정에 세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람 장관이 법안이 ‘죽었다’고 해도 ‘철회’라는 말을 안 썼으니 믿지 못하는 이유다. 홍콩 야당인 민주당의 우치와이 주석은 “홍콩 정부와 시민 사이에 이제 신뢰는 ‘제로’가 됐다”고 말했다.
지난 1일 일부 과격 시위대의 입법회 점거 사태를 계기로 “람 장관은 역대 행정장관 중 최초로 대중 앞에서 사과했다”며 폭력 시위에 대한 단호한 대응 외에는 시민들의 요구를 대부분 수용했다는 동정론도 나온다. 로이터통신은 “람 장관이 이미 베이징에 사표를 제출했고, 사퇴는 시간문제”라며 “람 장관이 지금 물러나지 않는 건 중국이 대중의 압력에 굴복했다는 좋지 않은 시그널을 국제사회에 줄 수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하기도 했다. 이유야 어떻든 이미 대중의 신뢰가 붕괴한 상황에서는 ‘레임 덕(임기 2022년 6월 30일)’만 길어질 뿐이다. 람 장관은 자신의 정책을 모두 뒤집을 자신이 없다면 결자해지 차원에서 물러나는 게 답이다. 사퇴 타이밍은 이미 늦었다.
utopian21@ 문화일보
07.22 홍콩 대규모 시위서 반중정서 표출…中 국가휘장 먹칠
홍콩에서 범죄인 인도법(송환법)에 반대하는 대규모 도심 시위가 21일 다시 열리면서 홍콩의 정치적 분열이 심화되고 있다. 일부 시위대는 이날 처음으로 중국 정부를 대표하는 기관에 몰려가 국가 상징물인 휘장에 먹칠하는 등 강한 반중(反中) 감정을 드러냈다.
이에 중국 중앙정부는 심야에 긴급 성명을 내고 일부 시위대의 이런 행동이 일국양제(一國兩制·한 국가 두 체제)의 마지노선을 건드리는 행위라면서 비판했다
▲연합뉴스
21일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민주진영 단체들의 연합체인 민간인권전선이 주최하는 송환법 반대 시위는 이날 오후 3시(현지시각) 코즈웨이베이의 빅토리아공원에서 시작했다고 보도했다.
검은 옷을 입은 반정부 시위대 43만명(주최 측 추산)은 송환법 완전 철폐, 캐리 람 행정장관 사퇴, 경찰의 시위대 과잉 진압 조사와 처벌, 완전한 민주 선거제 도입 등을 요구하면서 행진했다. 빅토리아공원에서 플레이그라운드까지 이어진 집회는 대체로 평화적으로 진행됐다.
하지만 일부 시위대가 경찰의 저지선을 뚫고 도로를 점거한 채 대법원 청사와 정부 청사 방향까지 나아가면서 경찰과 시위대가 곳곳에서 충돌해 부상자도 속출했다. 이날 경찰은 13만8000명이 참여한 것으로 추산된다.
시위대 일부는 경찰의 해산 명령에 불복하며 홍콩 도심까지 행진, 홍콩 연락공판실 앞 중국 중앙 정부를 상징하는 붉은 휘장에 검은 페인트를 뿌리고 달걀을 던지는 등 강한 반중국 정서를 표출했다. 연락판공실 청사를 둘러싼 벽에 스프레이 페인트로 반중국 구호와 욕설 등을 써 놓기도 했다.
중국 정부 기관을 향한 전례 없는 공격에 중국 중앙정부는 즉각 성명을 내고 시위대를 강력 비난했다.
국무원 신문판공실은 21일 밤 발표한 대변인 명의 담화에서 "이런 행위는 중국 정부 권위에 공공연히 도전하고 일국양제의 마지노선을 건드리는 것으로서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며 "홍콩 경찰이 적시에 행동에 나서는 것이 매우 필요하다"고 밝혔다.
홍콩 정부 역시 22일 성명을 내고 "국가 휘장을 훼손해 국가 주권에 도전한 시위대를 강력히 규탄한다"며 "홍콩 자치정부는 이번 사건을 법에 따라 심각한 방식으로 다룰 것"이라고 했다.
송환법 반대 문제를 놓고 홍콩 시민들 간 찬반 대립이 커지는 가운데 상대편에게 집단으로 폭력을 가하는 사건도 이어졌다.
이날 밤 위안랑(元朗) 전철역에서는 흰옷을 입은 남성들이 시위대를 공격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위안랑 역 폭력 사건으로 최소 7명이 부상해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고 있다.
SCMP는 이들이 폭력조직원들처럼 보였다고 전했다.
반면, 센트럴에서는 도로 점거에 항의한 차량 운전자가 수십명의 시위대에게 폭행당해 병원으로 옮겨진 사건도 벌어졌다.
홍콩 당국은 시위 양상이 과격해지는 것을 우려해 핵심 시위대 700여명을 추 적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SCMP는 경찰 관계자를 인용, 최근 당국이 폭력 시위에 연루된 혐의를 받는 700여명을 추적 중이며, 이들 대부분이 25세 이하 대학생이나 고등학생이라고 보도했다.
이날 AFP통신은 반정부 시위 소식을 전하면서 "지난 1997년 홍콩이 영국에서 중국으로 반환된 이래로 홍콩 정부 권위가 ‘최대의 도전을 맞고 있다"고 보도했다.
조선일보 이재은 기자
07-22 홍콩서 친중 시위대가 반중 시위대 공격, 40여명 부상
▲홍콩에서 친중 시위대가 반중 시위대를 공격, 40여명이 부상당했다고 홍콩의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가 22일 보도했다.
◇ 하얀 티셔츠 입은 친중 시위대 : 검은 티셔츠를 입은 반중 시위대와 구별하기 위해 하얀 색 티셔츠를 입은 친중 시위대는 21일 밤 엔룽 지하철역에서 쇠파이프 등을 이용, 반중 시위대를 무차별 공격했다.
이로 인해 지하철 바닥이 피바다를 이뤘으며 22일 새벽 2시30분 현재 모두 36명이 병원으로 후송됐다.
흰 상의를 입고 마스크를 쓴 다수의 건장한 남성들은 21일 밤 11시께 엔룽 역사에 들이닥쳐 쇠파이프 등을 휘두르며 시위를 마치고 귀가하던 시위대를 무차별적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정차한 전철의 객차로 피신한 사람들까지 쫓아가 쇠파이프를 휘둘러 객차 안에서 많은 승객이 비명을 지르는 등 일대 소동이 벌어졌다.
▲지하철 안까지 따라가 폭행을 하고 있는 친중 시위대 - 웨이보 갈무리
◇ ‘백색 테러’ 가능성 커 : 이들은 폭력조직인 삼합회 조직원들로 보였다고 SCMP는 전했다.
이들이 시위대를 공격할 당시, 현장에 경찰은 없었고, 경찰은 신고를 받고 사건 발생 이후 30분이 지나 현장에 도착, 늑장대응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전문가들은 중국 당국이 삼합회 등 폭력 조직을 동원, 시위대를 폭행한 ‘백색 테러’일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 반송환법 시위에 43만 명 참여 : 앞서 송환법에 반대하는 대규모 도심 시위가 열렸다. 주최 측은 이날 시위에 43만 명이 참여한 것으로 파악됐다고 밝혔다. 경찰은 13만8000 명이 참여한 것으로 추산했다.
이날 시위는 주최 측 추산으로 각각 103만 명, 200만 명, 55만 명이 참여한 지난달 9일과 16일, 이달 1일 시위보다는 참가자 줄었다.
경찰은 시위대를 진압하기 위해 고무총은 물론 최루탄을 쏘는 등 강경 대응했다고 SCMP는 전했다.
(서울=뉴스1) 동아일보
08-01 고향은 잃어도 자유는 잃을 수 없다… 시작된 ‘홍콩 엑소더스’
▲이달 홍콩을 떠나 대만으로 이주할 계획인 홍콩 시민 레이먼드 신 씨(왼쪽)가 아내, 딸과 함께 지난달 28일 홍콩의 한 호텔을 떠나고 있다. 그는 “홍콩 정부가 시민들을 억압하고 있다”며 “내 딸이 자유롭고 민주주의가 있는 곳에서 생활하도록 하고 싶다”고 말했다. 신 씨의 선택은 최근 크게 증가한 ‘홍콩 엑소더스’ 현상을 보여준다. 홍콩=윤완준 특파원 zeitung@donga.com
“지난해 홍콩 정부가 범죄인 인도법을 추진한다고 했을 때부터 이민을 생각했어요. 올해 5월 법안을 통과시키려 하자 더는 기다릴 수 없다는 급박함이 생겼죠. 대만 이주를 바로 행동에 옮겨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홍콩대 정보기술 전공 교수 출신으로 현재 학원을 운영 중인 레이먼드 신 씨(44)는 지난달 28일 홍콩에서 동아일보 기자와 만나 ‘왜 대만 이민을 선택했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그는 아내, 열 살 난 딸과 이번 달 대만으로 떠난다. 대만 현지에 집은 구했지만 아직 새 일자리는 찾지 못했다. 그는 “수입이 더 적을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도 홍콩을 서둘러 떠나려는 이유가 궁금했다. 신 씨는 “민주주의와 자유가 있다면 생활수준이 지금보다 낮아져도 받아들일 만한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홍콩은 우리에게 안전감을 주는 고향이었는데 지금 그 안전감을 위협받고 있어요. 홍콩 정부는 표현의 자유, 민주 선거를 원하는 홍콩 시민들을 억압하고 있습니다. 정치, 사회가 불안정한 홍콩에 남는 건 위험합니다.”
‘그럼에도 고향을 떠나는 건 어려운 결정이었을 것 같다’고 물어보니 “내 아이, 다음 세대가 자유롭고 민주주의가 있는 곳에서 생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목소리는 나직했지만 단호했다.
▲지난달 28일 홍콩의 한 호텔에서 열린 이민 컨설팅 업체의 대만 이민 설명회에 홍콩의 반정부 시위 시작 전보다 훨씬 많은 100여 명의 홍콩 시민이 몰렸다.
이민 컨설팅 업체가 이날 홍콩의 한 호텔에서 개최한 대만 이민설명회에 홍콩인 100여 명이 몰렸다. 준비한 의자가 부족해 사람들이 뒤에 서야 할 정도였다. 어린아이를 데리고 온 20∼40대 젊은 부부들이 많았다. 대만 내정(內政)부 이민처에 따르면 올해 6월까지 대만으로 이주한 홍콩인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7.4% 증가했다. 이런 추세면 올해 대만 이민자 수는 1997년 홍콩 반환 전 홍콩인들의 엑소더스 때인 1500∼1600명대에 육박할 것으로 보인다.
설명회를 연 컨설팅 업체의 로이 람 이사는 “최근 대만 이민 상담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다”고 전했다. 인도법 반대 시위 이전엔 한 달에 한 번 설명회를 열면 30∼40명이 왔지만 지금은 한 달에 4번을 열어도 매번 100여 명이 참가한다고 했다. 그는 “과거 이민 상담은 나이 많은 은퇴자들이 주로 많았지만 지금은 젊은이들이 많다. 중국을 좋아하지 않는 젊은층이 홍콩에 미래가 없다고 보고 홍콩과 가까우면서도 자유민주 체제인 대만을 선택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 “순민·폭민·이민” 홍콩 신(新)삼민주의
신 씨는 “지난달 21일 홍콩 위안랑에서의 ‘백색 테러’ 이후 나와 가족들의 안전이 걱정돼 하루 3, 4시간밖에 잠을 못 잘 정도로 힘들다”고 했다. 그는 시위대를 지지하지만 시위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그런 그가 “정부와 경찰에 실망했고 젊은이들을 생각하면 괴롭다. 마음이 매우 복잡하다”고 말했다. 그는 “이번 사태를 보며 이민 결정을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도 고향인데 아쉽지 않은가’라는 질문에 “아쉬운 마음이 없다. 이는 매우 슬픈 일”이라고 털어놓았다. 그는 “주변 친구들 모두 대만이 아니더라도 캐나다 호주 등으로 떠나려 하고 있다”고 전했다.
어머니, 10대 남동생과 함께 설명회장을 찾은 키티 훈 씨(23·여)는 ‘왜 대만으로 가려느냐’는 질문에 “그것보다 당장 홍콩을 떠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홍콩 경찰이 시민들을 보호하지 않아 매우 위험하다고 느낀다”고 말했다. 어머니 에이미 초 씨(56)는 “홍콩이 중국이 되는 걸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피아노를 가르치는 빈센트 입 씨(42)는 올해 말이나 내년 초 아내, 9세 5세 자녀와 대만으로 갈 계획이다. 그는 “2014년 우산혁명 이후 정부는 우리 권리를 한발 한발 조이며 통제해 왔다”며 “내 아이가 자유를 잃는 걸 보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 홍콩인들은 순민(順民) 폭민(暴民) 이민(移民)의 새로운 삼민주의를 얘기한다”며 자조 섞인 웃음을 지었다. 쑨원이 제창한 삼민주의는 민족주의, 민권주의, 민생주의다. 하지만 홍콩의 신(新)삼민주의는 ‘홍콩의 현재에 순응하거나 저항하지 않으면 이민을 선택해 떠날 수밖에 없다’는 홍콩 시민들의 절망적 상황을 풍자한다.
○ 경제 피폐하게 한 홍콩의 중국화
홍콩 시민들의 탈출 행렬에는 정치적 이유와 함께 살인적인 집값, 집세, 물가 등 경제적 이유도 크다. 본토에서 몰려온 중국인들이 홍콩인들의 삶을 어렵게 만들었다는 반감이 상당하다. 사회 불평등 정도를 보여주는 홍콩의 지니계수는 2016년 0.539를 기록해 폭동이 일어날 수 있는 수준인 0.5를 넘어섰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에 따르면 홍콩인들의 평균 임금은 남성 1만9100홍콩달러(약 288만 원), 여성 1만4700홍콩달러인데 홍콩 도심의 방 한 칸짜리 다세대주택 월세가 1만6551홍콩달러에 달한다. 매달 수입이 약 2만 홍콩달러인 레이먼드 신 씨는 월세가 2만 홍콩달러인 800평방피트(약 74m²) 집에서 살고 있다. 아내의 수입이 없으면 생활이 어렵다.
지난해 6월 대만으로 이주한 뒤 홍콩 이민업체의 대만지사에서 일하는 라우와이나 씨(32·여)를 지난달 30일 타이베이(臺北)에서 만났다. 그는 “2017년 결혼했지만 월세를 마련하지 못해 대만으로 오기 전까지 남편과 각자 부모 집에서 따로 살았다. 너무 슬펐다”고 말했다. 그는 “대만에서의 삶은 생활이지만 홍콩에서는 생존이었다”며 “중국인들이 홍콩으로 몰려 집을 사면서 젊은이들이 집세를 낼 수 없는 수준으로 가격이 올랐다”고 주장했다.
빈센트 입 씨는 “홍콩 반환 이후 매일 150명의 중국인이 중국 장기체류 비자를 받아 홍콩에 정착했다. 20여 년간 100만 명이 온 것이다. 홍콩 정부는 이들을 막거나 심사할 권한조차 없다”고 불만을 드러냈다. 그 결과 홍콩 인구 700만여 명 중 7분의 1을 돈 많은 중국인들이 차지하고 있다는 것. 그는 “이들이 집값과 물가를 올려 홍콩 주민들의 생활이 어려워졌다”며 “영국 식민지 때는 능력이 있으면 성공 가능성이 있었지만 지금은 중국과 인맥 등 관계가 조금도 없으면 어렵다”는 인식을 보였다.
이 와중에 ‘홍콩의 중국화’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있다. 1997년 홍콩 반환 당시 증시 시가총액 기준 중국 기업 비중은 20%에 미치지 못했다. 현재 이 수치는 60%에 달한다.
○ “우리는 사실상 정치적 난민”
▲올해 4월 대만으로 피신한 홍콩 퉁뤄완 서점 주인 람윙키 씨가 타이베이의 한 공원에서 동아일보 인터뷰에 응했다. 타이베이=윤완준 특파원 zeitung@donga.com
홍콩 퉁뤄완 서점 주인이던 람윙키 씨(64)는 올해 4월 홍콩 정부가 인도법을 통과시키려 하자 신변에 위협을 느끼고 대만으로 피신했다. 그는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 지도부를 다룬 책을 출판했다가 2015년 중국 당국에 붙잡혀 5개월 동안 억류된 뒤 홍콩으로 돌아와 이를 폭로했다. 그처럼 언제든 중국 당국의 억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홍콩인들의 공포는 인도법을 반대한 홍콩 대규모 시위의 배경이었다.
지난달 30일 타이베이 시내에서 만난 그는 “홍콩인들은 저항하거나 시 주석 의사에 통제당하는 갈림길에 놓여 있다. 시 주석의 권력이 너무 강해서 홍콩의 장래는 더욱 나빠질 것이다. 마지막 출로는 홍콩을 떠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미국에서 유학하다 방학을 맞아 홍콩에 잠시 온 융납탁 군(18)은 졸업 뒤에도 홍콩에 돌아올 생각이 없다. 그는 “홍콩의 친구들을 만나봤더니 여력이 되는 가정은 홍콩을 떠나지만 그렇지 못한 친구들은 떠나고 싶어도 홍콩에 남을 수밖에 없다더라”며 고개를 떨궜다.
라우와이나 씨는 “이전에는 더 나은 생활을 위해 대만에 왔지만 지금은 홍색(중국)의 홍콩 침입을 원하지 않는 홍콩 시민들의 정치적 탈출이라고도 볼 수 있다”며 “어떤 이민이든 사실 정치적 난민의 한 종류다. (일찍 떠난) 나는 운이 좋은 편”이라고 말했다.
레이먼드 신 씨에게 ‘중국은 홍콩의 자치권을 보장하는 일국양제(一國兩制)를 강조한다’고 말하자 헛웃음을 지으며 “이미 일국양제는 없다. 일국일(一)제”라고 꼬집었다. 그에게 ‘일국양제가 끝나는 2047년 홍콩 엑소더스가 현실화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고 말을 건네자마자 돌아온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돈다.
“엑소더스는 이미 시작됐어요. 이미 이곳에 믿음이 없기 때문이에요. 희망이 철저히 사라졌습니다.”
― 홍콩·타이베이에서 윤완준 베이징 특파원 zeitung@donga.com
08.03 대규모 시위
08.05 파업으로 번진 홍콩 시위....항공편 결항·도시기능 마비 우려
홍콩국제공항, 활주로 두 곳 중 하나만 운영
시위 참여 직원들 집단병가…지하철·버스 운행 차질 빚을듯
캐리 람 장관 "홍콩 번영과 안정을 위협하는 행위" 긴급 기자회견
‘범죄인 중국 인도법’(송환법)에 반대하는 홍콩 시민들이 5일 총파업에 들어가면서 항공기가 대규모로 결항되고 지하철, 버스 운행이 단축되면서 홍콩의 도시 기능이 마비될 위기에 처했다. 캐리 람 행정장관은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일국양제(一國兩制·한 국가 두 체제) 원칙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라고 시위대를 향해 경고했다.
이날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 보도에 따르면 홍콩 공항당국은 국제공항 활주로 2곳 중 한 곳만 운영한다고 밝혔다. 민항처 항공교통관리부 항공 관제사 20여명이 총파업 참여를 위해 집단으로 병가를 내면서 운영 인력이 부족해졌기 때문이다. SCMP는 "홍콩 국적 항공사인 캐세이퍼시픽과, 홍콩항공(Hong Kong Airlines), 그리도 이들 항공사를 이용하는 여행객들이 직접적으로 타격을 입을 수 있다"고 전했다.
캐리 람 장관은 이날 오전 10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시위대를 향해 "일국양제(一國兩制·한 국가 두 체제) 원칙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라며 경고했다. 캐리 람 장관은 송환법을 강행 처리하려다 시민들의 거센 저항에 직면해 추진하지 않았다. 하지만 홍콩이 이후 친중, 반중 시위대로 나뉘어 극심한 분열 양상을 보이자 예정에 없었던 기자회견을 열고 이 같이 발언한 것이다.
그는 "홍콩은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도시였지만, 일련의 폭력 행위로 인해 홍콩이 위험에 처하게 됐다"며 "(시위대 중) 어떤 사람들은 폭력적인 수단을 쓰고 다른 이들의 자유를 무시한다. (시위대는) 홍콩의 번영과 안정을 위협하는 행위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 홍콩에서는 범죄인 중국 인도법에 반대하는 시위대가 아침 출근 시간대에 지하철 출입문을 막아서며 운행을 방해하는 일이 자주 발생하고 있다. 사진은 지난달 30일 시위대와 경찰이 대치하며 홍콩의 한 지하철역 승차장이 승객들로 빼곡한 모습. /연합뉴스
이날 1000편 이상의 민간 항공기가 국제공항에 이착륙할 예정이었고 이 중 511편은 출발편이었다. 한 항공사 승무원은 SCMP에 "항공사들이 항공편 운항이 지연되고 결항도 많아질 수 있다고 우려해 직원들을 대기시켜둔 상태"라고 말했다.
홍콩 일간 명보(明報)도 민항처 항공교통관리부를 인용해 관제사를 포함한 직원 3분의 1이 총파업에 호응해 병가를 냈다고 전했다. 명보는 시간당 항공기 이착륙 능력이 68편에서 34편으로 줄어들었고 활주로는 6일 오전 6시까지 2곳 중 한 곳만 운영될 것이라고 했다. 민항처 측은 "공항 운영에 영향을 받을 수 있다"며 "승객들은 공항에 나가기 전 항공편을 확인하라"고 했다.
반송환법 시위 주최 측은 오전 7시30분부터 위엔룽역 등 4개 지하철 MTR 역사에서 비협조 전술이 시작된다고 예고했다. 시민들이 MTR을 타고 센트럴, 침사추이, 몽콕 등 도심지역으로 출퇴근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하지만 홍콩 철도노조연맹과 MTR노조는 조합원들에게 총파업 참여를 요청하지 않이라고 선을 그었다. SCMP는 "홍콩 버스 운행도 축소되거나 멈출 것으로 보인다"며 "홍콩 버스노조 관계자에 따르면 버스 운전사 상당수가 이날 병가를 냈다"고 보도했다.
SCMP는 시위 주최 측을 인용해 금융, 항공, 식음료 등 20개 이상 분야에서 홍콩 시민 50만명 이상이 총파업에 동참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전했다. 홍콩 노총 위원장인 캐롤 응은 "이번 파업은 전도시적인 파업"이라면서 "지난 6월9일 시위 에 100만명이 참여한 것으로 파업 참가 인원이 50만명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전망했다.
SCMP는 시위 주최 측이 행정부를 압박하기 위해 홍콩 공무원들에 총파업 동참을 호소하고 있으며 행정부 청사가 위치한 7곳에서 ‘파업(work stoppages)’이 진행될 것이라고 전했다. 시위 주최 측이 항만 터널 봉쇄와 버스 정류장 포위 등도 예고했다고 했다.
조선일보 전효진 기자
08.12 홍콩은 21세기 황제 시진핑의 '중국 통합' 시험대
중국 반환 22년 홍콩… 아직 공산당 통제에 길들여지지 않아
홍콩 크게 흔들리자 대만까지 들썩, 베이징의 고민도 깊어져
중국과 홍콩이 손을 맞잡고 췄던 탱고는 스텝이 꼬인 지 오래다. 이제는 스텝의 문제가 아니다. 서로 얼굴을 붉히며 싸우는 형국이다. '범죄인 인도법'을 두고 벌어진 중국과 홍콩의 갈등이 연일 지구촌의 주목을 받고 있다. 1997년 영국 식민지였던 홍콩이 중국에 귀속한 지 올해 22년이다. 중국의 자본이 과도하게 들어오면서 부동산·증시 등의 영역에서 홍콩 사람들이 직접 체감할 수 있는 생활고가 깊어졌다는 게 이번 사태의 큰 요인으로 꼽힌다. 아울러 150여 년의 영국 식민지 시절 누렸던 법치(法治)와 자유(自由)의 틀이 흔들릴지 모른다는 홍콩 시민의 불안감도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1997년 홍콩 반환 때 중국은 50년 시한의 '한 나라 두 체제(一國兩制)' 약속을 내걸었다. 홍콩 대다수 사람은 현지의 범죄인을 중국에 넘기는 법이 그 근간을 흔드는 조치라고 간주한다.
하지만 홍콩 사태를 제대로 보려면 보다 심층적이고 역사적으로 뿌리가 깊은 전통적 요소를 무시할 수 없다. '중앙'과 '지방', '통제'와 '이탈'이라는 중국의 오래된 통치 역학 구조다. 하나로 묶여 어엿한 정체성을 이루고 있는 듯하지만, 실제 중국의 구성은 복잡하다. 공산당에 몸담기 직전인 27세 마오쩌둥(毛澤東)은 이런 말을 했다. "중국을 22개 성(省), 3개의 특구(特區), 2개의 속지(屬地) 등 27개 구역으로 나누자. (…) 우리 후난(湖南) 사람들은 스스로 각성해 자결(自決)과 자치(自治)를 행하면서 후난 공화국을 세워야 한다." 그 이유는 "하나의 몸집을 유지하기 위해… 너무 많은 사람을 죽였고(殺人多), 너무 많은 피를 흘렸다(流血多)"고 했다. 후난에서 태어난 20대 청년 마오쩌둥은 자신의 고향을 중국으로부터 떼내고자 했던 분리·독립주의자였던 셈이다.
신해혁명(辛亥革命)을 이끌었던 쑨원(孫文)도 "중국의 각 지역은 사람들의 습성이 각기 다른 기후 조건에 따라 큰 차이를 보인다. 따라서 정치적으로는 중앙집권과는 잘 맞지 않는다. 미국식의 연방제도가 가장 적합한 구조"라고 했다. 이른바 느슨한 연합, 즉 연성자치론(聯省自治論)의 제창이다. 그러나 공산당 발기인으로 활동하던 마오쩌둥, 임시 대총통의 자리에 오른 쑨원은 분리와 독립, 분권(分權)과 지방자치에 관한 견해를 모두 철회하고 전통적인 중국 왕조의 통일적 판도를 구상한다. 21세기판 황제로 불리는 시진핑 주석은 전임자들에 비해 한층 더 강력한 중앙 통치를 꿈꾼다.
▲지난 10일 홍콩국제공항에서 홍콩 시민들이 ‘홍콩은 중국이 아니다’라는 말이 적힌 손팻말을 들고 시위를 벌이고 있다. 이들은 중국 정부가 개정을 추진했던 ‘범죄인 인도법’의 완전 철폐를 주장하고 있다(왼쪽 사진). 오른쪽은 홍콩 사태를 계기로 지지율이 크게 오른 대만 민진당의 차이잉원 총통이 지난달 미국을 방문했을 때 지지자들과 악수하는 모습. /로이터 연합뉴스
중국은 예로부터 강력한 중앙집권의 권력이 생겨나 안정적인 구도를 이루고자 했던 오랜 역사 과정이 펼쳐졌던 곳이다. 그러나 통일적인 구도를 형성했다가도 분열할 때가 매우 많았다. 따라서 중앙은 지방의 통제를 늘 고심했고, 그 이탈을 항상 경계했다. 현대 중국도 마찬가지다. 국토의 통일을 지상의 과제로 꼽는다. 역사와 문화적 배경이 매우 이질적이어서 중심으로부터 이탈하려는 경향이 다른 곳에 비해 높은 신장(新疆)위구르, 티베트에 대한 통제가 특히 유독 강한 이유다.
중국 집권 공산당은 최근 지난 40년의 개혁·개방 기조를 벗고 중앙 권력 집중화와 민간 부문 통제를 강화하는 등 보수적 흐름을 보이고 있다. 원인은 여러 가지겠지만 개혁·개방 과정에서 생겨난 심각한 부패 등으로 나름의 위기의식이 작용했을 듯싶다.
이번에 홍콩에서 대대적인 반발이 일어난 건 중앙 권력을 강화하려는 집권 공산당의 의도와 자유·민주적 가치에 오랫동안 익숙해져 있던 홍콩 시민들의 삶이 충돌한 결과이다. 홍콩은 영국 식민지 생활을 접고 중국의 판도로 회귀한 지 20년이 갓 넘은 '신생 지역'이다. 공산당 중앙의 통제에 길들여지려면 아직 시간이 필요하다. 홍콩에 대한 통제 강화를 위해 공산당이 내민 '범죄인 인도법'이 홍콩의 강력한 반발을 불렀다. 공산당 중앙이 강요하는 통제를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식민지 시절 동안 누렸던 자유와 법치(法治)의 유혹이 여전하다. 이번 사태로 홍콩의 반(反)중국 정서는 줄어들 기미가 현재로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홍콩 문제는 단지 홍콩에 그치지 않는다. 그 여파가 대만으로까지 번지고 있다. 대만은 홍콩과는 다른 역사 과정을 거친 곳이다. 국민당 장제스(蔣介石) 정부가 옮겨가 중국의 '간판'을 걸었지만 청(淸) 이전까지는 중국의 판도에 본격적으로 들지 않았던 지역이다. 따라서 오래전에 그곳에 이주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정체성과 함께 현 집권 민진당(民進黨)을 중심으로 독립 성향까지 드러내고 있다. 홍콩 문제가 돌출한 뒤 대만의 국제정치적 요소가 뒤를 이어 불거지고 있다. 대만에 대한 첨단 무기 판매의 문호를 다시 열고, 민진당 소속 차이잉원(蔡英文) 총통의 방문을 '이례적으로' 허용한 미국의 조치가 그렇다. 아울러 곤두박질치던 독립 지향의 민진당 지지율이 홍콩에 시위가 벌어질 때마다 급상승한다. 이 경우 내년 초 실시할 예정인 대선에서 민진당의 승리는 거의 확실해 보인다.
중국이 굴기하면서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과의 충돌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이번 홍콩 사태로 그 가능성은 크게 현실화되는 모습이다. 홍콩은 그 시발점에 불과할 수 있다. 전선이 대만으로 확산하면 문제는 더 심각해질 수 있다. 중국이 외교관계를 맺을 때 상대국에 요구해왔던 '하나의 중국(一個中國)' 원칙이 도전에 직면한다. 중앙으로부터 먼 지 방, 그래서 힘이 느슨하게 미치는 지역은 늘 권력 중심에 선 중국 통치자의 입장에서는 고민이자 '아킬레스건'이었다. 마침 베이징으로부터 아주 먼 홍콩에서 반중 시위가 이어졌고, 통제가 더 힘든 대만이 들썩인다. 중국을 견제하려는 서방의 공격력이 중국의 이런 약점을 직접 노릴 경우 양측의 대립은 아주 깊어진다. 요즘의 홍콩 사태에서 눈을 뗄 수 없는 이유다.
조선일보 유광종 중국인문경영연구소 소장
08.17 홍콩 시위 지도부 "18일엔 300만명 모이자"… 中 무력개입 분수령 될 듯
中 시진핑 등 수뇌부와 원로들, 베이다이허 회의 마치고 돌아와
내일 집회서 격렬한 충돌 땐 선전의 무장 경찰 투입할 우려
중국 전·현직 수뇌부와 당 원로들이 매년 여름 휴양지 허베이성 베이다이허(北戴河)에서 대내외 현안과 그 대응 노선을 논의하는 베이다이허 회의의 올해 회기가 끝났다. 홍콩에 대한 무력 개입 여부를 놓고 강경파와 온건파 간 대립이 불가피했을 이번 회의의 결론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 향방을 가늠할 분수령이 18일 홍콩 범민주 진영의 대규모 집회·행진이 될 전망이다. '200만명을 넘어 300만명 참가'를 외치는 주최 측은 '행진 불허'를 선언한 경찰과 벌써부터 긴장을 빚고 있다.
중국 당 기관지 인민일보 등 관영 매체들은 권력 서열 3위 리잔수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상무위원장이 15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전인대 상무위 회의를 주재했다고 일제히 보도했다. 같은 날 공산당 이론지 추스(求是)는 빈곤 타파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시 주석의 글을 실었다. 지난 1일 이후 시진핑 주석을 포함, 상무위원 7명이 동시에 공개 석상에서 사라진 이후 첫 공개적인 움직임을 통해 중국 지도부는 베이다이허 회의가 끝났음을 알린 셈이다.
올해 베이다이허 회의 기간 홍콩에선 시위대에 의한 초유의 공항 마비 사태와 중국인 구금·폭행 사건이 벌어졌다. 중국 정부는 이를 '테러리즘과 같은 행위'라고 비난했고, 군부는 "선전에서 홍콩까지 10분이면 된다"는 경고를 내놨다. 급기야 중국 선전에 무장 경찰 수천명이 집결했다. 베이다이허에 집결한 공산당 수뇌부의 기류와 절대 무관할 수 없는 흐름으로 풀이된다.
이런 분위기에서 범죄인 인도법 반대 집회·시위를 주도해왔던 홍콩 민간인권전선은 "지난 6월 16일의 200만을 넘어 300만명 참가"를 호소하고 나섰다. 홍콩 경찰은 공원 집회는 허용했지만 도심 행진은 불허했다. 시위대가 행진을 강행해 경찰과 격렬하게 충돌할 우려가 큰 상황이다.
무력 개입 우려가 고조되면서 홍콩 내에서는 폭력 시위를 반대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15일 자 홍콩명보와 동방일보 등에는 '홍콩은 참을 만큼 참았다'는 제목의 전면 광고가 게재됐다. 홍콩 최고 갑부 리카싱(李嘉誠·91)은 16일 친중 성향 문회보, 대공보에 '사랑으로서 의를 행하고, 분노를 멈추자'며 폭력 중단을 호소하는 광고를 실었다.
▲홍콩과 10분 거리 선전서… 중국 무장경찰, 시위대 진압 훈련 - 홍콩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떨어진 중국 광둥(廣東)성 선전(深圳)시 선전 스포츠스타디움에서 16일 중국 인민해방군 소속 무장 경찰들이 도열한 채 시위 군중 진압 훈련(왼쪽 아래)을 지켜보고 있다. 홍콩 시위대는 18일 300만명이 참가하는 대형 집회·행진 참여를 호소하고 있다. 이번 주말 시위가 홍콩에 대한 중국 정부의 무력 개입 여부를 가늠할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로이터 연합뉴스
시위 사태 장기화로 인해 불황 가능성이 한층 높아지자, 홍콩 정부는 대규모 경기 부양책을 내놨다. 폴 찬 홍콩 재무장관은 15일 기자회견을 열어 "올해 국내총생산(GDP) 성장률 전망을 당초 '2~3%'에서 '0~1%'로 대폭 하향 조정했다"고 밝혔다. 홍콩 야 당은 "홍콩 정부가 진심으로 경기 회복을 바란다면 정치적 위기를 먼저 해결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편 홍콩 캐세이퍼시픽 항공의 루퍼트 호그 최고경영자는 사임했다. 홍콩 시위에 직원들이 가담한 것을 두고 중국 당국의 경고를 받은 지 일주일 만이다. 두 달여에 걸친 시위 기간 홍콩에서는 748명이 체포돼 115명이 기소됐다고 중국 신화통신은 이날 전했다.
조선일보 베이징=이길성 특파원
08.19 중국 무력개입 막아라, 홍콩시민 '비폭력 시위'
"과격시위 멈춰 폭력진압 억제" 170만 시위대, 경찰과 충돌 피해
중국의 무력 개입 우려 속에 18일 열린 홍콩 범민주 진영의 시위가 폭우가 쏟아진 와중에도 주최 측 추산 170만명의 시민들이 참가한 가운데 열렸다. 하지만 최루탄은 터지지 않았다. 홍콩에서 주말 대규모 시위가 경찰과의 격렬한 충돌없이 이날처럼 평화롭게 끝난 것은 한 달여 만에 처음이었다. 중국의 무력 개입 압력에 굴복하지도, 그렇다고 개입의 빌미도 주지 않겠다는 홍콩 시민들의 의지가 결집된 결과로 풀이된다.
▲홍콩 시위 참가자들이 18일 비가 오는 가운데 우산을 펼쳐들고 홍콩 시내 도로와 육교 위를 행진하고 있다. 폭우가 쏟아진 이날 시위에는 170만명(주최 측 추산)이 참가했다. 시위를 주최한 홍콩민간인권전선은 중국에 무력 개입 빌미를 주지 않도록 폭력 행위 자제를 호소했다. 시위를 앞두고 중국 인민해방군 산하 무장 경찰은 홍콩에서 차로 10분 거리인 중국 광둥성 선전에서 시위 진압 훈련을 실시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지난 6월 이후 11번째 대규모 주말 집회인 이날 집회는 수천명의 중국 인민해방군 산하 무장 경찰과 진압 장비가 홍콩에서 10분 거리인 선전에 집결한 상황에서 이뤄졌다. 중국 당국은 지난 17일에도 무장 경찰 및 공안(일반경찰)과 장갑차 및 물대포, 경찰견까지 참가한 대규모 훈련을 실시하며 또 한 번 홍콩을 겨냥한 무력시위를 벌였다.
이런 압박 속에 시위를 주최한 홍콩민간인권전선은 '止黑暴, 制警亂(지흑폭, 제경란·과격 시위를 멈춰 경찰의 폭력 진압을 억제하자)'을 표방하며 폭력 자제를 호소했다. 폭우 속에서 우산을 쓴 채 집회장인 빅토리아공원에 몰려든 참가자들은 홍콩 정부청사까지 행진을 벌였지만 경찰과 충돌은 벌어지지 않았다. 전날에도 청년들의 시위를 지지하는 홍콩 교사 2만여명이 평화 행진을 벌였고, 오후엔 일부 시위대가 경찰과 대치를 했지만 조기 해산하면서 경찰의 최루탄이 터지지 않았다.
홍콩 시위 사태는 지난주 시위대에 의한 홍콩 국제공항 점거 및 중국인 폭행 사태로 중국의 무력 개입 가능성이라는 벼랑 끝으로 치달아왔다. 그러나 이후 '중국이 개입해 일국양제(一國兩制·한 국가 두 체제)가 조기에 종료될 경우 지금의 자유마저 잃을 수 있다'는 우려가 확산된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의 무력 개입 여부를 가를 분수령이었던 이날 집회가 평화적으로 끝남에 따라 중국이 당장 무력 개입할 명분은 약해진 것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행정장관 직접선거' 같은 시위대의 요구를 수용할 정치적 출구는 여전히 막혀 있는 상태에서 오는 10월 중국 건국 70주년을 앞두고 사태 조기 종결을 원하는 중국 지도부가 홍콩 정부를 압박하고 나설 경우 홍콩 사태는 다시 위기 국면으로 치달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조선일보 베이징=이길성 특파원
09.25 “시진핑은 히틀러”…중국 역린 건드리는 포스트잇으로 뒤덮인 홍콩 ‘레넌 월’
떼면 붙이고 떼면 붙이고. 홍콩의 친중(親中)·반중(反中) 시위대가 ‘레넌 월(Lennon Wall·레넌 벽)’에서 벌이는 싸움이다.
민주화를 요구하는 홍콩의 반중 시위가 16주째 주말을 맞은 21일, 친중 성향의 홍콩 시민들이 몽콕과 완차이, 삼수이포 등에 청소 도구를 들고 나타났다. 이들은 벽면 가득 붙어 있는 ‘쓰레기’를 칼로 긁어 떼어냈다. 시위를 지지하는 문구와 그림이 담긴 종이다. 뜯겨져 나간 종이엔 낙서칠이 된 캐리 람 홍콩 행정장관의 얼굴, ‘홍콩을 해방시키고 시대 혁명을 이뤄내자(光復香港 时代革命)’는 시위 구호 등이 있었다.
▲홍콩 코스웨이베이역 근처 육교 유리창에 디즈니 캐릭터 곰돌이 푸 그림 위에 ‘시틀러(#xitler)’라 적힌 노란 포스트잇이 붙어 있다. 곰돌이 푸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묘사하는 캐릭터이고 시틀러는 시 주석의 ‘시’와 독일 나치 독재자 히틀러의 ‘틀러’를 합친 말이다. /홍콩=김남희 특파원
친중 진영의 레넌 월 정화 작업이 끝나자 이번엔 반중 시위대가 포스터와 풀을 들고 나타났다. 이들은 너덜너덜해진 벽에 자유와 독립을 열망하는 내용의 새 포스터를 붙이기 시작했다.
레넌 월은 원래 영국 밴드 비틀스의 멤버 존 레넌이 1980년 12월 미국에서 암살된 후 옛 체코슬로바키아 수도 프라하에서 레넌을 추모하며 생겨났다. 당시 체코슬로바키아는 공산 정권의 ‘철의 장막’에 억압돼 있었다. 냉전 시대에 평화를 외치며 반전쟁 운동가로 활동한 레넌은 서구 음악이 금지됐던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반전·반공산주의의 상징이 됐다.
▲홍콩의 한 육교 유리창에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독일 나치 독재자 히틀러의 사진을 합성한 포스터가 붙어 있다. /홍콩=김남희 특파원
레넌이 사망하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한 예술가가 프라하에 있는 프랑스 대사관 근처의 외딴 벽에 레넌의 얼굴을 그렸다. 이후 레넌을 기리는 글뿐 아니라 체코슬로바키아와 소련의 공산주의를 비판하는 글들이 끊임없이 벽에 새겨졌다. 1989년 벨벳 혁명으로 공산 정권이 무너지자 레넌 월은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한 여성이 홍콩 코스웨이베이역 근처 육교 계단을 올라가며 유리창에붙어 있는 홍콩 시위 지지 게시물들을 보고 있다. /홍콩=김남희 특파원
레넌 월은 이제 홍콩 민주화 시위의 상징 중 하나다. 2014년 우산 혁명 당시 홍콩섬 애드미럴티역에서 홍콩 정부청사로 이어지는 외부 계단에 처음 포스트잇이 붙기 시작했다.
올해 6월 9일 홍콩 시민 100만 명 이상이 정부의 범죄인 인도법 개정안 추진에 반대해 거리로 나선 이후, 애드미럴티 지역을 시작으로 곳곳에 100여개의 레넌 월이 생겨났다. 육교, 버스 정류장, 지하철역, 대학교, 쇼핑몰 등의 벽면은 어느새 색색의 포스트잇과 포스터, 그림, 사진으로 뒤덮였다. 색의 도시 홍콩에 또 하나의 색이 더해졌다
▲홍콩 코스웨이베이역 근처 육교의 유리벽면은 홍콩 시위를 지지하는 레넌 월로 변신했다. /홍콩=김남희 특파원
모자이크 같은 거대한 벽면을 하나하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종이마다 다양한 메시지가 적혀 있다. ‘홍콩인 힘내라(香港人加油)’ ‘5대 요구, 하나라도 빠져선 안 된다(五大訴求缺一不可)’ 같은 대표적인 시위 구호 외에도, 과잉 진압 비판을 받는 홍콩 경찰에 대한 분노, 친중 인사를 향한 적개심 등이 글과 그림으로 표현돼 있다.
▲홍콩 시민들이 코스웨이베이역 근처 육교를 걸어가며 유리창과 바닥에 붙어 있는 홍콩 시위 지지 게시물을 보고 있다. /홍콩=김남희 특파원
그중에서도 중국의 역린(逆鱗)을 정면으로 건드린 글과 그림이 중국 정부의 인내심을 자극하고 있다. 단순히 중국 정부를 비판하는 차원을 넘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조롱하고 모독하는 내용이다. 시 주석을 시 황제로 섬기는 중국 입장에선 용인할 수 없는 일이다.
▲홍콩 코스웨이베이역 근처 육교 유리창에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을 각각 디즈니 캐릭터 곰돌이 푸와 티거에 비유한 사진이 붙어 있다. /홍콩=김남희 특파원
이달 7일 홍콩섬 코스웨이베이역 근처 헤네시 로드와 퍼시벌 스트리트가 교차하는 곳에 있는 육교. 유리창 전체가 레넌 월로 변했다. 유리창 한 켠엔 디즈니 캐릭터 곰돌이 푸(Winnie the Pooh) 그림 위에 ‘시틀러(#xitler)’라 적힌 작은 노란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곰돌이 푸는 시 주석을 묘사하는 캐릭터로, 시 주석을 독일 나치 독재자 히틀러에 비유해 ‘시틀러(시 주석의 ‘시’와 히틀러의 ‘틀러’를 합친 말)’라 쓴 것이다.
▲홍콩대 캠퍼스의 레넌 월에 홍콩 민주화 시위를 지지하고 중국 정부를 비판하는 포스트잇과 종이들이 붙어 있다. /홍콩=김남희 특파원
육교 위로 올라가는 계단 유리창엔 곰돌이 푸가 왜 시 주석을 의미하는지 자세하게 설명한 포스터도 붙어 있었다. 포스터 안엔 곰돌이 푸와 티거(호랑이 캐릭터)가 나란히 걷는 그림과 2013년 시 주석이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과 함께 걷는 사진이 아래위로 배치됐다.
옆에는 "푸의 순진한 성격이 중국 공산당이 소셜미디어와 검색 엔진에서 푸 검색을 차단한 이유로 추정된다"는 설명이 있었다.
▲홍콩대 캠퍼스의 레넌 월. /홍콩=김남희 특파원
2013년 시 주석과 오바마 당시 미 대통령의 첫 정상회담 때 두 사람이 걸어가는 모습과 푸와 티거가 함께 걸어가는 그림은 소셜미디어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중국인들은 시 주석을 푸, 오바마 대통령을 티거에 비유했다. 그러나 중국 정부는 푸 이미지를 이용한 시 주석 풍자와 패러디가 이어지자 중국 소셜미디어에서 이 그림을 없애버렸다.
▲홍콩대 캠퍼스에 캐리 람 홍콩특별행정구 행정장관의 얼굴이 들어간 분홍색 돼지 캐릭터가 곰돌이 푸를 발로 밟고 있는 그림. 곰돌이 푸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묘사하는 캐릭터이다. /홍콩=김남희 특파원
유리창엔 히틀러와 시 주석의 사진을 나란히 넣은 포스터도 여러 장 붙어 있었다. 히틀러가 나치식 경례를 하는 모습과 시 주석이 한 손을 들고 있는 모습을 합성했다. 옆엔 ‘차이나치(CHINAZI·중국을 뜻하는 영어 ‘차이나’와 ‘나치’를 합친 말)에 노(no)라고 말해라’란 문구가 적혀 있었다.
▲도널드 트럼프(가운데) 미국 대통령이 홍콩 시위대와 마주앉아 대화를 하라고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팔을 끌지만 시 주석이 이를 거부하며 기둥에 매달려 있는 모습을 묘사한 그림. /홍콩=김남희 특파원
대학생 시위의 주축인 홍콩대에서도 시 주석을 조롱하는 글과 그림이 레넌 월 곳곳에 붙어 있었다. 캐리 람 홍콩 행정장관의 얼굴이 들어간 분홍색 돼지 캐릭터가 푸를 발로 밟고 있는 그림이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홍콩 시위대와 마주앉아 대화를 하라고 시 주석의 팔을 끌지만 시 주석이 싫다며 기둥에 매달려 있는 모습 등이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언론·집회의 자유를 제약하고 사람들을 조종한다는 의미의 그림. /홍콩=김남희 특파원
일요일 시위 하루 뒤인 23일엔 홍콩 정부 소속 근로자들이 홍콩대역 바깥 레넌 월의 포스터에 페인트 칠을 해 시위 지지 메시지를 지워버렸다.
10-28 치정 살인사건 정치적 이용… 홍콩의 거센 반중 시위 초래
중국 광둥(廣東)성 선전(深(수,천))시에서 태어난 홍콩인 찬퉁카이(20)와 여자친구 푼모 씨(20)는 지난해 2월 8일 대만 타이베이(臺北)로 여행을 떠났다. 같은 달 17일 푼 씨의 어머니는 푼 씨로부터 “오늘 홍콩으로 돌아갈 거예요”라는 와츠앱 메시지를 받았다. 하지만 그날로 연락이 두절됐다.
찬퉁카이는 홍콩 경찰 조사 과정에서 푼 씨 살해를 인정해 바로 체포됐다. 찬퉁카이와 푼 씨는 지난해 2월 17일 타이베이의 호텔에서 크게 싸웠다. 찬퉁카이는 푼 씨의 머리를 벽에 부딪친 뒤 뒤에서 목을 조른 것으로 알려졌다. 푼 씨의 시신을 여행가방에 담아 타이베이의 한 공원 풀밭에 암매장했다. 그는 푼 씨의 카드로 돈을 뽑아 자신의 은행계좌에 입금했다. 기자가 확인한 올해 4월 12일 홍콩 고등법원 재판 기록에 드러난 범죄 행적이다.
이처럼 찬퉁카이가 살해 사실을 인정했음에도 홍콩 고등법원은 찬퉁카이에 대해 4차례의 돈세탁 혐의만 적용했다. 속지주의를 채택한 홍콩은 사법권이 미치지 않는 대만에서 발생한 범죄를 기소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29개월 형을 선고했으나 죄를 인정한 점 등을 감안해 18개월로 감형했다.
홍콩 정부는 찬퉁카이 사건을 이유로 올해 2월부터 범죄인 인도법 개정을 추진했다. 인도 대상 국가를 대만뿐 아니라 중국 본토로 확대한 게 홍콩 시민의 반중(反中) 정서를 건드렸다. 누구도 이 치정 살인사건이 중국 홍콩의 일국양제(一國兩制)를 흔들고 미중 간 이데올로기 전쟁으로 격화할 세계적 사건의 방아쇠가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범죄자 찬퉁카이도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이었다. 형기를 마친 23일 오전. 다소 초췌하고 상기된 그가 교도소 문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취재진 앞에 서자 시선을 돌리다가 고개를 숙였다. 입술을 몇 번 달싹거린 끝에 90도로 허리를 숙였다. “피해자 가족들에게 죄송합니다. 큰 아픔과 고통을 주었습니다. 자수를 원합니다. 대만으로 가 재판받고 복역하겠습니다. 피해자가 안식을 찾기를 바랍니다….” 그는 “사회와 홍콩 시민에게 나는 단지…. 죄송합니다. 다시 올바른 사람이 될 기회, 사회에 보답할 기회를 줬으면 좋겠습니다…”고 했다.
공교롭게도 이날 범죄인 인도법 개정안도 입법회(국회)에서 공식 폐기됐다. 하지만 이 법이 촉발한 홍콩사태는 반중 반정부 과격시위로 바뀌었고 해결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대만 사법 당국은 지난해 3월, 4월, 7월 세 차례나 홍콩 정부에 찬퉁카이 사건 증거 수집과 사법 지원을 요청했지만 홍콩 정부는 외면했다. 사법 분야에서 협력하면 대만을 국가로 인정하는 셈이라는 정치적 고려가 있었을 것이다. 올해 2월 범죄인 인도법 개정을 제안한 뒤 시민에게 의견을 묻는 기간도 20일에 불과했다.
중국 중앙정부와 홍콩 정부가 이 사건을 찬퉁카이의 범죄를 사법적으로 단죄하는 본연의 목표에만 충실했다면, 중국 본토 사법제도에 대한 홍콩 시민의 강한 불신을 경청했다면, 오늘의 홍콩은 다른 모습일 것이다. 홍콩의 혼란은 찬퉁카이 사건이 촉발한 나비효과가 아니라 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한 정부 의사결정의 실패가 아닐까.
윤완준 베이징 특파원 zeitung@donga.com
11월 11일 시위대 추락사 이어 실탄 발사… 홍콩 도심 마비 상태로
▲ 투석전 난무 10일 홍콩 몽콕 지역에서 반정부 시위대가 보도블록을 깨서 손에 들고 경찰들과 대치하고 있는 지점으로 황급하게 뛰어가고 있다. AP 연합뉴스
‘실탄 3발’에 2명 쓰러져
첫 사망자 발생한뒤 사흘만에
경찰 “폭력시위 중단을” 강공
시위대 ‘3파 투쟁’다시 돌입
홍콩의 한 시위 참가자가 11일 경찰의 총격을 받아 쓰러지는 동영상이 온라인에 유포되면서 홍콩 시위 현장이 들끓고 있다. 지난 8일 시위현장에서 첫 희생자가 나온 지 사흘 만이다. 9일 시작된 22주차 주말시위는 11일까지 이어졌고, 홍콩 시위대의 분노는 한층 커졌다. 중국 중앙정부와 홍콩 당국은 ‘강대강’ 대응을 천명했다.
이날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 AFP통신 등에 따르면, 이날 오전 7시 20분쯤 사이완호 지역에서 열린 시위에서 한 경찰이 도로 위 시위자를 향해 실탄을 발사하는 장면이 페이스북을 통해 생중계됐다. 홍콩 시위대에 빠르게 퍼져나간 이 동영상에는 시위자가 부상을 입고 눈을 부릅뜬 채 누워있는 장면도 담고 있다. 경찰은 성명을 내고 “과격한 시위대들이 시위를 벌였다”며 “당장 불법 행위를 중단하라”고 경고했다. 경찰은 이날 오전 벌어진 총격 사건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다.
홍콩 시위는 지난달 말 중국의 4중전회 직후 중국 중앙정부가 더욱 강경한 시위 진압을 예고하면서 격화 양상을 보여왔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지난 4일 캐리 람 홍콩 행정장관을 만나서도 폭력행위에 대한 진압과 처벌을 법에 따라 흔들림 없이 견지해 나갈 것을 주문했다. 이에 따라 홍콩 경찰은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공세적인 진압 작전에 나서고 있다. 4중 전회 후 첫 주말인 2일 시위에선 시민들이 집회를 개최하자마자 병력을 투입해 해산에 나섰다. 대형 쇼핑몰 내 시위에 대해서도 강경 대응을 자제하던 경찰이 홍콩 내 6개 쇼핑몰에 전격 진입해 대규모 검거 작전을 펴기도 했다. 중국 중앙정부 관료와 관변학자들을 통해 홍콩 국가보안법을 제정해야 한다는 주장도 속속 제기되고 있다.
시위 장기화에 따라 한풀 꺾였던 시위 기세는 복면금지법, 중국 4중전회를 거쳐 4일 첫 희생자가 나오면서 다시 되살아나고 있다. 시위대는 9월 이후 중단했던 동맹휴학과 총파업, 상점 철수 등 이른바 ‘3파 투쟁’도 재개했다. 오는 24일 예정된 구의원 선거가 연기될 수 있다는 전망도 제기된다. 홍콩 야당은 “야당이 선거에서 우세한 것으로 나타나자 정부가 선거를 연기하려 한다”며 반발하고 있다. 중국의 홍콩 주재 연락판공실은 홍콩과기대 내에서 벌어진, 본토 학생을 겨냥한 폭력을 강하게 비난했다. 이날 관영 환추스바오(環球時報)에 따르면 홍콩 주재 연락판공실은 전날 공개편지에서 “학원 폭력을 강력히 규탄한다”고 밝혔다.
김윤희 기자 worm@munhwa.com
11.13 '불화살'까지 등장했다…홍콩경찰·시위대 대충돌, 시가전 방불
▲지난 12일 홍콩 중문대 캠퍼스에서 홍콩 경찰이 대학생 시위대를 향해 최루탄을 쏘고 있다. [AFP=연합뉴스]
홍콩 반정부 시위대와 경찰 간 충돌이 시가전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양측은 대학 캠퍼스와 쇼핑몰, 도로 등 도심 곳곳에서 격렬히 충돌했다. 경찰이 최루탄·실탄으로 진압에 나서면, 시위대는 불화살과 화염병으로 대응하고 있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 등에 따르면 홍콩 중문대학, 이공대학, 시립대학 등 주요 대학 캠퍼스에선 학생들의 시위가 12일부터 13일 새벽까지 이어졌다. 시립대학에서는 학생들이 학장 집무실 내 집기 등을 부쉈다
▲홍콩 경찰이 홍콩 중문대 캠퍼스에서 중문대 학생 시위대를 제압하고 있다.[AP=연합뉴스]
이에 경찰은 교내까지 진입해 최루탄을 발사하며 시위를 벌이는 학생들 진압에 나섰다. 교내는 최루탄과 고무탄 발사로 생긴 연기구름으로 뒤덮였다. 한 시의원에 따르면 시위대와 경찰이 중문대 두 번째 교량에서 충돌하는 동안에만 1000발이 넘는 최루탄이 발사됐다.
▲홍콩 진보 성향 온라인 뉴스 매체 스탠드뉴스는 12일 홍콩 중문대 시위대가 불화살을 쏘는 모습을 촬영해 페이스북에 올렸다.[사진 스탠드뉴스 페이스북 캡처]
이에 중문대와 시립대 학생들은 자신들의 학교 출입구에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고 경찰 진입을 막았다. 중문대에선 학생들이 차량과 함께 폐품 등을 쌓아놓고 불도 질렀다. 시위대는 ‘홍콩 해방, 우리 시대의 혁명’이라고 적힌 현수막을 들고 캠퍼스 곳곳을 돌아다녔다. 최루탄을 쏘는 경찰에 맞서 우산, 식탁 등을 방패로 삼아 화염병을 던지며 저항했다. 일부 학생은 화살에 불을 붙여 양궁으로 쏘기까지 했다. 중문대 등 대학 캠퍼스 내에선 활, 화살, 투창 등 무기가 발견됐다.
대학 부총장이 나서도 역부족
시위가 격렬해지자 로키 퇀 중문대 부총장은 12일 시위 현장에 직접 나서 시위대와 경찰 간의 중재에 나섰다. 이로 인해 충돌은 한때 소강상태를 보였으나 이내 재개됐다. 경찰은 오후 10시가 넘자 파란색 염료를 섞은 물대포를 발사했다. 경찰은 성명을 통해 “대학 측과 협의해 물러서는 경찰에게 시위대가 벽돌과 화염병을 던지고 화살을 쐈다"며 "현장 경찰에게도 큰 위협이 됐기 때문에 물대포를 발사했다”고 밝혔다.
▲로키 탄 홍콩 중문대 부총장이 12일 밤 중문대 캠퍼스에서 시위대와 경찰의 충돌 중재 상황을 기자들에게 설명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홍콩 경찰이 코즈웨이베이 인근에 있는 한 기자에게 현장을 떠나라고 말하고 있다.[AP=연합뉴스]
양측의 충돌은 13일 새벽이 되어서 경찰이 일부 철수하면서 조금씩 가라앉았지만, 13일에도 이어질 전망이다. 중문대 학생들은 온라인에 올린 글을 통해 “우리는 실탄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라면서 “희생을 치르더라도 끝까지 싸울 것이며, 1명의 목숨을 100명 경찰의 목숨과 바꿀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 대해 SCMP와 AFP통신은 “교정이 전쟁터와 흡사하다”며 “대학 캠퍼스가 새로운 충돌의 장으로 떠올랐다”고 평가했다.
▲지난 12일 홍콩 카오룽퉁의 한 쇼핑몰에선 시위대가 크리스마스 트리에 불을 붙였다.[로이터=연합뉴스]
12일 밤 도심에서도 충돌은 격렬했다. 사이완호, 센트럴, 타이포, 몽콕, 카오룽퉁, 사틴 등 홍콩 곳곳에서는 시위대가 도로에 폐품 등을 쌓아놓고 불을 지르고 돌 등을 던지며 늦은 밤까지 시위를 벌였다. 경찰은 이에 맞서 최루탄, 물대포 등을 동원해 진압에 나섰다. 코즈웨이베이 한 상점에선 불이 나 자정이 다 돼서야 진압됐다. 한 쇼핑몰에선 시위대가 크리스마스 트리에 불을 붙이기도 했다. 시위대는 경찰서에도 화염병을 던졌고 경찰은 최루탄으로 맞대응했다.
교통 대혼란…지하철 중단·대학 휴교령
▲13일 밤 홍콩 중문대 인근의 지하철역의 모습. 시위대와 경찰 충돌로 지하철역 시설 곳곳이 파손돼 있다.[로이터=연합뉴스]
시위대가 지하철 운행 방해 운동에 나서면서 출근길 ‘교통대란’은 12일에 이어 13일에도 이어졌다. 홍콩 시위대는 정부를 굴복시키기 위해 이날까지 사흘 연속 대중교통 방해 시위를 계속하고 있다. 이날 오전 출근시간대 홍콩은 여러 지하철역이 폐쇄되고 버스가 운행을 중단했으며 도로가 봉쇄된 혼잡한 상황이다. 지하철(MTR) 서비스가 모두 중단됐다. 몽콕, 투엔문, 청콴오 역도 폐쇄됐다. 이날 공항 익스프레스를 제외한 모든 MTR은 밤 10시까지만 운행을 할 방침이다. 경전철 노선도 일부 운행이 중단됐다. 시위대가 도로 곳곳에 설치한 바리케이드 때문에 버스 운행도 차질이 빚어지고 있다. 70개 버스 노선이 운행 중단된 상황이다.
▲홍콩 반정부 시위대가 13일 홍콩 중문대 인근 지하철역에서 지하철을 부수고 있다.[로이터=연합뉴스]
교통대란으로 인해 휴교령을 내린 홍콩 학교들도 많다. 특히 샤틴과 타이포 지역의 초중고 학교들이 이날 대부분 휴교에 참여한다. 시위대와 경찰 간 무력충돌이 대학 교정 안으로까지 번지면서 홍콩 주요 대학가로 통하는 도로도 대부분 봉쇄됐다. 홍콩 대학들은 전날에 이어 이날도 휴교를 이어갈 예정이다. SCMP는 “13일 홍콩 내 약 11개 대학과 전문대가 시위 충돌로 인한 불확실성으로 인해 수업을 중단하게 될 것”이라고 전했다. 홍콩 경찰은 11일 이후 13일 현재까지 총 287명을 체포했다.
중국 당국 "홍콩 시위는 테러리즘"
한편 중국 당국은 홍콩 시위대의 행위를 테러리즘으로 규정했다. 13일 관영 신화통신에 따르면, 중국 국무원 홍콩 연락판공실은 전날 성명에서 “홍콩의 폭력 행위가 테러리즘의 심연으로 미끄러져 들어가고 있다”며 “홍콩 정부의 폭력 진압과 질서 회복, 폭력행위에 대한 엄정한 법 집행을 결연히 지지한다"고 밝혔다.
이승호 기자 wonderman@joongang.co.kr
11.18 홍콩 경찰 이공대 포위작전에 사수대 “들어오면 대학살”
▲18일 홍콩 폴리테크닉대 입구의 바리케이드가 경찰의 진입을 막기 위해 시위대가 던진 화염병에 불타고 있다. [AP=연합]
홍콩 경찰이 18일 새벽 시위대의 마지막 보루인 이공대를 포위한 채 고립 작전에 들어갔다. 교내에 남은 100여명의 사수대는 “엔드 게임”을 외치며 경찰과 혈전을 선언했다.
“염소폭탄 개발에 성공했다. 경찰 쥐**는 즉시 폴리에서 철수하라. 그렇지 않으면 경찰 막사나 경찰서에 염소폭탄이 폭발할 것이다. 한바탕 대학살이 될 것.”
17일 밤엔 홍콩 시위대의 온라인 포럼 ‘LIHKG’에 이같은 내용의 ‘최후통첩’이란 게시물이 올랐다. 사수대는 투명한 병의 사진도 함께 실었다. 이공대 대변인은 지난 16일 다수의 실험실이 파괴됐으며 실험실 안의 위험한 화학물질이 탈취됐다고 발표했다. 시민들은 위험에 대비하고 경찰에 해당 사건을 신고했다고도 알렸다.
홍콩 명보는 18일 경찰 내부 관계자를 인용해 “경찰은 어제 2000여 경찰력을 동원했으며 현 단계에서는 주도적으로 교내를 공격하기보다 포위를 선택했다”며 “그들이 투항할 때까지 8~10일간 포위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현재 가장 과격한 용무파(勇武派)가 교내에 남아있으며 위험 물질의 사용 가능성도 있어 진입 대신 교내의 사수대를 격리하기로 했다고 전했다.
▲18일 동이 틀 무렵 홍콩 시위대가 점거 중인 폴리테크닉 대학에 검은색 연기가 솟아 오르고 있다. 전날 시작된 경찰의 진압작전이 밤새 이어지면서 교내 곳곳이 불타 올랐다. [AP=연합
사수대는 전날 밤 격전을 “엔드 게임”에 비유했다. 홍콩 소재 대학생들로 이뤄진 이른바 ‘용무소대(勇武小隊)’다.
이날 경찰의 공세는 새벽 5시 20분경 최루탄과 물대포를 쏘며 시작됐다. 곧이어 특공대가 달려들었다. 밤샘 포위망에 갇힌 사수대가 남은 화염병을 던지며 격렬하게 저항했다. 특공대는 교문 입구의 시위대 의무실에서 치료 중인 부상 학생들을 연행했다. 일부 외신은 이를 놓고 경찰이 이공대에 진입했다고 전했지만 홍콩 경찰은 대변인을 통해 진입 작전은 아니었다고 해명했다.
▲홍콩 이공대학.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이날 동이 트며 텅진광(滕錦光) 이공대 총장의 영상 메시지가 전해졌다. 텅 총장은 “항쟁자(학생 시위대)가 공격을 멈춘다면 경찰도 공세를 늦추고 학교 내 인원이 빠져나갈 수 있도록 허용하겠다는 승낙을 받았다”며 “경찰서에서 공정한 처리를 보장했다. 내 제안에 따라 평화롭게 학교를 떠나길 바란다”고 달랬다.
▲18일 오전 홍콩 폴리테크닉 대학에서 전날 경찰에 맞선 시위 학생이 지친 모습을 앉아있다. [AP=연합]
이공대를 지원하는 거리 시위도 시작됐다. 이날 오전부터 조던역 사거리가 시위대가 뿌린 보도블록으로 다시 차단됐다. 그동안 해가 지면 시작되던 거리 점거 시위의 시작이 빨라졌다. 인근 건물 옥상에서 경찰이 최루탄을 쐈다. 이후 이공대 인근에서 시위대의 게릴라식 시위가 이어졌고 경찰은 최루탄으로 대응했다.
▲홍콩 시위대가 온라인 토론방에 올린 염산폭탄. 최후통첩으로 제목붙인 게시물은 경찰에 피의 복수를 다짐했다. [LIHKG 캡처]
17일 진행됐던 경찰의 대대적인 이공대 포위 작전에는 중국 정부의 지침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15일 홍콩과 인접한 선전(深圳)에 홍콩·마카오 공작협력 소조 조장인 한정(韓正) 부총리가 회의를 주도했으며 부총리급인 6명의 정치국 위원이 참석했다고 명보가 보도했다. 홍콩 소조 부조장으로 홍콩 치안을 총괄하는 자오커즈(趙克志) 공안부장을 비롯해 천원칭(陳文淸) 국가안전부장, 유취안(尤權) 전략부장 등 정치국 위원 6명도 참석했다.
시위대의 공격에 맞서 18일 새벽엔 경찰의 실탄 발사도 시작됐다. 경찰이 다친 여성을 불법시위 참가 혐의로 앰뷸런스로 강제 연행하던 도중 시위대의 투석 공격을 받고 세 발의 실탄을 발사했다. SNS에는 실탄만 발사할 수 있는 AR15 반자동 소총과 기관단총인 MP5로 무장한 경찰의 사진이 유포됐다.
도심 센트럴에서는 지난주에 이어 직장인의 “런치 위드 유” 가두시위도 이어졌다.
홍콩=신경진 특파원 shin.kyung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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