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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촌 여행/ 국가별77/ 포르투갈- 폴란드 - 폴리네시아 - 푸에르토리코

상림은내고향 2022. 8. 2. 22:09

지구촌 여행/ 국가별77/ 포르투갈 - 폴란드 - 폴리네시아 - 푸에르토리코

■ 포르투갈 Portugal

포르투갈 공화국, The Republic Portugal

▲국기

 

수도는 리스본이다. 행정상으로 대서양의 아조레스 제도와 마데이라 제도도 포르투갈의 일부이다. 동쪽과 북쪽으로 스페인과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서쪽과 남쪽으로는 대서양에 접해 있다. 겨울은 온난 습윤하고, 여름은 비교적 기후 변화가 없으면서 건조하다. 포르투갈인들은 유럽에서 가장 동질적인 민족에 속하며 지중해 주변 민족들과 신체적 특징이 유사하다. 국민의 대부분이 로마 가톨릭교도이고, 주요언어는 포르투갈어이다.

 

이베리아 반도의 포르투갈인들은 유럽에서 가장 동질적인 민족에 속하며 지중해 주변 민족들과 신체적 특징이 유사하다. 지리적으로 유럽의 서쪽 끝에 있는 탓에 육지를 정복하려는 자들의 집결지가 되어왔고, 해상 여행자들이 긴 해안선을 따라 정착촌을 세우기도 했다. 최근에는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대다수 이주하면서 최대 이민자 그룹을 이루고 있다.

 

로마인·수에비족·서고트족·무어인·유대인이 모두 포르투갈의 영토에 영향력을 끼쳤다. 대부분의 포르투갈인들은 유럽인들의 평균키보다 약간 작고 갈색눈에 검은색의 곱슬머리, 파르스름하거나 갈색 피부를 가지고 있다.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고 있으며, 대부분 로마 가톨릭교도이다. 주요언어인 포르투갈어는 로망스 제어이다. 아조레스 제도와 마데이라 제도의 주민들도 포르투갈계이다.

 

포르투갈은 대부분의 지역(70%)이 여전히 농촌으로 남아 있다. 인구밀도가 높은 북부와 인구밀도가 낮은 남부 사이에 인구와 촌락 형태가 뚜렷한 대조를 보이고 있다. 농촌지역에서 이농현상이 심각한데 특히 북부 일부 지역과 중동부지역, 남부의 해안지역에서 두드러진다. 브라가와 세투발 사이에 있는 해안지대에 저지의 평원과 도시개발 등의 요인이 작용하여 많은 인구가 몰리고 있다. 중앙평원인 미뉴, 해안지역인 알가르베 같은 곳은 인구과밀현상이 심각하다.

 

포르투갈의 인구는 2022년 기준 1,015만 323명이고, 인구밀도는 111명/㎢이다. 15세 이하 인구가 전체의 14%를 차지하고 있으며, 도시거주자는 전체 인구의 67%에 해당한다. 1985년 까지는 인구가 느리게 증가하다가 1995년 까지 다시 줄어들었고 2000년부터 다시 증가했다가 2015년 이후로 다시 줄어들고 있는 추세로 인구변동이 불안정하다.

 

공식 언어는 포르투갈어이고, 영어와 프랑스어, 스페인어가 함께 사용된다. 종교는 전체 인구의 80% 이상이 로마 가톨릭을 믿고, 그 외에 개신교와 유태교, 그리고 이슬람교 등도 분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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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2월 30일  항해시대 포르투갈의 도전과 혁신

  포르투갈 대항해시대의 상징 제로니무스 수도원. 길이 300m의 웅장한 석조 건축물이며 198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이윤 / 駐포르투갈 대사

비행기 창밖으로 다가오는 테주 강변의 모습은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그 느낌도 잠시뿐 바퀴가 덜컹하고 활주로를 치며 리스본 공항에 닿았다. 또다시 새로운 곳에서 나의 새로운 생활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가슴한구석이 설레었다. 15세기에 시작해 16세기 세계사의 중심에 혜성같이 나타났다 역사의 뒤안길로 멀어져간 포르투갈, 그 나라에 도착한 것이다.

포르투갈에서 맞이하는 첫 주말 아침 일찍 산책에 나섰다. 대항해시대의 역사가 살아 숨 쉬는 벨렝으로 향했다. 조용한 아침 광장을 압도하는 웅장하고 화려한 건축물이 눈앞에 나타났다. 제로니무스 수도원이다. 장대함과 섬세함이 조화를 이룬 아름다운 모습이다. 16세기에 지어진 이 수도원은 향신료 무역에서 얻은 수입으로 막대한 건축 비용을 충당했다. 그 옛날 멀고도 험난한 바닷길로 출항하기에 앞서 선원들은 이 수도원에서 기도를 드리며 마지막 안식의 밤을 보냈다고 한다. 자리를 옮겨 길 건너편으로 가보니 발견기념탑이 서 있었다. 항해왕이라 불리는 엔리케 왕자의 서거 500주년을 기념해 만든 대형 탑이다. 배 모양을 한 석조 탑은 대항해시대를 이끈 영웅들의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다. 바르톨로메우 디아스는 아프리카 최남단 희망봉에 다다랐고, 바스코 다가마는 희망봉을 돌아 인도에 도착했다. 카브랄은 인도로 가던 길에 신대륙 브라질을 경유했다

지금부터 5세기 전 포르투갈이 건설한 해상제국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유럽 대륙의 변방 남서쪽 땅끝에 있는 인구 100만의 작은 나라가 대항해시대를 선도해 나갔다. 그들은 유럽 대륙을 뒤로하고 대서양을 향한 모험의 길을 택했다. 아프리카 해안 전역을 돌아 중동, 인도, 동남아, 중국, 일본까지 연결하는 항로를 개척하고 곳곳에 기지와 거점을 세웠다. 바닷길을 장악하고 무역을 독차지하며 해상 네트워크 제국을 건설한 것이다.

역사상 어느 한쪽의 대외 진출은 다른 쪽의 고통을 수반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대한 평가는 객관과 신중을 요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미지의 바다에 운명을 내걸고 바닷길을 통해 세상을 연결했다는 관점에서 볼 때 포르투갈의 대항해는 큰 성공이고 세상에 대한 기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왜 대항해를 시작했고 어떻게 성공한 것일까? 한마디로 혁신이었다. 생각의 혁신, 기술의 혁신,시스템의 혁신이었다. 대서양 먼바다에 도전하여 바닷길을 통한 아시아 무역이라는 새로운 기회를 창출했다. 당시로서는 엄청난 사고의 전환이고 혁신이었다. 생각의 혁신은 과학기술의 혁신에 의해 뒷받침되었다. 카라벨이라는, 작으면서도 기동력 있는 배를 만들었고 바람과 해류를 이용한 항해술을 발전시켰다. 해도, 나침반, 천체관측기 등 첨단 항해 도구도 개발했다. 혁신을 견인하고 활용하는 국가 차원의 시스템도 작동했다. 분권화된 중세 유럽에서 일찌감치 독립적 국가 체제를 갖추고 왕권을 중심으로 해양 진출에 역량을 집중했다. 대항해시대 초기에 큰 역할을 한 엔리케 왕자의 항해학교는 지금의 눈으로 보면 다양한 부문의 인적 물적 자원을 융합한 혁신 시스템이었던 듯하다.

포르투갈은 아시아 해상제국의 명맥을 길게 이어가지 못하고 17세기에 중요한 기지와 거점을 하나씩 잃어버린다. 국제 경쟁력을 상실하고 후발 주자인 네덜란드영국 등에 도처에서 밀린 결과다. 그 후 포르투갈의 역사는 좌절과 굴곡을 경험한다. 포르투갈 사람들에게 대항해시대 선조들의 도전과 혁신에 관해 얘기하면 그들의 얼굴은 밝아지고 눈이 반짝거린다. 영광의 역사에 무한한 자부심과 향수를 갖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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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 포르투갈은 새롭게 나아가고 있다. 재정위기를 빠르게 극복하고 도처에서 움직이고 있다. 한국 기업과의 협력을 희망하는 브라가 창업지원센터 소장, 한국의 대학과 줄기세포 공동 연구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미뉴대 교수, 진취적 상인 정신으로 충만한 포르투 기업인, 일자리를 찾아 세계 어디로든 움직이는 젊은이들이 있다. 인류 역사상 도전과 혁신을 실천한 사회는 흥했고, 그렇지 않은 사회는 기울었다는 리스본대 노교수의 말에는 역사의 경험이 배어 있는 듯했다. 병신년 새해를 맞이하며 포르투갈의 도전에 박수를 보내고 그들의 성공과 중흥을 기원한다

◇이윤(58) △서울대 법학과 △제15회 외무고시 △재외동포심의관 △정책기획국장 △주남아공 대사 △현 주포르투갈 대사

문화일보

 

◆ 2022.07.11 ‘신항로 개척’ 상징이자 ‘식민시대’ 근원지… 대지진에 무너진 황금도시

해상무역 요충지 ‘리스본’

▲리스본 전경. ‘땅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되는 곳’인 리스본은 과거의 영광을 뒤로하고, 도시 재생에 힘을 쏟고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이슬람 점령 벗어난 후 1243년 포르투갈 수도로
바스쿠 다가마·콜럼버스·마젤란 등 탄생 시킨 ‘항해의 성지’

아시아·아프리카·아메리카서 약탈한 富로 종교시설 황금화
1755년 재앙에 도시건물 85% 파괴되며 쇠락


“땅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되는 곳.”

포르투갈 시인 루이스 드 카몽이스는 유라시아 대륙이 대서양 푸른 바닷속으로 사라지는 수직 절벽에 서서 바다를 향해 노래했다. 대서양 항로가 개척되기 전, 리스본은 유럽의 땅끝마을, 로마인의 표현에 따르면 ‘먼 서쪽에 있는’ 작은 도시에 불과했다.

이베리아반도를 가로지르는 거대한 테주강 하류의 리스본에는 약 7500년 전부터 사람들이 정착해 살았다. 유럽인들은 오랫동안 이 아름다운 도시가 올리시포, 즉 오디세우스가 건설한 전설 속 도시라고 믿었다. 그러나 리스본을 건설한 이들은 켈트인이다. 약 3200년 전, 그들은 이곳을 저주에 걸려 하반신이 뱀으로 변한 물의 요정 모우라(moura)의 도시로 만들었다. 땅끝의 수호신인 이들은 항해자들을 향해 저주를 풀어주면 보물을 주겠다고 유혹한다.

예부터 리스본은 지중해-대서양-북해를 잇는 무역으로 번영했고, 711년 이슬람 점령 후에는 유럽과 아프리카를 잇는 경계지대로 이득을 얻었다. 이베리아 레콘키스타의 결과, 1147년 리스본은 이슬람 지배에서 벗어났고, 1243년엔 포르투갈 왕국의 수도가 됐다. 나라 전역에서 마녀사냥의 광기가 휘몰아치는 와중에도 리스본인들은 상대적으로 개방적이었다. 리스본 상인은 여전히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세력, 베네치아의 무역업자, 북유럽 한자 동맹의 상인 등과 밀접한 거래 관계를 유지했다.

이슬람 점령기 동안, 리스본 사람들은 바다 너머 아프리카에 다채롭고 풍요로운 산물이 쌓여 있음을 잘 알았다. 모우라가 약속한 바다 너머 부에 대한 환상이 그들을 유혹했다. 바다를 건너가 아프리카의 황금, 인도의 향신료, 중국의 도자기와 비단 등을 가져올 무역로를 열고 싶었다. 13세기 초, 유혹을 못 이긴 이들은 아프리카 해안선을 타고 카나리아 제도에 이르는 대서양 항해를 시작했다.

1415년 엔히크 왕자가 모로코 세우타를 점령하자 탐험에 불이 붙었다. 벤 윌슨의 ‘메트로폴리스’에 따르면, “아프리카 나머지 모든 도시의 꽃”답게 “세우타 상인들은 대궐 같은 집에 살았고, 아프리카의 금과 상아, 노예, 아시아산 향신료를 취급했다.” 종교적 열정이 부의 열망과 만나자 대서양 탐험이 국가의 미래가 됐다.

연구 투자 없이 부를 만드는 방법은 없다. 1418년 엔히크 왕자는 세계 최초의 과학 연구소를 설립해 대서양 연구를 시작했다. 리스본은 “탐험으로 이익을 챙기려는 사람들과 세상 변화를 이해하려는 사람들의 성지”가 됐다. 이베리아의 수학자와 선박 업자 등은 이슬람 천문학자, 유대인 지도 제작자, 베네치아 선장, 스칸디나비아 상인, 아프리카 현자 등과 어울려 자유롭게 토론을 벌였다. 엔히크 연구소는 리스본판 ‘지혜의 집’이었다. 이들은 세계지도를 제작하고, 항해술을 발명하고, 강력한 대양용 선박을 건조했다. 이들이 만든 지도와 배가 없었다면, 인도항로를 발견한 바스쿠 다가마도, 대서양항로를 연 콜럼버스도, 세계 일주를 한 마젤란도 존재할 수 없었다.

15세기 초, 리스본인들은 대서양에서 마데이라섬을 발견하고, 사탕수수 농장을 세워 비싼 설탕을 유럽에 공급했다. 1487년 바르톨로메우 디아스가 희망봉을 발견했고, 1497년 바스쿠 다가마는 잔지바르를 거쳐서 드디어 인도의 캘리컷에 도착했다. 1499년 향신료를 싣고 리스본으로 돌아온 다가마는 항해 비용의 60배나 이득을 남겼다. 세계사의 운명이 바뀐 순간이었다.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하는 위대한 서사시 ‘우스 루지아다스’에서 카몽이스는 캐러벨을 타고 바다로 나간 포르투갈 오디세우스들을 찬미했다. “드높은 명성의 용사들이/ 루지타니아의 서해안으로부터,/ 누구도 항해한 적 없었던 바다를 통해/ 타프로바나 너머까지 진격하여/ 인간의 한계를 넘는/ 위험과 전투를 극복하며/ 먼 이방의 세계에서/ 저토록 고귀한 새 왕국을 세웠도다.”

그러나 ‘저토록 고귀한 새 왕국’은 동시에 야만과 유혈의 왕국이었다. 인도양 대도시의 운영 원리와 복잡한 교역망을 ‘최후의 십자군’ 다가마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인도로 돌아온 그는 가져간 상품이 팔리지 않자 이슬람의 음모라는 생떼를 부리면서 최첨단 무기인 함포를 사용했다. 캘리컷을 포위한 다가마는 포격을 퍼부어 도시를 폐허로 만든 후, 포르투갈 왕을 ‘바다의 제왕’으로 선포하고 면허장을 발급해 인도양 무역상들에게 ‘삥’(?)을 뜯었다. 한 이슬람 지도자는 말했다. “배를 타고 바다를 돌아다니지 못한다는 말은 처음 들어본다.”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긴 서양 제국주의의 출발이었다.

주제 사라마구는 ‘돌뗏목’에서 포르투갈을 유럽 대륙에서 떨어져 나와 “브라질과 아프리카에 닻을 내리는 거대한 뗏목”에 비유했다. 리스본이 그 역사의 중심에 있었다. 바다를 정복한 대가로 리스본은 세계 무역의 중심으로 빠르게 떠올랐다. 이 도시는 진정한 의미로 최초의 해양 제국주의 도시였다. 리스본인들은 마카오, 고아, 코친, 믈라카, 말루크, 사우바도르 등 전 세계 식민도시에서 무자비하게 부를 약탈해 강변 궁전, 제로니모스 수도원, 벨렘탑 등을 이국 취향의 마누엘 양식으로 화려하게 짓고, 교회와 수도원을 황금으로 뒤덮었다. 리스본엔 아시아와 아프리카와 브라질에서 들여온 직물, 융단, 염료, 상아, 소두구, 후추, 정향, 계피, 금이 넘쳐났다.

그러나 16세기 중엽 이후 영국·네덜란드 등과 치열한 ‘향신료 전쟁’을 치르는 첨단 제국주의 도시이자 가톨릭 보수주의의 거점으로 번영을 누리던 리스본에 갑자기 파멸의 날이 찾아온다. 1755년 11월 1일 만성절, 도시 앞바다에서 대지진이 일어난 것이다. 땅이 흔들리고 쓰나미가 덮치면서 황금의 도시 리스본은 철저히 파괴된다. 건물의 85%가 무너지고 주민 4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신의 영광’이 다한 것이다.

 

리스본 바이루 알투 지구 골목 모습. 게티이미지뱅크

 

대지진은 물리적·경제적 충격과 함께 유럽 사회에 정신적 충격을 줬다. 소식을 접한 볼테르는 ‘리스본 재앙에 관한 시’에서 “엄마 품에 안긴 채 짓눌려 피 흘리는/ 아이들은 무슨 죄악을, 무슨 과오를 범했단 말인가?/ 환락 속에 잠겨 있는 파리나 런던보다/ 리스본의 악행이 더 심했단 말인가?”라고 신에 대한 회의에 빠져 울부짖었다. 숙고 끝에 그는 ‘캉디드’에서 “지금은 우리의 정원을 가꿀 때”라는 결론을 내린다. 칸트 등이 계몽에 동참하면서 신의 은총만 바라는 신앙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경험과 진리를 진리의 기준으로 삼는 계몽주의가 유럽 전역에 들불처럼 퍼져나간다.

잿더미로 변한 리스본도 신앙의 도시에서 이성의 도시로 탈바꿈한다. 수습을 맡은 품발 후작은 리스본을 철저한 도시계획에 따라 유럽의 관문이자 문명 세계의 상징으로 재건하고, 세력이 위축된 귀족과 교회를 척결해 포르투갈을 중상주의에 바탕을 둔 절대 왕정 국가로 변화시키려 애쓴다. 이로써 리스본과 포르투갈은 후에 파리, 런던 등 여러 나라의 도시계획과 근대국가 제도에 큰 영향을 끼친다. 리스본은 인도항로를 개척해 중세를 무너뜨렸고, 자신을 제물로 삼아 신앙이 지배하는 세계를 파괴한 것이다.

보르헤스는 ‘루이스 드 카몽이스에게’에서 노래했다. “나는 알고 싶네./ 네가 최후의 강변인 그곳에서/ 겸허하게 깨달았는지./ 잃어버린 모든 것, 서구와 동방, 창검과 깃발이/ 네 루지아디스판 아이네이스 속에서만/ (인생사 우여곡절과는 무관하게) 영속하리라는 것을.” 19세기 중반 거대 식민지 브라질이 독립하면서 리스본은 파두의 슬픈 음조와 함께 몰락에 접어든다. 20세기 중반 ‘더러운 전쟁’ 끝에 고아를 인도에 돌려주고, 앙골라, 모잠비크 등 아프리카 식민지도 상실하면서 리스본은 세계사의 무대에서 잊힌 도시로 전락했다.

페르난두 페소아는 영혼의 고향 리스본을 아련한 어조로 우리에게 안내한다. “물길로 오는 여행자라면 아주 멀리서도, 햇살에 금빛으로 물드는 푸른 하늘로 떠오르는 또렷한 꿈속의 한 장면 같은 이 광경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돔과 기념비와 고성들이 주택들 위로, 이 아름답고 축복받은 도시의 전령처럼 아스라이 늘어서 있다.”

1910년 포르투갈은 공화제로 전환했고, 1926년 쿠데타 이후 오랫동안 살라자르 독재에 시달리다가 1974년 청년 장교들의 군사혁명을 통해 간신히 민주화됐다. 1994년 유럽 문화 수도 지정 이후 리스본은 도시재생에 몸부림치고 있으나, 모우라의 보물을 되찾을 길은 아직 뚜렷지 않다.

문화일보  장은수의 도시와 문학

 

◆볼거리

▲까보다로까(로까 곶)

 

여기는 유럽대륙의 서쪽 땅 끝 마을입니다.포르투갈의 서사시인 키모잉스는 이곳을 "땅이 끝나고 바다가 시직되는 곳" 이라고 표현했습니다

 

▲140m절벽 위에 십자가 대서양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세계문화 유산지로 지정된 카톨릭 성지인 파티마.15년전 성지순례시 방문 했을때 보다 너무 발전이 되어서 놀랐습니다

 

▲작은 시골지방 도시로 기억되던 옛날모습은 찾기가 힘드네요

 

▲파티마 대성당.

1917년 성모마리아의 발현으로 카톨릭 신자들의 순례지로서 매년 세계각국에서 많은신자가 찾아온다

 

▲1917년 5월부터 10월 까지 매달 13일이 되면 3명의 어린 목동앞에 성모마리아가 죄의 회개와 로사리오의 기도를 권했다는 유래때문에 순례지로서 알려 지게 되었다.

 

▲기적의 치유를 위해 아픈 환자들이 무릎을 꿇고 150M 대리석길 위로 성당을 향해 간다.

 

▲높이 65M 위에 예수님상이 있다.

 

▲성채로 둘러쌓인 포르투갈의 보석 "왕비들의 집"이라 불리우는 오비도스.

 

▲오비도스에 있는 시가지 전경.

 

▲벨렘탑;

바스코 다 가마의 신대륙발견(인도항로)을 기념하여 1515-1521년에 세워진 마뉴엘 양식의 건물이다. 항해선박들이  떠나고 돌아오는 것을 환송,환영하던곳이 었으며 건물 모퉁이마다 감시탑을 세워 적들의 침입을 감시하고 리스본 항구를 방어 하고 등대로서 역활을 한 장소.

 

▲벨렘탑 옆 광장에 있는 이 비행기는 1992에 새워진 것으로 이곳에서 브라질까지 항해에 처음 성공한 비행기를 기념해서 만든것이다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인 제로니모스 수도원.

 

이 수도원은 포르투갈 전성기때 마누엘 1세가 바스코 다 가마의 인도항로 발견을 찬양해 세운 수도원.내부에는 바스코 다 가마와 민족시인 루이스 데 카몽에스 관이 있다.

 

 

▲수도원 내부

 

 

▲수도원 앞의 임페리오 광장.

 

▲임페리오 광장

 

 

 

▲마데이라 섬 - 포르투갈에  속하는 대서양 카나리 군도 북쪽 250마일 지점에 있다

 

 

 

 

 

 

 

 

 

 

 

▲마데이라 공항 -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곳

 

▲리스본의 트램 - 리스본에는 5개 구간을 60여대의 트램이 도시 구석구석으로 사람을 나른다.

 

 

◆일상

▲포르투갈 대형산불 2017.6.19

 

▲사망 62명

 

 

 

 

 

 

 

■폴란드 Poland

Polska폴란드 공화국, Republic of Poland

▲국기

 

동부 유럽에 있는 국가. 수도는 바르샤바이며 화폐는 폴란드 줄러티이다. 비교적 광범위한 광물자원을 보유하고 있으며 역청탄 의 매장량은 세계적인 규모이다. 폴란드 경제에서 가장 빠르게 팽창하고 있는 분야는 서비스 부문이다. 폴란드 금융체계의 중심에는 독립적인 국립은행이 있어서 통화와 금융 부문을 규제한다.

 

우크라이나인·독일인·리투아니아인·벨라루스인 등 소수민족 집단이 있지만, 폴란드는 폴란드인이 전체 인구의 97%를 차지하며, 민족적으로나 언어적으로 뚜렷한 단일민족국가이다. 제2차 세계대전중 나치 점령하에 폴란드 인구의 1/5에 해당하는 600만 명이 죽음을 당했으며, 그중 유대인의 수가 약 300만 명으로 당시 폴란드에 거주하고 있던 거의 모든 유대인이 학살당한 것으로 추산된다.

 

폴란드는 다른 유럽 국가들과 비교해 전후 최고의 자연인구증가율을 기록했다. 1960년 3.3%의 인구증가율을 기록한 이후, 증가율 자체는 점차 낮아져 1980년 0.9%로 하락했고, 2000년대에는 0.5%의 감소율을 기록하고 있다. 인구는 2000년대 이후 3,800만 명대를 유지하고 있다. 폴란드의 인구는 2022년 기준 3,778만 1,379명이고, 인구밀도는 121명/㎢이다. 15세 이하 인구가 전체의 19%를 차지하고 있으며, 도시거주자는 인구의 대부분인 84%를 차지한다.

 

공식 언어는 폴란드어이다. 종교는 전체 인구의 약 90%가 로마 가톨릭교이다. 그 밖에 소수의 그리스정교·유태교·개신교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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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4.27   폴란드 왕국 기병대, 날개 펄럭이며 맹활약

[윙드 후사르(winged hussars)]

16~17세기에 활약한 폴란드 기병… 날개 달린 갑옷으로 공포심 일으켜
자신보다 수십 배 많은 적군 꺾고 폴란드 연합 왕국의 전성기 열어

2차 빈 포위전에서도 맹활약해 오스만의 유럽 침공 막아냈어요

 

중소 국가의 공군력에 맞먹는 전투력을 갖춘 미국 핵 추진 항공모함 칼빈슨(Carl Vinson)호가 며칠 내로 동해에 다다를 예정입니다. 아파트 25층 높이에 갑판 넓이가 축구장 3배인 칼빈슨 호에는 신형 함재기(항공모함에 이·착륙하는 전투기) 80여 대가 실려 있어요. 군사 전문가들은 "미국이 칼빈슨호를 한반도에 보낸 건 북한에 군사 도발을 하지 말라고 강력히 경고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오늘날 미국은 항공모함과 핵 잠수함 등 최첨단 무기로 막강한 군사력을 갖추어 세계 최강대국 지위를 누리고 있어요. '강력한 무기와 군사력을 갖추어야 강대국 지위를 유지할 수 있다'는 역사의 교훈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죠.

 

 16~17세기 폴란드 왕국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폴란드 기병‘윙드 후사르’를 묘사한 그림이에요. /위키피디아

실제로 역사 속 강대국들은 늘 그에 걸맞은 신식 무기나 강한 군대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역사의 변방에 머물던 폴란드 왕국이 16~17세기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며 전성기를 누릴 수 있었던 것도 강력한 군사력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었죠.


◇폴란드 왕국의 전성기를 연 '윙드 후사르'

독일과 러시아 사이 위치한 폴란드는 약 10세기 무렵 그 역사가 시작되었어요. 하지만 스웨덴, 러시아, 오스만 튀르크 등 여러 강대국이 주변에 있어 좀처럼 세력을 펴지 못했지요. 그런데 16세기부터 세력을 키우기 시작해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연합왕국(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왕국)을 구축했고, 17세기에 들어서는 오늘날 발트 3(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과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일대를 차지한 유럽 최강대국 중 하나로 거듭났지요.

그 배경에는 '윙드 후사르(winged hussars·날개 달린 후사르)'라는 강력한 기병대가 있었습니다. '후사르(hussar)'는 당시 동유럽에서 활약한 기병을 가리키는 말로, 헝가리 등 주변 국가에서는 대부분 가벼운 무장을 하고 소규모로 활동하며 적군을 교란하거나 보병을 보조하는 역할을 맡았어요.

하지만 16세기 등장한 폴란드의 윙드 후사르는 이들과 많이 달랐어요. 튼튼한 쇠갑옷으로 중무장해 적군의 총알에도 거침없이 돌격할 수 있었지요. 이들의 갑옷 등 부위나 말 안장에 달린 화려한 깃털 장식은 윙드 후사르의 상징이었습니다. 이 깃털은 체구를 더 크게 보이도록 해 적군의 기세를 꺾고 공포심을 주는 역할을 한 것으로 보여요. 윙드 후사르의 명성이 유럽 전역에 알려지면서 이 깃털 장식은 더 유명해졌습니다.

 

 2차 빈 포위전 당시 윙드 후사르와 오스만 군대의 전투 장면을 묘사한 그림.

 

화려한 외형과 강력한 전투력을 동시에 갖춘 윙드 후사르는 자신보다 수배 많은 적군도 무참히 짓밟았어요. 2500명의 윙드 후사르가 단 한 번의 돌격으로 12000명의 스웨덴군을 무너뜨리거나 300명의 윙드 후사르가 15000명의 오스만 튀르크 군대로 돌격해 1000여 명을 죽이는 일도 있었지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왕국은 윙드 후사르의 힘을 바탕으로 영토를 넓히고 전성기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오스만의 서유럽 침공을 저지하다

윙드 후사르의 위력이 가장 잘 드러난 전투는 17세기 말에 벌어진 제2차 빈 포위전이었습니다. 16세기부터 국력이 쇠퇴하던 오스만 튀르크는 1683년 신성 로마 제국의 국력이 약해진 틈을 타 10만명이 넘는 군대를 보내 신성 로마 제국의 요충지였던 빈을 포위하였어요. 빈을 점령하고 서유럽으로 영토를 넓혀 과거의 영광을 되찾으려는 게 오스만 튀르크의 속셈이었습니다.

 

 

2만여 명의 신성 로마 제국 군대와 빈 백성은 성 안에서 오스만 군대의 공격을 잘 버텨냈지만, 두 달 가까이 포위가 계속되고 물자가 떨어지자 점점 힘이 떨어졌어요. 이를 간파한 오스만 군대의 총공세가 펼쳐졌고 결국 빈 성벽의 한쪽이 무너져내렸습니다.

빈이 함락되기 직전이던 그때, 18000여 명의 윙드 후사르가 모습을 드러냈어요. 신성 로마 제국의 구원 요청을 받은 폴란드 국왕 얀 3세 소비에스키가 윙드 후사르와 구원군을 이끌고 빈에 도착한 것입니다.

국왕의 돌격 명령을 받은 윙드 후사르는 화려한 날개를 휘날리며 오스만 튀르크 군대로 달려들었습니다. 오스만 군대의 기병이 맞서려 했지만 윙드 후사르의 상대가 되지 못했어요. 윙드 후사르의 용맹한 돌격에 오스만 군대의 진영은 완전히 무너졌고, 심지어 군대 본진까지 점령될 처지에 놓였지요. 뒤이어 6만여 명의 폴란드 군대가 모습을 드러내자 오스만 병사들은 허겁지겁 달아났습니다. 영화 '반지의 제왕 2' 후반부에 등장하는 기마 전투 장면도 바로 제2차 빈 포위전에서 윙드 후사르가 펼친 극적인 활약을 본떠 만든 것이죠.

2차 빈 포위전 패배로 국력을 손실한 오스만 튀르크는 더 이상 유럽을 위협할 수 없을 정도로 급격히 쇠퇴했습니다. 몇몇 역사가는 "2차 빈 포위전은 서유럽과 오스만 튀르크 사이의 힘의 관계가 역전된 계기"라고 말하지요. 윙드 후사르를 지휘해 제2차 빈 포위전을 승리로 이끈 얀 3세 소비에스키는 "기독교 세계를 구한 인물"로 불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18세기 들어서자 폴란드 왕국은 급격히 쇠퇴하였어요. 잦은 전쟁으로 국력이 피폐해지고 지도층 내분과 외교적 실수가 겹친 탓입니다. 급기야 1772년에는 프러시아와 오스트리아, 러시아에 의해 나라가 분할되는 비참한 운명을 맞았지요(1차 삼국분할). 후사르도 총의 성능이 점점 좋아지면서 그 역할이 점점 줄어들었고, 1차 세계대전 때 참호와 철조망, 기관총으로 이루어진 전선(戰線)이 등장하면서 후사르와 기병은 전쟁터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되었습니다.

김승호 인천하늘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배준용 기자

 

◆인류 역사상 가장 잔혹한 현장  아우슈비츄Auschwitz  Poland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는 나치가 유태인을 학살하기 위하여 만들었던 수용소이며, 폴란드의 오슈비엥침(옛이름 아우슈비츠)에 있는 옛 수용소이다.

 

나치의 유대인 학살은 1941년 소련 침공시,하인리 히틀러는 SS특별행동부대(SS Einsatzgruppen)을 편성하여 국방군의 뒤를 따라 각종 처형임무에 투입하였다.

 

이들이 처형한 유대인, 공산주의자, 정치장교, 공산청년동맹 소속 공산주의계 청년 들로서 처형 방법은 직접총살이었다. 그러나  처형 속도와 탄약 문제가 심각했으며 부대원들에게서 심리적인 부작용 현상이 발견되었다

 

그래서 히틀러는 자동차 배기가스를 이용한 S트럭이었으나 불결한 결과로 인해 처형대원들의 불만을 샀고, 다시 기존 강제수용소와 S트럭에서 사용한 가스를 이용한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였다.

 

그 결과가 독가스를 이용한 유대인 학살이라는 범죄이다.

 

 

 

위치는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약 300km 크라카우에서 서쪽으로 약 61km  떨어진 곳이며 제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히틀러의 악명이 높은곳 이곳에서 처형된 사람들은 유태인·로마인 옛 소련군 포로·정신질환을 가진 정신장애인 동성애자·기타 나치즘에 반대하는 자들이었다. 

 

 

▲바우케나우에 제 2 수용소 건설  

 

나치는 아우슈비츠( 정확한 지명은 폴란드의 오슈비엥침 Oswiecim)의 유태인 제 1 수용소가 수용인원이 넘치자 아우슈비츠 제 1 수용소에서 3km 떨어진 브제진카(독일식 표기는 비르케나우 BIRKENAU ) 마을에 아우슈비츠의 제 1 유태인 수용소보다 약 20배 정도 큰 규모의 제 2의 아우슈비츠 유태인 수용소를 만들게 된다. 

 

 이 곳에는 2,000명씩 들어가는 독 가스실이 4개며 15분이면 8,000명이 질식사하고 30분이면 전부 소각할 수 있는 규모의 시설이 있었다고 한다. 우리가 영화나 다큐멘터리에서 보게되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모습은 브제징카 제 2유태인 수용소를 형상화한 것이다. 이곳의 입구는 "죽음의 문"이라고 불렀으며 열차노선이 끝나는 부분에 "국제 위령비"가 있다.

 

 

1945년 기준 약 600만 명(유럽 전체 유대인의 80%)이 살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1945 1월 27일 소비에트 연방의 붉은 군대의 진주로 인하여 해방되었다.

 

▲나치가 세운 강제수용소 AUSCHWIT I 로서 전체 28동으로 되어 있다.

 

 

희생자 수

 옛 소련군의 발표에 의하면 기존에 아우슈비츠에서 학살당한 사람 약 400만명 중에서 약 250만명이 유대인이다. 

 

그러나 뉴스위크지 1995년 1월 18일 자의 기사 에 의하면, 아우슈비츠에서 죽은 사람은 유대인을 포함하여 110만 ~ 150만명으로 추산했으며, 가장 많은 희생자가 유태인인 것은 분명하지만, 정확하게 몇 명이나 죽었는지는 알 수 없다고 했다.

 

유태인 외에  희생자들은 폴란드 양심수, 옛 소련군 포로(주로 정치장교), 집시민족 등이었다. 이어 2005년 아우슈비츠 해방 60주년 행사를 알리는 기사에서는 유태인 희생자 수를 100만명으로 쓰고 있다

 

▲박물관 사무소 건물

 

 

 

제1수용소 건물들은 빨간 벽돌건물들로 되어 있으며 현재는 박물관과 전시관으로 꾸며져 잘 보존되고 있다.

1947년에 세워진 희생자 박물관은 1979년에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이중 전기 철조망  - 탈주를 못하게 이중 전기 철조망으로 붉은 벽돌로 된 수용소를 감싸고 있다.

 

 

 

 

▲박물관에 있는 추모비 - 모든 관람객들이 이 앞에서 머리숙여 묵념하고 간다

 

 

▲독  가스통

 

 

당시 지리적인 근접성으로 소련군이 먼저 폴란드에 들어 왔을 때, 발견된 여자 머리카락이 3톤이었고

보통은 6~7톤씩 있었단다. 독일군은 이 머리카락으로 군용 모포를 만들어 각 군부대에 보급 했다고 한다 

 

전시실 각 방에는 이 머리카락말고도 고급 가죽신발, 살림도구, 안경, 옷가지 주소가 적힌 가방등등이 엄청나게 많이 쌓여 있었는데, 그 당시 유태인들이 얼마나 잘 살았는가를 알수 있었다.

 

 

▲독 가스실에 들어 가기 전에 샤워장으로 들어 간다고 거짓말을 하여  벗어 놓게한 의수와 의족들 

 

너무나 빈약한 한 끼의 식사 

 

▲굶주림에 시달리면서 죽지 않으려고 웅크리고 식사하는 모습의 조각상

 

 

▲총살의 벽 -  아우슈비츄 제10불럭과 11불럭 사이에 벽으로 이앞에서 수 천명이 총살 당했다.

 

▲독 가스실 요도

 

나치의 악랄한 명성을 떨쳤던 독 가스실의 그림이다. 그 때 죽음의 독 가스실 앞에는, 들어 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샤워장으로 위장하기 위하여이 세척실이라고 쓰여 있었고, 입구에서 2인당 비누 한개씩을 나누워 줌으로서 모두들 샤워장으로 들어가는줄 알았다. 

 

▲독 가스실 입구 - 원래는 폴란드군의 시신안치소였던 것을 독일군이 가스실과 시신화장소로 개조하였다.양쪽 뚝은 가스가 새어 나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독일군이 흙을 덮었다고 한다. 독가스실에서는 한 번에 약 2,000여명의 수용자가 학살당했다.

 

대부분의 피해자들이 노동력이 없는 노인과 여성, 그리고어린이 들이었는데, 수용소 도착즉시 선별되어 보내졌다. 독 가스실은 대개 샤워실의 모양을 하고 있었는데, 나치는 학살 피해자들에게 샤워를 하라고 하여 옷을 벗게 한 뒤,가스실에 보내어 학살하였다. 사용된 독가스는 효과가 빨리 나타나는 치클론 B라는 가스였다.

 

▲독 가스실 내부의 추모 꽃 다발 

 

아우슈비츠 수용소 내부시설 중 독 가스실로서 관광객들이 머리숙여 애도를 표하고 지나간다. 1941년 9월, 소련군 포로와 유대인 수용자들이 처음으로 독 가스실에서 학살 당한 아우슈비츠의 만행이 첫 학살이었다.이 독 가스실은 1회 400명을 질식사 시킬 수 있는 시설이다.

 

이후 수용소 내에서 죽은 전체 인원은, 유대인 150만명을 포함해 600만이라는 사람이 희생되었다. 유대인이 300만명이라는 얘기도 있는데, 시설규모나 시간으로 보아 학자들 사이에서는 150만 명이라는 것이 유력하단다.  

 

▲시체 소각장 전경 

 

학살 피해자들의 시체는  소각로 앞 부분에 화로가 있어 시신을 세겹으로 쌓은 후 한번에 200명 정도씩

대량으로 불태워졌는데 하루에 약 1,500~2,000구의 시체가 소각되었다.

 

 

경 악

어떻게 이럴수가 있을까? 두번다시 생각하기 싫은 곳이다.사진은 박물관 직원에게 양해를 얻어 그 참상의 자료들의 일부를 촬영할 수 있었다.  관광객 모두는 머리를 숙이고 어두운 마음으로 관광을 마치고 나오고 있다. 

 

▲Oswieecim 기차역 앞 정원

 

크라코프 구시가지에는 유명한 '야기에오 대학이 있다. 지동설을 주장한 코페르니쿠스가 수학했고, 또 2005년에 타계한 교황 요한 바오르 2세도  여기서 수학했으며 졸업 후에는 교수로 재직한 곳이다.

 

▲끝없는 평화로운 초원

 

 

 

 

유태인 수용소 - 아우슈비츠<폴란드어:Oswiecim>

 

크라코프 서쪽으로 61km 떨어진 곳에 제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히틀러의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 유태인 제 1 수용소가 있다. 이곳의 정확한 지명은 폴란드어로 '오슈비엥침'이다. 나치는 오슈비엥침의 유태인 제1 수용소가 수용인원이 넘치자 이곳에서 3km 떨어진 '브젠진카(독일어:비르케나우) 마을에 제1 수용소의 10배 가량의 제 2 수용소를 만들게 된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 인생은 아름다워'의 무대이다.

 

 

폴란드는 이곳을 회복하자마자 독일어식 발음인 '아우슈비츠'폴란드 옛 이름 '오슈비엥침'으로 재빨리 되돌렸다비참했던 역사를 더 이상 기억하기 싫어서였다. 그리고 박물관과 전시관으로꾸몄다. "가해자를 용서하라. 그러나 잊지는 말자"라는 말처럼 폴란드인들은 이곳을 민족정신의 산 교육장으로 삼고 있다고 한다.

 

▲아우슈비츠 제 1 수용소는 전체 28동으로 되어 있고 약 150만 명이 목숨을 잃은 곳 건물은 빨간 벽돌건물이며 현재는 박물관과 전시관으로 꾸며져 있다.

 

▲나치 친위대SS(Schutzs)가 인원 파악을 쉽게 하기 위해 열을 맞추도록 오케스트라를 연주하는 모습이다.

 

 

 

 

▲1945년 소련군이 아우슈비치를 해방시켰을 때 자루에 담아서 카펫용으로 수송하려던 머리카락 7kg을 찾아냈다고 한다.

 

▲생체실험에 이용한 어린이들의 모습이다.

 

말라빠진 두 다리로 생식기가 잘린채 상반신을 지탱하고 서 있는 쌍둥이. 맨발인채로 12시간이나 밖에 서 있게 하여 동상에 걸리게 한 소녀도 있었다고.

 

 

 

◆풍경

▲그단스크의 보름달

 

▲얼어붙은 숲과 호수

 

▲폴란드 타트라스 산

 

 

 

▲폴란드 포즈난 광장에서 1만개가 넘는 등불을 띄우는 축제

 

▲바르샤바 잠코비 광장

 

▲바르샤바 상공

 

 

 

▲폴란드 우산 시위 - 16.10.3 낙태금지 법안에 항의하는 수천명의 시민들

 

 

 

 

 

 

 

 

▲열차 충돌

 

 

▲폴란드 대통령 탑승비행기 추락사망

 

 

▲100년된 성 보이치에흐 교회가 13. 9. 15. 불타고 있다

 

 

▲ 바르샤바의 거리가 홍수로 물에 잠기다 13. 6. 9

 

 

■ 폴리네시아 [Polynesia]

태평양의 중부와 남부에 펼쳐져 있는 여러 섬을 통틀어 이르는 하와이 제도뉴질랜드, 이스터섬을 꼭짓점으로 하는 삼각형의 해역에 있으며 대부분이 산호초와 화산섬으로 이루어져 있다원주민은 폴리네시아인이며 서사모아통가피지의 여러 나라가 있다.

 

육지 총면적 약 2만 6000 km2. 폴리네시아란 ‘많은 섬들’이라는 뜻이다. 육지면적은 작으나 섬들이 분포하는 해역은태평양의 거의 반을 차지하며, 서부의 엘리스 ·통가 ·사모아 ·토켈라우 ·피닉스 제도(諸島), 중부의 쿡 ·라인 제도, 남동부의 투부아이 ·소시에테 ·투아모투 ·마르키즈 제도, 북부의 하와이 제도 및 남동쪽 끝의 이스터섬 ·살라이고메스 제도, 남서단의 뉴질랜드섬 등이 포함된다.

폴리네시아의 낮은 섬들은 대부분 산호초이고 높은 섬들은 거의가 새로운 현무암 화산이다. 폴리네시아는 전체가 대체로 균일한 기후를 나타내는데, 대부분의 섬들이 남동 무역풍영향권에 속하여 높은 섬들의 바람받이에는 강수량이 많아 삼림이 무성하고 바람그늘에는 강수량이 적다. 또 바람그늘 쪽에는 강수가 없는 경우가 꽤 많아서 사람이 살지 못하는 섬도 적지 않다.

광대한 해역에 섬들이 산재하지만 주민은 폴리네시아인(人)으로서의 현저한 동질성을 보여, 남서단의 뉴질랜드 원주민 마오리족(族)의 언어가 오늘날에도 최북단 하와이의 카나카족에게 통한다. 정치적으로는 대체로 북부(하와이)는 미국, 서부(사모아 ·통가 ·피닉스 ·쿡 등)는 영연방 제국, 동부(소시에테 ·투부아이 ·투아모투 등)는 프랑스, 그 동쪽(이스터 등)은 칠레에 의해 관할되어 왔으나, 근래에는 사모아(1962.1) ·통가(70.6) ·투발루(엘리스 제도, 78.10) 등의 독립국도 생겨났다
.

폴리네시아인은 형질적으로 꽤 명확한 단일 인종을 형성한다. 일반적으로 남녀 모두 큰 키(167.5∼174.8 cm)에 당당한 체구를 지니며, 피부는 밝은 갈색이고 모발은 직모(直毛) 또는 파상모(波狀毛)이다. 지적 수준은 오세아니아에서 최고라고 할 수 있다. 폴리네시아 서부, 즉 통가 ·사모아에서는 멜라네시아인(人)과의 혼혈이 꽤 두드러지나 동부로 옮아가면서 폴리네시아인으로서의 순수성이 높아진다. 폴리네시아인이 아시아에서 옮겨간 것은 기원전 수세기 때이며 그 후 10여 세기 사이에 폴리네시아 전역에 분포되게 되었다.

카본데이팅(방사성탄소에 의한 연대측정)에 의한 폴리네시아인의 거주증거는 가장 오래된 것이 르키즈의 BC 150년경으로 추정되고, 이스터섬이 4세기경, 하와이가 9세기, 뉴질랜드가 14세기경으로 여겨진다. 기원전 수세기경에 동남아시아해안지대에서는 일부 벼농사가 영위되었을 것으로 여겨지나 역시 타로감자 재배와 어로가 생업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것은 문화사적으로는 하크경(耕:Hackbau)의 문화단계인데, 폴리네시아인은 그와 같은 문화를 가지고 바다를 건넜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들은 아우트리거의 배나 더블카누로 널리 태평양을 항행하고, 하늘을 32등분한 해도를 사용한 해상민족이었다.

사회적으로 미크로네시아 ·멜라네시아에 비해 한층 엄중한 신분제도가 실시되고 있는데, 일반적으로 부계(父系)를 원칙으로 하며 토지의 상속은 모두 남계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 점에서 멜라네시아(특히 뉴기니와 폴리네시아의 중간) 사회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토지소유 형태를 예로 들면 일반적으로 말단의 경우 가족의 장(長)이 토지를 소유하나, 다시 씨족이나 부족의 장(長)이 중층적(重層的)으로 토지지배의 권한을 가지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가족의 장이 토지를 소유하되 그것은 근대적인 토지 소유의 개념과는 다르다. 말하자면 큰 친족집단(부족)에 속하는 토지의 일부를 일정한 관습적 상속권에 의해서 관리하는 데 불과하며, 따라서 토지 사용권을 소유하는 데 불과하였다.

식민정책의 결과로, 또는 세계경제와의 관계가 밀접해지는 데 따라 가족 중 평민 남자로서 자신의 명의로 토지를 소유하는 자가 각처에서 나타나고 있으나, 그런 경우라 할지라도 자신의 뜻대로 자유로이 토지를 처분할 수는 없다. 결국 공동체적 토지소유에서 개인적 토지소유로의 발전도 근대적인 의미의 법적 근거에 따른 자유로운 개인소유의 단계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한편, 법적인 근거에 의해 개인적 토지소유제로 전면 개편된 하와이나 뉴질랜드에서는 원주민의 토지가 거의 외래 플랜터(농원주)의 수중으로 흡수되어 버리는 결과를 낳았다.

본래 폴리네시아의 토지소유는 부족장으로부터 씨족장에게, 다시 씨족장으로부터 가족장에게 할당된 것이어서 부족장, 씨족장, 그리고 가족장은 각각 대추장(大酋長), 고위 추장, 보통 추장이라는 신분에 해당되어 사회적 신분관계가 엄격하였다. 그리고 하와이의 카메하메하 왕조나 타히티의 포마레 왕조와 같이 근세 유럽인이나 유럽 무기의 힘을 빌려 다른 부족을 정복해서 일종의 봉건국가를 형성하기까지에는 초(超)부족적인 통일국가의 형성이 불가능했다.

통가에서는 10세기경 투이통가라고 일컬어진 성스러운 왕에 의해 통일이 이루어졌으나 그 정치적 영역은 통가타푸섬 내부에 국한되어 있었을 뿐 통가 제도 전체를 초부족적으로 지배했던 것은 아니었다. 또 사모아에서는 19세기 중엽까지 몇 개의 왕가(부족장의 가계)에 의해 각자의 영역이 통치되어 오는 동안에 부족간의 싸움이 끊임없이 되풀이되었으나, 결국 스스로의 힘으로는 통일국가를 형성하지 못하고 외국 세력의 간섭에 의해서 비로소 명목상의 통일국가가 성립되었다.

폴리네시아에서는 상술한 바와 같이 주민의 사회적 지위가 대추장 ·고위 추장 ·보통 추장 ·평민이라는 계층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그 밖에 추장에게는 반드시 몇 사람의 대판추장(代辦酋長)이 딸려 있는 것이 상례로 되어 있다. 대판추장은 추장을 대신하여 지방이나 읍 ·면을 다스리거나 추장을 보좌하는 일을 맡는데, 대판추장도 계층구별이 있다.

일반적으로 추장의 지위에 있는 자는 대단한 권위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 앞에서 쉽게 입을 열지 않았고 그 대변인의 역할을 대판추장이 맡았다. 또 추장에게 부수된 권위는 자연히 추장으로 하여금 아랫사람들에 대해 여러 가지 금령(禁令)을 발하게 하여 행동을 제약하여 왔다. 이것이 이른바 ‘타부(tabu/tapu)’로, 추장의 보이지 않는 마력(魔力), 즉 ‘마나’의 발현이다. 터부(taboo)란 말은 타부에서 온 것이다. 이처럼 폴리네시아인의 종족국가는 마나적 ·신권적(神權的) ·터부적 국가였다고 할 수 있다.

[출처] 폴리네시아 [Polynesia ] | 네이버 백과사전

 

◆보라보라 섬

프랑스령 폴리네시아 보라보라섬

▲남태평양 중부 폴리네시아 소시에테제도의 타히티섬 북서쪽에 있는 보라보라섬


면적 약 30, 인구 약 7,000명 정도이다. 타히티섬에서 북서쪽으로 약 240km 떨어진 곳에 있다. 길이 10, 너비 4㎞의 산호섬이며 32㎞에 이르는 섬 일주도로가 나 있다. 수온이 따뜻하고 수심이 얕아 휴양지로 개발되어 각종 해양스포츠가 활발하며 관광업이 발달하였다. 태평양의 진주라는 별칭으로도 불리고, 영화 《허리케인》을 촬영했던 곳이기도 하다. 2차 세계대전 때 미군이 쓰던 대포가 남아 있다.

전형적인 환초 섬으로서 섬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투명한 라군과 모투들이 매우 인상적이고 공항은 본섬의 북쪽에 있는 모투 무테에 있고, 공항에서 주요 마을인 바이타페까지 에어 타히티의 고속 셔틀 보트가 운행되고 있다. 섬의 해안을 끼고 도는 도로의 길이는 약 29㎞이며 자동차로는 약 1시간 30분이면 일주할 수 있다.

도로는 투이바호라 곶을 넘는 부분 (자전거, 스쿠터는 미끄러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을 제외하면 평탄한 편이다. 이 밖에도 보라보라 섬에는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이 남겨 놓고 간 7인치 포의 잔해 8 문이 남아 있다. 섬을 일주하다 보면 쉽게 눈에 띤다.

섬에서 가장 이름난 해안가이며 주요 숙박 시설이 몰려 있는 마티라 곶 부근은 청록색의 투명한 라군과 백사장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어, 이 라군의 아름다움을 [태평양의 진주]라고 일컬을 정도다. 또한 보라보라 섬은 영화「허리케인」의 무대였던 것으로 유명하다. 보라보라는 뾰족한 바위 봉우리로 이루어진 화산섬이다. 화산섬을 둘러싼 바다는 연둣빛. 해저 산호가 가락지 모양의 띠를 이루고 있다. 띠 안에 섬이 솟아난 형국이다. 하늘에서 보라보라를 내려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가 쏟아져 나온다.보라보라의 바다는 한눈에 담을 수 없다. 호텔 앞 바다는 연푸른 빛을 띤 산호지대. 조금만 배를 타고 나가면 수많은 푸른 색으로 칠해진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모래사장이 훤히 보일 정도로 투명하거나 원시림 같은 녹색 바다가 이어지고, 다시 연두색으로 변하기도 한다. 색의 조화가 놀랍다. 이처럼 바다 빛깔이 다양한 것은 맑은 물 속의 산호 때문이다.

보라보라의 바깥쪽 바다는 해저 산맥처럼 이어진 산호띠인 리프(Reef)로 이뤄져 있다. 리프가 파도를 막아주는 까닭에 큰 파도가 없이 바다는 늘 잔잔하다. 그 안에 야자수만 가득한 새! 끼섬 모투(Motu)가 흩어져 있다. 산호가루가 부서져 섬이 된 모투의 앞바다는 연하디 연한 푸른 빛. 햇살이 해저 산호가루에 반사돼 물빛도 눈부시다. 산호에 닿은 햇살은 마치 물고기처럼 퍼덕댄다. 모투와 모투는 멀리서 보면 끊어질 듯 이어지며 다시 반지처럼 이어진 아톨(Atol)을 형성하고 있다. 모투와 아톨로 둘러싸인 바다는 호수처럼 잔잔한 라군(Lagoon·석호)을 이루고 있다. 모두 산호가 수백만년동안 만들어낸 신비다. 형형색색 다른 빛깔로 빛나는 바다 모습을 보려면 화산 봉우리인 오테마누(722)의 옆쪽이나 전망대에 올라서야 한다.

보라보라는 프렌치 폴리네시아에서도 역사가 가장 오랜 섬이다. 타히티의 섬들은 해저폭발로 이뤄졌다. 3백만년 전 보라보라가 생겼고 그 뒤 다른 섬들이 생겨났다. 보라보라는 원래 바우아바우에서 나온 말. 원주민 말로 ‘어둠 속에서 솟아났다’는 뜻이다. 또 ‘마이 테 포라’라고도 하는데 신께서 만들었다는 의미다.

보라보라가 서방세계에 알려진 것은 1767년 영국왕립함대 왈리스 함장에 의해서였다. 보라보라에 처음 상륙한 사람은 1768년 쿡 선장이다. 2차 세계대전을 앞두고 미국인들이 들어오면서 보라보라는 유명해졌다. 하와이 진주만 공습을 당한 미국은 남태평양의 보라보라에 급유를 위한 기지와 활주로를 만들었다.

1942
년부터 1946년까지 미군이 주둔했지만 전쟁은 없었다. 당시 미국 해군장교로 보라보라에 왔던 제임스 미케너는 ‘남태평양 이야기’란 책을 통해 상공에서 바라본 보라보라의 모습을 ‘남태평양의 진주’라고 표현했다. 보라보라의 모습이 마치 조개가 입을 열고 진주를 품은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보라보라의 흑진주도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이 책은 뮤지컬로 브로드웨이에서 히트했고 영화로도 제작됐다.

프렌치 폴리네시아를 여행하기 가장 좋은 때는 요즘이다. 4월부터 10월은 건기, 12월부터 3월까지가 우기다. 건기에는 적도상의 다른 섬과 달리 후텁지근하지 않다. 태평양을 건너오는 무역풍 때문이다. 시차는 한국보다 19시간 빠르다. 평균기온은 25.9. 프랑스령인 까닭에 프랑스어가 주로 쓰이지만 호텔에서는 영어가 통용된다.

▶교통편 국내에서 직항편은 없다. 일본의 오사카나 도쿄에서 에어 타히티누이(서울지점 027754697)로 갈아타야 한다. 오사카는 인천공항에서 1시간30, 도쿄는 2시간 거리. 일본에서 타히티섬 파페테공항까지는 약 12시간 걸린다. 파페테에서 보라보라까! 測 항공기로 45. 파페테 페리터미널에서 모레아섬까지는 배로 30.

 

◇보라보라의 풍경

▲남태평양 중부 폴리네시아 소시에테제도의 프랑스령 섬으로, 면적 약 30제곱km,
인구 약 5,300 여명으로 타히티섬에서 북서쪽으로 약 240 km 떨어진 곳에 있다.

 

 

 

 

 

 

 

 

 

 

 

 

 

 

 

 

 

 

 

 

 

 

 

 

 

 

 

 

 

 

 

 

 

 

 

 

하와이 진주만 공습을 당한 미국은 남태평양의 보라보라에 급유를 위한 기지와 활주로를 만들어 1942년부터 1946년까지 미군이 주둔했지만 전쟁은 없었다. 당시 미국 해군장교로 보라보라에 왔던 '제임스 미케너'는 1947년 ‘남태평양 이야기’란 소설을 통해 상공에서 바라본 보라보라의 모습을 ‘남태평양의 진주’라고 표현했다. 보라보라의 모습이 마치 조개가 입을 열고 진주를 품은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보라보라 펄 비치 - 물이 맑아 배가 공중에 떠 있는 착각을 일으킨다

 

 

 

 

 

 

■푸에르토리코 Puerto Rico

▲국기

 

서인도제도에 있는 미국 자치령.
공식 이름은 Estado Libre Aso-ciado de Puerto Rico/Commonwealth of Puerto Rico.

푸에르토리코의 초기 주민은 플로리다 남부와 남아메리카 오리노코 강 유역에서 이주해온 이주민들이었다. 1493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이 섬에 도착했을 때 이곳에는 유순한 아라와크 인디언이 호전적인 카리브 인디언에게 시달리며 살고 있었다. 1508년 후안 폰세 데 레온은 카파라 마을을 세우고 처음으로 금을 채굴하고 농사를 지으려는 시도를 했다.

 

16세기말 동안 영국인과 네덜란드인의 공격 때문에 스페인은 섬에 견고한 요새를 세웠으나 18세기말까지 푸에르토리코는 대체로 경제적으로 미개발 상태에 있었다. 1830년 이후부터 사탕수수·커피·담배 등의 3가지 수출농작물에 바탕을 둔 플랜테이션 경제가 점차 발달했다. 19세기말 푸에르토리코는 정치적 독립을 주장하기 시작했으며, 1897년 스페인으로부터 자치정부의 방대한 권한을 부여받았다. 이듬해 미국-스페인 전쟁 동안 미국군이 푸에르토리코를 점령했으며, 전후 푸에르토리코는 미국에게 양도되었다. 초기에 미국정부는 스페인 치하에서 자치권을 얻기 위해 투쟁했던 많은 푸에르토리코인의 원성을 사면서 푸에르토리코와 그 주민들을 미국화하려고 시도했다. 1917년 제한된 자치정부가 승인되었으며, 푸에르토리코 주민은 미국 시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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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7.04  황새 따라하던 뱁새 푸에르토리코, 결국…

[분수 모르고 미국式 임금·복지 고집… 디폴트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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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그리스 보는 듯
부채 720억弗 쌓여 있는데 복지 구조조정은 뒷전… 보조금이 월급보다 많기도

최저시급 美와 맞먹어
기업들 "부담 된다" 이탈

"과도한 임금과 복지 체계를 수술하지 않으면 디폴트(국가 부도)를 벗어날 길이 없다."


언뜻 디폴트 위기를 겪는 그리스에 대한 처방을 연상케 하는 이 진단은, 세계은행 부총재를 지낸 앤 크루거 스탠퍼드대 교수(경제학)가 카리브해의 섬나라 푸에르토리코에 대해 지난달 29일 내놓은 분석보고서 일부다. 그리스가 유로화라는 단일 통화권에 남아있기 위해 자국 상황에 맞지 않는 긴축 정책을 고수하다 망가진 것처럼, 미국 자치령인 푸에르토리코도 미국식 임금과 복지 체계를 따라가다 부도 위기에 몰렸다는 것이 보고서 핵심이다. '중남미의 그리스'로 불리는 푸에르토리코의 현재 상황이 그리스와 판박이처럼 닮았다는 것이다.

 

크루거 교수는 푸에르토리코 실정에 안 맞는 높은 최저 시급을 비판했다. 푸에르토리코의 최저 시급은 시간당 7.25달러로 미국 본토와 같다. 최저 시급이 푸에르토리코 근로자 임금 중간값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77%, 50개주 가운데 최고인 사우스다코타주(59%)보다도 높다. 실질 임금 수준에 비해 최저 시급이 너무 높아 일자리가 줄어든다는 것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 "푸에르토리코의 무능한 정치인들이 세계 최강대국 미국의 일원이라는 환상에 젖어 최저 시급 인하 같은 개혁 조치를 등한시했다"고 꼬집었다. 유로존에 속한 그리스처럼 푸에르토리코 역시 자기 체구보다 큰 신발을 신다 병들었다는 것이다.

경제 능력을 넘어선 과도한 복지 혜택도 푸에르토리코와 그리스의 공통점이다. 연금·복지 구조조정을 미루다 탈이 난 그리스처럼 푸에르토리코도 미국 본토 수준의 복지 혜택을 제공하고 있다.

보고서는 "푸에르토리코 빈곤층 3인 가구가 받는 정부 보조금은 월 1743달러로, 최저 시급 적용 대상자의 월평균 소득 1159달러보다 많다"고 지적했다. 일할 의욕을 갖기 어려운 구조다. 푸에르토리코의 15~64세 인구 가운데 취업자와 구직 활동자 비율은 43%, 미 본토(63%)보다 크게 낮다.

푸에르토리코는 스페인 식민 지배를 받다가 1952년 미국 자치령으로 편입됐다. 국가원수는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이지만, 2012년 선거에서 당선된 알레한드로 가르시아 파디야 주지사가 행정을 책임지고 있다. 푸에르토리코는 2000년대 초반까지 낮은 인건비와 세율을 앞세워 미국의 공장 역할을 해왔다. 당시 미국에서 팔리던 의류 상당수가 '메이드 인 푸에르토리코(Made in Puerto Rico)'였다. 하지만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시작으로 미국이 인건비가 저렴한 중남미 국가들과 잇따라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푸에르토리코의 미국 기업 공장들은 도미니카공화국·아이티 등 인근 카리브해 섬나라로 이전됐다. 도미니카공화국과 아이티 최저 시급은 1달러가 안 된다.

현재 푸에르토리코는 기존 부채의 이자도 갚기 어려울 정도로 재정이 악화됐다. 실업률은 12%로 미국 본토(5.3%)의 배가 넘는다. 국가신용등급은 디폴트 바로 위 단계로, 그리스와 같다. 하지만 독립국가가 아니기 때문에 그리스처럼 IMF(국제통화기금)의 구제금융도 받을 수 없다. 파디야 주지사는 일단 연방정부의 자금 지원을 기대하고 있지만, 최악의 경우 디트로이트시처럼 미 법원에 파산보호를 신청해야 할 수도 있다.

크루거 교수는 "푸에르토리코가 최저 임금 적용 대상에서 탈출하는 게 우선"이라고 했다. 하지만 WSJ "정치인들은 최저 시급 인하가 정치적 자살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누구도 총대를 메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조선일보 뉴욕=나지홍 특파원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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