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 여행/ 국가별76/ 페루
지구촌 여행/ 국가별76/ 페루
■페루 Peru
페루 공화국, Republic of Peru
▲국기
남아메리카 대륙에서 3번째로 큰 국가. 수도는 리마이며 대다수 국민들의 종교는 로마 가톨릭교이다. 화폐는 누에보 솔이고 농업·제조업·서비스업·광업 등이 근간을 이루는 개발도상의 혼합경제체제이다. 이 중 제조업이 GNP의 약 1/3을 담당하고 있다. 의료보건이 부족한 실정이며 15세까지의 무상의무교육이 실시된다. 언론매체는 검열법이 없는 언론의 자유를 보장한다.
자연환경
지형적으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3개 지역, 즉 코스타(해안지역)·시에라(고원지역)·셀바(동쪽의 광대한 열대우림지역)로 구분된다. 길고 좁은 건조 저지대인 코스타(460m)에 페루의 주요도시들이 있다. 시에라는 옥시덴탈 산계, 센트랄 산계, 오리엔탈 산계 등 안데스 산맥으로 이루어져 있다. 오리엔탈 산계는 고도가 2,750∼5,800m에 이른다. 페루 최고봉은 페루 중서부에 있는 우아스카란 산(6,768m)이다.
시에라 지역의 너비는 북부에서 95km, 남부에서 320km 이하이다. 셀바 지역은 해발 915m 이하의 습한 저지대이며, 아마존 강 유역의 열대우림지역을 포함한다. 페루를 흐르는 아마존 강의 본류로는 마라뇬 강과 우카얄리 강이 있다. 남부의 티티카카 호(8,288㎢)는 고도가 3,810m로 항행할 수 있는 수역 중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고도가 높다.
페루는 대규모 지진이 일어나기 쉽다. 마지막 화산 분출이 1869년에 일어났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지진은 보다 잦은 편이다. 페루의 기후지역은 고도 및 안데스 산맥에 의하여 구분되는 기후형태에 따라 다양한 분포를 보인다. 연평균기온은 해안에서 19∼22℃, 안데스에서 1∼14℃, 동부 삼림지대에서 24∼35℃에 이르기까지 차이가 크다. 강수량은 동부에서 1,900∼3,175㎜로 가장 많고, 건조한 서부 해안에서는 50㎜로 가장 적으며, 설선은 4,480∼5,000m의 분포를 나타낸다.
서부해안지역은 식생이 희박해 선인장과 메뚜기콩 정도만이 자란다. 시에라의 식생에는 다년생 관목, 선인장, 후추나무, 키 큰 초본류 등이 포함되며, 페루에서 가장 식생이 풍부한 몬타냐 지역에서는 야생고무·마호가니·기나수·코코아·바닐라·쿠라레나무 등을 주로 볼 수 있다. 낙타와 모습이 비슷한 라마(현지에서는 '야마'라고 함)·알파카·비쿠냐·과나코 등 유명한 페루 특유의 동물들이 모두 고지대에서 방목된다.
아마존 강 유역에 앵무새·원숭이·나무늘보·재규어·카피바라·악어 등이 서식하며, 강에는 피라니아가 산다. 페루에는 엄청난 양의 금·은·구리·철광·인산염·망간 등이 매장되어 있다. 북부 사막, 아마존 강 유역, 좁은 대륙붕에는 석유와 천연 가스가 대규모로 매장되어 있다. 수력발전의 개발 가능성도 매우 크다.
역사
페루에는 적어도 BC 8000년경부터 사람이 거주하기 시작했다.
13세기 중반부터 발달된 다양한 문화가 페루 각지에서 꽃피었다. 1438년경 잉카 제국이 50년에 걸친 정복사업을 시작했으며, 결국은 지금의 페루, 볼리비아, 칠레, 에콰도르, 아르헨티나 북부에 해당되는 지역을 장악했다. 1524년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처음 페루를 탐험했다. 그는 1531년 소규모 군대를 이끌고 다시 와서 잉카 제국을 정복하고, 잉카의 왕인 아타우아이파를 죽였다.
스페인은 페루 지역에 대한 통치권을 강화했고, 약 300년간 페루는 스페인의 통치하에 있었다. 19세기초 독립운동 당시도 페루는 스페인 국왕에게 충성을 지키고 있었다. 페루의 독립운동은 다른 스페인 식민지들이 전쟁을 통해 독립을 쟁취한 것에 힘입어 일어났다. 아르헨티나의 해방자 호세 데 산 마르틴 장군이 1821년 리마를 점령한 후 페루는 독립을 선포했다.
1836년 안드레스 산타 크루스는 페루-볼리비아 연방을 만들기 위해 페루와 볼리비아를 합병시켰으나 이 합병은 1839년 페루군이 칠레에 패하자 깨어졌다.
1844∼62년 라몬 카스티야 장군의 페루 통치기간 동안 정치적 안정을 되찾았다. 카스티야는 공공교육을 발전시켰고 노예제를 폐지했으며 군대를 강화시켰다. 1870년대에 시민당이 형성되면서 국가의 통제권이 군(軍)에서 민간정부로 돌아왔으나 심각한 경제침체를 해결할 수는 없었다.
경제적 혼란은 칠레와의 전쟁(1879∼84)에서 패함으로써 더욱 심각해졌다. 공공부채가 늘어남에 따라 경제회복을 돕기 위해 채권자들이 1889년 페루회사를 설립했다. 1895년에 민주당이 성립되고 니콜라스 데 피에롤라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정치적·경제적으로 질서정연한 발전을 이룬 후에 시민당의 아우구스토 레기아 이 살세도가 대통령에 당선되어 4년간(1908∼12) 통치했다.
레기아는 1919년 재선되어 미국 출자공공사업계획에 착수했다. 그는 재선되었지만 인기가 하락했고, 1930년 군사 쿠데타로 축출되었다. 쿠데타군의 지도자인 루이스 산체스 세로 대령은 1931년 대통령에 선출되었으나 1933년 암살되었다. 그의 후임자인 오스카르 베나비데스 장군은 경제를 회복시키는 데 주력했다.
1939년 마누엘 프라도가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미국의 정책에 동조하는 입장을 취했다.
전쟁이 끝나자 마누엘 오드리아가 정권을 장악했다(1948). 1956년 오드리아의 뒤를 이어 프라도가 대통령에 재선되었으며, 1963년에는 페르난도 벨라운데 테리가 대통령이 되어 효율적인 농경지 이용, 조직적인 지역사회 개발을 시작하고 문맹퇴치에 힘썼다.
1969년 군사평의회가 정권을 잡고 난 뒤 많은 외국상사 재산을 국유화했고, 대지주가 소유했던 토지를 소작농이 수용하도록 하는 사업을 추진했다. 1975년 8월 또다른 쿠데타가 일어나 기존의 군사평의회를 대체했고, 문민정부를 회복하는 기반을 닦았다. 새 군사평의회는 1978년 새헌법 초안을 위한 제헌의회를 소집했다.
1980년 벨라운데는 대통령에 재선되었다. 1985년에는 APRA의 알란 가르시아 페레스가 대통령이 되었다. 이들 두 정부는 모두 높은 인플레이션과 실업, 엄청난 외채, 테러리스트 전술을 사용하는 신(新)마오주의 단체인 '빛나는 길'(Sendero Luminoso), 투팍 아마루 혁명운동 등 게릴라들의 폭력에 시달렸다.
마약 거래와 만연해진 코카나무 재배로 경제개혁도 난관에 부딪혔다. 1990년 6월 대통령 선거에서 일본계 알베르토 후지모리가 당선되었다. 1992년 대통령에 의한 헌정중단조치, 의회와의 대결 및 대통령 암살과 정부 전복 쿠데타 기도 등으로 정국이 혼미했으나 같은 해 11월 총선거에서 후지모리가 승리함으로써 현재는 진정되어가는 추세이다.

▲마추픽추(Machu Picch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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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거리
◇잉카문명의 신비, 페루 마추픽추
해발 2,280m 높이에 돌 수 십만 개를 쌓아 만든 비밀의 도시가 존재하고 있다면 상상이 되겠는가? 하지만 이것은 상상이 아닌 엄연한 현실이라는 것이 포인트! 남 아메리카 대륙을 대표하는 볼거리이자, 세계의 불가사의 중 하나로 손꼽히는 페루의 마추픽추(Machu Picchu)가 바로 그 곳이다.


1. 거대한 제국의 흔적, 마추픽추
페루의 수도 리마에서 동남쪽으로 위치한 마추픽추는 해발 2,280m 정상에 위치하고 있다. 쿠스코 북서쪽의 우루밤바 계곡에 위치한 두 개의 뾰족한 봉우리와 울창한 밀림에 가려 산 아래에서는 그 존재가 드러나지 않아 쉽게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곳이기도 하다. 마추픽추를 누가 왜 만들었는지에 대한 정설이 여러 가지가 있으나 과거 페루를 지배했던 스페인의 공격을 피해 세운 도시라는 설도 있고 자연 재해를 대비한 장소로 마추픽추를 건설했다는 설 또한 존재한다. 하지만 중요한 건 지금껏 그 누구도 명확한 마추픽추의 건립 이유를 모른다는 것. 그래서 더욱 의미있고 신비스러운 곳일런지도!


▲ 마추픽추로 가는 기차
우루밤바나 쿠스코에서 기차와 버스를 갈아타고 거리에서 파는 왕사탕만한 크기의 옥수수를 먹다보면 어느새 마추픽추에 다다른다. 마추픽추의 입장처에 도착하기 전, 멀미를 할지도 모르니 조심해야 한다. 눈앞에 병풍처럼 펼쳐지는 거대한 산봉우리들이 오른쪽과 왼쪽을 왔다갔다 하면서 보여져 절묘한 페루인의 운전 기술을 엿볼 수 있는데 마치 곡예사가 버스를 움직이는 듯하다. 그렇게 아름다운 산등성이를 바라보는 경치에 취하고 달콤고소한 페루의 옥수수 맛에 반하다 보면 어느새 가슴 설레는 마추픽추 입구에 도달한다


미국의 고고학자이자 예일대학의 역사학 교수였던 하이람 빙엄(Hiram Bingam)이 발견한 마추픽추는 1911년 세상에 그 모습을 처음으로 드러냈다. 초기 마추픽추를 발견했던 당시에는 예일대로 유물이 대부분 건너갔으나 현재는 미국에 정식 반환 요청을 한 페루 정부 덕분에 다시 유물이 돌아왔다고 한다. 금으로 된 유물은 거의 없지만 대부분은 도자기로 만들었다는 것이 특징. 또한 과거 1만명 정도가 살았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이곳에는 몇 만 톤의 돌들을 산 위에 옮겨 신전과 집, 학교와 병원은 물론 계단식 밭과 배수시설, 무덤까지 완벽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 기존의 유적을 보호하기 위해 현지 관리인들이 점프샷(?) 인증 사진 촬영을 금지하고 있었는데 유적들이 무너지는 것을 보호하는 차원이라고 하니 슬프지만 재미있기도 하다.

유적을 둘러보면서 구름 아래의 내 발 밑으로 펼쳐지는 거대한 안데스 산맥의 웅장함에 또 한번 압도를 당한다. 산 아래에서는 절대 보여질 수 없는 공간이었으니 이곳을 '잃어버린 공중도시' 라고 부르는 구나 하는 생각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 진다. 또한 아웅다웅하며 별 것 아닌 일로 마음 상하고 웃기도 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인간이 이런 대자연 앞에서는 얼마나 보잘 것 없는 나약한 존재인지 문득 한없이 내자신이 작아지기도 했다. 이러한 이유들 덕분에 마추픽추는 여행자들 사이에서 '죽기 전 꼭 가봐야 할 세계 불가사의' 중 한 곳으로 해마다 손꼽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달디 단 산위의 바람을 마음껏 코로 흡입하며 심호흡을 해본다. 마추픽추에 오르기 전 고산병을 우려했지만 이미 우루밤바에서부터 서서히 고산 지대로 진입한 덕분에 몸이 적응을 해서인지 그다지 불편함은 느낄 수가 없어 더욱 산 위의 공기가 상쾌하게 느껴진다. 설사 고산병을 겪게 된다 하더라도 일평생 한 번 볼까말까 한 마추픽추인데 그정도 아픔쯤이야 기꺼이 훌훌 털어버리게 되지 않을까?
2. 마추픽추를 위한 관문, 쿠스코(Cusco)
마추픽추를 여행하면서 반드시 들르게 되는 도시, '쿠스코(Cusco)'는 해발 3,400m 에 위치한 고산 도시이다. 리마에서 항공 이동을 통해 대부분 도착하는데 공항을 빠져나오는 순간 감탄하게 된다. 눈앞에 펼쳐지는 선명하고도 거대한 하늘의 구름들이 마치 가짜 그림처럼 선명하게 보여지기 때문이다. 공항 주변은 얕은 산으로 둘러쌓인 분지 형태이기 때문이라는 현지 가이드의 설명이 이어진다. 쿠스코 시내를 가득 메운 주홍색의 기와 지붕은 어릴적 우리나라에서 많이 봤던 집의 형태라 꽤나 친숙하게 다가온다. 거리를 가득 메운 경차 '티코(Tico)'의 행렬도 이를 보태주니 더욱 친근감이 들 수밖에.
쿠스코는 인구 50만명이 사는 페루의 대표 여행 도시이다. 전세계 수많은 관광객들이 1년 내내 방문하니 여행 인프라 또한 잘 갖추어져 있다. 마추피추를 여행하는 다양한 방법, 오가는 교통편, 현지 근교 투어 등 그 어떤 여행정보도 내가 원하는 대로 선택할 수 있어 편리하다. 또한 시내는 페루의 수도 리마와는 사뭇 다른 풍경을 자아낸다. 잉카 시대, 식민지 시대, 그리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3가지의 건축물 양식이 혼합되어 있어 '믹스&매치'의 진수를 보여준다.

▲ 라 콤파니아 데 헤수스 교회
쿠스코의 중심 아르마스 광장을 기준으로 대성당과 라 콤파니아 데 헤수스 교회, 산토 도밍고 교회가 자리하고 있어 도보로의 관광이 가능하다. 산책하듯 자박자박 걸으며 시내를 둘러볼 수 있으니 마추픽추처럼 스케일이 큰 여행지는 아니지만 걷는 재미가 주는 소소함을 느낄 수 있어 매력적이다. 한 눈에 펼쳐지는 쿠스코 시내의 전경은 막힌 속이 뻥 뚫릴 만큼 시원시원하다. 아르마스 광장을 중심으로 몇 바퀴를 걸어봐도 같은 길이 전혀 지루하지 않을 만큼 말이다.

▲ 아르마스 광장
과거 한 시대를 비밀리에 풍미했던 위대한 유적의 흔적이 조금이라도 덜 손상되었을 때 이곳을 향할 수 있다면, 이보다 더 행운은 없을 것이다. 절대 간과하지 말아야 할 아름다운 산중 도시, 쿠스코에서의 여정과 함께 말이다.
조선일보
◇마추픽추 잉카신전

▲멀리서 본 태양의 신전

▲옆에서 본 태양의 신전


▲대신전






▲종이 한 장 들어갈 틈 없이 단단하고 조밀하게 합석 시키는 데에는 젖은 모래를 비벼서 돌의 표면을 매끄럽게 처리했다고 하는데 잉카인의 돌을 다루는 기술은 신기에 가까울 정도입니다


▲정상에서 왼쪽으로 약간 밑에 보이는 건축물이 달의 신전

▲지상의 제왕 퓨마신전

▲콘도르 신전의 오른쪽 날개

▲콘도르 신전의 왼쪽 날개


▲양날개 중앙 하단의 바위에 조각한 콘드르의 머리

▲능묘 (La Tumba Real 태양의 신전 아래에 설치)

▲황족의 미라를 안치하고 제사를 지냈을것이라고 추측되는 곳.
◇마추픽추 주변 경관









◇사라진 잉카의 공중도시 Machu Picchu in Peru
한 건축가는 마추픽추를 이렇게 노래했다. “깊고 깊은 계곡 위에 세워진 이 도시는 자연의 우주적 광경이다. 의례 같은 우아함, 그 돌들이 토해내는 영원의 표현 속에 성스러운 장소로서의 중요한 역할이 반영되어 있다. 안데스의 고봉들이 펼치는 환상적인 세계에 보석처럼 꼭 끼워진 잉카인들의 가장 위대한 유물이다.”
12세기 초 만코 카팍(Manco Capac)의 아들 신치 로카(Sinchi Roca)가 그의 누이동생 마마 쿠라(Mama Cura)를 왕비로 맞으면서 잉카는 신화가 아닌 역사시대로 들어선다. 잉카는 로카왕의 손자 마이타 카팍(Mayta Capac) 시대에 지배 면적이 확대되었고 제9대 파차쿠티 유판키(Pachacuti Yupanqui, 1438~1471) 시대에는 인구가 1100만 명이나 되었다.
16세기 초에는 안데스산맥에서 태평양 해안에 이르기까지 면적이 100만 제곱킬로미터에 달할 정도로 대제국이었고 황제를 정점으로 정치와 사회제도도 비교적 잘 정비되어 있었다. 잉카인들은 읽고 쓰지를 못했다. 그들은 ‘키푸(quipu)’라는 결승문자(結繩文字)를 사용했는데 노끈의 빛깔이나 매듭으로 여러 가지 뜻을 표시했다. 그들은 동물의 힘을 빌리거나 바퀴를 사용하지 않고 도로 · 계곡을 잇는 적교(吊橋) · 농업용수로 · 거대한 성채를 비롯하여 궁전과 신전을 건설했다.
▲잉카인들의 문자였던 키푸(quipu) 노끈의 색깔이나 매듭으로 의사 표시를 했다.
잉카의 의학 · 식물학 지식 수준은 대단했다. 잉카에는 의사계급이 있었고 국가가 고용한 약초 채집자들도 있었다. 잉카 의사들은 절단수술을 했으며 응급상황에서는 심지어 두개골에 구멍을 뚫는 수술도 감행했다. 두개골 수술은 아마 뇌가 부풀어 오르는 치명적인 증상의 처방을 위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고대 이집트인들과 마찬가지로 잉카인들은 미라 제작술을 완벽하게 터득하고 있었다.
한편 잉카인들은 제국 안에서 나는 금으로 찬란한 황금문화를 꽃피웠다. 그들은 구리나 놋쇠를 쓰듯이 황금을 사용했다. 태양을 숭배했던 그들은 태양신을 표현하는 데 황금을 아낌없이 사용했다.
쿠스코는 13세기 초에 건설되어 16세기 중반까지 중앙 안데스 일대를 지배했던 잉카제국의 수도였다. 해발고도 3400미터로 안데스산맥에 위치한다. 이 도시는 피사로와 에스파냐 군대에 의해 16세기에 정복되지만 반듯한 시가지, 아름다운 건물, 거대한 신전으로 정복자들을 놀라게 했다. 이후 쿠스코는 에스파냐풍의 도시로 변모해갔다.
삭사이와만은 ‘독수리여 날개를 펄럭여라’라는 뜻이다.
그런데 잉카인들에게 청천벽력 같은 일이 일어났다. 에스파냐 정복자 프란시스코 피사로(Francisco Pizarro, 1475~1541)가 이끄는 200여 명의 군사가 잉카제국에 들이닥쳐 잉카의 황제를 죽이고 잉카제국을 멸망시킨 것이다. 잉카가 멸망하자마자 황금도시에 대한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마지막 황제 아마루(에스파냐군에 의해 황제로 옹립된 만코 2세의 아들)가 엄청난 보물을 잉카의 마지막 수도 빌카밤바 어딘가에 숨겨놓았다는 것이다.
한때 잉카의 마지막 황제가 엄청난 보물을 숨겨둔 전설 속의 빌카밤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에스파냐 군사들은 빌카밤바를 찾기 위해 혈안이었지만 빌카밤바가 어디인지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었다. 에스파냐 군사에게 사로잡힌 잉카인들도 빌카밤바가 어디인지 밝히지 않았다. 결국 빌카밤바는 소문이 꼬리를 물면서 신비만 더해갔다. 많은 사람들이 소문에 혹해 빌카밤바를 찾으러 아마존 밀림으로 들어갔고 대부분이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그는 빌카밤바를 찾던 중 1911년 잉카인이 세운 공중도시 마추픽추를 발견했다.
황금의 도시를 찾기 시작한 지 200여 년이 지난 1768년 초케키라오가 빌카밤바란 소문이 퍼졌다. 초케키라오는 푸리마 항구에서 가까운 험준한 산속에 있는 유적이다. 1909년 미국 예일대학교의 하이럼 빙엄(Hiram Bingham, 1875~1956)은 빌카밤바를 찾기 위해 아푸리막강 유역의 험한 밀림 속을 탐험하다 초케키라오의 유적을 발견했다. 그곳에는 낭떠러지 위에 우뚝 솟은 궁전과 방형의 제의(祭儀) 광장, 약탈자들에게 짓밟힌 신전들이 있었다.
행정 책임자는 빙엄에게 “이 성채야 말로 잉카제국 최후의 비밀 수도였으며 방대한 재보가 어디엔가 잠들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빙엄도 처음에는 초케키라오가 만코 2세[에스파냐군에게 살해된 아타왈파(Atahualpa)황제의 동생]의 빌카밤바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초케키라오의 지형이 빌카밤바를 묘사한 자료들과 일치하지 않았다. 초케키라오는 빌카밤바가 아니었다.
빌카밤바의 발견에 실패한 빙엄은 1911년 다시 페루를 찾아 탐험을 계속했다. 토착 인디언의 안내를 받은 빙엄은 피사로를 피해 만코 2세가 탈출한 길을 더듬어 나갔고 산봉우리에 있는 폐허의 도시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우리는 인적이 전혀 없는 숲 쪽으로 길을 잡았다. 갑자기 폐허가 된 집들의 벽이 눈에 들어왔다. 잉카 최고의 석조 기술로 지은 집들이었다. ······ 정교하게 다듬은 마름돌들이 정확하게 맞물린 벽들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빙엄이 마추픽추를 발견할 당시의 모습으로 도시는 폐허가 되어 있었다.
빙엄이 발견한 이 유적이 바로 ‘마추픽추(늙은 봉우리란 뜻)’이다. 마추픽추는 잉카의 수도 쿠스코에서 우르밤바강(아마존강의 원류)을 따라 북서쪽으로 114킬로미터 올라간 지점에 건설되었으며 해발 2280미터 위치에 있다
도시 앞에 우뚝 솟은 봉우리는 잉카인들이 신성시했던 와이나픽추이다.
마추픽추는 잉카인들이 세계를 보는 방식인 상과 하, 우측과 좌측, 남성과 여성, 시간과 공간의 두 기준에 따라 절묘한 위치에 의도적으로 건설되었다. 마추픽추는 와이나픽추(Huayna Picchu)라는 원뿔 모양의 봉우리와 마주보고 있는데 와이나픽추는 잉카인들의 토템으로 신봉하는 두 동물의 형태를 갖고 있다. 와이나픽추 봉우리를 앞에서 보면 퓨마의 형상으로 보이며 좌측에 있는 세 개의 작은 봉우리는 새(콘도르)가 날고 있는 모습으로 보인다. 잉카인들에게 와이나픽추는 지상과 천상의 세계를 보여주는 신성한 산으로, 그곳에서 바라보이는 대지에 신성한 도시를 건설한 것이다.
큰 봉우리는 퓨마, 그 옆의 작은 봉우리들은 날개를 펼치고 있는 콘도르의 형상을 하고 있다.
잉카인들은 신성한 도시의 모든 시설들을 어떤 형상을 표현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배치했다. 그것은 날개를 활짝 펴고 날고 있는 새의 모습이다. 와이나픽추에서 보면 확연히 알 수 있다. 전설에 의하면 인간들은 무질서와 방탕에 빠지기 쉬우므로 태양이 다양한 색깔의 깃털을 가진 새를 보내 영혼들을 위무해준다고 한다.
▲1 와이나픽추에서 내려다본 마추픽추의 모습
▲2(1) 을 스케치한 그림이다.
▲3(2)를 뒤집었을 때의 모습이다. 새가 날개를 펼치고 나는 모습이다.
마추픽추는 에스파냐에 정복된 이후 5세기 동안이나 정글 안에 파묻혀 있었음에도 건물들의 지붕을 제외하고는 거의 훼손되지 않았다. 울창한 수림과 뾰족한 봉우리들, 신성한 계곡으로 불리며 우기에는 통과할 수 없을 만큼 지형이 험한 퐁고 보에니케 골짜기가 마추픽추를 외부세계와 격리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전설에 따르면 마추픽추는 태양신의 처녀들, 즉 ‘아크야’를 위해 건설한 것이라고 한다. 마추픽추를 건설하는 데 사용된 돌들은 600미터 아래의 깊은 골짜기에서 채취한 것인데 운반도구도 제대로 없었던 잉카인들은 악전고투했을 게 분명하다.
빙엄에 의해 세상에 알려진 이래 마추픽추는 차츰 비밀이 벗겨지고 있다. 마추픽추는 제례의식의 중심지였고 약 1200명이 거주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마추픽추는 테라스 형태의 농업구역과 도시구역으로 나눠져 있는데 계단식 밭에서는 옥수수와 감자, ‘안데스의 초록빛 황금’인 코카 잎을 재배했다. 가축도 따로 길렀다.
200개의 건물로 이루어진 유적지의 대부분은 가옥이나 저장고인데 지형의 장점을 최대한 이용했고 화강암으로 건설했다. 출입문은 사다리꼴이고 지붕은 3500미터 이상의 고산지에서만 자라는 이추(Ichu)라는 짚으로 만들어 덮었다.(현재 복원된 건축물의 지붕도 이추로 덮었음) 정방형의 공동 마당을 가운데 두고 열 채씩 무리로 지어진 2층집들은 좁은 도로나 다소 돋운 골목으로 연결되어 있다.
지붕을 고산지대에서만 자라는 이추로 덮었다. 고지의 마추픽추에서는 물을 확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잉카인들은 식수와 농사에 필요한 물을 끌어오기 위해 지하수가 나오는 곳에서부터 돌을 이용하여 고랑을 만들었다. 잉카인들의 돌 다루는 뛰어난 솜씨를 엿볼 수 있다.
잉카인들은 전통적으로 지하수가 나오는 곳에서 돌을 이용해 물길을 만들어 식수를 확보했다.
공동 마당에는 커다란 맷돌, 부피가 큰 농기구, 연료로 사용하는 라마의 배설물 저장소가 있었고 ‘추뇨(잉카인들의 주식으로 감자 말린 것)’를 만들기 위해 태양과 서리에 번갈아 노출되도록 감자를 널었다. 말린 고기 등은 줄에 매어 집 바깥에 매달았다.
종교 건축물은 주 광장 둘레에 축조했다. 정교한 부조가 새겨져 있고 반원형의 탑이 있는 태양신전, 세 개의 창문이 있는 신전, 제1신전 그리고 ‘왕의 묘’가 그것이다. 왕의 묘는 잉카 최고의 신에게 헌정된 숭배의 장소로 추정하며 무덤은 발견되지 않았다. 잉카인들의 믿음을 표현하는 세 계단이 있는데 이는 지하(죽음) · 지상(현생) · 하늘(신)을 의미한다. 신전 근처의 왕의 궁전에는 식당과 거실 등이 있으며 마추픽추에서 유일한 화장실이 있다.
▲왕의 무덤으로 추측되는 곳이다.
▲마추픽추에서 유일한 화장실로 왕의 궁전에 있다.
마추픽추에서 눈에 띄는 것은 천문관측을 위해 특별히 고안된 건축물이다. 하나의 거대한 돌을 깎아 만든 인티와타나(Intihuatana, 케추아어로 태양을 끌어들이는 자리)는 해시계와 유사한데 동짓날(남반구에서는 여름) 하루 동안 사제들은 여기에서 제물을 바치며 태양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잉카인들은 태양이 두 개의 ‘의자’를 갖고 있다고 믿었다. 북쪽의 주의자와 남쪽의 보조의자가 그것이다. 태양이 남쪽 의자에 자리 잡을 때인 하지가 한 해의 시작이었다. 전설에 따르면 잉카인들은 인티와타나에 이마를 대면 영혼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 열린다고 믿었다.
태양을 끌어들이는 자리라는 뜻을 갖고 있는데 해시계와 같은 역할을 했다. 잉카인들은 이 돌에 이마를 대면 영혼의 세계에 들어설 수 있다고 믿었다.
달의 신전은 유적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와이나픽추 중턱에 위치한다. 천연동굴을 이용해 다섯 군데의 벽감을 만들고 부조를 장식했다. 신전 안에는 거대한 바위의 가운데를 파서 만든 옥좌가 있지만 전설 속의 황금은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빙엄은 제단 구역에서 많은 인골을 발견했는데 대다수가 태양신에게 제물로 바치기 위해 선택된 여자들이었다. 발견된 175구의 미라 중 80퍼센트가 여자였고 나머지 20퍼센트는 사제와 아이들이었다. 빙엄은 현장에서 잉카제국을 상징하는 도자기 · 금속 · 섬유 등이 거의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볼 때 마추픽추가 어떤 정책적인 결단(군사 전략적 측면, 실용성 미비)에 의해 포기되었다고 생각했다. 반면에 세 개의 창문이 있는 신전 하부에서 수많은 도자기 파편을 발견했는데 이는 희생 또는 제사의 의식 중에 도자기를 떨어뜨린 것으로 추정한다.
학자들은 태양신의 후예로 숭배 받은 잉카제국의 아홉 번째 통치자인 ‘세상의 개혁자’ 파차쿠텍이 마추픽추를 건설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하지만 ‘세 개의 창문이 있는 신전’을 근거로 만코 카팍이 세운 잉카 최초의 수도라고 추정하는 학자들도 있다. 만코 카팍이 “내가 태어난 곳에 세 개의 창이 있는 석조 벽을 세우라”고 명령했기 때문이다.
마추픽추의 실체와 관련한 설은 다양하다. 마추픽추가 황금의 도시 ‘빌카밤바’이지만 도굴되었다는 설이 있는가 하면 종교의식과 천문관측을 위한 종교의 중심지, 아마존과 잉카를 연결한 물류와 교역의 중심지, 잉카왕의 여름 별장이었다는 주장까지 있다. 아마존 상류에 살고 있던 부족과의 대치에서 전략적인 요새의 역할을 했다는 주장도 있다. 마추픽추가 빌카밤바가 아니라면 만코 2세의 보물은 어딘가에 아직도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지금도 페루에서는 빌카밤바를 찾으려는 탐험이 계속되고 있다.
마추픽추를 방문하려면 쿠스코에서 우르밤바를 거쳐 오얀타이탐보(Ollantaytambo)에서 기차를 타야 한다. 오얀타이는 파차쿠텍왕 시대의 장군으로 왕의 딸과 사랑에 빠져 오얀타이탐보로 피신했다. 화가 난 파차쿠텍은 수차례에 걸쳐 오얀타이 장군을 공격했으나 번번이 격퇴되었고 결국 사랑을 인정했다는 전설이 있다. 이곳은 마추픽추로 들어가는 길목인 신성한 계곡의 입구인 동시에 군사적 · 전략적 요충지였다. 오얀타이탐보에는 군인들이 묵었던 숙소 · 종교시설 · 창고와 편의시설이 갖춰져 있고 마추픽추와 유사한 형태이다. 기찻길 옆으로는 아마존강의 원류인 우르밤바강이 흐른다. 이곳에서 버스를 타고 마추픽추로 들어가다 보면 유적지 입구에 황금은 발견하지 못했지만 탐험가로서의 명성을 얻은 빙엄의 표지석이 있다.
▲우르밤바강 아마존강의 원류이다.
한편 에스파냐인들이 잉카를 정복하고 파괴한 역사를 한번 살펴보자. 1530년대 초 잉카제국에 하얀 얼굴에 수염이 텁수룩한 에스파냐인들이 갑자기 나타났다. 하얀 얼굴의 사람들이 나타나 자신들을 지배할 것이라는 전설을 믿고 있던 잉카인들은 바로 그들이 태고 적 전설의 신들이라고 믿었고 그들에게 호의적이었다. 그런데 에스파냐 정복자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이끄는 200명가량의 군사는 잉카인들을 무차별 공격했고 잉카제국을 멸망시켰다.
▲1피사로
2페루 리마에 있는 피사로의 석관
에스파냐에서 사생아로 태어나 글도 배우지 못했던 피사로는 용병생활을 마친 뒤 신대륙으로 건너갔다. 발보아가 죽은 뒤 후계자가 되어 파나마를 건설하고 콜롬비아를 탐험한 피사로는 잉카제국의 정보를 입수한 뒤 일시 귀국했다. 그리고 에스파냐 왕실의 원조를 받아 준비를 갖춘 뒤 1531년 200명가량의 부하를 거느리고 중남미로 돌아왔다. 다음해 잉카의 내란을 탐지한 그는 잉카의 황제 아타왈파와의 회견장에서 황제를 납치했다. 아타왈파는 황금을 대가로 주겠다며 풀어줄 것을 제의한다. 피사로는 이를 받아들여 많은 황금을 받았지만 반란이 두려웠던 나머지 1533년 우상숭배와 근친혼 · 일부다처제의 죄를 물어 아타왈파를 화형(火刑)에 처하도록 했다. 그런데 잉카인의 신앙에 따르면 화형은 영혼의 소멸을 뜻하기에 아타왈파는 화형을 면하려고 기독교로 개종한 뒤 교수형을 당했다. 총이나 말(horse)을 몰랐고 신(神)은 흰 피부를 지녔다고 믿었던 잉카인들은 불과 200명의 군대에게 멸망하고 말았다. 피사로는 잉카제국의 수도인 쿠스코를 점령하고 이를 에스파냐왕에게 바쳤다. 그리고 1535년부터 새로운 수도 리마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피사로는 글자를 모르면서도 정확한 판단력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했지만 동료와의 싸움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잉카제국을 멸망시킨 프란시스코 피사로는 황금을 찾아 나섰던 사람이었다. 1524년 그는 황금을 찾아 탐험에 나섰지만 실패했다. 1526~1527년 두 번째 탐험에서 그는 잉카에 황금이 무진장 있다는 소문을 들었지만 파나마로 그냥 돌아갔다. 잉카의 황금이 탐났지만 아직 전투에 임할 준비가 돼 있지 않았던 것이다. 피사로가 1527년 잉카제국을 공격했다면 여지없이 실패했을 것이다. 당시 잉카제국은 제11대 왕 와이나 카팍의 통치 아래 최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528년 파나마에서 에스파냐로 돌아온 피사로는 잉카의 황금에 대해 에스파냐 왕에게 설명한 후 잉카 정복에 필요한 후원을 요청했다. 그 요청은 받아들여져 피사로는 1532년 페루에 상륙할 수 있었다. 이때 잉카의 사정은 몇 년 전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강력한 황제 와이나 카팍이 에콰도르 원정 중에 열병으로 죽은 뒤 그의 장남 와스카르가 제12대 왕으로 즉위했다. 하지만 와이나 카팍과 후궁 사이에서 태어난 아타왈파가 반기를 들었고 제13대 왕이 되었다. 피사로가 잉카를 침입할 당시 아타왈파는 수도 쿠스코 입성을 앞두고 전쟁에서 입은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안데스 산속의 카하마르카 온천에 머물고 있었다.
피사로는 잉카제국의 군대와 전투를 벌일 경우 승산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무리 부하들이 훈련이 잘된 용감한 병사들이고 무기와 장비가 충분하다고는 하지만 200여 명의 병력으로 수만의 잉카 정예군을 상대하는 것은 무모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피사로의 잉카 정복 이야기를 담고 있다.
피사로에겐 한 가지 계략이 있었다. 어떻게든 아타왈파만 사로잡으면 된다는 것이었다. 잉카로 올 때 피사로는 멕시코 아스텍 왕국을 정복한 코르테스를 만났는데 코르테스가 ‘일단 왕을 사로잡으시오’라고 충고했던 것이다. 나라의 존재가 왕의 신권에 달려 있는 남아메리카 인디언들에게 왕의 명령은 절대적이었기 때문이다.
피사로는 꾀를 내어 카하마르카에서 치료하고 있던 아타왈파에게 접근한 다음 아타왈파를 체포해버렸다. 왕이 포로로 잡히자 잉카는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내전을 끝내고 국가를 막 재건하려는 바로 그 순간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잉카인들은 왕을 살려준다면 7×5×3미터 크기의 방 안에 피사로가 들어 올린 손 높이만큼 보물을 채워주겠다고 피사로에게 약속했고 약속을 이행했다.
보물을 받은 뒤 피사로는 아타왈파를 살려주자고 했지만 부하들은 왕을 살려두면 무사히 귀환할 수 없다고 강력히 반발했다. 그들은 왕을 석방하다면 잉카인들이 곧바로 공격해 올 것은 불 보듯 빤한 일이라며 절묘한 대안을 제시했다.
아타왈파를 살해한 뒤 아타왈파의 동생인 만코 2세를 새 왕으로 옹립해 아타왈파와의 왕권 경쟁에서 패배한 와스카르 일족과 손잡게 하자는 것이었다. 피사로를 이용해 권력을 잡겠다는 야심으로 와스카르 일족은 피사로의 계획에 적극적이었다. 왕으로 추대될 것이라고 통보받은 만코 2세는 피사로를 황금 욕심에 눈먼 약탈자로 여겼고 에스파냐인과의 동맹은 언제든지 파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피사로는 잉카인들보다 한 수 위였다. 피사로는 만코 2세가 황제가 되자마자 그를 감금한 뒤 궁전을 약탈했다. 황제들의 황금 미라를 접수했고 성소에 있던 황금 접시 · 황금 용기 · 황금 신상을 모두 녹여 금덩이로 만들었다
만코 2세는 자유를 찾기 위해 협상을 제의했다. 그는 피사로에게 개 당 200킬로그램이 넘는, 황제들과 황후들의 황금 조상이 성스러운 계곡에 있는데 그 위치는 자신만이 안다고 하면서 자신과 부하 3000명을 풀어주면 그 조상들을 갖고 오겠다고 했다. 이번에는 피사로가 만코 2세의 꾀에 넘어갔다. 만코 2세는 부하들을 데리고 안데스의 협곡으로 들어가 사라져버렸다.
만코 2세는 군대를 정비해 쿠스코 탈환을 위해 공격을 퍼부었다. 하지만 에스파냐군의 저항은 완강했다. 이 싸움에서 패한 만코 2세는 다시 산속으로 도망갔다. 만코 2세를 추격한 에스파냐군은 만코 2세의 요새를 완전히 파괴했다. 하지만 만코 2세는 다시 도망한 후 새로운 요새이자 새로운 수도인 빌카밤바를 건설했다.
만코 2세와 잉카인들은 에스파냐군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벌이며 결사적으로 항전했다. 1541년에는 만코 2세에게 희소식이 날아왔다. 피사로가 살해된 것이다. 피사로에 불만을 품은 반란군이 피사로를 습격해 난도질했다. 반란군 대부분은 붙잡혀 처형되었지만 일부는 만코 2세에게 피신했다. 만코 2세는 그들을 열렬히 환영했다. 반란자들은 잉카 군사에게 에스파냐식 전술을 가르쳤고 만코 2세는 승마와 화승총 쏘는 법을 배웠다.
하지만 반란군은 점차 과거의 생활을 그리워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 에스파냐 왕이 아메리카대륙에 총독을 보냈는데 그가 살아남은 피사로 형제 일당과 충돌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잉카인의 틈에 숨어 있던 반란자들은 드디어 돌아갈 기회가 온 것 같았다. 그들은 만코 2세의 목을 갖고 간다면 피사로를 죽인 죄를 용서받고 문명의 땅 쿠스코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그들은 만코 2세를 살해하고는 그의 목을 가지고 탈출했지만 쿠스코에 도착한 이는 하나도 없었다. 잉카 병사들에게 쫓기다 모두 살해되었던 것이다.
1544년 만코 2세가 암살된 후 그의 아들 사이리 투파크가 에스파냐와의 항쟁에 나섰다. 때마침 피사로의 동생 곤잘로 피사로가 반란을 일으켰다가 에스파냐왕군에게 패배하는 일이 벌어졌다. 에스파냐는 잉카를 자신들 편으로 만드는 게 유리하다고 판단했고 에스파냐 총독은 황제 사이리 투파크에게 화해를 제의했다. 투파크는 제의를 받아들였고 빌카밤바를 떠나 리마로 갔다. 에스파냐인들이 세운 페루에 잉카의 황제가 발을 들여놓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투파크는 2년 후에 갑자기 사망했고 아들 티투 쿠시가 황제를 이었으나 11년 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 뒤를 이어 만코 2세의 다른 아들 투파크 아마루가 잉카의 마지막 황제가 되었다.
1572년 페루의 총독 프란시스코 데톨레도는 아마루가 은거하고 있던 빌카밤바를 공격했다. 그러나 그들이 발견한 것은 불에 탄 폐허뿐이었고 잉카인들은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아마루와 그의 마지막 추종자들은 아마존의 깊은 밀림 속으로 도망간 뒤였던 것이다. 그러나 밀고자에 의해 아마루는 사로잡혔고 쇠사슬에 목이 묶인 채 쿠스코로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당한 후 처형되었다. 잉카제국이 영원히 멸망한 것이다.
조선일보
◇마추픽추
▲잉카문명의 성지 마추픽추
▲조명받는 마추픽추(발견100주년기념 11.7.7.)
◇와이나픽추
▲와이나픽츄
◇태양의 도시 - 페루의 쿠스코
고대 잉카인들의 숨결이 깃든 세상의 배꼽이라는 쿠스코는 태양의 도시라고 불리웠던 도시입니다.
해발 3399m로 고원에 건설되어 고산병에 시달리는 경우도 있답니다. 구시가지는 스페인 정복자가 잉카인들이 만든 초석위에 스페인식의 건축물들을 건설한 곳이고....
지하의 뱀,지상의 퓨마,하늘의 콘도르를 숭상하는 잉카인들이 쿠스코를 건설할 때 퓨마 모양을...
◇쿠스코 삭사이와망
삭사이와망은 15세기 후반에 건설하기 시작하여 제10대왕인 또박 유빵귀(Topac Upanqui)대에 완성
3층 계단식으로 높이 18미터 길이 500미터로 돌의 크기는 높이 8.5미터 최고 361톤으로 10km 떨어진 채석장에서 운반해 거대한 성벽을 만들었으나 스페인에게 패한 후 작은 돌들은 대부분 쿠스코 성당이나 스페인인들 주택 짓는데 허물어져 사용했다 합니다.
◇쿠스코 잉카 신전
▲잉카인들은 성모마리아와 아기예수도 자신들의 모습으로
▲꾸스꼬 시 - 안데스 산맥에 위치한 잉카제국의 수도
◆뿌노
▲볼리비아를 오가는 관문이자 페루의 중심도시 뿌노
◆살리나스
▲염전 살리나스
◆우로스 섬 - 갈대의 섬
▲티티카카 호수에 있는 우로스 섬 - 토토라 라는 갈대로 만들어진 섬
우로스 섬 (Uros)
갈대로 엮은 호수위에 떠있는 섬에 사는 사람들 ! 푸노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티티카카 호수를 30분 정도 가면 우로스 ( Uros )섬을 만난다. 갈대 (토토라)로 만든 섬이다. 호수에 떠있는 40여개의 섬 에는 약 350명 정도가 생활하고 있으며 학교와 교회도 있다.
이 섬에 사람들은 우루족이라고 불리며 티티카카 (TitiCaca)호수애서서식하는물고기, 물새등을 잡고, 밭에서 감자 등을 재배하며 생활하고 있는데 근래에는 관광객상대로 생활하고있는사람도 많다 또한 섬과 섬을 연결하는 수단이 되는 배도 이 '또르또라'로 만든다. 우루족이 이렇게 갈대섬에서 산 지 벌써 680년이 넘었다고 한다. 토토라로 만드는 건 섬 뿐이 아니다. 집도 만들고 곤돌라 모양의 배도 만든다. 토토라의 연한 순 부분은 먹기도 한다.
우로스 섬은 이렇게 만들어진 갈대섬 40여개를 통칭하는 말인데,큰 섬에선 10여가구가 살기도 하지만 작은 섬은 달랑 집 2채인 곳도 있다. 갈대 더미가 물에 둥둥 떠있는 형국이기 때문에 밤이면 습기가 올라와 아주 춥다고 한다. 섬의 바닥은 계속 썩어들어가는 상태다. 바닥이 많이 썩으면 갈대를 위로 계속 쌓아 무게를 지탱할 두께로 만들어줘야 한다.
우로스 섬의 뜻이 '매일 새롭게'라던데, 늘 토토라를 위로 쌓아야만살아갈 수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일 듯하다. 큰곳에는 우체국, 박물관및 후지모리 대통령 시절 지은 학교도 보인다. 잉카 시대에 천민으로 쫓겨난 사람들이 코파카바나에서 생활을 하다가스페인 군에 쫓겨서 이곳에서 섬을 만들어 살게 되었다고도 한다. 어쨌든 그들은 몇 백년에 걸쳐서 자신들의 독자적인 원시 생활형태를 유지하면서 대를 이어 갈대섬에서 살아오고 있다.
◆풍경
▲샌프란시스코 사막
▲곡타폭포 - 220미터 높이 상단 폭포와 540미터 하단 폭포로 나뉜 총 770여 미터 2단 폭포 16.7.4 한국인 관광객 1명이 사진 찍다 추락 사망
▲리마 이카의 후아카치나 오아시스 전경
▲아마존 지역의 야리나쿠차 호수
▲절벽 위의 호수
▲해안 풍경
▲페루는 한 여름 13.1.20. 리마 둘채 해변
▲안데스 산맥
▲사라지는 빙하 - 안데스 산맥
▲아마존 - 나나이강과 이타야강의 검운 물쥴기가 열대우림을 샘처럼 휘감고 있다
▲세이바 트리 - 아마존 숲에 서식하는 높이 80m에 달하는 자이언트 트리
▲캐노피 원크 트레일 - 아마존 식생을 연구하기 위해 지상 20-40m 높이에서 나무 위의 곤충과 새들을 관찰할 수 있도록 만든 다리
▲황폐화된 아마존 - 황금을 찿는 사람들 때문에 열대 우림이 황폐화
▲비니쿤카
▲무지개 산
▲신비한 잉카 문명의 농경지
◆일상
▲빈민 지역
▲발렌타이 데이를 맞아 합동 결혼식 13.2.14.
▲음산한 안개 - 리마
▲누에바 에스페란사 묘지
▲리마의 공동묘지 - 망자의 날을 맞아 묘지를 찾는 사람들
▲ 페루의 성벽
▲계단식 밭
▲페루 헬기 추락 - 12. 6. 10. 오콕카테의 마마로사 산 해발 4900미터 고지에서 추락 사망한 시신 수습 한국인 8명 사망
▲홍수 17.3.16 리마 최소 12명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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