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중앙일보) 2022-07/ 07.01(금) 경찰대 - 07.29(금) 직언
분수대(중앙일보) 2022-07/ 07.01(금) 경찰대 - 07.29(금) 직언
07.01(금) 경찰대
1981년 개교한 경찰대는 법학과와 행정학과로 전공이 나뉜다. 4년 교육과정을 마친 뒤 각 학과 수석 졸업생은 대통령상 또는 국무총리상을 받는다. 법학과와 행정학과에게 번갈아 1등인 대통령상이 돌아간다. 1988년 경찰대학 제4기 졸업식 및 임용식에서 행정학과 수석 민갑룡 경위가 대통령상, 법학과 수석 김창룡 경위가 국무총리상을 받았다. 두 사람은 문재인 정부에서 각각 21대와 22대 경찰청장으로 나란히 임명됐다.
경찰대 졸업생은 순경·경장·경사까지 세 계급을 뛰어넘어 초급 경찰 간부(경위)로 경찰 생활을 시작한다. 간부후보생도 경위로 임관하지만 경찰대 졸업생이 더 많다. 경찰대끼리 서로 끌어주는 문화를 무시할 수 없다. 경찰대 출신들이 고위직을 상당 부분 차지하게 되면서 경찰대는 어느새 개혁 대상으로 거론된다. 윤석열 정부에서도 마찬가지다. 6월 말 기준 경찰청 치안감급 국장 12명 중 9명이 경찰대 출신이다. 2명은 간부후보생, 나머지 1명은 경장 특채로 입직했다. 대통령직인수위는 지난 4월 순경 출신 경찰관들의 경무관 이상 고위직 승진 인원을 20%까지 단계적으로 확대해가겠다고 했다. 시도해봄 직하다.
경찰대도 순혈주의를 타파하기 위해 고졸 신입생을 줄이고 편입제도를 신설하는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경찰대는 2023학년도부터 편입생 50명을 받는다. 3학년으로 편입되는 이들을 위해 2021학년도 입학생 정원을 기존 100명에서 50명으로 줄였다. 일반대학생과 재직 경찰관 중에서 25명씩 뽑힌 이들은 경찰대 41기로 편입된다.
3연속 경찰대 출신이냐, 아니면 비경찰대 출신이냐. 다음 달 23일까지가 임기인 김창룡 경찰청장의 후임 자리를 놓고 형성된 대립구도다. 경찰공무원법상 경찰청장(치안총감)은 바로 아래 계급인 치안정감에서 나와야 한다. 임기가 보장된 국가수사본부장을 제외한 6명의 치안정감 중 경찰대와 간부후보생 출신이 각각 2명, 행시 특채와 순경 공채 출신이 각 1명씩이다.
최근 행정안전부 내 경찰국 설치 논란과 관련해 경찰 지휘부의 침묵을 질타하는 일선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경찰대 출신이 많아서가 아니라 경찰 지휘부의 리더십과 정치력 부재를 문제 삼은 것이다.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게 아니라 사람이 자리를 만든 것인가.
위문희 사회2팀 기자
07.04(월) 노름빚
돈이나 재물을 걸고 따먹기를 하는 행위를 노름이라고 한다. 대개 일시적이고 소규모면 내기, 조직적이고 지속적이면 도박으로 본다. 노름의 근간은 추첨이다. 뽑힌 사람이 돈이나 재물을 갖는 방식이다. 학계에선 노름과 인류의 역사를 비슷하게 본다. 원시인은 동물 뼈로 주사위를 만들어 사용했고 기원전 1600년 이집트에선 타우(Tau)·세나트(Senat)라는 추첨 놀이를 했다. 성경에도 제비뽑기가 자주 등장한다.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땅을 공평하게 나눠주기 위한 방법으로 제비뽑기를 활용했다는 식이다.
한국에서 노름이 성행한 시기는 조선시대(1392~1910)다. 중국을 드나들던 역관(통역을 맡은 관리)을 통해 전파된 것으로 추정되는 투전(손가락 크기의 두꺼운 종이에 끗수를 적은 도구)이 유행했다. 영조 때 전국 곳곳에서 투전이 벌어졌고 ‘투전이 도둑질보다 더 큰 해악’이라며 법으로 금지했다. 이후 현재까지 노름을 법으로 금지하고 있지만, 근절하지 못했다. 대신 합법적으로 노름을 즐길 수 있는 장을 만들었다. 현재 정부가 공인한 노름(사행산업)은 카지노, 경마, 경륜·경정, 복권, 체육진흥투표권, 소싸움경기 등 7가지다. 이들 사행산업 수익금의 일정액은 각종 기금을 통해 공익사업 재원으로 쓰인다.
어느 시기나 노름은 골칫거리였는데 특히 노름빚이 문제였다. 빚까지 내 노름을 하다 결국 탕진하면 각종 범죄·자살 같은 사회적 문제를 야기했다.
최근 가상화폐를 투자로 볼지, 노름으로 볼지 논란이다. 지난 1일 서울회생법원이 가상화폐 투자 손실금을 개인회생 변제금으로 고려하지 않겠다는 실무준칙을 제정하면서다. 예컨대 1억원을 빌려 코인에 투자해 9900만원을 잃었다면 이전엔 빌린 1억원을 보유자산으로 봤지만, 앞으로 남은 100만원만 자산이다. 법원은 자살 등 가상화폐 손실에 따른 사회적 문제를 줄이고 채무자의 빠른 경제 복구를 위한 조치라는 입장이다. 반면 정부가 노름빚을 갚아주며 ‘빚투’(빚을 내 투자)를 권장한다는 반발도 거세다.
2004년 도입한 개인회생제도는 성실하지만, 불운한 채무자를 구제하기 위한 장치다. ‘적어도 이런 사람은 회생시켜야지’라는 암묵적 합의가 전제다. 가상화폐 손실을 채무자에게 돈을 빌려준 개인이나 금융기관, 나아가 정부가 함께 손해 보는 것이 마땅할지 분명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최현주 금융팀 기자
07.05 마약
조석연의 『마약의 사회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문헌에서 마약류가 공식적으로 처음 등장한 건 광해군 2년(1610년) 완성됐다는 『동의보감』 탕액편에서다. 아편은 이질이 멎지 않을 때 팥알만큼 따뜻한 물에 풀어 복용하되, 성질이 급하기 때문에 많이 쓰지는 말아야 한다고 적었다. 한국 전통사회에서 아편은 가정상비약이었다.
19세기 제국주의 국가들이 청나라에 흡연용 아편을 들여오면서 판도가 바뀌었다. 청나라는 아편 흡연 인구가 200만 명에 달하자 1839년 영국 상인들의 아편을 불태우고 퇴거를 명령했다. 영국 정부는 이에 반발해 청나라에 함대를 파견하고, 청나라는 아편전쟁에서 패배했다. 자연히 중독자도 늘었다.
이를 옆에서 지켜본 조선 정부는 아편을 극도로 경계했다. 개항기 일본과 체결한 ‘조일수호조규’ 등에 아편 수입을 금지하는 조항을 삽입했다. 1898년 고종 독살 미수 사건은 아편을 더욱 강력히 규제하는 계기가 됐다. 뇌물수수에 연루돼 유배형을 받은 역관 김홍륙이 궁중 요리사를 사주해 고종과 순종이 마실 커피에 다량의 아편을 탄 사건이었다.
그러나 식민지 조선은 일본의 통치자금 마련을 위한 아편 생산기지로 전락했다. 반대로 독립운동가들이 활동 자금을 마련하려고 아편을 밀매매하기도 했다. 1980년대에는 일본 밀수출용으로 제조하던 필로폰이 정부의 강력한 단속으로 수출길이 막히면서 되레 국내에서 유통돼 사회 문제가 됐다. 마약 중독은 단순히 개인의 문제라기보다는 다분히 국제 정세와 정치, 사회 환경의 산물임을 알 수 있다.
예전 우리나라는 마약사범의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박탈하거나, 국가 안보를 위협하는 사회악으로 규정해 생계수단을 빼앗는 등 엄벌주의로 일관했다. 이는 한국이 상대적인 마약 청정국이 되는 데 기여했지만, 마약중독자의 치료와 사회복귀를 어렵게 만드는 측면도 컸다.
요즘엔 마약사범을 사회악으로 모는 경험을 공유하지 못한 이들이 겁 없이 마약에 손대는 모양이다. 지난해 마약사범 중 10대는 450명으로 역대 최다였다. 20대 마약사범이 전체의 31.4%(5077명)로 30대와 40대를 누르고 처음으로 1위를 기록했다. 최근엔 고교 3학년 학생이 텔레그램 마약방 총책으로 검거돼 충격을 준다. 달라진 사회환경이 젊은이들을 망칠까 두렵다.
이경희 이노베이션랩장
07.06 빙하
빙하(氷河)는 수천 년의 세월과 자연이 만들어낸 보석이다. 녹는 속도보다 빠르게 쌓인 눈이 오랜 시간 집적되며 얼음층으로 발달한다. 남극 대륙과 그린란드를 덮은 대륙 빙하는 그 두께가 평균 2000m에 이른다. 123층 잠실 롯데타워(555m)의 4배 정도 되는 초고층 얼음층이다. 산악 빙하 틈으로 엿보이는 하늘색의 청명한 얼음 빛깔에선 신비감이 느껴진다.
중력 때문에 매일 몇 m씩 흘러 ‘얼음강’이라는 뜻을 가진 빙하는, 그 자체로 담수 자원의 보고다. 미국 지질조사국에 따르면 지구에 존재하는 담수의 68% 이상은 빙하에서 발견된다. 30%는 지하수로 존재하고, 겨우 0.3% 정도만 호수나 강·늪지 같은 지표수로 나타난다. 알프스·히말라야 등 산악 지역 인근 국가에서는 지금도 설선(만년설의 고도 하한선) 아래로 빙하가 흘러 녹아내린 물에 식수 등을 의존하고 있다.
지구온난화로 빙하가 빠르게 유실되고 있다는 건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2000년에 걸쳐 생성된 에베레스트 정상 근처의 빙하가 최근 25년 사이에 급격히 유실되면서, 네팔 관광청은 쿰부 빙하에 있는 산악 베이스캠프(5364m)를 옮기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등반가들이 베이스캠프에서 잠자는 동안 크레바스(빙하 표면에 생긴 깊은 틈) 수가 많아지고 있다고 증언하는 등 안전 문제가 제기됐기 때문이다.
빙하 유실로 멸종 위기에 처한 북극곰의 미래에 대해서도 다양한 시나리오가 나오고 있다. 북극곰은 해빙(海氷)을 타고 바다 멀리 나가 사냥하는 게 일반적인 습성이다. 특이하게도 그린란드 남동부에서는 해안가 근처에서만 머무르며 고립된 생활을 하는 북극곰들이 최근 발견됐다. 크기가 작았고, 새끼도 적게 낳는 등 유전적·신체적 차이가 있었다. 과학학술지 ‘사이언스’는 해빙이 더 줄어들면 다른 지역 북극곰도 이들처럼 바뀔 수 있다고 내다봤다.
지난 3일(현지시간)에는 이탈리아 북부 알프스 돌로미티산맥 최고봉 마르몰라다산(3343m)의 빙하가 붕괴했다. 7명이 숨지고 14명이 실종됐다. 빙하 규모가 1954년 9500만㎥에서 최근 1400만㎥로 85%가량 급감했다는 경고(이탈리아 파두아대)가 있었지만, 이렇게 심각한 참사로 이어질지는 몰랐던 것 같다. 기후 변화에 대한 인식이 관념적 수준에 머물러선 안 된다. 보다 진지한 접근이 필요하다.
한영익 정치에디터
07.07 자녀 살해
1990년대만 해도 동반자살이란 표현이 뉴스에 종종 등장했다. 사업이 망했거나, 생활고를 겪었거나, 장애나 질병으로 일상생활이 어렵다는 등의 이유로 일가족이 함께 비극을 맞이하는 경우다. 하지만 일가족 모두가 극단적 선택에 적극적으로 동의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한국기자협회가 보건복지부·한국자살예방센터와 함께 정한 ‘자살보도 권고기준 3.0’에서도 일가족 동반자살이란 표현을 엄격히 금하고 있다. “일가족 동반자살은 살해 후 자살이나 자살교사와 같은 범죄 행위로 인식되어야 한다”고 규정하면서다.
일가족 사망 중에서 가장 악랄한 형태는 부모가 자녀를 살해하는 경우다. 자녀를 부모의 소유물처럼 여기고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잘못된 생각이 원인이다. 어떤 경우엔 ‘홀로 남겨두는 게 더 불행하니까 어쩔 수 없이 데려간다’는 변을 유서로 남기기도 한다. ‘오죽하면 그랬을까’ 하고 이해해주길 바랐겠지만, 그 어떤 절박한 이유도 살인을 정당화할 수 없다.
지난달 29일 전남 완도 송곡항 앞바다에서 조유나(10)양이 부모와 함께 차량 속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경찰은 아빠 조모(36)씨가 1억원이 넘는 돈을 코인에 투자했다가 수천만원 손실을 보았으며, 카드빚과 대출 등 1억5000만원의 빚이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조씨가 생전 ‘수면제’ ‘방파제 추락’ 등을 검색한 사실도 알아냈다. 생활고를 비관한 범죄(자녀 살해) 가능성이 커진 셈이다.
최근 투자 실패로 고민하는 20~30대가 늘고 있다고 한다. 진선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대법원에서 받은 ‘회생·파산 현황’에 따르면 만 20~29세의 개인회생 접수 건수는 2019년 1만307건, 2020년 1만1108건, 2021년 1만1907건으로 매년 평균 800건씩 증가했다. 상당수가 주식이나 코인에 투자했다가 손실을 본 경우로 추정된다.
투자 실패로 비관하는 청년 중에서도, 특히 조씨와 같은 젊은 가장들을 정부와 지자체가 눈여겨봐야 할 것 같다. 혹시 모를 위험에서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심리 치료나 상담뿐 아니라, 필요하다면 적극적 분리조치가 이뤄져야 한다. 생활고가 자녀 살해로 이어지는 불행은 다시는 없어야 한다. 죽을 이유가 없던, 더 행복해야 마땅했던 유나양의 명복을 진심으로 빈다.
장주영 사회에디터
07.08(금) 열대야
‘열대야(熱帶夜)’는 일본에서 처음 쓴 말이다. 정확히는 일본 NHK 기상캐스터였던 쿠라시마 아츠시(倉嶋厚)가 만들었다. 쿠라시마는 원래 일본 기상청 예보관 출신이다. 1924년 나가노에서 태어나 1949년부터 예보관으로 활약했다. NHK에서 날씨 뉴스를 전달하게 된 건 1984년 60세 나이로 기상청을 정년 퇴직한 이후부터다.
독학으로 러시아어를 공부했던 그는 예보관 시절 폴란드 출장 때 ‘열대야’라는 러시아어 단어를 처음 접하고 이를 일본에 소개했다. 그가 1966년 저술한 『일본의 기후(日本の気候)』라는 책에도 열대야란 표현이 등장한다. 러시아에선 최저기온이 섭씨 20도 이상인 밤을 가리켰지만 쿠라시마는 25도로 기준을 높였다.
한국에서도 2008년까진 하루 중 최저기온이 25도 이상인 날을 열대야로 분류했다. 2009년부턴 밤(당일 오후 6시~다음날 오전 9시) 최저기온을 열대야가 발생한 기준으로 삼는다.
지난 6일 기상청에 따르면 서울 등 13개 관측지점에서 사상 처음 ‘6월 열대야’가 나타났다. 서울의 경우 가장 빨랐던 열대야 발생일은 1978년 7월 2일(25도)이었다. 올해엔 6월 26일(25.5도)과 27일(25.8도) 이틀에 걸쳐 열대야가 발생했다. 지구 온난화로 열대야는 늘어나는 추세다.
1973년 기상청 관측 이래 연도별 열대야 일수를 계산해보니 2위(2018년, 16.6일)부터 8위(2012년, 9.1일)까지가 2010년대였다. 이상 고온은 한국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일본 동부지역도 지난달 25일 한때 40.2도를 기록했다. 일본에서 관측 사상 6월 기온으로 가장 높았다.
쿠라시마에 따르면 기상이라고 하는 것은 ‘순환’이 본질이다. 변화의 연속이지만 오르면 내려가고, 내려가면 오른다. 인생과도 같다. 그는 2002년 아내를 잃은 뒤 얻게된 우울증을 극복하기까지의 과정을 수필로 출간했다. 책 제목이 『그치지 않는 비는 없다(やまない雨はない)』다. 일본 아사히TV에서 2010년 드라마로도 방영됐다.
올여름은 평년보다 더울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예측된다고 한다. 이달부터 전기요금은 킬로와트시(㎾h)당 5원 인상됐다. 덥고 습해서든 전기료 걱정 때문이든 잠을 설칠 수밖에 없는 날들이다. 그래도 가시지 않는 무더위는 없다.
위문희 사회2팀 기자
07.11(월) 연습생
“‘사룟값’이 없어 엎어질 뻔한 팀이었다.”
30여년간 K팝 현장에 있었다는 A관계자는 한 아이돌 그룹의 데뷔 과정을 설명할 때 이렇게 말했다. 처음엔 알아듣지 못했다. 곧 연습생 식대를 뜻한다는 것을 이해하고 좀 놀랐다. 물론 이 관계자가 한창 일할 때에 비해 현재는 연습생의 지위나 대우, 시각이 많이 달라졌다고 한다. 특별히 나쁜 뜻으로 선택한 단어는 아니었다. 무섭다고 느낀 것은 이 단어가 내포한 나름의 ‘직관성’이었다.
K팝 산업 가치 사슬의 가장 큰 특징은 완성되지 않은 재원을 포섭해 연습생으로 확보한 뒤 강도 높은 교육을 통해 키워내는 것이다. 연습생으로 뽑히는 것부터 어렵지만, 데뷔라는 좁은 문을 통과하기 위해 몇 배수가 되는 후보군과 다시 치열한 경쟁을 펼친다. 후보군을 두텁게 둔 K팝 기획사 입장에선 성공 확률을 높이고 비용을 절감하기 위한 방안을 찾을 수밖에 없다. 긴 연습 시간, 사생활 간섭은 이의 일부다. 잘 알다시피 데뷔 또한 끝이 아니다. 오히려 이때부터 진짜 전쟁이 시작된다. 매년 50여개 팀이 새로 나오는 ‘돌판’에서 존재를 수시로 증명해야 한다. K팝 업(業)의 자산이자 상품, 아티스트라는 복합적 성질을 지닌 아이돌은 이런 구조 속에서 태어난다.
피로감을 호소한 방탄소년단(BTS)이 단체 활동을 잠시 중단한다고 하면서 한바탕 난리가 났다. 우리도 우리지만, K팝의 확장된 영향력에 따라 해외에서도 분석이 끊이질 않는다. 이들은 특히 K팝의 성공을 가능케 한 연습생 제도에 비판적이다. 상업적 성공을 위해 어린 나이부터 모든 것을 걸고 몰두하는 것이 과연 괜찮은 것이냐는 의문이다. 주 6일 하루 10시간씩 연습, 휴대전화 사용 금지, 연애 금지와 같은 연습생 수칙에 기겁하는 것도 이해가 되긴 한다.
그들이 잘 모르는 것이 있다. 한국 사회에선 상당히 많은 직종이 유사한 패턴의 숨 막히는 경쟁을 거쳐야 고작 시작할 기회를 얻는다. ‘일반인’의 경쟁도 아이돌 못지않게 어린 나이에 시작한다. 주 6일 하루 10시간씩 입시에 쏟아부어도 안심할 수 없는 사회다. 대학에 가도, 취업의 좁은 문을 뚫어도 ‘K경쟁’은 좀처럼 끝나지 않는다. K팝도 K사회도, 우린 계속 이렇게 살 수밖에 없는지 되물어야 할 시점이긴 하다.
전영선 K엔터팀 팀장
07.12 아베노믹스
“일본은행(BOJ) 윤전기를 돌려 무제한으로 돈을 찍어내겠다.” 2012년 11월 아베 신조(安倍晋三) 당시 자민당 총재가 깜짝 발언을 했다. 돈을 뿌려 ‘잃어버린 20년’에 갇혀 있던 일본 경제를 살려내겠다는 말에 시장은 반색했다. 닛케이 지수는 한 달 만에 10% 넘게 올랐다. 극우의 상징이었던 그는 일본 경제의 희망으로 떠올랐다.
바로 다음 달 치른 중의원 선거는 아베 총재가 이끈 자민당의 압승으로 끝났다. 총리가 된 그는 선거 때 약속한 경기부양책을 발표했다. 중앙은행에선 돈을 풀고(양적완화) 정부에선 돈을 쓰고(재정완화) 경제 체질도 바꾼다(구조개혁)는, 이른바 3개의 화살이다. 아베노믹스는 그렇게 탄생했다.
아베 집권 초기 아베노믹스는 제대로 작동하는 것처럼 보였다. 주가는 튀었고 엔화 값은 가파르게 내렸다. 집권 첫해인 2013년 경제성장률이 2%로 올라서며 성공 가도에 오르는 듯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그의 영문 이름 ‘Abe’를 빗대 ‘자산 거품 경제(Asset Bubble Economy)’에 그칠 것이란 우려는 현실이 됐다. 그가 집권한 2013~2019년 일본의 연평균 실질 경제성장률은 0.98%에 그쳤다. 10년간 연평균 2% 성장을 이뤄내겠다던 그의 공언과 거리가 멀었다. 그가 총리에 오르기 전과 크게 다를 게 없었다.
집권 초기 4%대였던 실업률은 2%대로 내려갔지만 저출생 영향이 컸다. 엔저와 법인세 감면으로 늘어난 기업의 이익은 근로자 주머니로 가지 않았다. 가처분소득, 소비지출 등 가계지표는 악화했다. 코로나19 위기까지 터지며 그의 입지는 더 흔들렸다. 2020년 8월 건강을 이유로 들긴 했지만 그는 최장수 총리 기록(7년 8개월)을 남긴 채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일본 내부에서도 아베노믹스에 대한 평가는 냉정하다. “아베노믹스는 실패했다. 장기간 디플레이션과 경기 침체에서의 탈출이란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샐러리맨 세대는 가난해졌고 많은 사람이 생활고로 고통받고 있다”(얀베 유키오 『일본 경제 30년사』)는 진단이 나올 정도다.
아베 전 총리가 지난 8일 전직 해상자위대원이 쏜 총에 맞아 세상을 떠났다.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결말이었다. 아베 자신이 쏜 3개의 화살이 그가 예견하지 못한 결말을 향해 가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조현숙 경제정책팀 차장
07.13 우회전
두 달 전 광주광역시의 한 횡단보도에서 초등학생이 안타깝게 목숨을 잃었다. 교차로에서 우회전하던 시내버스가 횡단보도를 막 건너는 초등학생을 들이받은 사고였다.
교통사고 사망자는 꾸준히 줄고 있다. 하지만 보행 교통사고 사망자 비율은 34.9%(2021년)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19.3%)보다 높다. 차량 간 사고보다, 길을 건너다 사고를 당하는 경우가 유난히 많다는 뜻이다. 특히 우회전 사고가 빈번하다. 2018년부터 2020년까지 우회전 차량으로 사망한 보행자는 212명, 부상자는 1만3150명에 이른다. 대형차나 건설기계의 비중이 월등히 높은 것도 특징이다.
국내 자동차는 운전석이 왼쪽에 있다. 차종과 무관하게 왼쪽이나 전방에 비해 우측의 사각지대가 더 길다. 특히 대형 화물차의 우측 사각지대는 8.3m로 일반 승용차(4.2m)보다 약 두 배 더 길다. 사고 이후 “보행자를 못 봤다”고 말하는 운전자가 많은 이유다.
차량 우회전은 비교적 자유롭다. ‘사람이 없으면 초록불이어도 갈 수 있다’는 게 통념이다. 더 위험한데, 자율에 맡기니 사고가 많은 건 어쩌면 당연하다. 그렇다고 주행 신호가 따로 없는 우회전을 너무 기계적으로 규제할 순 없다. 심각한 교통체증을 유발할 수 있어서다.
우회전할 때 횡단보도 앞에서 일시정지(바퀴를 완전히 멈춰야 함) 의무를 강화하는 내용의 도로교통법 개정안이 12일 시행됐다. 원래는 보행자가 횡단보도를 건너는 중일 때만 멈춰야 했지만 이젠 건너든, 안 건너든 사람이 보이면 멈춰야 한다. 보행자가 건너려고 기다리는 상황이 대표적이다.
혼란은 불가피하다. 단속 현장에선 사람이 보였는지 안 보였는지, 일시정지를 했는지 안 했는지를 놓고 시비가 잦을 거로 보인다. 범칙금 6만원(벌점 10점)의 규제 효과도 의문이다. 우회전 신호기 설치, 대각선 횡단보도 등 보행자 친화적 신호 체계를 정비하는 게 시급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운전자의 태도다. 우회전할 때 잠깐이라도 멈칫하면 뒤에선 경적을 울린다. 심지어 보행자가 건너고 있는데도 빨리 가라고 재촉한다. 초록불 우회전은 할 수 있다는 것이지, 무조건 해야 하는 게 아니다. 조금 불편해도 사고를 줄이는 건 모두의 의무다. 운전자가 아닐 순 있어도 보행자가 아닐 순 없다.
장원석 S팀 기자
07.14 불행지수
미국 여론조사기업 갤럽은 매년 140여개 국, 15만 명을 조사해 ‘불행지수’를 발표한다. 구조화된 설문지 대신, 국가별로 면접관을 고용하고 교육한 뒤 전국으로 파견해 각계각층 사람들과 대면 인터뷰를 하는 방식이다. 엄청난 시간과 공이 들어간다.
갤럽은 불행을 슬픔·스트레스·분노·걱정 같은 정서적 괴로움에 육체적 고통을 더해 수치화한다. 조사 첫해인 2006년엔 24였던 불행지수는, 지난해 33으로 뛰어올랐다. 반면 만족감·즐거움·웃음·존중받음·배움 등의 총합인 ‘긍정적 경험 지수’는 같은 시기 68에서 69로, 단지 1이 늘었다.
짐 클리프턴 갤럽 대표는 지난달 경제전문지 이코노미스트 기고문에서, 불행의 증가 원인을 다섯 가지 추려냈다. 빈곤·외로움·고단함·불평등, 그리고 소셜미디어다. 그는 “세계의 기아 감소 추세는 멈췄고, 외로움의 해악은 하루에 담배 한 갑을 피우는 것과 같으며, 통계상 직장인은 실업자보다 부정적 감정에 노출될 가능성이 크다”고 설명했다.
불평등과 소셜미디어의 공통점은 ‘비교’다. 불평등은 필연적으로 비교로 이어진다. 소셜미디어는 비교를 일상화했다. 친구·이웃과의 비교도 벅찬데, 소셜미디어 속에선 전 세계인이 제 집안 깊숙한 곳까지 초대해 갖가지 자랑거리를 꺼내 놓는다.
‘비교 불행’이라면 한국도 빠질 수 없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자살률 1위가 된 지 오래다. 알코올 관련 사망자는 2020년 5155명으로, 20년새 두 배가 됐다. 마약 사범도 빠르게 늘고 있다. 전문가들은 “소셜미디어 대중화 등으로 ‘나는 남보다 못하다’는 상실감이 커진 탓”이라 진단했다.
불행지수를 낮추려면 비교를 멈춰야 할까. 조지 피터슨 토론토대 교수는 『12가지 인생의 법칙』에서 “비교는 타인이 아닌, 자신과 하는 것”이라 조언한다. 비교를 멈추려 하지 말고 대상을 바꾸라는 얘기다. 구체적인 방법도 제시한다. “라이벌·상사·자본주의 탓하지 말고, 책상 위부터 치우라”고 권한다. 하루 1분씩이라도 책상 한 쪽에 묵혀둔 서류더미 정리에 집중하란다. 또 삶을 장기적으로만 보지 말고, 5분 또는 1분 앞을 생각하라는 귀띔도 유용하다. 눈앞의 문제를 마주하고 해결할 때, ‘어제의 나’와 비교해 덜 불행해진 오늘의 나를 만날 수 있다.
박형수 국제팀 기자
07.15(금) 존영(尊影)
며칠간 ‘존영(尊影)’이라는 말이 뉴스에 오르내렸다. 지난 11일 국민의힘 최고위원회의에서 “윤석열 대통령 존영을 중앙당과 시·도당 사무실에 걸자”는 논의가 오간 게 계기다. 민주화 이후 태어난 한글 세대에게는 듣기조차 생소한 단어다. 존귀한(尊) 모습(影)이라는 의미로, 사전적 정의는 ‘남의 사진이나 화상 따위를 높여 이르는 말’(표준국어대사전)이다. 비슷한 말로 존조(尊照)가 있다.
무협지에서나 볼 법한 단어가 21세기 여당 회의에서 거론된 사연은 이렇다. 복수의 참석자들에 따르면 이날 한기호 사무총장이 최고위에 당무를 보고하면서 “지역 당원협의회와 시·도당 등에서 오래된 전직 대통령 존영 디자인 교체를 요구한다”는 민원을 전했다. 그러자 한쪽에서 “전직 대통령 사진을 거는데, 현직 대통령 사진은 어떻게 되나”라는 질문이 나왔다. “안 그래도 요청한 지역들에 윤 대통령 존영을 발송했다” “시·도당에서 거는데 중앙당에는 왜 안 거느냐는 말도 있다”는 식으로 논의가 흘러갔다.
국민의힘은 자유한국당 시절 홍준표 당시 대표 결정으로 이승만·박정희·김영삼 3인의 전직 대통령 사진을 당사에 걸었다. 더불어민주당 당사에는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 사진이 있다. 이들은 모두 고인이 된 전직 대통령이다. 그래서 “영정도 아니고 왜 살아있는 현직 대통령 사진을 회의실에 거나. 기괴하다”라는 젊은 당직자와 보좌진 반응은 일리가 있다.
존영이라는 이름 자체에서 풍기듯, 사진에 비현실적 권위를 부여해 통치 수단으로 활용하려는 발상 자체가 거부감을 준다. 스마트폰과 TV만 켜면 언제 어디서든 지도자 얼굴을 고화질로 볼 수 있는 시대에 사진 우상화는 사회주의 국가에서나 있는 일이다. 12일 홍콩 매체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올가을 당 총서기 3연임과 함께 ‘표준 초상화’를 준비 중이라고 보도했다. 북한에서는 6년 전 홍수 때 교사·학생 등 13명이 김일성·김정일 부자 초상화를 구하러 급류에 뛰어들었다가 사망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자유자재로 편집한 짤(사진)과 움짤(동영상)이 판치는 지금의 한국 정치에 존영 거론은 “시대착오적 발상”(조경태 의원)이 맞다. 역대 대통령 중 취임 초 최저 지지율을 기록 중인 윤 대통령이 때아닌 ‘사진 정치’ 논란을 겪는 것도 민망하다.
심새롬 정치팀 기자
07.18(월) 빚투
한 아이에게 어머니가 물었다. “못 보던 연필인데 어디서 났니?” 아이는 우물쭈물 답했다. “짝꿍 건데 몰래 가져왔어요.” 어머니는 말했다. “그래? 예쁘구나.” 다음 날 아이는 시장에서 포도를 훔쳐왔고 어머니는 “포도가 잘 익었구나”고 말했다. 아이는 자라면서 점점 더 많은 것을 훔쳤고 결국 남의 집에서 보석을 훔치다 잡혔다. 감옥에 가게 된 아들을 보고 땅을 치며 우는 어머니에게 아들이 말했다. “처음 남의 물건을 훔쳤을 때 어머니가 따끔하게 혼냈더라면 이 꼴이 되지 않았을 거예요. 어머니가 꾸짖지 않아 남의 물건을 훔치는 것이 나쁜 행동인지 몰랐잖아요.” 『이솝우화』 중 ‘도둑 어머니의 가르침’ 이야기다.
윤석열 정부의 ‘빚 탕감’ 정책이 도마 위에 올랐다. 지난 14일 발표한 만 34세 이하 저신용(신용평점 하위 20% 이하) 청년을 위한 ‘청년 특례 채무조정 제도’가 논란의 중심에 있다. 저신용 청년의 이자를 최대 50% 감면하고 3년까지 원금상환 유예한다. 금융위원회는 설명 자료에 ‘많은 청년이 저금리 환경에서 재산 형성 수단으로 저축 대신 돈을 빌려 주식·가상자산 등 위험 자산에 투자했다’며 ‘이들의 투자 실패가 장기간 사회적 낙인이 되지 않게 한다’고 밝혔다. ‘빚투’(빚내서 투자) 청년을 위한 구제책이라고 정부 스스로 밝힌 셈이다.
그간 성실히 저축해 온 청년층은 물론이고 전 연령층이 반발하고 나섰다. 지난해 가상자산 투자 연령별 비중은 30대 이하가 55%, 40대 이상이 45%다. 그런데 콕 찍어 청년층의 빚만 탕감하겠다는 제도는 지지율을 의식한 포퓰리즘 정책이라는 비난도 거세다.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 우려도 크다. 윤 대통령은 지난 15일 “부실화돼 뒷수습하기보다 선제적으로 적기 조치하는 게 국가 자산을 지키는 데 긴요하다”고 말했다.
취지는 좋다. 문제는 탕감만 있고 가르침이나 재기 발판은 없다는 점이다. 박근혜 정부는 2013년 국민행복기금을 조성해 4년간 58만 명의 빚을 탕감했다. 그런데 이 중 10만6000여 명이 다시 채무불이행자(3개월 이상 연체)가 됐다. 빚 부담에 허덕이는 청년들이 직접 돈을 벌어서 빚을 갚을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한다. 그래야 재기할 수 있고 빚투 무서운 줄도 안다.
최현주 금융팀 기자
07.19 자폐 스펙트럼
자폐 스펙트럼 장애(Autism Spectrum Disorder·ASD)는 신경 발달 장애의 한 종류다. 자신만의 세상에 갇혀 있는 자폐, 부모와 의사소통은 가능한 고기능 자폐, 공감 능력이 떨어지는 아스퍼거증후군 등 유사한 유형을 통틀어 일컫는다. ‘스펙트럼’이란 이름처럼 워낙 양상이 다양하다. 자폐 스펙트럼 장애가 있으면 지적 장애나 학습 장애도 나타나기 쉽다. 단, 특정 영역에 관한 기억력은 뛰어난 경우가 많다. 드물지만 특정 분야에서 천재적 재능이 나타나는 경우를 ‘서번트 증후군’이라 부른다.
『자폐 스펙트럼: 장애와 비장애 사이, 어떻게 인식하고 어떻게 지원할까』(마고북스)에 따르면 “임기응변적인 대인 관계가 서툴고, 자신의 관심과 방식 및 진행 속도를 유지하는 걸 가장 우선시하는 본능적 지향이 강한” 것이 자폐 스펙트럼의 전형적 특징이다. 이 책을 쓴 혼다 히데오 일본 자폐증협회 이사장은 장애 수준에는 이르지 않은 이들까지 포함하면 인구의 10%가 자폐 스펙트럼에 해당한다고 추정한다. 나아가 저자 자신도 자폐 스펙트럼인이라고 고백한다.
채널 ENA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가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주인공은 자폐 스펙트럼 장애가 있는 변호사다.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회전문을 통과하는 것도 어려워한다. 재료가 훤히 보이는 김밥만 먹으며, 향고래의 특성에 집착한다. 다정한 사람들의 도움 없이는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지경이지만, 한번 읽은 법전은 잊어버리지 않는 천재적인 변호사로 맹활약한다.
드라마에서나 가능한 판타지 같지만 현실 세계에서도 사회적으로 성공한 예를 찾을 수 있다. 일론 머스크도 테슬라 CEO가 대표적이다. 그는 지난해 미국 코미디 프로그램 SNL에 출연해 아스퍼거증후군이라고 고백했다. 자신이 가끔 이상한 말을 하거나 포스팅하는 건 뇌가 그렇게 작동하기 때문이라면서다.
혼다 이사장은 자폐 스펙트럼인을 치료해야 할 환자가 아니라 '지원해야 할 소수파의 종족'으로 인식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들을 대할 땐 먼저 경청하고, 명령이 아니라 제안을 해 합의를 이끌어내며, 구체적인 정보를 주고, 말과 행동을 일치시켜 신뢰를 심어주라고 권한다. 자폐인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을 대할 때 필요한 자세 아닌가 싶다.
이경희 이노베이션랩장
07.20 9급 공무원
9급 공채 시험은 공무원이 되기 위한 가장 보편적인 방법이다. 인사혁신처의 ‘국가공무원 인사통계’를 보면 지난해 신규 임용된 일반직 공무원 1만9326명 가운데 9급 공개·경력채용이 절대다수(1만1871명)였다. 7급 신규임용(1779명)은 9급 경력채용(2077명)보다 적었다.
채용 과정에서 가장 낮은 계급인 9급 공무원을 많이 뽑는 건 당연한 일이다. 정부 수립 이후 공무원 계급은 늘 9개였다. 처음에는 1급과 2~5급 갑·을로 계급을 나눴다. ‘5급을’이 9급과 같은 직급이다. 1~9급으로 체계가 바뀐 건 1981년이다.
윤석열 정부의 요직에도 9급 출신 인사들이 있다. 복두규 대통령실 인사기획관은 만 19세에 검찰 9급 공채 수사관에 합격해 이후 대검 사무국장(1급)을 지냈다. 윤 대통령의 대선 후보 시절 비서실장으로 발탁된 서일준 국민의힘 의원도 거제군청 9급 공무원(면서기)으로 입직했다.
올해 9급 국가공무원 시험 경쟁률은 ‘29.2대 1’였다.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80대 1로 정점을 찍었지만, 최근에는 다소 하락세다. 2020년 37.2대 1, 지난해 35대 1에서 올해는 30대 1이 깨졌다. 그런데도 공무원이 직장 선호도 최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을 부정하긴 어렵다. 만 13~34세 대상 조사에서 가장 근무하고 싶은 직장 1위로 국가기관을 꼽은 이가 21%나 됐다. (통계청 ‘2021년 사회조사결과’)
대통령실에 지인을 추천해 채용했다는 논란을 겪고 있는 권성동 국민의힘 대표 직무대행 겸 원내대표가 최근 “높은 자리도 아니고 행정요원 9급으로 들어갔다. 최저임금으로 서울에 어떻게 살지 내가 미안하다”며 “난 그래도 7급에 넣어줄 줄 알았는데 9급에 넣었더라”고 해명했다. 순간 ‘최저임금’ 수준의 박봉을 받으면서도 사명감을 갖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9급 공무원들, 그런 9급 공무원이 되기 위해 악전고투하는 공시생들의 표정이 떠올랐다. 권 원내대표가 평생 검사와 국회의원(4선) 등 고위직만 지내긴 했지만, 9급·공시생들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헤아렸다면 툭 내뱉기 어려운 발언이다.
결국 같은 ‘윤핵관’ 그룹의 장제원 의원이 권 원내대표의 해명을 “거칠다”고 비판하면서 채용 논란은 더 달아올랐다. 윤 대통령과 측근들에게 떨어지는 지지율을 돌려세울 의지는 있는 건지 궁금하다.
한영익 정치에디터
07.21 보편적 시청권
최근 한국을 다녀간 잉글랜드 프로축구 토트넘 홋스퍼는 두 차례 친선경기를 통해 국내 축구 팬들과 교감했다. 국내에 머문 일주일 사이에 ‘손흥민 소속팀’에서 명실상부한 ‘국민 축구팀’으로 자리매김한 모양새다.
토트넘 내한 경기의 흥행 성공은 지난 2019년 유벤투스(이탈리아) 방한의 악몽을 지웠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3년 전 유벤투스는 최소 45분 이상 뛴다던 간판스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약속과 달리 경기 내내 벤치를 지켜 물의를 빚었다. 거액을 주고 티켓을 구매한 팬들의 분노가 폭발했고, 이후 지리한 법적 분쟁이 이어졌다.
‘대성공’이라 평가받은 토트넘 내한 이벤트의 유일한 논란은 중계 방식이었다. TV 방송사 대신 초청사 쿠팡이 운영하는 OTT(Over The Top·셋톱박스를 거치지 않고 인터넷을 통해 콘텐트를 제공하는 방식) 서비스 ‘쿠팡 플레이’가 독점 중계했다. 이로 인해 중장년층을 비롯해 IT 접근성이 떨어지는 일부 사회적 계층이 시청에 곤란을 겪었다. 이와 관련해 우리 사회 일각에서 “온 국민이 주목하는 손흥민 경기인데, 보편적 시청권을 보장하지 않은 건 아쉽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지난 2007년 방송법에 적용한 보편적 시청권(Public Viewing Right)의 개념은 ‘올림픽이나 월드컵처럼 국민적 관심이 매우 높은 스포츠 이벤트의 경우 전 국민이 시청할 수 있는 방송 수단을 확보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과연 토트넘 경기가 보편적 시청권 적용 대상일까. 토트넘 선수단이 한국을 다녀간 건 기업(쿠팡)이 자사 고객(쿠팡 플레이 가입자)을 우대하고 수익도 내기 위해 스포츠 콘텐트(토트넘+손흥민)에 100억원 가까운 비용을 투자한, 철저히 상업적인 이벤트였다. 만약 쿠팡이 토트넘 초청 경기 대신 BTS 콘서트를 주최하고 자사 OTT 서비스로 생중계했더라도 같은 논란이 불거졌을까.
이번 기회에 보편적 시청권의 개념을 보다 명확히 다듬을 필요가 있다. 콘텐트도 채널도 빠른 속도로 다변화하는 흐름 속에서 ‘국민적 관심’이라는 애매한 표현이 관련 산업 성장의 걸림돌로 작용해선 곤란하다. 영상·기사·스포츠 경기를 막론하고 남다른 노력을 들여 제작했다면, 온라인 콘텐트라도 합당한 비용을 지불하고 즐기는 게 상식으로 통하는 시대다.
송지훈 스포츠디렉터 차장
07.22(금) 루키
64개 칸으로 이뤄진 체스판에서 ‘룩’은 좌우 코너에 1개씩 자리한다. 성채의 탑처럼 생긴 말이다. 체스는 편당 6종류의 기물 총 16개를 가지고 경기한다. 킹·퀸(각 1개씩), 룩·비숍·나이트(각 2개씩), 폰(8개)이다. 상대편의 킹을 잡으면 승리한다.
우리 편 진용에서 가장 뒤편에 있는 룩은 엔드 게임(종반전)으로 갈수록 진가가 드러난다. 스포츠계에서 신인을 뜻하는 ‘루키(rookie)’의 어원이 룩과 관련 있다는 설이 있다. 룩은 나중에 나서기 때문에 그 경기에서 새로운 선수로 여겨진다.
미국 야구계에는 아예 ‘루키리그’가 있다. 고졸 신인이나 중남미에서 넘어온 유망주가 선을 보이는 곳이다. 마이너리그(MiLB) 중에서도 등급상 가장 낮은 리그다. 월급도 없으며 식비와 숙박비, 교통비를 알아서 해결해야 한다. 루키리그에서 싱글A, 더블A, 트리플A를 거친 다음이 메이저리그(MLB)다.
MLB에서 16년간 뛰었던 추신수(40·SSG랜더스)도 루키리그부터 트리플A까지 마이너리그 과정을 단계적으로 밟았다. 부산고 졸업을 앞둔 2000년 고향 팀 롯데자이언츠가 1순위로 그를 지명했지만, 미국으로 건너갔다. 고교 시절엔 최고의 왼손 투수였지만 시애틀 매리너스의 제안을 받아들여 외야수로 전향한 그다. 추신수의 『오늘을 즐기고 내일을 꿈꾸다』에 루키리그에서 마음고생 한 기록이 남아있다.
한국 여자 골프계가 ‘슈퍼 루키’ 등장으로 떠들썩하다. 올 시즌 드라이버 평균 비거리 263.7야드(241.1m)로 1위를 기록 중인 윤이나(19·하이트진로)다. 윤이나는 지난 17일 경기도 양주 레이크우드 골프장에서 열린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투어 에버콜라겐 퀸즈 크라운에서 합계 20언더파로 우승했다. 정규투어 데뷔 첫해 14번째로 나선 시합에서 거둔 우승이다.
4라운드 내내 선두를 놓치지 않은 ‘와이어 투 와이어’ 우승이지만 막판에 고비도 있었다. 투어 8년 차 박지영에게 한때 선두를 내주고 역전당했다. 윤이나는 하지만 15번홀(파5)에서 3m 버디 퍼트를 집어넣고 다시 공동 선두로 복귀했다. 그리고 18번홀(파4)에서 6m 거리의 버디 퍼트에 성공해 우승을 확정했다. 윤이나의 루키 시즌이 항상 승리로만 장식될 순 없을 것이다. 고비가 올 때마다 첫 우승 마지막 라운드의 시합 내용을 기억했으면 한다.
위문희 사회2팀 기자
07.25(월) 깻잎 논쟁
이 논쟁은 아직 진화 중이다. 기원은 지난 2019년 8월 가수 노사연·이무송 부부가 출연한 예능프로그램(SBS ‘집사부일체’)에서 털어놓은 에피소드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들이 한 여자 후배와 식사를 하던 중 반찬으로 나온 깻잎 장아찌가 문제였다. 후배가 깻잎을 떼어내지 못하자 이무송이 젓가락으로 꼭지를 살짝 눌러 도와주게 된다. 이를 본 노사연은 ‘외간 여자의 깻잎을 잡아준다’고 화를 냈고 이무송은 ‘매너였을 뿐’이라고 항변했다. 이 부부싸움은 지난 겨울 갑자기 알고리즘의 알 수 없는 장난을 통해 각 커뮤니티 게시판을 장악했다. 모임이나 술자리 주제가 된 데 이어 예능 프로그램의 단골 소재로 등판했다.
계절이 두 번 바뀌는 동안 동일 논쟁은 종목을 바꿔가며 이어지고 있다. 애인 친구에게 새우를 까줘도 된다 안된다를 따지는 ‘새우장 논쟁’, 추운 날 애인 친구가 롱 패딩 지퍼를 올리지 못할 때 처신을 묻는 ‘패딩 논쟁’, 친구가 내 연인의 자동차 블루투스를 연결해 음악을 틀어도 되는가를 정해야 하는 ‘블루투스 논쟁’. 아마 이 순간에도 새 버전이 추가되고 있을 것이다. 유행 사이클이 주 단위로 바뀌는 요즘, 유독 이 논제가 끈질긴 생명력을 이어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당장의 재미는 그럴듯한 근거를 제시하는 데서 나온다. 해법이 기발할 때는 기꺼이 설득되기도 한다. 어떤 답변을 내는지를 보면 성격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도 흥미롭다. 과거와 달리 출신 학교나 고향, 가족 관계 등 신상정보를 물어보는 것이 절대 금기인 만큼, MBTI(마이어스 브릭스 유형지표)와 함께 초면의 어색함을 깨는 수단으로도 자주 쓰인다. ‘라떼’는 회식 자리에서 처음 보는 선배가 ‘아버지 뭐하시는지’를 묻기도 했지만, 지금 그랬다가는 매장 감이다.
또 하나. 대한민국에서 절교로 이어질 위험이 없는 거의 유일한 논쟁 주제다. 요즘은 어떤 자리에서 정치나 사회 이슈에 대한 ‘진짜 논쟁’을 꺼내려면 파국을 각오해야 한다. 격정적인 정치 환경을 경험한 지난 몇 년 간 누구에게나 깨진 단톡방 한두 개 쯤은 생겼다. 결국은 생각이 같은 사람끼리 만나 떠들며 기존 생각을 강화하고, 사회는 점점 극단으로 치닫는다. 깻잎 논쟁 정도의 유연성만 있어도 훨씬 소통이 편할텐데, 현재로써 이는 욕심 같다.
전영선 K엔터팀 팀장
07.26 한·미 통화스와프
2008년 10월 기획재정부와 한국은행 간 갈등이 극에 달했다. 한·미 통화스와프 첫 체결 ‘축포’를 터뜨린 직후 일이다. 불만은 한은에서 먼저 터져 나왔다. 공식 발표일 하루 전에 기재부가 체결 사실을 흘리고 모든 공이 기재부에 있는 양 거짓 회견을 했다는 비판이었다.
기재부도 가만있지 않았다. 협상에 소극적이었던 한은이 막상 체결되고 나니 딴소리를 한다며 반박했다. 양측 수장을 겨냥한 원색적 비판, 책임자 경질론까지 물밑에서 오갔다. 이명박 당시 대통령이 “위기 극복엔 부처 간 경계가 없다. 모두가 하나가 돼야 한다”며 공개 경고에 나설 정도였다.
‘누구 공이냐’를 두고 양대 기관이 낯 뜨거운 다툼을 벌일 만큼 당시 한·미 통화스와프의 화력은 대단했다. 미국발 금융위기로 달러당 1500원 가까이로 추락했던 원화가치가 통화스와프 체결 이틀 만에 200원 넘게 수직 상승(환율 하락)했다. 필요하면 언제든 300억 달러까지 원화로 맞바꿔 인출할 수 있다는 협약의 효력은 컸다. 이름도 낯선 통화스와프가 한국인 머리에 각인된 건 그때다.
지난주 재닛 옐런 미국 재무부 장관이 한국을 방문했다. 외환시장이 불안한 만큼 한·미 통화스와프를 다시 추진해야 한다는 요구가 거셌다. 물론 옐런 장관은 통화스와프에 대한 직접적 언급 없이 한국을 떠났다. 예견된 일이다.
통화스와프에 대한 전권은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가 쥐고 있다. 재무부가 체결하라, 마라 할 처지가 아니다. 미 재무부 격인 기재부가 외환 제도·협력 정책도 총괄하는 한국과는 한참 다르다. 기재부 관계자는 난감한 처지를 한 문장으로 축약했다. “옐런 장관이 한·미 통화스와프를 체결하겠다고 발표하는 건 한은 총재도 아닌 추경호 부총리(기재부 장관)가 다음 달 기준금리를 올리겠다고 하는 것과 같다.”
옐런 장관을 붙잡고 통화스와프를 체결해달라는 것 자체가 코미디란 얘기다. 14년 전 선배들이 했던 과잉 홍보의 대가를 지금 기재부가 치르고 있다. 통화스와프가 체결되면 시장에 좋겠지만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2008년에도 반짝 효과만 봤고 한국은 금융위기 폭풍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한·미 회담이 있을 때마다 통화스와프를 두고 변죽만 울리는 일이 더는 없었으면 한다.
조현숙 경제정책팀 차장
07.27 무상증자
공구우먼. 7월 주식시장에서 가장 뜨거웠던 종목 중 하나다. 빅사이즈 옷을 파는 점이 특이할 뿐, 흔한 패션 쇼핑몰과 다르지 않다. 그런데 매출이 473억원(2021년)에 불과한 이 회사의 시가총액이 약 1조원까지 치솟는 일이 벌어졌다. 이벤트는 무상증자였다.
1주당 신주 5주를 배정하는 무상증자를 발표한 6월 14일 이후 이틀 연속, 무상증자 권리락에 따라 8만9900원이던 주가가 1만5000원으로 조정된 6월 29일 이후 4거래일 연속 상한가를 기록했다. 그러나 4만2800원까지 치솟았던 주가는 그 후 열흘 만에 약 70% 급락했다. 뒤늦게 추매에 나선 사람은 대부분 피눈물을 흘렸을 터다.
기업의 자기자본은 자본금과 여윳돈인 잉여금으로 나뉜다. 잉여금에 있는 돈으로 주식을 발행해 공짜로 주주에게 나눠주는 게 무상증자다. 잉여금에 있는 돈이 자본금으로 단순히 이동한 것이니 전체 자기자본엔 변화가 없다. 주주 입장에서도 달라지는 건 없다. A가 B주식 100주(주당 1만원)를 보유했고, B가 1주당 신주 1주의 무상증자를 결정했다면 A의 주식은 200주로 늘어난다. 하지만 그 가치가 100만원에서 200만원으로 뛰는 건 아니다. 주가를 인위적으로 1만원에서 5000원으로 조정(권리락)하기 때문이다.
무상증자하면 소외당하던 종목도 일시적으로 관심을 받는다. 발행주식 수 증가에 따라 거래량도 는다. 무엇보다 권리락에 따라 주가가 낮아지면 그만큼 싸게 보이는 착시가 생긴다.
그러니 기업도 이를 이용한다. ‘좋은 회사니까 저희 좀 봐주세요’ 하는 취지로, 또 어떤 곳은 실적 부진에 따른 주주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무상증자를 택한다. 최근엔 벤처캐피탈(VC) 같은 투자자의 엑시트(투자금 회수) 수단으로도 활용된다. 의도는 달라도, 목표는 같다. 주가 띄우기다.
하지만 통계적으로 무상증자의 결과는 ‘단기 주가 상승, 장기 회귀’로 정리할 수 있다. 잠깐 반짝하지만, 곧 알맹이가 드러난다는 얘기다. 기업가치가 높아진 것도 아니고, 배당 같은 확실한 주주환원 정책도 아니니 당연하다. 그런데도 너도나도 무상증자하겠다고 나선다. 투기를 조장한다는 비판이 없지 않으나, 불법이 아닌데 무턱대고 막을 수도 없다. 투자자가 자신을 지켜야 한다. 공짜 점심은 없다.
장원석 S팀 기자
07.28 공정
“우영우가 강자에요. 모르겠어요?”
최근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는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7화에 등장한 대사다. 자폐 스펙트럼 장애와 천재성을 동시에 지닌 주인공이 간신히 직장에 들어가자, 이를 부정 취업이라 주장하는 한 동료 변호사의 분노에 찬 외침이다.
그의 다음 대사는 이렇다. “이 게임은 공정하지 않아. 우영우는 우리를 매번 이기는데, 우리는 우영우를 공격하면 안 돼. 왜? 자폐인이니까.(중략) 우영우가 약자라는 거? 그거 다 착각이에요.”
또 나왔다. 저 ‘공정’이란 단어 말이다. 공정은 지금 한국 사회에서 가장 힘세고 흔한 단어다. 지난 몇 번의 정권교체가 공정의 기치 아래 이뤄졌고 주요 선거 때마다 공정 아젠다는 필승 전략이었다. 공정은 한국 사회의 온갖 문제를 재단하고 해법을 모색하는 거의 유일한 기준이자, 절대 넘어선 안 될 최후 보루가 됐다.
공정의 사전적 정의는 ‘공평하고 올바름’이다.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고름’이라는 산술적 평등을 뜻하는 공평에, 올바름이란 윤리적 판단을 결합해 공정이 완성된다.
두 개의 기준을 가진 공정은 곧잘 무적의 논리가 된다. “불공정”을 외치는 이들은, 상대방이 ‘평등의 엄밀함’을 범했다고 비난하다, 다음 순간엔 ‘부도덕하다’고 질타한다.
공정이 반드시 지켜야 할 숭고한 가치인 건 맞을까. 신경과학자이자 문학가인 앵거스 플래처는 『우리는 지금 문학이 필요하다』에서 “우리 뇌는 공정에 대한 욕망을 타고났다”고 설명한다. 공정이란 인간이 이성을 챙기고 벼려서 얻어낸 고차원적 철학이 아니라, 침팬지·고릴라도 갖고 있는 선천적 갈망이란 것이다.
공정은 대단히 강력한 신경학적 욕구이기도 하다. 지나치게 사로잡히면 사회적으론 집단폭력이나 잔인한 처벌을, 개인적으론 고립과 증오심을 초래한다고 지적한다.
공정의 부정적 결과를 방지할 뇌의 균형추가 바로 ‘공감’이다. 대뇌 피질에서 작동하는 공감은 상대의 사과를 받아들이고 정상참작 요인을 찾아낸다. 저자는 공정과 공감을 오가는 내면의 저울이 균형을 이룰 때 사회가 유지된다고 조언한다. 공정의 외침만큼, 공감의 목소리가 커져야 하는 이유다.
박형수 국제팀 기자
07.29(금) 직언
직언은 정치의 영원한 난제이자 필요조건이다. ‘정관의 치’를 펼친 당 태종은 300번이나 간언(諫言)했다는 충신 위징을 가까이했다. 집요하고 신랄한 비판에 태종이 “이 시골 늙은이를 죽여버릴 테다”하고 울컥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물론 죽이지 않았다.
조선 최고 성군으로 꼽히는 세종은 재임 내내 신하의 바른 말에 귀를 기울였다. 세상을 뜨기 2년 전까지도 “아래 있는 사람이 마음속으로 그른 것을 알면, 진언(進言)하여 숨김이 없어야 마땅하다”(세종실록 123권)고 손수 강조했다.
대통령제에서도 직언 수용 여부가 리더의 성패를 가르곤 했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때 ‘악마의 대변인(Devil’s Advocate)’ 제도로 위기관리에 성공한 존 F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 이야기가 오래 회자한다.
반면 1977년 4월 뉴욕타임스는 당시 지미 카터 대통령 취임 100일을 이렇게 분석했다. “카터가 그의 선거 공약과 달리 측근으로부터 자신을 고립시키는 한편, 의견이 다른 주위 참모들에게 독설과 퉁명스런 태도를 보이고 있다.” 4년 뒤 카터는 재선에 실패했다. 퇴임 뒤 활동으로 재임 기간 혹평을 만회한 대표적 대통령이다.
9년 전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낸 허태열 전 실장은 지난 20일 본지 인터뷰에서 “나도 쉽지 않았다”고 직언의 어려움을 고백했다. 그는 “듣기 좋은 말만 하는 사람보다 대통령의 부족한 점을 메울 수 있는 사람을 곁에 둬야 한다”고 현 정부에 제언했다.
얼마 전 대통령실 인사 A씨와 현안에 대해 이야기하다 “왜 그런 의견을 윗선에 전하지 않나”라고 물었다. 내부에서 문제의식이 제대로 공유되지 않는 듯했는데, “내 업무영역 밖 일에 필요 이상으로 의견을 내봤자 주변에 괜한 오해만 산다”는 답을 들었다.
취임 100일을 맞아 “입법부와 행정부는 긴장 관계다”, “직언과 쓴소리도 마다 않겠다”고 공언한 권성동 국민의힘 대표 대행 겸 원내대표가 불과 9일 뒤 “대통령님의 뜻을 잘 받들어 당·정이 하나되는 모습을 보이겠다”고 적은 ‘텔레그램 충성 맹세’를 노출했다. 직언을 해야 한다는 이상과, 침묵 또는 아첨이 안전하다는 현실 사이 괴리를 견디는 게 권력 주변부 풍경이 돼가고 있다.◎
심새롬 정치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