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희의 新유대인 이야기4] [31] 2000년간 이어져 온 성인식 ‘바르 미츠바’ - [40] 헤지펀드의 대가 제임스 사이먼스
[홍익희의 新유대인 이야기4] 전 세종대 교수 조선일보
2022.03.22
[31] 2000년간 이어져 온 성인식 ‘바르 미츠바’
13세 성인식 때 재테크 첫발… “돈이란 불리는 것” 바로 주식투자

▲“넌 이제 성인이야” 스스로 결정할 권리와 책임을 동시에 받는 유대인 성인식 - 유대인의 성인식 ‘바르 미츠바’는 만 13세가 되는 해에 치러진다. 성인식을 마치면 결혼을 비롯해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를 갖게 되고 그에 따른 책임도 져야 한다. 유대인의 성인식은 신과의 계약을 지킬 것을 다짐하는 거룩한 행사이자, 사람의 아들이 ‘율법의 아들’로 거듭나는 순간이다. 유대인들은 자녀가 태어난 뒤 12년간 혼신의 힘을 다해 교육에 집중하고, 성인식 이후에는 자녀 교육에 간섭하지 않는다. 사진은 이스라엘 예루살렘의 한 성인식 장면이다. /게티이미지코리아
유대인에게 가장 중요한 행사의 하나가 성인식(바르 미츠바·Bar Mitzvah)이다. 유대인들은 기원전 1세기경부터 성인식을 거행했다. 성인식이란 유대인이 하느님과의 계약을 지킬 것을 다짐하는 거룩한 행사이다. 탈무드는 13세 이전에 한 맹세는 효력이 없다고 가르친다. 종교적 의무도 지우지 않아 속죄일에 금식할 필요도 없다. 한마디로 아직은 판단력이 미숙한 미성년인 것이다.
그러나 율법의 의미를 알게 되면 율법을 준수할 의무가 있다고 보는데, 그 나이가 바로 13세이다. 13세로 정한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유대인의 종교관에 의하면, 사람 영혼의 세계에는 여러 층이 있는데 ‘네샤마(neshamah)’라 불리는 영혼의 세계는 13세부터 시작된다고 한다. 이때부터 사람이 지각 있는 판단력을 지닐 수 있어 하느님과 계약을 맺고, 그 계약을 지킬 능력이 있다고 믿는다. 현대 발달심리학에서도 초등학교를 졸업하는 13세가 되면 아이의 사상과 윤리적 가치가 거의 형성된다고 보고 있다.
사회적 성공보다 공동체 가치 교육
유대인은 1년에 걸친 성인식 준비 기간을 통해 ‘내가 무엇이며, 왜 이 세상에 나왔으며, 무엇을 해야 하나’를 성찰한다. 그런 의미에서 성인식은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장이다. 성인식을 마친 유대인 자녀는 이제부터 성인으로서 모든 걸 책임지고, 모든 걸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다. 자신의 진로에 대한 결정은 물론 심지어 결혼도 할 수 있다. 인생관과 직업관이 세워지는 것이다. 성인식(바르 미츠바)에서 ‘바르’는 아들을 뜻하고, ‘미츠바’는 계약(율법)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바르 미츠바’는 ‘율법의 아들’, ‘신의 아들’이란 뜻이다. 사람의 아들이 성인식을 통해 ‘율법의 아들’로 거듭나는 순간이다.
유대인은 성인식 이후에는 자녀 교육에 일절 간섭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13세 성인식 이전에 자녀 교육을 끝마쳐야 한다. 그들이 12년간 혼신의 힘을 다해 자녀 교육에 헌신하는 이유다. 유대인 자녀 교육의 중요한 특징이 ‘부부 공동 교육’이다. 엄마는 아이가 말귀를 알아들으면 성경 말씀을 암송하고, 아이는 그게 종교인 줄도 모르고 자연스레 따라 외운다. 아빠는 밥상머리 교육과 베갯머리 이야기로 연결된다. 유대인 아빠들은 아이가 13세 이전에는 아무리 바빠도 집에 들어와 아이와 함께 저녁을 먹으며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아이들이 잠들기 직전 베갯머리에 앉아 최소 15분 이상 책을 읽어주거나 이야기를 들려준다.

▲유대교 경전 읽는 아이 - 성인식에서 주인공은 유대교 경전인 토라 두루마리를 펴고 축복문을 낭송한다. 부모는 이날 이후 자녀에 대한 종교적 책임서 벗어난다. /플리커
그 결과 유대인 아이는 네 살이 되면 다른 아이들에 비해 언어 인지력이 거의 두 배 가까이 높아진다. 보통 아이들이 800~900단어를 아는 데 비해 유대인 아이들은 1500단어 이상을 인지한다고 한다. 이는 이후에 더 큰 격차로 벌어지며, 부모와 더불어 하는 독서 습관을 통해 몰입도와 이해력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더 나아가 사유의 폭과 깊이가 달라진다. 유대인들이 각자의 분야에서 우뚝 서는 이유이다.
이렇게 유대인 부모들이 자녀 교육에 헌신적인 것은 하루에 두 번 드리는 ‘쉐마 이스라엘’ 기도 때문이다.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든지 길에 행할 때든지 누웠을 때든지 일어날 때든지 이 말씀을 강론하라”는 하느님의 명령을 실천하는 것이다.
고대로부터 이어진 유대인 디아스포라(고국을 떠나 흩어진 사람들) 공동체 수칙의 요점은 “모든 유대인들은 그의 형제들을 지키는 보호자이고, 유대인은 모두 한 형제다”라는 것이다. 이러한 유대인의 단결력과 공동체 의식이 자녀 교육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그렇다 보니 유대인 자녀 교육의 목표는 사회적 성공에 있지 않고, 자녀를 훌륭한 공동체 구성원으로 만들기 위한 ‘온전한 인격체’로 키우는 데 있다.
유대인들은 자녀가 공동체 구성원들과 잘 협력하며 지낼 수 있는 품성들, 이를테면 인간에 대한 사랑, 이해, 배려, 공감 능력, 협동심, 자선 등에 대한 가치관을 적극적으로 가르치며 몸소 본을 보인다. 궁극적으로 ‘나’로 사는 법이 아닌 ‘우리’로 사는 법, 곧 더불어 사는 법을 자녀에게 가르치는 것이다. 그들의 공동체가 2000년 이상의 떠돌이 생활에서도 민족적 동질성을 유지하며 살아남은 이유이다. 유대인이 강한 것은 개개인의 개인적 역량도 뛰어나지만 그들의 서로 돕는 협동심과 단결력이 강하기 때문이다.
우리와 유대인 자녀 교육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우리는 아이의 기를 살려준다며 초등학교까지는 자녀 교육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다가 중학교에 입학하는 13세 즈음부터 좋은 대학에 보내기 위해 엄마와 자녀 간에 전쟁이 벌어진다. 하지만 유대인 부모들은 애착 관계를 토대로 자녀에게 가치관과 인성을 제대로 가르쳐 13세에 성인식을 치르고 나면 자녀 교육에서 손을 뗀다. 유대인 자녀들이 중2병 없이 사춘기를 무난하게 넘길 수 있는 이유이다.
‘넘버 원’ 아닌 ‘온리 원’ 재능 탐색
또 다른 차이는 우리는 ‘베스트(best)’를 지향하지만 유대인들은 ‘유니크(unique)’한 존재가 되기를 원한다. 유대인에게 거룩함이란 ‘무리와 떨어져 있다’, ‘남들과 다르다’는 뜻이다. 유대인들은 하느님이 개개인 각자에게 남들과 다른 독특한 탤런트(재능)를 주신 것을 믿는다. 세상에서 각자 자기가 해야 할 역할이 따로 있는 것이다. 그래서 유대인 부모들은 자식이 최고가 되는 것을 바라지 않고 하느님이 주신 재능을 살려 남다른 존재가 되는 것을 원한다. 베스트는 반에서 단 한 명뿐이지만 유니크는 모든 학생들이 될 수 있다.

▲성인식 선물 받고 ‘활짝’ - 유대인 청소년은 성인식 때 주로 성경책, 손목시계, 축의금 등을 선물로 받는다. 신 앞에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고, 약속을 잘 지키고 시간을 소중히 아껴 쓰라는 의미 등을 담고 있다. /이스라엘관광청
유대인은 성인식 날 세 가지 선물을 받는다. 성경책, 손목시계 그리고 축의금이다. 성경은 신 앞에 부끄럽지 않은 책임 있는 인간으로 살라는 뜻이고, 시계는 약속을 잘 지키고 시간을 소중히 아껴 쓰라는 의미이다. 사람들은 성인식의 각별한 의미를 축하해주기 위해 보통 200~300달러의 축의금을 낸다. 부모와 친척들은 마치 유산을 물려주듯 큰돈을 주는 경우가 많다. 이때 모아진 돈은 수만 달러 내지 수십만 달러에 이른다. 자녀는 이 돈을 미래를 위해 일반적으로 주식과 채권, 예금 등에 나누어 묻어둔다. 벌써 포트폴리오를 배우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13세부터 독립적으로 재테크를 시작한다는 점이다. 이를 잘하기 위해 친구들과 함께 경제 동향과 관심 기업에 대해 조사하고 공부한다. 경제학 공부가 따로 없다. 성인식 때 받은 돈이 대학 졸업 무렵이면 몇 곱절로 불어나 있다. 이때 그들은 취직할 것인지 그 종잣돈으로 창업을 할 것인지를 결정한다.
이렇듯 그들은 처음부터 “돈이란 버는 것이 아니라 불리는 것”이라는 것을 금융 투자 실전을 통해 배운다. 그리고 평생 어떻게 버느냐보다는 어떻게 불리느냐로 씨름한다. 우리가 직장을 구해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돈을 벌 때, 그들은 열세 살부터 재테크 공부를 하며 돈을 불린다. 그리고 우리가 은퇴 이후를 의식하여 뒤늦게 재테크에 눈뜨기 시작할 때, 그들은 이미 고도의 금융 마인드로 무장되어 세상을 사는 것이다. 유대인들의 세계적인 경제 파워는 이렇게 어려서부터 훈련받은 결과이다. 무서운 차이이자 경쟁력이다.
[풍습 이상 의미의 성인식 행사]
자녀가 율법 하나 택해 대중 앞에서 직접 설명… 진정한 어른으로 대접
유대 전통에 의하면 성인식은 만 13세가 된 다음 날 하는 것이 원칙이나 보통 해당 주간의 안식일에 진행한다. 성인식을 맞은 자녀는 유대교 경전인 토라(모세오경) 두루마리를 펴고 축복문을 낭송한 뒤 토라 중 한 부분을 히브리어로 읽는다. 회중 앞에서 토라를 공식적으로 읽는다는 것은 유대인들에게는 특별한 축복으로 여겨져 왔다. 유대인 남자들이 고대로부터 모두 글을 아는 것은 성인식 때 토라를 읽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자녀의 낭송이 끝나면 부모는 자녀의 말을 이어받아 다음과 같이 화답한다. “이 아이에 대한 책임을 면하게 해주신 하느님께 영광을.” 이같이 부모는 자녀의 종교적 잘못에 대해 연대책임이 없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증인들 앞에서 선포한다. 이는 앞으로 자녀의 모든 잘못은 본인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부모로선 이날이 자녀에 대한 종교적 책임과 자녀 교육의 의무를 면하게 되는 기쁜 날이다.
다음 순서는 자녀가 말씀을 강론하는 ‘드라샤’이다. 자녀는 토라에 쓰인 율법 중 하나를 택해 1년 동안 끊임없이 원고를 가다듬어 이를 대중 앞에서 강론하는 것이다. 중세 독일 유대인들은 성인식 다음에 따로 드리는 예배에 성인이 된 자녀에게 설교를 하게 했다. 오늘날에도 성인식 날 오후 예배에 성인이 된 자녀가 설교하는 전통이 있다.
드라샤가 끝나면 성대한 음식을 함께 나누는 축제의 시간을 갖는다. 이때 친지들과 이웃들은 한 사람의 온전한 유대인이 탄생한 것을 기뻐하며, 자녀를 공동체 총회의 회원으로 맞이한다. 그는 이제 공동체의 앞날을 결정하는 중요한 투표에 참여할 수 있고, 공동체를 대표하여 성경을 봉독하고 대표 기도도 할 수 있다.
[32] 고대 이스라엘 패망 이후 떠돌이 민족이 버틴 비결
의무교육 2100년… 로마제국에 나라 잃어도 학교만은 지켜냈다
보통 나라들은 국가가 망하면 100년도 안 되어 역사에서 그 흔적이 사라진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나라를 잃고 2500년 이상 뿔뿔이 흩어져 떠돌이 생활을 했음에도 민족적 동질성을 잃어버리지 않았다. 그 비결은 무엇일까?
탈무드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수석 랍비가 북쪽 마을을 시찰하기 위해 두 랍비를 시찰관으로 보냈다. 두 랍비가 그 마을에 가서 말했다. “이 마을을 지키고 있는 사람을 만나서 좀 물어볼 일이 있소.” 그러자 그 마을의 경찰서장이 나왔다. “아니오. 우리가 만나야 할 사람은 이 마을을 지키고 있는 사람이오.” 이번에는 수비대장이 나왔다. 그러자 두 랍비가 말했다. “우리가 만나려고 하는 것은 경찰서장이나 수비대장이 아니라 학교 선생님이란 말이오. 경찰이나 군인은 마을을 파괴할 뿐이오. 교육자들이야말로 진정으로 마을을 지키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소.”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에 따르면 로마·유대 전쟁 당시 유대인 110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유대 랍비 요하난 벤 자카이는 나라가 망해도 유대교와 전통이 계승된다면 유대 민족이 살아남을 수 있다고 봤다. 그는 텔아비브 인근에 율법 학교를 세우고 토라와 탈무드를 가르쳤다. 나라 잃은 유대인들은 뿔뿔이 흩어져 살면서도 교육을 통해 언어와 민족 정체성을 잃지 않았다. 그림은 로마군에 패해 예루살렘이 함락되는 장면을 묘사한 19세기 화가 프란체스코 하예즈의 작품이다. /게티이미지코리아
성경 읽기 위해 의무교육 시작
그리스에서 독립을 쟁취한 고대 이스라엘 하스모니아 왕조의 마지막 군주가 살로메 알렉산드라(기원전 76~67년 재위) 여왕이다. 살로메는 분열된 국론을 하나로 모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여왕은 그간 적대했던 바리새파를 산헤드린(최고 법원)에 받아들여 화해하며 그들의 구전 율법을 법률에 포함했다. 여왕은 국민 단결을 위해서는 먼저 신앙심을 고취해야 한다고 믿었다. 신앙심을 위해서는 모두가 성경을 읽고 익혀야 했으나, 많은 국민이 문맹이었다. 여왕은 가정 예배를 이끄는 남자들만이라도 모두 성경을 읽을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유대인은 3000년 전부터 학교를 운영했다. 그러나 율법 학교 중심이어서 일반 서민들이 다닐 수 있는 초등학교는 부족했다. 살로메 여왕은 전국 각지에 초등학교를 세워 남자들 모두에게 무료 의무교육을 했다. 세계 최초 공교육이자 의무교육이었다. 문맹이 98% 이상이었던 고대에 글을 읽고 쓴 유대인들이 상업과 교역, 금융업에서 두각을 나타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스라엘은 국가의 미래를 책임질 인재를 길러내기 위해 1925년 히브리 대학교를 설립했다. 사진은 1935년 히브리대 물리학 수업 장면. /위키피디아
이렇게 유대인은 기원전부터 의무교육을 시행한 민족이다. 그런데 초등교육뿐 아니라 율법 학교 등 고등교육에 대한 무상교육도 그즈음 시작되었다. 이는 기원전 1세기 랍비 힐렐에게서 유래했다. 그는 몹시 가난했다.
하지만 랍비가 되고 싶은 꿈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막노동으로 하루 벌어 반은 아내에게 생활비로 주고 반은 율법 학교 수업료로 냈다. 그런데 하루는 한 푼도 벌지 못해 교실에 들어가지 못하고 지붕 위 채광창에 엎드려 교실 안을 훔쳐보며 공부하다 그만 잠이 들었다. 그날 밤 눈이 많이 내렸다. 아침에 선생님이 교실이 왜 이렇게 어둡냐며 천장을 보니 채광창을 막고 있는 힐렐의 몸 위에 눈이 1m나 쌓여 있었다. 학생들이 힐렐을 데려다 난로가에서 언 몸을 녹여주었다. 그 뒤 율법 학교도 무상교육이 실시되었다.
이후 힐렐은 최고 율법학자가 되었다. 하루는 이방인이 찾아와 “내가 이렇게 한 발로 서 있는 동안, 율법 내용 전부를 내게 가르쳐보시오”라고 말하자 힐렐이 서슴없이 답했다. “당신이 당해서 싫은 일을 남에게 하지 마십시오.” 이른바 ‘황금률’이라 부르는 말씀이다.
서기 66년부터 70년까지 1차 유대-로마 전쟁 당시 랍비 ‘요하난 벤 자카이’는 열심당의 무장투쟁이 성공하지 못할 것으로 보았다. 통찰력이 뛰어난 그는 유대 전쟁이 결국 대학살로 막을 내리고 유대인들은 뿔뿔이 흩어질 것임을 예견했다. 그는 이런 상황에서는 민족의 독립보다는 보존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랍비는 유대 민족이 영원히 살아남는 길을 골똘히 생각한 끝에 자신이 직접 로마군 사령관과 모종의 타협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당시 아무도 예루살렘을 떠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제자들에게 설명하고 함께 탈출 계획을 짰다. 제자들은 길거리로 나가 옷을 찢으며 위대한 랍비 요하난이 흑사병에 걸려 죽었다고 울부짖었다. 그들은 열심당원들에게 스승의 시체를 성 외곽에 매장하여 성 안에 흑사병이 돌지 않게 해달라고 요청해 허락을 얻어냈다.
제자들은 랍비가 든 관을 메고 성을 빠져나와 로마군 사령관 베스파시아누스 장군 막사에 도착했다. 랍비는 장군을 만나 그가 머지않아 황제가 될 것이라고 예언한 뒤, 황제가 되면 자신들이 유대 경전을 공부할 수 있는 조그만 학교 하나를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자기가 황제가 될 것이라는 예언에 내심 놀라며 예언이 이루어지면 호의를 베풀기로 약속했다.
같은 해 로마 황제 네로가 자살했다. 그 뒤 정치 군인 세 명이 왕위에 올랐으나 모두 몇 달 만에 살해되었다. 이때 베스파시아누스를 군대가 황제로 추대했다. 랍비는 당시 로마의 정치적 역학 관계를 꿰뚫어 보고 있었던 것이다. 69년 황제에 오른 베스파시아누스는 랍비의 예언이 성취된 데 대해 놀라며, 후임 사령관인 아들 ‘티투스’에게 약속을 지키도록 명령했다. 이로써 유대 교육이 소멸 위기에서 살아남게 되었다.
유대인 포로들이 콜로세움 세워
로마제국이 가장 고전한 전쟁이 로마-유대 전쟁이었다. 오죽했으면 승전 후 이를 기념하여 최초의 개선문을 만들었다.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에 따르면, 예루살렘 공방전 당시 성 안에 유대인 270만명이 있었는데, 전쟁 중 110만명이 사망했고 포로로 잡혀 간 유대인이 9만7000명이었다. 이 유대인 포로들이 건설한 게 로마의 콜로세움이다. 전쟁으로 열심당, 제사장 중심의 사두개파, 쿰란 수도원의 에세네파가 모두 소멸하고 오직 바리새파만 살아남았다. 이때 유대교는 사두개파의 전멸로 제사장이 없어져 평신도들이 지키는 종교가 되었다. 이후 유대교는 사제 없이 공부를 많이 한 학자, 곧 랍비가 이끄는 전통이 섰다.
요하난 벤 자카이는 텔아비브 인근 야브네에 율법 학교를 세우고 매년 랍비를 길러내 세계 각지의 유대인 마을에 보냈다. 그들은 거기서 시나고그를 세우고 토라와 탈무드를 가르쳤다. 이후 유대인에게 교육은 곧 신앙이었다. 벤 자카이는 비록 나라는 망해 없어졌지만 학교를 통해 유대교와 전통이 계승된다면 유대 민족은 살아남을 수 있다고 보았다. 이렇게 유대인들은 뿔뿔이 흩어져 디아스포라로 생활하면서도 교육을 통해 그들의 언어와 정체성, 곧 민족혼을 잃어버리지 않고 2000년 이상 간직할 수 있었다. 그만큼 교육의 힘은 무섭다.

▲1917년 영국이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인의 국가를 세울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고 밝히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유대인들은 대학 설립을 위해 모금 활동에 나섰다. 사진은 아인슈타인(왼쪽)과 하임 바이츠만 박사. 훗날 바이츠만은 이스라엘 초대 대통령이 됐다. /위키피디아
[아인슈타인·바이츠만… 이스라엘 건국 전부터 팔레스타인에 대학 설립]
‘밸푸어 선언’이 1917년에 있었다. 이는 1차대전이 끝나면 유대인들의 나라를 팔레스타인에 세울 수 있도록 영국이 지원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에 따라 유대인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그 땅에 학교부터 세운 것이었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과 훗날 이스라엘 초대 대통령이 된 하임 바이츠만은 세계를 돌며 자금을 모아 테크니온 공대(1924년 개교)와 히브리 대학(1925년 개교)을 설립했다. 교육이 앞으로 탄생할 이스라엘의 장래를 책임질 것이라고 본 것이다.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이 건국되자 1차 중동전쟁이 터졌다. 이집트 전투기들이 이스라엘을 폭격했고,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 이라크 등 아랍 5국이 이스라엘을 공격했다. 당시 이스라엘 유대인 인구는 65만명이었고, 아랍연합 인구는 1억4000만명이었다. 이스라엘군과 민간인들은 기적적으로 신생 조국을 지켜냈다. 테크니온 공대 졸업생들이 빵집 등 일터의 지하 공장에서 몰래 무기를 만들어 전쟁에 대비해온 덕이었다.
전쟁이 터지자 세계 각지에서 유대인들이 몰려들어 3년 만에 이스라엘 인구가 2배로 늘어났다. 이후 3차례나 더 중동전쟁이 있었지만 이스라엘은 막아냈다. 이를 계기로 이스라엘은 방위산업을 근간으로 하는 벤처 기업들이 탄생해 하이테크 산업을 주도했다. 오늘날에도 히브리 대학과 테크니온 공대가 이스라엘의 교육과 산업을 이끌고 있다. 교육의 중요성을 2000년 이상 역사적으로 증명해온 민족이 유대인이다.
[33] ‘인플레 파이터’ 폴 볼커 1979~87년 美연준 의장
볼커, 살해 위협에도 금리 20%로 인상… 3년 만에 인플레 잡았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의 주된 임무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지 않도록 선제적으로 대응하는 것이다. 둘째는 경기 부양으로 일자리를 창출해 실업률을 낮추는 것이다. 하지만 두 임무는 곧잘 상충하기도 한다.
정치가는 경기 부양을 원하고 연준 의장은 인플레이션을 막으려 하다 보면 둘은 곧잘 부딪치곤 한다. 중앙은행의 독립성이 보장되어야 하는 이유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선거 유세 당시부터 긴축 정책을 펴는 재닛 옐런 연준 의장을 비판했다. 그는 옐런이 제때 금리를 내리지 않아 경제를 왜곡했다고 비판하면서 자기가 당선되면 제일 먼저 자를 사람이라고 공언했다. 이후 트럼프는 직접 해임하기보다는 후임자를 자기 사람으로 바꾸는 쪽으로 방향을 바꿨다.
2017년 11월 트럼프 대통령이 제롬 파월 연준 이사를 연준 의장으로 지명함에 따라 재닛 옐런은 39년 만에 연임에 실패한 연준 의장이 되었다. 그 뒤 트럼프는 직간접으로 파월 의장에게 경기 부양 압력을 넣었다. 파월은 2020년 2월 팬데믹 사태를 맞자 과감한 금리 인하와 화끈한 양적 완화로 트럼프의 기대에 부응했다. 연준이 어찌나 돈을 많이 찍어냈는지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불과 14년 만에 연준의 통화 발행액은 무려 10배가 넘는 9조달러에 육박했다. 여기에 더해 미중 무역 전쟁에 따른 공급망 붕괴와 러·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유가, 곡물, 원자재 가격이 치솟아 물가 전망을 어둡게 만들고 있다.

▲1979년 지미 카터 정부 때 연준 의장이 된 폴 볼커는 1981년 로널드 레이건 정부 출범 이후에도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고금리 정책을 이어갔다. 그는 인플레이션이 14.8%까지 치솟자 기준금리를 20%까지 올렸다. 볼커를 그대로 두면 대통령 연임은 어렵다는 주장이 나왔지만, 레이건은 개입하지 않았다. 이후 인플레이션이 잡히기 시작했고 미국 경제가 되살아나는 계기가 됐다. 사진은 1981년 미 재무부 청사 앞에서 레이건(왼쪽) 대통령과 볼커(오른쪽) 연준 의장이 함께한 장면이다. /게티이미지코리아
“장기불황은 안 된다” 결단과 실행
이런 일이 닉슨 대통령 때도 있었다. 재선을 앞둔 닉슨 대통령은 연준의 독립성을 외치는 윌리엄 마틴 연준 의장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틴은 “미국 중앙은행의 임무는 파티가 한창 달아오를 때 그릇을 치우는 일”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 인물이다. 닉슨은 연준 의장 자리에 자기 사람을 앉히고 싶어 그의 경제 보좌관 아서 번스를 1969년 연준 의장에 임명했다. 그리고 과도한 유동성이 문제되던 상황임에도 닉슨은 재선을 위해 번스 의장에게 경기 부양을 위한 통화 팽창 정책을 요구했다. 연준의 통화 정책에 노골적으로 개입한 닉슨은 이듬해 재선에 성공했다.
1971년 8월 닉슨 쇼크로 금과 고리가 끊어진 달러는 마음만 먹으면 양껏 발행할 수 있었다. 번스 연준 의장은 물가가 오르는 상황에서 긴축 정책을 쓰지 않고 통화 팽창 정책을 지속하려니 인플레이션 수치를 가능한 한 낮게 보일 필요가 있었다. 이를 위해 연준 위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소비자물가지수에서 변동성이 큰 식음료와 유가를 제외해 탄생한 게 ‘근원 인플레이션 지수’다. 이후 근원 인플레이션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달러는 무제한 발행되었다. 게다가 4차례 중동 전쟁으로 1973년 1차 석유 파동이 들이닥쳤다. 번스 연준 의장 재임 기간인 1970~1978년 9년 동안 평균 물가 상승률은 9%였다.
1979년 2차 석유 파동이 일어나 미국의 인플레이션율이 두 자릿수로 치솟았다. 1979년 미국 인플레이션율은 13.3%나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연준의 해결사로 등장한 인물이 폴 볼커였다. 1979년 8월에 취임한 폴 볼커는 긴축을 통해 인플레이션과 전쟁한다고 선언했다. 긴축 정책을 쓰면 경기 침체가 심해져 대중과 정치인들이 반발하게 마련이다. 볼커는 앞뒤 안 가리고 인플레이션과 싸우기 시작했다. 1979년 10월 6일 기준금리를 11.5%에서 15.5%로 4%포인트나 올리는 조치를 단행했다. 당시 언론은 이를 ‘토요일 밤의 학살’이라 불렀다. 그러자 모기지 금리는 18%, 은행 금리는 20% 가까이 뛰어올랐다. 주식과 집값이 폭락했다. 기업들의 파산이 잇따랐고, 실업자가 폭증했다.
폴 볼커는 1927년 뉴저지에서 독일계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아버지에게 소신과 검약의 신조를 물려받았다. 볼커는 프린스턴대 우드로 윌슨 스쿨을 수석 졸업하며 졸업 논문에서 2차 대전 이후 연준이 인플레이션 관리에 실패한 이유를 분석했다. 당시 유대인들이 직장을 구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였다. 볼커는 수석 졸업생이라 다행히 연준의 인턴 자리를 구해 조사 보조원으로 일할 수 있었다. 그 뒤 하버드대 행정대학원 정치경제학 석사를 거쳐 런던정경대학에서 수학한 볼커는 1952년 연준에 통화량 분석 담당 정규직으로 입사했다. 이후 1957년 급여가 많은 체이스맨해튼 은행 이코노미스트로 자리를 옮겼다. 그 뒤 1962년에 재무부 금융분석국장으로 등용되었다가 1965년에 체이스맨해튼 부행장으로 복귀했다. 이렇게 연준과 재무부, 민간은행을 섭렵하던 볼커는 1971년에 재무부 국제 통화 담당 차관으로 발탁되어 닉슨이 그해 8월 15일 달러의 금 태환 중지를 발표할 때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로써 달러는 금과 고리가 끊어지고 전적으로 미국의 신용에 의존하는 신용화폐(Fiat Money)가 되었다.
그 뒤 볼커는 1975년부터 4년 동안 뉴욕 연방준비은행 총재를 거쳐 1979년 카터 대통령에게 연준 의장으로 임명받았다. 당시 미국의 인플레이션은 무려 13%에 달했다. 국가에서 인플레이션 파이터로 부름받은 그는 이를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이제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모든 사람과 싸워야 하는 운명임을 직감했다.
카터도 처음에는 인플레이션 억제 캠페인을 벌였으나 시중 금리가 20%까지 올라가면서 이야기가 달라졌다. 고금리가 경기를 악화시켜 유권자 지지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카터는 연준의 독립성을 지켜주기 위해 볼커의 정책에 개입하지 않았다. 1980년 가을 대선에서 카터는 ‘신자유주의와 감세 정책’을 들고나온 공화당의 로널드 레이건에게 패해 재선에 실패했다. 결정적 패인 중 하나가 볼커의 고금리 정책이었다.
이후 볼커는 더욱 독하게 긴축 정책을 밀어붙였다. 1981년 6월 인플레이션이 14.8%까지 치솟자 기준금리를 20%까지 올렸다. 무서운 결단이었다. 레이건 대통령도 고금리 정책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미국 경제가 장기 불황에서 빠져나오려면 인플레이션을 잡아야 한다는 점만은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막료들이 볼커 연준 의장을 그대로 두었다가는 카터처럼 연임에 실패한다는 경고를 쏟아냈지만, 레이건은 우리가 연준을 두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반문하며 개입하지 않았다.

▲워싱턴DC의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 이 건물은 1937년 준공됐다. /위키피디아
신변 안전 위해 권총 차고 근무
볼커에 대한 국민의 원성은 커갔다. 은행 금리가 21.5%까지 치솟는 과정에서 경기 침체로 많은 회사가 파산하며 실업률이 10%로 치솟아 수백만 명이 일자리를 잃었다. 하지만 인플레이션을 잡지 않고서는 미국 경제는 장래가 없다는 것이 볼커의 생각이었다. 빚더미에 앉게 된 농민들이 트랙터를 몰고 워싱턴으로 상경했다. 이들은 도시 한복판을 행진하고 연준 건물을 봉쇄하며 볼커의 퇴진을 요구했다. 키가 2m가 넘는 볼커는 권총을 차고 다녀야 할 정도로 온갖 시위와 살해 위협에 시달렸다. 고금리로 인한 고통은 1981년까지 3년이나 지속되었다.
1981년 중반 들어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예금 이자가 높으니 돈이 은행으로 몰려들었다. 은행 우대 금리 21.5%와 그 무렵 인플레이션 14.5% 차이만 해도 컸다. 시중 유동성이 줄어드니 인플레이션이 잡히기 시작했다. 1980년 6월 14.8%까지 올라갔던 인플레이션율이 1981년 9%로 꺾였다. 1982년에는 목표치 4%에 도달하여, 볼커가 긴축을 풀자 경제는 힘차게 살아났다. 이듬해에는 경제가 살아나면서도 인플레이션은 2.4%까지 떨어졌다. 이로써 볼커는 밀턴 프리드먼이 주장한 “인플레이션은 언제, 어디서나 화폐적 현상이다”라는 명제를 대중 뇌리에 심는 데 성공했다.

▲폴 볼커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재임하던 2009~2011년 백악관 경제회복자문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게티이미지코리아
[대응 타이밍 놓친 연준] 작년엔 “일시적 인플레” 올해는 “총력 다해 진화”… 바이든 지지율도 추락
지난주 미국 노동부는 3월 소비자물가가 전년 대비 8.5% 올랐다고 발표했다. 1981년 12월 이후 40년 3개월 만에 가장 큰 상승 폭이다. 자칫 잘못하면 두 자릿수 인플레이션을 맞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전 세계를 짓누르며 글로벌 긴축 공포에 휩싸였다.
사실 연준은 1년 전만 해도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지 않을 것으로 보았다.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더라도 일시적 현상일 것이라고 했다. 일시적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면 ‘평균 물가 목표제’(물가 상승률을 평균한 수치가 2%를 넘지 않으면 금리를 올리지 않는 것)를 도입해 대응하겠다고 했다. 또 인플레이션이 본격적으로 발생하더라도 그에 대응할 수단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 연준은 말을 바꾸어, 인플레이션의 불확실성이 커져 총력을 다해 인플레이션을 잡겠다고 한다. 인플레이션 대응에 실기한 것이다. 뒤늦게 온순한 비둘기에서 공격적인 매로 변한 것이다.
하이퍼 인플레이션으로 바이든 대통령의 지지율이 42%로 폭락했다. 당장 11월 중간선거에 빨간불이 커졌다. 성장을 못 하는 건 국민이 용서해도 물가를 못 잡으면 용서하지 않는다.
[34] 폴란드계 유대인 옐런 재무장관
철학자 꿈 접고… 위기마다 해결 나선 ‘경제 트리플 여왕’
재닛 옐런 미 재무장관은 1946년 뉴욕 브루클린의 폴란드계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초등학교 교사였으며 아버지는 의사였다. 아버지는 가족이 사는 집 1층에 병원을 내고 주로 부두 노동자, 공장 노동자들을 진료했다. 보통 진료비로 2달러를 받았는데 실직자들은 무료로 치료해주었다. 옐런은 아버지를 통해 노동자들, 특히 실직자들의 어려움을 헤아리는 따듯한 시선을 가지게 됐다.

▲재닛 옐런 미 재무장관은 2014년 연준 의장 취임 때 “통계 뒤에 있는 개개인의 삶과 경험, 그리고 도전을 결코 잊지 않겠다”고 했다. 소득 불평등의 확대에 따른 빈부 격차를 우려한 옐런의 지론은 “국가는 빈곤과 불평등을 해결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2020년 바이든 대통령은 옐런을 재무장관으로 발탁하면서 “실업과 노동의 존엄성에 초점을 맞춰 경력을 쌓은 인물”이라고 했다. 사진은 지난달 미 재무부에서 옐런 장관이 기자회견을 하는 장면이다. /AFP연합뉴스
옐런은 어릴 때부터 호기심 많았고 활동력이 왕성했다. 고등학교 때 심리학 동아리, 역사 동아리 활동에 참여하면서도 학교 신문 편집장을 지냈다. 게다가 공부까지 잘했다. 영문학 최우수상, 수학 최우수상, 과학 최우수상을 휩쓴 최우등 학생이었다. 고교 졸업 때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그녀가 다니던 해밀턴 고등학교는 학교 신문 편집장이 최우수 졸업생을 인터뷰하는 전통이 있었다. 그녀는 자신과 인터뷰를 진행해야만 했다.
옐런은 철학을 전공할 생각으로 명문 브라운 대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1학년 때 경제학 강의에 매료되어 전공을 경제학으로 바꾸었다. 이어 예일 대학에서 경제학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녀의 전공은 당연히 ‘노동경제학’이었고, 논문 지도 교수는 신(新)케인스 학파의 거장이자 토빈세로 유명한 제임스 토빈이었다. 옐런은 스승의 강한 윤리 의식과 사회적 책임감의 영향을 받아 케인스주의 경제학자가 되었다. 그녀가 시장에 적절한 정부 규제가 필요하다며 낮은 인플레이션 못지않게 낮은 실업률을 중시하는 이유이다.
옐런은 1971년부터 1976년까지 하버드 대학교에서 조교수로 재직했다. 이후 옐런은 1977년 연방준비제도 이사회 경제학자로 채용되어 국제 통화 개혁 연구를 맡았다. 이때 동료 유대인 경제학자 조지 애컬로프를 만나 결혼했다. 이후 둘은 연준을 떠나 런던정경대학에서 2년 동안 가르치다 미국으로 돌아왔다. 이후 옐런 부부는 1980년부터 버클리 대학에서 거시경제학을 가르쳤다. 옐런의 배우자 애컬로프는 정보가 공평하게 전달되지 않았을 때 빚어지는 경제 왜곡 현상을 분석한 이른바 ‘정보 비대칭 이론’으로 2001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
옐런은 1994~1997년 연방준비제도 이사회 위원과 1997~1999년 대통령 경제자문위원회 의장을 거쳐 2004년에 샌프란시스코 연방준비은행 총재가 되었고, 2010년 오바마 대통령이 연준 부의장으로 임명했다. 이후 2014년 연준 의장 취임 연설에서 “통계 뒤에 있는 개개인의 삶과 경험, 그리고 도전을 결코 잊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 무렵 3차례 양적 완화 시행으로 2008년 금융 위기 이전에 8000억달러 내외였던 연준의 본원통화 발행액이 4조3000억달러로 무려 5배 이상 불어나 있었다. 옐런은 인플레이션을 막기 위해 선제적 대응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녀는 긴축으로 돌아섰을 뿐 아니라 정치권 눈치 보지 않고 무려 5차례나 기준금리를 올려 시중 유동성을 거둬들였다. 이것이 금리 인하를 주장하는 트럼프에게 밉보여 연준 의장 연임을 못 한 이유였다.

▲재닛 옐런 미 재무장관의 남편 조지 애컬로프(오른쪽) 조지타운대, UC버클리대 교수는 2001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 사진은 당시 예컬로프 교수가 옐런과 함께 기뻐하는 장면. /AFP연합뉴스
남편은 ‘정보 비대칭 이론’으로 노벨 경제학상
옐런은 2014년에 소득과 부의 불평등에 대한 자료를 공개한 데 이어 2017년에도 후속 자료를 발표했다. 불과 3년 사이에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2014년도 자료만 해도 소득 점유율이 증가한 계층이 상위 3%였는데 상위 1%로 줄어들었다. 이는 소득 독식 체제가 날이 갈수록 심화됐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제 소득 점유율이 올라가는 계층은 상위 1%밖에 없었고, 그다음 9%는 현상 유지 중이며, 나머지 90%의 소득 점유율은 계속 줄어들고 있었다. 이는 중산층이 붕괴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문제는 이러한 자본주의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점이다.
상위 10%의 소득이 국민 전체 소득의 절반에 달했다. 이는 10명이 사는 사회를 가정했을 때, 돈 잘 버는 한 사람이 나머지 9명보다 돈을 더 많이 버는 걸 의미한다. 이렇게 한 사람에게 소득이 집중되면 이 돈은 사회로 흘러나오지 않고 곳간에 축적되어 사회 전체 소비의 총량이 그만큼 줄어든다. 이것이 불경기와 공황의 원인이다.
소득 불평등의 확대로 빈부 격차는 더 커졌다. 상위 10%가 미국 전체 부의 77%를, 나머지 90%가 23%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문제는 하위 50%다. 이들은 소유한 순재산이 거의 없다. 전체 부의 1% 남짓을 소유하고 있다. 한 달 벌어 한 달 사는 사람들로 위기에 취약한 계층이다.
옐런은 경질되는 마지막 날까지 직분에 충실했다. 그녀는 2018년 2월 2일 임기 마지막 날 미국 3대 은행인 웰스파고에 대해 전례 없는 초강력 제재를 가했다. 웰즈파고는 실적 달성을 위해 직원들에게 유령 계좌를 350여 만개를 만들게 했다. 고객들에게 자동차 보험을 억지로 들게 하고, 모기지 대출자들에게 부당한 수수료를 부과했다. 또 자영업자들을 속여 조기 해지 수수료를 내게 했다. 옐런은 웰스파고에 자산 규모 동결 명령과 함께 이사진 교체를 명령했다. 연준 역사상 처음 단행한 조치였다. 이후 은행과 최고경영자 개인에 대한 벌금도 뒤따랐다. 이 제재로 웰스파고는 2조달러 이상의 자산 취득을 제한받았고, 주가는 56% 하락했다.
“국가는 빈곤과 불평등을 해결할 의무가 있다고 믿습니다.” 이는 재닛 옐런의 지론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재무장관으로 재닛 옐런을 발탁하면서 “그녀는 실업과 노동의 존엄성에 초점을 맞춰 경력을 쌓았습니다”라고 지명 이유를 밝혔다. 이로써 그녀는 클린턴 정부에서 미국 역사상 첫 여성 경제자문회의 의장을, 오바마 정부에서 연준 100년 역사상 첫 여성 연준 의장을, 바이든 정부에서 미국 재무부 232년 역사상 첫 여성 재무장관을 맡아 이른바 경제정책 핵심 요직 세 곳을 다 거친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했다.

연준 의장때 금리 내리라는 트럼프와 갈등
미국의 자본주의는 이제 팬데믹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다. 금융 자본주의에서 포용적 자본주의로 바뀌고 있다. 첫째, 팬데믹 사태로 어려운 하위 50%의 붕괴를 막기 위해 통화 공급 주도권이 연준에서 재무부로 넘어왔다. 비상 상황에서는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하는 통화 정책보다 특정 대상을 지원하는 재정 정책이 더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둘째, 통화 공급은 월스트리트(금융시장)를 통한 유동성 살포에서 메인 스트리트(소비자와 기업이 있는 실물 시장)를 통해 필요한 곳에 필요한 양만큼 쏴주는 ‘점적관수(點滴灌水)’식 공급으로 바뀌었다. 재정에서 개인들에게 직접 지급되는 돈이 다른 재정 집행액의 두 배 이상으로 급증했다. 셋째, 재정 기능이 바뀌고 있다. 과거에는 재정의 3대 기능, 곧 ‘자원 배분, 경제 안정화, 소득 재분배’ 기능 중에서 ‘경제 안정화’ 기능을 중요시했다면 이제는 ‘소득 재분배’ 기능이 더 중요해졌다.
[美 치부 드러낸 옐런] “상위 5%가 富 63% 차지… 하위 50%, 겨우 1% 소유”
재닛 옐런은 2014년 10월 보스턴 연방준비은행이 주최한 콘퍼런스 기조연설에서 “소득과 부의 불평등이 100년 만에 최고 수준에 근접했다”고 지적했다. 연준 의장이 경기 동향이나 통화 정책이 아닌 불평등 문제를 공개적으로 거론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었다.
재닛 옐런은 2014년 연준 의장에 취임해 ‘소득과 부의 불평등’ 데이터를 공개했다. 그녀는 “미국의 불평등 정도와 불평등의 지속적 확대 추세가 매우 우려스럽다”며 그 누구도 공개하지 못했던 미국의 치부를 만천하에 알린 것이다. 금융 자본주의를 이끌고 가는 연준의 수장이 금융 자본주의의 본질적 문제점과 그 폐해를 솔직히 밝힌 것이다. 옐런은 특히 “상위 5%의 부가 1989년에는 미국 전체 부의 54%를 차지했는데, 2013년에는 63%로 늘어났다”며 “같은 기간 하위 50%의 부는 전체 3%에서 1%로 오히려 줄어들었다”고 서민 경제에 대해 걱정했다.
이는 여론의 핫이슈가 되어 정치판을 흔들었다. 소득과 부의 불평등 테마는 2016년 미국 대선에서도 가장 중요한 선거 의제로 떠올랐다. 당시 ‘민주적 사회주의자’를 자처하는 버니 샌더스 후보는 “상위 1%가 하위 90%의 소유를 모두 합친 정도의 부를 독점하는 것은 비도덕적이고 그릇된 일”이라며 부자 증세를 통해 누구에게나 대학 등록금을 무상으로 지원해 교육의 평등을 이루겠다고 호언했다. 그러자 다른 대선 후보들도 당파를 초월해 앞다투어 서민 경제를 위한 공약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35] 유대교·기독교·이슬람교 무엇이 같고 다른가(상)
“심판의 날 구원받으려면 선하게 살라” 야훼도 알라도 똑같은 가르침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유래한 한 뿌리의 종교들이다. 세 종교 모두 아브라함을 자기 종교의 최고 조상으로 섬긴다. 세 종교의 공통점은 유일신을 믿는 종교라는 점이다. 다만 유일신을 부르는 명칭이 다르다. 유대교에서는 여러 이름으로 부른다. 처음 하느님께서 직접 모세에게 가르쳐 준 이름은 ‘나는 나다(I am what I am)’라는 의미의 ‘에헤으 아세르 에헤으’였다. 히브리 성경에는 신의 이름이 ‘YHWH’라는 4개의 자음으로 기록되어 있다. 유대인들은 성경을 읽다가 신의 이름 ‘YHWH’가 나오면 이를 발음하지 않고 대신 ‘아도나이’라 읽었다. 이는 ‘나의 주님’이라는 뜻이다. 유대인들은 신의 이름을 발음하려 들지 않는다. 워낙 경건한 이름이라 인간이 함부로 부를 수 없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기독교에서는 ‘YHWH’를 ‘야훼 혹은 여호와’라 부른다. 반면에 이슬람교는 하느님의 이름을 고유명사로 부르지 않고 ‘The God’이라는 뜻의 ‘알라’라 부른다. 모두 같은 분, 다른 이름이다. 쿠란에서는 알라가 유대교와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과 동일한 하느님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슬람은 신에 대해 말할 때 그 신이 아브라함의 하느님, 모세의 하느님, 예수의 하느님, 무함마드의 하느님이라고 한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는 서로 갈라선 종교지만 원래는 같은 신을 믿는 한 뿌리의 종교다. 세 종교는 유일신에 의한 창조, 종말, 최후의 심판, 영원한 내세 등의 종교관이 같다. 특히 죽은 다음의 부활을 강조하며 최후의 심판 개념을 강조하는 것이 다른 종교와 차별화된 점으로 꼽힌다. 사진은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의 벽화로 최후의 심판을 묘사하고 있다. 4년여 작업 끝에 미켈란젤로가 1541년에 완성한 작품이다. /게티이미지코리아
세 종교 모두 아브라함이 최고 조상
우리나라에서는 원래 창조주를 한울님이라고 불렀는데, 선교사들이 성경을 한글로 번역할 때 이를 채택했다. 그 뒤 가톨릭은 ‘하느님’, 개신교는 ‘하나님’이라 부른다.
세 종교의 모태는 유대교다. 유대교는 기원전 2000년경 아브라함에서 시작해 기원전 13세기경 출애굽(출이집트) 때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느님으로부터 십계명과 율법을 받아 뼈대가 정립되었다. 그리고 기독교는 서기 90년경 얌니아 종교회의 이후 예수의 제자들에 의해 유대교에서 분리되었으며, 이슬람교는 기독교보다 약 600년 뒤 무함마드에 의해 생겨났다.
우리가 통상 구약성서로 알고 있는 유대교의 히브리 성서가 세 종교의 근본이다. 유대교는 구약만을 성서로 인정하는 반면 기독교는 구약과 함께 예수 이후의 복음서 ‘신약’을 성서로 믿는다. 이슬람교는 여기에 무함마드가 쓴 쿠란이 보태진다. 세 종교의 경전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유대교는 ‘타라크(구약성서)와 탈무드’이며, 기독교는 ‘구약성서와 신약성서’, 이슬람교는 ‘구약성서 가운데 쿠란과 상충하지 않는 토라(모세오경)와 다윗의 시편, 예수의 복음서 그리고 쿠란’이다. 그런데 이슬람교는 쿠란을 제외한 세 개는 후대에 일부 내용이 변질되었다고 보고 있다. 쿠란에서는 율법은 모세가, 복음은 예수가 선포했으되 진정한 예언자는 무함마드이고 그의 계시가 최종적이라 한다.

▲아브라함은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가 공통적으로 ‘믿음의 조상’으로 꼽는 인물이다. 사진은 아브라함이 후처 하갈을 내보내는 장면을 묘사한 19세기 화가의 작품. /게티이미지코리아
세 종교 모두 유일신에 의한 ‘창조, 종말, 최후의 심판, 영원한 내세’라는 종교관도 일치한다. 특히 죽은 다음의 부활을 강조하며, 최후의 심판 개념을 발전시켰다. 초기 유대교는 ‘야훼의 날’, 곧 ‘마지막 날’을 강조했다. 유대교에서 ‘마지막 날’이라는 용어는 메시아가 도래할 것이라는 믿음을 상징한다. 기독교와 이슬람교도 부활과 구원에 관한 믿음이 있다. 하느님이 모든 민족을 심판하는 날 하느님의 나라가 시작된다. 다만 유대교 개혁파는 이러한 메시아 사상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유대교에 부활과 최후의 심판 사상이 명료하게 정립된 시기는 기원전 6세기경 바빌론 유수기(포로기)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유대인들은 죽으면 지하 깊숙이 있는 ‘스홀’에 간다고 생각했다. 죽은 사람의 영혼이 반(半)수면 상태에서 목적 없이 존재하는 음침한 곳이다. 훗날 메시아가 그들을 부활시켜줄 것이라는 어렴풋한 믿음을 갖고 있었다. 당시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와 있던 유대인들은 자기들을 바빌론의 압제에서 해방시켜준 페르시아의 키루스(고레스) 대왕을 흠모하며 그의 종교인 조로아스터교의 일부 사상을 받아들였다. 대표적인 게 인간의 도덕적 선행의무를 일깨운 조로아스터교의 이분법적인 ‘선과 악’ 사상이다. 곧 ‘천사와 악마, 천국과 지옥, 부활과 심판’ 등을 받아들였다.
조로아스터교는 예언자 자라투스트라가 강조한 ‘좋은 생각’ ‘좋은 말’ ‘좋은 행동’을 하며 살라고 가르쳤다. 이러한 행동들이 악을 물리치는 무기가 된다고 보았다. 특히 선행이 가져다줄 심판과 부활을 강조했다. 죽은 뒤 3일을 무덤에서 지낸 뒤 4일째 계곡을 가로지르는 보응의 다리를 건너는데, 이때 살아있을 때 했던 행위에 대한 심판을 받는다. 만일 선행이 악행보다 많으면 영혼은 다리를 건너 하늘로 올라가지만, 악행이 많으면 다리가 좁아져 지옥으로 떨어진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다. 왜냐하면 지혜의 주 ‘아후라 마즈다’가 악마들 우두머리인 ‘아흐리만’을 결국 굴복시킨 뒤, 모든 인간을 부활시키고 최후의 심판을 주재하여 새로운 세상을 열기 때문이다.
이후 기독교는 최후의 심판 개념을 더욱 발전시켜 그리스도의 재림 때 최후의 심판이 있으며, 모든 인간이 하느님 앞에 서게 된다고 가르친다. 이슬람교에서도 최후의 심판 개념이 많이 확대되었다. 이슬람에서는 ‘부활의 날’ ‘심판의 날’이 세상의 마지막 이전에 선행된다. 심판의 날은 이슬람교의 5대 신앙 중 하나다. 부활의 날에 세상이 처음 생겼을 때부터 살았던 모든 인간이 다시 살아나 알라 앞으로 나간다. 이때 인간들의 모든 행위를 기록한 책이 두 천사에 의해 하느님 앞에 제출되고 선한 행위와 악한 행위를 수록한 2권의 책에 실린 기록에 따라 낙원이나 지옥으로 간다. 만일 종교 전쟁(聖戰·Jihad)에서 죽은 순교자의 삶을 살았다면 영혼은 곧바로 낙원으로 간다.
그렇다면 세 종교의 다른 점은 무엇일까? 가장 큰 차이점은 ‘예수에 대한 관점’ 차이다. 기독교는 예수를 삼위일체설에 입각하여 하느님의 아들이자 신이라고 믿는다. 반면 유대교와 이슬람교는 예수를 단지 하느님이 보낸 선지자 가운데 한 명으로 간주한다. 유대교는 예수를 유대교의 일파를 이끌다 순교한 선지자로 보고 있다.

▲기독교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자 신으로 믿는다. 반면 유대교와 이슬람교는 선지자 중 한 명으로 본다. 사진은 바닷가에서 설교하는 예수를 묘사한 그림. /브루클린 미술관
이슬람교 “쿠란 이외 경전은 왜곡돼”
이슬람교는 예수를 위대한 선지자의 한 사람으로 존경한다. 실제로 이슬람교에서는 예수가 하느님의 허락으로 여러 기적을 보여줬다고 믿는다. 이슬람교는 “예수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요람에서 말을 했고, 죽은 자를 살렸으며, 흙으로 새를 빚어 숨결을 불어넣는 기적을 행했다. 예수는 ‘하느님 이외에는 숭배받을 존재가 없다’는 유일신 사상을 사람들에게 설파했다”고 가르친다. 그리고 심판의 날이 가까워지면 예수는 다시 재림한다고 했다.
이슬람교의 말세는 알라만이 알 수 있는 영역이다. 말세는 대말세와 소말세가 있는데 대말세의 징조는 연기가 온 세상을 덮을 것이며 짐승들과 사기꾼들이 출현하고, 예수가 재림하며 태양이 서쪽에서 떠서 동쪽으로 지는 등 징조가 있다. 소말세는 사회의 부정부패, 고리대금, 간음, 대로에서의 범죄 같은 것으로 그 징조가 나타난다고 한다. 이 모든 것은 알라께서 쿠란과 하디쓰(예언자 언행록)를 통해 그들에게 알려주신 사실들이라고 한다.
이슬람교는 이렇게 예수를 위대한 선지자로 인정하면서도 참선지자는 바로 무함마드라고 가르친다. 이슬람교는 사라가 낳은 아들 이삭이 적자(嫡子)가 아니라, 하갈이 낳은 맏아들 이스마엘이 적자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이슬람교는 자신들이야말로 아브라함 종교를 계승했으며 이스마엘의 자손인 무함마드를 참선지자로 믿는다.
[유대교·기독교 갈라진 까닭] 로마와의 전쟁 막바지에 초기 기독교파 먼저 피란… 유대인들, 배신자로 인식
유대교와 초기 기독교는 오랜 기간 사이좋게 예배를 같이 보았다. 유일신 하느님을 믿는 뿌리가 같았기 때문이다. 초기 기독교 예루살렘 교회의 경우 유대교의 한 분파인 ‘나사렛파’로 존재했다. 그 무렵 로마와 전쟁 막바지에 예루살렘에서 최후의 일전이 있었다. 68년 로마군이 예루살렘 성을 포위하기 시작하자 종말론 신앙 속에 살아온 초기 기독교 ‘나사렛 사람들’은 종말이 임박했음을 확신하고 요르단강 동편 펠라성으로 피란 갔다. 이때부터 유대인들은 나사렛파를 배신자들로 여기며 신앙공동체를 함께할 수 없다고 보았다.
로마와의 전쟁 후유증으로 유대 민족의 절반이 멸절되어 거의 모든 종파가 와해되고 바리새파만이 남았다. 전쟁으로 제사장 계급이 전멸해 사제가 없어지자 이른바 랍비들이 주도하는 랍비적 유대교가 자리 잡았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나라가 로마제국에 의해 무참히 박살 난 이유 중 하나가 종파 간 교리 싸움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랍비들은 율법 논쟁은 용인하나 종파적 논쟁은 멈추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서기 90년 야브네(얌니아) 종교회의에서 구약성경을 확정 지으면서, 랍비 사무엘이 회당예배 때 바치는 18조 기도문 가운데 이단자들을 단죄하는 제12조에 ‘나사렛 사람들’을 덧붙였다. 그 뒤 나사렛 사람들, 곧 초기 기독교도들은 더 이상 유대교 회당예배에 참석할 수 없게 되었다. 이때부터 기독교는 독자 종단으로 독립했다.
[36] 한 뿌리서 나온 세 종교, 유대교·기독교·이슬람교(중)
유대교엔 원죄 사상 없어… “현재에 충실하지 않은 삶이 곧 죄”
이슬람교만큼 빠르게 성장한 종교는 없었다. 지금도 이슬람교의 증가 속도는 가파르다. 613년 무함마드는 유대교와 기독교의 장점을 따서 이슬람교를 만들었다. 무함마드는 유대인 디아스포라 공동체와 똑같은 유형의 ‘움마 공동체’를 만들어 어려운 시기를 이겨내고 세력을 확장할 수 있었다. 움마 공동체가 지향하는 정신이 ‘형제애와 평등정신’인데, 이는 유대인 공동체의 체다카(약자를 돌보는 정신), 미슈파트(하늘 아래 모든 사람은 평등)와 동일하다.
이처럼 움마의 중심에는 피보다도 강한 무슬림 ‘형제애’와 성별, 인종, 계급을 초월한 ‘평등사상’이 자리 잡고 있다. 움마 공동체는 사막사회에 뿌리 깊었던 남존여비 등의 차별을 하지 않고, 마지막 한 톨까지 나눠 먹는 정신으로 전폭적인 지지를 얻었다. 게다가 유대인의 공동체는 배타적이지만 움마 공동체는 개방적이었다. 믿음만 있으면 누구나 공동체의 일원이 될 수 있었다. “알라 이외에 신은 없고 무함마드는 신의 사자다”라고 암송하는 순간, 누구나 형제가 되고 움마의 구성원이 되었다. 이를 반긴 건 사회적 약자인 힘없는 서민과 소외계층이었다.

▲선악과를 따먹는 아담과 이브 - 기독교는 아담과 이브가 하느님이 금지한 선악과를 따 먹은 것을 ‘원죄’라 한다. 이 원죄는 십자가 보혈로 대속(代贖)한 예수를 믿으면 용서를 받을 수 있다고 한다. 반면 이슬람교에는 원죄 사상 자체가 없다. 아담이 하느님의 용서를 받았기에 그의 자손에게 원죄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유대교는 아담과 이브의 불순종이 죄라는 것은 인정하지만, 이 죄가 후손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지 않는 것으로 본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는 한 뿌리에서 비롯됐지만 원죄에 대해 다른 관점을 갖고 있다. /바르샤바 국립박물관
이슬람교, 형제애·평등 내세워 확장
사막의 척박한 환경 속에 아랍 부족들은 툭하면 이웃 부족을 약탈하거나 전쟁을 벌였다. 그런 호전적인 부족들을 하나로 묶어 움마 공동체로 만든 게 무함마드였다. 공동체 정신이 이들을 순한 양으로 변모시켜 움마가 이슬람의 원형이 된다. 이슬람은 단순한 종교가 아니라 신정일치(神政一致)의 총체적 사회 시스템이 됐다. 움마는 형제애로 똘똘 뭉친 신앙 공동체이자 이슬람교 메시지를 전파하는 사명을 지닌 신도 공동체란 의미로 사용됐다. 움마 공동체와 신정일치의 강한 종교적 지도력이 이슬람교 성장의 비결이다.
이처럼 교세를 키워가는 이슬람교와, 이 종교의 모태인 유대교와 기독교 등 세 종교 간 대표적 차이는 ‘구원에 대한 견해’다. 기독교는 인간의 죄를 십자가의 피로 속죄한 예수를 믿음으로써 구원된다고 가르친다. 반면 유대교는 율법을 실천하고 선행을 하면 구원된다고 생각한다. 이슬람들도 선하고 바른 행동을 하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이슬람교를 믿는 이들은 ‘실천적 다섯 기둥’이라 불리는 종교적 의무 5행(行)을 철저히 지키고 있다. 이는 “알라 이외에 다른 신은 없으며, 무함마드는 그의 선지자이다”라는 신조를 암송하고, 매일 메카를 향해 하루 다섯 번 기도하며, 가난한 자를 위한 자선, 라마단 기간 중의 금식, 평생 한 번 이상의 성지순례를 하는 것이다. 정리하면, 유대교는 ‘율법의 실천에 의한 구원’을, 기독교는 ‘믿음에 의한 구원’을, 이슬람교는 ‘행위에 의한 구원’을 강조한다.
이렇게 된 밑바탕에는 당시의 시대상이 반영되어 있다. 유대교가 창시되던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해 모세에 이르기까지의 시대는 다신교의 우상숭배가 일상적인, 삶의 방향이나 지침이 없는 무질서한 사회였다. 그래서 하느님은 유대인을 선택해 그들에게 올바른 삶을 위한 크고 작은 것들을 자세히 가르쳐 주셨다. 그것이 곧 613개의 성문율법과 구전율법이었다.
그러던 것이 유대교가 정착되어 가는 과정에서 엄격한 안식일 준수 등 너무 율법에 얽매이다 보니 율법의 본질보다는 형식이 더 우선되었다. 이를 바로잡은 분이 예수라는 것이 기독교의 주장이다. 이 과정에서 율법을 지킴으로써 구원받는 게 아니라 새로운 복음인 하느님의 아들 예수를 믿음으로써 구원받는다고 가르쳤다.
반면 기독교보다 600년 뒤에 탄생한 이슬람교는 유대교와 기독교가 성경을 자기들 입맛대로 변질, 타락시켜 신이 마지막 선지자 무함마드에게 하늘에 있는 성경 원본을 다시 내려주었다고 믿는다. 그래서 다시는 왜곡되거나 타락하지 않도록 이슬람교 교리는 단순하게 여겨질 만큼 명료하게 정립되었다. 이슬람교 교리는 ‘이만’(6가지 종교적 신앙)과 ‘이바다’(5가지 종교적 의무)를 기본으로 한다. 6신(信) 5행(行)이라고도 불린다. 5행을 신앙생활을 지탱하는 다섯 기둥으로 보아 ‘아르칸’(기둥들)이라 부른다. 이슬람은 종교적 의무를 이행하는 이 다섯 가지를 행동으로 보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가르친다. 이것이 이슬람이 ‘행위에 의한 구원’을 강조하는 이유이다.

▲메카에 모인 이슬람 순례자들 - 이슬람교는 라마단 금식과 성지 순례 등 ‘실천적 다섯 기둥’이라 불리는 종교적 의무들을 지키면 구원된다고 믿는다. 선한 행동을 하면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알자지라·플리커
유대교는 율법, 기독교는 믿음 중시
세 종교의 원죄(原罪) 사상도 다르다. 기독교에서는 아담과 이브가 하느님이 금지한 선악과를 따 먹은 것을 ‘원죄’라 한다. 이 죄가 하도 무거워 자손 대대로 전해 내려온다는 것이 ‘원죄 사상’이다. 선악과란 ‘선악을 분별하게 하는 지혜’를 주는 과일이다. 이에 하느님께서는 “이제 사람들이 우리처럼 선과 악을 알게 되었으니 끝없이 살게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에덴동산에서 내쫓으셨다. 다만 기독교에서는 예수를 믿으면 예수가 우리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 보혈로 대속했기 때문에 원죄에서 벗어난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이슬람교에는 원죄 사상 자체가 없다.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가장 커다란 차이점 중의 하나가 ‘대속(代贖) 사상’이다. 이슬람교에서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으로써 인류의 죄를 대신 씻어 구원했다는 대속의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아담의 사건을 통해 대속에 관한 이슬람교의 관점을 살펴볼 수 있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을 하느님께서 크게 꾸짖으시자 아담은 ‘저희들을 용서하시고 자비를 베풀지 않으신다면 실로 저희들은 잃어버린 자가 될 것입니다’라며 용서를 청했다. 이에 하느님은 아담을 용서해 주셨다. 이처럼 아담은 그의 죄를 용서받음에 있어 제3자가 필요치 않았다. 이슬람교는 아담이 용서받았기에 그의 자손에게 원죄란 있을 수 없다고 한다.
반면 유대교는 아담과 이브의 불순종 죄는 인정한다. 그러나 이 죄가 후손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다는 원죄 사상은 없다. 그들은 과거에 얽매이지 않는다. 유대인들에게 죄란 과거에 구속되지 않고 현재에 구속된다. 유대교에선 현재에 충실하지 않는 삶이 죄다.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삶이 죄다. 아담과 이브가 하느님에게 불순종한 것이 죄가 아니라 오늘을 사는 내가 하느님에게 불순종하는 것이 죄인 것이다.
인간은 하느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기에 하느님이 인간에 거는 기대가 있다. 그래서 유대교에서는 하느님의 자녀로서 합당한 삶을 살지 않는 것이 죄다. 주어진 가능성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게으름’과 ‘무능력’이 죄다. 자신의 미래에 대한 가능성을 믿지 않고 자기 계발을 게을리하는 사람은 하느님께 죄를 짓는 것이다. 하느님이 주신 자기 안의 달란트(재능)를 찾아내어 힘을 다하여 이를 키워 나가지 않아 무능력한 사람이 되는 것이 하느님께 죄를 짓는 것이다. 따라서 유대인에게 신앙이란 자기 자신 속에 내재된 하느님의 형상을 찾아 자신을 발전시켜 나가는 노력이다.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 - 기독교에서는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진 예수가 메시아다. 반면 이슬람교에는 ‘구세주’라는 중재자가 없다. /게티이미지코리아
[두 가지 희망 속에 사는 유대인]
메시아가 나타나는 것과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것… 2500년 전부터 굳게 믿어
유대인들은 2500년 전부터 두 가지 희망 속에 살고 있다. 첫 번째가 메시아가 나타나는 것이고, 두 번째는 그 메시아가 가져올 ‘올람 하바’ 세상이다. ‘지금 시대’는 히브리어로 ‘올람 하제’이며 ‘장차 다가올 세상’은 ‘올람 하바’다. 그런데 이 ‘올람’이라는 말은 시공을 초월한 개념이다. 유대인들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같은 선상에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유대인들은 모세가 하느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을 때 그들의 영혼이 모두 모세와 같이 있었다고 믿는다. 그들이 과거의 역사를 중히 여기는 이유다. 마찬가지로 ‘올람’은 어떤 일이 내일로 계속 이어질 경우 ‘지금’을 말하면서 또한 미래, 곧 영원을 말하기도 한다. 이 세상 삶이 끝이 아니라 이 세상은 주님이 오실 그날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대인은 과거가 살아 숨쉬는 ‘올람 하제’를 살면서 동시에 미래에 다가올 ‘올람 하바’의 시간을 같이 살고 있다는 것이다.
반면 개혁파 유대교는 어느 날 홀연히 출현하는 메시아가 아니라 유대인 하나하나가, 곧 유대 민족 전체가 하느님의 일을 거들어 이 세상을 바람직한 모습으로 바꾸어 나가야 한다고 믿는다. 기독교는 예수를 메시아로 보고 있다. 초림 메시아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으며 사흘 만에 부활하여 40일 동안 이 땅에 머물다가 승천했다. 그리고 때가 되면 재림 메시아로 이 땅에 다시 오신다고 한다. 그러나 이슬람교에는 ‘구세주’란 중재자가 없다. 누구나 알라를 믿고 선행을 쌓으며, 진실로 자신의 죄를 회개하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가르친다.
[37] 한 뿌리서 나온 세 종교, 유대교·기독교·이슬람교(하)
안식일 원조는 유대교 토요일… 기독교는 로마가 일요일로 바꿔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뿐 아니라 불교와 조로아스터교에서도 천사는 존재한다. 유대교에서 천사는 하느님이 불로 창조한 영적 존재들이다. 천사는 신과 인간의 중개자로 천사라는 말 자체가 히브리어로 ‘심부름꾼’을 뜻한다. 그들은 신의 뜻을 인간에게, 인간의 기원(祈願)을 신에게 전하는 존재다. ‘창세기’에서 천사는 여호와의 명령을 전달하며, 여호와를 대신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하고 행동한다. 아브라함과 야곱을 지켜주기도 하며, ‘출애굽기’에서는 홍해를 건너는 유대인을 보호하기도 한다.
악마도 있다. 히브리어 단어 ‘사탄’은 구약에서 27번 나타난다. 일부 천사들은 감히 창조주처럼 그들 자신이 강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급기야 루시퍼를 비롯한 많은 천사가 하느님을 배반하여 선한 천사와 악한 천사로 나뉘게 되었다. 악한 천사가 바로 악마(사탄)이다. 천사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안겔로스’이다. 이 말에는 신에게서 파견된 사제·예언자라는 뜻이 있다. 기독교에서 천사는 지혜롭고 능력이 뛰어난 영(靈)으로 신에게 봉사하며 인간을 수호한다. 인간에게는 사람마다 수호천사가 있다. 천사는 그 사람이 인생의 최고 목표인 천국에 갈 수 있도록, 선행을 권하고 악을 피하게 해준다.

▲천사와 악마는 세 종교가 영적 존재로 소개 -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에서는 천사와 악마를 영적 존재로 소개한다. 천사는 신과 인간을 중개하는 심부름꾼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고, 악마(사탄)는 하느님을 배반한 천사라고 말한다. 세 종교는 “나만 옳고 너희는 틀렸다”며 서로 반목하고 대립하는 갈등을 끝내고 포용하는 평화를 모색할 필요가 있다. 그림은 예수가 사탄(맨 오른쪽)의 유혹을 물리치는 장면을 묘사한 19세기 작품이다. /게티이미지코리아
유대교에서 천사는 신의 심부름꾼
이슬람교의 천사 역시 인간을 섬기도록 만들어졌다. 알라가 인간을 창조하고 천사들에게 말하기를 “머리를 조아리고 인간을 경배하라. 내가 인간에게 나의 생기를 불어넣었음이라”고 했다. 곧 인간에게는 신성이 있다는 뜻이다.
세 종교의 안식일에도 차이가 있다. 곧 금요일은 이슬람교, 토요일은 유대교, 일요일은 기독교의 안식일이다. 달을 중심으로 하는 음력을 세는 유대인의 하루는 달이 보이는 일몰로부터 시작된다. 창세기에 보면 ‘하느님께서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겨났다. 이렇게 첫날의 밤, 낮 하루가 지났다’라고 쓰여 있다. 하루를 일몰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그렇다 보니 유대인의 안식일은 금요일 일몰부터 토요일 일몰까지다. 원래 세 종교의 안식일은 유대교의 안식일과 같은 토요일이었다.
기독교에서 안식일이 일요일로 바뀐 사정은 이랬다. 예수 이후 로마제국에서는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이 공존하며 함께 예배를 보는 등 모두 안식일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다 서기 132년 유대인 반란으로 인해 안식일 금지 칙령이 생겼다. 로마제국은 안식일을 지키는 기독교인들도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박해를 가했다. 그러다 321년 콘스탄티누스 황제 때 로마제국에 안식일 개념이 처음 도입되었다. 그는 유대력에 기초한 기독교의 주 7일 제도와 로마의 일곱 행성 신들의 이름을 혼합시켜 요일 이름을 정했다. 그리고 태양신의 날(Sunday)을 일주일의 첫째 날로 정해 휴일로 선포했다. 이를 통해 콘스탄티누스는 로마제국의 2대 종교, 곧 태양신 아폴로를 숭배하는 신도들과 기독교도들을 묶어 단일 종교로 합쳐보려는 야심찬 종교 정책을 시도했다. 그 뒤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태양의 날인 일요일을 예수 부활절로 의결한 이후 콘스탄티누스는 교회도 태양신의 날인 일요일에 예배를 보도록 했다.
6세기경에 만들어진 이슬람교도 처음에는 유대교를 존중해 두 종교를 합치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예루살렘을 향해 기도하며 안식일을 지켰다. 그러다 유대인들이 무함마드의 이슬람교를 받아들이지 않자 무함마드도 유대교를 배척하기 시작했다. 그간의 예루살렘을 향한 기도도 방향을 메카로 바꾸고 예배일도 금요일로 옮겼다.
세 종교의 또 다른 차이는 사제의 유무다. 유대교와 이슬람교는 사제가 없다. 하느님과 평신도가 직접 소통하는 것이다. 유대교에 ‘랍비’가 있고 이슬람교에 ‘이맘’이 있으나 이들은 사제가 아니라 평신도이다. 유대교 랍비의 경우, 율법 공부를 많이 했기 때문에 예배의 모범을 보일 뿐이다. 유대교에서는 랍비 이외의 평신도들도 강론한다. 유대교를 본떠 만든 이슬람교 역시 사제가 없다. 이슬람교는 신과 인간 사이에 어떠한 중간 매체도 두지 않으며, 인간과 신의 직선적 관계를 중시한다. 이맘은 예배를 인도하는 사람인데 젊은이, 무식자, 걸인 등 누구나 될 수 있다. 이맘 지위를 취득하기 위해 특별 교육 과정이나 안수식 같은 의식을 거치치 않아도 된다. 무슬림은 모두 신 앞에 평등하다. 신 앞에 절대복종해야 하는 동등한 지위이다. 이처럼 이슬람은 절대적 평등주의를 내세운다.
반면 가톨릭은 하느님과 평신도 사이에 신부, 곧 사제가 있다. 사제는 ‘신과 인간의 중개인’을 의미한다. 예수는 베드로에게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라”(마태복음 16:19)고 말했다. 베드로가 초대 교황으로 추앙받는 이유이다. 현재 가톨릭에서 고해성사를 통해 ‘죄사함’을 받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슬람의 이맘과 유대교의 랍비 - 이슬람교 예배를 인도하는 이맘(왼쪽)과 유대교 랍비(오른쪽)는 사제가 아니라 평신도다. /아프리카연합 평화유지군(AMISOM)·플리커
유대교에 원래부터 사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모세의 형 아론에서 시작된 제사장 혈통이 있었는데 중간에 없어졌다. 서기 70년경 로마제국이 예루살렘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사두개파를 멸족시켜 사제직 혈통이 없어져 버렸다. 그 뒤 평신도들이 유대교를 지켜왔다.
이후 종교개혁으로 로마가톨릭에서 개신교가 갈라져 나오면서 많은 것이 바뀌었다. 루터가 주장한 ‘만인제사장설’은 누구나 하느님께 직접 예배하고 교통할 수 있다는 개신교 교리이다. 신약성서에서 사제는 예수 하나뿐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개신교는 성직자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개신교 교회들은 신학 교육을 받은 전문인이 설교를 해야 한다는 이유로 특별한 경우 이외에는 평신도들에게 설교를 허락하지 않는다.
역사를 보면 정치건 사상이건 관용성을 보이며 서로를 포용하면 융성했고, 서로 반목하고 대립하면 어김없이 쇠퇴했다. 종교도 마찬가지였다. 역사에서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가 서로를 인정하고 평화롭게 살았던 시기는 융성의 시기였다. 이베리아반도의 코르도바와 톨레도는 세 종교가 공존했던 대표적 도시다. 지금도 톨레도에 가면 당시의 유대교 회당인 시너고그와 가톨릭 성당, 이슬람 모스크를 함께 볼 수 있다.
절대적 진리를 강조하는 근본주의(교조주의)가 발흥하여 “나만 옳고 너희는 틀렸다”며 ‘개종 아니면 목숨’을 강요한 사회는 쇠퇴했다. 12세기 북부 아프리카에서 발흥해 이베리아반도를 침공한 이슬람 근본주의, 11~13세기 가톨릭 교황이 주도했던 십자군 전쟁이 그랬다.
높은 산을 오르는 길은 여러 갈래가 있다. 하느님께 가는 길도 이와 같지 않을까? 틀린 길이 아니라 서로 다른 길이다. 종교마다 올바르게 사는 길을 다른 이름으로 부른다. 이를 유대교에서는 ‘율법’, 기독교에서는 ‘복음’, 이슬람교에서는 ‘쿠란’, 불교에서는 ‘다르마’, 힌두교에서는 ‘요가’, 도교에서는 ‘도’라 부른다.
서로 다름 이해하고 포용해야 평화
프란치스코 교황은 무신론자인 한 언론인이 ‘신을 믿지 않거나 믿음을 추구하지 않는 사람들을 신이 용서할지’를 물었을 때, “신의 자비는 한계가 없으며 신앙이 없으면 양심에 따라 행동하면 된다”고 답했다. 교황조차 하느님의 자비는 무신론자에게도 베풀어진다고 답한 것이다. 하물며 하느님을 믿는 종교인들에게야 말해 무엇하랴. 이제 세 종교는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고 포용의 관용성을 보여야 한다. 서로 간의 반목과 대립을 끝내고 서로를 인정하고 평화를 모색해야 한다.

▲십계명을 보여주는 모세 - 모세가 십계명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여주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 /위키피디아
[같은 듯 다른 십계명]
“우상숭배 말라” 조항 논란… 가톨릭은 십계명서 삭제, 개신교는 모세 원본 유지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십계명은 하나다. 모세 율법의 핵심이다. 그러나 유대교, 가톨릭, 개신교는 십계명이 약간씩 다르다. 특히 가톨릭과 개신교의 십계명이 다르다. 왜 그럴까? 1세기경 유대인 철학자 팔론이 정리한 모세 십계명에서 제2항은 ‘너는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든, 아래로 땅 위에 있는 것이든, 땅 아래로 물속에 있는 것이든 그 모습을 본뜬 어떤 신상도 만들어서는 안 된다. 너는 그것들에게 경배하거나, 그것들을 섬기지 못한다’였다.
그런데 동방정교회와 로마가톨릭 사이에 우상숭배 논란이 일어 5세기에 성 어거스틴과 몇몇 가톨릭 교부들이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는 제2항을 아예 삭제했다. 이렇게 고치고 나니 10계명이 9계명으로 줄었다. 그러자 그들은 ‘이웃의 집을 탐내서는 안 된다. 네 이웃의 아내나 남종이나 여종이나 소나 나귀나 소유 중 아무것도 탐내서는 안 된다’는 제10항의 내용을 임의로 둘로 쪼개어 10계명으로 만들었다. 이렇게 탄생한 게 가톨릭의 십계명이다. 반면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는 다시 원래의 모세 십계명으로 회귀했다. 그래서 지금도 가톨릭과 개신교의 십계명이 약간 다르다.
[38] 美 현대 금융 두 거물 샌디 웨일과 제이미 다이먼
금융황제가 내친 후계자, 10년간 칼 갈아 新금융황제 되다
미국 현대 금융사에서 주목해야 할 두 사람이 있다. 샌디 웨일 전 시티그룹 회장과 제이미 다이먼 현 JP모건스탠리 회장이다. 두 사람은 16년간 동고동락한 사제지간이다. 1933년 브루클린의 빈민가에서 태어난 폴란드계 유대인 웨일은 코넬대 졸업 후 월급 150달러의 리먼브러더스 견습생을 거쳐 27세 때 20만달러를 빌려 자신의 증권회사 ‘시어슨’을 창업했다. 이후 그는 부도 직전의 회사를 싼값에 인수해 과감한 정리해고와 비용 절감으로 정상화한 뒤 매각한 자금으로 새 회사를 인수하는 방식으로 20년 동안 15회 이상의 인수·합병을 성공시켜 시어슨을 미국 2위의 증권사로 키워냈다. 그리고 이를 1981년 아멕스에 10억달러를 받고 팔아 월가를 놀라게 했다.

▲샌디 웨일(왼쪽)은 40대 후반에 자기 회사를 10억달러에 아멕스에 팔고, 아멕스 증권 부문 사장이 됐다. 이 때 그를 찾아온 20대 중반의 청년이 제이미 다이먼(오른쪽)이었다. 이들은 16년간 함께 일하며 굵직한 인수 합병을 성공시켰다. 웨일은 시티그룹 회장이 된 뒤 후계자로 꼽히던 다이먼을 쫓아냈다. 이를 악문 다이먼은 시티그룹을 꺾기 위해 뱅크원과 JP모건체이스의 합병을 추진했고, 2008년 금융 위기를 계기로 회사를 더욱 키워 시티그룹을 제쳤다. /게티이미지코리아
월가를 놀라게 한 웨일의 ‘무한 M&A’
웨일이 아멕스 증권사업 부문 사장으로 일할 때 그를 찾아온 청년이 제이미 다이먼이다. 그의 본명은 제임스이지만, 제이미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1956년 그리스계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다이먼은 증권 브로커였던 할아버지와 아버지 영향으로 어린 나이에 자본과 금융에 눈을 떴다. 다이먼이 1982년 하버드 MBA를 마치고, 진로를 의논하기 위해 아버지의 상사인 웨일을 찾아간 것이다. 당시 25세의 다이먼은 골드만삭스 등 여러 곳으로부터 고액 연봉의 취직 제의를 받은 상태였다. 웨일은 그 자리에서 다이먼에게 자신을 도와달라면서 함께 일하자고 했다.
다이먼은 흔쾌히 웨일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16년의 끈끈한 인연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웨일은 다이먼을 자신의 비서로 채용했다. 그 뒤 다이먼은 인수·합병을 추진하는 웨일의 손발이 되었다. 1985년 웨일은 아멕스 이사회에 펀드보험 사업 부문을 자신에게 넘길 것을 제안했다. 이 제안이 받아들여지지 않아 웨일이 아멕스를 떠날 때, 유일하게 그를 따라 나온 인물이 다이먼이었다.
웨일은 월가의 대형 은행들이 도매금융과 기업금융에 매달릴 때 소매금융으로 눈을 돌렸다. 다이먼과 함께 1986년 ‘커머셜크레디트’를 인수해 알짜 회사로 키워나가던 웨일은 ‘스미스 바니’를 자회사로 거느린 ‘프라이메리카’를 인수하고, 채권시장의 강자 ‘살로먼브러더스’를 합병해 트레블러스그룹을 이루었다. 그리고 웨일은 1998년 4월 다이먼과 함께 트레블러스그룹과 시티코프의 합병을 이끌어냈다.
1998년 4월 샌디 웨일이 주도한 시티코프와 트레블러스그룹의 합병은 세계 금융사에서 한 획을 긋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1998년 초 ‘시티코프’ 존 리드 회장과 ‘트레블러스’그룹의 샌디 웨일 회장 간에 합병 논의가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트레블러스’는 보험사와 증권사, 투자은행 업무를 하는 이른바 제2금융권이었다. 반면에 ‘시티코프’는 세계 100여 국가에 지점을 둔 제1금융권이었다. 그러나 합병은 ‘트레블러스’가 주도하여 2개월도 안 되어 성사됐다. 이로써 세계 27만 명의 직원과 2억 명의 고객을 확보한 ‘초대형 금융종합그룹’이 탄생했다. 샌디 웨일은 합병 과정에서 벌어진 존 리드 회장과 권력 투쟁에서 승리했다.
오늘날 시티그룹을 일군 샌디 웨일의 인생은 ‘현대 미국 금융사(史)’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티그룹의 탄생은 웨일의 영향력으로 이듬해 글래스-스티걸 법안(투자은행과 상업은행의 업무 병행 금지)을 폐기시키는 계기가 된 역사적 사건이다. 이후 ‘큰 것이 아름답다’가 금융계의 트랜드가 되었다. 이 합병에 자극받아 세계 금융업계에서 초대형 짝짓기가 줄을 이었다.
그 무렵 다이먼은 웨일의 틀림없는 후계자였다. 다이먼은 시티그룹 계열 증권사인 살로먼스미스바니의 공동 최고경영자를 맡았다. 당시 42세였다. 다이먼이 최고경영자로 발탁되자 시티그룹 후계자로 낙점되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러나 시티그룹이 완성되자 웨일과 다이먼 사이에 틈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웨일에게는 제시카라는 딸이 있었다. 그녀는 다이먼 밑에서 일했는데 승진이 좌절되자 회사를 떠났다. 웨일은 분노했다. 이후 그는 다이먼이 관리하던 자산운용 부문을 직접 챙겼다. 그 뒤 다이먼이 맡고 있던 살로먼스미스바니가 손실을 내자 1998년 11월 다이먼을 시티그룹에서 쫓아냈다. 합병한 지 7개월 만이었다. 웨일은 가혹했다. 떠나는 다이먼이 시티그룹의 우수 직원들을 데려가지 못하도록 3년 동안 스카우트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요구했다.
해고 충격 다이먼, 권투까지 배워
다이먼은 이를 악물었다. 골프도 치지 않는 그가 복싱을 배우기 시작했다. 인고의 시간이었다. 그 뒤 수많은 기업이 다이먼에게 최고경영자 자리를 제의했으나 다이먼의 목표는 하나였다. 웨일의 시티그룹을 꺾는 것이었다. 그는 시카고의 뱅크원을 택했다. 다이먼이 뱅크원을 선택했다는 뉴스에 뱅크원 주가가 20%나 올랐다.
그만큼 월가는 다이먼의 능력에 주목했다. 그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진가를 보여주었다. 적자에 허덕이던 뱅크원을 2002년 22억달러 흑자로 바꿨다. 7000여 명을 감원하는 극약 처방을 단행하면서 주가를 60% 이상 끌어올렸다. 그 뒤 그는 뱅크원과 JP모건체이스의 합병을 추진했다. 2004년 1월 JP모건체이스와 뱅크원의 합병이 성사되면서 시티그룹의 뒤를 바짝 추격하는 2위 은행이 되었다.
합병 조건을 보면 다이먼의 의도를 알 수 있다. JP모건체이스가 뱅크원을 550억달러라는 저렴한 가격에 사들이는 대신, 다이먼은 2년 뒤인 2006년에 합병은행의 최고경영자로 내정됐다. 피흡수 은행의 최고경영자가 합병 후 최고경영자가 되는 유례없는 계약을 맺은 것이다. 제임스 다이먼은 이렇게 다시 월가로 돌아왔다.
2008년 초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지자 미국 재무부와 연준이 파산 직전의 베어스턴스를 다이먼이 이끄는 JP모건체이스에 다급하게 넘겼다. 덕분에 JP모건체이스는 미국 5대 투자은행인 베어스턴스를 24억달러라는 헐값에 인수했다. JP모건체이스는 금융 위기의 구원투수라는 명분과 함께 연준의 자금까지 지원받으며 자사의 취약점인 주식중개업과 모기지 사업 강자인 베어스턴스를 거저먹다시피 했다.

▲다이먼 부활 도운 티머시 가이트너 - 뉴욕연방준비은행 총재를 지낸 티머시 가이트너 전 재무장관. 제이미 다이먼은 가이트너와 맺은 친분으로 영향력을 키웠다. /AP 연합뉴스
이 협상의 막후 주인공은 당시 뉴욕연방준비은행 총재였던 가이트너와 다이먼이었다. 앞서 둘은 뉴욕연준의 총재와 실세 이사로 호흡을 맞추고 있었다. 다이먼은 구조조정 귀재답게 1만3000명의 베어스턴스 인력을 절반 이하로 줄였다. JP모건체이스는 2008년 9월에는 미국 최대 저축은행인 워싱턴뮤추얼을 19억달러에 인수했다. JP모건체이스는 베어스턴스와 워싱턴뮤추얼을 인수하며 단숨에 시가총액 1위를 차지했다. 반면 1998년부터 2005년까지 세계 1위였던 시티그룹은 금융 위기 이후 4위로 내려앉았다.
다이먼의 주가는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그가 추진했던 정책들이 번번이 옳았다는 것이 입증되면서 ‘위기관리의 귀재’로 불리며 월가의 황제가 되었다. 그와 친한 가이트너가 2009년 오바마 행정부의 재무장관으로 발탁되면서 다이먼은 월가뿐 아니라 연준과 재무부를 막후에서 움직이는 실세가 되었다.
[다이먼의 경고] “먹구름 수준이 아니다… 허리케인이 몰려온다” 美 인플레 대응 비판
지난 6월 10일 발표된 미국의 5월 소비자물가지수(CPI)가 41년 만의 최악인 8.6% 오르며 인플레이션 우려를 크게 키우고 있다. 이로써 미국 최대 은행인 JP모건체이스 CEO 제이미 다이먼이 ‘경제 허리케인’이 몰려오고 있다고 한 경고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그는 연초부터 미국 경제에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다고 경고했는데, 최근 들어 이를 허리케인으로 바꾸었다. 특히 지난 6월 1일 뉴욕의 한 금융 콘퍼런스에서 다이먼은 “지금은 날씨가 화창하고 모든 것이 잘되고 있다. 연준이 일을 잘 처리하고 있다고 모두가 생각한다. 그러나 그 너머에 허리케인이 몰려오고 있다”고 말해, 통화정책 관리에 실패한 연준을 정조준해 비판했다.
다이먼은 허리케인의 첫 번째 이유로 연준의 ‘양적긴축’을 꼽았다. “우리는 역사책을 쓸 수 있을 정도의 뭔가를 보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어 “너무 많은 유동성이 풀렸기 때문에 연준으로서는 다른 선택지가 없다. 투기를 멈추고, 집값을 내리기 위해 유동성을 줄여야 한다”고 설명했다. 두 번째 요인으로는 우크라이나 전쟁의 장기화에 따른 원자재 가격 상승을 들었다. “유가는 배럴당 150∼175달러까지 오를 가능성이 있다”고 예상했다.
[39] 세계 석유산업 전설 영국 마커스 새뮤얼
나전칠기로 돈 번 청년, 석유회사 ‘셸’ 창업해 유럽·아시아 석권
한 유대인 소년이 나전칠기 등으로 돈을 번 뒤 석유회사를 세워 세계 경제사에 큰 획을 그었다. 런던의 한 가난한 유대인 집안에서 1853년 마커스 새뮤얼(Marcus Samuel)이 태어났다. 그의 히브리어 이름은 ‘모르드카’였다. 새뮤얼의 부모는 골동품 가게를 하고 있었는데, 11명의 자식들을 위해 정말 열심히 일했다. 아이들은 부모가 고생하면서도 항상 웃는 얼굴로 자기들을 대하는 모습을 보며 자라 매사에 밝고 긍정적이었다. 특히 열째 아들 새뮤얼은 꾀가 많고 활력이 넘쳤다. 하지만 학교 성적은 그리 좋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에게 무역업을 권했다.
새뮤얼이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아버지는 그에게 선물을 하나 주었다. 유대인들은 한 시기를 매듭지을 때 선물을 하는 관습이 있다. 아버지의 선물은 아시아행 편도 배편 한 장이었다. 돌아오는 표는 없었다. 그러면서 아버지는 아들에게 조건을 달았다. 아버지가 이제 늙었으니 집안 살림에 도움이 될 만한 장사거리를 여행 중에 궁리해 보라는 부탁이었다. 1871년 18세의 새뮤얼은 인도, 스리랑카, 태국, 싱가포르, 대만, 필리핀, 중국을 두루 거쳐 여행한 후 마지막 기항지 요코하마 항구에 내렸다. 그의 재산이라곤 5파운드가 전부였다. 일본에 아는 사람도 없고 기거할 집도 없었다.

▲세계적 정유회사가 된 셸 - 마커스 새뮤얼은 유조선을 활용한 대량 수송으로 석유 판매 가격을 낮출 수 있었다. 그는 일본 요코하마 해변에서 조개를 주웠던 경험을 담아 조개 모양 상표를 유조선에 붙였다. 이는 오늘날 세계적 석유 에너지 기업 셸(Shell)의 상표가 됐다. 그는 “낯선 일본의 해안에서 혼자 조개를 줍던 과거를 결코 잊지 않겠다”며 어려웠던 시절을 삶의 거울로 삼았다. 사진은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2년 미국 뉴욕의 셸 주유소에서 여성이 주유하는 장면이다. /게티이미지코리아
요코하마에 갔을 땐 달랑 5파운드뿐
새뮤얼은 ‘쇼난’이라는 해안의 빈 판잣집에 들어가 며칠 지냈다. 거기에서 그는 일본인들이 갯벌에서 조개 캐는 모습을 보았다. 조개껍데기를 보니 굉장히 아름다웠다. 그는 직감적으로 이런 조개껍데기로 단추나 장식품을 만들면 아름다운 상품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자신도 조개껍데기를 열심히 주워 이를 가공해 단추 등을 만들어 영국으로 보냈다. 그의 아버지는 이걸 자신의 골동품 가게에서 팔았다. 영국인들은 처음 보는 조개 장식품을 진기하게 여겼다. 조개 장식품은 날개 돋친 듯 팔렸고, 가게가 번창해 빈민가에 있던 점포를 번화가로 옮겼다. 장사가 잘되자 새뮤얼은 화장대 등 나전칠기 제품을 대량으로 보냈고, 아버지는 이를 도매로 팔았다. 마커스 새뮤얼은 23세인 1876년에 요코하마에 ‘새뮤얼 상회’를 설립했다.

▲1897년 셸(Shell) 운송·무역회사를 세운 마커스 새뮤얼. 그가 세운 회사는 1907년 네덜란드 왕립석유회사와 합병을 통해 로열더치셸이 됐고, 오늘날 세계 2위 석유회사로 성장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나전칠기 장사로 성공한 새뮤얼은 다음 단계로의 도약을 꿈꿨다. 그는 영국과 일본을 오가며 동생 샘을 끌어들여 무역 회사를 차렸다. 영국산 기계, 직물, 공구를 일본과 극동에 팔고, 일본의 쌀, 비단, 도자기, 구리, 석탄 등을 유럽과 중동에 팔았다. 그 무렵 기업인들 사이의 화제는 단연 석유였다. 새뮤얼 역시 1890년 코카서스 지역을 탐사하는 동안 석유의 잠재력을 깨달았다. 때마침 내연기관이 등장해 석유 수요가 급증했다. 록펠러가 석유왕이 된 것도 그즈음이었다. 그 무렵 일본은 난방 연료로 목탄을 쓰고 있었다. 새뮤얼은 이에 착안해 코카서스의 등유와 경유를 일본과 극동에 팔았다. 그때부터 일본과 극동은 석유로 난방하고 조명을 밝히기 시작했다. 이 사업도 대성공을 거두었다.
당시 새뮤얼은 동남아 시장을 놓고 미국의 록펠러와 경쟁이 붙었다. 그는 물류 비용을 줄일 방법을 찾았다. 바로 수에즈운하를 통과하는 일이었다. 그는 증기선 몇 척을 빌려 석유통을 가득 채우고 최초로 수에즈운하를 이용한 석유의 대량 운송에 성공했다. 이후 새뮤얼은 극동 항구에 대규모 석유 저장고를 건설하고, 1891년 프랑스 로스차일드 가문의 브니토 석유 회사와 9년간의 독점 계약을 맺어 등유를 극동에 판매했다.
그런데 러시아에서 일본까지 석유를 운반하는 게 쉽지 않았다. 석유를 담은 5갤런 통이 쓰러져 석유가 흘러나오기 일쑤였다. 그러면 더러워진 배를 청소하는 일이 큰 문제였다. 화재 위험이 큰 석유 운송을 선박 회사들이 꺼려 운송 비용도 엄청 비쌌다. 새뮤얼은 고민 끝에 아예 배 전체를 기름 탱크로 만드는 유조선을 착안했다. 그는 전문가에게 설계를 의뢰해 영국 조선 회사에 유조선을 발주했다. 그리고 1892년 유조선 선주가 되었다. 새뮤얼의 유조선은 수에즈운하 통과에 최적화되어 있었다.
그 무렵 러시아는 러시아산 석유를 외국 배가 운반하는 것을 금지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래서 새뮤얼은 당시 네덜란드 식민지였던 인도네시아 석유 탐사에 뛰어들었다. 네덜란드는 왕립 석유 회사를 설립해 수마트라 유전을 개발하고 있었다. 새뮤얼은 운 좋게 인도네시아 최대 유전 개발에 성공해 한꺼번에 8척의 유조선을 발주했다. 이 배들이 세계 최초의 유조선단이었다. 그리고 유조선마다 조개 모양 상표를 붙였다. 요코하마 해변에서 조개를 주웠던 추억을 배에 붙인 것이다. 이후 3년 사이에 수에즈운하를 통과한 유조선이 69척이었는데 그중 65척이 새뮤얼 소유 선박이거나 전세 선박이었다. 새뮤얼은 유조선을 활용한 대량 수송으로 석유 가격을 크게 낮췄다. 록펠러의 해외 독점이 무너진 이유도 수에즈운하로 러시아산 원유를 수송하는 새뮤얼의 유조선들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 뒤 유조선 사업이 잘되어 1897년 ‘셸(Shell) 운송·무역 회사’를 만들었다.
이후 새뮤얼은 보르네오와 영국에 정유 공장을 지어 유럽과 아시아 석유 시장을 석권해 선박왕 별명을 얻었다. 그 뒤 그는 상업 은행가가 되어 일본 지방채를 팔아 영국 자본의 일본 진출을 도왔다.
새뮤얼은 정계에도 진출해 1891년 런던시 의원이 되었고, 1902년 49세에 런던 시장에 취임해 런던 항만청을 설립했다. 그는 영국의 석유 산업을 일으킨 공로로 귀족 작위를 받았다.
“혼자 조개 줍던 때를 잊은 적 없다”
당시 새뮤얼은 영국 함대에도 석유를 공급하고 있었다. 그의 사업이 성공할수록 영국인들은 유대인이 석유 산업을 좌우한다며 반발했다. 압력이 심하게 들어왔다. 어쩔 수 없이 석유 회사를 팔 수밖에 없었던 그는 회사를 매각, 합병할 때 두 가지 조건을 내세웠다. 비록 소액 주주일지라도 반드시 그의 자손이 회사 임원이 될 것과 회사가 존속하는 한 조개 모양 상표를 사용해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이후 셸은 1907년 네덜란드 왕립석유회사(로열더치페트롤리엄)와 합병해 세계 2위 규모의 ‘로열더치셸’이 된다. 최근 회사명을 셸로 변경한 로열더치셸의 상표는 지금도 조개 모양이다.
새뮤얼은 자신이 어려웠던 시절을 기억하며 삶의 거울로 삼았다. 그는 “나는 죽음의 위협을 피해 런던으로 피란 온 가난한 유대인 집안의 아들로서, 낯선 일본의 해안에 도착해 혼자 조개를 줍던 과거를 결코 잊지 않겠다고 맹세했다”고 말하곤 했다.

▲유럽과 아시아 정복한 새뮤얼의 유조선단 - 러시아 석유를 일본에 팔던 마커스 새뮤얼은 배 전체를 기름 탱크로 만드는 유조선을 발주했다. 인도네시아 유전 개발에 성공한 새뮤얼은 8척의 유조선으로 유조선단을 꾸리고 배에 조개 모양 상표를 붙였다. 사진은 1960년대 유조선. /위키피디아
[유대인의 역경 교육]
삶의 시련 이겨낼 수 있게 부모가 일부러 역경을 선물 “어려워도 포기하면 안 된다”
삶에 설사 어려운 일이 닥쳐도 부모가 인내심을 가지고 침착하게 대응하면 이를 지켜본 아이 역시 시련을 이겨내겠다는 굳은 결심과 강인한 의지를 품게 된다. 어려운 환경 아래서도 부모의 이러한 태도는 자녀 교육에 아주 좋은 것이다. 삶이 아무리 힘들어도 가족의 행복을 결코 거두어 갈 수 없다는 믿음을 아이들에게 안겨준다. 부모가 강인한 의지로 삶을 헤쳐 나가는 모습을 보여줄 때 아이는 부모의 모습에서 더 큰 자각을 느끼며 성숙해진다. 부모가 어떤 자세로 곤경을 이겨나가는 모습을 보여주느냐에 따라 오히려 힘든 환경이 가족끼리의 단합과 우애를 촉진시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이를 ‘역경 지수(adversity quotient)’라 하여 중요하게 생각한다.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절대로 낙관적인 삶의 태도를 포기하지 않는 자세이다. 그래서 유대인 사회에서는 ‘역경 교육’이 강조되고 있다. 유대인들은 사람의 운명은 세찬 파도 가운데 있는 ‘조각배’이며 역경 지수는 이를 뚫고 나아가는 ‘힘’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녀들이 졸업 등 인생의 한 매듭을 지을 때마다 이를 축하하는 의미로 역경을 선물하곤 한다.
[40] 헤지펀드의 대가 제임스 사이먼스
수학으로 만든 투자기법… 그의 통장엔 연봉 3조원 꽂혔다
월가의 전설 제임스 사이먼스는 하버드대학 교수 출신이다. 그는 월가 최초로 컴퓨터 알고리즘 투자 기법을 개발한 금융 공학자로 연간 수입이 3조원에 이른다. 그의 회사는 수학자들이 개발한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자동 매매만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즉 데이터를 바탕으로 한 수학적 분석만을 의사 결정의 토대로 삼는 시스템이다.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제임스 사이먼스는 하버드대 등에서 수학을 가르친 뒤 국가안보국(NSA) 산하 연구소에서 초고속 암호 해독 컴퓨터 프로그램 알고리즘을 개발했다. 이를 투자에 적용한 그는 월가에서 자신이 세운 투자회사 ‘르네상스 테크놀로지’를 단기 투자 매매, 계량 분석에 특화한 회사로 키워냈다. 사진은 사이먼스가 2019년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주최 행사에 참석해 발언하는 장면이다. /게티이미지코리아
이제 주식시장은 사람의 ‘경험이나 감’이 아닌 컴퓨터 매매가 대세를 이루고 있다. 이를 주도한 제임스 사이먼스는 환경 변화에 흔들리지 않고 꾸준히 큰돈을 버는 것으로 유명하다. 다우지수가 반 토막이 난 글로벌 금융 위기 때조차 높은 수익을 냈다. 2008년 수익률 152%로 79억달러, 2009년 수익률 75%로 39억달러, 2010년 58%로 58억달러를 벌어 불황기에 오히려 큰 수익을 냈다. 헤지펀드가 평균 10% 손해를 기록한 2011년조차 수익률 71%로 71억달러를 벌었다. 헤지펀드는 뮤추얼펀드와 달리 많은 수수료를 뗀다. 사이먼스의 르네상스 테크놀로지는 고정 수수료 5%에 성과 수수료는 수익의 44%에 이른다. 그럼에도 투자자들이 줄을 선다. 과연 사이먼스는 어떤 방법으로 불황기에도 이런 큰 수익을 내는 것일까?
직감·경험보다 수학을 믿는다
미국 보스턴의 유대인 가정에서 1938년에 태어난 제임스 사이먼스는 호기심 가득한 천재다. 그는 MIT(매사추세츠공대) 수학과를 20세에 조기 졸업한 기념으로 뭔가 의미 있는 여행을 하고 싶었다. 친구들과 함께 스쿠터로 아메리카 대륙 종단에 나섰다. 여행 애칭은 ‘부에노스아이레스까지 죽기 살기로’였다. 하지만 중간에 위험한 고비를 넘기며 콜롬비아 보고타까지만 여행했다.
여행을 마친 후 버클리 대학원에 진학하고 결혼했다. 축의금 5000달러로 주식 투자를 시작한 그는 변동성이 큰 대두(大豆) 투자로 갈아탔다. 새벽마다 시장에 나가 대두 가격 움직임을 살피며 가격 변동을 예측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3년 만에 미분기하학으로 박사 학위를 땄다. 그 뒤 MIT 교수가 되어 재직하다 때려치우고 친구들과 함께 콜롬비아 보고타에서 제조 회사를 창업했다. 그는 회사를 성공적으로 정착시킨 뒤 1963년 하버드대 교수가 되었다.
▲2017년 뉴욕의 한 행사에 참석한 제임스 사이먼스(오른쪽)와 조 바이든. /게티이미지코리아
이번에도 교수직에 만족하지 못한 사이먼스는 뭔가 새로운 도전거리를 찾았다. 결국 이듬해 연봉이 두 배 많은 국가안보국(NSA) 산하 국방분석연구소로 자리를 옮겼다. 암호 해독 부서에 배치된 사이먼스는 의미 없어 보이는 난해한 데이터와 씨름하며 패턴을 찾아내는 일을 맡았다. 그는 그곳에서 선임들에게 패턴을 활용한 수학 모델과 컴퓨터 알고리즘 만드는 방법을 처음 배웠다. 천재일우 기회였다. 그 뒤 그는 초고속 암호 해독 컴퓨터 프로그램 알고리즘을 개발해 그간 풀지 못했던 소련 암호 해독에 성공했다.
1960년대만 해도 컴퓨터가 귀해 증권사들이 데이터를 카드 분류 방식으로 관리할 때였다. 사이먼스는 컴퓨터를 활용해 여러 프로그램을 시험해볼 수 있는 행운아였다. 이때 그는 암호 해독에서 귀중한 힌트를 얻는다. 곧 주식시장에서도 무의미한 것처럼 보이는 여러 신호 사이에서 유의미한 패턴을 발견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는 동료들과 함께 주식 투자 컴퓨터 프로그램을 만들어 투자하기로 했으나 자금 마련에 실패했다. 사이먼스는 퇴역 합참 의장의 베트남 전쟁 옹호 칼럼을 반박하는 인터뷰를 했다가 연구소에서 해고당했다.
하지만 그의 수학 실력을 익히 아는 학계는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다. 사이먼스는 1968년 뉴욕주립대 스토니브룩 캠퍼스의 수학과 학과장으로 초빙받아 30세에 다시 교수가 되었다. 그는 1976년 38세에 수학계의 노벨상이라 부르는 베블렌상을 받았다. 또 그가 학과장으로 재직했던 10년간 유명 교수 20명을 초빙해 스토니브룩 수학과를 일류로 키워냈다. 하지만 그의 못다 이룬 꿈, 곧 주식 투자에 대한 미련이 다시 꿈틀거렸다. 1978년 과감히 종신 교수직을 내던지고 마흔 살에 자신의 투자 회사를 설립해 금융계에 뛰어들었다.
▲제임스 사이먼스가 세운 ‘르네상스 테크놀로지’는 증시에서 컴퓨터 알고리즘으로 종목을 매매하는 기법을 쓰는 헤지펀드 회사다. /pinterest
“동료 도우면 보너스” 협업 이끌어
유대인의 특징은 무엇을 하든 ‘함께’한다는 점이다. 사이먼스 역시 천재 동료들을 끌어들였다. 1979년 암호 해독을 같이했던 수학자 레너드 바움과 스토니브룩 동료 교수 제임스 엑스를 영입했다. 그들과 외환 거래를 함께하며 암호 해독 때처럼 시장에서 유의미한 패턴을 찾아 투자 모델을 만들기 시작했다. 투자 모델이 완성되기도 전에 모금한 300여 만달러를 수천만 달러로 불렸다. 그 뒤 거래 품목을 늘려 원자재와 채권 선물에도 투자했다. 그들은 시장 데이터를 모아 마침내 수학적 투자 모델을 만들었다.
사이먼스는 1988년 엘윈 벌캄프를 끌어들였다. 그는 이미 선물 거래 알고리즘을 만들어 자신의 선물 거래 회사 ‘악스콤’을 1986년에 설립해 단타 거래로 높은 수익률을 올리고 있었다. 벌캄프는 사이먼스가 1988년에 만든 메달리언 펀드 투자 종목들의 평균 보유 기간을 1주 반에서 하루 반으로 줄였다. 유의미한 패턴의 지속 기간이 짧아 보유 기간이 짧을수록 수익이 컸기 때문이다. 사이먼스는 1992년 아예 악스콤을 사들여 이 알고리즘이 ‘메달리언 펀드’의 기초가 되게 했다. 이듬해에는 IBM의 초기 인공지능 개발자 로버트 머서와 피터 브라운을 영입해 투자 범위를 주식으로도 넓혔다. 이후 르네상스 테크놀로지는 인공지능을 활용한 컴퓨터 프로그램을 개발해 초단타 매매에 집중하게 된다.
사이먼스는 천재 수학자라기보다 천재 경영자였다. 40년 전에 이미 동료들의 창의성 발휘를 위해 자유 근무제는 물론 쾌적한 업무 환경 조성에 최선을 다했다. 뉴욕이 아닌 따듯한 서부에서 살고 싶다는 동료들을 위해 캘리포니아 비치에 별도 투자 회사를 마련해 주었다. 그는 MBA나 금융계 출신을 뽑지 않고 수학자, 물리학자, 기상학자들을 채용해 분야별 투자 모델을 개발했다. 하지만 과학자들의 특징은 홀로 연구하는 데 익숙해 팀원 간 소통과 협력에 문제가 많았다. 사이먼스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매주 업무 토론을 정례화하여 정보를 공유하게 했고, 격주로 전문가 특강을 듣고 이를 어떻게 업무에 접목할지 토론했다. 하지만 이것으로 충분치 않았다. 사이먼스는 궁리 끝에 소통과 협력을 제도화하기로 마음먹고 새로운 보너스 시스템을 만들었다. 개인별 보너스 지급액을 책정할 때, 예를 들면 본인 성과는 40%, 동료를 도와준 성과를 60%로 구성해 내가 성과를 내기보다 동료가 성과를 내도록 도와주면 더 많은 보너스를 받게 설계했다. 그리고 장기간 실적을 반영해 협동이 제도화, 체질화되게 만들었다. 이로써 서로 소통하고 협동하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사이먼스의 메달리언 펀드] 연평균 수익률이 66%, 30년간 130조원 벌어 세계 최강 펀드로 꼽혀
역대 세계 최강 헤지펀드는 제임스 사이먼스가 설립한 ‘르네상스 테크놀로지’의 메달리언 펀드다. 1988년 이래 30년간 연평균 66%라는 경이적 수익률을 올리며 수익 1045억달러를 달성했다. 이는 같은 기간 S&P500 수익률의 1000배로 30년간 누적 수익률이 3만3000배에 이른다. 1988년에 1000달러를 투자했다면 30년 후인 2018년에 3300만달러로 불어났다는 이야기다. 고율 수수료를 제하더라도 연평균 수익률 39%로 2000만달러에 달한다. 이 펀드는 직원들만 가입시켜 업무 동기 유발 장치로 사용되며 300여 직원 대부분을 억만장자로 만들어 주었다. 롱아일랜드 본사 근처에 대저택이 즐비한 이유다. 그러니 직원 모두가 주인 의식을 갖고 CEO의 자세로 협동하여 펀드를 키우고 있다. 지금은 사이먼스의 투자 기법을 따른 퀀트 투자(계량 투자)가 헤지펀드의 대세를 이루고 있다. 심지어 골드만삭스조차 컴퓨터 프로그램 매매에 치중하면서 2017년 트레이더 600명을 2명으로 줄이는 대신 프로그래머 200명을 고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