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아시아에 있는 나라. 수도는 아스하바트, 화폐는 마나트이다. 투르크메니스탄은 2개의 넓은 지역, 즉 오아시스와 사막지역으로 나뉜다. 주요 경제 산업은 목화 재배와 석유 및 가스 생산이다. 17세까지의 무상 의무교육이 실시되며 모든 언론매체는 정부에서 엄격하게 관리한다
투르크메니스탄은 주로 사막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코페트 산맥에서는 지진이 자주 일어난다. 아시아 대륙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데다가 고도의 차이도 크기 때문에 뚜렷한 대륙성기후를 나타내며 일교차와 연교차가 심하다.카라쿰 사막남동부지역의 경우 그늘의 최고기온이 50℃에 이르는 등 여름 동안에는 기온이 35℃ 이하로 내려가는 경우가 드문 반면 겨울에는 쿠슈카의 기온이 -33℃까지 떨어진다.
습도가 아주 낮고 강우량도 적기 때문에 관개가 중요한 문제로 부각된다. 주요강으로는 북동 국경지대를 따라 아랄 해로 유입되는 아무다리야(고대명은 옥수스) 강과 테젠 강, 무르가브 강, 아트레크 강이 있으며 운하와 저수지가 건설되어 있다. 카라쿰 사막을 가로지르는, 세계에서 가장 큰 관개 및 운송용 운하인카라쿰스키 운하(1,400km)는 1950년대에 건설되기 시작했다.
투르크메니스탄은 2개의 넓은 지역, 즉 오아시스와 사막지역으로 나뉜다. 주요 오아시스로는 코페트 산맥, 테젠, 무르가브, 중(中)아무다리야, 하(下)아무다리야가 있다.
토양은 다양하나 사막지역에는 일정한 토양층이 없다.
오아시스에는 관개농업에 적합한 토양층이 형성되어 있다. 오아시스, 산지의 계곡, 고원지대를 제외한 곳의 식물은 뚜렷한 사막 식물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 코페트 산맥의 계곡에는 야생 포도나무·아몬드나무·무화과나무·호두나무가 자라며 강 기슭을 따라 포플라·버드나무·갈대·등나무 숲이 우거져 있다. 동물로는 사막에 사는 여우·살쾡이·사막영양 등이 자주 발견된다. 산악지대에는 산양·염소·치타·스라소니·흰표범·호저가, 아무다리야 강 주변에는 재칼·멧돼지·붉은사슴 등이 서식한다. 카스피 해에는 캐비어로 유명해진 큰철갑상어와 어류들이 살며, 동안에는 겨우내 많은 철새들이 모여든다.
다음백과
◆2016년 05월 18일 말과 활의 제국
▲투르크메니스탄 호텔의 전시 그림
정태인 / 駐투르크메니스탄 대사
한민족의 조상은 북방기마민족이라고 한다. 한반도 북쪽에서 도래했고, 유목을 위해 말을 잘 타야 했으며, 생존을 위해 활쏘기가 필수였던 것 같다. 오래전 중국에서는 우리 민족을 동이(東夷)족이라고 불렀다. ‘夷(이)’에는 대단한 궁수(大+弓)라는 뜻이 있으니 말과 더불어 활과 인연이 깊은 민족으로 보인다. 고구려의 수렵도에는 말과 활이 모두 등장하니 이를 증명한다고 할 수 있다.
2014년 투르크메니스탄 부임 후 신임장 제정을 위해 주재국 정부가 지정한 오구스켄트 호텔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눈에 익은 그림이 하나 보였다. 말 타고 활 쏘면서 사냥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었다. 투르크메니스탄 사람들은 과거 돌궐족의 일파인 오구스족의 한 갈래라고 들었다. 과거 한민족과 더불어 유라시아 대륙을 공유하면서 유목하던 민족이라서 우리와 유사한 그 무엇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를 증명하는 그림이었다.
며칠 후 외교단 부임 인사를 위해 주재국 내 터키 대사관을 방문했다. 터키 대사는 집무실에서 나를 맞이했는데, 집무실 소파 테이블 위에 터키 국립박물관 소개 책자가 놓여 있었다. 책표지에는 고구려 수렵도 비슷한 그림이 있었다. 왜 고구려 수렵도가 여기에 있느냐고 물었더니, 터키 대사는 의아해 하면서 터키 역사문화를 소개하는 국립박물관의 대표적 그림이 그렇다고 했다. 터키도 말과 활의 문화를 공유하는 국가라는 증거이다. 그러고 보니, 투르크메니스탄과 같이 터키도 오구스족이 건설한 국가이다.
투르크메니스탄 대통령은 말을 좋아한다. 이 나라 사람들의 삶이 오래전부터 말과 매우 긴밀히 얽혀 지내왔기 때문에 그런가 생각했다. 그래서 신임장 제정 시 ‘신라 기마상’을 선물로 증정하고, 우리 민족도 말과 인연이 각별하다고 설명했다. 구르반굴리 베르디무함메도프 대통령은 내 이야기에 관심을 보이면서 경청했다. 두 나라는 말과 활이 어우러진 사냥의 전통을 공유하고 있다고 첨언했다. 연말이 되자 외교활동의 일환으로 투르크메니스탄 고위인사와 중앙아시아 출신 대사들에게 고구려 수렵도가 그려진 연하장을 돌렸다. 이후 말과 활의 이야기를 계속 들려주었다. “우리는 하나”라는 인식이 확산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그렇게 했다.
유목민족은 이동하는 민족이다. 전쟁을 치르는 데 있어서도 부족 구성원이 같이 움직이기 때문에 별도의 병참이 필요하지 않다. 기병과 궁수가 하나가 된 병사의 전투력은 신속하면서도 천하무적이다. 그래서 부족이 뭉치고 민족의 움직임이 한 번 시작되면 유라시아 내륙에서는 아무것도 장애가 되지 않았다. 한반도에서 만주를 거쳐 중앙아시아와 터키까지 소위 ‘돌궐 벨트’라는 하나의 활동 무대가 고래로부터 있어 온 것 같다. 그러한 관점에서 보면 투르크메니스탄도 한반도와 연결이 된다는 생각이 든다.
어찌 보면 유라시아는 말과 활의 역사 무대이다. 유목민족에게 말과 활은 생존의 핵심 수단이다. 유라시아 대륙을 이동하면서 살아야 하고 필요에 따라 전투력으로 전환되면 대적이 힘드니 역사를 바꾸는 일이 벌어지고는 했다. 말과 활의 주인이 자주 중국 역사의 주역이었고, 중동과 유럽의 역사도 종종 바꾸어 놓았다. 흉노가 그러했고, 돌궐이 그러했고, 몽골이 그러했다. 인도의 최근 천년도 돌궐 왕조와 몽골(현지어로는 무굴) 제국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수렵도를 공유하는 돌궐 벨트를 따라 과거 한민족의 발자취를 찾을 수 있고, 우리 선조들의 외교 활동 흔적도 발견할 수 있다. 지리적 거리와 냉전의 지정학으로 인해 우리 사고가 단절돼 왔다. 과거 우리의 가까운 이웃, 또는 형제를 발견하고 이러한 유대감 또는 공감대 속에서 미래를 그려보면 어떨까?
북아프리카 지역에서 가장 작은 나라이다. 아랍계와 베르베르계의 혼혈인이 주민의 다수를 점한다. 프랑스어가 널리 쓰이지만 공용어는 아랍어이다. 대다수 국민이 이슬람교도들이다. 인구밀도는 북아프리카에서 가장 높으며, 대부분분 해안 가까이에서 산다. 1881년 프랑스의 보호령이 되어 오랫동안 독립운동을 벌이다 1956년 독립을 하고 국제연합에 가입했다. 서비스업, 농업, 경공업, 석유와 인산염의 생산과 수출업이 가장 발달해 있다. 실업과 불완전 취업이 만연하며 경제개발을 서방국가들과 국제기구들의 보조에 의존하고 있다.
지형적 특징에 따라 북단에서 남단에 이르기까지 국토를 4개 지역으로 나눌 수 있다. 국토 총면적의 1/3을 차지하는 북부 산간지역에는 사암과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2개의 산맥인 노던텔(북쪽)과 하이텔(남쪽)이 솟아 있다. 이 산맥들은 각각 알제리의 텔아틀라스 산맥과 사하라아틀라스 산맥의 연장줄기이다. 해발 1,544m로 튀니지의 최고봉을 이루는샤나비 산은 알제리와의 국경 부근에 있다.
중부는 광대한 고원으로, 다시 서부 고지 스텝(해발 480m 이상)과 동부 저지 스텝(180∼480m)으로 나뉜다. 이보다 남쪽에 있는 저지에는 일련의 수심이 얕은 염호가 있는데, 그중 가장 큰것은자리드 호이다. 국토의 최남단부는 모래와 암석으로 이루어진 사하라 사막으로 이어진다. 피압 지하수가 풍부한 튀니지 남부 곳곳에는 잘 경작된 오아시스가 발달해 있다.
460km 길이의 마자르다(메제르다) 강은 이 나라 최대의 강이며 유일한 영구천으로, 수력발전과 관개에 이용되고 있다. 마자르다 강 유역은 이 나라에서 가장 비옥한 토양이며 최대의 농업지역을 이룬다.
북부지방은 지중해성 기후로, 겨울은 온화하고 습윤하며 여름은 무덥고 건조하다. 지중해 연안의 튀니스에서는 1일평균 최고기온이 8월의 33℃에서 1월의 14℃ 사이에 분포한다. 기온은 바다의 영향을 받으며, 해안이 내륙에 비해 기온차가 작다. 남부는 사막기후를 나타내며, 사하라 지방으로부터 빈번하게 불어오는 열풍 때문에 북부에 비해 기온이 훨씬 더 높고 기온차도 심하다.
강우량은 북부에서 연간 1,000∼1,500㎜의 분포를 나타내는 반면, 남부에서는 100∼200㎜에 불과하기 때문에 관개를 하지 않고서는 경작이 불가능하다. 습한 산비탈에서는 푸른 코르크나무와 오크나무 숲이 발달해 있으며, 중앙 스텝 지방에서는 아프리카나래새가 자란다. 건조한 남부에서는 약간의 관목을 볼 수 있으며 사하라 사막지역에는 오아시스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식물이 전혀 자라지 않는다.
이 나라의 야생동물로는 가젤·멧돼지·전갈·뱀 등이 있다. 가장 중요한 광물자원은 인회암으로, 아프리카 최대 규모의 인회암 광산 몇 개가 튀니지에 있다. 또한 아프리카 대륙에서 5번째로 큰 석유매장지이며, 4번째로 큰 천연 가스 산지이기도 하다. 그밖의 광물로는 철광·납·아연·수은 등이 있다.
다음백과
◆2016.04.17 튀니지 튀니스, 세상에서 가장 개방적인 이슬람 도시
2010년 12월 이슬람 세계 뒤흔든 자스민 혁명의 진앙지… 이슬람 신앙과 교리에 기계적으로 얽매이지 않는 관용적 라이프스타일 돋보여
▲2011년 ‘아랍의 봄’ 민주화 시위 발원지인 튀니지의 수도 튀니스의 역사는 3000년에 가깝다. 오랫동안 지중해에서 가장 잘나가는 도시였다. 카페에서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튀니스 시민들.
튀니스는 정치·경제·교육체제는 유럽식이며, 종교(이슬람교)와 언어(아랍어)는 아시아에서 유래했고, 땅은 아프리카 대륙에 위치해 있다. 가난하지만 미래를 낙관하는 시민들이 많은 이유는 재스민 혁명에서 폭발한 자유의 정신이 아직 도도하게 살아 있기 때문이다.
머리는 유럽, 가슴은 아시아, 몸은 아프리카에!
아프리카 최북단에 위치한 한니발의 도시 튀니스. 우리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지만 <내셔널지오그래픽 트래블러(National Geographic Traveler)>에 의해 2015년 최고의 관광지 20곳 중의 하나로 선정된 곳이다.
<로마인 이야기>를 쓴 시오노 나나미가 그랬다. 햇빛이 아낌없이 내리쬐는 여름날, 하얀 벽과 파란 대문으로 치장된 시디부사이드의 카페에 앉아 찐한 에스프레소 한잔을 느긋하게 마신다. 거기에 에메랄드색 지중해 위로 저물어가는 석양을 보고 있노라면 환상이라고. 프랑스의 작가 앙드레 지드 등 유럽의 수많은 예술인이 시디부사이드에서 아름다운 지중해를 바라보며 작품을 구상했다. 해가 져도 아름답다. 하늘이 낮고 공기가 신선해 별이 선명하게 보인다. 지중해에 떠 있는 배의 불빛을 관조하면 명상에 잠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된다.
▲비르사 언덕에 위치한 카르타고 박물관. 카르타고의 건국설화가 서려있는 곳이지만 대부분 로마 시대의 유물이 전시돼 있다.
튀니스(튀니스 메트로폴리탄에 속해 있는 카르타고, 시디부사이드 등 포함)의 역사는 3000년에 가깝다. BC 9세기 페니키아 사람들에 의해 건설되었는데, 오랫동안 지중해에서 가장 잘나가는 국가 중 하나였다. 그러나 BC 146년 로마제국과의 제3차 포에니 전쟁에서 패한 후 2000년이 넘게 로마인, 반달족, 사우디에서 온 아랍족, 터키의 오토만족, 프랑스인 등 이방인들의 지배를 받았다. 자국민이 지배하게 된 건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1956년부터다. 유럽·중동·아프리카의 영향을 받는 지정학적 위치 때문인지 튀니스에는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의 문화가 섞여 있다. 정치·경제·교육체제는 유럽식이며, 종교(이슬람교)와 언어(아랍어)는 아시아에서 유래했고, 땅은 아프리카 대륙에 위치해 있다. 튀니스인들 스스로도 3분의 1은 유럽, 3분의 1은 아시아, 3분의 1은 아프리카인이라고 한다. 머리는 유럽에, 가슴은 아시아에, 몸은 아프리카에 있는 것이다.
▲프랑스의 작가 앙드레 지드 등 유럽의 수많은 예술인이 시디부사이드에서 지중해를 바라보며 작품을 구상했다고 한다. 사진은 시디부사이드 상점가.
태양이 준 신의 선물, 올리브
튀니스는 지중해성 기후에 속해 있다. 6월부터 9월까지는 한 여름인데 낮 최고기온이 40도를 넘는 기간이 3달가량 된다. 3일 정도는 50도를 넘기기도 한다. 이렇게 태양이 강렬해도 여름에는 비가 거의 한 방울도 내리지 않는다. 강도 모두 메말라 버리는데 움푹 팬 흔적만이 강이라는 것을 알게 해준다. 신기한 건 이렇게 비가 오지 않아도 식물이 말라 죽지 않고 꿋꿋이 버틴다는 것이다. 강인한 튀니스 사람들처럼 말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수박과 복숭아 같은 튀니스의 과일은 기가 막히게 맛있다.
튀니스 주변은 대부분 밀밭과 올리브 언덕으로 이루어져 있다. 로마의 지배를 받기 전에는 산림이 우거진 곳이었는데 로마가 튀니지(국가 이름)를 식민지화한 후 배후 식량기지로 만들기 위해 나무를 모두 베어버리고 밀밭으로 만들었다. 로마의 빵 바구니(bread basket)라고 불릴 정도로 곡창지대가 되었다. 지금도 밀이 많이 난다. 한여름의 뜨거운 태양을 받고 익은 튀니지 올리브는 아마 지중해에서 최고일 것이다. 중동 사람들이 석유를 신의 선물이라고 하는데 튀니스 사람들은 올리브를 신의 선물이라고 한다. 올리브는 열매로 기름, 장아찌 등을 만드는 것은 물론 나무도 중요한 목재로 사용된다. 올리브는 거의 모든 음식에 사용되며 감기가 걸렸을 때 한 종지 먹으면 낫는다고 한다. 올리브는 튀니지의 가장 중요한 수출품 중의 하나다.
튀니스 사람들의 행동은 예측 불가능하다. 길가에 주차해 있던 차가 신호도 없이 출발하고, 방향등도 켜지 않고 갑자기 차선을 바꾸기도 한다. 골목에서 사람이 갑자기 튀어나오기도 하며 급정거는 기본이다. 출퇴근 시간에 튀니스의 도로는 아비규환이 된다. 시도 때도 없이 울려대는 경적과 번쩍거리는 전조등은 물론 역주행도 다반사다. 특히 퇴근 시간대가 되면 왕복 4차선(2+2차선) 도로가 1+3차선으로 바뀌어버린다. 교통량이 많은 쪽에서 반대쪽 차선 하나를 차지해버리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가변차로와 같다. 차선도 무시되는데 신호등이 있는 곳이면 3차선 도로에 차들이 보통 5줄로 서 있다. 우리 시각으로는 무질서해 보이겠지만 어쨌든 교통체증이 빨리 풀리니 이곳 사람들은 좁은 도로를 효율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튀니스 사람들의 예측 불가능한 행동과 무질서는 건축에서도 볼 수 있는데 대표적인 곳이 메디나(Medina)다. 메디나는 옛 이슬람식 시가지를 말한다. 성벽이 시가지 전체를 둘러싸고 있고 그 안에 모스크(이슬람 사원), 주거지, 시장 등이 있다. 튀니스의 메디나는 7세기에 지어졌으며 동서로 800m, 남북으로 1600m 정도의 규모다. 서울로 치면 4대문 안과 비슷하다. 메디나에 갈 때 조심해야 할 것은 소매치기가 아니라 바로 좁고 꾸불꾸불하고 복잡한 골목길이다. 미로처럼 되어 있어서 한 번 길을 잘못 접어들면 다시 원래 있던 자리로 찾아오기가 쉽지 않다. 이방인의 침략에 대비해서 복잡하게 만들었는데 메디나에 직접 가보면 어디로 나와야 할지 헷갈린다. 이렇게 이방인들이 헤매는 동안 여기 거주민들은 도망칠 시간을 벌었을 것이다.
튀니스 사람들의 이러한 특징은 시위할 때도 나타난다. 튀니지에서 재스민 혁명이 일어났을 때다. 곳곳에서 시위가 벌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시위하는 모습을 보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일사불란하게 줄지어 앉아서 마이크를 잡은 사람의 구호에 따라 모두가 복창하는 것이 아니었다. 시위대 앞의 몇 사람만 집중할 뿐 대부분 사방팔방을 보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핸드폰으로 문자 확인을 하고 있고 어떤 사람은 담배를 피고 있으며, 또 어떤 사람은 하품도 하고 있었다. 진압하러 오는 경찰도 열을 지어서 오는 게 아니라 각개전투식으로 사방에서 모여들었다. 시위대들도 한쪽으로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사방 팔방으로 튀었다. 도망가다가도 아는 경찰이 있으면 악수까지 하였다. 이러다가 군중들 틈에 섞이게 되는데 이때쯤 되면 누가 시위대이고 누가 경찰인지 구분이 안 간다.
▲튀니지 국민은 23년간 독재를 이어온 지네 엘아비디네 벤알리 대통령을 퇴진시키고 2014년 민주정부를 수립했다. 벤알리 대통령이 다녔다는 지투나 모스크.
예측 불가능한 행동과 ‘효율적인’ 무질서
튀니스 사람들은 왜 이렇게 예측 불가능한 행동을 하고 무질서한 도시시스템을 만들었을까? 종교의 영향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외부인의 침입에 대한 생존방식이었기 때문인 것 같다. 운동경기에는 아무리 상대방이 강해도 예측만 잘하면 이길 수 있다. 전쟁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적이 예측 불가능한 행동을 할 때 나의 군사 규모는 훨씬 더 커야 한다. 모든 경우의 수에 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튀니스 사람들은 이러한 무질서를 이용해 방위를 해왔다. 외국인의 눈으로 볼 때 튀니스는 무질서하고 예측 불가능한 곳이지만 튀니스 사람들에게 무질서와 예측 불가능은 가장 효율적인 생존의 수단이자 방어의 수단이었던 것이다.
튀니스 사람들의 종교는 수니파 이슬람교다. 다른 이슬람 국가들과는 달리 헌법에 종교의 자유가 허용되어 있고, 학교에서 히잡 착용이 금지되어 있다. 튀니스 여성들에게 히잡은 종교적인 목적이 아니라 일종의 패션이다. 빨강색, 파랑색, 노랑색, 보라색 등 다양한 색상의 히잡으로 멋을 부린다. 이슬람교의 휴일은 일요일이 아니라 금요일이다. 그러나 튀니지는 기독교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금요일 대신 일요일이 휴일이다. 경제 사이클을 유럽 국가들과 맞추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 술은 이슬람에서 돼지고기와 함께 금기시되는 대표 품목이다.
그런데 튀니스에서는 웬만한 술은 쉽게 살 수 있고, 까르푸에 가면 돼지고기도 살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와인, 대추야자 술(40도, 부하라고 함) 등을 생산까지 하고 있다. 튀니지 와인의 역사는 기원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기원전 2~3세기의 카르타쥐에 마공(Magon)이라는 농학자가 있었는데 와인을 만드는 법에 대한 책을 저술했다. 그의 와인 만드는 기법은 이후 로마인들도 채택했다고 할 정도로 뛰어났는데 현재 튀니지에는 그의 이름을 딴 마공이라는 와인이 있다. 맛과 가격에서 가성비가 최고다.
나는 튀니스에서 <백인의 눈으로 아프리카를 말하지 말라>라는 책을 썼는데 글이 막힐 때마다 마공을 한 잔씩 하곤 했다. 튀니스 시내의 까르타쥐 골프장에서 파는 맥주는 맛이 일품이다. 밍밍한 한국맥주와는 달리 물이 섞이지 않아 보리 특유의 고소한 맛이 느껴진다. 한국처럼 4도가 아니라 10도 정도 되는데 멋모르고 마셨다간 금방 취한다. 튀니스 사람들은 술을 쉽게 접할 수 있으나 실제로 마시는 사람은 드물다. 그대신 담배를 많이 피운다. 마르스(Mars)라는 현대식 담배와 시샤(Shisha)라는 물담배를 좋아한다. 물담배는 연초를 숯으로 태울 때 나오는 연기가 물을 통해 한번 걸러진 후 목까지 전달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필터가 없어서 매우 독하다. 마르스는 니코틴 함량이 국산담배의 10~20배는 된다. 이렇게 강한 담배를 튀니스 사람들은 쉬지 않고 피워댄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술로 스트레스를 푸는 반면 여기 사람들은 담배로 푸는 것 같다. 튀니스 거리에 늘어져 있는 카페에서 남자들이 쓴 에스프레소 한 잔 시켜 놓고 물담배를 피워대는 모습은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풍경 중의 하나다.
튀니스 시내에는 프랑스 성당이 있고 유대교 교회도 있다. 프랑스 식민지시대의 성당 건물을 허물지 않고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기도 하다. 카르타쥐 유적지에 가면 로마제국 시대의 참회록으로 유명한 성 오거스틴 동상이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다. 또한 십자가를 가슴에 안은 이름 모를 성자의 조각상도 전혀 훼손되지 않은 채 공개되고 있다. 이런 것들을 보면 튀니스인 특유의 개방성과 종교적 관용이 느껴진다.
이슬람교 신자들은 이슬람력 9월인 라마단 한 달 동안 일출부터 일몰까지 단식을 해야 한다. 라마단은 아랍어로 ‘더운 달’을 의미하는데 한 달 정도 지속되며 이 기간 동안 낮에는 물을 포함하여 모든 음식을 못 먹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8세 미만 어린이와 학생, 산모, 병자, 외국으로의 여행객 등은 단식에서 예외다. 단식 중에는 담배도 안 되고, 성생활, 악한 일 등도 금지된다. 라마단 기간 동안 근무시간은 오전 8시부터 오후 2시까지로 단축되는데 퇴근 시간인 오후 2시를 전후해 차가 많이 막힌다. 오후 5시쯤 되면 택시기사가 물 한 방울 못 먹어서 기진맥진하는데 이때 교통사고가 자주 난다. 낮에서 밤으로 바뀌는 시간대인 저녁 7시경에는 도로에 차가 거의 한 대도 보이지 않는다. 금식 해제를 알리는 무에진(이슬람 사원에서 예배 시간을 알리는 사람)의 소리가 모스크에서 들리면 바로 먹으려고 미리 밥상을 차려놓고 앉아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튀니스 사람은 낮에 안 먹는 대신 밤에 3끼를 모두 챙겨먹고 거기에 추가적으로 술과 고기를 더 먹는다. 많이 먹기 위해서 저녁 먹기 직전에 위를 달래 줄 수 있는 가벼운 수프부터 시작하는데 우리나라 남자들이 술 마시기 전에 우유를 마시는 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이렇게 거의 밤새도록 먹고 마시고 놀다 보니 잠을 제대로 못 자는 건 당연지사! 아침에 출근은 겨우 하더라도 하루 종일 멍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같은 현상 때문에 튀니지 초대 대통령이었던 하비브 부르기바는 라마단을 없애자고 주장했으나 무슬림들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혀 무산되었다.
▲튀니스에서 자동차로 1시간30분 거리에 있는 두가에는 로마시대의 도시 유적이 남아 있다. 하지만 튀니지 정부가 이슬람 이전의 역사를 방치한 탓에 유적지 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낮에는 굶고 밤에 포식하는 기간, 라마단
라마단이 끝난 다음날인 이슬람력 10월1일부터 3일간은 ‘이드-알 피트르(Eid-al Fitr)’라는 명절이다. 이 기간에 무슬림들은 가까운 모스크에 가서 예배를 드리기도 하고 친척들을 방문하여 선물을 주고받기도 하는데 우리나라의 추석이나 설과 비슷하다. 이드-알 아드하는 이드-알 피트르로부터 약 두 달 뒤인 이슬람력 12월에 성지순례를 끝내고 양을 알라께 바치는 축제다. 무슬림들에게 가장 큰 축제날이다. 이 축제 때는 보름 전부터 시장뿐만 아니라 공터가 있는 곳이면 우후죽순으로 양시장이 생긴다. 시골에서 차로 양을 운송하기도 하고, 목동들이 직접 몰고 오기도 한다. 성인 남자는 누구나 양을 1마리씩 잡아서 제물로 바쳐야 하는데 양을 7등분하여 6개의 큰 부분은 다른 사람에게 주고 본인은 가장 작은 것을 선택한다. 곧 죽게 될 운명이라는 것도 모른 채 끔벅거리는 양들의 선한 눈을 보면 불쌍하다는 생각도 들지만 이 축제를 통하여 농촌경제는 큰 활력을 얻는다.
긴 역사 동안 수많은 외부 세력과 섞이다 보니 튀니스의 음식도 다양하다. 대표적인 음식은 꾸스꾸스(Couscous)다. 꾸스꾸스는 튀니스 뿐만 아니라 주변의 알제리, 모르코, 이집트에서도 대표적인 음식이다. 꾸스꾸스는 좁쌀이나 밀을 작은 알갱이로 만들어 찐 다음 배추, 무, 당근, 양파 등과 같은 야채와 고기, 생선 등을 얹어 먹는다. 고기는 소고기, 닭고기, 양고기 등이 사용된다. 꾸스꾸스와 더불어 대표적인 음식이 하리샤(Harissa)다. 하리샤는 음식이라기보다는 양념인데 얼핏 보기에는 고추장처럼 생겼다. 하리샤는 칠리고추를 주재료로 하여 미나리과의 고수, 커민, 토마토 등을 섞어서 만든다. 레스토랑에 가면 갓 구워낸 바게트를 전채처럼 주는데 올리브 오일을 섞은 하리샤에 찍어 먹으면 메인 요리가 필요없을 정도다. 튀니스 음식은 주변국에 비해 더 자극적인데 부인이 요리에 매운 고추를 넣는 정도에 따라 남편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판별할 수 있다고 한다. 요리가 더 매울수록 더 사랑한다는 것이다.
길거리에서 파는 음식 중에 ‘샤와르마(Shawarma)’라는 게 있다. 레바논에서 유래된 샤와르마는 양고기, 닭고기, 소고기, 칠면조 등을 빙빙 돌아가는 꼬챙이에 뭉텅뭉텅 잘라서 끼워 넣고 불로 굽는다. 이것을 잘게 썰어 토마토, 양파 등 각종 야채와 함께 밀가루로 납작하게 만든 피타(pita)에 말아서 먹는다. 가격이 우리 돈으로 2000~3000원 하는데 정체불명 고기의 햄버거보다는 훨씬 더 신선한 것 같다. 튀니지는 기다란 지중해 해안(1300㎞)을 끼고 있어 생선 요리도 발달했다. 보통 튀기거나 굽거나 하여 쌀밥과 같이 나오는데 양념에 찍어 먹는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지중해 물고기는 회로 먹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중해라는 바다가 내해이고 물결이 잔잔하다 보니 물고기들의 활동성이 떨어져 살이 차지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이 외에도 브릭(bric), 따진(tajine) 등 다양한 음식이 있는데 맛이 거의 비슷비슷하다. 심지어 바게트와 하리샤에서도 비슷한 맛이 나는데 이는 파슬리(parsley), 고수(cilantro), 민트, 바질(basil) 등 향이 강한 양념들이 음식 종류를 가리지 않고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처음 튀니지 음식을 먹을 때는 음식별로 맛 차이가 좀 나지만 오래 먹으면 맛이 비슷비슷해진다.
여권없이프랑스로가는곳이까르푸?
▲튀니스에는 유장한 역사에 걸맞은 유물과 유적이 많다. 카르타고의 로마 유적지 중 하나인 안토니우스 공동 목욕장.
튀니스에는 까르푸와 지앙(Giant)이라는 대형 쇼핑몰이 두 군데 있다. 까르푸는 도심에 있고, 지앙은 차로 20분 정도 가야 한다. 까르푸는 유럽의 다른 곳처럼 규모가 크다. 엘지와 삼성 제품도 인기가 많다. 튀니스에서는 주로 남자가 장을 본다. 부인이 같이 오는 경우도 많지만 계산을 주로 남편이 한다. 가정의 경제권이 남편에게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튀니지 여성들의 지위는 주위 아랍국들에 비해서 훨씬 높다. 여성장관도 몇 명 배출했으며, 여성의 사회적 활동도 활발한 편이다. 튀니지 초대 대통령의 부인이 프랑스 여성이었는데 이 사람이 튀니지가 프랑스 식민지로부터 독립할 때 여성의 지위향상을 위해 많이 노력한 결과라고 한다. 튀니지는 과거 프랑스의 식민 국가였으나 튀니지 사람들이 프랑스에 갈 때에는 비자를 받아야 한다. 그런데 프랑스에서는 불법 이민, 불법 취업 등을 이유로 비자발급에 매우 엄격하다. 그래서 튀니지 사람들은 비자 없이 프랑스에 가는 곳이 까르푸라고 자조적인 이야기를 하곤 한다.
튀니스에서는 2주에 한번 쑥(Souk)이라는 전통 시장이 열린다. 옷, 생선, 야채, 과일, 완구, 공산품 등 없는 물건이 없다. 흥정만 잘하면 좋은 물건을 값싸게 살 수 있다. 쑥 중에서 가장 큰 곳은 라마르사에 있다. 여기에는 1m가 훨씬 넘는 갈치가 네 마리에 1만원 정도 하며, 커다란 가오리도 잘라서 파는데 5000원어치만 사면 온 가족이 푸짐하게 먹을 수 있다. 장어도 가끔씩 파는데 우리나라 장어보다는 세 배 정도 더 큰데 비해 가격은 3분의 1이 채 안 된다. 튀니스 서쪽지역에 있는 바다와 강이 맞닿은 곳에서 잡히는 장어는 우리나라에 수출되기도 한다. 쑥에 가면 이곳 사람들의 밝은 표정과 활기를 느낄 수 있다. 나는 아프리카 9개국을 여행했는데 시간이 없을 때도 시장과 박물관만큼은 꼭 들러보았다. 어느 곳이나 시장은 그 나라 사람들은 무엇을 입고, 무엇을 먹고 사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튀니스 시민은 스킨십과 제스처의 달인
튀니스에는 유장한 역사에 걸맞게 유물과 유적이 많다. 포에니 전쟁의 잔해가 아직도 남아있는 비르샤 언덕을 비롯하여 안토니우스 목욕장, 원형극장, 바르도 박물관 등 로마제국의 유적지가 곳곳에 남아 있다. 튀니스에서 조금 벗어나면 엘젬의 원형경기장(영화 <글레디에이터> 촬영장), 두가의 로마도시 등의 유적지가 있다. 울타리도 치지 않고 증개축도 하지 않은 채 대부분 허물어진 모습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심지어 로마시대의 아름다운 조각이 새겨진 기둥 일부분이 골프장 화분 밑받침으로 쓰이고 있다. 우리나라 같으면 국립중앙박물관의 가장 중요한 곳에 자리 잡아 전시될 정도인데도 말이다.
한니발이 자기들의 조상일 텐데 그를 기념하는 박물관 하나 없다. 내가 만난 한니발은 시내의 디스코텍 이름이었다. 튀니스에서 1시간30분 정도 운전하고 가면 두가라는 곳에 로마시대 도시 모습의 유적지가 있다. 연회장, 목욕탕, 콜로세움, 가정집, 제우스 제단 등등. 그러나 가끔씩 만나는 관광객들을 빼고는 한산하며, 소들이 유적지 위에서 놀고 있다. 귀중한 인류의 유산이 방치되고 있다는 느낌이다. 왜 그렇게 하느냐고 현지인 친구에게 물으니 이슬람교 이전의 튀니지 역사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서 그렇다고 한다. 하지만 어떠랴. 터만 있고 기둥만 있는 유적이 오히려 상상의 나래를 더 펴준다. 어정쩡하게 복원하여 유적 같지 않은 유적을 만드는 것보다 방치된 그대로가 더 좋을 수도 있다.
삶은 어디에서나 치열하다. 튀니스 사람들에게도 예외는 아니다. 많이 배웠건 적게 배웠건, 직업이 무엇이건 간에 열심히 노력하지 않으면 생계를 이어가기가 힘들다. 튀니지는 관광으로 먹고 사는 나라다. 국토 면적이 한반도의 4분의 3 정도 되지만 농사를 지을 만한 땅은 해안선에서 내륙 쪽으로 10㎞ 정도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사하라 사막이다. 하지만 지중해 해안과 상쾌한 날씨는 관광지로서, 휴양지로서 손색이 없다. 튀니스 사람들 중 외국인을 상대로 생계를 유지하는 택시 기사부터 메디나의 상인, 호텔 직원들은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한다. 학교에서 배우기도 하지만 대부분 TV를 통해서 깨우쳤다고 한다. 위성방송이 많아 TV 채널만 900개가 넘는다. 언어 배우는 데에는 왕도가 없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절실한 필요’인 것 같다. 이 사람들은 프랑스어를 하지 않으면 장사를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생계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에 프랑스어를 배우는 것이다. 한번은 택시를 탔는데 기사가 6개 국어를 구사할 수 있다고 했다. 일개 택시 기사인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고 물으니 튀니스 같은 곳에서 먹고 살려면 외국어 구사능력이 절실해서 배웠다고 한다.
튀니스의 제스처 문화는 유럽 못지않게 발달되어 있다. 그중에 운전과 관련한 제스처가 가장 재미있다. 택시를 타고 가다 보면 택시기사가 2~3분 간격으로 두 손을 운전대에서 떼고 ‘내가 뭘!’(두 손바닥을 허리 높이에서 하늘로 보임), ‘그래서 어쩌란 말이냐?(두 손을 올리고 어깨를 으쓱거림)’, ‘한판 붙어?(주먹을 쥐락펴락 함)’, ‘미친놈 아냐?(오른손을 머리 위쪽으로 휘휘 돌림)’ 등을 표현하는 제스처를 쓴다. 자기가 잘못해놓고 ‘내가 뭘!’, ‘그래서 어쩌란 말이냐?’고 하면 바로 옆에서 당한 기분 나쁜 운전자는 ‘너 미친놈 아냐’하는 제스처로 응수한다.
튀니스 사람들의 인사하는 방법은 우리와는 많이 다르다. 처음 만났을 때는 보통 악수를 하지만 친한 사람들끼리 만나면 서로 껴안고 양 볼을 교차하여 오른쪽, 왼쪽, 오른쪽, 왼쪽 순으로 맞댄다. 때로는 ‘쪽’ 하는 소리를 내기도 한다. 남자들끼리, 여자들끼리는 이렇게 인사하지만 남자와 여자 간에는 특별한 관계가 아니면 이렇게 인사하지 않는다. 이와 거의 똑같은 인사법이 프랑스에도 있는데 이를 ‘비주(bisou)’라고 한다. 조금 더 친한 사람들은 한 번 내지 네 번까지 진한 포옹을 하는데 이성끼리 하면 오해받기 십상이다. 어쨌든 스킨십이 뛰어난 사람들이다.
혁명에 시작은 있으나 끝은 없다
튀니스 사람들은 잘 아는 사람과 악수하기에는 다소 먼 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쳤을 때 오른손을 왼쪽 가슴에 얹고(한두 번 가슴을 가볍게 치기도 함) 미소를 띠면서 작은 소리로 ‘함둘레라’라고 말한다. 우리나라의 국기에 대한 경례하고 비슷하다. 함둘레라는 ‘신의 가호가 있기를’이라는 의미다. 허리나 머리를 굽혀 인사를 하지는 않는데 이는 알라 외에는 허리나 머리를 굽히면 안 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도 과거에는 오른쪽은 좋은 것, 왼쪽은 나쁜 것이라는 관념이 있었는데 튀니스에서도 마찬가지다. 오른쪽은 선, 행운 등을 의미하고 왼쪽은 악, 불행 등을 의미한다고 한다.
튀니지를 포함한 이슬람 국가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단어는 아마도 ‘인샬라’가 아닐까 한다. 인샬라는 ‘신이 원하신다면’이라는 뜻인데 우리의 ‘복불복’이라는 말과 비슷하다. 튀니스 사람들은 대부분 시간과 약속 개념이 미약한데 시간을 어기거나 약속을 못 지키거나 할 때 핑계거리로 ‘인샬라~’를 많이 사용한다. 자기는 최선을 다했는데 신이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란다. 현대에 와서 그 본래 의미가 많이 퇴색되었지만 원래 인샬라는 불확실한 미래의 일을 알라가 이루어주기를 바라는 소망의 표현이다. 하지만 튀니스에서 오래 살다 보면 인샬라가 편할 때도 있다. 내가 약속을 지킬 수 없는 경우인샬라를 사용하여 핑계를 댈 수 있으니까…. 하긴 우리나라도 한때 ‘코리언타임’이라는 게 있었다. 규칙적으로 도는 톱니바퀴처럼 시간과 약속을 지키고 산다는 것은 너무 피곤한 일이다. 삶의 여유를 위해 가끔씩은 인샬라를 외치면서 느슨하게 사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2010년 12월, 어떤 청년의 분신자살을 계기로 튀니지 혁명이 시작되었다. 튀니지 혁명을 재스민 혁명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재스민이 튀니지의 국화이고 튀니스 어디에서든 볼 수 있는 꽃이라는 데서 유래한다. 꽃이 피는 계절이 되면 튀니스 전역이 재스민 향기로 가득하다. 튀니지에서 시작된 재스민 혁명은 이웃 국가인 이집트, 리비아를 강타하여 중동국가 전체로 퍼졌다. 재스민 혁명의 원인에 대해서 분석들이 많지만 나는 청년실업이라고 본다. 분신한 청년은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자리를 구하려고 발버둥쳤으나 취업이 안 되자 가족의 생계를 위해 노점상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단속경찰이 이를 못하게 했다. 생계의 마지막 수단이었던 노점상을 못하게 되었을 때, 그리고 항의했다고 뺨을 맞았을 때 그 청년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 남았을까? 죽어라 노력해도 성취할 수 없는 사회, 희망이 없는 사회에 대한 불만의 표출로 분신을 택했던 것이다. 재스민 혁명은 또한 SNS혁명이었다. 대부분의 젊은이가 SNS를 하고 있는데 이들은 재스민 혁명을 실시간 중계했다. 언제 어디에 모여서 시위를 하자며 SNS로 서로 독려했고 경찰의 발포로 사람이 죽어가는 광경을 동영상으로 촬영하여 SNS로 전 세계에 호소했다. SNS가 없었으면 과연 재스민 혁명이 성공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혁명이 시작된 지 5년이 지났지만 혁명의 결과는 나라마다 차이가 크다. 시리아는 내전이 지속되어 수백만 명의 난민이 발생했고, 이집트에서는 수천 명이 사망했으며 무슬림형제단이 집권했지만 곧바로 군부쿠데타가 일어났다. 리비아는 종족 간에 전쟁이 벌어져 아직까지 국가의 기능을 못하고 있다. 그러나 혁명의 발원지인 튀니지에서는 300여 명만 사망했다. 그리고 국민적 합의를 바탕으로 헌법을 제정하고 대통령을 선출하는 등 민주적인 절차를 거치면서 안정을 찾고 있다. 높은 교육수준과 국민들의 개방적인 마인드 때문에 가능했으리라. 그 결과 2015년 노벨위원회는 프란체스코 교황과 메르켈 총리를 제치고 튀니지의 ‘국민4자대화기구’에 노벨평화상을 수여했다. 수준 높은 튀니지 국민에게 준 것이다.
혁명에 시작은 있으나 끝은 없다. 튀니지는 높은 실업률, 여전히 불안정한 정세 등 갈 길이 멀다. 혁명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오늘도 튀니지 사람들은 그들이 원하는 세상을 위해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김명주 - 1967년생. 서울대 농경제학과를 졸업하고 행정고시에 합격한 후 현재 기획재정부 감사담당관으로 재직하고 있다. 2008년부터 2012년까지 아프리카개발은행에 파견되어 튀니지에서 4년간을 지냈다. 그는 아프리카 9개국을 다녀오는 등 아프리카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백인의 눈으로 아프리카를 말하지 말라 1, 2>를 펴내기도 했다.
[출처: 중앙일보]
◆풍경
▲사하라사막 = 붉은 사막
▲황금빛 사하라 - 미국 텍사스 오스틴에 사는 여행가 퐐영
▲낙하산 관광객이 튀니지 상공을 날고 있다
▲반정부 시위대 13. 8. 6.
■ 티베트 Tibet
중국의 자치구로서 정식 행정 지명은 시짱 자치구이다. 티베트는 거대한 산맥으로 에워싸인 높은 고원에 있다. 북쪽으로는 쿤룬 산맥과 경계를 짓고, 티베트 고원의 서쪽과 남쪽 경계는 에베레스트 산을 안고 네팔과의 국경에 늘어선 히말라야 산맥이다.
티베트는 1950년대 이전까지 외부 세계로부터 고립된 단일한 실체였다. 티베트인의 다수가 인종학상 같은 조상으로부터 나왔으며, 티베트 불교(라마교)를 신봉하고 티베트어를 사용했다.
광물자원은 풍부하지만 경제는 아직도 미개발 상태에 머물러 있다. 농업활동은 어렵고, 야크나 야크와 암소의 교배종(mdzo-mo)으로부터 얻는 버터는 주요낙농산물이다.
정식 행정 지명은 시짱 자치구[西藏自治區]이다. 동쪽으로 쓰촨 성[四川省], 남동쪽으로는 윈난 성[雲南省], 북동쪽으로는 칭하이 성[靑海省], 북서쪽으로는 신장웨이우얼 자치구[新疆維吾爾自治區], 서쪽으로는 분쟁중인 잠무카슈미르, 남쪽으로는 인도·네팔·부탄·미얀마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1950년대 이전까지 외부 세계로부터 고립된 단일한 실체였다. 고유의 문화와 종교를 갖고 있던 티베트는 티베트 불교(라마교)를 신봉하고 티베트어를 사용했다. 서구식 의미의 경제발전은 극히 저조했다. 1950년중국이 티베트를 침공해서 점령했다.
중국은 티베트 불교의 교단 조직을 해체하고, 도로·교량·병원·학교를 건설함으로써 티베트를 근대화시키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티베트인은 1959년 이 지역의 수도인 라싸[拉薩]에서 대중봉기를 일으켜 중국에 대한 적개심을 나타냈다. 이 봉기를 진압한 후, 중국은 강제로 티베트 사회를 개조하려 했다. 귀족과 사찰의 재산을 몰수했으며, 집단농업방식을 도입했고, 티베트 불교에서 거행하는 공공 집회를 완전히 통제했다. 중국의 통치가 어느 정도 완화된 것은 1980년대 중반이다.
티베트는 거대한 산맥으로 에워싸인 높은 고원에 있다. 비교적 평탄한 고원의 북쪽 부분은 장탕(Byang-thang:'북부 평원'이라는 뜻)이라고 불리는데, 고도가 5,000m, 길이는 동서로 1,300㎞가 넘게 뻗어 있다. 북쪽으로는 쿤룬 산맥[崑崙山脈]과 경계를 짓는다.티베트 고원의 서쪽과 남쪽 경계는 8,850m 높이의 세계 최고봉에베레스트 산을 안고 네팔과의 국경에 늘어선히말라야 산맥이다.
마팜 호[瑪旁雍錯] 북쪽의 동쪽으로 뻗은 산맥이트랜스히말라야 산맥인데, 이 산맥의 몇몇 봉우리는 6,100m가 넘는다. 트랜스히말라야 산맥은브라마푸트라 강에 의해 히말라야 산맥과 분리된다. 브라마푸트라 강은 시짱 남부를 가로지르며 흐르다가 남쪽으로 꺾어져 산맥을 가로지른 뒤 인도로 들어간다.
기후는 대체로 건조하며 습도는 낮다. 고도가 높은 곳은 기온이 낮으나 낮은 계곡은 온화하다. 24시간을 주기로 기온이 가장 크게 변화한다. 1년 내내 강한 바람 때문에 이른 아침과 밤은 혹독하게 춥다. 그러나 서늘하고 건조한 공기 때문에 50~60년 동안 곡물을 안전하게 저장할 수 있다. 말린 날고기는 1년 이상 보존이 가능하고 전염병이 드물다.
티베트인의 다수가 인종학상 같은 조상으로부터 나왔으며, 같은 종교를 신봉하고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
기초적 경제행위에 따라 유목민, 반농·반목민, 그리고 숲에 거주하는 사람으로 나눌 수 있다. 상인·장인(匠人)·정부관리 및 승려와 여승도 있다. 라싸에는 구걸하거나 시체를 처리해 살아가는 특수한 신분 집단이 있었다. 이러한 신분적 구분이 엄격한 것은 아니었는데, 예컨대 승려도 정부관리가 될 수 있었다. 농민과 귀족 사이에는 사회적인 갈등이 존재했는데, 귀족의 지위는 혈통에 근거를 둔 것이다. 주민 대부분이 농민이었다.
광물자원은 풍부하지만 경제는 아직도 미개발 상태에 머물러 있다. 까다로운 지형과 혹독한 기후로 인해 농업활동도 크게 지장을 받는다. 주요농작물로는 보리·밀·기장·메밀·콩·대마·겨자 등이 있다. 야크나 야크와 암소의 교배종(mdzo-mo)으로부터 얻는 버터는 주요낙농산물이다.
티베트인은 다양한 채소를 재배해 주식을 보충하는데, 여기에는 무·순무·당근·감자·완두·파슬리·상추·토마토·양배추 등이 포함된다. 또한 마늘·양파·박하·미나리·콜리플라워·호박·애호박·가지도 재배한다. 수입식품으로는 차·설탕·쌀을 들 수 있는데, 이 지역의 남동부에서 약간의 쌀이 생산된다.
삼림지대는 접근이 불가능하므로 거의 개발되지 않고 있다. 1951년 이전 티베트인은 대부분이 걸어서 다니거나 동물을 이용해 이동했다. 코라클(버드나무 가지나 짐승가죽 등을 씌운 작은 배)은 큰 하천을 건널 때 사용되었다.
중국 공산당이 티베트를 장악한 후, 간선도로망이 건설되었다. 그중에서 대표적인 것은 칭하이와 쓰촨으로 통하는 간선도로이다. 1956년 이후 티베트와 베이징[北京]을 연결하는 항공노선도 생겼다. 현재 우편과 전신은 극히 한정되어 있다.
다음백과
◆ 티베트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중국은 1940년 14대 달라이 라마의 즉위식에 '행정원 몽장위원회' 사절단을 파견하였습니다. 그러나 14대 달라이 라마 즉위식 후에도 귀국하지 않고 '중화민국 행정원 몽장위원회 주 티베트 대표처'라는 이름으로 라싸에 계속 머물러, 1948년에 강제퇴거 되었습니다. 그리고 1949년에 중화인민공화국이 세워 집니다. 이때 중국은 티베트와 타이완을 포함한 중국의 옛 영토를 회복하겠다고 발표하였습니다.
(1) 1950년에 무슨 일이 일어났나요?
티베트 역사의 전환점은 1949년 중국의 인민해방군이 티베트의 국경을 넘으면서 시작되었습니다. 1950년 10월 6일 새벽, 중국은 40만 대군(인민해방군, 혹은 홍군)을 이끌고 티베트를 침공하였습니다. 약 5,000여명의 소규모 티베트군대를 패배시킨 중국군은 티베트의 반을 점령했고, 2주 만에 티베트 군대는 항복합니다. 중국의 티베트 침공에 대해 언급한 서양 군사 전문가는 중국군도 1만 명의 군사를 잃었다고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중국은 "평화적인 해방"이라는 모양새를 갖추기 위해 티베트 정부에게 소위 “티베트의 평화적 해방을 위한 17조항 협정”을 강요했습니다. 40만 중국군의 티베트 점령, 라싸를 침공하겠다는 위협, 티베트 전체의 파괴가 예상되는 상황에서 티베트인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1951년 5월 23일 베이징 시에서 티베트와 중화인민 공화국 양측이 십칠조 협의를 체결하며, 티베트는 최초로 중 국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포탈라 궁 앞 (뉴욕타임스)-평화로운 티베트를 총칼로 짓밟은 중공군의 모습
십칠조 협의는 중국의 중앙 인민정부와 티베트 지방 정부의 평화적인 티베트 해방에 관한 협의이며, 중화인민공화국과 티베트 양측의 정치적 관계와 티베트의 자치권 보장, 종교적 자유 인정 등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협의는, 한국의 일제강점기 때 을사조약과 같이, 강제적으로 서명되었기 때문에 국제 법에 따라 효력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1951년 10월 24일, 14대 달라이 라마께서는 마오쩌둥과 중앙 인민 정부 당국에 십칠조 협의를 준수하라는 내용의 전보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중국 정부는 십칠조 협의를 무시하고, 무자비한 고문과 학살로 티베트를 지배하였습니다. 1960~1970년대 중국 전역을 강타한 문화대혁명의 여파로 6,200여개 의 사찰 가운데 6,000개 이상의 사찰이 철저하게 파괴되었습니다. 티베트의 문화적, 민족적 특성(제정일치국 : 종교와 정치가 일치함)을 파괴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결국 1979년에는 13개의 사찰만이 티베트에 남았고 모조리 파괴되었습니다.
결국, 1959년에 14대 달라이라마께서는 인도로 망명했고, 망명정부를 수립하면서 강제조약인 십칠조협의 파기를 선포하게 됩니다. 이후 많은 티베트인들이 정치적인 이유 또는 탄압을 피해 인도로 망명하게 됩니다.
그러나 중국은 1949~1950년 군사적 정복과 점령의 결과로서 티베트에 대한 주권을 가졌음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사실 중국은 그 같은 주장을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군사적 정복, 점령 또는 불평등조약을 강요하는 방법으로 다른 나라에 대한 주권을 주장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불법적 주장이기 때문입니다.
대신 중국은 700년 전 즉, 원나라시대 때부터 티베트가 중국 일부가 되었다는 이론을 통해 권리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후 중국은 티베트의 원래 영토를 행정적으로 분리하여 서장자치구(시짱)에 대한 티베트 인의 자치를 허용하였으나, 실제로는 현재까지도 한족이 통치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역사가 진실을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2) 1959년 티베트 민중봉기
1959년 3월 10일 중국공산당의 강압적인 티베트 통치에 반발한 티베트인에 의하여 봉기가 일어났습니다. 봉기가 일어난 날인 3월 10일은 매년 티베트 망명 정부 등 세계에 흩어져 있는 티베트인들이 "티베트 민중봉기 기념일"이라는 이름으로 기념하고 있습니다.
1956년 티베트의 캄 지방과 암도 지방에서 시작된 티베트인에 의한 대규모 민중봉기는 1959년까지 계속되었고, 티베트 전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결국 티베트에는 중국 인민해방군이 증파되었습니다. 중국군은 티베트의 마을이나 사원에 공격을 강화하고, 중국군 사령관은 티베트 게릴라 부대를 굴복시키기 위해, 포탈라 궁과 달라이 라마를 폭격하겠다는 위협도 가했습니다.
3월 1일 라싸 교외에 있는 중국 인민해 방군 사령부에서 달라이 라마에게 연극 관람을 제안을 하였고, 14대 달라이 라마 께서는 그 제안을 미뤘지만, 최종적으로 는 3월 10일에연극을 관람하기로 합의 하였습니다.
그런데 약속 하루 전인 3월 9일, 중국군 장교들이 "전통에 어긋나지만 14대 달라이 라마가 연극관람할 때에 무장 경비대를 동행 시키지 않는 다는 조건과, 포탈라 궁에서 인민해방군 주둔지로 이동할 때 어떠한 공식적인 의식을 실시하면 안 된다"고 강하게 요구했습니다. 이 요구가 라싸에 있는 티베트 사람들에게도 퍼져, 중국군이 14대 달라이 라마의 납치를 꾀하고 있다 생각했습니다.
다음 날인 3월 10일, 14대 달라이 라마의 목숨이 위험하다는 소문을 듣고 약 30만 명의 티베트 민중들이 달라이 라마의 여름궁전인 노블링카 앞에 운집했고, 중국 인민해방군 측이 달라이 라마를 포탈라 궁 밖으로 데리고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궁전을 둘러쌌습니다.
3월 12일, 라싸에 모인 티베트인 항의자들이 티베트의 독립을 선언합니다. 그러자 중국군은 라싸의 큰 길에 바리게이트를 만들고, 충돌에 대비해 라싸 내외에 거점을 요새화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티베트인들의 독립요구 시위를 폭력적으로 진압하기 시작했습니다. 3월 15일 상황이 악화되자 티베트 정부는 14대 달라이 라마의 피난을 준비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14대 달라이 라마는 그럴 수 없다며 남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3월 17일 중국 인민해방군이 발사한 2발의 포탄이 달라이 라마의 궁전 근처에 떨어졌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대부분의 티베트인들은 14대 달라이 라마가 훗날의 티베트인과 티베트를 위해 피신하기를 원했습니다. 결국 3월 17일 새벽, 달라이 라마와 그를 보호하기 위한 수만 명의 티베트인들이 달라이 라마를 따라 인도망명길에 오릅니다.
그리고 3월 19일 라싸의 주요 사원에 포격을 포함한 전투가 시작됩니다. 티베트군 은 중국 인민해방군에 비해 숫자와 무장이 빈약해, 전투는 이틀 만에 종료되었습니다.
라싸의 주요 사원과 절은 중공군에 의해서 약탈과 심한 손상을 입었고, 폭격에 의해 철저히 파괴 되었습니다. 그리고 라싸에 남아있던 14대 달라이 라마의 무장경비원과 무기를 숨기고 있었던 티베트인들은 무장 해제 되어 공개처형 되었습니다.
티베트 망명정부의 공식적인 집계로만 중국군에 의해 1959년 3월~1960년 10월까지 87,000여 명의 티베트인들이 사망했고, 알려지지 않은 죽음을 합한다면 1959년 봉기에만 약 43만 명에 달하는 수많은 죽음을 뒤로한 채, 민중봉기는 끝이 났습니다.
하지만 티베트인들은 패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국제공동체가 티베트에서 발생한 사건에 충격적으로 반응했기 때문입니다. 티베트의 문제는 1959년과 1965년 사이 수차례에 걸쳐 유엔총회에서 논의되었습니다. 유엔총회는 3개의 결의안을 통과시켜 티베트에서 자행되는 중국의 인권침해를 비난하고 중국이 티베트의 자결권을 포함하여 인권을 존중해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티베트인의 계속되던 게릴라 작전도 1974년에 가서야 잠잠해졌습니다. 그러나 중국의 고문과 학살, 잔인한 억압을 통한 티베트 강점시도가 계속되었습니다. 티베트 여성들에게 강제적인 낙태와 불임수술을 자행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수백 명의 티베트 승려와 비구니, 티베트인들이 중국 강제노동수용소와 감옥에서 신음하였습니다. 티베트 승려들이 중국군에게 끌려나와 대중들이 보는 앞에서 환속 할 것을 강요당하고 강제로 노역하다 죽는 등 티베트인 의식의 중심에 있던 티베트불교를 상상도 못할 박해에 시달리게 했다고 티베트를 여행했던 사람들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국은 지금까지도 이런 내용들은 사실과 다르다며 부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잔인하고 폭력적인 중국의 탄압과 점령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지 저희는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중국 당국이 티베트에 관한 모든 정보를 차단하여 제대로 알려지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지난 3월 10일 민중봉기를 기억하며, 티베트의 진정한 평화와 자유를 위해 또 2명의 티베트인이 분신으로 세상에 티베트의 목소리를 전하고 있습니다. 불과 16세, 18세 소년들이었습니다.
그로부터 60여년이 넘게 흐른 지금도 티베트인들의 평화와 자유에 대한 의지는 꺾이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140여명이 넘는 티베트인들이 이렇게 분신으로 자신의 몸을 불꽃 삼아, 세상에 티베트의 평화를 위한 목소리에 불을 지피고 있습니다. 티베트의 목소리와 절규를 외면하지 말아주시기를 다시한번, 간곡히 부탁드립니다!!